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itle: 폭력론 노트
Subtitle: 비폭력 직접행동이란 무엇인가
Authors: 꼬오, 무까이, 向井,
Date: 2002
Source: http://blog.jinbo.net/attach/394/1149567404.pdf
Notes: 환경과 反차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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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국어판을 내면서

      2002년의 유언

    Ⅰ. 생명력

      비폭력과 아나키즘

      생명력으로서의 폭력과 비폭력

    Ⅱ. 폭력이란 무엇인가?

      폭력의 정의

      폭력지배의 의사비폭력(擬似非暴力) 체제화

    Ⅲ. 간디의 비폭력, 그 의미

      직접행동 ― 비폭력의 가시화(可視化)

      극한(極限) 상황에서의 문제

    Ⅳ. 국가와 전쟁

      권력의 본질로서의 폭력과 그 가면

      오직 비전(非戰)밖에 없다!

      베이유의 전쟁론

    Ⅴ. 비폭력이란 무엇인가

      비폭력과 의사비폭력 체제

      비폭력의 인민성

    Ⅵ. 의사비폭력 체제와 민주주의

      민주주의라는 의사비폭력 체제화

      의사비폭력과의 싸움

    Ⅶ. 게릴라, 인민성의 문제

      게릴라, 그 의미와 행방

      사파티스타가 시사하는 것

      ‘폭력단’의 의미

      테러에 대하여

    Ⅷ. 비폭력 직접행동이란 무엇인가

      생산노동ㆍ창조ㆍ유희

      자치와 관리

      간디의 소금행진

    Ⅸ. 비폭력 직접행동, 몇 가지 문제

      소수파의 노동운동

      공동체 등의 의미

      라르자크 공동체의 보베, 기타

    Ⅹ. 한사람의 무리(群)로

      생산점ㆍ생활점과 시민노동자

      시민노동자에서 잡민(雜民)으로

    부록 1. 지극히 사적․탈선적으로

      입장과 관계

      약한 자의 폭력과 비폭력

      조직과 그 내부 공격성

      폭력의 변질과 전환

      의사비폭력 체제의 현실

      비폭력 직접행동이란 무엇인가

      역사와 비폭력 행동, 여자들

    부록 2. 테러를 초월하는 것

      문제 제기 1 ― (오끼나와)

      문제 제기 2 ― (테러)

      절대상황과 테러

      비폭력 직접행동이란

    부록 3. 폭력론 노트 보충[補遺]

    해설을 대신해서 - 내게비폭력직접행동이란무엇인가

      편집후기

      「黑」 간행동인(刊行同人) 소개

      한국어판 편집후기


한국어판을 내면서

한국어판을 내면서 일본판에서 빠뜨렸던 것을 한 가지 첨가하겠다.

그것은, 지금 일본에서는 완전히 방치되어 논의조차 없는 일이지만, 생각하건대 이웃나라 한국이나 기타 여러나라에서 병역 해당연령의 젊은이들의 절실한, 쉽게 기피할 수도 없어 구체적으로 대응할 수밖에 없는 병역 문제가 현실적인 삶의 문제라고 하겠다.

*

그러니까 벌써 2년쯤 전의 일이었던 듯 한데 나는 한국 청년 붕어의 얘기를 들었던 것이다. 붕어군은 자기의 징병 검사를 앞두고 징병 거부를 선언하고 싸우고 있다고 했다. 나는 큰 충격을 받았다. 며칠 동안 멍하니, 아무 일도 손에 잡지 못한 채, 사고 정지 상태에 빠졌었다. 결코 허풍을 떠는 게 아니다. 그 후부터 나는 어쩌다가 ‘한국’이라는 말을 들으면 우선 반사 적으로 생각하는 것은 ‘징병제도’라는 말이다.

*

붕어군의 일이 없었다면 아마도 나는 ‘일본의 평화 헌법’에 도취해서 징병이니 병역이니 군대니 하는 것을 전혀 생각하지 않고 살고 있었을 것이다. 대부분의 일본 사람이 그런 것처럼(국가는 이렇게 모든 일에서 우리들을 국민으로 만들었다!).

나도 사실 베트남 반전운동이 들끓었을 때 ― 1960년대 ― 에는 ‘JATEC(탈주병 원조 조직)’에 조금 관계했었는데 도망 나온 미국군인[그 중에는 망명을 요구한 김동희(金東希)? 라는 이름을 가진 군인이 있었다는 것을 기억한다]을 도와 주거나 했는데 매년 12월 1일로 정한 WRI의 Prisoner’s Day 때는 우리에게 온 세계각국의 CO(Conscience Objection, 양심적 병역거부자) 명단에 있는 수감자 수백명에게 격려카드를 차입해주기도 했다(이스라 엘 형무소에 50여명이 갇혀 있었다. 너무 많아서 지금도 기억한다). 또 휴일에 외출한 자 위대원들에게 반전삐라를 살포하는 일을 한 적도 있었다.

그러다가 베트남 전쟁이 끝나자 어느덧 뚝 끊어졌는데, 생각하니 그게 벌써 30년이라는 망각의 세월이 흘러갔으며 이제는 그러한 공백조차 자각하지 않는 일상생활에 떠밀려오다 가, 그게 그러니까 붕어군의 얘기를 듣고 이제 새삼스레 깜짝 놀라게 되었으니 내가 불감증 에 걸렸던 것이 아닌지 모르겠다.

*

각설하고 이쯤해서 단박에 결론으로 비약한다. ‘폭력론 노트’를 들출 것도 없이 우리들 의 일상은 항상 ‘의사비폭력 체제하’에 존재한다는 것이다. 이 경우 (일본에서는) 평화헌법 에 도취되어 지금은 징병제가 면제된다는 것을 전혀 자각하지 않고 살아가고 있는데 (한국 에서는) 징병제도가 마치 당연한 것처럼 존재한다. 붕어군은 이런 상황에(한국과 일본) 돌 멩이를 던졌던 것이다. 다시 말하면 그것이 오히려 특별하고 이상한 일이 되고 말았는데, 이것은 일상에서 비일상성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리고 일본에서는 평화헌법 도취나 징병제 불감증이나 모두 똑같이 의사비폭력 체제하에서 무의식, 무자각으로 우리들의 의식의 토대 를 이루는 사회적 구조이다. 그것을 밝히는 게 바로 『폭력론 노트 ― 비폭력 직접행동이란 무엇인가』에서 말하려는 핵심이라고 해도 된다. 붕어군의 행동은 그래서 의미가 크다.

(부기)

근자에 건강이 좋지 않은 탓에 짧은 글인데도 뜻을 담아내지 못했다.

2003. 2. 26

무까이 꼬오(向井 孝)

2002년의 유언[1]

- 간행의 변 -

20세기를 ‘전쟁과 혁명의 세기’라는 이가 있다. 그렇다면 나는 1920년에 태어났으니까 내 생애는 완전히 20세기 안에서 살아온 것에다가 덤으로 21세기를 맞이하는 격이다. 다시 말해서 거의 전부, 일생이 20세기로 끝났다고 해도 괜찮을 것 같다.

그런데 9.11 이후에 나온 게 ‘테러에도 전쟁에도 반대’라는 그럴듯한, 일단은 누구든지 반대할 수 없는 슬로건이다.

이것 때문에 세계의 양상은 일변했다. 그때까지 의사적 비폭력 자세를 취하고 있던 여 러 국가는 그들이 가지는 위압적이고 압도적인 군사력을 드러내 놓고 반테러 전쟁을 정의 라고 하면서 테러사냥이란 명목으로 복종을 거부하는 전세계 인민에게 선전을 포고한 것이 다. 새로운 21세기는 진실로 그러한 미국의 1국 지배를 선두로 한 ‘반테러 전쟁국가와 인민 과의 싸움’의 세기로 시작되었다고 해도 좋다. 반테러 전쟁을 정의라는 명목으로 세계를 지배하려는 미국과, 이를 추종하는 국가들. 그러한 입장에 서서 오늘의 세계 상황을 재정립한다면 반테러 국가군에 대한 인민의 비폭력 직접행동의 움직임이 바야흐로 세계로 확대되기 시작했다고 할 수 있다. 아니 그보다도 이제 비폭력 직접행동밖에 없다는 것을 차츰 알아차릴 수 있게 되었다.

다시 한 번 말한다. 20세기의 ‘전쟁과 혁명’은 21세기에는 반테러 전쟁국가들과 인민과 의 대치상황에서 시작되었다. 오직 비폭력만을 말할 수밖에 없는 사람들이 새삼스레 내세우 는 것이 비폭력 직접행동이라는 것을, 지금처럼 강력하고 명확하게 얘기해야 할 때는 없었 다. 이것이 『현대 폭력론 노트』 개정판을 간행하게 된 이유이다.

2002. 12. 13 무까이 꼬오(向井 孝)

Ⅰ. 생명력

비폭력과 아나키즘

인민의 저항은 반드시 지배자의 폭력적 억압에 부딪친다. 그래서 지배권력에 대한 항쟁 은 결국 폭력적 대결로 발전하게 된다. 이러한 논리의 귀결은 자위를 위해서 ― 독립을 위 해서 ― 해방을 위해서 ― 혁명을 위해서 ― 폭동․봉기․게릴라․내란으로 나타나는 인민 의 대항폭력 〓 군사무장을 당연한 것으로 만든다.

그러나 지금 우리들이 당면한 21세기, 특히 9․11 이후의 세계가 명백하게 보여준 시 대상황과 질(質)은 과거와 명확하게 다르다. ‘테러’에 대해서 압도적 장비를 구사해서 반테 러 전쟁을 일으키는 큰 정부와 전쟁국가군(戰爭國家群)의 출현과, 전쟁이라는 재앙을 만들 어 내는 폭력기구로서의 국가에 어떻게 대항하는가, 이 모든 문제를 집약한 것이 우리들의 전면에 무겁게 내걸어졌다. 따라서 비전(非戰)을 주장하고 테러의 의미를 묻는 것은, 국가 권력에 대응할 때 피아(彼我)의 폭력, 그 자체의 본질에 대한 고찰을 하지 않을 수 없게 한 다.

먼저 결론부터 말하면, 그것은 1989년 이후 동유럽국가나 소비에트 러시아가 허망하게 붕괴함으로써 남겨놓은 20세기의 교훈 ― 사회주의나 민주주의를 표방하면서, 더구나 폭력 이 이끌어간 국가나 조직은 그 스스로 공포 그 자체인 권력으로 변한다. 그러한 폭력적 강 권은 반드시 반혁명을 가져올 수밖에 없다 ― 을 역사로 마음에 새기면서 새삼 새로운 우 리들의 투쟁 ― 비폭력 직접행동 ― 을 발견하지 않으면 안되는 것이다.

아나키스트가 비폭력을 주장하는 것은 특별히 새로운 일은 아니다. 그러나 흔히 일부의 입장에 그치고 때로는 경시되기도 했다. 아직까지도 아나키스트가 폭탄의 전설에 둘러싸여 져 있는 것은 ‘직접행동’을 개인의 생명 그 자체로 구현하지 않으면 안되었던 시대상황과도 관련이 있다. 그것은 아나키즘 안에 있는 비폭력 직접행동에의 본질지향이 오히려 고립된 개인을 부추겨서 대극적(對極的) 폭력 ― 폭력에 대항하는 정반대의 폭력 ― 즉 반폭력(反暴力)을 향해서 돌진하게 하는 역설적 전화라 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러한 전화의 의미를 밝혀내지 못하고 또 논리의 맥락을 스스로도 잃게 됨으로써 아나키즘은 한때 보통 사람들과 연대하지 못하면서 수십년의 침체를 면치 못했던 것이다.

일본에서 비폭력 사상은 ‘무저항’, ‘불복종주의’라고 번역되면서 종교적 신조(信條)쯤으로 받아들여져 오랫동안 그 적극적 의미가 묻혀 있었다. 그러나 WRI(War Resisters’ International ― 전쟁저항자 인터내셔널)가 “비폭력 직접행동이야말로 인민고유의 원리이고 방법이다”라고 표명했고, 영국의 100인위원회가 “비폭력 직접행동을 투쟁의 기조로 한다”고 선언한 바와 같이, 1960년대에 들어와 비폭력 사상은 각 지역 인민의 투쟁에 새로운 시야를 열어젖히면서 마침내 이 나라에서도 그 적극적 의미를 논하게 되었다.

이 노트는 최근 조금씩 안이하게 논의되는 비폭력과 비폭력 직접행동의 내용에 대한 오 해, 유행(流行)에 대해서 아나키즘의 입장에서, 특히 비폭력과 직접행동을 나눌 수 없는 일 체로 결합시켜 파악하고자 한다. 이것은 또 우리들 인민만이 갖는 힘으로서, 나아가 저항의 원리이자 방법으로서 비폭력 직접행동에 새로운 관점을 시사하는 것이 되어야만 할 것이다.

우리들은 현재, 이미 어떠한 체제와 기구를 파괴해야 하는지를 충분히 알고 있다. 그러 나 무엇을 그것에 대체해야 하는지를 잘 모른 채, 여전히 구태의연한 투쟁방법을 쫒아가고 있다. 비폭력 직접행동은 과연 권력의 거대한 폭력에 대항하는 결정적인 것이 될 수 있는가? 이에 대한 실증은 아직까지도 알 수 없는 미래에 존재한다고 밖에 할 수 없다. 그것은 지금 까지의 투쟁의 차원과 질을 그 뿌리에서부터 바꾸는 것과 같은 ― 예를 들면 지금 팔레스 타인에서 행동하는 ‘인간방패’와 같이 ― 힘든 모색과 시험을 거치지 않으면 안된다. 그리고 더 나아가서 새로운 활동의 질과 형태를 창조할 수 있는지가 문제이다. 이러한 과정에서 어 떤 때의 패배, 어떤 때의 무력(無力) ― 그렇다고 인민의 폭력적 대항이 항상 유효하고 승 리했다는 것은 아니다! ― 때문에 또 다시 과거의 폭력신앙으로 회귀해서는 결단코 안될 것이다. 최근 더욱 눈에 띄게 드러나고 있는 ‘반(反)테러전쟁’은 실로 그러한 위기이다.

생명력으로서의 폭력과 비폭력

본래 폭력도, 비폭력도 모두 개인의 생명력, 힘이다. 이것을 무엇보다도 먼저, 명확하게 말해두고 싶다.

생물은 태어난다는 의식 없이 어버이로부터 생을 이어받아, 생명력을 발휘해 죽을 때까 지 삶을 계속하는 힘을 갖는다. 그리고 생명력은 폭력과 비폭력이라는 양극에 걸쳐 나타난 다. 다시 말해서, 유아(幼兒)시에 나타나는 모친독점욕, 학급이나 그룹 보스의 존재, 크고 강한 육체를 향한 동경이나 단련, 자기를 권위있는 사람으로 만들고 싶은 욕망, 권세욕……. 이런 것들은 욕망의 전자(폭력적) 지향이고 성실성이나 근면, 우애, 그리고 생산, 노동, 유희, 창작 등으로 나타나는 일상성의 상황이 후자(비폭력)이다.

우리들의 삶은 그것이 힘으로 존재하는 한, 아이가 어른이 되듯 자연스럽게 이 두 측면 을 왔다갔다하면서 개인을 만들고 사회를 만들어간다. 이 점에서는 이 두 가지 지향은 서로 모순되지 않는다. 오히려 노력이나 격려, 지속적 추구를 위한 에너지로서, 결단, 용기, 인 내력으로, 또 헌신이나 자기희생, 기쁨의 향수(享受)나 창조력의 발현에 모두 불가결한 것 으로 있다.

폭력, 비폭력은 양자 모두 그러한 지극히 자연스러운 힘의 발현이다. 그것이 육체적인 능력으로 나타날 때 스포츠나 각종 경기가 되고 옛날의 무사도나 기사도 정신이 되고 또는 아이들 싸움 등에 나타나는 더 본능적이고 단순명쾌한 분쟁해결의 방법도 된다. 그리고 이 때 육체적 폭력에 따른 승패는 때로 정의(正義)로서 자기주장을 처리하는 방법이자 해결방 법이기도 했다.

Ⅱ. 폭력이란 무엇인가?

폭력의 정의

우리들은 폭력을 논할 때 아무래도 감성적으로 말하게 된다. 그래서 결국에는 논리적 모순과 혼란에 빠져 버린다. 우선 극히 단순하게 폭력에 대해서 정의해 두겠다. 폭력이란, 첫째로, 물리적 압력의 행사이다. 일반적으로 이러한 요건만으로 폭력이라고 규정되고 통용된다. 이것이 폭력론을 혼란에 빠뜨리는 애당초의 이유라고 하겠다.

둘째로, 가해의지의 발동이다. 이를테면 길모퉁이에서 갑자기 사람과 부딪쳐서 상대를 다치게 했다고 하자. 그 때 가해원인이 된 물리적 압력은 고의성이 없기 때문에 폭력이 아 니다. 가해의지가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경찰관이나 군인 개개인의 적에 대한 가해는 명령 이 있었기 때문이지 자기 의지가 아니다. 그렇다면 그때의 물리적 압력의 본질이란 무엇인가?).

셋째는, 자기 입장의 강제나 타자의 존재를 부정하는 ― 대화의 거부이다. 가령, 죽어 가는 환자의 부탁으로 실행하는 안락사는, 가해의 뜻을 갖고 있지만 폭력일 수는 없다. 거 기에 상대방의 뜻에 반해서 또는 뜻의 여하를 무시한 강제는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가해 의 뜻이 없는 것을 폭력이라 할 수 있을까? 폭력이란 소극적으로는 자기방어, 적극적으로 는 자기주장이 타자의 존재까지 규정하고 최종적으로는 타자의 부정이나 거부로 나타나는 것이다(그러면 경관이나 군인은 명령, 즉 자기 의사가 아닌 폭력을 행사하는 장치에 불과하다).

이상 세 가지 요건을 갖추었을 때, 대소강약과 관계없이, 그것은 폭력이다. 세 가지 중 에 하나가 빠져도 그것이 폭력적이라는 말은 들어도, 결코 폭력이 아니다. 둘째와 셋째 요 건만으로는 적어도 물리력을 띠지 않는 한 폭력은 아니며 오히려 비폭력적인 것이라고 밖 에 할 수 없다. 그리고 물리적 압력의 행사, 가해의지의 발동, 자기입장의 강제 또는 타자 의 부정 ― 대화의 거부, 이 세 가지를 완전히 구비하는 것은, 잘 생각해보면, 오직 개인폭력뿐이다.

폭력을 논할 때 반드시라고 할 수 있을 만큼 논의가 혼란에 빠지는 것은 왜일까. 그것은 개인폭력과 사회폭력의 질적 구분을 명확하게 하지 않고 단순히 폭력이라는 말로 뭉뚱그리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폭력의 결과는 그 행사(行使)와 피행사(被行使)의 구분을 따 지지 않고 모두 개인에게 수렴되고 환원된다는 중요한 특질을 깨닫지 못하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기동대라는 조직적 폭력장치의 발동결과는 대원 한 사람 한 사람의 폭력의 집적이다. 그리고 그러한 개인의 육체와 정신은 개별적으로 자기의 폭력행사에서 그 어떤 반응을 받는다. 한편 데모대가 입는 피해는 한 사람의 항의자 피살이거나 다른 참가자의 두부열상, 또는 시민의 안저출혈이다. 그리고 체포되어 재판을 받는 것은 반드시 개인이고 형벌을 받는 것도 그 개인이다. 폭력장치인 집단적 사회조직은 폭력의 결과로 직접적 타격을 받지는 않는다.

그렇다면 지금 우리들은 생명력과 폭력, 폭력과 폭력적, 개인폭력과 사회(조직)폭력, 이런 것들을 흔히 뒤섞어서 다루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우선 폭력의 정의를 엄격하게 바로 잡지 않으면 안된다.

오해를 무릅쓰고 단정하다면, 개인폭력은 사회적으로 거의 문제가 되지 않는다. 그것은 이를테면, 우리들이 폭력범죄에 마주치게 되는 것은 아주 드문 일이고 우연한 재앙과 같다. 그리고 그러한 폭력은 명백히 반사회적이기 때문에 고립되어 지지자나 동조자를 얻을 수 없으며 결국에는 소외되어 사회생활자로서의 일상을 지속하지 못한다. 기껏해야 개인폭력 은, 결국에는 자기파멸 직전까지 이르고마는 일시적인 현상밖에 되지 않는다. 또, 현실사회 에서 개인의 자의적 폭력이 횡행하는 것은 지배자의 권위를 실추시키고 나아가 그 존재기 반을 위태롭게 하기 때문에, 즉시 경찰력이 발동된다. 그렇게 개인폭력은 위법으로 단속된 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폭력이 일상적인 화제가 되고 신변의 문제로 느껴지는 것은 왜일까. 그것은 폭력의 결과가 모두 개인에게 수렴환원되기 때문이다. 비록 그것이 한 개인의 피해나 가해일지라도, 자신의 생사에 관한 직접적인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개인폭력은 사회 적 대응으로써 결국 극복된다는 귀결에도 불구하고 흔히 우리들이 일상생활에서 아직도 폭력을 두려워하는 것은 첫째로, 폭력에 대한 대항수단을 우리들 자신이 행사할 수 없기 때문 에, 둘째로, 우리들이 스스로 폭력에 대항하는 용기를 완전히 잃었기 때문이다. 그것은 우리들 대신에 국가가 폭력을 단속함으로써 우리에게서 일체의 대항수단을 금지하고 한편에 서 우리들은 가축처럼 겁이 많고 유순해져서 태고 때부터 많은 사람들이 가지고 있던, 들짐승에게 맨손으로 덤벼들던 용기를 이제 갖지 못한다는 것이다.

좀더 얘기한다면, 이미 우리들 앞에는 “폭력은 안된다”는 일종의 윤리감이 통용되고 있는 것이다. 이 때문에 무조건 폭력을 옹호하는 일은 드물다. 그러나 누구든 “언제 어느 때나 폭력은 반드시 악인가?”라는 질문을 받았을 때 그에 대한 긍정은 거의 모두 자신을 잃는다. 폭력이 필요하다고 느끼는 심정을 비폭력주의자조차도 말살할 수 없을 것이다.

폭력지배의 의사비폭력(擬似非暴力) 체제화

폭력이라고 할 때 우리들은 극히 물리적인 것, 예를 들면 매스컴이 대서특필하는 범죄 에다 일상생활에서 드물게 맞닥뜨리는 싸움질이나 금품갈취의 상해 등을 보태서 우선 생각 하고 나에게 미칠지도 모르는 감각적인 공포로 그것을 상기한다(테러도 그러한 의미에서 신변 가까이 느끼는 공포에 대한 상상력이다). 또 예를 들면, 가정내 폭력, 유아학대 등 당 사자에게도 대단히 심각하고 게다가 쉽지 않은 문제로 다루어지는 것도 있다. 그러나 그런 것의 본질은 인간관계의 사회 병리적인 갈등문제에 원인이 있기 때문에 폭력과 비폭력의 문제로 다루어야 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폭력의 문제로 다루게 되면 도리어 쉽다. 상대한 사람에 대해서 세 사람, 다섯 사람 꿇어앉히고 응징하여 단순한 약자로 만들 수 있다.

개인폭력의 범주는 쉽게 그 해결 방법을 찾을 수 있다 해도 지금 우리들의 눈앞에 존재 하는 사회폭력 = 권력의 폭력장치의 내실(內實)을 구체적으로 찌르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 뿐인가 잘못하다가는 개인폭력과 같은 차원에서 엉뚱하게 논하는 착각에 빠지게 된다. 지금 여기서 우리들이 대상으로 삼고자 하는 것은 개인폭력과는 전혀 질이 다른, 개인폭력의 시 점에서는 간단하게 파악할 수 없는 의사비폭력 체제로서 존재하는 사회폭력장치에 대해서다.

사회폭력은 우리들의 주변, 일상에서 폭력으로 직접적으로 나타나지 않고 오히려 역으 로 질서유지 장치로서 드러나고 있다. 게다가 사회질서로서 일견(一見) 우리들의 일상을 지 키는, 폭력에 대한 압제자의 모습을 하고 있다. 예를 들면, 경찰․군대와 같은 국가의 폭력 장치는 일반시민에게 합법인 것, 질서를 지키는 조직으로 비친다. 현대의 폭력의 의미와 내 용을 바르게 파악하기 위해서, 이렇게 의사화한 사이비 비폭력 체제로서의 사회폭력, 즉 의사비폭력 체제를 문제시하는 데서부터 출발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우리들은 이것을 염두에 두고서 비폭력의 문제로 들어가지 않으면 안된다.

Ⅲ. 간디의 비폭력, 그 의미

직접행동 ― 비폭력의 가시화(可視化)

상대방이 덤벼들어 때리면 반격의 자세를 취한다. 상대가 사과하지 않으면 되받아친다. 이것이 상대의 폭력에 대한 일반적이고 아주 흔한 응수이다. 이러한 행위는 본능적으로 누구든 피하기 어렵다. 그러니까 폭력에 대해서는 폭력적 대응이 자연스러운 자세이다. 여기에 선도, 악도 없다.

그런데 대응행위는 이것에 국한되지 않는다. 마하트마 간디는 폭력적 식민지 지배에 대 한 항의로서 폭력에 대해 완전히 반대의 입장, 즉 비폭력의 입장에서 “불복종”, “무저항”이라는 대응행위를 제창하고 이것을 실천했다. 그것은 상대의 폭력을 방어하지도 않고 달아나 지도 않으므로 강한 신념과 적극적 의지를 나타낸 것이다. 무저항의 저항이라고 해야 할 간디의 행위는, 그때까지 눈에 보이지 않던 것을 가시화(可視化)함으로써 비폭력에 힘의 의미를 부여하는 것이었다.

무저항에는 직접 상대에 대응하는, 눈에 보이는 행위는 없다. 있는 것은 폭력에 대한 폭력적 대응을 극복하려고 하는 자기에 대한 제지에서 비롯된 갈등과, 그러한 갈등에 대한 심리적인 자기대응이다. 그것이 보고 있던 증언자에게 전해졌을 때 비로소 가시화한다고 말 할 수 있다. 여기서 폭력에 대치하는 것은 눈에 보이는 물리적 강제력이 아니다. 그것과는 다른 힘이다. 정신적 또는 윤리적인, 눈에 보이지 않는 힘이라고도 할 수 있다. 비폭력이 불복종이라는 구체적 행위를 매개로 해서 나타남으로써 “폭(暴)이 아닌(非)” 힘(力)이 가시 화할 때 ― 그러한 가시화도 또 새로운 힘으로 보태지는 비폭력 직접행동의 출현을 의미한 다. 그래서 가시화는, 의식화를 가져온다.

20세기초 간디가 활동을 시작하기 전 비폭력의 의미는 폭력의 부정, 혹은 폭력행사가 없는 상황을 말하고 비폭력을 바라는 개인의 신조, 윤리, 종교 등 이를테면 정신주의의 입 장을 보여주는 것이었다. 그것을 간디나 그 후의 마틴 루터 킹 등이 구체적인 직접행동의 선두에 섬으로써 비폭력의 의미가 지닌 소극성이 바뀌게 되었다. 폭력에 대항하는 힘으로서 의 비폭력의 발견 ― 무저항과 불복종이라는 직접행동의 창조이다!

이렇게 간디의 제창에 의해서 비폭력은 비로소 사람들이 의식하는 힘으로서 의미를 갖게 되었다. 하기는 그때까지 아니, 그 이후까지도 비폭력은 정신주의, 심정적이고 엄격한 윤 리주의를 더 강하게 의미하면서 ‘직접행동’이 반드시 비폭력과 일체화, 또는 절대적으로 따 라붙지 않으면 안된다는 중요한 지점을 거의 논의하지 않았다. 그보다도 무시하는 경우가 그대로 이어져서 운동의 확대를 일부러 한정하게 되었다. 현재까지도 일부에서 남아있는 비 폭력의 실천은 보통사람이 쉽게 도달할 수 없는 어떤 종류의 정신적 경지라는 오해의 주요 한 이유일 것이다. 물론, 이제는 비폭력의 전술로 연좌시위, 데모, 피켓팅 등이 상식적으로 금방 상정된다. 그러나 이를테면 무언(無言) 전화라든가 일찍이 수상이 손을 들어 버린 칭찬전술[2]이라든가 스토커 등 물리력의 행사를 수반하지 않는 행동도 비폭력이다.

확실히 비폭력의 일면은 윤리성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비폭력도 또 하나의 힘이라 는 점에서 본래 윤리적인 선악의 의미를 갖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어디까지나 방법이며 수 단인 것이다. 그가 목적하고 의도하는 바에 따라 폭력, 비폭력이라는 서로 다른 형태의 힘 이 지닌 의미가 결정되는 것이다.

극한(極限) 상황에서의 문제

비폭력에 대해서 얘기할 때 반드시 제기되는 반문이 있다. 만일에 연인이 습격을 받았 을 때 어떻게 하는가. 예를 들어 목전에서 핵버튼을 누르려는 사람을 발견하고서 너는 구경 만 하고 있을 것인가 ― 등등의 문제이다. 그러나 이처럼 이미 제 삼자의 개입을 용납하지 않는 초를 다투는 극한 상황에서 누가 어떻게 절대 확실하고 유효한 대응수단을 실천할 수 있을까. 폭력은 자기능력이 상대를 능가할 때만 유효하고 자기가 상대보다 약할 때는 폭력 도 똑같이 힘이 못된다. 이럴 때 그 장소의 당사자만이 어떻게 대응할지를 결정할 수밖에, 다른 방법이 없다. 승패는 거기서 중요하지 않다. 이에 대한 시비나 선악도 논외의 문제이 다. 즉, 이 때 제 삼자의 입장에서 당사자의 입장을 상정하고 거취를 허둥대며 폭력이냐 비 폭력이냐 하고 시비선악을 논하는 것은 아무런 뜻이 없다.

도대체 이러한 문제설정은 첫째 그러한 상황을 전후와의 관계에서 분리해서 제기함으로 써, 둘째로 그런 일은 여간해서 있을 수 없다는 희박한 경우를 일반적인 예로 했다는 데서 옳지 않다. 만약 이러한 경우에도 우리가 비폭력적 대응을 주장한다면, 여간해서 없으며 또 있어서는 안될 상황 때문에 미리 어떤 방법을 검토하지 않으면 안된다. 또 항상 그런 문제 에 대한 대응이 정해져있고 모든 수단이 강구된 상황이 마련되지 않으면 안될 것이다. 그러 한 전제에서 그래도 또 예외의 예외로, 즉시적 대처밖에 별 방법이 있을 수 있겠는가. 비폭 력이 만능의 부적일 수는 없다.

그리고, 다음과 같은 ― 미국에서 1859년 존 브라운이 소수의 동지와 함께 무장봉기했다가 처형당했을 때 숲의 철인이자 비폭력주의자 소로우가 말한 ― 말을 소개하겠다.

“노예를 살리기 위해서 힘을 가지고 노예소유자에게 간섭할 권리가 인간에게 있 다”라고 말한 존 브라운의 가르침에 나는 찬성한다. 따라서 노예해방을 위해서 브라운과 같은 방법을 쓰는 사람이 나와도 나는 결코 그의 방법이 틀렸다는 말을 하지 않을 것이다. 나는 자유냐 죽음이냐의 선택을 요구하지 않는 박애주의자보다 노예의 입장을 대변한 캡틴 브라운의 박애주의 편을 들겠다.

Ⅳ. 국가와 전쟁

오늘날 이 지구상에 살고 있는 모든 인간은 국민이라는 개념으로 분류되고, 등록되고, 지배되고 있다. 우리들은 이러한 표딱지 없이, 국가의 영역 밖으로 한 발자욱도 나갈 수 없 고 국내에서도 갖가지 장애에 부딪친다. 게다가 우리들 자신은 이러한 개념을 거의 선천적, 운명적으로 받아들이고 스스로도 그렇게 부르고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는다. 국민이라는 개 념을 성립시키고 있는 근거는 그러한 집단 안에는 전혀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한다면 그것 은 놀라 마땅한 일이다.

예를 들면, 똑같은 인류의 구분 개념인 인종은 그러한 분류근거로 생물학이 있다. 또, 민족이라는 개념은 문화인류학에 그 근거를 두고 있다. 그러나 ‘국민’은 국가를 근거로 성립 되는데도 불구하고 국가는 그 구성자인 국민의 내실성과 전혀 무관한 것으로, 완전히 지배 자와의 관계에서 외재적 명칭으로 성립할 뿐이다.

국가가 국가일 수 있는 것은 우선 타국과의 관계 ― 기타국가로부터의 승인 ― 에서다. 그 기본요건은,

1) 일정한 영토를 갖는다

2) 영토내에서 생활하고 있는 인간에 대해서 타권력의 간섭을 불허한다

3) 그리고 지배하는 정치권력이 존재한다

는 데 불과하다. 다시 말해서, 국가는 단순히 하나의 정치사회적 결합형태에 불과하거나 또는 거대한 정치단체일뿐이다.

고대, 중세에서 국가라고 부르던 것에서부터 근대법치국가에 이르기까지 국가는 항상 지배계급의 권력기구 그 자체로 존재했다. 국가의 주권을 장악한 권력자의 지배와 이익을 위해서 우선 존재했다. 평상시, 국민의 보호자로 자처하고 있다가 최후에는 지배자들은 자기들 보신을 위해서 국가조차 팔아먹고 국민을 배신해서 도주해버린 많은 역사는 무엇보다 도 그것을 증명하고 있다.

권력의 본질로서의 폭력과 그 가면

‘부르조아국가의 지양’이라는 논리를 단순히 뒤집은 것에 불과한 ‘프롤레타리아국가’라는 개념이 있었다. 국가의 지배권력이 부르조아에서 프롤레타리아로 이행한다. 그것은 노예제 국가에서 봉건국가로, 그리고 다시 자본주의국가로 옮겨가는 마지막 단계에 나타난다고 했다.

그러나 20세기 사회주의국가의 행방이 현실에서 보여주는 바와 같이 거기서는 권력의 최대강화가 실현되었고 더구나 인민의 국가, 인민의 권력이라는 명분 아래 반역자를 가차없이 처단했다. 실로 그것은 국가체제로서 완벽한 침묵과 죽음의 체제를 만들어냄으로써 스스로 붕괴의 길을 걸었다.

그리고 우리들이 국가에 조금이라도 맞서려고 할 때 금방 나타나는 것은 거대한 폭력장치를 뒤에 둔 모든 권력적 규제이며 억압이다. 이것은 아무리 자유나 인권을 내걸고 민주주의를 외쳐도, 그것이 국가일 때는, 그 어느 국가도 다르지 않다. 내면적 강제, 이른바 사회 질서로서의 심리적․정신적 지배하에 더욱 완벽한 민주주의라는 의사비폭력 체제를 성립시 키면서 법의 이름으로 폭력을 행사한다.

이것만이 문제가 아니다. 국가는 항상 권익을 주장하면서 권익의 유지와 확대를 위해서 크고 작은 분쟁을 가져온다. 그래서 그것을 해결하는 배경으로 반드시 군대를 필요로 한다. 그것은 비상시를 위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평상시에 필요하다는 게 특징이다. 예를 들어, 일본의 ‘분쟁’은 대(對)러시아 북방 4개섬 쿠나시리에토로프, 대(對)한국의 독도, 대(對)중 국․대만의 첨각열도이고 이른바 영유권이나 영해문제이다. 그리고 대(對)북조선 문제가 있다. 이것들은 오히려 타국과의 외교적 교섭문제인데도 국내여론을 부추겨 내셔널리즘을 빚어내면서 전쟁을 위한 군비증강이라는 국내정치문제가 된다.

오직 비전(非戰)밖에 없다!

여기서 전쟁에 대해서 아무래도 언급해야겠다.

내 일생동안 가장 간절한 문제가 무엇이냐고 질문을 받으면 주저하지 않고 바로 ‘전쟁’ 이라고 대답할 것이다. 나는 10살에서 25살까지, 이른바 15년 전쟁[3], 특히 마지막 시기인 패 전까지의 수년간은 일상성의 상실을 당연지사로 하는, 더할 수 없이 엉망진창에다 비인간적 인 나날이었다. 오직 파멸과 죽음만이 있는 내일을 기다릴 수밖에 없는 생을 살았다.

전쟁은 절대로 안한다!! 이것은 지금 70이 넘은 사람은 그 누구나 일생 잊을 수 없는 경험에서 우러나는 결심이다. 그렇지 않다면 그는 천황가족이거나 그들과 멀든 가깝든 관련 된 입장에 있는 자들뿐이리라. 그러한 전쟁을 어느 날 갑자기 시작하더니, 똑같이 어느 날 갑자기 자기보신을 위해 휴전을 선언한 게 천황이었고 국가였다. 전쟁, 천황제, 국가는 이 때부터 언제․어느 때나 최대의 적이 되었다.

그래서인지 신헌법이 발표되고 제 9조[4]가 명시되었을 때도 나는 이와 무관하게 나의 신조로, 나의 맹세로 전쟁포기 ― 비전(非戰)이라고 마음 속에 다짐했던 것이다. 이것을 구체화한 것이 1953년 WRI(War Resisters’ International) JAPAN에 가맹할 때부터이다. 나는

WRI에 가입할 때 다음을 서명했다.

1) 병역이나 군무에 일체 종사하지 않는다

2) 군수산업과 그것과 관련된 곳에는 취업하지 않는다

3) 전쟁원인 제거를 위한 활동을 계속한다

전쟁을 싫어하는 것도, 피하는 것도, 반대하는 것도 아니고 오직 비전(非戰)뿐이다. 그런데 지금 미국과 그 밖의 나라가 보유하고 있는 핵무기의 총량은 지구 전체인구를 몇차례나 살해할 수 있을까. 핵무기는 언제든지 투하되며 오직 인민살해병기로서 존재한다. 그뿐만 아니라 일본에는 홋까이도오에서 큐우슈우까지[5] 50여기의 원자력발전소가 있다. 당 연한 얘기지만 전쟁이 터지면 미사일은 원자력 발전소를 노린다. 미사일 한발이 100킬로미터 사방을 죽음의 도시로 만든다는 것은 체르노빌사고에서 증명되었다. 이제 이만한 이유만으로 우리들의 입장은 이러니 저러니 논의할 것이 없다. 단호하게 비전(非戰)이다. 비전의 입장 이외에 있을 수 없다.

베이유의 전쟁론

시몬느 베이유가 1933년에 쓴 자그마한 글 「전쟁에 대한 고찰」을 읽어주기 바란다. 요약해서 소개하면,

마르크스는 현대의 생산양식을 노동수단에 대한 노동자의 종속으로 규정했다. 그 리고 또 각 자본가와 그 고용 노동자에 대한 투쟁이 결국은 노동자 전체에 대한 자본 가의 투쟁으로 변한다는 것을 논증했다. 이와 마찬가지로 전쟁은 결국 전투원(병사)의 전투수단(장비)에 대한 종속으로 규정되는 것이다.

그리고 현대전의 진짜 주인공인 무기는 결코 스스로가 직접 전투를 하지 않고 전쟁에 나가지 않는 일부 사람들의 조직(권력)에 의해서 관리된다. 이러한 관리장치는 자국의 병사, ‘국민’을 강제로 죽음을 의미하는 전쟁터로 내보내는 것말고는 전쟁의 수 단을 갖지 못한다. 그래서 어떤 나라의 타국가에 대한 전쟁은 곧 자국 군대에 대한 국 가적 군사장치의 발동, 다시 말해서 병사(국민)의 군사장치에의 종속을 강요한다. 즉, 어떤 전쟁도 국가와 참모본부의 모든 장치는 무기를 잡는 연령의 자기 국민에게 전쟁 의 양상을 제공하는 것이다.

그리고 기계는 노동자로부터 그들의 노동력만을 뺏고 자본가는 해고이외의 강제수단을 갖지 못하는데 비해 군인은 강제로 생명을 바칠 것을 요구받는다. 게다가 군법의 협박하에 임무를 강제당한다. 전쟁이 방위인가, 공격인가, 제국주의적인가, 민족적인가 등은 이미 문제가 아니다. 전쟁의 당사국은 모두, 적국도 똑같이 이러한 방법을 쓰지 않을 수 없다.

모든 전쟁론에 있어서, 특히, 사회주의자들이 빠져있는 큰 잘못은 전쟁이 무엇보 다도 가장 잔혹한 죽음을 강제하고 있는 국내정치인데도 그것을 대화정치의 하나의 에 피소드로 본다는 것이다. 그것은 극히 단순한 것 ― 살육은 억압의 가장 근본적인 형 태 ― 으로, 군인은 살육으로 내몰려서 죽는다는 사실이다. 그러한 억압의 장치는 한 번 구성되면 파괴될 때까지 존립을 계속하는 것이다. 모든 전쟁은(비록 혁명가에 의해 서 수행된다고 해도) 반동의 요인으로 보지 않으면 안된다. 국가장치에 의해 일어나는 전쟁은 아무에게도 자유를 가져다주지 못한다.

혁명전쟁은 혁명의 무덤이다. 따라서 군인이라기보다 무장시민에 대해서는 지휘장치, 경찰의 강압, 특별재판, 도망에 대한 형벌 등을 일체 부과하지 않고 자의(恣意)를 인정한다는 조건에서만 전쟁수행을 승인할 수 있을 것이다(근대사에서 한번 파리꼬뮨 때 이러한 전투가 있었다. 그게 어떤 결말을 가져왔는가 잘 안다). 전쟁에 종사하는 혁명은 반혁명의 타격으로 무너지든가 군사적 전투의 메카니즘 그 자체에 의해서 스스 로가 반혁명으로 전화할 수밖에 없다. 거기서 혁명의 전망은 극히 한정된다. 혁명은 전쟁을 피할 수 있는가 ― 이러한 곤란한 경우에, 일체의 희망을 걸고 도전하든가 아 니면 포기하든가 둘 중 하나이다.

때로 전쟁이 혁명적 요인인 듯 보일 경우, 확실히 전쟁의 결과로 조직의 나쁜 장 치는 붕괴하거나 바뀐다. 그러나 그것은 마르크스의 정식이 말하는, 국가장치를 파괴 하는 대신에 뒤바꾸는 혁명이 일어나는 데 불과하다. 이것은 이제까지 늘 일어난 사실 이다. 역사는 국가권력장치가 시민의 정치행위에 더욱 억압을 가할 때 이 장치를 파괴 하기 위해서 권력장치를 직접 상대해서 투쟁할지의 여부를 무조건적으로 선택하게 한다. 그러나 만일, 행동을 포기하지 않으려면 국가장치에 대해서 외부로부터가 아니라 내부로부터만 투쟁할 수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더군다나 전쟁의 경우 자기도 톱니 바퀴가 되어 있는 전쟁장치의 기능을 방해하든가 또는 그 장치가 인간의 생명을 짓뭉 개는 편에 서든가, 어느 편을 선택하지 않으면 안된다.

― 이것은 또 비폭력 직접행동의 입장에서 펴는 전쟁론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Ⅴ. 비폭력이란 무엇인가

비폭력과 의사비폭력 체제

우리들에게 비폭력이란 일상을 말한다. 일상이란, 가정을 만들고 아이를 기르고 생활에 필요한 것을 생산하기 위해서 일한다는, 정말로 당연하고 평범한 나날을 말한다. 뿐만 아니 라 너무나도 당연한 반복이기 때문에 그 소중함을 거의 의식하지 못하지만, 사실은 비폭력 적 질서에 기반을 둔 사회에서 비로소 그 생활을 일상적으로 영위할 수 있다. 폭력이 일상 을 뒤흔들고 나날의 생활에 위기를 가져오는 것은 비폭력적 일상이 깨졌을 때 밖에는 보이 지 않는다. 그래서 그때 이외에는 의식하지 못한다. 이를테면 지금 팔레스타인 자치구 등 폭력하에서 위기의 연속에서 이루어지는 생활은 하루살이 생활이라고 할 수 있으며 일상성 조차 박탈당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한 의미에서 폭력체제하와 의사비폭력 체제하의 일상은 명백히 다르다. 우선 자신들의 목전에 있는 사회상황을 의사비폭력 체제사회라고 규 정하는 게 필요하다.

거듭해서 말하자면 이러한 일상생활은 비폭력을 의식하지 않는 것과 표리(表裏)가 되어 대개는 폭력이 폭력으로 보이지 않는 상황으로서 실재하고 있다. 그러니까 현재 일본에서는 지금 우연히 머리 위를 포탄이 여기저기 날아다니지 않고, 단순히 개인폭력이 횡행하지 않 는다는 것만으로 흡사 비폭력 상황으로 여겨 아무렇지도 않게 생각하고 있는 것이다. 그래 서 신문이 써갈기는 범죄가 일어나도 강건너 불구경이고 그것도 금방 법적으로 단속될 것 이라는 전제가 있다. 그러나 단속이라는 명목으로 그 일부분을 보인 국가의 폭력기구는, 바 로 우리들의 일상에 존재하는 비폭력과는 질이 다른 의사비폭력의 상황이며, 그것은 의사비 폭력의 체제하에 우리 일상이 있다는 것과 다를 바 없다.

비폭력의 인민성

사회생활에 나타나는 비폭력 상황은 그것이 인민의 자각이나 의식의 확립같은 것을 통 해 가까스로 발동하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그만큼 비폭력성이 본능적이고 본질적인 인민의 속성이라는 것을 확실하게 보여준다. 우리들은 일상적으로 특별한 의도도 없이 질서 있는 사회생활을 영위하고 있다. 그것은 본래의 생명력 ― 비폭력성에 입각해서 나타난 속성적 상황의 역사적 결과로서, 국가기구나 법률, 제반제도 때문이 아니다. 단 우리들이 그것을 자 각하는 일이 거의 없고 또 아직 드러나지 않은[未然的] 무의식하에서 기능하고 있다는 것을 깨닫지 못할 뿐이다.

그러니까 인민의 일상생활과 사회의 비폭력 상황은 한 가지로 나타나서 나눌 수 없는 관계로 결부되어 있다. 그러나 그 의식에서는 폭력에 대응하는 것으로서 비폭력이 적극적으 로 파악되지 않는다. 우연히 일상생활을 파괴하는 적(敵)인 개인폭력만이 현실적으로 나타 나서 그에 대한 대처로 국가의 필요를 드러내고 있을 뿐이다. 또 그것이 마침내 국가권력의 법질서라는 이름의 의사비폭력 체제의 맹목적인 이유이기도 하다. 쉽게 신화를 예로 들자.

어느 날 난타국의 왕이 국민의 반란에 곤혹해서 석가에게 정치의 요체를 물었다. “우선 무엇보다도 타국하고의 전쟁을 그만둘 것이다. 전화(戰禍)로 오곡이 영글지 않 고 질병이 유행하고 도덕과 의리가 문란해진다. 전쟁을 하면서 나라를 다스릴 수 없 다.”

라고 대답했다던가. 이것은 어떠한 강권국가라도 안정된 통치와 국가의 존재기반으로 비폭력적 통치를 지향하는 것 밖에는 안정이 있을 수 없다는 원칙을 말하는 것이다. 폭력지 배를 드러내고 있는 사회, 앞서 예로 든 팔레스타인, 혹은 전쟁중에는 인민의 생산노동은 완전히 이루어질 수 없다. 다시 말해서 국민의 생산물을 수탈함으로써 성립되는 지배권력의 존립기반도 그야말로 근본에서부터 위태롭게 된다는 것이다. 이상을 바꿔 말하면,

1) 국가는 존재의 근저에 인민의 비폭력적 일상의 영위를 깔고 있다.

2)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회적 일상질서는 권력에 의해서만 유지된다고 바꿔치기 해서 그러한 의사비폭력 체제를 법제화․기구화하여 의사비폭력 상황을 통치의 결과로 과시한다.

3) 그러한 체제를 유지하고 완벽하게 지킨다는 명목으로 자기권력을 지키기 위한 폭력 장치를 더욱 증대하고 독점한다.

4) 그것은 인민 본래의 비폭력 일상의 의미에 대한 각성을 방해하고 인민자신의 사회관 리능력의 자각과 발현을 저지하는 의회제 민주주의 ― 투표와 선거 ― 로 인민 스스로의 의지를 자승자박하는 기구를 만든다.

요컨대, 국가의 국민지배는 일상에서 비폭력적 가면을 완벽하게 하여 이제 민주주의라 고 불리고 ‘반테러’를 주장하는 국가체제군에 의해 관철되고 있는 것이다.

Ⅵ. 의사비폭력 체제와 민주주의

민주주의라는 의사비폭력 체제화

권력지배는 폭력을 될 수 있는 한 억제하고 또 합법적인 명목을 고수하는 것으로 폭력 국가라는 것을 위장한다. 이렇게 해서 인민의 속성인 일상적 비폭력성은 의사비폭력 체제하 의 일상성으로 고쳐져서 부여된다. 그래서 인민의 일상이 권력에 의존함으로써 성립된 것 같은 환상을 갖게 되는 것이다. 국가와 인민이 상호의존적으로 외쳐대는 슬로건은 “폭력은 악이다!”, “우선 얘기하자”, “민주주의를 지켜라!”이다.

우리들의 모든 일상생활을 지배하고 침해하는 것으로서 폭력이 진짜로 결정적인 의미를 갖는 것은, 지금, 사회폭력, 기구폭력, 장치폭력이 어느 사이엔가 질적 전환을 끝내고 우리들의 일상에서는 거의 보이지 않게 된 때이다. 조직화되고, 기구화되어 자체의 생명력을 갖게 되었을 때부터이다. 그것은 단순히 인민이 폭력장치를 의식하지 못하게 하는 데만 문제 가 있는 것이 아니라, 실로 질적 전환으로 알아보지 못할 만큼 변모하여 지배의 배경에 존 재함으로써 우리들과 근본적으로 대립하게 된다. 폭력의 사회화 ― 전환은, 국가의 지배기구인 민주주의 안에서 더욱 완벽하게 나타난 다. 민주주의는 국가와 유착하는 순간부터 원리적 입장을 상실하고 기만과 환상으로 바뀌어 의사비폭력 체제의 폭력 그 자체의 도구가 된다. 그리고 확실히 국민은, 모든 개인은 헌법 앞에서 자유롭고 평등하므로, 기본적 인권을 보장받는다. 그러나 인권보장, 삼권분립, 국민 주권 등 민주주의의 원칙은 어디까지나 법적으로 그런 것이고 실질적으로는 법치국가로서 의 계급적 불평등, 부자유를 고정화하고 자본독재의 본질을 은폐하는 위장에 불과하다.

법치국가의 폭력 ― 군대, 경찰, 재판소, 감옥 등 ― 독점을 합법적으로 만들고 그 일방적인 행사를 법률의 이름으로 휘둘러댄다. 그러나 한편에서는, 공공복지의 이름을 빌려 인권제한 등 민주주의의 원칙을 이러저러하게 침해하는 국가의 행위까지도 당위화하는 역할을 다하게 된다. 게다가 선거, 투표, 의회라는 제도가 뜻하는 ― ‘네가 투표로 선택한 의 원이 정한 법규로’라는 논리는 우리를 자승자박하는 함정에 빠뜨린다. 그야말로 의사비폭력 체제로서 항상 인민을 대량으로 죽이는 기구를 내부에 숨긴 채 비폭력 사회로서의 허상을 전면에 내세우고 있는 것이다.

의사비폭력과의 싸움

그러나 민주주의가 어떻게든 비폭력 사회로서의 허상을 완벽하게 할지라도 정치부패와 함께 그 가면을, 옷 속에 감춰 입은 투구처럼, 때때로 노출시킨다. 때로는 비폭력의 가면을 벗어던지고 조직된 폭력기구의 물리적 행사로 환원한다. 예를 들면, 팔레스타인에서 감행되 는 이스라엘의 자의적 행동이다. 군대조직의 일원인 병사가 주민을 체포하고 능욕하고 고문 한다. 그러한 폭력은 특정개인의 개별적 성향에 따라서 더욱 잔혹하게 위법으로 행사되면서 개인폭력으로서의 내용을 갖는다. 그러나 이 경우 개인폭력은 당초 의미의 개인폭력과 똑같 아 보이지만 실은 크게 변질된 것이다. 다시 말해서, 첫째로, 가해자와 피해자의 위치가 대등하지 않다. 물론 입장이 역전되는 일도 있을 수 없다. 둘째로, 가해자가 지닌 압도적인 장비의 우위 상황에서 약소자, 무능력자에게 일방적으로 이루어진다. 셋째로, 피해자 ― 주 민 ― 는 자기의 가족이나 집단과 강제로 떨어져서 고립된 개인이 될 수밖에 없다. 이에 반 해서 가해자 개인의 배후에는 법적인 조직이 존재하고 있어 언제나 그곳으로 달아날 수 있 다. 넷째로, 피해자는 정당방위 수단까지도 행사할 수 없는 상황에서 더군다나 모든 책임을 덮어쓴 악으로 처벌된다. 이것은 당초 단순한 개인폭력이 의사비폭력 체제로 개인에게 환원 될 때 그것은 이미 사회폭력으로서의 폭력으로 변한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래서 반드시 개 인에게 수렴한다는 폭력의 특성은 사회화되더라도 그 자체로 나타나지만, 개인폭력의 원래 의미나 내용과는 다르다는 데서 인민의 생명력과는 전혀 관련이 없다. 그것은 다음의 것까지도 명백하게 한다.

1) 권력이 표현상 비폭력 일상을 명목으로 하고 있는 이상 그러한 사회질서가 혼란해지 는 것 ― 폭도나 범죄자의 출현은, 어쨌든지 치안을 혼란하게 하고 인심을 불안하게 한다는 데서 그들의 위신을 실추시키는 것이 된다. 데모의 폭동화나 범죄빈발은 의사비폭력 체제를 혼란시키는 것에 다름 아니다. 그것은 그대로 권력에 대한 공격의 의미를 갖는다. 나아가서 권력은 그것에 대응하기 위해 숨겨 놓았던 권력장치를 백일하에 발동시키지 않을 수 없다. 그것은 그들의 의사적인 비폭력의 정체를 드러내게 하는 것이기도 하다.

2) 따라서 우리들이 만약 일상생활에서 구현하고 있는 자치관리능력을 진짜 스스로의 것이라고 자각하고 권력의 지배질서가 이제는 불필요한 눈가림이라는 것을 안다면, 그것은 권력의 배후에 있는 폭력장치를 무용지물로 인민의 눈앞에 끌어냄으로써 권력유지의 기반 이 되고 있는 인민의 정신구조까지도 바꿔버리는 것이 될 것이다.

3) 그렇지만 인민이 권력에 대해 궐기할 때 그것은 또 일상생활의 비폭력 상황 ― 의사 이기도 해도 폭력 그 자체는 아닌 ― 을 위협한다는 자기모순에 봉착할 수밖에 없다. 게다 가 공공의 복지, 사회 안녕의 명목하에 권력에 의한 혹독한 탄압과 매스컴의 탄핵캠페인이 집중된다. 권력의 폭력적 탄압을 당연한 것으로 생각하는 심정은 널리 퍼져있다. 다시 말해 서, 인민의 반역은 권력의 토대를 뒤흔드는 것이면서 동시에 인민의 비폭력성 그 자체와도 대립하는 모순을 가지고 있는 데서 인민의 일상과 괴리되어 오히려 적대시될 우려가 있다.

그리고 우리들은 이상 세 가지 여건을 복합적으로 일체화하는 것으로서, 마침내 이제 새삼스럽게 비폭력 직접행동을 택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Ⅶ. 게릴라, 인민성의 문제

게릴라, 그 의미와 행방

아주 간단하게 말하면, 인민과 권력자의 다른 점은 우리 인민이 권력자와 대결할 무기를 빼앗겨서 갖고 있지 않은 데 비해 그들은 항상 크고 강력한 폭력장치를 보유 독점하는 데 있다. 그리고 애당초 우리들은 무장할 필요가 없지만 그들은 항시 자기권력을 유지하기 위해 무장을 필요로 하는 데 있다. 그들은 폭력장치를 위협적으로 소유하고 수시로 행사함으로써 그 자신을 유지할 뿐이다. 게다가 인민이 적대하지 않을 때도 그들은 항상 인민을 적대시하지 않으면 안된다.

그러나 또 인민과 권력자의 역사는, 그 입장은 거의 고정되어 있으면서 그 관계를 일시 적이기는 하지만 상황으로서 변화시켜왔다. 지배권력의 폭력장치는 조직의 근대화나 과학발달에 의해서 현저하게 강화되어 때때로 그 위력을 국가 내외로 강력하게 과시하고 발휘하 였다. 그런데도 인민의 지위와 처우는 최근 수세기 동안 점차적으로 향상되고 개선되어왔다고 할 수 있다. 권력은 공포정치를 대신해서 더욱 교묘한 회유와 타협, 당근을 낚시밥으로 던져주지 않으면 안되었다. 즉, 인민은 집단을 이루고 조직을 만들어 그들의 연합을 도모함 으로써 전체의 의지 ― 예를 들면, 탄원, 상소, 진정, 도피에다가 나아가서 폭동, 야습, 스트라이크 등의 인민고유의 방법, 다시 말해서 직접행동을 통해 그때마다 패배하면서도 오랜 세월을 두고 이러한 결과를 이루어 온 것이다.

19세기에 이르러서 노동자 계급이 등장했다. 만국의 노동자여 단결하라 ― 그들의 조직 화와 단결은 다가오는 인민의 시대를 예언하며 빛나는 전망을 열어주는 것같이, 인민측이 투쟁주체로서 질적으로 변화하며 새롭게 형성되는 것을 의미했다. 노동자 계급과 더불어 생 겨난 노동운동, 사회운동, 혁명운동은 20세기 세계를 뒤흔들고 움직이는 새로운 운동의 힘 이 되기도 했다. 또, 그것은 세계대전중의 피점령지구 주민의 저항이나 전후점령지 분할문 제, 민족독립운동의 봉기 등의 지하조직, 게릴라, 빨치산, 레지스탕스와도 연계되기도 했다. 이들은 옛날의 농민반란이나 종교반란 등의 유산과 교훈까지 흡수하면서 인민고유의 직접 행동과도 연계된 새로운 무장투쟁방법으로 발전하였다. 그것은 점차로 단련되어 인민만이 이룩할 수 있는 인민고유의 투쟁방법을 발전시키고, 게다가 권력측이 택할 수 없는 투쟁형 태라는 데서 유효성을 증명하는 것이었다. 이에 관해서 베트남전쟁 당시의 미국무부 차관 로스토프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미국은 하나의 예외를 빼고 모든 형태의 군사침략을 무력하게 만들어 승리했다. 그 예외라는 것의 하나가 게릴라전이다. …… 그것은 하노이가 중공의 지지하에 라오 스, 남베트남에서 펼친 방식이며 타이 동북부에서 준비하고 있는 방식이다. 또, 카스 트로가 카리브해 각국에 확대하려는 방식이고 공산주의자가 아프리카에 갖고 들어가려 는 방식이다. 그들이 왜 게릴라전을 택하는가 하면 …… 게릴라 한명에 대해서 정부군 15명이 필요하다는 게릴라전의 산술이 있다. 이것은 게릴라측에서는 서방측 군사주력 (主力)과의 대결위험이 낮다는 것, 약소국 고유의 약점을 이용한 정치기술을 발휘하기 쉽다는 것 때문이다.”

이러한 미국 고관의 발언을 바꿔 말하면 ―

1) 게릴라에게는 국가의 거대한 군사장치도 충분한 역할을 못한다. 정면대결을 위해 폭 력기구를 최대한 발동해서 전투를 시작해도 이겨야 할 전투를 헛다리짚게 만들어 예기치 않을 때 불의의 공격을 받는다.

2) 게릴라전은 전투의 승패에 기초를 두는 게 아니라, 정치기술의 발휘에 기초한다. 다 시 말해, 종래의 전쟁개념이나 전투양식의 규격과 그 틀을 완전히 벗어나면 벗어날수록 효 과적이다. 그리고 게릴라의 본질은 원칙적으로 무장투쟁의 승패에 있지 않다. 열악한 조건 에서 더구나 근대병기와 거대물량에 대항해서 지고 또 져도 결코 지지 않는 인민의 원리와 방법을 구현하는 데 있는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게릴라가 인민의 비폭력적 본질을 충분히 구현하고 있다는 것은 물론 아 니다. 비폭력적 본질의 맹아(萌芽)와 방향을 시사적으로 나타냄으로써 그 본질을 제시하고 있었다는 데 불과하다. 일반적으로 ‘게릴라’라고 할 때 그것은 무장한 유격전 소집단을 가리키는 게 보통이다. 그것은 불의의 습격이라도 전투를 주목적으로 하는 한 그 자체의 무장강화를 더욱더 추구 할 수밖에 없다. 그것은 적의 정치사정의 변화나 거듭되는 전략적 착오 등의 기회까지 합쳐 서 전투규모의 확대, 부대편성의 대형화와 조직의 근대화를 이루어, 전략 전술적 양식에도 근본적인 질적 전환을 추구하지 않을 수 없다. 즉, 게릴라를 병기, 병사의 수와 질의 우열에 기반을 둔 국가적인 군대차원의 지위로 정치적으로 발전시키는 것이다. 이 결과 입수할 수 있는 한 근대살상병기를 구입하여 베이유가 말한 자기의 병사를 사지(死地)에 보내어 싸우 는 것이다. 그리고 당연히 인접국가 또는 그러한 세력 등의 원조개입, 대리전쟁까지도 피할 수 없게 된다. 이것이 게릴라의 역할이 최상의 조건에 있을 때의 결말이다.

그것은 인민고유의, 인민만이 활용할 수 있는 유효한 투쟁방법을 버리는 것이다. 권력 탈취의 나라 따먹기 전쟁은 인민군과 군대조직이라는 구분관계에서 오직 군사적 승리를 위 한 군사신앙이 되어 모든 것을 국가체제화 하는 것이다. 이렇게 게릴라는 그것의 집단기구 로서의 폭력 때문에 애초부터 반드시 권력화의 요소와 지향을 갖게 된다. 그래서 처음에는 대단히 인민투쟁적이던 게릴라가 그들의 무력이 커지면서 어느 시점부터 실로 반인민적, 반 혁명적으로 변해버린다.

사파티스타가 시사하는 것

여기서 1994년 멕시코에서 무장봉기한 사파티스타 민족해방군(EZLN : Ejercito Zapatista de Liberacion Nacional)의 마르코스 부사령관의 시사적인 발언을 소개하겠 다.

▽ 되풀이하지만 우리는 권력도 정당이 되는 것도 바라지 않는다. 그러한 것은 필 요없다.

▽ 무기에 의해서 권력을 장악한 자는 결코 통치해서는 안된다고 우리는 생각하고 있다. 무기와 힘으로 통치할 위험이 있기 때문이다.

▽ 우리가 지향하는 것은, 민주주의와 정의와 자유를 요구하기 위해서 이제는 지 하로 들어가거나 무장하거나 할 필요가 없는 때이다.

▽ 우리는 어느날인가 병사가 더 필요치 않기 위해 병사가 된 전투원이다. (중략) 우리는 이러한 자기 소멸로 가는 길을 가다가 소멸할 운명인 직업을 선택했다. 우리는 무장투쟁을 1960년대 게릴라가 생각했던 것같이 유일한 길, 유일한 수단, 모든 것을 결정하는 유일한 진실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 EZLN은 엄밀히 정의된 이데올로기를 갖지 않은 봉기운동이다. 마르크스 레닌 주의나 사회적 공산주의나 카스트로주의나 게바라주의 등등 고전적인 정치적 경우 그 어느 것과도 합치하지 않는다. 무장투쟁이 해야 할 것은 문제 ― 자유의 결여, 민주주의의 부족, 부정의(不正義) ― 를 제기하는 일이고 그런 것을 이룩한 뒤에는 소멸하게 된다.

▽ 혁명운동이나 그 지도자는 모두 정치지도자나 정치적 주역이 되려고 하는 경향을 갖기 때문에 ‘혁명적’이라는 용어는 적절치 않다. 이에 대해서 EZLN은 어디까지나 사회반란을 계속하겠다. 혁명가는 항상 위로부터 변혁할 것을 바라고 있다. 그러나 사회반란은 밑으로부터 변혁할 것을 바라는 것이다.

(『이미 충분하다! 멕시코 선주민 봉기의 기록』[6], 『마르코스 여기는 세계의 변방인가』[7]에서)

그러면 위에서 얘기한 게릴라의 현대사적 경위에서 또는 이상과 같은 사파티스타의 새로운 시사로부터 우리들은 다음과 같은 물음을 제기할 수 있다.

1) 국가체제에 대한 게릴라의 투쟁을 권장하는 것이 다시 국가라는 폭력기구에 사로잡히는 악순환을 어떻게, 어디서 단절할 수 있는가?

2) 무장투쟁으로서의 게릴라에 대체하는 이를테면 비폭력 게릴라 같은 것이 있을 수 있는가? 그것은 어떤 것인가?

3) 역사적 게릴라의 여러가지 요소 중에서 게릴라의 인민성과 유효성을 이어받아서 우리들의 미래와 전망을 타개하는 핵심은 무엇인가?

‘폭력단’의 의미

규모와 성격 등을 달리하는 이러저러한 젊은이들의 그룹, 알기 쉽게 말해서 폭주족이나 중소 야쿠자조직, 나아가서 기업화한 거대 조직 등 아직도 어떤 종류의 개인폭력의 조직화, 집단화의 여지를 남기고 있는 현실은, 겉으로 그럴듯한 비폭력 사회를 허무는 것이어서 논리적으로 모순된 것같이 보인다.

권력이 왜 그렇게 깡패들의 조직화하고 집단화된 ‘폭력단’의 존재를 용납하는가? 그 첫째 의미는 그들이 권력에 직접적으로 아무런 공격을 가하지 않는, 오히려 영합하는 존재라 는 것이다.

야쿠자조직은 경제연구소와 우익단체로 위장, 총회꾼[8] 등 기업화되어 있지만 권력은 자 기의 권위가 크게 실추할 우려가 있을 때만 본보기로 단속할 뿐이고 서로 친숙하게 그들의 존재를 인정하고 있다. 덧붙여 말하면, 한때 야쿠자조직에 가입하는 거의 모두가 극빈층 출 신이고, 아니면 조선인, 피차별부락민이거나 대부분은 사고무친의 떠돌이로 오갈데 없는 사 람들이었다. 야쿠자조직은 그들에게 요세바(寄せ場)[9], 이케바(生け場)[10]라는 사회적 존재의 의미를 갖고 있었다고 할 수 있다. 예를 들면, 그러한 것이라고 할 수 있는 것으로 1924년 이른바 데끼야(テキヤ)[11]의 젊은 층이 아나키스트들의 ― 야스야 간이치(安谷 寬一), 와따 신기(和田 信義), 타카시마 산지(高島 三次)[12] 조력을 얻어 ‘전국 행상인 선구자 동맹(全國行商人先驅者同盟)’을 만들었다. 금방 남쪽에서는 큐우슈우에서 북쪽 홋까이도오까지 16개 지부에 수천명으로 늘어났지만 그들의 유동성 때문에 곧 해산할 수밖에 없었다. 또, 관동 대지진 때 많은 조선인을 자경단(自警団)으로부터 보호해 준 쓰꾸다마사 등 많은 조직체가 있었다는 것은 그들의 사회적 존재의 의미를 말살할 수 없는 뿌리 깊은 이유이다.

둘째 의미는, 오뉴월 파리떼처럼 생겨나서 파생하는 무수한 그룹에 대해서 아무리 강대 한 국가권력이라 해도 완전히 파악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다시 말해서 수적으로 어마어마 하기 때문에 경찰이 완전히 대응할 수가 없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 문제는 중요한 핵심을 건드리는데, 여기서는 이것을 암시하는 데 그치겠다. 즉, 잡초처럼 돋아나고 파생하는 규모나 성질이 다양한 ‘폭력단’과 같이 무수히 많은 인민의 개인 또는 소수 무명의 갖가지 그룹에 의한 특히 단 한번의 게릴라적 활동에는 국가의 폭력기구는 이에 충분히 대처할 수 없으리라는 것이다.

테러에 대하여

그러면 여기서, 이제 금세기 최대의 정치과제가 됐다고 할 수 있는 ‘테러’에 대해서 얘 기하지 않으면 안될 것이다. 단순하게 말하면, 테러는 게릴라 이전의 단계에서 대개 개인의 절박한 심정에서 시작한다. 예를 들어, 지금 팔레스타인에서 전해지는 상황 ― 이스라엘 병 사들이 가하는 무법행위 때문에 일상생활은 궁지에 몰리고 가족이나 친구 등이 이유 없이 살해된다. 그러한 상황 때문에 최후의 최후라고 생각하는 사람, 목숨을 버려서라도 하는, 궁 극적 생명력이라고 해야 하는 것이 도리어 테러를 감행하게 한다 ― 고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그들은 그들이 생명을 걸고 행동한 결과는 보지도, 듣지도 못한 채 일순간에 끝난다. 자신이 큰 성과를 희구했다 하더라도 결코 그 테러가 피아(彼我)의 입장을 역전시키거나 국 면을 번복시키는 승패에 크게 영향을 주는 것이 아니다.

게다가 그렇게 개별적인 형태로 나타난 테러는 때때로 궁지에 몰린 저항조직의 일개전 술로, 저지되기는커녕 오히려 칭찬받는 상황이 일반화되고 있다. 가령, 18세의 소녀가 자폭 테러한 보도에 대해서 우리들은 도대체 어떻게 대처하면 되는가. 여기서 나는 나의 입장을 밝혀두고 싶다. 나는 우선 무엇보다도 먼저 소녀의 입장에 선 다. 여하튼 하나밖에 없는 생명을 걸고 자폭테러를 감행하는 이외에 방법이 없었던 절박한 소녀에 대해서 나에게는 이런저런 시비할 여지가 없다. 그 사실의 절대성에 대해서 그저 머 리를 숙일 뿐이다. 그리고 폭탄에 희생된 사람에 대해서도 그들의 불운, 불행을 전적으로 슬퍼할 수밖에 없다. 그리고 나서 그 일과 직간접으로 연계된 조직이 문제가 된다. 간단하 게 말하면 그것은 옛날 전쟁말기에 지원이라는 이름으로 몸으로 부딪치는 돌격법, ‘가미가 제 특공대(神風特攻隊)’를 전술로 택한 일본군 참모본부와 같다는 점에서 그 어떠한 이유가 있다 해도 긍정할 수 없다. 왜냐하면, 말할 것도 없이 그러한 전술로 승리를 쟁취할 수 없 고 만일 그러한 투쟁이 힘을 갖게 되더라도 그것은 반인민적인 강권적 전쟁국가에의 지향 을 더더욱 강화하는 것이기 때문이라고만 말해두겠다.

테러는 명백하게 폭력이다. 그것이 최후의 생명력으로 나타날 때 어쩌면 그것은 진실한 폭력 그 자체이다. 그러한 폭력은 단 한번이라고 하는 한정적인 조건에도 불구하고 사람들 에게는 그렇지만도 않은데 그것은 왜 그럴까? 팔레스타인의 테러는 아메리카나 이스라엘에 관련해서 언제, 어디서, 누구에게, 어떻게 나타나게 될지 아무도 모른다는 공포 ― 두려움 의 상상력으로 발전한다. 그 뿐만 아니라 이것을 어떤 방법으로도 멈추게 할 수 없다는 데 서, 비폭력의 심리적 특성이 오히려 비폭력의 ‘힘’이라는 것을 깨닫지 않으면 안될 것이다. 상상력은 자꾸자꾸 공포심을 낳는다. 그렇기 때문에 반테러 전쟁은 자꾸자꾸 테러를 낳는 다. 그리고 그것에 대한 투쟁으로 테러를 저지하는 것으로 지금이야말로 ‘비전’은 비폭력 직 접행동의 초점이 되었다고 하지 않을 수 없다.

Ⅷ. 비폭력 직접행동이란 무엇인가

생산노동ㆍ창조ㆍ유희

흔히 직접행동이라고 하면 폭력에 호소하는 실력행사를 떠올리고 때로는 폭력의 동의어 로 받아들인다. 그렇지만, 직접행동과 폭력은 아무런 관계가 없다. 사전을 뒤져보면 ‘직접’ 이란 “사이에 아무것도 끼우지 않고 접하는 것, 다른 것을 통하지 않고 곧바로”라고 되어 있다.

우리들에게 직접행동이란 다른 것을 통하지 않고, 자신의 힘으로, 자기가 필요한 것을 요구하는 행동이다. 좀더 얘기하면 우리들이 일상에서 필요로 하는 것을 간접적으로가 아니 라, 곧바로 손에 넣기 위해서 취하는 행동이다. 그래서, 특히 폭력적 직접행동이라고 하지 않는 한 그것은 폭력 이외의 모든 방법이라는 데서 비폭력의 직접행동이다.

더 간단하게 말하면 우리들이 일상생활에서 필요로 하는 물건이라고 할 때의 ‘물건’이 란, 예를 들면 식품으로 대표되는 생활물자일 것이다. 그것을 손에 넣는다는 것은 그것을 생산하기 위한 도구까지 포함해서, 이 경우 헷갈릴 것도 없이, 물건을 만드는 일 ― 생산이 고, 그 행동이란 노동이다. 다시 말해서 직접행동의 본질은 우선 첫째로 물건을 만들고 그 것을 위해서 노동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생산과 노동이야말로 인류의 역사를 통해서 인민만이 짊어지고 이룩해온, 인민만이 할 수 있는 인민 최대의 힘이다. 폭력 이외의 힘이다. 비폭력 직접행동을 단순한 항의행동을 위한 전술이나 마음가짐처럼 생각할 때가 많다. 그러나 비폭력 직접행동이란, 그것은 말할 것도 없이, 비폭력 상황의 일상이 있어야만 가능 한 생산과 노동이다. 사람들이 가정을 꾸리고, 삶에 필요한 물건을 생산하는 가운데, 그러 한 힘은 명료하게 나타나서 우리들의 일상생활을 이룬다. 당연하고 별것도 아닌 발현 그 자 체인 것이다.

둘째로 그것은 생산과 노동의 결과를 누리는 것이고, 셋째로 일상생활을 즐기는 창조활 동으로서 이른바 노래, 춤, 축제 등으로 확대되는 놀이이다. 직접행동이란 주어진 것을 누 리는 오락만이 아니라 인민 스스로가 만드는 창조행위이기 때문이다.

자치와 관리

우리들의 생활은 분명히 비폭력적 일상에 기반을 두고 있다. 생산과 노동, 기타는 우리 들의 평온 무사한 사회생활의 지속과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 그것은 본래 생산과 노동을 위 협하는 것, 이를테면 전쟁 등의 폭력과 근원적으로 대립하는 것이다. 폭력은 물리적ㆍ형상적ㆍ적극적ㆍ능동적ㆍ물량적ㆍ순발적이어서 금방 인식할 수 있다. 그 과정도, 결과도 잘 보인다. 그러나 비폭력은 눈에 잘 보이지 않는다. 추상적ㆍ정신적ㆍ 심리적ㆍ지속적ㆍ수동적ㆍ소극적 그리고 일상적이다. 그러니까 아무일도 없는 상황일 뿐, 의식하지 않는 한 있는지 없는지 알 수 없다. 그래서 “이게 비폭력이다” 하는 것을 누구도 알아차리지 못한다.

그러한 비폭력은 이미 말한 바와 같이 무엇보다도 직접행동과 결부될 때 비로소 가시화 되고 우리들 앞에 힘으로 나타나는 것이다. 아무일도 없는 것으로 있는 비폭력은 우리들의 생명력의 근원이며 우리들의 삶 그 자체의 기반이 되는 힘이다.

그리고 이를 통해 갖가지 활동을 만들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더 명확하게 말하면 우리와 이웃동아리들의 교류관계 혹은 자치회나 동네모임과 같은 것을 포함한 자치관리 또 는 사회생활이랄 수 있겠다. 그런데서 우리들은 유사이래 현대까지 그 자신이 만들어 온 힘 을 자각하지 못하고 오히려 권력의 지배를 떠받침으로써 이러저러한 우여곡절을 겪어 왔다 고 할 수밖에 없다.

비폭력이 생산노동일 때 그것이 자치관리와 결부된다는 것은 당연하다. 예를 들면, 농 민이 볍씨를 심고 익으면 벤다. 그것은 본래는 내년을 위해서 씨를 남기고 식량으로 저장하 고 기타 필요한 물건과 교환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러한 일을 계획적으로 종합해서 스스로 또는 타자와 더불어 관리하고 운영하는 것이 자치관리인 것이다.

비폭력 사회란, 단순히 폭력이 횡행하지 않을 뿐 아니라, 자치관리사회로서 비폭력 상 황을 스스로의 힘으로 구현하는 사회다. 그렇다면 생산노동이 자치관리와 결부되지 않을 때 그것은 임금노동, 노예노동이 아닐 수 없다. 비록 그것이 생산을 한다 해도 의사적(擬似的) 생산행위라고 할 수밖에 없다. 그리고 바로 그것이 국가가 지배하는 의사비폭력 체제의 현 실인 것이다.

간디의 소금행진

여기서 비폭력 직접행동을 더 구체적으로 생각하기 위해서 간디가 실행한 소금행진을 예로 들어 생각해 보겠다. 그것은 영국이 인도농민의 제염을 금지하고 소금을 독점 전매함 으로써 인민을 많이 수탈하려는 소금 전매법에서 시작되었다. 간디는 각지에서 모여든 농민 을 이끌고 수십일간의 데모행진을 조직했지만 다짜고짜로 금지당하고 탄압과 투옥으로 이 어졌다. 그런데도 행진은 거리에서, 마을에서, 사람들이 가세해서 해안을 향해 나아갔다. 그 곳에서 해수를 퍼다가 스스로의 손으로 소금을 만들었다는 것은, 필요한 것을 만들었다 는 상징적 의미를 갖는 것이었다. 이것은 법을 어겨서까지 행진을 이어갔고, 소금 전매법을 무시하면서까지 필요한 소금을 손수 만듦으로써 직접적으로 국가의 법률과 대립하는 것이 었다.

직접행동이란 이처럼, 첫째로, 우리들 스스로의 손으로 우리가 필요한 것을 손에 넣는 것이다. 소금이 필요한 농민이 당사자가 되어 직접 소금을 요구하기 때문에 시위를 한 당연 성과, 무한대로 많은 해수에서 소금을 만드는 작업을 한 정당성은, 그 누구도 침해하지 않 고 피해를 주지 않는다는 데서 권력자의 무법을 부각시키고 그들의 무법성에 직접공격을 가하는 것이다. 그것은 스스로를 위해서 생산하는 행위을 통해서 권력자와 인민의 관계, 생 산자와 생산에 기생해서 수탈하고 낭비하는 자들의 자세까지도 부각시킨다. 이렇게 직접행 동은 생산노동 그 자체라는 점에서 생산관계의 진실을 명백하게 한다.

둘째로, 우리들이 자기의 개인책임에서 스스로 행위한다는 것이다. 그가 소금행진에 참 가하는 것은 자기의 필요 때문에 결정한, 의지에 의한 것이다. 그것은 데모나 전매법 위반 에 대한 권력의 탄압을 자신의 몸으로 받는 것이기도 하다. 결과를 누구에게도 전가할 수 없는 장소에 자진해서 자신을 둔다는 것이다. 그 자신이 붙잡혀 투옥될지도 모른다는 것을 예상하고 참가한다. 이렇게 직접행동은 개인책임을 명백하게 한, 한 사람 한 사람의 주체에 의해 이루어진다. 말하자면 이것은 자치관리이기도 하다.

셋째로, 그것은 합법ㆍ비합법을 초월한 생산행위이다. 행진에 참가해서 항의를 하는 것, 나아가서 그의 필요성에 따라서 소금을 만드는 것은, 정당성에서 법적 시비를 초월한다. 지 배자는 반드시 위법을 문제삼지만, 그러한 법은 그의 정당행위를 벌함으로써 스스로의 불법 을 드러내지 않을 수 없다. 합법은 권력자의 명분일 뿐 결코 정의의 보증이 아니다. 직접행 동에 대해서 법률이 강권을 동원하면 할수록 그것은 법률 그 자체의 부정의를 증명하고 스 스로 무덤을 파는 일이 된다. 합법ㆍ비합법은 우리들에게 전술적 고려 이상의 것이 아니다. 이렇게 직접행동은 권력의 어떤 규칙과도 관련이 없다.

넷째로, 그것은 정치라고 하는 간접수단을 일체 부정하고 배제한다. 길을 따라 바다로 향해서 걸어간다는 것, 해수를 퍼다가 소금을 만드는 것은 그들에게는 가장 빠르게, 확실하 게 자기의 소망을 달성하는 길이다. 그것은 자연스럽고, 직접적이고, 누구에게나 당연한 방 법이다. 게다가 인민이 그것을 직접 만드는 수밖에, 그 누구도 소금을 만드는 사람이 없다 는 데서 오직 하나밖에 없는 올바른 길이다. 그렇다면, 소금을 얻기 위해서 여러가지 방법 이 있다 해도 그가 해야 하는 일은 정해져 있다. 그 일 외에는 모두 길이 멀고 불확실한 데 다가 완전히 소망을 이룰 수 있을지 아무도 모른다. 가령, 정치에 의존해서 데모의 규제를 완화시켰다고 하자. 그러나 그것이 그 자신의 행동에 의하지 않는 한 인민은 정부와의 대차 대조표 한쪽에 빚을 지게 된다. 그뿐인가, 정치는 그들과 그들의 생산물 사이에 개입해서 경비를 사용하고 시간을 허비하고 구전을 착취한다. 또 그뿐인가, 그렇게 해서 그에게는 언 제나 정치꾼을 매개로 하지 않으면 아무일도 못하도록 배후자가 붙는다. 우리들이 자기의 생산물을 사용하는 데 그처럼 귀찮은 방법이 필요할까. 이렇게 직접행동은 정치가 쓸데없는 게재물일뿐 아니라 착취의 방법으로 있다는 것을 명백하게 한다.

다섯째로, 그것은 인민의 존재양식이고 그 자체로 생활과 밀착된 싸움이다. 그의 행위 는 생활 그 자체로 그의 실력을 보여주고 그러한 실력의 행사야말로 인민의 유일한 거절이 라는 것을 자각하게 한다. 소금행진을 하는 것은 그것이 나날의 생활과 같은 의미를 지녔기 때문이다. 그것은 삶이고, 살기 위해서 그때 그가 할 수 있는 최대의 실력을 그의 육체 ― 생활을 가지고 ― 로 실행하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인민에게 직접행동이란 타인에게 물 건을 빼앗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물건을 만드는 것, 그렇기 하기 위해서 방해를 무시하는 것이다. 이렇게 직접행동은 방해에 대해서는 실력행사로서 생활의 의미를 명백하게 한다. 여섯째로, 그것은 나날의 생활 ― 생산과 관련해서 자립적으로 나날의 생활을 관리하는 것이다. 우리들의 일상은 생산의 장소와 도구, 원료를 자신의 생활을 위해서 확보하고 물건 을 생산하며 나아가서 올바르게 분배하는 일이다. 방해와 협박, 검거와 투옥에도 불구하고 소금행진이 엄연하게 계속된 것은 참가자 개인 개인이 자주적ㆍ자립적이며 전체로서 행진 을 자기의 책임에서 조정하고 관리했기 때문이다. 그것은 사회생활의 질서가 사실은 권력에 의한 통제적 법규의 결과가 아니라 본래부터 인민이 가지는 자연스러운 기능에 있다는 것 을 증명한다. 이렇게 직접행동은 인민의 속성으로서의 비폭력과 결부되어 그것이 매우 능동 적인 힘이라는 것을 명백히 보여준다.

현재 우리들이 생각하고 있는 생산과 노동은, 사실은 자기의 노동력을 상품으로서 자본 에 파는 것에 불과하다. 그렇게 해서 얻은 대금을 중개로 해서 간접적으로밖에 자기가 필요 로 하는 것을 얻지 못한다는 데서 우리들의 생산노동은 명백하게 의사화되어 있다. 바꿔 말 하면, 직접행동은 본래의 비폭력 상황하에서만 그러하고 사이비 비폭력 체제하에서는 그것 과 대응하는 의사 생산활동 이외에 아무것도 아니다. 마찬가지로 현체제내에서의 비폭력은 전체가 의사화․왜소화되어 의사 직접행동이나 권력자신의 폭력행동 밖에 있을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것은 대단히 중요한 의미를 갖는 것이다.

이처럼 모든 것을 체제내에서 강탈당한 상황하에서 이루어지는 우리들의 싸움은 정확하 게 말하면 직접행동 그 자체로서가 아니라 우선 비폭력 직접행동의 회복과 탈권의 투쟁이 다. 소금행진에서 실행된 채염은 일상적인 비폭력 상황하에서 지속적으로 이루어질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사실은 상징적인 것, 그것이다. 소금행진에 들어 있는 매우 첨예한 정치투쟁 은 ― 우리들 자신을 위한, 생산노동을 탈환하기 위한 더욱 엄격하게 말하면 비폭력 직접행 동 ‘탈환’의 투쟁이 될 것이다. 그것은 자신을 노동소외에서 되찾아내서 의사 생산노동을 자 신을 위한 것으로 만들기 위한 투쟁이다.

Ⅸ. 비폭력 직접행동, 몇 가지 문제

소수파의 노동운동

노동운동은 단순히 자기의 노동을 착취하는 자본이나 그를 구성하는 사회기구에 대한 투쟁만으로 끝나지 않는다. 자기의 의사 생산노동, 그러한 의사를 가져다주는 의사상황에 대한 투쟁이다. 비폭력 직접행동의 탈환이다. 솔직히 말해서, 될 수 있는 한 일하지 않고 벌지 않는 주의다. 자기가 하고 싶고 또한 할 수 있는 것만 한다. 그렇게 일하는 방법을 추 구하고 연구하고 생각하는 것을 즐기고 기쁨으로 여긴다. 그렇기 때문에 투쟁이란 노동운동 에서의 단순한 임금상승이나 조건개선 투쟁을 의미하지 않는다. 이것은 노동에서의 창조적 인 투쟁이다. 그리고 또 이러한 투쟁은 종래의 조합운동과 다른 도시의 잡업(雜業)노동자나 프리아르바이터 등 ‘미조직(未組職)’의 유동적 노동자에 의한 움직임 ― 노동의 거부와도 통 하는 것이다.

예를 들면 지금 우리들이 ‘비전(非戰)’이라고 할 때 그것은 군수산업에서의 노동이라면 즉시 생산점의 방기(放棄)를 의미하지만 그 이전에 우선 위장태업, 업무 불이행, 작업실수 다발, 결국에 직무거부 등 갖가지 형태의 경위가 우선 있고 나서 마지막으로 부당해고에 대 한 재판으로 이어지는, 자기자신의 처신과 존재방식을 만드는 것이다. 결말에 가서 구조조 정이나 실업에도 불구하고 생산점을 버리거나 떠나지 않고 집요하게 최후까지 투쟁을 계속 하는 어쩌면 자기 파멸적으로 보이는 소수노동자들의 존재야말로 여기서 말하는 노동운동 인 것이다.

한편, 자본가들은 의사비폭력 체제하에서 무엇보다도 자본의 존립기반의 안정과 유지를 필요로 한다. 그러한 의사가 허물어지는 것은 사회적인 혼란과 불안이 일어난다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소수파들의 움직임은 그 자체가 권력공격의 의미를 갖는다. 그러나 당연하지 만 이러한 소수파노조의 투쟁도 권력의 탄압에 봉착하지 않을 수 없다. 예를 들면, 생산점 에서 만든 자치공간에 권력이 치고들어 왔을 때 당연히 그곳에는 피아간의 폭력적 공방의 형태가 출현한다. 그것은 권력이 쓰고 있는 의사비폭력의 가면을 벗겨 그들의 정체를 더욱 명백하게 해서 일견 폭력적으로 보이는 투쟁이 나타나게 될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직접행 동의 부활 ― 생산노동 탈환에서 본질적으로 비폭력을 지향하는 것이며 폭력투쟁과 동질의 것은 아니다. 의사비폭력 체제의 붕괴과정에 대응하는 인민의 반폭력(反暴力), 다시 말하자 면 생명력으로서의 힘이 한정적으로 나타난 것이다.

생명력과 사회폭력의 가장 다른 점은, 후자가 그의 폭력조직기구를 자기 긍정적으로 더 욱더 심화․확대할 수밖에 없는 데 반해서 전자의 폭력은 한정적이고 조건적이고 상황적이 며 항상 비폭력으로 수렴되는 반폭력이라는 것이다.

되풀이해서 말하면, 국가가 행사하는 폭력과 인민의 반폭력이 대항할 때 일견 똑같아 보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직접행동의 시점에서 볼 때 그것은 전혀 다른, 이질적이라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어찌보면 헷갈리는 것을 구별하는 결정적인 기준은 그 행위가 근본적으로 어떻게 생산노동과 관련되었는지, 또 생산노동의 확보와 결부되어 있는지이다.

앞서 폭력은, 투쟁이 일시적으로 상황을 타개해도, 마침내 사람들의 버림을 받는다고 말했다. 직접행동은 한정적․조건적․상황적으로 나타난다 ― 는 것은 투쟁이 경직되지 않 고 그때 그때에 따라서 다양한 게릴라의 형태를 취한다는 것도 시사하고 있다. 그리고 게릴 라는 폭력투쟁의 것만은 아니라는 것도 확실하다. 즉, 반폭력적 대응은 그것만으로 끝나지 않는 갖가지 방법으로서 창조적인 투쟁을 창출하는 것이다. 투쟁이란 종래의 비폭력이나 폭력의 개념으로부터도 완전히 자유로운 데서 일어날 것이 다. 직접행동이 생산노동뿐만 아니라 창조활동이라는 것은 이 경우에 특히 의미를 갖는다. 그것은 기존의 개념을 깬 새로운 투쟁 ― 비폭력 직접행동으로 나타나지 않으면 안된다. 그 래야만 투쟁이 대응의 상대성을 넘어서서 우리들의 힘이 되는 것이다.

거기서는 이제 폭력의 강약에 의해서 승패를 결정하지 않는다. 기존의 비폭력 개념은 흔히 기성의 폭력개념과 밀착해서 오히려 새로운 투쟁형태의 발상을 방해했다. 강령도 규약 도 없고 대표도 두지 않는 비조직적 조직의 일반화, 개별적이고 다양 다중한 각각의 문제를 가지고 부분끼리 붙었다 떨어졌다 자유자재로 움직임으로 연결되는 모임 ― 그러한 잡민 성의 구경꾼적 방종이나 무뢰한적 성격이야말로 힘으로 끌어들이는 것을 생각하지 않으면 안된다.

공동체 등의 의미

앞에서는 이를테면 노동조합 ‘연합’ 등이 상징하는, 작금의 노동자와 노동운동 일반의 거의 절망적인 상황을 뇌리에 떠올리면서 일부의 사람들에게 있는 가능성으로 썼다. 그러한 의미에서 현재 더욱 절망적일지도 모를 ‘공동체’의 아주 작은 가능성과 불가능성에 대해서 써두고 싶다.

예를 들어, 70년대경 조금 문제가 된, 소규모지만 각지에 파생했던, 지금은 겨우 두세 개만 남은 ‘공동체운동’의 현재는 어떠한가. 그 때를 돌이켜보면, 당시의 이러저러한 공동체 건설의 시도는 일상생활의 차원에서 스스로 비폭력 공간을 창출하려는 것이었다. 무의식하 에서라도 비폭력 직접행동의 연속적 일상화이고 일상생활의 비폭력 직접행동화를 지향하는 것이었다.

1) 그것은 무엇보다도 체제내의 상품화된 노동에 대해서 비금전적인 노동이라는 점,

2) 공동체의 창설과 운영이 자치관리의 실천이라는 점,

3) 게다가 생활의 공동성을 통해서 개인의 일상영위를 스스로가 엄격하게 따지는 자기 관리의 장이라는 점,

4) 생산이 노동의 결과뿐만 아니라 스스로가 찾아간 자신의 손에 의한 창조의 기쁨이고 누림이라는 점에서 그러했다.

그러나 또 그것이 무엇보다도 비폭력 직접행동 본래의 의미를 영위하는 것인데도 공동

체측에서 누구도 말하는 이가 없고 그것을 알지 못했다는 점이다. 그리고 그 이유의 대부분은 순전히 공동체 그 자체 안에 있었다. 즉,

1) 공동체는 농경 등 공동노동을 통해서 내실을 만들어 보자는 것이다. 그것을 위해서 처음부터 일상생활 차원의 문제가 집중돼서 미시적인 소(小)상황문제의 처리에 쫒겨서 비 폭력 직접행동적 시점이 방기되어 버렸던 것.

2) 예를 들어 공동체의 발기가 무상노동과 같은 자본과의 공존을 거부한 것이었다 해 도, 그것이 개인생활의 공동체로의 탈출이라는 사회와의 단절로 완결돼 버린다는 것.

3) 공동체를 외부의 정치적 상황에서 지켜내고 유지하기 위해서 외부와의 접촉 창구를 될 수 있는 한 한정시켜 버리고 탈사회적 폐쇄성으로 전화시켜 버린 것.

여기서 이 항목에 관련해서 반기지투쟁 등에 대해서 약간 덧붙여 두겠다. 예전의 기지 투쟁이라고 하면 지금도 오끼나와, 산리즈까[13], 칸사이 공항[14], 히주우다이[15] …… 등과 각 현장에서의 투쟁이 떠오른다. 이러한 기지투쟁은 권력의 토지몰수나 토지수용에 대해서 토 지를 내주지 않으면서 생활을 지키는 데서 시작했다. ‘연좌’가 아니라 이른바 ‘입주’같은 것 이다. 그것은 공간적 장(場)투쟁이고 동시에 좀더 시간(일상생활)적인 지속투쟁이며, 말하자 면 그 두 개의 분리 여부가 비폭력 직접행동의 초점이라고 할 수 있다. 그것이 가장 잘 나 타나는 것은, 이를테면 기지내의 경작이다(구체적으로 말하면 현재 굉음이 머리 위 수십미 터를 비행하는 매수예정토지에 있는 산리즈까의 순환농장과 같은 것인데, 그것은 존재 자체 가 비폭력 직접행동이라고 하지 않으면 안된다). 그것이 그처럼 우리들의 일상에 큰 의미를 갖고 있는데도 현실적으로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고 운동이라는 것의 내부에서 무시되고 있는 것은 왜인가.

그것은 지금까지 이러저러한 형태로 이미 나타나고 있는 비폭력 직접행동을 총체로서 파악하고 현재의 시점에 맞춰서 다시 미래를 전망하는 비폭력 직접행동론이 제시되지 않았 기 때문이 아닌가. 그것을 자각적으로 만들어내는 노력이 전혀 충분하지 않은 것이다.

라르자크 공동체의 보베, 기타

여기까지 썼을 때 라르자크 공동체의 보베가 일본에 왔다는 것을 알았다. 라르자크는 프랑스 중앙부의 협곡과 석회암의 침식이 이어진 고원지대에 있으며 로크포르치즈나 목공 예품을 특산품으로 하는 농촌공동체다. 1970년대 초부터 비폭력 직접행동을 실시하고 프랑 스육군의 훈련지확장 반대운동을 전국으로 확산시킨 것으로 알려졌다.

그들의 방법도 특이한데 국민중 남자에게 필수인 군무수첩의 일제 파기운동에서 시작하 여 파리 에펠탑 밑의 양떼 데모, 또는 2000두의 양떼로 현 의회봉쇄 작전, 립프시계 노동 자와의 공동투쟁 대파업, 트렉터 70대에 의한 공장내 행진, 용수로를 없애려고 한 도로공 사에 대한 노농돌격(연대․합작) 수로건설, 공병대사무소에 쳐들어가서 측량서류와 불용도 면의 파기(22명의 행동지원자 투옥), 전국에 확대된 라르자크 위원회(GFA)에 의한 모금 에서 확장예정지의 4분의 1, 1,515헥터의 입수, 신규입촌자와 지원자에 대한 농장개방, 500두를 수용하는 염소우리 완성, 이주자의 군용지 점령경작, 신규입촌자를 위한 학교만들기, 낙하산 강하부대를 포위하기 위한 풀베기 작전과 이동중인 군대차를 운전해서 멀리 떨 어진 곳으로 추방하기, 수확제에 전국에서 모인 10만 3000명 등등. 분방하면서도 언제나 의 표를 찌르는 파격적인 비폭력 직접행동의 전술로 이름이 알려졌다. 당시 촌민은 평상시 500 명에서 1000명이라는 말도 들었다(각 집마다 자립해서, 그때 그때 출입이 있다).

그런데 여기서 당시라는 것은 벌써 지금부터 20년도 더 된 1980년경의 일인데 그것은 라르자크공동체의 창시자 란자 델 파스트가 산리즈까의 공동투쟁을 위해서 일본에 왔고 오 오사까의 우리 아지트 살루톤에도 묵어간 일이 있었기 때문이다. 파스트는 그 때 이미 80 세, 젊었을 때 인도에 가서 직접 간디에게 오래 사사하고 귀국 후에 라르자크에서 공동체를 시작했다고 한다. 산리즈까에 대한 파스트의 감상은 지금까지 나의 뇌리에 깊은 인상으로 남아 있다.

산리즈까는 라르자크의 우리들과 완전히 같은 투쟁을 하고 있다. 라르자크에서는 그것을 비폭력 직접행동이라고 부른다. 그렇게 의식하고 하는 투쟁이다. 그런데 산리 즈까는 자기들 자신의 투쟁을 비폭력 직접행동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렇기는커녕 더욱 무장투쟁으로 돌진하려는 방향에 사로잡혀 오히려 폭력투쟁으로 비난받고 있다. 폭력이 아닌데 그게 비폭력 직접행동이라는 자각이 없다. 확신도 없다. 그것이 최후의 결정타를 날리지 못하게 하고 있다. 비폭력 직접행동은 당연한 일상의 보통행동이지만 그것을 비폭력 직접행동이라고 자각하는 것으로 힘이 된다. 운동이라는 면에서 말하면 라르자크에서는 개별적이며 각자의 과제에 대해서 각자의 입장에 입각한 공동성에서 시작된다. 청년, 부인, 노동자, 카톨릭, 프로테스탄트, 에콜로지스트, 망치와 낫[16], 유 기농업자 등이 당파, 정당, 조직체에 구애받지 않는다는 것 ― 개인의 입장으로 그것이 우선 비폭력 직접행동이라는 공통인식에서 성립된다”

그리고 2년후 파스트가 서거했다는 풍문을 들은 후 완전히 잊고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보베는 나에게 처음 접하는 전혀 미지의 사람으로, 처음에는 그저 라르자크라는 직함을 보고 깜짝 놀랐을 뿐이다. 2002년 3월 29일 신문은 이스라엘군이 팔레스타인에 침 입하여 공격을 시작했다고 전했다. 그리고, 수일 후에는 의장청사까지 포격으로 파괴하는 바람에 아라파트가 집무하는 의장실까지 포위하고 수도, 전기까지 끊고 식량공세를 꾀하는 등 무법행위를 저질렀다. 이에 대해서 ― 비폭력을 표방하는 수십명의 국제시민파견단이 ― 이스라엘군의 작전의 틈을 타고 식량 등을 가지고 의장청사에 돌입하고 그대로 그 의장실 에 있으면서 ‘인간방패’로 의장과 측근들을 포격으로부터 지키고 있다는 기사가 나왔다. 그 런데 그들 뜻있는 이들 속에 마침 라르자크의 보베라는 이름을 발견한 것이다. 그렇다면 30 여년간, 아직도 라르자크는 건재하고 비폭력 직접행동을 계속하고 있었던 것이다! 나는 우선 그것에 주목했던 것이다.

‘인간방패’의 행동과 전술에 대해서는 그 후에 간행된 『팔레스타인 국제시민파견단 의 장부 방위전일기(パレスチナ國際市民派遣団 議長府防衛戰日記)』(太田出版)에 자세하게 실 렸다. 그 책의 저자대표로 조제 보베의 이름도 나와 있는데, 그 서문을 조금 인용하면, “이스라엘 시민이 있는 한가운데서 작렬하는 인간폭탄은 무서운 행위이다. 그러나 수일간이라 도 팔레스타인을 방문한 사람이라면 누구나 그곳에서 몇 년간이나 절망이 재생산되고 있고 폭력이 대규모로 행사되고 있는 것을 반드시 지적할 것이다. 테러를 결코 허용하지 않는 것 이 아니라 무엇보다도 먼저 어떤 테러가 다른 테러에서 나온다는 것을 지적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해서 그 활동의 일단을 보이는 것 같았다.

그런데 다시 11월 11일 아사히신문 조간에 돌연 「재수감에서도 투쟁, 유전자조작에 항의 ― 프랑스 활동가 보베씨」 라는 타이틀의 기사가 실려 있었던 것이다.

일본을 방문한 프랑스의 세계화 반대 활동가 조제 보베씨(49세)가 인터뷰에 응하고 유전자조작을 위한 벼를 뽑아버린 사건에서 프랑스 대법원의 판결이 5일 언도가 예견되는 것에 대해 “내가 수감되더라도 투쟁은 형무소 밖에서 계속될 것이다”라고 말 했다. 또 미국자본계열의 햄버거 체인 맥도날드의 신축건물을 해체한 행위로 수개월의 금고형을 복역한 보베씨는 대법원 판결에서 실형이 확정되면 다른 사건과 합쳐서 14 개월 수감된다. 보베씨는 “합법성보다 운동의 정당성이 중요하다”라고 말했다.

여기서 비폭력 직접행동이 그대로 그의 투쟁이 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러한 일견 과격하게 보이는 행위는 그에게는 전혀 아무렇지도 않은 당연한 행위가 틀 림없다. 그리고 비폭력 직접행동이란 보베씨뿐만 아니라 본래부터 우리들에게도 그런 것이 다(이러한 비폭력 직접행동은 그 시점을 조금만 바꾸면 여러가지 실례를 얼마든지 들 수 있다. 이를테면 원전반대운동에서 시부루크에서 전원이 훈련을 마치고 1700명이 일제히 부 지내에 연좌행동을 전개하여 체포거부작전에 나서는 등, 우리는 운동의 가능성이 무한함을 간과하고 권력을 안도하게 하고 있다고도 하겠다).

Ⅹ. 한사람의 무리(群)로

생산점ㆍ생활점과 시민노동자

지금 일반적으로 시민 그리고 이와 동일하게 쓰이는 노동자라는 개념은, 국가와 자본에 생활의 모든 것을 내주고 있으면서 때로 중산계급 의식하에서 한결같이(?) 노동하는 도시 또는 그 주변의 근로자나 샐러리맨 그리고 시간제 근로자 등 주부일반에 대한 지칭일 것이 다.

여기서는 일단 ‘시민노동자’라고 부르기로 한다. 시민노동자는 생산점과 생활점이라는 두 개의 장을 축으로 나날이 왔다갔다하면서 일하는 대다수의 사람들이다. 그와 그녀는 날 마다 일터로 출근하고 무엇인가 ‘상품’을 만들기 위한 생산공정에서 일하고 있다. 틀림없이 그것은 생산노동이고, 만들어낸 ‘상품’은 그러한 사람들의 노동이 있었기에 있는 것이다. 그 런데도 그것은 결코 비폭력 직접행동의 생산노동이 아니다. 말할 것도 없이, 완성된 ‘상품’ 은 생산에 관련된 노동자들의 것이 아니라 처음부터 자본의 것이다. 만약에 그것을 필요로 한다면 임금에서 얼마의 돈을 꺼내서 대금을 지불할 수밖에 없다. 그는 다만 임금노동을 하 고 있을 뿐이다. 그러면서 그에 대해서 조금도 의심하지 않는 데서 시민노동자는 억지로 시 민생활의 충족 또는 만족을 얻는다.

그러한 시민노동자의 생활의 장으로서 시민사회는, 시민생활의 일상에 사적(私的) 개별 사항의 현실성으로 존재한다(그것과 대조해서 정치사회는 관념적․공적(公的) 보편사항의 추상성으로 시민생활과 격리되어 성립한다). 즉, 시민운동은 정치국가와 시민사회의 분열이 라는 모순, 본질적으로 생산력과 유통관계의 틈에서 파생되는 여러가지 상극을 개별적으로 해소하려는 데서 거의 체념하면서 때때로 분출되는 것으로서 있다. 이 운동은 시민개개인의 공통이해 또는 문제의식에 기초를 두어 당연히 조건적이고 부분적이고 한계적이다. 설령 운 동이 확대되고 앙앙된다 해도 시한적, 국지적인 것으로 멈추고 다른 부분과 결합되거나 누 적적 발전이 거의 없으며 쉽게 반권력투쟁이 되지 않는다.

말을 바꿔서, 이른바 노동조합은 산하의 노동자를 규합해서 한결같이 생산점을 지킴으 로써 이제는 조합원의 조촐한 물질적 욕구의 충족을 자본과 국가가 ‘풍요롭다’고 말하는 데 맡겨버리고 완전히 관리기구 속에 있다. “잃을 것은 사슬뿐”이라는, 그 자체로 변혁의 요인 을 내재한 노동자는 예전이나 지금이나 마르크스가 말한 부정적 존재로서의 ― 극빈층, 룸 펜프롤레타리아 또는 밀입국한 외국인 노동자들 속에만 존재한다. 따라서 자기의 일상을 의 식적으로 비폭력 직접행동의 위치로 밀고 나가서 생산점에서의 의사 생산노동을 방기하는 노동자는 없다. 극히 소수의 노동자와 개인이 가맹한 합동노조 등을 제외하고 거의 모두가 자본의 톱니바퀴의 하나로, 다시 말해서 사회생활의 기점(基点)을 임금노동에 두고 생산점 을 축으로 일상을 살고 있다.

그러나 그는 노동자지만 역시 한편에서 생활자적 시민이므로 하루에도 몇번씩 생산점을 이탈해서 노동자라는 것을 그만두는 순간이 있다. 예를 들면, 일하다가 자리를 떠나서 담배 를 피울 때, 점심을 먹으면서 주간지를 읽을 때, 술집에서 동아리들과 맥주를 마실 때 등. 그리고 휴식, 소비, 생활의 장으로서의 공간, 즉 거주의 장과 그것과 연관된 생활점으로 돌 아갔을 때. 이렇게 노동자는 생산점과 생활점을 왔다갔다하는 왕복을 날마다 되풀이하고 있 다. 그러나 그의 생활점은 그만의 장으로 외부로부터 거의 폐쇄되어 있기 때문에 일시적 휴 식의 장에 불과하다. 휴식이라기보다 다시 그저 생산점으로 되돌아가는 것을 전제로 하는 장이라는 점에서 그것은 도착점조차도 아니고 생산점 왕복의 반환점일 수밖에 없다.

다시 말해서 그의 생활은 확실히 생산점을 축으로 해서 회전하고 있는 것이다. 생산점 은 그에게 타자 ― 정치사회환경과 결부되는 유일한 통로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렇기 때문에 자기 소외적 생산점에서, 자기회복으로서의 생활점을, 만약에 그가 적극적으로 의식 했다 하더라도 그저 생산점에 의거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이것은 크든 작든 도시잡업 노동 자나 프리아르바이터들에 대해서도 할 수 있는 말이다.

그렇다면 그의 생산점으로부터의 탈출은, 생산점과 생활점의 두 곳으로 찢겨져서 왕복 하고 있는 자기의, 생활점에서의 자기발견 이외에는 있을 수 없다. 그것은 시민노동자로서 의 의사 생산노동을 객체화함으로써 노동자의 의미를 새로 발견하는 것이기도 할 것이다. 그러나 물론 그것만으로 시민노동자는 자본의 진지 ― 생산점을 내부에서 허물거나 탈취하 는 투쟁으로 궐기할 수는 없다. 그리고 여기서 시민사회에서 나온 시민운동이나 그룹이 다 양한 모습으로 시민노동자 앞에 등장하게 된다.

시민노동자에서 잡민(雜民)으로

시민운동은 본래 우리들의 생활점에 기반을 두고 있다. 그 기반은 일상생활을 영위하는 데서 생기는 감정적․이해적, 공동성․관계성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들이 시민운동 에 접촉하는 계기는 사회생활 중에 자기의 이해나 생활감정의 공동성의 인지와 관계의 공 감성에서 생긴다. 그러나 그것의 모양이나 내용, 과제의 크고 작음, 대상의 구별 등, 실로 천차만별이다. 관계의 설정도 임의이고 자의적이라고까지 할 수 있다.

그와 그녀는 때로 자기의 생산점과 인연에 관계없이 시민운동에 참가한다. 그러나 자기 의 생활점 = 시민생활에서는 서로 연결되며 타자와의 최저한의 필요관계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그것은 각자가 의식적으로 생활점을 시민사회를 향해서 열어나가는 행위라기보다도 오히려 생산점에서 벗어나서 익명화된 개인으로서 시민사회에 섞여들어 가게 되는 것이라 고 하는 게 옳다.

그러나 우리들의 생활점으로서의 시민사회도 시대의 커다란 조류와 변화에, 당연하지 만, 심하게 흔들린다. 때때로 직면하는 현실적인 정치과제에 비추어 자기의 내부로부터도 변화와 변혁을 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그리고 그와 그녀는 어쩔 수 없이 무관계의 관계로 서 현실 속에서 자치관리 의식을 환기시키는 모순적 존재가 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변화하는 시민사회는 옛날의 시민노동자적 체질을 더 한층 잡민화(雜民化)할 것이다.

그것은 과거의 조직이나 당파, 이데올로기나 정치 등과 무관한 이른바 아나키로 취미나 기호에 따르는 개인적이고 어느 의미에서는 무책임하고, 사정이 허락하면 가벼운 마음으로 “와”하고 모여서 움직이고 끝나면 각기 산산이 흩어지는 무조직적(無組織的) 모임이다. 정 체가 조금도 명확하지 않고 이합집산이 순탄하지 않은 모임이라고 해도 좋다.

그것은 지금 적지 않은 젊은이들 중에 자치관리의 경향 ― 이를테면 생산점과의 거리를 스스로 유지하면서 기업 사회일반과 다른 생활을 지향하는 잡업자들, 정규직 거부지향의 반 실업자군이나 프리아르바이터들 또는 자원봉사자들. 그 이름이 꽤 알려진, ‘아끼노아라시(秋の風, 천황제 반대모임)’나 ‘다메렝(だめ連)’ 등 한때는 끊어지고 또 어느 때는 부활하면서 거품처럼 생겼다가는 어느 사이에 꺼지는 소수집단의 파생, 시민도 인민도 노동자도 그래서 자기 이외의 아무것도 아닌 ‘잡민’ 의식의 출현인데 안토니오 네그리가 이름붙인 Multitude (다중)라고나 할 수 있는 것이다. 좀더 얘기하면 세계적으로는 반세계화․반자본주의의 이 름으로 이를테면 세계정상회의에 각국에서 모여드는 수만명의 잡다하고 카오스적인 그 숫 자가 의미하는 것들이다.

그리고 이러한 움직임에 공통된 근저에 커다란 흐름으로서, 나는, 지금 ‘비폭력 직접행 동’이 다양한 형태로 구체적으로 움직이고 있다고 주장하겠다.

앞에서 말한 소수노동자는 좀더 시민운동과의 접근이 요구되지만 라르자크나 사파티스 타의 구체적 시사는 틀림없이 귀중한 경험이 될 것이다. 더군다나 시민노동자라기보다 오히 려 잡민으로, ‘잡민화’됨으로써 더욱 개별과제에 대치하게 되는 여러 운동, ― 차별이나 국가 (國歌), 국기(國旗), 야스쿠니나 유사입법, 장애자문제, 이스라엘의 팔레스타인 침공 등 헤아 려보면 수십가지도 더 되는 ― 이러한 문제를 하나하나 흩어진 채 밑바닥에서 일반화하는 것이 비폭력 직접행동에 다름아니라는 것이다.

그리고 각각의 개별과제를 과제로 삼아서 움직이지 않을 수 없는 잡민의 잡민성을 만들 어내는 것, 그것이 바로 비폭력 직접행동이다. 다시 말하면 그것은 무엇보다도 조직으로써 가 아닌, 조직운동이 아닌 것을 특징으로 하는 ― 아나키즘에서 말하는 자유연합이다. 이를 테면 각각이 취미동호적 친목에서 시작하는 ‘관계’, 그리고 그것의 연계의 연계로 언제든지 헤어질 수 있는 비폭력 직접행동의 자의성이야말로 오히려 연결된 네트워크의 의미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끝으로 한마디만 더. 한 사람의 무리(群)로, 그러한 개인의 이합집산의 토대 위에 있는 비폭력 직접행동을 우리들이 극히 당연한 일상생활 속에 있는 것으로 새삼 자각하고 다시 파악하면, 그러한 시야에서 우리들의 일상은 틀림없이 크게 변할 것이다. 우리들이 변하는 그 때, 마침내 의사비폭력 체제는 흔들리기 시작했다고 말할 수 있지 않은가.

부록 1. 지극히 사적․탈선적으로

입장과 관계

애당초 “로프트플러스원 습격을 용서하지 않는다……”라는 이름에서 뭔가 내부투쟁같은 싸움판이라고 알려진다. 어느쪽이 어떻게 되든 나와는 그다지 관계가 없는 남의 일이다. 시 민사회의 일상적 변두리에서 일어난, 말하자면, 당사자들간의 컵 속의 폭풍이지. 그런데 그 게 또 ‘호기심에서라지만 어째서 당신이 공동서명인이 됐냐’고 물어보면, 첫째로, 이 ‘성명’ 에 찬성해 달라고 한 게 다른 사람도 아닌 가시마(鹿島)군이었기 때문에, 둘째로, 사건의 전후사정이나 시비가 어떻든 간에 이 경우 대다수의 ‘억울한 약한 자를 두고 볼 수 없어서’ 라는 취지에는 찬성하니까. 셋째로 로프트플러스원이라는 재미있는 술집의 영업이 이런 일 로 재미없게 되는 건 재미없으니까 ― 결국 이렇게 ‘남의 일에 참견’하면, ‘관계’라는 것이 이런 데서 시작해서 깊은 수렁에 빠지게 되는 것이다.

약한 자의 폭력과 비폭력

그러면 여기서 우선 ‘싸움은 결과적으로 힘센 놈이 이긴다’, 그리고 ‘승리를 결정하는 강 함은 상대보다 물리적 폭력이 월등하다는 것’임을 까놓고 말해둔다. 그래서 사또오(佐藤)군 에 대해서 말하면, 가령 그것이 일 대(對) 일의 개인적 싸움으로서 ‘폭력사건’이라면 어느쪽 이 이기든 간에 나와는 본래 무관하니까 내버려두면 된다. 그러나 그게 아무래도 모른 척 할 수 없게 되는 것은, 이를테면 사또오군 개인이 한 일에 대한 반응이 전기파(戰旗派)[17] 또는 어떤 뜻을 지닌 사람들과의 ‘일 대(一對) 조직(또는 다수)’이라는 형태의 다음 단계로 나타났기 때문이다. 그것은 폭력의 제 1차 질적 전환이다. 말을 바꾸면 ‘상대방이 강하다’든 가 ‘잘못하다간 진다’고 생각할 경우, 보통 약한 놈은 맞서서 싸움을 걸어서는 안된다. 감히 말하면 결국 사또오군과 같이(그렇지만 현장을 보지 않았으니까 무책임한 추측이 되겠지만) 청중 중의 한사람으로 강연중에 빈정대는 소리를 지르거나 야유하는 전단을 뿌리는 따위(이 것만 해도 용기와 다소의 각오가 필요하지만)일지도 모른다. 이것은 폭력에서 대결을 요구 하는 도발도, 폭력을 위한 것도 아니고 오히려 폭력을 봉쇄하기 위해 자연스럽게 나오는 약 한 자의 비폭력 ― 폭(暴)이 아닌(非) 힘(力)으로 나온 방법의 하나인 것이다. 그리고 그 때 비폭력도 폭력과 똑같은 생명력의 발현이며 특히 약한 놈에게는 폭력에 대응하는 의미를 지닌 힘이다(아울러서 말하면 약한 놈끼리의 폭력사건은 아이들 싸움에서 볼 수 있는 의투 (擬鬪)와 같은 결과로 끝나기 일쑤다. 만약 그렇지 않으면 순간적으로 끝나는 충동적 착란 혹은 생각하고 생각한 집념 끝에 결행하는 매복이나 야습, 또는 죽음을 각오한 테러이다. 그리고 조직적으로는 게릴라 밖에는 없다. 그러나 그 결과는 99% 결정되어 있다).

조직과 그 내부 공격성

앞에서 ‘강하다는 것은 물리적 폭력이 상대보다 우월하다는 것’이라고, 누구나 아는 것 을 말했다. 그러나 이 당연한 정리는 곧 상대측의 구체적인 대응 ― 다시 말해서 인원과 물 량의 조직화에 의해서 지극히 간단하게 전복된다. 그러니까 폭력은 조직에 대해서는(이쪽에 서도 조직으로 대응하지 않는 한) 거의 무력한 것이다(따라서 조직이야말로 현대폭력론의 핵심이다). 그리고 조직이라고 하면 전형처럼 떠오르는 정치당파, 분파주의(섹트)의 예를 들지 않아도 우선 무엇보다도 통일과 단결이 중시된다. 물론 그것은 규약, 당칙, 통제가 성 문화되고 전체의 합의와 승인으로 성립된다. 결코 강제나 지배를 의미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 확대중인 조직조차도 파벌이 생기는 것을 피하지 못하는 것은 왜인가. 더구나 운동이 매너리즘화(化)로 정체되어 꼼짝도 못하게 되면, 금방 노선문제로 옥신각신하게 되고 그것이 안으로의 단속 ― 사문(査問), 규탄, 나아가서 골육상쟁하는 내 부투쟁이나 분파투쟁으로 나타나는 것은 왜인가 ― 요컨대, 어떠한 조직이라도 그것이 통일 과 단결을 지향하는 한 언제든지 내부투쟁의 가능성을 내재하게 된다(이제까지 쓰여진 사 회운동사가 거의 모든 운동의 분열항쟁사에 불과하다는 것으로도 알 수 있듯이, 그것은 통 일과 단결이 조직의 내부 공격성에 의거하는 특성임을 밝혀둔다).

폭력의 변질과 전환

폭력이 조직을 의미하는 것이 되는 바로 그 순간부터 폭력은 변질된다. 다시 말해서, 인간적이기 때문에 동물적 생명력이라고 할 수 있는 본래의 생명력으로서의 의미를 상실하 게 되는 것이다. 그것은 첫째로 사또오군의 경우에서 본 바와 같은 조직폭력 대 개인이라는 노골적인 우열의 형태를 취한다. 그러나 그렇기 때문에 대체적으로 멈추지 않는다. 둘째로 인원수 대(對) 인원수 → 조직체 조직으로 전환한다. 우열의 확대를 통한 균형화이다. 셋째 번 전환 ― 즉 첫째, 둘째의 과정을 총괄하고 게다가 불가시(不可視)가 된 구조폭력 → 의 사비폭력 체제로 수렴함으로써 고정되는 것이다. 그것은 약한 놈이 그것을 승인하고 지지해 서 절대폭력이라는 의미의 것이 된다. 바꿔 말하면, 사또오군이 전기파에게 당한 로프트에 서의 폭력사건은 앞의 첫째 단계이면서 그 다음에 나오는 대응과 뒤엉켜서 폭력의 본질에 대한 성찰을 제기하고 있다.

의사비폭력 체제의 현실

되풀이하게 되지만, 현대사회의 최우익에 위치하는 최대의 조직은 국가이며 구체적으로 는 정부이다. 그것은 대의제로 시작해서 법규, 조례 등에 의한 질서유지를 명목으로 하는 합법적 폭력장치 ― 경찰, 재판소, 형무소를 구비한 의사비폭력 체제를 구성하고 있다. 국 민은 그러한 의사비폭력 이데올로기에 무감각한 채로 비폭력 질서에 합의하고 되풀이되는 선거에 의해서 추인(追認)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여기서 제기되는 질문은, 이렇듯 자기가 자기를 결박하고 있는 것과 같은 상황 에서 우리들은 무엇을 할 수 있는가, 무엇을 무기로 저항하는가이다. 대답은 단 두 가지 방 향 밖에 없다. 그것은 폭력적 저항인가 비폭력 직접행동인가이다.

그러나 이미 밝혀진 바와 같이 전자는 단 한 번에 끝나는 도박이다. 다시 조직적 대응 ― 이것의 강화․확대는 권력의 탄압을 초래한다. 거기서 나오는 운동의 위기와 부침이 때 로 스파이 문제나 내부투쟁이 된다는 것도 또한 이미 충분히 본 바이다 ― 그렇다면 단 한 가지 남은 것, 비폭력 직접행동뿐이다. 이제 선택의 여지는 없다. 지금 그것은 무저항주의 나 비폭력주의 또는 비폭력 행동으로 표현되기 때문에 애매하게 되었지만 실로 그것을 자 각하는 데서 폭(暴)이 아닌(非) 힘(カ)으로서 직접행동인 것이다.

비폭력 직접행동이란 무엇인가

두서없이 자의적으로 생각하는 대로 늘어 놓으면,

① 직접행동이란 생산과 창조, 예술과 문화의 자치관리, 노동과 유희의 자기 향유이며 그것이 바로 약한 사람들 ― 인민 ― 만이 일상생활에서 이루고 수행하고 있는 생활력인 것이다. 그리고 그것을 보증하는 절대조건이 비폭력 사회인 것이다.

② 애당초 비폭력 직접행동은 우리들 약한 자만이 갖는 생활력 ― 생명력 ― 의 힘이라 는 것을 우선 제대로 확인하라.

③ 국가는 그 권력을 직접적 폭력이 아니라 의사비폭력에서의 폭력으로 개입하고 지배 함으로써 구체화하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비폭력 직접행동은 본래의 그대로이고 게다가 그 렇기 때문에 의사비폭력 체제를 거부하고 저항하는 것이 된다.

④ 비폭력 직접행동은 승리를 지향하지 않는다. 오직 지고 또 져도 지지 않을 뿐이다. ‘두부에 못’, ‘버드나무에 바람’으로 대치한다. “이기는 게 아니라 끝내 지지 않을 뿐이다”라 고 할 때 비폭력 직접행동은 상대방의 의사(擬似)를 오히려 반대의 힘, ― 상대의 약점으로 삼는 의미와 방법이 된다. 그런 것으로 국가를 거부하는 영구혁명 ― 역사로 이어진다.

여기까지 썼는데, 아무래도 불충분하고 할 말이 더 있는 것 같다. 비폭력 직접행동의 방법을 말해달라는 질문을 받으면 나는 대답할 말이 없다.

그러나 비폭력 직접행동은 어떤 사태, 어떤 상황이 눈앞에 있고 그것을 향해서 몸을 내 밀며 부딪치는 방법의 다양성, 임기응변을 즐기는 법 ― 개인의 놀이에서 시작된다고 하면 조금은 통할지도 모른다. 여기서 내가 이제까지 해 온 것을 예를 들면 금방 “고작 그거야!” 하겠지만, ― 사또오군이 로프트에서 한 것과 비슷한, 이를테면 권력에 대한 “귀찮게 구는 5 월의 파리나 잠든 꽃 속의 모기[18]”처럼 때로 귀찮게 하는 정도의 것일 뿐이었다(이에 대해 경찰 나부랭이들은 기소도, 구류도 못했다. 그보다도 신문이 대서특필한 탓에 선전이 되어, 기껏해야 5차례밖에 안되는 ‘가택수색’이 있었을 뿐이다).

그런데 ― 요즘은 이제 나도 나이를 먹어 거의 움직이지 못하지만 ― 좀 전까지는 노동 자 소수파의 데모나 피켓팅, 연좌데모 등에 조금 기대를 걸고 가마가사끼(釜が崎), 산야(山谷), 거기다가 신주꾸(新宿)[19], ‘아끼노아라시(秋の嵐)’와 이노껭(イノケン)[20]이 문제제기한 것을 응원하면서, 동아시아 반일 무장전선(東アジア反日武裝戰線)[21], 일본 적군파 등의 체포자 구원(救援)에 당연히 관계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지금 천황제 반대, 원전반대, 사형제도 폐지, 국가배상 청구소송 등에 아주 쪼 금이나마 관계하고 있는 것은 무엇든 간에 그것들이 의사비폭력화한 국가폭력의 느슨해진 틈, 허점에 대치하는 특징을 지닌 과제의 장이기 때문이다.

역사와 비폭력 행동, 여자들

이쯤에서 결말을 서두르겠다.

요즘 내가 자꾸 생각하는 것은 역사의 연속성이라는 커다란 흐름 속에서의 변천이라기 보다 미완의 작은 성과[小達成]가 있다는 것, 그리고 그 의미에 대해서다(이를테면 그것은 비폭력 직접행동의 사회적 일상을, 그것을 자연스럽게 나타내고 있는 여자들의 여성사에서, 나는 어머니나 할머니가 걸어간 50년, 100년 전과 지금 나와 가까운 지기인 그녀들과의 공 통성과 차이점을 알면 변천이라고만 말할 수 있는 것이 아닌 역사의 의미가 밝혀질 것이다).

그것을 이 폭력론 노트에 이어서 말하면, 강한 자가 지배하는 직접폭력 사회에서 현대 국가의 의사비폭력 체제 사회까지 오는 데는 약한 자의 길고도 이러저러한 단계의 도정(道程)이 있었다. 그리고 그러한 연속성에서 앞으로도 그것이 계속되면서 결코 멈추지 않는다 는 역사에 대한 나의 신뢰이다. 그것이 내 삶이기 때문에 내가 역사에 책임질 문제는 아니 다.

의식하든 안하든 간에 결국에는 비폭력 직접행동의 작은 성과, 미달성(未達成)이 거듭 되면서 역사를 계속해서 만든다는 확신이다. 역사를 강에 비유하면, 개인의 일생은 강의 흐 름에 따라 흐르는 무(無)와 같은 한 방울의 물에 지나지 않는다. 나는 그런 무와 같은 한 방울의 물로서 흘러가면서, 때로는 그 흐름이 소용돌이치거나 맴돌다가 급하게 흘러가는 곁 물살을 헤엄쳐 왔으며, 생각하면 꽤나 재미있게 내가 하고 싶은 대로 떠내려왔다고 생각한 다. 그리고 그러한 흐름이 바로 문자 그대로 내 운동의 한순간을 뜻하는 것이었다. 조금만 더 비폭력 직접행동이란 무엇인가를 계속하겠다. ―

⑤ 폭력은 극복적, 적극적, 현상적(가시적)이다. 따라서 폭력의 행사는 의사비폭력 체 제하에서는 비일상적인 것으로 항상 여론의 감시를 당하고 그것의 과잉 행사는 거꾸로 억 제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⑥ 비폭력 직접행동은 방어적, 수동적, 정신적(불가시적)이다. 그러나 그렇기 때문에 역사의 연속성이 지속되는 가운데 있는 작은 달성을 어느 사이엔가 만드는 보이지 않는 축 적이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⑦ 비폭력과 직접행동을 하나로 묶는 것은 본질적 모순은 아닌가 하는 질문을 때때로 받는데, 그렇지 않다. 예를 들면 생물의 자웅, 인간의 남녀가 ― 생물본래의 사명 ― 생식 이라는 남녀관계가 새로운 생명을 계속해서 만드는 것같이 비폭력 직접행동은 생명생활이 라는 점에서 어떠한 폭력지배도 마음대로 할 수 없는 힘이다.

⑧ 사또오군의 패러디 명함이나 전단이나 야유가 무의식중에 모든 이를 웃기게 하는 따 위의 해학, 풍자, 특히 놀이 그 자체였다면 더욱 좋았는데. 여기서 빠진 것이 비폭력 직접 행동의 관점이다. 그보다도 사또오군이 만약에 알아차리고 여자들의 입장에서 문제를 제기 했다면 틀림없이 폭력ㆍ비폭력의 본질에 더 깊이 접근했을 것이다.

⑨ 역사의 연속성과 거기서 생기는 작은 성과는, 완전히 비폭력 직접행동의 자각과 그 확대를 이끄는 여기서부터 여자들이 열쇠를 쥐고 있다. 마지막으로 이것을 강조해둔다.

1999. 2. 8(未完的 完)[22]

부록 2. 테러를 초월하는 것

문제 제기 1 ― (오끼나와)

우선 처음에 아사히신문(1999. 6.26)석간에 실린 픽션, 오끼나와의 작가 메도루마 슌(目取眞 俊)씨의 『코자 희망(コザ希望)』[23]에서 추려내서 대강의 줄기를 소개하겠다(저자에게는 실례지만, ……은 중략부분)

6시 뉴스의 톱은 코자의 시가지에서 그다지 멀지 않은 숲 속에서 행방불명이던 미 군병사의 어린애가 시체로 발견되었다는 것이었다. 식당에 있었던 몇 사람의 손님과 점원의 눈이 텔레비젼을 주목한다. 사체에는 목이 졸린 흔적이 있고 현(縣) 경찰에서 는 살인과 사체유기로 범인의 행방을 쫓고 있다. 상투적인 말을 한 다음, 거리의 소리 가 소개된다.

…… 취재기자가, 신문사에 보낸 범행성명에 대해서 코멘트하고 있다. 앞에 있는 석간 1면을 본다. 성명문의 사진이 실려 있다. 지금 오끼나와에 필요한 것은 수천명의 데모도 아니고 수만명의 집회도 아니고 한 사람, 미국인 어린아이의 죽음이다. 위협적 인 예각과 직선의 빨간 글자

…… 헬리콥터가 촬영한 숲과 코자 시가의 화면이 나오다가 현지사(縣知事)와 일 미(日米)정부고관의 코멘트가 이어진다. 순진무구한 어린이를 노린 범행에 대한 분노 와 증오, 웃음을 참고 카레라이스를 입으로 나른다. 흥분된 말 뒤에 있는 초조감이나 당혹감을 감추지 못한다. 놈들은 유순하고 얼빠진 오끼나와 사람이 이런 일을 저지르 리라고는 생각조차 못했다. 반전이니 기지반대니 떠들어댔지만 고작 집회를 열고 질서 정연한 데모로 얼버무리는 유순한 민족, 좌익이니 과격파니 해봤자 사실상 해가 없는 게릴라를 펼칠 뿐이지 요인테러나 유괴를 하는 것도 아니고 총으로 무장하는 것도 아 니다. 군용지 사용료니 보조금이니 기지가 누는 똥과 같은 돈에 몰려드는 구데기 같은 오끼나와 사람, 평화를 사랑하는 화해의 섬, 구토가 난다.

…… 최저의 방법만이 유효한 거다. 멈춰서서 투덜거린다. 거리 저편에서 카메라가 돌아간다. 보도로 들어서서 걸음이 빨라지지 않게 주의하면서 아파트로 돌아왔다.

…… 시영단지 북쪽에 있는 숲으로 들어갔다. 스산한 길에서 차가 흔들릴 때까지 어린애는 눈을 뜨지 않았다. 뒤에서 나는 울음소리에 차를 세우고 돌아보니까 일어서 서 창을 열려고 한다. 사내아이인데 3살쯤 됐을까, 곧 차를 세우고 뒷좌석으로 돌아가 서 울어대는 조그만 몸을 안아 올린다. 그리고, 뒤에서 목을 졸랐다. 목구멍 속에서 무엇이 터지더니 오물이 팔을 적신다. 아이의 옷으로 닦고 다시 운전해서 숲 속에 있는 폐목이 된 양계장 그늘에 차를 세웠다. …… 국도에 나와서 택시를 두 번 갈아타고 아파트로 돌아왔다.

…… 돌아오는 길에 기노만(宜野灣)시 해안공원에 들렀다. 3명의 미군이 소녀를 강간한 사건에 8만여명이 모였지만 뭐 하나 하지 못한 희극이 먼 옛날처럼 생각났다. 그 날 회장 한 구석에서 생각했던 것을 이제 겨우 실천할 수 있었다. 후회도 감회도 없다. 불안에 떨던 조그만 생물의 체액이 어느날 돌연 독으로 변하는 것처럼, 자기의 행위는 이 섬의 자연이고 필연이라고 생각했다. ……

문제 제기 2 ― (테러)

다음은 『미스즈(みすず)』[24] 466호(2000년 1월)에 게재된 토야마 이찌로오(富山 一郞)씨의 글을 일부 옮긴 것이다.

모든 의미에서 테러를 생각하지 않으면 안된다. 그 앞에 정지하지 않고 한없는 상

상력과 인내심으로 그 일당들보다도 재빨리 그것을 예감하고 입수하지 않으면 안된다. 그리고 메도루마 슌은 코자를 생각하면서 이 작업에 착수했다. 오끼나와라는 이름에 달라붙어서 위기상황을 꾸준하게 말하는 자는 메도루마 슌의 『희망』이 우리들의 눈 앞에서 묘사한 어린애의 시체에서 시작하지 않으면 안되는 것이다. 말의 힘을 생각하 게 한 그의 에세이에 의해서 나는 구조되었다. ……

지금은 고인이 된 세끼 히로노부(關 廣延)는 오끼나와가 일본에 복귀한 1972년 5월 15 일의 코자를 이렇게 묘사했다. “지금 어떠한 노력으로도 그 무게와 같은 격정으로 조직할 수 없는 검은 분노가 이 땅을 뒤덮고 있다.”[25] 이렇게 조직되는 것이 불가능한 검은 분노가 정치화되기 위해서는 어떠한 논의를 거쳐야 하는지를 문제삼아야 할 시기이다. 이 독설가 (毒說家)의 말을 지금 다시 읽고 싶다. 그리고 역시 코자가 초점이 된다는 것은 명백하다. 1970년 12월 20일 심야에서 다음날 새벽에 걸쳐서 일어난 폭동을 생각하는 것이 지금 필요 하다. 오끼나와시(市) 평화문화진흥과(果)의 오랜 작업 끝에 태어난 『KOZA』[26],『미국이 본 코자 폭동』[27]은, 역사학이나 사회학의 분석과 자료로서가 아니라 그들의 검은 분노를 어떻게 정치화했는가라는 오직 한 가지 목적을 위해서 존재한다. 『KOZA』에 실려있는 「기지내의 흑인이 오끼나와 사람들에게 보내는 호소」는 이렇게 결론지었다. “폭동은 전적 으로 정당한 행동이었고 그밖에 놈들을 물리치는 방법은 없었다”. ‘폭동은 전적으로 정당’하 다는 지평에서 사고하기 시작해야 할 때다.

절대상황과 테러

우선 결론부터 말하면 나 개인은 ‘테러’는 잘 안한다. 하려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러나 다른 사람의 테러는 말려도 말릴 수 없는 것을 포함해서 테러의 시비를 논하고 싶지 않다. 그런데서 엄밀하게 말하면 오히려 “부득이하다”, “어쩔수가 없다”는 데 원칙적으로 긍정한다. 부정하거나 반대하지 않는다(여기서 말하는 ‘긍정’은 특히 역사로서 예를 들면 안중근, 박 열, 와다뀨우(和田久)등 특히 사회운동사에서 테러리스트라고 했던 죽은 자들에 대한 것이 다).

내게 테러는 ‘절대상황’하에 놓여진 사람이 이외에는 어떠한 방법도 발견하지 못한 막다른 데 빠진 심정이 선택한 ‘1인 1살’적 자살행위와 같다. 다시 말하면 ‘폭동’이 아니며 ‘게릴라’도 아닌 개인의 결의에 입각한 ‘폭력적 결재행위(暴力的 決裁行爲)’이다.

그런데 메도루마씨의 작품이 우리들의 문제일 수 있는 것은 전적으로 이질적인 상반되 는 입장을 시비없이 충격적으로 거칠게 내밀었기 때문이다. 그 첫째는 무엇보다도 테러의 내용이 세살배기 사내아이를 노렸다는 데서 오는 불쾌감, 혐오감이다. “최저의 방법이 가 장 유효”인지 아닌지를 따로하고 작가의 상상력이 이러한 영역까지 침입하는 것을 나는 용 서하고 싶지 않다. 오끼나와 섬사람들도, 픽션이기는 하지만, 이러한 가정의 테러를 틀림없 이 부정할 것이다. 그런데도 ― 이 작품은 테러의 배경인 ‘오끼나와 상황’에 대해서 야마또(ヤマト)[28]의 우리들은 아무일도 하지 못하고, 거의 방관자밖에는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을 비춰준다. 그것 은 이른바 양식있는 진보적 지식인이라는 사람들에게 ‘책임을 지지 않는 양심적 가책’, ‘견딜 수 없는 심정’을 갖게 한다. 토마야씨의 “모든 의미에서 테러를 생각하지 않으면 안된다”는 발언은 실로 그러한 ‘양심적 가책’까지 포함하면서 문득 정신을 차리고 보면 우리들의 주위 까지도 그런 ‘절대상황’에서 “이러지도 저러지도, 꼼짝도 못하는 우리들”에게 생각이 미치는 데서 새삼스럽게 테러의 의미를 묻는 것이다.

그러나 토야마씨가 테러를 문제삼을 때 우선 당초에 제시해야 하는, 테러를 필요로 하 는 ‘절대상황’을 암묵적으로 공통의식으로서 전적으로 생략하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확실히 지금 일본은, 더구나 오끼나와는 절박한 ‘위기국면’이라고 해야 하는 정치상황에 있다. 그러 나 그러한 ‘절대성’은 지금 일단 보편성, 일반성이기는 하지만, 좀더 얘기하자면, 그것은 순 전히 개개인의 위상에 있어서의 심정적인 생각의 심각성, 절박성에 따라서 이러저러하게 표 출되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일반성, 보편성보다는 더 강하게 개별적인 심정에 따라서 ‘결 의’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토야마씨는 ‘테러’라는 방법을 앞에 놓고 “나는 어떻게 하는가”를 말하면 되지 않는가.

“그 일당들보다도 재빨리 그것을 예감하고 입수하지 않으면 안된다”고 할 때의 ‘일당’이 라는 것은 누구인가. 여기서 주체가 되는 ‘일당’은 현지사나 일미의 고관은 아니다. 좀더 전 면에 끌려나온 것은 “순하고 겁많은 오끼나와 사람”, “예절바른 데모나 집회”, “피해가 없는 게릴라”, “기지의 돈에 모여드는 구데기”이다. 이것은 곧 자기 주위의 ‘전부’를 잘라버리고 ‘혼자’가 됨으로써(테러를 최후의 선택지로 하기 이전에) 빼도 박도 못하는 자신을 향하는 테러의 절대화로 나가는 것이다(테러를 필수로 하는 ‘절대상황’이란 이런 이유로 마침내는 만들어지는 것이다).

만약에 메도루마씨의 픽션의 결말이 3세의 남아를 목졸라 죽이려고 하다가 주저한 나머 지 결국 못하고 말았다는 것이었다면 이 작품의 충격 효과는 반 이상이 없어졌을 것이다. 또는 강간당한 오끼나와인 여자 하인이 가해자인 미군병사의 가족을 사살했다면 테러가 아 닌 것이 될 것이다. 왜냐하면, 단순한 복수를 위한 살인사건이 되기 때문에 오끼나와의 절 대상황은 휠씬 뒤에 있는 배경으로 멀어진다는 것은 확실하다.

일반적으로 테러는 반체제측에 있는 개인 또는 소수조직이 압도적으로 강력한 체제의 지배에 저항하고 반대하고 이의제기하기 위해 공중납치, 점거, 또는 요인 등의 유괴살해 등을 폭력행위(전술)로 삼는다. 물론 그것의 성공여부에 관계없이 테러가 승부를 결정하는 것 이 아니라는 것은 이미 과거의 역사가 보여주고 있다(더구나 그것의 연장확대로서 게릴라에 대해서 성급히 결론짓는다면 일본에서의 가능성은 없다고 해야 할 것이다).

과연 테러나 게릴라는 국가의 폭력성을 도발하고 현재화하는 데서 국가의 본질을 보여 준다. 그러나 좀더 얘기하면, 테러나 게릴라가 도발하는 국가의 폭력성은 어디까지나 형법 이 정한 범죄의 단속, 즉 대의제 국가가 승인한 합법적인 ‘의사비폭력’인 것이다. 그러한 점 에서 테러와 게릴라는 무엇보다도 그들이 거점으로 삼는 국민에 의해서, (다시 말해서 자승 자박적으로) 체포되고 처벌되는 것이다(테러는 공적 분노의 사적 해소일 수 있어도 문제의 근본적 ‘해결’일 수는 없다. 가령 일시적으로 반응이 있었다 해도 즉시 닥쳐오는 대대적 탄 압이 많은 관계자를 끌어들이게 된다. 더구나 순진무구한 어린애를 살해하는 것으로는 테러 의 의미를 보편적으로 납득시킬 수도 없을 것이다).

토야마씨의 코멘트에서 맨끝에 ‘코자의 폭동’이 나오는데, 폭동과 테러는 일견 비슷하다 해도 전혀 질이 다르다. 여기서 나는 “자연 발생적 코자 폭동은 전적으로 정당”하다는 것을 긍정하면서, 토야마씨의 성급한 결론이 결론은 아니지 않은가라고 말해두고 싶다.

비폭력 직접행동이란

메도루마, 토야마씨의 글을 읽으면서 나는 30년전에 국회앞에서 베트남 반전을 호소하 면서 분신자살한 에스페란티스트[29] 유이 추우노신(由比忠之進)씨를 생각했다. 그 때 유이씨 의 주머니에 있던 미국대통령과 일본수상에게 보내는 ‘직서(直書)’와 불에 타서 시커먼 누더 기가 된 와이셔츠와 상의는 지금 어떻게 되었을까. 나는 그때 유이씨의 시커먼 누더기가 된 와이셔츠를 빌려다가 히메지(姬路)에서 추도모임을 한 적이 있다. 그때 “유이씨는 다른 사 람을 해치는 대신 자기를 테러함으로써 세상에, 우리들에게 호소하려고 했던 것이다”라고 말했었다.

예를 들면 나는 훌륭하게 완공된 거대한 댐의 잔잔한 수면이라든가 물을 막은 제방둑을 타고 뻗어 있는 굵은 철관을 보면 이를 갈고 땅을 치면서 꺼져간 반대파 사람들을 생각한 다. 그리고 댐의 대폭파를 한순간 꿈에 그린다. 그리고 나서 틀림없이 몇 사람인가 나와 같 은 생각을 했을 것이라고 확신한다. ‘역사’의 100년, 200년은 그것을 위해 있으며 우리들은 그러한 역사의 흐름 속에서 ‘지금’을 살고 있다고 되돌아본다.

이런 것을 생각하고 있는데 이자와 코오지(井澤 辛治)씨가 『페민(ふえみん, Femin)』 2000년 4월 5일(2,586호)를 보내왔다. 비폭력 직접행동의 구체적 예로 이 신문에 실린 「원자력 잠수함 트라이덴트 관련 시설파괴(비무기화) 행동」에 관한 평가와 감상을 쓰라 는 주문이다. 좀더 자세하게 기사 내용을 요약해서 추려보면,

「원자력 잠수함시설에 직접행동」

울라, 엘렌, 앤지 세 사람은 행동계획을 세워 발언을 준비하고 등반훈련을 하고서 고무보트로 고이루호(ゴイル湖)를 건너갔다. 세 사람이 도착한 시설은, 트라이덴트 잠 수함이 음향과 레이더 그리고 수중 탐지기에 걸리지 않고 항해하는 방법을 조사하기 위한 곳이었다.

창문으로 들어가 조사장치 전부를 호수에 집어던져 연구실을 텅 비게 하고서 배선이나 스위치도 모두 절단했다. 이때의 손실은 당초 수십만 파운드로 계산되었다.

그녀들은 스코틀랜드의 형무소에 4개월간 유치된 후에 10월 31일 배심재판소에서 무죄판결을 받고 석방되었다.

이 기사에서 나는 ‘준비’니 ‘훈련’이니 하는 말에 특히 주목했다. 그것은 그 전에 10년 정도에 걸쳐서 활동을 계속한 ‘그리남코몬의 여자들 캠프’의 역사를 이어받은 것이 틀림없 다. 그리고 다음 ‘소(小) 해설문’을 보고나서 납득했다.

「TP 2000의 활동」

1998년에 시작한 이 활동은 지금 체포된 사람만 해도 400여명을 넘는다. 3개월마 다 비무장 캠프를 하고 이틀간 비폭력 워크샵에 참가한다.

우리들은 선서한 사람 리스트를 3개월마다 정부에 보내고 계획, 동기, 조직 등의 정보를 군에 공표한다. 그리고 대화와 교섭을 계속 요청하고 있다.

선서한 사람은 소그룹에 들어가 자기가 맡은 핵폐절(核廢絶) 행동의 종류를 결정한다. 연좌도 하고 봉쇄도 하면서 군사기지의 방책을 절단하고 원자력 잠수함에까지 헤엄쳐가서 장비를 파괴하는 등등 다양하게 비폭력 직접행동을 하고 있다.

우리들의 행동은 특별히 용기가 있어야 하는 행동이 아니며 누구나 할 수 있는 일 이다. 우리들은 자기자신이 핵범죄에 가담하는 것을 막기 위한 행동을 사전에 미리 행 할 책임과 권리가 있다.

그러나 ‘비폭력 직접행동’은 이런 것으로 시작해서 이런 것으로 끝나는가. 이러한 행동 의 강조만으로는 오해를 일으키지 않을까……. 끝부분에서 ‘우리들의 행동은 특별히 용기가 있어야 하는 행동이 아니며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이다’고 했지만 그것은 결코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닐 것이다. 굳이 말한다면 아무것도 아닌 보통사람, 특별히 용기가 있는 사람 이 아니더라도 마음만 먹으면 동아리에 참가할 수 있어야 한다. 캠프에서 공동생활을 하고 행동계획을 세워서 훈련함으로써 보통사람과 다름없는 특별한 사람이 될 수 있다는 것이라 고 생각한다.

그런 의미에서 ‘훈련의 일상화’나 ‘캠프’는 비폭력 직접행동의 중요한 운동과제이다. 그 런 다음에 연령이나 체력과 기술 등의 조건을 생각해서 선택된 소수자와 다수는 소수의 역 할을 협력, 보조, 지원 하는 등의 기타부문을 담당한다. 그것이 좀 간접적 관계라고 해도 서로 지지하는 한, 비폭력 직접행동이라는 것은 변함없다. 즉, 그러한 관계에서는 호기심이 나 순간의 기분 등까지 포함한 결의나 각오뿐만 아니라 그것에 대한 ‘몽상’까지도, 쉽게 실 행으로 옮길 수 있는 ‘방법’이 명확해지지 않으면 안된다. 예를 들어 ‘댐 폭파’에서, 우선 다 이나마이트의 입수, 사용방법, 설치시간, 댐의 경비, 댐의 급소, 하류에 대한 홍수대책과 인적 피해 등에서부터, 작업분담인가 단독결행인가, 그러한 것에 대한 조사, 준비, 훈련에 따라 이끌어내지는 것(결의)이어야 한다. 여기서 새삼 ‘폭력’의 의미가 문제가 된다. 그리고 비폭력 직접행동이 비로소 정치적, 사회적 방법으로 부상하는 것이다.

TP 2000에서는 선서한 사람의 명단 송부, 계획, 동기, 조직의 공개, 대화, 교섭의 기 회를 만드는 등등 ― (이렇게 ‘예고되는 것’은 지배권력에게 ‘짖궂은 전화’를 하는 것과 같은 질을 넘어서서 비폭력 직접행동의 특질을 잘 나타내고 있다) ― 전략까지 포함해서, 강자 (의사비폭력 체제 또는 구조폭력)에 대한 약자(인민)의 비폭력 직접행동의 일상화이다. 그 러나 그것은 여전히 ‘절대적 상황 인식’이라는 ‘비일상’을 면하지 못한다(『7인의 사무라이』 라는 영화에서 전문 전투기술자인 무사단은 필요하지 않게 될 때 떠나간다. 이른바 ‘직업 혁명가’도 이래야 하지 않을까 곰곰히 생각했다. 그러나 비폭력 직접행동의 경우, 전문적인 소수자는 매우 자연스럽게 다수 속으로 해소될 것이다. 그것이 비일상화이기도 하다).

좀더 솔직하게 말하면 비폭력 직접행동은 무엇보다도 우리들의 일상으로 이미 존재하는 일반적인 삶, 생활인 것이다. 그것을 깨달아야 한다.

1) 따라서 비폭력 직접행동은 싸움이기는 하지만 결과로서 승패는 아니다. 승패에 구애 되지도 않는다. 져도 또 져도 결코 지지 않는 데서 “살아 있는 것” 또는 저항행위이다. 이것 이 우리들의 ‘산다’는 것을 의미화(化)하는 비폭력 직접행동이다

2) 결코 지지 않는다는 것은, 우리들의 일순간과 같은 ‘생애’로써 역사를 모두 책임지는 게 아니라는 것을 의미한다. 책임을 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역사에 매듭을 짓 지 않은 채 과거에서 이어지는 지금, 즉 현대사를 우리들은 살고 있다. 그러한 무책임한 ‘적극성’이 비폭력 직접행동을 보편적이고 더욱 일상화하는 것이다.

3) 거기서 우리들은 우리들(인민)의 끝없는, 거의 느끼지도 못하는 ‘자유 연합성’에 의 거해서 자기가 하고 싶은 일, 할 수 있을 것 같은 것, 하기 쉬운 것, 그리고 마침 눈앞에 있어서 피할 수 없는 것 등에 대처해서 ‘무책임’하게 무엇이든 하면 되는 것이다. 한편 싫은 것은 하지 않고 안되는 것은 하지 않는 ― 그것이 적극적이면 적극적일수록 비폭력 직접행 동인 것이다.

4) 물론 하려고 해도 할 수 없는 것이 당연히 있을 것이다(현재의 문제는 모두 이것이 라고 해도 좋다). 이에 대해서는 똑같은 방식으로 늘 동일한 식으로 지는 게 아니라 방법을 그때 그때 바꿀 것, 다시 말해서 지는 방법을 바꿀 것, 체념하지 않고 바꾼 방법으로 계속 대처할 수밖에 없다. 잠이 들려고 할 때 귀찮은 파리나 모기 같은 것, 방법을 차례차례로 조금씩 바꾸는, 와글와글 떠드는 속에 비폭력 직접행동을 재미거리로 즐기는 것이다.

확실히 토야마씨의 말대로 현대사는 “그 앞에서 머물지 않는 상상력과 인내심”을 요구 하고 있다. 그것을 다른 말로 하면 어떠한 절대상황에서도 ‘승패’에 구애받지 않고 다시 권 력에 맞서는 사상이며 ‘테러’를 초월하는 방법과 사상을 제기하는 새로운 운동의 창출이라 고 할 수 있다. ― 그러나 그것은 “순하고 겁 많은”, “예절바른 데모, 집회, 게릴라” 등 기성 의 투쟁을 “부정적 매개”로 하는 데서 우선 항상 같은 스타일밖에 없는 운동방식, 투쟁방식 을 바꾸는 데서 시작되지 않으면 안될 것이다.[30]

부록 3. 폭력론 노트 보충[補遺][31]

일반적으로는 ‘비폭력 행동’이라고 하는데 여기에서 특별히 ‘비폭력 직접행동’이라고 한 것은 무슨 이유에서인가. ‘직접’을 넣고 안넣고에 따라 대체 어디가 어떻게 다른지 나에게 묻는다면 나는 다음과 같이 대답한다.

아마도 현 시점에서 이 두 가지 내용은 종종 같거나 또는 거의 같은 것이다. 본질적으 로나 현상적으로도 다른 점은 없다. 그런데 굳이 구분하려고 하는 것은 전자가 비폭력에 대 해서 좀더 자각적이고 의식적이고 신념적이라는 데서 ‘운동적’이다. 간디주의라고나 할까.

그렇다면 후자는 그러한 ‘비폭력’에 대해서 확고한 신념이나 자각의식이 다소 희박하다 고 하기보다, 오히려 비폭력이 일상행위의 당연한 연장으로 ― 다시 말해서 생산노동의 분 배, 향수(享受), 생식(生殖, 노트에서는 탈락되었지만 여기 넣는다), 창조나 유희(놀이)까 지 포함한 일상생활을 유지하는 것에 다름아니다. 따라서 본래 비폭력 직접행동은 일반적인 일상의 영위(살림살이)와 연결되는 것이기 때문에 오히려 비운동적이고 비주의적인 것으로 존재한다. 이것을 인식하고 자각하는 데서 『폭력론 노트』에서 말하는 ‘의사비폭력 체제’의 문제가 시작된다는 것을 말해 두겠다.

■ 우에노 치즈꼬(上野 千鶴子)씨가 ‘여성 국제전범 법정’과 관련해서 “어떤 행위를 범죄 화한다는 것은 무엇이 범죄가 아니라는 것을 동시에 정의함으로써 폭력의 일부를 범죄화는 것과 동시에 그밖의 범죄를 면책한다”고 했다. 그리고 “어떤 폭력이 어떤 조건에서 면책되 는가”, “정의로운 폭력은 있는가, 없는가” 자문하고 “폭력에는 좋은 폭력도 나쁜 폭력도 없다. 폭력은 폭력이다”라고 자답했다[32].

이러한 의견에 나는 전적으로 동의한다. 그것을 전제로 하면서 여기서 제기된 도메스틱 바이올런스(가정내 폭력)로 나타나는 개인폭력에 대해서 간단히 부언하겠다.

노트에서 나는 개인폭력의 문제는 폭력 그 자체로서 대응한다면 비교적 용이하게 대처 할 수 있는 것으로 그 이상 언급하지 않았다. 폭력은 강약(强弱)으로 결말이 난다. 개인에 한하면 폭력의 강도에 한계가 있다. 그러한 물리력으로서의 힘에 대항하는 방법은 얼마든지 있다. 예를 들면 압도적 인원수의 대항력으로 상대를 크게 응징하는 등이다.

그런데 그렇게 할 수 없는 문제로, 다시 말해서 폭력을 저지하는 것만으로 끝나지 않는 문제로서 도메스틱․바이올런스(가정내 폭력)가 있다. 그러니까 단순한 강자 약자의 관계가 아닌 폭력 이전의 문제 ― 예를 들면 가부장제나 가족의 구성, 성장기의 환경이나 친구들의 영향 등, 근친애증의 굴절된 인간관계가 우선 근저에 있어서 그것이 폭력으로 발현하기 때 문이다. 이러한 것을 전제로 해서 우에노씨가 말한 “남성성(男性性)의 핵에 있는 폭력성 등 과 같은 본질주의적인 말 대신에 남성성도 또한 구성된 것이고 따라서 변경가능한 것이라고 말해야”하는 문제가 제기될 것이다.

2002. 12. 13 무까이 꼬오(向井 孝)


해설을 대신해서 - 내게비폭력직접행동이란무엇인가

미즈따 후우(水田 ふう)

일반적으로 ‘비폭력’하면 ‘O’, ’폭력‘은 ’X’라는 이미지가 떠오른다. 그렇지만 나는 좀 다 르다고 생각한다. 인간이 그렇게 간단하게 둘로 나눠질까? 그러나 그것이 ‘폭력’, ‘비폭력’이 라는 말로 표현되면 뭔가 ‘선’ 대 ‘악’ 같이 된다.

‘폭력’도 ‘비폭력’도, 모두 개인의 마음 속에서는 하나로 연결된 것이고 어느쪽이나 생명 력이라고 해야 하지 않을까? 어느쪽이나 원초적으로 인간이 갖고 있는 힘이다. 생명력이다. 그것에는 선이니 악이니 하는 게 관련이 없다.

일상에서는 무의식적으로 ‘비폭력’으로 살아가는 개인에게 때때로 튀어나오는 생명력으 로서의 ‘폭력’을, 나는 오히려 긍정한다. 권력이나 세상이 그것을 테러라고 해도 완전히 부 정할 수는 없다고 생각한다. 그것이 어떤 ‘정의’, ‘대의’를 명분으로 한다 해도 모든 국가와 조직의 ‘폭력’, ‘비폭력’을 나는 단호하게 부정한다. 하기는 내가 부정한다 해도 국가는 꿈쩍 도 안하지만.

*

무까이상이 이 팜플렛에 싣는 원고를 쓰기 시작했을 때 『딸아이와 얘기하는 비폭력이 란 무엇인가』[33]라는 책이 나왔다. 나도 곧 읽어보았지만, 글쎄 역시 다르다. 물론 같은 데 도 많지만…… 근본적으로 다르다.

나는 개인의 폭력ㆍ비폭력과, 국가 또는 조직의 폭력ㆍ비폭력은 전혀 질이 다른 것이라 고 생각한다. 알기 쉽게 말하면, 전쟁으로 나타나는 국가의 폭력, 그리고 대개 사회질서나 규율로 나타나는 국가의 비폭력과 개인의 그것을 이 책은 뒤섞어서 말하고 있다(대개의 사 람도 그렇다).

자기의 8세와 13세의 딸에게 얘기한 것에 이런 데가 있다. “그렇지만 폭력이 필요한 때 가 있다고 생각하지 않아?”라는 딸의 말에 저자 셈란씨는 내가 잘못 읽은 건지 모르지만, 독재자 밀로세비치를 치기 위해서 NATO의 ‘공습’이 필요한 것처럼(나는 그렇게 읽었다) 쓰고 있다(딸들은 이런 대답을 어떻게 이해했을까?).

그리고 “그렇다면 비폭력은 법률과 궁합이 맞는군요”라는 말에는 “물론이지……”라고 답 하고 있다. 그런데 나의 비폭력 직접행동은 법률과 전혀 궁합이 맞지 않는다. 그런 것과 관 계가 없다. 이것은 국가에 대한 입장과 태도의 차이로서 결정적으로 다르다. 여기서 비폭력 이라 해도 셈란씨와 나는 입장이 완전히 반대다.

국가의 본질은 ‘폭력’인데도 대의정치ㆍ법률ㆍ재판ㆍ감옥ㆍ경찰ㆍ군대, 그런 것을 합법 화하는 투표…… 여러가지 민주주의적인 제도, 폭력을 배경으로 하는 ‘비폭력’이 원칙인 것 이다. 이러한 비폭력적 사회를 유지하는 것으로 국가가 성립한다. 그러나 이 비폭력은 우리 들의 비폭력과 비슷하지만 아니라는 것이다! 이렇게 환골탈태한 비폭력이야말로 문제가 되 는 것이며 우리들의 생명력인 비폭력 직접행동을 빼앗아간 게 아닌가.

그런 의미에서 나는 딸들이 내놓은 질문, “그래도 폭력이 필요한 때가 있다고 생각하지 않아?”는 대단히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누구나 만약에 자기 눈앞에서 폭한에게 애인이나 자 기 아이가 습격당하면 순간적으로 가까이 있는 돌이나 막대기를 들고 대항하지 않는가. 그 게 생명력으로서의 폭력이다. 그런데 셈란씨의 대답은 개인의 폭력을 부정하면서 국가나 NATO의 공습을 부득이한 일이라며 ‘긍정’하고 있다.

나는 완전히 그 반대다. 개인은 ‘폭력’을 부인하기 때문에 쓰지 않는 게 아니다. 쓸 수 없는 것이다. 폭력을 발휘할 수 있는 것은 권력을 가진 자들뿐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일 방적으로 폭력을 행사하는 국가(또는 조직)라는 것은 도대체 뭐란 말이냐.

*

오늘도 팔레스타인에서 비폭력 직접행동 ‘인간방패’를 실행하고 있는 국제연대운동(International Solidarity Movement, ISM)의 참가자에게서 메일이 왔다.

이스라엘 국방군은 군사력을 과시하면서 팔레스타인 사람들이 왕래하는 도로에 방 책, 벽, 도랑을 설치하고 팔레스타인의 토지를 불법으로 몰수하고 있습니다. 일을 하러 갈 수도, 장사를 하러 갈 수도 없게 된 이곳 사람들은 이렇게도 저렇게도 할 수 없 는, 황폐화된 경제상태에 처하고 말았습니다.

이스라엘의 군인들은 “올리브 수확을 하면 쏜다”고 선고했습니다. 어떤 군인은 “저격하기 쉬우니까”라는 말도 했습니다. 이것은 단순한 위협사격이 아닙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아이들은 탱크를 향해서 돌을 던지고, 수박을 팔던 소년은 탱크 에 올라타 대포구멍을 수박으로 틀어막습니다. 그런 아이들을 이스라엘군이 미제총으 로 저격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절망적인 상황에서 자기의 생명과 맞바꾸는 자폭공격을 하는 사람이 나와도 이상하지 않습니다.

우리들은 지금 미국의 농장노동자조합에 공개호소문을 보냈습니다. 이제 아무것도 잃을 게 없게 된 팔레스타인 농민에게 연대를 부탁합니다. 그러나 지금 우리들은 황폐를 멈추게 할 희망을 그다지 갖지 못한 실정입니다. 도시지역에서는 이스라엘군의 폭력은 더욱 더 강화되고…… (2002. 8. 20.)

그리고, 또 다른 멤버는 말한다.

자폭공격을 ‘분노와 증오에 불타는 종교적 광신자가 하는 것’이라고 나는 도저히 말하지 못하겠다. 나는 보았던 것이다. 살려달라는 절규를 무시당한 채 점점 더 심해지는 인종근절의 억압에 의해 절망으로 떨어지는 사람들을. 자폭공격은 숱한 선택들 중의 하나로 택한 저항수단 같은 게 아닌 것이다. 어디든 자존심을 가진 사람들은 있다. 자기의 존엄성을 지키기 위해서 자폭공격에 자진해서 나서는 사람이 없는 땅이 그 어디에 있을까?(2002. 9. 25.)

메일로 보내 온 이런 사정을 매일 읽으면 암담해진다. 우리들은 이렇게 우리를 압도하 는 국가폭력이 지배하는 세계에서 살아가고 있다. 이에 대해서 ‘폭력적인 반항심’이 마음 속 에서 우러나는 것은, 사람으로 오히려 당연한 것이 아닌가. 그러나 폭력은 물리적으로 강한 자가 이긴다. 폭력으로 대항하지 못한다. 더 당한다. 살해당한다. 돌 하나 던지면 대포로 보복당하니까. 그런 상황에서 사람은 거의 돌도 던지지 못하고 총도 가지지 못하고 “죽이겠다”는 말을 듣고도 밭에 나간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살 아남지 못한다. 밭에 나가 계속 농작물을 거두는 게 그들의 싸움이다. 그런 일상의 너무도 당연한 것을, 나는 그들의 비폭력 직접행동이라 부른다. ‘비폭력’이라는 진지한 신념을 투쟁 의 장에서만 실행하자는 것과는 좀 다르다. 그것은 내걸어진 전쟁에 이기기 위한 싸움이 아 니다. 살아 있는 한 지고 또 져도 결코 지지 않는 당연한 우리들의 일상 ― 삶 ―으로서의 비폭력 직접행동인 것이다.

일본에서 ISM에 참가한 청년들의 보고에서 “폭력으로의 비폭력 직접행동입니다”라는 표현을 들었다. 나에게는 그 의미가 쉽게 와 닿았다. ‘인간방패’의 행동은 팔레스타인 사람 들의 비폭력 직접행동으로서의 일상 ― 삶 ―을 조금이나마 유지시키기 위해 그 곳에서 함 께 생활하는 비폭력 직접행동인 것이다. 영국이나 아일랜드, 미국 그리고 이스라엘이나 스 위스, 이탈리아, 일본에서 수백명이 넘는 사람이 참가했다고 한다. 대부분이 젊은이들이지 만 그 중에는 아버지가 스페인 혁명에 종군했다는 70세의 여성도 있다는 것이었다.

그들은 방패가 되어 탱크 앞에 맨손으로 섰다. 농민과 함께 밭에 나갔다. 검문소에서 구급차를 통과시키라고 군인에게 말을 건다. 자폭공격자라고 지목되어 가옥파괴의 표적이 된 집에서 가족들과 함께 잠을 잔다. 방책이나 도랑을 넘어가는 노인이나 아이들 곁에 있으 면서 이스라엘군인들의 총격에서 그야말로 인간방패가 된다. 이스라엘군인은 그들이 그곳에 있기만 해도 함부로 총을 쏘지 못한다. 거기서 어떤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세계에 알리는 증언자로 그들이 그곳에 입회하고 있기 때문이다.

국가를 초월해서 개인이 총도 없이 전쟁상황으로 들어가서 ‘인간방패’가 된다. 이런 비 폭력 직접행동을 나는 지금까지 들어본 적이 없다. 이런 사람들이 소수나마 있다는 것이 나 에게는 빛으로 생각된다. 그런데도 그들 자신이 말하는 바와 같이 “지금은 황폐를 멈추게 할 희망을 그다지 갖지 못한다”는 것이 현실이다. 그러한 현실이 어쩔수없는 테러를 만들고 있다.

*

9․11에서 부시가 전세계에 “너는 미국편에 붙을 것이냐, 테러편에 붙을 것이냐”라고 추 궁할 때 나의 대답은 “테러편에 서겠다”였다. 그리고 “테러에도 전쟁에도 반대한다고 말하고 싶지 않다”고 「風 」[34] 33호에 썼다. 데모의 슬로건으로 ‘테러에도 전쟁에도 반대’가 나왔을 때 나는 ‘칼사냥’[35]이라는 말을 생각했는데, 현대의 ‘칼사냥‘은 권력의 명령에 의해서가 아니라 칼을 자기가 스스로 갖다 준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왜 비폭력주의자가 ‘테러’를 지지하는지 굉장히 당혹하여 편지를 보낸 사람이 몇 인가 있었다. 또 “테러에 박수치는 것은 ‘비열함’이다”라는 말도 들었다. 비록 ‘비열함’이라 해도 그것은 자기의 감정이다. 어떤 감정에도 5푼의 혼(魂)[36]이 있다. 비열한 마음이라고 해 서 숨기거나 부정할 수는 없다. 무심코 나오는 실토이니까.

속사정과 원칙이라는 것이 있다. 속사정이 있어야 원칙이 있다. 나는 속사정이 없으면 원칙도 만들 수 없고 원칙이 없으면 속사정도 나타나지 않는다. “테러편에 선다”는 것은 그 렇기 때문에 나의 감정에서 나오는 속사정이고 원칙이다.

그런데 나의 비폭력 직접행동에서 보면, 지금까지도 지금부터도 테러에는 반대지만 때 와 장소와 상황과 누구에게 보고하는 말인가에 따라 표현방법은 달라진다. 그것은 자기가 약한 자이고 약자의 편에 서는 것이 당연하다는 ‘입장’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나는 9․11때 미국을 두고 세상을 향해서 “테러편에 선다”고 말한 것을 취소할 생각은 없다. 베 트남 반전을 위해 무기를 잡고 싸우는 사람들을 응원한 것도, 폭탄을 던진 동아시아 반일 무장전선 사람을 지지ㆍ지원한 것도, 이번에 테러편에 선다고 한 것도, 지금 현재 살해당하 는 사람들, 그리고 권력에 대해서 싸우는 사람들 편에 선다(서고 싶다)는 것이 나의 제일의 입장이고, 속사정이고, 원칙이기 때문이다.

9․11이후 테러리스트의 형태는 확 변해버렸지만 테러리스트라고 하면 나는 안중근이 나 난바 다이스께(難波 大助), 나까하마 테스(中浜 哲)나 와다규우 따로오(和田久 太郞)를 생각한다. 그들은 누구와도 상의하지 않고, 누구의 명령도 받지 않고, 자기 혼자의 결의로, 그 이외에 길이 없는 극한상황에서 자기의 생명을 걸고 천황이나 육군대장의 생명을 노렸다.

나는 여간해서 이런 일을 안하지만 그래도 그들의 생각, 심정은 잘 안다. 테러는, 하고 싶은 맘이 있더라도 우선 무기가 있어야 한다. 자금 마련도 하지 않으면 안된다. 그리고 무 엇보다도 기회가 오지 않으면 할 수 없다. 때를 맞춰서 우연이 거듭되어야 비로소 할 수 있는 것이니까 그런 것이 충분하지 않아서 흐지부지되고 테러를 실행하지 못한(하지 않는) 채 역사에 묻힌 몇백 몇천의 난바 다이스께가 틀림없이 더 많이 있을 것이다. 그것은 지금도 마찬가지다. 자신이 그러한 형편에 있지 않다고 해서 자기의 보신(保身) 때문에 ‘반테러’를 부르짖고 싶지 않다. 보신이 나쁘다는 것이 아니다. 그것도 당연한 감정이 지만 그것을 감추고 그럴듯한 ‘운동’의 슬로건으로 깃발을 흔드는 것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 ‘운동’이라는 것은 대체로 다수파를 만들려고 하니까 그렇게들 거짓말을 한다. 때문에 데모 는 ‘반테러’를 말하지 않으면 아무 말도 할 수 없다. “두렵다”는 슬로건을 내걸면 된다. ‘테러 지지’를 말하는 것도, “두렵다”고 말하는 것도 모두 똑같이 사람의 마음 아닌가. 애당초 부터 한사람 한사람의 마음을 한 가지 슬로건으로 정리해 버린다는 것은 도무지 할 수 없는 일이니까.

‘운동’이 지금까지처럼 개인의 마음을 짓밟는 것이라면, 이제 오히려 한사람 한사람 고립(孤立)하는 것이 중요할지도 모른다.

*

옛날 『당했으면 보복하라』는 산야[山谷]에 관한 영화를 보았다. “당했으면 보복하라!” 는 극단적인 말이지만 철저하게 당한 사람은 보복할 기력도, 그런 걸 할 수 있다는 상상력 도, 용기도 없어지게 된다. 그래서 “당했으면 보복하라”가 아닌가.

우리들은 모두 처음부터 지고 있다. 아주 먼 옛날부터 줄곧 당하기만 한 게 아니냐. 약 한 놈이 강한 놈에게 덤벼들어 봤자 기습공격이라도 하지 않는 한 보복하려다가 도리어 크 게 당하는 것(여러가지 의미에서)이 정한 이치다. 이것은 뼈에 사무치도록 잘 알고 있다. 예를 들면 어딘가 요세바(寄せ場)에서 ‘폭동’이 일어나서 경찰이나 거간꾼을 해치웠다고 해 도 다음 순간에 배나 되는 보복이 기다리고 있다.

이러한 시대가 됐는데도 『미또 고우몽(水戶黃門)』[37]이나 『아바렝 보우쇼군(暴れん坊將軍)』[38]가 인기가 있는 것은, 검객영화의 마지막 장면이 반드시 악당들을 처치해주고 절대로 보복당할 걱정이 없다는 것으로 안도감을 주니까 그렇다. 나도 옛날 『히사츠시오깅(必殺仕置人)』[39]을 좋아해서 재미있게 보았었다.

항상 당하기만 하고 울며 겨자먹기가 될 수밖에 없을 때, 대신 보복해줄 사람이 있으면 뭐든 박수치고 환영한다. “그 새끼 죽어 마땅하지, 오랜 동안 나쁜 짓만 했으니까!” 하고 생각한다. 그러나 이러한 정의감은 또 “그런 나쁜 놈은 사형 당하는 게 마땅하지”가 되기도 한다. 생각해보면 그렇게 사람은 개인의 ‘폭력’과 권력의 ‘폭력’을 뒤섞어 버리면서 ‘폭력’은 안돼라고 원칙적으로 말하지만 결코 ‘폭력’을 부정하지 않는다. 오히려 마음 속에서는 모두 좋아하는 게 아닌가.

복싱이나 레슬링, 유도, 검도…… (이것도 일종의 폭력이지만) 힘이 대체로 같은데 일 정한 룰로 개인과 개인이 대등하게 폭력을 발휘할 수 있는 스포츠는 매우 인기있다. 사냥을 스포츠라면서 즐기는 사람조차 있다.

*

뭔가 같은 말을 하는 것 같지만 여기서 내가 하고 싶은 말은 개인의 폭력과 조직의 폭력은 전적으로 질이 다르고 똑같이 다루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그것을 우선 확실히 해두고 싶다.

인간이 응애하는 소리를 내고 어머니의 뱃속에서 태어나는 순간부터 가르치지 않아도 젖을 먹지 않는가. 이것이 생명력이라는 것인데 그것은 죽을 때까지 계속해서 살려고 하는 ‘힘’인 것이다. 눈앞에 장애물이 나타나면 손으로 막는다. 자신을 지키기 위해서 무심코 손 이 나간다. 돌멩이를 주어 들기도 하고 낫을 잡기도 한다. 이러한 ‘폭력’은 생명력이라고 해 야 한다. 그것은 이를테면 생산, 노동, 창작, 유희…… 와 같은 일상의 보편적인 삶, ‘비․ 폭․력 ― 폭(暴)이 아닌(非) 힘(力)’과 같은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폭력’은 본래부터 ‘비 폭력’과 따로 있는 게 아닌 ― 비폭력 직접행동이다.

그런데 한쪽 폭력은 물리적 강약에서 금방 결과가 나오기 때문에 이기려면 집단을 만들 거나 어떤게든 무력으로 강한 조직을 만들게 된다. 그러면서 개인의 생명력은 어느 사이엔 가 변질되고 그 결과로 조직이 성립된다.

테러의 문제도 거기에 있다. 처음에는 개인의 ‘테러’였던 것이 일단 조직의 전술로 쓰면 서 조직화하는 방향으로 나가게 되면(지금까지는 대개 그렇게 되었다) 그것은 전혀 질이 다른 적(敵)과 같은 것, 말하자면 ‘조직폭력’으로 변질되어 버린다. 조직은 절대로 개인이 아니라 조직을 지키려고 한다. 당이나 국가나 모두 그렇다. 베트남 사람들의 저항하는 폭력 은 미국을 몰아낸 후에는 더욱 조직화되어 다시 사람을 억압하는 기구로서 국가로 이어졌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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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은 전혀 다르지만, 옛날 고교생때 나는 오다 마꼬토(小田實)를 좋아했는데, 『難死の思想』을 읽고 잊지 못하는 구절이 있다. 전쟁 말기 오오사까(大阪) 시가지에 대공습이 있어서 엄청 많은 사람이 죽었다. 대공습 날에 이미 일본의 무조건 항복이 결정됐는데 8월 15일의 겨우 며칠 전이다. 물론 살해된 사람들은 거의 모두가 비전투원이었다. 전후 불탄 자리 들판에 혼자 우두커니 서서 오다 마꼬토씨는 “이제부터 결코, 더는, 국가라는 것을 신 봉하지 않겠다”고 생각했다고 써 있었다. 나도 그것을 읽고 나서 국가가 하는 일에 대해서 는 우선 의심한다. 더구나 몸을 바치거나 맡기거나 청원하거나 뭔가 기대하거나 하는 일은 하지 않겠다고 마음에 새겼던 것이다.

그리고 9․11과 그 후, 나에게는 점점 더 ‘국가’는 ‘인간’과 적대하는 관계라는 사실이 확 실해질 뿐이다. 국가에도 이러저러한 것이 있어서 사형제도를 없앤다거나, 망명을 인정하고, 난민을 받아들이고, 탈주군인을 숨겨주고, 복지가 충실하다거나 그래서 더 좋은 국가를 지 향해서 “모두들 투표하자!”는 소리가 빈번하다. 그렇지만 일단 전쟁이 시작되면 국가라는 것 은 반드시 우선 자기나라 사람에게 전사를 강요하는 것부터 시작한다. 나라를 지킨다지만 국민을 지키는 게 아니라는 것은, ‘오끼나와(沖繩)’ 전투[40]에서 너무나 뚜렷해졌던 게 아닌 가. 그리고 곰곰히 생각하니까 지금은 벌써 전시다. 이웃사람을 살펴보지 않고서는 본심을 얘기할 수 없게끔 돼버렸다.

그런데 아직도 ‘반국가’라니 시대에 뒤떨어졌다는 의견도 있다. “권력은 악이라고 생각할 게 아니라 어떠한 권력이면 정당화할 수 있는가를 생각해 볼 것”, 이것이 ‘21세기적인 사고 방식’이라는 것을 최근 석간(加藤 典洋, 朝日新聞, 2002년 9월 9일)에서 읽었다. 나는 진 짜로 화가 치밀었다. 이런 사람은 어떤 입장에서 누구를 보고 말하는 것인가.

고등학교에 들어갔을 때 『아까하타(赤旗)』를 파는 동급생에게 이끌려서 폴라리스 잠 수함 반대집회에 나가서 소련의 핵은 좋은 것이지만 미국의 핵은 나쁘다는 말을 듣고 깜짝 놀란 일이 있었다. 핵폭탄은 어떤 나라가 투하해도 그 밑에 있는 사람은 모두 죽지 않는가. 소련의 핵폭탄이면 죽지 않는단 말인가. 그런 건 “아이들도 알고 있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60년대 당시는 ‘침략전쟁’은 반대라면서 ‘혁명전쟁’은 지지하던 시대였다. 그리고 이런 전 쟁의 구분[Variation]은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 미국이 도발하는 전쟁은 ‘무한한 정의’이고 이에 반대하는 것은 모두 ‘악의 축’이란다. ‘정당화할 수 있는 권력’을 바라는 입장이 이 세 상에 존재하는 한, 이러한 구분은 없어지지 않을 것이다. 9․11 이후 지금처럼 국가의 악과 자본주의의 악이 확실하게 보이게 된 시대는 없다고 생각하는데, 안 그런가? 70년대의 폭력 혁명시대가 바뀌고 지금 모두 비폭력을 떠들어대고 있지만 21세기가 돼서도, 아니지, 지금 이야말로 반국가ㆍ반자본주의의 비폭력 직접행동이라는 슬로건이 우리들에게는 제일 걸맞는다. 그리고 알기 쉽다.

*

어! 뭔가 자꾸만 흥분하고 있다. 나는 처음에 셈란씨에 대해 나의 “비폭력 직접행동은 무엇인가”에 대해서 좀 써보려고 했던 것이었다. 이런 말이라면 8세, 13세 딸들은커녕 아무 도 들어주지 않을 것 같군…….

내가 8살, 13살때는 형제들과 싸우느라 날이 밝고 해가 저물었는데, 그럴 때마다 어머 니는 “아무리 상대가 나쁘다고 하지만 너도 손을 대면 너도 똑같다”는 꾸중을 했고 나는 이 말에 다시 화가 나고 이해도 못했다. 내가 비폭력주의가 된 것은 간디도, 킹도 무관하다. 싸움질할 때마다 어머니에게 상대가 폭력을 휘둘렀다고 해서 폭력으로 앙갚음하면 너도 똑 같은 거다라는 말을 듣고 자랐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그렇기 때문에 나의 ‘비폭력주의’는 내 안에 있는 ‘폭력성’을 사실은 부당하게 가둬두고 부정한 것뿐이었다. 그래서 오히려 완고하게 편협하고 답답한 사람이 되었다. 간디를 제대로 읽은 적이 없었지만 역시 비폭력이라고 하면 인격이 높고, 깨끗하고, 옳고, 금욕적이고, 현미가 주식이고 등등…… 으로 생각했었다. 그래서 좋다하고 1주일 단식을 한 적이 있었 다. 바보처럼. 비폭력을 정신수양처럼 생각했던 것이다. 그런 것을 해도 나는 아무것도 변 하지 않았다. 조금도 마음 편하게 되지 않았다. 무엇보다도 사랑과 연애를 금지당한 날은 난 살아갈 수 없을 것이고…….

‘비폭력’하면 아무래도 간디를 말해야 한다. 그러나 비폭력도, 간디도 오해를 면치 못했 다고 생각한다. 전쟁전 교과서에서 권력에 좋지 않은 사람이 하나하나 지워졌는데도 간디만 은 마지막까지 남아 있었던 것 같다. ‘비폭력’은 ‘무저항’으로 번역되었기 때문에 권력으로서 는 조금도 무섭지 않았던 것이다. 운동쪽에서도 똑같이 ‘혁명’은 폭력이고, ‘비폭력’ 같은 것 은 문제도 되지 않았을뿐더러 엄청나게 경멸당했었다. 그러던 운동이 이제는 ‘비폭력’을 말 하면서 ‘반테러’를 말하기 시작했다면 ‘비폭력’을 아직도 오해하고 있다는 것이다.

*

9․11 이후 미국에서는 존 레논의 「Imagine」이라는 노래를 내보내는 것을 자숙했다고 한다. ‘상상해봐요’라는 가사가 뭐냐고 해서. 그렇지만 ‘국가 없으면’이라는 말, 지금 상 상할 수 있을까.

아니지. 상상할 수 있지. 예를 들면 한신아와지[41] 대지진(阪神神戶淡路 大地震)때 행정 (行政)의 손길이 미치기 전까지 모두가 빠르게 아무런 말이 없어도, 자주적으로 활동을 시 작했다. 지금 무엇이 필요하고 무엇을 하지 않으면 안되는가. 그래서 자기가 할 수 있는 것 은 자기가 직접 한다. 자신들이 직접 사람들에게 호소한다. “직접적으로” ― 이것이야말로 ‘비폭력 직접행동’이다. 행정이 개입하면서 그러한 ‘직접’은 ‘간접’이 되었다. 행정 같은 것이 없는 편이 훨씬 빠르고 쉽고 확실하다는 것을, 그 순간 그 장소에 있었던 사람들은 진실로 느끼지 않았을까.

‘비폭력 직접행동’의 근원적 의미는, 자기들이 필요한 것을 자기들 스스로가 직접 문화 나 사업이나 놀이로 창출하는 상황과 행위를 말한다. 그것은 먼 옛날부터 사람들이 일군 나 날의 삶 속에 있다. 그 언저리에서 보통사람들이 별다를 게 없이 살아왔다. 그 이외에는 없 는, 일상의 삶 자체가 가지고 있던 ‘힘’을 자기의 것이라고 분명히 자각했다는 것. 지금은 이것저것 모두 국가ㆍ기업에 빼앗기고 반대로 국가ㆍ기업의 덕분이라고 하지만 그것이야말 로 주객의 전도인 것이다. 그것을 그야말로 뒤집지 않으면 안된다고 생각한다.

그렇기 때문에 비폭력 직접행동은 이를테면 인간방패나 연좌시위나 헝거스트라이크(단 식투쟁)나 드러눕기[Die in]등 기타 이러저러한 항의행동의 스타일이나 이른바 비폭력적인 전술에 한정된 것이라고 말하고 싶지 않다. 지배자의 의사비폭력 체제하에서 송두리째 뺏겨 버린 생명력을 하나하나 탈환할 것! 국민의 ‘생(生)’에서 자기자신의 개(個)의 ‘생(生)’을 되 찾자는 것이다! 바꿔 말하면 나날의 삶 속에서 ‘비폭력 직접행동’을 탈환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반국가’, ‘반자본주의’, ‘비폭력 직접행동’이라 해도 구름 잡는 얘기니까, 적(敵)들은 아프지도 가렵지도 않으니까, 그래서 이 세상이 지금 금방 어떻게 된다는 게 아 니다. 우리를 압도하는 국가폭력과, 누군가 말했듯이 ‘안락’하고 또는 ‘정체불명의 전체주의’ 하에서 이것저것 모두가 어둠 속에 빨려들어갈 것 같다는 것이다. 그렇지만 우리들은 삶을 그만둘 수는 없다. 그만둘 수 없는 이상 그때 그때 자기가 우연히 부딪친 문제에 덤벼들어 움켜잡고, 저항도 하고, 패스도 하고, 찌글어지고, 사랑도 하고, 아이를 낳고, 기르기도 하고, 놀고, 전단 한 장 만들기도 하고 등…… 할 수밖에 없지 않은가.

*

여기까지 쓰고 읽어보니까 뭔가 맥락도 없이 똑같은 말을 몇번씩 되풀이했다. 게다가 내가 생각하는 비폭력 직접행동이라지만, 무까이상이 쓴 것이다. 함께 살면서 얘기로 들은 것을 그냥 되풀이할 뿐이다. 내가 제일 좋아하는 등사판으로 출판한 『폭력론 노트 ― 비폭 력 직접행동이란 무엇인가』를 오래간만에 읽어보았지만 용어도 그대로, 완전히 베낀 것이 다. 그렇지, 그렇구말구. 아직 독자적인 나의 비폭력 직접행동이라고 쓸 수 없다. 그렇지만 옛날의 나와 지금의 나는 완전히 다르다. 아까 ‘동아시아 반일 무장전선을 지지, 지원하고……’라고 썼지만 사실은 조금 다르다. 그들이 체포됐을 때 무까이상은 금방 지지ㆍ지원하는 내용의 글을 썼지만 나는 “구원하는 것은 당연하지만 그들을 지지하지는 못한다”고 해서 무까이상과 울면서 1주일이나 싸웠을 정도였다. 그런 일이 있고 나서 나는 무까이상의 『폭력론 노트』를 되풀이해서 읽었다. 벌 써 30년 가까이 된 일이다. 읽고 ‘눈을 덮고 있던 비늘’이 여간해서 떨어질 것 같지는 않았 다. 그렇지만 개인의 ‘폭력’은 생명력의 일부분이라는 데를 발견하고 무엇인가 나는 크게 해 방된 기분이 들었다. 그래서 이제 알았다는 기분으로(아마도 조급하게 결론짓고) 어느 사이 에 ‘비폭력’에 구애받지 않는 비폭력주의자가 되었다. 그래서 이론이 아니라 『폭력론 노 트』가 ‘눈에 비늘’이 되어 있었다는 것을 알게 된 것은 고작 최근 1~2년이다. 그러나 지금 전세계가 ‘전쟁의 구름으로 뒤덮혀버린’ 상황에 한숨만 나온다. 그렇지만 우리들에게는 ‘비폭력 직접행동’밖에 없고, 그것뿐이다고 새삼 강하게 말하겠다.

*

결론이 될지 모르지만 이것이 나의 결론이다. 내게 ‘비폭력 직접행동’이란, 지금 그때 그 때의 ① 하지 않으면 안되는 일을 ② 하고 싶다는 생각에서 ③ 할 수 있을 것 같은 것을 ④ 자기가 좋아하는 방법으로 한다 ― 는 것. 그러한 당연하고 평범한 나날의 삶이 바로 비 폭력 직접행동인 것이다.

언젠가 ‘치매’를 ‘힘’으로 하면 ‘그저 치매’일 뿐이다 ― 라는 말을 들은 적이 있는데, 나 는 그 얘기를 들으면서 금방 ‘치매’를 ‘바보’로 바꿔서 ‘그렇지, 그렇다’ 하고 끄덕끄덕했다. 그런 거라고 생각한다.

비폭력 직접행동이라는 것은 우리들의 나날, 매일 매일의 무의식적인 삶을 “폭(暴)이 아닌(非) 힘(力)” 즉, 생명력으로 자기의 ‘힘’으로 적극적으로 자각하는 일이다. 그것을 새 삼 깨달음으로써 자신이 변해간다면…… 그렇게 되면 세상이 조금 변할지…… 도 모른다.

편집후기

1999년 시애틀에서 아나키스트들이 스타벅스나 나이키 등의 유리창을 파괴했다. 이에 대해서 “물건을 깨는 것은 폭력이다”, “물건쯤 깨는 것은 폭력이 아니다”, “오히려 상징적으 로 물건을 깨는 것은 좋은 일이다”하는 논쟁이 있었다. 이것은 운동에서 비폭력이 표방되면 언제나 제기되는 논쟁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현상적으로 나타난 것만으로 ‘비폭력’이다 ‘폭력이다’ 하는 따위의 논쟁은 전적으로 무의미하다.

비폭력 직접행동이란 행동의 양식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사람들의 자율적 생활과 인간의 자유와 존엄의 박탈에 대치하는 생명력에서 나오는 것이기 때문에 그야말로 그것은 비폭력과 반드시 일체를 이루는 것이다.

이 책은 『현대 폭력론 노트 ― 비폭력 직접행동이란 무엇인가』(自由連合社, 1970)의 개정 신판이다. 구판은 신좌익 운동이 무장과 군사적인 경향을 일층 강화시키는 시대상황에 서 간행되었지만, 이번에는 “테러에도 전쟁에도 반대”라는 슬로건이 의미하는, 우리들의 주 장과는 어디까지나 거꾸로 나가는 ‘비폭력’이 만연하는 시대에 간행하게 되었다.

작년 가을 이후 우리들 눈앞에 제기된 이상한 풍경은 이 책을 어디까지나 현재진행형으로 간행할 것을 요구했다.

팔레스타인, 아프가니스탄, 체첸, 이라크…… 스스로가 테러의 원인인 커다란 정부와 전쟁국가군이 ‘반테러’를 내걸고 사람들을 죽음으로 몰아넣고 있는 지금! 그리고 사람들의 자율적인 생활 〓 자치관리를 가능하게 하는 조건을 기반에서부터 파괴하는 국제금융자본과 기업이 전세계의 사람들에게 더더욱 다가서고 있는 지금! 전쟁의 이 편에서, 풍요로운 의사비폭력 체제내에서, 자율적인 생활을 가능하게 하는 것과 반대되는 조건을 갖추는 데 사회 전체가 스스로 그들과 한통속이 되고 있는 지금! 우리들의 삶은, 우리들의 생명력은 그들에게 도대체 무엇으로 대치할 수 있는가?

그리고 그런 것들에 대해서 우리들 나름의 불완전한 대답, 그것말고 무엇이 있겠는가! 이런 우리들의 불굴의 각오와 확신을 가지고 이 팜플렛을 간행한다.

나까지마 마사카즈(中島 雅一)

「黑」 간행동인(刊行同人) 소개

무까이 꼬오(向井 孝)

1920년 토오꾜오출생. 1954년 WRI ― Japan 서기를 자칭하고 반전(反戰), 반차별(反差別), 반정치(反政治), 비폭력 직접행동을 주장하고 활동해왔다. 반천황제(反天皇制) 삐라, 스티카, 신문 등이 빌미가 되어 모두 5차례의 가택수사를 받았다. 시집 『向井孝の詩』, 저 서 『山鹿泰治․人とその生涯 ― アナキズムとエスペラント(야마가 타이지․사람과 그 생애 ― 아나키즘과 에스페란토)』, 팜플렛 『ハウツ ー ビラ爆彈(삐라폭탄 제조법)』 그밖에 다 수. 사람들로부터 아나키스트라는 말을 듣는다.

미즈따 후우(水田 ふう)

1947년 돗또리현(鳥取縣) 요나고시(米子市)에서 출생. 고교졸업 후 ‘베트남에 평화를! 국민 운동(ベ平連)’을 벌이다. 69년 상경. 「안보거부 100인 위원회」 멤버로 활동하고, 요꼬따기 지(橫田基地) 반대운동으로 연좌데모, 전단살포를 4년간 계속했다. 74년 오오사까로 이주. 그 후부터 무까이 꼬오(向井 孝)와 함께 반전, 반원발(反原發), 반천황제, 감옥문제, 사형제 반대 등 주로 여성그룹으로 활동하면서 「WRI 뉴스」, 「비폭력 활동(非暴力活動)」, 「たんぽぽ新聞(민들레 신문, 감옥 재소자에게 보내는 뉴스지)」를 발행했다. 저서 『エエジヤナイカ, 花のゲリラ戰記(좋잖아, 꽃구경하면서 펼치는 게릴라전 이야기)』 (向井 孝․水田 ふう 共著). 『風』 발행.

나까지마 마사카즈(中島 雅一)

1967년 토오꾜오에서 출생. 1982년부터 반핵, 반천황제운동을 시작하고 그 이후 비당파 행 동그룹에 참가했다. 「Anarchist independent Review(1 ~ 10호)」 발행. 「黑, La Nigreco」 간행동인, 토오꾜오의 아나키스트, 아나코․펑크스 연합, Black Flag Collective 멤버, 편집자로 『となりに脫走兵がいた時代 ― JATEC, ある市民運動の記錄 (이웃에 탈주병이 있던 시대 ― JATEC(탈주병 원조조직), 어느 시민운동의 기록)』(思想の科學社) 등등.

1982년에 아나키즘을 만난 후부터, 아나키스트로서의 생활태도와 사상을, 일생을 걸고 실천 하려고 생각하면서 살아왔다. 그러나 실상을 돌아보면 그저 부끄러울 뿐이다.

한국어판 편집후기

非戰, 『환경과 反차별』 5호에서 예고한 무까이 꼬오(向井 孝) 선생의 『폭력론 노트 ― 비폭력 직접행동이란 무엇인가』를 『환경과 反차별』 소책자 시리즈 1호로 간행하 게 되었다. 7년쯤 전부터 한글 번역판을 내려고 무척 애를 썼지만, 뜻대로 되지 않다가 4년전에 전면적인 개작을 생각하고 있다는 무까이 선생의 말씀을 듣고 기다렸던 것이 다. 그게 2002년 12월 15일 책으로 나오자마자 나까지마 마사까즈(中島 雅一)씨는 서 울에 오는 인편에 그 책을 직접 보내왔다. 그리고 우리 편집동인 4사람은 각각 역할을 분담해서 일을 했다. 번역하는 일, 활자체로 옮기는 일, 말투를 고치고 다듬고……, 한 데 모여서 토론하기를 네 차례쯤 했나보다.

그리고 무까이 꼬오 선생은 「한국판 출간에 즈음해서」라는 글을 직접 써 보내 주었 다. 우리 나이로 여든 네 살의 할아버지가 최근에 부쩍 건강이 나빠졌는데도 글을 써보 낸 것이다. 더구나 한국판 15권을 돈을 내고 사겠다는 말까지 했다. 그는 가난한 분이 다. 고마운 일이다. 남들은 나를 아나키스트라고 부른다는 말 속에서 그의 아나키스트 로서의 진면목을 찾아볼 수 있다.

또 하나, 「黑 La Nigreco」의 간행동인 무까이 꼬오(向井 孝), 미즈따 후우(水田 ふう), 나까지마 마사까즈(中島 雅一)의 약력을 각각 보내왔다.

미국의 국가폭력이 전쟁으로 세계를 지배하고 있는 21세기 초에 무까이 꼬오의 「폭력 론 노트」는 세계인민의 지침서가 되고 아울러 이 땅의 보통시민들의 길라잡이가 될 것 을 바라면서……

― (ㅎ) ―

번역된 원고를 타이핑하면서 “와, 바로 이거야” 하고 가슴으로 느꼈던 그 감정이 아직도 생생하다. 또, 그러하기에, 이 작업은 내내 즐거움이었다. 친구들과 역할을 나누어 함께 일한 이 공동작업기간은 내 삶에 특별한 의미를 가지는 동시에 “일상적인 것”이 되어버 렸다.

미치광이 부시와 또, 앞으로도 계속 나올 제 2의 부시에 맞서는 저항은, 즉각적인 비폭 력 직접행동뿐만 아니라 눈에 보이지 않는 저항으로서의 우리의 일상적 삶이 되어야 한 다고 확신한다.

― 등대 2 ―

그동안 복권에 투자하지 않고 모아두었던 내 행운들이 드디어 한꺼번에 빛을 보게 된 것 같다. 무척 기쁘다. 낼모레면 책이 되어 나온다고 생각하니 소풍 전날 밤처럼 설레 고 불안하다. 그리고 처음 원고를 받아서 읽었을 때부터 함께 일하고 이렇게 끝을 맺게 되기까지가 무슨 드라마인 냥 한 장면 한 장면 떠오른다. 특히, 노트에 적어놓았던 (ㅎ) 의 재미난 말과 상계동까지 “삼백리” 길을 이틀이 멀다하고 드나든 고마움은 쉬이 잊히 지 않을 것 같다.

(ㅎ)의 표현으로는, “오늘 죽었다고 해도 놀라지 않을” 만큼 늙은 무까이 선생은 승리를 얘기하지 않는다. “져도 져도 끝내 지지 않는다” 고 말한다. 진 곳에서 기어오르고 기어 오른 인민의 역사가 지금 우리가 서 있는 지금 이 자리인 것이다.

비폭력 직접행동은 지금의 이 자리에서 우리가 우리 자신을 어떻게 볼 것인가의 문제라 고 생각한다. 잃어버렸다는 것도 잊어버린, 자신에 대한 신뢰를 되찾고 우리에게 힘이 있다는 것을 새기면서 단단하게 사랑하고 저항해야겠다(늘 다짐이군).

― 도라지 ―

평화학의 창시자라 불리는 요한 갈퉁은, 직접적 폭력(전쟁, 강간 등), 구조적 폭력(빈 곤, 환경파괴 등), 문화적 폭력(군대, 사형제도 등)이라는 개념을 통해 전쟁 등의 직접 적 폭력이 없는 상태를 소극적 평화, 사회 구조적 폭력까지 없는 상태를 적극적 평화라 고 이야기함으로써, 현 사회에 대해 보다 넓은 인식구조와 실천의 방향성을 제공해 주 었다.

이번 소책자의 무까이 선생은 현 사회를 ‘의사비폭력 체제’라고 적극적으로 인식하는 것 과 그 의사비폭력 체제 ‘아래’에서의 ‘비폭력 직접행동’이라는 삶․실천의 방향성을 제공 해 주었다. 짧고 쉬운 글 속에서, 그 의미는 더 넓고 깊은 무게로 다가왔다.

개인적으로 환경이라는 문제를 통해 세계를 새롭게 인식할 수 있었으며, 나아가 평화는 더 한층 폭넓은 인식의 지평을 열어주었다. 그리고 이번 의사비폭력 체제와 그 체제아 래에서의 비폭력 직접행동이라는 개념은, 지금까지의 인식을 더욱 명쾌하게, 새로운 버 전으로 포맷할 수 있는 인식과 실천의 계기가 되었다.

최근, 이라크 인간방패의 소식을 접하면서, 동시에 아직까지도 계속되고 있는 팔레스타 인의 인간탄알, 인간폭탄의 심정도 함께 생각해 본다. 직접적 폭력, 사회구조적 폭력이 없는 사회, 더 나아가 의사비폭력 체제의 극복이라는 과제는 우리 모두의 몫일 것이다. 자발적 개인과 그에 근거한 동아리들의 ‘비폭력 직접행동’이, 이 체제에 대한 끊임없는 저항과 투쟁의 방법론이라는 것을 공감하며, 이 글의 일독, 또 일독을 거듭 권한다.

― 빵돌이 ―



[1] 이 책자에 별지형식으로 덧붙여진 글임.

[2] 다케시타(竹下) 수상을 계속 칭찬함으로써 결국에는 바보로 만들어버린 사건을 가리킴.

[3] 1930년 ~ 45년.

[4] 일본의 헌법 조항으로 군대를 갖지 않고, 전쟁을 하지 않는다는 이른바 평화헌법을 말함.

[5] 일본은 4개의 주요 섬(홋까이도오, 혼슈, 시꼬꾸, 큐우슈우)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그 중 북쪽 섬 홋까 이도오와 남쪽 섬 큐우슈우를 지칭. 즉 일본 전국이라는 의미.

[6] 『もうたくさんだ! メキシコ先住民蜂起の記錄』(現代企劃室, 1995).

[7] 『マルコス ここは世界の片隅なのか』(現代企劃室, 2002).

[8] 돈을 받고 주주총회 등에 참가해 대주주의 앞잡이 역할을 하는 사람.

[9] 노동력을 사고파는 인력시장이나 노동시장.

[10] 생활하는 곳이나 삶터.

[11] 서민들이 벌이는 축제 같은 곳에서 변변찮은 싸구려 물건을 파는 노점.

[12] 기로친사(ギロチン社) 사건에 관련, 훗날 나고야의 오오야붕(대두목)이 됨.

[13] 토오꾜오 나리타 공항 건설 반대 투쟁을 지칭.

[14] 오오사까 인공섬 공항.

[15] 큐우슈우의 군사격 훈련장.

[16] 사회주의 세력.

[17] 일본의 신좌익 계파의 하나.

[18] 잠자고 있는 꽃 속에 들어간 모기처럼 별 힘을 쓸 수 없는 상황이나 상태를 의미함.

[19] 가마가사끼, 산야, 신주꾸 모두 요세바(寄せ場), 이케바(生け場)의 의미로서 노동시장이자 삶의 터전.

[20] 하루주꾸의 노점. 경찰단속에도 노점을 강행, 운동처럼 진행됨.

[21] 1979년 조선 재침략을 획책하는 일본자본을 공격하기 위해 만들어진 조직이다. 다이도오지 마사시 등이 미쯔비시 등등의 재벌기업에 폭탄공격을 했고, 천황을 폭살하려다가 붙잡혀 사형을 언도받았으나 꾸준한 사형반대운동으로 아직 수감중에 있다.

[22] 『1997 ‘로프트플러스원(ロフトプラスワン) 습격을 용서하지 않는 공동성명’ 전기록(全記錄)』에 게재.

[23] 3명의 미군이 소녀를 강간한 사건에 8만여명의 오끼나와 사람들이 모였던 코자 폭동을 배경으로 한 이야기.

[24] 출판사 이름.

[25] 『沖繩 1972. 5. 15』 (關 廣延, 海風社, 1987년).

[26] 『KOZA』(那覇出版, 1997).

[27] 『米國から見たコザ暴動』 (ゆい出版, 1999)

[28] 일본 본토를 의미.

[29] 에스페란토어(語)는 자멘호프(L.L.Zamenhof)가 모든 민족어들간의 평등과 중립에 기초해서 만든 세 계 공통어.

[30] 『反戰インンターネット情報(반전인터넷정보)』(No. 6. 2000. 6. 1.)에 『狀況の中の非暴力直接行動(상황에서의 비폭력 직접행동)』으로 실렸음.

[31] 「2002년의 유언 ― 간행의 변」과 함께 별지형식으로 덧붙여진 글임.

[32] 『フェミニズ厶から見たヒロシマ(페미니즘으로 본 히로시마)』(家族社, 2002년 9월).

[33] 『娘と話す‘非暴力’ってなに』(잭 셈란, 現代企劃室).

[34] 미즈따 후우의 개인지(個人紙)로, 무까이 꼬오 등도 글을 싣는다.

[35] 일본 전국시대 때, 각 영주간 전쟁에서 이긴 영수측이 진 영수측의 무기를 접수해서 무장해제 시키는 것을 가리킴

[36] “한치의 벌레도 5푼의 혼이 있다”는 일본의 속담.

[37] 일본 동북쪽 미또(水戶)의, 도쿠가와 막부를 인민의 편에 서서 옹호․지원하는 핵심측근 가문을 일컬음. 평민의 옷을 입고 전국을 유랑하면서 불의를 해결하는 암행어사 같은 역할을 함.

[38] 가령 조선시대 숙종이 옷을 바꿔 입고 암행한 것처럼 쇼군(장군)이 옷을 바꿔 입고 암행함.

[39] 반드시 이기는 사형집행인.

[40] 제 2차 대전 말기 일본은, 미국과 이곳에서의 전투로 시간을 벌었다. 천황을 살려주면 손을 들겠다는 조건을 얻어내기 위한 시간이었는데, 이로 인해 오끼나와 20만 명, 일본본토에서 100만 명이 죽었다.

[41] 오오사까․코오베․아와지를 일컬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