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itle: 유일자는 그대를 부르는 말이다
Subtitle: 교조주의 안에 갇혀있는 아나키즘에 대한 슈티르너주의적 실증(實證), 혹은 실증(悉證)에 관한 유일자의 실증(寔證)
저자: AARC
Date: 2026년 08월 25일

시작하기 전, 이 글은 유일자도 밥은 먹어야 산다 를 반박하는 글이다.

서문

가끔 한국 아나키스트 생태계에서 슈티르너에 관한 이야기를 듣는다. 그리고 그 이야기는 대부분 비판적인 것이고, 그 과정에서 치명적인 왜곡과 오독이 반복된다. 솔직히 이해할 수가 없다. 마르크스나 좌파 아나키즘에 대해 왜곡하는 자들에게는 득달같이 달려들면서, 정작 같은 아나키스트에 대해서는 사상이 다르다고 제대로 공부조차 하지 않은 채 왜곡을 일삼다니, 어이가 없지 않은가?

물론 본문에서도 이러한 비판을 예상한 듯, 슈티르너에 대한 학습이나 고민이 부족하여 그러한 글을 작성했을 수도 있다고 미리 언급한다. 당시에는 슈티르너에 관한 서적이 국내에 거의 없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러한 사정들이 변명이 될 수는 없다. 한 사람에 대해, 그리고 한 사람의 철학에 대해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채 ‘비판’을 한다는 것이 대체 무슨 소리인가? 게다가 슈티르너가 남긴 문서는 500페이지가 확실히 넘는다.

슈티르너에 대한 이러한 왜곡과 오독은 아마도 영문 번역의 영향도 상당할 것이다. 영문 번역본인 『The Ego and Its Own』은 번역 과정에서 용어를 적절하게 옮기지 못한 부분이 있어, 슈티르너의 사상을 오해하기 쉽게 만들어 버렸다. 많은 이들은 그를 극단적인 관념론자나 단순한 이기주의자로 여기지만, 이는 슈티르너를 지나치게 단순화한 해석이다. 그는 오히려 헤겔적 관념론을 해체하고 실존하는 개인 자체에 집중한 철학자이며, 이후의 실존주의와 포스트구조주의를 연상시키는 문제의식을 상당히 앞서 보여준 인물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 글을 작성한다. 본문에서는 “이 글에 대해 슈티르너를 사랑하고, 그의 사상이 혁명적 사회운동의 기반으로써 유의미하다고 생각하는 이들의 가열찬 반박과 그로 비롯할 토론을 꿈꾼다”고 말하지만, 나는 슈티르너가 결코 혁명적 사회운동의 기반으로서만 유의미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는 노조 운동가가 아니다. 슈티르너를 읽는다는 것은 그의 사상을 어떻게 혁명적 사회운동에 끼워 맞출 것인가를 고민하는 것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따라서 내가 이 글을 반박하는 핵심적인 이유는 다른 곳에 있다. 본문이 슈티르너의 철학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채, 자신이 비판하고자 하는 슈티르너를 먼저 만들어놓고 그것을 공격하고 있기 때문이다. 한마디로 『유일자도 밥은 먹어야 산다』는 전형적인 허수아비 공격의 오류를 범하고 있는 글이다.

I. 슈티르너주의적 실증(實證)

1) 유일자는 오롯한 개인이 아니다

우선 본문의 첫 문장부터 짚고 넘어가자. 슈티르너가 “오롯이 존재하는 나”를 말하고, 에고이즘을 “올바른 원칙”으로 내세운다는 서술부터가 이미 슈티르너를 상당히 왜곡하고 있다. 슈티르너의 에고이즘은 “인간은 공동체 없이 살아야 한다”는 원칙이 아니다. 더구나 유일자는 사회와 관계를 끊고 홀로 자연과 맞서 싸우는 원시인 같은 존재가 아니다. 오히려 유일자는 처음부터 구체적인 관계와 욕망, 능력과 상황 속에서 존재하는 개인이다. 그러나 이렇게 설명한다면 비평가들은 유일자를 개념으로 오해할 것이 분명하다. 유일자는 어떠한 개념이 아니라, “그대”를 의미한다. 유일자는 내용이 없는 말이고, ‘홍길동’ 같은 그저 이름일 뿐이다. 그러므로 “인간은 혼자 생산할 수 없다”는 사실은 슈티르너에 대한 반박이 되지 않는다. 유일자가 밥을 먹는다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사실이며, 슈티르너 역시 인간이 타인과 관계하고 서로 의존하며 살아간다는 현실을 부정한 적이 없다. 즉 유일자는 이 글을 읽고 있는 그대를 말하기에 당연히 밥을 먹고 타인과 관계하며 살아간다.

또다른 문제는 그 다음의 논리적 도약이다. 인간이 자신의 생존과 이익을 위해 공동체를 구성한다는 사실에서, 어떻게 공동체가 개인에게 하나의 대의가 되어야 한다는 결론이 나오는가? “공동체에 참여하는 것이 나에게 이롭다”와 “나는 공동체를 위해 복무해야 한다”는 전혀 다른 명제이다. 전자는 에고이즘과 아무런 충돌이 없지만, 후자는 별도의 정당화를 요구한다. 내가 다른 사람과 협력하는 것이 나에게 유리하다고 판단한다면 협력하면 되고, 여러 사람이 함께 생산하는 것이 혼자 생산하는 것보다 낫다면 함께 생산하면 된다. 코뮌을 이용하는 것이 나에게 이득이라면 코뮌에 참여하면 된다. 슈티르너가 이것을 금지해야 할 이유는 어디에도 없다.

오히려 이 지점에서 본문의 논증은 스스로 슈티르너의 주장을 입증하고 있다. “인간은 가장 에고이스트적이기에 가장 코뮌주의적이다”라는 명제에서 중요한 것은 앞부분이다. 인간이 자신의 이익을 위해 코뮌을 만든다면, 그 코뮌은 어디까지나 인간의 목적을 위한 하나의 수단이다. 그런데 수단이 언제 목적이 되는가? 내가 공동체를 이용하는 것과 공동체를 위해 내가 존재하는 것은 전혀 다른 관계이다. 전자는 “내가 공동체를 가진다”는 관계이고, 후자는 “공동체가 나를 가진다”는 관계가 될 수 있다. 슈티르너가 문제 삼는 것은 바로 이 역전이다.

크로포트킨의 『상호부조론』을 가져오는 것도 이 문제를 해결하지 못한다. 인간이 생존을 위해 협력하는 경향이 있다는 사실을 인정한다고 하자. 그렇다고 해서 협력이라는 사실에서 공동체에 대한 의무가 발생하는 것은 아니다. 인간에게 협력 성향이 있다는 것과 “공동체를 위해 개인의 이해관계를 희생해야 한다”는 것은 전혀 다른 주장이다. 상호부조가 인간에게 유리하기 때문에 이루어진다면, 그것은 오히려 에고이즘과 양립한다. 슈티르너가 거부하는 것은 상호부조가 아니라 상호부조를 하나의 신성한 의무로 만들어버리는 것이다. 그가 비판하는 것의 핵심은 ‘유령을 신성시하는 것’이지, 유령 그 자체가 아니다.

그렇기에 “인간은 홀로 생존할 수 없다”는 주장 역시 논점을 빗나간다. 물론 인간은 타인과 관계를 맺으나, 관계를 맺는다는 것과 관계에 복무한다는 것은 명백히 다르다. 나는 타인의 노동을 필요로 할 수 있다. 나는 친구가 필요할 수도 있고, 노동자와 고용주가 필요할 수도 있고, 거래 상대방이 필요할 수도 있으며, 공동체가 필요할 수도 있다. 그러나 내가 그것들을 필요로 한다는 사실이 곧 그것들이 나보다 높은 목적이라는 의미는 아니다. 물을 필요로 한다고 해서 물을 숭배해야 하는 것은 아니며, 집이 필요하다고 해서 집의 목적을 위해 살아야 하는 것도 아니다. 마찬가지로 공동체가 필요하다는 사실만으로 공동체가 나의 주인이 되는 것은 아니다. “어떤 것을 필요로 하는 것과 어떤 것을 신성히 여기는 것은 다르다”가 여기서 핵심이다.

더구나 본문에서는 “개별성이 일부 손실되더라도 그 손실보다 이득이 크다면 대의에 복무하기를 자율적으로 결정한다”고 말한다. 여기서도 결정적인 구분이 사라지는데, 내가 나의 목적을 위해 어떤 것을 포기하는 것과, 내가 어떤 대의를 위해 나 자신을 희생해야 한다고 믿는 것은 같은 것이 아니다. 내가 친구를 위해 시간을 쓰는 것이 나에게도 의미가 있어서 그렇게 한다면 그것은 나의 행위다. 그러나 “좋은 친구라면 자신의 이익보다 우정을 우선해야 한다”는 명제가 나에게 주어지는 순간 이야기가 달라진다. 전자는 내가 관계를 소유하는 것이고, 후자는 관계가 나에게 요구를 하는 것이다.

따라서 “대의가 선험적인 것이 아니고 인간이 만들어낸 것이라면 망령이 아니다”라는 주장 역시 성립하지 않는다. 슈티르너에게 망령(유령, spook)이 되는 것은 인간이 만들어내지 않은 것이 아니라, 인간이 만들어낸 것이 인간 위에 자립적인 권위를 획득하는 것이다. 국가도, 법도, 도덕도, 그리고 종교도 인간이 만들었다. 그렇다고 그것들이 인간이 만든 것이라는 이유만으로 망령이 되지 않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인간이 만들어낸 것이 인간을 지배하기 시작한다는 것이 치명적인 문제다. 내가 만든 규칙이 나에게 필요할 때 사용할 수 있는 도구라면 그것은 나의 것이지만, 어느 순간 “네가 나를 만들었으니 이제 너는 나를 위해 살아야 한다”고 말하기 시작한다면, 관계는 뒤집힌다.

그렇다면 두 번째 선제적 논거, 즉 “인간은 너무 어리석어서 한번 대의에 복무하면 그 대의가 자신의 이익을 해하더라도 반란하지 못한다”는 주장도 필요하지 않다. 슈티르너는 인간이 반드시 어리석다고 말할 필요가 없다. 인간은 충분히 영리할 수도 있고, 동시에 자신이 만든 관념에 사로잡힐 수도 있다. 중요한 것은 지능의 문제가 아니라 “관념과 인간의 관계가 역전되는 과정”이다. 내가 어떤 대의를 선택할 수 있다는 사실과, 내가 선택한 대의가 이후에도 나보다 높은 권위를 가져야 한다는 것은 별개의 문제다.

본문에서 파시즘을 끌어오는 것도 문제가 된다. 슈티르너의 망령 비판을 파시즘과 연결하려면, “개인이 자신의 이익을 위해 집단을 선택한다”는 사실 이상의 논증이 필요하다. 오히려 파시즘의 문제는 개인이 자신의 이해관계를 판단할 수 있다는 사실이 아니라, 국가·민족·인종·지도자와 같은 추상적 집단을 개인보다 높은 목적으로 만들고 개인에게 그것을 위해 희생할 것을 요구한다는 데 있다. “내가 국가를 선택했으므로 국가가 나의 주인이다”라는 명제는 에고이즘에서 자동으로 나오지 않는다. “내가 혁명을 선택했으므로 혁명이 나의 주인이다” 역시 마찬가지다. 슈티르너가 비판할 수 있는 것은 둘 다이다. 그가 겨누는 칼날은 특정한 정치적 진영을 향한 것이 아니라, 인간이 자신이 만들어낸 추상물을 자신보다 높은 존재로 떠받드는 행위 자체를 향한다.

결국 “모든 망령은 인간이 에고이스트로서 자발적으로 구성한 것”이라는 주장은 오히려 슈티르너의 문제의식을 약화시키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다시 확인해준다. 내가 공동체를 만들었다면 그것을 사용할 수 있고, 내가 연합을 만들었다면 그 연합을 이용할 수 있으며, 내가 어떤 대의를 선택했다면 그것을 나의 목적에 따라 이용할 수 있다. 그리고 그것이 더 이상 나에게 유익하지 않다면 버릴 수도 있다. 내가 하고자 하는 말은 내가 선택했다는 사실이 내가 영원히 복무해야 한다는 의무를 만들어내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내가 오늘 친구와 협력하기로 결정했다고 해서 내일 그 친구를 떠날 수 없는 것은 아니며, 내가 오늘 어떤 조직을 만들었다고 해서 그 조직의 영구적인 재산이 되는 것도 아니다.

마지막으로 “망령을 떨쳐내려면 망령보다 더 큰 이익을 제공하는 무언가를 제시해야 한다”는 주장에는 가장 근본적인 문제가 있다. 왜 반드시 그래야 하는가? 슈티르너는 “유일자로 살아가는 것이 언제나 공동체보다 경제적으로 효율적이다”라고 주장하지 않는다. 그것은 애초에 그의 주장이 아닐 뿐더러, 유일자는 필요하다면 공동체를 이용한다. 오히려 자신의 목적을 위해 공동체를 적극적으로 이용할 수도 있다. 문제는 공동체 없이 어떻게 살아남느냐가 아니라, 공동체가 나에게 유용하다는 사실이 어떻게 공동체에 대한 의무로 변환되는가이다. 공동체가 나에게 이익을 준다면 이용하면 된다. 협력이 나에게 이익을 준다면 협력하면 된다. 연합이 나에게 이익을 준다면 연합하면 된다. 그러나 그것이 나에게 더 이상 이익이 되지 않는 순간에도 “공동체는 중요하니까”, “대의는 중요하니까”, “우리는 함께해야 하니까”라는 이유로 남아 있어야 할 이유는 별도로 제시되어야 한다.

따라서 공동체가 필요할 수 있다는 사실이 공동체를 위해 살아야 한다는 의무를 만들어내지는 않는다. 문제는 공동체의 존재 여부가 아니라, 누가 누구를 소유하는가이다. 내가 공동체를 이용하는가, 아니면 공동체가 나를 이용하는가. 내가 대의를 소유하는가, 아니면 대의가 나를 소유하는가. 슈티르너가 하고자 하는 말은 바로 이것이다.

2) 유일자는 그대를 부르는 말이다

본문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유일자도 밥은 먹어야 산다. 그런데 여기서부터 오독이 드러난다. “밥은 혼자 만들 수 없다”는 사실을 대체 누가 부정했는가? 슈티르너의 유일자를 마치 어느 날 갑자기 숲속에서 눈을 뜬 원시인처럼 상정하고, 그가 맨손으로 벼를 심고 철제 식기를 만들고 화물선을 건조하여 밥 한 공기를 완성해야 한다고 요구하는 것은 슈티르너에 대한 비판이 아니라 하나의 허수아비를 세워놓고 비판하는 글이다. 유일자는 자급자족하는 원자가 아니다. 타인의 노동을 이용하고, 상품을 교환하고, 계약을 맺고, 협력하고, 조직을 만들고, 다른 사람의 능력을 자신의 목적을 위해 사용할 수 있는 구체적인 개인이다. 다시 반복하자면, 유일자는 개념이 아니라 이름이다. 그대가 그대답게 산다면, 그것이 바로 유일자를 의미한다.

오히려 현대의 분업은 이 점을 훨씬 명확하게 보여준다. 내가 직접 쌀을 재배하지 않는다고 해서 쌀을 먹는 것이 나의 에고이즘에 반하는가? 중국의 농민이 쌀을 생산하고, 다른 사람이 식기를 만들고, 또 다른 사람이 그것을 운송한다는 사실은 슈티르너를 반박하지 않는다. 그 모든 사람들이 서로의 능력을 이용하여 자신의 목적을 달성하고 있을 뿐이다. 농부는 나를 위해 농사를 짓는 것이 아니고, 선사는 나를 위해 배를 운항하는 것이 아니며, 식당 노동자는 나를 위해 밥을 짓는 것이 아니다. 각자가 자신의 목적을 위해 자신의 노동과 능력을 거래하고, 그 결과 수많은 개인의 행위가 하나의 거대한 생산망으로 연결된다. 이것은 “에고이즘의 실패”가 아니라 오히려 서로의 능력을 자신의 목적을 위해 이용하는 인간들의 관계가 얼마나 거대해질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사례이다.

따라서 국제분업의 존재에서 곧바로 “유일자는 사회에 복무한다”는 결론을 도출할 수 없는데, 왜냐하면 내가 수많은 타인의 노동으로 만들어진 상품을 이용한다는 것과 내가 그 노동체계의 목적을 위해 존재한다는 것은 전혀 다른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내가 스마트폰을 사용한다고 해서 스마트폰 산업에 충성을 맹세하는 것은 아니고, 병원을 이용한다고 해서 의료체계에 나 자신을 바쳐야 하는 것도 아니며, 도시의 상하수도에 의존한다고 해서 도시 자체를 나의 삶보다 높은 목적으로 인정해야 하는 것도 아니다. 의존은 이용의 관계를 설명할 수 있지만, 그 자체로 복무의 의무를 설명하지 못한다.

그리고 여기서 “분업을 없애면 생산성이 낮아진다”는 논증 역시 애초에 슈티르너에게 요구할 필요가 없는 답을 요구하고 있다. 슈티르너가 “분업을 철폐하라”고 주장했다는 전제가 먼저 증명되어야 하는데, 슈티르너의 에고이즘에서 반드시 나오는 결론은 “모든 사람은 모든 것을 직접 생산해야 한다”가 아니다. 오히려 자신의 능력으로 할 수 없는 것을 타인의 능력을 통해 얻는 것이 더 유리하다면 그렇게 하면 된다. 내가 농사를 짓는 것보다 농부가 생산한 쌀을 사는 것이 나에게 유리하다면 나는 쌀을 산다. 내가 자동차를 직접 만드는 것보다 자동차를 구입하는 것이 유리하다면 자동차를 구입한다. 내가 혼자 공장을 운영하는 것보다 다른 사람들과 협력하는 것이 유리하다면 협력한다. 에고이즘은 노동분업을 파괴하는 원칙이 아니라, 노동분업을 포함한 모든 사회적 관계를 하나의 수단으로 사용할 수 있게 하는 원칙이다. 애초에 슈티르너는 보편적이고 초월적인 당위를 세우지 않는다.

그렇다면 “내가 덜 풍족하게 살더라도 자유롭게 살 것인가, 아니면 자유를 포기하고 풍족하게 살 것인가”라는 질문도 잘못된 양자택일이다. 왜 자유와 풍족함이 반드시 서로의 반대편에 있어야 하는가? 이것은 슈티르너에게 선택지를 제공하는 것이 아니라 임의로 두 가지 선택지만 만들어놓은 것에 불과하다. 나는 타인과 협력하면서 풍족하게 살 수도 있고, 시장을 이용하면서 자유로울 수도 있으며, 공동생산에 참여하면서도 그 공동생산을 나의 목적을 위한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또한 나는 수많은 사회적 관계를 이용하면서도 그것들을 신성한 의무로 받아들이지 않을 수 있다. 자유와 풍족함 사이의 필연적인 제로섬 관계는 여기서 증명된 적이 없다.

더구나 “인류의 역사가 충분히 답을 보여준다”는 말은 논증이 아니다. 인류가 분업과 협력을 발전시켜 왔다는 사실은 인간이 협력을 선호하거나 협력이 생산성을 높인다는 사실을 보여줄 뿐이지, 그것이 어떻게 “그러므로 개인은 공동체적 생산에 복무해야 한다”는 규범으로 변환되는가에 대해선 설명하지 못한다. 농업이 수렵보다 많은 사람을 먹여 살릴 수 있다는 사실에서 “그러므로 농업을 위해 살아야 한다”는 결론이 나오지 않는다는 말이다. 산업화가 생산성을 폭발적으로 증가시켰다는 사실에서 “그러므로 산업체계에 복무해야 한다”는 결론 역시 나오지 않는다. 효율적인 수단이 발견되었다는 사실과 그 수단이 인간의 목적이 된다는 것은 다른 층위의 얘기이다.

슈티르너의 공동노동에 관한 언급을 “사변적”이라고 일축하는 것도 마찬가지인데, 여기서 중요한 것은 그가 완성된 경제학 교과서를 남겼느냐가 아니다. 왜냐하면 슈티르너의 철학이 경제체제의 모든 세부사항을 규정하는 체계적 사회과학이 아니기 때문이다. “공동생산을 어떻게 조직할 것인가?”라는 질문은 충분히 중요한 질문이지만, 그것에 대한 답이 없다는 사실이 곧 “그러므로 슈티르너의 에고이즘은 틀렸다”는 결론으로 이어지지는 않는다. 이것은 마치 윤리학자에게 철강 생산시설의 배치도를 요구하고, 그 배치도가 없으니 그의 윤리학이 틀렸다고 말하는 것과 비슷하다. 철학적 원리와 구체적인 경제 운영 매뉴얼은 서로 다른 층위의 문제다.

물론 슈티르너의 사상을 사회적·경제적 실천으로 확장하려 한다면 생산수단, 원자재, 물류, 분배, 교환 등의 문제를 고민해야 한다. 하지만 그것은 슈티르너에게 치명적인 반론이라기보다 슈티르너 이후의 사람들이 해결해야 할 실천적 문제다. 그리고 그 문제를 해결한다고 해서 반드시 슈티르너의 철학을 폐기해야 하는 것도 아니다. 오히려 어떤 생산체계가 더 효율적인지 계산하고, 어떤 협력이 자신에게 유리한지 판단하고, 어떤 조직을 이용할 것인지 결정하는 것 자체가 유일자의 행위가 될 수 있다.

공동생산물의 소유에 관한 논증은 더욱 흥미로운데, 본문은 생산물 하나를 놓고 “이것을 만든 사람은 누구인가”를 계속 거슬러 올라간다. 생산기계를 만든 사람, 원자재를 채굴한 사람, 생산과정에서 소비되는 식량을 만든 사람, 생산기술을 축적한 수천 년의 인간사까지 끌어온다. 그렇다면 다음과 같은 질문이 도출된다: 대체 어디까지 올라가야 소유권이 완성되는가? 생산물 하나에 영향을 준 모든 인간에게 영원한 지분을 인정해야 한다는 주장이라면, 현대사회의 거의 모든 생산물은 사실상 누구의 것도 될 수 없다.

더 중요한 것은 이것이 슈티르너의 소유(Eigentum) 개념을 현대적 법률상의 소유권(rechtliches Eigentum)과 동일시하고 있다는 점이다. 슈티르너에게 소유는 단순히 “이 물건에 대한 법적 권리는 누구에게 있는가”라는 의미가 아니다. 슈티르너 철학에서 소유는 훨씬 더 넓은 의미에서 자신의 힘과 능력으로 자신의 것으로 주장하고 사용할 수 있는 관계를 의미한다. 따라서 “이 생산물에는 인류 전체의 역사가 들어가 있으니 어느 개인도 자신의 것으로 삼을 수 없다”는 식의 논리는 오히려 또 다른 추상적 권리 개념을 끌어들이는 셈이고, 인간의 과거 전체가 어떤 생산물에 기여했다는 이유로 현재의 인간에게 그것을 사용할 권리를 행사할 수 없게 만드는 것이야말로, 하나의 거대한 추상적 소유자를 만들어내는 일에 불과해져 버린다.

그리고 “생산기술을 고안한 수천 년 인간사의 결과물이므로 공동생산 집단이 그것을 소유한다고 선언하는 것은 자본가가 사적소유를 선언하는 것과 무엇이 다른가”라는 질문에는 다음과 같이 답할 수 있다: 슈티르너의 논리에서는 그 소유를 신성한 권리라고 주장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다르다. 자본가가 “이것은 나의 법적 권리이므로 너는 복종해야 한다”고 말하는 것과, 어떤 사람들이 자신들의 힘과 결합을 통해 실제로 생산수단을 장악하고 그것을 이용하는 것은 같은 명제가 아니다. 왜냐하면 전자는 추상적 권리를 통해 타인을 지배하는 논리이고, 후자는 자신들의 능력과 결합을 통해 무엇을 할 수 있는가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물론 그 공동체가 다시 다른 사람에게 “이것은 우리의 신성한 공동소유이므로 너는 우리에게 복무해야 한다”고 말하기 시작한다면, 슈티르너는 바로 그 지점에서 다시 칼을 들 것이다.

그리고 “모든 인간을 먼저 해방해야 하지 않는가?”라는 질문은 이 글의 가장 흥미로운 부분이지만 여기서도 이상한 전제가 숨어 있다. 왜 유일자의 실천이 모든 인간의 해방을 선행조건으로 가져야 하는가? 내가 어떤 조직을 만들고, 다른 사람과 협력하고, 생산물을 교환하고, 노동을 분담하는 행위가 반드시 “모든 인간을 해방하는 혁명” 이후에만 가능하다는 근거는 어디에 있는가? 유일자는 세계 전체가 완성된 뒤에야 행동을 시작하는 인간이 아니다. 유일자는 이미 존재하는 ‘나’를 뜻하고, 지금 자신이 가진 관계와 능력으로 무엇을 할 수 있는지를 판단하는 인간이다.

따라서 마지막의 “현실에서 유일자가 밥을 먹는 방법은 두 가지뿐이다”라는 결론은 처음부터 잘못된 전제 위에 세워져 있다. 첫째가 니트이고 둘째가 광합성과 무한동력이라면, 그것은 슈티르너의 선택지가 아니라 본문의 저자가 만들어낸 선택지다. 왜 제3의 가능성인 타인의 능력을 이용하고 교환하며 협력하는 유일자가 삭제되어 있는가? 왜 유일자는 반드시 모든 생산수단을 혼자 소유해야 하는가? 왜 반드시 자신의 식량을 직접 생산해야 하는가? 왜 반드시 모든 사회적 관계로부터 독립해야 하는가? 그 어느 것도 슈티르너의 에고이즘에서 논리적으로 나오지 않는다.

오히려 유일자는 이렇게 행동할 수 있다: 농부가 필요하면 농부에게서 쌀을 사고, 노동자가 필요하면 노동자와 계약하며, 다른 사람들과 함께 공장을 운영한다. 그리고 공동체가 필요하면 공동체를 만들고, 시장이 유용하면 시장을 이용하며, 협동조합이 유용하면 협동조합을 이용한다. 심지어 국가의 인프라가 유용하다면 그것 역시 이용할 수 있다. 중요한 것은 그 어떤 것도 나의 목적 위에 놓이지 않는다는 것이다.

따라서 “유일자는 밥을 먹어야 한다”는 말은 맞다. 그러나 이 명제가 보여주는 것은 슈티르너의 에고이즘이 불가능하다는 사실도 아니고, 슈티르너 철학과는 전혀 상관 없는 비판이다. 오히려 이 명제는 인간이 타인의 능력과 사회적 생산물을 끊임없이 자신의 목적을 위해 이용한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문제는 유일자가 밥을 어디서 얻느냐가 아니라, “그 밥을 만들어준 사람들이 존재한다는 사실에서 왜 유일자가 그 생산체계에 복무해야 한다는 의무가 발생하는가”이다.

그리고 이 질문에 답하지 못한 채 “무한동력은 물리적으로 불가능하다”고 선언하는 것은 조금 우스운 결론이다. 무한동력이 불가능하다는 것에는 동의하나, 애초에 슈티르너는 유일자에게 무한동력을 요구한 적이 없다. 본문은 먼저 유일자를 무한동력이 필요한 존재로 만들어놓고, 그 무한동력이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증명한 뒤 슈티르너를 반박했다고 선언하고 있는 것이다. ‘아나키스트 연대’라는 이름으로 이런 허수아비 공격의 오류를 범하고 있으니 한국 아나키즘계의 지적 수준에 대해 상당히 염려되는 바이다.

II. 슈티르너주의적 실증(悉證)

슈티르너주의를 “관념적으로는 아름답지만 현실에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사상”이라고 규정하는 순간, 이미 논점이 뒤틀린다. 『유일자와 그의 소유』는 애초에 완성된 혁명 전략서도, 새로운 사회의 경제체제를 설계한 청사진도 아니다. 슈티르너가 하려던 일은 “어떤 사회를 건설할 것인가”라는 질문에 또 하나의 이상적 답안을 제출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 자기 자신을 위해 만들어낸 개념과 제도가 어떻게 거꾸로 인간의 주인이 되는지를 폭로하는 것이었다. 이것을 놓친 채 “그래서 생산수단은 누가 관리하는가?”, “혁명 첫날에는 무엇을 먹는가?”만 묻는다면 슈티르너에게 사회주의 경제학 교과서의 부재를 이유로 유죄 판결을 내리는 것과 다르지 않다.

더구나 이 글은 슈티르너를 비판하면서 묘하게 그가 가장 경계했던 방식을 반복한다. 프롤레타리아 독재, 제국주의, 파시즘, 나치즘이 현실에서 끔찍한 결과를 낳았다는 사실을 열거하면서 “아름다운 이론을 현실에 적용하면 괴물이 된다”고 말한다. 그런데 이 원칙을 슈티르너에게도 적용하려면 오히려 먼저 물어야 한다. 슈티르너가 주장한 것은 정확히 무엇인가? 그는 “유일자라는 이론을 사회 전체에 강제로 적용하라”고 말한 적이 없다. 오히려 어떤 새로운 사회질서를 세우고 그것을 사람들에게 관철시키는 정치 자체에 의심을 품는다. 그러므로 “슈티르너주의를 현실에 교조적으로 적용하면 반혁명이다”라는 주장은 상당히 기묘하다. 슈티르너의 핵심에는 애초부터 교조적으로 적용할 새로운 사회형태를 세우는 태도에 대한 불신이 들어 있기 때문이다.

1) 혁명운동적 관점에서 이루어지는 슈티르너주의 왜곡
(1) 《대중이 주도하는》에 대한 반박

물론 《대중이 주도하는 실질적 사회혁명》을 목표로 삼는 것은 하나의 정당한 정치적 입장이다. 문제는 그것을 곧바로 슈티르너를 평가하는 보편적인 척도로 바꾸는 데 있다. “우리의 혁명운동에 기여하지 못한다”와 “철학적으로 반혁명적이다”는 같은 말이 아니다.

슈티르너가 대중을 신뢰하지 않는다는 주장도 다시 읽어볼 필요가 있다. 슈티르너가 말하는 “비의지적 에고이스트”는 에고이즘을 가지고 있지 않은 인간이 아니다. 오히려 그는 누구나 자기 이해관계를 추구하지만, 그것을 자기 것으로 자각하지 못하고 국가, 도덕, 인간, 민족, 계급과 같은 관념의 요구를 자신의 요구로 착각할 수 있다고 본다. 여기서 핵심은 개인의 행동이 “자발적이냐 비자발적이냐”라는 심리검사가 아니다. 자기 이해관계를 자신이 붙잡고 있는가, 아니면 어떤 고정된 관념이 그것을 대신 말하고 있는가의 문제다. 슈티르너가 고정관념을 설명하면서 관심이 더 이상 자신의 것이 아니라 자신을 사로잡은 것이 되는 상태를 문제 삼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따라서 “비의지적 에고이스트도 체제를 자기 이익에 따라 유지하고 있으니 언제든 체제를 버릴 수 있다”는 반론은 슈티르너의 구별을 놓쳐버리는데, 왜냐하면 체제에 참여하는 모든 행위를 비판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슈티르너는 자신이 하고 있는 일을 자신의 것으로 파악하지 못한 채, ‘국가가 필요하다’, ‘정의가 그러하다’, ‘계급의 의무가 그러하다’ 같은 관념에 자신의 행위를 맡기는 상태를 비판하는 것이다. 국가를 이용하면서도 국가주의자가 아닐 수 있고, 노동조합에 가입하면서도 노동조합 자체를 신성시하지 않을 수 있다. 반대로 혁명가라고 자처하면서 혁명이라는 대의가 자신의 판단을 대신하게 만들 수도 있다. 슈티르너의 칼날은 어느 한쪽 진영만 향하는 칼날이 결코 아니다.

여기서 오히려 「아나키스트 연대」의 “대중이 자기 이익에 따라 체제를 만든다”는 설명이 슈티르너와 가까워진다. 그렇다면 그 대중에게 필요한 것은 반드시 새로운 공동체적 대의를 주입하는 것인가? 슈티르너라면 바로 그 지점에서 멈춰 세울 것이다. 국가를 거부하기 위해 또 다른 “인민,” “혁명,” “새로운 사회”를 최고의 가치로 세우는 순간, 기존의 신성한 관념 하나를 치우고 새로운 관념을 제단 위에 올려놓을 가능성이 생긴다. 이것은 슈티르너가 자유주의와 사회주의를 함께 비판했던 이유와도 연결되는데, 그는 개인의 해방이라는 이름으로도 개인 위에 새로운 추상적 권위를 세울 수 있다고 보았다.

(2) 《실질적 사회혁명》에 대한 반박

“체제에는 물리적 실체가 있으므로 개인의 내적 해방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는 지적 자체는 인정하겠다. 국가에는 경찰과 법원과 행정기관이 있고, 자본주의에는 공장과 금융과 공급망이 있으며, 개인이 단순히 머릿속에서 그것들을 부정한다고 해서 사라지는 것도 아니다. 하지만 슈티르너가 말하는 봉기를 그렇게 해석해서는 안 된다.

슈티르너는 혁명(Revolution)과 봉기(Insurrection, 반란)를 구별한다. 그에게 혁명은 기존 질서를 뒤엎고 새로운 질서를 세우는 정치적·사회적 행위에 가까운 반면, 봉기는 그와 달리 개인이 기존의 질서에 더 이상 자신을 맡기지 않고 자기 자신을 일으켜 세우는 것이다. 슈티르너가 봉기를 말할 때 중요한 것은 “가만히 방에 앉아 마음속으로 국가를 무시하자”가 아니다. 그는 오히려 기존 질서와의 관계 자체를 바꾸는 것을 이야기한다. 봉기가 성공하면 기존 질서는 그것을 지탱하던 개인들의 이탈 때문에 무너질 수 있지만, 봉기의 목적을 새로운 제도 하나를 세우는 것으로 고정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래서 “슈티르너는 조직되지 않은 산발적 개인의 반란만 이야기한다”는 표현도 지나치게 단순하다. 그가 제시하는 에고이스트 연합(Verein der Egoisten)은 바로 유일자들이 서로의 힘을 결합할 수 있다는 구상이다. 슈티르너가 거부하는 것은 조직 그 자체가 아니라 개인을 포섭하고 독립적으로 존속하는 사회적 실체로서의 조직이다. 연합은 개인들이 자신의 이익에 따라 그것을 이용하는 동안 존재하고, 그 관계가 더 이상 유용하지 않으면 달라지거나 해체될 수 있다. 국가처럼 개인에게 “너는 나의 구성원이며 따라서 나에게 의무를 진다”고 요구하는 형태와는 출발점이 다르다. 즉, 그가 비판하는 것은 조직 자체가 아니라 조직을 신성시하는 행위, 그리고 조직을 신성히 여기도록 만드는 의무이다.

이 차이를 무시하면 “슈티르너의 에고이스트 연합은 혁명군이 아니므로 아무것도 아니다”라는 결론밖에 남지 않는다. 하지만 그것은 슈티르너의 에고이스트 연합을 처음부터 혁명조직으로 만들고 나서 평가하는 것이다. 슈티르너가 말하는 에고이스트 연합은 특정한 역사적 임무를 완수하기 위해 영구적으로 존재해야 하는 당이나 국가를 말하는 것이 아니고, 함께 있는 개인들이 각자의 이익을 위해 맺는 관계를 말한다. 그렇기 때문에 그것이 얼마나 오래 지속되는지, 얼마나 거대한 조직이 되는지가 본질적인 기준도 아니다.

로자바나 사파티스타를 사례로 드는 것도 같은 문제를 안고 있는데, 그들이 생산수단을 점유하고 무장된 조직을 구성했다는 사실은 그들의 역사적 경험을 설명하는 데 중요하다. 그러나 그것이 슈티르너의 철학을 반박하지는 않는다. “실제로 변혁을 일으킨 조직은 이런 형태였다”에서 “그러므로 개인들의 유동적인 연합이라는 슈티르너의 구상은 틀렸다”로 가려면 훨씬 더 많은 논증이 필요하다. 역사적으로 어떤 조직이 성공했다는 사실은 특정한 조직형태가 모든 상황에서 정당하다는 증명이 아니다.

오히려 슈티르너의 입장에서는 다음과 같은 더 불편한 질문을 던질 수 있다: 혁명을 위해 만들어진 조직이 혁명이 끝난 뒤에도 계속해서 개인에게 의무를 요구한다면 어떻게 할 것인가? 혁명을 수행하기 위해 권력을 집중한 조직이 자신을 유지하는 것을 새로운 사회의 필수조건으로 선언한다면? “혁명을 위해서는 필요하다”는 말이 어느 순간 조직 자체의 존속을 정당화하는 원리가 된다면? 슈티르너가 혁명에 대한 불신을 갖는 이유는 이런 문제와 맞닿아 있다. 기존의 괴물을 쓰러뜨린 뒤 새로운 괴물을 행정기관의 형태로 세우는 것을 그는 해방의 완성으로 보지 않는다. 더 나아가 그는 애초에 해방을 하나의 보편적인 목적으로 두지 않는다.

“옥탑방 하나를 차지하고 소주를 마시며 에고이스트 동맹이라고 부른다고 해서 해방구가 되는 것은 아니다”라는 조롱 역시 슈티르너에게 특별한 반박이 되지 않는다. 물론 그것만으로 사회 전체가 변하지 않는다. 슈티르너도 작은 모임 하나를 만든다고 국가가 증발한다고 주장하지 않는다. 오히려 연합의 특징은 그 규모나 장엄함이 아니라 개인이 그것을 어떻게 사용하느냐에 있고, 작은 연합도 연합이고 거대한 연합도 연합일 수 있다. 중요한 것은 규모가 아니라 관계의 성격이다.

그리고 “집세를 내야 한다”는 말은 너무 당연해서 철학적 반론으로 기능하지 않는다. 슈티르너 자신이 가난과 채무의 현실을 몰랐던 것도 아니다. 오히려 그는 자신의 소유를 단순한 법적 권리로 이해하지 않고 자신의 힘과 능력으로 확보하고 유지할 수 있는 것과 연결했다. “법적으로 내 것이냐”보다 “내가 그것을 나의 것으로 만들 수 있는 힘을 가지고 있느냐”가 더 정확히 슈티르너 철학에서의 소유를 의미한다.

(3) 《새로운 사회의 건설》에 대한 반박

여기서 결국 가장 큰 차이가 드러난다. 「아나키스트 연대」는 혁명 이후의 사회를 미리 제시해야 대중이 혁명에 참여할 수 있다고 본다. (참고로 혁명 이후의 사회를 미리 제시하지 않고도 저항을 외치는 아나코-허무주의라는 분파가 있는데, 관심이 있는 자들에게 세라핀스키, 불꽃은 복되도다 를 추천한다.) 이것은 하나의 전략적 판단으로 여겨질 수 있겠지만, 슈티르너가 보기에 바로 그 순간 혁명은 새로운 “대의”를 만들어낼 위험을 가진다.

“혁명의 첫날 모든 사람이 배불리 먹어야 한다”는 것은 매우 중요한 실천적 문제이지만 그 중요성에서 특정한 경제체제의 도덕적 우월성이 자동으로 도출되지는 않는다. 코뮌주의적 공동소유를 선택할 수도 있고, 노동자들이 직접 생산시설을 운영할 수도 있고, 서로 다른 방식들을 섞을 수도 있다. 슈티르너가 하나의 경제모델을 제시하지 않았다는 사실은 오히려 그가 하나의 모델을 모든 사람에게 정답으로 강제하는 것을 거부했다는 점과 연결된다.

여기에서 “대중에게 새로운 사회를 제시해야 한다”는 문장이 흥미롭다. 대중이 혁명에 참여하려면 반드시 누군가가 먼저 “혁명 이후에는 이런 사회가 온다”고 설계도를 제시해야 한다는 것인가? 그렇다면 대중은 혁명의 주체인 동시에 미리 준비된 미래상을 받아들이는 대상이 된다. 슈티르너라면 오히려 그 구도를 의심할 것이다. 왜 새로운 사회의 형태가 혁명 이전에 완성된 관념으로 존재해야 하는가?

슈티르너의 봉기에는 “새로운 인간,” “새로운 사회,” “인류의 미래” 같은 거대한 목적지가 없다. 그것이 그의 약점이라고 말할 수도 있겠지만, 그것을 곧바로 반혁명이라고 부르는 것은 다른 문제이다. 그는 혁명의 실패 가능성을 피하기 위해 새로운 질서를 설계하는 것이 아니라, 혁명이 성공한 뒤에도 개인을 다시 어떤 질서의 구성원으로 만들 가능성 자체를 경계하는 것이다. 혁명은 기존의 배열을 다른 배열로 바꾸는 데 그칠 수 있지만, 봉기는 개인이 더 이상 자신을 그 배열의 재료로 제공하지 않는 데서 시작한다. 그렇기에 단순한 미래를 보는 아나키스트 연대보다 슈티르너는 더 큰 미래를 본다고 보여질 수 있다.

따라서 “슈티르너는 경제적 대안을 제시하지 않았으므로 반혁명적이다”라는 결론은 결국 정의의 문제에 불과하다. 혁명을 “새로운 사회의 건설”이라고 정의한 뒤, 그 건설 계획을 제시하지 않는 사람을 반혁명가라고 판정하면 당연히 슈티르너는 탈락한다. 하지만 그 정의 자체가 슈티르너가 문제 삼았던 정치적 사고방식과 맞닿아 있다. 그는 새로운 질서를 세우는 일을 인간의 최종 목적이라고 받아들이지 않는다. 그에게 중요한 것은 질서가 얼마나 아름다운가가 아니라, 그 질서가 나를 어떻게 취급하는가이다.

마지막으로 슈티르너의 개인적 실패를 들고 나오는 부분은 굳이 길게 반박할 필요도 없다. 슈티르너가 채무 때문에 고생했다는 사실은 그의 철학을 반박하지 않는다. 우유 사업이 실패했다는 사실 역시 마찬가지다. 철학자의 사업 실패를 철학의 논박으로 사용하는 것은 논증이라기보다 인신공격에 가까워진다. 스피노자가 렌즈를 갈았다는 사실이 그의 형이상학을 반박하지 않는 것처럼, 마르크스가 단 한번도 노동을 해본 적이 없다는 사실이 공산주의를 반박하지 않는 것처럼, 슈티르너가 돈 문제로 곤란을 겪었다는 사실도 에고이즘의 논리를 무너뜨리지 않는다.

오히려 그 사례에서 물어야 할 것은 다음과 같다: “유일자”라는 개념은 현실의 모든 경제적 곤란을 자동으로 해결해주는 만능열쇠인가? 물론 아니다. 슈티르너도 그런 약속을 하지 않는다. 그는 인간에게 성공적인 사업계획서를 제공한 것이 아니라, 인간이 자기 자신을 어떤 추상적 목적에 양도하고 있는지를 묻는 것이다.

그러므로 슈티르너를 반박하려면 “집세는 누가 내는가?”라는 질문보다 더 깊이 들어가야 한다. 슈티르너가 왜 혁명과 봉기를 구별했는지, 왜 국가 대신 에고이스트 연합을 말했는지, 왜 새로운 제도보다 개인의 자기소유를 앞세웠는지를 상대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결국 “우리는 혁명을 위해 조직이 필요하다. 슈티르너는 혁명조직의 설계도를 주지 않았다. 그러므로 슈티르너는 반혁명적이다”라는 순환논증만 남는다.

슈티르너에게 혁명의 목적은 새로운 신을 만드는 것이 아니다. 국가를 무너뜨린 자리에 인민이라는 신을 세우고, 자본을 무너뜨린 자리에 혁명이라는 신을 세우며, 혁명이 끝난 자리에는 새로운 사회라는 신을 세우는 것 역시 그가 경계할 법한 일이다. 해방된 유일자는 무엇을 위해 살아야 하는가? 아니, 애초에 누가 감히 유일자에게 무엇을 위해 살아야 한다고 말할 수 있는가?

2) 조합운동, 조직운동적 관점에서 이루어지는 슈티르너주의 왜곡

슈티르너가 노동자들의 힘을 말한 것은 맞지만, 그러나 문제는 그 말을 “산발적인 개인 파업”에 대한 찬양으로 읽는 데에 있다. 슈티르너가 노동자들에게 말하고 있는 것은 개별 노동자 한 명이 혼자 작업장을 박차고 나가라는 이야기가 아니고, 노동자들이 자신들의 힘을 스스로의 것으로 인식하고 그것을 자신들의 이해관계를 위해 사용하라는 것이다. 그 힘이 여러 사람의 결합을 통해 훨씬 커진다면 결합하면 된다. 슈티르너에게 협력 자체가 금지되어 있다는 근거는 어디에도 없다.

오히려 『유일자와 그의 소유』에서 중요한 것은 연합(Verein)이라는 개념이다. 슈티르너가 문제 삼는 것은 사람들이 함께 행동하는 것 자체가 아니라, 그 함께함이 개인들 위에 독립적인 목적과 의무를 가진 존재로 굳어지는 것이다. 내가 노동조합에 가입하고 그 조합을 이용하여 임금을 올리고 노동조건을 개선한다면, 그것은 충분히 에고이스트적인 행동이다. 파업 역시 마찬가지다. 여러 노동자가 함께 일손을 놓는 것이 자기들에게 유리하다면 함께하면 된다. 총파업이라고 해서 슈티르너와 양립할 수 없는 것이 아니다. 총파업이라는 전술을 거부하는 슈티르너의 원칙은 존재하지 않는다.

오히려 질문을 다음과 같이 뒤집어야 한다: 노동자들이 자기들의 이해관계 때문에 조합을 만들고, 그 조합을 이용하여 사용자와 싸운다면 슈티르너가 그것을 왜 비판해야 하는가? 슈티르너가 비판하는 것은 “조직된 노동자”가 아니라 조직 자체가 노동자보다 높은 목적이 되는 순간이다. 조합이 노동자들의 힘을 증대시키는 동안에는 유용한 연합일 수 있다. 그러나 조합의 규율이나 대의가 개인의 이해관계보다 우선한다고 선언되는 순간, 슈티르너 철학은 거기에 의문을 제기한다. 이것은 조직혐오와는 전혀 다른 행위이다.

“조직 안에서는 개별성을 일정 부분 포기해야 하므로 그것 역시 에고이스트적인 선택이다”라는 주장도 슈티르너와 충돌하지 않는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슈티르너는 그 선택을 원천적으로 부정하지 않는다. 내가 어떤 목적을 위해 나의 시간과 힘을 다른 사람들과 결합하는 것은 나의 행위, 곧 유일자의 행위다. 중요한 것은 그 순간에도 내가 그 관계를 내 것으로 사용하고 있는가 하는 것이다. 슈티르너가 묻는 것은 “조합이 나를 위해 존재하는가, 아니면 내가 조합을 위해 존재하게 되었는가?” 이다.

3) 유일자는 망령이 아니다

여기서는 더 근본적인 오독이 발생한다. 슈티르너의 “유일자”를 개인이 추구해야 할 어떤 이상적인 인간형으로 이해하고 있기 때문이다. (아무래도 니체의 위버멘쉬 개념과 헷갈려서 생기는 잦은 오해로 보여진다.)

그런데 유일자는 이상형이 아니다. 만약 유일자가 이상형이라고 생각한다면, 그대는 『유일자와 그의 소유』를 단 하나도 이해하지 못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슈티르너는 “유일자가 되어라”라는 새로운 도덕률을 세우고 있는 것이 아니다. 유일자는 어떤 인간의 본질이나 철학적 개념도 아니다. 내가 나 자신이라는 사실을 어떤 보편적 인간 개념으로 완전히 포섭할 수 없다는 것을 가리키는 표현에 가깝다. 즉, “유일자”는 그저 이 글을 읽고 있는 ‘그대’를 말하는 이름에 불과하다. 여기에는 어떠한 내용도 생각도 들어있지 않다. 대다수가 오해하는 것과 달리, 유일자는 개념이 아니라 언어로 표현되거나 정의될 수 없는 수 없는 ‘나’를 지칭하기 위해 쓰이는 말일 뿐이다. 그러므로 “현실의 인간은 관계와 사회에 의존하므로 완전한 개별성을 가질 수 없다”는 비판은 유일자를 겨냥한 반론이 되기 어렵다. 슈티르너는 애초에 유일자를 고립된 로빈슨 크루소 같은 존재로 만들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 점에서 “유일자는 인간이 아니다”라는 주장도 오히려 재미있는 역설을 만든다. 슈티르너가 말하는 유일자는 인간과 별개의 초월적 존재가 아니다. 그는 ‘인간’이라는 보편적 개념으로 나를 전부 설명할 수 없다는 것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나는 인간이다”라는 명제에는 아무 문제가 없지만, 그 명제가 “그러므로 나는 인간이라는 개념이 요구하는 방식으로 살아야 한다”는 결론까지 가져가는 순간 문제가 생긴다. 슈티르너가 공격한 것은 바로 그런 종류의 추상화다. 바로 이러한 이유 때문에 ‘유일자’라는 말에는 아무런 내용도 없는 것이다. 유일자는 그대에게 아무것도 요구하지 않고, 그대는 그대 자체로 이미 유일자이다.

따라서 결혼을 했고, 돈이 필요했고, 직업을 구하려 했고, 사업에 실패했다는 슈티르너의 생애를 끌어와 “보라, 그의 개별성은 관계와 돈에 의해 좌우되었다”고 말하는 것도 별 의미가 없다. 유일자는 사회적 관계로부터 독립된 인간이 아니기 때문이다. 친구를 필요로 하고, 연인을 사랑하고, 돈을 벌고, 다른 사람의 도움을 받는다고 해서 유일자가 사라지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런 관계를 자신에게 필요한 것으로 취하고 이용하는 것 역시 유일자의 삶이다. 만약 유일자의 정의를 ‘사회적 관계로부터 독립된 인간’으로 취급한다면, 그것은 곧바로 그대가 사회적 관계로부터 독립된 사람이라는 것을 의미하게 된다. 그러나 그대는 그러한 사람이 아니지 않는가? 유일자에는 고정된, 보편적인 정의가 존재하지 않는다.

그리고 “유일자”가 망령이라는 결론은 결정적으로 개념을 뒤집어놓는다. 슈티르너가 망령이라고 부르는 것은 개인 위에 군림하는 추상적 관념이다. 그런데 유일자는 바로 그러한 추상적 관념이 나를 대신해서 말하는 것을 거부하기 위한 말이다. 유일자를 또 하나의 신성한 이상으로 숭배하는 슈티르너주의자가 있다면 슈티르너는 아마 그 사람부터 비웃었을 것이다. “유일자가 되어야 한다”는 명령(애초에 모순이 가득한 명령이지만)을 새로운 도덕률로 받아들이는 순간, 유일자 자체가 또 하나의 고정관념, 즉 망령이 되어버리기 때문이다.

그러니 “슈티르너는 개인주의적 아나키스트들의 기원이므로 그들 역시 슈티르너로부터 비롯한다”는 마지막 문장은 오히려 이 글 전체의 문제를 아주 잘 보여준다. 슈티르너가 말한 것은 어떤 대의로부터도 비롯하지 않는다는 것이지, “슈티르너주의라는 대의로부터 비롯하라”는 것이 아니다. 슈티르너를 따르는 가장 슈티르너적인 방법이 슈티르너주의를 또 하나의 신조로 받아들이지 않는 것일 수도 있다는 이야기다.

그래서 “나는 어떠한 대의로부터도 비롯하지 않는다”는 문장을 읽고도 그것을 하나의 새로운 대의로 만들어버린다면, 슈티르너가 가장 먼저 문제 삼았을 것은 정작 그를 비판하는 사람들이 아니라 슈티르너주의자라는 이름 아래 슈티르너를 숭배하는 사람들일 것이다.

III. 슈티르너주의적 실증(寔證)

슈티르너를 19세기 중반의 산업사회에 묶어놓는 것부터가 지나치게 편리한 해석이다. 슈티르너가 살던 시대의 생산방식과 오늘날의 생산방식이 다르다는 것은 당연한 일이지만, 그 차이가 곧 그의 철학이 낡았다는 결론을 만들어주지는 않는다. 오히려 생산의 규모가 커지고 사회적 분업이 복잡해질수록 슈티르너가 던진 질문은 더 까다로워진다 — 이렇게 거대한 사회적 장치가 존재한다는 이유만으로, 개인이 그것을 위해 존재해야 하는가?

그리고 여기서 또 “유일자들이 구성하는 사회”라는 표현이 등장한다. 하지만 슈티르너는 유일자들의 이상사회를 설계하지 않았다. 그가 내놓은 대안인 에고이스트 연합은 이상사회라기보다 하나의 가능한 결합 방식, 즉 선택 가능한 사회적 관계에 더 가깝다. “유일자들이 모여 이런 사회를 건설하자”가 『유일자와 그의 소유』의 결론이 아니다. 그는 미래 사회의 완성된 모습을 제시하는 대신, 개인이 국가·도덕·인간·사회·혁명 같은 추상적 목적에 자기 자신을 넘겨주는 순간을 문제 삼는다. 따라서 “혁명 이후에는 의미가 있지만 혁명까지 가는 길을 제시하지 못한다”는 비판은 애초에 슈티르너에게 혁명 전략가의 역할을 부여하고 시작한 오류에 불과하다.

더구나 “유일자가 세상 만물을 자신의 소유라고 선언하면 괴물이 진압할 것”이라는 말도 슈티르너의 소유 개념을 지나치게 문자 그대로 받아들이는데, 슈티르너가 말하는 소유는 법률상 소유권을 선포하는 주문이 아니다. 국가가 “이것은 네 것이 아니다”라고 판결한다고 해서 유일자의 힘이 사라지는 것도 아니고, 반대로 개인이 “이것은 내 것이다”라고 외친다고 해서 법적 소유권이 생기는 것도 아니다. 소유는 무엇보다 내가 그것을 나의 것으로 취하고 사용할 수 있는 힘과 관계된다. 그래서 슈티르너는 법적 권리보다 힘을 이야기하는 것이고, 법이 인정해주는 소유와 내가 실제로 취할 수 있는 소유를 구별하는 것이다.

산업화가 개인의 생산력을 압도적으로 넘어섰다는 사실 역시 슈티르너를 무력화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렇기 때문에 그는 다른 사람들과의 결합을 거부할 이유가 없다. 공장을 혼자 운영할 수 없다면 다른 사람들과 함께하면 되고, 거대한 생산망이 필요하다면 그것을 이용하면 되며, 노동조합이 나에게 힘을 준다면 조합을 이용하면 된다. 슈티르너에게 문제는 혼자 할 수 있느냐가 아니라 그 결합이 누구의 목적을 위해 존재하느냐다. 연합이 나의 힘을 증대시키는 동안 그것은 나의 연합이다. 내가 어느 순간 연합의 목적을 위해 나 자신을 희생해야 하는 존재가 되면, 그때 슈티르너는 칼을 뽑는다.

마지막의 엥겔스 인용도 재미있다. “왕도 타도하고 법도 타도하자”는 말에 우리는 “그럼 돌멩이를 던지겠다”고 답한다. 좋다, 누가 그것을 말리지 않았는가? 슈티르너 역시 법과 국가를 머릿속에서만 부정하라고 한 적이 없다. 다만 돌멩이를 던지는 행위조차 하나의 새로운 대의에 자신을 바치는 행위로 만들 필요는 없다는 것이 그의 차이다.

왕을 타도하는 것, 법을 타도하는 것, 자본을 타도하는 것 모두 할 수 있다. 여러 사람과 함께할 수도 있고, 조직을 만들 수도 있고, 파업할 수도 있고, 필요하다면 총파업을 할 수도 있다. 슈티르너는 그것을 금지하지 않는다. 다만 그 투쟁에 참여할 것을 강요하거나, 혹은 투쟁이 끝난 뒤 누군가 “이제부터는 혁명과 인민과 새로운 사회를 위해 살아야 한다”고 말한다면, 슈티르너주의는 아마 그때 다시 나타날 것이다.

돌멩이를 하나 더 던지는 것과, 돌멩이를 던지는 이유까지 남에게 맡기는 것은 전혀 다른 문제이기 때문이다.

“슈티르너가 포이어바흐의 ‘인간,’ 또는 적어도 『기독교의 본질』에 나오는 ‘인간’을 거부한 것은 옳다. (······) 그러나 만약 개인이 우리의 ‘인간’을 위한 진정한 토대이자 출발점이라면, 자기중심성이 우리의 인간다움에 대한 사랑에 출발점이며, 그렇지 않으면 인간다움은 허공에 매달려 있는 것이 된다.”

— 프리드리히 엥겔스가 카를 마르크스에게, 1844년 11월 19일

결론

오늘날 아나키즘은 교조주의에 갇혀있다. 노조에 가입해서 투쟁하는 것, 거리에 나가 시위를 하는 것은 아나키즘의 수많은 선택 중 하나이지 의무가 아니다.

아나키즘은 평화를 추구하는 이념이지만 결코 평화로운 이념은 아니라는 말에 동의한다. 그러나 비판과 반박은 어떠한 것에 대한 제대로 된 이해와 해석을 바탕으로 세워져야 한다. 그러지 않는 이상, 이러한 토론에는 아무런 의미도 없을 뿐더러 아나키즘의 질을 떨어트리는 행위에 불과하다.

좌파 아나키즘이 본인들이 불편하다고 포스트-레프트 성향의 아나키즘을 배척한다면, 좌파 아나키즘은 본질적으로 권위주의와 다를 것이 없다. 아나키즘은 새로운 사회를 향한 대중의 혁명, 반란, 반역의 가장 날카로운 칼날이 되어야만 하지 않는다. 아나키즘이 또 하나의 보편적 당위를 개인 위에 세우는 순간, 그것은 자신이 타도하려 했던 권위의 형식을 다시 만들어내는 짓거리에 불과하다. 만약 그대들이 또다른 당위를 세운다면, 슈티르너주의자들을 비롯한 포스트-레프트 아나키스트들은 결코 좌파 아나키스트들과 함께하지 않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