엠마 골드만

여성 참정권

1910년

―편집자 주―

이 글은 엠마 골드만이 1910년 『아나키즘과 그 외 에세이들Anarchism and Other Essays』이라는 제목으로 펴낸 책에 실린 에세이다.

한국어 번역은 『저주받은 아나키즘』(김시완 역, 우물이있는집, 2001)이라는 다소 엉뚱한 제목으로 출판되었으나 현재는 절판되었다.

엠마 골드만의 에세이들을 편집하는 과정에서 별도로 하나의 문건으로 취급하게 되어 여기서는 〈여성 참정권〉만을 옮긴다.


우리 시대를 과학적 성취와 진보의 시대라 한다. 그런데도 여전히 미신을 숭배하는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닐 수 없다. 미신의 양태나 내용은 다르지만 인간의 마음에 작용하는 영향력과 재앙은 과거의 미신과 다를 바 없다.

우리 시대의 미신은 보통 선거권이다. 보통 선거권이라는 목표를 아직 성취하지 못한 사람들은 이 권리를 얻기 위해 피 흘리는 혁명적 투쟁을 하고 있고, 이미 그 권리를 장악한 사람들은 이 전능한 신전에 많은 희생자를 바쳤다. 그러니 이 보통 선거권의 신성함에 의문을 갖는 자에게는 화 있으리로다!

남성보다 여성이 보통 선거권을 숭배한다. 여성의 우상은 시대에 따라 여러 가지로 변천되어 왔지만 한 번도 무릎을 꿇고 손을 모으고 자기가 숭배하는 신상神像의 발이 흙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인식하지 못했다. 여성은 아득한 고대로부터 모든 우상들을 지극정성으로 섬겼다. 여성들은 우상들이 요구하는 희생을 치러야 했다. 여성의 자유와 자기 심장의 피와 자기 생명까지도 바쳐야 했다.

니체의 다음 경구를 기억하라.

“여성에게 갈 때 채찍만 가져가라.”

이 말은 매우 잔인하게 들리지만 바로 이 한 문장에 우상들을 섬기는 여성들의 태도가 어떤 것이었는지 말해주고 있다.

종교, 특히 기독교는 여성들을 열등한 생명체, 곧 노예로 평가 절하했다. 그래서 여성의 본성과 영혼은 억압되었다. 그렇지만 여성이 가장 열심히 기독교를 지탱하는 세력이었다. 확실히 종교가 여성으로부터 지지를 받지 못했다면 이미 오래 전에 사람들의 생활 속에서 사라졌을 것이다. 전 세계적으로 가장 열심히 일하는 선교사들과 가장 열심히 교회 일을 하는 사람들은 여성들이다. 이들은 자신의 정신을 옥죄고 자기 몸을 노예화하는 우상들의 제단에 자신을 희생시키고 있다.

참으로 만족할 줄 모르는 괴물인 전쟁은 여성에게 소중한 모든 것들을 빼앗는다. 전쟁은 여성의 오빠, 남동생, 연인, 아들을 빼앗고 그녀에게 고독과 절망의 삶을 안겨준다. 그러나 전쟁을 누구보다 지지하고 숭배하는 자 또한 여성이다. 아이들에게 정복과 권력을 사랑하라고 주입시키는 자가 바로 여성이다. 어린 아이들에게 전쟁의 영광을 속삭여주는 사람이 여성이다. 엄마들은 나팔소리와 총소리로 아이들의 잠을 깨운다. 전쟁터에서 돌아온 승자에게 영광스러운 관을 씌워주는 자도 역시 여성이다. 그렇다. 이 만족할 줄 모르는 괴물인 전쟁에게 최고의 값비싼 대가를 지불하는 자가 여성이다.

여기에 가정이라는 우상도 있다. 이 얼마나 끔찍한 숭배대상인가! 가정은 여성의 생명 에너지를 빨아먹는, 황금 막대기가 있는 현대적 감옥이다. 가정의 화사한 면 때문에 여성은 아내로서 엄마로서 가정주부로서 치러야 할 대가를 생각하지 않는다. 여성은 가정에 강력히 집착한다. 자신을 속박하는 그 가정에 집착한다.

여성은 자신이 교회와 국가와 가정에 지불하는 엄청난 희생을 알기 때문에 자신을 자유롭게 해 줄 보통 선거권을 원한다고 말할 수도 있다. 여성들에게는 선거권이 자신을 자유롭게 한다는 말이 사실일 것이다. 그러나 대다수의 여성 투표권 주창자들은 이를 불경스럽다고 비난한다. 이들은 오히려 자신들이 더 나은 기독교인과 가정주부 그리고 국가의 충성스러운 시민이 되기 위해 여성 투표권이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한마디로 여성 투표권은 여성이 아득한 옛날부터 수행해온 희생의 역할을 더욱 강화하는 수단이라는 것이다.

그런데도 여성들이 새로운 우상, 여성 투표권 앞에 엎드려 열광하고 헌신해야 하다니 얼마나 놀라운 모습인가. 과거의 여성이 그랬듯이 얼굴에 미소를 띤 채 박해, 감금, 고문 그리고 모든 형태의 비난을 견디고 있다. 심지어는 가장 의식 있는 여성조차도 옛날처럼 20세기의 신, 여성 투표권으로부터 기적을 바라고 있다. 생명과 행복과 기쁨과 자유와 독립 그밖에 모든 것이 이 투표권만 얻으면 당연히 나오리라 믿고 있다. 이런 맹목적 믿음에 빠져 여성은 50년 전에 이미 지성인들이 인식했던 바를 직시하지 못하고 있다. 바로 투표권이 악이라는 사실, 투표권이 사람들을 노예화하고 눈을 가려 자신들이 교묘하게 복종하게 된다는 사실을 알지 못한다.

여성의 평등한 투표권에 대한 요구는 여성도 모든 사회 문제에 대해 동등한 권리를 지녀야 한다는 주장에 근거하고 있다. 투표가 권리라면 아무도 이런 주장에 반박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슬프게도 인간의 마음은 우둔하여 부담을 지는 데에 권리가 있다고 생각한다. 한 무리는 법을 만들고 다른 한 무리는 그 법에 강제로 순종해야 하는데 이것이 바로 가장 가혹한 짐을 지우는 게 아닌가? 그런데도 여성은 투표권을 황금의 기회라고 아우성치며 달라고 한다. 이 투표권 때문에 이 세상에 많은 불행이 생겼고 남성은 자신의 순수함과 독립성을 빼앗겼다. 이 투표권으로 사람들은 철저하게 부패했고, 몇몇 무자비한 정치가들의 손아귀에 꼼짝없이 붙잡힌 먹이가 되었다.

불쌍하고 어리석고 자유로운 미국 시민들이여! 고작 굶어 죽을 자유, 위대한 미국의 고속도로를 달릴 수 있는 자유를 외치며 보통 투표권을 향유하는구나. 이 권리 때문에 우리의 팔다리는 쇠사슬을 차게 되었다. 우리가 받은 보상이라고는 파업이나 피켓 시위를 할 수 없다는, 즉 자기 노동의 열매를 강탈당하는 것 외에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가혹한 노동법이다. 20세기의 우상, 투표권으로 인한 재앙들을 보면서도 여성들은 전혀 배우는 것이 없다. 그러면서 여성이 정치를 깨끗하게 정화하리라고 확신하고 있다.

말할 필요도 없이, 나는 여성을 불평등하게 하는 보수적 관점에서 여성 투표권에 반대하는 것이 아니다. 여성이 남성과 함께 동등한 투표권을 갖지 말아야 할 신체적 · 생리적 · 정신적 이유는 없다. 그러나 남성이 실패한 곳에서 여성이 성공하리라고 맹목적으로 확신하지도 않는다. 그건 엉터리 주장이다. 여성이 사태를 더 악화시키지는 않을지라도 더 개선시킬 수도 없다. 따라서 여성이 정화하기 어려운 어떤 대상을 성공적으로 정화할 수 있다는 가정은 여성에게 초자연적인 권능이 있다고 믿는 것이나 마찬가지이다.

여성의 최대 불행은 천사 아니면 악마로 인식되는 것이다. 여성의 참된 구원은 여성을 이 지상으로 끌어내리는 것이다. 즉 인간으로 여성을 보는 것이 중요하다. 모든 인간은 어리석음과 실수를 범하기 마련이다. 그런데 이런 잘못을 교정시킬 수 있는 능력이 여성에게 있다고 믿을 수가 있는가? 여성이 정치적인 영역으로 진입한다고 해서 본래의 정치적 독성이 줄어들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는가? 아무리 열정적인 여성 참정권론자라 하더라도 그런 어리석은 주장을 하지는 않을 것이다.

사실 보통 투표권에 대해 가장 많이 연구한 사람들은 현재의 모든 정치권력체제는 불합리하고, 삶의 당면한 문제들을 해결하는 데 전적으로 부적절하다는 점을 이미 깨달았다. 여성 투표권을 열렬히 신봉하는 사람의 하나인 헨렌 섬너(Helen L. Sumner) 박사도 이런 관점에 동의하고 있다. 헬렌 여사의 훌륭한 저서 『평등 투표권Equal Suffrage』에서 그녀는 이렇게 언급한다.

“콜로라도에서 우리가 살펴본 바로는 평등 투표권이 현 체제의 가장 부패하고 타락한 특성을 그대로 반영하는 충격적인 방법에 복무하는 것이다.”

물론 섬너 박사는 마음속에 특정한 선거체제를 염두에 두고 한 말이지만 전체 대의제에도 똑같이 적용할 수 있다. 그런 토대에서 정치적 변수로서 여성이 얼마나 자신과 타인을 이롭게 할 것인가를 의심하지 않을 수 없다.

내가 이렇게 주장하면 우리의 열렬한 투표권 옹호론자들은 이미 여성 투표권이 있는 미국 내 주州들과 외국을 보라고 말한다. 호주와 뉴질랜드, 핀란드, 스칸디나비아와 국가들, 그리고 미국 내에서 여성 투표권을 허용하고 있는 아이다호, 콜로라도, 와이오밍, 유타 주에서 여성이 무엇을 성취했는지 잘 보라. 단지 먼 거리가 매력을 가져다주는 것뿐이다. 폴란드 속담을 인용하겠다.

“우리가 있지 않은 곳은 좋아요.”

사람들은 여성 투표권이 있는 곳의 여성들은 다를 것이라고 가정하고, 그들에게는 더 큰 자유와 사회경제적 평등, 세련된 인간적 삶, 대대적인 사회적 투쟁, 그리고 인류가 관련된 모든 중요한 문제에 대해 보다 깊은 이해가 있을 것이라고 가정한다.

호주와 뉴질랜드의 여성들은 투표를 하고, 법률 제정을 도울 수 있다. 그런데 이들 나라의 노동조건이 지금 막 여성 투표권 문제로 역사적인 투쟁을 전개하고 있는 영국보다 더 나은가? 이들 국가의 어머니들은 영국보다 더 모성을 보호받고, 아이들은 영국의 아이들보다 더 행복한가? 이들 국가의 여성은 남성과 여성에게 이중적으로 적용되는 청교도적 도덕규범에서 해방되었는가? 유세하러 돌아다니는 정치가가 아니라면 그 누가 감히 이런 질문들에 대해 긍정적인 답을 할 수 있겠는가? 그렇다면 호주와 뉴질랜드를 평등 투표권 성취의 성지라고 부르는 것은 옳지 않다.

한편, 호주의 현실정치를 아는 사람은 호주의 정치가 언론의 입을 막고 가장 가혹한 노동법을 발효시켰고, 중재위원회의 허가도 없이 파업을 반란과 동일한 범죄로 규정했다는 사실을 다 안다. 이런 사태에 대한 책임이 여성 투표권에 있다는 의미가 아니다. 호주가 경이로운 여성 노동자의 천국으로 언급될 이유가 없다는 점을 지적하고 싶을 뿐이다. 여성의 영향력으로 보스 정치의 굴레에서 노동을 해방시킬 수 없다.

핀란드도 여성에게 평등한 투표권을 부여했다. 아니, 정확히 말해 의회에 앉을 권리를 주었다. 이 권리가 주어진 이후 핀란드 여성은 러시아 여성의 열정보다 더 뜨거운 영웅적 열정을 발현했는가? 핀란드 역시 러시아와 마찬가지로 러시아 차르의 철권통치 하에 신음했다. 핀란드의 어디에 혁명적 러시아 여성들 같은 인물들이 있는가? 어디에 핀란드의 페로프스카이아(Perovskaias), 스피리도노바(Spiridonovas), 휘그너(Figners), 브레쉬코프스카이아(Breshkovskaias)가 있는가? 조국의 문제를 위해 기꺼이 시베리아 유형을 가는 핀란드의 어린 소녀들이 어디 있는가? 핀란드는 지금 슬프게도 영웅적 해방자가 없다. 어떤 이유로 투표권이 영웅적 해방자의 출현을 막는 역할을 했는가? 핀란드에서 자기 민족의 복수를 감행한 자는 여성이 아니라 남성이다. 남성은 투표권보다 더 효율적인 무기를 사용했다.

여성이 투표를 하는 미국 내 여러 주들이 있다. 이런 주들은 멋진 주라고 계속 칭송을 듣는다. 그러나 여성에게 투표권을 부여한 주에서는 무엇을 성취했는가? 성취한 것이 있다면 그것은 투표권 없이 열정적인 노력만으로는 성취할 수 없는 것이었는가?

사실 여성 투표권이 있는 주에서는 여성에게 평등한 재산권을 부여했다. 하지만 재산이 없는 여성 대중들에게 그 권리가 무슨 소용이 있는가? 수많은 임금노동 여성들은 하루 벌어 하루 먹고 살기도 바쁘다. 평등 투표권으로는 이런 여성 노동자들의 여건에 영향을 미치지도 못하고, 미칠 수도 없다. 이 점은 섬너 박사도 인정하고 있다. 섬너 박사는 사실을 정확히 알 수 있는 위치에 있다. 그는 열정적인 투표권 주창자이기도 하다. 평등 투표권 법에 유리한 자료를 수집하기 위해 뉴욕 주의 대학교 평등 투표권 연맹Collegiate Equal Suffrage League에서 콜로라도로 파견된 섬너 박사는 평등 투표권에 반하는 말을 가장 하기 싫어할 입장에 있는 사람이다. 그러나 그녀는 이렇게 말한다.

“평등 투표권은 여성의 경제적 여건에 아주 조금 영향을 미쳤다. 여성은 같은 일을 하고도 동등한 보수를 받지 못했고, 콜로라도의 여성들은 1876년부터 학교에서 평등 투표권을 행사했지만 여교사의 급여는 캘리포니아 여교사 급여보다 적다.”

섬너 박사가 말하지 않은 사실 하나가 더 있다. 콜로라도의 여성들은 34년 동안 학교에서 평등 투표권을 행사했고, 1894년부터는 모든 여성이 평등 투표권을 가졌지만 몇 달 전 실시된 인구조사 결과 덴버 시 한 곳에서만 15,000명의 저능아 학생이 있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교육부에서 일하는 사람들 대부분이 여성들임에도 불구하고 콜로라도의 여성들은 “가장 엄중한 아동과 동물보호법”을 통과시켰다. 콜로라도의 여성들은 궁핍하고 지능이 떨어지고 비행을 저지르는 아이들에게 지대한 관심이 있다. 그런데 이런 도시에서 15,000명의 저능아가 있다니 이 얼마나 여성의 보살핌과 관심이 없었다는 끔찍한 증거인가? 특히 가장 중요한 사회 문제인 청소년 문제에서 여성 투표권이 완전히 실패한 상황에서 여성 투표권을 찬양할 근거가 어디 있는가? 여성이 보다 우월한 정의감으로 정치를 할 것이라고 예상했는데, 그 결과물이어야 할 정의로운 법은 어디에 있는가? 1903년 광산 소유주들은 서부 광부 노조Western Miners’ Union를 상대로 게릴라 전투를 벌였다. 당시 제너럴 벨(General Bell)이 공포통치를 하고 있었다. 이 자는 한밤에 잠자는 사람들을 끌어내 국경선까지 납치한 다음 구덩이에다 버렸다. 그러면서 “법 따위 지옥에나 가라지, 몽둥이가 법이야”하고 말했다. 이때 여성 정치인들은 어디 있었는가? 왜 여성 정치인들은 이런 만행을 막기 위해 자신들의 참정권을 행사하지 않는가? 아니, 참정권을 행사하기는 했다. 여성 정치인들은 가장 공명정대한 인품을 지니고 있는 자유주의적 인물 와이트(Waite) 주지사를 패배시키는 데 표를 던졌다. 와이트는 결국 광산주들의 대표요 노조의 적이자 콜로라도의 제왕 피바디(Peabody) 주지사에게 권력을 넘겨주고 말았다. 남성 유권자만으로도 이보다 더 나쁜 결과를 가져오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럼 여성 투표권이 시행됨으로써 여성과 사회는 어떤 이득을 얻는가? 여성이 정치를 정화할 것이라는 주장은 미신에 불과하다. 여성 투표권이 실시되고 있는 아이다호, 콜로라도, 와이오밍, 유타 주의 정치 상황을 아는 사람은 이런 주장을 하지 않는다.

본질적으로 순수한 여성은 당연히 다른 사람들도 자기만큼이나 선량하게 만들기 위해 줄기차게 각고의 노력을 했다. 그래서 아이다호 주에서는 여성 투표권자가 거리의 여성들로부터 투표권을 빼앗았다. 거리의 여성들은 투표하기에 부적절한 “음란한” 여자라는 것이다. 여기서 “음란하다”라는 뜻은, 물론 돈을 위해 결혼하는 매춘을 뜻하는 것은 아니다. 불법적 매춘과 도박이 금지된 것은 말할 것도 없다. 이런 점을 고려할 때 법 자체가 여성적 특성을 지니고 있다. 바로 법은 항상 금지하는 특성이 있다. 모든 법들이 화려하다. 법이 진전될수록 결국은 지옥으로 향한 모든 문을 연다. 매춘과 도박은 금지법이 발표된 이후 그 어느 때보다 더욱 번성했다.

콜로라도에서는 여성의 청교도주의가 보다 극적인 형태로 표출되었다.

“불결하다고 이름난 정치인, 술집 관계자는 여성이 투표권을 갖게 되면서 정치에서 떨어져 나갔다.”[1]

콤스톡(Comstock) 형제가 더 잘할 수 있을까? 청교도 선조들이라면 더 잘 할 수 있지 않을까? 많은 여성들이 이런 생각을 한다는 것은 얼마나 끔찍한가. 나는 여성 투표권이 여성들의 지위를 높인다기보다는 굿이나 보고 떡이나 먹는 정치적인 관중으로 전락시키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나는 그것이 선량한 의도에서 나오기보다는 콜로라도 여인의 말처럼 “한 번도 들어가 본 적이 없는 집에 쳐들어가 정치적인 것이건 아니건 모든 것을 약탈해가고 싶어 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2] 그렇다, 인간의 정신, 그 세세한 구석구석까지 뒤져서 가져가고 싶어 하는 것이다. 이런 콜로라도 여인의 비난만큼 여성 대부분의 갈증을 해소시켜 주는 것은 없었다.

“지저분하기로 이름난 남성과 살롱 관계자들”이라. 확실히 여성 참정론자들에게는 더 많은 균형 감각이 필요하다. 참견 잘하는 국가는 심지어 정치나 환경을 완전히 정화한다면서 사람의 목숨을 빼앗는데 그 죄악상이 어찌 살롱 주인에 비하겠는가? 미국적 위선과 편견은 금주법에서도 확연히 드러났다. 금주법은 부자들은 술 취하게 내버려두면서 가난한 자가 술을 마실 곳은 샅샅이 뒤져 감시하였다. 다른 이유가 없다면, 삶을 향한 여성의 편협하고 순결한 태도는 정치적인 권력 소유 여부와 상관없이 자유에 더욱 큰 위험을 가져다준다. 남성은 이미 오래 전에 여성을 집어삼키고 있는 미신을 극복했다. 경제적 경쟁의 장에서 남성은 효율성과 정확한 판단력과 능력과 신속함을 과시하고 있다. 남성은 다른 사람의 도덕성을 청교도적 잣대로 재려고 하지도 않고 할 생각도 없다. 정치 활동에서도 남성은 맹목적이지 않다. 정치라는 제분소에서는 양이 문제이지 질이 문제가 아니라는 사실을 이미 간파하고 애초부터 감상적 개혁자가 아니면 고리타분한 보수주의자가 된다. 남성은 정치란 그저 거대한 습지 이상이 될 수 없다는 사실을 잘 안다.

정치에 뛰어든 여성은 야수의 본성을 알아야 한다. 여성은 자기 만족감과 이기주의를 통해 야수를 애완동물처럼 길들일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면 어린 양과 같이 부드럽고 달콤하고 순수해질 것이라고 생각한다. 여성은 자신의 표가 돈 때문에 매수된 적이 없다는 듯이, 여성 정치인은 매수될 수 없다는 듯이 위선을 떤다. 여성의 몸이 돈으로 거래되고 있는데 왜 여성의 투표권은 매수될 수 없는가? 바로 그런 현상이 콜로라도 주와 기타 여러 주에서 일어난 일이고, 이 사실을 여성 투표권을 옹오하는 자들도 부인하지 못하고 있다.

앞에서도 이야기했듯이 인간에 대한 여성의 이러한 편협한 태도만이 여성 정치인이 남성보다 우월한 정치인이 되지 못하는 유일한 이유는 아니다. 다른 요인들도 많다. 여성은 오랫동안 경제적으로 남성에게 기생하여 살아왔기 때문에 평등 개념을 완전히 상실하고 말았다. 여성은 남성과 동등한 권리를 강력히 요구한다. “그러나 험악한 지역에서 선거유세를 하려고 하는 여성은 거의 없다.”[3] 자기 이념을 위해 지옥과도 같은 곳에서도 정면으로 맞선 러시아 여성들과 비교할 때 이것은 얼마나 얄팍한 평등 의식인가!

여성은 남성과 동등한 권리를 요구한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자기의 존재가 남성들에게 매력적이지 못하면 분개한다. 남성들이 자신 앞에서 계속 담배를 피우고, 모자를 들어 올려 인사하지도 않고, 자신이 일어날 때 자리에서 발딱 일어나지도 않으면 무례한 행동이라고 분개하는 것이다. 이런 것들은 정말 사소한 일들이지만 그럼에도 미국의 여성 유권자들은 아주 중요한 것으로 여긴다. 영국의 숙녀들은 이제 확실히 이런 어리석은 개념에서 벗어났다. 영국 여성들은 자신의 성격과 힘을 최대로 발휘했다. 영국의 여성 유권자들이 보인 영웅성과 강인함에 경의를 표한다. 영국 여성들의 열정적이고 호전적인 태도는 일부 미국 여성들에게 시사하는 바가 컸다. 우리 자신의 맥없고 줏대 없는 모습을 반성하게 된 것이다. 그러나 영국의 여성 유권자들도 참된 평등에 대한 인식이 결여되어 있다. 참된 평등의식이 있다면, 여성 노동자 대중들에게는 아무런 혜택도 없고 한줌도 안 되는 귀족여성만을 위한 엉터리 법안을 통과시키려고 그렇게 많은 용감한 투사들이 엄청난 노력을 쏟아 부으며 투쟁하는 현실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겠는가? 사실 정치가는 기회주의자다. 정치가들은 모든 것을 얻을 수 없으면 중간조치를 취한다. 그러나 지적이고 자유주의적인 여성들은 투표권이 무기라고 생각하고 기득권을 박탈당한 자로서 경제적으로 우월한 계급보다 더 많은 투표권을 원한다. 경제 기득권층은 이미 자신들의 경제적 우월성을 바탕으로 많은 권력을 누리고 있다.

영국의 여성 참정권운동의 유능한 지도자인 에멀린 팽크허스트(Emmeline Pankhurst) 여사조차도 미국 강연 투어 때 정치적으로 우월한 자와 열등한 자 사이에는 어떤 평등도 있을 수 없다는 사실을 인정했다. 경제적으로 열악한 영국의 여성 노동자들이 여성 기득권자들에게 이득을 가져다주는 섀클턴 법안Shackleton bill[4]을 통과시킬 수 있었을까? 그것은 아마 열성, 헌신, 그리고 신에 대한 독실한 믿음으로 무장한 애니 케니(Annie Kenney)와 같은 계층들이 자신의 경제 지배자를 당선시켰듯이 자신들의 여성 정치 지도자들을 지지하여 당선시킨 결과일 것이다. 이것이 영국에 정착된 보편적인 선거운동의 결과이다. 그들이 주장하는 것과는 달리, 전혀 자신들을 함께 걱정해주지 않는, 정의라고는 조금도 보여주지 않는 투표의 힘을 믿는 사람들 대부분이 그런 결과를 낳는다.

미국의 선거운동의 공약은 최근까지 탁상공론의, 사람들의 경제적 요구와는 완전히 동떨어진 것이었다. 따라서 수잔 앤서니(Susan B. Anthony)라는 여성은 그 일에 대해 무관심했을 뿐 아니라 적대적이었다. 그녀는 1869년 뉴욕에서 여성들에게 차라리 파업을 하는 것이 낫다고 말했다.[5] 이러한 그녀의 태도는 죽기 전에는 변하지 않을 것 같다.

물론 여성노동조합연맹the Women's Trade Union League과 같은 단체에 속해 있는 여성 참정권론자들도 일부 있다. 그러나 그들은 소수이고 그들의 활동은 본질적으로 경제적이다. 나머지 사람들은 단지 당연히 해야 하는 것쯤으로 투표를 생각한다. 투표가 가난한 자를 위한 것이 아니라면 부자를 위한 것임은 뻔한 이치 아닌가? 8천만 임금노동자를 위한 것이 아니라면 이들 희생자들이 1년간 버는 돈 이상을 일주일 만에 탕진하는 게으르고, 기생적인 여자들을 위한 것임은 뻔하지 않은가? 그런 평등을 들어보았는가?

미국처럼 교만과 속물근성이 판치는 나라도 드물다. 특히 미국 중산층 여성들의 속물근성은 유별나다. 이들은 자신이 남성과 동등하다고 생각하고, 순수함, 선량함, 도덕성에서는 남성보다도 오히려 우월하다고 생각한다. 미국의 보통 투표권자들이 여성의 투표권을 무슨 기적적인 힘을 발휘하는 것처럼 여기는 것도 이상한 일이 아니다. 이 중산층 여성들은 스스로 우쭐해하며 투표권이 자신을 노예화한다는 사실을 간파하지 못한다. 남성에 의해서 노예가 되는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의 어리석은 생각과 관성 때문에 노예가 된다는 사실을 모른다. 투표로는 이 서글픈 사실을 없앨 수 없다. 오히려 이런 현실을 더 강화할 뿐이다.

위대한 미국 여성 지도자들 중의 한 사람은 여성이 동등한 임금을 받을 권리가 있을 뿐 아니라 심지어는 남편의 임금조차도 받을 권리가 법적으로 있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여성을 부양하는 데 실패하는 남자는 처벌되어야 하고 수감된 남자의 수입 역시 침착한 아내의 손에 의해 모아져야 한다는 것이다. 그동안 세계의 석학 중에서도 실패한 사회악 일소가 여성의 투표권으로 가능하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은 많았다. 이 우주의 창조자가 모든 계획을 미리 세워놓았다면 참으로 유감스러운 일이다. 그러나 그 계획대로 여성의 투표권이 행사되는 것이라면 남성을 완전히 능가할 것은 자명하다.

미신숭배의 유포만큼 위험한 것도 없다. 우리가 이단자들을 화형에 처하는 시대를 벗어났음에도, 우리는 아직도 사회적으로 용인된 관념과는 다른 생각을 가진 사람들에 대해서 비난하는 편협한 정신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그러므로 나는 아마 여성의 적으로 낙인찍힐 공산이 크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 문제에 대한 나의 생각을 수정할 생각은 없다. 나는 처음에 내가 말한 바를 계속 주장할 뿐이다. 여성이 정치를 더 악화시킬 것이라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여성이 정치를 더 개선시킬 것이라고도 생각하지 않는다. 여성이 남성의 실수를 개선시킬 수 없다면 왜 여성이 나서서 남성의 실수를 계속하려 하는가?

역사는 거짓의 축적물일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역사에는 몇 가지 진실이 담겨있다. 우리는 이 진실의 안내를 받아 미래를 개척한다. 남성들의 정치활동의 역사를 통해 남성은 무슨 일이든 보다 직접적이고 비용이 덜 들고 영속적인 방식으로 해나간다는 사실이 입증되었다. 사실 남성이 차지한 모든 땅들은 끊임없는 전투의 연속이었다. 투표권이 아니라 자기를 주장하기 위한 끊임없는 투쟁의 연속이었다. 여성이 투표권의 도움을 통해서 스스로 해방되리라고 가정할 수 있는 근거는 없다.

가장 끔찍한 절대왕정의 나라 러시아에서도 여성은 투표권이 아니라 여성 자신의 투쟁적 의지로 남성과 동등한 위치를 얻었다. 러시아 여성은 스스로 투쟁하여 배움의 길과 생업의 길을 얻었고, 동시에 남성의 존경과 동료의식을 획득했다. 아니, 그 이상을 얻었다. 러시아 여성은 찬양받았다. 전 세계 사람들의 존경을 받았다. 이런 결과를 투표권이 아니라 경이로운 영웅적 행동과 용기, 능력과 의지력으로 이루어냈다. 자유를 위한 투쟁에서 각고의 고통을 인내함으로써 얻은 결과였다. 보통 투표권이 실시된 나라나 미국 내 몇 개 주 중에서 러시아 여성의 승리와 같은 승리를 얻었다고 주장할 수 있는 곳이 어디 있는가? 미국 여성의 업적을 되돌아보면 여성 투표권이 아닌 보다 심오하고 강력한 요인이 여성 해방에 도움이 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세네카 폴스 협약Seneca Falls Convention에서 극소수의 여성들이 모여 남성들과 동등한 교육권과 다양한 직업을 얻을 수 있는 기회 균등의 권리를 요구하기 시작한 것이 고작 62년 전의 일이었다. 이 얼마나 놀라운 성취요, 승리인가! 무식한 자가 아니고서야 누가 여성을 단지 부엌데기라고 감히 말할 수 있는가? 또 누가 감히 이런저런 직업은 여성에게 개방해서는 안 된다고 주장하겠는가? 그 후 60여 년 동안 여성에게 유리한 새로운 분위기와 새로운 삶의 형태가 조성되었다. 이제 모든 인간적 사유와 활동영역에서 여성이 주도적인 인물로 등장했다. 투표권이 없어도, 법을 만들 권리가 없어도, 판사와 간수와 사형집행자가 되는 특권이 없어도 모든 일을 여성이 할 수 있다.

그렇다, 나는 아마 여성의 적으로 몰릴지도 모른다. 그러나 내가 여성에게 조금이라도 빛을 비출 수 있다면 그것으로 족하다.

여성의 불행은 남성의 일을 할 수 없다는 데 있지 않고, 자신의 인생을 남성을 능가하는 데 소모한다는 것에 있다. 여성은 오랫동안 누적된 전통 때문에 물리적으로 남성과 어깨를 나란히 할 수 없었다. 물론 몇몇 성공한 여성들도 있지만 얼마나 과도한 희생과 비용을 치르고 얻은 성공인가. 중요한 것은 여성 직종의 양이 아니다. 일의 질이 문제다. 여성이 투표권을 행사할 수는 있지만 투표권이 새로운 질적 변화를 가져오는 것은 아니며, 그것은 여성 자신의 삶의 질을 향상시킬 그 어느 것도 얻을 수 없다. 여성의 발전과 자유와 독립은 여성 자신을 통해 이루어진다. 그것은 첫째, 여성 자신을 성적 상품이 아닌 하나의 인격체로 주장해야 이루어진다. 둘째, 자신의 몸을 마음대로 하고자 하는 자의 권리를 거부하라. 즉 여성 자신이 원하지 않으면 임신을 거부하라. 신, 국가, 사회, 남편, 가족에 대한 복종을 거부하라. 그리고 삶을 보다 단순화하라. 그러나 깊고 풍요롭게 하라. 모든 영역에서 삶의 의미와 본질을 배우려 애쓰고, 여론과 대중적 비난에 대해 두려워하지 말아야 한다. 투표권이 아닌 바로 이런 노력으로 여성은 해방되고 지금까지 이 세상에 없었던 강력한 세력으로 등장할 수 있게 된다. 여성은 참된 사랑과 평화와 조화를 이룰 수 있고, 신성한 불을 담을 수 있고, 생명을 부여하며, 자유로운 남성과 여성을 창출하는 세력이다.


[1] Dr. Helen Sumner, 『Equal Suffrage』.

[2] Dr. Helen Sumner, 『Equal Suffrage』.

[3] Dr. Helen A. Sumner.

[4] 섀클턴은 노동자 리더였다. 그러므로 그가 자신의 지지자들인 노동자들을 위한 법안을 입안할 것으로 예상하는 것은 당연했다. 영국 의회는 이런 배신자들로 가득하다.

[5] Dr. Helen Sumner, 『Equal Suffrag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