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나키스트 연대
아연 주간 뉴스 단평 2020-12-13
1. [중립적이지 못할 탄소 중립]
12월 10일 각 방송사를 통해 흑백 영상이 하나 송출됐다. 영상은 문재인 대통령이 나와 화석연료 등 한국에서 배출되는 온실가스를 최대한 줄이고 불가피하게 배출된 가스는 산립, 습지 등을 통해 제거하여 실질적으로 배출량을 없애는 이른바 ‘탄소중립’의 필요성과 그 정책들을 열거하였다. 영상이 흑백인 이유는 고화질 컬러영상이 더 많은 탄소를 배출한다는 명목때문이었다.
맞는 말이다. 우리 시대의 과제 중 하나인 기후위기는 이미 당면 과제임을 부정할 수 없을 만큼 뚜렷해져 가고 있고 그 원인으로 지목되는 탄소 배출은 점점 늘어가는 현실에서 그 탄소 중립을 달성하기 위한 우리 사회의 노력의 필요성이 어느때보다 절실해진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문재인 정부가 해온 것, 그리고 탄소 중립 정책이 진정 흑백 방송쇼를 할만큼이나 진정성 있는 것이었는가? 이제껏 문재인 정부가 추진해온 그린뉴딜 정책은 기업의 탄소 배출에 유의미한 규제와 제한을 가하지 않은채 각종 이익을 당근으로 바쳐가면서 기업이 부디 더 친환경적으로 행동하길 바라는 보조금 정책에 지나지 않았다. 탄소 배출량은 거의 감소하지 않았고 반대로 코로나 사태 이전까지 계속 증가하는 추세에 놓였다. 전혀 ‘중립’적이지 못한 결과일 따름이다.
이번의 ‘탄소 중립’ 선언 또한 그린뉴딜의 재판일 뿐이다. 탄소 배출에 대한 규제는 거의 포함되지 않은 채 여전히 기업에 대한 지원금 정책이 위주이며 재생에너지로의 전환을 위한 전환 계획도 애매모호할 뿐이고 이를 주도할 주체도 사익을 쫓는 민간기업에 맡겨져 있다.
문재인 정부의 탄소 선언은 그저 립 서비스일 뿐 정부는 노동개악으로 노동자의 권리를 자본에 바쳤듯 코로나로 위기에 빠진 자본을 살리기 위해 환경 또한 장작으로 쓰고자 하고 있을 뿐이다. 자본에 봉사하는 정부에게도, 이익만을 쫓는 에너지기업에게도 공공 문제의 해결을 기대할 순 없다. 현 시대의 문제를 자각한 민중이 생산수단에 대한 공공소유를 통해 그 통제를 회복할 때에서만 비로소 전 지구적 위기의 해결을 위한 행위가 가능할 것이다.
http://www.hani.co.kr/arti/politics/bluehouse/973720.html
2. [2차 가해 좀 막 팔지 마라]
영화 감독 김기덕이 라트비아에서 코로나19 합병증으로 인해 사망했다. 그의 영화사에서의 업적에 대해서는 차치하고, 그가 여성 배우들에게 행한 권력관계를 이용한 그 모든 악행은 당연히 비난을 받아야 하며 죽어서도 단죄를 받아 마땅하다. 어느 누구도 이에 대해 이의를 제기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하지만 그의 죽음에 대해 명복을 비는 행위는 또 다른 것이다. 그가 아무리 용서 받지 못할 짓을 저질렀다고 하더라도, 용서를 빌지 않아 그 악행이 더욱 배가되었다 하더라도 이는 변함이 없다.
일각에서 김기덕의 죽음에 명복을 비는 것은 2차가해이니 그의 명복을 빌지 말라는 이야기가 나오고 있다. 하지만 이는 명복을 비는 사람들이 알아서 할 일이지 명복을 빌라 빌지 말라 해서는 안 될 일이다. 설령 김기덕에 대해 영원히 지옥불에서 불 타라고 저주를 퍼붓는 사람일지라도 말이다. 김기덕을 미화시켜 죄업을 덮으려는 시도를 하는 것이 아니라면 그의 명복에 대해 운운할 자유는 그 누구에게라도 있어야 한다. 돌을 던지든 눈물을 흘리든.
2차 가해라는 말이 너무나도 대중 없이 사용되고 있다. 2차 가해라는 말이 부당하게 자유를 침해하려는 작금의 이러한 시도가 계속된다면, 2차 가해라는 말 자체가 억압과 가해의 기제로 비웃음거리에 지나지 않게 될 것이다.
https://n.news.naver.com/entertain/article/416/0000265729
3. [무엇을 기대했나?]
무엇을 기대했나? 민주당이다. 의회민주주의를 그 누구보다 가장 잘 활용하며, 자신들을 의회민주주의의 수호자라 생각하고 있는, 어찌 보면, 아니, 확실히 국민의힘보다도 더더욱 의회민주주의에 부합한 정당이다. 그런 이들이니 당연히 국회법 상 존재하는 권한은 마구잡이로 행사할 수 있는 것이 아니겠나? 공수처법과 여러 건에 대해서 신청된, 정의당과 국민의힘이 진행하던 필리버스터에 대한 종결이 오늘 (12월 13일) 부로 표결되어 통과되었다. 민주당은 언제나 그렇듯 ‘확진자 수’를 내세우며 필리버스터를 마치 시위를 찍어눌러버리듯 끝내버렸고, 국정원법과 여러 법안들을 일사천리로 해치웠다. ‘유능한’, ‘진보’ 정당답다. 대단하다!
우리는 5.18법과 필리버스터 종결에 있어 의회민주주의의 아주 확실한 단면을 볼 수 있었다. 의회민주주의 체제에서는 반대의견은 애초에 설 자리조차도 없으며, 반대의견이 설 수 있도록 하는 요식행위조차도 언제나 그렇듯 힘의 논리로 찍어 눌려질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이는 자연스럽게 소위 ‘대의민주주의’ 의 원칙에 따라 자신의 의견을 대리해서 국회에 표출할 다른 국회의원이 배제되는 형식이 그 어떤 때에나 생길 수밖에 없고, 당연하지만 이건 민주주의라고 부를 수 없다. 애초에 누군가의 의견이나 누군가의 주장이 누군가를 통해 이야기 돼야 하는 불합리성은 제쳐두고서라도, ‘의회민주주의’라는 체제는 이미 실시간으로 그 ‘비민주성’을 강력히 드러내고 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의회민주주의의 개선이나 소위 ‘스위스식’ 이나 ‘북유럽식’을 주장하는 사람들도 간혹 보인다. 스스로를 아나키스트로 자처하는 사람들 또한 ‘의회민주주의’를 개량하는 형식으로 무언가 가능하리라 보는 경우도 존재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단호하게 이야기한다. 의회민주주의는 이미 그 자체로 민주주의가 아니며, 진정으로 ‘민주주의’를 실현하기 위해서는 노동조합에서, 우리가 스스로 만든 공동체에서, 우리가 직접 참여 가능한 코뮌에서 우리의 목소리를 내는 것뿐이다. 누가 나의 목소리를 대변해주는 순간, 민주주의는 붕괴된다. 내가 나의 목소리를, 우리가 우리의 목소리를 낼 수 있어야만 민주주의가 확립된다.
그러니 의회민주주의를 사랑하면서도 민주당의 폭정을 비판하며, 의회민주주의를 사랑하며 국민의힘과 야당의 비협조를 비탄하는 정치꾼들에게 말한다. 무엇을 기대했나? 이것이 그대들이 사랑하기 마지않는 의회민주주의이다. 의회민주주의는 당신들의 목소리를 대변하지 못한다. 오로지 노동자, 민중의 사회혁명을 통한 직접적인 투쟁과 움직임만이 진정 민주주의를 이루는 길이다.
https://n.news.naver.com/mnews/article/088/0000676221?sid=1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