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itle 감옥: 사회적 범죄와 교화의 실패 #author 엠마 골드만 #SORTtopics 감옥, 인권, 교도소, 아나키즘 #date 1910년 #lang en #pubdate 2021-04-06T04:08:28
―편집자 주―
이 글은 엠마 골드만이 1910년 『아나키즘과 그 외 에세이들Anarchism and Other Essays』이라는 제목으로 펴낸 책에 실린 에세이다.
한국어 번역은 『저주받은 아나키즘』(김시완 역, 우물이있는집, 2001)이라는 다소 엉뚱한 제목으로 출판되었으나 현재는 절판되었다.
엠마 골드만의 에세이들을 편집하는 과정에서 별도로 하나의 문건으로 취급하게 되어 여기서는 〈감옥: 사회적 범죄와 교화의 실패〉만을 옮긴다.

1849년 도스토예프스키는 자신이 수감된 감방 벽에다 〈성직자와 악마The Priest and the Devil〉이라는 이야기를 썼다. 다음은 그 내용이다. “요 작고 살찐 신부님, 안녕!” 악마가 성직자에게 말했다. “왜 당신은 가난하고 길 잃은 사람들에게 거짓말을 했죠? 지옥의 고통이 어떻다고 설명했죠? 저 사람들은 이미 이 지상의 삶에서 지옥의 고통을 겪고 있다는 걸 당신은 모르나요? 국가의 권력자들이 나의 대변자라는 사실을 모르나요? 지옥의 고통이 있다는 것으로 저들을 위협하고 있는 사람이 바로 당신이에요. 이걸 모르나요? 그렇다면 나와 함께 가 봐요.” 악마는 그 성직자의 옷깃을 잡고 공중으로 들어 올린 다음 일반 공장으로, 또 강철 주물공장으로 데려갔다. 거기에는 이리저리 부산하게 움직이며 뜨거운 열기에 땀을 흘리며 열심히 일하는 노동자들이 있었다. 성직자는 답답한 공기와 뜨거운 열기 때문에 못견뎌했다. 눈에 눈물을 흘리며 성직자는 악마에게 간청했다. “이 지옥 같은 곳에서 나가게 해줘.” “오, 나의 귀한 친구, 왜 이러시나? 더 많은 장소를 당신에게 보여줘야 하는데.” 악마는 성직자를 끌고 공장을 벗어나 한 농장으로 갔다. 거기에는 곡물을 타작하는 여인네가 보였다. 먼지와 더운 날씨는 견디기 어려웠다. 일을 감독하는 자는 몽둥이를 들고 서서 중노동과 배고픔으로 땅바닥에 쓰러지는 자가 있다면 그 자에게 무자비하게 매질을 가했다. 그 다음에는 이 노동자들이 가족들과 함께 살고 있는 오두막으로 갔다. 더럽고 춥고 연기가 나고 악취가 풍기는 토굴 같은 곳이다. 악마가 씩 웃는다. 집에서는 가난과 고통이 적나라하게 드러났다. 악마가 묻는다. “이 정도면 충분히 알겠죠?” 그리고 마치 악마 자신이 이 사람들을 동정이라도 하는 듯한 태도를 보인다. 하느님의 경건한 종인 성직자는 이 상황을 도저히 견딜 수 없어 한다. 돈을 쳐들고 성직자는 간청한다. “제발 여기서 나가게 해줘. 그래, 그래. 여기가 지상의 지옥이야!” “잘 보셨겠지. 그런데 왜 당신은 저들에게 또 다른 지옥이 있다고 말하는 거야. 이건 저들을 고문하는 거지. 이미 신체적으로 거의 죽은 저들을 다시 정신적으로 죽도록 고문하는 거야. 자, 따라와. 한 가지 더 최악의 지옥을 보여주겠어.” 악마는 성직자를 감옥으로 데려가 지하감옥을 보여주었다. 공기는 더러웠고 많은 인간 군상들이 질병에 시달리며 힘없이 바닥에 누워있었다. 봄에는 해충이 들끓었다. 해충은 이 헐벗고 야윈 몸뚱이를 게걸스럽게 파먹고 있었다. 악마가 성직자에게 말했다. “당신이 입고 있는 비단옷을 벗고 이 불행한 사람들처럼 발목에 쇠사슬을 차시오. 그리고 저 차갑고 더러운 바닥에 누우시오. 그런 다음 저들을 기다리고 있는 지옥을 말해주시오.” 성직자가 대답했다. “안 돼, 안 돼. 이것보다 더 무서운 건 있을 수 없어. 제발 여기서 나가게 해줘.” “그래요. 여기가 지옥이지요. 이것보다 더한 지옥은 있을 수 없지요. 그걸 몰랐나요? 여기 있는 이 사람들의 모습이 지옥의 광경이 아닌가요? 저들이 죽기 전에 머물고 있는 바로 여기가 지옥인 줄 당신은 몰랐나요?” 이 이야기는 50년 전 암울한 러시아에서 가장 끔찍한 감옥의 벽에 쓰여진 것이다. 그러나 지금 미국의 감옥에서도 이와 똑같은 현상이 일어나고 있다는 것을 누가 부인하겠는가? 자랑스러운 여러 개혁과 대단한 사회적 변화와 심대한 발견을 이루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인류는 점점 더 최악의 지옥으로 향하고 있다. 거기서 난폭하고 저급하게 취급당하고 고문을 당한다. 그런데 이 사회 자체가 만들고 있는 지옥을 인정하지 않는 환상 때문에 이 사회가 보호되고 있는지 모른다. 감옥이 사회적 보호막인가? 어떤 괴물 같은 인간이 이런 발상을 했는가? 그것은 마치 감옥에 있으면 널리 확산되는 전염병으로부터 보호받을 수 있다고 하는 것과 같다. 영국의 한 무시무시한 감옥에서 18개월을 보낸 후 출감한 오스카 와일드는 자신의 걸작 〈리딩 감옥의 시The Ballad of Reading Goal〉를 이 세상에 내놓았다. 그 시의 한 구절을 보자. 독초와 같은 사악한 짓들은 감방 공중에 활짝 꽃을 피운다. 인간의 선善은 감방에서 소진되고 사그라든다. 육중한 옥문은 차가운 고뇌요 간수는 절망이다. 사회는 이런 독한 공기를 계속 유지한다. 그래봐야 가장 최악의 결과만 양산된다는 걸 모른다. 우리는 지금 감옥 시설을 유지하기 위해 하루에 3백5십만 달러를, 일 년에 10억9만5천 달러를 소비하고 있다. 민주적인 사회에서 밀 생산에 필요한 7억5천만 달러와 석탄 생산에 필요한 3억5만 달러를 합한 액수를 감옥 유지에 소모하고 있다. 워싱턴의 부시넬(Bushnell) 교수는 감옥에 들어가는 비용을 연간 60억 달러로 추정했고, 범죄에 관한 미국의 저명한 저술인인 프랭크 리드스턴(G. Frank Lydston) 박사는 그 비용이 50억 달러는 족히 된다고 했다. 엄청난 수의 인간들을 짐승처럼 가두는데 이런 상상하지 못할 비용이 들어간다.[1] 범죄는 증가 추세에 있다. 우리가 알기로 미국에서는 지난 20년 전보다 인구 1백만 명당 범죄 수는 4.5배나 늘어났다. 미국의 범죄 양상 중 가장 가공할 측면은 (남부에서는 도둑이나 횡령, 강간이 많지만) 전반적으로 살인이 많다는 점이다. 런던은 시카고보다 범죄규모 면에서는 다섯 배나 크지만 연간 살인 건수로 보면 시카고가 118건이고 런던은 20건에 불과하다. 그렇다고 시카고가 대표적인 미국의 범죄 도시가 아니다. 시카고는 미국 내에서 일곱 번째로 범죄가 많은 도시이다. 남부의 네 개 대도시와 샌프란시스코와 로스앤젤레스를 포함한 도시 중에는 시카고가 선두이다. 이런 무서운 현실에 비추어 볼 때 감옥을 잘 운영해 사회를 보호한다는 이야기는 한 마디로 어불성설이다. 일반인들은 대개 어떤 진실을 간파하는 데 느린 편이다. 그러나 아주 철두철미하게 조직화되고 중앙집권화 된 대부분의 제도는 과도하게 국가 예산을 낭비하면서 유지되는데 이것은 사회적으로 완전히 실패한 것으로 입증되었다. 이제 누구나 감옥 존립의 타당성 자체를 의심하지 않을 수 없다. 우리 사회가 신성한 권리에 의해 보호되기 때문에, 즉 법의 권위에 의해 보호되기 때문에 사회조직이 안전하다는 생각은 이미 과거의 유산이 되었다. 지난 몇 년간에 걸쳐 광범위하게 감옥상황과 감옥 소요사태, 감옥 교화내용을 파악한 결과는 감옥에 들어간 사람들이 사회의 가장 밑바닥을 체험하게 된다는 것을 알려주고 있다. 즉 감옥에서 사회와 개인의 삶 간에 엄청난 괴리의 원인을 깨닫게 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감옥은 사회범죄를 막는 곳인가? 이 중요한 질문에 답하기 위해 우리는 마땅히 범죄의 본질과 원인, 그리고 범죄에 대처하기 위해 사용된 방법과 이런 방법을 통해 범죄의 공포를 사회에서 얼마나 효과적으로 제거했는지 여부를 살펴보아야 한다. 첫째, 범죄의 본질에 대해 생각해보자. 하벨록 엘리스(Havelock Ellis)는 범죄를 네 개 국면으로 구분한다. 즉 정치적, 감정적, 정신이상적, 상황적 범죄가 그것이다. 정치적 범죄는 어떤 면에서는 독재 정부가 정권의 안정을 위해 만들어낸 범죄이다. 정치범의 경우 반드시 유죄라고 하기 어렵고 반사회적 행동을 했다고 보기도 어렵다. 정치범은 단지, 그 자체로 반사회적인 정치질서를 타도하려한 것뿐이다. 이 사실을 전 세계가 다 인정한다. 그런데 미국에서만 어리석게도 민구국가에서는 정치범이 설 자리가 없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시카고의 아나키스트들도, 모든 파업자들도 정치범으로 인정되지 않는다. 하벨록 엘리스는 이렇게 말한다. “결과적으로 우리 시대 미국의 정치범은 다른 시대로 말할 것 같으면 영웅이요, 순교자요, 성인에 해당할 것이다.” 롬브로소(Cesare Lombroso)는 정치범을 인류 진보운동의 참된 선구자라 부른다. 다음은 감정적 범죄를 생각해보자. 하벨록 엘리스는 그의 저서 『범죄자The Criminal』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감정적 혈기 때문에 범죄자가 되는 자는 태어날 때부터 나쁜 인간은 아니며 오히려 정직한 삶을 사는 자이다. 이들은 어떤 부당하고 힘든 상황에 직면했을 때 자신을 위해 일을 저지른다.”[2] 와이어(Hugh C. Weir)는 그의 저서 『경찰의 위협The Menace of the Police』에서 감정적 혈기 때문에 일을 저지른 범죄자 짐 플래허티(Jim Flaherty)의 경우를 인용한다. 플래허티는 범죄자가 된 후 결과적으로 파멸하였고 가난에 찌들게 되어 사회에 의해 구제받기는커녕 오히려 알콜중독자와 상습범이 되고 말았다. 플래허티보다 더 동정이 가는 경우는 아르키(Archie)의 사례이다. 아르키는 브랜드 휘트록(Brand Whitlock)의 소설 『잘못된 판결The Turn of the Balance』에 등장하는 희생자이다. 이 소설은 미국 최고의 범죄폭로 소설이다. 플래허티 이상으로 아르키의 삶 자체가 범죄에 빠지기 쉬운 상태였고, 주변의 잔인한 비인간성 때문에 무자비한 법망에 걸려 죽게 된다. 아르키와 플래허티 같은 유형의 사람들은 많다. 이들의 행태를 통해 법적으로 범죄가 어떤 것인지 알 수 있고 사회가 범죄를 어떻게 다루는지도 엿볼 수 있다. 그리고 이런 과정에서 우리의 사회적 삶을 위해하는 사회적 악이 어떻게 창출되는지 파악할 수 있다. 다음으로 정신이상적 범죄를 보자. 역시 하벨록 엘리스의 말이다. “정신이상적 범죄자는 어린아이의 범죄로 취급될 수 있다. 왜냐하면 이런 범죄자의 심리는 어린아이나 동물의 상태와 동일하기 때문이다.”[3] 법적으로도 이미 드문 경우이기는 하지만 광적인 본성 때문에 범죄를 저지를 수 있고, 어떤 경우는 재산이 너무 많아 광적인 범죄를 저지르기도 한다는 사실을 인정한다. 하지만 전반적으로 법은 여전히 가혹할 정도의 권력을 발동해 정신이상을 범죄로 처벌한다. 엘리스는 리히터 박사(Dr. Richter)의 통계를 인용했는데, 독일에서는 144건의 정신이상 범죄 중 106명의 광인이 중벌을 받았다. 상황적 범죄자는 감옥에 수감된 자 중 가장 많은 비율을 차지한다. 이들이 사회 복리의 가장 큰 위협이다. 많은 인간 군상들이 범죄를 저지를 수밖에 없는 이유는 무엇인가? 사회에서 살기보다 감옥 담장 안에서 저주스러운 삶을 살기를 택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아무리 저급한 인간이라도 자유를 사랑한다. 그런데도 도망갈 곳도 없는 감옥에 들어가는 이유는 탈출구 없는 현실 때문이리라. 우리 사회와 경제의 구조가 잔인하고 가혹하기 때문에 범죄의 원인이 된다. 범죄를 저지르는 요인으로 생물학적, 생리학적, 심리학적 요소를 부인하는 건 아니다. 하지만 선진적 범죄학자들 중 그 누구도 사회 · 경제적 영향이 범죄를 일으키는 가장 무자비하고 해로운 요소임을 인정하지 않는 자가 없다. 본성적인 범죄성향이 있다고 해도 그런 성향이 유해한 사회적 환경에서 성장하게 되는 것은 사실이다. 하벨록 엘리스는 인명을 해치는 범죄와 술값이 밀접한 상관관계가 있고, 재산을 노리는 범죄와 밀가루 값 사이에 상관관계가 있다고 말한다. 엘리스는 범죄학자 케틀레(Quetelet)와 라카사뉴(Lacassagne)의 연구 결과를 인용하고 있다. 케틀레는 사회를 범죄의 온상으로 보고 범죄자를 그 온상에서 자란 사람으로 본다. 라카사뉴는 이렇게 말한다. “사회적 환경은 범죄를 배양하는 매개체고 범죄자는 그 배양균, 즉 활성화되도록 해주는 매개체를 만났을 때 성장하는 것이다. 모든 사회는 그 사회에 알맞은 범죄들이 있다.”[4] 산업이 번영을 구가하는 시기에도 노동자가 자기의 건강과 활력을 제대로 유지할 수 있을 정도로 벌이를 하기는 불가능하다. 그리고 번영이라는 것도 기껏해야 상황일 뿐 많은 사람들은 항상 실업상태에 있다. 세계 곳곳에서 많은 사람들이 일자리, 곧 먹을 것을 찾아 돌아다닌다. 이들이 찾는 곳인 빈민구제소가 아니면 슬럼가이다. 자존심이 조금이라도 남아있는 사람이라면 가난 때문에 굶주리고 비참해지느니 차라리 공개적으로 저항하거나 범죄를 저지른다. 에드워드 카펜터(Edward Carpenter)는 지표에 잡힌 범죄의 5/6는 사유재산권 위반과 관련된 범죄라고 평가한다. 철저하게 조사해본다면 90%의 범죄가 직간접적으로 경제 · 사회적 불평등과 사회의 무자비한 착취체계와 연루된 것임이 입증될 것이다. 범죄자가 이 점을 제대로 설명하지 못할지는 모르지만 자신의 범죄가 비참한 사회경제적 현실 때문이라는 사실 정도는 안다. 하벨록 엘리스와 롬브로소와 기타 저명한 사람들이 집대성한 범죄 관련 철학을 보면 범죄자들은 자신을 범죄로 몰아넣은 것이 사회라는 인식을 아주 강하게 가지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탈리아 밀라노의 한 도둑은 롬브로소에게 이렇게 말했다. “나는 도둑질을 하지 않았어요. 나는 단지 부자에게 남아도는 물건을 가져온 것뿐이에요. 내가 도둑이라면 변호사나 상인들도 도둑 아닌가요?” 어떤 살인자는 다음과 같은 기록을 남겼다. “사회적 미덕을 행하는 자들 중 3/4은 사악한 비겁자들이다. 이 사실을 알고 나는 공개적으로 부자를 공격한다고 해도 부자들이 교묘하게 사기치는 것보다는 덜 수치스럽다고 생각했다.” 또 다른 범죄자는 이런 기록을 남겼다. “나는 여섯 개의 달걀을 훔친 죄로 감옥에 있지만 수억을 꿀꺽한 장관들은 명예를 누리고 있어요. 불쌍한 나라 이탈리아 같으니라구!” 많은 교육을 받은 한 범법자는 다비트(Davitt) 박사에게 이렇게 말했다. “사회의 법이란 이 세상 부자들의 권력과 재산을 지켜줄 목적으로 만들어진 것이다. 그러므로 다수의 인간들은 권리와 기회를 빼앗기게 된다. 그런데 남의 것을 엄청나게 빼앗는 자의 것을 도로 빼앗은 나를 처벌하는 이유가 뭔가?” 이 사람은 또 이렇게 덧붙였다. “종교는 한 인간의 독립심을 빼앗고, 애국심은 부자들을 위한 신앙이고 서민들의 복지와 평화는 그 애국심으로 인해 희생된다. 토지법은 대지의 본성에 어긋난다. 이런 것들과 비교할 때 도둑질은 오히려 고상한 행위이다.” 이것이 그 도둑의 결론이다.[5] 이런 범죄자들의 말에는 모든 법과 도덕에 관한 책보다 더 위대한 철학적 진실이 담겨있다. 경제적 · 도덕적 · 철학적 요소들이 범죄의 세균이 되는 상황에서 과연 사회는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가? 범죄에 대처하는 방식에도 세월에 따라 몇 가지 변화가 있었지만 그 변화는 주로 이론적인 의미에서의 변화였다. 실제로 사회가 범죄자를 다루는 주요 동기는 항상 동일했다. 그것은 복수이다. 사회는 신학적인 사상도 채택했는데 그것이 처벌이다. 법적이며 소위 문명화된 방법이 바로 구금과 공포와 교정이다. 이상 언급한 모든 방법들은 다 완전히 실패했다. 오늘날 우리가 갖고 있는 범죄 해결책이란 암흑시대에 있던 해결책보다도 더 나아진 게 없다. 원시인처럼 누군가를 때려주고 어떤 비행에 대해 복수하고자 하는 자연적 충동은 시대에 뒤진 것이라고 생각한다. 문명화된 인간은 개인적 차원의 용기를 발휘하는 것이 아니라 조직적인 제도를 통해 비행을 처벌한다. 이것은 국가는 뭐든 해도 정당하다는 어리석은 믿음에 바탕한 것이다. 법의 위엄은 이성에 부여된 것이지 원시적 본능에 부여된 것은 아닐 것이다. 법은 보다 고상한 본능을 들먹인다. 사실 법의 권위는 신학적 논리와 혼합되면서 더욱 강화되었다. 신학에서는 처벌을 정화의 수단 내지 죄의 대속으로 선언한다. 하지만 법적으로 사회적으로 법령은 처벌을 행사하는 것으로 범죄자에게 고통을 가할 뿐만 아니라 타인에게 공포를 조장하는 효과를 노린다. 그런데 처벌이 가능한 실제적 토대는 무엇인가? 그것은 자유의지의 개념, 즉 인간이 항상 선악 간에 자유로운 선택을 행사할 수 있다는 것이 전제되어야 한다. 그 전제 위에서 악을 선택하면 그 대가를 치러야 하는 것이다. 이런 이론은 오래 전에 논파되어 폐기처분되었는데도 정부의 기관들은 이 이론을 매일 적용하고 있다. 결국 이 자유 선택의 이론을 인간의 삶을 가장 잔인하게 파괴하는 논리로 만든 것이다. 이 자유의지 이론이 지속되는 이유는 무서운 처벌이 더 크면 클수록 그 예방효과가 더 확실하다는 끔찍한 개념이 계속 유효하다고 보기 때문이다. 사회는 범죄자들을 가장 무서운 방법을 사용해 다루고 있다. 왜 이런 짓을 그만두지 않는가? 미국에서는 누구라도 유죄로 확정되기 전에는 무죄추정의 원칙을 적용받고 있지만 법의 집행 기관인 경찰은 공포를 휘두른다. 무력으로 일반인들을 무차별적으로 체포하고 곤봉으로 때리고 괴롭힌다. 한 마디로 야만적인 삼류 폭력을 사용하여 불쌍한 희생자들을 유치장에 가두고 욕설을 퍼붓는다. 그런데도 범죄는 급증하고 사회는 계속 그 비용을 치르고 있다. 한편 불쌍한 시민이 법의 은전을 온전히 입었을 때 그 사람의 진짜 고난이 시작된다는 것은 공공연한 비밀이다. 인간으로서 권리를 빼앗기고 매우 잔인한 간수들의 손에 운명을 맡긴 범죄자는 매일 비인간화의 과정을 경험한다. 이런 감옥의 참상은 정말 비참하다. 채찍과 곤봉과 사슬과 물고문과 전기고문, 독방 감금, 투우장에 집어넣기, 밥 굶기기 등의 고문수법을 동원하지 않고 선량한 인간을 만드는 처벌시설이나 교정시설이 미국에는 단 하나도 없다. 이런 처벌제도에서는 범죄자의 몸은 부서지고 영혼은 상처를 입고 정신은 고독한 감방생활에 말살될 뿐이다. 오하이오, 일리노이, 펜실베이니아, 미주리 주와 남부에서는 위에 열거한 그런 가증스런 처벌 수법들이 악명을 인정받아 해외로까지 수출되었다. 그리고 대부분의 감옥에서는 옛 기독교인이 처벌한 방법들이 여전히 유효하게 사용된다. 하지만 감옥의 담장이 높아 희생자들의 고통스러운 비명소리는 담을 넘지 못했고 소리를 삼켜버렸다. 이 20세기의 공포의 방인 감방에서 범죄자가 인간다운 인간으로 변모할 수 있다는 희망을 품기보다는 과감하게 모든 감옥들을 일거에 없애버리는 게 나을지 모른다. 감옥이라는 지옥의 문이 세상으로 열리면서 쇠약한 자, 불구자, 의지가 없는 자, 인간성을 상실한 파선한 선원들이 이마에 카인의 낙인을 찍고 그 문 안으로 들어섰다. 이들의 희망은 산산이 부서지고 이들의 모든 본능적 성향들은 억압되었다. 이들이 직면한 것은 오직 굶주림과 비인간성이었고, 이들이 다시 사회로 나왔을 때는 생존을 위해 다시 범죄에 빠져드는 것밖에 달리 길이 없다. 반평생을, 아니 거의 전 생애를 감옥에서 보낸 사람들도 적지 않다. 나는 아일랜드의 블랙웰스에 사는 한 여자를 아는데 이 여자는 38번이나 감옥을 드나들었다. 또 나는 내 친구가 피츠버그 감옥에서 돌봐준 17세 소년을 알고 있는데 이 소년은 아예 자유의 의미조차 몰랐다. 교도소에서 교화를 받는 것이 이 소년이 그때까지 살아오면서 걸어온 길이었다. 그러다 이 소년의 봄은 다 망가졌고 사회가 가한 복수의 희생자로 죽었다. 이런 개별적인 경험들은 교도소 교화와 관련된 광범위한 자료에 잘 나타나 있다. 이 자료들은 감금 내지 교화의 수단으로서 감옥이 얼마나 유용한지 못한 곳인가를 입증하는 것이었다. 선량한 뜻을 지닌 사람들이 이제 감옥 문제를 재검토하기 시작했다. 즉 진정한 의미로 죄수들을 교화하여 다시 인간다운 인간으로 만들려는 방법을 모색하는 것이다. 이것은 칭찬할만한 일이긴 하지만 마치 좋은 포도주를 케케묵은 병에 담는 것과 같아 좋은 결과를 얻기는 불가능할 것이다. 사회를 완전히 혁신하지 못하고서는 범죄라는 암으로부터 인간을 구제할 수 없다. 무디어진 사회적 양심이 바로 세워진다면 처벌제도도 새로운 모습을 갖추게 될 것이다. 그러나 무엇보다 먼저 취할 조치는 사회적 의식의 회복이다. 지금 사회의식은 너무 황폐화된 상태에 있다. 범죄는 정도의 문제일 뿐 반드시 존재할 수밖에 없다는 사실은 정말 슬픈 현실이다. 즉 정신적 · 심리적 · 사회적 환경에 따라 모두 나름대로 다소간의 범죄라는 질병을 갖고 있다는 이야기다. 그래서 각 개인의 범죄는 총체적 범죄상의 단면을 반영하는 것일 뿐이다. 사회의식이 각성되면 각 개인도 법을 위반하지 않게 된다. 사회적 범법자가 생기더라도 그 자를 박해하고 경멸하고 불신하지 않고 사회에서 다시 새 삶을 살 수 있도록 기회를 준다. 물론 현 제도로는 이런 수준에 도달하기 어렵다. 현 제도는 냉정하고 완고하며 잔인하다. 사회적 의식이 각성되면 감옥의 관리체계와 간수들과 경계병들의 잔인함으로 감옥에서 희생을 당하는 이들에게 자유를 줄 수 있다. 여론은 강력한 무기이다. 감옥을 유지하는 자들도 여론을 두려워한다. 특히 자신들의 직무가 여론에 좌우된다는 걸 인식하고 이들도 약간의 인간성을 지니도록 교육을 받기는 한다. 하지만 가장 중요한 조치는 죄인들도 감옥살이를 하는 동안 일할 권리를 행사하도록 하는 것이다. 동시에 금전적 보상도 하여 이를 저축하고 석방되어 새 삶을 시작할 때 이 돈을 활용하게 해야 한다. 현 사회에서 임금노예에 불과한 노동자들이 죄수들의 노동을 반대하는 상황을 고려할 때 많은 것을 기대한다는 것 자체가 어렵다. 나는 노동자들의 반대가 나쁘다고 말하고 싶지는 않다. 다만 죄수들의 노동을 반대하는 것은 그다지 타당한 주장이 아니라는 것을 말하고 싶을 뿐이다. 우선 노동조합에서 지금까지 제기한 반대논리는 마치 풍차와 싸우는 돈키호테 식으로 막무가내인 주장이다. 죄수들은 항상 일해 왔다. 다만 국가가 이들의 몫을 착취했을 뿐이다. 물론 개별적 고용주가 체계적으로 죄수의 노동력을 착취하기도 했다. 국가는 죄수들을 정부의 일에 동원하기도 했고 일반 사유지 농장에서 일을 시키기도 했다. 미국의 29개 주에서는 죄수가 농장에서 일하는 것을 추진하고 있다. 그러나 연방정부와 17개 주에서는 이 계획을 포기했다. 유럽의 경우도 이 계획을 취소시켰다. 왜냐하면 죄수들에게 중노동과 학대 그리고 끊임없는 부정이 자행되었기 때문이다. 올드리치(Aldrich)가 통치하는 주州인 로드아일랜드는 아마 최악의 예일 것이다. 1906년 7월 7일자로 약 5년간의 계약을 맺고 개별 계약자의 선택에 따라 다시 5년을 갱신할 수 있는데, 이 계약에 따라 로드아일랜드 교도소와 이곳의 ‘프로비던스 카운티 감옥’의 수감자들은 ‘릴라이언스 스털링사Reliance-Sterling Mfg. Co.’에 팔렸다. 이 회사는 실제로 거대한 죄수 노동 트러스트를 조직하고 있다. 코네티컷, 미시간, 인디아나, 네브래스카, 사우스다코타, 뉴저지와 일리노이, 위스콘신 교도소 등 11개 교도소의 죄수 노동력을 사용한다는 차용 계약을 맺고 있다. 로드아일랜드의 계약 내용에 따른 막대한 부당이득의 규모는 다음과 같은 사실에서 추정해볼 수 있다. 이 회사는 네브래스카에서 죄수 한 명의 노동 대가로 하루에 62.5센트를 지불한다. 예를 들어 테네시 주의 경우 죄수 한 명의 노동 비용으로 ‘그레이 더들리 하드웨어사Gray-Dudley Hardware Co.’로부터 하루에 1.10달러를 받는다. 미주리 주에서는 ‘스타 오버럴사Star Overall Mfg. Co.’에서 70센트를 받고 웨스트버지니아에서는 ‘크래프트사Kraft Mfg. Co.’로부터 하루에 65센트, 메릴랜드 주에서는 셔츠 제조회사인 ‘오펜하임, 오베른 독 앤 컴Openheim, Oberndorg & Co.’으로부터 55센트를 받는다. 여기서 보이는 가격차가 막대한 부당이익이 된다. 예를 들어, 릴라이언스 스털링사Reliance-Sterling Mfg. Co.가 일반 노동자를 활용하여 셔츠를 만드는 데 드는 비용은 12개당 1.20달러 이상 든다. 그러나 로드아일랜드 측에 지불하는 비용은 12개당 30센트이다. 게다가 로드아일랜드 주에서는 거대한 공장을 임대 사용하는 비용을 회사 측에 전혀 물리지 않고 있다. 뿐만 아니라 전기료, 난방비, 조명비, 하수처리비와 세금까지 부과하지 않고 있다. 이 얼마나 막대한 부당 이익인가![6] 미국에서 죄수 노동력으로 매년 생산되는 셔츠의 가치는 1천2백만 달러 이상으로 평가된다. 이로 인해 당장 그 영향을 받는 곳이 여성 노동자 산업체이다. 많은 여성 노동력이 죄수 노동력으로 대체된 것이다. 남자 죄수들의 문제도 고려해야 하는데, 이들은 일을 배워 석방 후 자립할 수 있는 기반을 닦아야 하는데도 돈도 벌 수 없는 일에 매여 아무런 준비도 못하게 되는 것이다. 많은 노동력이 교도소에서 허비되고 있는 상황에서 이 문제는 정말 심각하다. 그럼에도 교도소 측 말로는 수감자들을 유용한 시민으로 훈련시킨다고 큰소리치고 있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고려 사항이 남아있다. 그것은 죄수 노동력으로 창출되는 막대한 이익 때문에 계약자들이 늘 이 불행한 희생자들을 착취하고 학대하면서 이익을 극대화하려 한다는 점이다. 죄수들에게 힘에 부치는 일을 시키고, 이들이 과도한 요구 조건에 부응하지 못할 때는 잔인하게 처벌을 가하기도 한다. 죄수들은 이런 일을 하면서도 석방 후 생계를 꾸려나갈 소망을 전혀 가질 수 없다. 예컨대, 인디아나 주는 현대적인 감옥으로 개선하는 데 있어서 정책의 선두에 서서 돈을 쏟아 부었다. 그러나 1908년 교도소 훈련학교 측이 발표한 보고서에 따르면 135명이 체인 제조에 종사했고, 207명은 셔츠를 만들었으며, 255명은 주물공장에서 일했다. 총 597명이 이 세 종류의 일을 했다. 교도소에는 58개의 직종을 수감자들이 선택할 수 있도록 되어 있다. 이 중 39개는 국영업체와 연계된 직업이다. 다른 주와 마찬가지로 인디아나에서도 자체 교도소의 수감자들을 훈련시켜 출감 후 생계를 꾸려 나갈 수 있다고 공언한다. 그런데 실제로는 수감자들을 체인이나 셔츠나 빗자루 만드는 일에 배치했다. 빗자루 만드는 일은 ‘루이스빌 팬시 그로서리사Louisville Fancy Grocery Co.’의 이익을 위한 것이었다. 빗자루 만드는 일은 주로 맹인들이 독점했고, 셔츠 만드는 일은 여성 노동자들의 일이고, 체인 만드는 곳은 인디아나 주에 단 한 곳뿐이다. 그러니 죄수들이 출감한 후 체인 공장에 취업할 가능성은 전혀 없다. 한 마디로 직업훈련 자체가 웃기는 이야기다. 이렇게 주 정부가 힘없는 죄수들의 노동력을 착취하는 데 앞장선다면 노동조합에서 이런 더러운 짓거리를 멈추게 해야 하지 않겠는가? 또 노동조합이 조합원을 위해 주장하는 것처럼 죄수들에게 정당한 급료를 지불하라고 해야 하지 않겠는가? 그래야 죄수들이 일반 노동자들의 이익을 침해하는 적이 되는 싹을 자를 수 있다. 내가 이미 지적한 대로 수많은 죄수들이 무능하고 일자리도 없고 생계 수단도 없는 상태에서 해마다 재범을 저질러 감옥으로 되돌아가고 있는 실정이다. 과거에 죄수였던 사람도 살아야하지 않겠는가? 수감생활이 이들을 반사회적 인간으로 만든다. 출옥한 후 이들은 갈 곳이 없기 때문에 이들의 고통은 전혀 줄어들지 않는다. 이런 상황에서 필연적으로 건달과 사기꾼이 되고, 이들과 함께 형사와 경찰들이 공존하는 환경이 조성된다. 노동조합은 죄수 노동에 반대만하여 노동조합의 본래의 취지인 함께 일하고자 하는 목적을 상실하지 말아야 한다. 현 상태로 방치하면 경제적인 개선을 이루려는 모든 시도를 좌절시키는 독이 될 소지가 많다. 노동자들이 이런 결과를 피하고 싶다면 죄수들의 정당한 노동을 주장해야 하고 죄수를 형제로 받아들이고 노동조합에도 가입시켜야 한다. 그리고 수감자의 도움을 받아 죄수와 일반 노동자 모두를 착취하는 이 시스템을 전복시키는 데 힘을 모아야 한다. 마지막으로 언급해야 할 중요한 사항은 형 확정 선고의 야만성과 부당성을 인식해야 한다는 점이다. 변화가 있어야 하고 변화를 지향해야 한다는 데에 동의하는 사람은 쉽게 다음과 같은 결론에 도달한다. 즉 인간은 스스로 선량해질 기회를 부여받아야 한다는 사실이다. 그런데 10년, 15년, 20년씩 감옥에 갇혀 있으면서 어떻게 자신을 선량하게 만들 수 있겠는가? 자유와 기회가 있다는 희망이 있어야 살고자 하는 동기가 생기는 것이다. 사회는 너무나 오랫동안 수감자들에게 죄를 지어왔다. 적어도 수감자들에게 형을 확정하지는 말아야한다. 그렇게 될 가능성이 거의 없다는 걸 나는 안다. 그런 방향으로 변화가 일어날 가능성도 없다. 현 상황은 죄수와 교도관을 모두 양성하는 상황이다. 이런 상황이 영원히 폐지되지 않는다면 변화를 기대하기 어렵다. 순례자의 입에서 붉디 붉은 장미 한 송이! 그의 심장에서는 백장미 한 송이! 조금 낯선 방식으로 그리스도는 뜻을 밝혔으니, 어리석은 관료들은 그의 심장을 뚫고 위대한 교황의 눈에는 꽃이 피었네.
[1] W.C. Owen 저, 『Crime and Criminals』. [2] Havelock Ellis 저, 『The Criminal』. [3] Ibid. [4] Ibid. [5] Ibid. [6] 전국교도소노동위원회the National Committee on Prison Labor 간행물에서 인용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