엠마 골드만
아나키즘 - 그것은 진정 무엇을 옹호하는가
―편집자 주―
이 글은 엠마 골드만이 1910년 『아나키즘과 그 외 에세이들Anarchism and Other Essays』이라는 제목으로 펴낸 책에 실린 에세이다.
한국어 번역은 『저주받은 아나키즘』(김시완 역, 우물이있는집, 2001)이라는 다소 엉뚱한 제목으로 출판되었으나 현재는 절판되었다.
엠마 골드만의 에세이들을 편집하는 과정에서 별도로 하나의 문건으로 취급하게 되어 여기서는 〈아나키즘 : 그것은 진정 무엇을 옹호하는가〉만을 옮긴다.
늘 헐뜯기고, 저주받고 결코 이해되지도 못하는
그대는 우리 시대의 무서운 테러
모든 질서를 파괴한다고 소리치는 군중들이여,
그대여 그리고 전쟁과 살인자의 끊임없는 분노여
오, 소리치게 내버려두어라
결코 투쟁해본 적이 없는 그들에게
진실은 찾고자 하는 말의 뒤편에 있으니
그들에게 그 말의 좋은 의미는 주어지지 않았으니
그들은 계속 맹목 가운데에서 맹목으로 남을 것이다
그러나 그대여 오, 말이여,
너무나 깨끗하고, 너무나 강렬하고 너무나 순수한,
그대여 하고자 하는 바를 모두 말하라
내 그대에게 주리니! 미래를, 그대의 안녕을
그대들이 깨어난다면
그것이 따스한 햇볕처럼 올지, 폭풍 같은 전율로 올지,
나는 말할 수 없지만 그러나 마침내 알게 되리!
나는 아나키스트!
지배되지 않고, 지배하지도 않는!
존 헨리 맥케이(John Henry Mackay)
인류의 성장과 발전의 역사는 여명의 도래를 알리는 모든 새로운 이념의 끔찍한 투쟁의 역사이기도 하다. 낡은 이념은 끈질기게 전통에 붙어 가장 비열하고 잔인한 방법을 동원해 새로운 이념의 출현을 막는다. 그러나 새로운 이념은 어떤 형태로든 어떤 시대이든 자신의 모습을 스스로 드러내게 된다. 모든 진보적인 이념의 길에 어떤 엄청난 반대와 고난과 험난한 일들이 있었는지 알기 위해 우리는 굳이 먼 과거의 족적까지 추적할 필요는 없다. 팔다리를 잡아당기고 엄지손가락을 짓누르는 고문과 태형 같은 일은 지금도 우리 주변에서 자행된다. 우리에게 죄수복을 입히고 사회적 분노를 조장하면서 모든 세력들이 공모하여 고요히 전진하는 이 진보의 정신에 대항한다.
아나키즘 역시 다른 모든 혁신적인 이념들의 운명에서 벗어날 수 없다. 대부분의 혁명적이고 비타합젹 혁신주의자들의 길과 마찬가지로 아나키즘도 이 세상의 무지와 악의에 맞서 싸워야 한다.
아나키즘에 반대하는 말들과 행태들만 두루 다루려고 해도 책 한 권을 다 써야할 것이다. 여기서는 중요한 두 가지 문제만 다루고자 한다. 그렇게 함으로써 자연스럽게 진정한 아나키즘이 무엇인지 설명하겠다.
아나키즘에 반대하면서 나타나는 이상한 현상 중 하나는 아나키즘을 통해 소위 지성이라는 것과 무지의 차이가 확연히 드러나게 된다는 점이다. 모든 것이 상대적이기는 하다. 무지한 대중은 기본적으로 지식이나 관용이 있는 체하지 않는다. 항상 그렇듯 대중은 충동에 의해 행동하는데 그 행위는 어린아이처럼 유치한 동기에서 이루어진다. 알맹이가 없다.
아나키즘에 대한 무식한 자들의 반대 이유를 지적인 자의 반대 이유와 마찬가지로 살펴볼 가치가 있다.
아나키즘에 반대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첫째, 아나키즘은 아름답기는 하나 비현실적이다. 둘째, 아나키즘은 폭력과 파괴를 일삼기 때문에 위험하고 사악함으로 비난받아 마땅하다. 이 두 가지 주장은 지성인과 무지한 대중 모두 문제의 핵심을 철저히 알지 못하고 판단한 것이다. 풍문으로 들었거나 잘못된 해석에 근거한 판단이다.
오스카 와일드(Oscar Wilde)는 실천적 계획을 이미 실재하거나 아니면 현 상황에서 이행될 수 있는 계획이라고 규정한다. 그러나 우리가 반대하는 것이 바로 현실이다. 그리고 이 현실을 수용할 수 있는 계획은 잘못되고 어리석은 것이다. 따라서 현실적인 것의 참된 기준은 고여 있는 썩은 물을 떠내려 보낼 수 있을 정도로 생명력이 있고 그 새로운 생명을 키우고 유지할 수 있느냐 하는 것이다. 이런 개념에 비추어 보면 아나키즘은 정말 현실적이다. 다른 어떤 이념보다도 아나키즘은 잘못되고 어리석은 현실을 없애는 데 도움을 준다. 어떤 이념보다도 새로운 생명을 키우고 유지하는 것이다.
무지한 자의 감성은 아나키즘에 대한 피비린내 나는 이야기만 염두에 두고 계속 격정적인 상태를 보인다. 어떤 일이든 아나키즘 철학과 그 주창자들을 반대하는 데 이용된다. 그러므로 아무 생각도 없는 사람들에게 아나키즘이란 옛날이야기에 나오는, 어린아이에게 못된 짓을 하는 악인의 모습이다. 마치 모든 걸 삼켜버리는 시커먼 괴물과 같은 모습. 곧 파괴와 폭력이 아나키즘의 모습이다.
파괴와 폭력! 사회에서 가장 폭력적인 요소가 무지임을 어떻게 일반인이 알겠는가? 아나키즘은 바로 이 파괴적 세력에 대항해 싸우고 있지 않은가? 보통 사람들은 아나키즘의 뿌리가 자연적 힘의 일부이며 파괴를 일삼지 않고 사회의 본질적 생명을 부양하여 성장을 촉진하는 것임을 모른다. 잡초와 쭉이 자라는 토양을 제거해 결과적으로 건강한 과실을 맺게 하는 것이 아나키즘이다.
어떤 사람들은 아나키즘이 비난을 일삼기는 하나 깊이 있는 사색을 하는 정신적 노력을 별로 하지 않는 사상이라고 말한다. 이 사회에 정신적 나태가 만연한 것은 사실이다. 어떤 이념에 대해 그 밑바닥까지 철저하게 파헤쳐 보고 그 뿌리와 의미를 살피기보다 대부분 사람들은 그 이념을 통째로 비난하기 바쁘다. 아니면 그 이념에서 비본질적인 요소를 근거로 피상적이고 편견에 가득 찬 판단을 내린다.
아나키즘은 인간으로 하여금 모든 가정에 대해 생각하게 하고, 분석하게 한다. 그러나 일반 독자의 두뇌 용량은 그리 크지 않다. 그래서 먼저 아나키즘 정의에서부터 내 이야기를 시작하고 나중에 그 개념을 보다 정교하게 다듬도록 하겠다.
아나키즘 : 인간이 만든 법에 의해 구속되지 않는, 자유에 기초한 새로운 사회질서를 창출하려는 철학. 모든 형태의 정부는 폭력에 의존하고 있고, 따라서 그런 정부는 불필요할 뿐만 아니라 잘못된 것이고 해로운 것이라는 이론.
새로운 사회질서 역시 삶의 물질적 기초에 의지한다. 하지만 모든 아나키스트들은 오늘날 주된 악이 경제적인 악이라는 데 동의한다. 이 경제적 악의 해결책은 삶의 모든 국면, 즉 집단적인 측면뿐만 아니라 개인적인 측면, 또 외적 국면뿐만 아니라 내적 국면까지 철저하게 고려해야 나올 수 있다.
인류발전의 역사를 잘 살펴보면 서로 심하게 투쟁하는 두 가지 요소가 있음을 알게 된다. 이 요소들은 이제야 제대로 이해되기 시작했는데 사실 적절하게 배치되면 서로 낯선 이질적 요소도 아니고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고 진실로 조화롭기도 하다. 그 두 요소는 바로 개인적 본능과 사회적 본능이다. 개인과 사회는 오랫동안 무자비한 피의 쟁투를 벌여왔다. 각자 우위를 점하기 위해 투쟁한 것이다. 왜냐하면 각자 상대방의 중요성과 가치를 제대로 인식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개인적 본능은 개인의 노력과 성장과 자아실현을 촉진하는 잠재력이다. 사회적 본능은 상호부조와 사회적 복리를 이루는 잠재적 요소이다.
자신과 주변 환경 사이에서 격동하는 심리와 상황을 설명하기란 그렇게 어렵지 않다. 자기존재를 이해할 수 없었던 원시인은 총체적 이해능력이 결여된 상태로 자신을 깔보는 어떤 보이지 않는 존재가 있다고 보고 그 힘에 절대적으로 의존하고 싶어 했다. 우월한 힘을 지닌 존재에 비해 자신은 한낱 먼지와 같은 존재라고 인식하는 종교가 생겨났다. 우월한 존재는 오직 온전한 복종만이 필요했다. 모든 옛 현자들은 이렇게 생각했다. 이것이 인간과 신의 관계, 인간과 사회 및 국가와의 관계에 관한 성경 이야기의 핵심 내용이다. 다시 말하면, 인간은 아무것도 아닌 존재요, 신의 권능은 전지전능하다. 그래서 하느님께서는 인간이 전적으로 복종할 때만 인간을 용납한다는 것이다. 인간은 이 땅의 모든 영광을 다 누릴 수 있지만 자신을 자각할 수 없다. 국가와 사회, 도덕적 규범 모두 이와 똑같은 규제를 가한다.
아나키즘은 인간에게 자신을 자각하게 해주는 유일한 철학이다. 아나키즘은 신도 국가도 사회도 존재하지 않으며 이런 약속은 공허할 수밖에 없다고 주장한다. 왜냐하면 그 약속이란 인간의 복종을 통해서만 채워질 수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아나키즘은 순수한 생명체의 스승이다. 자연뿐 아니라 인간의 스승이다. 개인적 본능과 사회적 본능 사이에 갈등이 없는 것은, 심장과 허파 사이에 갈등이 없는 것과 같다. 허파는 귀중한 생명의 본질을 담아두는 곳이요, 심장은 생명의 본질을 순수하고 강력하게 유지시켜 주는 요소를 담아두는 곳이다. 개인은 사회의 심장이다. 사회적 생명의 본질을 보존하는 곳이다. 사회는 이 생명의 본질, 곧 개별적인 것을 순수하고 강력하게 유지시켜 주는 요소를 분배하는 허파이다.
에머슨(Ralph Waldo Emerson)은 이렇게 말했다.
“이 세상에서 가치 있는 유일한 것은 활동하는 영혼이다. 모든 인간이 자신 안에 이 영혼을 지니고 있다. 활동하는 영혼은 절대적 진리를 보고 진리를 말하고 창출한다.”
달리 말해 개별적 본능이 이 세상에서 가치 있는 한 가지이다. 개별적 본능이 진리를 보고 진리를 창출하고 그것을 살아있게 하는 참된 영혼이다. 개별적 본능에서 보다 큰 진리, 곧 새로운 사회적 영혼이 나오게 된다.
아나키즘은 인간을 포로로 묶어둔 환상에서 벗어나게 하는 위대한 해방자다. 아나키즘은 개별적인 힘과 사회적 힘을 조화시키는 중재자요 조정자다. 이런 통합을 이루기 위해 아나키즘은 지금까지 개별적인 본능과 사회적인 본능, 곧 개인과 사회를 조화롭게 화합하지 못하도록 방해한 위험한 세력들에 대해 전쟁을 선언했다.
인간 마음의 지배자는 종교이고, 인간의 욕망을 지배하는 것은 소유property이며, 인간의 행동을 지배하는 것은 정부다. 정부는 인간의 노예상태를 유지시키는 요새로 온갖 공포를 조성한다. 종교! 종교가 어떻게 인간의 마음을 지배하고, 인간의 영혼을 수치스럽게 만들고 타락시키는가. 종교는 신이 전부고 인간은 아무것도 아니라고 말한다. 하지만 무無에서 신은 너무나 전제적이고 너무나 독재적이고 잔인하고 가공스러운 왕국을 창조했다. 신들이 활동을 시작한 이래 이 땅은 무無가 아니라 어둠과 눈물과 피가 지배했다. 아나키즘은 인간을 깨워 이 검은 괴물에 대항하여 반란을 일으키게 한다. 자신의 정신적 족쇄를 끊으라고 아나키즘은 말한다. 당장 모든 진보에 가장 큰 장애인 어둠의 지배를 스스로 제거하라고 말한다.
인간 욕망의 지배자인 소유는 보다 근본적인 자기 필요를 충족시킬 권리도 포기하게 한다. 재산권은 신성한 권리라고 주장하는 순간 그것은 종교와 마찬가지로 인간을 규제하는 요인이 된다. 재산권은 마치 “희생하라, 쾌락을 포기하라, 복종하라”는 종교적 계율처럼 신성시되고 있다. 아나키즘의 정신은 미천한 지위로부터 인간을 부축해 세운다. 똑바로 서서 얼굴을 들어 빛을 보라고 한다. 이제 인간은 재산으로는 충족될 수 없고, 욕망을 부채질하고 인간 심성을 황폐화시키는 본질이 소유욕에 있음을 간파한다. 아나키즘은 이 괴물 같은 소유욕을 타격할 준비를 하고 있다.
위대한 프랑스 아나키스트 프루동(Pierre-Joseph Proudhon)은 “소유는 도둑질이다”라고 일갈했다. 그렇다. 그러나 이 도둑놈에게는 아무런 위험도 위태로움도 없다. 인간의 축적된 노력을 독점한 부가 출생권을 빼앗고 거지와 부랑자를 만들기도 한다. 인간이 부를 충분히 창출하지 못해 욕구가 충족되지 않는 건 아니다. 경제학을 배우는 학생이라면 지난 수십 년간 노동생산성이 정상적인 수요를 백 배나 초과했다는 사실을 안다. 그런데 비정상적인 제도 하에서 정상적인 수요란 무엇을 말하는가? 그것은 단지 소유가 불러일으키는 부를 향한 탐욕이다. 왜냐하면 부가 곧 권력이기 때문이다. 권력은 남을 복종시키고, 파괴하고, 착취하고, 노예로 만들고, 학대하고, 타락시키는 힘이다. 미국은 특히 이런 부의 힘을 자랑한다. 엄청난 국부를 미국은 지니고 있다. 미국을 구성하고 있는 개인이 비참할 정도로 가난하다면 미국이라는 국가의 부가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미국 국민이 희망과 기쁨은 없고 집도 땅도 없이 범죄와 더러움 속에 산다면 어떻게 되겠는가?
어떤 사업체도 그 이익이 비용보다 많지 않다면 파산은 불가피하다.
그런데 부를 산출하는 사업에 종사하는 사람들은 이 간단한 교훈을 잘 모르고 있다. 매년 인간 생명을 빼앗는 생산비용이 점점 늘어나고 있다. 지난해 미국에서 5만 명이 죽었고, 10만 명이 다쳤다. 부를 생산하는 데 일조한 대중들에게 돌아가는 몫은 점점 작아지고 있다. 그러나 미국은 맹목적으로 생산을 담당하는 자들을 파산하도록 내버려두고 있다. 범죄는 이것만이 아니다. 더욱 치명적인 범죄는 생산자가 기계의 한 부속품으로 전락하고 있다는 점이다. 기계나 강철의 주인에 비해 점점 더 자기 의지와 결정권이 줄어들고 있다. 인간은 자기 노동의 생산품을 빼앗길 뿐만 아니라 자유로운 선택권과 자기 정체성과 자기 이익과 자기 욕구를 도둑맞고 있다.
진정한 부는 유용하고 아름다운 물건을 만드는 데 있다. 강하고 아름다운 육체를 창조하고, 살고 싶은 환경을 창조하는 것에 도움이 되는 것이 진정한 부다. 그러나 30년 평생 동안 목화 실을 짜거나 석탄을 캐거나 도로를 건설해야 하는 노동자들에게는 이야기할 재산이나 부가 없다. 오직 이 세상에서 느끼는 것은 가증스럽고 끔찍한 잿빛 현실이다. 자기 삶이 그렇기 때문이다. 너무 허약해 살기조차 힘들고 겁이 나 죽지도 못한다. 그런데 이런 끔찍한 중앙집권화된 생산방법을 이 시대의 가장 자랑스러운 성취라고 찬양하는 사람들이 있다. 우리가 계속 기계에 종속된다면 이런 우리의 노예상태는 과거 왕에게 종속된 것보다 더욱 심하게 종속되는 결과를 낳는다는 사실을 제대로 알지 못하고 있다. 중앙집권화는 자유를 죽일 뿐만 아니라 건강과 아름다움과 예술과 과학을 죽이는 것임을 저들은 굳이 알려고 들지도 않는다. 자유와 건강과 아름다움과 예술과 과학은 모두 시계바늘처럼 움직이는 기계적 환경에서는 성취될 수 없다.
아나키즘은 이런 생산방식을 비판하지 않을 수 없다. 아나키즘의 목표는 개인의 잠재된 모든 능력들을 최대로 자유롭게 발현하는 것이다. 오스카 와일드는 완전한 인간을 이렇게 규정하고 있다.
“완벽한 조건 하에서 발전하는 자로 상처도 없고, 불구도 아니며 위험하지도 않는 자가 완전한 자다.”
그렇다면 완전한 인간은 자유롭게 일의 형태와 조건을 선택할 수 있고, 일할 자유가 있는 사회 여건에서만 가능하다. 탁상을 만들거나 집을 짓거나 밭을 가는 행위가 그 노동자에게는 미술가가 그림을 그리고 과학자가 발견을 하는 일과 같다. 어떤 일이든 자기가 한 것은 창조적 힘과 영감과 내밀한 갈망과 일에 대한 깊은 이해의 결과이다. 이상적인 아나키즘과 아나키즘의 경제적 활동은 자발적인 생산과 분배를 주관하는 조직체에서 발현되어 점차 자유로운 공산주의로 발전하게 된다. 이 상태는 최소한의 인간 에너지를 소비하여 최상의 것을 생산하는 수단을 갖추게 한다. 하지만 아나키즘은 개인의 권리도 인정한다. 각 개별적 성원들이 언제든지 자기 취향과 욕구에 따라 다른 유형의 일을 할 수 있어야 한다.
이렇게 인간 에너지를 자유롭게 표출하는 것은 완전한 개인적 · 사회적 자유가 보장된 상황에서만 가능하다. 그래서 아나키즘은, 모든 사회적 평등의 최대의 적이면서 제3자적 입장을 취하며 인간 행동을 지배하는 자, 곧 국가와 조직화된 권위체, 즉 그 법률체계에 저항한다.
종교가 인간의 정신을 속박하듯 소유, 곧 물질의 독점이 인간의 필요를 지배하고 질식시키듯, 국가는 인간의 영혼을 노예화시켜 모든 행동을 조작한다. 에머슨은 이렇게 말했다.
“모든 정부는 본질적으로 독재이다.”
그 정부가 신성한 권리를 지닌 정부냐 다수가 지배하는 정부냐는 중요하지 않다. 모든 측면에서 정부의 목표는 개인을 절대적으로 종속시키는 것이다.
미국 정부에 관련해서 위대한 아나키스트 데이비드 소로(Henry David Thoreau)는 이렇게 말했다.
“정부란 비록 최근에 등장한 것일지라도 하나의 낡은 전통의 산물일 뿐이다. 우리는 그런 정부를 손상시키지 않고 다시 후손들에게 물려주려고 한다. 하지만 정부의 그 순수성은 매순간 상실된다. 정부는 단 한 명의 살아있는 사람의 힘과 활력도 없는 무생물체다. 법이 인간을 정의롭게 만들지 못한다. 법은 정부를 존중하게 만드는 수단일 뿐이다. 제대로 모양을 갖춘 법은 매일 부정의不正義를 집행하는 제도이다.”
확실히 정부의 핵심은 부정의이다. 절대 오류를 범하지 않는다는 절대군주와 같은 교만과 자기만족감에 젖어 정부는 법을 정한다. 스스로는 가장 큰 범법을 자행하면서 가장 사소한 범법에 대해 재판하고, 비판하고, 처벌하며, 개인의 자유를 말살한다. 『플랜더스의 개A Dog of Flanders』의 저자인 위다(“Ouida”, Marie Louise de la Ramée)의 정당한 주장을 들어보자.
“국가는 오직 대중들에게 자신의 요구에 복종하라고 은밀히 세뇌한다. 그러면서 국가의 창고를 가득 채운다. 국가의 최고기능은 인간을 시계바늘처럼 일하게 만드는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넉넉하고 인간적이면서 보다 섬세하고 세련된 자유는 불가피하게 설 자리를 잃고 사라지게 된다. 국가는 세금 내는 기계를 원한다. 이 기계에 고장이란 없으며 국가재정은 절대 고갈되지 않는다. 대중은 그저 단조롭게, 순종적으로, 무감하게, 정신도 없이 양쪽의 울타리 사이로 곧게 난 길을 따라 움직이는 얌전한 양의 무리와 같다.”
그러나 이런 양떼도 정부의 속임수에 저항하게 된다. 정부는 부패하고 독재적이고 억압적인 방법들을 이용해 자신의 목적을 달성하려 한다. 따라서 바쿠닌(Mikhail Alexandrovich Bakunin)은 국가를 개인이나 소수자의 자유를 약탈하는 자와 동의어라고 비판한다. 이런 국가는 자체의 힘을 증대하기 위해 사회적 관계를 파괴하고, 생명 자체를 단축시키거나 완전히 말살하기도 한다. 국가는 종교적 제단과 마찬가지로 정치적 자유를 희생시키는 제단이다. 국가는 인간의 희생 위에 존속한다.
사실 정부 또는 조직화된 권위체인 국가는 단지 재산과 독점적 권력을 유지 보호하기 위해 필요하다는 주장에 동의하지 않는 근대 사상가는 거의 없다. 이런 역할을 하는 데 국가는 정말 효율적이라는 것이 그동안 입증되었다.
페이비어니즘Fabianism 하에 국가가 기적적인 형태로 변하기를 희망한 버나드 쇼(George Bernard Shaw)도 그 한계를 인정했다.
“잔인한 힘으로 가난한 자의 것을 도둑질하고 그들을 노예로 몰아가는 이런 작금의 거대한 기계가 국가의 모습이다.”
사실이 이럴진대 현명한 논객이라면 가난이 사라지고 난 이후에도 국가를 지탱하고 싶은 이유가 어디 있겠는가.
불행히도 여전히 많은 사람들이 국가는 자연법에 근거하고 있다는 너무나 잘못된 믿음을 갖고 있다. 그래서 국가가 사회적 질서와 조화를 유지시키고, 범죄를 감소시키고, 게으른 자가 동료의 몫을 빼앗지 못하도록 국가가 막아준다고 믿고 있다. 이 문제에 대해 이제부터 검토해보고자 한다.
자연법이란 자연의 요구와 조화를 이루는 가운데 어떤 외적 힘의 작용도 받지 않고 자유롭고 자발적으로 발현되는 것을 말한다. 예를 들어 충분한 영양섭취, 성적 만족, 빛과 공기와 운동에 대한 욕구 등은 일종의 자연법이다. 그러나 이런 자연법은 기계적인 정부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 정부가 휘두르는 곤봉, 총, 수갑, 감옥 등이 필요하지는 않다. 이런 법에 복종하는 경우는, 굳이 복종이라는 말을 쓴다하더라도, 그것은 자발적이고 자유로운 것이다. 정부가 조화로운 요소들을 통해 유지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은 정부가 살아남기 위해 자행하는 일련의 폭력과 무력과 강압을 행사하는 모습에서 충분히 알 수 있다. 그래서 블랙스톤(Lee Robert Blackstone)은 다음과 같이 정확한 표현을 했다.
“인간의 법은 효력이 없다. 인간의 법은 자연법을 거스르기 때문이다.”
수천 명을 살해한 후에도 질서를 찾지 못하는 상황에서 질서유지와 사회적 조화의 능력이 정부에 있다고 보기는 어렵다. 강요된 복종과 공포로 유지되는 질서는 안전한 질서가 못된다. 정부는 이런 질서를 유지할 뿐이다. 진정한 사회적 조화는 자연스러운 여러 이익집단들의 연대에서 성장한다. 일을 하는 사람은 아무것도 소유하지 못하고, 일을 전혀 하지 않는 자들은 모든 것을 향유하는 사회에서 다양한 이익집단들의 연대란 존재하지 않는다. 따라서 사회적 조화란 그저 기계에 불과할 뿐이다. 조직화된 권위체가 이런 상황에 대응하는 방식은 오직 불평등을 확대하는 것이다. 이미 이 땅에서 독점적 지위를 확립한 자들에게 훨씬 유리한 이득을 확대하고 아무것도 물려받지 못한 대중들을 더욱 노예화시키는 것이다. 정부의 모든 영역, 검찰, 경찰, 군대, 의회, 감옥 등은 사회에 존재하는 가장 적대적인 요소들을 억눌러 조화시키는 일에 매진한다.
가장 희극적인 변명은 권위와 법이 범죄를 줄인다는 것이다. 국가 자체가 가장 큰 범죄자라는 사실은 말할 것도 없고, 범죄에 전혀 대처하지도 않는다. 국가는 성문법과 자연법을 위반하고 세금의 형태로 도둑질을 하고 전쟁과 사형 제도를 통해 살인을 저지른다. 국가는 자신이 만든 가공할 재앙을 없애지도 줄이지도 못한다.
오늘날의 모든 제도, 즉 경제와 정치와 사회와 도덕적 제도가 공모하여 인간 에너지를 잘못된 방향으로 유도하는 한, 대부분의 사람들이 자기가 정말 하기 싫은 일을 하도록 강요되는 한, 자기가 살고 싶지 않은 삶을 강요받는 한 범죄는 불가피하고 법조문은 점점 더 증가될 것이다. 범죄는 전혀 없어지지 않는다. 오늘날의 사회는 절망의 연속이다. 가난과 공포와 두려움으로 가득한 투쟁을 거치면서 인간 영혼은 범죄와 타락의 길로 필히 빨려들고 만다. 이런 끔찍한 과정을 아는 사람은 표트르 크로포트킨(Pyotr Alexeyevich Kropotkin)의 다음 말의 진실을 음미해 보라.
“기득권을 유지하려는 자들은 법에 의존하고 그 법을 기반으로 한 처벌과 그 처벌로 파생되는 효과를 이용하려 할 것이다. 국가에 의해 널리 자행되는 수많은 악행들을 제거하려는 사람들이 볼 때 법은 국가의 행위를 옹호하고 정부는 범죄를 발본색원하는 데 도움을 준다는 명목으로 법에 재정적인 지원을 한다. 감옥에 가게 되면 자유를 빼앗긴 자의 상황이 어떤 것인지 알게 된다. 감옥에 갇히면 잔인한 간수들의 감시를 받고 짐승 같은 대우를 받고 많은 고통을 당하고 수치를 당하게 된다. 이런 사람들은 감옥과 처벌을 가하는 기관이 없어져야 할 가증스러운 기구라는 우리의 주장에 동의할 것이다.”
법이 게으른 자를 게으르지 못하게 하는 역할을 한다는 주장 역시 참으로 억지에 불과하다. 게으르게 놀고먹는 계층을 먹여 살리는 데 사회가 치러야 하는 비용, 허접 쓰레기 같은 게으른 계층을 보호하는 데 필요한 비용을 사회가 충분히 보유하고 있다면 그 사회의 자원은 충분하다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어쩌다 발생하는 게으른 개인을 못 먹여 살릴 이유는 없다. 더욱 중요한 사실은 게으름이 특권에서 생긴 경우와 신체적 · 정신적 장애로 생긴 경우를 구별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우리의 현 생산체제는 비정상적인 것으로 다들 일하기 싫게 만든다. 그러면서 사람들에게 노동을 사랑하라고 강요하고 있는 상황이다. 아나키즘은 노동의 암울하고 지겨운 측면과 강압적 측면을 없애고자 한다. 정말 즐겁고 힘 있고 다채롭고 진정 조화로운 노동의 조건을 만들어 가장 가난한 인간도 노동에서 여가와 희망을 발견하는 것을 아나키즘은 목표로 하고 있다.
이런 생기 넘치는 상황을 성취하기 위해 부당하고 억압적이며 자기 멋대로 행동하는 정부는 사라져야 한다. 정부는 기껏해야 모든 사람에게 단 한 가지 삶의 방식을 강요하고 있다. 각 개인의 사회적 차이와 필요를 전혀 고려하지 않는다. 정부와 법체계를 파괴하는 아나키즘은 기득권 권위에 의해 부과된 모든 제약과 침해로부터 개인의 자존과 독립을 구원해내고자 한다. 자유로울 때만 인간은 최대로 자아를 구현할 수 있다. 자유 속에서만 우리는 자신의 잠재력을 최상으로 발현하고 사고하고 행동하는 방법을 배우게 될 것이다. 오직 자유로울 때 인간을 구속하고 있는 사회적 족쇄의 본질적 힘을 꿰뚫게 될 것이고, 이것이 정상적인 사회적 삶의 참된 토대가 될 것이다.
그렇다면 인간 본성은 어떤가? 인간 본성은 변할 수 있는가? 변할 수 없다면 아나키즘 하에서도 인간 본성은 그대로 유지될 것인가?
인간 본성! 본성의 이름으로 얼마나 가공할 범죄들이 자행되었던가! 왕에서부터 경찰에 이르기까지, 얼간이 바보에서부터 아무런 비전도 없이 유희삼아 과학을 하는 사람까지 이 모든 멍청이들이 인간의 본성에 대해 목에 힘을 주며 말한다. 정신적 허풍이 크면 클수록 더욱 확고하게 인간 본성이 사악하고 허약하다고 고집스럽게 주장한다. 그러나 오늘날 완전히 마음에 족쇄를 채우고 상처를 입고 불구인 채로 감옥에 갇힌 자에게 그 본성이 허약하고 사악하다는 주장을 누가 할 수 있는가?
존 버로스(John Burroughs)에 의하면 생포된 동물들에 대한 실험연구는 전혀 소용이 없다고 한다. 생포된 동물의 특성과 습성은 야생의 땅을 떠났을 때 완전히 변하고 만다. 그런데 좁은 새장에 갇혀 매일 복종을 강요당하는 인간의 본성에 대해 말한다면 인간이 어떤 잠재력을 갖고 있다고 말할 수 있겠는가?
자유와 발전 그리고 기회가 있고, 무엇보다 평화와 휴식이 있을 때 인간 본성의 진짜 중요한 지배적 요소들이 무엇인지, 놀라운 잠재력이 무엇인지 말할 수 있다.
아나키즘은 종교의 지배로부터 인간 정신의 해방을 진정으로 대변한다. 또한 가난의 지배로부터 몸의 해방을, 정부의 족쇄와 제약으로부터의 해방을 대변한다. 아나키즘은 참된 사회적 부를 생산하기 위해 자유롭게 모인 개인들을 기반으로 한 사회질서를 지지한다. 이런 사회질서는 모든 인간에게 개인의 취향과 욕구와 성향에 따라 자유롭게 땅을 접하고 생활필수품을 최대로 확보할 수 있게 해준다.
이것이 전 세계의 많은 지성인들이 고심하여 얻은 결론이고 근대사회를 면밀히 관찰하고 연구한 결과 얻은 결론이다. 개인의 자유와 경제적 평등은 진정 세련되고 참된 인간성을 탄생시키는 쌍둥이다.
방법론에 대해 생각해보자. 아나키즘은 혹자가 생각하듯이 무슨 신비한 영감을 통해 이루어지는 미래의 이론이 아니다. 아나키즘은 끊임없이 새로운 조건을 창출해내면서 삶에 살아 숨쉬는 힘으로 작용한다. 따라서 아나키즘의 방법들은 모든 상황에서 동일하게 수행되어야 할 어떤 고정된 프로그램이 아니다. 각 지역의 경제적 필요에 따라 방법론이 달라지고 각 개인의 지적 능력과 기질적 특성에 따라 달라지게 마련이다. 톨스토이(Lev Nikolayevich Tolstoy)와 같이 조용하고 신중한 성격의 소유자는 바쿠닌이나 크로포트킨과 같은 열정적인 이들과는 다른 방법으로 사회개혁을 희망할 것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러시아의 경제적 · 정치적 상황으로 미루어볼 때 영국이나 미국에서보다 더 급진적인 조치를 필요로 한다. 아나키즘은 군사훈련과 획일화를 지지하지 않는다. 하지만 반역의 정신만은 대변한다. 인간 발전에 방해가 되는 모든 것에 저항한다. 이 점에 모든 아나키스트들이 동조하고 한 마음으로 대규모 사회 변혁을 가져올 수단으로 기존 정치 체계에 대한 저항을 시도한다.
소로는 이렇게 말했다.
“모든 투표행위는 게임이다. 체스 게임이나 주사위 놀음처럼 올바르게 선택하든지 아니면 잘못된 선택을 하는 게임에 불과하다. 투표는 편의주의적 행태를 전혀 넘어서지 못한다. 올바른 것에 투표한다 하더라도 아무 의미가 없다. 현명한 사람은 자기 권리를 우연에 맡기지 않으며, 다수의 힘에 압도당하지도 않는다.”
정치와 그 정치적 결과들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잘 살펴보면 소로의 논리를 알게 될 것이다.
의회주의 역사에서 무엇을 볼 수 있는가? 실패와 패배뿐이다. 대중의 사회적 · 경제적 고통을 완화할 수 있는 단 하나의 개혁도 성공하지 못했다. 노동을 개선하고 보호할 법이 통과되고 제정되었다. 그런데 가장 엄격한 광산보호법이 있는 일리노이 주에서 작년에 가장 많은 광산사고가 있었다. 어린이 노동금지법이 있는 주에서 어린이 착취가 가장 심하다. 우리 노동자들에게 최대의 정치적 기회가 주어졌지만 자본주의는 오히려 그 기세가 절정에 달했다.
노동자들은 자신의 대변자들을 뽑을 수 있다. 그래서 우리의 선량한 사회주의자 정치가들이 의회로 진출했다. 하지만 이들의 정직과 선량한 신념이 어떻게 되었는가? 정치에서는 선량한 의도조차도 오직 속임수와 요행으로 점철되어 있음을 명심해야 한다. 막후 협잡, 흥미를 끄는 조작, 아첨과 거짓말과 속임수가 정치술이다. 사실 모든 말에 속임수가 담겨 있다. 이런 속임수의 말로 정치가는 성공한다. 여기에 완전히 비도덕적인 사람이 된다. 인간이기를 포기한 정치가로부터 희망을 품을 수 있는 요소는 전혀 없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면 사람들은 또 바보같이 그런 정치가들을 믿고 밀어준다. 그리고는 또 배신당하고 속아 넘어간다.
순수한 사람은 험난한 정치판에서 부패하지 않을 것이라는 주장이 있다. 부패하지 않을 자가 있을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그 정치가는 아마 노동을 대변해 아무런 영향력도 행사하지 못하는 무력한 자가 될 것이다. 그런 사례는 수없이 많다. 국가는 자기 하수인들을 경제적으로 지배한다. 선량한 사람이라면, 그런 사람이 있다고 한다면, 자신의 정치적 신념을 지키다 경제적 지원을 잃던가 아니면 경제적인 주도권을 잡은 국가에 빌붙어 완전히 자신의 선량함을 버려야할 것이다. 정치의 장에서는 대안이 없다. 바보같이 따돌림을 당하거나 아니면 아첨해야 한다.
대중들의 마음속에는 여전히 정치가 무언가 해줄 것이라는 미신이 굳게 자리 잡고 있다. 그러나 진정 자유를 사랑하는 사람은 정치에 대해 미련을 갖지 않는다. 이들은 슈티르너(Max Stirner)의 말처럼 자신이 쟁취하는 만큼 자유를 향유하게 되리라는 것을 믿는다. 따라서 아나키즘은 직접적인 행동, 공개적인 저항을 표방한다. 모든 경제적 · 사회적 · 도덕적인 법과 규제에 저항한다. 그러나 저항과 반항은 불법이다. 법은 인간을 노예로 만든다. 불법적인 모든 행위를 하기 위해서는 순수함과 자기 의지와 용기가 필요하다. 한마디로 자유롭고 독립된 정신이 필요하다.
보통선거권universal suffrage도 직접적 투쟁의 결과로 얻은 것이다. 미국 혁명의 선조들이 반항과 반란의 정신을 갖지 않았다면 그 후손은 지금도 영국 왕의 신민으로 살아야 한다. 존 브라운(John Brown)과 그의 동지들의 직접적 행동이 없었다면 미국은 여전히 흑인 인신매매를 하고 있을 것이다. 사실 백인 인신매매는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이것도 직접적인 저항으로 폐지될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근대적 경제투쟁의 장인 노동조합도 직접 투쟁하여 쟁취하였다. 최근 들어 법적으로 정부가 노동조합운동을 분쇄하려고 시도했다. 그리고 인간의 노동조합 가입 권리를 주장한 자들을 법적으로 고소하여 노동조합운동을 한 자와 공모한 자라는 명목으로 감옥에 보냈다. 정부 측에서 타협과 간청 내지 회유책으로 나왔다면 노동조합은 오늘날 별로 성장하지 못했을 것이다. 프랑스와 스페인과 이탈리아와 러시아, 그리고 영국에서조차 직접적이고도 혁명적인 경제적 행동이 강력한 힘이 되어 자유를 위한 투쟁이 벌어지고 있다. 이제 전 세계가 노동세력이 얼마나 중요한가를 깨닫게 되었다.
노동자들의 경제적 자각으로 표현되는 최고 방법인 총파업은 미국에서는 별 볼 일 없었으나 그것도 이제는 옛말이 되었다. 이제 승리하기 위해서는 모든 노동자들이 총파업으로 연대 궐기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확실히 알고 있다.
경제문제와 관련해 직접행동이 효과적임이 입증되었다. 개별적 상황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수많은 침해에 대해서 오로지 끈질긴 저항만이 자신에게 최종적인 자유를 가져다준다. 가게 주인에게 직접 저항하고, 법률 당국자에게 직접 저항하고, 침입자에게 직접 저항하고, 도덕적 규범에 대해서도 지겹도록 저항해야 한다. 아나키즘은 이런 직접적 저항을 지속적으로 이어가야 할 논리적 방법으로 본다.
이러한 직접적 행동이 혁명으로 이어지지 않겠느냐고? 물론 혁명으로 이어질 것이다. 혁명 없이는 어떤 사회적 변화도 생기지 않는다. 사람들은 자신의 역사도 잘 모르지만 혁명도 생각이 실천된 역사적 결과라는 사실을 알지 못한다.
위대한 사상의 효소인 아나키즘은 오늘날 모든 인간의 활동영역에 스며들고 있다. 과학과 예술과 문학과 드라마와 경제적 발전을 위한 노력 등, 사실 모든 개인과 집단이 기존의 사회적 무질서에 저항하고 있는데 여기에는 아나키즘이라는 정신적 빛줄기가 비치고 있는 것이다. 아나키즘은 개인을 최고로 여기는 철학이다. 아나키즘은 사회적 조화의 이론이다. 아나키즘은 세계를 재건하는 위대하고 새롭게 부상하는 살아있는 진리이다. 곧 환한 신새벽을 맞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