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itle: <조직적 강령>에 대한 부록
Date: 1926.11.02
Source: http://www.nestormakhno.info/english/supporg.htm

기대했던 대로, <자유의지주의자적 코뮌주의자의 조직적 강령>은 러시아 자유의지주의 운동의 여러 투사들 사이에서 생생한 흥미를 불러일으켰다. 일부는 <강령>의 사상 전반과 그 근본적 명제들에 대하여 받아들였지만, 다른 이들은 그 명제들에 대하여 비판을 가하고 의혹을 제기해왔다.

우리는 <강령>에 대한 긍정적 반응과 진실한 비판을 모두 동등하게 환영한다. 총체적인 아나키스트의 강령을 건설하는 과정에서, 총체적인 자유의지주의적 조직을 건설하는 과정에서 진실하고 진지하며 본질적인 비판은 긍정적이고 창조적인 진취성만큼이나 중요한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다시 이야기하기로 마음먹은 아래 사항들은 진지하고 필수적인 비판에서 비롯된 것이다. 우리는 이 비판을 만족스럽게 받아들인다. 이 비판의 작가인 마리아 이시딘(수년간 투쟁해온 투사로서 우리의 운동에서 존중받는 존재)은 비판문과 함께 다음과 같은 편지를 보내왔다.

“당연하게도, 조직적 강령은 모든 아나키스트들이 논의하도록 만들어진 것입니다. 이 ‘강령’에 대한 최종의견을 정하고, 아마도 공개적으로 그것을 말하기 전에, 나는 충분히 설명되지 않은 특정 문제들에 대한 설명을 요청합니다. 이를 통하여 다른 독자들 역시 ‘강령’을 충분히 적확하게 바라볼 수 있을 것이고, 오해에 기반한 반대를 멈출 수 있을 것입니다. 내가 동지들에게 질문들을 던지는 이유가 바로 이것입니다. 이것들에 대한 명확한 답변을 주시기 바랍니다. 동지들의 답변이 <강령>의 총체적인 정신을 담고 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검토를 위해서라도 답변이 필요할 수 있을 것입니다.”

마리아 동지는 편지를 마무리하면서, 디엘로 트루다의 칼럼을 둘러싼 논란을 잠재울 수 있게 되기를 바란다는 의사도 덧붙였습니다. 이것이야말로 마리아 동지가 강령의 특정한 핵심부분을 명확히 하고자 하는 이유입니다. 이러한 접근 방식은 매우 공정합니다. 특정한 관점에 반대하기 위해 동의하지 않는 이와 격렬한 논쟁을 벌이는 것은 너무 쉬운 일입니다. 긍정적인 대안을 제시하지 않고 단지 논쟁만을 하는 것은 더욱 쉬운 일이지요. 새로운 입장을 적절하게 분석하고, 이해하여 기반이 잘 닦인 의견을 도출해내는 것이야말로 어려운 일입니다. 그리고 질문을 던지신 마리아 동지는 이 마지막 길을 택하였습니다.

그리고 이것이 마리아 동지의 질문입니다.

강령은 공통적인 전술과 노선에 기초하여 아나키스트 운동의 무장세력 대부분을 규합하는 것, 즉 총동맹의 구성에 그 중점을 두고 있습니다. 당신은 연방주의자인 이상, 분명히 "독자적 집단의 활동의 이념적, 조직적 행동"을 담당할 집행 위원회의 존재를 염두에 두고 있을 것이라 봅니다. 그런 기구는 모든 정당에서 찾아볼 수 있는 것이지만, 다수결 원칙을 받아들여야 기능할 수 있습니다. 동지들의 조직에서 각 그룹이 주어진 문제에 대해 자유롭게 자신의 전술을 준비하고 수립하거나, 자신의 입장을 수립할 수 있을까요? 만약 대답이 '그렇다'라면, 여러분의 단결은 순전히 도덕적인 것에 지나지 않게 될 것입니다(그리고 이것은 아나키즘 운동의 현 상태이기도 합니다). 반면에, 만약 여러분이 조직적인 통합을 추구한다면, 그 통합은 필연적으로 강요될 것입니다. 그리고 만약 여러분이 조직 내부에서 다수결 원칙을 받아들인다면, 사회를 그 방식으로 재조직하지 못할 이유가 있을까요? 동지들이 연방주의적 연결에 관한, 대의원의 역할에 관한, 다수결의 원칙에 관한 개념을 명확히 해주시면 좋겠습니다.

“‘자유소비에트 체제’에 대해 말하자면, 당신은 이 소비에트들이 "건설적인 비국가적 활동의 첫 단계"가 되기 위해 어떤 기능을 수행해야 한다고 보십니까? 그들의 역할은 무엇이어야 합니까? 그들의 결정은 구속력이 있을까요?

“강령은 “아나키스트들이 이론적으로 추동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이 개념은 명확하지 않습니다. 이것이 단순히 새로운 질서를 구축하려는 조직(노동조합, 지역 조직, 협동조합 등)들을 자유주의 사상에 물들이기 위해 아나키스트들이 최선을 다하겠다는 말입니까? 아니면 아나키스트들이 스스로 이 건설의 책임을 지겠다는 말입니까? 후자의 경우, 그 상황이 "당에 의한 지도"와 어떤 면에서 다른 겁니까? 이 문제를 명확히 하는 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특히 노동조합에서 아나키스트의 역할에 대해서도 같은 의문이 제기됩니다. "조직적인 방식으로 조합에 침투한다"는 것이 무슨 의미를 가지나요? 노동조합운동에 종사하는 동지들이 정책노선을 구축하기 위해 어떤 합의를 도출해야 한다는 의미일까요? 아니면 아나키스트 집행위원회가 노동운동의 전술, 파업과 시위 등에 대한 규칙을 규정하고 조합에서 활동 중인 무정부주의자들이 조합의 지도자 직위를 차지하고자 하고, 그 지도자로서의 권위를 이용하여 집행위원회의 결정을 조합원들에게 강요한다는 것을 의미할까요? 노동조합에서 활동하는 아나키스트 조직의 활동이 "아나키스트 총동맹에 의해 추동되어야 한다"는 강령에서의 언급은 이 부분에 대한 온갖 불안을 불러일으킵니다.

“혁명의 방어에 관한 부분에서, 군대는 "경제 · 사회생활을 통제하기 위해 대중에 의해 세워져 전국적으로 존재하는 노동자와 농민의 조직과 그 조직이 대변하는 노동자, 농민 대중에 대한 완전한 복종"의 원칙 위에 세어져야 한다고 명시되어 있습니다. 일반적으로 말하면, 그것은 선출된 사람들의 '민권'이라고 불립니다. 그게 당신에게 어떤 의미인가요? 경제 · 사회생활을 통제하고 군대를 소집할 수 있는 조직은 다름 아닌 국가권력자임이 분명합니다. 이 점은 매우 중요하기 때문에 강령의 작성자는 이 점에 대해 더 오래 숙고할 의무가 있습니다. 이것이 "이행기적 형태"일 뿐이라면, 강령은 왜 “이행기 개념”을 거부합니까? 그리고 만약 이것이 최종 형태라면, 왜 강령이 아나키스트적 문건일까요?

“강령에서 다룬 문제는 아니지만 내 동지들이 의견이 갈리는 몇 가지 질문이 있습니다. 그 질문 중 하나를 인용해 보겠습니다. 한 지역이 사실상 무정부주의자들의 영향 아래 있다고 가정해 봅시다. 그들의 다른 정당에 대한 태도는 어떨까요? 강령의 저자들은 비무장한 적에 대한 폭력의 가능성을 인정합니까? 아니면 아나키스트적 이상에 따라 언론, 조직 등에 대한 제한없는 자유를 인정합니까? (몇 년 전만 해도 이러한 질문은 무의미한 것으로 보였을 겁니다. 하지만 오늘, 제가 인지하고 있는 몇몇 견해들은, 제가 그 답을 확신하지 못하게 하네요.) 그리고, 광범위하게 말해서, 타인의 결정을 강제로 집행하는 것이 허용될 수 있을까요? 강령의 저자들은 비록 일시적일지라도 강제력의 행사에 동의합니까? 이 모든 질문에 대한 디엘로 트루다 그룹의 대답이 무엇이든 간에, 저는 강령의 한 가지 부분이, 그들이 공언하는 아나키스트 공산주의와 공공연히 대립하고 있다고 말할 수밖에 없습니다. 동지들은 임금체계와 착취가 일단 폐지되면, 그럼에도 불구하고 비노동자적 요소들이 남아있을 것이라고 추측합니다. 그리고 이런 요소들은 노동대중의 연합에서 제외됩니다. 그들은 공동생산물에 대한 그들의 몫에 대한 권리를 갖지 못할 것입니다. “필요에 따른 분배”는 언제나 아나키즘의 기초에 있었습니다. 그리고 아나키스트들은 그 원칙에서 사회적 연대가 가장 잘 보장된다고 보았습니다. 아나키스트들은"게으름뱅이들을 어떻게 할 것인가?"라는 질문에 대하여, "게으른 이들을 먹이는 것이 사회적 삶에 거짓되고 해로운 원리를 도입하는 것보다 낫다."고 대답하여 왔습니다. 그리고 동지들은 정치적인 이유로, 일종의 게으름뱅이라는 범주를 만들고, 억압을 통해, 그들을 배고픔으로 죽게 만들고자 합니다. 도덕적인 측면을 떠나서도, 동지들은 그것이 어떻게 귀결될지 생각하지 못합니까? 모든 노동하지 않는 사람에 대하여, 우리는 그들이 일을 하지 않는 근거를 확인해야 할 것입니다. 우리는 그들의 신념을 탐색해야 할 것입니다. 만약 누군가가 주어진 임무를 수행하기를 거부한다면, 우리는 그 거절의 이유를 조사해야 할 것입니다. 우리는 그것이 사보타주나 반혁명이 아닌지 살펴봐야 할 것입니다. 그렇지 않다면 우리의 사회는 첩보활동이, 강제 노동이, "노동력 동원"이, 그리고 무엇보다, 생명에 필수적인 생산물은 반대파를 굶겨 죽일 수 있는 권력자들의 하사품이 될 것입니다! 정치적 투쟁의 무기로서의 배급 말입니다! 동지가 러시아에서 본 광경이 이러한 비열한 협잡이 아닙니까? 그리고 저는 그것이 단순히 혁명에 위협적이라고, 사회적 연대에 대한 노골적인 배반이 위험한 적을 만들어낼 뿐이라고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내가 말하는 것은 그러한 사회조직이 아나키스트적 개념에 중심을 두고 있는 지의 문제입니다. 만약 이 점에 대해 양보를 하게 된다면, 결국 그 사회는 다른 모든 아나키스트적 발상들 역시 폐기하게 될 것입니다. 그 문제에 대한 여러분의 접근은 비국가적 사회 조직을 불가능하게 만들기 때문입니다. 나는 <강령>에 대하여 기고를 하고 싶습니다. 하지만 이 모든 회색 영역이 해명될 때까지 미루려 합니다.“

그리고 <조직적 강령>은 위에 인용한 질문에 대한 답변을 하고자 한다. 특히 다음의 문제들에 대하여 주로 다루게 될 것이다.

○ 아나키스트 운동에서 다수와 소수의 문제

○ 자유 소비에트 체제의 구조와 필수적 기능의 문제

○ 대중에 대한 이데올로기적 추동의 문제

○ 혁명의 방위의 문제

○ 언론과 발언의 자유의 문제

○ “필요에 따른 분배”라는 아나키스트적 원칙에 따른 건설의 문제

이 문제들을 하나 하나 다루어보자.

(1) 아나키스트 운동에서 다수와 소수의 문제

마리아 동지는 이 문제를 우리의 총동맹 집행위원회에 대한 생각과 연동시켜 접근하고자 한다. 만약 총동맹 집행위원회가 행정적 기능 외에 “개별 조직의 활동을 이론적이고 조직적인 관점에서 추동”하는 기능 또한 가지고 있다면, 이 추동은 억압적이어야 하는 것일까? 만약 그렇다면, 동맹에 가맹한 조직들은 스스로의 전술을 준비하고 입장을 결정할 수 있을까? 그렇지 않으면, 동맹의 다수가 결정한 전술과 입장에 따라야 하는가?

우선 우리가 볼 때, 총동맹 집행위원회는 중앙집중적 정당의 집행위원회와 달리 강압적인 성격을 지닌 권력기구가 이 될 수 없다. 아나키스트 총동맹의 집행위원회는 동맹에서 일반적인 성격의 기능을 수행하는 기구이다. "집행 위원회" 대신에, "동맹 최고 사무국"이라 부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집행 위원회"라는 이름이 그 행정 기능과 자주성을 더 잘 드러내는 이름이라 하겠다. 집행위원회는 어떤 식으로든 고립된 집단의 권리를 제한하지 않고, 이론적, 조직적 의미에서 그들의 활동을 추동할 수 있을 것이다. 동맹 내부에는 다양한 전술적 문제들에 대하여 부담을 느끼는 조직이 있을 수밖에 없다. 그렇기에 언제나 특정 조직들에게는 이데올로기적이나 조직적인 보조가 필요하다. 집행위원회가 이러한 도움을 제공할 수 있음은 말할 필요도 없다. 집행위원회는 다양한 문제에 대한 동맹이 채택한 전술적/조직적 노선을 가지고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부 단체나 다른 단체들이 자신들의 전술 노선을 추구하겠다는 뜻을 나타낸다면, 집행 위원회나 동맹이 그들을 막을 수 있는 위치에 있을 것인가? 다시 말해서, 동맹의 전술적, 정책적 노선은 다수에 의해 결정되어 내려질 것인가, 아니면 모든 그룹이 적합하다고 생각되는 대로 운영되어 동맹 내부에도 수개의 노선이 있을 것인가?

원칙적으로 우리는 동맹이 하나의 전술적, 정치적 노선을 가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동맹은 무정부주의 운동의 방탕과 조직부전을 종식시키기 위한 목적으로 고안되었으며, 서로 마찰을 일으키는 여러 전술적 노선 대신에 모든 자유의지주의 세력이 공통의 방향을 추구함으로서 궁극적으로 그 목적을 달성할 수 있도록 하는 총체적 노선을 두고자 고안되었다. 그것이 없다면 연합은 주요한 존재의 이유 하나를 잃게 될 것이다.

다만 몇몇 문제에 대한 동맹 구성원의 의견이 갈라져 다수파와 소수파의 시각 차이가 등장할 수도 있다. 이러한 사례는 모든 조직과 모든 당사자의 생활에서 흔히 볼 수 있다. 그리고 보통 그러한 상황은 해결된다.

우리는 무엇보다도, 동맹의 단결을 위해서, 그러한 경우에, 소수의견이 다수에게 양보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것은 소수자와 다수자 사이의 대수롭지 않은 의견 차이의 경우에는 쉽게 달성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소수파가 자신의 관점을 포기하지 않으려한다면, 동맹 내에서 다수의 견해와 전술, 그리고 소수의 견해와 전술이라는 두 가지 다른 견해와 전술을 가질 가능성이 있을 것이다.

그 경우에, 동맹은 각 입장들을 총체적으로 숙의하어야 할 것이다. 숙의를 거쳐 동일한 사안에 대해 서로 다른 두 가지 관점이 실현 가능한 것으로 판단된다면, 그 두 가지 의견의 공존은 가능한 것으로 받아들여질 것이다.

끝으로 이들을 분리하는 전술적 · 정치적 사안에 대해 다수세력과 소수세력 간 합의가 불가능하다고 판명될 경우, 소수세력이 이탈해 별도의 조직을 찾기 위한 분열이 발생하게 된다.

이것이 특정 의제에 대한 동의가 이루어지지 않은 경우 가능한 세 개의 결과들이다. 모든 경우에서, 문제는 단순이 동맹의 행정기구일 뿐인 집행위원회가 아니라, 동맹이라는 총체가, 동맹의 총회나 대의원대회가 이를 결정할 것이다.

(2) 자유 소비에트 체제

우리는 현재의 (볼셰비키적) 소비에트 구성에 반대한다. 이 소비에트는 국가의 다른 형태를 의미할 뿐이다. 노동자 농민 대표자의 소비에트는 정당이 운영하는 국가의 정치 조직이 되었다. 우리는 이러한 체제의 대안으로 노동자 농민의 생산/소비 조직의 소비에트를 제안한다. 이것이 “소비에트와 공장위원회의 자유로운 체제”라는 구호의 의미이다. 우리는 이 체제가 그 모든 부문과 기능이 노동대중의 생산/소비조직의 손으로 집중되어, 전체 노동대중의 필요를 충족할 수 있도록 기능하는 경제적/사회적 협약이라 바라본다. 이러한 조직들과 소비에트들의 연방은 국가와 자본주의 체계를 철폐할 것이다. 그리고 자유 소비에트 체제의 핵심이 될 것이다. 분명히 말하지만, 이러한 체제가 아나키스트 코뮌의 온전한 이상이 되지는 않을 것이다. 하지만 이것은 아나키스트 코뮌의 최초의 집행 사례가 될 것이고, 노동대중의 자유롭고 비국가적인 창조성의 시대를 열 것이다.

우리는 노동자 농민의 조직, 혹은 공장위원회의 소비에트가 경제적/사회적 삶의 다양한 영역에서 내리는 결정들이, 폭력이나 법령을 통해서가 아니라, 노동대중과의 공통의 이해를 통해 집행될 것이라 본다. 하지만 이 결정은 그들을 선출하고 지지하는 이들에게 구속력을 가져야 할 것이다.

(3) 아나키스트들이 이론적으로 대중을 추동할 것이다.

대중의 혁명적 요소와 그들의 혁명운동을 추동한다는 것은 결코 일부 아나키스트들이 새로운 사회를 스스로 건설하고자 하는 의도로 받아들여져서는 안 되고, 그렇게 될 수도 없다. 이 건설의 과업은 전체 노동사회의 손으로가 아니면 이루어질 수 없다. 이 과업은 그들에게만 주어지는 것이며, 이 권리를 빼앗으려는 모든 시도는 반-아나키스트적이라 여겨져야 한다. 이데올로기적 조타의 문제는 사회주의적 건설의 문제가 아니라 혁명적인 투쟁을 염두에 둔 이론적, 정치적 영향력을 가지는 문제이다. 대중적 혁명 투쟁의 성격과 방침에 관심을 갖지 않는 한, 우리는 혁명가도 투사도 될 수 없다. 그리고 그 투쟁의 성격과 방침은 객관적인 요인뿐만 아니라 주관적인 요인, 즉 다양한 정치 집단의 영향력에 의해서도 결정된다. 그렇기에 우리는 혁명적 투쟁에서 아나키스트의 이데올로기적 영향을 극대화하기 위해 모든 힘을 다해야 한다.

오늘의 "전쟁과 혁명의 시대"는 놀라운 급진성으로 주요한 딜레마를 제기한다. 혁명적인 사건들은 (국가사회주의도 포함하여)국가주의, 혹은 반국가주의(아나키즘)적 사상의 추동 아래서 발전할 것이다. 그리고, 우리는 국가주의가 혁명을 패배시키고 대중을 새로운 노예로 만들 것이라는 흔들리지 않는 확신을 가지고 있다. 그렇기에 우리의 과업은 그 혁명이 무정부주의적 경향에 의해 형성되도록 가능한 모든 것을 해야 한다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이러한 조건에서, 우리의 오래된 운영 방식, 즉, 작고 흩어진 집단에 의존하는 원시적인 방식으로는 과업을 수행하지 못할 뿐만 아니라 오히려 그 수행을 방해할 것이다. 그렇기에 우리는 새로운 방법른을 도입해야 한다. 우리는 아나키즘의 이론적인 영향이 사건의 진행에 미치도록 조직해야 한다. 서로 다른 사소한 행동을 통해 간헐적으로 영향력을 발휘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은 강력하고 지속적인 영향력을 만들어야 한다. 우리는, 아나키즘 최고의 투사들이 이론적으로나 실제적으로나 강력하고 적극적이며 이론과 전술 면에서 근거가 있는 조직체, 즉 아나키스트 총동맹으로 조직하지 않는 한, 그것은 거의 불가능할 것이라고 본다. 혁명적 조합주의를 이론적인 측면에서 추동하는 시도가 이루어져야 하는 것도 같은 의미이다. 조직적인 방식으로 노동조합에 침투한다는 것은 노동조합 내에서 활동하는 모든 아나키스트가 서로 일치하는 특정한 이론, 계획된 작업의 전달자가 되는 것을 의미한다. 아나키스트 총동맹은 노동 운동전반이나, 파업이나 시위를 위한 전술과 계획을 수립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총동맹은 노동조합 내에서 그 노동계급의 혁명적 전술을 다양한 사건 속에서 퍼트려야 한다. 하지만, 그 사상을 퍼트리기 위해서는 아나키스트들이 각자와는 물론이고, 그들이 소속되어 있는 상급조직과 분명한 합의를 이루어야 한다. 그리고 그 조직의 이름으로 이데올로기적이고 이론적인 작업을 수행하여야 한다. 노동조합 내에서 조직적인 방식으로 자유의지주의적 노력을 수행하고, 아나키스트적 노력이 일치하도록 하는 것은 권위주의적 절차와는 아무런 관계가 없다.

(4) 혁명의 방어

혁명의 방어에 대한 강령의 테제에 대한 마리아 동지의 반대는, 다른 그 어떤 것보다 더 오해에 바탕을 두고 있다.

강령은 내전이라는 조건에서, 노동대중이 그들의 혁명군을 만드는 것의 필요성과 필연성을 강조한다. 또한 이 군대가 노동자와 농민의 생산/소비 조직의 전반적인 방향에 종속되어야 할 것이라고 주장한다.

군대를 이 조직들에 종속시키는 것은 선출된 시민적 권력과 같은 사상을 전혀 의미하지 않는다. 절대로. 군대는, 그 정신과 상징성 면에서 가장 혁명적이고 가장 인기 있는 군대일지라도, 자체 주도적으로 존재할 수도, 작전을 수행할 수도 없다. 군대는 노동대중의 권리와 혁명적 위치를 방어하기 위한 기관이어야 한다. 바로 그 목적 때문에, 군대는 노동대중에게 정치적 측면에 있어 전적으로 종속되어야 한다. 우리는 정치적이라 강조하는 것은, 군사적이고 전략적인 방향에 있어서는, 군대 내부의 군사체가 이를 다루어야 하며, 노동자와 농민의 지도 조직에게 책임을 다해야 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정치적으로 군대는 누구에게 직접적으로 책임을 져야 할까? 노동대중은 단일체를 구성하지 않는다. 그들은 다양한 경제 단체로 대표될 것이다. 그리고 이 같은 조직들의 연방체에 군대는 종속될 것이다. 이연방체의 성격과 사회적 기능은 이 문건의 시작 부분에 기술되어 있다.

노동대중의 혁명군이라는 개념을 수용할지 말지는 각각의 판단이다. 하지만 만약 군대가 구성된다면, 그 군대는 노동자와 농민의 조직에 종속되어야 한다는 원칙을 수용하여야 한다. 이 문제에 대한 다른 대안은 없다.

(5) 언론의 자유, 발언의 자유, 조직의 자유 등.

승리한 프롤레타리아는 이제는 패배한 숙적들과 억압자들의 언론의 자유도, 발언의 자유도 빼앗아서는 안 된다. 하물며 승리한 프롤레타리아 대오 내의 혁명적 사회주의 조직과 아나키스트 조직이라면 더욱 그러하다.

노동대중에게 발언과 언론의 자유는 필수적이다. 이는 그들이 건설적인 경제적/사회적 노력에 소요되는 과업들을 더 잘 인지하도록 하낟. 그리고 무엇보다 이 자유를 통해 노동대중은 적들의 핵심적 성격을, 주장을, 계획과 의도를 알아낼 수 있다.

자본주의 언론이, 기회주의적 사회주의자의 언론이 혁명적 노동대중을 오도할 수 있다는 것은 사실이 아니다. 혁명적 노동대중은 거짓말을 하는 언론을 해독하고 폭로하여 마땅히 받아야 할 답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언론의 자유와 발언의 자유는 자본가나 국가 사회주의자들처럼 더러운 행위를 통해 살아남는 사람들을 겁주어 거대한 노동대중의 눈으로부터 숨게 할 것이다. 노동대중에게 언론의 자유는 엄청난 이득이 될 것이다. 그것은 그들이 모든 것을 들을 수 있게 하고, 스스로 사물을 판단하게 하며, 그들의 이해를 더 깊게 하고, 그들의 행동을 더 효과적으로 만들 수 있게 할 것이다.

언론과 발언의 자유를 특정인이 독점하거나, 특정 정당의 도그마에 정합한 것만에 대하여로 그 자유를 한정하는 것은 그 독점자와 언론에 대한 신뢰를 망칠 것이다. 언론의 자유가 억압된다면, 그것은 진실을 감추고자 하는 욕구가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것은 볼셰비키가 놀라운 방식으로 보여주었다. 그들의 언론은 총검 아래에서 신뢰를 얻고, 필요에 따라 사전에 검토된다. 다른 언론은 없다.

그러나, 언론, 혹은 언론의 남용이 혁명적 유용성을 이유로 제한될 수 있는 구체적인 상황이 있을 수 있다. 러시아 혁명 시대의 한 가지 사건을 보자.

1919년 11월, 예카테리노슬라프(현재의 드니프로)는 마흐노우슈치나 반란군의 통제 하에 있었다. 하지만 동시에, 예카테리노슬라프는 드니프르강 좌측의 아무르와 니즈네드네프로프스크를 점령하고 있던 데니킨 부대에 의해 포위되어 있었다. 그리고 야코프 슬라시초프가 이끄는 데니킨군 부대가 북방 크레멘추그 지역으로부터 예카테리노슬라프를 향해 진군을 시작했다.

당시에 예카테리노슬라프에는, 언론의 자유가 있었기에, 마흐노우슈치나의 기관지 푸츠크 스보보디(“자유를 향하여”), 사회혁명당 우파의 기관지 나로도플라스티예(“인민의 힘”), 우크라이나 사회혁명당 좌파의 기관지 보로트바(“투쟁”), 그리고 볼셰비키의 기관지 즈베즈다(“별”) 등과 같은 일간지들이 발간되고 있었다. 데니킨군의 영적 지도자였던 카데츠만이 신문을 발행하지 못했다. 자. 이제 카데츠가 예카테리노슬라프에서 자체적으로 기관지를 펴내고 싶어했다고 해보자. 이것은 데니킨의 작전행동에 도움이 되었을 것임은 부정할 수 없다. 혁명적 노동자들과 반란군들이 카데츠에게 언론의 자유를 허용해야 했는가? 그 언론이 군사적 역할을 할 것이 자명한데도? 우리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내전 상황에서는 이런 사례가 여러번 발생할 수 있다. 이런 경우 노동자와 농민들은 언론과 발언의 자유와 포괄적 원칙이 아니라, 현재 벌어지고 있는 군사 투쟁과 관련해 적의 대변자들이 맡게 될 역할을 보아야 할 것이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말해서, (내전과 같은) 특별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승리한 노동자들은은 좌파적 견해와 우파적 견해를 막론한 언론과 발언의 자유를 똑같이 제공해야 할 것이다. 이러한 자유는 자유 노동대중 사회의 자부심과 기쁨이 될 것이다.

아나키스트들은 계급적 적들과의 싸움에서 혁명적인 폭력을 지지한다. 아나키스트들은 노동대중이 그것을 사용할 것을 촉구한다. 그러나 그들은 단 한순간이라도 권력을 휘두르지 않을 것이며, 그들의 결정을 무력으로 대중들에게 강요하지도 않을 것이다. 이러한 연관성에서 아나키스트들의 방법은 선전, 논쟁, 그리고 말과 서면으로 이루어지는 설득이 될 것이다.

(6) 아나키스트의 원칙 “역량에 따라 일하고 필요에 따라 분배한다”의 적절한 해석

이 원칙이 아나키즘적 코뮌주의의 초석임에는 질문할 여지가 없다. 이것만큼 아나키즘적 코뮌주의의 이상에 적합한 경제적, 사회적, 법적 언명은 없다. 강령은 또한 다음과 같이 말한다. "사회혁명은 현존하는 사회질서 전체를 재건할 것이다. 그리고 그로 인해 모든 인민들의 기본적 욕구가 제공될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아나키스트 사회의 문제에 대한 광범위한 원칙의 선언일 뿐이다. 그것은 사회 혁명 초기의 실제적인 요구와 구별되어야 한다. 파리 코뮌과 러시아 혁명의 경험에서 보듯, 비노동계급은 패배하지만 결정적으로 패배하지는 않는다. 혁명 초기에 그들은 하나의 생각에 사로잡힌다. 모이고, 혁명을 타도하고, 잃어버린 특권을 회복하는 것이 그것이다.

이 경우, "각자의 필요에 따라" 혁명적 지역의 생산물을 공유하는 것은 극도로 위험하고 치명적인 것이 될 수 있다. 이것이 반혁명적 계급들을 부양하는 것이라는 도덕적이고 전술적 어리석음은 제쳐두더라도, 새로운 계급이 즉각 등장할 것이고, 혁명이 모든 인민들의 수요를 충족하려는 것을 이용하여 노동하지 않고 게을러질 것이다. 이 이중의 위험을 무시할 수는 없다. 효과적인 대책이 마련되지 않는 한, 저 새로운 계급은 은 혁명의 장점을 빠르게 편취할 것이기 때문이다. 가장 좋은 방법은 반혁명적이고 노동적이지 않은 계급을 유용하게 노동하도록 하는 것이다. 어떤 분야에서든, 어느 정도든, 이 계급은 사회가 필요로 하는 유용한 직업을 스스로 찾아야 할 것이다. 사회의 생산량에서 그들의 몫에 대한 그들의 권리가, 이것을 가능하게 할 것이다. 의무를 지지 않는 권리는 없기 때문이다. 이것이 우리의 아나키스트적 원칙이 만들어내는 핵심적 지점이다. 우리의 아나키스트적 원칙은 모든 개인이 자신의 필요에 비례하여 자신의 역량과 능력으로 사회에 복무하고, 복무하지 않는다면, 필요를 충족하지 못할 것이라 이야기한다.

어린이, 노인, 병자, 노약자 등은 예외로 한다. 당연히, 사회는 그러한 모든 사람들을 노동의 의무에서 면제해 줄 것이며, 그들의 모든 필요를 충족시킬 권리를 부인하지 않을 것이다.

노동대중은 누군가가 자기 필요에 따라 사회에서 원하는 만큼 가져가고, 그 누군가의 기분에 따라 분배하거나 말거나 하는 원칙으로부터 깊은 분노를 느끼고 있다. 노동대중은 이 멍청한 원칙의 적용으로부터 너무 오래 고통받아왔고, 그렇기에 노동대중은 이 부분에 대하여 굽히지 않을 것이다. 우리의 정의감과 논리 역시 이 원칙에 분노하고 있다.

이 입장은 노동대중의 자유로운 사회가 공고해져 반혁명적으로 새로운 생산을 사보타주하는 계층이 더 이상 존재하지 않고, 소수의 게으름뱅이들만이 있을 때 비로소 바뀔 것이다. 그제야 “역량에 따라 일하고, 필요에 따라 분배한다”는 아나키스트적 원칙이 사회적으로 온전히 실현될 것이다. 이 원칙에 기반한 사회만이 온전한 자유와 참된 평등을 누릴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때에도, 사회의 물질적, 정신적 자원에 대한 권리를 누리는 모든 신체 건강한 사람들은, 그 자원의 생산과 관련하여 특정한 의무를 부담하게 될 것이다.

바쿠닌은, 당대에 이 문제를 분석하면서, 성숙한 아나키스트적 사상과 행동을 보여주었다. “밥을 먹고 싶다면 노동해야 한다. 노동을 거부하는 사람은, 그들에게 적선하여 먹여줄 조직이나 마을을 찾지 않는 한, 자유롭게 굶어죽으면 된다. 이들에게 어떠한 정치적 권리도 주지 않는 것은 타당해보인다. 일할 수 있음에도 일하지 않는 그들의 부끄러운 모습은 스스로의 선택이며, 그들은 타인의 노동에 의존하여 살아가고 있기 때문이다. 각각의 개인이 수행하는 노동 외에 사회적/정치적 권리의 기반이 될 수 있는 것은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