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토쿠 슈스이

20세기의 괴물 제국주의

1901년 4월 20일

      제국주의에 서문을 부치다

      일러두기 세 가지

      1장 서언

      2장 애국심을 논하다

      3장 군국주의를 논하다

      4장 제국주의를 논하다

      5장 결론

제국주의에 서문을 부치다


인류 역사는 태초부터 종말에 이르기까지 신앙과 힘의 경쟁사다. 어느 때는 신앙이 힘을 제압하고 또 어느 때는 힘이 신앙을 제압한다. 빌라도가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 박았을 때는 힘이 신앙에 승리했을 때다. 밀라노 주교 암브로시우스가 황제 테오도시우스에게 참회를 명했을 때는 신앙이 힘에 승리했을 때다. 신앙이 힘을 제압했을 때 세상에 광명이 있고, 힘이 신앙을 제압했을 때 세상은 암흑이다. 그리고 지금은 힘이 다시금 신앙을 제압하는 암흑시대다.

정부에는 우주의 조화를 도모하는 철학자가 한 사람도 없는데, 육지에는 13사단의 군대가 있어 창과 칼이 도처에서 번쩍이고 있다. 민간에는 백성의 우수를 위로하는 시인이 한 사람도 없는데, 바다에는 26만 톤의 전함이 분쟁도 없는 해상에 큰 파도를 일으키고 있다. 가정의 문란은 극에 달하여 부자는 서로 원망하고 형제는 서로 다투며 고부는 서로 헐뜯고 있는데도, 바깥으로는 동해의 벚꽃 나라, 세계의 군자국임을 자랑하고 있다. 제국주의란 실로 이와 같은 것이다.

나의 벗 고토쿠 슈스이 군의 『제국주의』가 완성되었다. 자네가 소장파의 몸으로 오늘날의 문단에 기치를 올리고 있는 것은 세상이 다 아는 바이다. 자네는 기독교 신자는 아니지만, 세상의 이른바 애국심을 몹시 미워한다. 자네는 한 번도 해외의 자유국에서 유학한 적이 없지만, 성실한 사회주의자다. 나는 자네와 같은 인사를 벗으로 둔 것을 명예로 여겨 여기에 이 독창적 저술을 세상에 소개하는 영광을 부여받은 것을 감사한다.


메이지明治 34년(1901년) 4월 11일 도쿄 외곽 쓰노하즈角筈 마을에서

우치무라 간조



일러두기 세 가지


하나. 동양의 풍운은 나날이 다급해지고 천하는 공명을 위하여 열광하고 있다. 세상의 지사나 애국자들이 모두 머리카락이 거꾸로 서고 눈초리가 올라가 몹시 흥분하고 있을 때, 홀로 냉정히 이론을 풀이하고 도덕을 설파한다. 남송이 멸망할 때 충신 육수부가 애산厓山 앞바다 배 안에서 8세의 어린 황제에게 『대학大學』을 가르친 고사와 마찬가지로, 독선과 우회라고 조소당할 것임은 나도 알고 있다. 하지만 조소에 만족하며 도덕을 설파하는 것은, 영원히 정의의 길을 지키기 위하여 스스로 심려하고 헌신하지 않고는 견딜 수 없기 때문이다.

아아, 내 마음을 알아 사회에 전하는 것은 오로지 이 책뿐인가. 그리고 사회의 비난을 받으며 나를 벌하는 것도 오로지 이 책뿐인가.

하나. 전편의 논지는 서구 지식인들이 일찍이 충고하여 널리 알려진 바다. 그리고 지금은 톨스토이, 졸라, 존 몰리, 베벨, 브라이언이 가장 앞에 서 있다. 그 외에 극히 진보된 도의를 갖추고 극히 고상한 이상을 품은 여러 인사들도 모두 절실히 흠모하지 않을 수 없다. 그 때문에 나는 뻔뻔스럽게 ‘저술’이라 하지 않고 ‘기술’이라고 했다.

하나. 사소한 소책자이기에 애초에 소견을 상세히 다 논할 수는 없었지만, 요강을 제기할 수는 있었다고 믿는다. 이 책이 세상의 벽창호들에게도 다소나마 각성해야 할 때임을 알리고 진리와 정의를 위해 얼마간 공헌을 할 수 있다면, 그것이 내가 바라는 바다.


메이지明治 34년(1901년) 4월

벚꽃이 흐드러진 시절 「조보사」 편집국에서

슈스이 생(秋水生) 기술




1장 서언


제국주의, 들불처럼 일다

이른바 제국주의의 유행이 참으로 대단하다. 기세가 들불과 같다. 세계 만국이 모두 제국주의의 발밑에 엎드려 찬미하고 숭배하며 받들지 않는 자가 없다. 보라. 영국의 정부와 민간은 모두 제국주의의 신도다. 독일의 호전적인 황제는 열성으로 제국주의를 고취하고 있다. 러시아는 물론 제국주의를 전통적인 정책이라고 부른다. 그리고 프랑스나 오스트리아나 이탈리아도 마찬가지로 제국주의를 대단히 기뻐하고 있다. 미국 같은 나라마저도 최근 들어 빈번히 제국주의를 배우려 하는 것처럼 보인다. 우리 일본에서도 청일전쟁에서 크게 이긴 뒤로 위아래 모두 제국주의에 열광하는 모습은 멍에를 벗어던진 사나운 말과 같다.


무슨 덕이 있고 무슨 힘이 있나

옛날에 다이라노 도키타다는 “다이라 씨가 아닌 자는 인간이라도 인간이 아니다”라고 자랑했다. 오늘날 제국주의를 신봉하지 않는 자는 거의 정치가라도 정치가가 아니며, 국가라도 국가가 아닌 것 같다. 제국주의는 과연 무슨 덕이 있으며 무슨 힘이 있고 무슨 소중한 가치가 있어서 이다지도 유행하게 되었는가.


국가 경영의 목적

생각건대 국가 경영의 목적은 사회의 영원한 진보에 있으며, 인류의 전반적 복리福利에 있다. 그렇다. 단지 현재의 번영만이 아니라 영원한 진보에 있으며, 단지 소수 계급의 권세가 아니라 전반적 복리에 있다. 지금의 국가와 정치가가 신봉하는 제국주의는 우리들을 위해서 얼마만큼 진보를 돕고자 하는가, 얼마만큼 복리를 주려고 하는가.


과학적 지식과 문명적 복리

나는 사회의 진보와 그 기초는 반드시 진정한 과학적 지식을 기다리지 않으면 안 되며, 인류의 복리는 그 원천이 반드시 진정한 문명적 도덕으로 귀착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믿는다. 그리고 그 이상은 절대로 자유와 정의가 아니면 안 된다. 그 극치는 반드시 박애와 평등이 아니면 안 된다. 동서고금의 역사를 보아도 이것이 능히 순응하는 자는 송백이 겨울을 견디듯이 번성하고, 이것을 거역하는 자는 봄날의 꿈처럼 덧없이 무너져버린다. 제국주의 정책도 이 기초와 원천을 토대로 이상의 극치를 향해 나아간다면, 이 주의는 실로 사회와 인류를 위하여 천국에서 온 복음이다. 나는 기꺼이 제국주의를 위하여 선봉에 서고자 할 것이다.

하지만 만약 불행히도 제국주의가 발흥하고 유행하는 근본 이유가 과학적 지식이 아니라 미신이며, 문명적 도덕이 아니라 열광이고, 자유 · 정의 · 박애 · 평등이 아니라 압제 · 부정 · 고루 · 투쟁이었다고 하자. 그리고 가령 이 탐욕과 악덕이 정신적으로든 물질적으로든 세계 만국을 지배하는 일이 이대로 끝이 없다고 하자. 그 해독이 끼치는 영향을 생각하면 소름이 끼치지 않은가.


천사인가 악마인가

아아 제국주의여, 네 거침없는 기세는 20세기의 천지에 적광정토寂光淨土를 출현시키려고 하는 것인가. 무간지옥無間地獄으로 떨어뜨리려고 하는 것인가. 진보인가 부패인가. 복리인가 재앙인가. 천사인가 악마인가.


대단히 곤란한 급무

그 진상과 실질의 내용을 연구하는 것은 20세기를 움직이는 지도자들에게 대단히 곤란한 급무가 아닌가. 이것이 부족한 내가 무능함을 돌아보지 않고 굳이 붓을 쥐고 어쩔 수 없이 의견을 밝히는 까닭이다.




2장 애국심을 논하다


1


제국주의자의 함성

우리 국민을 팽창시키자. 우리 판도를 확장하자. 대제국을 건설하자. 우리 국위를 떨쳐 일으키자. 우리 국기를 영광되게 하자. 이것이 이른바 제국주의자의 함성이다. 그들이 자신의 국가를 사랑하는 마음은 깊다.

영국은 남아프리카를 무찌르고 미국은 필리핀을 토벌했다. 독일은 자오저우臎州를 손에 넣었고 러시아는 만주를 빼앗았다. 프랑스는 파쇼다(수단)을 정복했고, 이탈리아는 아비시나아(에티오피아)에서 싸웠다. 이것은 최근 제국주의를 강행하는 곳에서 드러난 눈에 띄는 현상이다. 제국주의가 향하는 곳에는 군비나 군비를 방패로 한 외교가 뒤따르지 않는 경우가 없다.


애국심을 씨실로, 군국주의를 날실로

그렇다. 제국주의가 발전하는 흔적을 보라. 제국주의는 애국심을 씨실로 하고 군국주의를 날실로 하여 짜낸 정책이 아닌가. 적어도 애국심과 군국주의는 현재 열국의 제국주의가 공유하는 조건이 아닌가. 따라서 나는 제국주의의 시시비비와 이해득실을 판정하고자 한다면, 우선 애국심과 군국주의에 대해서 가장 많은 검토를 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말하고 싶다.


애국심이란 무엇인가

그렇다면 지금의 애국심 또는 애국주의란 무엇인가. 이른바 패트리어티즘patriatism이란 무엇인가. 우리들은 어떻게 우리 국가, 국토를 사랑할 것인가, 또는 사랑하지 않으면 안 될 것인가.


2


애국심과 측은동정

생각건대 아이가 우물에 빠지려는 것을 보면 누구나 달려가 아이를 구하는 데 주저하지 않으리라는 것은 중국의 맹자가 말한 대로며, 우리들도 마찬가지다. 만약 애국심이 정말로 아이를 구하는 것과 같은 동정심, 측은지심, 자선의 마음과 같다고 할 수 있다면, 정말로 아름답고 순수하며 한 점 사심도 없는 것이다.

하지만 생각해보라. 진실로 고결한 측은지심과 자선의 마음은 결코 자기와 가까운지 아닌지를 문제 삼지 않는다. 이것은 마치 위급한 아이를 구할 때 우리 아이인지 남의 아이인지를 묻지 않는 것과 같다. 그런 탓에 세계만방의 어질고 의로운 지사志士仁人들은, 트란스발의 승리와 부활을 기원하고 필리핀의 성공과 독립을 빌었다. 그 적국인 영국인 가운데 그런 사람이 있다. 그 적국인 미국인 가운데 그런 사람이 있다. 애국심은 과연 그것을 가능하게 할 수 있을까.

지금의 애국자나 국가주의자는 십중팔구 트란스발을 위해 기도하는 영국인을 애국심이 없다고 매도할 것이다. 필리핀을 위해 기도하는 미국인을 애국심이 없다고 매도할 것이다. 맞다. 그들에게는 어쩌면 애국심이 없을 것이다. 하지만 고결한 동정, 측은, 자선의 마음은 확실히 여기에 있다. 그렇다면 애국심은 우물에 빠진 아이를 구하는 저변의 인심과 일치하지는 않는 것 같다.

그렇다. 나는 애국심이 순수한 동정심과 연민이 아님을 슬퍼한다. 애국심이 사랑하는 것은 자기 나라 땅에 한정된다. 자기 나라 사람에 한정된다. 다른 나라를 사랑하지 않고 단지 자기 나라를 사랑하는 사람은 타인을 사랑하지 않고 다만 자기 한 몸을 사랑하는 사람이다. 화려한 명예를 사랑하는 사람이다. 이익의 독점을 사랑하는 사람이다. 공公이라고 할 수 있는가. 사私가 아니라고 할 수 있는가.


망향심望鄕心

애국심은 또한 고향을 사랑하는 마음과 닮았다. 고향을 사랑하는 마음은 소중하다. 그러나 또한 몹시 경멸할 만한 것이다.


타향에 대한 증오

누가 어릴 적 죽마에 채찍질하던 시절에 진정으로 고향의 무슨 산 무슨 강을 사랑해야 한다고 깨달았겠는가. 그들이 회토망향懷土望鄕의 정을 일으키는 것은 실로 이향 타국이 있음을 깨달은 뒤가 아니겠는가. 동서로 떠돌다가 굳센 기상이 몇 번 꺾이고 점점 인정의 냉혹함을 깨달을 때, 인간은 청춘의 유쾌함을 떠올리고 옛 동무와 뛰놀던 고향에 대한 그리움이 절실해진다. 풍토가 대단히 몸에 맞지 않고 음식이 전혀 입에 맞지 않으며 자신의 생각을 털어놓을 벗이 없고 부모와 처자식의 근심을 어루만지지 못하면, 고향을 그리는 마음이 절실해진다. 고향이 사랑스럽고 숭고하기 때문에 생각한다기보다는 단지 타향이 혐오스럽고 꺼려지기 때문이다. 고향에 대한 순수한 동정심과 연민이 아니라 타향에 대한 증오다. 실의와 역경에 빠진 사람들은 대개 모두 그렇다. 그들이 타향을 증오하지 않았다면 그다지 고향을 사모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비단 실의에 빠지거나 역경에 처한 사람뿐만 아니라 득의양양하여 마음먹은 대로 잘되는 사람에게도 망향심이 있지 않느냐고 그들은 말한다. 그렇다. 정말로 망향심은 존재한다. 그런데 득의만만한 사람이 고향을 사모하는 마음은 더욱 경멸할 만한 것이다. 그들은 고향의 늙은 부모나 지인들에게 득의만만함을 과시하기를 바랄 뿐이다. 고향에 대한 동정심과 연민이 아니라 자기 한 몸의 허영이다. 과장이다. 경쟁심이다. 옛말에 이르기를 “부귀하여 고향에 돌아가지 않으면 비단옷을 입고 밤에 걷는 것과 같다”고 했다. 이 한마디는 그들이 품은 경멸할 만한 가슴 밑바닥의 비밀을 설파하여 불을 밝히는 것처럼 보이지 않는가.

대학을 우리 지방에 세우거나 철도를 우리 지방에 깔았으면 하는데, 이것은 아직 괜찮다. 심지어 총무위원을 우리 현에서 내거나 대신大臣을 우리 주州에서 냈으면 하고들 떠든다. 그들은 자기 한 몸의 이익이나 허영을 외면하고 진정으로 고향에 대한 동정심과 자애로운 연민의 마음에서 그러는 것일까. 유식한 자나 고결한 신사여, 이에 대해 추호의 모멸감도 없는가.


천하의 가련한 벌레

그렇다. 애국심이 망향의 정과 원인이나 동기가 같다면, 우예虞芮의 싸움이 애국자의 바람직한 표본인가. 촉만觸蠻의 싸움이 애굮자의 바람직한 비유인가. 천하의 가련한 벌레인가.


허과허영

여기서 생각해보자. 덴구 담배天狗屋의 이와야 마쓰헤이 씨가 ‘국익의 우두머리’라고 떠들어대는 것을 비웃지 마라. 그가 동궁 결혼 기념 미술고간에 1천 엔을 기부하기로 약속하고 그것을 지키지 않은 것을 비웃지 마라. 천하의 애국자와 애국심은 이와야 씨와 단지 오십보백보의 차이일 뿐이다. 애국심 광고는 단지 자기 한 몸의 이익을 위한 것일 뿐, 과장을 위할 뿐, 허영을 위할 뿐이다.



3


로마의 애국심

“당파는 없다. 다만 국가가 있을 뿐.”

“Then none was for a party, then all were for the state.”

이것은 로마의 시인이 과장해서 국가를 찬미한 말이다. 하지만 어찌 알겠는가. 이는 당파를 이용하는 지혜가 없었기 때문일 뿐이다. 국가가 존재하기 때문이 아니라 적국과 적수가 있기 때문일 뿐이다. 적국과 적수를 미워해야 한다는 미신이 있었기 때문일 뿐이다.


로마의 빈민

우리들은 알고 있다, 당시 로마의 빈민인 다수의 농민이 소수의 부유층과 함께, 또는 부유층을 따라서 국가를 위하여 전장에 나선 것을. 우리들은 또한 알고 있다. 그들이 적수와 맞서서 용맹분진勇猛奮進 전쟁터에서 자기 몸을 돌보지 않았고 충의가 진실로 감탄할 만했던 것을. 우리는 또한 알고 있다. 그들이 다행히 승전하여 임무를 완수하고 돌아왔을 때는 종군하는 동안에 진 빚 때문에 곧바로 노예 신분으로 전락했다는 것을. 보아라, 전시 중에 부자들의 밭이랑은 항상 하인과 노예가 경작하고 개간했지만, 빈자의 밭은 완전히 황폐해져 잡초만 무성해진 것은 당연하지 않은가. 그리하여 빚을 지고 결국 팔려 가서 노예가 된다. 과연 누구의 잘못인가.

그들은 로마의 적국과 적수를 증오했다. 하지만 적수가 그들에게 재난을 끼쳤다고 해도, 그것은 결코 동포인 부자들이 끼치는 재난에는 미치지 못할 것이다. 그들은 적수 때문에 자유를 빼앗겨야 한다. 재산을 빼앗겨야 한다. 노예가 되어야 한다. 그런데 그들은 실제로 동포 때문에 그렇게 되었던 것이 아닌가. 그들은 여기에 생각이 미치지 못했다.


얼마나 바보인가

부자들은 싸우면 재산이 점점 늘어나고 노예와 하인이 점점 많아진다. 그런데 빈자는 아무것도 늘지 않는다. 다만 국가를 위하여 싸웠을 뿐이다. 그들은 국가를 위해서 싸우다가 노예 신분으로 떨어지더라도, 여전히 적수를 토벌했다는 과거의 허영을 추억하고 감동하며 만족해서 과시하는 자들이었으니, 아아 이 얼마나 바보인가. 고대 로마의 애국심은 실로 이와 같은 것이었다.


그리스의 노예

고대 그리스의 농노인 헬롯Helot을 보라. 유사시에는 병사가 되고 평상시에는 노예가 되었다. 그들은 지나치게 강건하거나 그 수가 지나치게 늘어나면 항상 주인에게 살육 당했다. 더욱이 그들은 주인을 위해 싸울 때에는 충의가 비할 바가 없었고 용감하기 이를 데 없어서, 일찍이 한 번도 창을 거꾸로 들고 자유를 얻으려고 한 적이 없었다.


미신적 애국심

그들이 그러한 까닭은 무엇인가. 오로지 외국과 외국인, 즉 적국과 적수를 증오하고 토벌하는 것을 최고의 명예로 믿었기 때문이다. 최고의 영광으로 믿었기 때문이다. 허세를 몰랐기 때문이다. 허영을 몰랐기 때문이다. 아아, 미신, 그들의 애국심이라는 과장되고 허영에 넘치는 미신의 견고함은, 부패한 신수神水를 마시는 천리교天理敎 신도보다 지나치다. 해독 또한 이보다 더하다.


애증의 양면

이상하게 여기지 말라. 그들이 적수에게 품은 심각한 증오심을. 아마도 결함 있는 인간, 야수에 가까운 인간은 아무래도 차별 없이 평등하게 사랑하지 못할 것이다. 박애하지 못할 것이다. 원시 시대 이래로 애증의 양면은 항상 새끼줄처럼 서로 얽히고 쇠사슬처럼 서로 이어져 있다. 저 야수를 보라. 그들은 서로 의심하며 같은 무리를 잡아먹었다. 그런데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자를 만나면 갑자기 두려움에 휩싸여 공황恐慌에 빠지는데, 두려움과 공황은 곧바로 시기와 증오로 바뀌고, 시기와 증오는 다시 포효가 되고 공격이 되어, 전에 서로 잡아먹던 같은 무리는 오히려 서로 맺어져 공동의 적에 맞서 싸운다. 그들이 공동의 적을 상대할 때 같은 무리끼리는 친목 상태를 드러내야 했다. 그들 야수는 애국심이 있었는가 없었는가. 고대 인류의 야만적 생활이 어찌 이와 크게 달랐겠는가.

야만인은 같은 무리가 서로 단결하여 자연과 싸웠다. 다른 종족과 싸웠다. 그들은 애국심이 있었다. 하지만 깨달아야 한다. 그들의 단결이나 친목이나 동정은 다만 공동의 적을 상대한 데서 유래한 것임을. 다만 적수에 대한 증오의 반동임을. 같은 병을 앓고 나서 비로소 상련의 마음이 생긴 것임을.


호전적인 마음은 동물적 천성

그러므로 애국심은 외국과 외국인 토벌을 명예로 여기는 호전적인 마음이다. 호전적인 마음은 동물적 천성이다. 동물적 천성이 바로 호전적 애국심이다. 이것은 석가도 그리스도도 배격했으며 문명의 이상과 목적에 모순되는 것이 아니겠는가.

그런데 더욱 슬프게도 세계 인민은 여전히 동물적 천성의 경쟁장에서 19세기를 보내고, 나아가 여전히 같은 상태로 20세기의 신천지에 머물려고 한다.


적자생존의 법칙

사회가 적자생존의 법칙에 따라 점차 진화하고 발달하여 통일의 경계와 교통의 범위도 마찬가지로 확대됨에 따라, 공동의 적이었던 다른 종족, 다른 부락 사람들은 점차 줄어 증오의 목적도 사라진다. 증오의 목적이 없어지면 친목으로 맺은 목적도 사라진다. 여기에서 한 국가, 한 사회, 한 부락을 사랑하는 마음은 변해서 단지 한 몸, 한 집, 한 당파를 사랑하는 마음이 된다. 예전의 종족 간, 부락 간의 야만적인 호전적 천성은, 결국 변해서 개인 간 투쟁이 되었다. 당파 간 알력이 되었다. 계급 간 전투가 되었다. 아아, 순결한 이상과 고상한 도덕이 성행하지 않고 동물적 천성이 아직 제거되지 않은 동안은, 세계 인민은 결국 적을 만들 수밖에 없고 증오할 수밖에 없고 전쟁할 수밖에 없다. 그리하여 이것을 애국심이라고 이름 붙이고 명예의 실천이라고 일컫게 되었다.


자유 경쟁

아아, 19세기의 서구 문명이여. 한편으로는 격렬한 자유 경쟁으로 인심을 더욱 냉혹하고 무정하게 만들었고, 한편으로는 고상하고 정의로운 이상과 신앙이 널리 땅을 쓸었다. 우리 문명의 전도가 정말로 소름 끼치지 않을 수 없다. 그리고 눈 가리고 아웅하는 정치가나 공명을 좇는 모험가나 뜻밖의 이익을 추구하는 자본가는 이것을 보고 바로 절규하며 “주위를 둘러보라, 엄청난 적들이 쳐들어온다. 국민은 개인 간 투쟁을 멈추고 국가를 위하여 결합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들은 개인 간 증오심을 외부로 돌려서 자기들의 이익이 되도록 하고자 한다. 그리고 이에 따르지 않는 자가 있으면 꾸짖으며 비애국자, 국적國賊이라고 한다. 모른단 말인가, 제국주의의 유행은 실로 이러한 수단에서부터 비롯된 것을. 국민의 애국심은 환언하면 동물적 천성의 도발에서 나왔음을.



4


서양인 · 오랑캐에 대한 증오

자기를 사랑하라. 타인을 증오하라. 동향인을 사랑하라. 타향인을 증오하라. 신국神國이나 중화中華를 사랑하라. 서양인이나 오랑캐를 증오하라. 사랑하는 사람을 위하여 증오하는 자를 무찌르라. 이것을 일컬어 애국심이라고 한다.

그렇다면 애국주의는 가엾은 미신이 아닌가. 미신이 아니라면 호전적인 마음이다. 호전적인 마음이 아니라면 허위 광고이고 상품이다. 그래서 이 주의는 항상 전제 정치가가 자기의 명예와 야심을 달성하는 이기利器와 수단으로 사용한다.

이것을 단지 그리스, 로마의 옛 꿈으로 여겨서는 안 된다. 애국주의가 근대에 유행하고 이용되는 것은 상고 시대나 중세 시대보다 더욱 심하다.


메이지 성대聖代의 애국심

상기하라. 고故 모리타 시켄(森田思軒, 1861~1897) 씨가 글을 기고하여 황해黃海의 영험한 매가 영험하지 않다고 주장하자, 천하의 모든 사람들이 그를 비난하여 국적으로 삼았다. 구메 구니타케(久米邦武, 1839~1931) 씨는 신도神道는 제천祭天의 오랜 습속이라고 논한 일 때문에 교수직을 박탈당했다. 사이온지 공장(西園寺公望, 1849~1940)이 세계주의적 교육을 하려고 하자마자 문부대신의 지위가 위태로워졌다. 우치무라 간조 씨가 칙어의 예배를 거부하자 교수직을 박탈당했다. 오자키 유키오(尾崎行雄, 1858~1954) 씨가 공화共和라는 말을 입에 담자마자 장관직을 빼앗겼다. 그들 모두가 대단히 불경스러운 사람으로 매도되었고 비애국자로 벌을 받았다. 이것이 메이지라는 성대의 일본 국민에게서 발현된 애국심이다.

국민의 애국심은 일단 선호하는 바를 거역하면 남의 입에 재갈을 물리고 남의 팔을 누르고 남의 사상조차도 속박한다. 남의 신앙조차도 간섭한다. 역사 평론도 금지할 수 있다. 성서 연구도 방해할 수 있다. 모든 과학도 파괴할 수 있다. 문명의 도의는 이것을 치욕으로 여긴다. 그런데도 애국심은 이것을 영예로 알고 공명이라 한다.


영국의 애국심

비단 일본의 애국심만 그러할까. 영국은 근대 들어 대단한 자유의 나라라 일컬어진다. 박애의 나라라 일컬어진다. 평화의 나라라 일컬어진다. 그와 같은 영국조차도 예전에 애국심이 흘러넘쳤을 때에는 자유를 부르짖는 자, 개혁을 청원하는 자, 보통선거를 주장하는 자들은 모두 반역으로 몰리지 않았던가. 국적으로 벌을 받지 않았던가.


영국-프랑스 전쟁

영국인의 애국심이 크게 발양되었던 최근 사례는 프랑스와 벌인 전쟁만 한 것이 없다. 이 전쟁은 1793년 대혁명 때 발발하여 얼마간 계속되다가 1815년 나폴레옹의 몰락으로 대단원을 맞는다. 영국인들은 전쟁이 가까워지자 그 사상도 마찬가지로 오늘날의 사상과 거리가 별로 없었고, 애국심도 유행하는 사정과 방법이 오늘날의 애국주의와 그다지 다르지 않았다.


이른바 거국일치擧國一致

프랑스와의 전쟁. 단지 이 한 사건, 이 한마디가 있을 뿐이다. 원인이 무엇인지 묻지 않는다. 결과가 무엇인지 논의하지 않는다. 이해득실을 논하지 않는다. 시시비비를 가리지 않는다. 그러면 반드시 비애국자로 처벌받을 것이다. 개혁 정신이나 항쟁의 마음이나 비평 정신은 한때 완전히 정지되고, 아니 정지당하여 국내의 당쟁은 거의 자취를 감추고 말았다. 콜리지(Samuel Coleridge, 1772~1834) 같은 사람조차 초기에는 전쟁을 비난했지만 마침내 전쟁이 국민을 일치단결시킨 것을 신에게 감사하기에 이르렀다. 그리고 폭스(Charles Fox, 1749~1806) 무리가 변함없이 평화와 자유의 대의를 지지했으나, 의회의 대세를 바꿀 수 없음을 알고 의사당에 나가지 않은 일은 있었지만, 의사당에서는 모든 당파적 토론이 사라져버렸다. 아아, 당시의 영국은 거국일치, 우리 일본의 정치가나 책략가가 즐겨 입에 담는 ‘거국일치’, 로마 시인이 노래한 “단지 국가가 있을 뿐”이 성행했다.

하지만 생각해보라. 이때 모든 영국민의 가슴속에 무슨 이상이 있었는가. 무슨 도의가 있었는가. 무슨 동정이 있었는가. 무슨 ‘국가’가 있었는가.

영국민 모두는, 광기에 빠진 영국민의 모두는 오로지 프랑스에 대한 증오만을 품고 있었다. 오로지 혁명에 대한 증오뿐이었다. 오로지 나폴레옹에 대한 증오뿐이었다. 적어도 일말의 혁명적 정신이나 프랑스인의 이상과 관련한 사상이 있었는가. 그들은 오로지 이것을 혐오할 뿐만 아니라 앞다투어 모욕하지 않았는가. 단지 모욕할 뿐만 아니라 떼를 지어 공격하고 처벌하는 데 전력을 다하지 않았는가.


죄악의 최고조

이로써 깨달을 것이다, 외국에 대한 애국주의의 최고조는 내치內治에서 죄악의 최고조를 의미한다는 것을. 그리하여 전쟁 중에 크게 넘쳐흐른 애국광들의 애국심이 전후에 어떠한 상태가 되었는지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전후의 영국

전후의 영국은 프랑스에 대한 증오의 열광이 서서히 식으면서 군비 지출을 중단했다. 대륙에서 전쟁을 하는 동안 공업계가 교란되었기 때문에 특히 영국이 요청받았던 수요는 정지되었다. 영국의 공업과 농업은 갑자기 일대 불경기에 휩싸였다. 그러자 대다수 하층 인민의 궁핍과 기아가 뒤를 이었다. 이 시기에 부호 자본가에게 과연 한 점의 애국심이 존재했던가. 거국일치적 통합과 친목의 마음은 여전히 존재했던가. 그들은 동포가 궁핍과 기아에 빠지고 밑바닥으로 전락하는 것을 마치 원수를 보듯 하지 않았던가. 그들이 하층 빈민을 증오한 것은 프랑스혁명이나 나폴레옹을 증오한 것보다 훨씬 심하지 않았는가.


피털루

피털루 학살에 이르면 이를 갈 만하다. 그들은 나폴레옹군을 워털루에서 물리치고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의회 개혁을 요구하며 피터스 광장에 집결한 다수의 노동자를 유린하고 학살하지 않았는가. 사람들이 워털루 전투에 빗대어 피털루라 부르는 것이 이것이다. 워털루에서 적군을 물리친 애국자는 이제 돌변해서 피털루에서 동포를 학살한다. 애국심이라는 것은 정말로 동포를 사랑하는 마음인가. 일치된 애국심, 통합된 애국심은 전쟁이 일단 끝나면 국가와 국민에게 어떤 이익을 주는가. 보아라. 적수의 머리를 깬 예봉은 곧바로 동포의 피를 빨려고 한다.

콜리지는 전쟁 때문에 국민이 일치단결한 것을 신에게 감사했다. 그러나 여기에 이르러 일치된 자는 과연 어디에 있는가. 증오의 마음은 증오를 낳을 뿐이다. 적국을 증오하는 마음은 곧바로 국민을 증오하는 동물적 천성이 될 뿐이고, 워털루의 마음은 곧바로 피털루의 마음이 될 뿐이다. 허위인가, 애국심의 결합은.



5


눈을 독일로 돌리자

잠시 영국을 떠나 눈을 독일로 돌리자. 고故 비스마르크 공은 실로 애국심의 화신이었다. 독일제국은 애국신神이 모습을 드러낸 신령스러운 장소다. 애국종宗의 영험이 얼마나 신통한지를 알고자 한다면 일단 이 신령스러운 장소에 발을 들여놓지 않으면 안 된다.

우리 일본의 귀족이나 군인, 학자를 비롯하여 거의 세계 만국의 애국주의자, 제국주의자가 자신의 일처럼 따르며 함께 기뻐하고 매우 동경하고 사모해 마지않는 독일의 애국심은 고대 그리스나 로마나 근대 영국의 애국심에 비해 과연 미신이 아닌가. 과장된 허영이 아닌가.


비스마르크 공

고 비스마르크 공은 실로 희대의 호걸이다. 그가 정권을 잡기 전에는 복잡하게 분립해 있던 북부 게르만 각국은, 언어가 같은 국민은 반드시 결합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제국주의자의 눈으로 보면, 실로 가엾은 존재였다. 그리하여 각국을 부수어 한 덩어리로 만든 비스마르크 공의 대업은 역사에 찬란한 빛을 남겼다. 하지만 깨닫지 않으면 안 된다. 제국주의자들이 제국을 결합하여 통일하는 목적은 결코 실제로 제국의 평화와 이익을 원해서가 아니라 단지 무장의 필요성 때문임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일찍이 자유 평등의 도의를 깨달아 프랑스혁명의 장관을 선망했던 인사들 중에는 야만적인 싸움을 멈추고 협동과 평화의 이득을 얻거나 외적의 침공에 대비하기 위하여 게르만의 결합과 통일을 희망한 사람이 있었던 것은 분명하다. 이것은 참으로 그럴 만하다. 하지만 실제 역사는 결코 이런 종류의 희망에 맞출 수 없는 것을 어찌하겠는가.


게르만 통일

만약 게르만 통일이 진실로 북부 게르만 각국의 이익을 위하여 이루어진 것이라면, 그들은 왜 주민 다수가 독일어를 쓰는 오스트리아와 결합하지 않았는가. 그 이유는 다른 데 있지 않다. 비스마르크 일파의 이상이 결코 일반 독일인의 형제애에 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각국의 공통된 평화와 복리에 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오로지 프로이센 자체의 권세와 영광에 있었기 때문이다.


쓸모없는 전쟁

철두철미한 호전 정신을 만족시키는 수단으로 통합과 제휴를 추구하는 것이 인간의 본성이다. 갑의 붕우朋友는 을의 원수이기 때문이다. 안녕을 바라기 때문이 아니라, 패권을 과시하고자 해서이다. 준재 비스마르크 공은 능히 이러한 인정에 통달했다. 그는 실로 국민의 동물적 천성을 이용해서 수완을 발휘했던 것이다. 달리 말하면 그는 국민의 애국심을 선동하기 위하여 적국과 싸운 것이다. 자기에게 반대하는 모든 도의나 평론을 복종시키고 자기가 바라던 애국종을 창건하기 위하여 쓸모없는 전쟁을 도발한 것이다.

그렇다. 게르만의 통일자, 동물적 천성의 사도, 철혈 정책의 조사祖師가 심오한 모략을 세워 첫 번째로 착수한 것은, 가장 약한 이웃 나라와의 전쟁이었다. 그리고 이 전쟁에서 승리하자, 국민 중 미신이나 허영, 동물적 천성을 기뻐하는 무리는 앞 다투어 그 도당이 되었다. 이것이 바로 신 독일 제국의 결합, 신 독일 애국주의의 발단이었다.

두 번째로 비스마르크는 다른 이웃 나라에 도전했다. 이 이웃 나라는 이전 이웃 나라보다 강했다. 하지만 그는 적이 충분히 준비하지 못한 틈을 이용했다. 그리하여 애국심이라는 결합의 정신은 새로운 전장에서 왕성하게 일어났다. 이렇게 그 운동은 오로지 비스마르크 공의 나라인 프로이센과 국왕의 팽창을 위하여 교묘하게 이용되고 오묘하게 발휘되었던 것이다.


프로이센이라는 한 물체

비스마르크는 결코 순수한 정의를 품고 북게르만의 통일을 도모한 것이 아니다. 그는 결코 프로이센이라는 한 물체를 통합의 용광로 안에서 녹여 자취마저 없앨 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그가 허락하는 것은 오로지 프로이센 왕국을 맹주로 하는 통일이었다. 프로이센 왕에게 독일 황제의 영광을 짊어지게 하는 통일이었을 뿐이다. 누가 말할 수 있는가, 북게르만의 통일이 국민운동이라고. 그들 국민의 허영과 미신의 결과인 애국심은 완전히 한 사람의 야심과 공명을 위하여 이용된 것이 아닌가.


중세 시대의 이상

비스마르크의 이상은 실로 중세 시대 미개인의 이상을 벗어날 수 없다. 그가 진부하고 야만적인 계획으로 성공할 수 있었던 이유는, 사회의 다수가 도덕적으로나 심리적으로 아직 중세 시대를 벗어나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렇다. 다수 국민의 도덕은 아직 중세의 도덕이다. 그들의 심성은 아직 미개인의 심성이다. 단지 그들 스스로 속이고 남을 속이려고 근대 과학의 외피로 은폐한 것에 불과할 뿐이다.


프로이센-프랑스전쟁

비스마르크는 이미 쓸모없는 전쟁을 두 차례 일으켰고 다행히 성공했다. 그리하여 세 번째 전쟁을 일으키기 위해 열심히 병사를 기르고 호시탐탐 기회를 기다렸다. 기회가 왔다. 그는 또다시 다른 강국의 준비가 충분히 않은 틈을 이용했다. 아아, 프로이센과 프랑스 대전쟁. 이 전쟁이야말로 위험한 길 중에서도 가장 위험한 길이고, 흉기 중에서도 가장 흉악한 것이다. 그러나 비스마르크는 대성공을 거두었다.

프로이센-프랑스전쟁 결과, 북게르만 각국은 프로이센의 발아래 머리를 조아리게 되었다. 각국은 일제히 프로이센 국왕의 독일 황제 등극을 봉축해야 했다. 오로지 프로이센 국왕을 위해서다. 비스마르크의 안중에 있었던 것은 이것뿐이었다. 어찌 동맹 국민의 복리가 눈에 들어오겠는가.

그러므로 나는 단언한다. 독일 통합은 정의에 따른 호의나 동정에서 나온 것이 아니다. 독일 국민이 시체의 산을 넘고 피의 강물을 건너 맹금이나 야수처럼 통일을 이룬 것은 오로지 적국에 대한 증오심에 선동되었기 때문일 뿐이다. 전승의 허영에 취했기 때문일 뿐이다. 이것이 대인과 군자가 관여할 일이겠는가.

하지만 국민들 다수는 스스로 자랑하며, 세계의 어느 나라가 우리 독일 국민만큼 하늘의 총애를 입겠는가 하고 생각했다. 세계 각국의 다수도 마찬가지로 경탄하여, “위대하구나, 나라를 이루는 것은 마땅히 그러해야 한다”고 일컬었다. 일본의 대훈위 후작조차 덩달아 기뻐하며 자신도 동양의 비스마르크 공이 되고자 한다고 했다. 지금까지 영국의 입헌 정치가 세계에서 누리던 영광은 갑자기 사라지고 프로이센 군대의 검으로 옮겨 갔다.


애국적 브랜디

국민이 국위國威나 국광國光의 허영에 도취하는 것은 마치 개인이 브랜디에 취하는 것과 같다. 그는 이미 취했다. 귀가 달아오르고 눈이 희미하고 기가 멋대로 뻗어 시체의 산을 넘어도 그 비참함을 보지 못한다. 피의 강을 건너도 그 부정함을 알지 못한다. 그리하여 득의만만해졌다.


유도 선수와 스모 선수

국민의 무력이 전투에 뛰어나다는 명성을 얻는 것은 마치 유도 선수가 모든 기술을 전수받은 것과 같다. 스모 선수가 요코즈나横綱 띠를 두른 것과 같다. 유도 선수나 스모 선수는 단지 적수를 쓰러뜨릴 뿐이다. 기술은 여기에 머물 뿐이다. 만약 적수가 없으면 무슨 이익이 있겠는가. 무슨 명예가 있겠는가. 독일 국민의 자랑은 오로지 적국을 무찌르는 것뿐이다. 만약 적국이 없으면 무슨 이익이 있겠는가. 무슨 명예가 있겠는가.

유도 선수와 스모 선수가 브랜디에 취해 기능과 역량을 자랑하는 것을 보고도 사람들이 여전히 그들의 재주와 슬기, 학식, 덕행을 믿을 수 있겠는가. 국민이 전쟁의 허영에 취해 명예와 공적을 자랑하는 것을 보고도 다른 나라 국민들이 여전히 그들이 정치, 경제, 교육에서 문명적 복리를 초래한다는 것을 믿을 수 있겠는가. 독일의 철학은 존숭할 만하다. 독일의 문학은 존숭할 만하다. 하지만 나는 결코 독일의 애국심을 찬미할 수는 없다.


현 독일 황제

비스마르크 공이 보좌했던 황제나 비스마르크 공 자신이나 모두 이미 과거의 사람이 되었다. 하지만 철혈주의는 여전히 현 황제의 머리 위에 머물러 있다. 애국적 브랜디는 여전히 현 황제를 취하게 하고 있다. 현 황제가 전쟁을 즐기고 압제를 즐기고 허영을 즐기는 것은 나폴레옹 1세를 훨씬 능가하고 나아가 나폴레옹 3세를 훨씬 능가한다. 거대한 대국민은 지금 여전히 피로써 손에 넣은 결합과 통일이라는 미명하에 자신들을 멋대로 부리는 어린 압제자에게 만족하고 있다. 그리하여 애국심은 여전히 대단히 강렬하다. 하지만 어찌 영원한 현상이겠는가.


근대 사회주의

보라. 애국심의 폐해는 절정에 달했다. 맥베스의 포악함이 극에 달했을 때 숲이 움직여 다가온 것처럼, 가공할 만한 강적은 이미 흙먼지를 일으키며 다가온 것이 아닐까. 이 강적은 미신적이지 않고 이론적이다. 중세적이지 않고 근대적이다. 광기적이지 않고 조직적이다. 그 강적의 목적은 애국종과 애국종이 벌인 사업을 모조리 파괴하는 데 있다. 이것을 이름하여 근대 사회주의라고 한다.

고대의 야만적이고도 광적인 애국주의가 근대 문명의 높고 원대한 도의와 이상을 굴복시켜 밀어내는 것이 앞으로도 계속해서 비스마르크 공 당시와 변함이 없을지는 금세기 중엽에 결판이 날 것이다. 그래도 독일의 사회주의가 융성하게 일어나 애국주의를 향해 격렬히 저항을 한 것을 보면, 전승의 허영과 적국의 증오에서 태어난 애국심이 국민 상호 간의 동정이나 박애심에 추호도 도움이 되지 않음을 어찌 깨닫지 못하겠는가.


철학적 국민

아아, 대단히 철학적인 국민으로 하여금 각종 정치적 이상 가운데 대단히 비철학적 사태를 연출하게 한 것은 비스마르크 공이 저지른 최대의 죄악이다. 만약 비스마르크 공이 존재하지 않았다면 비단 독일뿐만 아니라 독일을 최고로 삼는 유럽 각국의 문학, 미술, 철학, 도덕이 얼마나 진보하고 얼마나 고생했겠는가. 어찌 울부짖으며 서로 물어뜯는 들개나 늑대의 모습이 20세기의 오늘에 나타났겠는가.



6


일본 황제

일본의 황제는 독일의 어린 황제와 다르다. 전쟁을 좋아하지 않고 평화를 소중히 여기신다. 압제를 좋아하지 않고 자유를 소중히 여기신다. 일국을 위하여 야만적인 허영을 기뻐하지 않고 세계를 위하여 문명의 복리를 바라신다. 결코 지금의 애국주의자, 제국주의자가 아니신 것 같다. 하지만 우리 일본 국민을 보면 애국자가 아닌 자는 쓸쓸한 샛별처럼 거의 없다.

나는 단연코 동서고금의 애국주의, 단지 적을 증오하고 토벌할 때에만 발양되는 애국심을 찬미할 수 없기 때문에 굳이 일본 인민의 애국심을 배격하지 않을 수 없다.


고토 백작

고토 백작은 예전에 한 번 일본 국민의 애국심 선동을 시도하여 국가가 ‘위급 존망’에 처해 있음을 부르짖었다. 천하의 애국지사는 마치 풀이 바람에 날리는 것처럼 저절로 따라갔다. 그런데 백작은 갑자기 조정에 발을 들여놓았고, 대동단결은 춘몽처럼 사라졌다. 당시 일본인의 애국심이라는 것은 실을 백작을 사랑하는 애백伯심에 지나지 않았던 것이 아닌가.

아니 고토 백작을 사랑한 것이 아니다. 번벌藩閥 정부를 증오했기 때문이다. 그들의 애국심은 증오심이다. 같은 배를 타고 가다가 바람을 만나면 오나라와 월나라도 형제다. 이 형제가 어찌 찬탄할 만한 것인가.


청일전쟁

일본인의 애국심은 청일전쟁에 이르러 세상에 일찍이 없을 정도로 폭발했다. 그들은 이루 말할 수 없이 청나라 사람을 모멸하고 질시하고 증오했다. 백발노인에서 삼척동자에 이르기까지 거의 청나라 4억의 생명을 죽이고 섬멸해야 감탄할 듯한 기개가 있었다. 마음을 비우고 떠올려보라. 오히려 미치광이를 닮지 않았던가. 오히려 굶주린 호랑이의 마음을 닮지 않았던가. 그렇다. 야수를 닮았던 것이 아닌가.


동물적 천성의 탁월함

그들은 과연 일본 국가와 국민 전체의 이익과 행복을 바라서, 진실로 동병상련의 마음이 있어서 그렇게 했는가. 아니다. 오로지 적을 많이 죽이는 것을 기뻐했을 뿐이다. 적의 재산을 빼앗고 적의 땅을 많이 나누어 가진 것을 기뻐했을 뿐이고, 우리의 동물적 천성의 탁월함을 세계에 자랑하고자 했을 뿐이다.

우리 천황이 출병시키신 것은 참으로 중국 고상에서 일컫듯이 형서荊舒를 무찌르고 융적戎狄을 쳐부수기 위해서였을까. 정말로 세계 평화를 위해서, 인도人道를 위해서, 정의를 위해서였을까. 하지만 어쩌겠는가. 이로 인해 선동된 애국심의 본질은 증오이며, 모멸이고, 허영이다. 청일전쟁의 전과로 어떻게 국민 전반을 유형, 무형으로 이롭게 할 것인가에는 전혀 생각이 미치지 못하는 것은 아닐까.


돌을 섞은 캔

보면 안다. 한쪽에서 오백 금, 천 금을 휼병부恤兵部에 헌납한 부호가 한쪽에서는 병사들에게 돌을 섞은 캔을 팔아치웠다. 한쪽에서 죽음을 각오했다는 군인이 한쪽에서 상인의 뇌물을 품에 넣었는데, 그 액수가 이루 헤아릴 수가 없다. 이것을 이름하여 애국심이라 한다. 이상할 것도 없다. 야수 같은 살육의 천성이 열광을 극대화했을 때 죄악이 번성하는 것은 필연적 결과이기 때문이다. 이것이 어찌 천황의 마음이시겠는가.


일본의 군인

일본 군인이 존황충의尊皇忠義의 정情이 깊은 것은 참으로 주목할 만하다. 하지만 그들이 품은 존황충의의 정이 문명 진보와 복리 증진에 얼마나 공헌하는지는 문제다.


우리 황상皇上을 위하여

의화단 사건이 일어났을 때, 다구大沽에서 톈진天津에 이르는 도로가 험준하여 아군이 몹시 곤란했다. 한 병졸이 울면서 말하기를 우리 황상을 위한 것이 아니니 이 고생을 견디느니 오히려 죽는 것이 낫겠다고 했다. 이 말을 듣고 눈물을 흘리지 않은 자가 없었다. 나 또한 이 때문에 운다. 나는 가련한 병사가 황상을 위함이라고 하고 정의를 위해서, 인도를 위해서, 동포 국민을 위해서라고 하지 않은 것을 비난하지 않는다. 그는 평소에 가정에서 학교에서 병영에서 자기 한 몸을 오로지 황상에게 바칠 것을 훈도받고 명령받아 다른 것을 모르기 때문이다. 스파르타의 노예는 자유가 있는 줄 모르고, 권리가 있는 줄 모르고, 행복이 있는 줄 몰라서 주인을 위하여 혹사당하며 채찍을 맞고, 전장에 나가 죽는다. 전장에서 죽지 않더라도 주인에게 살육당하면서도, 자만하며 생각하기를 국가를 위함이라고 한다. 나는 역사를 읽고 항상 그들을 위해 울었다. 지금 이 마음으로 또한 우리 병사를 위해 운다.

하지만 지금은 스파르타 시대가 아니고, 우리 황상은 자유와 평화와 인도를 소중히 여기시니, 어찌 신하를 노예로 삼기를 바라시겠는가. 나는 믿는다. 우리 병사로 하여금 황상을 위함이 아니라, 오히려 진심으로 인도를 위해서, 정의를 위해서라고 말하게 한다면 황상께서 기꺼이 받아들이실 것임을. 이것은 참으로 근왕 충의의 목적에 합치하는 것임을.


효성스러운 창부

부모 형제를 재앙에서 구하기 위하여 도둑질을 하는 자가 있다. 또는 창부가 되는 자가 있다. 중세 이전에는 몸을 위태롭게 하고 이름을 더럽히고 나아가 부모와 형제, 가문을 욕되게 하는 것이 찬미되었다. 문명의 도덕은 오로지 그 심사를 슬퍼하고 어리석음을 동정하지만 결코 비행을 용서하지는 않는다. 충의심도 좋다. 천황을 위함도 좋다. 하지만 정의와 인도는 내가 알 바 아니라고 한다면 그것은 야만적인 애국심이다. 미신적인 충의다. 어찌 저 효성스러운 창부나 도적과 다르겠는가.

나는 슬퍼한다. 우리 군인의 충의심과 애국심이 아직 문명의 고상한 이상과 합치하지 않음을. 나아가 중세 이전의 사상에서 전혀 벗어나지 못한 자가 있음을.


군인과 종군기자

그들 군인의 충의심, 애국심이 왕성한 데 반해, 동포와 인류를 위하는 동정심이 사라진 것은 신문기자의 대우 하나만 보아도 알 수 있다. 북청사변에서 군인들이 종군기자를 만났을 때 냉혹함이 극에 달했다. 그들은 기자가 먹을 것이 없음을 돌아보지 않았다. 기자가 묵을 곳이 없음을 돌아보지 않았다. 기자가 병들었을 때 돌아보지 않았다. 기자의 생명이 위험해도 돌아보지 않았다. 오히려 기자들은 우리와 관계가 없다고 했다. 그리고 기자들을 매도하고 질책하여 마치 노예처럼 대했다. 마치 적수처럼 대했다.

군인은 국가를 위해서 싸운다고 한다. 종군기자도 마찬가지로 우리 국가의 한 사람이 아닌가. 동포의 한 사람이 아닌가. 그런데도 군인들에게 애호하는 마음이 없는 것이 어찌 이토록 심한가. 그들이 말하는 국가에는 단지 천황이 있을 뿐이고, 군인 자신이 있을 뿐이다. 그 외에는 모르기 때문이다.

우리 4천만 민중은 목을 길게 빼고 아군의 안위가 어떠한지 알고자 한다. 발꿈치를 높이 들어 아군의 전황이 어떠한지 듣고 싶어 한다. 종군기자는 전장에 뛰어들어 생사의 길을 넘나든다. 어찌 단지 신문 부수를 늘릴 뿐이겠는가. 그들은 진실로 우리 4천만 민중의 갈증을 해소하고자 전장에 뛰어든 것이다. 그런데도 군인은 기자들이 쓸모없다고 했다. 4천만 국민에 한 점의 동정도 없음을 알지 못하겠는가.


국민이 안중에 없음

봉건 시대 무사는 국가를 무사의 국가라고 했다. 정치를 무사의 정치라고 했다. 농 · 공· 상에 종사하는 인민은 국가와 정치에 관여할 권리도 없고 의무도 없다고 생각했다. 지금 군인도 마찬가지로 국가를 천황과 군인의 국가라고 여긴다. 그들은 국가를 사랑한다고 하지만 안중에 군인 이외의 국민이 있는가. 그러므로 깨달을 것이다, 애국심 발양은 적수에 대한 증오를 더하지만 결코 동포에 대한 애정을 더하는 것은 아님을.


애국심 발양의 결과

국민의 고혈膏血을 짜내 군비를 확장하고, 생산 자본을 뿌려 비생산적으로 낭비하고, 물가 폭등을 격화시켜 수입 초과를 초래하고는 국가를 위해서라고 한다. 애국심 발양의 결과는 믿음직한가.

많은 적군의 생명을 빼앗고 적군의 땅과 재산을 많이 얻어놓고, 그러면서도 오히려 정부의 예산은 이로 인해 두 배, 세 배 증가한 것을 국가를 위해서라고 한다. 애국심 발양의 결과는 믿음직한가.



7


애국심이라는 것은 이와 같다

내가 앞에서 주장한 바에 따라 이른바 패트리어티즘, 즉 애국주의나 애국심이 도대체 어떤 것인지 대략 이해할 수 있었다고 믿는다. 그것은 야수적 천성이다. 미신이다. 광기다. 허영이다. 호전적인 마음이다. 실로 이와 같은 것이다.


인류의 진보가 있는 이유

주장하지 마라. 애국심은 인간의 자연스러운 성정이라 이것이 존재하는 것은 결국 어쩔 수 없다고. 생각해보라. 자연에서 발생한 각종 폐해를 막는 것은 참으로 인류의 진보가 있는 이유가 아니겠는가.

물은 정체되어 움직이지 않고 오래되면 부패한다. 이것이 자연이다. 만약 이 물을 움직이게 하고 흐르게 해서 부패를 막는다면 자연에 거역하는 것이라고 비난할 수 있겠는가. 인간이 노쇠하여 질병에 걸리는 것은 자연이다. 병자에게 약을 투여하는 것을 자연에 거역하는 것이라고 책망할 수 있는가. 금수나 어패류나 초목은 생명을 자연에 맡긴다. 죽음을 자연에 맡긴다. 진화하거나 퇴보하는 것 또한 스스로 이루는 것이 아니라 자연에 맡길 뿐이다. 만약 인간이 자연에 순응하는 것을 능사로 삼는다면 그야말로 금수, 어패류, 초목일 뿐, 어찌 인간이라고 할 수 있겠는가.

인간은 스스로 일어나 자연의 폐해를 바로잡기 때문에 진보하는 것이다. 다만 가장 많이 자연의 욕정을 제압하는 인민이 가장 많이 도덕이 진보한 인민이다. 천연물에 가장 많은 인공을 가한 인민이 물질적으로 가장 많이 진보한 인민이다. 문명의 복리를 누리려는 자는 실로 자연을 맹종해서는 안 된다.


진보의 대의

그러므로 깨우쳐라, 미신을 버리고 지식을 쌓고, 광기를 버리고 논리를 쌓고, 허영을 버리고 진실을 쌓고, 호전적인 마음을 버리고 박애의 마음을 쌓는 것이 인류 진보의 대의임을.

그러므로 깨우쳐라, 저 야만적 천성을 벗어나지 못하면서 지금의 애국심에 혹사당하는 국민은 품성이 더럽고 천박하니 감히 고상한 문명 국민이라 일컬을 수 없음을.

그러므로 깨우쳐라, 정치를 애국심의 희생으로 삼고, 교육을 애국심의 희생으로 삼고, 상공업을 애국심의 희생으로 삼고자 하는 자는 문명의 도적, 진보의 적, 나아가 세계 인류의 죄인임을. 그들은 19세기 중엽에 일단 노예 신분에서 탈출한 다수의 인류를 이치에 맞지 않는 애국심이라는 미명 아래 또다시 노예 신분으로 떨어뜨릴 뿐만 아니라, 나아가 야수의 경지로까지 추락시키려고 하는 자임을.


문명의 정의와 인도人道

그러므로 나는 단언한다. 문명 세계의 정의와 인도는 결코 애국심의 발호를 허락하지 않으며 반드시 이것을 제거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을. 하지만 어찌하겠는가, 비천한 애국심이 이제 나아가 군국주의militarism가 되고 제국주의가 되어 전 세계에서 유행함을. 나는 지금부터 조금 더 자세히 군국주의가 어떻게 세계의 문명을 파괴하고 인류의 행복을 저해했는지를 살펴보고자 한다.




3장 군국주의를 논하다


1


군국주의 세력

지금 군국주의 세력의 왕성함은 전례가 없고 거의 극에 달했다. 각국이 군비 확장에 소모하는 정력이나 그로 인해 사라져버리는 재력을 일일이 계량할 수도 없다. 군비를 단지 평상시 외환이나 내란을 방어하는 도구로 여길 뿐이라면 어찌 이토록 심할 필요가 있겠는가. 그들은 유형적으로 무형적으로 나라 전체를 군비 확장의 희생으로 삼으면서도 여전히 반성하려고 하지 않는다. 군비 확장의 원인과 목적은 방어 이외의 것임에 틀림없다. 보호 이외의 것임에 틀림없다.


군비 확장의 이유

그렇다. 군비 확장을 촉진하는 이유는 다른 곳에 있었다. 다름 아니라 일종의 광기, 허영심, 호전적 애국심이다. 단지 무인의 호사로서 대개 병법을 가지고 놀기 위한 것도 있다. 무기, 양식 등의 군수품을 제공하는 자본가가 일확천금의 막대한 이익을 얻기 위해서 촉진하는 것도 있다. 영국, 독일 등에서 군비를 확장하는 데에 이들이 관여하는 힘이 특히 강했다. 하지만 무인이나 자본가가 쉽게 야심을 확고히 할 수 있는 이유는 다수 인민이 허영적, 호전적 애국심을 분출하는 것을 기회로 삼기 때문이다.

갑 국민은 “우리는 평화를 원한다. 하지만 을 국민이 침공을 욕망하니 어찌하겠는가”하고 말한다. 을 국민도 “우리는 평화를 원한다. 하지만 갑 국민이 침공을 욕망하니 어찌하겠는가”하고 말한다. 세계 각국이 모두 같은 말을 하지 않는 곳이 없다. 먹던 밥이 튀어나올 정도로 골계의 극치다.


무사 인형 공주 인형

이런 식으로 각국 국민은 아이들이 무사 인형이나 공주 인형의 아름다움을 자랑하며 누가 더 많이 가졌는지를 겨루는 것처럼, 무장이 얼마나 정예하고 병함兵艦이 얼마나 많은지를 겨루고 있다. 그것은 단지 서로 겨루는 것일 뿐이지, 결코 적국이 곧 쳐들어온다고 믿는 것은 아니다. 결코 외국으로 출정하는 것이 긴요하다고 여기는 것은 아닌 것 같다. 이것은 아이들 놀이와 비슷하다. 더욱이 가공할 만한 참상이 이 내부에서 배태됨을 어찌할까.


몰트케 장군

고故 몰트케 장군은 “세계 평화의 희망은 몽상일 뿐이고, 더욱이 이 꿈은 결코 아름답지 않다”고 했다. 그렇다. 평화의 꿈은 장군에게는 추할 것이다. 장군은 실로 아름다운 몽상가였다. 장군이 프랑스를 이겨 50억 프랑의 배상금과 알자스, 로렌 두 주를 할양했음에도, 오히려 프랑스의 상공업이 빠르게 번영하고 독일 시장이 갑자기 일대 혼란과 좌절에 빠진 것을 보고 불같이 화를 낸 사건은, 장군의 아름다운 꿈의 결과였다. 아름다운 꿈의 결과가 몹시 추하지 않은가.


야만인의 사회학

그리하여 몰트케 장군은 또다시 아름다운 무력으로 프랑스를 크게 타격해서 무너뜨려 일어나지 못하게 하려고 자주 시도했다. 이것은 오로지 무력의 승리로 국민을 부유하게 하려는 몰트케 장군의 정치적 수완이다. 만약 이와 같은 마음가짐을 20세기 국민의 이상으로 숭배해야만 한다면, 우리는 언제 야만인의 윤리학, 야만인의 사회학 이상으로 나아갈 수 있겠는가.


작은 몰트케의 배출

하지만 군국주의가 번성한 결과, 몰트케 장군은 현대의 이상이 되었다. 모범이 되었다. 작은 몰트케가 우후죽순처럼 세계 도처에서 배출되었다. 동양의 한 소국에서도 작은 몰트케는 의기양양하게 활보한다.

그들은 군비 제한을 주장한 니콜라이 2세 황제 폐하를 몽상가라고 비웃었다. 평화회의를 농담이라고 매도했다. 그들은 항상 평화를 희구한다고 설파하는 혀를 가지고, 한편에서는 군비는 미덕이고 전쟁은 필요하다고 앞장서서 외친다. 나는 그 모순을 비난하지 않을 것이다. 잠시 사회가 군비와 전쟁을 필요로 하는 이유를 들어보자.



2


머핸 대령

최근 들어 군국이라는 것에 정통하다고 일컬어지는 인물이 바로 머핸 대령만 한 이가 없을 것이다. 그의 대저작은 영미 각국의 군국주의자, 제국주의자들 사이에서 대가의 작품으로 낙양洛陽의 종잇값을 올리기에 이르렀다. 우리나라 무사 중에도 그의 책을 애독하는 자가 많음은 그의 번역서 광고가 잦은 것을 보아도 알 수 있다. 그러므로 나는 군국주의를 논하는 자가 우선 그의 의견에 주의하는 것은 편익이자 의무라고 믿는다.


군비와 징병의 공덕

머핸 대령이 군비와 징병의 공덕을 설파한 것은 대단히 교묘하다.


군비가 경제적으로는 생산을 위축시키고 인간의 생명과 시간에 과세하는 등의 불이익이나 해독을 초래한다는 것은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었으니 새로이 주장할 필요도 없다.

하지만 한편으로 살펴보면, 그 이익은 폐해를 보상하고도 남음이 있지 않은가. 웃어른의 권력이 쇠잔하고 극도로 기강이 해이해진 시절을 맞아, 나이 어린 국민이 질서와 복종과 존경을 학습할 수 있는 병역이라는 학교에 들어가, 체구는 조직적으로 발달하고, 극기나 용기나 인격이 군인의 요소로 양성되는 것은 아무런 쓸모없는 일인가. 다수의 연소자가 향촌을 떠나 무리를 이루어 고등 지식이 있는 선배와 섞여 정신을 결합하고 동작을 같이해야 함을 교육받고, 헌장 법규의 권력에 대한 존경심을 길러서 각자의 집으로 돌ㄹ아가는 것은, 오늘날처럼 종교가 퇴폐한 시절에 아무런 쓸모없는 일인가. 보라. 처음으로 교련을 받은 신병의 태도나 동작과 이미 교련을 끝낸 병사가 가두에 모여 있을 때의 용모와 체격을 비교해보라. 얼마나 우열이 심한지를 충분히 알 수 있을 것이다. 군인적 교련은 장래에 활발한 생계를 영위하는 데 결코 유해한 것이 아니며, 적어도 대학에서 세월을 소비하는 것보다 유해하지 않다. 그리고 각 국민이 상호 간에 무력을 존중하기 때문에 평화가 더욱더 확보되어 전쟁이 줄어들고, 우연히 격변이 발생해도 과정이 급속히 진행되며 대단히 쉽게 진정된다. 이것이 아무런 쓸모가 없다고 할 수 있겠는가. 아마도 전쟁은 백 년 전에는 만성적 질병이었지만, 오늘날에는 발생이 극히 드물며 오히려 급성 발작에 가깝다. 그러므로 급성적 전쟁의 발작에 대응하는 준비, 즉 선량한 목적에서 싸우는 마음은 본래 선하고 아름다운 것임을 잃지 않으며, 그리하여 이 마음은 병사가 용병傭兵이었을 당시보다도 훨씬 광대하고 왕성함을 확인할 수 있다. 그것은 지금 국민이 모두 병사이고 단지 한 군주의 노예가 아니기 때문이다.


머핸 대령의 언사는 참으로 교묘하다. 하지만 나는 이 주장이 대단히 논리에 맞지 않다고 생각한다.


전쟁과 질병

머핸 대령의 논리를 해부하면, 요컨대 전투를 익혀 질서와 존경과 복종의 덕을 기르는 것은 오늘날과 같이 권력이 쇠잔하고 기강이 해이할 때는 가장 긴요한 일이다. 하지만 전쟁은 질병이다. 백 년 전에는 만성적 질병이었다. 지금은 국민 개병이고 전쟁은 감소했다. 우연히 전쟁이 일어나도 급성이다. 건강할 때에 항상 급성 발작에 대응하는 준비와 주의가 필요하다고 한다. 머핸 대령의 주장에 따르면 국민이 전쟁이라는 만성적 질병에 걸렸던 시대에는 질서가 있고 기강이 잡혀 있었고, 건강한 시대는 “기강이 해이하고” “종교가 퇴폐”한 시대가 된다. 이상하지 않은가.


쇠잔한 권력과 해이한 기강

머핸 대령이 권력의 쇠잔, 기강의 해이라고 언급한 것은 아마도 사회주의의 등장을 가리키는 것이다. 그것이 거짓임은 두말할 필요도 없다. 하지만 설령 지금을 백 년 전과 비교하여 기강이 해이해졌다고 하더라도, 설령 사회주의자가 현 사회의 질서와 권력을 파괴하려고 시도하는 것을 기강이 해이하고 종교가 퇴폐한 결과라도 하더라도, 징병제와 군인적 교련으로 과연 이것을 막을 수 있을까. 부디 현실을 직시하라.


혁명 사상의 전파자

미국 독립전쟁을 지원했던 프랑스 군인은 대혁명에서 구질서 파괴에 유력한 동기가 되지 않았던가. 파리에 침입한 독일 군인은 독일제국에서 혁명 사상의 유력한 전파자가 되지 않았던가. 현재 유럽 대륙에서 징병제를 채택한 제국의 병영이 항상 사회주의의 일대 학교로서 현 사회에 대한 불평 양성소가 되는 것이 뚜렷이 보이지 않는가. 나는 사회주의 사상이 흥하여 번성하기를 바란다. 그리고 사회주의를 양성한다는 이유에서 결코 병영을 배척하는 사람이 아니다. 그렇다 하더라도 머핸 대령의 말처럼 병사의 교련이 웃어른에 대한 복종과 존경의 미덕을 기를 수 있다는 말이 거짓임을 깨닫지 못하겠는가.

그렇다. 카이사르의 군대는 과연 얼마나 국가의 질서에 존경심을 품었던가. 크롬웰의 군대는 처음에 의회를 위하여 빼든 검을 휘둘러 오히려 의회를 전복시키지 않았던가. 그들은 단지 카이사르, 크롬웰이 있음을 알았을 뿐, 국가의 질서와 기강은 몰랐다.


질병의 발생

인간이 군인적 교련을 받는 것은 단지 선량한 목적을 위하여 싸우기 위함인가, 아니면 이른바 급성 질병 치료에 대응하기 위함인가. 설령 그렇다고 하더라도 그들이 치료 기회를 얻지 못한 채 백 년을 유유히 오래도록 교련으로 시작해서 교련으로 끝나는 것을 참겠는가. 아니다, 반드시 스스로 질병을 일으켜서 만족하고자 할 것이다.


징병제와 전쟁 횟수

국민 개병이고 왕후의 노예가 아니라는 말은 맞다. 하지만 이로써 각 국민이 서로 무력을 존중하기 때문에 전쟁이 감소한다는 말은 터무니없는 망언이다. 고대 그리스와 이탈리아는 국민 개병이었지, 결코 왕후의 노예가 아니었다. 그런데도 전쟁은 만성 질환이 아니었던가. 용병을 써서 약소국을 정벌할 경우에는 순전한 징병보다 편리한 점이 있다. 그렇지만 국민 개병의 징병제가 결코 전쟁을 미연에 방지하거나 줄이는 것은 아니다. 나폴레옹의 전쟁도 징병이었다. 근대 유럽에서 오스트리아-프랑스전쟁, 크림전쟁, 오스트리아-프로이센전쟁, 프로이센-프랑스전쟁, 러시아-투르크전쟁이 빈발하여 징병제의 참상은 극에 달하지 않았던가.

만약 최근에 서로 필적할 만한 양국 간 전쟁에서 끝이 앞당겨진다면, 그것은 국민의 훈련이 완전하기 때문이 아니라 전쟁의 참상이 몹시 끔찍하거나 인간의 도리를 반성하는 것이 더욱 빨라졌기 때문일 뿐이다.


전쟁 감소의 이유

1880년 이후에 서로 필적할 만한 강국 간 전쟁이 거의 일어나지 않은 것은 두 나라 국민이 서로 존경하기 때문이 아니라, 단지 전쟁 결과에 대한 공포를 통찰하고 어리석음을 깨달았기 때문일 뿐이다. 독일과 프랑스는 전쟁이 함께 멸망하는 것으로 끝날 것임을 깨달았다. 러시아 황제는 일등국과 싸우는 결과가 파산과 영락ruin임을 깨달았다.

강국이 서로 싸우지 않는 것은 단지 이 때문이다. 징병 훈련으로 존경심을 양성한 성과가 아니다. 보라. 그들은 지금 아시아, 아프리카에 엄청나게 무력을 쓰고자 하지 않는가. 그렇다. 그들의 허영심, 호전성, 야수적 천성은 오히려 군인적 교련으로 격렬하게 선동되고 있다.



3


전쟁과 문예

군국주의자는 철이 물과 불의 단련을 거쳐 예리한 검이 되듯이, 인간도 일단 전쟁의 단련을 거치지 않으면 결코 위대한 국민이 될 수 없다고 말한다. 미술이나 과학, 제조업은 전쟁의 고무나 자극 없이는 능히 고상한 발달을 이루기 어렵다. 예로부터 문예가 크게 흥하여 번성한 시대는 대개 전쟁 이후 시대에 속한다. 페리클레스의 시대는 어떠한가. 단테의 시대는 어떠한가. 엘리자베스의 시대는 어떠한가라고 말한다. 나는 평화회의가 제창되던 때에 영국의 유력한 군국주의자가 이 주장을 한 것을 알았다.

그렇다. 페리클레스나 단테나 엘리자베스 시대의 인민들은 모두 전쟁을 알았다. 하지만 고대의 역사는 거의 전쟁으로 충전되었다. 전쟁을 거친 것은 비단 이들 시대만이 아니다. 그 외의 시대도 마찬가지로 전쟁을 겪었다. 어찌 그들의 문학을 오로지 전쟁의 은덕이라고 할 수 있겠는가. 따라서 그들의 문학이 전후에 급속히 흥하여 번성했다거나 그것들이 전쟁과 관련한 일관된 특징이 있음을 증명하지 않으면 아직 견강부회를 벗어날 수 없다.

고대 그리스의 여러 나라 중에 전쟁을 즐기고 전쟁에 능란한 것으로 스파르타만 한 데가 없다. 그런데 스파르타는 과연 기술이나 문학이나 철학을 하나라도 남긴 것이 있는가. 영국 헨리 7세와 헨리 8세의 조정은 맹렬한 내전이 끊이지 않았다. 하지만 문예 발달은 추호도 볼 만한 것이 없지 않은가. 엘리자베스 시대의 문학 부흥은 멀리 에스파냐 무적함대를 제압하기 이전에 예견된 것이었고, 에드먼드 스펜서나 셰익스피어나 베이컨이 결코 이 전쟁 때문에 나왔다고 할 수는 없다.


유럽 각국의 문예와 학술

30년전쟁은 독일의 문학과 과학을 한 차례 시들게 만들어버렸다. 루이 14세 즉위 당시에 융성했던 프랑스의 문학과 과학은 터무니없는 무력으로 극도로 쇠미해졌는데, 겨우 만년에 이르러 부흥이 시작되었다. 프랑스의 문학이 전승의 시대보다도 전쟁에 패하여 어려운 시대에 항상 융성했음을 왜 알지 못하는가. 근대 영국의 테니슨(Alfred Tennyson, 1809~1892), 새커리(William M. Thackeray, 1811~1863)의 문학, 다뉭의 과학을 크림전쟁 승리의 성과로 돌린다면 누가 비웃지 않겠는가. 독일의 여러 대가는 프로이센-프랑스전쟁 후에 나온 것이 아니라 그 전에 나왔다. 미국 문학의 전성기는 내란 후가 아니라 전이다.


일본의 문예

우리 일본의 문예도 나라(奈良, 710~794) · 헤이안(平安, 794~1192) 시대에 융성했던 것이 호겐(保元, 1156~1158) · 헤이지(平治, 1159) 시대에 쇠퇴했으며, 호조北條 시대(가마쿠라 시대)의 소강상태를 거쳐 다소 부흥의 기운으로 향했지만, 겐코(元弘, 1331~1334) 이후 남북조에서 오닌(應仁)의 난(1467~1477)을 거쳐 겐키(元龜, 1570~1573) · 덴쇼(天正, 1573~1592)에 이르는 동안에 거의 인멸되어, 단지 오산五山의 승려에 의해 한 줄기 명맥이 이어진 것은 적어도 역사를 읽은 자라면 수긍하는 사실이다.

따라서 문예가 전쟁 이후에 흥하여 번성하는 경우가 만약 있다면, 이것은 단지 전쟁 동안에 억눌리고 방해받던 문예가 다소 태평한 시대를 만나 머리를 쳐드는 것이지, 결코 전쟁 때문에 촉진되는 것이 아니다. 무라사키 시키부(紫式部)나 아카조메에몬(赤染衛門)이나 세이 쇼나곤(淸少納言)은 전쟁으로 무슨 감화를 입었는가. 산요(山陽)나 바킨(馬琴)이나 후라이(風來)나 소린(巢林)은 전쟁 때문에 무슨 고취를 얻었는가. 오가이(鷗外)나 쇼요(逍遙)나 로한(露伴)이나 고요(紅葉)는 전쟁과 무슨 관계가 있는가.

나는 전쟁이 사회 문예의 진보에 걸림돌임을 확인했다. 아직 전쟁이 발달에 보탬이 되는 것을 본 적이 없다. 청일전쟁 때 나온 군가 〈쳐부수어라 혼내줘라 청나라를〉을 나는 대문학大文學이라 부를 수 없다.


무기 개량

칼과 창이나 함포가 개량되고 진보하여 점점 견고하고 우수해지는 것은 어쩌면 전쟁의 힘인 것 같다. 하지만 이것은 모두 과학기술이 진보한 결과이며, 사실 평화 덕분 아닌가. 설령 전쟁 자체의 성과라고 하더라도, 무기의 발명과 개량이 국민을 고상하고 위대하게 만드는 지식과 도덕에 얼마나 공헌하겠는가.


군인의 정치적 재능

그렇다. 군국주의는 결코 사회의 개선과 문명의 진보에 도움이 되는 것이 아니다. 전투 숙달과 군인 생활은 결코 정치적 · 사회적으로 인간의 지덕을 증진시키지 못한다. 나는 이 점에 대한 더욱더 적합한 증거로서, 예로부터 무공이 혁혁한 영웅이 정치가로서 재능과 문치의 성적이 얼마나 보잘것없는지를 제시하고자 한다.


알렉산드로스, 한니발, 카이사르

고대에 알렉산드로스 대왕, 한니발, 카이사르는 최고의 호걸로서 삼척동자도 그 이름을 알았다. 하지만 그들은 쉽게 파괴하는 것에 비해 건설의 힘이라고는 없었다. 알렉산드로스의 제국empire은 정치학적 관점에서 보면 실로 있어서는 안 되는 현상이다. 거기에는 오로지 정복의 전환conversion이 일시적으로 있었을 뿐이기에, 알렉산드로스의 제국이 산산이 붕괴되어 간 것은 당연한 이치다. 한니발의 병략과 지략은, 그가 이탈리아를 압도한 15년 동안 로마인이 감히 그 위세를 우러러보지 못하게 만들었다. 하지만 카르타고가 부패의 고황膏肓에 든 것을 구할 수는 없었다. 카이사르가 전쟁에 임하는 것은 굶주린 호랑이와 같았어도 정치의 단상에 서는 것은 눈먼 뱀과 같아서, 오로지 로마의 민정을 타락시켜 만인의 원성을 샀을 뿐이다.


요시쓰네, 마사시게, 유키무라

미나모토노 요시쓰네(源義経, 1159~1189)는 전투에 탁월했다. 구스노키 마사시게(楠正成, 1294~1336)나 사나다 유키무라(真田幸村, 1567~1615)도 마찬가지로 전쟁에 뛰어났다. 하지만 누가 그들의 정치적 수완을 믿을 수 있겠는가. 그들의 완전한 군인 자질을 정치의 단상에 세우면, 과연 호조 씨 9대, 아시카가(足利) 씨 13대, 도쿠가와(徳川) 씨 15대의 기초를 열 수 있었겠는가.


항우와 제갈량

일흔네 차례의 크고 작은 전쟁에서 승리한 항우는 법을 3장으로 줄인 고조(高祖)에 미치지 못했다. 제갈량의 팔문八門과 둔갑은 결국 무제(武帝)인 맹덕(孟德)의 신서新書에 미치지 못했다. 사회의 인심을 연결하고 천하의 태평을 부르는 길은 깃발을 들어 올리고 장수를 베는 힘이 아니라 분명히 다른 데 있기 때문이다.


프리드리히와 나폴레옹

근대의 무인 가운데 가장 정치적 공적이 뛰어난 것은 프리드리히(Friedrich Ⅱ, 1712~1786)와 나폴레옹이다. 하지만 프리드리히는 처음부터 무인 생활을 몹시 싫어하여 전투를 익히는 것을 큰 고통으로 여겼다. 그는 군국주의적 이상의 적당한 대표자가 아니다. 그런 그조차도 견고한 건설을 사후에 남길 수 없었다. 나폴레옹의 제국이 양국의 교상橋上의 불꽃처럼 갑자기 빛났다가 사라졌음은 두말할 나위도 없다.


워싱턴

워싱턴(George Washington, 1732~1799)은 현자다. 그는 이른바 나면 장군이요 들면 재상이었다. 하지만 그를 결코 순전한 무인으로 보아서는 안 된다. 그는 우연히 어쩔 수 없이 시운에 휩쓸려 싸운 것이지 전쟁을 즐기는 사람이 아니었다.


미국의 정치가

미국에서 군인의 소양이 있는 자가 일찍이 최상의 정치가에 들지 못한 것은 특히 주의할 가치가 있다. 무인으로서 처음으로 미국 대통령이 된 사람은 앤드루 잭슨(Andrew Jackson, 1767~1845)이 아닌가. 그리고 관직 쟁탈은 그의 시대부터 시작되지 않았는가.

그랜트 장군(Ulysses Simpson Grant, 1822~1885)은 최근의 무인 중 가장 존경할 만한 인물로 꼽힌다. 하지만 대통령으로서 성적이 대단히 좋지 못했음은 당원조차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 아닌가. 그는 전쟁에서 인내와 정직함 속에서 발휘된 기술이나 수완을 문사에 응용하지 말았어야 했다.


그랜트와 링컨

나는 링컨(Abraham Lincoln, 1809~1865)이 군사에 정통하여 모든 장군이 그의 술책에 결코 미치지 못했음을 안다. 하지만 이것은 우연히 진정한 대정치가는 군국에 관한 것도 쉽게 요리할 수 있음을 증명하는 것일 뿐, 군인적 교련이 대정치가를 만든다는 어리석은 이론의 증거가 아니다. 일찍이 공자(孔子)는 문사文事가 있는 자는 반드시 무비武備가 있다고 말한 적이 있다. 워싱턴이나 링컨은 이쪽이다. 하지만 무비가 있는 자가 반드시 문사가 있는 것은 아니다. 그랜트 장군과 같은 경우가 이쪽이다.


넬슨과 웰링턴

근대 영국에서 세계에 공명을 떨쳐 군인의 이상이자 군국주의자들의 숭배 대상이 된 사람으로 육지에는 웰링턴(Arthur Wellesley Wellington, 1769~1852)이 있고, 바다에는 넬슨(Horatio Nelson, 1758~1805)이 있다. 웰링턴의 정치적 수완은 얼마간 범용 정치가의 수준이라고 일컬어지기도 했다. 하지만 결코 일대를 경영하고 만민을 지도할 재목은 아니었다. 그는 철도가 하등 승객에게 부여하는 편리함을 “하층 인민으로 하여금 쓸데없이 전국을 여행시키는 것”이라고 하여, 이에 반대하지 않았던가. 넬슨에 이르러서는 거의 언급할 가치도 없다. 그는 해군 이외에는 추호의 가치도 없는 인물이었다.


야마가타, 가바야마, 다카시마

눈을 돌려 우리 일본을 보자. 어찌 그들 군인의 정치적 수완이 칭찬할 만한 것이겠는가. 동양의 몰트케, 넬슨, 웰링턴에 비유되어 숭배되는 야마가타 후작이나 가바아마 백작, 다카시마 자작은 메이지의 정치사, 사회사에서 과연 어떠한 특기할 만한 점이 있는가. 선거 간섭, 의원 매수의 전례를 만들어 우리 사회의 인심을 부패와 타락의 극점으로 빠뜨린 죄악을 저지른 장본인이 아닌가.

나를 멋대로 군인과 군대를 매도하는 사람으로 여기지 말라. 나는 농 · 공 · 상 가운데 지자智者나 현자가 있는 것처럼, 군인 중에도 또한 지혜로운 자나 현명한 자가 있음을 안다. 나는 그러한 사람들은 존경하기를 주저하지 않는다.


군인 중 지혜로운 자와 현명한 자

다만 지혜로운 자나 현명한 자는 군대적 교련을 거치거나 전쟁을 겪고 비로소 생겨나는 것이 아니다. 손에 총검이 없고, 어깨에 견장이 없고, 가슴에 훈장이 없어도, 지혜로운 자나 현명한 자는 능히 지혜롭거나 현명하다. 하지만 그들이 아무리 지혜롭고 현명하더라도, 군인의 직무로서나 군인 교육의 성과로서는 사회 전반에 아무런 이익도 주지 못한다.

통일을 배운다고 말하지 말라. 사람을 죽이는 통일이 무엇이 존경할 만 한가. 규율에 복종한다고 말하지 말라. 재물을 허무는 규율이 무엇이 존경할 만한가. 용기가 생긴다고 말하지 말라. 문명을 파괴하는 용기가 무엇이 바람직한가. 아니 이 규율, 통일, 용기조차도 그들이 병영을 한 발짝만 나가면 아득하여 흔적을 남기지 않는다. 남은 것은 오로지 강자에 맹종하고 약자를 능멸하는 악풍뿐이다.



4


군국주의의 폐해

군국주의와 전쟁은 단지 사회 문명의 진보에 도움이 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사회 문명을 잔인하게 해치는 폐해가 가공할 만하다.


고대 문명

군국주의자는 고대 문명이 역사에 출현했을 때는 모두 병상兵商일치의 사회였다고 말한다. 그들은 고대 이집트, 고대 그리스를 군비가 문명을 진전시킨 증거로 들려고 한다. 하지만 틀렸다. 나는 믿는다. 이집트가 무력 정복, 군비 위주로 타락하지 않았다면, 번영이 수백 년은 더 지속되고, 명맥은 수천 년은 보존되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한다. 이 문제에 관해서 그리스는 따로 일고의 가치가 있다.


아테네와 스파르타

고대 그리스가 무력을 중시했다고 해도, 각국은 자연히 달랐다. 스파르타는 철두철미하게 군국주의를 유지했다. 생활은 조련이었고, 사업은 전쟁이었다. 그 외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그리하여 이미 앞에서 언급했듯이 스파르타 문명은 하나도 볼 만한 것이 없다. 아테네에 이르면 이 정도로 극단적이지 않다. 페리클레스는, 우리는 저와 같은 조련으로 자기를 고통에 빠뜨리지 않아도 유사시에 용기가 꺾이지는 않는다. 우리는 전쟁에 대응할 준비에 급급하여 생애를 조련에 다 쓰는 자에 비해 결코 뒤떨어지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이것은 커다란 이익이 아니겠는가. 근대의 군국주의자는 스파르타를 선택할 것인가, 아테네를 고를 것인가.

그들이 아무리 어리석더라도 풍요로운 아테네 문명을 버리고 감히 스파르타의 야수적 군국주의를 찬미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런데도 군국주의자들의 주장에 비추어보면, 스파르타가 바로 그들의 최대 이상에 합치하는 것이 아닌가.


펠로폰네소스 전후의 부패

군국주의자는 이렇게 말할지도 모른다. 우리들은 스파르타 같은 극단적인 것을 원하지 않는다. 다만 아테네의 군국주의를 모범으로 하면 그것으로 선하고 아름다운 상태가 될 것이라고 한다. 그렇다. 스파르타에 비하면 그래도 괜찮다. 하지만 생각해보라. 아테네도 군비가 정치개혁에 관여하여 무슨 성과를 올렸는가. 사회적 품성의 향상에 관여하여 얼마만큼 효과가 있었는가. 시민들에게 전쟁을 선동하는 것 이외에 과연 어느 정도의 이익과 손해가 있었는가. 아테네가 펠로폰네소스 전쟁에 종사하기를 30년, 군국주의의 이익과 효과는 이때에 비로소 최고로 발휘되었어야 하지 않았던가. 그렇지만 결과는 반대였다. 다만 부패와 타락이 있었을 뿐이다.


투키디데스의 위대한 역사서

펠로폰네소스 전쟁이 그리스 인민의 도덕을 완전히 일소하고 신앙을 파괴하고 도리를 인멸하여 얼마나 처참한 상태가 극에 달했는가를 볼 필요가 있다면, 일단 투키디데스가 쓴 천고의 역사서를 빌려오자. 투키디데스는 다음과 같이 묘사한다.


여러 도시에서 소요가 일단 발생하면, 혁명적 정신은 계속 전파되어 종래의 것들이 모조리 파괴되지 않고는 끝나지 않는다. 그 시도는 나타날 때마다 한층 흉포해지고, 그 복수는 일어날 때마다 한층 처참하다. 언어의 의미는 이미 실제 사물과의 관계를 잃고 다만 그들이 적당하다고 여기는 대로 변경되었다. 저돌이나 맹진猛進은 용맹이라는 의미로 사용되었다. 신중한 사려는 비겁한 자의 구실로 여겨졌다. 온화함은 연약함의 이면이라고 일컬어졌다. 만사를 아는 자는 아무것도 하지 않는 무능한 자가 되었다. 광인적 에너지는 진정한 사나이의 본성이 되었다. … 광포함을 좋아하는 자는 신임 받고, 반대하는 자는 혐의를 받았던 것이다. … 애초에 도당의 음모에 관여하기를 꺼리는 자는 이간질하는 자로 간주되었고, 적을 두려워하는 겁쟁이로 낙인찍혔다. … 나쁜 짓을 해서 남을 곤경에 빠뜨리는 자는 감탄을 받고, 양민을 선동하여 죄악을 권하는 자 또한 더더욱 감탄을 받았다. … 복수는 자기 보전보다도 숭고했다. 각 당파 간의 일치단결은 다만 그 세력이 없으면 아무것도 못하는 기간 동안만 유지되었을 뿐이며, 그들이 다른 당을 압도하게 되면 간계나 폭력을 있는 대로 휘두르고 무서운 복수가 또한 연이어 일어났다. … 이리하여 전쟁은 그리스인의 모든 악덕을 자아냈다. 고상한 천성의 한 요소인 질박함이라는 것이 대수롭지 않게 여겨지고 모습을 감추었다. 추잡하고 불쾌한 투쟁, 폭력적인 복수심이 도처에 만연하고 그들을 화해시키는 데 도움이 되는 한마디 말조차 없었으며, 그들을 믿게 하는데 도움이 되는 한마디 선서조차 없었다. … 비열한 잔꾀를 부리는 자는 일반적으로 가장 성공했다.


아아, 이것이 고대 최고의 문명국, 모든 시민이 군대적 교련을 경험한 지역에서 군국주의자가 찬미하는 전쟁이 낳은 결과가 아닌가. 우리 일본의 군국주의자도 마찬가지로 청일전쟁 후 사회 인심이 이와 거의 대동소이함을 보고 틀림없이 만족하고 있을 것이다.


로마를 보라

내려와서 로마를 보라. 그들이 용전분투하여 이탈리아 각지의 자유를 빼앗은 결과 로마 시민은 어떠한 품성을 기를 수 있었는가. 어떠한 미덕을 신장시킬 수 있었는가. 국내는 마침내 참담한 도살장이 되었다. 마리우스(Gaius Marius, BC157~BC86)가 나타나고, 술라(Lucius Sulla, BC138~BC78)가 나타났다. 민주공화국은 귀족 전제국으로 변했다. 자유 시민이 준동하는 노예가 되지 않았던가.


드레퓌스 대사건

최근에 세계 이목을 집중시킨 프랑스의 드레퓌스 사건은 군정이 사회 인심을 부패시키는 것을 뚜렷이 보여주는 사례다. 재판이 애매하고 처분이 난폭한 것은, 그 사이에 일어난 유언비어의 기괴하고 추악함을 보면 알 일이다. 세상 사람들에게 프랑스 육군은 거의 악인과 치한으로 충만한 듯한 의심을 품게 했다. 이상하게 여길 필요는 없다. 군대 조직에서는 악인이 흉포함을 십분 발휘하는 것이 다른 사회보다도 쉽고, 정의로운 인물이 치한과 비슷해지는 것 또한 다른 사회에 비해 한층 쉽다. 왜냐하면 육군은 압제의 세계이기 때문이다. 권위의 세계이기 때문이다. 계급의 세계이기 때문이다. 복종의 세계이기 때문이다. 도리가 문 안으로 들어서는 것을 허락하지 않기 때문이다.

생각건대, 사법권 독립이 완전하지 않은 동양 각국 이외에는 이처럼 횡포한 재판, 횡포한 선고는 육군이나 군법회의가 아니면 결코 볼 수 없는 일이다. 보통의 민법, 형법이 절대로 허락하지 않는 일이다.


졸라, 결연히 일어서다

그런데도 용맹한 수만의 군대 중에 드레퓌스를 위하여 무고함을 외치고 재심을 촉구하는 자가 단 한 사람도 없었다. 모두들 오히려 무고한 한 사람을 죽이더라도 육군의 치욕을 덮는 편이 좋다고 말한다. 그때 에밀 졸라가 결연히 일어섰다. 그의 불과 같고 꽃과 같은 위대한 글은 뚝뚝 떨어지는 빨간 열혈을 프랑스 4천만 국민의 머리 위로 부었던 것이다.

당시에 만약 졸라가 침묵했더라면 프랑스 군인은 결국 입을 다물고 드레퓌스의 재심이 영구히 열리지 못했을 것이 틀림없다. 그들이 정의롭지 못하고 수치를 모르고 용기가 없는 것은 실로 이런 상태이고, 시정의 일개 문사에 미치지 못했다. 군인적 교련이라는 것은 이렇게 보면 조금도 가치가 없지 않은가.


당당한 군인과 시정의 일개 문사

맹자는 “스스로를 반성하여 옳다고 생각하면 천만 명이 가로막아도 단호히 나아간다”고 말한다. 이 기개와 정신이 일개 문사에게 보이고 당당한 군인에게 보이지 않는 것은 어찌 된 까닭인가.

어쩌면 윗사람에게 반항하는 것은 군인이 해서는 안 되는 것이고, 또한 할 수가 없는 것이다. 드레퓌스 사건 당시 프랑스 군인의 맹종은 그것만으로는 아직 그들의 도덕심 결핍을 증명하기에 충분하지 않다고 말하기도 한다. 정말로 그런가. 그렇다면 더욱 현저한 실례를 보여드리고자 한다.


키치너 장군

지금 트란스발로 옮겨서 싸우고 있는 키치너 장군은 영국의 군국주의자나 제국주의자가 신처럼 숭배하고 존경하는 인물이 아닌가. 보라. 그는 먼저 수단에 원정하여 마흐디의 분묘를 발굴하고 그것으로 만족한 바로 그 사람이 아닌가. 오자서(伍子胥)가 아버지의 원수를 치기 위하여 평왕의 시체에 채찍질을 한 것은 2천 년이나 옛날 일이라, 이미 식자들이 조롱하고 매도하는 바가 아니었는가. 하물며 19세기 말엽의 문명 시대에 공공연히 대영제국의 국기 아래 현지인들이 성자라 부르고 구세주로 받드는 위인의 분묘를 발굴하는 것은 머핸 대령이 일컬은 극기와 인내, 용기를 양성한 군인이기에 비로소 아무렇지도 않게 할 수 있는 일일 것이다. 천하의 인심을 선동하여 모조리 군국종軍國宗의 신도로 삼고 마흐디의 분묘를 발굴하는 마음을 이상으로 삼아 한 나라의 정치가 이 잔인한 손에 맡겨진다고 한다면, 이 또한 가공할 만한 것이 아닌가.


러시아 군대의 포악함

최근에는 청나라에서 러시아 군대의 포악함을 보라. 퉁저우通州 한 지방에서만 그들에게 위협당하여 강물에 빠져 죽은 부녀자가 7백여 명에 달했다. 이 사건 하나만으로도 사람을 전율시키지 않는가. 군인적 교련과 전쟁 준비가 능히 인격을 고양하고 도의를 양성한다면 13, 14세기 이후 전투에서 나고 전투에서 죽은 카자크(Kazak)는 인격이 높고 도의가 넘쳐나지 않으면 안 되는 도리다. 하지만 사실은 참으로 이와 반대인 것은 어째서인가.

만약 군국주의가 진정으로 국민에게 지식과 도덕을 심고 지위를 향상시키는 효과가 있다고 한다면, 투르크는 유럽에서 제일 높은 지위에 있지 않으면 안 될 터이다.


투르크의 정치

투르크의 정치는 군국의 정치다. 투르크의 예산은 군사비의 예산이다. 무력으로 보면 투르크는 결코 약소국이 아니다. 투르크의 주도권은 19세기에는 완전히 몰락했지만, 그래도 나바리노에서는 선전했다. 크림에서 선전했다. 플레벤에서 선전했다. 테살리아에서 선전했다. 투르크는 결코 약소국이 아니다.

그렇지만 그것이 진정으로 투르크가 자랑으로 삼는 것인가. 자랑으로 삼기에 충분한 것인가. 부패하고 흉포하고 가난하고 무지하다는 점에서 거의 모든 문명적 진보에서 유럽 최하위에 있는 것이 투르크 아닌가. 국가의 운명이 끊어지려고 하는 가는 실과 같아서 니콜라이 1세에게 병자 취급을 당한 것이 투르크 아닌가.

독일은 평균적으로 말하면, 아직 고등교육을 받은 국민의 지위를 잃지 않았다. 문예나 과학의 많은 부분이 아직 찬연히 존재하고 있다. 하지만 철혈주의와 군국주의가 온 나라를 휩쓴 뒤로 예전의 높고 원대한 윤리 사상은 지금 어디에 있단 말인가.


독일과 일대 도덕의 원천

독일 국민은 예전에는 유럽에서 일대 도덕의 원천이었다. 칸트, 실러, 헤르더, 괴테, 리히터, 피히테, 블룬칠리, 마르크스, 라살, 바그너, 하이네 등의 이름은 문명국들이 우러러 본류로 삼았고, 이들에게 감화 받은 세력이 끊이지 않았다. 그런데 지금은 어디에 있는가. 지금 우리는 예술, 과학의 많은 것을 독일에서 배우고 있다. 그래도 철학에서, 윤리에서, 정의나 인도人道의 일대 문제에서, 지금 독일 문학에서 배우고자 하는 것이 하나라도 있는가. 사회주의의 이상이 아직 중류의 기둥이라는 것을 제외하고는 유럽 각국이 우러러 본류로 삼을 가치가 있는 것이 어디에 있을까.


기린과 봉황은 가시밭에 살지 않는다

아무것도 이상히 여길 것은 없다. 기린과 봉황은 가시가 있는 곳에는 살지 않는다. 비스마르크 공, 몰트케 장군을 이상으로 삼는 세계에서는 괴테, 실러의 재생을 바라기 힘들다. 가엾은 애국주의자여, 그대는 오로지 빌헬름, 뷜로, 발더제가 그만큼 문명을 진보시킬 수 있다고 생각하는가.


독일 황제와 불경죄

그러므로 나는 단언한다. 군국 정치가 하루 행해지면 국민의 도의는 하루 부패하는 것이다. 폭력이 하루 행해지면 이론이 하루 절멸하는 것을 의미한다. 독일이 비스마르크 공의 독일이 된 이후, 유럽에서 윤리적 세력influence을 잃은 것은 자연의 도리다. 지금의 빌헬름 2세 황제가 즉위한 뒤로 10년 동안 불경죄로 처벌받은 자가 수천 명에 이른 사실이 눈에 보이지 않는가. 이것은 우리 충성스럽고 선량한 일본 국민이 꿈조차 꾸지 못할 일일 것이다. 군국주의자는 그럼에도 아직 이것을 바람직하다고 하는가. 이렇게 되어도 아직 군국 정치를 명예라고 할 셈인가.



5


결투와 전쟁

군국주의자는 나아가 전쟁을 찬미하며 말한다. 국가의 역사는 전쟁의 역사다. 개인 간의 분쟁이 결투duel로 최후의 판가름이 나는 것과 마찬가지로, 국제 분쟁에 최후의 판정을 내리는 것은 전쟁이다. 요컨대 지구상에 국가라는 구별이 존재하는 동안은 전쟁이 사라지지 않는다. 전쟁이 존재하는 동안 군비의 필요는 어쩔 수 없다. 또 전쟁은 우리들이 강건한 힘, 굳센 마음, 강직한 성정을 서로 비교하면서 진정한 대장부의 의기와 정신을 발양하는 소중한 수단이다. 만약 이것이 없으면, 천하는 딴 세상이 되어 유약한 여성의 천하가 되고 말 것이라고. 어찌 그런 것이 있겠는가.

나는 여기에서 개인 간 결투의 시시비비나 이해득실을 왈가왈부할 여유가 없다. 하지만 전쟁을 결투와 비교하는 것은 부도덕의 극치임을 단언한다. 서양의 결투도 일본의 결투果し合い도 한 사람의 명예에 목적이 있을 뿐이다. 한 사람의 체면에 목적이 있을 뿐이다. 두 사람의 힘을 비교할 경우는 극히 평등한 위치에서 극히 공명하게 싸움을 한다. 그리고 한 사람이 다치거나 죽으면 만사가 정리되어, 훗날에 마음에는 한 점의 그늘도 남지 않는다. 진정으로 남성을 위한 미덕을 잃지 않는다. 하지만 전쟁의 경우는 이것과 완전히 상반된다. 그 목적의 비열함과 수단의 역겨움은 한이 없다.

옛날에 이름을 대며 일대일 승부를 한 전쟁은 얼마간 결투와 닮은 점이 있다. 하지만 이것은 지금 전쟁에서는 가장 멍청한 짓으로 조소당하지 않는가. 전쟁은 오로지 빈틈없을 것을 요구하고 있다. 오로지 남을 속일 것을 요구하고 있다. 지위의 평등과 방법의 공명함을 중시하는 등의 행위는 무익한 관용으로 역사의 웃음거리가 되고 있지 않은가.


교활함을 겨루는 기술

그렇다. 전쟁은 오로지 교활함을 겨루는 기술이다. 전쟁의 발달은 교활함의 발달이다. 미개의 야만인이 교활함을 즐기는 경우는 대개 적의 허를 찌르는 데 있다. 복병에 있다. 야습夜襲에 있다. 양도(糧道, 군량미를 나르는 길)를 끊는 데 있다. 함정을 파는 데 있다. 그리하여 교활함이 부족한 자는 몸은 멸망하고 재산은 갈취당하며 땅을 빼앗겨, 우자적존優者適存, 즉 빈틈이 없고 남을 속이는 데 탁월한 자만이 생존할 뿐이다. 이렇게 되면 통상의 지식이나 기술은 도움이 되지 않으므로 더욱 더 많은 교습과 조련이 필요해지는 것이다. 교습과 조련 등이 거의 도움이 되지 않게 되면, 더욱더 크게 무기의 기교를 겨루게 된다. 이것이 예로부터 전쟁 기술이 발달하고 진보한 대체적인 순서다.


전쟁 발달 단계

전쟁 발달 단계는 오로지 어떻게 적의 의표를 찔러 쓰러뜨릴 것인지 수단을 강구하는 데 있었다. 목적이 아무리 비열하고 수단이 아무리 역겨워도 문제가 되지 않았다. 이래서야 어찌 개인의 결투와 같은 수준에서 논할 수 있겠는가. 이래서야 어찌 남자의 미덕인 강건함이나 굳셈, 강직함을 서로 비교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겠는가. 개인의 결투는 승패를 최후의 판결로 하는데, 전쟁에 이르면 항상 복수에 복수가 이어지는 참상이 연출되는 것은 결코 이유가 없는 것이 아니다.

어차피 전쟁은 음모다. 속임수다. 여성적 행위다. 호리狐狸적 지술知術이다. 공명정대한 싸움이 아니다. 사회가 전쟁을 유쾌하게 여기고 중시하고 필요로 하는 동안 인류의 도덕은 아무래도 여성적, 호리적 성격을 탈피할 수 없다.

지금 세계 각국은 이 비열한 죄악을 저지르고자 수많은 청년을 끌어내 병영이라는 지옥에 던져 넣고 있다. 야수의 본능을 키우고 있다.


가엾은 시골 장정

보라. 가엾은 시골 장정이 울면서 부모, 형제자매와 헤어지고, 울면서 소와 말, 닭과 개와 헤어지고, 울면서 아름다운 산수, 평화로운 전원을 뒤로하고 병영에 들어간다. 밤낮으로 듣는 것은 상관의 엄격한 질타 소리다. 보는 것은 고참병의 잔인한 능욕의 얼굴이다. 무거운 것을 등에 지고 동으로 달리게 하고 서로 쫓긴다. 피로를 견디며 오른쪽으로 향하고 왼쪽으로 달린다. 오로지 이와 같은 것을 3년 동안 반복하니, 단순하고 고통스럽다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아귀도의 고통

군대가 그들에게 지급하는 것은 하루에 불과 3센錢이다. 이것은 거의 거지 신세가 아닌가. 그래도 담배는 피우지 않으면 안 된다. 우편요금도 지불하지 않으면 안 된다. 심한 경우에는 항상 고참병의 학대를 모면하기 위하여 밥값이나 술값을 뇌물로 주지 않으면 안 된다. 심부름 값을 살짝 건네지 않으면 안 된다. 돈이 있는 자는 그래도 괜찮다. 조금이라도 가난한 자에게는 3년이나 되는 긴 군대 생활은 정말이지 아귀도의 고통이다. 지옥의 옥졸獄卒이라고 하는 우두牛頭, 마두馬頭에게 당하는 고통이다. 더욱이 부자는 고등교육을 받는다는 이유로 징병을 모면하고, 몸이 약하다는 이유로 피할 수 있을 것이다. 빈민의 아들은 항상 이 혹독한 고통을 견디지 않으면 안 된다. 공정하다고 할 수 있는가. 나는 그들이 징병검사를 기피하고 병영을 탈주하고, 자포자기 끝에 종종 수치스럽게 죽는 것을 증오하지 않고 오히려 그 마음에 대단히 슬퍼할 것이 있음을 느낀다.

이와 같이 괴로워하며 3년을 지내고 병영을 나온 뒤에 남는 것은 무엇인가. 단지 부모의 노쇠, 전원의 황폐, 자신의 타락한 품행밖에 없다. 이러한 것까지 국가를 위하여 필요하다는 것인가. 의무라고 해야만 하는 것인가.


군비 자랑을 그만두자

군비를 과시하는 것을 그만두자. 징병 제도를 숭배하는 것을 그만두자. 나는 병영이 의지할 곳 없는 유민을 수없이 만들어내는 것을 보았다. 생산력을 낭비하는 것을 보았다. 많은 능력 있는 청년들을 좌절시키는 것을 보았다. 병영이 있는 지방의 풍속이 심하게 파괴되는 것을 보았다. 행군 연도의 양민이 그들 때문에 큰 피해를 입는 것을 보았다. 하지만 아직 군비와 징병이 국민을 위하여 쌀 한 톨, 금 한 조각이라도 생산한 것을 보지 못했다. 하물며 과학이나 문예나 종교와 도덕의 드높은 이상은 어떻겠는가. 아니 비단 이러한 것들을 생산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완전히 파괴하려고 하는 것은 아닌가.



6


왜 언제까지나 서로 도발하는 것일까

아아, 세계 각국의 정치가나 국민은 어찌하여 이토록 수많은 군인과 병기와 군함을 끌어안고 오래도록 서로 헐뜯으려고 하는 것일까. 어찌하여 일찍이 들여우처럼 서로 속이고 또한 미친개처럼 서로 물어뜯는 상황을 탈출하여 더 높은 문명과 도덕의 경지로 진입하려고 노력하지 않는 것일까.

그들은 전쟁이 죄악이자 해독임을 알고 있다. 그들 중에 되도록 전쟁을 피하려고 하지 않는 자가 없다. 그들은 평화와 박애가 정의이자 복리임을 알고 있다. 그들 중에 되도록 빨리 평화와 박애가 실현되기를 바라지 않는 자가 없다. 그런데도 어찌하여 단호히 전쟁 준비를 폐지하고 평화와 박애의 복리를 얻지 않는 것일까.

그들은 생산물이 싸면서도 동시에 풍부해지기를 바라고 있다. 통상과 무역이 번영하고 융성해질 것을 바라고 있다. 또 군사공채가 막대한 자본을 낭비하고 생산력을 소모한다는 것을 알고 있다. 전쟁이 통상과 무역을 크게 저해하고 좌절시킨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런데도 어찌하여 군비의 비용과 전쟁력을 절감하여 상공업에 투입하지 않는 것일까.


평화회의의 결과

보라. 재작년에 러시아 황제가 군비 제한 회의를 제창하자, 각국은 조금도 이의를 제기하지 못하고 영국, 미국, 독일, 프랑스, 러시아, 오스트리아, 벨기에, 이탈리아, 투르크, 일본, 청나라 등 20여 개국 전권위원이 명확히 “현재 세계를 무겁게 억누르는 군비 부담을 제한함으로써 인류의 유형, 무형의 복리를 증진하는 데 크게 노력할 것은 인정한다”(평화회의 최종 결의서)고 결의하지 않았던가. 그들은 “일반의 평화를 유지하도록 노력할 것을 절실히 희망하며, 전력을 다하여 국제 분쟁의 평화적 처리를 원조할 것을 결의했고 … 국제적 정의 감각을 강고히 할 것을 희망하며 … 국가 안전, 국민 복리의 기초인 공평정리의 원칙을 국제적 협상으로 확립하는 것이 절대로 필요함을 인정하”(국제 분쟁 평화적 처리 조약)여, 중재 재판에 관한 규정을 한 것이 아닌가. 그런데도 어찌하여 더욱더 의지와 관념을 추진하고 확장하여 결연히 육해의 군비를 철폐하지 않는 것일까.


약간 일보 전환

지금의 군비를 평화를 확보하는 수단이라고 둘러대는 것은 용서할 수 없다. 공명심이 왕성하고 허영심이 강한 정치가나 군인은 대개 총포를 헛되이 녹슬게 하고 전함을 헛되이 썩히는 것을 견디지 못하여, 반드시 어느 날 기회를 보아 실지에 써보려고 하지 않는 자가 없는 것이, 취한이 칼을 들고 흘겨보고 있는 듯하다. 불안해서 조마조마할 수밖에 없다. 군비가 평화의 확보에서 평화의 교란이 되는 것은 완전히 종이 한 장 차이에 지나지 않는다. 그렇다. 서로 대항하여 세력이 균형을 이룬 유럽 국가들 사이에서는 세력 균형주의라는 이름 아래 잠깐은 평화 확보자가 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인구가 적고 무력이 약한 아시아, 아프리카 국가를 만나면 갑자기 변해서 이른바 제국주의라는 이름으로 평화의 교란자가 된다. 지금의 청나라나 남아프리카의 예를 보라. 무장에 급급하여 최소한의 평화를 유지하는 것이 군비를 제거하여 적극적인 평화를 받아들이는 것에 비해 어찌 낫다고 할 수 있겠는가.

하지만 그들이 군비를 철폐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군비 확장에 국력을 허비하는 데 열중하는 것은 왜일까. 다름 아니다. 그들의 양심이 모조리 공명과 이욕으로 뒤덮여 있기 때문이다. 정의와 도덕의 관념이 동물적 본능인 호전심에 압도당하기 때문이다. 박애심이 허영 때문에 감소되었기 때문이다. 이론이 미신 때문에 안 보이게 되었기 때문이다.


맹수와 독사의 지역

아아, 개인은 이미 무장을 풀었는데, 국가는 아직 그렇게 할 수 없다. 개인은 이미 폭력의 결투를 금지했는데, 국가는 아직 그렇게 할 수 없다. 20세기 문명은 아직 약육강식의 영역을 벗어나지 못하고 세계 각 국민은 마치 맹수와 독사의 지역에 살고 있는 것처럼 하루도 편안히 쉴 수 없다. 치욕이 아닌가. 고통이 아닌가. 이것은 사회의 선각자가 태연히 간과할 수 있는 문제인가.




4장 제국주의를 논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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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수가 고기를 탐하다

야수가 어금니를 닦고 발톱을 갈아 울부짖는 것은 고기를 찾기 때문이다. 야수적 본능에서 벗어날 수 없는 그들 애국자가 무력을 기르고 군비를 확장하는 것은 모두 자기의 미신과 허영과 호전심을 만족시키기 위해 희생물을 찾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애국심과 군국주의의 열광이 정점에 달할 때 영토 확장 정책이 전성기를 맞이하게 되는 것은 본래 이상한 일이 아니다. 지금 제국주의 정책의 유행은 바로 여기에 해당한다.


영토 확장

그렇다. 제국주의란 요컨대 대제국great empire 건설을 의미한다. 대제국 건설이란 그대로 속령과 영토의 대확장이 많은 부정과 불의를 의미하고, 또한 많은 부패와 타락을 의미하고, 최후에는 영락과 멸망을 의미함을 슬퍼한다. 무엇을 근거로 이와 같이 말하는가.

생각건대 대제국 건설이 오로지 주권자도 없고 주민도 없는 황량한 산야를 개척하여 여기에 인간을 이식하는 정도에 머무른다면 대단히 좋은 것이리라. 하지만 지식과 기술이 날로 발달하고 교통이 날로 편리해지는 지금, 지구상 어디에서 주인 없는 땅을 발견할 수 있겠는가. 세계 도처에 이미 주권자가 있고 주민이 있다고 한다면, 그들은 과연 폭력을 사용하지 않고 전쟁을 하지 않고 속임수 없이 조금이라도 땅을 점유할 수 있는가. 유럽 각국이 아시아, 아프리카에서 펼치는, 미국이 남태평양에서 펴는 영토 확장 정책은 그것을 감행할 때 제국주의로 하지 않았는가. 무력으로 하지 않았는가.

그리고 그들이 모두 이 정책을 위하여 날로 천만 금을 소비하고, 달로 수백 명의 목숨을 해치고, 만 1년이 넘어도 종국의 전망이 서지 않은 채, 헛되이 땀을 흘리며 영원히 스스로를 괴롭히는 것은 진정으로 그들이 동물적 애국심을 억누르지 못했기 때문이 아닌가.


대제국 건설은 날강도의 소행

생각 좀 해보라. 오로지 무위武威를 떨치기 위해서, 오로지 사욕을 채우기 위해서 멋대로 남의 국토를 침략하고 남의 재산을 약탈하고 남의 인민을 살육하거나 신첩臣妾이나 노예로 삼고 의기양양해서 이것을 대제국 건설이라고 믿는다. 그렇다면 결국 대제국 건설은 말 그대로 날강도의 소행이 아닌가.


무력 제국의 흥망

날강도 짓을 무사의 관례라고 여겼던, 의롭지 못하고 부정한 제왕 정치가는 날강도 짓을 저지르고 유쾌해하고 있다. 이전 세기의 영웅호걸의 사업은 대개는 이것이었다. 하지만, 보라. 하늘을 결코 이러한 부정과 불의를 용서하지 않는다. 예로부터 무력으로 팽창한 제국 가운데 끝까지 지속된 것이 있는가. 그들 제왕 정치가는 처음에는 공명과 사욕을 위해, 또는 국내의 단결과 안정을 유지하기 위해 계속해서 국민의 야수성을 선동하고 부추겨 외국을 정벌한다. 그리고 외국에 승리하여 영토를 확장한다면, 대제국이 일단 건설된다. 국민은 허영에 눈이 멀고 군인은 권세를 늘린다. 새로운 영토는 압제에 시달리고 혹사당하고 조세가 무겁게 부과되고 재산을 빼앗긴다. 이어서 다가오는 것은 영토의 황폐와 곤궁, 불평과 반란이다. 본국의 사치와 부패, 타락이다. 그리고 그 국가는 또 다른 신흥 제국에게 정복당한다. 예로부터 무력 제국의 흥망은 완전히 똑같은 과정을 거치고 있다.

저 옛날, 스키피오는 카르타고의 폐허를 보고 로마 또한 언젠가 이렇게 될 것이라고 탄식하며 말했다. 그렇다. 최후에는 정말로 그렇게 되었다. 칭기즈 칸의 몽고 제국은 지금 어디에 있는가. 나폴레옹의 제국은 지금 어디에 있는가. 진구(神功) 황후의 속령은 지금 어디에 있는가.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의 웅대한 계획은 어디에 있는가. 아침이슬처럼 덧없이 사라져버리지 않았는가. 기독교 제국은 결코 멸망하지 않는다고 말하지 말라. 로마제국은 말년에 기독교를 국교로 신봉하지 않았던가. 노예 해방 이후의 제국은 결코 쇠퇴하거나 퇴폐하지 않는다고 말하지 말라. 에스파냐 대제국의 본토는 노예 제도를 폐지하지 않았는가. 공업 제국은 결코 영락하지 않는다고 말하지 말라. 무어인과 피렌체인은 공업을 크게 발달시키지 않았는가.

국가의 번영은 결코 강도질로는 얻을 수 없다. 국민의 위대함은 결코 약탈과 침략으로는 얻을 수 없다. 문명의 진보는 일개 제왕의 전제로 가능한 것이 아니다. 사회의 복리는 한 나라 국기의 통일에 있는 것이 아니다. 오로지 평화에 있다. 오로지 자유에 있다. 평등에 있다. 생각해보면 알 수 있다. 우리 호조(北條) 씨 치하의 인민은 몽고 황제 쿠빌라이(1215~1294) 병사에 비해 얼마나 천수를 누릴 수 있었는가. 현재의 중립국 벨기에 인민이 독일, 러시아 국민들에 비해 얼마나 평화를 즐기고 있는가.


쇠락은 국가를 뒤따른다

누가 ‘무역trade은 국기國旗를 뒤따른다’고 하는가. 역사는 명백히 쇠락이 국기를 뒤따르고 있음을 보여준다. 그런데도 앞차가 뒤집히면 그 바퀴자국에 뒤차도 빠지는 것이다. 주마등의 회전이 끝이 없는 것과 같다. 나는 지하의 스키피오가 또다시 오늘날 서구의 말로를 한탄하지 않을까 걱정한다.



2


국민의 팽창인가

제국주의자는 이렇게 말한다. 과거의 대제국 건설이 제왕 정치가의 공명과 사욕을 위해서였던 것은 정말로 그렇다. 하지만 지금의 영토 확장은 국민의 팽창을 억누를 수 없기 때문이다. 과거의 제국주의는 개인적personal 제국주의였다. 지금의 제국주의는 국민적national 제국주의로 명명하지 않으면 안 된다. 과거의 불의와 해악을 끄집어내어 현재에 적용할 수는 없다고 한다.

정말로 그런가. 지금의 제국주의는 국민의 팽창인가. 소수 정치가나 군인의 공명심 팽창이 아닌가. ‘국민이 팽창’한 반면에 국민 다수의 생활의 전투struggle가 나날이 매우 심해지고 있지는 않은가. 빈부 격차가 점점 벌어지고 있는 것은 아닌가. 빈궁과 기아, 무정부당anarchist과 무수한 죄악이 점점 증가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이와 같은 상태에 놓인 그들 다수의 국민은 어떠한 여유가 있어 무한히 팽창을 할 수 있겠는가.


소수의 군인, 정치가, 자본가

게다가 소수의 군인, 정치가, 자본가는 가엾은 국민 다수의 생산을 방해하고 재산을 낭비하고 생명까지 빼앗아, 그것으로 대제국 건설을 도모하고 있다. 자국 국민 다수의 진보와 복리를 희생해서 가난하고 약한 아시아인이나 아프리카인, 필리핀인을 협박하고 능욕한다. 그리고 이름하여 국민의 팽창이라고 하는데, 엉터리도 너무 심하다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설령 국민 다수가 이 정책에 가담했다고 해도 어찌 이것이 진정한 팽창일까. 오로지 국민들의 야수적 호전심이 교묘하게 선동 당했기 때문일 뿐이다. 애국적 허영과 미신과 해독은 결코 고대 제왕의 제국주의에 뒤지지 않음을 알 수 있다.


트란스발의 정벌

영국이 트란스발 정복을 도모한 것은 보어인의 독립을 빼앗고 자유를 빼앗고 유익한 금광을 빼앗아, 영국의 국기國旗 아래아프리카를 통일하고 철도를 관통시켜 그것으로 소수의 자본가와 공업가, 투기꾼의 잇속을 만족시키기 위해서였다. 세실 로즈의 야심과 체임벌린의 공명을 만족시키기 위해서였다.


놀랄 만한 희생

그들이 쓸데없는 목적을 위하여 얼마나 가공할 만하고 놀랄 만한 희생을 강요하고 있는지를 보자.

1899년 10월 트란스발 전쟁(보어전쟁)이 벌어진 뒤로 내가 이 원고를 집필하는 시점에 이르기까지 거의 500일, 그간 영국군 사망자는 이미 1만3천 명에 이른다. 부상자는 이보다 더 많다. 그리고 불구자가 되어 병역을 면제받고 집으로 돌아간 자가 3만 명이다. 현지인 사망자는 실제 수치를 알 수 없다고 하지 않는가.


수만 명의 선혈의 값 10억 엔

더욱이 그들의 재정적 희생을 보자. 20만 병사를 2천 리 밖에 주둔시키고 수많은 선박이 왕래하는 데 드는 하루 군비가 2백만 엔이라고 한다. 그들은 이미 10억 엔의 부를 두 나라 국민의 선혈로 바꾸지 않았는가. 그리고 그 사이 금광 채굴 정지로 거의 2억 엔에 해당하는 금의 산출이 감소했다고 하지 않는가. 비단 두 나라의 불행일 뿐만 아니라, 세계 복리에 끼치는 영향 또한 적다고 할 수 없다.

현지인의 참상에 이르면 특히 동정을 금할 수 없다. 영국인의 포로가 되어 세인트헬레나 섬에 유배된 자가 이미 6천 명, 세일론(실론) 섬으로 유배된 자가 2천4백 명, 지금 키치너 장군은 1만2천 명을 더 인도로 보내려 하고 있다. 그리고 두 나라 공화국의 장정은 거의 사라졌고 전원은 완전히 황폐해졌으며 병마兵馬가 통과하는 들에는 풀이 없다고 한다. 아아, 그들에게 도대체 무슨 죄가 있는 것인가. 어떤 책임이 있는 것인가.

현실이 이와 같은데도 여전히 지금의 제국주의는 불의나 부정이 아니라고 하는가. 횡포나 해독이 아니라고 하는가. 고상한 도의를 내세우는 국민이 허락할 수 있는 존재인가. 20세기 문명 천지에 포함시킬 수 있는 존재인가.


독일의 정책

자유를 숭배하고 평화를 사랑한다고 하는 영국에서조차 여전히 이와 같다. 나는 독일, 군국주의의 화신인 독일이 육해군비를 크게 확장하느라 항상 수많은 귀중한 희생을 강요하고 있음을 의심하지 않는다. 작년에 의화단 운동에 독일 황제가 복수라는 말을 부르짖으며 발더제 장군을 동아시아에 파견했을 때, 같은 해 9월인 독일사회당대회가 한 결의는 독일 제국주의의 진상을 갈파하고도 남음이 있었다.


독일사회당의 결의

마인츠에서 열린 독일사회당대회 총회는 다음과 같이 결의했다.


독일제국 정부가 취한 중국 전쟁 정책은 자본가의 광적인 이익 추구와 대제국 건설이라는 군사적 허영심과 약탈적 정욕에서 출발한 것으로서, 이 정략은 외국의 땅을 강제적으로 영유하여 그 주민을 억압하는 것을 주의로 하는 것이다. 이 주의의 결과는 약탈자가 멋대로 야수적 힘을 떨쳐 멋대로 파괴할 수 있게 하는 것이므로, 강포하고 의롭지 못한 수단으로 침략의 욕망을 채우고 그로 인해 학대를 받은 자는 끊임없이 약탈자를 향해 반항을 시도하게 되는 것이리라. 그뿐만이 아니라, 외국에서 펴는 약탈 정책과 정복 정책은 반드시 각국의 질시와 경쟁을 불러일으켜, 그로 인해 육해군비의 부담은 견딜 수 없는 지경까지 이르게 될 것이다. 이것은 실로 위험한 국제 분쟁을 초래하여 전 세계 대혼란을 야기하기에 이를 것이다.

우리 사회민주당은 인간이 인간을 억압하고 멸망시키는 신조에 반대하므로, 단호히 약탈 정책과 정복 정책에 반대한다. 인민의 권리와 자유, 독립을 존중하고 보호하며, 근대 문명의 교의에 따라 세계 각국과 문화 관계, 교통 관계를 유지하는 것은 바로 우리 당이 희망하고 의도하는 바다. 현재 각국의 부르주아 사회와 군사력을 쥔 자들이 응용하는 교칙은 바로 문명에 대한 대대적 모욕이다.


그 말이 얼마나 공명하고 고상한가. 너무도 찬란해서 해나 별과 그 빛을 겨룰 듯한 진리가 여기에 있지 않은가.

그렇다. 약탈과 정복으로 영토 확장을 시도한 유럽 각국의 제국주의는 문명과 인도에 대한 대대적 모욕이다. 그리고 나는 미국의 제국주의에서도 마찬가지로 많은 부정과 불의를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미국의 제국주의

미국이 처음에 쿠바의 반란자를 도와 에스파냐와 싸울 때는 자유와 인도를 위하여 학정虐政을 제거한다고 내세웠다. 정말로 그대로라면 의의는 대단히 숭고하다고 해도 좋을 것이다. 그리고 만약 쿠바 인민이 은혜에 감복하여 덕을 좇아 미국의 통치를 받는 백성이 되기를 원한다면, 쿠바를 병합해도 나쁘지는 않다. 나는 결코 미국이 온갖 책략을 써서 쿠바 인민은 교사하고 선동한 증거를 적발하지는 않을 것이다.


필리핀의 병탄

하지만 필리핀 군도의 병탄과 정복에 이르면 절대로 용서할 수가 없다.


독립의 격문과 건국의 헌법을 어찌하리

미국은 정말로 쿠바 반란자들의 자유를 위해서 싸웠는가. 그렇다면 어찌하여 필리핀 인민의 자유를 구속함이 그리도 심한가. 정말로 쿠바의 자주와 독립을 위해서 싸웠는가. 그렇다면 어찌하여 필리핀의 자주와 독립을 침해함이 그리도 심한가. 미국은 다른 나라 인민의 의지와 달리 무력과 폭력으로 강압하여 그 땅을 빼앗고 부를 갈취하려 하고 있다. 이것은 참으로 문명과 자유가 빛나는 미국 건국 이래의 역사를 심하게 더럽히는 것이 아닐까. 생각건대 필리핀의 땅과 부를 병탄하는 것은 미국에게는 물론 이익일 것이다. 하지만 이익이 되니까 해도 괜찮다는 논리를 댄다면 옛날 무사의 강도짓도 이익 때문에 해도 된다는 것인가. 그들은 과연 그들 조상의 독립선언서, 건국 헌법, 먼로선언을 어디에 팽개쳐버리려고 하는가.

국가가 생존하려면 영토 확장이 불가피하다고 주장하는 것은 용서되지 않는다. 그들은 출병하면서 처음에 자유와 인도를 표방했다가 갑자기 돌변하여 국가 생존의 필요를 구실로 내세우고 있다. 얼마나 급속한 타락인가.

설령 그들이 말하는 대로 영토를 확장하지 않으면 미국이 경제적으로 위험에 빠진다고 해도 필리핀 병합에서 얻는 부와 이익은 뻔하다. 과연 미국의 위험을 구하기에 충분할까. 단지 경제적 존속을 하루 늘릴 수 있는 정도일 뿐이다. 그렇다. 쇠망은 단지 시간문제가 될 것이다. 그들의 토지와 인구, 자본과 기업 세력이 무한함을 인식하면서도 굳이 비관적 관측을 해보았지만, 아무리 경시하려고 해도 나는 그럴 수 없다.


미국의 위험

만약에 장래에 미국의 국가 존속에 위험이 있다면, 그것은 결코 영토가 좁아서가 아니라 영토 확장이 끊이지 않는 데 있다. 대외로 세력을 떨치지 못하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사회 내부의 부패와 타락에 위험이 있다. 시장이 작은 것이 문제가 아니라, 부의 분배가 불공평한 데 있다. 자유와 평등의 멸망에 있다. 침략주의와 제국주의의 유행과 발호에 있다고 믿는다.


미국이 융성한 원인

미국이 오늘날 융성과 번영을 이룩한 원인을 한 번 더 떠올려보아도 좋다. 자유인가 압제인가. 논리인가 폭력인가. 자본주의적 세력인가 군비의 위엄인가. 허영의 팽창인가 근면한 기업인가. 자유주의인가 제국주의인가. 지금 그들은 일종의 공명과 사욕을 위해서, 애국적 열광을 위해서 앞 다투어 나쁜 길로 들어서려 하고 있다. 나는 그들이 쓰러질 위험을 두려워할 뿐만 아니라, 참으로 자유와 정의와 인도를 위하여 깊이 슬퍼한다.


민주당의 결의

재작년 가을에 미국 아이오와 주의 민주당이 결의한 내용은 무척 만족스러웠다.


우리는 필리핀 정복에 반대한다. 왜냐하면 제국주의는 군국주의militarism를 의미하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군국주의는 무단 정치government by force를 의미하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무단 정치는 합의 정치의 사망을 의미하고 정치적 · 공업적 자유의 파괴를 의미하며, 권리 평등의 살해와 민주 제도의 섬멸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그렇다. 제국주의는 도처에서 이와 같은 부정과 해독을 끼치려 하고 있다.



3


이민의 필요

영국, 독일의 제국주의자들이 대제국 건설이 필요하다고 주장하는 첫 번째 논거는 이민에 있다. 그들은 공공연히 말한다. 지금 우리나라 인구는 해마다 늘어나 빈민이 날이 갈수록 증가하고 있다. 영토 확장은 과잉 인구 이주를 위해 어쩔 수 없다고 한다. 언뜻 대단히 도리에 맞는 것처럼 보인다.


인구 증가와 빈민

영국, 독일 제국의 인구 증가는 사실이다. 빈민 증가 역시 사실이다. 하지만 빈민이 증가한 원인을 모두 인구 증가로 돌리지 않으면 안 되는가. 이것은 한 번 생각해보지 않으면 안 되는 문제다. 그들 말대로라면 그 논리는 요컨대 인구가 많으면 재부財富가 적고, 인구가 적으면 재부가 많다는 것으로 귀착될 것이다. 절로 웃음이 나는 이야기다. 이것은 실로 사회 진보의 대법칙을 무시하는 것이다. 사회과학Social Science을 무시하는 것이다. 경제의 원리를 무시하는 것이다.

짐승이나 물고기들은 모두 자연의 음식을 먹는다. 먹는 수가 점점 많아지면 음식물이 점점 주는 것은 필연의 도리다. 하지만 인간은 생산적 동물이다. 자연의 힘을 이용하여 스스로 의식주를 생산할 수 있는 지식과 능력이 있다. 그리고 이 지식이나 능력은 해마다 시대마다 가공할 만한 속도로 개선되고 진보되고 늘고 있다. 그러므로 산업혁명이 일어난 이후 세계 인구가 몇 배 증가하는 한편으로 재부가 확실히 몇 십 배 증가한 것이다. 그리하여 영국, 독일 제국은 실로 세계 재부의 대부분을 점유한 나라가 아닌가.


빈민 증가의 원인

부富만 놓고 보면, 이미 온 세계를 압도하고 있다. 그런데도 빈민이 날이 갈수록 증가하는 것이 어찌하여 인구 과잉의 죄인가. 생각건대 원인은 따로 존재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렇다. 빈민의 증가는 사실은 지금의 경제 조직과 사회 조직이 불량하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자본가나 지주가 터무니없이 이익과 토지를 독점하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재부 분배의 공정성을 잃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나는 진정한 문명적 도의와 과학적 지식에 따라 이 폐인을 제거하지 않으면 이민과 같은 것은 임기응변식의 관장灌腸적 치료에 지나지 않으며, 설령 온 나라의 인민을 모조리 이주시켜도 빈민은 결코 모습을 감추지 않을 것이라고 믿는다.

한 발 물러서서 이민이 인구 과잉과 빈민 증가를 해결할 유일한 구제책이라고 해보자. 그렇다고 과연 영토를 확장할 필요가 있는가. 대제국을 건설할 필요가 있는가. 그들의 인민은 과연 자국의 국기 아래가 아니면 생활할 수 없는가. 부디 사실을 보여 달라.


영국 이민의 통계

영국 영토의 광대함은 이미 ‘해가 저물지 않는다’고 한다. 그러면서도 1853년부터 1897년에 이르는 동안에 외국으로 이주한 영국인과 아일랜드인 약 850만 명 가운데 자국 식민지로 향한 사람은 불과 200만 명에 지나지 않고, 나머지 550만 명은 모두 미합중국으로 향했다. 1895년의 영국 이주 통계는 다음과 같다.


미합중국 195,632명

오스트레일리아 10,809명

영국령 캐나다 22,357명


자국 영토로 향하는 자는 영토 이외의 나라로 향하는 자에 비해 6분의 1의 비율에 지나지 않는가.

이민자들은 자유가 있는 곳이면 곧 내 고향이나 다름없다. 결코 모국 영토인지 아닌지를 문제 삼지 않는다. 그러므로 제국주의자가 이민의 필요를 구실로 내세우는 것은 전혀 이유가 되지 못함을 알 수 있다.


이민과 영토

나는 이민 자체를 나쁜 것이라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적어도 스파르타인이 노예Helot의 인구 증가를 꺼려 살육한 것에 비하면 대단히 진보한 방법임을 의심하지 않는다. 하지만 세계 영토가 확장할 수 있는 것은 일정한 한계가 있는 반면에 인구 증가는 무제한의 기세를 보이고 있다. 만약 이민이 절대로 자국 영토가 아니면 안 된다고 한다면 곤란하고 급박한 상황이 반드시 닥칠 것임에 틀림없다.

생각해보라. 영국, 독일 제국은 처음에 아시아, 아프리카의 무인지경에서 영토를 찾을 것이다. 이것을 분할할 것이다. 그리고 이민은 결국 분할한 영토에 가득 찰 것이다. 그리고 또 다른 영토를 찾아도 여지가 없는 데까지 이를 것이다. 이렇게 되면 그들 제국은 서로 죽이며 서로 빼앗지 않으면 안 된다. 최후에 강대한 무력 국가가 다른 영토를 빼앗을 수 있었다고 가정해보자. 그 영토도 몇 년이 지나면 인구 과잉이 될 것이다. 다음에 오는 것은 궁핍과 쇠락을 수밖에 없다. 이와 같은 것이 곧 제국주의의 논리이자 목적이라고 한다면, 대단히 비과학적이지 않은가.

한편에서는 프랑스도 실제로 왕성하게 영토 확장을 추구해 마지않는다. 하지만 프랑스의 인구는 결코 증가하지 않고 빈민이 비교적 적은 것을 보면, 어찌 이민의 필요 때문에 일어난 일이라 할 수 있겠는가.

이제 미국도 마찬가지로 영토 확장을 추구하고 있지만, 이민의 필요에서 나온 것이 아님은 명백하다. 미국 영토는 광대하고 천연자원이 풍부하며, 세계의 이민이 여기에 모이는 형국은 마치 백천百川이 앞 다투어 대하大河로 흘러 들어가는 것 같은 느낌이다. 영국인 이주자가 많을 뿐 아니라, 1893년부터 1897년에 이르는 동안 외국으로 이주한 독일인 22만4천 명 가운데 19만5천 명이 미국으로 향했다. 그리고 스위스, 네덜란드, 스칸디나비아 제국의 이민도 마찬가지로 다수가 미국으로 간다. 세계의 이민을 병탄하는 미국이 어찌 자국 이민을 장려할 필요가 있겠는가.

이탈리아도 재화를 낭비하고 인간을 살육하여 아비시니아의 광막한 들에 식민지를 얻고자 고투하고 있는데, 이민은 모두 남북 아메리카의 외국 국기 아래로 향하고 있다.


커다란 오해

그러므로 나는 단언한다. 제국주의라 명명하는 영토 확장 정책이 진정 이민의 필요 때문에 일어났다고 하는 것은 커다란 오해다. 특히 이민을 침략의 구실로 삼는 따위의 행위는 자신과 타인을 기만하는 정도가 심하므로, 마땅히 일어나서는 안 된다.



4


새로운 시장의 필요

제국주의자는 누구든지 일제히 ‘무역은 국기를 뒤따른다’고 외치며, 영토 확장은 자국 상품을 팔 시장을 긴급히 찾아야 하는 필요성 때문에 일어났다고 말한다.

나는 세계의 교통이 점점 편리해지기를 바란다. 세계 무역이 점점 번영하기를 바란다. 하지만 영국 상품의 시장이 반드시 영국 국기 아래 있어야만 하며, 독일 상품의 시장이 반드시 독일 국기 아래 있어야만 하는 이유가 과연 어디에 있는가. 우리의 무역이 무력이나 폭력으로 강요하지 않으면 이루어질 수 없다는 이유는 과연 어디에 있는가.


암흑시대의 경제

암흑시대의 영웅호걸은 자국의 부강을 바라기에 항상 타국을 침략하여 재부를 약탈하고 조세를 징수했다. 칭기즈 칸, 티무르의 경제는 이와 같은 것이었다. 만약 제국주의자가 오로지 다른 미개한 백성을 압도하여 토지를 빼앗고 그 백성을 신하로 삼아 이들에게 매매를 강요하는 것을 경제 원칙으로 삼는다면, 암흑시대의 경제와 무엇이 다른 것일까. 이것은 문명의 과학이 절대로 허락하지 않는 것이 아닌가.


생산 과잉

그들은 어떠한 이유로 신 시장 개척을 필요로 하는 것일까. 그들은 자본 과잉과 생산 과잉으로 괴로워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아아, 이것은 무슨 잠꼬대인가. 자본가와 공업가가 생산 과잉에 괴로워하고 있다고 외치는 반면에, 보라, 수천만 하층 인민은 항상 의식주 부족을 호소하며 울부짖고 있지 않은가. 생산이 과잉인 것은 정말로 수요가 없기 때문이 아니라, 다수 인민의 구매력이 부족하기 때문일 뿐이다. 다수 인민의 구매력이 부족한 것은 부의 분배가 공평성을 잃고 빈부 격차가 점점 벌어지고 있기 때문일 뿐이다.


오늘날의 경제 문제

그리고 생각해보라. 서구에서 빈부 격차가 점점 확대되고 부와 자본이 점점 소수의 손에 축적되어 다수 인민의 구매력이 크게 약화된 까닭이 무엇인가. 다름 아니라 지금의 자유 경쟁 제도의 결과로 자본가와 공업가가 자본 이익을 터무니없이 독점하고 있기 때문이 아닌가.


사회주의 제도의 확립

그러므로 서구에서 오늘날의 경제 문제는 다른 미개 인민을 무릎 꿇게 하여 상품 소비를 강요하는 것보다 우선 자국 내 다수 인민의 구매력을 증진시키는 것이 아니면 해결할 수 없다. 자국의 구매력을 증진시키려면 자본 이익을 터무니없이 독점하는 것을 금지하고, 그것으로 일반 노동에 대한 이익 배분을 공평히 하는 것이 아니면 안 된다. 그리고 분배를 공평하게 하려면 현재의 자유 경쟁 제도를 근본적으로 개조하여 사회주의 제도를 확립하는 것이 아니면 안 된다.

이대로만 진행된다면 자본가의 경쟁은 없다. 어찌 이익을 독점할 필요가 있겠는가. 이익 독점이 없어지면, 다수의 의식주는 공평히 분배될 것이다. 다수의 의식주가 충족된다면 어찌 과잉 생산에 종사하겠는가. 생산 과잉의 걱정이 없어지면, 어찌 국기의 위엄을 빌려 티무르식 경제를 행할 필요가 있겠는가. 이것이 문명적인 경제고, 과학적인 경제며, 또한 진정으로 도의적인 경제다.


파산과 타락이 있을 뿐

그런데도 서구의 정치가나 상공업자는 이렇게 하지는 않고 오로지 한때의 허영을 자랑하며 영원히 이익을 독점하고자 하여 해외 영토를 확장하는 데 막대한 자본을 투입하는 것이 흐르는 강물처럼 멈출 줄을 모른다. 그리하여 그 결과는 어떠한가. 정부 재정은 점점 팽창하고, 자본은 점점 흡수된다. 상공업자는 이익에 광분하여 점점 격해진다. 분배는 점점 불공평해진다. 이렇게 영토 확장이 점점 더 확대되고 무역액이 점점 더 증가하면 국민 다수의 곤궁은 갈수록 심해질 것이다. 다음에 오는 것은 곧 파산과 타락뿐이다.


유목적 경제

설령 영토 확장 비용 때문에 재정이 고갈되고 파산에까지 이르지 않는다 하더라도, 각국의 경쟁이 오늘날과 같이 격렬하다면, 이른바 신 시장 개척은 장래에 과연 어느 정도의 여지를 남기고 있을까. 여지가 없어지면, 곧 앉아서 굶어 죽을 수밖에 없다. 굶어 죽지 않으려면 각국이 서로 싸워서 빼앗지 않으면 안 된다. 물과 풀을 찾아 전전하는 유목민은 물과 풀이 없어지면 당장에 쓰러질 수밖에 없다. 쓰러지지 않으려면 서로 죽이고 빼앗을 수밖에 없다. 제국주의 경제는 곧 유목적 경제인가.

그렇다. 개척할 수 있는 시장이 부족하기 때문에 각국이 이미 서로 빼앗을 조짐을 보이고 있다. 영국인은, 독일은 우리 시장의 적이다. 격파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말한다. 독일인은, 영국인은 우리의 경쟁자다, 압도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말한다. 그리하여 양국은 전쟁 준비에 여념이 없다. 기괴하기 이를 데 없다. 그들의 통상과 무역은 상호 복리에 있는 것이 아니라, 남을 손상시킴으로써 어떻게든 이익을 챙기는 데 있다. 평화 생산을 경쟁하는 것이 아니라 무력 쟁탈에 전념하는 데 있다.


영국 대 독일의 무역

특히 영국은 현재 독일 무역의 최대 고객이 아닌가. 독일은 현재 영국 무역의 고객으로서 3위 아래로 내려가는 일이 없지 않은가. 양국 무역은 최근 10년 동안 이미 수천만 엔 증가했다. 영국의 독일 무역액은 오스트레일리아 무역액과 비교해 크게 손색이 없으며, 또한 캐나다와 남아프리카를 합친 것보다 훨씬 많다. 독일이 영국 자본을 수입하여 이용하고 있는 액수 역시 결코 적지 않다. 만약 그들이 타국을 격파하고 압도하는 것을 유쾌하게 여긴다면 이것은 자기 손으로 무역의 대부분을 부수는 것을 유쾌하게 여기는 것이다. 기타 각국의 관계가 대개 이런 식이다.


고객의 살육

만약 고객을 살육하고 재화를 빼앗고는 재산을 축적하는 비결을 알았다고 한다면 천하 만인이 누가 비웃지 않겠는가. 서구 각국이 오로지 다른 나라를 괴롭혀서 자기 나라의 이익을 도모하고자 하는 것이 마치 상인의 어리석음을 닮지 않았는가.

나는 지금 시장 확장 경쟁이 마치 무력 전쟁과 같음을 슬퍼한다. 그들은 남을 괴롭히기 위해서 우선 자신이 괴로움을 당하고 있다. 남의 이익을 갉아먹기 위하여 우선 자신의 이익을 갉아먹을 수밖에 없다. 그 결과 다수 국민은 이 때문에 곤궁해지고 기아에 허덕이며 부패하여 멸망한다. 그러므로 나는 이렇게 말하고 싶다. 제국주의 경제는 야만적 경제다. 티무르식 경제다. 부정不正이다. 불의다. 비문명적이다. 비과학적이다. 정치가가 눈앞의 헛된 명예를 좇고 투기꾼이 뜻밖의 이익을 손에 쥐기 위함일 뿐이다.

일본의 경제

되돌아와서 우리 일본의 경제 실태를 보라. 이보다 더욱 심하다. 우리 일본은 무력을 가지고 있다. 그것으로 국기를 해외에 세울 수 있을 것이다. 우리 국민은 이 국기 아래 투입할 수 있는 자본을 얼마나 가지고 있는가. 이 시장에 출하할 수 있는 상품을 얼마나 제조할 수 있는가. 일단 영토를 확장하면 무인들이 점점 발호할 것이다. 정무 비용이 점점 증가할 것이다. 자본이 점점 결핍되어 생산이 점점 위축될 것이다. 우리 일본이 제국주의를 받들고 맹목적으로 나아간다면 그 결과는 이대로 비참한 것이 될 뿐이다.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어리석음

서구 제국주의자들은 자본 과잉과 생산 과잉에 구실을 돌리고 있지만, 일본의 경제 사정은 이것과 완전히 다르다. 서구의 대제국 건설은 부패와 영락을 향하여 나아가는 것은 두말할 필요도 없지만, 그래도 아직 몇 년간은 국기의 허영을 자랑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 일본에 이르면 제국을 건설한대도 어찌 능히 하루라도 유지할 수 있겠는가. 그런데도 멋대로 다수 군대와 군함을 끌어안고 목청껏 외치면서 제국주의가 아니면 안 된다고 말한다. 우리 일본 제국주의자의 어리석은 정도는 정말로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



5


영국 식민지의 결합

영국 제국주의자는 또한, 우리 군대를 완전히 하고자 한다면 식민지 전체의 강고한 통일과 결합이 필요하다고 말한다. 이것은 호전적 애국자가 가장 좋아하는 주장이다. 하지만 아주 조소를 금치 못할 논의다.


불리함과 위험

영국 제국주의자들이 영국 국민에게 끊임없이 방비가 완전하지 못함을 들어 걱정시키는 이유는 영토가 너무 크기 때문이 아닐까. 생각해보기 바란다. 각 식민지 인민은 모두 애초에 모국에서 생활할 수 없어서, 자유를 얻기 위해, 의식주를 얻기 위해 천리 타향으로 이주한 사람들이다. 그리하여 이제 각자가 번영된 행복한 생활을 할 수 있게 되었다. 무엇이 걱정되어 새삼스레 대제국 통일이라는 미명하에 모국의 간섭과 질곡을 감수하지 않으면 안 되는가. 모국을 위하여 막대한 군비와 병역을 부담하지 않으면 안 되는가. 항상 모국과 함께 서구 각국의 분쟁에 말려들지 않으면 안 되는가. 이보다 더 불리하고 위험한 일은 아마도 없을 것이다.


영국 당시의 무력

특히 무력이 쓸모없는 죄악이라는 것은 앞에서 이미 언급했다. 하지만 가령 자국의 방비가 필요 불가결한 것이라고 하자. 방비의 완벽함과 무력의 위세는 결코 영토의 광대함에서 나올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보라. 펠리페 2세가 이끄는 에스파냐 대제국을 격파했을 당시 영국은 아직 소영국little England이지 않았는가. 루이 14세의 프랑스 대제국을 격파했을 당시의 영국도 아직 소영국이지 않았는가.


영국의 번영 원인

그렇다. 그들의 무력이 찬란한 광채를 뿜어낸 것은 그야말로 소영국일 때였다. 그들 제국주의자가 진정으로 방비가 완전하지 않음을 걱정한다면, 왜 단호히 각 식민지의 독립을 허락하지 않는가. 다행히 이대로 실현된다면 그들은 비로소 두 발 뻗고 잘 수 있고, 동시에 각 식민지도 마찬가지로 오히려 자유의 복리를 얻은 것을 진심으로 기뻐할 것이다.

생각해보라. 지금까지 영국의 번영과 팽창은 결코 무력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풍부한 철과 석탄에 힘입은 것이다. 무력을 앞세운 침략과 약탈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평화로운 제조업 덕분이었다. 그 사이, 그들이 길을 잘못 들어서 야수적 본능을 굳히고 고대 제국주의의 방식을 흉내 내어 식민지를 티무르식 경제 수단으로 취급한 적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그러나 그들은 이 때문에 미합중국의 이반이 일어나자 넌더리가 나서 생각을 고치고 방도를 바꾸어 각 식민지에 자치를 허락했다. 그러므로 그들의 광대한 영토는 사실 제국주의자가 일컫는 제국을 형성한 것이 결코 아니다. 다만 혈맥과 언어, 문학을 같이하여 변함없는 진정한 동정심이 있고 무역 부문의 상호 이익이 다르지 않기 때문에, 그 연합은 영구한 운명을 지속하고 무한한 번영을 가져온 것이다.


영국제국의 존재는 시간문제

그렇다. 영국이 예전에 무력적 허영에 취해 항상 대륙 각국과 교섭에만 열중했다고 한다면, 어찌 오늘날의 성대를 누릴 수 있었겠는가. 아니, 오늘날의 성대조차도 장래에 국기와 무력의 영광을 위하여 각 식민지에 불리함과 위험을 안겨주어 정신적 연대를 잃게 하는 행동을 강요한다면, 나는 대영제국의 존재는 실로 시간문제라고 믿는다.

지금 체임벌린의 억누를 수 없는 야심은, 피트, 디즈레일리의 의봉을 이어 이 평화로운 대국민을 이끌어 군국주의와 제국주의의 나쁜 술에 취하게 만들고 예로부터 이어져 온 무력적 제국 멸망의 전철을 밟게 하고 있다. 나는 이 명예 있는 국민을 위하여 깊이 유감스러워하지 않을 수 없다.


키플링과 헨리

공명을 안달하는 군인과 정치가, 뜻밖의 이익을 좇는 투기꾼은 아직 어느 정도 용서할 수 있다. 하지만 학식이 높아 국민의 정신적 교육을 책임져야 하는 문사나 시인이 모두 나서 무력 확장을 앞장서서 외치는 데 이르면 통탄을 금할 길이 없다. 영국에서 키플링이나 헨리 등이 가장 두드러진 예다.


제국주의는 사냥꾼의 생계

그들은 야수 같은 애국자가 먹이를 뒤지는 것을 보고 찬미하며 말한다. 국기의 영광이다. 위인의 공로가 있는 사업이다. 국민적 사상을 환기한다. 누가 세실 로즈가 우리 영국에서 태어난 것을 자랑으로 여기지 않겠는가. 누가 키치너의 공적을 기리지 않겠는가. 전자는 우리 제국을 위하여 수천 킬로미터의 영토를 확장했고, 후자는 하르툼의 국치를 씻고 문명과 평화로 야만적이고 미개한 습속을 개선했다고 한다. 제국주의의 목적이 정말로 야만인을 토벌하고 섬멸하여 문명과 평화의 정치를 시행하는 데 있다고 한다면, 제국주의의 생명과 활력이 지속되는 것은 오로지 야만인이 존재하는 기간 동안뿐일 것이다. 사냥꾼의 생계가 유지되는 것은 부근의 산과 들에 짐승들이 떼 지어 돌아다니는 기간에 지나지 않는다.

남아프리카가 완전히 평정된다면 로즈는 나아가 어디에서 제2의 남아프리카를 찾으려 할 것인가. 수단은 이미 정복되었다. 키치너는 나아가 어디에서 제2의 수단을 찾으려 할 것인가. 만약 토벌할 야만인이 없어지면 그들은 국기의 영광을 잃는 것이다. 국민적 사상은 소멸해 간다. 위인의 공로가 있는 사업은 행방을 모르게 되는 것이다. 덧없는 것이 제국주의의 전도가 아닌가.

호언장담하며 국민의 호전심을 선동하는 키플링, 헨리의 사상이 내게는 아이들의 장난처럼 보인다. 사회 문명의 진정한 진보와 복리를 원하는 자는 명심하고 이런 식으로 하면 안 된다.



6


제국주의의 현재와 미래

이상과 같이 보면, 제국주의의 현재도 미래도 예측 곤란한 것은 아니다. 그것은 요컨대 경멸스러운 애국심을 만족시키기 위하여 혐오스러운 군국주의로 추진하는 일정한 정책을 부르는 명칭에 불과하다. 그 결과는 곧 타락과 멸망뿐이다.

그들의 대제국 건설은 필요가 아니라 욕망이다. 복리가 아니라 재해다. 국민적 팽창이 아니라 소수 인간의 공명과 야심의 팽창이다. 무역이 아니라 투기다. 생산이 아니라 강탈이다. 문명을 뿌리내리게 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문명을 괴멸하는 것이다. 이것이 어찌 사회 문명의 목적인가. 국가 경영의 본지인가.

이민을 위해서라고 말하지 말라. 이민은 영토 확장이 필요하지 않다. 무역을 위해서라고 말하지 말라. 무역은 결코 영토 확장이 필요하지 않다. 영토 확장을 필요로 하는 것은 오로지 군인과 정치가의 허영심뿐이다. 금광과 철도의 이익을 좇는 투기꾼뿐이다. 군수를 공급하는 어용상인뿐이다.


국민의 존엄과 행복

특히 국민의 존엄과 행복은 결코 영토의 위대함에 있는 것이 아니라, 높은 도덕 수준에 있다. 무력의 위대함에 있는 것이 아니라 이상의 고상함에 있다. 군함과 병사가 많음에 있는 것이 아니라 의식주 생활의 풍요로움에 있다. 영국의 전통적 존엄과 행복은 방대한 인도제국을 영유하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한 사람의 셰익스피어를 가진 점에 있다는 것은 칼라일이 말한 대로다.


독일국을 크게, 독일인을 작게

로버트 모리어 경(Sir Robert Burnett David Morier, 1826~1893)은 예전에 비스마르크를 비평하며 말했다. 그는 독일을 크게 만들었다. 그렇지만 독일인을 작게 만들었다. 그렇다. 영토의 위대함은 대개의 경우 국민의 위대함과 반비례한다. 왜냐하면 그들의 대제국 건설은 오로지 무력의 팽창이기 때문이다. 야수적 본능의 팽창이기 때문이다. 그들은 나라를 부유하게 만들려고 인민을 약화시키고, 국광國光과 국위를 빛내기 위하여 인민을 부패하고 타락하게 만든다. 그러므로 제국주의가 나라를 크게 하고 인민을 작게 한다고 일컫는 것이다.


한때의 물거품

국민이 작아지고 말았는데 국가가 어찌 성대할 수 있겠는가. 성대한 것처럼 보이는 것은 요컨대 한때의 물거품에 불과하다. 태풍이 한번 지나가면 구름이나 안개와 마찬가지로 흔적도 없이 사라지는 것은 예로부터 역사가 명확히 보여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슬프게도 세계 각국은 경쟁적으로 이러한 물거품 같은 팽창에 애쓰면서 멸망으로 향하는 위험을 깨닫지 못하고 있다.


일본의 제국주의

그리하여 지금 우리 일본도 마찬가지로 이 주의에 열광하여 다른 것은 돌아보지 않는다. 13사단의 육군, 30만 톤의 해군은 더 커졌다. 타이완의 영토가 확장되었다. 의화단 운동에 군대를 파견했다. 국위와 국광은 덕분에 올라갔다. 군인은 가슴팍에 허다한 훈장을 장식했다. 의회는 이것을 찬미했다. 문사와 시인은 이것을 칭송했다. 그런데 이 영토 확장은 얼마나 우리 국민을 위대하게 했는가. 얼마만큼 우리 사회에 복리를 가져왔는가.


그 결과

8천만 엔의 예산은 수년이 지나지 않아 3배가 되었다. 타이완 경영은 점령 이래 1억6천만 엔의 경비를 내지에서 빼앗아 갔다. 2억 엔의 배상금은 꿈처럼 사라졌다. 재정은 점점 문란해졌다. 수입은 점점 초과했다. 정부는 증세에 이어 또 증세를 했다. 시장은 점점 곤혹스러워했다. 풍속은 점점 퇴폐하고 죄악은 나날이 증가했다. 그런데도 사회 개혁 주장은 매도되지 일쑤고, 교육 보급 논설에는 냉소를 보낸다. 국력이 날마다 없어지고, 국민의 생명이 날마다 줄어들고 있다. 만약 이와 같은 상황이 그대로 수년간 멈추지 않는다면, 나는 동양 군자국의 2500년 역사는 눈 깜짝할 사이의 짧은 꿈으로 끝날 수밖에 없다고 믿는다. 아아, 이것이 우리 일본에서 제국주의의 효과가 아닌가.

그러므로 나는 단언한다. 제국주의 정책은 소수의 욕망 때문에 다수의 복리를 빼앗는 것이다. 야만스런 감정 때문에 과학적 진보를 저해하는 것이다. 인류의 자유와 평화를 섬멸하고 사회의 정의와 도덕을 살해하여 세계 문명을 쳐부수는 파괴자일 뿐이다.




5장 결론


신천지 경영

아아, 20세기 신천지에서 우리들은 어떻게 하면 경영을 완성할 수 있을까. 우리들은 세계 평화를 바라고 있다. 그런데 제국주의는 세계 평화를 교란한다. 우리들은 도덕의 발달을 바라고 있다. 그런데 제국주의는 도덕의 발달을 말살한다. 우리들은 자유와 평등을 바라고 있다. 그런데 제국주의는 자유와 평등을 파괴한다. 우리들은 생산과 분배의 공평함을 바라고 있다. 그런데 제국주의는 생산과 분배의 불공평함을 더욱더 자극한다. 문명의 위기 중에 진정으로 이보다 더 큰 것은 없다.


20세기의 위험

이것은 나의 개인적인 의견이 아니다. 작년에 뉴욕 「월드World」 신문이 〈20세기의 위험〉이라는 제목으로 서구의 여러 명사에게 의견을 구했을 때, 군비주의와 군국주의가 가공할 만한 것이라고 답변한 사람이 대단히 많았다. 프레더릭 해리슨은 장래의 정치적 위험은 유럽 각국이 과다한 군대와 군함과 군비를 축적하는 데 있으며, 그 결과는 곧 그들의 통치자와 인민을 유혹해서 주로 아시아, 아프리카 땅에 지배권을 다투게 하려고 하기 때문이라고 했다. 쟁윌은 20세기의 위험은 군국주의라는 중세 사상의 반동적 흉기라고 했다. 하디는 군국주의보다 위험한 것은 없다고 했고, 블린트는 위험은 제국주의라고 했다.


페스트의 유행

그렇다. 제국주의는 마치 페스트의 유행처럼 추잡하고 무섭다. 그것에 접촉하는 곳은 당장에 멸망에 이르고 만다. 애국심은 진정으로 그 병균이다. 군국주의는 틀림없이 전염의 매개인 것이다. 생각건대 18세기 말에 프랑스혁명의 대청결법은 유럽의 천지를 청소하고 일단 소멸했다. 그 이후 영국의 32년 개혁이나 프랑스의 48년 혁명이나 이탈리아의 통일이나 그리스의 독립은 한결같이 이 제국주의라는 역병의 유행을 막는 수단이었다. 그래도 그 사이 나폴레옹이나 메테르니히(Klemens Wenzel Lothar von Metternich, 1773~1859)나 비스마르크 패거리가 교대로 병균을 뿌려댔기 때문에 결국 오늘날과 같은 유행을 불러왔던 것이다.


애국적 병균

이제 이 애국적 병균은 관민과 상하에 만연하고 제국주의 페스트는 세계 각국으로 전염되어, 20세기 문명을 파괴하지 않고는 못 배길 듯한 기세를 보이고 있다. 사회 개혁의 건아로서 국가의 유능한 의사醫師를 자임하는 의로운 지사가 부디 크게 분발하여 일어나지 않으면 안 될 때가 아닐까.


대청결법과 대개혁

그렇다면 어떠한 계획으로 오늘날의 급무에 대응하지 않으면 안 되는가. 다름 아니다. 사회와 국가를 향해 대청결법을 시행하라. 바꾸어 말하면 세계적 대혁명 운동을 개시하라. 소수의 국가를 변혁하여 다수의 국가로 만들라. 육해 군인의 국가를 변혁하여 농상공인의 국가로 만들라. 귀족 전제의 사회를 변혁하여 평민 자치의 사회로 만들라. 그런 후에야 정의와 박애심이 곧 편협한 애국심을 압도할 수 있는 것이다. 사해동포의 세계주의가 곧 약탈적 제국주의를 소탕하고 잘라내버릴 수 있는 것이다.


칠흑 같은 암흑의 지옥

무사히 이대로 계획이 실현되었을 때 우리들은 비로소 부정과 불의, 비문명적이고 비과학적인 현재의 천지를 개조할 수 있고, 사회의 영원한 진보를 기대할 수 있으며, 인류의 전반적 복리가 완전해질 수 있는 것이다. 만약 그렇지 않고 오래도록 오늘날의 추세대로 방임하고 반성하지 않는다면 우리들의 앞길에는 오로지 칠흑 같은 지옥이 기다리고 있을 뿐이다.


帝國主義, 警醒社書店
『廿世紀之怪物帝国主義』라는 제목으로 1901년(메이지明治 34년) 4월 20일에 경성사서점警醒社書店에서 간행되었다. 재판은 1901년 5월 10일, 제3판은 1903년 10월 10일, 제4판은 광고만 존재하고 실물은 확인되지 않았다. 1902년에는 중국에서 번역 출간되었다(趙必振 역, 『二十世紀之怪物帝國主義』, 上海通雅書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