엠마 골드만

결혼과 사랑

1910년

결혼과 사랑에 관한 일반관념은 그것이 동의어이고 같은 동기로부터 생겨나며, 같은 인간의 욕구를 커버한다는 것이다. 대개의 통속관념과 같이 이 역시 사실이 아니라 미신에 근거하고 있다.

결혼과 사랑은 공통점이 없다. 그것들은 마치 극과 극처럼 떨어져 있다. 사실, 서로 적대적인 것이다. 물론 어떠한 결혼은 사랑의 결과였다. 그러나 사랑이 결혼을 통해서만 그 자신을 긍정할 수 있기 때문이라고 말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대부분의 사람이 습속을 전혀 벗어나지 못하기 때문이다. 결혼은 별 볼일 없는 것이지만 단지 여론 때문에 그것에 순종하고 있는 남녀가 요즘 많이 있다. 어쨌든 어떤 결혼은 사랑을 토대로 하고 있는 것도 사실이고, 또 그 사랑이 결혼한 뒤에도 계속되는 경우가 있는 것도 사실이지만, 나는 그것이 결혼과는 무관하게 그렇게 되는 것이지, 결혼 덕분이라는 주장을 하고 싶지는 않다.

반면, 사랑이 결혼에서 비롯된다고 하는 것은 완전히 거짓이다. 극히 드물게 부부가 결혼한 뒤 사랑에 빠진다는 기적적인 현상을 듣기도 하지만, 자세히 살펴보면 피할 수 없는 것에 대한 단순한 적응에 불과하다는 사실이 밝혀질 것이다. 상호간에 점차 생겨나는 사랑은 자발성, 강렬함, 사랑의 아름다움과 같은 것들에서 멀리 떨어져 있으며, 그러한 것들의 결여는 남녀 모두에게 반드시 모욕적인 것임이 증명될 수밖에 없다.

결혼은 주로 경제적 합의, 보험 계약과 같은 것이다. 일반적인 생명보험 계약과 다른 점은 그것이 단지 보다 더 구속력 있고 까다롭다는 것이다. 투자 대비 수익은 미미하다. 보험에 가입하는 사람은 보험금을 일시에 많이 납입하든 아니면 조금씩 나누어 납입하든, 혹은 언제든 자유롭게 납입을 도중에 중지할 수도 있다. 그러나 만약 여성이 한번 결혼보험에 가입하면 자신의 이름, 사생활, 자존심, 심지어 목숨까지도 ‘죽음이 갈라놓을 때까지’ 바쳐 평생 남편을 위해 납입해야 한다. 더욱이 결혼보험은 여성에게 평생의 종속을 선고하여 개인적으로도 공적으로서도 전혀 쓸모없고 기생하는 존재가 되게 한다. 남성 역시 결혼세를 지불하지만 여성보다 그의 영역이 넓어짐에 따라 결혼이 여성에게만큼 그를 제한하지는 않는다. 남성은 그는 경제적인 의미에서 자신의 사슬을 더 많이 느낀다.

이리하여 단테가 말한 지옥의 문에 새겨진 글귀가 결혼에 동등한 힘으로 적용된다. “여기 들어오는 자, 모든 희망을 버려라.”

결혼이 실패라는 것은 웬만큼 바보가 아닌 이상은 부인하지 않을 것이다. 이혼통계를 훑어보면 누구나 결혼이 얼마나 쓰라린 실패인지를 분명히 볼 수 있을 것이다. 또 이혼법이 느슨해지고 여성이 점점 문란해지고 있다는 틀에 박힌 팔레스타인 식 주장도 다음과 같은 사실을 설명하지는 못할 것이다. 첫째, 결혼은 열둘에 하나, 이혼으로 끝나고 있다. 둘째, 1870년 이래, 이혼의 수가 인구 10만 명에 대해 28퍼센트에서 73퍼센트로 증가하였다. 셋째, 1867년 이래 이혼사유로 간통의 수가 270.8퍼센트 증가했다. 넷째, 버려지는 일이 369.8퍼센트 증가했다.

이러한 놀라운 통계에 더해 이 문제를 소재로 다루는 문학 희곡이 많이 있다. 로버트 헤릭의 『Together』, 피넬로의 『Mid Channel』, 유진 월터의 『Paid in Full』 그리고 이외에도 많은 작가들이 결혼의 건조함, 단조로움, 비열함, 불만족 등을 들고, 조화와 이해의 요소가 결여되어 있다고 논하고 있다.

사려 깊은 사회학 연구자들은 이런 현상에 대해 대중적이고 통속적인 변명으로는 만족하지 않을 것이다. 그는 결혼이 왜 그렇게 비참한지를 증명하기 위해 바로 양성의 생활에 더 깊이 파고들어야 할 것이다.

에드워드 카펜터는 모든 결혼 뒤에는 두 성별의 일생에 걸친 환경이 자리 잡고 있다고 말한다. 서로 너무나 다른 환경이기 때문에 남성과 여성은 서로 타인으로 남게 되는 것이다. 극복할 수 없는 미신, 관습, 습관의 벽으로 분리된 결혼은 서로에 대한 지식과 존중을 발전시킬 수 있는 잠재력을 지니지 못하며, 그것이 없는 모든 결합은 실패할 수밖에 없다.

모든 사회적 허위를 증오하는 헨리크 입센(Henrik Ibsen)은 아마도 이 위대한 진리를 실현하고자 했던 최초의 사람이었다. 노라가 그녀의 남편을 버린다―그것은 어리석은 비평가들이 말하는 것처럼 그녀가 자신의 책임에 권태를 느끼고 여성의 권력이 필요함을 느꼈기 때문이 아니라, 그녀가 8년간 생면부지의 남과 생활하며 아이를 낳았다는 것을 자각했기 때문이다. 일면식도 없는 두 사람이 평생에 걸쳐 친밀한 관계를 만들어 나가는 것보다 더 비열한 타락이 있을 수 있을까. 여성은 남편의 수입 이외에 남편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알 필요가 없는 것이다. 또 남성이 여성에 대한 지식이라고 하는 것은 그녀가 마음에 드는 표정을 짓고 있다는 것 이외에는 아무것도 없다. 우리는 아직 여성에게는 영혼이 없다는 신학적 신화, 남성의 부속품에 불과하다는 신학적 신화에서 나아가지 못했는데, 그는 자신의 그림자를 두려워할 정도로 강인한 남성의 편의만을 위해 그의 갈비뼈로 만든 것이다.

아마도 여성이 열등하다고 하는 것은 여성이 만들어진 재료의 성질에 책임이 있을 것이다. 어쨌든 여성에게는 영혼이 없다―여성에 대해서 알아야 할 것이 무엇이 있을까? 뿐만 아니라 여성에게 영혼의 분자가 적으면 적을수록 아내로서의 가치가 커지고, 더욱 쉽게 남편과 동화될 수 있다는 것이다. 오랜 기간 이른바 결혼제도라는 것을 보존한 것은 이 남존설男尊說에 대한 맹종적인 묵인으로, 이제 여성은 진정으로 주인의 은혜에서 벗어난 존재로서 스스로를 자각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신성한 결혼제도는 점점 훼손되고 있으며 어떤 감상적 한탄도 그것을 막을 수 없다.

일반적으로 딸들은 어려서부터 결혼이 그녀의 최종 목표라는 말을 듣는다. 따라서 그녀의 훈련과 교육은 그 목표를 향해야만 한다. 말 못하는 동물이 도살을 위해 살찌워지는 것처럼 그녀는 이를 위해 준비된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그녀가 아내나 어머니로서의 직무에 대해 알게끔 허락된 것은 보통 직공들이 그 작업에 대해 아는 것보다 아주 적다. 훌륭한 소녀가 결혼관계에 대해 아는 것은 무례하고 야비하다는 것이다. 오, 그 존엄의 모순 때문에 결혼 서약을 필연적으로 불결한 것에서 가장 순결하고 가장 신성한 결정으로 바꾸어, 누구든지 과감히 그것을 묻거나 혹은 비판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는다. 그렇지만 그것이 확실히 결혼을 주장하는 사람들의 일반적인 태도이다. 미래의 아내와 어머니는 성性이라는 경쟁 분야에 있어서 여성의 유일한 자산에 대해 전혀 무지하다. 그리하여 그녀는 한 남성과 평생 관계를 맺게 되는데, 그것은 자신이 가장 자연스럽고 건강한 본능인 섹스에 의해 엄청나게 충격을 받고, 격분하고, 분개하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결혼 생활의 불행, 불행, 괴로움, 육체적 고통의 상당 부분이 큰 미덕으로 찬미 받는 성 문제에 대한 죄악적 무지 때문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 개탄스러운 사실 때문에 많은 가정이 파멸로 끝을 맺었다고 내가 말하는 것도 결코 과장이 아니다.

그러나 만일 여성이 충분히 자유롭게 성장하여 국가나 교회의 허가 없이 성의 신비를 배울 수 있다면, 그녀는 “좋은” 남성의 아내가 되기에 전혀 부적절하다며 하여 유죄를 선고받을 것이다. “좋은 남성”라고 하는 것은 텅텅 빈 머리와 많은 돈에 불과하다. 생기와 열정으로 가득 찬 건강하고 성장한 여성이 자연의 요구를 거부하고, 가장 격렬한 욕구를 억제하고, 건강을 해치고, 정신을 망가뜨려야 한다는 생각보다 더 황당한 것이 있을 수 있는가. “좋은” 남성이 나타나서 자신을 아내로 데려가기 전까지 성 경험의 심오함 영광에서 버려야 한다는 생각보다 더 터무니없는 것이 있을까? 이것이 바로 결혼의 의미이다. 이 같은 조합이 실패가 아니면 무엇으로 끝날 수 있을까? 이것은 비록 가장 중요하지는 않지만 결혼의 한 요소로서, 결혼을 사랑과 구별 짓는 것이다.

우리 시대는 실제적인 시대다. 로미오와 줄리엣이 있는 부모님의 분노를 무릅쓰고서 서로 사랑하고, 그레첸이 사랑을 위해 이웃들의 소문에 스스로를 드러냈던 시대는 지났다. 설령 드물게 젊은 사람들이 사치스러운 로맨스에 빠져들어도, 그들은 연장자의 감시를 받고, 그들이 ‘성품이 좋아질’ 때까지 훈련을 받고 짓이겨진다.

소녀에게 주입되는 도덕적 교훈은 남성이 ‘어떻게’ 그녀의 사랑을 불러 일으켰느냐가 아니라 오히려 ‘얼마나’ 사랑을 불러 일으켰느냐 하는 데 있다. 남성에게 경제력이 있을까? 그가 아내를 부양할 수 있을까? 이것이 실제적 미국 생활의 중요한 유일한 신이다. 그리고 결혼을 정당하다고 인정하는 유일한 조건이다. 이것이 점차 모든 소녀의 사상에 침투한다. 그의 꿈은 달빛과 키스도 아니고 웃음과 눈물도 아니다. 그녀는 쇼핑 투어와 할인 판매대를 꿈꾼다. 이러한 영혼의 빈곤과 비도덕성은 결혼 제도 속에 내재되어 있는 요소들이다. 국가와 교회는 다른 어떤 이상도 인정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국가와 교회는 단지 남녀를 지배하는 데 필요한 수단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물론 사랑을 돈보다 더 중요하게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다. 특히 이는 경제적인 필요로 인해 어쩔 수 없는 독립을 재촉 받은 계급의 사람들에게 있어 그러하다. 그 거대한 원동력에 의해 움직여진 놀라운 만큼의 여성 지위의 변화는 여성들이 산업의 각축장에 들어온 이래 얼마나 근소한 시일이 지났는지를 되돌아볼 때 참으로 경탄하지 않을 수 없다. 600만 명의 여성 임금 노동자, 남성과 동등한 권리를 가진 600만 명의 여성들이 착취당하고, 도둑맞고, 파업하고, 심지어 굶고 있다. 더 필요하신 건 없으신지? 그렇다, 인생의 모든 여정에서 최고 두뇌 노동에서 광산 또는 철도 노동, 아니, 탐정 및 경찰에까지 종사하는 600만 여성 임금 노동자. 확실히 해방은 완료되었다.

그러나 그럼에도 여성 임금 노동자 중 극소수는 남성과 마찬가지로 노동을 남성과 같은 관점에서 영구적인 문제로 보고 있다. 남성은 아무리 노쇠해도 그는 독립적이고 자급자족하라는 가르침을 받아왔다. 오, 나는 어느 누구도 우리 경제적 발판에서는 진실로 독립할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다. 더구나 가장 불쌍한 남성 표본도 기생寄生하는 것을 나쁘게 여기고, 아니 적어도 기생한다고 알려지는 것을 증오한다.

여성 노동자는 자기의 지위를 임시적이라고 생각하여 맨 처음 입찰자에 의해 내던져질 것을 예상하고 있다. 그것이 남성보다 여성을 조직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지에 대한 이유다. “내가 왜 조합에 가입해야 하지? 나는 결혼도 하고 가정을 꾸릴 거야.” 그녀는 어려서부터 그것을 그녀의 궁극적인 소명으로 간주하도록 배워오지 않았는가. 그러나 그녀는 가정이 비록 공장과 같이 큰 감옥은 아니라고 해도 한층 견고한 문과 빗장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가정은 누구도 빠져나갈 수 없는 충실한 파수꾼을 가지고 있다. 가장 비참한 것은 가정이 더 이상 임금 노예로부터 그녀를 자유롭게 하지 않고 단지 그녀의 일감을 증가시킨다는 것이다.

위원회에 제출된 “노동, 임금, 인구집적”에 관한 최근의 통계에 따르면, 뉴욕 시의 노동자 중 기혼자는 겨우 그 10%에 지나지 않는다. 이들은 전 세계에서 가장 저렴한 임금으로 노동을 계속해야 한다. 이 끔찍한 현상에 가정의 노역이 수반되는 것이다. 이렇게 해서 가정의 보호와 영광에 무엇이 남겨질 것인가? 사실 결혼한 중산층 소녀조차 가정에 관해서 이야기할 수는 없는 것이다, 그녀 주변을 만들어 내는 것은 남성이기 때문이다. 남편이 짐승인지 사랑스러운 사람인지는 중요하지 않다. 내가 증명하고자 하는 것은 결혼은 오직 남편의 은혜만으로 여성에게 가정을 보장한다는 것이다. 그녀는 매년 그녀의 인생과 생활에 대한 면모가 그녀의 주변 환경처럼 평평하고 좁고 칙칙해질 때까지 남편의 집을 돌아다닌다. 그녀가 잔소리하고, 옹졸하고, 시비 걸리고, 험담하고, 참을 수 없는 사람이 되어 그 남자를 집 밖으로 몰아내는 것은 별로 놀랄 일이 아니다. 그녀는 가고 싶어도 갈 수 없었다. 갈 곳이 없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대부분의 부인들은 결혼 후 얼마 되지 않아 모든 능력을 완전히 상실하고 바깥 세상에 대해 절대로 무능한 것으로 변한다. 그녀의 외모에 부주의해지고, 동작은 추해지고, 결정을 의존하게 되며, 판단에 겁이 많아지고, 뚱뚱해지고 지루해지며 대부분의 남성이 미워하고 경멸하게 된다. 삶을 이어가기에 아주 멋진 분위기가 아닌가?

그러나 만약 결혼이 없다고 하면 어린이는 어떻게 보호받을까? 결국 이것이 가장 중요한 이유인 것은 아닐까? 무슨 허위이자 위선적인 말인가! 결혼이 어린이를 보호한다고 해도 가난하고 집 없는 어린이 수천 명 있지 않은가. 결혼이 아이를 보호해도 고아원과 소년원은 넘쳐나지 않는가. 그리고 아동학대방지협회는 항상 ‘사랑하는’ 부모로부터 작은 희생자를 구해내고 그들의 부모보다 더욱 친절한 아동보호회의 손에 그들을 두려고 노력하고 있지 않은가. 아아, 이 무슨 모욕인가.

결혼은 “말을 물가로 데려갈” 힘을 가지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말에게 물을 먹일 수 있는 힘은 가지고 있지 않다. 법률은 아버지를 구속하고 그에게 죄수의 옷을 입힌다. 그러나 그것이 어린이의 배고픔을 가라앉힌 적이 있는가? 부모가 직장이 없거나 신분을 숨긴다면 그때 결혼은 어떻게 되는가. 결혼은 그 남자를 “재판”으로 데려오기 위해, 그를 안전하게 문 안에 가두기 위해 법을 발동한다. 그러나 그의 노동은 어린이가 아니라 국가에 도움이 된다. 어린이는 그저 아버지의 옷가지에 대한 아련한 기억을 가지게 될 뿐이다.

소위 여성의 보호에 대해서는―그곳에 결혼의 저주가 깃든다. 결혼은 진정 그녀를 보호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보호라는 생각 자체가 이미 혐오스러워 할 만한 것이다. 이와 같은 것이 실로 인생을 유린하고 모욕하며 인간의 존엄성을 떨어뜨리는 것이다. 이 기생적 제도는 영원히 몰아내야만 한다.

그것은 마치 다른 부성애적 방식인 자본주의와 같다. 그것은 인간의 타고난 권리를 빼앗고, 성장을 방해하고, 인간의 몸을 오염시키며, 인간을 무지와 가난과 의존 속에 있게 하고, 그런 뒤 인간 자존심의 마지막 흔적에 영위하는 자선을 조직한다.

결혼이라는 제도는 여성을 기생충으로, 절대적으로 의존적인 존재로 만든다. 결혼은 삶의 투쟁에 대해 여성을 무력화시키고, 그녀의 사회적 의식을 말살시키고, 상상력을 마비시킨 다음, 그 자애로운 보호를 강요하는데, 이는 진정 올가미이자 인간성에 대한 희롱이다.

만약 모성이 여성의 본성을 가장 잘 충족시키는 것이라면, 사랑과 자유를 이외에 어떠한 보호를 필요로 하는가? 결혼은 여성의 완성을 유린하고, 화나게 하고, 타락시킨다. 결혼은 여성에게 “네가 나를 따라올 때에만 너는 생명을 낳으리라”라고 말하지 않는가. 만약 여성이 자신을 팔아 모성애를 사는 것을 거부한다면 결혼은 그녀를 헐뜯고 욕되게 하지 않는가. 결혼은 설령 여성이 증오와 강박에 의해 임신하는 일이 있어도 모성애를 재가하지 않는가. 그러나 만일 모성애가 자유로운 선택, 사랑, 황홀, 치열한 정열의 결과라면, 결혼은 무고한 머리 위에 가시관을 씌우고 피로 사생아라는 무서운 단어를 새기지 않는가. 만약 결혼이 그것에 대해 주장된 모든 미덕을 포함한다면, 모성애에 반하는 범죄는 결혼을 사랑의 영역에서 영원히 추방시킬 것이다.

인생 전반에 걸쳐 가장 강하고 깊은 요소인 사랑, 희망의 전조, 기쁨의 전조, 황홀감의 전조, 모든 관습의 반항, 사랑, 인간 운명의 가장 자유롭고 가장 강력한 형성자인 사랑. 이렇게 모든 것을 압도하는 힘이 어떻게 국가와 교회가 낳은 잡초, 즉 결혼과 동의어가 될 수 있겠는가?

자유로운 사랑? 마치 사랑이 자유 이외의 것인 양 말한다! 인간은 많은 지혜를 샀지만, 전 세계 수백만 명은 사랑을 사는 데 실패했다. 인간은 육체를 정복했지만 지상의 모든 권력도 결국 사랑을 정복할 수는 없었다. 인간은 온 나라를 정복했지만, 그의 모든 군대는 사랑을 정복할 수 없었다. 인간은 정신을 쇠사슬로 묶고 족쇄를 채웠지만 사랑 앞에서는 전혀 속수무책이었다. 왕좌에 높이 올라, 황금으로 명령할 수 있는 모든 화려함과 화려함을 가졌더라도 사랑이 그를 스쳐지나간다면 그는 외롭고 처량하다. 사랑이 있는 곳은 가장 궁핍한 오두막에서도 생명과 색채로 따뜻하게 빛나고 있다. 이리하여 사랑에는 거지를 왕으로 만드는 마법의 힘이 있다. 그렇다, 사랑은 자유인 것이다. 사랑은 자유 이외의 어떤 대기에서도 살 수 없다. 오직 자유에서만 사랑은 자신을 충분하고 완전하게 부여할 수 있다. 사랑이 한 번 뿌리를 내리면 우주의 어떤 법률도, 어떤 법정도 흙에서 그것을 뜯어낼 수 없다. 하지만 만약 땅이 불모라면 결혼은 어떻게 과실을 수확할 수 있겠는가. 그것은 죽음과 맞서는 덧없는 삶의 마지막 필사적인 투쟁과 같다.

사랑은 보호가 필요 없다. 그것은 그 스스로 보호한다. 사랑이 생명을 얻는 한, 어떤 아이도 애정 결핍으로 버려지거나, 배고프거나, 굶주리지 않는다. 나는 이것이 참인 것을 알고 있다. 나는 그들이 사랑한 남성들에 의해 자유롭게 어머니가 된 여성들을 많이 알고 있다. 그러나 어떤 어린이라도 자유로운 어머니가 줄 수 있는 주의와 보호와 헌신을 향락하는 것은 어려울 것이다.

권위를 옹호하는 사람들은 자유로운 모성애가 그들의 먹잇감을 빼앗을까 봐 두려워한다. 누가 전쟁을 하겠는가? 누가 부를 창조하겠는가? 만약 여성이 어린이의 무차별 양육을 거부한다면 누가 순경이 되고 간수가 되겠는가? 종족, 종족! 왕과 대통령과 자본주의자, 사제가 외친다. 비록 여성이 단순한 기계로 전락하더라도, 종족은 보존되어야 한다―그리고 결혼제도는 여성의 해로운 성性의 각성에 대한 유일하게 안전한 문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속박 상태를 유지하기 위한 이러한 광란의 노력은 허사였다. 역시 교회의 칙령, 통치자들의 미친 공격, 법의 팔조차 소용없다. 여성은 더 이상 가난과 노예제도의 멍에를 벗어 던질 힘도, 도덕적 용기도 없는 병들고, 미약하고, 노쇠하고, 비참한 인간들의 종족 생산 당사자가 되고 싶지 않다. 대신에 여성은 결혼이 그러한 것처럼 강요에 의해서가 아니라, 사랑과 자유로운 선택을 통해 더 적은 수의 더 나은 아이들을 원하고 있다. 우리의 사이비 도덕주의자들은 자유로운 사랑이 여성의 가슴 속에서 깨운 아이에 대한 깊은 책임감을 배워야만 한다. 멸망과 죽음만을 숨 쉬는 대기 속에서 생명을 낳기보다는, 차라리 여성은 모성의 영광을 영원히 버릴 것이다. 그리고 만약 엄마가 된다면, 그것은 아이에게 여성의 존재가 양보할 수 있는 가장 깊고 최고의 것을 주는 것이다. 아이와 함께 성장하는 것이 그녀의 좌우명이다. 그녀는 그것만이 여성이 진정 남성과 여성의 건설을 돕게 된다는 것을 알고 있다.

입센이 훌륭한 솜씨로 알빙 부인을 묘사했을 때, 그는 자유로운 어머니의 환상을 보고 있었음에 틀림없다. 그녀는 이상적인 어머니였다. 그녀는 결혼과 그 모든 공포를 극복했다. 그녀는 스스로의 사슬을 타파하고, 그녀의 자유로운 정신을 고양시켜 재생되고 강해질 때까지 자유롭게 치솟게 했다. 아아, 그녀의 삶의 기쁨인 오스왈드를 구하기에는 너무 늦었지만, 자유로운 사랑이 아름다운 삶의 유일한 조건이라는 것을 깨닫는 데에는 늦지 않았다. 알빙 부인처럼 피와 눈물을 대가로 치러 정신적 각성을 얻은 사람들은 결혼을 허위, 천박, 공허한 모욕으로 여겨 부인한다. 그들은 사랑이 단 한 번의 짧은 시간 동안만 지속되든 혹은 영원히 지속 되든 그것이 새로운 종족, 새로운 세계를 창조하고, 고무시키고, 고양하는 유일한 기초임을 알고 있다.

피그미 족처럼 왜소한 현재 우리의 상태에서 사랑은 사실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낯선 것이다. 오해와 기피로 좀처럼 뿌리를 내리지 못하거나, 어쩌다 우연히 뿌리를 내려도 곧 시들어 버린다. 사랑의 섬세한 섬유질은 날마다 갈기갈기 찢기는 압박과 긴장을 견딜 수 없다. 그것의 영혼은 너무나 복잡해서 우리 사회조직의 끈기 있는 씨실에 스스로를 적합하게 할 수 없다. 사랑은 그것을 요구하는 사람들과 함께 울고 탄식하며 괴로워하지만 그럼에도 그 절정에 오를 능력 결여되어 있다.

언젠가, 언젠가는 남성과 여성이 일어나 그 최고봉에 도달할 것이다. 그들은 크고, 강하고, 자유롭게 성장해 만날 것이다. 그리고 그들은 사랑받을 준비를 하고, 헤어질 준비를 하고, 사랑의 황금빛을 뿌릴 날이 올 것이다. 얼마나 화려하고 상상력 넘치는 어떤 시적 천재가 남녀의 삶에서 그러한 힘의 잠재력을 대략적으로나마 예견할 수 있을까. 만약 세상이 진정한 교제와 온정을 낳는다면, 결혼이 아닌 사랑이 부모가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