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자 주―

이 글은 엠마 골드만이 1910년 『아나키즘과 그 외 에세이들Anarchism and Other Essays』이라는 제목으로 펴낸 책에 실린 에세이다.

한국어 번역은 『저주받은 아나키즘』(김시완 역, 우물이있는집, 2001)이라는 다소 엉뚱한 제목으로 출판되었으나 현재는 절판되었다.

엠마 골드만의 에세이들을 편집하는 과정에서 별도로 하나의 문건으로 취급하게 되어 여기서는 〈소수 대 다수〉만을 옮긴다.


우리 시대의 특징을 한 단어로 말하라면 나는 ‘양quantity’이라 하겠다. 대중의 힘이 도처에서 위력을 떨치고 질적인 것을 파괴한다. 우리의 모든 삶이 생산, 정치, 교육이 양과 수에 달려있다. 한때 철저한 장인정신과 자기 일의 질적인 품격을 자랑스럽게 여기던 노동자들이 이제는 머리도 쓰지 않고 유능하지도 않은 자동부품 같은 노동자들로 대체되었다. 이런 노동자들이 엄청난 양의 물건들을 쏟아낸다. 삶에 평안과 안락을 더해주지 못하는 이런 양적인 것들은 인간의 부담만 가중시킬 뿐이다.

정치에서도 양이 판친다. 양적 증가에 비례하여 원칙과 이상과 정의와 신의 같은 것들은 완전히 수적 질서 속에 파묻힌다. 우위를 점하려는 투쟁을 하면서 여러 정당들은 서로 속임수와 기만과 교활함과 뒤통수치는 솜씨를 발휘하여 다수를 차지하려 한다. 다수가 되어야만 승자가 된다. 성공만이 유일한 신이다. 얼마나 비용이 들고 어떤 끔찍한 희생을 치르느냐는 중요하지 않다. 이런 슬픈 사실을 굳이 확인해주기 위해 애쓸 필요는 없을 것이다.

과거 정부가 이토록 뻔뻔스럽게 드러내놓고 부패하고 철저하게 썩은 적이 없었다. 국민의 권리와 자유를 진정으로 보호하는 수호자로서의 정부의 배반행위는 과거 몇 년 동안의 비난을 훨씬 뛰어넘는 것이었다.

정치 모리배들이 다수를 차지하고 부패한 정치현실이 확고하게 우위를 점해버린 지금 정치집단의 범죄는 극에 달해 소경도 그것을 볼 지경인데 수없이 이용당하고 배신당한 다수는 정치판의 승자에게 대항하지 않고 오히려 그 편을 들고 있다.

소수는 당황하였다. 어떻게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미국적 자유의 전통을 배반했는지 묻지 않을 수 없었다. 판단이 어디에 있으며, 합리적 능력은 도대체 어디로 갔는가? 합리적 능력을 상실한 이유는 다수가 합리적으로 추론할 수 없기 때문이다. 다수는 옳은 판단능력이 없다. 독창성과 도덕적 용기를 완전히 상실한 다수는 항상 자신의 운명을 타자의 손에 맡기고 있다. 스스로 책임질 능력이 없기 때문에 다수는 파멸로 가는 줄도 모르고 지도자를 추종한다. 스톡만(Stockman) 박사의 다음과 같은 주장은 타당하다.

“우리 가운데 있는 진리와 정의에 대한 가장 위험한 적들은 똘똘 뭉친 다수, 저주받은 저 똘똘 뭉친 다수이다.”

야망도, 지도력도 없는 대중은 아무것도 증오하지 않는다. 이들은 개혁을 외치는 새로운 진리의 선구자를 반대하고 비난하고 괴롭힌다.

사회주의자들을 포함해 정치가들이 자주 언급하는 우리 시대의 슬로건은 우리 시대가 개인주의 시대, 곧 소수의 시대라는 것이다. 물 밑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모르는 단순한 사람이라면 이 견해에 박수를 보낼지 모른다. 이 세계의 부는 소수에게 축적되어 있다. 하지만 이 소수의 성공은 개인주의 때문이 아니다. 대중의 무기력함과 비겁함과 철저한 순종 때문에 가능한 성공이다. 대중은 오로지 지배당하고 지도받고 강제되기를 바란다. 개인주의를 말할 것 같으면 인류 역사상 그 어느 때에도 정상적이고 건전한 방법으로 온전히 표출되지 못했고 자기 위상을 차지하지 못했다. 그럴 기회가 별로 없었다.

정직한 목적의식으로 충만한 개별적 교육가와 근본적인 이상을 지닌 예술가나 작가 또는 독자적인 과학자나 탐험가, 비타협적인 선구자들은 매일같이 낡은 지식과 창의성을 가진 인간들에게 밀려난다.

페러(Francisco Ferrer i Guàrdia)와 같은 교육가들은 어디에서도 용납되지 않는다. 그러나 잘 조리되어 소화가 잘 되는 음식을 제공하는 것, 곧 기존의 사회체제를 그대로 수용하는 교육, 곧 기계부품 같은 인간양성 교육 및 엘리트 교육은 아무런 제약도 없이 성공적으로 이 시대의 주요 교육으로 자리 잡고 있다. 문학이나 드라마의 세계에서는 험프리 워즈(Humphrey Wards)와 클라이드 피치스(Clyde Fitches) 같은 대중에 영합하는 인물들이 대중의 우상이지만 에머슨(Ralph Waldo Emerson)과 소로(Henry David Thoreau), 휘트먼(Walt Whitman) 같은 인물들의 천재성과 미적 가치를 아는 사람은 거의 없다. 입센(Henrik Johan Ibsen)과 하우프트만(Hauptmann), 버틀러 예이츠(Butler Yeats), 스테판 필립스(Stephen Phillips) 같은 인물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이들은 모두 대중의 지평을 넘어선 고독한 스타들이다.

출판인들과 극장 주인과 비평가들은 창조적인 예술에 내재된 질적 품격을 요구하지 않는다. 얼마나 많이 팔릴 것인가, 대중의 기호에 맞는지 만을 고려한다. 슬프게도 대중의 기호란 덤핑 시장과 같다. 정신적인 소화 작용이 전혀 필요 없는 그런 맛이다. 결과적으로 진부하고 평범하고 뻔한 내용이 대표적인 문학작품으로 행세한다.

예술에서도 이와 똑같은 상황에 우리가 직면해 있다는 사실은 굳이 말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공원과 도로변을 살펴보라. 저속하고 혐오스러운 예술작품들이 깔려 있다. 다수의 취향이 이런 예술적 유린을 참지만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구성이 잘못되고 수법이 미숙한 조각품들이 난무하는 속에서도 미국시민들은 미켈란젤로와 같은 진짜 예술을 숭배한다. 그러나 그것은 단지 성공한 예술에 한해서다. 기존의 정해진 개념에 영합하지 않으며 자기의 독창성을 발휘하고 이를 삶 속에 실현하려고 애쓰는 진실된 천재 예술가들은 비참한 생애를 보낸다. 이 천재의 작품이 어느 날 대중의 일시적 유행에 맞는 날이 올지도 모르지만 그땐 이미 이 천재의 심장이 멎었을 때일 것이다. 이상도 안목도 없는 대중이 거장의 유산을 죽게 한다.

오늘날 예술가는 프로메테우스 같은 삶으로는 경제적 궁핍에서 헤어나지 모사기 때문에 결국 창조적인 예술을 하지 못한다고 말한다. 어느 시대를 막론하고 예술가들은 경제적인 곤란을 겪었다. 미켈란젤로는 오늘날의 조각가나 화가처럼 자기 후원자에게 의존해야 했다. 그러나 예술적 안목은 대중의 무분별한 식견과는 확실히 다르다. 그렇기 때문에 오히려 이들은 거장의 반열에 올라 자랑스럽게 존경받고 있다.

오늘날 예술을 지키는 자는 오직 한 가지 기준, 하나의 가치, 곧 돈만을 생각한다. 얼마나 위대한 작품이냐 같은 질적인 문제에는 관심이 없고 얼마나 많은 달러를 버는지에만 관심이 있다. 그래서 미르보(Octave Henri Marie Mirbeau)의 성격극 『사업은 사업Les Affaires Sont Les Affaires』에 나오는 금융업자는 색깔만 요란한 미술작품을 보고 이렇게 말한다.

“얼마나 위대한 작품인지 보시오. 5만 프랑 짜리입니다.”

꼭 우리 주변의 천박한 벼락부자들 같다. 이런 엉터리 인물들은 위대한 작품을 발견했다고 떠들면서 자기 수준의 천박함을 돈으로 메우려 한다.

사회에서 저질러지는 가장 용서할 수 없는 범죄는 사상의 자유와 관련된 것이다. 민주주의를 내세우는 나라에서 너무나 확실하게 다수의 횡포가 자행된다.

미국의 개혁운동가 웬델 필립스(Wendell Philips)는 50년 전 이렇게 말했다.

“절대적인 민주적 평등이 보장된 우리나라에서는 여론이 전지전능한 것이다. 여론이라는 독재적 권력은 미치지 않는 곳이 없어 숨을 곳도 없다. 여론이나 투표의 결과가 자신의 사회생활이나 사업에 영향을 미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국민은 단 한 명도 없을 것이다. 그리하여 국가는 자기의 신념을 두려움 없이 행사하는 개인들의 합이 아니고 겁쟁이들이 모여 있는 집단이 된다. 다른 어떤 나라 사람들보다 미국인들은 서로를 두려워한다.”

우리의 현실은 웬델 필립스가 직면했던 상황에서 조금도 더 나아지지 못했다.

오늘날도 그때와 마찬가지로 여론은 전능한 독재자이다. 겁쟁이들의 집합인 다수는 자기 영혼과 마음이 얼마나 가난한가를 반영해주는 여론을 그대로 수용한다. 이런 상황에서 루즈벨트(Theodore Roosevelt) 대통령 같은 인간이 전례 없이 부상할 수 있었다. 루즈벨트는 어리석은 대중의 심리를 잘 이용한 가장 사악한 인간이다. 정치가로서 그는 다수의 인간은 이상이나 고결함에는 거의 관심이 없다는 사실을 잘 알았다. 대중들은 그저 겉모습이 그럴듯하면 그만이었다. 대중들은 비가 오는지 눈이 오는지 관심도 없고, 흑인들이 치한들에게 둘러싸여 린치를 당하거나 말거나 신경도 쓰지 않았다. 그저 대중적 흥밋거리에 희희덕거렸다. 정신상태가 더욱 가증스럽게 뒤틀릴수록 대중들은 더욱 기뻐하고 환호했다. 이렇게 이상은 없고 영혼은 천박한 상황에서 루즈벨트는 당대의 인물로 행세했다.

한편 정치적 위상을 높이려고 하는 자들과 세련되고 문화적이며 나름의 능력을 갖춘 자들은 자기 몸을 사려 어린애처럼 침묵을 지키고 있다. 우리 시대가 개인주의 시대라는 주장은 어불성설이다. 우리 시대는 모든 역사의 아픔을 반복하고 있을 뿐이다. 진보와 계몽과 과학과 그리고 종교적 · 정치적 · 경제적 자유를 위한 모든 노력이 대중이 아닌 소수로부터 나온다. 항상 그렇듯 오늘날도 소수가 진정 제대로 이해받지 못하고 쫓기고 투옥되고 고문을 당하고 살해된다.

나자렛의 선동가가 주창한 형제애의 원칙에는 생명과 진리와 정의의 싹이 보존되어 있다. 그러나 이 빛은 소수의 빛일 뿐이다. 그런데 이 원칙을 다수가 장악하는 순간 형제애의 원칙은 고통과 재앙을 퍼뜨리는 피와 불을 부르는 원칙과 예언이 된다. 로마의 전제정치에 대한 공격은 한밤중 어둠 속에서 솟아오르는 태양과 같았다. 후스(Johannes Huss)나 칼뱅(John Calvin), 루터(Martin Luther) 같은 위대한 인물들의 등장이었다. 그러나 로마 가톨릭이라는 괴물에 대항한 그들에게 대중은 그 적 못지않게 잔혹하게 공격했다. 이 이단자, 곧 소수는 이런 행태에 굴복하지 않으려 했고, 그로 인해 화를 당했다. 무한한 정열과 희생과 인내를 시험한 후 인간의 정신은 마침내 종교적 환상에서 자유로워졌다. 소수의 인간은 계속 새로운 정복을 향해 나아가고 다수는 뒤에 처진다. 세월이 흐르면서 진리는 허위의 확산과 함께 왜곡된다.

정치적으로 볼 때 그간 존 볼(John Ball), 와트 타일러(Wat Tyler), 윌리엄 텔(William Tell)과 같은 위인들을 본받은 수많은 개인들이 왕과 독재자들의 권력에 대항해 싸웠지만 인류는 여전히 절대적 노예상태이다. 개인주의적 선구자들이 볼 때 이 세계의 뿌리까지 뒤흔든 엄청난 사건은 프랑스대혁명이다. 흔히 그렇듯 엄청난 사건은 사소한 사건에서 촉발된다. 한 선동가 카미유 데물랭(Camille Desmoulins)의 웅변과 열정은 여리고 성의 나팔소리와 같았다. 그 후 고문과 학대와 공포의 기구와 상징인 바스티유 감옥이 불태워졌다.

모든 시대에서 항상 위대한 이념, 해방의 기치를 든 자는 소수였다. 대중이 기치를 들지 않았다. 대중은 이 무거운 깃발을 옮기지 못한다. 이런 진리는 다른 어떤 곳보다도 러시아에서 확연히 입증되었다. 이미 수많은 사람들이 피에 주린 정권에 의해 목숨을 잃었지만 왕좌에 앉은 괴물은 조금도 동요하지 않았다. 강철 같은 멍에를 뒤집어쓰고 문화적으로 이념적으로 문학적으로, 가장 내밀한 감성까지도 억압당하고 있는 상황에서 어떻게 독재자를 몰아내는 일이 가능하겠는가? 기동성이 떨어지고 게을러터진 다수인 대중, 곧 러시아 농노는 한 세기에 걸친 투쟁과 희생과 말할 수 없는 비참함을 겪고도 여전히 “하얀 손을 가진 사람”(지식인을 뜻한다.-역자 주)이 밧줄을 가져와 우물에 빠진 자신들을 건져줄 것이라고 믿었다.

미국에서의 자유를 위한 투쟁에서도 다수는 장애물이었다. 지금까지도 미국 건국의 아버지들인 제퍼슨(Thomas Jefferson)과 패트릭 헨리(Patrick Henry)와 토마스 페인(Thomas Paine)의 이념을 그 후예들은 부인하고 있는 형편이다. 대중들은 그들 중 누구도 원하지 않았다. 링컨이 숭상했던 위대함과 용기는 당대의 대서사시의 배경인 다수에게 잊혀졌다. 흑인들의 참된 성자들의 모습은 보스턴의 소수의 투사들에게 남아있다. 그들은 로이드 개리슨(Lloyd Garrison), 웬델 필립스, 마가렛 풀러(Margaret Fuller), 시어도어 파커(Theodore Parker)이다. 이들의 위대한 용기와 강인함은 존 브라운에서 그 절정에 달했다. 지칠 줄 모르는 열정과 웅변과 인내로 남부 지주들의 요새를 무너뜨린 것은 이들이었고 링컨과 그 추종자들은 노예제 폐지가 이미 현실이 되었고 모든 사람이 그렇게 인식했을 때 그저 대세를 따랐을 뿐이다.

약 50년 전 별 같은 이념 하나가 이 세상의 사회적 지평 위로 떠올랐다. 이 이념은 너무나 멀리까지 너무나 혁명적으로 모든 사람들을 매료시키면서 전 세계 독재자들의 간담을 서늘하게 했다. 한편 이 이념은 수많은 사람들에게 희망과 기쁨과 즐거움의 상징이었다. 선구자들은 자신들이 가야할 길이 얼마나 험난하지 알고 있었다. 하지만 자부심을 갖고 두려움 없이 전진하기 시작했다. 이제 이 이념은 인기 있는 슬로건이 되었다. 그것은 오늘날 거의 모든 사람의 이념적 지표가 된 사회주의다. 가난한 피해자는 물론 부자도, 범죄자뿐만 아니라 법을 집행하고 유지하는 자들도, 종교적 허위를 자행하던 자는 물론 자유로운 사상가들도, 평범한 아가씨는 물론 첨단 유행을 걷는 아가씨들도 사회주의자가 되었다. 하지만 사회주의자가 되지 말아야 할 이유는 없는가? 이 50년 전의 진리는 이제 거짓이 되었다. 이 사회주의 이념은 젊은이들의 상상력을 마비시키고, 젊은이의 열정과 힘과 혁명적 이상을 앗아갔다. 왜 사회주의를 거부하면 안 되는가? 사회주의는 더 이상 아름다운 이상이 아니다. 다수의 의지에 힘입어 현실적으로 작동하는 체제가 사회주의다. 왜 거부할 이유가 없는가? 사회주의 역시 다른 정치와 마찬가지로 교활하고 용의주도하게 매일같이 대중을 어리석게 만들고 응석받이로 만들고 그들을 속인다. 사회주의는 무수히 찬양되었다. 가난한 다수가, 억압을 받고 상처 입은 자들 대다수가 사회주의를 찬양했다.

사회주의를 찬양하는 장황한 발언을 과거에 들어보지 못한 자가 있는가? 모든 정치가들이 한결같이 읊조리는 사회주의를 모르는 자가 누구인가? 대중들이 피를 흘리고, 도둑을 맞고 착취를 당하고 있다는 사실을 나도 알고 표를 얻기 위해 미끼를 던지는 자도 안다. 하지만 이런 가공할 상황에 처하게 된 것은 그 책임이 한 줌도 안 되는 기생충 같은 작자들에게 있다기보다 대중 자체에 있다. 대중은 그 주인들에게 매달려, 채찍을 감수하며 자신들을 위해 진리를 말하는 자를 “십자가에 매달라!”고 가장 먼저 외쳤다. 그 순간 성스러운 자본주의적 권위와 부패한 제도에 저항하는 목소리를 높이는 사람도 있기는 했을 것이다.

그러나 대부분의 대중들은 기꺼이 군인이 되고, 정치가가 되고, 감옥의 간수가 되고, 교수형 집행자가 되었다. 이들이 없었다면 자본주의의 권위와 사유재산은 과연 얼마나 오래 지속되었을 것인가! 사회주의 선동가들은 결코 쉽게 자본주의의 권위와 사유재산을 없애지 못한다는 사실을 나 못지않게 잘 알고 있다. 그러나 저들은 다수의 미덕을 주장한다. 왜? 사회주의자들의 목적은 권력을 행사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수적 우위 없이 어떻게 권력을 장악할 수 있겠는가? 그렇다. 권력과 권위와 강제력은 대중의 힘에 의존한다. 하지만 절대 거기에는 자유, 개인의 자유로운 발전, 자유로운 사회의 탄생은 없다.

내가 억압받은 자, 기득권이 없는 자를 동정하지 않기 때문에, 또 그들이 당하는 수치와 공포와 분노를 모르기 때문에 다수를 영원한 창조적 세력이라고 인정하지 않고 비난하는 것은 아니다. 절대 그건 아니다. 하지만 대중은 절대 정의나 평등을 대변하지 못한다는 사실을 나는 아주 잘 안다. 다수는 인간의 목소리를 억압하고, 인간의 정신을 짓누르고, 인간의 몸을 구속한다. 다수는 항상 삶을 획일화하고 잿빛으로 만들고 사막과 같이 단조롭게 만든다. 대중은 항상 개인성을 말살하고 자유롭게 표출되는 독창성의 발휘를 막는다. 따라서 나는 다음과 같은 에머슨의 주장을 믿는다.

“대중의 요구와 영향력은 조잡하고 서투르고 유해하다. 대중에게는 칭찬 대신 교육이 필요하다. 나는 대중의 그 어떤 점에도 동의하지 않는다. 대중을 훈련시키고, 분열시키고, 쪼개어 각각의 개인들로 만들어야 한다. 대중! 대중이 재앙이다. 나는 어떤 대중도 전혀 원하지 않으며 오직 정직한 남자와 사랑스럽고 세련된 여성만을 원한다.”

달리 말해 사회적 · 경제적 복지가 살아있고 활기를 띠게 하려면 오직 비타협적이고 지적인 소수의 열정과 용기와 결심이 있어야 한다. 대중을 통해 이것이 현실화되지는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