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나키스트 연대
아연 주간 뉴스 단평 2021-03-08
1. [체제 편입을 요구하지 말고 체제에 반란하자]
故 변희수 하사의 죽음을 보며, 안타까움을 금할 수 없었다. 누군가의 성적 정체성, 성적 지향성이 그 삶을 선택할 자유를 침해하는 것은 언제 보아도 안타깝다. 국가의 폭력이, 그들이 지정한 “소수자”를 짓밟고, 짓누르고, 그 짓밟힌 이가 아파하고, 괴로워하다, 끝내는 자신의 목숨마저 내어놓아야 하는 것이, 우리에게는 결코 남의 일이 되지 못한다. 그녀의 죽음은 국가 폭력에 의해 희생된 모든 이의 죽음이고, 언제라도 그 희생자가 될 수 있는 모든 인민대중에게 위협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그녀를 온전히 추모할 수 없다. ‘인간’ 변희수씨는 분명한 국가폭력의 희생자이지만, ‘하사’ 변희수 씨는 국가폭력의 일부이기 때문이다. “이 나라를 지키는 당당한 여군이 되고 싶”다던 그녀의 말은, 자기 자유를 박탈당한 인민의 가슴 아픈 목소리이면서도, 그 “나라”의 폭력의 일부가 되고자 하는 적극적 의지인 것이 아닌가.
어찌보면, 군대라는 조직이 트랜스젠더의 복무를 거부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이성애중심주의라는 것은 결국 노동력의 꾸준한 재생산을 요하는 자본주의적 담론이다. 국가는 그 자본주의의 경호원이고, 군대는 그 경호원이 독점하고 있는 폭력이다. 그러하건데, 소수자의 탄압에 앞장서야 하는 전위에, 어찌 소수자를 둘 수 있겠는가.
그렇기에, 변희수 하사의 강제전역이 반려되고, 그녀가 “당당한 여군”이 된다는 것은, 체제의 근본적 변혁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오직 그 체제에 트랜스젠더 운동이 편입되었다는 것을 의미할 뿐이다. 군대와 전쟁이 오직 귀족계급 남성의 전유물이었던 시대에서, 군대의 문호가 무산대중으로, 여성으로, 유색인종으로 확대되었다고 해서 사회가 변혁한 것이 아닌 것처럼, 결국 그들을 표면적 배제의 대상에서 제외하고 다른 배제의 대상을 만들어내었다는 의미 이상을 가지지 못하는 것처럼 말이다.
국가의 손에 쥐어진 검은색 K-2 소총이 인민대중을 죽이는 총이라면, 국가가 쥐고 있는 무지개색 K-2 역시 인민대중을 죽일 수 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총의 도색을 바꾸는 것이 아니라, 국가와 자본의 손에서 총을 빼앗아, 인민의 손에 돌려놓는 것이어야 한다. 소수자의 체제 편입을 요구하는 것이 아니라 체제 자체를 근본적으로 변혁하는 것이어야 한다.
변희수 씨의 아픔에 깊은 안타까움을 전한다. 이러한 일은 다시는 없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나라를 지키는 일”에 트랜스젠더가 편입할 수 있는 제도를 만드는 것이 아니라 트랜스젠더에 대한 차별을 정당화하고, 제도화하는 국가 자체를 무너트려야 한다. 변희수 씨에 대한 추모에서 멈추지 말고, 또 다른 변희수 씨가, 나라를 지키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힘으로, 자신이 사랑하는 사람들의 공동체를 지키고 싶다”고 말할 수 있는 세상을 위해 투쟁해 나가자.
""변희수 하사의 죽음은 사회적 타살"...이어지는 추모 물결" :
https://n.news.naver.com/article/056/0011001607
2. [고난과 혐오에 대항한 연대를 ]
코로나는 우리 사회에 육체적 질병만이 아닌 혐오라는 이름의 정신적 질병마저도 가져왔다. 지난해 초 코로나 바이러스의 확산 이후 심화된 혐오 문화는 반중 감정과 맞물려 증오의 대상을 그들로 잡았고 미국에서는 인종주의적 증오 범죄의 급증이란 작금의 결과로 나타났다. 혐오자들의 인종주의적 증오는 중국계만이 아닌 아시아계 전반을 향하고 있으며 뉴욕에서만 코로나 이전에 비해 아시아계에 대한 증오 범죄 비율이 7배로 증가한 상태이다.
이는 비단 미국에만 한정된 일이 아니다. 여기 한국에서도 오랫동안 존재했던 중국인, 특히 조선족에 대한 혐오문제는 코로나 시작 이래로 빠르게 악화되고 있다. 온라인 상에 만연한 혐오 표현은 혐오를 조장하는 가짜 뉴스와 언론들, 이 시기를 이용해 그들에 대한 증오를 부추기는 우파들과 이로 인한 일상적인 혐오들. 중국인, 조선족에 대한 혐오는 충분히 심각하다.
우리들은 이런 혐오에 굴할 수 없다. 코로나의 근원지가 어디냐 따위는 어떤 혐오도 정당화 할 수 없음을 분명히 인식하고 지금 이 땅에서도 해외에서도 모두가 고통스러운 시기를 맞아서 소수자, 외국인들에 대한 혐오를 조장하고자 하는 이들에 대항하여야 한다. 고난의 시기에 필요한 것은 혐오가 아닌 연대의 정신이다.
""죽을까봐 무서웠다"...美 아시아계 혐오 범죄 급증" :
https://news.sbs.co.kr/news/endPage.do?news_id=N1006229722&plink=ORI&cooper=NAVER
""혐오 백신은 언제 나오죠" 대림동 중국동포 '울분, 상처' 그대로" :
https://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2&oid=277&aid=0004855883
3. [화시촌은 사회주의의 실패인가?]
1961년, 중국의 어느 비좁은 황무지 땅에서 화시촌이라는 작은 마을이 시작되었고 그 마을에서 우런바오 전 서기는 비밀리에 주민들을 모아 1969년에 주민들이 공동으로 소유하는 작은 철물공장을 세웠다. 이들은 당시에는 중앙 정부의 관료들이 방문하면 일부러 농사를 짓는 척하면서 그들이 떠나면 몰래 공장을 돌리고는 했다. 마오쩌둥 이후 덩샤오핑이 집권하면서 1979년 개혁 개방이 시작되자 이미 시장경제에 진출할 기반을 갖추고 있던 화시촌의 향진기업은 고속성장을 하면서 부유함과 풍족한 복지를 누리기 시작 했고 21세기 초에는 한국 언론으로부터도 사회주의와 자본주의가 적절히 융합한 사례로 주목받았다.
그러다가 2017년, 중앙일보의 국제면에 화시촌의 위기가 보도되었다. 이후 계속하여 몰락해가는 화시촌이 보도되면서 결국 2021년 3월 1일 MBC 뉴스에서 파산 위기에 놓인 화시촌이 보도되었다. 언론에서는 하나같이 입을 모아 기존 낙후산업으로부터의 체질 전환 실패와 집체주의식 공동경영을 문제의 주된 원인으로 삼았으며 사회주의의 한계점이라 말한다. 그러나 과연 화시촌의 실패는 사회주의의 실패인가? 우선 단순히 화시촌을 기업으로만 보고 자본주의적으로 따지자면 체질 전환 실패와 공동경영의 한계가 몰락의 원인이 맞다. 그러나 아나키즘이나 사회주의의 관점에서, 행복할 권리, 복지를 중요시하는 관점에서 바라보면 어떨까?
잠시 사회주의의 실패냐 아니냐를 따지기 이전에 애초에 화시촌 향진기업이 사회주의적이라 할 수 있는지부터 따져보겠다. 화시촌을 한 문장으로 요약하자면 국제 자본주의 시장에서 이윤을 추구하는 마을 기반 기업이다. 즉, 화시촌도 결국 본질은 기업이며 사회주의적이라 하기는 어렵다. 주민들이 모두 기업의 주식 중 일정량을 보유하고 있고 경영을 같이 한다고 해도 그 한가지 사회주의적인 요소를 제외하면 모든 것은 자본주의의 토대 하에 자본주의적으로 운영된다. 아나키즘이나 사회주의의 관점에서 보자면 화시촌은 사회주의적 공동체로의 전환을 실패한 것이지 애초에 사회주의라 하기도 어렵다.
그러면 화시촌은 왜 사회주의적 공동체로 전환하는 것에 실패했는가? 그 전에 화시촌이 사회주의적 공동체로 전환이 가능했는지를 따져보자. 우선 1969년 주민들이 자주적으로 작은 철물공장이라는 생산수단을 만들어서 공동으로 소유하고 자주적으로 운영했다는 점은 좋은 시작점이다. 이후 1979년 개혁 개방이 시작되면서 화시촌에는 부가 쌓이기 시작했다. 이후에 만약 화시촌의 주민들이 관광객을 위한 호화 시설이나 금융업 등 이윤 추구에 힘을 쏟지 않고 축적한 부를 활용하여 기본적으로 자급자족할 수 있는 생산수단을 확보했다면 자본주의 시장에서 어느 정도 독립하여 경기 순환에 영향을 받지 않거나 적게 받으면서 자립할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화시촌은 그러지 않고 다른 기업과 다를 것 없이 이윤 추구에 집착하다가 필연적인 경기 순환의 힘에 휩쓸려 곤두박질치고 말았다.
그러나 화시촌의 실패를 그저 탐욕스런 주민들의 잘못이나 사회주의 자체의 한계라 할 수 있는가? 원래부터 살아왔던 주민과 이후 향진기업에 고용된 농민공 간에 존재했던 격차를 생각하면 사회주의적 공동체로 전환이 가능했을까 의문이 들기도 하지만 일단 그렇게까지 쉽게 단언할 수는 없다고 본다. 아무리 화시촌에서 자급자족을 위한 생산수단을 확보하여 자본주의의 시장 경제에서 최대한 독립한다 해도 결국 국가가 권력 유지비용을 위해 요구하는 세금을 납부해야 할 것이다. 이를 납부하기 위해서는 결국 국가에서 요구하는 대로 필요 이상을 생산할 수 밖에 없을 것이다. 결국 아무리 자본주의 시장을 벗어나 사회주의적 공동체로 전환하여 모두가 안정적이고 풍요롭게, 행복하게 살고 싶어도 국가가 있는 한 우리는 국가의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 수탈당할 수 밖에 없으며 이런 국가의 압제에서 벗어나려면 민중이 단결하여 국가를 지탱하는 생산수단을 최대한 독점 후 사회화하여 국가가 성립할 수 없도록 해야 한다.
"파산 위기 놓인 중국 '최고 부촌'" :
https://imnews.imbc.com/replay/2021/nwtoday/article/6104771_34943.html
"중국 화시촌, 사회주의+자본주의= ‘무릉도원’" :
http://www.hani.co.kr/arti/international/china/380842.html
"주민들에게 150평 주택, 중형차 나눠주던 마을의 몰락"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