볼린
알려지지 않은 혁명 1917~1921
제3권: 진실을 위한 투쟁
1917년 10월혁명 이후 러시아에서 일어난 우파 반동과는 별개로, 같은 기간 및 그 이후에도 반대 방향으로의 일련의 운동이 생겨났다. 이는 진정한 자유 및 볼셰비키 권력이 비웃고 발아래로 짓밟은 사회혁명의 원칙 그 이름으로 볼셰비키 권력과 싸운 혁명 운동이었다.
실제로 정부와 공산당 대오 내에서도, 억압적 국가주의와 중앙집권주의, 관료주의에의 가공할 추세, 적나라한 사회적 무능과 볼셰비키의 파렴치한 폭력으로 인해 반발과 반역의 움직임이 촉발되었다.
그래서 1918년 여름, 그때까지 정부에 참여했던 《사회주의혁명당》 좌파가 정부를 떠나 볼셰비키와 결별하고 그들에 반대한다고 발표했다. 그들은 곧 탄압에 쓰러졌다.
이후 볼셰비키당 내부에서 “《노동자 반대파the Workers’ Opposition》”라고 불리는 것이 등장했는데, 이는 레닌이 『공산주의에서의 “좌익” 소아병Left-Wing" Communism: An Infantile Disorder』이라는 제목의 소책자를 출판하도록 만들었다. 이 “《노동자 반대파》”도 마찬가지로 무자비하게 반복된 탄압으로 궤멸했다. 그 뒤로도 항상 정부와 당내에서 반대 운동이 뒤따랐고, 이 모든 운동도 마찬가지로 치명적인 흉포함으로 진압되었다.
이 모든 운동들은 엄밀히 말하자면 정치적이었고, 당에 대한 비판 측면에서 자주 꽤 부드러운 것이었지만 본질적 이해관계가 거의 없었다. 물론 미래의 역사학자는 그들에게서 체제를 묘사하고 판단하기 위한 매우 의식적인 자료들을 발견할 것이다. 그러나 혁명과 그 운명의 관점에서 볼 때, 그들은 이따금의 격렬한 투쟁에도 불구하고 기본적으로 “가족 간 다툼”이었다. 만약 반대파나 반역자들이 승리했다면 국가는 근본적인 상황에서 아무런 변화 없이 주인만 바뀌었을 것이다. 새 주인들은 필연적으로 전임자의 정책과 방법을 채택하도록 내몰렸을 것이다. 사람들에게 바뀌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을 것이다. 또는 차라리, 속담에서도 보이듯 “더 많이 변할수록 더 똑같이 남게 되었을 것이다.”
이러한 “궁정” 내 소란 바깥에 본질적으로 대중적이며, 비정치적이고, 전적으로 사회적이며 진정 혁명적이었던 다양한 좌파 운동이―때로 큰 규모로―발생했다.
우리는 주로 이 모든 것 가운데 가장 의식적이며, 가장 중요하고, 외부로 거의 알려지지 않은 자유의지주의 단체의 운동 두 가지에 집중할 것이다. 그것은 1921년 3월의 크론슈타트Kronstadt와 1918년부터 1921년 말까지 거의 4년간 지속된 우크라이나에서의 거대하고 격렬한 운동이다.
제1부.지리에 관한 노트
크론슈타트Kronstadt는 2세기 전 핀란드 만灣 하단의 상트페테르부르크St. Petersburg(현재의 레닌그라드Leningrad)에서 서쪽으로 30킬로미터 떨어진 코틀린Kotlin 섬에 세워진 요새, 더 정확히는 요새 도시이다. 발트해에서 옛 수도로 접근하는 것을 방어하고 있으며 러시아 《발트 함대The Baltic Fleet》의 주요 기지이기도 하다. 핀란드 만은 겨울이면 얼어붙으며, 크론슈타트와 레닌그라드 사이 통신은 매년 다섯 달 동안(11월부터 4월까지) 만의 두꺼운 얼음 위 눈길을 통해 이루어진다.
코틀린 섬―매우 불규칙한 둘레를 지닌 좁고 길쭉한 땅―의 길이는 12킬로미터이다. 가장 큰 폭이 2킬로미터에서 3킬로미터이다. 해안은 접근하기 어려우며 잘 요새화되어 있다. 레닌그라드와 마주한 섬 동부에는 크론슈타트 시市와 항구, 부두가 있으며 전체 면적의 약 3분의 1을 차지한다. 북쪽과 서쪽, 남쪽 해안에는 보루와 요새가 산재해 있다. 1917년 혁명 당시 이 해안과 도시 사이 지형은 사실상 사막이었다.
이 섬은 북쪽과 남쪽으로 많은 요새와 포대로 둘러싸여 있으며, 꽤 멀리까지 바다로 튀어나와 있다. 바다에서 20킬로미터 떨어져 섬을 마주 보고 있는 본토의 한 지점에는 중요한 요새인 크라스나야 고르카Krasnaya Gorka가 있다. 섬의 북쪽 해안과 바다로 10킬로미터 떨어진 다른 해안에는 리시 노스Lissy Noss라 불리는 요새화된 곶이 있다.
도시 내부에서 가장 주목할 만한 특징은 거대한 야코르나야 플로샤디Yakornaya Ploshchad', 즉 앵커 광장Anchor Square이다. 최대 3만 명을 수용할 수 있는 이 광장은 이전에 징집병 훈련과 군사 훈련 점검용으로 사용되었다. 혁명 기간 동안 그곳은 규칙적인 대중 토론장이 되었다. 토론이 소집될 때마다, 그리고 사소한 경보에도 수병, 병사, 노동자들이 대중 집회를 개최하기 위해 그곳으로 달려가고는 했다. 겨울 동안은 커다란 “해상 함선 학교”에서도 같은 역할을 맡았다.
크론슈타트의 인구는 첫째로 커다란 막사에 넷으로 나뉘어 배치된 《발트 함대》의 선원들, 그다음 주로 포병인 수비대 병사, 그리고 마지막으로 약 5만 명에 달하는 많은 장교, 공무원, 상인, 숙련 노동자 등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제2부.혁명 이전의 크론슈타트
《발트 함대》와 《크론슈타트 수비대the Kronstadt garrison》는 러시아혁명에서 가장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다. 많은 요인이 이에 기여했다. 우선 수병은 대부분 노동계급에서 모집되었는데, 해군은 자연스레 그 가운데 가장 적합하고, 가장 교양 있으며 기민한 신병을 선발했다. 그뿐만 아니라 이런 종류의 노동자들은 정치적으로도 가장 진보적이었다. 많은 경우 그들은 해군에 입대하기 전 혁명가의 싹이었거나 때로는 심지어 활동적인 투사들이었는데, 이는 필연적으로 규율과 지휘에도 불구하고 동료 수병들에게 강한 영향력을 행사했다.
게다가 수병은 종종 임무를 수행하며 외국을 방문했기에 이곳들의 상대적으로 자유로운 체제를 차르 러시아의 체제를 비교하기 적절한 입장이었다. 그들 대부분은 서유럽의 망명자들과 관계를 유지하며 그들의 금지되고 비밀리에 전해지는 문헌을 읽음으로써 군대를 포함해 다른 어떤 이들보다도 정당들의 사상과 계획을 받아들였다.
우리는 당시 수도와의 근접성이 그 정치적, 지적, 산업적 활동의 활발함으로 인해 크론슈타트 사람들의 교육에 크게 기여했다는 점을 덧붙여 두어야 하겠다.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는 “정치적 생활”이 최고조에 이르러 있었다. 중요한 노동자 집단들이 있었으며, 대학에는 수많은 격동의 젊은이들이 있었다. 혁명 단체들의 활발한 활동, 점점 더 빈번해지는 커다란 소요와 시위, 이에 때로 뒤따르는 난투극, 그리고 급격하고 직접적인 정치적, 사회적 사건들과의 접촉은 모두 크론슈타트 사람들로 하여금 국내 생활, 대중의 열망과 투쟁, 그리고 당대의 정치적, 사회적 문제에 활발하고 지속적인 관심을 가지도록 만들었다.
상트페테르부르크는 실제로 크론슈타트를 항상 긴장하게 만들었고, 때로는 열병에 시달리게 했다. 이미 1905년에서 1906년 및 1910년에 크론슈타트 수병들은 꽤 심각한 반란을 시도했으나 이는 가혹하게 진압되었다. 하지만 그들의 정신은 더욱 맹렬하고 생생해졌다.
마침내 1917년 혁명 초기부터 극좌 세력, 볼셰비키, 《사회주의혁명당》 좌파, 최대주의자, 조합주의자 및 아나키스트는 모두 크론슈타트에 활동적이고 조직적인 중심지를 만들었고, 그들의 활동은 곧 많은 수병에게 상당한 영향을 끼쳤다.
이런 모든 이유로 인해 크론슈타트는 곧 1917년 혁명적 대중의 전위가 되었다. 그것은 그 활동력, 그 선진 의식으로 인해, 그들이 트로츠키가 권력을 장악하는 것을 도울 때 트로츠키가 일컬었던 것처럼 “러시아혁명의 긍지이자 영광”이었다. 이는 볼셰비키당의 일탈과 사기에 그들이 맞서자마자 이제는 “반혁명분자 돼지 새끼”가 된 “영광”에 대해 그가 대포를 돌리는 것을 막지는 못했다.
제3부.혁명의 전위로서의 크론슈타트
1917년 2월부터 혁명 기간 내내, 그리고 거의 모든 곳에서 크론슈타트의 사람들은 투쟁의 한가운데에 있었다. 그들은 스스로를 지역 활동에만 국한하지 않고 활력이 넘쳤다. 그들은 혁명적 열정과 전투적 열의로 가득 차 있었고, 힘과 용맹을 갖추고 있었으며, 스스로의 역할을 의식해 끊임없이 혁명에 필요한 모든 것을 망설임 없이 바쳤다―그들의 화력과 신념을, 그들의 의식과 활력을. 그들은 헌신적인 투사가 되었고, 목숨을 바칠 준비가 되었으며, 선동가와 대중 선전가, 혁명 문헌의 배포자, 온갖 종류의 기술자, 그리고 무엇보다도 비할 데 없는 전사가 되었다.
1917년 2월, 크론슈타트는 즉시 혁명으로 결집했다. 봉기해 도시를 점령한 수병들은 고통스러우나 그들이 생각하기에 필요한 행동을 취해야 한다고 느꼈다. 2월 27일과 28일 밤, 그들은 약 2백 명의 악명 높은 반동 고위 장교들을 붙잡아 현장에서 처형했다. 희생자 가운데는 1910년의 반란 시도 중 수백 명의 수병을 총살하도록 명령한 이들, 그뿐만 아니라 포로로 잡힌 수병들에게 짐을 매달아 빠뜨린 유명한 토틀레벤Totleben 요새 익사 사건을 일으킨 이들도 있었기에 오랜 세월에 걸쳐 쌓인 원한과 증오가 이리하여 달래졌다.
수병들은 그들이 존경하고 좋아하는 장교들뿐만 아니라 탄압 동안 단순히 포악함을 참았던 장교들 역시 최선을 다해 보호했기 때문에 이 2백 명 장교의 처형이 유일한 유혈사태였다. 봉기 내내 동안 수병 집단은 소란 속에 길을 잃은 장교들을 찾아 헤매며, 그들이 다른 선원에 의해 체포된 것을 알게 되면 풀어주어 그들의 배나 막사에 안전하게 배치했다.
수병들은 곧 크론슈타트의 첫 소비에트를 조직했다. 이 소비에트는 처음에는 매우 온건했으나(구성원 대부분이 《사회주의혁명당》 우파이거나 멘셰비키였다), 혁명적 대중의 압력에 의해 임시정부와의 날카로운 대립으로 내몰리게 되었다. 눈앞에 보이는 이러한 갈등의 원인은 사소한 것이었으나 대중은 그 기저에 있는 중요성을 잘 이해하고 있었다. 정부는 크론슈타트 사람들의 독립적 정신이나 열렬한 활동을 용납할 수 없었던 것이다. 임시정부는 어떤 희생을 치르더라도 크론슈타트 사람들의 독립적 정신을 파괴하고 열렬한 활동을 마비시키기를 바랐다. 요컨대 불평분자를 진압하고 도시를 완전히 복속시키고자 했던 것이다.
첫 번째 갈등은 원만하게 해결되었다. 많은 회의와 숙고 끝에 크론슈타트 사람들은 당분간 양보하는 것이 신중하다고 여겼다. 동시에 소비에트의 나약한 태도에 불만을 품은 그들은 새로운 대표를 선출하기 시작했다.
곧 임시정부와의 새로운 갈등이 발생했다. 반복되는 인내의 끝에 크론슈타트는 봉기 직전에 있었으나 전국적으로 이 이른 행동을 이해받지 못하리라는 생각만이 수병들에게 이를 재고하게 만들었다.
크론슈타트에 대한 첫 중상모략이 러시아 국내외 부르주아 언론에 의해 날조되고 유포된 것이 이 시기였다. “크론슈타트는 러시아로부터 분리 독립해 스스로 자치공화국을 선포했다.” “크론슈타트는 독자적 화폐를 찍어내고 있다.” “크론슈타트는 독일과 개별 평화 조약을 체결하려 하고 있다.” 이런 것들이 퍼져나간 유언비어 중 일부였다. 그들의 목적은 전국적으로 크론슈타트의 신용을 떨어뜨린 뒤 어려움 없이 그들을 소탕할 수 있게 하는 것이었다.
첫 임시 정부는 이 계획을 수행할 시간이 없었다. 그들은 전반적 반대에 무너졌다. 반면 크론슈타트는 대중이 보기에 호감을 얻었다.
두 번째 크론슈타트 소비에트는 이전보다 훨씬 더 왼쪽에 있었다. 많은 볼셰비키, 몇몇 최대주의자, 또한 몇몇 아나키스트가 여기에 속해 있었다.[1] 그러나 소비에트의 활동과 다양한 파벌 사이의 불가피한 투쟁은 노동자들 사이에서, 배에서, 막사에서, 작업장에서의 엄청난 활동들에 비하면 거의 중요하지 않은 것이었다. 앵커 광장에서 계속해 진행된 회의에서는 혁명의 모든 문제가 모든 관점에서 논의되고 검토되었다. 사람들은 격렬하고 열정적인 나날을 보냈다. 크론슈타트는 이렇게 스스로를 교육했고 혁명의 모든 단계에서, 러시아의 모든 지역에서, 다가올 투쟁 가운데 곧 활약하게 될 매우 활동적인 역할을 대비했다.
처음에 수병들은 케렌스키에게 호의적이었으나 곧 그의 본모습을 알아챘고, 6월 18일의 유명한 공세 실패로부터 2주 뒤 크론슈타트는 케렌스키와 그 정부를 반대하는 분명한 입장을 취했다. 크론슈타트의 적의를 알게 된 케렌스키가 페트로그라드로 간 많은 수병을 체포하며 이외 억압적 조치를 취하려 하자 적대감은 더욱 커져갔다.
혁명적 기관총 연대가 무기를 들고 전선으로 보내지는 데에 반대하자 정부에 충성하는 군대가 그들을 향해 발포해 페트로그라드의 소요는 불길을 더해갔다. 크론슈타트의 1만 2천 수병과 병사, 노동자들이 흑적기와 “모든 권력을 지역 소비에트로”라는 구호가 적힌 플래카드를 들고 페트로그라드에 상륙한 것은 바로 이때, 7월 4일이었다. 시위대는 볼셰비키를 포함한 여러 정파가 정치적 상황을 심의하고 있는 토리드 궁을 향해 행진했다. 그들은 시위를 확장고 수도의 대중과 주둔군을 끌어들여 정부가 붕괴하고 소비에트가 이를 대신할 때까지 투쟁을 밀어붙이기를 바랐다. 그들의 바람은 이루어지지 않았고, 정부를 지지하는 군대와 거리에서 교전을 벌이다 여러 명을 잃은 후에 그들은 실패를 인지하고 아무 성과 없이 크론슈타트로 돌아가야 했다. 새로운 혁명은 아직 예정되지 않았다.
정부도 시위대를 엄격히 다루기에 충분하지 않다고 느꼈으며, 쌍방이 무자비한 투쟁에 대비하며 오랜 기간에 걸쳐 협상한 끝에(크론슈타트는 실제로 페트로그라드를 공격하기 위해 전투 대형을 갖추고 있었다) 마침내 합의에 이르러 모든 것이 다시 평화롭게 되었다.
이 실패한 “소란”의 특징 중 몇 가지에 대해 강조할 가치가 있다. 볼셰비키가 우세한 위치에 있었으며 시위대가 채택한 것은 주로 구호였다. 크론슈타트 내에서 대표자들은 행동의 주요 조직자였다. 수병들이 그들에게 물었다. “당이 그 행동을 인정하지 않으면 어떡합니까?” 그들이 답했다. “우리는 강제로라도 그들이 우리를 지지하도록 만들 겁니다.” 그러나 중앙위원회는 아무런 결정도 내리지 않았기에(혹은 기권하기로 결정했기에), 몇몇 유명한 볼셰비키들이 다른 정파들과 협상하고 있었기에, 볼셰비키 지도자들은 “비공식적으로만” 참여했기에, 레닌은 발코니에서 격려 연설을 하는 데 그치고 모습을 감추었다. 트로츠키와 다른 지도자들은 어떤 참여도 삼가고 눈에 띄지 않으려 했다. 그 운동은 그들의 것이 아니었고 그들이 통제하지 않았으므로 그들은 그것에 아무런 관심이 없었다. 그들은 그들의 시간을 기다리고 있었다.
중앙위원회의 머리글자가 새겨진 거대한 붉은 깃발로 장갑차를 장식한 많은 볼셰비키는 그것을 시위의 선두에 놓기를 원했다. 그러나 수병들은 자신들이 볼셰비키당이 아니라 소비에트의 비호 아래 행동하고 있다고 선언하며 장갑차를 후방으로 보냈다.
크론슈타트에서 이미 영향력이 발휘하던 아나키스트들은 그날 행동의 적극적 가담으로 여러 사람을 잃었다. 하지만 이는 근본적으로 대중의, 수많은 반란자의 운동이었다.
7월 이후 부르주아 언론은 다시금 크론슈타트에 대한 중상을 퍼부으며 반란이 “독일의 자금으로” 조직되었다고 암시하며(그들은 심지어 수병 한 명당 하루 25루블을 받는다고 구체적으로 적어두기도 했다!) 반역죄를 들먹였다. 사회주의 언론도 이 합창에 합류해 그 운동이 “의심스러운 분자들”의 소행이라고 주장했다. 이 캠페인은 케렌스키가 크론슈타트를 가혹한 탄압으로 위협할 수 있게 했다. 그러나 우리가 보았듯, 그는 감히 행동하지 못했다.
크론슈타트 사람들은 전혀 겁먹지 않았다. 그들은 스스로가 올바른 길을 걷고 있다는 사실을 점점 더 인식하게 되었고, 또한 크론슈타트의 활동에 영향을 준 신념, 힘, 목표가 그들 자신의 것임을 대중이 이해할 날이 다가오고 있음을 점점 더 확신하게 되었다.
이 시점에서 크론슈타트는 엄청나고 거의 열광적인 활동을 시작했다. 그들은 전국 각지로 선동가들과 대중 선전가들을 잇달아 파견하는 것부터 시작했다. 그들의 구호와 표어는 “모든 권력을 지역 소비에트로”였다. 지방에서는 이 사절들이 무더기로 체포되었으나 크론슈타트는 더 많은 밀사를 파견하는 것으로 화답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그들의 노력은 보상받았다. 지금껏 케렌스키를 지지했던 《흑해 함대The Black Sea Fleet》 수병들은 마침내 크론슈타트의 “반혁명적” 역할에 대해 비난하는 “믿을 만한 소식통으로부터의 정보”를 의심하기 시작했다. 논란을 불식시키기 위해 그들은 크론슈타트에 대표단을 파견했다. 소비에트가 진지하게 맞은 이 대표단은 도시 주민들과 스스럼없이 의논하며 그들의 태도를 접했고 언론과 당국의 거짓말을 밝혀냈다. 그때부터 두 함대 간 긴밀한 접촉이 이뤄졌다.
게다가 전선에 있던 몇몇 부대가 크론슈타트에 대표단을 파견하여 수병들의 심리상태를 파악하고, 필요할 경우 중상모략에 의해 크게 왜곡된 크론슈타트의 평판을 바로잡았다. 이러한 대표단 중 하나는 상당한 숫자의 병사로 구성된 정규 군사 원정대를 구성하고 있었다. 그들은 만일의 사태에 대비하기 위해 무기(심지어 대포와 기관총까지)로 가득 찬 배를 타고 크론슈타트에 도착했다. 만일 소문과 신문에 적힌 대로라면, 그들은 독일로부터 자금을 조달받는 “크론슈타트 독립공화국”의 옹호자들에 의해 총격을 받을 것이 뻔하다고 예상했기 때문이다! 그들은 해안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닻을 내리고 우선 “전권 대표”와 함께 작은 배 몇 척을 도시로 파견했다. 상륙한 그들은 적국에서의 정규 순회 정찰대처럼 조심스레 도시 쪽을 향해 전진했다.
이 모든 것은 여느 때와 같이 소련의 진지한 환영과 스스럼없고, 열정적인, 하지만 다정한 토론으로 끝맺어졌다. 수병들은 항구로 옮겨진 “원정대”의 배에 방문했고, 손님들은 전함을 방문했다. 저녁이 되자 대표단은 “모든 권력을 지역 소비에트로!”라는 외침과 함께 확신을 가지고 전선으로 돌아갔다.
종종 이 대표단들은 수병들이 전선의 지친 부대와 교대해야 한다고 제안하기도 했다. 그러면 크론슈타트 사람들은 자신들의 견해를 확고하게 설명했다. “토지가 농민에게 주어지지 않고 혁명이 완전히 승리하지 않는 한,” 그들은 말했다. “노동자는 지킬 것이 아무것도 없습니다.”
코르닐로프(Lavr Georgiyevich Kornilov) 장군이 페트로그라드로 진군하기 얼마 전, 반동분자들은 정국을 장악하기 위해 노력했고, 일부 군대에서 규율을 재정립하고, 전선에서 사형 제도를 다시 시행하고, 병사위원회를 박살 내려 했다. 크론슈타트는 이에 따라 무장 봉기를 위한 준비를 재개했다.
그와 거의동시에 케렌스키 정부는 리가Riga 전선을 강화한다는 구실로 크론슈타트와 모든 요새에서 중포重砲를 옮겨오기로 했다. 수병들의 분노는 끝이 없었다. 그들은 이 대포가 전선에서 효과적인 역할을 수행할 수 없다는 것을 완벽하게 알고 있었고, 독일 함대가 크론슈타트를 공격할 준비를 하고 있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그들은 이를 막기 위한 준비를 하고 있었는데, 이는 대포가 없다면 불가능했을 것이다. 정부 구성원들이 그러한 사실에 그토록 무지하다는 것을 믿을 수 없었기에, 그들은 케렌스키의 결정으로부터 크론슈타트를 공격하기 전에 무장 해제하고자 하는 열망, 즉 혁명에 대한 직접적인 배신을 보았다. 그들은 케렌스키 정부가 가능한 모든 수단을 통해 혁명을 진압하기로 결정했고, 크론슈타트와 페트로그라드가 독일에 항복하는 선택지도 배제하지 않았다고 완전히 확신했다.
크론슈타트는 주저하지 않았다. 배에서, 요새에서, 작업장에서 저항과 반란을 위한 계획을 세우기 위한 비밀회의가 열렸다. 동시에 몇십 명의 선원이 매일 페트로그라드로 가 공장과 작업장, 막사를 방문해 공개적으로 반란을 설파했다.
이토록 격한 반대에 직면하자 정부는 재고한 뒤 양보했다. 타협안이 교섭되었고, 소규모 분대만이 전선으로 향했다. 수병은 대체로 이 해결책에 만족했는데, 장교위원회의 경계로 인해 전선이야말로 그들이 침투하는 데 성공하지 못한 유일한 장소였기 때문이다. 이제 “크론슈타트 전염병”이라고 불리는 것을 그리로 운반할 기회가 생겨났다.
1917년 8월의 코르닐로프의 쿠데타 시도 이후, 크론슈타트의 수병들이 특히 쿠데타 시도 섬멸에 두각을 드러내자 그들에 대한 대중의 마지막 불신도 깨어졌다. 동시에 케렌스키의 인지도는 나날이 줄어들고 있었다. 크론슈타트가 정부에 저항하고 반동분자들의 음모를 폭로하고 자신을 기만하지 않는 것이 옳았다는 것이 도처에서 받아들여지기 시작했다.
크론슈타트의 정신적 승리는 확정되었고, 이때부터 많은 노동자와 농민 대표단이 그곳에 방문해 실제 상황에 대한 계몽을 구하고 미래에 대한 조언과 제안을 구했다. 이 대표단은 떠나며 수병들에게 선전가와 문헌을 그들 지역으로 보내 줄 것을 요청했다. 크론슈타트에게는 이보다 더 좋을 수 없었는데, 곧 크론슈타트로부터의 사절단이 최소한 며칠 동안 머물며 토지의 직접 수용, 정부에의 복종 거부, 재선, 그리고 소비에트의 통합, 평화를 위한 단호한 투쟁과 혁명의 지속을 권하지 않은 단 한 곳의 지방, 단 한 곳의 지역도 없었다고 과장 없이 말할 수 있다.[2] 그리하여 크론슈타트 사람들은 끊임없는 활동으로 노동자와 농민 조직, 군대[3]에 혁명 정신을 불어넣는 동시에 모든 허락되지 않는 행위, 증오적 행위와 개인의 절망에 대항하는 강경한 태도를 취했다.
혁명이 낡은 사회와 싸우고 있는 모든 곳마다 크론슈타트 사람들은 투사의 대열에 함께 했다.
크론슈타트에서의 볼셰비키 이전 시대를 마치기 전에, 무장 투쟁과 다른 긴급한 과업에도 불구하고 그곳에서 성취된 강력한 건설적 사업에 대해 전할 개념이 우리에게 남아 있다. 이 분야에서 크론슈타트 소비에트는 기술 및 병사위원회와 선전위원회라는 두 가지 중요한 기구를 만들었다.
기술 및 병사위원회는 14명의 소비에트 구성원과 함께 해상운송 노동조합과 전함 및 요새의 여러 대표단으로 구성되었다. 더불어 각 주요 요새에 특별위원 사무소가 설치되었다. 이 위원들은 소비에트 및 위원회 간 정기적 연락을 유지하고 요새와 설비의 태세 점검을 감독하는 임무를 맡았다.
위원회는 크론슈타트의 방어와 기술적 필요에 관련된 모든 것을 관리했다. 위원회는 무엇보다도 노동자들의 전반적 무장, 전투 대형을 구성하고 군사 훈련을 시키는 임무를 맡았다. 위원회는 모든 전투 부대에 대한 일일 기록을 남겼으며 상선 및 그 화물과 승객의 환경을 감독했다. 또한 함선 수리 작업을 지휘했으며 거대한 고철로 가득 찬 거대한 포병대 창고도 담당했다.
선전위원회는 매우 중요하게 여겨졌다. 그것은 크론슈타트 내부뿐만 아니라 다소 먼 거리의 지역에서도 훌륭한 교육 활동을 계속해 나가 그 범위는 전국적으로 꾸준히 확대되었다. 매일 여러 요새에서 웅변가, 선동가, 강연가, 선전가를 요청했으며, 그중 일부는 바다로 30킬로미터 떨어져 있거나 페트로그라드 교외도 있었다.
위원회는 모든 종류의 문건, 자세히는 정치 및 사회 작품(사회주의적, 공산주의적, 아나키즘적)과 과학의 대중화, 특히 전반 및 농업 경제를 다루는 책을 주문, 수집, 배포했다. 수병이나 병사들은 자신들의 돈으로 작은 도서관을 꾸리고자 했는데, 자신이 먼저 주의하여 읽은 뒤 후에 그가 태어난 그의 “고향”으로 가져가고자 계획했다.
선전가를 고르고 파견하는 데 사용된 방법들은 어느 정도 주목할 만한 가치가 있다. 어느 작업장이나 군부대, 함선도 지역으로 대중 선전가를 파견할 수 있었다. 선전가로서 파견되기를 원하는 사람은 자신이 속한 부대 혹은 함선의 위원회에 그 의사를 밝혀야 했다. 이의가 없으면 부대나 함선 위원회는 그에게 임시 허가를 발행해 주었다. 그 뒤 그는 선전위원회의 승인을 받고 소비에트 총무에게로 향했다. 만약 소비에트 총회에서 그를 개인적으로 알고 있던 이들이 그의 신청을 지지하고, 혁명적 혹은 도덕적 이유로 그를 반대하는 사람이 없다면 소비에트는 소비에트의 이름으로 공식적이고 최종적인 허가를 발급해 주었다. 그 허가증은 그가 어디를 가든 안전할 수 있게 해주었다. 이러한 임무를 위한 자금은 소비에트의 재정에서 조달되었으며, 이는 노동자들의 임금에서 자발적으로 모인 자금으로 충당되었다.
거의 항상 선전가는 크론슈타트 노동자들이 농민들에게 선물하기 위해 만든 제품들을 특별히 가지고 다녔다. 이러한 노동자들, 특히 “귀향할”, 그래서 농민들을 관심이 큰 이들은 여가를 이용해 못, 편자, 낫, 쟁기 등과 같은 시골에서 필요한 종류의 물품을 생산하는 가게를 차렸다. 그들은 이러한 일을 하며 병사들과 수병 전문가들의 도움을 받았다. 이 기업은 크론슈타트 노동자 조합이라 불렸다. 그들은 도시의 모든 주민에게 쓸모가 없는 고철을 가져와 달라고 요청했으며 기술위원회로부터도 이를 받았다.
크론슈타트의 사절들은 지역 소비에트를 통해 농민들에게 선물할 이 제품들을 잊지 않고 챙겼다. 빵과 자유를 위한 투쟁에 크론슈타트를 지원하겠다고 약속한 농민들로부터 따뜻한 감사의 편지가 크론슈타트 소비에트로 쇄도했다.
또 다른 흥미로운 건설적 사업은 크론슈타트 주민들이 집산 채소 원예를 위해 해안과 도시 사이 빈 땅을 사용하며 설립된 일종의 원예 코뮌이었다. 같은 지역에 거주하거나 같은 가게에서 일하는 50여 명으로 구성된 도시 사람들의 모임은 공동으로 토지를 일구기로 약속했다. 이 공동체들은 각각 제비뽑기로 선택된 땅을 시로부터 부여받았다. 공동체 구성원들은 전문가, 측량사, 농학자들로부터 도움을 받았다.
이 공동체 구성원들이 관심을 지닌 모든 문제는 대표자 회의나 총회에서 논의되었다. 준비위원회가 종자 분배를 담당했다. 연장은 도시 내 병참과 공동체 구성원이 직접 공급했다. 비료 역시 시에 의해 공급되었다.
이 텃밭은 크론슈타트 주민들에게 특히 1918년과 그 이후 기근이 발생했을 때 중요한 역할을 하기도 했다. 이들을 중심으로 형성된 공동체는 주민들을 더욱 가까워지게 하는 역할을 했다. 이 자유 공동체 운동은 큰 활력을 보여주었다. 이것은 1921년에도 여전히 존재했고 볼셰비키가 크론슈타트에서 파괴할 수 없는 유일의 독립 기관으로 남아 있었다.
크론슈타트의 공공 서비스와 도시의 내부 생활에 관한 모든 문제는 시민들에 의해 관리되었고, 주택위원회들과 민병대를 매개로 차근차근 주거와 모든 도시 사업의 사회화를 향해 나아갔다.
일반적으로 말하면 볼셰비키의 등극 전 크론슈타트 및 러시아 다른 지역들에서는 주택 거주자들이 먼저 여러 거주자 회의를 조직했다. 이 모임들은 거주자위원회라고 불렸는데, 이는 활동적이고 필수적인 기능을 충족할 수 있는 이들로 구성되었다. 위원회는 주택의 관리와 주민의 복리를 감독했으며 주간 야간 경비 등을 지정했다. 각 주택위원회는 구성원 중 한 명을 시가지위원회로 위임했는데, 시가지위원회는 시가지 전반에 관련된 사항을 담당했다. 그런 다음 지구위원회, 자치구위원회, 그리고 나아가 도시위원회가 생겨났는데, 도시위원회는 도시 전체의 관심사를 처리하고, 자연스럽고 논리적인 방법으로 필요한 편의의 집중화를 수행했다.
민병대의 조직 역시 위원회의 조직과 유사했다. 각 주택에는 거주자 가운데 추첨으로 뽑힌 민병대가 있었으며, 시가지 민병대, 지구 민병대 등이 있었다.
담당자들이 개인적인 성향이나 적성에 따라 행동하고, 따라서 그들의 활동의 중요성을 충분히 인식하고 양심적이고 지적으로 행동했기에 모든 도시 편의가 훌륭하게 기능했다.[4] 따라서 크론슈타트의 노동자들은 주거지와 모든 도시 편의의 완전한 사회화를 향한 물결을 이루면서 동시에 사회 생활의 근본적 변화를 가리키는 평화롭고 창조적 조치들의 복합체를 달성했다.[5]
제4부.볼셰비키의 사기에 맞서는 크론슈타트
우리는 이제 볼셰비키의 찬탈과 그 결과로서의 독립의 종언에 대한 1921년 3월의 그 절망적이고 영웅적인 투쟁이라는 크론슈타트 서사시의 결정적인 지점에 다가서고 있다.
크론슈타트 사람들과 새 정부 사이의 첫 번째 불화는 10월 혁명 직후에 일어났다. 모든 권력을 지역 소비에트로라는 구호는 크론슈타트에 있어 그들이 각각 고려하는 문제에 대한 각 지역, 각 소비에트, 각 사회 조직의 독립을 의미했다. 그것은 “중앙”의 허락을 구하지 않고 자주성을 지니고, 결정을 내리고, 행동할 권리를 의미했다. 이러한 이해에 따르면, 각 소비에트, 각 노동자 및 농민 단체가 스스로의 주인이었기에 “중앙”은 지역 소비에트에 대해 그들의 뜻을 지시하거나 강요할 수 없었다. 물론 그들은 그 활동을 다른 조직과 조정해야 하지만, 이는 연방적 기초에 의한 것이다. 전국적인 문제들은 총 연방 센터에 의해 조정될 것이다. 따라서 크론슈타트는 “프롤레타리아”에 “우호적인” 정부의 보호 아래 소비에트 자유 연방과 공장위원회가 사회혁명의 쟁취를 방어하고 그것을 계속해 나갈 수 있는 강력한 조직력이 점차 생겨날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정부는 당연히 근본적인 문제, 즉 노동자와 농민 조직이 스스로를 오롯이 해방하는 것을 돕는 문제를 제외한 모든 데에 관심을 기울였다. 정부는 제헌의회에 정신이 팔려 제헌의회의 설치와 특권, 다양한 정당과의 관계, 남아 있는 부르주아지와의 협력을 위한 계획의 상세화(“노동자의 생산 통제”) 등에 몰두하고 있었다. 그것은 노동자 조직의 독립과는 거의 관련이 없었다. 사실, 정부는 그것을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
실제로 볼셰비키 정부는 명백히 “권력을 소비에트로”라는 구호를 특이한 방식으로 이해하고 있었다. 그들은 그것을 정반대로 적용했다. 노동대중에게 도움을 주고 그들 스스로의 자율적 활동을 쟁취하고 확대하도록 하는 대신 그들로부터 모든 “권력”을 빼앗아 지배하는 것처럼 대하는 것부터 시작되었다. 그들은 공장을 마음대로 취급하고 노동자들을 자율적 결정권으로부터 배제하였다. 그들은 관련 노동자들의 조언도 구하지 않고 독단적이고 강압적인 조치를 취했다. 그들은 노동자 조직들로부터의 요구를 무시했다. 그리고 특히 소비에트와 다른 노동자 조직들의 활동의 자유를 여러 구실로 점차 억제했는데, 도처에서 정부의 의지를 독단적으로, 심지어 폭력으로 강요했다.
(크론슈타트 역사로부터의 다음 예시는 혁명의 실제 과제에 직면했을 때의 정부의 독단적인 태도와 무능함을 양면으로 드러낸다.)
1918년 초, 크론슈타트의 노동 대중은 많은 회의를 통해 과제를 논의한 후 주거지 사회화를 추진하기로 결정했다. 우선 지역 소비에트의 동의를 구한 다음, 인구와 건물 조사, 주택의 공평한 재분배, 주택의 복구, 유지 보수, 수리 서비스 및 새로운 건설의 시작을 담당할 유능한 조직 창설 과제가 있었다.
마지막 대중 집회는 소비에트의 몇몇 구성원―《사회주의혁명당》 좌파와 아나키즘적 조합주의자―에게 다음 전체 회의 때 의제를 발의하도록 분명히 지시했다. 그 결과 이 대표단이 작성한 상세한 계획이 소비에트 사무실에 전달되었다.
이 계획의 첫 번째 항목은 다음과 같이 발표했다. “향후 토지와 건물의 사적 소유는 폐지된다.” 다른 항목은 이를 명확히 서술하고 있다. “각 건물의 관리는 이후 모든 거주자에 의해 선출된 주택위원회가 담당할 것이다 … 건물에 관한 중요 사항은 거주자위원회를 통해 협의 및 해결할 것이다 … 지구 전체에 관한 사항은 거주자 총회에서 검토한다. 지구위원회는 거주자총회에서 임명되어야 한다 … 도시 전체에 관한 사항은 자치구위원회가 담당할 것이다.”
볼셰비키인 소비에트 구성원들은 과제가 매우 중요하고 철저한 검토가 필요하다는 구실로 일주일간 논의를 연기할 것을 요청했다. 소비에트가 연기에 동의하자 그들은 “중앙”의 지시를 받기 위해 페트로그라드로 향했다.
다음 회의에서 볼셰비키는 고려 중인 계획의 연기를 요청했다. 그들은 특히 그러한 중요한 문제는 전국적으로만 해결할 수 있으며, 레닌이 이미 이 과제에 대한 법령을 준비하는 과정에 있고, 계획의 이익을 위해 크론슈타트 소비에트가 “중앙”의 지시를 기다려야만 한다고 밝혔다.
《사회주의혁명당》 좌파, 최대주의자, 아나키즘적 조합주의자는 즉각 논의를 요청하고 투표를 진행했다. 논의 과정에서 극좌파는 논의 직후 투표의 필요성 및 채택될 경우 사업의 즉각 실행을 진행할 필요성에 대해 강조했다. 그러나 볼셰비키와 《사회민주노동당》(멘셰비키)은 통일 전선을 형성하고 일어나 회의장을 떠났다. 길고 얄궂은 박수갈채와 “드디어 저들이 통합하는군!”하는 외침이 그들의 행동 뒤로 이어졌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최대주의자 대표는 소비에트가 이 계획의 각 항목 별로 투표할 것을 제안했다. 이로 인해 볼셰비키는 돌아와 투표를 할 수 있었고, 따라서 퇴장함으로써 그들이 사유재산 폐지에 반대한다는 잘못된 인상을 지울 수 있었다.
이 제안은 채택되었다. 한편, 볼셰비키는 자신들이 전술적 오류를 저질렀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들은 다시 자리를 잡고 “토지와 건물의 사적 소유는 폐지된다”는 첫 번째 항목에 투표했다. 이는 그들에게 “원칙”에 대한 투표였다. 그러나 이 원칙을 즉시 실현할 수 있는 수단을 다루는 항목이 논의에 나오자 그들은 다시 회의장을 떠났다.
그러나 몇몇 볼셰비키는 이 문제에서 당의 규율에 따르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생각했다. 그들은 자리에 남아 토론에 참여하고 계획에 투표했다. 그들은 선거 참여자들에게 즉각적 실현을 위해 투표할 의무가 있다고 밝혔다. 그럼에도 그들은 엄하게 질책받으며 “아나키즘적 조합주의적 일탈”을 이유로 당에서 제명되었다.
이 계획은 채택되었으나 이후 오랫동안 작업장, 대대, 함선 내에서 지속적이고 격렬한 분쟁의 대상이 되었다. 회의에 회의가 이어졌다. 소비에트 구성원들은 논의의 세부사항과 그들의 입장에 대한 보고서 제출을 요청받았다. 이 계획에 반대하는 일부 볼셰비키는 선거 참여자들에 의해 소비에트로부터 소환되었다.
이러한 사건 이후 볼셰비키는 아나키즘적 조합주의자에 대한 폭력적 캠페인을 시작했으며 채택된 계획의 실현을 방해하려 했다. 그들의 노력은 헛수고였다. 곧 위원회(주택, 지구 등)가 설치되고 기능하기 시작했다. 계획은 활기를 띠게 되었다. “모든 거주자는 좋은 주거에 대한 권리가 있다”는 원칙이 현실이 되었다.
모든 주거지는 보다 공평한 분배를 확립하기 위해 위원회에 의해 순차적으로 방문, 조사 및 입주되었다. 한편으로는 불운한 사람들이 살고 있던 끔찍한 오두막들이 발견되었고, 더러는 여러 가족이 함께 살고 있었다. 다른 한편으로는 소수의 사람만이 차지하고 있는 10개 혹은 15개의 방이 있는 안락한 아파트가 있었다. 예를 들어 미혼의 기술학교 관리자는 방이 스무 개나 되는 호화로운 아파트에 혼자 살고 있었는데, 위원회가 악취 나는 오두막집에서 쫓겨난 몇몇 불운한 가족을 위해 조사를 실시하고 그의 “생활공간”을 줄이려 하자 그는 격하게 항의하며 이 행위를 “순 강도질”이라고 불렀다.
곧 비위생적인 판잣집과 다락방, 불결한 지하실을 채웠던 모든 사람이 어느 정도 보다 청결하고 안락한 곳에 자리 잡았다. 여행자들을 위한 여러 호텔도 설립되었다. 그리고 각 자치구위원회는 건물의 보수와 개선을 위한 작업장을 조직했다. 이 작업장들은 효과적으로 기능했다.
후에 볼셰비키 정부는 이 조직을 파괴하고 건설적인 시도들을 쓸어내 버렸다. 건물의 관리는 순전히 관료주의적 기관인 부동산 및 건물 센터로 넘어갔고, 위로부터 조직되어 국가경제위원회에 속했다. 이 센터는 모든 건물, 지구 및 자치구에 공무원, 더 정확히는 경찰을 두었는데, 그 주요 역할은 주택에서의 활동을 감시하고, 각 지구 거주민의 동향을 추적하고, 숙박 및 비자 규정 위반을 보고하고, “수상한 이” 등을 고발하는 것이었다.
몇 가지 쓸모없는 관료적 법령이 공포되었지만, 모든 과제, 모든 긍정적이고 구체적인 과업은 폐기되었다. 관련이 있는 사람들은 (다른 분야와 마찬가지로) 사업 관리에의 참여에서 배제되었고, 모든 것이 다시 타성과 침체 상태에 빠졌다. 보다 좋은 건물들은 국가의 관료주의적 서비스, 공무원들의 아파트 등을 위해 징발되었고, 나머지는 방치되어 곧 악화되기 시작했다.
크론슈타트 수병들은 모든 생활 분야에서 이런 종류의 절차를 밟은 결과, 그들이 “프롤레타리아 국가”나 “프롤레타리아 독재” 등의 거짓 구호에 속아 넘어갔다는 것을 깨닫는 데 오래 걸리지 않았다. 그들은 노동 대중의 새로운 적들이 우호를 가장해 권력을 장악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들은 환멸을 숨기지 않았다. 볼셰비키 정부의 관료주의적, 독단주의적, 반反사회주의적, 반反혁명적 행위에 대한 평화적이지만 확고한 반대는 1917년 말, 10월혁명 이후 겨우 두 달 만에 그들 가운데 나타나기 시작했다.
그러나 볼셰비키 정부는 크론슈타트 투사들의 상황을 잘 알고 있었고, 이 참된 혁명의 성채가 페트로그라드 근처에 계속 존재하는 한 그들이 안전하다고 여길 수 없었기에 경계했다. 무슨 수를 써서라도 그들을 무력하고 복종하도록 만들 필요가 있었다.
그리하여 정부는 마키아벨리식 음모를 정성들여 만들어냈다. 그들은 크론슈타트를 정면으로 공공연히 공격하는 것이 아니라―체계적이고 교활하게―일종의 위장 전술로 크론슈타트의 최정예 병력을 조준해 면직하고, 전투적 분자들을 제거하고, 그들의 힘을 고갈시키고, 최후의 수단으로 그들을 완파함에 따라 크론슈타트를 약화하고, 빈곤하게 하고, 고갈되게끔 했다.
우선 그들은 수병의 혁명적인 열망과 재능을 그 어느 때보다 악용했다. 10월 직후, 도시 사람들의 식량 상황에 재앙이 닥치자 정부는 크론슈타트에 특수 승무원으로 구성된 선전가들을 조직해 지방, 시골 지역 및 마을들로 보내 농민들에게 연대와 혁명적 의무, 특히 도시에 식량을 공급할 필요성에 대해 설득하도록 요구했다. 볼셰비키는 크론슈타트 사람들의 혁명적 명성이 대의에 이루 헤아릴 수 없을 만큼 기여하고 있다고 말했다. 수병들은 그 누구보다 쉬이 농민들에게 굶주린 노동자를 위해 농산물 일부를 양보할 수 있도록 설득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이다.
크론슈타트는 이에 응했다. 수많은 대열이 전국 방방곡곡으로 출발해 맡은 바 임무를 수행했다. 하지만 거의 모든 파견대가 천 갈래 방향으로 흩어졌다. 여러 가지 이유로 그 구성원들은 방방곡곡에 머물 수밖에 없었고, 크론슈타트로 돌아오지 않았다.
정부는 또한 내부 상황이 불안해지거나 위협받고 위험한 곳이면 어디든 크론슈타트로부터 대규모 분대를 지속적으로 파견했다. 크론슈타트는 늘 이에 응했고, 용감한 투사와 전사들 가운데 많은 이들이 다시는 그들의 함선이나 막사를 보지 못했다.
크론슈타트는 나아가 특별한 재능, 책임감 혹은 용기가 필요한 직무를 수행하거나 직위를 수행하도록 계속해 사람들을 파견해 달라고 요청받았다. 군부대 지도자, 장갑열차, 장갑차, 철도역, 전문 노동자, 정비 노동자, 선반 노동자, 대포 거치병 등이 어떠한 희생도 불사할 준비가 된 크론스타트 사람들 가운데 끊임없이 차출되었다. 남부에서 칼레딘(Aleksei Maximovich Kaledin)의 폭동이 심각해지자 크론슈타트는 다시 상당한 병력을 파견해 적군을 격멸하고 많은 병력을 전장에 남겨두었다.
이러한 예비적 조치는 모두 이미 심각하게 약화된 크론슈타트로는 사실상 저항할 수 없던 강타로 마침내 정점을 찍었다. 1918년 2월 말, 칼레딘에 대한 원정을 마치고 돌아온 수병들이 겨울 눈 덮인 핀란드 만의 전경을 내려다볼 수 있는 종착역에서 하차했을 때, 그들은 그곳을 가로지르는 길이 사람들로 검게 가득 찬 것을 보고 놀랐다. 그들은 더플백을 등에 메고 페트로그라드로 향하는 크론슈타트의 수병들이었다. 돌아오는 이들은 곧 떠나는 사람들의 입으로부터 쓰라린 진실을 알게 되었다.
10월 혁명 직후 《범 러시아 수병 총회the Pan-Russian Congress of Sailors》가 채택한 결의안과는 달리 대표단의 만장일치에 의한 명령에 따라 함대를 해산하지 않고 혁명적 전투 부대로서 온전히 유지해야 한다고 선언한 인민위원회는 1918년 2월 초, 기존 함대는 해산되었다고 선포한 잘 알려진 포고를 발표했다. 새로운 《“붉은 함대Red Fleet”》가 새 토대 위에 창설된다는 것이었다. 이후 모든 징집병은 그들이 “자발적으로” 해군에 입대했다는 개별 서약서에 서명해야만 했다. 그리고―중요한 세부사항인데―선원들의 급여가 분명 매우 매혹적으로 지급될 것이었다.
선원들은 포고를 이행하기를 거부했고, 정부는 서명을 제출하지 않으면 배급이 48시간 이내 보류될 것이라는 최후통첩으로 화답했다. 크론슈타트는 그 시점에 그에 저항할 만큼 강하지 않다고 여겼다. 수병들은 마음속 깊숙이부터 분노하고 그 새로운 “혁명적” 권력을 저주하며 소지품을 챙기고 여러 대의 기관총을 들고 요새를 떠났다. “우리는 아직 총이 필요할 것 같은데,” 그들은 말했다. “볼셰비키는 알아서 후에 용병을 무장시키라고 합시다.”[6]
그 뒤 여러 이유로 혁명 전선에서 돌아온 일부 수병들이 크론슈타트로 돌아와 스스로 부대를 재편성했다. 그러나 이는 보잘것없는 한 줌에 불과했다. 주요 병력은 거대한 나라 전역에 흩어져 있었다.
크론슈타트는 더 이상 이전과 같은 도시가 아니었다. 정부는 이 사실을 거듭 확인해 왔다. 예를 들어, 독일과의 협상 동안, 크론슈타트 소비에트는 다른 압도적 다수 소비에트와 마찬가지로 독일 장군들과 평화협정을 맺는 데에 반대표를 던졌다. 모든 회의와 집회에서 그러한 협정은 거부되었다. 그러자 볼셰비키는 특정 예방책을 강구한 다음 처음에는 투표를 무효화하고, 다시 한번 의제를 던져 평화협정을 강요했다. 크론슈타트는 양보했다.
평화협정이 체결되고 마침내 크론슈타트, 《흑해 함대》 등의 단단한 혁명 세력이 해체되면서 볼셰비키 정부는 노동자에 대한 독재를 공고히 할 수 있는 확실한 장을 갖게 되었다. 1918년 4월 모스크바 등지에서 아나키스트 그룹을 공격하고, 회의장을 폐쇄하고, 신문을 탄압하고, 투사들을 감옥에 가뒀을 때 크론슈타트는 다시 한번 발톱을 드러냈지만, 그들은 더 이상 이전 같은 예리함을 지니지 못했다. 이제 와서 수병들이 찬탈자에게 총구를 돌리는 것은 불가능했는데, 찬탈자는 더 이상 그들의 손이 닿지 않는 곳에 있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이전의 폭군들처럼 이미 모스크바의 크렘린 성벽 뒤에 자리 잡고 있었다. 크론슈타트는 두 가지 항의 결의에 스스로를 국한할 수밖에 없었다. 하나는 앵커 광장에서 열린 대중 집회에서 채택되었고, 다른 하나는 소비에트에 의해 채택되었다.
그 즉시 “혁명의 긍지이자 영광”에 대한 격한 탄압이 가해졌다. 볼셰비키는 회의의 자발적 소집을 금지했다. 소비에트는 해체되었고 보다 유순한 것으로 대체되었다. 도시에는 체카Cheka가 설치되었다. 공산주의자 기초 단위가 작업장, 연대, 함선 등 곳곳에 만들어졌다. 모든 사람은 정보원에 의해 감시당했고, 볼셰비키의 활동에 대한 사소한 비판으로도 “유죄”가 내려져 페트로그라드로 보내졌고, 그렇게 보내진 이들 대부분은 사라졌다.
크론슈타트는 이러한 억압적 행동에 맞서 단 한 번 성공적으로 봉기했다. 전함 페트로파블롭스크Petropavlovsk는 스쿠리힌(Petr Markovich Skurikhin)이라는 이름의 아나키스트 수병을 당국에 넘기기를 단호히 거부했다. 이번에는 볼셰비키가 고집하지 않았다. 어떤 경우에도 후에 다른 수단으로 얻을 수 있는 한 개인 때문에 폭동을 유발하는 것은 신중하지 않거나 쓸모없는 일이었을 것이다.
볼셰비키 정부는 이 단 한 번의 거슬리는 사건을 제외하고는 참된 혁명의 선봉인 크론슈타트가 공산주의 권력의 철권 아래 무너져 사실상 무력하다는 데에 자축했다. 그러나 이는 단지 절반에 불과한 사실이었다.
몇 달 동안 크론슈타트는 혁명의 무덤을 파는 자들의 찬탈과 범죄들을 무력하게 목격했다. 휴가를 마치고 돌아온 수병들은 “노동자 권력”이 노동자들을 어떻게 대했는지에 대해 이야기했다. 이 나라에서는 농민에게 무자비하게 마지막 곡물, 마지막 가축, 많은 경우 가재도구에 이르기까지 생산물을 징발해 경작자들이 아사 상태에 처하게 했다. 그들은 이에 저항하는 사람들을 대량으로 체포하거나 처형하는 데 의지하는 것을 주저하지 않았다. 도시 주변에는 무장한 경비대가 있었는데, 그들은 농민들이―대개 굶주리는 그들의 친척에게―보내는 몇 안 되는 처참한 밀가루 포대를 무자비하게 압수하고 저항하는 이들을 감옥에 던져넣었다. 동시에 그들은 필요한 데에는 손을 비빌 줄 알았기에 투기를 목적으로 상품을 옮기는 실제 상인들에게는 눈을 감았다.
“노동 대중은 무장해제 되었소.” 귀환하는 수병이 이야기했다. “노동자의 전반적인 무장, 그리고 그들의 언론 및 활동의 자유는 명백한 반혁명분자들뿐만 아니라 혁명의 참된 길을 포기한 이들도 두렵게 한 것은 분명합니다. 그들은 다른 모든 군대와 마찬가지 권력을 지닌 당의 손에 맹목적인 힘이 된 적군赤軍을 창설했습니다. 작업장과 동료 노동자로부터 뿌리째 분리된 병사들은 기만적인 구호에 현혹되고, 야만적 규율을 부여받고, 조직화 된 방식으로 행동할 수 있는 수단을 박탈당해 그들을 통제하는 이들이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 마음대로 하도록 쉽게 조종할 수 있었습니다.”
크론슈타트 사람들은 보고 들으며 분노에 휩싸였지만, 자신들은 무력하다고 느꼈다. 그동안 사람들은 끊임없이 점점 더 속박당하고, 재갈이 물리고, 예속되었다.
마침내 온갖 탄압에도 불구하고 폭풍우가 몰아쳤다. 그것은 크론슈타트가 아니라 페트로그라드에서 시작되었다. 1921년 2월 말에 이르기까지 도시 노동자들의 상황은 견딜 수 없는 것이 되었다. 그들의 정상적인 삶 전체가 붕괴했다. 가장 필요한 생필품들이 부족했다. 심지어 빵마저 배급되어 구하기 힘들었다. 연료가 부족해 집들은 더 이상 난방을 할 수 없었다. 철도는 거의 제 기능을 하지 못했고, 많은 공장이 폐쇄되어 상황을 악화했다.
노동자들의 호소, 질문, 항의는 아무런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볼셰비키 정부는 사태의 심각성을 완벽하게 인식하고 있었고, 심지어 이를 해결할 능력이 없다는 것을 인정하기까지 했다. 그러나 정부는 정책 변경을 완강히 거부했다. 정부는 불만을 품은 노동자들과의 논의조차 시작하지 않고, 모든 제안, 모든 협력, 모든 주도권을 사전에 거부했다. 정부의 유일한 해결책은 가장 독단적인 폭력으로 수행된 더 많은 징발, 더 많은 군사 행동, 더욱 억압적인 조치들이었다.
마침내 페트로그라드에서 심각한 소란이 일어났다. 가장 중요한 공장 중 일부는 즉흥으로 노동자 총회를 개최하고 정권 교체를 요구하며 정부에 적대적인 결의안을 채택했다. 작업장과 도시 성벽에도 같은 취지의 성명서가 나타났고, 대중은 혼란스레 동요했다.
당연히 이 거대한 대중 운동에는 다양한 분파가 존재했고, 다양한 관점이 나타났다. 사상이나 토론의 자유가 허용되지 않았으며 많은 혁명가가 감옥에 있었기 때문에 이 새로운 동요는 필연적으로 모호하고 혼란스러웠다. 혁명이 이미 길을 잃었기에 전체 운동이 불가피하게 왜곡될 수밖에 없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반혁명 프로파간다―특히 중도 사회주의자들―에 영향을 받은 부류들이 혁명이 앞으로 나아갈 수 있도록 장애물을 제거하고자 하는 대신 혁명을 역행시킬 수 있는 조치와 해결책을 제안하는 것은 당연했다. 이렇듯 자유 무역으로의 복귀와 제헌의회의 소집을 요구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그럼에도 세 가지 중요한 사실을 명심해야만 한다.
1. 문제의 부류들은 운동 전반과는 거리가 멀었다. 그들은 결코 가장 강력하지도, 가장 대담하지도 않았다. 좌파를 위한 선전의 자유와 대중을 위한 행동의 자유는 아직 진정성 있는 볼셰비키의 도움으로 상황을 타개할 수 있었다.
2. 우리는 전반적 관점에서 볼셰비즘 역시 반동적 체제를 대표한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 따라서 두 가지 반동 세력이 존재했다. 하나는 억제당한 일부 반反볼셰비키 분파로 구성되었고, 다른 하나는 혁명을 마비시키고 석화시킨 볼셰비즘 그 자체였다. 진정한 혁명적 세력은 다른 곳에 있었다.
3. 진정한 혁명 세력을 대표하는 분파 가운데 크론슈타트가 가장 중요했다. 크론슈타트 사람들이 볼셰비키에 적대적이지만 제헌의회나 사적 자본주의로의 회귀와 같은 반동적 사상과는 전혀 공통점을 찾을 수 없는 해결책을 상상한 것과 운동 초기 수행한 활동이 이에 대한 충분한 증거를 제공한다.
몇몇 선언서와 제헌의회 소집을 요구하는 전반적 프로파간다에 응해 크론슈타트는 다음과 같은 메시지와 함께 비밀리에 페트로그라드의 공장과 작업장 노동자들에게 대표단을 파견했다.
“크론슈타트의 모든 혁명적 힘, 그 총과 기관총은 단호하게 제헌의회 및 모든 퇴보로 돌려질 것입니다. 그러나 ‘프롤레타리아 독재’에 환멸을 느껴 사기꾼들에 대항해, 자유 소비에트, 언론과 출판의 자유, 조직과 행동의 자유, 모든 이데올로기적 경향―아나키스트, 《사회주의혁명당》 좌파 등―의 노동자, 농민을 위해 일어선다면, 만일 노동자들이 10월의 진정한 구호를 위해 세 번째 진정한 프롤레타리아 혁명을 일으킨다면 크론슈타트는 온 힘을 다해 쟁취 아니면 죽음뿐이라는 의지 아래 만장일치로 그들을 지지할 것입니다.”
2월 22일 모든 대규모 공장에서 자발적 회의가 시작되었고, 24일에는 소란이 더욱 심각해졌다. 그날 아침 당국은 “숙청”에 몰두해 페트로그라드에서 가장 큰 공장 중 하나인 트루보치니Troubotchny 공장 노동자들의 개별 작업카드 검사를 실시했다. 이것이 최종적인 자극이었다. 공장은 가동을 멈췄다. 수십 명의 노동자가 다른 공장 사람들을 소집하러 향했고, 곧 발트 및 라 파르메La Ferme 공장과 파트론니Patronny 군수품 노동자들이 파업에 동참했다.
2, 3천 명의 흥분한 노동자 군중이 거리에 모여 시위를 하려고 했다. 이런 종류의 운동에 맞서기 충분한 경찰과 군 특수부대를 보유한 “노동자, 농민의 정부”는 육군사관학교 학생(쿠르산티kursanty라 불리는 학생장교) 분대를 파견했다. 이 부대들과 비무장 군중 사이에 충돌이 일어났다. 노동자들은 흩어졌고, 다른 곳에서는 경찰과 군대가 여러 차례 집합을 금지했다.
2월 25일, 운동은 계속 성장해 도시 전체로 퍼져나갔다. 파업자들은 해군 본부 무기고와 갈레르나야Galernaya 항구 노동자들을 불러냈다. 수많은 노동자가 이곳저곳 모여들었다가 다시 특수 편대에 의해 해산되었다.
무질서가 늘어나는 것을 본 정부는 페트로그라드 주둔군에게 대기 지령을 내렸다. 그러나 이들 역시 동요 중이었고, 몇몇 부대는 노동자에 대항해 싸우지 않겠노라 선언했다. 그들은 무장해제를 당했지만, 정부는 더 이상 주둔군에 의존할 수 없었다. 따라서 진압은 주둔군 없이 이루어졌는데, 지방 및 내전의 일부 전선에서 엘리트와 주로 공산주의자 부대로 이루어진 여러 분대를 데려왔다. 같은 날 정부는 페트로그라드에서 운동에 대한 모든 활동을 관장하도록 지노비예프(Grigory Yevseyevich Zinoviev) 주재 아래 《국방위원회》를 조직했다.
2월 26일, 페트로그라드 소비에트 회의에서 방어위원회 위원이자 《공화국 혁명 군사평의회the Revolutionary Military Council》 위원인 라셰비치(Mikhail Mikhailovich Lashevich)라는 소문난 공산주의자가 상황에 대한 보고서를 작성했다. 그는 트루보치니 노동자들을 “자신의 사적 이익만을 생각하는 자들”, “반혁명분자”라고 묘사하며 비난했다. 그 결과 작업은 중단되었고, 노동자들은 자연히 식량 배급을 박탈당했다. 같은 회의에서 《발트 함대》의 정치위원 쿠지민(Nikolai Nikolayevich Kuzmin)은 크론슈타트에 정박해 있던 함선의 선원들 사이에 처음으로 어느 정도 소요가 발생했다고 언급했다.
2월 27일부터는 다양한 종류의 성명서가 상당량 거리에 유포되어 페트로그라드 성벽에 게시되었다. 가장 특징적인 것 중 하나는 다음과 같다.
“정부 정책의 근본적 변화를 요구한다. 노동자와 농민은 무엇보다 자유가 필요하다. 그들은 볼셰비키의 규칙에 따라 생활하고자 하지 않는다. 그들은 자신의 운명을 스스로 결정하고자 한다.
동지들이여, 혁명적 질서를 주장하라! 조직적이고 결정적인 방식으로 다음을 요구하라. 투옥된 모든 사회주의자와 비당원 노동자의 석방, 모든 노동자에 대한 포위 상태 폐지 및 언론과 출판 그리고 결사의 자유, 제諸 작업장위원회 및 노동조합, 소비에트의 자유로운 재선거.”
정부는 대규모 체포와 여러 노동자 조직을 탄압하는 것으로 응대했다.
2월 28일, 다른 곳에서 데려온 공산주의자 군부대가 페트로그라드로 침입했다. 곧바로 노동자들에게 무자비한 탄압이 가해졌다. 무장해제된 그들은 저항할 수 없었다. 이틀 만에 파업은 무력에 의해 박살 났고, 노동자들의 동요는 트로츠키가 표현한 것처럼 “철의 손”에 의해 소탕되었다. 하지만 크론슈타트가 행동을 개시한 것은 정확히 2월 28일이었다.
2월 28일, 며칠 동안 동요 상태에 있던 페트로파블롭스크의 승무원들은 다른 전함인 세바스토폴Sevastopol 호의 신속한 지지를 얻은 결의안을 채택했다. 이 운동은 전체 함대로 급속히 확장되어 주둔군의 적군 연대들을 사로잡았다. 여러 수병 대표단이 노동자들과 더 긴밀한 관계를 맺고 상황에 대한 정확한 정보를 얻기 위해 페트로그라드로 파견되었다. 이러한 수병들의 활동은 전적으로 평화롭고 충실했다. 그것은 “프롤레타리아 정부”가 지도하는 “노동자 국가”에서는 전혀 비정상적인 것이 아닌 노동자들의 특정한 요구에 정신적 지지를 보낸 것이었다.
3월 1일, 앵커 광장에서 총회가 열렸다. 총회는 《발트 함대》의 제1, 제2 소함대가 공식적으로 소집했으며, 그 발표가 크론슈타트 소비에트 기관지에 실렸다. 같은 날 《전 러시아 집행위원회All-Russian Central Executive Committee》 위원장 칼리닌(Mikhail Ivanovich Kalinin)과 《발트 함대》 정치위원 쿠지민이 크론슈타트에 도착했다. 칼리닌은 군대의 사열, 음악, 휘날리는 깃발과 함께 환영받았다.
1만6천 명의 수병, 적군, 노동자들이 총회에 참석했다. 의장은 《크론슈타트 소비에트 집행위원회》 위원장 바실리예프(Vasiliev)가 맡았다. 칼리닌과 쿠지민이 참석했다.
페트로그라드로 파견된 대표단은 보고서를 작성했다. 매우 분노한 총회는 페트로그라드 노동자들의 정당한 열망을 억누르려는 공산주의자들의 방식에 유감을 표명했다. 전날 전함 페트로파블롭스크가 채택한 결의안이 총회에 발의되었다. 토론 도중 집행위원장 칼리닌과 정치위원 쿠지민은 결의안과 페트로그라드의 파업, 크론슈타트 수병들을 극도로 폭력적인 방식으로 공격했다. 그러나 그들의 연설은 아무런 효과가 없었다. 페트로파블롭스크 호의 결의안은 페트리첸코(Stepan Maximovich Petrichenko)라는 수병에 의해 표결에 부쳐졌고, 만장일치로 승인되었다. 정치위원 쿠지민은 이 사건에 대해 다음과 같이 언급했다. “이 결의안은 《크론슈타트 수비대》의 압도적 다수에 의해 채택되었다. 이는 도시 총회에서 3월 1일, 약 1만6천 명의 시민이 참석한 가운데 발의되었고, 만장일치로 채택되었다. 크론슈타트 집행위원회 위원장 바실리예프와 칼리닌 동지는 결의안에 반대표를 던졌다.”
다음은 이 역사적 문건의 전문이다.
“1921년 3월 1일 개최 《발트 함대》 제1, 제2 소함대 총회 결의.
상황을 조사하기 위해 승무원 총회에 의해 페트로그라드로 파견된 대표단의 보고를 들은 총회는 현재 소비에트가 노동자와 농민의 의지를 표현하지 않는다는 것이 밝혀졌기에 다음이 필요하다는 결정을 내렸다.
1. 비밀투표에 의한 소비에트 재선이 즉시 시행되어야 하며, 노동자. 농민 사이 선거운동은 언론과 행동의 완전한 자유 하에 진행할 것.
2. 모든 노동자, 농민, 아나키스트 및 좌파 사회주의 정당들을 위한 언론과 출판의 자유를 확립할 것.[7]
3. 노동자 및 농민 조직에 집회의 자유를 부여할 것.
4. 아무리 늦어도 1921년 3월 10일까지 페트로그라드 시市 및 크론슈타트, 페트로그라드 주州에서 적군 및 수병 총회를 정당 바깥에서 소집할 것.
5. 노동자, 농민 운동의 결과로 투옥된 모든 사회주의 정치범 및 모든 노동자, 농민, 적군 및 수병을 석방할 것.
6. 감옥이나 강제수용소에 있는 이들의 사례 조사를 목적으로 하는 위원회를 선출할 것.
7. 어떠한 정당도 자신들의 사상을 전파하거나 이를 위해 국가로부터 돈을 받을 특권을 지녀서는 안 되며, 각 지역에서 선출되어 정부가 자금을 지원하는 교육 및 문화위원회로 대체해야 하기에 ‘정치 사무소’를 폐지할 것.
8. 모든 장벽을 즉시 폐지할 것.[8]
9. 건강에 위험한 직종에 종사하는 노동자를 제외한 모든 노동자의 배급량을 균일하게 할 것.
10. 군대 내 모든 부대에서 공산주의자 특공대를 폐지하고 공장의 공산주의자 경비대를 폐지할 것. 경비부대가 필요할 경우, 여러 단체에 의해 군대로, 노동자에 의해 공장으로 제공되도록 할 것.
11. 농민이 도움을 청하지 않고 자신의 일을 하는 것을 조건으로 자신들의 토지에 관해 완전한 행동의 자유와 소를 소유할 권리를 부여할 것.
12. 이동 통제 위원회를 설립할 것.
13. 보조를 고용하지 않는 조건 아래 자유로이 수공예 활동을 허용할 것.
14. 우리는 군대의 모든 부대와 쿠르산티 생도들에게 우리의 결의안에 동참할 것을 요청한다.
15. 우리는 우리 결의안 전부가 언론에 널리 공표되기를 요구한다.
이 결의안은 소함대 승무원 총회에서 만장일치로 채택되었다. 두 사람이 기권했다.
서명 : 총회 의장 페트리첸코, 서기 페레푤킨(Perepyolkin).”
번역된 글이 전적으로 노동자 스스로의 손에 운동이 달려있다는 것을 증명하고 외부의 영향이나 음모 없이 스스로의 사상과 열망을 정확하게 표현했음을 증명하는 결의안의 대중적 어조, “소박한” 문체, 진솔한 분위기를 반영하지 못한 것이 유감이다.
크론슈타트 소비에트의 임기가 끝나가고 있었기에 총회는 3월 2일 함선, 수비대, 작업장, 조합 및 여러 소비에트 기관의 대표자 회의를 소집해 새 선거의 세부 사항을 논의하기로 했다. 이 결정은 소비에트 규약에 완벽하게 부합하는 것이었다. 이 회의는 소비에트의 공식 기관인 「이즈베스티야Izvestia」에서 공식적 및 정기적으로 발표되었다.
3월 2일, 3백 명이 넘는 대표단이 이전에 기술자 학교였던 교육회관에 모였다. 그들 중 대다수가 정당에 속해 있지 않았으며, 공산주의자는 소수였다. 그럼에도 관례에 따라 “대표자 회의의 의무와 과업”이라는 안건에 대한 작성자는 그들 가운데 선출되었다.
그 회의는 수병 페트리첸코에 의해 개최되었다. 회의는 다섯 명의 위원으로 구성된 위원회를 공개적으로 선출했다. 이들 중 한 명은 후에 회의 구성원은 수병, 적군, 노동자 및 소비에트 직원이었다고 밝혔다. 당연히 대표자 가운데 “구舊체제의 장교”(후에 페트로그라드 공산주의자들이 퍼뜨린 비난)는 단 한 명도 없었다.
회의의 업무는 소비에트의 새 선거였다. 그들은 전날 채택된 결의안을 고려해, 선거가 보다 자유롭고 공평한 기준으로 구성되기를 바랐다. 그렇게 정해진 임무를 수행할 수 있는 소비에트가 요구되었다.
그 회의의 정신은 완전한 의미의 “소비에트”였다. 크론슈타트는 소비에트에게 모든 정치적 영향에서 벗어나 노동자들의 열망을 진정으로 대변하고 그들의 의지를 표명할 것을 요구했다. 이것은 관료적 정치위원의 독단적 체제의 적수였으나 소비에트에게는 그렇지 않았던 대표자들을 충성으로부터, 공산당 자체에 동조하는 데로부터, 존재했던 긴급한 문제에 대한 평화적 해결책을 원하는 것을 막지 못했다.
그러나 크론슈타트 사람들 자신의 말로만 이야기하도록 하자. 다음은 1921년 3월 11일 크론슈타트 《임시 혁명위원회the Provisional Revolutionary Committee》의 「이즈베스티야」에 실린 기사이다.
3월 1일 오후 2시, 혁명광장에서 임의가 아닌 소비에트 집행위원회의 승인을 받아 수병, 적군 및 노동자 회의가 개최되었다.
그 회의에는 1만5천 명의 사람들이 참석했다. 집행위원회 위원장 바실리예프 동지가 회의를 주재했다. 《전 러시아 집행위원회》의 칼리닌 동지와 《발트 함대》 쿠지민 정치위원도 참석했다.
이 회의의 목적은 제1, 제2 소함대 총회에서 이전에 채택된 결의안에 대해, 국가의 무질서한 현 상황에서 벗어나는 방법에 대해 논의하는 것이었다.
이 “결의안”은 이제 모두에게 알려졌다. 그것은 소비에트의 권력을 위협할 만한 어느 것도 포함되어 있지 않았다.
오히려 그것은 소비에트의 진정한 권력, 즉 노동자와 농민의 권력에 대한 개념을 분명히 나타내고 있었다.
연설을 했던 칼리닌과 쿠지민 동지는 그것을 이해하고파 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들의 연설에는 아무런 반향이 없었다. 그들은 고통에 비탄하는 대중을 이길 수 없었다. 그리고 회의는 만장일치로 소함대의 결의안에 찬성표를 던졌다.
다음 날(3월 2일) 집행위원회의 인지와 권한을 바탕으로, 「이즈베스티야」에 발표된 지시에 따라 함선, 수비대, 작업장, 노동조합 등 각 조직으로부터 두 명씩의 대표자들이 교육회관(옛 기술자 학교)에서 3백 명 이상 모였다.
당국 대표들은 동요했다. 일부는 도시를 떠나기도 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전함 페트로파블롭스크의 승조원들은 건물 경비를 맡아 그들에게 닥칠 어떠한 위협으로부터도 보호해야 할 의무가 있다고 여겼다.
회의는 페트리첸코 동지에 의해 개최되었다. 다섯 명으로 구성된 위원회 선출 이후, 그는 《발트 함대》 정치위원 쿠지민 동지에게 발언권을 주었다. 수비대와 노동자들이 공산당 권력의 대표자들에 대해 취한 매우 분명한 입장에도 불구하고 쿠지민 동지는 그것을 인정하기를 거부했다.
회의의 과제는 현 상황에 대한 평화적인 해결책을 찾는 것이었다. 특히 결의안이 선언한 것과 같이 소비에트의 재선거가 보다 공평히 행해지도록 할 수 있는 기관을 만들어야만 했다. 거의 전원이 공산주의자로 구성되어 있고 정말로 중요한 문제를 해결할 수 없었던 이전 소비에트 세력의 임기가 끝나가고 있었기에 이 과제는 더욱 시급했다.
그러나 쿠지민 동지는 대표단을 안심시키기는커녕 그들을 적대시했다. 그는 우리를 지켜보고 있던 전 유럽의, 폴란드의 위협에 대한 크론슈타트의 애매한 입장에 대해 이야기했다. 그는 페트로그라드에서는 모든 것이 평화롭다고 주장했다. 그는 그들이 원한다면 자신을 총살할 수도 있는 대표단의 손에 사안이 달려있다고 강조했다. 그리고 결론적으로 그는 다음과 같이 선언했다. “만일 대표자 여러분이 무력 분쟁을 시작하기를 원한다면 그래도 됩니다. 왜냐하면 공산주의자들은 스스로 권력을 포기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끝까지 싸울 것입니다.”
쿠지민 동지의 이 멍청한 연설은 대표자들의 마음을 달래는 데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았다. 오히려 이는 그들의 불쾌함을 늘렸다. 그에 뒤이은 집행위원회 바실리예프 위원장의 막연하고 의미 없는 연설은 주목받지 못했다. 절대적 다수의 대표자들은 공산주의자들에 대해 명백하게 적대적이었다.
그럼에도 대표자들은 당국 대표자들과 공통점을 발견하리라는 희망을 잃지 않았다. 회의 의장이 일을 시작하고, 그날 작업을 시작하고 회의 의제 작성을 호소하자는 의장의 호소는 만장일치로 가결되었다….
회의는 공산주의자에 대한 반감을 감추지 않았다. 하지만 공산당 대표자들이 비非당원 대표자들과의 공동 작업을 계속하기 위해 회의에 남아 있어야 하는지에 대한 질문이 제기되었을 때 회의는 이에 대해 긍정적으로 반응했다. 몇몇 이의와 공산주의자들을 체포하자는 일부 대표자들의 제안에도 불구하고, 대표자들은 공산주의자도 다른 이들과 마찬가지로 단위와 조직들의 대표자임을 고려해 전체적으로 이 입장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이 사실은 크론슈타트의 적군, 수병, 노동자뿐만 아니라 노동자들의 비당원 대표들도 전날 회의에서 채택된 결의안이 정당에 속한 공산주의자와의 분열로 이어지리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는 것을 다시금 증명했다. 그들은 여전히 공통의 언어를 찾을 수 있기를 바랐다.
이어서 페트리첸코 동지의 제안으로 전날의 결의문이 낭독되었다. 이는 압도적 다수의 대표자에 의해 채택되었다. 그리고 회의가 구체적인 작업을 시작할 준비가 된 바로 그 순간, 전함 세바스토폴의 대표자가 긴급 발표 발언권을 요청했다. 그는 소총과 기관총을 지닌 트럭 열다섯 대나 되는 병력이 회담장으로 향하고 있다고 발표했다. 훗날의 조사 결과에 따르면 이 잘못된 소식은 공산주의자들이 회의를 무산시키기 위해 퍼뜨린 것으로 드러났다. 그러나 그것이 전달되었을 당시에는―특히 당국 대표자들이 회의에 대해 취한 전반적 긴장과 적대적 입장에 비추어 볼 때 모든 상황이 대표자들에게 그것을 믿게끔 했다.
그럼에도 결의안 채택을 출발점으로 삼아 당면한 사업에 대한 논의에 나서자는 의장의 제안은 받아들여졌다. 회의는 결의안 조항들을 효과적으로 이행하기 위한 조치를 논의하기 시작했다. 페트로그라드에 대표단을 파견하자는 안건은 그 구성원들이 체포될 것이기에 각하되었다. 이후 몇몇 대표자들은 회의의 위원회가 《임시 혁명위원회》를 구성해, 그들이 소비에트 재선 준비를 담당할 것을 제안했다.
이 순간, 의장은 2천 명이나 되는 부대가 회의장으로 향하는 도중이라고 발표했다. 격한 분노 및 흥분과 함께 우려스러워진 대표자들은 교육회관을 떠났다. 이 마지막 대화를 이유로 종료된 회의의 명령 수행을 담당할 《임시 혁명위원회》는 전함 페트로파블롭스크에 설치되어 그들의 노력으로 도시의 모든 질서가 확실히 모든 임금노동자―수병이든, 병사든, 노동자든―의 이익을 보장할 때까지 자리잡게 되었다.
우리는 이 진술에 혁명위원회 구성원 중 한 명이 후에 알린 몇 가지 세부 사항을 추가해야 한다. 이 위원회를 창설하기로 한 결정은 회의 폐막 몇 분 전, 모든 우려스러운 소문과 쿠지민, 칼리닌, 바실리예프의 위협에 영향을 받아 만장일치로 통과되었고, “회의의 위원회와 페트리첸코 의장은 이러한 위원회를 보다 정규적 방식으로 창설하는 데 필요한 기간 동안 혁명위원회의 임무를 임시로 담당할 것이다”라고 명시했다.
더욱 강조되어야 할 사실은 3월 1일 공개회의 직후 크론슈타트의 공산주의자들이 이 운동에 대한 군사행동을 진지하게 준비하기 시작했다는 점이다. 지역 공산당 위원회는 특히 당원들의 중무장에 착수했다. 그들은 요새의 정치위원에게 무기 보급을 요구하며 공산주의자 단위들에 소총, 기관총, 탄약을 분배하라고 명령했다. 크론슈타트의 공산주의 지도자들이 3월 2일 적대 행위를 시작했더라면, 예기치 못한 상황이 그들의 계획을 좌절시키지 않는 한 대표자 회의를 방해할 수 있었으리라는 점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크론슈타트에서 명단을 올린 2천 명에 달하는 공산당원 중 대다수는 신념이 아니라 개인적 이유로 입당한 정식 당원일 뿐이었다. 저항운동이 시작되자마자 대개의 공산당원은 그들의 지도자들을 버리고 총체적 운동에 합류했다. 공산당 지도부는 크론슈타트에 주둔하며 맹목적으로 당에 헌신한 일부 쿠르산티의 지원에도 불구하고 함대와 수비대 및 모든 사람을 저지할 수는 없었다. 그 때문에 지도부는 크론슈타트 내부에서 즉각적으로 무력충돌을 일으키려는 생각을 포기했다. 그들 중 일부는 도망쳤다. 다른 이들은 운동에 맞서 그들을 각성시키기 위해 주변의 요새로 향했다. 쿠르산티가 그들을 따랐다. 그들은 요새를 차례로 방문했지만, 그들이 바라던 지원을 발견하지 못했다. 마침내 그들은 레드포인트[크라스나야 고르카(크라스나야 고르카는 러시아어로 붉은 언덕을 의미한다.-역자 주)]으로 향했다. 그 결과 3월 2일 저녁 크론슈타트에는 《임시 혁명위원회》의 권력 외에 다른 권력이 없었다.
3월 3일, 《임시 혁명위원회》 「이즈베스티야」(신문) 첫 호가 등장했다. 1면에는 다음과 같은 선언문이 있었다.
“크론슈타트 요새와 도시 여러분에게.
동지, 시민 여러분, 우리나라는 지금 어려운 시기를 겪고 있습니다. 벌써 3년간 기근과 추위, 경제적 혼란이 우리를 끔찍한 악으로 사로잡았습니다. 나라를 통치하고 있는 공산당은 대중과의 접점을 잃고, 대중을 총체적 붕괴 상태에서 끌어낼 힘이 없음을 드러냈습니다. 당은 최근 페트로그라드와 모스크바에서 일어난 소동에 전혀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는데, 이는 노동 대중의 신뢰를 잃었음을 분명히 보여주었습니다. 더구나 그들은 노동자들이 제시하는 요구에도 전혀 신경을 쓰지 않았습니다. 당은 그들 모두를 반혁명의 덫으로 여깁니다. 그들은 마음속 깊이 스스로를 속이고 있습니다.
이러한 소동과 요구는 노동하는 모든 이의 목소리입니다. 모든 노동자, 수병, 적군은 오늘날 노동자 공통의 노력과 공통의 의지만이 이 나라에 빵, 나무, 석탄을 제공하고, 국민에게 옷을 입혀 따뜻하게 할 수 있으며, 공화국이 처한 교착상태에서 벗어나게 할 수 있다는 점을 분명히 알고 있습니다.
3월 1일 화요일에 열린 우리 시의 대 회의에서 노동자, 병사, 수병 모두의 이러한 의지가 명확히 드러났습니다. 회의는 제1, 제2 소함대 수병들의 결의안을 만장일치로 찬성표를 보냈습니다.
채택된 결정 중 하나는 즉시 소비에트 재선으로 이행하는 것이었습니다. 소비에트가 노동자의 대표성을 유지하고, 소비에트가 활동적이고 활력적인 기관이 되게끔 하려는 이번 선거를 위한 보다 공평한 기반을 확립하기 위해 해군, 수비대 및 노동자 대표자들이 3월 2일 교육회관에서 모였습니다. 이 회의는 새로운 선거를 위한 기초를 마련한 뒤 건설적이고 평화로운 임무, 즉 소비에트 체제 개편 작업을 시작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공산당 권력 대표자들의 위협적인 연설 이후, 탄압을 걱정하여 대표자들은 《임시 혁명위원회》를 만들기로 결정하고 도시와 요새의 행정에 대한 전권을 부여했습니다. 임시 위원회는 전함 페트로파블롭스크에 자리하고 있습니다.
동지, 시민 여러분! 임시 위원회는 우선 유혈사태를 막는 데에 신경을 기울이고 있습니다. 도시와 부대, 요새에서 혁명적 질서를 유지하기 위해 모든 노력을 다했습니다.
동지, 시민 여러분은 일을 멈추지 마십시오! 노동자 여러분, 기계 앞에 그대로 계십시오. 수병과 병사들은 자리를 떠나지 마십시오. 모든 일하는 이들, 모든 기관은 작업을 계속해야 합니다.
《임시 혁명위원회》는 모든 노동자 조직, 바다와 그 외 모든 조합, 육상과 해상의 모든 단위, 마찬가지로 모든 시민 각각에 지지를 요청합니다. 위원회의 임무는 여러분과 형제애적 협력 아래 새 소비에트에 대한 공정하고 정당한 선거에 필요한 조건을 보장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동지 여러분, 질서, 침착, 평정을 지니십시오. 모든 이가 노동자의 이익을 위해 정당한 사회주의 과업을 수행하도록 하십시오.
1921년 3월 2일, 크론슈타트에서. 서명 : 《임시 혁명위원회》 위원장 페트리첸코, 서기 투킨(Toukin).”
같은 호에는 소함대의 유명한 결의안과 다음과 같은 몇 가지 행정적 메모가 포함되어 있었다. “3월 2일 오후 9시, 요새의 모든 적군 단위와 대다수 부대는 《임시 혁명위원회》와의 연대를 선언했다. 모든 기관과 통신 수단은 위원회의 경비로 보호된다.”
볼셰비키는 크론슈타트에 대한 공격을 준비하는 데 한시도 지체하지 않았다. 그들은 처음부터 이 운동이 그들에게 재앙을 초래할 수 있음을 인식했다. 따라서 그들은 운동이 확산하기 전에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가능한 한 빨리 그것을 소멸시키기로 했다.
동시에, 그들은 몇 가지 조치를 취했다. 1. 그들은 레드포인트(크라스나야 고르카), 오라니옌바움Oranienbaum, 리시 노스 등 크론슈타트 및 페트로그라드 주변의 중요한 전략적 요충지에 대한 통제를 서둘러 확보했다. 2. 그들은 페트로그라드의 포위 상태를 유지하며 “질서” 유지를 위해 특별한 억압적 군사 조치를 취했다. 3. 그들은 노동자들을 진정시키기 위해 일정한 양보―우리는 수도 주변의 “장벽”으로 인한 억압을 이야기한 바 있다―를 했다. 4. 그들은 트로츠키의 최고 지휘하에 크론슈타트를 공격하기 위한 특별군을 신속하게 조직했다. 5. 그들은 여론을 오도하고 자신들의 행동을 정당화하기 위해 크론슈타트 사람들에 대한 거짓과 중상모략의 폭력적 캠페인을 시작했다.
이 맹렬한 프로파간다는 3월 2일에 시작되었다. (크론슈타트) 혁명위원회의 「이즈베스티야」 제2호에는 3월 3일 모스크바에서 송신되어 전함 페트로파블롭스크가 수신한 무선 전보를 기사화한 뉴스를 볼 수 있다. 그것은 다음과 같이 진행되었다.
“로스타[ROSTA(러시아 전보국Russian Telegraph Agency의 약칭-역자 주)] 라디오 뉴스, 3월 3일 모스크바.
모두에게! 모두에게! 모두에게! 백위대의 음모에 맞서 무장하라!
코즐롭스키(Alexander Nikolaevich Kozlovsky) 전 장군과 전함 페트로파블롭스크의 반란은 이전의 수많은 음모에서와 마찬가지로 협상국의 첩자들에 의해 조직되었다. 이것은 코즐롭스키의 반란 2주 전에 헬싱키로부터 다음과 같은 전보를 발행한 프랑스 부르주아 신문 「르 마탱Le Matin」을 읽음으로써 알 수 있다. ‘최근 크론슈타트의 반란 이후 볼셰비키 군 당국은 크론슈타트를 고립시키고 크론슈타트의 수병과 병사가 페트로그라드에 접근하는 것을 막기 위한 조치를 취했음을 페트로그라드로부터 접했다. 질서가 회복될 때까지 크론슈타트로의 식량 공급은 중단되었다.’ 크론슈타트의 분리 독립은 파리Paris에 의해 지휘된 것, 프랑스의 방첩 활동이 그 안에 섞여 있는 것이 분명하다. 항상 같은 이야기다! 파리가 지휘하는 《사회주의혁명당》 당원들은 소비에트 정부에 대한 반란을 계획하고, 준비를 마치자마자 진짜 주인―차르주의 장군―이 등장한다. 《사회주의혁명당》 당원들의 도움으로 권력을 되찾으려 하는 콜차크(Alexander Vasilyevich Kolchak)의 이야기가 다시 반복된다. 차르주의 장군에서부터 《사회주의혁명당》 당원들에 이르기까지 노동자의 모든 적은 굶주림과 추위에 대해 예상하고자 한다. 당연히 장군들과 《사회주의혁명당》 당원들의 반란은 빠르게 진압될 것이고 코즐롭스키 장군과 그의 조력자들 역시 콜차크와 같은 운명을 맞이하게 될 것이다.
하지만 협상국 첩보원의 그물이 크론슈타트에만 쳐 있지 않다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노동자와 적군이여, 그물을 찢어라! 첩보원과 도발자의 가면을 벗겨라! 평정심, 자제력, 경계심을 지녀라! 일시적일지라도 분명 고통스러운 식량과 다른 문제들을 극복하는 진정한 방법은 집중적인 작업과 옳은 판단에 의한 것이지, 노동자의 고통과 저주 받을 적들의 더욱 큰 기쁨을 더할 수 있는 무분별한 과잉에 의한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잊지 말라.”
군사 명령, 포고문, 팸플릿, 통지서, 신문 기사, 라디오 방송 등 모든 수단을 동원해 정부는 부적격한 거짓말을 퍼뜨리고 강요했다. 모든 선전 수단과 정보가 그 손에 있었기에 자유로운 목소리가 진실을 알릴 수 없었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된다.
크론슈타트 「이즈베스티야」 제4호(3월 6일자)에서 우리는 다음을 읽을 수 있다.
우리는 공산주의자들의 비행기로부터 크론슈타트 상공에 뿌려진 포고문의 내용을 모두에게 알린다.
시민들은 이 중상모략적 도발에 대해 경멸감을 느낄 뿐이다.
크론슈타트 사람들은 공산주의자들의 증오스러운 권력이 어떻게, 그리고 누구에 의해 타도되었는지를 알고 있다.
그들은 《임시 혁명위원회》가 선출되고 헌신적인 투사들―즉 인민의 가장 훌륭한 아들들인 적군, 수병, 노동자가 이끌고 있음을 알고 있다.
그들은 아무도, 적어도 모든 차르주의 장군이나 백위대에 의해서는 그들에게 족쇄를 채우지 못하게 할 것이다.
“몇 시간 후면 항복하게 될 것이다”라고 공산주의자들은 위협한다.
개 같은 위선자들, 누구를 속이려 드는가?
《크론슈타트 수비대》는 결코 차르주의 제독들에게 항복하지 않았으며, 볼셰비키 장군들에게도 항복하지 않을 것이다.
겁쟁이들! 너희는 우리의 힘과 승리를 향한 우리의 의지, 당당히 죽으려는 의지를 알고 있으며, 우리는 주머니에 차르주의 지폐 더미, 금, 노동의 산물과 노동자의 피로 가득한 너희 정치위원처럼 도망치지 않을 것이다.
「이즈베스티야」의 동일호(제4호)는 독자들의 의식 고양을 위해 모스크바 전보국에 의해 방송된 다음과 같은 보도를 기사화했다.
“크론슈타트의 기만 당한 사람들에게.
악당들이 당신을 어디로 이끌었는지 보이는가? 당신은 여기까지 이르렀다. 전직 차르주의 장군들의 탐욕스러운 송곳니는 이미 《사회주의혁명당》과 멘셰비키 뒤에 모습을 드러내고 있다. 페트리첸코와 투킨 등 모두는 차르주의 장군 코즐롭스키, 보륵세르(Borkser) 대위, 코스트로미티노프(Kostromitinov), 치르마놉스키(Chirmanovsky), 그리고 다른 확실한 백위대에 의해 꼭두각시처럼 조종당하고 있다. 그들은 당신을 속이고 있다! 그들은 당신이 민주주의를 위해 투쟁하고 있다고 말하지만, 가혹한 이틀이 지났고, 당신은 당신이 민주주의를 위해 싸우는 것이 아니라 차르주의 장군들을 위해 싸우고 있음을 보고 있다. 당신은 새로운 비렌(Robert Nikolayevich Viren)[9]이 당신 목에 밧줄을 거는 것을 받아들였다.
그들은 페트로그라드가 당신과 함께 하고 시베리아와 우크라이나가 당신을 지지한다고 거짓말한다. 이 모두는 우스운 거짓말에 지나지 않는다. 페트로그라드의 마지막 수병은 코즐롭스키 같은 차르주의 장군들이 당신 가운데 있다는 것을 알고 등을 돌렸다. 시베리아와 우크라이나는 소비에트의 권력을 확고히 옹호한다. 붉은 도시 페트로그라드는 소수 《사회주의혁명당》과 백위대의 가련한 가식을 비웃는다.
당신은 완전히 포위되었다. 몇 시간 뒤면 항복해야 할 것이다. 크론슈타트는 빵도 연료도 없다. 만일 당신이 고집을 부린다면 메추리처럼 총을 맞을 것이다. 당연히 이 모든 장군―코즐롭스키와 보륵세르―, 페트리첸코나 투킨 같은 비열한 놈들은 마지막 순간 핀란드의 백위대로 도망칠 것이다. 하지만 당신들, 단순히 속임 당한 수병과 적군은 어디로 갈 것인가? 만약 그들이 핀란드에서 당신을 받아들이겠다고 약속한다면, 그들은 또 당신을 속이고 있는 것이다. 당신은 콘스탄티노플로 이끌려 간 브란겔 장군의 병사들이 굶주림과 질병으로 파리 떼처럼 죽었다는 것을 모르는가? 당장 정신 차리지 않으면 똑같은 운명이 당신을 기다리고 있다.
한시도 지체 말고 즉시 항복하라! 무기를 내려놓고 우리에게 오라! 범죄 지도자들, 특히 차르주의 장군들을 무장해제하고 체포하라! 즉시 항복하는 자의 오류는 용서받을 것이다. 즉시 항복하라! 《페트로그라드 방어위원회Petrograd Defence Committee》.”
페트로그라드 소비에트의 무선 전보에서도 같은 암시가 이루어졌다. 본문은 「이즈베스티야」 동일호에서 기사화되었으며, 그 전에 다음과 같은 소개가 있다.
하지만 그들은 《크론슈타트 수비대》나 크론슈타트 노동자들을 속이는 데는 성공하지 못할 것이다.
마지막으로 「이즈베스티야」 제5호(3월 7일자)는 매우 긴, 새로운 모스크바의 무선 전보를 옮긴다.
언론은 이를 기사화하기 전, “그들은 여전히 거짓말을 하고 있다”는 메모와 함께 그에 대해 논평한다.
언론은 볼셰비키가 꾸며낸 이야기를 다음과 같은 말로 반박한다.
우리는 방금 로스타 라디오의 정보에 따르면 모든 이가 우리와 동맹을 맺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협상국과 프랑스 첩보원, 백위대와 차르주의 장군들, 멘셰비키, 《사회주의혁명당》, 핀란드 은행가들, 한마디로 전 세계가 불쌍한 공산주의자들을 향해 달려들고 있다. 그리고 우리, 크론슈타트 사람들만이 그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고 있었다.
공산주의자들의 어리석은 이 문서는 솔직히 말해 웃긴다. 우리는 크론슈타트 사람들에게 재미를 선사하기 위해 이를 기사화한다.
길이가 너무 길기에 무선 전보 전체를 적을 수는 없다. 우리는 몇 가지 특유 구절을 인용하는 데 그치겠다.
“…3월 2일, 《노동 및 국방위원회the Labour and Defence Council》는 다음과 같이 명령했다. 코즐롭스키 전 장군과 그 당파들은 불법으로 지정되었다. 2. 페트로그라드시市 및 주州에 전쟁 상태를 선포한다. 3. 이 지역 전체의 최고 권력은 페트로그라드 위원회에 위임한다. …
페트로그라드는 절대적으로 평온하며, 최근 몇몇 개인이 정부에 대해 비난했던 소수의 공장조차 상황을 이해했다. 그들은 협상국과 반혁명의 앞잡이들이 그들을 어디로 끌고 갔는지 깨달았다. …
미국 공화당이 갓 정권을 장악하고 소비에트 러시아와의 상업적 관계를 회복하려던 바로 그 순간, 크론슈타트에서의 유언비어의 확산과 무질서로의 선동은 새 미국 대통령에게 깊은 인상을 주고 러시아에 대한 미국 정책의 변화를 막기 위해 조직되었다.
런던에서의 회의도 동시에 개최되고 있다. 이러한 소문의 확산은 터키 대표단에 영향을 미쳐 협상국의 요구에 따르게 하려는 것이다. 페트로파블롭스크 호 수병의 반란은 의심의 여지 없이 소비에트 러시아에 내란을 일으키고 국제 정세를 교란하고자 하는 거대한 음모의 무대이다. 이 계획은 러시아 내에서 멘셰비키, 《사회주의혁명당》의 지원을 받아 차르주의 장군과 전직 공무원들에 의해 시행된다”
이 모든 문서에서 끊임없이 반복되는 이름이 있다―운동의 지도자이자 주인이라 일컬어지는 코즐롭스키 장군이 그것이다. 사실 크론슈타트에는 코즐롭스키라는 이름의 차르주의 전 장군이 있었다. 그를 포병대 전문가로 배치한 사람은 이전 차르 장군들의 위대한 복구자였던 트로츠키였다. 코즐롭스키가 볼셰비키에 쓰임 받는 동안, 그들은 그의 과거를 외면했다. 그러나 크론슈타트가 반란을 일으키자 그들은 그들의 “전문가”의 존재를 이용해 희생양을 만들어냈다.
사실 코즐롭스키는 크론슈타트 사건에서 아무런 역할도 하지 않았으며 볼셰비키가 언급한 그의 “보좌관”―보륵세르, 코스트로미티노프, 치르마놉스키 가운데 한 명은 단순한 제도사에 불과했다. 그러나 볼셰비키는 수병들을 공화국의 적으로 매도하고 그들의 운동을 반혁명적이라고 발표하기 위해 그들의 이름을 교묘히 이용했다. 공산주의 선동가들은 페트로그라드와 모스크바의 공장마다로 파견되어 “코즐롭스키 장군이 지휘하는 백군 음모의 보금자리”에 대항하고 “크론슈타트의 백위대 반란에 맞서는 노동자, 농민의 정부를 지지하고 방어에 협력할 것”을 요구했다.
코즐롭스키 자신은 볼셰비키가 그 사건에서 그에게 맡긴 배역을 알고 나서야 어깨를 으쓱할 수밖에 없었다. 그는 후에 이 요새의 볼셰비키 지휘관은 《임시 혁명위원회》가 설립되자마자 도망쳤다고 언급했다. 볼셰비키의 규칙에 따르면―공교롭게도 코즐롭스키 장군이 맡고 있던―포병대 지휘관이 그를 대신해야 했다. 그러나 공산주의 권력이 혁명위원회 권력으로 대체되어 이 규칙들이 더는 유효하지 않았기에 코즐롭스키는 그 직을 받아들이는 데 거부했다. 따라서 혁명위원회는 또 다른 전문가인 솔로비야노프(Solovianoff)를 요새의 지휘관으로 지명했다. 코즐로프스키는 포병대 기술 점검 감독을 맡았다. 그의 “보좌관들”, 전혀 중요하지 않은 이들도 전적으로 운동 바깥에 머물러 있었다.
동시에, 역사적 역설처럼 트로츠키의 지시에 따라 크론슈타트에 맞서 행동하기로 정해진 군대의 지휘를 맡았던 이는 중요한 차르주의 전직 장교였던 유명한 투하쳅스키(Mikhail Nikolayevich Tukhachevsky)(이후 스탈린의 명령으로 총살되었다)였다. 더구나 볼셰비키에 복무한 모든 차르주의 “전문가”와 파수꾼들이 크론슈타트에 대한 포위 및 공격 계획을 세우는 데 참여했다. 빈정거리는 상대방에 의해 이렇듯 비방당한 크론슈타트 사람들은 기술 및 군사 전문가인 코즐롭스키와 겁이 많은 코즐롭스키의 모습 및 정치적 관점에서 전혀 중요하지 않았던 서너 명의 사람들을 완전히 구분할 수 있었다.
크론슈타트 운동은 자발적으로 일어났다. 만일 이 운동이 미리 구상하고 준비한 계획의 결과였다면, 이는 확실히 가장 바람직하지 않은 시기인 3월 초에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몇 주 뒤 해빙海氷으로부터 풀려날 크론슈타트는 강력한 함대를 마음대로 사용할 수 있는 거의 난공불락의 요새가 되었을 것이고, 이는 페트로그라드에 끔찍한 위협이 되었을 것이다. 외국으로부터 보급을 받는다면 크론슈타트는 오래 버틸 수 있을 뿐 아니라 심지어 정복에 나섰을 수도 있다. 볼셰비키 정부에 있어 절호의 기회는 바로 그 운동의 자발성 및 수병들의 행동에 있어 어떠한 사전 계획도, 어떠한 계산도 없다는 점이었다.
크론슈타트에는 진정한 의미의 “반란”이란 없었다. 그곳에는 도시 전체와 수비대, 함대에 빠르게 받아들여진, 주어진 상황에 절대적으로 정당하고 자연스러운, 자발적이고 평화로운 운동만이 있었다. 볼셰비키는 그들의 권력, 지위 및 특권을 두려워해 사건들을 강제하며 크론슈타트를 무장투쟁으로 몰아갔다.
당연히 크론슈타트는 볼셰비키의 암시와 중상모략에 응답하고자 최선을 다했다. 《임시 혁명위원회》는 신문과 라디오 방송을 통해 러시아와 세계 노동 대중에게 그들 운동의 진정한 목표와 열망을 알리는 동시에 공산주의 정부의 거짓말을 논박했다. 이에 따라 「이즈베스티야」 제4호는 3월 6일 혁명위원회의 다음과 같은 라디오 호소문을 기사화했다.
모두에게! 모두에게! 모두에게! 동지들, 노동자들, 적군과 선원들이여!
여기 크론슈타트에서는 공산주의 독재 정권의 지배하에 당신―당신, 당신 아내, 굶주리는 당신 자식들―이 얼마나 고통받는지 알고 있다.
우리는 공산주의 소비에트를 전복했다. 며칠 후면 《임시 혁명위원회》가 새로운 소비에트 선거를 진행할 것이고, 자유로이 선출되어 소수의 맛이 간 “공산주의자들”의 의지가 아니라 모든 노동 대중과 수비대의 의지를 명확히 반영할 것이다.
우리의 명분은 정당하다. 우리는 당의 권력이 아니라 소비에트의 권력을 지지한다. 우리는 노동 대중의 대표자를 선출할 자유로운 선거를 지지한다. 공산당이 독점하고 조종하는 거짓 소비에트는 언제나 우리의 필요와 요구에 귀를 기울이지 않았다. 우리가 받은 유일한 응답이라고는 암살자의 총탄뿐이었다.
이제 당신의 인내, 노동 대중의 인내가 임계점에 다다르자 그들은 사탕발림으로 당신의 입을 막으려 하고 있다. 지노비예프의 명령에 따라 페트로그라드 주에서는 장벽이 철폐되고, 모스크바는 외국으로부터 가장 필요한 식량과 필수품을 구입하기 위해 천만 루블을 할당했다. 그러나 우리는 페트로그라드의 프롤레타리아가 이런 사탕발림으로 그들을 매수하려는 것을 용납하지 않으리라는 것을 알고 있다. 공산주의 지도자들을 넘어, 혁명적 크론슈타트는 손을 내밀어 형제애적 지원을 당신에게 제공할 것이다.
동지들, 그들은 당신을 속일 뿐 아니라 뻔뻔스럽게도 진실을 왜곡하고 있으며, 그들은 가장 비열한 날조에 의존하고 있다. 동지들은 자신을 속이지 말라. 크론슈타트에서 권력은 오로지 혁명적 수병, 병사, 노동자 손에 있지, 모스크바 라디오가 거짓으로 당신을 믿게 하려는 것처럼 “코즐롭스키라는 개인이 이끄는 반혁명분자” 손에 있지 않다.
주저하지 말라, 동지들! 우리와 단결하자! 우리와의 관계를 확립하라! 비당원 대표자들이 크론슈타트에 올 수 있게끔 허가하도록 요구하라. 그들만이 진실을 말할 수 있으며 “핀란드 자금”이나 협상국의 덫이라는 따위의 수치스러운 중상모략을 벗겨낼 수 있다.
도시와 전장의 혁명적 프롤레타리아 만세! 자유롭게 선출된 소비에트 권력 만세!
3월 12일, 「이즈베스티야」 제10호에서 위원회는 크론슈타트가 차르주의 장군들에 의해 지배되고 있다는 이야기에 대해 다음과 같은 구체적 반박을 발표했다.
공산주의자들은 백위대 장군과 장교, 그리고 사제가 《임시 혁명위원회》 구성원에 포함되어 있다고 빗대어 말한다. 이러한 거짓말에 종지부를 찍기 위해, 우리는 위원회가 다음과 같은 열다섯 명의 위원으로 구성되어 있다는 점을 그들에게 알린다.
1. 페트리첸코, 페트로파블롭스크 호 탑승 일등 하사관.
2. 야코벤코(Yakovenko), 크론슈타트 지구 전화 교환원.
3. 오소소노프(Ossossonoff), 세바스토폴 호 정비공.
4. 아르히포프(Arkhipov), 갑판 정비공.
5. 페레푤킨, 세바스토폴 호 정비공.
6. 파트루셰프(Patrushev), 페트로파블롭스크 호 갑판 정비공.
7. 코필로프(Kopylov), 의무대 일등 위생병.
8. 베르치닌(Verchinin), 세바스토폴 호 선원.
9. 투킨, 전기 작업자.
10. 로마넨코(Romanenko), 선박 수리점 경비원.
11. 오료친(Oryochin), 제3 기술학교 직원.
12. 발크(Valk), 목수.
13. 파블로프(Pavlov), 광산 작업장 노동자.
14. 바이코프(Baikov), 짐마차꾼.
15. 킬가스트(Kilgast), 조타수.
같은 목록을 3월 14일자(제12호)에 기사화한 이 신문은 풍자적인 논평으로 기사를 마무리했다. “우리 장군들 가운데는 브루실로프(Aleksei Alekseyevich Brusilov), 카메네프(Lev Borisovich Kamenev) 등이 있다.[10] 경찰관 트로츠키와 지노비예프는 당신에게 진실을 숨기고 있다.”
볼셰비키는 중상모략 캠페인을 진행하며 운동의 정신과 목표를 왜곡하는 데 그치는 것이 아니라 크론슈타트 사람들의 행동마저 왜곡하고자 했다. 그리하여 그들은 크론슈타트의 공산주의자들이 “폭도” 손에 온갖 폭력을 당했다는 소문을 퍼뜨렸다. 크론슈타트는 이 문제에 대한 진실을 거듭 강조했다. 예컨대 「이즈베스티야」의 제2호에는 다음과 같은 지적이 있다.
《임시 혁명위원회》는 체포된 공산주의자들이 폭력에 시달렸다는 거짓 소문에 우려를 표한다. 체포된 공산주의자들은 전적으로 안전하다.
더구나 체포된 몇몇 공산주의자 중 일부는 석방되었다. 공산당의 대표자는 체포 이유를 조사하기 위한 위원회의 구성원이 될 것이다. 공산주의자 동지 일리인(Ilyin), 카바노프(Kabanov), 페르부친(Pervouchin)은 《임시 혁명위원회》에 지원했으며 페트로파블롭스크 호에 수감된 수감자들을 방문할 수 있는 권한을 부여받았다. 이 동지들은 위의 내용을 확인하고 서명한다. 서명 : 일리인, 카바노프, 페르부친. 복사부본 서명 : 《임시 혁명위원회》 위원 N. 아르히포프, 서기 서명: P. 보그다노프(Bogdanov).
동일호는 또한 위 공산당원들의 서명에 더해 “《공산당 크론슈타트 부문 임시위원회the Provisional Board of the Kronstadt Section of the Communist Party》 호소문”도 게재했다. 쉬이 이해할 법한 이유로 인해 공산주의자들을 향한 이 “호소문”의 어투는 신중하며 모호하다. 그럼에도 이는 다음과 같은 중요한 구절을 포함하고 있다.
책임을 맡은 공산주의자들이 총살당했으며, 공산주의자들이 손에 무기를 쥐고 크론슈타트에서 반란을 일으킬 것이라는 거짓 소문을 신뢰하지 마십시오. 이는 유혈사태를 일으키려는 의도로 유포된 거짓말입니다. 《공산당 임시위원회》는 새로운 소비에트의 선거에 관한 필요성을 인지하며, 당원들에게 《임시 혁명위원회》의 조치를 방해하지 말고 자리를 지켜주도록 요청하고 있습니다. 《공산당 크론슈타트 부문 임시위원회》 서명 : J. 일리인, A. 카바노프, F. 페르부친.
다음과 같은 제목의 짤막한 편지 형식의 다양한 답변이 간간이 등장했다. 그들의 거짓말.
우리는 이를 아래 기사들에서 읽을 수 있다.
「이즈베스티야」 제7호(3월 9일자)
크론슈타트에 맞서 작전을 펼치고 있는 군 지휘관은 적군 사령부의 한 기자에게 조금 전 다음과 같은 보고서를 전달했다.
“우리는 크론슈타트 주민들이 식량을 거의 공급받지 못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크론슈타트 수비대》의 1급 사수 연대는 반란군에 합류하기를 거부하고 무장해제 시도에 저항했다. 반란의 주요 지도자들은 핀란드로 피신할 준비를 하고 있다. 크론슈타트에서 탈출한 비당원 수병은 3월 4일 크론슈타트에서 열린 수병 회의에서 코즐롭스키 장군이 발언권을 쥐었다고 진술하고 있다. 연설에서 그는 소비에트 당파에 맞서 강력한 힘과 단호한 행동을 요구했다.
크론슈타트는 사기가 저하되었다. 사람들은 의기소침해 있다. 그들은 반란의 종식을 초조하게 기다리고 있으며, 백위대 지도자들이 소비에트 정부에 넘겨지기를 바라고 있다.”
공산주의자들이 사건에 대해 말하는 것이란 이런 것이다. 이것이 노동 대중의 눈에 우리 운동을 더럽히기 위해 그들이 의존하는 수단이다.
우리는 페트로그라드 「프라브다Pravda」 3월 11일 호에 실린 메모를 그대로 기사화한다.
“크론슈타트에서의 무장투쟁. 어제 오후 8시, 《국방위원회》를 통해 현재 오라니옌바움에 있는 군 지휘관 투하쳅스키 동지로부터 다음과 같은 연락이 왔다. 크론슈타트에서 격렬한 총성이 들렸다―소총 및 기관총 소리들이. 쌍안경을 통해 콘스탄틴Constantin 요새 동북 쪽에 위치한 광산 작업장 근처에서 사방으로 흩어진 대열로 공격하는 것을 볼 수 있었다. 이번 공격의 대상은 콘스탄틴 요새이거나 백위대에 저항하고 광산 작업장 부근에 정착한 부대 중 하나일 것으로 추정된다.
우리는 백위대 장교들에게 핀란드행 비행에 너무 많은 기대를 해서는 안 되며, 금이 아닌 적당한 양의 납을 얻게 되리라는 점을 알린다.”
우리는 적색 언론으로부터 다음 내용을 기사화한다.
“3월 11일, 오라니옌바움. 크론슈타트에서 수병들이 폭도들에 맞서 봉기를 일으킨 것이 확인되었다.
3월 12일, 오라니옌바움. 어제, 사람들이 크론슈타트로부터 핀란드 해안으로 몰래 얼음을 넘어가는 것이 목격되었다. 마찬가지로 핀란드에서 크론슈타트로 사람들이 오는 것이 보였다. 이는 크론슈타트와 핀란드 사이에 접촉이 존재한다는 것을 증명한다.
3월 12일, 오라니옌바움. 어제 크론슈타트 상공을 비행한 적군 조종사들은 거리에서 사람들을 거의 보지 못했다고 보고했다. 모든 경비원과 감시자가 사라졌다. 핀란드와의 추가적인 접촉은 관찰되지 않았다.
3월 11일, 오라니옌바움. 크론슈타트로부터의 이탈자들은 수병들의 사기가 매우 낮다고 알린다. 반란 지도자들은 수병들에 대한 신뢰를 완전히 잃었기에 그들은 더 이상 포병대에 남아 있을 수 없었다. 이는 실권을 쥐고 있는 장교들이 주도하고 있다. 수병들은 거의 전적으로 포병대에서 제거되었다.
크론슈타트 사람들을 과도하고 폭력적이라고 거짓말로 비난하며, 볼셰비키는 완벽히 수치스러운 방식을 취했다.
우리는 3월 5일 「이즈베스티야」 제3호에서 한 사설을 읽을 수 있다. “사흘 전, 크론슈타트는 4년 전 도시가 차르와 그의 장군들을 제거했던 것처럼 공산주의자들의 가공할 권력을 제거했다. 사흘 동안 크론슈타트 시민들은 당의 독재로부터 해방되어 자유로이 숨을 쉬었다.
크론슈타트의 공산주의 지도자들은 부끄럽게도 죄를 지은 부랑아처럼 도망쳤다. 그들은 그들 가죽이 벗겨질까 두려워했다. 그들은 《임시 혁명위원회》가 체카와 같은 방법으로 그들을 죽게 할 것이라 여겼다. 쓸데없는 걱정이다! 《임시 혁명위원회》는 복수를 강요하지 않는다. 위원회는 아무도 위협하지 않는다.
크론슈타트의 모든 공산주의자는 자유다. 어떠한 위험도 그들을 위협하지 않는다. 도망을 시도하다 우리 순찰대 손에 놓이게 된 이들만 체포되었다. 그러나 이들조차도 '적색 테러'에 대한 대가를 치르게 하려는 사람들로부터 언젠가 일어날지도 모르는 복수로부터 안전하다. 공산주의자의 가족 역시 모든 시민과 마찬가지로 어떠한 공격으로부터도 안전하다.
이에 반해 공산주의자들의 행동은 어떠한가? 그들이 어제 비행기에서 살포한 전단에는 크론슈타트에서 일어난 사건과 관련 없는 많은 사람이 페트로그라드에서 체포되었다고 쓰여 있다. 더욱 나쁜 것은 그 가족들까지도 감옥에 갇혔다는 것이다.
‘《국방위원회》는’ 전단에는 이렇게 쓰여 있다. ‘이 모든 수감자가 크론슈타트에서 폭도들에 의해 체포된 동지들, 특히 《발트 함대》 정치위원 N. 쿠지민, 크론슈타트 소비에트 위원장 바실리예프 동지 및 몇몇 다른 이들을 위해 인질로 잡혀 있음을 밝힌다. 인질들은 우리 체포된 동지들이 사소한 부상이라도 입는다면 목숨으로 대가를 치르게 될 것이다.’
《국방위원회》는 이렇게 성명을 마친다. 이는 무력한 자의 분노다. 무고한 가족을 고문하는 것은 공산주의자 동지들의 명성에 새로운 영예를 더하지 않다. 그리고 무엇이 되었든 크론슈타트의 수병, 적군, 노동자가 그들로부터 빼앗은 권력을 되찾을 수 있는 방법은 그러한 방법이 아니다.”
크론슈타트는 3월 7일 「이즈베스티야」 제5호에 기사화된 다음의 무선 전보를 통해 공산주의자들의 성명에 응답했다.
“《크론슈타트 수비대》의 이름으로 《임시 혁명위원회》는 페트로그라드 소비에트에 인질로 잡혀 있는 노동자, 수병, 적군 가족을 24시간 이내에 석방할 것을 요구한다.
《크론슈타트 수비대》는 크론슈타트의 공산주의자들이 완전한 자유를 누리고 있으며 그들의 가족은 어떠한 위험으로부터도 안전함을 밝힌다. 페트로그라드 소비에트의 전례는 이곳에서 뒤따르지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는 인질 억류와 같은 방법이 절망적 분노에 분개했을 때라도 가장 비열하고 경멸스럽다고 여기기 때문이다. 역사는 수치스러운 짓을 알지 못한다.
《임시 혁명위원회》 위원장 페트리첸코, 서기 킬가스트.”
《국방위원회》는 지방에서 차출한 수많은 군대를 바탕으로 페트로그라드를 “계엄 상황”이라 가장한 공포의 지배에 굴복시킬 만큼 무자비했다. 《국방위원회》는 도시를 “정화”하기 위한 체계적인 조치를 취했다. 크론슈타트에 동조했다는 혐의를 받는 많은 노동자, 병사, 수병이 투옥되었다. 페트로그라드의 모든 수병과 “정치적으로 신뢰할 수 없는” 군의 여러 연대는 먼 지역으로 보내버렸다.
지노비예프 위원장이 지휘하는 위원회는 페트로그라드 시와 주를 완전히 장악했다. 북부 지역 전체에 전쟁 상태가 선포되었고 모든 모임이 금지되었다. 정부 기관을 보호하기 위해 특별 경계 조치가 취해졌으며, 기관총이 지노비예프 및 기타 볼셰비키 고위 공무원들이 차지한 아스토리아Astoria 호텔에 배치되었다.
도시는 긴장이 만연했다. 새로운 파업이 발생하고 모스크바의 노동자가 봉기했으며 동부 및 시베리아의 농민이 봉기했다는 소문이 끊이지 않았다. 언론을 믿을 수 없던 대중은 극단적인 소문들이 분명 거짓일지라도 열렬히 귀를 기울였다. 모든 시선이 중요한 사건이 일어나리라 예상되는 크론슈타트로 쏠렸다.
한편 벽보는 파업 참가자들의 직장 복귀, 지시하고, 작업 중단 금지, 거리에서의 집회 금지 등이 적혀있었다. “집회를 열 경우” 그들은 이런 글을 읽을 수 있었다. “군대는 무기를 사용할 것이고, 저항할 경우 그 자리에서 발포를 명한다.”
페트로그라드는 행동할 만한 힘이 없었다. 가장 치욕적인 공포에 굴복해 침묵을 지켜야만 했던 수도는 크론슈타트에 모든 희망을 걸었다.
운동 첫날부터 크론슈타트는 내부를 조직하는 과업에 착수했다. 많은 문제를 한꺼번에 처리해야만 하는 막대하고 시급한 일이었다.
처음에는 페트로파블롭스크 호에 자리 잡았던 《임시 혁명위원회》는 곧 크론슈타트 중심부에 위치한 인민의 집으로 자리를 옮겼고, 이는 「이즈베스티야」에 따르면 “사람들과의 더욱 긴밀한 접촉”으로 이어질 것이었다. 더욱이 처음에는 다섯 명에 불과했던 위원은 당장의 요구를 모두 충족하기에는 부족하다고 여겨져 곧 열다섯 명으로 늘어났다. 「이즈베스티야」는 확대된 위원회가 3월 4일 개최한 회의 가운데 언급된 그들의 첫 활동 가운데서 다음과 같은 보고서를 발표했다.
“회의는 당면한 업무로 나아갔다. 도시와 수비대에 식량 및 연료가 충분히 공급되었음이 밝혀졌다.
이후 노동자들의 무장 문제가 거론되었다. 수병과 병사들이 전투부대로서 위치를 지키고 싶어 했기에 모든 노동자가 예외 없이 무장하고 도시 내부를 지키는 일을 맡기로 결정되었다. 이 결정은 열렬한 지지를 받았다. …
그다음, 사흘 안에 모든 노동조합 및 노동조합 평의회의 행정위원회 재선출을 결정했다. 노동조합 평의회의 행정위원회는 노동자들의 주요 기관이 되어 《임시 혁명위원회》와 상설적으로 연락할 것이다.
그런 뒤 페트로그라드, 페테르고프Peterhof, 오라니옌바움으로부터 숱한 위험을 무릅쓰고 탈출한 수병들이 현지 상황을 보고했다. 그들은 이 지역 주민과 노동자는 크론슈타트에서 일어나는 일에 대해 전혀 알지 못한 채 공산주의자들에 의해 유지되고 있다고 밝혔다. 백위대와 장군들이 크론슈타트에서 활동하고 있다는 소문이 사방으로 퍼지고 있었다. 이 대화는 모두의 웃음을 불러일으켰다.”
그러나 이 시기 창설된 《임시 혁명위원회》와 여타 조직만이 활동의 접근 수단은 아니었다. 모든 사람이 강하게 활기를 띠고 재건 작업에 새 힘으로 참여했다. 혁명적 열정은 10월의 나날에 필적했다. 공산당이 혁명을 장악한 이후 처음으로 크론슈타트는 자유를 느꼈다. 연대와 형제애의 새로운 정신은 수병, 수비대 병사, 노동자 및 다른 모든 이를 공동의 대의를 위한 공동의 노력으로 재결합했다. 심지어 공산주의자들조차 이 도시 전체의 형제애 전염에 영향을 받아 크론슈타트 소비에트 선거 준비에 참여했다.
「이즈베스티야」 지면들은 대중이 자유 소비에트로부터 진정한 해방의 길과 진정한 혁명을 성취하고자 하는 희망을 되찾자 다시 모습을 드러낸 이 전반적인 열정에 대한 풍부한 증거를 제공한다. 신문에는 시민 개개인, 다양한 단체와 조직으로부터 이 열정에 대한 완전한 통제, 연대와 헌신의 감정, 유효하게 행동하며 공동의 과업에 참여하고자 하는 소망에 이르기까지의 온갖 종류의 통지, 결의안, 호소문으로 가득했다.
“권리는 모두에게 평등하며 누구도 특권을 지니지 않는다”는 원칙이 확립되고 엄격히 유지되었다. 식량 배급량은 평준화되었다. 볼셰비키 정권 아래서 훨씬 더 많은 배급을 받던 수병들은 노동자와 시민들에게 주어지는 것 이상의 배급량을 받지 않기로 했다. 특별 배급은 병자와 어린이에게만 주어졌다.
우리는 방금 전반적인 흥분이 공산주의자들에게 영향을 미쳤다고 언급했다. 실제로 그 흥분은 그들 중 많은 이의 의견을 뒤집었다. 「이즈베스티」 지면에는 중앙정부의 태도를 규탄하고 《임시 혁명위원회》의 조치 및 행동방침을 지지하는 크론슈타트 공산주의자 단체와 조직의 선언이 많이 실려 있었다. 그러나 그보다 더 강력한 증거는 도시 내 공산주의자의 태도 변화에 대한 것이다. 매우 많은 수의 크론슈타트 내 공산주의자들이 공개적으로 탈당을 선언했다. 「이즈베스티야」 몇몇 호에 수백 명이나 되는 공산주의자의 이름이 발표되었는데, 그들의 양심은 교수형 집행자인 트로츠키와 같은 당에 머무르는 것을 금했다. 탈당이 곧 너무 많아져 지면이 부족해지자 신문은 개별 발표를 중단하고 지면이 허용될 때만 단체 명의로 다룰 수 있다고 발표했다. 사람들은 대탈출의 인상을 받았다.
많은 지면으로부터 무작위로 따온 여러 글은 이 갑작스럽고 중요한 변화에 대해 적절한 생각거리를 준다.
나는 공산당의 정책이 나라를 있을 수 없는 교착상태에 빠뜨렸다는 것을 깨달았다. 당은 관료적으로 변했다. 그들은 아무것도 배우지 못했고 아무것도 배우고 싶어 하지 않는다. 그들은 대중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기를 거부하고 그들의 의지를 대중에게 강요하려 한다. (1억 1,500만의 농민을 생각해 보라!) 그들은 언론의 자유와 대중이 선거 절차를 수정해 국가 재건에 참여할 수 있게 되는 가능성만이 사람들을 무기력에서 깨어나게 할 수 있다는 것을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나는 이제부터 스스로가 공산당의 일원이라 여기기를 거부한다. 나는 3월 1일 공개회의에서 채택된 결의안에 전적으로 찬성하며, 따라서 내 모든 능력과 힘을 《임시 혁명위원회》의 처분에 맡긴다. 나는 이 선언의 신문 게재를 요청한다.
(3월 5일, 「이즈베스티야」 제3호)
* * *
일반 공산주의자 동지들! 주위를 둘러보면 우리가 끔찍한 수렁에 깊게 빠져 있음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우리는 소수 “공산주의자” 관료에 의해 여기까지 이끌려 왔는데, 그들은 공산주의자를 가장해 우리 공화국에서 가장 안락한 보금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공산주의자로서, 나는 당신을 동족상잔으로 몰아넣고 있는 이 가짜 “공산주의자들”을 제거하자고 당신에게 간청한다. 아무런 책임도 없는 우리 일반 공산주의자들이 우리의 동지, 비당원 노동자, 농민으로부터 비난을 받는 것은 그들 덕분이다.
나는 현 상황에 경악하고 있다. 이 “공산주의자” 관료들의 이익을 위해 우리 형제들의 피를 흘리는 것이 가당키나 한 것인가? 동지들, 정신을 차리라! 당신을 도발하고 도살장으로 밀어 넣는 이 관료들에게 이용당하지 말라. 그들에게 나갈 문을 보여주어라. 진정한 공산주의자는 자신의 사상을 강요해서는 안 되며, 전체 노동 대중과 함께 그들과 같은 대오로 진군해야 한다.
러시아 공산당(볼셰비키) 당원 로이칼리(Rojkali)
(3월 9일, 「이즈베스티야」 제7호)
* * *
페트로그라드에 대표단을 파견하겠다는 크론슈타트 동지들의 제안에 대한 화답으로 트로츠키와 공산주의자 고위층이 첫 포탄을 발사해 피 흘린 것을 보고 나는 더 이상 공산당원으로 간주되지 않기를 요청한다. 공산당 연설가들의 연설은 내 머리를 그리로 향하게 했으나 공산주의자 관료들의 행동은 그것을 다시 되돌리게 했다.
나는 공산주의자 관료들이 그들의 진면목을 드러내고, 그리하여 내 잘못을 보게 해준 데에 감사한다. 난 그들 손에 쥐어진 눈먼 도구였다.
당원번호 537575번 전 공산당원 안드레 브라타체프(Andre Bratachev)
(3월 9일, 「이즈베스티야」 제7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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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금의 참상은 당 수뇌부에 자리 잡은 소수 불손한 공산주의자들의 행동에 관한 결과이며, 내가 일반 투사로서 당에 합류했다는 점을 고려할 때, 나는 그들 활동의 결실을 공포 속에 바라본다. 오직 노동자, 농민만이 파멸로 내몰린 나라를 구할 수 있으나 실권을 쥐고 있는 공산당은 그들을 완전히 속였다. 이러한 이유로 나는 당을 떠나 노동 대중을 방어하고자 힘쓰고 있다.
(3월 9일, 「이즈베스티야」 제7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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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지들, 그리고 친애하는 나의 산업, 군사, 해군 학교 학생 여러분! 저는 30여 년을 사람들에 대한 깊은 사랑으로 살아왔습니다. 제가 할 수 있는 한, 저는 배우고자 하는 모든 이에게 빛과 지식을 가져다주었습니다. 1917년 혁명은 저에게 새로운 열망을 주었습니다. 제 활동은 늘어났습니다. 저는 제 이상을 이루기 위해 그 어느 때보다 열심히 일했습니다. “모든 것을 인민을 위해”라는 공산주의의 구호는 내게 고귀함과 아름다움의 영감을 주었고, 저는 1920년 2월 공산당 당원 지원자가 되었습니다. 하지만 크론슈타트의 7천 명이나 되는 평화로운 사람들과 제 사랑하는 제자들을 향해 쏘아진 첫 총성은 제가 이 무고한 사람들의 피를 흘리게 만드는 공범으로 여겨지게 할 수도 있다는 생각에 저를 두려움에 떨게 했습니다. 저는 더 이상 범죄행위로 인해 수치스러워진 사상을 믿거나 전파할 수 없다고 여깁니다. 따라서, 첫 격발 이래로 저는 스스로를 공산당 당원으로 여기기를 그만두었습니다.
교사 마리아 니콜라예브나 샤텔(Maria Nikolaevna Chatel)
(3월 10일, 「이즈베스티야」 제8호)
* * *
크론슈타트 동지들의 페트로그라드로 대표단을 보내자는 제안에 대해 트로츠키는 비행기를 보내 무고한 여성과 아이들에게 폭탄을 실은 비행기를 보냈으며, 더욱이 그들은 온갖 장소에서 순수한 노동자들에게 총을 쏘고 있기에 우리 제3지역 전기공 일반 공산주의자는 트로츠키와 그 대리인들의 짐승 같은 행동에 깊이 분개하며, 이에 공산당을 떠나 노동자 해방을 위한 공동의 투쟁에서 모든 순수한 노동자와 함께하고 있다. 우리는 우리가 탈당한 것으로 여겨지기를 바란다.
(17명의 서명이 뒤따른다—3월 10일, 「이즈베스티야」 제8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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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3년 동안 크론슈타트에서 초등학교와 육군, 해군에서 교사로 근무했습니다. 저는 항상 자유로운 크론슈타트 노동자들과 함께 정직하게 걸어 오며 공교육 분야에서 제 모든 정력을 그들에게 바쳤습니다. 공산주의자들이 천명한 문화에 대한 커다란 열정과 착취자에 대한 노동자의 계급투쟁, 소비에트 건설의 시각은 저를 공산당 대오로 이끌었습니다. 1920년 2월 1일, 저는 당원 지망자가 되었습니다. 지망 이후 저는 당 고위층으로부터 여러 심각한 잘못들을 목격해 왔습니다. 저는 이러한 잘못이 공산주의의 아름다운 사상을 오염시킨다는 결론에 도달했습니다. 대중에게 매우 좋지 않은 인상을 남긴 더욱 심각한 잘못은 관료주의, 당과 대중 사이 분열, 대중에 대한 당의 독재적 절차, 많은 출세주의자 등입니다. 이 모든 잘못은 대중과 당 사이의 바닥이 없는 심연을 넓혀, 당을 국가 내부 붕괴에 맞설 힘이 없는 기관으로 만들었습니다.
지금 벌어지고 있는 일들은 정권의 가장 끔찍한 폐해를 드러나게 했습니다. 수천의 크론슈타트 주민들이 “노동자 이익의 수호자”에게 그들의 온전히 정당한 요구를 제시하자 관료화된 공산당 고위층은 그것을 거부하며 크론슈타트 노동자들과 자유로우며 형제애적인 합의에 도달하는 대신 혁명적 도시의 노동자, 수병, 적군을 향해 동족상잔의 불을 지폈습니다. 그리고―이것이 결정타였는데―비행기에서 무방비 상태의 여성과 어린이에게 폭탄을 투하한 것은 공산당의 왕관에 멋진 월계관을 덧댔습니다.
공산주의자들의 야만적인 행위에 대한 책임을 함께 지고 싶지 않고, 유혈사태 및 대중의 극심한 고통을 초래한 그들의 위계질서 전술에 반대하기에 나는 더 이상 스스로를 공산당 당원 지망자로 여기지 않고, 크론슈타트 노동자의 구호를 전적으로 받아들인다는 것을 공개적으로 선언한다. “모든 권력을 당이 아닌 소비에트로.”
(3월 12일, 「이즈베스티야」 제10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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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중으로부터 신뢰를 잃은 공산당의 권력은 크론슈타트에서 폭력이나 유혈사태 없이 혁명적 노동자들의 손에 넘어갔다. 그럼에도 중앙 정부는 크론슈타트를 봉쇄했다. 그들은 굶주림, 추위, 반역 모함으로 권력을 강요하고자 거짓 성명서와 라디오 메시지를 퍼뜨렸다.
우리는 이러한 전술을 사회혁명의 기본 원칙인 “모든 권력을 노동자에게”에 대한 반역으로 여긴다. 이 반역으로 권력을 쥔 공산당은 노동자의 적을 편 들게 되었다. 우리에게는 오직 한 가지 선택지가 있을 뿐인데, 우리 자리를 지켜 폭력, 반역, 도발로 노동 대중에 권력을 행사하려는 모든 이에 맞서 끊임없이 투쟁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당과의 모든 관계를 단절한다.
전 공산당원 밀로라도비치(Miloradovich), 베스소노프(Bezsonov), 마르코프(Markov)
(이즈베스티야 10호, 3월 12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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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지 노동자들의 피로 자기 손을 더럽히는 데 주저하지 않았던 대영주 트로츠키의 행동에 반감을 지닌 나는 당을 떠나 성명을 발표하는 것이 나의 도덕적 의무라고 여긴다.
당원 지망자, 건설노동조합 위원장 V. 그라베데프(Grabedev)
(3월 12일, 「이즈베스티야」 제10호)
마지막으로, 우리는 같은 유형의 선언에서 도출한 몇몇 유익한 발췌문을 옮긴다. 이 발췌문들은 각지에 퍼져있던 정신과 태도에 대해 매우 분명히 알려준다.
우리 하기의 서명자들은 … 그것이 노동 대중 의지의 표출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공산당 당원이었다. 그러나 그들은 실제로는 노동자와 농민의 교수형 집행인으로 모습을 드러냈다. …
(3월 7일, 「이즈베스티야」 제5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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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공산당 입당 지망자들은 … 당국이 아니라 오롯이 노동자의 정당한 대의와 연대할 것을 만장일치로 선언한다. …
(3월 9일, 「이즈베스티야」 제7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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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당들은 정치질에 몰두해 왔다. 하지만 내전이 끝났을 때, 사람들은 당이 경제생활로 눈을 돌려 파산한 국가 경제 재건으로 진전을 이뤘으면 하고 바랐다.
농민은 도시에 빵을 제공해야 한다는 사실을 이해하기 위해 정치위원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그리고 노동자는 농민에게 필요한 모든 것을 제공하기 위해 최선을 다할 것이다.
(3월 13일, 「이즈베스티야」 제11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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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월 14일, 붙잡혀 해상 함선 학교에 억류된 240명의 《쿠르산티, 장교 및 적군 총회the general assembly of kursanti, officers and Red soldiers》는 다음과 같은 결의안을 채택했다.
“3월 8일, 우리 모스크바와 페트로그라드의 쿠르산티, 장교 및 적군은 크론슈타트 도심을 공격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우리는 백위대가 반란을 일으켰다고 전해 들었다. 무기를 사용하지 않고 도시 외곽에 접근해 수병과 노동자 전위대와 접촉했을 때, 우리는 크론슈타트에 백위대 반란은 존재하지 않음을 깨달았고, 오히려 수병과 노동자들이 정치위원의 절대권력을 전복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우리는 곧 자발적으로 크론슈타트 사람들의 편에 서고 《임시 혁명위원회》에 우리를 전투부대로 배치해 달라고 요청했는데, 이는 우리가 크론슈타트 및 러시아의 모든 노동자, 농민의 진정한 옹호자들과 함께 싸우고 싶기 때문이다.
우리는 《임시 혁명위원회》가 모든 노동자의 해방을 위한 올바른 길을 취했다고 생각하며, ‘모든 권력을 당이 아닌 소비에트로’라는 사상만이 그렇게 올바르게 시작된 일을 완성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3월 16일, 「이즈베스티야」 제14호)
* * *
우리 크라스노아르메이스크Krasnoarmeysk 요새의 적군은 《임시 혁명위원회》와 혼연일체다. 우리는 위원회와 노동자, 농민을 끝까지 지킬 것이다. 아무도 비행기에서 뿌려진 공산주의자들의 성명이 하는 거짓말을 믿을 수가 없다. 이곳에는 장군도 주인도 없다. 크론슈타트는 늘 노동자와 농민의 도시였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공산주의자들은 우리가 첩보원들에 의해 현혹되었다고 한다. 이는 뻔뻔한 거짓말이다. 우리는 늘 혁명으로 쟁취한 자유를 지켜왔으며, 늘 그 자유를 지킬 것이다. 만일 누군가 이를 확신하고 싶다면, 우리에게 대표단을 보내도록 하라. 장군들은 공산주의자들에게 봉사하고 있다.
국가의 운명이 불확실한 지금 이때, 우리 손으로 권력을 쟁취하고, 《임시 혁명위원회》에 최고지휘권을 부여한 우리는 모든 수비대와 노동자에 노동자의 자유를 위해 죽을 준비가 되어 있음을 선언한다. 공산주의자들의 지배와 지난 세월의 공포로부터 해방된 우리는 한 발짝이라도 물러서느니 죽음을 택하겠다.
크라스노아르메이스크 요새 분대
(3월 7일, 「이즈베스티야」 제5호)
크론슈타트는 자유로운 러시아에 대한 열정적인 사랑과 “진정한 소비에트”에 대한 무한한 믿음으로 고무되었다. 크론슈타트 사람들은 마지막까지 우선 페트로그라드, 이어서 러시아 전체의 지원으로 전국에 완전한 해방을 이룰 수 있기를 바랐다. 다음 선언서는 그들 태도의 전범典範이다.
“크론슈타트의 동지, 수병, 노동자, 적군 여러분!
우리 《토틀레벤 요새 수비대》는 공산주의자들의 증오에 사로잡힌 멍에에 맞서 영광스럽게 투쟁하는 이 암울하고 비극적인 시간에 형제애로 인사를 전합니다. 우리 모두는 하나가 되어 고통받는 형제들, 폭력과 기만으로 인해 저주받을 노예로 다시 매여 있는 모든 러시아의 농민과 노동자의 해방을 위해 죽을 준비가 되어있습니다. 우리는 단호한 결의로 요새 주변에 쳐진 적들의 포위를 부수고 참된 진리와 자유를 온 땅에 전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이 메모는 1921년 3월 16일 크론슈타트 「이즈베스티야」의 최종호(제14호)에 게재되었다. 적은 크론슈타트 문앞에 다다랐다. 페트로그라드와 그 외 지역들은 군대와 경찰력의 막대한 집결로 겁에 질려 악을 물리치는 데 명백히 무기력했다. 정부에 맹목적으로 헌신하는 막대한 쿠르산티 군의 공격을 받은 요새 내 영웅적인 소수 방어자에게는 희망이 거의 남아 있지 않았다. 그래도 크론슈타트 사람들은 그들의 위대한 이상과 동기의 순수성, 임박한 해방이라는 거센 믿음으로 불리한 전투를 계속하기를 바랐다.
그들은 무장투쟁을 원치 않았다. 그들은 평화적이고 형제애적인 수단으로, 소비에트의 자유로운 재선거, 공산주의자들과의 이해, 노동 대중 사이 설득과 자유로운 행동으로 갈등을 해결하고자 노력했다. 동족상잔의 투쟁이 그들에게 강요되었으나 사건이 전개되며 그들은 점점 더 정의롭고 고귀한 대의를 위해 마지막까지 싸우겠다는 의지가 강해졌다.
그들 태도의 중요한 측면은 그들의 활동에 대한 원조 문제를 고려하는 방식이었다. 그들은 다양한 사람들, 특히 《사회주의혁명당》 우파들로부터 원조 제의를 받았다. 그러나 그들은 그들로부터의 모든 원조를 거부했다. 《사회주의혁명당》 좌파로부터는 자유와 신의의 정신, 헌신과 형제애로만, 그리고 그것이 정치적으로 결부되지 않을 때만 그들의 원조를 받아들였다. 그들은 지지자들의 협력을 환영했지만, 어떠한 압력도, 어떠한 “독재”도 받아들이지 않았다.[11]
3월 3일부터 16일까지의 반란 동안 《임시 혁명위원회》가 열네 호의 「이즈베스티야」를 펴냈다. 크론슈타트 및 러시아 전체를 위한 새롭고 진정 자유로운 삶에 대한 반란군의 불타는 고귀한 열망, 그들에게 주어진 싸움 가운데 그들의 숭고한 헌신과 “마지막 한 방울 피가 다할 때까지” 방어하겠다는 확고한 결의, 이 모든 가장 중요한 자질들은 그들 신문에 실린 일련의 기사에 충실히 반영되어 그들의 목표를 명확히 하고, 맹목적이고 오도된 이들을 설득하고자 노력했고, 우리가 앞서 살핀 것처럼 공산주의자들의 중상모략 및 적대적 행위에 화답했다.
우리는 지금은 거의 완전히 알려지지 않은 이 역사적 지면들을 살펴보았다. 1917년 러시아혁명을 상실하고 타국에서 발발할지도 모르는 혁명에 미리 위협을 가하는 근본적 오류를 경계하기 위해 이것들은 모든 나라 노동자들이 읽고 또 읽어야 한다. 다시 말해 “프롤레타리아 독재”, “프롤레타리아 정부”, “노동자, 농민 국가” 등 실질적 내용이 없는 새 구호 아래 정당을 바탕으로 이루어지는 행동, 정치 권력의 복원, 새로운 정부 수립, 중앙집권적 국가 조직을 경계하기 위해 말이다. 이 신문들은 크론슈타트의 서사시와 마찬가지로, 진정으로 노동자, 농민에 속하는 이는 정부도, 국가주의자도 될 수 없으며, 또한 정부와 국가주의자는 노동자에도, 농민에도 속하지 않는다는 것을 결정적으로 증명하고 있다.
크론슈타트 「이즈베스티야」 창간호(1921년 3월 3일)에는 안내와 행정상 메모 외에도 “크론슈타트 요새 및 도시 사람들에게”라는 선언문과 우리가 이미 인용한, 유명한 수병들의 “결의안”이 포함되어 있다.
모스크바 무선 전보(위에 인용한 것)이 포함된 제2호(3월 4일)에는 다음과 같은 중요한 호소문이 실려 있다.
시민 여러분, 크론슈타트는 자유를 위한 어려운 싸움을 시작하혀 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언제든지 크론슈타트를 수복하고 그들의 권력을 우리에게 다시금 강제하려는 공산주의자의 공세를 예상할 수 있는데, 이는 굶주림과 추위, 경제적 붕괴를 초래할 것입니다.
우리는 모두 마지막 한 사람까지 투쟁과 단결로 우리가 쟁취한 자유를 지킬 것입니다. 우리는 크론슈타트를 정복하려는 계획에 저항할 것이며, 만일 공산주의자들이 무력으로 정복을 시도한다면, 우리는 그에 걸맞는 저항으로 응할 것입니다.
《임시 혁명위원회》는 주민 여러분이 총소리가 들린다 해도 동요하지 말 것을 요청합니다. 침착하고 여유로움이 우리에게 승리를 가져다 줄 것입니다.
《임시 혁명위원회》
우리는 이미 일반적 메모, 선언 및 안내를 제외하고 제3호(3월 5일)의 모든 부분을 인용했다. 그럼에도 우리는 다음 문단을 추가할 수 있을 것이다.
크론슈타트에는 완벽한 질서가 유지되고 있다. 모든 기관은 정상적으로 기능하고 있다. 거리는 사람들로 가득하다. 사흘 동안 총알 한 발 발사되지 않았다.
크론슈타트 수병과 노동자의 못박힌 손이 공산주의자의 손에서 키를 빼앗아 조타석을 장악했다. 소비에트라는 선박은 안전하고 능숙하게 페트로그라드로 항해할 것이며, 그로부터 노동자 손의 권력이 불행한 러시아 전체로 퍼져나갈 것이다.
하지만 동지들, 조심하라! 항로는 암초로 가득하니 보초를 두 배로 늘리라! 키를 부주의하게 돌리면 사회 재건이라는 소중한 사명을 지닌 선박이 바위에 부딪힐 수도 있다.
동지들, 키를 보라―당신 적들이 이미 그것을 빼앗으려 하고 있다! 단 한 번의 실수로도 그들은 성공할 것이고 소비에트라는 선박은 차르주의 종복從僕들과 부르주아지 대리인들에게 의기양양한 웃음을 선사하리라.
동지들, 그대들은 지금 공산당 독재에 대한 위대하고 평화로운 승리를 기뻐하고 있다. 그러나 그대의 적들 역시 기뻐하고 있다. 그대와 그들은 정반대의 이유로 즐겁다. 그대는 노동자가 자유롭게 일하고 농민이 자신의 땅에서 난 노동의 생산물을 처분할 권리를 누리는 것을 보고자 하는 고귀한 희망과 함께 소비에트의 진정한 권력을 되찾고자 하는 불타는 열망에 가득 차 있다. 그들은 차르주의와 장군들 특권의 재확립을 꿈꾸고 있다.
그대의 관심사는 다르다. 그들은 그대의 동지가 아니다. 그대는 평화적인 재건이라는 창조적 임무를 시작하기 위해 공산주의 권력을 제거해야만 했다. 그들은 노동자, 농민이 다시 그들의 노예가 될 수 있게끔 이 권력의 유지를 원한다. 그대, 자유를 찾으라. 그들은 그대를 예속하고자 한다.
“육군 원수” 트로츠키는 공산주의 정치위원들의 절대 왕정에 반기를 든 자유롭고 혁명적인 크론슈타트를 위협하고 있다. 공산당 독재라는 수치스러운 멍에를 타도한 노동자들은 이 새로운 트레포프(Alexander Fyodorovich Trepov)[12]에게 군사적 패배의 위협을 받고 있다. 그는 크론슈타트의 평화로운 사람들을 폭격하겠노라 엄포를 놓았다. 그는 과거 “총알을 아끼지 말라”던 트레포프의 명령을 되풀이한다. 그는 혁명적 수병, 노동자, 적군을 상대하기 위해 어마어마한 총알을 비축해둬야 할 것이다.
공산주의자들에 의해 유린당한 소비에트 러시아의 독재자인 그에게 노동 대중의 운명은 아무 의미를 지니지 않는다. 중요한 것은 권력이 그의 당 손아귀에 남아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는 오만하게도 소비에트 러시아의 이름을 참칭해 말을 한다. 그는 용서를 약속한다! 당의 절대 왕정을 위해 가차 없이 피를 흘리는 공산주의 카자크의 지도자, 모든 자유로운 영혼의 억압자인 피로 물든 트로츠키, 그는 감히 이 언어를 대담하고 단호하게 붉은 깃발을 지키는 크론슈타트 사람들에게 사용한다!
공산주의자들은 노동자의 피와 투옥된 가족들의 고통을 대가로 그들의 절대 왕정을 다시 세우고자 한다. 그들은 반란 수병, 노동자, 적군이 다시 위험을 무릅쓰게 강제하고 싶어 한다. 그들은 러시아 노동자를 무질서, 굶주림, 빈곤의 구렁텅이로 몰아넣은 그들의 사악한 정책의 정착을 꿈꾸고 있다.
이제 그만! 노동자들은 더 이상 속지 않을 것이다! 공산주의자들이여, 너희 희망은 헛되고, 너희 위협은 아무런 효과도 없다. 노동자 혁명의 마지막 단계가 나아가고 있다. 이는 사기꾼들과 중상모략하는 자들을 온 나라에서, 너희 작업으로 더럽혀진 소비에트에서 쓸어버릴 것이다. 그리고 트로츠키 씨, 우리는 당신 용서가 필요하지 않소!
* * *
공산주의 독재에 의한 노동 대중 탄압은 사람들 사이에 지극히 당연한 분개와 분노를 불러일으켰다. 그 결과 몇몇 공산주의자가 거부되거나 해고되었다. 다시는 이런 일이 일어나면 안 된다. 우리는 복수를 추구하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노동자로서 우리 이익을 보호할 것이다. 우리는 냉정하게 행동해야만 하며, 방해나 중상모략으로 노동자의 권력과 권리 회복을 막는 이들만을 제거해야 한다.
* * *
공산주의자들은 자신들로부터 도망치는 권력을 보존할 방법을 모르기에 가장 비열한 도발을 감행하고 있다. 그들의 타락한 언론은 크론슈타트 운동을 백위대의 음모라고 주장하며 대중을 선동하기 위해 온 힘을 다했다. 바로 지금 악명높은 패거리들은 “크론슈타트는 핀란드에 팔아 넘겨졌다”는 구호를 내걸고 있다. 그들의 신문은 불과 독을 토해내고 있다. 프롤레타리아에게 크론슈타트가 반혁명 세력 손에 넘어갔다고 믿게 하는 데 실패하자, 그들은 이제는 국민 정서라는 것을 이용하려 하고 있다.
전국이 우리 라디오 메시지를 통해 크론슈타트의 수비대와 노동자가 투쟁하는 이유를 알고 있다. 하지만 공산주의자들은 페트로그라드에 있는 우리 형제들을 속이고자 하며 사건의 의미를 왜곡하려 한다.
페트로그라드는 쿠르산티의 총검 및 당의 “경비대”에 포위되어 있다. 말류타 스쿠라토프(Malyuta Skuratov)[13]―트로츠키―는 비당원 노동자와 적군이 크론슈타트에 오지 못하도록 하고 있다. 그는 그들이 진실을 알게 될까 두려워하며, 진실이 곧바로 공산주의자들을 쓸어버릴까 두려워한다. 노동 대중의 눈이 뜨이면 그들의 못박힌 손이 권력을 잡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것이 페트로그라드 소비에트가 진정 공평한 동지를 크론슈타트로 보내 달라 요청하는 라디오 메시지에 응하지 않은 이유다. 고위층 공산주의자들은 몹시도 두려워하며 진실을 질식하게 하고 “백위대가 크론슈타트에서 일하고 있다”, “핀란드인은 이미 크론슈타트 반란군의 도움으로 페트로그라드를 점령하기 위해 군대를 조직했다”는 등 거짓에 거짓을 더하고 있다.
우리가 이 모두에 답할 말은 한 가지뿐이다. “모든 권력을 소비에트로.” 손을 떼라, 너희 손을 붉게 물들인 피는 백위대, 영주, 부르주아지와 맞서 싸운 피다.
마지막으로, 같은 호에는 크론슈타트 노동자들이 미래 혁명의 노동 대중에게 유산으로 남기는 계획과 계약인, 실질적 “신앙 고백”이 실려 있다. 그들의 고결한 염원과 희망은 이 문서에 확고하고 명료하게 표현되어 있다.
10월 혁명을 일으키며 노동계급은 해방을 얻기를 바랐다. 그러나 그것은 인간 특성에 더욱 나쁜 노예제를 초래했다. 경찰 군주제의 권력은 찬탈자―공산주의자―손에 넘어갔고, 공산주의자들은 사람들에게 자유를 주는 대신 체카의 감옥에 대한 공포를 주었는데, 그 공포는 차르주의 경찰의 방식을 훨씬 능가했다.
오랜 세월의 투쟁과 고통 끝에 소비에트 러시아의 노동자는 체카 카자크의 무례한 명령, 총검 찌르기, 귓가를 스치는 총알만 얻었을 뿐이다. 사실 공산주의 권력은 노동자들의 영광스러운 상징인 낫과 망치를 또 다른 상징으로 대체해 버렸는데, 그것은 새로운 관료제, 공산주의자 공무원 및 정치위원이 평온하고 근심 없게 존재를 유지할 수 있도록 해주는 총검과 빗장 걸린 창문이었다.
그러나 그 모든 것 가운데 가장 비열하고 죄악적인 것은 공산주의자들이 확립한 정신적 노예제이다. 그들은 노동자의 생각과 도덕적 삶에 손길을 뻗쳐 모든 사람이 그들의 공식에 따라서만 생각하게끔 강제했다. 국가가 주도하는 노동조합의 힘을 빌려 그들은 노동자들을 기계에 묶어 놓았고, 노동을 유쾌하게 만드는 대신 새로운 노예제로 변모시켰다. 자발적 반란에까지 이른 농민의 항의에 대해, 파업으로 내몰리는 생활상에 시달리는 노동자의 요구에 대해 그들은 대량 살상과 차르주의 장군들이 부러워할 법한 포악함으로 응답한다.
노동해방의 붉은 깃발을 맨 먼저 들어 올린 노동자의 러시아는 공산주의 통치의 더 큰 영광을 위해 순교자들의 피로 물들어 있다. 그와 함께 프롤레타리아 혁명의 위대하고 아름다운 약속과 가능성이 모두 물에 잠겼다.
이는 점차 더 분명해지고 있으며, 바야흐로 가식적으로 행동하는 공산당이 노동자의 보호자가 아니라는 것이 명백해졌다. 노동 대중의 이익은 그들과는 무관하다. 권력을 장악한 뒤 공산주의자들은 오직 한 가지만을 우려한다―권력을 잃지 않는 것이 그것이다. 그것은 그것을 잃지 않는 것이다. 이를 위해 그들은 어떤 수단도 정당하다고 생각한다. 중상모략, 기만, 폭력, 암살, 반역자 가족에 대한 복수조차도.
하지만 순교 당한 노동자들의 인내심은 바닥났다. 전국 각지가 반란의 불길, 억압과 폭력에 맞서는 투쟁의 불길로 타오르고 있다. 노동자의 파업이 증가하고 있다. 볼셰비키 사냥개들은 경계한다. 그들은 피할 수 없는 세 번째 혁명을 금지하고 억누르기 위한 조치를 취하고 있다. 그러나 그 모든 것에도 불구하고 혁명은 도래했다. 그것은 노동 대중 스스로에 의해 성취되었다. 공산주의 장군들은 곧 그들이 공산주의 권력이 혁명 사상에 대한 반역이라 확신하며 일어난 이들이라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그들을 몹시도 두려워하며 노동자의 분노에서 벗어날 곳이 없다는 것을 깨달은 공산주의자들은 카자크의 도움으로 감옥, 사형 집행을 비롯한 기타 극악무도한 행위로 반란군을 공포에 떨게 하고자 한다. 공산주의 독재의 지배 아래, 삶은 죽음보다도 더욱 나빠졌다.
반란을 일으킨 노동자들은 공산주의자에 대한 투쟁과 농노제 복원에 대한 투쟁이 도중에 멈출 수 없음을 깨달았다. 그들은 끝을 보아야만 한다. 공산주의자들은 양보하는 척한다. 그들은 페트로그라드 지방의 장벽을 제거했다. 그들은 외국으로부터 제품을 사 오기 위해 천만 루블 어치의 금을 할당했다. 하지만 누구도 그에 속지 않는다. 주인, 독재자의 철권은 이 사탕발림 뒤에 숨겨져 있는데, 이는 일단 평온을 되찾기만 하면 이 양보에 대해 끔찍한 대가를 치르게 할 주인의 손이다.
아니, 중간에 멈춰서는 안 된다. 쟁취하느냐 죽느냐 뿐이다. 우파뿐만 아니라 좌파 반혁명주의자들에게도 공포인 붉은 크론슈타트가 선례를 보였다. 바로 이곳에서 위대하고 새로운 혁명의 원동력이 모습을 드러냈다. 이곳에서 지난 3년간의 폭정에 대항해, 절대군주제의 멍에에 시달린 지난 모든 세기를 능가하는 공산주의 독재정치의 탄압에 대항해 저항의 깃발이 솟아올랐다. 이곳 크론슈타트에는 노동자들의 마지막 사슬을 끊고 사회주의 건설에 새로운 고속도로를 놓아줄 세 번째 혁명의 토대가 마련되어 있다.
이 새 혁명은 기계적이고 정치적인 공산주의 방식에 반대되는 새로운 사회주의 건설의 본보기가 될 것이기에 동서양 노동 대중을 구원할 것이다. 그리하면 우리 경계 너머 노동 대중은 지금 그곳에서 노동자와 농민의 이름으로 자행되고 있는 모든 것이 사회주의가 아님을 확신하게 될 것이다.
이 방향으로의 첫 발자국은 총을 쏘지 않고, 피 한 방울 흘리지 않고 성취되었다. 노동자는 피를 원하지 않는다. 그들은 정당방위일 경우에만 피를 흘릴 것이다. 공산주의자들의 모든 반란 행위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그들이 거짓되고 사악한 선동으로 혁명 작업을 훼방하는 것을 막기 위해 그들을 사회생활에서 고립시키는 데 그칠 정도로 우리의 본성을 충분히 통제하고 있다.
노동자와 농민은 거침없이 앞으로 나아가고 있다. 그들은 제헌의회와 부르주아 체제를 뒤에 두고, 노동자의 목에 올가미를 조여 목을 조르겠노라 위협하는 체카 및 국가자본주의를 앞세운 공산당 독재를 뒤에 둔다.
막 일어난 변화는 마침내 노동 대중에게 정당에 의한 폭력적 강요 없이 자유로이 선출된 소비에트를 보장할 수 있게 하는 가능성을 제공한다. 이러한 변화는 또한 그들이 노동자, 농민, 지식인의 자유로운 연합으로 지방적 연방을 재편성할 수 있게끔 한다. 공산주의 독재의 경찰 기구는 마침내 깨어졌다.
우리는 제7호(3월 9일)의 두 가지 짧은 기사를 인용하겠다. 첫 번째는 격렬한 비판이다.
그들 라디오 방송에서 공산주의자들은 정치위원들의 찬탈과 압제에 맞서 진정한 소비에트 권력을 방어한 세 번째 혁명의 선동가들에게 어마어마한 오물을 쏟아부었다.
우리는 크론슈타트 사람들에게 이 사실을 숨긴 적이 없다. 우리는 「이즈베스티야」에 늘 이러한 중상모략 공격을 공개해 왔다. 우리는 두려울 것이 없기 때문이다. 시민은 반란이 어떻게, 누구에 의해 일어났는지 알고 있다. 노동자와 적군은 수비대에 장군도 백위대도 없다는 것을 알고 있다.
한편, 《임시 혁명위원회》는 페트로그라드에 라디오 메시지를 보내 공산주의자들이 (노동자, 수병, 그 가족들로) 가득 들어찬 감옥으로부터 인질과 정치범을 석방할 것을 요구하고 있다.
두 번째 방송에서는 크론슈타트로 이곳에서 어떤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에 대한 진실을 페트로그라드 노동 대중에게 알릴 수 있는 비당원 대표단을 파견할 것을 제안했다. 공산주의자들은 어떻게 했는가? 그들은 이 라디오 메시지를 노동자와 적군에게 숨겼다. “육군 원수” 트로츠키의 몇몇 부대가 우리 편에 서며 페트로그라드에서 신문을 가져왔다. 이 신문에는 우리 라디오 메시지에 대해 단 한 마디도 없었다.
그러나 표시가 된 카드를 가지고 놀면서 사람들에게 비밀이 없다고, 심지어 외교적 비밀도 없다고 외치는 이 사기꾼들은 오래 가지 못할 것이다. 들어라, 트로츠키, 사람들을 속이는 이상 무고한 이들을 무더기로 총살할 수는 있을 것이다. 하지만 진실을 총살할 수는 없다. 진실은 마침내 드러날 것이고, 그리하면 너와 너의 카자크들은 대가를 치러야 할 것이다.
두 번째 기사는 건설적인데, 노동조합에 문제에 관한 토론을 시작하기 위해 게재되었다.
공산주의 독재 아래 노동조합과 그 행정위원회 업무는 최소한으로 줄어들었다. “사회주의” 러시아에서 4년간 혁명적 조합주의 운동이 일어나는 동안, 우리 노동조합들은 계급 조직이 되지 못했다. 이는 그들의 잘못이 아니었다. 이는 실제로는 중앙집권적인 “공산주의적” 방식으로 대중을 가르치려던 집권당 정책의 결과였다.
최종적으로 노동조합의 업무는 기록과 아무 데도 쓸모없는 통신문 보관에 그치게 되었는데, 이런저런 노동조합의 조합원 수를 확정하고 각 조합원의 전문성, 당과의 관계 상황 등을 밝히는 것이 그 목적이었다. 협동조합적 성격의 경제 활동, 조합원들 문화 교육에 대해서는 아무런 조치가 이루어지지 않았다.
이는 오롯이 이해할 수 있다. 만일 노동조합이 상당한 독립적 활동에 관한 권리를 부여받았다면 공산주의자가 취한 모든 중앙집권적 건설체계는 붕괴를 피할 수 없었을 테고, 이는 정치위원들과 “정치 부문”의 무용성 입증으로 이어졌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실패들이 노동자들을 노동조합으로부터 분리했고, 마침내 노동조합을 노동계급의 참된 조합 활동을 방해하는 경찰의 보금자리로 탈바꿈했다.
공산당 독재가 타도되면 노동조합의 역할은 철저히 바뀌어야만 한다. 그들과 재선거를 거친 행정위원회는 국가의 경제적, 문화적 혁신을 위해 대중을 교육하는 막대하고 긴급한 임무를 수행해야 한다. 그들은 이 활동에 새로이 정화된 정신을 불러와야 한다. 그들은 사람들의 이익을 진정으로 대표하는 이가 되어야 한다.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은 노동계급에 의해 행정이 이루어지고, 새로 태어난 노동조합의 도움을 빌리지 않는 이상 강력해질 수 없다. 활동에 매진하자, 동지들! 모든 짐을 떨치고 새로운 노동조합을 건설하자. 여기 우리의 힘이 있다.
「이즈베스티야」 제8호(3월 10일)는 주로 공산주의자들의 크론슈타트 공격과 그 방어에 대한 군사적 사건에 지면을 할애했다.
제9호(3월 11일)에는 힘찬 “노동자, 농민에게 고함”이 실렸는데, 우리는 이 중 몇 가지 중요한 구절을 인용하도록 하겠다.
크론슈타트는 공산주의자들의 가증스러운 권력에 맞서 노동자, 농민의 해방을 위한 영웅적인 투쟁을 시작했다. … 지금 일어나고 있는 모든 일은 공산주의자들에 의해, 3년 동안 지속된 피로 물들고 파멸적인 작업에 의해 준비된 것이다. 우리가 전국으로부터 받은 편지는 공산주의자에 대한 불만과 저주로 가득 차 있다. 분노와 분개로 불타며 휴가에서 돌아온 우리 동지들은 전국에서 볼셰비키가 저지른 참상을 우리에게 들려주었다. 더구나 우리 역시 우리 주변에서 일어나는 모든 것을 보고 듣고 느꼈다. 광활한 러시아의 들판과 도시로부터 막대하고 비통한 고통의 외침이 우리에게 들려온다. 그것은 우리 마음을 분노로 가득 채우고 우리 손을 무장시킨다.
우리는 과거로 돌아가고 싶지 않다. 우리는 부르주아지의 하인도, 협상국의 용병도 아니다. 우리는 모든 노동자의 권력을 지지하지, 어느 한 정당의 제한 없고 전제적인 권력을 지지하지 않는다. 콜차크(Alexander Vasilyevich Kolchak)도, 데니킨도, 유데니치(Nikolai Nikolayevich Yudenich)도 크론슈타트에서 활동하고 있지 않다. 크론슈타트는 노동자 손에 있다. 크론슈타트의 일반 수병, 병사 및 노동자의 양식과 양심은 마침내 우리가 현재의 교착상태에서 벗어날 수 있는 언어와 경로를 찾아냈다. …
처음에 우리는 모든 것을 평화롭게 해결하기를 바랐다. 하지만 공산주의자들은 양보하려 하지 않았다. 그들은 니콜라이 2세보다 더한 전제군주로서 통치할 수 있게끔 전국을 피로 물들일 준비를 하며 권력에 매달렸다. 바로 이것이 러시아의 사악한 천재 트로츠키가 우리에 맞서 지금 우리 형제들을 배치하는 이유다. 수백 구의 시체가 이미 요새 주변 얼음을 덮고 있다. 나흘간 전투는 격렬했고, 대포가 고함을 치고, 형제들의 피가 흘렀다. … 나흘간 크론슈타트의 영웅들은 적의 모든 공격을 성공적으로 물리쳤다. 트로츠키는 매와 같이 우리 도시를 덮친다. 그러나 크론슈타트는 끝까지 버틸 것이다. 우리는 모두 항복하느니 죽을 각오가 되어 있다. …
노동자 동지들, 크론슈타트는 당신을 위해, 굶주린 이들을 위해, 추위로 얼어붙은 자들을 위해, 누더기를 걸친 채 피난처도 없는 이들을 위해 싸우고 있다. 볼셰비키가 권력을 유지하는 한 더 나은 삶이란 있을 수 없다.
당신은 이 모두를 받치고 있다. 무엇을 위해서인가? 공산주의자를 편안히 살게 하고 정치위원들을 살찌우게 하기 위해서인가? 아직도 그들을 믿고 있는가? 지노비예프는 페트로그라드 소비에트에 정부가 수백만 루블의 금을 여러 제품을 구매하기 위해 할당했다고 말하며 각 노동자가 50루블 어치씩 얻게 될 것이라고 산정했다. 노동자 동지들, 그것은 볼셰비키 도당이 당신들을 사고자 하는 두당 가격이다. …
농민 동지들, 볼셰비키 권력이 가장 많이 기만하고 착취한 것은 바로 여러분이다. 수 세기 동안 꿈꿔왔던 지주로부터 빼앗은 땅은 어디 있는가? 그것은 공산주의자들의 손에 있거나 솝호스sovkhoz로 부당하게 사용되었다. 그리고 당신이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그것을 보고 입맛을 다시는 것뿐이다. 그들은 빼앗을 수 있는 모든 것을 당신으로부터 빼앗아 갔다. 당신은 약탈로 완전히 파멸하게 되었다. 당신은 볼셰비키 농노제에 기진맥진해졌다. 그들은 당신이 새 주인의 뜻을 따르고, 굶주리고, 입을 열지 못하고, 가장 비참한 빈곤에 처하도록 순종을 강요했다.
동지들, 크론슈타트 사람들은 수천만 노동자와 농민이 그들의 호소에 응답하기를 바라며 반란의 깃발을 올렸다. 크론슈타트에서 갓 밝은 여명은 온 러시아의 밝은 태양으로 바뀌어야 한다. 크론슈타트에서 막 자리 잡은 혁신은 온 러시아를, 무엇보다도 페트로그라드를 소생시켜야 한다. 우리 적은 감옥을 노동자로 가득 채웠지만, 진실하고 용기 있는 많은 이가 여전히 자유롭다. 동지들! 공산주의 절대군주제에 맞서 투쟁을 위해 일어나라!
같은 호에는 다음과 같은 주석이 곁들여져 있다.
《임시 혁명위원회》와 「이즈베스티야」 편집자들이 공산주의자들의 눈사태 같은 탈당 선언에 휩싸여 있다고? … 이 광란의 비행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볼셰비키로부터 권력을 탈취한 노동자들이 가할 복수에 대한 두려움인가? 아니, 몇 번을 다시 말해도 아니다!
어떤 여성 노동자가 우리에게 탈당을 선언하러 왔을 때, 누군가 “이 도망자들”에 대해 언급했다. 그녀는 분개하며 “우리는 도망치는 것이 아닙니다”라고 대꾸했다. “우리 눈이 뜨였을 뿐입니다.”
제 권력을 지키려는 바보들의 이익을 위해 핀란드 만의 얼음을 붉게 물들였던 노동자의 피, 이 피가 사람들의 눈을 뜨게 했다. 아직 좁쌀 만한 정직함이라도 유지하고 있는 사람들은 모두 미친 듯 선동가 패거리를 떠나고 있다. 그 패거리에는 부정직한 자와 범죄자 이외에는 아무도 남아 있지 않다―모든 계급의 정치위원, 체카 요원, 굶주린 노동자와 농민을 희생하며 기름진 거물, 왕궁과 박물관 및 사람들이 피로 쟁취한 모든 것을 빼앗은 뒤 그 주머니를 금으로 가득 채운 이들 말이다.
이 모든 악당은 여전히 희망을 지니고 있다. 헛되도다! 차르주의와 경찰의 지배를 타도한 사람들은 공산주의 농노제의 사슬 역시 없앨 것이다. 노동 대중의 눈이 뜨였다.
「이즈베스티야」 제10호(3월 12일)는 이미 인용된 자료보다 더 두드러진 내용을 포함하고 있지는 않다. 그럼에도 우리는 “혁명의 단계”라는 제목의 기사에서 다음과 같은 몇 줄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새로운―공산주의―노예제가 뿌리내렸다. 농민은 “소비에트” 경제 아래 농노로 바뀌어버렸다. 노동자는 국영 공장에서 단순 임금 노동자가 되고 있다. 지식 노동자 계층은 거의 완전히 박멸되었다. 항의하는 이들은 체카의 감옥으로 던져졌다. 그리고 계속 활동하는 이들은 장벽에 가로막혀 줄지어 서 있을 뿐이었다. 러시아 전체가 거대한 감옥으로 바뀌었다.
발아래 짓밟힌 노동자의 권리를 위한 투쟁을 할 때, 누군가는 레닌이 위선자가 되지 않고 진실을 말하리라고 기대할 수도 있을 것이다. 노동자, 농민은 그들 마음속에서 레닌을 트로츠키와 지노비예프와는 다른 존재로 여긴다. 그들은 트로츠키와 지노비예프의 말은 한마디도 믿지 않았다. 하지만 레닌에 대한 그들의 신뢰는 아직 사라지지 않았다.
그러나 3월 8일 러시아 공산당 제10차 총회가 시작되었을 때, 레닌은 거기서 봉기를 일으킨 크론슈타트에 대해 모든 거짓말을 되풀이했다. 그는 운동의 구호가 “소비에트를 위한 것, 단 볼셰비키 독재에 반대하는”이라고 선언했으나 “백군 장군들 및 프티petit 부르주아적 아나키스트 분자들”을 들먹이는 데 주저하지 않았다.
이렇게 하여 레닌은 이러한 쓰레기 같은 말을 함으로써 스스로를 트로츠키, 지노비예프와 같은 곳으로 끌어들였다. 그는 운동의 토대가 당의 독재에 맞선 소비에트의 권력 쟁취를 위한 투쟁이었다고 인정했다. 하지만 그는 곤란스럽다는 듯 덧붙였다. “이는 또 다른 종류의 반혁명이다. 그것은 매우 위험하지만, 첫눈에 보기에 사소해 보일지라도 그들은 우리 정책이 필요로 한다고 여기는 수정사항으로 보인다.”
그가 곤란스러워하는 데는 이유가 있다. 혁명적 크론슈타트가 강타한 타격은 심각하고, 당 지도부는 독재정치의 끝이 다가왔다고 느끼고 있다. 레닌의 큰 곤란은 크론슈타트에 대한 그의 연설 내내 드러난다. “위험”이라는 단어가 끊임없이 반복된다. 예를 들어, 그는 말한다. “우리는 프롤레타리아를 단결시키는 대신 그들을 단결시키기 때문에 우리에게 매우 위험한 이 프티 부르주아적 위험을 끝내야만 한다. 우리에게는 최대한으로의 단결이 필요하다.” 그렇다, 공산주의자들의 우두머리는 벌벌 떨면서 “최대한으로의 단결”을 호소해야 하는 실정이다. 공산주의 독재와 당이 심각한 분열을 드러내고 있기 때문이다.
과연 레닌이 진실을 말하는 것이 가능했을까? 최근 노동조합에 관한 공산주의자 간 논의에서 그는 말했다. “이 모든 것이 지루해 죽을 것 같다. 이제 진절머리가 난다. 내 병이 아니더라도 나는 기꺼이 모든 것을 던져버리고 어디로든 도망치고 싶다.” 하지만 그의 동료들은 그가 도망치게 놔두지 않을 것이다. 그는 그들의 포로다. 그는 그들이 그러듯 심각한 중상모략을 해야만 한다.
동시에 당의 모든 정책은 크론슈타트의 행동에 방해받는데, 크론슈타트는 “통상通商의 자유”가 아닌 진정한 소비에트의 권력을 요구하기 때문이다.
같은 호에는 지노비예프에 대한 다음과 같은 거센 비난이 실려 있다.
3월 11일 페트로그라드 「프라브다」에서 우리는 지노비예프가 비당원 동지들에게 보낸 편지를 읽었다. 자신의 이익을 위하여 남에게 의지하는 이 뻔뻔스러운 작자는 유감스럽다는 듯 페트로그라드의 공장에서 공산주의자인 노동자가 점점 더 드물어지고 있다고 말한다. 그러면서 그는 “공산주의자는 무슨 수를 써서라도 정직한 비당원 남녀 노동자를 소비에트의 대의로 끌어당겨야 한다”고 결론짓는다.
공장 내 공산주의자 수가 매우 감소함은 당연한 일이다. 모두가 배신자의 당을 떠나고 있다. 체카 요원들이 비당원 노동자들을 길들이고자 온갖 방법으로 노력하는 것―특히 그들을 공산주의자들과의 협력의 늪으로 끌어들이려 하는 것도 당연하다.
이 선동가(지노비예프)는 “그러므로 우리는 비당원 노동자들을 체계적으로 우리의 작업에 끌어들이기 위해 질서정연하고 체계적인 방식으로 시작하고 있다”고 쓰고 있다. 하지만 어떤 정직한 노동자가 도둑, 정치위원, 체카 요원 패거리에 가담하겠는가? 노동자는 이 경찰들이 노동자의 불만을 억누르고, 후에 노동자를 더욱 악독하게 짓밟기 위해 일부 양보와 인정을 통해 노동자의 경계심을 잠재우려 하고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노동자는 지금 비당원 동지들이 크론슈타트에서 공산주의자들에게 어떻게 다뤄지고 있는지 보고 있다.
“최근,” 지노비예프는 낑낑대며 말한다. “우리는 발트해 인근 공장과 큰 오해가 있었다. 그러나 만약 이 작업이 정해진 계획을 실현해 다른 이들의 모범이 된다면 그들 중 많은 노동자의 잘못은 용서받을 것이다.”
여기서 선동가는 자신의 부정을 알렸는데, 불과 며칠 전만 해도 공산주의자들은 라디오를 통해 크론슈타트 노동자들에게 페트로그라드의 모든 것이 순조로우며 발트해 인근 작업도 정상적으로 진행되고 있다고 확언했다. 그것이 이제는, 한마디로 말해 “큰 오해” 운운하고 다른 공장들에 대한 “모범을 만들어 달라”는 제의를 한다. 다른 공장에서도 무슨 일이 있는가? 지노비예프는 그때 우리를 속인 것인가, 아니면 지금 속이고 있는 것인가?
발트해 노동자의 호의를 얻기 위해 공산주의자들은 세상의 모든 좋은 것들을 약속한다. “우리는 현재 가장 중요한 위치인 식량, 공급, 연료, 기관 통제 등에 노동자를 배치할 것이다. 우리는 페트로그라드 노동자가 이 어려운 시기를 극복할 수 있도록 비당원 노동자에게 그들 대표단의 중개를 통해 금으로 외국 제품을 구입할 때 가장 적극적인 역할을 다할 수단을 제공할 것이다. 우리는 우리 기관의 관료주의에 맞서는 활발한 캠페인을 시작할 것이다. 우리는 서로를 질책하고 비판할 수도 있으나 근본적 문제에서는 항상 합의에 도달할 것이다.” 이런 식으로 오늘 지노비예프는 부드럽고 달콤하게 노래한다. 그는 노동자를 잠재우고 크론슈타트의 형제들에게 쏘아진 포탄으로부터 주의를 돌리게끔 하기 위해 꿀 발린 말로 말한다.
왜 공산주의자들은 지금까지 이렇게 말하지 않았는가? 왜 그들은 거의 4년이나 되는 통치 기간 중 이런 일을 한 적이 없는가? 그 모두는 매우 간단하다. 그들은 이전에 약속했던 것들을 이룰 수 없었고, 지금도 이룰 수 없다. 우리는 그들의 약속, 심지어 그들이 계약이라 부르는 종이 쪼가리의 가치를 알고 있다.
아니, 세상 어떤 금을 위해서든 노동자는 자신의 자유와 형제들의 피를 팔아넘기지 않을 것이다. 그러니 지노비예프에게 “합의”라는 공허한 계획을 포기하도록 하라. 지금 크론슈타트의 형제들이 진정한 자유를 지키기 위해 일어섰으니 노동자들이 공산주의자들에게 줄 수 있는 대답은 단 한 가지뿐이다. 선동가들과 교수형 집행인들이여, 아직 도망칠 수 있을 때 즉시 권력을 포기하라! 거짓말로 스스로를 속이지 말라.
같은 호에는 《임시 혁명위원회》의 호소가 실려 있는데, 여기서 우리는 다음 구절을 인용한다.
권력을 장악하고, 공산당은 당신에게 안녕을 약속했다.
하지만 우리는 무엇을 보고 있는가?
3년 전, 우리는 이런 이야기를 들었다. “여러분이 원할 때마다 대표를 소환하고 소비에트를 재선출할 수 있다.”
그러나 우리가 크론슈타트에서 당의 압력에서 자유로울 수 있는 소비에트를 재선출하고자 했을 때, 새로운 트레포프 트로츠키는 정확히 다음과 같은 명령을 내렸다. “총알을 아끼지 말라!”
배반이다!
우리는 또한 우리 장군이라는 자들이 누구인지, 누가 이 운동을 이끌고 있는지 페트로그라드 노동자들이 알 수 있도록 대표단을 파견하게끔 허가해줄 것을 요청했다.
이 대표단은 오지 못했다. 공산주의자들은 대표단이 진실을 알게 된 뒤 여러분에게 전할 것을 두려워한다.
반란군의 마지막 호 「이즈베스티야」인 제13호(3월 15일)에는 다음과 같은 사설이 실려 있다.
《레닌 트로츠키 회사》라는 오래된 회사는 잘 운영되고 있다. 집권 중인 공산당의 범죄적 절대주의 정책은 러시아를 빈곤과 파멸의 구렁텅이로 몰아넣었다.
그 뒤 그들이 후퇴할 시간이 되었음이 분명하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노동자가 흘린 눈물과 피가 아직 부족한 것 같다. 혁명적 크론슈타트가 공산주의자들에 멸시당하고 짓밟히는 노동자의 권리를 위해 역사적 투쟁을 대담하게 감행하는 그 순간, 까마귀 떼는 제10차 당 총회를 개최하기로 했다. 그 총회는 동족상잔의 작업을 더욱 성공적으로 계속하기 위한 수단을 강구하고 있다.
공산주의자들의 뻔뻔함은 완벽에 이르렀다. 그들은 “통상적通商的 양보”에 대해 매우 평온하게 말하고 있으며, 레닌은 더할 나위 없이 간단하게 다음과 같이 선언한다. “우리는 양보적 입장을 취하기 시작했다. 이 사업의 성패는 우리에게 달려 있지 않다. 그러나 우리는 최선을 다해야만 한다.” 그리고 그는 이어 말하기 위해 볼셰비키가 러시아를 상당히 혼란에 빠뜨렸다는 것을 인정한다. “우리가 다른 나라를 경제적으로 따라잡고 싶다면 외국 기술을 사용하지 않고서는 국가를 재건할 수 없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기계뿐만 아니라 국내에도 풍부한 석탄을 외국으로부터 사들일 수밖에 없었다. 우리는 여전히 소비재를 계속 유통하고 농업 경제를 위해 필요한 물품을 얻기 위해 새로운 희생을 치러야 할 것이다.”
그렇다면 그들이 노동자를 공장 노예로, 농민을 솝호스의 농노로 바꾸어버린 이름난 경제적 업적은 어디에 있는가?
하지만 이러고서도 끝이 아니라고? … “만일 우리가 훌륭한 농업 경제와 거대 산업을 재건하는 데 성공한다면,” 레닌은 계속 말한다. “이것은 오직 모든 생산자에게 대가 없는 새로운 희생을 강요함으로써 이루어질 것이다.” 이것이 바로 공산주의적 절대주의의 멍에를 기꺼이 짊어지고자 하는 이들에게 볼셰비키 우두머리가 희망하도록 하는 “안녕”이다. 그는 잔인하게 옳았다. 제8차 소비에트 총회에서 이렇게 선언한 농민의 말은 잔인할 정도로 옳았다. “모든 것이 훌륭하게 진행되고 있다. … 다만, 땅이 우리 것이라는데 빵은 당신들 것이다. 물이 우리 것이라는데 물고기는 당신들 것이다. 숲이 우리 것이라는데 나무는 당신들 것이다.”
레닌은 “소규모 토지 소유주에게 약간의 편의를 제공하고 자유 경제 영역을 다소간 확대하겠다”고 약속했다. 선한 늙은 주인처럼, 그는 후에 당 독재가 더욱 악독하게, 더 열정적으로 노동자의 목을 조르기 위해 몇몇 편의를 내밀고 있다. 그것은 이 입장을 통해 쉬이 파악할 수 있다. “국가가 황폐화되고 끔찍한 빈곤에 빠져 있기에 우리는 분명 강제를 피할 수 없다.”
… 따라서 레닌은 최대한의 통상적 양보와 그에 대한 세금이라는 건설과업을 염두에 두고 있다.
같은 호에는 다음과 같은 유익한 요약이 실려 있다.
“동지들, 우리는 새롭고 아름다운 삶을 건설할 것이다”라고 공산주의자들은 말을 하고 글을 썼다. “우리는 폭력의 세계를 부수고 아름다움으로 가득 찬 새 사회주의 세계를 건설할 것이다.” 이렇듯 그들은 사람들에게 노래했다. 현실은 어떠한지 살펴보자.
가장 좋은 집, 가장 좋은 아파트는 모두 공산주의 기관의 사무실로 징발되었다. 따라서 관료들만이 편안하고, 쾌적하고, 널찍한 조건으로 지내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거주할 수 있는 숙소 수는 줄어들었고, 노동자들은 이전과 똑같은 환경에 머물러 있다. 그들은 전에 없을 만큼 최악의 환경에서 부대끼며 살아가고 있다.
집들은 수리되지 않아 낡아빠졌다. 난방은 작동하지 않는다. 깨진 창유리는 교체되지 않았다. 지붕에는 물이 새는 구멍으로 가득하다. 담장은 무너졌다. 굴뚝은 군데군데 부서졌다. 변기가 고장 나 내용물이 아파트 곳곳으로 흘러넘쳐서 시민들은 마당이나 이웃집에서 볼일을 봐야만 한다. 층계는 불이 들어오지 않으며 쓰레기로 가득 차 있다. 마당에는 분뇨가 쌓여 있는데, 개구멍, 야외 화장실, 배수로, 하수구가 청소되거나 비워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거리는 불결하다. 보도는 절대 수리되지 않으며, 고르지 않고 미끄럽다. 거리를 걷는 것은 위험하다.
집을 얻기 위해서는 주택국局에서 영향력을 행사해야만 한다. 그것 없이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 오직 기관과 친하게 지내는 사람들만이 제대로 된 아파트를 가지고 있다.
식량은 더욱 심각하다. 무책임하고 무지한 관료들은 어마어마한 생산품을 망쳐 놓았다. 유통되는 감자는 늘 얼어 있다. 봄과 여름에는 고기가 늘 썩어 있다. 예전 같으면 지금 시민들이 “아름다운 새 삶의 건설자들”로부터 얻는 것을 돼지에게도 먹이지 않았을 것이다. “소비에트 서민 물고기”인 청어가 오랫동안 이 상황을 버티게끔 해주었으나 그조차도 점점 부족해지고 있다. 소비에트의 상점들은, 사장이 온갖 잡동사니를 쌓아놓아도 노동자 노예들은 그에 대해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던, 불행했던 기억 속 오래된 공장의 상점들보다 더욱 나쁘다.
우리의 지배자들은 가정생활을 파괴하기 위해 집단 식당을 발명했다. 그 결과 어떻게 되었는가? 음식은 전혀 먹을 만한 것이 아니다. 농산물은 시민들에게 도달하기도 전에 다양한 방법으로 도난당하고, 시민들은 남은 것만 얻을 수 있다. 어린이의 영양상태는 조금 나아지기는 했으나 여전히 몹시 부족하다. 우유가 특히 부족하다. 공산주의자들은 그들의 솝호스(국가 농장)를 위해 농민으로부터 모든 젖소를 징발했다. 더군다나 이 가축 중 절반은 목적지에 도착하기도 전에 죽고, 살아남은 소의 우유는 우선 지배자들에게, 그런 다음 공무원에게 간다. 그 뒤 남은 것만이 어린이에게 돌아간다.
하지만 가장 구하기 어려운 것은 옷과 신발이다. 사람들은 중고 양복을 입거나 교환한다. 거의 아무것도 분배되지 않는다. 예컨대 노동조합 중 한 곳이 현재 단추를 분배하고 있다―한 사람당 단추 한 개 반씩 말이다. 우스꽝스럽지 않은가? 신발은 얻을 수조차 없다.
공산주의 낙원으로 가는 길은 아름답다. 그러나 맨발로도 건너갈 수 있을까?
모든 필수품의 분배에 어마어마한 균열이 있다. 소위 “협동조합”의 고객들과 지배자들은 모든 것을 소유하고 있다. 그들은 그들만의 식당과 특별 배급품도 가지고 있다. 그들은 또한 정치위원의 요구대로 제품을 분배하는 “상품국局”도 좌지우지하고 있다.
우리는 마침내 이 “코뮌”이 생산적인 작업을 망치고 완전히 사기를 떨어뜨렸다는 것을 깨달았다. 작업에 대한 모든 열망, 작업에 대한 모든 관심이 사라졌다. 제화공, 재단사, 배관공 등이 모두 작업을 그만두고 흩어졌다. 그들은 경비원, 심부름꾼 등으로 복무하고 있다. 볼셰비키가 건설하려던 낙원이 바로 그런 것이다.
구舊체제를 대신해 독재, 오만, 편파, 도둑질, 투기의 새 체제가 들어섰는데, 이는 모든 빵 한 조각, 단추 한 개에 이르기까지 당국에 손을 내밀어야만 하는 끔찍한 체제, 자기 자신의 노동력을 처분할 수 없는 체제, 노예제와 타락의 체제다.
10월혁명을 일으키는 과정에서, 수병과 적군, 노동자, 농민은 소비에트의 권력을 위해, 노동자의 공화국 건설을 위해 그들의 피를 쏟았다.
공산당은 대중의 열망에 세밀하게 주의를 기울였다. 노동자의 열정을 자극하는 매력적인 구호를 깃발에 새긴 후, 노동자를 투쟁 속으로 휩쓸고 들어가 볼셰비키만이 건설할 수 있는 아름다운 사회주의 왕국으로 이끌겠노라 약속했다.
자연스레 무한한 기쁨이 노동자와 농민을 사로잡았다. 그들은 “지주와 자본가의 지배 아래 우리가 견뎌 온 노예제는 마침내 신화가 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들판, 공장, 작업장에 자유로운 노동의 시대가 온 것 같았다. 마치 권력이 노동자의 손에 넘어가는 듯했다.
능수능란한 프로파간다로 노동자 계급의 자녀들은 당의 대열에 합류하고 엄격한 규율 아래 종속되었다. 그런 다음 충분히 강해졌다고 느낀 공산주의자들은 우선 다른 경향의 사회주의자들을 권력으로부터 점차 제거하고, 그 뒤 노동자와 농민을 여러 국가 직책에서 몰아내면서 노동자, 농민의 이름으로 계속 통치했다.
이런 식으로 공산주의자들은 자의적 권력의 모든 폭압과 함께 정치위원을 통한 통치를 만들어냈다. 그들은 모든 대의와 노동자의 의지에 반해 자유로운 노동에 기반한 사회를 건설하는 대신 완고하게 노예제와 국가사회주의 건설을 시작했다.
이른바 “노동자의 통제”에도 불구하고 완전히 산업이 쇠퇴했을 때, 볼셰비키는 노동과 공장의 국유화를 확립했다. 노동자는 자본가의 노예에서 국영기업의 노예로 탈바꿈했다. 이것도 곧 더 이상 충분하지 않았고, 그들은 테일러 시스템[프레드릭 윈슬로 테일러(Frederick Winslow Taylor)가 제창한 관리법으로, 19세기 말 기업 규모 확대와 노사 쟁의 증가에 따라 노동생산성 향상이 새로운 문제로 대두하자 작업의 동작을 분석한 뒤 불필요한 움직임을 제거해 표준 동작을 정하고, 이를 통해 작업 시간을 산출, 표준 작업량 달성을 위한 성과급 제도 도입 등을 일컫는다-역자 주] 적용을 계획했다.
농민은 모두 공공의 적으로 선포되었으며 “쿨라크kulak”로 여겨졌다. 공산주의자들은 그런 다음 매우 기획적으로 농민을 몰락시키고 소비에트의 착취로 대체하기 시작했는데, 즉 새로운 농업 부당 이득자의 사유지, 국가를 확립했다. 그것이 바로 농민들이 그들이 바라던 해방된 땅에서 자유로운 노동 대신 볼셰비키식 사회주의로부터 얻은 것이다. 거의 전적으로 징발된 빵과 가축을 대신하여 그들은 체카의 습격과 집단 총살을 받았다. 노동자 국가의 훌륭한 교환 시스템―그것은 빵을 주면 총알과 총검을 받는 것이다!
시민들의 삶은 당국의 규칙에 따라 규제되어 죽을 만큼 단조롭고 진부해졌다. 자유로운 노동과 개인의 자유로운 계발로 활기가 넘치는 삶 대신, 전례가 없고 믿을 수 없는 노예제도가 탄생했다. 모든 독립적인 사상과 범죄적 지배자들의 행위에 대한 비판은 범죄가 되었고, 투옥으로, 때로는 사형으로 단죄되었다. 실로 인류에게 불명예인 사형제도는 “사회주의 조국”에서 확장되었다.
이것이 바로 공산당 독재가 우리에게 가져다준 아름다운 사회주의 왕국이다. 우리는 당국과 그들 무오류의 정치위원들이 지시하는 대로 유순히 선출하는 소비에트 공무원과 더불어 국가사회주의를 받아들였다. “일하지 않는 자 먹지도 말라”는 구호는 이 아름다운 “소비에트” 정권 아래서 “모든 것을 정치위원에게”로 바뀌었다. 그리하여 노동자, 농민, 그리고 지식 노동자는 감옥에서 그들에게 맡겨진 임무를 수행하기만 하면 된다.
이는 더 이상 견딜 수 없게 되었다. 혁명적 크론슈타트는 감옥의 쇠사슬과 빗장을 처음으로 깨부쉈다. 그들은 생산자 스스로가 노동 생산물의 주인이 되어 원하는 대로 처분할 수 있는 노동자의 진정한 소비에트 공화국을 위해 싸운다.
이 기록을 마무리하며, 우리는 반란군 「이즈베스티야」 발행물 대부분이 그들의 요구 및 감정을 명확히 표현한 표제를 지니고 있음을 강조한다. 몇 가지 예시를 들기로 하겠다.
제5부.최종장 : 독립의 종언
비극적인 마지막 활동에 대해 논의하는 것이 우리에게 남아 있다―크론슈타트에의 공격, 도시의 영웅적 방어, 최종 함락이.
3월 7일 「이즈베스티야」 제5호에는 정보를 얻기 위해 페트로그라드에서 크론슈타트로 대표단을 파견하는 것과 관련하여 결정된 협상의 세부사항을 찾아볼 수 있다.
「이즈베스티야」 보도에 따르면 “《임시 혁명위원회》는 페트로그라드로부터 다음과 같은 무선 전보를 받았다. ‘페트로그라드에서 크론슈타트로 비당원과 몇몇 당원 가운데 선출된 소비에트의 대표단을 파견해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를 알 수 있을지 라디오를 통해 페트로그라드에게 알려달라.’
《임시 혁명위원회》는 즉각 라디오로 회신했다. ‘페트로그라드 소비에트에의 무선 전보. 페트로그라드 소비에트로부터 수신한 무선 전보는 “페트로그라드에서 크론슈타트로 비당원과 몇몇 당원 가운데 선출된 대표단을 파견해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를 알 수 있을지”를 문의했으나, 우리는 여러분 비당원들의 독립성을 확신할 수 없음을 알리며, 우리 대표단이 참관한 가운데 공장, 적군 단위, 수병으로부터 비당원 대표단을 선출할 것을 제안한다. 여러분은 거기에 15퍼센트의 공산주의자를 추가할 수 있다. 크론슈타트에서 페트로그라드로 대표단을 파견하는 일자 및 페트로그라드에서 크론슈타트로 대표단을 파견하는 일자를 3월 6일 18시까지 회신해주기를 요청한다. 만약 이 시각까지 회신이 불가능한 경우, 별도 일자와 지연 사유를 명시해 줄 것을 바란다. 크론슈타트 대표단의 복귀는 보장되어야 한다.
《임시 혁명위원회》”
이러한 협상에도 불구하고 페트로그라드에서는 정부가 크론슈타트에 대한 군사 작전을 준비하고 있다는 소문이 계속해서 퍼지고 있었다. 하지만 사람들은 그것을 믿지 않았다. 그것은 너무나도 범죄적이며, 너무나도 있을 수 없는 일처럼 보였다.
페트로그라드 노동자들은 크론슈타트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전혀 알지 못했다. 유일한 정보는 공산주의 언론이 제공한 것이었으며, 이 공표는 항상 “크론슈타트에서 반혁명적 반란을 조직한 차르주의 장군 코즐롭스키”에 대해 말하고 있었다. 사람들은 어떠한 태도를 채택해야 할지를 페트로그라드 소비에트에 의해 소집된 회의를 걱정스레 기다렸다. 소비에트는 3월 4일 소집되었다. 소집된 구성원만이 이 모임에 참여할 수 있었는데, 이들은 주로 공산주의자였다.
여기에 이 회의에 참석을 허가받은 아나키스트 알렉산더 버크만(Alexander Berkman)은 크론슈타트 반란에 대해 그의 뛰어난 조사에서 다음과 같이 이를 설명했는데, 이는 우리가 우리 보고에서 사용한 것과 같은 확실한 출처를 기반으로 한다.[14]
“페트로그라드 소비에트 위원장으로서, 지노비예프는 개회를 선언하고 크론슈타트의 상황에 대해 긴 연설을 했다. 나는 지노비예프의 관점에 상당히 동의해 이 회의에 참석했다는 것을 인정한다. 이 회의는 크론슈타트에서의 반혁명 기도 ‘징후’를 이유로 소집되었다는 점에 말이다. 하지만 지노비예프의 연설은 수병들에 대한 공산주의자들의 비난이 진실의 그림자조차 없이 순전히 지어낸 것이라는 것을 내게 확신시키기에 충분했다. 나는 지노비예프가 여러 상황에서 연설하는 것을 들은 적이 있다. 일단 그의 전제가 받아들여지기만 하면, 그는 설득 면에서 재능을 지니고 있었다. 그러나 이 회의에서 그의 태도, 주장, 어조, 태도―모든 것이 그의 주장의 허위와 위선을 반영했다. 그가 느끼는 양심의 가책이 내게는 명백히 보였다.
크론슈타트에 대한 유일한 ‘증거’는 잘 알려진 3월 1일의 결의안이었다. 그들의 요구는 정당하고 심지어 온건했다. 치명적인 조치들은 이 문서와 수병들에 대한 칼리닌의 격렬하고 히스테리에 가까운 비난에 기초해 결정되었다. 예브도키모프(Yefim Georgievich Yevdokimov)―지노비예프의 오른팔―가 미리 준비되고 제출한 크론슈타트에 대한 결의안이 채택되었다. 대표들은 어마어마한 편협함과 피에 굶주린 듯한 난폭함으로 지나치게 흥분했다. 이 호전적 결의안의 채택은 페트로그라드 공장의 몇몇 대표자들과 수병 대표자들의 항의 및 큰 소란 속에 이루어졌다. 이 결의안은 크론슈타트를 반혁명적 선동으로 유죄 선언하고 즉각적인 항복을 요구했다. 이는 선전포고나 마찬가지였다.
많은 공산주의자가 그 결의안이 이행될 것이라고 믿지 않았다. 트로츠키가 과거 크론슈타트 수병들에게 부여했던 묘사처럼, ‘러시아 혁명의 긍지이자 영광’을 무력으로 공격하는 것은 말도 안 되는 일처럼 보였다. 친밀한 친구들 가운데 분별 있는 공산주의자 중 상당수는 그런 유혈사태가 벌어진다면 당을 떠나겠노라 말했다.”
다음날인 3월 5일, 트로츠키는 크론슈타트에 최후통첩을 공표했다. 그것은 라디오를 통해 크론슈타트 사람들에게 전달되었고, 대표단 파견에 관한 두 개의 무선 전보로 3월 7일 「이즈베스티야」의 같은 호에 게재되었다. 당연히 대표단 파견 문제에 대한 모든 협상은 즉시 중단되었다.
트로츠키의 최후통첩 본문은 다음과 같다.
“노동자, 농민의 정부는 크론슈타트와 반란을 일으킨 함선이 즉시 소비에트 공화국 당국에 항복할 것을 명령한다. 따라서 나는 사회주의 조국에 맞서 손을 든 모든 이가 지체 없이 무기를 내려놓을 것을 명령한다. 저항하는 자는 무장 해제되어 소비에트 당국으로 인도될 것이다. 체포된 정치위원과 다른 정부 대리인은 그 자리에서 석방되어야 한다. 무조건 항복하는 자만이 소비에트 공화국의 자비를 기대할 수 있을 것이다.
나는 동시에 반란 진압과 무력을 통한 수병 진압에 대비할 것을 명령한다. 평화적인 사람들이 입을지도 모르는 부상에 대한 모든 책임은 전적으로 백위대 폭도들의 머리에 달려있다. 이는 마지막 경고다. 서명: 《공화국 혁명 군사평의회》 의장 트로츠키, 총사령관 카메네프”
이 최후통첩에는 역사적 위협이 담긴 트로츠키의 명령이 뒤따랐다. “나는 너희를 사냥새처럼 쏘아버릴 것이다.”
페트로그라드에서 그때까지도 자유로웠던 몇몇 아나키스트는 볼셰비키가 크론슈타트에 대한 공격을 포기하도록 설득하고자 마지막 노력을 기울였다. 그들은 러시아의 혁명적 엘리트, 크론슈타트의 수병과 노동자에게 닥친 학살을 막기 위해 최후의 노력을 하는 것이 혁명에 대한 그들의 의무라고 여겼다. 이들은 3월 5일 《국방위원회》에 항의문[15]을 보내 크론슈타트의 평화적 의도와 정당한 요구를 강조하고, 공산주의자들에게 수병들의 영웅적인 혁명적 역할을 상기시키며 동지와 혁명가에 걸맞은 방식으로 갈등을 해결하려는 방법을 제시했다. 문제의 문서는 다음과 같다.
“페트로그라드 《노동 및 국방위원회》 및 지노비예프 위원장 귀중
지금 침묵을 지키는 것은 불가능하며 심지어 범죄적이기까지 합니다. 이제 막 일어난 사건들은 아나키스트로서 우리가 솔직하게 발언하고 현 상황에 대해 우리의 태도를 명확하게 제시하게끔 합니다.
노동자와 수병 사이의 불만과 동요의 마음은 가장 진중한 관심을 요하는 사실의 결과입니다. 추위와 굶주림은 불만을 야기했으며, 토론과 비판은 거의 불가능했기에 노동자와 수병은 공식적으로 불만을 표명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백위대 패거리는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 이 불만을 이용하고 싶어 하고, 이용할 수도 있습니다. 수병 뒤에 숨어, 그들은 제헌의회, 자유 무역 및 기타 유사한 이익들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우리 아나키스트는 오랫동안 이러한 요구의 근본적인 오류를 폭로해 왔으며, 우리는 모든 사람 앞에서 우리가 사회혁명의 모든 벗과 함께, 그리고 볼셰비키의 편에서 반혁명 시도에 맞서 손잡고 싸울 것을 선언합니다.
우리는 소비에트 정부와 노동자, 수병 간의 갈등이 무기가 아니라 동지애적 정신으로, 혁명적이고 형제애적인 협정을 통해 청산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현 상황에서 소비에트 정부가 유혈사태에 의존하는 것은 노동자들을 위협할 뿐, 달래지 못할 것입니다. 오히려 이는 위험을 증가하고 협상국과 반혁명분자의 과업을 강화하는 역할만 할 것입니다.
더 중요한 것은, 노동자, 농민의 정부가 노동자, 농민에 대해 무력을 사용한다면 국제 혁명 운동에 참혹한 반향을 불러일으킬 것이라는 점입니다. 그것은 사회혁명에 막대한 손상을 입힐 것입니다. 볼셰비키 동지들, 너무 늦기 전에 되돌아보십시오! 여러분은 돌이킬 수 없는 조치를 취하려 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여러분에게 다음과 같이 제안합니다. 아나키스트를 포함해 다섯 명으로 구성된 위원회 선출. 이 위원회는 평화적인 방법으로 갈등을 해결하기 위해 크론슈타트로 갈 것입니다. 현 상황에서는 이것이 가장 급진적인 해결책입니다. 이는 국제적으로 혁명적 중요성을 지니게 될 것입니다.
서명 : 알렉산더 버크만, 엠마 골드만, 페르쿠스, 페트롭스키
1921년 3월 5일, 페트로그라드.”
편지를 보낸 것에 대해 버크만은 다음과 같이 적었다. “지노비예프는 그 문서가 《국방위원회》에 제출될 것이라는 통보를 받았다. 그는 그것을 가지고 오게끔 사적으로 대리인을 보냈다. 나는 이 호소문이 위원회에서 논의되었는지는 모르겠다. 확실한 것은 그들이 그에 대해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3월 6일, 트로츠키는 공격을 위한 준비를 마쳤다. 가장 충성스러운 사단들인 쿠르산티 연대, 체카 분대, 공산주의자로 구성된 군 부대가 세스트로레츠크Sestroretsk, 리시 노스, 크로스나야 고르카 요새뿐만 아니라 인근 요새화된 지점에 배치되었다. 최고의 군사 기술자들이 크론슈타트 봉쇄와 공격 계획을 세우기 위해 작전 지역으로 파견되었다. 투하쳅스키가 부대 총사령관으로 임명되었다.
3월 7일 오후 6시 45분, 세스트로레츠크, 리시 노스, 크라스나야 고르카의 포병대가 크론슈타트를 포격하기 시작했다. 비행기에서 포탄과 폭탄, 또한 오만한 선언문들이 눈사태만큼이나 어마어마하게 도시로 투하되었다. 크라스나야 고르카로 파견된 “까마귀 떼”―트로츠키, 투하쳅스키, 디벤코(Pavel Efimovich Dybenko) 등―가 맹렬한 공격을 가해 포위된 요새를 점령하라고 거듭 명령을 내렸다. 이 시도들은 헛수고였다. 가장 맹렬한 공격이 용맹스러운 방어자들에 의해 격퇴되었다. 폭격은 도시에 전혀 공황을 불러일으키지 않았다. 오히려 그것은 사람들의 분노를 키우고 끝까지 저항하겠다는 의지를 다지게 했다.
3월 8일, 「이즈베스티야」 제6호는 처음으로 새로운 상황을 보도했다. 그것은 ‘트로츠키의 첫 총성은 공산주의자들의 조난 신호다’라는 제목으로 대서특필되었으며, 그 아래로 다음과 같은 첫 번째 공식 발표가 실렸다.
오후 6시 45분 세스트로레츠크와 리시 노스의 공산주의 포병대가 크론슈타트 요새에 첫 포격을 가했다. 요새는 도전에 응했고, 곧 포병대를 침묵시켰다. 이후 크라스나야 고르카에서 발포가 시작되었다. 전함 세바스토폴이 이에 훌륭하게 반격했다. 간헐적 총성이 이어지고 있다. 우리 측에서는 적군 두 명이 부상을 입고 병원으로 이송되었다. 물질적 피해는 없다.
1921년 3월 7일, 크론슈타트
이 공식 발표 뒤로 우리가 여기 다시 옮긴 것과 같은 메모가 이어졌다.
그들은 크론슈타트를 포격하기 시작했다. 우리는 준비되었다! 우리의 힘을 시험해보자.
그들은 행동을 서두르고 있다. 그들은 공산주의자들의 모든 거짓말에도 불구하고 러시아 노동자들이 3년간의 노예 생활 끝에 혁명적 크론슈타트가 시작한 해방 과업의 위대함을 인식하기 시작했다는 것을 알고 있다.
교수형 집행관들은 불안해하고 있다. 그들 끔찍한 광기의 희생자인 소비에트 러시아는 그들의 감옥에서 탈출하고 있다. 그리고 동시에 그들은 노동자들에 대한 지배를 포기하도록 강요받고 있다.
공산주의 정부는 조난 신호를 보내고 있다. 자유 크론슈타트가 여드레나 버티고 있음은 그들의 무력함을 증명한다. 조금만 더 있으면 우리 영광스러운 함선과 요새의 합당한 반격이 “모든 권력을 당이 아닌 소비에트로!”의 기치를 올린 혁명적 크론슈타트와의 전투를 받아들일 수밖에 없게 하고 소비에트 해적의 함선을 침몰시킬 것이다.
그 다음에는 호소문이 이어졌다.
《임시 혁명위원회》는 오늘 다음과 같은 무선 전보를 발송했다.
“모두에게, 모두에게, 모두에게.
첫 번째 포탄이 막 발사되었다. 노동자의 피로 얼룩진 ‘육군 원수’ 트로츠키는 공산주의 독재에 맞서 소비에트의 진정한 권력을 다시 세우고자 일어선 혁명적 크론슈타트에 첫 발포를 했다.
우리―크론슈타트의 적군, 수병, 노동자들―는 피 한 방울 흘리지 않고 공산주의의 멍에로부터 해방되었다. 우리는 우리 가운데 있던 그들 당 사람들의 목숨을 살려주었다. 그러나 그들은 이제 대포로 위협해 우리에게 다시 그들의 권력을 강제하고 싶어 한다.
우리는 어떠한 유혈사태도 원하지 않고, 크론슈타트가 소비에트의 권력을 위해 싸운다는 것을 스스로 확인할 수 있도록 페트로그라드 프롤레타리아 비당원 대표단을 이리로 보내줄 것을 요청했다. 하지만 공산주의자들은 페트로그라드 노동자들에게 우리의 요구를 숨기고 포격을 개시했는데―이는 노동 대중의 요구에 대한 거짓 노동자, 농민 정부의 상습적인 조치다.
소비에트 권력의 방어자인 우리가 사회혁명 쟁취를 수호하고 있다는 것을 전 세계 노동자가 알았더라면! 우리는 크론슈타트의 폐허 속에서 노동 대중의 정당한 대의를 위해 싸워 쟁취하느냐 죽느냐로 나아갈 것이다.
전 세계 노동자가 우리를 판단할 것이다. 무고한 이들의 피가 권력에 취해 정신 나간 멍청이 공산주의자들 머리 위로 쏟아질 것이다.
소비에트 권력 만세.
《임시 혁명위원회》”
우리는 여기에 감동적인 세부 사항을 더할 수 있다. 3월 7일은 소비에트 러시아의 노동절이었다. 크론슈타트는 포위되고 공격받았으나 이를 잊지 않았다. 끊임없는 포격 속에서도 수병들은 세계 노동자에게 축하의 말을 송출했다. 이 메시지는 같은 호에 기사화되었다.
노동절, 이날은 공통된 축일이다. 크론슈타트의 우리―노동 대중의 적인 공산주의자들이 쏜 대포와 폭발하는 포탄 소음 속에 있는―는 전 세계 노동자에게 형제애로 인사, 혁명적이며 자유로운 적색 크론슈타트의 인사를 전한다. … 우리는 당신이 곧 모든 형태의 폭력과 억압으로부터 자유롭게 해방되기를 바란다.
자유로운 혁명적 노동자 만세! 세계 사회 혁명 만세!
《임시 혁명위원회》
같은 호에는 다음과 같은 성명도 실려 있었다.
3월 7일 어제, 노동자들의 적인 공산주의자들이 크론슈타트를 향해 포격을 개시했다. 사람들은 용감히 포격을 받아넘겼다. 이는 곧 도시의 노동 대중이 《임시 혁명위원회》에 전적으로 동의하고 있음을 누가 보아도 알 수 있는 것이었다.
교전이 시작되었음에도 위원회는 포위당했다고 선언할 필요가 없다고 판단했다. 사실 그들이 무엇을 두려워하겠는가? 분명 그들의 적군도, 수병도, 노동자도, 지식인도 아니다.
반면 페트로그라드는 포위로 인해 오전 7시까지 혼자 외출하는 것이 허용되지 않는다. 이해할 법하다. 지배자들은 그들의 노동자를 두려워할 수밖에 없다.
크론슈타트에 대한 첫 공격은 핀란드 만을 뒤덮은 눈 가운데 설상복으로 위장한 공산주의 부대 정예군에 의해 북쪽과 남쪽에서 일제히 진행되었다. 습격으로 요새를 점령하려는 이 첫 시도는 끔찍하고 비상식적인 인명 손실을 초래했다. 수병들은 이것을 몹시 애통해하며 크론슈타트가 반혁명분자라고 속아 넘어간 무장한 형제들에게 감동적인 말로써 호소했다. 「이즈베스티야」는 공산주의자들을 위해 싸운 적군을 향해 3월 10일(제8호)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우리는 형제들의 피를 흘리게 하고 싶지 않으며, 최소한으로 응사하고 있다. 우리는 노동자의 정당한 대의를 수호해야 하며, 그 이유로 우리는 사람들을 희생하며 특권적 생활을 만들어낸 공산주의자들에 의해 확실한 죽음으로 내몰린 우리 형제들에게 발포할 수밖에 없다고 생각한다.
우리 형제들이여, 불행히도 공격이 개시되었을 때 무시무시한 눈보라가 몰아치고 있었고, 모든 것이 어두운 밤의 그림자에 가려 있었다. 그럼에도 공산주의 교수형 집행자들은 그들 공산주의자 편대로 구성된 후방 부대의 기관총으로 당신을 위협하며 당신을 얼음 위로 향하도록 명령했다.
여러분 가운데 많은 이가 그날 밤 핀란드 만의 얼어붙고 광대한 광야에서 죽었고, 새벽이 와 눈보라가 잦아들자 지치고, 굶주리고, 걸을 수도 없는 지경의 여러분 분대의 비참한 잔당만이 설상복을 걸치고 우리에게 살금살금 다가왔다.
새벽에는 천 명도 넘었으나 하루가 지나자 아무도 헤아릴 필요도 없이 수가 줄었다. 여러분은 이 모험을 위해 자기 피로 대가를 치렀다. 여러분의 패주 이후, 트로츠키는 새로운 도살의 희생자를 찾기 위해 페트로그라드로 향했다. 우리 농민과 노동자의 피는 그에게 헐값이다.
크론슈타트는 페트로그라드 프롤레타리아가 지원할 것이라는 확고한 믿음으로 지냈다. 하지만 수도의 노동자들은 공포에 떨었고, 크론슈타트는 포위되고 고립되어 아무런 도움도 받을 수 없었다.
《크론슈타트 수비대》는 약 1만4천 명의 병력으로 구성되어 있었으며, 그중 1만 명이 수병이었다. 이 수비대는 만을 따라 흩어져 있는 광대한 전선과 많은 요새, 포대를 방어해야 했다. 끝없이 보강된 볼셰비키의 지속적인 공격, 식량 부족, 길고 추운 밤은 모두 크론슈타트의 활력을 감소하는 데 기여했다. 하지만 수병들은 마지막 순간까지 영웅적인 인내심으로 그들의 숭고한 본보기가 전국에 뒤따르기를 바랐다. 그러나 싸움은 너무나 불공평했다. 수천의 볼셰비키 병사가 항복하고, 다른 병사들은 해빙으로 약해지고 균열 및 구멍으로 가득하거나 포탄에 의해 부서진 얼음 아래 수도 없이 익사했음에도 이 손실은 공격의 강도를 조금도 줄이지 못했다. 새로운 증원군이 끊임없이 도착했던 것이다.
이 밀물에 맞서 도시가 홀로 무엇을 할 수 있었겠는가? 도시는 버티기 위해 안간힘을 썼다. 도시는 페트로그라드와 모스크바의 노동자 및 적군의 전반적 봉기, 세 번째 혁명의 시작이 될 봉기가 임박하기를 간절히 바랐다. 그렇게 도시는 꾸준히 좁혀오는 전선에서 밤낮없이 영웅적으로 싸웠다. 그러나 봉기도 지원도 나타나지 않았다. 크론슈타트의 저항은 날이 갈수록 약해졌고 공격자들은 점차로 유리해졌다.
더구나 크론슈타트는 후방 지역을 공격할 계획이 없었음에도, 공산주의자들은 여러 거짓말 중에서도 혁명적 수병들이 페트로그라드를 폭격하고자 한다는 중상적인 소문을 퍼뜨렸다. 사실, 이 유명한 요새는 바다로부터의 공격에서 수도를 방어하고자 하는 단 하나의 목적을 위해 구축되었다. 그래서 건설자들은 크론슈타트의 후방을 특별히 보강하지 않았고, 볼셰비키가 거의 매일 밤 공격을 가한 것은 그 이유 때문이었다.
3월 10일 하루 내내 공산주의자 포병대는 남쪽에서 북쪽으로 온 섬을 끊임없이 포격했다. 12일과 13일 밤, 공산주의자들은 남쪽에서 다시 흰 “설상복”을 뒤집어쓰고 공격했다(3월 11일 「이즈베스티야」는 “짙은 안개가 발포를 막았다”고 공식 발표했다). 이 공격으로 수백 명의 쿠르산티가 다시 한번 희생되었다.
그 후 며칠 동안 싸움은 점점 더 평탄하지 못하게 되었다. 방어자들은 피로와 궁핍으로 지쳐 있었다. 그들은 현재 도시 바로 외곽에서 싸우고 있었다. 혁명위원회가 매일 발표한 전투에 관한 성명서는 점점 더 비극적으로 되었다. 희생자 수가 급격히 증가했다.
마침내 3월 16일, 절정이 다가오는 것을 느낀 볼셰비키는 격렬한 포격에 앞서 우레와 같은 집중 공격을 감행했다. 그들은 무슨 수를 쓰더라도 끝을 내야 했다. 계속된 시시각각의 저항 가운데 크론슈타트의 모든 발포는 공산주의자들에 대한 저항이었고, 언제든 셀 수 없이 많은 이들을 각성시킬 수 있었다. 그들은 이미 갈수록 더 고립되고 있다고 느꼈다. 트로츠키는 이제 중국인과 바시키르Bashkir인으로 구성된 분대를 파견할 수밖에 없었다. 크론슈타트를 신속하게 소탕하지 않으면 크론슈타트가 볼셰비키 권력을 붕괴할 것이었다.
이른 아침부터 크라스나야 고르카의 중포들이 도시에 끊임없이 포탄을 퍼부어 화재와 파괴를 일으켰다. 비행기들은 폭탄을 투하했는데, 그중 하나는 눈에 띄는 적십자 표지에도 불구하고 병원을 파괴했다. 이 맹렬한 폭격에 이어 남쪽과 동쪽에서 총공격이 뒤따랐다.
《발트 함대》의 이전 사령관이자 미래의 크론슈타트 독재자 디벤코가 훗날 기록한 것과 같이, 공격 계획은 총사령관 투하쳅스키와 남부군 참모의 지시에 따라 매우 세심하게 준비되었다. 요새에의 공격은 새벽에 시작되었다. 디벤코는 “흰 설상복과 쿠르산티의 용맹함이 대오를 나아갈 수 있게 했다”고 썼다.
그럼에도 적은 격한 기관총 전투 끝에 여러 지점에서 격퇴되었다. 도시의 성벽 아래서 전투가 벌어지는 가운데 수병들은 가장 위험한 지점까지 돌진해 명령을 전달하고 사기를 북돋으며 능숙하게 작전을 수행했다. 진정한 용맹의 열광이 방어자들을 사로잡았다. 아무도 위험이나 죽음에 대해 생각하지 않았다. “동지들, 마지막 노동자 분대를 빨리 무장시키시오! 무기를 들 수 있는 모두가 돕게끔 하시오”하는 외침이 들려왔다. 그리고 마지막 분대가 꾸려져 무장하고 서둘러 전투에 참가하게 되었다.
여성 대중은 위험을 무릅쓰고 탄약을 운반하러 도시 밖으로 멀리 나가며 용기와 활동을 증명하기도 했다. 그들은 사방에서 부상자를 모아 병원으로 옮기고 응급처치를 준비했다.
3월 16일 저녁까지 전투는 아직 결판나지 않았고, 민병대는 여전히 말을 타고 거리를 가로지르며 비전투 인원에게 안전한 곳으로 대피할 것을 호소했다. 그러나 몇몇 요새가 함락되었고, 도시에서 자유를 얻은 공산주의자들은 크론슈타트의 약점이 페트로그라드 문이라는 것을 공격자들에게 알리는 데 성공했다. 3월 17일 오전 7시, 볼셰비키는 이때까지 없던 수준의 공격으로 밀어붙이며 도시 중심부인 유명한 앵커 광장으로 진격했다.
그래도 수병들은 굴복하지 않았다. 그들은 각 지역, 거리, 집을 지키며 “사자처럼” 싸움을 계속했다. 적군은 커다란 희생을 치른 뒤에야 몇몇 구역에서 확고한 거점을 확보할 수 있었다. 《임시 혁명위원회》의 구성원들은 계속해 위험 지역에서 다른 지역으로 이동하며 전투 부대를 이동하고 방어 체계를 세웠다. 인쇄소는 아직 간행되지 않은 「이즈베스티야」 제15호를 계속 준비했다.
17일 하루 내내 그들은 도시 내에서 싸웠다. 수병들은 어떠한 자비도 주어지지 않으리라는 것을 알고 있었고, 체카의 지하실에서 비굴하게 암살당하느니 차라리 싸우다 죽고자 했다. 그것은 잔인한 학살이자 도살이었다. 수병들로 인해 목숨을 부지한 도시의 많은 공산주의자는 그들을 배신하여 무장해 후방에서 공격했다. 공산주의자들에 의해 감옥에서 풀려난 《발트 함대》의 정치위원 쿠지민과 크론슈타트 소비에트 위원장 바실리예프는 반란을 청산하는 데 가담했다.
크론슈타트 수병과 병사들의 필사적인 싸움은 3월 17일 밤까지 계속되었다. 전투가 벌어지는 열닷새 동안 그 안의 공산주의자들에게 아무런 해를 끼치지 않았던 도시는 이제 사냥, 야만적인 처형, 잦은 암살의 커대란 극장이 되었다. 학살로부터 도망친 일부 분대는 핀란드 쪽으로 후퇴했다. 3월 18일 이른 아침, 그들(공산주의자)은 여전히 도시 몇몇 구역에서 반란군과 싸우고―혹은 그들을 추격하고―있었다.
혁명가들의 두 가지 계획은 수행되지 않았다. 우선 수병들은 세 번째 혁명의 기치를 가장 먼저 내걸었던 두 척의 거대한 전함―페트로파블롭스크와 세바스토폴―을 막판에 폭파하기로 했다. 그러나 그들이 이 계획을 수행하려 했을 때 그들은 전선이 끊어져 있는 것을 발견했다. 둘째로, 크론슈타트의 거의 대다수 주민은 공산주의자들이 “죽음과 공허”뿐인 도시만을 점령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 도시를 떠나기로 정했다. 교통수단이 전혀 없었기에 이 계획은 실행할 수 없었다.
크론슈타트 정치위원으로 임명된 디벤코는 “반란 도시 소탕”의 전권을 부여받았다. 이는 학살의 난장판을 의미했다. 체카에 의한 희생자는 셀 수 없이 많았고, 요새 함락된 후 며칠 동안 집단 처형당했다.
이후 몇 주 동안 크론슈타트의 감옥은 수백의 크론슈타트 출신 수감자로 가득 찼다. 매일 밤, 몇몇 수감자 무리가 체카의 명령으로 끌려 나와 총살당했다. 이로 인해 크론슈타트 《임시 혁명위원회》 일원이었던 페레푤킨이 사망했다. 또 다른 위원회 구성원인 베르치닌은 봉기 초반에 볼셰비키에게 배반당해 체포되었다. 다음은 「이즈베스티야」가 3월 9일 제7호에서 “백기白旗의 악용”이라는 제목으로 이 사건을 묘사한 글이다.
“3월 8일 어제, 몇몇 적군 병사가 흰 깃발을 지닌 채 오라니엔바움을 떠나 크론슈타트로 향해 왔다. 우리 동지 두 명은 휴전 깃발을 든 이들을 만나기 위해 비무장으로 말을 타고 나갔다. 우리 동지 중 한 명은 적군에게 다가갔고, 다른 한 명은 조금 떨어진 곳에서 멈췄다. 우리 동지들이 그들에게 몇 마디 말하기도 전에, 공산주의자들은 그에게 몸을 던져 그를 말에서 끌어 내리고 데려갔다. 다른 한 동지는 크론슈타트로 돌아올 수 있었다.”
이런 식으로 끌려간 크론슈타트 측 사자가 베르치닌이었다. 당연히 그에 대한 소식은 더 이상 들리지 않았다. 다른 《임시 혁명위원회》 구성원들의 생사는 우리에게 알려지지 않았다.
진정 자유로운 소비에트를 위해 볼셰비키의 절대주의에 반기를 들었던 크론슈타트 사람들은 감옥에서, 강제 수용소에서, 아르크한겔스크Arkhangelsk의 극지방에서, 투르케스탄Turkestan의 먼 사막에서 오랜 세월 동안 비참한 삶을 견뎌내며 서서히 죽어갔다. 아마도 그들 가운데 오늘날까지 살아있는 이들은 없을 것이다.
봉기가 일어난 지 얼마 되지 않아 볼셰비키 정부는 진압 기간 중 국외로 탈출하거나 국내에 숨어있던 반란자들이 자발적으로 자수한다면 모두 사면하겠다고 선포했다. 이 “사면”을 믿었던 순진한 이들은 모두 현장에서 체포되어 무기를 들었던 동지들과 같은 운명에 처했다. 이 비열한 덫은 볼셰비즘의 진짜 역사에서―다른 많은 것들 가운데서도 특히―가장 불명예스러운 장 중 하나이다.
레닌은 크론슈타트 운동에 대해 아무것도 이해하지 못했다―아니, 오히려 아무것도 이해하려 하지 않았다. 그와 그의 당에 가장 중요한 것은 무슨 수를 써서라도 권력을 유지하는 것이었다. 반란군에 대한 승리는 그를 잠시 안심시켰다. 하지만 그는 장래를 두려워했다. 그는 크론슈타트의 무장이 당에 “그들의 입장을 반영하고 검토하도록 만들었다는 것”을 인정했다.
그가 노동자의 소요와 반란이 분명히 가리키는 방향으로 당을 수정했는가? 전혀 그렇지 않다. 이 사건들로부터의 궁극적인 교훈은 당이 독재 원칙을 수정할 필요가 있다는 것과 소비에트 전반에 대한 자유로운 선거의 필요성이었다.
볼셰비키들은 이 방향으로 아주 조금이라도 양보한다면 그들의 권력에 결정적인 타격을 줄 것이라는 점을 완벽하게 이해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들에게는 무엇보다도 그 권력 전체를 보존하는 것이 필수적이었다. 마르크스주의자, 권위주의자, 국가주의자로서 볼셰비키는 대중의 어떠한 자유나 독립적 행동도 허용할 수 없었다. 그들은 자유로운 대중에 대한 신뢰가 없었다. 그들은 독재의 몰락이 그간의 모든 작업을 파괴하고, 그들 자신이 그것이라고 믿었던 혁명을 위기에 빠뜨릴 것이라 확신했다. 동시에 그들은 독재―“통제 장치”―를 보존하는 데 있어 혁명의 목표를 근본적으로 훼손하지 않으면서도 “전략적으로 후퇴”할 수 있고, 심지어 일시적으로 경제정책 전체도 포기할 수 있다고 확신했다. 최악의 경우, 그들은 이러한 목표들의 달성이 지연될 수도 있다고 말했다. 그러므로 그들의 생각은 오직 이 질문에만 집중되었다. “우리의 지배를 온전히 유지하기 위해서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
경제 분야를 일시적으로 양보하고, “권력”을 제외한 모든 분야에서 양보하는 것―그것이 그들의 첫 번째 해결책이었다. 그들의 유일한 “절충안”은 사람들의 불만을 달래기 위해 그들에게 뼈다귀를 던져주는 것이었다. 그들은 겉보기에 그칠지라도 약간의 만족감을 주어야 했다.
필수적인 양보 분야를 결정하고, “후퇴”의 한계점을 정하는 것이 그들의 두 번째로 몰두하고 있는 점이었다. 그들은 마침내 이러한 양보의 범위를 확정했는데, 가장 우스운 역사적 모순이게끔, 레닌과 그의 당은 그들이 거짓으로 돌려 싸우고 그 많은 피를 흘렸다고 주장한 크론슈타트 사람들의 계획을 정확히 그대로 적용했다.
레닌은 그 유명한 “신경제정책(NEP)”을 공표했다. 이것은 사람들에게 일정한 “경제적 자유”, 즉 개인의 상거래와 산업 활동의 자유를 부여했다. 그렇게 크론슈타트 반란군이 요구한 “자유”의 진정한 의미는 전적으로 왜곡되었다. 신경제정책은 크론슈타트가 요구했던, 완전한 해방을 향한 행진을 계속하고 가속할 수 있던 노동 대중의 자유롭고 창조적이며 건설적인 활동 대신 개인이 무역을 하고, 사업을 하며 부자가 될 수 있는 “자유”였다. 잠시간 소비에트 신흥 부자인 “네프멘nepmen”이 등장한 것이 이 시기였다.
러시아와 외국의 공산주의자들은 NEP를 “전략적 후퇴”로 간주하고 설명했는데, 이는 당에 필수불가결한 독재가 3월의 사건으로 인해 흔들렸던 입지를 강화할 수 있게끔 숨통을 틔워주었고, 브레스트-리토프스크 당시의 “군사적 휴지기”와 비슷한 종류의 “경제적 휴지기”였다는 것이다.
실제로 NEP는 후에 혁명적인 방향으로 더 잘 전진할 수 있기 위해서가 아니라, 반대로 출발점으로, 그러니까 이전과 같은 포악한 당 독재, 이전과 같은 제한 없는 국가주의, 이전과 같은 신흥 자본주의 국가에 의한 노동 대중의 지배와 착취로 더 잘 돌아갈 수 있게끔 중단된 것에 불과했다. 볼셰비키는 궁극적으로 크론슈타트의 재현에 대한 더욱 큰 보장과 함께 전체주의적 국가자본주의의 길로 돌아갈 수 있도록 후퇴했다.
볼셰비키는 크론슈타트의 종국적인 반복에 대한 더 큰 보장을 가지고 전체주의 국가 자본주의의 길로 더 잘 돌아갈 수 있도록 후퇴했다.
후퇴하는 동안, 이 신흥 자본주의 국가는 이 위험에 대비해 “마지노선”을 세웠다. 그들은 물리적, 군사적 힘을 늘리고, 은밀히 새로운 부르주아적 성격을 지닌 행정적, 관료적, 경찰적 “기구”를 창설해 모든 사람을 “철권”으로 짓밟고, 나라 전체를 전체주의적 병영과 감옥으로 변화시킬 수 있을 만큼 충분히 강력하다고 느끼게끔 하기 위해 NEP 수년을 이용했다.
전략적 후퇴가 이것을 의미한다면, 그것이 일어났다. 레닌의 죽음(1924년)과 스탈린의 계승―그 후 몇몇 당내 투쟁―이후, 신경제정책은 탑압 받고, “네프멘”들은 체포되거나 추방되거나 총살당했고, 그들의 물품은 몰수되었고, 장갑을 갖추고 무장하고 관료화되고 자본화된 국가는 “기구”와 강력한 사회적 특권층과 살찐 계급의 지원으로 완전한 전능을 확고히 다졌다. 그러나 이 모든 사태가 사회혁명이나 노동 대중의 열망, 또는 그들의 진정한 해방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다는 것은 명백하다.
볼셰비키 정부는 내부적으로 NEP를 시행하는 데만 머무르지 않았다. 역사적으로 더욱 아이러니하게도, 볼셰비키가 크론슈타트 사람들을 “협상국의 하인”이라고, “자본가들과 거래를 하고 있다”고 중상모략하고 있던 바로 그때, 그들 자신이 바로 이 일을 수행하고 있었다. 레닌의 지시에 따라 그들은 외국 자본가들을 인정하고 그들과 동맹을 맺는 방향으로 길을 떠났다. 그들이 크론슈타트 수병을 총살하던 바로 그때, 그리고 시체의 산이 아직 핀란드 만의 얼음을 덮고 있던 때, 그들은 다양한 나라의 기업인들과 여러 중요한 계약을 맺고 거액 융자, 협상국의 대규모 자본주의, 폴란드 제국주의의 희망에 부응했다.
그들은 영국-소비에트 무역 조약(영역본 표기는 the Anglo-Russian commercial treaty로 되어 있으나 1921년 3월 16일 체결된 The Anglo-Soviet Trade Agreement를 가리킨다-역자 주)에 서명하여 영국 자본에 문을 열었다. 그들은 리가 조약(1921년 3월 18일 체결된 The Peace of Riga. the Treaty of Riga라고도 한다-역자 주)에 서명했는데, 이로 인해 1천2백만 명이 반동적 폴란드 손에 넘어갔다. 동맹으로 인해 그들은 신생 터키 제국주의가 코카서스 혁명 운동을 목 졸라 죽이는 것을 도왔다. 또한 그들은 모든 나라의 부르주아지와 사업 관계를 맺기 위해 준비하며 이 부분에서 지원을 구했다.
우리는 이미 다른 곳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혁명을 목 졸라 죽일 때 권력은 점점 더 확실히, 견고히, 편의상 권력에 기생해 관계하기를 원하는 반동적 · 부르주아적 분자의 원조와 지원으로 자신을 보증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 권력은 발밑에서 땅이 허물어져 가는 것을 느끼고 점점 대중과 멀어져 혁명과의 마지막 유대도 끊어버리고 크고 작은 독재자, 추종자, 아첨꾼, 출세주의자, 기생충들로 이루어진 특권계급을 만들었으나 새로운 세력을 거부하고 파괴한 뒤 진정으로 혁명적이고 긍정적인 어떠한 일도 해낼 만한 힘이 없기에 자신을 공고히 해 반혁명 세력과 교섭해야만 하는 것이다. 권력이 점점, 그리고 더 자주 기꺼이 구하고자 하는 것은 반혁명 세력과의 교제다. 권력은 그들과 함께 후퇴한다. 그 이외에 자신의 명맥을 확보할 길은 없는 것이다. 대중의 우정을 잃은 권력은 새로이 공감해 줄 이들을 얻고자 한다. 권력은 언젠가는 새로 공감해주는 이들을 배반할 수 있기를 바란다. 그러나 그러는 동안 시간이 지날수록 반혁명적 · 반사회적 활동에 더욱 빠져들고 만다.”
크론슈타트는 함락되고 국가사회주의가 승리했다. 그들은 오늘날에도 여전히 의기양양하다. 그러나 사건의 어김없는 논리는 그들을 절대적으로 재앙으로 이끈다. 그 승리는 그 속에 마지막 파멸의 씨앗을 심었기 때문이다. 그것은 공산주의 독재의 실체를 점점 더 드러냈다. 점차로 사건의 논리에 사로잡힌 공산주의자들은 자신들의 지배와 특권을 지키기 위해 목표를 희생하고, 모든 원칙을 포기하며, 누구와도 거래할 준비가 되어 있음을 보여주었다.
크론슈타트는 모든 멍에로부터 자신을 해방하고, 정치적 보호자나 지도자나 교사 없이 노동 대중이 직접, 결연히, 또한 대담하게 시도한 사회혁명을 달성하려는 사람들의 첫 번째 완전한 독립적 시도였다. 이는 세 번째, 그리고 사회혁명을 향한 첫걸음이었다.
크론슈타트는 쓰러졌다. 하지만 그것은 과업을 완수했고, 그것이 중요한 것이었다. 대중이 반란을 일으키며 펼쳐지는 복잡하고 그늘진 미로 속에서 크론슈타트는 옳은 길을 밝히는 환한 불빛이다.
그들이 스스로를 깨달은 상황에서 반란군이 스스로 찾은 상황에서, 용어와 사상을 없애는 대신, 협동, 조직, 자주 경영 대신 여전히 권력(소비에트 권력)을 말하는 것은 별로 문제 되지 않는다. 그것은 과거에 대한 마지막 찬사였다. 일단 토론, 조직 및 행동의 완전한 자유가 노동 대중 스스로에 의해 완전히 획득되면, 일단 독립적인 대중 활동의 진정한 길이 발견되면, 나머지는 저절로 불가피하게 도래할 것이다.
아직 안개가 짙고 불빛과 길을 비추는 것을 가리는 것은 별로 문제 되지 않는다. 일단 불이 밝혀지면, 그 빛은 절대 꺼지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수백만의 사람들이 그것이 빛나는 것을 볼 날이―아마도 머지 않아―다가오고 있다.
제1부. 우크라이나의 대중운동
이 장은 나를 곤란스럽게 한다.
내가 크론슈타트 운동에 대해 100여 페이지를 할애했다고 친다면, 우크라이나에서 일어난 일들을 제대로 다루는 데에는 그 범위, 기간, 그리고 특히 혁명적 및 교훈적 중요성을 고려할 때 적어도 다섯 배의 분량이 필요할 것이다. 하지만 이는 불가능하다.
게다가 이 운동에 대한 나의 참고 문헌은 표트르 아르시노프(Peter Andreyevich Arshinov)의 뛰어난 작품, 『마흐노주의 운동의 역사History of the Makhnovist Movement』[16]에 한정되어 있다. 그리고 내 현재 상황에서 아르시노프의 작업을 빠짐없이 써넣을 수는 없다. 그런가 하면 이미 출판된 문헌으로 페이지를 채우는 것은―비록 그 명확한 성격과 작품의 서지학적 희소성을 고려한다고 하더라도―과장되는 것처럼 보인다.
나는 두 가지 중요한 요소들로 분명 연구를 충실하게 할 수 있다. ⑴ (1936년과 1937년에) 러시아어로만 출판된 운동의 창시자이자 군사 지도자인 네스토르 마흐노의 회고록 2권과 3권에 명시된 특정 사실들. ⑵ 1919년 말과 1920년 말 두 차례에 걸쳐 이 운동에 참여한 이후 약 6개월 동안의 나 자신의 개인적인 경험.
마흐노의 회고록에 관해서 말하자면, 회고록 저자의 죽음으로 인해 시작 부분에서 작품을 끝나게 했다(마흐노는 1935년 파리에서 사망했다). 출판된 세 권(1권은 2, 3권이 나오기 훨씬 전에 러시아어와 프랑스어로 출판되었다)은 1917년에서 1918년까지만을 다루었다. 그것들은 실질적 운동의 문턱에서, (1919년에서 1921년의) 가장 특징적이고 중요한 사건들 앞에서 정확하게 멈춘다.
나 자신의 개인적인 경험에 대한 설명은 그것이 전반적이고 완전한 역사에 끼워 넣어질 수 있다면 매우 유용할 것이다. 이 전체에서 유리되고서는, 그것들은 동등한 중요성을 지니지 않는다.
그럼에도 특히 내가 염두에 두고 있는 관점에서 러시아혁명을 연구한다면 우크라이나의 대중운동에 대해 말하지 않을 수 없다.
이 운동은 혁명에서 이례적일 정도로 중요한 역할을 했다. 심지어 크론슈타트보다 훨씬 더 중요하게. 이 중요성은 그 범위, 기간, 본질적으로 대중적인 성격, 명확한 이데올로기적 관점, 그리고 마침내 그것이 달성하고자 했던 과업에 의한 것이다.
이 책의 독자가 쉽게 이해할 수 있는 이유로 인해, 모든 이용 가능한 문헌들은 그것이 어떤 종류이든 간에, 이 운동에 대해 전혀 언급하지 않는다. 혹은 만약 언급하고 있다면, 그것은 단지 그것을 비방하기 위한 목적으로만 몇 줄에 걸쳐 그렇게 할 뿐이다.
지난 연구들에서 우크라이나 서사시는 오늘날까지 거의 완전히 알려지지 않은 상태로 남아있다. 그럼에도 “알려지지 않은 혁명”의 요소들 가운데 그것은 확실히 가장 주목할 만한 것이다.
사실, 거의 400페이지에 달하는 아르시노프의 작품조차 요약에 불과하다. 우크라이나 운동이 그에 합당하게 다루어진다면 그것은 여러 권의 책을 채울 것이다. 역사적으로 매우 가치가 있는, 운동에 관한 서류들만으로도 수백 페이지에 달할 것이다. 표트르 아르시노프는 그것들의 극소수만을 재현할 수 있었을 뿐이다.
이 정도 규모의 작업은 필요한 모든 자료를 마음대로 이용할 수 있는 미래의 역사학자들에 의해 수행되어야 할 것이다. 우리의 현재 과제는 이 운동을 최대한 조명하는 것이다.
이 모든 모순된 고려사항들은 마침내 나로 하여금 다음과 같은 결정을 내리게 했다.
1. 진지하고 진정 관심이 있는 독자들에게 표트르 아르시노프의 기초 저작을 읽도록 촉구하는 것. 1924년 작은 자유의지주의 서점에 의해 출판된 이 책은 쉽게 발견할 수 없다. 그러나 독자들은 서점, 파리의 부둣가를 따라, 혹은 큰 도서관에서 그것을 찾으며 보낸 시간을 후회하지 않을 것이다.
2. 표트르 아르시노프의 기록에서 많은 부분을 끌어냄으로써 이 운동의 가장 중요한 측면들을 독자들에게 전달하는 것.
3. 네스토르 마흐노의 회고록에서 발췌한 특정 세부사항들로 해설을 완료하는 것.
4. 내 개인적 인상과 평가로 그것을 완성하는 것.
우크라이나(또는 소小러시아)라는 지명은 면적이 약 45만 제곱킬로미터(프랑스의 약 5분의 4 크기)이고 약 3천만 명의 인구가 거주하는 러시아 남서부의 광대한 지역을 가리킨다. 여기에는 키이우, 체르니고프Tchernigov, 폴타바Poltava, 하르키우Kharkiv, 예카테리노슬라프Ekaterinoslav, 헤르손Kherson 및 토리드 같은 주州, 혹은 “정부”가 포함된다. 후자는 크림반도 입구에 있으며, 거기에서 흑해의 일부, 페레코프Perekop 지협 및 아조프Azov 해협으로 나뉜다.
우크라이나에 대한 자세한 설명에는 몰두하지 않기로 하고, 나는 1917년에서 1921년 사이에 그 지역에서 전개된 사건을 이해하기 위해 독자가 알아야 할 몇 가지 특징을 간략히 언급하겠다.
그곳은 세계에서 가장 풍족한 농업지역 중 한 곳이다. 풍요롭고 비옥한 흑토黑土는 비할 데 없는 농작물을 생산한다. 우크라이나는 한때 “유럽의 곡창지대”라고 불렸는데, 이는 우크라이나가 여러 유럽 국가들에게 밀과 다른 농산물의 매우 중요한 공급원이었기 때문이다. 곡물뿐만 아니라 우크라이나는 채소와 과일, 비옥한 대초원, 목초지, 숲과 수로, 그리고 마지막으로 동부의 돈Don 강 유역에 석탄이 풍부하다.
우크라이나는 특출난 풍요와 지리적 위치 때문에 이웃 나라에게, 심지어 멀리 떨어진 나라들에게도 늘 유혹의 대상이었다. 여러 민족이 뒤섞였지만 자유와 독립을 수호하고자 하는 확고한 열망을 지닌 우크라이나 사람들은 수 세기 동안 투르크, 폴란드, 독일, 특히 강력한 인접 국가인 차르의 대大러시아에 대항해 전쟁과 투쟁을 경험했다. 최종적으로, 부분적으로는 정복에 의해, 부분적으로는 자발적으로(그들의 부를 지키기 위해 다양한 경쟁자들에 대항해 하나의 강력한 이웃에 의해 효과적으로 보호받을 필요성을 느꼈기 때문에) 막대한 러시아 제국에 통합되었다.
그러나 우크라이나 사람들의 민족적 구성, 성격적 특성, 심리적 기질, 서방 세계와의―전쟁, 상업 등을 통한―전통적 접촉, 특정한 지리적 및 지형적 특징으로 인한 결과, 대러시아와 우크라이나의 상황 사이에 현저한 차이가 있는 채 차르의 관리가 이루어졌다.
우크라이나 일부 지역은 대러시아에서 그러했던 것처럼 완전한 복종을 결코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들은 항상 독립, 저항, 대중 반란의 정신을 보존했다. 상대적으로 교양 있고 고상하며, 개인주의적이고 망설임 없이 주도권을 쥘 능력이 있고, 독립을 염원하며, 전통적으로 도전적이고, 스스로를 지키는 데 준비되어 있고 익숙하며, 수 세기 동안 자유로우며 스스로의 주인인 데에 익숙한 우크라이나 사람들은 일반적으로 러시아의 나머지 사람들을 특징 짓는 그 총체적 노예제도에―육체뿐만이 아니라 정신까지도―결코 굴복하지 않았다.
이는 특히 일종의 암묵적으로 인신 보호 영장habeas corpus을 획득해 자유롭게 살았던 우크라이나 특정 지역 주민들에게 적용되었는데, 그들의 지역은 코르시카의 마키maquis 관목지대처럼 차르의 군대가 접근하기 어려웠기 때문이다.
드니프로Dnieper 강 하류의 섬들―유명한 자포로자Zaporizhzhia 지역에 있는―의 자유를 사랑하는 사람들은 14세기부터 남자들로만 이루어진 진영을 스스로 조직했으며, 대러시아를 포함한 여러 인근 국가들의 예속화 시도에 맞서 수 세기 동안 투쟁했다.[17] 마침내, 이 전사들은 러시아 정부에 복종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볼니차volnitza(자유로운 삶)의 전통은 우크라이나에서 계속 살아 숨 쉬었으며 결코 억누를 수 없었다. 예카테리나 2세(Catherine Ⅱ) 이후 우크라이나 사람들의 정신에서 자포로지예 공화국 전통의 모든 흔적을 지워 없애려는 노력이 아무리 대단했더라도, 이 지난 세기(14~16세기)의 유산은 남아있었다.
대러시아의 무자비한 농노제는 농민들의 끊임없는 저항으로 인해 우크라이나에서 다소 더 “진보적인” 모습을 보였다. 수천이나 되는 이들이 매우 잔인한 영주들로부터 탈출해 관목지대로 도망치거나 볼니차로 피신했다.
대러시아 내에서는 더 이상 농노이고자 하지 않은 이들, 더 많은 자유를 원하는 이들, 자주적인 삶을 사랑하는 이들, 경찰로 인해 곤경을 겪거나 제국의 법이라는 채찍 아래 놓인 이들은 모두 우크라이나의 스텝이나 숲, 기타 접근하기 어려운 지역으로 도망쳐 새로운 삶을 시작했다. 그렇기에 우크라이나는 수 세기 동안 온갖 도망자들의 약속된 땅이었다. 바다와 타간로크taganrog, 베르댠스크Berdiansk, 헤르손, 니콜라예프Nikolaev, 오데사 항구 인근, 중앙과 멀리 떨어져 있고 은신처로 가득 찬 지역인 코카서스 산맥과 크림반도 인근―이곳들은 강하고 진취적인 개인들이 기존 사회와 단절하여 자유롭고 복종되지 않는 삶을 영위할 수 있는 가능성을 증가시켰다. 이들 중 일부는 후에 막심 고리키(Maxim Gorky)에 의해 훌륭하게 묘사된 방랑자(보시아키bossiaki)의 핵심을 제공했다.
이렇듯 우크라이나의 분위기는 대러시아의 그것과 매우 달랐고, 우리 시대에까지 우크라이나의 농민들은 자유에 대한 특별한 애정을 보존해왔고, 이는 그들을 정복하려고 하는 모든 권력에 대한 완강한 저항으로 나타났다.
이러한 사실들에 비추어 볼 때 독자들은 볼셰비키의 독재와 국가주의가 어째서 대러시아보다 우크라이나에서 훨씬 더 단호하고 장기적인 저항에 직면했는지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기타 요인들은 이 관점을 뒷받침한다.
1. 공산당의 조직된 세력은 대러시아에 비해 우크라이나에서는 약했다. 볼셰비키가 그곳 농민과 노동자들에게 미치는 영향은 늘 미미했다.
2. 이것과 더불어 다른 이유들로 10월혁명은 한참 후에 효력을 발휘했다. 이는 1917년 11월 말에 시작되어 1918년 1월까지 계속되었다. 그것은 처음에는 우크라이나에서 권력을 유지한 지역 민족주의 부르주아지―페틀류라주의자Petlyurist, 혹은 “민주주의자” 페틀류라(Symon Vasylyovych Petliura)의 당파―가 대러시아의 케렌스키 정권과 평행을 이루었다. 볼셰비키는 혁명적인 이유보다는 군사적 이유로 이 정권과 맞섰다.
3. 공산당의 인기 없음과 무력함은 소비에트에 의한 권력 장악이 대러시아와는 완전히 다르게 행해졌다는 것을 의미한다.
우크라이나에서 소비에트는 훨씬 더 현실적인 의미에서 노동자 및 농민 대표 회의에 참여했다. 정당에 지배되지 않는 이 소비에트는―멘셰비키 역시 우크라이나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지 못했다―대중을 종속시킬 수단이 없었다. 그렇기에 공장의 노동자들과 마을의 농민들은 그들 스스로가 진정한 힘이라고 느꼈다. 그들의 혁명적 투쟁에서 그들은 누구에게든 주도권을 양보하거나 대러시아의 공산당처럼 늘 융통성 없는 가정교사를 곁에 두는 데에 익숙하지 않았다. 이 때문에 훨씬 더 큰 정신, 사상, 행동의 자유가 뿌리내렸다. 그것은 대중 혁명 운동에서 필연적으로 명백해졌다.
이 모든 요인은 처음부터 스스로를 느끼게 했다. 대러시아에서 혁명은 공산주의 국가의 궤도에 신속하고 무난하게 도입되었으나 이 국가화와 독재의 도입 과정은 우크라이나에서 상당한 장애물에 마주쳤다. 볼셰비키의 “소비에트 기구”는 주로 군사력에 의해 설치되었다.
대중의 자치 운동, 특히 농민 대중의 그것은 국가화의 과정에 병행해 발전한 정당들에 의해 전적으로 도외시되었다. 이 독립운동은 페틀류라의 “민주공화국” 아래 이미 나타나 있었다. 그것은 천천히 발전했으나 1917년 2월 1일부터는 존재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것은 농노 경제의 전복과 생산수단의 공동 소유와 대중 스스로가 토지를 개발하는 원칙에 기반한 혁명적 체제의 창설을 모색하던 자발적인 운동이었다.
이러한 원칙의 이름으로 많은 곳의 노동자들이 공장 소유주들을 몰아내고 생산 관리를 새로운 노동조합, 공장위원회 등 계급 조직의 통제 하에 두었다. 농민들은 상류층gentry과 쿨라크(부유한 농민)의 땅을 차지했고, 이 땅을 일하는 이들 스스로만 사용하도록 엄격하게 제한함으로써 새로운 농업 경제 체제의 틀을 짰다. 당연히 이 과정은 매우 천천히, 계획적이지 않고 자발적인 방식으로 퍼져나갔다. 이것들은 더 크고, 더 의식적이며, 더 잘 조직된 미래 활동을 향한 서투른 첫 번째 단계였다. 하지만 대중은 직감적으로 그들이 걷고 있는 길이 올바른 것이라고 느꼈다.
“노동자와 농민들에 의한 이러한 직접적인 혁명적 행동의 관행은,” 표트르 아르시노프는 말했다. “혁명의 첫해 동안 우크라이나에서 전혀 방해받지 않고 발전되어 대중을 위한 정확하고 신중한 혁명적 행위를 만들어냈다. 권력을 잡은 일부 정치 집단이나 다른 이들이 노동자 측의 이 혁명적 행동 노선을 부수려고 할 때마다 노동자들은 혁명적 저항을 시작했으며 이러한 시도들에 대항하기 위해 이런저런 방식으로 투쟁했다.
따라서 혁명 초기에 시작된 사회적 독립을 향한 노동자들의 혁명 운동은 우크라이나에 어떤 정권이 세워지든 약화되지 않았다. 10월 봉기 이후 권위주의적인 국가 통제 체제를 도입하려 했던 볼셰비키에 의해서도 소멸되지 않았다.
이 운동에서 특히 특징적이었던 것은 혁명에서 노동계급의 진정한 목표를 달성하고자 하는 열망, 노동의 완전한 독립을 차지하고자 하는 의지, 그리고 마지막으로 비非노동 사회 집단에 대한 저항이었다.
자신들이 노동계급의 두뇌이며 자신들의 권력이 곧 노동자들의 권력이라는 것을 증명하려고 시도한 공산당의 모든 궤변에도 불구하고, 스스로의 계급 정신과 직관을 유지했던 모든 노동자와 농민들은 그 당이 사실 도시와 시골의 노동자들을 그들 스스로의 혁명적 과업들로부터 멀어지게 하고 있다는 것을 점점 더 인식하게 되었다. 국가주의 조직 그 자체가 바로 그들의 독립과 노동의 자유로운 처분에 대한 그들의 권리를 빼앗고 그들을 그 지배 아래 두는 것이 그 권력이라는 것을 말이다.
독립에 대한 열망, 완전한 자율自律에의 열망이 대중의 심층부에서 생겨난 운동의 토대가 되었다. 모든 점에서, 그들의 생각은 늘 이 개념에 뿌리를 두고 있었다. 공산당의 국가주의적 행동은 이러한 열망을 무자비하게 억눌렀다. 그러나 노동자들의 마음을 명확하게 하고 저항하게끔 몰고 간 것 역시 바로 어떠한 이의도 받아들이지 않는 뻔뻔스러운 당의 이런 행동이었다.
처음에 이 운동은 새로운 권력을 승인하지 않고 농민들이 지주들의 토지와 재화를 수용하는 자발적 행동을 하는 데에 국한되었다. 그들은 그들만의 방식과 수단을 찾아냈다.”
(표트르 아르시노프, 『마흐노주의 운동의 역사History of the Makhnovist Movement』, pp.70~72)
브레스트-리토프스크 평화협정 이후 오스트리아-독일군에 의한 잔혹한 우크라이나 점령으로 인해 노동 대중에 대한 끔찍한 결과와 함께 우크라이나에 새로운 상황이 조성되었고 대중운동의 발전이 촉진되었다. 여기서, 나는 실례를 무릅쓰고 표트르 아르시노프의 거의 모든 장을 인용하도록 하겠다. 브레스트-리토프스크 평화협정에 뒤이은 사건들에 대해 이보다 더 나은 설명은 없을 것이다. 평화협정의 주요 조항이 독일에게 볼셰비키가 물러난 우크라이나에 대한 자유로운 접근을 허용했다는 것을 상기하자.
아르시노프의 셈은 빠르고 탄탄하며 관통적이다. 나는 아무것도 개선하거나 추가할 필요가 없다. 그것은 사실에 있어 절대적으로 정확하며, 독자가 이후의 사건들을 이해하기를 바란다면 각각의 세부사항이 중요하다.
“볼셰비키가 독일제국 정부와 맺은 브레스트-리토프스크 평화협정은 우크라이나의 문을 오스트리아-독일에게 활짝 열어주었다. 그들은 주인으로서 거기에 들어갔다. 그들은 군사행동에만 국한하지 않고 국가의 경제 및 정치적 생활에 관여하게 되었다. 그들의 목적은 그곳의 생산품을 전용하는 것이었다.
이를 쉽고 완전히 달성하기 위해 그들은 대중에 의해 전복된 귀족들과 지주들의 권력을 재확립하고, 헤트만Hetman 스코로파즈키(Pavlo Skoropadsky) 독재 정부를 세웠다.
그들의 군대는 러시아와 우크라이나의 상황을 맹목적이고 야만적인 세력의 난장판으로 표현하며, 지역의 질서를 파괴하며 성실한 노동자들을 공포에 떨게 한 그들 군대의 장교들에 의해 체계적으로 오도되었다. 이 과정에서 그들은 군인들에게 반란 농민과 노동자에 대한 적개심을 자극해 오스트리아-독일 군대의 행동(완전히 비정하며 흔한 강도짓 같은 행동)을 도왔다.
스코로파즈키 정부의 묵인과 도움을 받아 오스트리아-독일이 우크라이나에 행한 경제적 약탈은 거대하고 끔찍했다. 그들은 모든 것―밀, 가축, 가금류, 달걀, 원자재 등―을 날랐기에 운송수단이 부족할 지경이었다. 오스트리아와 독일인들은 서둘러 가능한 한 많은 것들을 빼앗아 전리품으로 넘겨진 창고에 옮기고는 차례로 기차에 실었다. 수백, 심지어 수천의 기차가 모든 것을 실어 날랐다. 농민들이 이 약탈에 저항하고 노동의 결실을 지키고자 한 시도는 채찍질, 보복, 총격으로 끝맺어졌다.
침략자들의 폭력과 그들의 냉소적인 군사적 약탈에 더해 오스트리아-독일의 우크라이나 점령은 맹렬한 상류층의 반동을 수반했다. 헤트만 정권은 노동자들의 모든 혁명적 쟁취의 소멸, 과거로의 완전한 회귀를 의미했다.
따라서 이 새로운 상황이 페틀류라와 볼셰비키 하에서 이전에 시작된 운동의 진행을 강하게 가속한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어디에서나, 마을을 중심으로 어디에서나 상류층과 오스트리아-독일에 대한 반란 행위가 일어나기 시작했다. 그리하여 우크라이나 농민들의 거대한 운동이 시작되었고, 이는 후에 혁명 반란이라는 이름으로 불리게 되었다.
이 반란의 기원은 때때로 그저 오스트리아-독일의 점령과 헤트만 정권의 결과로만 간주된다. 이 설명은 불충분하고 부정확하다. 반란은 총체적 상황과 러시아혁명의 근본적 성격에 뿌리를 두고 있다. 그것은 혁명을 자연스러운 결론으로 이끌고자 하는 노동자들의 시도였다. 노동의 진실되고 완전한 해방과 수위권首位權으로 이끌고자 하는. 오스트리아-독일의 침략과 농업적 반동은 그 과정을 가속시켰을 뿐이다.
운동은 급속도로 큰 비중을 차지했다. 도처에서 농민들은 상류층에 대항해 그들을 암살하거나 몰아내고, 그들의 토지와 재화를 수용하고, 침략자들을 신경도 쓰지 않았다.
헤트만과 독일 당국은 무자비한 보복으로 대응했다. 반란을 일으킨 마을의 농민들은 채찍질을 당하고, 집단 총살당하고, 모든 물품이 불살라졌다. 짧은 시간 안에 수백 개 마을이 군대와 지주 계급으로부터 끔찍한 처벌을 받았다. 이는 1918년 6, 7, 8월에 일어났다.
그 뒤 농민들은 꾸준히 봉기를 일으키고, 게릴라로 조직되어 분산된 전투를 시작했다. 마치 눈에 보이지 않는 조직의 명령에 의한 것처럼 그들은 여러 장소에서, 거의 동시에, 다수의 파르티잔 분대를 형성해 귀족들, 그들의 경비원 및 권력의 대리인들에 대해 군사적으로, 또한 늘 기습적으로 행동했다. 대체로 20명, 50명, 혹은 100명의 잘 무장된 기병들로 구성된 이 분대는 예상치 못한 곳에 갑자기 나타나 귀족이나 헤트만의 국가수비대를 공격해 농민들의 모든 적을 학살하고는 그들이 왔던 것처럼 빠르게 사라진다. 농민들을 박해한 모든 영주와 그 충실한 하인들은 파르티잔에 의해 주목받았고 끊임없이 청산될 위기에 처했다. 모든 경비원, 모든 독일 장교들은 거의 확실한 죽음을 선고받았다. 전국 각지에서 매일 일어나는 이런 업적들은 농업적 반혁명의 핵심을 도려내고, 그것의 토대를 허물고, 농민들의 승리를 위한 길을 마련했다.
아무런 준비 없이 일어난 거대하고 자발적인 농민 반란과 같이, 이렇듯 조직화된 게릴라 행동은 늘 농민들에 의해 어떤 정치 조직의 도움이나 지시 없이 행해졌다는 점에 주목해야만 한다. 그들의 행동방식은 그들 스스로가 운동의 필요를 돌보고, 그것을 지휘하고 승리로 이끌도록 했다. 헤트만 및 귀족들에 대항해 싸우는 모든 기간 동안, 농민들은 여전히 악랄하며 잘 무장하고 조직된 적들과 홀로 마주했다. 이 사실은 혁명 반란 전체의 성격 그 자체에 커다란 영향을 미쳤다. 정당이나 민족주의적 요소의 영향을 받지 않고 끝까지 ‘계급 행동’으로 남아있는 곳마다, 그것은 농민 대중의 가장 깊은 곳에서 그 기원의 흔적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제2의 근본적 특성도 그대로 지니고 있었다―이 모든 농민이 소유한 완벽한 의식, 즉 스스로가 그들 스스로의 길라잡이이자 그들 스스로의 운동에 대한 제작자라는 것을. 파르티잔에게는 특히 이 생각이 스며들어 있었다. 그들은 그들 운동의 특별한 특성에 자부심을 느꼈고 그들 스스로 자신의 사명을 완수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반혁명의 야만적인 보복은 운동을 멈추지 못했다. 반대로 그들은 그것을 확대하고 확장할 동기를 제공했다. 농민들은 혁명적 행동의 전반적인 계획에 대한 사건의 힘에 의해 점점 더 단결하게 되었다.
확실히, 전 우크라이나 농민들은 단일한 지도력 아래 행동하는 단일 세력으로 조직된 일이 없다. 혁명 정신의 관점에서 그들은 모두 단결했지만, 실제로는 주로 지역별로, 지방별로 서로 분리된 파르티잔의 작은 분대가 단결해 보다 크고 보다 강력한 단위를 형성하듯이 조직되었다. 반란이 더 잦아지고 보복이 더 격렬해지고 조직화되면서 이러한 동맹은 긴급한 필요가 되었다.
우크라이나 남부에서는 훌랴이폴레Huliaipole 지역이 통합을 주도했다. 그곳에서는 방어를 위해서뿐만 아니라 주로 농업적 반혁명의 완전한 파괴를 위해서도 반란이 일어났다.”
이 후자의 목표는 보다 중요하고 결정적인 성격을 지녔으며, 농민 대중의 통합을 향한 운동에 부여된 보다 큰 과제였다. 다른 지역의 혁명분자를 운동에 결합하고 모든 혁명적 농민들을 참가시키며, 가능하다면 전체로서 반동과 맞서 싸울 수 있는 거대한 조직 세력을 개발하는 것 말이다.
이 통합 작업과 우크라이나 남부의 혁명 반란의 전반적 발전에 있어 가장 중요한 역할은 이 지역 농민 출신, 즉 네스토르 마흐노가 이끄는 파르티잔 분대에 의해 수행되었다. 때문에 이 운동은 “마흐노주의 운동”으로 알려져 있다.
“운동이 시작된 첫날부터” 표트르 아르시노프는 말한다. “농민들이 상류층을 무찌르는 정점에 이르기까지 마흐노는 반란 지역 전체와 투쟁에서 가장 영웅적인 순간들이 그의 이름과 연관될 정도로 압도적이고 중심적인 역할을 했다. 후에 반란이 스코로파즈키 반혁명에 완전히 승리했으나 이 지역이 데니킨에 의해 새롭게 위협받게 되자 마흐노는 데니킨에 대항해 투쟁하는 수백만 농민들의 집결지가 되었다.”
우크라이나 남부 지역만이 이 거대한 작전에 관여했다는 점이 강조되어야 한다. “왜냐하면,” 아르시노프가 계속해 이야기하듯 “모든 곳에서 반란이 그 정신, 그 혁명적 본질, 그리고 노동계급의 이익에 대한 충성심을 유지한 것은 아니었다. 우크라이나 남부 지역에서는 반란 세력이 점점 더 자신의 역할과 역사적 사명을 인식하며 아나키즘의 검은 깃발을 들고 노동자의 자유로운 조직이라는 반反권위주의적인 길을 걷기 시작했으나, 서부와 북서부 지역에서는 헤트만 타도 후 외국의 요소들, 즉 그들 계급의 적들, 특히 국가 민주주의자(페틀류라의 당파인 페틀류리비치petlurivtzi)들로 인해 점차 미끄러졌다. 우크라이나 서부 저항세력은 2년 이상 동안 민족주의의 기치 아래 자유주의적liberal 부르주아지의 이익을 추구한 그들을 지지했다. 따라서 키이우, 볼린Volhynia, 포돌리예Podolia, 폴타바Poltava 지역 당국의 반란 농민들은 다른 반란군들과 공통된 기원을 가지고 있었으나, 그 뒤 자신들 가운데서 역사적 사명의 의식이나 단결의 능력을 발견할 수 없었고, 노동계의 적들 지배 아래 들어가 그들 손에서 맹목적인 도구가 되었다.
”남부에서의 반란은 전혀 다른 의미를 지녔으며 다른 양상을 띠었다. 그들은 사회의 비노동적 요소로부터 엄격히 분리되었고, 신속하고 단호하게 억압과 노예제도의 민족적, 종교적, 정치적 및 다른 편견들을 제거했다. 그들은 도시와 시골 프롤레타리아 계급의 진정한 열망에 기반을 두었고, 노동의 많은 적에 대해 이 열망들의 이름으로 격렬한 싸움을 계속했다.”
우리는 이미 몇 가지 자유의지주의적 작품을 제외하고는 러시아혁명에 관한 모든 기존 문헌이 묵과하는―혹은 그저 중상하는 몇 줄만 적어둔, 우크라이나 남부에서 대大 농민 반란에서 막대하고 뛰어난 역할을 한 우크라이나 농민 네스토르 마흐노의 이름을 몇 번이나 언급했다. 반란의 주역이자 군사 지도자인 마흐노에 대해, 그들이 조금이라도 그를 언급한다면 그것은 오직 그에게 “도적”, “암살자”, “강도”, “유대인 학살자pogromist” 등과 같은 칭호를 부여할 때뿐이다. 그들은 항상 집요하게 그를 진흙탕에 끌어넣고, 중상하고 혐오한다. 이 파렴치한 저자들은 기껏해야 사실을 조사하거나 우화와 분리하지 않고 이 자유의지주의적 투사의 삶과 행동에 대한 터무니 없고 어리석은 전설을 퍼뜨렸다.[18]
““마흐노는” 표트르 아르시노프가 말하기를 “1889년 10월 27일에 태어났으며, 예카테리노슬라프현縣 알렉산드로프스크alexandrovsk 지역의 훌랴이폴레 마을에서 어머니 밑에 자랐다. 그는 가난한 농민 집안의 아들이었다. 그의 아버지가 사망했을 때 그는 불과 생후 10개월이었고, 그와 네 명의 어린 형제들은 어머니가 보살피게 되었다.
집안의 극심한 빈곤 때문에 그는 일곱 살부터 목동으로 일하면서 마을 농민들의 소와 양을 돌봤다. 여덟 살 때 그는 지역 학교에 입학해 겨울에는 통학하고, 여름이면 늘 목동으로 일했다.
열두 살 때, 그는 직업을 구하기 위해 가족을 떠났다. 그는 귀족들과 우크라이나에 식민지가 많았던 독일 농민들(쿨라크)의 농장에서 일했다. 열넷이나 열다섯 살이 되었을 무렵 이미 그는 착취자들에 대해 강한 증오를 느꼈고, 언젠가 자신과 다른 이들을 위해 ‘그들에게 복수할’ 수 있는 방법을 꿈꿨다. 그러나 열여섯 살이 될 때까지 그는 정치계와 아무 접점이 없었다. 그의 사회적이고 혁명적인 관념은 그 자신과 같은 농민과 프롤레타리아 같은 매우 좁은 범위에서 형성되고 자리 잡았다.[19]
1905년의 혁명은 그를 작은 범위에서 당장 벗어나 혁명적인 사건들과 행동들의 급류로 몰아넣었다. 그때 그는 열일곱 살이었다. 그는 혁명적인 열정으로 가득 차 있었고 노동자 해방을 위한 투쟁에서 무엇이든 할 준비가 되어 있었다. 정치조직들과 여러 차례 접촉한 후, 그는 아나키즘적 코뮌주의자 대열에 들어가기로 결심했고, 그 순간부터 불굴의 투사가 되었다. 그는 많은 활동을 계속했고, 자유를 위한 투쟁 중 몇 가지 가장 위험한 행동에 참여했다.
1908년, 그는 차르 당국에 넘겨져 아나키스트 단체와 테러 행위에 가담했다는 이유로 교수형을 선고받았다. 그는 나이가 어리다는 이유로 사형에서 강제노동을 동반한 무기징역으로 감형받았다. 그는 모스크바의 부티르키Butyrki 중앙 교도소에서 복역했다. 비록 감옥 생활은 절망적이고 매우 견디기 힘들었으나 마흐노는 그 기간을 이용해 독학했다.[20] 그는 대단한 인내를 보이며 문법, 수학, 문학, 문화사, 정치경제학을 배웠다. 사실 감옥은 마흐노의 이후 혁명 활동에 큰 도움이 된 역사적, 정치적 지식을 습득한 유일한 학교였다. 인생, 행동, 업적은 그가 인간과 사회적 사건들을 알고 이해하는 방법을 배운 다른 학교들이었다.
마흐노의 건강이 위태로워진 것은 그가 감옥에 있던 젊은 시절이었다. 그는 끈질겼으며 강제노동에 처해 인격을 완전히 상실하는 것을 받아들일 수 없었기에 늘 교도소 당국에 반항했으며 추위와 습기 때문에 폐결핵에 걸렸던 독방에 계속 감금되었다. 1917년 3월 1일 모스크바에서의 프롤레타리아 봉기로 인해 다른 모든 정치범과 함께 마침내 석방되기까지 그는 9년간의 수감 중 ‘품행 불량’으로 빈번하게 쇠고랑을 찼다.
그는 곧 훌랴이폴레로 돌아왔고, 농민 대중은 그에게 깊은 위로를 보였다. 그는 온 마을에서 혁명으로 인해 가족에게 돌아온 유일한 정치범이었으며, 그 때문에 농민들의 자발적인 존경과 신뢰의 대상이 되었다. 그는 더 이상 경험이 부족한 청년이 아니라 사회적 갈등에 대한 강력한 의지와 확고한 사상을 지닌 검증된 투사였다.
훌랴이폴레에서 그는 즉시 혁명 과업에 뛰어들었고, 우선 그의 마을과 주변 지역 농민 조직을 추진했다. 그는 농장 노동자 조합을 설립했다. 자유 코뮌과 지역 농민 소비에트를 조직한 것이다. 그가 가장 관심을 가진 문제는 농민들을 강력하고 확고한 동맹으로 결합하고 조직해 토지를 소유한 상류층과 정치적 통치자들을 몰아내고 그들 스스로의 삶을 영위할 수 있게 하는 것이었다. 이를 위해 그는 선전가이자 활동가로서 농민들의 조직 활동을 이끌었다. 그는 그들을 혁명적인 방법으로 통합하기를 추구했고, 그들을 희생시키는 명백한 기만, 부당, 억압을 설명하고자 했다.
케렌스키 정부 기간과 1917년 10월 기간 동안 그는 지역 농민 조합, 농업위원회, 금속 및 목공 노동자 조합, 마지막으로 훌랴이폴레 농민과 노동자 소비에트의 위원장이었다. 1917년 8월, 그가 지역의 모든 토지 소유 상류층을 모아 토지와 건물에 관한 모든 문서를 그에게 넘기게 한 것이 그의 이 마지막 역할이었다. 그는 이 모든 재산에 대한 정확한 목록을 작성한 뒤, 처음에는 지방 소비에트 회의에서, 다음에는 소비에트 지구 총회에서, 마지막으로 소비에트 지역 총회에서 보고했다. 그는 토지의 사용에 관해 토지 소유 상류층과 부유한 농민들(쿨라크)의 권리를 가난한 임금 노동 농민의 권리와 평등하게 하는 것을 추진했다. 그의 제안에 따라 총회는 지주와 쿨라크에게 임금 노동 농민과 동등한 토지(뿐만 아니라 도구와 가축까지)를 제공하기로 결정했다. 예카테리노슬라프, 토리드, 폴타바, 하르키우 및 다른 지역 당국의 여러 농민 총회는 훌랴이폴레 지역의 사례를 따라 동일한 조치를 채택했다.
마흐노는 운동 기간 동안 그의 지역에서 상류층의 토지와 물품을 수용했고, 심지어, 필요한 경우 반항하는 지주들을 처형해 농민운동의 혼이 되었다. 그리하여 그는 스스로 부자들과 지역 부르주아 집단의 치명적인 적이 되었다.”
오스트리아-독일에 의해 우크라이나가 점령되었을 때, 즉시 비밀 혁명위원회가 생겨났고, 마흐노에게 침략자 및 토착 통치자들에 대항하기 위해 농민과 노동자의 전투부대를 창설하는 임무를 맡겼다.
“그는 할 수 있는 것들을 다 했다.” 아르시노프는 기록한다. “하지만 타간로크, 로스토프Rostov, 차리친Tsaritsyn에서 그의 파르티잔들과 함께 퇴각할 수밖에 없었고, 모든 단계를 바로잡았다. 오스트리아-독일의 군사적 지원으로 힘을 얻은 지역 부르주아지는 그의 목에 현상금을 걸었고, 그는 한동안 숨어지낼 수밖에 없었다. 우크라이나와 독일 군 당국은 복수를 위해 그의 어머니 집을 불태우고 불구가 된 전쟁 참전용사였던 형 에밀리안(Emelian Makhno)을 총살했다.
1918년 6월, 마흐노는 모스크바로 가서 우크라이나 농민들 사이에서 혁명적 자유의지주의 활동을 수행하기 위한 방법과 방향에 대해 몇몇 나이 든 아나키스트 투사들과 상의했다. 그러나 그가 만난 아나키스트들은 당시 우유부단하고 소극적인 태도를 보였고,[21] 그는 만족스러운 제안이나 조언을 얻지 못했다.”
모스크바에서의 짧은 체류 기간 동안 마흐노가 나이 든 아나키스트 이론가인 표트르 크로포트킨과, 또 레닌과 함께 대화를 나눴다는 것은 언급할 가치가 있다. 그는 회고록에서 그들에 대한 자세한 설명―특히 레닌과의 대화―을 들려주었다. 그는 크로포트킨의 제안을 매우 고맙게 생각한다고 말했다. 레닌과의 인터뷰에서는 네 가지 사항을 다루었는데, 즉 우크라이나 농민들의 사고방식, 우크라이나 지역의 당면 전망, 정규군(붉은 군대)을 창설할 볼셰비키의 필요성, 볼셰비키와 아나키스트 간 불화가 그것이었다. 그 대화는 어느 정도 흥미롭기는 하지만 너무 짧고 피상적이어서 실질적인 중요성을 가질 수는 없었다. 우리는 볼셰비키가 마흐노에게 우크라이나 국경을 넘어 가능한 한 위험을 최소로 줄이고 귀국하는 데 그가 취한 예방 조치들에 대해 어느 정도 도움을 준 것에 대해 언급할 필요가 있다.
마흐노는 농민 대중을 특히 강력한 역사적 세력으로 여겼다. “오랫동안,” 아르시노프는 계속한다. “그는 수 세기 동안 축적된 혁명적 활력을 끌어내고, 기존의 억압 체제에 대해 이 어마어마한 힘을 퍼붓기 위해 방대한 농민 대중을 어떻게 조직화할 것인가에 대한 생각을 숙고했다. 그는 이 생각을 실행에 옮길 때가 왔다고 느꼈다.”
그렇기에 그는 모스크바에 잠시 머문 후 1918년 7월 우크라이나로 돌아와 훌랴이폴레 지역으로 돌아가고자 했다.
“여정은” 아르시노프는 말한다. “헤트만 정부의 손에 걸리지 않기 위해 매우 어렵게, 그리고 매우 비밀리에 이루어졌다. 한 번은 마흐노가 거의 죽을 뻔했다. 그는 오스트리아-독일 분대에 체포되었고, 불행하게도 그때 자유의지주의 팸플릿을 지니고 있었다. 오랫동안 개인적으로 마흐노를 알고 있던 훌랴이폴레 출신의 부유한 유대인이 그를 풀어내기 위해 많은 돈을 지불함으로써 그를 구출하는 데 성공했다.
그가 돌아오는 길에, 공산주의자들은 마흐노에게 우크라이나의 특정 지역을 골라 그들의 이름으로 비밀리에 혁명적 활동을 계속할 것을 제안했다. 당연히 그는 이 제안에 대해 논의하는 것조차 거부했다. 그가 성취하고자 했던 과업들은 볼셰비키와는 공통점이 없었다.”
훌랴이폴레로 돌아온 마흐노는 농민들을 위해 승리를 거두는 것 아니면 죽기로 결심했고, 어떤 경우에도 이 지역을 떠나지 않았다. 그의 귀환 소식은 마을에서 마을로 급속히 퍼져나갔다. 그는 즉석 모임에서 연설하고, 편지와 소책자를 써서 배포하면서 거대한 농민 대중 사이에서 공개적으로 계획을 시작하는 것을 미루지 않았다. 펜과 입으로 그는 농민들에게 스코로파즈키와 지주들의 권력에 대항하는 결단력 있는 투쟁을 호소했다. 그는 노동자들이 이제 자신들의 운명을 스스로 감당해야 하며, 행동의 자유를 빼앗기지 말아야 한다고 지칠 줄 모르고 선언했다. 그의 열렬한 호소는 몇 주 지나자 많은 마을과 지역 전체가 듣게 되었으며, 대중을 다가올 거대한 사건들에 대해 준비시켰다.
호소 외에도, 마흐노는 즉각 직접행동을 추진했다. 그의 첫 번째 관심은 마을과 도시에서 선전과 행동의 자유를 보장하고 동시에 게릴라 작전을 시작하기에 충분히 강한 혁명적 군사 조직을 구성하는 것이었다. 이 조직은 신속하게 조직되었는데, 마을 사이에는 행동 준비가 되어있는 놀랍도록 전투적인 분자들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들에게는 오직 훌륭한 조직가가 없을 뿐이었다. 마흐노는 바로 그 사람이었다.
그의 첫 번째 군사 조직은 두 가지 긴급한 과업을 수행했는데, 즉 농민들 사이의 선전과 조직적 활동을 열정적으로 추구하고, 모든 적에 대해 완강한 무장 투쟁을 계속하는 것이었다. 이 용서 없는 투쟁의 지침은 다음과 같았다. 농민을 박해한 영주도, 헤트만의 경찰도, 농민들의 확고한 적인 러시아나 독일 장교도 동정받을 자격이 없다. 그들은 반드시 섬멸되어야 한다. 가난한 농민과 노동자의 억압에 참여한 모든 자들, 그들의 권리를 억압하고 노동력을 착취하려는 자들은 모두 처형되어야 한다.
2~3주 안에 군사 조직은 벌써 지역 부르주아지뿐만 아니라 오스트리아-독일 당국에게도 공포의 대상이 되었다. 마흐노의 혁명군 활동 영역은 넓었는데, 로조바야Lozovaya에서 베르댠스크, 마리우폴Mariupol, 타간로크까지, 루간스크Lugansk에서 예카테리노슬라프, 알렉산드로프스크, 멜리토폴Melitopol에까지 이르렀다.
신속한 이동이 그의 특별한 전술이었다. 그것과 지역의 규모 덕분에 그는 항상 예기치 못한 곳에 갑자기 나타날 수 있었다. 단기간에 그는 지역 부르주아지가 권력을 재확립하고 있는 모든 지역을 철과 불의 원으로 둘러쌌다. 지난 두세 달 동안 옛 영지에 다시 정착하는 데 성공한 이들, 농민을 노예로 삼고 그들의 땅을 훔치고 노동의 결실을 향유한 모든 이들, 주인으로서 농민을 다스린 모든 이들은 갑작스레 자신들이 마흐노와 그의 파르티잔의 무자비한 손 아래 놓였음을 알게 되었다.
바람처럼 빠르게, 용감하게, 적에게 무자비하게, 그들은 어떤 영토에 우레처럼 나타나 농민들의 불구대천의 원수들을 모조리 도륙하고는 그들이 왔던 것처럼 재빠르게 사라졌다. 다음날, 마흐노는 100킬로미터 이상 떨어진 어떤 마을에 나타나 “국가수비대(varta)”, 장교와 귀족들을 도륙하고, 독일 부대가 (그에 모든 대비를 했음에도 불구하고)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깨닫기도 전에 사라질 것이다. 그 다음날, 마흐노는 100킬로미터 떨어진 곳에서 보복을 하려는 헝가리 분대에 맞서거나 몇몇 바르타 대원의 목을 매달 것이다.
때때로 적들을 조롱하기라도 하는 듯이 마흐노는 훌랴이폴레의 가장 중심부나 많은 오스트리아-독일 부대가 항상 주둔하고 있는 폴루가이Polugai, 혹은 부대들이 밀집해 있는 다른 곳에 갑자기 나타나 그의 손에 걸린 장교들을 죽이고는 안전하고 철저하게 그가 가는 길을 티끌 만한 흔적도 남기지 않고 벗어나고는 했다. 아니면 추적자들이 마침내 새로운 루트를 발견해서 그들이 몇몇 농민이 그들에게 알려준 마을에서 그를 추월해 사로잡을 기대를 하고 있을 때, 그는 스스로 바르타의 군복을 입고 소수의 파르티잔과 함께 적들의 한가운데로 침투해 그들의 계획과 대비를 파악하고는 했다. 그런 다음 그는 “마흐노를 추격하기 위해” 수비대 분대와 함께 출발해서 도중에 그들을 전멸시켰다.
모든 농민은 파르티잔에게 헌신적이고, 적극적이며 능숙한 지원을 제공했다. 그들의 모든 루트에서 그들은 그들이 필요할 때마다 안전한 숙소, 음식, 말, 심지어 무기까지 찾을 수 있음이 확실했다. 종종 농민들은 자신의 목숨을 걸고 그들을 집에 숨기고는 했다. 많은 경우, 어떤 마을 주민들은 마흐노와 그의 기수들이 마을에 있거나 추적자들이 지목한 곳과 반대 방향으로 가는 동안 추적하는 부대들을 잘못된 길로 몰아넣었다.
많은 마을이 반란군에 대한 자세로 인해 무자비하게 처벌당했고, 모든 이가 꽂을대로 잔혹하게 구타당했고, 보다 강하게 의심되는 농민 중 일부는 그 자리에서 총살당했다. 어떤 마을은 보복 조치로 불타버리기도 했다. 그러나 그 무엇도 침략자들과 그 대리인들, 토지 귀족과 반혁명분자들에 대한 노동자들의 격렬한 저항을 줄일 수 없었다.
파르티잔은 오스트리아, 독일, 헝가리 부대와 마주칠 때 다음과 같은 규칙을 고수했다. 장교는 죽이고 체포된 병사들은 석방한다. 그들은 병사들이 자국으로 돌아가 우크라이나 농민들이 무엇을 하고 있는지 말하고 사회혁명을 위해 일해야 한다고 제안했다. 자유의지주의 문헌과 때로는 돈이 그들에게 분배되었다. 오직 농민들에 대한 폭력 행위로 유죄를 선고받은 것으로 알려진 병사들만 처형당했다. 붙잡힌 오스트리아, 독일, 헝가리 병사들을 대하는 이런 방식은 그들에게 확실한 혁명적인 영향을 미쳤다.
반란 활동 초반 동안, 마흐노는 농민들의 조직가이자 인도자일 뿐만 아니라 억압받는 이들의 강력한 복수자였다. 그의 주도로 수백의 귀족들의 둥지가 파괴되었고, 수천의 압제자와 사람들의 적극적인 적들이 무자비하게 소탕되었다.
그의 과감하고 단호한 활동, 출현과 퇴장의 신속함, 타격의 정밀함과 죽여서든 살려서든 그를 사로잡는 것의 명백한 불가능함으로 인해 그의 이름은 곧 지역에서 유명해졌다. 부르주아지와 당국을 공포와 증오로 전율하게 하는 이름이었다. 반면 노동자 사이에서 그 이름은 깊은 충족감, 자부심과 희망의 감정을 불러일으켰다. 그들에게 마흐노는 이미 전설적인 인물이 되어 있었다.
그리고 마흐노의 성격과 행동에는 사실 전설에 걸맞은 자질들이 있었다. 그의 비범한 대담함, 완강한 의지, 모든 상황에서의 지략, 그리고 마지막으로 그의 행동에 자주 수반되는 유쾌한 유머―이 모든 자질들이 사람들에게 깊은 인상을 주었다.
그러나 마흐노의 인성에서 중요한 자질은 이것만이 아니었다. 그의 활동 초기의 반란 활동에서 드러난 도전 정신은 전사와 조직가로서의 어마어마한 재능의 첫 번째 징후일 뿐이며, 후에 전모가 드러났다. 단지 놀라운 군사 지도자이자 조직가일 뿐만 아니라 훌륭한 선동가였던 마흐노는 그가 활동한 지역에서 지속적으로 회의 횟수를 늘렸다. 그는 사회혁명에 관한, 반란의 최종 목표였던 노동자들의 자유롭고 독립적인 공동생활에 관한 당면한 과업에 대해 보고했다. 그는 또한 농민과 노동자, 오스트리아와 독일 병사, 돈Don과 쿠반Kuban 카자크 등에 호소하는 것뿐만 아니라 이 효과에 대한 팸플릿도 출판했다.
“정복하느냐 죽느냐―이것이 이 역사적 순간에 우크라이나 농민과 노동자가 직면한 딜레마이다. 그러나 우리는 무수히 많기에 모두 죽을 수는 없다―우리는 인간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정복할 것이다 … 하지만 우리는 우리의 운명을 새로운 주인의 손에 맡기는 지난 세월의 실수를 반복하기 위해 정복하지 않을 것이다. 우리는 우리의 운명을 우리 자신의 손에 맡기고, 우리의 의지와 진리에 대한 우리의 관념에 따라 우리 삶을 영위하기 위해 정복할 것이다.” 이처럼 그의 첫 번째 호소 중 하나를 통해, 마흐노는 방대한 러시아 농민 대중에게 말했다.
제2부.마흐노주의 반란군의 결성
곧 마흐노는 그의 지역에서 모든 반란자의 집결지가 되었다. 모든 마을에서 농민들은 비밀 지역 집단을 만들었다. 그들은 마흐노 아래 집결해 그의 모든 활동을 지지했고, 그의 조언과 제안을 따랐다. 많은 파르티잔 분대들―이미 존재했던 것들과 새로 형성된 것들―이 통합적 활동을 추구하며 그의 집단에 합류했다. 모든 혁명적 파르티잔이 전반적 규모의 통합과 활동의 필요성을 인식했다. 그리고 모두 이 통합이 마흐노의 지시에 따라 가장 잘 달성되리라고 생각했다. 이는 당시까지 서로 독립적이었던 반란 세력 중 몇몇 큰 단위의 견해이기도 했다. 이들 중 주목할 만한 이들은 쿠릴렌코(Vasily Vasilyevich Kurilenko)(베르댠스크에서 활동), 슈스(Fedir Shchus)(디브로우카Dibrivka 지역의), 페트렌코-플라토노프(Pyotr Petrenko Platonov)(그리치노Grichino 지역의)가 지휘하는 대규모 단위였다. 그들은 모두 자발적으로 마흐노에 합류했다. 이런 식으로 남부 우크라이나의 분리된 파르티잔 단위가 마흐노의 최고 지휘하에 하나의 반란군으로 통합되는 것은 사건의 힘과 대중의 의지를 통해 자연스럽게 이루어졌다.
방대하고 억누를 수 없는 농민 반란은 마침내 점령군과 헤트만의 경찰을 붕괴시키는 데 성공했다. 외국 무력의 지원을 받은 반혁명은 점차 설 자리를 잃었다. 전쟁의 종결과 독일 및 오스트리아의 정치적 혼란으로 독일과 오스트리아는 최후의 일격을 받았다. 1918년 말, 독일과 오스트리아 부대들이 우크라이나를 떠났다. 헤트만과 지주들은 다시 한번 도망쳤고, 이번에는 두 번 다시 돌아오지 않았다.
이 순간부터 우크라이나에서는 매우 다른 세 개의 기초 세력이 활동했는데, 페틀류라주의Petlurism, 볼셰비즘, 마흐노주의Makhnovism가 그것이었다. 우리는 독자가 어려워하지 않게, 그리고 우리가 그것을 설명할 필요가 없을 정도로, 우크라이나에서의 그 목표와 전술을 인식할 수 있게끔 볼셰비즘에 대해 충분히 이야기했다. 그리고 우리는 마흐노주의라고 불리는 독립적인 농민운동에 대해 적절한 설명을 해왔다.
우리는 페틀류라주의 운동의 본질과 활동을 간략히 설명할 필요가 남아있다. 1917년 2월 혁명의 첫날부터 우크라이나 자유주의 부르주아지는 “러시아인들Muscovite” 혁명의 “과잉”을 두려워하고, 그들 나라에서 이들을 피하고자 노력하며 우크라이나의 민족 독립을 지지했다. 차리즘이 타도되자 러시아의 모든 좌파 정당이 자신들의 생활에서 바라는 것은 무엇이든 완전히 자유롭게 행할 권리를 엄숙히 선언했기에, 그들은 성공의 희망을 가지고 이를 달성하고자 할 수 있었다.
부르주아지는 부유한 농민(쿨라크), 자유주의 지식인 등, 우크라이나 사람 중 몇몇 다른 계층의 지원을 받아 “범 러시아Pan-Russian” 국가로부터의 완전한 분리를 목표로 하는 방대한 자치주의, 민족주의, 분리주의 운동을 일으켰다. 그러나 이 운동이 필요할 때 의지할 수 있는 대중적 무장 세력을 개발하지 않는 한 실질적이고 지속적인 성공을 기대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달은 이 운동의 안내자 시몬 페틀류라와 다른 이들은 전선과 후방에 있는 우크라이나 병사들로 관심을 돌렸다. 그들은 국가를 토대로 하여 병사들을 특수 우크라이나 연대로 조직하기 시작했다.
1917년 5월, 운동의 지도자들은 운동을 지휘하기 위해 《범 군사위원회general military committee》를 선출할 《군사위원회military congress》를 조직했다. 나중에 이 위원회는 확장되어 《라다Rada》(우크라이나어로 의회라는 뜻)라고 이름 붙여졌다. 1917년 11월, 범 우크라이나 총회에서 이는 《중앙 라다Central Rada》, 새로운 우크라이나 민주공화국의 일종의 의회가 되었다. 마침내 한 달 후, 《중앙 라다》는 이 공화국의 독립을 엄숙히 선언했다.
이 사건은 대러시아에서 막 권력을 잡은 볼셰비즘에 심각한 타격을 입혔으며, “국민의 권리”에도 불구하고 당연히 우크라이나에서의 지위를 확립하고자 했다. 따라서 볼셰비키는 서둘러 그 지역으로 군대를 보냈다. 우크라이나의 수도 키이우 주변에서 그들과 페틀류라의 부대 사이에 격렬한 전투가 벌어졌다. 1918년 1월 25일, 볼셰비키는 도시를 점령하고 그들의 정부를 수립했으며, 곧 우크라이나 전역으로 그들의 권력을 확장하기 시작했다.
그들은 그저 부분적으로만 성공했을 뿐이었다. 페틀류라 정부와 분리주의 운동의 정치인들, 그리고 그들의 부대는 서부 지역으로 후퇴해 견디며 볼셰비키의 우크라이나 점령에 항의했다. 얼마 뒤 볼셰비키가 자치주의 운동을 진압하기 위해 나섰을 개연성이 크다. 그러나 당면한 상황이 이를 막았다. 1918년 3월과 4월에 그들은 대러시아로 후퇴했고, 브레스트-리토프스크 평화협정 조항에 따라 오스트리아-독일 점령군에 자리를 내주었다.
곧바로, 오스트리아-독일에 앞서 페틀류라가 키이우에 재진입했다. 그들의 정부는 새로운 우크라이나 공화국을 선포했다. 이 역시 단 몇 주만 지속되었을 뿐이다. 페틀류라주의자보다 우크라이나의 옛 영주나 주인들과 타협하는 편이 오스트리아-독일에게 있어 훨씬 더 유리했다. 그들의 군사력 지원으로 독일은 공화국 정부를 무자비하게 퇴위시키고, 그것을 절대적 당국자인 헤트만 스코로파즈키로 대체했다. 페틀류라는 한동안 투옥되어 정치판에서 잠시 모습을 감춰야했다.
그러나 헤트만 정권의 붕괴는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거대한 농민 반란이 곧 그에게 강력한 타격을 가하기 시작했다. 스코로파즈키의 약점을 알아차린 페틀류라주의자들은 정력적으로 일하기 시작했다. 상황은 그들에게 유리했다. 농민들이 반란을 일으키고 있었고, 수십만의 반란분자가 헤트만 정부에 대항해 행진하라는 호소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페틀류라주의자들은 이 세력의 일부를 집결시키고, 조직하고, 무장시킬 수 있는 충분한 수단을 지니고 있었기에 전진하여 거의 저항받지 않고 여러 대도시와 지역을 점령했다. 그들은 이렇게 정복된 지역에 페틀류라를 필두로 한 “디렉토리야Directorate”라는 새로운 종류의 권력을 부여했다. 그렇게 그들은 다른 지망생들, 특히 볼셰비키의 부재를 틈타 우크라이나의 좋은 지역들에 대해 그들의 세력을 빠르게 확장시켰다.
1918년 12월, 스코로파즈키는 도망쳤고, 페틀류라의 “디렉토리야”가 엄숙하게 키이우에 입성했다. 이 사건은 온 나라에 커다란 열광을 불러일으켰고, 페틀류라주의자들은 그들의 성공을 확대하기 위해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다 하며 국민적 영웅을 가장했다. 짧은 시간 안에 그들의 세력은 다시 우크라이나 주요 지역으로 확장되었다. 그들이 심각한 저항에 부딪힌 것은 남부, 마흐노주의 농민운동 지역에서였다. 거기서 그들은 성공하지 못했고, 반대로 몇 번의 심각한 반전을 경험했다.
그럼에도 나라의 모든 대도시에서 페틀류라주의자는 승리를 거두고, 이번에는 자치주의자 부르주아지의 지배가 보장된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이 성공은 실체가 없는 것이었다. 새 권력은 스스로 자리 잡게 할 시간이 거의 없어 붕괴하기 시작했다. 헤트만이 붕괴하는 순간, 페틀류라주의자의 궤도 안에 있던 수백만 명의 농민과 노동자들은 곧 환멸을 느끼고 페틀류라의 대열을 일제히 떠나기 시작했다.
“그들은 자신들의 이익과 염원을 위해 다른 수단을 찾았다. 대부분 도시와 마을로 흩어졌으며 거기서 새로운 권력에 대해 적대적인 태도를 채택했다. 다른 이들은 마흐노주의자들의 반란 단위에 가담했다. 페틀류라주의자들은 이렇게 하여 사건이 진행되며 무장했던 것과 같을 정도로 곧 무장해제되었다. 부르주아적인 자치, 부르주아적인 민족적 단결에 대한 그들의 사상은 혁명적인 이들 가운데서 아주 잠시밖에 계속되지 못했다. 대중혁명의 불타는 숨결은 이 잘못된 사상을 잿더미로 만들었고 그 지지자들을 완전히 무력하게 만들었다. 동시에, 우크라이나에서 권력을 장악하고자 단호히 결심했으며 계급 선동 방법에 대한 전문가인 볼셰비키 군이 북부에서 빠르게 접근하고 있었다. 페틀류라의 디렉토리야가 키이우에 들어선 지 한 달 만에 볼셰비키 부대가 차례로 입성했다. 이후 공산주의자들의 세력은 우크라이나 전역으로 확장되었다.”(표트르 아르시노프, 전게서, p.106.)
이렇게 하여, 헤트만이 몰락하고 오스트리아-독일이 떠나자 곧 모스크바 정부는 우크라이나에서 당국, 공무원, 투사 간부, 그리고 특히 군대와 경찰을 복원하기 위해 서둘렀다.
그러나 서부와 남부에서 이는 곧 중단되었는데, 한편으로는 그곳에서 다시 한번 후퇴한 페틀류라의 민족주의 분자에 의해, 다른 한편으로는 마흐노가 이끄는 농민 대중의 진정한 독립운동에 의해서였다. 페틀류라는 나라의 중심부에서 쫓겨났으나 자신이 패배했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볼셰비키가 접근하기 가장 어려운 지역으로 후퇴한 그는―그가 할 수 있는 곳이면 어디서든―그들과 마흐노의 “농민 단위” 모두에 저항하려고 했다. 독립적인 농민운동은 곧 페틀류라의 부르주아지(먼저는 활동에 들어가며, 이후에는 데니킨과 브란겔의 군주제적 시도들에 대항하여)뿐만 아니라 볼셰비키의 강탈에도 직면할 수밖에 없었다. 이렇듯 우크라이나의 상황은 그 어느 때보다 복잡해졌다. 현재 존재하는 세 가지 세력 각각은 다른 두 가지와 싸울 수밖에 없었다. 볼셰비키는 페틀류라에 맞서고, 페틀류라는 볼셰비키와 마흐노에 맞서고, 마흐노는 페틀류라와 볼셰비키에 맞서야 했던 것이다. 이후, 이 혼란은 네 번째 요소의 출현, 즉 역사적 통합과 온전한 기반에서 구 러시아 제국을 재건하고자 하는 민족주의자 및 군주주의자 러시아 장군들의 개입으로 더욱 복잡해졌다. 그 순간부터(1919년 여름) 네 개의 세력은 각각 다른 세 세력과 치열한 투쟁을 벌였다.
우리는 이러한 혼란스러운 상황에서 우크라이나는 전쟁과 혁명의 여파로 밀려나 순수하게 약탈을 일삼은 무장 도적단의 무절제한 착취와 습격의 무대가 되었다는 것을 추가해 두어야만 하겠다. 그러한 무리는 사방에서 들끓었고, 구석구석 은신처가 있었으며, 중앙 우크라이나에서 거의 간섭 없이 움직였다.[22]
볼셰비키가 최종적으로 다른 세력들에 이기기까지 3년간의 전투 기간(1918년 말부터 1921년까지) 동안 국가가 급락하고, 형성되고, 파괴되고, 재형성되는 현실 같지 않은 조합이 일어난 이상한 혼란을 상상하기는 쉬울 것이다.
우리는 아르시노프와 더불어, 우크라이나에서 볼셰비키의 모든 활동은 그들이 숨기려 하지도 않은, 무력에 의해 강요된, 순수한 강탈이었다는 것을 덧붙이고 강조해야만 한다.
처음에는 하르키우에, 다음에는 키이우에 그들의 정부를 설치하면서, 그들은 헤트만의 권력으로부터 벌써 해방된 지역에 군대를 보내 군사력으로 공산주의 권력 기관을 만들었다.
“볼셰비키가 본대를 보내 어느 곳을 점령하고 페틀류라의 파르티잔을 몰아냈을 때뿐만 아니라 그 지역이 자유롭고 노동자들 스스로가 주인이었던 곳일지라도 공산주의 권력이 군사 명령에 의해 정착되었다. 이를 달성하고 권력이 이미 강화된, 이 권력을 만들어냈을 것이라 추정되는 노동자 및 농민 평의회(소비에트)가 후에 나타났다. 소비에트 이전에는 ‘혁명위원회’가 있었고, ‘위원회’ 이전에는 그저 사단급 군사 단위가 있을 뿐이었다.”(표트르 아르시노프, 전게서, p.129.)
우리는 많은 특수한 상황 때문에 우크라이나에서 사회혁명이 극좌파 정당에 의한 권력 장악이 아니라 새로운 압제자에 대한 농민들의 거대한 자발적 반란을 통해 시작되었다는 것을 봐왔다.
처음에 이 반란은 폭풍과 같았다. 격한 분노로 농민 대중은 수 세기 동안 자신들을 억압해 오던 모든 혐오스러운 것들을 폭력적으로 파괴하는 데 헌신했다. 이때의 파괴 작업에는 어떠한 긍정적인 요소도 나타나지 않았다. 그러나 조금씩 사건들이 전개되면서, 혁명적 농민들의 운동은 조직화되고 통합되어 그 근본적인 건설 임무를 지금껏 이상으로 정확하게 실현했다.
우리는 그저 사건을 요약할 수 있을 뿐이고, 많은 세부사항을 생략할 수밖에 없기에 헤트만 정권의 붕괴와 독일 점령 종식에 뒤이어 일어난 사건들 동안 점점 더 두드러지게 나타나는 특징들, 마흐노주의 운동의 본질적인 특징을 곧바로 설명할 것이다.
이러한 운동의 특징은 두 가지 다른 그룹으로 나눌 수 있다. 한편으로는 장점과 공적, 다른 한편으로는 결점과 실수인데, 왜냐하면 마흐노주의 운동은 결점이 없는 것이 아니었고, 그 실패의 일부는 볼셰비키가 그것을 비방하고 중상할 수 있도록 했기 때문이다.
운동의 장점은 다음과 같다.
1. 모든 지도, 모든 정당, 그리고 그 어떠한 형태의 당파와 정치로부터 독립된 것―운동의 진정한 자유의지주의적 정신. 이 근본적이고 매우 중요한 특성은 ⒜농민 반란 초기의 자발성, ⒝자유의지주의자 마흐노 개인의 영향, ⒞지역의 다른 자유의지주의적 분자들의 활동(마흐노는 전투 과업에 열중해 완전한 자유 가운데 일할 수 있는 다른 자유의지주의자들을 끌어들이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 ⒟정당과의 일상적 접촉에서 반란군이 얻은 교훈에 기인한다. 운동의 이러한 자유의지주의적 경향은 비노동 혹은 특권층에 대한 뿌리 깊은 저항, 어느 조직에서든 사람들에 대한 독재의 거부, 그리고 노동자들 스스로가 지역 문제에 대해 자유롭고 완전한 자기관리를 추구한다는 데서 나타났다.
2. 운동의 모든 세력의 자유롭고 연방적인(따라서 더욱 단단한) 조화는 방대하고 자유롭게 조직되고 잘 훈련된 사회운동이 된다.
3. 약 7백만 명의 주민을 포함한 전국의 넓은 지역에서 운동이 행사한 유익하고 진보된 사상적 영향.
4. 끊임없는 무기와 탄약 부족에도 불구하고, 거듭되는 수치스러운 배반에도 불구하고, 다른 끔찍한 곤란에도 불구하고 거의 4년 동안 모든 강탈과 우크라이나에서 활동한 모든 억압 세력에 저항할 수 있었던 혁명농민군의 비할 데 없는 전투적 용맹.
5. 조직적, 전략적, 군사적 천재일 뿐만 아니라 운동의 전투 핵심의 인도자인 아나키스트 네스토르 마흐노의 다른 뛰어난 자질들.
6. 극도로 불리한 상황에도 불구하고 급속도로 자유의지주의적 사상을 습득하고 이를 적용하고자 노력한 농민 대중과 반란군.
7. 상황이 허용하는 한 경제, 사회 및 혁명적 투쟁 방면에서 운동이 만들어낸 특정한 긍정적 성과들.
운동의 단점은 다음과 같았다.
1. 평화로운 작업과 진정 긍정적인 작업에 집중하지 못한 채 거의 지속적으로 모든 종류의 적에 맞서 싸우고 방어해야 하는 필요성.
2. 운동 내 군대의 존속. 군대는 어떠한 것이든 간에 항상 그리고 필연적으로 일정의 심각한 결함과 특정 종류의 사악한 사고방식에 영향을 받는다.
3. 운동 내 자유의지주의적인 지적 세력의 부족.
4. 마흐노의 특정 개인적 결점. 조직적 및 군사적 재능, 자유의지주의적 열정, 그리고 다른 주목할 만한 군사적 자질 외에, 마흐노는 인격과 교육에 심각한 약점을 지니고 있었다. 어떤 면에서는, 그는 그의 과업을 감당할 수 없었다. 이러한 약점들―우리는 그것들을 돌아볼 기회가 있을 것이다―은 운동의 영역과 도덕적 중요성을 감소시켰다.
5. 공산주의자들에 대한 태평함과 필수적인 의혹의 결여.
6. 농민반란군을 지원할 수 있는 활발하게 조직화된 노동자 운동의 부재.
7. 무기와 탄약의 지속적 부족. 마흐노주의자들은 거의 항상 적들로부터 노획한 무기들로 무장해야 했다.
하지만 우리는 사건들로 돌아가도록 하자. 왜냐하면 이어지는 설명을 통해 우리는 전체적으로 그것을 판단할 수 있을 만큼 충분히 운동의 장점과 단점을 모두 관찰할 기회를 가질 것이기 때문이다.
1918년 10월, 마흐노의 분대는 파르티잔들의 혁명군으로 뭉쳐 헤트만 스코로파즈키 군에 대한 총공격을 시작했다. 11월에 독일과 오스트리아 군대는 서부 전선의 사건과 점령하고 있던 국가 내 사건으로 인해 완전히 혼란에 빠졌다. 마흐노는 이러한 상황을 이용했다. 그는 어떤 곳에서는 이들 부대와 함께 대처하고 중립성을 얻었으며, 심지어 어렵지 않게 그들을 무장 해제하면서 그들의 무기와 탄약을 확보했다. 다른 곳에서는 그들을 전투에서 물리쳤다. 예컨대, 사흘 간의 격한 싸움 끝에 그는 훌랴이폴레 전체를 점령했다.
곳곳에서 헤트만 정권의 종말이 예견됐다. 우크라이나 군대와 헤트만의 수비대(바르타)는 반란 운동이 엄청나게 성장하기 전에 거의 모두 해산되었다. 젊은 농민들이 마흐노의 군대로 한꺼번에 몰려들었고, 마흐노의 군대는 지원병들을 모두 무장시킬 수 없었기에 대부분을 돌려보내야 했다. 그럼에도 마흐노주의 반란군은 충분히 여러 보병과 기병 연대를 무장할 수 있었고, 약간의 대포와 많은 기관총도 가지고 있었다.
곧 그들은 모든 세력으로부터 해방된 매우 넓은 지역의 주인이 되었다. 그러나 헤트만은 여전히 키이우를 장악하고 있었다. 때문에 마흐노는 북부를 향해 출발했다. 그는 차플리네Chaplyne, 그리치노 및 시넬니코베Synelnykove의 주요 철도역과 파울로흐라드Pavlohrad 도심을 점령했다. 그러고 나서 그는 서부로 방향을 틀어 예카테리노슬라프 방면으로 향했다.
그곳에서 그는 페틀류라의 잘 정비되고 완전 무장을 갖춘 군대를 마주했다. 이 시기 페틀류라주의자들은 마흐노주의 운동을 우크라이나 혁명의 중요한 사건으로 간주했다. 마흐노주의에 대해 잘 알지 못했던 그들은 이 “반역자 무리”를 자신들의 세력권으로 끌어들여, 그들을 자신들의 지배하에 두기를 바랐다. 매우 우호적으로, 그들은 마흐노에게 일련의 정치적인 질문들을 제기했다. 페틀류라주의 운동과 페틀류라 정부에 대한 그의 의견은 무엇인가? 그는 장래 우크라이나의 정치 구조를 어떻게 구상했는가? 그는 독립 우크라이나의 창설을 위해 공동으로 일하는 것이 바람직하고 유용하다고 생각하지 않는가?
마흐노주의자들의 답변은 명확했다. 그들은 그들의 의견으로는 페틀류로우슈치나Petlurovtchina는 혁명적 농민들의 길과는 완전히 다른 부르주아 민족주의 운동이며, 우크라이나는 자유로운 노동과 자주적인 노동자, 농민에 기반해 조직되어야 하기에 그들은 다른 누구와의 연합도 받아들이지 않고, 노동자들의 운동인 마흐노우슈치나Makhnovitchina와 부르주아지의 운동인 페틀류로우슈치나 사이에는 투쟁만이 있을 뿐이라고 선언했다.
이 “의견 교환”에 뒤이은 사건들은 우크라이나 투쟁에서 일반적이었던 일종의 혼란을 분명히 보여준다. 마흐노의 군대는 예카테리노슬라프 교외의 니주네드네프로우스크Nijne-Dneprovsk에 주둔해 도시를 공격할 준비를 했다. 그곳에는 볼셰비키 위원회도 있었는데, 그들은 소수 병력을 보유하고 있었으나 행동하기에 충분하지는 않았다. 마흐노는 이 지역에서 용맹한 혁명가이자 매우 재능있는 군사 지도자로 알려져 있었고, 이 “위원회”는 그에게 당의 노동자 부대 지휘권을 제안했다. 마흐노는 수락했다.
그는 종종 그러했듯, 위험 부담이 가득하지만 성공한다면 많은 것을 약속하는 계략에 의지했다. 그는 자신의 부대들을 열차에 실어 니주네드네프로우스크에서 예카테리노슬라프 기차역으로 보냈다. 그가 알고 있던 것처럼, 이러한 열차들은 교외에서 일하는 사람들을 예카테리노슬라프로 실어 날랐고, 그들은 보통 장애물이나 점검 없이 통과되었다. 만약 열차가 멈추기 전 우연히 계략이 발각되었더라면 모든 부대가 포로로 잡혔을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방해받지 않고 통과해 역에 멈췄다. 순식간에 마흐노주의자들이 역과 그 주변을 점령했다. 도시 안에서 격렬한 전투가 일어났다. 페틀류라주의자들은 패배했다. 그들은 예카테리노슬라프를 버리고 후퇴했다. 그들은 당시 마흐노가 도시를 점령하고 부대를 재편성하는 데 만족했기에 쫓기지 않았다.
며칠 뒤, 페틀류라주의자들은 증원 병력을 이끌고 반격해 마흐노의 군대를 물리치고 도시를 탈환했다. 그러나 그들은 곧바로 마흐노주의자들을 추격할 만큼 충분히 강하다고 여기지 않았다. 반란군은 다시 시넬니코베 지역으로 후퇴했고, 거기서 반란 지역의 북서부 경계에 있는 페틀류라주의자과 그들 사이에 참호를 파고 전선을 구축했다.
주로 반란을 일으킨 농민이나 징집병으로 구성된 페틀류라의 부대는 마흐노주의자들과 접촉하자 빠르게 해체되었고, 곧 이 전선은 전투 없이 녹아내렸다. 후에 예카테리노슬라프는 볼셰비키에 의해 점령되었는데, 볼셰비키는 당분간 도시를 벗어나는 위험을 감수하지 않았다. 마흐노는 그의 군대가 예카테리노슬라프와 광활한 해방 지역을 모두 쥐고 있기에 충분하지 않다고 여겼다. 그는 도시를 볼셰비키에게 맡기고 오직 그의 지역 경계만을 통제하기로 결정했다. 이렇게 하여 예카테리노슬라프 남부와 동부로 수천 제곱킬로미터에 달하는 거대한 지역이 모든 당국과 군대로부터 자유로워졌다. 볼셰비키는 예카테리노슬라프를 통치했고, 서부로는 페틀류라주의자가 전역을 지배했다.
마흐노주의자 농민들은 그들 지역의 자유와 비교적 평화로움을 이용해―불행히도 짧은 기간이었지만―일정한 긍정적 과업들을 성취했다.
1918년 12월부터 1919년 6월까지 약 6개월 동안 훌랴이폴레 농민들은 어떠한 정치적 권력도 없이 지냈다. 그들은 그들 사이의 사회적 유대를 깨뜨리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새로운 형태의 사회 조직을 만들었는데, 자유 노동자 코뮌과 소비에트가 그것이었다.
그 뒤, 마흐노주의자는 『자유 노동자의 소비에트에 관한 혁명반란군(마흐노주의자)의 범汎 테제General Theses of the Revolutionary Insurgents (Makhnovists) concerning the Free Workers’ Soviet』라는 제목의 팸플릿을 통해 그들의 사회적 사상을―특히 소비에트에 관한 그들의 구상을―공식화했다.
코뮌의 경우, 여러 곳에서 사회생활을 공동체적이고 공정하고 평등하게 조직하려는 시도가 이루어졌으며, 볼셰비키의 공식 코뮌에 적대적인 태도를 보인 바로 그 농민들은 자유 코뮌을 설립하기 위해 열성적으로 움직였다.
“로자 룩셈부르크Rosa Luxemburg”라고 불리는 첫 코뮌은 프로코프스코예Prokovskoie 마을 근처에 조직되었다. 처음에는 회원이 수십 명에 불과했지만, 나중에는 3백 명이 넘었다. 이 코뮌은 그 지역의 가장 가난한 농민들에 의해 만들어졌다. 로자 룩셈부르크를 추모하며 코뮌을 봉헌하면서, 그들은 그들의 공평과 그들 정서의 고귀함을 증명했다. 그들은 로자 룩셈부르크가 독일에서의 혁명적 투쟁의 순교자라는 것을 이전부터 알고 있었다. 코뮌의 기본 원칙은 로자 룩셈부르크가 분투했던 교의와는 전혀 일치하지 않았다. 그러나 농민들은 사회 투쟁의 희생자를 기리고 싶어 했다. 이 코뮌은 비권위주의적 원칙에 기반을 두고 있었다. 그것은 매우 좋은 결과를 얻었고, 궁극적으로 이웃 농민들에게 큰 영향력을 행사했다.[23]
훌랴이폴레에서 7킬로미터 떨어진 곳에 또 다른 코뮌이 설립되었는데, 간단히 “제1 훌랴이폴레 농민 코뮌”이라고 불렸다. 그것 역시 가난한 농민들의 작업이었다. 20킬로미터 떨어진 곳에는 제2, 제3 코뮌이 있었다. 다른 곳에도 몇 개가 더 있었다.
이 모든 코뮌은 일하는 사람들에게 생활필수품을 제공하기 위해 소수의 훌륭한 조직가들의 도움을 받아 농민들 스스로의 자발적인 자극에 의해 자유롭게 만들어졌다. 그들은 공산주의자 당국에 의해 매우 비효율적으로 운영되는 인공적인 소위 “모범적 코뮌들”과 닮은 점이 없었는데, 모범적 코뮌들은 보통 무작위로 소집되어 진지한 작업을 할 수 없게 모순된 요소들이 모여 있었다. 볼셰비키의 소위 “코뮌들”은 곡물을 낭비하고 땅을 황폐하게 할 뿐이었다. 국가, 즉 정부 보조금을 받으면서 그들은 노동을 교육하는 척하며 사람들의 노동으로 먹고 살았다.
우리가 여기서 관심을 지닌 훌랴이폴레의 코뮌들은 진정한 노동 코뮌들이었다. 그들은 어릴 때부터 근면에 익숙했던 믿을 만한 농민들을 모았다. 그들은 실질적인 물질적 상호부조와 평등의 원칙에 기반을 두었다. 모두가―남성이든 여성이든 어린이든―각자 자신의 능력 범위 안에서 일을 해야 했다. 조직 기능은 그것들을 적절히 수행할 수 있는 동지들에게 맡겨졌다. 그들의 임무가 완수되면 이 동지들은 코뮌의 다른 구성원들과 마찬가지로 공동 작업으로 복귀했다. 이러한 건전하고 진지한 원칙들은 코뮌이 노동자들 스스로에서 생겨났으며 그 발전이 자연스러운 과정을 따랐기 때문이다.
마흐노주의 파르티잔은 농민들에게 압력을 가하는 일 없이 자유 코뮌 사상을 전파하는 데에만 스스로의 역할을 국한했다. 후자는 가난한 농민들의 주도로 형성되었다.
마흐노주의 농민들의 사상과 활동이 1921년 크론슈타트 반란군과 모든 면에서 유사하다는 것을 살펴보는 것은 흥미롭고 중요하다. 이는 노동 대중이 자유롭게 생각하고, 탐구하고, 행동할 수 있는 기회를 가질 때, 이전의 혁명을 검토함으로써 알 수 있듯이 장소, 환경, 심지어―우리는 이것도 추가할 수 있다―시간에 관계 없이 점차적으로 동일한 과정을 발견한다는 것을 증명한다. 다른 모든 추론과는 별개로, 이는 전체적으로 이 과정이 노동자에게 옳고, 공정하고, 참된 과정임을 우리에게 믿을 수 있게 할 것이다. 확실히, 여러 이유로 노동 대중은 지금까지 이 과정을 결코 유지할 수 없었다. 하지만 그것을 단념하지 않거나 혹은 끝까지 따라갈 수 있는 가능성은 시간과 발전의 문제일 뿐이다.
농민들의 건설적 활동은 자유 공산주의에 있어서의 이러한 실험에만 국한되지 않았다. 훨씬 더 방대하고 더 중요한 과업들은 스스로를 드러내는 데 꾸물거리지 않았다. 지역 전체를 아우르는 각종 문제에 대한 공통된 실천적 해법을 찾아야 했고, 먼저 지구를, 나중에는 지방을, 마지막으로 지역 전체를 아우르는 종합 기관 설립이 필수적이었다.
농민들은 실패하지 않았다. 그들은 농민, 노동자, 파르티잔 정기 총회에 의지했다. 그 지역이 자유로웠던 기간 동안, 세 번의 지역 총회가 있었다. 그 총회들은 농민들이 연락을 강화하고, 복잡한 상황 속에서 더 확실하게 방향을 잡고, 경제적, 사회적 및 기타 과제를 명확하게 할 수 있도록 했다.
길고 열정적인 토론 끝에 총회는 그 지역의 모든 주민에게 전반적으로 자발적이고 평등한 소집을 호소하기로 결의했다. “자발적 소집”이라는 것은 총회의 도덕적 권위에 의해 승인된 이 호소가 반란군에 새로운 병력이 필요하다는 것을 강조하는 한편, 아무도 징집을 강요받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했다. 즉, 그 호소는 모두의 양심과 선의를 향한 것이었다. “평등한 소집”이란 군대를 구성하는 데 있어 각 자원병의 개별 상황에 주의를 기울여 소집의 무게가 가능한 한 평등하고 공정하게 사람들에 의해 분배되고 지원될 수 있도록 하는 것을 뜻했다.
페틀류라와 데니킨에 대항하는 투쟁의 총지휘기구로서, 전투 중에 노동자 자신들 사이의 경제적, 사회적 관계를 유지하고 지원하며, 또한 그들과 파르티잔 사이의 정보와 통제에 대한 요구를 돌보고, 최종적으로 채택된 다양한 조치들을 실행하기 위해 이 제2차 총회는 농민, 노동자, 파르티잔으로 구성된 《지역 혁명 군사위원회》(소비에트)를 설립했다.
이 위원회는 자유지구 전체를 포괄했다. 그것은 지역 총회에서 내려진 모든 경제적, 정치적, 사회적, 군사적 결정을 수행하기로 되어 있었다. 따라서 그것은 어떤 의미에서는 전체 운동의 최고 집행자였다. 그러나 그것은 전혀 권위주의적인 기관이 아니었다. 오직 엄격한 집행 기능만이 그것에 할당되었다. 그것은 총회의 지시와 결정을 수행하는 데에 국한되었다. 그것은 언제라도 총회에 의해 해산되어 존립이 무산될 수 있었다.
불행하게도 그 지역에는 무기가 부족했다. 그들이 적절한 때에 새 분대를 구성하지 못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그들은 입대하러 온 자원병 중 90퍼센트를 돌려보내야 했다. 이는 1919년 6월 데니킨의 총공세 동안 이 지역에 불가피한 결과를 초래했다.
제3부. 데니킨의 공세와 최후의 패배
“국가주의자들은” 아르시노프가 정당하게 말한 것처럼, “자유로운 사람들을 두려워한다. 그들은 권위가 없다면 사람들은 사회적 교류의 닻을 잃게 될 것이고, 흩어져 야만적인 상태로 돌아갈 것이라고 주장한다. 이것들은 게으름뱅이, 권위와 타인의 노동을 사랑하는 이들, 또는 부르주아 사회의 맹목적 사상가들이 지닌, 명백히 터무니없는 생각들이다.”
이미 노동의 세계와 노동의 자유의 치명적인 적―권위―은 우크라이나 지역을 바싹 압박하고 있었다. 그것은 양쪽에서 동시에 위협을 가했다. 동남부에서 데니킨 장군의 군대가 올라오고 있었다. 북부에서는 공산주의 국가의 군대가 내려오고 있었다.
데니킨은 헤트만 스코로파즈키가 함락된지 하루만에 처음으로 도착했고, 시쿠로(Andrei Grigoriyevich Shkuro) 장군이 이끄는 반혁명 분대들은 순찰대로 활동하면서 돈 강과 쿠반Kuban 강을 따라 우크라이나로 침투해 폴루구이Polugui와 훌랴이폴레에 접근했다. 이는 해방된 지역에 대한 새 반혁명의 첫 번째 위협이었다.
마흐노주의 반란군은 자연스레 이쪽으로 향했다. 보병과 기병대는 잘 조직되고 지휘되었으며, 꽤 잘 무장하고 있었으며 열정과 열의로 가득 차 있었다. 보병은 사실 매우 독특하고 독창적인 방식의 장비를 갖추고 있었다. 그들은 말을 이용해 기병처럼 움직였는데, 말을 타고 있는 것이 아니라 우크라이나 남부의 타찬카Tachanka라고 불리는 스프링이 달린 가벼운 마차를 타고 있었다. 이 보병들은 기병대와 같은 속도로 빠르게 이동하면서 하루에 60킬로미터에서 70킬로미터까지, 심지어 필요하다면 90킬로미터에서 100킬로미터까지 쉽게 이동할 수 있었다. 마흐노주의 기병대는 확실히 세계 최고 중 하나였다. 그들의 공격은 격렬하고 압도적이었다.
이 혁명적 농민 중 많은 이들이 1914년 전쟁에서 싸웠으며, 따라서 훈련되고 검증된 전투원이었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 이는 농민들이 마흐노주의 투사들의 어느 정도 해소할 수 있도록 해주었기에 매우 중요했다. 실제로 전선의 특정 구역에서는 인근 농민 수백 명이 정기적으로 지친 투사를 대신했다. 투사들은 그들에 힘입어 집으로 돌아갔다. 2, 3주간의 휴식 뒤 그들은 전선에서 다시 그들의 자리에 서기 위해 돌아왔다.
우리는 농민들 역시 처음부터 반란군에게 정기적으로 식량과 사료를 공급할 책임을 지고 있었다는 것을 덧붙여 두어야만 한다. 중앙 공급 부서가 훌랴이폴레에서 조직되었다. 보급품들이 전선으로 보내지기 위해 사방에서 그곳으로 보내졌다.
데니킨은 마흐노주의자의 완강한 저항을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 더욱이 그는 페틀류라의 디렉토리야와 볼셰비키 사이에 투쟁이 임박했다고 간주했다. 그는 이 상황을 이용해 둘 모두를 쉽게 이기고―적어도 초반에는―예카테리노슬라프 북부 경계 너머에 전선을 구축하기를 바랐다.
첫 번째 전투가 끝난 뒤, 데니킨의 부대는 돈 강과 아조프 해 방향으로 후퇴해야 했다. 짧은 시간에 폴루구이부터 바다까지의 모든 영토가 해방되었다. 마흐노주의 파르티잔은 베르댠스크와 마리우폴 같은 몇몇 중요한 기차역과 도시들을 점령했다. 데니킨에 대한 첫 번째 전선이 확고히 자리 잡은 것은 이 순간―1919년 1월―부터였다. 이는 후에 마리우폴 동부와 동북부로 100킬로미터 이상 확장되었다.
당연히 데니킨은 포기하지 않았다. 그는 계속해 공격과 침투를 강화했다. 6개월 동안 마흐노주의자들은 이 반혁명적 폭주를 막아냈다. 시쿠로 장군 역시 뛰어난 기병을 보유하고 있었기에 전투는 끈질기고 치열했다. 게다가 그는 파르티잔의 전술을 사용했다. 그의 분대는 마흐노주의 군대의 후방 깊숙이 침투한 다음 빠르게 퍼져나가 그들이 도달할 수 있는 곳의 모든 것을 파괴하고, 불태우고, 학살했다. 그런 다음 마법처럼 사라지고 갑자기 다른 곳에 나타나 같은 파괴를 저질렀다.
이러한 침략으로 고통받는 것은 오직 노동자들뿐이었다. 데니킨주의자들Denikinists은 농민들이 반란군에 준 도움과 데니킨주의자에 대한 적대감에 대해 복수했다. 그들은 그렇게 해서 혁명에 대한 반발을 불러 일으키기를 희망했다. 아조프 지역의 특별 속령屬領에 아주 오랫동안 거주했던 유대인들 역시 이 습격으로 고통받았다. 데니킨주의자들은 나타날 때마다 유대인들을 학살함으로써 그들의 임무를 용이하게 할 수 있는 대중적 반反유대인 운동을 일으키고자 했다.
그러나 잘 훈련되고 무장된 군대에도 불구, 맹렬한 공격에도 불구하고 데니킨주의자들은 혁명적 열정으로 가득 차 있고 게릴라 전투에 능숙한 반란군 부대를 진압할 수 없었다. 반대로 격렬한 6개월간의 전투 동안 시쿠로 장군은 마흐노주의 부대로부터 몇 번이나 80킬로미터에서 120킬로미터에 달하는 급박한 후퇴만이 그를 엄청난 재해로부터 구할 수 있었던 타격을 받았다. 이 기간 동안 마흐노주의자들은 적어도 다섯 번에서 여섯 번 거의 타간로크 성벽까지 진격했다. 이때 병력과 무기의 부족이 마흐노의 데니킨 반혁명 섬멸을 방해했을 뿐이다.
마흐노주의자에 대한 데니킨주의자 장교들의 증오와 분노는 믿을 수 없을 만큼 고조되었다. 그들은 포로들을 정교한 고문으로 굴복시켰다. 그들은 종종 포탄을 폭발시켜 그들을 난도질했다. 그리고 몇 가지 사례가 알려졌는데―그것들은 반란군 언론을 통해 상세히 언급되었다―포로들은 붉게 달궈진 뜨거운 철판 위에서 산 채로 구워졌다.
전투 과정에서 마흐노의 군사적 재능은 눈에 띄게 드러났다. 훌륭한 전쟁 지도자로서의 그의 명성은 그의 적인 데니킨주의자에게서조차 인정받았다. 그러나 이것이 마흐노를 죽이거나 사로잡은 사람에게 데니킨 장군이 50만 루블의 포상금을 거는 것을 막지는 못했다.
이 기간 전체 동안 마흐노주의자와 볼셰비키 사이 관계는 소원했으나 우호적이었다. 한 가지 사실이 이를 역설했다. 1919년 1월 마흐노주의자는 격전 끝에 데니킨주의자를 아조프 해로 내몰아 그들로부터 마차 100대 분량의 밀을 노획했다. 마흐노와 반란군 간부들이 처음 한 생각은 이 전리품을 모스크바와 페트로그라드의 굶주린 노동자들에게 보내는 것이었다. 이런 생각은 반란군 세력 대중들에 의해 열광적으로 받아들여졌다. 마차 100대 분량의 밀이 모스크바와 페트로그라드에 마흐노주의자 사절단과 함께 전달되었고, 모스크바 소비에트는 이를 매우 따뜻하게 받아들였다.
볼셰비키는 데니킨보다 훨씬 늦게 마흐노주의 운동 지역에 나타났다. 반란군은 이미 몇 달 동안이나 데니킨과 전투를 벌여왔다. 디벤코가 이끄는 볼셰비키 제1사단이 북부로부터 시넬니코베에 아무런 방해 없이 도착했을 때, 반란군은 데니킨을 그들의 지역에서 몰아내고 마리우폴 동부로 방어선을 구축했다.
이 시점에는 마흐노 역시 모든 반란 운동과 마찬가지로 볼셰비키에게 전혀 알려지지 않았다. 그때까지 그는 공산주의 언론에서 장래가 유망한 대담한 반란군으로 거론되고는 했다. 그의 스코로파즈키와의 싸움, 페틀류라와 데니킨과의 전투는 볼셰비키 지도부로부터 호의를 가져다주었고, 매우 자연스레 그의 군대를 그들의 군대에 통합하기를 희망했다. 때문에 그들은 미리 마흐노를 찬양하며 그를 알지도 못한 채 신문의 칼럼 면 전체를 그에 할애했다.
“볼셰비키 투사들과 마흐노 휘하 간 첫 만남은 1919년 3월 동등한 찬사와 호의 아래 이루어졌다.” 표트르 아르시노프는 기록하고 있다. “마흐노는 즉시 데니킨을 격퇴하기 위한 연합 전선을 준비하기 위해 그의 모든 분대와 함께 적군赤軍에 합류하도록 요청받았다. 볼셰비키와 마흐노주의자 농민 사이의 정치적, 이데올로기적 차이는 공통의 대의에 근거해 연합에 있어 장애물로 간주되지 않았다. 볼셰비키는 반란군의 특수성이 침해되지 않을 것이라고 이해시키고자 했다.
마흐노와 그의 간부들은 공산당 당국의 도착이 이 지역의 자유에 대한 새로운 위협이라는 것을 완벽하게 알고 있었다. 그들은 그것을 새로운 종류의 내전 조짐으로 보았다. 그러나 그들도, 군대도, 지역 소비에트도 모두 우크라이나 혁명 전체에 치명적인 영향을 미칠지도 모르는 이 전쟁을 원하지 않았다. 그들은 돈과 쿠반으로부터 다가오고 있는 드러나고 잘 조직된 반혁명으로부터 시야를 놓지 않았으며, 오직 한 가지 가능한 관계―무력 충돌만이 있음을 놓치지 않았다.
이 위험은 날이 갈수록 더해갔다. 반란군은 볼셰비키와의 싸움이 사상 영역에 국한될 수 있다는 희망을 지니고 있었다. 이럴 경우, 자유의지주의 이론의 활력과 농민들의 혁명적 양식, 그리고 그들의 자유 운동에 있어 이질적인 요소들에 대한 저항은 그 지역의 자유를 가장 잘 보장하는 것이기에 그들은 그들의 지역이 완전히 안전하다고 여길 수 있었다.
반란군 지도자들의 전반적 의견에 따르면 운동이 군주제적 반동에 대항하는 모든 세력을 집중하고 그것이 일소될 때까지 볼셰비키와의 이데올로기적 불일치에 신경을 쓰지 않아야만 했다. 이러한 맥락에서 마흐노주의자와 적군 사이의 연합이 이루어졌다.”
양군이 체결한 협정의 핵심 조항은 다음과 같다. “ⅰ. 반란군은 내부 조직을 그대로 유지한다, ⅱ. 공산당 당국이 임명한 정치위원을 받아들인다, ⅲ. 엄격히 군사적인 사안은 적군 최고사령부에 종속된다, ⅳ. 데니킨에 대한 전선으로부터 분리될 수 없다[24], ⅴ. 적군과 동일한 탄약과 보급품을 제공받는다, ⅵ. 혁명반란군이라는 이름과 검은 깃발을 유지한다.”(검은 깃발은 아나키스트 깃발이다.)
우리는 동시에 마흐노의 군대가 “제3여단”이라는 이름을 수여 받았음을 명기해야 한다. 후에 그것은 “제1 혁명 반란 사단”이 되었고, 그 뒤에는 다시 독립해 “(마흐노주의) 우크라이나 혁명반란군”이라는 확정된 이름을 채택했다.
마흐노주의 군대에 있어 가장 중요한 점은 당연히 내부 조직의 유지였다. 따라서 이는 적군에 “유기적”으로 편입되는 행위가 아니라 긴밀한 협력 조약에 불과했다.
여기서 나는 잠시 멈춰 반란군 내부 조직의 몇 가지 특징에 관해 이야기하겠다. 이 조직은 세 가지 기본 원칙에 기반을 두고 있다. 1. 자발적 입대, 2. 지휘부에 대한 피선거 자격, 3. 자유롭게 수락된 규율.
자발적 입대는 군대가 자신의 자유의지로 입대한 혁명적 투사들로만 구성되었다는 것을 의미했다.
지휘부에 대한 피선거 자격은 간부를 포함한 군대 내 모든 지휘관 및 기타 주요 직책을 맡은 이가 모두 군대 전체 혹은 해당 부대에 의해 투표로 선출되었거나 (위급 상황 중 지휘관이 직접 임명했을 경우) 만장일치로 승인을 받았다는 사실을 뜻했다.
자유롭게 수락된 규율은 다음과 같은 방법으로 이루어졌다. 규율의 모든 규칙은 반란군 위원회에 의해 작성되고 그 뒤 여러 부대의 위원회들에서 승인되었다. 승인되면 그것들은 각 반란군과 지휘관의 개별 책임으로 엄격히 지켜져야 했다.
볼셰비키와 반란군 사이 동맹은 전적으로 군사적인 것이었다. 모든 정치적 질문은 임의로 배제되었다. 이로써 동맹에도 불구하고 지역 노동자들은 그들이 추구해왔던 것과 같은 경제적, 사회적 발전, 더 정확하게는 혁명, 권력을 받아들이지 않는 노동자의 완전히 자유롭고 독립적인 활동을 자유롭게 따를 수 있게 되었다.
우리는 이것이 볼셰비키와 파르티잔 사이의 단절, 파르티잔에 대한 볼셰비키의 비열하고 빈정거리는 비난, 그리고 자유지구에 대해 공산주의자들이 무장 침략한 유일한 원인이었다는 것을 곧 보게 될 것이다.
1919년 2월, 지역 소비에트가 창설된 이래, 마흐노주의 지역 노동자들은 스스로를 통합적이자 조직적이라고 생각했고, 이러한 연대감으로부터 농민은 매우 긴급한 다른 구체적인 문제에 대처하게 되었다. 그들은 도처에서 자유 지역 소비에트를 만드는 것부터 시작했다. 당시의 사정상, 이 작업은 느리게 이루어졌지만 농민들은 그것이 진정 자유로운 공동체를 구축할 수 있는 유일의 건전한 기반이라고 여기며 그 생각을 일관되게 유지했다.
곧 농민과 도시 노동자 사이 직접적이고 견고한 연합 문제가 대두되었다. 농민의 의견에 따르면 그러한 연합은 정당과 국가 기관, 중간 공무원 외부에서 노동자 기업이나 조직과 직접 설립되어야 했다. 그들은 직관적으로 이것이 혁명의 통합과 이후 발전에 필수적이라고 여겼다. 동시에, 그들은 그 성취가 투쟁 없이는 대중에 대한 지배권을 포기하지 않는 공산주의자들과 필연적으로 투쟁을 불러일으키리라는 것을 완벽하게 자각하고 있었다. 그러나 농민들은 이 위험이 아주 심각하다고는 생각하지 않았는데, 농민과 노동자가 단결하면 그들을 제압하려는 어떤 정치 권력에도 쉽게 저항할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어쨌든, 농민과 노동자의 자유롭고 직접적인 연합은 마침내 진정하고 해방을 위한 혁명을 달성하고, 이를 방해, 변형, 억압할 수 있는 모든 요소를 제거하는 유일의 자연스럽고 생산적인 방법으로 보였다. 도시 노동자와의 결합 문제가 제기되고 논의된 것도 이러한 맥락에서였는데, 이는 마침내 반란 지역 전체의 목표가 되었다.
사람들의 그러한 태도와 이런 종류의 계획이 세워진다면 정당들, 특히 공산주의자가 마흐노주의 지역에서 성공할 수 없다는 것은 말할 것도 없다. 이러한 정당들이 국가주의 프로그램과 조직 계획을 지니고 그곳에 나타났을 때, 그들은 냉담하게, 무관심하게, 때로는 적대적으로까지 받아들여졌다. 그들의 투사들, 요원들은 종종 다른 이들의 일에 간섭하기 위한 초대 받지 않은 이들로서 공개적으로 비난받았다. 지역 곳곳에 잠입해 주인 행세를 한 공산당 당국은 자신들이 침입자이자 사기꾼으로 간주되고 있다는 것을 분명히 이해하게 되었다.
당초 볼셰비키는 마흐노주의 군대를 적군 대열에 흡수해 손 쓰지 않고 사람들을 순종시킴으로써 이 소극적 저항을 해결하기를 바랐다. 그들은 곧 이 희망이 헛된 것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이 지역 농민들은 볼셰비키 정부 요원과 어떠한 관계도 맺고 싶어 하지 않았다. 그들은 그들을 무시하고 거부했다. 때때로 그들은 그들을 함부로 다루기까지 했다. 어떤 곳에서는 무장한 농민들이 마을에서 “특별위원회”(체카)를 몰아냈으며, 훌랴이폴레에서는 공산주의자들이 감히 그런 기관을 설립할 엄두도 내지 못했다. 다른 곳에서는 공산당 행정부를 심어 넣으려는 시도로 인해 사람들과 당국 간 유혈 충돌로 이어져 상황이 매우 어려워졌다. 마흐노주의 군대 역시 다루기 어려웠다.
볼셰비키가 사상과 사회운동으로서 마흐노주의에 대해 조직적이고 체계적인 싸움을 시작한 것은 그들이 상황의 실체를 깨달았을 때였다. 늘 그렇듯 언론이 캠페인을 시작했다. 명령이 떨어지자 언론은 반란 운동을 비판하기 시작해 점차 부유한 농민들(쿨라크)의 운동으로 취급하고, 그 사상과 구호를 반혁명적이라고 묘사하며 그 활동을 혁명에 해롭다고 비난하기 시작했다. 중앙 당국의 연설과 명령뿐만 아니라 신문에도 이 운동의 지도자들에 대한 직접적인 위협이 등장했다.
머지않아 그 지역은 사실상 봉쇄되었다. 일부 지역에서는 공산당 당국이 도로 장벽을 세웠고, 곧 훌랴이폴레를 오가는 모든 혁명 투사들이 도중에 체포되었는데, 그들은 종종 실종되기도 했다. 더구나 반란군에의 탄약 보급도 상당히 줄어들었다.
1919년 4월 10일, 훌랴이폴레에서 제3차 농민, 노동자, 파르티잔 제3차 지역 총회가 개최된 것은 이러한 새 복잡한 문제와 위협의 그림자 아래에서였다.
그 목적은 당면한 과제를 정확하게 해결하고, 지역의 혁명적 생활의 전망을 검토하는 것이었다. 200만 명이 넘는 사람들을 대표하는 72개 지구 대표들이 총회 작업에 참여했다. 나는 그 과정에 대한 기록이 없다는 점을 유감스럽게 생각하는데, 이 과정에서 사람들이 자신들의 진로와 새로운 생활을 위한 그들 스스로의 대중적 형태를 추구하는 지혜와 명쾌함과 동시에 어떤 따뜻함을 명확하게 볼 수 있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얼마 전부터 예상되던 상황이 벌어진 것은 이 제3차 총회가 끝나갈 무렵이었다. 볼셰비키 군사령관 디벤코로부터의 전보가 총회장에 도착했다. 그것은 총회를 “반혁명적”이라고, 그 조직가들은 “범법자들”이라고 난폭하게 선언했다. 이는 볼셰비키가 이 지역의 자유를 직접 공격한 첫 번째 사건이자 동시에 반란군에 대한 선전포고였다.
총회는 그 엄청난 중요성을 완벽히 이해했다. 총회는 즉시 전보에 대한 분노의 저항 의견을 내놓았다. 전보는 즉시 인쇄되어 농민과 노동자들에게 배포되었다.
며칠 후, 《혁명 군사위원회》는 공산당 당국으로, 디벤코라는 인물에게 혁명 중 이 지역의 진정한 역할을 강조하고 누가 진정 반동적 방향으로 그것을 끌고 간 책임이 있는지 상세한 답변을 작성해 보냈다. 이 답변은 긴 분량이지만 양 당사자의 입장을 훌륭하게 드러내고 있기에 우리는 이를 완전히 옮겨 적기로 하겠다.
“디벤코 ‘동지’는 4월 10일 훌랴이폴레에서 소집된 총회가 반혁명적이라고 선언하고 그 조직가들을 법의 테두리 바깥에 두었다. 그에 따르면 가장 모진 탄압이 그들에게 가해져야 한다. 우리는 그의 전보를 그대로 인용하겠다. ‘노보 알렉세옙카Novo Alexeyevka, No.283, 4월 10일, 오후 2시 45분. 아버지 마흐노 동지 귀하, 나 알렉산드로프스크 사단의 참모장은 … 내 명령으로 해산된 혁명군 총참모부 명의로 소집되는 어떤 총회라도 명백히 반혁명적인 것으로 간주될 것이며, 그 조직가들은 자신들이 범법자로 지정되었기에 가장 가혹한 진압 조치들에 노출될 것임을 알린다.[25] 그러한 조치가 필요하지 않도록 즉시 조치를 취하도록 지시하라. 서명: 사단장 디벤코.’
총회를 반혁명이라고 선언하기 전, 디벤코 ‘동지’는 심지어 이 총회가 누구에 의해, 어떤 목적으로 소집되었는지 알아보려고도 하지 않았다. 따라서 그는 총회가 실제로는 《혁명 군사위원회the Military Revolutionary Council》의 집행위원회에 의해 소집되었음에도 훌랴이폴레의 ‘해체된’ 혁명군 총참모부에 의해 소집되었다고 말한다.
결과적으로, 총회가 소집된 이후 총회 구성원들은 그들이 범법자로 선언된 것인지, 또는 총회가 디벤코 ‘동지’에 의해 반혁명으로 간주되는 것인지 여부를 알 수 없다. 이것이 맞다면 이 총회를―각하가 보기에 반혁명이라면―누가, 어떤 목적으로 소집했는지 각하에게 설명하도록 허락해 달라. 그러면 그것은 당신이 표현하는 것처럼 끔찍해 보이지 않을 수 있다.
이미 언급했듯, 총회는 훌랴이폴레 《지역 혁명 군사위원회》 집행위원회에 의해 소집되었다. 이는 《혁명 군사위원회》의 추후 자유 행동을 결정할 목적으로 소집된 제3차 지역 총회였다(디벤코 ‘동지’, 당신도 보듯이 이 ‘반혁명’ 총회는 세 번이나 열렸다).
이제 의문점이 생긴다―《혁명 군사위원회》는 어디로부터 왔으며, 어떤 목적으로 만들어졌는가? 만약 아직 모른다면, 디벤코 ‘동지’, 우리가 알려주겠다. 《지역 혁명 군사위원회The Regional Military Revolutionary Council》는 올해 2월 12일 훌랴이폴레에서 개최된 제2차 총회 결의에 따라 형성되었다(당신도 그것이 당신이 여기 있지도 않았던 한참 전이라는 것을 알 것이다). 위원회는 투사들을 조직하고 자발적 소집을 진행하기 위해 만들어졌는데, 이는 백군白軍이 이 지역을 포위하고 최초 자원병들로 구성된 반란군 부대가 전선을 확장하기에 충분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당시 우리 지역에는 소비에트 부대들이 없었다. 더구나 사람들은 그 지역 방어가 스스로의 임무라고 생각해 소비에트 부대의 개입을 별로 중요하게 여기지 않았다. 《혁명 위원회》가 창설된 것은 이 때문이다. 그것은 제2차 총회 결의에 따라 각 지구 대표로 구성되었는데, 전부 합해 32명의 구성원이 각각 예카테리노슬라프와 토리드Tauride 주의 지구들을 대표했다.
《혁명 군사위원회》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뒤에 알려주겠다. 지금으로서는 다음과 같은 질문들이 제기된다. 제2차 지역 총회는 어디로부터 왔는가? 누가 소집하였는가? 누가 승인했는가? 그것을 불법이라고 부른 이들이 있었는가? 그렇지 않다면 어째서인가? 제2차 지역 총회는 요컨대 제1차 총회에서 선출된 5명으로 구성된 신규 단위에 의해 훌랴이폴레에서 소집되었다. 이 제2차 총회는 2월 12일 개최되었다. 그리고 놀랍게도, 그것을 소집한 이들은 범법자들이 아니었다. 왜냐하면 당신도 알다시피 그 지역에는 아직 사람들이 스스로의 피로 쟁취한 그들의 권리를 감히 억압할 수 있는 ‘영웅들’이 없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새로운 의문이 생긴다. 제1차 총회는 어디서 왔는가? 누가 그것을 소집했는가? 등등. 디벤코 ‘동지’, 당신은 아직 우크라이나 혁명 운동이 다소 생소해 보이는 것 같기에 우리는 그 시작에 대해 말해야 할 것 같다. 그것이 우리가 할 일이다. 그리고 이 사실들을 알게 되면, 당신은 아마도 당신의 관점을 조금 수정하게 될 것이다.
그래서 대표단은 임무로부터 돌아온 뒤 모든 ‘당’ 또는 모든 ‘권력’ 혹은 모든 ‘법’ 바깥의 제2차 지역 총회를 소집했다. 왜냐하면 당신, 디벤코 ‘동지’, 그리고 당신처럼 법을 사랑하는 이들은 그때 멀리 떨어져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반란 운동의 영웅적 지도자들은 이제 막 노예제의 사슬을 스스로 끊어낸 이들에 대한 권력을 원하지 않았기에, 총회는 반혁명으로 선언되지 않았고 그 소집자들도 범법자로 선고받지 않았다.
지역 총회로 돌아가자. 훌랴이폴레 지역에 《혁명 군사위원회》가 창설될 당시, 우리 지역에 소비에트 권력이 나타났다. 제2차 총회에서 통과된 결의안에 따라, 지역 총회는 소비에트 당국의 출현에도 작업을 중단하지 않았다. 그것은 총회의 지시를 수행해야 했다. 위원회는 집행 기구이지 지휘 기관이 아니었다. 그렇기에 그것은 그 능력을 최대한 발휘하여 계속해 작업을 했고 항상 혁명적 과정을 따랐다.
소비에트 당국은 조금씩 총회의 활동에 장애물을 세우기 시작했다. 소비에트 정부의 정치위원과 다른 고위 공무원들은 총회를 ‘반혁명’으로 취급하기 시작했다. 그 다음 총회 구성원들은 4월 10일 훌랴이폴레에서 제3차 지역 총회를 소집해 위원회의 향후 행동을 결정하거나, 총회가 필요하다고 판단하면 이를 청산하기로 결정했다. 그래서 총회가 개최되었다.
그들은 반혁명을 이끈 반혁명분자들이 아니라 반란과 사회혁명의 수준을 가장 먼저 드높인 이들이었다. 그들은 모든 압제자에 대항해 이 지역의 총체적 투쟁을 조정하는 것을 도와왔다. 72개 지구 대표들과 몇몇 반란군 단위 대표들이 총회에 참석했다. 이들은 모두 《혁명 군사위원회》가 필요하다고 판단했고, 나아가 집행위원회를 확대해 자발적이고 평등한 지역 소집을 수행하도록 지시했다.
이 총회는 이 지역이 반란의 수준을 가장 먼저 드높였던 만큼, ‘반혁명’이라고 선언한 디벤코 ‘동지’의 전보에 다소 놀랐다. 그것이 총회가 이 전보에 대해 활발한 항의 의견을 내놓은 이유이다.
이런 사실들이 당신을 깨우쳐 줄 것이다, 디벤코 ‘동지’. 생각해 보라! 당신―오직 당신―에게 백만 노동자, 스스로 노예의 사슬을 떨쳐내고, 지금은 스스로의 의지에 따라 스스로의 삶을 건설하는 과정에 있는 사람들을 반혁명이라고 선언할 권리가 있는가? 아니다! 만일 당신이 진정 혁명가라면, 당신은 압제자들과 싸우는 것, 새롭고 자유로운 삶을 건설하는 것을 도울 것이다.
스스로를 혁명가라고 칭하는 이들이 그들 자신보다 더 혁명적인 사람들 모두를 불법화하는 것을 가능하게 하는 법이 존재할 수 있는가? 총회의 집행위원회는 대중 전체를 대표하기 때문이다.
모든 입법자들과 모든 법을 막 타도한 사람들을 지배하기 위해 폭력적인 법을 제정하는 것이 허용되고 용인될 수 있는가?
단지 대중이 허락을 기다리지 않고 혁명가가 그들에게 약속한 훌륭한 것들, 즉 자유와 평등을 취했다는 이유로 ‘혁명가’가 자신을 보호자라고 부르는 혁명적 대중에게 가장 가혹한 형벌을 가할 권리를 지닌 법이 존재하는가?
‘혁명가’가 갓 쟁취한 자유를 빼앗을 때, 혁명적 대중은 침묵해야만 하는가?
혁명의 법은 자신을 선출한 혁명적 대중이 그에게 부여한 의무를 수행해야 한다고 믿기 때문에 대표자들을 쏘라고 명령하는가?
혁명은 누구의 이익을 옹호해야 하는가? 당에 속한 이들인가 아니면 피로써 혁명을 일으킨 이들인가?
훌랴이폴레 지역 《혁명 군사위원회》는 모든 압력, 모든 정당의 영향력 위에 존재한다. 그것은 단지 그것을 선출한 이들만을 인정한다. 그것의 의무는 사람들이 지시한 것을 달성하고, 사상의 전파에 있어 어떤 좌파 사회주의 정당 같은 장애물을 만들지 않는 것이다. 따라서, 노동자 사이에서 볼셰비키 사상이 성공한다면, 《혁명 군사위원회》―‘명백하게 반혁명적인’ 조직―는 필연적으로 다른 조직―‘더 혁명적인’ 볼셰비키―로 대체될 것이다. 하지만 그 동안은 우리를 방해하지 말고, 억압하려 하지 말라.
만일 당신과 당신 같은 사람들이, 디벤코 ‘동지’, 이전과 같은 정책을 고수하는 데에, 당신이 그것을 선하고 양심적이라고 믿는다면, 당신의 작고 더러운 작업을 결론 보라. 당신과 당신 패거리가 쿠르스크에 있을 때 지역 총회를 소집한 모든 조직가를 범법자라고 선언하라. 우크라이나의 사회혁명 수준을 처음으로 드높인 모든 이들, 당신의 허가를 기다리지 않고, 당신의 계획에 따르지 않고 행동한 이들 모두를 반혁명이라고 선언하라. 또한 대표들을 ‘반혁명적’ 총회에 파견한 모든 이들을 범법자라고 선언하라. 마지막으로, 당신의 허락 없이 노동자의 해방을 위해 반란 운동에 참여했던 모든 사라진 동지들을 범법자로 선언하라. 당신의 허가 없이 총회가 소집한 모든 것을 영원히 불법이며 반혁명이라고 선언하라. 하지만 진실은 군대를 넘어선다는 것을 알아두라. 당신의 위협에도 불구하고 총회는 임무들을 포기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총회에는 권리가 없으며 사람들의 권리를 빼앗을 권리가 없기 때문이다.
서명 : 위원장 체르노크니즈니(Tchernoknijny), 부위원장 코간(David Kogan), 비서 카드베(Kardbet), 코발(Koval), 페트렌코(Petrenko), 도첸코(Dotzenko) 및 기타 총회 구성원”
총회의 회신은 볼셰비키 당국을 분노하게 했다. 그들은 볼셰비키 당국에게 우크라이나를 평화적으로 독재에 종속하려는 모든 희망을 포기해야 한다는 것을 증명했다. 그리고 이때부터 볼셰비키는 이 지역에 대한 무장 공격을 계획했다.
이 역시 얼마 뒤 마흐노주의를 몰아내는 것이 다른 무엇보다 필수적이라는 유명한 발표를 한 트로츠키였다. 그는 “마흐노우슈치나는 대중의 심층부에서 우리에 대한 대항을 자극하는 반면 노골적인 반혁명가 데니킨은 이후 계급 프로파간다에 의해 손쉽게 위험에 처할 가능성이 있기에 우크라이나 전체를 그에게 양보하는 편이 나을 것이다”라고 설명했다.
그는 지휘관 및 군사 지도자 회의에서 이를 제안했다. 그리하여 그는 한편으로는 마흐노주의 운동의 대중 혁명적 성격을 완벽하게 인식하고 있음을, 다른 한편으로는 데니킨의 운동의 진정한 성질을 전혀 인식하지 못하고 있음을 증명했다.
동시에 볼셰비키는 이 지역 내에서 일련의 정찰 원정과 조사에 착수했다. 고위 공무원과 일반 투사들―카메네프, 안토노우-오우세옌코(Vladimir Alexandrovich Antonov-Ovseenko) 등―은 마흐노를 방문해 분명 우호적인 방식으로 질의와 비판을 했으나 때로는 비아냥이나 공공연한 협박을 하기도 했다.
볼셰비키와 협력해 마흐노주의자가 청산한 차르주의자 전직 장교 그리고예프(Nikifor Aleksandrovich Grigoriev)의 폭동이 잠시 이 활동을 중단시켰다. 하지만 곧 모든 것이 다시 활기를 되찾았다.
1919년 5월, 볼셰비키는 마흐노를 암살하려 했다. 음모는 평소의 전략과 다행스런 우연한 사고로 인해 마흐노에게 간파되었다. 또 다른 사고와 그의 신속한 반응으로 그는 음모의 주동자에 손이 닿을 수 있었다. 그들은 처형되었다.
또한 마흐노는 볼셰비키 기관에서 일하는 동지들로부터 예카테리노슬라프, 하르키우 등지로 소집되었을 때 가지 말라는 경고를 받았는데, 공식 소환은 죽음이 기다리는 함정일 것이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최악의 사태는 “백군의 위험”이, 데니킨은 대규모 코카서스인 부대의 도착으로 인해 마흐노주의 지역 내에서 상당한 병력 증원을 받은 때 볼셰비키는 반란군에게 군수품 공급을 완전히 중단해 심각해졌다는 것이었다.
뒤에 보게 될 것처럼, 그들은 데니킨의 진정한 강점이나 장기적인 계획을 전혀 알지 못했기에 계산에 심각한 오류를 범했다. 그는 혁명에 대항하는 총력전을 목표로 코카서스, 돈, 쿠반 지역에서 주요 부대를 소집하고 있었다. 몇 달 전 마흐노주의 반란군에 의해 바다로 밀려난 데니킨은 그의 군대를 재편성, 무장, 준비시키는 등 큰 힘과 주의를 기울였다. 무엇보다도 그는 훌랴이폴레의 반란군이 그의 왼편에 지속적인 위험이 되었기에 마흐노주의 군대를 박살내야만 했다. 볼셰비키는 이 모든 것에 대해 아무것도 알지 못했다―더 정확히는, 그들은 마흐노주의에 대항하는 투쟁에 몰두하며 그것에 대해 아무것도 알고 싶어 하지 않았다.
1919년 5월 말, 준비를 마친 데니킨은 두 번째 군사 작전을 개시했는데, 그 범위와 열의는 볼셰비키뿐만 아니라 마흐노주의자마저 놀라게 했다. 이에 따라 6월 초에는 자유지구와 우크라이나 전역이 동시에 양쪽으로부터 위협받게 되었다. 한쪽은 서남부 데니킨의 강력한 공세에 의해서였고, 다른 한쪽은 북부의 적대적인 볼셰비키로부터였는데, 그들은 아주 조금도 의심할 여지 없이 데니킨이 마흐노주의자를 소탕하게 내버려두고, 심지어 데니킨의 일을 더 쉽게 만들려고까지 했다.
이러한 곤란한 상황에서 훌랴이폴레 《혁명 군사위원회》는 사태의 심각성을 고려해 예카테리노슬라프, 하르키우, 헤르손, 토리드, 도네츠Donetz 분지의 여러 지역의 농민, 노동자, 파르티잔 및 적군 특별 총회를 소집하기로 결정했다.
이 제4차 지역 총회―매우 극적으로 준비된―는 6월 15일 소집되었다. 그것은 주로 데니킨의 진격과 소비에트 당국이 자신들이 어떤 상황에 처해 있는지 깨닫지 못하는 무능으로 인해 전국에 드리워진 치명적 위험을 피하기 위한 전반적 상황과 수단을 조사하기 위한 것이었다.
총회는 또한 이 지역 주민들의 식량 배급 문제, 그리고 마지막으로 전반적인 지방 자치 행정 문제를 고려해야 했다.
아래는 《혁명 군사위원회》가 우크라이나 노동자들에게 발행한 이 총회에 대한 호출문이다.
“제4차 특별 노동자, 농민, 파르티잔 대표 총회(전보 제416호).
예카테리노슬라프, 토리드 및 인접 지역의 모든 지구, 자치구, 코뮌, 마을 집행위원회에. 아버지 마흐노의 부대로 알려진 우크라이나 제1 반란 사단의 모든 부대에. 같은 지역에 위치한 적군의 모든 부대에!
《혁명 군사위원회》의 집행위원회는 5월 30일 회의에서 백군의 공세로 인한 전선의 상황과 소비에트 권력의 전반적인―정치적 및 경제적―상황을 조사한 뒤 노동 대중만이 해결책을 찾을 수 있다는 결론에 도달했다. 그렇기에 훌랴이폴레 지역 《혁명 군사위원회》는 훌랴이폴레에서 6월 15일 특별 총회를 소집하기로 결정했다.
투표 방법 : 1. 농민과 노동자는 3천 명당 1명의 대표를 파견한다. 2. 반란군과 적군은 각 부대 대표를 위임한다. 3. 사무국은 아버지 마흐노 사단에서 2명의 대표를 파견하고, 여단의 경우 각 여단당 1명의 대표를 파견한다. 4. 각 지구 집행위원회―소비에트를 기초로 인식하는―는 각 조직별 대표 1명을 파견한다.
비고 : a. 노동자 대표 선거는 마을, 자치구, 공장 및 작업장 집회에서 열릴 것이다. b. 소비에트의 특별 회의 또는 여러 단위의 위원회는 대표를 파견하지 않는다. c. 《혁명 군사위원회》는 여유 있는 물품을 가지고 있지 않으므로 대표들에게 식량과 돈을 제공해주어야 한다.
의제 : a. 《혁명 군사위원회》 집행위원회의 보고서 및 대표단의 보고서. b. 현재 상황. c. 훌랴이폴레 지역의 역할, 과제 및 목표. d. 지역 《혁명 군사위원회》 조직 개편. e. 지역 군사 조직. f. 식량 보급 문제. g. 농업 문제. h. 재정 문제. i. 농민과 노동자의 통합. j. 치안. k. 지역 사법 행위. l. 새로운 사업.
1919년 5월 31일, 훌랴이폴레에서 작성.”
소집이 호출되자마자 볼셰비키는 훌랴이폴레 지역을 공격하기로 결정했다. 반란군 부대가 데니킨의 카자크의 격렬한 공격에 저항하며 죽을 때까지 진군하는 동안, 볼셰비키 연대는 북부에서 반란군 지역을 침공해 후방의 마흐노주의자들을 공격했다. 마을을 침략한 볼셰비키는 투사들을 붙잡아 그 자리에서 처형했다. 그들은 자유 코뮌과 다른 지역 조직들도 파괴했다.
공격을 지시한 것은 트로츠키였다. 그가 “그의 국가”에서 몇 걸음 떨어진 곳의 독립 지역을 용인할 수 있었겠는가? 그의 시종인 프랑스나 다른 곳들에서는 위대한 트로츠키, 초인으로 불리는 그가 자유롭게 살아가며 신문에서 두려움이나 경의 없이, 그저 국가 공무원으로서 그에 대해 말하는 사람들의 솔직한 이야기를 들었을 때, 분노와 증오를 억누를 수 있었겠는가?
자질은 한정적이나 헤아릴 수 없는 자존심과 증오를 지닌 이 사람, 훌륭한 웅변가이자 논객, 거대한 나라의―혁명이 유산된 덕분에―“결코 틀림없는” 군사 독재자가 된 이 “반신半神”이, 그가 사적인 적으로 간주하고 취급한 “아나키즘적 도적들”의 영향과 도움을 받은 자유민을 이웃으로 용인할 수 있었겠는가?
그러나 비록 덜 가식적이고 악의적이라 했을지라도, 어떤 정치가든, 어떤 사회주의 교황敎皇이든 그가 한 것처럼 행동했을 것이다. 우리는 그가 레닌과 완벽하게 일치해 일했다는 것을 결코 잊어서는 안 된다.
그가 마흐노우슈치나에 대해 발표한 많은 명령의 모든 문장에서 무한한 자존심과 격렬한 분노가 드러난다. 우선 여기에 그가 훌랴이폴레 《혁명 군사위원회》의 소집에 대해 발행한 유명한 명령 제1824호가 있다.
“공화국 《혁명 군사위원회》 명령 제1824호. 1919년 6월 4일, 하르키우.
모든 군사위원에. 모든 집행위원에. 알렉산드로프스크, 마리우폴, 베르댠스크, 바흐무트Bakhmut, 파울로흐라드, 헤르손의 모든 집행위원회에.
훌랴이폴레의 집행위원회는 마흐노 여단의 참모들과 협력해 이달 15일 소비에트와 알렉산드로프스크, 마리우폴, 바흐무트, 베르댠스크, 멜리토폴, 파울로흐라드 지역 반란군 총회를 소집하고자 하고 있다. 이 총회는 우크라이나 내 소비에트 세력과 마흐노 여단이 주둔하고 있는 남부 전선의 조직에 정면으로 반하는 것이다.
이 총회는 그리고리예프(Nikifor Aleksandrovich Grigoriev)의 그것과 같은 새롭고 불명예스러운 반란의 발흥, 백군에게 전선을 돌파당하는 것 외에는 아무런 결과도 얻을 수 없으며, 마흐노 여단은 지도자들의 무능과 범죄 계획, 반역 앞에 끊임없이 후퇴할 수밖에 없다.
1. 현재 명령에 따르면 이 총회는 금지되어 있다. 어떠한 경우에도 이는 개최되지 않을 것이다.
2. 모든 농민과 노동계급 주민에게 구두 혹은 서면으로 해당 총회에 참가하는 것은 소비에트 공화국과 전선에 대한 반역 행위로 간주될 것임을 경고해야 한다.
3. 해당 총회의 모든 대표는 즉시 체포되어 우크라이나 제14군(구舊 제2군) 혁명 군사 재판소에 회부되어야 한다.
4. 마흐노와 훌랴이폴레 집행위원회의 소집을 전파한 자들도 마찬가지로 체포될 것이다.
5. 현 명령은 전보되는 즉시 법적 효력을 지닌다. 이는 널리 확산되어 모든 공공장소에 게시되어야 하며, 소비에트 당국의 대표, 군 부대의 지휘관 및 정치위원에게 전달되어야 한다.
서명 : 《혁명 군사평의회》 의장 트로츠키, 최고사령관 바체티스(Ioakim Ioakimovich Vatsetis), 《혁명 군사평의회》 구성원 아라토프(Aratoff), 하르키우 지역 군사위원 코흐카레프(Kochkareff).”
“이 문서는 그야말로 전형적이다.” 아르시노프는 말한다. “러시아혁명을 연구하는 이는 누구나 이를 암기해야 한다. 이는 노동자들의 권리 찬탈의 비명을 대변하는 것이므로 이 주제에 대해 더 이상 이야기하는 것은 무의미하다.”
“스스로를 혁명가라 칭하는 이들이 그들보다 더 혁명적인 사람들 모두를 범법자로 규정할 수 있는 법이 존재할 수 있는가?” 이는 두 달 전 디벤코에게 보낸 유명한 회신에서 혁명적 농민들에 의해 제기된 질문 중 하나였다. 트로츠키의 명령 제2조는 그러한 법이 존재할 수 있으며, 명령 제1824호가 그 증거라고 분명히 답하고 있다.
같은 문서에서 훌랴이폴레 혁명가들은 “대중이 혁명가의 허락을 기다리지 않고 그들에게 약속한 훌륭한 것들, 즉 자유와 평등을 취했다는 이유만으로 ‘혁명가’가 자신을 옹호자라고 부르는 혁명적 대중에게 가장 엄한 처벌을 내릴 권리가 있는 법이 존재하는가?”라고 물었다. 명령 제2조는 그렇다고 답한다. 만일 농민과 노동자가 그들의 자유 총회에 감히 참가한다면 그 모든 이들이 반역죄를 선고받을 것이라고 말이다.
“혁명의 법은 그가 그를 선출한 혁명적 대중에 의해 부여된 임무를 수행해야 한다고 그가 믿고 있기에 대표를 총살하라고 명령하는가?” 트로츠키의 명령(제3조, 제4조)은 위임권을 수행하는 대표뿐만 아니라 위임권을 수행하지도 않은 이들도 체포해 “혁명 군사 재판소 앞에 회부될 것”이라고 선언하고 있는데, 우리는 이것이 사형 선고나 다름 없었음을 강조할 수밖에 없다.
디벤코에게 질문을 던지며, 반란군은 트로츠키의 명령 제1824호를 예견했다고 한다. 비록 그것이 사실이 아니라 하더라도, 그들은 그것들에 대한 틀짜기에 훌륭한 통찰력을 보였다.
트로츠키는 훌랴이폴레에서 일어난 모든 일에 마흐노가 개인적 책임이 있다고 생각했다. 그는 총회가 훌랴이폴레의 집행위원회나 “마흐노 여단의 교착” 때문이 아닌 그 둘로부터 완전히 독립된 지역 《혁명 군사위원회》로부터 소집되었다는 것을 아는 데에 고생하지도 않았다.
이 명령에서 트로츠키가 “백군 앞에서 끊임없이 후퇴했다”고 비난한 “마흐노주의 지도자들의 배반”에 대해 벌써부터 계속해 되풀이하는 것은 의미심장하다. 그는 자신이 데니킨 진격 바로 전날 마흐노 부대에 더 이상 군수품을 보급하지 말라고 명령했던 것을 덧붙이는 것을 잊었다. 이는 전략이자 신호였다. 며칠 뒤, 트로츠키와 모든 공산주의 언론은 데니킨의 군대에 “전선 개방”을 위장한 것에 대해 상세히 다루었다. 그리고 명령 제1824호에는 군대와 적군 당국에 모든 방법으로 마흐노주의를 뿌리부터 파괴하라는 트로츠키의 다른 많은 명령이 뒤따랐다. 게다가 그는 마흐노 및 그의 참모들뿐만 아니라 순전히 교육 활동만을 수행하는 평화적인 투사들까지도 어떤 수를 써서라도 체포하라는 비밀 명령을 내렸다. 그 명령은 그들 모두를 전쟁 평의회 앞에 데려와 처형하라는 것이었다.
트로츠키는 데니킨에 대한 전선이 오직 반란 농민의 노력과 희생 덕분에 형성되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이 전선은 특히 반란이 격동적이던 때―즉 이 지역이 모든 권위로부터 해방되었을 때 생겨났다. 전선은 그들이 쟁취한 자유를 위한 파수꾼으로서 동남부에 자리 잡았다. 6개월 이상 동안 혁명반란군은 군주제적 반혁명의 가장 격렬한 공격에 맞서 무너지지 않는 장벽을 유지했다. 거기서 그들은 수천의 병사를 희생했다. 그들은 마지막까지 자유를 지키고자 준비하기 위해 모든 자원을 활용했다.
그렇다, 트로츠키는 모든 것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에게는 우크라이나의 혁명적 대중에 대한 그의 캠페인을 공식적으로 정당화하는 것이 필요했다. 그리고 그가 이 전선을 무너뜨리고, 무기와 탄약을 빼앗고, 모든 조직 수단을 빼앗아 혁명을 배반하고, 데니킨의 군대를 위해 길을 열었다고 반란군을 비난할 수 있게 한 것은 기상천외한 오만과 위선, 괴물 같은 냉소주의였다.[26]
6월 15일로 예정된 제4차 지역 총회는 개최되지 못했다. 그보다 훨씬 전에 볼셰비키와 데니킨주의자가 이미 이 지역에서 활동하고 있던 것이다.
볼셰비키는 그들이 이미 들어선 지역이나 그들이 침략한 인근 지역에서 트로츠키의 명령을 수행하기 시작했다. 예를 들어 알렉산드로프스크에서는 총회 소집과 위원회의 의제를 논의하고자 계획된 모든 노동자 회의가 죽음의 고통 아래 금지되었다. 그 명령을 무시하고 모인 이들은 무력으로 해산되었다. 다른 도시와 마을에서도 볼셰비키는 같은 방식으로 행동했다. 마을의 농민들은 여전히 더 난폭하게 다루어졌다. 많은 곳에서 투사들, 심지어 “반란군과 총회에 유리한 행동을 한 것으로 의심되는” 농민들도 체포되어 재판을 받은 뒤 처형되었다. 소집을 전한 많은 농민이 명령 제1824호에 대해 알기도 전에 체포되어 “재판”을 받고 총살당했다.
마흐노 본인도, 그의 참모들도 이 명령에 대해 어떠한 연락도 받지 못했다. 볼셰비키는 기습적으로 그들을 체포하기를 바라며 그들에게 너무 빨리 경각심을 주는 것을 피하고 싶어 했고, 그들은 명령이 발표된 지 3일 후에야 우연히 그것을 듣게 되었다. 마흐노는 즉각 반응했다. 그는 볼셰비키 당국에 전보를 보내 현재 상황상 사령관직을 포기하기를 원한다고 공표했다. 그들은 그에게 아무런 답을 하지 않았다.
우리는 이제 마흐노주의 서사시에서 일련의 예외적이고 극적인 전환들 중 첫 번째에 도달했는데, 이 전환은 마흐노 자신, 그의 군대 여러 부대의 지휘관, 반란군 전체, 나아가 자유지구 전체 주민들에게까지 매우 혹독한 시험을 초래했다. 만일 이 상황의 해결이 모두의 공이라면, 이는 그에 참여한 모든 이들의 뛰어난 자질과 엄청난 용기, 놀라운 자제력 덕분이었다.
트로츠키의 명령 제1824호가 발표되기 며칠 전, 마흐노는 볼셰비키가 그리치노 지구의 전선을 약화시켰고, 그리하여 데니킨의 군대가 동북부 방면을 통해 훌랴이폴레 지역에 자유롭게 접근할 수 있도록 제공하고 있다는 것을 발견했다. 그는 이를 곧장 위원회와 참모들에게 알렸다.
사실 카자크 무리는 반란군 전선을 통과하지 못하고 적군이 주둔하고 있는 왼편 지역을 장악하고 있었다. 상황은 비극적으로 변했다. 데니킨의 군대는 마리우폴-쿠테이니코보Kuteinikovo-타간로크에서 전선을 유지하던 마흐노주의 군대를 우회해 이 지역 중심부를 막대한 규모로 침공했다.
4월 이래로 전국의 농민들은 수많은 자원병을 훌랴이폴레로 보냈으나 허사였다. 우리가 본 것처럼 볼셰비키는 그들의 약속과 그들이 체결한 합의에 반해 반란군에의 모든 보급을 차단하고 지역 방어를 방해했기에 그들을 무장시킬 수 있는 수단이 아무것도 없었다. 가슴 속에 분노를 품고, 마흐노주의 참모들은 자원병들을 집으로 돌려보낼 수밖에 없었다. 데니킨주의자의 진전은 피할 수 없는 결과였다.
““하루는” 아르시노프는 적는다. “훌랴이폴레의 농민들이 그들의 마을을 구하기 위해 연대를 결성했다. 그들은 도끼, 곡괭이, 낡은 기병소총, 산탄총으로 무장하고 백군의 사기를 꺾기 위해 그들을 찾아 나섰다. 훌랴이폴레로부터 15킬로미터 떨어진 스뱌토두코바Sviatodukhova 마을 근처에서 그들은 꽤 많은 수의 돈과 쿠반 카자크를 마주했다. 훌랴이폴레 사람들은 그들에 맞서 영웅적이고 잔혹한 전투를 벌였으나 훌랴이폴레 출신의 푸틸로프 공업단지 노동자인 지휘관 베레텔니코우(Boris Veretelnikov)를 포함해 거의 모두가 죽임당했다. 이후 카자크들이 물밀 듯 밀려와 1919년 6월 6일, 훌랴이폴레를 점령했다. 마흐노는 참모들과 1개 부대를 이끌고 마을에서 약 7킬로미터 떨어진 기차역으로 후퇴했으나 저녁에는 기차역마저 포기해야 했다. 밤사이 그가 소집할 수 있는 모든 병력을 재집결한 뒤 마흐노는 다음 날 아침 힘차게 반격을 가해 훌랴이폴레로부터 적을 몰아내는 데 성공했다. 그러나 그는 잠시 동안만 마을의 주인으로 머물렀을 뿐이었다. 데니킨주의 별동대가 그들의 군대를 구하고자 몰려왔고, 그가 마을을 완전히 포기하게 했다.”
이런 식으로 백군에게 전선을 개방하고 마흐노주의자를 상대로 은밀하게 명령을 내렸음에도 불구하고 볼셰비키는 상황이 아무것도 바뀌지 않은 것처럼 반란군에 대해 계속해 우호적인 태도를 가장했다. 이는 운동의 지도자들, 특히 마흐노를 사로잡기 위한 작전이었다. 지역 당국에 명령 제1842호가 담긴 전보를 보낸 지 이틀 후인 6월 7일, 볼셰비키 최고사령관은 마흐노에게 장갑열차를 보내 “끝까지” 저항하라고 명령하고 다른 지원군을 약속했다. 실제로 이틀 뒤 적군의 여러 부대가 훌랴이폴레에서 20킬로미터 떨어진 차플리네Tchaplyne 근처의 하이추르Haychur 역에 도착했다.
총사령관 보로실로프(Kliment Yefremovich Voroshilov)(미래의 전쟁 인민위원), 육군 정치위원 메즐라우크(Valery Ivanovich Mezhlauk), 그리고 다른 공산당 고위 공무원들이 이 파견대와 함께 도착했다. 겉으로 보기에는 적군 사령부와 반란군 사령부 사이에 긴밀한 접촉이 이루어졌다. 일종의 통합 참모부가 만들어졌고, 메즐라우크와 보로실로프는 마흐노에게 장갑열차로 이동해 공동으로 작전을 지휘할 것을 요청했다.
이 모두는 냉소적인 코미디에 불과했다. 바로 그 순간 보로실로프는 트로츠키가 서명한 명령서를 주머니에 넣은 채 마흐노를 비롯한 다른 모든 운동 지도자들을 사로잡고, 반란군을 무장 해제하고, 조금이라도 저항하려고 하는 모든 이를 가차 없이 총살하라고 명령했다. 보로실로프는 이 명령을 수행할 적절한 순간을 기다리고 있었다.
충실한 친구들은 마흐노에게 개인적으로 닥칠 위험과 그의 모든 군대 및 혁명 운동을 위협하는 위험에 대해 경고했다. 그의 상황은 점점 더 어려워졌다. 한편으로 그는 적 앞에 직면해 나타날 마흐노주의자와 볼셰비키 사이의 유혈 사태를 어떻게든 피하고 싶어 했다.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 그는 그의 동지들, 군대, 모든 대의를 싸워보지도 않고 희생할 수는 없었다.
그는 만족할 만한 해결책을 찾았다. 모든 사안을 저울질하며 그는 두 가지 중요한 결정을 내렸다. 1. 그는 반란군 사령관직을 당분간 포기하기로 결심했다. 2. 그는 그의 군대 모든 부대에 그들이 있던 곳에 머물러 해방 투쟁을 재개하기에 적절한 순간을 기다리는 동안―일시적으로―적군의 지휘를 받아들이도록 요청하기로 결정했다.
이틀 뒤, 그는 비범한 냉정함과 기술로 이 이중의 묘책을 수행했다. 그는 조용히 보로실로프와 메즐라우크를 떠나며 그의 참모들에게 당분간 그가 일반 투사로 활동하는 편이 더 유용할 것이라고 밝혔다. 그는 소비에트 최고사령부에 다음과 같은 성명을 보냈다.
“제14군 참모 보로실로프에, 《혁명 군사평의회》 의장 트로츠키에, 하르키우의 레닌에, 모스크바의 카메네프에.
《공화국 혁명 군사평의회》의 명령 제1824호에 따라 나는 제2군 참모진과 트로츠키에게 내가 지금 맡고 있는 직위의 사임을 요청하는 전보를 보냈다. 반복해서 요청한다. 내가 해명할 필요가 있다고 믿는 이유는 다음과 같다. 비록 내가 반란군과 함께 데니킨의 백군과 맞서 전쟁을 수행했음에도, 자유와 자유로운 행동에 대한 사랑 외에는 대중에게 아무것도 설파하지 않았음에도, 공산주의-볼셰비키당 기관지뿐만 아니라 모든 공식 소비에트 언론은 나에 대해 혁명가로서 적합하지 않다는 소문을 퍼뜨렸다. 그들은 나를 도적으로, 그리고리예프의 공범으로, 자본주의를 재건할 목적으로 소비에트 공화국에 대항하는 음모자로 보이게 하고 싶어 한다. 그렇기에 〈마흐노주의Makhnovism〉(「길 위에서On the Road」 제51호)라는 제목의 기사에서 다음과 같은 질문을 제기한다. ‘마흐노주의 반란군은 누구에 대항해 일어났는가?’ 그리고 그는 기사를 통해 마흐노주의가 소비에트 권력에 대항하는 전선에 다름 아니라는 것을 증명하는 데 전념하고 있다. 그는 반란군이 지난 6개월 동안 막대한 손실을 입고 있는 100킬로미터가 넘는 백군에 대한 실제 전선에 대해서는 한마디도 하지 않는다.
명령 제1824호는 나를 ‘소비에트 공화국에 대항하는 음모자’이자 ‘그리고리예프와 같은 반역의 조직가’라고 부른다. 나는 그들이 그들의 일을 논의할 총회를 그들이 직접 소집하는 것은 노동자와 농민의 불가침의 권리―혁명으로 쟁취한 권리―라고 생각한다. 그렇기에 중앙 당국이 그러한 총회를 소집하는 것을 금지하고 그들을 불법이라고 공표하는 선언(명령 제1824호)은 노동 대중의 권리를 직접적이고 오만하게 침해하는 것임을 드러낸다.
나는 나에 대한 중앙 당국의 태도를 완전히 이해한다. 나는 이러한 당국이 반란 운동을 그들의 국가주의적 활동과 양립할 수 없는 것으로 여긴다고 절대적으로 확신한다. 동시에 그들은 이 운동이 내 개인에게 밀접하게 매어져 있다고 믿으며, 반란 운동 전체에 대해 그들이 느끼는 모든 분노와 증오를 내게 돌린다. 트로츠키는 의도적으로 거짓말과 중상모략을 쌓아 올리며 나에 대한 개인적인 증오의 흔적을 드러내는데, 위에서 언급한 트로츠키의 기사보다 이를 더 잘 보여줄 수 있는 것은 없다.
반란 운동에 대한 중앙 당국의 이러한 적대적인 태도―이제는 공격적이 된―는 불가피하게 특수한 내부 전선 창출로 이어지며, 그 양측에는 혁명에 대한 믿음을 지닌 노동 대중이 있다. 나는 이 우발적 사태를 노동자에 대한 막대하고 용서 받지 못할 범죄라고 생각하며, 그것을 피하기 위해 내가 할 수 있는 모든 일을 하는 것이 나의 의무라고 믿는다.
중앙 당국이 이 범죄를 저지르는 것을 막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은 내가 생각하기에 명확하다. 나는 내가 맡은 직을 떠나야만 한다. 이렇게 하면 나와 혁명반란군은 중앙 당국에 의한 반 소비에트 음모에 연루되었다는 의심을 받지 않게 될 것이며, 중앙 당국은 그들이 만약 다른 태도를 취했더라면 쉽게 피할 수 있었을, 군수품뿐만 아니라 때로 보급까지 태업하며 의미 없는 협상 와중에 혁명으로 얻은 수없이 많은 인력과 영토를 반란군이 잃게 되었던 불신과 기만의 관계가 아니라 우크라이나의 반란을 중요한 현상으로 간주하게 되고, 그것이 대중에 의한 사회혁명의 살아있고 활발한 징후로 여기리라 생각한다.
나는 누군가 내 직위를 대신해줄 것을 요청한다.
1919년 6월 9일 하이추르 역에서. 서명 : 아버지Batko 마흐노.”
마흐노의 성명을 받은 볼셰비키는 그가 아직 하이추르에 있다고 여기고 그의 직위를 접수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을 보내 그를 붙잡으라는 명령을 내렸다. 동시에 그들은 반란군의 참모장 오세로프(Oseroff), 참모진인 미하레우-파우렌코(Mikhalev-Pavlenko)와 부르비하(Burbyga), 그리고 《혁명 군사위원회》의 몇몇 인원을 기만적으로 체포했다. 이들은 모두 그 자리에서 사형에 처해졌다. 이는 볼셰비키의 손에 넘어간 다른 많은 마흐노주의자들의 사형 집행을 위한 신호탄이었다.
하지만 마흐노는 탈출했다. 하이추르를 감싼 볼셰비키의 촉수에서 노련하게 빠져나간 그는 예기치 않게 알렉산드로프스크에 있는 그의 군대에 도달했다. 그는 그가 곤경에 처할 것이라고 경고했던 친구들로부터 그가 하이추르에 있다고 믿은 볼셰비키가 그의 후계자를 알렉산드로프스크에 지명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거기서 그는 잠시도 지체하지 않고 공식적으로 사단의 업무와 지휘권을 이 새로운 장에게 넘겼는데, 그는 이제 막 배치된 뒤 아직 마흐노에 관한 어떤 직접적인 명령도 받지 못했다. 아르시노프는 말한다. “그는 볼셰비키가 자신이 지휘했던 사단의 일과 관련해 그를 비난할 구실을 가질 수 없도록 공개적으로, 그리고 정직하게 자기 직책을 내려놓기 원했기에 이렇게 했다. 그는 신중히 행동하고 싶었다.”
이 지휘권 이양 후, 그는 반란군에게 새 상황을 설명하는 해설적 성명을 전했다. 그는 당분간 사령관직을 떠나야 함을 발표하고, 반란군이 일시적으로 볼셰비키 참모들의 지휘를 받게 되리라는 사실에 동요하지 말고 데니킨 부대에 대항해 이전처럼 활력적으로 싸우기를 요청했다.
반란군 부대원들은 이해했다. 거의 모든 부대는 적군 사령관을 인정하고 볼셰비키 군대로의 편입을 받아들였다고 선언했다.
볼셰비키는 자신들이 승리했다고 믿었다. 그러나 그들은 동시에―마흐노를 따르는―보다 헌신적인 연대 지휘관 몇몇이 비밀리에 만나 마흐노의 지휘 아래 다시 돌아올 적절한 순간을 기다리기로 엄숙하게 맹세했다는 것은 알지 못했다. 이 결정은 전혀 누설되지 않았다.
이 모든 일을 마친 뒤 마흐노는 소규모 기병 분대와 함께 사라졌다. 그동안 적군 단위로 변모해 정규 지휘관―칼라시니코프(Kalachnikoff), 쿠릴렌코, 부다노프(Budanoff), 클라인(Klein), 데르멘지(Dermendji) 등―의 휘하에 남아 있던 반란군 연대는 데니킨의 군대를 계속 저지해 알렉산드로프스크와 예카테리노슬라프를 점령하는 것을 막았다.
우리가 언급했듯, 볼셰비키 지도자들은 데니킨 작업의 진정한 성질을 알지 못했다. 예카테리노슬라프와 하르키우가 함락되기 불과 며칠 전, 트로츠키는 데니킨이 심각한 위협이 아니며 우크라이나는 전혀 위험하지 않다고 선언했다. 그는 다음날 하르키우가 심각한 위협을 받고 있다는 것을 깨닫자 자신의 견해를 바꿔야만 했다. 그가 정신을 차릴 때가 된 것이다. 예카테리노슬라프는 6월 말 함락되었으며, 하르키우는 2주 뒤 데니킨의 손에 넘어갔다.
볼셰비키 당국은 공세를 재개하거나 심지어 방어를 조직하려고도 하지 않았다. 그들은 오직 우크라이나로부터 대피하는 데에만 신경을 썼다. 거의 모든 적군 병력이 이 행동에 참여했다. 그들은 가능한 한 많은 병력과 화물 차량을 끌고 북부로 퇴각했다. 분명 그들은 우크라이나를 운명에 내맡기고 있었다. 그들은 우크라이나를 전부 반동분자 손에 넘기고 있었다.
마흐노는 투쟁의 주도권을 되찾고 독립적인 혁명 세력의 안내자로 다시 행동할 적절한 순간이 왔다고 판단했다. 이번에 그는 데니킨과 볼셰비키 모두에 대항해 행동해야만 했다.
볼셰비키 지휘 아래 임시로 남아 있던 반란군 분대들은 볼셰비키 상관을 제거하고 적군을 떠나 마흐노의 지휘 아래 재편성하라는 끈기 있게 기다리던 지시를 받았다. 그들이 이 지시를 수행하고 그들의 안내자에게 다시 합류하기 전부터도 새로운 반란군이 마흐노 주변에 형성되었다.
새로운 상황은 오스트리아-독일 침공 이후의 사건들을 떠올리게 했다. 우리가 언급했듯, 데니킨주의자들과 그 주인들, 즉 군대를 이끌고 돌아온 옛 영주들의 태도는 노동 대중에 대해 극단적으로 오만하고 잔인했다. 그들이 재확립되자마자 이 신사들은 봉건 절대군주제를 복구하기 시작했다. 끔찍한 보복의 무자비한 “백색 테러”가 우크라이나 온 마을과 도시를 덮쳤다.
오래지 않아 회답이 왔다. 많은 농민이 반동으로부터 도망쳐나와 자연스레 새 압제자들에 맞서 싸울 수 있는 이라고 여겨지는 마흐노를 찾아왔다.
채 2주도 되지 않아 마흐노의 지휘 아래 새로운 군대가 형성되었다. 그들이 보유한 무기는 불충분했지만, 때마침 적군을 떠난 “기초” 연대가 도착하기 시작했다. 그들은 활기와 열정, 투지가 넘칠 뿐만 아니라 무기와 탄약도 잘 갖춘 채 차례로 나타났다. 그들이 적군을 떠날 때 손에 넣을 수 있는 모든 무기를 챙겼기 때문이었다. 불시에 이런 일을 당한 퇴각 중인 볼셰비키 사령부는 아군 내에서 반란이 일어날 것을 우려해 이 대담한 행동에 맞설 수 없었다. 돌아오는 많은 아나키스트에 더해, 몇몇 적군 연대는 마흐노주의자들과 공통된 목적을 세우고 반란군 지위를 확장시켰다.
이 새로운 부대들과 함께 마흐노는 먼저 데니킨 사단의 진격을 저지하고자 했다. 그는 단계적으로 후퇴해 새로운 환경에 적응하고 공격을 재개할 수 있는 유리한 첫 번째 기회를 노렸다. 그러나 데니킨주의자들은 경계를 늦추지 않았다. 그들은 앞선 겨울에 마흐노주의자가 그들에게 초래한 손실과 패배를 잊지 않았다. 그들의 사령부는 반란군과 싸우기 위해 전군―몇몇 기병, 보병, 포병 연대―을 배치했다.
적의 우세한 병력 앞에 천천히 후퇴하던 중, 반란군은 점차 묘한 모습을 취했다. 마흐노주의자들의 완강한 저항―그의 진격을 방해하고 심각하게 지연시킨 저항―의 부활에 화가 난 데니킨은 군대뿐만 아니라 모든 농민과도 전쟁을 벌였다. 일상적인 박해와 구타에 더해 그가 점령한 마을은 불타고 파괴되었다. 농민 거주지 대부분이 약탈당하고 파괴되었다. 수백 명의 농민이 총살당했다. 여성들은 학대를 당했고, 우크라이나의 마을들, 특히 훌랴이폴레에서 거의 모든 유대인 여성이 강간을 당했다.
이러한 전쟁은 데니킨주의자의 접근에 의해 위협받는 마을 주민들이 그들의 집을 버리고 도망치도록 만들었다. 그리하여 마흐노주의 군대의 후퇴에 가축이나 소지품을 가지고 집으로부터 도망치는 수천의 농민 가족들이 합류했다. 그것은 진정한 의미에서 이주였다. 엄청난 수의 남성, 여성, 어린이가 군대를 따라 서부로 천천히 후퇴했는데, 이는 점차 수백 킬로미터에 이르렀다.
후퇴가 시작될 무렵 마흐노 군대에 도착한 나는 이 그림처럼 아름다운, 후에 “바퀴 위 왕국”을 보았고, 그 환상적인 움직임에 뒤따랐다. 1919년 여름은 우크라이나에서 보기 드물게 건조했다. 먼지가 많은 도로와 인근 들판 위로 이 인해人海는 수천 마리 소와 각종 짐 마차, 독자적 식량 공급과 행정, 보건 서비스와 함께 천천히 움직였다. 이는 군대를 위한 사실상의 보급 열차가 되었다.
하지만 군대는 이 엄청난 수의 도망자들의 움직임에 영향을 받지 않았다. 그들은 본대를 보호하기 위해 떠난 단위를 제외하고는 늘 그 진로를 엄격하게 유지했는데, 특히 기병대는 거의 늘 싸우고 있었다.
전투를 하지 않을 때는 보병대가 군대의 행진을 이끌었다. 내가 앞서 언급했듯 그들은 타찬카를 타고 있었다. 두 마리 말이 이끄는 이 탈것은 각각 앞 좌석에 운전자를 태우고 뒤에는 병사 둘을 태웠다. 일부에는 기관총이 좌석에 설치되기도 했다. 포병대는 후방에 배치되었다. 거대한 검은 깃발이 첫 번째 마차 위로 휘날렸다. 양면으로 “자유가 아니면 죽음을”, “농민에게 땅을, 노동자에게 공장을”이라는 구호가 은빛으로 수놓아져 있었다.
그들이 살아온 환경에도 불구하고, 끊임없는 위험과 거의 매일 같은 전투에도 불구하고, 이 모든 이들은 기백과 용기가 넘쳤다. 그들 각 개인은 모두에게, 그리고 모두는 각 개인에게 책임을 느꼈다. 때로 인기 있는 노래나 혁명가가 대열 어딘가에서 울려 퍼지고는 했고, 곧 수천 명의 목소리로 합창이 되었다. 마을에 도착하면 이 도망자들은 다시 길을 떠나라는 지시가 있을 때까지 야영했다. 지시가 있으면 그들은 기다리지 않고 늘 서쪽을 향해, 늘 그들 주변에서 일어난 전투의 메아리를 향해 행진을 재개했다.
4개월 동안 이어진 이 후퇴 과정에서 수천 명의 난민이 군대를 스스로 떠나 길을 나서 우크라이나 전역으로 흩어졌다. 그들 대부분은 영원히 집과 재산을 잃었다. 몇몇은 사실 새로운 집을 짓기도 했지만, 많은 이들이 탈진하거나, 질병에 걸리거나, 백군 손아귀에 넘어가 목숨을 잃었다.
처음에 반란군은 알렉산드로프스크 시 근처의 드니프로를 파고들려 했다. 한동안 그들은 유명한 키치카스Kitchkass 다리(러시아에서 가장 중요한 다리 중 하나)의 주인으로 남아 있었다. 그러나 곧 월등히 많은 적의 수에 압도당해 강을 버려야만 했고, 처음에는 돌린스카Dolynska로, 후에는 옐리사베트흐라드로 후퇴해야만 했다.
한편 우크라이나와 크림반도 여기저기에 남아 있던 소수의 적군은 볼셰비키 사령부의 태도에 완전히 사기가 떨어져 모든 군사적 중요성을 잃었다. 그들은 공산당 당국이 우크라이나에서 도망친 것을 혁명적 대의에서 벗어난 것으로 간주했다. 무활동과 의심 속에 정체되어 있던 이들에게 마흐노는 이 나라에서 유일한 혁명적 희망이었다. 마침내 7월에 크림반도의 거의 모든 적군 연대가 반란을 일으켜 지휘관들을 물러나게 하고 마흐노의 군대에 합류하기 시작했다. 이 행동은 적군 대열에 임시로 남아 있다가 거의 모든 볼셰비키 부대를 데리고 떠난 마흐노주의자들에 의해 신중히 준비되고 수행되었다. 반란 이후 잘 조직되고 열정이 충만한 이 수많은 연대는 이전 지휘관들을 포로로 잡고 많은 무기와 탄약을 가지고 강행군하며 마흐노를 찾아 진군했다. 그들의 변절은 볼셰비키에게 타격을 주었는데, 그 때문에 우크라이나에서 그들의 군대가 아무것도 아니게 되었기 때문이다.
회의는 8월 초 헤르손 주의 주요 마을인 도브로벨리치키우카Dobrovelychkivka에서 열렸다. 이 결과 마흐노의 군대는 다시 강력해졌다. 이제부터 대규모 군사행동을 그릴 수 있었다. 심지어 승리도 바라볼 수 있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마흐노는 퇴각을 중단했다. 그는 우선 그의 군대를 재편성하기 위해 그렇게 했는데, 사방에서 자원병이 몰려오고 있던 것이다. 포모스치나야Pomostchnaia, 옐리사베트흐라드, 보즈네센스크Voznessensk 사이의 점령지 곳곳에 피켓을 세워두고―그는 군대를 완전히 재편성했다. 이제는 약 2만 명의 전투원이 있었다. 그들은 보병과 기병 4개 여단, 포병 사단과 기관총 연대로 나뉘었다.
슈스가 지휘하는 기병대는 2~3천 명을 헤아렸다. 기관총 연대는 약 500대의 기관총을 지니고 있었다. 대포도 충분했다. 150~200명의 기병으로 구성된 대대는 마흐노의 장거리 이동, 습격, 그 외 다양한 군사행동에 늘 동행하는 특수 부대로 편성되었다.
재정비를 마치자 마흐노는 데니킨의 군대에 맹렬한 공격을 시작했다. 전투는 극도로 격렬했고, 데니킨주의자들의 군대는 반복해 수 킬로미터 동쪽으로 후퇴했다. 그러나 곧 마흐노주의자들의 탄약이 떨어지기 시작해 세 번 중 두 번의 공격은 보급품을 확보하기 위한 것이 되었다. 더욱이 데니킨은 많은 수의 새로운 예비 부대를 전투에 투입했다. 그는 모스크바까지 완벽한 안전 속에 진격할 수 있도록 무슨 수를 써서라도 반란군을 소탕하고 싶어 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마흐노주의자는 이와 동시에 크림반도와 오데사에서 우크라이나를 가로질러 북부로의 통행을 강요하는 일부 볼셰비키 군대와 대면해야 했다.
결국 방어할 수 없는 상황이 되었고, 마흐노는 포모스치나야, 옐리사베트흐라드, 보즈네센스크 지역을 포기하고 서부로 후퇴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하여 1919년 8월부터 9월 말까지 거의 두 달에 걸친, 키이우로의 600킬로미터가 넘는 경로의 잘 알려진 퇴각이 시작되었다.
데니킨의 분명한 계획은 마흐노주의 군대를 포위해 섬멸하는 것이었다. 그는 몇 개의 최정예 연대를 파견했는데, 그 중 일부는 “농민 무지렁이”를 특히 혐오하는 젊은 장교로 구성되어 있었다. 그 중에서도 제1 심페로폴Simferopol 연대와 제2 라빈스키Labinsky 연대는 용맹함, 전투력, 격앙된 활력으로 도처에서 두각을 나타냈다.
사나운 전투, 전례 없는 폭력이 거의 매일되었다. 실제로 이는 두 달 동안 지속되었고 양측 모두 매우 격렬히 싸웠다.
이 퇴각 전체 기간 동안 나는(아르시노프와 나를 포함해 선전 교육 위원회를 이루고 있던 다섯 명의 동지와 함께) 마흐노의 군대와 함께 있었는데, 이 기나긴 일련의 날들을 마치 끝없는 악몽처럼 기억한다.
불과 몇 시간밖에 되지 않는 여름의 밤들은 사람과 말에게 짤막한 휴식조차 허락하지 않았고, 희미한 여명, 기관총의 덜그럭거리는 소리, 폭발하는 포탄, 질주하는 말과 함께 사라져버렸다! 데니킨주의자는 사방에서 공격하며 반란군을 사악한 철과 불로 포위하려 했다.
그들은 매일같이 행동을 재개해 마흐노의 군대를 항상 더 가까이 압박하고, 그들의 원을 늘 더 단단히 조여 반란군이 움직일 공간을 점점 더 적게 만들었다.
매일 잔혹한 백병전을 치르는 야만적인 전투가 마흐노주의 군대 정면과 측면 할 것 없이 벌어져 해질녘까지 계속되었다. 매일 밤 마흐노주의 군대는 퇴각할 수밖에 없었고, 데니킨주의자의 사악함에 완전히 집어 삼켜지기 전에 점점 좁아지는 통로를 간신히 빠져나왔다. 그리고 해가 뜨면 다시금 그들을 포위하려는 무자비한 적과 맞서야 했다.
반란군은 옷, 신발, 심지어 때로는 식량도 부족했다. 납빛 하늘 아래 타는 듯한 열기, 빗발치는 총알과 포탄을 뚫고 그들은 점점 더 그들의 지역에서 알 수 없는 목적지와 운명으로 멀어져 갔다.
8월 말, 이미 마흐노를 무겁게 짓누르고 있던 데니킨의 군대는 오데사와 보즈네센스크 부근에서 온 새 부대들로 강화되었는데, 데니킨은 이미 그의 병력 대부분을 이끌고 오룔Oryol(모스크바에서 멀지 않은 곳)로 진군해 적군을 몰아내고 있었고, 가능한 빨리 마흐노주의자들을 몰아내고 싶어 했다. 마흐노주의자가 그의 후방에 존재하는 한, 그는 안전하다고 느낄 수 없었다.
상황은 날이 갈수록 악화되었다. 그러나 마흐노는 절망하지 않았다. 그때 그는 동요하지 않고 능숙하게 퇴각을 계속했다. 그리고 투사들은 그들의 이상에 고무되고, 그들의 임무를 의식하고, 그들 자신의 대의를 위해 싸웠음을 인지하고, 매일 용기와 저항의 진정한 기적을 성취했다.
마침내 그때까지 퇴각 길로 따라오던 철도 부근을 포기하기로 결정되었다. 그 전에 반란군은 최근 데니킨에게 향하던 장갑열차들을 폭파했는데, 그중 하나는 더욱 강력한, 그 유명한 “무적Invincible호”였다.
퇴각은 마을에서 마을로 시골길을 따라 계속되었고, 헐떡이며 녹초가 된 도망자들에게 점점 더 어려워졌다. 그러나 반란군은 한순간도 용기를 잃지 않았다. 그들은 모두 적으로부터 승리할 희망을 품고 있었다. 그들은 모두 용감하게 그 혹독한 상황을 견뎌냈다. 지칠 줄 모르는 인내심으로 그들의 의지는 한계까지 뻗어 있었고, 그들은 적의 계속적이고 끔찍한 불길 아래에도 사랑하는 안내자이자 동지인 마흐노를 중심으로 뭉쳤다.
그리고 마흐노는 밤낮을 가리지 않고, 땀과 먼지 범벅인 채 겨우 몇 시간 눈을 붙일 뿐 활동을 거의 중단하는 일 없이 끈질기게 전선을 살피고, 모든 것을 주시하고, 투사들을 격려하고, 많은 경우 적의 실수를 이용해 그들에게 결정적인 타격을 줄 수 있는 순간만을 생각하며 전투에 격렬히 몸을 던졌다.
그는 데니킨주의자의 모든 움직임과 활동을 날카로운 눈으로 지켜보았다. 그는 끊임없이 사방으로 정찰대를 보냈다. 시시각각 정확한 보고가 그에게 전달되었다. 그는 자신의 사소한 지휘 실수가 군대 전체와 그들의 모든 대의에 치명적일 수 있다는 것을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그는 또한 데니킨의 군대가 북부로 진격할수록 전선이 크게 확장되어 후방이 더욱 취약해진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는 이 상황을 잘 살피고 때를 기다렸다.
9월 중순쯤, 반란군은 키이우 주의 우만Uman 시에 도착했다. 그들은 그곳이 페틀류라주의자들의 수중에 있음을 발견했다. 페틀류라는 데니킨과 전쟁 상태에 있었다. 모스크바로의 행군에서 데니킨은 볼셰비키가 패배한 후 우크라이나 서부를 쉽게 점령할 수 있으리라 기대하며 그곳을 방치해 두었다.
마흐노주의자에 대한 페틀류라주의자의 태도는 어떠했는가? 그리고 마흐노주의자는 어떻게 행동해야 했는가? 그들은 페틀류라주의자를 공격해야 했는가? 그렇게 하지 않으면 퇴각을 계속할 수 없기에 마흐노주의자는 페틀류라주의자의 영토와 도시를 자유로이 통과할 수 있게 해달라고 요청해야 했는가? 마흐노주의자 편에 서서 데니킨주의자와 싸우자고 제안해야 했는가? 혹은 페틀류라주의자가 그저 중립을 지키고 후에 상황을 최대한 이용하도록 제안해야 했는가? 모든 것을 고려할 때, 마지막 해결책이 가장 합리적으로 보였다.
우리는 반란군이 약 8천 명의 부상자를 냈다는 사실을 언급할 필요가 있다. 이런 상황에서 이들은 모든 의료적 원조를 박탈당했다. 더구나 그들은 군대의 후방에서 거대한 무리를 이루고 있었고, 이는 군대의 움직임과 군사 작전에 심각하게 지장을 주었다. 참모들은 우만 시 당국에 최소한 가장 중상을 입은 이들의 치료를 위해 시내 병원에 데려가 줄 것을 요청할 생각이었다.
다행스럽게도 반란군 진영에서 이러한 문제들이 논의되고 있던 바로 그때, 페틀류라주의자 대표단이 도착해 데니킨과 전쟁 중이기에 마흐노주의자들을 적대함으로써 새로운 전선을 만들기를 피하고자 한다고 공표했다. 이는 마흐노주의자의 바람과 완벽히 일치했고, 양측간에 서로에 대해 엄격히 군사적 중립을 유지하기로 합의하는 협약이 체결되었다. 그뿐만 아니라 페틀류라주의자는 부상 당한 마흐노주의자들을 그들의 병원으로 이송하는 데 동의했다.
이 협약은 당면한 상황에만 적용되는 이 엄격한 군사적 중립이 어느 한 측에게도 정치적, 이념적 제약을 가하지 않는다고 규정했다. 내가 직접 협상에 참여했기에, 나는 조항의 중요성을 분명히 강조한다. 마흐노주의자는 페틀류라주의자 대중이 그들에게 큰 동정심을 지니고 있으며 그들의 선전에 귀를 기울일 것을 알고 있었다. 따라서 간섭 없이 이를 수행할 자유가 있는지가 문제였으며, 마흐노주의자는 특권계급의 옹호자이자 노동자의 적으로 정체를 폭로하는 『페틀류라는 누구인가?Who is Petlura?』라는 제목의 팸플릿을 발행했다.
페틀류라주의자 당국은 마흐노주의자의 확고한 적이었으나 그들에 대해 극도로 신중한 태도를 유지하는 데는 많은 이유가 있었다. 그렇지만 반란군은 페틀류라주의자의 “중립”이 순전히 표면적인 것이며 그들이 마흐노주의자를 없애기 위해 데니킨주의자와 비밀리에 연합할 수도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반란군이 며칠간 휴식을 취하고, 부상자들을 처리하고, 후방으로부터의 즉각적인 공격을 피하고, 함정에 걸려들지 않도록 하는 것이 문제였다. 이 모든 목표는 달성되었다. 그러나 다른 한편 마흐노주의자의 의혹은 곧 가시적으로 확인되었다.
“중립” 협약에 따르면 반란군은 우만 시 인근 테쿠차Tekucha 마을 근처 10제곱킬로미터의 영토를 차지할 권리가 있었다. 홀타Golta를 중심으로 페틀류라의 군대는 북쪽과 서쪽으로, 데니킨의 군대는 동쪽과 남쪽으로 분산되어 있었다. 그러나 협약이 체결된 지 며칠 뒤, 마흐노주의자는 반란군을 포위하고 말살하기 위한 협동 계획을 수립하기 위해 페틀류라주의자와 데니킨주의자 사이에 협상이 개최되고 있다는 동조자들의 정보를 접했다. 그리고 실제로 며칠 후인 9월 24일 밤 마흐노주의자 정찰대는 4~5개의 데니킨주의자 연대가 서쪽 후방에 있다고 보고했다. 그들은 페틀류라주의자의 도움을 얻어, 혹은 적어도 페틀류라주의자의 묵인 아래 페틀류라주의자가 점령한 영토를 통과해야만 그곳에 다다를 수 있었다. 9월 25일 밤, 마흐노주의자는 데니킨의 군대에 완전히 포위되었다. 데니킨의 본대는 동쪽에 집중되어 있었으나 강력한 장벽이 마흐노주의자의 후방에 세워졌으며, 우만 시는 이미 병원과 개별 주택에 분산되어 있던 부상자들을 찾아내 죽이는 데니킨주의자 수중에 있었다.
데니킨주의자 사령부가 발행한 명령이 마흐노주의자 참모들에게 전달되었는데, 다음과 같았다. “마흐노 무리가 포위되었다. 그들은 완전히 사기가 꺾이고, 무질서하고, 굶주려 있으며 탄약도 없다. 나는 사흘 안에 그들은 공격해 섬멸할 것을 명령한다.” 거기에는 우크라이나의 데니킨주의자 총사령관 슬라스초우(Slastchoff) 장군의 서명이 적혀 있었다(그는 후에 볼셰비키로 전향했다).
이제 모든 퇴각이 반란군에게 불가능해져 결정적 전투의 순간이 다가왔다. 모든 반란군의, 모든 운동의, 모든 대의의 운명이 이 지대한 전투에 달려있었다.
그리고 이 순간 마흐노는 지극히 단순하게 이때까지의 퇴각은 그저 떠밀려 왔을 뿐이었지만 다음날인 9월 26일 진짜 전쟁을 시작할 것이라고 선언했다. 그는 이 마지막 전투에 필요한 준비를 모두 마치고, 즉시 첫 번째 작전을 시작했다.
9월 25일 저녁, 그때까지 서쪽으로 진군하던 마흐노주의자는 갑자기 방향을 바꿔 데니킨주의자 군대의 본대를 향해 동쪽으로 이동하기 시작했다. 첫 접촉은 저녁 늦게 크루텐코이krutenkoi 마을 근처에서 벌어졌다. 마흐노주의자 제1 여단은 데니킨의 선발대를 공격했고, 데니킨의 선발대는 더 나은 위치를 점하기 위해 후퇴하며 적을 본대 쪽으로 끌어당겼다. 그러나 마흐노주의자는 그들을 뒤쫓지 않았다.
마흐노가 바라던 대로 이 작전은 적을 속여 그들이 이것을 정찰이나 교란으로 여기게 했고, 반란군이 여전히 서쪽으로 진군한다는 인상을 주었다. 그는 우만 시에서 그들 뒤편으로 가 준비해둔 함정에서 그들을 소탕할 준비를 했다. 슬라스초우 장군은 반란군이 감히 자신의 본대를 공격하리라고는 한순간도 예상하지 못했고, 정면 공격의 가능성에도 대비하지 않았다.
하지만 이것이 정확히 마흐노의 계획이었다. 그의 추론은 매우 간단했다. 적진을 돌파하는 것만이 군대를 안전히 지킬 수 있는 유일한 기회였고, 따라서 그들을 소탕하기를 기대하며 동쪽의 데니킨 군대에 맞서 싸움을 시도해 봐야만 했다. 전날의 작전은 단지 적의 주의를 분산시키기 위한 것이었다.
9월 26일 한밤중에 모든 마흐노주의 군대는 동쪽으로 진군하기 시작했다. 적군의 본대는 마흐노주의자가 점령하고 있던 페레호노우스카Peregonovska 마을 근처에 집중해 있었다. (아래는 이후 벌어진 전투에 대한 표트르 아르시노프의 서술이다.)
“전투는 새벽 3시에서 4시 사이 시작되었다. 이는 점점 더 격해졌고, 양쪽에서 규칙적으로 내뿜는 기관총의 소용돌이로 오전 8시에는 절정에 이르렀다. 마흐노는 기병대의 호위를 받으며 적의 측면을 공격하기 위해 해질녘에 떠났었다. 이어진 전투 내내 더 이상 그에 대한 소식은 없었다.
9시가 되자 수적으로 열세이고 기진맥진한 마흐노주의자는 설 자리를 잃기 시작했다. 이미 그들은 마을 외곽에서 싸우고 있었고 사방에서 다가오는 적의 증원부대가 그들에게 새 포화를 퍼부었다. 그들은 천천히 퇴각하였고, 반란군 참모는 물론 기병소총을 다룰 줄 아는 모든 사람이 무장하고 전투에 참여했다.
위험한 순간이었다. 그 전투와 함께 반란군의 모든 대의가 사라진 것처럼 보였다. 시가지에서 적을 사격할 준비를 하라는 명령이 모든 사람, 심지어 여성들에게도 내려졌다. 모두가 전투와 그들 삶의 절정의 순간을 위해 준비하고 있었다.
그러나 갑자기 적의 기관총 사격과 미친 듯한 환호성이 점점 약해지기 시작하더니 멀리 후퇴하기 시작했다. 마을을 방어하고 있던 이들은 적군이 후퇴하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렸고, 조금 떨어진 곳에서 전투가 일어나고 있음을 알아차렸다. 군대가 후퇴하고 페레호노우스카 거리에서 전투를 준비하던 그 순간 예기치 않게 나타난 것은 마흐노였으며, 전투의 운명을 결정지었다. 먼지를 뒤집어쓰고 분투로 피로한 그는 깊은 협곡을 통해 적의 측면에 도달했다. 포효 없이, 하지만 그의 온몸에 아로새겨진 불타는 결의로 그는 전속력으로 데니킨주의자를 향해 몸을 던졌고, 호위대가 뒤따르며 그들의 대열로 파고들었다.
모든 기진맥진함, 모든 낙담이 마법처럼 마흐노주의자들에게서 사라졌다. ‘아버지Batko가 왔다! 아버지가 기병과 함께 싸우고 있다!’하는 외침이 여기저기서 터져나왔다. 그리고 그들은 용기백배하여 죽음에 처할 것처럼 보이는 사랑하는 안내자를 따라 앞으로 나아갔다. 마흐노주의자가 ‘난도질’이라고 부르는 어마어마하게 흉포한 백병전이 뒤따랐다.
심페로폴 제1 장교연대는 용감했으나 처음에는 천천히 질서정연하게 퇴각해 마흐노주의자의 기동력을 멈추려 하던 것이 이후 거대한 재촉과 무질서에 빠져버렸다. 그들은 결국 목숨을 걸고 도망치게 되었다. 다른 연대들은 공포에 사로잡혀 그들을 따라갔고, 마침내 데니킨의 모든 군대가 궤멸해 무기를 버리고 페레호노우스카에서 약 15킬로미터 떨어진 시뉴하Syniukha 강을 헤엄쳐 살아남으려고 했다. 그들은 그때까지 반대편 강둑에 다다를 수 있을 것이라 희망했다.
그러나 마흐노는 상황을 완벽하게 이해하고 이를 이용하기 위해 서둘렀다. 그는 후퇴하는 적을 추격하기 위해 전속력으로 기병대와 포병대를 보냈고, 자신은 도주병들을 뒤에서 사로잡을 수 있는 지름길로 최고의 기병대 선두에 서서 향했다. 이는 약 12킬로미터에서 15킬로미터에 이르는 이동이었다.
데니킨의 군대가 강에 도착한 바로 그 순간, 그들은 마흐노주의 기병대에게 추월당했고, 수백 명이 그곳에서 싸늘한 시체가 되었다. 그들 대부분은 맞은 편 강둑으로 건너갈 시간이 있긴 했으나 거기서도 마흐노가 기다리고 있었다. 데니킨주의자 참모들과 함께 있던 예비 연대는 놀라며 포로로 사로잡혔다. 많은 장교가 마흐노주의자의 손에 넘어가는 것을 피하기 위해 근처 나무에 가죽 벨트로 목을 맸다. 마흐노를 몇 달 동안이나 맹렬히 추격해 온 이들 중 극히 일부만이 간신히 목숨을 건졌다. 장교들로 구성된 제1 심페로폴 연대와 다른 몇몇 연대는 반란군의 칼날 아래 완전히 섬멸되었다. 그들의 퇴각 경로 2~3킬로미터에 걸쳐 시체들이 널려 있었다.[27]
그리고 이 광경이 누군가에게는 아무리 끔찍한 광경이었다 하더라도, 이는 데니킨의 군대와 마흐노주의자 사이 결투의 자연스러운 결과일 뿐이었다. 추격 내내 데니킨의 군대는 반란군을 박멸하는 것 외에는 아무 생각이 없었다. 마흐노가 조금이라도 실수를 했더라면 반란군도 똑같은 운명을 맞았을 것이다. 반란군을 지원하거나 함께 싸웠던 여성들조차도 구원받지 못했을 것이다. 마흐노주의자들은 그것을 알기에 충분한 경험이 있었다.”(전게서, pp.229~232.)
데니킨의 본대가 전멸하자 마흐노주의자들은 지체 없이 한 번에 세 가지 갈래로 드니프로 강과 그들의 고향을 향해 출발했다. 이 귀환은 맹렬한 속도로 이루어졌다. 데니킨의 군대가 패배한 다음날, 마흐노는 이미 전장에서 100킬로미터 이상 떨어진 곳에 있었다. 호위병을 동반한 그는 본대보다 40킬로미터 앞서 움직였다. 하루 뒤, 마흐노주의자들은 돌린스카, 크리비이 리흐Kryvyi Rih, 니코폴Nikopol의 주인이 되었다. 다음날 키치카스 다리가 전속력으로 점령되었고 알렉산드로프스크가 반란군 손에 넘어갔다.
그들의 맹렬한 진격은 마치 그들이 잠자는 숲속의 미녀의 마법에 걸린 왕국으로 들어서는 것처럼 보였다. 아무도 우만 시에서 일어난 사건에 대해 아직 듣지 못했다. 아무도 마흐노주의자들의 운명을 알지 못했다. 데니킨주의자들은 방어를 위한 아무 예방책도 취하지 않았는데, 그들은 후방 배치 부대에서 일반적으로 보이는 나른함에 깊이 취해 있었다. 마흐노주의자는 봄의 벼락처럼 적을 덮쳤다. 알렉산드로프스크 다음은 폴루가이, 그런 뒤 훌랴이폴레, 베르댠스크, 마리우폴의 차례였다. 열흘이 지나자 중앙 우크라이나 전역은 군대와 당국으로부터 자유로워졌다.
하지만 단순히 군대와 당국의 문제만이 아니었다. 마치 거대한 빗자루처럼, 반란군은 도시와 마을, 시골을 지나며 착취와 예속의 흔적을 모두 쓸어버렸다. 돌아온 상류층, 부유한 농민(쿨라크), 거물급 기업가, 경찰, 사제, 데니킨주의자 장長들, 잠복해 있는 장교―이 모든 것들이 마흐노우슈치나의 승리의 길에서 쓸려나갔다. 감옥, 경찰서, 초소 등 사람들의 예속을 상징하는 이 모든 것이 파괴되었고, 농민과 노동자의 적극적인 적이라고 알려진 모든 이들은 사형 선고를 받았다. 도처에서 대지주들과 쿨라크들이 많이 죽었다. 이 사실은 볼셰비키가 마흐노주의 운동이 이른바 “쿨라크”적 성격을 지녔다며 퍼뜨린 신화가 거짓임을 드러내기에 충분하다.
이와 관련해 내가 목격한 전형적인 에피소드가 기억에 떠오른다. 그들이 돌아오는 길에 몇몇 마흐노주의자 연대는 상당히 중요한 마을을 차지했다. 그들은 사람과 말들이 휴식하고 회복하게 하기 위해 멈추었다. 그들과 함께 도착한 우리 선전위원회는 교회 바로 맞은 편 마을 광장에 살고 있던 농민 가족이 보살펴주었다.
우리가 막 들어서려던 때, 밖에서 움직임과 고함 소리가 들렸다. 밖으로 나가자 우리는 마흐노주의 파르티잔들에게 무언가를 설명하고 있던 농민 군중이 보였다. “예, 정말이지, 동지들, 그 돼지 새끼는 마흔 명 전부에 대한 명단을 만들어서 그걸 당국에 보냈습니다. 그 사람들은 전부 총살당했습니다….”
우리는 그들이 마을 사제를 이야기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농민들에 따르면 그는 데니킨주의자 당국에 많은 주민들을 마흐노주의 용의자 혹은 동조자로 고발했다. 반란군 중 일부가 현장에서 수행한 신속한 조사는 농민들이 진실을 말하고 있음을 보여주었다.
그들은 사제의 집으로 가기로 했으나 농민들은 그곳이 잠겨 있고 그도 거기 없다고 말했다. 누구는 사제가 도망쳤다고 여겼고, 누구는 교회에 숨어 있다고 믿었다. 농민 군중과 반란군은 교회로 갔다. 문은 닫혀 있었고 바깥에 커다란 자물쇠가 걸려 있었다.
“보세요!” 몇몇이 소리쳤다. “밖에서 문이 잠겨 있으면 안에 있을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사정을 더 잘 아는 다른 이들은 사제에게 도망갈 시간이 없었으므로 도망친 것처럼 보이게끔 하기 위해 그를 교회에 가두도록 교회지기에게 지시한 것이라고 말했다. 이에 확실히 하기 위해 반란군 일부가 소총 개머리판으로 자물쇠를 부수고 교회 안으로 들어갔다. 그들은 내부를 샅샅이 뒤졌지만 아무도 발견하지 못했다. 하지만 그들은 사용 흔적이 있는 요강과 비축된 식량을 발견했다.
그들은 이제 사제가 교회에 숨어 있다고 확신했다. 군중이 들어서는 소리를 들은 사제는 아래에서 자신을 발견하지 못한 추격자들이 추적을 포기하기를 바라며 종탑으로 올라갔다. 종탑에는 좁은 나무 계단이 있었는데, 반란군은 분노에 찬 외침과 함께 칼과 총의 덜그럭거리는 큰 소리를 내며 종탑으로 뛰쳐 올라갔다.
광장에서 지켜보던 사람들은 갑자기 종탑 지붕 아래에서 필사적으로 손짓하며 울고 있는, 분명 매우 두려워하고 있는 검은 캐석을 입은 키 큰 남자의 모습을 보았다. 그는 젊었고, 지푸라기 색 머리카락이 바람에 흩날렸다. 그는 공포에 질려 얼굴을 일그러뜨린 채 광장을 향해 팔을 뻗고 애처롭게 외쳤다. “형제 여러분! 형제 여러분! 나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습니다, 아무것도 하지 않았습니다. 불쌍히 여겨 주십시오, 형제 여러분!”
그러나 벌써 거센 팔들이 그의 캐석 꼬리를 잡고 그를 끌어냈다. 그들은 사제를 교회 밖으로 끌어내고 광장을 가로질러 많은 이들이 모인 안뜰로 들어섰다. 많은 농민과 반란군이 들어섰다. 다른 이들은 광장, 열린 문 앞에 남아 있었다.
곧바로 임시 인민재판이 준비되었다. 우리 위원회는 그 일부가 아니었으나 목격자로 머물렀다. 우리는 사람들이 알아서 하도록 내버려 두었다. “좋아,” 그들이 사제에게 소리쳤다. “무슨 할 말이 있나? 당신은 이제 대가를 치러야 할 거야. 남길 말이 있으면 하고, 원한다면 기도를 하시지!”
“형제 여러분, 형제 여러분,” 그는 온몸을 떨며 반복했다. “나는 결백합니다, 나는 결백합니다, 나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습니다, 형제 여러분.”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는 게 무슨 소리야?” 몇 사람이 소리쳤다. “어린 이반과 파울로, 꼽추 세르게이, 다른 사람들을 고발한 게 당신 아니었나? 명단을 작성한 게 당신 아니었나? 당신을 공동묘지로 데려가서 희생자들의 무덤을 보여줄까? 아니면 경찰서에 가서 서류를 찾아볼까? 우리는 당신 필체로 그 명단을 찾을 수 있을 거야.”
사제는 무릎을 꿇고 앉아 초췌한 눈과 온몸에 땀이 뚝뚝 떨어지는 모습으로 계속 반복했다. “형제 여러분, 나를 용서하십시오, 불쌍히 여겨 주십시오, 나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습니다.” 우리 위원회에 소속되어 있던 젊은 여성은 우연히 그의 근처에 있었다. 그는 여전히 무릎을 꿇은 채 그녀의 치맛자락을 잡고 입술을 가져다 대며 애원했다. “자매님, 나를 지켜 주십시오. 나는 결백합니다. 나를 구해주세요, 자매님!”
“내게 뭘 바라는 건가요?” 그녀가 물었다. “당신이 결백하다면 스스로 변호하세요. 이 사람들은 짐승들이 아니에요. 당신이 정말 결백하다면 그들은 당신을 해치지 않을 겁니다. 하지만 당신이 죄를 지었다면 내가 무얼 할 수 있겠어요?”
말을 탄 반란군 한 사람이 군중을 헤치고 안뜰로 들어섰다.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알게 된 그는 사제 뒤에 멈춰 서서 운 나쁜 사제의 등을 사납게 채찍질하기 시작했다. 채찍을 칠 때마다 그는 되풀이해서 말했다. “사람들을 속인 죗값이다! 사람들을 속인 죗값이다!” 군중은 그를 냉담하게 지켜보았다.
“충분합니다, 동지,” 나는 부드럽게 말했다. “어쨌든 그는 고문 기술자는 아니었습니다.”
“오, 그렇죠,” 그들은 내 주변에서 비꼬며 외쳤다. “그들은 아무도 고문한 적 없고 말고요. 그렇죠?”
다른 반란군이 앞으로 나왔다. 그는 사제를 거칠게 흔들었다. “좋아, 일어나! 이 코미디는 이만 하면 충분해! 일어서!”
고발된 사제는 더 이상 울지 않았다. 그는 매우 창백한 얼굴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거의 의식하지 못한 채 일어섰다. 그는 먼 곳으로 시선을 두고 말없이 입술을 움직였다.
반란군은 몇몇 동지들에게 신호를 보냈고, 그들은 즉시 사제를 에워쌌다. “동지들,” 그는 농민들에게 외쳤다. “여러분 모두는 이 사람이 반혁명분자임이 증명되었고, ‘용의자’ 명단을 작성해 백군 당국에 제출했으며, 이 고발의 결과 여러 농민이 체포되어 처형당했다고 말했습니다. 맞습니까?”
“예, 사실입니다!” 군중이 고함쳤다. “저 자는 우리 가운데 마흔 명을 중상모략했습니다. 온 마을이 알고 있습니다!”
그 뒤 그들은 다시금 희생자들의 이름을 말하고 확실한 증인들을 불렀다. 처형된 사람들의 친척 몇 명이 사실을 확인하기 위해 왔다. 당국자들은 그들의 행동에 대한 설명으로 사제가 작성한 명단을 그들에게 댔다.
사제는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이 사람을 변호할 농민이 여기 있습니까?” 반란군이 물었다. “이 사람의 죄에 대해 의혹이 있는 사람이 있습니까?” 아무도 움직이지 않았다.
그러자 반란군이 사제를 붙잡았다. 그의 캐석이 난폭하게 벗겨졌다. “아주 좋은 천이군!” 그가 말했다. “이거면 우리는 멋진 검은 깃발을 만들 수 있겠어. 우리 깃발은 완전히 해져버렸거든.”
그리고 그는 사제에게 말했다. “이제 무릎을 꿇고, 돌아서지 말고 기도를 하도록.”
사형 선고를 받은 이는 그렇게 했다. 그는 무릎을 꿇고 두 손을 모은 채 중얼거리기 시작했다.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온 세상이 아버지를 하느님으로 받들게 하시며, 아버지의 나라가 오게 하시며…” 두 명의 반란군이 그의 뒤에 따라 섰다. 그들은 권총을 뽑아 조준하고 그의 등에 몇 발의 총알을 쏘았다. 총성이 건조하고 무자비하게 울려퍼졌다. 몸뚱이가 쓰러졌다. 그것으로 끝이었다. 군중은 사건에 대해 이야기하며 천천히 해산했다.
마흐노는 천둥 같은 귀환 동안 그가 참가했었던 몇 가지 다른 극적인 에피소드들을 말해주었다. 저녁이 되면 그는 모두가 데니킨주의자 장교처럼 옷을 입은 몇몇 기병과 함께 사나운 반동분자, 데니킨 숭배자, 농민의 처형자로 알려진 몇몇 대귀족에게 모습을 드러냈다. 임무를 마치고 돌아온다는 장교로 위장한 이들은 그 사유지에서 잠시 쉬고, 밤을 보낸 뒤 다음 날 아침 떠나고 싶어 했다. 그들은 당연히 열렬한 환영을 받았다. “장교 나리들”은 편히 쉴 수 있었다. 그 사유지는 데니킨주의자 분대가 잘 지키고 있었다. 아무것도 두려워할 것이 없었다.
방문객들을 맞이하기 위해 잔치가 열렸다. 경비대 장교와 몇몇 절친한 친구들이 참석했다. 맛있는 음식, 진귀한 와인, 고급 과실주가 제공되었다. 혀가 풀렸다. 모두가 야단스럽게 “마흐노주의 도적단”과 반역자들을 저주하며 그들의 조속하고 완전한 진압을 바라고, 데니킨과 백군의 건강을 기원했다. 때때로 지나치게 신뢰하는 귀족은 손님들에게 만일의 사태에 대비한 그의 웅장한 무기고를 보여주기도 했다.
잔치가 끝날 무렵, 마흐노는 난폭하게 자신의 정체를 밝혔고, 형언할 수 없는 충격과 공포, 혼란의 무대가 뒤따랐다. “사유지는 마흐노주의자에게 둘러싸여 있으며 경비대는 무장해제되었다. 너는 죗값을 치러야 해.”
절규도, 애원도, 도망치려는 시도도 아무 의미가 없었다. 영주와 그의 친구들, 충실한 요원들, 경비대 장교들은 그 자리에서 처형되었다. 경비병들은 철저히 심문받은 뒤 그에 따른 대우를 받았다. 사건이 끝나면 그들은 무기를 챙겨 또 다른 소굴로 나아갔다.
마흐노주의자의 중앙 우크라이나 점령은 데니킨의 반혁명운동 전체에 치명적인 위험이었다. 사실 볼노바하Volnovakha와 마리우폴 사이에 데니킨 군대의 보급 기지가 위치해 있었고, 이 지역 모든 도시에 엄청난 군수품이 비축되었다. 물론 이 모든 보급품이 바로 마흐노주의자 손에 넘어가지는 않았다. 예를 들어 볼노바하 주변에서는 마흐노주의자와 데니킨 수많은 예비 부대 사이에 닷새 동안 치열한 전투가 있었다. 그러나 그 지역 철도가 모두 반란군 손에 들어갔기 때문에 포탄 하나도 빠져나갈 수가 없었고, 전쟁 물자 역시 북부든 어디든 데니킨의 군대에 도달할 수 없었다.
볼노바하에서와 마찬가지로 여러 곳의 데니킨주의자 예비 부대가 마흐노주의자와 싸웠으나 그들은 곧 정복되고 소멸했다. 그런 다음 마흐노우슈치나의 홍수는 도네츠 분지 아래와 북부로 굽이쳤다. 10월, 반란군은 예카테리노슬라프를 점령했다.
데니킨은 어쩔 수 없이 모스크바로의 진격을 포기해야만 했다. 그는 서둘러 최정예 부대들을 훌랴이폴레 전선으로 보냈다. 불길이 흑해와 아조프해 해안에서부터 하르키우, 폴타바에 이르기까지 전 지역에 걸쳐 맹위를 떨쳤다. 지원 병력, 특히 많은 수의 장갑차 및 마몬토프(Konstantin Konstantinovich Mamontov)와 시쿠로가 지휘하는 우수한 기병대 덕분에 백군은 마리우폴, 베르댠스크 및 훌랴이폴레에서 마흐노주의자를 후퇴시키는 데 성공했으며, 동시에 마흐노주의자는 시넬니코베, 파울로흐라드, 예카테리노슬라프 및 기타 도시와 지역을 점령했다. 따라서 데니킨은 몇 안 되는 단적인 지역적 성공으로부터 어떤 이점도 얻을 수 없었다.
10월과 11월에 걸쳐 데니킨의 주력 부대는 북쪽에서 내려와서 마흐노와 격렬한 전투를 벌였다. 11월 말, 심각한 발진티푸스 전염병에 시달린 마흐노주의자들은 예카테리노슬라프를 포기하고 남부로 다시 모일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데니킨은 더 이상 공고히 서 있을 수 없었다. 마흐노주의자들은 온 방면에서 그를 계속 괴롭혔다. 더욱이 적군이 발자국을 따라 북쪽에서 내려오며 그를 밀쳐내고 있었다. 그의 군대는 붕괴 직전이었다. 곧 그의 최정예 부대―코카서스인 부대―는 마흐노와의 싸움을 계속 거부하기 시작했다. 그들은 그들의 진지를 버리고―사령부는 그들을 막을 수 없었다―자신들의 고향으로 떠났다. 이것이 데니킨주의 군대의 완전한 몰락 그 시작이었다.
여기서 1919년 가을 데니킨주의 반혁명을 궤멸한 영광은 오롯이 마흐노주의 반란군에 속한다는 역사적 사실을 강조할 필요가 있다. 반란군이 페레호노우스카에서 결정적 승리를 거두지 못하고, 데니킨 후방 기지들을 계속 제압하지 못하고, 대포, 식량, 탄약을 파괴하지 않았더라면 백군은 늦어도 1919년 12월에 모스크바로 입성했을 것이다.
데니킨의 최정예 부대가 후퇴했다는 소식을 들은 볼셰비키는 깜짝 놀랐으나 나중에야 이러한 반전(페레호노우스카에서의 패배와 그 결과)의 진짜 이유를 알게 되었고, 그로부터 얻을 수 있는 이점들을 빠르게 깨닫게 되었다. 그들은 오룔 근처에 있던 데니킨을 공격해 그가 총퇴각하게 했다. 그러나 이 전투, 게다가 적군과 후퇴하는 백군 사이의 몇 차례 다른 전투도 분명 이차적 중요성을 지니고 있었다. 백군 측의 저항은 그들의 후퇴와 군수품 및 보급품의 철수를 보호하기 위한 것이었다. 적군은 오룔에서 쿠르스크를 거쳐 흑해와 아조프해 해안까지의 길목 전체를 따라 저항받지 않고 진격했다. 후퇴하는 백군의 경로를 따른 적군의 우크라이나 및 코카서스 진입은 1년 전 헤트만 스코로파즈키의 몰락이 볼셰비키 진군의 길이 트인 것과 정확히 같은 효과를 낳았다.
북쪽에서 백군이 퇴각하는 것을 막아낸 것은 마흐노주의자들이었다. 백군의 마지막 붕괴 때까지 반란군은 많은 어려움을 겪었다. 혁명적 파르티잔에게 간접적 구원을 받은 볼셰비키는 그들이 얻지 못한 월계관을 거두기 위해 우크라이나로 돌아왔다.
제4부. 해방된 지역의 마흐노주의자
지속된 무장 투쟁, 즉 “바퀴 위 왕국”의 생활 양식은 불가피하게 마흐노주의 지역의 사람들에게 그 어떠한 안정성도 빼앗았을 뿐만 아니라 광범위한 긍정적이고 건설적 활동의 가능성도 빼앗았다. 그럼에도 가능한 모든 순간 운동은 거대한 유기적 활력의 증거를 보였고, 노동 대중은 놀라운 창조적 의지와 능력을 보였다.
몇 가지 예를 들어보자. 우리는 이미 몇 차례 마흐노주의 언론을 언급했다. 당시의 다양한 장애물과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아나키스트 《나밧》 연맹과 직접적 관계를 유지한 마흐노주의자들은 팸플릿, 신문 등을 계속 발행했다. 그들은 심지어 〈『자유 노동자의 소비에트에 관한 혁명반란군(마흐노주의자)의 범汎 테제General Theses of the Revolutionary Insurgents (Makhnovists) concerning the Free Workers’ Soviet』라는 제목으로 상당한 규모의 소책자를 출간하기도 했다.
일간, 또는 주간으로 출간되던 신문, 「자유를 향한 길Road to Freedom」은 주로 자유의지주의 사상을 대중적이고 구체적으로 설명하는 데 전념했다. 이론과 강령에 더 집중된 「나밧」은 주간으로 발행되었다. 우리는 또한 마흐노주의 운동과 그 군대의 관심사, 문제점 및 임무를 주로 다루는 신문인 「마흐노주의자의 목소리The Makhnovist Voice」라는 신문도 언급해 두어야겠다.
위 『범 테제』의 경우, 당시 가장 시급한 문제에 대한 마흐노우슈치나들의 견해를 요약했는데, 지역과 자유 소비에트들의 경제 조직, 새로이 건설될 사회의 사회적 기반, 방어의 문제, 정의의 구현 같은 것들이었다.
자주 거론되는 질문은 다음과 같은 것이다. 마흐노주의자는 투쟁 과정에서 점령한 도시와 마을에서 어떻게 행동했는가? 그들은 어떤 방법으로 민간인을 조직했는가? 그들은 어떤 방법으로 정복한 도시의 삶, 즉 행정, 생산, 무역, 지방자치 등을 조직했는가?
이와 관련해 수많은 속설과 중상모략이 퍼졌기에 이를 밝히고 진실을 규명해야 한다. 페레호노우스카 전투 이후 마흐노주의자 군대가 알렉산드로프스크, 예카테리노슬라프 등 여러 중요한 도시를 점령했던 바로 그 시기에 그들과 함께하고 있었기에 나는 독자에게 직접적이고 정확한 설명을 할 수 있다.
마흐노주의자가 정복자로서 어떤 도시에 들어서면서 가장 먼저 우려했던 것은 자신들이 새로운 권력, 정당, 즉 일종의 독재라는 위험한 오해를 제거하는 것이었다. 그들은 즉시 벽에 커다란 통지문을 게재해 사람들에게 대략 다음과 같이 말했다.
“도시와 주변 지역 모든 노동자에게!
노동자 여러분, 여러분의 도시는 현재 마흐노우슈치나 혁명반군이 점거하고 있다. 이 군대는 어떤 정당, 어떤 권력, 어떤 독재에도 복무하지 않는다. 오히려 이 군대는 이 지역을 모든 정치적 권력, 모든 독재로부터 해방하고자 한다. 이 군대는 모든 착취와 지배로부터 행동의 자유, 노동자의 자유로운 삶을 보호하기 위해 노력한다.
다시 말해 마흐노주의 군대는 어떠한 권위도 대변하지 않는다. 이 군대는 누구에게도 아무런 의무를 부과하지 않을 것이다. 이 군대의 역할은 노동자의 자유를 수호하는 데 국한된다. 농민과 노동자의 자유는 그들 자신에게만 속하며, 어떠한 제약도 받아서는 안 된다.
여러분이 원하는 한, 옳다고 생각하는 방법을 통해 삶의 모든 면에서 바라는 대로 행동하고, 조직하고, 상호 이해에 도달하는 것은 노동자와 농민 자신에게 달려있다.
따라서 마흐노주의 군대는 여러분에게 아무것도 강요하지도, 지시하지도 않을 것이며, 어떠한 명령도 내리지 않을 것이라는 사실을 분명히 이해해야 한다. 마흐노주의자는 그들에게 필요한 지적, 군사적 및 기타 능력을 활용한 의견이나 조언을 제공함으로써 여러분을 도울 것이다. 하지만 마흐노주의자는 여러분을 어떤 경우라도 통치할 수 없고, 지시할 수 없다.”[28]
이 통지문은 거의 항상 도시와 주변 지역 노동 대중에게 마흐노주의자 동지들이 보다 자세한 방식으로 그들의 견해를 밝히고, 필요한 경우 권위나 인간에 의한 인간의 착취가 없는, 자유와 경제적 평등에 기반하여 그 지역의 삶을 조직하기 위한 몇몇 실용적인 조언을 제공하는 큰 회의에 참석하도록 초대하며 끝맺었다.
모종의 이유로 통지문에 그러한 초대를 첨부하지 못한 경우, 이는 얼마 후 작은 특별 통지문으로 대체되기도 하였다.
사람들은 대개 처음에는 이런 완전히 새로운 행동 방식에 약간 놀랐으나, 빠르게 그 상황에 익숙해졌으며 열정적으로 자유로운 조직이라는 과업을 시작해 큰 성과를 이루었다.
말할 것도 없이, “군대”의 태도에 대해 안심한 도시는 평범한 모습과 일상생활을 회복했다. 상점들은 다시 문을 열었고, 가능한 곳에서는 작업이 다시 시작되었으며, 다양한 행정기관이 제 기능을 재개했고, 시장들이 다시 열렸다. 그리하여 평화롭고 자유로운 분위기 속에서, 노동자는 낡은 제도를 체계적으로 대체할 수 있는 활동을 적극적으로 준비했다.
해방된 각 지역에서 마흐노주의자는 적에게 그들의 의지를 강요할 만한 충분한 힘을 지닌 유일한 조직이었다. 그러나 그들은 이러한 힘을 결코 지배하려는 목적 또는 어떠한 정치적 영향력을 위해 사용하지 않았다. 그들은 순수하게 정치적, 이념적인 반대자에 맞서 그 힘을 사용하지 않았다. 대신에, 군사적 적대세력, 노동자 행동의 자유에 반하는 패거리들, 경찰, 감옥, 이런 것들이 마흐노주의 군대가 감독하고자 노력한 요소들이었다.
자유로운 이념적 활동, 사상의 교환, 토론, 선전, 그리고 비권위주의적 조직과 결사의 자유에 대해 마흐노주의자는 언론, 출판, 양심, 집회, 정치, 이념 또는 기타 단결의 자유라는 혁명적 원칙을 어느 곳에서나 완전히 보장했다. 이는 점령한 모든 도시와 마을에서 모든 금지 조항을 해제하고 언론 기관과 정치 조직에 부과한 모든 제한을 전부 폐지하는 데서부터 시작되었다.
베르댠스크의 감옥은 파괴에 적극적으로 동참한 수많은 군중에 의해 폭파되었다. 알렉산드로프스크, 크리비이 리흐, 예카테리노슬라프 등지에서 감옥은 철거되거나 불살라졌다. 어디서나 노동자들이 이에 환호했다.
모든 형태의 언론, 출판, 집회, 그리고 단결의 자유가 모두에게 즉각 선포되었다. 다음은 마흐노주의자가 그들이 점령한 지역에서 이를 알린 선언문을 재현한 것이다.
“Ⅰ. 모든 사회주의[29] 정당, 조직 그리고 당파들은 자신들의 사상, 이론, 견해 및 관점을 말과 글로 자유롭게 전파할 권리가 있다. 사회주의 표현과 언론의 자유에 대한 어떠한 제한도 허용되지 않을 것이며, 어떠한 박해도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비고: 군사 성명서는 혁명반란군의 중앙기관인 「자유를 향한 길」 관리자에 의해 제공되지 않는 이상 인쇄되지 않을 수 있다.
Ⅱ. 모든 정당과 조직이 자신들의 사상을 전파할 수 있는 완전한 자유를 허락하는 데 있어, 마흐노주의 혁명반란군은 모든 당사자에게 노동 대중에 대해 정치적 권위를 준비, 조직 그리고 부과하려는 시도는 표현과 선전의 자유와는 무관하므로 허용되지 않을 것임을 알린다.
1919년 11월 5일, 예카테리노슬라프
마흐노주의 혁명반란군 《혁명 군사위원회》”
러시아 혁명 전체 과정에서 우크라이나의 마흐노우슈치나 기간은 노동 대중의 진정한 자유가 완전히 표현된 유일한 시기였다. 이 지역이 자유롭던 동안 마흐노주의자가 점령한 도시와 지역의 노동자들은 처음으로 그들이 원하는 바를 원하는 대로 표현하고 이루기 위해 행동할 수 있었다. 그들은 마침내 자신의 판단에 따라, 정의와 진리에 대한 자신의 감정에 따라 삶과 노동을 스스로 조직할 기회를 지녔다.
마흐노주의자가 예카테리노슬라프에서 보낸 몇 주 동안, 완전한 자유 아래 다양한 정치적 성향의 대여섯 가지 신문이 생겨났다―《사회주의혁명당》 우파 신문 「나로도울라스티에Narodovlastie」(인민의 힘), 《사회주의혁명당》 좌파 신문 「즈나먀 보스타니야Znamia Vosstaniya」(반란의 표준), 볼셰비키 신문 「즈베즈다Zvezda」(별) 등등. 사실을 말하자면 볼셰비키는 언론과 단결의 자유에 대한 권리가 적게 인정되었는데, 이는 그들이 가능한 모든 곳에서 노동계급의 언론과 단결의 자유를 파괴했기 때문이며, 또한 1919년 6월 예카테리노슬라프에서 훌랴이폴레 지역의 범죄적 침략에 직접 참여한 그들에게 엄중한 징계를 가하는 것이 정의에 다름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언론과 단결의 자유라는 대원칙을 해치지 않기 위해, 그들은 방해받지 않고 다른 모든 정치적 경향과 마찬가지로 사회혁명의 기치에 새겨진 모든 권리를 누릴 수 있었다.
마흐노주의자가 볼셰비키, 《사회주의혁명당》 당원 및 기타 국가주의자에게 부과해야 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 유일한 제한은 사람들에게 독재를 강요하려는 자코뱅Jacobin적 “혁명 위원회” 설립에 대한 금지였다. 여러 사건이 이 조치가 부당하지 않음을 증명했다.
마흐노주의 군대가 알렉산드로프스크와 예카테리노슬라프를 점령하자마자, 지역 볼셰비키는 은신처에서 나와 자신들의 정치적 권력을 확립하고 사람들을 통치하기 위한 종류의 위원회(일명 “혁명위원회Rev-Com”)를 조직하기 위해 서둘렀다. 알렉산드로프스크에서 이러한 위원회 구성원들은 마흐노에게 “활동 영역 분리”를 통해 군사권은 그에게 양도하고 위원회는 완전한 행동의 자유와 모든 정치적, 민사적 권위를 갖도록 하자고 제안하기까지 했다. 마흐노는 그들에게 노동 대중에 그들의 의지를 강요하는 대신 “가서 정직한 직업을 가지라”고 충고했다. 예카테리노슬라프에서도 비슷한 사건이 발생했다.
이러한 마흐노주의자의 태도는 정당하고 논리적이었다. 언론, 출판, 조직 등의 완전한 자유를 보장하고 방어하고자 했기에, 이 자유를 억압하고, 다른 조직을 억누르며, 노동 대중에게 그들의 의지와 독재적 권위를 강요하려는 대오에 대해 아무런 주저 없이 조치를 취할 수 있었다.
마흐노주의자는 주저하지 않고 이를 행했다. 알렉산드로프스크에서 마흐노는 “혁명위원회” 구성원 중 누구라도 이런 행동을 조금이라도 시도한다면 체포해 총살하겠다고 위협했다. 예카테리노슬라프에서도 그는 똑같이 행동했다. 그리고 1919년 11월, 공산주의 성향을 지닌 제3 반란군(마흐노주의) 연대의 지휘관 폴론스키(Polonsky)가 이러한 행동에 가담한 혐의로 유죄 판결을 받았을 때, 그는 공범들과 함께 처형되었다.
그달 말, 마흐노주의자는 예카테리노슬라프를 떠나야 했다. 그러나 그들은 노동 대중에게 진정한 자유는 노동자의 손에 있으며, 자유의지주의 정신과 진정한 권리의 평등이 그들 사이에 확립되자마자 그것이 퍼지고 발전하기 시작했다는 것을 보여줄 시간이 있었다.
알렉산드로프스크와 그 일대는 마흐노주의자가 처음으로 꽤 오랜 기간 머무른 장소였다. 입성 직후 그들은 노동 대중을 도시 노동자 총회에 참석하도록 초청했다.
총회는 마흐노주의자의 그 지역의 군사 상황에 대한 상세한 보고로 시작되었다. 그런 다음, 노동자가 해방된 지역의 생활을 스스로 조직하는 것, 즉 반동으로 파괴된 조직을 재건하는 것, 공장과 상점을 최대한 빠르게 생산으로 복귀시키는 것, 소비자 협동조합을 조직하는 것, 주변 시골 농민과 즉시 합류하는 것, 제품 교환 등을 목적으로 하는 노동자와 농민 조직간 직접적이고 정기적인 관계를 수립하는 것 등을 제안했다.
노동자들은 이 모든 생각에 열렬히 환호를 보냈다. 하지만 처음에는 그들의 파격에 고민하고, 게다가 전선이 가깝다는 불안함에 그 수행을 망설였다. 그들은 가까운 시일 안에 백군―혹은 적군―이 돌아올 것을 두려워했다. 언제나 그렇듯 불안정한 상황이 건설적 작업을 방해했다.
그러나 문제는 거기서 그치지 않았다. 며칠 뒤 두 번째 총회가 열렸다. 노동자가 자치 관리 원칙에 따라 삶을 조직하는 문제가 활발하게 토의되었다. 마침내 총회는 중대한 지점에 도달했다―그것을 수행할 첫 번째 단계, 즉 정확한 방법에 대해서 말이다.
이 제안은 몇몇 활동적 노동조합의 대표들로 구성된 추진위원회를 구성하기로 정했다. 총회는 위원회에게 즉각적인 조치를 위한 계획을 수행하는 임무를 부여했다. 철도 노동조합과 제화공 노동조합의 몇몇 조합원이 이 지역의 경제적, 사회적 생활을 가능한 한 빨리 재활성화하기 위해 필수적인 노동자 기관을 만들 추진위원회를 즉시 조직할 준비가 되어 있다고 밝혔다. 위원회는 활력적으로 작업에 착수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철도 노동자들은 열차를 다시 운행하게 되었고, 여러 공장이 다시 문을 열었으며, 여러 노동조합이 다시 설립되었다.
보다 궁극적인 개혁을 기다리는 동안 사용 중이던 돈―다양하게 발행된 종이돈―은 계속해 교환 수단으로 사용될 것이라고 정해졌다. 하지만 한동안 사람들이 다른 교환 방법을 사용했기에 이는 부차적인 문제였다.
노동자 총회가 끝난 직후, 1919년 10월 20일 알렉산드로프스크에서 대규모 지역 노동자 총회가 소집되었다. 이 총회는 조직 방식, 절차 및 업적 면에서 매우 특출났기 때문에 특별히 주의를 기울일 가치가 있다. 나는 적극적으로 이 총회에 참석했기에 자세한 설명을 할 수 있다.
마흐노주의자는 지역 노동자 총회 소집을 주도하며 매우 민감한 임무를 맡았다. 그들은 사람들의 생활에 필수적이고, 탄복할 만하고, 합리적인 중요한 자극을 주기를 희망했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는 총회와 대중에게 자신들을 강요하는 것을 피해야 했고, 자신들의 의견을 받아쓰기하지 않도록 해야 했다.
무엇보다도 이 총회는 모든 반대파에 의한 탄압의 위협 아래 소위 대표단에게 강요되고 온순하게 채택될 것이 정해진, 이미 준비된 결의안을 총회에 제출하는 정당(혹은 지배계급)의 당국이 소집한 것과는 달라야 한다는 점이 중요했다. 게다가 마흐노주의자들에게는 반란군과 관련해 총회에 제출해야 할 많은 질문이 있었다. 반란군의 운명 및 반란군이 맡은 모든 임무는 총회가 이 질문들에 어떻게 답변하느냐에 달려 있었다. 그러나 이 특수 분야에서도 마흐노주의자는 대표자들에게 어떠한 압력도 주지 않기 위해 노력했다.
이러한 위험을 피하기 위해 다음과 같은 내용이 결정되었다.
1. “선거 캠페인”은 수행되지 않는다. 마흐노주의자는 마을, 조직 등에 대표단을 선출해서 10월 20일 알렉산드로프스크 노동자 총회에 파견해야 한다고 알리는 데 그쳤다. 따라서 사람들은 완전히 자유롭게 대표자를 지명하고 지시할 수 있었다. 2. 총회가 개최될 때, 마흐노주의자의 대표자는 반란군에 관한 문제가 주요 논의 사항이었기에 그들에 의해 이번 총회가 소집되었다는 것을 설명할 것이었다. 동시에 총회는 당연히 사람들의 생활에 관한 문제를 해결해야 했다. 두 가지 모두, 심의와 결정은 모든 압력으로부터 절대적으로 자유로울 것이고, 대표들은 그들의 결정이 무엇이든 위험에 노출되지 않을 것이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이 회의는 특별 회의로 간주 되어야 하며, 지역 노동자들은 스스로의 주도 아래 자신이 원하는 대로 자신들의 삶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제각각의 노동자 회의를 후속적으로 개최해야 했다. 3. 개회 직후, 대표자들은 총회의 위원회를 선출하고, 마흐노주의자에 의해 그들에게 제안된―강요된 것이 아닌―의제를 그들에 맞게 수정해야 했다.
총회를 2, 3일 앞두고 나는 흥미로운 사건을 경험했다. 어느 날 저녁, 아주 젊은 남자가 내게 자신을 소개했다. 그는 자신을 《사회주의혁명당》 좌파의 지역 위원회 위원인 루빔(Lubim) 동지라고 밝혔다. 나는 바로 그의 흥분한 상태를 알아차렸다. 그는 어찌나 흥분했던지 아무런 준비도 없이 내게 온 이유를 설명했다.
“볼린 동지,” 그는 우리가 있던 작은 호텔 객실을 왔다 갔다 하며 외쳤다. “무례하게 굴어 죄송합니다만, 위험이 너무나 큽니다. 동지는 확실히 이를 모르고 있습니다. 단 일 분도 지체할 시간이 없습니다. 좋습니다, 여러분은 아나키스트고, 따라서 유토피아주의자며, 따라서 순진합니다. 하지만 여러분의 순진함을 어리석은 데까지 끌고 갈 수는 없습니다. 여러분은 그럴 권리도 없는데, 그것은 여러분 스스로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들과 전체적인 대의의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나는 그의 장황한 말을 한마디도 이해하지 못했노라 고백했다.
“좋습니다,” 그는 점점 더 흥분하며 계속했다. “여러분은 농민과 노동자 총회를 소집했습니다. 이 총회는 엄청난 중요성을 지닐 겁니다. 하지만 여러분은 아이처럼 굴고 있습니다! 말로 다 못 할 여러분의 순진함으로 무얼 하고 있습니까? 여러분은 총회가 열릴 것이라고 휘갈겨 쓴 작은 종이 한 장만 보냈습니다! 그게 전부입니다. 소름 끼치고, 미친 짓입니다. 설명도, 선전도, 선거 캠페인도, 후보 명단도, 아무것도, 아무것도 없습니다! 제발, 볼린 동지, 눈을 좀 뜨시오! 여러분들 상황에서는, 결국 조금은 현실적이어야 합니다! 아직 시간이 있을 때 무언가를 하시오. 선동가들을 보내고 투표자에게 후보 명단을 제시하시오. 우리에게 약간의 선거 캠페인을 할 시간을 주시오. 사람들―주로 농민인―이 제헌의회 소집이나, 심지어 군주제의 복원을 요구하는 반동적 대표자를 보낸다면 여러분은 무어라 말하겠습니까? 사람들은 반혁명의 영향을 심각하게 받고 있습니다. 그리고 대다수 대표자가 반혁명적이고 총회를 훼방 놓는다면 어쩔 셈입니까? 그러니 너무 늦기 전에 행동하시오! 총회를 잠시 연기하고 몇몇 조치를 취하시오.”
나는 이해했다. 루빔은 정당의 일원으로서 상황을 그렇게 바라본 것이었다.
“들어보시오, 루빔,” 나는 그에게 말했다. “지금의 상황 속에서, 대중혁명의 와중에, 그리고 그 모든 일이 일어난 이후에 노동 대중이 반혁명분자와 군주제주의자를 그들 자신의 회의에 보낸다면, 내 일생의 모든 작업은 심각한 실수였을 것이고, 내가 할 일은 하나뿐일 거요―내 책상 위에 보이는 권총으로 내 머리를 날려버리는 것이지.”
“우리는 진지하게 이야기해야 하고 극적으로 표현해서는 안 됩니다…” 그가 끼어들었다.
“루빔 동지, 내가 매우 진지하게 말하고 있다는 것을 분명히 말씀 드리겠소. 우리는 우리 절차에서 아무것도 바꾸지 않을 것이고, 만약 회의가 반혁명적이라면, 나는 스스로 목숨을 끊을 겁니다. 나는 그런 끔찍한 환멸을 견뎌낼 수 없소. 그리고 이제 한 가지 기본적인 사실에 주목하시오. 총회를 소집한 것은 내가 아니고, 어떻게 소집할지 결정한 것도 내가 아닙니다. 그 모든 것은 내 동지들의 일이오. 나는 아무것도 바꿀 권한이 없소.”
“네, 저도 압니다만 동지는 큰 영향력을 지니고 있습니다. 동지는 변경을 제안할 수 있습니다. 그들은 당신 말을 들을 겁니다.”
“나는 제안하고 싶지 않소, 루빔, 우리는 모두 그렇게 하는 데 동의하고 있습니다.”
대화는 끝났고, 루빔은 아무런 위로도 받지 못한 채 나를 떠났다.
1919년 10월 20일, 농민과 노동자 대표 200여 명이 회의장에 모였다. 대표단 외에도 우파 사회주의 정당―《사회주의혁명당》과 멘셰비키―과 《사회주의혁명당》 좌파를 위한 여러 공간도 마련되었다. 그들은 모두 고문 역할로 총회에 참석했다. 《사회주의혁명당》 좌파들 사이에서 나는 루빔 동지를 보았다.
특히 총회 첫날 나를 놀라게 한 것은 거의 모든 대표자가 드러내는 냉담함, 아니 오히려 불신이었다. 우리는 나중에 그들이 이 총회가 다른 많은 회의와 다르지 않을 것이라고 예상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들은 대표자들을 조종하고 미리 정해진 결의안에 투표하도록 만들 권총을 찬 사람들을 강단 위에서 보리라고 예상했던 것이다. 회의 분위기는 얼어붙었고 이를 해소하는 데 시간이 조금 걸렸다.
나는 개회 역할을 맡았고, 대표단에게 합의된 내용을 설명한 뒤 우선 집행위원회를 선출한 다음 마흐노주의자가 제안한 의제의 수정을 다뤄야 한다고 설명했다.
총회 구성원들은 내가 회의를 주재하기를 바랐다. 나는 동지들과 의논한 뒤 이에 동의했다. 그러나 나는 대표자들에게 나의 역할은 총회의 기술적인 부분, 즉 채택된 의제 논의를 진행하는 것, 발언자를 선정하고 발언권을 부여하는 것, 행사 진행을 수월하게 하는 것 등에 엄격히 제한될 것이며 대표자들은 나로 인한 압박이나 간섭에서 완전히 자유롭게 심사숙고하고 결정에 도달해야 한다고 밝혔다.
곧바로 우파 사회주의자 한 사람이 발언권을 요청했다. 그는 총회 조직자들에게 맹렬한 공격을 퍼부었다. “대표자 동지 여러분,” 그가 말했다. “우리 사회주의자들은 여러분에게 이곳에서 수치스러운 희극이 펼쳐지고 있다는 사실을 경고하는 것이 우리 의무라고 생각합니다. 저들은 여러분에게 아무것도 강요하지 않는다고 말합니다! 하지만 그들은 벌써 매우 교묘하게도 여러분에게 아나키스트 의장을 강요했고, 여러분은 계속해서 이들에게 조종당할 겁니다.”
총회의 성사를 기원하고 전선으로 향해야 하는 데 양해를 구하고자 하며 몇 분 전 도착한 마흐노는 연단에 올라 사회주의자 발언자에게 날카롭게 답변했다. 그는 대표자들에게 그들의 선출이 완전히 자유로웠다는 점을 상기시키고 사회주의자들은 부르주아지의 충실한 수호자라 비난하며 그들에게 정치적 개입으로 총회 업무를 방해하지 말라고 충고했다. “여러분은 대표자가 아니오,” 그는 끝맺었다. “그러니 총회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면 언제든 자유로이 떠날 수 있소.”
아무도 이에 반대하지 않았는데 네다섯 명의 사회주의자만이 그러한 “추방”에 거세게 항의하며 감정적으로 회의장을 떠났다. 아무도 그들이 떠난 것을 유감스러워하지 않는 듯했다. 오히려 회의장은 확신한 듯 전보다는 조금 덜 쌀쌀하게 느껴졌다.
이러한 방해 뒤 대표자 한 명이 발언을 위해 자리에서 일어났다. “동지 여러분,” 그가 말했다 “의제로 넘어가기 전에, 내가 생각하기에 아주 중요한 사전 질문을 미리 제시하고 싶습니다. 방금 이곳에서 한 단어가 언급되었습니다―부르주아지라는 말이요. 우리가 모두 부르주아지가 무엇인지 완벽하게 이해하고 거기에 모두가 공감하는 것처럼 비난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나는 이것이 큰 오류로 보입니다. 부르주아지라는 용어는 모두에게 명확하지 않습니다. 나는 이것이 매우 중요하기 때문에 작업에 착수하기 전에 그것이 정확히 무엇을 의미하는지 인식하는 편이 유용하리라 생각합니다.”
연설자의 말솜씨가 유려함에도(나는 그의 소박한 농민 복장에도 불구하고 그가 진짜 농민이 아니라고 느꼈다) 그의 연설의 요지는 우리 사이에 부르주아지의 옹호자가 있다는 것과 그의 의도가 총회를 떠봐서 가능하면 대표자들의 사기를 약화하는 것임을 분명히 보여주었다. 그는 분명 상당한 수의 대표자들로부터―의식적이든 속아 넘어가서든―지지를 받을 것으로 기대하고 있었다. 그가 성공했더라면, 총회는 말도 안 되는 혼란에 빠질 위험에 처했을 것이고, 작업은 심각하게 동요되었을지도 모른다.
긴장감이 감돌았다. 내가 방금 총회에 설명했듯―내게는 내 의견을 강요하고 대표자의 유감스러운 제안을 간단한 장치로 제거할 권리가 없었다. 그 문제를 완전한 자유 아래 결정하는 것은 총회에, 다른 대표자들에 달려 있었다. 그들이 무엇을 생각하는지 아직 분명하지 않았다. 그들 모두는 누구인지 알 수 없는 사람들, 그리고 분명 총회를 무척 불신하는 알 수 없는 사람들이었다. 나는 사건이 그대로 흘러가게 두기로 결심하고 무슨 일이 일어날지 자문했다. 그러자 루빔의 걱정이 떠올랐다.
이 모든 생각이 머릿속을 빠르게 스쳐 지나가는 동안, 대표자는 연설을 마치고 자리에 앉았다. 순간 나는 모인 이들이 어리둥절하고 있는 것을 똑똑히 보았다. 그러다 아주 갑작스럽게, 마치 미리 준비라도 한 것처럼 회의장 곳곳에서 대표자들이 외치기 시작했다.
“이봐, 이 대표자는 어디서 날아온 작자요? 어디서 왔소? 누가 저 사람을 보냈지? 지금까지 일어난 모든 일을 겪고도 부르주아지가 무엇인지 모른다면, 그를 이곳으로 보낸 자들은 이상한 선택을 했군! 애늙은이, 말해보게, 부르주아지가 무언지 아직 모르나? 머리가 둔한가 보군. 집에 가서 알아보거나 입 다물고 우리를 바보 취급하지 마시오.”
“우리는 의견이 갈려 시간 낭비하는 것 말고도 다른 할 일이 있소,” 다른 대표자들이 외쳤다. “지역 전체에 해결해야 할 중요한 문제들이 있소. 그리고 한 시간 넘게 우리는 작업에 착수하는 대신 빈둥거리고 있었지. 사보타주처럼 보이기 시작했소. 어서 작업에 착수합시다.”
“그래, 그래, 바보짓은 그만하고, 일을 합시다.” 사방에서 고함이 들려왔다.
친 부르주아 대표자는 아무 말 없이 듣기만 했다. 그는 실수를 저지른 것이었다. 그는 약 일주일 동안 계속된 남은 총회 내내 완전히 침묵했고, 다른 대표자들로부터 고립되어 있었다.
대표자들이 이렇게 유감스러운 동료를 질책하는 사이 나는 루빔을 바라보았다. 그는 놀라고 기뻐하는 듯 했다. 그러나 루빔이 연단에 올랐을 때 아직 폭풍이 잦아들지 않아 소동이 계속되고 있었다.
“동지 여러분,” 그가 시작했다. “끼어들어서 죄송합니다. 잠시면 됩니다. 《사회주의혁명당》 좌파 지역위원회의 이름으로 말하겠습니다. 이번에는 정말 중요한 질문입니다. 우리 의장이 밝힌 바에 따르면, 그는 사실상 총회를 주재하고 싶어 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여러분은 그가 실제로 총회 의장의 실질적 기능을 수행하고 있지 않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동지들, 우리 《사회주의혁명당》 좌파는 이것이 매우 나쁘고 해로울 것을 염려합니다. 이는 여러분의 총회가 머리 없이, 방향도 없이 일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동지들, 머리 없는 생물을 본 적 있습니까? 아니오, 동지들, 그건 불가능합니다. 그것은 무질서와 혼란을 의미합니다. 우리는 이미 그에 질렸습니다. 아니, 이런 상황에서 유용하고, 유익하게, 그리고 혼란스럽지 않게 작업하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총회를 위해 여러분은 진짜 의장, 진짜 지도자가 필요합니다.”
루빔은 다소 슬프고 애원하는 어조로 혹평을 전했는데, 그의 개입은 “머리”라는 단어가 반복될 때마다 점점 더 우스꽝스럽게 들렸다. 하지만 아직 내 방식이 증명되지 않았기에 대표자들이 루빔의 생각에 동조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는 그 머리라는 작자들을 충분히 보았소,” 회의장 곳곳에서 고함이 터져 나왔다. “언제나 머리, 머리! 한 번만이라도 그것들 일해 봅시다. 우리 정말 자유로운 일을 해봅시다. 볼린 동지는 이미 기술적인 면에서 총회를 도울 것이라고 밝혔습니다. 그거면 충분하오. 우리 스스로의 규율을 지키고, 적극적으로 일하고, 눈을 똑바로 뜨는 것은 우리에게 달려 있소. 우리는 ‘일과 규율’이라는 명목으로 우리를 꼭두각시처럼 다루는 ‘머리’들을 더는 원하지 않소.”
루빔은 가만히 앉아있을 수밖에 없었다. 이것이 마지막 소동이었다. 나는 안건을 읽기 시작했고 의회는 작업을 시작했다. 아르시노프는 총회에 대해 규율이 잡혀 있고, 작업이 질서정연했으며, 대표자들을 활기차게 하는 커다란 열정, 진지하고 결연한 모습, 결정된 사안의 중요성, 그리고 성취한 업적 면에서, 이 총회는 매우 뛰어났다고 언급했는데 이는 매우 정확한 것이었다.
작업은 놀랄 정도로 신속하고 일사불란하게, 주목할 만한 만장일치와 친밀감, 열정으로 진행되었다. 셋째 날이 끝날 무렵에는 불신의 흔적이 모두 사라졌다. 대표들은 그들 활동의 자유로움과 맡은 일의 중요성에 크게 고무되었다. 그들은 거리낌 없이 총회에 헌신했다. 그들은 자신이 스스로를 위해, 그리고 자신들의 목적을 위해 일하고 있음을 확신했다.
거창한 연설도 웅대한 결의안도 없었다. 작업은 실용적이고 현실적이었다. 다소 복잡한 문제를 간단한 말로 축약해야 할 필요가 있거나 대표자들이 작업을 시작하기 전 명확한 설명을 원할 때 그들은 상세한 보고서를 요청했으며, 나 혹은 다른 적합한 동지가 설명을 제공했다. 짧은 토론 뒤 대표자들은 확실한 결과를 얻기 위한 작업을 시작했다. 우선 의제의 원칙에 동의하면, 그들은 보통 매우 사려 깊은 계획을 작성하고 수사학적인 결의안을 작성하는 대신 실용적 해결책에 도달하는 특별 위원회를 만들었다. 이런 식으로 지역 생활이나 자유의 수호에 큰 관심을 지닌 시급하고 구체적인 질문들이 위원회와 대표자들에 의해 열성적으로 가장 세세한 부분까지 논의되었다.
기술적인 부분의 의장 자격으로 세워진 나는 업무 순서를 감독하고, 완료된 각 의제의 결과를 공식화 및 발표하며, 대표자들에게 몇몇 절차적 규칙을 고려하고 채택하도록 요구하는 것 등만 하면 되었다. 가장 중요한 것은 총회가 절대적이고 진정한 자유 아래 기능했다는 것이었다. 위로부터의 영향력도, 제약적인 요소도 느껴지지 않았다.
진정 노동 대중의 이익을 위해 기능하는 자유 소비에트라는 개념, 노동 생산물의 상호교환에 기초한 농민과 도시 노동자 간 직접적인 관계 문제, 도시 및 농촌에서의 자유의지주의적이고 평등주의적인 사회 조직의 출범. 이 모든 의제는 적합한 동지들의 지원과 협력으로 대표자들에 의해 진지하고 면밀히 검토되었다.
무엇보다도 총회는 혁명반란군의 조직 및 증원에 관한 수많은 문제를 해결했다. 48세까지의 모든 남성 인구가 이 군대에서 복무하기로 정해졌다. 총회의 기조와 마찬가지로 이 입대는 자발적이나 이 지역이 깨닫고 있는 극히 위험하고 불안정한 상황을 볼 때 가능한 전반적이고 많은 수가 그리할 것이었다.
총회는 또한 군대에의 보급이 전리품 및 특권층으로부터 수용한 것들 이외에도 농민의 선물에 의해 주로 이루어질 것이라 결정했다. 이 선물의 크기는 각 가족의 규모에 따라 신중하게 정해질 것이었다.
순전히 “정치적인” 질문들에 대해 총회는 결정하기를, 노동자들이 위로부터 어떠한 간섭도 없이, 자신들만의 경제적, 정치적, 행정적 삶을 자신들만의 수단과 연방적 원칙에 따라 연합된 직접기관을 통해 조직하기로 했다. 아르시노프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농부들은, 그들 가운데는 나이 든 이, 심지어 더 나이 든 이도 있었는데 그들은 이것이 완전히 자유롭고 스스로 주인일 뿐만 아니라 참된 형제애를 느끼는 첫 회의이며 결코 그것을 잊을 수 없으리라고 말했다. 그리고 실제로 총회에 참가한 사람들은 그것을 잊을 수 없을 것처럼 보였다. 모두는 아니더라도 많은 이들에게 이 총회는 진정한 자유가 사람들에게 사랑과 형재애의 마음으로 함께 단결된 삶을 살 수 있는 기회를 주는 삶에의 아름다운 꿈으로 그들 기억 속에 영원히 새겨졌다.
그리고 그들이 떠날 때 농민들은 총회의 결정을 실천할 필요성을 강조했다. 대표자들은 결의안을 농촌 전역에 알리기 위해 복사본을 지참했다. 서너 주 안에 총회 결과가 전역에 알려질 것이었고, 농민과 노동자 스스로의 주도권으로 소집할 다음 총회는 막대한 노동 대중의 관심과 적극적 참여를 분명 끌어낼 것이었다.
불행하게도, 노동 대중의 진정한 자유는 그 최악의 적인 권력에 의해 계속해서 파괴되고 있다. 데니킨의 군대는 대표단에게 집으로 돌아갈 여유도 주지 않고 북부 전선에서 강행군해 많은 마을을 다시 차지했다. 확실히 이번 침략은 짧은 기간에 불과했다. 이는 죽음을 목전에 둔 적들의 신음과도 같았다. 하지만 이는 가장 중요한 순간 농민들의 건설적인 작업을 중단시켰고, 대중을 위한 자유로운 사상에 똑같이 적대적인 또 다른 권위(볼셰비즘)가 북쪽으로부터 접근하고 있었기에 노동자의 대의에 회복 불가능한 해를 입혔다. 또한 볼셰비즘이라는 대중의 자유 사상에 똑같이 적대적인 또 다른 권위주의 세력이 북쪽에서 접근하고 있었기 때문에, 데니킨의 침략은 노동자들의 대의에 돌이킬 수 없는 해를 끼쳤다. 새로운 총회를 소집하는 것이 불가능했을 뿐만 아니라, 첫 총회에서의 결의안조차 시행에 옮길 수 없었다.”(전게서, pp.242~244)
총회의 마지막 국면을 장식한 몇몇 사건들을 묵과할 수 없다. 총회가 막바지에 이르러 내가 전형적인 “일반안건”을 다루기 시작했을 때, 몇몇 대표자가 총회의 완전한 독립성과 그것이 불러일으킨 열의, 그리고 그것이 작업 과정에서 행사한 도덕적 영향을 또 다르게 증명하는 섬세한 임무를 수행했다.
“동지들,” 이때 연단에 올라선 한 대표자가 말했다. “우리 작업을 마치고 해산하기 전에, 우리가 생각하기에 구성원들이 주목해야 할 고통스럽고 유감스러운 사실들을 몇몇 대표들이 총회에 알리고자 결정했습니다. 많은 혁명반란군 부상병들이 의약품, 의료 지원 등의 부족으로 매우 열악한 처우를 놓여 있다는 사실이 우리의 귀에 들어왔습니다. 이를 확인하기 위해 우리는 이 부상병들이 이송된 병원과 시설을 방문했습니다. 동지들, 우리가 본 것은 매우 슬픈 광경이었습니다. 아프고 상처 입은 이들은 모든 의료적 돌봄을 받지 못할 뿐만 아니라 인간적인 잠자리나 먹거리도 제공되지 못하고 있습니다. 대부분이 깔 것, 베개, 이불 없이, 심지어 땅바닥에서 구시대적으로 자고 있습니다. 딱딱한 땅바닥을 조금이라도 부드럽게 해줄 지푸라기조차 시내에는 없어 보입니다. 이 불쌍한 이들 중 많은 사람이 돌봄이 부족해 죽고 있습니다. 아무도 그들을 돌보지 않고 있습니다. 현재 어려운 상황에서 우리 군의 참모들은 이 문제를 관리 감독할 여유가 없다는 것을 아주 잘 알고 있습니다. 마흐노 동지 역시 전선의 시급한 문제에 몰두하고 있습니다. 이 모든 것이, 동지들, 총회가 이 상황에 개입해야 하는 이유입니다. 이 아프고 다친 이들은 우리의 동지, 형제, 아들들입니다. 그들은 우리 모두의 대의로 인해 고통받고 있습니다. 나는 약간의 호의만 있어도, 적어도 그들의 고통을 덜어줄 지푸라기라도 찾을 수 있으리라 확신합니다. 동지들, 나는 총회에 즉시 이 문제에 대해 적극적으로 관심을 쏟을 위원회를 지명하고 이 돌봄을 조직하기 위해 모든 힘을 다하기를 제안합니다. 또한 도시의 모든 의사, 약사와 연락을 취해 지원과 조력을 요청해야 합니다.”
이 제안은 총회에서 채택되었을 뿐만 아니라 열다섯 명의 대표자가 자원해 이 문제를 처리하기 위한 위원회를 구성했다. 처음에는 엉터리 회의를 마치고 하루 이틀 만에 귀가할 것으로 예상했던 이들 대표자는 곤경에 처한 동지들을 돕기 위해 자신들의 이익을 희생하고 귀가를 미루는 데 주저하지 않았다. 그들은 알렉산드로프스크에 며칠을 더 머물러 성공적으로 임무를 완수했다. 그들은 지푸라기를 찾아냈고, 임시 의료 돌봄을 조직했다.
이 문제가 빠르게 해결된 후 다른 대표자가 발언권을 요청했다. “동지들,” 그가 발언했다. “똑같이 심각한 다른 문제에 대해서도 이야기하고 싶습니다. 우리는 시민들과 혁명반란군 사이 어느 정도 마찰이 발생했다는 사실을 접했습니다. 특히 혁명반란군에 볼셰비키의 체카만큼이나 심각한, 자의적이고 통제되지 않은 행동을 수행하는 대對간첩 기관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보고 받았습니다. 수색, 체포, 심지어 고문과 처형까지도 보고되었습니다. 이러한 소문이 사실인지는 모르겠으나, 우리가 접하게 된 몇몇 항의 내용은 확실히 심각해 보였습니다. 이는 심각한 편견을 야기하고 심지어 우리의 모든 대의를 위태롭게 할 것이 분명합니다. 우리는 순수하게 군사적인 문제에는 간섭하고 싶지 않지만, 만약 그것이 실제로 존재한다면, 악용과 도를 넘은 행위에 대항할 의무가 있는데, 사람들이 우리 운동에 등 돌리게 할 것이기 때문이고, 대중의 신뢰와 전반적인 호평을 받고 있기에 총회는 이 점에 대해 기본적인 조사를 진행하고, 진실을 밝히고, 필요한 부분에 대한 조치를 취하고, 사람들을 안심시킬 의무가 있습니다. 총회는 노동자 생활의 관심사에서 비롯하고, 현재 이 지역의 최고 기관입니다. 이는 무엇보다 총회가 노동자 스스로를 대표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나는 즉시 이 이야기들을 조사하고, 그 결과에 대응해 행동할 위원회를 꾸릴 것을 제안합니다.”
즉시 이 목적을 위해 여러 대표자가 위임된 위원회가 구성되었다. 볼셰비키 정권 아래서는 노동자 대표자들의 이러한 주도는 불가능했을 것이다. 이런 종류의 활동으로 총회는 진보와 자아실현에 대한 열망에 기반한 사회가 처음부터 기능할 방법에 대해 엿볼 수 있었다.
우리는 뒤이은 사건들 때문에 이 위원회가 임무를 끝까지 완수하지 못했다는 사실을 덧붙여야겠다. 끊임없는 전투, 군대의 이동, 모든 작업을 집어삼킨 긴급한 상황이 그것을 가로막았다.
마지막 사건이 하나 남아있다. 또 다른 대표자가 자리에서 일어섰다. “동지들,” 그가 말했다. “총회가 몇몇 결함과 약점에 대응하는 행동을 취하고 있는 만큼, 또 다른 유감스러운 사건을 언급하겠습니다. 이는 그다지 중대한 사안은 아니지만, 이 사태가 유발하는 슬픈 마음 때문에 주의를 기울일 필요가 있습니다. 여러분 모두는 며칠 전 우리 도시 성벽에 붙여진 알렉산드로프스키의 지휘관 클라인 동지의 서명이 적힌 안내문을 읽었을 것입니다. 이 안내문에서 클라인 지휘관은 사람들에게 과도한 음주를 삼가고, 특히 술에 취해 길에 나서지 말 것을 당부했습니다. 이는 모두 올바르고 좋습니다. 안내문은 전혀 모욕적이거나 과하지 않고, 무례하거나 권위적이지도 않으며, 이에 대해선 클라인 동지를 자랑스러워할 수 있을 뿐입니다. 다만 동지 여러분, 그저께까지만 해도 이곳에서는 대중적인 저녁 연회가 음악, 춤, 그리고 다른 오락거리들과 함께 총회가 앉아있는 바로 이 건물에서 열렸습니다. 혁명반군뿐만 아니라 시민들도 거기 참석했습니다. 나는 이것이 전혀 비난받을 만한 점이 없다고 서둘러 밝힙니다. 젊은이들은 즐거워했지만 침착했습니다. 이는 전적으로 인간적이고 자연스러운 것이었습니다. 물론 이 연회에는 술도 많이 있었습니다. 많은 혁명반군과 시민들이 술에 진탕 취했습니다. 통로에 쌓인 빈 병의 개수만 봐도 직접 확인할 수 있습니다. (웃음소리) 잠시만요, 동지들, 내 발언의 주된 목적은 그게 아닙니다. 기분이 좋은 사람은 술을 마시고, 술을 마신 사람은 술에 취합니다. 그건 나쁠 게 없습니다. 하지만 더 심각한 것은 돼지처럼 술에 취한 사람들 가운데 한 명이 우리 클라인 동지, 군대 지휘관 가운데 한 명이자 도시의 군사령관이며 과도한 음주에 반대하는 훌륭한 안내문의 서명자였다는 사실입니다! 동지들, 그는 어찌나 취했는지 걷지도 못했고 마차에 실려 이른 아침에야 집에 돌아가야 했습니다. 그리고 가는 길에 그는 욕설을 퍼붓는 등 추잡하게 행동했습니다. 그래서 동지 여러분, 의문이 생깁니다. 클라인 동지는 자신이 다른 도시민들 위에 있고 직접 설교한 올바른 행동을 따르지 않아도 된다 생각하는 걸까요? 오히려 그가 먼저 모범을 보여야 하지 않습니까? 내가 보기에 그는 너무나 심각한 잘못을 저질렀기에 무시해서는 안 될 것 같습니다.”
클라인의 행동은 정말로 해로운 것이 아니었고, 대표자들은 그 소동을 희극적인 것으로 여겼지만 이는 그들 사이에 어느 정도 감정을 불러일으켰다. 클라인을 향한 불만은 전반적이었는데, 그의 행동은 자신을 “대중”보다 높다고 여기고 자신이 무엇이든 할 수 있는 “대장”이라고 생각하는 잘못된 마음에서 나온 것일 수도 있기 때문이었다.
“클라인을 당장 소환해야 합니다!” 누군가 제안했다. “총회 앞에 와 해명하게 하시오!” 곧바로 서너 명의 대표자들이 클라인을 데려오는 임무를 맡고 파견되었다. 30분 뒤, 대표자들이 그와 함께 돌아왔다.
나는 그가 어떤 태도를 보일지 궁금했다. 클라인은 혁명반란군의 가장 뛰어난 지휘관 중 한 명이었다. 젊고, 용감하고, 매우 활기 넘치고, 전투적인―체격이 좋고, 거친 외모와 호전적인 습관의 소유자인―그는 언제나 전투의 심장부로 뛰어들었고, 아무것도, 그 누구도 두려워하지 않았다. 그는 여러 차례 부상을 입었다. 동료와 일반 병사들 모두에게 인기 있는 그는 볼셰비키를 내던지고 마흐노에게 여러 적군 연대를 가져온 장본인이었다. 내 기억이 틀리지 않다면 그는 독일계 농민 가족의 아들로 거칠고 투박한 사람이었다.
그는 어떤 상황이라도 동료들, 즉 다른 지휘관들과 마흐노의 적극적인 지지와 보호를 받으리라는 점을 알고 있었다. 그는 노동자로 이루어진 총회가 자신보다, 군대와 마흐노보다 위에 있다는 것을 깨달을 만큼의 충분한 지식을 지니고 있을까? 그는 노동자와 그들의 총회가 주인이라는 것을, 군대와 마흐노 등은 단지 대의의 종복에 불과하며, 노동자와 그들 기관에 늘 책임이 있다는 것을 이해할 것인가? 총회가 임무로 복귀하기를 기다리는 동안 그러한 질문들이 나를 사로잡았다.
이러한 개념은 전혀 새로운 것이었다. 볼셰비키들은 대중의 정신으로부터 그것을 말살하기 위해 모든 것을 다 했었다. 예컨대 노동자 총회가 정치위원이나 적군 지휘관을 소환해 명령을 내린다면 이는 볼만한 구경이 될 것이다! 물론 이는 절대 상상할 수 없는 것이다. 하지만 어떻게든 노동자 총회가 감히 그것을 할 수 있다고 가정하더라도, 소환된 정치위원이나 지휘관은 단상 위에서 무기를 빙빙 가지고 놀며 자화자찬을 늘어놓고 소리쳤을 것이다. “순전히 노동자 모임밖에 되지 않은 당신들이 공훈, 상처, 최고 표창을 받은 정치위원, 실질적인 지도자를 감히 소환한다고? 당신들은 그럴 자격이 없소! 나는 오직 내 상관에게만 책임이 있소. 내게 따질 것이 있다면 내 상관에게나 전하든가 하시오.”
클라인도 비슷한 말을 내뱉고 싶은 유혹에 휩싸이지 않을까? 그가 전혀 다른 상황, 전혀 다른 심리적 태도를 진정 이해할 수 있을까?
잘 차려입은 제복과 무장의 클라인이 단상에 올랐다. 그는 다소 놀란 기색이 역력했고, 나는 그가 불안해하는 듯 보였다.
“클라인 동지,” 질의를 맡은 대표자가 물었다. “당신이 우리 도시의 군사령관입니까?”
“그렇습니다.”
“공공장소에서 음주를 삼가라는 안내문을 작성해 부착한 사람이 당신입니까?” “그렇습니다, 동지, 내가 그랬습니다.”
“말해보시오, 클라인 동지, 우리 도시의 시민이자 사령관으로서, 당신은 도덕적으로 스스로의 권고에 복종할 의무가 있다고 생각합니까, 아니면 스스로는 이 안내문에 포함되지 않거나 그 위에 있다고 생각합니까?”
눈에 띄게 긴장하고 당황한 클라인은 단상 가장자리로 몇 걸음 걸어가 불안한 목소리지만 진심을 담아 말했다.
“동지들, 내 잘못입니다. 알고 있습니다. 나는 지난밤 수치스럽게 만취해 실수를 저질렀습니다. 하지만 내 이야기를 조금 듣고 이해하려 노력해 주십시오. 나는 투사, 전선에 서는 사람, 군인입니다. 나는 관료가 아닙니다. 내 항의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왜 나를 이 도시의 사령관 자리에 앉혔는지 모르겠습니다. 사령관으로서 나는 온종일 책상 앞에 앉아 서류에 서명하는 것 말고는 할 일이 없습니다. 이건 내가 할 일이 아닙니다! 내게는 활동, 트인 하늘, 전선, 전우가 필요합니다. 나는 이곳에서 좀이 쑤셔 죽을 것만 같습니다. 그래서 지난밤 만취했습니다. 동지들, 나는 내 실수를 만회하고 싶습니다. 그러려면 나를 전선으로 돌려보내 주기만 하면 됩니다. 거기서, 나는 진정 봉사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여기, 이 저주받은 사령관 자리에서는 아무것도 약속할 수 없습니다. 내 자리를 대신할 다른 사람을 찾게 해주십시오, 이 일을 할 수 있는 사람을 말입니다. 동지들, 나를 용서하고 전선으로 보내주십시오.”
대표자들은 그에게 잠시 나가 있으라고 요청했다. 그는 순순히 따랐다. 그들은 그의 사건을 심의했다. 그의 행동이 허영심 많고 위압적인 지도자의 사고방식 때문이 아니라는 것은 분명했다. 그것이 그들이 알고 싶어 했던 전부였다. 의회는 그의 성실함과 이유를 명확히 인식했다. 그들은 그를 다시 불러와 그의 설명을 고려해 그에게 실수의 책임을 묻지 않을 것이며 그를 전선으로 돌려보내는 데 필요한 일들을 할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대표자들에게 감사를 표하고 왔던 때처럼 훌쩍 떠났다. 대표자들은 그들의 말을 지켰고, 며칠 뒤 클라인은 전선으로 복귀했다.
일부 독자들에게는 이러한 사건들이 사소하고 중요하지 않은 것처럼 보일 수 있으며, 이렇게 많은 장을 차지할 가치가 없어 보일 수도 있다. 나는 혁명적 관점에서 볼 때 이 사건들이 혁명 이전, 혁명 과정, 혁명 이후를 통틀어 레닌, 트로츠키, 스탈린의 모든 연설보다도 무한히 더 중요하고, 시사하는 바가 크고, 유용하다고 감히 말하겠다.
그리고 나는 총회 바깥에서 일어난 한 가지 작은―개인적인 것―이야기를 덧붙이고 싶다. 나는 떠나려던 찰나, 환하게 웃고 있던 루빔을 만났다. “당신은 내가 어째서 이렇게 기쁜지 상상도 못 할 겁니다.” 그가 말했다. “총회 때 내가 얼마나 바빴는지 보셨을 겁니다. 내가 무얼 했는지 아십니까? 나는 정찰부대와 특수부대 편성에 몰두했습니다. 바로 이 문제가 의제로 올라왔었지요. 이틀 동안 나는 이를 연구하고 실용적인 해결책 발굴을 담당한 대표자들의 위원회와 함께 일했습니다. 나는 그들에게 많은 도움을 주었습니다. 그들은 내게 고마워했지요. 나는 물론 이롭고 필요한 작업을 했지요. 나는 이것이 대의에 도움이 되리라는 것을 알고, 매우 만족스럽습니다.”
“루빔,” 내가 그에게 말했다. “내게 솔직히 말해보시오. 이 이롭고 필요한 작업을 하는 동안, 당신의 정치적 역할에 대해서 단 한 순간이라도 생각했습니까? 정당의 일원으로서의 지위를 생각했습니까? 당신의 당에 대한 책임을 다하는 일에 대해 생각했습니까? 당신의 이로운 작업이란 사실 구체적이고 정확한 비정치적 작업, 협력과 협조였지 ‘머리’로서의 행동이나 ‘자신의 의견을 강요하는 정부적 방향’이 아니지 않았습니까?”
루빔은 생각에 잠긴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총회는 훌륭했고 성공적이었습니다. 나는 인정합니다,” 그가 말했다.
“맞습니다, 루빔,” 나는 결론지었다. “잘 떠올려 보십시오. 당신은 정치적인 활동에서 벗어난 순간 정말로 제 역할을 잘 해냈습니다! 그리고 아주 단순히, 작업에 대해서 잘 아는 동지로서 동료들을 도왔습니다. 그것이 바로 총회 성공 비결의 전부라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이것이 혁명 성공 비결의 전부이기도 합니다. 모든 혁명은 지역단위에서뿐만 아니라 더 큰 범주에서도 이렇게 작동해야 합니다. 혁명가와 대중이 그것을 깨우친다면 혁명의 참된 승리가 보장될 겁니다.”
나는 루빔을 두 번 다시 보지 못했다. 나는 그가 어떻게 되었는지 모른다. 만일 그가 살아있다면 오늘날 어떻게 생각할지 모르겠다. 하지만 이 글이 그의 눈에 들어가 그가 기억할 수 있기를 바란다.
* * *
알렉산드로프스크 총회를 마치고 며칠 뒤, 마흐노주의자는 끝내 예카테리노슬라프를 점령했다. 하지만 그곳에서 그들은 그 어떠한 긍정적인 것도 조직할 수―심지어 시도할 수도―없었다. 도시에서 밀려난 데니킨의 부대는 드니프로 왼쪽 강둑에 간신히 진을 칠 수 있었다. 노력에도 불구하고 마흐노주의자들은 그들을 제거할 수 없었다. 데니킨주의자들은 한 달 내내, 하루도 빠짐없이 보유한 여러 장갑열차의 대포로 도시에 폭격을 가했다. 혁명반란군의 문화위원회가 도시 노동자 회의를 소집할 때마다 이를 솜씨 좋게 접한 데니킨주의자들은 특히 회의가 열릴 예정지에 많은 포탄을 발사했다. 진지한 작업도, 체계적인 조직도 불가능했다. 교외에서만 겨우 몇 번의 회의를 열 수 있을 뿐이었다.
“예카테리노슬라프의 주인이었으나 그 도시의 생활에 대한 건설적 조직을 달성하기 위해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는 것은 마흐노주의자를 지적할 때 볼셰비키가 가장 애용하는 주장 중 하나다. 이렇게 말하며 볼셰비키는 대중에게 두 가지 중요한 상황을 은폐한다. 우선 마흐노주의자는 단 한 번도 정당이나 당국의 대리인이었던 적이 없었다. 예카테리노슬라프에서 마흐노주의자는 혁명적 군사 부대로서 도시의 자유를 수호했다. 이 기능으로 미루어볼 때 혁명을 위한 건설적 계획을 시도하고 달성하는 것은 전혀 그들의 몫이 아니었다. 이 일은 오직 그 지역 노동자들에 의해서만 수행될 수 있는 것이었다. 마흐노주의 군대는 기껏해야 그들의 창의적 정신과 조직 면에서 그들의 의견과 조언을 최대한 많이 제시하는 수밖에 없었다. 특히 볼셰비키는 당시 도시가 처했던 예외적 상황에 대해서는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 마흐노주의자가 그곳에 머물던 기간 내내 도시는 포위상태였을 뿐만 아니라 실제로 폭격을 받고 있었다. 포탄이 떨어지지 않는 때가 한순간도 없었다. 노동자가 자유로운 행동의 원칙에 따라 삶을 조직하기 위해 착수하는 것을 막은 것은 마흐노주의 군대가 아니라 이러한 상황이었다.
마흐노주의자가 그들을 도우러 온 철도 노동자들에게, 그들에게는 평원과 자신들의 말로도 충분하다며 철도가 필요 없다고 했다는 헛소문이 있는데, 이 역겨운 창작물은 1919년 10월, 데니킨 신문에서부터 시작되었고, 그 출처로부터 볼셰비키는 그들의 목적을 이루기 위해 그것을 취했다.”(표트르 아르시노프, 전게서, p.246)
이 헛소문은 노동자에게 마흐노주의 운동을 더럽게 보이게 할 목적으로 볼셰비키가 퍼뜨린 다른 신화와 중상모략에 더해졌다.
11월 말, 러시아 전역에 퍼지고 있던 무서운 전염병이 반란군을 덮쳤다. 적어도 절반이 병을 앓았으며 사망률이 높았다. 이것이 볼셰비키의 추격을 피해 크림반도로 퇴각 중이던 데니킨 주력군의 공격을 받았을 때 마흐노주의자가 예카테리노슬라프를 포기할 수밖에 없었던 주된 이유다.
예카테리노슬라프를 떠난 반란군은 멜리토폴, 니코폴 및 알렉산드로프스크 사이 지역에서 부대를 재정비했다. 알렉산드로프스크에서 마흐노주의 참모진은 1919년 12월 말, 데니킨을 추격하고 있던 몇몇 적군 사단 사령부에 따라잡혔다. 마흐노주의자는 이미 이렇게 되리라는 것을 예상한 지 조금 된 시점이었고 새로운 상황에서 충돌이 아닌 형제애적인 만남을 전망하고 있었기에 아무런 예비 조치도 취하지 않았다.
회의는 이전에 있던 여러 회의와 똑같았다. 겉으로 보기에는 우호적인, 심지어 진심 어린 것처럼 보였지만 이는 폭풍우와 불시의 사건을 숨기고 있었고―우리는 이것이 터져 나오기를 기다렸다. 의심의 여지 없이 볼셰비키는 그들을 떠난 여러 적군 연대를 취한 마흐노주의 군대로부터 그들에게 가해진 타격을 원한과 앙심으로 기억했다. 한 치도 의심할 바 없이 그들은 자유 군대나 그들의 권위를 인정하지 않는 거대한 영토의 독립운동이라는 존재를 더 이상 용인할 수 없었다. 머지않아 충돌이 불가피했고 볼셰비키가 첫 번째 기회에 공격을 망설이지 않을 것이 분명했다. 마흐노주의자는 이 상황을 어느 정도 인지하고 있었고, 모든 차이점을 평화롭고 형제애적으로 조화할 준비가 되어 있었으나 불신을 느끼지 않을 수는 없었다.
하지만 양군의 병사들은 형제애로 서로 인사를 나누었고, 투사들은 악수하며 공동의 적―자본주의나 반혁명에 맞서 싸우겠노라 선언하는 회의를 개최했다. 일부 적군 부대는 심지어 마흐노주의 대열에 합류하고자 하는 바람을 나타내기도 했다.
여드레 뒤 폭풍이 몰아쳤다. “혁명반란군 사령관”―마흐노―은 적군 제14군단 혁명 군사평의회로부터 반란군을 폴란드 전선으로 이동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모두가 이것이 마흐노주의자에 대한 새로운 공격의 첫걸음이라는 것을 곧바로 알아차렸다. 폴란드 전선으로 이동하라는 명령은 여러 이유로 그 자체로 터무니없었다. 애초에 반란군은 제14군단에도, 적군의 다른 어떤 부대 휘하에도 있지 않았다. 적군 사령관은 홀로 데니킨과 맞서 싸운 반란군에 명령을 내릴 권한이 없었다. 더구나 이 이동 명령이 형제애적인 고찰이었다 해도 절반이나 되는 병사, 거의 모든 지휘관과 참모, 그리고 마흐노마저도 아팠기에 이를 수행하는 것은 실질적으로 불가능했다. 마지막으로 반란군의 전투적 자질과 혁명적 유효성은 낯선 지형 및 지역 주민들에게 알려지지 않은 이 군대가 이해할 수 없는 목표를 위해 싸워야만 하는 폴란드 전선보다 그들의 땅인 우크라이나에서 더 컸다. 마흐노주의자는 이러한 주장들로 적군 사령관의 명령을 수행하기를 단호히 거절했다.
하지만 양측 모두 그 제안과 답변이 전부 순수한 외교적 수사에 지나지 않다는 것을 완벽하게 이해하고 있었다. 모두가 진짜 일어나고 있는 일이 무엇인지 알고 있었다. 반란군을 폴란드 전선으로 보내는 것은 우크라이나 혁명운동의 주요 신경중추를 차단함을 의미했다. 그것이 볼셰비키가 바라던 것이었다. 그들은 지역의 완전한 주인이 되고자 했다. 만약 반란군이 이를 승낙한다면 그들은 목표를 달성할 것이었다. 반대할 경우를 대비해서는 그들이 바라는 결과를 달성하기 위한 추진력을 준비했다. 마흐노주의자는 이를 알고 있었고 타격을 막기 위해 준비했다.
마흐노주의자의 거절에 대한 반응까지는 오래 걸리지 않았다. 하지만 반란군이 먼저 행동을 취하여 당장의 유혈사태를 면했다. 그들은 적군 사령부에 답변을 보냄과 동시에 적군 병사들에게 그들 지도자의 자극적인 도발에 속지 말 것을 호소했다. 그런 다음 그들은 진영을 해체하고 백군이 막 물러나 어떤 권력도 지배하고 있지 않던 훌랴이폴레로 향했다. 그들은 무사히 도착했고, 적군은 한동안 그들의 움직임을 저지하지 않았다. 오직 후방에 남아있던 소수의 중요하지 않은 부대 및 고립된 개인들만이 볼셰비키에 포로로 붙잡혔다. 그러나 2주 뒤인 1920년 1월 중순, 볼셰비키는 마흐노와 그 군대의 구성원들이 폴란드 전선으로 향하는 것을 거부했다며 범죄자라고 선언했다.
연극의 세 번째 막이 올랐다. 이는 아홉 달 동안 지속된 마흐노주의자와 공산주의 당국 간의 격렬한 투쟁이었다. 우리는 세부 내용에 대해 다루지는 않고 양측 모두에게 무자비한 투쟁이었다고 언급하는 데 그치겠다. 볼셰비키 지휘관은 적군 병사와 마흐노주의자 사이에 생겨날지도 모르는 형제애 형성을 막기 위해 레트인(Lett인. 발트 해 연안에 살던 이들을 의미한다-역자 주) 저격수와 몇몇 중국인 부대, 즉 러시아혁명의 진정한 의미에 대해 조금도 생각하지 않고 맹목적으로 지도자들의 명령에 복종하는 데 만족한 이들을 파견했다. 볼셰비키 측은 믿기 힘든 속임수와 만행으로 투쟁을 진행했다.
적군 부대가 열 배는 더 많았기에 마흐노와 그의 분대는 매우 능숙하게, 그리고 대중의 도움으로 끊임없이 그들의 손이 닿지 않는 곳에 머물렀다. 동시에 볼셰비키 최고 사령부는 의도적으로 반란군과의 공개적인 싸움을 피했다. 그들은 다른 방식의 전쟁을 선호했다. 수없는 정찰을 통해 적군은 마흐노주의 분대가 미약하거나 존재하지 않는 마을과 지역을 발견했다. 그런 뒤 그들은 이 방어력이 없는 군락들을 공격해 거의 전투 없이 점령했다. 그렇게 하여 볼셰비키는 여러 곳에서 확고히 자리매김할 수 있었는데, 그렇게 그 지역들의 자유로운 발전을 막을 수 있었다.
자리 잡은 모든 지역에서 그들은 혁명반란군이 아닌 농민 대중에 대한 전쟁을 일으켰다. 집단 체포와 처형이 곧 시작되었고, 데니킨주의자의 탄압은 볼셰비키의 탄압에 비하면 별것도 아니게 되었다. 반란군과의 싸움에 대해 당시 공산주의 언론은 패주하거나, 체포하거나, 사살한 마흐노주의자의 숫자를 보도했다. 하지만 이렇게 보도된 숫자는 반란군 병사가 아니라 단순히 마흐노주의자에 우호적이거나 그렇다고 규정된 마을 사람들이었다는 데에 대한 언급은 늘 묵과했다. 적군이 어느 마을에 도착했다는 것은 후에 수많은 농민이 즉각 체포된다는 것을 의미했고, 그 대부분은 마흐노주의 반란군이나 “인질”로서 총살당했다. 훌랴이폴레 마을은 이쪽저쪽 번갈아 가며 점령당했다. 당연히 볼셰비키의 거듭된 침략으로 인해 큰 고통을 겪었고, 마을의 모든 생존자는 공산주의자들 탄압의 무서움을 알게 되었다. 가장 보수적인 추정에 따르면 당시 우크라이나에서 소비에트 당국에 의해 2만 명 이상의 농민과 노동자가 총살되거나 중상을 입었다. 비슷한 정도의 많은 이는 시베리아나 다른 곳으로 투옥되거나 추방되었다.
아파서 종종 의식을 잃기도 했던 마흐노는 그를 찾던 적의 손에서 몇 번이나 간신히 빠져나갔다. 그는 시간을 벌기 위해 때로 자신을 희생하는 농민들의 숭고한 헌신에 자신의 안전―치료까지도―을 빚지고 있었다.
당연히 마흐노주의자는 그런 무지막지한 혁명의 왜곡에 무관심한 채 있을 수 없었다. 그들은 볼셰비키의 테러에 대해 그에 못지않게 강하게 대응했는데, 그동안 헤트만 스코로파즈키와의 투쟁에서 사용한 모든 게릴라 전술을 적에게 퍼부었다. 적군 병사들이 강제로 전투에 파견되었다는 것을 알고 있던 그들은 적군 포로를 붙잡았을 때 무장 해제한 다음 풀어주었다. 그들과 합류하기를 원하는 병사들은 형제애로 맞아들였다. 하지만 수장들, 공산당의 정치위원과 대표자들의 경우 어떠한 정당한 이유로 일반 병사들이 그들을 살려야 한다고 요구하지 않는 한 대개 칼로 베었다. 모든 마흐노주의자는, 그들이 누구든 볼셰비키 손에 넘어간다면 항상 그 자리에서 총살당했다는 것을 우리는 잊지 말아야 한다.
소비에트 당국과 그 앞잡이들은 종종 마흐노주의자를 신념이나 법률이 없는 도적처럼, 동정심 없는 흔한 암살자로 묘사했다. 그들은 이 “범죄자”들 손에 죽임을 당한 적군 병사와 공산당 당원의 긴 명부를 펴냈다. 하지만 그들은 이 희생자들이 공산주의자 자신이 시작하거나 도발한 전투 중에 쓰러졌다는 본질적인 사실에 대해서는 항상 침묵을 지켰다.
볼셰비키 정부의 가장 큰 골칫거리는 중 하나는 마흐노가 살아 있지만 붙잡을 수 없다는 것을 아는 것이었다. 그들은 마흐노를 제거하는 것이 운동의 청산과 같을 것이라 확신했다. 따라서 1920년 여름 내내 그들은 마흐노 암살을 끊임없이 조장했는데, 그 중 어느 것도 성공하지 못했다.
“1920년 내내, 심지어 그 이후에도,” 아르시노프는 말한다. “소비에트 당국은 마흐노주의자에 맞서 도적들과 싸우는 척하며 전투를 계속했다. 그들은 이러한 러시아 내외의 중상모략을 유지하기 위해 언론과 선전 수단을 모두 동원해 전국을 설득하려 격렬한 선동을 벌였다.
동시에 수많은 저격수 및 기병 사단이 이 운동을 파괴하고 반란군을 진짜 도적 떼가 되도록 내몰기 위해 파견되었다. 마흐노주의자 포로들은 무자비하게 처형당하고, 그들의 가족―아버지, 어머니, 아내, 친척들―은 고문당한 뒤 살해되었고, 재산은 약탈당하거나 몰수되었으며 집은 파괴되었다. 이 모든 것이 큰 규모로 시행되었다.
당국에 의해 매일 저질러지는 이 모든 공포에 직면해 많은 반란군에게는 그들의 엄격한 혁명적 입장을 그대로 유지하고, 격분해 도적질의 나락으로 떨어지지 않기 위해 초인적인 의지와 영웅적인 노력이 필요했다. 많은 이들은 결코 용기를 잃지 않았고, 혁명의 깃발을 내리지 않았으며, 끝까지 그들의 과업에 충실했다.
이 힘들고 고통스러운 시기에 그것을 본 이들에게 있어 이 광경은 그야말로 기적이었으며, 이들 노동 대중의 혁명에 대한 믿음이 얼마나 깊은지, 사상이 그들을 이끌었던 대의에 대한 헌신이 얼마나 강한지를 보여준다.”(전게서, pp.273~274)
1920년 여름이 끝날 무렵, 마흐노주의자는 적군뿐만 아니라 볼셰비키 체제 전체, 러시아와 우크라이나에 있던 모든 정부군에 맞서 투쟁을 계속해야 했다. 이 투쟁은 날이 갈수록 격해지고 확장되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반란군은 때때로―수적으로 너무나 우세했던 적을 피하고자―그들의 기반을 떠나 천 킬로미터 이상의 강행군을 해야만 했다. 때로는 도네츠 분지로, 때로는 하르키우와 폴타바 지역으로 후퇴해야 했다.
반란군은 이러한 비자발적 방랑을 선전 목적으로 꽤 사용했고, 하루 이틀 동안 머문 모든 마을은 마흐노주의자들의 거대한 강당이 되었다.
혁명반란군이 처한 매우 어려운 상황이 그들의 조직을 완벽하게 유지하지 못하게 했다는 점도 덧붙여야겠다. 데니킨의 패배로 반란군이 자신들의 지역으로 돌아온 후, 《혁명 총회Council of Revolutionary》(마흐노주의)가 세워졌다. 이는 군대 내 모든 부대의 대표들로 구성되었고 꽤 정기적으로 활동했다. 그것은 엄밀한 군사작전을 수반하지 않는 의제들을 다뤘다.
1920년 여름, 군대가 특히 불안정하고 고통스러운 상황에 처했을 때 이러한 기관은 너무 번잡스러웠고 만족스럽게 기능할 수 없었다. 이는 반란군이 선출하거나 비준한, 일곱 명의 위원으로 구성된 더 작은 위원회로 대체되었다. 이 위원회는 군사 업무 및 작전, 조직 및 총괄, 그리고 교육, 선전 및 문화라는 세 부문으로 나뉘어졌다.
제5부. 브란겔의 공세와 패배
이렇게 우리 희곡의 네 번째 막, 즉 브란겔의 원정을 시작한다. 전 차르주의 장교인 브란겔 남작은 데니킨을 대신해 백군 운동의 수장이 되었다. 같은 지역―크림반도, 코카서스, 돈, 그리고 쿠반 지역―에서 그는 데니킨 부대 잔당을 다시 모아 재편성하고자 했다. 그는 그에 성공했고, 여러 차례 주민들을 징병해 그의 기초 부대를 보강했다. 볼셰비키의 피해막심한 정책이 점점 더 많은 사회 구성원을 그들에게 대항하도록 만들었기에, 그는 마침내 잘 조직되고 전적으로 충성스러운 군대를 세우는 데 성공했다.
1920년 봄, 브란겔은 볼셰비키를 심각하게 괴롭히기 시작했는데, 그는 데니킨보다 더 교묘하고 교활했기에 곧 위험에 처하게 되었다. 한여름이 되자 그가 우위를 점하기 시작하는 것이 분명해졌다. 그는 천천히, 그러나 확실하게 밀어붙였고, 곧 그의 진격은 도네츠 분지 전역에 심각한 위협이 되었다. 볼셰비키는 여기에 깊이 연루되고 있었고, 폴란드 전선도 상황이 역전되고 있었기 때문에 혁명 전체가 다시 위험에 처했다.
데니킨의 공세 당시와 마찬가지로 마흐노주의자는 그들의 힘과 능력을 최대한 발휘해 브란겔과 싸우기로 했다. 그러나 그때마다 적군은 그들의 후방을 공격했고, 그들은 전선을 버리고 퇴각해야만 했다. 동시에 소비에트 당국은 마흐노주의자에 대한 중상모략을 멈추지 않았다. 그렇기 때문에, 예컨대 마흐노주의자를 계속해서 “도적때”와 “쿨라크의 수호자”로 취급하고, 마흐노와 브란겔이 동맹을 맺었다며 유언비어를 퍼뜨리고, 하르키우 정부의 대표는 예카테리노슬라프 소비에트 총회에서, 당국이 이 동맹에 대한 문서화 된 증거를 보유하고 있다는 주장을 퍼뜨리는 데 주저하지 않았다. 그들에게 이 모든 절차는 “정치 투쟁 전술”이었다.
마흐노주의자는 점점 더 위협이 되어 가는 브란겔의 진격에 무관심할 수 없었다. 그들은 지체하지 않고 브란겔과 맞서 싸워 그가 정복한 땅을 통합하고 확장할 시간을 허락하지 않는 것이 중요하다고 느꼈다. 하지만 공산주의자에 대해서는 어떻게 해야 했는가? 우선 그들은 마흐노주의자의 행동을 가로막았다. 둘째로 그들의 독재는 브란겔만큼이나 노동자의 자유에 대해 적대적이고 사악했다.
모든 면으로 문제를 검토한 반란군 위원회와 군 참모부는 다른 모든 것에도 불구하고 혁명에 있어 브란겔이 제1의 적이며 볼셰비키와의 이해를 시도하고 그에 도달할 필요가 있다고 결론지었다. 해당 의제는 반란군 앞에 제기되었고, 반란군은 대규모 회의에서 브란겔의 파멸이 중대한 결과를 초래할 것이라고 결론지었다. 총회는 위원회와 참모부의 의견에 동의했다. 공산주의자에게 함께 브란겔을 소탕하기 위해 마흐노주의자 사이 적대행위를 중단하기로 제안할 것이 정해졌다.
7월과 8월, 이 결과에 대한 파견단이 모스크바와 하르키우에 반란군 위원회와 사령관의 명의로 보내졌다. 그들은 아무런 답변도 받지 못했다. 공산주의자는 마흐노주의자에 대해 전투와 비방을 이어 나가며 전쟁을 계속했다.
9월, 공산주의자는 예카테리노슬라프를 버려야 했고 브란겔은 별다른 저항 없이 베르댠스크, 알렉산드로프스크, 훌랴이폴레와 시넬니코보Sinelnikovo를 취했다. 그때가 되어서야 공산당 중앙위원회의 이바노프(Ivanov)라고 불리는 자를 필두로 한 전권 대표단이 당시 마흐노주의자가 진을 치고 있던 스타로빌스크Starobilsk(하르키우 지역)로 와 브란겔에 대한 연합행동을 주제로 협상을 시작했다. 이 협상은 그 자리에서 이루어졌다. 그들은 마흐노주의자와 소비에트 당국 간 군사 및 정치적 예비 협정을 체결했다. 이 예비 협정의 조항들은 공식적으로 비준되기 위해 하르키우로 보내질 것이었다. 이것과 볼셰비키 참모부와의 이후 연락 유지를 위해 부다노프와 포포프(Popoff)가 하르키우로 떠났다.
1920년 12월 10일부터 15일 사이, 협정 조약 최종본이 작성되어 양측이 채택했다. 우리는 이를 간결하게 요약하고 싶지만, 이 역사적 문서가 당시의 상황을 잘 드러내고 있기에 전문을 인용할 수밖에 없으며, 협정의 세부 사항을 전부 알지 못하면 협정 이후의 사건들을 온전히 이해하거나 인식할 수 없다.
“우크라이나 소비에트 정부와 우크라이나 (마흐노주의)혁명반란군 간 정치 및 군사 예비 협정
제1부―정치적 합의1. 소비에트 공화국 영토 내 투옥되거나 망명 중인 모든 마흐노주의자와 아나키스트의 즉각적인 석방. 마흐노주의자 또는 아나키스트에 대한 모든 박해의 중단(소비에트 정부에 대항하여 무력 충돌을 계속하는 이들은 본 조항의 적용을 받지 아니한다).
2. 소비에트 당국의 전복을 촉구할 수 있는 모든 것을 제외하고, 군사적 필요에 의한 검열을 존중하는 조건 아래 모든 마흐노주의자와 아나키스트의 그들 원칙과 사상을 위한 공개적인 표현과 선전, 언론과 출판의 완전한 자유. 모든 종류의 출판물에 있어서, 소비에트 정부가 인정한 혁명적 조직으로서 마흐노주의자와 아나키스트는, 당연히 출판에 대한 기술적 규칙을 따르는 조건으로 소비에트 정부의 전문 기구를 이용할 수 있다.
3. 소비에트에 대한 자유로운 참여 및 마흐노주의자와 아나키스트의 선출권. 내년 12월 개최될 제5차 《범 우크라이나 소비에트 총회Pan-Ukrainian Congress of Soviets》 구성에의 자유로운 참석.
제2부―군사적 합의4. 우크라이나 (마흐노주의)혁명반란군은 적군 최고사령부에 종속되는 파르티잔 부대로서 공화국 군대에 추가된다. 그것은 이전에 확립된 내부 구조를 유지하며 정규 적군의 기준과 원칙을 채택할 필요가 없다.
5. 소비에트 영토에서, 전선에서, 또는 전선을 이동하는 동안 혁명반란군은 적군으로부터의 그 어떤 분대나 탈영병도 받아들이지 않는다.
비고:
a. 브란겔에 대한 전선에서 고립된 뒤 혁명반란군을 만나 합류한 적군 병사 및 부대는 다시 적군과 합류할 때 적군 대열로 재배치되어야 한다.
b. 현재 브란겔에 대한 전선 있는 마흐노주의 파르티잔과 혁명반란군에 있는 모든 이는 이전에 적군에 의해 징병 되었더라도 그곳에 남는다.
6. 공동의 적―백군―을 궤멸하기 위해 우크라이나 (마흐노주의)혁명반란군은 협정이 체결되었음을 협력하는 노동 대중에 알리고, 사람들에게 소비에트 권력에 적대적인 모든 행동을 중단할 것을 촉구한다. 마찬가지로 소비에트 권력은 협정 조항을 즉시 공표한다.
7. 소비에트 공화국 영토에 거주하는 (마흐노주의)혁명반란군 투사의 가족은 적군 병사 가족과 동일한 권리를 누리며, 이를 위해 우크라이나 소비에트 정부는 필요한 서류를 제공한다.
위 정치적 합의의 세 조항에 더해, 총회 대표와 마흐노주의 군대 사령관은 소비에트 정부에 다음과 같은 네 번째 특별 조항을 제출했다.
“정치적 합의 제4조
마흐노주의 운동의 필수 원칙 중 하나는 노동자의 자주 관리를 위한 투쟁이기에 반란군은 다음과 같은 네 번째 지점을 주장해야 한다고 여긴다. ‘마흐노주의 군대가 활동하는 지역에서 노동자와 농민은 경제적, 정치적 자주 경영을 위한 자체 자유 기관을 창설한다. 이러한 기관들은 소비에트 공화국 정부 기관에―합의를 통해―자주적이며 연방적으로 결합할 것이다.’”
* * *
사실 그것은 우크라이나 마흐노주의 반란군이 소련과 연방 관계를 유지하며 완전히 자유롭게 그들의 사회실험을 수행할 수 있는 두세 가지 부문을 남겨두기 위한 것이었다. 이 특별 조항은 비록 서명된 협정에 삽입되지는 않았으나 마흐노주의자는 당연히 이에 매우 큰 중요성을 부여했다.[30]
우리는 독자가 이 협정의 본문을 면밀히 검토할 것을 촉구한다. 그것은 두 가지 반대 경향을 명확히 구분한다. 하나는 국가주의적이며 당국의 일반적 특권과 특혜를 방어하고, 다른 하나는 대중적이고 혁명적이며 예속된 대중의 일반적 요구를 방어한다. 협약―노동자의 당연한 권리를 요구하는 정치적 조항을 포함한―의 첫 번째 부분에 마흐노주의자의 주장만이 포함되어 있다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이 문제에 있어서 소비에트 당국은 모든 전형적인 폭정의 태도를 취했다. 그들은 마흐노주의자에 의해 공식화된 요구를 제한하고자 노력했고, 모든 부분에서 흥정하려 들었으며, 노동자의 권리, 그들의 참된 자유를 위해 양도할 수 없으며 필수불가결한 권리를 줄이고자 가능한 모든 일을 했다.
소비에트 당국은 여러 구실을 대며 이 협정을 발표하는 것을 오랫동안 미루었다. 마흐노주의자는 이것은 좋지 않은 징조로 여겼다. 그들은 소비에트 당국의 진정성이 부족하다는 것을 알고, 협정이 공표되지 않는 한 반란군은 그 조항에 따라 행동할 수 없다고 단호히 선언했다. 소비에트 정부가 마침내 협정 본문을 공표하기로 한 것은 이러한 직접적인 압박 이후였다. 하지만 그들은 모든 내용을 한꺼번에 공표하지는 않았다. 그들은 우선 제2부(군사적 합의)를 발표했고, 얼마 지난 뒤 제1부(정치적 합의)를 발표했다. 그로 인해 협정의 진정한 의미는 모호해졌다. 그것을 읽은 사람 중 대다수가 볼셰비키가 원했던 것처럼 그것을 정확히 이해하지 못했다. 특별 정치 조항(제4조)에 관해 우크라이나 당국은 이를 모스크바와 협의해야 한다며 협정에서 들어냈다. 10월 15일에서 20일 사이에, 마흐노주의 군대는 브란겔을 공격하기 시작했다. 전선은 시넬니코보에서 알렉산드로프스크, 폴루구이, 베르댠스크까지 확장되었다. 공격 방향은 페레코프를 향하고 있었다.[31]
페레코프와 오리히우Orikhiv 두 도시 사이의 첫 전투에서 드로즈도프(Drozdov) 장군이 이끄는 브란겔의 주요 부대가 패배했고 4천 명의 병사가 포로가 되었다.[32] 3주 후, 이 지역은 브란겔의 군대로부터 해방되었다. 그는 크림반도를 향해 퇴각했으며, 11월 초 마흐노주의자는 적군과 함께 페레코프 앞에 섰다.
적군이 페레코프를 봉쇄하고 며칠 뒤 마흐노주의 부대 일부는 참모진의 명령에 따라 지협 왼쪽으로 30킬로미터를 이동해 이 시기면 얼어붙은 시바시Syvash 해협 얼음 위로 출발했다. 마르첸코(Alexei Ivanovich Martchenko)(원래 훌랴이폴레 출신의 아나키스트 농민)가 이끄는 기병대가 선두에 섰고, 코진(Thomas Kojin)(혁명적 농민이자 매우 용맹한 지휘관)이 이끄는 기관총 연대가 뒤따랐다. 해협을 횡단하는 동안 적의 폭력적이고 지속적인 포격이 가해져 여러 목숨을 앗아갔다. 그러나 공격자들의 대담함과 끈기는 마침내 패주하는 브란겔 군대의 저항을 무너뜨렸다. 그런 다음, 굴라이-폴퍄 출신의 또 다른 아나키스트 농민, 세멘 카레트니크(Simon Mikytovich Karetnik)(훌랴이폴레의 또 다른 아나키스트 농민) 지휘 아래의 또 다른 마흐노주의 군대인 “크리미아the Crimean”는 11월 13일과 14일 폭풍에 휩싸인 심페로폴을 향해 오른쪽으로 이동했다. 동시에 적군은 페레코프를 건너기 시작했다.
시바시 해협을 건너 크림반도에 진입함으로써 마흐노주의자가 페레코프 지협을 탈환하는 데 크게 기여했다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브란겔은 페레코프 협곡에서 시바시 해협을 건넌 마흐노주의자에게 포위당하는 것을 피하고자 지금껏 난공불락으로 알려졌던 페레코프 지협에서 크림반도 안쪽까지 물러나야 했다. 브란겔의 모험은 끝났다. 그의 군대 잔당들은 서둘러 크림반도 남쪽 해안에서 외국으로 떠났다.
우리는 예카테리노슬라프에서의 퇴각과 볼셰비키와의 두 번째 분쟁, 그리고 브란겔의 원정에 뒤이어 군사적 충돌이 또다시 반란 지역 노동 대중의 모든 창조적 활동을 다시금 방해했음을 이미 언급했다. 하지만 훌랴이폴레 마을은 예외였다.
우리는 마을로 여겨지지만 훌랴이폴레는 사실 도시, 심지어 상당히 큰 도시라는 점에 유의해야 한다. 확실히 당시 인구는 거의 전적으로 농민들이었지만, 그 수는 2만에서 3만을 헤아렸다. 이 마을에는 여러 초등학교와 두 개의 고등학교가 있었다. 그곳의 삶은 활발했고, 사람들의 정신은 매우 발달해 있었다. 많은 지식인―교사, 교수 등―이 그곳에서 자리를 잡은 지 꽤 시간이 흘렀다.
데니킨, 볼셰비키, 브란겔에 맞선 격렬한 투쟁 가운데 훌랴이폴레는 여러 차례 주인이 바뀌었음에도, 소비에트 정부가 협정에도 불구하고 이 지역에 대한 반半 봉쇄를 유지하며 노동자의 자유로운 활동을 막기 위해 최선을 다했음에도, 훌랴이폴레에 거주하는 적극적인 핵심 마흐노주의자는 모든 이들의 도움과 열렬한 지지를 받으며 매우 활기차게 건설적인 작업을 계속 수행했다.
우선 그들은 자유 지구 노동자 소비에트 조직에 관심을 가졌다. 이 소비에트는 모든 정치 당국으로부터 독립된, 자유와 평등의 원칙에 기초한 이 지역의 새로운 경제적 사회적 생활의 기초를 다지기 위한 것이었다. 이를 위해 훌랴이폴레 사람들은 몇 차례 예비를 열었고, 몇 주간 기능할 소비에트를 설립했다. 이는 후에 볼셰비키에 의해 파괴되었다. 동시에 반란군 총회는 자유 소비에트 헌법을 작성해 발표했다.
그들은 또한 학업 지도와 공교육에 적극적으로 헌신했다. 거듭된 무장 침략이 교육 분야에 끔찍한 영향을 끼쳤기 때문에 이 작업은 무척 시급했다. 오랫동안 보수를 받지 못한 교사들은 뿔뿔이 흩어졌고, 학교 건물들은 버려졌다. 상황이 허락하는 한 마흐노주의자와 훌랴이폴레의 모든 주민은 교육 시스템 재건 임무를 수행했다.
특히 주목할 만한 것은 이 작업을 시작한 이들이 이 작업에 기반을 둔 선도적인 사상들이다. 이는 다음과 같았다.
1. 젊은 세대 노동자를 교육하는 과정은 노동자 스스로 감독해야 한다.
2. 학교는 단지 없어서는 안 될 지식의 원천이 될 뿐만 아니라 참된 인간사회를 위해 투쟁할 수 있는 의식을 지니게 하고, 그에 따라 생활하고 행동할 수 있는 자유로운 사람을 계발할 수 있는 수단이 되어야 한다.
3. 이 두 가지 조건을 충족하기 위해서는 학교가 독립적이어야 하며, 따라서 교회와 국가로부터 분리되어야 한다.
4. 젊은이를 가르치는 것은 이 목적에 필요한 능력, 적성, 지식 및 기타 자질을 모두 갖춘 이들의 몫이어야 한다. 당연히 이는 노동자의 효과적이고 경계심 있는 통제 아래 놓여야 한다.
훌랴이폴레에는 프란시스코 페러(Francesc Ferrer i Guàrdia)의 자유 학교 원칙을 지지하는 지식인이 있었다.[33] 이들의 지도하에 광범위한 교육 사업을 설계하기 시작한 활발한 운동이 전개되었다. 농민과 노동자는 마을과 그 주변 모든 학교에 필요한 교육 인력을 유지했으며, 학업에 필요한 모든 경제적, 교육적 필요를 충족시키기 위해 농민, 노동자, 교사로 구성된 복합 위원회가 구성되었다. 이 위원회는 프란시스코 페러의 생각에 영감을 받아 기록적인 시간 내에 무상교육 계획을 수립했다. 동시에 성인을 위한 특별 강좌가 조직되었고, “정치적”, 아니 오히려 사회적, 이데올로기적 과목의 수업이 기능하기 시작했다.
곧 이전에 교사 활동을 포기하고 훌랴이폴레를 떠났던 많은 이가 부흥을 알게 되어 돌아왔고, 다른 곳에 살던 많은 전문가도 운동에 참여하기 위해 마을로 왔다. 이런 식으로 교육 작업은 새로운 기틀 위에서 다시 시작되었다. 우리는 또한 새로운 사상에 영감을 받아 매우 흥미로운 결과를 달성한 연극 공연 재개도 언급해야만 한다.
대중의 이 모든 창조 정신은 1920년 11월 26일 우크라이나 전역을 강타한 새롭고 격렬한 볼셰비키의 공격에 의해 잔인하게 파괴되었다.
그 모든 일이 일어난 뒤, 마흐노주의자 가운데 그 누구도 볼셰비키의 혁명적 진실성을 믿지 않았다. 그들은 브란겔의 공세가 위험하기 때문에 볼셰비키가 마흐노와 협상하도록 만들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리고 그들은 마흐노우슈치나에 대항하는 새로운 캠페인을 위한 구실이라도 찾을 것이 분명했다. 아무도 협정의 견고함이나 지속성을 믿지 않았다. 그러나 마흐노주의자는 대개 동맹이 3~4개월 동안 지속될 것으로 예상했고, 이 시간을 이용해 마흐노주의 및 자유의지주의 사상과 운동에 대한 적극적인 선전을 계속하고자 했다. 이 희망은 환상에 불과했다.
볼셰비키 정부가 협정 조항을 적용한 방식은 이미 충분히 의심스러웠다. 그들이 그 조약을 정직하게, 또는 효과적으로 이행할 생각이 없다는 것이 분명했다. 그들은 투옥된 마흐노주의자와 아나키스트 가운데 소수만을 석방했으며, 가능한 모든 방법을 동원해 자유의지주의 투사들의 이데올로기적 활동을 계속 막았다.
군사 업무에 몰두하던 마흐노주의자는 이 불안정한 상황에 대해 한동안 관심을 둘 수 없었다. 하지만 몇몇 아나키즘 활동이 우크라이나에서 다시 태동했다. 선전이 일부 재개되고 몇 가지 신문이 다시 등장했다.
자유의지주의 사상과 운동에 대한 노동 대중의 관심과 공감은 모든 기대를 뛰어넘었다. 모스크바 감옥에서 나와 우크라이나로 돌아온 나는 수많은 인파가 하르키우에 있는 우리 회의장을 매일 저녁, 그리고 공지된 모든 강연마다 가득 메우는 것을 보고 놀랐다. 그때마다 우리는 매번 수백 명을 돌려보내야 했다. 하지만 이미 혹독한 추위의 계절임에도 불구하고 많은 사람이 반쯤 열린 문을 통해 모든 말을 들으며 바깥에 머물러 있었다.
곧 우크라이나 아나키스트 대오는 볼셰비키가 마흐노와 맺은 협정에 거의 관심을 두지 않던, 대러시아에서 온 많은 투사에 의해 확대되었고, 운동은 나날이 강해졌다. 이 상황은 아나키스트의 성공에 격분한 볼셰비키가 반응을 서두르게 할 수밖에 없었다.
마흐노주의자는 정치적 합의의 잘 알려진 제4조의 작용에 크게 의존했다. 그들은 노동자와 농민에 의한 경제적, 사회적 자치권에 대한 볼셰비키로부터의 승인을 얻기를 간절히 원했기에 그것을 긴급하게 검토하고 결정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들은 소비에트 당국에 두 가지 선택지 가운데 하나를 선택할 것을 요구했다. 해당 조항에 서명하거나 반대의 이유를 솔직하게 설명할 것.
아나키스트 프로파간다는 서서히 이 문제로 집중되었다. 11월 중순이 되자 이 제4조는 모든 곳에서 대중의 관심을 끌었으며 앞으로 가장 중요해질 것 같았다. 하지만 볼셰비키의 입장에서 이는 절대 받아들일 수 없는 조항이었다.
이 무렵 하르키우에서 새로운 상황에서 수행될 아나키즘 활동의 유형을 확립하기 위해 아나키스트 회의가 계획되었다. 그리고 그 무렵 레닌은 브란겔의 원정을 청산함으로써 안심하며 마흐노주의자와 아나키스트에 대한 새로운 공격을 교묘히 준비하기 시작했다. 그는 그 유명한 비밀 전보를 잇달아 보냈는데, 아나키스트는 이 경고를 너무 늦게 받았다.
“세멘 카레트니크의 파견대―반란군과 함께 크림반도에서 심페로폴로 진군하고 있다고 알려졌던―가 훌랴이폴레로 복귀 조치 되자 마흐노의 부관인 그레고르 바실레우스키(Gregor Vassilevsky)가 소리쳤다. ‘이건 협정 파기다. 나는 일주일 안에 볼셰비키가 우리 등 뒤에 칼을 들고 서 있을 거라고 장담해.’ 이 발언은 11월 16일 일이었고, 같은 달 26일, 볼셰비키는 크림반도의 마흐노주의자 참모들과 부대를 배신해 기습했다. 동시에 그들은 훌랴이폴레를 공격했고, 하르키우에 있던 마흐노주의자 대표들을 체포하고, 최근 설립된 모든 아나키스트 조직을 파괴하고, 회의에 참석하러 온 이들을 포함한 모든 아나키스트를 투옥했다. 이는 우크라이나 전역에서 같은 방식으로 진행되었다.”(표트르 아르시노프, 전게서, pp.297~298)
제6부. 볼셰비키의 마흐노주의자와 아나키스트에 대한 제3차 겸 최종 전쟁; 반란군의 패배
이렇게 하여 볼셰비키의 우크라이나 마흐노주의자, 아나키스트, 노동 대중을 상대로 벌인 세 번째이자 마지막 전쟁이 시작되었다. 이 전쟁은 비대칭이고 누그러뜨릴 수 없는 투쟁으로 9개월간 지속됐고 자유 운동이 파괴된 뒤에나 끝났다. 다시 한번, 속임수와 사기에 근거한 잔인한 세력이 승리했다.
당연히 볼셰비키 정부는 그 배반에 대한 해명에 굼뜨지 않았다. 그들은 마흐노주의자와 아나키스트가 소비에트 정부에 대해 음모와 거대한 폭동을 준비하고 있다고 꾸몄고, 마흐노가 코카서스 전선으로 가는 것을 거부하며 농민을 징집해 소비에트 당국에 맞서 싸울 군대를 꾸리고 있었다며 비난하고, 마흐노주의자가 크림반도에서 브란겔에 맞서 싸우지 않고 적군 후방을 저격했다고 밝혔다.
이 모든 변명은 전혀 사실이 아니었다는 것은 말할 필요도 없다. 하지만 마흐노주의자와 아나키스트에게 침묵을 강요하며 볼셰비키는 외국 및 러시아에서 사람이 그들을 믿도록 만들었다.
이 상황에 대해 우리가 진상을 규명할 수 있도록 해주는 여러 정황이 존재한다.
1. 1920년 11월 23일, 마흐노주의자는 폴루구이와 훌랴이폴레에서 적군의 저격수 제42사단 소속의 볼셰비키 첩자 아홉 명을 체포했다. 이들은 방첩 책임자가 그들을 마흐노의 집, 그의 참모진 구성원, 혁명반란군 지휘관, 총회 구성원에 대한 정보를 얻기 위해 훌랴이폴레로 보냈다고 자백했다. 이후 그들은 훌랴이폴레에 남아 적군의 입성을 기다리다 해당 인물들의 소재지를 일러주기로 되어 있었다. 예기치 않은 적군 입성을 피해 이 인물들이 피신할 경우, 그들은 그림자를 드리워 행적을 놓쳐서는 안 되었다. 첩자들은 11월 24일이나 25일까지 훌랴이폴레에 대한 공격이 있을 것이라고 밝혔다.
혁명반란군 총회와 군대의 사령관은 당시 《우크라이나 인민위원회the Council of People’s Commissars of the Ukraine》 의장이자 하르키우 《혁명 군사평의회》 의장이던 라콥스키(Christian Georgievich Rakovsky)에게 사람을 보내 이 음모에 대한 상세한 해명과 함께 다음과 같이 요구했다. 하나, 제42사단장 및 음모에 연루된 이들에 대한 《중앙 전쟁위원회》의 즉각적인 체포 및 공소 제기. 둘, 불의의 사건을 예방하기 위해 적군이 훌랴이폴레, 폴루구이, 말라 토크마치카Mala Tokmachka, 투르케니우카turkenovka 통행 금지.
하르키우 정부의 반응은 다음과 같았다. “소위 ‘음모’는 단순한 오해에 불과하다. 그럼에도 소비에트 당국은 이 문제의 해결을 특별위원회 손에 맡겼으며, 마흐노주의 군대의 참모가 이 위원회 업무에 참여할 두 명의 위원을 임명하기를 제안한다.” 이 회신은 11월 25일 하르키우에서 훌랴이폴레로 직접 전달되었다.
이튿날 아침, 혁명반란군 총회의 비서 P. 리빈(Peter Rybin)은 전보를 통해 직접 하르키우와 이 문제 및 모든 논점에 대해 재논의했다. 하르키우의 볼셰비키 당국은 제42사단 사건은 마흐노주의자에게 있어 온전히 만족할 수 있도록 확실히 해결될 것이며 정치적 합의의 제4조 역시 만족스러운 방식으로, 우호적으로 해결될 것이라고 덧붙였다.
리빈의 이 대화는 11월 26일 오전 9시에 이루어졌다. 그러나 6시간 전, 한밤중에 하르키우에서 마흐노주의자 대표들은 물론, 하르키우 및 다른 우크라이나 지역에 있던 모든 아나키스트가 체포되었다. 그리고 리빈이 직접 전보로 대화를 나눈 지 정확히 2시간 뒤, 훌랴이폴레는 사방으로 적군에게 포위되어 맹렬한 폭격을 받았다. 같은 날 같은 시간, 크림반도의 마흐노주의 군대가 공격받았다. 그곳에서 볼셰비키는 그 군대의 모든 참모와 지휘관 세멘 카레트니크 체포 계략에 성공해 한 사람도 빠짐없이 죽였다.
2. 나는 마흐노주의 군대의 대표들과 함께 하르키우에 있었고, 우리에 대한 음모를 전혀 알지 못했기에 11월 25일 라콥스키를 만나 협정 제4조에 대해 정확하게 무엇이 행해지고 있었는지 알아보라는 명령을 받았다. 라콥스키는 나를 매우 정중하게 맞이하고 사무실로 초대했다. 근사한 안락의자에 앉아 세련된 종이칼을 가지고 태연하게 놀던 그는 제4조에 대한 하르키우와 모스크바 사이의 논의가 이미 마무리되었으며, 그것이 며칠 사이 만족스러운 결과를 얻으리라 기대할 만한 충분한 이유였다고 내게 웃으며 장담했다. 하지만 그가 내게 이렇게 말하고 있던 바로 그 순간, 아나키스트와 마흐노주의자에 대한 공격을 시작하라는 명령서가 바로 우리가 앉아있던 책상 서랍에 들어 있었다.
같은 날 오후, 나는 하르키우 농업연구소에서 아나키즘에 관한 강연을 했다. 강당은 가득 찼고, 강의는 새벽 1시쯤, 매우 늦게 끝났다. 집으로 돌아온 나는 우리 신문에 게재할 글을 조금 쓰고 2시 30분쯤 잠자리에 들었다. 잠든 지 얼마 되지 않아 불길한 소란이 들려왔다. 총소리, 무기끼리 부딪히는 소리, 계단을 오르내리는 구두 소리, 문을 두드리는 소리, 고함과 욕설이 들렸다. 나는 무슨 일인지 이해했다. 옷을 입을 시간밖에는 없었다. 누군가 내 방문을 격하게 두드렸다. “문을 열지 않으면 부수고 들어가겠소.” 자물쇠를 풀자마자 나는 난폭하게 붙잡혀 끌려가 이미 수십 명이 잡혀있는 지하실에 던져졌다. 제4조는 이렇게 만족할 만한 해결책을 찾았다.
3. 훌랴이폴레 공격 다음 날인 11월 27일, 마흐노주의자는 적군 포로들로부터 제4군 정치부가 발행한 〈마흐노에 맞서 전진!Forward Against Makhno!〉과 〈마흐노비주의에 죽음을!Death to Makhnovism!〉이라는 제목의 날짜가 적히지 않은 선언문을 발견했다. 포로들은 이 선언문을 같은 달 15일과 16일에 받았다고 말했다. 선언문은 정치와 군사 협정의 조항을 위반하고, 코카서스 전선으로 이동하라는 명을 거부하고, 소비에트 권력에 대항하는 반란을 계획하는 등의 죄를 저지른 마흐노에 대해 행동할 것을 촉구했다. 이는 반란군이 크림반도를 건너고 심페로폴을 점령하고 있는 동안, 그리고 마흐노주의자 대표단이 하르키우 등에서 소비에트 당국과 평화적으로 협력하고 있는 동안에도 이 모든 비방이 날조되어 언론에 보내졌음을 증명하는 것이었다.
4. 1920년 10월과 11월 사이, 즉 마흐노주의자와 볼셰비키 간의 군사적, 정치적 합의가 협의 중이던, 그리고 그것이 막 완성된 후 마흐노를 암살하려던 두 가지 볼셰비키의 음모가 마흐노주의자에 의해 밝혀졌다.
내가 위에 기록한 모든 사실로 미루어 이 거대한 반反마흐노 공격이 세심하게 준비되어야 했으며, 정교화하는 데 적어도 2주가 걸렸다는 것이 분명하다. 이는 단지 마흐노주의자에 대한 배신적인 공격이 아니라 모든 면에서 세심하게 계획된 치밀한 계략이었다. 볼셰비키는 심지어 마흐노주의자의 경계심을 느슨하게 하기 위한, 가짜 안전 보장 주장과 거짓 약속 등으로 그들을 진정시키기 위한 속임수를 고안한 것이다.
이것이 마흐노주의자와 소비에트 권력 사이의 협정 파기에 관한 사실들이다. 이는 특정한 소비에트 문서, 예컨대 당시 남부 전선 사령관 프룬제가 발행한 명령으로 확인된다. 이 문서는 볼셰비키의 배신을 증명하고 그들의 모든 거짓과 속임수를 무위로 돌리는 데 충분하다.
“혁명반란군 사령관 마흐노 동지에 대한 명령. 남부 전선 군대 지휘관들에게 복사. 제00149호. 1920년 11월 23일, 멜리토폴 총사령부 발행.
브란겔에 대한 적대행위 중단과 그의 완전한 패배로 남부 전선 《혁명 군사평의회》는 파르티잔 군대의 임무가 완수되었다고 판단한다. 따라서 혁명반란군의 《혁명 군사위원회》에 반란군 파르티잔 부대를 적군 정규 부대로 즉각 전환할 것을 제안한다.
혁명반란군이 지속될 이유는 더 이상 없다. 오히려 특수한 조직과 특수한 임무를 수행하는 이러한 부대는 적군과 나란히 존재함으로 인해 결코 용납 불가능한 결과를 낳는다.[34]
그러므로 남부 전선의 《혁명 군사평의회》는 혁명반란군 《혁명 군사위원회》에 다음과 같은 명령을 내린다.
1. 현재 크림반도에 주둔하고 있는 모든 반란군 부대는 즉시 제4 소비에트 군에 편입되어야 한다. 《혁명 군사평의회》가 이 전환을 담당한다.
2. 훌랴이폴레 군사 조직은 청산되어야 한다. 전투원들은 해당 부대 지휘관의 지시에 따라 예비 분대로 배치될 것이다.
3. 혁명반란군 《혁명 군사위원회》는 전투원들에게 이러한 변화의 필요성을 설명하는 데 필요한 모든 조치를 취해야 한다.
서명 : 남부 전선 총사령관 M. 프룬제, 《혁명 군사평의회》 스밀가(Ivar Tenisovich Smilga), 참모장 카라티긴(Karatygin)”
독자는 소비에트 정부와 마흐노주의자 사이 협정의 역사를 상기해야 한다. 이 조약을 체결하기에 앞서, 마흐노주의자 전권사절단과 볼셰비키 사절단 간 협상이 이루어졌다. 이 사절단은 공산주의자 이바노프가 이끌었으며 체결을 위해 스타로빌스크에 있는 마흐노주의 진영을 직접 방문했다. 본격적인 협상은 하르키우에서 계속되었으며, 그곳에서 마흐노주의자는 볼셰비키와 3주에 걸친 협상을 통해 만족스러운 조약을 체결했다. 양측은 각 조항을 세밀하게 검토하고 토론했다. 이 협정의 최종안은 두 당사자, 즉 소비에트 정부와 우크라이나 혁명반란군 총회가 대표한 혁명 반란 지역에 의해 승인되었다. 이는 각각의 서명으로 봉인되었다.
협정의 본질상, 협정의 어떤 조항도 두 당사자의 사전 동의 없이는 효력이 정지되거나 수정될 수 없었다. 그러나 프룬제의 명령은 군사적 합의 첫 번째 조항을 무시했을 뿐만 아니라 협정 전체를 무효화했다. 이는 볼셰비키가 이 협정을 진지하게 받아들이지 않았다는 것을, 그들은 협정을 작성하는 척하는 수치스러운 연극을 했다는 것을, 협정은 마흐노주의자가 브란겔에 맞서 스스로 소탕되도록 설득하기 위한 어마어마한 기만이자 책략, 함정일 뿐이라는 것을 증명한다.
심지어 프룬제의 명령 역시 그 잔인할 정도의 솔직함이나 단순함에도 불구, 다음과 같은 사실에서 알 수 있듯 덫으로 설계되었다.
1. 마흐노가 제00149호 명령을 접수함과 동시에, 크림반도의 제4군은 모든 수단을 동원하여 마흐노주의자에 맞서 행동하고, 혁명반란군이 불복종할 경우, 모든 군사력을 동원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2. 훌랴이폴레에 주둔하고 있던 반란군 참모진이나 하르키우의 마흐노주의자 사절단 모두 이 명령에 대해 아는 바가 없었다. 마흐노주의자는 볼셰비키의 침공이 있은 지 3~4주 후에야 우연히 그들 손에 들어간 일부 신문을 통해 이를 알게 되었다. 이에 대한 설명은 간단하다. 마흐노주의자에 대한 기습 공격을 비밀리에 준비하고 있던 볼셰비키는 계획이 알려진다면 공격이 필연적으로 격퇴되었을 것이기에, 사전에 이런 종류의 문서를 보내 그들을 감시할 여력이 없었다.
3. 동시에 그들은 그들의 공격을 정당화해야 했다. 이 때문에 프룬제의 명령은 마흐노주의자에 대한 공격과 협정 약속 파기 이후에야 신문에 게재되었다. 이 소식은 하르키우의 신문 「공산주의자The Communist」에 1920년 12월 15일 처음 게재되었다.
이 모든 책략은 마흐노주의자에게 기습을 가하고 파멸시키기 위해, 그리고 그것이 완벽하게 명예롭다는 것을 암시하기 위해 “정당한 근거”로써 그들 행동을 설명할 목적을 지니고 있었다.
앞서 언급했듯, 마흐노주의자에 대한 공격은 아나키스트 투사 대량 체포와 함께 수반되었다. 우크라이나 전역에서 일어난 이 대량 체포는 아나키즘 사상과 활동의 완전한 파괴뿐만 아니라, 사람들에게 사건의 진정한 의미를 설명할 수 있는 모든 가능성을 질식시키는 것을 목표로 삼았다.
반드시 아나키스트뿐만 아니라 그들의 친구나 지인으로 여겨지거나 그들의 글에 관심 있는 이들도 체포되었다. 옐리사베트흐라드에서는 15세에서 18세 사이의 청소년 15명이 투옥되었다. 사실 주도州都인 미콜라이우Mykolaiv의 고위 당국자들은 아이가 아니라 진짜 아나키스트를 원한다며 이 체포에 대한 불만을 품기는 했다. 하지만 이 청소년 가운데 한 명도 그 자리에서 풀려나지 않았다.
하르키우에서는 아나키스트 추격이 전례 없는 규모로 전개되었다. 도시의 모든 아나키스트를 잡기 위해 함정과 매복이 설계되었다. 이런 종류의 덫이 자유 서점 협회에 설치되었다. 책을 사러 온 이는 누구든 체포되어 체카로 보내졌다. 협정 파기 이전에 합법적으로 출간돼 서점 벽에 붙여진 「나밧」 신문을 읽으려고 서점 앞에 선 사람들이 감금되기도 했다.
하르키우 아나키스트 가운데 한 명인 그레고르 체스니크(Gregor Tsesnik)가 체포를 면하자, 볼셰비키는 정치와는 아무런 관련도 없던 그의 아내를 감옥에 가두었다. 그녀는 즉각 석방을 요구하며 단식투쟁에 돌입했다. 그러자 볼셰비키는 그녀에게 체스니크가 그녀의 석방을 원한다면 체카에 자수해야 한다고 말했다. 체스니크는 심각한 병을 앓고 있었으나 그렇게 해서 투옥되었다.
우리는 앞서 크림반도에 주둔하고 있던 마흐노주의 군대 참모들과 지휘관 세멘 카레트니크가 기만적으로 체포 당해 그 자리에서 처형당했다는 사실을 언급했다. 기병대를 지휘하던 마르첸코는 볼셰비키 제4군의 수많은 부대에 둘러싸여 맹렬한 공격을 받았지만, 페레코프 지협의 장애 지형물과 바리케이드를 뚫고 탈출했다. 그의 부하, 아니 잔당을 이끌고 밤낮으로 감행한 강행군 끝에 그는 케르멘치크Kermentchik의 작은 마을에서 마흐노(우리가 앞으로 보게 될 것처럼 다시금 볼셰비키로부터 탈출한)와 합류하는 데 성공했다.
크림반도에서 마흐노주의 군대가 운 좋게 탈출했다는 소문이 이미 자자했다. 사람들은 이들의 귀환을 초조하게 기다렸다. 마침내 12월 7일, 기병 한 명이 전속력으로 달려와 마르첸코의 군대가 몇 시간 안에 그곳에 도착할 것이라고 알렸다. 케르멘치크의 마흐노주의자들은 영웅들을 만나기 위해 신나서 몰려들었다.
마침내 멀리서부터 천천히 다가오는 아주 적은 수의 기병을 보았을 때 그들이 느꼈을 비통함을 상상할 수 있다. 1천5백여 명의 강력한 기병대 대신 250명의 적은 이들이 지옥 불구덩이로부터 돌아왔다. 그 선두에는 마르첸코와 타라노우스키(Taranovsky)(또 다른 용맹한 반란군 지휘관)가 있었다.
“크림 군의 귀환을 알리게 되어 영광이오”라고 마르첸코는 씁쓸한 반어법으로 말했다. 몇몇 반란군은 간신히 웃고 있었다. 그러나 마흐노 본인은 침울하게 침묵하며 감정을 다스리려 했다. “그렇소, 형제들,” 마르첸코가 말을 이었다. “우리는 이제 드디어 공산주의자가 어떤 것인지 알게 되었소.”라고 덧붙였다.
곧바로 총회가 열렸다. 크림반도에서의 사건이 다시금 전해졌다. 그리하여 알게 된 것은 볼셰비키 참모의 지시로 훌랴이폴레에서 군사 회의에 참여하기 위해 파견된 육군 지휘관 카레트니크가 도중에 체포되었으며, 크림 군의 참모장 가브릴렌코(Peter Gavrilenko)도 그의 모든 참모 및 부대 지휘관들과 함께 같은 방식으로 당했다는 사실이었다. 그들은 모두 즉시 총살당했다. 심페로폴 문화 및 선전위원회는 군사 책략조차 없이 체포되었다. 그리하여 크림반도에서 승리를 거두었던 혁명반란군은 어제의 동맹이었던 볼셰비키에게 배반당하고 소멸했다.
내 경험은 이 사건들에 대한 더 많은 사실을 밝힌다. 하르키우에서 체포된 후 모스크바의 체카 형무소로 끌려온 나는 어느 날 체카 비밀 작전부장이었던 삼소노프(Samsonov)의 부름을 받았다. 그는 나를 심문하는 대신 원칙에 관한 토론으로 끌어들였고, 이렇게 우리는 우크라이나에서의 사건에 관해 이야기하게 되었다. 나는 그에게 마흐노주의 운동에 대한 볼셰비키의 행동은 배반이라 생각한다고 직설적으로 말했다.
그가 활기 있게 대답했다. “아, 당신은 그것을 배반이라 합니까? 그건 당신의 뿌리 깊은 순진함을 보여주는 것일 뿐이오. 우리 볼셰비키가 보기에는 혁명이 시작된 이래 많은 것을 배웠고, 이제는 정말 유능한 정치인이 되었다는 증거라고 봅니다. 이번에 우리는 우리가 희생양이 되게 내버려 두지 않았소. 우리는 마흐노가 필요할 때 그를 이용했고, 더 이상 그의 도움이 필요하지 않게 되고 성가신 존재가 되자 그를 완전히 제거했소.”
삼소노프의 말은 볼셰비키의 행동과 모든 음모에 대한 진짜 이유를 완전히 인정하는 것이었다. 이는 국가 공산주의의 실체를 이해하고자 하는 모든 이들의 머릿속에 새겨져야 한다.
권위와 혁명 사이 이 죽음의 투쟁 마지막 극적인 사건들을 간략히 다루는 일이 우리에게 남아있다. 우리는 앞서 볼셰비키의 치밀한 준비와 갑작스러운 공격에도 불구하고 마흐노가 다시 한번 그들로부터 탈출했음을 말했다. 11월 26일 훌랴이폴레가 적군에게 포위되었을 때, 그곳에는 약 250명의 마흐노주의 특수기병대(마흐노를 포함한)만이 있었다. 수적으로는 보잘것없으나 분노로 자극받은 이 소수의 병사와 함께, 마흐노(당시 병이 거의 회복되지 않았으며, 상처로 고통받고 있었고, 최근에는 발목 골절까지 당했다)가 역습을 개시했다. 그는 우스페노우카Uspenovka에서 훌랴이폴레로 진격하던 적군 기병 연대를 간신히 물리쳐 적의 손아귀에서 벗어났다.
그는 곧 볼셰비키를 떠나 그와 합류하러 온 일부 적군뿐만 아니라 사방에서 몰려드는 반란군 부대를 조직하는 데 매진했다. 그는 1천 명의 기병과 1천5백 명 보병으로 구성된 부대를 꾸려 반격을 시도했다. 여드레 후, 그는 적군 제42사단을 격파하고 거의 6천 명이나 포로를 사로잡아 다시금 훌랴이폴레의 주인이 되었다. 포로 가운데 약 2천 명이 혁명반란군에 입대할 의사가 있다고 밝혔다. 나머지는 대중 집회에 참석한 뒤 같은 날 풀려났다. 사흘 뒤 마흐노는 안드리이우카Andriivka 부근 볼셰비키에게 또 한 번 처참한 패배를 안겨주었다. 그는 밤새, 그다음 날까지 적군 두 개 사단과 싸워 물리치고 다시 8천에서 1만 명가량의 포로를 사로잡았다.
마흐노는 그런 다음 코마르Komar와 콘스탼티니우카Kostiantynivka, 그리고 베르댠스크 근처 적군에게 연속해 세 번의 타격을 입혔다. 볼셰비키 보병은 마지못해 싸우며 기회가 될 때마다 항복했다.
“아르시노프는 우리에게 이렇게 말했다. “적군 병사들은 포로로 잡히자마자 풀려났다. 그들은 집으로 돌아가 더 이상 사람들을 억압하는 권력의 도구로 봉사하지 말라는 권고를 받았다. 그러나 마흐노주의자는 즉시 이동해야만 했기에 풀려난 포로는 며칠 뒤 다시 각자의 부대로 복귀했다. 실제로 소비에트 당국은 마흐노주의자에 의해 해방된 적군 병사를 다시 붙잡기 위한 특별위원회를 조직했고, 그들은 탈출할 수 없는 마법의 원 안에 갇혔다. 볼셰비키의 경우 절차가 훨씬 더 간단했다. 대對마흐노주의 투쟁 특별위원회의 명령에 따라, 모든 마흐노주의자 포로는 그 자리에서 바로 총살되었다.”(전게서, p.315)
얼마간 마흐노주의자는 그들이 승리하고 있는 듯하다는 생각에 고무되었다. 2개 혹은 3개 볼셰비키 사단만 물리치면 상당수 적군이 그들에게 합류하고 나머지는 북쪽으로 후퇴할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곧 여러 지역의 농민이 볼셰비키가 반란군을 추격하는 데 그치지 않고 정복한 마을로부터 주로 기병으로 구성된 연대를 꾸리고 있다는 소식을 전했다.
실제로 마흐노는 곧 훌랴이폴레 남쪽의 페도로우카Fedorovka에서 여러 보병과 기병 사단에 포위되었다. 전투는 새벽 2시부터 오후 4시까지 쉬지 않고 계속되었다. 마흐노는 적의 대열을 뚫고 동북쪽으로 탈출하는 데 성공했다. 그러나 사흘 뒤 그는 콘스탼티니우카 마을 근처에서 매우 많은 수의 기병대와 강력한 포병대에 맞서 또 다른 전투를 치러야 했다. 포로로 붙잡은 몇몇 장교들로부터 마흐노는 둘은 기병대, 둘은 혼성으로 구성된 네 개 사단이 있으며, 적군 지휘관이 몇 개 추가 사단의 도움으로 그를 포위하고자 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이 정보는 농민들이 제공한 것뿐만 아니라 마흐노 자신의 정찰 결과와도 완벽하게 일치했다. 무슨 수를 써서라도 성과를 얻고자 반란군에 맞서 대규모로 집결된 병사의 수를 볼 때, 적군 사단 두세 개에 대한 승리는 무의미하다는 것이 점점 더 분명해졌다. 이는 이제 볼셰비키 군대에 대한 승리를 거두는 문제가 아니라 반란군의 완전한 궤멸을 피하는 것에 대한 문제가 되었다. 약 3천 명으로 줄어든 이 군대는 매일 인원과 무기가 네다섯 배 우세한 적들과 싸워야만 했다. 이 상황에서 대참사의 발생은 더 이상 의심의 여지가 없었다.
혁명반란군 총회는 남부 지역에서 임시로 포기하기로 했고, 마흐노는 어디로든 총퇴각의 방향을 정할 수 있게 되었다.
“아르시노프는 말한다. “마흐노의 천재성이 가장 큰 시험을 앞두고 있었다. 작은 규모의 반란군을 향해 사방에서 진격해오는 거대한 군사망을 탈출하는 것은 결코 불가능해 보였다. 3천 명의 혁명적 투사는 최소 5만 명의 군대에 둘러싸여 있었다. 하지만 마흐노는 한순간도 용기와 침착을 잃지 않았다. 그는 이 거대한 부대들에 맞서 영웅적인 대결을 시작했다.
적군 사단들의 지옥 같은 포위망에 둘러싸인 그는 전설의 티탄처럼 진군해 전후좌우, 사방으로 전투를 벌였다. 적군의 여러 부대를 궤멸시키고 2만 명 넘는 포로를 잡은 뒤 마흐노는―마치 무턱대고 돌진하는 것처럼―비록 이 광산 지역 노동자들이 빈틈없는 병사들의 장벽이 기다리고 있다고 했음에도 유조우카Yuzovka 방향인 동쪽으로 먼저 방향을 잡더니, 그만이 알고 있는 환상적인 경로를 따라 서쪽으로 잽싸게 방향을 틀었다.
이때부터 평범한 길들은 완전히 버려졌다. 군대의 이동은 눈과 얼음으로 덮인 들판과 고원을 가로질러 수백 킬로미터나 계속되었다. 이 행군이 성공하기 위해서는 비범한 방향감각과 연습이 필요했다. 지도도 나침반도 그런 움직임에는 쓸모가 없다. 지도와 도구는 방향을 알려줄 수는 있었지만, 마흐노주의 군대는 한 번도 겪은 일 없는 계곡이나 급류에 빠지는 것을 막을 수는 없었기 때문이다. 언덕이 많고 길이 없는 대초원을 가로지르는 이 행군은 군대가 우크라이나 대초원이 어떻게 이루어져 있는지 완벽하게 알고 있었기에 가능했다.
이 훌륭한 기동으로 마흐노주의 군대는 적의 수백 대 대포와 기관총을 피할 수 있었다. 또한 이는 마흐노가 페트로베Petrove에서 백 킬로미터는 떨어진 곳에 있다고 믿고 있던 제1 볼셰비키 기병대의 2개 여단을 기습해 격파할 수 있게 했다.
이 일방적인 투쟁은 몇 달이나 지속되었고, 밤낮으로 끊임없이 전투가 벌어졌다. 키이우에 도착한 마흐노주의 군대는 겨울의 가장 추운 때에 언덕과 바위가 많은 지역에서 모든 포砲와 보급품, 탄약, 심지어 마차 대부분마저 포기해야 했다. 동시에 《붉은 카자크The Red Cossacks》라고 불리는 두 개의 적 기병 사단이 서쪽 국경에서 마흐노에 맞서 볼셰비키가 파견한 군대와 합류했다.
이제 탈출할 가능성은 전혀 없는 것처럼 보였다. 그곳은 죽음을 앞둔 것처럼 보일 정도로 자원이 없는 지방이었다. 극도로 천천히 전진할 수밖에 없는, 온통 얼음으로 뒤덮인 절벽과 가파른 협곡만이 있을 뿐이었다. 사방에서 끊임없이 대포와 기관총이 발사됐다. 마흐노주의자 중 누구도 다시 안전하게 탈출할 수 있을 것이라 기대하지는 못했으나, 부끄럽게 줄행랑쳐 흩어질 생각은 하지 않았다. 그들은 단호히 함께 죽고자 했다.
절벽과 하늘과 적의 포탄 사이에서 홀로 마지막까지 싸울 준비를 한, 마치 사형 선고를 받은 듯한 이 적은 사람들을 보는 것은 이루 말할 수 없을 만큼 슬픈 일이었다. 가슴이 찢어지는 비탄, 치명적인 고뇌가 나를 사로잡아 절망의 비명을, 그렇다, 온 우주에 비명을 지르게 했다. 끔찍한 범죄가 저질러질 것이라고, 사람들의 마음속에서 가장 위대한 것, 역사의 영웅적 세기에 사람들이 만들어낸 가장 고귀하고 숭고한 것이 파괴되려고, 영원히 파괴되려 하고 있었다.
마흐노는 운명이 그에게 부과한 시험에 명예롭게 맞섰다. 그는 할리치냐Galicia 국경 지역으로 진군해 키이우로 돌아가 그 도시 근처의 드니프로 강을 다시 건너, 폴타바 지방으로 내려갔다가 하르키우로 내려간 뒤 다시 쿠르스크를 향해 다시 북쪽으로 방향을 틀었고, 이 지점과 벨로흐라드Belograd 사이 철로를 따라 적진에서 훨씬 더 유리한 곳으로 빠져나가 그를 추격하기 위해 파견된 많은 볼셰비키 사단을 멀찌감치 남겨두었다.”(전게서 pp.317~320)
마흐노의 군대를 제거하려던 이 시도는 실패했으나 소수 반란군과 소비에트 국가 군대 사이의 일방적인 싸움은 끝나지 않았다. 볼셰비키 사령부는 그들의 목표를 계속 좇았다―마흐노주의 운동의 중핵을 사로잡아 파괴하는 것을. 우크라이나 전역의 적군 사단이 반란군 잔당을 추격하고 고립시키기 위해 파견되었다. 이윽고 사악한 강철이 소수의 영웅적 혁명가들을 조여들었고 사활을 건 투쟁이 다시 시작되었다. 우리가 직접 이 희곡의 결말을 직접 말하기보다 아르시노프의 책에서 인용한, 마흐노가 러시아를 떠난 뒤 그에게 보낸 편지를 여기 다시 옮기는 편이 나을 것이다. 그것은 그 투쟁의 마지막 격동을 훌륭하게 보여준다.
“내 사랑하는 벗, 자네가 떠난 지 이틀 뒤 나는 쿠르스크 지방의 코로차Korotcha 마을을 점령했네. 나는 자유 소비에트 헌법을 수천 부 인쇄해 바프냐르카Vapniarka와 돈 지역을 거쳐 예카테리노슬라프와 토리드 주를 향해 출발했네. 한쪽으로는 우리를 서서히 따라붙는 공산주의 보병대에 맞서, 다른 한쪽으로는 볼셰비키 참모가 파견한 제2 기병대에 맞서 나는 매일 격렬한 전투를 치러야 했지.
자네는 우리 기병들을 잘 알고 있겠지. 적군 기병대는 보병과 장갑차의 지원을 받지 않는 한 결코 그들을 붙잡을 수 없네. 그 덕분에 나는 큰 손실이 없는 것은 아니었으나 방향을 바꾸지 않고 돌파할 수 있었지. 우리 군대는 진정 대중적이고 혁명적인 군대라는 것을 매일 보여주었네. 그들이 견뎌야 했던 물질적인 여건에서라면 그들은 곧바로 녹아 없어지듯 사라져야 했지만 오히려 인력과 자원이 끊임없이 늘어났다네.
우리가 싸웠던 치열한 전투 가운데 하나에서 우리 기병대 특수 분대는 서른 명의 전사자를 냈는데, 그중 절반은 지휘관이었고, 그 가운데는 우리의 소중하고 좋은 친구―나이는 젊으나 군사적 업적은 뛰어난―분대의 지휘관 가브리엘 트로얀(Gabriel Troian)도 있었네. 그는 기관총에 맞아 즉사했지. 그의 곁에서 아폴론(Appolon)과 다른 용감하고 헌신적인 동지들도 쓰러졌네.
훌랴이폴레로부터 조금 떨어진 곳에서 우리는 브로바(Mikhail Brova)와 파르호멘코(Artem Yakovlevich Parkhomenko)의 지휘를 받는 기백이 넘치는 신규 편성 부대와 합류했네. 얼마 뒤 부됸니(Semyon Mikhailovich Budyonny)의 제4 기병 사단 제1 여단이 지휘관 마슬라크(Maslak, Grigory Savelievich Maslakov)를 필두로 우리 쪽으로 넘어왔지. 볼셰비키 권위와 전제주의에 대한 투쟁은 더욱 치열해졌네.
1921년 3월 초[35] 나는 브로바와 마슬라크에게 나와 함께 있던 부대 중에서 돈과 쿠반으로 진격할 특수부대를 편성하라고 했네. 또 다른 무리는 파르호멘코의 지휘 아래 편성되어 그가 사망한 보로네시Voronezh 지역으로 보내졌지. 6백 명의 기병과 이바뉴크(Ivanyuk)의 연대로 구성된 세 번째 무리는 하르키우로 파견했네.
거의 같은 시기에 우리의 가장 좋은 동지이자 혁명가인 브도비첸코(Vdovichenko)는 전투에서 부상 당해 치료를 위해 소규모 분대와 함께 노보스파시우카Novospasivka로 이송됐네. 그들의 은신처는 볼셰비키 선발대에 의해 발각됐고, 브도비첸코와 그의 전우 마트로센코(Matrossenko)는 그들이 붙잡힐 상황임을 깨닫고 스스로 방아쇠를 당겼네. 마트로센코는 즉사했지만 브도비첸코의 총알은 두개골 아래, 목 위에 박혔네. 공산주의자들은 그가 누구인지 알고는 그를 치료해 일시적으로 그의 죽음을 막았지. 그는 알렉산드로프스크에 있는 병원에서 동료들에게 그를 구할 방법을 찾아달라고 간청했네. 그는 극악무도한 고문을 당했다네. 볼셰비키는 그가 마흐노비주의를 포기하고 포기했다는 취지의 문서에 서명하게 하려고 노력했네. 그는 비록 너무 약해져 거의 말을 할 수 없었지만, 그들의 제안을 경멸스럽게 거절했다네. 이 거절 때문에, 그는 언제든지 총에 맞았을 수 있지. 하지만 나는 그에게 그런 일이 일어났는지 아닌지 알 수 없었네.
이때 나는 드니프로 강을 가로질러 니콜라예프를 급습했네. 그 뒤 페레코프를 통해 드니프로 강을 다시 건너 우리 지역으로 이동했지. 나는 우리 측 분대와 만나기를 바랐네. 하지만 공산주의 사령부는 나를 잡기 위해 멜리토폴 부근에 매복을 준비해두었지. 눈이 녹기 시작하고 강이 떠다니는 얼음 조각으로 덮여 있어서 드니프로 강을 다시 건너거나 전진하는 것은 불가능했네. 우린 싸워야 했고, 그 말인즉 내가 다시 안장에 앉아 직접 작전을 지휘해야 한다는 뜻이었지.[36]
우리 병사들은 능숙하게 방향을 틀어 적 부대 부분 부분을 피했고, 나는 다른 이들에게 24시간 내내 경계 태세를 굳게 유지하도록 하며 우리 정찰대로 그들을 괴롭혔네. 이 기간 사이 나는 60베르스타를 강행군해―3월 8일 새벽―몰로치니Molochnyi 호수 기슭에 진을 치고 있던 제3 볼셰비키 군을 물리치고, 이 호수와 아조프해 사이의 좁은 곶을 가로질러 베르흐냐와 토크마크Tokmak 지역의 공터에 간신히 도착했다네. 그곳에서 나는 쿠릴렌코를 베르댠스크, 멜리토폴 지역으로 보내 그곳의 반란 운동을 지휘하게 했네. 나 자신은―훌랴이폴레를 지나갈 목적으로―체르니고프 주로 향했는데, 여러 지역의 농민 대표단이 와서 그들 지역을 방문해 달라 부탁했기 때문일세.
이 여정에서 내 부대―페트렌코 휘하 1천5백 명 기병과 보병 2개 연대―는 강력한 볼셰비키 사단에 둘러싸여 멈추었네. 이번에도 내가 직접 역습을 지휘해야 했지. 우리는 적군을 철저히 물리쳤고, 무기, 총, 탄약, 말을 탈환했을 뿐만 아니라 많은 포로를 잡는 성공을 거두었네.
하지만 이틀 뒤, 우리는 매우 용감한 신규 부대의 공격을 받았네. 이런 일상적인 전투에 우리 병사들은 그들 목숨에 거의 가치를 두지 않는 데 익숙해져서, 비범하고 숭고한 영웅적 업적 역시 일상적인 것이 되었다는 것을 말해야겠네. ‘자유로운 삶 아니면 죽음을!’이라는 외침과 함께, 병사들은 적 부대에 아랑곳하지 않고 몸을 던져 자신들보다 훨씬 강한 적진을 뒤엎어 달아나게 했지. 어리석을 정도로 대담했던 이번 반격 중에 나는 허벅지를 뚫고 맹장 근처 배를 관통한 총알에 맞았네. 나는 말에서 떨어졌고, 전투 경험이 부족했던 병사 하나가 ‘아버지Batko가 죽었다!’고 외치는 바람에 우리 병사들의 사기가 꺾였지. 이로 인해 우리 반격은 실패했고, 퇴각할 수밖에 없었네.
그들이 내 상처를 봉합할 때까지 수레 같은 것으로 십여 베르스타를 끌었고, 나는 많은 피를 흘렸네. 나는 레우 진코우스키(Lev Nikolaevich Zinkovsky)의 경호를 받으며 의식을 잃은 채 있었지. 이게 3월 14일이었네. 15일 밤, 나는 의식을 되찾았다네. 우리 군대의 모든 지휘관과 참모가 빌라시(Viktor Fedorovich Belash)를 필두로 내 머리맡에 모여 각지에서 반란 운동을 지휘하던 쿠릴렌코, 코진 등에게 백에서 2백 명 규모의 분대 파견 명령에 서명해 달라고 했네. 그들은 내가 다시 안장에 앉을 수 있을 때까지 1개 연대와 함께 비교적 조용한 곳에서 요양하기를 원했지. 나는 파견 명령에 서명하고 자부드코(Mefodisiy Vlasovich Zabudko)에게 나와의 연락을 유지하는 조건으로 아군 지역에서 독립적인 유격대를 편성하게끔 했네. 3월 16일 아침이 되자 나와 함께 있던 작은 소규모 특수부대를 제외하고 이 모든 분대는 이미 떠난 상태였네.
이 순간 적군 제9 기병 사단이 우리 진지를 습격해 우리는 진을 거둘 수밖에 없었네. 그들은 13시간 동안 180베르스타에 걸쳐 우리를 추격했네. 마침내 아조프해 연안 슬로보다Sloboda에 도착하자마자 우리는 말을 갈아타고 5시간 동안 멈출 수 있었네. 3월 17일 새벽, 우리는 노보스파시우카를 향해 행군을 재개했다네. 그러나 17베르스타 뒤, 우리는 새로 편성된 지 얼마 안 되는 적 기병대를 만났지. 쿠릴렌코를 쫓다가 놓친 그들은 우리를 덮쳤네. 그 기병대는 25베르스타 동안 우리를 쫓은 뒤(우리는 완전히 지쳐 정말 싸울 수가 없었네) 우리에게 과감하게 달려들었지.
무엇을 할 수 있었을까? 나는 안장에 오르는 것뿐 아니라 상체를 일으켜 앉는 것조차 할 수 없었네. 수레 바닥에 눕혀져 있던 나는 2백 야드 떨어진 곳에서 끔찍한 백병전이 펼쳐지는 것을 보았네. 우리 병사들은 나를 위해서, 단지 나를 포기하지 않으려 죽었다네. 하지만 결국에는 그들도 나도 안전할 수 없었지. 적은 끊임없이 도착하는 새 증원군 덕분에 대여섯 배 더 강했다네.
그곳에는 베르댠스크 근처 체르니곱카Chernigovka 마을의 미샤(Micha)의 지휘 아래 있는 기관총 5대가 있었네, 자네가 나와 함께 하던 때 가지고 있던 총들이지. 나는 이 기관총 사수들이 급히 내 수레 쪽으로 오는 것을 보았네. 그 병사들이 내게 이렇게 말했네. ‘아버지Batko, 당신 목숨은 우리 대의와 농민운동을 위해 없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이 대의는 우리에게 소중합니다. 우리는 곧 죽겠지만, 우리 죽음은 당신과 당신을 충실히 돌보아 줄 사람들을 구할 겁니다. 우리 부모님께 우리의 이 말을 꼭 전해 주십시오.’ 그들 가운데 한 명이 나를 껴안았고, 나는 더 이상 내 근처의 그들 중 누구도 볼 수 없었네. 잠시 후, 레우 진코우스키는 나를 품에 안고 근처에서 죽은 농민의 수레로 갔네. 멀리에서 기관총이 내는 큰 소리와 폭탄이 터지는 소리를 들었네. 우리 병사들이 볼셰비키의 발을 묶고 있었지. 우리는 3~4베르스타를 이동해 강을 건널 시간을 벌었네, 나는 살아남았네. 하지만 우리 기관총 사수들은 모두 그곳에서 죽었지.
얼마 뒤 우리는 다시 그곳을 지났고, 스타로두보우카Staroduvovka 마을 농민들은 기관총 사수들을 묻은 공동묘지를 보여주었네. 사랑하는 벗이여, 나는 아직도 그 용감한 투사들, 소박하고 정직한 농민들을 생각하면 눈물을 참을 수가 없네. 나아가 나는 이 사건이 나를 치유하는 것 같았다는 점을 자네에게 말해야겠네. 그날 저녁, 나는 다시 안장에 올라타 그곳을 떠났네.
4월에 나는 우리 군의 모든 부대와 다시 연락을 취했고, 근처에 있던 이들을 폴타바 지역으로 보냈네. 5월에는 코진과 쿠릴렌코의 부대가 합류해 2천 명의 기병과 몇몇 보병 연대를 구성했지. 하르키우를 향해 공산당의 거물급 간부들을 쫓아내기로 결정됐네. 하지만 그들은 경계를 늦추지 않고 있었지. 그들은 60대가 넘는 장갑차와 여러 기병대 사단, 많은 보병을 보내 나를 맞았다네. 이들과의 전투는 몇 주 동안 계속되었네.
한 달 후 슈스 동지는 똑같이 폴타바 지역에서 전투에서 전사했네. 그는 당시 자부드코 군의 참모장이었네. 그는 용감하게 의무를 다했네. 그리고 한 달 뒤에는 쿠릴렌코의 차례였네. 그는 철로를 따라 행진하는 아군을 엄호했고, 부대 주둔을 직접 맡았으며, 항상 선두에 섰지. 어느 날, 그는 부됸니의 기병 기습을 받고 그 싸움에서 전사했네.
5월 18일, 부됸니의 기병은 예카테리노슬라프 지역에서부터 돈 강을 향해 우리 동지들 브로바와 마슬라크(부됸니의 제1 여단 지휘관이었으나 그의 모든 부하와 함께 우리에게 합류한)가 지휘하던 농민 반란을 진압하기 위해 진군하고 있었네.
우리 군은 페트렌코-플라토노프의 지휘 아래 연합된 여러 분대로 구성되어 있었네. 주요 참모와 나도 이 무리의 일부로 편성되어 있었지. 그날 이 무리는 부됸니가 추격하는 데서 15~20베르스타 정도 떨어져 있었네. 무엇보다도 내가 항상 이 무리 가까이 있다는 것을 알았기에 부됸니는 그와 우리 사이의 짧은 거리에 조바심을 냈네. 그는 돈 지역 농민 진압에 투입하기로 되어 있던 장갑차 부대장에게 16대의 차량을 보내 노보스파시우카 마을을 봉쇄하라고 명령했지. 부됸니 자신은 제19 기병 사단(이전의 내무사단) 선두에 서서 노보스파시우카를 향해 들판을 가로질러 진군했네. 그는 협곡을 피하고, 여울을 조심하고 보초를 세워야만 했던 장갑차에 앞서 그곳에 도착했지. 정찰병들의 경계가 우리에게 이 모든 움직임을 눈치채고, 예방 조치를 취할 수 있게 해주었네. 부됸니가 우리 진영 시야에 도착한 순간, 우리는 맹공격을 퍼부었네.
선두에서 당당히 질주하던 부됸니는 곧바로 말머리를 틀었네. 그 부끄러운 겁쟁이는 동지들을 버리고 도망쳤지. 벌어진 전투는 마치 악몽과도 같았네. 우리에 맞서 보내진 적군 병사들은 그때까지 중부 러시아에 남아있던 부대들이었지. 그들은 확고한 내부 규율을 지키고 있었네. 그들은 우리를 알지 못했네. 그들은 우리가 흔한 도적떼라고 들었고, 범죄자들 앞에서 물러서지 않는 것을 명예로 여겼네. 한편 반란군은 스스로 옳다고 여기며 적을 무찌르고 무장 해제시키기로 단호히 결의했지. 이 전투는 우리의 모든 전투 가운데 전무후무하게 치열했네. 결국 부됸니의 군대는 완전히 패해서 부대가 해산되고 많은 병사가 탈영했네.
그 후 나는 이전 시베리아인으로 구성된 부대를 조직해 무장하고 보급을 갖춘 그들을 글라수노프(Glasunov) 동지 지휘 아래 시베리아로 보냈네. 1921년 8월 초, 우리는 볼셰비키 언론을 통해 이 부대가 사마라Samara 지역에 나타났다는 것을 알게 되었네. 이후로 그들에 대한 더 이상의 언급은 없었네. 1921년 여름 내내 우리는 싸움을 멈추지 않았네. 그 해 극심한 가뭄과 그로 인한 예카테리노슬라프, 토리드, 그리고 헤르손과 폴타바 일부 지역과 돈 지역의 흉작으로 인해 한쪽은 쿠반과 차리친, 사라토프Saratov 아래로, 나머지는 키이우와 체르니고프로 이동해야만 했지. 키이우와 쳬르니고프로 향한 행군은 코진 동지가 맡았네. 우리가 다시 만났을 때, 그는 체르니고프 농민이 취한 결의안 다발을 내게 주었네. 이 결의안에는 그 지역 농민들이 우리의 투쟁을 전적으로 지지하기를 원한다고 밝혀져 있었지. 나는 자부드코와 페트렌코 동지의 부대와 함께 볼가Volga 강을 건너 습격했네. 그런 다음 돈 강을 건너 철수했는데, 여러 아군 부대를 만나게 되어 그들을 아조프에서 온 브도비첸코의 옛 부대에 합류시켰다네.
1921년 8월 초, 내가 입은 부상의 심각성을 고려해 나는 몇몇 지휘관과 함께 집중적으로 치료받기 위해 외국으로 떠나기로 했네. 우리의 최고의 지휘관―코진, 페트렌코, 자부드코―도 비슷한 시기 중상을 입었네. 8월 13일, 기병 백 명을 대동하고 드니프로 방면으로 출발해 16일 아침, 17척의 어선의 도움을 받아 오를크Orlik와 크레멘추크Kremenchuk 사이의 강을 건넜네. 이날 나는 여섯 차례 부상을 입었지만 모두 가벼운 것이었네. 가는 길에 우리는 아군 부대원 몇 명을 만났고, 그들에게 우리가 외국으로 떠나는 이유를 설명해 주었네. 그들은 모두 같은 말을 했지. ‘가서 쾌차한 뒤, 아버지Batko, 돌아와 우리를 구해주십시오.’
8월 19일, 우리는 보브리네츠Bobrynets에서 12베르스타 떨어진 인훌레츠Inhulets 강을 따라 진을 치고 있는 적군 제7 기병 사단과 맞닥뜨렸네. 우측에는 우리를 발견한 기병대가 퇴로를 차단하기 위해 진군하고 있었기 때문에 돌아갈 수는 없었네. 그래서 나는 진코우스키에게 나를 말에 태워달라고 부탁했지. 순식간에 우리는 검을 뽑고 함성을 지르며 마을에 몰려있던 사단의 기관총을 향해 돌진했네. 우리는 겨우 맥심 기관총 13대와 루이스 경기관총 3자루를 손에 넣었지. 이렇게 우리는 여정을 계속할 채비를 했네. 하지만 우리가 기관총을 손에 넣자마자 사단 전체가 우리를 공격했네. 우리는 쥐덫에 걸렸네. 하지만 우리는 용기를 잃지 않고 제38 연대와 사단을 공격해 승리했네. 통로를 뚫은 우리는 이 모든 군대의 맹렬할 공격으로부터 끊임없이 스스로를 방어하며 멈추지 않고 110베르스타를 달렸지. 우리는 가까스로 탈출했지만 17명의 전우를 잃은 후에야 비로소 탈출할 수 있었네.
8월 22일, 그들은 나를 다시 한번 돌봐야 했네. 총알이 내 목을 관통해 오른쪽 볼로 나왔지. 다시 한번 나는 수레 바닥에 눕게 됐네. 26일, 우리는 적군과 새로이 전투를 치러야만 했네. 우리는 최고의 동지이자 투사인 페트렌코-플라토노프와 이바뉴크를 잃었네. 나는 마지막으로 우리 일정을 변경할 수밖에 없었고, 8월 28일 드니스테르Dniester 강을 건넜네. 이렇게 나는 외국으로 왔네….”
이렇게 하여 1921년 말, 정당이나 당국, 억압적 체제의 역사가 아닌 대중의 역사 한 부분을 대표했던 우크라이나의 위대한 대중 희곡이 막을 내렸다. 이러한 이유로, 아니 정확히 이 패배 때문에, 러시아 밖에서는[37] 모든 당국 “초인”과 그 추종자들이 이 사건의 진실을 숨겼다는 가능성에 대한 의심은 제기되지도 않는다. 역사적 진실은 이 피그미족을 그들의 찰흙 받침대에서 내려놓을 것이다. 진정한 대중 혁명이 언젠가는 권력을 휘두르는 “초인”을 모조리 쓸어낼 것이다. 그렇게 되면 진실을 알고 행동하는 이들이 대중의 참된 역사를 써 내려갈 수 있을 것이다.
거느리고 있는 수많은 사단과 가장 끔찍한 억압과 폭력적 수단을 사용하는 데 망설이지 않고, 공산주의 정부는 재빨리 전역을 떠돌던 마흐노주의 부대 잔당을 소탕하고 해산하는 데 성공했다. 또한 서남부에 남아있던 소수의 페틀류라주의 군대뿐만 아니라 새로운 주인에 반항하며 들고 일어나거나, 이들의 견딜 수 없는 형벌을 피해 산으로 피신한 매우 다양한 성격의 수많은 농민 분대의 저항도 소탕했다.
마흐노와 그와 함께 외국으로 피신했던 소수의 전우는 다시는 그들이 태어난 땅을 보지 못했다.
우크라이나 전체가 볼셰비키 독재에 정복당했다.
제7부. 마흐노와 그의 동지들의 운명. 에필로그
여기에서는 에필로그의 형식으로, 탄압의 최종장과 일부 마흐노주의자 투사들의 개별 운명에 관한 세부 사항을 언급하도록 하겠다.
마흐노주의자에 대한 볼셰비키의 세 번째이자 마지막 전쟁은 또한 명백히 우크라이나 농민 전체에 대한 전쟁이었다.
그들의 목표는 반란군을 궤멸하는 것뿐 아니라 반항적 대중 전체를 복종시켜 다시 무기를 들고 새로운 운동을 탄생시킬 기회 자체를 제거하는 것이었다. 그들의 목적은 바로 반란의 씨앗을 뿌리 뽑는 것이었다.
적군 사단은 반란 지역의 모든 마을을 조직적으로 돌아다니며 종종 부유한 지역 농민(쿨라크)이 제공한 정보에 기초해 많은 수의 농민을 몰살했다.
홀랴이폴레, 노보스파시우카, 우스페노우카, 말라 토크마치카, 폴로히Polohy 등 지역의 큰 마을에서 수백 명의 농민이 총살되었다.
살인에 굶주린 체카 요원들은 곳곳에서 반란군의 아내들과 아이들을 총살했다.
이 “탄압” 활동은 남부 전선 총사령관 프룬제가 지휘했다. 그는 이 작전을 개시하기 전, 그는 남부 전선 군대들에 보낸 명령서에 “우리는 둘을 세기 전에 마흐노우슈치나를 박멸해야 한다”고 적었다. 그리고 그는 스스로를 숙련된 전사처럼 여기며 자신이 정복자, 새로운 귀족인 마냥 죽음과 황폐를 주변에 뿌리며 “이 무지크 무리”를 대했다.
그리고 이제 우리는 우크라이나 대중운동에 참여한 몇몇 이들의 개별 운명에 대해 간단히 언급하도록 하겠다.
세레긴(Sereguin)은 농민이자 1917년부터 아나키스트였다. 그는 처음부터 반란에 참여했고, 대부분 기간 동안 마흐노주의 군대의 보급 부문 책임자였다. 우리는 그가 어떻게 되었는지 모른다.
우리가 간략히 언급할 다른 마흐노주의자들은 다음과 같다. 아나키스트 노동자 부다노프(생사 불명), 교사 첸노크니즈니(Tchennkoknijny)(생사 불명), 노동자였던 추벤코 형제(생사 불명), 농민 세라다(Serada)(브란겔과의 전투 중 심각한 부상을 입고 아직 마흐노와 협력적이던 볼셰비키에 의해 병원에 입원, 1921년 3월의 결별 후 특히 가증스러운 상황 아래 볼셰비키에 의해 사살), 가르쿠차(Garkucha)(1920년 피살), 콜리아다(Koliada)(1920년 피살), 클라인(생사 불명), 데르멘지(생사 불명), 프라우다(Pravda)(생사 불명), 본다레츠(Bondaretz)(1920년 피살), 브로바(1920년 피살), 자부드코(피살), 마슬라크(생사 불명), 트로이안(Troian)(피살), 골리크(Golik)(생사 불명), 테헤레드냐코우(Teheredniakov)(총살), 도첸코(생사 불명), 코발(Koval)(생사 불명), 파르코멘코(Parkomenko)(피살), 이바뉴크(피살), 타라노우스키(피살), 포포프(총살), 도마첸코(Domachenko)(생사 불명), 티첸코(Tykhenko)(생사 불명), 부리마(Buryma)(생사 불명), 추마크(Tchumak), 크라트(Kratt), 코간(Kogan) 등 우리를 떠나간 수많은 다른 이들의 이름들.
이들 모두는 수천의 이름이 알려지지 않은 투사들과 마찬가지로 노동 대중 최하위층 출신이었다. 이들 모두는 혁명의 순간에 모습을 드러냈고―마지막 숨을 거둘 때까지 노동자의 진정한 대의에 복무했다. 그들 생애에는 그 대의 외에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았다. 그들 각자도, 그리고 거의 항상 그들의 가족과 더불어 그들의 빈약한 소유도 함께 파괴되었다. 이 숭고한 대중혁명을 “쿨라크 폭동” 또는 “도적질”이라고 묘사하기 위해서는 볼셰비키의 뻔뻔함, 무례함, 비열함, 즉 벼락출세한 “정치가”라는 비열한 종족이 필요하다.
우리는 또 다른 사건, 극악무도한 다른 사건을 이야기해야만 한다.
마흐노주의자와 볼셰비키 간 협정 당시 보구시는 하르키우에 있었다. 전설적인 훌랴이폴레에 대해 많은 이야기를 들은 그는 곧장 마흐노우슈치나를 연구하고 싶어 했다. 안타깝게도 그는 단 몇 시간만 자유 훌랴이폴레를 볼 수 있었다. 협정 파기 직후 그는 하르키우로 돌아왔다. 그곳에서 그는 체카에 체포되어 1921년 3월에 총살당했다.
이 처형은 오직 한 가지 설명만이 가능하다. 볼셰비키는 해외와의 연줄을 가지고, 그들의 마흐노주의자에 대한 그들 침략의 진실을 알고, 이를 러시아 바깥에 폭로할 수 있는 단 한 사람도 살아남기를 원하지 않았다고 말이다.
병들고, 많은 부상에 시달리고, 그 나라의 언어를 모르고, 익숙했던 것과는 너무나 다른 환경에 적응하기 어려웠던 그는 파리에서 물심양면으로 어려운 삶을 보냈다. 그의 외국 생활은 길고 단지 길고 비참한 고통에 지나지 않았고, 그에 대항할 힘도 없었다. 그의 친구들이 이 슬픈 쇠락의 세월의 무게를 지탱할 수 있게 도와주었다.
때때로 그는 어떤 활동을 시도했다. 특히 그는 우크라이나에서 그의 투쟁과 혁명의 역사를 집필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는 그것을 끝마치지는 못한 채 1918년 말 그 시도를 중단했다. 저자가 살아있을 때 1권(러시아어 및 프랑스어)이 출간되었고, 사후 2, 3권(러시아어로만)이 출간되었다.
그의 건강은 급격히 악화되었다. 테논Tenon 병원에 입원한 그는 1935년 7월에 그곳에서 사망했다. 그는 페르 라셰즈 묘지Père Lachaise Cemetery에서 화장되었는데, 거기서 여전히 그의 유골이 담긴 항아리를 볼 수 있다. 그는 과부가 된 아내와 딸을 남겼다.
끝을 맺기 전에, 마흐노주의 운동을 비난하고 혁명반란군과 마흐노의 명성을 더럽히기 위해 퍼뜨린 중상모략―볼셰비키 및 다른 이들이 퍼뜨린―을 반박할 필요가 있다. 또한 마흐노주의와 그 운동을 시작하고 이끈 사람들의 진솔한 약점과 결점을 보다 면밀히 조사할 필요가 있다.
우리는 이미 마흐노주의 운동을 도적질로, 마흐노는 도적으로 묘사하려는 볼셰비키의 대대적인 시도에 대해 언급했다. 지금까지 제시된 정보가 독자 스스로 이러한 중상모략에 대한 진실을 판단하는 데 충분했기를 바란다. 나아가 볼셰비키가 매우 능숙하게 사용하며 제시하는 거짓된 이야기에 진실성 비슷한 것을 부여한 일부 사실을 조사할 필요가 없었다면 나는 이 점을 굳이 강조하지 않았을 것이다.
지리적으로 매우 광범위했음에도 불구하고, 마흐노주의 운동은 자신만의 경계 안에 갇혀 다른 세계와 동떨어져 있었다. 대중으로부터 생겨난 운동이었기에 그것은 연출, 홍보, 또는 소위 영웅적 표현에 영향을 받지 않았다. 그것은 어떠한 정치적 행동도 성취하지 않았고 지배 엘리트층을 만들어내지 않았다. 형식적인 절차와 “상냥한 지도자”의 업적이 아닌, 진실되고, 구체적이며, 살아있는 운동으로서 그것은 “후세를 위해” 그 사상과 행동을 보존할 수 있는 문서들을 모을 시간이나 기회도, 심지어 그럴 필요조차도 없었다.
사방으로 무자비한 적들에 둘러싸여 휴전도 종전도 없이 공격받고, “정치인”과 그의 심복의 시끄러운 목소리 속에 휩쓸리고, 그리고 최고의 투사 가운데 적어도 열 명 중 아홉은 잃은 꼴의 이 운동은 어둠에 잠길 운명이었다. 그 때문에 그것의 본질을 밝히는 것은 쉽지 않다. 모든 혁명 시기 수많은 겸손한 영웅들이 영원히 알려지지 않은 채 남아있는 것처럼, 마흐노주의 운동 또한 거의 알려지지 않은 노동자들의 서사시로 남아있어야 한다는 것은 거의 불가피하다. 볼셰비키가 이러한 상황 및 그 상황으로 인해 생겨난 무지를 이 운동에 대해 자신들이 원하는 것을 말하고자 하는 데 악용했다는 것은 말할 필요도 없다.
이와 관련해 또 다른 중요한 점이 고려되어야 한다. 1917년에서 1921년 사이에 우크라이나의 삶을 완전히 와해한 불분명하고 혼란스러운 전투 동안, 수많은 무장 조직이 있었는데, 이들은 구조도 없고 조직되지도 않은 분자들로 이루어진 사기꾼, 약탈자, 도적의 지휘 아래 놓인 조직들이었다. 이 조직들은 위장술을 활용하는 것을 서슴지 않았고, 그들 “파르티잔”은 때때로 검은 리본을 매단 채 스스로 “마흐노주의자”라고 불렀다. 당연히 이는 많은 유감스러운 혼란을 야기했다.
이 단체들은 자신들을 파괴한 마흐노주의 운동과는 공통점이 없었다. 볼셰비키는 당연히 신념이나 도덕도 없는 이 도적과 반란군의 차이점을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이러한 혼란은 그들의 목적에 훌륭하게 부합했고, “노련한 정치가”로서 그들은 자신의 목적을 위해 그것을 이용했다.
여기서 우리는 마흐노주의자가 그들 군대에 대한 훌륭한 평판에 매우 염려하고 있었음을 강조해야 한다. 조심스럽게, 하지만 매우 우호적인 방법으로 그들은 투사 개개인의 행동을 예의주시했고, 일반 대중에 대해 올바르게 행동했다. 일반적인 정신, 정상적 수준을 유지할 수 없는 병사는 대열에 머무를 수 없었다.
이는 1919년 여름, 사기꾼 그리고리예프가 패배한 뒤 혁명반란군 진영에서 일으킨 일화에서 잘 드러난다. 이 전 차리스트 장교는 수천 명의 젊은 우크라이나 농민을 꾀어 볼셰비키에 대항한 상당히 광범위한 봉기에 가담시키는 데 성공했는데―이 봉기는 반동적이었으며, 반反유대인적이었고, 일부는 전리품에 대한 단순한 욕구에 영향을 받은 것이었다. 1919년 7월, 센토바Sentova 마을에서 마흐노와 그의 친구들은 그리고리예프를 공개회의에 초대해 그의 가면을 벗겨 본성을 드러냈다. 잔인하고 무지하며 마흐노주의자의 사고방식을 전혀 알지 못하는 그는 먼저 입을 열어 반동적인 연설을 했다. 마흐노의 답변을 들은 그는 자신이 졌다는 사실을 깨닫고 무기를 뽑으려 했다. 짧은 싸움 끝에 그와 그의 경호대는 패배했다.
그리고리예프를 따르던 젊은 농민 중 압도적 다수는 그럼에도 그들 우두머리가 악용해 왔던 혁명적 정신이 깃들어 있었기에 그들이 원한다면 마흐노주의 반란군에 합류할 수 있다고 결정되었다. 하지만 이 신병들은 거의 모두 후에 쫓겨나야만 했다. 그리고리예프 부대에서 나쁜 습관을 몸에 익힌 이 병사들은 마흐노주의자 투사들의 도덕적 수준에 도달할 수 없었다. 분명 마흐노주의자 투사들은 때가 되면 그들을 교육할 수 있으리라 생각했지만 당면한 조건에서는 그 일에 관여할 수가 없었고, 때문에 반란군의 명예를 훼손하지 않기 위해 그들을 제대시켰다.
마흐노주의 운동과 마흐노에 대한 여러 의견의 작가들에 의해 특히 수치스러운 중상모략이 저질러져 왔다. 그들 중 일부는 이를 의도적으로 퍼뜨렸으나, 대다수는 출처를 확인하거나 사실관계를 세밀히 조사하지 않고 이를 반복해 왔다.
마흐노주의자와 마흐노는 반유대주의 감정에 함몰되어 유대인을 추격하고 학살했으며, 심지어 그들이 대학살pogrom을 지원하고 조직했다는 주장이 있다. 조금이나마 더 신중한 이들은 마흐노가 “비밀스러운” 반유대주의자였으며, 그의 조직원들이 행한 악행에 동조하지는 않았더라도 묵인하고 눈감았다며 비난한다.
우리는 이러한 주장의 허위성에 대한 광범위하고 반박 불가능한 증거를 수십 페이지에 걸쳐 다룰 수 있다. 우리는 마흐노와 혁명반란군 총회가 공표한 반유대주의에 대한 비난 글과 선언문을 언급할 수 있다. 우리는 군대와 인민 중에서 단발적이고 잘못된 소수의 불운한 사람들이 아주 조금이라도 반유대인적 성향을 드러낸 것에 대해 마흐노 자신과 다른 동지들이 지시한 행동들에 대해 말할 수도 있다. 이러한 일이 일어났을 때 마흐노는 직접, 그리고 격렬하게 반응하는 데 주저하지 않았다.
마흐노주의자가 그리고리예프를 처형한 이유 가운데 하나는 그의 반유대주의 및 그가 옐리사베트흐라드에서 조직한, 약 3천여 명의 목숨을 앗아간 거대한 포그롬이었다. 그리고 반란군에 합류한 그리고리예프의 파르티잔들의 주된 해산 이유는 그들의 전 대장이 그들에게 주입한 반유대주의적 정신이었다.
우리는 일련의 유사한 사실들을 인용할 수 있지만, 이 주제를 지나치게 확대할 필요는 없다고 여기며, 다음과 같은 필수적인 사실들을 간략하게 언급하는 것으로 만족하도록 하겠다.
1. 마흐노주의 군대에서 상당히 중요한 부분을 유대계 출신 혁명가들이 담당했다.
2. 교육 및 선전위원회의 구성원 중 여럿은 유대인이었다.
3. 군대의 여러 부대에 있는 많은 유대인 전투원 외에도, 유대인 포병과 유대인 보병으로 구성된 포병 중대가 있었다.
4. 우크라이나의 유대인 공동체는 혁명반란군에 많은 자원입대자를 제공했다.
5. 대체로 우크라이나 인구 비율에서 매우 큰 비중을 차지한 유대인은 이 운동의 모든 활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마리우폴, 베르댠스크, 알렉산드로프스크 등지에 흩어져 있던 유대인 농업 공동체는 지역의 노동자, 농민, 파르티잔 협의회에 참여했다, 그들은 지역 《혁명 군사위원회》에 대표단을 파견했다.
6. 부유하고 반동적인 유대인들은 명확하게 유대인이라서가 아닌 비유대인 반혁명분자들과 똑같은 방식으로 마흐노주의 군대의 처벌을 받았다.
몇 년 전 파리에서 저명한 유대인 작가이자 역사학자인 체리코워(Elias Tcherikower)에게 마흐노주의와 반유대주의에 관해 인터뷰할 기회가 있었다. 나는 아래에 그의 답변을 옮긴 것이다.
체리코워는 혁명가도 아나키스트도 아니다. 그는 그저 꼼꼼하고 세심하며 객관적인 역사학자일 뿐이다. 수년 동안 그는 러시아 내 유대인 박해에 관한 연구를 전문으로 해 왔다. 그는 이 주제에 대한 기본적이고 매우 잘 정리되고 정확한 글을 여럿 발표했다. 그는 세계 각지에서 온갖 종류의 문서를 받았다. 그는 수백 건의 공식 및 비공식 증언을 들었고, 이것을 자신의 연구에 사용하기 전 사실관계를 철저히 확인했다.
다음은 마흐노주의 군대와 마흐노의 유대인 대중을 향한 태도에 대해 정확하게 알고 있는 것이 있는지에 대한 내 질문에 대한 그의 답변을 그대로 옮겨 놓은 것이다.
“나는 이 질문에 대해 여러 번 고민했습니다.” 그가 내게 말했다. “이는 앞으로 더 정확한 증언이 나올 경우를 대비해 늘 유보적인 태도를 취하며 내린 결론입니다. 군대는 항상 군대이기 마련이고, 필연적으로 과오와 비난받아 마땅한 행위를 저지르는데, 왜냐하면 그들은 건강하고 정상적인 삶을 빼앗기고, 그들의 사악한 충동을 방출하는 조건과 환경에 내던져지며, 심지어 아주 종종 어떠한 처벌도 없이 폭력을 사용할 수 있는 권한을 가진 집단을 구성하는 모든 개인을 통제하고 감독하는 것은 물리적으로 불가능하기 때문입니다. 당신도 나만큼이나 이 점을 잘 알 것입니다. 마흐노주의 군대도 이 규칙에서 예외가 아니었습니다. 그들 또한 때때로 비난받아 마땅한 행동을 저질렀습니다. 하지만 나는 전체적으로 볼 때 나는 마흐노주의 군대의 행동이 1917년에서 1921년 사이에 러시아에서 활동했던 다른 군대의 행동과는 비교할 수 없을 만한 것이었음을 확실히 말할 수 있게 되어 기쁩니다. 내가 확실히 증명할 수 있는 두 가지 사실이 있습니다.
하나. 적군을 포함한 모든 군대 가운데 마흐노주의자가 일반적으로 시민들, 특히 유대인과 관련해 가장 잘 행동했다는 것은 부인할 수 없습니다. 나는 이에 대해 수많은 증언을 보유하고 있습니다. 마흐노주의 군대에 대한 불만의 비율은 다른 군대들과 비교했을 때 무시할 만한 수준입니다.
둘. 마흐노가 직접 조직했다고 전해지는 포그롬에 대해서는 언급할 필요도 없습니다. 이는 중상모략이거나 오류입니다.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마흐노주의 군대에 대해서는, 나는 이 부분에 대한 단서와 고발을 보유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현재까지 사실을 확인하려 할 때마다, 나는 문제가 된 날에 마흐노주의 부대는 지목된 장소에 있을 수 없었으며 모든 군대가 그곳으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었음을 밝힐 수밖에 없습니다. 포그롬이 일어난 장소와 날짜에는 그 어떤 마흐노주의 부대가 활동하지도, 근처에 머물고 있지도 않았다는 사실을 나는 증거를 확인할 때마다 매번, 그리고 확실히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단 한 번도 나는 유대인에 대한 포그롬이 일어난 곳에서 마흐노주의 부대의 존재를 증명할 수 없었습니다. 따라서 문제의 포그롬은 마흐노주의자의 소행이 될 수 없습니다.”
공정하며 정확한 이 증언은 가장 중요한 것들 가운데 하나다. 이것은 무엇보다도 우리가 이미 언급한 사실인 도적떼의 존재, 온갖 악행을 저지르며 “마흐노주의자”를 사칭해 몸을 가려 유대인을 상대로 행하는 포그롬으로부터 얻을 수 있는 이익을 거부하지 않는 무리가 존재했다는 것을 확인해준다. 오직 꼼꼼한 검토만이 혼란을 해결할 수 있다. 일부 경우에는 사람들이 오해하고 있었다는 데 의심의 여지가 없다.
독자가 절대로 시선을 돌려서는 안 되는 또 하나의 사실이 있다. 우크라이나에서 일어난 대중혁명은 마흐노주의 운동만이 있던 것은 아니었다. 그것은 단지 이러한 운동 중 가장 중요하고 의식적인 것이었으며, 가장 깊게 대중적이고 혁명적인 것이었다. 볼셰비키에 의해 자유의 마지막 외침마저 억압되는 날까지, 같은 유형의 운동, 덜 널리 퍼져있고 덜 명확하고 덜 조직된 다른 운동이 여러 곳에서 끊임없이 발생했다. 예컨대 외국 언론이 종종 언급하며 마흐노주의 운동과 자주 혼동되는 “녹군” 운동이 그것이다. 훌랴이폴레 반란군보다 자신들의 진정한 임무에 대한 의식이 덜했던 이 다양한 조직의의 전투원들은 종종 유감스러운 실수와 과실을 범했고, 마흐노주의 운동은 이러한 잘못된 행동에 대해 자주 책임을 져야 했다. 무엇보다 볼셰비키는 마흐노주의자가 이런 다양한 “혼돈의 도적떼”를 하나의 운동으로 모으거나 조직하지 않았다는 등의 이유로 비난했다. 이 비난은 볼셰비키 위선의 표본인데, 소비에트 정부가 가장 염려하던 것은 우크라이나의 모든 대중혁명 세력이 마흐노주의 운동의 보호 아래 모일 가능성이었음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볼셰비키는 이를 막기 위해 최선을 다했으며, 마흐노주의자가 통합을 이루지 못했다고 비난하는 것은 발을 묶은 뒤 걸을 수 없다며 비난하는 것과 같았다. 만약 그들이 그렇게 할 수 있도록 내버려졌더라면, 마흐노주의자는 분명 그들 기준 아래 전국의 모든 대중적 혁명운동을 통합해냈을 것이다.
마흐노주의 반란군과 반란 지역의 모든 사람들은 노동자의 국적에 아무런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다. 처음부터 마흐노우슈치나로 알려진 운동은 우크라이나에 거주하는 모든 국적의 가난한 대중을 받아들였다. 대다수는 자연스럽게 우크라이나 국적의 농민으로 구성되었으나, 6퍼센트 언저리는 대러시아 출신이었고, 적은 비율이지만 그리스인, 유대인 등도 있었다.
1919년 5월 마흐노주의 선언문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담겨있었다.
“농민과 노동자, 파르티잔이여, 그대들은 모든 국적―러시아인, 유대인, 폴란드인, 독일인, 아르메니아인 등―의 노동자가 동일하게 빈곤의 심연에 처박혀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대들은 무수한 정직하고 용감한 혁명적 유대인 투사들이 자유를 위한 투쟁 과정에서 목숨을 바쳤는지 알 것이다. 혁명과 노동자의 명예는 우리 모두가 러시아인이든, 폴란드인이든, 유대인이든, 그 어느 국적이든 모든 노동자를 똑같이 억압하는 자본과 권위의 원칙에 대해 전쟁을 한다는 것을 가능한 한 크게 선언할 것을 요구한다. 우리는 모든 곳에서 우리의 적이 국적을 불문한 착취자임을 선포해야 한다―러시아 제조업자, 독일 거대 철강업자, 유대인 은행가, 폴란드 귀족 등…. 모든 국가와 국적의 부르주아지는 혁명에 맞서, 전 세계와 모든 국적의 노동 대중에 맞서는 치열한 투쟁 가운데 단결하고 있다.”
착취당한 이들로 구성되었으며 노동자들의 자연스러운 결합으로 한 덩어리로 합쳐진 마흐노주의 운동은 처음부터 모든 이들에 대한 깊은 형제애가 스며들었다. 그것은 단 한 순간도 국민적, 혹은 “애국적” 정서에 호소하지 않았다. 볼셰비키에 맞선 마흐노주의자의 모든 투쟁은 오로지 노동의 권리와 이익의 이름 아래 수행되었다. 민족적 편견은 마흐노주의 운동 안에서 영향을 미칠 수 없었다. 누구도 투사 개개인의 국적에 관심이 없었으며 그에 구애받지도 않았다. 또한 참된 혁명은 개인과 대중을 똑같이 근본적으로 변화시킨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대중이 효과적으로 스스로 혁명을 이뤄내기만 한다면, 그들의 사상과 행동의 자유가 온전히 유지되기만 한다면, 그 어떤 세력도 그들의 길을 막는 데 성공하지 못한다면, 반란을 일으킨 이들의 열정은 무한할 수 있다. 그렇게 되면 이 자연스러운 열정이 모든 편견, 모든 인위적인 관념, 수천 년 동안 축적된 모든 유령―국가적 망령, 종교적 허깨비, 권위적 망상―을 얼마나 쉽고 간단히 치워내는지 알게 될 것이다.
볼셰비키가 마흐노에게 던진 마지막 비난은 비록 그가 도적이 아니었더라도, 그리고리예프보다 똑똑하고 교활하고 세련된 자였다고 해도, 결국 그와 같은 사기꾼이라는 것이었다. 그들은 마흐노가 아나키즘이라는 사상을 가장해 운동 내에서 개인적인 목표를 추구했다고, 그가 모든 위원회와 협의회를 무시하고 “소공자”처럼 행동했으며, 운동에 참여한 이상주의적 투사들에 대한 완전한 독재권위를 행사했고, 그 당사자들은―의식적으로든 무의식적으로든―스스로를 속여왔다고 주장했다. 나아가 그는 은밀하고 불명예스러운 폭력적 행위, 방탕과 타락을 저지를 수 있는 “지휘관” 도당을 모았으며, 이러한 행위를 묵인했으며, 그 과정에서 사상가들과 그들의 사상을 비웃고 조롱했다는 이야기도 떠돌았다.
여기서 우리는 분명 민감한 문제를 다루고자 한다. 여기에는 이러한 비난에 볼셰비키가 이용했던, 진실처럼 보이게끔 만든 사실들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이 사실들은 자유의지주의의 대의를 위해 보다 면밀히 조사해야 하는 몇몇 실제적 결점 및 약점과 연관이 있다.
마흐노주의 운동을 면밀히 조사하는 데에 있어 세 종류의 결점을 구분할 필요가 있다. 우선은 전투에 참여한 이들의 의지에 의한 것도 아니며 누구도 비난할 수 없는 일반적인 성질의 결점들이다. 이들 중 가장 중요한 것은, ① 거의 무한한 전투와 이동 때문에 어디에도 정착하지 못한 채, 혹은 바로 그 이유로 인해 지속적인 건설적 과업에 헌신하지 못한 것, ② 불가피하게 점점 더 전문적이고 영속적 성격을 띠게 된 군대의 존재, ③ 반란을 지원할 적극적이고 조직적인 노동자 운동의 결여, ④ 운동에 헌신하는 지식인층의 부재.
그 다음은 개인에 의한 일부 결점인데, 이는 마찬가지로 누구를 탓할 수 있는 것이 아닌데―교육 부족, 이론과 역사적 지식 부족, 그리고 이 운동에 생기를 불어넣은 자들의 사회 전반에 대한 폭넓은 이해 부족에 의한 것이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결점의 불행한 결과가 바로 마흐노주의자가 공산주의 국가와 그 행동을 지나치게 신뢰하는 태도였다.
마지막으로는 마흐노와 그의 절친한 친구들의 개인적인 결점이 있는데, 이는 피할 수 있던 점이었기에 마땅히 비난의 대상이다.
처음 두 가지 항목에 대해서는 우리가 이미 언급한 내용이 있기에 특히 주의를 기울일 가치가 있는 한 가지 상황―군대의 오랜 존속을 제외하고는 논의를 확장하는 데 큰 의미는 없다.
군대는 어떤 것이든 종류를 불문하고 악惡인데, 심지어는 자원입대자들로 구성되어 고귀한 대의를 위해 헌신하는 자유로운 대중의 군대조차도 본질적으로 위험하다. 일단 군대가 영속화되면, 그것은 필연적으로 사람들과 노동의 세상으로부터 유리된다. 군대의 구성원들은 건강한 노동 생활을 영위할 의지와 능력을 잃는다. 감지할 수 없기에 더욱 위험한 점진성으로, 군대는 점차 반사회적, 권위주의적, 심지어 독재적 성향을 지닌 유한자有閑者들의 모임이 되는데, 이 나태한 자들은 폭력 자체를 추구하기 시작하고, 그들이 방어하고자 하는 바로 그 대의에 반하는 경우에조차 폭력을 사용한다.
이러한 결함은 지도자들 사이에서 가장 강하게 나타나지만, 일반병사는 거의 아무런 생각도 없이 그 본을 따르려 할 것이다. 심지어 지도자들이 틀린 경우에도 말이다. 바로 이렇게 영속화된 모든 군대는 최종적으로 불의와 억압의 도구가 되는 경향이 있다. 그들은 끝내 본래 목적을 망각하고, 자신들의 존재 자체가 목적이라고 여기게 된다.
마흐노와 여타 반란 운동 창시자 및 조직가들, 그들의 군대도 이런 성향을 가지고 있었는가? 그들은 모든 타락을 극복했는가? 나는 마흐노 본인과 그의 많은 친구, 협력자들의 도덕적 자질이 그들에게 부과된 중압에 완벽하게 부합하지는 않았음을 말해야 하는 것이 유감스럽다.
반란군에 머무는 동안, 나는 종종 몇몇 지휘관들이―특히 쿠릴렌코의 이름이 자주 언급되었다―마흐노보다 운동 전반을 고무하고 이끄는 데 도덕적으로 더 적합하다는 이야기를 자주 들었다. 쿠릴렌코는 심지어 군사능력의 면에서도 마흐노와 대등하며, 견해의 폭에서는 그를 확실히 능가한다는 이야기도 때때로 덧붙여졌다. 나는 그런데도 왜 마흐노가 그 지위를 차지하고 있었느냐고 물었을 때, 마흐노는 그의 몇몇 성격 덕분에 병사들 대부분에게 더 호감을 받고 더 높이 평가받는다는 답변을 받았다. 병사들은 그를 더 잘 알고 있었고, 오랜 시간에 걸친 그의 지휘에 익숙해 있었고, 그에 대해 절대적인 신뢰를 보냈다. 그는 더 단순했고, 더 대담했고, 더 동지적이며, 더 농민적이었다.
마흐노와 그의 친구 중 여럿이 그들 지위에서 조금의 이탈도 없이 완수했어야 할 몇몇 도덕적 의무에 태만했음은 분명한 사실이며, 볼셰비키가 그들 주장을 진실처럼 보이게 하는 겉모습을 만들어주고 운동 전체와 그 명성을 크게 손상한 운동의 약점 및 그 창시자들의 개인적 결점을 여기서 다루도록 하겠다.
마흐노주의는 인간이 만들어내고 주도한 것이었으며, 모든 인간의 창조물과 마찬가지로 빛뿐만 아니라 그림자도 지니고 있었다. 진리와 불편부당에 대한 우리의 열망을 충족하기 위해서 뿐만 아니라, 운동 전체에 대한 더 나은 이해에 도달하고, 그 경험으로부터 필요한 교훈과 결론을 도출해내기 위해서는 이러한 그림자를 들여다보는 것이 필수적이다.
우선 표트르 아르시노프가 이 주제에 대해 한 말을 인용하도록 하겠다.
“마흐노의 성격은” 그가 우리에게 말했다. “여러 특출난 특징을 담고 있었다―기백, 의지, 인내심, 활발함과 활동성 같은 것들을. 그 특징들은 한데 어우러져 보는 이에게 큰 인상을 남겼고, 혁명가들 사이에서도 그를 돋보이게 했다. 동시에 그는 정치와 역사를 이해하는 데 필요한 이론적 지식이 부족했다. 그 때문에 그는 필요한 혁명적 일반화 및 결론에 자주 도달하지 못하거나 심지어 그 필요성을 인식하지 못했다.
혁명 반란이라는 거대한 운동은 그 성질에 부합하는 새로운 사회적, 혁명적 방법론의 탐색을 절실히 요했다. 이론에 대한 훈련이 부족했던 마흐노는 늘 이 과업에 부합할 수 없었고, 혁명 반란의 중심에 있던 그의 위치를 감안할 때 이 결함은 운동 전반에 영향을 미쳤다. 우리는 마흐노가 역사, 정치, 사회과학 분야에서 보다 폭넓은 지식을 가지고 있었더라면 혁명 반란은 피할 수 없는 패배가 아니라 러시아혁명의 발전에 거대한, 심지어는 결정적인 역할을 했을 것이라 믿는다.
게다가 마흐노는 때때로 그의 우수한 자질을 감소시키는 한 가지 특징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종종 부주의함에 사로잡혔다. 활력과 의지로 가득했지만, 그는 아주 심각한 위기 때 상황의 심각성에 대처하는 데 필요한 통찰력에 전혀 걸맞지 않은 경솔함을 자주 보였다. 한 가지 예로 1919년 가을, 데니킨의 반혁명에 대한 승리는 범 우크라이나 반란을 전개하는 데 충분히 활용되지 못했다. 이 승리는 그 목적에 특히 부합했음에도 말이다. 이는 승리감에의 도취뿐만 아니라 강한, 하지만 틀린 안도감과 부주의함에 의한 것이었다. 마흐노를 선두에 둔 반란의 지도자들은 해방 지역에 지속된 백군이나 볼셰비키의 위협에 충분히 대비하지 않고 정착했다.”
이러한 비판은 전적으로 사실이다. 그러나 이 모두가 언급할 가치가 있는 것들은 아니며, 우리는 아르시노프가 마흐노의 “부주의함”을 언급하면서 겨우 암시하기만 한 것을 완성해야 한다. 이 부주의함 자체는 때로 더 깊은 나약함의 결과였기에 때때로 마흐노는 의심의 여지 없이 운동에 영향을 미치는 도덕적 붕괴 상태에 빠지게 되었다.
마흐노 성격의 모순은 뛰어난 의지와 성격에도 불구하고 결코 몇몇 유혹을 이겨낼 만큼 강하지 못했으며, 결국 자기 자신을 비롯해 친구들 및 협력자들과 함께 추락했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때때로 그를 끌어내린 것은 그의 주변인들이었고, 그는 단호하게 그들을 저버릴 수 없었다.
그의 가장 큰 결함은 분명 알코올 중독이었다. 그는 단계적으로 중독되었지만, 어떤 시기에는 그 증상의 상태가 특히나 수치스러운 것이었다. 음주는 주로 그의 도덕에 영향을 끼쳤다. 육체적으로 바뀌지는 않았지만, 술에 취한 그는 지나치게 쉽게 흥분하고, 짓궂고, 부당하고, 고집 세지고 폭력적이게 되었다. 군대에 있던 시간 동안 나는 그의 비정상적인 상태 때문에 중요한 순간에 그로부터 어떠한 합리적인 것을 받아낼 수 없는 채 그를 절망 가운데 그대로 내버려 둬야 했다. (실제로 어떤 기간에는 이것이 그의 “정상적” 상태가 되기도 했다!)
마흐노 및 그와 친밀한 이들―지휘관을 포함한 다른 이들―의 두 번째 결함은 여성에 대한 그들의 행동이었다. 특히 술에 취했을 때, 이들은 수치스러운, 심지어 혐오스러운 행동을 즐겼고, 자신들과의 집단 난교에 몇몇 여성이 참여하기를 강요하기도 했다. 이러한 방탕한 행위는 그들을 알고 있던 사람들의 사기를 떨어뜨린 것은 말할 것도 없고, 이로 인해 마흐노의 명성이 훼손되기도 했다.
그러한 도덕적 부정행위는 필연적으로 또 다른 과도한 행위와 남용을 초래했다. 술로 인해 마흐노는 자신의 행동에 무책임해졌다. 그는 스스로를 통제하지 못했다. 그리고 갑작스레 그의 혁명에 대한 의무감을 대체한 것은 종종 폭력으로 뒷받침되는 개인적인 변덕이었다. 그것은 독단과 터무니없는 만행이었고, 다른 사람에 대한 그의 태도와 마흐노 같은 이가 결코 포기해서는 안 되는 대의에 대한 차분한 반성, 통찰력, 개인적 품위 및 자제력을 이상한 모습으로 대체한 군벌 우두머리의 독재적 횡포였다.
이러한 문란과 탈선의 필연적 결과는 “전사적 감정”의 과잉이었고, 이로 인해 마흐노에 대한 일종의 군사적 파벌, 또는 카마릴라camarilla라 부르는 것이 형성되었다. 이 파벌은 때때로 총회나 다른 기관의 의견을 고려하지 않은 채 결정을 내리고 행동했다. 그들은 자신의 중요성을 과대평가하고 파벌에 속하지 않은 모든 이들에 대한 경멸을 보였으며, 투사 대중과 노동 대중으로부터 점점 더 멀어졌다.
내 견해를 뒷받침하기 위해 나는 내가 목격한 몇몇 사건 가운데 하나를 언급하도록 하겠다. 총회가 어떤 지휘관의 직권 남용에 대해 항의하고 있던 어느 날 저녁, 마흐노는 회의 중간에 입장했다. 그는 술에 취해 있었고, 극도로 흥분한 상태였다. 그는 권총을 꺼내 사람들에게 겨누고 총회원들 앞에서 이리저리 흔들며 그들을 심하게 모욕했다. 그 후 그는 아무런 설명도 듣지 않고 밖으로 나갔다. 비록 어떤 지휘관에 대한 항의가 근거 없는 것이었다 하더라도, 그에 대한 마흐노의 답변 방식은 그 자체로 더 큰 항의의 대상이 될 만했다. 나는 이러한 종류의 다른 사건들을 더 이야기할 수도 있다.
그러나 마흐노주의 운동의 최고점을 지나치게 강조하는 것을 피한 것과 마찬가지로, 우리는 그 그림자 역시 과장하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 애초에 아르시노프가 말한 것과 같이 “마흐노의 성격은 혁명과 함께 성장하고 발전했다. 매년 그는 자신의 임무에 대해 더욱 심오하고 의식적이 되었다. 1921년까지 그는 1918년 및 1919년에 비해 성격의 깊이가 상당히 깊어졌다.” 게다가, 마흐노와 그의 일부 친구들의 잘못된 행동은 대체로 산발적이었고, 그들의 높은 공로가 그것들을 크게 상쇄했다. 그들의 행동은 “일반적인 태도”로 간주되지 않았다. 그것은 일련의 탈선에 지나지 않았다. 이는 계산적이며 영속적이고 경직된, 강압적 권력에 뒷받침되어 공동체 전체에 뿌리내리는 정부의 성질과는 다른 것이었고, 이 점은 중요하다. 전반적으로 자유로운 분위기에서, 광범위하고 의식적인 대중 운동을 바탕으로, 해악은 오직 국지적인 상처일 뿐이었고, 그 곪은 부분이 유기체 전체를 오염시킬 수는 없었다.
실제로 지휘관 및 반란군 일반 병사들로부터 마흐노와 그의 “파벌”의 일탈에 대한 상당한 저항이 생겨났다. 마흐노는 반복적으로 소집되어 그의 일탈에 대한 심각성을 주의받았다. 그가 이에 대체로 주의를 기울이고 개선하기 위해 노력했다는 사실은 인정받아야 하는 지점이다.
“잊어서는 안 되는 것은” 표트르 아르시노프는 적확하게 지적한다, “마흐노가 어린 시절부터 지내 온 불우한 조건, 삶이 시작되면서부터 겪은 불우한 환경, 그를 둘러싼 모두가 거의 완전히 교육을 받지 못했다는 점, 그리고 마지막으로 그의 사회적, 혁명적 투쟁에 도움을 줄 만한 경험 있고 정통한 도움을 줄 수 있는 이들의 부재다.
가장 중요한 것은 운동의 전반적인 분위기였다. 최종적으로 중요한 것은 마흐노도 지휘관들도 아니었다. 그것은 대중이었다. 그들은 모든 독립성, 표현과 행동의 자유를 유지했다. 이러한 자유 운동의 전반적인 분위기 속에서 대중의 활동은 ”지도자“의 오류를 궁극적으로 바로잡았으리라 확신할 수 있다.
바로 이 제동이, 개인의 일탈에 대한 이 저항이 악을 언제나 포착할 수 있는 한, 대중의 표현과 행동의 완전한 자유는 혁명의 절대적이자 불변의 쟁취에 있어 가장 중요한 것이 되고, 그렇게 지속되어야 한다.
우크라이나에 머무는 동안 나는 몇 번이나 일부 “지도자”들의 죄책감에 휩싸인 태도와는 대조되던, 아직 자유롭던 대중의 단순하고 건강한 반응을 볼 수 있었던지! 그리고 나는 몇 번이나 되돌아봤던가. ‘진짜 형명에서 중요한 것은 우두머리도, 지휘관도, 전문 혁명가도 아닌 혁명적인 대중이다. 그들 안에 진리와 안녕이 있다. 운동에 활기를 불어넣는 이, 진정한 지도자, 진정한 혁명가, 엘리트의 역할은 대중을 도우며 그에 적합한 존재로 남는 것이다.’”
이러한 점을 고려할 때, 볼셰비키의 펜 아래서 확대되었던 만큼으로 마흐노주의 운동의 약점을 과장할 이유가 없다. 볼셰비키는 운동 전체의 명예를 훼손하고자 의도적으로 개인의 잘못을 과장하고 왜곡했다. 하지만 그러기 위해서 볼셰비키 지도자들은 스스로를 돌아보기만 하면 됐다!
그럼에도 우리가 언급한 몇 가지 결함과 부적절함은 의심의 여지 없이 그 당시 운동을 약화했다. 모든 장애물과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운동이 처음부터 보다 멀고 넓은 곳을 바라보는 시야로, 다시 말해 그 과업을 수행하는 데 더 합당한 방식으로 인도됐더라면 사태의 추이가 어떻게 되었을지 누가 알겠는가?
“데니킨과의 투쟁에서 마흐노주의자들의 노력은 엄청났다”고 아르시노프는 말한다. “지난 몇 달 동안 그들이 보여준 영웅적 행위는 모두에게서 존경받았다. 해방된 넓은 모든 지역에서 그들은 혁명의 대의를 보존할 수 있는 유일한 이들이었고, 오직 그들만이 데니킨주의 반혁명의 무덤을 팔 수 있는 이들이었다. 도시와 농촌의 대중 모두는 사건을 그렇게 이해했다.
그러나 바로 이 상황 때문에 많은 마흐노주의자는 자신들을 볼셰비키의 도발로부터 안전하다고, 북쪽에서 밀고 내려오는 적군은 마흐노주의자에 대한 공산당의 비방이 거짓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다고, 이 군대는 새로운 속임수에, 새로운 도발에 귀를 기울이지 않을 것이라고, 오히려 마흐노주의자와 대면했을 때 그들에게 합류할 것이라고 굳게 믿도록 만들었다. 심지어 일부 낙관적인 마흐노주의자는 마흐노주의 경향이 광범위한 전국의 대중에게 받아들여졌기 때문에 공산당은 아마도 자유로운 사람들에 대한 새로운 공격을 조직할 엄두를 내지 못할 것이라 믿는 데까지 이르렀다.
마흐노주의자의 군사 및 혁명 활동은 이러한 마음가짐에 지배받고 있었다. 그들은 드니프로와 도네츠 지역 일부를 점령하는 데 그쳤다. 그들은 북진해 그곳을 장악하려 하지 않았다. 그들은 두 군대가 만나면 도입해야 할 행동 방안이 저절로 명백해질 것이라 여겼다. 이 낙관주의는 우크라이나의 당시 상황과 일치하지 않았다. 이것이 바로 그 결과가 마흐노주의자가 기대하던 것이 아니었던 이유다. …
1919년 가을, 데니킨 반혁명 격파가 마흐노주의 운동과 러시아혁명 전체의 주요 임무 가운데 하나였던 것은 사실이다. 이 작업은 전적으로 마흐노주의자가 수행했다. 그러나 이것만이 이 비극적인 시기에 그들이 혁명을 위해 수행해야 했던 임무의 전부는 아니었다. 데니킨의 군대로부터 이제 막 해방된, 반란을 일으킨 지역은 모든 영토에 대한 즉각적 방어의 재조직이 긴급히 필요했다. 이 방어 없이는 영토와 데니킨주의 해체로 인해 생긴 그 모든 혁명적 가능성이 퇴각하는 데니킨의 군대를 추격하기 위해 우크라이나로 파견된 볼셰비키의 국가주의 군대에 의해 전멸할 위험에 처해 있었다. …
어떤 경우에도 볼셰비즘은 마흐노주의와 같이 자유로운 대중 운동의 존재를 받아들이지 않을 것이었다. 이 대중의 의견이 무엇이든, 볼셰비즘이 운동의 목을 조르고 파괴하는 것을 막지는 못할 것이었다. 그 때문에 우크라이나에서 사건과 대중 운동의 중심에 있던 마흐노주의자는 그러한 만일의 사태에 대비하는 데 필요한 모든 조치를 미리 취해야 했다. …
따라서 1919년 가을, 사건의 과정이 마흐노주의에 부과한 역사적 과업 중 하나는 고립되고 제한된 지역이 아닌 우크라이나 반란 전역에서 사람들의 자유를 수호할 충분한 힘을 가진 혁명군을 창설하는 것이었다는 것은 당연하다. 데니킨에 맞선 격렬한 투쟁 과정에서 이는 분명 쉬운 일은 아니었을 테지만, 우크라이나 대부분이 혁명의 한복판에 있었고 마흐노주의 쪽으로 기울어져 있었기 때문에, 이는 역사적으로도 필요할 뿐만 아니라 전적으로 가능했다. 마흐노주의자에 합류하기 위해 문을 두드린 반란군 중에는 영토 남부에서 온 자들 뿐 아니라 북부에서 온 이들도 있었다[예를 들어 폴타바를 점령하고 있던 비빅(Bibik)의 군대가 있었다]. 적군 일부 분대는 마흐노주의의 기치 아래 사회 혁명을 위해 싸우고 싶은 열정에 중앙 러사아로부터 왔는데―특히 오가르코프(Ogarkov)의 지휘 아래에 있던 오룔 지방에서 상당히 많은 수의 군대가 합류했다. 그들은 볼셰비키 및 데니킨 군대를 상대로 전투를 벌이며 10월 말 예카테리노슬라프에 도착했다.
마흐노주의 규율이 자발적으로 끓어올라 우크라이나 전역을 맴돌았다. 이 전체를 조직하는 데 필요한 조치를 취하고, 우크라이나 전역을 떠돌던 수많은 무장 조직을 혁명의 영토를 수비할 수 있는 강력하고, 대중적이며, 혁명적인 단일 군대로 합치기만 하면 되었다. 좁고 제한된 영역이 아닌 영토 전체를 방어하는 그러한 세력은 무력을 사용하고 퍼뜨리는 데 익숙한 볼셰비키에 대한 가장 설득력 있는 반론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승리에의 도취와 몇몇 부주의로 인해 마흐노주의자는 적절한 때 이런 종류의 군대를 만들지 못했다. 그래서 볼셰비키가 우크라이나에 진군하자 반란군은 훌랴이폴레의 제한된 지역으로 철수해야 했다. 그것은 심각한 군사적 오류였다. 볼셰비키가 그들의 이익을 위해 이 오류를 활용하는 데는 오래 걸리지 않았고, 그 결과는 우크라이나 혁명 전체 및 마흐노주의자에게 큰 영향을 미쳤다.”(전게서, pp. 253–9)
모든 점에서 아르시노프와 동의할 필요는 없지만, 우리는 어떠한 커다란 약점 때문에 중대한 문제들이 다뤄지지 않았고 필수적인 임무가 수행되지 않았다는 데에 동의할 수밖에 없다. 내 책에서 가장 중요하고 가장 시사적이라 생각하는 이 장을 마치기 전에, 나는 대중 운동의 초기 조직화에 협력해 숨을 불어넣고 도움을 주는 것을 고려하고 있는 이들에게 말 몇 마디를 전하고 싶다. 단순히 우크라이나 대중의 서사시를 읽는 데에 그치지 말라. 이 대중 혁명의 약점과 오류를 진지하게 성찰하라. 이로부터 배울 수 있는 교훈은 적지 않다.
이 일은 쉽지 않을 것이다. 지금 당장 해결해야 할 다른 문제 가운데서, 가능한 한 빨리 극복하고 제거해야 할 다른 어려움 가운데서, 여러분은 진정한 혁명을 수호할 필요성과 무장세력이 야기하는 해악을 피할 필요성을 조화시킬 수 있는 수단을 구상해야 한다. 그렇다, 잘 성찰하고, 이를 위해 다가올 행동을 이끌기 위한 기본 원칙을 지금 확립하라. 시간이 촉박하다. 여러분의 결론은 여러분이 생각하는 것보다 더 빨리 필요할지도 모른다.
제8부. 세계 노동자들에게 있어 마흐노우슈치나의 위상
나는 표트르 아르시노프의 책 마지막 페이지 가운데 내가 깊게 공감하는 한 구절에 기대어 결론을 내리고자 한다:
“지금까지 서술한 역사는 운동의 모든 웅장함을 보여주기에는 부족하다. 우리는 단지 훌랴이폴레 지역에서 발생했던 운동 가운데 하나의 흐름에 대한 이야기를―단편적으로―다뤘을 뿐이다(물론 가장 중요한 것임은 사실이다). 이 흐름은 더 거대한 전체의 일부를 이루었다. …
만약 우리가 우크라이나 전역에 걸친 모든 마흐노주의의 파급 효과에서 이 운동을 다룰 수 있었다면, 이 작은 흐름들 각각의 역사를 추적하고 그것들을 서로 엮고 공통의 빛으로 비출 수 있었다면, 우리는 마흐노주의의 깃발 아래 진정한 자유와 진정한 평등이라는 참된 사회 혁명의 핵심 이상을 위해 투쟁한 수백만의 사람들의 위대한 표상을 얻을 수 있었을 것이다. 우리는 언젠가 마흐노주의 운동에 대한 보다 상세하고 복잡한 역사서가 이 과제를 수행하기를 바란다. …
마흐노비즘은 보편적이며 불멸이다. … 노동 대중이 복종을 거부하는 곳, 그들이 독립에 대한 열정을 기르는 곳, 계급의 의지와 정신을 집중하고 표출하는 곳 어디서나 늘 자신들의 대중적 사회운동을 만들어낼 것이며, 자신들의 뜻대로 행동할 것이다. 그것이 마흐노주의의 진정한 본질을 이루는 것이다.
러시아 농민과 노동자의 피비린내 나는 비극이 역사에 흔적을 남기지 않고 지나가서는 안 된다. 무엇보다도 러시아에서 사회주의의 실천은 노동 계급에게는 친구가 없다는 것을 보여주었고, 그들 수고의 결실을 빼앗으려는 적들만이 있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국가사회주의 또한 이러한 적들 가운데 하나라는 점을 충분히 보여주었다. 이 생각은 대중의 의식 속에 해마다 더욱 확고하게 심어지고 있다.
혁명이 시작된 이래, 아주 완고한 장교들의 피가 흐른 초반 이후 크론슈타트는 가장 광범위한 자유를 확립했다. 시민들은 자신의 의견을 표명하는 데 전혀 제한이 없었다. 오직 소수 고질적인 차르주의자가 감옥에 남아 있었으나 즉흥적 폭력사태가 끝나자, 이성이 자기 보호 본능을 넘어서기 시작하자 회의에서 전반적 사면에 관한 안건이 제기될 만큼 크론슈타트 사람들은 감옥을 몹시 증오했다. 모든 수감자의 석방이 예상되었으나 도시 인근에 한정되었다. 크론슈타트라면 반동적 기만이 성공할 수 없었겠으나, 수병들은 그렇다고 해서 다른 지역에 반혁명분자를 보내고자 하지도 않았다. 케렌스키의 행동은 새로운 분노를 불러일으켰고 계획은 중단되었다. 그러나 분노로의 역전은 이것이 마지막이었다. 이때부터 크론슈타트에는 단 한 차례의 사상 박해도 없었다. 모든 주제가 자유롭게 유포될 수 있었다. 앵커 광장의 강단은 누구에게나 열려 있었다.
문서에 관해 말하자면, 독자는 그것이 상당히 달래는 어투의, 애매하고 심지어 아리송한 용어로까지 쓰였다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저자들은 볼셰비키를 이성적으로, “동지애적 정신”으로 행동할 수 있도록 유도할 수 있다는 순진하고 헛된 희망을 키웠다. 그러나 볼셰비키는 동지가 아니었고, 그들은 크론슈타트와의 갈등에서 아주 조금이라도 양보하면 그들 독재에 대항하는 전반적 운동을 풀어주게 되리라고 느꼈다. 그들에게 그것은 생사가 달린 문제였다.
프룬제는 그럴듯하게 보이지만 실제로는 거짓 주장인 예수회의 방식으로 자신의 명령을 정당화하려 한다. 그는 볼셰비키 권력이 반란군을 더 이상 필요로 하지 않게 되자 마흐노주의 군대와 운동을 완전히 없애고자 한다는 참된 유일한 주장을 인정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만일 그가 이를 인정했다면 그 이유를 말해야 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러면 정부의 거짓말과 노동 대중에 대한 정부의 진정한 태도가 드러났을 것이다.
[1] 여러 이유로 소비에트 내 아나키스트의 존재는 다소 이례적이었다. 크론슈타트 외에는 페트로그라드와 모스크바 소비에트에 아나키스트가 있었다. 다른 곳에서는 소비에트에 속한 아나키스트가 드물었다. 소비에트에 대한 아나키스트들의 전반적 태도는 그들의 상황이 전개됨에 따라 바뀌었다. 처음에 아직 소비에트가 노동자 조직의 성격을 지니고 있을 때는 호의적이었으나 혁명적 추동력이 스스로를 특정의 유용한 기능을 하는 데에 만족하는 것으로 그치기를 바랄 때 그들의 태도는 회의적인 태도를 보이게 되었고, 소비에트가 정부에 의해 조종당하는 정치 기구로 변형됨에 따라 마침내 완전히 부정적인 태도를 띠게 되었다. 따라서 아나키스트는 처음에는 동지들이 이 기관들에서 선거에 나서는 데에 반대하지 않았다. 그들은 후에 이를 포기하며 “권위주의적, 중앙집권적, 국가주의적 기반에 따라 조직되어 순수한 정치 조직이 된 소비에트에의 모든 참여에 대해 절대적으로, 또한 분명히 반대한다”고 선언하며 끝을 맺었다(1919년 4월 옐리사베트흐라드Yelisavetgrad에서 개최된 《나밧》 총회 결의).
[2] 이 시기 《사회주의혁명당》 우파와 멘셰비키는 소비에트에서 쫓겨나 볼셰비키에게 자리를 내주고 있었다. 그리고 그때 다음 (10월) 혁명의 근본적 요소들이 열정적으로 위조되고 있었다. 레닌은 이 모든 상황을 파악하고 있었고, 그의 때를 준비하고 있었다.
[3] 여기서 우리는 이 모든 활동이 진행되는 시점에 《발트 함대》가 3월혁명의 이름으로 페트로그라드에 독일 함대가 접근하는 것을 막기 위해 몇 차례나 힘든 전투를 치러야 했다는 것을 적어두어야 하겠다.
[4] 1917년 8월부터 11월까지 당시 페트로그라드에 거주했던 이 책의 저자는 자주 크론슈타트로 가 강의를 하고 그곳 사람들의 자유롭고 강인한 삶을 직접 보았다. 일부 세부사항은 크론슈타트에 거주하며 모든 과업에 적극적으로 참여한 또 다른 투사가 쓴 훌륭한 러시아어 팸플릿에서 따온 것이다―에핌 야르추크(Efim Yartchuk) 저, 『러시아혁명에서의 크론슈타트Kronstadt in the Russian Revolution』. 이 팸플릿은 번역되지 않았다.
[5] 당연히 볼셰비키는 그들이 권력을 획득했을 때 이 자치 행정을 조금씩 청산하고 공무원이 통제하는 기계적 국가주의 조직으로 대체했다.
[6] 잘 알려진 것과 같이, 볼셰비키 정부는 몇 달 후 모든 사람을 무장해제 했다. 그가 누구든 어디에 있든, 모든 시민은 사형 협박 아래 지방 당국에 무기를 반납하도록 소환되었다.
[7] 이 조항의 진정한 의미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크론슈타트를 이해할 필요가 있다. 사실 극좌에게만 요구되는 언론과 출판의 자유를 제한하고자 하는 분위기가 있었다. 이 결의안은 운동의 본질을 오해할 가능성을 사전에 제거하기 위해서만 이를 행했다.
[8] 이는 앞서 언급한 도시 주변의 무장부대를 말한다. 그들의 공식적인 임무는 불법 상거래를 단속하고 식량과 다른 상품들을 압수하는 것이었다. 이 “장벽”의 무책임함과 독단은 전국적인 유명세를 떨치고 있었다. 정부가 크론슈타트 공격 전날 이들을 억압했다는 것은 중요하다. 이런 식으로 정부는 프롤레타리아를 잠재우고 속이려 했다.
[9] 비렌 제독은 혁명 당시 크론슈타트의 지휘관이었는데, 가장 사나운 차르주의 장교 중 한 명으로 1917년 2월 28일 수병들에 의해 총살되었다.
[10] 볼셰비키 장군 브루실로프, 카메네프 등은 과거 차르주의 장군이었다.
[11] 《임시 혁명위원회》가 페트로그라드에 파견한 대표자 중 한 명은 크론슈타트에 잘 알려진 두 명의 아나키스트 야르추크 동지(저명한 책의 저자)나 나를 데려오는 것을 목표로 삼았다. 《임시 혁명위원회》는 우리가 도착해 그들 과업을 돕기를 원했다. 크론슈타트에 있던 그들은 아직 우리 둘 다 볼셰비키에 의해 투옥되었다는 것을 알지 못했다. 이 사실은 비록 사소하나마 크론슈타트의 독립적, 혁명적 경향의 또 다른 증거이다. 반혁명 운동은 절대 아나키스트의 협력을 구하지 않을 테니 말이다. 더욱이 《임시 혁명위원회》 위원장인 페트리첸코 자신부터가 아나키즘의 지지자였다.
[12] 트레포프는 1905년 소동 당시 군대에 내린 그의 유명한 명령, “총알을 아끼지 말라”로 유명한 차르 니콜라이 2세의 가장 악랄한 장군 중 하나였다.
[13] 말류타 스쿠라토프는 15세기 차르 폭군 이반[Ivan the Terrible(이반 4세, 뇌제 이반이라고도 불리며 차르라는 호칭을 처음 사용하였다-역자 주)] 근위대의 지휘관이었으며, 그의 이름은 인간 잔인함의 상징으로 대대로 전해져 내려오고 있다.
[14] 이 출처란 즉 《임시 혁명위원회》의 「이즈베스티야」, 소비에트 문건들과 엄선된 목격자들이다. 내가 알기로 그의 조사는 영어로 쓰인 팸플릿 형태로 처음 등장했다. 그 뒤 스페인 내전 당시 아나키스트 평론지 「티몬Timon」에 다시 게재되었고, 마지막으로 1939년 1월 프랑스 아나키스트 신문인 「르 리베르테르Le Libertaire」가 여러 호에 걸쳐 연재했다.
[15] 1921년 페트로그라드에서 아나키스트들이 여전히 자유롭게 활동하는 것을 보고 독자가 놀라지 않도록, 우리는 문제의 문건 서명자들이 볼셰비키게 위험하다고 여겨지지 않았다는 것을 언급해 두어야겠다. 알렉산더 버크만과 엠마 골드만(Emma Goldman)은 러시아에서 과격한 활동에 관여하지 않았고, 페르쿠스[Nikifor (Hyman) Perkus]와 페트롭스키(Petrovsky)는 “소비에트”(친親 볼셰비키)라고 불리는 종류의 아나키스트였다. 그럼에도 후에 버크만과 골드만은 추방되었고, 페르쿠스와 페트롭스키의 운명은 우리에게 알려지지 않았다. 어쨌든 아나키즘 운동의 마지막 흔적은 1921년 사라졌다.
[16] 표트르 아르시노프. 《모스크바 아나키스트 그룹 연맹The Anarchist Federation of Moscow》의 일원인 이 러시아 아나키스트는 그 기간 가운데 대부분을 우크라이나에서의 운동에 참여했다(아르시노프의 『마흐노주의 운동의 역사Istoriya Makhnovskogo Dvizheniya』는 1923년 베를린에서 처음 출판되었다. 영역본인 『마흐노주의 운동의 역사History of the Makhnovist Movement』는 1974년 《흑적과 연대Black & Red and Solidarity》에 의해 디트로이트와 시카고에서 출판되었다. 볼린의 페이지 인용은 프랑스어판을 참조하라. P. Archinoff, 『마흐노주의 운동의 역사L’Histoire du Mouvement Makhnoviste』, 파리, Librainelnternationale, 1924.
[17] 러시아의 위대한 작가 중 한 명인 니콜라이 고골[Nikolai Vasilyevich Gogol. 1809~1852.]은 그의 훌륭한 소설 『대장 불바Taras Bulba』에서 자포로자의 생활과 관습에 대해 감탄할 만한 장면을 그려냈다.
[18] 예컨대 조셉 케셀(Joseph Kessel)의 특정 “작품들”을 참조하라.
[19] 마흐노가 학교 교사인 척했다거나 아나키스트 지식인의 영향 아래 자라났다는 모든 종류의 그의 삶에 대한 설명은 다른 많은 다른 것들처럼 사실이 아니다.
[20] 마흐노는 아나키스트라는 이유로 자신처럼 강제노동을 선고받은 아르시노프와 친분을 맺었다. 비교적 교육을 잘 받았던 아르시노프는 그의 공부를 도왔다.
[21] 이는 1918년 4월 아나키스트들에 대한 잔인한 탄압 직후였다. 레닌은 마흐노와의 대화에서 모스크바 아나키스트들이 “사방에 도적떼를 숨겨두었다”고 거짓 주장을 하며 이 사건을 간단히 언급했다. 마흐노는 레닌에게 확실한 증거가 있느냐고 물었다. 레닌은 체카의 능력을 언급하며 얼버무렸고, 그 자리에 있던 다른 볼셰비키에 의해 다른 주제가 소개되며 대화가 중단되었다.
[22] 한참 뒤, 볼셰비키는 습관적인 중상모략 방법을 사용해 독립적 농민운동과 마흐노를 이러한 반혁명적 도적 무리와 동일시하려 했다. 우리가 말한 것들로 미루어 독자는 분명 이미 사실을, 그리고 실제와 신화의 차이를 인식할 수 있을 것이다.
[23] 그것은 1919년 6월 9일과 10일, 볼셰비키가 마흐노주의자 지역에 행한 일반 작전 중 파괴되었다.
[24] 이 조항은 마흐노주의자들의 예방책이었다. 그들은 실제로 어떠한 다른 구실을 붙여 적군 사령부가 반란군을 다른 전선으로 보내 간섭 없이 이 지역에서 볼셰비키 권력을 수립할 수도 있음을 우려했다. 독자가 곧 보게 되듯, 이 우려는 이후 사건에 의해 전적으로 옳았음이 드러났다.
[25] “아버지 마흐노”라는 별명은 운동의 통합 이후 붙여졌다. “아버지”(Batko)라는 용어는 우크라이나에서 나이가 많거나 존경받는 이에게 종종 붙여진다. 이는 어떠한 권위주의적 의미도 지니고 있지 않다.
[26] 후에 공산주의자들은 스페인(1936~39년)에서 같은 전술을 채택했다. 그 사건은 내게 세세히 알려졌다. 테루엘Teruel에서는 공산주의자 여단이 약 1,500명의 아나키스트 여단과 함께 프랑코(Francisco Franco Bahamonde)에 맞서 전선을 지켰다. 아나키스트 여단이 파괴되게 하기 위해 공산주의자들은 밤중에 몰래 자발적으로 철수했다. 다음 날 아침, 파시스트들은 허점을 파고들어 아나키스트 여단을 포위했다. 1,500명 중 500명만이 수류탄과 권총으로 길을 뚫고 탈출할 수 있었다. 나머지 1,000명의 투사들은 학살당했다. 다음 날 공산주의자들은 아나키스트들이 배반해 프랑코에게 전선을 개방했다고 비난했다!
[27] 해질 무렵, 나는 말을 타고 천천히 데니킨주의자 연대들의 골고타 언덕을 따라 동지들의 약간 뒤편으로 향했다. 나는 한창의 나이에 잔인하게 난도질당해 별이 빛나는 하늘 아래 널부러져 있고, 길을 따라 홀로 버려져 있거나 쌓여 있거나, 속옷만 남았거나 혹은 아예 벌거벗겨진 채 먼지와 피로 뒤덮여 있으나 별빛 속에 핏기가 없고 푸르스름한 그 수백의 시체가 있던 기묘한 광경을 결코 잊지 못할 것이다. 그들 중 많은 수가 팔이 없거나, 더러는 끔찍하게 훼손되거나, 일부는 머리가 없거나, 몇몇은 심각한 칼날 타격으로 거의 두 동강이 나 있었다. 때때로 나는 말에서 내려 이미 뻣뻣하게 굳어 있는 말 없고 움직이지 않는 시체 위로 마치 불가해한 신비를 발견하기라도 바라는 양 애타게 몸을 굽혔다. “그들이 이겼더라면 우리 모두가 지금 이렇게 되었겠지.” 나는 생각했다. “이건 운명인가? 운인가? 정의인가?” 다음날 지역 농민들은 이 모든 잔해를 길가의 거대한 공동묘지에 묻었다.
[28] 일부 도시에서는 마흐노우주의자가 ‘지휘관’을 임명했는데, 그 역할은 오직 부대와 민간인들의 소통자 역할로만 구성되며, 사람들의 삶에 특정 영향을 미칠 수 있는 군사적 필요에 의한 조치를 취하는 것, 그리고 군 사령부가 그 조치를 취하는 것이 적절하다고 여기는 것에 국한되었다. 이 지휘관은 민간인에 대한 어떠한 권한도 없었으며 민간인의 삶에 어떠한 방식으로도 간섭하지 않았다.
[29] 그들은 여기서 사회주의 정당들과 다른 조직들만을 명시하는데, 이는 이러한 권리를 비 사회주의자들로부터 지키고자 한 것이 아니라 단지 대중혁명에 가운데 우파는 활동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심지어 그들의 부재에 대한 의문조차 제기되지 않았다. 이런 상황에서 부르주아지가 감히 출판물을 펴내지 못하고 인쇄소의 주인이 된 인쇄공들이 단호히 인쇄를 거부하는 것은 당연했다. 그러니 그들에 대해 언급할 필요가 없었다. 결국 “모든 사회주의”라는 표현은 “사회주의자”에 제한되는 것이 아닌 “모두”를 가리키는 말이었다. 그럼에도 반동분자가 그들의 작품을 인쇄하고 출판한다 해도 아무도 그것에 구애받지 않았는데, 그것은 새로운 환경에서 그것이 아무런 위험도 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30] 마흐노주의자와의 협정 체결 이후 볼셰비키는 《중앙 전쟁위원회the Central Commissariat for War》를 통해 마흐노는 브란겔과 손잡은 적이 없었으며, 그것은 허위 정보 등에 근거한 오류라고 발표해야 했다는 사실은 유의미하다. 이 발표는 1920년 10월 20일경 〈마흐노와 브란겔Makhno and Wrangel〉이라는 제목으로 《중앙 전쟁위원회》에 의해 「프롤레타리안the Proletarian」 및 다른 하르키우 신문에 게재되었다.
[31] 페레코프는 크림반도와 본토를 연결하는 매우 좁고 언덕이 많은 지협地峽이다.
[32] 바로 이 시점에 마흐노는 전보를 통해 추벤코(Alexei Vasilyevich Chubenko)와 나의 석방을 요구했다―나는 1919년 12월 말 투옥되었다. 당시 볼셰비키들은 내게 마흐노주의 군대의 전투적 자질에 대한 찬사를 표했다.
[33] 프란시스코 페러, 스페인의 유명한 자유사상가, 무상교육 시스템의 창시자. 로마 가톨릭교회의 거센 증오의 대상이었던 그는 혁명 음모에 가담했다는 누명으로 단죄되어 1909년 총살당했다. 그의 처형은 전 세계적 대규모 항의 운동을 일으켰다. 프란시스코 페러는 스스로를 아나키스트로 칭했다.
[34] 프룬제는 적군 병사가 무장 해제된, 심지어 마흐노주의자에 의해 살해된 몇몇 사례도 언급한다. 하지만 그가 말한 모든 사례는 라콥스키와 하르키우의 마흐노주의자 대표들에 의해 면밀히 검토되었고, 다음과 같이 결론지어졌다. ‘1. 마흐노주의자는 이러한 비행과 아무런 연관이 없다. 2. 만약 군대에 대한 적대행위가 마흐노주의 군대에 속하지 않은 특정 분대에 의해 벌어졌다면 이는 주로 소비에트 당국이 시의적절하게, 그리고 명확히 인지할 수 있게 반란군과의 협정을 공표하는 데 소홀했기 때문이다.’ 사실, 마흐노주의 군대에 편입되지 않은 수많은 개별 군대(우리는 잠시 후 다른 부분에서 이 주제를 다뤄야만 한다)가 우크라이나 여기저기서 운영되었다는 것이 알려졌다. 이들 부대 대다수는 독자적으로 행동하면서도 반란군의 의견과 태도를 존중했다. 그들이 적군과 마흐노주의자가 체결한 협정에 대해 알았더라면 소비에트 당국과 군대에 대한 모든 적대행위를 분명 중단했을 것이다.
[35] 독자는 이때가 크론슈타트 반란 시기였음을 상기할 것이다. 마흐노가 그 운동에 간접적으로 참여했다는 볼셰비키의 주장은 틀린 것이다.
[36] 앞서 말했듯 마흐노는 총탄에 발목이 부러졌기에 몹시 필요한 경우에만 말을 탔다.
[37] 소수 자유의지주의 단체와 전문가들을 제외하고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