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리코 말라테스타: 아나키스트 조직이라는 상(1927)

최근(잘 알려져 있듯이 오늘날 이탈리아에서는 비파시스트 언론을 자유롭게 향유할 수 없다.) 『자유의지주의적 코뮌주의자의 조직적 강령』[1]이라는 프랑스 소책자를 읽게 되었다.

이 아나키스트 조직에 관한 상은 해외 러시아 아나키스트 그룹의 이름으로 출판되었으며, 러시아 동지들에게 향하는 글로 보인다. 하지만 이 책자는 모든 아나키스트들에게 동등하게 흥미로운 내용을 담고 있다. 그리고 이 책자의 저자들이 책이 쓰인 언어의 나라(프랑스)뿐 아니라 전 세계의 동지들의 지지를 구하고 있음도 분명하다. 이 중 어떠한 경우라 하더라도, 러시아 아나키스트들뿐 아니라 모든 국가의 아나키스트들이 『강령』이 내어놓은 제안이 아나키스트의 원칙을 지키고 있는지, 그것의 적용이 아나키즘의 대의에 진실로 복무하는 것인지를 확인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해당 동지들의 목적은 훌륭하다. 그들은 지금까지 아나키스트들이 그 원칙의 이론적 · 실천적 가치와 그 숫자, 그 용기와 자기희생의 정신에 비해 합당하지 않게 정치적 · 사회적 사건에 대한 영향력에서 배제되어 왔음을, 그리고 이 상대적 실패의 주된 요인이 큰 규모의 진지하고 적극적인 조직이 부재한 것이라는 진단을 적확하게 내린다.

그리고 여기까지의 논거에 나는 다분히 동의한다.

협동과 연대를 실천할 수 있는 유일한 수단으로서의 조직은 본질적으로 사회를 유지하는데 필요하다. 이것은 총체적 인간사회가 되었건, 어떠한 인민 집단이 되었건, 어디에서나 성립하는 회피할 수 없는 사실이다.

인간은 홀로 살아갈 수 없기에, 아니, 인간은 혼자서는 인간이 될 수 없으며, 사회의 일부가 되어 동료들과 협동하지 않으면 홀로 도덕적 · 물질적 필요를 만족할 수 없기에, 이해관계와 감정을 공유하는 이들을 자유롭게 조직할 수단이 없거나, 이에 대하여 충분히 발전적인 인지를 하지 못한다면 결국 다른 사람들의 조직에 굴복할 수밖에 없다. 그리고 이 다른 사람들의 조직은 일반적으로 지배계급이나 자기 편의를 위해 타인의 노동을 착취하는 자에 의해 구성된다. 오랜 세월 이어져온 소수 특권 계급에 의한 대중의 압제는 다수대중이 다른 생산노동자들과 함께 조직할 것에, 그들을 착취하는 자들에 맞선 자기 방어의 권리와 그 이득을 누릴 것에 동의하지 못한 것의 결과물이었다.

아나키즘은 이러한 상태에 대응하여 떠올랐다. 아나키즘의 기본 원칙은 상호간 권위가 없는 구성원의 자유로운 합의에 의해 운영되는 자유로운 조직이다. 그리고 이것은 누구도 자신의 의지를 타인에게 강요할 수 없음을 뜻한다. 그렇기에 아나키스트들이 그 개인적 · 정치적 생활을 그들이 전체 인간 사회가 기초하여야 한다고 믿는 그 원칙 위에 세워야 함은 자명하다.

몇몇 논객들에 따르면, 아나키스트들은 모든 형태의 조직을 거부하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정확하게는 이 주제에 관한 다수의, 혹은 너무 많은 논의들은 조직이라는 원칙 그 자체가 아니라 그 수단에 대하여 이야기한다. 때문에 조직에 가장 격렬히 반대하는 동지들이 실제로 원하는 것을 하고자 할 때 필요한 것은 그들 역시 우리와 같은 조직을, 때로는 더 효과적으로 만드는 것뿐이다. 조직의 문제는, 다시 말하지만 조직 그 자체가 아니라 수단의 문제다.

그렇기에 나는 우리 러시아 동지들이 취한 입장에 오직 공감할 수밖에 없다. 나는 아나키스트들이 지금껏 만들어온 것보다 더 일반적이고, 더 단결되고, 더 공고한 조직이야말로 우리의 힘과 승리의 핵심 요인이 될 것이라고, 우리 이상에 대한 지지를 확보하는 강력한 수단이 될 것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는다. 그 조직이 모든 오해와 무지와 다수로부터의 적대감 속에서 투쟁하는 우리들 운동에 필연적으로 내재한 오류와 약점을 극복하지 못한다 해도 말이다.

나는 아나키스트들이 다른 아나키스트들과 타협하고, 가능한 많이, 가능한 훌륭하게 조직하여 변혁과 해방을 위한 인민대중의 투쟁의 방향에 영향을 미치는 것이 필수적이고, 무엇보다 시급하다고 믿는다.

오늘날 사회 변혁의 핵심 세력은 노동운동(노동조합운동)이며, 그 방향성은 주로 사건의 과정과 다음 혁명의 목표에 의존한다. 스스로의 이익을 방어하기 위해 세운 조직을 통해 노동자들은 그들이 감내하는 압제와 그들을 사장들로부터 갈라놓는 반목을 인지할 수 있고, 그 결과로 더 나은 삶을 희망하고, 집단적 투쟁과 연대에 익숙해지고, 자본주의와 국가 체제 안에서 가능한 개선들을 쟁취할 수 있다. 그리고 그러한 과정에서 타협이 불가능한 갈등이 발발하면 이에 혁명이나 반동이 따라오게 된다. 아나키스트들은 노동조합운동의 유용성과 중요성을 인지하고, 노동조합운동의 발전을 지지하며, 이를 그 행동의 지렛대로 삼아야 하고, 이를 위하여 다른 세력들과의 협력을 통하여 가능한 모든 것을 행하여야 한다. 노동조합운동은 사회혁명으로의 길을 열고, 계급 체계의 종말을, 완전한 자유를, 평등을, 평화를, 연대를 가져올 것이다.

하지만 많은 사람들의 기대와는 달리, 노동운동이 스스로의 의지로, 본질적으로, 곧바로 사회혁명으로 이어질 것이라 믿는 것은 끔찍한 오류가 될 것이다. 오히려 물질적이고 즉각적인 이해관계에 근거한 모든 운동은(대규모 노동운동 역시 이에 포함되는데), 자극이 없이는, 추동력이 없이는, 이론가들의 노력이 없이는, 필연적으로 상황에 적응하고 보수화되며 변혁을 두려워하고, 결국 새로운 특권계급이 되며, 우리가 파괴하고자 하는 체제를 공고히 하는 데에 기여하게 되곤 한다.

그렇기 때문에 아나키스트 조직이 노동조합의 안팎에서 아나키즘을 실현하기 위해 투쟁하고, 타락과 반동의 세포들을 죽이기 위해 노력해야만 하는 필요가 존재한다.

하지만 그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아나키스트 조직들은 그 구성과 집행에 있어 아나키즘의 원칙에 걸맞게 유지되어야 한다. 이는 그 조직들이 개인의 자유로운 행동을 당면한 필요성과, 협력의 즐거움과, 집행 가능한 환경을 위한 교육의 수단과, 우리가 원하는 미래를 위한 정신적 물질적 준비와 어떻게 엮어낼지 알아야 한다.

『강령』이 그리는 상이 이에 부합하는가?

내가 보기에는 그렇지 않다. 『강령』은 아나키스트들에게 조직을 향한 더 큰 열망을 불러일으키지 못한다. 오히려 『강령』은 ‘조직하다’라는 단어가 ‘지도자에게 굴복하고 권위주의자가 되어 중앙 집중을 통해 자주성을 박멸한다’는 말과 동의어라 믿는 동지들의 편견을 강화하기 위해 의도적으로 만들어진 것으로 보일 정도다. 그리고 무엇보다 『강령』은 우리가 그토록 부인해온, 사실이 아니라고 증명하는, 하지만 사람들이 조직가로 묘사되는 아나키스트들의 특성이라 주장하는 모든 요소들을 포괄하고 있다.

『강령』을 확인해보자.

먼저, 나는 모든 아나키스트들이 하나의 ‘총동맹’, 즉 단일하고 적극적인 혁명조직체에 모일 수 있다는 것이 오류이며 실현불가능하다고 바라본다.

우리 아나키스트들은 모두가 하나의 당(여기서 ‘당’은 한 편에 속해있는 사람을 말한다)에 속해있다고 말할 수 있다. 이는 우리가 총체적으로는 같은 열망을 공유하고 있으며, 어떠한 방식으로건 같은 상대와 적에 대하여, 같은 목표를 바라보며 투쟁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것은 우리가 하나의 특정한 조직으로 모이는 것이 가능하다거나 옳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서로의 투쟁의 조건과 환경은 너무나도 다르다. 선택할 수 있는 행동의 방식은 너무 다양하다. 그리고 총동맹을 만들기에는 각자의 기질 차이와 개인적 불합치성이 너무나 크다. 총동맹이 개인의 활동에 대한 장애물이자 내적 갈등의 원인이 아닌, 협력의 수단이자 모두의 노력을 검토하는 수단이 되기에는 이러한 차이들이 너무 크다.

이를테면 선전과 소요를 위한 공개적 조직을 만드는 것과 소속국가의 정치적 조건에 의하여 그 계획과 방법론과 구성원을 숨길 필요가 도출되어 구성된 비밀결사를 만드는 방식과 그 성원의 구성이 같을 수 있는가? 선전과 체현을 통한 개인의 점진적 변화를 통해 사회 변혁을 만들고자하는 이들이 폭력적으로 유지되고 있는 현상을 폭력적으로 파괴하고, 압제자들의 폭력에 맞서 자유로운 선전과 이상의 실질적 실현을 만들고자 하는 혁명가들의 방식을 채택할 수 있겠는가? 그리고 특정한 이유로 서로 잘 지내지 못하고, 서로를 존중하지 못하며, 아나키즘에 있어 동등하게 훌륭하고 유용한 투사도 아닌 이들을 한데 모을 수 있겠는가?

또한 『강령』의 저자들조차 아나키즘의 서로 다른 경향의 대표자들을 한 데 모으는 것이 조직의 건설에 있어 ‘서투른’ 방법이라 선포하고 있다. 그들은 이러한 조직이 ‘다층위의 이론적이고 실천적인 요인들을 포함하는 이러한 형태의 조직은 단지 아나키스트 운동의 질문에 대해 서로 다른 답을 가진 개인들을 기계적으로 모아놓는 것에 지나지 않’으며, ‘이 모임은 현실을 마주하는 순간 필연적으로 다시 분해될 뿐’이라 이야기한다.

여기까지는 좋다. 하지만 그렇다면, 만약 『강령』의 저자들이 다른 경향의 존재에 대해 인지한다면, 그들은 그 다른 경향의 아나키스트들이 자신의 방법으로 조직하고, 그들이 최선이라 여기는 방향으로 아나키를 위해 활동할 권리가 있음을 인정해야 할 것이다. 아니면 『강령』의 저자들은 스스로가 『강령』을 따르지 않는 이들을 아나키즘으로부터 추방하거나 파문할 권리가 있다고 여기는 것인가? 물론 『강령』의 저자들은 그들이 자유의지주의 운동의 모든 건강한 요소들을 ‘하나의 조직에 모아내’고 싶어 한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이렇게 하면 그 건강한 요소들이 건강하게 판단할 것이라 말한다. 하지만 건강하지 않은 요소들에 대해서는 어떻게 할 것인가?

물론 스스로를 아나키스트라 묘사하는 이들 중에는, 모든 인간 집단 안에서 그러하듯이, 서로 다른 가치를 가진 요소들이 있다. 더 끔찍한 것은, 아나키즘의 이름으로 아나키즘과 거의 무관한 개념을 전파하는 이들도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 문제를 어떻게 회피할 수 있는가? 아나키즘의 진리는 한 개인이나 위원회에게 독점될 수도 없고, 그래서도 안 된다. 또한 그 진리는 실질적이건 허구이건 간에 다수의 결정에 따라서도 안 된다. 결국 모든 이가 광범위한 비판의 자유를 집행하고, 우리 각각이 스스로의 이상에 따라, 스스로와 그 동지들을 위하여 선택하는 것만이 필요하고, 그것으로 충분하다. 결국에는 사실이 누가 옳았는가를 결정해줄 것이다.

그렇기에 모든 아나키스트들을 단일한 조직에 모으겠다는 생각은 내려놓자. 그리고 러시아 아나키스트들이 제안하는 것처럼 총동맹을 그 실질적 상으로, 즉, 아나키스트의 특정 분파의 동맹으로 바라보자. 그리고 그들이 제안하는 조직적 방법론이 아나키스트적 방법론과 원칙에 부합하는지, 그리고 이것이 아나키즘의 승리를 가져올 수 있을지 판단해보자.

다시 한 번, 나는 『강령』이 그러할 수 없다고 생각한다.

나는 러시아 동지들의 제안이 가지고 있는 진정성을 의심하지 않는다. 이들은 아나키즘적 코뮌주의를 촉발시키고자 하며, 이를 가능한 빠르게 할 방법을 찾고 있다. 하지만 무언가의 실현을 위해서는 그것을 원하는 것 뿐 아니라 적합한 수단을 채용해야 한다. 목표한 장소에 도착하기 위해서는 올바른 길을 따라가야지, 그렇지 않으면 이상한 곳에 도착하고 만다. 『강령』이 말하는 조직은 다분히 권위주의적이기에 그들이 원하는 아나키즘적 코뮌주의의 승리를 가져다줄 수 없고, 오직 아나키즘적 영혼을 속이고, 그 의도에 반하는 결과를 낳을 뿐이다.

정확하게는, 그들의 총동맹은 이데올로기적으로 정치적 · 기술적 작업을 지시하는 서기들을 가진 조직들로 구성되어 있다. 그리고 그 구성 조직들의 활동을 조율하기 위해 총동맹 집행위원회가 있어 동맹의 결정을 책임지고 ‘동맹의 이론적 입장과 총체적 전술에 따라, 각개 조직에 이론적, 조직적 지침을 주’는 것이다.

이것이 아나키즘적인가? 내가 보기에 이것은 정부이자 교회다. 물론, 경찰이나 총검은 없고, 지도된 이데올로기의 신실한 양떼도 없을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이것이 무능하고 불가능한 정부이자, 이단과 분열의 요람인 교회임을 의미할 뿐이다. 〈총동맹〉의 본질은, 그들의 경향은 여전히 권위주의적이며, 반反아나키스트적이다.

이것이 사실이 아닌지 보라.

‘아나키스트 총운동의 집행기관으로서 아나키스트 동맹은 무책임한 개인주의적 전술을 공고하게 반대하고, 집단책임의 원칙으로 대오를 정비해야 한다. 모든 구성원의 정치적이고 혁명적인 활동에 대해서는 동맹 전체가 책임져야 한다. 그리고 그렇기에, 모든 구성원은 동맹의 정치적이고 혁명적인 행동에 대해 책임져야 한다.’

그리고 이 개인의 독립성과 자주성과 행동의 자유에 대한 완전한 부정 뒤에, 마침내 그들이 아나키스트임을 떠올리고는 그들이 연방주의자이자 중앙화에 반대한다고 부르짖는다. ‘(중앙화의) 자연스럽고 불가피한 결과는 사회생활과 조직의 생활을 예속시키고 기계화시키는 것이다.’

하지만 만약 총동맹이 각 구성원의 행동에 책임이 있다면, 어떻게 다양한 모임의 개별 구성원들이 스스로 최선이라 믿는 일반 강령을 적용할 수 있는가? 막을 방도가 없는 행동에 대한 책임을 어떻게 질 수 있는가? 그렇기에 총동맹과 그 집행위원회는 결국 각개 구성원들의 행동을 감시하고 그들에게 명령할 수밖에 없다. 그리고 사후 불승인이 사전 승인을 뒤집을 수 없기에, 누구도 집행위원회의 허가가 없이는 어떤 것도 하지 못할 것이다. 그리고 집행위원회가 무엇을 할지도 모르는 상황에서, 그 집행을 막을 도리도 없는데, 어떻게 개인이 총동맹의 행동에 대한 책임을 질 수 있는가?

나아가, 『강령』의 저자들은 ‘총동맹’이 제안과 거절의 주체인양 이야기한다. 그들은 총동맹의 의지가 모든 구성원의 의지와 같다고 보는 것인가? 만약 그렇다면, 총동맹이 기능하기 위해서는 모든 질문에 대해 모두가 같은 의견을 가지는 것이 필요불가결할 것이다. 그렇기에 만약 모두가 일반적이고 근본적인 원칙에 합의하는 것은 정상적이지만(그렇지 않다면 단결할 이유가 없을 것이기 때문에), 사고하는 존재들이 무엇을 할 것인가에 대하여 언제나 모두 같은 의견을 유지하고 집행부와 지도부를 신뢰할 것이라 가정하여서는 안 된다.

현실적으로 총동맹의 의지는 오직 의회를 통해 드러나 집행위원회를 지명하고 통제하며 중요한 문제를 결정하는 다수의 의지일 수 있을 뿐이다. 본질적으로 의회는 구성 조직 다수에 의해 선출된 대표단들로 구성되어 있을 것이고, 이 대표단들이 무엇을 할 것인지 결정할 것이고, 아마도 그 결정은 대표단들의 다수의 의견을 따를 것이다. 그렇기에 최선의 경우라 하더라도, 결정은 다수 중 다수에 의해 이루어질 것이고, 이는 결국 소수만을 대변하게 될 것이다.

나아가 아나키스트들이 살아가고 투쟁하는 조건 속에서, 이 의회는 오히려 부르주아 의회보다 더 대표성이 약하다. 그리고 아나키스트들이 그 집행체에 대해 가지는 통제력은 적절할 수도 효과적일 수도 없다. 실천에 있어 아나키스트 의회에는 의지와 역량이 있는 자들만이 참여할 수 있을 것이다. 충분한 돈이 있고, 경찰에 의해 이동제한이 되지 않은 자들 말이다. 대규모 집단의 의견과 열망을 대변하는 사람의 수만큼이나, 소규모 동아리를 대변하는 사람도 많다. 그리고 배신자들과 첩자들에 대한 사전 주의가 있지 않는 한(혹은, 이 사전 주의의 필요 그 자체 때문에라도) 각 대표자들과 그들이 대변하는 가치를 진지하게 점검할 수는 없다.

결국 어떠한 경우라도 이는 결국 순수한 다수결체계로, 순수한 의회주의로 전락할 뿐이다.

아나키스트들이 소수에 의한 통치(귀족정, 과두정, 특정 계급이나 당에 의한 독재)나 1인에 의한 통치(전제정, 왕정, 개인적 독재)만큼이나 다수결에 의한 통치(민주정)을 거부한다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아나키스트들은 오랫동안 소위 다수에 의한 통치가 언제나 소수에 의한 통치로 전락한다고 비판해왔다.

우리 러시아 동지들에게 이 비판들을 다시 반복해야 하는가?

물론 아나키스트들은 삶의 영역에서 때로는 소수가 다수의 의견에 따라야 한다는 것을 인지한다. 당면한 필요나 유용성이 있을 때, 그리고 그것을 집행하는데 모두의 동의가 필요할 때, 소수는 다수의 의사를 따를 필요를 느낄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일반적으로 삶에서의 이해관계가 평화롭게 조율되고, 평등한 조건 아래에 있을 때, 모두는 조화와 관용과 합의라는 동인을 가지게 된다. 하지만 특정 집단이 다른 그룹의 의견에 따르는 것은 호혜적이고 자발적이어야 하고, 사회의 운영이 마비되는 것을 막기 위한 필요와 선의로 이루어져야 한다. 이는 원칙적으로 강제되거나 법적으로 제시되어서는 안 된다. 이는 일상생활에서 달성하기 어려운 목표일 수 있지만 그 어떠한 인간의 그룹에서도, 아나키즘이야말로 다수와 소수의 자유롭고 자발적이며 자연스러운 합의에 가장 가까운 것이라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

그렇기에 만약 아나키스트들이 다수가 인류 사회 전반을 통치할 권리를 가지고, 개인이 그 통치를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는 것을 부정한다면, 만약 아나키스트들이 모두의 자유로운 합의가 모든 집행의 근거가 되기를 원한다면, 그 자유롭고 자발적인 조직 내에서 다수결의 원칙을 받아들이고, 아나키스트들이 어떠한 설명도 없이 다수의 결정에 따라야한다고 말할 수 있겠는가?

비非아나키스트들이 아나키에 대해 다수가 소수를 지배하는 것 따위가 발생하지 않는 자유로운 조직으로 받아들이고, 이것을 실현 불가능한 유토피아라거나 먼 미래에나 가능할 것으로 바라보는 것은 이해할 수 있다. 하지만 아나키즘의 이상을 가지고, 아나키를 실현하려 하거나, 최소한 그 즉각적인 실현을 진지하게 접근하는 사람들이 아나키즘의 승리를 위한 투쟁에서 아나키즘의 기본 원칙을 포기하여서는 안 된다.

내가 보기에 아나키스트 조직은 러시아 동지들이 제안한 것과는 매우 다른 기반 위에 세워져야 한다.

아나키스트 조직은 각 개인과 그룹들의 완전한 자율성, 완전한 독립성, 그리고 이에 따르는 완전한 책임이라는 기반 위에 세워져야 한다. 아나키스트 조직은 공통 목적의 달성을 위해 협력과 단결이 필요하다 믿는 이들 간의 자유로운 조화 위에 세워져야 한다. 아나키스트 조직은 다져진 결의와, 합의된 강령과 모순되는 것은 하지 않겠다는 의무감 위에 세워져야 한다. 조직의 실질적 구조와 생명력은 이 기저 위에 세워지고 구성되어야 한다. 각 그룹과, 그 그룹들의 연방과, 그 연방들의 연방에 대하여, 회의에 대하여, 총회에 대하여, 유관자 협의회 등에 대하여 모두 그렇다. 하지만 이 모든 것은 자유롭고 개인의 사상과 자주성이 방해되지 않는 방식으로, 개인 홀로는 수행할 수 없거나 수행하기 어려운 작업을 하기 위한 관점만을 위하여 이루어져야 한다. 이로써 아나키스트 조직의 의회는 상술한 모든 대의제의 문제점을 안고 있으면서도 권위주의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다. 이 의회는 법을 만들지도, 자신들의 결의안을 타인에게 강요하지도 않기 때문이다. 이들은 적극적인 동지들 간의 개인적 관계를 유지하고 확장하며, 행동의 수단과 방법에 대한 계획적인 학습을 함께 진행하고 장려하며, 다양한 지역의 상황을 총화하고 각각에 필요한 행동을 집행하며, 아나키스트 조류들의 의견을 모아서 이를 통계로 내는 데에 복무하여야 한다. 이들의 결정은 의무적 규칙이 되어서는 안 되고, 제안이나 추천으로 받아들여져야 한다. 이들은 그 결정을 수용하는 이들을 제외하면 속박이나 강요가 되어서는 안 된다.

아나키스트 조직의 행정부는 그 조직을 수인하지 않는 이들에 대한 행정 권력도, 지도력도 가져서는 안 된다. 행정부는 동지들에 대하여 자기 관점을 선전할 뿐 조직의 공식적 의견이라는 명분으로 강제해서는 안 된다. 행정부는 원하는 이들에게 회의의 결정사항과 각 그룹 및 개인이 제기한 의견을 출판하여 그룹간의 관계를 형성하고 동의하는 이들 간의 협력을 만들어내야 한다. 모든 개인은 다른 개인과 관계를 맺을 자유가 있어야 하며, 특정한 목적을 위해 설립된 위원회가 제공하는 서비스를 영위할 수 있어야 한다.

아나키스트 조직에서 모든 개인은 자신의 의견을 제기하고, 합의된 원칙과 모순되지 않고 타인의 활동을 방해하지 않는 한 어떠한 전술이라도 사용할 수 있어야 한다. 조직은 단결의 필요성이 해소의 필요성보다 큰 동안만 유지되어야 한다. 만약 해소의 필요성이 더 커진다면, 조직은 해소하고 다른 조직을 장려해야 한다.

물론 조직의 수명과 영구성은 그 조직이 장기적 투쟁에서 얼마나 성공적이었느냐에 달려있다. 그리고 특정한 기구가 영원불멸하고자 하는 의지는 본능적이고 당연한 것이다. 하지만 자유의지주의적 조직의 수명은 그 구성원의 자율성과 상황의 지속적 변화에 그 기저를 맞추어가는 것에 달려있어야 한다. 만약 조직이 유의미한 과업을 수행할 수 없다면, 차라리 없는 것이 낫다.

러시아 동지들은 내가 말하고자 하는 조직이 그 이전의 것과 유사하며, 그다지 효율적이지 않다고 바라볼 수도 있다.

이해한다. 이 동지들은 볼셰비키들이 러시아에서 거둔 성공을 바라보고, 이에 아나키스트들이 볼셰비키처럼 모아내어 조직된 군대로 만들고, 소수 지도자의 이데올로기적, 실천적 지침에 따라 현존체제를 공고히 공격하며, 이를 통한 물질적 승리 이후 새로운 사회의 구성을 지도하고자 바라는 듯하다. 그리고 이러한 시스템은, 아나키스트들이 이에 참여한다는 전제 하에, 그 지도자들이 상상한대로의 인간이라면 더 효과적인 것일 수 있다. 하지만 그 결과는 무엇일까? 러시아에서 사회주의와 공산주의에 벌어진 일이 아나키즘에 벌어지는 것 아닐까?

「디엘로 트루다」의 동지들은 우리와 마찬가지로 승리에 목마르다. 하지만 살아가고, 또한 승리하기 위해서 우리는 삶을 부인하거나 다가올 승리의 성격을 바꾸어서는 안 된다.

우리는 투쟁하고 승리하고자 한다. 하지만 우리는 아나키스트로서, 아나키를 위해 그러하고자 한다.

말라테스타

「일 리스베글리오Il Risveglio」(제네바)[2]

1927년 10월

네스토르 마흐노: 『강령』에 관하여(1928)

친애하는 말라테스타 동지.

『자유의지주의적 코뮌주의자의 조직적 강령』이라는 재외 러시아 아나키스트 그룹의 문건에 대한 동지의 답신을 읽어보았습니다.

해당 답신에 대해 저는 동지가 『강령』의 상을 오해하고 있거나, 아니면 동지가 혁명적 행동에 있어 집단적 책임을, 아나키스트 세력이 반드시 받아들여야 하는 지침의 기능을 거부하며, 이로써 책임의 원칙을 부인하고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그 원칙은 근본적 원칙입니다. 이 원칙을 통해 우리 각각은 아나키스트의 이상을 이해할 수 있고, 대중에 침투하고자 하는 의지를 다잡을 수 있으며, 희생의 정신을 지닐 수 있습니다. 이 원칙을 통해 각 개인은 혁명적 방법론을 채택하고 다른 방법론은 무시할 수 있습니다. 책임의 원칙이 없이는 사회적 빈곤을 바라보기만 하는데 필요한 힘을 가질 수도 없고, 의지를 가질 수도 없으며, 지성을 가질 수도 없습니다. 하물며 그에 맞서 싸우는 데에 있어서는 어떠하겠습니까. 집단적 책임을 통해서만 모든 영역과 학파의 혁명가들이 힘을 모을 수 있습니다. 이 원칙 위에서 혁명가들은 그들의 부분적 반란이 헛되지 않을 것이라는 희망을, 피착취대중이 혁명가들의 열망을 이해할 것이라는 희망을 가지고 시기에 적절한 적용방식을 추출하여 해방을 향한 새로운 길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말라테스타 동지께서는 아나키즘적 혁명에 있어 개인적 책임을 주장합니다. 그리고 나아가 동지는 투사로서 살아가는 내내 그것을 지지하여 왔습니다. 적어도 내가 당신의 글을 읽어본 바는 그러합니다. 하지만 동지는 아나키즘 운동 전체의 경향과 행동에 있어 집단적 책임의 필요성과 유효성을 부정합니다. 집단적 책임이 당신에게 위험하게 느껴지기에, 당신은 이를 부정합니다.

반면 나는, 우리 운동을 온전히 마주한 이후, 집단적 책임에 대한 동지의 거부가 근본이 없는 것으로 보일 뿐만 아니라, 사회혁명에 있어 위험한 것으로 보입니다. 우리의 적들에 대한 결정적 전투를 수행하는 데에 있어, 경험을 빌리는 것은 유용할 것입니다. 혁명적 전투에서 얻은 나의 경험적 교훈은, 혁명적 사건의 순서가 어떻건 간에, 누군가는 진지한 이데올로기적, 전술적 지침을 내려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는 오직 아나키즘에 헌신하는 공고한 집단적 정신만이, 그 집단적 의지를 통해 시대의 요구를 표현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반면, 우리 아나키스트 대오가 지금껏 이를 간과하여 왔다면, 이제 우리 아나키즘적 코뮌주의자들은 우리의 이론적이고 실천적인 강령의 일부가 되어야 합니다.

투사들의 집단적 영혼과 집단적 책임만이 현대 아나키즘이 그 이론적 순환, 역사적 오류를 떨치게 할 수 있습니다. 혁명기에 아나키즘이 이데올로기적으로도 실천적으로도 노동대중을 이끌 수 없으며, 그렇기에 총책임을 질 수 없다는 편견을 떨칠 수 있습니다.

나는 이 편지에서 동지가 『강령』에 대해 한 말들에, 이를테면 ‘경찰만 없는 교회이자 권위’라는 평가를 하나하나 따지지 않겠습니다. 나는 단지 비판의 과정에서 이러한 단어가 사용되었다는 것에 놀라움을 표합니다. 오랫동안 생각해보았지만, 나는 동지의 의견에 동의할 수 없습니다.

동지는 잘못되었습니다. 그리고 내가 동지의 논박에 동의할 수 없기에, 나는 다음과 같이 질문을 던집니다.

아나키즘이 압제자와 자본주의, 그리고 그에 복무하는 국가에 맞선 노동자들의 투쟁에서 일정한 책임을 져야 합니까? 그렇지 않다면, 왜인지 말해줄 수 있습니까? 만약 맞다면, 아나키스트들이 함께 작업하여 그 운동이 현존 사회 질서의 기반을 온전히 청산할 수 있도록 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지금의 조직부전 상태에서, 노동계급의 투쟁과 사회적 행태에 대해 이데올로기적, 실천적으로 어떠한 영향을 줄 수 있습니까?

아나키즘이 혁명이 아닌 어떤 수단을 택할 수 있습니까? 아나키즘의 건설적 개념을 입증하고 공고히 하기 위해 취할 수 있는 수단은 무엇입니까?

서로 단단하게 결속하여 그 최종목표를 향한 단결과 행동을 집행할 영구한 조직이 필요하지 않습니까?

사회의 자유로운 발전을 보장하기 위하여 제도의 확립이 필요하다고 아나키스트들이 말할 때, 그 의미는 무엇이겠습니까?

우리가 추구하는 코뮌주의적 사회에서, 사회적 제도가 없이 아나키즘이 무언가를 할 수 있습니까? 만약 그렇다면 무슨 수단을 통해서입니까? 만약 아니라면 그 제도의 이름은 무엇이 되어야 합니까? 아나키스트들이 지도적 기능을 수행하고 책임을 져야합니까? 아니면 단지 무책임한 보조자로 남아야 합니까?

친애하는 말라테스타 동지. 동지의 답변은 나에게 두 가지 이유에서 중요합니다. 동지의 답변은 아나키스트 세력과 운동을 총체적으로 조직하는 데 대한 동지의 관점을 알 수 있게 해주었습니다. 그리고(우리 솔직해집시다) 동지의 의견은, 일생을 자유의지주의적 이상에 투철하고 공고하게 헌신한 노련한 투사의 의견으로서, 다수 아나키스트들과 지지자들에게 논의조차 없이 받아들여졌습니다. 그러므로 이 시대가 우리 운동에 던지는 긴급한 질문들에 대한 완전한 연구가 가능할지, 그리고 이에 따라 그 발전이 더뎌질지 아니면 새로운 도약을 할지는 동지의 태도에 달려 있습니다. 과거의 지지부진함을 계속한다면, 오늘 우리의 운동은 아무 것도 얻을 수 없습니다. 반면, 우리 앞에 놓인 사건들을 바라볼 때, 아나키즘에게는 아직 그 역할을 다할 기회가 있습니다.

답신을 기다리겠습니다.

1928

혁명적 친애를 담아

네스토르 마흐노

에리코 말라테스타: 『강령』에 대하여에 대한 답변(1929)

친애하는 동지께.

아나키스트 조직에 대한, 『강령』이라는 이름으로 알려진 문건에 대한 나의 비평에 대해 동지가 작년에 보낸 편지를 이제야 읽었습니다.

나의 상황을 아신다면, 왜 답변이 없었는지 이해하실 겁니다.

나는 우리의 논쟁에 참여하고 싶지만 그럴 수 없습니다. 전복적인 문건이나, 정치적 · 사회적 주제를 다루는 모든 편지들이 검열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오랜 시간이 지나고, 몇몇 행운에 따른 기회들이 있어야만, 동지들의 죽어가는 목소리를 듣고, 그 행동을 볼 수 있습니다. 그렇기에 나는 『강령』과 그에 관한 나의 비판이 광범위하게 논의된 것을 알았지만, 어떤 말들이 오갔는지는 알 수 없었습니다. 이 주제에 관한 문건 중, 동지의 서신을 처음으로 읽는 것입니다.

만약 우리가 자유로운 대화를 나눈다면, 나는 논쟁을 시작하기 전에 동지에게 몇몇 모호한 부분들에 대하여 물었을 것입니다. 아마도 러시아어에서 프랑스어로의 불완전한 번역이 이 모호함의 원인으로 보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상황이 그러하지 못한 만큼, 내가 이해한 만큼 답하겠습니다. 이 동지의 회신을 바랍니다.

동지는 내가 동지에게 있어 과거와 현재와 미래의 혁명을 이끌었고, 이끌어야만 하는 집단적 책임의 원칙을 받아들이지 않는다는 사실에 놀란 듯합니다.

하지만 나는 아나키스트의 입에서 나오는 ‘집단책임’이 대체 무슨 의미가 될 수 있는지 오히려 궁금합니다.

나는 군대가 그 병사들을 통제함에 있어서 반란을 행한 병사들이나 적전 도주한 병사들의 분대에 연대책임을 묻는 것으로 이를 행함을 압니다. 나는 누구도 침략에 저항을 하지 못했기에, 군 장성들이 마을을 파괴하고 아이들을 포함한 모두를 학살하는데 거리낌이 없다는 것을 압니다. 나는 오랜 세월 동안 정부가 집단 책임의 체계를 통하여 반란을 위협하고 통제하고, 세금을 수취해온 것을 압니다. 이것은 효과적인 위압의 수단이 될 수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자유와 정의를 위해 투쟁하는 사람들은 물질적 제제와 무관한 도덕적 책임감만으로 움직이는 것인데 어떻게 집단책임이 가해질 수 있겠습니까?

이를테면, 만약 무장한 적군과의 전투에서 내 옆 사람이 겁쟁이처럼 군다면, 그것은 나와 모두에 대한 위협이 됩니다. 하지만 스스로의 역할을 할 용기가 없는 것에 대한 비판은 오직 그에게만 가해져야 합니다. 음모를 꾸미는 동안, 다른 음모가가 배신하고 그 동지들을 감옥에 보냈을 때, 배신당한 이들이 배신한 이들의 행위에 책임을 져야 합니까?

『강령』은 “모든 구성원의 정치적이고 혁명적인 활동에 대해서는 동맹 전체가 책임져야 한다. 그리고 그렇기에, 모든 구성원은 동맹의 정치적이고 혁명적인 행동에 대해 책임져야 한다.”고 적고 있습니다.

이것이 아나키스트들이 가지고 있는 자율과 자주의 원칙과 병존이 가능한 것입니까? 지난 문건을 돌이켜보자면, “만약 총동맹이 각 구성원의 행동에 책임이 있다면, 어떻게 다양한 모임의 개별 구성원들이 스스로 최선이라 믿는 일반 강령을 적용할 수 있는가? 막을 방도가 없는 행동에 대한 책임을 어떻게 질 수 있는가? 그렇기에 총동맹과 그 집행위원회는 결국 각개 구성원들의 행동을 감시하고 그들에게 명령할 수밖에 없다. 그리고 사후 불승인이 사전 승인을 뒤집을 수 없기에, 누구도 집행위원회의 허가가 없이는 어떤 것도 하지 못할 것이다. 그리고 집행위원회가 무엇을 할지도 모르는 상황에서, 그 집행을 막을 도리도 없는데, 어떻게 개인이 총동맹의 행동에 대한 책임을 질 수 있는가?”

물론 나는 공통의 목적을 위해 타인과 서로 협력하고 협동하는 모두가 행동에 있어 동지들과의 협력의 필요성을 느껴야 하고, 타인의 행동, 그리고 나아가 공통적 목표를 해하는 것을 하지 말아야 하며, 이루어진 합의를 존중하여야 한다고 믿습니다. 의견의 차이나, 조건의 변화나, 방법론에 대한 갈등이 협동이 불가능하거나 부적절하다고 느껴지게 하여, 그 조직을 떠나야하는 상황이 아닌 한 말입니다. 또한 나는 이 의무감을 느끼지 못하고, 이 의무를 실행하지 않는 사람은 조직에서 제명되어 마땅하다고 여깁니다.

아마, 동지가 집단책임이라고 말한 것은 조직의 구성원들 간의 조화와 연대가 필요하다는 의미였을 것이라 봅니다. 그리고 만약 그렇다면, 내가 보기에 동지의 문제는 잘못된 언어의 사용입니다. 하지만 근본적으로 단어 사용의 문제는 중요하지 않고, 우리간의 합의는 수월히 이루어질 것입니다.

동지의 편지에서 보이는 진정으로 중요한 문제는, 사회운동에서 아나키스트의 기능(역할)이 무엇이어야 하는지에 대한 것, 그리고 이 과업을 수행하는 방법에 관한 것입니다. 이것은 기본적인 문제이고, 아나키즘의 존재 이유이며, 그 의미는 명확히 통용되어야 합니다.

동지는 아나키스트들이 (혁명운동과 사회의 공동체적 재조직에 있어) 지도적이고 책임 있는 역할을 수행해야 하는지, 아니면 스스로를 무책임한 보조자로 제약해야 하는지 물었습니다.

이 질문은 너무도 정밀하지 못해서 나를 당황스럽게 만듭니다. 조언과 예시로 인민들에게 방향을 제시하고, 인민들이 스스로 우리의 방법론과 해결책을 다른 것들과 비교하여 선택하도록 지도하는 것도 가능합니다. 그리고 인민에 대한 통제권을 확보하고 특정인의 사상과 이득을 경찰력으로 강제함으로써 인민들을 지도하는 것도 가능할 것입니다.

동지가 원하는 지도는 무엇입니까?

우리는 정부가(모든 정부가) 악하다 믿기에, 자유가 없이는 연대와 정의가 불가능하다고 믿기에 아나키스트입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정부가 되기를 원할 수 없고, 다른 이들이, 특정 계급이, 특정 정당이, 특정 개인이 권력을 잡고 정부가 되려는 것을 막아야 합니다.

동지는 대중을 폭력과 시행착오로부터 보호하는 것이 지도자의 책무라 보는 듯합니다. 하지만 나에게 지도자의 책무란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권력을 가진 자들은 혁명을 마주하기 전까지는 어떠한 책무도 지지 않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매일 혁명을 할 수 없고, 혁명은 정부가 최대한 악惡해진 이후에나 가능합니다.

동지 또한 내가 아나키스트들이 다른 혁명가들의 정부에서 단순히 보조가 되는 것을 원하지 않는 것을 이해할 것입니다.

오히려 나는 우리 아나키스트들이 우리 강령의 공고함을 믿고, 운동을 우리의 이상을 현실화하는 방향으로 끌어오기 위해 영향력을 확보하여야 한다고 믿습니다. 하지만 이 영향력은 타인보다 더 많이, 더 잘 행동하는 것으로 확보되어야 하며, 이렇게 확보한 영향력만이 유용할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는 우리의 사상을 심화시키고, 강화하며, 선전하여야 합니다. 공통된 행동으로 우리의 힘의 공조를 만들어야 합니다. 우리는 노동운동 안에서 행동하여 그것이 자본주의 체제 안에서의 작은 개선을 추구하는 것으로 제약되고 오염되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는 완전한 사회변혁을 준비하는 과정에 기여할 수 있도록 행동해야 합니다. 우리는 미조직대중이 반란의 의지를, 자유롭고 행복한 삶에 대한 열망과 희망을 각성할 수 있도록 행동해야 합니다. 우리는 국가와 자본주의의 힘을 약화시키고, 노동자의 의식적 수준과 물질적 조건을 향상시키는 모든 운동을 주도하고 지지해야 합니다. 간단히 말해 우리는 미래로 향하는 길을 열 혁명적 행동을 정신적으로, 물질적으로 준비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리고 혁명의 시기에, 우리는 (가능하다면 다른 이들보다 먼저, 더 효과적으로) 필수적인 물질적 투쟁에 열정적으로 참여하고, 그 투쟁을 국가의 억압적 힘을 모두 파괴하는 방향으로 추동하여야 합니다. 우리는 노동자들이 생산수단과 생산물의 재고를 확보하도록, 소비재의 공정한 분배를 스스로 조직하도록, 각 코뮌과 지역 간의 거래에 있어 필요한 생산물과 공공서비스를 제공하고, 생산을 지속하며 심화할 수 있도록 촉진하여야 한다. 우리는 가능한 모든 수단을 활용하여, 지역적 조건과 기회에 맞추어, 노동자 조직 · 협력자 · 자발적 모임의 행동을 촉진함으로써 새로운 권력, 새로운 정부의 등장을, 필요하다면 폭력적으로라도 막아야 합니다. 하지만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권력 독점의 시도를 무력화시키는 것이라 하겠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인민들의 충분한 동의를 만들어내지 못하고, 국가가 그 권력기구와 폭압기제로 재건되는 것을 막지 못한다면, 우리는 정부에 참여하건, 그것을 인정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우리는 그 정부에 대하여 반란을 일으키고, 모두의 완전한 자치를 요구해야합니다. 우리는 실질적 반란의 상태를 유지하거나, 잠재적 반란여지를 두어야 합니다. 오늘 승리할 수 없다면, 최소한 미래를 예비해야 합니다.

이것이 동지가 말하는 바, 아나키스트들이 혁명의 준비와 집행 과정에서 수행해야하는 역할입니까?

동지와 동지의 저서들에 대하여 내가 아는 바에 따르면, 동지는 그러할 것이라 믿습니다.

하지만 동지가 지지하는 총동맹에는 집행위원회가 이데올로기적, 조직적인 지침을 내릴 것입니다. 이에 나는 동지가 총 운동의 관점에서, 중심체를 만들고, 권위주의적 방식으로 혁명의 이론적, 실천적 강령을 지도하려는 것이 아닌지 우려합니다.

만약 그렇다면 우리는 대극점일 것입니다.

동지의 조직, 또는 관리기구가 아나키스트들로 구성되어있다고 해도, 그것은 정부 이상도 이해도 아닙니다. 혁명의 승리를 위해 그러한 기구가 필요하다고, 온전한 선의로 믿어보아도, 혁명 이후 그 기구가 제일 먼저 할 일은 그 의지를 대중에 강제하기 위한 힘을 확보하는 것일 것입니다. 이 기구는 이를 위해 무장경찰을 두어 물리적 수비를 강화하고, 관료를 두어 그 명령을 집행할 것입니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대중운동은 마비되고 혁명은 죽을 것입니다.

이것이야말로 볼셰비키들에게 일어난 것이 아닙니까?

우리의 계획이, 우리의 강령이, 우리의 유토피아의 승리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우리의 계획은 경험과 검증이 필요하고, 우리의 강령은 경험에 따라 수정될 수 있으며, 우리의 이상향은 시대와 장소의 도덕적 · 물질적인 조건에 적응하며 발전해나갈 것이기 때문입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인민입니다. 인민들이 수천 년 간의 예속이 내재화시킨 양처럼 순한 태도를 내려놓고, 자유롭게 생각하고 행동하는 방법을 배우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위대한 해방의 작업이야말로 아나키스트들이 헌신해야하는 것이라 하겠습니다.

동지가 나의 편지에 준 관심에 감사합니다. 더 깊은 이야기를 나눌 수 있기를 바랍니다. 친밀과 경의를 담아.

「리스베글리오」

1929년 12월

네스토르 마흐노: 말라테스타에게 보내는 두 번째 편지(1930)

친애하는 동지께.

동지에게 답신하기 위해, 그 편지의 러시아어 번역판을 읽기를 기대해왔습니다. 그 편지에서 동지는 논쟁을 시작하기 전에, 오해를 방지하기 위해, 내가 가지고 있는 아나키즘에 대한 생각을 말해줄 것을 요청했습니다. 나는 그 생각을 설명함과 동시에 내가 우리 운동의 약점을 초래한 이유라 보는 것들에 대해 말하고자 합니다.

다른 모든 아나키스트들과 마찬가지로, 나는 권위를 거부합니다. 나는 중앙화에 근거한 모든 조직에 반대합니다. 나는 국가나 입법부를 인정하지 않습니다. 나는 부르주아 민주주의와 의회주의에 반대합니다. 나는 부르주아 민주주의와 의회주의가 노동자의 해방을 방해하기 위한 사회적 형태라 바라봅니다. 간단히 말해, 나는 노동자의 착취에 기초한 모든 체제에 반대합니다.

그렇기에 나에게 아나키즘은 착취당하고 압제당한 이들의 혁명적인 사회 강령입니다. 하지만 나에게 오늘의 아나키즘은 단 하나의 사회적 행동을 수행할 수단도 가지고 있지 못합니다. 우리는 늪에 빠진 셈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지금까지처럼 남아있다면, 그 상황을 바꾸지 못할 것입니다.

내가 바라보기에 우리는 우리가 동의하는 만큼만 이해할 수 있습니다. 나는 아나키스트들이 우리 이론가들의 사상으로부터 떨어진 논리적 결론을 도출하는데 있어, 전통적인 견해를 폐기하는 것을 두려워하지 말아야 한다고 믿습니다. 이를테면 이러한 질문이 있다고 해봅시다. 아나키즘이, 혹은 혁명적 노동 대중이 현재 국가가 차지하고 있는 유용한 사회적 기능의 지속을 보장하는 영속적 조직을, 아나키스트적 이상을 확립하기 위한 실질적 정책의 유지를 보장하는 수단으로써의 조직을 구상할 필요가 있는가? 아니면 이것은 아나키스트 활동가 그룹에 영향을 받은 노동자의 조합과 농업 협동조합 등의 역할인가?

나는 이 오래된 문제를 아나키스트들이 풀어내어야 그만큼 중요한 다른 문제들을 마주할 수 있으리라 봅니다.

특히, 아나키즘과의 관계는 증명될 필요조차 없는 이러한 기구들의 성격을 구체적이고 시대에 부합하는 방식으로 결정하기 위해 아나키스트들은 크로포트킨이 표현한 것처럼 “공통적 법 사회 기구”에 대해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 추정은 굉장히 중요한 것이 될 것입니다. 혁명적 대중 전체에게 있어서만이 아니라, 아나키스트들에 대해서도 말입니다. 우리 중 90% 이상은 이 질문을 고민해본 적도 없다는 것을 잊지 맙시다. 말라테스타도, 포레도, 우리의 옛 동지들 중 누구도 이 문제를 다루지 않았고, 우리 운동의 개탄스러운 상태에 대해 아무 말도 하지 않았습니다. 이 동지들은 오든 것은 잘 되고 있으며, 아나키스트들은 그 대체 불가능한 파괴적이고 건설적인 역할을 다가올 혁명에서 할 준비가 되어있다고 말할 뿐입니다. 하지만 현실은 완전히 다릅니다. 해가 지날수록 우리의 운동은 노동자들 안에서 영향력을 잃어가고 , 결과적으로 약해져갑니다. 일부 이론가들은 “아나키즘의 강점은 그 약점에 있고, 약점은 그 강점에 있다”며, 아나키스트 조직이 그 영향력을 잃는 것이 걱정할 일이 아니라고 합니다. 하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이 주장은 그저 멍청할 뿐입니다. 이 주장은 단지 아나키즘의 현 상태에 대한 실질적 인식을 회피하기 위해 만들어진 공식일 뿐입니다.

나는 참된 사회운동은 다양한 권위주의적 사회 체계에 맞선 투쟁에 필요한 다양한 수단을 제공할 수 있는 상대적으로 안정적인 조직형태가 없이는 긍정적 정책을 제시할 수 없다고 믿습니다. 이러한 방법론의 부재가, 특히 혁명의 시기에, 아나키스트의 행동의 결과가 스스로를 “모든 구조”에 반대하는 지역적 개인주의로 전락하게 하는 결과를 가져옵니다. 아나키스트들이 이처럼 실질적 성취에 대한 어떠한 희망도 주지 못했기에, 대중이 우리로부터 떠났습니다.

투쟁하고 승리하기 위해, 우리는 전술을 실천적 행동의 계획으로 표현해내야 합니다. 아나키스트들이 이러한 계획을 가질 때만, 아나키스트들은 착취당한 대중을 모아내고, 그들을 거대한 혁명전투를 위해 예비하고, 급진적인 사회 변혁을 쟁취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반복하는 말이지만, 이러한 것은 영속적인 조직이 없이는 시도될 수도 없습니다. 오늘날의 선전 그룹들이 혁명과업 수행에 충분하다는 것은 환상에 불과합니다. 어떠한 사회적 조직이라도, 특정한 역할을 수행하고자 한다면, 혁명기가 시작되기 전에 대중들이 그 조직을 알아야 합니다.

그렇기에 나는 아나키스트들이 좌와 우와 중앙 모두를 거부하느라 시간을 낭비하기보다는 그들이 무엇을 원하는지에 천착하고, 노동자들에게 그들이 무엇을 거부하는지 얘기하기보다는 현실적인 것을 이야기해야 한다고 믿습니다.

그리고, 오직 이렇게 할 때에만, 아나키스트들은 스스로가 원하는 역할, 흔히 말하는 것처럼 “권력과 다수의 폭압에 맞서 일어난 자유의 수호자”가 될 수 있을 것입니다.

안타깝게도, 아나키즘은 오직 철학적으로만 강력합니다. 아나키즘은 실천적 수단이 없습니다. 아나키즘은 심지어 혁명기에조차 스스로를 현현하지 못했습니다. 아나키즘의 정신을 가진 자발적 운동이 등장하였다 하더라도, 대중의 논에는 단지 절망적 시도로 보였을 뿐입니다. 그리고 이는 아나키즘의 비참한 상황을 더 비참하게 만들었을 뿐입니다.

동지는 내가 혁명 전, 그리고 혁명 중에 아나키스트의 역할에 대해 동지와 같이 받아들이느냐고 물어보았습니다. 동지의 답신을 참조할 때, 나는 동지와 완전히 동일한 입장을 가집니다. 하지만 나는 그러한 역할은 오직 우리의 총동맹이 지금과 달리 이데올로기적으로 단일하고 전술적으로 단결되었을 때 가능하다고 봅니다. 광범위한 아나키즘적 행동은 오직 잘 짜인 조직 기반이 있고, 그 조직이 투사들의 집단책임의 원칙에 따라 운영되기 때에만 가능하다는 것이, 우리가 경험으로부터 얻은 교훈입니다.

“대중을 어떻게 이끌고자 합니까?”라 물으셨지요. 나는 모든 사회운동은, 특히 다수 대중의 혁명운동은, 그 운동의 목표를 달성하기 위한 조언을 제시해야 한다고 봅니다. 대중은 이를 진행하기에는 너무 다원적입니다. 명확한 정책을 가진 이데올로기그룹 만이 이 과정에서 혁명의 시작을 향해 추동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그룹만이 애매한 점을 밝히고, 대중의 무의식적 갈망을 명백히 정의하며, 행동과 말을 통한 예시를 만들어낼 수 있습니다. 이를 위해서라도 우리의 총동맹은 그 정치적 단결과 조직적 성격을 명확히 해야 합니다. 실질적 성취의 범위에서, 자치적 아나키스트 그룹들은 새로운 상황들을 모두 마주해야 합니다. 이를 통해 문제의 해결을 확립하고, 망설임 없이, 아나키즘의 목표를 수정하는 일 없이 대응해야 할 것입니다.

형제애를 담아

네스토르 마흐노

1930 8월 9일


[1] 영어 번역문은 『아나키스트 총동맹의 조직적 강령』. 이 문건은 『자유의지주의적 코뮌주의자의 조직적 강령』이라 불리기도 한다. 역자는 해당 문건을 『자유의지주의적 코뮌주의자의 조직적 강령』이라 번역한 바 있기에 해당 제목으로 번역하였다.-역자 주

[2] 역자 주 - 이탈리아의 아나키스트 루이지 베르토니가 편찬한 잡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