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itle 남자는 페미니스트가 될 수 없다 #author 키야 #SORTtopics 아나르카 페미니즘, 페미니즘, 가부장제, 성해방 #date 2022년 1월 12일 #lang en #pubdate 2022-01-12T08:26:38 난 아래 문제에 대해 파격적인 이론을 제기할 만큼 똑똑하지도, 새로운 관점을 제시할 만한 사회적 위치에 놓이지도 않았다. 페미니즘에 관심이 없는 사람을 설득할 수도 없을 것이고, 이 주제에 대해 박식한 자는 콧방귀 뀌며 넘길 수도 있다. 다만, 독자가 페미니스트 운동에 의욕이 앞서 페미니스트를 자칭하는 시스젠더 남성이라면 이 문제에 대한 다음과 같은 내 관점을 공유한다. 성과 젠더에 대한 내 생각들을 모아 놓고 분석해본다면, 페미니즘의 요소가 많겠지만, 난 페미니스트라 자칭하지 않는다. 남자는 페미니스트가 될 수 없기 때문이다. 아직 철이 덜 든 사람들은 페미니즘을 여성우월주의과 동치라고 여기겠지만, 그들이 뭐라 하든, 페미니즘은 성과 젠더간의 억압적인 관계를 허물고 평등한 사회를 만들기 위한 운동이다. 조금 더 구체적으론, 성 차별주의와 가부장제를 없애는 것이 페미니즘의 목표이다. 남성이 주도하는 체제에 반대하고 맞서는 운동이기 때문에 “여성주의”, 즉 페미니즘(feminism)인 것이다. 가부장제는 남성의 사회적 권위와 통치를 정당하게 여기는 위계구조이다. 즉, 남성이 아닌 모든 이, 특히 여성을 복종시키는 체계이다. 여성이 단순히 여성이라는 이유로 사회적 하위계층에 놓이고, 같은 원리로 남성은 단순히 남성이라는 이유로 다른 모든 성과 젠더의 머리 위에 놓인다. 이렇게 남성과 여성은 서로 대립구조에 놓여, 한쪽에게는 특권을, 다른 하나에는 억압을 선사한다. 이런 가부장제는 지배자가 될 남성과 피지배자가 될 나머지 성들이 존재해야만 성립한다. 때문에, 성 차별적인 환경에서 자라 이 부조리를 내면화하고, 수많은 이들의 고통을 유발하는 가부장제의 혜택을 누리는 남성은 그 존재 자체가 여성과 다른 모든 성과 젠더에게는 억압적이다[1]. 일부 남성은 그 특권을 누린다는 것을 체감하지 않을 수 있다. 또 일부는 심지어 여성보다 불리한 상황에 처했을 수 있다. 나아가 모든 여성이 남성보다 아래에 놓이지 않았다는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이는 가부장제에 의한 불평등이 존재하지 않는 것이 아닌 “교차성”(intersectionality)에 의한 것이다. 사회는 복합적인 상호작용으로 이뤄져 있다. 사람이 다른 사람과 관계를 맺을 수 있는 방법은 무수히 많고, 이때 형성될 수 있는 억압적 관계의 종류도 그만큼 많다. 투표권을 지닌 노동자 양성애자 시스젠더 장애인 남성과, 건강한 신체를 지닌 외국인 트랜스젠더 부르주아 여성이 있다면, 이들 중 누가 절대적으로 더 나은 위치에 놓였을까? 다양한 사회정치적 요소가 서로 엇갈려 편의를 받거나 해를 입는 것이 교차성이다. 어느 한 방면에서는 억압을 행하는 자는 다른 여러 방면에서는 억압을 받는 자가 될 수 있다. 물론 성 차별주의와 가부장제는 여성에게만 해로운 것이 아니다. 남성도 이런 체제의 피해를 입을 수 있다. 이상적인 남성성을 충족하지 못하는 남자도 결국에는 사회적으로 매장을 당한다. 하지만, 사회적으로 요구된 남성성을 충족한 남자는 지배자가 될 수 있어도, 여성성을 충족한 “완벽한” 여성은 결국 남자의 지배를 받는 여성이다. 가부장제 사회의 눈에 “최고의 여성”은 남자가 거느리기 편한 아랫것에 지나지 않는다. 서로 같은 총의 피해를 입는다 해도, 하나는 반동 때문에 개머리판에 걸친 어깨가 나가는 정도이고, 다른 하나는 발사된 총알을 맞는 상황이다. 가부장제의 특권을 누리는 자가 이 사실을 자각하지 않고 있다는 것은 어찌 보면 억압적 체계가 의도대로 유지되고 있음을 보이기도 한다. 특권을 누리는 자는 그 불평등한 상태가 자신에게는 해롭지 않기에 자연스럽다 여기기 마련이다. 남자인 우리는 비록 남자이기에 겪은 압박감과 부당함을 알아도, 여성이기에 겪는 고통을 알 수는 없다. 막을 수 없는 생리를 법적으로 보호받아야 하는 것, 가족 내에서 여성이기에 항상 뒷전에 남겨지는 것, 실패를 하면 여성이기에 당연하고 성공을 해도 자신의 성공이 아닌 “특출난 여성”의 성공으로 기억되는 것, 압도적으로 높은 성폭력을 당할 확률과 폭력을 당해도 낙인은 피해자에게 찍히는 것, 대부분의 정신적 육체적 압박을 책임져야 하는 육아를 도맡는 것은 선택이 아닌 자연스러운 사실로 여겨진다는 것, 자신의 신체를 상징적으로 토막내 값을 메기는 사회에서 산다는 것... 이 말고도 수많은 형태의 억압을 받으며 살지 않는 것이 성 차별 가부장제 사회에서 특권층인 남자로서 사는 것이다. 이런 특별한 취급을 받는 것을 거부하더라도, 성 차별적 사회의 구조는 남자의 발 밑에 여성을 굴복시킨다. 가부장제가 사람의 의사를 고려했다면 과연 억압적일까? 특권은 그것을 누리는 자와 누리지 못하는 자를 구별 지어야만 성립하기에, 남자로서 존재하는 것 자체가 억압자가 되는 것이다. 남자로서 존재하기에, 여성의 고통에 공감하고 이에 연대할 수는 있어도, 이를 절대로 체감할 수 없고, 진정으로 이해할 수 없다. 내가 페미니스트를 자칭하지 않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사회는 날 남성으로 인식하기에 내게는 그에 따른 기회가 더 주어진다. 나는 페미니즘이라는 강령을 통하지 않아도 사람들이 내 생각을 듣게 할 수 있다. 페미니즘이 기껏 마련한 남성의 억압이 존재하지 않는 안전지대에 내가 끼어들어 그곳의 다른 성과 젠더의 사람들을 억압하고 싶지 않다. 세상이 들어야 하는 것은 페미니스트들의 목소리이지, 나와 같은 또 하나의 남성의 목소리가 아니다. 페미니스트 운동에 있어 남자로서 내 역할은, 그들의 목소리를 듣고, 나와 내 주변의 남자들이 행하는 억압을 멈추고 남자로서 가부장제에 도전을 거는 것이다. 성 평등은 우리 모두에게 이로운 것이지만, 성 차별과 가부장제에 맞서 싸우는 것은 남자가 아닌 이들의 몫이다. 남자인 우리들은 그들에게 길을 내어주고 도움이 필요할 때 연대를 하는, 이 투쟁의 주도권을 쥔 페미니스트가 아닌, 동맹자의 역할에서 그친다. 우리는 우리가 누리는 특권을 인지하고, 다른 모든 성의 고통에 공감하고, 페미니스트의 투쟁에 연대하지만, 그들의 목소리와 주도권을 대체할 생각은 없다. 페미니스트를 자칭하지 않는 것은 이러한 현실을 이해하는 것이다: 남자는 페미니스트가 될 수 없다.
[1] 이 내용을 자신의 정체성에 대한 공격으로 받아들이거나, 자신의 남성성에 죄책감과 무기력함을 느낀 이들을 위해 다음을 강조한다. 이 문제는 “악한 사람” 또는 “착한 사람”에 의한 문제가 아니다. 복합적인 체계가 한 성을 다른 나머지 성 위에다가 놓은, 개개인의 문제가 아닌 우리 모두를 에워싸는 구조상의 문제이다. 위 내용은 모든 남자가 필연적으로 “악”하다는 말이 아닌, 억압적인 성 차별적 구조의 꼭대기에 놓였다는 말이다. 아나키스트라면 이러한 구조적인 문제가 존재한다는 사실은 이해하기 어렵지 않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