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itle 알려지지 않은 혁명 1917-1920 : 혁명의 탄생, 성장, 승리 #author 볼린 #SORTtopics 혁명, 러시아혁명, 볼셰비키 혁명, 러시아 #lang en #pubdate 2021-03-25T13:52:08 #centerchapter 1 #seriesname 알려지지 않은 혁명 1917-1920 #seriesnumber 1권 ** 볼린(Voline, 1882~1945) by Rudolf Rocker 브세볼로드 미하일로비치 아이헨바움(Vsevolod Mikhailovich Eichenbaum)은 1882년 8월 11일 러시아 제국의 보로네츠 지구에서 태어났다. 그는 러시아어로 쓰인 시를 담은 작은 책자 하나만을 그의 본명으로 펴냈고, 다른 많은 문건, 에세이는 그의 필명인 볼린(Voline)으로 작성하였다. 그의 부모는 의사였고, 그들의 아이들을 교육하기 위하여 프랑스인, 독일인 가정교사를 고용할 수 있을 만큼 부유했다. 덕분에 브세볼로드와 그의 형제 보리스(Boris)는 어려서부터 두 언어에 익숙해졌다. 볼린은 프랑스어와 독일어를 모국어인 러시아어만큼 유창하게 구사할 수 있었다. 그의 첫 번째 대중교육은 보로네츠의 한 대학에서 이루어졌다. 그곳에서의 교육을 마친 후, 그는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법학을 공부했다. 하지만 이 미래에 대한 준비는 당시 러시아에서 자라나고 있던 중대한 상황에 따라 달라질 수밖에 없었다. 볼린은 19세에 혁명적 사상을 접했고, 1901년부터 노동운동에서 그 역량을 발휘하였다. 1905년, 러시아 제국은 위대한 혁명에 휩싸였고, 로마노프 제정帝政을 거의 무너트렸다. 이 때, 볼린은 사회혁명당에 입당하여 이 반란에서 중요한 역할을 맡았다. 반란이 유혈진압 된 후 그는 다른 활동가들처럼 체포되었다. 1907년 차르 정권은 그를 추방하였다. 하지만 그곳에서 그는 운이 좋게도 탈출하였고, 프랑스로 망명할 수 있었다. 파리에서 볼린은 여러 사회주의 정파의 이론을 학습하고, 이를 평가하며, 사회적 문제를 일반론적으로 바라볼 수 있었다. 그는 프랑스 무정부주의자의 대변인이었던 세바스티앙 포르(Sébastien Faure)와 같은 자유주의자들과 관계를 맺었다. 그리고 그는 파리에서 작은 러시아 아나키스트 서클에 가입하였다. 이러한 영향 속에서 볼린의 정치적 · 사회적 관점은 바뀌어갔고, 1911년 사회혁명당을 탈당하고 아나키즘 운동에 합류하였다. 1913년, 유럽에 전운이 감돌자 그는 국제 반전 행동 협의회의 일원이 되었다. 이 활동은 프랑스 정권을 화나게 하였고, 1915년 전선이 대륙 전역으로 확대되었을 때 비비아니-밀레랑(Viviani-Millerand) 정부는 전쟁 기간 동안 볼린을 강제수용소로 보내려고 하였다. 프랑스 동지들의 도움으로 그는 보르도를 떠나 미국행 화물선에 탈 수 있었다. 뉴욕에서 볼린은 미-캐나다 러시아 노동자 노동조합에 가입하였다. 이 단체는 10,000명의 조합원이 가입되어있었고, 당시 프랑스의 Confédération générale du travail(CGT)와 이념을 공유하고 있었다. 그는 활동 영역을 넓힐 수 있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그는 〈노동자의 소리〉라는 기관지의 편집부에서 일하게 되었다. 그러나 1917년 러시아혁명 이후, 노동자의 소리는 미국을 떠나 페트로그라드로 옮기기로 결정하였다. 그곳에 도착해서 그들은 이후에 조직된 아나코 생디칼리스트 선전노동자 노동조합의 협조를 얻을 수 있었다. 〈노동자의 소리〉를 러시아에서 편찬하는 것은 쉽게 이루어졌다. 볼린은 이 조합에 가입했고, 편집자 중 하나로 선출되었다. 최초의 몇 달 동안 신문은 주간으로 편찬되었지만, 1917년 10월 이후 일간이 되었다. 그러는 동안 모스크바의 볼셰비키 정부는 브레스트-리토프스크 평화조약을 체결하였고, 이를 통하여 우크라이나 전역은 독일과 오스트리아의 점령군에게 넘겨졌다. 볼린은 페트로그라드를 떠나 우크라이나의 외국 침략자 · 러시아 부역자와 맞서 싸우기 위한 자유주의 파르티잔에 가담했다. 이후 수개월 동안 러시아는 상대적으로 자유를 누렸고, 볼셰비키 외의 사회운동 역시 그 사상을 독자적 출판물과 집회를 통해서 외칠 수 있었다. 때문에 볼린은 여러 영역에서 바삐 활동해야 했다. 그는 소비에트 교육계몽부에서 일했다. 1918년 가을, 그는 나밧(Nabat)이라고 불릴 우크라이나 아나키스트 협의회 창설에 도움을 주었다. 나밧의 주된 조직이 있던 쿠르스크 외에도, 그들은 같은 이름으로 우크라이나 전역에서 지역신문을 펴냈다. 볼린은 나밧 사무국의 일원이 되었고 기관지의 편집국 일도 맡았다. 그리고 쿠르스크에서 열린 총회는 그에게 원칙에 대한 변증법적 선언을 편찬하도록 하였고, 이 선언은 러시아의 모든 자유주의적 사회주의 계파가 받아들여 공동투쟁을 하는 동력이 되었다. 하지만 나밧의 미래에 대한 계획은 1919년 봄에 무산되었다. 소비에트 정권은 아나키스트 신문을 억압하고 활동가들을 일제 검거하는 등 탄압을 시작하였다. 이 때 볼린은 마흐노(Nestor Ivanovych Makhno)의 혁명군에 입대하였다. 마흐노의 군대에서 그는 교육부의 장을 맡았다. 그는 교육을 통해서 인민을 계몽하고, 토지의 공동소유 · 지방자치 · 연방적 연대를 바탕으로 한 새로운 사회질서를 준비하고자 했다. 1919년 12월, 혁명군 사령부는 그를 크리보이로그 지구로 보내어 헤트만 페틀류라(Hetman Petlura)의 위험한 선동에 대항하도록 하였다. 하지만 그곳에 가는 동안 그는 장티푸스에 걸렸고, 한 농부의 집에 머물러야만 했다. 그러는 동안 소비에트 정권과 마흐노의 파르티잔 사이에 갈등이 일어났다. 이로 인해 볼린은 모스크바 정부의 군대에 의해 체포되었고, 감옥을 옮겨 다니며 수감되었다. 트로츠키(Leon Trotsky)는 볼린의 사형을 명령했고, 볼린 자신에 따르면 단순한 우연에 의하여 죽음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었다. 1920년 3월, 그는 모스크바 감옥으로 이감되어 10월까지 수감되었고, 소련과 마흐노군 사이 평화협정의 결과로 석방되었다. 볼린은 카르코프로 돌아가 이전의 활동을 계속하였고, 레닌 정권과 마흐노군 사이의 교섭에 참여하기도 했다. 하지만 볼셰비키는 이 협정을 위반하였고, 11월에 볼린과 그 동지들은 다시 체포되어 모스크바의 타강카Taganka 감옥에 수감되었다. 그들에게는 자유주의적 시각을 제외한 어떠한 혐의도 없었다. 하지만 상황의 급격한 변화에 따라 그들이 다른 수천 명처럼 숙청당할 것이라는 데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었다. 1921년 여름, 국제 적색 노동조합 총회가 모스크바에서 열렸다. 회의에는 이 국제적 조직과의 연계를 고민하고 있는 스페인, 프랑스 외 각국의 아나코 생디칼리스트 단체도 참여하였다. 그들이 도착할 때 쯤, 타강카 감옥의 아나키스트들은 10일 이상 지속된 단식투쟁에 돌입하였고, 정권은 왜 그들이 수감되었는지를 공개할 수밖에 없었다. 참가자들은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듣고는 격렬하게 항의하였고, 러시아 동지들의 석방을 요구하였다. 하지만 러시아 정부는 이미 단식투쟁자들을 국외 추방하는 조건 하에 석방하기로 결정한 이후였다. 이는 정치범들이 소위 프롤레타리아의 붉은 조국"으로부터 추방된 첫 번째 사례가 되었다. 그리고 소비에트 정부는 뻔뻔하게도 이 희생자들에게 체코슬로바키아 전쟁 포로의 여권을 제공하였다. 추방된 이들이 독일의 스테틴Stettin 항에 도착했을 때, 그들은 항구 관리에게 본명을 제시하고 볼셰비키가 준 여권은 그들의 것이 아니라고 밝혔다. 다행스럽게도 당시 독일은 혁명적 상황에 놓여있었고, 다른 때라면 불가능했을 일들이 가능했다. 항구의 책임자는 그들의 상황에 공감하고, 그들 중 두 명을 베를린으로 보내, 그들을 책임질 수 있는 우호적 단체를 찾아볼 수 있게 하였다. 이 둘이 베를린에 도착했을 때, 독일 자유 노동조합의 위원장이었던 프리츠 카터(Fritz Kater)는 그들과 함께 경찰청장에게 갔고, 필요한 서류를 구비하여 모두가 베를린에 올 수 있도록 하였다. 그들은 베를린에 1921년 말에 도착했다. 이 정도 규모의 사람들에게 일자리를 제공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지만, 독일 동지들은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다했다. 특히 전간기戰間 期 독일에서 주거 문제가 심각했던 만큼, 이 러시아인들의 집을 찾기는 무엇보다 어려운 일이었다. 그 중에서 가장 힘든 일은 볼린의 일곱 가족이 함께 살 수 있는 집을 구하는 것이었다. 조합이 찾을 수 있는 유일한 주거공간이라고는 다락방뿐이었다. 이 때 나는 볼린과 그의 동지들을 처음 만났다. 그는 41세밖에 되지 않았지만 더 나이 들어 보였다. 그의 머리칼과 수염은 거의 하얗게 새어있었다. 하지만 그의 열정적인 몸짓과 민첩한 움직임은 이 첫인상을 금세 바꿔놓았다. 그는 지성적이고 영리했으며 부드러운 태도를 지니고 있었다. 그는 사려 깊고 예의바르게 행동했으며, 외적인 조건과 개인적 고난을 신경 쓰지 않았다. 그의 주변 환경은 집중에 도움이 되는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그는 그의 가족들이 자고, 먹고, 일상을 영위하는 공간에서조차 집필을 이어나갔다. 사실 볼린은 베를린에서 많은 일을 했다. 그는 독일어로 된 80페이지짜리 소비에트 러시아에서의 아나키스트 숙청 팸플릿을 써냈다. 그리고 이 팸플릿은 러시아에서 벌어지는 일에 대한 첫 번째 외부 기록이 되었다. 또한 그는 페트르 아류시노프(Peter Andreyevich Arshinov)의 『마흐노주의 운동의 역사(History of the Makhnovist Movement, 1918-1921)』를 번역하였고, 〈아나키스트 노동자(The Anarchist Worker)〉라는 러시아어 잡지를 편집했다. 그 외에도 그는 강연과 집필을 계속하며 독일 자유주의 운동을 위해 많은 일을 했다. 볼린은 2년 동안 베를린에 있었다. 그는 세바스티앙 포르로부터 파리에서 함께 지내자는 초대를 받았다. 포르는 아나키즘 백과사전의 출판을 준비하는 중이었고, 외국어에 능숙한 사람이 그것을 지속적으로 도와줄 필요를 느꼈다. 볼린은 이를 통해 진일보한 활동을 할 수 있었다. 그는 백과사전에 다양한 글들을 썼다. 또한 그는 CNT 기관지 〈반-파시스트 에스파냐(Anti-facsist Espana)〉의 편집자가 되어달라는 요청도 받았다. 하지만 그는 프랑스에서 독일에서보다는 경제적으로 풍족해졌지만, 불운 또한 닥쳐왔다. 그 중 최악은 그의 부인이 사망한 것이었다. 사별 후 얼마 되지 않았을 때, 그는 파리를 떠나 님Nîmes으로 갔고, 다시 마르세유로 갔다. 그곳에서 그는 제2차 세계대전을 맞이했다. 나치가 프랑스를 침공했을 때 그는 더더욱 위험에 처했다. 그는 은신처를 옮겨 다니면서 지속되는 비극과 고통에 놓여야만 했다. 전쟁이 끝났을 때, 그는 파리에 돌아왔지만, 바로 요네씨병(Jhone's disease, para-tuberculosis)으로 입원하게 되었다. 그곳에서 그는 숨을 거뒀고, 페르라세즈Père Lachaise의 오래된 공동묘지에 묻혔다. 그의 옛 친구들은 수많은 고통이 있었지만 더 나은 세상을 위하고 자유와 사회정의를 위해 싸우는 투사로 남은, 불굴의 의지를 가진 동지를 추모했다. ** 서론 : 필수적인 사전 정보 1. "러시아 혁명"은 세 가지를 의미한다. 전반적인 혁명운동(1825년 12월당의 반란부터 현재까지), 1905년-1917년의 두 봉기, 아니면 1917년의 대폭발이 그것이다. 이 글에서 "러시아 혁명"은 첫 번째 의미로 사용된다. 이렇게 해야만 독자가 현재 소련의 상황에 대하여 전체적으로 이해할 수 있기 때문이다. 1. 상대적으로 온전하게 러시아 혁명의 역사를 보기 위해서는 한 질 이상의 책이 필요하다. 이는 이후 역사가들이 장기 프로젝트로 가져가야 한다. 이 책에서 우리는 보다 제한적인 목적만을 다루고자 한다. 그 목적은 (a)러시아에서의 운동을 총체적으로 바라보게 한다, (b) 외국에서는 잘 알려지지 않은 핵심적 요소들을 강조한다, (c) 특정 영역에 대한 평가와 결론이 가능하도록 한다, 의 세 가지가 될 것이다. 작업이 진행되면서 더욱 광범위하고 세밀해졌다. 1905년과 1917년의 두 봉기를 다루는 부분에서 독자들은 지금껏 알려지지 않았고, 출판되지 않은 세부사항들을 볼 수 있을 것이다. 1. 이 글을 읽는 동안 하나의 문제의식을 가져야 한다. 러시아의 전반적인 발전은 서유럽의 그것과 다르다. 정확하게는, 러시아 혁명은 러시아의 역사에 대한 완전한 학습과 함께 사유되어야 한다. 하지만 이것은 우리의 작업이 가지는 한계를 아득히 뛰어넘는다. 이 상황을 해결하기 위하여 우리는 필요하다고 보일 때마다 독자에게 역사적 정보를 제공하고자 한다. ** 도입 모든 혁명은 - 다양한 성향을 지닌, 다양한 세대의, 다양한 저자들이 연구한 것이라 하더라도 - 오랫동안 본질적으로 알려지지 않은 것으로 남는다. 수 세기가 지난 후라 할지라도 가끔씩 옛 반란에 대한 새로운 사실과 출간되지 않은 문건들이 발견되곤 한다. 이러한 발견은 우리가 가지고 있던 지식을 흐트러트리고, 반란에 대하여 우리가 모든 것을 완전히 알고 있다는 환상을 부순다. 크로포트킨(Pyotr Alexeyevich Kropotkin)과 조레스(Jean Jaurès)가 새로운 문건을 발견하기 전까지, 프랑스 대혁명에 대한 저작들이 얼마나 많았는가? 그리고 조레스는 대혁명에 대한 광범위한 사료들을 아직 건드리지도 못했다고 하지 않았는가? 일반적으로 혁명을 연구하는 방식은 알려져 있지 않다. 나아가 경험이 많고 양심적인 집필가들 마저 오류와 부주의를 범하게 되기에 독자들은 이 주제에 대하여 명확하게 알 방법이 없다. 이들은 펄펄 끓는 "혁명의 용광로" 안에서 벌어지는 충격적인 사실과 현상을 꼼꼼하게 분석하고 검증하는 데 수고를 다한다. 하지만 그들은 혁명의 시간 중에 "용광로" 바깥에서 조용하게 발생하여 온 사회적 진보에 대해서는 무시하곤 한다. 최선의 경우에도 그들은 이 진보를 지나가는 몇 마디로 요약하고, 모호하고 선언적인 언어만으로 묘사하며, 편향되거나 오류에 가득한 해석을 내어놓고는 한다. 그리고 이 숨겨져 있지만 중요한 사실들을 볼 때야말로 그 시기에 벌어진 일을 밝혀낼 수 있다. 또한, 혁명기의 현상 - 경제적 · 사회적 · 심리적 - 을 과학적으로 분석하고, 정확하게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를 설명하는 방법론은 여전히 미숙하다. 이것이 끝이 아니다. 혁명기의 지독한 역사적 소용돌이 속에서는 순수한 "르포"조차 묘사에 있어 공백을 만들어낼 수밖에 없다. 많은 사실은 아마도 영원히 밝혀지지 않을 것이다. 혁명기를 살아가는 이들은 어떠한 방향으로든 이 폭풍에 휩쓸리기 때문에 그들이 보고, 생각하고, 경험한 것을 미래세대를 위하여 기록할 경황조차 없다. 마지막으로, 내가 가장 강조하고 싶은 이유는, 혁명기에는 사람들이나 심지어 역사가들조차 그들의 주장, 도그마, 당, 계급을 뒷받침하는 부분들만을 찾아 헤맨다는 것이다. 모든 주체들은 그들의 이론에 맞지 않는 사실들을 숨기고 폐기한다. 각각의 혁명가들 각자의 이론에 따라 나뉘어 상대의 주장을 배척하고 왜곡한다. 진지하지조차 않은 수많은 서적들은 말할 필요조차 없다. 그렇다면 누가 참되고 유일한 진실을 발견할 수 있는가? 아무도 할 수 없다. 아니, 실질적으로 아무도 할 수 없다. 그렇기에 혁명이라는 주제는 이를 기록한 책만큼 다양한 설명이 존재하고, 실제 혁명에 대한 근본적 진실은 알려지지 않는다는 것이 놀라운 일은 아니다. 하지만 앞으로 올 또 다른 반란의 씨앗을 품고 있다는 것이 혁명의 숨겨진 부분이다. 의미 있게 살고 싶은 사람이거나 사건을 완전히 이해하고 싶은 사람이라면 이 미지의 영역을 살펴야만 한다. 그리고 작가로서 나의 의무는 이를 돕는 것이 될 것이다. 이 글에서 "미지의 혁명"은 러시아 혁명이다. 정치인과 어용작가들에 의해 다루어진 러시아 혁명이 아니라 무시되고, 의도적으로 숨겨져 왔으며, 심지어 왜곡되어 알려진 러시아 혁명이다. 러시아 혁명에 관한 서적을 훑어보라. 아직까지 이 책들은 편향된 개인에 의해, 교조적 · 정치적 · 심지어 개인적 관점으로 쓰였다. 작가가 백군파인지 적군파인지, 민주주의자인지, 사회주의자인지, 스탈린주의자인지, 트로츠키주의자인지에 따라 서로 다른 모습을 지닌다. 진실은 화자의 의도에 따라 배치된다. 진실을 찾는 것은 실패할 수밖에 없다. 작가들은 중요하지만 침묵하는 그 사실이 그들의 이념에 배치되거나, 관심이 없거나 혹은 불편하면 무시하여 왔다. 1789년의 혁명에서부터 1917년의 혁명까지, 근본적인 문제는 동일하다. 압제에 반대하고, 자유의 숨결에 자극받고, 해방을 주목적으로 하였던 이 혁명들은 어쩌다가 새로운 독재를 낳고, 새로운 지배계급을 만들고, 혁명에 참여한 대중을 새로운 노예제에 빠트렸는가? 혁명이 이러한 비극적 결말로 끝나지 않으려면 무엇이 필요한가? 이러한 결말이 역사적으로 불가결한 것인가, 아니면 몇몇 요인과 오류와 실패로부터 비롯되었기에 회피 가능한 것인가? 만약 후자가 옳다면, 앞으로 올 혁명에서 이 위험 요인들을 제거하는 방법은 무엇일까? 이를 방지하거나 극복하는 것은 가능한 일일까? 필자의 견해로는, 알려지지 않은 — 혹은 지속적으로 배척되어온 — 요소야말로 이 문제의 열쇠이자 그 해결의 대체 불가능한 부분을 제공한다. 그리고 필자는 이 책에서 부인 불가능한 사실들을 제공함으로써 그 견해를 확고하게 하고자 한다. 필자는 1905년과 1917년 러시아 혁명에 활발하게 참여하였다. 그리고 그는 객관적으로 사실을 검증하고자 한다. 러시아 혁명에 대한 솔직한 탐구와 전반적 분석은 필자의 이념적 위치에 근거하고 있다. 1908년부터 필자는 어떠한 정당에도 소속되어 있지 않았다. 하지만 필자의 개인적 신념은 자유 지상주의적 관점에 근거하고 있다. 그렇기에 필자는 아나키스트로서, 러시아 혁명을 객관적으로 바라보는 사치를 누릴 수 있다. 필자는 어떠한 권력에도, 높은 지위에도, 특권에도, 어떠한 독트린의 승리에도 관심이 없다. 필자는 그저 진실을 추구한다. 필자의 열정과 유일한 야망은 1917년의 사건들을 백일하에 드러내고, 이를 통해 올바르고 유용한 결론을 이끌어내는 것이다. 다른 모든 혁명과 마찬가지로, 러시아 혁명은 알려지지 않고, 나아가 예측도 되지 않는 사실들을 포함하고 있다. 이 연구가 언젠가 러시아 혁명을 연구하는 이들이 진실 되고 온전히 독립적인 연구를 만드는 데에 도움이 되기를 바란다. ** 최초의 수확(1825-1905) *** 19세기 초의 러시아; 혁명의 탄생 다른 유럽 국가들과 비교했을 때 러시아가 정치적 · 경제적 · 사회적 · 문화적 후진적인 요인은 다음과 같다. 나라의 거대한 크기, 침략자들에게 먹잇감이 되기 좋을 정도로 낮은 인구밀도, 몽골에 의한 2세기 이상의 지배, 계속되는 전쟁, 다양한 재해, 그리고 다른 불운한 요인들. 정치적으로 19세기 초의 러시아는 (“차르”라 자칭하는) 절대군주가 거대한 토지, 군사 귀족, 강력한 관료제, 광범위하고 광신적인 성직자, 그리고 7,500만 명의 원시적이고 무지하며 차르 아래 복종하는 농민을 기반으로 지배하고 있었다. 경제적으로 러시아는 고도로 성장한 몇몇 도시(상트페테르부르크와 모스크바라는 두 수도와 남부의 도시들)을 제외하고는 농업 봉건제 단계에 머물렀다. 상업과 공업은 침체되어 있었다. 이 나라의 경제적 기반은 농업으로, 인구의 95%가 그에 종사하고 있었다. 토지는 직접 생산자인 농민이 아니라 국가나 대지주인 “포메슈체키(помещик, pomeshchik)”의 소유였다. 농민들은 법적으로 땅과 그 소유주에게 귀속된 농노였다. 지주들은 그들의 선조들이 군사적, 정치적 공헌으로 봉해진 봉지를 세습하여 소유하고 있었다. 이 봉건귀족들은 그들의 농노의 생사여탈권을 가지고 있었다. 이들은 농노들이 노예처럼 일하게 할 뿐 아니라 농노에 대한 매매, 처벌, 처형까지도 할 수 있었다. 7천5백만 명의 농노 - 노예는 제정 러시아의 경제적 기반이었다. 이러한 사회의 구조를 말하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하다. 제일 위에는 절대적 주군인 차르와 그의 친족, 그에게 봉사하는 참사회, 고위 귀족, 군사 계급, 고위 성직자가 있었다. 그 밑에는 사회적 생활, 권리, 자유에 대한 개념조차 박탈당한 지방의 농노와 도시 빈민이라는 노예들만이 있었다. 이 둘 사이에는 상인, 관료, 공무원, 예술가와 같은 중간 계급이 있었지만, 색도 없고 중요하지도 않았다. 제정 러시아 사회의 문화적 수준이 높지 않았던 것은 자명하다. 특히 이 시기에는 이미 교육받지 못하고 가난에 찌든 민중과 수준 높은 교육을 받은 특권 계급 사이에 놀라울 정도의 차이가 발생하였다. 이 차이에 대해서는 추후에 논하도록 하겠다. 대중의 농노화는 제정 러시아의 질병과도 같았다. 몇몇 고귀한 사람들은 18세기 말부터 이미 이 가증스러운 제도에 대항하여 왔다. 그리고 그들은 이 자비로운 행동에 대하여 대가를 치러야만 했다. 한편 주인에 대한 농민들의 반란은 점점 빈도가 높아져갔다. 지방에서의 개별적인 반란(너무 심하게 행동하는 지주들에 대항하는)을 제쳐놓고라도 농민 대중들은 두 개의 특기할만한 반란(17세기의 라진[Stenka Razin, Stepan Timofeyevich Razin] 반란과 18세기의 푸가초프[Yemelyan Ivanovich Pugachev] 반란[Pugachev's Rebellion])을 일으켰고, 이 반란들은 실패하였지만 차르의 정부에 지대한 문제가 되었고, 거의 체제 전복에 성공했다. 이 두 특징적인 운동들은 주로 그들이 직면한 적 - 토지를 소유한 귀족, 도시귀족, 그리고 부패한 행정부 - 를 향해 일어났다. 체제 전반을 전복하고 더 평등한 다른 체제를 수립한다는 일반이념은 존재하지 않았다. 배신과 폭력, 그리고 성직자와 다른 반동들의 도움으로 이 농민 반란을 “심리적으로” 까지 진압하는데 성공하였고 이와 같이 넓게 확산된 반란은 이후 긴 시간 동안 더 이상 없었다. 1825년 알렉산더 1세가 후계자 없이 죽고 그의 형제 콘스탄틴이 계승을 거부하여 다른 형제 니콜라이가 왕위를 계승하였을 때, 정권을 상대로 한 첫 번째 의식적인 혁명운동이 일어났다. 이 운동은 사회적으로는 농노제의 철폐를 이야기하였으며, 정치적으로는 공화국이나 입헌군주제의 수립을 목적으로 하였다. 이 운동은 피압제자로부터가 아니라 특권 계급 내부에서 일어났다. 정부가 왕위 계승에 몰두한 덕택에 이 음모주의자들은 그들이 오랜 기간 준비해오던 기획을 펼치기 시작했다.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터져 나온 이 반란에서 이들은 수도 주둔연대로부터 도움을 받았다.(이 운동의 지도부에는 제국군의 장교들도 포함되어있었다) 이 반란은 의회광장에서의 짧은 전투 이후 패배했다. 지방에서 계획 중이던 몇몇 반란들은 미연에 방지되었다. 이 반란은 새로운 차르인 니콜라이 1세에게 깊은 인상을 주었으며 그는 매우 세밀한 조사를 명했다. 조사관들은 이 운동에 참여하지 않고 단순히 공감하는 자들까지도 찾아내었다. 반란에 대한 진압은 “최종적”이자 “본보기”가 되어야 했기에 매우 잔혹하게 이루어졌다. 다섯 명의 주동자는 교수대에서 죽었고, 수백 명이 수감, 추방되고, 강제 노역에 처해졌다. 12월에 이 반란이 발발했기에 참여자들은 12월 혁명당원이라 불린다. 그들 거의 모두는 귀족이거나 다른 특권 계급 출신이었고, 전문 직업훈련이나 고등교육을 받았다. 열린 생각과 예민한 감수성을 가졌던 그들은 독단적이고 불공정한 정부, 무지, 가난, 노예제에 짓눌린 민중을 보면서 고통스러워했다. 그들은 18세기 운동가들의 저항들을 이어받아 행동에 옮겼다. 그들을 추동한 주요한 요인은 1812년 전쟁 이후 목격한 프랑스였다. 프랑스에 다녀오면서 그들은 유럽의 높은 수준의 문명과 상대적으로 야만적인 러시아 민중의 삶을 비교할 수 있었다. 러시아에 돌아와 그들은 퇴행적인 민중을 억압하는 정치적 · 사회적 체제에 맞서 투쟁하기로 결의하였다. 그들은 많은 교육받은 지식계급을 조직했다. 이 운동의 지도자 중 한명이었던 페스텔(Pavel Pestel)은 다소 모호한 수준의 사회주의적 이상을 이 계획에 결합시키기도 하였다. 저명한 시인인 푸시킨(Alexander Pushkin) 역시 이 운동에 공감하였으나 참여하지는 않았다. 이 반란을 진압하자마자 두려움에 떤 새로운 황제 니콜라스 1세는 전제적이고 관료적인 러시아의 공안 체제를 극단적으로 밀어붙였다. 압제자에 대항한 농민들의 반란과 "작은 하느님 차르"에 대한 맹목적인 숭배가 서로 모순되는 것이 아니었다는 것은 특기할만하다. 앞서 이야기하였듯 농민반란은 그들이 직면한적인 지주(포메슈체키), 귀족, 공무원, 경찰을 향하여 일어났다. 농민들은 그들이 당하는 압제의 보다 근본적인 원인을 차르 정부 - 귀족과 특권계급의 수호자이자 가장 첫 번째 특권을 가진 귀족인 차르가 대변하는 - 에서 찾지 않았다. 농민들에게 차르는 평범한 필멸자보다 위대하고 그들의 작은 이해관계와 취약함과는 거리가 멀며 제국의 위대한 운명을 이끄는 현신과 같았다. 권력자들, 관료들, 그리고 성직자들은 이 사고방식을 농민들에게 세뇌하기 위하여 최선을 다했다. 농민들은 이 신화를 받아들였고, 결국 이 신화는 흔들리지 않게 되었다. 그들은 차르는 신민들의 더 나은 삶을 원하지만 중간계급이 그들의 특권을 유지하기 위해 차르와 민중을 갈라놓고 차르가 신민들의 현실을 모르게 만들었다고 믿었다. (농민대중은 민중과 차르가 서로 만날 수만 있다면, 특권계급이 잘못된 길로 이끈 차르는 곧 진실을 볼 것이고 그의 잘못된 조언자들과 부정한 측근을 물리치시며 농민들의 고통을 해결해줄 것이라 믿었다. 차르는 농민들을 멍에로부터 풀어줄 것이고, 직접 일하는 사람에게 귀속될 좋은 땅을 줄 것이었다.) 따라서 가장 잔혹한 주인들에 저항할 때에도 농민들은 그들과 차르를 갈라놓는 벽이 무너지고 차르가 사회정의를 다시 세울 것을 기대하며 기다렸다. 종교적 신비주의는 이러한 대기와 고통과 심판의 시간을 받아들일 수 있도록 하는 기제였다. 그들은 원시적인 숙명주의에 따라 먼저 물러났다. 이러한 현상은 러시아 농민 대중의 큰 특징이었다. 이는 19세기에 불만이 고조되고 반란들이 점점 더 자주 일어나는 상황에서 오히려 더욱 강하게 표현되었다. 농민들은 인내를 잃었지만, 그들이 인내를 잃으면 잃을수록 오히려 더욱 그들의 “해방자”인 차르를 기다렸다. “차르 신화”는 19세기 러시아인의 삶에서 중심적인 특징이었다. 이를 고려하지 않으면 이후의 사건을 이해할 수 없다. 이 신화는 다른 방식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특정한 현상들을 설명한다. 이는 이미 서술한 러시아의 역설을 설명하는데 도움을 준다. 이 역설은 많은 유럽인들에게 충격을 주었으며, 1917년의 혁명 이전까지 사라지지 않았다. 한편에는 교육받고, 진보적이고, 인민의 자유와 행복을 원하고, 시대정신에 민감하며, 노동계급의 해방과 민주주의와 사회주의를 위해 투쟁하는 사람이 있는 반면 다른 한편에는 자기 해방을 위해 아무것도 하지 않고, 자신의 우상 아래 완강히 복종하며, 자신을 위해 희생한 다른 이를 이해하려고도 하지 않는 이들이 있다는 역설 말이다. 이들은 세상에 무관심하고, 진실에 눈뜨지 않고, 어떠한 목소리도 듣지 않으며 그저 초기의 기독교인들이 메시아를 기다린 것처럼 해방자 차르만을 기다렸다.[1] *** 압제, 폭력, 실패; 발전의 지속 니콜라이 1세의 통치는 1825년부터 1855년까지 계속되었다. 이 기간은 혁명적 관점으로는 아무것도 아니었다. 그럼에도 이 30년은 특정한 부분에서 중요성을 가진다. 데카브리스트의 난을 진압하며 제위를 계승한 니콜라이 1세는 러시아를 철권으로 통치하고자 하였고, 자유주의에 대한 모든 열망의 싹을 뿌리 뽑고자 했다. 그는 절대 권력을 한계까지 강화하였고 러시아를 억압적 관료국가로 만드는데 성공했다. 프랑스 혁명과 그에 뒤이은 유럽에서의 혁명운동은 니콜라이 1세에게 악몽과 같았다. 그는 혁명에 대하여 극단적인 사전 예방책을 도입하였다. 전 인민은 감시당했다. 관료와 경찰, 법관의 전횡에는 어떠한 제약도 가해지지 않았다. 독자성에 대한 어떠한 열망도, 경찰의 철권을 피하려는 어떠한 시도도 잔혹하게 제압당했다. 자연스럽게 어떠한 형태의 언론, 집회, 결사의 자유도 존재할 수 없었다. 검열은 그 어느 때보다 성행했다. 모든 “위법”은 가장 높은 형량으로 다루어졌다. 국제 정세와 함께, 1831년에 폴란드에서 일어난 반란은 러시아 제국의 군국화를 가속했다. 인민의 삶은 병영생활과 같았고, 규율을 회피하려는 모든 이에게 잔혹한 형벌이 가해졌다. 니콜라이 1세의 치세는 그 별명 사나운 자 니콜라이와도 같았다. 이 모든 수단에도 불구하고 - 혹은 이 수단들과 그 반인륜적 효과 덕분에 - 러시아 제국은 그 불안정성을 계속 드러냈다. 차르가 친위세력으로 여긴 영지귀족들은 농노들을 착취하고, 끔찍하게 대하면서도 어떠한 처벌도 받지 않았다. 농민들은 이에 분노하였다. 포메슈체키(지주)와 지방정부에 대한 반란은 위험한 수준까지 치달았다. 억압적 수단은 점점 더 효과를 잃어갔다. 관리들의 부패, 무능, 변덕은 참을 수 없는 단계까지 이르렀다. 차르는 “인민의 질서를 유지하기 위해” 관리들의 지지와 폭력을 필요로 하였기 때문에 어떤 것도 듣지 않고, 보지 않았다. 이러한 행각으로 고통 받던 이들의 분노는 더욱 커질 뿐이었다. 사회적 활력은 죽어갔다. 오직 멍청하고 불능인 공식적 절차만이 허용되었다. 이러한 상황은 전체 체계의 불가피한 붕괴를 초래한다. “채찍의 지배”는 겉보기에는 강해보였지만, 안으로는 썩어 들어가고 있었다. 거대한 제국은 이미 “진흙발의 거인”이었다. 점점 더 많은 대중들이 이러한 현상을 인지하기 시작했다. 이 유지 불가능한 체제에 대한 저항의 정신은 사회 전역에 번져나갔다. 이러한 조건 속에서 급격하고 중대한, 위대한 진보가 청년 지식계층 사이에서 시작되었다. 러시아의 토지는 거대하고, 러시아인들은 아이를 많이 낳는다. 그렇기에 러시아에서 청년들은 계급을 막론하고 상당수를 차지한다. 그들의 일반적 관점은 어떠하였는가? 청년 농민을 제외하고 보면, 우리는 교육받은 청년세대들이 진보적 사상을 선호하였음을 알 수 있다. 19세기 중반 러시아의 청년들은 농노제에 반대하였다. 차르 전제정은 그들에게 충격 그 자체였다. 검열은 서구 세계에 대한 학습을 막지 못했다. (오히려 금단의 과일이야말로 더 달콤한 법이다.) 이 학습은 청년들의 상상력을 자극했다. 자연과학과 유물론은 청년들에게 강한 인상을 남겼다. 이 시기 러시아 문학은 인본주의의 영향을 받아 꽃피었고 이는 청년들에게 강한 영향을 주었다. 같은 시기에, 농노의 노동력과 자유의 부재로는 시대의 경제적 요구에 더 이상 부응할 수 없었다. 이 모든 이유에 따라 지식인, 특히 청년지식인들은 니콜라이 1세의 지배가 끝날 때까지 점점 더 해방적으로 이념화되어갔다. 지식인들은 농노제와 전제정에 단호하게 반대하기 시작했다. 이 시기에 유명한 니힐리즘Nihilism 조류가 탄생했다. 또한 투르게네프(Ivan Turgenev)가 『아버지들과 아들들(Отцы и дети, Fathers and Sons)』에서 묘사한 보수적 “아버지”와 맹렬하게 진보적인 “아들”의 대립도 이 시기에 등장한다. “니힐리즘”이라는 단어에 대해 러시아 바깥에는 광범위하고 뿌리 깊은 오해가 있다. 이 단어는 75년 전 러시아 문학에서 비롯되었고, 그 라틴어 어원에 따라 번역되지 않은 채 다른 나라로 퍼져나갔다. 프랑스 등지에서 “니힐리즘”은 러시아에서 만들어지고 수많은 조직적 추종자를 거느린 혁명적 정치, 사회 원칙으로 받아들여지곤 한다. 사람들은 여전히 “니힐리스트 당”과 그 “니힐리스트” 당원에 대해 이야기한다. 이 중 어떠한 것도 정확한 사실이 아니다. “니힐리즘”이라는 단어는 19세기 중반의 소설가인 이반 투르게네프에 의해 러시아 문학과 언어에 추가되었다. 투르게네프는 그의 소설에서 이 단어를 사용하여 1850년대 말 러시아 청년 지식인 사이에 등장한 사상의 한 조류 - 원칙이 아닌 - 을 설명하였다. 이 단어는 금세 유행하게 되었다. 이 조류는 철학적이고 도덕적인 성격을 가지고 있었다. 그 영향권은 지식계층 바깥으로 퍼져나가지 않았다. 니힐리즘은 언제나 개인적이고 평화적인 태도를 견지했다. 그러하였기에 니힐리즘은 저항정신에 영향 받지 않았고, 오직 전 인류의 행복이라는 꿈을 추구했다. 이 조류로 인해 촉발된 운동은(그것을 운동이라 할 수 있다면) 문학과 관습의 영역을 벗어나지 않았다. 당대의 지배체계 아래에서 다른 형태의 운동은 불가능했다. 하지만 이 두 영역에서 니힐리즘은 행동의 원칙들을 도출해낼 수 있었다. 이 제약들 속에서 니힐리스트 운동은 러시아 청년들의 지적이고 도덕적인 발전을 이끌어내었고 이는 그들이 보다 광범위하고 급진적인 개념을 받아들이는 길을 닦았다. 이를테면 19세기 후반의 러시아에서는 교육받은 여성의 해방이 이루어졌다. 엄격하게 철학적이고 개인주의적인 성격에도 불구하고 니힐리즘의 조류와 그 인본주의적이고 자유로운 영혼은 이후 실질적이고 정치적이자 사회적인 혁명 운동을 일으킨 사회적 개념의 맹아를 포함하고 있었다. “니힐리즘”은 이후 서구 사상의 자극과 내적 · 외적요인으로 발생할 운동의 토양을 닦았다. 러시아 바깥에서는 “니힐리즘” 조류를 이후 당이나 조직이 주도한 물질적 목적을 갖춘 운동과 혼동하곤 한다. 하지만 니힐리즘은 그저 이 운동을 선도하였던 사상의 조류로 받아들이는 것이 적합하다. 철학적 개념으로서 니힐리즘은 유물론과 개인주의를 폭넓게 받아들였다. 뷔히너(Georg Büchner)의 유명한 저작 『힘과 질료(Kraft und Stoff)』는 러시아어로 번역되어 비밀리에 등사되었고, 수천 부가 배포되었다. 이 책은 러시아 청년 지식인의 성서가 되었다. 야콥 몰레스코트(Jacob Moleschott), 찰스 다윈(Charles Robert Darwin), 그리고 여러 유물론자와 자연과학자들의 저작은 영향력을 강하게 발휘했다. 유물론은 절대적 진리로 받아들여졌다. 유물론자들처럼 니힐리스트들 역시 종교에 대한, 순수이성과 논리적 근거에 벗어나는 모든 것, 물질적 현실을 벗어나는 모든 것, 실질적 효용이 없는 모든 것에 대한 전쟁을 치렀다. 즉, 모든 영적이고 감정적이며 관념적인 것들이 그들의 적이었다. 그들은 미학, 아름다움, 편안함, 영적 즐거움, 감정적 사랑, 패션, 쾌락 등을 경멸했다. 그들은 예술은 관념론의 표상이라 거부하기까지 했다. 그들의 위대한 사상가였던 피사레프(Pisarev Dmitrii Ivanovich)는 노동자와 예술가 사이의 유명한 대비를 쓴 적이 있다. 피사레프는 어떤 벽돌공이라도 라파엘로보다 더 소중하다고 말했다. 벽돌공은 유용한 물질을 생산하지만, 라파엘로의 그림은 아무 쓸모도 없기 때문이라는 것이었다. 그의 저작에서 피사레프는 위대한 시인 푸시킨을 격하하기 위해 유물론과 효용론의 이론을 열렬히 찬양했다. “자연은 사원이 아니라 연구실이며 인간은 그 안에서 노동한다.” 니힐리스트의 “끊임없는 전쟁”은 오직 글과 말로 진행되었다. 니힐리즘의 활동은 그 이상에 대한 조심스러운 선전물을 생산하는 것으로 제한되었다. 심지어 경찰과 검열관이 “외국의 이단”과 모든 사상을 억압하고 있는 이상 그 선전물을 배포하는 것조차도 어려운 일이었다. 니힐리즘의 외연은 일반적으로 수수하게 옷을 입고 거리낌 없이 행동하는 것으로 드러났다. 예를 들어 여성니힐리스트는 머리를 짧게 잘랐고, 안경을 씀으로써 아름다움과 겉치레에 대한 거부감을 드러내었으며, 패션을 부정하기 위해 허름한 옷을 입고 남자처럼 걸으며 담배를 피우는 것으로써 성 평등을 주장하고 관습을 경멸했다. 우스워 보일지라도 이것이 그 운동의 진지함을 격하할 수는 없다. 다른 형태의 운동이 불가능하다는 사실은 니힐리즘 운동을 설명하고 정당화한다. 니힐리즘의 핵심적 이론은 개인주의였다. 니힐리즘의 개인주의가 모든 제약, 의무, 장애, 사회적 전통, 가족, 관습, 도덕, 신앙, 인습을 절대적인 개인의 자유의 이름으로 부정한 것은 이 시기 러시아의 억압적 환경에 대한 자연스러운 반동이라 할 수 있다. 남성이건 여성이건, 모든 개인이 그 자주성과 사상의 자유를 침해하는 모든 것으로부터 스스로를 온전히 해방하는 것. 이것이야말로 니힐리즘의 기본적 이념이었다. 개인이 완전하게 자유로울 권리를 옹호하는 것 말이다. 이제 독자들이 왜 이 조류가 니힐리즘이라 불렸는지 이해할 것이라 믿는다. 이 용어는 가족, 사회, 종교, 전통과 같이 타인에게 신성하고 자연스러운 것 중 아무것도(라틴어로 nihil) 받아들이지 않는 이데올로기의 신봉자를 의미하는 것이다. “당신은 무엇을 인정합니까? 당신의 주변 환경 중 무엇을 승인하고, 그 중 어떤 것이 당신을 통제할 권리가 있습니까?”라는 질문을 받았을 때 “아무것도!”라고 답한다면 그가 바로 니힐리스트인 것이다. 전술하였듯 그 개인주의적이고 철학적인 성격(개인의 자유를 옹호한다고 하였지만 그것을 위하여 전제정에 저항하지는 않았다)에도 불구하고, 니힐리즘은 실질적이고 직접적인 장애물에 대한 물질적 투쟁이 이루어질 수 있는 토대를 마련하였다. 하지만 니힐리스트들이 그 투쟁을 감내한 것은 아니었다. 니힐리스트들은 “실제로 개인을 해방하기 위하여 무엇을 할 수 있는지” 물음을 던지지도 않았다. 그 이론은 최후의 순간까지도 순수하게 이념적인 논점과 도덕적인 성취의 영역에 머물렀다. 해방을 위한 직접행동을 고민하는 것은 그 다음 세대의 과제로 남았다. 그때가 되어서야 최초의 혁명적이고 사회주의적인 집단이 러시아에서 조직되었고, 행동의 때가 왔다. 하지만 이 집단은 이전 세대의 “니힐리즘”과는 전혀 무관하였고, 그 단어조차 배제되어 오직 1860-70년대의 지적운동에 대한 기억으로만 남았다. 외국인들이 “니힐리즘”이라는 단어를 볼셰비즘 이전의 러시아 혁명운동 전반을 묘사하기 위하여 사용하고 “니힐리스트 당”을 이야기하는 것은 러시아 혁명 운동사를 모르기에 가능한 일인 것이다. 니콜라이 1세의 터무니없이 반동적인 정권은 현실적 정세나 지식인의 소요를 인지하는 것을 거부했다. 그 대신 정권은 비밀 정치경찰(그 유명한 오흐라나[Охрана])와 경찰 특무반을 이용하여 이 운동을 파괴하면서 변화를 거부하였다. 정치적 처형은 진실로 고통이 되었다. 이 시기에 청년 도스토옙스키(Fyodor Mikhailovich Dostoevsky)는 전혀 무해한 학습 모임에 소속되었다는 이유로 처형될 뻔하였고, 러시아 최초의 비평가이자 출판가인 벨린스키(Vissarion Belinsky)는 그 이름조차 알리지 못하고 있었으며, 또 다른 출판가인 게르첸(Aleksandr Ivanovich Herzen)은 국외로 추방되었다. 바쿠닌과 같은 혁명가들은 말할 것도 없었다. 하지만 이러한 억압은 뿌리 깊은 곳에 원인을 두고 있는 동요를 진정시키지 못했다. 상황을 개선하는 것은 더욱 큰 실패로 돌아갔다. 차르가 해결책이랍시고 내놓은 것은 억압적인 관료기구를 강화하는 것이었다. 그 와중에 러시아제국은 크림전쟁에 끌려들어갔다. 재앙이었다. 전쟁 기간 중의 우여곡절은 체제가 파산하였음을, 제국의 약점이 무엇인가를 적나라하게 드러냈다. "진흙발"이 처음으로 드러났다.(물론 그 교훈이 유용하게 사용되는 일은 없었다.) 국가의 정치적이고 사회적인 상처들이 노출되었다. 니콜라이 1세는 전쟁에서 패하고 난 직후인 1855년 죽었다. 그는 체제의 파산을 명확히 인지했지만 그것과 대면할 수는 없었다. 일부는 니콜라이 1세가 스스로를 감금함으로써 자살한 것이라고 주장한다. 이러한 해석은 상당히 설득력이 있지만 증거는 없다. 이후의 사건을 독자가 더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조금 알려진 사실을 강조하고 가도록 하자. 이 모든 약점과 방해에도 불구하고 이 시기 동안 러시아는 유의미한 문화적, 기술적 진보를 이루었다 경제적 필요에 의하여 “국가” 산업이 태동하였고, 자연스럽게 노동계급이 탄생했다. 여러 도시에 대공장들이 세워졌다. 항구가 생겼다. 탄광, 철광, 금광이 가동하기 시작했다. 교통망이 확장되고 발전했다. 두 수도 상트페테르부르크와 모스크바를 잇는 최초의 특급 열차가 건설되었다. 두 도시 사이의 토양은 단단하지 않고, 늪지와 습지가 많았다. 이 철로구간은 건설에 적합하지 않았다. 두 도시의 거리는 약 400마일이었다. 경제적으로 합리적인 건축이라는 입장에서 보면 직선 루트는 거론할 여지조차 없었다. 하지만 니콜라이 1세는 이 건설에 개인적인 관심을 보였고, 공학자들에게 청사진을 제출할 것을 명했다. 공학자들은 이 상황에 편승하여 차르에게 복잡한 청사진을 제출했다. 니콜라이는 이를 이해했다. 그는 청사진을 간단히 바라보고, 이를 치운 뒤, 연필과 종이를 가져와, 두 점을 찍고, 그 점을 있는 직선을 그린 후, "두 점을 잇는 가장 짧은 선은 직선이다"라고 교시했다. 공학자들은 이를 집행할 수밖에 없었고, 집행했다. 참으로 가르강튀아적인 과업이었으며, 수천 노동자의 고난과 맞바꾸어 믿을 수 없이 싼 가격으로 이루어진 과업이었다. “니콜라예프스카야” 철도가 완성되었을 때, 이 철도는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철도 중 하나가 되었다. 405 마일의 거의 완벽한 직선 구간으로서 말이다. 여기에서 우리는 새로이 등장한 노동계급이 그들의 출신지인 농촌과 관계를 지속하고 있었으며, “바깥일”이 끝나면 돌아갈 곳으로 생각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강조하고자 한다. 나아가 전술한 바와 같이 농노들은 토지와 영주에게 귀속되어있었고 이를 영구히 떠나지 못했다. 공단에 취업하기 위해서는 지주와의 특별한 계약이 선행되어야 했다. 실질적인 도시노동자들 - 이 시점에서는 떠돌아다니는 장인 - 은 아주 적은 수에 불과했다. 그렇기에 이 시점에서 우리는 “프롤레타리아트”를 다룰 수 없다. 하지만 프롤레타리아트가 만들어지기 위한 추진력은 이미 존재했다. 안정적이고 정기적인 노동력에 대한 필요가 존재했고, 이는 농노해방을 주장하는 이유 중 하나가 되었다. 토지에 예속되지 않은 임금노동자, 실질적인 산업 프롤레타리아는, 두 세 세대가 지나면 러시아에 나타날 것이었다. 문화영역에서의 진보 역시 분명히 존재했다. 부유한 부모는 자식들이 교육받기를 원했다. 고등학교와 대학의 학생 수는 빠르게 증가했고, 정부는 중 · 고등 교육기관을 빠르게 만들 수밖에 없었다. 국가의 발전 뿐 아니라 경제적 · 기술적 수요 또한 교육을 요했다. 니콜라이 집권 말기에 러시아는 여섯 개의 대학을 가지고 있었고, 전문학교 또한 여럿 있었다. 이처럼 당시의 러시아가 모두 교육받지 못했고, 야만적이며, 미개하였다는 말은 거짓이다. 농노제 하의 농민 대중은 교육받지 못했고 “미개”했을 수 있다. 하지만 도시 거주자들은 서유럽의 문화적 성취를 부러워할 이유가 없었다. 청년 지식인의 경우, 어떠한 측면에서는 다른 유럽 국가의 청년들보다 더욱 진보한 모습을 보이기도 하였다. 노예화된 대중과 특권계층의 거대한 차이는 이미 논의한 바와 같았다. *** 개혁; 혁명의 지속 / "차르의 몰락”과 혁명의 몰락; 반동 러시아와 체제의 위기를 대면해야 했던 것은 니콜라이 1세의 아들이자 계승자인 알렉산드르 2세(Alexander II)였다. 일반적 불만, 급진적 지식계층의 압박, 농민 대중의 반란에 대한 두려움, 그리고 시대의 경제적 요구 등은 반동집단의 저항에도 불구하고 차르가 개혁노선을 취할 수밖에 없도록 하였다. 알렉산드르는 관료 시스템과 행정관의 독단을 중단하고 사법체계에 변화를 주기로 결정했다. 다른 무엇보다 그는 농노제의 문제에 맞서야 했다. 1860년부터 개역은 꼬리를 물고 빠르게 진행되었다. 가장 중요한 것은 농노제의 철폐(1861), 선출된 재판관이 포함된 순회재판소 설치(1864), 지방자치정부의 설치(1864) 등이었다. 지식계층을 포함한 모든 인민의 활력은 이제는 가능한 일들을 진행하는 데 돌려졌다. 자치구들은 세속적 교육을 하는 초등학교간의 광범위한 연결망을 만들었다. “자치정부의” 그리고 “도시의” 학교들은 당연하게도 정부의 감시와 통제 아래에 있었다. 종교교육은 의무였으며 “총대주교”는 중요한 역할을 했다. 학교들은 일정 수준의 자치를 누렸고, 지방정부들은 진보적 지식인들 사이에서 교사들을 채용했다. 위생환경과 교통망 개선 역시 상당히 많은 관심을 끌었다. 러시아는 조금 더 자유롭게 숨을 쉴 수 있었다. 하지만 이미 서구권에 비하여 뒤처진 상황에 비추어 개혁이 중요한 문제였음에도 불구하고 알렉산드르 2세의 개혁은 진보된 계층의 열망 및 국가의 물질적, 도덕적 필요에 비하여 턱없이 부족하고 불완전했다. 개혁의 효과를 담보하고 인민에게 실질적 자극을 주기 위해서는 언론의 자유, 집회와 결사의 권리 등 확고한 자유와 권리를 부여하는 개혁이 수반되어야 했다. 그러나 아무것도 변하지 않았다. 검열은 여전히 진지한 문제였다. 언론은 계속 입이 막혔고, 자유는 주어지지 않았다. 성장 중인 노동계급에게는 어떠한 권리도 없었다. 귀족, 지주, 부르주아지가 지배계급이 되었다. 무엇보다도 전제정은 온전하게 남아 있었다.(알렉산드르 2세가 개혁의 “뼈대”는 던져주면서도 이를 완수하지 못한 이유가 바로 체제 변화에 대한 두려움이었다. 따라서 그 개혁은 인구를 만족시키지 못했다.) 농노제 폐지의 진행 상황이야말로 이 상황의 진면목, 개혁의 가장 취약한 부분을 보여준다. 모든 현상변화에도 헛되이 고군분투하던 지주들은 (진보적 요소의 압박과 오랫동안 극적으로 맞서다가 결국 이 결정을 내린)차르의 고귀한 결정 앞에 허리를 숙여야 했다. 그러나 지주들은 이 개혁을 최소화하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 알렉산드르 2세 자신도 그의 “친애하는 귀족들”의 신성한 이익을 침해하고 싶지 않아 했다. 결국 지주들의 최선은 더욱 쉬운 일이었다. 차르가 개혁을 지시한 주된 이유는 다름 아닌 혁명에 대한 두려움이었다. 그는 농민들이 그의 의도를 인지하고 개혁에 대해 궁정에서 쏟아져 나오는 반대 의견을 인지하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그는 이번에야말로 그들의 인내심이 정말 막바지에 이르렀고 그들이 해방을 기대한다는 것과, 개혁이 연기된다면 뒤따를 동요가 거대하고 끔찍한 반란을 일으킬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개혁 반대자들과의 마지막 토론에서 차르는 잘 알려진 이 문장으로 그의 실제 감정을 토로한다. “아래로부터 그것이 받아들여질 때까지 기다리는 것보다 위에서부터 자유를 주는 것이 낫다.” 그러므로 그는 농노제 폐지라 일컫는 “자유”가 지주와 귀족들의 이익을 최대한 침해하기 위해 할 수 있는 모든 일을 했다. 시인 네크라소프(Nikolay Alexeyevich Nekrasov)는 낭랑한 시로 다음과 같이 읊었다. “쇠사슬이 마침내 끊어졌다. 그래, 부러졌다. 한쪽 끝이 영주를 쳤고, 다른 쪽 끝은 농민을 쳤다.” 분명히 농민들은 마침내 개인의 자유를 얻었다. 하지만 그들은 그것에 대해 많은 것을 지불해야했다. 그들은 매우 작은 땅뙈기를 받았다. (그들에게 적어도 배고픔으로 죽는 것을 막을 수 있을 만큼 구성된 큰 땅을 주지 않고서 그들을 “자유롭게” 하는 것은 분명히 불가능했다.) 게다가 그들은 오랜 기간 동안 국가에 세금을 내야했고 나아가 이전 지주들로부터 몰수한 토지에 대해 많은 수수료를 지불해야 했다. 7천 5백만 농민들이 분배받은 땅이 전체 농지의 3분의 1에 지나지 않았다는 점에 유의해야 한다. 또 다른 3분의 1은 국가에 의해 소유되었고, 나머지 3분의 1은 지주들의 손에 남아 있었다. 이 비율은 농민 대중에게 기근의 삶을 선고했다. 그들은 “포메슈체키”들의 자비만으로 삶을 유지해야 했다. 그의 모든 “개혁” 과정에서 알렉산드르 2세는 오직 즉각적인 재앙을 회피할 수 있는 한도에서 가능한 최소한의 자유를 허가하고자 노력했다. 그렇기에 이 “개혁”의 결함과 결핍은 1870년에 이미 체감할 수 있었다. 도시 노동자들은 늘어나는 착취에 대해 방비할 수단이 없었다. 언론의 자유와 집회 금지는 어떠한 비판도, 선전도, 사회적 행동도 사상의 순환도, 최종적으로 진보도 불가능하게 하였다. “인민人民”은 더 이상 전제정의 독단적 권력의 “신민臣民”이 아니었다. 농민 대중은 국가와 특권계급을 유지하기 위한 고된 노동으로 인해 전락하여 짐승인 채로 남아있었다. 청년 지식인들은 이 한심한 상황을 금방 알아차렸다. 이 시기에 서구 국가들은 이미 비교적 선진적인 정치 사회 체제를 갖추고 있었다는 것이 그들을 더욱 괴롭혔다. 1870년경 서유럽은 사회적 투쟁의 와중에 있었다; 사회주의는 강도 높은 선전을 시작했고 마르크스주의는 노동자 계층을 강력한 정당으로 조직하기 시작했다. 이전과 마찬가지로 당대 최고의 선전가들은 그 절차의 기교와 다양성을 이해할 만큼 교육도 받지 못했고 지성도 없던 검열관에게 계속 반항하고 이를 회피했다. 선전가들은 관습적인 문체로 쓰인 잡지 기사를 통해 사회주의 사상을 지식인들에 전달하는 데 성공했다. 이렇게 해서 그들은 젊은이들을 교육했고, 그들에게 외국의 정치사회적 사건과 사상의 변화에 대해 정기적으로 알렸다. 동시에 그들은 알렉산드르 2세의 소위 개혁의 이면, 진짜 동기, 위선, 그리고 그들의 단점들을 교묘하게 노출시켰다. 따라서 이 시기 러시아에서는 자연스럽게 지하조직이 형성되었다. 지하조직은 이 경멸스러운 체제에 대항하여 적극적으로 투쟁하고, 무엇보다도 노동계급의 정치적, 사회적 해방에 대한 생각을 발화하고자 하였다. 이들 집단은 숭고한 희생정신으로 “노동 대중을 계몽한다”는 임무에 자신을 바친 남녀 청년들로 구성되어 있었다. 이리하여 많은 수가 가정과 위안, 직업을 포기하고 대중을 계몽하기 위해 “민중 속으로(В Народ, v narod)” 가고자 하는 청년 지식인들의 방대한 운동이 형성되었다. 동시에 정권의 주요 수하에 대한 테러 활동이 시작되었다. 1860년에서 1870년 사이에 몇몇 고위 공무원들에 대한 암살 시도가 있었다. 또한 차르에 대한 몇 가지 성공적이지 못한 시도도 있었다. 그 운동은 실패로 끝났다. 거의 모든 선전원들이 경찰에 체포되었다(흔히 농민들이 그들을 고발했다). 그들은 투옥되거나, 추방되거나, 혹은 강제 노동형에 처해졌다.[2] 그 운동의 실질적인 결과는 0이었다. 차르가 민중 교육에 있어서 불가침의 장애물이라는 것은 점점 더 명백해졌다. 단 한 걸음만 더 나아가면, 이토록 큰 장애물이라면, 차르를 없애야 한다는 논리적 귀결에 이를 수 있었다. 차르 암살을 핵심 목표로 삼은 너덜너덜하고 절망적인 청년들이 이 단계를 밟았다. 다른 요인들도 이 결정을 이끌어냈다. 소위 “개혁”으로 국민을 속인 사람은 공개적으로 처벌받아야 했다. 그 속임수는 수많은 대중 앞에서 폭로되어야만 했다. 대중의 관심을 위해서는 극적이고 끔찍한 행동이 필요했다. 요컨대 차르를 제거한다는 것은 그 체제의 허약성과 취약성, 그리고 우연적이고 일시적인 성격을 사람들에게 보여주는 것이었다. “차르 신앙”은 따라서 한 번에, 완전히 살해되어야 했다. 이 단체의 일부 회원들은 더 나아가, 차르 암살은 일반적 발전의 맥락에서 혁명과 차르주의(Tsarism)의 몰락을 가져올 여정의 출발점이 될 수 있다고 주장했다. 스스로를 나로드나야 볼리아(Наро́дная во́ля, Narodnaya Volya[민중의 의지])라고 불렀던 이 단체는 세부적인 준비 끝에 이 프로젝트를 실행했다. 차르 알렉산드르 2세는 성에서 여행하던 중 살해되었다. 1881년 3월 1일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테러리스트들은 황실 마차에 두 개의 폭탄을 던졌다. 첫 번째는 마차를 파괴하고 두 번째는 치명상을 입혀 차르의 두 다리를 모두 제거했다. 그는 즉사했다. 대중은 그 행위를 이해하지 않았다. 농민들은 글을 읽지 않았다. (그들은 전혀 읽을 수 없었다.) 완전히 무시되고 모든 선전에서 배재된 그들은, 차르는 그들이 잘 살기를 바라지만 그의 선의가 귀족들에 의해 좌절되었다는 생각에 매료되어 있었다. 농민들은 귀족들이 차르를 암살하여 농노제 폐지에 대한 복수를 하고 그것을 회복할 희망을 가지고 있다고 비난했다.(농민들은 이 암살이 귀족의 저항이라는 증거를 찾아냈고, 이에 그들은 귀족의 음모를 비난했다.) 차르는 죽었지만, 그에 대한 신앙은 죽지 않았다.(독자들은 24년 뒤 역사가 이 신앙을 파괴하는 것을 볼 것이다.) 민중은 지식인들을 이해하지 못했고, 움직이지 않았다. 어용언론은 이 “저열한 범죄자”, “끔찍한 악당”, “머저리들”을 소리 높여 비난했다. 궁정의 혼란은 그리 오래가지 않았다. 차르의 장남인 젊은 후계자 알렉산드르가 곧바로 권력을 잡았다. 암살을 조직하고 실행한 나로드나야 볼리아 당의 지도자들은 빠르게 적발되어 체포되고 재판을 받은 뒤 처형되었다. 그중 한 명인 젊은 그리네비츠키(Ignacy Hryniewiecki) - 차르를 죽인 폭탄을 던진 바로 그 사람 - 은 그 폭발로 인해 스스로 치명상을 입고 그 자리에서 죽었다. 소피아 페로브스카야(Sophia Lvovna Perovskaya), 젤리아보프(Andrei Ivanovich Zhelyabov), 키발치히(Nikolai Ivanovich Kibalchich [그 폭탄을 만든 당의 유명한 기술자]), 미하일로프(Timofey Mikhailov)와 루사코프(Ivan Vasilyevich Rusakov)가 교수형에 처해졌다. 광범위하고 가혹한 박해와 억압 조치들은 이 당을 빠르게 빈사상태로 만들었다. 모든 것이 제자리로 돌아갔다. 암살의 영향을 많이 받은 신임 황제 알렉산드르 3세는 이제 겨우 폐기하였던 완전한 반동의 길로 돌아가고자 하였다. 그의 아버지의 완전히 불충분한 “개혁”은 그에게 과도하고, 불행하고, 위험해 보였다. 그는 그것들을 개탄스러운 실수라고 생각했다. 암살은 그들의 불충분함의 결과였다. 알렉산드르는 개혁을 더욱 진전시켜야한다는 것을 이해하기보다 오히려 그 개혁이 악의 원인이라고 보았다. 그리고 아버지의 살해를 틈타 가능한 모든 방법으로 ‘개혁’에 반대했다. 그는 개혁의 정신을 왜곡하고, 그 효과를 상쇄하고, 오랜 기간에 걸쳐 일련의 반동적 법령을 제정하여 개혁에 대한 장애물을 조성하기 시작했다. 관료적이고 억압적인 국가는 권리를 되찾았다. 모든 운동, 자유주의 사상의 모든 표현은 숨통이 막혔다. 차르는 농노제를 부활시킬 수는 없었다. 그러나 노동 대중들은 어쩌면 영원히 불분명한 신분을 가진 착취하기 좋고 어떠한 권리도 없는 상태로 남아 있어야 한다는 통보를 받았다. 문명화된 계층과 백성들 사이에 만들어졌던 작은 접촉은 다시 불가능해졌다. 상위 계층의 열망과 침울하고 사려 깊지 못한 국민의 삶의 열망이 봉합할 수 없이 벌어진 상태인 “러시아의 역설”은 여전했다. 모든 종류의 사회 활동은 다시 금지되었다. 알렉산드르 2세의 소심한 개혁으로 살아남은 것 마저 우스개로 전락했다. 이러한 조건하에서 혁명 활동의 부활은 불가피했다. 이것은 실제로 일어난 일이었다. 그러나 이 활동의 본질뿐 아니라 형태도 새로운 경제적 · 사회적 · 심리적 요인에 의해 완전히 변형되었다. *** 세기말; 맑스주의; 급격한 진보; 반동(1881-1900) 나로드나야 볼리아 당의 차르주의에 대한 폭력적인 투쟁이 실패한 후, 다른 사건들이 러시아 혁명 운동의 근본적인 변혁에 기여했다. 가장 중요한 것은 마르크스주의의 출현이었다. 알려진 바와 같이 마르크스주의는 사회적 투쟁에 대한 새로운 개념을 표현했다. 그것은 혁명적 행동의 구체적인 프로그램을 이끌어냈고, 서유럽에서는 사회민주당이라고 불리는 노동자 계급 정당에 대한 개념을 만들어 냈다. 모든 방해에도 불구하고, 라살레(Ferdinand Lassalle)가 정리한 사회주의 사상과 마르크스주의의 개념 및 업적은 러시아에 알려지고, 연구되고, 설교하고, 은밀하게 실천되었다. 합법적인 문학마저 탁월한 기술로 베일에 싸인 언어를 사용하여 사회주의를 다루었다. 잘 알려진 “대규모 저널”이 열정적으로 발행되었다. 그들의 기고자 중에는 그 시대의 최고의 언론인과 홍보인들이 있었는데, 그들은 정기적으로 사회 문제, 사회주의 독트린, 그리고 그것들을 실현할 수 있는 수단을 분석하였다. 이러한 출판물들이 그 나라의 문화생활에 갖는 중요성은 굉장했다. 어떤 지식인 가족도 이들을 읽지 않을 수 없었다. 도서관에서는 최신호를 얻기 위해 대기자 명단에 이름을 올려야만 했다. 한 세대 이상의 기간 동안 러시아인들은 이 저널들로부터 사회 교육을 받았고 여러 종류의 비밀 간행물을 읽음으로써 이 교육을 완성했다. 이리하여 오직 프롤레타리아트의 조직적인 행동에 바탕을 둔 마르크스주의 이데올로기는 초기 음모가들의 실망을 대신하는 희망이 되었다. 또 다른 중요한 사건은 산업과 기술의 급속한 발전이었는데 그 결과들은 모두 광범위했다. 철도망, 다른 교통수단, 광업, 석유 시추, 야금업, 섬유 및 기계 공구 산업 - 이 모든 생산적 활동은 큰 진척으로 발전하여 잃어버린 시간을 보충했다. 공업지대가 전국에서 발흥했다. 수많은 도시들은 새로운 공장들과 증가하는 노동계급 인구로 인하여 급속도로 변화했다 이러한 산업적 급변은 그들의 불충분한 땅을 포기하거나 겨울 동안에 추가적인 일을 찾아야 하던 많은 비참한 농민들로 구성된 노동력으로 운영되었다. 다른 곳과 마찬가지로 산업 발전은 무산 계급의 발전을 의미했다. 그리고 다른 곳과 마찬가지로 이 계급은 혁명 운동을 대표하는 계급이 되어갔다. 따라서 마르크스주의 사상의 확산과 마르크스주의자들이 의존했던 산업 프롤레타리아트의 성장이 새로운 상황을 결정짓는 기본 요소였다. 일반적으로 산업 발전과 전반적인 생활수준의 상승을 위해서는 교육을 받은 사람, 전문가, 기술자 및 숙련된 노동자들을 필요로 한다. 모든 유형의 학교들 - 국립, 공립, 그리고 사립 - 의 수는 도시와 지방에서 지속적으로 증가하였다. 대학, 특수 기술학교들과 다른 고급교육기관들, 초등학교, 전문 과정들이 모든 곳에 생겨났다. (1875년에 징집된 군인들의 79%가 문맹이었다. 1898년까지 이 수치는 55%로 떨어졌다) 이 모든 발전은 절대주의 정치 체제의 틀 밖에서 이루어졌고 심지어 그것에 반대해서도 일어났다. 그 정권은 점점 더 경직되고, 터무니없고, 눈에 거슬리는 시체들을 그 나라의 살아있는 몸 위에다 고집스럽게 붙들고 있었다. 결과적으로 잔인한 억압에도 불구하고 혁명적이고 사회주의적인 선전뿐만 아니라 공화주의 운동은 점점 더 널리 퍼졌다. 심지어 가장 낙후되고 가장 억압받는 존재였던 농민들조차도 빈곤과 비인간적인 착취로 인해 발생한 광범위한 동요에 의해 크게 촉진되었다. 이러한 동요는 “젬스트보스(Zemstvo)”에서 일했던 수많은 지식인들이 (당시 이 사람들은 “젬스키 라보트니키(zemski rabotnici)”, 즉 “젬스트보 노동자”로 알려졌고, 시골에 가족이 있던 노동자들, 계절적 노동자들, 그리고 농업 프롤레타리아에 의해 농민들에게 전해졌다. 정부는 이 선전에 대응할 수 없었다. 세기가 끝나갈 무렵, 두 개의 뚜렷한 세력은 화해할 수 없을 정도로 서로 대치했다. 하나는 차르의 친위세력이자 특권계급, 즉 귀족, 관료, 지주, 군사귀족, 고위 성직자와 신생 부르주아 계급으로 구성된 반동 세력이었다. 다른 하나는 1890년~1900년에 주로 학생들로 구성되었으나 도시와 산업 지역의 젊은 노동자들 또한 포섭하기 시작한 젊은 혁명 세력이었다. 1898년 마르크스주의 성향을 가진 혁명적 조류는 러시아 사회민주노동자당을 만들었다(“노동 해방단團[Gruppa Osvobozhdenie Truda, Emancipation of Labor Group]”이라고 불리는 최초의 사회민주적 집단은 1883년에 창설되었다). 분명히 대립하고 있는 이 두 세력 사이에는 제3의 세력이 서 있었는데, 주로 중산층 대표들과 일정한 수의 “특출난” 지식인 즉 대학교수, 변호사, 작가, 의사들로 구성되어 있었다. 조심스러운 자유주의 운동이었다. 은밀히 그리고 매우 신중하게 혁명 활동을 지원했음에도 불구하고, 이 사람들은 (알렉산더 2세의 통치 기간 동안처럼) 임박한 혁명의 위협 아래 절대주의 정권이 큰 양보를 해서 결국 헌정 체제의 수립으로 이어지기를 바라면서 개혁에 대한 더 큰 믿음을 가지고 있었다. 오직 농민 대중들만이 이 대립구도 바깥에 남아 있었다. 알렉산드르 3세는 1894년에 죽었다. 그의 자리는 로마노프 황가의 마지막 황제가 되는 니콜라이 2세(Nikolai II)가 차지했다. 막연한 차르 신앙에 따르면 새 차르는 자유주의자였다. 심지어 그는 “그의 신민”에게 차르의 절대 권력을 크게 제한하는 헌법을 부여하고 싶어 했다고 한다. 이것이 현실이기를 소망하면서, 한 자유주의적 “젬스트보스(시 의회)”는 젊은 차르에게 매우 소심하게 대표권을 요청하는 탄원서를 제출했다. 1895년 1월, 니콜라이 2세는 결혼식에서 귀족, 군, “젬스트보스”의 다양한 대표단을 맞이했다. 시 대표들은 새 주인이 축하를 받으면서도 갑자기 화가 치밀어 올라 발을 동동 구르고 신경질적으로 “젬스트보스”에게 “미친 꿈”을 영원히 포기하라고 외치며 요구한 사실에 놀랐다. 이러한 요구는 즉시 “젬스트보스”의 “지속적인” 태도에 대한 특정 “외부세력”에 대한 억압적인 조치로 나타났다. 이리하여 절대주의와 반동은 나라의 전반적인 발전을 비웃으면서 다시 한 번 자신들을 존재를 재확인시켰다. *** 20세기; 성급한 진보; 혁명적 전진; 결과(1900-1900) 우리가 방금 언급한 사건들과 특징들은 20세기 초에 더욱 뚜렷해졌다. 한편, 절대 권력은 사회의 열망을 인지하는 대신 가능한 모든 수단을 동원하여 스스로를 유지하고 모든 혁명운동은 물론 어떤 반대표현도 억압하는 길을 택하기로 했다. 니콜라이 2세의 정부가 대규모 반유대주의 선동에 을 통하여 주민의 불만을 다른 곳으로 돌린 것 역시 이 때였다. 반면, 러시아의 경제 발전은 가속되었다. 1900년부터 1905년까지 5년 동안 산업과 기술은 엄청난 도약을 이루었다. 석유 생산(바쿠 유전), 석탄(도네츠 탄광), 금속의 생산은 다른 공업국의 수준에 빠르게 이르고 있었다. 도로와 교통수단(철도, 자동차, 하천, 해양교통)이 확대되고 현대화되었다. 수천 명, 심지어 수만 명의 노동자를 고용하고 있는 대형 건설 공장이 대도시 외곽에 세워지거나 확장되었다. 산업지역 전체가 세워지거나 확장되었다. 예를 들어, 우리는 거대한 푸틸로프 공장, 광대한 네브스키 조선소, 큰 발틱 공장, 그리고 상트 페체르스부르크에 있는 다른 공장들을 나열할 수 있다. 콜피노, 추호보, 세스트로레치 등 수만 명의 노동자가 있는 산업적 수도들도 있고, 모스크바 근처의 이바노보보 - 보즈 - 네센스크의 산업지역, 그리고 하르코프, 에카테리노슬로라프 등 남부 러시아의 몇몇 중요한 공장들이 있다. 이러한 급속한 발전은 이해관계자 그룹 이외의 나라에서는 잘 알려져 있지 않았다. (오늘날까지도 볼셰비키 이전 러시아에는 산업이 거의 없었으며, 소련의 산업은 전적으로 볼셰비키 정부에 의해 창조되었다고 믿는 사람들이 많다.) 그럼에도 그 발전은 산업적인 관점뿐 아니라 사회적으로도 상당한 것이었다. 산업화는 무산계급 운동적 요소의 빠른 성장을 가져왔다. 당시의 통계에 따르면 1905년 러시아에는 약 300만 명의 노동자가 있었다. 동시에 러시아는 문화 문제에 있어서 급속한 발전을 이루었다. 성인의 교육도 빠르게 진행되고 있었다. 1905년 러시아에는 남성과 여성을 위한 약 30개의 고등교육 대학과 학교가 있었다. 거의 모든 학교들은 국가 재정에 의존했다(지자채의 개별 자금 지원을 받은 소수의 기관만 제외). 오래된 전통에 따라, 주로 알렉산드르 2세의 개혁의 결과에 따라, 대학의 법령은 상당히 자유분방했고 많은 내부 자치를 허용했다! 알렉산드르 3세와 니콜라이 2세는 이것들을 줄이려고 노력했다. 그러나 이런 종류의 모든 시도는 심각한 혼란을 유발했다. 때문에 정부는 마침내 이를 포기했다. 대학졸업생 가운데 특정 절차에 따라 대학과 고등전문학교 교수들이 선정됐다. 거의 모든 도시들, 심지어 중요하지 않은 도시들도 고등학교와 소년 소녀들을 위한 예비 학교를 가지고 있었다. 중등학교는 국가, 개인 또는 “젬스트보스”에 의해 설립되었다. 세 가지 경우 모두 국가가 교육 프로그램을 수립했으며, 그 교육과정은 거의 비슷했다. 신학은 의무 수강대상이었다 소수의 예외를 제외하면 중등학교의 교직원은 대학 사회로부터 모집되었다. 한 대학에 입학하여 졸업으로 이어지는 연구 프로그램은 8년 동안 지속되었다. 만약 준비가 된 학생들은 8년 의무교육 외에도 1년을 준비반에서 보낼 수 있었다. 도시와 농촌의 초등학교 수는 급격히 증가했다. 몇몇은 주에 의해 설립되었고 다른 것들은 자치단체와 “젬스트보스”에 의해 설립되었다. 모두 국가의 감시와 통제 하에 있었다. 초등교육은 무료였다. 그것은 강제적이지 않았다. 주 정부는 당연히 초등학교에 교리문답서를 제공했다. 초등학교를 졸업한 사람들은 중등학교 4년 동안 적어도 졸업장을 취득해야만 했다. 성인을 위한 저녁 강좌와 일부 잘 짜여진 “민중의 대학”이 모든 대도시에서 제 기능을 했다. 자치도시들과 특히 개인들은 이러한 기관들에 매우 열성적으로 헌신했다. 고등학교와 대학에서 노동자와 농민의 자녀는 드물었다. 교육비는 너무 비쌌다. 그럼에도 널리 퍼진 전설과는 달리 고등 교육과정 학교들은 노동자의 자녀나 농민의 자녀들 모두가 접근할 수 있었다. 대다수의 학생들은 진보적인 직업의 지식인 가족, 공무원, 사무직 노동자, 그리고 부르주아 계급 출신이었다. 지식인들이 최소한 진보적인 신념을 내세웠다는 사실은 경찰의 감시에도 불구하고 학교 교과과정 밖에서 상당히 진보적인 사상의 선전이 가능하게 만들었다. “민중의 대학” 강사와 초등학교 교사들은 혁명가 출신이 많았다. 보통 자유주의적 성향의 일부 장학사들은 그들을 용인했다. 그들은 어떻게 “일을 되게 만들” 수 있는지 알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당국은 이 선전을 막을 수 없었다. 학교교육과 대화 외에도 글을 통한 교육이 이루어졌다. 일반적으로 학자들에 의해 쓰이거나 위대한 작가들의 발췌문들로 구성된 엄청난 양의 인기 있는 팸플릿들이 시장에 나왔다. 이 팸플릿들은 모든 학문을 다루고 매우 진보적인 정신으로 정치와 사회 문제를 분석하였다. 이렇게 불어난 글의 홍수에 대해 공식적인 검열은 무력했다. 저자와 출판업자들은 당국의 경계를 속일 수 있는 수많은 방법을 발견했다. 지식인과 및 노동자 계층에서 비밀스럽지만 광범위하게 확산되던 혁명적이고 사회주의적인 문학을 더한다면 광범위한 교육운동이 1900년에서 1905년 사이의 기간을 특징짓는다는 것을 잘 알 수 있을 것이다. 이제 우리는 이에 뒤따르는 혁명 운동의 범위와 진보적 성격을 이해하는 데 필요한 특정한 세부사항을 제시할 수 있다. 우리는 이러한 정치적, 사회적 열망의 움직임이 주목할 만한 도덕적 발전에 의해 완성되었다는 것을 강조해야 한다. 젊은이들은 종교적, 국가적, 성적인 모든 편견으로부터 스스로를 해방시켰다. 어떤 면에서는 러시아 아방가르드 운동이 오랫동안 서구 국가들보다 더 발전하기도 했다. 인종과 국가의 평등, 남녀의 평등, 자유로운 결혼, 종교의 부정은 아방가르드 운동 내부에서는 일반적이었다. 실제로 이것들은 “니힐리스트” 시대부터 행해져 왔다. 모든 분야에서 러시아 작가들(벨린스키, 헤르젠 체르니솁스키, 도브롤루보프, 피사레프, 미하일로프스키)은 거대한 일을 해냈다. 그들은 여러 세대의 지식인들에게 차르정권이 부과하는 의무교육에 반하여 완전한 해방의 의미를 가르쳤다. 해방의 영혼은 러시아 청년들과 떼어놓을 수 없는 신성한 전통이 되었다. 그들은 공식적으로 제공되는 교육은 받았지만, 졸업장을 받는 순간 이로부터 도망갔다. “대학에 가지 마시오!”라고 우리 교구의 주교가 고등학교를 졸업하는 우리들의 졸업식에서 소리쳤다. “대학에 가지 마시오. 대학은 폭도들의 소굴이니…….(어디로 가길 원하셨을까?) 이 명예로우신 주교님은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알고 있었다. 거의 예외 없이 대학에 진학한 모든 젊은 남녀가 잠재적 혁명가가 된 것은 사실이었다. 국민 가운데 ‘학생’은 ‘반역’을 의미했다. 이 한때의 반란군들은 나이를 먹어가며 삶의 문제와 불행에 의해 깨지고, 그들의 첫 번째 신념을 잊어버리거나 종종 부정했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그들에게는 것은 자유주의적인 신념, 반대 정신, 그리고 심각한 상황에서 가장 먼저 타오를 준비가 되어 있는 살아있는 불꽃이 남아있었다. 그럼에도 노동 대중의 정치 · 경제 · 사회 상황은 변하지 않았다. 국가와 부르주아 계급에 대한 착취가 점점 심해지고 있음에도 노동자들에게는 여전히 방어 수단도, 집결할 권리도, 들을 권리도, 그들의 요구를 관철할 권리도, 조직할 권리도, 투쟁할 권리도, 파업할 권리도 모두 결여되어 있었다. 노동자들은 물질적으로나 도덕적으로 불만족스러워하고 있었다. 농촌에서는 농민 대중의 가난과 불만이 계속 커졌다. 1억 7,500만 명의 남자, 여자, 아이들이 버려졌고 일종의 인간 가축으로 여겨졌다(사적인 처벌은 1863년 법적으로 폐지되었지만 1904년까지 그들에게는 현실이었다). 일반 문화와 초등 교육의 부족, 원시적이고 불충분한 도구, 신용이나 다른 형태의 보호나 원조의 부재, 매우 높은 세금, 당국의 자의적이며 잔인한 대우와 “상위” 계급, 가족이 늘어나면서 작은 땅뙈기가 더 작아지는 것, “쿨라크(кула́к, 부농)”와 “토지 상류층” 사이의 경쟁. 심지어 “농민 공동체”인 “미르(мир)”도 더 이상 구성원들을 지원할 수 없었다. 게다가 알렉산드르 3세의 정부와 그의 후계자 니콜라이 2세의 정부는 “미르”를 단순한 행정 기구로 축소했고, 이후 “미르”는 국가에 의해 면밀히 관찰되고 감시되었다. 그의 주된 목적은 농민들에게 세금과 수수료를 지불하도록 강요하는 것이었다. 따라서 사회주의적이고 혁명적인 선전과 활동이 일정한 성공을 거두어야 하는 것은 불가피한 일이었다. 비밀스럽지만 정력적으로 확산된 마르크스주의는 주로 학생들 사이에서 퍼져나갔지만 노동자들 사이에서도 수많은 추종자들이 발생했다. 1898년 창당한 사회민주당의 영향력은 이 당이 불법임에도 불구하고 많은 도시와 특정 지역에서 느낄 수 있었다. 활동가들에 대한 정부의 처벌은 점점 더 잔인해졌다. 수많은 정치적 재판이 있었다. 행정부와 경찰의 탄압 조치는 수천 명의 “대상”을 맹렬히 공격했다. 감옥, 망명지, 강제노동 수용소가 가득 찼다. 그러나 당국은 당의 활동과 영향력을 최소한으로 줄일 수 있었으나, 앞서 첫 번째 정치 집단을 억압하는 데 성공했던 것처럼 그것을 억누르는 데는 성공하지 못했다. 1900년 이후 당국의 온갖 노력에도 불구하고 혁명운동은 상당히 성장했다. 학생과 노동자들이 일으키는 혼란은 매일 일어나는 사건이 되었다. 대학은 정치적 문제 때문에 몇 달 동안 휴교하는 경우가 많았다. 노동자들의 지지를 받은 학생들의 반응은 공공장소에서 울려 퍼지는 시위를 조직하는 것이었다. 상트페테르부르크의 카잔 성당의 광장은 학생들과 노동자들이 모여 혁명적인 노래를 부르고 때로는 붉은 깃발을 들고 시위하는 고전적인 장소가 되었다. 정부는 경찰과 기마 코사크들을 검과 채찍으로 무장시켜 광장과 인근 거리를 ‘청소’하기 위해 돌려보냈다. 혁명이 거리를 정복하기 시작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독자에게 일반적인 상황을 정확하게 알리기 위해서는 우리는 또 다른 의문을 던져야 한다. 우리가 방금 그린 그림은 정확하다. 그러나 이 그림에 대한 수정 없이 오직 이것만을 언급함으로써, 국가와 국민의 커다란 총체성을 끊임없이 언급하지 않음으로써, 우리는 상황을 과장할 위험을 무릅쓰게 될 것이며 결국 다른 일반적인 평가들과 같이 이후의 사건들에 대한 이해로 이어지지 않는 잘못된 평가를 하게 될 것이다. 우리는 1억 8천만 명 이상의 엄청난 인구 집단 중에서 우리가 묘사한 지적 운동의 영향을 받은 집단이 아주 작은 계층만으로 구성되어 있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된다. 사실 그것은 주로 학생들인 수천 명의 지식인과 대도시의 노동자 계층의 엘리트들로 구성되었다. 나머지 인구, 즉 무수한 농민 대중, 도시 주민의 대다수와 심지어 노동 인구의 대다수는 여전히 혁명적인 소요에 무관심하고 심지어 그것에 적대적이었다. 선진국의 구성원들은 1900년부터 급격히 증가하여 그 명분에 승리한 노동자들의 수가 지속적으로 증가하였고, 혁명적인 폭발은 또한 점점 더 비참한 농민 대중들에까지 이르렀다. 그러나 동시에 그 활동만으로 주요한 사회적 변화를 결정할 수 있는 규모의 대다수의 대중은 원시적인 전망을 유지했다. ‘러시아의 역설’은 거의 그대로였고, ‘차르 신앙’은 수백만 명의 인간을 계속해서 현혹시켰다. 이 집단과 관련하여 문제의 운동은 작고 피상적인 발효에 지나지 않았다(1903년 런던에서 열린 사회민주회의에는 노동자 4명만 참가했다). 이런 상태에서는 전위세력과 한참 뒤에 남아 있는 인구 집단 간의 어떠한 접촉도 불가능했다. 독자는 그 뒤에 일어난 사건들을 이해하기 위해 이것을 끊임없이 명심해야 한다. 1901년에 혁명 활동은 새로운 요소에 의해 풍부해졌다. 사회민주당과 함께 사회혁명당도 일어났다. 이 당의 선전은 금세 상당한 성공을 거두었다. 두 정당은 세 가지 본질적인 점에서 서로 달랐다. 1. 철학적으로나 사회학적으로 사회혁명당은 마르크스주의 교리에 동의하지 않았다. 2. 반反 마르크스주의에 근거하여 사회혁명당은 농민문제(러시아에서 가장 중요한 문제)에 대해 다른 해결책을 상세히 기술했다. 사회민주당은 노동자 계층만을 기반으로 하여 농민 대중을 중시하지 않고(그들의 급속한 무산계급화를 기다리며) 결과적으로 농촌 선전을 소홀히 한 반면, 사회혁명당은 러시아 농민 민중을 혁명적, 사회주의적 대의에 끌어들이기를 희망했다. 사회혁명당은 농민들의 무산계급화를 기다리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생각했다. 결과적으로 그들은 농촌에서 대규모 선전을 실시했다. 사회민주당의 농민 프로그램은 자영농 토지의 확대와 그 밖의 작은 개혁들이었던 반면, 사회당-개헌당의 최소 프로그램은 토지의 완전하고 즉각적인 사회화를 포함했다. 3. 이러한 교리에 근거하여 사회민주당은 대중의 행동에 의지했고 모든 테러 활동과 모든 정치적 암살을 사회적으로 쓸모없는 것으로 일축했다. 반면 사회혁명당은 지나치게 열성적이거나 잔혹했던 차르주의 고위 관리들에 대한 암살 시도의 효용을 인정했다. 중앙위원회의 지시로 정치적 암살을 준비하고 수행한 혐의로 고발된 ‘전투 생물체’라는 특수 기구를 만들기도 했다. 이러한 차이점을 제외하면, 두 당의 단기적 정치사회계획(“최소계획”)은 거의 같았다. 즉, 사회주의로 나아가는 길을 닦을 부르주아 민주 공화국을 건설하는 것이었다. 1901년부터 1905년까지 사회혁명당은 여러 차례 암살 시도를 감행했는데, 그 중 일부는 큰 반향을 일으켰다. 1902년, 당의 젊은 활동가인 학생 발마체프(Stepan Valerianovitch Balmachev)는 내무부 장관 시피아긴(Dmitri Sipiaguine)을 암살하고, 1904년 또 다른 사회혁명당원 학생 사조노프(Igor Sazonov)는 시피아긴의 유명하고 잔인한 후계자인 폰 플레헤브(Vyacheslav Konstantinovich von Plehve)를 살해했으며, 1905년 사회혁명당원 칼레이예프(Caleyev)는 모스크바 총독인 세르게이 대공(Grand Duke Sergei Alexandrovich)을 살해했다. 두 정당 외에 작은 아나키즘 운동도 벌어졌다. 매우 약하고 대중인지도가 낮았던 그들은, 지식인과 노동자(남부의 농민들)의 일부 집단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상트페테르부르크에는 두 개의 아나키즘 단체가 있었고 모스크바에 있는 더 많은 집단이 있었다.(후자가 더 강하고 더 활동적이었다)이 뿐만 아니라 남쪽과 서쪽의 집단도 있었을 것이라 추정된다. 이들의 활동은 약한 선전, 과잉 충성하는 정권의 하수인에 대한 암살 시도, 그리고 '개인의 복수' 행위로 제한되었다. 자유주의 문학은 외국에서 밀반입되었는데, 이는 주로 나로드나야 볼리아가 붕괴된 후 영국으로 망명한 크로포트킨의 팸플릿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1900년 이후 혁명적 활동의 급격히 증가에 정부는 경보를 울렸다. 당국자들을 가장 괴롭힌 것은 그들의 선전물이 노동대중에게 호의적으로 받아들여졌다는 사실이었다. 그들은 불법이었고 따라서 존재 자체가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두 사회주의 정당 모두 주요 도시에 위원회, 선전계, 비밀 인쇄소 그리고 꽤 많은 집단을 가지고 있었다. 사회혁명당은 암살들을 성공시켰고, 그 파장은 많은 관심과 심지어 감탄까지 불러일으켰다. 정부는 방어와 진압 - 감시, 간첩, 도발, 감옥, 대 박해(погром, 大 迫害) - 이 불충분하다고 판단했다. 노동 대중을 사회주의 정당들의 영향과 모든 다른 모든 혁명 활동으로부터 떼어놓기 위해 정부는 논리적으로 노동자들의 운동에 대한 정부의 지배를 이끌어내는 마키아벨리적인 계획을 구상했다. 그것은 정부 스스로 명령한 합법적이고 공인된 노동자 단체를 출범시키는 것이었다. 이를 통하여 그들은 두 가지 효과를 동시에 노렸다. 한쪽은 노동자 계급의 공감과 감사, 헌신을 끌어 모아 혁명 정당으로부터 멀어지게 하는 것이었고, 다른 한쪽은 그것을 예의 주시하는 동시에 이 노동자들의 운동을 정부의 의지에 따라 이끌어가는 것이었다. 그 일은 의심의 여지없이 섬세한 작업이었다. 노동자들을 국가 기구로 끌어들이고, 그들의 의심을 잠재우고, 흥미를 돋우고, 그들에게 아첨하며 유혹하고, 그들이 알지 못하는 사이에 그들을 속이고, 그들의 포부를 만족시키는 척하고, 당을 몰락시키고, 그들의 선전을 무력화시키고, 특히 구체적인 행동으로 그들을 능가하는 것이 필요했다. 이것이 성공하기 위해서는 경제나 사회질서에 있어 어느 정도 양보를 하는 데 동의하는 동시에 노동자들을 끊임없이 조종할 수 있어야 했다. 그런 ‘프로그램’은 정부가 절대적인 신뢰를 갖고 있는, 교활하고 능숙하고 경험이 많으며 노동자들의 심리에 정통하고, 노동자들에게 자신을 강요하고 자신감을 얻는 방법을 알고 있는 자들에 의해 실행되어야 했다. 정부는 마침내 이 사업을 수행하는 임무를 맡은 비밀경찰(오흐라나)의 두 요원을 선정했다. 하나는 모스크바의 주바토프(Sergei Vasilyevich Zubatov)였고, 다른 하나는 상트페테르부르크 교도소의 주임 신부인 가폰 신부(Georgy Apollonovich Gapon)였다. 차르 정부는 불장난을 하고 싶었다. 이윽고 그 불은 그들 자신을 잔혹하게 불태웠다. ** 요동 *** 가폰의 서사시; 최초의 총파업 모스크바에서 주바토프는 꽤 빠르게 정체가 밝혀졌다. 그는 큰일을 이룰 수 없었다. 하지만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는 일이 보다 더 잘 진행되었다. 매우 교활하며 음지에서 일을 꾸미는 가폰은 노동자 집단에 자신감을 심어주는 법, 심지어는 애정을 얻는 방법까지도 알고 있었다. 선동가 겸 조직가로서 특출 난 재능을 발휘한 그는 이른바 “노동자 모임(페테르부르크 공장노동자 모임, Assembly of Russian Factory and Mill Workers of St. Petersburg)”을 세우고 개인적으로 주도하는 데 성공했다. 1904년 말 경에는 수도의 각기 다른 열한 지역에서 회원 수가 수천 명에 달했다. 노동자들은 자발적으로 저녁에 이러한 “모임”에 참석하여 그들의 문제를 논의하며 강의를 듣고 신문을 보았다. 입구는 가폰주의자인 노동자들이 엄중히 지키고 있었기 때문에, 정당들의 활동가는 쉽게 그곳에 들어갈 수 없었다. 설령 입장했다고 해도 그들은 재빨리 눈에 띄어 밖으로 내동댕이쳐졌다. 상트페테르부르크 노동자들은 그들의 “섹션”을 매우 소중하게 여겼다. 그들은 가폰을 완전히 신뢰했고, 자신의 불행과 포부에 대해 이야기하고, 상사와 맞서 싸우는 여러 가지 방법을 검토하면서 자신의 처지를 개선할 수 있는 방안을 논의했다. 가난한 소작농의 아들이자 노동자들 사이에서 일생을 보낸 가폰은 자신을 털어놓는 노동자들의 심리를 완벽하게 이해했다. 그는 노동자들의 운동에 대해 찬성과 진정한 공감을 연기하는 데 매우 능했다. 적어도 처음에는 그런 것도 그의 공식적인 임무였다. 정부가 노동자들에게 하고자 했던 제안은 다음과 같다. “노동자들이여, 당신은 당신이 속한 모임을 통해 꼼꼼하게, 법적 한도 내에 머무름으로써 당신의 상황을 개선할 수 있다. 성공하기 위해서 정치에 관여할 필요가 없다. 여러분의 구체적이고 개인적이며 또한 즉시적인 관심사에 관심을 가져라. 그러면 여러분은 곧 더 행복한 삶을 살게 될 것이다. 정당과 정치적 투쟁, 나쁜 양치기들, 즉 사회주의자들과 혁명가들이 제안한 방식들은 여러분이 가질 만한 가치가 있는 것으로 당신들을 이끌지 않을 것이다. 눈앞의 경제적 이익에 관심을 가져라. 이것은 허용되며 오직 이런 식으로만 당신의 상황을 개선시킬 수 있을 것이다. 정부는 당신들에 대해 매우 걱정하고 있으며 당신들을 도울 것이다.” 이것이 가폰과 그의 조력자들이 설파한 이론이었다. 근로자들은 이 초대에 곧바로 응답했다. 그들은 행동을 준비했다. 그들은 가폰의 동의를 얻어 그들의 요구를 발전시키고 공식화했다. 가폰은 그의 아주 미묘한 입지에서 이 행동에 참가해야만 했다. 만약 그가 그렇게 하지 않는다면 그는 즉시 노동자들의 불만을 불러일으킬 것이었다. 그는 노동자들의 이익을 배신하고 관리자의 편을 들어준다는 비난을 받고 인기를 잃을 것이다. 이윽고 더욱 심각한 의혹들이 제기될 것이다. 이렇게 되면 그가 하려던 일은 엉망이 될 것이다. 이중 첩자로서 가폰은 다른 무엇보다도, 어떻게 얻어내는지 알고 있는 공감대를 유지하고자 애썼다. 그는 이것을 잘 이해했고, 마치 노동자들의 대의명분을 완전히 지지하는 것처럼 행동했다. 그는 이를 통해 운동에 대한 통제력을 유지하고, 대중을 마음대로 조종하고, 지휘하고, 모양을 만들고, 그들의 행동을 도식화할 수 있기를 바랐다. 그러나 그 반대의 일이 일어났다. 그 운동은 재빨리 주어진 한계를 넘어섰다. 그것은 예측하지 못한 진폭, 활력, 추진력을 빠르게 획득하여 모든 계산을 태워버리고, 저자들의 예상을 뒤엎었다. 그것은 곧 진정한 홍수가 되어 가폰을 끌어들였다. 1904년 12월,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가장 큰 회사 중 하나이자 가폰이 수많은 추종자와 친구들을 거느린 푸틸로프 공장의 노동자들이 이 행동을 개시하기로 결정했다. 가폰의 동의로 그들은 자리를 마련하여 경영자들에게 매우 온건한 경제 요구 목록을 주었다. 그 달 말에 그들은 관리자들이 “이러한 요구를 고려하는 것이 가능하다고 믿지 않았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정부는 그것에 대해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게다가 공장의 경영자들은 지도자로 여겨지는 일부 노동자들을 해고했다. 노동자들은 복직을 요구했지만 경영진은 이를 거절했다. 노동자들의 분개와 분노는 엄청났다. 우선 그들의 오래고 지난한 노력이 허사로 돌아갔다. 둘째로, 그리고 더 중요한 것은, 그들은 그들의 노력이 성공으로 귀결될 것이라고 믿고 있었다는 점이다. 가폰 자신도 그들을 격려하고, 희망으로 그들을 채웠다. 그리고 그들의 첫걸음은 그들에게 결코 정당화될 수 없는 쓰라린 실패만을 가져다주었다. 그들은 속았다고 느꼈고, 해고된 동지들을 위해 도덕적인 책임으로 개입할 의무가 있다고 느꼈다. 자연스럽게 그들의 시선이 가폰 쪽으로 쏠렸다. 가폰은 자신의 위신과 역할을 살리기 위해 누구보다 분개한 듯 행동했으며 노동자들에게 푸틸로프 공장에 가서 힘차게 반응할 것을 촉구했다. 그들은 주저하지 않았다. 그들은 모임과 가폰의 보호가 계속되고, 요구를 순전히 경제적인 것으로 국한시키는 이상 안전하다고 느꼈다. 그렇기에 그들은 몇 번의 격동적인 회의 끝에 파업으로 자신들의 명분을 지지하기로 결정했다. 정부는 가폰을 믿고 개입하지 않았다. 때문에 1904년 12월 러시아 최초의 대규모 파업인 푸틸로프 공장의 파업이 일어난 것이다. 그러나 그 운동은 거기서 그치지 않았다. 모든 노동자 모임은 푸틸로프 노동자들의 행동을 옹호하기 위해 동요하고 움직였다. 그들은 푸틸로프 노동자들의 실패를 자신들의 실패로 이해했다.(그리고 그것이 참으로 옳다) 가폰은 당연히 그 모임의 편을 들어야 했다. 저녁에는 푸틸로프 파업자들에게 유리한 연설을 하고 노동자들에게 단호한 행동으로 지지해 줄 것을 촉구하며 그들 모두를 방문했다. 며칠이 지났다. 어마어마한 동요가 수도에 있는 많은 노동자들을 뒤흔들었다. 공장은 저절로 비워졌다. 신호도 준비도 리더십도 없었지만 푸틸로프 파업은 상트페테르부르크 노동자들로 인한 사실상의 총파업이 되었다. 그리고 그것은 폭풍이었다. 파업참가자들은 즉각적이고 분명한 조치를 요구하며 모든 형식과 규칙을 무시하고 일제히 모임을 향해 돌진했다. 한마디로 파업만으로는 부족했다. 뭔가 행동하고, 뭔가 해야만 했다. 그것은 크고, 인상적이고, 결단력 있는 것이어야 했다. 이것이 일반적으로 그들이 받은 느낌이었다. 정확히 어떻게, 어디서부터인지는 모르지만, 환상적인 생각이 등장했다. 그 생각은 러시아의 모든 불행한 노동자와 농민의 이름으로 차르에게 “청원”을 준비하자는 생각, 탄원서를 지지하기 위해 겨울 궁전 앞에서 대규모 시위를 벌이자는 생각, 가폰이 이끄는 대표단을 통해 차르에게 직접 탄원서를 바치며 차르에게 그의 민족의 불행에 귀를 기울여 달라고 부탁하자는 생각이었다. 비록 이 생각이 순진하고 역설적이었다 하더라도 이 생각은 상트페테르부르크의 노동자들 사이에서 들불처럼 번졌다. 이를 통해 노동자들은 단결했고, 영감을 받았고, 열광했다. 이 생각은 노동자들의 움직임에 의미와 정확한 목표를 부여했다. 모임은 대중을 모아 행동을 조직하기로 결정했다. 가폰은 탄원서 초안 작성자의 책임을 요청받았다. 다시 한 번 그는 동의했다. 그리하여 그는 환경의 힘으로 역사적인 대중 운동의 지도자가 되었다. 탄원서는 1905년 1월의 첫 며칠 동안 준비되었다. 단순하고 감동적인 그것은 헌신과 자신감을 발산했다. 인민의 고통은 대단히 많은 감정과 성의로 드러났다. 차르에게 이러한 고통을 직시하고, 효과적인 개혁에 동의하고, 그것들이 관철되는 것을 보게 해달라는 요청이었다. 가폰의 청원이 영감을 받아 진정으로 감동적인 작품이었다는 것은 이상하지만 의심할 여지가 없다. 다음 단계는 모든 구역에서 청원을 채택하고, 그것을 대중에게 전달하고, 겨울 궁전을 향한 행군을 조직하는 것이었다. 그 사이에 새로운 요소가 작용하기 시작했다. (당원들이 “가폰주의[Gaponism]”을 멀리하기 시작하는 순간까지) 정당에 속한 일부 혁명가들은 가폰과 만났다. 그들의 주된 목적은 그에게 그의 태도, 탄원서, 그리고 그의 행동을 “덜 순종적이고, 더 위엄 있고, 더 확고하고, 더 혁명적인” 모습을 취하도록 영향을 주는 것이었다. 진보적인 노동자들의 순환도 그를 이 방향으로 몰고 갔다. 가폰은 우아하게 굴복했다. 일부 사회주의 혁명가들은 그와 관계를 맺었다. 가폰은 그들에 동의하여 원래의 청원을 원래보다 상당히 확대시켰고, 차르에 대한 충성스런 헌신을 내려놓았다. “청원”의 최종본은 역사상 가장 위대한 역설이었다. 그것은 차르에게 충심으로 그의 힘을 제거하는 철저한 혁명을 승인하고 심지어 수행할 것을 요청하였다. 실제로 혁명당의 전체 최소 프로그램도 여기에 포함됐다. 긴급히 요구되는 조치들 중에는 언론의 완전한 자유, 발언의 자유, 사상의 자유, 모든 협회와 조직에 대한 절대적인 자유, 노동자의 노조 가입권, 파업권, 대지주가 아닌 농민 공동체에 유리한일부 농업법 제정, 그리고 마지막으로 즉각적으로 민주적 선거법의 근간으로 선출된 제헌의회를 소집할 것이 있었다. 그것은 무뚝뚝한 자살 초대였다. "청원"의 완전하고 최종적인 텍스트는 다음과 같다. 폐하 우리, 상트페테르부르크의 노동자들, 우리의 부인들, 우리의 아이들과 부모들, 늙은이와 무산자들이 당신께 왔나이다. 차르시여, 당신의 정의와 보호를 바라나이다. 우리는 거지로 전락했습니다. 우리는 압제받고, 심한 노동의 무게에 짓눌리고, 모욕을 당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인간으로 여겨지지 않고 묵묵히 슬픈 운명을 감내야 하는 노예로 취급받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 모든 것을 참아왔습니다. 그러나 이제 우리는 무지와 전제주의의 무저갱으로 던져지고 있습니다. 전제주의와 모든 인간법칙에 반하는 대우가 우리를 사로잡았습니다. 차르시여. 우리는 더 이상 견딜 수 없습니다. 견딜 수 없는 괴로움을 계속하느니 차라리 죽고 싶은 끔찍한 순간이 왔습니다. 이것이 우리가 일을 중단한 이유이고, 우리가 사장들이 우리의 정당한 요구를 수용할 때까지 돌아오지 않을 것이라고 말한 이유입니다. 우리는 아주 작은 것만을 요구했습니다. 그리고 그 조금조차 없다면 우리의 삶은 삶이 아니라, 지옥이고, 영원한 고문이 될 것입니다. 우선 상사에게 우리의 필요를 충분히 고려하여 합의할 것을 요청하였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거절했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필요를 논의할 그 권리를, 법이 그러한 권리를 인정하지 않는다는 핑계로 거부당했습니다. 우리의 하루 8시간 노동에 대한 요구도 불법이라 기각되었습니다. 우리는 우리를 임금 결정 과정에 참여시켜 줄 것을 요구했습니다. 우리와 공장 내부 행정 사이에 의견 차이가 있을 경우 조정하기 위해서, 남녀에 무관하게 미숙련 노동자의 하루 최저 임금 1루블을 위해서, 초과 근무 억제를 위해서, 거기서 일하는 사람들이 바람, 비, 눈 등으로 죽지 않을 수 있는 작업장의 안전을 위해서였습니다……. 우리는 또한 아픈 사람들을 돌볼 것을 요구했고, 업무지시 시 욕을 하지 말 것을 요구했습니다. 이 모든 요구는 법에 어긋난 것이라며 거부되었습니다. 공식적으로 요구하는 바로 그 행위는 범죄로 해석되었습니다. 우리의 상황을 개선하고자 하는 열망은 사장들에 의해 그들에게 무례한 것으로 간주되었습니다. 차르시여. 여기 있는 당신의 백성 30만 명이 있습니다. 우리는 외형상으로만 인간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인권이 없습니다. 우리는 말하는 것도, 생각하는 것도, 우리의 필요를 논의하기 위한 목적으로 만나는 것도, 우리의 상황을 개선하기 위한 조치를 취하는 것도 허락받지 못하였습니다. 우리 중 누구라도 감히 노동계급을 위하여 목소리를 높이면 징역이나 유배에 처해집니다. 너그러운 마음과 예민한 영혼을 가지는 것은 범죄로 간주됩니다. 불운한 자, 노숙자, 희생당한 자, 죽어간 자에 대한 동정의 감정을 표현하는 것은 가증스러운 범죄입니다. 차르시여! 이것이 당신에게 통치의 권능을 내리신 주의 계명과 일치하는 것입니까? 그런 법 아래에서 삶에는 가치가 있습니까? 자본가와 관료들만을 남겨둔 채, 우리 러시아 노동자들은 차라리 죽는 것이 낫지 않겠습니까? 폐하, 그런 미래가 우리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것이 우리가 당신의 궁전 앞에 모인 이유입니다. 당신은 우리의 마지막 희망입니다. 당신의 백성을 불행과 무지만이 있는 무법자들의 구덩이에서 건져 주십시오. 당신의 백성들에게 기회를, 그들의 진짜 운명을 실현할 수 있는 수단을 내려 주십시오. 그들을 관료들의 참을 수 없는 억압에서 구해주십시오. 백성들과 폐하를 갈라놓는 벽을 허물고 그들을 함께 나라를 다스리도록 하명하십시오. 폐하는 사람들을 행복으로 이끌기 위해 이곳에 내려오셨습니다. 그러나 우리에게 고통과 굴욕만을 주는 폐하의 공무원들은 조금씩 그 행복을 빼앗아갑니다. 우리의 요구를 주의 깊게, 그리고 분노 없이 바라보아 주십시오. 이 요구들은 악을 위해서가 아니라 우리와 주님과 폐하의 최선을 위해서 만들 졌습니다. 우리의 오만이 아니라, 오늘의 끔찍한 상황을 종식시키고자 하는 일반적인 필요로 만들어졌습니다. 러시아는 너무 거대하고, 너무 다양한 요구가 있기에 관료로만 구성된 정부만으로는 이를 이끌 수 없습니다. 민중의 필요를 아는 것은 오직 민중이기에, 민중이 정부에 참여하는 것은 절대적으로 필요한 일입니다. 그러므로 당신의 백성을 돕는 것을 거절하지 마십시오. 전국의 모든 계급 대표들에게 지체 없이 집합하라고 명하십시오. 자본가와 노동자가, 사무관이, 사제들이, 의사들이, 교수들이 스스로의 대표자들을 선택하도록 하십시오. 누구든지 그가 원하는 사람을 자유롭게 선출하도록 하십시오. 그리고 이를 통해 보편적 참정권 하에서의 제헌의회를 허용하여 주십시오. 이것은 우리의 중심적인 요구입니다. 다른 모든 것은 그것에 대하여 부차적인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의 열린 상처에 대한 최고이자 유일한 진정한 연고입니다. 이 연고를 바르지 않으면 우리의 상처는 계속 열려 있고 우리는 피를 흘리며 죽게 될 것입니다. 우리의 병에는 만병통치약이 없습니다. 다양한 치료법이 필요합니다. 지금 그것들을 나열하겠습니다. 폐하, 마치 아버지에게 하는 것처럼 당신에게 경의로 말씀을 올리나이다. 이하의 대책은 불가결합니다. 첫 번째 요구안은 모든 권리의 부재와 러시아 국민을 표시하는 무지에 대한 대책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이러한 조치에는 다음이 포함됩니다. 1. 개인의 완전한 자유. 즉, 언론, 결사의 자유, 종교적인 문제에 대한 사상의 자유, 교회와 국가의 분리. 1. 국가가 지원하는 보편적 교육 및 의무교육. 1. 국가에 대하여 책임지는 장관, 행정조치의 적법성 보장 1. 예외 없이 법 앞에 있는 모든 개인의 평등. 1. 신념으로 수감된 모든 사람들의 즉각적인 석방. 두 번째 요구안은 빈곤에 대한 대책입니다. 1. 간접세 전면 폐지. 소득에 대한 직접적이고 급진적인 과세. 1. 토지 매입 수수료의 철폐. 이자율 인하, 국민에 대한 토지의 점진적 배분. 세 번째 그룹은 자본에 의한 노동력 파괴에 대한 대책으로 구성된다. 1. 노동법의 제정 1. 사업장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협력할 목적으로 조합을 설립할 자유 1. 8시간 근무, 시간외 근무 제한 1. 자본과 투쟁할 자유 1. 노동자를 위한 국가보험법 제정에 서민 대표 참여 1. 최저 임금 폐하, 이상이 우리의 주된 요구입니다. 그들이 이루어지리라 명하십시오. 이 일이 성사될 것을 우리에게 약속해 주십시오. 그러면 폐하는 러시아를 행복하고 영광스럽게 만들 것입니다. 그러면 당신의 이름은 우리의 마음, 우리 아이들의 마음, 그리고 우리 아이들의 아이들의 마음 속에 영원히 새겨질 것입니다. 그러나 만일 당신이 약속을 하지 않는다면, 당신이 우리의 청원을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우리는 여기, 이 광장, 당신의 궁전 앞에서 죽겠습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갈 곳도 없고, 다른 곳에 있을 이유도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에게는 오직 두 가지 길이 열려 있습니다. 하나는 자유와 행복으로, 다른 하나는 무덤으로 이어집니다. 차르시여. 이 길들 중 하나를 가리키시면, 우리는 그것을 따를 것입니다. 그것이 우리를 죽음으로 이끌지라도. 만약 우리의 삶이 고통 받는 러시아를 위한 학살로 끝난다면, 우리는 그 희생을 후회하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는 그것을 행복하게 받아들일 것입니다. 이 상황의 모든 역설적 요소에도 불구하고, 이루어진 행동은 다양한 실절적 요소로 구성된 사회적 압력의 논리적 귀결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당대의 다양한 요소들의 자연스러운 “합명제(synthesis)”였던 것이다. 한편, 차르 앞에서 집단 시위를 벌인다는 생각은 본질적으로 차르의 선한 의지에 대한 대중의 순진한 신앙을 드러낸 것에 지나지 않았다.(우리는 이미 “차르신앙”이 국민에게 행사한 장악력을 묘사했다.) 시골과의 유대를 끊은 적이 없었던 러시아 노동자들은 고대의 전통에 따라 “작은 하느님”에게 도움과 보호를 요청하고자 했다. 그들은 자발적이고 저항할 수 없는 분노로 일어섰다. 그리고 그들은 의심할 여지없이, 분명하고 확실한 해결책을 얻기 위해 아픈 곳을 가리켰다. 마음 한 편에서는 적어도 부분적인 성공을 기대하면서, 그들은 무엇보다도 그들의 현재 위치를 알고 싶어 했다. 한편 혁명당들의 영향력은 그 운동을 멈추기거나 더 혁명적인 운동으로 대체하기에는 너무 힘이 없었지만 가폰에게 어느 정도 압력을 가할 만큼은 강했다. 그로 인해 가폰의 행동은 “혁명화”되었다. 요컨대 그 행위는 자연스럽게 작용하고 있는 힘의 사생아였다고 하겠다. 지식인과 자유주의자들은 벌어지는 사건을 수동적으로 관찰하는 것밖에 할 수 없었다. 가폰 자신의 행동과 심리는 역설적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쉽게 설명될 수 있다. 원래 광대보다 못한 경찰의 프락치였던 그는 저항할 수 없을 정도로 앞으로 내몰린 대중 운동의 엄청난 파도에 휩쓸려갔다. 그 운동은 결국 그를 사로잡았다. 여러 가지 일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를 우상화하는 군중들의 선두에 서게 되었다. 모험적이고 낭만적이었던 그는 환상에 매몰되었던 것이 틀림없다. 그 사건들의 역사적 중요성을 본능적으로 인식한 그는 아마도 과장된 그림을 그렸을 것이다. 그는 이미 온 나라가 혁명을 겪고, 왕위가 위태롭게 되어 있는 것을 볼 수 있었고, 그 운동의 최고지도자, 국민의 우상인 가폰 자신이 영광의 정상에 선 모습을 볼 수 있었다. 현실이 반영된 것 같은 이 꿈에 사로잡힌 그는 마침내 자신이 시작한 운동에 몸과 마음을 바쳤다. 경찰 프락치로서의 그의 역할은 더 이상 그의 관심사가 아니었다. 그는 거대한 폭풍의 번개에 완전히 현혹된 채, 그에게 거의 신의 사명감으로 보였을 자신의 새로운 역할에 완전히 흡수된 채, 이 열띤 나날을 보내는 동안 더 이상 그런 생각을 하지도 않았다. 아마 1905년 1월 초의 가폰의 전망이었을 것이다. 지금 이 순간에는 그가 성실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이것이 행사 며칠 전에 가폰을 만나 그가 활동하는 것을 직접 본 필자의 개인적인 인상이다. 가장 이상한 요소였던 정부의 침묵과 경찰이 개입하지 않은 것 역시 쉽게 설명할 수 있다. 경찰은 ‘새로운 가폰’의 생각을 읽을 수 없었다. 그들은 그의 행동을 영리한 조치로 해석하였고 끝까지 그를 믿었다. 그리고 마침내 경찰이 그 변화와 임박한 위험을 알게 되었을 때, 그들은 더 이상 사건을 중단시키거나 통제할 수 없었다. 처음에는 다소 당황한 정부는 마침내 단 한 방에 이 운동을 일소할 기회를 기다리기로 했다. 잠시 동안 경찰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우리는 이 이해할 수 없고 불가사의한 사실이 대중을 격려하고 그들의 희망을 높였다는 것을 덧붙여야 한다. “정부는 이 운동에 감히 반대하지 않는다. 그들은 굴복할 것이다.”라고 사람들이 논했다. 겨울궁전을 향한 행진은 1월 9일 일요일 아침(옛 달력)으로 정해졌다. 마지막 날들은 주로 “모임”에서 “청원”의 공람에 바쳐졌다. 거의 모든 곳에서 똑같은 일이 반복되었다. 그 날 동안, 가폰 자신이나 그의 동료 중 한 명은 회의 장소를 교대로 채운 많은 노동자들에게 청원서를 읽고 논평했다. 자리가 메워지자마자 문이 닫히고 탄원서가 낭독되었다. 참석한 사람들은 별도의 시트에 서명을 하고 방을 나갔다. 길거리에서 참을성 있게 차례를 기다렸던 또 다른 인파가 방을 가득 메웠고, 같은 일이 반복되었다. 이것은 자정 이후까지 모든 모임에서 계속되었다. 이러한 마지막 준비에 비극을 더한 것은 연설자와 군중들이 호소문에 응하여 엄숙하고 엄숙한 맹세를 한 것이다. 선동가는 이렇게 말했다. “노동자, 농민들, 동지 여러분! 불행한 형제들이여! 모두 대의에 충실하여 시위에 참여하라. 일요일 아침 겨울궁전 앞 광장에 나와라. 그렇게 하지 않으면 우리 대의를 배반하게 될 것이다. 그러나 엄숙한 시간에 맞춰 조용히 평화롭게 와라. 가폰 신부는 이미 차르에게 경고했고, 차르가 자네들 가운데서도 무사할 거라고 개인적으로 장담했다. 만약 당신이 잘못된 행동을 허용한다면, 가폰 신부는 그것에 대해 책임을 져야 할 것이다. 탄원서를 듣지 않았는가. 우리의 요구는 정당하다. 우리는 더 이상 이 비참한 생활을 계속할 수 없다. 그래서 우리는 사랑과 희망으로 가득한 마음으로 차르에게 맨손으로 가는 것이다. 그가 해야 할 일은 우리를 받아들이고 우리의 요구를 들어주는 것뿐이다. 가폰 자신이 청원을 제출할 것이다. 동지들, 형제자매 여러분, 차르께서 우리를 받아 주시고, 그가 우리의 말을 경청하며, 우리의 정당한 요구를 충족시키기 위한 조치를 취하기를 바라도록 하자. 그러나 우리를 받아들이는 대신, 총과 칼을 들고 우리를 공격하면, 형제들이여, 오히려 그를 불쌍히 여기십시오! 우리에게 더 이상 차르는 없을 것이다. 그러면 그는 그의 가문과 함께 영원히 그를 저주받으리라! 동지여, 형제들이여, 시민들이여! 그러면 그의 배신을 결코 잊지 못할 것이라고 맹세하라! 가능한 모든 방법으로 그 배신자를 멸할 것이라고 맹세하라…….” 그러자 온 회중은 완전히 넋을 잃고 손을 들어 “우리는 맹세한다!”라고 대답했다. 가폰은 모든 “모임”에서 최소 한 번 이상 탄원서를 읽어주었다. 그리고 그는 이렇게 덧붙였다. “나, 사제 게오르기 가폰은 신의 뜻에 따라, 차르가 너희를 배신할 경우에 너희가 차르에게 한 맹세에서 해방시켜주겠다. 그리고 그를 파멸시킬 자를 미리 축복한다. 그럴 경우 우리는 더 이상 차르를 갖지 않게 될 테니까!" 그는 감정으로 창백해져서 떨고 있는 청중에게 이 말을 두세 번 되풀이했다. “나를 따를 것이라 맹세하라, 너의 사랑하는 이들, 너희의 아이들의 목숨을 걸고 맹세하라!” “예, 신부님. 예! 우리는 우리 아이들의 목숨을 걸고 맹세합니다!”라는 대답은 변함없었다. 1월 8일 저녁에는 모든 것이 행진을 위한 준비가 되어 있었다. 어떤 지식인 집단에서는 정부의 결정이 취해진 것을 알게 되었다. 그 결정은 다음과 같다. 어떤 상황에서도 군중은 궁에 접근할 수 없다. 군중이 고집한다면 주저 없이 총을 쏘라. 피 흘리는 것을 막기 위해 재빨리 당국으로 대표단이 파견되었다. 그러나 헛수고였다. 이미 모든 명령이 내려져 있었다. 수도는 철저히 무장한 부대가 관리하고 있었다. 나머지는 잘 알려져 있다. 1월 9일 일요일 아침, 주로 노동자와 그 가족으로 구성된 거대한 군중들이 겨울 궁전 방향으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수도와 그 근교 곳곳에 출발한 수만 명의 남녀와 아이들이 집결 장소를 향해 행진했다. 대오는 어디에서나 군대와 경찰들의 장벽과 마주쳤고, 그들은 이 인간 바다를 향해 끊임없이 발포했다. 그러나 거대한 군중의 압력은 시시각각 증가하였고, 군중들은 어쨌든 계속해서 궁전 쪽으로 이동하여 그 주변의 거리를 쉼 없이 메우고 또 메웠다. 총성에 의해 흩어진 수천 명의 사람들이 끈질기게 목표를 향해 움직였다. 그들은 운동의 추동력에 의해 자극받았고, 호기심에 차 있었고, 분노에 차 있었고, 그 분노와 공포를 외치는 강한 필요에 의해 움직였다. 이 모든 것에도 불구하고 차르의 궁전 앞 광장에 성공적으로 도달할 수만 있다면, 차르께서 그들에게 와서 그들을 받아들이고 모든 것을 고쳐줄 것이라고 믿으면서, 계속해서 희망의 불꽃을 간직하고 있는 사람들이 많았다. 혹은 차르가 이 명백한 현실에 직면하면 그는 더 이상 저항할 수 없었고 굴복할 수밖에 없을 것이라고 생각한 이들도 있었다. 그래도 다른 사람들, 즉 가장 순진한 사람들은, 차르가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모르고, 도살자에 대해 아무것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들은 경찰이 처음부터 사실을 은폐한 뒤 이제는 백성들이 “작은 하느님”과 접촉하는 것을 막으려 하고 있다고 상상했다. 그래서 그들은 무슨 수를 써서라도 차르에 도착해야만 했다……. 게다가 그들은 그곳에 있기로 맹세했다. 무엇보다도 가폰이 그곳에 있었다. 아마도 그는 차르와 만나는 데 성공했을 것이다……. 어쨌든 인파는 사방에서 뚫고 들어와 마침내 겨울궁전의 바로 주변까지 침범하여 광장으로 들어갔다. 무장 해제되고 괴로워하며 절망에 빠진 군중을 해산시키기 위해 정부는 오직 사격만을 지시하고 있었다. 그것은 역사상 유일무이한, 상상조차 할 수 없는 무서운 광경이었다. 이 거대한 군중들은 자신의 크기가 모든 움직임을 방해했기 때문에 전진도 후퇴도 할 수 없었고, 기관총의 근거리 사격에 공포와 고통, 분노 섞인 비명만을 지를 수 있었다. 이 상황은 후에 “학살”이라고 불린다. 매 사격 명령마다 대오는 조금씩 뒤로 밀려났다. 짓밟히고, 숨 막히고, 부서졌지만, 그들은 새로 도착한 이들에 막혀 죽은 이들 위로, 죽어가는 이들 위로, 다친 이들 위로 새롭게 대오를 형성해야 했다. 그리고 또 다른 사격이 주기적으로 이 살아있는 덩어리를 통해 죽음의 전율을 발사했다. 이것은 인접한 거리들이 마침내 비워질 때까지 오랜 시간 동안 계속되었다. 그리고 군중은 마침내 탈출할 수 있었다. 이 날 수도에서 수백 명의 남자, 여자, 아이들이 죽었다. 당국은 병사들의 양심을 무디게 하고 양심의 가책을 없애기 위해 그들을 취하게 했다. 어떤 병사들은 궁전 근처의 정원에 심어진 나무에 오른 아이들을 “쏘아 떨어뜨리며” 즐거워했다. 저녁 무렵, “질서가 다시 확립되었다.” 피해자의 수는 정확히 알려지지 않았다. 그러나 그 날 밤 동안 시체로 가득 찬 긴 열차는 이 모든 불쌍한 시체들을 도시 바깥으로 운반하였다. 그들은 들판과 숲에 대충 매장되었다. 또한 차르는 그날 수도에 있지도 않았다고 알려져 있다. 군 당국의 목줄을 풀어준 후, 그는 상트페테르부르크 근처의 차르스코예 셀로(Tsarskoye Selo)라는 여름 별장으로 피신했다. 가폰은 차르의 상징물들과 그림들로 둘러싸인 채 나르바 문을 통해 궁전 쪽으로 이동한 많은 군중을 이끌었다. 다른 곳과 마찬가지로 이 군중은 성문 바로 가까이에 주둔하고 있는 군대에 의해 분산되었다. 그는 간신히 도망쳤다. 그는 첫발을 쏘자마자 납작 엎드려서 꼼짝도 하지 않았다. 잠시간 사람들은 그가 다치거나 죽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는 동료들에 의해 재빨리 안전한 곳으로 옮겨졌다. 긴 머리를 잘랐고, 민간인 복장을 입었다. 얼마 후 그는 정권의 손이 전혀 닿지 않는 외국으로 떠났다. 러시아를 떠나기 전에 그는 노동자들에게 다음과 같은 짧은 호소문을 보냈다. “나는 사제로써 순진무구한 형제, 자매, 아이들을 학살한 모든 관리와 병사들을 저주한다. 민중의 압제자들에게 저주가 있으라. 민중의 자유를 위한 투쟁을 지지한 병사들을 축복한다. 차르는 민중의 피를 흐르게끔 명령한 배신자니, 나는 병사들의 차르에 대한 충성 맹세가 이제 무효하다고 선언한다.” 또한 그는 다른 성명을 통해 다음과 같이 선언했다. “…노동자 동지들이여, 이제 더 이상 차르는 없다! 오늘 그와 러시아 민중 사이에 피가 넘쳐흘렀다. 러시아 노동자들이 러시아 인민의 해방을 위한 투쟁을 수행해야 할 때가 왔다. 이 투쟁은 복될지어다. 내일 나는 너의 가운데 있을 것이다. 오늘 나는 잠시 휴식하고 있다.” 이 호소문은 전국에 대대적으로 배포되었다. 아마 가폰의 운명에 대해 몇 마디 말하기에는 지금이 가장 좋은 때일 것이다……. 그의 친구들의 구원을 받아, 전前 사제는 해외에 정착했다. 사회혁명당원들이 그를 돌보았다. 이제부터 그의 미래는 그에게 달렸다. 그는 자신의 과거와 결별하고, 교육을 받고, 자신의 이념을 완성하기 위해 필요한 모든 것을 다 받았다. 진정한 실천가가 되고자 하는 과정이었다. 그러나 가폰은 그런 종류의 인간이 아니었다. 한때 그의 어두운 영혼 속에서 우연히 타오르던 신성한 불꽃은 단지 야망과 개인적인 면죄부의 불꽃일 뿐이었다. 그 불꽃은 재빨리 꺼졌다. 가폰은 자기교육과 진지한 활동에 대한 준비에 몰두하는 대신,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에 만족하고 있었다. 느리고 참을성을 요하는 일은 그에게 아무 의미가 없었다. 그는 즉각적이고 찬란하게 그의 덧없는 모험을 반복하기를 꿈꾸었다. 그러나 러시아에서는 사건이 천천히 일어났다. 대혁명은 오지 않았다. 그의 권태는 커졌다. 그는 마침내 이전 일들을 잊기 위해 방탕한 태도를 취했다. 그는 대부분의 시간을 음울한 카바레에서 보냈다. 그곳에서 반쯤 술에 취해 매춘부들과 함께 그는 깨져버린 환상을 통곡했다. 그는 해외에서의 생활을 역겨워했다. 조국의 상황은 그를 고문했다. 그는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러시아로 돌아가고 싶어 했다. 그래서 그는 그의 정부에 용서를 구하고, 충성을 다시 바치는 편지를 쓰겠다고 생각했다. 그는 비밀경찰에게 편지를 썼다. 그는 그렇게 관계를 재개했다. 그의 전 상관들은 그의 제안을 상당히 호의적으로 받아들였다. 그러나 그들은 제안을 승낙하기 전에, 그가 회개하였고 선한 의지가 있다는 물적 증거를 요구했다. 그가 사회혁명당의 유력 인사들과 아는 것을 알고 그들은 그에게 이 정당에 대해 결정적인 타격을 입히는 데 도움이 될 정확한 정보를 제공해 줄 것을 요청했다. 가폰은 그 제의를 받아들였다. 그 사이 당에서 영향력 있는 인물 중 한 명인 기술자 루템베르크(Pinhas Rutenberg)는 가폰과 경찰의 새로운 관계에 대해 듣게 되었다. 그는 당 중앙 위원회에 이것을 보고했다. 위원회는 가폰의 정체를 밝히기 위해 가능한 모든 것을 할 임무를 그에게 주었다. 루텐베르크는 그 역할을 맡았다. 그는 가폰의 신뢰를 얻었고, 가폰은 루텐베르크가 거액을 받고 자진해서 자기 일당을 배반할 것이라고 짐작했다. 루텐베르크는 그에 수락한 듯 행동했다. 그는 매우 가폰을 통해 중요한 당의 비밀을 경찰에 전달하기로 합의했다. 그들은 가격을 협상했다. 루텐베르크가 유도하고 가폰이 경찰의 동의를 얻어 그것을 실행한 이 협상을 통해 마침내 가폰뿐 아니라 루텐베르크도 러시아에 돌아갈 수 있게 되었다. 그 연극의 마지막 공연은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열렸다. 루텐베르크는 그곳에 도착하자마자 가폰의 충실한 동료들에게 미리 가폰에 대해 경고했지만, 그들은 그가 배신자라는 것을 믿으려 하지 않았다. 루텐베르크는 그들에게 반박할 수 없는 증거를 제공할 수 있다고 말했다. 루텐베르크의 “배신”에 대해 가폰이 지불해야 할 대가가 최종적으로 결정되는 마지막 만남에 가폰주의자 노동자들이 숨어 있기로 했다. 회의는 수도에서 멀지 않은 인적이 드문 별장에서 열렸다. 노동자들은 가폰의 진짜 역할을 확인하고 그의 정체를 대중에 공개하기 위해 회의가 열리고 있는 방과 인접한 방에 숨어있었다. 그러나 노동자들은 자제할 수가 없었다. 그들은 가폰의 배신을 확신하자마자 두 사람이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방으로 뛰어 들어갔다. 그들은 가폰에게 몸을 던져 그를 붙잡았다. 가폰이 무릎을 꿇고 과거의 이름으로 용서를 빌며 간청했음에도, 그들은 가폰을 잔인하게 살해했다. 그리고 그들은 밧줄을 그의 목에 걸고 천장에 매달았다. 이리하여 가폰의 개인적인 서사시는 끝이 났다. 대체로 진실된 그의 회고록에서, 가폰은 1905년 1월 9일 이전의 경찰과의 관계를 나름대로 정당화하려고 매우 어색하게 노력했다. 이 점에 대해서는 그가 모든 사실을 말하지 않은 것 같다. 하지만 운동에 대해서는 그 나름의 진실을 말했다. 1월 9일의 사건은 전국적으로 엄청난 반향을 불러왔다. 러시아의 가장 어두운 구석에 사는 사람마저도 차르가 평화롭게 왕궁에 온 사람들이 그들의 불행을 토로하는 말을 듣는 대신 냉혹한 총살 명령을 내렸다는 것을 알았다. 오랫동안 농촌에서는 대표를 선출하여 상트페테르부르크로 진실을 확인하기 위해 비밀리에 파견했다. 곧 모두가 그 사실을 알았다. 그제야 비로소 “차르 신앙”이 사라졌다. 이는 역사적인 역설이다. 1881년에 몇몇 혁명가들은 그 신앙을 죽이기 위해 차르를 암살했다. 하지만 그 신앙은 살아남았다. 그러나 24년 후, 그것을 죽인 것은 차르 자신이었다.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는 1월 9일의 행사가 파업을 확대시키는 효과를 가져왔다. 이는 곧 총파업이 되었다. 1월 10일 월요일에는 공장이나 조선소가 하나도 움직이지 않았다. 조용한 반란의 움직임이 사방에서 웅성거렸다. 상트페테르부르크 노동자들의 파업이라는 러시아 노동자들의 혁명적 파업은 분명한 사실이 되었다. 지금까지의 논의에서 중요한 결론을 도출할 수 있다. 사람들이 차르의 본성, 상황의 총체성, 투쟁의 진정한 목적을 이해하기 위해 그들은 유형적이고 광범위한 역사적 경험을 겪을 필요가 있다. 선전도, 열정적인 이들의 희생도 그 자체로 이런 결과를 초래할 수는 없다. *** 소비에트의 탄생 이제 우리는 러시아 혁명의 가장 중요한 국면 중 하나, “소비에트”의 탄생과 최초의 활동에 도달한다. 역설적으로 이것은 러시아 혁명의 여러 측면 중 가장 이해도가 낮고 가장 자주 왜곡된 측면 중 하나이다. 오늘날까지 “소비에트”의 기원에 대해 쓰인 모든 문건에는 - 외국뿐 아니라 러시아 문서에도 - 관심 있는 독자들마저 알아채지 못할 비약이 있다. 첫 노동자들의 “소비에트”가 언제, 어디서, 어떻게 형성되었는지 정확하게 판단하지 못하고 있다. 오늘날까지 거의 모든 작가들과 역사가들, 부르주아뿐 아니라 사회주의자(“멘셰비키” · “볼셰비키” 등)들은 1905년 말, 10월 총파업 당시, 잘 알려진 10월 17일의 차르의 선언문 및 그 이후의 사건들과 최초의 “노동자 소비에트”의 기원을 연계하여 설명해 왔다. 다음 페이지를 읽음으로써 독자는 이 간극이 발생한 이유를 이해할 것이다. P. 밀류코프(Pavel Nikolayevich Milyukov)의 회고록을 포함한 몇몇 작가들은 1905년 초에 미래의 “소비에트”의 선구자가 있었음을 암시했다. 그러나 그들은 어떤 정확한 세부 사항도 밝히지 못하고 있다. 그리고 그들이 제시한 모든 세부사항들은 틀렸다. 밀류코프는 “치들로프스키 위원회(Chidlovski's committee)”에서 소련의 기원을 발견했다고 믿는다. 이 위원회는 정부와 자유주의자들이 공동으로 설립한 공식 기구로, 1905년 1월에 노동자를 대표하는 공식 대표들의 협력으로 특정 사회 문제를 해결하려고 노력했지만 허사였다. 밀류코프에 따르면 대표단 중 한 명인 노사르(Georgii Stepanovich Khrustalev-Nosar)라는 이름의 지식인이 다른 대표단과 함께 위원회의 막바지에 “소비에트(최초의 노동자 소비에트)”를 결성했고, 노사르는 이 소비에트의 의장이자 정신적 지도자가 되었다고 한다. 이것은 막연하다. 그리고 무엇보다 그것은 부정확하다. 우리가 보여줄 것처럼 노사르가 “치들로프스키 위원회”에 등장했을 때, 그는 이미 이 “위원회” 이전에 결성된 첫 번째 노동자 소비에트의 구성원이었으며 또한 의장이었다. 다른 작가들도 비슷한 실수를 저질렀다. 사회민주당은 때때로 자신들을 첫 번째 소비에트의 진정한 선구자로 내세운다. 볼셰비키들은 종종 그들로부터 이 명예를 훔치기 위해 최선을 다한다. 그들 모두가 틀렸고, 아주 단순한 진실을 외면하고 있다. 어떠한 당도, 하나의 상설 조직도, 한 “지도자”도, 첫 번째 소비에트의 개념을 만들지 않았다. 소비에트는 작고, 단순하고, 완전히 사적인 모임의 맥락에서 이루어진 집단적 합의의 결과로서 자발적으로 일어났다.[3] 여기서 독자가 발견할 자료는 이전에 출판되지 않았으며 “알려지지 않은 혁명”의 가장 기대되지 않았던 장 중 하나를 구성한다. 역사적 진실을 재구성할 시간이다. 이것은 이 진실이 상당히 시사적이기에, 재구성의 필요성은 더욱 시급하다. 신상발언을 용서해 주길 바란다. 1905년 말이 아니라 그해 1~2월,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결성된 첫 번째 "노동자를 대표하는 소비에트"의 탄생에 나는 무의식적으로 관여했다. 오늘날, 그 당시 행동에 참여했던 노동자 중 한 명이 아직 살아 있고 그 이야기를 할 수 있지 않는 한, 나는 아마도 이 역사적 사건을 재구하고, 연표를 그릴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일 것이다. 나는 이 사실들에 대해 여러 차례 서술하고 싶었다. 내가 러시아와 외국의 신문들을 공부할 때마다, 나는 항상 같은 간극을 발견했다. 어느 작가도 러시아에서 첫 노동자들의 소비에트가 어디서, 언제, 어떻게 나타났는지를 정확히 말할 지 못했다. 알려진 모든 것, 오늘까지 알려진 것은 이 소련이 1905년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태어났다는 것, 그리고 그 첫 번째 의장은 상트페테르부르크 법률 사무원 노사르라는 것이다. 그런데 이 소비에트에 대한 개념은 어디서 어떻게 생겨났을까? 왜 그것이 시작되었는가? 어떤 상황에서 채택되어 실행에 옮겼는가? 노사르가 의장이 된 배경은? 그는 어디서 왔으며, 어느 당에 속했는가? 첫 번째 소비에트에 있던 사람들은 누구였는가? 그것은 어떤 기능을 했는가? 역사적으로 중요한 이 모든 문제들은 해결되지 않은 채 남아 있다. 이 격차가 생기는 것은 분명히 이해할 수 있다. 첫 번째 소비에트 탄생은 완전히 사적인 사건이었다. 그것은 어떤 광범위한 캠페인이나 행동 밖에, 모든 사람들의 관심을 넘어, 매우 친밀한 분위기 속에서 일어났다. 독자는 간접적으로 내가 말하는 것을 증명할 수 있다. 러시아 혁명의 이 측면을 다룬 글에서 독자는 거의 우연히 언급된 노사르-흐루스탈레프의 이름을 발견할 것이다. 그러나 그는 또한 곤혹스러운 것을 발견할 것이다. 아무도 이 남자가 어떻게, 언제, 왜, 어떤 상황에서 그가 첫 번째 소비에트의 의장이 되었는지를 말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사회주의 작가들은 노사르에 대해 말해야 하는 것에 눈에 띄게 화가 나 있다. 그들은 그의 이름을 언급하고 싶지 않은 것 같다. (아무리 그러고 싶더라도)이 역사적 사실에 대해 침묵할 수 없는 그들은 노사르와 그의 역할에 대해 이해할 수 없고 부정확하게 몇 마디 중얼거리다가 레온 트로츠키가 상트페테르부르크 소비에트의 의장이 된 1905년 말부터 소비에트의 활동으로 비약한다. 이 재량, 짜증, 그리고 급박함도 쉽게 이해할 수 있다. 우선 일반적으로 역사학자나 사회주의자들(트로츠키 포함)이나 정당들 모두 소비에트의 진짜 기원에 대해 전혀 알지 못하고, 이를 인정하는 것은 의심할 나위 없이 짜증나는 일이다. 둘째로, 사회주의자들이 사실을 알게 되고 그것을 반영하고 싶어 한다 해도, 그들은 소비에트와 전혀 무관하며, 그들이 한 모든 것은 훨씬 후에 그것을 이용한 것뿐이라는 것을 인정해야 할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이 진실을 알든 모르든 그들은 이 사실을 슬그머니 넘기고 자신에게 유리한 그림을 그리기 위해 가능한 모든 방법을 동원할 것이다. 지금까지[4] 내가 이러한 사실들을 서술하지 못한 것은, 나 자신에 대한 글을 쓰는 것이 불편하기 때문이었다. 또한 내가 집필하던 “대중 언론”에서는 소비에트에 대해 쓸 기회가 없었다. 시간이 흘러가도 나는 소비에트의 기원에 대한 침묵을 끝내고, 오류와 신화에 맞서 싸우고, 진실을 밝히기로 결심할 수 없었다. 그러나 몇 년 전, 나는 한 기사의 가식적인 암시와 거짓말에 분개하여 프랑스 파리의 러시아 역사 학술지 발행인 M. 멜구노프(Nikolai Alexandrovich Melgunov)를 방문했다. 나는 순전히 서류상의 목적으로 그에게 첫 번째 노동자 소비에트의 탄생에 대한 상세한 설명을 제공했다. 나의 제안은 아무것도 이끌어내지 못했다. 첫째로 출판사가 내 글의 어떤 것도 바꾸지 않는다는 나의 조건을 받아들이지 않았고, 둘째로 그의 글이 공정한 역사 출판과는 거리가 멀었기 때문이다. 소비에트에 대해 말할 때 나는 알려진 사실을 이야기한다. 그리고 만약 언론이 관심이 있었다면, 여기서 진실을 발견할 수 있었을 것이다. 1904년에 나는 상트페테르부르크 노동자들 사이에서 문화와 교육 사업에 종사했다. 나는 나만의 방법에 따라 혼자 프로젝트를 수행했다. 나는 본질적으로 혁명적이었지만 어느 정당에도 속하지 않았다. 나는 겨우 22살이었고, 대학을 막 졸업했다. 연말이 되자 나는 백여 명의 노동자를 가르치고 있었다. 나의 제자 중에는 남편과 함께 가폰의 “모임” 하나에 속한 젊은 여자가 있었다. 내가 이 사실들을 언급한 예외 하나에 대해 짚고 넘어갈 필요가 있겠다. 세바스티앙 포르가 발표한 아나키스트 백과사전에서 “혁명” 항목 아래에 러시아 혁명에 대한 간략한 연구에서 “리볼루션”이라는 단어로 이러한 사실들을 언급했다. 그 후 파포레는 “진정한 사회 혁명”이라는 제목의 책을 출판했는데, 거기서 그는 백과사전에 나와 있던 몇몇 연구들을 다시 출판했다. 그러나 “일반 대중”은 자유주의 서적을 읽지 않기 때문에 인용된 사실들은 거의 알려지지 않았다. “모임.” 그때까지 나는 가폰이나 그의 ‘모임’에 대해 거의 들은 바가 없었다. 어느 날 저녁, 내 학생은 나를 동네 “모임”으로 데리고 가서 그것과 그 창시자에 관심을 갖기를 열망했다. 그날 저녁 가폰 자신이 회의에 참석하기로 되어 있었다. 그때 가폰의 진짜 역할은 아직 결정되지 않았다. 급진적인 노동자들은 “모임”이 합법적이고 정부의 지원으로부터 나왔기 때문에 그 프로젝트에 대해 완전한 신뢰를 가지지는 못했지만, 그들은 그것에 대한 그들만의 해석을 가지고 있었다. 사제의 다소 신비한 행동이 그들의 해석에 확신을 주었다. 그들은 합법성의 보호막 아래에서 가폰이 실제로 광대한 혁명 운동을 준비하고 있다고 믿었다.(이것이 많은 노동자들이 나중에 그 남자가 경찰 요원이었다고 믿으려 하지 않았던 이유 중 하나이다. 가폰의 정체가 확실히 노출되었을 때, 가폰의 친한 친구였던 노동자들 중 일부가 자살했다.) 12월 말에 나는 가폰을 만났다. 그의 성격은 나를 매료시켰다. 그는 내 교육 사업에 관심이 있는 것처럼 보였거나 아니면 관심 있는 것처럼 보이고 싶었던 것 같았다. 우리는 다시 만나서 더 길게 이야기하기로 합의했고, 이를 위해 가폰은 자신의 주소와 함께 면회 카드를 내게 주었다. 며칠 후 그 유명한 푸틸로프 공장 파업이 시작되었다. 그 직후(1905년) 1월 6일 저녁, 내 제자는 감정이 북받쳐 사건들이 매우 심각한 국면을 맞고 있다고 내게 말하게 되었다. 가폰은 수도 노동자 대중들의 거대한 움직임을 시작했으며, 그는 모든 구역을 방문하여 군중을 격려하고 그들을 1월 9일 일요일 겨울 궁전 앞에서 “탄원”을 제출하는데 함께하도록 조직하고 있었다. 그는 이미 이 탄원서를 썼고, 그 다음 날 저녁, 1월 7일 우리의 섹션에서 그 탄원서를 읽고 토론할 것이라고 말했다. 말도 안 되는 전술 같았다. 나는 상황을 평가해 보고 싶었기에 그 다음 날 저녁 그 섹션에 참석하기로 결정했다. 다음날 나는 섹션에 갔다. 어마어마한 추위에도 불구하고 많은 군중이 방과 거리를 가득 메우며 모여들었다. 사람들은 진지하고 조용했다. 노동자 외에도 지식인, 학생, 군인, 경찰 요원, 소규모 동네 상인 등 각계각층의 사람들이 있었다. 여자들도 많았다. 경비원은 없었다. 나는 방으로 들어갔다. 사람들은 가폰 신부가 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이윽고 그가 왔다. 그는 재빨리 단상으로 가서, 모두 서서 서로를 꽉 누르고 있는 군중들 사이로 나아갔다. 그 방에는 천 명이 있었을지도 모른다. 인상적인 정적이었다. 갑자기 거대한 모피 코트를 벗지도 않고 단추만 푼 채, 그의 캐석(cassock. 성직자의 평상시 외출복 - 역주)과 사제의 은 십자가가 보이게 하면서 퉁명스럽고 단호한 몸짓으로 커다란 겨울 모자를 벗고, 긴 머리가 떨어지도록 내버려둔 채, 가폰은 첫마디부터 주의 깊게 귀를 기울이며 떨고 있는 이 커다란 군중에게 청원서를 읽고 설명했다. 극도로 쉰 목소리에도 불구하고 - 그는 며칠 동안 쉬지 않고 자신을 혹사했다 - 엄숙하면서도 동시에 따뜻하고 눈에 띄게 진실된 그의 느린 연설은 그의 모든 간청과 호소에 대해 열광적으로 반응하는 이 모든 사람들의 가슴에 바로 꽂혔다. 그가 만들어낸 감정은 잊을 수 없는 것이었다. 어떤 사람은 막막하고 결정적인 일이 일어날 것이라고 느꼈다. 나는 내가 모든 장황한 이야기 동안 특별한 감정으로 떨었던 것을 기억한다. 겨우 말을 끝냈을 때, 가폰은 연단에서 내려와 몇 명의 충성스런 추종자들에게 둘러싸인 채 서둘러 떠나면서 바깥의 군중들이 들어와 탄원서가 그의 협력자 중 한 명이 다시 낭독되는 것을 들을 수 있도록 했다. 인파에 의해 그와 분리되어, 그가 서두르고, 초인적인 노력에 의해 흡수되고, 지치고, 또한 친구들에게 둘러싸여 있는 것을 보고, 나는 그에게 굳이 접근하려고 하지 않았다. 게다가 이것은 무의미했을 것이다. 나는 제자가 내게 말한 것이 사실이라는 것을 이해했다. 엄청난 대중들의 움직임, 중요한 운동이 시작되고 있었다. 나는 1월 8일 다음 날 저녁에 다시 한 번 그 구역에 갔다. 나는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보고 싶었다. 그리고 나는 주로 대중들과 접촉하고 싶었고, 그들의 행동에 참여하고 싶었고, 나 자신의 행동에 형태를 부여하고 싶었다. 학생 몇 명이 동행했다 섹션에서 찾아낸 것들이 내가 해야 할 일을 지시했다. 우선 다시 한 번 거리에 모인 군중을 보았다. 나는 그 모임의 한 멤버가 “청원”을 읽고 있다고 들었다. 기다렸다. 몇 분 후 문이 힘차게 열렸다. 천 명쯤 되는 사람들이 방을 나갔다. 또 천 명이 달려들었다. 나는 그들과 함께 들어갔다. 문이 닫히자마자 플랫폼에 앉아 있던 가폰주의자 노동자가 탄원서를 읽기 시작했다. 아아! 그것은 끔찍했다. 힘없고 단조로운 목소리로, 영혼 없는 목소리로, 조금도 설명하거나 결론을 내지 않고, 그 남자는 주의 깊고 불안한 군중 앞에서 글을 중얼거렸다. 그는 지루한 강의를 10분 만에 끝냈다. 그러고 나서 그 방은 또 천 명을 받기 위해 비워졌다. 나는 친구들과 잠깐 상의했다. 우리는 결정했다. 나는 무대를 향해 돌진했다. 그날까지 나는 대중 앞에서 말한 적이 없었다. 그러나 나는 망설이지 않았다. 민중에게 알리고 교육하는 방식을 바꾸는 것은 절대적으로 필요한 일이었다. 나는 다시 한 번 자기 의무를 다할 준비를 하고 있는 노동자에게로 올라갔다. “정말 피곤해 보이네요. 제가 대신할 수 있을까요?”라고 그에게 말했다. 그는 놀란 눈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그는 당황했다. 그가 나를 본 것은 처음이었다. “두려워하지 마세요.” 하고 나는 말을 이었다. “저는 가폰의 친구입니다. 여기 증거가 있어요.” 그리고 가폰의 방문 카드를 보여 주었다. 친구들은 나를 지지했다. 그 남자는 마침내 굴복했다. 그는 일어나서 내게 청원서를 주고 연단을 떠났다. 나는 즉시 읽기 시작했고, 문건을 해석했고, 특히 중요한 문구와 시위와 요구를 강조하면서, 차르가 이를 거부할 것이라 확신을 가지고 이야기했다. 나는 아주 늦은 밤까지 탄원서를 몇 번이나 읽었다. 나는 몇몇 친구들과 함께 모임에서 잤다. 다음날, 그 유명한 1월 9일 아침, 나는 청원서를 한두 번 더 읽어야 했다. 그리고 우리는 거리로 나갔다. 거대한 군중이 첫 신호에 출발할 준비를 하고 그곳에서 우리를 기다렸다. 9시에 내 친구들과 나는 팔짱을 끼고, 첫 3열에서 군중을 선동하여 따라오도록 하면서 궁전 쪽으로 출발했다. 군중이 줄지어 우리를 따라왔다. 우리는 광장이나 궁전 어느 쪽에도 결코 도달하지 못했다. 억지로 네바강을 건너게 된 우리는 소위 “트루이스키” 다리의 접근로에서 군대의 벽에 부딪혔다. 몇 차례 실효성 없는 경고 후에, 군대는 총격을 가하기 시작했다. 두 번째 총격은 특히 살인적이었다. 군중들은 멈춰 서서 흩어졌고 약 30명의 사망자와 두 배의 부상자가 발생했다. 많은 군인들이 공중으로 발사했다는 것을 언급해야 한다. 군대가 마주보고 있는 집들의 상층부에 있는 많은 창문들이 총알에 의해 산산조각이 났다. 며칠이 지났다. 상트페테르부르크의 파업대오는 거의 온전하게 남아있었다. 이 엄청난 파업이 자발적으로 일어났다는 것을 강조해야 한다. 그것은 어느 정당이나 어떤 노동조합 조직(당시 러시아에 노동조합이라는 것은 없었다)이나 어떤 파업 위원회에 의해서도 시작되지 않았다. 그들 자신의 주도와 완전히 자유로운 추진력으로, 노동 대중은 공장과 조선소를 비웠다. 각 정당은 자신들 늘 해오던 대로 그 운동을 이용하는 것조차 할 수 없었다. 그들은 완전히 무시당했다. 노동자들은 곧 다음과 같은 질문에 직면했다. 이제 무엇을 할 것인가. 가난이 파업자들의 문을 두드렸고, 그것에 지체 없이 대응해야만 했다. 한편, 도처에 있는 노동자들은 어떻게 투쟁을 계속해야 하고 또 할 수 있는지를 물었다. 지도자를 빼앗긴 “모임”은 거의 무력하게 변했다. 정당은 살아 있는 기색을 보이지 못했다. 그렇기에 그 행동을 조정하고 이끌어갈 기구가 시급히 필요했다. 나는 이 문제가 수도의 다른 지역에서 어떻게 제기되고 해결되었는지 모른다. 아마도 “모임” 중 일부는 그들 지역의 파업자들에게 최소한 물질적인 원조를 제공할 수 있었을 것이다. 내가 살던 구역에서는 사건들이 특정한 방향으로 반전하였다. 그리고 독자들이 보게 될 것처럼, 그들은 후에 대중투쟁으로 이어졌다. 우리 집에서는 매일 노동자 40여 명이 회의를 열었다. 경찰은 한동안 우리를 그냥 내버려두었다. 최근의 사건 이후 경찰은 불가사의한 중립을 지켰다. 우리는 이 중립성을 이용했다. 우리는 행동할 방법을 찾았다. 우리는 몇 가지 결정을 내리려고 했다. 내 학생들과 나는 우리 학습모임에 종지부를 찍고 보다 적극적으로 활동하기 위해 각 정당에 개별적으로 가입하기로 했다. 우리 모두는 그 사건을 혁명의 시작이라고 생각했다. 1월 9일 이후 8일쯤 지난 어느 날 저녁, 누군가가 내 방의 문을 두드렸다. 오직 나뿐이었다. 키가 크고 개방적이며 공감하는 태도를 가진 한 젊은이가 들어왔다. “당신이 아무개 씨요?” 하고 그는 물었다. 내가 고개를 끄덕이자 그는 이렇게 말을 이었다. “당신을 오랫동안 찾아다녔소. 어제가 되어서야 당신의 주소를 알게 되었지. 나는 법률사무원인 게오르기 노사르요. 이곳에 온 이유를 말하겠소. 1월 8일에 당신이 청원서를 강독하는 것을 들었소. 당신은 노동자 서클과 많은 관계를 가지고, 많은 동료들이 있는 것 같아 보였고, 어떠한 정당에도 속하지 않은 것 같았소.” “맞습니다.” “글쎄요, 저도 정당에 속해 있지 않고, 그들을 믿지 않아요. 하지만 저는 개인적으로 혁명적인 사람이고, 노동자들의 움직임에 공감합니다. 하지만 아는 노동자가 없어요. 반면에 저는 정권에 반대하는 부르주아 자유주의자들과 광범위한 접촉을 가지고 있지요. 그래서 말인데 좋은 생각이 있습니다. 수천 명의 노동자와 그들의 아내, 그리고 아이들이 파업으로 인해 끔찍하게 고통 받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반면에, 저는 이런 비참한 사람들을 돕는 것을 좋아할 부유한 사업가들을 알고 있지요. 간단히 말해서, 저는 파업 대오를 위해 꽤 많은 돈을 모을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문제는 어떻게 하면 조직적이고 공정하며 유용한 방법으로 그것들을 분배할 수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난 당신을 떠올렸습니다. 당신이 알고 있는 몇몇 노동자들이 내가 가져올 수 있는 돈을 받는 일을 맡아 줄 수 있습니까? 그리고 1월 9일의 파업대오와 희생자 가족들에게 나누어 줄 수 있습니까?" 나는 즉시 승낙했다. 내 친구들 중에는 사장의 수레에 접근할 수 있는 노동자가 있었는데, 그것을 노동자들을 방문하여 구호품을 나누어 주는 데 사용할 수 있었다. 나는 다음날 저녁에 친구들과 모였다. 노사르가 거기 있었다. 그는 이미 수천 루블을 가지고 왔다. 우리의 행동은 바로 시작되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우리의 하루는 이 작업에 바쳐져야 했다. 저녁에 나는 노사르로부터 필요한 자금을 받아 들였고, 방문 일정을 준비했다. 그리고 다음날 아침, 친구들의 도움을 받아 파업 노동자들에게 돈을 나누어 주었다. 노사는 이리하여 나를 찾아온 노동자들과 면식을 쌓았다. 그러나 파업은 끝나가고 있었다. 매일 몇몇 노동자들이 직장으로 복귀했다. 동시에 자금은 바닥나고 있었다. 그러자 다시 심각한 의문이 떠올랐다. 무엇을 해야 하나? 어떻게 하면 행동을 계속할 수 있을까? 그리고 그것은 지금 어떤 형태를 취할 수 있을까? 공동의 활동을 계속하지 않고 영원히 분리될 것이라는 전망은 고통스럽고 무의미해 보였다. 우리가 개별적으로 정당에 가입하기로 한 결정은 더 이상 우리를 만족스럽지 않았다. 우리는 다른 것을 원했다. 노사르는 정기적으로 우리의 토론에 참여했다. 어느 날 저녁, 우리 집에 노동자 몇 명과 노사르가 모여 있을 때, 우리는 상설 노동자 조직을 결성하자는 생각을 나누었다. 이를테면 위원회나 협의회 같은 것이었다. 이를 통해 사태를 올바르게 따라가고, 모든 노동자들 사이에 연결고리 역할을 하고, 필요하다면 그들에게 상황을 알리며, 혁명적인 노동자들의 집결지가 될 수 있을 것이었다. 나는 우리가 이 생각을 어떻게 떠올렸는지 정확히 기억나지 않는다. 그러나 그것을 제안한 것은 노동자 자신이었다고 생각한다. 러시아어로 정확히 평의회를 뜻하는 소비에트라는 단어는 이 특정한 의미와 함께 처음으로 발음되었다. 간단히 말해서, 이 첫 번째 협의회는 노동자들의 상설적인 사회적 집회소와 같은 것이었다. 그 제안은 채택되었다. 그리고 거기서 “소비에트”가 어떻게 조직되고 기능할 것인가가 결정되었다. 그 프로젝트는 급속히 성장했다. 모든 대공장 노동자들에게 새로운 협의회의 창설과 노동자 대표단 협의회(소비에트)로 명명된 조직의 간부들을 선출하기 위한 선거를 알린다는 결정이 이루어졌다. 그러나 또 다른 질문이 쏟아졌다. 누가 소비에트의 일을 지휘하는가? 누가 지휘하고 지도하겠는가? 그곳에 있던 노동자들이 주저 없이 이 자리를 내게 제의했다. 노동자들이 나에게 보여준 신뢰에 감동하였음에도 불구하고 나는 그들의 제의를 거절했다. 나는 동료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당신들은 노동자다. 당신들은 노동자로서 당신의 이익을 다룰 기구를 만들고 싶어 한다. 그렇다면 처음부터 스스로 문제를 해결하는 법을 배워라. 당신들 중 하나가 아닌 사람에게 운명을 맡기지 마라. 새로운 주인을 만들지 마라. 그들은 결국 당신들을 지배하고 배신하게 될 것이다. 나는 당신의 투쟁과 해방과 관련된 모든 일에서 당신 자신만이 진정한 결과에 도달할 수 있을 것이라고 확신한다. 당신들 스스로를 제외하고는 아무도 당신들을 위하거나 당신들을 대신해서 아무것도 하지 않을 것이다. 당신은 당신들 중에서 의장, 서기, 그리고 당신의 행정 위원회 멤버들을 찾아야 한다. 요컨대 어느 정도의 교육을 전제로 하는 지적이나 도덕적인 조언이 필요하다면 지식인, 교육받은 사람들에게 의지할 수 있다. 그들은 당신을 지배하거나 조직에 간섭하지 않고 도움을 줄 수 있을 것이다. 필요한 교육을 빼앗긴 것은 당신의 잘못이 아니기 때문에, 그들은 당신들에게 이 도움을 줄 의무가 있다. 이런 지식인 동료는 여러분의 모임에도 참석할 수 있지만 오직 조언만을 해야 할 것이다." 나는 또 한 번 이의를 제기했다. “노동자도 아닌데, 내가 어찌 이 조직의 일원이 될 수 있는가? 어떤 방법으로 들어갈 수 있을까?” 이 마지막 질문에 대한 대답으로 나는 아주 쉽다는 말을 들었다. 그들은 나를 위해 노동자 등록증을 발급할 것이고, 나는 다른 이름으로 그 조직에 참여하면 될 것이라고 했다. 나는 그런 절차에 거세게 항의했다. 나는 그것이 나와 노동자들에게 가치 없을 뿐 아니라 위험하고 역겹다고 생각했다. “노동자 운동에서는 모든 것이 솔직하고 정직하며 성실해야 한다.” 그러나 나의 제안에도 불구하고 내 동료들은 스스로가 “지도指導” 없이 무언가를 할 수 없을 만큼 강하다고 느끼지 못했다. 그래서 그들은 미래의 볼셰비키 정치위원 트로츠키에게 소비에트에 들어올 것을 제안하고 서기로 지명했다. 이후 흐루스탈레프-노사르가 체포되자 트로츠키는 의장이 되었다. 1905년 1월 상트페테르부르크의 노동자들이 제시한 예시를 따라 여러 다른 도시의 노동자들이 같은 조직들을 만들었다. 노동자들의 소비에트가 여기저기서 형성되었다. 그럼에도 그 당시 그들의 존재는 일시적이었다. 그들은 빠르게 지역 당국에 의해 발견되고 억압되었다. 반면 우리가 본 바와 같이 상트페테르부르크 소비에트는 오랜 기간 동안 계속 기능했다. 1월 9일의 사건이 있었기에, 특히 러일 전쟁에서의 큰 좌절 이후에는, 중앙 정부는 감히 그것을 건드리지 못했다. 당분간 그들의 탄압행위는 노사르의 체포에 국한되었다. 게다가 1월 파업은 그 자체의 추진력 부족으로 끝이 났었다. 보다 광범위한 움직임이 없는 이상, 첫 번째 소비에트의 활동은 곧 하찮은 일로 전락할 것이었다. 상트페테르부르크 소비에트는 1905년 말에 마침내 진압되었다. 차르 정부는 1905년 혁명운동의 마지막 흔적을 “청산”했다. 트로츠키뿐 아니라 수백 명의 혁명가들을 체포하고 모든 좌익 정치조직들을 파괴했다. 상트페테르부르크의 소비에트는 1917년 2월 3일의 결정적인 혁명 당시 다시 나타났다. 이때는 러시아의 모든 도시와 주요 지역에 소비에트가 형성되었다. *** 재앙적 전쟁; 혁명적 파업의 승리 1905년 1월의 사건들이 일으킨 파도는 당장 잠잠해지지 않았다. 이번에는 온 나라가 들썩였다. 1905년 봄부터 차르 정권의 전반적인 상황은 점점 더 불안해졌다. 그 주된 이유는 러시아가 러일 전쟁에서 겪은 쓰라린 패배였다. 오만에 근거하여 1904년 2월에 시작된 이 전쟁은 민족주의, 애국주의, 군주주의 감정을 자극하기 위한 목적으로 크게 전개되어 절망적으로 패배했다. 러시아 군대와 함대는 완패했다. 여론은 공개적으로 당국의 무능과 정권의 퇴폐를 실패의 원인으로 지목했다. 많은 노동자들뿐만 아니라 다른 계층들도 점점 커져가는 분노와 반란의 정신에 빠르게 사로잡혔다. 연달아 이어진 패배의 효과는 압도적이었다. 사람들은 더 이상 감정을 억제할 수 없었다. 분노는 한계를 몰랐고, 동요는 널리 퍼졌다. 패배를 자각한 정부는 묵묵부답이었다. 이런 상황을 틈타 자유주의 그룹과 혁명적 그룹에서는 정권에 대한 폭력투쟁을 시작했다. 사람들은 언론과 발언의 자유가 공인되기를 기다리지 않고 실행했다. 그것은 진정한 “정치적 자유”를 위한 전쟁이었다. 모든 조류의 글, 심지어 혁명적인 글까지도 검열이나 통제 없이 나타나서 자유롭게 팔렸다. 정부와 전체 시스템이 맹렬한 비난을 받았다. 소심한 자유주의자들조차 행동에 나섰다. 그들은 수많은 노동조합들을 설립했다. 이를테면 “노동조합 연합” (모든 노조의 활동을 지휘하는 중앙 위원회의 한 종류), 비밀조직인 “해방노동조합” (정치 조직)등이었다. 그들은 또한 “제헌민주당”이라는 정당을 정식으로 조직하기 위해 서둘렀다. 정부는 이미 1월 파업과 소비에트를 묵인하고 있었기 때문에 이 모든 것을 용인할 수밖에 없었다. 정치적 암살은 꼬리를 물고 가속적으로 일어났다. 폭력시위, 심지어 심각한 봉기가 여러 도시에서 일어났다. 어떤 곳에서는 사람들이 바리케이드를 쳤다. 각 지방에서는 농민들이 반란을 일으켜 실제의 “재커리”(농민 반란)를 터뜨리고, 성을 불태우고, 토지를 전용하고, 토지 소유자들을 쫓아내거나 심지어 암살하기도 했다. 사회주의 의제를 가진 농민연합이 결성되었다. 정권의 적들은 너무 많아졌고 또한 대담해지고 있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그들이 옳았다. 정부의 군사적 패배와 고통스러운 “도덕적” 상황이 모든 이유가 되지는 못한다. 그러나 그들은 이 운동을 억압하기 위한 가장 중요한 수단인 자금이 부족하다는 이유는 구성한다. 국채 확보를 목적으로 해외(주로 프랑스)에서 벌어지고 있는 협상은, 차르 정권에 대한 신용 부족으로 끝없이 질질 끌었다. 1905년 여름 동안 육군과 해군에서 심각한 문제가 발생했다. 흑해 해군의 주요 부대 중 하나인 전함 포템킨의 잘 알려진 반란의 그 훌륭한 예시다. 체제붕괴의 마지막 저지선인 군대가 무너지기 시작했다. 이번에는 온 나라가 점점 더 단호하게 차르체계에 맞서기 시작했다. 1905년 8월, 여러 가지 압력에 굴복한 황제는 사후적이지만(또한 위선적이지만) 현실을 인정하고 특정한 “자유”를 인정하기로 결정했다. 또한 매우 제한된 권리와 극도로 제한된 선거권에 근거한 국회(이하 “두마[дума]”)를 소집하겠다고 약속했다. 내무부 장관인 불리긴(Alexander Bulygin)은 이번 선거를 준비하고 집행할 역할을 맡았다. 그러나 이 매우 소심하며 위선적인 행보는 어느 누구도 만족시키지 못했다. 선동과 반란은 계속되었고 “불리긴의 두마”라고 불리는 이 “두마”는 결코 형성되지 않았다. 불리긴은 부득이하게 “자진사퇴”하도록 강요받았고, 이 역할은 비테(Count Sergei Yulyevich Witte)가 계승하여 니콜라이 2세로부터 보다 의미 있는 양보를 받아내는데 성공했다. 한편 정부의 복지부동함 및 누구나 아는 불능상태는 반정부세력과 혁명세력에게 용기를 주었다. 10월 초부터 사람들은 전국적 규모의 총파업이 혁명의 서막을 열 것이라고 말하고 있었다. 러시아 전체를 아우르는 이 파업은 10월 중순에 일어났다. 그것은 1월의 파업보다 덜 자발적이었다. 소비에트, “노동조합 연합”, 그리고 주로 수많은 파업 위원회는 오래 전부터 이 파업을 예상하고 미리 준비하고 조직하였다. 공장, 조선소, 작업장, 창고, 은행, 행정 사무실, 철도 및 기타 모든 교통수단, 우체국 및 전신국 - 모든 것이, 절대적으로 완전히 중단되었다. 그 나라의 생명은 정지되었다. 정부는 설 자리를 잃고 굴복했다. 10월 17일, 차르는 잘 알려진 “10월 17일의 선언”이라는 선언문을 발표했는데, 이 선언문에서 그는 엄숙하게 모든 정치적 자유를 부여하고 가능한 한 빨리 대표회의 일종인 “국가두마(Госуда́рственная ду́ма, The State Duma)”를 소집하기로 결정했다고 선언했다.(두마라는 용어는 차르를 돕기 위해 설치된 국가회의나 귀족[보야르] 회의였던 두마보야르스카야에서 비롯되었다. 이후 16세기와 17세기에 여러 계급의 대표자의 회의인 젬스카야 두마가 있었다. 마지막으로 이 글에서 서술하고 있는 시기에, “고로드스카야 두마”는 “도시 위원회”를 의미했다) 선언문에 따르면 이 두마는 정부를 돕기 위한 기구였다.) 한마디로, 입헌군주제에 대한 모호한 약속이었다. 몇몇 서클들은 그것을 진지하게 여겼다. 그와 거의 동시에 “10월 17일 연합”이라는 정당이 나타나 선언문에서 발표한 개혁을 수용하고, 적용하고, 옹호하겠다고 선언했다. 사실 차르 정부의 이 행위는 “헌법”과는 상관없는 두 가지 목적을 가지고 있었다. 1. 해외에서 효과를 내기 위해 혁명이 끝났고, 정부는 그 상황에 대한 지배력을 되찾았다는 인상을 만들어서 여론, 특히 프랑스 금융계의 여론에 영향을 미쳐서 대출 협상을 부활시킨다. 1. 대중을 속이고, 그들을 진정시키고, 혁명을 향한 길을 막는다. 이 두 가지 목표가 실현되었다. 파업은 끝났고, 혁명의 기운은 깨졌다. 해외에서 조성된 인상은 완전히 호의적이었다. 이 모든 것에도 불구하고 차르 정부는 혁명을 진압할 만큼 여전히 강한 것으로 보였다. 대출도 허가되었다. 혁명당들이 그 모험에 흥분하지 않았다는 것을 명백히 해야 한다. 그들은 선언을 단순한 정치 공작으로 보고 이를 즉시 노동 대중에게 설명하기 시작했다. 게다가 노동자들은 조금 이상한 상태였다. 그들은 확실히 만족을 얻은 듯이, 자신만만한 듯이 파업을 끝냈다. 그러나 파업이 끝났다는 사실은 단순히 혁명에 추동력이 부족하고 아직은 때가 아니라는 신호였다. 진정한 만족의 표정은 없었다. 국민들은 “새로운 권리”의 사기행각을 인지했고, 이를 서둘러 사용하지 않았다. 이것은 금방 증명되었다. 차르의 “선언문”이 걸려있는 성벽 아래에서는, “승리”와 차르가 약속한 “새로운 체제”를 기념하기 위해 조직된 평화적인 공개 시위가 경찰에 의해 분산되었고 유대인이 집단학살 당하고 있었다. *** 혁명의 패배; 요동에 대한 평가 1905년 말, 프랑스 부르주아지는 융자에 찬성했고, 재정부는 그것을 허가했다. 이 “수혈”은 빈사상태의 차르 정권을 구했다. 게다가 정부는 굴욕적이지 않은 평화 조약으로 전쟁을 끝내는 데 성공했다. 그 시점부터 반동세력이 돌아왔다. 그들은 인민의 눈앞에 아름다운 미래를 내걸면서 혁명에 저항했다. 이와 별개로 혁명은 스스로 숨을 죽였다. 10월 파업은 당시로써 최대의 노력이자 최고점이었다. 지금 그것이 필요한 것은 “숨을 쉬고”, “휴지기”를 가지는 것이었다. 게다가 좌파가 다수인 두마의 자극을 통해, 추후의 반등을 기대할 수도 있었다. 그 동안에 차르가 그의 선언문을 통하여 약속했던 인민 자유의 회복은 철저히 억압되었다. 정부는 다시 혁명 언론을 불법으로 만들고, 검열을 다시 시작하고, 대량 체포를 진행하고, 손에 닿는 곳에 있는 모든 노동자조직이나 혁명조직을 청산하고, 소비에트를 탄압하고, 노사르와 트로츠키를 투옥하고, 주요 폭동이 일어난 지역에 군대를 파견하여 가혹한 대숙청의 예시를 보여주었다. 군과 경찰은 더욱 강화되었다. 그러나 정부가 감히 건드리지 못한 것이 하나 남아 있었는데, 그것은 곧 소집될 두마였다. 이 모든 반동에도 불구하고, 혁명세력은 반동세력의 고집스러움에 대응하는 두 번의 궐기를 만들어냈다. 첫 번째는 슈미트(Pyotr Petrovich Schmidt) 소령의 지휘 아래 일어난 흑해함대의 또 다른 반란이었다. 그 소요는 진압되었고 슈미트는 총살되었다. 두 번째는 1905년 12월 모스크바 노동자들의 무장 폭동이었다. 그것은 며칠 동안 정부군에 대항했다. 이를 종식시키기 위해 정권은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병력을 들여왔고 포병부대까지 불러들였다. 이 폭동이 일어나고 있는 동안, 전국적으로 새로운 총파업을 일으키려는 시도가 있었다. 만약 이 파업이 일어났더라면 폭동은 승리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번에는 사전조직이 10월의 그것과 비슷했음에도 불구하고, 필요한 추진력은 빠져 있었다. 파업은 총파업으로 불붙지 않았다. 우편 뿐 아니라 철도도 그대로 기능했다. 정부는 군대를 수송할 수 있었고 모든 곳에서 상황을 통제할 수 있었다. 혁명이 숨을 죽였다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었다. 결국 1905년 말에 폭풍은 장애물을 넘지 못하고 잦아들었다. 하지만 그것은 중요하고 없어서는 안 될 일을 수행했다. 그것은 지형을 휩쓸고 준비했다. 그것은 그 나라의 삶과 인구의 정신에 영구적인 흔적을 남겼다. 격동기의 최종적 “대차대조표”를 검토해 보자. “대변”에는 무엇이 있을까? 구체적으로 두마라는 결과가 있었다. 두마는 충분히 광범위한 선거권을 바탕으로 만들어졌다. 그리고 이는 러시아 사회가 과하게 끔찍하거나 혹은 너무 급격한 절망에 빠지지는 않을 수 있게 할 것이었다. 두마 또한 “숨을 고르고”, “휴지기”를 가질 필요가 있었다. 전 인민이 두마에게 큰 기대를 걸었다. 1906년 봄을 맞아 실시된 총선에는 전국에서 열띤 선거전이 펼쳐졌다. 모든 정당들이 거기에 참여했다. 이런 국가정세가 빚어낸 상황은 충분히 역설적이었다. 좌파 정당들이 선거 선전을 공공연히 합법적으로 확산시키는 동안(정부가 이에 개입하려면 새로운 규정을 만들거나 교활한 함정을 쳐야만 했다) 교도소는 운동을 청산할 당시 체포된 같은 정당의 당원들로 붐볐고, 언론은 여전히 벙어리마냥 입을 다물고 있었으며, 노동자의 조직은 여전히 금지되어 있었다. 하지만 단지 표면적으로 역설적일 뿐, 쉽게 설명할 수 있다. 이 설명은 또한 정부가 두마가 어떻게 기능하리라 예측했는지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될 것이다. 선거 때문에 인민들에게 일정한 자유를 주어야 했음에도 불구하고 정부는 두마가 절대주의에 반할 것이라고 보지 않았다. 정부가 보기에 두마의 역할은 협의와 보조만을 하는 하부 기관으로서 일부 업무에서 관료들을 돕는 것에 지나지 않았다. 좌파 정당들의 선거 선전을 어느 정도 용인해야 했지만 그것도 일정 수위로 한정되었고, 정당이나 유권자, 두마 자체가 반항적인 태도를 취하려는 어떤 시도에 대해서도 대응했다. 두마는 혁명과 아무런 관련이 없었기 때문에 정부가 혁명가를 감옥에 가둔 것은 전혀 역설적이지 않았다. 러시아에 새롭게 등장한 또 다른 구체적인 변화는 다양한 합법 정당들의 구성이었다. 1905년의 사건까지 러시아에는 비밀스럽고 “정치적”이라기보다는 혁명적인 두 정당만이 있었다. 이들은 사회민주당과 사회혁명당이었다. 10월 17일 선언과 이에 따라 주어진 약간의 자유, 그리고 무엇보다 선거운동 자체가 완전히 새로운 합법 · 준합법 정당들을 낳았다. 어용 왕당파들은 극단적으로 반동적이고 “대학살 지지자” 정당인 “러시아 국민 연합”을 만들었는데, 그들의 “공약”은 “두마를 포함하여 범죄적 봉기의 압력에 의해 약속된 모든 것”을 억압하고 1905년의 사건들의 마지막 흔적을 완전히 없애는 것이었다. 조금은 덜 격렬하게 반동세력, 즉 대다수의 고위공무원, 대공장주, 은행가, 귀족, 사업가, 지주들이 우리가 이미 언급한 “10월 17일 연합” 주위에 모였다. 이 두 우익 정당의 정치적 입지는 미미했다. 그들은 그저 웃음거리에 불과했다. 대다수의 부유층과 중산층, 저명한 지식인들은 우로는 “10월 17일 연합”에 가깝고, 좌로는 공화주의적 성향까지 표출한 중도파의 거대 정당에 당적을 두었다. 다수당의 프로그램은 절대주의를 종식시키는 헌법 체계를 두고, 군주의 권력을 크게 제한한 채 유임하는 계획을 제안했다. 그들은 “입헌민주당(약칭 “카데트당”)”이라는 이름을 가져갔으며, “국민자유당”이라고도 불렸다. 그 지도자들은 주로 지방 자치 단체, 변호사, 의사, 학자들로 구성되었다. 상당한 자금에 접근할 수 있고, 큰 영향력과 입지를 가진 이 정당은 창당한 순간부터 광범위하고 활기찬 활동을 펼쳤다. 극좌파에는 “사회민주당”(굳건한 공화주의 이행계획과 혁명적 전술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선거운동은 다소 개방적이고 합법적이었다)과 마지막으로 “사회혁명당”(농민 문제를 제외하면 그들의 계획과 전술은 사회민주당의 그것과 다르지 않았다)이 있었다. 두 당은 두마에서의 자유로운 행보를 위해 “노동당”(이후 별도의 정당이 되었다)이라는 이름으로 출마하고 선거운동을 진행하였다. 이 두 당은 두말할 나위 없이 주로 노동자, 농민, 지식인의 광범위한 계층을 대변하였다. 이쯤에서 이 정당들의 계획과 사상을 검토하고 가도록 하자. 정치적 문제를 제외하면 모든 정당의 계획 중 가장 중요한 부분은 의심의 여지없이 농민 문제였다. 그것은 긴급하고 효과적인 해결책을 요구했다. 1861년의 농노해방 이래 농민인구는 급격히 증가하였고, 1인당 토지면적은 급격히 축소되어 농민들은 기근에 시달리고 있었다. 농민들은 “닭 한 마리가 뛰어다닐 땅도 없다”고 말하고 있었다. 이 문제에 대한 공정하고 효과적인 해결을 바라는 다수의 농민들이 점점 더 조바심을 내며 기다리고 있었다. 모든 정당들은 그 문제의 중요성을 알고 있었다. 시간이 흐르면서 다음 세 가지 대안이 제시되었다. 1. 입헌민주당은 대지주와 국가의 토지 일부를 농민에게 양도함으로써 농토를 확대하자고 제안하였다. 농민들이 국가의 원조를 받아 공식적이고 “공정하게” 매겨진 토지대를 점진적으로 지불하게 하자는 제안이었다. 1. 사회민주당은 농민들이 필요로 하는 토지를 무상으로 양도할 것을 제안했다. 토지는 국가의 자산이며 필요에 따라 분배될 수 있어야 한다(토지의 “국유화” 또는 “공유화”). 1. 사회혁명당은 가장 급진적인 해결책을 제시했다. 개인 소유주의 손에 있는 모든 토지를 즉각적이고 완전하게 몰수하고, 모든 부동산을 압류하며, 그 토지는 국가의 통제 하에, 농민집단에게 분배하자는 것이었다.(토지의 “사회화”). 두마는 다른 일을 하기 전에 이 급하고 복잡한 문제를 처리해야 했다. 이 시기 극좌파 양당(사회민주당과 사회혁명당)의 일반 이념에 대하여 간략하게 다룰 필요가 있겠다. 1900년경에는 이미 러시아 사회민주당 중심부에서 주요한 견해의 차이가 나타났다. 그것의 “최소계획”을 고수하는 일부 당원들은 다가오는 러시아 혁명은 부르주아 혁명이 될 것이며 그 결과는 비교적 온건할 것이라고 주장했다. 이러한 사회주의자들은 “봉건적” 전제군주제에서 사회주의로 단계를 비약하는 것이 가능하다고 믿지 않았다. 부르주아 민주공화국을 통하여 빠른 자본주의 발전의 길을 닦아 미래 사회주의의 토대를 마련해야 한다. 이것이 그들의 기본적인 생각이었다. 러시아의 “사회주의 혁명”은, 그들 생각에 당분간은 불가능했다. 그러나 당내 다수파의 의견은 달랐다. 그들은 다가올 혁명이 “사회주의 혁명”이 될 수 있다는 논리적 귀결을 가지고 있다고 보았다. 이들은 “최소계획”을 폐기하고 당을 통한 권력의 쟁취와 자본주의에 대한 즉각적이고 결정적인 투쟁을 준비했다. 전자의 지도자들은 플레나코프, 마르토프 등이었다. 후자의 위대한 창시자는 레닌(Vladimir Ilyich Ulyanov, Lenin)이었다. 이 두 진영 사이의 최종적 분리는 1903년 런던 총회에서 이루어졌다. 레닌주의 성향의 사회민주당이 다수파였다. 러시아어로 “다수파”는 “볼시인스보”이며, 이러한 경향의 당원들은 볼셰비키라고 불렸다. "소수파"는 “멘시인스보”이기에, 이들은 “멘셰비키”라고 불렸다. 두 가지 이념조류는 각각 볼셰비즘과는 멘셰비즘이라는 이름을 얻었다. 1917년 “볼셰비키”들이 승리한 이후 스스로를 “공산당”이라 칭하였고, “멘셰비키”들은 ‘사회민주당’이라는 이름을 유지했다. 집권 공산당은 “멘셰비키”를 반혁명분자라 선언하고 이를 일소했다. 사회혁명당 역시, 두 개의 정당으로 갈라졌다. 당내 우파는 “멘셰비키”와 마찬가지로 부르주아 민주 공화국의 과정을 거쳐야 한다고 주장했고, 당내 좌파는 볼셰비키와 같이 혁명은 최대한 진행되어 궁극적으로는 자본주의 체제의 즉각적인 철폐와 사회주의의 확립이 진행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1917년 볼셰비키가 집권한 이후, 그들은 사회혁명당 우파를 반혁명세력으로 규정하고 청산했다. 볼셰비키는 사회혁명당 좌파와 처음에는 협력했다. 이후 양당 간에 큰 이견이 생기자 볼셰비키들은 옛 동맹과 결별했다. 마침내 볼셰비키는 그들을 불법으로 규정하고 몰살시켰다.) 1905년 혁명 당시 이 두 반체제적 조류(볼셰비즘과 사회혁명당 좌파)의 실질적인 영향력은 미미했다. 혁명 당시 모습을 드러낸 다양한 사상적 조류에 관한 설명을 완성하기 위해 우리는 사회혁명당에서 비롯된 제3의 조류 역시 보아야 할 것이다. 이들은 혁명을 통하여 부르주아 국가뿐만 아니라, 국가 그 자체의 철폐 역시 이루고자 하였다. 이러한 사상의 흐름은 러시아에서 최대주의라는 이름으로 알려졌는데, 그 이유는 그 구성원들이 최소계획을 거부하면서 사회혁명당 좌파와 결별하고, 최대계획, 즉 온전히 비정치적 기반 아래 건설된 완전한 사회주의의 실현을 위해 즉각적으로 투쟁할 것을 주장하였기 때문이다. 따라서 “최대주의자”들은 정당을 구성하지 않았다. 그들은 “최대혁명을 위한 사회주의자 연합”을 만들었다. 이 “연합”은 자신의 견해를 전달하는 팸플릿을 발행했다. 그것은 또한 몇 편의 정기 간행물을 출판했지만 오래 가지는 못했다. 회원은 많지 않았고 영향력도 미미했다. 그들은 주로 테러 활동을 펼쳤다. 그러나 그것은 모든 혁명 투쟁의 일부였고 많은 회원들은 진정한 영웅으로 죽었다. 최대주의자들의 사상은 전반적으로 무정부주의에 매우 가까웠다. 최대주의자들은 “마르크스주의자들”을 맹목적으로 따르지 않았다. 그들은 정당들의 유용성을 부정했고 국가와 정치적 권위를 강하게 비판했다. 그럼에도 그것은 정치적 권위를 즉각적이고 완전하게 폐기할 엄두를 내지 못했다. 그들은 완전한 “무정부주의” 사회로의 직접적이고 즉각적인 이행이 가능하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최대주의자들은 그것은 국가와 권위의 요소들이 “최소한으로 감소”될 “노동자 공화국”을 이행기 형태로 제시했다. 최대주의자들은 이 노동자 공화국 또한 급속하게 사멸할 것이라 보았다. 이러한 “임시적” 국가 권한의 유지에 대한 관점에서 최대주의와 무정부주의의 차이가 발생한다. (볼셰비즘에 동의하지 않는 모든 사상의 흐름과 마찬가지로, 막시말리즘[최대주의]은 1917년 혁명 당시 볼셰비키에 의해 격파되었다.) 아나키즘과 조합주의적 개념은 이 시기에 러시아에서는 거의 알려지지 않았다. 바쿠닌과 크로포트킨이라는 아나키즘의 ‘아버지’들이 러시아인이었기 때문에 러시아가 오랫동안 무정부주의적인 사상과 움직임을 가진 나라였을 것이라고 많은 사람들이 믿고 있다. 이것은 심각한 오해다. 바쿠닌(1814–1876)과 크로포트킨(1842–1921)은 모두 해외에서 아나키스트가 되었다. 그들 중 어느 누구도 러시아에서 아나키스트로 활동한 적이 없었다. 그들의 작품들 또한 1917년 혁명까지 해외에서만 등장했는데, 종종 외국어로도 쓰였다. 러시아어로 번역, 각색 또는 출판된 그들의 작품에서 발췌한 몇 편만이 러시아에 비밀리에 소량으로 유입되었고, 이를 보는 것은 큰 위험을 동반했다. 게다가 이 서적들이 러시아 내륙에서 유통되는 것은 거의 불가능했다. 마지막으로 러시아인들의 사회, 사회주의, 혁명적인 교육에는 아나키즘적 요소가 전혀 없었다. 그렇기에 몇몇 예외를 제외하고는 아무도 아나키즘 사상에 관심을 갖지 않았다. 1917년 혁명 이전 러시아에는 노동자 운동이 존재하지 않았기 때문에 조합주의는 전혀 알려져 있지 않았다. 심지어 1905년 러시아의 노동자 조직 형태인 “소비에트”가 빠르게 무너진 것은 조합주의적 구상 및 운동의 부재에 근거하였다고 추측할 수도 있다. 노동조합 조직이 존재했다면 노동자들의 운동을 주도했을 것이라는 데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우리는 이미 상트페테르부르크, 모스크바, 서부와 남부에 몇몇 작은 아나키즘 집단이 존재했다고 언급했다. 그러나 그것이 전부였다. 모스크바 아나키스트들은 1905년의 행사에 적극적으로 참여했고 12월의 무장 반란 동안 관심을 끌었다. (1917년 이후 볼셰비키는 자신들의 뜻에 맞지 않는 다른 모든 운동을 분쇄하면서 아나키즘 운동을 격파했다. 그러나 그들은 그것을 쉽게 짓뭉갤 수는 없었다. 1917년 혁명 과정 중 볼셰비키와 아나키즘 사이의 거세었지만 해외에서는 알려져 있지 않은 투쟁, 3년 이상 지속되어 “마흐노”와 같은 두드러진 사건을 만들어낸 투쟁 은 이 작품의 마지막 부분에 기술될 것이다.) 1905년의 도덕적 결과와 심리적 효과로 돌아가도록 하자. 1905년이 미래에 대한 준 영향은 실제로 만들어낸 몇 안 되는 구체적인 업적보다 훨씬 더 컸다. 우선 이미 지적했듯이 “차르 신앙”은 사라졌다. 광범위한 대중은 정권의 실체와 그것을 없애야 한다는 절박함을 인식하게 되었다. 절대주의와 차르는 도덕적으로 격하되었다. 이것이 전부가 아니다. 마침내 대중들은 이 정권에 오랫동안 반대해 온 전위 지식인, 좌파 정당, 그리고 혁명가와 같은 사람들과 힘을 합쳤다. 진보주의자와 대중 사이의 견고하고 광범위한 접촉은 이렇게 성립되었다. 이제 접촉이 더 깊게, 더 단단하게 확산될 일만 남아있었다. “러시아의 역설”이 드디어 사라졌다. 두 가지 커다란 성취가 실현되었다. 한편에는 궁극적인 혁명이 “기댈 수 있는” 물질적 요소, 두마가 있었다. 다른 한편에는 모든 광범위한 반란의 길을 막았던 정신적 장애가 무너졌다는 것이 있다. 대중은 마침내 사회의 병폐를 이해했고, 해방 투쟁의 최전선에 있는 사람들과 합류했다. 다가올 결정적 혁명을 위한 토양이 마련되었다. 이것이 1905년의 요동기의 “대변”이었다. 하지만 “차변” 역시 어마어마했다. 불행하게도 1905년의 운동은 조합주의적 조직이든 노동조합이든 어떠한 노동자 계급의 조직도 만들 수 없었다. 노동자 대중은 단결권을 얻지 못했다. 그들은 상호연락망도 조직도 없는 상태로 남았다. 이 상황의 심리적 결과로, 다가올 혁명에서 노동 대중들은 정당들의 상호적대와 권력투쟁(그 결과가 노동계급에게 어떠한 것도 줄 수 없는)의 장에서 ‘우승 상품’으로 전락하였다. 혁명 전야의 시기에 노동자 운동과 실질적 노동자 조직이 부재했다는 사실은 이후에 특정 정당이 노동자를 위한다는 명분으로 지배하게 되는 미래의 문을 열었다. 우리는 이 “부채”의 엄청난 무게가 1917년의 혁명에 치명적일 것이라는 것을 나중에 보게 될 것이다. 결국 그것은 혁명을 분쇄한다. 이와는 별개로 상트페테르부르크 최초의 노동자 소비에트의 초대 의장인 노사르-흐루시탈레프의 개인적 운명에 대하여 이야기해보자. 운동의 “청산”(1905년 말) 중 체포된 노사르는 재판을 받고 유죄판결을 받고 시베리아에 유폐되었다. 그는 탈출하여 해외로 도피했다. 그러나 그 역시 가폰처럼 새로운 생활에 적응할 수 없었고, 심지어 규칙적인 일을 맡을 수도 없었다. 그는 확실히 방탕한 생활을 하지 않았고 배신 행위도 저지르지 않았다. 그러나 그는 무질서와 가난과 불행 속에서 살아야 했다. 이것은 1917년 혁명까지 계속되었다. 혁명이 발발하자마자 그는 다른 많은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급히 조국으로 돌아가 혁명 투쟁에 참가했다. 그러나 그는 중요한 역할을 하지 못했다. 우리는 그 후 그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모른다. 우리가 신뢰하는 한 소식통에 따르면, 그는 결국 볼셰비키에 등을 돌리고 그들에게 총살당했다고 한다. ** “휴지기” 진정한 혁명과 그 첫 번째 시도 사이의 12년 동안 “폭발”과 “격동”은 혁명적인 관점에서 두드러진 발전은 없었다. 오히려 반동이 창궐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일부 대규모 파업과 크론슈타트의 발트 함대 반란을 주목해야 한다. 두마의 종말이야말로 이 시기의 가장 멋진 사건 중 하나였다. 두마는 1906년 5월에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회기를 시작했다. 이러한 첫 회기에는 열광적인 대중의 열의가 수반되었다. 정부의 모든 책략에도 불구하고 두마는 정부에 저항했다. 제헌민주당은 소속 의원의 수와 그 자질로 두마를 지배했다. 모스크바 대학의 교수로 제헌민주당의 가장 저명한 의원 중 한 명인 무롬체프(Sergey Andreevich Muromtsev)가 국회의장으로 선출되었다. 좌파 의원들 - 사회민주당과 사회혁명당(“노동자 옹호파”)도 당당한 연합을 형성했다. 전 국민이 두마의 심의를 열의로 바라보았다. 모든 희망이 두마 쪽으로 향했다. 사람들은 최소한 중요하고 효과적이며 공정한 개혁을 기대했다. 그러나 “의회”와 정부는 그 첫 접촉부터 적대감을 키웠다. 정부는 두마를 은근한 경멸로 대했다. 그들은 두마를 거의 용납하지 않았고, 협의체로서도 받아들이지 않았다. 반면 두마 자체는 입법 · 헌법기관으로서의 권한을 요구했다. 그들 사이의 관계는 점점 더 껄끄러워졌다. 민중은 분명히 두마 편을 들었다. 정부는 불리하고 우스꽝스러우며 위험하기까지 한 위치에 있었다. 더구나 혁명은 당장 발생하지 않을 것이었고 정부는 이것을 알고 있었다. 더구나 정부는 군대와 경찰에 의존할 수 있었다. 그래서 정부는 결정적인 조치를 취했다. 새로운 정력적인 장관인 스톨리핀(Pyotr Arkadyevich Stolypin)이 책임자로 임명되었다. 그는 두마가 농업과 관련하여 준비한 “인민에 대한 호소”를 빌미로 삼았다. 어느 날 아침 “대표자들”은 두마의 문이 닫힌 채 군대가 이를 지키고 있는 것을 발견했다. 군과 경찰이 거리를 행진했다. “첫 번째 두마”로 알려진 두마는 해산되었다. 이 행동을 주민들에게 알리고 “설명”하는 공식 칙령이 발표되었다. 이 일은 1906년 여름에 일어났다. 긴 일련의 암살과 몇 차례의 고립된 반란을 제외하면, 스베보르크와 크론슈타트(Кронштадтское восстание, The Kronstadt rebellion)(후자는 단기간에 진압되었고, 전자는 1905년 10월에 일어났다)의 반란을 제외하고서 국가는 평온함을 잃지 않았다. 대표자들은 감히 효과적으로 저항하지 못했다. 그 이유는 쉽게 설명할 수 있다. 저항한다는 것은 혁명으로 눈을 돌리는 것을 의미할 것이다. 그러나 당대로서는 혁명이 무력하다는 것이 어디에서나 느껴졌다.(만약 이러한 상황이 아니었다면 정부는 감히 두마를 이렇게 무례한 태도로 해산하지 못했을 것이다. 정부는 스스로가 진정으로 강력하다고 느꼈고, 적어도 한동안 이 판단은 오류가 아니었다.) 부르주아 계급은 자신의 이익에 유리한 혁명을 꿈꾸기에는 너무 약했다. 노동자 대중과 그 당은 이 시점에서 혁명을 감행할 준비가 되어 있지 않다고 느꼈다. 결과적으로 대리인들은 해산에 굴복했다. 게다가 이 포고령은 두마를 완전히 폐쇄한 것이 아니라 다소 수정된 규칙에 근거하여 가까운 장래에 새로운 선거가 있을 것이라 공표했다. “인민의 대표자”들은 이러한 자의적 행위에 대한 항의의 뜻을 표명하는 수준을 넘어서지 못했다. 이 항의성명을 완전한 자유 속에서 준비하기 위해 전前 대리인(주로 제헌민주당에 속해있었다)들은 핀란드(러시아 제국은 일정한 입법 독립을 보장하고 있었다) 비보르크Вы́борг, Viborg 시에서 만났는데, 이것이 이 성명이 “비보르그 항의”라는 이름을 받은 이유다. 그 후 그들은 침착하게 집으로 돌아왔다. 그들은 “반란”의 무해한 성격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얼마 후 특별법원에 의해 재판 후 유죄 판결을 받았고, 가벼운 형을 선고받았다. (하지만 그들은 두마 재선권을 잃었다.) 오직 대표자 중 한 명, 스타브로폴Stavropol 지구에서 온 젊은 농민이자 “노동자 옹호파”였던 오니프코만이 사임하지 않았다. 크론슈타트에서의 봉기를 자극한 것은 그였다. 현장 체포된 그는 하마터면 총살형에 처해질 뻔했다. 그는 재판에서 시베리아 유형을 선고받았다. 그는 탈출에 성공하여 해외 도피처를 찾았고, 1917년에 러시아로 돌아왔다. 나중에 그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는 알려지지 않았다. 어떤 매우 믿을 만한 소식통에 의하면, 그는 우파인 사회혁명당 당원으로서 계속 투쟁하다가 볼셰비키에 등을 돌리고 그들에게 총살당했다고 한다. “첫 번째 두마” 해산 직후 정부는 선거법을 개정하고, 치졸하게도 다른 예방책과 책략으로써 “두 번째 두마”를 소집했다. 이 두마는 첫 번째에 비해 훨씬 온건하고 평범했는데, 그럼에도 이는 여전히 정부에게 있어 “너무 혁명적”이었다. 모든 책략에도 불구하고 두마에는 여전히 수많은 좌익 대표자들이 있었고, 이 두마는 곧 해산되었다. 이번에는 선거법이 대폭 수정되었다. 게다가 그들을 흥분시키는 사건이나 토론이 잠시 관심을 끌었던 몇몇 순간을 제외하고는 대중은 곧 두마의 활동, 혹은 비활동에 대한 모든 관심을 잃었다. 두 번째 두마의 해산은 세 번째, 마지막으로 네 번째 두마로 이어졌다. 이 마지막 두마는 반동 정부의 손에 완전히 유순한 도구로써, 1917년의 혁명까지 그 황량하고 무해한 존재를 유지할 수 있었다. 개혁이나 유용한 법에 대해서 두마는 전혀 성취한 것이 없다. 그러나 그것의 존재가 완전히 쓸모없는 것은 아니었다. 일부 야당 대표들의 비판적인 연설이 있었고, 시시각각 불타오르는 현안 앞에서 차르의 입장을 확인할 수 있었고, 절대주의 정권이 복지부동할 때 발생하는 “의회”의 불능을 확인시켰다. 이 모든 사실들은 정권의 실체에 대해서, 부르주아 계급의 역할에 대해서, 달성해야 할 과제에 대해서, 정당들의 계획에 대해서 수많은 민중들을 깨우쳐 주었다. 이 시기는 한마디로 길고 훌륭한 “실험”으로 다른 정치 사회 교육 수단이 없을 때 가능한 유일한 것이었다. 이 기간의 주요한 특징은 두 가지 병렬적인 사건이었다. 하나는 절대주의 체제의 가속적이고 결정적인 퇴화, 혹은 “부패”였고, 다른 하나는 대중의 의식의 급속한 성장이었다. 차르 정권의 퇴폐에 관한 의심의 여지없는 징후는 해외에 알려져 있었다. 황실의 태도와 생활양식은 일반적으로 군주제가 몰락하기 전의 태도와 생활양식의 전형이었다. 니콜라이 2세의 무능과 무관심, 그의 각료와 직속공무원의 우둔함과 부패, “전제군주”와 그의 가족을 사로잡은 저속한 신비주의(잘 알려진 라스푸틴의 일화), 이 요소들은 해외의 어느 누구에게도 비밀이 아니었다. 잘 알려지지 않은 것은 대중들의 심리에 일어나고 있는 심오한 변화였다. 그럼에도 예를 들어, 1912년의 한 사람의 의식화 상태는 1905년 이전의 같은 사람의 원시적 상태와는 더 이상 공통점이 없었다. 점점 더 많은 계층이 직접적으로 차르 반대 세력이 되어가고 있었다. 노동자의 모든 조직과 정치사회적 선전을 금지한 야만적인 반동만이, 대중들이 그들의 생각에 최종적인 형태를 부여하는 것을 막았다. 따라서 놀라운 혁명적 사건들의 부재가 곧 어떤 식으로든 혁명적 과정이 중단되었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그것은 수면 아래에서, 특히 사람들의 생각과 감정의 영역에서 조금도 줄어들지 않은 강렬함으로 계속되었다. 그 동안 많은 중대한 문제들은 해결되지 않고 있었다. 러시아는 교착 상태에 빠져 있었다. 폭력적이고 결정적인 혁명이 불가피해졌다. 이제 추동력과 무기만이 부족했다. 이러한 조건 아래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했다. 이 전쟁은 대중들에게 혁명에 필수불가결한 무기와 필요한 추동력을 선사했다. ** 폭발 *** [전쟁과 혁명] 타국 정부와 마찬가지로 니콜라이 2세의 정부 역시 제1차 세계대전을 통해 사악한 본능, 동물적 열정, 국가주의와 민족주의와 같은 사악한 감정을 불러일으키는데 성공했다. 러시아에서도 다른 나라들과 마찬가지로 수백만 명의 남자들이 속고, 최면에 걸리고, 혼란에 빠져 도살장으로 가는 소떼처럼 전투 전선으로 돌진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는 중, 당대의 진짜 문제는 잊혀졌다. 그리고 러시아군에 의해 달성된 몇 안 되는 초기의 “성공”은 더욱 “국민의 위대한 열정”을 불러일으켰다. 하지만 이 인공적으로 연출된 콘서트에 특별한 음이 섞여있었다. 러시아인의 정신에 깊이 각인된 생각이 이 “열정” 뒤에 숨어 있었다. 우리는 싸워서 이길 것이다. 그러나 정부는 스스로를 속이지 않는 것이 좋을 것이다. 전쟁이 끝나면 우리는 우리의 법안을 제출할 것이다. 우리의 헌신과 희생에 대한 보답으로 정권의 완전한 변화를 기대한다. 우리는 우리의 권리, 자유를 되찾을 것이다. 전쟁이 끝나면 상황은 달라질 것이다. 그리고 군인들은 속삭였다. “전쟁이 끝나면 우리는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우리의 총을 지킬 것이다.” 그러나 곧 러시아의 상황이 바뀌었다. 연이은 패배가 시작되었고, 그들과 함께 불안과 환멸, 백성들의 분노가 되살아났다. 그 전쟁은 엄청난 돈과 인명을 앗아갔다. 수백만 명의 인명이 희생되었고 거기에는 목적도 보상도 없었다. 로마노프 정권은 다시 한 번 그들의 무능과 부패, 약점을 보여주었다. 더구나 큰 희생을 낸 어떤 패배들은 설명되지 않고, 미스터리하고, 의심스러웠다. 전국 방방곡곡에서 이야기가 오갔다. 노골적인 무능과 범죄적인 태만, 매수된 대법원, 최고 지휘부에 잠입한 첩자, 왕가와 그 지도자들이 독일 출신이라는 것, 궁정 그 자체가 대역을 저지르고 있다는 이야기들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왕실 구성원들은 독일인에 대한 동정심이 있다거나 심지어는 적과 직접 거래했다는 비난을 받았다. 이에 대한 분노와 증오로 황후는 “보체”라고 불렸다. 걱정스럽고 불길한 소문이 대중들 사이에 퍼졌다. 처음에 황실은 크게 동요하지 않았다. 몇 가지 조치가 어색하고 뒤늦게 취해졌다. 그것은 그저 형식적일 뿐이어서 효과적이지 못했고, 아무도 만족하지 못했고 아무것도 성취하지 못했다. 니콜라이 2세는 부대와 백성의 사기를 회복하려는 시도의 일환으로 명목상 최고 지휘권을 맡았다. 그는 전선으로 갔다. 그러나 이는 매일같이 악화되고 있는 일반적인 상황을 바꾸지 못했다. 차르는 절대적으로 무능하고 비활동적이었으며, 무엇보다 무력했다. 군대, 나아가 국가가 해체되었다. 절망의 결과로 자유주의자들 뿐 아니라 심지어 차르의 직속 수행자들까지도 음모를 꾸몄다. 그 중 한 음모는 차르가 더 “시의적절하고” 인기 있는 군주인 그의 삼촌 니콜라이 대공에게 “전쟁과 왕가를 지키기 위하여” 양위하게 하는 것이었다. 모두가 임박한 몰락을 예상할 수 있었다. 그들은 우선 사악한 수도승 라스푸틴을 숙청하는 것으로 시작했다. 그러나 공모자들은 다음에 무엇을 해야 할지 망설이다가 그들끼리 합의에 이르지 못하고 지체했다. 1917년 2월의 폭발이 일어났을 때 상황은 이 단계에 있었다. 이 갑작스런 폭발을 일으킨 것은 군사적인 전개도, 왕실의 반역도, 심지어 차르의 무능이나 바닥을 친 인기도 아니었다. 국민을 절박하게 만들고 결정적인 타격을 준 것은 경제생활의 완전한 해체, 그리고 국가의 존재 그 자체였다. 크라이보신(Alexander Vasilyevich Krivoshein) 장관은 행정부와 국가의 모든 봉사에 대해 “해체란 그런 것”이라고 인정하면서 “마치 정신병원과 같다”고 말했다. 차르 정부의 무능, 그 참담한 결과가 대중에게 결정적인 조치를 취할 수밖에 없게 만들었다. 전쟁 중인 모든 국가들은 그 시점에 엄청난 경제적 · 재정적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 그것은 멀리 떨어진 전선에 있는 수백만을 먹이고 보급을 유지하는 동시에 정상적인 생활을 유지해야만 했기 때문이었다. 이 이중적인 일은 어디에서나 엄청난 부담을 초래했다. 그러나 다른 모든 곳에서는 - 심지어 상황이 특히 어려웠던 독일에서도 - 거의 성공적으로 이루어졌다. 예고된 것도, 미리 계획한 것도 없고, 조직적인 것도 없는 러시아를 제외한 모든 곳에서 말이다. 자유도시연합, 전쟁산업위원회 등의 노력이 없었다면 이 총체적인 권력의 붕괴는 더 빨리 나타났을 것이라는 점을 덧붙여야 한다. 자발적으로 생겨난 이 단체들은 육군과 시민 대중들의 보다 긴급한 요구를 상당한 수준으로 만족할 수 있었다. 이러한 세력의 활력과 유익한 활동뿐만 아니라 젬스트보스, 자치단체 등 관료주의에 저항하여 만들어진 단체의 활동도 도덕적으로 매우 중요한 영향을 미쳤다. 러시아 전역에서는 차르의 총체적 무능과 더불어 그것을 완벽하게 대체할 수 있는 요소의 존재를 느낄 수 있었다. 나아가 그 요소들을 두려워하여 방해하던 로마노프 정권이 온 국가를 재앙으로 몰아붙이고 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군대와 러시아 인민들은 자유 연합과 위원회가 숭고한 헌신으로 생산을 보장하고, 운송을 조직하고, 물자를 감독하며, 배급과 군수품의 도착과 배급을 보장하는 것을 보았다. 그리고 정부가 국가의 이익에 대해 아무 생각도 없이 이 필수적인 활동들에 반대하고 제지하는 것을 보았다. 차르 정권의 몰락과 그 대체에 대하여 군대와 민중들이 정신적 준비를 마쳤다는 것은 대단히 중요한 사실이다. 그것은 혁명 전의 과정을 완성했다. 준비작업을 마무리한 것이다. 1917년 1월, 상황은 걷잡을 수 없게 되었다. 경제적 혼란, 노동자들의 빈곤, 그리고 러시아의 사회적 붕괴는 매우 심각했는데, 몇몇 대도시들, 특히 페트로그라드(상트페테르부르크의 옛 이름 - 역주)에서는 연료, 옷, 고기, 버터, 설탕뿐만 아니라 빵까지도 부족해졌다. 2월에는 상황이 더 나빠졌다. 두마와 젬스트보스(시의회), 자치단체, 연합, 위원회 등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도시 안 사람들은 기근에 처했고, 군대는 보급을 받지 못했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군대는 완전히 패배했다. 2월 말, 러시아가 물질적으로든 정신적으로든 전쟁을 계속하는 것은 절대 불가능했다. 그리고 도시의 산업 노동자들이 “공장을 계속 유지하기 위해” 물자를 조달하는 것도 불가능했다. 그러나 차르는 이러한 현실에 대해 아무것도 알고 싶어 하지 않았다. 그는 맹목적으로(러시아 제국이라는) 궤도에서 벗어난 낡은 기계에 집착했다. 그리고 그는 그 전까지와 마찬가지로 억압 및 활동적인 사람들에 대한 폭력, 그리고 정당의 활동가들을 탄압했다. 전쟁의 “위대한 열정”에서 2년 반 밖에 지나지 않은 시점에 혁명까지 사태가 진전한 것은, 한편으로는 민중들이 더 이상 전쟁을 지속하거나 기근을 견딜 수 없었기 때문이었고, 다른 한 편으로는 차르의 맹목적인 완강함 때문이었다. 2월 24일(옛 러시아 달력 기준), 페트로그라드에서 소요가 시작되었다. 이 소요는 주로 식량 부족에 관한 것이었고, 심각해질 것 같지 않았다. 그러나 다음날 사건이 돌연 급변했다. 수도의 노동자들은 러시아 인민의 다수가 그들과 연대하고 있다고 판단했다. 그들은 수 주 간 집중적으로 선동되었고, 굶주렸으며, 빵을 배급을 받지도 못했다. 그들은 거리를 점거하여 격렬한 시위를 벌였으며, 해산을 완강히 거부했다. 그러나 이 첫날 시위는 신중하고 공격적이지 않았다. 빽빽하게 들어찬 군중 속에서 노동자들은 아내와 자식들과 함께 소리쳤다. “빵! 빵을 달라! 먹을 것이 없다! 빵이 아니면 죽음을! 우리 아이들이 굶어 죽어가고 있다. 빵을! 빵을!” 경찰 외에 정부는 시위대에 대항하여 기마부대인 코사크 분대를 보냈다. 그러나 당시 페트로그라드에는 신뢰할 수 없는 예비군을 제외하고는 병력이 거의 없었다. 그렇기에 노동자들은 조금도 겁먹지 않았다. 그들은 군인들에게 맨가슴을 내밀며 아이들을 안아 들고 울부짖었다. “할 수 있다면 죽여 봐라! 굶어죽느니 총에 맞아 죽겠다!” 마침내 - 그리고 이것이 이 에피소드의 핵심이다 - 거의 모든 병사들이 미소를 지으며 무기를 사용하지 않고 사나운 군중 편을 향해 걸어갔고 장교들의 명령을 무시했다. 그렇다고 장교들 역시 특별히 고집스러운 것은 아니었다. 어떤 곳에서는 군인들이 노동자들과 이야기하며 총을 주고 말에서 내려 시위대와 어울렸다. 군대의 이런 태도는 시위하는 노동자들에게 용기를 주었다. 그러나 여기저기서 경찰과 코사크 일당은 붉은 깃발을 든 시위대에게 돌격했고 시위대 중 몇 명이 죽거나 다쳤다. 페트로그라드와 교외의 병영은 여전히 혁명의 편에 서지 않았다. 그리고 정부는 혁명과 싸우기 위해 그들을 보내지 않았다. 그러나 2월 26일 아침, 주목할 만한 일이 일어났다. 정부는 두마 해산을 명령했다. 이것은 모두가 결정적인 행동을 시작하기 전에 기다리고 있던, 일종의 신호였다. 수도의 모든 곳에 동시다발적으로 알려진 이 뉴스는 시위에 박차를 가했다. 그 순간부터 시위는 엄연히 혁명 운동의 성격을 띠게 되었다. “차르 타도!”, “전쟁 타도!”, “혁명 만세!” 등의 함성이 한결 단호해지고 위협적인 태도를 보이는 군중으로부터 울려 퍼졌다. 시내 곳곳에서 시위대는 단호하게 경찰을 공격했다. 법원을 포함한 공공건물 몇 채가 불에 탔다. 거리에는 바리케이드가 세워졌다. 곧 많은 붉은 깃발이 나타났다. 병사들은 여전히 중립을 지켰지만 점점 더 자주 군중들과 어울렸다. 정부는 점점 더 군대에 의존할 수 없게 되었다. 정부는 반군에 대항하여 도시의 모든 경찰력을 투입했다. 경찰은 대규모 공격을 위해 분대를 만들었다. 그들은 여러 집의 지붕과 일부 교회에 기관총을 설치하고 모든 전략 요충지를 점령했다. 그리고 분노하는 군중에 대한 총공세를 시작했다. 2월 26일, 하루 종일 싸움은 뜨거웠다. 많은 곳에서 경찰이 해산되었고, 경관이 살해되고, 기관총이 무력화되었다. 그러나 맹렬하게 저항하는 곳들도 있었다. 전선에 있던 차르 니콜라이 2세는 상황의 중대성에 대한 경고를 전보로 전해 받았다. 한편 두마는 해산 명령에 굴복하지 않기로 했다. *** 혁명의 승리 결정적인 행동은 1917년 2월 27일에 일어났다. 이른 아침부터 페트로그라드 수비대의 모든 연대는 더 이상 망설이지 않고 반란을 일으켜 무기를 손에 들고 수도의 특정 전략 지점들을 점령했다. 혁명이 자리 잡게 되었다. 그러는 동안 반항적이고 위협적이며 부분적으로 무장한 시위대가 즈나멘스카야Znamenskaya 광장과 니콜라예프스키 철도역 부근으로 빽빽하게 모여들었다. 정부는 아직은 믿을 수 있던 제국 방위군으로부터 두 개의 기병 연대를 차출했고, 강력한 경찰 분대를 보냈다. 군대는 경찰을 지원하기로 되어 있었다. 통상적인 절차(시위대 해산 경고) 이후 경찰 지휘관은 시위대를 향하여 돌격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그러나 최후의 또 다른 “기적”이 일어났다. 근위대 기병대를 지휘하는 장교가 사브르를 치켜들었고, “경찰을 향해 돌격하라!”고 외쳤다. 두 연대가 경찰에게 진격했다. 거의 순식간에 경찰은 두들겨 맞고, 튕겨 나가고, 압도당했다. 곧 경찰의 마지막 저항이 무너졌다. 혁명군은 정부의 요새를 점령하고 도시의 모든 요충지를 점령했다. 미친 듯이 몰려드는 군중들에 둘러싸인 수도연대는 항복했다. 그들은 깃발을 펼치지 않은 채 두마(가엾은 제4두마)가 연좌중인 토리데 궁으로 행진하여 스스로 해산하였다. 얼마 후 페트로그라드 수비대와 그 교외 지역의 마지막 연대들이 혁명에 합류했다. 수도 부근에는 더 이상 차르의 무장한 군대가 없었다. 민중은 자유가 되었다. 혁명이 승리했다. 이에 뒤따르는 사건들은 오늘날에도 잘 알려져 있다. 두마의 유력 인사들로 구성된 임시 정부가 구성되어 국민들의 열렬한 찬사를 받았다. 지방은 혁명에 열성적으로 가담했다. 차르의 명령으로 일부 병력은 급히 전선에서 철수하여 반군이 장악하고 있는 수도로 파견되었으나 도착할 수 없었다. 철도 노동자들이 그들의 수송을 거부했기 때문이다. 그러자 병사들은 장교들의 말을 듣지 않고 혁명에 합류했다. 일부는 전선으로 돌아갔고 다른 일부는 그냥 흩어졌다. 철도를 타고 페트로그라드로 돌아온 차르 니콜라이 자신은 드노Дно, Dno 역에 기차를 정차시킨 다음 다시 프스코프로 돌아갔다. 그곳에서 그는 두마가 보내온 사절단과 혁명에 가담한 군 인사들을 마주했다. 그는 그 상황을 받아들이는 것 외에는 할 수 있는 것이 없었다. 3월 2일, 자잘한 협상 끝에 그는 자신과 그의 아들 알렉시스를 위해서 퇴위에 서명했다. 잠시 동안 임시정부는 전 황제의 동생인 마이클 대공에게 왕위를 수여하려고 했다. 그러나 그는 이 제안을 거절하면서 나라와 왕조의 운명은 정기적으로 선출되는 제헌의회의 손에 맡겨져야 한다고 선언했다. 전선은 혁명의 완수를 환영했다. 차르 정권은 무너졌다. 그날 즉시 제헌의회의 구성이 선포되었다. 제헌의회 소집을 기다리는 동안 임시정부는 공인되고 공식적인 권력기구가 되었다. 승리한 혁명의 첫 번째 행동은 끝났다. 요점을 명확히 드러내기 위해 2월 혁명에 관한 몇 가지 사실을 세부적으로 재조명해 보도록 하자. 다시 한 번 말하지만, 대중의 행동은 자발적이었으며 오랜 기간을 거쳐 구체적인 경험과 정신적 준비가 절정에 달한 상태였다. 그들의 행동은 어느 정당이 조직하거나 지도한 것이 아니었다. 무장한 인민, 즉 군대의 도움을 받아 혁명은 승리할 수 있었다. 조직화의 요소는 도입되어야 했고, 곧바로 도입되었다. (탄압 때문에라도 좌파 정당과 그 지도자들의 중앙화 된 조직은 혁명 당시 러시아와는 거리가 멀었다. 사회민주당의 마르토프, 사회혁명당의 테르노프, 레닌, 트로츠키, 루나차르스키, 로소프스키, 라이코프, 부하린 등은 모두 외국에서 살고 있었다. 그들은 2월 혁명 후에야 귀국했다.) 또 다른 중요한 점은 이러한 사건들로부터도 나타난다. 다시 한 번 말하지만, 혁명은 러시아가 전쟁을 지속한다는 불가능한 과업을 정부가 완고하게 고수함에 따라 자연스럽게 심화된 즉각적이고 구체적인 자극으로 인해 발생했다. 이것이 불가능하다는 인식은 전쟁이 러시아를 나락으로 빠뜨린 것과 불가분한 혼란을 낳았다. *** 사회주의 혁명을 향하여 두마에 의해 형성된 임시정부는 물론 엄밀히 말하자면 부르주아적이고 보수적이었다. 어렴풋하게나마 사회주의자였던 케렌스키(Alexander Fyodorovich Kerensky)를 제외하면 리보프 공(Prince Georgy Yevgenyevich Lvov), 구트코프(Alexander Ivanovich Guchkov), 밀류코프와 같은 임시정부의 구성원들은 거의 모두가 제헌민주당원이었고, 사회적으로 특권 계급에 속해 있었다. 그들에게 있어 혁명의 완수란 일단 절대주의가 전복되는 것이었다. 그것은 이제 막 시작되었을 뿐이다. 이제 그들은 “질서를 재정립”하고, 국가와 전투의 여러 상황을 조금씩 개선하고, 그 어느 때보다 적극적으로 전쟁을 “밀어붙이고”, 새로운 정신으로 병사들을 고무시키고, 제헌의회를 평화적으로 소집하여 새로운 헌법, 새로운 정치 체제, 그리고 새로운 정부형태를 만들고자 하였다. 그러므로 백성들은 착한 아이들처럼 이 새로운 주인들이 그들에게 베풀어줄 호의를 인내심 있고 신중하게 기다리기만 하면 되었다. 임시정부라고 불리는 이 새로운 주인들은 스스로를 다른 ‘문명화된’ 나라의 사람들처럼 권력을 사용할 좋은 온건 부르주아로 보았다. 그리고 그들이 가지고 있는 체제에 대한 정치적 전망은 훌륭한 입헌군주제를 넘어서지 못했다. 대부분의 임시정부 구성원들은 아마도 소심하게 아주 온건한 부르주아 공화국을 꿈꾸었을 것이다. 농경문제, 노동자의 문제 등은 이후에 구성된 정부에 의해 ‘검증된’ 서구식 모델로 해결될 것이다. 임시정부는 필요하다면 준비기간을 질질 끌어서라도 대중을 다시금 진정시키고, 그들의 질서를 잡고, 그들을 복종하게 하며, 민중이 그들의 욕망을 위해 너무 폭력적이거나 한계를 넘지 않도록 할 수 있을 것이라는 다소간의 확신이 있었다. 그들은 “정상적인” 선거가 빈틈없고 강직한 제헌의회를 만들 것이라 확신했다. 이 시점에서 “현실주의자”, “확립된” 정치인, 학자, 경제학자, 사회학자들이 계산에서 틀렸다고 말하는 것은 즐거운 일이다. 현실은 그들을 비껴나갔다. 나는 뉴욕에서 1917년 4, 5월에 제헌의회의 구성과 개연성 있는 행동들에 대해 상세하게 분석한 명예교수의 러시아 강연에 참석했던 기억이 난다. 그리고 그 존경할 만한 교수에게 단 한 가지 질문을 했다. “러시아 혁명이 제헌의회를 넘어설 경우에 대하여 어떻게 전망하십니까?” 그 유명한 강사는 그가 “현실주의자”라며 “분명히 무정부주의자”인 질문자에게 "나는 환상적인 가설에 아무런 관심도 없다"고 경멸하는 듯 말했다. 하지만 곧 다가올 미래는 이 학식 있는 교수가 스스로를 완전히 속였으며, 그 스스로가 “환상적인” 가설에 빠져있었다는 것을 실증했다. 두 시간 동안의 연설에서 그는 단 한 가지 사건을 분석하지 않았다. 그리고 몇 달 후에 그것이 실제로 일어났다. 여기에 개인적인 반성을 더하고 싶다. 1917년 현실주의자들, 정치인들, 작가들, 러시아인과 외국인 교수들은 거의 예외 없이 러시아 혁명에서 볼셰비즘의 승리를 예측하지 못했다. 볼셰비키가 러시아 혁명에서 승리한 것이 역사적으로 확정된 사실이기 때문에 이들은 이제 볼셰비즘을 인지하려 하고, 관심을 가지려하고, 스스로를 볼셰비키가 되려고 한다. 그들은 볼셰비즘의 "매우 긍정적인 중요성"과 "완전한 세계 전체의 승리"를 (다시 한 번 스스로를 속이며) 찬미한다. 마찬가지로 “현실주의”와 “예지력”을 가지고 있는, 전과 같이 오만하고, 동일하게 확신에 가득 차 있는 이 신사들이 "세계 사회 혁명에서 자유지상주의 이념의 진정하고 완전한 승리"라는 사실 역시 예측하지 못하며, 그것이 일어난 후에 받아들이는 것이 고작이리라 믿는다. 임시 정부는 분명히 직면한 장애물을 고려하지 않았다. 가장 심각한 장애물은 제헌의회 소집 전에 처리해야 하는 문제의 본질이었다. (그리고 임시 정부 지도자들은 노동자들이 의회의 구성을 기다리고 싶어 하지 않을 수도 있고, 그것은 전적으로 그들의 권리로 보장되어있다는 것을 결코 생각하지 못했다.) 우선 전쟁이 문제였다. 인민들은 전쟁을 환멸스러워 했고 기진맥진해 있었다. 전쟁은 인민의 의지에 반하거나 기껏해야 완전한 무관심속에서 계속되었다. 러시아군은 물리적으로나 도덕적으로 부인할 수 없이 패배했기 때문이었다. 러시아의 비참한 상황과 혁명이 군대를 뒤흔들었다. 두 가지 가능한 해결책이 있었다. 하나는 전쟁을 종식시켜 평화 조약을 체결한 뒤 군대를 해산시키고 오로지 국내 문제에만 관심을 갖는 것이었고, 다른 하나는 최소한 제헌의회가 소집될 때까지 전선을 유지하다가 기강을 회복하여 육군의 사기를 ‘회복’하고 어떤 희생을 치르더라도 전쟁을 계속해야 하는 불가능한 일을 시도하는 것이었다. 첫 번째 해결책은 다른 호전주의자들과 동맹을 맺고서 그 동맹을 깨는 것을 “국가적인 수치”로 여기는 “애국적인” 부르주아 정부에게 있어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이었다. 게다가 그들은 정부가 “임시적”이었던 만큼, “완전한 결정권을 가진 제헌의회가 소집되기 전에 중요한 변화는 있어서는 안 된다”는 규율을 지켜야만 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임시정부는 두 번째 해결책을 선택했다. 그러나 당시 상황에서 이것은 실현 불가능했다. 일반적으로 이 지점은 강조되지 않지만, 이는 중요한 지점이다. “부르주아 국가”라는 이름의 기계는 1917년 2월 러시아에서 오작동했다. 부르주아 국가의 목적과 활동은 언제나 인민의 이익과 열망에 반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인민이 자신의 운명의 주인이 된 이상, 고장 난 국가를 수리하고 다시 정상으로 되돌릴 수는 없었다. 강제적이든 자유롭든 그 기계를 작동시키는 것은 정부가 아니라 인민이기 때문이다. 고장 난 기구는 억지로 움직이게 하거나 재가동할 수 없었다. 그리고 인민은 더 이상 자신의 것이 아닌 목표를 향해 자발적으로 “행진”하지 않았다. 따라서 고장 난 장치를 다시 작동시키기 위해 시간과 힘을 허비하기보다 새로운 상황에 알맞은 다른 장치로 교체할 필요가 있었다. 부르주아적이고 민족주의적인 정부는 이것을 이해할 수 없었다. 그들은 “부르주아 정부”와 몰락한 정권의 사악한 유산인 전쟁 두 가지 모두를 유지하고자 했다. 이 점 때문에 그것은 점점 더 스스로의 지지도를 떨어뜨리고 있었다. “부르주아 국가”라는 고장 난 기계로는 앞으로 나아갈 수도, 전쟁에의 의지를 강요할 수도 없었다. 이렇게 당시의 가장 심각하고 가장 시급한 문제는 미봉된 상태로 남아있을 수밖에 없었다. 두 번째 골치 아픈 문제는 농민문제였다. 인구의 85%를 차지하는 러시아의 농민들은 자신 소유의 토지를 열망했다. 혁명은 이러한 열망에 막대한 힘을 주었다. 수세기 동안 착취당하고 속아 넘어간 농민 대중들은 더 이상 다른 어떤 것에도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다.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어떠한 의례나 의식 없이 지금 당장 토지가 필요했다. 물리적으로도 정신적으로도 러시아는 전쟁을 계속할 수 없었다. 차르 정권이 그 사실을 인정하지 않으려한 것이 혁명의 직접적인 원인이었다. 그리고 이 불가능성이 계속되는 한 그것을 인식하지 못한다면 어떤 정부라도 차르 정부와 마찬가지로 무너지게 것이라는 것이 자명한 논리적 귀결이었다. 확실히 임시정부는 상황을 바꾸어 혼란을 끝내고 국가를 재정비하여 새로운 에너지를 주기를 희망했다. 그러나 이것들은 환상이었다. 시간이나 대중의 심리상태는 그것을 허락하지 않을 것이었다. 1905년, 10월 17일 선언 직후에 두마의 소집에 대비한 농민의회가 소집되었고 농민 대중의 염원을 대변하는 대표자들이 선출되었다. “토지대를 상환하라는 말은 내게 반항을 불러일으킨다.” 농민 대표들 중 한 명이 선언했다. “그들은 우리가 어제의 노예주들에게 보상하라고 한다. 그들은 심지어 지금 우리 시대에도, 우리의 삶을 괴롭게 만들었던 사람들이다. 지금껏 내어온 소작료가 충분히 보상이 아닌가? 우리가 대지에 흘린 준 피의 양을 측정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게 다가 아니다. 우리 할머니들은 이 자들의 사냥개들에게 모유를 먹여야 했다. 그것은 상환이 아닌가?" “수세기 동안 우리는 바람에 날린 모래알 취급을 받아야했다. 그리고 그들은 바람이었다. 그리고 이제 우리가 다시 토지대를 지불해야 한다고? 외교적 논의는 필요 없다. 단 하나의 방법, 혁명적 방법이 있을 뿐이다. 그렇지 않으면 그들은 다시 한 번 우리를 속일 것이다. ‘상환’을 말하는 것은 무엇이든 타협이다. 동지들, 조상의 잘못을 되풀이하지 말자. 1861년 그들은 우리보다 더 영리했고, 우리를 소유하고 있었다. 인민이 모든 것을 가져가지 않았기에 그들은 우리에게 아주 조금만을 던져줄 수 있었다.” 오렐Орёл, Orel 지역 농민들은 “우리는 그들에게 땅을 판 적이 없다”며 반발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 대금을 상환할 필요가 없다. 이미 우리는 비인간적으로 낮은 임금을 받고 일함으로써 충분한 돈을 지불했다. 아니, 어떤 경우에도 우리는 상환금을 지불하지 않을 것이다. 귀족님네들은 달에서 땅을 얻어온 게 아니다. 그들의 조상들이 점령한 것이다.” 카잔 지역 대표들은 “토지대 상환을 요구하는 것은 국민에 대한 명백한 부당”이라고 말했다. “인민들은 토지 매매 영수증을 땅과 함께 받아야 했다. 사실, 지주들은 우리에게서 이 땅을 산 적이 없었다. 그들은 나중에 팔기 위해 우리에게서 토지를 몰수했었다.” 그리고 다른 농민들은 1897년과 1906년 사이에 유명한 학자 니콜라이 루바킨에게 이렇게 말했다. “올로프, 데미도프, 발라초프 등 모든 지주들은 그들의 땅을 차르와 황후로부터 선물 받았다. 그런데 지금 그들은 토지에 가격을 지불받기를 원한다니, 그것은 불공평할 뿐만 아니라 공공연한 강도행각이다.” 이것이 1917년에 왜 농민들이 더 이상 기다리지 않으려 했는지를 설명해준다. 거의 모든 곳에서 그들은 토지를 몰수하고 아직 도망치지 않은 지주들을 내쫓고 있었다. 그들은 심의, 속임수, 그리고 정부나 제헌의회의 결정에 대해 신경 쓰지 않고 그들 나름대로 그리고 스스로 “농민문제”를 해결했다. 주로 농민들로 구성된 군대는 확실히 이러한 직접 행동을 지지할 준비가 되어 있었다. 임시정부는 그 상황을 받아들일 것인지 아니면 그것에 저항할 것인지 결정하지 못했다. 저항한다는 것은 반란을 일으키고 있는 농민들에 대립하는 것이며 또한 거의 불가피하게 군대에 대립한다는 의미였기 때문이다. 그래서 자연히 임시정부는 전쟁의 문제와 마찬가지로 제헌의회가 지능적이고 능숙한 기동으로 일을 정리할 수 있기를 바라며 기다리는 전술을 채택했다. 정부의 대변인은 농민들이 모든 법을 제정할 권리가 있고 확실히 농민들에게 완전한 만족을 줄 것이라고 호소했다. 그러나 이것은 아무것도 바꾸지 않았다. 이러한 호소는 대부분 헛된 것이었고 이 전술은 성공할 가망이 없었다. 왜냐하면 농민들은 권좌에 있는 ‘신사’들의 말에 조금도 신뢰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충분히 자주 속아왔다! 그리고 그들은 이제 그 땅들을 차지할 만큼 강하다고 느꼈다. 그들에게 이것은 정의였다. 때때로 그들이 머뭇거렸다면 그것은 오로지 처벌에 대한 염려에서 나온 것일 뿐이었다. 또한 산업 노동자들의 문제는 농민들의 문제만큼이나 부르주아 정부에 의해 해결될 수 없는 문제였다. 노동자들의 대다수는 혁명을 통해 삶의 질을 최대한 개선하고 최소한도의 권리 확립이 이루어질 것을 원했다. 즉각적이고 매우 심각한 투쟁이 충분히 예견되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임시정부가 어떤 방법으로 그 입지를 유지할 수 있었겠는가? 또한 순수하게 경제적인 문제는 다른 문제들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는데다 대처를 늦출 수도 없기 때문에 그 해결이 지극히 어려웠다. 전쟁과 혁명의 와중에, 혼란스러운 나라에 혼란스러운 상황이 발생하면서, 생산은 물론, 교통, 교류, 금융 등등을 새롭게 정비할 필요가 있었다. 그리고 정치적 문제가 남아있다. 당시의 상황에서는 그것에 대한 타당한 해결책이 없었다. 임시정부는 최대한 빠르게 제헌의회를 소집하는 임무를 부여받았다. 그러나 여러 이유 때문에 이것은 성공할 수 없었다. 무엇보다 정부는 의회의 개회를 두려워했다. 약속한 바와는 달리 정부의 가장 큰 희망은 개회를 가능한 한 많이 연기하는 것이었고, 운이 좋아진다면 “입헌” 군주제의 설치를 추구할 것이다. 그러나 다른 위험한 장애물이 생겼다. 가장 심각한 문제는 노동자들의 소비에트, 특히 페트로그라드 소비에트의 부활이었다. 이것은 혁명 초기, 그리고 1905년과 마찬가지로 다른 노동 단체의 부재 속에서 다시 정비되었다. 사실 그 순간 산업 노동자들은 온건한 사회주의자, 멘셰비키, 그리고 올바른 사회 혁명가들의 영향을 받고 있었다. 그러나 마찬가지로 그들의 이념과 프로그램은 임시정부의 계획에 절대적으로 어긋났고, 자연히 페트로그라드 소비에트의 정신적 영향과 활동은 곧 정부의 계획과 충돌하기 시작했다. 페트로그라드 소비에트는 일종의 러시아 제2 정부와 같았다. 그들은 모든 지방 소비에트의 광대한 네트워크의 기조를 정하고 그 활동을 조정했다. 이리하여 전국 노동계급의 지지를 받아 순식간에 강한 세력이 되었다. 그들은 또한 군대 안에서 점점 더 많은 영향력을 확보했다. 오래 지나지 않아 소비에트의 지시는 종종 임시정부의 지령보다 훨씬 더 큰 비중을 차지하게 되었다. 그런 상황에서 임시정부는 소비에트를 신중하게 다루어야 했다. 정부가 그들과 싸우는 것을 선호했을 것이라는 것은 말할 나위도 없다. 그러나 언론의 절대적 자유, 조직의 절대적 자유, 그리고 사회적 행동의 절대적 자유를 요란하게 선언한 혁명으로 조직된 노동자들에게 이러한 행동을 취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이를 집행할 수 있는 어떠한 실질적 힘도 정부에게는 없었다. 이에 따라 정부는 그들의 강력한 경쟁자를 용인하고, 심지어 그들을 “꼬드길” 수밖에 없었다. 임시정부는 노동자와 군대가 그들과 공감하지 않고 있음을 잘 알고 있었다. 심각한 사회 갈등이 발발하면 그 두 결정적인 세력이 의심의 여지없이 소비에트의 편을 들 것이라는 것 또한 잘 알고 있었다. 임시정부는 언제나 그랬듯이 그저 “바라고” 있었다. 그들은 시간을 벌기 위해 노력했다. 그러나 소비에트라는 비공식적이지만 위협적이며, 두 번째 “지도세력”의 존재는 공식적이지만 무력한 임시정부가 극복해야 할 가장 큰 장애물 중 하나를 구성했다. 사회주의 정당들의 격렬한 비판과 선전, 특히 극좌파적 요소(사회혁명당 좌파, 볼셰비키, 아나키스트)도 무시할 수 없었다. 그간의 맥락에 따라 임시 정부는 언론의 자유에 대한 억압적인 조치를 강행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런 짓을 하려했다 하더라도 명령을 이행할 병력은 누구의 편이었겠는가? 그들은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것이 하나도 없었다. 조직적이고 강한 유대를 가졌으며 강력한 물리력(경찰 · 군대 · 자금 등)을 확보한 강력한 부르주아 계급이라 할지라도, 당대 러시아에 존재하는 이 정도로 많은 문제들에 대한 만족스러운 해결책을 제시하고 그 의지와 계획을 강요하는 것이 어려웠을 것이다. 그리고 그런 부르주아는 러시아에 존재하지 않았다. 자신의 계급적 이익에 복무하는 부르주아지는 러시아에 거의 존재하지 않았다. 러시아의 부르주아들이 약하고, 체계적이지 않고, 전통이나 역사적 경험마저 없던 이상, 그들은 성공할 수 없었다. 또한 그들은 활동적이지 조차 않았다. 그래서 “원칙적으로” 부르주아지를 대표하는 임시정부는 권력공백 상태에서 일해야 했다. 이것이 틀림없는 실패의 근본 원인이었다. *** 사회주의 정부를 향하여; 사회주의의 빈곤 따라서 본질적으로 부르주아적인 최초의 러시아 임시정부는 신속하게 우스꽝스럽고 치명적인 무능상태로 전락했다. 그 가엾은 정부는 스스로를 유지하기 위해 할 수 있는 모든 일을 했다. 임시정부는 만들어지고, 사태를 미루다가, 기능을 멈췄다. 한편 모든 기본적인 문제들의 해결도 수렁에 빠졌다. 이 유령 정부에 대한 비판과 그에 따른 대중적 분노는 날이 갈수록 증가했다. 곧 대중들은 임시정부의 존재를 납득할 수 없게 되었다. 엄숙한 취임 이후 60일도 되지 않았던 5월 6일, 그들은 소위 (사회주의자가 참여한) “연립정부”에게 자리를 양보할 수밖에 없었다. 연립정부의 가장 영향력 있는 구성원은 매우 온건한 사회혁명당원, 혹은 오히려 “독자적”인 사회주의자라 할 수 있는 알렉산드르 케렌스키였다. 이 부르주아-사회주의자 연립체제는 전임자보다 더 만족스러운 결과를 얻기를 바랄 수 있었을까? 당치도 않았다. 조건과 행동의 무력성은 필연적으로 1차 임시정부의 그것과 동일했다. 힘없는 부르주아에게 의지해야 하고, 전쟁을 계속해야 했고, 점점 더 시급한 문제의 진정한 해결책을 찾을 수 없었으며, 좌익의 공격을 받고, 모든 종류의 어려움에 항상 둘러싸인 이 두 번째 임시 정부는 첫 번째와 마찬가지로, 그리고 거의 같은 기간 동안 기능했다. 7월 2일, 몇 가지 부르주아적 요소를 가졌지만 주로 사회주의자들로 구성된 제3의 임시 정부가 이를 대체했다. 제3 정권의 영도자이자 그를 뒤이은 제4 정권의 최고지도자였던 케렌스키는 이때부터 일종의 러시아의 두체가 되었고, 사회혁명당은 멘셰비키와 긴밀히 협력하여 혁명의 주인으로 확실히 부상했다. 한 걸음만 더 나아가면 러시아는 농민 · 산업 노동자 집단 · 소비에트 · 군대 · 지식인 등 매우 실제적인 세력을 기반으로 한 사회주의 정부를 가지게 될 수도 있었다. 하지만, 그것은 아무것도 성취하지 못했다. 권력을 확보할 때만 해도 마지막 케렌스키 정부는 매우 강력해 보였다. 그리고 사실은 그렇게 될 수도 있었다. 변호사 겸 두마의 의원인 케렌스키는 대중들 사이에서도 군대에서도 큰 지지를 누렸다. 혁명의 발발 당시 두마에서 그가 한 연설은 기억에 남을 만한 성공을 거두었다. 그리고 그가 권력을 잡았다는 것은 러시아 전역에 엄청난 희망을 불러일으켰다. 그는 소비에트에 대해 거리낌 없이 의존할 수 있었고, 이를 통해 국가의 노동자 계급 전체에도 의존할 수 있었다. 왜냐하면 그 순간 압도적으로 많은 대의원(소비에트 · 공장 위원회 · 군인 위원회)은 사회주의자들이었고 소비에트는 전적으로 사회 혁명당 우파와 멘셰비키들의 손에 장악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케렌스키 내각의 초기 몇 주 동안, 러시아 인민들이 그를 너무나도 신뢰하였기에 케렌스키를 공공연히 비판하는 것은 위험했다. 몇몇 선동가들이 공공 광장에서 케렌스키에 반대하는 연설을 하다가 린치를 당한 일까지 있었다. 그러나 이 상황에서 필요한 이익을 얻으려면 케렌스키가 오래전 당통이 추천하였던, 단 하나의 조건을 모든 측면에서 효과적으로 이행했어야 하였다. 그는 항상 - 대담하게, 더 대담하게, 언제나 대담하게 행동해야 했다. 그리고 이것은 바로 케렌스키에게 전혀 없는 성품이었다! 현재의 상황에서 대담함은 다음과 같은 것을 의미할 수 있다. 1. 즉각적인 전쟁포기 (혹은 이를 위한 방법의 발견) 2. 자본주의 부르주아 정권과의 결정적인 단절(즉, 완전한 사회주의 정부의 형성) 3. 모든 러시아의 경제사회를 사회주의 체제로 즉각적인 방향 전환. 이 모든 것은 사회주의적 신념을 가지고, 구성원 다수가 사회주의자이며 지도자 역시 사회주의자였던 정부로서는 완벽하게 논리적이고 “필수적”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언제 어디서나 그렇듯이, 러시아 사회주의자들과 케렌스키는 역사적 필요성을 이해하고 나아가 그들의 진정한 계획을 마침내 완수할 수 있는 좋은 순간을 포착하는 대신에 그들의 빌어먹을 “최소 계획”의 포로가 되어 부르주아 민주혁명을 위한 투쟁을 교조적으로 주장하고 있었다. 사회주의자와 케렌스키는 그들의 허약한 이데올로기에 사로잡혀 있었다. 그들은 노동대중을 위하여, 노동계급의 해방을 위하여 행동하기보다는 오히려 러시아 자본주의와 국제자본주의 사이에서 장난을 치고 있을 뿐이었다. 케렌스키는 전쟁을 포기하지도 못했고, 부르주아에게 등을 돌리지도 못했다. 그는 노동자 계급에 굳건히 기반을 둘 수도 없었고, 단순히 혁명을 계속하는 것조차 할 수 없었다! 그리고 제헌의회의 소집조차 해내지 못했다. 그는 전쟁을 계속하길 원했다! 무슨 수를 써서라도! 감히 그가 한 일은 다음과 같았다. 첫째, 개혁조치를 역행하는 것이었다. 전방에서는 사형제도와 군법회의가 부활했고, 후방에서는 억압적인 조치들이 뒤따랐다. 그리고 그는 전선을 수차례 방문하여, 전쟁의 열의를 되살리고자 연설과 선동적인 장광설을 늘어놓았다. 그는 전쟁이 관성적으로만 계속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래서 그는 말과 벌로 새로운 추진력을 주고자 했다. 그는 총사령관이라는 직함으로 너무 많은 웅변을 늘어놓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러시아 대중은 그를 총 웅변관이라 부르기 시작했다. 두 달은 케렌스키의 지지도가 바닥으로 떨어지기에 충분했다. 특히 그의 연설을 야유했던 산업 노동자들과 병사들 사이에서 그의 지지도는 더욱 바닥을 쳤다. 그들은 평화와 사회혁명의 집행을 원했다. 또한 그들은 제헌의회의 신속한 소집을 원했다. 모든 임시 정권들이 고집스럽게 소집을 미루었던 것은 그들이 지지도가 없던 이유 중 하나였다. 볼셰비키들은 이것을 이용하여 무엇보다도 그들이 집권하는 즉시 의회를 소집할 것을 약속하였다. 요컨대 케렌스키 정부가 실패한 이유는 앞선 정권들의 붕괴를 초래한 이유와 같았다. 온건한 사회주의자들은 전쟁을 끝낼 수 없었고, 기본적인 국가적 문제를 해결하는 데에 있어 한탄스러울 만큼 불능이었으며, 그리고 혁명을 부르주아 체제의 한계 아래에 가두려고 시도했다. 이러한 치명적인 불충분함의 논리적 귀결로 말미암은 몇 가지 상황과 사건은 상황을 악화시키고 케렌스키의 몰락을 촉진시켰다. 볼셰비키는 이때까지 중 최대의 세력을 결집하여 선전과 행동을 위한 강력한 조직을 보유하게 되었고, 수천 명의 웅변가들과 기사들을 전국에 퍼트렸으며, 정부(와 모든 온건한 사회주의자)의 정책, 태도, 활동에 대한 능숙하고 정확하고 격렬한 비판을 하였다. 그것은 전쟁의 즉각적인 중단과, 모든 전시 군대의 해산, 혁명의 지속을 주장했다. 그들은 전력으로 사회주의적이고 혁명적인 사상을 퍼트렸다. 그들은 제헌의회를 즉각적으로 소집하고, 그들에게 권력이 주어지면 당대의 모든 문제를 신속하고 성공적으로 해결하겠다는 약속을 매일 되풀이했다. 그들은 긴장을 풀지도 않고, 위협도 받지 않고, “권력! 모든 권력을 소비에트에!”라고 아침부터 저녁까지, 저녁부터 아침까지 외쳤다. 볼셰비키에게 정치적 권력을 주면 모든 문제가 시정되고, 해결되고, 실현될 것이다. 더 많은 지식인, 산업 노동대중, 군대가 그들의 이야기를 듣기 시작했다. 볼셰비키 신봉자의 수는 급격하게 증가했고, 모든 공장과 기업들에 침투하여 1917년 6월에 그들은 이미 무장세력, 선동가, 선전가, 작가, 조직가, 활동가들로 이루어진 위력적인 세력을 모집했다. 그들은 또한 상당한 자금을 보유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들은 레닌이 지휘하는 용기 있는 중앙 위원회를 그 지도부로 두고 있었다. 그들은 사납고 열정적이고 충만한 활동을 이어갔고, 적어도 정신적으로는 모든 상황을 통제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극좌세력에 경쟁자가 없었던 이상 이것은 사실이었다. 사회혁명당 좌파는 세력이 너무 약했기에 그저 위성정당밖에는 될 수 없었고, 아나키스트 운동은 거의 시작되지 않았다. 그리고 혁명적 조합주의 운동은 우리가 알다시피 존재하지 않았다. 케렌스키는 자신이 점점 더 안전하지 못하다고 느낀 나머지 감히 볼셰비키들을 단호하고 직설적으로 공격하지 못했다. 그는 두서없는 방식으로 오직 미봉책에 의지했다. 그리고 그 미봉책은 그의 적을 꺾을 수는 있었지만 오히려 그 적들을 홍보해 주고, 그들에게 대중의 관심과 존경, 신뢰를 쥐어주었다. 이러한 소심한 반동은 적을 약화시키는 대신 강하게 했다. 그리고 다른 많은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케렌스키는 위험을 보지 못했다. 그 순간 볼셰비키의 승리를 예상하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볼셰비키 내에서도 레닌 혼자만이 반란을 준비할 기회가 눈앞에 있다고 주장한 것은 주목할 만한 일이다. 마침내 동맹국에 의해 압박당하고, 자신의 꿈과 말에 의해 최면에 걸린 케렌스키는 그 유명한 독일 전선 공세를 시작했다. 이 공세는 비참하게 실패하고 그의 지지도에 끔찍한 타격을 입혔다. 그리고 7월 3일에는 페트로그라드에서 주둔군(그리고 크론슈타트 요새에서 온 수병들)에 의해 정부에 대항하는 무장 봉기가 일어났고, “케렌스키를 쓰러뜨려라! 사회혁명 만세! 모든 권력을 소비에트에!”라고 부르짖었다. 힘든 일이었지만 케렌스키는 아직까지는 상황을 통제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는 이전의 영향력을 잃어버렸다. 그때 그에게 치명타를 가하는 사건이 일어났다. 혁명의 물결과 케렌스키의 우유부단함에 절망한 “백군”의 장군이었던 코르닐로프(Lavr Georgiyevich Kornilov)는 전방에서 수천 명의 병사(대부분은 다른 사람들에 비해 쉽게 속일 수 있는 코카서스 연대 출신)를 데려왔고, 수도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에 대해 그들을 속여서 페트로그라드로 보내 무장한 범죄자들의 무리를 종식시키고 그들을 몰살시킬 힘이 없는 정부를 수호하겠다고 맹세한 다른 장군의 지휘 아래 두었다. 알려지지 않은 이유로 케렌스키는 코르닐로프에게 미약한 저항만 하였다. 수도는 오직 노동자들의 격노한 결의와 엄청난 노력, 숭고한 희생정신만을 통해 구원되었다. 페트로그라드 소비에트의 좌익의 도움으로 수천 명의 노동자들은 급히 무장을 하고 코르닐로프를 상대하는 “전선”을 형성했다. 수도 변두리에서 벌어진 전투는 여전히 우유부단했다. 노동자들은 한 치의 땅도 양보하지 않았다. 그러나 많은 이들이 죽었고 충분한 병력과 군수품을 확보할 수 있을지 확신하지 못했다. 하지만 철도, 전신 노동자들의 열정적인 활동과 전선의 군인 위원회의 도움으로 코르닐로프의 본부는 전선에서, 나아가 러시아 전역에서 고립되었다. 밤중에 코르닐로프의 병사들은 “도적, 범죄자, 놈팽이”(라고 이야기를 들은)로 묘사되던 이들의 영웅적인 저항에 놀랐다. 그들은 이 상황이 속임수라 의심하기 시작했고, 죽은 사람들을 조사하기로 결정했다. 그들은 그 시체들이 모두 진정한 산업 노동자들의 못이 박힌 손을 가지고 있다 것을 발견했다. 또한 그때 페트로그라드에 있던 코카서스 출신의 사회주의자들 몇 무리가 코르닐로프의 진영으로 사절단을 보냈다. 사절단은 그곳의 병사들과 상의하여 실정을 알리고 동족상잔의 싸움을 포기하도록 설득했다. 다음날 아침, 코르닐로프의 부하들은 자신들이 속았다고 선언하고, 형제 노동자들과의 싸움을 계속하기를 거부하고 본선으로 돌아갔다. 코르닐로프의 모험은 끝났다. 이 직후 여론은 케렌스키가 코르닐로프와 은밀히 공모했다고 비난했다. 사실이든 아니든 대중은 이 비난을 믿었다. 그 상황은 케렌스키 정부와 온건한 사회주의자들을 도덕적으로 끝장냈다. 볼셰비키의 단호한 공세를 위한 길이 열렸다. 그 후 중요한 사건이 또 발생했다. 소비에트, 공장 협의회, 군인 협의회의 대의원 선거에서 볼셰비키는 온건사회주의자들에 대하여 압도적인 승리를 거두었다. 이렇게 그들은 노동자 계급과 혁명 활동을 완전히 장악했다. 볼셰비키는 사회혁명당 좌파의 협력으로 농민들 사이에서도 폭넓은 공감을 얻었다. 그들은 결정적 공세를 위한 훌륭한 전술적 위치를 확보했다. 이 시기에 레닌은 범 러시아 소비에트 의회를 소집하고, 이 의회가 케렌스키에 저항하는 반란을 일으키도록 조직하고, 군대의 도움으로 정권을 전복하여 볼셰비키가 권력을 잡고자 하는 계획을 수립하였다. 그리고 그 계획을 실행하기 위한 준비는 일부는 공개적으로, 일부는 비밀리에 진행되었다. 레닌은 도피처에서 필수적인 부분들을 원격으로 지시하였다. 케렌스키는 위험을 감지하면서도 그것을 피할 힘이 없었다. 사건의 진행속도가 빨라졌다. 드라마의 마지막 장이 시작되고 있었다. 이 시점에서 그 시기 러시아 정세의 두드러진 요소들을 요약하는 것은 적절하다고 보인다. 1917년 2월부터 10월까지 국정을 맡은 모든 보수 또는 온건 정부들은 혁명 과정에서 러시아 민중들이 맞닥뜨린 예외적으로 심각한 문제를 주어진 조건 하에 해결할 수 없음을 증명했다. 이것이 8개월이라는 짧은 기간 동안 부르주아 입헌정부, 부르주아 민주주의 정부, 두 개의 온건한 사회주의 정부로 여러 차례 정부가 전복된 주된 이유였다. 이 불능성이 두드러지게 드러난 두 가지가 있다. 1. 러시아는 전쟁을 지속하는 것이 불가능했지만, 네 정부 중 어느 누구도 전쟁을 멈출 수 없었다. 1. 인민들은 제헌의회의 소집을 기다렸지만, 모든 정부가 소집에 실패했다. 전쟁의 즉각적인 중단과 의회의 즉각적인 소환을 요구하고 안전을 위한 유일한 해법으로써 사회 대혁명을 제시한 극좌파의 끈질긴 선전은 중요성이 덜한 다른 요소들과 함께 혁명의 우레와 같은 행진에 활기를 불어넣었다. 결과적으로 2월에 일어난 러시아 혁명은 차르 전제정에 대한 봉기였다. 그리고 이 봉기를 통해 러시아는 부르주아 정치 혁명의 단계, 그리고 민주적이고 온건한 사회주의의 단계를 빠르게 앞질렀다. 10월에는 모든 장애물을 제거하기 위한 길이 열렸고, 혁명은 효과적으로 그리고 완전히 사회 혁명적인 기반 위에 세워졌다. 모든 온건한 정부와 정당의 실패 후에 노동 대중이 남아 있는 마지막 정당으로 눈을 돌린 것은 당연한 논리적 귀결이었다. 두려움 없이 사회혁명을 바라본 유일한 정당. 권력이 주어졌을 때 기존의 모든 문제를 신속하고 행복하게 해결할 것을 약속한 유일한 정당. 볼셰비키가 바로 그 정당이었다. 다시 한 번 말하지만 아나키즘 운동은 여전히 너무 약해서 사건에 실질적인 영향을 미칠 수 없었다. 그리고 조합주의 운동은 없었다. 사회적 관점에서 보면 상황은 다음과 같았다. 세 가지 기본 요소가 존재했다. 1. 부르주아지, 2. 노동자 계급. 3. 이데올로그이자 전위의 역할을 맡은 볼셰비키. 부르주아지는 우리 모두가 알고 있듯이 약했다. 볼셰비키는 그것을 제거하는 데 큰 어려움을 겪지 않을 것이다. 노동자 계급도 약했다. 조직되지 않았으며 경험이 없고, 기본적으로 자신의 참된 과제를 알지 못하던 그들은 그들 스스로의 계급적 이익을 위해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그것은 모든 것을 볼셰비키에게 맡겼고, 볼셰비키들은 그 행동을 장악했다. 여전히 어느 정도의 발전이 필요하지만 독자들이 사건 전개를 더 잘 따라가고 이해할 수 있도록 도울 수 있는 주석을 추가하고자 한다. 혁명의 시작부에 러시아 노동계급이 이토록 불충분했던 것은 이후 혁명 전체에 치명적인 악영향을 주었다. 이는 1905-6년의 실패한 혁명으로 지불해야 했던 악랄한 빚이 남아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 당시 노동자들은 단결권을 얻지 못한 채 뿔뿔이 흩어졌다. 1917년에 노동계급은 그 후유증을 느꼈다. (볼셰비키가 집권한 후 초기 진로를 생각해 보자. 노동자들이 볼셰비키에 기대했던 역할과는 달리 그들은 노동자들이 스스로 혁명을 성취하고 스스로를 해방하도록 조력하거나 노동자들의 투쟁을 지원하는 대신, 집권한 순간부터 스스로를 절대적인 주인으로 만들었다. 그들은 금방 부패했다. 그것은 그들 자신을 특권 계급으로 만들었다. 그리고 이후에 그들은 새로운 형태로 노동계급을 파괴하고 대상화하였고, 최종적으로 착취하였다.) 이 때문에 혁명 전체가 변질되고 오도되었다. 왜냐하면 민중이 볼셰비키의 위험을 인식하게 되었을 때, 때는 이미 늦었기 때문이다. 그들의 새로운 주인의 견고하게 조직된 물질적, 행정적, 군사적 권력과 투쟁한 이후 민중은 굴복했다. 그 쓰라리고 불평등한 갈등은 약 3년 동안 계속되었고, 오랫동안 러시아 밖에서는 실질적으로 알려지지 않은 채로 남아 있었다. 실질적 해방을 위한 혁명은 다시금 “혁명가” 그 자체에 의하여 좌초되었다. “정치적 권력”은 그 자체로서 힘을 가지지 않는다는 것에 대하여 설명하도록 하자. 그것은 국가와 군대와 경찰의 무기인 자본에 기반을 둘 때에만 강할 수 있다. 그러한 기반이 부족하면 그것은 여전히 “공허하고, 무력하며, 작동할 수 없는” 채로 남아있게 된다. 러시아 혁명은 이것에 대한 확고한 근거를 제공한다. 1917년 2월 이후 러시아 부르주아지는 “정치적 권력”을 손에 쥐었지만 실제로는 힘이 없었고, 두 달 후 “권력”은 저절로 없어졌다. 정부의 파산 이후, 부르주아지는 생산자본도, 집단적 자신감도, 견고한 국가 기구도, 그들 자신의 군대도 소유하지 않았다. 제2 임시정부와 제3 임시정부도 같은 방식으로, 같은 이유로 무너졌다. 그리고 볼셰비키가 사건을 촉발시키지 않았다하더라도 케렌스키 정권은 조금 후에 정확히 같은 운명을 만났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 분명히 사회혁명이 “국가”를 인수하는 과정에 있다면 (자본 · 토지 · 광산 · 공장 · 통신수단과 자금이 국민의 손에 넘어가기 시작하고, 육군은 후자와 공동의 명분을 만들기 시작한다면) “정치적 권력”을 걱정할 이유가 없다. 패배한 계급이 전통에 따라 정부를 구성하려고 할 때 그것이 어떤 중요성을 가질 수 있을까? 설사 그들이 그 일에 성공한다고 해도 그것은 유령 정부가 될 것이고, 효과적이지 않으며, 무장한 사람들의 사소한 노력에도 쉽게 제압될 것이다. 그리고 혁명과정에서 “정부”에게 “정치적 권력”이 왜 요구되는가? 혁명정부는 오직 한 가지 과제, 즉 인민과 같은 경로로 나아가고, 스스로를 정비하고, 단결하고, 경제적으로 완전해지고, 필요하다면 자신을 방어하고, 자신을 확장하고, 대중을 위한 새로운 사회적 삶을 구축하는 과제만을 수행하면 된다. 그것은 “정치적 권력”과는 아무 상관이 없다. 이것이 평범한 혁명가들과 그들이 만들어낸 경제적이고 사회적인 조직들, 그들이 만들어낸 협동조합들이 수행해야하는 일이다. 근본적으로 “정치적 권력”이란 무엇인가? “정치적” 활동이란 무엇인가? 나는 이해할 수 있는 정의나 대답을 얻지 못한 채 좌파 정당 당원들에게 이런 질문들을 몇 번이나 제기했는지 모른다. 어떻게 “정치적” 활동을 그 자체로 활동으로 정의할 수 있으며, 어떻게 존재의 확실한 이유를 가지고 있는 공동체에 유용할 수 있을까? 사회적 · 경제적 · 행정적 · 입법적 · 외교적 · 문화적 활동 등은 다소 정확한 묘사와 정의가 가능하다. 하지만 “정치적” 활동은 무엇인가? 이 용어는 국가적으로 광범위하게 확장된 집단에게 없어서는 안 될 중앙 행정 활동을 정확히 나타낸다고 한다. 그렇다면 “정치적 권력”은 “행정력”을 의미하는 것인가? 이 두 가지 개념이 전혀 같지 않다는 것은 쉽게 알 수 있다. 권력과 행정의 개념은 혼동스럽다(마치 국가와 사회가 혼동되는 것처럼). 사실 행정적 활동은 인간 활동의 어떤 분야에서도 분리될 수 없으며, 그 중 필수적인 부분이다. 행정은 조직, 조정 또는 중앙 집권의 근간이다. 특정한 활동은 일반적인 행정을 필요로 할 수 있다. 각 분야에서 조직 능력을 보유한 이는 일반적으로 조직가 또는 “행정가”의 역할을 수행하며, 이는 단순히 해당 분야의 전체 활동의 일부분일 뿐이다. 모두와 같이 한 명의 노동자인 이들은 강고한 정치적 권력이 없이도 “행정”(만남 · 결합 · 균형 등)의 수행을 보장할 수 있다. 그렇기에 “정치적 권력”은 여전히 정의할 수 없는데, 그것은 평범하고 실제적이며 구체적인 인간의 활동에 해당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것이 사회의 실질적 기능이 제대로 수행될 때 “정치적 권력”이 공허해지고, 그들 스스로의 무게에 짓눌리게 되는 이유이다. 인간 공동체에는 특정한 “정치적” 기능이 없기에, “정치적 권력”은 존재할 수 없다. 러시아의 법학자인 골덴바이저(Alexander Alexandrovich Goldenweiser)는 그의 회고록에서 그가 혁명 기간 동안 특히 불안정한 지역이었던 우크라이나의 한 도시에서 살았다고 회고한다. 혁명이 일어나는 과정에서 도시는 백군이나 적군의 “권력” 바깥에 여러 번 남겨졌다. 골덴바이저는 그 도시의 인민들이 “권력”이 있을 때보다 더 잘 살아가며 노동했고, 자신의 필요를 충족했다고 놀란 어조로 이야기한다. 골덴바이저만 그러한 사실을 언급한 것은 아니었다. 더 놀라운 사실은 그가 그것에 놀랐다는 것이다. 사람이 살아가고, 행동하고 스스로의 필요를 충족하기 위해 조직을 꾸리게 하는 원동력이 “권력”인가? 모든 인류 역사에서 사회를 잘 조직되고 조화롭고 행복하게 해주는 “권력”이 존재한 적이 있는가? 아무리 멀리 거슬러 올라가도, 역사는 우리에게 그 반대의 사실을 가르쳐준다. 인간 사회는 정치적 권력이 약하고 그것이 민중에게 관여를 덜 할수록 더욱 행복하고, 조화롭고, 진보했다. 강한 “정치적 권력”은 인민들에게 불행, 전쟁, 빈곤, 정체 외에는 아무것도 주지 않는다. “정치적” 권력은 특정한 필요를 충족하기 위해 인간 사회의 진화과정에서 형성되었다. 그리고 지금, 그 필요성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정치적 권력”에 대하여 더 이상 논의하지는 않겠다. 그것은 우리의 주제에서 너무 멀어지게 할 것이다. 우리는 근본적으로 수천 년 동안 “권력”은 전쟁 외에는 어떤 것도 만들어내지 못했다는 것을 말하는 것으로 논의를 국한하고자 한다. 그 주제를 증명하는 학술적 저술들은 다양하며, (최근 러시아에서 수십 년 동안) 놀라운 방식으로 그것을 증명해 왔다. “행정”을 위해서는 강요, 명령, 강제할 수 있어야 한다고 주장되어 왔다. 이 주장에 따르면 “정치적 권력”은 강제의 수단을 가진 큰 집단(국가)의 큰 중앙 행정이다. 그러나 중앙행정이 필요한 경우 이와 같은 대중적 행정 서비스는, 특정하고 영구적인 “정치적 권력”을 세울 필요 없이, 훨씬 더 효율적으로, 이루어질 수 있다. 또한 대중이 스스로를 조직하여 효과적인 행정 집행력을 만들 수 없다는 주장도 있다. 이 글에서 독자가 충분한 반증을 발견하기 바란다. 사회주의 혁명의 와중에 정당들이 “권력을 획득”하기를 원한다면, 민중들은 그저 혁명적 과업을 지속하고 정당을 고립시키면 된다. 그러면 정당들은 곧 이 쓸모없는 시도를 포기하게 될 것이다. 1917년 2월 이후, 그리고 특히 10월 이후, 러시아 노동자들이 새로운 주인을 만들어내는 대신, 그저 혁명적 과업을 지속하고, 그들 자신을 방어할 노동자의 군대를 꾸리고, 전반적인 지지를 끌어내었더라면 “정치적 권력”이라는 개념은 곧 사라졌을 것이다. 다음 장에서는 지금까지 알려지지 않은 다양한 사실들을 다룰 것이며, 이 사실들로 위 명제를 확인할 것이다. 다음 혁명이 올바른 길을 가고, 정치적 “궁정 혁명가”들에게 현혹되지 않기를 바란다. ** 볼셰비키 혁명 1917년 10월 말, 러시아 혁명의 클라이맥스가 가까워졌다. 대중은 새로운 혁명을 위한 준비를 끝마쳐가고 있었다. 7월 이후 여러 차례의 자발적인 봉기(이미 언급된 페트로그라드의 봉기, 칼루가의 봉기, 그리고 카잔의 봉기 등)와 군대와 민간인 모두의 소요가 이를 증거하고 있다. 그때부터 볼셰비키 당은 대중과 군대라는 두 가지 실질적인 힘을 이용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확보했다. 그들은 행동에 착수했고 결정적인 전투를 열렬히 준비했다. 그들의 선동은 무시무시했다. 그것은 결정적인 전투를 위한 노동자와 군인들의 부대 구성에 마지막 손질을 했다. 또한 그들은 승리 이후를 대비하여 자체적 부대를 구성했고, 레닌을 필두로 하는 볼셰비키 정부의 구상을 완성했다. 레닌은 사태의 추이를 유심히 지켜보다가 마지막 지침을 내렸다. 미국에서 몇 달 전에 돌아온 레닌의 오른팔 트로츠키와 상당한 권력을 나눠 갖는 것이었다. 사회혁명당 좌파는 볼셰비키와 협력하고 있었다. 아나코 생디칼리스트와 아나키스트들은 비록 수가 적고 조직력 또한 약했지만 케렌스키에 대항하는 대중의 행동을 지지하고 격려하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 그들은 새로운 혁명이 새로운 정당에 의한 권력의 교체라는 정치적 방향에서 벗어나 진정한 사회적 길 위에서 자유로운 조직과 협동을 지향하여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어지는 사건의 경과에 대해서는 상당히 잘 알려져 있기에 그에 관해서는 간략하게만 다시 이야기 할 것이다. 볼셰비키당 중앙위원회는 케렌스키 정부의 극도로 약한 부분 인식하고, 노동 대중 대다수의 압도적 지지를 얻어냈으며, 언제나 혁명의 전위였던 크론슈타트 함대와 페트로그라드 주둔군 다수의 지지를 얻었다고 확신했다. 그들은 10월 25일로 거사일을 정했다. 범 러시아 소비에트 의회 역시 같은 날로 소집되었다. 중앙 위원회가 보기에 이 (구성원의 대다수는 당의 지침을 맹목적으로 추종하는 볼셰비키들이었던) 의회는 혁명을 지지하고 보족하며, 러시아의 모든 혁명 세력을 규합하여 케렌스키의 마지막 저항에 맞설 것이었다. 10월 25일 저녁, 폭동이 일어났다. 의회는 예정대로 페트로그라드에서 열렸다. 그러나 의회가 굳이 개입할 필요도 없었다. 시가전도, 바리케이드도, 광범위한 전투도 없었다. 모든 일이 간단하고 빠르게 일어났다. 모두에게 버림받았지만 여전히 환상에 사로잡혀있던 케렌스키 정부는 수도의 겨울 궁전에 머물러 있었다. “정예” 경비대대와 여성, 청년 사관생도들이 그를 지키고 있었다. 소비에트 의회와 당 중앙위원회가 공동으로 고안한 계획에 따라 볼셰비키에 의해 장악된 일부 분대가 경비병들을 공격했다. 크론슈타트 함대에서 차출되어 겨울궁전 맞은편의 네바강에 정박한 전함 수 척이 이를 지원했다. 가장 주목할 만한 것은 순양함 오로라였다. 짧은 교전과 몇 발의 포격 후 볼셰비키는 궁전을 점령했다. 케렌스키는 간신히 도망쳤다. 정부의 다른 구성원들은 체포되었다. 결과적으로 페트로그라드에서 “반란”은 볼셰비키가 이끄는 소규모 군사작전으로 한정되었다. 정부의 공백을 틈타 볼셰비키의 중앙위원회가 그 자리를 대체했다. 사실상의 궁정 혁명이었다. 케렌스키는 전선에서 소환된 일부 병력(코사크와 코카서스 사단)을 이끌고 페트로그라드로 진군하려 시도했다. 이 시도는 수도의 노동 대중과 재빨리 구원에 나선 크론슈타트 수병들의 활발한 무력 개입 덕분에 실패했다. 페트로그라드 외곽의 가치나 근처에서 벌어진 전투에서 케렌스키 부대의 일부가 패배했고, 나머지는 혁명 진영으로 넘어갔다. 케렌스키는 해외로 도피했다. 모스크바 등지에서는 볼셰비키에 의한 권력 장악이 더 어려웠다. 모스크바에서는 열흘간 혁명군과 반동군이 격렬한 전투를 벌였다. 희생자가 많았다. 몇몇 구역은 포격으로 큰 피해를 입었다. 마침내 혁명이 승리했다. 다른 도시들에서도 격렬한 투쟁 끝에야 승리를 확보할 수 있었다. 그러나 농촌은 대부분 평온하게, 아니 오히려 무관심하게 지냈다. 농민들은 자신들의 지역적 문제에 너무 열중했다. 그들은 스스로 “농민 문제”를 해결하고 있었다. 어쨌든 그들은 볼셰비키들이 권력을 장악하는 것에 문제의식을 느끼지 않았다. 일단 토지를 갖게 되고, 대지주의 귀환을 두려워할 필요가 없게 되자, 그들은 만족하여 누가 왕위를 계승했는지에는 관심을 두지 않았다. 농민들은 볼셰비키가 그들에게 어떠한 해도 끼치지 않을 것이라 보았다. 그리고 농민들은 볼셰비키가 전쟁을 끝내고자 한다는 것을 들었고, 이는 그들이 보기에는 완벽하게 정당하고 합리적이었다. 그들은 이 새로운 정권에 반대할 이유가 없었다. 혁명이 어떻게 이루어진 방식은 “정치적 권력”을 위한 투쟁의 무용성을 잘 보여준다. 만일 권력이 민중들과 그들의 군대에 의해 뒷받침된다면 혁명에 대항하여 승리하는 것은 불가능할 것이고, 따라서 혁명을 공격하는 것은 무의미할 것이다. 그러나 반대로 만약 혁명이 민중 대다수와 군대에 의해 버려진다면, 그것은 신경 쓸 가치가 없다. 무장한 사람들의 작은 몸짓 하나만으로도 그것은 카드로 만든 집처럼 무너질 것이다. “정치적”인 권력이 아니라 혁명의 무궁무진하고 자발적이며 잠재적인 힘, 그 저항할 수 없는 정신, 혁명이 열어젖히는 새로운 지평, 그것이 가져다주는 어마어마한 가능성에 더 집중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 그러나 동부와 중앙 러시아 등 여러 지역에서 볼셰비키군대의 승리는 완전하지 못했다. 반혁명운동이 곧 나타났다. 그들은 단결하고, 권위를 확보하였으며, 1921년 말까지 계속된 내전이 이어졌다. 특히 안톤 이바노비치 데니킨(Anton Ivanovich Denikin) 장군이 이끄는 한 무리의 반란군은 볼셰비키의 권력을 심각하게 위협했다. 남부 러시아에서 출발한 데니킨의 군대는 1919년 여름 거의 모스크바의 문턱에 이르렀다. 표트르 브랑겔(Pyotr Nikolayevich Wrangel) 장군이 같은 지역에서 일으킨 또 다른 봉기 역시 위험했다. 그리고 알렉산드르 바실리예비치 콜차크(Alexander Vasilyevich Kolchak) 제독이 시베리아에서 조직한 세 번째 백군은 한동안 눈에 띄게 위협적이었다. 그는 옴스크에 있는 본부에서 우랄 산맥으로 서진하여 볼셰비키를 몇 차례 전투에서 격파했다. 다른 반혁명적 반란은 덜 중요했다. 외국은 이러한 움직임을 부분적으로 지원하며 그들에게 물자를 제공했다. 일부 온건 사회주의자, 사회혁명당 우파, 그리고 멘셰비키들은 백군을 지지했고, 심지어 그들을 정치적으로 지도하기도 했다. 반면 볼셰비키 정권은 두 방향에서 길고 힘겨운 투쟁을 이어가야 했다. 옛 동지였던 사회혁명당 좌파와의 투쟁이 한 방향이었고, 다른 방향은 아나키즘 운동과 그 사상에 대한 투쟁이었다. 당연히 이러한 좌파 운동들은 반혁명 쪽에서 볼셰비키와 싸운 것이 아니었다. 오히려 그들은 “진정한 사회주의 혁명”이라는 이름으로 볼셰비키당의 집권을 ‘배신’한 것이었다. 반혁명 세력의 탄생, 그리고 특히 그 범위와 세력은 볼셰비키 세력의 파탄에 뒤이은 필연적인 결과였고, 볼셰비키가 러시아 인민의 경제사회적 삶을 새롭게 만들어내지 못한 결과였다. 이제 이 책은 한 발 더 나아가 10월 혁명이 가져온 실질적 발전이 무엇이었는지, 또한 새로운 권력이 스스로를 강요하고 유지하며, 폭풍을 통제하고, 혁명의 문제를 자신만의 방식으로 ‘해결’한 수단이 무엇이었는지를 보게 될 것이다. 1922년 말이 되어서야 볼셰비키당은 상황을 완전히 통제하고 있다고 느낄 수 있었다. 차르 제정과 부르주아 봉건정의 폐허 속에서 이제 새로운 사회를 건설하기 시작할 필요가 있었다.
[1] 1917년 혁명 전까지 19세기 러시아의 이러한 상황과 대혁명 전 프랑스가 비슷하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러시아의 상황은 더욱 특이하다고 볼 수 있다. [2] 악명 높은 “193인의 재판”이 탄압의 절정이었다. [3] 레닌이 그의 저작에서 말하고, 부하린이 그의 저작 <공산주의 ABC>에서 언급하였던 것처럼 “소비에트”는 1905년에 노동자에 의해 자발적으로 형성되었지만 세부적인 내용을 말하지 못했다. 하지만 세부적인 부분에서 그들은 이 노동자들이 볼셰비키의 일원이거나, 적어도 그 “단초를 가지고 있었다”는 왜곡된 인상을 덮어씌웠다. [4] 각주 소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