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itle: 유고슬라비아의 혁명적 운동의 탄생
Date: 1969
Source: https://theanarchistlibrary.org/library/fredy-perlman-birth-of-a-revolutionary-movement-in-yugoslavia
Notes: SNU의 KOC

"이단은 언제나 적보다 더 위험하다." 한 유고슬라비아 철학자가 폴란드 맑스주의 정권 치하 맑스주의 지식인의 탄압을 분석한 후 남긴 말이다. (S. Stojanovic, Student, Belgrade, 1968년 4월 9일, 7페이지.)

'노동자 자주관리'가 공식 이념이 된 유고슬라비아에서 대중 통제를 위한 새로운 시도는 공식 이념과 그것이 설명하는 사회 관계 사이의 골을 보여주었다. 이를 드러낸 이단아들은 일시적으로 고립되었으며, 그들의 투쟁은 잠시 탄압받았다. '자주관리'라는 이념은 유고슬라비아 노동인민이 창출한 부와 권력을 성공적으로 집중시킨 영리 기술관료주의적 관료제의 가면으로 작동했다. 그러나, 그 가면을 단 한번, 부분적으로만 벗겨낸 것 만으로도 그 가면은 효력을 잃었다. 유고슬라비아의 지배 엘리트들이 드러났으며, 그들의 맑스주의적 선언은 한번 공개되면 더이상 그들의 통치를 정당화할 수 없게되는 신화라는 사실이 드러났다.

1968년 6월, 이론과 실천, 공식 선언과 사회관계 사이의 격차는 실천과 사회활동을 통해 드러났다. 학생들은 시위와 평의회를 통해 스스로를 조직하였고, 자주관리를 내걸던 체제는 이렇게 보기 드문 대중의 자발적 조직에 경찰과 언론 탄압으로 응답했다.

유고슬라비아의 이념과 사회의 간극의 성격은 1968년 6월 이전에 이미 분석되었고, 그것을 분석한 이들은 유고슬라비아를 지배하는 '혁명적 맑스주의자'들이 말하는 '계급의 적'이 아니었다. 그들은 유고슬라비아의 혁명적 맑스주의자, 이단아들이었다. 공식 논평에 의하면, 노동계급이 권력을 차지한 사회에서는 노동자가 노동자 자신에게 맞서 파업을 하는 것이 어처구니없는 일이기에 파업이 있을 수 없다. 그러나 실제로는 유고슬라비아에서 보도되지 않았을 뿐, 파업은 지난 11년 동안 꾸준히, 그리고 대규모로 일어났다.(Susret, 98호, 1969년 4월 18일) 더 나아가, "유고슬라비아의 파업은 노동운동의 부활 시도를 나타내는 현상이다." 다시 말하면, 노동자가 지배하는 사회에서 노동운동이 죽었다는 뜻이다. "이는 어떤이에게는 모순처럼 들릴 수 있다. 그러나 노동자 자주관리라는 것이 서류에만 존재하는 것이기 때문에 모순이 아닌 것이다."(L. Tadic, Student, 1968년 4월 9일, 7페이지)

노동자와 학생이 스스로 통치하는 사회에서, 노동자는 누구에 맞서 파업을 하고, 학생은 누구에 맞서 시위를 하는 것일까? 이 질문에 대한 해답은 유고슬라비아 공산주의자 연맹의 선언문에서는 찾을 수 없고, 유고슬라비아 사회 관계에 대한, 선언과 모순된다는 이유로 이단으로 낙인찍힌, 비판적 분석을 통해서만 찾을 수 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운동은 진보와 국가적 이해관계에 의해 정당화된다. 유고슬라비아 사회에서 계획, 정책, 개혁은 진보와 노동계급의 이름으로 정당화된다. 그러나 핵심 계획을 입안하는 자는 노동자가 아니며, 그 계획이 노동자를 위한 것도 아니다.

"한쪽에는 노동계급을 이루는 최저생활수준에 미치지 못하는 삶을 살아가는 임금 노동자가 있다. 노동계급은 경제 개혁의 댓가를 온전히 치르고 있으며, 이 사실을 공개적으로 받아들이길 강요받고 있다. 다른 한쪽에는 밤새 스스로를 자본화하는 파렴치한 집단이 사적 노동, 서비스, 상업, 중산층에 기반하여 존재한다. 그들의 자본은 노동이 아닌 투기, 중개, 개인 노동의 사적 관계로의 전환, 그리고 무엇보다도 탈법적 부패에서 나온다."

이 모순은 보다 일반적인 표현으로 정의 가능한데, 맑스가 밝힌 사회관계가 노동계급의 이름을 내건 맑스주의 정당이 일으킨 사회주의 혁명을 겪은 사회에서 그대로 나타나고 있다는 것이다. 노동자는 노동과 임금(개인소득이나 성과급이라는 이름으로 불러도 상관없다)을 맞바꾸고, 임금은 노동자의 물질적, 사회적 생존에 필요한 상품을 구매할 만큼만 지급되며, 잉여노동은 국가와 기업 관료들에 의해 착취되어 자본으로 전환, 노동자의 물질적, 사회적 생존 조건을 결정하는 외부 압력으로 돌아온다. 공식 역사에 의하면, 유고슬라비아는 유고슬라비아 공산주의자 연맹이 권력을 쟁취한 1945년에 착취를 폐지하였다. 그러나 노동자는 여전히 잉여노동을 바쳐 국가와 기업 관료를 배불리고, 그들의 보상받지 못한 노동은 그들의 행동이 아닌 보다 높은 권력에 의한 힘으로 돌아와 그들을 탄압한다. 그렇다면 노동자는 강제 노동을 하는 것이며, 착취당하는 것이다. 공식 역사에 의하면, 유고슬라비아는 1952년 노동자 자주관리 제도를 도입하여 노동계급이 관료제를 사회 집단에서 축출했다고 선언한다. 그러나 노동자는 그들의 생활 수단 대신 생활 활동으로부터 소외되어 그들 스스로를 통제하지 못하며, 법적 문서와 선언문에서는 이미 사라졌다고 주장하는 그들을 노동과 생산으로부터 소외시킨 자들에 의해 통제받고 있다.

미국의 경우, 트러스트는 역사상 그들이 미국 노동계급의 막강한 생산력을 중앙집중화하기 시작하려 할때 법적으로 완전히 사라졌다. 유고슬라비아의 경우, 1952년 노동계급을 통제하던 사회 계층이 살아졌다. 그러나 실제로는 "통일되고 중앙집중화된 관료주의적 독점 체제의 해체는 모든 사회활동 내 자주관리 조직(노동자 평의회, 자주관리 기관 등)의 망으로 변화하였다. 형식적, 법적, 명목적, 제도적 관점에서는 자주관리 사회가 맞다. 그러나 이것이 실제 관계의 상황에서도 적용되는가? 자주관리의 이면의 자주관리 기관 안에서는 두 거대하고 대립하는 경향이 생산관계에서 등장하였다. 의사결정의 중심부에는 분산되고 변형된 관료주의가 존재한다. 이는 노동자와 그들의 이해에 맞서 노동 관리와 잉여 노동 분배의 독점을 유지하는 비공식 집단이 존재하며, 그들은 노동이 아닌 관료주의적 위계구조 상의 지위에 기초해 이를 전용하고, 조직 또는 지역의 대표자를 영원히 권력을 쥐게 하여 그들의 직위와 기존의 구분, 수준 이하의 노동, 비합리적 생산을 유지하고 이를 노동자의 짐으로 지우게 한다. 그들 사이에서 그들은 독점 소유의 대표자처럼 행동한다. (...) 다른 한편에는 온전히 사회주의적이고, 자주관리의 경향을 띠며 이미 일어서기 시작한 운동이 있다." (Pecujlic, 같은 책)

이 온전히 사회주의적인 경향은 노동자가 자신이 생산한 상품에 의해 착취당하게 하는 의존성과 무기력에 맞선, 그리고 모든 사회 활동에 대한 통제권을 그 행위자가 쟁취하기 위한 투쟁을 상징한다. 그러나 이미 스스로 사회/경제/법 체제가 자발적 조직되고 자주적으로 통제된다고 주장하는 사회에서 이러한 투쟁이 어떠한 형태로 받아들여질 수 있을까? 어떤 혁명적 투쟁이 공산당이 국가 권력을 쥐고, 이 당이 스스로 관료주의적 통치를 끝장내고 자주관리를 공식 이념으로 채택했다고 하는 상황에서 발전할 수 있을까? 이 투쟁에서는 이미 자본을 몰수하여 자본가 계급에 대한 몰수도 있을 수 없고, 공산당이 지난 사반세기 동안 국가 권력을 장악했기에 혁명적 맑스주의 정당의 국가권력 쟁취도 있을 수 없다. 오직 다시 했을 때에는 그 전보단 낫다는 확신 속에서 해왔던 일을 반복하는 것만이 가능하다. 그러나 과거의 실패로 전망을 한정지을만큼 정치적 상상력이 그렇게 부족하지는 않다. 유고슬라비아에서도 다른 곳과 마찬가지로, 자본가 계급의 사유재산이 몰수와 '노동계급의 조직'(즉 공산당)으로의 대체, '노동계급의 조직'의 국가 권력 쟁취, 그리고 권력을 쥔 공산당의 다양한 형태의 '사회주의'에 대한 선언은 이미 역사적 사실이며, 이는 상품 생산, 노동 소외, 강제 노동의 종말 뿐 아니라 대중의 자발적 조직과 자주적 통제의 시작조차도 의미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이제 깨달았다.

결과적으로, 이미 '멋진 신세계'과 같은 시각에서 산업화의 가속과 사회 관계의 합리화을 위한 효율적 도구임이 검증된 투쟁의 조직 방식은 노동 대중 전체의 일부에 대한 독립적이고 비판적인 기획과 통제를 위한 투쟁의 조직 방식이 될 수 없다. 정당 관료에 의한 국가 권력 쟁취는 그 정당이 스스로를 '노동계급의 조직'이라고 칭하고 그들의 통치를 '프롤레타리아트 독재'나 '노동자 자주관리'라고 칭한다고 해도 그 이상으로 나아갈 수 없다. 또한, 유고슬라비아의 경험은 '노동계급의 조직'이 국가권력을 쟁취하는 것이 노동자의 사회적 생산 통제로 나아가는 길의 단계도, '노동자 자주관리'라는 공식 선언도 이를 실현하기 위한 단계도 될 수 없음을 보여주었다. 유고슬라비아의 경험은 최소한 역사적으로 유고슬라비아 노동자들이 세계 최초로 모든 단계의 사회적 삶에 있어 권력의 탈소외를 위한 투쟁에 나섰음을 보여줄 뿐이다. 그러나 유고슬라비아 노동자들은 그러한 투쟁에 앞장서지 못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학생들이 이러한 투쟁에 앞장섰고, 유고슬라비아 학생들은 세계 최초도 아니었다.

노동계급을 조종하기 위해 맑스주의적 단어를 쓰면서 벌어지는 정당의 국가권력 장악은 그와 완전히 다른 역사적 사명인 상품 관계의 폐지와 사회주의적 관계의 건설과 구분되어야 한다. 반세기 동안 전자는 후자를 가장하여 등장하였다. '신좌파'의 등장은 이 혼동을 끝장내었다. 전세계적인 부흥을 경험하고 있는 이 혁명적 운동은 정당 관료를 국가 권력에 밀어넣는 짓거리를 멈추고, 이미 권력을 쥔 관료 체제에 맞선다는 특징을 갖고 있다.

당 이론가들은 자본주의 사회의 '신좌파'는 '사회주의 국가'의 학생운동과 전혀 관련이 없다고 주장한다. 이러한 관점은 유고슬라비아의 학생 운동이 자본주의 국가와 같이 잘 발달하지 않았다는 점, 1968년 6월 이전까지 유고슬라비아 학생들이 수동적이고, 친미적 감정을 가지고, 소부르주아적 인생 목표를 가졌다는 점에서 아주 잘쳐줘봐야 과장된 주장이다. 그러나 이들 이론가들의 바람에도 불구하고 유고슬라비아 학생들은 그렇게 뒤쳐지지 않았으며, 사회주의 혁명이라는 과제에 적합한 새로운 조직 양식을 향한 탐구는 유고슬라비아 학생에게도 빠지지 않았다. 1968년 5월, 프랑스에서 모든 형태의 분리된 사회 권력을 탈소외시키기 위한 거대한 투쟁이 역사적 경험을 쌓고 있을 때 베오그라드 법학 교수들 사이에서 '학생과 정치'라는 주제가 논의되고 있었다. '논의의 성격을 결정한 주제'는 "스토자노비치 박사의 효현에 의하면 '복지국가'의 신화와 전통적 부르주아 민주주의는 물론 선진 서구 사회에서 혁명적 목표를 모든 수단을 동원하여 무디게 만드는데 성공한 사민주의 정당들, 즉 전통적 좌파 정당을에 맞선 '신좌파' 운동에서의 인간 참여 가능성이었다." ("The Topic is Action", Student, 1968년 5월 14일, 4페이지)

1968년 5월, 유고슬라비아 학생들은 자본주의 사회의 동지들과 많은 공통점을 갖게 된다. 베오그라드 학생신문의 1면 사설에서는 "현재 사회정치 형국의 갈등은 수많은 문제에 대하 쉽고 빠른 해결책이 없다는 사실에 의해 더욱 첨예해졌다. 다양한 형태의 갈등이 대학에서 수면 위로 떠올랐고, 전망의 부족, 다양한 문제들에 대한 해결책의 부족이 다양한 행동 양태의 뿌리에 있다. 이를 느낀 수많은 이들이 이 갈등이 충돌로, 중대한 정치적 사태로 번질지, 또 이 사태가 어떤 형태로 일어날지를 묻는다. 누군가는 총체적 사회구조를 특정짓고 이 상황의 직접 원인이 되는 조건에 영향을 미칠 빠르고 효과적인 방법이 없기에 이 사태가 무뎌질 뿐 피할 수 없다고 말한다."("Signs of Political Crisis", Student, 1968년 5월 21일, 1페이지) 같은 신문의 1면에서는 '노동의 핵심에 가려진 소외'에 관한 맑스의 아래 인용문을 게재하였다. "노동은 부자들에게는 경이를, 노동자에게는 고통을 생산한다. 궁전을 짓고 노동자에게는 움막만을 준다. 아름다움을 생산하지만 노동자에게는 끔찍함 뿐이다. 기계가 노동을 대신하지만, 노동자의 일부를 야만적 일자리에 내팽개치고, 나머지를 기계로 만든다. 정신을 창조하지만, 노동자에게는 무지와 크레틴증만을 안겨준다."

같은 달, 베오그라드 청년연맹 기관지 사설에서는 "우리가 보건대 유고슬라비아 학생의 혁명적 역할을 (학생들의 물질적, 사회적 상황의 문제와 모순을 포함한) 일반적인 사회 문제와 모순을 해결하기 위한 참여에 있다. 특정 학생 문제는 그것이 아무리 심각할지라도 고립되고 일반적 사회문제와 떨어져 해결될 수 없다. 학생의 물질적 상황은 사회의 경제적 상황과 분리될 수 없고, 학생 자주관리는 자주관리의 사회적 문제와 분리될 수 없다."(Susret, 1968년 5월 15일) 이 기관지의 다음 호에서는 '현재 청년 정치 참여의 조건과 취지'에 관한 논의를 담으며 아래와 같은 관측을 내놓았다. "따라서 대학은 보다 넓은 범위의 사회 제도와 분리될 수 없기에 대학 개혁은 사회 전체의 개혁, 또는 어쩌면 혁명 없이는 불가능하다. 그렇기에 사상과 행동의 자유, 그리고 소위 대학의 자율성은 사회 전체가 변화할 때, 그리고 이 변화가 총체적 자유와 자주관리의 수위를 바꾸는 것이 가능할 때에만 가능하다는 사실 역시 뒤따라온다." (Susret, 1968년 6월 1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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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8년 4월, 자본주의 국가들의 동지들처럼 유고슬라비아의 학생들도 베트남민족해방전선과의 연대와 미국의 군국주의에 반대하는 시위를 열었다. 루디 두치케(독일 신좌파 학생운동가 - 역자 주)가 슈프링거(독일의 보수 언론, 디 벨트, 빌트 등 신문사 소유 - 역자 주)가 급진적 서독 학생들에 맞서 벌인 기획의 결과로 피격당했을 때, 유고슬라비아 학생들은 독일 사회주의학생연맹과의 연대를 위한 시위를 열었다. 베오그라드의 학생 신문은 루디 두치케와 독일 맑스주의 철학자 에른스트 블로흐에 대한 기사를 실었다. 유고슬라비아 학생들은 세계 학생운동의 경험을 알 수 있었다. "올해 여러 나라에서 벌어지고 있는 학생 봉기는 청년은 사회를 바꾸는 과정에서 중요한 사업을 맡을 수 있음을 보여준다. 용기와 투쟁에 대한 의지가 상승했고, (혁명이 지적 대담의 주제로 자주 올라와) 수많은 학생들의 비판적 의식이 투철해졌다는 점에서 이러한 봉기는 우리 대학의 동아리들에도 영향을 미쳤다고 볼수 있다. " (Student, 1968년 4월 23일, 1페이지) 파리는 이 투쟁에 대한 의지를 나타낼 수 있는 조직 형태의 예시를 보여주었다. "파리뿐 아니라 독일, 이탈리아, 미국 학생들의 새로운 혁명적 운동에서 완전히 새롭고 무엇보다 중요한 점은 이 운동은 현존하는 모든 정치 조직으로부터 독립되었기에 가능했다는 것이다. 공산당을 포함한 모든 조직들은 체제의 일부가 되어 일상적인 의회주의 놀음의 규칙에 엉겨붙어 그들이 차지한 지위를 내려놓을 각오를 하고 이 미친듯이 용감하고 언뜻 보기에 가망없어보이기까지 한 이러한 행동에 참여할 의지가 없었다." (M. Markovic, Student, 1968년 5월 21일)

유고슬라비아 학생운동의 발전에 기여한 또다른 요소는 베오그라드 학생들의 학생회 내 관료제에 대한 경험이었다. 같은해 4월, 철학부 학생들은 폴란드의 맑스주의 지식인 탄압에 항의하는 서한을 모았다. "오늘날 전세계에서 학생들은 인류 사회를 창조하기 위한 투쟁의 최전선에 있기에 우리는 폴란드 사회주의 체제의 반응에 매우 경악했다. 자유로운 비판적 사고는 어떠한 권력으로도 탄압받을 수 없으며 설령 그것이 표면적으로 사회주의 이상에 기대고 있을지라도 그러하다. 우리 청년 맑스주의자들은 오늘날 사회주의 국가에서 반유대주의적 공격과 타협하고 이를 내부 문제에 대한 해결책으로 이용하는 것을 이해할 수 없다. 우리는 폴란드 사회주의가 과거 수많은 아픈 경험을 겪은 이후에 내부 문제를 비민주적인 방식으로 해결하려 드는 것이나 그 해결책으로 맑스주의 사상을 탄압하는 것을 이해할 수 없다. 또한 노동계급과 그들의 완전한 해방을 목표로 하는 진보적 학생운동 사이에 갈등과 분열을 조장하는 것에 대해 파렴치하다고 여긴다." (Student, 1968년 4월 23일, 4페이지) 철학부 학생들의 모임은 이 편지를 폴란드로 보냈지만 유고슬라비아 학생연맹 대학 위원회는 이를 반대했다. 왜냐? 철학부 학생들은 자신들의 관료들이 가진 기능과 이해관계를 아래와 같이 분석했다. "유고슬라비아 학생연맹 대학위원회는 정치적 활력를 잃고 행동하지 못하며 무력하게 무언가를 할 책임감을 전혀 느끼지 못하는 상황에 이르렀다. 아무도 조직에 따지지 않고 조언이 들어오지 않는 한 행동을 '취해야 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 이는 학생 청년들의 표현에 대해 나쁜 전술이며 민주주의에 대한 더 나쁜 태도이다. 대학위원회가 행동의 핵심에 대해 이해하길 그만둔 때 논의는 형식의 영역으로 이어진다. '어떤 의견을 내야 하나?' '누구의 허가를 받아야 하나?' 이러한 수동적인 분위기에서 누가 행동을 시작할 것인지는 물어볼 필요도 없다. 대학 위원회가 다른 어떤 모임도 아닌 바로 그 구성원 자신들이 제기한 행동에 대해 반대하는 것은 우리 사회주의의 핵심 원리가 구성원 수준에서 의사결정을 내리는 자주관리라는 점을 생각할 때 모순이 아닌가? 다시 말하자면 우리의 죄는 오직 우리가 자주관리의 기본권을 행사했다는 것이다. 조직은 스스로 해산할 수 없으며, 해산을 실현하기 위한 수단이 될 뿐이다. 우리 행동의 가장 위대한 가치는 바로 위로부터의 어떠한 지시나 명령도 제도화된 형식도 없이 평범한 군중에 의해 시작되었다는 사실에 있다." (같은 문서)

노동 소외에 기초한 사회관계와 대학 문제의 불가분성, 세계 '신좌파'의 경험, 대중에 의한 자발적 조직과 관료주의적 조직 사이의 차이에 대한 자각 등의 요소와 함께 베오그라드 학생들은 행동에 나섰다. 행동을 촉발시킨 사건은 사소했다. 1968년 6월 2일 밤, 뉴 베오그라드의 학생 기숙사 근처 야외에서 열리기로 한 공연이 실내의 작은 공간으로 장소가 변경되었다. 공연을 보고자 했던 학생들은 들어갈 수 조차 없었다. 산발적인 시위가 벌어져 이윽고 수천명의 학생들이 가담했다. 시위대는 정부청사를 향해 행진하기 시작했다. 그들은 자본주의 사회와 같이 경찰(유고슬라비아의 자주관리적 언어에 의하면 공식적으로는 '민병대'라 불린다)에 의해 저지당하여 학생들은 민병대의 지팡이로 두들겨맞고 상당수가 체포되었다.

다음날인 6월 3일, (칼 맑스 붉은대학으로 개명된) 베오그라드 대학을 구성하는 학부 대다수와 뉴 베오그라드 거리 곳곳에서 총회가 지속적으로 열렸다. "학생들은 토론에서 유고슬라비아 사회의 총체적인 사회 격차, 실업 문제, 사유재산 증가, 특정 사회계층의 불로소득, 노동계급 다수의 견딜 수 없는 조건, 그리고 노동에 따른 분배 원칙을 유지하기 하기 위한 노력 등을 강조했다. 토론은 '노학연대', '우리는 노동인민의 아들이다', '사회주의 부르주아 물러가라', '언론자유 집회자유' 등과 같은 구호와 박수로 인해 중단되었다." (Student, 특별호, 1968년 6월 4일, 1페이지)

언론 탄압에 이어 경찰의 탄압이 들어왔다. 유고슬라비아 (공산당) 언론은 학생들의 투쟁을 다른 인민들에게 알리지 않았다. 그저 학생들의 투쟁을 학생 문제에 의한, 특권을 가진 동떨어진 집단의, 실제로 일어나지 않은 투쟁으로 보도했다. 베오그라드 당국이 검열한 Student지의 6월 4일자 1면에는 초기의 혁명적 투쟁을 특권층 학생들의 반항으로 규정하는 언론의 시도에 대해 아래와 같이 밝혔다. "언론은 다시 한번 대학의 사건을 왜곡하는데 성공했다. 언론에 의하면 학생들은 자신들의 물질적 조건을 향상시키고자 투쟁한다. 집회와 시위에 참여한 모든 이들은 학생들이 우리 사회 전체의 이해를 망라한 투쟁, 무엇보다도 노동계급의 이해관계를 위한 투쟁이라는 전혀 다른 방향으로 향하고 있음을 아주 잘 알고 있다. 이것이 시위대의 발표가 다른 무엇보다도 부당한 사회격차를 언급한 이유이다. 학생들에 의하면 (사회 불평등에 맞선) 자주관리와 계혁의 관계에 대한 것이기도 한 이 투쟁은 노동계급과 지금의 유고슬라비아를 가장 중요하게 다루고 있다. 신문은 부당한 사회 격차에 대해 언급한 발언은 한마디도 인용하지 않았다. (...) 또한 집회와 시위에서 외쳤던 노동자와 학생의 연대를 위하여, 노학연대 등 노동자와 학생의 길과 이해관계는 결코 떨어질 수 없다는 하나된 감정과 생각을 담은 주요 구호들에 대해서도 말하지 않고 있다." (Student, 1968년 6월 4일, 1페이지)

6월 5일, 유고슬라비아학생연맹은 성장하는 운동의 지배력을 확보하고, 대변인을 맡는데 성공했다. 이들은 평의회, 집회, 데모의 학생들이 요구한 혁명적 목표를 포함한 '정치행동강령'을 제시하였지만, 동시에 '2부' '대학 개혁'이라는 조항을 부록처럼 끼워넣었다. 이 조항은 나중에 새로이 깨어난 유고슬라비아 학생운동을 다시 잠재우는데 핵심 역할을 맡는다. 정치행동강령의 1부는 사회 불평등을 시작으로 고용, '공산주의자동맹을 포함한 모든 사회정치단체의 민주화', 사회 재산의 사유 재산으로의 왜곡, 부동산 투기, 문화의 상업화 등을 짚었다. 그러나 급진적 학생들이 1부에서 상대적으로 명확히 명시한 그들의 목표에 만족하여 읽어보지도 않은 2부는 완전히 다른, 사실상 정 반대의 내용을 담고 있다. 2부의 첫번째 요구는 1부에서 밝힌 목표가 전혀 이루어지지 않을 것이라고 전제한다. 이는 유고슬라비아 사회 체제의 현재 요구 조건을 대학에도 적용하는 것으로, 유고슬라비아의 상업주의적이고 기술관료주의적인 체제가 요구하는 바를 만족시키는 기술관료주의적 개혁을 요구한다. "우리 경제와 자주관리적 관계의 사회문화적 발전을 위한 요건에 맞춘 학교 체제의 즉각적인 개혁 (...)" (Student, 특별호, 1968년 6월 8일, 1-2페이지)

이 학생 봉기를 그들이 맞섰던 지배적 사회 관계의 요건에 종속되게 하기 위한 조작이자 조잡한 뒤집기는 다음해까지 명백하게 드러나지 않았다. 체제의 즉각적 반응은 훨씬 분명하여, 억압, 고립, 갈라치기를 이어나갔다. 경찰의 탄압은 폭력, 연행, 사건이나 집회 및 시위에 대한 온전한 내용을 담은 학생 신문 검열 등의 형태를 띠었다. 그리고 6월 6일 밤, "비밀경찰 요원 두 명과 경찰관 한 명이 학생신문을 나눠주던 학생들을 야만적으로 공격, 신문 600부를 압수하여 찢고 불태웠다. 모두 신문을 받고자 모인 수많은 시민들 앞에서 벌어진 일이다." (Student, 1968년 6월 8일, 3페이지)

경찰의 탄압 외에도 지배적 이해관계자들은 학생들을 노동자들로부터 고립시키고 갈라놓는데 성공하였다. 그들은 일시적으로 그들의 '진보적 학생운동과 그 학생들이 온전히 해방시키고자 목표하는 노동계급 사이의 갈등을 조장하고 갈라놓으려는 파렴치한 시도'를 달성했다. 이는 다양한 방식으로 이루어졌다. 학생 언론 검열과 공식 언론의 호도는 노동자들이 학생들의 요구에 관심을 갖지 못하게 했다. 기업 관리자와 전문가 집단은 학생들의 투쟁을 '그들의' 노동자들에게 '설명'해주면서 노동자들에게 '그들의' 공장을 '폭력적인' 학생들의 공격으로 지켜야 한다고 가르치고 언론에 '노동자 공동체'의 이름으로 경찰에게 유고슬라비아의 자주관리를 폭력적인 학생들로부터 감사하다는 편지를 보냈다. "전해지는 글과 말에 의하면, 학생들은 국가민병대에게 무력을 사용하고, 경찰서를 포위하여 막았다. 처음부터 학생운동이 도시와 대학 시설에서 보여준 질서와 자기 통제는 폭력이라는 낡은 단어로 묘사됐다. (...) 노동자와 학생의 갈등을 만들고자 하는 이 관료제는 공산주의자 동맹, 기업과 국가 기관에 또아리를 틀고 특히 언론에 영향력을 드러내고 있다. (언론은 매우 권위적인 구조를 가지면서 오직 책임과 비판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자주관리에 기대고 있다.) 노동자-학생운동에 직면한 관료제는 발 밑의 땅이 무너지고 그들이 향하고자 하는 음침한 곳이 사라지는 것을 느끼며 공포에 질려 무의미한 주장을 질러대고 있다. (...) 우리 운동은 시급히 노동계급과 이어져야 한다. 우리의 기본 원칙을 설명하고, 이를 실현시켜야 하며, 보다 풍부하고 정교해져야 하고, 구호에 그쳐서는 안된다. 그러나 이것이야말로 관료제가 두려워하는 것이고 그렇기에 그들은 노동자들에게 학생들로부터 공장을 지키라 하고 학생들이 공장을 파괴할 것이라고 한다. 이 얼마나 길이남을 멍청한 짓인가!"(D. Vukovic, Student, 1968년 6월 8일, 1페이지) 이리하여 유고슬라비아 사회주의의 자주 관리자들께서는 마치 프랑스의 (CGT, 프랑스 공산당 등) '노동자 조직'이 그로부터 몇주 전 프랑스 노동자들을 사회주의 혁명으로부터 지켜냈듯이 유고슬라비아 노동자들을 유고슬라비아 학생들로부터 지켜내는 데 성공한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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탄압과 분열은 유고슬라비아 혁명 운동을 끝장내지 못하였다. 평의회는 계속 열렸고, 학생들은 계속해서 노동자와 연대하고 사회 전환이라는 책무를 실현할 수 있는 조직 방식을 찾고 있었다. 마지막 단계는 운동을 진정시키고 가능하다면 재기시켜 맞서싸워야 할 체제의 요구에 복무하게 만드는 것이었다. 이 단계는 Student지의 6월 11일자 신문에 게재된 티토의 중대 연설의 형태로 나타났다. 절대 다수의 인민이 중국의 '개인 숭배'를 지상 최악의 죄로 여기는 사회에서 절대 다수의 학생은 모든 유고슬라비아의 공공기관, 가정, 신문 1면에 지난 사반세기동안 사진이 걸려온 인간(티토 - 역자 주)의 아래와 같은 말에 박수를 보냈다. "...이 시위들과 그 전의 일을 생각해보건대, 청년 및 학생들의 봉기는 자발적인 행동이라는 결론에 이르렀습니다. 그러나, 이들 시위가 전개되고 이후 거리에서 대학 강당으로 이어짐에 따라, 이 사태를 자신들의 뜻대로 이용하고자 하는 외세의 요소들이 점차 침투하고 있습니다. 가장 반동적인 것에서부터 마오쩌둥의 이론에 기댄 급진적 요소와 같은 가장 극단적인 것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경향과 요소들이 있습니다." 문제를 사상의 취지에서 사상의 근원(외세 사상의 외세적 요소)로 뒤집어 혁명적 학생들을 고립시키고 분리시키려는 이러한 시도 이후 공화국 대통령(티토 - 역자 주) 각하께서는 토착적 사상만을 가진 바른 토종 학생들을 회복시키려 노력하시었다. "그러나 절대 다수, 그러니까 90% 정도의 학생들은 정직한 청년들이라고 생각합니다. (...) 대학 내 최신 정세를 보면 90%의 학생은 약에 찌들지도 않고, 저 많은 질라스(티토의 정적으로 당원의 계급화를 비판함 - 역자 주), 란코비치(티토의 정적으로 스탈린주의적 중앙집권 통제 경제와 세르비아 중심주의를 지지함 - 역자 주), 마오주의자들이 학생들에게 관심있다는 명목 하에 그들이 원하는 바를 이루려는 것을 허락하지 않는 우리의 사회주의자 청년들입니다. (...) 우리 청년들은 올바릅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들에게 더 많은 관심을 가져야 합니다." 학생들에게 그들이 지금까지 해왔던 것을 하지 말 것을 말함으로서, 자주관리 유고슬라비아의 대통령 각하께서는 그들이 어떻게 해야할지를 말한 것이다. "동지들 그리고 노동자 여러분, 나는 우리 학생들이 이들 문제에 대해 건설적인 시각과 해법을 통해 도울 것이라고 호소합니다. 그들이 우리가 하는 일을 따르게 하십시오, 그것은 그들의 권리입니다. 그들이 우리 일상에서 자기 역할을 하게 하고, 모든것이 불분명하거나 분명해야 할 때 나를 찾을 수 있게 하십시오. 그들의 대표가 찾아오게 하십시오." 투쟁의 취지와 목표에 대해 티토는 유치원생들 앞에서 그들의 항의를 하나하나 들어주겠다고 약속하며 이렇게 말했다. "이 항쟁은 어느정도는 학생들이 내가 내 스스로 물어보았지만 해결하지 못한 것이 있다는 것을 발견한 결과입니다. 지금 학생들에게 이를 해결하기 위해 최선을 다할 것을 약속하며, 학생들 역시 나를 도와줄 것이라 믿습니다. 또한, 내가 이를 해결하지 못한다면 이 자리에서 내려올 것입니다. 공산주의자로서의 자각이 있는 오랜 공산주의자라면 자신이 있는 자리를 고집하지 말고, 그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인민에게 그 자리를 기꺼이 내줘야 한다고 봅니다. 마지막으로 다시 한 번 학생들에게 호소합니다. 이제는 학업으로 돌아올 시간입니다. 시험이 얼마 안남았습니다. 여러분의 성공을 빕니다. 만약 여러분이 계속 시간을 낭비한다면 부끄러운 줄 알아야 합니다." (Tito, Student, 1968년 6월 11일, 1-2페이지)

'학생 조직'이 대학 개혁을 위한 '투쟁'을 선도하는 동안, 학생들은 전혀 다른 목적으로 투쟁을 위해 스스로를 조직하기 시작한 학생들은 다시 수동적이고 정치적으로 무관심해졌다. "6월은 학생들의 의식이 폭발한 시기였다. 6월 이후에는 여러 의미로 그 이전과 비슷해졌는데, 이는 사회의 6월의 사건과 그것이 나타낸 목적에 대한 부적절한 대응으로 설명 가능하다." (Student, 1969년 5월 13일, 4페이지)

'대학 개혁'의 취지는 베오그라드 대학 총장에 의해 정의되었다. 6월 사건 반년 후 Student지에 실린 그의 방침에 의하면, 총장은 학생의 노동계급으로부터의 분리나, 학생의 기술관료나 군과의 체계적 통합 등 학생들이 콕집어 맞서싸운 것들을 '목표'라고 집어넣었다. "대학과 학생의 물질적 입지를 향상시키기 위한 투쟁은 우리의 지속적인 임무입니다. (...) 현재 대학 업무에 관한 핵심 문제 중 하나는 모든 패배주의와 선동에 맞서 싸울 책무입니다. 우리 대학 그리고 학생 청년은 우리 사회주의 조국의 수호에 기꺼이 그리고 열렬하게 참여했고, 참여할 것입니다. 우리를 공격하고자 하는 사방의 모든 침략자들에 맞서 우리의 방어력을 건설하기 위한 체계적 조직은 우리 모두의 빠르고 지속적이며 효과적인 행동이 되어야 합니다." (D. Ivanovic, Student, 1968년 10월 15일, 4페이지) 이러한 발언들은 '대학 개혁의 취지는 자주관리'라는 내용을 담은 길고 모호한 문장들에 뒤이어 나왔다. 총장이 '자주관리'의 '취지'에 대해 이해하고 있는 바는 위에 인용한 바로 저 발언에서 분명히 확인할 수 있다.

학생들이 적극적으로 대학 개혁을 위한 '투쟁'에 참여하지 않아, 그 책무는 그 문제에 관심 있는 전문가들인 학부와 교직원들에게 넘어갔다. "교사 다수와 그 동료들의 주요 대화 주제는 자동차, 별장, 그리고 편한 삶이다. 학계의 저술에서 냉철하게 비판받은 사회 엘리트들의 주요 대화 주제도 그와 같은데, 정작 그들은 그들 자신이야말로 그 엘리트 집단의 중요하고 필수불가결한 부분이라는 점을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 (B. Jaksic, Susret, 1969년 2월 19일)

대학 개혁으로 가는 길에서, 유고슬라비아의 대표적인 (관변) 경제학자 중 한명은 마술적 요소와 함꼐 관료주의 지상낙원을 옹호하였다. 그는 몇년 전 소련의 '사회공학자'가 국가 관료제에 의한 인간 활용을 위해 개발한 산술적 '국가생산수지'를 역설하였고, 이제는 '실제 사회 체계 분석을 위한 일반 체제 이론의 도입'을 옹호하고 있다. 이 일반 체제 이론이라는 것은 미국과 같은 '선진적이고 진보적인 사회 체제'에 대한 초신 과학적 발견이다. 이에 의하면 "일반 체제 이론은 미래 사회과학계의 모든 전문가들 뿐 아니라 영역에 관계없이 사회발전에 참여하는 모든 전문가들에게 필수 불가결한 것이 될 것"이라고 한다. (R. Stojanovic, "On the Need to Study General Systems Theory at Social Science Faculties", Student, 1969년 2월 25일) 만약 대학 개혁을 통해 이 일반 체제 이론이라는 것이 모든 미래 유고슬라비아 기술관료들의 머리에 주입된다면 아마도 유고슬라비아는 마법과 같이 '선진적이고 진보적인 사회체제', 그러니까 상업주의적이고 기술관료주의적이며 군사 관료주의적인 인간공학의 신천지로 도약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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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생들은 노동자들로부터 분열되었다. 그들은 투쟁을 재기했다. 이는 학내 관료들이 상업주의-기술관료주의적 엘리트들에 보다 더 효과적으로 충성한 결과였다. 관료들은 학생들로 하여금 이 '대학 개혁'을 '자주관리'하고 그들을 경영자, 기술자, 관리자로 만드는 과정에 참여하라고 다독였다. 한편, 유고슬라비아 노동자들은 이전보다 훨씬 더 많은 것을 생산하고, 그들의 노동이 만들어낸 산물이 노동자에 맞서 권력을 휘두르는 다른 사회집단의 권력과 부를 증대하는 것을 목도하였다. 헌법에 따르면, 노동자는 스스로를 다스린다. 그러나 Student지의 노동자와의 인터뷰에 의하면 "문서에서만 그럴 뿐이죠. 경영자가 사람들을 고르면, 노동자는 따라야 합니다. 그게 이곳이 돌아가는 방식이죠." (Student, 1969년 3월 4일, 4페이지) 노동자가 이 계속해서 증가하는 부와 권력의 사회적 불평등에 맞선 투쟁을 만들어내려 한다면, 유고슬라비아의 끔찍한 실업을 마주하게 될 것이다. 유고슬라비아를 떠나는 것 외에는 답이 없는 수많은 실업예비군이 그를 대체하고자 기다리고 있다. 노동자는 여전히 '스스로를 다스릴' 강력한 수단을 가지고 있다. 자본주의 사회의 노동자들도 가지고 있는 파업 말이다. 그러나 한 분석가에 따르면, 사회의 혁명적 조류와 나머지 노동계급으로부터 분리된 노동자들의 파업은 '경제주의적' 파업이며, 유고슬라비아 사회에서 노동자의 힘을 증대하지 못한다고 한다. 오히려 반대의 효과를 일으키는데, "11년간의 파업 경험이 무엇을 바꾸었는가? 파업이 터지는 모든 곳에서 파업을 일으킨 바로 그 사회 관계가 재상산된다. 예를 들어, 노동자들은 분배에서 부당한 대우를 받았다는 이유로 봉기하면, 이전에 부당한 대우를 자행했던 이들이 받았던 것을 토해내고, 파업이 멈추고 노동자는 다시 피고용인으로 돌아간다. 그리고 이전에 자신의 자리를 유지하기 위해서 노동자들을 지켰던 이들이 다시 그렇게 된다. 다시 말하면, 임금노동 관계는 이를 해결하기 위한 파업의 핵심 원인으로, 지속해서 재생산된다. 따라서 이런 질문이 따라올 수밖에 없다. 노동계급이 현재 기업 상황에서 온전한 의미로 스스로를 해방시키는 것이 가능한가? 아니면 전사회의 수준을 발달시키고, 서로 다른 기업, 부서, 공화국 사이의 어떠한 분리도 허용하지 않는 과정인가?" (Susret, 1969년, 4월 18일)

노동계급을 착취해왔던 전문가에 대해, Student지는 기업의 다양한 유형에 대한 자세한 설명을 실었다. "1) 기업 사무원(관리자, 경영자, 영업사원 등)은 경영이사회, 노동자평의회, 또는 기타 자주관리 조직으로부터 임금을 받고 기업에게 경제적으로 이득이 되도록 법조항이나 도덕을 어긴다. (...) 2) (...) 3) 유령 일자리는 탈세를 위해 존재한다. (...) 4) (...) 5) 사회적 소비를 위한 기금은 사유 아파트나 별장의 건설 또는 자동차 구매를 위해 쓰인다. (...)" (Student, 1969년 2월 18일, 1페이지)

사회주의 유고슬라비아의 공식 이념은 상업주의-기술관료주의적 엘리트의 이해관계와 결코 충돌하지 않는다. 사실은 오히려 그들의 이해관계를 정당화한다. 1969년 3월, 유고슬라비아 공산주의자동맹 9차 당대회 폐회식에서는 6월의 혁명가들의 비판을 인용하면서 이를 기각해버리고 공식 이념을 재확인했다. 상품 생산이 사회관계의 중심에 놓여있는 것을 '사회주의'라고 부르는 어처구니없는 주장은 여기서도 다시 나온다. "사회주의 하 상품 생산의 경제 법칙은 현대 생산력과 합리적 경영 발전의 강력한 지지대로 작용한다." 이 문구는 '사회주의' 하 상품 생산의 대안이 스탈린주의 뿐이라는 이제는 식상하기까지 한 악마의 논리에 기대고 있다. "정부의 행정관료주의적 관리와 사회적 재생산은 현실 관계를 무너뜨리고 독점과 경영 환경의 소위 관료주의적 주관주의를 형성하여 사회 생산물의 분배의 기생충과 비합리성을 필연적으로 양산하게 된다. (...)" 따라서 선택은 하나다. 현 상태를 유지하든가, 아니면 1948년 이전까지 공산주의자동맹이 유고슬라비아 사회에 강제해왔던 바로 그 시스템으로 돌아가든가. 이러한 논리는 유고슬라비아의 공식적인 구호인 "노동에 따른 분배"라는 이념이 말하는 바를 무너뜨리는데에도 쓰인다. 이들의 해석은 "능력과 기여의 차이를 무시한다. 이러한 요구는 강력한 생산과 사회 위에서 인공적이고 미신적인 균등화를 만들어내고 빈곤과 불평등과 특권을 만들어내는 행정관료 권력의 형성을 초래한다." (Student, 1969년 3월 18일) "노동에 따른 분배"라는 원칙은 역사적으로 자본가 계급이 지주들의 귀족정에 맞선 투쟁 과정에서 등장한 것으로, 현재 유고살라비아에서도 이 원칙은 부르주아들이 말한 것과 같은 원리로 작동하고 있다. 때문에 유고슬라비아 무역업체의 성공한 상업주의적 기업가들의 막대한 개인 소득(과 성과급) 역시 그의 물질적 성공이 그의 훌륭한 능력과 사회에 대한 기여를 입증한다는 이유로 이 구호에 따라 정당화된다. 다시 말하면, 분배는 노동에 대해 상품 경제에서 시장이 내리는 사회적 평가에 의해 이루어지는 것이다. 이러한 분배 체계는 (맑스가 자본주의 상품 생산의 반대라고 정의한) 사회주의가 아닌 자본주의 상품 생산이라고 불리는 사회 관계 체제를 설명하는 "능력에 따른 노동, 시장 성과에 따른 분배"라는 구호로 요약할 수 있다.

이 문건에 대한 변호는 정교한 논쟁 방식이 아닌 지금이 가능한 최선의 세계라는 보수적 자기 만족으로 점철되어 있다. "이 자료가 담고 있는 정신과 기본 사상과 일치하지 않는 비판을 받아들이기 어렵다. (...) 우리가 마주한 모든 관계와 문제들에 대한 합리적 해법을 제공할 계획에 대한 저항은 우리 사회의 현실적인 가능성 너머에 있는 듯 하다. (...) 이것이 현실이다. 각 기업, 지부, 지역 등의 각기 다른 노동 조건을 배제할 수 없다. (...)" (V. Rakic, Student, 1969년 3월 11일, 12페이지)

Student지의 다른 호에서는 이러한 태도가 아래와 같이 규정한다. "모든 것을 일관적으로 급진적이라고 과장하여 판단하는 당사자는 스스로를 객관적으로 존재하는 무언가로 규정한다. 따라서 그에게는 모든 것이 지나치게 이상주의적이고, 추상적이고, 공상적이고, 비현실적이고, 현실과 너무 동떨어져있지만, 자신은 결코 그렇지 않다. 사회의 전환을 위해 기여하는 수많은 이들이 계속해서 현실에 기대어 존재하는 벽에 의존하며 현실에 대한 그들의 미신적 감각과 소위 현실 정치라고 볼리는 것에 의존해 그것이 그들이 피해를 봤다는 장애물인 자기 자신이라는 사실조차 깨닫지 못하고 있다." (D. Grlic, Student, 1969년 4월 28일, 3페이지)

"우리는 (사회주의는 말할 것도 없으려니와) 자주관리 그리고 민주주의가 이념적 형식으로 소외되어 있을 때 자주관리에 대한 선언과 포고를 내리는 식으로 그것을 도입했다는 사실만으로 어떠한 투쟁의 필요성도 부정한 채 자주적 통제권을 선택할 수 있다는 환상을 퍼뜨리는 위험한 수단이 될 수 있음을 잊어서는 안된다. 우리가 이미 우리 스스로를 다스리고 있을 한 왜, 누구와 싸워야 하며, 우리의 잘못에 대해서는 다른 누구도 아닌 우리가 책임져야 합니다." (같은 글)

유고슬라비아의 사회주의 이념은 공허하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지배 엘리트는 스스로의 정당성을 깨버렸다. 그러나 비판적 분석, 혁명 이론의 형태로 폭로는 여전히 이루어지고 있다. 자발적 조직에 바탕한 혁명적 행동은 아직은 경험이 매우 부족하다. 한편, 과거 사회주의를 위해 투쟁했던 이들은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 투쟁하며 자신들의 정권을 노동계급의 자주관리로 규정하려 들고, 상품 경제를 이론가가 된 자기 자신의 입으로 세계에서 가장 민주적인 사회라고 정의하고 있다. 1969년 5월, 유고슬라비아 공산당 중앙위원회에서 오랜 기간 활약한 크로아티아에서 선출된 새 통령은 "우리의 발전에 대한 가장 기초적인 지표들은 크로아티아, 그리고 유고슬라비아 사회주의 공하국의 경제적 발달이 온전히 조화로우며 진보적임을 보여줍니다"라고 무심하게 말했다. 그는 유고슬라비아 노동자의 실업과 강제 망명 문제에 대해 우려를 표하면서도 그 문제에 대해서는 "임시적으로 해외에 고용된 우리 인민에 대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조치들을 준비하고 있습니다. 이 조치들은 체계화되고, 발전되고, 우리 체제, 경제 및 도덕 내의 통합된 일부로 포함될 것입니다."라며 곧 해결될 문제라고 평했다. 그는 또한 현재 체제와 그에 대해 정곡을 찌르는 비판에 대해서도 우려를 표하면서 "좌파적이고 혁명적인 글귀부터 국수주의적 분위기와 함께 철학, 문헌학, 노동력의 움직임, 민족과 공화국의 경제 상황이라는 형식으로 모순적으로 보이는 것은 신경쓰지 않고 내놓은 망상, 혼돈, 절망, 안달, 공상적인 허상"이며, "이러한 사실들을 우리의 총체적 발전과 현실의 맥락과 떼어놓고 패배주의, 의기소침, 때로는 국수주의적 행동에 이용하기 위해 과장하고 일반화하려는 시도들을 가열차게 저지해야 합니다. 우리 노동 인민에게 이러한 시도를 체계적이고 사실대로 알려야 하며, 그들의 특성과 방법, 실제 의도, 그리고 그러한 행동의 의미를 적시해야 합니다."라고 말했다. (J. Blazevic, Vjesnik, 1969년 5월 9일, 2페이지)

유고슬라비아 '신좌파'의 탄생에 대해 유고슬라비아 대통령에서부터 크로아티아 통령에 이르기까지 보인 공식 입장은 Student지의 5월 13호 1면에서 풍자적이고 해학적으로 요약되었다. "(...) 반대파 상당수가 스스로 민주주의를 위한다고 표방하지만, 그들이 진짜로 원하는 것은 일종의 순수 내지는 온전한 민주주의, 일종의 자유의지주의라 할 수 있다. 실제로 그들이 싸워 얻고자 하는 것은 감히 자신들의 의지와 신념에 따라 말하고 행동하겠다는 기득권이다. 우리는 분명히 모든 이가 스스로에게 책임을 지는 우리 사회에 대한 이러한 반민주 분자들의 모든 시도를 저지할 것이다. (...) 이들 반대파에 맞선 투쟁에서 민주적 수단이 충분한 성과를 내지 않는 한 비민주적 수단을 쓰지 않을 것이다. 민주적 투쟁의 가장 훌륭한 예는 관료 권력과의 대결이다. 최근까지 관료주의가 우리의 가장 큰 사회악이었단 사실은 잘 알 것이다. 그리고 관료주의는 어디로 갔는가? 눈녹듯 사라졌다. 우리의 자주관리 체계와 민주세력의 압박으로 스스로 자연히 녹아내려 자주관리에 전혀 적합하지 않은 사람이나 정부 구조조차 하나도 바꿀 필요가 없었다. 반대파들은 우리의 지대한 사회 격차를 공격해대며 부당하다고까지 말한다. (...) 그러나 우리 사회의 전위 세력이자 통치 세력이며 진보적 경향을 담지한 역사적 주체인 노동계급은 다른 사회 계층을 희생하여 특권을 누려서는 안된다. 우리 체제의 미래 건설을 위해 희생할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한다. 노동계급은 이를 염두에 두고 모든 인민이 가난한 사회를 만들 평준화를 위한 요구임이 명백한 사회 격차의 급격한 해소에 대한 요구를 분명히 거부해야 한다. 그러나 우리의 목표는 모두가 부자가 되어 필요에 따라 분배받는 사회이다. (...) 반대 세력은 또한 계속해서 실업 문제를 가지고 공격한다. 우리 체제의 반대자들은 일자리를 만들어내는 것이 (6월에 창문을 여는 것 만큼이나) 뭔 대수냐고 말하며 훈련된 청년 인민들이 경제 개혁을 가속할 것이라고 말한다. (...) 현재 우리의 발전 단게에서는 더 많은 일자리를 만들어 낼 수는 없지만 다른 해결책을 만들 수는 있다. 국경을 개방하여 노동자들이 해외에서 자유롭게 고용될 수 있게 할 것이다. 우리 모두가 고향에서 일할 수 있다면 정말 좋긴 할 것이다. 그러나 개혁을 위한 투쟁은 마지막 궁극의 장에 마주했고 상황은 명백히 개선되고 있다. 실제로 우리 인민들은 지금도 나쁘게 받아들이지 않고 있다. 예전에는 한 국가에서만 일할 수 있지만, 이제는 전 세계에서 일할 수 있다. 한 국가에서 전 세계로 향하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이는 상호 이해와 우애를 이끌어낼 것이다. (...) 이들 각종 극단주의자, 좌경 분자, 우경 분자, 무정부자유주의자, 급진주의자, 선동꾼, 선교사, 교조주의자, (심지어 우리의 혁명이 위기해 처했다고 주장하는) 사이비 혁명가, 반개혁주의자, 비공식 조직 (...), 일신론자, 토속주의자 기타 등등 우리의 적들을 모두 일일이 설명할 수는 없을 것이다. 이들 모두는 사태의 온상이라 할 수 있는 것들을 보여준다. 이들 비공식 조직과 극단주의자들은 마땅히 사회로부터 가열차게 배제되어야 하며, 그들의 파괴적 행동을 막기 위해 개조되어야 한다." (V. Teofilovic, Student, 1969년 5월 13일, 1페이지)

유고슬라비아의 경험은 세계 혁명 운동의 경험에 새로운 점을 더했다. 이들의 존재는 사회주의 혁명은 과거 유고슬라비아의 역사적 사실이 아니며, 미래의 투쟁임을 보여준다. 이 투쟁은 이제 막 시작하였으나, 아직 어디로 향할지는 모른다. "바뵈프가 적은 바와 같이, 관리자는 관리를 위해 혁명을 조직하지만, 진정한 혁명은 오직 아래로부터 대중 운동의 형태로만 가능하다. 사회의 모든 자발적 인간 활동은 역사적 주체로서 등장하여 정치의 정체성과 인간 소외의 형태로서 작동하는 바로 그 정치의 소멸을 기초하는 대중의 의지를 창조한다." (M. Vojnovic, Student, 1969년 4월 22일, 1페이지) 이 관점에서 혁명은 한 대학, 공장, 민족국가에 한하여 생각할 수 없다. 더 나아가, 혁명은 언제 어디서 이미 일어난 사간의 반복도, 과거 관계의 재생산도 아니다. 다만 새로운 것의 창조일 뿐이다. 다른 유고슬라비아 작가의 말을 빌리면, "단지 생산과 창조의 갈등이 아니다. 더 큰 관점에서 동구뿐 아니라 서구에서도 절차와 모험의 갈등이다." (M. Krleza, Politica, 1968년 12월 29일, Student, 1969년 1월 7일에서 인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