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itle: 유일자도 밥은 먹어야 산다
Subtitle: 슈티르너주의적 사변思辨, 혹은 사변邪辨에 관한 혁명적 · 조직지향적 아나키스트의 사변私辨
Date: 2020.10.8
Source: [https://blog.naver.com/anarchistleague/222110592059]

0. 서문, 혹은 왜 이런 도발을 하고 있는가에 관하여

요즘 들어 간헐적으로 슈티르너에 관한 이야기를 듣는다. 현대 사회주의 운동에 있어 슈티르너의 중요성이 높다고도 한다. 솔직히 이해할 수가 없다. 슈티르너에 대해 아무리 고민을 해보아도 그의 사상이 이론적으로 특출하다는 생각이 들지도 않고, 실천의 기반이 되기에도 너무나 어렵다는 생각이 들 뿐이다.

물론 슈티르너에 대한 학습, 또는 고민이 부족하여 그런 것일 수도 있다. 슈티르너에 관한 서적은 사실상 출판된 것이 없고, 기껏 조금씩 나오는 것이라고 해봐야 슈티르너를 마르크스와 니체와 헤겔과 포이어바하와 비교하는 대상으로 사용하고 있을 뿐이다. 물론, 솔직히 말해서 일평생 남긴 문서가 500페이지가 되지 않는 학자에 대한 심도 있는 연구를 바라는 것도 우스운 일일 것이고 말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 글을 작성한다. 이 글에 대해 슈티르너를 사랑하고, 그의 사상이 혁명적 사회운동의 기반으로써 유의미하다고 생각하는 이들의 가열찬 반박과 그로 비롯할 토론을 꿈꾼다. 나아가 그 토론의 과정에서 그들이 주장하는 슈티르너의 유의미성을 우리도 납득할 수 있게 되기를 바란다.

이 글은 아나키스트 라이브러리 번역 및 아카이빙 프로젝트 진행 중에 번역한 두 편의 글, 〈슈티르너 : 유일자와 그 소유〉, 〈막스 슈티르너와 아나키즘적 코뮌주의의 관계〉에 관한 서평도 겸한다. 전자는 1907년에, 후자는 2017년에 쓰였다. 100년의 간극만큼이나 두 글은 서로 상이한 견해를 가지고 있다. 사실상 슈티르너에 대한 비판과 찬동의 글을 모두 살펴볼 수 있었다.

1. 슈티르너주의적 사변(思辨)

『유일자와 그 소유』를 영어로 살펴보고(때문에 오역 및 오독의 가능성이 있다는 것을 부정하지 않는다. 이 글에 대한 비판은 우리가 오독한 부분에 대한 비판 또한 겸하여 주기를 바란다.) 관련한 글을 읽으면서 지속적으로 제기할 수밖에 없었던 생각이 있다. 슈티르너의 이상이 물질세계에서 펼쳐지는 것이 가능한가? 라는 부분이다.


슈티르너가 논하는 것처럼 오롯하게 개인의 개별성을 확립하는 것, 그리고 그 개별성을 통해 세계를 자신의 것이라 선언하는 것은 미美적이며 아름답다. 하지만 모든 사회적 철학은, 그 유토피아적 목표에 있어서는 아름답다는 점을 짚고 넘어가야만 한다. 파시즘도, 전체주의도, 심지어 자본주의도, 그 목표가 아름답지 아니하면 사회사상으로서 성립할 수가 없다. 그렇기에 특정한 사회철학이 단순히 철학자의 망상이 아니라 유의미한 이데올로기로 존재하기 위해서는 그 철학을 물질적 세계에 적용할 수 있는 방법이 함께 제시되어야 한다.

물질계에서, 물리법칙에 기초해 살아가는 인간의 육체는 안타깝게도 너무나도 큰 물질적 제약조건들에 둘러싸여 있다. 거칠게 말해서, 인간은 밥을 먹지 않으면 죽는다. 그리고 인간의 정신은, 육체의 한계를 뛰어넘지 못한다. 육체가 죽으면 정신도 죽는다. 그렇기에 물질적 제약조건 하에서 성립할 수 없는 관념은, 그저 관념일 뿐이다. 사변思辨일 뿐이다.

그렇다면 막스 슈티르너가 『유일자와 그 소유』에서 주창한바 개인주의, 혹은 에고이즘은 어떠한가.

1) 오롯한 유일자는 존재할 수 있는가

슈티르너와 『유일자와 그 소유』는, 책의 제목에서도 명확히 알 수 있듯이 “유일자”의 “개별성”과 “유일성”을 계속해서 부르짖는다. 오롯이 존재하는 “나”와 “나”의 이해관계에 따르는 행동, 에고이즘이 곧 올바른 원칙이라고 말한다. 이로부터 그 유명한 경구, “나는 어떠한 대의로부터도 비롯하지 않는다!(I have set my cause on naught!)”가 등장한다.

참으로 그러하다. 모든 인간은 어떠한 대의로부터도 비롯하지 않는다. 모든 인간은 자신의 이득에 기초하여 행동하고 살아간다. 인간이 자신의 행동에, “나”가 아닌 더 큰 대의를, 때로는 조직을, 때로는 집단을, 때로는 국가를, 때로는 종교를, 때로는 인류를, 때로는 이념을, 때로는 계급을 앞세우는 것은, 분명하게 기만적인 일이다. 인간이 대의에 복무하는 것은 자신의 이득에 복무할 때에만 그러하다.

하지만 여기에서 하나의 이야기를 해보자. 우리는 방금 ‘인간이 대의에 복무하는 것은 자신의 이득에 복무할 때에만 그러하다.’라고 이야기했다. 그렇다. 인간은 자신의 이득을 위해, 에고이스트적으로, 언제라도 대의를 만들어내고, 그에 복무할 수 있다.

그리고 우리 「아나키스트 연대」는 조직을 지향하는 아나키스트로써, 오히려 인간은 가장 에고이스트적이기에 가장 코뮌주의적이라고 주장한다.

크로포트킨이 『상호부조론』에서 말한 것이 이와 같다. 크로포트킨은 『상호부조론』에서 인간이 공동체를 구성하는 것은 생물로서 자신의 생존(이득)을 극대화하려는 과정에서 만들어낸 결과물임을 밝힌 바 있다. 코뮌은 신성불가침의 것이 아니라, 에고이스트적 인간의 공동체인 것이다.

무엇보다도, 인간은 홀로 생존할 수 없다. 오롯한 개인은 자연을 이겨내지 못한다. 오롯한 개인은 홀로 생산할 수 없다. 오롯한 개인은 번식할 수 없다. 그렇기에 인간은 유일자로서, 에고이스트로서, 자신의 생존과 최대 이익을 위해 함께하기를 선택한다. 그 선택의 과정에서 자신의 개별성이 일부 손실된다 하더라도 그 손실의 크기가 이득의 크기보다 작은 한, 그 대의에 복무하기를 자율적으로 결정한다.

이것이 망령에 복무하는 것인가. 그렇다고 하기 위해서는 둘 중에 하나의 선제적 논거가 필요하다. ① “대의”라는 것은 선험적인 것이어서, 인간이 만들어낸 것이 아니고, 인간이 거기에 복무할지 말지를 결정하는 것이거나 ② 인간은 너무나도 어리석어서, 한번 “대의”에 복무하기로 결정한다면, 나중에 그 “대의”가 자신의 이익을 해한다 하더라도, 그에 반란하지 못하거나.

그리고 두 논거 모두가, 일정 부분 파시즘의 근거가 된다. 파시즘은 선험적 국가(집단)에 최대한 희생적으로 복무하는 것이 자기의(혹은 자기의 유전적 · 비유전적 후손들의) 이득에 복무하는 것이라는 논리에서 비롯한다. 파시즘은 개별 인간들은 너무나도 어리석기에, 계몽되고 집단을 이끌어갈 수 있는 “유일자”, 혹은 “파쇼”가 인간을 이끌어야 한다고 바라본다.

모든 “망령”은, 그리고 그 “망령”에 대한 복무 결정은, 인간이 에고이스트로써 자발적으로 구성하고 결정한 것임을 잊어서는 안 된다. 그래야만 인간이 “망령”을 해체하는 것 역시 자발적으로 할 수 있는 것이라고 주장할 수 있다. 슈티르너와 같이, 현재 인간이 “망령”에 복무하는 것 자체를 문제시한다면 결국은 너무나도 에고이스트적이어서 파시스트가 되는, 형용모순적인 일이 발생할 수밖에 없다.

인간이 공동체를, 집단을, 슈티르너가 “망령”이라 부르는 그 무엇들을 구성하고, 그 “대의”에 따르는 것은 인간이 에고이스트적 판단을 거쳐 결정한 것이다. 그렇기에 그 “망령”이 “개별성”에 가하는 해악이 커서, “망령”을 떨쳐내야 한다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망령”보다 더 큰 이익을 제공하는 무언가를 제시해야만 가능하다.

유일자도 밥은 먹어야 살기 때문에 “망령”을 떨쳐낸 개인이 어떻게 경제생활을, 생존을 이어갈 것인가에 대한 고민이 필요한 것이다. “망령”에 복무하는 것보다 오롯한 ‘유일자 됨’이 더 생존에 유리하다는 것을 확립해야 하는 것이다. 그런데 그것이 가능할 리가.

2) 유일자도 밥은 먹어야 산다.

그렇다. 유일자도 밥은 먹어야 산다. 하지만 밥은 혼자서는 만들 수 없다. 슈티르너가 『유일자와 그 소유』를 쓴 당시인 19세기 중반에는 어땠는지 모르겠지만 최소한 2020년 현재에는 그러하다. 산업의 고도화는 가장 단순한 생필품 하나조차 개인의 힘으로 만들어내지 못하게 만들었다.

아무 밥집이나 들어가서 공기밥 한 공기를 시킨다고 해도, 그 공기밥에는 중국의 쌀 농민과, 베트남 스테인리스 식기 제작 노동자와, 그것들을 한국으로 운송하는 필리핀 선사들과, 한국에서 도매상으로 운송하는 화물노동자와, 식당에서 그 밥을 하는 조선족 노동자의 노동이 들어가 있다. 그리고 이러한 노동들이 만들어낸 높은 생산성이, 우리가 밥을 먹을 수 있게 한다.

누군가는 묻는다. 그러한 산업의 분절화, 국제 분업 체계가 문제인 것이 아니냐고. 물론 산업의 분절화나 국제 분업이 노동의 소외를 촉발하고 있음은 자명하다. 하지만 여기에서 문제가 되는 부분은 분업 그 자체인가, 아니면 노동의 소외인가. 당연하게도 노동의 소외이다. 그런데 왜 문제의 본질이 아닌, 산업의 분업화 철폐를 이야기하는가. ‘모든 인민이 풍족하게 누릴 수 있는 생산성’이 사회주의의 기반인데 어째서 생산성을 낮추는 것이 필요불가결한 것인 것처럼 이야기하는 것인가.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분업을 통해 산업사회가 확보한 생산성이 자급자족이 가능한, 1인 완결적인 노동으로 돌려놓았을 때, 사회의 전반적 생산은 인민들 각각에게 돌아가는 ‘밥’의 양은 분명히 줄어들게 된다는 것이다. 이럴 때 “유일자”는 어떠한 선택을 하게 되는가. 내가 덜 풍족하게 살더라도 세상만사로부터 자유로울 것인가, 아니면 자유를 포기하더라도 더 풍족할 것인가. 그 답은 인류의 역사가 충분히 보여주고 있다고 생각한다.

슈티르너의 옹호자들은 슈티르너 역시 공동 노동의 즐거움을 역설하였다고 주장한다. “그렇기에 경쟁적이지 않고, 우리의 시간과 수고를 요구하지 않는 노동에 대한 합의는 언제나 도움이 된다.” 하지만 이 역시 다분히 사변思辨적이다.

저것을 모르는 이가 있는가. 자본주의적 구조에서 벗어나서 노동자가 자신의 노동에 책임을 지는 공동생산을 하자는 주장을 하지 않는 사회주의자가 세상에 어디 있는가. 문제는 크게 두 가지다.

우선 물리적 현실의 층위를 보자. 현존하는 체제에서 그러한 공동생산을 어떻게 조직할 것인가의 문제다. 단지 의식적으로 각성한 에고이스트 몇몇이 ‘공동생산을 해보자’고 결의하는 것만으로 공동생산의 체계가 완성되는가? 생산에 필요한 장비는 어떻게 할 것이고, 원자재는 어떻게 할 것이며, 생산물의 분배 및 교환은 어떻게 할 것인가. 슈티르너는 이에 대하여 전혀 답을 주지 못한다. 이 답이 있었다면, 슈티르너가 기획한 ‘청년헤겔학파가 소유하고 협력의 원칙에 따라 운영되는 우유배달 사업’이 그리 처참하게 실패하지는 않았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이 문제에 대해서는 글 후반에 더 자세히 논의하기로 한다.

또 다른 문제는 보다 사변적이다. 이처럼 공동 생산된 생산물을 오롯이 유일자의 소유로 돌릴 수 있는가에 관한 문제다. 공동생산의 과정에 투입된 것들은 결코 그 공동 생산 집단만의 것이 아니다. 누군가는 그 생산기계를 만들었고, 누군가는 원자재를 채집했고, 누군가는 생산의 과정동안 공동 생산 집단이 먹고 살 밥을 만들었다. 더 깊게 보자면, 그 생산의 과정을, 생산 기술을 고안한 수천 년 인간사의 결과물이 공동생산의 결과물이 된다. 그것을 슈티르너의 “에고이스트 동맹”이 자신들의 “소유”라 선언한다는 사실이, 어딘가에서 갑작스레 툭 튀어나온 자본가가 생산물의 사적소유를 선언하는 것과 무엇이 다른가.

물론 슈티르너의 사변思辨적 사유 어디에선가는 이것이 가능할지도 모르겠다. 모든 인간이 “유일자”로서 모든 생산물이 자신의 소유라 선언하고, 그 소유를 함께 누리는 것 말이다. 하지만 이를 이야기하려 한다면 먼저 모든 인간을 해방하는 것부터 시작해야 하지 않을까. “망령”에 복무하는 다른 인민들의 비非에고이스트적 생산 활동에 의존하는 “에고이스트적 생산”이 의미가 있는가.

그렇기 때문에 현실의 층위에서 “유일자”가 밥을 먹을 수 있는 길은 둘 밖에 없다. 하나, 자신의 눈앞에 밥을 대령해주는 ‘비에고이스트’들로부터 눈을 돌리고 자신의 에고이스트적 순수함에 감동받으며 살아간다. 니트다. 망령에 복무하면 지는 것이라고 생각해야 한다. 또 다른 하나, 광합성을 익힌다. 아니, 엄밀하게는 광합성마저 태양이라는 타자에 의존하는 것이므로, 자가발전 무한동력을 신체적으로 구성한다.

무한동력은 물리적으로 불가능하다.

2. 슈티르너주의적 사변(邪辨)

앞서 슈티르너의 “유일자”에 관한 논거가 관념의 영역에서는 아름답게 빛나지만 결국 그 자체로는 현실에 적용하는 것이 불가능한 사변思辨이라는 이야기를 늘어놓았다. 하지만 마찬가지로 앞서 말했듯이 관념의 영역에서 아름답지 않은 사상은 없다.

이론적으로라면 프롤레타리아 독재는 단순히 이행기적 과제를 완수한 후 스스로 해소했어야 한다. 하지만 우리는 소비에트조朝의 붉은 차르를 보았을 뿐이다. 제국주의자들은 백인의 짐을 지고 유색인종들을 계몽하여 세계를 진보시켰을 것이다. 레오폴트 2세는 콩고에서 흑인들의 손목을 잘랐다. 백인의 침략에 맞서 아시아 민족이 함께 맞서 아시아를 지켜내자던 아시아주의자들은 결국 귀축영미의 항공모함에 아시아 민족들의 제로센을 들이박았을 뿐이다. 이론적으로, 관념적으로라면 나치즘은 레벤스라움을 확보한 게르만족의 총통에 의해 더 나은 세계를 만들었을 것이다. 더 이상의 자세한 설명은 생략한다.

이는 관념적으로 아름답지만 현실의 영역에 적용되면 사이해지는 사상들을 현실에 억지로 적용하면 무슨 사태가 벌어지는지를 보여주는 사례의 일부에 불과하다.

그리고 우리는 슈티르너주의의 사변思辨을 현실에 교조적으로 적용하는 시도들이 사회의 변혁과 그를 위한 운동을 저해한다고 생각한다. 차라리 권위주의 · 전체주의적 변설이라면 안티-파시스트-액션이라도 하겠으나 심지어 자유주의적 사변思辨이기에 그 또한 난해하다.

그렇기에 아래와 같이 슈티르너적 사변思辨은, 현실에서 사변(邪辨 : 사이한 변설)화 된다고 감히 도전장을 던진다.

1) 혁명운동적 관점에서 슈티르너주의

해당 부분을 기술하기에 앞서, 우리가 합의한 혁명운동이라는 것이 가지는 의미에 대하여 서술해 보도록 하겠다. 우리는 《대중이 주도하는》 《실질적 사회혁명》을 통해 현존 권위주의 체계를 분쇄하고, 개인의 자유가 최대한 보장되는 《새로운 사회를 건설하는 것》을 꿈꾼다. 그리고 이를 위한 운동을 혁명운동이라고 정의한다. 때문에 이에 반하는 것을 자연스레 반혁명이라 부르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슈티르너주의가 사변邪辨이라 주장하는 것은, 우리에게 슈티르너주의가 반혁명적이기 때문이다.

그 판단에 대해서 조금 더 세세하게 이야기해 보도록 하자.

⑴ 《대중이 주도하는》

대중이 주도한다함은 혁명의 주체가 대중 한 사람 한 사람이어야 한다는 의미이다. 우리는 모든 대중에게 그러한 역량이 있으며, 나아가 대중만이 그러한 역량을 가지고 있다고 바라본다. 현존하는 체제라는 것은 대중이 “그 체제의 유지가 자기의 이익에 도움이 되기에” 유지하도록 두는 것일 뿐이기 때문이다.

국가라는 예시를 들어보자. 국가는 개별 인민이 집단으로 모였을 때의 이득이 그러기 위해 포기해야 하는 손실보다 더 크기에 만들어낸 임의의 집단일 뿐이다. 그렇기에 우리는 아나키스트로써, 현대 사회에서 국가가 나에게(혹은 인민에게) 주는 이득이 포기의 비용보다 크므로, 국가를 해체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다른 모든 것들 역시 그러하다. 인간이 종교를 믿는 것은 종교로부터 오는 정신적 만족감 · 소속감이 눈에 보이지 않는 신을 주인으로 섬기는 비용보다 크기 때문이다. 신앙의 비용이 그 편익보다 클 때면 인간은 언제라도 배교를 해왔다. 인간이 계급적 이익에 복무하는 것은, 자본주의라는 체제에 개인으로써 투쟁하는 것보다, 계급으로써 투쟁하는 것이 개인의 이익에 더 도움이 되기 때문이다.

이처럼 대중은 이미 자신의 이익에 따라 체제를 구성하고 있다. 그렇기에 그 체제를 떨칠 수 있는 것도 오직 대중뿐이다. 이것이 우리에게 있어 혁명을 주장하는 기저가 된다.

하지만 슈티르너에게 대중은 어떠한가. 슈티르너는 “망령”에 복무하는 개인을 “비의지적 에고이스트”라 부르며 그들이 “망령”을 강화 · 유지하는데 복무한다 말한다. 하지만 여기에서 궁금한 점이 생긴다. “의지적 에고이스트”가 구성한 세계와 “비의지적 에고이스트”가 구성한 세계는 그 심층적 부분을 제외하고 드러나는 표층에 있어 무엇이 다른가. 개인이 “의지적”으로 체제를 유지하는 것을 결정하건, “비의지적”으로 구성하건, 체제는 존재하는 것이 아닌가.

“의지적 에고이스트”가 “유일자”로써 체제를 박차고 떨쳐낼 수 있다면 “비의지적 에고이스트” 또한 가능하다. “비의지적”으로 “에고이스트”적 선택을 하면 체제를 강화하기만 한다니. 얼마나 대중을 신뢰하지 못하고 있는 것인가.

⑵ 《실질적 사회혁명》

실질적 사회혁명을 추구한다는 것은 우리가 추구하는 사회혁명이 지극히 실질적이고 물질적이며 물리적인 세계, 즉 우리가 사는 이 땅에 발을 디디고 이루어져야 한다는 의미이다. 다시 말해 현실적인 제약조건을 고려하는 가운데 전술적이고 전략적인 투쟁을 통해 압제자를 타도하여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현실적인 제약조건은 무엇인가. 현재의 예시를 들어본다면, 자본주의, 국가, 도덕, 정의, 또는 다른 그 어떠한 추상적인 관념들이 물리적 실체를 가지고 대중을 압제하고 있다는 것이라 할 수 있겠다. 원래는 인간이 더 나은 삶, 더 많은 이익, 더 큰 즐거움을 위해 만들어낸 ‘관념’들이, 어느덧 실체를 가지고 인간 위에 군림하고 있는 것이다. 보드리야르의 말을 빌리자면 ‘시뮬라크르’로 전용轉用되어버린 ‘시뮬라시옹’이다.

이는 단순한 “망령”이 아니다. 실체를 가진 환상, ‘괴물’이라 부르는 편이 오히려 합당할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단순히 “유일자 됨”으로, 또 “망령”을 떨쳐내는 것만으로는 혁명을 할 수 없다. ‘괴물’은 맞서 싸워 퇴치해야하는 것이다. 혼자 떨쳐 일어나면 잡아먹히는 결과가 있을 뿐이다.

그리고 ‘괴물’과 싸우는 것은 단지 한 개인, “유일자”만의 힘으로는 불가능하기에 우리는 조직을 이야기한다. 대중을 조직하고, 조직된 대중을 통해 괴물과 맞서 싸우며, 그 싸움을 통해 또 다른 대중을 조직하고. 이로써 언젠가 ‘괴물’을 쓰러트리리라는 희망을 만들고자 한다. 하지만 슈티르너는 조직되지 않은 산발적인 반란만을 이야기한다. 그리고 역사를 돌이켜보면, 이러한 산발적인 개인의 반란들은 결국 깨어지고, 그저 반동의 강화에 복무해왔다는 사실을 수없이 발견할 수 있다.

물론 슈티르너 또한 “에고이스트 동맹”을 이야기한다. 하지만 그 “동맹”이 혁명의 과정에서 어떠한 역할을 할 수 있을지는 미지수일 뿐이다. 그가 그리는 “동맹”의 상은 “망령”을 떨쳐낸 개인, “의지적 에고이스트”들의 모임이다. “동맹”의 상상도는 아름답다. 하지만 앞서 말했듯 체제는 단순한 “망령”이 아니라, 물리적 실체를 가진 ‘괴물’이기에, ‘괴물’을 타도하지 못하고 단순히 눈을 돌렸을 뿐인 이들의 “동맹”은 괴물의 예비 희생자에 불과하다. 잘 쳐줘봐야 괴물의 눈을 피해 잠시 숨어있을 수 있을 뿐이다.

지난 백 수십 년간 아나키스트들은 무수히 많은 공동체들을 꾸려왔다. 하지만 그 공동체들 중 유의미한 변혁적 힘을 가지고 개인들의 삶을 실질적으로 변화시킨 곳은 몇 되지 않는다. 그리고 그러한 공동체, 간단히 예를 들자면 로자바Rojava나 사파티스타 민족해방군Ejército Zapatista de Liberación Nacional의 공통된 특징은 공동체가 생산수단을 점유, 무장하여 실질적인 투쟁을 만들어냈다는 데에 있다.

아나키스트 몇 사람이 시내 옥탑방 하나를 차지하고 소주잔을 기울이며 “이곳이 우리의 에고이스트 동맹(코뮌)”이라고, “이곳은 우리의 소유”라고 선언한다고 해서, 그곳이 해방구가 되지는 않는다. 하다못해 옥탑방 월세를 고민해야 하고, 소주를 살 돈을 고민해야 하는 것이다.

체제는 단순히 그 구성원들이 떨치고 일어남으로 자연해소하지 않는다. 체제는 그 구성원들이 떨치고 일어나 스스로 단결하여 투쟁하고 그것을 통해 타도되었을 때 비로소 해소된다. 그리고 이 투쟁의 기반이 되어야 하는 것은 “유일자” 동아리가 아니라 자신의 이해관계에 따라 경제적으로 단결한 인민대중의 조직이다.

⑶ <새로운 사회의 건설>

바쿠닌이 『독일에서의 반동』에서 논하였듯이 “파괴적 열정은 창조적 열정이기도 하다.” 우리는 이를 다음과 같이 독해한다. ‘창조적 열정이 없는 파괴적 열정은 없다.’

앞서 논하였듯이 인간은 자신의 이득을 위하여 집단을 구성하였다. 그렇기에 그 (체제라는 ‘괴물’이 된) 집단이 외려 ‘나’의 이득을 해친다는 것이야말로 내가 체제에 저항하고 투쟁하는 것의 기저가 된다. 하지만 혁명을 실질적으로 만들기 위해서는, 체제를 파괴하기 위해서는 “나”뿐만이 아닌 모든 대중의 투쟁이 필요하다. 그렇기에 혁명은 대중에게 체제의 파괴 이후 새로운 사회를 제시할 수 있어야 한다.

크로포트킨이 『빵의 쟁취』에서 논한 것과 같이 혁명에서 가장 중요한 과제는 혁명의 첫 날, 대중이 배부르게 먹는 것이다. 이는 경제의 문제이자 생산의 문제다. 물질적이고 물리적인 문제다. 그리고 꾸준히 이야기해온 것과 같이 슈티르너주의는 이 문제에 대해 해결책을 제안하지 못한다. 그 해결책을 제안하지 못하면 대중은 혁명에 나서지도, 슈티르너가 말하는 것처럼 “반란”에 나서지도 못한다.

슈티르너는 대중들이 “의지적 에고이스트”가 되지 못하여 체제가 유지된다고 말한다. 그렇지 않다. 대중들은 언제라도 체제를 파괴할 수 있다. 다만 파괴 이후의 물질적, 경제적 삶에 대한 창조적 대안이 제시되지 못하고 있기에 체제를 유지하는 것을 의지적 · 비의지적으로 선택하고 있는 것뿐이다.

혁명운동 내에서는 대안을 제시하려는 시도들이 여러 방향에서 존재해왔다. 아나키즘적 코뮌주의자들이 이야기하는 코뮌에 의한 생산수단 · 생산물의 공동소유가 그렇고, 아나키즘적 조합주의자들이 이야기하는 산업에 대한 노동자의 직접적 · 민주적 통제가 그러하다. 동의 여부를 차치해 꼽아보자면, 사민주의(혹은 민사주의)자들은 소위 복지사회를 제시하며, 볼셰비키들은 프롤레타리아 독재에 의한 생산수단의 국유화를 제시한다.

새로운 사회의 경제적 생활의 재조직 방식은 당연히 각 정파, 분파별로 다르다. 하지만 다르다는 것은 서로 논의가 가능하다는 것이다. 최소한 혁명운동이라는 생각의 틀은 공유하고 있다는 이야기이다. 하지만 우리는 슈티르너주의와 우리의 혁명운동 간 공통분모를 발견하지 못한다. 슈티르너주의는 경제적, 물질적 대안을 전혀 제시하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우리는 다시금 슈티르너주의는 반혁명적이라고 말할 수밖에 없다.

단적으로 말해서 슈티르너는 집세를 내지 못해 감옥에 갔다. 우유 유통 사업에 실패했다. 슈티르너가 에고이스트면 어떻고, 유일자면 어떻다는 말인가. 그것은 슈티르너를 채권자들의 추심으로부터 구해내지 못했는데 말이다.

2) 조합운동, 조직운동적 관점에서 슈티르너주의

우리는 민주적 · 투쟁적 · 혁명적 노동조합운동이 혁명운동에 있어 무엇보다도 유의미한 수단이자, 목적 그 자체라고 바라본다. 이는 노동자들의 현장에 기초한 투쟁을 통해 노동조건을 개선 및 방어하고, 결정적인 국면에서 총파업투쟁을 통해 산업을 노동자의 자주적이고 민주적인 통제 아래에 두며, 이러한 조합들의 연방적 결합으로 사회를 재구성해내야 한다는 것이다.

슈티르너 또한 노동자들의 투쟁이 중요함을 역설한다. “노동자들의 손에는 가장 놀라운 힘이 쥐어져 있다. 그리고 만약 그들이 그것을 정확히 인지하고 사용한다면, 무엇도 그들을 이길 수 없다. 그들은 단지 일하는 것을 멈추고, 노동의 생산물을 자신의 것이라 선언하고, 즐기면 된다. 이것이 노동쟁의의 관점이다. 국가는 노동의 예속에 의존한다. 노동자들이 자유로워진다면, 국가는 사라질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이 지점에서 오히려 슈티르너주의와 우리의 조합주의운동 사이에 메울 수 없는 간극을 본다. 슈티르너는 파업투쟁을 찬미하지만 그것을 산발적인 파업투쟁에만 국한한다. 어째서인지는 알 수 없다. 19세기 중엽의 산업현장이라는 곳이 단지 노동자 하나가 결심하고 일을 멈추면 멈추는 현장이었는지도 모른다.(컨베이어벨트의 등장이, 포디즘의 등장이 1913년이었으니 가능한 일이기는 하겠다.) 혹은 슈티르너가 그저 조직적으로 뭉쳐 하나로 움직이는 것을 “망령”이라 바라보아서일 수도 있다.

하지만 우리는 총파업을 이야기한다. 모든 산업, 모든 노동은, 특히 현대 사회에서 서로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 때문에 개별의 노동자들이 일손을 놓는 것만으로는 ‘그 무엇도 이길 수 없다.’ 현대 산업구조에서 노동은 너무 쉽게 대체된다. 내가 홀로 파업에 돌입한다 하더라도 내 옆자리 사람이 그 자리를 메울 수 있다. 다른 회사가 그 생산을 대체할 수 있다. 조직되지 않은 파업은 체제에 조금의 균열도 내지 못한다. 슈티르너가 말한 것처럼 하나의 유일자가 “생산을 멈추”면 그는 급여를 받지 못해 굶어죽는다. 굶어죽지 않기 위해 “생산물을 자신의 소유라 선언”하면, 그저 그 유일자가 감옥에 갈 뿐이다.

그리고 이러한 투쟁을 위해 필요한 것이 조직이다. 물론 조직의 속에서 개인이 오롯한 유일자로 존재할 수 없는 것은 분명하다. 조직이라는 것 자체가 특정한 목적의 달성을 위해 자발적으로 일정 정도 개별성을 포기한 인간人間의 모임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위에서 언급한 것처럼 이를 선택하는 것 역시 에고이스트적이다.

다시 한 번 슈티르너주의자들에게 묻는다. 에고이스트로서 대중이 에고이스트적으로 선택한 조직, 집단을 비판하는 근거가 무엇인가?


3) 유일자라는 망령에 관하여

원론으로 돌아가서, 슈티르너가 말하는 “망령”은 무엇인가. 우리는 “망령”이 개인이 아닌 외적인 존재로써 개인을 규율하고 그 명분이 되는 모든 것을 말한다고 인지하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슈티르너의 “유일자”, “개별성”에 대한 집착 역시 “망령”에 불과하다고 바라본다. 인간은 혼자서는 물적으로 존재할 수가 없다. 인간은 홀로 살아가는 것보다 집단을 선택하는 경향성을 지닌다. 그리고 그러한 것을 전제로 함께 살아가기 위해 자발적으로 “개별성”을 포기하는 것 또한 인간이다.

슈티르너의 삶을 보자. 슈티르너는 결혼(혹은 그에 준하는 연애)를 두 차례 했다. 슈티르너는 대학 교수 취업에 실패했고, 돈에 궁해지다보니 방세를 내지 못해 채권 추심자들에 의해 감옥에 가기도 했다. 슈티르너는 우유 배달 사업을 시도했고, 실패했다. “유일자”를 이야기한 슈티르너의 개별성이 관계에, 직업에, 명예에, 돈에 의해 끊임없이 좌우된 것이다.

이것이 잘못되었다고 말하지는 않는다. 슈티르너 역시 인간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인간이라면 이것이 당연한 것이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관념적 “개인”이 아닌 물질적 ‘인간’에게는 온전한 “개별성”을 확립하는 것이 가능하지 않다.

그렇기에 “유일자”는 ‘인간’이 아니다. ‘인간’이 아니면서, ‘인간’의 지향성을 드러낸다. 그렇기에 우리에게는 “유일자” 역시 “망령”이다. 그리고 우리는 이것을 현대 슈티르너주의자들에게서 다시금 바라본다. 그들은 어떠한 경우가 있어도 “개별성”, “독자성”, “유일자 됨”은 포기할 수 없는 지향점이라 바라본다. 그것들을 포기할 수 없기에 조직을 거부하고, 사회 변혁 운동을 거부한다.

“슈티르너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나는 어떠한 대의로부터도 비롯하지 않는다.” 그리고 개인주의적 아나키스트들은 슈티르너로부터 비롯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3. 이에 관하여, 사변(私辨)

분명히 말하지만 우리는 슈티르너라는 개별 철학자의 의미를 부정하지 않는다. 산업이 고도화되지 않고 덜 분절화되었던, 개별 인간의 생산력에 많은 것을 의존하던 당시의 맥락을 고려하면 슈티르너의 기대가 타당했다고 바라볼 수도 있다. 산업혁명을 통해 증대된 개인의 생산력을 바라보며 과학기술의 발전에 따라 개인의 노력만으로 생산의 영역을 대체할 수 있는 시대가 곧 도래하리라고 믿었을 수도 있다.

무엇보다 우리는 슈티르너의 관념론적 세계관이 해방된 사회에서 각 개인의 지향점을 제시할 수 있다는 의미를 인지한다. 분명하게도 슈티르너가 말하는 온전히 개별성을 확보한 개인(“유일자”)들이 구성하는 사회상은 아름답다. 슈티르너와 같이 개인에 집중하고, 개인의 이득을 극대화할 수 있는 사회를 만드는 것이, 아나키스트적 사회혁명의 기저임은 분명한 사실이다.

하지만 우리는 2020년 한국 사회에서 혁명을 꿈꾸고 있다. 2020년의 한국사회는 고도로 산업화되어 《산업적 분절》 없이는 현재의 편익을 개인들이 누릴 수 없다. 조선 사회, 일본령領 조선 사회의 “유일자”들은 슈티르너가 바라보는 것과 같은 곳을 바라볼 수 있었을지 몰라도 현재 한국 사회의 “유일자”들은 그러하지 않을 수밖에 없다.

또한 슈티르너의 개인관이 혁명 이후의 개인에게 유의미할 수는 있지만 혁명까지 가는 길을 제시하지 못한다면 그것은 그저 사변적 잡설에 불과하다. “유일자”가 “의지적 에고이스트”로써 세상 만물을 자신의 “소유”라 선언하면 무엇하는가. 물질화된 “망령”, 우리가 말하는 ‘괴물’들은 그 시도를 바로 진압할 텐데.

엥겔스는 슈티르너에 대해 다음과 같은 시를 헌정한 바 있다.

“슈티르너를 보라, 그를 보라, 모든 억압의 조용한 적.

그 순간, 그는 여전히 맥주를 들이키지만,

머지않아 피를 물처럼 마시게 될 것이다.

모두가 사납게 “왕을 타도하라” 외칠 때

슈티르너는 즉시 “법 또한 타도하라” 답한다.

슈티르너 존엄히 선포 하니

네가 자신을 굽히고 감히 자유롭다 칭할 때

너는 곧 노예제에 익숙해지리니

교조주의를 타도하고, 법마저 타도하라.”

하지만 우리에게 이것은 슈티르너에 대해 비꼬는 것으로 들린다. 우리는 왕도 타도하고 법 또한 타도하고, 교조주의도 타도해야 한다. 하지만 그 타도는 그저 외침으로만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그 타도는 경제와 물질에 근거한 대중의 민주적 조직의 자발적 직접행동으로 이루어진다.

우리는 왕을 타도할 길을 찾을 것이다. 그 타도 이후에 슈티르너주의자들이 법 또한 타도하라고 외친다면 그 법 또한 타도할 길을 찾을 것이다. 우리는 당신들처럼 그저 타도하라고 외침기만 하기보다는, 왕과 법에 돌멩이를 하나 더 던질 것이다.

마지막. 다시 한 번, 왜 이러한 도발을 던지는가.

2020년 현재, 코로나 19 사태의 장기화로 우리 모두는 침체되어 있다. 직접 행동을 주문하고 있지만 대중들이 거리에 나서는 것 자체를 무서워한다면 어찌할 도리가 없다.

하지만 그렇다고 가만히 있을 수는 없다. 더 침체될 수는 없다. 그렇기에 우리는 스스로 ‘아나키스트’라고 자칭하는 모두에게 감히 이 고민을 던진다.

분명히 과하게 공격적이고 도발적인 글이다. 하지만 이렇게 함으로써 이 글에 분노한 독자들의 격정적이고 진심어린 반론을 끌어낼 수 있다면 그야말로 우리가 원하던 일이다.

아나키즘은 평화를 추구하는 이념이지만 결코 평화로운 이념은 아니다. 오히려 새로운 사회를 향한 대중의 혁명, 반란, 반역의 가장 날카로운 칼날이 되어야만 한다. 이 글이 촉발할 수 있는 우리 내부의 이론투쟁과 논쟁으로 우리의 칼날을 더 날카롭게 벼려서 반드시 다가올 사회 혁명의 때, 체제를 향해 휘둘러지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