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적으로 포르노그라피는 제도와 규범에 의해 억압된 시대적인 성적 욕망의 분출이라는 혁명적 기제였다. 프랑스 혁명의 과정에서는 푸른 피를 가진 존재였던 왕공귀족들을 붉은 피의 욕망의 대상으로 끌어내린 그들에 대한 에로 동인지가 등장한다. 빅토리아 시대의 영국에서, 그 고결한 도덕이 감추고 있는 욕망을 표현하기 위해 <채털리 부인의 연인>이 나왔다.

그리고 그렇기에 국가는 언제나 포르노그라피를 억압하고 통제해왔다. 조선시대의 고고하신 유자(儒者)님들부터, 퇴폐미술전을 개최한 나치독일이 그러했고, 혁명 러시아가 ‘그나마’ 혁명적이던 시기 이루어진 <새생활투쟁>의 성과를 철회하신 강철의 대원수까지, 국가권력은 개인의 욕망을 억압하는 것에서부터 복종의 기제를 건설한다. 그렇기에, 조선반도의 대통령이 어느 당에서 나오건 간에, 각자의 방식으로 포르노그라피를 언제나 규제하고, 차단했다.

그리고 위대한 자본주의의 시대가 밝았고, 모든 것을 상품으로 만드는 그들의 앞에서, ‘억압된 욕망의 분출’마저 자본이 이윤을 창출하는 기제가 되었다. 사람들은 “자본을 가진 만큼”, “자본이 허용하는 만큼” 자기 욕망을 분출할 수 있다. 누군가는 자기 섹슈얼리티를 자본에 판매하고, 누군가는 자기 노동의 대가를 지불하고 그것을 산다. 결국 이득을 보는 것은 이 두 노동을 중계하는 자본이다. 그러니, 국가의 규제에는 코웃음을 치던, 인도 정부가 유입을 규제하자 대놓고 트위터에 우회주소를 올리던 PornHub이, 마스터카드와 비자카드와 페이팔이 거래를 막자 급격히 정책을 바꾼 것이 아니겠는가.

에르네스토 게바라의 얼굴이 박힌 티셔츠를 입는 것이 반미반제 공산주의 혁명의 상징이 될 수 없는 것처럼, 포르노그라피는 더 이상 성해방의 기제가 될 수 없다. PornHub에 올라오는, 나체로 읽어주는 <빵의 쟁취>영상을 보는 것은 결국 PornHub이라는 포주에게, 그 스트리밍을 올린 스트립 클럽에게 돈을 주는 것이지, 아나키즘이 될 수 없듯 말이다.

자본은 자유롭다. 자본주의 사회의 지배자가 자본이니, 그보다 더 자유로울 수 없다. 자본은 인간의 예속 위에 자유롭다. 그렇기에 ‘자유’와 ‘자본화’는 종종 혼동된다. 그러다보니 아나코-캐피탈리즘이라는 끔찍한 혼종이 등장하기도 하고, ‘자유’라는 단어가 우파에 잠식당하기도 한다. 그리고 이것은 성애에 있어서도 마찬가지다. 성애의 자본화, 혹은 성노동의 비범죄화는, 어느덧 성해방 담론인 양 이야기된다. 이번 PornHub에 대한 금융자본의 보이콧에 있어서도, 그것이 성노동자의 수입을 줄인다는 비판이 제기된다.

물론 국가와 자본이 성욕을 규제하고 억압하는 것은 우스운 일이다. 하지만 그것이 PornHub을 무슨 성해방투사로 만들어주지는 않는다. 성해방은 “성애(혹은 비성애)의 자유”에서 비롯하는 것이지, “성애의 자본화”에서 비롯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자신의 성애를 결정할 자유”가 성해방이지, “타인의 성애를 돈내고 관람할 자유”는 성해방이 아니다.

이렇게 이야기하면, 소위 “성노동운동가”나, “성자유주의자”님들께서 성노동자의 생존권이 어떻네, 섹슈얼리티의 자유로운 사용이 어떻네 이야기하실 것을 안다. 하지만, 회사가 어렵다고, 그 회사 노동자들이 자발적으로 임금을 깎아가며 “상생”하거나 일부 구조조정을 수용하는 것을 “노동자의 자유”라 표현하지는 않는다. 회사가 어렵다고 무급 연장 · 야간노동을 하는 것이 자기 노동력의 자유로운 사용이라고 하지는 않는다. 그저 자본에 대한 예속의 강화일 뿐이다. 이처럼, 성노동자들이 PornHub을 옹위하는 것 역시, 성애의 자본에 대한 예속을 강화하는 것이 될 뿐이다.

글을 마무리하며, PornHub이라는 “글로벌 포주”에 대한 규제가, 성노동자들 본인의 투쟁으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더 거대한 금융자본에 의해, 국가에 의해 이루어진 것에 대한 안타까움을 표한다. 성노동자 본인들 스스로가, 자신의 노동을, 혹은 타인의 섹슈얼리티를 착취하고 있는 “포주”를 몰아내고, 자기 섹슈얼리티의 “자유로운” 사용을 울부짖을 때, 비로소 국가로부터도, 자본으로부터도 자유로운 성해방이 도래할 수 있으리라 믿어 의심치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