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자 주―

이 글은 엠마 골드만이 1910년 『아나키즘과 그 외 에세이들Anarchism and Other Essays』이라는 제목으로 펴낸 책에 실린 에세이다.

한국어 번역은 『저주받은 아나키즘』(김시완 역, 우물이있는집, 2001)이라는 다소 엉뚱한 제목으로 출판되었으나 현재는 절판되었다.

엠마 골드만의 에세이들을 편집하는 과정에서 별도로 하나의 문건으로 취급하게 되어 여기서는 〈청교도의 위선〉만을 옮긴다.


미국의 예술과 관련하여 청교도 정신을 거츤 보글럼(Gutzon Borglum)은 다음과 같이 언급했다.

“청교도주의는 우리 충동 속의 자연스러운 본성에 대한 존중과 정직이 명백하게 우리를 양육함에도 불구하고, 너무도 오랫동안 우리를 자기중심적이고 위선적으로 만들어온 결과 우리 예술의 개성과 진실을 거세시켰다.”

보글럼은 청교도 정신이 삶 자체를 불가능하게 했다고 덧붙여 말하고 싶었을지도 모른다. 예술 이상으로, 탐미정신 이상으로, 삶은 천 갈래의 아름다움을 표상한다. 삶은 영원히 변화하는 거대한 파노라마와 같다. 반면에 청교도주의는 고정적인, 변할 수 없는 삶의 개념에 바탕하고 있다. 그것은 삶이 신의 처벌로, 인간에게 부여한 저주라는 칼뱅주의적 이념을 바탕으로 하고 있다. 자신을 구원하기 위해 인간은 끊임없이 회개해야 하고, 모든 자연적이고 건전한 충동을 비난해야 하고, 기쁨과 아름다움에 대해서는 등을 돌려야 한다.

16세기와 17세기 때 청교도는 영국의 철권통치를 찬양했다. 그러면서 모든 예술과 문화 양식들을 파괴했다. 종교적 금언을 따르려 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셸리(Percy Bysshe Shelley)에게서 자식들을 빼앗은 것도 청교도 정신이었다. 청교도 정신은 또한 바이런(George Gordon Byron)에게 고향 땅을 밟지 못하게 만든 속 좁은 정신이다. 이 위대한 천재 시인이 자기 고향의 무미건조하고 단조롭게 아무런 재미도 없음에 대해 반기를 들었다는 이유로 고향에 갈 수 없게 했다.

청교도는 영국에서 가장 자유스러운 여성들을 허위로 가득한 보수적 결혼을 하도록 강요했다. 대표적인 인물이 메리 울스톤크래프트(Mary Wollstonecraft)와 조지 엘리엇(George Eliot)이 있다. 최근에는 청교도에서 극작가 오스카 와일드의 삶을 희생하도록 요구했다. 사실 청교도는 예술계에서 가장 해로운 요소로 쉼 없이 작용했다. 그 역할을 행한 대표적인 인물인 존 불(John Bull)은 영국민의 예술적 표현을 검열했고, 중산층이 존중할 만한 고리타분한 내용에 대해서만 승인했다.

영국에서는 미국을 청교도의 변방이라고 부르기도 하는데 그 이유는 영국을 순수한 정통 청교도의 나라로 보기 때문이다. 우리의 삶이 청교도에 의해 질식당한 것은 분명한 사실이고 청교도는 자연적이고 건전한 우리의 충동을 말살한다.

이런 청교도 정신을 미국에 이식시킨 장본인은 영국이다. 그 유산은 바로 필그림 파더스Pilgrim Fathers라 부르는 선조들로부터 내려왔다. 종교적 박해와 억압을 피해 메이플라워호에 승선한 청교도 선조들은 청교도적인 전제와 범죄를 통해 신세계를 건설했다. 뉴잉글랜드의 역사, 특히 매사추세츠 주의 역사는 삶을 우울로, 기쁨을 절망으로, 자연스러운 것을 질병으로, 정직과 진실함을 가증스런 거짓과 위선적인 것으로 만드는 가공할만한 공포로 채워졌다. 물고문 의자와 태형을 가하던 기둥 등 미국의 정화를 위해 선호된 수많은 고문기구들은 영국적 방법의 결과물이었다.

문화의 도시 보스턴은 청교도의 역사에서 “피의 도시Bloody Town”로 전락했다. 보스턴에서 행해진 비공인된 종교적 신념에 대한 잔인한 박해는 인근 마을 살렘에 비견되는 것이었다. 보스턴의 광장에서는 아이를 안은 채 헐벗은 한 여인이 마음대로 연설을 했다는 죄로 공개적으로 채찍을 맞았고, 바로 그 자리에서 메리 다이어라는 퀘이커교도 여성은 1659년 교수대에 목이 달렸다. 사실 보스턴은 청교도로 인한 방자한 범죄가 만연한 곳이었다. 1692년 여름 살렘에서는 마법 문제로 18명이 죽었다. 불과 유황으로 마귀를 내쫓은 곳이 매사추세츠만은 아니었다. 캐닝(George Canning)은 이렇게 정확한 진단을 내렸다.

“필그림 파더스는 신세계를 구세계의 잔재로 가득 채웠다.”

이 시기의 무서운 사회상은 가장 뛰어난 미국의 고전 『주홍글씨The Scarlet Letter』에 잘 나타나 있다.

이제 청교도는 더 이상 고문 도구를 사용하지 않는다. 그러나 청교도는 지금도 미국인의 정신과 가성을 장악하고 있는 매우 위해한 집단이다. 남북전쟁 전의 토르케마다(Torquemadas)처럼 안소니 콤스톡(Anthony Comstock)은 미국 도덕을 주관한 독재자였다. 그는 선과 악, 순수와 불결의 표준을 제시했다. 그는 도둑과도 같이 한밤중에 침입하여 사람들의 사생활과 가장 은밀한 사적 관계까지도 간섭했다. 콤스톡이 세운 정탐 조직은 러시아 비밀경찰 중 악명 높은 ‘제3국Third Division’보다 더 뛰어난 활약을 했다.

그런데 일반 대중은 왜 자신들의 자유가 이렇게 침해당하는 것을 참았을까? 그 이유는 간단히 말해 콤스톡이 앵글로색슨 혈통의 청교도를 큰 목소리로 대변했기 때문이다. 자유주의자들도 앵글로색슨 청교도의 영향에서 완전히 자유로울 수 없었다. 콤스톡을 후원자로 모신 많은 청교도 단체들이 생겨났다. 그 이름을 열거해 보면 전통이 깊은 ‘소년소녀 크리스찬 절제 연합Young Men's and Women's Christian Temperance Unions’, ‘순수연맹Purity Leagues’, ‘미국안식일연합American Sabbath Unions’, ‘금주법 지지모임the Prohibition Party’이 있다. 이런 단체들은 미국의 예술과 문화를 심각하게 퇴보시켰다.

유럽은 적어도 예술과 미술 계통에서는 과감하게 당대의 사회 문제와 성 문제를 파헤쳤고 모든 허위들을 신랄하게 비판했다. 유럽에서는 죽은 청교도 시체를 수술용 메스로 해부하여 죽은 과거의 억압에서 해방되는 길을 열었다. 그러나 미국인의 삶에는 계속 청교도적 규제가 가해짐으로써 진실도 정직도 가능하지 않았다. 오직 우울하고 무미건조한 규범이 인간 행동을 지시했고 자연적 표현을 막았으며 최상의 충동을 질식시켰다.

20세기의 청교도는 미국의 플리머스 록Plymouth Rock에 처음 상륙했을 때와 마찬가지로 여전히 자유와 아름다움의 적이다. 청교도는 우리의 가장 깊은 감성을 사악하고 죄악으로 가득한 것이라고 비난한다. 그러나 인간 감성의 진정한 기능을 전혀 모르는 청교도는 그 자체가 이루 말할 수 없는 악의 창조자이다.

미학의 역사를 보면 이 사실이 너무나 확연히 드러난다. 청교도와 교회는 육체를 악한 것으로 보고 육체와 투쟁했다. 육체는 어떤 희생을 치르더라도 짓누르고 숨겨야 할 대상이었다. 이로 인한 잘못된 문제들을 근대적 사상가들과 교육가들이 인식하기 시작했다. 그들은 이렇게 말한다.

“누드는 정신적으로도 의미심장할 뿐만 아니라 위생적으로도 좋다. 젊은이들의 자연스러운 성적 호기심을 완화하기도 하고 병적인 감정 표출을 방지하는 역할도 한다. 또 청춘의 호기심에서 벗어난 어른들에게도 누드는 하나의 영감을 불러일으키는 것이 된다. 인간의 본질적이고 항구적인, 즉 이 세계 내에서 가장 우리 자신과 근접한 누드에는 그 자체에 열정과 아름다움과 품위를 지니고 있다. 이런 누드를 감상하는 것도 우리 삶의 핵심적인 활력소 중 하나이다.”[1]

그러나 순결주의는 이런 인간의 마음을 전도시켜 누드의 아름다움을 감상할 수 있는 힘을 상실하게 만들었다. 순결이라는 명목 아래 우리의 자연스러운 모습을 숨길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순결은 본성에 부과된 인위적 제약일 뿐이다. 그것은 인간에게 허위로 가해진 수치라는 장치이다. 순결에 대한 근대적 관념, 특히 순결 이데올로기의 최대 희생자인 여성에 대한 순결의 관념은 우리의 자연적 충동들을 오히려 감각적으로 과장하게 만든다. “순결은 옷을 많이 입어야 한다”는 말이 있다. 이 말대로 기독교인과 순결주의자는 언제나 이교도들에게 낡은 옷을 입혀 선함과 순결함을 지닌 자로 개종시키려고 한다.

인간 몸, 특히 여성의 몸과 관련하여 그 의미와 기능을 전도시키는 청교도는 여성들에게 금욕을 강요했고, 그것을 따르지 않는 여성을 죄악 많은 인류의 후예요 창녀라 비난했다. 이로 인한 결과들을 살펴보면 이것이 얼마나 엄청난 범죄인가를 알 수 있다. 결혼하지 않은 여성에게는 절대적으로 섹스를 금했으며 이 금기를 어기는 여성은 비도덕적이고 타락한 자로 여겼다. 그 결과 신경쇠약, 성 불감증, 우울증 등 무수한 신경병을 낳게 되었고, 덧붙여 노동의욕 상실, 삶의 기쁨 감소, 불면증, 성도착 내지 성적 상상에의 병적인 몰입을 낳았다.

성적 통제로 인해 발생하는 해로운 결과 중에는 심리적으로 남녀 간의 성을 차별하게 된다는 점도 있다. 그래서 프로이트는 많은 여성들의 지적 열등현상의 이유를 성적 억압을 목적으로 여성에게 부과된 성적 금지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청교도는 결혼하지 않은 여성의 자연스러운 성욕은 억압하면서 여성들의 결혼생활에서는 무절제할 정도의 다산을 축복이라고 한다. 다산이 여성에게 축복만은 아니다. 과거에 억제되었던 성욕이 과도한 섹스로 이어지거나 자신의 육체적 허약함이나 대가족을 부양할 아이들을 낳게 된다. 과학적으로 안전하다고 입증된 피임 방법까지도 완전히 금지되었다. 아니, 피임이라는 주제 자체를 언급하는 것을 죄악시했다.

청교도적 폭압 때문에 많은 여성들이 자신들의 육체적 능력을 점차 상실하였다. 병들고 허약해진 여성들은 기본적으로 자식들을 돌보는 일도 하지 못하게 된다. 경제적 압박과 함께 자신의 신체적 허약함을 인식하고 많은 여성들이 아이를 낳기보다는 목숨이 위험할 수 있는데도 낙태를 감행한다. 미국에서의 낙태 비율은 우리의 생각보다 훨씬 높은 비율에 이르렀다. 최근의 조사에 따르면 임신한 100명의 여성 중 17명이 낙태를 한다. 이런 놀라운 수치도 의사들에게 와서 낙태한 경우만 해당된다. 비밀리에 낙태가 성행하고 있다는 사실을 고려할 때 청교도의 어리석음과 위선 때문에 수많은 희생자들이 계속 생겨나고 있다.

청교도에서는 매춘을 금지하고 매춘부를 체포하여 감옥에 보내지만 매춘은 여전히 극성을 부린다. 청교도의 위선적인 신성함이 탄생시킨 아기가 매춘이다. 매춘은 우리 시대의 열풍이다. 허리케인과도 같이 매춘이 문명화된 모든 세계를 휩쓸고 있다. 매춘 뒤에는 질병과 재앙이 남는다.

사생아 매춘을 해결하기 위해 청교도가 제시한 유일한 해결책은 더 많은 억압과 무자비한 박해이다. 최근에 나온 매춘 금지법으로 페이지 법Page Law이 있다. 이 법안은 유럽에서 실패한 한심한 정책을 뉴욕에 시행하는 것이다. 즉 청교도가 낳은 이 불행한 희생자인 매춘부들을 등록하여 사회로부터 격리시키는 것이다. 순결주의자들은 자신들이 만들어낸 끔찍한 천벌인 성병을 규제하려고 하나 그것은 페이지 법처럼 어리석은 짓이다.

그런데 청교도와 순결주의의 편협하고 답답한 정신이 소위 자유주의자들에게까지도 감염되고 있다. 청교도의 위선에서 태어난 매춘과 그 결과에 반대하는 일에 자유주의자들도 맹목적으로 동참하고 있다. 청교도는 의도적으로 진정한 성병 방지법을 무시한다. 즉 “성병은 신비하고 무서운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즉 육체에 가한 벌, 악을 추구하다가 얻은 부끄러운 악이 아니라 정상적으로 처방하여 치료될 수 있는 일반 질병이다”라는 점을 모두에게 밝혀야 한다. 그러나 청교도는 애매함과 위장과 은폐의 방법을 이용하면서 성병이 더욱 만연하기에 좋은 환경을 오히려 만들었다. 청교도는 고집이 얼마나 완고한지 엘리치(Ehrlich) 교수가 매독 치료법을 발견했는데도 이를 달갑게 여기지 않았다. 매독 치료법을 ‘유독성’ 치료법이라고 애매하게 표현했다.

청교도가 악을 저지르는 데 거의 무한정한 능력을 발휘할 수 있는 것은 국가와 법의 비호를 받기 때문이다. 국민을 ‘부도덕’으로부터 지킨다는 핑계로 청교도는 은근히 정부의 주장을 국민들에게 침투시키고 우리의 사상과 감정과 심지어 행동까지도 합법적으로 검열한다.

일반 예술과 문학과 드라마와 우리의 가장 내밀한 취미인 사적 우편물까지도 이 가혹한 독재자 청교도의 마음에 달려있다. 청교도는 안소니 콤스톡이나 그와 비슷하게 무지한 일부 경찰들에게 인간의 가장 숭고한 본성을 창조하는 천재를 모욕할 권력을 주었다. 우리 삶에서 가장 중요한 문제들을 다룬, 위험스럽게 은폐된 문제들을 끄집어내려는 시도로 쓰여진 책들은 법적으로 범죄적 내용으로 취급되었다. 책을 쓴 힘없는 저자들은 감옥에 들어가거나 어떤 형태로든 파멸의 기롤 내몰리게 된다.

차르가 통치하던 러시아에서도 개인의 일상적 자유가 청교도 윤리의 요새라는 미국에서처럼 유린당하지는 않았다. 미국 대중들에게 유일한 휴식일인 일요일은 아무런 오락도 할 수 없는 날이다. 원시적 풍습과 고대 문명에 관한 글을 쓰는 사람들은 안식일이 아무 일도 하지 않고 전반적으로 기쁘게 즐기는 축제의 날이었다는 데 동의한다.

유럽 국가들은 이런 축제의 전통을 살려 기독교 시대의 단조롭고 바보 같은 일요일 지내기에서 벗어났다. 일요일마다 콘서트 홀, 극장, 박물관, 공원은 남녀노소로 가득 찬다. 특히 주중에 일을 하는 노동자들의 가족이 많이 나들이를 한다. 이렇게 활기와 기쁨으로 넘치는 하루를 보내면서 일상의 힘든 일을 잊고 새 힘을 얻는다. 일요일은 대중들이 제대로 된 사회의 진정한 삶이란 어떤 것인지 잘 보여주는 날이다. 이 날은 이익을 추구하고 자기 영혼을 파괴하는 일에서 벗어난다.

청교도는 사람들에게 일요일마저 빼앗았다. 자연히 노동자들만이 악영향을 받게 된다. 백만장자들은 호화스러운 집과 세련된 사교모임들을 유지하고 있다. 하지만 가난한 자는 미국 평일의 일반적인 모습인 따분하고 지겨운 생활을 한다. 유럽의 야외 활동은 활기차고 재미있는데 미국에서는 그 모습이 답답하고 부패한 잿빛 교회와 시골 응접실이나 뒷골목의 음침한 분위기이다.

그나마 금주법을 적용하는 주에 사는 사람들은 뒷골목에서 술 마시는 것도 못한다. 겨우 숨어서, 많은 돈을 주고도 밀주나 마실 수 있다. 금주법이야말로 정말로 웃기는 법이다. 청교도가 이룩한 모든 성취들이 그렇듯 금주법 역시 인간 체제 속에 깊이 들어있는 악마를 내쫓으려고 만들었다. 그런데 금주법이 시행된 마을에 술주정꾼이 가장 많다. 아마 가장 위선적인 사람을 뽑는 대회라도 있다면 청교도가 우승자가 될 것이다. 건강과 경제적 이류로 술을 금한다고 명시하지만 금주법의 정신 자체가 비정상적이므로 비정상적인 삶을 만들어낼 뿐이다.

우리의 상상력을 고양시키고 기분을 좋게 하는 모든 자극들은 공기처럼 우리 삶에 꼭 필요하다. 술은 우리 몸을 활기차게 하고, 동료애를 깊게 한다. 이런저런 자극이 없다면 창조적인 일은 불가능하고 친절하고 온화한 태도도 생기지 않는다. 어떤 위대한 천재는 술잔 속에서 자기를 본다. 인간의 감정 전체를 통제하려는 청교도의 시도는 정당하지 않다. 바이런(Byron)이나 포(Poe)와 같은 작가들은 어떤 청교도들이 할 수 있는 것보다 더 심오하게 인간의 마음에 자극을 주었다. 이들은 삶에 의미를 부여하고 삶을 다채롭게 해주었다.

청교도는 붉은 피를 맹물로 만들고, 아름다움을 추함으로, 다양성을 획일성으로 만든다. 어떤 형태든 청교도에는 독성이 있다. 강력하고 활기차 보이는 모든 것의 표면에 청교도라는 독이 묻어 전체를 멸망시키고 있다. 텐(Hippolyte Taine)의 말처럼 모든 참된 영혼을 지닌 자들은 이것을 깨달았다.

“청교도는 문화와 철학과 유머와 친교의 죽음을 낳는다. 청교도의 특징은 따분함, 단조로움, 우울이다.”


[1] Havelock Ellis, 『The Psychology of Sex』.