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나키스트 연대
아연 주간 뉴스 단평 2021-06-06
1. [아나키스트는 백신 접종을 반대해야 하는가?]
우선 분명히 밝혀두고 시작하고자 한다. 아나키스트 연대는 다른 어떤 이유도 아닌 우리가 함께 살아가고 있는 모든 이웃을 위해, 그리고 우리 스스로를 위해 가능하다면 최대한 빨리 백신 접종에 동참할 것이다.
왜 이런 이야기를 하느냐 하면 최근 스스로를 아나키스트라고 이야기하며 코로나19 백신에 대한 음모론을 펴는 이들이 아나키스트 연대의 카카오톡 오픈채팅방에서도 있었기 때문이다. 음모론이라는 것이 늘 그렇듯 사람들의 불안을 이용해 영혼을 좀먹어 들어가는 것이지만, 자본가들이 세계의 인구를 감소시키기 위해 일부러 변종 바이러스를 퍼뜨리는 약품을 백신이라는 이름으로 포장해 공급하고 있다는 류의 이야기는, 해도 너무 했다.
그러면 저런 허황된 이야기들은 더 상대할 가치도 없으니 제쳐 두고 몇 가지를 따져보도록 하자. 첫째, 아나키스트는 국가 혹은 정부가 주도하는 백신 접종에 동참하거나 찬성해야 하는가? 이것은 국가를 존속시키는 행위이기에 아나키즘과 상충하는 것이 아닌가? 둘째, 백신 접종에 반대한다면 이것은 사회를, 조금 더 직접적인 말로 사람들의 목숨(문자적 표현 그대로 목숨)을 지켜낼 수 있는가?
두 번째 질문부터 분명하게 답하겠다. 현재 백신을 통한 접종 외에 코로나19의 전파를 멈추거나, 혹은 그 속도를 늦출 수 있는 방법은 없다. 코로나19에 감염된 이들에 대한 치료제는 또 다른 문제이니 다른 기회에 다룰 수 있겠지만, 코로나19의 감염 이전에 이로부터 예방수칙보다 더 높은 확률로 감염을 막을 수 있는 방법은 예방 접종뿐이다. 21세기의 과학이 가리키는 방법은 이 길이다.
그러면 왜 이러한 과학적 근거를 눈 앞에 두고도 백신을 접종하면 안 된다느니 하는 이야기가 나오는가? 첫째로는 백신 접종에 대한 선택의 자유를 이야기하는 이들이 있고, 둘째로는 과학적 근거에 대한 근거 없는 비난 및 불신이 큰 갈래로 나뉠 것이다. 과학적 근거에 대한 근거 없는 비난 및 불신, 혹은 검증되지 않은 사례를 이야기하는 것은 논하지 않겠다. 논할 가치가 없는 이야기는 논하지 않을 용기도 때로는 우리에게 필요하다. 그러면 첫째 이유, 백신 접종에 대한 선택의 자유(물론 둘째 이유의 방어를 위해 이것을 사용하는 사례도 대다수다)에 대해서는 어떻게 이야기할 수 있을까?
분명한 것은 그 선택은 당연히 존중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내 몸에 약물을 투여하지 않겠다는 이들에게 강제로 그것을 투여할 방법은 없다. 그것이 자유다. 하지만 자유는 언제나 책임이 따르는 것이고, 그 선택에 대한 결과를 책임질 자세가 되어 있기를 바랄 뿐이다. 자신의 선택으로 백신 접종을 거부한 이들은 앞서 이야기했던 것과 같이 우리와 함께 살아가는 이들에 대해 직접적인 생명의 위협을 초래하는 이들일 것이다. 그렇다면 국가나 정부가 아니더라도 공동체는 그런 이들에게 그에 상응하는 것들을 요구할 수 있을 것이다. 이에 대한 것만 수용할 수 있다면, 그 선택은 자유다.
다시 원론으로 돌아와서, 그렇다면 아나키스트는 국가나 정부에 협조해 백신 접종을 해야 하느냐는 질문에 답해보자. 우리는 이에 대해 백신 접종은 국가나 정부를 존속하는 것 이전에, 사회를 지켜내는 일로 접근해야 한다고 답하겠다. 백신 접종 거부를 국가와 정부에 대항하는 무기로 사용해 국가와 정부가 무너진다고 해보자. 사람들이 지금보다 더 많이 죽어나간 뒤의 세상에 도래할 수 있는 것은 그저 혼란 그 자체인 카오스이지, 다른 질서로 사회를 재편하는 아나키즘이 아닐 것이다. 우리는 '다른' 세계를 원하는 것이지, '망해버린' 세계를 원하는 것이 아니다.
고장난 시계도 하루에 두 번은 맞는다. 아무리 내가 싫어하는 사람이라도 삶에서의 모든 행동이 틀릴 수는 없다. 소 뒷걸음질 치는 격이라도 맞는 말을 한다. 자본과 국가가 백신 개발 및 접종을 서두르는 것은 물론 지금의 체제를 지키고 유지하기 위해서다. 이미 자본과 국가는 지금의 상황을 기존의 체제 수호가 어려울 수도 있는 심각한 상황으로 받아들이고 있다.
이러한 상황에서 우리는 우리와 우리 주변의 목숨을 내던지자는 주장이 아니라, 백신의 분배조차 자본의 논리에 목줄이 매여 끌려다니는 상황을 지적하고, 우리 목숨을 가지고 거래하는 자본을 폭로하고, 이에 대한 반대의 의견들을 모아내는 일에 열중해야 할 것이다. 다시 한 번 말하지만 우리는 '동귀어진'이 아니라 '다른 세상에의 상상력'을 향해 나아가야 한다.
백신 접종에 동참하든 하지 않든 자유다. 하지만 그로 인해 누군가 목숨을 잃을 확률이 올라가고 전파가 계속될 확률이 올라간다면 그에 대한 반대급부는 전적으로 책임지도록 하자. 그리고 제발 이상한, 말도 안 되는 음모론에 혹하지 말고 이 상황에서도 이윤과 차별을 먼저 생각하는 자본과 국가에 대항할 수 있는 방법들을 모색하자. 그러기 위해서, 일단 살아남자. 우리가 살아남는 이유가 국가를 유지시키기 위해서도 아닌 것을 명확히 인식하고, 우리가 여러 상품을 구매하는 것이 자본을 배불리기 위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명확히 인지하자. 바로 그 자리에서부터, 우리는 대중과 함께 이야기를 시작할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백신접종 100일…이달 '1천300만명+α·11월 집단면역' 청신호(종합)" :
https://www.yna.co.kr/view/AKR20210604127951530?input=1195m
2. [일찍 깬다고 저절로 일찍 출근할쏘냐]
5월 15일, 서울 용산구의 한 도로에서 한 청소노동자가 지친듯이 주저 앉더니 결국 뒤로 쓰러지고 말았다. 가로청소 위탁업체에 소속된 60세의 박모씨는 뇌경색으로 병원에 옮겨져 치료를 받았지만 열흘만에 끝내 세상을 떠나버렸다. 심장질환도 있던 그이지만 아직 자녀 둘이 대학생이기에 일을 계속하려 했던 그는 노년에 청소업체에 들어가서 오후 4시에 일이 끝나면 잠만 잘 정도로 힘들어했다. 그는 다른 동료들과 더불어 본래 근무시작 시간은 새벽 6시임에도 불구하고 업무량 달성을 핑계로 매일 1시간 더 일찍 출근해서 5시부터 청소를 시작했다. 게다가 청소해야 할 구간이 무리하게 할당되어서 탄력적으로 사용하라던 휴게 시간도 눈치를 보면서 쓰기 어려워 했다.
이런 정황으로 보아 박모씨의 안타까운 죽음은 명백히 무리한 노동을 강요해온 청소업체가 저지른 산업재해이며 살인이다. 다행히 청소업체는 뒤늦게라도 장례절차와 산재신청을 적극적으로 지원하겠다고 했지만 업체 측에서 1시간 더 일찍 출근하는 것에 대해 이따구로 변명했다. “60대가 넘어가면 잠이 없고 새벽에 일어나는 게 습관이 되다 보니까 저절로 일찍 깨서.” 참으로 어처구니 없는 말일 수가 없다. 60대가 넘어간다고 모두 잠이 없어지는가는 둘째치고 상식적으로 일찍 깬다고 저절로 일찍 출근하는 것이 말이 된다고 생각하는가? 차라리 그 시간에 체조를 하거나, TV나 라디오를 듣거나 하지 않을까?
왜 이리도 청소노동자, 운송업자 등 필수노동자를 경시하는가? 딱히 ‘배움’ 없이 할 수 있다고 보니까? 우선 과연 해당 직종에 업무에 대한 ‘배움’이 아예 없는지도 의문이지만 일단 그토록 주장하니 없다고 치자. 그렇다고 그 일의 강도가 약한가? 아직 해도 뜨지 않은 새벽이나 깊이 해가 저문 심야에 바닥을 쓸고 닦으며, 역겨운 토사물을 치우며, 무거운 쓰레기를 치우는 일은 절대 손쉽게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그러면 그 일이 중요하지 않은가? 흔히 억대의 연봉을 받지만 실제로 노동을 한다고 보기 어려운 변리사와 변호사들은 물론이요 실제로 현문명에 많은 이기를 가져다주는 하이테크 개발자들 조차도 인류의 풍요로운 삶에 기여할 뿐이지 직접적인 생존에 필수적이지는 않다. 그러나 필수노동자들은 당장 존재하지 않는다면, 누군가가 그 일을 하지 않는다면 인류는 순식간에 물자 부족과 열악한 환경에서 발생하는 질병에 의해 멸망하고 말 것이다. 이 세상에 소중하지 않은 노동자는 없다는 것이다.
"60대 청소 노동자의 죽음...그들은 왜 1시간 일찍 출근했나" :
https://imnews.imbc.com/.../article/6231498_34936.html
3. [그러면 망하시면 됩니다]
중소제조업체들이 괴로운 모양이다. 원자재 가격이 오르고, 해운 운임이 상승했는데, 주52시간 규제에 최저임금 인상까지 겹쳐서, 버틸 수가 없단다. 원자재 가격이나 해운 운임 상승은 통제할 수 없는 리스크니까, 내버려두자. 애초에 리스크도 고려 안하고 경영하는 멍청한 경영자라면 망하는 것이 정당하니까 말이다. 아마도 노동시간 최대한도 규제나, 최저임금 인상에 대한 얘기를 하고 싶었던 모양이다. 기업들에게 감히 규제를 하다니! 나아쁜 좌익? 빨갱이? 친노동? 문재인 정부! 같은 말 말이다.
그러니까 대한민국의 중소제조업체라는 곳들은, 노동자들이 주 64시간의 노동을(1주 52시간에 탄력적 근로시간제를 확대적용해주고 어쩌고 헤서 52시간까지는 연장수당 없이 일하고, 12시간은 연장근무할 수 있게 해줬으니까), 시간당 8,720원 미만을 받으며 하지 않으면 망하는 곳들이라는 뜻이다.
그리고 그러면 망하시면 된다. 망하기 싫으면 그 잘나셨다는, 고수익의 근거라는 “경영능력”같은 것을 발휘해서 판로를 뚫어보시던가. 그것을 할 능력이 안되면, 그 능력에 걸맞게 사장 월급을 까서 노동자들 최저임금을 맞춰주던가. 그것도 못할 정도의 기업체라면, 사장님들이 그토록 사랑해오시던 시장경제의 원칙에 따라 문을 닫는 것이 옳다.
아니, 그런데, 솔직히 주 64시간 노동이 적은 것도 아니고, 최저임금도 그렇게 높은 건 아니지 않나?라고 생각했더니, “임채운 서강대 경영학과 교수는 “경기가 개선되고 있다지만 대기업과 일부 1차 협력사만 호황일 뿐 2~3차 협력사는 힘겨운 상태”라“고 밝혔다고 한다. 인간적으로, 대기업 사내하청을 중소기업이라고 부르는 건 좀 그렇지 않은가. 결국 문제는 대기업들이 삥을 너무 많이 뜯어가서 그런건데 말이다.
이런 말도 안되는 기사를 쓴 곳이... 음, 한국경제....
(끄덕)
""이 와중에 주 52시간, 더 버틸 힘 없다"...중소 제조업 '비명'" :
http://naver.me/G5rhtZOw
4. [죽여놓고 추모를 하랜다]
현충일이다. 국가를 위해 희생한 사람들을 위해 국민들과 국가 전체가 묵념하고 그들의 정신을 기리는 날이다. 물론 현충일에서 대부분 묵념의 대상이 되는 사람들 중 절대다수는 군인인 것은 넘어가고, 경제개발이라는 명목 아래에 죽어나간 이름 없는 노동자, 민중은 없다는 것은 넘어가자. 국가가 추모하고 기억하려는 척조차도 안 하려는 대상일 뿐이니까.
월남전에 참전해 죽어나갔던 사람들, 한국전쟁에 참전해 죽어나갔던 사람들을 국가는 기억하는 척 행사를 진행한다. 그리고 민족의 자주독립국가를 건국하고자 한 사람들 (심지어 자칭 아나키스트들도) 을 기리고자 한댄다. 그리고 그들의 정신을 따라 앞으로 나아가겠단다.
착각하지 말아야 한다. 그들이 죽은 이유는 그들이 민족과 국가를 위해 희생하고자 마음 먹고 미친듯이 돌격을, 자폭을, 총탄이 빗발치는 전투현장에 나섰기 때문이 아니다. 당신들이 멋대로 '의무' 랍시고 정해놓은 법과 헌법에 따라 징병됐고, 그 속에서 죽음으로 몰아 죽음의 당위성을 강제로 만들어낸 것이 아닌가?
착각하지 말아야 한다. 독립운동을 통해 만들고자 했던 나라가 어떤 나라인지는 몰라도, 미소 양국에 의해 찢어발겨진 한반도에서 나타는 양 정부가 그 소위 '민족' 에 대한 착취와 억압을 자행하고 학살과 통제, 지배를 자행했음을 우리는 잊을 수 없다.
국가권력이 끌고 거 죽여놓고 추모를 하라는 정신나간 행태를 우리는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다. 그럴 시간에 우리는 차라리 정부청사에 침이라도 한 번 더 뱉고자 한다. 그것이 차라리 죽어간 사람들에 대한 더 올바른 추모일테니까.
"오늘 66회 현충일 추념식...전국 1분 묵념" :
http://naver.me/5uxqcgFh