엠마 골드만

애국심: 자유에의 위협

1910년

―편집자 주―

이 글은 엠마 골드만이 1910년 『아나키즘과 그 외 에세이들Anarchism and Other Essays』이라는 제목으로 펴낸 책에 실린 에세이다.

한국어 번역은 『저주받은 아나키즘』(김시완 역, 우물이있는집, 2001)이라는 다소 엉뚱한 제목으로 출판되었으나 현재는 절판되었다.

엠마 골드만의 에세이들을 편집하는 과정에서 별도로 하나의 문건으로 취급하게 되어 여기서는 〈애국심: 자유에의 위협〉만을 옮긴다.


애국심이란 무엇인가? 자기가 태어난 곳, 어릴 때의 추억과 희망과 열망과 꿈이 있던 곳에 대한 사랑이 애국심인가? 순진한 어린 시절에 흘러가는 구름을 보고 우리도 저 구름처럼 빨리 달리고 싶었던 그런 고향에 대한 사랑이 애국심인가? 애국심의 고향은 수십억 개의 반짝이는 별들을 세던 곳이요, 밤의 어두움 때문에 두려움에 떨며 작은 심장이 고동치던 곳인가? 또 그곳은 새들의 노랫소리를 듣고, 나비처럼 날아 그들처럼 저 멀리 날아가는 꿈을 꾼 곳인가? 아니면 어머니 무릎에 앉아 용사들의 용감한 이야기와 정복의 이야기를 듣던 곳인가? 간단히 말해 애국심이란 행복하고 즐겁고 신나게 놀던 어린 시절의 아름답고 소중한 추억이 고스란히 묻어있는 그 장소에 대한 사랑인가?

애국심이 이런 것이라면 오늘날 미국인 중 애국적이라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은 거의 없다. 그들의 놀이터는 공장과 광산과 제재소이고, 새의 지저귐 대신 기계소리에 귀가 멀었기 때문이다. 옛 전사의 이야기를 더 이상 들을 수 없다. 오늘날 어머니의 이야기는 슬픔과 눈물과 탄식의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애국심은 무엇인가? 존슨 박사는 이렇게 말한다.

“애국심은 악당이 마지막으로 의지하는 곳이지요.”

애국심에 반기를 든 우리 시대의 위인 톨스토이는 애국심을 살인자 양성을 정당화하는 원천이라고 규정한다. 살인자라는 직업은 생필품인 구두, 의복, 집을 만드는 것보다 사람을 죽이는 훈련을 요구받는다. 그리고 이 살인자는 일반 노동자들보다 훨씬 좋은 보수와 영예를 보장받는다.

또 한 사람 위대한 반애국주의자인 구스타프 허브(Gustave Hervé)는 애국주의를 간단히 미신이라고 부른다. 종교보다 더 해롭고 잔인하고 비인간적인 미신이 애국주의라는 것이다. 종교적 미신은 인간이 자연 현상을 제대로 설명할 수 없는 데서 나왔다. 원시인은 천둥소리를 듣고 번개를 보았을 때 이 현상들을 설명할 수 없었다. 그래서 이 현상은 자신보다 훨씬 더 큰 힘을 지녔다고 결론지었다. 이와 유사하게 비가 내리는 것이나 기타 여러 자연현상에서 초월적 힘을 보았다. 이에 비해 애국주의는 거짓말과 허위의 네트워크를 통해 인위적으로 만들어지고 유지되는 미신이다. 인간에게 자존심과 권위를 빼앗고 교만함과 독단을 증대시키는 미신이다.

확실히 독단과 교만과 이기주의가 애국주의의 핵심적 요소들이다. 그 예를 제시해보겠다. 애국주의는 지구가 여러 개의 작은 지역으로 나뉘어 있고, 강철 문이 그 경계를 이룬다고 가정한다. 우연히 특정한 장소에 태어난 자는 다른 지역에 태어난 자보다 자신이 더 낫고 고상하고 위대하고 지적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그 선택된 장소에 태어난 모든 사람은 다른 사람들에게 자신의 우월성을 과시하기 위해 싸우고 죽이는 것이 의무라는 것이다.

물론 다른 지역에 사는 사람들도 이와 비슷하게 생각한다. 그 결과 어릴 때부터 다른 민족, 예컨대 독일인, 프랑스인, 이탈리아인, 러시아인에 대한 피비린내 나는 이야기를 들으면서 마음에 독기를 품게 된다. 이 아이가 어른이 되었을 때 자기는 신에게 선택된 자로서 자기 나라를 외적의 침입으로부터 지켜야 한다는 신념을 확고하게 지니게 된다. 그래서 우리 인간들은 많은 육군과 해군을 보유하고 더 많은 전함과 무기들을 유지하려고 한다. 미국 역시 이런 목적으로 짧은 기간에 무려 4억 달러를 군비에 쏟아 부었다. 이 4억 달러는 다름 아닌 일반 국민들에게서 빼앗은 돈이 아닌가. 그리고 분명한 사실은 애국심을 지닌 자들은 부자가 아니라는 사실이다. 부자들은 세계주의자Cosmopolitan이다. 부자들은 세계 어디를 가나 고향 같다. 미국에 사는 우리는 이 점을 잘 안다. 부유한 미국인은 프랑스에서는 프랑스인, 독일에서는 독일인, 영국에서는 영국인이 아닌가? 이들은 미국 공장의 어린 노동자와 면화 노예들이 생산한 코스모폴리탄적 물건들을 걸치고 흥청망청하지 않는가?

그렇다. 부자들의 애국심이란 이런 것이다. 예를 들어 러시아 차르 같은 독재자에게 사소한 재난이 생겼을 때 위로 전문을 보내는 것과 같은 장식이다. 러시아의 세르기우스(Sergius) 황제가 러시아 혁명분자에게 처형당했을 때 미국의 루스벨트(Franklin Delano Roosevelt) 대통령이 자기 나라 국민의 이름으로 위로 전문을 보냈듯이 말이다.

애국주의란 교활한 살인자 디아즈(Diaz) 같은 자를 지지한다. 이 자는 멕시코에서 수천 명의 목숨을 빼앗았고, 미국 내 멕시코 혁명주의자들을 체포하여 아무런 혐의도 없는데도 미국 감옥에 투옥시키는 데 일조하였다.

그러나 애국심은 부와 권력을 쥔 자의 것이 아니다. 일반인들에게 잘 먹히는 것이 애국심이다. 볼테르(Voltaire)의 절친한 친구이기도 한 프러시아의 프리드리히 대제(Frederick the Great, Frederick Ⅱ)에 관한 역사적 교훈이 떠오른다. 볼테르가 프리드리히에게 말했다.

“종교는 사기지만 대중들을 위해 꼭 존속되어야 합니다.”

애국심에는 비용이 많이 소요된다. 아래 통계들을 살펴보면 이 말을 의심하지 않을 것이다. 지난 사반세기 동안 전 세계의 육군과 해군에 투입된 비용이 점차적으로 증가했다. 경제문제를 연구하는 학생 입장에서는 이런 군비 증가에 깜짝 놀랄지 모르겠다. 1881년에서 1905년까지 편의상 5년 단위로 군비증가 상황을 살펴보자. 이 기간 동안 몇몇 강대국들의 육군과 해군에 들어간 비용을 중심으로 살펴보면, 영국은 1881년에서 1905년 사이에 군비가 2,101,848,936달러에서 4,143,226,885달러로 증가했다. 프랑스는 3,324,500,000달러에서 3,455,109,900달러로, 독일은 725,000,200달러에서 2,700,375,600달러로, 미국은 1,275,500,750달러에서 2,650,900,450달러로, 러시아는 1,900,975,500달러에서 5,250,445,100달러로, 이탈리아는 1,600,975,750달러에서 1,755,500,100달러로, 일본은 182,900,500달러에서 700,925,475달러로 증가했다.

여기서 언급한 각국의 군비를 5년마다 검토했다. 1881년에서 1905년 사이에 영국 육군에 투입된 비용은 4배, 미국의 경우는 3배, 러시아는 2배, 독일은 35%, 프랑스는 15%, 일본은 거의 5배 증가했다. 이들 국가들이 1905년까지 25년 동안 투입한 전체 비용 중 육군에 투입한 비용의 증가율을 비교하면 다음과 같다.

영국은 20%에서 37%, 미국은 15%에서 23%, 프랑스는 16%에서 18%, 이탈리아는 12%에서 17%, 일본에서는 12%에서 14%이다. 반면 독일의 경우는 58%에서 25%로 그 비율이 줄어들었다는 사실이 흥미롭다. 이렇게 육군에 투입된 지출 비율이 줄어든 주요 이유는 다른 데 투입된 액수가 많아졌기 때문이다. 다만 1901~1905년 기간만 놓고 보면 군에 지출된 비용이 이전의 다른 기간 동안보다 훨씬 더 높다. 통계상으로는 국가 전체 수입 중 육군에 투입된 비용이 가장 높은 나라들은 영국, 미국, 일본, 프랑스, 이탈리아 순이다.

강한 해군을 만들기 위해 투입된 비용 역시 인상적이다. 1905년까지 25년 동안 해군에 투입된 비용의 증가를 국가별로 보면 다음과 같다. 영국 300%, 프랑스 60%, 독일 600%, 미국 525%, 러시아 300%, 이탈리아 250%, 일본 700% 액수 측면에서는 영국을 제외하면 미국이 해군에 가장 많이 투자를 했다. 그 어느 나라보다도 미국의 해군 육성비용은 국가 전체투자액 중 가장 많은 액수를 차지한다. 1881~1885년 기간에는 미국 해군의 비용이 국가 전체비용 중 6.20%를 차지했는데 그 총액은 1890년까지 6.60%로, 1895년까지는 8.10%, 1900년까지는 11.70%, 그리고 1901~1905년에는 16.40%를 차지했다. 그리고 지금도 그 비율이 계속 증가하고 있을 것이 틀림없다.

군비증가 내역은 인구 1인당 세금 내역을 계산해보면 보다 확실히 알 수 있다. 앞에서 제시한 25년의 기간 동안 1인당 세금 증가액을 국가별로 비교해 보면 아래와 같다. 영국 18.47달러에서 52.50달러, 프랑스 19.66달러에서 23.62달러, 독일 10.17달러에서 15.51달러, 미국 5.62달러에서 13.64달러, 러시아 6.14달러에서 8.37달러, 이탈리아 9.59달러에서 11.24달러, 일본 86센트에서 3.11달러.

국민 1인당 부담 비용을 대략적으로 살펴봐도 군비로 인한 경제적 부담이 어느 정도인지 알 수 있다. 이런 자료를 바탕으로 내릴 수 있는 확실한 결론은 육군과 해군에 투입된 비용이 현 시점에서 계산된 각국의 인구 증가율보다 훨씬 높다는 것이다. 달리 말해 군비 부담이 증가하면서 각국은 점차 인력과 자원을 고갈시키고 있다.

이런 쓸데없는 낭비를 하게 된 원인이 바로 애국심이다. 이 비용이면 질병을 앓고 있는 일반인을 치료하고도 남는 돈이다. 그런데도 애국주의는 여전히 극성을 부린다. 사람들에게 계속 애국심을 가지라고 촉구한다. 애국심 때문에 쓸모없는 비용을 치르고, 국방을 책임지는 자들을 먹여살리고 심지어 자기 자식을 희생시키면서까지 애국심을 발휘해야 하는 형편이다. 애국심은 국가에 대한 충성을 요구한다. 이런 맹목적인 충성은 부모와 형제자매를 죽일 수 있는 태세를 갖추고 그런 명령에도 복종한다는 의미이다.

외국의 침략으로부터 국가를 지키기 위해서는 상비군이 필요하다는 주장이 일반적이다. 하지만 모든 지식인은 이 주장이 어리석은 국민을 겁주고 강제하기 위해 유지된 하나의 미신임을 다 안다. 세계의 각 정부는 서로의 이해관계를 잘 알고 함부로 침략행위를 저지르지 않는다. 전쟁이나 정복에 참여하는 것보다 국제 분쟁을 중재하는 것으로 더 많은 이익을 얻을 수 있다는 사실을 각국 정부는 잘 안다. 칼라일(Thomas Carlyle)은 이렇게 말했다.

“전쟁이란 겁이 너무 많아 자기가 직접 나가 싸울 수 없는 두 도둑놈간의 싸움이다. 그래서 이 마을 저 마을에서 젊은이들을 모아 군복을 입히고 무장을 갖춰 서로 야수처럼 싸우라고 들판에 내보낸다.”

모든 전쟁의 원인을 추적해 보면 그 원인이 유사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스페인-미국 간 전쟁을 예로 들어보자. 이 전쟁은 미국의 역사상 상당한 규모로 전개된 애국적 사건으로 기록될 것이다. 우리 미국인의 심장은 저 잔악한 스페인 사람들에 대해 얼마나 불타는 적개심을 가졌던가! 솔직히 말하건대 이런 우리의 분개는 자발적으로 불타오른 것이 아니다.

부처 웨일러(Butcher Weyler)가 다수의 점잖은 쿠바인과 쿠바 여성들을 난폭하게 죽인 사건 이후 신문의 선동으로 그렇게 되었다. 소위 정의에 불타는 미국 국민들의 적개심은 높아졌고 나가 싸우겠다는 분위기가 되었다. 그리고 실제로 용감하게 싸웠다.

그러나 포연이 자욱해지고 전사자를 파묻고 전쟁 비용이 국민의 부담으로 돌아와 생필품 값과 집세가 뛰자, 즉 애국적 열기에서 제정신으로 돌아오자, 미국은들은 갑자기 스페인 미국 간 전쟁의 원인이 설탕 가격이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보다 명료하게 말한다면 스페인 정부에 의해 위협을 받은 미국 자본가들의 이익을 지키기 위해 미국민의 생명과 피와 돈이 이용되었던 것이다.

이것은 과장된 이야기가 아니다. 확실한 사실과 수치에 근거한 주장으로 쿠바 노동자에 대한 미국 정부의 태도에서 입증된다. 쿠바가 미국의 손아귀에 확고히 장악되자 쿠바를 해방하기 위해 파견된 미군들은 전쟁 직후에 발발한 담배 제조 노동자들의 대규모 파업 때 쿠바 노동자들을 사살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자본주의적 이익 때문에 전쟁이 발발한 경우가 이것만은 아니다. 많은 사람의 피와 눈물을 흐르게 한 끔찍했던 러일전쟁의 비밀이 벗겨지기 시작했다. 이 엄청난 희생을 요구한 전쟁의 이면에는 아주 엄청난 상업주의의 신이 도사리고 있었다.

러일전쟁 당시 러시아 총사령관이었던 쿠로파트킨(Aleksey Nikolayevich Kuropatkin)은 전쟁 이면에 숨겨져 있던 진실을 밝혔다. 러시아 황제와 의회는 한국의 토지와 광산 개발권을 따내어 거기에 투자하고 있었다. 그리고 이 전쟁을 통해 신속하게 재산을 모을 수 있는 독점적 권리를 행사할 수 있었다.

육군 상비군과 해군력이 평화를 지키는 최선책이라는 주장은 가장 평화적인 시민은 중무장한 시민이라는 주장과 같은 논리이다. 일상적 경험에서 보듯이 무장한 개인은 항상 자기 힘을 과시하고자 한다. 이런 성향은 역사적으로 볼 때 정부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정말 평화로운 나라는 평화를 지킨다는 명분으로 생명과 에너지를 전쟁준비에 소모하지 않는다.

사실 육군과 해군을 증강해야 한다는 강력한 주장은 외부로부터 오는 위험 때문이 아니다. 오히려 내부에서 점증하는 대중적 불만과 노동자들의 국제적 연대에서 비롯된 정부의 두려움 때문이다. 여러 열강들이 대비하는 것은 내부의 적을 쳐부수려는 것이다. 이 내부의 적은 일단 의식이 각성되면 어떤 외부의 침략자보다 무서운 적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수세기 동안 대중들을 노예화해온 열강들은 대중들의 심리를 철저하게 연구했다. 그 결과 일반적인 대중은 어린아이와 같아서 작은 장난감 하나만 쥐어줘도 절망과 슬픔과 눈물이 기쁨으로 돌변할 수 있다는 사실을 알아냈다. 그 장난감의 의상을 더욱 화려하게 하고 색깔을 요란하게 할수록 대중이라는 무수한 어린애들한테 더 잘 먹혀든다.

육군과 해군은 사람들의 장난감이다. 군대를 더욱 매력적이고 좋게 만들고 이런 장난감을 전시하는데 수많은 돈을 썼다. 함대를 구성하고 그 함대를 태평양으로 파견하는 미국 정부의 목적은 모든 미국 시민이 미국에 대해 자긍심과 영광을 느끼게 하려는 것이다.

샌프란시스코는 이 태평양 해군 함대를 유치하는데 수십만 달러를 썼다. 로스앤젤레스는 6만 달러, 시애틀과 타코마는 약 10만 달러를 썼다. 이 함대를 유치한다는 말이 무슨 말인가? 고위 장교들이 멋진 만찬을 즐기는 동안 용감한 수병들은 음식을 배고프지 않게 달라고 반란을 일으켰다. 남녀노소 할 것 없이 수많은 사람들이 미국 전역에서 굶주려 거리에서 쓰러지는데 26만 달러가 불꽃놀이와 극장 파티와 먹고 마시고 흥청거리는 데 쓰였다. 일자리가 없는 많은 사람들이 헐값에라도 자신의 노동력을 팔지 못하고 있는데 말이다.

26만 달러! 이런 엄청난 액수의 돈을 당신은 평생 만질 수나 있겠는가? 먹을 것도 잠잘 곳도 없는 샌프란시스코, 로스앤젤레스, 시애틀, 타코마 같은 도시의 아이들은 이 태평양 함대를 구경하러 갔다. 이것을 두고 한 신문은 다음과 같이 언급했다.

“아이들에게 영원히 잊지 못할 추억.”

멋진 배를 구경하는 일이 잊지 못할 멋진 일이긴 하다. 문명화된 살육장치를 봤으니 말이다. 어린이의 마음이 이 함대를 보고 오염된다면 참된 인간적 형제애를 실현할 소망이 깃들 곳이 어디 있겠는가?

우리 미국인들은 평화를 사랑하는 사람이라 한다. 우리는 피 뿌리는 것을 증오한다. 우리는 폭력에 반대한다. 그러나 우리는 비행기에서 다이너마이트 폭탄을 무고한 시민들에게 떨어뜨릴 수 있다는 사실에 발작적으로 기뻐한다. 경제적 궁핍 때문에 자기 목숨을 걸고 대부호의 집을 턴 사람을 우리는 언제든지 변호하기는커녕 교수대에 매달고 전기의자에 앉혀 죽이고 그것도 아니면 린치라도 가할 태세가 되어 있다. 그러면서 우리 마음은 미국이 지상에서 가장 강력한 국가가 되고 궁극적으로는 전 세계 모든 국가를 미국의 강철 군화 아래 짓누를 수 있다는 생각에 한껏 가슴이 부풀어 있다.

이것이 애국심의 논리이다.

애국심의 논리 때문에 일반인들이 당하게 될 사악한 결과들이 이 정도인데, 애국심의 직접적 피해자인 군인들이 당하게 될 모욕과 상처는 어떠하겠는가? 군인들은 무지하고 미신적인 데서 불쌍하게 당하는 미혹된 희생자들이다. 조국의 구원자요 민족의 보호자라는 군인에게 애국심은 무엇을 심어주었는가? 평화 시에도 노예 같은 복종과 사악함과 왜곡된 삶을 강요받는다. 그리고 전시에는 자기 목숨을 잃을 위협에 처하게 된다.

최근 샌프란시스코로의 강연 투어에서 나는 프레시디오를 방문했다. 이곳은 샌프란시스코 만灣과 골든게이트 파크가 굽어보이는 너무나 아름다운 곳이다. 이곳은 원래 어린아이들의 놀이터와 연약한 사람들을 위한 정원과 음악당이 있어야 할 곳이다. 그런데 이곳은 병영이 자리 잡아 추하고 더러운 회색빛을 띠고 있었다. 여기서 젊은 군인들이 상사의 군화와 계급장이나 닦으면서 청춘을 보내고 있었다. 여기서도 나는 계급적 구별을 확인했다. 자유로운 공화국의 건강한 아들들이 죄수들과 같이 일렬로 서서 위관급 장교들에게 경례를 붙이고 있었다. 미국의 평등이란 인간성을 타락시키고 군복을 찬양하는 것이 아닌가!

병영 생활은 성적 도착을 발달시키는 경향이 있다. 미국의 병영도 유럽 군과 비슷한 결과를 양산하고 있다. 성 심리학에 관한 저명한 저술가인 하벨록 엘리스(Havelock Ellis)는 유럽 병영의 성도착증을 철저하게 연구했다. 그의 글을 인용하겠다.

“일부 병영은 남성의 사창굴이다. 자신의 몸을 파는 군인들의 수는 믿기지 않을 정도로 많다. 어떤 부대에서는 대부분의 군인들이 돈을 받고 몸을 팔았다고 보아도 과언이 아니다. 여름밤에는 하이드 파크와 앨버트 게이트 근처에서 근위병과 기타 군인들이 활발하게 서로 거래를 하느라고 붐빈다. 이들은 신분을 숨기지도 않고 병영 안팎에서 군복을 입고 성매매를 한다. 대부분의 경우 이 돈들은 병사들의 부수입이 된다.

어느 정도까지 이런 성도착 현상이 군 내부까지 침투했는지는 별도의 집이 이런 성매매용으로 존재한다는 사실에서 충분히 그 실상을 파악할 수 있다. 이런 관행은 영국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고 보편적이다. 영국과 독일에서뿐 아니라 프랑스에서도 군인들이 몸을 판다. 군 매음용 특별 하우스가 파리와 군 주둔지 마을에 존재한다.”

하벨록 엘리스의 연구에 미국 병영에 관한 연구도 포함되었더라면 이런 유럽의 여러 나라에서 벌어지는 현상들이 미국의 육군과 해군에서도 동일하게 유행한다는 사실을 알아냈을 것이다. 상비군이 증가하면서 필연적으로 이런 성도착 현상이 확산되고 있다. 병영은 성도착증의 온상이다.

병영 생활은 성적 문제뿐만 아니라 군인들의 제대 후 노동력 활용에도 문제를 야기한다. 직업적 기능이 특출한 사람은 군에 입대하지 않으려 하지만 이런 사람이 군에 들어가서 군 생활을 마치고 나면 스스로 옛 직업과는 전혀 다른 일을 찾는다. 그저 흥분하고 모험이나 감행하도록 훈련받고 그러면서 게으른 습성까지 갖게 된 군인들은 평화로운 일들이 적성에 맞지 않게 된다.

제대한 군인들은 사회적으로 유익한 일터로 돌아가기 어렵다. 군에 종사하는 사람들은 대개 사회적 하층민과 출옥한 사람들이다. 이들은 삶이 힘들거나 개인적 성향 때문에 군에 들어가는 경우가 많다. 이들이 군 복무 기간을 마치고 사회로 복귀할 때는 이전보다 더욱 잔인해지고 타락한 상태라 과거처럼 다시 범죄에 빠질 가능성이 높다. 우리의 감옥에 들어온 사람들 중에 군인이었던 사람들이 많다는 건 잘 알려진 사실이다. 또 군에 입대하는 사람 중에는 전과자들이 많다.

애국심으로 인한 폐해가 극명하게 드러난 사건이 있다. 바로 윌리엄 부왈다(William Buwalda) 이등병과 관련된 사건이다. 부왈다 이병은 어리석게도 군인의 신분이면서 인간으로서 누릴 수 있는 권리를 제대로 행사할 수 있다고 믿었다. 그러나 군 당국은 그를 아주 엄중하게 처벌하였다. 그는 15년 동안 자기 조국에 봉사했다. 이 기간 동안 그의 기록은 깨끗했다. 부왈다의 형기를 3년으로 감형시킨 펀스턴(Funston) 장군의 말을 들어보자.

“장교든 사병이든 군의 첫 번째 의무는 무조건 정부에 복종하고 충성하는 것이다. 자신이 그 정부를 인정하고 말고는 따질 필요도 없다.”

이렇게 펀스턴 장군은 충성의 성격을 규정했다. 이 사람의 말대로라면 군에 입대하면 독립선언문의 원칙들이 다 폐기된다.

애국심이 이상하게 발전하여 생각 있는 한 인간이 충성스러운 하나의 기계로 변질되는 것이다.

부왈다에게 너무나 가혹한 형을 선고하는 이유를 정당화하면서 펀스턴 장군은 미국민들에게 부왈다와 같은 행동은 “반역에 맞먹는 중범죄”라고 말했다. 부왈다는 실제로 어떤 무서운 범죄를 범했는가?

그 개요를 요약하면 이렇다. 윌리엄 부왈다는 1천5백 명이 모인 샌프란시스코의 한 집회에 참석했다. 그리고 겁도 없이 연사인 나에게 손을 흔들었다. 이것을 두고 펀스턴 장군은 ‘무서운 중범죄’라 하여 ‘탈영보다 훨씬 더 질이 안 좋은 엄청난 군사적 범죄’를 범했다고 하는 것이다.

부왈다의 행동이 한 사람을 범죄자로 만들 만큼 애국심에 어긋나는 행동이라 할 수 있는가? 이 행동으로 그를 감옥에 보내고, 15년간 충성한 군 복무의 의미를 다 소멸시키는 것이 정당한가?

부왈다는 조국에 인생의 황금기와 청춘을 바쳤다. 그러나 그는 아무것도 얻지 못했다. 애국심은 이렇듯 냉혹하고 다른 모든 욕심쟁이 괴물처럼 모든 것을 다 요구한다. 애국심은 군인도 자기의 감정과 의견을 표현할 수 있고, 취향과 사상을 가질 수 있는 권리가 있는 인간이라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는다.

애국심은 군인에게 이런 인간적 권리를 인정하지 않는다는 것을 부왈다 사건을 통해 배웠다. 비록 값비싼 대가를 치렀지만 이런 교훈이라도 얻었으니 전혀 무익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부왈다가 석방되었을 때 군 내에 그가 있을 자리는 없었다. 그러나 그는 더 큰 인간의 자존을 되찾았다. 어찌 되었든 인간의 자존이라도 되찾았으니 3년간 감옥에서 썩은 대가는 받은 셈이다.

최근 한 신문 기사에서 미국의 군 상황에 관한 글을 쓰는 사람이 독일에서는 군인이 민간인보다 우월한 힘을 행사한다는 사실에 대해 논평을 했다. 여러 이야기들 중 그의 요점은 우리 공화국 정부가 다른 건 몰라도 독일과는 달리 모든 시민에게 평등한 권리를 보장한다면 그것만으로도 공화국은 존재할 만한 이유가 충분하다는 것이다.

미국이 평등하다고 생각하는 이 기자는 벨(Bell) 장군이 통치하는 애국적 정권이 콜로라도 주를 통치하고 있을 때 그곳에 있지 않았음이 분명하다. 벨 장군은 콜로라도에서 애국심과 공화국이라는 이름으로 사람들을 군인으로 뽑아 진흙탕에 굴리고 국경선을 넘나들게 만들고 온갖 종류의 수치를 다 당하게 했다.

이런 모습을 그 기자가 봤다면 아마 생각을 바꿨을 것이다. 이 콜로라도 사건은 미국이 군사강국으로 성장하면서 빚어진 유일한 사건이 아니다. 파업이 발생하면 군인들이 권력을 쥐고 있는 자들을 구원하려 달려간다. 파업 현장에서는 마치 로마 황제의 근위병처럼 거만하고도 잔인하게 행동한다. 그렇게 하도록 인정한 군법이라는 것이 우리에게 있다. 이 군법을 그 기자는 잊고 있는가?

글을 쓰는 사람들이 지닌 가장 큰 문제점은 현 시사에 대해 아주 무지하다는 점이다. 게다가 정직함도 결여되어 있어 말해야 할 이야기를 하지도 않는다. 이런 상황에서 무지막지한 군법이 별 논의도 거치지 않고 일반인에게 널리 홍보도 되지 않은 채 의회를 통과했다. 그 군법은 대통령에게 일반 시민을 의무적으로 군인으로 징집할 권리를 부여했다. 즉 국가 방위가 필요하다면 평화롭게 사는 시민을 살인자로 돌변시킬 권리를 대통령에게 부여한 것이다. 말이 국가 방위이지 실제로는 대통령을 정점으로 한 특정 정당의 이익을 지키기 위한 것이다.

한 기자는 미국에서와 같은 군사주의는 해외에서 절대 있을 수 없다고 주장한다. 그 이유는 미국의 경우는 자발적으로 군인이 되는 반면 유럽에서는 의무복무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하지만 여기서 두 가지 중요한 사실을 고려해야 한다.

첫째, 유럽에서는 징집제도 때문에 전 계층에 걸쳐 군사주의에 대한 깊은 혐오감을 낳았다. 많은 젊은이들이 군에 징집되지만 군에 들어간 다음에도 무슨 수를 써서라도 군에서 나오려고 한다.

둘째, 강제적으로 징집하여 군대를 유지하려는 군사주의로 인해 거센 반군사적 운동을 야기했다. 이 반군사적 운동을 유럽 열강들은 그 무엇보다 더 우려하고 있다.

어쨌든 자본주의 최대의 요새는 군사주의이다. 군사주의가 와해되는 순간 자본주의도 흔들리게 된다. 미국에는 징집제도가 실시되지 않는 것이 사실이다. 강제로 남자들이 군에 끌려가지 않는다. 그러나 우리는 스스로의 필요 때문에 군에 입대하는 사람이 많고, 그래서 보다 확고한 군사력을 유지하고 있다. 경기 불황 때 엄청난 군 입대 지원자가 몰리는 것은 사실이다. 군사주의의 일에 종사하는 일이 매력적이거나 명예로워서 그러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일자리를 찾아 전국을 누비거나 빵을 타려고 줄을 서 있거나 시 당국에서 마련한 노숙자 숙소에서 잠을 청하는 것보다는 군인이 되는 게 낫다. 어찌되었건 한 달에 13달러는 벌 수 있고, 하루 세 끼 식사와 잠자리를 보장받는 것이 아닌가.

하지만 이렇게 자기 필요에 의해 자발적으로 군에 입대한다고 해서 군이 인간다운 곳이 될 수는 없다. 군 당국자들은 육군과 해군에 지원하는 자원의 수준이 떨어진다고 불평한다. 이건 매우 고무적인 현상이다. 군 지원자의 수준이 떨어진다는 얘기는 아직도 미국의 보통사람들 중에는 군복을 입느니 차라리 굶어 죽을지도 모르는 길을 택하겠다는 자립의 정신과 자유에 대한 사랑을 지키고 있는 사람이 있다는 증거이다.

세계 어느 곳을 막론하고 생각이 있는 남자와 여자라면 애국주의란 너무나 협소하고 제한적인 개념이기 때문에 우리 시대에 맞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달을 것이다. 권력의 중앙집중이 강화되면서 전 세계 억압받는 국가들 간에 국제적 연대의식을 형성하게 했다.

이 연대의식은 미국의 광부와 동포인 자본가 사이의 유대감보다 미국의 노동자와 다른 나라의 노동자들 사이에 보다 조화로운 공통의 이해관계가 있음을 나타낸다. 이런 연대의식을 갖게 될 때 외국의 침략을 두려워하지 않게 된다. 왜냐하면 모든 노동자들이 한 마음이고 다같이 고용주에게 이렇게 말할 것이기 때문이다.

“우린 당신을 위해 할 도리를 다했다. 네 밥벌이는 네 스스로 하라.”

이 연대의식은 심지어 군인들의 의식까지도 각성시킨다. 군인들도 인류라는 대가족의 한 성원으로 편입된다. 과거 투쟁의 역사에서 가장 확고한 연대의식에 바탕해 투쟁의 힘을 얻은 사례들이 있다. 1871년 파리 코뮌Paris Commune 때는 파리의 군인들이 동지애적 연대의식으로 투쟁에 나선 형제들에게 발포하라는 명령을 거부했다. 20세기 초에는 연대의식에서 힘을 얻어, 러시아 전함에 탄 수병들이 선상 반란을 일으켰다. 결국 이 세계적 연대의식은 전 세계의 억압받고 짓밟히는 자들이 착취하는 자에 대항한 봉기를 일으키게 했다.

유럽의 프롤레타리아는 이런 연대의 위대한 힘을 깨닫고 애국주의와 그 애국주의의 피비린내 나는 화신인 군국주의에 맞섰다. 이로 말미암아 많은 사람들이 프랑스와 독일과 러시아와 스칸디나비아 제국들의 감옥을 가득 채웠다. 많은 사람들이 구습과 미신에 과감히 대항해 일어났기 때문이다.

이런 운동은 노동계급에 국한되지 않았다. 모든 계층의 사람들이 이 저항운동에 동참했다. 예술과 과학과 문학계의 저명한 사람들이 이 운동을 주창했다.

미국도 이런 흐름을 따를 수밖에 없을 것이다. 군사주의 정신이 이미 모든 계층 속으로 침투했다. 그렇지만 이제 미국에서의 군사주의는 다른 그 어느 곳보다 더 큰 위험에 처하게 될 것이다. 왜냐하면 자본주의가 아무리 없애려고 해도 군사주의의 온상인 자본주의의 부패상이 점점 더 심해질 것이기 때문이다. 군사주의 붕괴의 조짐은 이미 학교에서 시작되고 있다. 정부는 이렇게 주장할 게 분명하다.

“당신의 자녀들을 나에게 맡기시오. 내가 인간으로 만들어 주겠소.”

군사적 전술로 훈련하는 교과과정에는 군사적 업적을 기리는 내용이 포함되어 있다. 젊은이의 마음은 정부가 원하는 마음으로 바뀌어간다. 게다가 이 땅의 젊은이들은 육군과 해군에 입대하라는 현란한 포스터의 유혹을 받을 것이다. 정부의 대변자는 젊은이들에게 군에 입대하라고 이렇게 외친다.

“세계를 관광할 수 있는 멋진 기회.”

이리하여 순진한 젊은이들에게 도덕적으로 애국심을 갖도록 유인하는 군사적 유혹이 전국을 휩쓸고 간다.

미국의 노동자는 군과 국가와 연방정부 등의 손아귀에서 너무나 많은 고통을 당했기 때문에 이런 기생적이고 획일적인 제도들에 대해 혐오감과 반감을 갖는다. 하지만 단지 비난하는 것만으로는 이 거대한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 우리는 선진적 교육으로 군인들을 교육해야 한다. 반애국적인 문헌을 통해 군인을 계몽시켜 군인이라는 직업의 무서운 실체를 알게 할 필요가 있다. 인간에 대한 참된 관계가 무엇인지 의식화시켜야 하고 자기 노동으로 자기 삶을 유지해야 한다는 기본 원칙을 확실히 알게 해줘야 한다.

이런 의식화를 정부 당국자는 가장 두려워한다. 군인이 급진적 집회에 참여한다는 것은 이미 반역의 의식이 고조되었다는 증거이다. 이제 급진적 팸플릿을 군인들이 읽게 되면 반역의 분위기는 지극히 고조될 것이다.

하지만 당국은 항상 진보를 향한 모든 발걸음을 다 반란이라고 짓밟았다. 그렇다고 해도 사회를 재건하기 위해 진지하게 투쟁하는 사람들은 이 모든 상황을 이겨낼 것이다. 어쩌면 공장보다도 병영에 진리를 확산시키는 게 더욱 중요할지도 모른다.

애국이라는 거짓을 파괴해버릴 때 모든 민족이 하나의 형제로 통일되는 그런 위대한 사회구조, 곧 참으로 자유로운 사회를 만들기 위한 길을 가게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