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Necromancy of 아나키스트 연대
그래서, 왜 <강령>인가
아나키스트 운동의 실천적 방법론에 관하여
『아나키스트 총동맹의 조직적 강령』은 우크라이나의 혁명반군 운동이 패배한 후, 프랑스로 망명 중이던 네스토르 마흐노를 포함한 러시아 아나키스트 그룹이 작성한 것이다. 이 문건은 1924년 당시에도 충분한 논란이 되었다. 마흐노는 우크라이나에서 함께 투쟁하였던 브세보폴트 미하일로비치 아이헨바움(활동명 볼린)과의 격렬한 논쟁을 거쳐야 했다. 이탈리아의 아나키즘적 코뮌주의자 에리코 말라테스타 역시 『강령』에 반대했다. 애초에 ‘아나키스트 조직’이라는 말만 들어도 질겁하는 개인주의적 아나키스트 · 반란적 아나키스트들에 대해서는, 그저 말을 말자.
『강령』은 결코 완전한 문건이 아니다. “아나키스트 총동맹”의 상은 위험하다. 궁극적으로 본인의 아나키즘에 입각하지 않은 ‘아나키스트’들을 ‘아나키스트가 아니’라고 말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이기 때문이다. 내가 그들에게 동의하건 말건, 반란적 아나키스트들도, 개인주의적 아나키스트들도 ‘아나키스트’다. 함께 투쟁할 수는 없겠지만 말이다. “혁명의 방어”는 분명한 군대의 재건이다. 혁명은, 그 혁명에 동의하는 인민대중의 자체적 역량으로만 방어할 수 있다. 그 역량을 뛰어넘는 “방어”를 지도력과 지휘력과 신묘한 전술로 이루어낼 수는 없다. 지휘통제체계를 통합하는 것이 인민대중의 역량을 뛰어넘게 할 수 있다면, 우리가 노동자 국가와 프롤레타리아 독재를 받아들이지 못할 이유는 또 무엇이겠는가.
그럼에도, 『강령』이 그토록 논란을 불러일으켰으며 당대에는 그다지 큰 조류를 만들어내지 못하였음에도 불구하고, 『강령』을 기반으로 한 흐름은 오늘에도 분명하게 남아있다. 아니, 어쩌면, 아나키즘의 각 분파들 중에서, 결국 가장 활동적이고 강성한 세력으로 남아있다고 보아도 무방할 것이다. 이것은 왜인가. 대체 『강령』이 무엇이기에, 출판이 된지 100년이 가까운 시간이 흘렀음에도, 여전히 그 이야기가 유의미하게 이루어지고 있는가.
『강령』이 주장하는 바는 다음과 같다.
하나. 아나키즘 운동을 통일된 강령에 근거한 하나의 조직으로 묶어내어야 한다는 것. 이는 1917년 이후 러시아의 아나키스트 운동이 분산되고 각자의 방법론으로 각자 투쟁하다가 결국 한순간에 청산되어버린 경험에 근거한다. 어제는 《전국 아나키스트 총연맹》에서 공장위원회를 통한 노동자 자주경영을 이야기하였는데, 오늘은 《전국 아나키스트 연방》에서 모든 생산시설에 대한 폭탄테러를 이야기하고 있으면, 아나키즘이 과연 대중을 설득할 수 있냐는 이야기다. 디엘로 트루다는 그 강령의 내용이 계급투쟁을 기반으로 한 아나키즘이어야 하고, 대중의 무장투쟁을 기반으로 해야 하며, 생산의 노동자 자주통제에 기반으로 해야 한다고 제시하지만, 필자 본인의 동의 여부와는 무관하게 그것은 강령의 요체가 아니다. 시대와 조건에 따라 그 내용은 달라질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강령』의 요체는, 사회혁명의 방법론을 계급투쟁에 두건, 개인적 각성에 두건, 인민의 자발적 무장봉기에 두건, 그것에 합의하는 아나키스트들이 하나의 조직에 모여 하나의 전술에 따라 하나로 활동해야 한다는 것에 있다.
하나. 그 조직에 소속된 아나키스트 활동가들이 대중조직에 침투하여 대중조직을 강령의 방향으로 추동하여야 한다는 것. 아나키즘의 요체가 대중의 직접적이고 자주적인 결정에 있음은 분명하다. 『강령』도 이를 부정하지 않는다. 아니, 오히려 “노동해방은 오로지 광대한 노동대중의 직접적 혁명 투쟁과 자본주의 체계에 대항하는 계급 조직을 통해서만 가능하다”고 말한다. 하지만 현재의 노동대중이, 지난 수천 년의 인류 역사를 거치며 ‘지도되는 것에 익숙하여져 버린’ 2021년의 노동대중이, 지금 그 억압의 속박을 풀어낸다고 해서, 자주적 결정을 익숙하게 할 수 있는가? 당장 대표적인 노동대중의 자발적 조직인 노동조합을 보자. 오늘의 임금투쟁을 더 이어갈 것인지, 아니면 현재까지 받아낸 양보에 우선 만족하고 다음의 투쟁을 위해 조직을 가다듬을 것인지에 대한 판단이, 조합원들에게 “마음껏 해보세요”라고 말한다고 이루어지던가? 그렇지 않다. 오히려 그렇게 내버려두었을 경우, 지금까지의 관성에 따라, 대표자를 세우고, 그 대표자에게 의사결정권을 위임하고, 그 판단에 소극적으로 복무함에 그치게 되는 경우가 많다. 대중이 이것을 선택하였다고 하여 이것을 그저 수인하는 것이 아나키스트의 방향성인가? 『강령』이 부정하는 것은 이것이다. 『강령』은 아나키스트 활동가들이, 대중을 조력하여, 대중의 자주적 결정이 이루어질 수 있도록, 대중이 또 다른 억압을 ‘자주적으로’ 구성하지 않을 수 있도록 추동해야 함을 이야기하는 것이다.
그렇기에 결국 『강령』이 이야기하는 아나키즘은, “아름다운 유토피아도, 추상적 철학의 이데아도 아니다. 아나키즘은 노동대중의 사회 운동”이다. 대중운동의 현상을 직시하고, 그 현상을 바탕으로 아나키스트의 대중운동의 상을 고민하자는 것이다. 아나키스트들이 바라는, 관념의 세계에만 존재하는, 이상적 대중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현재의 이 저주받을 체제 속에서 교육받고, 구성되어온 실체로서의 대중을 바라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대중이, 현재의 조건에서, 자신이 변혁의 주체가 될 수 있다는 사실을 인지하지 못하고 있음은 분명한 사실로 존재한다. 나아가, 스스로가 조직할 수 있음을, 자기 노동의 조건과 삶의 조건을 결정할 여지가 있다는 것을 인지하지 못하고 있음 또한, 물리적 사실로 존재한다. 기껏 조직을 만들어놓은 후, 법의 규정을, 자본의 상생운운을, 국가의 폭압을 넘어선 요구를 만들어내지 못하고 ‘합법적’ 조직의 테두리로 쪼그라드는 경우가 많다는 것 또한 자명한 사실이다. 요구를 만들어내는 데까지 성공했다하더라도, 그 요구를 쟁취하기 위한 투쟁의 방법론을 찾아내지 못하고, 마찬가지로 ‘합법투쟁’에 매몰되어 보수화되고 형해화形骸化되는 경우 역시 무수하게 많다.
아울러 이러한 대중을 객관적 조건으로 바라볼 때, 아나키스트들은 그 조건에 순응하고 대중의 결정이라는 흐름에 복무해야 하는가. 아니면 그 조건 속에서, 우리의 이상을, 우리의 최대요구를 발화하며 대중을 우리의 방향으로 끌어오기 위한 이정표가 되어야 하는가.
그리고 『강령』은, 여기에서 후자를 선택하였기에, 오히려 『강령』을 ‘전위당을 옹호하고’ ‘대중을 지도하려 하는’ ‘유사 볼셰비키’라 부르는 자들의 이데올로기보다 한층 더 대중지향적 운동이 된다.
볼린은 아나키즘의 ‘통합’을 주장했다. 아나키스트들이 하나의 토론장에서 서로의 주장을 천천히 점검해가며, 서로가 동의할 수 있는 지점들을 모색하여 가자는 주장이었다. 하지만, 그 공통점은 포괄하는 대상이 커지면 커질수록 작아질 수밖에 없다. 결국 작아지고 작아져, ‘국가와 자본에 반대한다’는 단순한 테제만이 남게 되는 순간, ‘통합’의 운동성은 삭제된다. 설혹 아나키스트들이 민족해방운동에 적극적으로 복무하여야 한다는 주장이라도, 아나키스트들이 정치에 적극적으로 복무하여 제도와 체제를 보다 자유의지주의적으로 만들어내야 한다는 주장이라도, 그것이 국가와 자본에 반대하는 한 ‘통합’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러한(혹은 이것보다는 수위가 낮을지라도) 주장들을 ‘통합’해나간 결과, 아나키즘은 대중운동에 밀착하지 못한 지식인(혹은 유사지식인)들의 지적 유희에 불과하게 되었다. 만약 특정한 주장들을 ‘통합’하는 것을 포기하고, 그것을 ‘유사 아나키즘’이라 취급하기로 결정한다면, 그것이 어째서 ‘통합’인가. 광의의 『강령』인 것이지.
말라테스타는 아나키즘 운동의 조직이, 조직적 책임이 아니라 개인적 책임의 원칙으로 이루어져야 한다고 비판한다. 이것이 정확하게 무엇을 비판하는 것인지 알 수가 없다. 모든 조직의 구성원은, 개인적 책임의 원칙에 따라, 조직의 결정에 대한 책임을 분담한다. 조직의 결정에 동의하지 않는 모든 개인에게는, 그 결정 과정에 개입하고, 결정을 바꿔내기 위해 노력하고, 그래도 바꾸어내지 못하였다면 조직을 분열해낼 자유가 있다. 그렇다면 이러한 행동을 취하지 않고, ‘그럼에도 조직적 단결이 필요하므로 조직에 복무’하기로 결정했다면, 그 개인적 행동에 대한 책임은 져야 하는 것이 아닌가? 그 책임이, ‘조직적 책임’인 것 아닌가? 그리고 더 나아가, 대중에게 방향을 제시하는 것이 아나키스트 활동가의 책임이라는 것은 긍정하면서 ‘조직적 원칙’이 아닌 ‘개인의 선의’에 의존하여버리는 것은, 너무도 낯이 익은 이데올로기에 대한 긍정이다. 결국 어리석은 대중을 지도하시는 하나의 선하신 분이 되는 것이 아닌가. 말라테스타가 『강령』에 대해 마흐노와 논쟁할 때에는 “아나키스트 조직의 행정부는 그 조직을 수인하지 않는 이들에 대한 행정 권력도, 지도력도 가져서는 안 된다”고 말하던 그 말라테스타가, 단 1년이 지난 후 “하지만 그들(대중들)의 지성과 주도권에 너무 크게 의존해서도 안된다”면서, “우리의 말과 행동을 통해 지시하는 것처럼 보이는 것을 회피”하면서 “군중이 바로 스스로를 돌볼 수 없다면, 자주적이고 결정을 할 수 있는 선량한 사람들이 그들을 위해 무언가를 해야”한다고 말한 것은 결코 놀라운 일이 아닌 듯하다.
모든 층위에서의 자유를 추구하며 “조직적 단결”의 필요성마저 부정했던 개인주의적 아나키스트들에 대해서는, 음, 그래서 착취당할 자유랑 착취할 자유마저 긍정하셔서 아나코-캐피탈리스트가 되셨나요? 라고 묻고, 더 말을 하지 말도록 하자.
“하지만 볼셰비키가 러시아 인민대중의 마음을 얻었다고 해서, 아나키스트들이 볼셰비키가 되면 안 되는 것 아닌가요!”라고 말할지도 모르겠다. 참으로 옳다. 그래서, 강령주의는 아나키즘적 볼셰비즘인 것인가. 볼셰비즘의 요체는 전위당의 집권과 그를 통한 대중에의 지도다. 프롤레타리아트의 계급적 의지를 대변하는 노동자 계급 정당이 대중을 지도하고, 대중이 그 지도에 따름으로서 계급적 의지를 실현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아나키스트 총동맹》은 대중의 의지를 참칭하지 않는다. 총동맹은 그 구성원, 또는 구성조직의 의지를 대변한다. 그 의지로 대중을 설득하고 추동해낸다. 대중 속에서, 대중으로서, 아나키스트적 의지를 가진 대중으로서 대중을 자신의 방향으로 끌어들이고, 대중이 아나키스트적 의지에 부합하는 결정을 하도록 조직적으로 행동한다.
그리고 여기에서 ‘아나키스트적 의지’는 대중을 ‘지도’하는 것을 원하지 않는다(최소한 『강령』은 그렇게 말하고 있다). ‘아나키스트적 의지’는 대중이 스스로 조직하고, 스스로 결정하고, 스스로를 옥죄는 위계질서를 타격하여 자기 삶에 대한 주도권을 확보해내는 것이 사회주의이자 혁명이라고 바라본다. 그렇기에 아나키스트 총동맹의 목적은, 대중을 조직하고, 대중의 결정을 행정적으로 돕고, 모든 위계질서에의 타격에 대한 전술적 조력을 제공하고, 대중의 주도권을 편취하고자 하는 다른 이데올로기―정당들에 맞서는 것에 있다.
『강령』의 방법론이 볼셰비키의 그것을 일부 차용한 것이라고 하면 그것이 옳을 수도 있다. 하나의 이데올로기로 단결한 하나의 조직이, 통일된 전술적 방법론으로 대중을 추동해내는 것 말이다. 하지만 이것은 어찌 보면, 대중을 조직하기 위하여 필요한 방법론인 것이 아닌가. 어쨌든, 그들이 결과적으로 실패할 수밖에 없는 체제를 재건하여 버렸다고 해도, 그렇게 하여 그들이 대중을 배신하였다고 하여도, 볼셰비키는 1917년 10월, 대중을 조직하여 혁명에 성공했다. 그 볼린마저도, 당시 볼셰비즘의 대두가 당연한 것이라고 하고 있지 않은가(“모든 온건한 정부와 정당의 실패 후에 노동 대중이 남아 있는 마지막 정당으로 눈을 돌린 것은 당연한 논리적 귀결이었다. 두려움 없이 사회혁명을 바라본 유일한 정당. 권력이 주어졌을 때 기존의 모든 문제를 신속하고 행복하게 해결할 것을 약속한 유일한 정당. 볼셰비키가 바로 그 정당이었다.”).
어떠한 이데올로기를 다른 이데올로기와 등치하는 것은 그 방법론적 일치에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목적과 요체의 층위에서 이루어져야 한다. 대중을 조직해내는 것은 모든 형태의 사회변혁 운동을 집행함에 있어 반드시 필요한 과업일 뿐, 그 자체가 목적적인 것은 아니다. 『강령』의 목적이 대중의 의사를 대변하여 대중을 지도하는 정부를 건설하는 것이라면, 강령은 아나키즘적 볼셰비즘인 것이 맞다. 하지만 그렇지 않다.
마지막으로 이야기해야 할 지점은, 2021년 조선반도에서 아나키즘에 입각한 사회변혁적 대중운동을 이야기하는 우리에게 가능한 대중운동의 전술적 방법론이 무엇인가에 관한 지점이다. ‘통합’의 방법론은, 그 유효성의 여부를 떠나, 최소 둘 이상의 아나키스트 이론이 존재해야 가능하다. 2021년 조선반도에서는 불가능한 선택지다. 개인의 자유의지에 의한 코뮌을 이야기하고 싶으면, 국가와 자본의 통제에서 벗어난 코뮌의 상을 단 하나라도 보여주고 이야기하면 좋겠다. 2021년 조선반도의 아나키즘 운동은, 그러한 코뮌을 건설할 수 있을 정도의 인자도, 물적 기반도, 콘텐츠도, 연방도 그 무엇도 갖추지 못했다. ‘노동대중의 의지로 작동하는 혁명적 생디칼’을 사회혁명의 이상으로 말한다면, 그 생디칼이 언제 다가올지 모르는 사회혁명의 그날까지 혁명적일 수 있는 추동력이 어디서 나오는지 설명해 달라. 1907년 마냥 노동조합의 건설 자체가 탄압의 대상이라면, 노동조합의 건설 자체가 의미 있는 과업이겠지만, 2021년 조선반도는 타협적 조합주의를 하기에는 너무나도 훌륭한 토양을 갖추고 있다. 그 생디칼들의 총파업이 사회 혁명의 날을 열 것이라고 이야기한다면, 전술적 단결이 없이 어떻게 총파업을 만들어낼 것인지 알려 달라.
결국, 2021년 조선반도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동일한 강령에 동의하는 아나키스트 대중 · 활동가들의 조직을 통한 대중운동에의 전술적 개입이다. 그리고 다시 한 번, “아나키즘은 아름다운 유토피아도, 추상적 철학의 이데아도 아니다. 아나키즘은 노동대중의 사회운동”이다. 아나키스트가 바라보아야 하는 것은, 지구 반대편의, 혹은 100년 전의 사회운동 지형이 아니라, 2021년 오늘 조선반도의 운동 지형이다. 그렇기에 나는 다시 한 번, 『강령』을 말한다.
언젠가, 정말로 언젠가, 『강령』을 이야기하는 내가, 대중의 사회운동에서 ‘권력’이 되고, 대중을 지도하려 할지도 모른다. 볼린이, 말라테스타가, 밥 블랙이 『강령』에 대하여 제기했던 문제가 실제로 나타날 지도 모른다. 하지만 나는 그런 일이 발생할 때 나를 타도해줄 아나키스트 동지들의 투쟁을 믿는다. 그렇게 『강령』마저 타도될 때, 혹은 『강령』이 스스로 해소할 때, 그토록 바라마지않는 노동대중의 해방에 한발 더 다가갈 수 있으리라 믿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