#title 아나키즘과 조합주의 #subtitle CNT 모델과 그 딜레마 #author 바딤 다미에 #SORTtopics 아나르코 생디칼리슴, 생디칼리슴, 조합주의, CNT #date 2012 #lang en #pubdate 2021-03-24T06:27:02 한 철학자는 역사를 배우지 않는 자는 그 오류를 반복한다고 이른 바 있다. 역사는 과거로부터 올바르지 않은 것을, 잘 되지 않은 것을 찾은 것이다. 이로써 현재, 그리고 미래의 실수를 피할 가능성을 얻을 수 있다. 물론, 사회적 · 노동계급적 투쟁의 조건과 상황이 다른 수천 킬로미터 바깥의 동지들에게 조언하는 것은 합리적이지도 않고, 그저 우쭐대는 것일 수도 있다. 하지만 내가 스페인의 아나키즘적 조합주의 운동의 역사를 돌이켜 볼 때, 나는 그곳에서 위대한 혁명의 빛나는 승리만을 보지 않는다. 오히려 나는 일부 내적 문제 역시 바라본다. 그리고 그 문제는 CNT의 영웅적인 역사 전반에 동일하게 남아있다. 1920년대 초에 이루어진 볼셰비키의 장악 시도, 정치 참여에 대한 끝없는 논쟁, 프리모 데 리베라(Primo de Rivera)에 대한 반독재 투쟁에서 안헬 페스타냐(Ángel Pestaña)와 호안 페이로(Joan Peiró) 등의 지도그룹이 야당 정치인들과 협력한 것, 트레인티스모Treintismo,[1] 1936년 7월 사라고사 총회Zaragoza congress에서 결의한 『자유의지주의적 코뮌주의 연방 강령』의 실천 거부, 내전 과정에서의 “미니스테리알리스모Ministerialismo”[2], 1940년대와 50년대 중 프랑코와의 투쟁 과정에서 권위주의 정당들과의 공동 전선, “싱코푼티스모Cincopuntismo”[3], 개량주의자들의 침투와 이로부터 비롯한 CGT의 분열, 그리고 무엇보다 “이단”과의 실질적 문제들 등….

*** 모순에 관하여
CNT가 그 역사 내내 개량주의와의 공고한 투쟁을 이끌어왔음은 분명하다. 개량주의는 언제나 패배했지만, 계속 갱신되어가며 되살아났다. 개량주의가 언제 발발하는지 이해하지 못한다면 우리는 이 질병을 치유하지 못할 것이다. 소위 아나키즘적 조합주의에 있어서도 비슷한 문제가 불가피하다는 견해가 있다. 이 관점에 따르면 아나키즘적 조합주의는 최종적 목적과 매일의 성취 간의, “최대주의”와 “개량”간의 “유물론적 모순”에 놓여 마치 쥐가 난 듯 행동한다는 것이다. 이 관점에 따르면 아나키즘적 조합주의의 길은 매우 좁고, 때문에 “개량주의”로 전락하기 매우 쉽거나 심지어 “자연스럽다”고 할 수도 있다. 하지만 어떠한 질병을 간단히 “자연스러운 것”이라 선언하는 것은 불가능하며 언젠가 치명적이 될 것이다. 헤겔적 “부정의 부정”을 주장하는 마르크스주의자들 정도만이 모순을 모든 발전의 기반으로 둘 수 있을 뿐이다. 아나키즘은 그 목적으로 조화를 추구하며, 이 목적은 모순의 소멸과 조화의 회복하는 수단을 통해서만 이룰 수 있다. 모순에 의해 부서진 유기체는 결코 일관되게, 지적으로, 목적적으로 기능할 수 없다. 장기적으로 그것은 결국 패배할 것이다. 아나키즘적 조합주의의 일반 원칙 중 하나는 아나키즘을 목적으로 두고 조합주의를 수단으로 두는 것이다. 무엇보다 아나키스트 노동자 운동 혹은 아나키즘적 조합주의는 알려진 대중 아나키즘의 유일한 형태다. 그리고 이것은 아나키즘적 조합주의가 매일의 공고한 투쟁을 통해 인민의 연대와 자주적 역량을 회복하고, 위계와 지배가 없는 새로운 삶의 전망을 제시할 수 있기 때문이다. 매일의 조합적 행동이야말로 아나키스트의 목적을 달성할 수 있는 최고의 수단이지만, 자유를 소망하는 사람들에게 그 자체가 가치 있는 것은 아니다. 우리 운동 내부의 누구도 그것에 대해 공식적으로 의구심을 제기하지 않는다. 하지만 가끔 현실은 다르게 보인다….

*** 모든 노동자에게 열려있다?
스페인 CNT의 특이성은 그 힘과 놀라운 성공의 근본이었다. 이지만 이것은 그 문제(일부는 “외부에서 유입된” 문제이기는 하지만)의 기반이기도 했다. 먼 과거를 바라보지 않더라도 우리는 스페인의 CNT가 1910년, 두 가지 서로 다른 전통의 교차점에서 설립되었음을 기억할 수 있다. 한 전통은 제1인터내셔널의 스페인 지역 연방과 그 노동자 조직이다. 이들은 명확하고 개방적인 자유의지주의적 목적을 가지고 있었으며, 일상의 개선 뿐 아니라 자유롭고 국가가 없는 사회를 향해 투쟁했다. 또 다른 전통은 프랑스 CGT가 대변하는 직접행동을 기반으로 한 혁명적 조합주의였다. 이웃나라에서 성장한 이 운동의 영향력은 스페인 노동자 조직들이, 자신들이 사용하던 이름이었던 “소시에다데스 데 레시스텐시아(Sociedades de Resistencia, 저항협회)”를 포기하고 프랑스식의 “생디칼”을 수용하게 할 정도로 매우 거대했다. 혁명적 조합주의의 일부 핵심 강령들이 피레네를 건너왔다. 특히 그 이상과 사회적 목적에 무관하게 “모든 노동자에게” 열려있는 노동자 조직이라는 개념(이데올로기적으로 “중립적인” 조합주의)과 미래 사회를 자유코뮌이 아닌 조합의 연방체로 바라보는 관점이 그러했다.(프랑스 CGT의 아미앵 헌장은 이 핵심지점들을 드러낸다.) 하지만 CGT 전통의 중요성은 프랑스와 스페인에서 서로 다르게 나타났다. 프랑스에서 혁명적 조합주의의 수용은 노동자 운동 내부에서 권위주의적 마르크스주의자들의 지배를 떨쳐내는 과정에서 발생한 필연이었다. 아미앵 헌장은 자유의지주의자, 권위주의적 사회주의자, 순수노동조합주의자 사이의 합의였고, 아나키스트들은 상당 기간 이 헌장을 이용하여 노동계급 내에서 자유의지주의적 이상의 영향력을 확대할 가능성을 얻을 수 있었다. 하지만 스페인 아나키스트 노동자 운동에는 합의가 필요하지 않았다. 그 운동은 스스로도 충분히 강했다. 프랑스의 상황에서 “진보한” 개념들은 스페인에서 혼란스러운 양면성을 만들었다. CNT는 자유의지주의적 사회라는 목적과 “모든 노동자에게” 열린 생디칼이라는 두 개념을 모두 수용했다. 심각한 모순이 만들어졌다. 자유의지적 목적을 거부하고 단지 “노동자이고자하는” 사람이 어떻게 부분적 개선만이 아니라 자유의지주의적 사회를 향한 총체적 변혁을 위해 투쟁하는 조직의 구성원이 될 수 있는가? 이 모순은 CNT 안에서 “아나키스트”와 “조합주의자”(정확하게는 더 “중립적” 조합주의자)라는 두 경향 사이의 영속적인 문제를 낳았다. “개방성”의 원칙은 CNT의 문을 혁명가들뿐만 아니라 개량주의자들에게도 열어젖혔다. “말라테스타적인” 입장을 가진 아나키스트들 역시 그들의 노동조합에 대한 관점에 따라 이를 지지했다. 이들은 노동조합이 자유의지주의적 사회를 위한 투쟁의 수단이 아니라, 개량주의적 수단이라고 바라보았다. “비非이데올로기적 조합주의”와 말라테스타적 아나키즘 모두가 “모든 노동자에게의” “개방성”과 아나키즘적 조합주의 조직의 최대한 신속한 양적 성장을 어떻게든 확보하는 것을 목표로 하였다. 그리고 미래 사회에 있어 “조합적 구조”의 지지자들(트레인티스모 등)은 아나키즘적 조합주의 조직이 더 커질수록, 혁명이 가까워질 것이라 주장했다. 하지만 이 “수량적” 접근의 논리적 귀결 역시 문제였다. 조직을 키우기 위해 조합주의 조직은 그 이상을 “순화”해야 하고, “정상인”들에게 더 매력적이 되어야 했다. 이렇게 해야 혁명적이지 않은 “온건한” 노동자들에게 접근할 수 있기 때문이다. 덜 아나키스트적이고, 덜 “이념적”인 “이단”화가 필요했다. 정치인들과 개량주의자들과의 타협에 더 적극적이 되어야 했다. 다시 말해, 이들은 스스로 개량주의자가 되어야 했다. 이때부터 “개방성”과 “질”에 무관한 강제적 성장은 개량주의자의 기치가 되어 CNT를 내부에서 갉아먹었다.

*** 아나키즘 vs. “덜 이데올로기적인 조합주의
CNT의 더 “아나키스트적인” 분파는 위험을 빠르게 파악하고, 이를 제거하고자 했다. 1920년대 초반, 이들은 아르헨티나의 아나키스트 노동자 운동인 FORA의 실험에 관심을 보였다. “FORA주의”는 “비이데올로기적 조합주의”와 말라테스타적 입장 모두를 거부했다. CNT와 마찬가지로, FORA는 아나키즘적 코뮌주의(자유의지주의적 코뮌주의)적인 목적을 가진 아나키스트 노동조합임을 공개적으로 선언했다. 하지만 이들은 CNT의 “모든 노동자에 대한 개방성”의 원칙과 양적 성장에 대한 집착을 거부했다. "FORA주의자“들은 ”아나키스트들과 그에 공감하는 사람들로 구성되어 노동자들에게 투쟁과 모든 노력의 진정한 끝을 생산생활의 매일 속에서 보여줄 수 있는 자랑스러운 노동조합 운동의 건설“을 제안했다[에밀리오 로페스 아란고(Emilio López Arango), 디에고 아바드 데 산티얀(Diego Abad de Santillan), 『노동 운동에서의 아나키즘El anarquismo en el movimiento obrero』, 바르셀로나, 1925, p.163]. 이는 조합주의적이며 “이데올로기적인” 아나키스트 노동자 조직에 대한 제안이었다.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아나키스트적 이상이 명확하고 공개적으로 정의된 조합을 의미했다. 아나키스트의 사회적 목적에 근본적으로 동의하지 않는 자들이나 “더 효과적인” 노동조합을 찾는 이들은 이 조합에 가입할 수 없었다. FORA는 “아나키스트와 그에 공감하는 사람들”의 조합이었다. 유럽 아나키스트 운동에 참여하던 다수는 이 접근에 대해 오해했다. “FORA주의”가 일종의 아나키스트 정당을, 모든 구성원이 스스로를 의식적으로 “아나키스트”라 선언하고, 자유의지주의 이론을 인지하며, 아나키스트들의 철학적 모임이나 실천그룹에 참여하는 조직을 만들고자 하는 시도였다는 오해를 하고 있다. 이는 사실과 다르다. FORA는 “의식화된” 사람들만을 위한 것이 아니었다. FORA는 “자발적인” 아나키스트들, 즉 아나키스트 이론을 모르고 스스로 “아나키스트”라 선언하지도 않지만 국가가 없는 코뮌주의적 사회에 대한 아나키스트적 목표를 공유하는 사람들 역시 수용하였다. “철학적, 정치적 아나키즘에 대하여 우리는 사회적 아나키즘 운동에 대한 우리의 개념과 우리의 현실을 제시한다. 아나키즘 철학과 충돌하지 않는 광범위한 대중의 조직, 그리고 인간을 이상의 수용자로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있는 그대로, 착취당하고 압제당한 인간 일부의 구성원으로 바라보는 것이다.” 페스타냐와 페이로의 정치적인 회피를 마주했을 때, 상당수 스페인 아나키스트들과 아나키즘적 조합주의자들은 “FORA주의”적 선택지에 대한 동의를 드러냈다. 후안 고메스 카사스(Juan Gómez Casas)가 FAI의 역사에 대해 쓴 책을 읽어보아도 이를 알 수 있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다른 선택지가 등장했다. 모든 아나키스트 실천그룹들을 FAI로 단결하게끔 하여 CNT 내부에서 “덜 이데올로기적인 조합주의”라는 개량주의적 경향성에 맞서는 아나키스트 세력으로 행동하고자 한 것이었다. 시간이 지난 오늘, 우리는 이 시도가 아주 짧은 시간 동안, 제한된 성공만을 거둘 수 있었음을 안다. 무엇보다도 재건된 “아나키즘적 조합주의” 역시 서두에 언급한 모순을 해결하지 못했다. 모든 조직에 “특별한” 아나키스트가 있다면, 이는 다른 이들(다수)가 그렇지 않다는 것을 의미할 수밖에 없다. 이 문제는 스페인 혁명에서 CNT의 운명을 결정지었고, 여전히 풀리지 않고 있다.

*** 지금은?
(스페인뿐만 아니라 전세계의) 아나키즘적 조합주의 운동의 실제 현황은 아나키스트 전통과 아미앵 헌장의 “혁명적 조합주의” 전통의 양면성이 개량주의자들의 손에서 강력한 무기가 됨을 보여준다. 그들은 이 양면성을 활용하여 혁명적 투사들 및 노동조합과 싸우고, “이상주의적” 내용을 순화하고, 수량적 성장을 위하여 아나키즘적 조합주의를 “탈脫이데올로기화”하며, 개량주의적 노동조합 및 정치 세력과의 협력을 강요한다. 그들이 기대하는 것은 자명하다. 우리는 전세계적인 자본주의의 공세 속에 살고 있으며, 거대하고 “공식적인” 개량주의적 노동조합은 노동자들의 방어를 조직하고 싶어 하지 않고, 할 수도 없다. 개량주의적 조합주의자들은 그 존재를 인정받고 싶어 한다. 하지만 사회적 원자화와 흐릿한 노동계급 의식의 결과로, 이들은 혁명적 아나키즘적 조합주의의 “극단주의적이고” “과도하게 혁명적이며” “과도하게 이데올로기적인” 부분만을 거부하는 다수를 모집할 수 있다. 이들의 목적은 사회의 자유의지주의적 변혁에 대한 목적이 없는 “정상적인”(아마도 약간 더 “급진적이고” 고집이 있는) 노동조합이 되는 것이다. 결국 “비이데올로기적 조합주의”는 사민주의가 될 수밖에 없다. 하지만 이 희망 중 다수는 장기적으로 허사가 될 것이다. “후기 케인즈주의” 자본주의는 고집 있는 “사회적 파트너”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 자본주의는 조직노동의 파괴를, 조직노동의 항복을 요구한다. 이러한 맥락에서 자기만의 상상 속 “급진주의”의 승리를 희망하는 개량주의자들에게는 자리가 없다. 항복을 조직하기 위해서는, 거대하고 “공식적인” 노동조합으로 충분하다. 개량주의적이고 “탈이데올로기적인” 조합주의자들은 노동자들에게 아무것도 주지 않고도 아나키즘적 조합주의 운동을 죽일 수 있다. 이제 고루한 아나키즘과 “개방성”의 “양면성”을 떨쳐내자. 이것을 고집한다면 우리는 패배할 것이다. 아나키즘적 조합주의의 새로운 선택지와 새로운 대안을 논의하자. 이것이 아나키즘과 조합주의의 실질적 결합에 관한 “FORA주의적” 실험이 아나키스트 노동자 조직에 관한 FORA의 “모델”이 실제 상황에서 유용한 이유라고 하겠다. [1] 사회혁명 전 이행기의 필요성을 긍정한 CNT의 내부 분파와 그 이데올로기. 즉각적인 혁명을 주장한 “FAI주의자”들과 노선투쟁을 벌였다.-역자 주 [2] 이탈리아 사회당 등에서 발원한 의회주의적 사회주의. 자유주의 정당의 진보적 부문과의 연계 역시 전술로서 가능하다고 주장함.-역자 주 [3] 1960년대, 프랑코가 설립한 어용노조 CNS(Confederación Nacional de Sindicatos)와 CNT의 일부 분파가 체결한 5개조항의 합의. 이 합의를 통하여 프랑코의 어용노조는 그 조직 확대에 탄력을 받았다.-역자 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