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비자도 노동자도 모두 민중이다.]

서울 강동구의 한 대단지 아파트에서 차량 높이 때문에 택배 차량의 출입을 막아서 기사들이 물건을 정문에 두고 갈 수 밖에 없는 상황 때문에 논란이 됐었다. 택배 기사들과 아파트 주민간의 마찰 끝에 일부 주민들은 택배 기사들을 문자 폭탄으로 조롱 및 협박까지 했고 그 결과 당장은 다시 손수레를 끌고 문앞 배송을 재개했다. 이 참사에 필자의 입장을 명확히 밝히자면 무턱대고 낮은 차고의 택배 차량을 사용하라고 강요하거나 손수레로 문앞 배송까지 하라는 것은 노동자의 근로 환경을 전혀 배려하지 않은 무책임한 주장이라고 본다. 하지만 그렇다고 바로 배려심 없는 저 아파트의 입주민 대표회에 대해 비판하기 보다는 같은 상황이지만 다르게 결말이 난 훈훈한 사례를 살펴보려 한다.


세종시의 한 아파트 역시 거의 동일한 문제를 겪던 아파트 단지다. 하지만 이들은 앞서 말했던 택배 기사와 아파트 주민간의 마찰을 순조롭게 피할 수 있었다. 바로 주민들과 택배 기사들이 서로 적극적으로 협의하여 해결책을 냈기 때문이다. 구체적인 방안을 보자면 아파트 주민들이 공동으로 분담하여 택배 배달 전동 카트를 아파트 단지 내에 배치하였고 택배 기사들은 전동 카트를 활용하여 문제 없이 다른 곳처럼 문 앞 배달을 할 수 있도록 했다. 이 외에도 다른 방식이지만 비슷하게 아파트 주민들과 택배 기사들이 협의하여 해결책을 마련한 경우가 꽤나 있다고 한다.


필자는 보통은 이렇게 서로 협의할 수 있는 게 정상이라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소비자도 결국 노동자이고 노동자도 결국 소비자이기 때문이다. 민중은 흔히 해결자들이라 자칭하는 국가나 자본주의 기업, 정당, 의회와 달리 조금만 더 노력해도 서로 문제에 대해 공감하고 이해할 수 있다. 이번 사례는 단순히 노동자와 소비자 간의 협력을 떠나 민중의 자치 능력을 증명한다.

https://imnews.imbc.com/replay/2021/nwdesk/article/6151657_34936.html

https://imnews.imbc.com/replay/2021/nwdesk/article/6152609_34936.html


https://www.mk.co.kr/news/world/view/2021/04/354984/

< 가장큰 범죄조직의 또다른 범죄 >

소위 ‘공권력’은 언제나 그들이 범죄자로부터 민중을 지킨다고 선전하지만 실제로 그들은 언제나 민중을 해치는 가장 큰 범죄자다. 지난 12일 미네소타주에서는 또 한명의 흑인이 경찰의 총격으로 인해 사망했고 15일에는 지난달 말 경찰에 요구에 따라 양손을 들기까지한 13살 소년을 사살한 영상이 공개되었다.

그간의 무수한 경찰 폭력 사건과 이전 조지 플로이드의 죽음으로 촉발된 시위에도 불구하고 최소한의 가식조차 배우지 못한 모양이다. 공권력에 의한 폭력은 언제나 존재해왔고 그것이 존재하는 한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민중과 괴리되어 민중에 의해 운영되지도, 그들을 운영하는 주인조차 민중의 억압하는 주체인 조직이 어떻게 민중을 위해 행동 할 수 있겠는가.

바쿠닌이 말한 바와 같이 사람들이 몽둥이로 맞고 있을 때 그 몽둥이가 “민중의 지팡이”라고 불린다 해서 행복해 하지는 않을 듯이 이는 ‘경찰의 민주화’ 등의 따위로 해결될 문제가 아닌 본연의 문제다. 공권력이란 기본적으로 민중이 아닌 정부에 충성하며 지배권력에 철저하게 상명하복하는 조직이며 그들을 지배하는 것은 정부는 그 권위구조와 자본주의와의 결합으로 말미암아 필연적으로 노동 대중을 억압하게 된다.

국가와 그 권위질서가 파괴되지 않는한 이러한 희생은 멈출 수 없고 계속될 것이다. 물건너 미국땅만이 아닌 이 땅에서도 우린 그들에 의해 흘러진 너무나 많은 피를 보았다. 우리 아나키스트들은 공권력이라 불리우는 모든 지배계급의 폭압적 통제수단에 반대하며 민중은 그들 스스로의 안전과 질서를 위해서 그 모든 권력조직을 파괴하고 그들의 손으로 직접 질서를 세워야 한다.


[법으로 풀리지 않을 것이다]

비단 하단의 기사뿐만이 아니다. 이전에도, 지금도, 그리고 앞으로도 계속해서 자본가(위 기사에서는 병원이지만 영리를 목적으로 하는 이들이 자본가가 아니라고 누가 말할 수 있겠는가)는 노동자들을 속일 것이고, 법을 정교하게 만들면 만들 수록 그 허점을 찾아내 더욱 교묘하게 노동자들의 등을 치려 들 것이다. 이런 일들을 해결하기 위해 많은 노동단체, 사회단체가 출범했다. 하지만 지금, 무엇이 바뀌었는가. 심지어 "직장갑질 119에 따르면 최근 2년간(2019~2020년) 입사갑질 신고가 559건 이뤄졌지만 수사기관에 통보된 건 단 1건(0.18%)에 불과했"고, "과태료가 부과된 것도 177건(31.66%)에 그쳤고 전체 신고건수의 절반이 넘는 371건(66.37%)은 별도 조치 없이 행정종결됐다."

직장갑질 119는 고용노동부의 홍보와 더불어 "구직자를 보호하고 입사갑질을 예방하기 위해 법률을 개정하고 제도를 개선해야 한다"고 이야기한다. 물론 당장 할 수 있는 일들을 하는 것 역시 의미를 지닐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것이 정말 근본적으로 노동자들의, 구직자들의 고충을 해결하고 문제를 없앨 수 있는 방법인가. 앞서 이야기한 것처럼 오히려 자본가들은 이것들을 더욱 잘 피해갈 수 있는 방법을 찾기 위해 더 많은 시간과 노력과 돈을 들이고는 말할 것이다. "우리는 답을 찾을 것이다. 늘 그랬듯이."

그렇다면 근본적으로 이런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방법은 무엇인가. 그것은 바로 자본가들이 이런 꼼수와 장난질을 칠 마음 자체를 처음부터 가지지 못하게 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이런 짓을 하다가 걸리면 내 이익이 끝장나는구나'라는 생각에서부터 시작될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 강력한 처벌조항을 신설하자고? 사법부가 아직도 노동자의 편으로 보이는가? 돈을 받고 책임을 덮어 씌워 꼬리 자르기를 하는 일은 그런다고 사라지지 않을 것이고, 설령 직접 책임자가 감옥에 들어간다 하더라도 그가 그 안에서 반성을 할 리 만무하거니와 그러고 나면 막대한 이익은 그대로 유지될 것이다. 다시 한 번 말하지만, 법률 제정, 처벌 조항의 강화 따위는 결코 이 문제의 해결책이 될 수 없다.

때문에 우리는 이렇게 권하고 싶다. 일터에서 일하는 노동자들이 회사를 늘 감시하고 견제할 수 있는, 더 나아가서는 회사의 운영에 직접 참여해 방향을 정할 수 있는 더욱 강하고 건강한 노동조합이 필요하다. 노동조합의 조합원이라면 아직 노동조합에 가입하지 않은 동료에게 이것을 쉽게 설명해 함께 하자고 권해야 하고, 노동조합 가입을 망설이는 노동자라면 이 방법 말고는 나의 권리를 아무도 지켜주지 않음을 다시 한 번 두 눈 똑똑히 뜨고 인식해야 할 것이다.

그리고 일하며 살기 위해 일자리를 구하는 구직자라면 구직자의 모임을 만들어 노동조합과 연계해 내가 일하게 될 지도 모르는 현장들을 더욱 일하기 좋은 환경으로 만드는 데에 함께 하고, 노동조합과 함께 싸워 노동조합이 단체협약에 구직자의 모임에서 열심히 일한 이들이 우선적으로 그 일터에서 일할 수 있게끔 만들어 나가는 일이 필요할 것이다. 내가 일하고 싶은 곳, 일할 곳의 환경은 누군가가 대신 좋게 만들어 주는 것이 아니라 내 손으로 좋게 만들어야 하는 것이고, 자본가들의 이윤 극대라는 욕심으로 일하기 어려운 작금의 이 실업률은 우리의 투쟁으로, 우리의 직접행동으로만 깨부술 수 있다. 아무도, 그 누구도 대신 해주지 않는다. 아직도 정부가 실업률을 올리겠다고 하는 말을 믿는 순진함을 유지하는 이는, 없을 것이라고 믿고 싶다.

다시 한 번 적는다. 내가 원하는 것을 내가 말하지 않으면 아무도 관심법을 써서 내 생각을 이해해 주거나, 설령 관심법을 써서 그것을 알게 되었다 하더라도 대신 해주지 않는다. 말하자, 뭉치자, 싸우자.

""정규직이라더니"...과장·허위 광고로 구직자 울리는 '입사갑질'" :
https://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hm&sid1=102&oid=421&aid=0005296583


[과학기술을 다시 위대하게]
과학기술의 발전은 인류의 역사에 있어, 참으로 위대한 것이었다. 특정 온도 이상을 인위적으로 만들어내면 불이 붙는다는 최초의 기술이 인류가 정착생활이라는 것을 할 수 있게 만들었다는 것을 생각해보면, 사실상 인류가 인류로 존재할 수 있는 근간이, 과학기술일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이는 현대 사회의 성립에도 마찬가지였다. 자동기관의 등장이야말로 노동계급이 성립한 근거였다. 화약무기의 등장이, 육체적으로 강건한 중장기병 열 명만 있어도 인민대중의 반란을 진압할 수 있던 시대에서, 혁명의 시대가 열리게 된 계기였다.

하지만 어느 순간부터, 과학기술은 위대하지 않은 양 여겨지는 듯하다. 미합중국의 대통령은 코로나-19 팬데믹에서 감염을 예방하기 위하여 소독약을 주사할 것을 권장한다. 백신은 효과가 없고, 인간을 나약하게 만드니 백신의 접종을 거부하는 자들이 차고 넘쳐난다. 수천년간 유전자 통제로 만들어진 작물을 먹어온 사람들이 GMO 작물은 인간에게 위험하다고 주장하고, 화학물질의 결합 속에서 살아가면서도 화학조미료는 자연스럽지 않으니 건강하지 않다고 말한다. 과학기술의 존재 자체가 생태계를 파괴하고 있으니, 우리는 기술문명을 파괴하고 원시사회로 돌아가야한다는 주장에 대해서는, 말을 말자.

어쩌다 이렇게 되었나, 를 생각해보면, 이 모든 것이 결국 과학기술 때문이었다. “충분히 발달한 과학은 마법과 구분할 수 없”기에, 대중들은 더 이상 과학을 이해할 수 없다. 솔직히 핵융합발전과 핵분열발전의 차이를 구분하기 위해, 원자공학 전공서적을 읽는 사람이 몇이나 되겠는가. 그저 ‘핵’ ‘발전’이라니, 체르노빌을 떠올리게 되는 것 아닌가. 바쿠닌이 말하였듯, 전문지식을 가진 자들에게는, 언제나 자연스러운 권위가 주어진다. 그리고 그 권위는, 그 전문지식이 삶을 나아지게 만들기에, 인민대중이 부여한 것이었다. 하지만, 과학은 마법이 되었고, 마법사들은 자신의 마법을 이해시키지 못했다. 그렇다면 그들의 권위가 무엇을 기반으로 존재할 수 있겠는가.

그렇지만, 과학기술은 위대해야 한다. 누가 뭐라고 말해도, 과학기술이 가져온 농업생산력의 증대가 아니었다면, 우리는 결코 맬서스 트랩을 벗어나지 못했다. 기아로 죽어가는 이들을 여전히 보아야만 했다. 누가 뭐라고 말해도, 불을 피우기 위하여 산을 민둥산으로 만들어가며 나무를 베는 것 보다는, 석탄을 떼고, 원자력발전소를 운영하는 것이 더 생태친화적인 것은 부정할 수 없다.

그렇기에, 과학기술은, 결국 다시금 인민대중을 설득해내야 한다. 그들의 언어로, 그들의 전문용어로, 그들만의 기술을 만들어내는 것이 아니라, 인민대중의 언어로, 인민대중에게 왜 스스로가 필요한지를 설명해내야 한다. 그렇게 다시금 과학기술이, 스스로의 권위를 승인받고, 인민대중이 통제하는 인민의 것이 될 때에야, 과학기술이 인류의 삶 속에서, 다시금 위대해질 수 있을 것이다.
https://n.news.naver.com/mnews/article/032/0003069822?sid=10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