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itle 20세기의 아나키즘적 조합주의 #author 바딤 다미예 #SORTtopics 아나키즘적 조합주의, 역사, 노동조합, 계급투쟁, 대중운동 #date 2001 #source 바딤 다미예 동지에게 허락을 득하여 번역함. #lang en #pubdate 2021-09-05T11:39:18 #notes 한국어판 번역 : 아나키스트 연데 ** 영역자의 서문 21세기의 첫 10년 동안, 세계의 많은 노동조합과 노동조합 총연맹들은 100주년을 축하했다. 이러했던 상황은 지난 세기의 노동계급의 역사를 반영하고 있는 것이다. 주류 노동대중 조직들은 그들의 역사를 조합원들에게 더 나은 노동조건과 삶의 조건을 확보하기 위한 끝없는 투쟁의 역사로, 국가와 자본으로부터 조금씩의 양보를 쟁취해내는 과정으로 바라보고 있다. 하지만 노동운동에는 조금 더 높은 곳을 바라봐온 경향이 있다. 아나키즘적 조합주의자들은 그들의 목적을 국가와 자본으로부터 사회의 통제력을 확보하고, 생산/분배/소비의 영역에서 노동자의 자주통제를 건설하고자 하여 왔다. 지금까지 우리가 아나키즘적 조합주의에 대하여 보기 위해서는, 우리는 일반적으로 루돌프 로커의 <아나르코-생디칼리즘 : 이론과 실천>[1]이었다. 이 책이 운동의 주요한 존재였던 루돌프 로커가 쓴 서적인 것은 맞지만, 이것은 70년 전에 작성된 것이다. 책이 출판된 이래, 아나키즘적 조합주의 운동에 대한 연구들은 많이 진행되었지만, 운동 전체를 파악하거나 그 역사의 전체 전모를 취재하려는 시도는 없었다. 아나키즘적 조합주의는 언제나 다양한 문화와 생산양식 속에서 존재해 온 세계적 운동이었다. 그리고 아나키즘적 조합주의가 너무나 다양한 환경에서 존재했다는 사실은 역사학자들이 그 범위와 다양성을 정당하게 평가하기 어렵게 하였다. 그 원 자료는 다양한 언어와 널리 분산된 아카이브에서 발견되지만, 접근성이 떨어진다. 1920년대부터 30년대까지의 조합주의 인터내셔널의 역사에 대한 기념비적 저작을 쓴 러시아의 역사학자 바딤 다미예는 이 과업에 도전한다.[2] 아나키즘적 조합주의 운동의 역사에 대한 간단한 요약문을 쓰기 위해서조차, 그는 고전적 자료들을 참조해야 했다. 2차 문헌이 운동의 많은 중요한 측면에 불충분하기 때문이었다. 이 책 <20세기의 아나키즘적 조합주의>는 200년 모스크바에서 초판이 출판되었다. 저자는 영어판을 위하여 추가 문건들을 제공해주었다. 스페인 혁명에 대한 보다 깊은 문서들, 현대 러시아의 상황에 대한 추가 문서 등이었다. 결국, 영어판은 러시아판보다 2배는 더 길다. 이 책은 러시아의 아나키즘적 조합주의 운동에 적극적으로 활동하는 동지가 러시아 독자들을 대상으로 작성한 것이지만, 이 영어판을 통하여 받아 마땅한 국제적 관심을 확보할 수 있게 되기를 바란다. 영어판을 준비하는 것을 도와준 바딤 다미예 동지에게 감사를 표한다. 그리고 편집작업을 도와준 게일 실비어스 동지에게도 감사를 표한다. 말콤 아키볼드, 2009년 9월 서문 아나키즘적 조합주의는 세계 노동자 운동의 근본적인 경향성이다. 아나키즘적 조합주의는 노동자의 혁명적 노동조합이 국가가 없는, 자주적인 사회를 만들기 위해 활동하는 것을 의미한다. 아나키즘적 조합주의는 역사 속의 아나키즘 운동에서 유일하게 대중적인 변형이었다. 이 운동은 20세기의 첫 10년이라는 사회적, 경제적, 정치적 변화의 시기에 일어나 그 힘을 얻었다. 국제 산업자본주의 체제의 '중심부'에서는 선진 산업사회로의 전환이 이뤄지고 있었고, '주변부'과 '준주변부'에서는 산업화 과정이 여전히 시작에 불과했다. 격심한 사회 변화의 속도는 노동자들에게 많은 고통을 주었고, 그들은 전통적인 직업과 삶의 형태를 포기하도록 강요했고, 고된 조건으로 공장으로 밀어넣어졌다. 이전의 농업노동자들은 그들이 수세기간 살아온 익숙한 삶의 형태를 바꾸도록 강요되었고, 이전의 숙련공들은 특정분야에 특화될 것을 요구받거나 비숙련공 취급을 받아야 했다. ‘대규모 사회’가 부상 한다는 조건 아래에서 인간인격의 소외와 원자화는 지대해졌고, 이에 노동자들의 의식은 상처를 입었다. 노동운동은 상당부분 산업 자본주의 체제의 대안 세력으로 탄생했다. 이탈리아의 사회학자 마르코 레벨리가 지적했듯이, “현대 국가는 처음부터 이 두 서로 대립하는 경향으로 서로를 상쇄했다.”[3] 물론 이러한 반대는 좀 더 급진적으로 드러나거나(공장제도 도입에 저항한 영국에서의 러다이트 운동의 형태), 덜 급진적으로 드러나거나(노동자 상호지원 사회를 건설하여 사회적 영역을 장악하는 형태) 하였다. 하지만 거의 언제나 이 “초기” 노동운동은 산업화 이전 공방의 시대로부터 전래되어 온 자주성, 공동체적 삶, 집산주의의 정신에 기반해 있었고, 이를 통하여 공장이 내포하고 있는 전제주의에 반하였다. 노동의 분할은 아직 테일러주의적 세분의 수준에는 이르지 못하였다. 자신의 노동에 대해 잘 이해하고 있고, 그 노동이 생산과정 전체에서 어떠한 역할을 담당하고 있는지를 잘 이해하고 있던 숙련공들은 생산의 자기통제에 대해 생각해낼 수 있었다. 반면, 한편, 사회 통합에 관한 국가적 메커니즘은 아직 충분한 발전을 이루지 못했다. 오히려 사회 영역은 노동운동 조직에 의해 거의 완전히 통제되었고, 이는 자주경영적 대안으로 간주되기도 했다. 산업자본주의 체계의 해체, 제거, 또는 급진적 변혁을 목적으로 하는 급진적 경향은 당대의 사회적 현실에서 분명히 존재의 여지가 존재했다. 당대 혁명적 조합주의자들과 아나키스트들의 다수가 산업의 진보성에 대한 신화에서 벗어나지 못하였던 것은 맞지만, 여전히 그들의 사회적 목표는 체계에 맞선 투쟁을 통해, 그 체계를 자주경영과 자유로운 합의에 기반한 사회구조로 “아래로부터” 대체해 내는 것에 있었다. 이러한 관점은 당대 노동대중의 요구와 충분히 호환 가능한 것이었다. 아나키즘적 조합주의를 중요하지 않은, 주변부적 현상이라고, “극단주의자 그룹”의 몰계급적 모험주의라고, 살롱 지식인들의 판타지라고 부를 수는 없다. 아나키즘적 조합주의는 스페인, 러시아, 프랑스, 일본, 아르헨티나, 스웨덴, 이탈리아, 중국, 포르투갈, 독일 등의 전세계에 퍼져있던 국제운동이었다. 아나키즘적 조합주의는 강력하고 건강한 사회적 근본과 전통을 가지고 있다. 아나키즘적 조합주는 수십만, 아니 수백만의 임노동자들을 조직할 수 있었다. 아나키즘적 조합주의자들은 20세기의 가장 중요한 사회적 봉기와 투쟁에 적극적으로 동참하여 그 투쟁에 지워지지 않을 자취를 남겼을 뿐 아니라, 많은 나라에서 그들 자신의 가치, 규범, 관습, 상징을 가진 특별하고, 불굴의, 노동 계급 문화의 중심을 형성했다. 아나키즘적 조합주의의 이상과 전통은, 그리고 사업장과 지역적 자주경영에 대하여 내건 슬로건은, 다른 사회운동에 영향을 주었다. 이를테면 부다페스트의 노동자 평의회 운동(1956), 1968년의 학생과 청년 봉기, 1980-81년 폴란드에서의의 독립자치노동조합 “연대”, 아르헨티나의 “인민의회” 같은 것들 말이다. 아나키즘적 조합주의의 역사를 모르고서는, 세계의 역사에 관하여 충분히 이해할 수 없다. 지난 120년간 이루어진 인간성의 발전과 그 운명을 온전히 이해할 수 없다. ** 1부 : 혁명적 조합주의 *** 1장 : 제1인터내셔널부터 혁명적 조합주의까지 아나키즘적 조합주의의 역사는 제1인터내셔널의 반권위주의세력에 기원한다. 바쿠닌주의자와 연방주의자가 그들이다. 제1인터내셔널은 1864년 창립되어 다양한 사회주의 경향을 포괄하고 있었다. 이 국제 노동계급의 조직을 논의하는 과정에서, 사회 해방의 도구로서의 노동조합에 대한 개념이, 총파업의 역할에 대한 개념이, 국가기구를 생산의 조직으로 대체한다는 개념이, 사회의 자주경영에 대한 개념이, “직접행동”에 대한 개념이, 노동자들이 스스로의 이해관계에 따라 직접행동하여야 하고, 그 과업을 정당이나 지도자들에게 넘겨주어서는 안된다는 개념이 형성되었다. 1872년의 인터내셔널 분열 이후, 이 관점은 반권위주의적 아나키스트들의 관점이 되었다. 그들과 대치하였던 맑스주의자들은 사회민주주의적이거나 사회주의적인 정당의 건설을 통해 정권을 확보하고 “국가를 쟁취”하고자 하였다. 비동시적으로, 서로 다른 방향으로 발전해온 아나키즘과 맑스주의라는 두 경향 사이의 경쟁관계는 노동 운동을 지배했다. 하지만 20세기 초에는 국가 사회주의자(사회민주주의자)들이 우위를 차지하고 있는 것으로 보였다. 그들의 맞수였던 반권위주의적 사회주의자(아나키스트)들은 다수 국가의 노동운동 진영에서 축출되었다. 반면, 19세기 말의 아나키스트들은 상징적인 폭력행동을 통해, 노동대중의 공고하고 장기적인 조직이 없어도 혁명을 가져올 수 있다는 잘못된 전술을 통해, 반면교사로서 노동운동의 발전에 기여했다. 한편, 1880년대의 급격한 경제 성장은 노동대중이 산업자본주의 체계의 틀 안에서 평화롭게 노동조건을 개선시켜나갈 가능성에 대한 환상을 강화했다.[4] 사회민주주의는 인류의 역사가 선형적으로 진보한다는 개념에 기원한다. 그 이론가들은 자본주의의 발전이 미래에 다가올 사회주의의 기반을 닦을 것이라고 상정했다. 두 사회주의 대오의 근본적인 차이는 정권의 획득에 대한 관점의 차이에서 비롯한다. 사회민주주의자들은 정권의 획득을 통해 자본가들로부터 권력을 찬탈하여 노동자들에게로 이양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고, 이로서 자본주의가 만들어낸 산업 기계가 모두에게 속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는 결국 생산에 있어 공장 시스템이 사회 전체로 확장되는 것을 의미했다.[5] 노동계급의 해방과 사회주의는 자본주의와 산업화 논리를 파괴하는 것이 아니라 자연법칙에 따른 자연스러운 귀결로 여겨지게 되었다. 20세기 초, 유럽의 다수 노동조합들이 사회민주당들의 통제 아래에 놓였다. 독일과 오스트리아-헝가리의 자유노조, 프랑스, 네덜란드, 벨기에, 포르투갈의 노동조합들, 스페인의 일반노조(UGT), 스칸디나비아, 스위스의 노동조합 연맹들이 그러했다. 영국에서는 노동조합의 다수 세력이 의회주의적 사회주의를 받아들였고, 노동당의 창당을 지지했다. 노동조합운동에서 사회민주주의자들의 특징적 전술은 노동자들의 대규모 대중운동을 당의 노선에 귀속시키고, 노조 관료들의 힘과 영향력을 강화하며, 노동조합 재정의 통제를 확보하고, 정치적/사회적 문제를 당에 맡겨둔 채 노동조합이 순수하게 경제적 투쟁에 몰두하게끔 하는 것이었다. 아나키스트들과 다른 반권위주의적 사회주의자들은 스페인과 라틴아메리카에서만, 프랑스와 포르투갈, 이탈리아의 일부에서만 노동운동 내의 영향력을 유지할 수 있었다. 하지만 20세기 초, 사회민주주의의 헤게모니는 흔들렸다. 노동자 계급정당들의 의회전술에 대한 불만족은 당내의 좌익 반대파들을 만들어내었을 뿐 아니라, 노동조합들의 저항 역시 만들어내었다. 혁명적 조합주의라는 새로운 급진적 조류가 등장했다. 이 조류는 “노동대중의 경제적/사회적 조건의 변혁을 위해 ‘혁명적인 직접 행동’의 전술을 채택하는 노동조합운동”을 지칭하는 것이었다.[6] 노동자들의 태도와 행동이 이렇게 급진화된 것에 대한 이유들 몇 가지를 이야기해보자. 먼저, 산업생산 구조 내에서 노동자의 위치에 변화가 있었다. 1890년대부터 1900년대 초반까지 산업생산의 조직이론은 완전히 분할된 노동이 가능하게 할 만큼의 전문화 수준에 이르지 못했다. 산업체의 노동자들은, 아직까지는 그들이 자치와 독립성의 정신을 물려받은 공인들과 유사한 온전성을 가지고 있었다. 이들은 생산에 관한, 그들이 전문가인 영역에 관한, 노동을 조직하는 영역에 관한, 노동시간의 분배에 관한 복잡한 지식을 가지고 있었다. 이러한 상황은 노동자들이 전체 생산과정을, 사회를 노동자의 자주적 통제 아래에 둘 수 있다고 상상할 수 있게끔 하였다.[7] 세기가 바뀌면서 발발한 생산체계의 혁명(새로운 에너지원의 발견과 전기와 내연기관 사용의 증대)은 산업의 다양한 영역에서의 관계적 변화를 가져왔고, 새로운 관계를 만들어내었다. 기술적 진보의 광범위한 적용은 생산과정의 진보를, 노동자의 노동조건과 생활조건의 변화를 가져왔다.[8] 노동계급은 점점 더 도시로 집중했다. 그리고 도시의 단일한 생활조건은 계급의식을 키우고 임노동자간의 연대감을 촉발했다. 거의 모든 영역에서 기업의 급격한 이익 상승에도 불구하고 실질임금은 정체하거나 심지어 감소했다. 생산의 기술적, 조직적 변화는 노동자들의 전문적인 기술력을 손상시켰다. 기계의 작동에 기계적/전기적 구성 요소를 추가하면서 노동과정은 분절되었고, 노동자의 기술은 노동 프로세스 전체를 파악할 수 있을 정도의 총체성을 상실하였고, 노동의 자주적 통제에 대한 가능성 역시 상실되었다.[9] 노동의 조직 및 경영에 대한 새로운 방법론(모든 노동자에 대한 직접 고용, 분절적 노동, 성과급, 인센티브 모델, 공장 내 위계질서의 구축)은 기업과 경영진이 생산을 보다 엄격하게 통제하고 강화할 수 있게 하였으며, 작업 부하와 작업 시간을 모두 늘릴 수 있게 하였다. 이는 우선 제조업, 광업, 철도운송 등의 부문에서 노동자들의 불만을 불러일으켰다. 동시에 건설, 하역, 농업, 석유 산업에서는 비숙련 임시직의 수가 늘어나고 있었다. 그들의 상황은 불안정하였지만, 그 산업은 노동의 특화와 특정 사용자들에게 의존적이지는 않았다. 그렇기에 이들은 스스로의 권리와 이익을 지키기 위해 빠르게 행동할 수 있었다. 연구자들은 당시 노동자들 사이의 연대감이 빠르게 성장했다고 기록한다. 이는 1911년부터 1912년 사이에 있었던 영국, 네덜란드, 프랑스 운수노동자들의 대규모 파업이 국제적 성격을 보여주었다는 데에 근거한다. 선원, 항만노동자, 육상수송 노동자들의 상호 지지는 임노동자들에게 승리를 가져다주었다. 다른 나라의 노동자들 역시 파업 중의 식사와 보육등을 조직하면서 상호부조라는 비슷한 방법론을 채택하였다.[10] 파업운동은 거의 모든 곳에서 성장하고 있었다. 많은 나라들에서 총파업, 혹은 “정치”파업이 발발했다. 노동자들은 사회민주주의적 노동자 계급정당과 노동조합들의 전통적 정치에 만족하지 않았다. 사회민주주의는 총파업의 방법론이 “완전한 헛소리”라 거부했다. 쾰른에서 열린 독일 자유노조 총회(1905)에서, “경제적 투쟁의 영역에서 경험이 부족한 아나키스트와 같은 이들이 주장하는 총파업이라는 생각은 논의할 가치조차 없”[11]음이 다시금 확인되었다. 물론 부분적 요구를 위한 경제적 투쟁의 경우에도, 사회민주주의의 영향력 아래에 있는 노동조합들은 점점 개량주의로 기울었고, 정부나 기업과 타협을 택하여 왔다. 파업은 오직 극단적인 상황에나 채택할 수 있는 전술이 되었다. 그들은 개량주의적 노동조합이 중앙집중적 계획에 근거하여 작동하도록 조직을 구성했다.(이를테면, 독일의 파업은 산별노조 중앙의 간부에 의하여 규정되어야 했다.) 이러한 노동조합들 안에서 편협하고 전제주의적인 관료제가 형성되었다. 의사결정에 다층적 구조를 가진 거대 조직 모델과 특정분야에 특화한 전업활동가에게 업무를 맡기는 것은, 노동조합의 조합원들의 힘과 자원에 제약을 두어야 한다는 가정에서 비롯한 것이다. 노동조합의 전업 관료들은 점점 더 불확실한 투쟁에 참여하는 것보다는 조직의 구조를 유지강화하는 데에 힘을 쏟았다.[12] 노동조합의 지도부는 노동조합의 투쟁사업비를 축적하기 위하여 파업을 회피하고자 했다. 1911년 12월의 베를린 금속노동자 투쟁의 경우처럼 노동조합의 지도부가 강제로 파업을 멈춘 적도 있었다. 이에 더하여 1920년대 초반에 금속, 도예, 담배, 제화, 섬유 산업에서 독일 임노동자들의 파업투쟁이 패배하면서, 유럽의 활동가들은 독일적인 중앙집권적 노동조합 모델이 한계에 도달했다고 결론을 내렸다.[13] 개량주의적 노동조합 지도부는 직접적인 파업투쟁 대신에 기업집단과 노동조합 사이의 중앙집권적 “산별 임금협약”을 선호했다. 업종과 지역에 따라 맺어진 이 협약은 일정 기간 동안 양측을 구속했다. 노동자들은 이러한 행동들에 분노했다. 이러한 협약이 불합리한 노동조건과 빼앗긴 권리에 그들을 구속하여버리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이다. 1911년 영국 광업노동자 연맹이 펴낸 소책자에 따르면, “일반적이고 가장 중요한 질문에 대해 답하자면, 노동조합 중앙조직은 최고의 권위를 누리고 있다”면서 “이 지도부는 ‘젠트리’이자 국회의원이 되어가고 있다. 그리고, 그들의 권력을 이용하여 그들은 놀라운 사회적 지위를 확보한다. 이러한 지도부가 보여주고 있는 화해의 정치야말로 비난받아 마땅하다.”[14] 독일의 노동조합 활동가 카를 로쉬에 따르면 “모든 계급적 모순을 청산하고자 투쟁하는 노동조합 내부에서, 두 계급이 형성되었다.” 전능한 “채용 간부”와 그들을 승인하고 그들에게 투표하는 “평범한 자들”이 그것이었다.[15] *** 2장 : 혁명적 조합주의 운동의 탄생 노동운동에서의 사회민주주의와 그와 관련된 것들(의회주의, 개량주의, 당과 노조관료의 지배)에 대한 도전은 프랑스에서 처음 등장했다. 프랑스에서 노동자들은 아랠로부터 혁명적 조합주의의 전술론을 채택하였다. 이 노선은 부르스 드 트라바일(bourses de travail)에서 즉각적으로 확산되었다. 첫 번째 부르스 드 트라바일은 1886년 파리에서 건설되었다. 최초이 이곳은 직업소개소로 지어졌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노동자들의 집합소이자 문화적 교육의 중심으로 기능하기 시작했다. 부르스는 직업간 조직의 지역적 형태에서 계급투쟁을 위한 노동조합의 본부로 변화하였다. 1892년에는 전국적 연맹이 건설되었다. 부르스 드 트라바일은 노동자들이 지역적 층위에서 정당이나 다른 노동조합으로부터 독립적으로 적극적인 일들을 해내었다. 부르스는 주체적 조직과 상호부조의 독특한 형태의 본부가 되었다. 부르스는 실업자들이 일자리를 찾는 것을 도왔다. 이들은 산업재해의 희생자들을 돕기도 했다. 이들은 도서관을, 사회적 박물관을 건설했고, 전문가와 제너럴리스트들을 길러냈다. 그리고 부르스는 노동조합의 건설을 위한 선전작업을 해내었다. 부르스는 이를 위하여 파업을 조직하기 위한 체계적 방법을 세웠고, 투쟁기금을 모금하였으며, 전체 투쟁에 함께하였다.[16] 부르스 드 트라바일의 약점은 그들이 재정을 지방정부에 의존하였다는 것이다. 이는 정부 관료와 노동운동의 활동가들 사이에 지속적인 갈등의 요인이 되었다. 프랑스의 사회주의자(“게데주의자”)들은 부르스 드 트라바일 운동에 어떠한 영향력도 행사하지 않았다. 부르스에 참여한 사람들은 1880년대와 1890년대에 이루어진 사회/노동 법안의 허점들에 의하여 눈을 뜬 평조합원 활동가들이었다. 쥘 게데의 사회당에 반대했던 사회주의자 집단의 구성원들(특히 “알레망주의자”들)과 파리, 루앙, 툴루즈, 알제리 등지의 노동조합에서 활동하던 아나키스트들 역시 참여했다. 아나키스트들은 혁명의 시기에 지역 부르스들과 노동조합들이 “생산자의 조직”이 되어 자주적으로 통제되고, 자유의지적이며, 국가가 없는 사회의 맹아가 될 것을, (만약 노동대중들이 아나키스트적 의식을 갖추기 전에 혁명이 일어난다면) “온전한” 아나키즘으로 향하는 이행기가 될 것을, 국가나 화폐가 없는 사회인 자유의지주의적 코뮌주의의 도입단계가 될 것을 기대했다. 아나키스트인 페르낭 펠루티에가 부르스 드 트라바일 연맹의 서기장으로 선출되었다. 그는 혁명적 조합주의의 형성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 프랑스의 부르스 드 트라바일 운동에서 혁명적 조합주의의 가장 중요한 원칙들 몇몇이 도출되었다. 그리고 이 원칙들은 제1인터내셔널에서 반권위주의 세력(“바쿠닌주의자”)들이 제안한 원칙과 유사했다. 노동조합의 정당으로부터의 독립, 정치투쟁에의 비참여, “직접 행동”(사람들이 자신의 이익에 근거하여 직접 일어나는 것을 의미했다.[17]), 노자간의 직접 교섭을 통한 임노동자의 노동조건 개선, 사회혁명의 수단으로서의 총파업에 대한 준비 등이 그것이었다. 이 유사성은 부르스에 참여중이던 아나키스트들로부터의 영향 만으로 설명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당대 프랑스 노동자들의 실질적 경험으로부터 온 것이라고 보는 것이 더 정확할 것이다. 1902년, 부르스 드 트라바일 연맹은 다른 노동조합 중앙조직이었던 노동총연맹(Confédération Générale du Travail, CGT)와 함께 통합CGT를 건설했다. CGT는 1912년, 프랑스의 조직노동자 100만명 중 60만명을 조직하여 가장 큰 노동자 조직이 되었다.[18] CGT의 지도부는 혁명적 조합주의를 충실히 계승했다. 이 이데올로기적 입장은 여러 노동조합들로부터 지지를 받았다. 부두노동자, 금속노동자, 연필, 보석, 성냥, 모자 등을 제조하는 노동자, 인쇄노동자, 건설노동자, 제지노동자, 식품노동자, 운수노동자, 지방공무노동자 등이 혁명적 조합주의를 지지했다. 하지만 CGT는 개량주의자들이 주도하는 노동조합들 역시 포괄하고 있었다. 철도노동자, 제책노동자, 섬유노동자, 기계관리노동자, 군수산업 노동자, 음악가, 도예노동자, 시설관리노동자, 담배제조노동자, 트럭운전노동자 등이 그러했다.[19] 역관계는 매우 불안정했고, 언제건 변화할 수 있었다. 하지만 적극적 투쟁의 시기동안 심지어 개량주의적 노동조합에 속한 노동자들마저 혁명적 조합주의를 지지했다. CGT의 급진화는 파업을 선도하는 것에서만 드러나지 않았다. CGT는 군국주의와 식민주의에 대한, 일 8시간 노동에 대한 캠페인을 조직했다. 1905년 5월 1일부터 프랑스의 노동조합 중앙은 다음 해부터 일 8시간 노동을 도입하기 위한 대규모 투쟁에 돌입했다. 전국적으로 표어들과 유인물들이 배포되었고, 현수막이 게시되었으며, 회의들이 열렸다. 이 사안에 대한 보고서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노동계급 안에 구원론적 분위기가 자리잡았고, 이는 현실을 사로잡은 조합주의자들을 억제했다.(많은 공장에서 ‘70일 더, 그러면 우리는 자유로워지리라’나 ‘67일 더, 우리의 해방은 시작된다’와 같은 현수막을 읽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이와 동시에 부르주아지는 집단광기에 사로잡혔다. 대공포가 등장했다.”[20] 정부는 CGT의 지도부를 체포하고, 도시에 병력을 투입했다. 1906년 5월 1일이 되기 한주일 전, 여러 사업장에서 일 8시간 노동을 요구하는 파업이 터져나왔고, 5월 1일에는 총파업이 발발했다. 파리 단독으로만 20만명의 노동자가 이 파업에 참여했다. 거리에서는 바리케이드가 세워지고 전투가 벌어졌다. 많은 산업부문에서 경제적 생활은 온전히 확보되었다. 수개월간 몰아친 후위의 파업은 정부로부터 많은 양보를 얻어냈다. 개별 기업에서는 노동시간이 줄어들고 임금이 인상되었다. 주휴일과 토요 단축근무가 법제화되었다. 건설 노동에서의 노동강도가 줄어들었다. 다음 수년간, CGT에 대한 탄압은 더욱 강해졌다. 정부는 파업을 진압하기 위해 군대를 투입했고, 군인들은 노동자들에게 총격을 가했다. 시가전이 발발했다. 노동조합은 그 자원의 고갈을 더 이상 감당할 수 없었다. 1908년 CGT의 지도부는 개량주의자들의 손에 넘어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914년에는 총연맹의 행동들에서 강력한 혁명적 순간들이 포착되었다. CGT는 반군국주의/반전 캠헤인을 적극적으로 지속했다. 노동자들의 요구에 맞지 않았던 연금 입법안과 인플레이션에 대한 투쟁도 진행했다. 프랑스의 혁명적 조합주의는 다른 유럽 국가들로 전파되었다. 1903년의 총파업 이후, 1893년에 만들어진 네덜란드의 전국노동사무국은 개량주의적 사회민주주의와 결별하고 혁명적 조합주의를 도입했다. 이탈리아에는 1891년부터 프랑스의 부르스 드 트라비일과 유사한 “노동의 집”들이 세워졌다. 1904년의 총파업, 남부에서 1905년에 일어난 총파업과 충동들, 1906년 토리노에서 발발한 총파업 등은 노동자이 단결의 필요성을 느끼게끔 하였다. 1906년, 이탈리아 노동총연맹(CGdL)이 건설되었다. 그 지도부는 사회주의자들이었고, 혁명적 조합주의자들이 주된 반대파였다. CGdL의 개량주의적 사회주의 지도부에 대하여 노동자들은 만족하지 못했다. 그리고 이 불만은 지도부가 1907년 밀란 철도노동자들의 파업과 1908년 파르마의 지역파업에 대한 지지를 거부하면서 더욱 커졌다. 반면 혁명적 조합주의자들은 1908년부터 1911년까지의 기간 동안 아풀리아 농업노동자들의, 토리노와 제네바의 금속노동자들의 대규모 행동을 지도하고, 이탈리아의 아프리카 침동에 반대하는 파업을 조직하고, 피옴비노와 엘바 섬의 주조 노동자들의 파업을 지도하고, 카라라 건설노동자의 파업을 선도했다. 이렇게 혁명적 조합주의 운동의 통합적 구조가 점차적으로 건설되었다. 마침내, 1912년에는 이탈리아 조합주의자 동맹(USI)가 연방적, 자주적 구조를 가지고 건설되었다. 그리고 1914년, 이 조합에는 124,000명의 조합원이 가입했다.[21] 혁명적 조합주의자들은 이탈리아 노동자들의 가장 큰 규모의 행동들을 조직했다. 이를테면 대리석 채석 노동자들의 총파업, 밀란 금속노동자들의 총파업, 건설노동자, 선원, 농업노동자 철도노동자들의 활동, 1913년 가구 제조 노동자들과의 연대총파업, 1914년 카라라 건설노동자들의 파업 등이었다. 1913년 6월에는 마르셰(안코나)와 에밀리아 로마냐에서 반군국주의 시위가 반란이 되었다.(“붉은 주간”) USI는 이 모든 행동들을 방해했던 CGdL의 지도부와 달리,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아나키스트들이 1890년대 초반부터 노동자의 조직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던 포르투갈에서는, 프랑스 혁명적 조합주의의 예시를 통해 다수 노동자들이 사회주의 정당들의 영향력에서 벗어났다. 직접행동의 방법론을 실천하는 적극적 파업운동이 성장했다. 1907년에는 몇몇 노동조합이 개량주의자들의 통제를 벗어나 노동총연맹을 창립했다. 1909년에는 아나키스트들과 혁명적 조합주의자들이 리스본에서 사회주의자들을 치워내고 노동조합과 협동조합들의 총회를 개최했다. 이 총회의 참가자들은 일 8시간 노동에 대한 논의를 진행했고, “필수재의 생산에 대한 영향력의 증대”를 목표로 하는 노동자의 조직을 건설하기로 합의하였다. 1911년, 포르투갈 북부의 포르투에서는 자율적 노동총연맹이 사회당의 영향령 바깥에서 건설되었다. 그 해에 개최된 제2회 조합주의자 총회는 그들이 혁명적 조합주의적 지향을 굳히게끔 하였다. 1910년부터 1912년까지, 포르투갈은 급진적이고 반란적인 파업투쟁의 파도 속에 놓였다. 이 투쟁들은 군경과의 충돌, 그리고 사보타주를 포함하고 있었다. 1912년에는 에보라 지역의 20,000 농업노동자 파업에 연대하여 조합주의자들을 총파업을 선포했다. 노동자들은 무장했고, 리스본은 말 그대로 노동대중의 손에 떨어졌다. 개량주의적 노동조합의 정치는 반란을 진압하는 것을 도왔다. 이에 뒤따른 탄압은 조합주의자들과 사회주의자들이 뭉치도록 만들었다. 1914년 토마르에서 열린 전국 노동자 대회에는 두 경향의 대표자들이 출석했다. 그 결과 전국노동조합(Uniao Operaria Nacional, UON)이 건설되었고, 그 아래에서 각각의 이데올로기들은 온전히 독립적으로 활동했다. 하지만 혁명적 조합주의의 이상과 실천은 그 영향력을 키워갔고, 1917년의 회의에서 혁명적 조합주의가 공인되었다.[22] 독일과 스칸디나비아에서 아나키즘과 혁명적 조합주의 운동은 사회민주주의 진영의 좌파 활동가들과 노동조합내 소수파들이 건설하였다. 1897년 (관료적 노동조합 중앙 조직의 건설에 반대하던) “지역주의자”들이 자유노동조합연맹(Freie Vereinigung deutscher Gewerkschaften, FVdG)을 건설했다. FVdG는 1900년대에는 총파업의 개념과 직접행동의 방법론을 도입했다. 1912년에는 프랑스 CGT의 영향을 받은 강령을 채택했다. 이에 대응하여 1908년 독일 사회민주당은 당원들이 FVdG에 가입하지 못하도록 하였다. 스웨덴의 “청년 사회주의자”들은 1908년에 이루어진 노동조합과 관련한 토론을 거쳐 CGT의 투쟁적 · 전술적 방법론에 대한 지지를 결정했다.[23] 다음 해 총파업의 패배는 사회민주주의적 노동조합 지도부에 대한 환상을 더욱 철저히 부수었다. 그리고 1910년에는, 다수 노조의 대의원들이 “스웨덴 노동자 중앙조직(Sveriges Arbetares Centralorganisation, SAC)"[24]의 건립을 선포했다. 노르웨이와 덴마크의 노동조합 운동 안에도 조합주의적 비주류파 조직이 건설되었다. 1911년 여름 스칸디나비아 국가들에서는 직장폐쇄가 연쇄적으로 일어났고, 이러한 조건에서 만들어진 합의들이 스칸디나비아에서 혁명적 조합주의 운동의 확산을 도왔다. 앵글로-색슨 국가들에서 혁명적 조합주의는 “산별노조주의”의 실현이라는 방향으로 등장했다. 이는 노동자들을 사업장이 아니라 산업에 따라 조직하는 것을 의미했다. 프랑스와 이탈리아의 조합주의적 노동조합들과는 다르게, “산별노조주의”는 조직적 기반을 가장 낮은 생산단위에 두었다. 그리고 그 상급조직으로서의 산별 연맹과, 나아가 모든 노동자를 사업장을 넘어 조직하는 “원 빅 유니온”의 건설을 이야기했다. 1905년 미국에서는 세계산업노동자연맹(the Industrial Workers of the World, IWW)가 급진적 노동조합들의 주도로 건설되었다. IWW는 점점 더 혁명적 조합주의적인 성격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IWW는 노동자들의 노동조건 개선을 위한 투쟁을 사회혁명과 노동조합에 의한 생산통제를 기반으로 하는 새로운 사회를 향한 투쟁과 묶어내어 직접행동으로 만들어내고자 했다. 관료적 노동조합들과는 다르게, IWW는 비숙련공, 이민자, 여성의 조합가입을 인정했다. 1906년부터 1916년까지 IWW는 미국의 역사에서 가장 급진적이고 가장 쓰라렸던 파업들에 참여했다. 이를테면, 네바다주 골드필드에서 발발했던 노동자들의 반란이나, 오레곤주 포틀랜드에서 발발했던 벌목노동자들의 파업, 수천의 섬유노동자들이 벌여낸 메인주 스코우히건, 매사추세츠주 로렌스에서의 파업투쟁, 펜실베니아주 맥키스 록에서 일어난 금속노동자들의 파업투쟁 등이 그것이었다. 그리고 이에 따라, 당연하게도 IWW의 활동가들은 탄압당했다.[25] 호주에서 IWW의 조직은 조정전치주의 도입 시도 및 파업 파괴 시도에 대한 대응으로 이루어졌다. 영국, 남아프리카공화국, 1917년 러시아, 1차 세계대전 이후 독일에서도 IWW의 강령에 기반한 노동자 조직들이 건설되었다. 영국의 혁명적 조합주의 운동은 IWW의 선동에 따른 영향력과, 노동자이자 활동가인 톰 만과 가이 보우만이 펴낸 신문 <더 신디칼리스트>의 영향력 아래에서 일어났다. 1910년에는 산업적 조합주의자 교육 동맹(Industrial Syndicalist Education League, ISEL)이 구성되었다. 영국의 조합주의자들은 자체적인 노동조합을 건설하기보다는 기존의 노동조합을 장악하려하였다. 이들은 광업과 철도 노동조합을 장악하는 데에 성공하였다. 전전기 영국에서는 조합주의가 빠르게 성장했다. 제1인터내셔널의 창립을 불러온 1911년 선원들의 총파업이나 1912년 봄에 있었던 백만 광업노동자들의 총파업 등 조합주의자들이 조직한 대중행동은 이전까지의 계급투쟁에서 보여준 크기를 아득히 초월하는 것이었다.[26] 벨기에, 네덜란드, 미국의 선원들이, 하역노동자들이, 영국의 운수 노동자들이 영국선원들의 행동을 지지했다. 광업 노동자들의 파업 결정은 노동자들의 총투표를 통하여 결정되었고, 사용자와의 교섭 과정에서 노동자들은 교섭단에게 명확하고 구속력 있는 지침을 주었으며, 연방주의 정신에 따라 개별 광산과 지역에 대한 자율성을 부여했다. 남웨일즈 광업노동자 연방은 혁명적 조합주의의 원칙(현장의 자율성이 의사결정의 최고 조건이어야 한다는 것, 채용된 노동조합 지도부를 거부하는 것, 노동자들의 산업 통제를 그 목적으로 하는 것)에 따라 조직을 재건설하는 계획을 수립했다.[27] 20세기 초, 혁명적 조합주의의 경향성은 여러 나라로 퍼져나갔다. 벨기에에서는 1910년에 리에주 지역 노동조합 연맹이, 1913년에는 벨기에 노동조합 총연맹이 건설되었다. 스위스, 러시아(일부에서는 러시아에서 “아나키즘적 조합주의”라는 단어가 조어되었다고 말한다.), 오스트리아-헝가리, 발칸 제국, 캐나다 등지에서도 마찬가지였다. *** 3장 : 혁명적 조합주의와 아나키즘 20세기 초의 혁명적 조합주의는 이론가의 머리속에서 태어난 것이 아니었다. 혁명적 조합주의는 노동자들이 찾아낸 자신만의 독트린,[28] 즉 직접행동의 원칙을 가진 노동자 운동의 실천이었다. 프랑스 CGT의 주된 활동가 중 하나였던 에밀 푸제는 이 말을 노동계급은 현대 사회에서 지속적인 투쟁을 맞이하게 되며, “그들 자신을 제외한 어느 누구도, 어떠한 정부도, 어떠한 힘도 그들을 위할 것이라 기대하지 않게 되었다. 노동계급은 자신의 투쟁을 건설하고, 스스로의 역량을 행동의 수단으로 사용한다.[29] CGT의 지도자중 하나였던 조르주 이베토는 ”직접 행동은 상황에 따라 다양하게 드러날 수 있다. 노동자들은 각자의 업무에 따라, 각자의 상상력에 따라, 각자의 주도성에 따라 새로운 방법론을 만들어낼 것이다. 원칙적으로 직접행동은 합법성에 대하여 신경쓰지 않는다. 직접행동은 사용자가 두려움이나 스스로의 이익을 위하여 양보하도록 강제하는 것을 포함하고 있다.“[30] 이러한 방법론은 생산에 있어 노동자와 정반대에 있는 자들, 즉 기업가나 자본가들에게 직접적으로 향하는 경제투쟁의 방법론(불매운동, 개별적/집단적 사보타주, 파업)을, 혁명적 조합주의적인 선전행동과 반군국주의적 활동을 포함하고 있었다. 정치투쟁이 조직노동자들의 과업이라는 개념은 거부되었다. 현존하는 체제의 틀 안에서 노동자들이 스스로의 권리를 확보하고 조건을 개선하기 위한 투쟁은 국가와 자본에 대한 전위가 될 것이었다. 결과적으로, 자본주의는 철폐될 것이고, 임노동은 철폐될 것이며, 노동조합으로 조직된 노동자들이 생산의 통제를 확보할 것이다. 그렇기에 혁명적 조합주의자들에게 파업은 특별한 것이었다. 그들은 파업을 최종 목표가 아닌 “혁명적 훈련”이자 임박한 혁명에 대한 노동자들의 준비라고 바라보았다. 혁명적 조합주의 운동은 그에 맞는 이데올로기적 독트린을 구성하지 못했다. 이론층위에서 혁명적 조합주의는 다양한 원천을 가진 사상의 복잡한 총합일 뿐이었다. 이 복잡성에는 여러 경향들이 기여했다. 혁명적 조합주의 운동을 처음으로 연구하기 시작한 사람 중 하나인 네덜란드의 조합주의자 크리스티안 코르넬리센은 혁명적 조합주의 활동가들을 다음과 같은 세 그룹으로 나누었다. 노동조합만으로 “충분”하다고 여겨 이데롤로기로부터 거리를 둔, 계급투쟁의 실천에 기반하여 급진적 위치를 확보한 노동조합주의자들, 노동조합운동에서 단순소요에서 행동으로 이행할 여지를 바라본 아나키스트들, 사회주의를 의회주의의 교착상태에서 떼어내고 싶어했던 사회주의 정당과 그룹의 구성원[31]들이 그것이었다. 노동조합에서 일하며 노동조합을 자유의지주의적 입장으로 끌어가고 싶어했던 아나키스트들은 노동조합이 단지 자기 노동조건의 개선을 위한 투쟁의 기구인 것이 아니라, 총파업이라는 수단을 통해 사회혁명을 이행하고, 경제의 통제력을 확보하며, 사회 전체의 이익을 위해 생산과 소비를 계획할 수 있는 기구로 바라보았다. 1909년, 유명한 프랑스 혁명적 조합주의자였던 에밀 파토와 에밀 푸제는 “어떻게 혁명을 건설할 것인가”라는 계획서를 펴냈다.[32] 이들은 노동조합이 혁명적 파업의 과정에서 자본주의적 소유구조를 철폐하고, 스스로를 생산자 조직으로 변형시킬 것이라 보았다. 각각의 노동조합은 각각의 사업장을 점유하고, 생산과 분배를 재조직할 것이었다. 노동조합들은 지역적 · 산업적 연방을 통해 새로운 사회의 기구가 될 것이고, 경제적/사회적 삶의 영역에서 결정을 하고 그 결정을 집행할 것이었다. 통계를 수집하고 그것을 공유하며, 이 통계에 기반하여 생산과 분배를 조직할 것이었다. 그리고 행정이 아래에서 위로 이루어지는 사회적 절차를 담보할 것이었다. 이때 지역에 기반하여 그 거주민들을 통치하는 자들은 단지 지역 층위의 생활 조직에서 보조적 역할만을 담당하게 될 것이었다. 혁명적 조합주의자들의 미래상을 통해 우리는 산업자본주의 사회에 대한 아나키스트적(자유의지주의적)이고 자주적인 대안의 기본 요소들을 확인할 수 있다. 하지만, 아나키즘과 혁명적 조합주의의 원칙에는 차이들이 있다. 우선, 혁명적 조합주의는 아나키즘적 코뮌주의의 독트린보다 더 많이 산업적 진보와 조직의 산업적 구성을 선호했다. 아나키즘은 자본주의, 사적소유, 국가에만 반대한 것이 아니라, 사회적 생활의 중앙집중화 및 노동의 분화와 특화에도 반대했다. 아나키스트 이론가들은 직업적 조직이나 공통된 이해관계에 기반한 조직들에 반대하지 않았지만, 그들은 여전히 미래의 자유로운 사회는 자주적이고, 자율적이며, 지역적인 코뮌의 연방에 기반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산업적 중심화는 직업위계와 특화를, 공장에서의 전제주의와 노동의 분화를, 생산과 생산성에 대한 광신을 전제한다. 아나키스트들은 산업주의의 논리에 대항했다. 그들은 산업의 탈중심화를, 산업을 소규모 단위로 쪼갤 것을 주장했다. 그들은 산업을 지역적 필요에 따라 재정돈하기를 원했다. 그들은 산업적, 농업적, 지적, 육체적 노동의 온전성을 회복하고자 했다. 그들은 코뮌과 지역이 최대한 자급자족하기를 바랐다.[33] 반면, 다수의 조합주의자들은 대규모 중앙집중적 산업 체제를 청산하기보다는 현존하는 체제 내에서 노동 과정에 영향을 주고자 했다. 그렇기에 코르넬리센은 분업이 임노동자들에게 “커다란 발전”이며, 그들의 해방에 기여할 것이라고 말한 것이다. 그는 제2인터내셔널의 산업적 맑스주의의 정신에 입각하여, 생산수단의 자본주의적 소유관계의 청산은 노동자들이 그 운영에 모두 참여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고 선언한다. 코르넬리센은 노동조합의 채용관료를 옹호하기도 한다.[34] 다르게 표현하자면, 노동조합에서 일하던 일부 아나키스트들은 조합주의가 새로운 산업시대의 아나키즘이라고 여기는 경향이 있었다. 에밀 푸제는 “나는 아나키스트이지만, 아나키는 나에게 중요하지 않다.”[35] 혁명적 조합주의 운동의 일부 아나키스트들은 아나키스트적 사회 원칙과 노동조합이 주도하는 위계적이고 중앙집중화된 생산 체계 사이의 차이를 인지했다. 그들은 이러한 “조합주의 체제”가 아직 국가를 철거하지는 못할지라도, 그 필연적인 발전태는 “경제 관계에 있어 코뮌주의 원칙을 완전히 적용”하고 “결과적으로 (국가의) 무쓸모성”을 불러와 국가의 “완전한 소멸”을 낳을 것이었다. 즉, 조합주의는 우리를 아나키로 이끌 것이었다.[36] 아나키즘적 코뮌주의의 이론은 사적 소유와 국가를 끝장낼 사회혁명 직후에 사회는 “역량에 따라 일하고, 필요에 따라 분배하는” 코뮌주의적 생산과 분배의 체제로 변할 것이라는 것이다. 파토와 푸제의 책은 이행기적이고 “집산주의적인” 대안을 제시한다. 그리고 이 대안은 당대의 맑스주의자들의 그것과 유사했다. 즉, 생필품은 코뮌주의적으로 분배하되, 나머지 재화들은 “노동에 따라” 분배하는 것이다.(이를테면, ‘노동전표’ 같은 것을 통해서 말이다.) 그리고 코르넬리센은 사회민주주의자들과 같이 현대 산업사회에서 세계경제의 상호의존성은 점점 증대하기에, 자급자족은 불가능할 것이며, 가격과 노동의 대가는 사회주의 사회에서도 최소한 그 풍족의 상태가 유지되는 동안은 화폐의 형태로 유지될 것이다.[37] 19세기 말, 20세기 초의 상당수 맑스주의자들은 의회주의적 사회주의와 개혁주의라는 “노망”에서 깨어났고, 혁명적 조합주의가 사회주의에 생명을 부여할 수 있는 수단이라고 보았다. 조합주의적 “신맑스주의” 이론가들(프랑스의 조르주 소렐, 에두아르드 베르트, 위베르 라가르델, 이탈리아의 아르투로 라브리올라와 엔리코 레온 등)은 국가와 공장의 규율을 비판하고 그 청산을 요구하는 맑스주의적 입장으로 돌아가고자 노력했다. 그러나 그들의 폭력의 동원에 대한 생각, “다수의 민주주의”에 대비되는 의미에서의 전위-엘리트 “혁명적 소수”의 강조, 그리고 온전히 실현할 수 없더라도 믿어야 하는 신화가 있다는 생각(소렐은 이에 대한 예시로 조합주의자들이 이야기하는 바 총파업이나 맑스주의자들이 이야기하는 바 “결정적 혁명”을 든다.[38])은 자유의지주의적 관점에 반하는 것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들의 글은 매우 널리 읽혔고, 많은 국가에서 혁명적 조합주의 운동과 연관되어 그 발전에 지대한 영향을 주었다. 아나키즘적 코뮌주의의 이론가들(표트르 알렉세예비치 크로포트킨, 에리코 말라테스타 등)은 여전히 사회진보의 뿌리는 인류의 윤리적 진보에 있다고 보았다. 자본주의는 상호부조에 기반한 인류의 사회적 본성을 막기에 퇴보적 체제다. 인류를 서로 투쟁하는 계급들로 분할하는 것은 인간 본성의 실현을 막는 반동이다.[39] 아나키즘적 코뮌주의자들은 이로부터 계급사회의 청산이라는 요구를 도출한다. 그리고 이로 나아가는 길은 억압된 사회적 층위의 저항을 통해 이루어질 것이다. 하지만 그들은 “우리가 바라는 아나키즘적 혁명은 특정한 계급의 이익에 국한하지 않을 것이다. 우리 혁명의 목적은 현재 경제적, 정치적, 윤리적으로 억압되고 있는 전체 인류의 해방에 있다.”[40]고 강조한다. 반면, 혁명적 조합주의는 맑스주의적인 경제 우위와 사회발전에 있어 계급투쟁의 진보성 개념을 도입하였다. 혁명적 조합주의는 산업 자본주의의 발전이 자유 사회를 향한 경제적/사회적 기반을 만들어낸다는, 자신의 계급이익을 위한 프롤레타리아트의 투쟁은 필연적으로 자본주의의 철폐를 가져올 것이라는 전제를 상정했다. 이러한 전제는 혁명적 조합주의자들이 스스로의 조직적/강령적 관점을 체현해낸 “아미엥 헌장”(1906년 프랑스 CGT의 총회에서 승인된 문건)에 잘 드러난다. 물론 “헌장”은 프랑스 노동조합 총연맹 내의 서로 다른 경향들의 합의를 거쳐 만들어진 것이지만, 이 문서는 여러 나라의 노동운동에 결정적인 영향을 주었다. 혁명적 조합주의의 원칙들을 선언한 것이다. 이 문서에 따르면, CGT는 이데올로기가 아니라 계급에 기반하여 모든 “임노동과 경영활동을 제거하기 위한 투쟁”의 필요성을 인지한 모든 노동자들을 “정치적 경향에 무관하게” 포용할 것이었다. “헌장”은 “모든 형태의 착취와 억압에 맞선” 경제적 영역에서의 계급투쟁의 원칙을 천명했다. “헌장”은 조합주의가 이중적인 목적을 가지고 있다고 말한다. 우선, 노동계급의 노동조건의 즉각적 개선을 위한 투쟁을 지도하는 것이고, 나아가 총파업을 통한 “자본의 수용”을 통한 “완전한 해방”을 준비하는 것이었다. 그렇기에 노동조합(생디칼)은 미래에 “사회적 재조직의 기반이 될 생산과 재분배를 담당할 집단”으로 변모할 것이었다. 노동조합의 조합원들에게는 정당과 이데올로기, 종교 등을 조합 내로 끌어들여 계급적 단결을 해하지 않을 것이 권고되었다. 하지만, 노동자가 조합 바깥에서 자기 이상을 위해 투쟁할 권리는 인정되었다.[41] 그렇기에, 아나키즘적 코뮌주의와 비교할 때, 혁명적 조합주의는 부분적이고 비일관적이며 모순적인 산업자본주의 체제와의 투쟁만을 대변하는 것이었다. 그렇기에 아나키스트들이 이 새로운 운동을 비판적으로 받아들이는 경우가 잦았다는 것은 놀라운 일도 아니다. 크로포트킨은 노동조합 내부에서 일할 것을 처음으로 요구한 사람 중 하나였다.[42] 또한 크로포트킨은 파토와 푸제의 책에 노동자의 자기 조직과 자주경영이라는 측면에서 혁명적 조합주의가 얼마나 아나키즘과 유사한지 서문을 써 주기도 했다.[43] 하지만 모든 아나키스트들이 혁명적 조합주의에 공감한 것은 아니었다. 아나키즘과 조합주의 사이의 논란은 1907년 8월의 (놀랍지 않게도, 네덜란드의 조합주의자 코르넬리센이 조직한)암스테르담 총회에서 불붙었다. 프랑스의 대표였던 CGT의 활동가 피에르 모나트는 조합주의가 “1906년의 아미엥 총회에서 정의된 바와 같이” 자기완결적이라면서, 아나키즘과 조합주의의 공통된 입장과, 두 입장이 상호간에 영향을 주고 있음을 강조했다. 그는 조합주의가 아나키스트의 입장의 갱신이자 “아나키즘 운동과 혁명을 만들어낼 방법”이라고 주장했다. 총회의 다른 참가자들은 조합주의의 “자기완결성”에 대하여 비판하였다. 보헤미아의 아나키스트였던 카렐 보흐리체크는 조합주의는 아나키즘적 선전의 수단이자 도구여야지 그 목적이 되어서는 안된다고 주장했다. 코르넬리센은 아나키스트들이 지지하여야 할 것은 모든 형태의 조합주의나 모든 형태의 직접행동이 아니라, “목적적으로 혁명적인” 조합주의나 직접행동이라고 주장했다. 모나트의 입장에 대하여 가장 활발히 비판한 것은 이탈리아의 아나키스트인 에리코 말라테스타였다. 그는 노동조합에서 일하는 아나키스트들을 지지하였지만, 노동조합과 노동운동이 혁명적 투쟁의 수단 중 하나일 뿐이라고 말했다. 말라테스타는 미래의 노동조합이 “스스로 생산의 운영을 가져올 역량이 있는 조직”이 될 것이라는 것을 부정하지는 않았지만, 노동조합의 핵심은 현존 사회의 틀 안에서 집단적인 물질적 이득을 수호하는 도구가 되는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노동자들의 연대가 공통된 경제적 계급이득에서 비롯할 것이라는 것을 부정했다. 특정 집단이 타인의 희생으로 자신의 요구를 이루는 것이 온전히 가능했기 때문이다. 그는 공통된 이상에 기반한 프롤레타리아트의 “윤리적 연대”의 가능성을 보았다. 말라테스타는 총파업이 사회혁명을 대체할 수 없다고 말하였다. 노동의 중단은 혁명을 촉발할 수는 있겠지만, 반란과 수용을 대체할 수는 없을 것이었다. 그리고 그는 아나키스트들이 아나키스트적 이상에 따라 노동조합을 “각성시켜야”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면서도 그는 특별하고 온전히 혁명적인 노동조합의 상을 거부하고, “완전히 중립적인” 단일한 노동조합을 지지했다.[44] 하지만 이미 암스테르담 총회에서 아메디 뒤노아가 “노동자 아나키즘”이라는, 훗날의 아나키즘적 조합주의와 매우 밀접하게 연관된 개념을 도출했다. 그리고 이 개념은 추상적이고 단지 문학적일 뿐이었던 “순정 아나키즘”을 대체했다.[45] 총회는 아나키스트 인터내셔널 내에 조합주의자들(러시아의 알렉산드르 샤피로와 영국의 존 터너) 일부와 조합주의에 공감하고 있던 독일의 아나키스트 루돌프 로커를 포함하는 부서를 만들기로 결의했다. 이 부서는 1911년 말에는 그 업무를 중단했다.[46] 아나키스트들이 혁명적 조합주의를 비판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이 새로운 조류는 아나키스트 노동운동 내에 지대한 영향력을 행사하였다. 특히 제1인터내셔널 당시부터 아나키스트 노동운동이 존재하여 왔던 스페인이나, 이후에라도 아나키스트 노동운동이 발흥하였던 라틴아메리카 등지에서 그러하였다. 스페인의 경우, 거대한 아나키스트 노동조합의 전통은 1870년대의 제1인터내셔널 스페인 지역 연맹(Federación Regional Española de la Asociación Internacional de Trabajadores), 그리고 1880년대의 스페인 지역 노동자 연맹(Federación de Trabajadores de la Región Española)으로 거슬러 올라갈 수 있다. 후자의 조직을 재건하려는 시도에도 불구하고, 국가의 잔학한 탄압 아래에서 노동조합들은 독자적으로 행동할 수밖에 없었다. 1907년, 바르셀로나의 자율적 노동자 모임들은 아나키스트들의 영향 아래에서 “노동자의 연대”(Solidaridad Obrera)라는 연맹을 건설했다. 이 연맹의 목적은 자본주의 체제를 “노동자의 조직으로, 그리고 그 조직이 변모한 노동의 사회적 체제로” 대체하고자 하였다. 연맹의 활동은 곧 스페인에서 가장 산업적으로 발전한 지역이었던 카탈루냐 전체로 퍼져나갔다. 1909년, “노동자의 연대”는 모로코에서의 식민전쟁에 반대하는 바르셀로나 총파업을 조직하였지만, 이는 군대에 의하여 잔혹하게 진압되었다.(“비극의 한 주”, la Setmana Tràgica) 다른 지역에서도 유사한 형태의 조직들이 자라났다. 혁명적 조합주의 운동의 추동력은 프랑스 CGT가 보여준 예시였다. 1910년 10월부터 11월까지 바르셀로나에서 열린 총회에서, 스페인 노동자들의 전국조직이 건설되었다. 전국노동총연맹(Confederación Nacional del Trabajo, CNT)가 그것이었다. CNT의 조직구조는 CGT의 그것에 기반을 두고 있었다. 노동자 협회들은 노동조합(“생디칼”)들로 그 형태를 전환했다. CNT의 건설과정에서 채택한 결의안들과 결정문들은 아나키즘과 혁명적 조합주의의 결합을 만들고자하는 시도를 반영했다. 조합주의적 입장에 가까웠던 지점들(부분적 개선을 위한 투쟁의 필요성, 일 8시간 노동, 최저임금의 도입, 직접행동이라는 방법론의 적용, 혁명적 총파업)과 더불어, CNT 총회에서 의결한 결의안들은 정치와 정당을 거부하는 등 아나키즘 운동의 전통을 이어가는 것을 포함하고 있었다. 스페인의 아나키즘적 조합주의자들은 다시 한 번, 제1인터내셔널의 표어, “노동자의 해방은 노동자 스스로의 과업이다”를 채택했다. CNT는 조합주의가 그 자체로 목적인 것이 아니라 혁명적 총파업을 조직하고, “부르주아지에 대한 혁명적 수용을 통해 노동자의 완전한 해방”을 확보할 수 있는 수단이라고 선포했다. 이들은 조합주의가 새로운 “강력한 사상”, 새로운 급진적 사회 재건 계획, 즉 아나키즘을 선전하는 필수적 방법이라고 선언했다. 1911년, CNT는 30,000명의 조합원을 조직하고 있었다. CNT는 마드리드, 빌바오, 세비야, 헤레스 데 라 프론테라. 말라가, 타라사 일대에서 대규모 파업을. 사라고사에서의 총파업을, 모로코 전쟁에 반대하는 혁명적 총파업(1911년 가을)을, 10만 섬유 노동자의 파업을, 발렌시아 총파업(1914년 3월)을 조직할 수 있었다. 1911년, CNT는 금지되었고, 1914년까지 지하조직으로 남아야 했다.[47] 멕시코, 쿠바, 브라질 등의 라틴아메리카 국가에서의 아나키스트들은 노동조합 운동 내부에서 활동했다. 1870년대부터 제1인터내셔널의 후계자들이 활동하고 있었던 아르헨티나와 우루과이에서, 아나키즘은 노동운동 내부에서 최고로 발전했다. 에토레 마테이, 에리코 말라테스타, 그리고 다른 유명한 아나키스트들이 아르헨티나의 첫 번째 노동자 조직의 건설에 참여했다. 1901년, 아르헨티나의 전국단위 노동자 연맹이 등장했다.(그리고 1904년부터, 이 연맹은 아르헨티나 지역 노동자 연맹(Federación Obrera Regional Argentina, FORA)이라고 알려졌다.) 연맹 창건 1년 뒤, 사회민주주의자들이 연맹에서 철수했고, 1905년의 총회에서 FORA는 “아나키즘적 코뮌주의의 경제적, 철학적 원칙”을 선전할 것을 조합원들에게 권고하였다. 동시에 FORA는 조합주의의 “자기완결성”과 “중립적” 노동조합의 상(프랑스 혁명적 조합주의자와 말라테스타 모두가 가지고 있던 상)을 모두 거부하였다. FORA는 많은 지역적 파업과 총파업들을 조직했고, 노동일수의 절감과 노동조건의 개선을 쟁취했다. 이를테면, 설탕산업 노동자들에 연대한 총파업(1901년 로사리오)이나 판매노동자들과 연대한 총파업(1902년에 부에노스 아이레스에서, 1904년에는 전국적으로)이 있겠다. 부에노스 아이레스의 제빵 노동자들의 파업(1902년)이나 항만노동자들의 파업(1902년, 1903~1904년) 역시 있었다. 1907년, 1909년, 1910년에는 수십만 노동자들이 탄압에 저항하여 전국적 연대 총파업에 참여했다. 1907년에는 아나키스트들의 주도하에 임차인들의 총파업을 조직하기도 했다. 이러한 행동과 시위는 종종 경찰과의 폭력적인 충돌과 시가전으로 이어졌고, 이는 잔학한 탄압으로 이어졌으며, 이 탄압은 시위성 파업으로 응답되었다.[48] 1907년, 유럽의 한 아나키스트 신문의 기자는 “이곳의 아나키즘 운동은 세계의 어느 곳과도 다르다고 할 수밖에 없다. 이곳에서 모든 노동자는 아나키스트다.”[49] 1916년, “중립적” 조합주의의 지지자들은 FORA에서 분열했다. 이 분열해나간 온건파는 “9차 총회의 FORA"라고 알려졌다. FORA의 영향 아래에서 1905년에는 우루과이 지역 노동자 연맹(Federación Obrera Regional Uruguay, FORU)가 구성되었다. FORU는 더 조용히, 많은 조직적 등락을 경험하며 발전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루과이의 노동자 아나키스트들은 시내전차의 차장들, 제빵사들, 가죽세공노동자들, 건설노동자들, 운수 노동자들, 인쇄 노동자들, 금속노동자들, 통조림 공장 노동자들 등의 중요한 파업들과, 몇몇 총파업을 조직할 수 있었다. FORU는 정부가 일 8시간 노동을 도입하도록 강제하기도 하였다.[50] 아르헨티나의 FORA는 1916년 창립된 파라과이의 지역노동자 센터(Centro Obrero Regional del Paraguay, CORP)의 모델이 되기도 하였다. 멕시코, 쿠바, 브라질 등지에서는 노동운동의 시작부터 아나키스트들이 본질적인 영향력을 행사했다.[51] 멕시코의 아나키스트들은 멕시코 최초의 노동조합, 멕시코 노동자의 위대한 모임(El Gran Círculo de Obreros de México, GCOM)의 건설에 개입했다. 20세기 초에 아나키스트들은 포르피리오 디아스의 독재에 항거하는 강고한 투쟁을 집행했다. 하지만 1910년부터 1917년까지의 혁명적 시기 동안 아나키스트들의 세력은 분열했다. 리카르도 플로레스 마혼이 이끄는 활동가 분파는 반란운동을 조직했고, 마침내 독재를 몰아내는 데에 성공했다. 하지만 이 분파는 사회혁명의 목표, “땅과 자유”를 얻기 위하여 새로운 체제에 맞서 행동을 계속했다. 다른 분파는 조합주의적 노동조합 본부, 세계 노동자의 집(Casa del Obrero Mundial, COM)을 건설하는 데 참여했다. 멕시코 조합주의자들은 혁명의 자유주의-헌법주의 세력과 동맹을 체결했고, 그로서 일터에서의 자유를 확보할 가능성을 얻으려 하였으며, 이들이 판초 비야가 이끄는 북방의 혁명군, 그리고 에밀리아노 사파타가 이끄는 남방의 농민반란을 진압하는 것을 돕고자 했다. 하지만 1916년, 정부는 조합주의자들을 파괴했다. 1898년까지 스페인의 식민지였던 쿠바에서는 아나키스트 운동이 대도시 아나키스트들의 영향 아래에서 발전했다. 20세기 초의 쿠바 노동조합주의자들은 아나키스트들의 영향 아래에 있었다. 브라질에서 아나키스트들은 사회주의자들을 이겨내고 다수 지역의 노동조합 연맹들을 장악했다. 그리고 1906년, 아나키스트들이 주도한 전국 노동조합 본부, 브라질 노동자 총연맹(Confederação Operária Brasileira, COB)이 건설되었다. 적극적인 파업투쟁이 전국적으로 펼쳐졌다. 라틴아메리카의 다른 지역에서도 아나키스트 노동운동이 퍼져나갔다. 칠레에서 아나키스트들은 다양한 숙련공의 저항 조직에, 그리고 “만코뮤날레”[52](그리고 “만코뮤날레”는 노동조합이, 상호부조사회가, 지역 노동자 연합이 되었다.) 에 함께했다. 그리고 이들은 다수의 강력한 파업들을 조직했다. 하지만 1907년 이들의 운동은 큰 타격을 받았다. 정부는 아나키스트들이 조직한 30,000 질소비료노동자들의 파업을 폭력적으로 진압했고, 이 과정에서 최대 4,000명의 인민들이 살해당했다.[53] 페루에서는 노동자 아나키스트들이 제빵, 섬유, 항만, 선원, 단순노무직 노동조합을 대표했다. 이들은 강력한 파업투쟁을 주도했고(이를테면, 일 8시간 노동이 여러 직종들에 도입된 후 발생한 1913년 카야오의 총파업이 있겠다.) 토착 공동체주의자들과의 공동작업도 진행했다.[54] 다수의 행동적 노동조합들이 볼리비아, 에콰도르, 파나마 등지에서 아나키스트의 영향력 아래에 있었다. 혁명적 조합주의와 아나키스트 노동운동이 세계로 빠르게 퍼져나가면서, 얼마 지나지 않아 조직간의 교류들이 생겨났고, 급진적 노동조합의 국제연합을 만들고자 하는 시도가 생겨났다. 1907년 9월, 암스테르담에서 아나키스트 총회가 열리고 있던 당시, 조합주의자들의 회의가 따로 열렸다. 독일자유노동조합(Freie Vereinigung deutscher Gewerkschaften. FVdG)에 따르면, 이 회의에서는 “조합주의 운동 국제 회보”를 4개국어로 펴내어 각국의 조합주의 조직간 연락망의 강화를 꾀하는 것이 결의되었다. 회보는 코르넬리센의 편집으로 파리에서 출판되었다. 이 출판은 네덜란드, 독일, 보헤미아, 스웨덴, 프랑스의 조합주의자들이 재정적으로 후원하였으며, 미국의 IWW도 분기별로 지원하였다.[55] 네덜란드, 독일, 프랑스의 혁명적 조합주의 조직의 일반적 활동가들은 프랑스 CGT가 개량주의자들 뿐 아니라 혁명적 노동조합들도 참여하는 국제 노동조합 총회를 개최할 것을 요청하곤 했다. 몇몇 프랑스 혁명적 조합주의자들은 다른 혁명적 노동조합들과의 관계를 강화하는 것을 지지하거나 심지어 더 높은 우선순위를 두기도 했다. 하지만 CGT의 지도부는 노동운동의 단결을 위하여 이를 거부했다. CGT는 사회민주주의자들과 개량주의자들의 방패 아래에 있는 국제 조직, 국제 노동조합 전국본부 사무국(International Secretariat of National Trade Union Centres, ISNTUC))에 가맹했다. 1905년과 1907년 CGT는 사무국이 조직한 회의의 참석을 거부했다. 독일의 노동조합들이 총파업과 반군국주의 의제를 담은 결의안을 거부했기 때문이다. CGT는 1909년부터 회의에 참석하였지만, 전권을 가진 대의원회의 형태로 전환을 실패하였다. 혁명적 조합주의 세력의 결집은 CGT 없이 진행되었다. 국제적 연대를 위한 새로운 제안은 IWW의 6차 회의에서 이탈리아, 독일, 네덜란드의 조합주의적 노동조합들에 의하여 제기되었다. 그리고 국제 회의를 주관하는 책임은, 영국의 산업조합주의교육동맹(Industrial Syndicalist Education League, ISEL)이 맡았다. 회의의 참가자들은 “자주적 노동조합으로 조직된 혁명적 노동자”로 제한되었고, 정당의 “활동가들”이나 “관료들”은 거부되었다. 런던에서의 국제 조합주의 총회를 위한 준비 위원회는 1913년 9-10월 사이에 소집되었다. 총회의 회기들은 런던의 홀보른 마을회관에서 열렸다. 독일의 FVdG, 아르헨티나의 아나키스트 노동조합 FORA와 조합주의적 노동조합 “아르헨티나 지역 노동자 총연맹”(Confederación Obrera Regional Argentina, CORA), 브라질의 COB, 벨기에, 쿠바, 프랑스, 스페인, 네덜란드의 노동조합들, 이탈리아의 조합주의적 노동조합과 지역단위 노동조합들, 스웨덴의 SAC(이들은 노르웨이와 덴마크의 조합주의자들을 대변하기도 하였다.)의 대표자들이 참석했다. IWW의 대표단은 참관하고 있었다. 이 총회의 서기로는 코르넬리센이 선출되었고, 러시아의 아나키즘적 조합주의자 알렉산드르 샤피로가 통역을 맡았다. 이 회의에서는 국제 협력의 문제가, 이론과 전술의 문제가, 반군국주의와 반전운동의 문제가, 이주노동의 문제가 논의되었다. 회의 중에는 이탈리아의 대의원 알세스테 데 암브리스와 같이 제시된 결의안의 반국가주의/반자본주의적 편향을 완화함으로서 “노동계급의 분열”을 회피하기 위한 새로운 노동조합의 인터내셔널을 건설하고자 하는 이들과, 더 공고하게 혁명적 노선을 가진 이들 사이의 차이가 표면화되었다. 회의가 종료될 때, 혁명적 조합주의의 기본적 입장을 담은 원칙의 선언이 채택되었다. “자본주의적 예속과 국가의 억압”이 부정되었다. “계급투쟁”이 사적 소유와 노동자의 연대의 불가피한 결과물이라 선언되었다. 이 문건은 자유 연합에 기반한 독립적 산별노조의 건설을 통해 매일의 필요를 위한 투쟁과 자본주의/국가의 철폐를 위한 투쟁 모두를 지향해야 한다는 선언을 포함하고 있었다. 노동자의 조직이 “정치적/종교적 차이가 만들어낸 분할책동을 극복해야 한다는 원칙은 유지되었다. 이 선언은 노동조합이 자산의 사회화를 이루어내고, 생산을 사회 전체를 위해 운영하는 기구가 되어야 한다는 관점을 드러내었다. 직접행동이 투쟁의 수단이라 인지되었다. 무엇보다, 이 총회는 새로운 조합주의 인터내셔널의 건설을 향한 결정적인 일보가 되었다. 총회는 국제적 연대를 부르짖었으며, 국제 조합주의 정보국을 건설하여 상호간의 소통과 협력을 보조하고 다음 회의의 준비를 담당하기로 하였다. 정보국의 본부는 그 본부를 파리에 두려는(그렇게 하여 CGT의 통제 아래에 두려는) 데 암브리스의 시도에도 불구하고, 네덜란드의 전국노동사무국(Nationaal Arbeids-Secretariaat, NAS)가 제공하기로 하였다. 정보국은 게릿 반 에르켈을 회장으로 하여, 서기인 토마스 마르크만, 재정담당자 A.J.후스, M.A. 반 데르 하그, 그리고 F. 드류스로 구성되어 1914년 1월부터 공식적인 업무에 들어갔다. 노동자 아나키스트와 혁명적 조합주의자들의 더 큰 단결은 수개월 뒤 발발한 1차 세계대전에 의하여 방해되었다. 1차 세계대전은 혁명가들의 모순과 비일관성을 보여주었다. *** 4장 : 1차 세계대전 중의 혁명적 조합주의 1차 세계대전은 조합주의자들의 국제주의적, 반군국주의적 입장에 대한 중대한 시험이었다. 일부(알렉산더 버크만, 안토니오 베르나르두, V. 가르시아, A. 샤피로, 빌 샤토프)는 에리코 말라테스타와 엠마 골드만과 함께 전쟁에 반대하는 성명에 연명하여 전쟁이 양측 모두의 공격성에 의한 것이라 격하했다. 이들은 그들의 목적이 “반란을 촉발시키고 혁명을 조직”하는 것이라고 선언했다. 다른 일부는(이를테면 크리스티안 코르넬리센과 같은) 표트르 크로포트킨, 장 그라브, 샤를 말라토, 그리고 다른 유명한 아나키스트 수명과 함께, 독일의 제국주의가 “더 큰 악”이라고 바라보면서 협상국을 지지했다. 프랑스에서 혁명적 조합주의의 약화는 전쟁 전부터도 목격되었다. 산업화의 진보는 생활 조건의 일시적 안정과 다소간의 임금 인상을 가져왔다. 파업은 더욱 평화로운 성격으로 이루어졌으며, 노동자와 노동조합들 중에는 협상을 통해 문제를 풀고자 하는 경향이 등장했다. CGT의 지도부(사무총장이었던 레옹 주오, 피에르 모나트 등)는 점점 더 산업적 발전의 현실을 고려하도록 내몰렸다. “1910년 이후 혁명적 조합주의자들의 이데올로기적 가식과 CGT 조합원들의 실질적 행동은 점점 더 벌어지기 시작했다. 미래를 향했던 아미엥의 합의는 더 이상 의미가 없었다.” 전쟁은 프랑스 혁명적 조합주의의 재앙을 더욱 심화시켰다. CGT의 연방국은 전쟁에 반대하는 총파업을 조직하기는커녕 “조국의 수호”를 부르짖었다. 전쟁 기간 동안, CGT의 대표자들은 다양한 국립 “혼성 위원회”에 협조했다. 그러는 와중, 알퐁스 메하임과 피에르 모나트가 이끄는 반전파가 표면화되었고, 라 비 우브리에(La Vie Ouvriere)라는 신문 중심으로 조직되었다. 그 다음 해, 좌파 혁명적 조합주의자들은 조합주의 방어 위원회(Comité de Défense Syndicaliste, CDS)를 결성하여 “아미엥 헌장”에 명시된 바 극단적인 반전주의적 입장을 취하였다. 그리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전쟁에 반대하였던 좌파 사회주의자들로부터 독립성을 상당히 유지할 수 있었다. 1917년, CDS는 노동자들의 파업 행동을 지지했으며, 노동의 집약화와 생활 조건의 악화에 반대하는 목소리를 높였다. 이탈리아에서 전쟁에 대한 입장의 문제는 USI의 분열을 낳았다. 사무총장 A. 데 암브리스가 이끄는 그룹은 참전을 지지했다. 이들은 참전이 이탈리아의 “혁명화”를 촉발할 것이라 보았다.(이 입장은 “혁명적 개입주의”라 지칭되었다.) 하지만 USI의 다수 구성원들과 조직들은 이 입장을 지지하지 않았다. 새로운 사무총장으로 아르만도 보르기가 선출되었다. 1915년, USI는 전쟁에 반대하는 총파업을 의결했다. 하지만 그것을 집행할 수는 없었다. “개입주의”의 후예들은 다수 노동조합들에서 제명되었다. IWW의 미국인 조합주의자들은 참전에 반대하는 적극적인 투쟁을 시작했고, 정부와 민족주의자들로부터 잔혹한 처벌을 받았다. 1915년, IWW의 유명한 활동가인 조 힐이 사형당했다. 1916년에는 민족주의적 광풍 속에서 5명의 조합원이 경찰에 의한 총격을 당했다. 1917년에는 애리조나의 광산 파업과 관련하여, 1,200명의 IWW 조합원들이 뉴 멕시코 사막으로 추방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IWW는 1915년 캘리포니아 휘틀랜드나, 1916년 미네소타 메사비 레인지에서의 대규모 파업에 조력할 수 있었다. 1917년 봄에는, IWW는 사업장 내의 행동과 사보타주를 조직하여, 목공과 구리광산 산업(전쟁에 필수적인 산업)에 손상을 입혀내었다. 1916년부터 1917년까지 IWW의 조합원 수는 40,000명에서 75,000명으로 늘어났고, 1917년 여름이 끝날 즈음에는 125,000명에서 250,000명 사이로 늘어났다. 독일에서의 조합주의 운동은 전쟁의 시작과 함께 마비되었고, FVdG와 그 기관지는 금지되었다. 영국에서 역시 특별하게 활동적인 일은 벌어지지 않았다. 전쟁이 지속될수록, 노동자의 삶은 더욱 끔찍해졌다. 많은 나라들에서 파업이 타올랐고, 단식 투쟁 역시 이어졌다. 아나키스트들과 조합주의자들은 이러한 투쟁들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1918년 5월, 프랑스에서 혁명적 조합주의자들의 회의에서 전쟁에 반대하는 혁명적 총파업을 결의했다. 이 시위에서 특히 적극적인 역할을 한 것은 루아르와 파리 지역의 금속노동자들이었고, 이들의 투쟁은 군수산업에 지대한 피애를 입혔다. 이 운동은 탄압되었고, 활동가들은 전선으로 내몰렸다. 그리고 조합주의 방어 위원회의 지도자 레이몽 페리카는 국가반역죄로 고발되었다. 1916년, (중립국이었지만, 경제적으로 전쟁에 휘말렸던)스페인에서 전국의 노동자들은 생활 물가 인상에 반대하는 시위에 나섰다. 스페인은 마비되었다. CNT는 사회주의자들의 일반노동조합(Unión General de Trabajadores, UGT)와 “혁명적 동맹”을 체결했다. 1917년 5, 6월 스페인은 혁명의 문어귀에 섰다. 8월에는 유래를 찾아볼 수 없는 규모의 총파업이 무장투쟁을 동반하여 발발했다. 수일간의 전투 끝에 이 투쟁은 진압되었다. 포르투갈에서 발발한 물가 인상과 실업률의 증가에 저항하는 시위는 자발적인 성격을 가진 저항행동으로 발전해나갔다. 1914년 9월, 리스본에서 소요가 불타올랐고, 최초의 사망자가 나왔다. 1915년 봄, 실업자들이 농업부를 포위하고 파괴했다. 노동조합은 폭동과 아수라장을 파업으로 조직했다. 1917년에는 혁명적 조합주의자들이 UON에서 사회주의자들을 완전히 압도하면서 주도권을 잡았다. 첫 번째 충격 이후 평정을 되찾는 과정에서, 아나키스트들과 혁명적 조합주의자들은 일상적인 국제 연대를 재건하고자 노력했다. 1915년, 국제 반군국주의 회의가 스페인의 갈리시아 지역에서 조직되었다. 이 회의에는 스페인 노동계급 아나키스트의 이름난 분자들(이를테면 앙헬 페스타냐, M.안드레우, 프란시스코 미란다 콘차, 호세 로페스 보우사, 에우제비오 카르브, 엘류테리오 퀸타니야 등)뿐 아니라, 포르투갈, 프랑스, 잉글랜드, 이탈리아, 브라질, 아르헨티나, 쿠바 등지의 대표단들도 함께 하고 있었다. 이 회의에서 국제적 총파업의 의제가 다루어졌다. 회의는 스페인 CNT의 재생에도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1916년 12월, 중립국이던 네덜란드의 NAS는 전 세계의 노동자 조직을 소환하여 혁명적 조합주의의 국제 회의를 개최하고자 하였다. 하지만 이는 종전까지 집행되지 못하였다. 노동자 조직이 1차 세계대전을 막아내지 못했다는 사실은, “중립적” 조합주의의 무능은, 노동대중 사이에서 증대하고 있던 혁명적 감정은 조합주의 운동의 변화가 시급하게 필요하도록 만들었다. 알렉산드르 샤피로는 이후 “세계대전은 중립적 조합주의를 청산했다”고 기록한다. 많은 활동가들이 조합주의는 그 자체로 충족적이지 않으며, 스스로 조직된 노동자의 운동을 명확한 혁명적 이상으로 추동되는 직접행동과 결합할 필요를 느끼게 하였다. ** 2부 : 아나키즘적 조합주의 *** 5장 : 혁명의 시기 1917년 러시아에서 시작한 혁명의 파랑은 서서히 전세계를 뒤덮었다. 아나키스트와 조합주의자들은 투쟁들에 적극적으로 참여했고, 혁명적 행동의 최전선에 있었다. 노동자들의 일반적 열정과 대규모 자기조직은 자유의지주의적 노동운동의 새로운 추동력이 되었다. 1917년부터 1918년까지 러시아의 아나키즘적 조합주의자들은 신문 <골로스 트루다>와 <노비 골로스 트루다>를 중심으로 모였다. 그리고 1918년, 그들은 두 번의(8-9월과 11-12월) 전러시아 총회를 개최했다. 1920년, 러시아 아나키즘적 조합주의자 총연맹(Rossiyskaya Konfederatsiya Anarkho-Sindikalistov, RKAS)가 건설되었다. 우크라이나에서는 마흐노우슈치나 운동에 지대한 영향을 준 우크라이나 아나키스트 조직 총연맹 : 나밧의 건설에 아나키즘적 조합주의자들이 참여하였다. 자유의지주의자들은 공장위원회와 독립적 노동조합들로부터 상당한 지지를 받았다. 1917년 말, 1918년 초에 자유의지주의자들은 돈바스강 유역 데발체베에서 25,000~30,000명의 광부들을 IWW의 강령에 기반하여 조직해내었다. 이들은 시베리아 체렘호보의 광부들을, 쿠반과 노보로시스크 지역의 항만노동자들과 시멘트 산업 노동자들을, 철도 노동자들을, 향수 산업 노동자들을 조직했다. 1918년 아나키즘적 조합주의자들은 모스크바, 하르키우, 키예프의 제빵노동자들을 지원했다. 페트로그라드의 전신-우정 노동자들을 지원했다. 볼가 지역의 수운 노동자들을 지원했다. 이 조직들 중 일부는 백군에 의하여 분쇄되었고, 일부는 볼셰비키 정권에 의하여 병합되거나 활동가에 대한 직접적 탄압을 겪으며 무력화되었다. 아나키즘적 조합주의자들은 1918년의 1차 범러시아 노동조합 총회에서 80,000 조합원들을 대변할 수 있었지만, 1919년의 2차 총회에서는 53,000명의 조합원들을, 1920년의 3차 총회에서는 최대 35,000명의 조합원들만을 대변할 수 있었다. 일부 조합주의자들을 볼셰비키 정부로부터 자주적인 노동총연맹을 조직하고자 하였으나, 이는 진압되었다. 1922년에는, 아나키즘적 조합주의자들이 건설한 노동조합들은 해산되었고, 그들의 출판 조직은 폐쇄되었다. 1920년 11월부터 12월 사이에 아나키즘적 조합주의 운동의 지도적 활동가들이었으며, 마흐노우슈치나 운동에 참여하였던 브세폴로드 볼린, 아론 바론, 마르크 므라흐니 등이 체포되었다. 1921년 3월에는 그리고리 막시모프가 체포되었다. 타간스크 감옥에서 벌어진 10일간의 단식투쟁과, 적색노동조합 인터내셔널의 1차 총회에 참석하고자 왔던 외국 대표단의 항의에 힘입어, 볼린, 막시모프, 므라흐니와 그들의 동지들은 1922년 1월, 소비에트 러시아에서 추방되었다. 또 다른 저명한 아나키즘적 조합주의자였던 알렉산드르 샤피로는 1922년 여름 베를린에서의 조합주의자 회의에서 돌아온 이후 볼셰비키 정권에 의하여 체포되었다. 해외에서의 여러 항의들에 힘입어, 그 역시 추방되었다. 독일에서 아나키스트들은 평의회운동에 참여했다. 저명한 아나키스트 구스타프 란다우어와 에리히 뮈삼은 바바리아 소비에트 공화국의 집행기구에 참여했다. FVdG는 1918년 11월 혁명 직후부터 활동을 재개했고, 기관지 데어 신디칼리스트를 펴내기 시작했다. FVdG는 “공식 정당들의 정치에 대한 환상에서 깨어나 급진적 조합주의자라고 스스로를 정의하는 노동자들의 유일한 조직적 대안이라고 자임했다.” 조합주의자들은 평의회 운동의 좌익을 자처하면서 평의회 운동이 정당운동처럼 되어서는 안되며, 경제적 기능의 운영을 스스로 확보하는 것이 되어야 한다는 입장을 취했다. FVdG의 기관지는 “노동자 평의회는 기업의 모든 예결산에 대한 통제력을 가져야 하며, 주문을 받고 원자재를 주문하는 과업에 적극적으로 참여해야 한다. 이렇게 함으로서 노동자 평의회는 노동자들의 이익을 위하여 행동하는 것이 아니라 사회 전체를 위하여 행동하게 될 것이다. 지난 분석에서, 노동자들이 생산수단의 유일한 주인이 될 때, 비로소 그들의 인간성을 완성할 수 있을 것이”라고 강조한다. 독일 조합주의자들은 뮐하임의 튀센 공작기계 공장에서의 노동자 평의회에 영향력을 가지고 있었고, 뮌하임의 노동자-군인 평의회에서도 영향력을 가지고 있었다. 이러한 영향력을 바탕으로 그들은 함보른의 파업투쟁에서 결정적인 역할을 맡았고, 뮌헨 소비에트에 참석할 수 있었다. 평의회 운동이 약화되어 바이마르 공화국의 체제에 편입된(기업 평의회에 관한 법률이 제정된 1920년 2월 4일)이래, FVdG는 평의회가 자본주의 사회 내에서 확산하고 발전할 가능성을 환상이라 여겼다. 조합주의자들의 영향력은 1919년 4월의 루르 총파업에 대한 폭력적 진압 직후 빠르게 상승했다. 1919년 12월에는, FVdG는 독일자유노동조합(Freie Arbeiter-Union Deutschlands, FAUD)로 형태를 변경했다. FAUD의 창립 총회 당시에는 약 112,000명의 노동자들이 가입되어 있었다. FAUD는 반혁명을 다시 되돌리기 위한 총파업을 호소했지만, 큰 반응을 얻어내지 못했다. 1919년부터 1920년 사이 루르에서 발발한 급진적 파업의 과정에서, 조합주의자들의 직접행동이라는 방법론은 자주 사용되었다. 1920년 3월, 카프 폭동에 대항하는 총파업은 여러 지역에서 무장 봉기로 발전하였다. 그리고 “폭동주의”를 경계했던 중앙 집행위원회의 조심스러운 태도에도 불구하고, FAUD의 지역지부들은 그 투쟁들을 지도했다. FAUD는 에센, 뮐하임, 오버하우젠, 뒤스부르크, 도르트문트의 노동자 평의회에 참여했다. 뮐하임과 함보른에서, 공장 평의회들은 FAUD의 조언에 따라 튀센 대공장의 통제력을 확보했다.(혹은, 공장을 “사회화”했다.) “루르의 붉은 군대”의 45%는 FAUD의 조합원이었다. 튀링겐의 산업도시 죄메르다에서 조합주의자들과 좌파 공산주의자들은 소비에트 공화국을 선포했다. 이 운동은 잔혹하게 진압되었지만, 이 혁명적 시기를 거치며 FAUD 조합원의 수는 계속 증가했다. 1921년, FAUD에는 150,000명의 조합원이 있었다. 1921년 3월, 베를린의 중앙 집행위원회의 부정적 태도와 달리, FAUD의 튀링겐 지역 조합원들은 좌파 공산주의자들과 함께 무장봉기에 나섰다. 혁명의 물결은 썰물처럼 빠져나갔고, 정부의 탄압이 시작되었다. 그리고 이는 FAUD 조합원의 수를 급격히 줄였다. 1922년 FAUD의 대의원대회당시에는, 단지 70,000명의 조합원 만이 대표되었다. 하지만 FAUD는 특히 지역 층위에서는(루르와 라인란트의 광업노동자들이나 금속노동자, 베를린의 건설노동자, 중부 독일 지역 등) 여전히 중요한 세력으로 남아있었다. 1923년, 대공황과 프랑스-벨기에 군에 의한 루르 강점이 불러온 혁명적 열기 속에서, 아나키즘적 조합주의자들은 많은 파업을 조직했고, 실업자들의 시위를 조직했으며, 이를 통하여 총파업과 사회혁명을 부르짖었다. 하지만 경제 공황과 대규모 실업은 FAUD의 힘을 깎아내었고, 그 대오는 30,000명으로 줄어들었다. 이탈리아에서는 1919년 여름에는, 혁명적 조합주의자들의 노동조합인 USI가 탄압을 이겨내고 스페지아의 파업투쟁과 볼로냐의 48시간 총파업을 성사시켰다. USI는 노동자들이 공장을 장악할 것을 권고했다. 1919년 12월 파르마에서 열린 3차 회의에서, USI는 “국가의 안티테제로서” “자율적이고 자유로운” 평의회를 제안했다. 이 평의회들은 노동자들의 방위기구이자 다가올 사회의 행정기구가 될 것이라 인지되었다. USI는 노동자들이 주도적으로 공장평의회를 건설하는 것을 지지하였고, 이로서 노동자들의 개량주의적 “타락”에 빠지지 않을 것이라 주장했다. 1920년 2월, USI에 소속된 금속노동자들은 세스트리 포넨테와 인근 도시의의 공장들을 점거하고 이를 운영할 평의회를 두었다. 3월에는 노동자의 반란이 토리노까지 퍼져아갔고, 4월에는 피에몬트와 나폴리 전역에서 소요가 발생했다. 피옴비노에서 USI 노동자들은 일바(Ilva)가 저지른 1,500명의 집단해고에 맞서 반란을 일으켰고, 도시를 점령했다. 조합주의자들은 농업 노동자들을 조직하고, 반군국주의적 시위를 조직하는 데에도 적극적이었다. 1920년 7월, USI는 사용자들의 교섭 해태와 직장폐쇄에 맞선 금속노동자들의 대규모 공장 점거를 주문했다. 8~9월에는 밀라노에서 노동자들이 스스로 무장하여 “적위대”를 건설하고, 300여개 기업을 점거했다. 이 운동은 전국으로 확산되었다. 평의회는 공장을 확보하였다. 그러나 USI보다 수배 이상 더 다수의 조직이었던, 사회주의자들이 통제하고 있는 CGL은 최소한의 약속과 개선에 만족하고 혁명을 바라보지 않으며 운동에 제동을 걸었고, USI와 그 500,000 조합원들은 홀로 투쟁을 지속하는 위험을 감수하지 않았다. 다음 해 3월, USI는 밀라노에서의 총파업을 조직하고, 수감된 조합원들을 응원하기 위해 “노동의 집”을 폐쇄할 수 있었다. 하지만 이탈리아에서 혁명의 파도는 사그라들었다. 1921년 겨울부터 봄 사이, 조합주의자들은 다른 좌파들과 마찬가지로 파시스트들의 무장 공격의 대상이 되었다. 파시스트들은 전국적으로 “노동의 집”을 부수고, 좌파적 노동조합과 정당들의 행동을 방해했다. “파시스트 폭력배들의 공격에 맞서, USI는 반동의 물결에 대항하기 위한 다층위의 행동을 조직했다. 사회적 투쟁을 더 급진화하고, 스스로 무장했다. 정당이나 다른 노동조합들의 우유부단함과 대조적으로, USI는 직접행동을 선택했다. 반파시스트 투쟁과 계급투쟁의 수위가 높은 지역에대 한 파시스트들의 체계적이고 전략적인 공격에 맞서, USI는 ‘인민의 영웅들’이라는 자경단을 건설하고, ‘노동자의 집’을 요새화하여 파시스트 폭력배들의 공격을 견딜 수 있게 하였다.” 조합주의자들과 아나키스트들은 파시스트들의 공격에 프롤레타리아트적 계급행동, 즉 파업으로 맞섰다. 하지만 이들은 이탈리아의 우익들의 전폭적인 지원을 받고 있던 파시스트들을 척결하지는 못했다. “검은셔츠단”에 맞선 투쟁을 통해 이탈리아의 노동조합들은 “노동자의 동맹”을 건설했고, 1922년 7월에는 반파시스트 파업을 선포한 것은 사실이다. 파르마, 바리 등 소수의 도시에서, 이 파업은 무장봉기로 발전했따. 하지만 개량주의자들은 이 상황에서도 또 퇴각했다. “파시즘은 저항할 수 없는 세력이 되었고, 수세에 처해있던 전제적 국가의 지배계급의 지원을 받아 앞길의 모든 장애물들을 치워낼 수 있었다. 개량주의 좌파의 모호한 행동, 공산당의 분파주의, 혁명세력의 군사적/정치적 준비되지 않음은 노동운동의 패배를 앞당겼다.” 수 개월 뒤, 1922년 10월, 파시스트 지도자인 베니토 무솔리니가 정권을 장악했다. 새로운 체제가 수립된 이후, USI에 대한 노골적인 탄압은 USI의 모든 지역 조직들을 파괴했고, 조직의 가장 열정적인 조합원들에 대한 체포와 추방이 뒤를 이었다. USI의 활동은 지하활동으로 제한될 수밖에 없었다. 스페인에서 혁명적 노동운동은 빠르게 성장했다. CNT의 새로운 조직들이 모든 곳에서 등장했다. 1918년 7월 카탈루냐 지역 회의에서 내려진 결정에 따라, 이 조합들은 지역 차원에서 “통합”되어 기업별 노조에서 산별노조의 형태에 더 가깝게 변하였다. CNT는 1백만 이상의 조합원을 가지고 있었다. 1918년 11월 아나키스트들의 전국 총회에서는 모든 자유의지주의자들이 CNT에 가입할 것이 결의되었다. 1919년 2월, “라 카나디엔세” 사에서의 파업에 대한 연대로서, 아나키스트 노동조합들은 총파업을 시작했다. 그리고 이 파업은 스페인 노동운동의 역사에서 가장 크고 가장 성공적인 투쟁 중 하나가 되었다. 이 투쟁은 지배계급들에게 두려움을 심었다. 계엄령마저도 사용자들을 구원할 수 없었다. 파업투쟁은 노동자들의 완전한 승리로 끝났다. 노동자 투쟁의 중심은 바르셀로나였다. 그 외에도, 1919년 말의 직장폐쇄에 맞선 투쟁이나 1920년 11월의 탄압에 맞선 총파업, 1923년 운수노동자들의 파업 등 대규모 사건들이 있었다. CNT는 다가올 사회 혁명 이후, 경제를 유지하기 위한 통계적 자료들을 모으기 시작했다.
이에 지배계급은 다른 전술을 준비했다. 이들은 어용(“황색”)노조를 건설하고 “피스톨레로” 갱을 이용한 백색 테러를 통해 노동운동의 활동가들을 살해하기 시작했다. 1919년 12월, 혁명적 열정의 분위기 속에서 CNT는 마드리드에서 대회를 개최하여 그 목적을 국가의 해소와 자유의지주의적(아나키즘적) 코뮌주의의 건설이라고 천명하였다. 이를 통하여 CNT는 마침내 공식적으로 “중립적 조합주의”의 개념을 부정하고 제1인터내셔널에서의 바쿠닌 분파의 전통의 올바름을 선언했다. 정부는 CNT가 만들어낸 끊임없는 파업의 파도에 대항하여 체제적 탄압을 개시했다. 1921년 3월에 이루어진 총연맹 집행간부에 대한 체포를 포함하여, CNT의 지도적 활동가들에 대한 체포가 이어졌다. CNT는 지도력을 잃었고, 지하로 스며들 수밖에 없었다. 1923년 봄, 저명한 노동계급 지도자 살바도르 세기와 프란세스크 코마스가 살해당했다. 아나키스트들과 조합주의자들은 반혁명적 테러리즘에 파업과 무장행동으로 맞섰다. 이 대치상태는 1923년 9월 프리모 데 리베라의 독재가 수립되고 독립적 노동조합 활동이 금지될 때까지 계속되었다. 프르투갈에서 혁명적 조합주의자들은 UON을 장악했고, 건설노동자들과 연대한 리스본의 총파업을 성공적으로 조직했다. 이들은 경찰과 국방군에 맞선 무장항쟁을 요구했다. 1918년 11월, UON이 총파업을 계획하고 선포하자, 건설노동자들은 무장 봉기를 부르짖었따. 이 봉기는 패배하였지만, 이것이 노동자들을 주눅들게 하지는 못했다. 1919년, 물가 인상과 실업률 증가에 맞선 노동자들의 시위는 계속되었다. 경제의 몇몇 부문에서는, 일 8시간 노동을 쟁취해내기도 하였다. 1919년 9월의 총회에서, UON은 포르투갈 노동자 전체의 단결된 조직으로 전환할 것을 결의하였다. 노동총연맹(Confederação Geral do Trabalho, CGT)가 건설되었다. 그 규약에는 혁명적 조합주의의 원칙들이 담겼다. 총연맹 내의 경향들 모두는 순수조합주의가 불충분하다는 점에 합의했다. 1922년부터 포르투갈 CGT는 노동조합 뿐 아니라, 학생과 예술가를, 임차인 조직들을, 소비협동조합들을, “조합주의적 연대조직”들을 포괄하기 시작했다. 1919년에 120,000명에서 150,000명 수준을 달성했던CGT의 조합원 수는 1922년 다소 줄었지만, 여전히 포르투갈의 조직 노동자들 중 다수를 점하고 있었다. 그들의 행동은 상당부분 자발적인 성격을 가지고 있었다. 이들은 조직적으로 갑작스럽게 시위를 몰아치고, 강력한 조직을 건설하거나 노동자들 사이의 연대를 건설하기 전에 썰물처럼 흩어지곤 했다.(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수의 파업들이 성공적으로 이루어졌다. 이는 1924년 2월, 10만 이상이 참여한 포르투갈 사상 최대의 노동자 시위를 포함한다.) 프랑스에서 혁명적 노동운동의 재건 역시 시작되었다. 프랑스 CGT의 개량주의적 지도부에 의한 파업운동의 약화는 노동조합 내 소장파가 피에르 모나트와 신문 <라 비 우브리에>를 중심으로 조직하도록 만들었다. 이 소장파는 1919년 9월 CGT 총회에서 더욱 강화되었고, 스스로의 협력체를 만들어 “혁명적 조합주의자 위원회”(Comités Syndicalistes Révolutionnaires, CSR)를 건설하고, 개별 노동조합과 “부르스 드 트라바일”에서의 영향력을 세우고자 하였다. 소장파들은 철도노동조합 내에서 그 입지를 공고히 할 수 있었다. 1920년 초, 철도 파업이 프랑스를 마비시켰다. 혁명적 조합주의자들은 5월 1일의 총파업을 조직했고, 여기에는 금속노동자, 건설노동자, 항만노동자, 광업노동자 등이 참여했다. 하지만 이러한 반란이 혁명으로 성장할 것이라는 희망은 실현되지 않았다. 1921년 9월, 리옹에서 열린 소장파의 회의에서는 CSR의 중앙위원회가 건설되었고, 그 대표자는 피에르 모나트가 맡았다. 1921년 12월, 파리에서 열린 총회에서 혁명적 조합주의자들은 CGT로부터의 분열을 선언했고, 1922년 7월에 생테티엔에서 열린 총회를 통해 “통합CGT" (Confédération générale du travail unitaire, CGTU)를 건설했다. 아나키스트들과 조합주의자들은 다른 유럽국가의 노동운동에도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스웨덴 SAC의 조합원의 수는 1920년에는 32,000명에 달했다. SAC는 주로 미장이, 건설노동자, 벌목노동자, 제지노동자, 금속노동자 등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이들은 사회민주주의적 노동조합 운동에 비해 수적으로는 적었지만, 전후 파업투쟁에 광범위하게 참여했다. 노르웨이와 덴마크의 조합주의자들의 조직은 SAC와 밀접하게 연관을 가지고 있었다. 네덜란드의 NAS는 징집과 물가 인상에 반대하는 운동에 열정적으로 참여하는 것을 통해 전쟁 기간 중 입지를 강화했다. 그리고 NAS는 전후의 파업과 시위의 물결에 복무했다. 1918년, NAS의 조합원 수는 49,000명까지 성장하였지만, 여전히 사회민주주의자의 노동조합이나 사무직 중심의 합의주의적 노동조합보다 그 규모가 작았다. 1920년부터 1922년까지 이어진 파업투쟁의 실패는 NAS 조합원 수의 축소로 이어졌고,(1922년 가을에, NAS의 조합원은 26,000명으로 줄어들었다.) 내적 부동의를 강화했다. 불가리아에 강력한 아나키스트 운동이 존재했고, 영국, 체코슬로바키아, 벨기에 등지에 분명한 조합주의적 경향성이 존재하였지만, 유럽의 다른 지역에서는 아나키즘적 조합주의에 기반한 노동조합 중앙을 건설해내지 못했다. 러시아에서 발발한 혁명의 파고와 전후 경제적 어려움은 아르헨티나의 노동자 계급 투쟁을 크게 확장시켜내었다. 이에는 FORA와 그 가맹노조들이 선도적 역할을 하였다. 이중 특기할만한 것은 1919년 1월 부에노스 아이레스에서 벌어진, 바리케이드에서의 전투와 잔혹한 탄압(“비극의 한 주”)를 동반한 총파업, 1920년 5월 수도에서 발발한 총파업, 정부군에 의해 잔인하게 진압된 1921년 파타고니아의 농업노동자들의 파업과 반란 등이 있었다. 우루과이의 FORU는 1917년부터 1921년까지의 기간 동안 지역과 전국을 가리지 않는 공고한 파업투쟁들을 연쇄적으로 조직하면서 우루과이의 파업 운동을 사실상 이끌었다. 전쟁 중 브라질의 아나키스트들은 군국주의와 이윤을 위한 식량 가격 인상에 대항한 운동의 중심에 있었다. 1917년, 상 파울루, 산투스, 리우 데 자네이루에서 거대한 총파업이 발발했다. 투쟁의 과정 속에서 노동자들은 상당한 양보를 받아내었고, 노동법이 제정되도록 하였다. 1918년 11월, 리우 데 자네이루의 아나키스트들은 반란을 일으켰고, 정부를 몰아낸 뒤 “코뮌주의 공화국”을 선포하고자 하였다. 반란은 진압되었고, 정부는 150,000명의 노동자가 가입되어 있던 친 아나키스트 노동조합 연맹을 부수어놓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나키스트들은 1920년 브라질 노동자 총연맹의 3차 총회 결과가 확인해주는 것처럼, 노동운동 내에서 입지를 유지할 수 있었다. 아나키스트 노동운동은 1924년의 군사반란 이후에야 겨우 무너트릴 수 있었다. 멕시코에서 아나키스트들은 노동계급 지도자들이 정권과 야합하는 것을, 1918년 멕시코 지역 노동조합 총연맹(The Confederación Regional Obrera Mexicana, CROM)을 창건한 루이스 모로네스를 필두로한 노동조합 활동가들의 친정부적 방침을 비판했다. 아나키스트와 조합주의자 조직들은 1921년 총회를 열고, 노동총연맹(Confederación General de Trabajadores, CGT)의 창립을 선포했다. CGT는 섬유노동자, 시내전차의 차장, 전화 교환수, 유전 노동자 등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1920년대 동안 아나키즘적 조합주의자들은 임노동자들의 파업투쟁을 선도했다. 60,000명의 조합원을 가지고 있던 총연맹은 “자유의지주의적 코뮌주의”를 지지했다. 칠레에서 아나키스트와 조합주의자들은 1921년까지 칠레 노동조합 연맹의 극좌분파로 기능했다. 하지만 아나키스트들의 관심은 1918년부터 1919년 사이 결성된 세계산업노동자연맹 칠레분과로 쏠렸다. 칠레 IWW는 1920년에는 항만, 선원, 건설, 제화 등의 산업에서 25,000명 이상의 조합원을 조직하고 있었다. 칠레 IWW는 높은 물가와 식량공급의 부족에 대항한 행동들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칠레 IWW는 1927년 카를로스 이바녜즈의 군사 독재가 시작되기 전까지 학생운동을 지원하기도 했다. 라틴 아메리카의 다른 국가들에서도, 아나키즘적 조합주의에 입각한 노동운동의 선두에 섰다. 파라과이 지역 노동조합 본부는 전기 노동자들의 파업과, 아순시온에서의 총파업을 비롯한 파업투쟁을 선도했다. 볼리비아에서 1918년에 창건된 라 파스 지역 노동 연맹과 조합주의적인 광업 노동조합은 절박한 파업투쟁을 개시했다. 페루의 아나키즘적 조합주의자들(선원, 제빵, 섬유 노동자 등)은 일 8시간 노동의 개시와 물가 인상에 반대하는 공고한 투쟁을 지속했다. 1919년, 혁명적 성격을 가졌던 총파업의 파도 속에서, 페루 지역 노동자 연맹이 등장했다. 정부는 노동시간의 단축에 동의할 수밖에 없었다. 이 운동은 1930년대 중반, 군부독재에 의하여 파괴되었고, 노동조합에 대한 영향력은 공산당원과 민족주의적 개량주의자들에게로 넘어갔다. 에콰도르에서는 아나키스트들의 영향력 아래, 지역적 노동조합 연맹이 1922년에 탄생했다. 같은 해 10월부터 11월까지, 이 연맹은 과야킬에서 에콰도르 사상 최대의 총파업을 조직했다. 이 과정에서 과야킬은 상당기간 노동자들의 통제 아래에 있었다. 파업에 대한 잔혹한 탄압은 운동에 큰 타격을 주었고, 에콰도르의 노동운동은 1920년대 후반이 되어 아나키즘적 조합주의자들이 다수의 노동조합을 살려낸 후에야 겨우 회복할 수 있었다. 쿠바에서 아나키스트들과 조합주의자들은 1921년 창건된 아바나 노동조합 연맹과 1925년 창건된 쿠바 전국 노동조합 연맹의 지도부를 장악하였으나, 1925년부터 1927년까지, 헤라르도 마차도 이 모랄레스의 독재정권에게 분쇄되었다. 이는 쿠바에서 공산주의자들이 노동운동의 통제를 쥐게 만든 재앙이었다. 중앙아메리카 제국에서 아나키스트와 아나키즘적 조합주의자들은 상당기간 노동운동 조직에서 상당한 영향력을 유지했다. 이를테면 코스타리카 노동총념앵(1913~1923), 파나마 노동조합연맹(1921~1923), 파나마 노동조합총연맹(1920년대 중반), 엘살바도르 지역노동조합 연맹, 과테말라 노동조합 활동위원회(1920년대 말) 등에서 그러했다. 1 일본의 노동운동은 1차대전 후 1918년 쌀소동과 1919년~1921년 사이 몰아치던 파업의 파도 속에서 빠르게 급진화되었다. 파업투쟁의 과정에서 노동자들은 직접행동의 방법론을 광범위하게 사용하였다. 일본에서 가장 중요한 노동조합 본부였던 우애회(友愛會)에서, 아나키스트, 혁명적 조합주의자, 볼셰비즘의 지지자들은 영향력을 키워나갔다. 그들의 노력은 1920년 우애회의 총회에서 계급투쟁과 직접 행동의 방법론을 승인하도록 만들었고, 우애회는 1921년 일본노동조합총동맹으로 그 이름을 바꾸었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은 1922년, 노동운동 세력의 이합집산이 이루어졌다. 노동조합 본부의 개량주의적 지도부와 공산주의자들은 노동조합운동을 부문에 기반하여 재편하고자 했다. 이들과 가까웠던 아나키스트와 조합주의자들은 연방주의적 원칙과 노동조합의 자율성을 고수했다. 자유의지주의자들은 총동맹을 떠났지만, 상당수의 인쇄노동자, 기계노동자, 금속노동자, 전기 노동자, 도쿄 지역본부 등 상당수의 노동조합들이 그들의 영향력 아래에 남았다. 아나키스트 노동조합들의 연맹은 1923년 9월의 “대지진”이후의 탄압을 지연시킬 수 있었다. 이 과정에서 아나키즘적 조합주의 운동의 지도자였던 오스기 사카에가 살해되었다. 1926년이 되어서야 아나키즘적 코뮌주의의 원칙을 승인한 노동조합 본부가 등장했다. 전국노동조합자유연합회(全国勞動組合自由連合会)가 그것이었다. 연합회는 1930년대 중반까지 존재하다가 정부의 탄압으로 해소되었다. 중국에서의 첫 번째 근대적 노동조합은 1910년대 광저우에서 아나키스트들이 조직했다. 그리고 아나키스트들은 최초의 파업 역시 조직했다. 1920년대 초, 광저우의 노동조합들은 아나키스트의 영향 아래(이 영향력은 항만 노동자와 서비스 노동자들 사이에서 특히 강하였다) 화공호조회(華工互助會)로 단결하였지만, 1923년부터 1924년 사이 분열하였다. 1920년 11월, 아나키스트들의 주도하에 호남노공회(湖南勞工會)를 건설하여 중공업과 경공업을 막론하고 노동자들을 조직했다. 하지만 1922년 1월, 호남노공회는 지방정부에 의하여 분쇄되었고, 지도부는 처형되었다. 1920년대, 아나키즘과 조합주의 운동의 중심은 상하이로 넘어갔다. 이곳에서 1924년 3월 아나키스트와 다른 비공산당계 노동조합들이 노동조합연맹을 건설했다. 이 노동조합은 파업투쟁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하지만 1927년 국민당이 연맹의 통제력을 탈취했다. 1926년, 아나키스트들과 아나키즘적 조합주의자들은 민봉사(民蜂社)를 창립하고 IWA에 가맹했다. 이 조직은 국공내전 시기를 견뎌내며 1920년대 말까지 존속했다. 극동의 피식민국가 다수에서 사회적 투쟁의 중심은 민족국가의 독립을 획득하는 것이었기에, 아나키스트들의 반국가주의적 표어는 널리 퍼지지 못횄다. 인도에서 온 만다얌 파타사라티 티루말 아차르야가 이끄는 혁명적 이민자 집단은 아나키즘적 조합주의의 입장을 취했다. 이 조직은 인도의 노동조합 내에서 일하고자 작업을 취하고자 했으나, 이들의 선전은 대영제국의 식민정부에 의하여 탄압되었다. 조선과 대만의 아나키스트들은 일본의 동지들에게 강하게 영향을 받아, 1920년대 동안 다수의 노동조합과 지하조직을 건설했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해산되었다. 말레이시아와 다른 동남아시아 국가에서는 1920년대 동안 중국인 노동자들의 아나키즘적 노동조합들이 활동했다. 전후에는 조합주의 운동의 특이점이라 할 수 있는 IWW의 활동이 증대했다. IWW는 유럽의 조합주의자들처럼 노동조합이 혁명을 수행하고 스스로 주도권을 가진다는 사상에 동의했고, 직접행동의 전술을 채용하며 의회주의와 정댕에 비판적이었다. 하지만 이들은 연방주의를 부정하고, 대신 모든 “원 빅 유니온”을 건설하여 산별 지부로 분할하고자 했다. IWW에서 아나키스트들은 중요한 역할을 맡지 않았다. 오히려 다양한 좌익 맑스주의 정당의 활동가들이 더욱 많은 역할을 맡았다. 미국에서는 1917년부터 1920년 사이 IWW의 조합원들이 정부로부터 지대한 탄압을 당했다. 캐나다에서는 다른 산별노조주의적 노동조합 본부, 원 빅 유니온(One Big Union, OBU)이 건설되어 캐나다 서부에서 강력한 총파업을 선도했다. 북아메리카 IWW와 OBU는 아나키즘적 조합주의의 노선을 따라 발전한 것이 아니었다. 호주와 뉴질랜드에서, IWW의 초기주체들이 기존 노동조합들 안에서 작업을 수행했고, 그들이 산별 기반으로 연합하고, IWW의 원칙을 수인하도록 추동했다. 이들은 1차 세계 대전 중 심각한 탄압을 당했고, 결과적으로 많은 지도적 활동가들이 공산당에 입당했다. 남아프리카공화국에서는 산별노조주의자들이 IWW(1910~1914), 국제사회주의자동맹(1915~1921), 산업사회주의자동맹(1918~1921)을 중심으로 집결했다. 이들은 1921년부터 1922년까지 이어진 광산 파업을 포함한 대규모 파업을 조직했고 “백인”과 “흑인”과 인도인 노동자들의 활동적 노동조합 다수를 조직했다. 하지만 1921년 이후, 남아프리카공화국의 산별노조주의자 다수는 공산당에 입당했다. 콜롬비아와 베네수엘라에서는, 1920년대 중후반이 되어서야 아나키즘적 조합주의 경향이 유의미한 영향력을 가지기 시작했다. *** 6장 : 혁명적 조합주의에서 아나키즘적 조합주의로 러시아 혁명은, 노동운동이 사회개량주의에 대한 혁명적 대안이 될 수 있을 것이라는 것을 제시하는 것처럼 보였다. (당 관료들이 일하는 국가 기구가 아닌, 비정당적 자주적 조직이자 생산을 자주경영하는 노동자의 기구이며, 지역적 삶의 조직기구인)소비에트라는 개념은 많은 아나키스트들과 조합주의자들이 추구하는 체제를 구상하는 데에 있어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다수의 자유의지주의자들은 러시아 혁명에 매료되었다. 이들은 러시아 혁명에서 실제로 일어나는 일보다는, 일어났으면 하고 바라는 일에 더 집중하였다. 말라테스타의 말에 따르면, 자유의지주의자들은 프롤레타리아 독재를 정부 체제로 해석하지 않고, “노동자가 토지와 생산수단을 수용하기 위한 혁명적 행동이라고, 계급도, 착취도, 억압도 없는 사회와 삶을 조직하는 시도라고 바라보고 있습니다. (...) ‘프롤레타리아 독재’는 모두의 독재가 될 것이고, 결과적으로 독재가 아니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모두에 의한 정부는 더 이상 역사적으로 권위주의적이고, 실질적 의미에서의 정부가 아닐 것이기 때문입니다.”[56] 일부 자유의지주의자들의 분파(“아나키즘적 볼셰비즘”)는 볼셰비키의 “프롤레타리아 독재”가 사회의 아나키즘적 조직을 향해 가는 중간 단계라고 바라보았다. 이로부터 수년이 지나서야 아나키스트와 조합주의자들이 “소비에트의 권력” 뒤에 숨어있는 당-국가 독재를 눈치챌 수 있었다. 혁명적 조합주의자들은 아나키즘과 볼셰비즘 중 하나를 선택할 필요가 있었다. 혁명적 조합주의 운동의 지향과 목적의 문제가 국제적 운동 통합 과정의 핵심이었다. 1918년 말, 네덜란드와 독일의 조합주의자들은 다시 한 번 국제 회의를 개최하고자 하였지만, 1912년 2월 코펜하겐에서 열린 회의에는 스칸디나비아 지역의 대의원들만이 참여할 수 있었다. 1919년부터 1920년까지 네덜란드와 스웨덴에서 총회를 개최하고자 했지만, 이는 실패로 돌아갔다. 이러한 와중, 볼셰비키들은 공산당과 유럽 각국의 조직들과 함께 코민테른의 창설을 선포했다. 많은 아나키스트들과 혁명적 조합주의자들은 이 국제연대체가 사회민주주의 좌익뿐 아니라, 자유의지주의자들에게도 충분히 매력적인 것이라고, 혁명적 원칙에 대한 맑스와 바쿠닌의 역사적 합의와 같은 것이라고 보았다. 루이 레이몽 페리카가 이끌고 있던 프랑스의 조합주의 방어 위원회(Comité de Défense Syndicaliste, CDS)는 코민테른 가입을 선언했다. 이탈리아의 USI도 1919년 7월에 코민테른 가입을 선언했으며, 이는 12월에 총회를 통해 의결되었다. 심지어 스페인의 CNT도(“진정한 노동자의 인터내셔널”을 조직하기 위한 총회를 준비하면서 “임시적으로”) 그러했다. 미국 IWW의 빌 헤이우드나 영국 혁명적 조합주의의 전위였던 톰 만 등 앵글로색슨 조합주의의 저명한 지도자들도 공산당에 입당했다. 물론 일찌감치 볼셰비키와 프롤레타리아 독재에 대하여 날카롭게 비판했던 아나키스트들도 있었다. 이를테면 이탈리아의 루이지 파브리나 독일의 루돌프 로커가 그러했다. 1919년에는 스웨덴의 혁명적 조합주의자들(SAC)이볼셰비키의 사회민주주의적 중앙화에 대한 회의주의가 도출되었다.[57] 하지만 볼셰비즘의 영향력에 대한 저항의 중심은 독일의 혁명적 노동조합 FAUD였다. 1918년 12월, FAUD는 혁명적 사회주의자들과의 협력을 부르짖었다. FAUD에는 공산당을 지지하거나, 심지어 당원인 사람들도 있었다. 1919년 봄, FAUD 대오에 만연하던 관점은 비정당적 “프롤레타리아 독재”를 의회주의가 아닌 평의회의 형태로 이루어내는 것이었다. 물론 이들은 여전히 생산수단의 사회화는 혁명적 노동조합에 의하여만 이루어질 수 있다는 입장을 고수했다. FVdG를 FAUD로 변경하였던 1919년 12월의 12차 총회에서, 소비에트 러시아와의 연대가 표출되었다. 하지만 바로 그 총회에서 루돌프 로커는 조합주의의 원칙에 관한 보고서를 바탕으로 토론에 참여했다. 그의 연설과 뒤이은 “조합주의 원칙에 관한 선언”은 아나키즘과 혁명적 조합주의의 통합으로서 아나키즘적 조합주의 운동의 이데올로기적 기반을 선포했다. 표트르 크로포트킨의 아나키즘적 코뮌주의의 지지자였던 로커는 아나키즘의 전통적 목표(국가, 사유재산, 분업의 철폐, 자유코뮌의 연방의 건설, 인민의 실질적 수요를 만족하기 위한 경제적 다변화)를 독일의 아나키스트 구스타프 란다우어의 ‘사회의 총체적 반란을 기다리지 않고 새로운 문화와 다가올 자유로운 사회의 요소들을 건설해 나가는 것’이라는 개념과 융합시켰다. 로커는 사회혁명은 즉발적으로 일어나는 것이 아니며, 현존하는 자본주의 사회의 틀 안에서 준비되어야 하고, 이 준비가 잘 될수록, 혁명의 수행은 덜 어려운 과업이 될 것이라고 믿었다. 로커는 혁명적 조합주의자들과 같이 노동조합이 혁명을 준비하는 기구라고 믿었다. 로커가 보기에 노동조합은 당장의 개선만이 아니라, 혁명을 위해서도 투쟁할 것이었다. 노동조합은 “자본주의 사회에서의 이행기적 산물이 아니라, 미래의 사회주의적 경제조직의 세포가 될 것”이었다. 로커는 사적소유를 “소유의 독점”이라고 부정하고, 정부를 “의사결정의 독점”이라고 비판하면서, 조합주의자들이 “토지, 작업도구, 원자재, 사회적 부의 집산화를 위해, 자유의지주의적이고 국가가 없는 코뮌주의에 기반하여 경제적 삶을 재조직하기 위해, ‘역량에 따라 일하고, 필요에 따라 분배하는’ 원칙을 위해” 투쟁하여야 한다고 말했다. 로커는 부르주아 국가, 국경, 의회주의, 정당 뿐 아니라, 볼셰비즘(정당 공산주의) 역시 비판했다. 중앙화, 국가권력의 유지, 경제의 국유화(정부에 의한 소유)는 “사회주의가 아니라 착취의 최악의 형태인 국가 자본주의”가 될 수밖에 없기 때문이었다. 조합주의자들은 정치권력을 확보하기 위해 행동하는 것이 아니라 정치권력을 타도하기 위하여 행동해야 한다. 사회주의는 위로부터의 결정으로 이루어질 수 없다. 사회주의는 생산자의, 노동자의 자주적인 조직이 정신노동과 육체노동 모두를 할 때에 이루어진다. 이는 “생산의 조직 · 기업 · 부문이 전체적인 경제적 유기체의 자율적 구성원이 되어, 상호적이고 자유로운 합의에 따라 공동의 이익을 위한 생산과 분배를 집행하는 것”을 의미한다 . 로커는 통계와 자발적 합의가 “아래로부터의 계획”의 도구가 될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는 “기업과 작업장의 조직을 경제적 평의회가 운영하고, 전반적인 생산의 조직을 산업/농업 조직이 운영하고, 소비의 조직을 노동교환소(이를테면, 지역적 층위에서의 노동자 산별 조직)를 통하여 운영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독일의 아나키즘적 조합주의자들의 주장에 따르면, 총파업은 승리하기 위하여 사유재산에 대한, 기업에 대한, 식료품에 대한, 부동산에 대한 수용을 집행할 필요가 있다. 기업의 경영은 노동자 평의회에게로 이관되어야 한다. 주거의 경영은 입주자 평의회에게로 이관되어야 한다. 지역과 기업의 대표자들이 코뮌을 구성할 것이다. 화폐와 상품경제 체제는 철폐되어야 한다. 소비의 조정(최초에는 고정된 수준에서, 차차 요구에 따른 소비로 이행)은 “노동교환소”와 입주자 평의회가 진행할 것이다. 아나키즘적 조합주의와 혁명적 조합주의의 근본적 차이는, 아나키즘적 조합주의자들은 직접행동이 아나키즘적 코뮌주의를 확보하는 “자기충족적” 수단이라고 바라보지 않았다는 것이다. 아나키즘적 조합주의 인터내셔널의 사무총장 알렉산드르 샤피로가 이후 밝힌 것처럼, “아나키즘적 조합주의는 지유의지주의적 코뮌주의에 기반한 사회혁명을 수행할 조직력으로 존재한다. 하나키즘적 코뮌주의자들이 혁명을 조직하고자 한다면, 아나키즘적 조합주의자가 될 수밖에 없다. 노동조합에 가입할 수 있는 모든 아나키스트들은 아나키즘적 조합주의에 입각한 노동총연맹에 가입하여야 한다.” 독일의 아나키즘적 조합주의자들은, 그들의 새로운 원칙이 공개적으로 반볼셰비키를 지향한 것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공산당원들과의 제한적 협력을 허용했다.그렇기에 1921년 1월, FAUD의 집행위원회는 독일통합공산당 중앙위원회에 보낸 편지에서, 사전에 요구(이를테면 일 6시간 노동이나 하도급의 철폐, 혹은 무기 생산의 거부)를 조율하고, 전술을 합의하며, 참가자들에게 평등한 의결권을 부여한다는 조건하에, 조합주의자들이 공동투쟁에 나설 것이라 밝혔다. 하지만 국가공산주의자들에게 이러한 조건은 수용할 수 없는 것이었다. 1921년, FAUD는 정당의 당원들은 조합주의 조직에 함께할 수 없음을 선포했다. 하지만 1920년까지는, 실천에 있어 협력의 가능성은 여전히 열려있었다. 1920년 여름, 각국의 혁명적 노동조합들은 소비에트 러시아의 초대에 응하여 모스크바에서 열린 코민테른 2차 회의에 대표단을 파견했다. FAUD 역시 “러시아의 소비에트 경제 체계를 학습하여, 우리가 러시아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에 대한 명확한 그림을 그릴 수 있게 하고, 우리가 독일에 있는 러시아 동지들의 경험을 평가할 수 있도록” 오스트레일리아의 폴 프리먼과 독일의 어거스틴 서치를 파견하였다. 프리먼은 이후 볼셰비즘을 옹호하였지만, 서치는 볼셰비즘을 맹렬히 공격했다. 서치는 그가 러시아 혁명으로부터 받은 인상에 대하여 시기적절한 책을 펴내었다. 서치는 정치권력의 확보, 중앙화, 독재적 국가사회주의라는 볼셰비키적 방법론을 날카롭게 비판하면서, 다음과 같이 권했다. “우리 나라에서 혁명을 하고자 한다면 볼셰비키적 방법론을 따라서는 안된다.” 코민테른의 2차 회의에는 여러 국가에서 조합주의자들의 대표단과 옵저버들이 참석했다. 스페인의 앙헬 페스타냐, 프랑스의 마르셀 버지와 베르토 렙티, 영국 노동조합 대표단을 대표한 존 태너, 그리고 IWW의 대표단 등이었다. 회의가 시작된 직후, 이탈리아 USI의 선도적 활동가였던 아르망도 보르기가 모스크바에 도착했다. 회의가 시작하기 전, 볼셰비키들은 각국의 노동조합들이 코민테른에 가맹한 공산당의 지도 아래에 있을 수 있도록, 노동조합들의 혁명적 인터내셔널을 건설하자고 제안하였다. 이 프로젝트는, 프롤레타리아의 독제를 수인하는 것 역시 포함하고 있었다. 앙헬 페스타냐, 어거스틴 서치, 존 태너는 개량주의적 노동조합에서의 활동이나 프롤레타리아 독재, 정치권력의 쟁취, 그리고 공산당에 종속된 조직으로서의 노동조합이라는 볼셰비키적 개념을 거부했다. CNT는 코민테른에 가입할 것을 결정하였기에, 스페인의 대표단은 이 계획에 서명하는 데에 동의했다. 다만, 스페인 대표단은, 볼셰비키들이 프롤레타리아 독재나 정권의 확보에 대한 모든 언급을 삭제할 것을 약속받았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페스타냐는 속았다. 합의서는 원래의 문구 그대로 출판되었고, 페스타냐의 서명이 적혀있었다. 회의 중에도 동일한 불일치지점들이 드러났다. 혁명적 노동조합들은 새롭게 건설된 “적색노동조합 인터내셔널”(프로핀테른)에 가입할 것인지에 대한 결정을 내려야 했다. 영국의 노조위원장단과 프랑스의 혁명적 조합주의자들(1920년 9월의 오를레앙 회의에서, 이들은 아미엔 헌장을 재확인하는 의미로 이러한 결정을 내린 바 있다.)은 프로핀테른에의 가입을 결정했따. 1920년 12월, 베른린에서 오랫동안 기다려온 국제 조합주의 회의가 개최되었다. FAUD(독일과 체코슬로바키아를 대표), FORA(아르헨티나를 대표)., IWW(미국), CRS(프랑스), NAS(네덜란드), 영국의 노동조합 위원장단과 노동위원회, 그리고 스웨덴의 SAC가 참석했다. 노르웨이와 덴마크의 조합주의자들과 포르투갈의 CGT는 이 회의에 대한 지지를 선언했다. 러시아 노동조합의 대표자들 역시 대표단을 파견했고, 프롤레타리아 독재와 프로핀테른(이들은 프로핀테른이 코민테른과 무관하다고 주장했다.)을 옹호할 것을 주장했다. 스웨덴과 독일의 대표단들은 모스크바의 입장에 대하여 비판하고, 러시아의 아나키스트들에 대한 처형을 비판했다. 프랑스의 대표단은 볼셰비키를 공고하게 지지했다. 네덜란드의 대표단은 분열했다. 다른 대표단들은 혁명적 노동조합들의 국제적 연맹의 형태에 대한 구체적인 요구를 부르짖었다. 이 요구들은 러시아와 프랑스를 제외한 모든 대표단들에게 승인되었고, “베를린 선언”이라 알려지게 되었다. 이에 따라, 프로핀테른은 계급투쟁에 기반하고, 자본주의적 체제의 지배를 청산하며 자유코뮌주의 사회의 건설을 그 목적으로 두어야하게 되었다. 또한 노동계급의 해방은 반드시 경제적 투쟁을 통하여 이루어질 것이며, 생산과 분배의 조율은 프롤레타리아트의 경제적 조직의 과업이 되어야 한다는 것에 동의할 것을 요구받았다. 노동조합 인터내셔널이 정당이나 정치조직과 협업할 수는 있겠지만, 모든 정당으로부터 완전한 독립성을 보장받아야 함 역시 강조되었다. 모든 혁명적 조합주의 조직이 모스크바의 프로핀테른 회의에 참석할 것을 요구받았다. 국제 조합주의 정보국이 암스테르담에 건설되었다.(네덜란드의 베르타르드 란싱크가 사무장을 맡았고, 독일의 루돌프 로커나 영국의 존 태너 역시 이에 참여했다.) 볼셰비키와 서유럽의 공산당들, 그리고 모스크바의 조직위원회는 혁명적 조합주의자들이 공산주의자들의 방패 아래에 있는 새로운 국제 노동조합 협회에 참여하도록 설득했다. 독일의 FAUD는 이에 대한 반대의견의 중심에 있었다. 그렇기에 독일 공산당의 노동조합 부문은 지역당협과 FAUD 내부 당협 들에게 FAUD와 “투쟁하여 굴복시킬 것”을 명하는 지침을 하달했다. 공산주의자들은 수단을 가리지 않고 FAUD에서 탈퇴할 것을 종용했다. 독일의 아나키즘적 조합주의자들은 모스크바 회의에 대표단을 파견하지 않았다. 프랑스에서는, CGT의 내부 반대파가 존재했다. 공산주의자들은 CGT 내에 “ (1) 아나키즘적 조합주의자들, (2) 아1906년 아미엥 강령으로 돌아가고 싶어하는 구세대 조합주의자들, (3) 공산주의적 조합주의자들의 세가지 경향성이 있다.”고 분석했다. 모스크바는 세번째 경향성이 모스크바를 지지하여 첫 번째 경향성을 무력화할 것을 기대했따. 그럼에도 불구하고 CRS 중앙위원회의 사무장이던 피에르 베스나르는 볼셰비즘에 반대하는 입장을 취했다. 스페인 CNT의 새 지도부(호아킨 마우린, 안드레스 닌 등)은 모스크바에 합류하고자 했다. 이들은 이전 총연맹 집행위원회의 구성원들이 체포된 이후인 1921년 4월, 바르셀로나에서 열린 총회에서 수뇌부가 되었다. 이들은 모스크바에 “우리 총연맹의 일부 분파는 적색노동조합 인터내셔널에 참여하는 것을 반대한다. 하지만 CNT가 프로핀테른에 가맹하는 것은 우리의 공고한 희망”이라고 밝히는 편지를 쓰기도 했다. 1921년 7월, 프로핀테른의 회의에서, 공산주의자들은 그들에게 유리하였던 대의제 체제에 힘입어 과반을 확보하는데 성공했다. 1920년 베를린 회의에 참가했던 혁명적 조합주의 조직들은 FAUD를 제외하고는 모두 대표단을 보냈다. 하지만 알베르 르모앙이 제안한 바, 프로핀테른이 코민테른에 종속되어서는 안 된다는 안건은, 프랑스 조합주의자들과 FORA, IWW, NAS, SAC, 독일 좌파공산주의 노동조합들의 지지에도 불구하고 부결되었다. CNT, USI, NAS, IWW, FORA, 프랑스와 캐나다의 조합주의자들, FORU, 독일 노동조합들이 제안한 개량주의적 노동조합과의 협업 반대 안건 역시 부결되었다. 이러한 상황 이후 조합주의 반대파는 모스크바에서 모여, “세계 혁명적 조합주의자들의 선언”을 채택하고, “전세계 혁명적 조합주의자들의 조직”을 건설할 것에 동의했다. 이 조직은 CNT, USI, CSR, IWW, SAC, NAS, FORA, 독일의 노동조합들, 덴마크, 노르웨이, 캐나다, 우루과이의 노동조합들을 포괄하여 280만명에 근접하는 조합원을 확보할 것이었다. 새로운 조직의 본부는 파리에 둘 것이 제안되었지만, 이것이 조직의 건설로 바로 이어지지는 않았다. 볼셰비키들은 조합주의 반대파의 통일전선을 찢어내는 데에 성공했다. 프로핀테른의 지도부는 스페인 CNT의 대표단과 야합했다. 이들은 공산주의자들이 사회주의적 노동조합인 UGT를 설득하여 CNT에 흡수되도록 중재하겠다고 약속했다. 프랑스 대표단은 프로핀테른의 대표단과 회의를 가지고 “아미엥 헌장”이 준수된다는 조건 하에, 즉 노동조합이 정당으로부터 독립성을 유지한다는 조건 하에 프로핀테른에 가입하는데에 합의했다. 사실상 모든 조합주의 조직이 특정한 조건이 준수되는 한 프로핀테른에 가입하는 것에 찬성했다. FORA만이 모스크바에서 대표단을 철수시켰다. 상황이 모스크바에 불리하게 바뀐 것은, 볼셰비키들이 자행한 러시아와 우크라이나의 아나키스트, 아나키즘적 조합주의자들에 대한 탄압과,(해외 조합주의자들의 대표단이 모스크바에서 이들의 석방을 요구했다.) 노동조합을 코민테른에 종속시키려는 볼셰비키의 지속적인 시도와 연관되어 있었다. 1921년 10월, 독일, 네덜란드, 스웨덴, 체코슬로바키아, IWW에서 활동하는 조합주의자들의 국제회의가 FAUD의 13차 대의원대회에 맞추어 뒤셀도르프에서 개최되었다. 이 회의에서, 무산되었던 노동조합 인터내셔널의 건설에 관한 결의안이 채택되었다. 회의이ㅡ 참가자들은 베를린 선언에 따라, 독일에서 새로운 국제총회를 개최할 것을 주장했다. 이 회의의 계획은 혁명적 조합주의자들의 국제 정보국에 위임되어 회의에 관한 적합한 국제 공람을 발행하기로 하였다. 이탈리아의 USI는 이에 응했다. 1922년 3월 USI의 4차 총회에서는, 니콜로 베키가 주장한 바 프로핀테른 가입안이 노동조합과 코민테른의 상호관계의 문제가 소비에트 영토 바깥에서 엄밀히 검토될 때까지 보류되었다. 스웨덴의 SAC의 조합원들은 코민테른에 가입하고, 공산당과 관계를 만들 수 있던 규약의 개정선언을 총투표를 통해 부결시켰다. CNT는 1921년 8월의 총회를 통해 정당으로부터의 독립성, 그리고 사회혁명과 자유의지주의적 코뮌주의 조직에 관한 원칙을 재확인했다. 새로 선출된 CNT 전국위원들은 아나키스트들로 구성되어 있었다. 1922년 6월 사라고사에서 열린 총회에서, CNT는 원칙의 문제로 코민테른에서 탈퇴하고, 조합주의자 회의에 대표단을 파견하는 결의안을 채택했다. 기본적으로, 프로핀테른에 대한 조합주의자들의 요구는 다음과 같이 축약할 수 있었다. “(1) 코민테른과 프로핀테른의 상호 대표를 취소하여 혁명적 노동조합 운동의 독립성을 담보할 것. (2) 프로핀테른의 2차 회의는 소비에트 영역 바깥에서, 러시아의 해로운 영향력 바깥에서 열려야 한다는 것. (3) 조지아, 아르메니아, 우크라이나처럼 러시아가 실효지배중인 국가에서 독자적 대표단을 보내지 못하게 할 것. (4) 프로핀테른 집행위원회의 거소를 소련 바깥에 둘 것. (5) 공산당을 포함한 모든 정당으로부터 노동조합 운동의 독자성을 보장할 것. (6) 개량주의적 노동조합에 가입되어 있는 혁명적 소수의 대표성을 거부할 것. 이를테면, 암스테르담 인터내셔널[58] 내부의 공산주의적 소장파의 대표성을 거부할 것. (7) 프로핀테른에서의 투표는, 그 조합원 수와 무관하게 1국 1대표성의 원칙을 유지할 것. (8) 각국에서의 실천과 전술에 대한 프로핀테른의 개입과 지도를 중단할 것”[59] 프로핀테른과 조합주의 사이의 공통된 토양을 찾고자 하는 노력은, 프랑스의 통합CGT가 주도했다. 통합CGT는 1922년 CGT에서 탈퇴한 좌파들에 의하여 건설되었다. 1922년 3월 8일 통합 CGT의 조합주의적 지도부는 프로핀테른의 집행위원회에 편지를 써 각국의 노동조합들이 공산당과 코민테른에서 완전한 독립성을 누릴 수 있도록 엄격히 감시할 것을 요구하면서, 이 조건에서만 프로핀테른에 가입하겠다고 전하였다. 이러한 연결망 속에서 통합CGT는 “모든 혁명적 세력의 동맹”이라는 틀 안에서 공산주의자들과 협업하기 위하여 “협업특별위원회”를 건설하였다. 스페인의 공산주의자 힐라리 아를란디스는 이 제안을 수용할 것을 강력히 주장했다. 그는 조합주의 인터내셔널 안에서. 일부 공산주의 서클 안에서, 특히 프로핀테른이 “극도로 취약하고” 러시아 아나키스트들에 의한 반볼셰비키 소요가 활발하던 라틴 아메리카에서 인기있던 이 제안을 수용함으로서 “자유의지주의자들을 최대한 빨리 무장해제 시킬 것”을 주장했다. 그는 “만약 프로핀테른의 완전한 독립성을 보장함으로서 이 반대 운동을 한번에, 완전히 끝장내지 않는다면, 우리는 이 문제를 결코 끝낼 수 없을 것이다. 오늘의 조합주의 반대파의 타협불가능한 요구는 조직적 독립성이지만, 내일 자유의지주의자들은 프롤레타리아 독재에 대한 문제를 제기할 것이다.”라고 경고했다. 프로핀테른의 지도부는 3월 10일자로 통합CGT가 모스크바에 두 명의 대표단을 보내 “공통된 이해관계에 이득이 될 모든 경향의 2차 총회의 기틀을 마련”하기 위한 교섭을 진행하자고 제안했다. 하지만 조합주의자들은 모스크바와의 교섭이 더욱 큰 규모로 이루어져야 한다고 믿었다. 1922년 3월, 이탈리아 USI의 총회는 통합CGT의 제안을 수인하고, 국제 회의를 개최하여 합의 조건을 논의하기로 결정했다. 이 국제 회의는 6월 16일부터 18일까지 파리에서 열리기로 계획되어 있었다. 이를 위하여 통합CGT의 행정위원회는 4월 28일의 회의를 통해 프로핀테른의 초대를 거절했따. 통합CGT는 적색노동조합인터내셔널의 서기장 로조프스키에게 파리에서 조합주의자들이 프로핀테른에 가입하는 것을 방해하는 “차이를 없애기 위한” “사전회의”를 진행하겠다는 결정을 통지했다. 통합CGT는 회의를 준비하고 있던 USI와 협의하여 회의의 장소를 베를린으로 바꾸었고, 이를 통하여 러시아 노동조합의 대표단이 더욱 쉽게 참여할 수 있도록 배려하였다. 1922년 5월 19일, USI의 지도부였던 아르만도 보르기와 알리브란도 지오반네티는 “러시아 노동조합의 서기”에게 6월 16일부터 18일까지 베를린에서 “국제 조합주의자 회의를 개최하여 국제 혁명적 조합주의 운동과 적색노동조합 인터내셔널 사이의 관점 차이를 학습할 것이며, 만약 이 차이가 해소되지 않는다면 혁명적 노동조합 인터내셔널을 구성할 것”을 통지했다. USI는 이탈리아, 프랑스, 독일, 스페인, 포르투갈의 노동조합들에게, 그리고 각국의 “조합주의적 소수파”들에게 초대장을 보냈다. 국제 조합주의자 회의에 참석한 프로핀테른의 대표자들에게 보낸 안내장에는, 세 가지 핵심적인 문제, 즉 정당으로부터 노동조합의 독립성, 개량주의적 노동조합에 공산주의적 분파가 있는 것을 금지할 것, 개별 조직의 내적 행동에 개입하지 말 것을 제외하고는 모든 문제에 대해 논쟁도, 양보도 가능하다고 적시되어 있었다. “우리는 이 세가지 가장 중요한 문제에 대하여 우리의 입장을 고수할 것이고, 이 조건 아래에서 우리는 공개적인 분열까지 감행할 준비가 되어 있다.” 1922년 6월 베를린에서 열린 국제 조합주의자 회의에는 프랑스, 독일, 노르웨이, 스페인, 러시아의 아나키즘적 조합주의자들, 그리고 프로핀테른을 대변하는 공식적인 러시아 노동조합이 참여했다. USI의 공산주의 분파와 FAUD에서 분열한 노동조합들은 투표권이 없었다. 소련의 대표자들은 이에 불복하여 회의를 거부했다. 다수의 대표자들은 소련에서 벌어지고 있는 아나키스트 탄압을 날카롭게 비판했다. 그리고 이것이 조합주의자들과 공산주의자들의 최종적인 분열이 되었다. 프랑스의 대표단은 내부적 의견차이로 인하여 투표에서 기권하였지만, 나머지 대표단들은 프로핀테른에서 분열하고 혁명적 노동조합들의 국제 회의를 건설할 것을 결의했다. 이를 준비하기 위하여 루돌프 로커, 아르만도 보르기, 앙헬 페스타냐, 알베르 젠슨, 알렉산드르 샤피로가 참여한 사무국이 베를린에 세워졌다. FAUD의 선언에 기반하여 원칙의 선언이 채택되었다. 이 원칙은 정당, 의회주의, 군국주의, 민족주의, 중앙집권주의를 거부했다. 이 원칙은 육체적, 정신적으로 노동하는 노동자의 경제조직이 완전안 자치를 누려야 함을, 총파업을 포함한 직접행동이 그 최대의 외부적 표출이 되어야 한다는 것을, “사회 혁명의 준비단계” 원칙을 천명했다. 혁명의 목표는 경제적, 사회적 생활의 재건이나, 사회적 삶에서 국가기능의 청산이고, 자유의지주의적 코뮌주의의 체계를 건설하는 것이었다. 프롤레타리아 독재와 볼셰비키적 방법론은 결정적으로 거부되었다. 연구자 웨인 소프의 말에 따르면, 이 선언은 “조합주의 사상에서 중대한 진보를 보여주었다. 이 선언은 1차 세계 대전 전의 유럽 조합주의에서는 은연중에 드러나던 것을, 명확하게 드러내어 확인하였다. 선언은 ‘아미엥 헌장’과 달리, 단지 정치적 중립성만을 드러낸 것이 아니라, 그동안 그저 질적으로 다르면서 적대적인 조직으로만 여겨졌던 정당들이 필연적으로 노동조합에서 영향력과 통제력을 확보하려 할 것임을 밝히며, 모든 정당에 반대함을 드러내었다. 정치적 국가에 대한 타격 역시 선언하였음은 물론이다. 짧게 말하자면, 베를린에서 채택된 이 문건은, 조합주의의 원칙을 격상시켰다.” 최소한 일부의 혁명적 조합주의자들이라도 회유하기 위하여, 코민테른과 프로핀테른의 지도부들은 두 “적색” 인터내셔널 모두에서의 상호 대표성을 철회했다. 그러면서도 그들은 공산주의자들이 노동조합에서 “지도부”가 되어야 한다는 고집은 놓지 않았다. 통합CGT의 지도부는 이 양보가 충분하다고 보았고, 프로핀테른에 가입할 것을 선언했다. 통합CGT의 자유의지주의적 소수파는 “조합주의 방어 위원회”(Committee of Syndicalist Defense, CDS)를 구성했다. 네덜란드의 NAS 지도부의 다수는 모스크바의 양보에 만족하여 새로 구성될 조합주의 인터내셔널에 참여하는 것을 반대했다. 다른 혁명적 조합주의 노동조합들은 스스로와 볼셰비키 사이의 조직적 구분을 지지했다. 1922년 10월 포르투갈 CGT의 총회에서, 55명의 지역 대표자들은 새로운 인터내셔널의 건설을 지지했고, 오직 22명만이 프로핀테른 가입을 지지했다. 이 과정에서 일부 혁명적 노동조합에서는 초기 유럽 아나키즘적 조합주의와 구세대 조합주의, 볼셰비즘 사이의 분열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고 보았다. 아르헨티나의 FORA는 다가올 조합주의 인터내셔널 창립총회에 “제안서”를 보내어, 제안된 조직 체계와 투쟁의 방법론을 완전히 지지하며, 새로운 국제 조직의 사회적 목표인 자유의지주의적 코뮌주의를 옹호했다. 하지만 FORA는 자본주의 아래에서, 자본주의적 조건에 대응하기 위해 자라나, 국가와 자본에 대한 노동자의 저항 수단으로 그 의무를 다한 노동조합이 혁명의 과정에서 새로운 사회의 기반이자 지도적인 기구가 될 것이라는 상을 거부했다. “자본주의적 생산 체계와 국가에 의한 지배를 청산한 이후, 조합주의적 경제기구는 착취와 폭압의 체계에 대항하는 투쟁의 핵심무기로서 그 역사적 역할을 마치게 될 것이다. 노동조합은 자유로운 생산자와 소비자들의 자유로운 연방과 자유로운 조직에 그 자리를 내어주어야 한다.” 또한 FORA는 노동조합의 산별 조직에 반대했다. 그들은 산별에 따른 조직형태가 자본주의를 모방한 것이라 여겼다. 마지막으로 FORA는 공산주의자들의 노동조합과의 “통일전선”에 반대하였다. 아나키즘적 조합주의 인터내셔널(혹은 “베를린 노동조합 인터내셔널”)의 최종적인 구성은 1922년 12월 25일부터 1923년 1월 2일까지 베를린에서 불법적으로 열린 창립총회에서 이루어졌다. 이 총회는 경찰의 진압과 체포로 마무리되었다. 이 회의에는 아르헨티나의 FORA, 이탈리아의 USI, 독일의 FAUD, IWW 칠레 분회, 스웨덴의 SAC, 노르웨이 조합주의자 연맹 (Norsk Syndikalistisk Forbund), 덴마크의 조합주의 선전 동맹, 네덜란드의 NAS, 멕시코의 CGT에서 참여했다. 스페인 CNT의 대표단은 베를린에 도착하기 전에 체포되었다. 포르투갈 CGT는 서면으로 지지를 표했다. 숙의 투표에 참여한 대표단에는 독일의 좌파 공산주의자들이었던 통합 독일 노동자 총연합(Allgemeine Arbeiter-Union - Einheitsorganisation, AAUD-E), 독일의 청년 아나키즘적 조합주의자, 프랑스의 CDS, 프랑스 건설노동자연맹, 센느청년연맹, 재외 러시아 아나키즘적 조합주의자 그룹, 체코슬로바키아자유노동조합, 1920년과 1922년 네덜란드와 독일에 세워졌던 국제 조합주의 정보국의 대표자들이 있었다. 이 조직들의 구성원 수를 합치면 대략 200만 정도가 되었다. 미국 IWW는 14차 연간 대의원대회를 통해, 프로핀테른에도 조합주의 인터내셔널에도 가맹하지 않기로 결정했다. 이들은 두 조직 모두가 적합하지 않다고 보았다. 네덜란드 NAS의 대표자들을 제외한 모든 대의원들은 볼셰비키의 “양보”에도, 프로핀테른에의 참여도 거부하였다. 새로운, 아나키즘적 조합주의 인터내셔널의 건설이 선포되었다. 이탈리아의 알리브란도 지오바네티의 제안에 따라, 새로운 조직의 이름은 1차 인터내셔널의 그 역사적인 이름, ‘국제노동자협의회’를 지속하기로 결정되었다. IWA의 원칙적 선언문(“혁명적 조합주의의 원칙”)은 본질적으로 1922년 6월의 베를린 선언의 반복이었다. IWA의 서기장으로 선출된 것은 루돌프 로커, 아우구스틴 서치, 알렉산드르 샤피로였다. 회의의 기록은 자본주의와 사민주의적 개량주의에 대한 분노 뿐 아니라, 볼셰비키적 “국가 사회주의”에 대한 분노도 담고 있었다. 대표단들은 볼셰비키가 러시아에서 혁명을 탄압하고 있으며, 새로운 국가자본주의 체계를 만들어 소련의 노동자들이 임노동자로 착취당하게 만들고 있다고 비난했다. 이들은 “모든 국가와 민족의 노동대중에게”라는 글을 통해 “대중을 새롭게 만들어진 정치위원-지배자 계급에 예속하기 위하여 소비에트나 협동조합처럼 인민이 자주적으로 세워낸 모든 기구를 억지로 파괴하는 볼셰비즘은 대중의 창조적인 활동을 마비시켰고, 새로운 전제정을 탄생시켰으며, 자유사상을 부수고 러시아의 정신적 생활을 지긋지긋한 정당의 잔재에 귀속시켰다”고 선언했다. 소위 “볼셰비키의 변명거리인 프롤레타리아트 독재는 새로운 상류계급이 광범위한 인민대중을 지배하는 것을 확정지었고, 모든 경향의 혁명을 죽여버렸다. 그러면서도 이는 러시아의 경제적/사회적 생활을 새로운 길로 이끌거나 사회주의의 영혼을 가진 건설적 과업을 해내지 못하였다.” 루돌프 로커가 이후에 설명한 것처럼, 아나키즘적 조합주의자들에게 볼셰비키는 “사회주의의 절대주의적 경향”의 후계자였으며, 사회적 혁명보다는 정치적 혁명에 더 관심을 가졌다는 점에서, 프롤레타리아 혁명이라기보다는 부르주아 혁명이었다는 점에서, “사회주의적 자코뱅”에 그치는 것이었다. 볼셰비즘에 대한 날선 비판에도 불구하고, 일부 조합주의자들은 혁명적 프롤레타리아트의 “통일전선”으로서 프로핀테른과의 동맹의 가능성에 대해 믿고 있었다. 프랑스 대표단은 베를린 총회에서 이와 관련한 결의안 초안을 제출했다. 회의 참가자 다수가 이에 대하여 크게 열정을 보이지 않았지만, 프랑스 동지들의 상황을 복잡하게 하고 싶지 않았기에 이에 동조해 주었다. FORA는 이러한 타협에 반대했고, 결의안에 대한 투표를 기권했다. IWA의 창립은 각 분구별 총회, 혹은 총투표를 통하여 수인되었다. 유럽에서는 FAUD, USI, SAC, CNT가 IWA의 가맹을 빠르게 결의하였다. 노르웨이에서는 인터내셔널의 건설이 총투표를 걸쳐 만장일치로 가결되었다. 1924년 10월, 포르투갈에서는 104개의 조합이 IWA에 가맹하고, 6개만이 프로핀테른에 가입했다. 네덜란드에서, 노동조합의 총투표에서 공산주의자들과 프로핀테른의 지지자들이 약간 과반수를 차지했다. 이에 IWA의 구성원들은 새로운 노동조합, 네덜란드 조합주의적 노동조합연맹(Nederlands Syndicalistisch Vakverbond, NSV)을 조직했다. 프랑스 통합CGT에서 마침내 분열한 혁명적 조합주의자의 CGT(Confédération Générale du Travail-Syndicaliste Révolutionnaire, CGT-SR) 역시 IWA에 가맹했다. 1920년대와 30년대에는, 오스트리아, 덴마크, 벨기에, 스위스, 불가리아, 폴란드, 루마니아 등처에서 IWA의 유관 조직들이 등장하기도 했다. 아메리카 대룩에서, 멕시코의 CGT는 총회를 통해 IWA 가맹을 승인했따. 1923년 12월, FORA는 베를린에서 채택한 “혁명적 단결”에 대한 결의안에 극도의 불만을 표하고, 인터내셔널에의 가입을 조건부로 돌리고, 총투표를 미루기로 결의했다. 하지만, 이 논쟁적 결의안은 폐기되었고, IWA가입에 대한 반대도 사라졌다. 우루과이, 브라질, 파라과이, 볼리비아, 콜롬비아, 페루, 과테말라, 에콰도르, 쿠바, 코스타리카, 엘 살바도르의 아나키즘적 조합주의자들도 IWA에 가입했다.(1929년, 아메리카 대륙 노동자 연합이 IWA에 건설되었다.) 일본과 중국에서도 가맹조직이 나타났다. 미국에서는 IWW 산하 해양운수산별노조가 IWA에 가맹했다. *** 7장 : 1920년대와 1930년대의 국제 아나키즘적 조합주의 운동 국제노동자협의회는 국제적 혁명의 파도가 잠잠해지기 시작했을 때에야 재건되었다. IWA의 많은 가맹조직들은 잔혹한 탄압을 마주해야 했고, 이내 분쇄되었다. 이탈리아에서 무솔리니가 권력을 잡은 이후인 1924년 4월, USI 지역지부들의 활동은 이미 무력화되었다. USI는 지하로 들어가 재조직했고, 중요한 파업들(발다르노와 엘바에서의 광산 파업, 카라라에서의 석조노동자 파업, 금속노동자들의 파업)을 이끌었다. 하지만 1927년, USI는 마침내 파괴되었고, 그 활동가들은 체포되거나 추방되었다. 포르투갈에서 군부독재가 수립되자, 1927년 2월 CGT는 총파업을 조직하고자 했다. 파업은 진압되었고, 100명에 가까운 사람들이 살해되고, 많은 활동가들은 체포되었으며, CGT는 불법화되었다. CGT는 지하에서 그 세력을 재조직해내었으며 많은 노동조합과 지부들을 재건했다. 1929년부터 1930년까지, CGT는 32개의 가맹노조와 15,000~20,000명의 조합원을 가지고 있었고, 1934년에는 7개의 가맹연맹으로 재편할 수 있었다. 포르투갈의 아나키즘적 조합주의자들은 실업과 물가 인상에 맞선, 일 8시간 노동을 위한, 노조 할 권리를 위한 가열찬 투쟁을 지속했다. 1934년 1월 살라자르 정부는 노동조합을 파시스트적 기업으로 대체하는 법령을 내어놓았고, CGT는 이에 대하여 “혁명적 총파업”과 봉기로 응답했다. 반란은 패배했다. 포르투갈 노동자들의 영웅적 저항도, CGT의 파괴를 막지는 못했다. 1920년대 말, 아르헨티나의 FORA는 최소 4만에서 최대 10만 사이의 조합원을 조직하고 있었고, 총파업과 지역파업을 성사시켜 일 6시간 노동을 쟁취하였다. 하지만 1930년의 군사쿠데타와 뒤따른 탄압이 조직을 강타했고, FORA는 이로부터 재기하지 못했다. 1923년 혁명운동의 하강 이후, FAUD의 조합원 수는 급감했다. 1929년, FAUD에는 9,500명의 조합원을 가지고 있었지만, 끔찍한 대규모 실업을 겪으며 조합원의 수는 1931년의 6,600명, 1932년의 4,300명으로 줄어들었다. 소수노조가 되어버린 FAUD는 독자적으로 파업을 집행할 수가 없었다. FAUD는 적극적인 문화사업과 선거거부 캠페인을 집행했고, 개량주의적 노동조합이 조직한 파업에 참여하여 그 파업을 더 급진적으로 만들고자 했다. FAUD는 직접행동과 연대파업이라는 수단을 통하여 나치즘의 맹공에 맞서고자 했다. 히틀러가 집권한 이후, FAUD는 1930년대 후반까지 그 지하투쟁을 지속했다. 나치는 베를린에 있던 IWA 본부를 침탈했고, IWA 사무국의 구성원들은 겨우 독일을 탈출했다. 페루, 브라질(1930년 이후), 콜롬비아, 일본(1930년대 중반), 쿠바(1925~1927 이후), 불가리아(1930년대 초에 등장한 노동조합연맹은 30년대 말에 무너졌다.), 중앙아메리카 제국에서 발생한 대규모 정부의 탄압은, 아나키즘적 조합주의에 입각한 노동조합들을 파괴했다. 파라과이와 볼리비아에서는, 차코전쟁 기간 동안 아나키즘적 조합주의적인 노동자 조직 활동가들을 추방했으며, 이 조직들은 이전까지의 수준으로 돌아가지 못했다. 프랑스에서 역시 대중성을 확보할 수 없었다. 1929년부터 1933년까지의 기간 동안의 대공황은 다수의 국가들에서 민족주의적이고 국가주의적인 감정을 키웠고, 결과적으로 운동을 크게 약화시켰다. 멕시코에서, CGT 지도부는 민족주의-개량주의 정부와 야합하였고, 국가주도의 조정전치주의 원칙을 승인했다. CGT는 IWA를 탈퇴했다. 1930년대 말, 합법적인 아나키즘적 조합주의 노동조합이 남아있던 곳은 오직 칠레(노동총연맹, 1931), 볼리비아(라 파스 지역 노동 연맹), 우루과이(FORU) 뿐이었다. FORA는 지하조직으로 활동했다. 아나키즘적 조합주의의 주요 요새는 스페인에 있었다. 1931년의 왕정 붕괴 이후 CNT의 영향력과 힘은 크게 증대했다. 1934년 6월 IWA 사무국이 CNT에 보낸 서신은 “독일, 폴란드, 프랑스 등 모든 곳으로부터, 우리 IWA 사무국은 현재 상태에 대한 보고를 받습니다. 그리고 그 상태는 다음과 같이 표현할 수 있습니다. ‘국제 파시즘은 우리의 혁명운동을 파괴하였습니다.’ 우리가 그것(파시스트적 반동)을 이겨내고 사회혁명의 희망을 둘 수 있는 유일한 곳은, 스페인입니다.”라고 적고 있다. 1931년 개최된 CNT의 첫 합법 총회에는 50만 이상의 조합원이 대표되었고, 수년 뒤 그 수는 1백만을 초과했다. 공화국 역사의 첫 1년 반 동안, 총파업 30회와 지역파업 3,600회가 조직되었다. 이 파업들은 대부분 CNT가 조직했다. 아나키즘적 조합주의자들이 조직한 농민들은 토지를 점거하고, 대규모로 토지의 사회화를 요구했다. 1932년부터 1933년까지 지역 수준의 혁명적 봉기의 파도가 스페인 전역을 휩쓸었다. CNT의 조합원들은 도시 중심부를 점유하고 자유의지주의적 코뮌주의를 천명했다. 정권은 이 운동을 진압하기 위해 무진 애를 써야 했다. 수천이 사살되거나 체포되었지만, 스페인에서 아나키즘적 조합주의의 영향력은 지속적으로 커져갔다. 반동의 공격에 맞서, 아나키즘적 조합주의자들은 전술적 문제들을 다루어야 했다. 우선, 인스부르크에서의 IWA 총투표는 창립총회에서 프랑스 조합주의자들에 의하여 제시된 결의안을 거부한 볼셰비키들의 행동을 규탄하며 공산당과의 통일전선에 대한 가능성을 부인했다. IWA의 2차 총회(1925)에서는 자유가 아닌 권력투쟁의 도구로 전락한 정당에 대한 부정적 태도를 확인했다. 앞으로 정당들과의 장기적 동맹은 IWA의 목적과 모순되는 것으로써, 불가능하게 될 것이었다. 총회에 참가한 이들은 파시즘과 볼셰비즘을 노골적인 폭력과 대규모 탄압에 의지하는 “새로운 형태의 반동”이라 받아들였다. 총회는 노동자들이 시민적 자유와 결사의 자유를 수호하기 위하여 투쟁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선언하면서도, 이 투쟁은 자본주의와 함께 철거되어야 할 민주적 체제의 일부로서 이루어져서는 안된다고 천명했다. 아나키즘적 조합주의자들은 독자적으로 행동할 것이며, 심지어 파시스트와 군부독재에 대하여 투쟁할 때에조차 공식적인 동맹은 체결하지 않을 것이다. 그저 “다른 정치세력과의 길이 겹칠 때도 있을 것”이었다. 볼셰비즘과의 투쟁에서, 다른 세력과의 협업은 용인될 수 없을 것이었다. 자유주의적 부르주아지들은, 스스로의 지배에 대한 위협과 마주했을 때, 언제라도 독재자들에게 권력을 이양할 준비가 되어있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독재에 맞선 투쟁은 통치의 체제로서 민주주의를 강화하는 방식으로 집행되어서는 안될 것이다. 총회에서 결의한 바에 따르면, 독재에 맞선 최선의 투쟁은 노동자들의 계급투쟁이다. 1931년의 4차 총회에서도, 비슷한 느낌의 결의안이 채택되었다. 무엇보다 IWA는 우사한 관점을 가진 다른 조직들(아나키스트 연합과 조직들, 반군국주의 조직들 등)과의 협업에 근거한 것이지만, 구체적인 목표를 쟁취하기 위해 다른 노동조합들과의 협업, 파업에 대한 지지, 연대 등은 허용되었다. IWA는 사회민주주의 인터내셔널이나 공산주의적 노동조합에 자주 접근하였고, 피시스트/독재 국가에서 생산된 물건에 대한 동시다발적 불매운동을 조직하거나, 파업으로 부족한 물자를 대체하기 위한 물품 수입을 저지하기 위한 파업을 조직하곤 했다. 1930년대 초, 아나키즘적 조합주의자들은 파시스트 반동에 대한 투쟁이 그 어느 때보다 시급한 문제라고 여겼다. 하지만 이들은 이 투쟁의 문제를 스스로의 사회혁명노선에 따라 접근하고자 했다. IWA가 1932년 5월 1일에 발표한 성명에 따르면, “많은 국가에서, 가까운 시일 내에, 혁명이냐, 파시즘이냐의 문제가 도출될 것”이었다. 1933년, IWA는 나치 독일에 대한 전세계적 불매를 호소했다. 스페인과 스웨덴의 IWA 가맹조직들은 독일의 물건과 선박을 바탕으로 한 업무를 거부하면서, 동시에 불매운동을 조직했다. 네덜란드에서도 이 운동을 지지했다. 하지만 프랑스에서는 반대를 표했다. 이들은 이러한 행동이 히틀러의 프로파간다로 악용될 수 있음을 걱정했다. 1933년 말, CNT에 가해진 파업은 이러한 투쟁을 끝냈다. 아나키즘적 조합주의자들은 국제적 반동에 대항하기 위하여 사민주의자들과 공산주의자들을 믿지 않고 그들의 “반파시스트”, “반군국주의” 회의들을 거부했다. 공산주의자들이 “통일전선” 건설을 제안한 이후, IWA 사무국은 이 안건을 각 가맹조직들에게 발의했지만, 결국 그 안건을 날카롭게 비판하며 부결했다.(이미 독일에서 추방당한 상태였던 FAUD만이 “반파시스트 통일전선”을 지지했다.) 1934년 5월, 사무국은 “통일전선” 조직의 가능성을 부정하는 선언문을 다시 한 번 발표했다. 이에 호응하여 파리에서 열린 IWA 5차 총회(1935)에서는 프랑스의 CGT-SR이 제출한 결의안이 채택되었다. *** 8장 : 1920년대와 30년대의 아나키즘적 조합주의 내 이데올로기적, 이론적 논의 많은 국가들에서 경험한 패배하였음에도 불구하고, 독재자들의 폭압과 공산주의자들의 정치가 아나키즘적 조합주의 운동을 무너트리려 하였음에도 불구하고, 1920년대와 30년대는 아나키스트와 아나키즘적 조합주의자들 사이의 이데올로기적, 이론적 논쟁이 활발하던 시기였다. 이 논쟁에 참여한 자들은 단지 현재 자본주의적 사회에 대한 통찰적 분석을 제시하였을 뿐 아니라, 사회적 대안의 윤곽선을 높은 통찰력으로 묘사해내었다. IWA가 생산한 모든 문건과, 그들이 내린 모든 결정은 아나키즘적 조합주의자의 단결을 강조하고 있었다. 이들의 공통된 목적(자유의지주의적 코뮌주의, 자유사회주의)와 공통된 원칙과 공통된 투쟁의 방법론(사회혁명에 이르는, 또는 사회혁명을 포함하는 직접행동)이 있어서의 단결이 그것이었다. 하지만 국제 아나키즘적 조합주의 운동은 이 틀 안에서도 크게 다른 흐름들을 보여주었다. 루돌프 로커는 1925년 암스테르담에서 열린 IWA 2차 총회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우리는 조직 내에서, 나아가 여러 국가의 조직들의 국제적 협의회 안에서 온전한 합의에 이르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안다. 그러면서도 우리는 한 조직 안에서의 의견 차이가 정신적 발전을 보조하고 독립적 판단을 촉진한다는 것을 안다. 이것이 IWA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이다.” 러시아 혁명과 1차 세계대전 이후 혁명의 경험은 자유의지주의자들이 현대 사회와 그 대안을 바라보는 관점에 큰 영향을 주었다. 이 시기에 소위 “아나키즘적 수정주의”가 등장했다. 이탈리아에서 에리코 말라테스타와 카밀로 베르네리가 그 선전의 일선에 나섰다. 오랫동안 아나키즘적 코뮌주의의 선도적 이론가였던 에리코 말라테스타는 러시아 혁명의 경험으로부터 “광범위한 코뮌주의 사회를 조직하기 위해서는, 경제생활 전체(생산수단, 화폐, 소비)를 급진적으로 변혁해야 한다. 그리고 이것은 한 번에 한 단계씩 이루어질 수밖에 없다”는 결론을 도출했다. 말라테스타는 혁명의 과정에서 아나키스트들은 최초에 소수일 것이나, 그 스스로의 이상과 생각을 사회 전체에 도입하여서는 안될 것이라고 믿었다. 그가 보기에 혁명은 다수의 코뮌들이 코뮌주의적으로, 그러나 동시에 상업적 관계로 묶여있는 다원사회의 등장을 촉발할 것이다.[60] 베르네리는 아나키스트 사회에서 서로 다른 경제구조의 공존에 대한 상을 발전시켰다. “모든 아나키스트들은 무신론자이지만 나는 불가지론자다. 모든 아나키스트들은 코뮌주의자이지만 나는 자유주의자다. 나는 협동조합과 개별 노동자 사이의 자유경쟁과 거래를 지지한다.”[61] 몇몇 아나키스트들은 볼셰비키들이 왜 러시아 혁명에서 승리했는지를 고민하다가, 전술과 조직이라는 측면에서 볼셰비키로부터 배울 것이 있다는 결론에 도달했다. 이렇게 “강령주의자”(네스토르 마흐노와 페트르 아르시노프가 선도하는 그룹)들이 등장하여 역사에서 계급투쟁의 원칙을 인지하고, 아나키스트의 강력한 조직을 건설하여 소비에트와 노동조합 내에서 단결된 세력으로 기능하고, 혁명을 이데올로기적으로 선도하고 그를 통해 건설적인 역할을 하려하였다. 필연적으로 “강령주의자”들은 혁명적 과정에서의 단계론을 긍정하고, 소비에트가 정부의 기능을 충족하는 것도 긍정한다. 이들은 미래 사회의 생산 체계에서, 탈중심화와 생산통합의 문제는 통합된 경제의 필요성에 따르는 기술적 문제일 뿐, 원칙의 문제가 아니라고 주장했다. 이들은 생산의 산업적 조직 구성을 승인하였고, 사적소유를 철폐하고 생산에 대한 통제력을 공장평의회에게로 이관할 것을 주장했다.다수의 아나키스트들(브세폴로드 볼린과 러시아 망명자들, 에리코 말라테스타, 세바스티앙 포레)는 이러한 입장을 비판했다. 이들은 이것이 반권위주의적 원칙과 자유의지주의적 코뮌주의의 가치에서 벗어난 것이라고 바라보았다. 아나키즘적 코뮌주의의 즉각적 도입에 대한 다른 반론은 자유 코뮌이라는 것이 범용성과 특화라는 산업사회 역사발전단계의 “진정한 정신과 경향”에 반한다는 주장이었다. 이를테면, 유명한 아나키즘 역사가인 막스 네틀라우는 “아나키즘적 코뮌주의가 내포하고 있는 인류의 농촌-산업 원자화”를 비판하면서 “탈중심화는 연대와 정반대에 있는 무언가를 생산하며, 마찰과 갈등을 배증시킨다. 발전에 대한 우리의 희망은 연대를 건설하는 것에 있다. 더 큰 단위를 연방으로 묶어내는 데에 있다. 지역적 경계와 장벽을 허무는데 있다. 천연자원과 여러 형태의 부를 집단적으로 통제하는데 있다.”고 비판한다. 동시에 네틀라우는 “집산주의”의 원칙(노동에 따른 분배_와 노동의 화폐 대체가 생산을 조직하는 산업적 형태에 걸맞다고 주장한다. IWA 안에서 벌어진 사회혁명의 궤적에 관한 논쟁과 다툼은 일정부분 20세기 초에 존재하던 아나키즘적 코뮌주의자와 조합주의자의 갈등의 지속과도 같았다. 전자는 자본주의와 국가의 철폐만이 아니라, 공장이라는 전제정을, 노동의 분절을, 비인간적 기술을 철폐하고자 했다. 반면 후자는 산업-기술적 진보를 환영하고, 이에 기반하여 사회주의적 사회를 건설하고자 했다. 이들의 싸움은 자본주의 발전의 최신경향, 즉 포디즘과 테일러리즘에 입각한 생산의 합리화에 대한 분석과도 연관되어 있었다. 산업 발전의 이 단계는 기계화와 컨베이어벨트 기술을 통한 대량 생산, 노동 과정을 여러 작업들의 연쇄로 분할하는 것, 그리고 노동자의 통제력을 극도로 낮추어 노동자가 전체적인 관점과 자기 노동의 의미를 잃게 하는 것에 기반하여, 그 대가로 대량생산의 가능성을 열었다. “자본주의적 합리화”의 문제는 리에주에서 1928년 열린 IWA 3차 총회에서 처음 다루어졌다. 총회에 참석한 대의원들은 “노동의 모든 영역에서의 진보”에 찬성한다고 선언하면서도, 그것이 자본주의적 생산의 영역에서 현현하는 방식이 노동자에게 있어 부정적이라고도 말했다. 총회에서 통과된 결의안은 진행중인 산업발전 과정이 “구식의 사적 자본주의”에서 “현대의 집단적 자본주의”로, 무제한적 경쟁에서 단일 시스템에 의한 전세계의 착취로 이행중인 사회발전의 새로운 단계의 직접적 결과라고 평가했다. 결의안은 합리화가 자본가들의 이익에 따라 집행되고 있으며, 그것이 노동자들에게는 육체적, 정신적 피폐화와 “산업노예제” 체제에의 종속을 가져오고 있다고 강조한다. 합리화는 노동인민에게 실업을, 그리고 그에 따른 더 나쁜 생활조건을 강요한다. 총회는 자본주의 경제의 이러한 변화가 사회주의의 전제조건이라기보다는 미래의 국가자본주의의 전제조건이라고 선언했다. 결의안은 사회주의로 향하는 길은 생산의 지속적 성장이 아니라 인민의 명확한 사고와 굳건한 의지에 의하여 정의된다고 적었다. 사회주의는 단지 경제적 문제인 것이 아니라, 문화적, 심리적 문제이기도 하다. 사회주의는 인민이 스스로의 역량을 신뢰하는 것을 전제한다. 그리고 이 작업은 복잡하고 통합적이다. 이 모든 것들은 현재의 합리화와 맞지 않았다. 결의안은 경제의 중앙집중이 아닌 탈집중화를, 특화와 분업이 아닌 통합을, 모든 인민의 역량이 통합적으로 구성되어 발전할 것을 대변했다. 거대한 국가적, 국제적 자본의 구조가 건설되는 것에 대항하여, 노동자들은 스스로의 국제 경제조직을 강화해야 하며, 이를 통해 일상적 요구를 위한 투쟁 뿐 아니라 사회의 재조직을, 노동시간의 단축을, 실업에 대한 저항을 위한 국제적 파업과 직접행동들을 조직하여야 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산업자본주의 체제의 발전에 대한 비판적 입장과 이에 대한 급진적 투쟁의 요구는 맑스주의자들과 같이 사회주의를 기술과 노동생산성의 발전과 연관지어 생각하는 상당수 아나키즘적 조합주의자들의 반대에 마주했다. 이들은 기술의 새로운 형태와 생산의 조직이 사회주의와 호환이 가능하다고 여겼다. 이러한 접근은 논리적으로 생산과 전체 경제의 집중화를 수반하고, 탈집중화되어 자급자족적 코뮌들의 연방이라는 개념에 대한 부정을, 결과적으로 분배에 관한 코뮌주의적 원칙에 대한 부정을 가져왔다. 산업의 세기에는 집산주의의 옛 사상이 더욱 적합하다고 여겨졌다. 1920년대 말에는 로커조차도, 원칙적으로 아나키즘적 코뮌주의에 동의하면서도, “모두가 각자의 노동에 따른 모든 생산물을”이라는 집산주의적 원칙이 혁명적 변혁의 시기에는, 새로운 사회 건설의 첫 장에는 더 적합하다고 여기기 시작했다. 로커는 혁명에 필연적으로 뒤따를 경제적 어려움에 대하여, 현대 사회에서 증가하고 있는 이기적 태도에 대하여 이야기하면서, (맑스주의자들처럼)코뮌주의적 분배의 도입이 물질적 “풍요”와 관련이 있다고 말하였다. 서치는 이 문제에 대하여 코르넬리센과 토론하는 과정에서 “순수한 분배경제를 이룩하는 것은 오직 산업화되지 않은 사회의 소규모 공동체에서만 가능하다. 현대 산업사회에서, 개별 국가가 벗어날 수 없는 국제경제의 상호의존성이라는 조건 아래에서, 상품의 교환은 필연적으로 가치를 결정할 수밖에 없다.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교환이 가격을 정하고, 가격이 임금을 정하게 된다.”고 제안하였다. 결국 대안은 아나키즘의 원칙에 반하는 중앙의 계획이 될 것이고, 그는 이것이 최소한 보편적 풍요의 시기까지는 지속될 것이라 보았다. 산업적 발전의 문제와 미래의 자유 사회의 본질에 대한 활발한 논의는 실절적으로 IWA의 기관지였던, FAUD가 펴내던 잡지 <디 인터내셔날레>를 통해 이루어졌다. 이전의 FAUD가 스스로 “코뮌주의적 아나키즘의 전도사”라고 명확히 선언하였다면, 이제는 많은 활동가들이 “필요에 따른 분배”라는 아나키즘적 코뮌주의의 원칙이 “미친 생각”이라고 여기며 반대하기 시작했다. 이들은 현존 경제 영역을 학습하고(헬무트 뤼디거), 분배를 실질적 노동 “생산력”에 맞추어 조정할 것(게르하르트 바르텐베르그, “게르하르트”)을 요구하기 시작했다. 재정적 규제를 통한 “배급”이 코뮌주의적 아나키즘보다 “더 공정하다”는 의견마저 제시되었다.(프리츠 데트머) “사회주의 연방 체계에는” 조정되고 계획된 경제와 경제적 민주주의라는 의미로서의 “생산력의 산업적 연쇄”가 존재하여야 한다는 의견도 있었다.(프리츠 리노프), 그리고 누군가는 혁명 이후라 할지라도 국가의 사회적 기능들은 “온존되어야 한다”고 주장하기도 했고(바르텐베르크), 다른 누군가는 평의회의 연방은 혁명 이후 아나키즘적 조합주의자들이 소수가 될 “통일전선”을 구성하는 이행기를 거쳐야 건설될 수 있다고 주장하기도 했다.(라이노르트 부시) 반면, 독일의 일부 아나키즘적 조합주의자들은 아나키즘적 코뮌주의의 반산업주의적 원칙을 고수하였다. 그렇기에 하인리히 트리뷔스는 산업적 혁신을 “자본주의적 사고방식”이라 비판하고, 현재의 이윤기반 경제의 완전한 변혁을 지지했다. 그는 노동자들이 아래로부터 계획을 조직하고, 인민의 실질적 필요에 기반하여 생산하는 비화폐적 코뮌주의 경제의 건설을 지지했다. 그는 맑스주의에서 빌려온 개념인 “대량생산”과 중심화를 거부하고, “산업화”에 반대하는 의미에서의 “농업화”에 기반한 경제생활의 재조직을 선호했다. 1932년, FAUD의 지도부는 거센 이데올로기적, 이론적 논쟁 속에서 거의 마비되었다. 산업주의적 경향이 가장 강했던 것은 프랑스의 CGT-SR이었다. 프랑스 아나키즘적 조합주의의 이론가이자 실천가였던 피에르 베스나르는 1차 세계대전 이전의 조합주의자들처럼 인간성의 산업적 발전이 가지고 있는 진보성에 대한 가정에서 논의를 시작한다. 베스나르에 따르면 (생산라인과 연관된, “포드주의-테일러주의” 시대의)기술적 변화는 노동자의 사회적 해방에 새롭고 광범위한 관점을 열어주었다. 노동자의 조직은 자본주의에 맞서 투쟁하면서 동시에 내적구조를 자본주의의 경제 구성과 유사하게 재조직하여 혁명적 총파업의 승리 이후 경제의 운영을 즉시 확보할 수 있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다르게 말하자면, 자본주의 내에서 자라난 노동조합과 그 연맹은 새로운 사회의 신경체계가, 경제적 협력과 계획의 기구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베스나르가 이르는 바 “자유의지주의적 코뮌주의”는 그 첫 단계로서, 화폐체계의 요소를 가지고 “노동에 따라” 분배하는 단계가 될 것이다. 베스나르가 “자유 코뮌주의”라고 부르는 2단계가 되어서야, 자주경영적 코뮌주의 사회의 이상이 완전히 시행될 수 있을 것이다. 아나키즘적 코뮌주의의 원칙으로부터 멀어지는 것은 라틴 아메리카의 아나키스트들, 특히 아르헨티나 FORA의 활동가들의 날카로운 반응을 촉발했다. FORA의 이론가들은 혁명적 조합주의에 대한 전통적 비판(혁명적 조합주의가 본질적으로 유사맑스주의라는 비판)과 유럽 아나키즘적 조합주의에 대한 비판(아나키즘과 혁명적 조합주의를 통합하려는 시도라는 비판)에 공고하게 근거하고 있었다. 이들은 혁명 전 사회의 조합주의적 구조라는 개념에 대한 문제를, 프롤레타리아트의 계급통일전선이라는 개념에 대한 문제를 제기했다. 동시에 이들은 노동운동과 유리된 아나키스트의 “이데올로기적-정치적” 조직이라는 시도(말라테스타에 의해 제안된 것, 그리고 강령주의자들에 의하여 제안된 것)에 대해서도 역시 비판했다. FORA는 이러한 시도에 대해 “노동자의 아나키스트 조직” 모델을 강화하는 것으로 응수했다. 이 조직은 노동조합의 형태를 가지고 있지만, 스스로를 경제적 문제의 해결로 제약하는 것이 아니라 연대와 상호부조, 아나키즘적 코뮌주의의 문제에 역시 나설 것이었다. FORA의 이론가들은 맑스주의적이고 산업주의적인 역사관을, 현대 자본주의를, 사회혁명을 섬세하게 비평했다. 20세기 들어 이러한 비평이 나온 것은 처음이었다. 무엇보다 이들은 맑스주의적인 사적 유물론에 입각한 선형발전 이론을 비판했다. 이들은 인류가 경제법칙에 귀속되어 발전하는 것이 아니라, (크로포트킨이 말한 것처럼)윤리적 개념과 매혹적 사상의 진화에 의해서도 발전한다고 말한다. 그렇기에 FORA는 경제적/역사적 결정론을 날카롭게 비판하고, 자본주의와 그 경제조직이 본질적으로 진보적이라는 개념을 부정한다. FORA의 이론가들은 산업자본주의 사회의 경제구조(공장 체계, 특화, 극도의 분업 등)이 “정치적 국가”(정부)에 대응하는 의미로서 “경제적 국가”라고 받아들인다. 새로 건설될, 자유로운 사회는 구체제의 법칙에, 그 논리에 따라서는 안 된다. 오히려 그로부터 결정적이고 급진적으로 분열해야만 할 것이다. 새로운 사회는 자유코뮌과 자유연합에 기반해야 한다. 새로운 사회의 표어는 “모든 권력을 노동조합에!”가 아니라, “누구에게도 권력이 없게!”여야 한다. FORA의 이데올로그 에밀리오 로페스 아란고는 아나키즘적 코뮌주의의 체제는 구체제 기구의 내적 성격으로 건설되어서는 안 되고, 그렇지 않으면 결국 러시아 혁명의 운명을 맞이할 것이라고 경고했다. 프롤레타리아트는 “산업적 제국주의의 파고를 막는 방파제가 될 운명에 놓여있다. 프롤레타리아트가 부르주아 문명으로부터 독립적으로 사회적 문제를 이해할 수 있도록 윤리적 가치를 만들어내는 것만이 반자본주의적이고 반맑스주의적인 혁명의 파괴불가능한 기저가 될 수 있다. 이 혁명은 대규모 산업과 금융, 산업, 상업 트러스트의 체제를 끝내는 혁명이 될 것이다.” 자본주의 내에서 프롤레타리아의 순수하게 경제적인 이익은 현존 체제의 틀 안에서, 다른 프롤레타리아를 착취함으로서 이루어질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이 프롤레타리아트의 통일전선이 불가능한 이유가 된다. 연대와 자유라는 습관과 개념을 확산시키는 것은 중요한 것이다. 그리고 이것은 경제적 직접행동을 통해 이루어질 수 있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 궁극적인 목적을 시야에서 놓쳐서는 안 된다. 아나키스트 노동자 조직은 단지 “모든 노동자의 조직”이 되어서는 안 되고, 아나키즘적 코뮌주의의 이상을 공유하는 이들의 조직이 되어야 한다. 자본주의의 발전에 수반한 아나키즘적 조합주의 전술의 변경에 대한 논의는 1931년 마드리드에서 열린 IWA 4차 총회에서 가장 활발히 터져 나왔다. 이 총회는 아나키즘적 조합주의자들이 자본주의적 합리화의 당연한 결과라 바라본 대공황의 한복판에서 열렸다. 합리화는 생산양을 폭증시켰지만, 동시에 일자리를 줄이고 노동자의 구매력을 줄인 것이다. 총회에서 산업적 경향과 반산업적 경향은 험악하게 부딛혔다. IWA 총회에서의 논의들에 관한 역사적 저작의 저자인 무뇨스 콘호스트는 이 논의의 본질은 다음과 같이 요약될 수 있다고 적었다. “한 편에는, 샤피로가 써낸 합리화에 관한 문서 초안이 총회의 결정에 따라 최종적으로 발표될 것을 기다리고 있었다. 이 문서는 기계화와 연관된 새로운 생산의 방법론이 유리한 것이라 고집했다. 이 생산의 방법론은 노동대중의 의식을 준비시키는 근본으로 여겨져야 하며, 혁명의 경제적 내용을 조직하기 위한 시작점으로 여겨져야 한다는 것이다. 다른 한편에는 (로커가 쓴 - 작가 주)생산자가 생산에 직접 책임을 지고, 자신의 생산활동을 다른 개인들의 활동태와 분리시킬 수도 없고, 분리시켜서도 안된다는 보다 아나키스트적인 내용이 있었다. “이러한 접근은 합리화를 반대한다기보다는 개인의 사회적 생산에의 참여와 개인의 개별성 보존 사이의 균형을 요구한 것이다.” 로커는 “혁명은 착취당하는 노동자라는 수세기간 전통과 교회라는 이름으로 신성한 의무가 되어버린 노예적 개념을 변혁해야만 한다고 선언한다. 그리고 그 형태는 지금까지와는 다른, 더 조화로운 인간관계에 어울리는, 총체적 노동에 기반한 형태가 되어야 할 것이라고 하였다.” 루돌프 로커는 기술적 발전이 삶을 인간적으로 만들 수 있지만, 인간이 생산을 위해 존재하게끔 하는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그럴 수 없다고 결론을 내린다. 사람들이 소외와 생태적 문제에 대해 이야기하기 오래전부터, 로커는 건강에 해로운 상품의 생산이 “사회적 자살”이라고 언명해왔다. 기계의 단조로운 리듬에 맞추어 일하는 것은 개인의 인성을 말살한다. 경제의 중심에 있어야 하는 것은 인간이고, 생산은 실질적 소비자의 수요에 따라 조직되어야 한다. 로커는 “노동의 합리화가 지금의 형태로 50년을 지속한다면, 사회주의의 희망은 사라질 것”이라고 경고했다. 베스나르는 당시 발생하고 있던 변화에 대한 산업적 분석에 근거하여, 샤피로의 재정적 경영의 통제권을 확보할 공장위원회 건설 허가에 대한 제안에 반대하면서, “국제 조합주의 재조직 계획”을 제안했다. 자본주의가 “경제적, 사회적 합리화라는 고통을 던지고 있는 이상” 조합주의 운동은 “우리의 적과 동일한 층위에 위치해야 하”며, 스스로의 “국제적 규모의 합리화”를 통하여 투쟁해야 한다. 그는 모든 국가에서 아래로부터 조직된 산별노조 형태의 국제 조직을 다시 세워낼 것을 호소했다. 사업장의 노동조합들이 전국적 네트워크로 모이고, 그 네트워크가 국제 산별조직에 가맹한다. 이 국제조직의 과업은 경영과 기술적 정보를 모으고, 노동자의 기업 통제를 적용하며, 노동력을 재배치하고 노동자가 모든 층위의 생산을 통제할 수 있도록 준비하는 것이 될 것이다. FORA는 로커의 합리화 비판보다 더 멀리 나가면서 베스나르의 입장을 날카롭게 공격했다. 아르헨티나 대의원 중 한명은 총회장에서 “산업자본주의는 파시즘만큼이나 위험한 폭압의 형태다. 동지들은 경제적 문제만이 결정적으로 중요한 것이라 바라본다. 하지만 지금 형태의 자본주의의 도구들을 우리가 손에 쥔다고 해도, 그것은 거대한 메커니즘에 의하여 박살난 인류를 해방할 도구가 될 수 없다. 대공황은 기계화와 합리화를 크게 진전시켰다. 그리고 이 진전은 도시의 산업에만 제한되는 것이 아니라 농업에도 마찬가지로 확산될 것이다. 이것이야말로 사회혁명을 통해서만 해결될 수 있는 세계적 재난”이라고 선언했다. 결과적으로 라틴아메리카의 대의원들은 프랑스 조합주의자들이 제안한 국제 아나키즘적 조합주의 운동을 산별노조의 국제 구조로 만들어 혁명과정에서 현존 산업생산을 확보하자는 재조직 계획을 거부했다. 이들은 “산업화는 필수적인 것이 아니다. 사람들은 산업화 없이도 수천 년을 살아왔다. 행복한 삶과 더 나은 삶은 산업화에 의존하는 것이 아니”라고 첨언하면서, “다가올 혁명이 모든 것을 한 순간에 결정할 것이라고 생각하지는 말자. 다가올 혁명은 마지막 혁명이 아닐 것이다. 혁명적 봉기에 대한 준비는 봉기가 시작하는 순간 내던져질 것이고, 혁명은 어떻게 살아갈 것인지를 스스로 만들어낼 것이”라고 주장했다. 아르헨티나 대의원들은 프랑스 조합주의자들이 “IWA를 기계화하려는 오류를 범하고 있다. 생산만을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을 생각하여야 함에도 말이다. 우리의 주된 고민은 경제 체제를 조직하는 것이 아니라, 아나키스트 이데올로기의 선전이어야 한다.”고 말했다. 그는 “인간이 사회를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사회가 인간을 위해 존재하기에” 합리화에 반대한다고 말하면서 “순수한 생디칼리즘을, 자연으로의 회귀를, 농업으로의 회귀를, 코뮌을” 부르짖었다. “이 원칙을 따를 때만, 우리는 시장을 위한 생산을 극복하고 자유로운 분배로 전환할 수 있을 것이다.” 우루과이의 FORU 역시 FORA를 따라 베스나르의 계획에 반대했다. 일본의 노동조합연맹인 전국노동조합자유연합회는 조합주의적 산업주의를 라틴아메리카 아나키스트들보다 더 격렬히 비판하였다. 이들은 아나키즘적 혁명에 대한 개념을 상세히 설명하면서 산업자본주의의 논리와 중대한 차이가 있음을 이야기했다. 이들은 현재의 체제가 분업과 그에 수반하는 위계에 기반하고 있다고 말했다. 분업과 기계화는 노동자들에게서 책임감을 앗아갔고, 협력과 행정을 주관하는 권위를 요구하며, 이것은 자유의지주의적 코뮌주의의 원칙에 합치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렇기에 미래의 자유로운 사회의 구조는 현재의 권위주의적이고 자본주의적인 구조와 합치할 수 없다. 새로운 사회는 산업주의와 그 영혼파괴적 분업을 극복하고, 다른 형태의 생산과 소비의 상호관계에, 특히 소비에 기반하여야 한다고 주장했다. 새로운 사회의 기본 단위는 자급자족적이며 자율적인 산업-농업의 통일체인 코뮌이어야 할 것이었다. 일본 아나키스트들은 계급투쟁이 역사적 사실이라는 것은 인정하지만, 그것이 자유의지주의적 혁명의 기저가 될 것이라고 바라보는 것은 거부했다. 이들은 혁명이 자본주의의 모순에서 촉발되는 것도 아니고, 계급의 물적 이익에서 비롯될 것도 아니며, 자유와 계급의 철폐에 대한 인간의 열망에서 비롯할 것이라고 보았다. 일본 아나키즘의 이론가인 핫타 슈조는 “계급투쟁과 혁명은 같은 것이 아니기에” “혁명이 계급투쟁적 방법론을 통해 올 것이라 보는 것은 중대한 오류가 될 것”이라고 주장한다. 전국노동조합자유연합회는 전통적 조합주의를 거부했다. 이들은 전통적 조합주의가 산업자본주의 모델의 재생산적 요소라 바라보았다. 사회를 직업에 따라 분할하는 것은, 공장 체계와 중앙집중을 존속시키는 것은, 사회를 직종별, 산별 노조에 기반하여 조직하는 것은 분업과 경영위계를 영속화할 것이라는 것이다. 핫타 슈조는 “조합주의는 생산의 자본주의적 방법론을 수용할 것이고, 대공장 체계를 존속시킬 것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분업과 경제적 조직의 형태를 유지시켜, 자본주의적 생산방법론이 영속하게 할 것이다.” 노동조합의 구조는 자본주의적 생산 방법론에서 비롯하기에 산업자본주의의 거울상을 만들어낸다. 만약 단순히 자본가들을, 사용자를 몰아내고 광산을 광부에게, 주조공장을 주조공들에게 쥐어준다해도, 서로 다른 생산의 부문 간에서, 각개 노동자 집단 안에서의 모순은 존속할 것이다. 결국 다른 분야들 간의 갈등을 해결하기 위한 조정기구가 필요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이것은 계급이 다시 생겨날 위험이자 노동조합 관료제의 형태로 새로운 국가나 정부가 출현할 대한 위협이 될 것이다. 일본 아나키스트들은 새로운 사회를 노동자 평의회에 기반하여 세우는 것도 완전히 잘못되었다고 주장했다. 노동자 평의회 또한 생산으로부터 비롯하였기에, 마찬가지로 자본주의적 분업을 재생산할 것이다. 나아가 노동자 평의회는 필연적으로 권력의 기반이 되고, 물질적 부의 생산에 직접 참여하지 않는 이들이나 경제의 “2차적” 산업에 참여하는 이을 차별하게 할 것이다. 핫타는 “평의회가 얼마나 경제적 지향을 가지고 있건 간에, 평의회의 건설은 권위주의적 지배를 낳을 것이라는 은 분명한 것”이라고 강조한다. 이제 선택의 순간이 왔다. 코뮌인가 산별노조인가. 산업의 합리화인가 탈중앙화된 산업/농업 경제의 총합인가. IWA의 가맹조직 중 다수는 이 두 극단 사이 어딘가에 위치해있었다. 1931년의 총회는 “국제적 재조직”의 문제를 총투표에 붙이기로 결의했다. 1935년 파리에서 개최된 IWA의 정기 총회에는 정부의 백색테러로 부수어진 라틴 아메리카 조직들이 참여할 수 없었고, CGT-SR의 제안이 가결되었다. 하지만 IWA의 재조직에 관한 결정은 실질적으로 집행되지 못했다. FORA의 구상은 당대에는 놀라울 정도로 훌륭한 산업자본주의 체계의 소외적, 파괴적 성격에 대한 비평을 포함하고 있었다. FORA의 제안은 반세기가 지난 오늘에 와서야, 생태주의 운동의 추천사이자 처방전으로 읽히기 시작했다. 그들의 비평에 약점이 있었던 것은 분명하다. 그들은 미래 사회에 대한 구체적인 상을 그리는 것을, 그 사회에 어떻게 도달하고 무엇을 준비하여야 하는지에 대하여 구체적으로 제시하는 것을 총체적으로 거부했다. 아르헨티나 이론가들의 생각에 따르면, 이렇게 하는 것은 대중의 혁명적 자발성과 즉발성을 제한할 것이었다. 사회주의의 성취는 기술적이고 조직적인 준비의 문제가 아니라 자유와 평등과 연대를 향한 감정의 씨앗을 뿌리는 것에서 온다고, 아르헨티나의 노동자-아나키스트들은 고집했다. 하지만 유럽의 아나키즘적 조합주의자들은 이러한 접근이 권위주의에 대한 보호를 제공하지 못하며, 혁명의 성취를 엘리트주의적 “전위”에게 넘겨주기에 딱 좋은 접근이라고 주장했다. 맑스주의자들은 사회주의적 사회 기능의 구조와 기전에 대하여 상상하려 하지 않았기에, 미성숙하고 무지한 대중에 대한 “과학적 사회주의자”들의 지배라는 개념이 논리적으로 뒤따랐다. 혁명의 시기에 대중은 무엇을 원하지 않는지는 알고 있지만, 새로운 해방된 삶에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는 이해하지 못한다. 그렇기에 대중은 “교육적 독재”라는 계몽주의적, 자코뱅적 개념으로 귀결하게 된다. 4차 총회에서 스웨덴의 대의원 알베르 젠슨이 말한 것처럼 “사회혁명이 승리하기 위해서는 세밀하게 준비되어야 한다. 모든 것을 즉흥적으로 하는 것은 말이 되지 않는다. 이러한 입장은 혁명의 주도권을 확보하려는 정치 선동가에게 이용당할 것이고, 독재를 구축하는데에 이용당할 것이다.” 이 시점에 특히 관심을 끈 것은 스페인의 아나키즘적 조합주의자들이었다. 스페인에서 사회혁명은 곧 현실이 될 것처럼 보였다. 이것이 CNT의 대의원단이 베스나르의 제안을 지지한 이유였다.[62] 빅토르 오로본 페르난데스는 “노동자들의 건설적 역량을 키워낼 필요가 있다. 자본주의는 스스로 사멸하지 않는다. 건설적 행동은 바리케이드보다 중요하다”고 선언했다. “파괴는 그 자체로 창조적인 것이 아니다. 혁명에서 가장 중요한 날은 혁명 다음날이다. 바로 이 날 새로운 건설이 시작된다.” 그는 러시아에서 “아나키스트들은 투쟁했다. 그리고 그러는 와중 볼셰비키들은 건설을 시작했다.”고 말한다. 더 많은 사람이 혁명을 준비할수록, 더 많은 사람이 자본과 국가의 철폐와 수용 이후에 무엇을 해야 할지 알게 될 것이다. 그리고 더 많은 사람이 혁명을 준비할수록, 전위당에 의한 혁명의 탈취의 위험은 줄어들 것이다. 유럽 아나키즘적 조합주의자들의 주장의 요지는 자유의지주의적 가치와 사상을 확산시키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는 것이었다. CNT는 인민을 기술적으로, 조직적으로 준비시켜 그들이 혁명 이후에 생산의 운영을 탈취할 수 있도록, 생산의 영역을 틀어쥐는 것이 필수적이라는 주장을 계속했다. 벤투라 마르케스 시실리아는 스페인 아나키스트들의 이론지인 라 레비스타 블랑카에 “다음과 같은 사실은 자명하다. 특정한 사상이 승리하기 위해서는, 그 사상이 옹호자들의 머리 속에 스며들어야만 한다. 인민의 준비 부족은 동요를 낳을 것이고, 동요는 혁명의 방어에 치명적이다. 이것이 우리가 사회의 아나키즘적 재조직을 진행하기 전에 인민들이 준비할 필요가 있다고 보는 이유라고 하겠다”고 강조했다. 그는 혁명이 폭력적일 수 있지만, 새로운 사회를 여는 주요한 길은 선전에 있다는 주장을 지속했다. “승리는 오직 총체적 노력이 다수 인민의 지지를 얻을 때의 결과로만 얻어질 수 있다. 이 복합적 행동은, 다수 인민의 지지는 오직 이데올로기적이며 경쟁력있고, 진지하며, 섬세하고, 책임감있는 프로파간다의 사전작업을 거침으로서 얻어질 수 있다.” 라 레비스타 블랑카의 또 다른 작가인 후안 마스고미에리는 이것이 모든 인민이 아나키스트가 될 때까지 기다려야만 하는 지루한 작업인 것이 아니라고 말한다. “아나키즘적 사회혁명이 전체 인민대중을 위한 불가변적 승리의 힘이 되기 위해, 모든 사람이 특별한 지적 노력이 없어도 새로운 조직적 기능과 질서에 대하여 인지하고 이해하여야 하는 것이 필수적이다. 그리고 이 명확한 이해는, 새로운 체계에 대한 물질적 지식은 추상적이고 철학적인 학습보다 더 분명하게 혁명의 승리를 담보할 혁명적 의식을 불러일으킬 것이다.” 스페인 아나키스트들은 일부 조합주의자들이 제시한 아나키스트 사회와 자유의지주의적 코뮌주의 사이의 차이에 대한 개념을 거부한다. 모든 제약이 단순히 사라진 상태로서의 아나키에 관한 모호한 관념은 “서글픈 정세”를 만들고, “자기 스스로의 이상에 대한 무의식적 사보타주에 이르게끔하여 새로운 향이 첨가된 정치인들의 길을 닦아줄 것이다.” CNT 내에는 혁명적 조합주의에 가까운 조류도 존재했다. 이 조류는 “사회의 조합주의적 건설”이라는 개념과 “자유의지주의적 코뮌주의”라는 개념에서 혁명적 조합주의와 유사했다. 총파업과 반란을 통하여 혁명이 승리한 이후에 무엇을 할 것인지에 대한 논쟁은 진행중이었다. 아나키즘적 코뮌주의의 전통을 따르는 공동체주의자들은 미래 사회의 기저는 최대한 자율적이고 자급자족적인 자유의지주의적 코뮌(“자유로운 자치구”여야 한다고 믿었다. 이에 따라, 공동체주의자들은 코뮌간의 경제적 연결과 협업의 조율에 대하여 그다지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이들은 모든 잉여생산물은 무료로 교환될 수 있을 것이라 가정했다. 산업주의자들은 혁명적 조합주의의 일부였다. 이들은 혁명 이후에도 중앙화된 공장 운영구조와 경제조직의 구성은 유지될 것이며, 그 소유가 개인이나 국가가 아닌 유관 노동조합에게로 이양될 것이라 바라보았다. 이들의 강점은 경제적 문제에 관한 해결책을 자유의지주의적 계획의 원칙에 맞추어 제시하는 데에 있었다. 공동체주의자 중 가장 유명한 이론가는 작가이자 출판업자인 페데리코 우랄레스(라 레비스타 블랑카의 편집자), 그리고 외과의사인 이삭 푸엔테였다. 우랄레스는 크로포트킨의 추정을 스페인의 마을 코뮌 전통과 연계시키며, 이것이 연대라는 집단적 원칙을 실현하기에 적합한 기반이라고 판단했다. 그는 혁명은 자본주의적 공황 이후에 발발할 것이며, 그 결과는 자유부락에 내재한 공동체 전통을 되살리는 것이 될거라는 주장을 계속했다. 또한 우랄레스와 그 지지자들은 혁명적 자발성에 의존하고 있었다. 다른 아나키스트들은 노동자 반란의 실험을 위한 이정표가 될 수 있는 자유 사회에 대한 사상을 만들어내는 것이 필수적이라고 여겼다.(1932년부터 1933년까지의 아나키즘적 조합주의 반란들의 뒤에 있었던 정파 노소트로스의 관점이 이러했다.) 이러한 사상은 봉기의 지도자들 중 하나였던 푸엔테와 그의 책 에 의하여 대중적이 되었다. 이 책에는 스페인에서 자유의지주의적 코뮌주의 체계를 건설하기 위한 계획과 그 실행을 옹호하는 주장들이 담겨있었다. 우랄레스와 비슷하게, 푸엔테는 인간의 사회적 경향에 대한 크로포트킨의 이해를 따랐다. 그는 혁명적 엘리트나 혁명 이후 이행기에 대한 개념을 거부했다. 그는 공동체주의 운동이 인류의 사회적 본성에 부합한다고 믿었다. 푸엔테는 스페인에서 자유의지주의적 코뮌주의가 건설될 수 있으며, 그 이후 자본주의의 세계를 견뎌낼 수 있을 것이라 믿었다. 그는 코뮌이 대중조직(모든 거주민의 총회)으로 존재할 수 있는 것은 마을과 소도시에서일 뿐이며, 많은 인구가 살아가는 곳에서, 그 기능은 노동조합의 조직(생산자의 조직)에 의해 이루어질 것이다. 하지만 그는 아나키즘적 코뮌주의의 전통에 입각하여 자발적 본성과 코뮌의 사회경제적 자급자족을 강조했다. 그는 “새로운 사회의 설계자들”이 운영을 계획하고 산업적 발전을 만드는 것에 회의적이었다. 사회적 부, 생산수단, 그 수단을 통해 생산된 생산물은 모두의 것이어야 한다. 사회의 각 구성원들은 자기 역량에 따라 일할 의무가 있고, 그 노동에 대하여 자기 필요를 충족할 만큼을 받게 될 것이다. 모든 형태의 화폐는 불필요해질 것이다. 부는 “그 요구에 따라” 분배될 것이다. 무엇보다, 거시경제는 “다양한 지역의 협업의 결과”일 것이고, 총투표, 총회, 산별연맹 등을 통하여 가장 낮은 곳에서부터 협업의 약속이 이루어질 것이다. 푸엔테의 책은 아나키스트 조직들 내에서 큰 인기를 끌었다. 책은 전제되었고, 광범위하게 논의되었다. 산업주의자들 중 주요한 이론가는 디에고 아바드 데 산티얀이었다. 그는 아르헨티나에서 스페인으로 왔고, FORA의 견해를 포기했다. 그의 책 <혁명의 경제적 기구>는 현대 산업을 포용하면서 계획과 경제적 협력의 필요성을 강조했다. 그는 크로포트킨의 경제적 지역주의를 비판하였으며, 자유 코뮌은 시대착오적이고 “반동적 유토피아”라고 선언했다. 아바드 데 산티얀은 미래 사회의 형태는 다양할 수 있기에, 자유로운 실험이 중요하다고 여겼다. 하지만 원칙적으로 그는 베스나르가 그러했던 것처럼 상대적으로 경직된 조합주의적 구조로 사회 전체를 재편하기를 원했다. 나아가, 다른 산업주의자들처럼, 그는 자유의지주의적 코뮌주의가 완전한 아나키즘(코뮌주의)로 향하는 길에서 일종의 이행기이기에, 코뮌주의적인 분배의 원칙(“필요에 따른 분배”)로부터 벗어나는 것도 가능한 것이라고 해석했다. 이 이론적 · 전술적 차이는 분열을 낳았다. 가장 중요했던 분열은 1931년 개량주의적이고 실용주의적인 조합주의의 지지자들(후안 페이로, 앙헬 페스타냐 등)이 탈퇴하여 “30인의 선언”(Manifesto de los Treinta)을 작성한 것이라 하겠다. 1930년대 중반에 이르면, 스페인이 사회혁명의 문턱에 와있다는 것이 명확해졌다. 그리고 CNT는 아나키스트 “계획”의 일반적 을 자유 코뮌주의에 기반한 사회의 변혁으로 향하는 실질적 계획으로 만들어야 할 시급한 문제를 마주했다. 1936년 사라고사에서 열린 CNT의 총회는 역사상 최초로 사회혁명을 향한 구체적 방법을 제시하는 아나키스트의 계획을 담은 문건, <자유의지주의적 코뮌주의에 대한 총연맹의 구상>을 승인했다. 이 문건은 두 조류(공동체주의와 산업주의)의 이상과 접근법 모두를 포함했지만, 푸엔테의 방법론에 아주 많이 입각해있었다. 자유의지주의적 코뮌주의(능력에 따라 일하고 경제적 가능성의 틀 안에서 필요에 따라 분배하는 원칙)는 어떠한 형태의 “이행기” 없이, 사회혁명 이후 즉시 건설되어야 한다. 다가올 자유로운 사회의 기저는 이중적 조직 위에 놓여야 한다. 지역적 조직(자유코뮌과 그 연방)과 산업적 조직(생산자의 조직이자 코뮌의 경제적 기구로서의 노동조합)이 그것이다. 이 계획은 통계적으로 결정된 필요와 생산력의 가능성에 기반한 아래로부터의 탈중앙적 계획을 지지했다. 화폐는 철폐될 것이고, 생산자/소비자를 위한 카드로 대체될 것이다. 이 카드의 유일한 기능은 그 소유자가 실제로 노동하고 있음을 입증하기 위한 것이 될 것이다. “혁명의 폭력적 시기가 지나면, 사적소유, 국가, 권위, 그리고 계급은 철폐될 것이다. ... 부는 사회화될 것이고, 자유로운 생산자들의 조직은 생산과 소비를 스스로의 손으로 직접 운영할 것이다. 각개 지역에는 자유 코뮌이 설치될 것이고, 이를 통하여 새로운 사회적 메커니즘을 촉발할 것이다. 노동조합으로 단결한 각 산업과 업종의 생산자들은 자기 사업장에서의 조직의 형태를 자유롭게 결정할 것이다.” 경제적, 사회적 생활의 조정, 방어의 문제 등은 코뮌에, 조합에, 그들의 연방에 위임할 것이 제안되었다. 계획은 코뮌주의적인 분배의 원칙을, 성별간 관계에서의 변혁을, 교육을, 예술과 과학의 자유로운 발전을 강조했다. 국가와 상비군은 철폐될 것이었고, 이는 코뮌의 연방과 노동자의 자경단으로 대체될 것이었다. ** 3부 : 스페인 혁명 *** 9장 : 1936년 7월 19일의 봉기 1936년 7월, 우익 장성들이 스페인 공화국에 대항하여 일으킨 파시스트 군부 반란에 맞서, 카탈루냐의 수도이자 스페인 최대의 산업중심지였던 바르셀로나에서는 총파업이 발발하여 노동자 반란이 되었다. 이 반란의 핵심부에는 무장한 CNT 조합원 및 그 지지자들이 있었다. 봉기를 준비하고 조직한 것은 바르셀로나에서 CNT, 이베리아 아나키스트 연방(Federación Anarquista Ibérica, FAI), 청년자유의지주의자(Juventudes Libertarias)의 조합원, 구성원들이 조직한 노동계급의 지역공동체 “방어위원회”였다. 봉기에서 가장 적극적으로 행동한 것은 아나키스트 정파 노소트로스(부에나벤투라 두루티, 프란치스코 아스카소, 후안 가르시아 올리베르, 리카르도 산츠, 아우렐리오 페르난데스 등이 그 구성원이었다)로서, 이들은 중앙혁명방어위원회와 같은 것을 구성했다. 바르셀로나의 군사반란은 진압되었다. 하지만 노동자들은 군부대와의 단순 충돌로 스스로를 제약하지 않았다. 이들은 자발적으로 사회혁명을 집행하기 시작했다. 노동자들은 기업을 점거하고 노동자 자주경영을 도입했다. 노동자들은 물자, 운송, 사회서비스를 확보했다. 노동자들은 새로운 삶을 조직했다. CNT의 식품산업노동조합의 조합원들은 인민들이 무료로 식사할 수 있는 공동체 식당을 열었다. 전투중에도, 바르셀로나 식량위원회의 노동계급 부문은 식량의 징발을 조직하고 생산품으을 농민들의 식량과 교환하기도 했다. 시장과 화폐경제는 비화폐적 교환으로 대체되었다. 이러한 교환을 통해 얻어진 식량은 위원회가 설정한 기준에 따라 분배되었다. 의복과 다른 소비재들은 도소매상을 통하여 분배되었다. 노동자들이 자본주의 혐오의 상징으로써 은행과 조폐창을 약탈하고 화폐를 불태운 적도 있었다. 전당포의 물자들은 그것을 저당맡겨야 했던 이들에게로 반환되었다. 노동조합은 대규모 정부 건물과 민간 건물을 몰수하고, 그곳에 본부를 두었다. 다수의 공장, 운수산업, 사회서비스산업에서는 노동자 집단의 총회가 열려 경영위원회를 선출했다. 경영위원회의 다수는 CNT의 대의원들이었다. 이러한 생산수단의 집단적 점유는 “집산화”라고 불리웠다. 여러 산업부문(바르셀로나의 목공, 제빵, 철도 등)에서 산업의 집산화는 사회화의 다음 단계로 나아갔다. 산업의 시작부터 끝까지 전반적인 과정은 노동자 자주경영의 대상이 되었고, 해당 산업의 노동자들은 그에 걸맞는 기구들을 건설했다. 바르셀로나는 수일 내에 일상을 되찾았다. 대중교통은 여전히 운행중이었고, 공장은 가동되었고, 상점은 개점했으며, 통신 체계도 작동했다. 연구자들은 바르셀로나에서 발생한 혁명적 방법론과 뒤이은 일상생활의 정상화는 기본적으로 CNT 노동자들의 자발적 행동에 근거한 것이라고 결론짓는다. 총연맹의 상위 위원회 따위가 이러한 지침을 내린 것이 아니었다. 이러한 행동을 주도한 것은 CNT 산하조직의 평조합원들이거나, 아나키즘적 조합주의/아나키즘의 최전선 활동가들이었다. CNT 섬유노동조합의 조합원이었던 안드레 카프데비야는 “카탈로니아의 프롤레타리아트는 아나키즘적 조합주의의 혁명적 선전에 흠뻑 젖어있었다. 수십년에 달하는 기간 동안, 기회가 왔을 때 혁명을 집행할 수 있는 것은 노동자들 뿐이라는 관념이 노동자들 사이에 뿌리를 내렸다. 그렇기에 그 가능한 시기가 왔을 때, 노동자들은 그렇게 했다”고 말한다. 혁명은 다른 도시들(특히 카탈루냐)에서, 농촌 지역(카탈루냐, 아라곤 일부, 안달루시아, 발렌시아)에서 주도권을 쥐었다. 대농장 지역에서 농민들은 지주로부터 토지를 점유했다. 많은 지역에서 이들은 집단적으로, “집단농장”을 구성하여 농업을 집행하기로 합의했다. 아라곤이나 안달루시아 등지에서, 아나키스트들은 수십년간 농민대중들의 소요를 일으켜 왔다. 이 소요를 목격하고, 참여했으며, 연구해온 가스톤 레발은 “우리의 동지들은 자신이 파견된 가장 후진적인 지역에서 농장 작업에 참여했고, 기술적 발전에 대하여 이야기했고, 아이들에게 읽는 것을 가르쳤다. 이렇게 (아나키즘이라는) 복음이 가장 후진적인 농촌에 사회적으로 침투할 수 있었”다고 전한다. 독일의 아나키즘적 조합주의자 아우구스틴 서치는 아라곤의 무네사 마을에서 온 아나키스트의 이야기를 전한다. 그는 오랜 시간 바르셀로나에서 노동했고, 그가 태어난 마을로 돌아가 농민들에게 자유의지주의 사상을 알렸다. 그의 영향력 아래, 무네사 마을의 농민들은 집단농장, 혹은 자유코뮌을 조직했다. “크로포트킨의 <빵의 쟁취>스페인어판은 식탁위에 놓여있었다. 저녁에는 집단농장의 구성원들이 그 테이블 근처로 모여, 그 중 한명이 책을 큰 목소리로 읽곤 했다. 그야말로 새 시대의 복음서였다.” 혁명의 첫 수일 간, 사회적 자주경영을 위한 새로운 구조들이 등장했다. 이 구조들은 공장, 마을 코뮌, 도시 구획 등지에서 혁명적 노동자와 농민들이 자발적으로 구성했다. 이 구조들은 언제나 거주민, 혹은 조합원의 총회를 기반으로 구성되었다. 이들은 혁명위원회, 공장위원회, 군인위원회 등을 선출하여 일상적이고 협력적이며 기술적이고 집행적인 기능을 수행했다. 이 위원회들의 구성원들은 자신을 선출한 총회의 지시를 수행한다는 틀 안에서 행동했고, 언제라도 재소환될 수 있었다. 위원회들의 중요한 결정은 코뮌의 구성원들의 의사에 합치하게 이루어졌다. 바르셀로나 혁명위원회는 CNT 지역방어위원회와 “바리케이드 위원회”에서 태어났다. 이들은 거리층위의 조직, 즉 식품 등의 서비스를 조정하고, 질서를 유지하는 과업을 자임했다. 군사반란의 실패 직후 많은 마을들에서 거주민들은 지방정부를 제거하고 총회를 통해 선출된 혁명위원회가 행정적이고 경제적인 기능을 장악했다. 혁명위원회는 모든 소유권에 관한 문서를 불태우고, 대지주들의 토지, 건물, 작물, 창고를 몰수하고, 교회를 창고로 바꾸고, 토지를 집산화하고, 자경단을 조직하는 등 혁명적 조치를 즉시 집행하곤 했다. 대중 조직의 구성에 참여한 것은 아나키즘적 조합주의자들만이 아니었다. 다른 노동조합, 이를테면 사회당을 지지하여 온 노동조합총동맹(Unión General de Trabajadores, UGT)의 평조합원들도 이에 참여했다. 결과적으로 대중조직의 구성은 CNT, UGT, 그리고 다른 세력들의 역관계를 반영하는 것이었다. 어떠한 경우라 하더라도, 국가의 권력은 스페인 영토 다수의 지역에서 기능을 멈추었다. 마드리드에 있던 공화국 중앙정부는 군사반란을 저지하는 것에서 무능함을 보여주었고, 모든 권위를 상실했다. 루이스 콤파니스가 이끌던 카탈루냐 지방정부(제네랄리타트)가 통제할 수 있는 것은 정부청사 건물뿐이었다. 지역 행정은 철폐되거나 무력화되었다. 군대와 경찰은 해산되거나 파괴되었다. 바르셀로나는 주로 아나키즘적 조합주의자들로 구성된 노동자의 자경단이 통제하였다. 현대의 연구가 아벨 파즈는 “권력은 거리에 있었고, 무장한 인민으로 체현되었다”고 적는다. 카탈루냐 노동자들에게 지대한 영향력을 발휘하던 아나키즘적 조합주의자들은 이 권력으로 무엇을 할지에 대한 결정을 내릴 필요가 있었다. 이들은 이 권력을 파괴할 수도, 스스로 가질 수도, 다른 이에게 넘겨줄 수도 있었다. *** 10장 : 자유의지주의적 코뮌주의냐 반파시스트 통일전선이냐 이론적으로, 스페인의 아나키즘적 조합주의자들이 권력의 문제에 대하여 취할 입장은 1936년 7월이 되기 한참 전에 결정되어 있었다. 스페인의 아나키스트(자유의지주의) 운동은 1870년대에 운동이 시작될 때부터 사회혁명을 통해 국가와 자본을 대한 동시다발적으로 타도하고, 국가없는 체계, 즉 자유 코뮌과 자유 노동조합의 자유로운 연방으로 이행할 것을 설파해왔다. 사회 혁명의 상황에서 어떠한 행동을 취할지에 대한 계획은 1933년 말, 이제 막 집권한 우익 정부에 맞선 봉기를 계획하면서 그 윤곽을 그려냈다. 새로운 사회의 건설에 대한 가이드라인은 1936년의 사라고사 계획에 명시되었다. 스페인 아나키즘적 조합주의는 혁명의 순간에 무엇을 해야할지에 대해서는 명확한 개념을 가지고 있었지만, 역설적으로 사회 혁명을 위한 사회의 “성숙도”를 결정하는 기준을 명확히 밝히지 못했다. 다르게 표현하자면, 지금이 새로운 사회 건설의 청사진을 적용할 때인지는 어떻게 판단할 것인가의 문제말이다. 1936년 7월의 CNT는 이 문제에 대하여 합의할 수 있는 답을 찾아내지 못했다. “자유의지주의적 코뮌주의에 관한 총연맹의 관점”은 당대의 혁명적 성격을 총체적으로 다루었지만, 혁명의 순간 그 자체에 대해서는 모호하게 다루었다. CNT는 오랜 세월, CNT가 스페인 전체 노동자의 압도적 다수를 차지하거나, CNT의 조직구조가 전체 경제를 탈환할 준비가 되어있을 때에만 진정한 사회혁명이 가능할 것이라 믿어왔다. CNT 내부의 급진적 아나키스트들(노소트로스 등)은 다른 입장을 가지고 있었다. 이들은 혁명을 향한 대중의 준비는 그 무엇보다도 심리적인 문제이고, 이 준비도는 혁명적 정세의 진행에 따라 발전해 나갈 것이라고 보았다. 이들도 그 질적 변화의 순간을 설명하고 이론화하기 위한 노력을 그다지 기울이지는 않았다. 나아가, CNT는 스페인의 상황은 파시즘이냐 자유의지주의적 코뮌주의냐의 이지선다라고 주장해왔다. 파시스트 반동에 대한 답은 오직 사회혁명뿐이었던 것이다.[63] CNT는 다른 거대 총연맹인 사회당이 통제하던 UGT와의 관계도 명확하게 정의하지 못했다. 그러면서도 아나키즘적 조합주의자들은 그들이 UGT와 “동맹”을 맺을 수 있기를 열망했다. 하지만, 사라고사 총회에서 그들은 이러한 조약은 UGT가 사회당을 청산하고 사회혁명의 입장을 수용하는 조건에서만 이루어질 수 있다고 승인했다. 이 모든 것들이 불명확함을 낳았다. 이것이 바르셀로나에서, 카탈루냐 전체에서, 나아가 스페인 전역에서 사건들이, 그 사건들을 수십년간 꿈꿔오고, 그를 위해 투쟁해오던 아나키스트들에게 “선물”처럼 주어졌을 때, 아나키스트들은 이 “선물”을 사용하지 못하게 만들었다. CNT가 언제나 개량주의적 경향성을 포용해왔고, 개량주의자들이 간헐적으로 조직의 지도부를 통제해왔다는 것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그렇기에, CNT를 1920년대 말부터 1930년대 초까지 대표해온 페스타냐와 페이로는 공화주의적 정치조직들과 가까운 관계를 유지했고, 1931년부터 32년까지, 개량주의 그룹인 “트레인티스타”의 지도자가 된 것도 놀랍지 않다. 이 분파의 다수는 CNT를 탈퇴하였고, 1936년에 재가입하였다. 하지만, CNT 안에는 “트레인티스타” 말고도, “순수” 조합주의자들이 상당수 남아있었고, 실용주의적으로 경도된 이들도 많았다. 이것이 스페인 아나키즘적 조합주의의 모순적 조직관의 결과였다. 스페인 아나키즘적 조합주의는 아나키스트의 목적과 사회적 이상을 혁명적 조합주의의 신념과 무관하게 “모든 노동자에게” 열려있는 노동조합의 원칙과 섞어내려고 했다. CNT의 조합원들은 의식화된 아나키스트들로 구성되어 있을 수가 없었다. 특히 공화국 시기(1931년부터)에 가입한 이들에 대해서는 더욱 그러했다. 이 실용주의적 접근의 신봉자들은 위험하고 “극단주의적인” 결정을 회피하고자 했던 CNT의 집행기구와 그 활동가들과 죽이 맞았다고 할 수 있다. 1936년 7월 20일, 제네랄리타트의 수반 콤파니스는 CNT의 카탈루냐 지역 위원회와 만났고, 군대의 “파시스트적 반란”을 진압한 이후에 발발하고 있는 상황에 대하여 논의하고자 위원회의 대표자들을 회의에 초대했다. CNT 산하조직들, 산하 위원회들, FAI의 조직들은 총회를 열어 이 제안을 검토했다. 참가자들의 의견은 시작부터 달랐다. 노소트로스의 가르시아 올리베르는 자유의지주의적 코뮌주의를 선포할 것을 주장했고, 아바드 데 산티얀은 반파시스트 통일전선을 지지했다. 마누엘 에스코르사 등의 중도적 입장은 콤파니스 정부에 더 이상 신경쓰지 말자고 제안했다. 이 입장은 콤파니스 정부와 어떤 합의도 하지 말고, 경제의 산업화에 전념하여 콤파니스에게서 모든 실권을 빼앗자는 것이었다. 에스코르사는 실권은 CNT의 손에 있으며, 정치권력은 무시될 수 있다고 주장했다. 바자 료브레가트나 조제 셰나 등 노동계급구역에서 온 아나키즘적 조합주의자들은 정부와의 협력에 강력히 반대했지만, 그렇다고 가르시아 올리베르를 지지하지도 않았다. 오히려 이들은 에스코르사의 관점을 지지하였다. 격론이 이어졌고, 때로는 싸움도 벌어졌다. 최종적으로 내려진 결론은 무장 대표단을 보내어 콤파니스와 회동하고, 서로 정보를 교환한다는 것이었다. 이는 본질적으로 임시적이었다. 콤파니스는 CNT와 FAI의 대표단을 맞이하면서, 아나키스트들의 승리를 축하하고, 사임의사를 밝혔다. 하지만 그러면서 그는 대표단에게 그들이 전통적인 정치세력 없이는 해나가기 어려울 것이라는 설득을 시도했다. 그는 자유의지주의자들에게 파시즘에 승리하기에는 아직 한참 남았으며, 그러기 위해서는 아나키즘적 조합주의자들이 “민병대 위원회”를 구성하여 참여하는 동맹기구가 필요하다고 이야기했다. 이 기구는 파시스트 반란의 최종적인 패배를 이룩할 것이었다. 아나키스트 대표단은 그들이 합의할 권한이 없다고 밝히면서, 그 제안을 조직에 전달하겠다고 말했다. 콤파니스는 CNT와의 합의를 기다리지 않고, 인민 민병대의 창립과 그에 따른 지휘기구를 구성한다고 선포했다. 이 지휘기구는 그의 측근들로 구성되어 있었다. CNT 지역위원회는 가르시아 올리베르와 두루티의 보고를 들은 뒤, 콤파니스에게 CNT가 기구의 건설을 임시로 도울 수 있고, 최종적인 참여여부는 카탈루냐 지역 총투표를 통해 결정될 것임을 알리기로 결의했다. 1936년 7월 21일 열린 카탈루냐 CNT의 지역 총회(지역 조직들의 총투표)에서, 바자 료브레가트의 대표단은 새롭게 건설된 반파시스트 민병대 중앙위원회(Comitè Central de Milícies Antifeixistes de Catalunya, CCMA)에서 탈퇴하고, CNT의 결의안, 원칙, 이데올로기적 목적이 규정하는 대로 자유의지주의적 코뮌주의를 선포하자고 제안했다. 노소트로스의 회원인 가르시아 올리베르는 자신의 조직을 대표하여 바자 료브레가트의 요구를 지지했다. 그는 이미 저질러진 오류를 바로잡고, 사회혁명을 끝까지 수행하자고 부르짖었다. CCMA는 해소되어야 하며, 스페인 전역에 자유의지주의적 코뮌주의를 건설해야 할 것이었다. 유명한 FAI의 활동가 페데리카 몬세니, 아바드 데 산티얀, 그리고 카탈루냐 CNT의 사무국장 마리아노 바스케스는 이 제안에 반대했다. 몬세니는 아나키스트 독재를 만들어 아나키즘의 요체에 모순되는 행동을 하지 않으려면, 사건의 진행을 강제해서는 안된다고 주장했다. 그녀는 타협을 제안했다. 우선 CCMA에 가입하고, 군사 반란을 완전히 패배시킨 후, 그 기구에서 탈퇴하여 아나키스트 사회를 만드는 과업을 지속하자는 것이었다. 아바드 데 산티얀은 “민병대 위원회”에의 참석을 지지하면서, 국제 자본주의는 스페인의 자유의지주의적 코뮌주의를 허용하지 않을 것이고, 군사적 개입으로 맞설 것임을 강조했다. 그는 양면전선을 경계하면서, 자유의지주의적 코뮌주의를 이후로 “미룰것”을 요구했다. 바스케스는 총회의 2차 회기에서, 혁명을 “끝까지 짊어지지 않더라도” CNT는 그 실질적 힘을 바탕으로 거리를 통치할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렇기에 그는 CCMA에 남아 독재와 투쟁하는 것이 가치가 있다고 말했다. 이에 뒤따른 논의의 과정에서, 바자 료브레가트의 대표단은 그들의 제안을 공고하게 유지했다. 가르시아 올리베르는 반대파의 제안에 논박을 시도했다. 그는 “노동조합주의적”이거나 “아나키스트적” 독재를 원한다는 비판을 부정하면서, 1917년 러시아에서 일어났던 일처럼, 혁명의 적들이 이용할 수 있는 공백의 시기를 남겨두지 않기 위해서라도 빠르게 결정할 것을 촉구했다. 그는 “나는 스페인과 전 세계에서 조합주의가 그 가치를 인류와 역사에 그 가치를 선언할 때를 마주했다고 생각합니다. 만약 우리가 자유의지주의적 사회주의를 건설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지 않는다면, 미래는 이전처럼, 프랑스 혁명에서 튀어나온 정치처럼, 정당들로 시작하여 그 중 하나로 끝나게 될 것”이라고 주장했다. 가르시아 올리베르는 그가 “공포를 심고자”하는 시도를 비판하면서, 혁명은 군사반란과 국제적 개입 모두에 맞설 수 있다고 강조했다. 가르시아 올리베르는 자유의지주의적 코뮌주의를 선포하고 “끝까지 밀어붙이자”는 자신의 주장을 반복했다. 모두가 자신의 의견을 말한 후, 아바드 데 산티얀은 표결안을 공식적으로 정리했다. CCMA에 가입하거나, 자유의지주의적 코뮌주의를 선언하거나였다. 이 문제는 투표에 붙여지도록 되었다. 오직 바자 료베르가트의 대표단만이 자유의지주의적 코뮌주의에 표를 던졌고, 나머지 대표단들은 “반파시스트적 협력”에 찬성했다. 승인된 결의안은 혁명은 “반파시스트적 단계”를 지나고 있을 때, 자유의지주의적 코뮌주의는 적합하지 않으며, 현시점에서는 “거리에서 벌어지고 있는 반파시스트 전선”을 공고히할 필요가 있다는 견해를 보여주었다. 단 2달 전에 결정한 행동강령이, CNT의 일부에서 180도 변모하게 만든 요인은 무엇이었는가? 자유의지주의적 코뮌주의를 선포하지 않고 다른 반파시스트 세력(사회주의자, 공산주의자, 공화주의자)과 협력하겠다는 카탈루냐 CNT의 결정은 다수 아나키즘적 조합주의자들이 이후에 알아차렸듯이, 복잡한 정세애 대한 성급한 평가에서 비롯한 것이었다. 카탈루냐에서만 승리한 자유의지주의자들은 스페인의 다른 지역에 대한 확신이 없었다. 1937년 IWA 총회에 CNT가 보고한 바에 따르면, “우리는 협력을 결의했다. 레반테 지역(발렌시아)는 무방비하고 무력하다. 그 병영은 군사반란 가담자들로 가득하다. 마드리드에서 우리는 소수세력이다. 안달루시아는 노동자들이 겨우 사냥용 엽총으로만 무장하여 산에서 투쟁을 이어나가고 있는 혼란스러운 상태다. 북부의 상황도 확실하지 않다. 스페인의 나머지 지역은 파시스트들의 손아귀에 떨어졌다. 카탈루냐의 문턱인 아라곤에서 적들이 등장했다. 우리의 국내외적 적들의 실질적 상황은 알려져 있지 않다.” CNT의 활동가들은 독립적인 혁명을 지속하여 파시스트, 정부, 국제개입의 3면 전선에 맞서는 것을 회피하고자 했다. 다르게 말하자면, 활동가 다수는 전국적으로 사회혁명을 이야기하기에는 너무 이르고, 카탈루냐의 독자적 자유의지주의적 코뮌주의는 무너질 수밖에 없다고 믿은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마도 여전히 1932~1933년 반란의 패배에서 헤어나오지 못한 카탈루냐 아나키즘적 조합주의자들이 보는 것과는 달리, 실제 상황은 전혀 희망이 없는 것이 아니었다. 당시의 반란과는 달리, 이번에는 고립된 지역적 분출이 아니었다. 사회혁명운동은 카탈루냐와 발렌시아로 퍼져나갔고, 안달루시아로 가는 길은 열려있었다. 다르게 말하자면, 이베리아 반도의 경제적 · 산업적 · 농업적 중심지가 혁명의 손아귀에 떨어진 것이었다. 이러한 정세를 보았을 때, “끝까지 가는 것”을 감수하는 것은 충분히 가능했다. 현대 스페인의 아나키즘적 조합주의자 아벨 파즈는 “당시의 상황에서, 우리는 권력의 문제가 너무 성급하게 결정되었다고 믿는다. 그리고 이 성급함은, CNT의 보고서가 명확하게 보여주는 바와 같이 ‘혁명의 중요성 전반’을 고려하지 못하게 하였다. 만약 가르시아 올리베르의 제안이 받아들여졌다면, 혁명의 문제는 풀뿌리 층위에서부터 의심할 여지 없이 정리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렇게 하지 않음으로서 아나키즘적 조합주의자들은 소중한 시간을 잃었고, 적들에게 주도권을 넘겨주었다. 마지막으로, 가르시아 올리베르가 그의 회고록에 적어둔 하나의 요인에 대하여 이야기해보자. 대의원들은 급하게 소집되었고, 무엇을 논의할지에 대하여 사전에 통지받지 못했다. 다르게 말하자면, 대의원단은 스스로 대변하고 있는 조합과 조직의 지침이 없이 총회 결의안을 채택했다. 이것이야말로 CNT의 연방주의적 절차에 대한 중대한 침해였다. 그리고 이 침해는 이후 만연하게 되었다. 파즈는 “첫 번째 오류는 7월 19일과 20일, 일부 활동가들이 조합원의 의지를 스스로의 의지로 대체하여 결정을 내렸을 때 이미 범해졌다. 이 순간부터 기층과 상층의 차이가 발생하기 시작했다. 기층은 혁명의 확산을 원했고, 상층은 혁명을 통제하고 제약하고자 했다.” 노소트로스의 다른 구성원들은 총회에서 발언하지 않았다. 저명한 노소트르소 회원이었던 리카르도 산스는 후일 다음과 같이 회고한다. “우리는 조직적으로 (논의의 결과에) 압력을 가하지 않았다. 우리는 우리 조직이 독재에 반대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리고 우리의 입장이 받아들여진다 해도 그러했을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특정 방향으로의 결정을 강제하려 하지 않았다. 우리에게는 더 급하게 해야 할 일들이 많았다.” 콤파니스는 두루티가 민병대를 이끄는 것에 합의했다. 이 민병대는 적들의 손에 떨어진 사라고사를 확보해야 할 것이었다.“ CNT의 총회가 끝난 그 저녁, 노소트로스와 그 지지자들(마르코스 알콘, 가르시아 비방코스, 도밍고, 조아킨 아스카스코 등)의 회합이 개최되었다. 그 회합에서는 정당과의 동맹을 넘어 인민자치를 위한 새로운 기구를 혁명위원회와 CNT 가맹조직들에 기반하여 건설할 필요성에 대하여 합의가 이루어졌다. 하지만 이러한 행동에 돌입할 시기에 대한 의견차이가 있었다. 가르시아 올리베르는 노소트로스가 아나키즘적 조합주의자들의 민병대를 활용해 바르셀로나의 정부 청사와 핵심 시설을 확보함으로써 ”7월 18일에 시작한 과업을 끝낼 것“을 주장했다. 두루티는 이 계획이 ”멋진 것“이지만, CNT 활동가들의 분위기를 고려할 때, 시기가 ”적절하지 않다“고 판단했다. 두루티는 자유의지주의적 민병대가 아라곤의 수도 사라고사를 확보하여 카탈루냐가 경제적 · 정치적 봉쇄를 피할 수 있을 때까지, 열흘을 기다리자고 제안했다. 가르시아 올리베르는 반대했다. 그는 사라고사의 확보는 이후에도 할 수 있다고 주장했지만, 그 주장은 지지를 얻어내지 못했다. CCMA의 첫 회의에서, 아나키즘적 조합주의자들은 CCMA를 군사적, 기술적 과업의 수행으로 제약하려는 콤파니스의 계획을 거부했다. 아나키즘적 조합주의자들은 CCMA가 카탈루냐의 경제적, 정치적, 군사적 행정의 기구가 되어 제네랄리타트의 수장으로서의 콤파니스의 역할은 단지 명목상으로만 남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결국 CCMA는 준정부, 준인민 기구가 되었다. CCMA에서 핵심적인 역할을 하였던 아나키스트들 외에도, UGT의 대표도, 좌익 민족주의자들도, 공산주의자들(코민테른의 지도를 받아 7월에 카탈루냐 통합사회당을 건설해 스페인공산당과 밀접하게 관계를 맺었다)도, 통합맑스주의노동자당(POUM)도 있었다. CCMA는 사회적-정치적인 근본적 문제에 대한 결정을 내렸지만, 순수한 정부라고 볼 수는 없었다. CCMA의 구성원들은 그들을 대표로 임명한 각자 조직의 최고위원회에 가장 우선의 책임을 져야 했기 때문이다. 결국 결정을 내리는 것은 이 조직들이었으며, CCMA는 이를 수인할 뿐이었다. 이를테면 1936년 8월 10일까지, CCMA의 공문서는 FAI의 카탈루냐 지역위원회의 소인이 찍혀있어야 유효했다. 카탈루냐의 질서를 유지하는 것은 CCMA에 소속된 각 조직과 운동세력들이 조직한 민병대가 주도하는 순찰대였다. 이 중 가장 강력한 것은 CNT의 민병대였다. CNT, FAI, FIJL의 구성원들은 내전의 전개 과정에서 전선의 반란군들과 함께 싸운 자원군의 기반을 구성하기도 했다. 1936년 7월 24일, 두루티가 이끄는 2,000명의 대오가 아라곤으로 출병했다. 내전 초기, 군사반란군에 대항하여 싸워 승리할 수 있던 다른 정파의 무장세력은 존재하지 않았다. 아라곤의 상당 부분을 해방한 두루티의 열列(Durruti‘s Column)은 자유의지주의적 원칙에 따라 조직되었다. 지휘관은 선출되었고, 병사들과 같은 조건으로 생활했다. 군법은 없었고, 모두는 자율적 자기규율을 보였다. 아라곤에서 싸웠던 CNT의 민병대는 16,000명 정도로 강력했다. 아나키즘적 조합주의자들은 8월 초 공화정부 중앙이 발효한 예비군 동원령을 거부했다. 하지만 1936년 8월 6일, CNT는 제네랄리타트와 CCMA에 일부 참여하기로 타협했고, 이는 그들의 근본적 원칙에서의 이탈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나키즘적 조합주의자들의 민병대는 여전히 자발적 인민군의 원칙에 기반하고 있었다. *** 11장 : 시대의 압박 아래 그렇기에 CNT는 “총체적 혁명”을 원칙적으로 포기하고 군부, 팔랑헤, 왕정복고주의자들에 대한 승리를 확보할 때까지 자유의지주의적 코뮌주의를 미뤄두는 원칙적 결정(그리고 이후에 확실해진 것처럼, 이것이 그들의 운명을 결정지었다.)을 내렸다. 당시 국가 권력에 대한 아나키즘적 조합주의자들의 공식적 입장은 “CNT-FAI 선전물 정보 회람”과 카탈루냐 CNT의 기관지 <솔리다리다트 오브레라>에 실린 “정부의 무용성”이라는 기사에서 찾아볼 수 있다. 이 입장은 사회적, 경제적 영역에서 혁명을 지속하되, 국가에는 신경을 쓰지 말고, “아래로부터의” 반파시스트 인민전선을 유지할 것으로 스스로의 역할을 축소하는 것이었다. 이 기사에서는 공화국 중앙정부와 카탈루냐 공화정부가 군사반란을 진압하거나 예방하려는 어떠한 수단도 취하지 않았기에, 그 존재는 반파시스트 투쟁에 불필요하다고 강조한다. 아나키즘적 조합주의자들은 전국적인 “사회적 투쟁”이 계속되고 있다고 믿었다. 이들은 “인민전선 세력의 협력과 자발적 집산화를 통한 식량 공급의 조직은 우리의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매우 중요하다. 하지만 지금까지 이것은 국가의 통제 아래에서 이루어진 것이 아니고, CNT와 UGT 등의 노동조합들에 기반한, 탈중앙적이고 비군사화된 방식으로 이루어져 왔다”고 적고 있다. 현 정부는 “기본적으로 국제 금융자본의 소유권을 보장하려 하는 취약한 현상유지자일 뿐”이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정부는 인민전선에 불필요하거나 해롭기까지 할 것이다. 정부는 타협의 수단이 되거나, 정치적 이합집산과 내부투쟁으로 의사결정구조를 마비시키거나, “노동자 국가” 따위의 새로운 독재를 구축하려 할 것이기 때문이다. CNT와 FAI의 지도부는 반파시스트 정당 및 운동과 타협했고, 그들에게 양보했으며, 이를 “상황의 전개”를, 내전에서의 승리 필요성을 운운하며 정당화했다. 이들은 (국제적 개입을 회피하기 위해)외국 자본에 대한 수용을 중단하고, 단지 노동자 자주경영만을 도입하기로 합의했다. 혁명위원회, 반파시스트 민병대 위원회 등 새로운 기구들은 총회를 개최하기보다는 CCMA에서 그러한 것처럼, CNT, UGT, 그 외의 조직들간의 합의로 운영되었다. 지역층위에서 혁명적 기구들과 혁명 이전의 구조가 공존하는 경우는 잦았고, 이는 상호간의 충돌을 낳았다. 아나키즘적 조합주의적인 대중들은 첫 한 달간은, “상층부가” 합의한 타협에 대하여 그다지 신경쓰지 않았다. 이들은 사회혁명을 스스로, “아래로부터”, 스스로의 자유의지주의적 “주요사상”에 입각하여 집행하였다. 해당시기 스페인 혁명 과정에서 보여준 노동자 자주경영의 규모는 역사에 비할 바가 없었다. 바르셀로나의 기업 70%는 소유주로부터 확보되어 CNT와 UGT의 통제 아래에 놓였다. 발렌시아의 기업 50%도 마찬가지였다. 농촌에서의 집산화 역시 널리 집행되었다. CNT 산하 카탈루냐 농민 조합은 1936년 9월 5일부터 7일 사이에 이루어진 지역 총투표를 통해 대농장과 임노동으로 운영되는 모든 토지를 집산화할 것을 결의했다. 수용된 토지는 조합의 통제와 운영 아래로 들어갔고, 그 구성원들, 혹은 “모든 노동자”의 직접적 이익으로 돌아갔다. 결과적으로 카탈루냐, 발렌시아 등지에서 농민들이 자주경영적 집단농장을 구성하는 과정은 넓게 퍼져갔다. 이 현상은 아나키즘적 조합주의자들의 민병대가 해방하였던 아라곤 지역에서 더욱 널리 퍼졌다. 농민들의 조직은 지역 토지의 60%를 통제했고, 스스로를 아나키즘적 조합주의 정신에 따르는 자유롭고 자주경영적인 코뮌으로 변모시켰다. 하지만 이 풀뿌리 자치의 앞에 정치적 타협이 장애물로 등장했다. 자유의지적 코뮌주의가 선포되지 않은 이상, 화폐의 철폐와 필요에 따른 분배의 집행 역시 부정되었다. 도시에서 화폐의 순환은 완전히 회복되었다. 최대의 성취는 소위 “가족수당”의 도입이었다. 이로서 각각의 노동자들은 가족구성원의 수에 따라 동일한 임금을 받을 수 있었다. 저임금 노동자들에 대한 임금의 대폭 인상도 있었고, 이를 통해 노동자 집단 내에 존재하던 임금격차를 줄일 수 있었다. 농촌에서는 제약 없는 소비, 식량배급, 지역화폐의 도입, “가족수당”제도 등의 실험들이 이루어졌다. 하지만 이 모든 방법론들은 상호 협력이 없이 이루어졌다. 지역의 혁명적 기구들의 활동 사이에는 어떠한 협력도 이루어지지 않았따. 아나키즘적 조합주의의 “계획”과 달리, 이 기구들은 연방적으로 단결하지 않고 지역층위에서 독자적으로 작동했다. 노동자 집단에 의한 경영이라는 이행기로서의 “집산화”를 넘어 경제를 온전히 사회화 하기 위하여, 아나키즘적 조합주의자들은 1936년 8월 11일 카탈루냐 경제 평의회의 건설을 주도했다. 이 평의회는 총체적인 협력을 주도하고, 경제를 계획하며, 가격정책을 세울 것이었다. 하지만 이 기구 역시 그 구성(CNT, UGT, 정당을 포괄하였다)과 그 과업에 있어 타협적 성격을 가지고 있었다. 평의회는 소비 수요에 따른 생산의 규제, 해외무역의 독점, 산업 · 상업 · 농업 · 운수업의 집산화 가속, 농민과 소비자들의 협동 장려, 실업자들에게 직업 제공, 세금 체계 개혁 등의 다양한 수단들을 그 목적으로 두고 있었다. 경제 평의회에서 주요한 역할을 맡았던 아바드 데 산티얀은 평의회가 새로운 경제 체제의 건설을 가져올 수 있어야 한다고 믿었다. 반면, 아나키즘적 조합주의의 급진적 분파(두루티 등)은 혁명적 성취의 “합법화”는 단지 제네랄리타트의 권력을 강화하여 “국가자본주의”나 “국가사회주의”를 가져올 뿐이 될 것이라 두려워했다. 세력간의 불안정한 균형은 오래가지 못했다. 아나키스트들이 청산하지 않은 국가권력과 정당과 그들을 지지하던 사회적 계층은 주어진 숨쉴 틈을 사용하여 혁명에 대한 공세를 가했다. 철폐되지 아니한 국가의 손에는 화폐와 재정적 자원이라는 강력한 지렛대가 남아있었다. 집산화된 산업에는 원자재가 충분히 주어지지 않았다. 1937년의 IWA 총회에 CNT가 제출한 보고서는 “맑스주의자들과 공화주의자들은 동맹을 구성하고, 그들이 소유하고 있는 자금과 무기를 활용하여 그 지지자들을 향한 이익배당의 정치를 행하고 있다. 그들은 자기 지지자들에게 식량과 무기와 행정부의 일자리와 통신수단과 운송수단을 제공하고 있다.” “카탈루냐는 스스로 해외 무역을 조직하고, 스페인의 다른 지역과 해외에서 경쟁해야 했다. 그렇지 않으면 카탈루냐는 시민들을 먹이지도, 아라곤 전선의 필요를 충족하지도 못했을 것이다. 정부는 반파시스트적 단결을 해하고, 외국과의 공식적 관계를 해하지 않으려는 우리의 노력을 이용했다. 정부는 그들이 가지고 있는 독점적 외교 상황을 이용했다. 그리고 이로서 우리가 모든 영역에서 해온 활동들을 잔혹하게도 파괴했다.” 마드리드와 카탈루냐의 정부는 아나키즘적 조합주의자들에 대한 3방향의 압력을 동시에 가하기 시작했다. 이들은 무장이 충분하지 않던 민병대에게 무기와 탄약의 보급을 지연시켰다. 이들은 산업과 농업의 집산화의 범위와 과정을 제약하려 했다. 이들은 민병대를 정규군으로 대체하려 했다. 1936년 9월, “통제불가능한” 아나키스트들을 향한 카탈루냐 언론의 맹공이 시작되었다. 언론에 따르면, 아나키스트들은 전선으로 무기를 보내지 않고 스스로 보관하면서, 경제적으로 “유토피아적 실험”을 하고 있었다. CNT의 지도부는 권력 체계에 자리잡고 스스로를 변화시켰다. CNT는 당시의 요구를 만족시키기 위해 조직을 재구성했다. 이로써 실질적인 경제적, 사회적 생활의 조정이라는 명복으로 급격히 성장한 관료계층이 정당화되었다. CNT와 FAI의 활동적 평조합들이 전선에서 싸우고 있거나 지역에서의 노동자 자주경영 과업에 짓눌려 있다는 사실을 이용하여, 많은 노동조합 관료들(전국, 지역, 지구 위원회의 구성원들, 다양한 노동조합 위원회, 민병대 위원회, 경제 평의회 등)은 아나키즘적 조합주의적 대중의 요구와 열망을 점점 덜 신경쓰기 시작했다. 평조합원 활동가들은 연속되는 총회, 총투표, 회의를 따라가지 못했고, 의제를 섬세히 검토하지 못했다. CNT 역사를 기록해온 조제 페이라츠가 적었듯, 조직의 연방적 구조는 본질적으로 무너져 내렸다. 전국위원회는 개별 노동조합에 “지침을 하달하는 기계”가 되었고, 총투표는 위로부터의 공지사항을 전파하는 수단으로 전락했으며, 각 위원회의 주요한 결정은 호선되어 총회에서 추인된 선별된 활동가들의 회의에서 승인되었다. 이는 조직에서의 주도권은 “위에서 아래로” 행사되는 것이 아니라 “아래에서 위로” 행사되어야 한다는, 각개 위원회가 근본적 문제에 관한 중요한 결정을 승인하는 것이 아니라, 총회에서 “평조합원”들이 내린 결정을 집행하는 것이어야 한다는 아나키즘적 조합주의의 원칙에 모순되는 행동이었다. 다수 아나키즘적 조합주의자들은 CNT의 초기 관료화와 국가와 정당에 점점 더 많이 양보하는 정책에 공개적으로 반대했다. 두루티는 이 지점에 대한 걱정을 자주 드러내었다. 급진주의 분파는 1936년 8월 초 열린 카탈루냐 CNT의 지역 총회에서 진행되는 상황의 방향을 돌려놓으려 시도했다. 가르시아 올리베르와 두루티는 혁명의 성과와 힘을 잃게 하고 있는 정치세력과의 협력을 중단할 것을 요구했다. 하지만 다수는 “반파시스트진영” 내부의 내전을 두려워했다. 7월 20일부터 계속되온 방향성은 크게 달라지지 않은 채로 남아있었다. UGT와의 “혁명적 동맹”과 정치적-군사적 지도를 위한 전국 방어 위원회의 건설의 필요성에 관한 결의안이 채택되었다. 역사가 파즈는 급진적 소수파가 대세에 따라 조직적 규율을 지켰다고 적는다. “이 교착상태를 벗어나는 유일한 방법은 ‘활동가의 책임감’을 내던지고 조직을 고려하지 않은 채 거리로 나아가 혁명적 과업을 수행하는 길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어떠한 활동가도 이를 행하지 못했다.” 8월 중순에는 CNT가 UGT와의 동맹을 실천하려 시도했고, 그 지도자였던 사회주의자 라르고 카바예로와의 교섭에 들어갔다. 두 노동조합이 함께 공화국 중앙정부를 전복하고 혁명의 방어를 위한 혁명적 훈타[64]를 건설할 가능성이 논의되었다. 마지막 순간에 라르고 카바예로는 공화국 정부의 정당성을 파괴할 수 없다며 이 계획을 거부했다. 1936년 9월 4일, 라르고 카바예로는 스페인 공화국의 총리로 임명되었다. 아나키즘적 공화주의자와 반파시스트 전선 사이의 갈등은 계속해서 자라났다. 아나키스트들이 “무기를 숨기고 있다”는 비판에 반응하여, 바르셀로나의 “방어위원회”는 “혁명이 정치 권력의 문제를 해결할 때까지, 마드리드 중앙정부의 명령을 따르는 무장세력이 존재하는 한” 무기를 보관하고자 하였다고 선포했다. 그들은 무기야말로 “우리의 혁명적 투쟁을 담보할 수단”이라고 여겼다. <솔리다리다트 오브레라>는 공장과 농장의 집단을 옹호하면서, 독자들에게 전쟁의 “혁명적 성격”을 상기시켰다. 전선에서 이루어진 라디오 방송에서, 두루티는 “파시즘과 자본주의는 같은 것”이라고 말했다. “두루티 열”에 속한 공장위원회와 군사위원회는 바르셀로나의 공산주의자 병영에 봉인되어 있는 무기들을 지금 즉시 전선으로 보내지 않으면, 바르셀로나로 진군할 것이라 위협했다. 사바델랴의 공산당 사무실에서 발견된 8정의 기관총은 전선의 병사들에게 보내졌다. *** 12장 : CNT의 정부 참여 그러는 와중에도, “상황”의 논리는 CNT 지도부가 다음과 같은 행동을 하게 만들었다. CNT 지도부는 군사-정치 행동의 지도에 참여할 방법을 찾아 헤맸다. 그들은 이것이 혁명적 투쟁을 공고히 하는 것을 도울 것이라 믿었다. 1936년 9월 15일, CNT 지역 연맹들의 회의에서, 전국위원회는 “군사적 계획의 집행기구이자 정치경제적 계획의 조정기구로서의 전국 방어 평의회”의 필요성에 관한 결의안을 채택하도록 만들었다. 라르고 카바예로가 이끌고 있던 이 평의회는 3가지 주요 정파(아나키즘적 조합주의, 맑스주의, 공화주의)의 “대표단”들을 모두 포함할 것이었고, 군대와 경찰은 인민 민병대로 대체될 것이었다. 평의회의 경제계획은 은행, 교회자산, 부동산, 대기업, 상업의 사회화를 포함할 것이었다. 사회화된 생산수단은 노동조합이 경영할 것이고, 혁명적인 경제실험을 집행할 자유도 주어질 것이었다. 유사한 평의회들이 지역적 층위에서 구성되었다. 이 구성의 초안을 UGT에 동맹 제안과 함께 보내는 것이 총투표를 통하여 결의되었다. 페이라츠가 알맞게 표현한 것처럼, 방어위원회는 다른 이름을 가진 정부였을 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나키스트들은 이 기구의 “비정부적” 형태를 중요하게 여겼다. 라르고 카바예로는 이 제안이 담고 있는 모순을 완벽하게 이해하고, 이 평의회가 헌법적 원칙을 침해한다며 거절했다. 하지만, 이 당시의 사건들에 관한 구체적 연구를 수행한 파즈에 따르면, 라르고 카바예로와 (새로운 사무총장이자 개량주의 노선을 지지하던 오라시오 마르티네스 프리에토가 이끌던) CNT 중앙위원회 양측 모두는 상대가 무엇을 원하는지를 잘 알고 있었고, 이 순간부터 다양한 압박전술을 통한 끝없는 거래의 과정에 돌입했다. 총리가 가지고 있던 패는 전선의 아나키스트 민병대에게 자금과 무기를 보내주는 문제에 관한 것이었다. 민병대는 사라고사와 우에스카를 탈환한다면, CNT 중앙위원회가 타협을 멈추고 자유의지주의적 코뮌주의를 선언할 것이라는 희망을 가지고 있었다. 전선의 민병대에게는 무기와 탄약이 부족했고, 점점 약화되어 갔다. 상황은 심각해졌고, 두루티와 아바드 데 산티얀은 아나키스트 부대가 마드리드의 국립은행을 공격하여 그 재정을 수용하고, 그것으로 무기를 구매하는 계획을 세웠다. 하지만 전국위원회는 이 계획에 반대했다. 카탈루냐에서는 CNT 지역위원회가 “이중권력”을 그만두라는 라르고 카바예로 정부의 지속적 압력에 굴복하여 CCMA의 해산에 동의했다. 그 대신, CNT의 대표단들이 제네랄리타트에 합류했다. 이렇게, 처음으로 아나키즘적 조합주의자들이 공개적으로 정부기구에 합류했다. 카탈루냐 CNT의 저명한 활동가들이던 가르시아 올리베르, 아우렐리오 페르난데스, 셰나, 마르코스 알콘 등은 이를 갈면서도 이 결정을 받아들였다. 카탈루냐 CNT 지도부의 지속적 타협에 대한 평조합원 활동가들의 반응은 달랐다. CNT의 주요한 인물 중 하나였고, 바르셀로나에서 유명하였던 마르코스 알콘은 CCMA를 해소하고 CNT가 카탈루냐 정부에 합류한 이후, 바르셀로나의 방어위원회 대표단(다니엘 상에스, 안젤 카르발레라, 트라포타 등)을 마주한 것을 회상한다. 이들은 알콘에게 방어위원회가 그들이 CNT와 FAI의 본부로 가 “혁명을 방해하고 있는” 그 지역위원회를 해산할 것을 결의했다고 알렸다. 대표단들은 마르코스 알콘이 CNT 카탈루냐 지역위원회의 새 사무국장이 되어줄 것을 제안했다. 알콘은 이 활동가들의 상황 분석과 타협에 대한 분석에 동의하면서도, 그들이 제안한 방법을 따르는 것은 조직에 무책임하고 “해로운” 것이라 반대했다. 그는 방어위원회가 행동에 옮기는 것을 어렵게 막아냈고, 그 대신 그들이 “노동조합 안에서 세력을 키”우, 노동조합에 근거하여 CNT 위원회가 조합원들의 의지를 수행할 수 있도록 하라고 요구했다. 이렇게 카탈루냐에서 사회혁명을 계속 키워낼 마지막 기회가 저물었다. 중대한 분기점이 된 것은, 9월 28일 개최되었던 지역연맹 총회였다. 이 총회에서, 전국방어평의회 건설 제안에 대한 다른 노동조합 및 정치조직들의 부정적 반응에 대한 후회감이 표출되었다. CNT는 조직의 대표단이 투쟁의 지도부에서 제외된 것은 지도부의 권위를 해치는 일이라 주장하며, UGT와의 “혁명적 동맹”을 재차 부르짖으며 그 동맹이 이루어지지 않으면 모든 결과에 대한 책임은 UGT에게 있을 것이라 위협했다. 무기의 부족에 관한 문제는 1936년 10월 1일 마드리드에서 IWA 사무총장이었던 피에르 베스나르가 두루티와 함께 스페인의 총리 카바예로를 회동하면서 일정부분 진전한 것으로 보였다. 두루티는 만약 정부가 CNT-FAI에게 무기를 구매하기에 충분한 재정적 지원을 하지 않는다면, 전선의 병사들이 마드리드로 향할 것이라 경고했다. 이 회동 이후 스페인 정부는 160만 페세타 어치의 무기를 구매하고, 그 3분의 1의 물량을 카탈루냐와 아라곤에 배정하는 것에 동의했다. 하지만 수일이 지난 후, 소련이 개입하여 공화국 정부에게 원조를 제의하면서 무기회사와의 거래는 취소되었다.[65] 소련의 원조는 아나키즘적 조합주의의 적이자, 스페인에서의 사회혁명을 반대했던 공산주의자들의 영향력을 크게 키웠다. 마드리드와 카탈루냐의 CNT 지도부의 회유적 태도와는 달리, 전선과 아라곤의 아나키즘적 조합주의자들은 독자적 중앙을 수립했다. 이들은 자신의 조직에 공개적으로 도전했고, 스페인 혁명의 “반환점” 노선에 따르는 무언가를 만들고자 했다. 두루티가 마드리드에서 아라곤 전선으로 돌아온 이후인 1936년 10월 6일, 농민들과 아나키즘적 조합주의자들의 지역 총회가 부하랄로스에서 열렸다. 이 총회에서 오직 아나키스트들만으로 구성된 아라곤 방어 평의회가 건설되었다. 이 평의회는 군사, 경제, 사회적 영역의 모든 활동을 조정할 권한을 받았다. 평의회는 다양한 활동 영역으로 나뉘어진 분과로 구성된, 정부와 유사한 기구였다. 하지만 이 기구를 만들어낸 이들은 평의회와 풀뿌리 총회 사이에 수직적 위계가 아닌 연방주의적 상호관계를 선호했다. “각 분과는 조직의 대표단이 제시한 계획을 발전시키고, 그 대표단의 승인을 필요로 할 것이다. 하지만 일단 승인된 이후, 계획은 일반의무가 될 것이고, 전체적으로 집행될 것이다.” 아벨 파스는 이 문건을 인용하면서 “역사상 처음으로, 지역 전체가 정당으로부터 독립적인 혁명적 행동을 주도했다. 이들은 주권이라 선포된 총회에 전적으로 기반하였다. 실제로 일어난 것에 대하여 이야기하자면, 아라곤에서의 사회 조직은 자유의지주의적 코뮌주의에 최대한 가까운 것이었다.” 중앙정부와 카탈루냐 정부는 아라곤 평의회를 인정하지 않았다.[66] 두루티와 그 부대의 도움을 받아, 자주경영되는 집단농장이 건설되기 시작하였고, 1937년 2월 카스페 총회에서 최종적으로 건설이 완료되었다. 아라곤에서는 혁명의 열기가 상승하고 있었지만, 공화국의 다른 지역에서 혁명은 둔화하고 있었다. 국가 권력은 혁명적 자발성에 대한 통제를 강화했고, CNT 지도부는 이를 막으려 하지 않았다. 10월 9일, 카탈루냐 정부는 1936년 7월 20일 이후 건설된 모든 지역위원회와 행정, 문화, 기타기구를 해소할 것을 명령했다. 그 자리에는 제네랄리타트가 새로운 공동체적 위원회를 구성할 것이었다. 그 구성원은 선출되는 것이 아니라 지역정부에 참여하고 있는 각 운동세력과 정당들의 대표단들로 구성될 것이었다. 이 법령을 위반하는 것은 반역죄로 취급될 것이었다. 하지만 많은 혁명 위원회들은 법령을 묵살했고, 새로운 조직에 권력을 이양하려 하지 않았다. “이중 권력”의 체계는 혁명적 기구들이, 자기 조합원들에게 정부의 명령을 이행할 것을 촉구하는 CNT의 지속적 압력에 굴복하여 마침내 포기할 때까지 수개월간 지속되었다. 라르고 카바예로의 중앙정부는 군율과 지휘체계, 군법을 복구하고, 민병대를 정규군으로 편입하는 법령을 반포했다. 9월 30일에는 중앙 전선의 민병대 10개 분견대를 10월 10일까지 정규군으로 전환하는 법령이 반포되었다. 나머지 전선에서의 전환은 10월 20일까지 이루어질 것이었다. 10월 21일, 정부는 정규군 창설에 관한 법령을 반포했다. 정부의 결정은 아나키즘적 조합주의 민병대 사이에 폭풍같은 분노를 일으켰다. 아나키스트의 “아스카소” 분대의 병사는 “이 전쟁에서 혁명적인 성격을, 사회 변혁의 이상을 빼고 나면, 이 전쟁은 스페인 독립전쟁으로 남을 뿐이다. 이는 더 이상 새로운 사회를 위한 혁명전쟁이 아니”라고 선언했다. 중부스페인의 CNT 민병대는 정부가 프롤레타리아트를 “새로운 쇠사슬”로 옥되려 한다고 비난하면서, 군대의 재건이 “흔한 권위주의적 전술”이고, 군국주의의 침투가 “파시즘에 필수적인 것”이라 묘사했다. 이들은 군대의 재건이 “과거로의 회귀”라면서, 노동계급은 자신의 피로 지켜낸 것을 포기하지 않을 것이라 위협했다. 두루티는 인터뷰를 통해 의식적 규율을 잡고, (통합에 반대하는 공산주의자들의 부대를 지칭하면서)통합 사령부를 구성하는 것에는 반대하지 않는다고 밝혔다. 하지만 동시에 두루티는 군대와 같은 계급도, 경례도, 훈련도, 처벌도 보고싶지는 않다고 밝혔다. 그는 혁명전쟁은 싸우는 목적을 이해한 인민들의 자발적 부대야말로 효과적이라는 주장을 지속했다. 1936년 9~10월의 기간 동안, 아나키스트의 “콜룸나 데 이에로”(Columna de Hierro, 철의 분대)는 발렌시아에서 어마어마한 사건을 일으켰다. 이들은 전선에서 철수하여 후방으로 향했다. 이들은 국가 예비군을 해산하고 무장해재한 후, 그 구성원들을 전선으로 보내라고 요구했다. CNT의 지도부는 민병대 원칙을 확인했다. 하지만 동시에 CNT의 전사들이 정부의 결정에 순응하도록 설득했다. 공화국 정부는 산업과 농업 경제에서의 자주경영에 압박의 박차를 가하기 시작했다. 라르고 카바예로 정부는 군수 산업의 국유화를 명령했고, 군수산업을 국가관료의 통제 아래에 두었다. 아나키즘적 조합주의자 후안 파브레가스는 제네랄리타트의 경제부 장관이 되었고, 10월 2일에는 노동자들이 기업에 대한 수용을 멈출 것을 요청했다. 최소한 처음에는, 누구도 그의 요청에 귀를 기울이지 않았다. 하지만 10월 24일, 카탈루냐는 산업의 집산화를 합법화하는 한편 중소기업들은 예외로 두는 법령을 반포했다. 이 법령은 노동자 위원회가 선출한 관리자라는 위치를 만들었고, 자주경영기업(특히 대기업)을 국가가 통제하도록 하였다. CNT의 지도부가 국가와 타협한 것은, 그들이 “혁명을 합법화”하는 정책을 위해 정부에 직접 참여한 것의 영향이었다. 농업 경제의 경우, 라르고 카바예로 정부의 농업부 장관이었던 공산주의자 유리베가 서명한 1936년 10월 7일의 법령은 반란분자라 선포된 지주의 토지를 수용하는 것만이 합법이라고 명시하고 있었다. 이렇게 대농장들을 확보했던 집단농장들이 불법적 집단이 되었다. 1936년 10월, CNT의 사무총장 오라시오 마르티네스 프리에토는 공화국 정부에 CNT가 들어가는 것에 대한 협상을 시작했다. 그는 CNT가 장관직 6개를 가져갈 것을 요구했지만, 라르고 카바예로는 4개의 직위만을 허용하고자 했다. 1936년 10월 25일, 이 합의의 전조가 보였다. CNT의 카탈루냐 지역 조직들과 UGT 사이에, FAI와 카탈루냐 통합 사회당 사이에 협약이 체결되었다. 이 협약은 경제의 집산화가 제네랄리타트에 의하여 지도되고 조정되어야 한다고 규정하고 있었다. 협약은 주거의 시유화(市有化), 통합 군사령부, 민병대의 (이들을 “인민군”으로 바꾸려는 의도를 가진) 강제동원, 노동자 자주경영의 도입, 은행의 국유화, 금융에 대한 국가의 통제 등도 담고 있었다. 아래로부터 독립적으로 주도된 “규율되지 않은 자들”에 대한 투쟁의 필요성은 특별히 강조되었다. CNT의 지도부는 라르고 카바예로 정부를 압박하기 위해 협박에 의존했다. 1936년 10월 23일, 중부 스페인, 발렌시아, 아라곤, 카탈루냐, 안달루시아 지역의 CNT 연맹 총회는 “대 파시스트 투쟁의 지도부에, 혁명의 정치-경제적 생활의 구조에 CNT가 들어가는 것에 관한” 대정부투쟁에 관한 전국위원회의 보고를 논의했다. 이 총회에서 채택한 결의안은 아나키즘적 조합주의 활동가들의 비일관성과 무력함을 드러냈다. 그들에게 중요한 것은 권력 확보에 드는 “비용”이 아니었다.(아마도, 오라시오 마르티네스 프리에토를 포함한 다수 “지도부”에게는 이것이 중요했겠지만 말이다.) 오히려 이들에게 중요한 것은 역관계를 CNT에게 유리하게 변경하는 것이었다. 이 결의안은 본질적으로 공화국 정부를 향한 최후통첩이었다. 총회는 발렌시아, 중부 스페인, 카탈루냐의 지역 조직들이 대표단을 구성하여 공화국 대통령 마누엘 아사냐 디아스와 면담하기로 결정했다. “재앙으로 달려가고 있는 정부에 CNT의 가입 필요성을 설명하기 위하여 (...) 이 조건 아래 9월 15일의 지역 조직들의 총회에서 승인함.” 면담 대표단은 48시간 동안 응답을 기다리기로 되어 있었다. 만약 그 응답이 부정적일 경우, “군사적 성격의 방법을 동원하여 마드리드, 발렌시아, 아라곤, 안달루시아, 카탈루냐 간의 통신을 확보하고, 인민들의 통행과 마드리드로 향하는 물자의 운송을 통제”할 것이라 협박했다. 이 결의안을 이행하기 위하여, 전국위원회는 카탈루냐, 아라곤, 레반테, 안달루시아 지역의 전선을 통합하기 위한 전국 전시 평의회를 임명하고자 했다. CNT는 지역위원회들과 함께, 100,000 조합원을 동원할 것을 제안했다. 총연맹은 “우리의 모든 지역 세력을 하나의 행동으로 조직하는 것을 통해 경제를 통제하고 물자를 조정할 수 있”게 되리라 의도했다. 동시에, 러시아의 외교단과 상담하는 것이 총회에서 채택한 결의안을 이행하는 데에 필수적일 것“임을 결정했다. CNT의 위협은 허세였고, 라르고 카바예로는 이를 완벽하게 이해했다. 라르고 카바예로를 지지하고 있던 소련도 마찬가지였다. 아바드 데 산티얀이 이후에 알아차린 것처럼, 이 시기 라르고 카바예로는, 티에라 이 리베르타드지에 쓴 기사에서도 보이듯, 파시즘에 맞서 싸우기 위한 “질서정연한 군대”와 “이행기 국가”에 대하여 확고히 주장하고 있었다. 최종적으로, CNT는 그 후보자를 스스로 지명한다는 조건으로 정부에 4개의 직위를 받았다. 그리고 이 선택은 오라시오 마르티네스 프리에토가 직권으로 결정했다. 프리에토는 이 결정을 전국위원회에 통지할 수고조차 들이지 않았다. CNT 중도 분파의 대표격이었던 후안 로페스와 후안 페이로는 프리에토의 전화를 받았고, 그들이 무역부 장관과 산업부 장관에 임명되었음을 공손하게 통지받았다. FAI의 구성원이었던 몬세니와 가르시아 올리베르는 더 설득할 필요가 있었고, 이 설득을 위해 프리에토는 바르셀로나로 향했다. 몬세니는 장관직을 거부했지만, 피리에토와 카탈루냐 CNT의 사무국장 마리아노 바스케스는 계속 권고했다. 그녀는 24시간 동안 더 고민해보겠다고 말했고, 그녀의 아버지에게 조언을 구했다. 몬세니의 아버지이자 오랜 아나키스트였던 페데리코 우랄레스는 그녀에게 이것이 “아나키즘과 CNT의 멸망”을 의미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하지만, 만약 조직이 요구한다면, 상황을 고려하여, 동의할 필요가 있다고도 말하였다. 대화가 다시 시작되었을 때, 프리에토는 몬세니에게 조직적 책임을 상기 시켰다. 몬세니는 너무나도 고통스러워하면서도, “그녀의 삶 전체로부터 멀어지는 것” 같은 감정을 느끼면서도. 동의할 수밖에 없었다. 가르시아 올리베르 역시 정부에 함께 하는 것에 즉각 동의하지 않았다. 지금까지 올리베르는 급진주의자로 여겨져왔다. 그는 전술적 고려에 의해 더 동요했다. 그는 그가 전쟁을 조직하는 데에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던 공간인 바르셀로나를 떠나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그는 정부에 들어가는 것에 동의했다. 그리고 이 결정의 책임은 CNT 전국위원회임을 주장했다. 가르시아 올리베르는 그저 조직의 결정에 따른 것 뿐이라는 입장을 유지하였지만, 현실을 바라보면, 이 순간부터 그는 정당과 각종 정파들과 열렬하게 야합하는 협조주의자가 되었다. 프리에토는 마드리드로 돌아와 라르고 카바예로와 세부사항을 조율했다. 1936년 11월 4일, CNT와 FAI의 평조합원들은 신문지상에서, 라르고 카바예로의 내각에 자신들의 조직에서 4명이 들어갔다는 놀라운 사실을 처음으로 확인할 수 있었다. 법무부 장관 가르시아 올리베르, 산업부 장관 후안 페이로, 무역부 장관 로페스 산체스, 공중보건부 장관 몬세니가 그들이었다. CNT 지도부는 조합원들에게 이 장관들은 개인적인 관점이 아니라 조직의 입장을, “총회를 통해 사전 결의된, 단결한 노동대중 다수의 집단적 의지”를 대변할 것이라고 못박았다.[67] 이 주장의 노선은 국가를 폭압과 계급적 지배의 도구로 바라보는 아나키즘의 반국가주의적 이상과 완전히 모순되어 있었다. 어떠한 기사는 “상황에 따라 정부와 스페인 국가의 본질이 변화하였다”면서 “현재 상황에서의 정부는 국가 지배의 주요 수단이자 노동계급을 압제하는 힘이 될 수 없다. 더 이상 국가는 사회를 계급적으로 분할하는 기구가 아니기 때문이다. 이제 CNT가 정부와 국가에 들어간 이상, 이들은 여전히 인민을 압제하지 않는다”고 말한다. 이 마지막 문장은, 국가를 인민 스스로의 대변자들로 채움으로서 “전체 인민에 복무하도록 하는 것”이 “그저” 필수적이라는 국가 사회주의의 지지자들의 테제와 완전히 동일하다. 이 기사는 “CNT가 중앙정부에 들어가는 것은 우리 나라의 정치적 역사에서 가장 중요한 사건”이라면서, “국가의 기능은 노동자 조직의 동의에 따라, 국가의 정치적 사회적 생활의 방향을 지도하는 것에 그칠 것이다. 그리고 정부는 단지 전쟁을 올바르게 수행하고, 공통 계획에 따라 혁명적 과업을 조정하는 과업만을 가질 것”이라고 말한다. CNT 중앙위원회는 성명을 통해 정부에 함께하는 합의는 “우리 군사 전선의 섬세한 상황”에 따라 이루어진 것이라고 설명한다. 총연맹은 “이베리아의 프롤레타리아 혁명의 승리”를 추구하고 있으며, “그 핵심 주장을 포기하지 않았고, 앞으로도 포기하지 않아” 꾸준히 비정치적으로 남을 것이라는 것이다. 하지만 CNT는 중대한 상황을 바라보면서, “정부 내에서의 책임과 지위를 요구”할 수밖에 없었다. 중부지역 CNT의 성명서도 비슷한 주장을 계속한다. “CNT는 결코 자체적 강령과 원칙을 포기하지 않는다. CNT가 정부에 들어간 것은 오직 전쟁을 이기기 위해서다.” CNT의 입각이 선포된 날, 두루티는 라디오를 통해 성명을 발표했다. 그 언명은 보존되지 않았고, 목격자들의 증언에 따르면, 심각한 검열과 왜곡이 있었기에 언론으로 출판되지도 못했다. 마르코스 알콘은 두루티가 “CNT와 FAI의 책임자들이 두려움에 떨게 만들었다. 두루티는 그들이 그 빌어먹을 반파시즘의 기치 아래 혁명을 가로막았다고 극도로 날카롭게 발화하였다”고 되뇌인다. 이것은 급진적 아나키스트의 지도자의 마지막 연설이 되었다. 마드리드는 파시스트 군대에 의하여 위기에 처해있었고, 11월 6일 공화국 정부는 공황에 빠져 도시를 포기했다. 그들은 두루티 부대에 사정했고, 두루티 부대는 마드리드 포위전을 도우러 왔다. 맹렬한 전투 끝에 마드리드는 무너지지 않았다. 하지만 두루티는 불가사의하게도 1936년 11월 19일, 죽었다. 정부와의 타협과 공존에 대한 반대파는 가장 뛰어나고, 상징적이며, 대중들에게 잘 알려진 존재를 잃었다. *** 13장 : 정부에서의 CNT - 결과와 교훈 CNT는 1937년 5월까지 정부에 남아있었다. 이 “권력에의 편입”의 결과는 스페인 아나키즘적 조합주의에 재앙이 되었다. CNT 출신의 장관들은 군사적 상황을 개선하지도 못했고, 혁명적 투쟁에 대한 곡역을 막아내지도 못했다. 몬세니는 정부에의 참여가 실패라고 공공연히 인정했으며, 로페즈는 경제 부처가 공산주의자와 우익 사회주의자들의 손에 있는 상황에서는 어떠한 성과도 낼 수 없음을 강조했다. 조합주의자들은 노동조합이 “해외 무역의 독점”을 통제하게 하지도 못했고, 산업의 집산화와 공동농장에의 재정적 지원을 담은 법령을 통과시키지도 못했다. 1937년 2월 22일의 정부 법안은 산업의 국유화와 국가주도의 가능성을 열었다. 나아가, 자유의지주의자들이 정부 내의 CNT-FAI의 조합원들을 이르던 바, “동지-장관”들의 활동은 아나키즘 운동의 근본 원칙과 전통으로부터 결별한 것이었을 뿐 아니라, 오히려 아나키스트들에게 곤경을 초래했다. 가르시아 올리베르의 사법 개혁은 양성평등과 1936년 7월 19일 전 범죄에 대한 사면을 확보하는 동시에 범죄자들에 대한 “노동교화소”와 같은 “자유의지주의적” 프로젝트 역시 폐기했다. 그가 제출한 법령들(이를테면, 무기와 폭발물을 숨기는 것에 최대 20년 형을 내리도록 한 것)은 1937년 5월 이후 아나키스트들을 공격했다. CNT-FAI와의 “공동책임”이라는 포장 아래, 노동조합이 정부 내에서 지위를 가지고 있던 기간 동안, 스페인 공화국과 카탈루냐 공화국의 정부는 인민 민병대의 청산과 정규군의 창설(1937년 1월), 혁명위원회 및 지방 평의회의 해산과 임명 지자체로의 대체(1934년 1월 4일),[68] 카탈루냐의 질서를 유지해온 노동자 분견대의 철폐(1937년 3월)와 같은 반혁명적 행위를 집행할 수 있었다. 이 시기 정부의 기본 계획은, 노동자들의 무장을 해제하는 것이었다. 전선에서 통제력을 가진 아나키즘적 조합주의에 입각한 노동자의 조직을 해산하려는 시도는, 1937년 4월 카탈루냐와 프랑스의 국경지대에서 치열한 전투를 낳았다. 경제의 집산화에 대한 공산주의자, 우파 사회주의자, 공화주의자들의 공격은 매우 잦아졌다. 스페인 농업부와 CNT와 UGT가 만든 노동자 집단농장 사이에서는 발렌시아의 오렌지 농장을 둘러싼 폭력적 충돌이 벌어졌다. 카탈루냐 식량배급부와 분배를 사회화하려던 바르셀로나 CNT 사이에서도 충돌이 일어났다. 마침내, 1937년 5월, 재앙이 일어났다. 바르셀로나에서 경찰은 노동자 자주통제 상태에 있던 전화교환소를 공격했고, 이는 바르셀로나의 아나키즘적 조합주의 노동자들의 대규모 봉기를 촉발했다. 1936년 7월에 그러했던 것처럼, 노동자의 자주적 조직의 기본단위가 지구 방어 위원회로 전환했다. 아나키즘적 조합주의에 입각한 대중은 바르셀로나의 많은 지역을 점령했고, 사회혁명이 더 심화될 가능성이 높아졌다. 하지만 CNT-FAI의 지도부는 “반파시스트 통일전선”의 붕괴를 두려워하여 노동자들이 바리케이드를 포기하도록 설득했다. 이후 “반혁명적 공화주의자”들은 역공에 나섰다. 합의의 지지자였던 라르고 카바예로는 총리에서 해임되었다. CNT-FAI의 대표자들은 중앙정부와 카탈루냐 지방정부의 직책에서 해임되었다. 아라곤 방어 평의회는 1937년 8월의 법렬에 의하여 해소되었고, 공산당원 엔리케 리스테르가 이끄는 공화국군은 아라곤 지역의 농촌 코뮌 다수를 파괴했다. 1938년, 후안 네그린 정부는 다수의 법령을 발표했다. 이를 통해 미등록 집단농장은 해산되었고, 그 토지는 국가의 통제 아래에 놓였으며, (전시 필요라는 명목으로) 노동자 자주경영을 점차 줄여나가 산업 대부분이 국유화되거나 군부의 통제 아래에 놓였다. 아나키즘적 조합주의자 수천명이 “통제불가능한 요소”로 여겨져 체포되었다. CNT-FAI의 지도부는 이 노동운동 탄압에 어떠한 저항도 하지않고, “무엇보다, 우리는 파시즘과의 전쟁을 이겨야 한다”는 주장만을 반복했다. 하지만 CNT-FAI의 지도력에는 금이 가고 있었다. FAI 반도 위원회의 지도적 존재들의 다수는 그들이 아나키즘적 조합주의의 전통에서 한 걸음도 물러선 적이 없으며, 전쟁이 승리하면 그 전통을 적용하기 시작할 것이라 계속 재확인했다. 동시에, CNT 중앙위원회를 구성하는 자들, 특히 사무총장이었던 바스케즈와 흑막이었던 프리에토는 아나키즘적 조합주의의 근본적 원칙들을 사회민주주의적 “노동자 민주주의”와 “혼합경제”의 관점으로 대체하고자 노력하고 있었다. 이들은 FAI를 CNT를 통제하는 정당으로 만들고자 했다. 정치적 권위에 대한 양보의 규모와 정도에 대한 내적 갈등에도 불구하고, CNT-FAI의 지도부는, 내전이 끝날 때까지 “반파시스트 통일전선”과 “차악”의 개념에 사로잡혀있었다. 1938년 4월, CNT는 다시금 정부의 교육부, 공중보건부 장관직을 확보했다. 부르주아-공화주의자 진영과 파시스트 진영 사이의 내전의 승리를 위해 사회혁명을 “연기”하거나 “억제”하는 전술은 전쟁의 결과에도 그다지 좋은 영향을 주지 못하는 것으로 드러났다. 역사가 증명하고 있는 것은, 정규군과 군사국가를 통해, 군사 전문가의 지배를 따르는 것으로는, 어떠한 전쟁에서도, 일반적 전쟁이건 “반파시스트” 전쟁이건, 승리하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프랑코를 이겨낼 수 있던 것은, 희망에 가득하던, 두루티가 말한 것처럼 혁명적 투쟁을 방어하며 “가슴속 새 세상”을 즐기던, 1936년 7월의 노동자들 뿐이었다. 내전의 패배 이후 아바드 데 산티얀은 “우리는 전쟁에 승리하지 않고서는 우리의 혁명이 승리할 수 없다는 것을 알았다. 그렇기에 우리는 혁명을 희생했다. 우리가 이해하지 못했던 것은, 이 희생이 전쟁의 승리를 가로막았다는 것이었다.” 대중은 혁명적 열정을 잃었고, 싸울 의미를 잃었다. 1939년 초 공화국군의 탈영병이 어마어마한 수준으로 늘어났고, 프랑코군과의 내통도 늘어난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 14장 : “상황”에도 불구하고 맑스주의적 경향성에 속한 많은 연구자들은 스페인 혁명의 패배의 책임을 아나키즘적 조합주의 운동으로 돌리기 위해 시도해왔다. 이들은 CNT-FAI와 정부의 야합은 노동자의 정권 확보를 거부하는 아나키스트 이데올로기의 결과라고 주장한다.[69] 하지만 이러한 관점은 근거가 없다. 무엇보다, 아나키스트들은 단지 새로운 “프롤레타리아” 정권의 건설에 반대할 뿐 아니라, 구체제의 청산 역시(물론, CNT 지도부는 이 청산을 막기 위해 최선을 다했지만) 강조한다. 어떠한 경우에도, CNT-FAI가 행동한 방식은 그들의 자유의지주의적 이론“ 때문에” 그렇게 한 것이 아니라, 그 이론에도 불구하고 그렇게 행한 것이다. 무엇보다 스페인의 아나키즘적 조합주의적인 대중들이 그들의 “지도자”들의 명에 따라 혁명적 과업과 사회혁명을 멈추었다고 보는 것도 부적절하다. 그 전까지 노동자와 농민의 자주경영 조직을 건설하는데에 있어 큰 역할을 하고 있던 CNT-FAI의 수십만 평조합원들은 “그들이 정치적 놀음판의 말로 제약되는 것을 원하지 않았다.” 그렇기에 이들은 공장에서, 노동조합에서, 코뮌에서 명령이나 지침을 기다리지 않고 독립적 행동에 나섰다. 이러한 “아래로부터의” 자율적 건설은 “지도자”들에 의존하지 않았고, 오히려 그 지도부들에도 불구하고 존재했다. 이것이 아나키스트의 “실질적 추동력”의 힘을 증명하는 것이 아닌가. 아나키즘적 조합주의가 농촌보다는 도시에 집중한 운동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스페인 농촌지역에서의 혁명은 전체적으로 정부의 압력과 그에 대한 타협이 더 효과적이었던 도시에서의 혁명보다 더 나아갔다. 농촌에서는 생산의 영역에서뿐 아니라, 삶의 다른 영역들에서의 자주적 조직들도 건설되었다. 집단농장의 구성원들은 자발적으로 지주들로부터 수용한 토지와 자신의 토지를 합쳤고, 자신이 가지고 있던 재정을 내어놓기도 했다. 각각의 가정은 자신의 필요를 충족하기 위한 소규모 텃밭을 가지고 있었다. 집단농장이 아닌 개인의 토지를 경작하고 싶은 사람이 있다면, 그 요구는 일반적으로 수용되었다. 다만, 그 경작은 개별적으로 진행해야 하며, 임노동을 사용해서는 안된다는 단서가 붙었다. 동료 마을주민들이 “개인”들에게 가하는 도덕적 압력을 배제하는 것은 어려웠지만, 그것이 직접적인 물리적 폭력으로 발전하는 경우는 스페인의 “집산화” 과정에서 알려진 바가 없다. 집단농장은 마을 전체의 거주민들, 혹은 최소한 압도적 다수의 거주민들을 포괄했다. 많은 집단농장은 “가족수당”을 도입했다. 화폐는 혁명위원회가 수용하여 은행에 보관하였다. 몇몇 지역들은 자체적인 화폐를 발행하기도 했다. 혁명위원회는 분배구조를 확보하였으며, 가격은 집단적으로 결정되었고, 집단적으로 통제되었다. 집단 창고와 집단 상점이, 주로 교회였던 건물에 만들어졌다. 사회변혁은 조정되지 않은 다양한 형태로 이루어졌다. 가끔 이는 토지 소유구조의 특이성과 연결되어 있기도 했다. 아라곤에서 80%의 토지가 대지주의 소유였다면, 레반테(발렌시아)와 카탈루냐에서는 소농의 소유 비율이 우세했다. 이 소규모 경작자들 중 훌륭한 아나키스트들이 다수 있기는 했어 집단농장의 건설을 시작하기는 했지만, 레반테와 카탈루냐에서의 집산화의 길에는 장애물이 더 많았다. 이 지역들에서는, 대지주들의 토지만 수용되었다. 하지만 전쟁에서 비롯한 식량의 부족은 공동체 평의회가 사적 거래를 제한하고 사회화를 촉진하는 수단을 사용할 수밖에 없도록 만들었다. 이로서 완전한 집산화가 이루어졌다. 하지만 이는 아라곤에서만큼 지역 대중의 지지를 받지는 못했다. 몇몇 집단농장들은 규모가 크고 풍족했지만, 이들 중 다수는 여전히 화폐적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다. 아라곤에는 400~500개의 집단농장이 구성되었고, 발렌시아에서는 900개, 카스티야에서 300개, 카탈루냐에서 40개, 에스트레마두라에서 30개가 구성되었다. 1936년 말부터 1937년 초까지, 약 30만에서 40만명이 연방에 속한 집단농장에서 거주했다.(이는 집단농장이 공화국군과 프랑코주의자들에 의하여 파괴될 때까지 계속되었다.) 이 집단농장들에서는 아나키즘적 사회구조가 최대한 발현되었다. 이곳에는 “소유자도, 지역 유지도, 성직자도, 착취자도 없었다.” 아라곤에서 집단농장은 지역 인민의 70% 가량을 포괄했고, 경작지의 60% 가량을 확보하고 있었다. 1937년 2월, 카스페에서 열린 집단농장들의 회의에서는, 집단농장에 가입하지 않고 개별적으로 농사를 짓고 싶은 자들은, 임노동을 사용하지 않으며 집단농장이 제공하는 서비스를 이용하지 않는다는 전제 아래 그렇게 할 권리가 있다고 공식적으로 확인했다. 이러한 개인은 스스로가 경작할 수 있는 만큼의 토지만을 가질 수 있었다. 아라곤에서 수공업 공장이나 다른 형태의 지역 산업, 상점이나 교육기관, 문화공간 등은 사회화되었다. 아라곤의 마을들에는 강하고, 오래된 공동체적 전통이 있었고, 이 전통은 인민들을 아나키즘적 코뮌주의 사회에 적합한 자유로운 지역적 · 경제적 공동체로 묶어내기 쉽게 만들었다. 집단농장 내부에는 위계질서가 없었고, 모든 구성원들은 평등한 권리를 가지고 있었다. 보통 한 달에 한 번 열렸던 구성원들의 정기 총회가 주된 의사결정기구였다. 공동체적이고 경제적인 생활을 조직하기 위한 위원회가 선출되었고, 이는 보통 이전의 혁명위원회에 기반한 것이었다. 위원회는 일반적으로 다양한 부문의 대표자들로 구성되어 있었고, 특권을 가지고 있거나 특별한 보상을 받지 않았다. 사무국원과 회계담당자를 제외하면, 이들 모두는 자신의 업무를 지속해야 했다. 집단농장의 성인인 구성원 모두는, 임산부를 제외하고는, 모두 노동해야 했다. 노동은 자주경영에 기반하여 조직되었다. 5~10명으로 구성된 분반이 매일의 회의를 통해 노동과 관련된 기본적 문제에 대한 결정을 내렸다. 이 회의에서 선출된 대의원들이 다른 분반과의 협업 및 정보 교환의 역할을 수행했다. 많은 집단농장은 순환보직의 원칙을 집행했고, 노동자들은 즉각적 필요에 따라 한 부문에서 다른 부분으로 이동하였다. 산업공장은 공동체적 구조 안에 포괄되어 산업과 농업을 총화할 수 있게 하였다. 집단농장은 지역 연방을 통해 함께 모였다. 화폐는 서서히 청산되어갔다. 집단농장이 건설된 첫 주, 많은 집단농장들은 임노동을 철폐하고, 공동 창고에 있는 모든 재화에 대한 무제한적 무료 소비를 도입했다. 하지만 전쟁과 물자부족이라는 조건에서, 이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특히 집단농장 바깥에서는 화폐가 여전히 유통되고 있었기에 더욱 그러했다. 1936년 9월에는 다수의 코뮌들이 소위 “가족수당” 체계로 전환했다. 집단농장에 소속한 각 가정은 동일한 금액을 지급받았다.(집단농장의 규정에 따라, 한명에게는 7-10 페세타가, 부인이 있을 시 50%를 추가하여, 가족구성원 1명당 15%씩을 추가하여 지급되었다.) 이 수당체계는 식량과 소비재의 구입을 위한 것이었지, 저금을 장려하기 위한 의도가 없었다. 많은 코뮌들에서 국가 화폐를 대신하기 위한 쿠폰이 도입되거나 카드, 혹은 교환권이 도입되었다. 전쟁 상황에서, 특정한 종류의 식량은 배급되었지만, 다른 것들(와인, 버터 등)은 거의 무제한적으로 이용할 수 있었다. 화폐를 폐지한다는 최종 결정이 내려지는 순간까지 “아라곤에서 집산화를 채택한 510개의 마을 중 3분의 1에서 화폐가 철폐되었고, 집단농장의 창고에서 소비자 책자를 제시하고 모든 재화를 무료로 이용할 수 있었다. 그리고 나머지 3분의 2에서는 채권, 쿠폰, 교환권 등 발행한 코뮌 내에서만 사용할 수 있는 대안화폐가 사용되었다. 지역주의적 성격을 가지고 있던 개별 코뮌에 필요했던 첫 번째 활동은 집단농장간의 불평등을 해결하는 것이었다. 몇몇 집단농장은 더 풍족했고, 다른 곳은 가난했다. 상황의 목격자였던 독일 조합주의자 서치가 확인한 것처럼, 최초에 일부 집단농장은 “자급자족”이라는 표어 아래에서의 경제적 계획에 반대했다. 집단농장 사이의 완전한 독립성과 코뮌 내부 분배체계의 차이는 그들이 경제활동을 조정하기 어렵게 만들었다. 사회혁명을 심화시키는 것을 지지하던 아나키스트들은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헌신했다. “집단농장”을 개인적으로 선전하던 두루티처럼 말이다. 1937년 2년, 카스페 총회에는 수백명의 대의원들이 참여하여 개최되었다. 참가자들은 “집산화”에 대한 선전을 가속하고, 실험적 농장과 기술학교를 건설하며, 집단농장들 간의 상호부조를 조직해 기계와 노동력을 공유하기로 합의했다. 마을 간의 경계는 없어질 것이고, 공동체 소유의 한계도 폐지될 것이었다. 집단농장의 연방이 바깥 세상과의 교환을 조정하고, 내부적 소모가 아닌 대외적 교환에 사용할 공동 재화들을 조성하며, 교환가능한 재화들에 관한 통계를 수집하기로 하였다. 마지막으로, 집단농장과 연방 내에서 모든 형태의 화폐 유통을 완전히 철폐하고, 공동의 소비자 책자(책자를 제시하면 소비재를 가져갈 수 있었다.)로 대체하기로 하였다. 이 책자들은 각개 거주민의 실질적 수요를 맞출 수 있도록, 그리하여 생산이 인민의 구체적 수요에 기반할 수 있도록, 그로서 아나키즘적 코뮌주의의 “아래로부터의 계획”이 실현될 수 있도록 설계된 것이었다. 아라곤 집단농장들의 활동은 매우 성공적이었다. 공식 통계만 보더라도, 1937년 아라곤 지역의 수확량은 20% 증가하여, 동시기 오히려 수확이 감소했던 스페인의 다른 지역들과 대조되었다. 아라곤에서는 길, 학교, 병원, 농장, 문화 기구가 건설되었고, 많은 마을에서 이러한 건설은 처음 있는 일이었다. 노동의 기계화 역시 이루어졌다. 거주민들은 보건서비스를 제공받았고, 반권위주의적 교육을 무료로 제공받았다.(의사와 교사는 집단농장의 정규 구성원이었다.) 많은 집단농장은 세금을 내지 않았고, 오히려 전선에 직접적이고 자발적으로 물자를 보내는 것을 선호했다. 스페인의 도시에서 사회변혁은 보다 조정되지 않은 형태로 이루어졌다. 산업체 다수를 노동자가 점유하여 스스로의 통제 아래에 두고 있었지만, 그러면서도 노동조합과 노동자 조직에 의한 기업의 수용에서 산업의 완전한 사회화로의 이행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이는 자산-화폐 관계가 아직 철폐되지 않았고, 화폐는 여전히 자본가와 국가의 손에 있었기 때문이다. 당시를 목격한 가스톤 레발에 따르면, “바르셀로나와 발렌시아의 노동자들은 공장을, 작업장을, 기계를 원자재를 확보하고 화폐 체계의 잔재와 평범한 자본주의적 상업관계를 이용하였다. 이들은 생산을 스스로 조직하고, 자기 노동으로 생산한 것을 팔아 그 이익을 가져갔다.” 아바드 데 산티얀은 CNT에서의 경제문제를 다루면서, 정부와 타협해야 한다는 압력이 노동자들이 “더 나아가지” 못하게 했다며, “그리고 이것이 모든 것을 시작부터 왜곡했다. 이것은 실질적 사회화가 아니라, 오히려 노동자의 신자본주의였다. 자본주의와 사회주의 사이에서 흔들리는 자주경영이었다. 만약 혁명이 조합의 지도 아래에서 완전히 수행되었다면 이러한 일은 벌어지지 않았을 것이다.” “우리는 계획을 위한 경제체를 조직하지 않았다. 우리는 공장주를 공장에서 내쫓고, 공장을 통제할 위원회를 건설하는 데에서 만족했다. 우리는 우리 사이의 연결고리를 만들려는 시도나 경제를 실천적으로 조정하려는 시도를 하지 않았다. 우리는 계획이 없이, 우리가 무엇을 하는지도 모르고 행동했다”고 인정한다. 도시에서는 분배의 사회화 역시 이루어지지 않았고 그 파급효과는 곧 나타났다. 바르셀로나에서 CCMA가 구성된 이후, 다양한 정치세력의 대표자들을 포괄하는 중앙식량공급위원회가 건설되었다. 이 위원회는 전선과 병원에 대한 물자의 공급을 조직했고, 상점을 열었으며, “인민식당”의 네트워크를 유지했다. 하지만 개인 상업의 체계는 유지되었고, 그 해가 끝날 때까지 바르셀로나에서 이 현상은 식량의 품귀, 물가의 투기적 인상 등의 해악으로 나타났다. 1936년 12월에는 분배 분과에 속한 CNT의 노동조합이 도소매상의 노동자들에게 투기에 대항하여 싸우라고 주문하기에 이르렀다. 이들은 도소매상의 노동자들이 상점주가 물건을 “잘못된 고객들에게” 팔고 있지는 않은지, 이들이 물가를 독단적으로 올리고 있지 않은지 감시할 것을 촉구했다. 노동자들은 여전히 임금을 받았다. 많은 경우(이를테면 바르셀로나에서) 소위 “가족수당”을 적용시켜 같은 가족 구성원의 수를 가진 노동자들은 같은 임금을 받게 할 수 있었다. 하지만 더 많은 경우, 노동자들이 할 수 있던 것은 임금 격차를 축소하고 저임금 노동자들에게 대규모의 임금인상율을 적용하는 정도로 제약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산업의 여러 부문에서, ‘조합화’는 개별 기업의 층위를 넘어 전반적으로 확산되었다. 소위 기업의 “집단”이 단일 기업처럼 협력하여 작동하기 시작했다. (예를 들어, 알코이의 모든 산업부문이, 카탈루냐의 가스, 수도, 전기 공급이, 바르셀로나의 대중교통이, 많은 지역에서의 운수와 공중보건산업이 이러한 방식으로 조직되었다.) 아나키즘적 조합주의 노동조합들은 전시 상황과 “지도부”의 타협에도 불구하고 혁명적 변혁을 지속하고 심화시키고자 하였다. 목공 부문의 조합 하나는 아나키스트들이 처음부터 자기 의지, 즉 “7월 19일에 수명을 다한 체제를 더 인간적이고 평등한 것, 자유의지주의적 코뮌주의로 대체하는 것”을 실현할 수 있었다고 강조한다. 바르셀로나와 카탈루냐에서 “이러한 변혁은 시작했었다.” 하지만 “다른 조직들이 CNT-FAI의 구성원들의 열정을 이용”하여 “인민의 추세”를 새로운 패배의 방향으로 돌려놓았다. 결과적으로 “참된 수용을 진행하여 광범위한 인민의 열망을 충족하는 대신, 사업주들은 매주 임금을 지불해야 하게 되었고, 일당을 인상하는 대신 시급을 낮추게 되었다. 이것이 전쟁이 한창일 때 말이다!” 이미 수용된 기업들에서는 다수의 “기생충같은 관료들”과 통제위원회가 등장했다. 이들은 생산에 참여하지 않았다. 나아가 산업 내에서 성장한 집단들은 서로 평등하지 않은 상황을 마주하게 되었고, 이들은 협동조합을 모방하여 서로 경쟁하려 하였다. 이렇게 “두 개의 계급, 새로운 부자와 언제나처럼의 빈자”가 등장하게 되었다. 아나키즘적 조합주의자들은 동산의 통제를 통해 경제적 활동을 전용하고자 했다. 이들은 “정부나 그와 비슷한 공식기구가 대변하고 있는 소부르주아지”, 관료, 공무원, “쓸모없는 요원과 중간관리자”들은 경제가 평범하게 작동하는 것을, 경제가 발전하는 것을 담보할 수 없다고 믿었다. 그렇기에 노동조합과 그 조직이 “전체 생산을 통제하고 경영할” 의무를 가지고 있다는 것이었다. 목공 부문의 노동조합이 설명하는 것처럼, 아나키즘적 조합주의자들은 제네랄리타트의 집산화에 관련한 법령을 인지했지만, 실천에 있어서는 그것을 다른 방향으로 틀어놓고자 시도했다. “우리는 산업의 모든 부문에 대한 집산화에 동의했다. 하지만 단일한 재정기구를 통해 그것을 평등한 분배 체계로 전환하고자 했다. 우리는 노동자 집단들의 빈부격차에 동의한 바가 없다.” CNT의 산하 노동조합과 연방들은 경제의 사회화 계획에 관하여 적극적으로 논의하였다. 수도, 가스, 전기 노동자들을 포괄하고 있는 연방은 전력 공극의 집산화에 관한 계획을 수립했다. CNT와 UGT의 섬유노동조합연맹의 대표단은 합동회의를 열고 “카탈루냐의 모든 섬유부문에 대한 완전한 집산화를 시행”하고, 그 산업에 자주경영의 체계를 승인하기로 결의했다. 바르셀로나 CNT의 지역총회 참가자들은 “산업분야의 사회화를 전국적 규모로 시행할” 필요성을 선포했다. 이들은 공장평의회, 부문협의회, 산별협의회, 나아가 총체적인 경제평의회까지, 모든 층위에서의 자주경영을 제안했다. 한 산업의 각 부문은 그 산업의 상황에 대하여 완전하고 구체적인 연구를 진행하고, 현재의 역량과 생산성에 대한, 노동자 수에 대한, 확보한 원자재에 대한, 판매 시장에 대한, 발전 가능성에 대한 구체적인 자료를 포함한 사회화 계획을 경제 평의회에 제출하여야 할 것이었다. 1937년 1월 1일, 운수산업의 전국회의는 국유화냐 사회화냐의 문제를 논의하였다. 레반테 지역에서 농민들의 지역적 연방과 과일 수출 사업 노동자의 통합노동조합은 (외화를 확보할 수 있는 기초적 수단이었던)오렌지 등 과일들을 재배하는 농민들을 향한 성명을 발표했다. 각 마을과 조합이 개별적으로 수출에 뛰어들고, 그로부터 확보한 외화를 개별적으로 사용하던 당시의 상태는 경쟁을 낳았다. 그리고 통합노동조합은 이를 “불운한” 사태라 명명했다. 조합들은 생산물 재고와 상호부조 기금을 공동으로 관리할 “중앙기구”를 건설하여 이 기구를 농민들 스스로가 통제해야 한다고 부르짖었다. 레반테 농민 연방은 이에 호응하여 오랜지 생산량의 약 50%를 통합해내었고, 이 중 70%까지가 무열조직을 통해 유럽 시장으로 팔려나갔다. 1937년 2월, 카탈루냐 CNT의 총회는 산별조합을 재건하여 작물재배나 원자재의 채광으로부터 최종생산물의 분배까지 생산의 전체 과정을 포용하고 통제할 것을 승인했다. 카탈루냐에서 지역 조합과 연합에 관한 경제적 조사가 이루어졌다. 이로서 CNT는 정보를 수집하였고, “아래로부터 계획”되는 “혁명적 경제”의 건설을 준비할 수 있었다. 이 통계에는 지리적 입지와 기후, 사회혁명운동의 전통, 지역민의 경제적 상황과 경제적 연결망, 주거 상황, 미래의 가능성 등이 포함되어 있었다. 1937년부터 발생한 혁명의 점차적 역행은 광범위한 사회화 계획이 적용되지 못화게 하였다. 전시 조건하에서 정부는 경제활동에 대하여 국가의 통제를 강화하거나 심지어 산업, 특히 군수산업에 대한 직접적으로 국유화하는 방향을 지향했다. 이에 따라 CNT 내에 조합주의적 운영 부문을 구성하여 협력과 계획의 자율적 구조를 만들고, 산별연맹과 경제 평의회를 총체적으로 지도하며, 스스로의 은행을 갖추게 하자는 개념이 일부 활동가들 사이에 확산되었다. 1938년 1월 발렌시아에서 열린 CNT 전국 경제 회의에서는 이 개념을 승인하였다. 스페인의 아나키즘적 조합주의 노동자들의 사업이 유예되고 불완전했다 하더라도, 그들이 만들어낸 사회변혁의 중요성은 결코 과대평가되고 있는 것이 아니다. 역사상 단 한 번도, 이러한 규모의 변혁이 이루어지지 못했다. 아나키즘적 조합주의는 지금껏 “그 회의를 통해 구상되어 왔던 모든 것, 공장과 농장에 대한 노동자의 통제, 생산의 계획적 전개, 경제적 관계에서의 평등, 건설적인 결정 채택의 가능성”을 실현했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은 공화국 정부의 틀 바깥에서 이루어졌다.” 아라곤에서는, 자유의지주의적 코뮌주의를 적용할 가능성이 원칙적으로 실현되었다. CNT-FAI 지도부가 총체적 혁명의 이상에서 후퇴하고, 정부와 정당과 인민전선과 타협한 것은 평범한 아나키즘적 조합주의자들의 맹렬한 저항운동과 직접적 불복종 운동을 촉발했다. 이러한 사건들에 대한 정보는 파편으로만 남아있고, CNT, FAI, 청년자유의지주의자(Juventudes Libertarias) 등이 집행한 반조직행위에 대한 체계적 조사는 지금까지 남아있지 않다. 그렇기에 이 반대세력의 실제 규모를 가늠하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일 수밖에 없다. 파편화된 정보를 간략히 요약해보자면, 저항운동에는 세가지 기본 형태가 있었다. 우선, 경제적 · 사회적 생활에 대한 국유화의 정치에 맞서고, 노동자 자주경영의 영역에서의 성취를 지키려는 CNT 기층조직의 저항이 있었다. 공화국 정부와 노동조합/집단농장 사이의 충돌은 지속적으로 발생했다. 1937년 초, 카탈루냐 농업부 장관은 바르셀로나 CNT가 제안한 분배의 사회화 계획에 반대했다. 발렌시아 지역의 오렌지 농장에서 노동자-농민들의 조직의 경제활동의 통제를 확보하려는 정부의 시도는 날카로운 갈등을 촉발했다. 상업부 장관이자 CNT의 조합원이던 후안 로페스는, 1937년 초, 농업부 장관이자 공산주의자였던 유리베의 도움을 받아 집단농장에 대한 정부 통제를 확언하는 법령을 반포했다. 하지만 다수의 발렌시아 협동조합들은 그 법령을 따르는 것을 거부했다. 정부는 투유에라와 알파라라는 마을들을 전략적 거점으로 보고 포병과 전차부대가 포함된 군경부대를 보냈다. 하지만 엽총과 구식 대포 2정으로 무장하고 있던 농민들은 공고한 저항을 선보였다. 이들은 인근의 하티바, 카르카헨테, 간디아, 수에카 지역의 지지를 등에 업고 “간디아 전선”을 구성했다. 카타로하, 리리아, 몽카다, 파테르나, 부리아나 마을의 농민들은 “빌라네사 전선”을 구성했다. 집단농장들을 돕기 위해 자유의지주의적 “철의 분대” 2개 여단이 달려왔고, CNT도 타루엘-세고르베 전선을 포기하고 2개 여단을 파견했다. 쿠예라 지역에서의 전투는 4일간 지속되었고, 정부군은 측면 공략을 시도했다. CNT가 개입한 이후, 휴전과 상호 포로 교환에 관한 합의가 이루어졌다. 레반테 지역의 집단농장들은 오렌지의 생산과 수출에 대한 통제를 유지할 수 있었다. 1938년 초, (CNT-FAI 지도부의 압력에도 불구하고) 발발한 바르셀로나 연예 산업 노동자들의 파업에 대한 정보도 존재한다. 이 파업은 그들의 산업에 대한 국가 통제 도입에 반대하여 일어났다. 정규군화에 대항하여 일어난 아나키스트 민병대원들의 저항도 이야기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충돌의 결과로, CNT 카탈루냐 지역 위원회는 군대의 명령을 듣기를 원하지 않는 대원들은 전선에서 나가도 된다고 결정할 수밖에 없었다. 두 번째 형태는, CNT-FAI의 “협조주의적”이고 “타협주의적”인 노선에 대하여 공개적이고 날카롭게 비판한 아나키즘적 조합주의 문건들이 있었다. 이 문건들은 “반파시스트 통일전선”이라는 명목으로 혁명을 정리하고 정부와 협력하는 것을 비난하였다. 이러한 저항행동에서 중요한 역할을 맡았던 것은, 1936년 12월 29일부터 출간되었던 신문 <신념>이었다. 이 신문은 CNT-FAI의 바자 료브레가트 지역조직에서 출판하였다. 그 편집장은 카탈루냐 CNT의 기관지 솔리다리다트 오브레라의 총편집자였으나, CNT-FAI 지도부의 친정부정책에 동의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해임된 리베르토 칼레자스가 맡았다. <신념>지는 아나키즘적 조합주의 운동의 혁명적 소장파의 관심을 끌어모았다. <신념>지를 통해 맹렬한 비판을 쏟아내던 작가들은 조제 알베롤라, 펠리페 알라이스, 조제 페이라츠, 세베리노 캄포스, 플로레알 오카나, 프란시스코 카레노, 자이메 발리우스 등의 저명한 아나키스트들이었다. 레리다의 아나키스트 소장파들도 <아크라시아>(편집자 : 페이라츠)라는 이름의 출판물을 펴내었다. 토르토사 지역의 <시우다트 이 캄포>, 발렌시아의 <노소트로스>, 카탈루냐지역 청년자유의지주의자(FIJL)의 기관지 <루타>와 <에스푸에르사>, ‘두루티의 친구들’이 펴내던 신문들(<라 노체>, 그리고 1937년 5월 이후부터는 <엘 아미고 델 푸에블로>) 역시 이 저항에 함께했다. 아나키즘적 조합주의 운동의 평범한 활동가들은 이 모든 출판물들을 흥미롭게 읽고 이를 지지했다. 마지막으로, 소장파 그룹들 역시 존재했다. 발렌시아에서는 FAI의 일부 부문과 FIJL이 노소트로스 출판부에 모여 정부 참여에 대하여 강력한 입장을 내었다. 1936년 12월의 발렌시아에서는 이코노클라스타 그룹의 성명서들이 자주 나타났다. 이 성명서들은 CNT를 대표하는 정부인사들을 포함한 국가기구 전반에 대한 맹렬한 비판을 담고 있었다. CNT의 조합원들은 이 성명서에 찬동으로 응답했다. 그렇기에 CNT 전국위원회는 이 성명서들을 애써 무시하고, 이것이 “규율이 없고 무책임한” 비판이며 “그 누구도 대변하지 않는다”고 비난했다. FIJL의 핵심조직이었던 카탈루냐 FIJL은 정부 참여에 대한 반대 입장을 공개적으로 취했다. 이들은 이것이 아나키즘의 신념에서의 이탈이고, “상황”에 순응하는 것이며, “지도자”들과 협력하는 것일 뿐이라고 말했다. 1937년 5월의 상황에 적극적으로 참여한 후, FIJL은 공개적 반대파가 되어 CNT-FAI 지도부의 결정에 따라 반파시스트 정당의 청년조직과 합의서를 체결하는 것을 거부했다. 이에 대한 반응으로, 아나키즘적 조합주의 운동의 지도부는 FIJL의 “규율이 없는” 기관지 <루타>의 인가를 취소하겠다고 협박했다. 1937년 봄, CNT 전국위원회의 정책에 불만족한 아나키즘적 조합주의자 분파는 “두루티의 친구들”을 건설했다. 이 조직에는 4~5,000명의 회원이 있었다. 이들은 자유의지주의적 코뮌주의가 선언되지 않은 것을, 정부에의 참여를, 사회주의자 · 공산주의자 · 부르주아 공화주의자들과의 협력을 비난했다. 이 조직의 구성원들은 아나키즘의 “정통적” 방법론과 “개량주의적” 방법론 모두를 비판했다. 그러면서 아나키즘의 이론과 전술을 더욱 발전시켜, 다음과 같은 원칙에 기반하여 세워내야 한다고 주장했다. “자유도시”(코뮌), 노동조합에 의한 경제의 운영, 혁명의 방어를 위한 혁명위원회의 건설, 지역 방어위원회들의 활동상의 협조의 원칙이 그것이었다. 하지만 다른 아나키스트 소장파 조직들은 두루티의 친구들에 크게 매력을 느끼지 않았다. 다른 조직들은 두루티의 친구들이 권위주의적 방법론에 집착한다고 비판했다. CNT-FAI에서 활동하고 있던 이 조직들(바자 료브레가트 지역의 <신념>과 <통제불능>, 바르셀로나의 <로스 키조테스 델 이데알>, 레리다의 <아크라리아>등)은 조직을 정당으로 전환하거나 자유의지주의 운동을 통일하고 중앙화하려는 시도에 반대하면서, 아나키즘적 조합주의의 전통적인 원칙과 이상으로 돌아갈 것을 주장했다. 1937년 말, 저명한 아나키스트인 산타나 칼레로, 세베리노 캄포스, 페이라츠는 “자유의지주의 운동의 의식화돤 일원 중 주된 소장파 세력”을 대변하는 유인물을 펴내었다. 이 유인물은 “지도부”가 “상황적 요구”라는 미명 아래 “아나키즘의 이데올로기적 원칙”을 배신하고, “아나키즘의 정수”를 침해하고 있으며, “악취를 풍기는, 혐오스러운 정책을 통해 CNT-FAI의 폐와 뇌를 중독시키고 있”다고 비난했다. 이들은 “국유화와 중앙화에 묶인 상태”로부터 벗어날 것을 부르짖었다. 두루티의 친구들처럼, 정통 아나키즘적 조합주의로의 회귀를 지지하던 자들은 자유의지주의적 대중조직(CNT-FAI)를 제외한 다른 행동의 분야를 구상하지 않았다. 이들은 평범한 활동가들 사이에서, 총회와 회의에서의 연설을 통해 운동의 공식 노선을 변경시키고자 노력했다. 1938년 10월 개최된 CNT, FAI, FIJL 지역 협의회의 전국 총회에서, “협력”의 반대자들은 정부에 들어가는 정책에 대한 최후의 전투를 치르고자 했다. 카탈루냐 FIJL의 대의원은 “국가를 파괴하기 위해 국가에 들어간다는 것은, 그러니까, 매춘을 없애기 위해 당신의 부인과 누이동생을 사창가에 보낸다는 것과 같은 것”이라고 선언했다. 그리고 카탈루냐 FAI의 대의원 셰나는 연방이 정치에 참여할 수 있다는 가능성이 언급된 것에 대한 시위로서 총회장에서 퇴장하였다. 하지만, 소장파는 그들이 원하는 변화를 얻어내는 데에 실패했다. 이들은 분열되어 있었고, 조직적으로 미숙했다. 언제나처럼 활동가들은 “우리 조직”에 대한 신념에 사로잡혀 있었고, 그 틀 바깥에서 대중들이 어떻게 말하건, 그것은 수용할 수 없는 것이었다. 무엇보다, 스페인의 아나키즘적 조합주의는 체계적이고 협조적인 정파투쟁의 경험을 가지고 있지 못했다. 그렇기에 소장파들은 CNT-FAI의 지도부를 제거해내지 못했다. *** 15장 : 스페인 혁명과 국제 아나키즘적 조합주의 1936년부터 1939년까지 국제 아나키즘적 조합주의 운동은 스페인 혁명에 대한 최대한의 실천적 연대냐, CNT 지도부에 대한 비판이냐의 사이에서 분열되었다. 1936년부터 IWA의 사무총장이었던 베스나르는 그 해 가을에만 혁명 스페인을 3차례 방문하였고, 그곳에서 CNT 지도부가 아나키즘적 조합주의의 원칙에서 멀어졌으며, 이것이 혁명의 퇴보를 가져오고 있다는 것을 발견하였다. 베스나르는 CNT의 입각이나 정당과의 협업, 정규군화, 조합의 경제적 통제에 대한 저지, 스탈린의 소련에 대한 비판 거부, 자유의지주의적 코뮌주의 건설 과업 수행의 거부에 대하여 날카롭게 비판했다. 하지만 이러한 와중에도, 1936년과 1937년의 IWA 정기 총회와 1937년의 임시 총회에서 확인할 수 있듯이, IWA는 CNT의 노선에 영향력을 행사할 실질적 힘을 가지고 있지 않았다. IWA 사무국부터가 분열되었다. 헬무트 뤼디거와 네메시오 갈베는 베스나르와 입장이 달랐고, CNT의 “강요된” 전술을 옹호했다. 아르헨티나와 우루과이의 노동자 조직(FORA와 FORU)는 스페인 CNT를 강력하게 비판했다. 이들은 CNT의 정책이 혁명적 조합주의적인 오류로부터의 논리적 귀결이라고 바라보았다. 프랑스의 CGT-SR도 CNT를 비난했다. 이 조직들은 스페인의 동지들이 스스로의 결정과 전술을 재점검하고, IWA의 원칙에 대하여 명확히 지지하고 있음을 확인할 것을 촉구했다. 러시아의 아나키스트 망명자였던 볼린이 핵심적인 역할을 맡았던 “프랑코포니 아나키스트 연맹”(Fédération Anarchiste Francophone, FAF)은 CNT 지도부의 정부 참여와 협조주의노선에 맞서 투쟁하던 스페인 아나키스트/아나키즘적 조합주의자들의 소장파 세력과의 연대를 선언했다. FAF는 “줏대없는” “이데올로기적 배신”을 당한 스페인 아나키스트들을 참된 “CNT-FAI” 라 부르며, “CNT-FAI의 대오 내부에서뿐 아니라, 국제 아나키즘 운동 전반에서 분열이 필연적”이라 여긴다고 선언했다. 1937년의 IWA 임시 총회 전, CNT를 IWA에서 제명하는 것까지 논의되고 있었다. 하지만 CNT의 지도부는 이 비판의 물결을 “특수한 상황”을 빌어, 다른 나라에서 아나키즘적 조합주의 운동이 약하다는 것을 빌어, 다른 어떤 곳에도 혁명적 투쟁이 없었다는 점을 빌어 무력화시켰다. CNT의 지도부는 베스나르를 IWA 사무총장에서 해임시키는 데에 성공했다. 나아가, CNT 지도부는 IWA의 원칙과 강령을 개정하여 “한물간” 지점들을 삭제하고, 혁명의 방어에 관한 규정을 신설하며, 각 가맹조직들에게 “광범위한 자율”을 부여하여, 각 조직이 필요하다고 판단한 모든 전술노선을 택할 수 있게 하여야 한다고 주장했다. 뤼디거가 이끌던 독일 망명자들의 아나키즘적 조합주의자 모임은 이 방향으로 더 나아갔다. 이들은 아나키즘적 조합주의의 개념과 전술을 근본적으로 갈아 엎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들은 아나키즘적 조합주의의 원칙이 다른 반파시스트 세력과의 협력을 열어놓는 방향으로 재검토되어야 하며, 반제국주의적 입장과 혁명전쟁 지지의 방향으로 드러나야 한다고 주장했다. 뤼디거는 전술적 “탄력성”과 “명확한 개념”을 지지했다. 그리고 이것은 정치적 활동의 필요성, “혁명” 정부의 필요성, 국가주의자들 및 정당기구와의 협업의 필요성, 규율잡힌 “혁명군”과 압제수단 창설의 필요성, 부르주아지를 보호하고, 사유재산을 보호할 필요성을 포함하고 있었다. 하지만 CNT를 비판하는 대오에는 단결이랄 것이 없었다. 스웨덴의 SAC는 정부 참여를 비난하였지만, “반파시스트 협력”은 옹호했고, 전술적 자율성을 명문화하는 것도 옹호했다. CGT-SR과 베스나르는 “민주주의적 자본주의에의 참여”를, 국가나 정당이나 군대와의 협력을, 아나키즘적 조합주의의 기본 원칙 폐기를 날카롭게 비난했다. 하지만 이들은 명확한 대안을 내놓지 못했고, 일정부분의 “전술적 수정”에, 혁명적 전쟁과 반식민주의적 전쟁의 가능성에 대한 조항을 삽입하는 데에 동의했다. FORA와 FORU는 다른 관점에서 IWA의 원칙과 전술을 바꾸는 데에 확고한 입장으로 반대했다. IWA의 원칙과 전술은 국가에 대한 투쟁과 직접행동에, 정치와 정치세력과의 연대에 대한 거부에 기반하고 있었따. 이들은 모든 전쟁에 반대함을 재확인할 것을 주장했다. 전쟁은 필연적으로 자본가들의 권력투쟁에 지나지 않기에, 혁명을 통하여 전쟁을 반대해야 하기 때문이었다. 라틴 아메리카의 아나키스트들은 그들이 파시즘과 계급에 기반하지 않은 반파시즘 사이에는 원칙적으로 차이가 없다고 명확히 밝혔다. 둘 모두 “프롤레타리아 해방의 적”일 뿐이기 때문이다. 이데올로기적 · 전술적 혼란은 IWA의 과업을 지연시켰고, 스페인 CNT의 지도부가 인터내셔널로부터 그들의 행동을 승인받을 수 있게 하였다. 1937년 12월의 임시총회에서 스페인이 요구한 “사회주의의 세 분파”(아나키스트, 공산당, 사회민주주의자)들의 “세 인터내셔널”이 회합하고 파시즘과 제국주의에 맞서기 위한 상설위원회를 두자는 제안이 부결되었지만, 총회는 CNT에게 “실험”을 “자기 책임 아래에서” 지속할 권리를 주자는 CGT-SR이 제안한 결의안을 채택했다. 파시스트 국가의 물건에 대한 국제적 불매운동을 조직하자는 제안을 담은 사회민주주의 인터내셔널(혹은 암스테르담 인터내셔널)에 보내는 성명서의 초안이 기획되었다. 하지만 암스테르담 인터내셔널의 지도부는 이 제안을 거부했다. 결국, 1938년의 6차 총회에서, 라틴 아메리카와 프랑스 CGT-SR의 대의원들이 불참한 가운데, 스페인, 스웨덴, 포르투갈의 대의원들은 네덜란드 대의원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IWA의 헌장을 개정하는 데에 성공했다. 이 개정안은 다른 무엇보다, 각 가맹조직에 “광범위한 전술적 자율성”을 부여하고, 혁명시기 노동조합이 노동자의 민병대를 지도할 수 있도록 허용하였다. CGT-SR의 행동은 공식적으로 규탄되었다. 서면으로 제출된 FORA와 FORU의 의견은 거의 고려되지 않았다. CNT 지도부는 인터내셔널 내의 반대파에 맞서 승리했다. 하지만 이것은 어떠한 객관적 상황도 바꾸지 못했고, 스페인 내에서 그들의 입지를 강화하지도 못했다. 내전은 패배했다. 1939년 초, 스페인 공화국의 모든 영토는 반군 장성들의 손아귀에 떨어졌다. 마침내 피로 물든 공포의 체계가 건설되었다. CNT는 숙청되었고 수십만이 국경을 넘어 탈출해야 했다. 아나키즘적 조합주의자의 개별적 무장 조직들은 1960년대 초까지 빨치산 투쟁을 지속했다. 스페인의 아나키즘적 조합주의 운동은 망명기를 거치며, 내전 기간 중의 “정부 참여” 실험에 대한 자아비판적 평가를 할 수 있을 정도의 힘을 회복하였고, 올바른 교훈을 도출해낼 수 있었다. 스페인 자유의지주의 운동(CNT-FAI-FIJL)의 대륙간 총회가 1947년 4월 툴루즈에서 개최되었고, “정부와의 협업의 결과”는 “재앙”이었다고 여기며, 국가권력을 철폐하고 그것을 노동자의 자주경영으로 대체하는 전통적 아나키즘의 개념으로 돌아갈 것을 선언했다. ** 4부 : 몰락, 그리고 재생의 가능성 *** 16장 : 2차 세계대전기의 아나키즘적 조합주의 스페인의 패배 이후 수 개월 뒤 2차 세계대전이 발발했다. 이 전쟁은 IWA의 활동을 완전히 무력화시켰다. 1938 총회의 결정에 불편함을 느낀 FORA는 다음 총회가 이 결정을 재검토할 때까지 “일시적으로 IWA와의 관계를 중단할 것”을 결의했다. 아르헨티나와 우루과이의 아나키스트들은 혁명이 발생하는 순간 노동조합의 기능은 멈추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들은 노동조합이 노동계급의 민병대를 지도한다는 개념을 거부했다. 이들은 “전술적 자율성”이라는 미명 아래에서 국가나 정당과 협동하는 것에 반대했다. 이들은 1938년 총회가 결정한 바, IWA 총회에의 각 조직 대표단 수를 조합원 수에 비례하여 정하는 것에 반대했다.(그 이전까지는 모든 조직이 동일한 대의원 수를 가졌다.) 이들은 청년 조합주의자들의 특별 국제조직을 건설하는 것에 반대했다. 2차 세계대전에 관하여, FORA와 FORU는 그들의 반전/반군국주의적 입장을 유지했다. 전쟁은 서로 다른 국가와 자본가들이 각자의 통치와 특권을 공고히 하기 위하여 벌이고 있는 것이었다. 전쟁이 자유와 정의를 향한 인민의 투쟁과 부합하거나, 그 희망이 될 방법은 없었다. 라틴 아메리카의 아나키스트들은 반파시즘이 단지 참전국 중 한 편의 자본의 이익에만 복무하는 것이라고 보았다. 그렇기에 이들은 노동자들이 반파시즘의 기치와 맥락 아래에서 이루어지는 전쟁을 지지하지 말 것을 촉구했다. 이들은 “파시즘도, 반파시즘도 필요없다”는 표어를 사용했다. 이들은 반전/반군국주의 활동의 심화를 부르짖으면서 “전쟁에 대한, 모든 전쟁에 대한 유일한 해결책은, 인민의 혁명적 단결이다.” 2차 세계대전기의 유럽에서는 아나키즘적 조합주의가 독자적 세력으로 개입하기에 너무나도 그 세력이 약했다. 1930년대 말, 6,000명의 조합원을 조직하고 있던 CGT-SR이 해산되었다. 폴란드, 네덜란드, 벨기에, 노르웨이, 덴마크의 조합주의적, 아나키즘적 조직들은 나치 점령 이후 불법화되었다. IWA 사무국은 스웨덴에 위치했고, 교전국의 자유의지주의자들과 연락할 수 없었다. 전쟁 초기, 자유의지주의 조직의 다수는 “국제주의적”이라 불리던 입장을 취했다. 이는 제국주의적 전쟁을 사회혁명으로 변혁한다는 혁명적 좌파들의 전통적 표어와 유사한 것이었다. IWA 사무국의 선언문은 “전쟁은 자본주의의 결과”이며, “원자재, 식민지, 시장을 놓고 벌이는 자본가 집단 사이의 잔혹한 경쟁이 표현된 것”이고, “제국주의 국가들은 그 영향력을 공고히 하고 세계와 그 부를 통제하고자, 자국의 이득을 위하여 싸울 뿐”임을 지적했다. IWA는 파시즘을 “자본주의의 가장 잔혹한 형태”이며, “인류 최대의 적”이라고 받아들였지만, 노동자들이 민주주의를 믿지 말 것을 권고했다. 민주주의는 “반동과 전쟁을 용인”하고, “평화를 담보하지 않”기 때문이다. IWA는 “인류가 자유로운 생활을 누리고, 끝없는 전쟁에서 스스로를 해방하기 위해서라도, 자본주의는 철폐되어야 한다”고 선언한다. “민족국가간의 전쟁은 계급 간의 전쟁으로 바뀌어야 한다. 국제 노동계급은 그 모든 힘을 다하여 자본주의를 철폐해야 한다.” 프랑스, 스웨덴, 네덜란드, 벨기에의 아나키스트와 아나키즘적 조합주의 조직들 역시 같은 정신을 담은 선언문을 발표하였다.[70] 하지만 현실에서는, 상당수의 아나키스트들이 얼마 지나지 않아 이 입장을 버리고 “최악”이라 할 수 있는 파시즘에 대한 투쟁에 집중하기 시작했다. 망명중이었던 독일의 아나키즘적 조합주의자들은 스웨덴 조합주의자들을 매개로 서구 열강들의 정보부로 복무하였다. 폴란드에서 조합주의자들과 아나키스트들은 “조국방위”(그래도 “부르주아들과 함께”라고 말하지는 않았다.)를 부르짖었고, 자기들만의 유격분견대를 만들었다가 사회주의자들의 유격대였던 “폴란드 인민군”과 통합하여 1944년의 바르샤바 봉기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이탈리아와 불가리아에서 아나키스트들은 자신만의 빨치산 분견대를 구성하여 파시스트 체제의 무장세력과 전투를 벌였다. 이탈리아 아나키스트들은 지역과 작업장에서 지하조직건설에 참여하는 동시에 정당이나 정치조직들로부터 조직적 독립성을 유지하고자 노력했다. 이들은 레지스탕스에 참여했고, 파시스트와 독일 뿐에 대한 파업 뿐 아니라 이탈리아 자본가들을 향한 파업을 준비하고 집행하는 것 역시 조력하였다. 한 연구자는 “적극적 활동은 당시의 상황 전개(나치즘-파시즘과의 투쟁)에 적합한 전략을 집행하여 혁명적 상황으로 확장하려는 지속적 노력을 동반하였다”고 적는다. “노동자-활동가들과 좌파 정당의 평당원들에게 보낸 ‘노동자의 통일전선’에 대한 제안은 레지스탕스 지하조직을 아나키즘과 노동자 평의회의 정신 아래에서 반-권력의 요소로 여기는 사업의 일부였다. 아나키스트들이 공장위원회에 참여한 것도 이 관점으로 보아야 한다. 해방운동을 두 번째 리소르지멘토로 바라본 민주주의적 계획에 투항한 것이 아니었다.” 우리는 아나키스트들이 최소한 한번 우크라이나에서의 무장투쟁을 조직해 내었다는 것을 알고 있다. 마흐노우슈치나 운동의 참가자였던 오시프 체브리는 1942년 우크라이나에 밀입국하여 키예프 지역에서 빨치산 분견대를 조직했다. 그 선배들의 전통을 따라, 이 조직은 독일과 소련 모두에 대항하여 행동하던 중, 1943년 독일군에 의하여 패배하였다. 헝가리에서 아나키스트 청년학생들의 소규모 조직이 빨치산 투쟁에 참여했고, 1944년 말 부다페스트에서 사보타주를 조직했다. 네덜란드와 벨기에의 아나키스트와 아나키즘적 조합주의자들은 “3번째 전선”을 자처하면서 연합국과 추축국 모두에 반대함을 선언했다. 이들은 정당으로부터 독립적인 시민불복종과 노동운동의 조직을 선동했다. 프랑코와의 전쟁을 패한 뒤의 스페인 아나키스트들은 단결하지 못한 채 반파시스트 세력과의 협력을 지지하는 세력과 모든 국가주의 세력과 동맹을 거부하는 전통적 아나키즘의 입장으로 회귀하자는 세력으로 나뉘어 있었다. 전통주의자들은 2차 세계 대전이 순수한 자본가들간의 싸움이라고 바라보았고, “프랑스 레지스탕스와 독일군 사이의 싸움이 발발할 경우, 활동가들은 도시인민들 사이로 숨어들어야 할 것”이라 제안했다. 공화주의 세력과의 동맹을 지속하자고 제안한 이들은 스페인 아나키스트 망명자들이 프랑스 레지스탕스에 참여할 것을 촉구했다. 스페인의 자유의지주의자들은 이베리아 반도에서 지하투쟁을 지속했고, 프랑코와 히틀러를 암살하고자 노력했다. 프랑스 아나키스트들은 국제주의적 입장을 취했다. 마르세유에서 브세폴로드 볼린과 앙드레 아루를 중심으로 하고 있던 그룹이 특히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이 조직은 노동자들이 독일/이탈리아의 파시즘에 맞서 싸우는 것 뿐 아니라, 소련의 스탈린주의나 서구 민주주의적 자본주의에도 맞서고, 지배계급과 피지배계급을 통합하려는 시도인 “민족해방”에도 맞서 싸워야 한다고 선전하는 유인물을 배포했다. “국제 혁명적 조합주의자 연맹”이라는 이름으로 알려진 마르세유 그룹은 사회혁명을 선동했고, 프랑스 전역의 아나키스트 조직들의 관심을 끌었다. 영국의 아나키스트들 역시 파시즘과 민주주의의 전쟁이라고 포장된, 제국주의적 전쟁에 반대하는 목소리를 높였다. 이들은 반전 선동을 계속했고, 파업투쟁을 지지했으며, 영국군 내에서 군인평의회를 조직하고자 했다. *** 17장 : 2차 세계대전 후의 아나키즘적 조합주의 아나키스트들의 희망에도 불구하고, 2차 세계대전은 사회혁명으로 발전하지 않았다. 오히려, 세계대전은 민족국가를 강화하고, 서구 지역에서 “민주적 코포라티즘”이라는 틀 안에서의 사회적 동반자성(정부, 기업, 노동조합의 협력)이 건설되는 계기가 되었다. 동구권에는 공산당의 독재가 군림하기 시작했다. 동유럽 정부들은 자유의지주의 운동을 되살리려는 모든 시도를 탄압했다. 불가리아에서는 아나키즘적 코뮌주의 연방과 전국노동총연맹이 각각 1944년과 1946년 재건되었다. 1947년에는 불가리아 전역에 11,000명의 아나키스트와 1,000명의 아나키즘적 조합주의자들이 확인되었다. 하지만 얼마지나지 않아 자유의지주의 조직들은 금지되고 해산되었으며, 그 선도적 활동가들은 체포되었다. 1948년부터 1949년 사이 동독에서는 수백명의 아나키즘 · 자유의지주의적 사회주의 조직 구성원들이 체포되었다. 그리고 이 운동의 지도자였던 빌리 옐리네크는 1952년 3월, 감옥에서 살해되었다. 전쟁 기간 중 등장했던 폴란드의 조합주의 조직들은 1944년 이후 기능하지 못했다. 헝가리에서 아나키스트들은 일정 부분 그들의 영향력 아래에서 조직되었던 “체펠” 노동자들의 파업 이후 완전히 분쇄되었다. 스페인과 포르투갈의 아나키즘적 조합주의자들은 여전히 지하투쟁을 계속하고 있었다. CNT는 불법 노동조합들을 재건하려고 시도했고, 일부 활동가들은 프랑코 체제와의 무장투쟁을 진행했다. CNT의 재건 시도는 강력한 탄압을 마주해야 했고, 시도는 실패하고, 또 실패했다. 1946년 이후 CNT가 분열하면서 상황은 더욱 복잡해졌다. CNT의 일부는 혁명 기간 중 발생해왔던 실수들을 다시 반복하지 않고자 했고, 다른 일부는 반프랑코 세력의 통일전선을 고집했다. 결과적으로 CNT는 깊은 위기에 빠졌다. 1960년이 되어서야 다시금 단결을 재건할 수 있었다. 이러한 조건에서 1940년대 CNT의 조합원으로만 30,000명 이상이 있던 프랑스의 아나키스트 망명가 집단이 수행해야 했던 주된 과업은, 신문과 잡지를 발행하는 일이었다. 살라자르 독재 아래에서, 포르투갈 CGT의 활동력은 서서히 죽어갔다. 지하 노동조합 활동과 불법 출판물의 발행은 1960년대 말에는 더 이상 이루어지지 않았다. 남아메리카의 아나키스트들과 아나키즘적 조합주의자들은 국가권력의 엄중한 탄압을 마주해야 했다. 1946년, 아르헨티나의 FORA는 메이데이 집회에 3,000명의 대오로 나설 수 있었다. 이들은 후안 페론의 체제에 맞서 공고하게 저항했다. 1946년부터 1948년까지의 시기 동안 이들은 각종 규제와 금지를 뚫고 제빵노동자와 항만노동자의 파업을 조직했고, 노동쟁의에 대한 국가의 개입에 만서 투쟁했다. 하지만 그 이후 독립 노동조합의 불법화와 자유의지주의적 출판물의 금지가 운동을 강타했다. 새로운 조합원들의 유입은 사실상 멈추었고, 새로운 세대의 사회활동가들과의 접촉도 이루어지지 못했다. 노병은 사라졌지만, 대체할 이들은 들어오지 않았다. 이웃한 우루과이의 FORU는 작은 그룹으로 줄어들었다. 1950년대 초, 칠레 CGT와 볼리비아의 라 파스 지역 노동연맹은 해소되었다. 이들에게는 전국의 유일 노동조합연맹에 가입할 것이 강요되었다. 서유럽 국가 다수에서 전후 아나키즘적 조합주의자들은 합법적으로 활동할 수 있었다. 하지만 아나키즘과 아나키즘적 조합주의 운동의 대규모 부활은 일어나지 않았다. 프랑스에서만 짧은 시간 동안 무언가가 일어났다. 전국노동총연맹(Confédération Nationale du Travail, CNT-F)는 파리, 보르도, 마르세유, 툴루즈 등지에서 수만명의 노동자들을 조직했다. 하지만 CNT-F는 얼마 지나지 않아 물질적 부족과 견실한 활동가의 경험을 겪기 시작했다. CNT-F에 가입하였던 노동자들은 얼마 지나지 않아 더 온건한 노동조합으로 떠나갔다. 프랑스 아나키스트들은 아나키즘적 조합주의를 노동운동을 분열시키는 요인이라고 바라보았다. CNT-F는 소규모 노동조합 수준으로 줄어들었다. 이탈리아의 아나키스트 운동도 아나키즘적 조합주의자들의 노동조합이 아닌 아나키스트의 노동조합적 단결을 지향했다. 1950년, 한때 강력했던 USI의 재조직이 선포되었지만, 그다지 중요하지 않은 조직으로 남았다. 스웨덴 SAC의 대오는 상대적으로 잘 유지되었지만, 1945년 22,000명의 조합원에서 1957년에는 16,000명으로 줄어들었다. 사학자 마르셀 반 데르 린덴과 웨인 소프는 “대중운동으로써의 조합주의가 사라진 이유는, 정부의 탄압과 같은 일시적 요인이 아니라, 자본주의 사회의 변화에 있다고 보는 것이 가장 타당한 설명일 것”이라고 적고 있다. 우리는 다른 무엇보다 루돌프 로커가 경고한 바, 자본주의적 생산의 합리화에 관한 노동계급적 급진주의의 부정적 영향을 숙고할 필요가 있다. 연구자들이 이야기한 것처럼, 1920년대에 시작한 자동생산과정은 2차 세계대전을 기점으로 크게 발전했다. 컨베이어 벨트의 도입으로 상징되는 자동생산은 노동에 있어 극도의 특화와 분업을 낳았다. “특화된 노동자 다수”로 분류할 수 있는 새로운 사회적 형태는 생산 전반에 대한 감수성을 가지지 못했고, 그렇기에 생산을 온전히 통제하고자 하는 요구를 밀어붙이지 못했다. 사회적 모순의 축은 노동의 내용과 생산자의 자주성의 문제를 다루던 생산의 영역에서 잉여생산물과 소비에 대한 분배의 영역으로 이행했다. 이는 산업자본주의의 대안으로 성장하여 생산의 노동자 통제를 위한 투쟁을 지향하던 급진적 노동운동의 하강을 낳았다. 이러한 발전의 이면에는 경제와 사회 영역에 대한 국가개입 경향성이 성장하고 있었다. 이 경향성은 2차 세계대전 이후 “사회적 국가”나 “복지국가” 모델의 형성을 낳았다. 구매력의 증대를 이야기하는 케인즈주의적 정책은 자본주의 선진국 노동자의 부를 증대시켰고, 전체 체계를 유지하는 것이 노동자들에게 이익이 되도록 만들었으며, “사회적 동반자” 모델을 통해 필요를 충족하는 것이 가능한 것으로 보이게 했다.[71] 연구자들이 말하는 것처럼, 조합주의 조직들은 새로운 현실에 대하여 “세 가지 가능성만을 가지고 있었고, 이 세 가지 모두가 재앙과 같은 결과를 가져올 수 있었다. “조합주의 운동은 (1)이전의 원칙을 계속 유지하거나(이 경우, 조합주의 운동은 필연적으로 주변화될 수밖에 없을 것이었다.) (2)새로운 조건에 발맞추어 전술을 완전히 바꾸거나(이 경우, 조합주의 운동의 원칙을 포기하는 것이 될 것이었다.), (3)자진해산하여 비조합주의적 노동조합에 가입하거나의 가능성만을 남기고 있었다.” IWA는 첫 번째 길을 택했다. 이들은 아나키즘적 조합주의 운동이 시대에 부합하게 될 때를, 그 이상이 다시금 사회와 공명할 때를 기다리기로 결정했다. IWA는 2차 세계대전 이후 다시금 그 업무를 수행하기 시작했고, 스페인의 망명 혁명가들에게, 소규모 노동조합들에게, 유럽과 라틴아메리카의 활동가 조직들에게 기댈 곳을 제공했다. 스페인 CNT가 국가주의 정치세력과의 협력을 거부하고 사회혁명을 지향하기로 결정한 이후, CNT는 1951년 열린 IWA 7차 총회에서 1938년 그들이 제안하였던 바 “전술적 자율성”에 관한 수정조항을 폐기하자고 제안했다. 길고 활발한 논쟁과, 이에 뒤따른 IWA의 분열까지 경험한 후에야, 1956년 열린 9차 총회에서 이 폐기 결의안이 채택되었다. 그리고 FORA는 다시금 IWA에 돌아왔다. 10차 총회에서 참가자들은 FORA의 대의원들이 주축이 되어 “오직 자유의지주의적(아나키즘적) 코뮌주의와 연방주의를 목표로 하는 조직만이 IWA에 속할 수 있다”고 선언했다. 스웨덴의 SAC와 네덜란드 조합주의자들은 이 이데올로기적 논쟁과 관계되어 1958년 IWA를 탈퇴했다. SAC는 여전히 스스로가 “자유의지주의적 조합주의자”의 노동조합이라고 생각했지만, 그들의 실천은 두 번째 길을 따라갔다. 이들은 “근대화”라는 명목으로 아나키즘의 원칙들을 수정하였다. “수정주의자”들의 이데올로기적 관점에 강한 영향을 준 것은 1930년대 말 스웨덴에 정착하였던, 독일의 조합주의자이자 망명자였던 뤼디거였다. 뤼디거는 스페인 혁명 당시부터 이미 아나키즘적 조합주의의 전통적 원칙들에 대한 수정을 주장해왔다. 그의 주장의 핵심은, 아나키즘적 코뮌주의 사회 건설을 위한 투쟁을 포기하고, “이행기” 개념을 인정하자는 데에 있었다. 그리고 뤼디거는 아나키즘의 “정통성”을 버리고, 국가를 철폐하는 대신에 그 개혁을 시도해야 한다고 제안했다. “프루동, 바쿠닌, 크로포트킨, 맑스, 란다우어의 시대 이후로 국가가 만들어낸 변화의 결과로, 우리는 국가의 파괴는 단지 압제기구의 파괴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매우 중요한 사회적 기능의 총체가 파괴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라고 주장할 수 있다. 인민들에게 그러한 행동을 선동하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오늘의 사회적 관계라는 조건 아래, 우리는 국가가 수행하고 있는 사회적 기능을, 진정한 사회적 기능으로 변혁해야 하는 문제를 마주하고 있다. 이 투쟁에서, 우리는 개량의 길에 의지해야할 때가 있다.” 뤼디거는 우리가 “사회혁명”에 집착할 것이 아니라 “현존하는 국가와 경제구조 안에서 대의(민주)제의 체계를 갱신하기 위해 행동”해야 한다고 말한다. 그는 이러한 목적을 가지고 다른 정치세력과 동맹을 맺고, 지방선거에 참여하기도 하여야 한다고 주장했다. SAC의 “수정주의자”들은 복지국가 기능의 수행에 참여하는 동시에 노동조합의 인기를 끌어올리는 실용적 방법론에 따라 실업보험공단에 참여하는 것을 지지했다. 이 공단의 재정은 기업과 국가, 그리고 노동조합 조합원들의 기여금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공단의 운영은 노동조합에 위임되었다. 조합주의자들은 노동문제에 대한 국가의 개입에 맞서 싸워왔고, 국가의 지원을 받는 사회적 대화 기구 참여를 거부해왔다. 하지만 이제 SAC의 “수정주의” 세력은 노동조합이 사회보험체계의 개혁을 위해 이러한 기구에 참여할 것을 지지하기 시작했다. 1952년 SAC의 조합원들은 내부 회의를 개최하여 조합주의 노동조합이 운영하는 실업급여공단을 건설하자는 강령 수정안을 투표에 발의했다. SAC는 1952년, 조합주의의 목적은 “산업민주주의”를 적용하는 것이라고 선언했다. 급진적 직접행동(폭력적 저항과 생산에 대한 사보타주)는 구시대의 것이라 여겨졌다. SAC는 노동자 집단에게 기업의 행정을 맡길 것을 제안했고, “민간 · 지자체 · 국영기업에 노동자 통제를 적용”하려는 노력이 필요하다고 표현했다. SAC의 기관지 <아르베타렌>의 편집장 에베르트 아르비손이 설명한 것처럼 그들은 “혁명이라는 ‘요술지팡이’를 완전히 포기”했다. 스웨덴 조합주의자들은 부분적 개혁이 “사회가 원하는 방향으로 가게 하기 위한 실용적 수단”이라고 바라보았다. “SAC는 경제의 진보적 민주화가 그 주된 과업이라 여긴다. 기본적으로, 이 개념은 경제적 권력을 주주에서 소비자들에게로 점차 이전하는 것을 포함한다.” 이와 관련하여, SAC는 사기업의 경영진에 노동자 이사제를 도입할 것을 추구했다. 동시에 스웨덴 조합주의는 산업자본주의에 대한 대안 제시를 거부했고, 복지국가 체계의 좌익 소장파의 위치를 점하겠다고 선언했다. “스웨덴식 복지국가 모델”의 한 요소로서 SAC가 건설한 실업보험공단은 노동자들이 조합주의 세력에 참여하게끔 만들었고, 스웨덴 조합주의의 몰락을 지연시켰다.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 SAC의 방향전환은 노동조합과 국제 아나키즘적 조합주의 운동과의 관계를 무너트렸고, 스웨덴 조합주의자들은 개량주의와 협조주의에 대한 날선 비판에 시달리게 되었다.[72] IWA의 영향력은 1960년대에 저점을 찍었다. 이 시기 동안 아나키즘적 조합주의자들은 현대 사회의 전개, 자본주의와 국가의 진화, 소위 “현실 사회주의” 국가(IWA가 정의한 바, ‘국가 자본주의’ 국가)의 상황에 대한 분석 등 이론적 작업을 할 정도의 세력만을, 개발도상국에서 협동에 기반한 운동의 가능성을 모색하고, 농업의 문제에 대해 제안을 던지거나 전쟁의 위협에 반대하는 행동을 할 수 있을 정도의 세력만을 가지고 있었다. 1968년부터 69년 사이의 국제적 학생 · 노동자 운동의 파도와 프랑코 체제의 청산 이후, 유럽과 북아메리카에서 아나키즘적 조합주의에 대한 흥미가 자라났다. 스페인에서 CNT가 재창립되었고, 이탈리아에서는 USI가 재건되었다. 아나키즘적 조합주의 조직들은 여러 나라에서 일정부분 부활하였다. 이 시기 IWA는 국제적 문제와 새로운 사회 운동을 분석하느라 바빴다. 이들은 이러한 문제들을 사회혁명적 관점으로 판단하고자 시도했다. 1980년대에 접어들어 벌어진 경제의 세계화, 신자유주의로의 이행, “복지국가” 모델의 붕괴는 국가주의 좌파정당(사회민주주의자들과 공산주의자들)에, 그리고 그 영향 아래에 있던 노동조합들에게 재앙으로 다가왔다. 소련과 동유럽 국가에서 공산당 체제가 무너졌고, 사회민주당들은 신자유주의적 원칙 일부를 수용했다. 노동조합들은 실질임금의 삭감과 지난 수십년간 임노동자들의 투쟁으로 얻어온 사회적 성과들이 축소되는 것을 바라보아야만 했다. 그리고 이 자리에서 “불안정노동화” 과정이 전개되었다. 불안정하고, 합법적 노사관계에 보호받지 못하며, 비정규적 고용과 나빠져가는 노동조건이 도입되었다. 노동시간의 “유연화” 모델 역시 도입되어 노동자보다는 기업의 이익에 맞춘 노동시간의 재배치가 가능하게 하였다. 아나키즘적 조합주의는 이 세기말적 사화변화가 “전통적 좌파”가 대응할 수 없는 “시대적 도전”이라고 바라보았다. 이들이 보기에 소련의 붕괴, 공산당 체제의 붕괴, “신자유주의적 전체주의”로 현현한 자유시장 모델 등은 모두 “혁명적 사회주의자들과 좌파 사민주의자들의 정치 기반이었던 국가 통제라는 개념이 패배하였다는 것을 의미”하였고, 제1인터내셔널 당시 그러했던 것처럼, 자유의지주의적 사회주의자들과 권위주의적 사회주의자들간의 논쟁을 재개하여 “근본적인 사고의 재정립을 할 필요가 있”는 것이었다. “사회주의적 재평가의 요지는 자본주의에 대한 대안이 되는 것이어야 한다. 자본주의는 개혁할 수 없다. 자본주의는 철폐되어야 한다. 우리가 20세기의 역사로부터 배울 수 있는 가장 중요한 교훈은 다음과 같다. ”어떠한 국가도 노동자의 자유를 보장할 수 없다. 이에 반대한다면, 그저 닥쳐라.“ 1990년대에, 국제 아나키즘적 조합주의 운동은 부활했다. 러시아, 동유럽, 아메리카 대륙 IWA의 새로운 가맹조직들과 지지조직들이 등장했다. 2001년의 아르헨티나 혁명이 시작한 후, FORA가 재탄생하였다. 스페인, 이탈리아, 프랑스의 가맹조직들은 여전히 그 규모는 작았지만, 적극적으로 활동하기 시작했다. 이들은 노동운동 전체를 포괄하려 시도하지 않았다. 오히려 이들은 자주경영적이고 스스로 조직한, 개량주의적 노동조합이나 정당들과 독립적인, 노동자 조직을 건설하고 이를 급진화하는 데에 활동의 방점을 찍었다. 이 조직들에서 모든 결정은 총회를 통해 이루어졌고, 직접행동의 방법론이 도입되었다. 20세기 말부터 21세기 초까지, 여러 국가의 아나키즘적 조합주의자들은 사회적 투쟁과 노사분규의 현장에서 적극적인 역할을 하였다. 스페인의 CNT는 10,000명의 조합원들과 함께 이 부문을 선도했다. 스페인에서 벌어진 가장 거친 파업투쟁들은 CNT의 작품이었다. 1985년부터 1986년까지 CNT 조합원들의 주도 하에 이루어진 푸에르토 레알 조선소 폐쇄에 맞선 투쟁은 광범위한 사회적 시위로 자라났고, 노동자들에 의한 직장 점거와 도시 거주민들의 대규모 집회가 뒤를 이었다. 노동조합 중앙위원회나 대의기구 따위가 이 투쟁을 지도하지 않았다. 모든 기본적인 결정들은 노동자들이, 총회를 통해 직접적으로 내렸다. 이 총회들은 노동조합의 관료들의 인가 없이 이루어졌다. CNT의 제안은 언제나 승인되었고, 다른 노동조합들의 결의안은 승인되지 못했다. 이렇게 매주 목요일 노동자들이 조선소를 점거하고 총회를 개최하는 것이 결정되었다. 파업 기간 중, 지역 거주민들의 총회 역시 매주 열렸다. 투쟁의 진행상황에 관심있는 모두는, 조선소 근무를 하는지 여부와 무관하게 이 총회에 참석하고, 투표하며, 그들이 관심을 가진 문제에 대한 결정을 내리는 절차에 참여할 수 있었다. 총회에서는 투쟁의 구체적 방법론과 형태에 대한 결정뿐 아니라 사보타주와 직접행동을 수행하는 것에 대한 결정들도 내려졌다. 푸에르토 레알에서의 반란을 진압하기 위해 특공대가 투입되었다. 전국에서 1,000명 이상의 경찰이 차출되어 푸에르토 레알의 반란을 막기 위해 보내졌다. 인민들은 경찰의 진입을 막기 위해 도시 외곽에 바리케이드를 쌓아올리기 시작했다. 인민들은 진압차량에 돌을 던졌고, 옥상에서 가구와 쓰레기를 던졌다. 이들은 경찰들과의 시가전을 두려워하지 않았다. 철도에, 고속도로에, 다리 위에 바리케이드가 설치되었고, 전화선을 잘랐다. 노동자와 도시 거주민들의 투쟁은 승리로 끝났다. 스페인에서 다시금 활발해진 아나키즘적 조합주의에 입각한 파업운동은 21세기 초까지 계속되었다. CNT는 안달루시아주 토마레스에서 환경미화원들의 134일간의 파업투쟁을, 세비야에서 철도 청소 노동자와 크레인 기술자들의 “무기한” 파업을, 아드라 지자체 노동자들의 투쟁을, 바르셀로나 인근의 “메르카도나” 백화점에서 180일간의 파업을, 정부의 사회경제적 정책에 맞선 수천 규모의 행진을 조직했다. USI로 모인 이탈리아 조합주의자들은 “대안적” 노동조합들이 조직한 총파업에 참여했다. 스페인, 프랑스, 이탈리아에서는 또 다시 분열이 일어났다. 이 국가들에서 일부 집단은 아나키즘적 조합주의 원칙의 일부(정당의 거부, 생산에 있어 사회적 대화 기구에의 불참 등)를 포기하면서 대중기반을 확보하고자 탈퇴를 결정했다.[73]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IWA는 산업자본주의에 대한 총체적 대안이라는 스스로의 전통적 역할을 지켜나갔다. 아나키즘적 조합주의자들은 노동자의 자주적 조직 건설의 촉매제로써의 역할을 수행하면서, 인민들이 자기 권리와 매일의 요구를 위해 일어나는 과정에서 사회적 자주경영의 기술과 구조를 얻을 수 있을 것이라 희망하고 있다. *** 18장 : 현대 러시아에서의 아나키즘적 조합주의 21세기 초의 국제 아나키즘적 조합주의를 조망하면서 현대 러시아의 유사 조직에 대해 짧게나마 언급하지 않을 수는 없겠다. 소련에서 자유의지주의 운동은 1980년대 말 페레스트로이카의 시대에 부활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초기 활동가들의 관점은 엉망진창이었다. 이는 러시아가 수십년간 나머지 세계로부터 고립되어 자율적 학습에 기반해서만 반대 세력이 존재할 수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1989년, 아나키즘적 조합주의자 총연맹(Konfederatsiya Anarkho-Sindikalistov, KAS)가 건설되어 일시적으로 모든 자유의지주의 조직들을 모아내었다. KAS에는 수백명의 활동가들이 소속되어 있었다. 하지만 그 이름과 달리, KAS는 주로 프루동주의적 관점을 따라 “국가가 없는 시장 사회주의”를 지향하는 자들로 구성되어 있었고, 이는 국제 아나키즘적 조합주의의 전통에서는 이미 거의 온전히 제거된 경향이었다. 소련의 붕괴나 시장 자본주의로의 이행과 같은 사회-정치적 상황의 변화는 이 조직의 이데올로기적, 전술적 모순을 심화시켰다. 그리고 1990년대 초, KAS는 해체되었다. 조직구성원 일부는 개별적으로 독립지역의 노동조합(시베리아 노동 총연맹)의 틀 안에서 조합주의적 노동조합의 건설을 실천하려 했다. 아나키즘적 코뮌주의와 아나키즘적 조합주의의 전통으로 돌아간 첫 번째 자유의지주의 조직은 모스크바를 중심으로 1991년 3월에 건설된 “혁명적 아나키스트의 조직”(Initsiativa Revolyutsionnykh Anarkhistov, IREAN)이었다. 1995년 IREAN의 활동가들은 다른 아나키즘적 코뮌주의 조직과 함께 “혁명적 아나키즘적 조합주의자 총연맹”(Konfederatsiya revolyutsionnykh anarkho-sindikalistov, KRAS)을 건설했고, 1996년 IWA의 20차 총회를 통해 IWA에의 가맹이 승인되었다. KRAS는 스스로를 노동조합의 초동주체(프로피니치아티바)라고 여겼다. 이는 즉, 이들이 스스로를 아나키즘적 조합주의에 입각한 노동조합을 건설하는 과정에서의 이행기라고 여겼다는 것이다. 지난 수년간, KRAS는 러시아의 사회운동과 시위에 동적으로 맞추어 기복있는 성장을 보여왔다. KRAS-IWA의 구성원들은 모스크바, 바이칼스크, 고멜, 야로슬라블, 로스토프-온-돈, 상트 페체르스부르크 등지에서 활동해왔다. 모스크바에서 이들은 교육, 과학, 기술 노동자들의 조직을 건설했다. 러시아 아나키즘적 조합주의자들의 활동에서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는 것은 회의와 출판(신문인 <프랴모예 데이스트비예>(“직접 행동”), 잡지인 <리베르타르나야 미슬>(“자유의지주의 사상”, 유인물 등)의 형태로 선동작업을 지속해가는 것이다. 바이칼에서 KRAS 회원들은 산별노조 건설에 참여했고, 이 노동조합은 1990년대 중반, 셀룰로오스지 공단에서의 파업을 조직하였지만 정부의 탄압에 분쇄되었다. KRAS의 활동가들은 파업과 노동자 시위에 참여하는 노동자들에게 지지와 기술적 조력을 제공하였다. 이를테면 모스크바 교외지역에서의 교직원 투쟁(1995)이나, 로스토프-온-돈의 “로스첼마시” 공장 파업(1998), 야스노고르스키의 기계도구 공장 파업(1999, 이 파업은 노동자 총회에 의하여 지도되었고, 공장을 점거했다.), 모스크바 이주건설노동자들의 파업(1999), 브세볼로시스크 포드 공장 파업 등이었다. 파업투쟁을 조력하는 과정에서, KRAS는 자기조직, 직접행동, 정당과 관료적 노동조합구조로부터의 독립 등 아나키즘적 조합주의의 방법론을 노동운동에 녹여내고자 시도했다. KRAS의 구성원들은 반전선동을 계속했고, 1 · 2차 체첸전쟁과 트란스-코카서스 전쟁에 대한 반대 운동에 참여했다. 이들은 생태주의 캠페인에, 고령연금 “개혁” 반대 시위에, 주거 · 공동체 서비스 개혁에 대한 반대운동에, 모스크바에서의 고위관료 주택 건설 반대운동에, 철도 운송료 인상 반대운동에 참여했다. ** 서지학적 고찰 아나키즘적 조합주의의 역사는 거의 연구된 바 없다. 사회역사학자들은 노동운동에 있어 사회민주주의/공산주의적 경향에 매력을 느껴왔다. 기독교적이나 다른 “주류” 노동조합에 대한 연구도 소수 존재한다. 소련에서는, 소련 공산당의 이데올로기적 독점 아래에서, 아나키즘적 조합주의는 비타협적 투생으로 맞서야할 이데올로기적 적수라 여겨졌다. V. Yagov, B. M. Leibzon, V. V. Komin, F. Ya. Polyansky, N. V. Ponomarev, S. N. Kanev, E. M. Kornoukhov, I. S. Rozental, 등의 책에서, 아나키즘적 조합주의는 (트로츠키주의나 마오주의와 함께)“소부르주아 혁명”의 분파 중 하나라 여겨졌다. 이 작가들은 아나키즘적 조합주의가 여러 국가에서, 서로 다른 시기에, 굉장히 많은 노동대중의 지지를 받았다는 것을 인지했다. 하지만, 이 사실은 노동운동의 “취약함”과 미성숙함이 드러난 것이라 해석되었다. 아나키스트와 조합주의자들의 근본적 사상과 관점은 그저 단순한 것이라고, 아니면 그저 오류일 뿐이라고 축소되었다. 이 책들은 아나키즘적 조합주의 경향의 내용을 분석하지 않고, 그저 이 경향이 “극좌파”라 비난했을 뿐이다. IWA는 거의 언급되지 않았다. 그리고 20세기 초의 혁명적 조합주의와, 소렐이나 라브리올라 등의 조합주의적 “신맑스주의자”와, IWW와 CNT등의 서로 다른 노동조합들이나, 1920년대 초 볼셰비키 당 내의 “노동자 반대파”를 서로 구분하지 않고 “아나키즘적 조합주의”라 통칭하고 있었다. 몇몇 국가의 역사연구가들은 혁명적 조합주의 운동과 아나키즘적 조합주의 운동과 연관된 다른 문제들을 어느 정도 건드렸다. 프랑스의 S. N. Gurvich, V. M. Dalin, G. Morozov, R. Sabsovich 등이 그랬고, 스페인의 S. P. Pozharskaya, L. V. Ponomareva등이 그러했으며, 이탈리아의 Z. P. Yakhimovich, 라틴아메리카 국가들의 B. I. Koval 등이 역시 그러했다. 일반적으로 이러한 연구들은 아나키즘의 역사를 특정하여 다룬 것이 아니었다.(몇 안 되는 예외 중 하나로, Ye, Yu, Staburova가 진행한 중국에서의 아나키즘 조사를 들 수 있겠다.) 이 역사가들은 공식적인 견해에서 벗어나지 않으면서도, 국제 노동운동의 일원으로서의 혁명적 조합주의와 아나키즘적 조합주의에 대한 이해를 넓혀주는 정보와 사실들을 제시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노동운동에 있어 아나키스트 · 조합주의자들의 역할과 그들의 “대중에 대한 영향력”에 대한 평가에는 여전히 이데올로기적 편향이 더 우세하다. 1990~1991년, 소련공산당의 이데올로기 독점이 무너지고 보존자료들이 공개된 이후, 러시아 역사가들은 사회운동에 대해 더 높은 수준의 연구를 진행할 수 있었다. 연구자들은 아나키스트들의 역할에 대해 더 객관적으로 서술하기 시작했다. 러시아 아나키스트들에 대한 2권 분량의 책이 출판되었고, 러시아의 아나키스트와 아나키즘적 조합주의자들에 관한 연구결과들이 등장했다. 하지만 러시아 혁명에서의 아나키즘적 조합주의에 대한 심도있는 연구는 아직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은 분명히 인지해야 한다. 국제 아나키즘적 조합주의 운동에 대한 연구 역시 시작되었다. A. V. Shubin은 우크라이나에서의 마스노유슈치나 운동에서 아나키스트들의 역할과 1930년대 스페인 혁명시기 스페인 아나키즘적 조합주의, 전간기 러시아 망명자들간의 논의와 국제 아나키즘운동에 대한 논문 수 개를 출판했다. 무엇보다 그는 스페인에서 아나키즘적 조합주의자들이 수행한 사회 변혁을 구체적으로 이야기했고, CNT의 정치적 실행에 대해서도 이야기했다. 그는 아나키즘에 대한 헛소리들과 CNT에 대한 비난이 근거없음을 보여주었다. 그러면서도 그는 1920~30년대의 아나키즘적 조합주의가 “시장 사회주의의 입장”으로 이행하면서 크로포트킨에서 바쿠닌으로 “역행”했다는 증명되지 않은 주장을 하기도 했다. 전반적으로 말해보자. 아나키즘적 조합주의 연구에 큰 진전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지금까지의 러시아 역사학계에서는 IWA의 역사나, 세계 각국에 존재했던 그 가맹조직들에 대한 조사는 이루어지지 않았다. 다른 국가들에서는 개별 국가의 아나키즘적 조합주의 조직과 조합에 관한 연구들이 다수 출판되었따. 가장 강력했던 운동이었던 스페인에 대한 연구가 가장 많이 진행되었다. 무엇보다 애초에 이 스페인 운동에 참여한 연구자들이 많았다.(M. Buenacasa, M. Iñigez, J. Gómez Casas, G. Leval, S. Lorenzo, A. Paz, J. Peirats 등). 이 조건은 그들의 연구에 낙인을 찍은 것도 맞다. 그들의 연구서를 읽다보면, 스페인 아나키즘적 조합주의자들을 오랫동안 분열시켜온 질문에 대한 양극의 논쟁이 여전히 지속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를테면, FAI의 역할에 관한, 개량주의와의 투쟁에 관한, 혁명과 내전기의 전술에 관한 문제들 말이다. A. Balcells, A. Bar, B. Bolloten, J. Brademas, A. Elorza, J. Garner, 등 이 문제에 대하여 전혀 언급하지 않는 저자들에 의한 연구들도 있다. 역사가들은 제1인터내셔널의 바쿠닌 분파 아나키즘의 직접적 후계자로서, 두 경향 사이의 독창적 “공생”을 구성한 스페인 조합주의의 독특한 성질을 보여주었고, 동시에 프랑스 혁명적 조합주의의 영향을 받았다는 것도 보여주었다. 현재까지의 조사들은 스페인 아나키즘적 조합주의 노동조합 내에서의 아나키스트 조직들의 활동에 관한 다양한 분석을 보여주었다. 일부 역사가들은 그 활동이 해로웠다고 말했고(S. Lorenzo), 개량주의와 공산주의 경향에 반대하는 노력은 이해할 수 있지만, 여전히 무의미했다고 말하는 이들도 있었으며, 최소한 이 조직들의 행동 일부는 긍정적이었다고 해석하는 이들도 있었다.(A. Paz, J. Gómez Casas) 하지만 스페인 아나키즘적 조합주의 연구에 있어, 여전히 연구가 부족한 문제와 이야기들이 있다. 특히 CNT에서 벌어진 프로핀테른에 대한 지지/반대 논쟁, CNT에서의 “노동자 아나키즘” 경향성 발현, 그리고 1923년 프리모 데 리베라의 쿠데타 이후 아나키즘 운동에서 벌어진 내부투쟁에 대하여 그러하다. 다양한 책과 논문들이 다루고 있는 특별한 주제가 있다. 스페인 혁명과 스페인 내전기(1936~1939)의 아나키즘적 조합주의자들의 활동과 역할에 대한 것이 그것이다. 다른 유럽 국가들에서 그러하듯, 연구자들의 주요 관심사는 프랑스 혁명적 조합주의를 향해있었고, 이것이 다른 모든 조합주의 운동의 원형이라고 여겨져왔다. E. Dolléans, G. Lefranc, J. Maitron, J. Julliard 등은 이 관점에 주요하게 기여하였다. 하지만 프랑스 조합주의 운동 역사의 사회적 기반과 구체적 순간들의 문제(구조, 회원구성, 사회적 입법과의 관계)에 대한 연구는 여전히 부족하다. 프랑스 아나키즘적 조합주의자들이 전간기에 건설한 소규모 노동조합의 활동에 관한 연구는 여전히 부족하다. 1960년대 말부터 이루어져온 독일 역사가들(H. M. Bock, A. Vogel, U. Klan, D. Nelles, H. Rübner 등)의 연구는 독일자유노동조합과 유관 사회조직들의 창설과 전개에 관한 충분한 세부사항을 담고 있다. 하지만 이들도 독일 아나키즘적 조합주의 운동 대오의 내적인 이데올로기적 논쟁에 대해서는 상대적으로 관심을 덜 기울이고 있다. M. Antonioli, C. Venza, E. Falco, G. Careri 등은 이탈리아의 조합주의를 조사하고 있으며, E. Rodrigues, J. Freire, P. F. Zarcone와 같은 자유의지주의 사상의 연구자들이 포르투갈의 아나키즘적 조합주의를 연구하고 있다. 유럽 다른 국가의 조합주의 운동은, 오직 협소한 관점을 가진 조사들만이 이루어졌을 뿐이다. E. Bilsky, A. López, S. Marotta, I. Oved, J. Solomonoff 등은 아르헨티나의 아나키스트 노동운동에 관한 논문과 기사 다수를 작성했다. 안타깝게도, 이 연구들은 1920~1921년 사이의 기간을 강조하고 있고, 1920년대 아르헨티나에서 새롭게 등장한 노동계급 아나키즘의 존재는 자주 무시된다. 국제 아나키즘 운동의 토론장에서 고수했던 FORA의 입장에 대해서는 지금보다 더 많은 분석이 필요하다. 칠레, 브라질, 멕시코, 쿠바의 아나키즘적 조합주의 운동에 대한 연구는, 상대적으로 잘 연구되었다. 하지만 이 연구들이 무시하고 넘어간 일부 상황과 세부사항들이 있고, 결과적으로 독자는 조직의 전개에 대한 체계적이고 정확한 상을 그리는 대신, 주요 사건들에 대한 개괄만을 알게 된다. 아나키즘과 조합주의의 역사를 다루는 개별 연구들 역시 존재한다. R. Scalapino, J.-J. Gandini, A. Dirlik, Nohara Shiro 등이 중국 아나키즘에 대한 연구를 진행했다. 안타깝게도, 아나키즘적 조합주의 운동은 이 작업들에서 그다지 많은 관심을 끄는 부분이 아니다. 결국 1920년대 중반 이후 중국의 자유의지주의 사상의 역사는 “공백”으로 남아있다. 전간기 일본 아나키즘과 조합주의에 대해서는, J. Crump, P. Pelletier, S. Large 등 유럽과 북아메리카의 연구자들의 가치있는 연구가 상당히 많이 이루어졌다. 키요시 아키야마, 아키노부 고토, 류지 코마츠, 야스유키 스즈키 등의 연구가 일본어로 출판되었다. 요시하루 하시모토의 책은 영어로 변역되었지만, 나머지는 구미권의 독자들에게는 접근성이 부족하다. 한국 아나키즘의 역사를 다룬 연구는 하기락의 방대하나 자세하지는 않은 연구일 뿐이다. 영어권 국가들에서, 국제 조합주의 운동의 중점은 조합주의와 혁명적 조합주의로 가득차있다. 오랜 기간 동안, 1차 세계대전 전 영국에서 일어난 조합주의 경향은 영국 노동운동의 역사에서 그다지 중요하지 않은 독자적이고, 일시적인 사건이라는 선입견이 존재해왔다. 하지만 최근의 십수년간, 노동자 자주경영을 위한 투쟁의 전통이, 노동조합의 통합을 위한 운동이, 평조합원 사이의 급진적 운동이, 조합주의 운동의 영향력이 관측되면서 역사가들은 이 사건에 더 많은 관심을 주기 시작했다. 연구자들은 영국 조합주의가 외적 현상이 아니라, 당시의 역사적 상황에 따른 반응이었으며, 사업장과 업종을 넘어 산업 내외간 노동자들의 이익공동체를 지향하고자 하는 추동력의 현현이었다는 결론에 이르렀다. 다른 영어권 국가들의 조합주의 운동(IWW와 OBU)에 대한 연구는 미국의 F. Thompson, P. Renshaw, M. Dubofsky, P. Carlson, and M. Hargis, 캐나다의 G. Jewel과 D. Bercuson, 남아프리카의 L. van der Walt 등에 의하여 이루어졌다. 하지만 조합주의의 “산업적” 경향성 전체에 대한 연구는 아직 이루어지지 않았다. 아나키즘적 조합주의의 역사적 위치와 역할은 국제 역사학계에서 여전히 논쟁중이다. 맑스주의자들은 아나키즘적 조합주의가 선형적으로 진보할 노동운동의 “미성숙”의 산물이라는 견해를 유지하고 있다. 이들에게 조합주의와 아나키즘적 조합주의는 경제적 퇴행성을, 반산업적이고 “원시주의적”인 농민 · 수공업자(“1세대 노동자들”)의 반란을 의미한다. 이러한 반란은 산업자본주의 사회에 적합하지 않다. 아나키즘적 조합주의의 시대는 근대 대규모 산업이, 대량생산과 대량소비가 등장하면서 완결되었다. 아나키즘적 조합주의는 20세기 초까지 수공업이나 공장식수공업이 여전히 우세하였던 “후진국”(프랑스, 이탈리아, 스페인, 포르투갈, 라틴 아메리카)들에서나 겨우 “생을 유지”하고 있었다. 아나키즘적 조합주의의 관습과 전통은 노동자와 기업간의 공식적 단체교섭이 아닌, “취약한” 규율과 “직접행동”이라는 반란적 방법론의 확산을 낳는다. 당연하게도 대규모 산업의 진보는 맑스주의 사상이 노동계급 사이에서 확장되게 하는 요인이 될 것이다. 기업에 확고히 저항하고, 그들의 권력에 도전하는 것이 아니라, 협상과 생산 유지를 위한 노사협력을 더 중요하게 보는 새로운 형태의 노동조합이 건설되었다. 다른 관점은, 기술적-경제적 결정론에 상당한 범위를 둔 맑스주의적 관점과 대조적으로 개별 국가의 특수성, 문화와 정신의 차이, 국가의 형태와 기능, 계급 저항의 전통을 강조했다. 이와 관련하여, 조합주의와 아나키즘적 조합주의가 특히 라틴어계열의 인민들(프랑스, 스페인, 라틴 아메리카 등)에게 받아들여진 “라틴적” 현상이라는 테제가 등장했다. 다수의 사회민주주의적 연구자들(M. Adler와 W. Sombart)뿐 아니라, 많은 조합주의자들도 이러한 입장을 취해왔다는 사실은 흥미롭다. 오늘날까지 많은 역사가들은 노동조합 운동에 있어 실용적 앵글로색슨, 사회민주주의적 유럽대륙, 조합주의적 라틴의 경향을 나누어왔다. 이에 따르면, 라틴적 조합주의는 낮은 규율과 조합비 사용에 대한 적은 책임감, 행동의 급진적 형태에 있어서의 취약성으로 드러난다. 현대 연구자 대부분은 “극단적” 관점을 지양하고 다양한 요인과 상황들에 대한 연구를 지향한다. 아나키즘적 조합주의가 노동계급의 “의식 부재”나 “후진성”이 드러난 것이라는 테제는 사실로 뒷받침되고 있는 것이 아니다. 아나키즘을 유토피아적이고 소부르주아적인 운동이라 규정하는 것은, 왜 이 운동이 세계 각국의 노동계급 상당수가 이 운동을 선호하였는지를 설명하지 못한다. 역사적 사실들은 조합주의가 새로운 기술과 경영론의 도입이 자기 기술의 가치를 떨어트릴까 두려워하던 숙련 · 수공예 노동자들뿐 아니라, 산업의 성장과 군수산업의 성장으로 산업현장에 나오게 되었지만 “전통적” 노동조합이 무시해오던, 직업교육만 받은, 어린, 비숙련 이주노동자들의 지지도 받아왔다는 것을 공고하게 보여준다. 다수 연구자들은 노동운동이 선형적으로 발전한다는 이론의 정합성에 대한 의문을 제기했다. 그리고 이러한 의문은 노동자의 급진적 행동과 탈중앙적 조직구조를 “후진적”이라 여기는 것에 대한 의문이기도 했다. 이들은 “초기” 노동운동의 수공업적이고 공동체적인 전통이 노동자 일부가 더 계급의식적이고 독립적인 활동을 하도록 이끌었다. 이 계급의식은 노동의 사회적 중요성에 대한 개념이나, 더 독립적이고 책임성있는 생산에의 추구나, 생산과정과 그 결과를 통제하려는 열망을 포함하고 있었다. 아나키즘적 조합주의의 “라틴적” 성격에 관한 테제는 사실에 부합하지 않는 것이기도 하다. 연구자들은 혁명적 조합주의나 노동계급 아나키즘이 라틴계 국가들 뿐 아니라 영어권, 게르만어권, 슬라브어권, 아시아 지역 등 매우 다양한 국가와 지역들에서 선전했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주어진 상황에 기반하여 볼 때, 무언가 공통적인 이유가 되는 요인이 있을 수밖에 없다고 여기게 되는 것은 당연하다. 각국의 조합주의 운동에 대한 비교분석을 시도했던 역사가들(P. Schöttler, G. Haupt, L. Peterson, P. Lösche, W. Thorpe, M. van der Linden 등)은 자유주의적 자본주의로부터 국가의 개입으로 특징되는 “조직된” 자본주의로의 총체적 이행이라는 맥락에서 이를 해석하고자 했다. 이들은 급진적 저항은 노동의 대공장화에 저항하였다기보다는 노동의 탈숙련화에 저항한 것이라고 바라본다. 동시에 이들은 이전의 노사관계나 노동의 조직론에 만족하지 못한 새로운 층위의 노동자들이 등장하였음을 고려한다. 이 불만족한 부류는 중앙화된 노동조합과 사회주의자들의 정치적, 의회적 활동은 자기 이익과 필요를 지키기에 충분하지 못하다고 바라보았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 역사가들은 기업의 규모와 조합주의적 태도 사이의 직접적 연관성을 보이지 못했다. 조합주의 운동은 일터에서의 권위적 구조 형성을 거부해온 서로 다른 층위의 노동자들을 한 데로 모은 것이었다. 마지막으로, 일부 연구자들은 20세기 초 혁명적 조합주의 운동과 아나키즘적 조합주의 운동의 성장을 산업자본주의적 문명의 구성과 발전의 역사라는 맥락에서 바라보는 관점에 매달렸다. 이들은 조합주의 운동이 산업자본주의에 대한 저항의 형태이며, 산업자본주의를 자주경영과 독특한 노동계급 문화에 기반한 대안적 사회모델로 대체하려는 노력이었다고 바라본다. 20세기, 분업과 자주성 박탈에 기반한 “포드주의-테일러주의”적 대량생산 모델이 도입되면서, 생산과정의 총체성에 대한 감수성이 박탈되었고, 결과적으로 생산과정을 통제할 가능성 역시 박탈되었다. 이것은 다른 여러 요인들과 함께 노동계급의 급진성을 무너트렸고, 노동운동을 약화시켰으며, 노동계급문화의 “해소”를 낳았다. 다수의 학자들은 (아나키즘적 조합주의를 포함한) 급진적 노동 대중운동의 하락이 20세기 중반의 “사회적 국가”의 등장을 초래했다고 본다. 이러한 정치적 발전에 힘입어, 사회적 투쟁의 중심은 생산의 영역(과 그 영역을 통제하려는 투쟁)에서 분배와 소비의 영역으로 이행했다. 노동자들은 국가의 사회적이고 분배적인 기능에 점점 더 의존했고, 아나키스트들이 제안한 반국가적 대안을 거부하기 시작했다. 이 관점에서 바라보면, 20세기 후반의 아나키즘적 조합주의의 대중성 감소는 결코 “되돌릴 수 없는 것”이 아니다. 특히 지금처럼, “사회적 국가”와 “포드주의” 모델에 위기가 오고 있을 때에는 더욱 말이다. 20세기 초반의 혁명적 조합주의와 아나키즘적 조합주의 운동의 국제적 성장을 지지하는 “공통” 요인을 분석함에 있어, 역사가들은 각국의 특이점들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이 특이점들에는 조직의 구성과 형태, 사회적 기반, 이데올로기적 경향, 당면과제, 정당과의 관계, 그리고 무엇보다 노동조합적 문제와 사회-문화적 문제 중 어디에 더 집중했는지 말이다. 국제 아나키즘적 조합주의 운동과 혁명적 조합주의 운동은 매우 불공평하게 다루어졌다. <계급의 기억>(런던, 1982)에 담겨 있는 다수의 조합주의 역사에 관한 논문들에 따르면, 다른 국가의 상황을 다루는 기사나 유인물은 거의 없었다. 이데올로기적 논쟁들, 아나키즘적 조합주의 노동조합 및 연맹체들의 조직태, 그들의 국제적 관계성과 IWA와의 관계 등은 오직 피상적으로만 다루어졌다. 노동운동의 역사에서 아나키즘적 조합주의의 사회적 기저와 역사적 위치를 다루는 문제들은 여전히 논쟁적이다. 조합주의 인터내셔널(IWA)의 역사에 대한 연구는 거의 이루어지지 않았다. 단지 IWA 사무국이나 아나키즘적 조합주의 조직들이 서낸 유인물들만이 있을 뿐이다. 그 유인물들을 읽다보면, IWA가 스스로의 기원을 제1인터내셔널에(최소한 그 반권위주의 분파에_ 두고 있음을 알 수 있으며, 두 조직간의 입장적 지속성을 유지하고자 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1920년대, IWA의 관심은 볼셰비즘에 맞서는 것에 쏠려있었다는 것을, IWA 회의의 개괄과 그들이 채택한 결의안들을 알 수도 있다. 이 압축적인 밑그림들만 보아서는, IWA에서 발생한 사건들과 그 원인들에 대한 세부적 분석이 가능하지 않다. 아나키즘적 입장에 공감하는 연구자들이 써낸, 과학적가치가 높은 기사들도 있다. 하지만 이러한 연구서들의 수는 매우 적으며, 오직 운동의 역사 중 일부 순간들만을 다루고 있다. 캐나다 역사가 W. Thorpe는 베를린 인터내셔널의 건설과정에 대한 특기할만한 연구를 기여했다. 그는 암스테르담 국제 사회역사 연구원의 도움을 얻어 1913년 조합주의자들의 런던총회에 관한 논문을 출판했고, 1차 세계대전 전 혁명적 조합주의자들의 국제적 연결망에 대한, 그들과 볼셰비키의 차이에 대한, 베를린 인터내셔널의 건설까지의 진행과정에 대한 조사를 진행했다. Thorpe의 연구는 1차 세계 대전 전의 조합주의에 대한 총체적 연구와 조합주의적 국제 전력의 수립 과정에서의 논쟁들에 대한 분석을 다루고 있다. 그는 노동조합을 당 노선에 종속시키려는 공산당들의 시도와 관련하여 조합주의가 마주해야했던 딜레마에 대하여 서술한다. Thorpe는 아나키즘적 조합주의의 국제조직의 건설 과정을 조사하기 위해 그들의 회의록, 총회 서기록 등을 추적한다. 안타깝게도, 그의 연구는 각국에서의 조합주의 조직들의 발전과 활동, 그들의 혁명적 사건과 파업에의 참여, 그들의 이데올로기적-이론적 성취에 대해서는 거의 다루지 않는다. 나아가 Thorpe는 소련이나 공산당의 보관자료들을 거의 사용하지 않는다. 이러한 부족함을 보완하기 위해 Thorpe와 네덜란드의 역사가 M. van der Linden은 1990년, <혁명적 조합주의 : 국제적 관점>이라는 총서를 펴냈고, 이는 프랑스, 네덜란드, 독일, 스웨덴, 영국, 스페인, 이탈리아, 포르투갈, 아르헨티나, 멕시코, 미국, 캐나다에서 혁명적 조합주의와 아나키즘적 조합주의의 발전에 관한 자료들을 모아낸 첫 번째 시도가 되었다. 이 총서에 담겨있는 Thorpe의 “2차 세계대전 전 조합주의적 국제주의”는 1939년까지 IWA의 역사에 대한 간략한 요약을 하고 있다. 이 책의 중요한 가치는 그 편집자들이 각국 조합주의 운동의 주요한 전문가들을 저술에 참여시켰다는 것이다. 그러면서도 IWA의 이야기는 굉장히 일반적으로만 다루어지고 있고, 그 과업과 활동의 구체적 순간들에 대해서는 깊이 탐구하지 않는다. 이데올로기적 논쟁에 대한 분석은 거의 부재한다. 개별 국가들에 관한 논의는 상대적으로 간략하고, 각 측면에 대한 분석의 심도는 서로 심하게 차이난다. 운동의 핵심적 순간들에 대한 서술이 충분히 다루어지지 않거나, 아예 언급되지 않은 경우도 있다. 그렇기에 국제 아나키즘적 조합주의 운동을 필요불가결한 것이자 국제적 현상으로 보며, 국내외적 요인들과 각국의 사회혁명적 전개과정의 상호 영향에 근거한 것이라 바라보는 관점에서 서술된 이 운동의 성장에 관한 총체적 역사는 아직 없다고 보는 것이 맞다.
[1] <아나르코-생디칼리즘 : 이론과 실천>, 도서출판 아연, 2021 [2] Vadim Damier, Забытый Интернационал. Международное анархо- синдикалистское движение между двумя мировыми войнами. [The Forgotten International. The international anarcho-syndicalist movement between the two world wars.]: Vol. 1. От революционного синдикализма к анархо- синдикализму. 1918-1930. [From revolutionary syndicalism to anarchosyndicalism. 1918-1930.] (Moscow, 2006), 904 pp., ill.; Vol. 2. Международный анархо-синдикализм в условиях “Великого кризиса” и наступления фашизма. 1930-1939. [International anarcho-syndicalism faces the “Great Crisis” and fascist aggression. 1930-1939.] (Moscow, 2007), 736 pp., ill. [3] M. Revelli, “Der Sozialstaat in den Brennesseln,” Die Aktion (Hamburg), no. 113/119 (March 1994), p. 1932. [4] A. Castel, De la Premiere Internationale a l’Association Internationale des Travailleurs (Marseille, 1995), pp. 13-15. [5] H.-J. Steinberg, “Zukunftsvorstellungen innerhalb der deutschen Sozialdemokratie vor dem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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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uskin-Antonov, Очерки по новейшей истории Германии. 1890-1914 [Essays on the contemporary history of Germany, 1890-1914] (Moscow / Leningrad, 1925), p. 321. [12] K. Schonhoven, “Lokalismus – Berufsorientierung – Industrieverband: Zur Entwicklung der organisatgorischen Binnenstrukturen der deutschen Gewerkschaften vor 1914,” in W. J. Mommsen and H. G. Husung (eds.), Auf dem Wege zur Massengewerkschaft: die Entwicklung der Gewerkschaften in Deutschland und Grossbritannien 1880-1914 (Stuttgart, 1984), pp. 291, 295. [13] C. Cornelissen, “Die neueste Entwicklung des Syndikalismus…,” p. 131. (n8) [14] C. Cornelissen, “Die neueste Entwicklung…,” p. 128-129. (n8) [15] K. Roche, Aus dem roten Sumpf oder: Wie es in einem nicht ganz kleinem Zentralverband hergeht (Berlin, 1909); reprint (Hamburg/Altona, 1990), p. 4. [16] W. Thorpe, “The Workers Themselves...,” p. 26. (n7) [17] 프랑스 혁명적 조합주의의 선도적 활동가인 빅토르 그리퓔레스는 “직접행동은 노동자 스스로의 행동을, 자기 이익을 스스로 대변하여 이루어지는 행동을 의미한다. 노동자 스스로가 자기 최선을 다한다. 그 노동자는 그를 지배하는 힘을 스스로 떨쳐내고 원하는 것을 얻는다. 직접행동을 통해 노동자는 스스로의 투쟁을 만들어낸다. 노동자는 그에 대한 모든 책임을 지고, 자신의 해방을 타인에게 캍기지 않는다.”고 설명한다.(G. Aigte, “Uber die Entwicklung der revolutionaren syndikalistischen Arbeiterbewegung Frankreichs und Deutschlands in der Kriegs- und Nachkriegszeit,” Die Internationale, 1931, no. 4 (Februar), p. 88.에서 재인용) [18] W. Thorpe, “The Workers Themselves...,” p. 26. (n7) [19] L. Mercier-Vega and V. Griffuelhes, L’Anarcho-syndicalisme et le syndicalisme revolutionnaire (Paris, 1978), p. 14. [20] direkte aktion, 1993, no. 98 (Mai-Juni), p. 7. [21] G. Careri, L’Unione Sindacale Italiana tra sindacalismo di base e trasformazione sociale (n. p., 1997), p. 9. [22] Die Internationale,no.5 (Juni 1925), p. 148ff.; C. Da Fonseca, Introduction a l’histoire du mouvement libertaire au Portugal (Lausanne, 1973). [23] Freiheit und Brot (Berlin / Koln, 994), pp. 23-32. [24] L. K. Persson, Syndikalismen I Sverige 1903-1922 (Stockholm, 1975). [25] L. Adamic, Dynamit: Geschichte des Klassenkampfs in den U.S.A. (1880-1930), 3. Aufl. (Stuttgart, 1985). V. Trautman, D. Ettor, et al., Производственный синдикализм (индустриализм) [Industrial Unionism], coll. of articles (Petersburg-Moscow, 1919).도 참조하라. [26] C. Cornelissen, “Die neueste Entwicklung…,” p. 138. [27] Ibid., pp. 144-147. [28] 1330년대를 독일 학자 게르하르트 아이테는 "혁명적 조합주의 노동운동에서는 다른 그 어떤 운동들보다도, 자신의 길을 찾고 만들어가는 노동계급의 생생한 본성을 관측할 수 있다.“고 적었다. ”이것이야말로 이 운동이 잘 정제되고, 깔끔한 이론의 결과로 도출된 것이 아니라 실질적인 삶의 요구에서 성장하였음을 보여주는 것이라 본다. 혁명적 조합주의자들은 언제나 조합주의는 노동자가 스스로의 문제에 대하여 이야기하는 것이지, 지식인들을 만들어내는 것이 아니라고 말한다. (G. Aigte, Die Internationale, 1930, no. 2 (Dezember), p. 45). [29] E. Pouget, L’Action directe (Marseille, 1997), p. 1. [30] G. Yvetot, A.B.C. syndicaliste + F. Pelloutier, L’Organisation corporative et l’anarchie (Toulouse, n.d.), p. 33. [31] C. Cornelissen, “Uber den internationalen Syndikalismus,” Archiv fur Sozialwissenschaft und Sozialpolitik, Bd. XXX (Tubingen, 1910), pp. 153-154. [32] E. Pataud and E. Pouget, Comment nous ferons revolution (Paris, 1909). [33] 이를테면, P. A. Kropotkin, Fields, factories, and workshops (Montreal: Black Rose Books, 1996).을 보라. [34] C. Cornelissen, “Uber den internationalen Syndikalismus...,” pp. 158, 161, 165; C. Cornelissen, “Zur internationalen syndikalistischen Bewegung,” Archiv fur Sozialwissenschaft und Sozialpolitik, Bd. XXXII (Tubingen, 1911), p. 842. [35] V. Garcia, Antologia del anarcosindicalismo (Caracas / Montady, 1988), p. 17.에서 인용 [36] M. Rayevsky, Anarcho-syndicalism and critical syndicalism (New York, 1988), p. 17. [37] C. Cornelissen, Theorie de la valeur (Paris,1903). [38] G. Sorel, Reflections sur la violence (Paris, 1906). [39] Anarchistes en exil. Corresondence inedite de Pierre Kropotkine a Marie Goldsmith 1897-1917 (Paris, 1995), p. 290. [40] E. Malatesta, Anarchie (Berlin, 1995), p. 290. [41] H. Dubief (ed.), Le Syndicalisme revolutionnaire, Paris (1969), pp. 95-96.에서 아미앵 헌장의 전문을 볼 수 있다. [42] P. Kropotkin, 생디말리슴과 아나키즘, https://blog.naver.com/anarchistleague/222071256969 [43] P. Kropotkin, preface to E. Pataud and E. Pouget, How we shall bring about the revolution (London / Winchester (Mass.), 1990) [44] 총회에서의 발언들과 그에 뒤따른 결의안은 Congres Anarchiste tenu a Amsterdam. Aout 1907. Compte-rendu analytique et resume de rapports sur l’etat du mouvement dans le monde entier, Paris (1908).을 참조하라. [45] V. Garcia, Antologia del anarcosindicalismo..., p.18. [46] Brandenburgisches Landeshauptarchiv (eh. Staatsarchiv Potsdam). Pr. Br. Rep. 30, Berlin C Polizeiprasidium, Tit.94, Lit.A, Nr. 24: Die Anarchistische Internationale. 1908-1915. (15644), Bl. 14,16. [47] “Prefigurando futuro”: 75° aniversario de la CNT. 1910-1995, (Madrid, 1985), p. 4-8; Congresos anarcosindicalistas en Espana. 1870-1936 (Toulouse/ Paris, 1977), pp. 35-40; J. Peirats, Les anarchistes espagnols. Revolution de 1936 et luttes de toujours (Toulouse, 1989), pp. 9-13. [48] E. Lopez Arango and D. Abad de Santillan, El anarquismo en el movimniento obrero (Barcelona,1925); A. Lopez, La FORA en el movimiento obrero (Buenos Aires, 1987). [49] E. Lopez Arango and D. Abad de Santillan, op. cit., pp. 20-21. [50] F. Pintos, Профсоюзное движение в Уругвае [The Labour Union Movement in Uruguay] (Moscow, 1964); C. Zubillaga and J. Balbis, Historia del movimiento sindical uruguaya (Montevideo, 1984). [51] J. M. Hart, Anarchism and the Mexican Working Class, 1860-1931 (Austin, 1987); F. Fernandez, El Anarquismo en Cuba (Madrid, 2000); S. Dolgoff, The Cuban Revolution: a Critical Perspective (Montreal, 1976); E. Rodriques, Socialismo e sindicalismo no Brasil (Rio de Janeiro, 1969); E. Rodrigues, Pequena historia da imprensa social no Brasil (Florianopolis, 1997). [52] 역자주 - 지역에 기반한 노동자의 사회조직 [53] J. Godio, Historia del movimiento obrero latinoamericano, Vol. 1., Anarquistas y socialistas 1850-1918 (Mexico, 1980); L. Gambone, “The Libertarian Movement in Chile,” Black Flag, 1990, January, No. 196; L. Vitale, Contribucion a una Historia del Anarquismo en America Latina (Santiago, 1998). [54] El anarcosindicalismo en el Peru (Mexico, 1961). [55] See: C. Cornelissen, “Uber den internationalen Syndikalismus...,” p. 150 (n31); M. Van der Linden and W. Thorpe (eds.), Revolutionary syndicalism: an international perspective..., p. 239 (n19). [56] 역자 주 - 에리코 말라테스타, <프롤레타리아 독재에 관하여>, [57] 1922년, SAC는 모스크바에서 만들어진 인터내셔널에 가입하는 것이 정당으로부터의 독립이라는 조합주의적 원칙에 부합하지 않는다고 선언했다. [58] 사회민주주의자들에 의하여 통제되고 있던 국제 노동조합 조직 [59] Bestand RY1/I2/708, Aktenband No. 53, Bl. 75-78 [60] E. Malatesta, “Quelques considerations sur le regime de la propriete apres la revolution” in Articles politiques (Paris, 1979), pp. 379-390. [61] P. Adamo, “Anarchismo tra ethos e progetto,” A – Rivista anarchica, 1997, no. 1 (233), Febbraio, p. 36. [62] 이 입장이 CNT 조합원 모두와 공유된 것은 아니었다. 1931년 6월 CNT의 총회에서, 조합주의자 후안 페이로가 제안한 조직을 산별노조에 기반하여 재편하는 것에 관한 논쟁이 불붙었다. 아나키스트들은 이 계획에 반대했다. 이를테면 저명한 아나키스트 호세 알베롤라는 “산별연맹의 지지자들은 목표에 대한 믿음을 잃어 기계의 효율성에 희망을 두는 지경에 이르렀다. 하지만 나는 기계는 생명력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생명력을 고갈시킨다고 말한다. 결국 산별연맹을 건설함으로서 우리는 개인의 자주성에 대한 모든 언명들과 모순되는 무언가를 건설하는 셈이다. 우리에게는 이상이 필요하다. 그리고 아무리 보아도, 이 자본주의적 기계들은 우리의 이상을 언제건 파괴할 것이다. 논쟁의 끝에 페이로의 결의안은 302,000표 대 81,000표로 가결되었지만, 실제로 집행되지는 못했다. A. Paz, op. cit., pp. 219-222 (n64); J. Peirats, Les anarchistes espagnols..., pp. 63-64 (n46). [63] 카탈루냐 CNT의 기관지 솔리다리다트 오브레라는 “파시즘을 부술 수 있는 유일한 가능성은 사회혁명의 실행에 있다”고 쓴 바 있다. [64] 역자주 - 군사정부 [65] 이 무기 구매 협상에 관한 세부 내역은 1937년 IWA 총회에 사무총장의 보고를 통해 확인할 수 있다. 이 문서는 International in the International Institute of Social History에 저장되어 있다. [66] 아라곤 방어 위원회는 1936년 12월 말, 아나키스트들이 다른 정파의 대표자들을 구성에 포함하겠다고 말했을 때에야 공식적으로 인준되었다. [67] CNT-FAI 출신의 정부 구성원들이 일부 변혁을 집행할 수 있었음은 인정해야 한다. 몬세니의 주도 하에, 모든 공화국 지역에서 무료 의료 서비스가 제공되었고, 새로운 병원이 건설되었으며, 낙태는 합법화 되었다. 가르시아 올리베르는 “자유”결혼을 합법화 하였고, 감옥과 교화소의 생활규제를 완화하였다(구체적 사실을 위해, A. V. Shubin, Анархо-синдакалисты в испанской гражданской войне 1936-1939 гг. [Anarcho-syndicalists in the Spanish civil war 1936-1939], (Moscow, 1997), pp. 17-18.을 보라)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수단들은 아나키즘적 조합주의의 자체적 강령과는 무관했으며, 그 “정체성”에 걸맞는 것도 아니었다. [68] 아라곤 지역의 집단농장들은 1937년 2월 회의를 개최하고 아라곤에서의 지역 권력기구의 재구성과 관련된 결의안을 채택했다. 이 결의안은 권력기구가 집단농장연방의 경제에 개입하지 말아야 한다고 언명하고 있었다. [69] 이에 관하여 처음으로 언급한 것은 트로츠키주의 작가인 F. 모로우의 1938년 저작이었다. F. Morrow, Revolution and Counter-Revolution in Spain (Atlanta, 1974).을 보라. [70] Delo truda – Probyzhdeniye, 1940, no.1, Yanvar – Fevral, pp. 7-12. 다만, “벨기에, 스페인, 이탈리아, 프랑스, 독일 아나키스트들”은 IWA의 성명서가 파시즘을 “최대의 적”이라고 칭한 것에 동의하지 않았다. 이들은 “우리에게 오늘의 적은, 어제에도 그러했고, 내일에도 그러할 것처럼, 우리의 사장들이다. 그리고 우리의 최대의 적은 국가고 정부이며, 그 압제의 수단이자 그것들을 떠받치는 공식적 · 준공식적 기구들이다. 군대고, 관료제이며, 교회다. 이 모든 수단이 자유와 개별성에 대한 압재의 공범이다.” [71] 이 현상을 처음으로 분석한 사람들 중에는 철학자 허버트 마르쿠제가 있다. 허버트 마르쿠제의 <일차원적 인간>을 참조하라. [72] 새로운 방향성이 SAC를 구원한 것도 아니었다. SAC는 1960년대의 “청년 반란”세대와 교감하지 못했다. 20세기 말 벌어진 스웨덴 산업 구조의 변화와 “스웨덴 모델”의 붕괴는 스웨덴 조합주의에 큰 타격을 가했다. 2002년 SAC에는 단지 7,000명의 조합원만이 남아있을 뿐이었다.(역자 주 - 2018년 그 조합원 수는 3,055명으로 줄어들었다.) [73] 1984년 CNT를 탈퇴한 노동조합들이 통합하여 노동총연맹(Confederación General del Trabajo, CGT)를 건설했다. 1995년에는 프랑스 CNT-AIT를 탈퇴하여 “비뇰르가의” CNT가 건설되었다. 이들은 다른 개량주의적 노동조합들처럼 선거에 참여하고, “사회적 대화”기구에 참여하고, 사업주들과의 교섭을 진행하고자 했다. 다른 “공식적” 노동조합들처럼, CGT는 국가의 지원금을 받았고, 관료들을 채용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