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승회

하기락의 아나키즘론

      1. 글머리에

      2. 만 남

      3. 하기락과 그 시대

      4. 1930-40년대 한국 아나키즘과 하기락

      5. 해방후의 활동과 자주인 철학의 정초

      6. 하기락의 책만들기

      7. 결별: 새 시대의 아나키즘을 위하여

      8. 결 어

1. 글머리에

글쓰기에 앞서 필자는 두 가지 제한 사항을 먼저 말하고 싶다. 우선 이 논문은 사람에 대한 연구라는 사실이다. 더구나 그 목소리가 아직 역사로 되지 않은 사람에 대한 연구이다. 사람이면 누구든 자신의 다양한 관심과 활동, 요구와 주장으로 자신의 일생을 채운다. 이 중에는 서로 상충되고, 모순되는 요구와 주장들도 있다. 우리가 누구를 안다고 하는 것이 이 모든 것을 이해하는 경우를 말하는 것은 아니다. 이질적인 것으로 보이는 그 사람의 저편의 이익관심interests에 대해서는 무지하면서도 자신의 이해의 지평 위에 그려진 사람만 알면서도 우리는 잘 안다고 말한다. 이는 어쩌면 해석학적 딜레마hermeneutische Dilemma인지도 모르겠다.

필자는 허유(虛有-고故 하기락 교수의 호) 하기락 교수의 아나키즘 사상을 조금 알고 있을 뿐, 그의 다른 관심사에 대해서는 알지 못한다. 그러므로 이 글을 읽는 독자가 하기락 교수의 아나키즘 사상에 대한 필자의 서술이 그의 다른 분야에 대한 이익관심과 상충하거나 모순된다고 보여지더라도 필자로서는 감당하기 어려운 부분이며, 해명할 수도 없다는 사실을 말해두고자 한다. 예를 들면 ‘니콜라이 하르트만의 인식론’에 대한 하교수의 해석이 아나키즘 연구에 어떤 영향으로 남아 있으며, 도대체 무슨 관계가 있는가? 라든지….

두 번째로 이 논문은 하 교수의 철학적 논변에 대한 시비를 가리기 위함이 아니라, 우리에게 ‘불길한 미완’으로 보이는 한 인간의 사상적 면모를 해명하려는 것이므로 철학적 엄밀성보다는 역사적 사실 관계에 주목할 수밖에 없다는 사실이다. 그러다 보니 다소나마 철학적 글쓰기에 익숙한 필자로서는 이 글이 아무래도 논문답지 않게 될 거라는 우려를 지울 수가 없다. 그러나 역사적 사실을 중시한다 하더라도, 필자로서는 단순히 사료에 대한 역사서술자의 평가만 고집하는 실증적인 사가가 되고 싶지는 않다. 역사적 사실은 현재와 부단히 대화하고 있으며, 그 대화 사이를 이어주는 논리가 있다고 보고, 그것을 깊이 추적해 보고자 한다. 더욱이 연구 대상인 하 교수는 ‘아나키즘적 실천’의 문제에 깊숙이 개입해 있기 때문에, 역사적 사실과 실천과의 관계에 주목함으로써 '역사적 해석'이 갖는 한계를 넘어서고자 노력할 것이다.

‘사실史實과 현재와의 관계 지음’은 어떤 경우도 매개자가 필요한 법인데, 필자는 그런 중개인 역할을 하게 될 것이고, 그러는 가운데 필자의 ‘사적인 담화’가 개입할 수도 있을 것이다. 이 모든 것을 고려할 때, 이 글은 기왕의 논문쓰기 형식을 탈피하여 자유롭게 이야기할 수밖에 없다고 생각된다.

2. 만 남

필자는 1993년 5월 대구 신천동에 있던 회의실에서 필자와 박연규 씨를 중심으로 결성한 《대구아나키즘연구회(이하 ‘대구아연’으로 칭한다)》[1]의 창립 월례발표회에서 〈맑스인가, 바쿠닌인가?―제 1인터내셔날과 유럽노동운동의 이념투쟁〉[2]라는 논문을 발표하였다. 필자의 기억으로는 그날 15명 정도의 회원이 참석하였는데, 검정색 빵모자에 가방을 비껴 맨 채, 약간 굽은 지팡이를 짚고 들어서는 노인이 있었다. 그가 바로 하기락 교수였다. 필자는 그날 하기락 교수를 처음 대면했다. 82(1993년 당시)세의 노인이라기에는 너무나 건강해 보였다.

발표가 끝나고 토론 시간이 되자, 하 교수는 누구보다도 많은 말을 했다. 젊은 토론자들을 제치고 혼자서 논증하고, 결론내리고 하였다. 지금 고백하건대 성미 급한 나로서는 주리가 틀리는 자리였다. 그 후로도 필자는 하교수가 등장하는 자리에선 언제나 비슷한 경험을 했다. 1995년 8월 서울 동숭동 국민문화연구소에서 개최된 에서는 폐회시간을 넘기고 사회자의 제지에도 불구하고 계속 이야기하자, 듣다 못한 노철학자 유명종 원광대학교 명예교수는 “저 영감이 아무래도 노망이 들었어! 그만하고 내려와!”라고 짜증을 내기도 하였다.

그러나 필자는 과의 인연으로 하 교수와 만나게 된 것을 소중하게 생각하며, 개인적으로는 한국아나키즘운동사에 관한 많은 살아있는 지식을 얻게 된 데 감사하는 마음은 변함이 없다. 필자는 독일 유학 시절 직업공동체 운동에 참여하여 공부한 적이 있었는데, 당시에는 마르크스주의를 연구하는 학도였기 때문에, 아나키즘이라면 조직적인 혁명운동에 걸림돌이 되는 ‘불평하는 자유주의자’ 정도로 이해하고 있던 나로서는, 독일의 직능공동체 운동의 이념적 기초가 아나키즘임을 알고 많이 놀랐던 적이 있다. 아나키즘에 대한 이런 인연으로 귀국 후 아나키즘 연구단체를 만들자는 제의에 쉽게 동조하게 되었다.

하여튼 필자가 서울로 이주하고, 박연규 씨가 다시 미국으로 돌아가면서 《대구아연》은 1994년 여름 이후 사실상 활동중단에 들어가게 되었다. 하지만 하 교수는 그간 10여 회의 월례발표회에 빠짐없이 참석하였으며, 《대구아연》과 《부산아연》의 듬직한 중심이었다.

3. 하기락과 그 시대

헤겔의 말대로 “철학의 시대의 아들”이기 때문에, 그의 시대를 이해하지 않고는 그의 사상의 전모를 이해하기 어려울 것이다. 알고 있듯이 하 교수는 태어나서부터 장년이 될 때까지 일제의 식민지 지배라는 암울한 시기를 살았다. 그의 철학은 이 시기에 형성되었고, 시대의 요구와 문제의식을 반영했다. 그러므로 그의 시대를 돌이켜 보는 것이 의미 있을 것이다.

허유 하기락 교수는 1912년 1월 26일 경상남도 함양군 안의면 당본리에서 출생하여 1997년 2월 3일 향년 86세를 일기로 대구시 수성구 만촌2동 990-73번지 자택에서 타계하였다. 하 교수는 열여덟 살이던 1929년 경성 제2고등보통학교(지금의 경복고 전신) 3학년이었다. 그해 광주에서 학생사건이 일어났고, 서울에서도 고보를 중심으로 학생운동이 일어났다. 하 교수는 제2고보의 시위에서 주동자로 찍혀 퇴학당하였다. 그 후 1년 동안 서울과 안의安義를 왔다 갔다 하며 낭인 생활을 했던 것으로 추측된다. 1년 후에 중앙고보 2학년에 편입, 1933년 졸업하였다. 그가 고보를 졸업하였을 때 가세家勢는 말이 아니었다. 하는 수 없이 낙향하여 2년 동안 농사일을 하게 된다. 1930년대에는 이미 국내에도 여러 아나키즘 단체가 만들어지고, 아나키스트들에 대한 일본의 탄압도 시작되었다. 하지만 이 시기까지 그가 아나키스트임을 내보인 흔적은 없다. 고보를 졸업한 지식인 청년이 농사나 짓고 있으니, 부모들의 강압에 못 이겨 서둘러 장가를 들게 되었다. 그러나 하 교수는 “시골에 처박혀 있기에는 너무 억울해서”[3] 일본 유학길에 오르게 된다. 안의 출신의 젊은 아나키스트 하기락은 1935년부터 37년까지 일본 상지대학 예과를 마친 후에, 와세다대학 문학부 철학과에 입학한다. 일본 유학은 하교수가 아나키즘에로의 길을 접어드는 중요한 계기가 된다. 유학 시절 내내 아나키즘에 대한 관심으로 일관했고, 결국 일생을 “아나키스트라는 이념적 표식”과 함께했다.

1939년 12월 와세다대학 조선인 동창회 석상에서 그는 다른 아나키스트 동지들과 더불어 일제의 식민지 정책, 특히 창씨개명에 대해 강하게 비판하였다. 이 사건으로 일본 경찰에 검속檢束되어 3개월간의 구류처분을 받는다. 기록에 의하면 “하기락은 작년 1월 거행의 동경 각 대학 전문학교 조선학생 연합 졸업생 송별회에서 당국으로부터 조선말 사용을 금지시킨 것을 통절하게 불만을 품고, 동지를 규합하여 이 반대운동을 획책하고 작년 6월 중 淀橋區 戶塚町 소재 喫茶店 松月堂에서 당시 와세다대학 문학부 청강생(경성 이화여전 교원) 한치진(韓稚振)의 환영회를 빙자하여 와세다대학 문학부생 김언병, 이지인(李趾麟), 정인욱, 윤정병을 권유 합동하고, 이상의 문제를 토의한 결과 조선 민족문화 옹호의 견지로부터 조선어 사용금지 문제에 관한 학생의 여론을 환기시킬 것이라 하고, 그 후 검거에 이르기까지 재삼 민족문화옹호 철학연구를 빙자하여 동지규합에 노력하여 온 사실이 판명되었다. 그리고 경시청에서는 본인 등에 대하여 엄중히 훈계한 결과 각성한 바 있으므로 일단 석방하였다.”[4]

대학을 졸업한 후(1941년) 그는 황해도 재령에 있는 재령상업고등학교에 교직 자리를 얻게 되었다. 그러나 한 학기를 마치고 대학 시절의 아나키스트 운동 경력이 문제가 되어 쫓겨나게 된다. 하 교수는 당시를 이렇게 회고한다: “자주인 사상으로 봐도 일제가 보면 불온한 것이고, 무정부주의자라고 봐도 역시 불온분자이니까 봐줄 턱이 없지….”[5] 그는 다시 고향으로 내려와서 농사꾼이 된다. 두어 해 뒤에 해방이 되었고, 다시 황해도 학교에 복직을 생각하기도 했으나, 이미 그때는 38선으로 분단되어 마음대로 되지 않았다. 그래서 그는 부산에 새로 만들어진 「자유민보(이 신문은 미군정 당시 경남도지사 김철수가 창간하였다)」라는 신문의 주필로 취직을 한다. 당시의 시대 상황이 그러했듯이 그는 2년을 채우지 못하고 다시 대구로 옮긴다. 1947년 《대구문리과대학(나중에 대구대학으로 이름을 바꾸고 청구대학과 통합하여 현재의 영남대학으로 된다)》에 잠시 자리를 잡았다가 1953년 고병간 박사(당시는 전쟁 중이라, 임시수도가 부산에 있었고, 고병간 의대학장은 문교부 차관을 겸하고 있었다)의 초빙으로 경북대학교 문리과대학 철학과에 자리를 잡았다. 그로부터 18년간 경북대학교 철학과에 재직하게 된다.

하 교수는 1947년 에 재직할 당시 유림(柳林)선생이 조직한 《독립노동당》에 가담하여 기관지 「독립노동신문」을 편집한 적이 있고, 경북대학교를 퇴임한 직후인 1972년에는 《민주통일당》을 주도하고 있던 정치인 양일동 씨의 요청으로 1년간 정책위 의장직을 맡은 적이 있다. 선생의 생애에서 현실 정치에 가장 깊이 발을 들여 놓았던 시기이다. 양일동 씨와는 일본 유학 시절부터 절친한 사이였다.[6] 그러나 하 교수의 현실정치 참여는 오래가지 못했다. 1974년 그는 계명대학교로 옮겨 학문 활동을 계속한다. 교수로서의 그의 학문 활동은 계명대학교 철학과에서 마친다. 정년퇴임 후에도 하 교수는 효성카톨릭대학(현 대구가톨릭대학교-편집자 주) 등에서 계속 강의를 하였으며, 활발한 저술활동도 계속하였다. 1963년 선생은 《한국칸트학회》를 창립하였으며, 이는 현재의 전국 규모의 《대한철학회》로 발전하였다. 1947년부터 1997년 임종까지 40년간의 학문 활동을 통해 선생은 많은 논문과 저서를 남겼다. 하 교수는 한국의 제1세대 철학자로서 철학적 엄밀성을 잃지 않으면서도, 사회운동가로서의 열정을 쏟았다.

4. 1930-40년대 한국 아나키즘과 하기락

앞에서 필자는 하 교수의 생애를 연대기적으로 살펴보았다. 이를 토대로 필자는 30-40년대 한국 아나키즘의 이론적 지평과 하교수의 활동을 살펴보고자 한다. 필자가 30년대 이후 국내에서의 아나키즘 연구와 실천적 활동에 국한해서 다루려는 이유는 첫째; 1920년대 한국 내에서의 아나키즘 연구 및 실천 투쟁은 몇몇의 선구자를 제외하고는 사회주의라는 큰 틀 내에서 공산주의와 혼재하고 있었으며, 아나키스트라고 자처하는 사람들조차도 공산주의와 아나키즘에 대한 분명한 구분 의식이 없었기 때문이다.[7] 둘째; 하 교수와 관련된 논의만이 본고의 주제이므로 선생이 아나키즘에 대한 분명한 입장을 표명한 시기가 30년대 이후라 여겨지기 때문이다.[8]

먼저 1930년대 한국 내에 명백히 아나키즘 이론에 근거한 연구 단체 혹은 항일무장투쟁 조직이 있었느냐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30년대는 일제의 만주정벌로 조선 반도는 일제의 병참기지화하고 있었다. 조선 내의 모든 사회운동은 극도의 탄압에 시달리고 있었다. 이 시기까지 한국 아나키스트들은 더러는 옥사하고, 많은 선구자들이 감옥에 있었다. 단재 신채호 선생은 여순감옥에, 이정규, 이을규 형제와 유림(柳林)은 중국에서 국내로 송환되어 왔다. 《이천자유회》, 《창원흑우연맹》, 《제주도 우리계》, 《진우연맹》, 《조선무정부주의자연맹》 등에 가담한 많은 투사들이 투옥되어 국내의 아나키스트 진영은 전멸한 상태였다.

광주 학생사건이 아나키스트들에 의한 항일운동은 아니었지만, 하 교수가 아나키즘운동사에 최초로 등장하는 것은 1929년 서울 제2고보 소요 사태이다. 18세의 2학년이던 하기락은 하공현(河公鉉)과 함께 제2고보에서 광주학생운동의 여세를 몰아 서울에서 학생 운동을 계승하고자 선두에 나섰으며, 그로 인하여 퇴학처분을 받게 되었다. 이는 아나키즘과는 무관한 사건이지만, 신채호의 〈조선혁명선언〉, 또 일본에서의 박열의 활동(박열은 1923년 동경지진 당시 “불령사不逞社 대역사건”으로 복역중이었다)에 관해 소상히 알고 있었던 그는 이미 아나키즘적 저항의 정신이 깃들어 있었음이 분명하다. 1939년 일본 유학 시절에도 비슷한 사건을 겪게 되는데, 앞에서 소상히 밝힌 바와 같이 1939년 12월 와세다대학에서 있었던 “조선인 졸업생 송별회사건”이다. 이 시기에 한국에는 이미 프루동, 바쿠닌, 크로포트킨 등 고전적 아나키즘 이론가들의 문건이 번역 소개되고 있었다. 한글로 번역되지 않은 문헌들은 일본어로 번역되었으며, 대부분의 지식인들은 이들 문헌을 접할 수 있었다. 아나키즘 연구는 철학자나 실천가들보다는, 주로 문학자들, 문예운동가들 사이에서 일어났다. 권구현(權九玄) 등 쟁쟁한 아나키즘 이론가들이 등장하면서 문학에서 아나키즘과 마르크스주의(공산주의) 논쟁이 시작되었다. 소위 아나키즘 문학과 부르주아 문학 간의 논쟁이 그것이다.

한국에서 프로문학의 대두는 1920년대 중반이다.[9] 아나키즘 문학은 당시까지만 하더라도 프롤레타리아 문예운동 내에 속해 있었다. 박영희, 한설야, 임화 윤기정을 중심으로 한 프로문학이 강해지자, 이향, 홍의 등은 아나키즘 문학이론으로 이에 저항하면서 논쟁은 시작된다. 권구현은 프로문예=마르크스주의라는 등식을 거부하면서 “프로문예 중에 아나키즘 문예와 볼셰비즘 문예의 대립을 예상해볼 수 있다. 공산주의자가 자신의 인생관 내지는 사회관에 입각하여 무산계급문예를 수립할 수 있다면, 아나키스트 역시 그의 사상적 견지에서 무산계급예술론을 수립할 수 있을 것”[10]이라고 지적한다. 권구현은 아무리 무산계급문예라 하더라도, 예술 활동이 예술의 본질을 벗어나는 것이어서는 안 되며, 특히 사회혁명의 선전도구로 전락하는 것에 반발한 것이다. “아나키스트는 결코 집단을 무시하지 않는다… 그러나 아나키스트는 자연적인 법칙에 순응하는 개성의 자유를 고조하며 볼셰비키들처럼 무산계급을 의식적으로 외세의 강권에 의하여 볼셰비즘의 범주내로 도입코자 하지 않는다. 가장 자연스러운 자유연합 사회를 … 형성코자 함이 아나키스트의 최대 안목이다.”[11]

프로문학에 대항한 권구현의 아나키즘 문학론은 한국의 아나키즘 이론을 한층 정교하게 하는데 기여했다. 넓은 의미로는 사회주의와 아나키즘, 좁게는 볼셰비즘과 아나키즘 이론 간의 구분이 불분명하던 시기에 권구현은 볼셰비즘 역시 억압적 국가기구를 폐지하는 것이 아니라, 부르주아에 의한 지배를 프롤레타리아에 의한 지배로 바꾸는 것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간파함으로써 “자연법칙에 순응하는 개성의 자유를 강조하여 이에 따른 자유연합 사회를 건설하는 것”[12]이 아나키즘의 최대 목표라고 규정하게 된다.

5. 해방후의 활동과 자주인 철학의 정초

하 교수가 아나키즘 사상에 경도된 것은 아마도 고향 안의의 사상적 분위기와 무관치 않은 것 같다. 당시 안의에는 이름난 아나키스트들이 많았다. 1926년 대구의 진우연맹사건의 주모자들도 대부분이 안의출신이었다(신재모, 하종진, 하경상, 김정근 등이 이 고장 출신이다). 나이로 보면 7~8년 위인 선배 사회운동가들로부터 선생은 자연스럽게 아나키즘 사상에 경도되게 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본격적으로 아나키즘을 표방한 시기는 해방을 전후한 시기가 아닌가 싶다. 여기서는 하 교수가 아나키즘을 자신의 ‘자주인 철학’으로 체화體化해 가는 과정을 살펴보고자 한다.

먼저 아나키즘의 전통을 간략하게 살펴보자: 아나키즘은 매우 광범위하다. 본고에서 논하는 아나키즘은 프랑스 혁명 후 프랑스를 중심으로 나타난 사회사상을 일컫는다. 정통파 아나키즘은 윌리엄 고드윈(W. Godwin)의 『정치적 정의』(1793)를 시작으로 프루동, 막스 슈티르너(M. Stirner), 구스타프 란다우어(G. Landauer, 1870-1919), 바쿠닌, 크로포트킨, 톨스토이, 워렌(Josiah Warren), 터커(Benjamin Tucker)로 이어지는 사상적 전통을 가리키는 말로 이해하고자 한다. 여기에는 개인주의적 경향과 사회적 경향이 혼재하고는 있지만, 그것이 서로 단절된 전통으로부터 나온 것이 아니라, 연속적인 발전의 산물이라는 점에서 하나의 전통으로 이해할 수 있다.

이 주류 아나키즘 사상은 ⑴ 개인의 무제약적인 자유 보장, ⑵ 이를 위해 무국가 사회의 실현, ⑶ 인류의 행복과 번영을 위해 개인의 창의성과 자발성의 최대한 보장, ⑷ 국가로부터 비롯되는 모든 제도와 위계질서의 부정, ⑸ 개인의 자발적 도덕성에 대한 믿음, ⑹ 그러므로 인간의 자유와 평등을 제한하는 세 가지 죄악인 국가, 종교, 경제제도를 거부하는 것 등으로 요약할 수 있다. 이 중에서도 국가가 제1의 타도 대상인 바, 아나키즘에 의하면 국가는 ① 원래가 약자를 착취하려는 강자의 욕구의 표현이므로, 인민 전체의 복지를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인민의 지배를 효율적으로 집행하기 위한 강제적 실체이다. ② 국가는 필연적으로 계급성에 기초하여 각종 제도와 법규를 만들고, 이를 통해 생존권과 욕망을 통제하는 착취적 수단이 된다. ③ 국가의 존재는 최고의 인륜성을 실현하는 현실태(헤겔의 생각처럼)가 아니라, 인민의 자발적 도덕을 파괴하는 파괴적 실체라는 것이다.

아나키스트들은 국가의 본질이 좋은 것이냐 나쁜 것이냐를 놓고 논쟁한 것이 아니라, 국가권력을 탈취할 것이냐, 파괴할 것이냐를 놓고 싸웠다(가장 대표적인 예가 마르크스와 바쿠닌 간의 논쟁이다). 이처럼 아나키즘과 마르크스주의-사회주의-공산주의는 그 근본부터가 달랐음에도 초기 아나키스트들은 물론이고, 마르크스주의자들 사이에서도 아나키즘이 사회주의의 아류로 인식되면서 그 독자적인 사상적 기반을 갖추는데 어려움이 많았고, 아나키즘이 역사적으로 “잊혀진 몽상가의 추억”으로 인식되게 된 가장 결정적인 원인이 되었다.

하기락의 아나키즘은 이런 전통으로부터 출발하여, 그가 살던 시대의 요구에 따라 수정, 변형된 아나키즘 사상을 발전시켜 왔다. 필자는 이를 ‘자주인 철학’으로 이해하고자 한다. 그의 말을 들어 보면: “자기 스스로 자기의 주인이 되고자하는 사람을 ‘자주인libertarian’이라 부른다. 권위나 군력을 가지고 남을 지배하려는 사람을 권위주의자Authoritarian라 한다. 이 두 종류의 인간은 서로 용납이 안 된다. 권위주의자를 혐오, 배격하고 자주인 다운 생활을 관철하려는 입장을 취하는 사람을 아나키스라 한다.”[13] 필자는 하기락의 아나키즘을 “자주인 철학”으로 개념화하고자 한다. 아나키스트들 사이에서 ‘자주인’이라는 용어가 사용되기 시작한 것은 1972년 《한국자주인연맹》의 창립과 더불어서이다. “우리는 각자 자기를 주재하는 자주인이다. 우리는 자주인의 자유의지로 연합한 자유로운 사회를 건설코자 한다. … 모든 인간의 주권은 평등하다. 이 권리는 누구도 침범하지 못한다. 우리는 다스리는 자와 다스려지는 자로 인간을 구별하는 일체의 정치적 관념을 부정한다.”[14] 당시 자주인이라는 표현을 쓰게 된 것은 아마도 유신이라는 현실 정치적 조건 때문이었을 것이다. 스스로를 아나키스트라 부르기에는 여러 가지 제약이 있었을 것이다.

자주인 사상은 1987년 제4차 대회에서 더욱 구체화된다. “우리는 다수자의 노동성과를 소수자의 재산 축적의 수단으로 만드는 현재의 경제체제의 개혁을 촉구한다. 이는 수탈된 것의 탈환을 의미하는 것이다. … 위계제도적 관료독선은 산업의 발전을 유효하게 합리적으로 관리할 수 없다는 실증을 보여주었다. 산업의 운영은 직업별, 직장별 산업종사자들의 지역평의회와 이들이 서로 연합한 중앙협의회에 의해 담당되어야 한다. … 근로대중의 산업의 자주관리를 요구한다.” 선생이 발표한 이 개회사는 다분히 초기 공산주의적 생각과 일치하는 점이 많이 있다. 20세기 유럽 노동운동의 핵심적인 쟁점은 ‘공장평의회’와 ‘산업의 자주관리Autonomie der Industrie’였다. 이 개회사에도 똑같은 말이 나온다. 자주인은 그러나 공산주의자와 달리 ‘국유화’를 주장하는 것이 아니라, 산업의 ‘사회화Sozialisierung’를 주장한다.

또한 하 교수의 어떤 글에도 ‘군비축소’ 주장이 빠진 적이 없다. 60년대 이후 선생은 자주인의 철학에 평화주의를 포함시킨다. 이는 1988년 10월 “세계평화를 위한 국제학술회의”로 이어진다. 투자한 열정에 비하면 실패한 행사라는 평이 지배적이지만, 세계적인 아나키스트들이 한국에 모일 수 있었던 것은 선생의 추진력이 아니었으면 어려웠을 것이다. 발제강연에서 그는 “‘나’라는 한 인간이 인간으로서 최고의 가치를 지녔다면, ‘너’라는 인간도 또한 인간으로서 최고의 가치를 지닌 자이다. 여기에 있어서 비로소 각인이 만인의 자유를 존중하고 만인이 각인의 자유를 보장하는 ‘아나키’사회가 실현될 수 있는 것이다. 이리하여 인간중심 사상은 곧 사회주의로 통하는 길이다. 평등은 사회적 정의의 필수조건이고, 사회적 정의에 있어서 비로소 만인의 자유가 보장되는 것이다.”[15] 이 글에서도 ‘군비축소’와 ‘노동자에 의한 산업의 자주관리’도 거론된다.

하 교수가 공식적인 자리에서 발표한 마지막 글인 〈역사의 발전과 인간의 해방〉[16]에서도 동일한 주제로 결론을 삼는다: 자주인은 “지역과 직장이 구성원 상호간의 자유의사와 자유합의에 따라 자율적으로 자치되는 사회를 추구한다. 이 바탕 위에서 … 인간의 다양한 사회적 욕구를 충족시킬 목적으로 각종의 자율적 협회가 충분히 그 기능을 발휘할 수 있어야 한다. 나라 전체는 이와 같은 모든 지역, 직장 및 각종 협회의 자율적 자유연합의 원리에 따라 구성되는 사회가 아니면 안 될 것이다. 그럴 적에 우리는 나라 전체의 일을 조사, 통계, 계획하는 사무기관을 배제하지 않는다. 그것은 백성을 다스리기 위한 통치기관이 아니라, 백성들 자신의 자치적 사무기관이다.”[17] 그는 아나키즘의 자치 원리를 절묘하게 표현하고 있다. 제레미 리프킨이 『노동의 종말』에서 강조하고 있듯이, 국가의 강제는 사회의 제3영역(공적 영역)의 강화를 통해 해소할 수 있다는 주장은 이미 하 교수의 이 글에서도 드러나고 있다. 건강한 사회는 지역, 직장, 협회가 자율적으로 연합한 형태로 운영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국가를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공적 영역의 확대와 더불어 자율적 자치기관으로 변해야 함을 말하는 것이다.

자주인 철학은 크로포트킨으로부터 유래한 것이다. 일제 강점기를 거치면서 자주인 사상은 민족주의 이념과 결부되어 항일 무장투쟁의 이념이 되었다. 한국 아나키즘이 강한 민족주의적 색채를 띠게 된 것은 명백히 일제의 식민지 지배 때문일 것이다. 하 교수의 자주인 철학 역시 민족주의로부터 나온 것이고, 이는 무정부주의 운동에 강력한 이념적 공감대였다. 그러나 민족주의 때문에 한국아나키즘은 해방 후에도 발목이 잡혀 있었다. 필자는 하 교수의 자주인 철학은 그것이 민족주의적 배후에 의존하는 한 아나키즘 본래의 의도와는 배치되는 것일 뿐만 아니라, 사회이론으로서 아나키즘의 발전을 기대할 수 없다.

아나키스트는 조직을 거부한다고 즐겨 말한다. 그러나 해방 후 한국 아나키스트들은 두 사람이 모이면 조직을 만들고, 회장이라는 이름을 감추고 ‘대표간사’를 선출하고, 강령을 채택하고, 선언문을 낭독하는 계몽주의적인 정치적 세리머니를 즐거워했다. 이제 하 교수가 제창한 자주인 철학은 2세대 신아나키스트들에 의해 이론적으로 새롭게 단장되어야 하며, 공적 영역의 논변이 아니라, 생활세계의 의사소통적 담론으로 자리 잡아야 할 것이다.

6. 하기락의 책만들기

책은 각자의 운명을 타고난다(habent sua fata libelli). 하 교수가 펴낸 책은 여러 모로 기이한 운명을 타고났다. 본 연구를 위해 문헌을 섭렵하면서 필자는 하 교수의 거의 모든 저작이 뒤죽박죽으로 섞여 있고, 같은 내용이 계속 반복되고 있어서 혼란스러움을 금치 못하였다. 『탈환』(1985)의 〈후기〉는 『자기를 해방하려는 백성들의 의지』(1993)에 반복된다. 8년 전의 〈후기〉를 왜 다시 전재하는지, 그간 아무런 상황변화도 없었다는 것인지 의아스럽다. 그럼에도 전재했음을 밝히는 문구는 어디에도 없다. 하 교수는 『탈환』을 펴내면서 “1978년 『한국아나키즘운동사』 전편을 내면서 ‘후편도 계속 간행코자 한다’고 예고해 놓고 아직까지 실행에 옮기지 못하고 있으므로 … 우선 잠정적으로 운동사 전체를 오늘에 이르기까지 간추린 약사로서 이에 대충코자 한다.”[18]고 적고 있다. 탈환은 《한국무정부주의운동사 편찬위원회》가 약속한 후편을 만들지 못하고 있으므로 자기가 개인적으로 후편을 펴낸다는 뜻이다. 그런데 내용은 7년 전에 나온 『운동사』와 대동소이하다. 엄밀한 의미에서 『운동사』는 《한국무정부주의운동사 편찬위원회》[19]의 저작이다.

정화암, 최갑룡 등이 하기락에게 넘긴 자료가 어느 정도 정리된 것이었느냐, 아니면 신문 스크랩, 녹취한 테이프 정도였다면 하교수의 1985년 판 『탈환』은 『운동사』를 표절한 것은 아니라는 주장이 가능하다. 그런데 만약 1977년 7월 하 교수에게 넘어간 원고가 상당히 진척된 수고手稿의 상태였다면 표절이라는 주장도 가능하다.

여기서 이 책이 만들어지기까지의 내막을 잠시 살펴보자: 사실 『한국아나키즘운동사』를 편찬하기로 한 것은 정화암의 생각이었고, 출간 15년 전에 이미 계획된 것이었다. 1963년 12월 22일 돈암동 진흥장에서 열린 송년회에서 결의된 사항이었다. 1967년 1월 제8차 회의에 이르기까지 하기락의 이름은 등장하지 않는다.[20] “1977년 여름 신문자료를 수집한 세권의 노트와 최갑룡이 정리한 세편의 ‘자료정리원고철’, 기타를 모두 하기락에게 넘겨서 조선무정부주의운동사를 집필토록 하였다. 1978년 3월 1일 하기락은 이 운동사 전편(8.15이전)을 탈고하였다. 하기락은 같은 달 5일 정화암, 최갑룡, 고성희 이지활, 김한수, 박기성 등을 청운아파트 1동 307호 자택으로 초청하고, 『조선무정부주의운동사 전편』의 탈고脫稿를 보고했다. 회합한 동지들은 이를 접수하고 본 편찬위원회에서 직접 발행키로 합의했다.”[21]

이상의 표현으로 보아 하 교수에게 넘어간 원고는 ‘관련 자료’ 수준이 아니라, “정리된 원고철”이며, “수고手稿노트”이다. 1978년 9월 23일 에서 개최된 출판기념회에서 최갑룡의 경과보고에도 잘 드러나고 있다: “원고가 완결되기까지 1976년 7월부터 정화암, 최갑룡이 경기도 수원 근교 신갈 기도원에서 침식을 함께하며 (원고정리를) 감행했습니다. 1977년 봄에는 서대문구 역촌동 여관방에서 (원고) 정리를 마치고 같은 해 7월에 하기락에게 일체 수집된 (원고)를 넘기고 편집을 부탁했습니다.”[22] 이 말로 미루어 보건대 원고는 최갑룡과 정화암이 주도적으로 정리하였고, 상당히 정리된 원고를 하기락에 넘긴 것 같다. 이런 문제를 제쳐 놓고라도 『탈환』이 『운동사』에 비해 더 세련된 역사적 서술방식을 취하고 있는 것도, 새로운 사실이 추가된 것도 아니라는 점이다.

문제는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일단 한번 표절한 책을 선생은 다시 한 번 제목을 바꿔 『자기를 해방하려는 백성들의 의지』로 재탕하고 있다. 다시 말하면 최초의 원고가 누구로부터 나왔건 간에, 분명한 것은 하 교수 개인의 원고가 아니었다는 사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그 원고를 토대로 세 권의 책을 생산해 냈다. 10여 년 전부터 아나키즘에 관심 가져온 필자로서도 이미 그 당시부터 이 저작의 이런 운명을 알고 있었다. 하물며 동년배 동지들이 몰랐을 리 없다. 선생은 왜 이런 얼굴 없는 책을 만들었는지, 또 이 책과 관련된 당사자들이 동일한 내용의 책을 두 권 더 펴내는 것에 동의해 주었는지 필자로서는 헤아리기 어렵다.

『한국아나키즘운동사』의 〈편찬후기〉에는 “이 책은 개인의 사적 저작이 아니라, 운동에 참여했던 여러 동지들의 공동작업으로 추진되었다”고 명시되어 있고, 또 책의 저자 역시 편으로 되어 있음에도 불구하고 〈서문〉은 하기락 교수가 쓰고 있다. 편찬위원회는 소위원회를 만들었고, 여러 차례 회의를 했다. 그러나 그 명단에는 하기락이라는 이름은 한 번도 등장하지 않는다. 더욱이 100쪽이 넘는 〈서장〉은 분명 하 교수가 집필한 것인데, 『운동사』에는 어울리지 않는 ‘이념사’를 다루고 있다. 이 〈서장〉은 그 자체로서 작은 ‘아나키즘 이념사’인데, 왜 이 문건이 『운동사』에 포함되었느냐이다. 편집위원회의에 참석한 사람들은 위원장 정화암(鄭華岩)을 비롯하여, 양일동(梁一東), 양희석(梁熙錫), 최갑룡(崔甲龍), 이정규(李丁奎), 이을규(李乙奎), 신기초(申基礎), 이홍근(李弘根), 김재현(金在炫) 등이었다.

『운동사』의 이런 운명은 이 책의 아나키즘 관련 저작이 전무하던 시대에 나왔다는 점과, 중요한 사료적 가치에도 불구하고 16년 만에 재판을 하는 부진을 면치 못하게 된 원인이 아닌가 싶다. 책은 스스로 운명을 가지고 태어나지만, “철학이 그 이론을 회색에 회색을 덧칠하면 삶의 모습은 이미 늙은 것이며, 젊어지지 않는다(Wenn die Philosophie ihr Grau in Grau malt, dann ist eine Gestalt des Lebens alt geworden, und mit Grau in Grau läßt sie sich nicht verjüngen, sondern nur erkennen)”[23]는 괴테를 변형시킨 헤겔의 현학적인 표현을 떠올리게 된다.

피터 크로포트킨(표트르 알렉세예비치 크로포트킨을 가리킨다.-편집자 주)의 『근대과학과 아나키즘』은 1973년 이을규 선생이 창문각에서 출판하였다. 이 책의 편집 역시 하기락 선생이 편집을 맡았고, 〈편집후기〉에서 선생은 이렇게 말한다: “역자 회관(晦觀) 이을규 선생은 우리나라의 아나키즘운동의 개척자요 지도자 중의 한 분이다. 편집자는 일찍이 중학시절에 선생의 온후한 인격과 고매한 사상에 깊은 인상을 받았으며, 항상 흠모의 정을 잃지 않았다. … 편자(하기락)는 고인(이을규)의 사위 趙漢膺 동지와 함께 선생에게서 입은 은의恩誼에 보답하는 마음으로 편집과 교정에 임했다.”[24]

그런데 이 책 역시 또 다른 운명으로 부활한다. 1993년 부산의 신명출판사에서 『근대과학과 아나키즘』[25]이라는 제목으로 재출간한 것이다. 물론 역자는 하기락이다. "고매한 사상에 깊은 인상을 받아 중학시절부터 흠모해 온 선생"의 번역 원고를 한자를 한글로 바꾸는 것 말고, 전혀 새롭게 다듬은 흔적도 없이 자기 이름으로 재출간한 것이다.

이 책이 출간될 무렵 필자는 박연규 씨로부터 푸념하는 소리를 들은 적이 있다. “하교수가 번역서를 내는데, 샘 돌고프(Sam Dolgoff)의 논문 한편을 번역해 달라”고 주문하였다는 것이다. 당시 박연규 씨는 뉴욕 시립대학 박사과정을 수료하고 잠시 대구에 머물 때였다. 기이하게도 한 권의 책에 두 사람의 글이 들어 있는 이 번역서는 출간 5년 밖에 안 되었음에도 지금 그 어디에서도 찾을 수 없는 잊혀진 문건으로 사라지고 말았다. 기왕 재출간하려면 크로포트킨의 주요 논문인 〈아나키즘의 도덕〉을 포함시켰어야 할 텐데(이을규 번역본에는 〈아나키즘의 도덕〉이 들어 있다) 중요한 논문은 삭제하고 있다.

필자가 지나간 이미 오래된 책의 표절 여부를 시시콜콜 따지는 것은 두 가지 의미를 함축하고 있다: 첫째; 하 교수의 이런 ‘책 만들기’가 혹시 철학자로서의 학문적 엄밀성을 훼손하지나 않을지 염려하는 것이고, 둘째로는 후세대 아나키즘 연구자들이 하교수가 이룩한 연구 성과를 뛰어넘어 새 지평을 열기 위해서는 먼저 간 이의 오류를 반복하지 말자는 자성의 의미도 담겨 있다. 하여간 하 교수의 아나키즘 관련 저서와 역서를 보면서 지난 60년간 한국 아나키즘의 질곡의 역사를 보는 것 같아 아쉬웠다. 하지만 지난 60년간 한국 아나키즘의 살아있는 역사로 자리매김 되어 온 하 교수의 위상은 확고하다 하겠다. 필자의 비판은 그의 아나키즘운동사와 이념사에서 그가 차지하는 위상과 역할을 훼손하려는 의도는 아니다.

7. 결별: 새 시대의 아나키즘을 위하여

우리는 하 교수의 자주인 철학을 넘어서야 한다. 그것은 시대에 뒤진 것이어서가 아니라, 하 교수의 아나키즘이 안고 있는 이론적 한계 때문이다. 아나키즘은 역사 속에서 한 번도 주류에 속해 본적이 없다. 유럽에서 아나키즘은 19세기 사회개혁운동의 한 영역으로 등장하였다. 이는 노동운동과 사회주의운동과 밀접한 연관을 가지고 있다. 일제하 한국 아나키스트들은 이런 사회관계적 맥락을 무시하고, 아나키즘을 민족해방운동에 적용하였으며, 해방 후에는 현실정치의 힘의 관계 내에서 자신들의 위치를 정하고자 했다. 그러나 일제하에서의 민족해방투쟁은 일정한 성과를 거두었다고 평가할 수 있는 면이 있지만, 해방 후의 정치적 행위들은 번번이 실패하였다. 더욱 문제인 것은 그 실패가 마치 훈장인 양 기록되어 “운동사”라는 이름을 붙이고 있다는 점이다. 물론 실패의 기록도 성공사례 만큼이나 중요하다. 그러나 ‘기록으로 남기기 위한 실패’는 용납할 수 없는 것이다. 필자는 한국 아나키즘운동사를 보면서 무수히 많은 ‘기록남기기 행위들’에 실망하지 않을 수 없었다.

또 한 가지 한국 아나키즘의 편향성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윌리엄 고드윈이나 막스 슈티르너, 크로포트킨에게 큰 영향을 주었던 란다우어의 개인주의적 아나키즘 사상은 전혀 언급되지 않고 있으며, 대부분의 아나키스트들은 사회적 아나키즘[26]만을 논의해왔다. 사회를 단순히 개인의 집합으로 보는 원자론적 관점(슈티르너), 그리고 미국 아나키즘의 한 흐름으로 소로우(H.D. Thoreau), 휘트먼(W. Whitman), 워렌의 논의는 완전히 무시되고 있다. 개인주의적 아나키즘은 고전적인 자유주의의 이념과 흡사한데, 한국에서는 개인주의적 아나키즘의 설득력 있는 형이상학적 논변을 무시한다. 사회적 아나키즘은 자유, 선, 정의, 의무 등 개인과 도덕의 문제를 적극적으로 해명하지 못하는 한계를 그냥 떠안고 있다. 물론 막스 슈티르너의 극단적으로 이기적인 아나키즘이 사회문제를 해결함에 있어서 많은 한계를 가지는 것이지만, 한국 아나키즘은 앞으로 개인과 사회의 도덕적 갈등을 해소함에 있어서 고드윈 식의 절충이 필요하다고 본다. 본고는 아나키즘 이론을 소개하는 자리가 아니므로 고드윈, 슈티르너, 란다우어의 아나키즘에 대한 논의를 길게 끌고 가지는 않을 것이다.

나는 아나키즘을 정치적 기제mechanism로 보는데 반대한다. 최근 들어 아나키즘이 세간의 주목을 받는 이유도 정치적 기제로서가 아니라, 아나키즘이 ‘시민공동체적 삶의 원리’로서의 가능성을 보여주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새로운 시대의 아나키즘은 그런 방향에서 재정립되어야 한다. 아래에서는 새로운 시대의 아나키즘, 그 대강을 밝히고자 한다:

지금 한국에는 하나의 유령이 배회하고 있다. 그것은 아나키즘이라는 유령이다! 이 유령은 그러나 혁명에 대한 불길한 예감을 주는 것이 아니라, ‘위기 증후군’에 시달리는 한국사회의 지성에게 신선한 충격과 함께, 하나의 ‘오래된 미래기획’으로 다가오고 있다. 지난 세기에 실패한 귀신이 어째서 지금 더욱 복잡하고 정보화된 한국 사회를 배회하고 있는가? 산업사회 초기에 유럽에서 등장한 ‘아나키적인 삶의 양식’은 하루가 다르게 증가하는 ‘사회적 생산력’의 발전에 고무된 다수의 부르주아지들을 사로잡기에는 분명 역부족이었다. 그래서 아나키즘은 우리들의 추억 속에 ‘허무적인 테러나 극단적인 파괴주의’로 각인刻印되어 왔다. 추억 속의 아나키즘을 우리는 한동안 ‘무정부주의’라고 불렀었다.

시민사회를 허물고 등장한 근대 국민국가에서 권력과 지배권은 무한히 집중되고 있다. 권력과 폭력수단의 집중은 자본주의적 ‘세계기획’과 뜻을 같이하고 있다. 그래서 거기에선 마르크스주의와 레닌주의의 정교한 조직이론과 혁명이론이 ‘자본주의적 세계기획’에 대적하는 가장 강력한 카운터파트counterpart였다. 자본의 팽창과 함께 증가하는 산업예비군들, 그들의 혁명 역량에 기대를 걸고 마르크스도, 엥겔스도, 레닌도 내일 당장 장밋빛 혁명의 아침이 오리라고 믿었다. 사실 19세기 유럽 노동운동의 성실한 서기書記역을 자임했던 칼 마르크스는 그가 프롤레타리아의 혁명 역량을 너무 높이 평가했던 죄밖에 없다. 노동자 해방운동과 결부되어 나타난 유럽 사회주의 운동의 100년 생애는 그러나 우리에게 혁명의 찬란한 아침이란 어디에도 없다는 것을 가르쳐 줄 뿐이다.

이제 세상은 바뀌었고, 현대사회에서 권력과 폭력의 독점은 ‘카리스마적 권위’나 ‘완력’, 혹은 ‘공장 굴뚝으로부터’ 나오지 않는다. 그것은 네트워크로부터 나온다. 정보화사회에서 중앙집중적 거대 권력은 급속하게 분산되고 있다. 수십만, 수백만이 하나의 깃발 아래 모여 오직 하나의 목표―‘내일 아침의 혁명을 위하여’ 일사분란하게 움직이지 않는다. 따라서 정보화사회에서 사회운동은 어떤 통일적인 목표도 지향하지 않는다. 바로 아나키즘의 원리이다. 주지하고 계시듯이, 아나키즘은 중심을 전복함으로써 하루아침에 세상을 바꾸려는 혁명적 방법보다는 저변, 주변을 허무는 다중심적인 행위규범을 선호한다. 페미니즘운동, 환경 · 생태운동, 반전 · 반핵운동, 지역분권주의 운동, 평화운동, 소비자운동 등 신사회운동의 다양한 스펙트럼은 그것을 잘 말해 주고 있다. 이제 신사회운동을 위한 사회이론, 그 도매상 역할은 낡은 ‘무정부주의’가 아닌 ‘신아나키즘’이 담당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아나키즘은 일원론으로부터 ‘다원론’으로, 대립과 갈등에서 ‘상호주의’로, 환원주의적 사고에서 ‘반환원주의’로, 경쟁의 논리에서 ‘협동적 참여의 논리’를 표방하고 있기 때문에, 신사회운동과 논리적 정합성을 갖는다고 믿는다.

나는 인도주의적 아나키즘의 한 유형으로 ‘에코아나키즘’을 신아나키즘의 원류로 삼고자 한다. 크로포트킨이 선언하고 있듯이, 아나키즘은 사회를 배타적인 개인들의 집합이 아니라, 상호 협동하는 사회적 개인들의 집합으로 이해하고 있다. 그래서 나는 감히 “아나키즘의 사회조직 원리는 자본주의의 등장과 더불어 파괴된 인간의 존재의 본질을 더욱 가까이서 바라보게 하는 우리의 존재의 고향Heimat”이라고 말하고자 한다. 하이데거(M. Heidegegr)의 멋진 부연설명을 기억하며, 한마디 더 첨가하면; ‘고향은 실존을 그리워하는 현존의 가상현실’이며, 이는 아나키즘을 통해 복원될 수 있으며, 복원되어야 한다.

우리는 이 그리움을 아나키즘의 이상으로 실현코자 한다. 아마 거기에선 아침에 낚시하고, 오후엔 밭을 갈고, 저녁엔 무도회에 나가서 춤을 추고, 늦은 밤엔 교양 있는 이웃과 철학을 토론하는 그런 곳일 것이다. 마르크스가 희망했던 것과 아주 똑같이 … 그러나 아나키즘은 능력에 따라 일하고 필요에 따라 분배되는 그런 공산사회(마르크스)가 아니라, 필요한 만큼 일하고, 일한 만큼 분배받는 ‘자유사회’일 것이다. 이제 나는 아나키즘의 이론적 지평을 열어 보임으로써 생태 · 환경운동, 공동체운동 등 신사회운동의 이론적 동일성을 제시하고자 한다. 아나키의 ‘상호부조에 의한 공산적 자유’, ‘권력과 위계 없음’, ‘폭력의 거부’라는 대명제는 생태 · 환경의 위기 시대를 사는 우리가 한 번 기대어봄직한 매력적인 담론들을 포함하고 있다. 후기 산업사회의 위기 증후는 허무적인 자조와 자기파괴적인 경향이 아니라, 삶에 대한 강한 긍정과 주체의 의지로써 회복될 수 있으며, 그런 방식으로 회복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에코아나키즘은 ‘자본의 높은 언덕을 넘어 아나키 공동체의 견소포박見素包朴한 마을로 들어가려는 사람들에게 튼튼한 이성의 지팡이’가 될 것이다.

8. 결 어

글을 마감하면서 1993년 여름 하회마을에서 있었던 학술대회에서 있었던 에피소드를 소개하고자 한다: 그해 8월 14~15일 양일간 전국의 아나키즘 연구자 48명이 참가하여 학술발표회를 가졌다. 논문발표와 회의로 진행된 모임은 매우 인상적이었다. 특히 밤에 있었던 모닥불 파티는 참석자 모두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다. 그런데 2일째 하오 폐회에 즈음하여 선생께서는 필자를 부르더니, “이보게, 구 동지! 폐회에 앞서 ‘결정문’을 채택해야 하지 않겠는가?” 나는 깜짝 놀라 “아니 무슨 결정문을 말씀하십니까?”라고 반문했고, 참석자들과의 협의한 후에 결정하겠노라고 얼버무렸다. 결국 선생의 “결정문 채택” 주장을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그때 필자는 사실 ‘결정문’이라는 말에 〈한국아나키스트 하회선언〉쯤으로 생각했고, 학술행사에서 그런 발상을 한다는 건 이해할 수 없었으며, “지금이 독립운동 하던 시대인가? 무슨 결정문을 채택한단 말인가!”라고 불편하게 생각했다. 물론 지난 50년간 한국에서 아나키즘은 탁상공론이 아니라, 강력한 실천적 무기로 인식되어 왔으며, 또 그렇게 해야만 살아남을 수 있었던 시대적 한계를 가지고 있었던 점을 고려하면 선생의 발상을 이해할 수 없는 것은 아니지만, 소위 신세대 아나키스트로서는 ‘당혹스러움’ 그것이었다. 그 후에도 이 이야기는 종종 에피소드로 회자되었다. 필자로서는 당시 하 교수가 거창한 ‘정치적 선언문’을 염두에 둔 것이 아니라, 아마도 ‘기록’으로 ‘흔적’을 남기자는 뜻이었을 걸로 이해하고 싶다.


[1] 필자보다는 박연규 씨가 하기락 선생으로부터 더 많은 영향을 받았던 듯싶다. 나는 선생으로부터 직접 를 만들라는 주문을 받은 적은 없고, 주로 박연규 씨로부터 전해 듣는 입장이었다. 월례발표에 꼭꼭 참석한 사람은 구승회, 김상은, 김진철, 박연규, 송재학, 윤용택, 이강대, 임해수, 정상봉, 조기현, 최찬식, 하기락, 등이었다.

[2] 이 글은 나중에 구승회/김성국 외, 『아나키, 환경, 공동체』, 서울: 모색출판사 1996에 수록되었다.

[3] 김정길, 「월간 조선」, 인터뷰기사, 1993년 6월호, 476-481쪽.

[4] 독립운동사 자료집 13, 『학생독립운동사』, 1178-1185면, 인용은 『한국아나키즘운동사』, 대구: 형설출판사 1978, 428쪽.

[5] 김정길, 「월간 조선」, 인터뷰기사, 1993년 6월호, 477쪽.

[6] 양일동은 박정희의 5·16 쿠테타정권에 의해 10여 년간 정치규제에서 묶여 있었다. 1972년 해금된 그는 2월 정화암, 하기락 등과 규합하여 “자주 · 민주 · 통일”의 원칙하에 《민주통일당》을 조직하였다. 당위원장은 양일동이었다. 그러나 이 당은 다시 10년이 못 되어 전두환 군사정권에 의해 와해된다.

[7] 이에 대해서는 오장환, 〈1920년대 초기 국내 사회주의 수용기의 아나키즘적 경향에 관한 일고찰〉, 자유사회연구회 편, 『아나키즘연구』, 1호(1995), 57-81쪽 참조.

[8] 1925년 9월에 대구에서 결성된 《진우연맹》은 명백히 국내 최초의 아나키즘 연구단체이다. 1928년의 “진주아나키스트사건”, 29년의 《마산아나키스트그룹》과 《창원흑우연맹》 등 20년대에 일어난 크고 작은 아나키즘 관련 사건은 선생과의 직접적인 연관이 없으므로 본고에서는 다루지 않는다.

[9] 1925년 의 결성이 그 시발이다.

[10] 조선무정부주의운동사 편찬위원회, 『한국아나키즘운동사―전편, 민족해방투쟁』, 대구: 형설출판사 1978, 203쪽.

[11] 위와 같은 책, 208쪽.

[12] 위와 같은 책, 212쪽.

[13] 조오지 우드코크/하기락 옮김, 『아니키즘―사상편』, 대구: 형설출판사 1981, 번역자 서문.

[14] 하기락, 『자기를 해방하려는 백성들의 의지』, 부산: 신명출판사 1993, 강령. 353-4쪽.

[15] 위와 같은 책, 399-400쪽.

[16] 〈역사의 발전과 인간의 해방〉. 이 글은 1995년 5월 13일 이화여대에서 열린 광복50주년 기념 학술발표회에서 기조발표한 원고임.

[17] 하기락, 〈조국통일 발의문〉, 별쇄본 91쪽. 이런 표현은 이미 『한국아나키즘운동사』의 〈서문〉에도 나온다.

[18] 하기락, 『탈환』, 대구: 형설출판사, 3쪽.

[19] 저작자는 《조선무정부주의운동사 편찬위원회》인데 책의 제목은 『한국아나키즘운동사』이다. 이런 통일되지 않은 용어를 쓴 것으로 보아서 원 저작자들은 ‘무정부주의’를, 하기락은 '아나키즘'을 주장한 것 같다.

[20] 최갑룡, 『어느 혁명가의 일생』, 대구: 이문출판사 1995, 64-66쪽.

[21] 조선무정부주의운동사 편찬위원회, 『한국아나키즘운동사―전편, 민족해방투쟁』, 대구: 형설출판사 1978, 459쪽. 이 기록은 위원장 정화암의 명의로 되어 있다.

[22] 최갑룡, 『어느 혁명가의 일생』, 대구: 이문출판사 1995, 67쪽. 괄호 안은 필자 추가.

[23] G.W.F. Hegel, Grundlinien der Philosophie des Rechts, Suhrkamp Werke Bd.7, Vorrede S.28.

[24] 피터 크로포트킨/이을규 역, 『현대과학과 아나키즘』, 서울: 창문각 1973, 218쪽.

[25] 피터 크로포트킨/하기락 역, 『근대과학과 아나키즘』, 부산: 신명출판사 1993. 이 책에는 샘 돌고프/박연규 역, 『현대산업사회와 아나키즘』이라는 30쪽 정도의 논문이 함께 실려 있다.

[26] 상호부조적 아나키즘(mutualist anarchism), 집산적 아나키즘(collectivist anarchism), 공산주의적(공동체적) 아나키즘(communist anarchism), 아나르코 생디칼리즘(anarcho-syndicalism) 등을 들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