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리코 말라테스타

아나키즘에서의 개인주의

1897

      아나키즘에서의 개인주의

      개인주의에 대한 첨언

아나키즘에서의 개인주의


우리가 이 글을 쓰는 것은 불쾌한 활동에 대한 정당화 수단으로 스스로를 개인주의자라고 자칭하는 자나 경찰과 공중질서 · 부르주아지와 도덕 · 정의의 관계와 유사한 정도의 관계를 아나키즘과 맺고 있는 자들에 대해 이야기하려고 하는 것은 아니다.

또한 이 글은 “수단적으로 개인주의적인” 동지들, 즉, 오늘날의 투쟁에서 개인적인 행동을 선호하거나 이에 전적으로 의존하는 동지들에 대해 이야기하려는 것도 아니다. 이 동지들은 개인적 행동이 더 효과적이라고 생각하고, 어떠한 조직도, 집단적 합의도 개인의 자유를 제약한다고 보기에 이 방식을 택한다. 이 동지들의 전술적, 원칙적 문제에 대해서는 조직에 대한 문제를 다룰 때 이야기하도록 하겠다.

이 글에서 우리는 철학으로서, 인간 사회의 본질에 대한 총체적 이해로서, 개인과 그룹의 관계로서 개인주의를 다루고자 한다. 이러한 개인주의는 우리 동지들 중 일부가 (때로는 스스로 인지하지도 못한 채) 보여주고 있다.

개인이 완전한 물리적, 도덕적, 지적 발전이 가능하다고 믿고, 개인의 가장 큰 행복을 성취하는데 있어 사회가 장애물이 아니라 도움이라 믿는다는 의미에서 스스로를 개인주의자라 부르는 사람들도 있다. 하지만 이러한 측면에서 우리를 모두 개인주의자라 부르는 데는 아무런 문제가 없다. 우리가 스스로를 그렇게 자칭하지 않는 이유는, 우리는 다른 중요한 것들을 더 많이 바라보고 있기에 개인주의자라고 자칭하는 것은 혼란일 뿐이기 때문이다. 앞서 말한 측면에서 우리는 아나키스트나 사회주의자임과 동시에 개인주의자이기도 하다. 그리고 다른 모든 학파나 당도 마찬가지다. 개인만이 유일하게 지각과 의식이 있는 존재이며, 우리가 즐거움이나 고통, 자유나 예속, 권리, 의무, 정의 등을 이야기할 때, 우리는 살아있는 개인에 대해서만 떠올리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때로 개인주의는 단지 단순히 언어의 문제이며 전혀 중요한 것이 아니다. 하지만 간혹 개인주의를 받아들이는 이와 그것을 회피하는 사람 사이에 실질적이고 중대한 차이가 발생하곤 한다. 이 두 집단의 궁극적인 목적은 같을지라도 실질적인 결과물은 크게 다를 수 있기 때문이다. 이 중 하나를 흘겨보며 반동이라고 취급할 이유는 없다. 아나키스트들의 “철학”에 빠지려 하던 그 순간부터 이처럼 혼란스러운 개념과 언어들이 튀어나와 앞뒤도, 우리가 동의하는지 아닌지도 알 수 없게 만들어버렸기 때문이다. 하지만 우리가 스스로에게 잘 설명하는 것은 긴급한 문제라 하겠다. 이로써 우리가 특정 동지들의 활동 전체를 사로잡아 실질적 선전 작업에 해가 되게 하는 추상적 관념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을 것이다.

개인주의적 아나키스트들이 말하고 쓴 모든 것을 엄밀히 검토한 후, 우리는 그들의 논리에 두 가지 함축적이고 상호모순적인 관념이 공존한다는 것을 발견했다. 이는 확연히 드러나지는 않지만, 심지어 스스로를 개인주의자라고 부르지 않는 아나키스트들의 사상에서도 서로 다른 모양새로 계속 튀어나온다.

첫 번째로, 이들은 사회가 스스로 온전하며 스스로 자족할 수 있어서 스스로의 이익을 제외하고는 함께할 이유가 없고, 사회가 제공하는 이익이 사회가 희생을 요구하는 개인적 자유보다 작으면 언제든 떠날 수 있는 자치적 개인의 총합이라고 바라본다. 간단히 말해서 이들은 인간 사회를 모든 주주들이 자유롭게 가입하거나 탈퇴할 수 있는 주식회사처럼 바라본다. 오늘날 소수 개인들이 모든 부를 독점하고 있는 상황에서 그들은 나머지가 사회와 사회 속 승자들에 의해 규정된 규칙을 따르도록 강제된다고 말한다. 하지만 만약 토지와 노동의 수단을 모두가 자유롭게 사용할 수 있다면, 만약 인민들이 특정 계급의 조직된 힘이 강제하는 예속으로 떠밀리지 않는다면, 이익을 주지 않는 사회에 누구도 남지 않을 것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사람의 물질적 필요가 충족되면, 그는 자유에 대한 필요를 최우선으로 여길 것이고, 개인의 의지를 조금이라도 희생하게끔 하는 모든 형태의 공존은 거부될 것이다. 이들은 ‘네가 원하는 것을 하라’는 말을 가장 협소하고 절대적인 행동의 정언명령으로 받아들인다.

그리고 개인주의자들은 절대적이고 무제한적인 자유를 가진 자치적 개인의 존재를 상정하면서, 이해관계의 충돌이나 다양한 열망이 등장하면 갈등이 발생한다고 말한다. 이 갈등에서 누군가는 승리하고, 누군가는 패배할 것이며, 이렇게 우리는 사라졌어야 할 압제와 착취의 세계로 돌아오게 된다.

때문에 누구보다도 모두의 복리를 갈망하는 개인주의적 아나키스트들은 모두의 영구한 복리와 개인의 불가침의 자유라는 두 원칙 사이의 논리적 비약을 메우기 위한 방법이 필요했다. 그리고 그들은 다른 원칙을 들고 나온다. 자연법에 따른 조화가 그것이다.

네가 원하는 것을 하라. 하지만 그들은 실제로는 불가변적이고 자연적으로, 개인이 오직 다른 이들의 동등한 자유를 침해하지 않는 만큼만 원하는 것을 할 것이라고 본다.

한 친구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우리의 자유는, 인간의 모든 시설 위에 펼쳐지는 우리의 자유는, 다른 이의 자유를 결코 침해하지 않을 것이다. 자신만의 궤도를 따라 공전하는 별들과 같이, 개인은 스스로의 자유를 추구함에 있어 다른 이의 자유와 겹치지도, 이를 통한 혼란이 발생하지도 않을 것이다.”라고 말이다. 그리고 다른 이들은 생리학을 천문학으로 대체하여, “식물과 동물에서 세포들이 공감적 응집”을 이룬다고 이야기한다. 그리고 다른 이들은 수정의 결정을 이야기한다. 이렇게 이들은 자연과학 전체를 통틀어 이야기한다. 그리고 이들 중 누구도, 기형의 수정이, 생존투쟁이, 우주적 재앙이, 질병이, 유산이, 재앙과 상처의 집합이 존재한다는 것을 기억하려하지 않는다.

부조화와 이해관계 충돌은 현존 기구의 결과물이다. 국가를 파괴하라. 거래와 금융과 화폐주조의 완전한 자유를 존중하라. 토지의 소유권이 경작의무에 귀속되게 하라. 아니면 자급자족적 농업을 하라. 우리에게 자유로운, 완전히 자유로운 경쟁을 허하라(터커 학파의 개인주의적 아나키스트들은 이렇게 주장한다). 그러면 세상에 평화가 찾아올 것이다. 생산성과 입지에 따른 가치차이인 지대의 차이는 자연스럽게 사라질 것이고, 경쟁은 자연의 축복을 모두가 가장 현명한 방식으로 영위할 수 있도록 할 것이다.[1]

코뮌주의 학파의 개인주의적 아나키스트들(형용모순 같아 보이지만 실제로 이런 것이 존재한다)은 국가와 사적 소유를 파괴하면 모든 것은 잘 될 것이라 말한다. 모든 사람은 자연스럽게 합의할 것이다. 노동은 생리학적으로 필요하기에 모두는 노동할 것이다. 생산은 언제나 자연스럽게 소비자 수요를 충족할 것이다. 모든 사람이 즐거운 일을 한다면 부지불식간에, 의도하지 않더라도, 모든 개인은 자신이 필요한 정확히 그 일을 할 것이기에 규칙도 합의도 필요하지 않을 것이다.

결국, 가장 아래에서부터 살펴보면, 개인주의적 아나키즘은 단순히 조화주의와 섭리주의의 일종에 불과하다.

우리가 보기에, 개인주의가 함축하고 있는 원칙들은 완전히 틀렸다.

개별적 인간은 사회로부터 독립적이지 않고, 오히려 사회의 산물이다. 하지만 사회가 없다면 개인은 결코 야만적 동물성에서 벗어나 인간이 되지 못하였을 것이고, 사회 밖에서 인간은 빠르게 원시적 동물상태로 돌아갈 뿐이다.

입센이 쓴 『인민의 적An Enemy of the People』의 주인공인 스토크만 박사가 대중이 그를 이해하거나 따르지 않는 데에 짜증을 내며 “가장 강한 사람은 가장 고고히 살아간다”고 말할 때, 그는 완전한 오류를 범하고 있다. 그는 아나키스트라고 받아들여지는데도 말이다. 만약 스토크만이 타인보다 더 지식이 있고, 타인보다 생활에 더 여력이 있다면, 그것은 스토크만이 사회의 이득을 취하여 현재와 과거의 인간들과 지적으로 소통할 수 있는 삶을 살았기 때문이고, 오히려 사회에 더 종속되는 것인데 말이다.

사회 안에서 인간은 자유로울 수도, 예속될 수도 있다. 행복할 수도, 불행할 수도 있다. 하지만 이 모든 것을 떠나 인간은 사회에 남아야 한다. 그것이 인간을 인간으로 만드는 맥락이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인간은 관념적이고 불가능한 자율성을 갈망하는 대신, 그 자유와 행복의 근거를 동료 인간들과의 합의에서 찾아야 하고, 타인과 함께 자신에게 알맞지 않은 사회적 기구를 조정하여야 한다.

마찬가지로, 인간의 의식적이고 분명한 행동 없이도 자연스럽게 확립되는 조화를 상정하는 자연법에 대한 믿음은 허황되고 사실에 반한다.

국가와 사유재산이 없어진다고 하더라도, 조화는 자연스럽게 오지 않는다. 자연이 인간의 축복과 불운에 매달린다 해도 결국 그 축복과 불운을 만드는 것은 인간이니 말이다.

하지만 만약 우리가 이해했다면, 우리는 이를 짧게 이야기해야 한다. 그리고 우리의 독자들이 우리 문건이 너무 길다고 불평하는 소리가 들리는 것 같다.

그렇다면 다음 이 시간에.



개인주의에 대한 첨언


지난 호에서 우리는 조화주의(자연법칙이 모든 것을 자동으로 최선으로 만들 것이라는 신념)가 개인주의자들의 사상의 기저이며, 이것이 그들의 따뜻하고 감상적인 모두의 행복에 대한 추구를, 개인이 절대적 자유를 누리며 타인과 타협할 필요도 없는 사회라는 이상과 어우를 수 있는 유일한 길이었음을 밝혔다.

진실을 말하자면 조화주의적 요소는, 아니, 낙관적 숙명론의 요소는 모든 아나키즘과 현대 사회주의의 각 분파들에서도 발견할 수 있다. 그 이유는 다양하며 서로 부딪힌다. 이는 인간의 필요성에 의해 살아남은 종교적 관념의 잔재이기도 하다. 이는 부르주아 특권을 정당화하기 위해 이익의 조화를 말한 경제학자의 영향이기도 하다. 이는 자연과학의 인기에 기인하기도 한다. 또한 이는 문제를 예쁘고 단순하게 만들어 선전에 사용하고자 하는 욕망의 산물이기도 하다. 또한 어려움을 마주하고 해결하는 것보다 그것을 무시하는 것이 더 편하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리고 모두의 실수가 논리적으로 어떻게 귀결하는지 잘 보여준다는 점에서, 개인주의자들에게는 참으로 감사할 따름이다.

하지만 거의 모든 사람이 오류를 범했다는 사실이 그 오류를 정당화하지는 못한다.

이 소위 자연에서 발견할 수 있는 조화라는 것은 오직 다음과 같은 것을 강조한다. 무언가가 존재한다는 것 그 자체는 그 존재의 필요충분조건이 만족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하지만 자연에는 목적이 없다. 아니, 최소한 인간적인 목적은 없다. 자연은 인간의 죽음, 상처, 고통에 대해 신경 쓰지 않는다. 그리고 이 죽음, 상처, 고통 역시 자연적 “조화”의 구성요소다. 고양이가 쥐를 먹는 것은 자연스러운 현상이고, 우주적 질서와 완전히 조화롭다. 하지만 만약 우리가 쥐에게 물어본다면, 쥐가 그 질서를 좋아하겠느냐는 말이다. 모든 생명체는 먹어야 하기에, 생명의 수와 힘은 각 종에 따른 음식의 양에 따라 제한된다. 하지만 자연은 이 한계를 재앙으로, 기아로, 퇴화로 집행한다. 무수히 많은 예시를 들 수도 있다.

자연이 예술보다 우월하다 주장하기 위해, 샤를 푸리에[2]는 이제는 고전이 된 해괴한 비유를 들고 나온다. 서로 다른 색의 구슬로 꽃병을 채우고, 그 꽃병을 흔들고, 책상 위에 부으면, 그 어떤 화가가 만들 수 있는 것보다 아름다운 색의 조화를 볼 수 있을 거라는 말이다. 물론 그럴 수는 있지만…. 이렇게 해서 티치아노의 《성모승천》을 그릴 수는 없지 않은가. 우리는 아름다움을 얻을 수는 있지만 우리가 원하는 것을 얻지는 못한다. 그리고 이것이 핵심이다.

자연이 섭리로서의 제공자로서 존재하는 신비로운 법칙이 모든 것을 인간의 입맛에 맞게 제공할 것이라는 것은 잠시만 자세히 들여다봐도 우스운, 모든 근거와 모순되는 것이다. 숙명론은 그것이 우리를 추동하는 동기들과 모순되더라도, 어쨌든 납득할 수 있다. 하지만 낙관적 숙명론은, 지적인 운명이 인간의 복리를 신경 쓴다는 것은 결코 납득할 수 없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조화의 법칙이 있다면 왜 그 법칙은 지난 수세기를 미적거리다가, 우리가 아나키를 주장하는 순간 효력을 발휘하는 것인가?

국가와 사적소유는 오늘날 사회적 적대감의 최대 요인임이 분명하다. 하지만 국가와 사적소유는 자연법칙이 기적적으로 작용하여 태어난 것이고, 기존의 적대감에 의해 영향을 받았다. 만약 국가와 사적 소유가 파괴된다 하더라도 인민이 이 둘을 만들어낸 갈등을 조정할 다른 방향을 정착시키지 않는다면, 다시금 살아날 것이다.

이해관계와 열망의 부딪힘은 현존하며 앞으로도 언제나 존재할 것이다. 만약 현존하는 갈등들이 충분히 제거되고 자율적 합의가 등장한다 하더라도 다른 갈등이 튀어나와 싹틀 것이다. 누군가에게 새로운 욕망이 생겼을 때, 그 동료들의 생각이 즉각 변화하여 그의 욕망을 충족시킬 수 있게 한다는 것을 상상이나 할 수 있는가? 모든 새로운 생각이 다른 모두에게 환영받을 수 있다고 믿을 수 있는가? 모든 새로운 생각이 옳을 것인가? 더 이상 누구도 실수를 하지 않는다는 것인가? 아니면 자연의 법칙이라는 것이 너무나도 다양성이 부족해서 각 개인 간의 차이를 억누르고, 모든 개인이 수학적 정체성을 자발적으로 만들어낼 수 있도록 한다는 것인가? 만약 그렇다면, 다시 말하겠지만, 이러한 끔찍한 단일성은 오직 인간적 구조에만 속하는 것이다. 자연은 가만히 내버려두면 다양성을 더 많이 만들어내기 때문이다.

공허한 장광설은 그만두자. “모든 개인의 자유에는 제약이 없지만, 타인의 자유와 충돌하지도 않는다”고 말할 때, 이것은 숭고하고 사회진화에 있어 가장 완벽할 이상에 대한 확인이다. 하지만 이상이 아닌 긍정적이고 실질적인 현상에 대한 이야기라면, 혹은 이러한 이상이 단지 현존 기구를 파괴하는 것으로 이루어진다고 말하는 것이라면, 이는 단순히 추상적 관념으로 현실을 부정하는 오류가 될 것이다. 우리가 프롤레타리아로서, 피통치대중으로서 감내해야 하는 억압에 대한 이야기를 잠시 미루어두자. 그렇다면 당신이 하고 싶은 것이 많겠지만, 그것이 타인을 불쾌하고 불편하게 한다면 하지 말아 달라. 우리는 자발적으로 공동체를 위한 희생을 포기하면서 즐거움을 느낄 수 있다. 하지만 우리는 우리가 무엇이건 할 수 있도록 해주는 타인들이 서로 다른 취향과 필요가 만족될 때 더 즐거울 것이다. 우리의 자유는 언제나 타인의 자유에 의해 제약된다.

그리고 우리는 “취향과 사치”에 대해서만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다. 기초적 필요를 충족하는 것에서조차 자연스러운 갈등이 등장하게 된다. 그리고 이를 모두의 선善이라는 관점에서 해결하는 것은 인간의 과제다. 누군가 다른 사람에게서 빼앗아야만 얻을 수 있는 음식을 갈망할 수도 있고, 다른 누군가가 이미 차지하고 있는 자리를 채워야 할 필요가 있을 수도 있다. 우리는 모든 종류의 식량을, 모두가 만족할 수 있을 만큼 생산할 수 있다. 하지만 우선 생산을 해야 한다.

이것이 각자의 환경에 의해 각자가 원하는 대로 생산하면 자연스럽고 합의 없이 이루어질 것이라는 것은 끔찍한 실망만을 낳을 것이다. 실질적으로 이러한 방식은 집행을 방해하고, 타인의 결정에 의존해야하는 상태로 스스로를 몰아가는 것을 의미할 뿐이다.

이는 노동에 있어서도 마찬가지다. 그들은 노동이 건강에 유익하고, 개인의 즐거움을 위한 유기적 필요가 있기에 모두 노동할 것이라고 말한다. 이는 사실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사실이 아닌 것은, 운동의 필요에 따른 생산량이 자연스럽게 필요 생산량에 맞을 것이고, 인간이 자발적으로 생산수단이 결정하는 조건에 적응할 것이라는 전제다. 만약 모든 사람이 하고 싶은 일만을 하고, 해야 하는 일을 하지 않더라도 모든 일이 잘 돌아간다고 한다면 필수적인 잡무들은 전혀 이루어지지 않을 것이다. 누가 잡무를 하고 싶어 하겠는가. 누군가는 합의를 통해 이 일을 해야만 한다.

토지가 거주민들을 풍족하게 먹이고, 노동이 즐거움이나 최소의 노력으로 조직될 수 있다는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조직이 필요하다. 모두가 임의로, 스스로 원할 때, 원하는 방식으로, 타인이 하는 것에 신경 쓰지 않고, 협력하거나 집단적 작업에 포괄되는 것 없이 노동한다 하더라도, 모든 일의 끝에서 우리는 수많은 낱알과 더 많은 기계와 신발과 아티초크가 생산되는 것을 바라보리라…. 이것이 신의 손에 자신을 맡기는 것과 다른 것이 무엇인가….

결론을 짓자. 인간은 사회 안에서 살아야 한다. 그리고 사회 안에서 살기 위해서는 타인과의 합의가, 협력이 필요하다. 이러한 협력은 자발적으로, 자유로운 협약을 통해 이루어져 모두의 행복을 위해 사용될 수도 있을 것이다. 아니면 힘으로, 소수에 의한 강압으로 이루어져 이를 강요한 자들의 사적 이익을 위한 착취가 될 수도 있을 것이다. 모두의 행복을 위한 자유롭고 의지적인 협동이 아나키다. 특정 계급의 이득을 위한 강요된 협력은 권위주의 체제다.

[1] 미국의 아나키스트 벤자민 터커(1843-1939)는 「자유Liberty」라는 잡지에 그의 사상을 담았다. 터커는 「자유」지를 1881년부터 1908년까지 편집했고, 1893년에는 『책 대신에Instead of a Book』이라는 책을 출판했다.

[2] 프랑스의 사회주의자 샤를 푸리에(1772-1837)는 인간 열정의 무제한적 해방으로부터 시작될“우주적 조화”에 관한 체계적 교리를 만들기 위해 노력했다.


Complete Works of Errico Malatesta, Volume III, ed. Davide Turca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