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리코 말라테스타
점진주의
아나키즘적 사회를 이루거나 설립에 접근하는 최상의 전술 논의는, 아나키스트 활동가 사이 상호 신뢰를 비추고 개인 간 비방을 멀리하는 선에서 유용하고 실제로 필요하다. 하지만 논의 와중에 일부는 상대를 ‘점진주의자’라고 비난하고, 비난받은 이는 ‘점진주의’를 모욕처럼 여기며 단호히 부인한다.
하지만 단어의 실제 의미와 우리 원칙의 논리를 고려하면, 우리는 모두 점진주의자이다. 가능한 모든 방식으로 우리는 점진주의자여야만 한다.
특히 정치를 논할 때 그렇듯, 일부 단어는 의미를 계속해서 바꾸며 본래의 논리적이고 자연스러운 의미와는 다른 뜻을 갖게 된다.
그렇게 ‘가능주의자possibilist’라는 단어가 탄생했다. 맨정신으로 자신이 진정으로 불가능을 원한다고 주장하는 이가 있을까? 하지만 프랑스에서는 가능주의자라는 용어가 아나키스트 파울 브루스Paul Brousse의 지지자를 칭하는 데까지 이르렀다. 브루스의 지지자는 사회당 일원으로, 부르주아 민주주의와의 불가능한 협력을 위해 기꺼이 사회주의를 포기하려 했다.
‘기회주의자opportunist’라는 단어도 마찬가지이다. 누가 ‘반기회주의자’가 돼, 제때 오는 기회를 저버리고 싶을까? 하지만 프랑스에서는 기회주의자라는 단어가 구체적으로 감베타Gambetta[1]의 지지자를 칭하게 됐고, 지금까지도 명확한 이상이나 원칙 없이 체저속하게 단기 이익만을 좇는 사람 또는 정당을 일컫는다.
‘변형주의자transformist’라는 단어도 같은 경우다. 세상과 삶이 진화하고 변화함을 누가 부정하겠는가? 오늘날 누가 ‘변형주의자’가 아니겠는가? 하지만 이탈리아의 데프레티스[2]가 선도한 부패하고 근시안적인 정책을 일컫는 데 사용됐다.
단어의 본래 의미와는 다른 뜻을 부여해 오해 일으키는 일은 이제 그만 멈춰야 한다. 하지만 정치인이 부패한 자기 목적을 고운 단어 뒤에 숨기려고 의미를 바꾸는 현실 속에, 실질적인 변화는 어려운 일이다.
따라서 아나키스트 사이에 오가는 ‘점진주의자’라는 비난은 일을 차례로, 가능해졌을 때, 또는 아무것도 하지 않거나 무언가를 하더라도 아나키즘의 반대 방향으로 나아가는 이를 칭하리라. 이 경우 점진주의라는 용어를 부정해야 한다. 하지만 점진주의 본질은 변하지 않는다. 변화가 서서히 일어남은 세상의 이치이며 아나키즘도 마찬가지이다. 아나키는 오직 조금씩 이뤄진다.
앞서 말했듯, 아나키즘은 필연적으로 점진적이다.
아나키를 절대적 최상이라 여길 수 있고, 우리 머릿속 등대처럼 최고의 위치를 유지해도 옳다. 당연하게도 현재라는 지옥도에서 우리가 갈망하는 미래까지 가는 갑작스러운 한걸음으로 아나키즘 이상에 도달할 수 없다.
권위주의자, 즉 사회 질서를 힘으로 확립하는 것을 도덕적이며 필요하다고 여기는 이는 어리석게도 자기가 권력을 쟁취하면 법과 선언과 경찰gendarmes로 모두를 한없이 자신의 의지대로 강요할 수 있기를 희망한다.
하지만 자유를 향한 존중만을 강요하고 자기 이상을 실천하는 데 설득과 자유로운 협업의 이점에 기대는 아나키스트에게 권위주의자의 희망은 상상도 할 수 없다.
원칙 없고 무식한 개혁주의 신문이 내 주장이라며 비방한 바와 반대되게, 아나키를 이루는 데 있어, ‘모두’가 아나키스트가 돼야 한다는 말이 아니다. 내 생각에는 오히려, 오늘날의 맥락으로 인해, 특수한 조건 아래 놓인 소수만이 아나키즘적 이상을 떠올릴 수 있다. 이런 믿음 때문에 내가 혁명가라고 불린다고 생각한다. 권위주의와 특권이 번창하는 상황에서 실질적인 변화가 일어나기 전에 일반적인 전환이 가능하다는 믿음은 헛됐다. 따라서 아나키를 이루는 데 있어 조직화가 필요하다. 충분한 자유를 확보하고, 어느 한 곳에서 수적으로 충분하고 자립할 수 있으며 지역사회에 영향력을 펼칠 핵심 아나키스트 집단이 생기면 그런 수준의 아나키는 점진적으로 가능해지리라. 다시 한번 말하지만, 아나키, 또는 점진적으로 아나키를 이룰 수 있는 상태에 도달하려면 우리는 조직해야 한다.
모두를 한꺼번에 설득할 수도 없고, 생계와 선전 활동이 우리로 하여금 사회에서 고립돼 살 수 없게 하니 아나키스트가 아니거나 우호적이기만 한 대중 사이에 아나키를 최대한 실천하는 방법을 물색해야 한다.
문제는 따라서 점진적으로 행할지가 아니라 우리 이상을 가장 빠르고 진정성 있게 행하는 방법을 찾는 것이다.
오늘날 우리 앞길은 폭력과 실수의 긴 역사 끝에 일부 계층이 쟁취한 특권으로 가로막혔다. 쟁취한 특권으로 지식과 기술 우위를 선점한 이 계층은 또한 피지배계층에서 군대를 모병해 원할 때, 그리고 책임을 무는 이 없이 무력을 행사한다.
그래서 혁명이 필요하다. 혁명은 우리가 사는 폭력의 국가를 타파하고 더욱 거대한 자유와 정의와 연대를 향한 평화로운 수단을 만든다.
아나키스트는 혁명 이전, 도중, 이후 어떤 전술을 채택해야 할까?
틀림없이 혁명 이전에 거사를 준비하고 실행에 옮기는 데 필요한 일은 검열돼 말할 수 없으리라. [3] 어쨌든 적의 시선 아래 전술 논의는 무의미하다. 하지만 우리 신념에 충실하고, 우리 사상을 최대한 전파하고, 적과 어떠한 타협도 하지 않고, 나타나는 모든 기회를 취할 최소한의 정신을 준비해야 한다.
그렇다면 혁명 도중에는 어떻게 해야 할까?
우선 혁명은 우리 힘만으로 할 수도, 하려고 해서도 안 된다. 전국 모든 대중이 모든 관심을 쏟아붓지 않는 한, 혁명은 실패하리라. 만약 희박한 확률을 초월해 우리 혼자 힘으로 혁명을 이룬다면, 우리 상황은 지속하기 어려우리라. 왜냐하면 우리의 이상을 강요함으로써 우리는 아나키스트이길 그만두게 돼 우리의 권위주의로 혁명을 와해하거나, 반대로 현장에서 물러남으로써 우리와 다른 목표를 가진 세력이 우리 노력의 과실을 취하게 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우리는 모든 진보 세력과 전위 정당과 협업해 대중을 운동에 끌어들여 우리의 혁명이 이룰 수 있는 바를 이루게 해야 한다.
하지만 구체적인 우리 목표를 포기하자는 말은 아니다. 오히려 내부적으로 단결되고 나머지 세력과 확실히 구분된 채로 우리 목표인 정치권력의 폐지와 자본가의 재산 몰수를 추구해야 하리라. 만약 우리 노력에도 불구하고 대중의 과업을 가로막고 자기 의지를 강요하려는 새로운 형태의 권력이 생긴다면, 우리는 새 권력과 함께하지도, 인정하지도 않을지어다. 또한 우리는 대중이 이 세력에게 다스릴 수단을 넘기지 않도록 해야 하리라. 이들을 영원히 무찌르는 날까지 병사와 자원을 충당할 수 없어 힘을 기를 수 없게 해야 한다.
결론적으로, 우리의 자치권과 필요에 따라 우리 이상을 실천할 권리와 수단을 때에 따라서 폭력을 사용해서라도 유지해야 한다.
그렇다면 혁명 이후, 그러니까 지배층이 패배하고 반란 세력이 최후 승리한 다음에는 무엇을 해야 할까?
혁명 이후 시점에 점진주의가 특히나 중요해진다.
우리는 삶의 현실적인 방면에 신경 써야 한다. 생산과 교역과 통신, 아나키즘적 단체와 계속해서 권위를 추구하는 단체 사이 관계, 코뮌주의 공동체와 개인주의 공동체 사이 관계, 그리고 도시와 농촌 사이 관계를 생각해야 한다. 자연의 힘과 재료를 이롭게 활용해야 하리라. 공교육과 육아 제도와 장애인 복지와 건강 제도와 일반범죄자를 다루는 치안과 계속해서 개인의 이익을 위해 타인의 자유를 침해하는 자에 대한 방어 등, 각 지역 내 각 시점에 따른 조건에 맞게 우리 산업과 농업 분배를 신경 써야 하리라. 각 문제의 해답은 경제적 수지 타산에 맞아야 할뿐더러, 정의와 자유의 의무를 다해야 하며 추후 진보를 위한 길을 터야 한다. 필요에 따라 정의와 자유와 연대를 경제 조건보다 더 중요시해야 한다.
모든 일이 어떻게든 해결되리라는 믿음으로 모든 것을 파괴할 마음을 갖지 않아도 된다. 우리 문명은 수천 년의 발전으로 수백만 인구가 제한된 공간에서 끊임없이 팽창하고 복잡해지는 요구를 수용하며 동거할 방법을 해결해왔다.
위 발전은 지배계층의 이득을 위해 권위주의적 수단으로 사실상 대다수 대중의 손 밖에 놓였다. 하지만 지배와 특권을 제거하면 실질적인 이익만 남게 된다. 대자연의 힘을 길들인 인류의 승리와, 과거 세대의 경험과, 인류 역사를 통틀어 습득한 사회적 습관과, 상호부조의 증명된 이익을 모두 누리리라. 이 모두를 포기하기란 아둔할뿐더러 불가능하다.
한마디로, 우리는 권위와 특권에 맞서 싸우며 문명이 선사하는 이점을 활용해야 한다. 우리는 대체제를 찾을 때까지 인간의 필요를 충족하는 어떤 것도 파괴해서는 안 된다.
우리는 자본주의적 강요와 착취에 대해서는 타협하지 않으리라. 하지만 자유와 타인의 동등한 권리를 침해하지 않는 한, 다양한 문명의 사회적 규범은 존중해야 한다. 대중의 도덕성이 성장하고 덕분에 인류가 손에 넣는 물질적·지적 수단이 늘어나는 한 점진적 진보에 만족해야 한다. 이 모든 것을 이루는 동시에 연구와 실천과 선전으로 더욱 높은 이상을 향한 발달을 가속하리라.
본문에서 난 해답보다 더 많은 문제를 제기했다. 하지만 맥락에 따라 바뀔 해답을 구하게 해줄 여러 조건을 효과적으로 나열했다고 자신한다. 우리 해답은 언제나 아나키즘적 원칙에 부합해야 한다. 누구도 명령을 내리지 않고, 누구도 착취당하지 않으리라.
시대는 역동적이고 우리는 준비돼야 하니, 모든 동지는 빠르게 생각하고 연구하고 준비할 의무를 지고 있다.
[1] 프랑스 법률가이자 정치인 레온 감베타Leon Gambetta(1838-1882).
[2] 이탈리아 정치인이자 1876년과 1887년 사이 여러 차례 수상에 오른 아고스티노 데프레티스Agostino Depretis.
[3] 말라테스타가 글을 쓴 1925년 무솔리니 독재 아래 이탈리아에서 모든 출판물은 파시즘 정권의 검열을 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