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cholium

뉴스에 이리저리 치이며

2021-02-13

정보기술이 우리의 일상에 점점 더 깊이 침투하면서, 뉴스는 대중의식의 중심 자리를 차지하게 되었다. 우리는 작은 인터넷 기계를 항상 휴대하기 때문에 항상 뉴스에 쫓긴다. 사람들과 어울리기 위해 사용하는 소셜미디어에서 우리는 기사, 반응 글과 뉴스 관련 ‘짤’의 폭격을 받는다. 채팅방에서 우리의 가족과 친구들은 그들이 감정적 반응을 하게 만든 기사들에 우리도 같은 반응을 갖길 바라며 글들을 공유한다. 어디를 가던, 피할 수 없이 우리는 뉴스의 추적을 당한다.

인터넷의 편재성은 뉴스를 일상으로 들여놓는다. 뉴스를 접하기 위해 텔레비전 근처에서 정해진 시간을 기다리거나 거추장스러운 신문지를 펼칠 필요가 없다. 그리고 과거와는 다르게, 이제는 실시간으로 소식을 접한다. 이는 우리의 현상학적 경험을 극단적으로 바꾼다. 더 이상 우리 일과는 기상, 출근, 사교, 식사, 새 소식 접한 뒤 취침 전 취미로 이뤄진 생활이 아니다. 대신 우리 일과는 홍콩의 폭동 속에서 힘겨운 삶이나, 극우의 무력과시에 대한 두려움이나, 정신적으로 불안정한 ‘교외 엄마’들이 하는 우리 현 소문화권에서 용인하지 않는 행동에 대한 독선적인 경악감으로 조금씩 채워진다. 뉴스는 시간을 가리지 않고 침투한다.

활동가와 급진주의자들은 새로운 사건을 추적하고 이에 응답하는 것을 모든 활동의 시발점으로 만들었다. 그렇지 않으면 무책임하고, 무관심하고, 특권을 누리는 것으로 보이고 효과적이지 않은 것으로 인식된다. 우리가 좋아하지 않는 일이 뉴스에 올라오면, 당장 가서 그 문제를 해결하라는 부름이 내포돼있다. 일부는 우리가 지금 일어나고 있는 그 어떠한 끔찍한 악행도 멈출 수 있다고 생각한다. 또 다른 이들은 시작부터 실패할 것이 뻔한 투쟁과 시위를 통해 ‘세력을 키우자’는 입 발린 말을 한다. 각자의 냉소함이나 사상과는 무관하게, 우리는 뉴스를 통해 접하는 사건에 대응하는 것에 중점을 둔다.

뉴스 소식의 화려한 그 특성 때문에 우리에게 정말로 일어나고 있는 일을 알아내기 힘들어진다. 우리는 일상의 경험의 중요성을 무시하고 뉴스로 접하지만 않았다면 우리 삶에 분명한 영향을 끼치지 않았을 사건에만 집중하게 된다[1].

뉴스에 의존하는 것은 세상을 얄팍하고 변덕스러운 관점으로 이해하는 것이다. 초기보고는 절대로 정확한 경우가 없고 같이 보도 내용은 맥락을 쉽게 흐린다. 보도된 사건이 일어난 현장 -예를 들자면 시위-에 있어본 적 있는 사람은 이 점을 곳 바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기자는 대개 맥락을 모르거나, 자신들의 사상에 알맞게 사건을 보도하거나 둘 다이다. 때문에 우리가 세상 소식을 모르는 것이 아닌, 뉴스는 우리가 무언가를 이해하고 있다는 착각을 하게 한다.

뜻 깊은 분석이나 생각은 뉴스에는 존재하지 않는다. 기사들은 -특히 인터넷에서 훑어 읽히는 기사들- 독자의 관심을 잃지 않고 새로운 개념이나 사고방식을 묘사할 시간이 없다. 새로운 관점에 대한 상세한 설명을 할 시간이 없다는 것은 지배적 사상의 현실에 대한 묘사법이 승리한다는 말이다. 우리가 그 어느때보다도 더 뉴스에 관심이 쏠려있다는 말이 사실이면, 이는 자본주의 상식이 끊임없이 우리에게 주입되고 있다는 말이기도 하다.

뉴스는 어느 소식에 대한 흥분을 만든 뒤 곧바로 다른 곳으로 관심을 바꾼다. 이 모순 덕분에, 모든 것은 ‘가장 중요한 것’이 된다 -다음주가 돼 우리가 이 사건을 잊기 전까지는. 트럼피즘{1}과 2016년 대선 당시 제기된 러시아와의 내통에 대한 고발이 이 현상에 대한 예이다. 우리는 이 사건에 신경을 써야 하는 것이 원칙이라 하지만, 신경 써야 하는 사건들은 매주 바뀌고 이들 때문에 달라지는 것은 없다. 결국 뉴스를 향한 분노는 상관없어진다. 제보된 현상이나 사건은 일상이 되면서 분노의 대상은 군중의 걱정거리로부터 서서히 잊혀진다. 일상은 뉴스가 아니기 때문에 계속해서 분노를 표출할 만한 새로운 사건으로 관심은 넘어간다. 예를 들어, 이십 년 전 노동착취공장에 대한 분노와 여러 반대운동이 있었지만, 이 공장의 존재 사실이 상식이 되자 사람들은 걱정하기를 그만두고 관심을 다른 곳으로 돌렸다.

뉴스 사업의 이념은 매우 강력한 기관들에 의해 정해진다. 이 글에서 설명할 필요 없는 기업 매체에 대한 수많은 비판이 존재하지만, 간단한 증명이면 충분하다: 권력을 쥔 사람이나 기관이 무언가를 대중의식에 들이길 원한다면, 그들은 그저 보도거리가 부족한 기자에게 그 무언가를 쥐어 주기만 하면 된다. 안될 경우 짤, 봇 또는 소셜 미디어 상의 다른 허위정보 도구를 사용하면 된다.

뉴스가 구경거리로 변질되면서 사람들은 뉴스에 보도되기 위해서만 행동하기 시작한다. 행동은 현실성을 잃고 덕분에 영향력도 잃는다. 요즘 말로 표현하자면, 우리는 뉴스에 나오는 사람들이 ‘랄핑’ (LARPing) {2}을 하고 있는 게 아닌가 의심하게 된다. 우리는 그들이 진짜로 무언가를 이루고 있는지, 아니면 온전히 다른 사람들의 시선을 받기 위해 무언가를 하고 있는 척하고 있는지 생각하게 된다. 전시성의 군림이다. (Scholium, 2019)

관심을 끌기 위해, 뉴스는 두려움과 분노를 불러일으키려 한다. 뉴스에서 본 것에 두려움을 느낀다면, 우리는 반드시 하던 일을 잠시 멈추고 무대 뒤에 우리가 무언가를 하기를 원하는 사람이 있는지 생각해봐야 한다. 이는 오래되고 잘 알려진 지적이지만, 아나키에 끼치는 영향은 그렇지 않다. 두려움은 무력함을 불러일으켜 우리로 하여금 보호자를 원하게 하는 반아나키적 태도를 갖게 한다. 선불교 승려 틱낫한은 두려움은 어릴 적 부모를 향한 의존성으로부터 난다고 서술한다. 한없이 무력한 탓에, 우리는 생존을 위해 그들에 의존했고 때문에 그들이 없을 때 두려움에 떨게 됐다는 것이다. 두려움은 부모 곁으로 돌아가 보호를 받으라는 신호이다. 결론적으로, 두려움은 권위를 좋게 보게 만든다.

일부는 최신 뉴스를 듣는 것을 넓은 세상의 현황에 대해 아는 것으로 착각한다. 그들은 뉴스에 주의를 기울이는 것은 그들이 사는 세상을 이해하는 방법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뉴스가 정말로 새로운 사건을 보도한다면, 일상의 사실은 누가 보고하는 건가? 우리 주변의 사회와 세상에 그 어떠한 화려한 사건도 일어나고 있지 않으면 어떻게 되는 건가? 뉴스는 원래 비정상적인 사건을, 일상을 벗어나 전개되는 것들을 보도해야 한다. 뉴스의 편향을 무시하고, 보도 내용이 저들이 말하는 것처럼 온전한 현실이라는 말을 믿는다 해도, 어째서 새로운 소식에 반응하는 것이 우리의 우선사항이 돼야 하는가?

때를 불문하고, 셀 수 없이 많은 사람들이 노동착취공장에서 노역을 하고 비인간 동물들은 공장식 축산 농장에 갇혀 있다. 수억 또는 그 이상이 기아와 식량부족에 시달린다. 생태계가 죽어가고 있다. 세상 모두가 무력함과 불안함에 떨고 자신의 의식주를 통제할 수 없다. 그리고, 당연히, 우리는 이제서야 이해하기 시작한 다른 수없이 많은 방법으로 우리 삶으로부터 소외됐다. 1968년 프랑스에서 일어난 인민봉기 당시, 누군가 벽에 ‘비혁명 주말 하나는 일 개월 간 끊임없는 혁명보다 무한히 더 잔인하다’라 적었다. 어쩌면 일상 속 시시함과 끔찍함은 중요한 것일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다. 이 글은 반드시 지속적인 사회운동을 지지하지는 않는다. 요점은 뉴스와 새소식은 고통의 독점을 쥐고 있지 않다는 것이다.

뉴스와 새소식과의 지나친 접촉이 일으키는 ‘경험 포화’는 의식에 미묘하지만 중요한 변화를 일으킬 수 있다. 물론 평상시의 자질구레함은 군중의 관심을 끈 적은 없지만, 뉴스 전달의 용이성은 ‘사건’을 일상보다 중요한 것으로 받아들여지게 만들었다. 새로운 사건에만 관심을 갖고 우리의 일상을 어떻게 변화시킬 것인지에 대한 생각을 경시한다. 이 모든 것은 후자가 우리 일생의 경험의 대부분을 차지함에도 불구하고 그런다.

새로운 것에 대한 지속적인 집착은 끊임없는 섭취에도 불구하고 절대로 채워지지 않는 공허를 드러낸다. 뉴스가 보도하는 새로운 사건에 집착하는 사람들은 선견지명이 부족하다 (Landstreicher, 2009). 이들은 자기지향이 부족하기 때문에 새로움으로부터 방향성을 찾는다. 우리들 중 원하는 세상에 대한 뜻이 확고하고 현 세상에 대항하며 사는 방법을 아는 이들은 과업과 가능성을 위한 무한한 가능성을 쥐고 있다. 그들은 일상을 어떻게 계획할 것인지에 대한 계획을 세우고, 이 사회에 맞서 비대칭전을 펼치고 인관관계에서 여러 가능성을 탐구하고 신뢰하는 사람들과 함께 힘을 기른다. 이러한 작업들은 뉴스에 대한 조증스러운 의식을 요하지 않는다. 항상 그렇지는 않겠지만, 사색과, 대화와 영감을 통해 우리도 언젠가는 과업을 계획할 수 있을 것이다.

새로운 소식에 대한 집착은 어떠한 보수주의를 드러낸다. 마치 일부 사람들은 현재 세상의 상태에 대한 불만이 없는 듯하다. 이들이 문제 삼는 것은 일상의 변화이고 위기이다. 어쩌면 자본주의 아래 일상을, 그 하찮은 여가 활동과 불만족스러운 인간관계와, 전체적인 소극성을 이들은 그닥 문제로 여기지 않는 것일지 모른다.

흔히 급진주의자들은 사회적 위기를 변화를 추진하기 위해 이용한다. 우리가 지지하는 입장 중 하나는 우리가 지적하는 것을 대중 또한 지적할 경우, 이에 대한 투쟁을 대중화해야 한다는 입장이다. 이것은 우선 사항이 되지 않는 한에서 해로울 것이 없는 주장이다. 하지만 우리가 뉴스 진입주의자, 급진주의자, 모든 쓸모 없는 시위에 참여를 지지하는 자가 된다면, 우리는 얼마 안가 반복된 실패 덕분에 지치기만 할 것이다. 대부분의 사회적 문제는 시위를 통해, 무장시위라 할지라도, 해결될 수 없고 우리 같은 헌신적인 소수만으로 성공적으로 항쟁의 규모를 키울 수 없다. 투쟁이 시작한다면, 우리는 이를 돕기 위해 참여할 수 있다. 하지만 일어나는 모든 시위에 ‘힘을 기르기 위해’ 참여하는 것은 절대로 효과적이지 못하고 잘해봐야 시간 낭비이다.

뉴스와 소셜 미디어를 향한 비판을 들은 일부는 실용주의를 주장할 수도 있다: “세상은 바뀌었고 우리는 온라인으로 이주하지 않으면 무산될 것이다.” 막스 호르크하이머 (Max Horkheimer)는 이 ‘도구적 이성’을 지적했다. 미로를 가로지르는 쥐는 이 도구적 이성을 사용한다. 이성을 사용해 직시하는 현실에 자기자신을 적응시키는 것이다. 현대의 이성을 지배하는 유형으로서 오로지 수단을 고려하고 절대로 목적을 생각하지 않는다. 묵언의 암시된 그의 목적은 자본주의에 의해 이미 정해져 있다: 돈을 번다, 경쟁 우위를 확보한다, 등. 하지만 다른 유형의 이성도 존재한다. 자신만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이성을 사용하는 것처럼, 원하는 인생과 세상이 무엇인지에 대한 확고한 생각을 갖는 것처럼 말이다. 이런 유형의 이성은 완강하고 도전적이다, 세상을 있는 대로 받아들이는 것을 거부한다 (호르크하이머, 1947).

반면에, 뉴스에 자기자신을 끊임없이 맞추는 것은 모든 것이 일시적인 ‘유동적 근대성’의 신자유주의 시대 경제에 반응하도록 훈련된 습관이다. 빛과 예산 감소와 불안정한 직장이 유발하는 경제적 불안정함은 우리가 경제를 위해 계속해서 변하게 한다. 당신의 직장이 자동화, 감축 또는 외주 되고 있는가? 재교육 받고 분야를 바꾸는 것이 좋을 것이다. 당신의 고장에 당신의 분야와 관련된 일자리가 없거나 높아지는 집세를 감당할 수 없는가? 살던 곳을 버리고 다른 곳으로 이사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연인관계에서 우리는 한 사람이 다른 한 사람에게 맞춰주는 상황이 있을 때 힘의 불균형이 있다고 한다. 이 관계의 조건은 후자가 내세우고 힘은 그에게 있다. 뉴스가 우리에게 내세우는 행동 조건을 받아들인다면 우리는 뉴스의 권위에 굴복하는 것이다. 뉴스가 우리에게 맞춰주지 않고 우리가 뉴스에게 맞춰주는 것이다. 세상의 거대한 체계들이 우리들보다 더 강력한 것은 당연하고 이에 꾸준히 반응하는 것은 이 체계에 대항하는 실용적인 방법이라고 반박을 할 수 있다. 하지만 아나키스트는 수단을 목적에 맞게 계획해야 한다. 강력한 기관에 휘둘리지 않는 삶을 원한다면, 우리는 이에 알맞게 행동해야 할 것이다.

대담하고, 자의적이고 확고한 주장을 갖은 사람은 비협조적인 사람이라는 인식을 받는다. 하지만 우리는 이런 사람들을 존중한다. 남을 위해 계속해서 바뀌는 사람은 우리는 존중하지 않는다. 융통성은 몰인격적이다. 신자유주의와 행동주의 모두 우리를 대중의 시중으로 만든다.

새로움을 위해서 계속해서 자기 자신을 바꾸는 것과는 다르게, 지속적으로 무언가를 하는 것은 그 활동에 대해서 당신의 변화와 성장을 가능하게 한다. 특히 다른 사람들과 협력할 때, 어떻게 하면 그 일을 더 잘 할 수 있는지 깨닫게 해준다. 뉴스 소식에 대응해 계속해서 당신이 하고 있는 일을 바꾸는 것은 이 가능성을 희생시킨다. 이를 통해 배우는 것이 있다면 이는 절대 문제를 해결하는 방법이 아닌 오로지 변하는 현실에 반응하는 방법뿐이다.


출처

- Bauman, Zygmunt. “Liquid Modernity”. 1999

- Horkheimer, Max. “Eclipse of Reason”. 1947

- Landstreicher, Wolfi. “On Projectuality” Willful Disobedience, vol. 4, number 1. 2009. https://writerror.com/texts/on-projectuality

- Nhat Hanh, Thich. Fear: Essential Wisdom For Getting Through the Storm. 2012

- Scholium “The Hollowing of Anarchy: Exhibition Value”. 2019. https://scholium.noblogs.org/post/2019/01/20/the-hollowing-of-anarchy-exhibition-value/

[1] 뉴스가 직접경험을 다룰 때처럼, 이 개념은 모호해진다. 백인 경찰관에 의한 조지 플로이드의 참혹한 살인은 전세계 곳곳의 수백만명이 자신들의 경험에 대해서 되돌아보게 만들었다. 이는 그들도 경찰폭력에 시달리기 때문일 수도 있다. 그들과 그들이 사랑하는 사람들이 비슷한 운명을 맞게 될 수 있다는 가능성이 뇌리에서 떠나지 않는다. 고로, 조지 플로이드의 살인을 뉴스를 통해 목격하는 것은 그들이 항상 경험하는 두려움과 억압의 연장이었다. 하지만 이러한 상황들은 일반적인 현실을 증명하는 예외상황이다.

{1} 트럼피즘(Trumpism)은 미국의 45대 대통령 도널드 트럼프 (Donald Trump)의 허무맹랑한 말과 행동들을 일컫는다.

{2} 랄프(LARP)는 영어 ‘Live-Action Role Play’의 약자로 보드게임이나 비디오게임 같이 가상에서 하는 역할게임이 아닌, 현실에서 상상 속 놀이를 하는 것을 말한다. 엄청난 상상력을 발휘해야 한다는 점에서 랄프는 어린이들의 놀이와 유사하다.


2021.05.24, 원문링크 https://scholium.noblogs.org/post/2021/02/13/getting-pushed-around-by-the-news-2nd-ed/
원문 "Getting Pushed Around by the News" (영문) 번역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