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나키스트 연대
아연 주간 뉴스 단평 2021-01-04
1. [정인아, 미안해]
사상이나 이념, 신념을 막론하고 모두가 허탈할 일이었다. 모두가 분노할 일이었다. 피해자인 정인 양에 대한 잔혹한 이야기를 다시 상기하는 것만으로도 너무나 큰 기력과 감정을 소모하게 되는 것이니 이는 뒤로 두기로 한다. 아마 정인 양 역시 그 서사에 초점이 맞춰지는 것을 바라지는 않을 것이라 의심치 않는다.
한 사람이, 너무도 적은 날을 이 땅에서 우리와 함께 보내다 숨졌다. 억울하고 분통이 터지지만 언제나 그렇듯 남은 이들은 남은 이들의 일을 해야 한다. 이것이 우리가 미처 몰랐던 곳에서 고통 받은 이들에게 할 수 있는 최소한의 속죄이자 비슷한 처지의 이들을 구할 수 있는 길이 될 것이다.
많은 이들이 바라는 것과 같이, 우리는 정인 양의 양부모가 모자람 없는 죗값을 치르기를 바라마지 않는다. 하지만 이러한 일들이 다시 일어나지 않게 하기 위해서 해야 하는 일들이 새로운 입법이라는 결론에는 동의를 하기가 어렵다. 정인 양이 죽음에 이르기까지 세 차례의 아동학대 의심 신고가 있었고, 이 중 두 차례는 법으로 의무화된 제도에 따른 신고의무자들의 신고였다. 하지만 결국 이것들로는 정인 양의 죽음을 막을 수 없었다.
아동학대 신고는 해마다 늘어 2019년 기준 4만 건을 넘겼다. 그러나 이 수치보다 더욱 절망스러운 것은, 전문가들에 의하면 아동학대 범죄자들에게는 공통점이 발견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즉, 아동학대를 예방할 수 있는 데이터베이스 구축 자체가 오리무중이라는 이야기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러한 억울한 죽음들에 어떻게 대처해야만 하는가?
답은 늘 어렵지 않다. 결국 상호부조와 공동육아의 확대가 그것이다. 그리고 이를 우리 스스로 실행할 직접행동에의 용기다. 이는 법으로 강제한다고 하여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우리 모두가 우리 다음 세상을 이어나갈 이들을 존중하고 사랑하는 마음, 더 좋은 것을 주고 싶은 그 마음으로 가능한 것이기 때문이다. 이런 자발적인 사랑을 법으로 누군가에게 의무 지울 때, 사람들은 사랑에서 멀어지고 움츠러든다. 혹여나 정해진 것을 어겨 내게 불이익이 돌아오지는 않을까 하는 그 망설임이 우리 주변의 다급한 목소리에 손길을 내밀기를 망설이게 한다.
우리 모두 이번 정인 양 사건에 분노하고 있다. 모두가 안타까운 마음으로, 억장이 무너지는 마음으로 뒤늦게 미안한 마음을 감출 길을 찾지 못하고 있다. 그렇다면 우리가 우리 주변의 다급함을 모른 척하지 말자. 우리 주변의 도움을 요청하는 목소리를 미처 못 보고 지나치지 말자. 자신이 아프고 억울하다는 목소리조차 내지 못하는 이들에게 우리가 먼저 다가서지 않으면, 우리는 언제고 다시 끝없는 참회의 굴레를 뫼비우스의 띠처럼 걷게 될 것이다.
https://n.news.naver.com/article/293/0000032716
2. [의미 하등 없는 핑퐁]
의회민주주의 아래에서 가장 재미있는 것은 바로 그 스스로가 가지고 있는 ‘삼권분립’ 체제가 완전히 분립되어 있지 않다는 점이다. 여기 대한민국에서 그러한 일이 벌어지고 있다. 무려 박근혜와 이명박 전 대통령들에 대한 사면론이 불거지고 있는 것이다. 물론 혹자는 말할 것이다. 대통령에게 있는 ‘사면권’이란, 곧 사법부를 견제하기 위한 것이라고 한다거나, 행정부 수장으로서 마땅히 행사할 수 있는 권한이라고 한다거나. 그러나 우리는 의문을 가진다. 대통령이 애초에 ‘왜’ 존재해야 하는 것인지, 그리고 대통령이 대체 ‘왜’ 인민을 가두고 사면할 권리를 가지고 있는 것인지에 대해서 말이다.
우리 아나키스트 연대는 소위 말하는 ‘사면’과 사면할 대상이 존재하는 ‘교도소’의 존재, 그리고 ‘교도소’에 인민을 쳐넣을 수 있는 권한이 있는 ‘사법부’와 ‘경찰’의 존재를 부정한다. 왜? 그들은 인민의 그 어떤 동의도, 그 어떤 합의도 없이 자기들 멋대로 인민을 사로잡고 감옥에 쳐넣기 때문이다. 수많은 노동계급이 그렇게 희생되었고, 합법적 권한 행사라는 명목 아래에 많은 인민대중이 권력에 의해 죽어나갔다. 그렇게 해서 나타나는 변명은 고작 ‘국민이 건네준 권력’이라는 것이다.
국민이 건네준 권력이라고? 4년에서 5년에 한 번 있는 선거를 통해 선출되어 권력을 행사하는 그 치들이 하는 모든 일은 인민의 동의 아래에서 행해지는 것인가? 파쇼의 후예이자 이를 자랑스럽게 떠벌리고 다니던 마녀, 부르주아 민주주의를 그 누구보다도 열렬히 사용하며 자본을 긁어모으고 노동자들을 착취하던 인간을 인민이 심판하지 못하도록 한 것은 누구인가? 그래놓고 인민의 압도적인 불만에 꼬리를 내리고 겨우 요식행위로 형식적 절차를 거쳐 교도소에 넣은 뒤에, ‘통합’을 위해 사면권을 행사하겠다니. 웃기는 일이다. 거기에 동의하는 정치집단들도 마찬가지다. 결국 그들은 자신들의 정치적 이익과 자본에 복무하는 것이지, 인민대중은 안전에도 없는 것이다.
그 모든 정치집단, 그 모든 의회민주주의를 추구하는 집단은 어떠한 변화도 만들어낼 수 없음이 이번 사면과 관련된 거대정당들의 핑퐁에서 드러나고 있다. 우리는 진정한 변혁을 일궈내기 위해서는, 그 누구에게 권력을 건네주어 그 누군가가 어떠한 인민을 사면해주거나 벌하는 것이 아닌, 인민이 직접 힘을 행사하여 파쇼와 부르주아를 격멸할 것을 주장한다. 그것이 바로 직접행동이고, 그것이 바로 사회혁명이 아니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