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나키의 경제학

우리가 살아가는 지성의 시대를 마무리하고 있는 자, 새라 페일린을 인용하건대, “지금은 사회주의 실험의 시기가 아니다.” 1930년대 이후 최악의 경제 불황을 겪고 있는데 말이다! 아나키스트들은 지금이야말로 정확히 그 시기라고 본다. 자유의지주의적 사회주의에 한정해서 말이다.

(또 다시) 불황을 겪고 있는 자본주의와 국가 사회주의의 실패는 명확한 교훈을 던진다. 사회민주주의자들은 신자유주의가 되었고(신노동당? 신대처주의겠지!) 스탈린주의가 붕괴한 지도 20년이 지났다. 스탈린주의는 국가 자본주의와 당에 의한 지도를 사용하여 자본주의라는 질병이 사회주의라는 약보다 더 매력적인 것으로 보이게 만들었다. 아나키스트들은 이에 대하여 무고하다고 자신해도 좋다. 바쿠닌과 그 동료들은 이 결과가 현실이 되기 수십년 전부터 이를 예견했으니까 말이다.

그렇다면 이제 대안에 대하여 말해보자. 이전에, 자본주의는 경제의 가장 최근의 형태임을 잊지 말자. 프루동에게 “정치경제학의 근본 해악은 일시적 조건, 즉 사회가 귀족 계급과 프롤레타리아 계급으로 나누어진다는 것을 최종적 상태로 단언하는” 것이다. 노예노동이 있었고, 농노들이 있었으며, 그리고 자본주의가 등장한다. 자본주의가 무엇인가? 프루동은 자본주의가 “우리가 지금 지나고 있는 시기, 임금노동이라는 특별한 성격으로 정의되는 시기”라고 말한다.

즉, 자본주의는 노동의 고용에 기반한, 노동(자유)의 부분을 사용자에게 판매하는 것에 기반한 경제체제라 하겠다. 아나키스트들에게, 이것은 잘 쳐줘야 “임금노예제”다.

아나키즘은 노동자의 연방을, 자유로운 노동을 원한다. 이는 노동하는 자가 그 노동을 통제하여야 한다는 것이다. 장기적으로 우리는 노동의 철폐(노동과 놀이가 같은 것이 되는) 것을 꿈꾼다. 크로포트킨을 인용하자면, 우리는 “모든 인민이 자유로운 노동, 즉 스스로의 노동과 자유를, 그것을 통하여 부를 축적하는 타인에게 팔지 않아도 되는 상황을 건설”하려 한다.

아나키즘의 기원

아나키즘은 도서관에 틀어박힌 사상가들의 작품이 아니다. 그 근원은, 크로포트킨이 그의 걸작 “현대 과학과 아나키즘”에서 강조한 것처럼, 노동계급 인민들의 착취와 억압에 대항한 투쟁과 자주적 행동에 있다.

우리는 더 나은 사회와 자본주의를 관념적으로 비교하지 않는다. 대신 우리는 자본주의 안에서 자본주의에 대항하는 투쟁에서 만들어질 새로운 세상의 구조를 바라보려 한다. 그렇기에 우리는 파업을 조직하기 위한 총회와 위원회들이 자유로운 사회에서는 생산을 조직하는 현장조직이 될 것이라 바라본다. IWW를 인용하자면, 옛 세상의 껍질 안에서 새로운 세상을 건설하는 것이다.

아나키즘의 여러 분파들

아나키즘(자유의지주의적 사회주의)에는 일반적으로 세 분파가 있다. 상호주의, 집산주의, 코뮌주의가 그것이다. 아나키즘적 조합주의는 목적이라기보다는 전술에 가깝고, 그렇기에 그 지지자들은 저 셋 중 하나를 지향한다. (일반적으로 이들은 아나키즘적 코뮌주의를 지향한다. 최초로 아나키즘적 조합주의 전술을 구상한 바쿠닌이 스스로를 집산주의자라고 자칭하였음에도 말이다.) 실천에 있어, 여러 영역들에서 인민의 의사와 마주한 조건에 따라 여러 방식들을 실험하게 될 것이다. 자유로운 실험은 자유의지주의 원칙의 기본이다.

이 세 분파가 특정 문제에 대해 다른 의견을 가지고 있다하더라도, 이들은 특정한 핵심 원칙들을 공유하고 있다. 만약 누군가가 어떠한 것을 “아나키즘”이라고 부르지만 이 중 하나라도 부정한다면, 우리는 그것이 아나키즘이 아니라고 말하면 된다.

첫 번째 원칙은 사적 소유가 아닌 점유의 원칙이다. 프루동은 <소유란 무엇인가>에서 자유 사회에서는 사용권이 소유권을 대체할 것이라고 말한다. 이는 자연스럽게 부의 평등한 분배를 의미하기도 한다. 두 번째 원칙은 사회화이다. 이는 작업장과 토지에 대한 자유로운 접근권을, 결과적으로 지주와 사용자들의 종식을 의미한다.(이는 “점유와 사용”이라고도 불린다. 세 번째 원칙은 자발적 조직, 혹은 생산자에 의한 생산의 자주통제다. 이러한 노동자 조직의 이름은 다양할 수 있지만(협동조합, 노동조합, 집단생산, 노동자 기업 등) 원칙은 동일하다. 마지막 핵심 원칙은 자유로운 연방이다. 이는 동적 경제에 필수적인 자유연합간의 자유연합에, 생산자간의, 공동의 이해관계에 기반한 협력적 연방간의 수평적 연결에 기반하는 것이다. 이는 탈중심화에 그 뿌리를 두고 있기도 하다.(자본주의 사회의 기업과 스탈린주의 사회의 국가 경제가 증명하듯, 중심화는 작동하지 않는다.) 이는 상향식으로, 위임되었지만 소환가능한 대의원들을 바탕으로 조직될 것이다.

바쿠닌은 “토지는 경작자에게, 농업 코뮌에게 속해야 한다. 생산의 도구는 노동자들에게, 노동자의 조직에게 속해야 한다”고 이러한 종류의 경제를 요약하였다. 자주통제적 사업장에서의 의사결정요인은 자본주의사회에서의 그것과 구조적으로 다를 것이다. 크로포트킨을 인용하자면, 제정신박힌 사회의 경제는 “인간의 필요에 관한 연구, 그리고 그것을 만족시킬 수 있는 경제적 수단에 관한 연구.”여야 한다. 오늘날 우리는 여기에 생태주의적 고려를 더해야 하며, 크로포트킨 역시도 이에 동의했을 것이다.(그의 고전 <농장, 공장, 작업장>은 분명히 생태주의적 관점을 가지고 있다.)

소유 비판

자유 경제에 관한 아나키스트의 상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아나키스트의 자본주의 비판을 이해할 필요가 있다. 잘 알려졌듯이, 프루동은 “소유는 도둑질이다”라고 주장했다. 그리고 이 말은 두 가지 함의를 가진다. 먼저, 지주들은 세입자들의 생활수단에 대한 접근권을 판매한다. 그렇기에 집세는 착취다. 다음으로, 임노동은 착취다. 노동자들은 임금보다 더 많은 일을 하게 된다. 프루동을 인용해보자.

“노동하는 자는 누구나 소유자가 된다. 이 사실은 현재의 정치경제학과 법학의 원리들 안에서 부정될 수 없다. 그리고 내가 소유자라고 말할 때, 우리 위선적인 경제학자님들처럼 봉급, 임금, 급료 등의 소유자들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내가 말하는 것은 자신이 창출하는 가치의 소유자들이다. 그 가치를 자신이 창출했음에도 불구하고 주인만이 그 혜택을 독차지하고 있지만 말이다. (...) 〈일하는 자는 심지어 자신의 임금을 받은 후에도, 자신이 생산한 사물에 대한 자연적인 소유권을 가진다.〉”

이는 프루동의 “소유는 전제주의다”의 근거가 된다. 다르게 표현하자면, 프루동은 소유가 위계적 사회 관계를 만들고, 이 권력구조는 소유자들이 노동자에게 갑질을 할 수 있게끔하고, 노동자들의 착취를 담보한다. 프루동을 다시 인용하자면,

“당신은 임노동자가 된다는 것이 무엇인지 아는가? 그것은 업무지시만큼이나 그 이상으로 자신의 선입견에 집착하는 사장 (...) 밑에서 일하는 것이다. 그것은 끊임없이 남들의 생각을 연구하면서 스스로는 아무 생각도 가지지 않는 것, 일용할 빵과 일자리를 잃을 두려움 말고 다른 자극제를 모르는 것이다. 임노동자는 그를 고용한 소유권자가 이런 연설을 하는 것을 듣는다. ‘당신이 해야 할 것은 당신과 조금도 관계없다. 당신은 그것을 감독할 것이 전혀 없으며, 당신은 책임지지 않는다.’”

결국, 전술하였듯, 소유권을 사용권으로 대체할 필요가 있다. 사적소유는 오직 사용하는 것에 대해서만 존치되어야 한다. 알렉산더 버크만을 인용하자면, 아나키즘은

“생산수단과 생산물의 사적소유를 철폐하고, 이를 통하여 자본주의적 기업을 철폐하려한다. 사적소유는 오직 사용하는 것에 대해서만 존치되어야 한다. 즉, 시계는 당신의 것이 될 수 있지만, 시계 공장은 인민에게 속해야 한다는 것이다. 토지, 기계, 다른 모든 공공시설물은 집단적으로 소유되어 살 수도, 팔 수도 없어야 할 것이다. 실질적 사용이야말로 유일한 명분으로 취급될 것이다. 소유가 아닌 점유를 실현할 것이다. 탄광 노동자들의 조직이 탄광을 책임질 것이다. 하지만 그들은 탄광을 소유하는 것이 아니라, 탄광의 가동위원회가 될 것이다. 철도노조가 철도를 운영할 것이고, 다른 산업에 대해서도 이와 같다. 공동체의 이익을 위하여 협력적으로 운영되는 집단적 소유가 이윤을 위하여 사적으로 구성되는 사적소유를 대체할 것이다.”

프루동은 이를 “주인이 없는 점유자들”이라고 요약한다.

사회화

모든 아나키스트들이 “사회화”라는 단어를 사용한 것은 아니지만, 이것은 자유 사회에의 필수적 기반이며, 당연하게도 이 개념은 아나키즘의 근간이다. 이 단계를 거쳐야만 생산수단에 대한 자유로운 접근이 담보되고, 결국 전반적인 자주통제가 가능해지기 때문이다. 엠마 골드만과 존 모스트가 주장하였듯, 사회화는 “논리적으로 모든 주인과 하인의 관계를 삭제한다.”

이는 아나키즘이 아나키즘이라 불린 순간부터, 아나키스트들의 입장이었다. 1840년 프루동은 “토지는 우리 생명의 보존에 필수불가결한 사물”이며, “따라서 공통의 사물이고, 따라서 전유될 수 없는 것”이라고, “모든 축적된 자본은 사회적 소유이므로, 누구도 배타적인 소유권을 가질 수 없다”고 주장했다. “농부는 그가 경작하는 토지를 전유하지 않”으며, “모든 자본은 (...) 집단적 노동의 결과물”이기에 “집단적 소유”가 되어야 한다. 당연하게도, 프루동은 “민주적으로 조직된 노동자 조직”을 주장했고, “조직의 규약 아래 부의 이전은 노동의 도구에 적용되지 않을 것이므로, 불평등의 원인이 될 수 없다.”고 주장했다.

경제학자 데이비드 엘러만이 설명한 것처럼, 민주적 생산현장은 “사회적 공동체이고, 생활의 공동체는 아니지만 노동의 공동체이다. 민주적 현장은 현장의 공화국, 아니 공동의 통치(res publica)를 건설하는 것이다. 생산의 궁극적 통제는 그 기업에서 일하는 인민들의 권리로 주어질 것이다. 이 분석은 기업이 사회화되면서도, 국유화되지 않는다는 의미에서 ‘사적인 것’으로 남을 수 있는지를 보여준다.”

자주경영

사회화의 논리적 귀결은 노동시장이 없어지는 것을 의미한다. 인민들은 단순히 가입할 생산자 조직을 찾을 것이고, 생산자 조직은 연대할 조직들을 찾을 것이다. 임노동은 과거의 것이 될 것이고, 그 자리는 자주경영이 대체할 것이다.

이는 “노동자 자주통제”라고 불리기도 한다. 혹은, 프루동의 말을 빌리자면, “산업 민주주의”이자 현장을 “노동자의 작은 공화국”으로 만드는 것이다. 크로포트킨은 자유의지주의적 경제는 “대지에서, 공장에서, 광산에서 일하는 이들의 조직이 스스로 생산의 관리자가 되는” 것에 기반해야 한다고 말한다.

이는 보통선거의 원칙(그리고 평등한 구조)에, 소환가능한 행정노동자에게, 육체노동과 지식노동의 결합에, 노동력의 분할이 아닌 노동의 분할에 기반해야 한다.

그렇기에 프루동은 작업장이 “작업에 참여하는 이들의 공동의, 불가분의 자산”이어야지, “임노동자의 육체와 정신을 착취하는 주주들의 집단”의 것이어서는 안된다고 제안한다. 이는 “조직에 가입한 모든 개인”이 “회사의 자산 모두를 가지”고, “모든 직위는 선출되어야 하고 구성원들에 의하여 승인되어야 하기에” “어떠한 직위라도 할 수 있는 권리”를 가져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아나키즘의 모든 분파들은 이러한 원칙을 내재하고 있지만, 그들 사이에는 분명한 차이가 있다.

상호주의

처음으로 이야기할 분파는 상호주의분파이다. 이 분파에서 가장 유명한 것은 프루동일 것이다.[1]

이 체계는 시장을 수인한다. 이는 자본주의를 내재하는 것은 아니다. 시장이 그 체제를 정의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자본주의가 발발하기 수천년 전에도 시장은 존재했다. 자본주의를 특징짓는 것은 상품의 생산과 임노동이다.[2] 이는 상호주의가 상품의 생산에 기반하고 있지만, 임노동은 자주경영과 협동조합으로 대체된 형태를 의미한다.

이는 분배가 필요에 의하여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이루어진 노동양에 의하여, 행위에 의하여 이루어짐을 의미한다. 노동자는 그 노동의 모든 생산물을 가져야 하지만, 이는 다른 협동조합원들의 수고에 대하여 보상한 이후에 그렇게 하게 될 것이다. 이는 협동조합이 투자하지 않을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협동조합은 세계 전체로서 그들의 집단적 수입의 얼마만큼이 개별 구성원들에게 분배되고, 또 얼마를 협동조합의 사용을 위해 남길 것인지를 결정할 것이라는 의미이다.

신고전학파 경제학자들은 협동조합이 높은 실업율을 낳을 것이라 주장한다는 것을 기억해보자. 하지만, 그 이데올로기가 항상 그러하듯이, 이는 거짓된 가정에 기반한 것이며, 결국 그 예측은 관측된 사실과 전혀 무관한 것이 된다.

자유 신용 역시 상호주의의 핵심 사상이다. 인민은행을 조직하고, 인민은행의 유지비는 이자(거의 0%의)를 통하여 확보하게 될 것이다. 이는 노동자들이 스스로의 생산수단을 만들 수 있게 할 것이다. 신고전학파 경제학은 상호금융이 신용을 창조함으로써 화폐공급을 늘리기에 인플레이션 문제가 발생할 수 있다고 말한다. 하지만 신용이 무작위로 생성되는 것이 아니라, 더 많은 재화와 용역을 생산하기 위하여 투입되는 “합리화” 과정을 거쳐 생산되기에, 이는 분명한 오류다. 그렇기에 자유 신용은 적은 재화에 기반한 더 많은 화폐를 의미하지 않고, 더 많은 재화를 생산하기 위한 화폐를 의미한다.

마지막으로, 농업-산업 연방에 대하여 이야기해야 한다. 프루동은 고립된 협동조합이 직면할 문제를 인지하고, 연대와 상호부조, 지지에 기반하여 위험을 절감하기 위한 연방을 조직할 것을 제안한다. 모든 산업이 상호연관성을 가지고 있기에, 노동자 조직들이 서로를 지지해야 한다는 것은 분명해보인다. 나아가, 이 연방은 시장 세력에 의하여 자본주의가 부활하는 것을 막는 방법으로도 적용될 수 있다. 또한 연방은 철도, 도로, 보건 등 공동체적으로 소유되어 노동자 협동조합에 의하여 운영되어야 하는 공공서비스를 운영하는 방식도 될 수 있을 것이다.

상호주의는 전략적으로 개량주의적이다. 상호주의는 자본주의를 대안기구와 경쟁이라는 수단을 통하여 대체하고자 한다. 소수의 아나키스트들이 이 관점을 지지한다.

집산주의

다음으로 설명한 아나키스트 분파는 집산주의다. 가장 유명한 집산주의자는 바쿠닌일 것이다. 집산주의는 상호주의와 유사하지만, 보다 덜 시장의존적이다.(하지만 여전히 행위에 의한 분배에 기반하고 있다.) 하지만 집산주의는 보다 코뮌주의적 요소들을 가지고 있으며, 그 지지자들 다수는 집산주의가 자유의지주의적 코뮌주의로 진화할 것이라 바라본다.

결국, 집산주의는 상호주의와 코뮌주의 사이의 어딘가에 있는 것으로, 두 분파의 요소들을 공유하고 있다. 그렇기에, 우리는 집산주의에 대해서는 더 논의하지 않을 것이다. 자유의지주의적 코뮌주의와 마찬가지로, 집산주의는 자본주의를 개량할 수 없다고 바라보는 혁명적 분파다.

코뮌주의

먼저, 코뮌주의는 맑스-레닌주의나 스탈린주의가 아니다! 그것은 국가자본주의이지, 결코 코뮌주의적인 것이 아니었고, 자유의지주의적 코뮌주의의 경우는 말할 것도 없다. 대부분의 아나키스트들은 자유의지주의적 코뮌주의자이며, 그 이론은 크로포트킨으로 대변된다.

상호주의나 집산주의와는 다르게, 코뮌주의는 시장을 상정하지 않는다. 코뮌주의는 화폐나 그 대체재(노동전표 등)의 철폐에 근간한다. 그렇기에 코뮌주의에는 임노동과 임금 체계가 모두 존재하지 않는다.(“역량에 따라 일하고, 필요에 따라 분배한다.”)

아나키즘적 코뮌주의는 집단소유의 개념을 노동의 생산물까지 확장한다. 이것은 우리가 칫솔을 공유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단지 모든 생산물을 필요한 모든 이가 자유롭게 이용할 수 있다는 의미이다. 크로포트킨을 인용하자면, “(국가 사회주의자들이) 지금까지 옹호한 수도승적, 군사적 코뮌(공산)주의가 아닌, 수확되거나 생산된 생산물들이 모두의 처분에 맡겨져 모든 사람이 원하는 만큼 가질 수 있는 자유가 있는 자유 코뮌주의”인 것이다.

아나키즘적 코뮌주의자들은, 화폐가 존재하는 한, 비자본주의적 시장에서 조차도 자본주의적 시장에서 발생하는 문제와 비슷한 문제가 발생할 것이기에, 화폐의 철폐를 요구한다. 소득은 필요를 반영하지 않으며, 정의로운 사회는 이 결핍을 인지해야 한다. 시장은 공공재나 효과적인 보건 등의 필요를 충족할 수 없다. 시장은 합리적 의사결정에 필요한 정보에의 접근을 막는다.(무언가의 가격이 5파운드라는 것은 그것이 얼마만큼의 오염을 만들어내는지, 그것을 만드는 노동 현장의 조건이 어떠한지를 알려주지 않는다.) 시장에서는 원자화된 개인의 행동의 결과로 인하여 집단적으로 비합리적인 행동을 하게 된다.(이를테면, 시장에서 살아남기 위한 경쟁은 사람들이 더 열심히, 더 오래 일하게 할 것이다. 그리고 이것은 과생산을 초래하고, 이러한 시장 신호에 반응하여 시장에 진입하는 기업들을 낳아 결국 공황을 초래할 것이다.) 이윤 추구는 불확실성을 증대시키고, 공황의 가능성을 증대시키며, 그 결과인 사회적 빈곤을 증대시킨다.

아나키즘적 코뮌주의에서의 자원분배는 가격의 비교를 통해서가 아니라, 재화의 사용가치와 상대적 희소성 모두를 비교하여 결정될 것이다. 사용가치는 긍정적 측면(얼마나 수요를 충족하는가)과 부정적 측면(어떤 자원을 사용하는가, 어떠한 오염을 초래하는가, 얼마나 많은 노동을 내포하고 있는가 등)을 동시에 고려할 것이다. 이를 통하여 총체적인 실질 비용에 대한 정보가 가격의 뒤에 숨지 않고 드러나, 그것에 관하여 논의하여, 합리적 의사결정을 하는 데에 사용될 수 있을 것이다. 희소성은 자신들의 생산역량과 주문의 양을 서로 소통하며 비교할 수 있는 노동조합이 판단할 수 있을 것이다. 노동조합이 더 많은 주문을 받을수록, 그 생산물의 희소성 지표는 올라갈 것이고, 이것을 바탕으로 다른 노동조합들은 해당 물질의 대체재를 찾을 수 있을 것이다.

근거

말은 쉽지만, 그저 희망찬 생각일 뿐 아닌가요! 라고 말할 수도 있겠지만, 자유의주주의적 경제 사상에는 실증적 근거가 차고 넘친다.

이를테면, 노동자 자주경영과 이윤 공유는 생산성을 증대시킨다. 노동자 운영 기업은 자본주의적 기업보다 더 생산성이 높다. 이 문제에 관한 226개의 연구 중 94%는 긍정적 효과가 있다는 결론을 내었다. 흥미로운 것은 노동자 소유 기업이 생산성에 끼치는 긍정적 효과를 극대화하기 위해서는, 의사결정 구조에 노동자가 참여할 수 있어야 했다는 것이다.

나아가 협동조합에는 임금과 처우의 격차가 크지 않다. 놀랍지 않은 사실은, 높은 수준의 평등이 생산성을 증대시킨다는 것이다.(노동자들이 타인을 노예화하거나, 타인의 노동을 착취하여 부유해지는 것을 선호하지 않기 때문이다.)

주식시장의 부재는 어떠한가? 주식시장이 실물경제에 끼치는 악영향은 더 말할 필요도 없다. 나아가, 주식시장에서 경영진과 주주들 간의 소통문제가 심각한지를 보라. 무엇보다, 주식시장이 장기적 성장보다 단기적 차익을 더 높게 평가한다는 것을, 그 결과로 특정한 산업에 대한 과투자를 초래하고, 결국 위험과 도박을 증대시킨다는 것을 생각해보라. 은행중심의 자본주의가 주식시장중심 자본주의보다 호경기-불경기 순환의 정도가 매우 덜 극단적이다.

몬드라곤과 같은 자본주의 하에서 성공한 협동조합들은 일반적으로 협동조합그룹을 구성하여 농업-산업 연방의 단초를 확인할 수 있다. 그리고 이들은 많은 경우 자체적 금융기구를 가지고 있다.(프루동의 사상이 정합적임을 보여준다 하겠다.)

그리고 세계의 다양한 사회혁명의 예시를 보라. 1936년 스페인 혁명의 레퍼런스를 들지 않고는 어떠한 아나키즘적 이야기도 완결적이지 못하다. 그리고 이 주제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스페인 혁명은 자유의지주의적 자주통제가 대규모로 이루어질 수 있다는 근거를 보여준다. 카탈로니아 산업의 다수는 성공적으로 집산화되었으며, 광범위한 토지는 집단소유와 집단통제의 원칙으로 경작되었다. 더 최근의 사례를 보자면, 아르헨티나에서 신자유주의에 대응하는 반란이 발발했을 때, 이는 문을 닫은 사업장을 확보하는 과정을 포함했다. 이 되찾은 공장들의 사례는, 사용자가 우리를 필요로 할 수는 있지만, 우리는 사용자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준다.

달성의 방법론

그렇기에, 자유의지주의적 사회주의의에 대한 열망과 달성 가능성이 전술한대로라고 할 때, 그것을 어떻게 달성할지에 대한 의문이 문제가 된다. 그리고 그 방법론 안에는 자본주의 안에서 조합을 건설하고, 지지하는 것이 포함될 것이다.(프루동 : “새로운 사회는 옛 사회의 심장에서 만들어질 것이다.”) 이는 사회화와 협동조합을 직장폐쇄, 구제금융, 국유화의 대안으로 선전하는 것 역시 포함될 것이다.

하지만 대부분의 아나키스트들은 이것이 저항의 문화를, 자본주의와 국가에 대한 집단적 투쟁을 조직하는 과업의 일부로 바라본다. 즉, 직접 행동(파업, 시위, 점거 등)을 조직하고, 모든 투쟁이 그 내부인들에 의해 자주적으로 통제되는 것을, 이 과정에서 모든 조직이 아래로부터 자주통제되는 것을 분명히 하는 목적의 일부 말이다. 이 목적은 인민들이 작업장을, 집을, 토지를 점유하는 것을 시작하게 하고, 결과적으로 사회화를 현실로 만들 것이다. 우리의 투쟁을 스스로 조직하는 과정에서, 우리는 우리 삶을 통제하는 방법을 배울 것이다. 현 체제에 대항하는 투쟁의 조직을 건설하면서 새로운 사회의 설계도를 그려낼 수 있을 것이다.

함께하면 우리는 세계를 바꿀 수 있다!

아나키스트 경제학

도입

경제학은 많은 경멸에 시달리고 있다. 그리고 이것은 정당하다. 말라테스타가 이야기하였듯, “성직자가 모든 것이 신의 뜻이라 설교하여 인간을 유순한 신민으로 만든다면, 경제학자는 모든 것이 자연 법칙이라 말하여 그렇게 한다.” 그렇기에 “누구도 빈곤에 책임이 없으며, 빈곤에 반하여 반란하는 것은 의미가 없다.” 프루동은 “정치 경제학은 가진 자들의 경제학이며, 사회가 필연적이고 유기적으로 빈곤을 생성한다는 이론의 적용”이라고 말한다 그리고 이것은 정당하다. 세계 곳곳에서 빈곤에 시달리는 인민들은 프루동에 동의할 것이다. “경제학자들은 사회의 적이다.”

흔한 대안들이 더 나쁜 것으로 드러난 것 말고는, 바뀐 것은 없다. “모든 시민들은 국가로부터 임금을 받는 고용인으로 바뀐다. 사회는 총체적으로 하나의 사무실이, 하나의 공장이 될 것이다.”는 레닌의 시각을 도출할 수 있는 것은 비-노동자뿐이다. 이러한 형태의 사회주의가 빈곤함은, 우리가 “총체적 경제를 우편 서비스를 따라 조직해야한다”는 레닌의 주장에서 총체적으로 드러난다. “우편으로 향하다(going postal)"이라는 표현이 왜 생겼는지를 생각해보자.[3]

크로포트킨이 오래 전부터 적었듯, 맑스주의자들은 “사회주의 국가라는 관념이 모두가 국가의 피고용인이 되는 국가 자본주의의 체계와 다른 것이 무엇인지 설명하려 하지 않는다.”

자본가들을 관료로 대체하는 것보다는 더 나은 미래상이 필요하지 않겠는가.

대안의 필요성

아나키스트들은 오랫동안 이러한 제한적 미래상에 대한 투쟁을 벌여왔다. 이를테면 엠마 골드만은 “실질적 부는 효용과 아름다움을 내포하고 있어, 이를 통하여 강하고 아름다운 육체와 영감을 주는 환경을 만들어낼 수 있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이러한 것을 경제학 교과서에서 찾을 수 있는가? 크로포트킨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경제학자들은 이윤, 지대, 자본에 대한 이자의 이름으로, 토지나 자본의 소유자들의 이익은 임노동자들의 저임금 노동에서 비롯할 것이라 말한다. ... 여기에 사회경제학의 핵심 주제인 ‘무엇을, 어떻게 생산할 것인가’라는 거대한 문제는 필연적으로 내재되어있다. 결국 모든 경제학 논문에서 가장 찾기 어려운 주제는, 인간의 필요를 만족하는 데에 필요한 에너지의 경제학의 구체적 형태가 된다.”

이는 사회주의가 과학을 넘어 자본주의와 부자를 옹호하는 이데올로기가 된 부르주아 경제학에 종언을 고할 것이라는 것을 의미한다. 또한 이는 경제학이 진정한 과학으로 태어날 새벽을 의미하기도 할 것이다.

아나키스트 경제학은 무엇인가?

그렇다면 아나키스트 경제학은 무엇인가? 나는 이것이 두 가지 의미를 가진다고 바라본다. 첫 번째 의미는, 자본주의에 대한 아나키스트적 분석과 비평이며, 두 번째는 아나키즘적 경제가 어떻게 기능할지에 대한 이론일 것이다. 이 둘은 당연히 상호연관성을 가지고 있다. 우리가 자본주의의 무엇에 반대하는가는 자유의지주의적 경제에 대한 우리의 상에 반영될 것이고, 자유로운 사회에 대한 우리의 희망과 꿈이 분석의 길잡이가 될 것이다.

하지만 아나키스트 경제학에 대하여 논의하기 전에, 비자유의지주의적 대안들에 대하여 다룰 필요가 있을 것 같다. 역사적으로, 사회주의 경제의 문제를 바라보는 데에는 두가지 방식이 있어왔지만, 두 방식 모두가 오류였다. 하나의 방식은 미래사회에 관한 구체적인 묘사를 제공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의 방식은 사회주의에 관한 짧은 언급만 하고 넘어가는 것이다.

미래 식당에서의 레시피는 다음과 같을 것이다...

첫 번째 부류의 사회주의자들에는 푸리에나 생시몽 부류가 있다. 이들은 상세한 계획을 제시했고, 곧바로 두 가지가 명확해졌다. 그들의 완벽한 공동체는 달성이 불가능하다는 것, 그리고 그들의 엘리트주의적 본석이다. 이들은 정말로 진지하게 그들이 가장 잘 안다고 믿었고, 그들이 “사회주의”라 칭하는 것에 대한 상에서, 민주주의와 자유는 그다지 중요하지 않았다. 프루동은 이 체제가 전제정이라고 공격했다. 이는 옳았다.

이들의 미래상은 그다지 열망할만하지도, 실천적이지도 않았다. 하지만 이를 떠나, 우리가 미래 사회에 관한 구체적인 묘사를 제공할 수 있다는 것에 함축된 것은 오류일 뿐이다. 이를테면, 아담 스미스는 자본주의가 어떻게 작동해야 하는지에 대한 구체적 모델을 제시하지 않았다. 그는 자본주의가 작동해온 방식에 대하여 묘사했을 뿐이다. 추상적인 모형이 등장한 것은 한참 뒤에, 신고전학파 경제학자들이 현 체제를 정당화하기 위하여 만들어낸 것이었다. 이들은 전후경제에서 세력으로서 최대치를 달성했고, 경제학자들은 불가능한 가정들에 기반하여 부적합한 모형들을 제시했다. 안타깝게도, 이러한 모형들은 지금까지, 그리고 아직도 사용되고 있으며, 현실의 경제와 현실의 인민들에게 끔찍한 것을 강요하고 있다.

우리는 신고전학파의 진실한 신도들에게 감명을 주기 위하여 이러한 것을 반복하지는 않을 것이다.

(최선의 경우) 불가능하거나, (최악의 경우) 국가 자본주의인 맑시즘

사회주의 경제학을 바라보는 다른 방식은 맑스와 연관된 것이다. 맑스는 사회주의에 관하여는 거의 쓰지 않았고, 그가 유토피아적 사회주의자들과 그들의 세부적 계획에 반대하였다는 것도 분명하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그가 남긴 계획에 대한 소수의 저작들은 사회주의의 골칫거리가 되었다.

그가 프루동의 시장사회주의에 대안으로 제시한 <철학의 빈곤>에서도 이 문제는 드러난다. 이 책은 단 세 줄로 요약할 수 있다. 이 책이야말로 구성의 실패에 관한 훌륭한 예시로서, 두 명 사이의 경제관계를 논의할 때에만 실현 가능한 것이다. 이 책은 수백만 사이의 경제관계를, 그 수백만이 구성하고 있는 생산물과 작업장에 대하여 논의할 때에는 철저히 실현불가능한 것이다. 그렇기에 이 책은 단순히 유토피아적이며, 맑스가 그의 경제학이 어떻게 작동하는지 설명하고자 시도해보았다면, 그것이 명확해졌을 것이다.

맑스는 <철학의 빈곤>에서 주장하던 즉각적인 (중앙집권적)공산주의를 금새 포기했고, <공산주의자 선언>에서는 국가자본주의라는 이행기를 주장했다. 국가자본주의는 “사회주의”가 서서히 자리잡아 자본주의적 구조 위에 중앙집중적으로 세워진 “사회주의”가 되기 위한 근간이 될 것이었다. 하지만 이 중앙 계획에 대한 옹호은 자본주의 사회에서 기업들이 그 규모를 어떻게 키우는 지에 대한 추정에 근거하여, 시장을 광범위한 의지적 의사결정으로 대체하는 오류에 기반하고 있었다. 자본주의 아래에서, 의사결정은 소수의 손에 맡겨지게 되는 것은 맞지만, 맑스는 대기업들에 의한 계획이 가능한 것은 그들이 단 하나의 요인, 즉 이윤에만 기반하여 있기 때문임에 대하여 의문을 가지지 않았다. 자본주의에서의 이러한 축소주의가 마치 중앙계획이 작동할 수 있을 것처럼 보이게 하는 요인이 된다.

또한 의사결정 계층이 이윤의 증대와 소수의 지배력 강화를 위하여 만들어낸 경제적 구조와 산업적 구조가, 자본주의가 거부하는 것을 지향하는 사회주의에 걸맞다는 신기한 우연이 놀랍지 않은가!

신고전학파 경제학과 마찬가지로, 이러한 오류적 관념은 그에 합당한 결과를 낳는다. 러시아 혁명 중, 맑스주의자들은 볼셰비키가 공장위원회가 주도하는 (불완전하더라도) 진정한 사회주의를, 그들이 자본주의로부터 물려받은 중앙집중적 산업구조를 건설하기 위하여 약화시키는 데에 있어 이데올로기적 기반을 제공하였다. 그리고 이는 경제와 사회주의 모두에게 재앙이었다.

현재를 분석함으로서 미래를 그리기

맑스주의적 관점이 오류라면, 우리는 미래를 현대 사회와 그 경향에 대한 분석에 근거하여 다시금 그려내야 한다.

나는 아나키스트들이 자본주의를 무언가 완벽한 모형에 추상적으로 비교하지 않으려함을 강조하려한다. 프루동이 그의 저서 <경제적 모순의 체계>에서 주장하였듯, 노동자 조직의 “현재형태”는 “불충분하며 이행기적이다.” 그는 이 지점에서 유토피아적 사회주의자들에 동의하면서도, 그의 자본주의 모순과 경향에 대한 분석과, 사회주의의 기반에서 그들의 상을 거부한다.

“우리는 계속해서 경제적 사실과 실천에 관한 학습을 계속하고, 그 의미를 탐구하며, 그 철학을 구성하여야 한다. 사회주의의 오류는 현실에 천착하지 않고 환상적 미래를 향해 나아가는 종교적 몽상에 있다...”

이 자본주의에 관한 분석과 비판은 긍정적 미래상에 반영된다.

이를테면, 프루동은 노동자들이 그들을 노동을 통제하고 생산을 위한 “집체적 힘”을 전용하는 사용자들에게 “스스로의 무기를 팔아치우고, 자유를 바쳤”기에 생산과정에서 착취당한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집단적 힘의 원리 덕분에 노동자들은 평등한 사람이고, 그 우두머리들과 같은 조합원이다.” “이러한 조직은 현실적이다. 그 조직에 참여하는 사람은 그러해야 한다.” “평의회에서의 설득력 있는 목소리”는, “적극적 요소”는 “평등”에 기반하기 때문이다. 이는 자유로운 접근성과 사회화를 의미한다. 그리고 이로서 노동자들은 작업장에 합류하는 즉시 “조합원의 권리와 특혜들을 누리게 될 것”이다. 이는 “정치경제학의 부정과 사유재산의 소멸을 포함하는 평등에 기반한 해결책, 다르게 표현하자면 노동자의 조직”을 건설할 필요성을 의미한다.

현재의 투쟁으로 미래를 건설하자

오늘날 우리는 오직 자본주의만을 분석하고, 그 움직임을 이해하고, 그에 내재된 미래지향적 요소들을 인지할 수밖에 없다. 우리는 두 가지 형태, 즉 자본주의에 내재된 물적 요소(대규모 생산 등)와, 자본주의에 반하는 요소(노동조합, 저항, 파업 등)을 본다.

이 중 후자는 아나키즘의 핵심이며, 아나키즘과 (일반적으로 전자를 강조하는)맑시즘을 구분하는 요인이다. 그렇기에 우리는 프루동이 1848년 혁명 과정에서, 바쿠닌이나 크로포트킨과 같은 혁명적 아나키스트들이 노동운동을 바라볼 때, 협동조합적 작업장과 공동신용을 지향한 것을 유념할 필요가 있다. 이를테면, 혁명적 아나키스트들은 “직종에 따라 조직된 노동자들이 산업의 모든 부문을 장악하고, 그 산업을 사회적 편익을 위하여 관리하여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리고 우리는 자본주의적 압제와 착취에 맞서 싸우는 파업을 위한 총회가, 쟁의대책위원회가, 노동조합총연맹이 미래의 사회주의 경제에서 사업장의 총회로, 위원회로, 연방으로 손수이 변할 수 있음을 본다.

이 관점은 사회주의가 어디로부터 오는지에 대한 이해를 제공한다. 사회주의는 자유를 위해 투쟁하는 압제당한 자들의 자기행동으로부터, 아래로부터 온다. 이는 결국, 자유의지주의적 사회주의의 기본구조는 노동계급 인민들이 착취와 압제에 반하여 진행하는 투쟁의 과정에서 건설된 조직임을 보여준다.

이에는 시간이 필요할 것이다. 크로포트킨이 강조하였듯, 아나키스트들은 “혁명이 일부 사회주의자들의 몽상마냥 한 순간에, 눈 깜짝할 새에 다가오리라 믿지 않는다.” 이는 그가 사회혁명이 마주하게 되리라 제대로 예견한 경제적 문제에 관해서는 특히 옳다. 그렇기에 크로포트킨이 주장한 바 “우리는 혁명이 공개적으로 코뮌주의적이거나, 실로 집산주의적인 성격을 그 반란적 서곡에서부터 드러낼 수 있기를 기다려야 하는가. 그것은 혁명의 사상을 한 번에, 모두 던져버리는 것과 같은 것이 될 것이다.” 그리고 이는 모든 혁명에서 관측될 수 있다. 심지어 스페인 혁명과, 그 과정에서 CNT의 조합원들에 의하여 건설된 집단생산은 아나키스트들이 계획한 것도, 원한 것도 아니었다. 오히려 이는 시대가 요하는 특정한 조건의 산물이었다.

(자유의지주의적) 사회주의의 벽돌들

그렇기에 아나키스트 경제학은, 혁명 이후, 아나키스트 경제가 발현하는 과정에서 발전할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여전히 그 기초에 대한 개론은 이야기할 수 있을 것이다.

아나키즘의 모든 분파들은 상당한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 프루동이 주장하는 바, “토지와 노동의 도구는 사회적으로 소유되어야” 하고, “민주적으로 조직된 노동자의 조직”이 “광범위한 연방”으로 단결하는 것은 핵심적인 상에 대한 훌륭한 요약이다.

이러한 경제는 사용권, 점유, 사회화가 사적 소유와 국가 소유를 대체하게 될 것이다. 생산의 자주통제 역시(크로포트킨이 항상 강조하는 것처럼, 노동자들은 “산업의 실질적 통제자가 되어야 한다.”) 이를 따를 것이다. 그렇기에, 산업/농업/공동체의 사회경제적 연방이 사용자와 그 이해관계, 그리고 사용자 그룹에 따라 구성되어야 할 것이다.

아나키스트 경제는 탈집중적 경제일 것이다. 크로포트킨이 주장한 바, “사회혁명으로부터 귀결할 경제적 변화는 매우 거대하고 심오할 것이어서, 하나의 개인, 혹은 여러 개인들이 새로운 사회형태를 상세히 말하는 것은 불가능한 것이다. 이는 오직 대중의 집단적 작업으로만 서술될 수 있다.” 이는 결국 참된 자치와 수평적 관계에 기반한 경제적 체들 간의 자유로운 합의(혹은 계약)의 필요성을 의미한다.

간단하게 말하자면, 생산은 탈집중화될 필요가 있고, 집단간의 합의로 대체될 필요가 있다. 집중화된 체는 주관에 따라 구성되는(사용가치는, 그 정의에 따라, 주관적일 수밖에 없다.) 특정한 필요를 충족할 수 없다. 또한 집중화된 체는 언제, 어떤 재화가 필요한지 인지할 수도 없다. 만약 그 인지를 시도한다해도, 결국 이들은 데이터의 늪에 빠질 수밖에 없다.

이는 개인과 작업장, 공동체 모두에 적용할 수 있는 것이다. 크로포트킨이 예견하였던 것처럼, “강력한 중앙집중적 정부가 사전에 계획한 수량 만큼의” 재화들이 “특정한 날, 특정한 장소로 보내어질 것을 명령”하고, “특정한 관료가 특정한 날에 그것을 특정한 창고에 적재하는 것”은 “올바르지 않을” 뿐 더러, “매우 유토피아적”이다. 실현가능하고 매력적인 사회주의는 인민의 “협동, 열정, 지역적 지식”을 필요로 한다.

이러한 체제는 적합한 기술에 기반할 것이다. 여기에서 나는 아나키스트들이 대규모 산업에 반대하지 않으며, 프루동으로부터 꾸준히 그 입장을 명확히 하여 왔음을 강조할 필요를 느낀다. 그렇기에 우리는 크로포트킨이 주장하는 바와 같이 “현대산업을 분석하여보면, 우리는 그 중 일부가 수천수백의 노동자들이 한 공간에 모여 협업하는 것을 필연적으로 요함을 알 수 있다. 거대한 철공소나 광산기업들은 필수적으로 이 범주에 속한다. 대양증기선은 마을 공장에서 만들 수 없다.” 자유로운 사회에서 산업의 규모는 객관적 필요에 의하여 결정될 것이다. 이는 이윤동기에 따라 결정되어 기술이 요하는 규모로 만족하지 못하는 경향이 큰 자본주의 사회에서의 그것과는 다를 것이다.

나아가 생산은 누적에 기반할 것이고, 분할에 기반하지는 않을 것이다. 업무의 분장이 분업을 대체하여 육체노동과 정신노동을, 산업노동과 농업노동을 조합하게 될 것이다. 농업과 산업은 자유 공동체에서 공존할 것이고, 인민들에게 다양한 종류의 노동을 제공할 것이며, 주문자와 생산자 사이의 분할을 없앨 것이다. 흥미로운 일을 할 수 있는 행운의 소수와 불결한 환경에서 지루한 일로 고통받는 다수의 분할 역시 종식할 것이다.

이는 물론 작업장의 환경과 노동 그 자체의 변혁을 내포하고 있다. 많은 사람들은 자유의지주의적 사회주의가 자본주의적인 산업구조와 노동의 방식을 가져와 내버려 둘 것이라 생각하는 듯 하다. 과연 사회혁명 이후에 노동자들이 그렇게 할까?

자유의지주의적 코뮌주의

다시 한 번, 이것들은 아나키즘의 모든 분파들에서 공통적으로 보이는 이론이다. 분파간의 핵심적 차이는 분배의 문제에 있다. 소비를 이루어진 노동에 기반하여 조직할 것이냐, 아니면 코뮌주의적으로 조직할 것이냐의 문제, 즉, 오래된 행위와 필요 논쟁이다.

대부분의 아나키스트들이 코뮌주의자임은 분명하다. 여기서 코뮌주의자(코뮤니스트)라는 것은 소비에트 연방에서의 그 공산주의자를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능력에 따라 일하고, 필요에 따라 분배한다”는 의미에서 그러하다. 대부분의 아나키스트들은 이것이 최선이라는 것에 동의할 것이다. 그 이유는 크로포트킨이 잘 설명하였기에, 굳이 여기에서 요약하지는 않겠다.

이러한 체제가 빠르게 달성될 수 있는가는, 얼마나 정교하게 작동할 것인가는 아나키스트 서클들에게 논의할 여지가 없는 것이었다. 자유의지주의적 코뮌주의 사회는 그 사회를 건설한 이들의 열망과, 그들이 마주하는 객관적 조건들에 기반하여 발전할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오늘날 그러한 체제가 가져올 당연한 문제들에 대하여 논의할 수 있고, 하여야 한다.

상호주의와는 다르게, 상품의 가격이란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이윤추구 동기는 경제적 공황을 가져오고, 자본주의 아래에서 불확실성을 더한다. 그리고 비자본주의적인 시장에서도 역시 많은 문제가 있을 것이라 보는 것은 합당하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시장가격은 경제적 의사결정의 이정표가 될 수 있다. 그 가격이 노동, 원자재, 생산 소요 시간 등 실질비용을 반영하는 이상(물론 그 과정에서 더 많은 것들을 무시하거나, 숨기지만 말이다.), 생산 상황의 변화를 반영하는 이상(이 상황이라는 것이 독점이나 이윤 등 자본주의적 조건에 의하여 왜곡된 것이라 해도) 말이다.

그렇다면 가격이 없이 자원을 분배할 수 있는 최선의 방법은 무엇이냐는 질문은 당연히 제기될 수밖에 없다. 하지만 이 질문은 당연하지 않다. 이를테면, 금과 납은 비슷한 사용가치를 가졌다. 왜 하나를 사용하고, 다른 것은 사용하지 않는가? 시장 때문이다.(금이 1kg에 100파운드이고, 납이 1kg에 10파운드라는 것은 무엇을 선택할지 고르는 것을 단순하게 만든다.) 그렇기에 자유의지주의적 코뮌주의 경제에서는, 인민들이 실질적인 비용과 생산의 조건에 대하여, 시장의 왜곡효과 없이 통지받아야 한다. 크로포트킨이 말하는 것처럼, “아직도 우리가 가격이라고 부르는 것을 그저 우리의 행동을 지도하는 맹목적 최고지도자로 받아들이는 것보다, 그 종합적 결과를 분석하는 것을 시작하지 못하였나?” 그렇기에 “우리는 가격을 분석”하고, “그 서로 다른 요소들을 구분”하여 우리의 경제적, 사회적 의사결정을 위하여 통지할 필요가 있다.

그렇기에 우리는 자유로운 사회의 연방적 구조를 통해 자원분배의 가이드라인에 합의할 필요가 있다. 이를테면, 의사결정의 다양한 요인들에 대한 가중치는 생산물을 만들어내는 각 단계의 비용-편익 분석을 통하여 만들어질 수 있다.(이전의 결정이 옳았고, 비용에 대한 소통이 이루어졌다는 전제로) 이는 객관적인 가격을(생산에 소요된 시간, 에너지, 자원) 반영할 수 있게 할 것이다. 하지만 수요와 공급의 변화는 어찌할 것인가? 이는 중요한 문제다. 자유의지주의적 코뮌주의 사회는 요구(수요)에 따라 재화를 생산(공급)할 것이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각각의 작업장들이 예상치 못한 상황들, 즉 생산이나 공급의 단기적 변화에 대비하여 재고를 유지할 것임은 상식적인 일이다. 더하여, 각 작업장들은 요구 와(혹은) 생산의 상대적 차이를 포함하고 있는 희소성 지뵤츨 가지고 있을 것이고, 이는 다른 작업장들이 대안을 찾을 수 있도록 이용될 수 있을 것이다. 그렇기에 만약 하나의 생산물의 공급에 차질이 생긴다면, 희소성 지표가 오를 것이고, 다른 이들에게 다른 작업장에 연락하라거나 대체제를 물색할 필요가 있음을 알릴 수 있을 것이다.

작업장들의 연방은 둘 모두의 변화를 점검할 방도를 찾을 것이다. 그리고 이로써 대규모 프로젝트에 대한 투자나 투자철회를 조직하게 될 것이다. 이는 공동체 내에서의, 이해관계자 집단과 사용자 조직과 연방에서의 논의에 기반하여 이루어질 것이다. 투자 역시 다른 층위에서 이루어질 것이다. 개별적 작업장들은 조합원들의 더 많은 자유시간을 위하여 생산 시간을 줄이고, 생산량을 늘리기 위하여 투자할 것이다.(그리고 이것이 창조적 작업과 생산성에 대한 진정한 인센티브가 될 것이다.) 연방 조직의 필요성은, 서로 다른 결정들이 서로 다른 층위에서 이루어져야 한다는 그 사실에 구체적으로 근거한다.

하지만 생산은 단순히 재화를 생산하는 것 이상의 의미를 가진다. 가격의 절감이나 기술적 가능성의 문제보다 더 중요한 것은 인간적인 문제다. 그렇기에 우리는 (이윤 극대화나 시간의 절감과 같은) 단일한 객관적 기준을 거부하고, 큰 그림을 보아야 한다. 자본주의가 “이것이 싼가?”에 기반하였다면, 자유의지주의적 경제는 “이것이 옳은가?”에 기반할 것이다.

결론

궁극적으로, 우리는 경제적 자유에 대한 자발적 흥미를 가지고 있다. 나는 사장의 노예가 되는 것이 어떻게 이기심의 예시가 되는지 이해하지 못한다. 하지만 부르주아 경제학은 그렇다고 말한다.

크로포트킨이 강조하였듯, “생산은 인간의 필요를 바라보지 않게 되었고, 완전히 잘못된 방향으로 향하고 있으며, 그 조직은 오류를 범하고 있다. 우리는 생산을 재조직하여 그것이 모든 필요를 충족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그리고 이것은 모든 인간의, 모든 유일한 개인의 필요를 말하는 것이다. 즉, “소비자”로서, 생산자로서, 공동체 구성원으로서, 생태계의 일원으로서의 사용가치를 말하는 것이다. 자본주의가 거부하거나, 타인의 비용을 대가로 부분적으로만 충족하는, 하지만 우리의 삶에서 필요한 측면들에 대한 것 말이다.

맑스주의자들과 달리, 우리는 우리의 현재 경제 구조가 계급위계 내의 이윤동기가 만들어낸 상처들로 가득함을 인지하고 있다. 그렇기에 우리의 단기적 목적은 자본을 수용하여 그것이 인간의 필요를 충족하게끔하는 것이라면, 우리의 장기적 목적은 산업과 산업구조를 변혁하는 것이다. 우리는 레닌이 말한 것과는 다르게, 자본주의 아래에서 “효율적인” 것이, 사회주의를 위하여 좋지 않다는 것을 인지한다.

먼저 언급하였던 것처럼, 아나키스트 경제학은 혁명 이후에, 아나키스트 경제가 만들어진 이후에 만들어질 것이다. 우리의 시야는 자본주의적 선입견에 둘러쌓여있기에, 우리는 그 결과를 예측할 수 없다.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계급과 위계의 철폐 위에 태어날 자유의지주의적 사회의 밑그림을 그려내는 것이다. 그리고 이 밑그림은 자본주의에 관한 우리의 분석과 비판에, 그에 대항한 투쟁에, 우리의 희망과 꿈에 기반할 것이다.

읽을거리

이 문건은 아나키즘 경제학에 대한 단편적 소개글에 지나지 않는다. 아나키스트 FAQ의 섹션 1은 이 문제를 더 자세하게 다루어, 자주경영, 사회주의, 시장의 문제, 탈집중화의 필요성 등을 다루고 있다. 수년전 나는 아나키의 경제학이라는 제목으로 발제한 적이 있다. 이 발제에서 나는 아나키스트 주요 분파들에 대하여 요약한 바 있다. 프루동의 상호주의는 <소유는 도둑질이다!>의 서문에서 논의되었으며, <기반을 닦다 : 아나키스트 경제학에 대한 프루동의 기여>에서 요약되었다. 아나키스트 FAQ의 섹션H는 맑스주의적 경제상의 문제들을 다룬다. 특히, 섹션 H.6은 자본주의적 기구를 도입하기 위하여 볼셰비키가 감행한 공장위원회에의 공격(크로포트킨이 당대에 썼듯, 우리는 “코뮌주의를 어떻게 도입하지 말아야할지를 러시아를 통해 배우고 있다”)을 다루고 있다. 그리고 만약 고유주의자[4]께서 이 글을 읽고 계시고, 내가 사용하는 바 자유의지주의라는 단어가 잘못되었다고 주장하신다면, 그 단어를 만들어낸 것은 우리 사회주의자들이었다고 말해두겠다.


[1] 경제학계에서, 이 체계는 “조합주의”나 “시장 조합주의”라 불리우기도 한다. 특정한 주제에 대해 거의 모르는 것은 이러한 오류적 글쓰기를 가능하게 한다.

[2] 엥겔스를 인용하는 것이 마음에 들지 않을지는 모르겠으나, “생산의 목적, 즉 상품의 생산은 생산수단에 자본의 성격을 가져오는 것이 아니다.” “상품의 생산은 자본 존재의 전제조건 중 하나이기 때문이다. (...) 생산자는 그가 생산한 것만을 팔기에, 자본가가 아니다. 생산자는 생산수단을 사용하여 다른 임노동자를 착취하기 시작하는 순간 자본가가 된다.” 엥겔스는 맑스가 <자본>에서 행한 분석을 반복하고 있다.(그리고 맑스는, 프루동의 소유와 점유에 대한 구분을 반복한다.)

[3] 역주 - 1986년부터 1993년까지, 미국의 우정노동자들은 다종다양한 사업장 내 총기사고에 연루되었다. 1997년, <상트페테르스부르크 타임즈>가 미국의 우정사업본부에 대해 평가하면서, 'going postal'이라는 용어를 사용하였고, 과도한 직장 내 스트레스로 인한 사업장 내 폭력사태를 칭하는 용어로 사용되기 시작하였다.

[4] 역자주 - 아나코-캐피탈리즘의 분파. 어떠한 도덕적 가치도 소유권에 우선할 수 없다고 주장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