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itle: 아나키즘의 혼란주의자들에게 답함
Date: 1927.8.18
Source: www.nestormakhno.info
Notes: 아나키스트 연대의 C.Necromancy가 번역함

서문 : 문제의 본질

『조직적 강령』이 촉발한 논쟁은 지금까지 주로 『강령』이 담고 있는 주장 또는 『강령』이 제안한 조직의 형태에 초점을 맞추었다. 일부 지지자들뿐만 아니라 그것의 비판자들 대부분은 『강령』이 무엇을 전제로 하고 있는가에 대한 명확한 시각을 가지고 있지 않았다. 그들은 『강령』이 어째서 나왔는지, 그 저자들이 어느 지점에서 출발하는지 확인하기 위해 노력하지 않았다. 그러나 이러한 문제는 강령의 정신과 중요성을 이해하고자 하는 사람들에게 가장 중요한 문제다.

최근 볼린(Voline)과 몇몇 아나키스트들이 강령에 대한 총체적 반박이라며 펴낸 『강령에 대한 답변』은, 그들이 그토록 노력하였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행간을” 읽었다고 주장하였음에도 불구하고―강령에 대한 진부한 비난의 수준을 넘어서지 못했다. 그리고 문제의 심장을 직격하지 못하고 있기도 하다.

이 『답변』이 강령의 테제에 대해 전혀 이해하지 못하고, 잘못 말하며, 강령의 논리에 대응하기 위해 궤변을 사용한다는 점을 감안할 때, 이 《재외 러시아 아나키스트 그룹the Group of Russian Anarchists Abroad》은 이 반박(일 수도 있던 것)에 매달려, 이미 오래전부터 이야기되고 있던 지점들 몇 개를 발견해 내었다. 그와 동시에, 《그룹》은 『답변』의 정치적 · 이론적 무능함을 드러냈다.

아래의 논평은 그들의 답변을 검토한 것이다. 이것은 『강령』의 보론이나 부록이 아니다. 단지 『강령』의 테제 몇 가지를 명확히 하기 위한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나키스트 조직에 관한 강령에 관심을 가지는 동료들이 고려할 수 있는 몇 가지를 지적할 수 있는 이 기회는 감사히 사용하겠다. 우리는 이것이 『강령』의 의미와 정신을 더 잘 이해하는데 도움이 될 것이라고 믿는다.

우리에게는 1917~1919년 러시아에서 아나키스트 운동의 실패를 볼셰비키 당의 국가주의적 탄압 탓으로 돌리는 버릇이 생겼다. 하지만 이는 심각한 오류다. 볼셰비키의 탄압이 혁명 기간 동안 아나키스트 운동의 확산을 방해한 것은 맞지만, 그것은 하나의 장애물에 불과했다. 오히려 아나키스트 운동이 조직과 전술에 있어 보이는 내적 특징이라 할 수 있는 모호함과 우유부단함과 비효율이야 말로 그 실패의 주요 원인들이었다.

아나키즘은 사회혁명이 직면하고 있는 주요 문제들에 대해 확고하고, 공고하고, 즉발적인 의견을 가지고 있지 않았는데, 혁명을 수행하는 대중을 만족시키기 위해 필요한 것은 이 의견들이었다. 아나키스트들은 공장들의 수용 요구했지만, 새로운 생산과 그 구조에 대한 명확한 개념은 가지고 있지 않았다. 아나키스트들은 “능력에 따라 일하고, 필요에 따라 분배”하는 코뮌주의 체제를 옹호했지만, 그들은 현실세계에서 이 원칙을 적용할 방법을 만들지 못했다. 이런 식으로, 아나키즘은 우리를 의심하는 자들이 이 대원칙을 우스꽝스러워보이게 만들도록 허용했다. (그저, 얼마나 많은 사기꾼들이 혁명 기간 동안 공동체 자산을 개인적으로 가지기 위한 수단으로 이 원칙을 이용했는지 기억할 수 있을 것이다.) 아나키스트들은 노동자들의 혁명적인 행동에 대해 많은 이야기를 했지만, 대중들을 그러한 행동으로, 심지어 그 가까이로조차 이끌지 못했다. 아나키스트들은 대중과 그들의 이데올로기 사이의 상호 관계를 조정할 수 없다는 것을 증명했다. 그들은 대중들에게 권위의 굴레를 떨쳐버리라고 떠들었지만, 한편으로는 혁명의 이익을 어떻게 통합하고 그것을 방어할 수 있는지는 떠들지 않았다. 그들은 다른 많은 문제와 관련하여 명확한 의견과 구체적인 행동 정책을 가지고 있지 않았다. 그것이 바로 그들이 대중들의 활동으로부터 멀어지게 하고 대중들을 사회적, 역사적 기능부전으로 몰아넣은 것이다.

이것이 우리가 러시아 혁명에서 아나키스트 운동의 실패 요인으로 바라보는 것이다. 1905년부터 1917년까지의 과정을 살아낸 러시아 아나키스트로서 우리는 이에 대해 확신한다.

아나키즘의 내적 비효율성은 우리가 아나키즘의 성공을 담보할 수 있는 방식을 고민하도록 만들었다.

20년 이상의 경험과 혁명적 행동, 20년간의 아나키스트 대오에서 시행해온 노력, 그리고 아나키즘이 조직적인 운동으로서 끊임없이 실패해왔다는 결과. 이 모든 것이 하나의 동질적 이론, 정책, 전술에 뿌리를 둔 새롭고 포괄적인 아나키스트 조직의 필요성을 우리에게 확신시켜 주었다.

이것이야말로 『조직적 강령』의 전제다. 러시아혁명을 직접 경험하지는 않았지만 그에 대하여 조금이라도 알고 있는 다른 나라의 아나키스트 투사들이 자국 내 아나키즘 운동 안의 정세를 주의 깊게 살펴본다면, 그들은 러시아에서 아나키즘이 실패하게 만든 내적 비효율성이 그들 자신의 대오에서 동등하게 만연하다는 것을, 그리고 이것이 특히 혁명의 시기에 아나키스트 운동에 치명적인 위협이 될 것이라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때에서야 그들은, 『조직적 강령』이 사상적으로, 조직적으로, 사회적으로 아나키즘에 있어서의 중요한 진일보였음을 이해할 것이다.

표트르 아르시노프

일부 러시아 아나키스트들의 『답변』에 대한 응답

1927년 4월의 『답변』은 《재외 러시아 아나키스트 그룹》이 『조직적 강령』을 비판하고 반박하기 위해 출간되었다.

『답변』의 저자들은 단지 『강령』의 특정한 사상에 동의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총체적으로 동의하지 않는다고 주장한다. 그들은 『강령』이 정확히 “(본인들이) 받아들일 수 없는 기본적인 원칙, 본질, 사고방식을 담고 있는 것”이라고 말한다. 그들은 그것이 아나키즘이 아니라 볼셰비즘이라고 생각한다. 그들은 볼셰비키와 “강령주의자”의 이념적 본질이 동일하다고 말한다. 그들은 “『강령』의 저자들은 다음의 것들을 필수불가결한 것으로 본다. 지도부의 설립, 그 지도부를 따르는 군대와 경찰직. 이것은 본질적으로 이행기적인 정치적 · 권위적인 국가주의의 도입을 의미한다”고 말한다. 그리고 『답변』에는 이와 유사한, 놀라운 주장들이 넘쳐나고 있다.

우리는 주장을 하기 전에 그에 적절한 증거를 제시하는 것이 저자의 의무라고 믿는다. 근거 없는 주장을 하는 이러한 관행은 아나키스트들을 의심스러워 보이게 할 것이다. 모든 아나키스트들은 이러한 주장들에 대해 단호한 입장을 취해야 한다.

앞으로의 글에서 우리는 『답변』의 저자들이 그들의 주장에 어떠한 근거를 제시했는지를 찾아볼 것이다. 그리고 이 과정이, 그들의 주장의 의미와 가치를 알려줄 수 있기를 진심으로 바란다.

『답변』의 저자들은 그들이 “『강령』의 일부 근본적이고 중요한 테제들에 총체적으로 동의하지 않는다”는 선언으로 글을 시작한다. 하지만 실제로, 그들이 제시하는 쟁점들은 『강령』의 조직과 원칙에 관한 모든 테제에 대한 것이다. 이 의견의 차이를 설명하기 위해, 그들은 많은 것을 한다. 많은 궤변을 사용하고, 스스로의 주장에 반하는 주장들을 들이민다. 이는, 그들이 『강령』에 대해 선험적으로 적대적이지만, 『강령』이 제시하고 있는 어떤 문제에 대해서도 그들 자신의 명확한 대안적 견해를 가지고 있지 않기 때문에, 필연적으로 발생한 일이다. 그래서 우리는 그들을 이해하기 위해 그들의 주요한 반대 의견을 바탕으로 논의할 것이다. 그러나 그 과정에서 우리는 더 많은 것을 보게 될 것이다. 『답변』의 저자들이 『강령』의 특정 주장을 반박하면서, 동시에 같은 주장을 답습하고, 그것이 자신의 주장이라 주장하며, 『강령』에 대항하기 위해 『강령』을 사용하는 것으로 귀결하는 것을 볼 것이다.

하나만 짚고 넘어가자. 그들의 반대에 대한 가장 좋은 반론은 『강령』 그 자체이다. 그들이 제기한 모든 문제에 대한 우리의 구체적이고 결정적인 의견은, 『강령』에서 그대로 찾을 수 있다. 그럼에도 우리는 그들이 근거하고 있는 정신과 조류를 명확히 하기 위해, 『답변』의 저자들이 그토록 반박하고자 했던 『강령』의 특정 지점들만으로 이야기를 이어갈 것이다.

아나키스트 운동이 허약했던 원인

『강령』은 아나키스트 운동의 취약성의 주요 원인이 운동 내 조직적 요소와 조직적 관계의 부재라고 바라보고, 이것이 아나키스트 운동을 “만성적인 무無체계”의 상태로 몰아넣는다고 본다. 이와 동시에, 『강령』은 이러한 무체계가 몇몇 이데올로기적 단점들에 내재한 것이라고 본다. 우리는 이러한 단점들을 아나키즘과 무관한 소부르주아적 원칙들에서 바라본다. 우리 운동에 만연해 있는 무체계는 이데올로기적 혼란에서 비롯한다. 그리고 이러한 이데올로기적 혼란이라는 현실을 극복하기 위해, 『강령』은 동일한 강령을 기반으로 하는 총체적 조직의 설립을 제시한다. 『강령』은 이를 통해 아나키스트들의 총체적 조직을 위한 기초를 마련하고 이데올로기적 동질성을 구축할 수 있다고 본다. 그렇기 때문에 이 조직은 집단적으로 만들어져야 하고, 그로써 아나키즘을 그 이념적 모순과 조직의 불충분함으로부터 해방하고, 동질적인 원칙으로 묶인 강력한 아나키스트 조직을 위한 길을 닦을 수 있는 역량을 확보하게 될 것이다. 우리는 대중들 속에서 아나키즘을 발전시키고 강화하는 다른 방법을 찾을 수 없다. 『강령』은 아나키즘의의 다양한 분파들을 하나의 “부드럽게 단결한 가족”으로 통합하는 접근법은, 아나키즘 운동을 회복시키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약화하고 혼란스럽게 할 것이라고 지적한다.

『답변』의 비판은 강령이 제시한 아나키스트 운동이 취약해진 원인에 대한 상을 완전히 부정한다. 그들은 이 원인이 “사회혁명의 개념에 관한, 폭력에 관한, 이행기에 관한, 조직에 관한 우리의 전망에 기초한 몇 가지 생각의 혼란”에서 비롯한다고 바라본다. 또한, 『답변』의 저자들은 아나키스트들이 서로 동의하지 않는 다른 문제들에 대해서도 요약하고 있다. 그들이 옳다면, 아나키스트들은 서로 공통된 관점을 가지지 못하고 있는 것이 맞으며, 조직의 문제를 다루기 전에 먼저 이론화부터 해야 하는 것이 아니겠는가? 우리는 이러한 생각과 공약들을 지금까지 너무 자주 들어왔다. 『답변』의 저자들이 해야 할 것은, 이론적인 작업이 필요하다고 수백 번째로 위협하는 것이 아니라, 그 작업을 수행하고, 그것을 실현하여 강령에 대한 대안으로 제공하는 것이 아닐까? 아나키즘의 원칙들에 대한 우리의 생각은 전혀 다르다. 우리는 사회혁명의 이상, 폭력, 집단적 창조성, 독재, 조직 등 주요 현안에 대해 아나키스트들 사이에 합의가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아직까지 사회혁명, 폭력적 혁명, 조직을 부정하고 있는 사람들은 언제나 그럴 것이고, 그들만을 위하여 아나키즘 운동의 역사를 처음부터 짚어나가는 것은 정말 순진한 행동이 될 뿐일 것이다. 누군가는 그들이 사회혁명의 이상을 수용하지 않는다고 말하고, 그 순간 다른 누군가는 그들이 폭력혁명에 반대한다고 말한다. 그 와중에 세 번째로 누군가 와서, 아나키즘적 코뮌주의 자체에 대한 불만을 말하고, 네 번째 사람이 나타나 계급투쟁에 반대하는 목소리를 높인다. 이 모든 상황들마다 “아나키즘의 원칙들”은 정확한 것이 아니라고 말하는 것은, 우리가 총체적 이론을 장만하는 데 실패하였음을 증명할 뿐이다. 바쿠닌(Bakunin), 크로포트킨(Kropotkin), 그리고 말라테스타(Malatesta)는 아나키즘의 원칙에 대해 충분히 정확히 알고 있지 않았던가? 그 원칙에 입각한 여러 나라에서 아나키스트 운동이 일어났다. 어떻게 그 운동들이 충분히 명확하지 않았다고 주장할 수 있는가?

물론, 아나키즘에 불명확한 점이 많은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그것들은 완전히 다른 성격의 것이다. 아나키스트 운동 내에는 의심할 여지없이 아나키스트적인 자들이 있는가 하면, 자유주의적liberal 경향과 개인주의적 일탈 역시 포함되어 있고, 이것이 안정적 기반의 확보를 방해하고 있는 것이다. 아나키즘 운동을 다시 건강하게 하기 위해서는, 이러한 경향과 일탈을 청산해야 한다. 하지만 이 운동의 일부인, 공개적인, 혹은 정체를 숨긴 개인주의자들(그리고 『답변』의 저자들은 정체를 숨긴 개인주의자들임이 분명하다)은 이러한 숙청을 막아선다.

아나키스트적 계급투쟁

『강령』은 “인간 사회의 역사에서 계급투쟁은 언제나 사회의 형태와 구조를 결정하는 핵심적 요소”라고 매우 분명히 선언한다. 이는 아나키즘은 계급투쟁의 토양 위에서, 탄압받은 노동자들의 심장에서 탄생하여 성장해왔다는 것을, 아나키즘은 탄압당한 대중들의 사회운동이라는 것을 의미한다. 아나키즘을 일반적인 인본주의적 문제로 표현하려는 시도는 사회적, 역사적 오류다. 자본과 노동 사이의 투쟁에서, 아나키즘은 전적으로, 그리고 불가분적으로, 노동계급과 함께 싸운다.

『답변』의 저자들은 이 명확하고 정확한 언명을 “우리는 통합synthesis을 만들어야 하며, 아나키즘이 계급적 요소와 인본적 요소와 개인주의적 요소를 모두 포괄한다고 선포하여야 한다”고 받아친다. 이것은 노동의 진리를 바라보는 것조차 두려워하는 자유주의자liberal들과 공통되는 견해이다. 그들은 부르주아지와 프롤레타리아트 사이에서 영구히 머뭇거리면서 경쟁 계급들 사이의 연결고리로 이용될 공통의 인도주의적 가치를 찾고 있다. 하지만 우리는, 불가분한 단 하나의 인류가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우리는 아나키즘적 코뮌주의는 오로지 노동계급의 결단에서 이루어질 수 있을 뿐, 부르주아지를 포함한 인간 전체의 활동에서 이루어질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다. 결과적으로 이 관점은 전 세계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사회적 비극에서 어느 편에도 서지 않는 자유주의자들의 견해다. 이러한 견해는 계급투쟁과, 아나키즘과 무관하다.

이데올로기적 관점에서의 대중의 지도 문제

『답변』은 『강령』이 실제로 제시하고 있는 것보다 스스로 궁리해낸 권위주의적인 지도指導에 대한 상을 바탕으로 『강령』을 비판한다. 보다 넓게 말하자면, 『답변』 내내 그 저자들은 불가사의한 『강령』에 무언가 숨겨진 의미를 부여하려 한다. 그리고 이 의미를 바탕으로 『강령』이 아나키스트뿐 아니라, 감상적 국가주의자들마저 당혹스럽게 할 만한 무언가라고 호도하려 한다. 그렇게 하기 위해 아나키스트들이 아나키즘적 노동조합에 대하여 행하는 이데올로기 영역에서의 추동은 그 조합들을 아나키스트 조직에 종속시키는 것으로 바뀐다. 혁명을 방어하기 위해 적용하려는 일반적인 혁명 군사전략의 방법론은 중앙집권적 국가 군대의 아이디어가 “된다.” 아나키스트 조직의 집행위원회라는 개념은 독재적인 중앙위원회가 무조건적인 복종을 요구하는 것이 “된다.” 아마도 『답변』의 저자들이 이 모든 문제의 본질을 파악하기에 너무나도 무식한 것일 뿐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겠다. 하지만 그렇지 않다! 이 모든 오도와 자의적 해석은 같은 결말을 낳는다. 우리의 반대자들이 “사상적 관점에서 대중을 지도한다”는 표현에 경종을 울리는 척 하는 것이 결국 어떻게 마무리되는지는 곧 보여주도록 하겠다. 하지만 그렇다면, 이들은 그저 영향력이라는 개념을 너무나도 두려워하여, 스스로에게 영향을 주는 것도 두려워하는 이상한 종자들이 아닌가? 대중을 “사상적” 관점에서 지도한다는 것은, 운동에 이정표가 존재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사회주의적 투쟁과 요구들 내부에는 이러한 이정표들이 많지 않다. 그리고 아나키스트들이, 대중의 이정표가 비엔나 노동자의 혁명운동을 배반한 사회민주주의자 따위가 아닌, 아나키스트 사상이기를 바라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하지만, 아나키스트 사상이 대중 운동의 초석이 되기 위해서는, 우리는 잘 조직된 이데올로기적 활동을 전개해야 한다. 다시 말해서, 대중들 사이에 매우 명확하고 일관된 이데올로기로 선전할 수 있는 아나키스트 조직이 필요하다. 이는 너무나도 기초적이고 자명한 것이어서, 오늘날 이 시점에, 아나키즘을 잘 안다고 주장하는 자들에게 다시 한 번 이를 확인해줘야 한다는 것부터가 부끄러운 일이다. 또한 『답변』의 저자들은 이것을 너무나도 잘 알고 있다. 그렇기에 그들은 우리의 관점을 오도하고, 아나키스트 총동맹에 관한 온간 멍청한 말들을 늘어놓은 뒤에, 아나키스트들이 경제조직 내에서 해야 할 일은 대중들에게 정신적, 사상적으로 영향을 주는 일이라고 이야기한다. 그리고 이것이 특히 아나키스트 조직이 대중들을 “사상적” 관점에서 실제로 돕는 일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이는 『강령』을 모욕한 뒤 『강령』의 입장을 빌리는 것과 같은 것이 아닌가? “사상적 관점에서 대중들에게 영향과 도움을 준다”는 의미는 무엇인가? 아나키스트들이 유대인 학살을 자행하거나 사적 형벌을 가하는 폭도들에게 이데올로기적 조력을 하면 되는 것인가? 이데올로기의 영역에서 대중들에게 행하는 모든 조언은 아나키스트의 이데올로기와 일치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그것은 아나키스트적인 조언이 아니다. “이데올로기적 지원”은 사상적 관점에서의 영향력 행사, 혹은 사상적 관점의 지도를 의미할 수 있을 뿐이다. 바쿠닌, 크로포트킨, 르클뤼(Reclus), 말라테스타 등은 의심의 여지없이 대중들의 이념적 지도자들이다. 그러나 우리는 여기에서 더 나아가, 간헐적인 영향력 행사가 아닌, 영구적인 요소가 되는 것을 목표로 한다. 그것은 공동의 이념으로 묶여 구성원들이 이념적으로 조정된 활동을 하는 조직을 통해 더 이상 옆길로 새거나 해소하지 않을 때에야 비로소 가능해질 것이다. 이것이 제기된 문제에 대한 우리의 입장이다. 그리고 『답변』의 저자들이 이데올로기 영역에서의 지도가 권위주의적 지도를 의미한다고 주장하기 위해 궤변을 늘어놓았음은 분명해 보인다.

우리의 반대자들은 혁명은 인민대중이 스스로 만드는 것이라고 말한다. 맞다. 하지만 그들이 알아야 하는 것은 혁명대중은 그 심장에서 혁명을 준비하고 선도할 소수의 주도적 대중을 내포하고 있다는 것이다. 우리가 주장하는 것은 노동자 아나키즘 지지자들이 그 소수가 되어야 진정한 사회혁명이 가능하다는 것이다.

이행기 개념

강령은 사회주의 정당들이 “이행기”라는 단어를 인민의 삶에서 구체제 질서의 여전히 가지고 있으며, 새로운 경제적 · 정치적 체계를 설치하는 과정이라고, 노동대중의 온전한 해방이 아직은 이루어지지 않은 체계라고 이해하고 있음을 적시하고 있다. 하지만 아나키즘적 코뮌주의는 이러한 이행기 과제를 부정한다. 아나키즘적 코뮌주의는 노동대중이 스스로 자유롭고 평등한 사회를 건설하기 위한 기초를 놓는 사회혁명을 옹호한다.

그 문제를 이 이상 명확하게 표현할 수는 수 없다. 그러나 『답변』의 저자들은 『강령』에서 정반대의 것을 발견하기 위해 노력해왔다. 그들은 『강령』이 대체로, “(이행기에 관한) 사상을 아나키즘에 접목시키려는 시도”에 불과하다고 본다. 그리고 그들은 다음과 같은 것을 근거로 제출한다. 『강령』은 노동계급에 적대적인 계급의 압력(혹은 폭력)이 노동자의 투쟁에 의하여 중단되는 시기를 바라본다. 그리고 『답변』의 저자들은 이에 대하여, 그래서 그것이 왜 이행기가 아니냐고 묻는다. 다시 『강령』을 보자. 『강령』은 “능력에 따라 일하고 필요에 따라 분배”한다는 아나키즘적 코뮌주의의 원칙이 반란을 일으킨 노동자들이 혁명을 부수는 것 말고는 관심조차 없고 생산에 참여할 의지도 없는 반反혁명적 적들을 먹여 살려야 한다는 것은 아니라고 주장한다. 그 원칙은 평등한 사회의 구성요소들 간의 분배의 평등을 의미할 뿐이다. 그것은 반혁명적 목적을 위해 사회를 떠난 자들에게는 전혀 적용되지 않는다. 더욱이 그 원칙은 사회서비스를 이용하는 모든 노동사회의 구성원들이 그들의 힘과 역량에 따라 복무해야지, 그들의 변덕에 따라서는 복무하라거나, 복무하지 않아도 된다는 것이 아니다. 『답변』의 저자들은 다시금 이 문제를 제기하며 울부짖는다. 그러니까 이게 왜 이행기가 아니냐! 그들은 “모든 종류의 예외, 제한 또는 특권 없이, 그 양에 관계없이, 모든 생산물에 대한 동등한 즐거움을 누릴 원칙의 적용”이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물론 그들도 이 원칙에서 반란을 일으킨 노동자들이 생산에서 아무런 역할을 하지 않고 오직 그들에게 적대할 방법을 모색하는 부르주아 계급에게 먹이를 주어야만 하는지 여부는 그다지 명확하게 드러나지 않는다는 것은 알았겠지만, 하지만 『강령』의 노동에 대한 원칙에서 노동대중이 부르주아를 부양하지 말아야 한다고 말하니, 그저 노동대중이 부르주아를 부양해야 한다고 주장하자. 같은 것이다. 그들이 이것을 전혀 원하지 않았다 해도 말이다.

우리는 이 관점에 대하여 논의조차 하지 않을 것이다. 사회혁명의 그 날, 노동계급이 이 문제를 스스로 해결할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노동계급이 『답변』의 저자들이 일하기를 거부하는 부르주아들에 대하여 보여주는 부드러운 보살핌에 대한 찬사를 보내지는 않을 것이라고 믿는다. 『답변』의 저자들이 그런 호의를 가지고 부르주아를 노동 사회의 정직한 구성원으로 만드는 방법을 강구해주면 좋을 것 같다.

그러나 『답변』의 저자들의 최고 걸작은 그 이후에 나온다. 그들이 『강령』의 모든 입장을 반박하고, 『강령』의 저자들을 부끄러운 볼셰비키라고 일축하고, 『강령』이 이야기하는 건설적인 체계는 이행기적인 정치적 · 경제적 측면의 국가라고 말한 뒤, 그들은 혁명 이후의 아나키스트 사회의 대담한 윤곽을 보여준다. 모두가 자신의 필요를 충족할 수 있으며, 『강령』이 이야기하는 사회와는 공통점이 없는, 그런 사회 말이다. 하지만 이러한 묘사도 볼 수 있을 것이다. 사회혁명을 향한 창조적 노력은 “아나키스트 사회의 구성을 위한 자연스러운 시작이 될 것”이라는 것 말이다. 이제 『강령』을 보자. “사회 혁명이 노동자의 패배로 끝나, 다시 투쟁과 자본주의에 대한 새로운 공세를 준비해야 하는 경우가 되거나, 아니면 노동자의 승리로 끝나 노동자가 토지, 생산수단, 사회적 기능의 수단을 손에 쥐는 경우가 되거나, 어떠한 경우에도 노동자들은 자유로운 사회의 건설을 시작해야 한다. 한 번 시작되면, 스스로를 끊임없이 강화하고 완성해나가는 것이 코뮌주의 사회의 건설의 특징이기 때문이다.” 아마도 우리의 반대자들의 우뇌는 좌뇌가 행하는 것을 모르는 모양이다.

생산의 문제

또한 『답변』의 저자들은 생산 문제와 관련해서도 우리에게 명확한 반대 의견을 제기하지 않는다. 그들이 『강령』의 어느 부분을 반대하는지, 그리고 그들이 무엇을 지향하는지 알 수가 없다. 『강령』이 이야기하는 통합되고 조정된 생산의 개념은 노동자들이 직접 선정한 기구가 생산을 지시하는 개념과 마찬가지로 전혀 논의되지 않는다. 그들은 조정된 생산이라는 개념이 중앙집권화와 국가주의라며, 탈脫중앙적 생산을 옹호한다.

생산의 통합이라는 개념은 명확하다. 『강령』은 역사를 총체적으로 보면, 현대 사회는 수 세대 간 노동자들의 노력으로 이루어진 결국 하나의 거대한 작업장이라 바라본다. 그렇기에 사회는 모두의 것이며, 특정한 누군가의 것이 되어서는 안 된다.

생산의 각 부문은 상호 연결되어 있어 분리될 수 없다. 각 부문은 분리된 실체로 생산하거나 존재할 수 없다. 작업장의 통합은 기술적 요인에 의해 결정된다. 그러나 이 거대한 공장에는 단 하나의 통일되고 조정된 생산만이 존재할 수 있다. 생산은 노동자와 농민 생산 단체가 정한 전반적인 계획에 따라 수행되고, 이 계획은 사회 전체의 요구에 따라 입안되어야 한다. 그 공장의 생산물은 노동 사회 전체에 속하여야 한다. 그러한 생산이야말로 실로 사회주의적이다.

『답변』의 저자들이 생산의 탈중앙화를 어떻게 구상하고 있는지 설명하는 것을 생략한 것은 매우 유감스러운 일이다. 그러나 우리는 그들이 몇몇 독립적인 생산, 고립된 산업, 분리된 기업집단, 심지어 그들이 적합하다고 생각하는 대로 그들의 제품을 생산하고 처분하는 분리된 공장들에 대해 말하고 있다고 추정할 수 있다. 『답변』의 저자들은 탈중앙화 된 생산이 연방주의 원칙에 따라 운영될 것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연방에 가입한 각 단위는 소규모 민간 기업가일 것이기에 생산은 전혀 사회주의적이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이는 소유의 분할에 기초하기에, 경쟁과 반목을 불러일으키는 데 오래 걸리지 않을 것이며, 결국 얼마 지나지 않아 자본주의가 될 것이다.

생산의 통합은 권위주의적 “중앙”으로부터 지시를 받는 중앙화 된 생산이 아니다. 생산의 통합은 진정한 코뮌주의적 생산이다.

혁명의 방어

혁명의 방어의 문제에 관하여, 『강령』은 혁명을 방어하는 가장 효과적인 수단이 생산, 공급, 토지의 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하는 것이라고 이야기한다. 하지만 『강령』은 또한 이러한 해결이, 그 특권을 유지하거나 되찾기 위한 착취계급이 촉발한 치열한 내전을 일으킬 것이라고 바라본다. 그것은 필연적 귀결이다. 『강령』은 현재 권력을 가지고 있는 계급이 “군사 행동에 있어서의 두 가지 기본 원칙, 즉 작전 계획에 있어서의 단결과 지휘체계의 통일”에 의존할 것이라고 본다. 『강령』은 노동대중 역시 이러한 투쟁의 방법에 의지해야 할 것이고, 자발적으로 생겨날 모든 무장 세력이 하나의 군대로 통합되어야 할 것이라고 말한다. 하지만 이것이 지방의 의용군이 반혁명세력에 맞선 독자적 투쟁을 벌이지 못하게 하는 것은 아니다. 이는 단지, 혁명적 노동자와 농민의 군대가 반혁명적 학살의 전선에서 더 많은 부분을 맡아야 한다는 의미이다.

노동자들은 반혁명과의 전투를 위하여 작전 계획에 있어서의 단결과 지휘체계의 통일을 확보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적들은 최악의 시기에 최악의 지점을 타격할 것이다.

역사가 이에 대한 가장 좋은 증거다.

1. 모든 인민 봉기는 군대가 지배계급에 맹목적으로 복무하는 것을 중단하고 반란군들과 운명을 같이 했을 때 성공적이었다.

2. 러시아혁명 시기에, 무장 세력을 통합하고, 전체 지역에 영향을 주는 군사 작전을 수행할 수 있던 대중운동만이 신뢰를 얻을 수 있었다. 마흐노(Makhno) 동지를 중심으로 한 반란 운동이 그러했다. 이러한 필요를 이해하지 못한 반란 그룹은 잘 조직된 적 앞에서 스러졌다. 러시아혁명의 한복판에서 이러한 일은 수백 번도 넘게 일어났다.

3. 콜차크(Kolchak), 데니킨(Denikin), 유데니히(Yudenich) 등이 이끈 러시아 반혁명세력이 실패한 것 역시 그들이 단일한 작전 계획과 통합사령부를 꾸리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그랬기 때문에 (1918년) 콜차크가 카잔Kazan 근교에서 모스크바로 행군하는 동안 데니킨은 캅카스Caucasus에 머물렀고, (1919년) 콜차크가 청산되었을 때 데니킨이 모스크바에서 포위당한 것이다. (참고 : 우리는 콜차크와 데니킨을 결국 군사적, 사회적 패배에 이르게 한 파르티잔의 투쟁에 대하여 말하는 것이 아니다.)

내전 기간 동안 혁명반군은 통합된 작전계획과 통일된 지휘체계를 다룰 수 있어야 한다. 그러지 못하면 노동자와 농민들은 병법에 매우 정통한 반혁명 세력에 의해 패배할 것이다. 『강령』은 노동자가 그러한 방법론을 활용하여야 한다고 말하는 것과 동시에, 모든 군대는 혁명에 복무해야 한다고 지적하였다. 이러한 군사조직의 존재를 내전 기간에만 한정해야 한다고 말한 것 역시 물론이다. 일단 전쟁이 끝나면, 혁명군은 더 이상의 존재 이유가 없기에 사라질 것이다. 우리는 『강령』에서 혁명의 방어를 다루는 전체 장에서 노동자가 통합 작전계획과 통일 지휘체계를 가져야 할 필요성만을 강조했다. 『강령』은 혁명군의 개념과 방법론 모두가 내전 상황에 필요한 전략으로만 간주되어야 하며, 결코 아나키스트적인 원칙이 아님을 강조하고 있다. 제정신이 박혀있고, 정직한 누군가가, 이것을 바탕으로 강령의 원칙이 중앙집권적 상비군의 원칙이라 몰아붙이는 것은 당혹스러운 일이다. 그리고 『답변』의 저자들께서는 이렇게 하신다. 그들은 우리가 연합/당의 지시에 따르는 생산자 조직에 복종하는 중앙집권적 군대를 창설하고자 하는 열망을 가지고 있다고 말한다. 우리는 아나키스트들이 이 견해가 터무니없고 일관성이 없다는 것을 스스로 이해할 만큼 통찰력이 있다고 믿는다. 『답변』은 혁명의 방어 문제에 대한 유의미하고 즉발적인 해결책을 제안하지 않는다. 『답변』의 저자들은 『강령』에 대한 모욕들을 늘어놓은 뒤에, 혁명에 있어서의 군사적 단결에 대해 무언가에 대해 중얼거렸고, 비록 평상시처럼 잘못 표현하기는 했지만, 평소처럼 『강령』에 반대했다.

하지만 『강령』에 의해 선포된 것처럼 노동자의 생산조직에 혁명군이 귀속되는 것의 필요성을 점검하는 것이야말로, 『답변』의 저자들이 진정으로 놀라운 정신을, 혜안이 넘치는 진정한 걸작을 써낸 것이라 하겠다. 그들은 어찌 감히 우리가 이것이 이행기가 아니라 주장하는지 분노한다. 노동자와 농민 생산 조직에 대한 혁명군의 종속이 정확히 어떻게 이행기를 구성하게 되는지는 불가사의한 수수께끼이다. 노동대중의 군대는 그 자체로 종착점인 것이 아니다. 이 군대는 노동자와 농민 혁명을 수행할 수밖에 없다. 결국, 군대에 책임을 물을 수 있는 것은 노동자와 농민들뿐이며, 군대를 지도해야 하는 것도 노동자와 농민들뿐이다. 『답변』의 저자들에 따르면, 혁명군, 아니 그저 무장 그룹이라 말해도 될 이들은, 노동자와 농민의 조직에 책임을 지지 않아도 된다. 이들은 독자적으로 존재할 것이며, 원하는 대로 싸울 것이다. 어쩌면 이렇게 자신이 들어온 총구의 방향과 정반대의 말을 할 정도로 뻔뻔할 수 있는가!

아나키스트 조직

이 점에서도, 『답변』의 저자들이 가장 열심인 것은 『강령』을 잘못 표현하는 일이다. 무엇보다도 그들은 집행위원회의 개념을 당 중앙위원회, 즉 명령을 내리고 법과 명령을 만드는 위원회로 호도한다. 정치를 조금이라도 아는 사람이라면 집행위원회와 중앙위원회는 전혀 다른 생각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다. 집행위원회는 아나키스트 기구일 수 있다. 실제로, 그러한 기구는 많은 아나키즘적 조직, 아나키즘적 조합주의 조직에 존재한다.

『답변』의 저자들은 동질적인 이데올로기에 기초한 광범위한 아나키스트 조직이라는 개념은 거부하면서도, 모든 아나키스트 분파가 하나의 “단일한 가족”으로 모이는 통합 조직의 개념은 이야기한다. 그 조직의 설립을 준비하기 위해, 그들은 모든 논쟁적인 문제들을 모든 각도에서 토론하고 검토하는 신문을 모든 나라에 출판하여 아나키스트들을 중재하자고 제안한다.

우리는 이미 이 통합이라는 개념에 대한 입장을 설명했다. 그리고 그것을 반복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저, 아나키스트들 사이의 의견불일치는 토론의 장으로 활동할 정기간행물의 부족 따위에서 비롯하는 것이 아님을 짚고 넘어가도록 하겠다. 이 토론의 장은 서로 다른 조류를 한데 모으지는 못할 것이고, 단지 노동대중의 마음을 혼란스럽게 만들 뿐일 것이다. 나아가, 스스로 아나키스트라고 자칭하는 개인들이 한 아름 있다 해도, 이들이 아나키스트인 것은 아니다. 이러한 자들을 (무언가를 기반으로 하여) “하나의 가족”으로 묶어내고, 그 웅성거림을 “아나키스트 조직”이라고 호칭하는 것은 단순히 우스꽝스러운 것일 뿐 아니라, 해롭게 우스꽝스러운 것이다. 만약 불행하게도 이런 일이 일어난다면, 아나키즘이 노동대중의 혁명적 사회운동으로 발전할 가능성은 사라질 것이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무차별적 혼합이 아니라 전체 아나키스트 세력과 조직들로부터 선별된 아나키즘적 코뮌주의 조직이다. 이것이야말로 아나키스트 운동의 생존에 반드시 필요한 것이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뒤범벅인 통합이 아니라 아나키스트 이데올로기의 분화와 탐구를 통해 그 모든 것을 동질적인 운동 강령으로 묶어내는 것이다. 이것만이 아나키스트 운동을 노동대중의 운동 안에서 재건하고 강화할 수 있는 방법이다.

『답변』의 윤리적 특징 몇 가지를 언급하며 결론을 내리도록 하자. 현실적인 측면에서, 『답변』이 비판하고 있는 것은 『강령』이 아니다. 『답변』은 그 저자들이 멋대로 오해하고 있는 입장들에 대하여 반박하고 있다. 『답변』에는 추측이 포함되어 있지 않은 문단이 단 하나도 존재하지 않는다. 이들은 언제나 『강령』의 입장 속에서 예수회적인 후퇴를 찾아내고, 그것들을 조작한 후에, 그 입장에 반대한다. 그들의 손에서, 『강령』은 아나키스트 운동과 노동계급에 대한 사악한 음모로 바뀌었다. 이것이 그들이 어떻게 『강령』의 생각을 이해하고 있는지를 대표한다. “대중을 정치적, 사회적으로 지도하기 위한 조직의 구체적 형태와 그 활동태는, 가장 높은 곳에 전위당(총동맹), 약간 아래에 동맹이 이끄는 노동자와 농민의 조직, 더 아래에 반혁명에 대항하기 위한 기반으로 세워진 조직(군대)이 있는 형태가 될 것이다.” 이 외에도, 그들은 “경찰과 같으며 정치적인 폭력” 기구에 대하여 이야기한다. 결국 이들은 아나키스트 총동맹이 지도하는 경찰국가의 상을 그려놓은 것이다.

이 모든 거짓말의 목적은 무엇인가? 『답변』의 저자들이 『강령』을 읽었다면 『강령』이 함축하고 있는 사상이 자본주의적 계급 사회에 대항하는 투쟁의 기간 동안 아나키스트 세력의 조직을 건설해 대중들 사이에 아나키즘을 선전하고 그 투쟁의 이데올로기적 방향을 결정해야 한다는 것으로 귀결되는 것을 인지했을 것이다. 노동대중이 자본주의 사회를 퇴치하는 그 순간, 노동대중의 역사에 새로운 시대가 도래할 것이다. 모든 사회 · 정치적 기능이 새로운 삶의 창조에 착수할 노동자와 농민들의 손에 넘어가는 시대가 도래할 것이다. 그 시점에서, 아나키스트 조직과 총동맹은 존재의 이유가 없어질 것이고, 결국 노동자와 농민들의 생산적인 조직으로 녹아들 것이다. 『강령』은 혁명 이후 노동자와 농민의 역할을 다루는 〈건설의 문제〉라는 장을 포함하고 있다. 반면, 세계 아나키스트 연합의 구체적인 역할에 대해서는 아무런 언급도 하지 않는다. 그리고 이것은 우연이 아니라 고의적인 누락이다. 우리는 모든 정치적이고 경제적인 활동은 노동조합, 공장 위원회, 평의회 등 자치적 기구들에 집중될 것이라고 바라보기 때문이다.

하지만, 『답변』의 저자들에 따르면, 이 시점에 아나키즘적 코뮌주의 당 같은 것이 등장할 것이다. 어딘가 위에서부터 구성되어, 노동대중의 “상급”조직과 “하부”조직에, 군대에 지침을 내리려 할 것이다. 그러니까 이것이 그들이 비판 문건을 작성하는 방식이다. 이들이 독자에 대해 진실을 취급하는 방식이다. 이러한 방법론의 무책임함은 정치적 문제에 대하여 판단할 수 있는 독자들에게 놀라움으로 다가올 뿐이다.

아나키스트 운동이 취약해진 다른 이유들을 분석하면서, 『답변』의 저자들은 다음과 같이 지적한다. “조사, 분석, 비교를 할 수 있는 여력도 없고 욕망도 없는 대중의 현재 심리 상태는 결과적으로 가장 쉬운, 가장 적은 저항이 따르는 과정을 모든 정파의 선동가들이 제시하는 ”준비된“ 방법에 따르도록 한다”고 말이다.

『답변』에 대한 분석을, 그 놀라운 저자들의 말로 마무리하도록 하자. 그들은 스스로의 무가치함과 위선을 다음과 같은 놀라운 말로 대변한다. “대중의 창조적 가능성에 대해, 대중의 자치적 행동에 대해, 이데올로기적 지도가 이 가능성에 얼마나 큰 위협인지에 대해 말해보자. 만약 『강령』을 믿는다면, 그 사람은 대중들이 자기 해방을 위한 길을 찾을 수 없다고 믿을 뿐 아니라, 그러한 욕망조차 없다고 믿는 것이다. 대중들이 가장 저항이 적은 길을 찾는 것이라 바라보는 것이다.”

이것이 실제 상황이라면, 아나키즘에 있어서는 상황이 좋지 않다. 이것이 사실이라면, 아나키즘은 대중을 자기편으로 억지로 끌어들여야 할 테니까 말이다. 『강령』을 어떻게든 비난하기 위하여, 이성과 사실들에도 불구하고, 『답변』의 저자들은 결국 저러한 선언을 하는 것으로 전락했다.

우리의 앞선 논의에서, 『답변』 저자들의 계획이 근본 없고, 우리 운동의 비일관성의 전형이라는 것을 충분히 보였기를 바란다. 그리고 윤리적으로 말하자면, 『답변』은 비방은 어떻게 하면 되는지에 대한 좋은 본보기일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