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세현
동아시아 아나키즘, 그 반역의 역사
책을 쓰게 된 동기
언어학자이면서 아나키스트인 노엄 촘스키(Noam Chomsky)는 “아무도 아나키즘Anarchism이란 용어를 독점할 수 없다.”는 말을 남겼다. 그런데 하루하루 고된 삶을 이어가는 우리들에게 ‘아나키즘’이라는 단어는 어떤 느낌을 줄까. 조금은 음울한 표정으로 역사의 급류를 헤쳐가야 하는 비운의 운명을 안고 살아간 극소수의 지식인들만이 독점할 수 있는 말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을까. 이렇게 인식하게 된 데는 아나키즘을 ‘무정부주의無政府主義’라는 다소 과격한 말로 번역한 것도 한 몫을 할 것이다. 아나키즘이 정부나 국가에 대한 반대의 의미를 포함하고 있기는 하지만, 무정부주의라는 말은 아나키즘의 한 가지 특성만을 보여줄 뿐이다. 심지어 어떤 극소수 아나키스트들은 아나키즘 속에 과연 ‘무정부’ 같은 요소가 들어 있는지조차 의심하기도 한다.
그렇다면 아나키즘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한마디로 정의할 수 없다. 마치 빛이 프리즘을 통과하면 여러 가지 색깔을 보여주는 것과 같다. 아나키즘은 여러 가지 사상들이 복잡하게 결합하여 이루어진 것이므로, 하나의 체계로 쉽게 정리할 수는 없다. 심지어 어떤 연구자는 아나키즘을 이론 이전에 신념과 감정의 대상으로 연구해야 할 특수한 사상이라고까지 한다. 그래서인지 역사상 많은 아나키스트나 연구자들이 아나키즘에 대한 정의를 나름대로 내리고 있지만, 아직까지도 모두 공감할 수 있는 명쾌한 대답은 없다. 아나키즘이라는 빛의 파장이 이렇게 넓은 것이라면, 차가운 쇳소리를 내며 달리는 전철을 타고 가다 문득 대기업과 국가권력의 힘에 대해 알 수 없는 저항감을 느끼는 우리들 모두가 아나키스트는 아닐까. 어쩌면 아나키즘이란 우리가 살면서 느끼는 자유에 대한 열망 그 자체일지도 모른다.
내가 동아시아의 아나키즘을 쓰게 된 것은 동아시아 아나키스트의 극적인 삶을 알아보고 싶은 충동 때문이다. 이것은 내가 아나키즘에 처음 흥미를 느끼게 된 이유이기도 하다. “나의 양심은 나의 것이고, 나의 정의는 나의 것이고, 나의 자유는 최고의 자유”라고 선언했던 역설의 명수 푸르동(Pierre-Joseph Proudhon), 자유에 대한 열정을 안고 “파괴는 새로운 창조”라면서 바리케이드 위에서 반역을 꿈꾸던 바쿠닌(Mikhail Alexandrovich Bakunin), 민중은 “권력에 쉽게 굴복하지만 그렇다고 권력을 숭배하지는 않는다.”며 민중을 무한히 신뢰하고 사랑했던 크로포트킨(Pyotr Alexeyevich Kropotkin) 등 우리에게 잘 알려진 서양 아나키스트들의 삶은 한결 같이 매우 열정적이다. 이런 모습을 동아시아의 아나키스트에게서도 찾아 그것을 독자에게 소개하고 싶었다. 사형수의 신분에도 불구하고 죽음을 두려워하기보다는 동료를 먼저 걱정했던 고토쿠 슈스이(幸徳秋水), 폐결핵에 걸려 치료를 받아야 함에도 불구하고 육식이 인간의 폭력성을 부추긴다고 믿어 채식을 고집하다 절명한 스푸(師復), 일제의 침략에 맞서 비타협적인 행동으로 일관하다 형무소의 차가운 바닥에서 죽어간 신채호(申采浩) 등이 그러한 사례일 것이다.
그리고 아나키스트 개인의 인간적인 매력을 넘어, 우리가 살고 있는 동아시아의 근대화 과정에서 그들이 추구한 사상과 행동이 갖는 역사적 중요성을 짚어보고 싶었다. 나는 오래 전부터 중국 근대 아나키즘에 관심이 많았다. 그리고 중국의 사례를 연구하는 과정에서 아나키즘이 결코 시대의 이단이 아니라 당시 역사적으로 요구된 사상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이것은 일본이나 한인 아나키스트의 경우도 예외는 아닌 듯싶다. 앞서 언급한 고토쿠 슈스이의 제국주의에 대한 저항, 스푸의 전통에 대한 비판, 신채호의 민족독립을 위한 민중해방의 논리 등은 모두 아나키즘에 뿌리를 둔 사상이다. 그리고 이러한 문제들은 동아시아 근대사상사에서 가장 중요한 주제들과 맞닿아 있다. 여기서 우리는 동아시아 사회에 아나키즘이 수용되어 한때 광범위한 세력을 형성했다는 사실이 단순한 우연의 산물이 아니라, 동아시아 근대사회 내부의 절박한 시대적 요청에 의한 것이라는 실마리를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아나키즘이 우리에게 주는 현재적 의미를 헤아리는 것이 이 글의 마지막 목적이다. 사람들은 아나키스트를 풍차를 향해 돌진하는 돈키호테에 비유하곤 하지만 실제 아나키스트들은 대체로 고결한 인격의 소유자였다. 그들은 세상을 움직이는 것은 이름없이 역사의 저편으로 사라져버린 헌신적이며 용기 있는 수많은 사람들 때문이라고 믿었다. 그리고 그들의 이러한 낙천적인 삶의 이면에는 개인과 사회에 대한 진지한 고민과 날카로운 성찰도 담겨 있다. 인간에 대한 믿음과 권력에 대한 그들의 반대는 도덕적 가치 기준이 혼란한 현재의 우리들에게 양심의 소리에 귀 기울일 것을 가르쳐준다. 뿐만 아니라 아나키즘은 개인 문제뿐만 아니라 현대 사회 문제의 해결에도 적지 않은 영감을 줄 것이라 기대한다. 냉전체제의 해체와 전 세계의 자본주의화는 우리에게 민족과 국경을 넘어서는 새로운 패러다임을 요구하고 있다. 그런 의미에서도 인종과 지역을 넘어선 아나키즘의 국제적 연대정신은 재해석의 여지가 있는 것이다.
덧붙이자면, 일본 · 중국 · 한국의 아나키즘에 대한 과거의 연구는 주로 민족이나 국가의 틀에 제한해 그 운동을 정리함으로써 아나키스트의 국제주의를 이해하기에 무척 곤란한 점이 많았다. 이런 이유에서 나는 동아시아라는 좀더 넓은 범주를 가지고 아나키스트 운동을 비교, 정리해 아나키즘을 실감나게 이해하고자 했다. 그러나 막상 글을 맺고 보니 아쉬움이 많이 남는다. 가령, 아나키즘 운동이 왜 쇠퇴했는가 하는 문제는 무척 중요하지만 이 책에서는 간략하게 다루었을 뿐이다. 그럼에도 아나키스트들의 꿈과 희망, 그리고 그들의 좌절의 과정을 반추함으로써 우리들의 삶과 역사에 대한 이해를 넓혀보려 했던 필자의 의도가 독자들에게 다소의 공감이라도 얻을 수 있다면 그저 감사할 따름이다.
이 소책자의 많은 내용들은 일일이 주를 달지는 않았으나 각 지역(특히 일본과 한국) 아나키즘 연구자의 연구 성과의 덕을 크게 보고 있다. 주로 도움을 많이 받은 글로는 고마츠 류지(小松隆二, 일본), 곤도 겐지(近藤憲二, 일본), 장준(蔣俊, 중국), Dirlik(미국), 사가 다카시(嵯峨隆), 오장환(한국), 이호룡(한국) 등이 있다. 그리고 본문 가운데 담겨 있는 몇 가지 관점들은 평소 필자가 아나키즘과 관련해 동학同學들과 토론하는 과정에서 얻은 것들도 적지 않다. 그들 모두에게 고마움을 전하며 너그러운 이해도 구한다. 더욱이 이 글이 빛을 보게 해준 것은 책세상 편집부의 오랜 인내심 덕분 아닌가 싶다. 동학이나 선학先學들의 많은 혜택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글 가운데 나의 무지와 독단으로 말미암아 잘못된 내용들이나 겸손하지 못한 주장들이 있을 것이다. 이런 문제점은 독자들의 도움으로 빠른 시일 내에 고쳐지기 바란다. 마지막으로 최근 주변의 많은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꿋꿋함을 잃지 않고 계시는 부모님께 삼가 이 글을 올린다.
들어가는 말
서양의 고전적 아나키즘은 19세기 중반부터 20세기 전반까지 구미歐美 사회에서 풍미했으며, 주로 과학과 진화, 이성과 합리의 이름을 빌려서(혹은 그 반대의 입장에 서서) 강권적인 권위와 권력들 - 예를 들어, 국가나 정부, 종교나 교회, 군주나 부르주아, 또는 가부장제의 위계질서 등 -을 비판하고 부정했다. 그들은 이런 권위와 권력들은 불필요할 뿐 아니라 인간의 자유를 억압하는 것이라고 주장한 점에서 공통의 색깔을 가질 수 있었다. 그런데 이런 고전적 아나키즘에 대해 그 비판자들은 이 사상이 정부와 국가에 대한 철저한 파괴만을 주장하면서 허무주의와 유사하다고 보았고, 이들이 암살 활동에 적극 참여한 사실을 들어 테러리즘과 동일시하기도 했다. 나아가 모든 권위를 부정한다는 점에 주목해 아나키즘은 한낱 유토피아 사상의 하나에 불과하다고 규정했다.
하지만 이런 지적들은 아나키스트의 도덕적인 충동이나 건설에 대한 열정을 간과하거나 무시하고, 여러 정치파벌들이 흔히 채용하는 테러의 방법을 그들만의 책임으로 뒤집어씌우려는 책략에서 기인한 측면이 있다. 어쩌면 아나키즘의 공상성 역시 그 사상이 현실 사회에서 충분히 실험되지 않았다는 사실에 기초해 설명한 것인지도 모른다. 물론 아나키스트들 내부에서조차 적지 않은 이견이 존재했기 때문에 그런 오해를 증폭시킨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이제는 아나키즘의 부정적인 측면보다는 그들의 사상에 내재되어 있던 긍정적인 요소들을 탐색하는 것이 우리에게 좀더 생산적인 활동이 아닐까.
널리 알려진 바와 같이, 역사적으로 아나키스트는 마르크시스트, 볼셰비키, 마오이스트와 같은 사회주의의 여러 계파들과 함께 활동했으나 대부분 그들에게 억눌리고 그에 의해 제거되었다. 왜냐하면 아나키즘이 비록 공산주의와 마찬가지로 사회주의의 하나였지만 공산당과 같은 전위조직의 존재와 프롤레타리아 독재를 부정함으로써 공산주의자와 근본적으로 화해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또다른 아나키스트의 일부는 개인의 자유를 극대화하고 국가의 역할을 극소화한다는 점에서 자유주의에 접근하기도 했지만, 기본적으로 아나키즘은 현존하는 사회제도를 개혁하는 수준을 넘어서 그 사회의 근본 모순을 뿌리 뽑으려 한다는 점에서 자유주의자와도 어우러질 수 없었다. 그래서 민족주의와 국민국가를 화두로 삼는 20세기 국제사회에서 정치운동으로서의 아나키즘은 보통 스페인 내전을 전후하여 급속한 쇠퇴의 길을 걸었다고 설명한다.
그런데 흥미롭게도 20세기 후반에 들어와서 다시금 아나키즘의 부활을 점치는 사람들이 부쩍 늘고 있다. 이런 현상은 소련 및 동구 사회주의 붕괴와 아시아 사회주의의 존속 그리고 자본주의의 전 지구적 확산이라는 급격한 변화의 물결과 깊은 관련이 있는 듯하다. 즉 자본주의와 사회주의의 대결구도가 해체되고 제3의 길을 모색하는 과정에서 아나키즘의 부활 가능성이 제기되는 것이다. 최근 자주 논의되는 중앙집권주의에 대항하는 지방분권주의, 강권적 국가를 대체하는 지역공동체 추구, 대의제 민주주의를 불신하며 나타난 직접 민주주의에 대한 열망 등은 비록 아나키즘의 주장과 완전히 일치하는 것은 아니지만 그 정신과 무척 친근한 것임에는 틀림없다. 또한 포스트모더니즘과 같은 새로운 패러다임의 등장 역시, 아나키즘과 직접적인 관련성을 따지기에는 다소 모호할지라도 그 사유구조를 설명하는 과정에서 아나키즘이라는 용어가 매우 빈번하게 사용되는 것도 사실이다.
오늘날 새롭게 등장하고 있는 아나키즘은 고전적 아나키즘과는 달리 그 범위가 넓어지고 다른 사회운동과의 결합도 서슴지 않는다는 특징을 가지고 있다. 현대의 아나키즘은 고전적 아나키즘에서 말하는 무정부나 노동조합과 같은 무거운 주제에서 벗어나 21세기 정보산업사회에 걸맞은 여러 가지 변신을 시도하고 있다. 일부는 아나키즘의 환경친화적인 특성에 주목해 이를 발전시켜 환경운동이나 생태공동체운동을 펼치면서 에코 아나키즘Eco-Anarchism이라는 독자적인 영역을 만들어냈다. 다른 일부는 첨단기술 문제에 관심을 가지고 인터넷과 같은 정보통신 도구의 확산이국가의 경계를 허물어 전 세계 차원의 자유로운 인간관계를 구성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고 그런 사회를 열망한다. 또 다른 아나키스트들은 기존의 학교제도를 부정하고 이를 대체하는 자유학교 또는 대안학교라 불리는 교육운동에 관심을 가지고 있다. 그들은 노동과 지식의 결합이라는 아나키즘의 이상적인 교육관을 다시 한 번 실현시키고자 노력한다. 그 밖에도 과거의 무신론에서 벗어나 인간의 정신적 · 초월적 측면을 강조하는 사람들도 나타나고, 여성문제와 관련해 아나르카 페미니즘Anarcha-feminism을 제창하면서 동성애와 같은 사회 문제에 깊숙이 개입하는 사람들도 있다.
현대의 아나키스트는 고전적 아나키즘에서 강조했던 몇 가지 원칙들을 과감히 폐기하지만, 그 배경에는 아나키즘적 상상력을 극대화해서 21세기의 새로운 변화에 맞추려는 그들의 의지가 담겨 있다. 아나키즘의 발 빠른 변신은 어쩌면 그 사상에 내재된 고유의 탄력성 때문에 가능한지도 모른다. 지금으로서는 이러한 시도가 단지 하나의 실험으로 끝날지 아니면 새로운 모델을 만들어낼지는 단정 지어 말하기 어렵다. 왜냐하면 현실 사회에 엄연히 존재하는 국가 · 정당 · 정치의 존재를 부정하고 미래 사회에 대한 대안을 제시한다는 것은 여전히 쉽지 않은 문제로 비춰지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풍부한 ‘아나키즘적 상상력’은 21세기 우리의 문제들을 돌파하기 위한 값진 유산임에는 틀림없을 것이다.
이 소책자는 최근 아나키즘에 대한 관심 증가라는 흐름에 발맞추어 이 사회사상에 독자들이 좀 더 가까이 다가갈 수 있기 위해 쓴 글이다. 하지만 이 책의 주제는 기본적으로 현대의 아나키즘이 아니라 역사상의 아나키즘 문제이다. 그것도 동아시아의 세 나라, 즉 일본 · 중국 · 한국(여기서 일단 베트남이나 타이완과 같은 지역은 다루지 않는다)의 아나키즘에 한정해 그 사상과 운동을 다루고 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이 세 나라의 아나키스트 운동은 남아있는 관련 자료가 부족해서 그 실체가 제대로 드러나지 않았다. 아마도 아나키즘에 대한 부정적인 이미지로 말미암아 이 운동에 관한 기록물이 거의 보존되지 않았기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근래에 들어와 자료의 수집이 활발해지고 나라별로 아나키즘 연구가 꾸준히 진행되어 이제는 어느 정도 윤곽을 그릴 수 있는 수준에 다다랐다. 지금은 이미 3국 모두 자신들의 아나키스트 운동에 관한 몇 권의 연구서를 가지고 있으며, 이 글은 바로 그런 연구 성과를 바탕으로 동아시아의 아나키즘을 좀 더 입체적으로 기술하려는 것이다.
그렇다면 동아시아 아나키즘의 출발점은 대략 어디쯤일까? 서양 사회의 경우 고드윈(William Godwin), 슈티르너(Max Stirner), 푸르동, 바쿠닌, 크로포트킨, 톨스토이(Count Lev Nikolayevich Tolstoy) 등으로 대표되는 일련의 사상적 계보가 구성되어 있고, 그 구체적인 활동에 대해서도 많은 연구가 이루어졌다. 하지만 동아시아 사회의 경우는 아직까지 지적 계보조차 분명하지 않다. 단지 연구자들은 19세기 후반에 이미 서양 아나키스트 운동이 각 나라의 신문이나 잡지에 일부 소개되었고, 20세기 초반에 적지 않은 아나키즘 관련 서적들이 출판되었다는 사실에 주목해, 1900년대에 들어오면서 이미 동아시아 사회에 아나키스트가 존재했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아나키즘의 수용 과정은 사회주의의 수용 과정과 일치하며, 아나키즘이 일정한 사회운동 세력을 형성한 대략의 시점은 1906년 또는 1907년쯤이라고 보고 있다.
이 책에서는 20세기 전반기를 풍미했던 세 사람의 동아시아 아나키스트가 등장한다. 일본의 고토쿠 슈스이[1], 중국의 스푸[2], 한국의 신채호[3]가 바로 그들이다. 그들이 주인공인 이유는 우선 동아시아 세 나라, 즉 일본 · 중국 · 한국의 대표적인 아나키스트라는 점 때문이다. 하지만 이 이유의 전부는 아니다. 왜냐하면 일본에는 오스기 사카에(大杉栄), 이시카와 산시로(石川三四郎), 이와사 사쿠타로(岩佐作太郎)와 같은 저명한 아나키스트가 있고, 중국에는 리스쩡(李石曾), 류스페이(劉師培), 어우성바이(區聲白), 황링수앙(黃凌霜), 빠진(巴金)과 같은 걸출한 아나키스트가 있으며, 또한 한국에도 유자명(柳子明), 이정규(李丁奎), 정화암(鄭華岩), 박열(朴烈) 등과 같은 인물들이 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앞의 세 인물을 중심으로 글을 전개하기로 한 것은 그들의 행적이 나름대로 동아시아 아나키즘의 독특한 성격을 적절히 보여준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재미있게도 고토쿠 슈스이는 1900년대에, 스푸는 1910년대에, 신채호는 1920년대에 주로 활동한 인물이어서 대략 시간의 흐름에 따라 이들을 등장시켜 글을 전개하는 방식을 취했다. 아울러 오스기 사카에, 리스쩡, 류스페이, 박열 등도 글 가운데 제법 언급되었다. 이들은 대부분 비운의 죽음을 맞이한 사람들이다. (그런데 여기서 이들이 활동하던 시기가 해당 지역 아나키즘의 전성시기와 일치하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은 먼저 지적해두고자 한다.) 동아시아의 아나키스트 운동은 세 나라 모두 대략 1920년대를 전후해 가장 활발했다고 보는 것이 적절할 것이기 때문이다.
1920년대를 전후해 전성기를 누리던 동아시아 아나키스트 운동은 곧이어 새로운 경쟁자(볼셰비키)의 도전을 받았다. 이들은 한때 정치권력의 도전에 맞서기 위해 연합전선을 구축하기도 했지만 그것은 그리 길지 않았다. 그들은 자유연합이냐 중앙집권이냐의 문제를 놓고 아나키즘 · 볼셰비즘 논쟁이 일어나면서 서로 갈라섰다. 반드시 이 논쟁 때문에 아나키즘 운동이 몰락했다고 보기는 힘들지만, 이 논쟁을 전후해 그 운동이 급격히 약화된 것은 사실이다. 이른바 아나 · 볼 논쟁의 주요 내용은 표면상으로는 서양과 유사하지만 각 지역과 국가의 상황에 따라 나름대로 독특한 양상을 띠고 있었다. 이 글의 마지막에서는 이 세 나라에서 일어났던 아나 · 볼 논쟁을 소개하면서 아나키스트 운동의 쇠퇴 과정을 정리해보았다.
제1장 일본 : 천황제와 군국주의에 대한 비판 그리고 노동운동
1. 마르크시스트에서 아나키스트로 - 고토쿠 슈스이
일본이 자본주의가 채 발달하기도 전인 19세기 후반에 이미 서구의 사회주의를 들여왔다는 사실은 매우 흥미롭다. 70년대 초에 ‘코뮤니즘’이나 ‘소셜리즘’이란 용어가 등장했고, 80년대에는 사회주의와 공산주의를 소개하는 책자도 발행됐다. 이 현상은 메이지 정부가 위로부터의 근대화를 주도하는 과정에서 사회주의에 대한 예방책을 마련하기 위해 사회주의를 부정적으로 소개한 것이다. 그리고 유럽 유학 지식인들이 늘면서 일본 사회를 비판하고, 부르주아 민주주의를 소개하면서 사회주의를 조금씩 수용하기 시작했다. 이처럼 후진국에서 나타나는 사상의 조숙성 문제는 일본에만 적용되는 것이 아니다.[4] 중국에서도 아직 자본주의가 성숙하지 않았던 20세기 초반에 일부 진보적 지식인들과 유학생들이 사회주의를 받아들였다. 이때 사회주의는 유럽과 달리 자본주의를 옹호하는 정부를 타도하는 것이 아니라, 황제 지배의 전제군주제를 타도하기 위한 이론적 무기로 작용했다. 일본이 정부의 승인 아래 사회주의를 경계의 대상으로 소개했다면, 중국에서는 개명 인사들이 반체제를 위한 이념으로 사회주의를 받아들인 것이다.
동아시아의 사회주의는 자본가와 노동자의 대립 구도에서 싹튼 것이 아니라 서학西學이라는 새로운 사조를 수용하는 과정에서 섞여 들어온 것이다. 그리고 사회 내부의 필요와 맞물리면서 자리를 잡았다. 예를 들어, 일본에서는 여러 사회주의 파벌이 활동하는 가운데 아나키즘이 점차 독자적인 정치세력으로 성장했고, 중국에서는 아나키즘이 처음부터 가장 먼저 주도권을 쥐고 상당한 세력을 형성했다. 이처럼 사회주의든 아나키즘이든 서양의 근대사상이 동아시아 사회에 들어와 전개된 방식은 출발부터 서유럽과 크게 달랐다. 그러므로 구미와 동아시아 사회에 같은 사상이 존재했다고 해서 같은 역할을 했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태도는 위험하다.
동아시아 근대사회의 국가 간 세력 판도를 극적으로 바꾸어놓은 사건이 청일전쟁이라는 데에는 큰 이견이 없다. 이 전쟁을 전후로 중국 중심의 전통적 세계질서는 붕괴됐으며, 일본이 대표 주자가 되어 동아시아 국제질서를 새롭게 만들어가기 시작했다. 청일전쟁은 일본 정부가 추진한 메이지유신과 청 왕조가 추진한 양무운동이라는 근대화의 마지막 시험장이다. 여기서 승리함으로써 일본은 근대화에 대한 자신감을 얻는 것은 물론 중국으로부터 막대한 정치· 경제적 이권을 챙길 수 있었다. 거꾸로 중화의식의 몰락을 경험한 중국에서는 급진적인 개혁을 요구하는 소리가 높아졌고, 캉유웨이(康有爲)와 같은 변법파가 등장했다. 그런데 여기서 주목할 점은, 청일전쟁이 한편으로는 일본의 대륙 침략을 더욱 부추겼지만, 다른 한편으로 일본에서 사회주의 운동이 일어나는 계기를 마련했다는 사실이다.
청일전쟁 후 일본 자본주의는 급격히 발전해 산업자본을 확립했다. 이에 따라 자본주의의 폐해도 곳곳에서 나타났다. 노동자와 자본가의 대립이 표면화되면서 노동자들은 생존을 위해 갖가지 투쟁을 벌였다. 이런 노동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사회주의의 영향을 받은 단체들이 등장했다. 1897년에 사회문제연구회가 결성되어 노동 문제를 연구하기 시작했고, 머지않아 몇 개의 노동조합도 결성됐다. 그리고 노동 문제가 사회 문제로 자리 잡으면서 사회주의에 대한 관심이 높아졌다. 1898년에는 무라이 토모요시를 회장으로 하여 가와카미 키요시, 가타야마 센, 고토쿠 슈스이, 니시카와 코지로 등이 사회주의 연구회를 만들었다. 1900년에 이 연구회는 아베 이소오 회장이 이끄는 사회주의협회로 이름을 바꾸었다. 이렇듯 노동 문제 또는 사회 문제와 관련하여 몇 가지 단체가 조직과 해산을 반복하던 끝에 마침내 1901년 5월에는 사회주의협회를 기초로 사회민주당이라는 정당을 결성하기에 이르렀다. 이 정당은 아베 이소오, 가타야마 센, 가와카미 키요시, 고토쿠 슈스이, 니시카와 코지로, 기노시타 나오에 등 6명의 사회주의자가 발기했으며, 평등주의, 평화주의, 보통선거, 계급제도의 폐지 등을 주장했다. 하지만 사회민주당은 겨우 하루 만에 정부의 금지 명령을 받아 해체되었다.[5]
비록 사회주의 정당을 조직하는 데는 실패했지만, 정당에 참여했던 인물들은 책을 통해 사회주의를 널리 알렸다. 니시카와 코지로의 『사회당』과 『칼 마르크스』, 아베 이소오의 『사회문제해석법』과 『사회주의론』, 가타야마 센의 『나의 사회주의』, 고토쿠 슈스이의 『장광설長広舌』과 『사회주의 신수社会主義神髄』 등이 이때 나온 책들이다. 그 밖에도 당시 출판된 무라이 토모요시의 『사회주의』, 후쿠이 준조의 『근세사회주의』, 게무야마 센타로의 『근세무정부주의』와 같은 저작들도 일본 사회에 사회주의를 보급하는 데 크게 기여했다.[6] 그들이 소개한 사회주의는 체계적이지 못하고 잡다한 내용을 소개하는 수준에 머물렀지만, 초창기의 이런 현상은 자연스러운 것이다.
일본이 사회주의를 수용한 과정을 보면, 1902년에서 1904년 사이에 러시아의 나로드니키 운동과 허무당 활동을 활발하게 소개했다는 점이 눈길을 끈다. 특히 허무당과 허무주의를 소개한 것은 동아시아의 아나키즘 수용 과정에서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왜냐하면 아나키즘을 처음 접할 무렵에는 러시아에 풍미하던 테러리즘이나 허무주의를 아나키즘과 거의 같은 의미로 받아들였기 때문이다. 그런데 여기서 기억해야 할 사실은, 허무당원이 러시아의 니힐리스트만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인민 속으로’라는 구호를 만들어낸 러시아의 인민주의자들을 총칭한다는 점이다. 사실 러시아 인민주의자들의 범주는 폭넓다. 대체로 그들은 차르 정권에 맞서 정치혁명을 추구하기보다는 농민의 사회경제적 해방을 추구했던 인물들이다. 이 인민주의자들 가운데 바쿠닌파로 분류할 수 있는 아나키스트들도 다수 포함되어 있었다. 따라서 번역 과정에서 허무당원을 아나키스트와 동일시한 것은 부분적인 착오이긴 하지만 완전히 틀린 말은 아니었다.
일본 사회에 러시아 허무당원의 테러 활동이 소개된 것은 19세기 말 사회주의가 처음 들어온 시기와 일치한다. 그러나 이들의 활동을 단순히 외국의 신기한 사정을 넘어 진지한 문제로 인식하게 된 것은 20세기에 들어와서다. 일본인들이 테러리즘에 열광한 것은 아니지만 허무당원들의 활동은 일본에 거주하던 외국인 급진주의자들의 호기심을 불러일으키기에 충분했다. 더구나 이즈음 일본에는 러시아 혁명가들(많은 수가 허무주의자들)이 차르의 압제를 피해 망명 와서 반체제 활동을 하고 있었기에 남의 나라 일로만 여길 수도 없었다. 이들 러시아인은 중국인으 비롯한 외국 혁명가들에게 폭탄제조법 등을 가르쳐주기도 했다.
허무주의와 허무당원이 아나키즘과 아나키스트와 같은 것이라는 인상을 준 대표적인 저작은 1902년 당시 도쿄대학 학생이던 게무야마 센타로가 펴낸 『근세무정부주의』다. 이 책은 전편에서는 러시아의 허무주의를, 후편에서는 구미 여러 나라의 아나키즘을 다룸으로써 허무주의와 아나키즘을 같은 맥락에서 이해하도록 만들었다. 이 책은 광범위하게 유통되어 사회적으로 큰 영향을 미쳤다. 특히 동아시아 사회에서 아나키즘을 ‘무정부주의’라고 부르게 된 것도 이 책에서 비롯되었다고 보는 것이 통설이다.[7] 센타로 이전에도 이 용어를 사용한 예가 있기는 하지만, 이 책을 통해 아나키즘이 무정부주의란 번역어로 정착해 대중화된 것이다. 이 용어는 중국이나 한국에도 그대로 수용되어 동아시아 3국에서 널리 쓰이게 된다.
게무야마 센타로는 본디 아나키즘을 비판하기 위해서 『근세무정부주의』를 준비했다고 한다. 하지만 역설적이게도 이 책으로 말미암아 일본인들은 물론 일본에 거주하던 중국인들(어쩌면 한국인들도 포함될지 모른다)이 아나키즘에 큰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그런데 무정부주의라는 용어는 머지않아 동아시아 사회에서 아나키즘에 대한 잘못된 인상을 심어 적지 않은 문제를 초래하기도 했다. 무정부주의라는 번역어가 유통된 다음에는 아나키즘이 허무주의자의 암살이나 폭동과 동일시되면서 원래의 의미가 심하게 왜곡되었을 뿐만 아니라, 모든 정부나 조직을 부정하는 혼란과 폭력의 대명사가 된 것이다.[8]
일본 메이지시대의 사회주의자들 가운데 가장 대표적인 사람은 가타야마 센과 고토쿠 슈스이다. 가타야마 센은 기독교의 인도주의 입장에서 출발해 사회주의자로 변모한 이른바 기독교 사회주의자다. 그는 노동조합운동에 투신해 1897년 일본 최초의 근대적 노동조합을 만들기도 했다. 그 후 사회주의연구회와 사회민주당을 결성할 때에도 핵심적인 역할을 했다. 1903년에는 「노동세계」에 발표한 논문들을 모아 『나의 사회주의』라는 책을 펴냈다. 여기서 그는 의회주의에 기초한 사회주의를 주장했는데, 이 주장이 메이지 사회주의의 한 흐름을 형성한다.
비극적인 죽음으로 일본인들에게 깊은 인상을 남긴 고토쿠 슈스이는 동아시아 아나키즘을 서술할 때 가장 먼저 얘기해야 하는 인물이다. 메이지시대의 가장 대표적인 사회주의자이자 아나키스트이기 때문이다. 가타야마 센이 있다고는 하지만, 메이지시대의 사회주의는 고토쿠 슈스이를 중심으로 전개되었고, 그의 죽음으로 일단락되었다고 보아도 과언이 아니다. 따라서 고토쿠 슈스이의 삶의 궤적은 일본 메이지시대의 사회주의와 아나키즘의 전개 상황을 그대로 보여준다. 특히 그가 마르크시스트(정확히 얘기하면 사회민주주의자가 적당하다)에서 아나키스트로 전향한 것은 일본 사회주의 운동사는 물론 동아시아 아나키스트 운동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하는 중대한 사건이다.
고토쿠 슈스이(원래 이름은 고토쿠 덴지로)는 1871년 어느 지방현의 약재상 가정에서 태어났다. 태어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부친이 별세하고 불우한 어린 시절을 보냈지만 한학을 열심히 공부해 중국 고전에 상당한 교양을 쌓았다. 17세가 되던 1887년에는 상경해 자유민권운동에 참가함으로써 서양 부르주아 사상가의 저작을 접했다. 그는 나카에 초민과 같은 자유당 좌파의 전통을 이어받아 이상사회의 꿈을 키워나갔다. 특히 프랑스의 사회사상에 심취해 이 방면에 나름대로 정통했다. 1900년부터 1901년 사이에는 사회주의에 접근했고, 사회민주당 창립에도 참여했다. 그는 주로 「만조보万潮報」란 신문을 중심으로 사회주의 활동을 했는데, 1901년 이 신문에 기고한 글에서 “나는 사회주의자다”라고 선언함으로써 혁명가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사회주의자로서 고토쿠 슈스이의 초기 사상을 한마디로 요약하면 반전평화론이라고 할 수 있다. 그는 지구상의 모든 전쟁에 반대했고 각 나라의 군비 확장을 비난했으며 일본의 군국주의 정책에도 정면으로 대항했다. 또한 근대 시기 전쟁의 원인을 연구하는 과정에서 제국주의를 발견하고, 이를 분석하는 데 몰두했다. 1901년 「만조보」에 〈20세기의 괴물, 제국주의〉라는 글을 발표해 그 연구 성과를 알렸으며,[9] 다음 해에 출간한 논문집 『장광설』에서도 반제국주의 사상을 전개했다. 그는 이런 책들에서 역사 발전의 규율에 따라 자본주의는 반드시 사회주의로 대체된다고 주장하고, 자본주의의 한 형식인 제국주의는 모든 죄악의 근원이자 타도 대상이라고 단언함으로써 마르크시스트로서의 모습을 비교적 선명하게 보여주었다. 그의 제국주의 비판은 서양 열강뿐만 아니라 일본의 군국주의 경향을 겨냥한 것이기도 했다.
고토쿠 슈스이는 군국주의를 비판하면서 일본인의 애국주의도 서슴없이 비판했다. 그는 애국심이란 “국민의 허구와 미신의 결과”이며, 애국주의란 “야수의 천성이자 미신이요, 광란이자 허구이며, 호전적인 마음”이라고 주장했다. 그는 군국주의와 애국주의를 동전의 앞뒷면과 같은 관계로 보아 함께 부정했고, 세계주의에 기초해 민족과 조국을 초월한 보편적 인류애를 강조했다.[10] 이런 주장은 일본의 진보적 지식인들과 노동자들에게 반제투쟁의 이론적 근거를 마련해준 것이기에 의미가 크다. 고토쿠 슈스이가 사회주의자로서 펼친 이론적 탐색은 마침내 『사회주의 신수』(1903)라는 저작을 낳는다. 이 책은 앞서 말한 가타야마 센의 『나의 사회주의』와 함께 메이지시대 사회주의를 대표하는 양대 저작으로 꼽힌다. 고토쿠 슈스이의 침략적 제국주의와 배타적 애국주의에 대한 비판은 중국 문제에서도 나타난다. 그는 서양 열강의 중국 정책은 물론 일본이 대륙 진출을 위해 펼친 침략정책도 한 치의 양보 없이 비판했다. 뿐만 아니라 러일전쟁 시기에는 반전사상을 직접 실천에 옮김으로써 지행일치의 모범을 보였다.
「만조보」가 러시아에 대한 전쟁을 지지하는 쪽으로 태도를 바꾸자 고토쿠 슈스이는 1903년 11월 여기서 이탈해 사카이 토시히코와 더불어 ‘평민사平民社’를 조직하고 주간 「평민신문」을 창간했다. 이로써 그는 사회주의자로서 새로운 단계에 들어서게 된다. 평민사는 ⑴자유 · 평등 · 박애, ⑵ 평민주의, ⑶ 사회주의, ⑷ 평화주의, ⑸ 비폭력이라는 방침을 내걸고 독서회, 연구회와 같은 전국적인 조직망을 통해 러시아와의 전쟁을 반대하는 운동을 펼쳤다. 그들은 러시아와 일본이 대립하는 배후에는 정치가와 자본가의 음모가 숨어 있다고 폭로하고 전 세계 평민이 연대하는 반전평화운동을 제창했다.
이러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1904년 1월 러일전쟁이 일어나자 일본 열도는 전쟁 열기로 흥분의 도가니에 빠져들었다. 진보적인 일본인들조차 막상 전쟁이 일어나자 대부분 열렬히 전쟁을 지지했다. 하지만 고토쿠 슈스이와 사카이 토시히코 등은 여전히 「평민신문」을 중심으로 반전 논리를 폈다. 그들은 “군비와 전쟁은 오늘날의 국가가 자본주의 제도를 옹호하기 위해 만든 철의 장벽이며, 대다수의 인류는 이로 말미암아 엄청난 희생을 치르고 있다”고 지적했다. 그리고 이 전쟁에서 “일본이 조선, 만주와 시베리아를 얻게 된다면 이익을 얻는 집단은 정치가나 자본가 계급일 뿐이다. 지위나 자본이 조금도 없는 대다수 노동 인민은 결국 아무것도 얻을 수 없다”고 주장했다. 또 러시아 사회주의자들에게 군국주의에 반대하기 위한 반전 공동 투쟁을 제의해 일정한 성과를 올리기도 했다.[11] 이처럼 전쟁 중에도 「평민신문」이 반전의 필봉을 누그러뜨리지 않자 당국은 신문을 폐간해버린다. 이 시기 고토쿠 슈스이와 사카이 토시히코가 일으킨 반전운동은 일본 근대사에서 처음 전개된 조직적인 반전운동으로 높이 평가받고 있다.
러일전쟁이 한창일 때, 고토쿠 슈스이와 사카이 토시히코는 『공산당선언』 대부분을 번역해 「평민신문」에 발표하고 다음 해 책으로 펴낸다. 이 책은 사실상 『공산당선언』의 첫 번째 일본어 판본으로 일본 마르크시즘의 출발을 알린 이정표이다. 여기서 부르주아와 프롤레타리아라는 말을 자산계급, 무산계급이란 용어로 처음 번역했다고도 한다. 그 후 『사회주의 - 공상에서 과학으로의 발전』, 『마르크스전』, 『엥겔스전』 등이 차례로 번역 출간되었다. 얼마 후 일본에 머물던 중국인 아나키스트들도 고토쿠 슈스이의 영향을 받아 자신들의 아나키즘 잡지에 『공산당선언』 일부를 번역 소개했다. 중국에서 완역본이 나온 것은 1920년(천왕타오가 중국 공산당 창당을 준비하던 중 상하이에서 『공산당선언』을 완역 출간했다)인데, 재일 아나키스트들의 작업은 그 전에 나온 번역본들 가운데 대표적인 것이다. 사실 일본이나 중국에서 마르크시즘을 처음 소개한 사람들 가운데는 아나키스트가 많았다. 이는 초창기에 아나키스트들이 마르크시즘에 큰 거부감이 없었다는 것을 보여준다. 훗날의 일을 생각하면 역사의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한편 「평민신문」 폐간 직후인 1905년 2월, 니시카와 코지로가 번역한 책이 문제가 되어 필화 사건이 일어났다. 이때 고토쿠 슈스이는 인쇄인이란 이유로 체포되어 반년 가까이 감옥 생활을 하게 된다. 감옥은 언론을 통한 투쟁에 한계를 느낀 그에게 조용한 독서와 사색의 기회를 마련해주었다. 훗날 고토쿠 슈스이는 이때를 회고하며 “나는 마르크스파의 사회주의자로서 투옥되었으나 출옥할 때는 과격한 아나키스트가 되어 돌아왔다”고 말했다. 아마도 이때 크로포트킨의 아나키즘 사상을 본격적으로 접한 듯하다. 크로포트킨의 사상은 당시 세계에서 가장 영향력이 큰 아나키즘 사조 가운데 하나였다.
출옥한 지 얼마 지나지 않은 1905년 10월 중순, 고토쿠 슈스이는 돌연 미국 방문 길에 오른다. 어떤 사람들은 그가 천호아제를 자유롭게 비판하기 위해 미국으로 갔다고 말한다. 당시 일본에서는 천황제 지배 이데올로기가 꾸준히 강화되어 사회주의자들은 이 흐름에 어떻게 대처할 것인지 고심했다. 특히 천황 중심의 통치체제가 점점 군국주의로 치닫는 것을 우려하는 목소리가 높았다. 미국에서 고토쿠 슈스이는 혁명적 노동조합인 I.W.W의 사회주의자들, 주로 아나키스트 노동운동가들과 교류하면서 아나키즘에 한 걸음 더 다가섰다. 그 과정에서 당시 새롭게 대두된 반의회주의 경향을 흡수한 듯하다. 1906년 4월 18일, 고토쿠 슈스이는 캘리포니아주에서 대지진이 일어나 온 시내가 무정부적 혼란 상태에 빠지는 것을 목격한다. 이 돌발적인 사건을 계기로 고토쿠 슈스이는 마르크시스트에서 아나키스트로 극적인 사상전환을 하게 된다.[12] 구미 사회운동가와 접촉함으로써 아나키즘과 생디칼리슴을 수용한 그는 예정보다 빨리 귀국한다.
일본에서 아나키스트들이 집단적으로 출현한 것은 대략 1906년 무렵인 듯하다.[13] 고토쿠 슈스이가 미국에 체류하던 1906년, 일본의 사회주의 운동은 기독교 사회주의자들이 만든 잡지 「신기원」과 가타야마 센, 구츠미 겟손, 오스기 사카에 등이 참여한 잡지 「광光」이 주도하고 있었다. 여기서 구츠미 겟손은 고토쿠 슈스이와 더불어 일본 아나키스트 운동사에서 제1세대 지도자로 꼽히는 인물이다. 고토쿠 슈스이가 사회 문제에 관심이 많았다면 그는 개인 문제에 관심이 많았다.[14] 그리고 오스기 사카에는 고토쿠 슈스이를 이어받아 다음 세대 아나키스트 운동을 이끌며 아나키즘의 전성기를 구가한 인물이다. 이 시기에 사카이 토시히코가 「사회주의연구」라는 잡지를 만들어 마르크시즘과 아나키즘을 선전한 사실도 주목할 만하다. 이 잡지에 실린 글들은 재일 중국인의 잡지에도 일부 번역 소개되었다. 무엇보다 1906년에 일어난 가장 큰 사건은 2월에 ‘일본사회당’이 합법 정당으로 조직되어 일본 사회주의운동사에 한 획을 그은 일이다. 고토쿠 슈스이는 창당 시기에 미국에 있었지만 많은 사람들은 이미 그를 일본사회당 지도자의 한 사람으로 생각하고 있었다.
그런데 1906년 6월 23일, 고토쿠 슈스이는 귀국 환영회 자리에서 자신이 마르크시즘을 버리고 아나키스트가 되었다고 공식 선언함으로써 일본 사상계에 큰 충격을 안겨준다. 직접행동선언으로 알려진 ‘세계혁명운동의 조류’라는 연설을 통해서였다. 그는 이 연설에서 보통선거를 통한 권력 창출이라는 의회주의 노선은 사회혁명의 방법으로 무력하다고 말하고, 노동자의 직접행동인 총동맹파업을 통해 사회주의 운동을 전개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런 주장은 바로 아나르코 생디칼리슴Anarcho-Syndicalism(노동조합주의적 아나키즘)의 원칙에 바탕을 둔 것이다. 아나르코 생디칼리슴이란 아나키스트들이 혁명 수단의 하나로 생디칼리슴을 받아들인 것이다. 이 사상을 통해 아나키즘과 노동운동이 결합할 수 있었고, 그 후 아나키즘은 조직적인 대중운동을 펼쳤다. 사실 아나키스트들이 의회제도를 불신하는 것은 역사가 깊다. 프랑스 대혁명의 먼지가 채 가라앉기도 전에 이미 푸르동이 개인의 주권을 대표자에게 넘겨주는 행위는 주권을 상실하는 행위라며 의회제도를 거부한 바 있다. 그가 “보통선거는 반혁명적이다”라고 주장한 후 이런 전통은 계속되었다. 어쨌든 문제는, 고토쿠 슈스이의 폭탄선언으로 말미암아 갓 태어난 일본사회당에 분열의 기미가 나타났다는 사실이다.
1907년에 들어서자마자 평민사를 재건한 고토쿠 슈스이는 일간지 「평민신문」을 발행한다. 마침 「신기원」과 「광」이 폐간되었기에 이 잡지에 참여했던 사회주의자들의 도움을 받아 새로 신문을 펴낸 것이다. 「평민신문」 2월 5일자에 발표한 〈나의 사상 변화〉란 글에서 고토쿠 슈스이는 “솔직히 말하면 사회주의 운동의 수단 방법에 관한 나의 의견은 재작년 투옥 당시와 달라졌고, 다시 작년의 여행에서 크게 변했으니, 지금 수년 전을 회고하면 스스로 거의 딴 사람처럼 느껴진다”고 밝혔다. 그리고 “보통선거와 의회정책만으로는 진정한 사회주의 혁명을 달성할 수 없으며, 사회주의 목표를 이루기 위해서는 오직 일치단결한 노동자의 직접투쟁에 의존해야 한다”는 원칙을 다시 강조했다.[15] 이 글은 일본사회당 제2차 대회 직전에 발표했는데, 이미 당은 의회정책을 지지하는 쪽과 직접행동을 지지하는 쪽으로 분열하고 있었다.
1907년 2월에 열린 일본사회당 제2차 대회는 이른바 의회정책파와 직접행동파의 논쟁의 장이 됐다. 가타야마 센, 다조에 데츠지를 중심으로 모인 의회정책파는 제2인터내셔널 노선을 따라 의회주의 방법을 통한 사회주의 혁명을 주장했다. 한편 고토쿠 슈스이, 사카이 토시히코, 야마가와 히토시, 오스기 사카에 등이 이끄는 직접행동파는 의회 투쟁을 완전히 부정하고 총파업을 통한 직접행동을 주장했다. 투표에서 직접행동파가 압도적으로 승리하자, 일본 정부는 즉시 「평민신문」의 발행을 금지하고, 일본사회당을 해체했다. 그러나 이런 탄압 속에서도 직접행동파는 일본 사회에 아나키즘적 사회혁명을 성취할 것을 선언했다. 일본사회당이 분열한 후 의회정책파는 1907년 8월 사회주의동지회를 결성해 일요일마다 연구회를 개최하고, 주간 「사회신문」, 「도쿄사회신문」 등을 발간했다. 한편 직접행동파는 같은 해 9월 금요강습회를 결성해 금요일마다 강연회를 개최했고, 일간 「평민신문」, 「오사카평민신문」 등을 발간해 독자적인 활동에 들어갔다. 정부가 직접행동파에 대한 탄압 강도를 한층 높여 선전 활로가 봉쇄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청년 사회주의자 대부분은 고토쿠 슈스이의 주장에 동조해 금요강연회를 중심으로 모여들었다. 결국 직접행동파가 일본 사회주의 운동의 주류를 형성하게 된 것이다.
한편 일본의 사회주의 운동이 새로운 국면을 맞이할 즈음, 일본에 거주하던 중국인 및 한국인 혁명가나 유학생도 그 영향을 강하게 받았다. 그들은 단체와 잡지들을 만들어 사회주의를 적극 수용했고, 그 가운데 일부는 아나키즘을 받아들여 고토쿠 슈스이의 운동노선과 걸음을 같이했다. 이것이 동아시아 아나키스트 연대의 시작이다.
2. 동아시아 혁명가들의 사상 교류
고토쿠 슈스이는 사회주의에 입문할 때부터 중국 문제에 유난히 관심이 많았으며 동정적인 태도를 취했다. 1905년 러시아에서 혁명이 일어나자 그는 중국에서도 이와 비슷한 혁명이 발생할 것을 기대했다. 그는 중국이 병든 환자가 아니라 잠자는 사자라고 굳게 믿었으며, 머지않은 장래에 중국이 제2의 러시아가 될 것이라고 예측했다. 이런 관심은 아나키스트가 되어서도 이어졌다. 그러나 한국 문제를 보는 견해는 달랐다. 1900년 이전에 고토쿠 슈스이는 일본의 한국 침략을 지지했다. 그러다 사회주의자였던 「만조보」 시절에 생각을 바꾸지만 정부 정책에 대한 비판에는 여전히 미온적이었다. 하지만 평민사 시절 이후 즉 아나키스트가 된 다음에는 일본의 한국 침략을 본격적으로 비판한다. 아마도 정보가 부족하여 일본을 한국의 침략자로 인식하는 데 시간이 걸렸던 것 같다.[16]
아나키스트가 된 고토쿠 슈스이는 중국과 한국을 침략하는 일본의 군국주의 정책에 반기를 들고 일본에 거주하던 중국인과 한국인들에게 우호적인 태도를 보였다. 그는 특히 중국의 혁명가들과 긴밀한 협조 관계를 구축하려 했다. 이미 재일 중국 유학생은 만여 명을 넘어섰고, 그들이 주로 거주하던 도쿄 지역은 일본 사회주의자들이 가장 활발하게 활동하는 곳이었다. 많은 중국 유학생과 혁명가들은 일본 사회주의자들의 정치집회에 참가했으며, 일부는 고토쿠 슈스이와 직접 교류했다. 중국동맹회 회원이었단 장타이옌(章太炎), 장지(張繼), 류스페이, 허쩐(何震) 등이 대표적인 인물들이다. 이들은 1907년 초부터 고토쿠 슈스이와 만나면서 그의 영향 아래 자연스레 아나키즘을 받아들였다. 같은 해 고토쿠 슈스이는 「평민신문」에 쓴 글에서 일본인 혁명가와 중국인 혁명가의 결속을 다지고, 나아가 동아시아 여러 나라의 사회주의자들이 연대할 것을 촉구했다. 그의 바람은 곧 이루어졌다. 중국동맹회의 주요 지도자인 장타이옌이 이 제안에 호응해 국제적인 단체를 조직하려 한 것이다.
1907년 4월(?) 일본, 중국, 인도, 필리핀, 베트남 등의 혁명가들은 도쿄에서 ‘아주화친회(亞洲和親會)’라는 단체를 만들었다. 이 단체는 동아시아에서 처음으로 반제국주의를 목표로 모인 국제조직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남아 있는 자료가 많지 않아 구체적인 규모와 활동을 파악하기는 어렵다. 지금까지 알려진 바로는 일본에서는 금요강습회파의 고토쿠 슈스이, 야마가와 히토시, 오스기 사카에 등이 참가했고, 중국에서는 중국동맹회 회원인 장타이옌, 장지, 류스페이 등이 참가했다. 그리고 인도의 망명객과 다른 나라의 일부 혁명가들이 참여했으며, 장타이옌을 회장으로 해서 인도인회관 등에서 모임을 가졌다고 한다.[17]
다행히 장타이옌이 만든 것으로 보이는 〈아주화친회약장〉이 남아 있어 이 단체가 추구한 바를 조금은 알 수 있다. 이 문헌을 보면 아주화친회는 우선 제국주의 반대 투쟁을 제창하면서 민족의 독립과 해방을 첫 번째 과제로 삼고 있다. 그리고 이런 과제를 이루기 위해 민족을 초월하는 아시아인의 국제적 연대를 강조하고 있다. 약장은 “아시아인으로 침략주의를 주장하는 자를 제외하고, 민족주의 · 공화주의 · 사회주의 · 무정부주의자를 불문하고 모두 입회할 수 있다”고 규정하고 있다.[18] 제국주의에 반대하는 세력이라면 사상에 관계없이 수용하려는 의지가 인상적이다. 특히 사회주의자 단체가 민족주의자의 참가를 허락하고 있다는 점이 두드러지는데, 아마도 각 나라의 특수한 사정을 고려했기 때문으로 보인다. 물론 민족주의자의 범주에 침략적 민족주의자는 들어가지 않는다. 아주화친회는 순수한 아나키스트 조직이 아니라 진보적 인사들의 연합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책임자를 따로 두지 않고, 가입과 탈퇴가 자유롭다는 규정으로 보아 아나키즘의 자유연합 정신이 짙게 스며 있었음은 분명하다. 활동 기간은 18개월 정도로 추측한다.
그렇다면 아주화친회에 한국인은 없었을까? 고토쿠 슈스이나 오스기 사카에는 1900년대에 이미 일본에 한국인 사회주의자가 있었다고 말한다. 그런데 믿을 만한 한 일본인의 회고를 보면, 한인 혁명가들은 일본인이 참가한다면 자신들은 아주화친회에 참가하지 않겠다는 뜻을 밝혔다고 한다. 이 말대로라면 강렬한 배일 감정 때문에 일본인과의 공동전선을 거부한 것이다. 현재로서는 당시 한인의 활동을 말해주는 특별한 기록이 남아 있지 않기 때문에 이 회고에 의지해 생각할 수밖에 없다. 만일 이 시기에 한국인 아나키스트가 있었다면 그들은 아마도 친목회 중심의 개인적인 차원에서 아나키즘을 수용하고 아직 조직적으로 활동하지는 못했을 것이다.
아주화친회와 같은 시기에 ‘사회주의강습회’가 창설된 것도 주목할 만한 또 다른 사건이다. 이 단체는 1907년 6월 고토쿠 슈스이의 금요강습회의 영향을 받아 중국인 혁명가 장지와 류스페이 등이 만든 아나키즘 단체이다. 그 구성원은 아주화친회와 거의 일치하며, 일본 쪽 협력자 역시 고토쿠 슈스이를 비롯한 일본인 아나키스트들이었다. 이 단체는 파리에서 조직한 ‘세계사世界社’와 더불어 중국 최초의 사회주의(아나키즘) 단체였다. 따라서 그들이 발간한 「천의」는 같은 시기 파리에서 펴낸 「신세기」와 더불어 중국 최초의 사회주의(아나키즘) 잡지다. 류스페이가 이 잡지에 쓴 〈아주현세론〉을 보면 고토쿠 슈스이처럼 반제국주의와 아시아 연대론을 제창하고 있어 흥미롭다. 그는 이 글에서 중국의 독립을 맨 앞에 놓지만 중국 혁명의 문제를 사회혁명의 범위 안으로 흡수함으로써 편협한 종족주의의 한계를 벗어나 있다.
당시 장지나 류스페이 등 중국의 청년 급진주의자들은 중국동맹회의 정치 노선에 불만이 많았다. 그들은 동맹회가 공화혁명을 주장하지만 실은 종족주의 혁명의 수준을 넘지 못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이를 대신할 새로운 혁명이론을 모색했는데, 그것이 바로 아나키즘이었다. 이 단체의 설립 목적에 “중국인들은 단지 민족주의만을 알았지 민생의 고통을 살피지 않아 근본적인 혁명 방법을 찾지 못하고 있다. 마땅히 사회주의를 연구해야 한다”는 구절이 있듯이, 그들은 기존의 민족주의 혁명 노선에 부정적인 태도를 분명히 했다. 고토쿠 슈스이는 사회주의강습회의 첫 번째 창립 모임에서 초청 강연을 하여 중국인들과의 유대를 과시했다. 그 후에도 일본인 아나키스트들은 사회주의강습회에 꾸준히 참석해 강연을 하는 등 활발하게 사상을 교류했다.[19]
중국의 청년 혁명가들이 고토쿠 슈스이의 영향을 받아 아나키즘 사상을 받아들이자 쑨원이 이끄는 중국동맹회에 분열이 일어난다. 고토쿠 슈스이의 직접행동론이 일본 사회주의 운동의 분화를 촉진했듯이 중국 혁명가들이 아나키즘을 수용함으로써 동맹회가 분열하게 된 것이다. 중국인 아나키스트들은 더욱 근본적인 사회혁명을 추구하기 위해 중국동맹회를 개조하려 했다. 그들은 쑨원이 일본 정부에 의해 국외로 추방되자 그 틈을 이용해 동맹회의 주도권을 장악하려 했다. 일부 동맹 회원의 반대로 이 시도는 실패했지만, 일본의 아나키스트들은 이 사건을 중국 혁명이 이론적으로 성숙하는 과정의 하나로 이해했다. 고토쿠 슈스이가 제창한 동아시아 아나키스트들의 연대는 그 후에도 계속되었다. 사회주의강습회와 「천의」는 중국 아나키즘의 출발점 가운데 하나이므로 다음 장에서 다시 다룰 것이다.
한편 고토쿠 슈스이는 1907년에 아나르코 생디칼리슴의 원칙에 따라 직접행동론을 주장하긴 했지만 정당 문제나 선거 문제에는 뚜렷한 관점을 세우지 못했다. 나아가 아나키즘 사상의 주요한 특징인 국가권력 부정에 대해서도 충분한 이론적 뒷받침이 없었다. 다시 말해 아나키즘과 마르크시즘의 주요 분기점인 혁명 후의 과도기 문제, 즉 프롤리테라이 독재 문제 등에 대한 명확한 부정에는 아직 이르지 못한 것이다(일본 내 중국인 아나키스드들도 같은 한계를 안고 있었다). 아마도 마르크시스트에서 아나키스트로 전화하는 데에는 시간이 필요했으리라. 그는 크로포트킨의 『빵의 쟁취』를 번역하면서 이와 같은 이론적 한계를 극복한다. 이 책은 공동소유, 공동생산, 공동소비를 내건 아나키즘적 공산주의를 설명한 책으로, 1909년 1월에 일본어판이 발행되었다.
여기서 동아시아 아나키스트의 사상적 지주라고 할 수 있는 크로포트킨의 사상을 잠시 살펴보자.
크로포트킨(1842~1921)은 19세기 후반에서 20세기 전반에 걸쳐 전 세계에 영향을 미친 아나키즘 이론가이자 활동가이며, 국제적인 지리학자이기도 하다. 그는 1880년대부터 정력적으로 아나키즘 선전 활동을 시작해 광범위한 저작을 남겼다. 특히 1883~1886년 프랑스 감옥에서 저술한 『빵의 쟁취』(1892)와 『전원 · 공장 · 작업장』(1899)이 대표작이다. 그 후 영국에서 『현대과학과 아나키즘』(1901)과 『상호부조론』(1902)[20] 등을 출판했다. 그의 사상은 ‘상호부조론’이란 제목에서도 보듯 상호부조주의라고도 불린다.
크로포트킨류의 사상을 두루 일컬어 아나르코 코뮤니즘Anarcho-Communism(공산주의적 아나키즘)이라고 하는데, 이 용어는 크로포트킨의 동료이자 추종자인 엘리제 르클뤼(Élisée Reclus)가 처음 사용했다고 알려져 있다. 그들은 가족 · 종교 · 국가와 같은 권위가 소멸하고, 개인의 자유와 욕구에 따라 생활하는 유토피아를 꿈꾸었다. 그들은 국가 대신 코뮌을 단위로 하는 자유연합 사회를 희망했다. 이 사회는 ‘능력에 따라 일하고, 필요에 따라 소비하는’ 원칙이 통하는 사회였다. 그리고 사유재산을 철폐하여 모든 재화를 코뮌이 공동으로 소유하며, 도시와 농촌이, 공업과 농업이 절묘한 조화를 이루는 분권 사회였다. 그들은 개인이 창의성을 마음껏 발휘하고, 상호부조의 정신이 충만해 즐거운 노동이 가능한 곳, 또한 불평등한 교육이 낳은 정신노동과 육체노동의 차별이 사라진 그런 세계를 꿈꾼 것이다.
크로포트킨은 본디 자연과학자라서 그런지 자신의 사상을 과학적 아나키즘이라고 주장하기도 했으며, 아나키즘 이론을 집대성하기 위해 노력했다. 어떤 사람들은 그가 바쿠닌의 정신을 이어받으면서도 바쿠닌의 파괴의 이론을 건설의 논리로 바꾸어놓았다고 평가하기도 한다. 크로포트킨의 사상은 유럽뿐만 아니라 동아시아에도 아주 큰 영향을 미쳤다. 고토쿠 슈스이, 오스기 사카에, 리스쩡, 스푸, 신채호 등 이 책에 등장하는 동아시아 아나키스트들 대부분이 크로포트킨주의자라고 할 수 있다.
왜 크로포트킨의 사상이 동아시아 사회에 가장 큰 영향을 미쳤는지 이해하려면 좀더 친절한 설명이 필요하다. 우선 그의 아나르코 코뮤니즘이 당시 세계에서 가장 널리 유행한 아나키즘 이론이자 운동이었다는 사실을 지적할 수 있다. 따라서 동아시아인들도 그의 이론을 자주 접했을 것이다. 다음으로 사상의 친근성을 들 수 있다. 러시아의 풍토에서 싹튼 크로포트킨의 사상은 동아시아의 정치 · 문화 · 환경과 비슷해 받아들이기가 쉬웠다는 얘기다. 예를 들어, 윤리학이 중심에 있는 크로포트킨의 사회주의 이론은 유학 중심의 윤리정치를 추구한 동아시아의 전통과 매우 가깝다. 더욱이 크로포트킨의 사상은 과학적 연구 성과에 바탕을 둔 보편성을 강조함으로써 군국주의로 나아가던 일본뿐만 아니라 전제군주제가 남아 있던 중국이나, 심지어 일제의 침략에 시달리던 한국에서도 받아들일 만했다. 특히 피압박자의 처지에서 볼 때 국제 연대라는 사상은 새롭고 매력적인 흐름이었음이 틀림없다.
그렇다면 아나르코 코뮤니즘은 고토쿠 슈스이가 미국에서 영향을 받은 아나르코 생디칼리슴과는 어떻게 다른가? 아나르코 생디칼리슴은 아나키즘과 생디칼리슴이 결합한 것으로, 생디칼리슴에 자유연합 사상이나 강권을 부정하는 요소가 있다는 사실에 주목한 아나키스트들이 이 사상을 아나키즘에 접목한 것이다. 아나르코 생디칼리스트들은 노동조합을 무기로 체제를 타도하고, 혁명이 성공한 후에는 정부를 생산과 분배를 담당하는 기관으로 바꿈으로써 무계급 · 무국가 사회를 만들려고 했다. 이 사상은 프랑스에서 등장해 남유럽 지역으로 확산되었으며, 곧 국제적인 운동으로 성장했다. 아나키즘 연구자들은 생디칼리슴을 통해 아나키즘이 노동운동으로 부활했다고 평가하기도 한다.
아나르코 코뮤니즘과 아나르코 생디칼리슴은 사회혁명을 달성하기 위한 방법에서 어느 정도 구분된다.[21] 보통 아나키스트들이 사용한 혁명 수단에는 몇 가지가 있다. 첫째, 테러이다. 그들은 테러를 통해 아나키즘을 선전하고 동시에 민중을 각성시켜 기존 체제에 저항하고자 했다. 주로 혁명의 초기 단계에 사용하는데, 반란과 폭동 또는 총파업이 불가능한 상황에서 택하는 수단이다. 테러 행위는 그 자체가 목적이 아니라 ‘행동을 통한 선전’ 수단의 하나였다. 우리가 여기서 기억해야 할 사실은 테러가 아나키스트의 전유물은 아니라는 점이다. 민족주의자든 공산주의자든 자신들의 세력이 미약할 때는 테러를 즐겨 사용했다. 아나키스트를 테러리스트와 동일하게 여기는 것은 반대파들이 이미지를 조작한 결과라는 혐의가 짙다. 동아시아의 아나키스트들은 테러가 최선의 방법이 아니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으나, 자신의 도덕성과 희생을 담보로 테러를 선택했다. 청말 중국의 혁명가들이나 일제시대 한인 혁명가들이 테러를 주로 사용했으며, 개인주의적 아나키스트들도 선호했다. 이 방법은 대중운동이 활발해지면 자연스럽게 수그러들었다.
둘째, 선전과 교육이다. 아나키스트들은 동서양을 불문하고 각종 사회문화운동을 통해 아나키즘을 선전하고 전파하는 데 주력했다. 그들은 대중이 아나키즘을 많이 알수록 이상사회에 더 가까이 다가갈 수 있다고 믿고, 신문이나 잡지 및 서적 발간 등에 힘을 쏟았다. 특히 중국의 아나키스트들은 무엇보다 교육을 통한 아나키즘 사회 건설을 강조했다. 따라서 유학 운동, 학교 건설, 야학 운영, 여성 교육 등이 활발하게 일어났다. 그들은 이런 방법으로 아나키즘 사회를 실현하려면 오랜 시간이 걸린다는 것을 알았지만, 절대 다수 민중의 각성이 없는 한 완전한 아나키즘 사회를 실현할 수 없다고 믿었다. 어쩌면 교육에 대한 강조는 동아시아 아나키스트 운동에서 가장 두드러진 특징일지도 모른다. 여기에는 넓은 의미에서 아나키스트 이상촌 건설 운동도 포함될 수 있을 것이다. 일본의 신촌운동, 중국 푸젠 지역의 농민자위운동, 만주 한족총연합회의 혁명 근거지 건설 운동 등이 그 예이다.
셋째, 총파업이 있다. 일부 아나키스트들은 아나키즘이 노동운동과 결합할 경우 개량주의로 흐를 가능성을 염려했다. 하지만 많은 아나키스트들은 노동운동의 혁명성에 주목해 노동자가 주체가 된 노동조합을 사회혁명의 수단으로 보고, 총파업과 같은 경제적 직접행동을 통해 아나키즘 사회를 실현하려고 했다. 이런 맥락에서 20세기 들어서면서 적지 않은 아나키스트들이 노동 현장에 들어가 노동자를 조직화하고, 불매운동 · 태업 · 파업을 시도했다. 그들은 궁극적으로는 총파업을 통해 자본주의 사회를 타도하고 사회주의 혁명을 이루려 한 것이다. 일본에서는 한때 아나르코 생디칼리스트와 순수 아나키스트들이 대립하기도 했으나, 중국에서는 아나르코 생디칼리슴이 아나르코 코뮤니즘에서 분화 · 발전하여 서로 친밀한 관계를 유지했다.
다소 거칠게 도식화하면, 앞으 두 가지 방법이 전통적으로 아나키스트들이 주로 사용한 방법이라면, 세 번째 방법은 아나키즘이 생디칼리슴과 결합하면서 새롭게 받아들인 방법이라고 할 수 있다. 20세기 초에는 아나르코 코뮤니즘과 아나르코 생디칼리슴이 전 세계를 풍미하고 있었는데, 고토쿠 슈스이의 아나키즘도 크로포트킨의 사상과 노동조합주의가 결합한 것이라 할 수 있다. 고토쿠 슈스이의 사상은 일본 아나키스트들의 노력으로 동아시아 혁명가들에게 널리 보급되었다. 중국인 아나키스트 장지가 독일인 롤러의 『총동맹파업』을 번역해 출판한 것도 이 같은 시대 분위기를 반영한다.
앞서도 말했듯이 아주화친회와 사회주의강습회의 결성으로 출발한 동아시아 아나키스트들의 연대 활동은 그 후에도 꾸준히 계속되었다. 중국 혁명을 지원하기 위해 국경을 넘은 일본 아나키스트의 활동, 일본과 중국 아나키스트의 지원을 받아 민족해방운동에 참여한 한인 혁명가들, 아나키즘 이상사회를 실현하기 위해 조직된 동아시아 아나키스트의 국제조직들, 상하이노동대학이나 푸젠성 농촌자위운동에 참여한 동아시아 아나키스트들의 연합 활동 등이 그것이다. 국경을 초월한 이들의 초국가주의 연대의식은 동아시아 근대사에서 매우 이채로운 페이지를 장식하고 있다. 그러나 지금까지 동아시아 아나키스트의 연대 활동에 대한 연구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기 때문에 우리는 지극히 단편적인 사실만을 알고 있을 뿐이다.
3. ‘대역 사건’과 고토쿠 슈스이의 죽음
일본에서 아나키스트 운동이 사회운동으로 자리 잡자 일본정부는 그들을 제거하기 위해 음모를 꾸민다. 이른바 천황을 암살하려 했다는 대역 사건이 그것인데, 그 배경에는 ‘공개장 사건’(또는 천장절 사건)과 ‘적기 사건’이 있었다.
공개장 사건은 미국에서 활동하던 일본 아나키스트들이 주도한 것이다. 미국에서는 1906년부터 이와사 사쿠타로[22] 등이 미국의 아나키스트 알렉산더 버크만(Alexander Berkman)이나 엠마 골드만(Emma Goldman) 그리고 고토쿠 슈스이의 영향을 받아 사회혁명당을 결성하고, 기관지 「혁명」을 발행하고 있었다. 그들은 1907년 11월 3일 일황 천장절에 〈테러리즘〉이란 제목의 인쇄물을 일본 각지에 게시하거나 나눠주었다. 이것은 ‘일본황제 무츠히토(메이지 천황을 가리킨다)에게 보내는 글’로 시작하는 협박장이었다. 여기서 그들은 천황이 신의 아들이라는 주장을 조롱하면서, 천황은 원시인에서 진화한 인류의 한 사람에(인류에서 진화한 평범한 한 사람에) 불과하다고 했다. 그리고 마지막 구절에서는 천황 주변에서 언제 터질지 모르는 폭탄에 주의하라고 경고하고 있다. 이 협박장의 내용은 러시아 허무당원의 분위기를 연상시킨다. 공개장 사건은 일본 정부가 한창 진행하고 있던 천황 신성화 작업에 찬물을 끼얹는 것이었으므로, 관계당국은 주모자를 찾으려 혈안이 되었다. 어떤 사람들은 이 사건을 계기로 정부가 사회주의자에 대한 대대적인 탄압을 준비하기 시작했다고 말한다. 그 탄압의 모습은 적기 사건을 계기로 드러난다.
1908년 6월 22일 일간 「평민신문」 필화 사건으로 투옥되었던 한 동지가 출옥하자 이시카와 산시로[23]의 주최로 환영회가 열렸다. 행사가 끝날 즈음, 돌연 일부 사회주의자들이 붉은 천에 무정부 · 무정부공산 · 혁명이란 흰 글자를 새긴 깃발을 올리고 혁명가를 불렀다. 그리고 이 적기를 빼앗으려는 경찰과 청년들 사이에 난투극이 벌어졌다. 이 충돌로 오스기 사카에, 사카이 토시히코, 야마가와 히토시 등 많은 사회주의자가 검거되어 가혹한 징역형을 받았다. 이것이 이른바 적기 사건의 요지이다. 사건이 일어난 후 고토쿠 슈스이의 금요강습회는 붕괴되고, 직접행동파는 큰 타격을 받았다. 한편 사회주의자들에게 온건한 태도를 취한다고 비판받던 사이온지 내각이 물러나고 새로운 내각이 들어서자 사회주의 운동에 대한 전면적인 탄압이 실시되었다. 사회주의 출판물은 나오는 대로 발행금지를 당했으며, 결국 대부분 폐간되었다. 집회마다 번번이 해산 명령을 내렸으며, 해산에 불응하면 공권력으로 진압했다. 이와 같은 극심함 통제와 탄압으로 사회주의 운동은 질식 상태에 놓이게 된다.[24] 재일 중국인 아나키스트 운동도 치명적ㅇ니 타격을 받아 해체 일보 직전에 이르렀다.
적기 사건으로 사회주의 운동이 위축되었을 때 고토쿠 슈스이는 고향에서 휴양하고 있었다. 그는 곧 도쿄로 돌아와 평민사를 중심으로 「자유사상」을 발간했으나 계속 금지 조치를 당했다. 이즈음 그의 생각은 천황제 정부의 존재 자체를 부정하는 수준에까지 이르렀다. 사실 고토쿠 슈스이는 일본에서 가장 먼저 천황제를 비판한 인물 가운데 하나다. 하지만 천황제를 회의했다고 해서 천황을 암살할 생각까지 한 것은 아니었다. 그런데 그가 운영하는 평민사에 드나들던 젊은 청년들 때문에 문제가 일어난다. 혈기 넘치던 청년들은 일본 정부는 물론 천황제에 대한 공격을 서슴지 않았고, 그 가운데 몇 사람은 실제로 천황을 암살할 계획을 세우고 있었다. 그들의 소박한 음모가 정부 당국의 올가미에 걸려든 것이다.
1910년 5월 25일 직공 미야시타 다키치가 폭탄을 제조하다 발각된 사건을 계기로 이른바 대역 사건이 시작되었다. 미야시타 다키치, 니무라 다다오, 니타 토카시, 후루카와 리키사쿠 등 4명을 검거한 정부당국은 사회주의자들이 폭탄으로 천황을 암살하려 했다고 발표했다. 그리고 이들의 검거로 시작된 체포 열풍은 전국으로 확대되어 수백 명의 사회주의자가 체포되어 조사를 받았다. 그 가운데 고토쿠 슈스이와 그의 아내 간노 스가도 포함되어 있었는데, 고토쿠 슈스이는 원고 집필 도중에 갑작스레 끌려갔다. 정부는 형법 제73조 위반(대역죄)으로 모두 26명의 사회주의자를 기소해 특별재판소에서 신속하게 재판을 진행했다. 재판부는 판결을 서두르기 위해 취조나 공판도 제대로 하지 않고 기소한 26명 가운데 24명에게 사형을 언도하고 나머지 두 명도 중형에 처했다. 사형을 언도받은 사람 가운데 12명을 다음날 무기징역으로 감형하는 사전 계획된 유화조치도 있었지만, 정부는 형이 언도된 지 일주일도 지나지 않아서 고토쿠 슈스이를 비롯한 12명을 전격 처형함으로써 전 국민을 다시 한 번 경악케 했다. 아마도 국내외에 항의할 시간을 주지 않고 재빨리 사건을 마무리하기 위해 처형을 앞당겼을 것이다.
이 사건은 전부 날조된 것은 아니었지만, 정부가 말한 것처럼 그렇게 엄청난 내용을 담은 것도 아니었다.[25] 만일 고토쿠 슈스이가 젊은이들의 암살 음모를 미리 알고 있었다고 하더라도, 그의 사상과 행동에 비추어볼 때 아마도 찬성하지 않았을 것이다. 따라서 고토쿠 슈스이가 암살 계획을 지휘했다는 당국의 주장은 설득력이 없다. 오히려 대역 사건은 일본 정부가 고도의 정치적 계산 아래 조작한 것으로 보는 것이 타당할 듯싶다. 사건이 벌어진 시점은 바로 일본이 한국과 만주를 본격적으로 침략하기 시작한 때와 일치한다. 당시 고토쿠 슈스이, 가타야마 센 등이 한일합방에 반대하고 있었으므로, 정부로서는 정적을 제거하고 동시에 국민의 관심을 호도하기에 대역 사건만큼 좋은 구실이 없었을 것이다. 대역 사건은 그 후에도 몇 차례에 걸쳐 일어나는데, 대부분 당면한 정치적 위기를 타파하기 위해 조작된 것들이어서 이런 심증을 더욱 굳히게 만든다. 고토쿠 슈스이를 죽음으로 몰아간 대역 사건은 지금까지 분명한 전말이 밝혀지지 않고 있다.
고토쿠 슈스이의 옥중 생활은 일본인들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을 뿐만 아니라, 그를 동아시아 아나키스트의 선각자로 각인시켰다. 그는 사형 직전 남은 시간을 이용해 자신의 반역사상을 기술했다. 옥중에서 변호인에게 보낸 진술서에서는 ‘권력과 무력에 기대는 강압적 통치가 없어지고 도의로 결합된 상호부조의 공동사회’를 희망한다고 밝혔다. 여기서 그는 자기 변호를 하기보다는 의회제도를 부정하고 직접행동을 주장하게 된 배경을 설명하고, 일반인들이 아나키즘을 오해하는 바를 불식시키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 취조나 공판 과정에서도 아나키즘과 테러리즘의 차이점, 사회혁명의 정당성, 직접행동론의 의미와 같은 문제들을 성실히 기술하고, 특히 동지들에게 세심한 주의를 기울이는 따뜻함을 보였다. 그의 최후의 모습은 메이지시대 일본 아나키즘이 지향하는 바를 보여주었다.[26]
아나키스트 고토쿠 슈스이의 사상은 같은 시기에 활동한 일본의 국가사회주의자 기타잇키(北一輝)와 비교하면 좀더 선명하게 이해할 수 있다. 권력의 소재를 개인에 둔 고토쿠 슈스이는 혁명의 주체를 계급이라고 보았으나, 권력의 소재를 국가에 둔 기타잇키는 혁명의 주체를 민족이라고 보았다. 이런 관점에서 고토쿠 슈스이가 일본과 중국 등 피압박 계급의 국제적 연대를 제창했다면, 기타잇키는 피압박 민족인 일본과 중국의 동맹을 주장했다. 또한 고토쿠 슈스이가 크로포트킨의 상호부조론에 기반해 생존 경쟁을 수반하는 사회진화론을 비판했다면, 기타잇키는 사회진화론에 담긴 생존 경쟁의 관점을 받아들여 부강한 민족국가 · 국민국가 건설을 강조했다. 이런 차이점은 국제 연대 문제에도 그대로 반영된다. 앞서 보았듯이 고토쿠 슈스이는 아주화친회와 같이 민족과 국가를 뛰어넘는 동아시아 사회주의자의 연대를 제창했다. 반면에 기타잇키는 일본이 우선 개조에 성공하고 중국이 민족주의 혁명을 달성하면 일본과 중국이 동맹을 형성하고, 만약 인도가 독립하면 동아시아 연맹을 구축해 최종적으로는 세계연방을 만든다는 구상을 가지고 있었다. 두 사람 모두 중국 혁명을 적극적으로 지지했고 궁극적으로는 초국가주의를 지향했지만, 민족과 국가 문제에 대한 관점은 전혀 달랐다. 이런 두 가지 흐름은 다음 시대에도 계속되어 개인을 맨 앞에 두는 아나키즘과 국가를 제일로 하는 국가사회주의로 이어진다.[27] 두 사람의 차이점을 알면 중국과 한국에서 활동한 아나키스트와 국가사회주의자의 차이를 이해하는 데도 도움이 된다.
그런데 고토쿠 슈스이가 반제의 관점에서 피압박 민족의 반제국주의 투쟁을 강조하기는 했지만 식민지국가의 민족 해방과 독립 투쟁에 대한 인식이 부족했다는 평가를 받기도 한다. 서양의 제국주의와 일본의 군국주의를 비판하지만 동시에 피압박 민족의 민족주의 및 애국주의 사조도 부정함으로써 서양의 원론에만 충실했지 동아시아의 특수한 상황을 간과했다는 것이다.[28] 그의 반제국주의 · 반군국주의 이론을 오스기 사카에가 완성했다고 보는 것은 그 때문일 것이다.
대역 사건 후 사회주의자에 대한 일본 정부의 탄압은 극에 달해 모든 언론 집회의 자유를 빼앗겼다. 이즈음 정부의 태도는 신경과민 수준으로, 사회라는 글자만 들어가면 무조건 위험하게 여길 정도였다. 결국 정부의 지속적인 탄압으로 말미암아 일본의 사회주의 운동은 겨울잠에 들어간다. 적기 사건과 대역 사건이라는 두 차례에 걸친 사회주의와 아나키스트 운동에 대한 탄압이 메이지시대 사회주의 운동의 좌절을 가져온 것이다. 하지만 이런 탄압 사건을 계기로 일본의 아나키즘은 내부의 체계를 다듬어가고 있었다.
4. 일본 아나키스트 운동의 재생 - 오스기 사카에
대역 사건과 같은 당국의 탄압으로 말미암아 일본의 아나키스트들은 한참 동안 침묵을 지켰다. 이시카와 산시로는 유럽으로 탈출해 10여 년 동안 망명 생활을 했으며, 야마가 타이지도 탄압을 피해 대륙으로 건너가 중국의 아나키스트 운동을 도와주고 있었다. 그러던 중 적기 사건으로 검거되었다가 먼저 출옥한 사카이 토시히코가 몇몇 동지들과 함께 생계 유지의 방편으로 평범한 출판사를 설립했다. 뒤이어 출옥한 오스기 사카에, 야마가와 히토시 등이 가세했지만 얼마 동안 조용히 지내야 했다. 이들은 적기 사건으로 옥중에 있었기 때문에 대역 사건의 풍파를 피할 수 있었고, 그것이 어쩌면 그들의 생명을 유지시켰는지도 모른다.
그러다가 1912년 10월 오스기 사카에와 아라하타 간손이 「근대사상」을 발행함으로써 사회주의 운동은 다시 기지개를 켠다. 이 잡지는 오스기 사카에를 중심으로 하는 다이쇼시대 일본 아나키즘의 새로운 출발을 알리는 것이었다. 이는 학생과 지식인을 상대로 하는 종합교양지의 성격을 띠고 있었으나, 고토쿠 슈스이의 정신을 이어받아 전쟁을 반대하는 내용도 많이 실었다. 「근대사상」은 독자들에게 좋은 반응을 얻었는데, 훗날 중국 최초의 마르크시스트가 된 리따자오(李大釗)도 일본유학 중 탐독했다고 알려져 있다. 그러나 이 잡지 역시 1914년 9월에 폐간 당했는데, 오스기 사카에는 같은 해 10월에 다시 노동자를 대상으로 하는 「평민신문」을 창간했다. 창간호에서 편집자는 고토쿠 슈스이의 사상을 이어받아 아나르코 생디칼리슴의 색깔을 분명히 드러냈다. 그러나 당국의 탄압은 여전해 1915년 3월 이 신문도 더 이상 버티지 못하고 폐간되고 말았다. 그 후에도 이런 종류의 신문과 잡지의 창간과 폐간 그리고 복간이 반복된다.[29] 이 시기에 ‘근대사상’이나 ‘평민신문’이란 같은 제목을 단 신문 잡지가 여러 차례 등장하는 것은 이런 까닭에서다.
당시 「평민신문」 종간호에는 다음과 같은 글이 실렸다. “개인적 사색의 성취가 있고서야 비로소 우리는 자유로운 인간이 되는 것이다. 아무리 자유주의를 표방한다 할지라도, 그것이 남의 판단에서 빌려온 것이라면, 그 사람은 마르크스나 크로포트킨의 사상적 노예에 불과할 것이다. 사회운동은 흔히 일종의 종교적 광신을 수반하는 동시에 이런 노예를 만들어내는 경향이 있다. 우리는 어떤 경우에도 노예가 되어서는 안 될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교조와 권위를 거부하는 오스기 사카에의 사상을 엿볼 수 있다. 그는 어떤 이론이나 사상도 절대화하는 것을 싫어했다. 유럽의 아나키즘 철학 역시 예외는 아니었다. 그는 자기 자신의 충분한 경험과 자유로운 판단에 따라 얻은 결론만 받아들였으며, 이러한 실증적 정신으로 평생을 일관했다. 권위에 굴복하지 않고 자신의 판단에 따라 사색하고 생활하는 것, 어떤 지도자의 논리에도 얽매이지 않고 자기 자신의 인생을 다듬어 나가는 것, 이것이 바로 오스기 사카에의 인생관이자 사회관이었다.[30] 그는 이미 고토쿠 슈스이의 직접행동론에서 진일보해 아나키즘의 목표와 이상에서 더욱 확고부동한 반권위주의 · 반권력주의 관점을 확립함으로써 일본 아나키즘의 새로운 시대를 열고 있었다.
오스기 사카에는 아나르코 생디칼리슴 운동을 활성화해 고토쿠 슈스이의 사상을 실천하면서 동시에 한 걸음 더 나아갔다. 사실 그의 시대는 노동자 중심의 아나키스트 운동이 활발한 시기였다. 1919년 8월에 오스기 사카에는 동지들과 함께 「노동운동」을 창간했다. 이 잡지의 한 논설에서 그는 노동운동이 임금 인상이나 노동시간 단축과 같은 단순한 생물학적 또는 금전적 요구에 그쳐서는 안 되며, 인간 해방이란 근본적인 목표를 설정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또한 노동자는 복종의 습성과 노예적 생활에서 해방되어야 하는데, 자본가에게서 해방되어야 할 뿐만 아니라 노동조합 지도자의 권위에서도 해방되어야 한다고 역설했다. 노동자의 자발적인 행동이야말로 노동운동의 기초이자 아나키즘 사회의 시금석이라는 주장이다.
오스기 사카에는 「노동운동」(이 잡지 역시 몇 차례의 폐간과 복간을 거듭했다) 종간호에서도 이른바 백지주의白紙主義 이론을 편다. “인생은 결코 미리 기록된 완결된 책이 아니라, 각자가 그 속에 한자 또 한자 기입해 나가야 하는 백지와 같은 것이다. 인간이 살아간다는 것, 그것이 바로 인생이다. 그럼 노동운동이란 무엇인가? 이 문제에 대한 해답 또한 마찬가지다. 노동 문제는 노동자의 인생 문제다. 노동자는 노동 문제라는 백지로 된 한 권의 큰 책을 가진 사람이다. 그는 자신의 운동으로 한자 또 한자, 한줄 또 한줄, 한 장 또 한 장 스스로 써 넣어야 한다.” 그는 여기서도 반권위주의 원칙에 따라 자신의 모든 문제에 주체적으로 대처할 것을 강조하고 있다. 그는 개인의 창의성 · 주체성 · 자유 발의를 강조하고, 타인의 지도 · 명령 · 지령에 반대했으며, 권위를 추종하는 복종과 망언을 배격했다. 이러한 원칙은 노동운동에서도 마찬가지인데 각 조합의 자유 발의, 자유 합의, 조합 간의 자유 연합을 주장하면서 권위적 우상 타파와 신질서 창조를 강조했다. 그에게 진정한 노동운동이란 노조 지도자의 노선을 충실히 따르는 것이 아니라, 노동자 스스로 이루어나가는 것을 의미했다. 이러한 관점은 공산당이 주도하는 노동운동과는 근본적으로 다른 것이다.[31]
1917년 러시아 혁명의 성공은 동아시아 사회에 볼셰비즘의 물결을 일으킨다. 그리고 그 영향으로 1920년대를 전후해 나라마다 공산당이 설립되기 시작했다. 일본에서는 과거 고토쿠 슈스이와 함께 「평민신문」을 창간하고 반전운동을 전개했던 사카이 토시히코와 야마가와 히토시가 볼셰비즘을 받아들였다. 그들은 일본공산당 창당에 참가하면서 오스기 사카에와 다른 길을 걷기 시작했다. 하지만 이때 오스기 사카에는 러시아 혁명을 어떻게 평가하느냐 하는 문제에 잠시 관망하는 태도를 보였다.
그러던 중 1920년 5월에는 사회주의 계열 노동조합들이 연합해 제1회 메이데이 행사를 치렀다. 이것은 제1차 세계대전으로 인해 불경기가 심화되자 노동자의 권익을 지키기 위해 준비한 행사였다. 여기서 노동자들의 단결을 위해 노동조합 상호간의 횡적 유대를 지탱해줄 상설기관을 설치하자는 얘기가 오간 끝에 간토 지방의 노동조합동맹회가 결성되었다. 그런데 이 조직 안에서 아나키스트와 볼셰비키 사이에 반목이 싹트기 시작했다. 같은 해 12월에는 양 파벌의 대립을 미연에 방지하기 위해 여러 사회주의 파벌이 다시 모여 대동단결을 내걸고 일본 사회주의동맹을 결성했다. 발기인으로는 오스기 사카에, 이와사 사쿠타로 같은 아나키스트를 비롯해 사카이 토시히코, 야마가와 히토시 등 마르크시스트들을 포함한 30명의 저명한 사회주의자들이 참여했다. 이 동맹은 기관지 「사회주의」를 내기도 했으나, 다음 해 5월 당국의 명령으로 해산해야 했다.
1920년 10월 오스기 사카에는 극동사회주의자회의에 참석해달라는 한인 동지의 연락을 받고 상하이로 향한다. 중국, 조선, 일본, 러시아 등 여러 나라 대표가 모인 이 회의는 동아시아에 공산주의의 거점을 만들기 위해 코민테른이 주최한 모임이었다. 당시 오스기 사카에는 러시아 혁명에 깊은 관심을 가지고 있었으며, 볼셰비키와의 공동전선에 대한 기대를 버리지 않고 있었다. 그는 이 회의에서 코민테른 일본 지부를 설치해 달라는 요청을 받았으나, 이를 거절하고 다만 정보 교환을 위해 위원회를 만들겠다는 약속을 하고 귀국했다. 이렇게 하여 일본 사회주의 운동은 국제화의 길을 걷는다.
다음 해 12월에도 모스크바에서 극동민족대회가 열렸다. 이때 참석한 일본 대표들을 보면 공산주의자보다 아나키스트가 많았다고 한다. 대부분 노동운동 단체의 대표였던 그들은 대회에 출석하는 것보다는 러시아의 진상을 파악하는 데 힘썼다. 이런 일련의 접촉을 통해 일본의 아나키스트들은 러시아의 현실에 크게 실망했으며, 볼셰비키 정권의 통치 아래 노동자와 농민의 자유가 희생당하고 있다고 판단했다. 결국 그들은 볼셰비키와 협력하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결론을 내렸다. 그 후 아나키스트와 볼셰비키 사이에 존재하는 이념의 차이가 점점 표면으로 노출됨으로써 노동운동을 중심으로 격렬한 논쟁이 일어났다. 그런 와중에 1922년 7월 일본공산당이 창당되었다.
국내에서 일본 볼셰비키와 연합하는 것을 단념한 오스기 사카에는 국제 사회주의 운동에 관심을 쏟았다. 때마침 1923년 2월 베를린에서 열리는 산 · 티미에 인터내셔널 50주년 기념집회에 참가해달라는 초청장이 도착한다. 당시 오스기 사카에는 러시아 혁명 과정에 일어난 아나키스트 계열의 크론슈타트의 수병 반란과 우크라이나의 마흐노 농민운동에 큰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두 사건 모두 러시아의 아나키스트 운동과 관련이 있는 움직임이었다. 그는 유럽으로 가서 진상을 좀더 자세히 알아보고, 아울러 외국 아나키스트와의 국제적 연대를 모색하기 위해 집회에 참석하기로 결심한다. 우여곡절 끝에 그는 중국 아나키스트의 도움으로 상하이를 거쳐 프랑스 마르세유에 겨우 도착할 수 있었다. 그는 곧장 파리로 가서 국제적으로 유명한 아나키스트들과 접촉했으며, 5월 1일 파리 교외에서 열린 메이데이 행사에 참가해 일본의 노동운동에 관한 연설을 한다. 이때 경찰에 검거되어 불법 입국자로 수배중이라는 사실이 밝혀지자 퇴거 명령을 받고 같은 해 7월 일본으로 돌아온다. 오스기 사카에는 이 여행에서 유럽의 아나키스트들과의 교류를 통해 다시금 러시아의 볼셰비키 혁명은 아나키즘의 원리와 근본적으로 상충한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었다.
1923년 9월 1일 간토 대지진이 일어났다. 일본의 위정자들은 천재지변으로 인한 정치적 위기를 모면하기 위해 계엄령을 선포하고 “조선인과 사회주의자들이 폭동을 일으켰다”는 유언비어를 퍼뜨린다. 널리 알려진 바와 같이 바로 이때 군과 경찰 그리고 자경단에 의해 6천 명에 달하는 한인과 일본인 사회주의자들이 대량 학살되었다. 박열이 고토쿠 슈스이처럼 다른 대역 사건에 연루되어 체포된 것도 이즈음이다. 그리고 이 혼란 상황에서 많은 일본인 사회주의자와 노동운동가들이 희생되었다. 그 가운데에는 일본 최고의 사회주의 운동가인 오스기 사카에도 포함되어 있었다. 오스기 사카에는 어느 날 아내와 어린 조카와 함께 헌병대로 끌려갔다. 그들은 무참히 살해되어 우물에 던져졌다. 그의 나이 39세. 이로써 다이쇼시대 일본 아나키스트 운동의 탁월한 지도자였던 오스기 사카에는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그의 죽음이 알려지자 청년 아나키스트들은 복수를 위해 테러를 감행한다. 이런 테러 활동의 시작은 그 후 일본 아나키스트 운동이 전개된 양상과 관련해 미묘한 변화를 암시하는 것이었다.
제2장 중국 : 군주제와 군벌정부에 대한 저항 그리고 신문화 운동
1. 정치혁명에서 사회혁명으로
20세기 초 청 왕조가 국내에 설립한 신식 학당이나 해외로 파견한 유학생 사회에서 혁명가들이 출현한 사실은 역사의 아이러니다. 국내에서는 신흥 대도시인 상하이를 중심으로 진보적인 지식인들이 모이기 시작했다. 그들이 조직한 단체 가운데 대표적인 것이 ‘중국교육회’로, 여기서 펴낸 「아사경문俄事警聞」이나 「경종일보警鐘日報」는 이미 부분적으로 서양의 아나키즘을 소개하고 있었다. 훗날 중국 아나키스트 운동의 지도자가 되는 우즈후이(吳稚暉), 장타이옌, 차이위안페이(蔡元培) 등도 중국교육회에 참가하고 있었다. 한편 해외 유학생은 주로 재일 유학생 사회를 가리키는데, 이는 이들이 해외 유학생의 절대 다수를 차지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일본에 유학한 학생들은 일찍부터 동향회와 같은 여러 모임을 만들고, 그 중 일부는 조그만 서클을 만들어 반청혁명의 여론을 전파했다. 항구 도시 상하이는 일본으로 가는 관문이어서 이 지역 혁명가들과 일본의 유학생 사회는 긴밀한 연락망을 구축하고 있었다. 당시 중국의 급진적 지식인들이 직면한 절박한 문제는 서양 열강의 제국주의 침략에 대응하고 중국 사회를 정체시킨 전제주의 봉건 문화를 혁신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무엇보다 제1 과제는 군주제 개혁 또는 타도였다. 이를 위해 여러 가지 서구의 신사조를 수용했는데, 아나키즘도 그 가운데 하나였다.
1903년 청 왕조는 상하이 지역 신문 「소보蘇報」를 반청운동을 한다는 이유로 폐간시켰다. 이 사건으로 장타이옌과 쩌우룽(鄒容) 등이 체포되고, 중국교육회와 같은 진보 단체는 탄압을 받았다. 그러나 이 사건은 혁명운동을 처음으로 고양시키는 결과를 가져왔다. 당시 막 형성되기 시작한 혁명파들은 더 이상 청 왕조에서 희망을 찾을 수 없다는 절망을 느끼고 체제 전복을 위해 암살과 폭동과 같은 비상수단을 생각하게 되었다. 이때 그들의 관심을 자극한 것이 바로 일본 유학생 사회를 통해 들어온 러시아 허무주의와 허무당원의 활동이다. 그런데 허무주의(아나키즘도 포함)가 처음 중국에 들어왔을 때 이것은 혁명파의 전유물이 아니었으며, 오히려 개혁파 인사들이 더 일찍 소개했다는 사실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그 원인은 중국 지식인 사회에 널리 퍼진 청 왕조에 대한 절망감에 있다. 청일전쟁의 패배와 변법운동의 좌절, 나아가 서양 열강에 무력하게 대응하는 청 왕조의 모습은 청말 지식인들의 분노와 좌절을 자아냈고, 의화단 운동이 실패하자 그 절망감은 최고조에 이른다. 따라서 개혁파든 혁명파든 상관없이 지식인들은 중국 사회에도 러시아처럼 허무당원이 출현하기를 기대했다.[32]
이런 분위기에서 일본인 사회주의자들의 저작 가운데 고토쿠 슈스이의 『장광설』, 후쿠이 준조의 『근세사회주의』, 니시카와 코지로의 『사회당』, 게무야마 센타로의 『근세무정부주의』 등이 곧바로 번역 출판되었다. 이 책들을 번역한 재일 중국인들은 자신들이 개혁파이든 혁명파이든 상관없이 청 왕조의 변혁을 추구하고 있었으므로 호감을 가지고 번역하는 경우가 많았다. 러시아의 허무주의나 허무당원을 보는 태도에서도 이러한 사실을 쉽게 알 수 있다. 개혁파도 허무당원의 대의명분에는 의심을 품기도 했지만 테러와 같은 방법에는 큰 흥미를 느꼈다. 아마도 그들은 사회주의라는 거창한 이론 체계에 관심을 기울기에 앞서 우선 중국 사회를 변혁시키기 위한 효과적인 방법에 주목한 듯하다.
앞의 번역서들 가운데 고토쿠 슈스이의 『장광설』에 나오는 “무정부주의가 유행하는 이유는 사람들이 국가사회에 절망했기 때문이며, 전제정부는 무정부주의의 제조공장이다”라는 말은 당시 혁명가들 사이에 널리 유행했다. 물론 이 시기의 고토쿠 슈스이는 사회민주주의자로, 아직 아나키스트는 아니었다. 중국인들에게 아나키즘을 널리 알린 것은 일본에서와 마찬가지로 게무야마 센타로의 편저 『근세무정부주의』다. 이 책은 여러 편의 논문으로 나뉘어 여러 차례 중국인의 신문이나 잡지에 연재되었으며, 진이(金一)란 사람이 『자유혈自由血』(1904)이란 제목으로 전체 내용을 의역하기도 했다.[33] 중국인들이 허무당원을 아나키스트로, 허무주의를 아나키즘과 동일시하게 된 데도 이 책의 영향이 크다.
번역자들 가운데 가장 열광적으로 러시아 허무당을 찬양한 사람은 양두성(楊篤生)이다. 그의 글에는 소위 암살시대의 심리가 잘 묘사되어 있다. 그는 “허무당! 허무당! 나는 너를 사랑한다! 나는 너를 숭배한다! 너희들이 실행한 일들은 개새끼 같은 황제를 죽일 수 있고, 고통 받는 형제자매를 구할 수 있다. 어느 한 가지 일도 천지를 놀라게 하지 않은 것이 없었다. 나는 오래도록 너희들을 보고 너희들과 얘기해, 모든 것을 배우고 싶다. 나는 너희들의 수단과 방법을 배워 똑같이 하고 싶다”고 절규했다.[34] 하지만 어투에서 쉽게 드러나듯이 그는 안정된 틀을 갖춘 것이 아니라 감정적인 수준에서 허무당을 숭배했다.
장지 역시 양두성 못지않게 과격한 사람이다. 그가 편역한 『무정부주의』(1903)는 1907년 이전에 출판된 번역서 가운데 가장 체계적인 아나키즘 저작이다. 그 역시 흥분된 말투로 이렇게 소리친다. “나는 만주족 전부를 죽이려고 한다! 복수의 대의를 선전하고 복수할 수 있는 장렬한 국민을 양성하기 위해서다. 나는 아시아 특산의 군주 모두를 죽이려고 한다! 아시아인의 수치심을 씻어 아시아인의 광명을 밝히기 위해서다. 나는 정부 관리를 모두 죽이려고 한다! 모든 특권의 뿌리를 제거하기 위해서다. 나는 재산가 자본가를 모두 죽이려고 한다! 한 나라의 경제를 고루 평등하게 해 빈부의 차이를 없애기 위해서다. 나는 결혼한 자를 모두 죽이려고 한다! 자유연애로 만사 공공의 기초를 이루기 위해서다. 나는 공맹교도를 모두 죽이려고 한다! 사람들마다 그 진실을 깨달아 거짓 도덕의 흔적을 없애기 위해서다.”[35] 이처럼 그는 바쿠닌의 파괴와 건설의 주장을 어설프게 설교하는 동시에 만주족에 대한 증오가 충만한 복수주의를 역설했다. 근대 중국 최초의 아나키스트라고 평가받기도 하는 장지의 아나키즘은 평등의 원리를 강조하는 특징을 지닌다.[36]
양두성과 장지는 1903년을 전후하여 상하이와 일본에서 활동한 과격한 사람들로, 허무주의와 아나키즘이 혼합된 초기 아나키스트들이다. 하지만 그들이 숭배한 것은 종족적 증오심과 폭력에 대한 찬양들로 서양 본래의 아나키즘과는 거리가 멀었다.
당시 상하이 중국교육회 회장인 차이위안페이 역시 일찍부터 아나키즘을 소개한 사람이다. 그가 「아사경문」에 발표한 소설 〈신년몽新年夢〉(1904년 2월)은 아나키즘 색채가 매우 짙은 이상사회를 그리고 있다. 이 작품은 이상사회를 통해 국가 · 정부 · 사유재산 · 군비의 폐지, 성씨 · 가정 · 혼인 · 법률의 폐지와 언어 문자의 통일을 주장한다. 그가 그린 이상사회는 중국 아나키스트들이 훗날 제시한 이상향과 거의 일치한다. 근대 중국의 대표적인 교육가이기도 한 차이위안페이의 사상에 아나키즘 색채가 짙다는 데 이미 많은 학자들이 공감하고 있다. 한 연구자는 그를 ‘철학적 아나키스트’라고 평가한다. 이처럼 1903년 「소보」 사건을 전후하여 고조된 혁명의 분위기는 1905년 무렵까지 계속되었다.
그런데 러시아의 허무주의와 중국의 허무주의 사이에는 일정한 차이가 있었다. 중국의 혁명적 허무주의자는 러시아 인민주의자들의 반정치적 경향과는 달리 청 왕조의 전복이라는 정치혁명을 추구했다. 그들은 개별적이고 단편적으로 러시아의 허무주의를 받아들여 정치혁명가임을 자신했으나 여전히 본디 아나키즘의 사회혁명과는 거리가 멀었다. 아울러 중국의 혁명적 허무주의자들이 고려하지 못한 개인의 도덕 문제는 훗날 중국의 아나키스트들에게는 피할 수 없는 문제로 다가왔다.
1905년 8월에는 쑨원이 중심이 되어 일본 도쿄에서 중국동맹회를 결성했다. 이 혁명 단체는 민족 · 민권 · 민생이라는 삼민주의를 혁명 강령으로 내걸고, 「민보民報」라는 기관지를 발행했다. 이 잡지는 삼민주의 외에 국수주의나 아나키즘도 선전했다. 아나키즘 관련 기사가 이 잡지에 자주 실린 것은 쑨원이 아나키즘에 호감을 느끼고 있었고, 장지나 장타이옌과 같이 아나키즘 성향이 짙은 사람들이 편집을 맡고 있었기 때문이다. 쑨원은 평소 “동물계는 경쟁이 원칙이며, 인류는 호조가 원칙”리라는 절충적 관점을 제시함으로써 아나키즘에 친근감을 보였으며, 장타이옌도 사회진화론을 비판하기 위해 상호부조론에 큰 관심을 가졌다.[37] 이 잡지에서 공화주의자와 아나키스트가 논쟁을 벌이기도 했다. 여기에 실린 글들을 보면, 공화주의자가 아나키즘을 이해하는 수준도 과거와 달리 비교적 높은 편이었다. 어쨌든 이즈음 일부 동맹회원들이 러시아 허무당원과 같은 테러활동을 수차례 벌여 중국 전역을 떠들썩하게 했다.
중국인에게 아나키즘의 수용은 이론적으로 볼 때 혁명 이론의 전진을 의미했다. 종족주의에 기초해 만주족 정권인 청 왕조를 타도하는 정치혁명에서, 사회주의에 기초해 전제왕조라는 군주제를 전복하려는 사회혁명으로 나아간 것이다. 앞 장에서 살펴본 고토쿠 슈스이와 중국동맹회의 일부 혁명가들이 활발하게 사상을 교류한 시기가 바로 이때이므로 그 상황을 대략 짐작할 수 있다. 그리고 그 이론적 탐색은 「천의」와 「신세기」라는 두 잡지에서 펼쳐졌다.
2. ‘중국식’ 아나키즘과 ‘과학적’ 아나키즘
1906년이 일본 아나키스트 운동사에 한 획을 그은 해라면, 다음 해인 1907년은 중국 아나키스트 운동사에서 상징적인 해이다. 그해 6월 도쿄에서 ‘사회주의강습회’라는 단체가 설립되어 「천의」라는 아나키즘 잡지를 펴냈고, 같은 시기 파리에서는 ‘세계사’라는 단체가 「신세기」란 아나키즘 잡지를 발간해 중국 아나키스트 운동의 출발을 알렸기 때문이다. 두 단체는 보통 그들이 발간한 잡지의 이름을 따서 천의파와 신세기파라고 불리는데, 어떤 사람들은 활동한 도시 이름을 따서 도쿄그룹과 파리그룹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일본이 중국에 아나키즘을 전파한 동쪽 통로라면, 프랑스는 서쪽 통로라고 할 수 있다. 천의파에는 장지, 류스페이, 허쩐, 왕궁취안(汪公權) 등이 참여했고, 신세기파에는 리스쩡, 우즈후이, 추민이(民誼), 장징장(張精江) 등이 참여했다.
천의파의 이론적 지도자가 류스페이였다면, 신세기파의 이론적 지도자는 리스쩡이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류스페이가 본디 장타이옌과 같이 저명한 국학자이자 국수주의자인 데 반해, 리스쩡은 프랑스에 유학해 생물학을 공부한 자연과학자라는 사실이다. 그리고 류스페이가 고토쿠 슈스이처럼 사회주의와 아나키즘이 적절히 결합한 일본 아나키즘의 영향을 받았다면, 리스쩡은 엘리제 르클뤼나 장 그라브(Jean Grave)와 같이 크로포트킨의 사상을 주로 하는 프랑스의 정통 아나키즘 이론을 수용했다고 할 수 있다. 이런 개인의 특성과 환경의 차이는 그들의 잡지에도 고스란히 반영되었다. 우선 천의파 류스페이의 사상을 간단히 살펴보자.
「천의」는 1907년 6월 일본 도쿄에서 반월간으로 발행되었다. 「천의」의 광고에는 “고유의 사회를 파괴하고 인류 평등을 실행하는 것을 모토로 삼는다. 여계女界 혁명을 제창하는 것 외에, 종족 · 정치 · 경제의 여러 혁명도 아울러 제창한다”고 쓰여 있다. 사실 「천의」는 기본적으로 여성잡지였으므로, 그 내용은 상당 부분 아나르카 페미니즘에 관한 것이었다. 여성해방론에 관한 기사는 주로 류스페이의 아내인 허쩐이 기고했다. 그녀는 남성에 대한 적개심을 내세우며, 여성의 노동 참여나 참정 문제에 반대하는 독특한 관점을 제시했다. 심지어 초혼인 남자는 초혼인 여자와, 재혼인 남자는 재혼인 여자와 결혼해야 한다는 등의 극단적인 평등주의를 주장해 고토쿠 슈스이와 가벼운 논쟁을 벌이기도 했다. 하지만 그녀의 글은 상당수가 남편인 류스페이의 도움을 받아 쓴 것이었으며, 이 잡지에 가장 많이 기고한 사람도 류스페이였다.
「천의」에 실린 류스페이의 글에는 고토쿠 슈스이의 영향이 적지 않게 드러난다. 그는 고토쿠 슈스이처럼 제국주의 비판에 많은 관심을 보였고, 나아가 서양의 자본주의 문명 전반에 대해 강한 회의를 드러냈다(그는 중국인으로서는 처음으로 반제국주의를 주장했다). 그리고 노동자와 농민을 동정했으며, 의회주의와 보통선거를 반대했으며, 총동맹파업과 같은 혁명 방법을 지지했다. 이른바 ‘강종强種’과 ‘약종弱種’의 논리를 만들어, 아시아와 유럽의 사회혁명가가 연합해 아시아 각 민족의 해방을 이루고 유럽의 부르주아 정부를 함께 타도하자고 주장하기도 했다. 고토쿠 슈스이의 사상에 마르크스주의와 아나키즘이 혼재되어 있듯이, 류스페이 역시 아나키즘과 마르크스주의를 뚜렷하게 구분하지 않았다. 「천의」에 『공산당선언』의 일부를 번역해 실은 사실에서도 알 수 있듯이, 대체로 마르크스주의에 호의적이었다.
류스페이의 아나키즘은 크로포트킨의 사상에 바탕을 두었다는 점에서 동아시아의 다른 아나키스트들의 사상과 유사하다. 그는 스펜서(Herbert Spencer)나 헉슬리(Thomas Henry Huxley)의 사회진화론이 제국주의 이데올로기의 하나임을 간파하고, 상호부조를 중심에 두는 크로포트킨의 사상을 가장 원만한 사상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는 모든 사물은 상대적이며 중심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무중심설’에 기초해 자신만의 ‘인류균력설(人類均力說 : 개인이 여러 가지 재능을 골고루 재능을 갖추는 것)’을 펴기도 했다.[38] 또한 바쿠닌, 슈티르너, 톨스토이의 아나키즘에도 흥미를 보임으로써 아나키즘 이론에 좀 더 개방적인 모습을 보였다. 특히 국수주의자 시절부터 계속 루소의 평등론에 관심을 기울였는데, 평등권이 자유권이나 독립권보다 우선한다고 생각했다. 그는 심지어 인류의 평등을 위해서라면 개인의 자유를 어느 정도 제약할 수 있다는 논리까지 폈다.
류스페이가 일본 아나키즘의 영향을 받은 것은 분명하지만, 그는 나름대로 아나키즘을 재해석하는 창의성을 발휘했다. 그는 「천의」에서 국수주의와 아나키즘을 결합한 독특한 관점을 제시했다. 고대 중국 학술에 관한 풍부한 지식을 응용해 독자적으로 아나키즘 이론을 풀이한 것이다. 예를 들면, 중국 고대 사상가 노자를 중국 아나키즘의 창시자로 보았고, 허행(許行) · 포경언(鮑敬言) · 이탁오(李卓吾) 등을 전통시대의 대표적인 아나키스트라고 주장했다.[39] 또한 그는 국학國學과 관학官學의 대립 구도를 가지고 중국의 전제정권을 비판하는 동시에 서양의 자본주의 제도도 비판했다. 심지어 서구의 부르주아 문명보다 중국의 고대사회가 아나키즘 이상에 더욱 가깝다고 보아 이를 미화했다. 이처럼 그의 아나키즘에는 전통주의적 요소가 풍부하게 녹아 있었다.
일본 아나키스트의 도움을 받아 태어난 만큼 천의파의 운명은 일본 아나키스트 운동과 궤를 같이했다. 일본 정부의 탄압으로 인해 아나키스트 운동이 침체하자 천의파도 쇠퇴의 길을 걸었다. 장지가 이른바 옥상연설 사건 때문에 일본 경찰의 눈을 피해 프랑스로 망명하자, 사회주의강습회는 해체되었고 「천의」도 폐간되었다. 류스페이가 다시 ‘제민사齊民社’를 만들고, 「형보衡報」라는 신문을 발행했으나 역시 오래가지 못했다. 그리고 류스페이가 갑자기 양강 총독인 뚜안팡(端方)에게 투항함으로써 결국 천의파는 몰락하고 만다. 왜 류스페이가 아나키즘을 버리고 ‘변절’했는지는 지금까지도 수수께끼다. 그의 아내 허쩐의 친척인 왕궁취안의 유혹 때문이라고도 하며, 류스페이의 성격과 환경 요인들을 지적하기도 한다.
그런데 이 문제를 좀 더 넓은 시각에서 본다면, 서양의 물질문명이 중국의 전통문화를 말살할지도 모른다는 위기의식 때문에 류스페이가 국수를 권장하던 뚜안팡에게 투항했다고 풀이할 수도 있을 듯싶다. 다시 말하면, 그에게 아나키즘이란 처음부터 국학의 부흥이라는 목표 아래 제한적인 의의를 지니는 도구적 성격이 강했다는 것이다. 그가 “중국 국수의 존망은 무정부 공산주의의 실행에 달려있다”[40]고 말한 것을 보더라도 류스페이의 아나키즘이 국학의 범주 안에서 설명되어야 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41]
류스페이의 사상의 특징은 국학과 혁명이 결합한 것으로, 전통적 평균平均 사상과 근대적 평등 사상을 한데 섞은 절대평등의 유토피아를 추구했다는 점이다. 그의 아나키즘을 ‘중국식 아나키즘’이라고 평가하는 것도 그 때문이다. 이런 전통주의적 해석법은 신세기파와 뚜렷하게 구분된다. 중국식 아나키즘은 아나키스트 운동의 비주류를 형성해 그 후에도 꾸준히 나타난다. 타이쉬(太虛)의 불교와 아나키즘의 결합, 주치엔즈의 개인주의적 아나키즘, 타포(太朴)의 중국적 아나키즘, 징메이지우(景梅九)의 『학휘學彙』 등에 나타난 아나키즘 해석 등이 이 흐름에 속한다. 이러한 성격의 아나키즘은 신채호가 ‘조선식 아나키즘’을 주장한 것과 관련해 기억할 만하다. 사실 류스페이와 신채호의 아나키즘에는 비슷한 점이 많고 따라서 두 사람의 아나키즘을 비교 연구하는 작업이 필요하다는 것이 필자의 평소 생각이다.
천의파와 함께 중국 아나키즘의 또 다른 출발점인 신세기파는 리스쩡의 주도로 프랑스 파리에서 조직되었다. 프랑스는 아나키스트 푸르동의 고향이자 바쿠닌, 크로포트킨과 같은 저명한 아나키스트들이 활동하던 곳이다. 1880년대 이후 크로포트킨의 친구이자 제자인 엘리제 르클뤼와 장 그라브는 아나르코 코뮤니즘 운동을 주도했다. 르클뤼는 “진화는 곧 혁명”이라는 관점에서 아나키즘을 해석한 인물로, 평생 채식주의를 실천한 청교도적인 혁명가이다. 또한 그라브는 프랑스 아나키즘을 대표하는 잡지 「신세기」의 편집자로서 크로포트킨의 아나키즘과 아나르코 생디칼리슴을 선전했다. 1907년 무렵은 프랑스 아나키스트 운동의 전성기였으며, 르클뤼와 그라브가 해석한 크로포트킨의 사상과 아나르코 생디칼리슴은 중국인 유학생들에게 영향을 미쳤다.[42] 그 결과 신세기파가 탄생한다. 당시 중국은 자본주의가 아직 발달하지 않았기 때문에 유학생들은 생디칼리슴보다 아나르코 코뮤니즘에 더 큰 관심을 기울였다.
신세기파의 이론가 리스쩡을 중심으로 그들의 사상과 활동을 살펴보자. 리스쩡은 1902년 장징장과 함께 프랑스에 유학 와서 농업실용학교에 입학했다. 졸업 후 파스테르학원에서 생물학과 화학을 공부하면서 대두에 관한 논문을 준비하던 즈음 그는 엘리제 르클뤼의 조카인 폴 르클뤼의 소개로 크로포트킨의 사상과 프랑스의 혁명철학을 받아들였다. 그는 우선 채식주의를 실천하고 육체노동을 하면서 아나키즘 윤리에 따른 검소한 생활을 했다. 또한 대두 식품에 관한 연구를 마치고 직접 두부를 생산하기 위해 두부공장을 차렸다. 이때부터 중국인 노동자들과 함께 ‘일하며 공부한다’는 아나키즘의 교육사상을 실천에 옮겼다. 리스쩡은 얼마 후 「소보」사건 때문에 런던에 망명 중이던 우즈후이와 일본에서 건너온 청년 추민이 등과 뜻을 모아 ‘세계사’라는 아나키스트 단체를 조직한다. 장징장이 이들의 활동을 경제적으로 지원했고, 당시 독일에서 공부하던 차이위안페이도 협조했다.
세계사에서 펴낸 잡지가 바로 「신세기」이다. 이 잡지의 이름이 프랑스판 「신세기」와 같다는 사실에서도 알 수 있듯이 이들은 프랑스 아나키스트들에게 도움을 받았고, 일부 기사는 프랑스판 「신세기」에서 발췌한 것이었다. 한편 그들은 같은 시기에 화보집 「세계」를 펴내 서양의 물질문명을 소개하는 데도 적극적으로 앞장섰다.
「신세기」에서 리스쩡은 자유 · 평등 · 박애 · 대동 · 공도公道 · 진리 · 개량 · 진화 등의 개념들을 이용해 아나키즘을 설명한다. 그는 아나키즘의 가치를 실현하기 위해 먼저 기존 질서에 저항할 것을 호소했다. 그리고 구체적인 공격 대상으로 군국주의 · 가정주의 · 사산私産주의 · 종교주의를 꼽았다. 그는 이 다섯 가지를 강권주의라는 용어로 정리하고, 강권주의에 반대하는 것이 바로 자신들의 아나키즘이라고 요약했다. 다른 글에서는 종교 · 전통 · 가족 · 방종 · 엘리트 · 통치 · 군벌 · 국가에 반대할 것을 주장하고, 자유 · 과학 · 인도 · 혁명 · 공산 · 국제 등에 찬성한다고 선언하기도 했다. 여기서 보듯, 신세기파의 아나키즘은 정부나 국가에 대한 혁명 외에도 가족, 종교, 전통에 대항하는 문화혁명을 강조한다.
리스쩡은 “어떤 형태든 상관없이 모든 정부는 자유와 평등의 적”이라고 비난했다. 이른바 정부라는 것은 인민의 대표기구가 아니라 이로운 법률을 마음대로 제정해 사회를 운영하고 이를 국가라고 부른다는 것이다. 따라서 정부란 소수가 다수를 지배하는 기관일 뿐이며, 정상적인 사회를 파괴하는 근본 원인이라고 보았다. 같은 맥락에서 부르주아 정부도 비판했다. 즉 자본주의란 자본가가 노동자를 착취하는 구조이고, 이를 비호하는 기관이 정부인데, 정부는 곧 국가를 대표하므로 결국 부르주아 정부도 특권층이 이익을 독점하고 인민을 해치는 ‘만악의 근원’이라는 것이다. 하지만 그가 가장 먼저 타도할 대상으로 지목한 것은 청 왕조였다.
리스쩡은 청 왕조를 전복하는 것이야말로 중국 아나키즘 혁명의 시작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는 만주족과 한족이 대결하는 종족주의 구도에서 반청혁명을 주장한 것이 아니라, 황제 체제를 타도한다는 맥락에서 반청혁명을 제창했다는 점에서 중국동맹회의 혁명파와는 달랐다. 그가 배만排滿혁명이 아닌 배황排皇혁명을 주장한 것은 황제 체제라는 군주제가 인간의 자유를 억압한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나아가 리스쩡은 부르주아 정당정치와 의회정치도 부정했다. 절대 소수가 대다수의 평민을 통치하는 것이 전제정치라면, 대의제정치는 다수의 지배계급이 전체 평민을 지배하는 것이므로 어느 면에서는 더욱 독재적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파리의 아나키스트들은 공화주의 혁명은 정치혁명이고 아나키즘 혁명은 사회혁명이라고 구분해, 전자보다 후자가 더 근본적인 혁명이라고 보았다. 배황혁명이 배만혁명보다 우월하다는 논리와 사회혁명이 공화혁명보다 우월하다는 논리는 결국 쑨원의 삼민주의를 비판하는 데로 나아갔다. 하지만 신세기파의 중국동맹회 비판은 어디까지나 동지적 관계에 바탕을 둔 것으로, 류스페이의 천의파가 중국동맹회의 주도권을 장악하려고 시도했던 것처럼 적대적이지는 않았다.
리스쩡의 아나키즘은 원론적인 아나키즘에 비해 아주 점진적인 실천방법을 내세웠다. “혁명이란 진화의 연속”이라는 르클뤼의 해석을 받아들인 그는 진화와 혁명을 동일한 것으로 단지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이라고 믿었다. 이런 유연한 해석 아래 왕조혁명과 아나키즘 혁명 사이에 사회 발전의 한 단계로 공화혁명과 같은 과도기 혁명이 필요할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43] 그래서 “정치혁명을 수단으로, 사회혁명을 궁극으로”라는 표현이 등장했다. 곧바로 아나키즘 혁명을 추구하지 않은 그의 온건한 태도는 혁명 수단에서도 나타난다. 그는 테러와 폭동 또는 총파업과 같은 행동주의를 취하기도 하지만, 아나키즘에 대한 선전과 교육을 통한 장기적인 혁명을 더 선호했다. “아나키즘 혁명은 교육으로 혁명을 이루는 것”이란 신세기파의 구호에서도 잘 나타난다. 육체노동과 정신노동의 결합을 핵심으로 하는 리스쩡의 교육사상은 그 후 대규모의 교육운동과 유학운동으로 발전한다. 이 운동은 지식인과 노동자를 차별하는 전통사회의 오래된 악습을 치유하는 데 영향을 미침으로써, 근대 중국의 지식인 사회에 깊은 인상을 남겼다. 리스쩡의 이러한 사상은 우즈후이에게서 큰 영향을 받은 것이다.[44]
파리의 아나키스트들은 군국주의와 조국주의에 반대했을 뿐만 아니라 부분적으로는 제국주의에 대한 비판의식도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전체적으로 볼 때 그들이 가장 큰 관심을 기울인 것은 중국의 혁명 문제였다. 귿르이 받아들인 프랑스의 아나키즘 이론 가운데 정치와 경제 논리는 대부분 직수입된 것으로 중국 사회의 현실에 비추어 다소 설득력이 부족했던 반면, 문화사상은 매우 독창적인 것이었다. 사실 과학주의에 기반한 반전통의 급진적 문화론은 신세기파의 한 가지 특색이다. 이것은 공화주의자들과 뚜렷이 구분되는 점이기도 했다.
신세기파는 종교란 일종의 미신이며 과학적 근거가 없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따라서 아나키즘에 입각한 교육을 통해 종교의 가치체계를 대체할 새로운 도덕체계를 갖추자고 주장했다. 그리고 그들은 전통사회의 기본 단위인 가족을 ‘만악의 근원’이라고 보았다. 따라서 봉건 가족제도의 지주인 예교와 삼강윤리를 가혹하게 비판했다. 심지어 공자를 중심으로 하는 유교 문화에 대한 혁명을 주장했다. 그들은 절대적 권위를 누리던 공자에 대해 근대 중국에서 처음으로 본격적인 비판의 포문을 연 사람들이 되었다. 신세기파는 중국인의 가장 큰 결함은 전통문화에 대한 과대망상에 있다고 생각했다.
신세기파는 종종 아나키즘 사회를 전통 용어를 써서 대동大同사회라고 표현했지만, 여기서 대동사회란 전통적인 의미의 대동사회와는 전혀 다른, 과학기술이 고도로 발달한 미래 사회를 의미했다. 사실 그들은 근대 중국에서 과학주의를 처음으로 소개한 집단으로도 유명하다. 그들이 선전한 과학주의의 핵심은 19세기 말~20세기 초에 전 세계를 풍미했던 서양의 진화론이다. 그러나 그들은 기존에 유행하는 사회진화론이 아니라 진화론을 새롭게 해석한 크로포트킨의 상호부조론을 받아들였다.
동아시아 사회가 진화론을 수용한 것은 한마디로 혁명적인 사건이었다. “천天은 불변한다”는 중국의 고대철학과는 거꾸로 “만물은 변화한다”고 주장한 서양의 진화론은 중국인의 세계관을 뒤흔들어놓는다.[45] 옌푸(嚴復)가 『천연론天演論』에서 처음 소개한 약육강식 적자생존의 사회진화론 사상은 약자였던 중국인의 각성을 요구하는 데 초점이 맞추어져 있어, 곧바로 제국주의론으로 연결될 여지는 적었다. 오히려 변법파뿐만 아니라 공화파 혁명가들이 이를 받아들여 민족의식의 자각과 분투를 주장하는 민족주의 사조가 등장한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사회진화론은 제국주의의 침략에 적절한 대응방안을 제시하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중국의 위기는 스스로 세계의 대세에 적응하지 못한 필연의 산물이라는 결론으로 나아감으로써 부정적인 결과를 낳았다. 이를 극복하기 위한 대안으로 등장한 것이 바로 상호부조론이다.
신세기파가 받아들인 상호부조론은 본디 스펜서의 사회진화론을 비판한 진화론의 수정이론으로, 자연계나 인간사회에서 적자생존의 원리보다 상호부조의 원리가 더욱 중요한 요소임을 강조한다. 이 학설은 사회주의 성격을 띠고 있어 제국주의의 위협에 대항하는 국제적 민중 연대라는 반제의 논리를 제공했다. 따라서 제국주의를 비판하려는 사람들에게는 매력적인 이론이었다. 상호부조론은 중국의 아나키스트들이 종족주의 감정에 기초한 민족주의 혁명을 넘어서 군주제와 제국주의 문제에 대한 궁극적인 해결책을 제시하는 데까지 나아갈 수 있도록 뒷받침해주었다. 이처럼 중국에서는 상호부조론이 일본에 비해 더욱 결정적인 영향을 발휘한 듯하다.
「신세기」가 선전한 아나키즘 사상, 즉 크로포트킨의 아나르코 코뮤니즘은 중국 아나키즘을 대략적으로 보여준다. 사실 근대 중국의 아나키스트 운동 이론은 신세기파에서 기원해 그 범위를 크게 넘지 못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다음 절에서 소개할 스푸가 중국 아나키스트의 전형으로서 나름대로 독특한 색깔을 보여주기는 했지만, 그의 아나키즘 역시 「신세기」에 뿌리를 두고 있다. 이 잡지에서 리스쩡이 주로 서양의 아나키즘 이론을 번역 소개하거나 가족 · 삼강 · 여성과 같은 문제에 관심을 기울였다면, 또 다른 이론가인 우즈후이는 주로 과학주의와 세계어를 선전하고 국수주의를 공격했다. 특히 우즈후이는 비아냥거리는 어투로 논적을 비판하는 데 탁월한 재능을 보였다.
여기서 우리는 천의파의 ‘평등’적 세계관과 신세기파의 ‘대동’적 세계관 사이에는 아나키즘을 해석하는 방식에서 근본적인 의식의 차이가 존재한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즉 천의파의 평등개념이 전통적인 평균의 관념에서 왔다면, 신세기파의 대동 개념은 전통적 세계관을 역전시킨 것이었다. 천의파의 평등사회가 전통시대 도가의 이상사회를 모델로 한 것이라면, 신세기파의 대동사회는 근대적 진화와 진보 관념에 바탕을 둔 것으로 다가올 미래 사회에 건설될 것이었다. 따라서 천의파가 국수와 무정부를 결합하려 한 반면, 신세기파는 거꾸로 ‘옛것보다는 지금을 소중히 여긴다’는 기치 아래 철저하게 국수주의에 반대했다. 심지어 그들은 “중국 문화의 생사 여부는 국수를 어떻게 처분하느냐에 달려 있다”[46]고 선언했다. 이런 태도는 중국의 한자를 폐지하고 에스페란토어로 바꾸자는 문자혁명론에서 절정에 이른다. 파리의 아나키스트들은 ‘과학’으로 ‘전통’을 대체하려 했던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족 · 삼강 · 공자 · 여성 문제들에서는 도쿄의 아나키스트들과 비슷한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47]
신세기파는 때마침 프랑스 아나키스트 운동의 전성기에 형성되었기 때문에 천의파에 비해 이론적인 수준이 상대적으로 높았다. 그래서 신해혁명 후에도 중국 아나키즘의 정통으로 자리잡아 꾸준히 영향력을 발휘했다. 물론 천의파의 류스페이가 이른바 ‘변절’ 문제에 연루되어 정치적으로 몰락한 반면, 신세기파의 우즈후이, 리스쩡 등이 쑨원에 적극적으로 협력하여 중화민국 성립 후 중국 사회의 저명인사가 된 것 역시 또 다른 원인인 것이다.[48]
3. 중국 아나키스트의 초상 - 스푸
신해혁명은 청 왕조의 몰락을 가져왔다. 청 왕조의 몰락은 곧 신세기파가 말한 배황혁명의 성공과 공화정부의 등장을 의미했고, 결국 사회혁명의 과제가 남게 되었다. 그런데 옛 신세기파의 구성원들은 곧바로 공화정부를 붕괴시키기 위한 투쟁에 들어가지 않고, “민국民國을 건설하면서 아나키즘 사회를 추구한다”는 점진적인 길을 선택하고 쑨원의 국민당을 지지했다. 하지만 그들은 정치에 참여하지 않는 이른바 불관不官주의의 태도를 취했다. 대신 스스로 아나키스트라고 말하면서 여러 가지 도덕운동과 교육운동을 추진했다.[49] 그들이 이처럼 합법적인 사회운동에 열중할 무렵 「신세기」의 사상을 중국 본토에 보급하고 직접 실천에 옮긴 인물이 있으니, 그가 바로 스푸이다.
스푸는 일반적으로 중국 현대사에서 가장 전형적인 아나키스트라고 평가받는 인물이다. 그는 어린 시절 체계적으로 전통교육을 받았으며, 1899년 15세 때 시험에 합격한 수재였다. 그러나 과거제도를 혐오한 그는 과거를 포기하고 사회 활동에 참가한다. 1904년 일본에 유학해 이듬해에 중국동맹회에 가입했는데, 이즈음 일본 아나키즘과 러시아 허무주의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 특히 고토쿠 슈스이의 저작을 읽고 깊은 감명을 받았다고 한다. 또한 이 시기에 그는 암살 활동에 매료되어 러시아인에게 폭탄제조 기술을 배웠다. 1906년 중국동맹회는 중국 현지의 봉기를 계획하자 광저우에 스푸를 파견해 그 준비업무를 맡겼다. 그는 얼마 후 친구와 함께 향산에 여자학교를 세워 여성교육운동을 전개하는 한편, 1907년에는 광저우에서 청 왕조의 고위 관리 리준(李準)을 암살할 계획을 세운다. 그러나 폭탄을 제조하던 중 실수로 폭약이 터져 한쪽 팔을 잃는 큰 부상을 입고 체포되어 1909년까지 향산감옥에 수감되었다.
스푸는 감옥에서 불교 관련 저작과 「신세기」와 같은 아나키즘 잡지들을 읽었다. 그는 독서를 통해 아나키즘에 흥미와 지식을 가지게 되었으나, 여전히 강렬한 민족주의 성향을 띠고 있었다. 당시 그가 감옥에서 쓴 글을 보면 류스페이와 유사한 국수주의자의 모습이 나타나 흥미롭다. 그는 불교의 교리, 제자학이나 문자학에 관심을 보였고, 유교를 신랄하게 비판했다. 특히 송명이학宋明理學과 캉유웨이의 공교론孔敎論을 비판하면서 고대사상의 부흥을 기원했다. 이처럼 국수주의와 아나키즘 사이에 친밀성이 존재했다는 사실은 근대 중국의 독특한 정치문화 환경에서 비롯한 것이다.
출옥 후부터 신해혁명 전까지 스푸는 두 가지 활동을 펼쳤다. 하나는 「신세기」에서 선전한 아나키즘을 연구한 것이고, 다른 하나는 암살 활동에 적극 참가한 것이다. 1910년 봄, 그는 홍콩에서 지나암살단을 조직했는데, 모든 강권에 반대한다는 목적을 내세웠다. 이 시기 그는 이미 중국동맹회에서 이탈한 상태였으나, 완전히 아나키스트로 전향한 것도 아니었다. 1910년 겨울 왕징웨이(汪精衛) 등이 청 왕조의 섭정왕을 암살하려다 실패하고 체포되자, 스푸는 이 계획을 다시 실행하기 위해 베이징으로 잠입하려 했다. 하지만 베이징 진입이 삼엄한 경비로 불가능해지자 잠시 계획을 연기하고 다시 광저우로 내려와 반청 봉기를 준비한다. 1911년 3월에 일어난 광저우 봉기가 수군제독 리준의 진압으로 실패하자, 스푸는 리준을 테러해 암살하는 데 성공했다. 같은 해 9월에는 청 왕조가 광저우에 파견한 만주족 장군도 암살했다. 그러나 우창 봉기가 일어나고 신해혁명이 성공한 후에는 전제정부가 전복되었다고 판단해 암살 활동을 중지했다. 그리고 1912년 봄 암살단을 해체한 스푸는 아나키즘 도덕 원리를 알리고 실천하는 활동에 주력함으로써 본격적으로 아나키스트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1912년 5월, 스푸는 광저우에서 사회혁명을 선전하기 위해 ‘회명학사(晦鳴學舍 : 회명은 시경 정풍편에 나오는 ’비바람 이렇게 어두워도 닭의 울음은 그치지 않는다‘는 시구에서 따왔다고 한다)’를 조직했다. 여기에는 류스신(劉石心) · 쩡비안(鄭彼岸) · 쩡페이강(鄭佩剛) 등이 참여했다. 그들은 함께 노동하고 학습하는 생활을 계속했고, 아나키즘을 선전하는 작업을 직업으로 인식했다. 이 단체는 중국에서 아나키즘을 전문적으로 선전한 최초의 단체다. “몇 년 전에 「신세기」에서 뿌린 종자가 (마침내) 희명학사를 통해 가꾸어지고 성장”하게 된 것이다. 그 후에도 스푸가 만든 상하이 무정부공산주의 동지사를 비롯해 창수 무정부 전파사, 난징 무정부 토론회, 광저우 무정부공산주의 동지사 등 아나키스트 단체가 잇달아 만들어졌다. 심지어 홍콩에도 대동사大同社라는 단체가 만들어졌고, 중국 아나키스트가 주도한 이발공회와 찻집공회 같은 노동운동 단체들이 출현했다.
스푸의 본래 이름은 류샤오빈이다. 배만 혁명운동을 시작하면서 만주족을 타도하고 광복을 생각한다는 뜻을 담아 류쓰푸(劉思復)라고 개명했다가 성을 없애고 또 개명해 스푸(師復)라 불렀다. 아나키즘을 수용한 후 가족주의와 종족주의에 반대한다는 의미에서 성을 버리고 이름을 바꾼 것이다. 성씨를 폐지하는 것은 중국 아나키스트의 특징 가운데 하나였는데, 민족국가의 이상을 완전히 버리고 철두철미한 아나키스트가 되려는 의지를 나타내는 행동인 듯하다.
신해혁명으로 청 왕조가 전복되자 한동안 낙관적인 정서가 지배했다. 아나키스트들 역시 잠시나마 새롭게 건립된 공화정부를 신임하는 태도를 보였다. 그들은 폭력행위를 자제하고 개인 도덕의 수양을 통해 새로운 사회도덕을 창출하려 애썼다. 1912년 2월 신세기파의 우즈후이, 리스쩡, 추민이, 장징장 등은 차이위안페이, 장지 등과 함께 진덕화나 육불회六不會 같은 도덕 수양 단체를 조직했다. 스푸도 이러한 움직임을 적극 지지했고, 1912년 7월 진덕회와 유사한 ‘심사心社’를 조직해 도덕계몽운동에 동참했다. 아직까지 그는 갓 태어난 공화정부를 노골적으로 비판하지 않았으며, 아나키즘 혁명 활동을 직접 실행하려고도 하지 않았다.
회명학사와 심사는 중국 아나키스트 운동이 새로운 단계에 진입했음을 알리는 표지였다. 두 단체는 활동 범위와 임무가 서로 달랐는데, 전자가 대외 활동에 비중을 두었다면 후자는 개인의 도덕 수양을 강조했다. 회명학사는 공산주의, 군국주의 반대, 공단(노동조합)주의, 종교주의 반대, 가족주의 반대, 채식주의, 언어 통일, 만국대동이라는 8가지 강령을 내세웠으며, 심사는 1) 육식을 하지 않는다, 2) 음주를 하지 않는다, 3) 흡연을 하지 않는다, 4) 용역을 부리지 않는다, 5) 가마나 인력거를 타지 않는다, 6) 결혼하지 않는다, 7) 족성族姓을 쓰지 않는다, 8) 관리가 되지 않는다, 9) 의원이 되지 않는다, 10) 정당에 가입하지 않는다, 11) (해군과 육군 같은) 군인이 되지 않는다, 12) 종교를 믿지 않는다라는 12가지 규약을 정했다. 심사의 12규약은 주로 개인의 도덕과 관련이 있고 회명학사는 사회혁명을 주장했지만, 종교와 가족을 반대하는 데는 일치했다. 회명학사의 강령에서 주목할 만한 것은 ‘공단주의’(생디칼리슴. 여기서는 아니르코 생디칼리슴을 의미한다)와 ‘언어 통일’(에스페란토어를 사용하자는 주장이다) 두 가지 조항이다.
앞서 언급했듯이 신해혁명 후 얼마 동안 스푸는 정치 문제가 아니라 도덕 문제에 주력했다. 그의 도덕혁명론에 관한 내용 가운데 가족 문제를 다룬 부분을 간단히 살펴보자.
스푸는 청 말기에 천의파와 신세기파와 마찬가지로 전제군주제와 봉건 문화를 비판하는 과정에서 자연스레 전통질서의 지주인 가족에 주목하게 되었다. 심사를 성립할 무렵 발표한 〈가족주의를 폐지하자〉라는 긴 글을 보면 그가 가족의 해체에 관심이 깊었음을 알 수 있다. 스푸는 “중국의 가정은 가정이 아니라 일종의 암흑과 같은 감옥일 뿐이다”라고 선언한다. 그리고 가족제도의 폐지를 위해 다음과 같이 혼인혁명과 족성혁명을 주장했다. “가족의 기원은 혼인에 있으며, 가족의 경계는 족성에 있다. 따라서 혼인을 폐지하면 가족제도의 근원을 끊을 수 있고, 족성을 폐지하면 가족의 경계를 허물 수 있다. 이 두 가지는 서로 표리 관계에 있다.” 그 밖에도 강상명교에 대한 혁명 즉 삼강三綱혁명을 주장했다. 스푸는 〈가족주의를 폐지하자〉의 후반부에 「신세기」에 실렸던 리스쩡의 〈삼강혁명〉 전문을 재수록함으로써 자신의 의견이 신세기파와 완전히 일치한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즉 부위부강, 부위자강, 군위신강의 삼강은 종교적 미신일 뿐이며, 인인人人의 평등, 부자 평등, 남녀 평등은 과학적 진리라는 관점을 그대로 받아들여 가정혁명, 성현혁명, 강상혁명 등을 제창한 것이다. 스푸는 신세기파의 문화혁명론을 대부분 받아들여 도덕 계몽을 아나키즘 혁명의 첫 걸음으로 삼았다.
사실 아나키즘은 개인의 철저한 자유를 추구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개인의 금욕적인 생활을 강조하는 경향이 있다. 이는 자본주의적 윤리에 대한 비판과도 관련이 있다. 하지만 청말 민국 초의 중국은 자본주의보다 봉건적인 요소가 더 강한 사회였다. 따라서 당시의 아나키스트들은 봉건질서를 유지하는 도덕과 윤리에 먼저 비판의 칼날을 높이 들었던 것이다. 심사의 규약은 이런 정서를 잘 반영하고 있다.
회명학사와 심사를 만든 후 약 1년 동안 스푸는 「신세기」 등에 연재된 여러 글들을 모아 출판하는 데 힘을 기울였다. 그는 한쪽 팔이 불편함에도 불구하고 기사 작성과 번역, 문장 수정과 활자 교열, 인쇄와 제본에 이르는 전체 과정을 거의 혼자서 감당하는 초인적인 능력을 보여주었다. 당시 출판한 많은 서적들은 국내뿐 아니라 국외에도 보냈고, 대부분 무료로 배포했기 때문에 상당한 파급 효과를 낳았다. 군벌정부가 자주 명령을 내려 이런 책들의 유통을 막으려 한 것도 그 때문이다.
그런데 1912~1913년에 스푸는 점점 현실 정치에 강한 회의와 불만을 느끼게 된다. 따라서 그는 당시 위안스카이(袁世凱)의 독재정치뿐만 아니라 자칭 사회주의를 선전한다던 쑨원의 국민당이나 장캉후(江亢虎)의 중국사회당 노선을 비판하기 시작했다. 스푸는 쑨원의 민생주의에 국가사회주의 성격이 강하다고 보고, “쑨원이 말하는 국유화 정책을 사회주의라 한다면 청 왕조와 위안스카이 정부의 국유화 정책도 사회주의라 부를 수 있지 않겠는가”라고 비판했다. 장캉후의 중국사회당에 대해서도, “당의 강령이 사회주의 원칙에 어긋날 뿐 아니라 토지정책 등 여러 주장이 개량적인 사회 정책만도 못하다”고 신랄하게 비판했다. 그는 이들이 국가권력의 성격을 구조적으로 파악하지 못한다고 판단했다.
더구나 스푸가 가장 존경하던 신세기파의 우즈후이나 천의파의 장지가 정치 활동에 참여한 일은 그에게 큰 충격을 안겨주었다. 그는 우즈후이와 장지에게 편지를 보내 현실 정치를 가까이하지 말라고 요구했고, 이로 인해 그들 사이에 정치 참여를 둘러싼 서신 논쟁이 일어났다. 스푸는 이들의 정치 참여가 “아나키즘을 위해 통곡을 금할 수 없는 사건”이라며 아쉬움을 표시했다. 그는 이즈음 개인의 도덕 계몽만으로는 아나키즘 이상사회에 이를 수 없으며, 아나키즘 원리를 소개하고 전파하는 일이 절실하게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결국 스푸는 1913년 8월 광저우에서 「회명록晦鳴錄」(일명 ‘평민의 소리’라고도 부른다)이라는 잡지를 펴낸다. 3호부터는 제목을 「민성民聲」으로 바꾸어 사회혁명과 세계대동을 주장했다. 이 잡지는 중국어와 에스페란토어 두 부분으로 구성되었는데, 한편으로는 국제 아나키스트 운동의 흐름을 소개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민국 초기에 유행하던 사이비 사회주의 이론을 비판했다. 이때부터 보통 회명학사를 민성사라고 부르는데, 위안스카이 정부의 탄압이 계속되자 마카오나 상하이 등지로 출판 장소를 계속 옮겨 다녔다. 스푸가 제1세대 아나키스트인 신세기파와 결정적으로 다른 점은 아나키즘의 원칙을 충실히 고수해 공화정부 자체를 부정했다는 것이다. 그는 어떤 정치권력과도 타협하지 않았으며, 오직 순수한 사회혁명만을 추구했다.
스푸는 「민성」에서 아나키즘과 다른 사회주의의 차이점은 무엇인가, 아나키즘 사회혁명의 수단과 방법은 무엇인가라는 문제에 답하기 위해 애썼다. 첫째 문제에서 그는 우선 아나키즘과 아나르코 코뮤니즘의 개념을 규정한 뒤, 마르크스적 공산주의를 권위주의적이라는 관점에서 비판했다. 뿐만 아니라 쑨원의 삼민주의(민족 · 민권 · 민생 가운데 주로 민생주의가 해당된다)나 장캉후의 삼무주의(무정부 · 무종교 · 무가정을 의미한다)는 물론 중국사회당원들이 주장하던 순수사회주의, 진정사회주의, 극단사회주의, 무치無治주의, 무정치주의와 같은 모호한 사회주의 개념도 비판했다. 그의 비판은 어디까지나 ‘동류이파同類異派’의 우호적인 관점에 서 있었지만, 전통주의와 아나키즘의 결합과 같은 절충적 관점에 대해서는 가차 없이 비판했다. 스푸의 아나키즘은 한마디로 크로포트킨주의였으며, 사회주의 이론에 대한 그의 이해는 당시로서는 가장 수준 높은 것이었다.
스푸가 제시한 사회혁명의 방법은 〈무정부공산당의 목적과 수단〉이라는 글에 나타나 있다. 여기서 그는 첫째, 신문 · 서적 · 연설 · 학교 등을 통해 우리의 사상을 일반 평민에게 전파하고……, 둘째, 선전 시기에는 상황에 따라 두 가지 수단을 사용할 수 있는데, 하나는 세금 납부나 병역을 거부하든지 파업을 하는 것이다. 다른 하나는 암살과 폭동과 같은 방법을 사용하는 것이다……, 셋째, 전파가 성숙해지면 대중 봉기를 일으켜 정부와 자본가를 타도해 현 사회를 전복시키는데, 이것이 평민대혁명이다……, 넷째, 평민대혁명은 곧 세계대혁명으로 각국의 혁명당과 연합해 일국의 범위를 넘어서는 것이다. 또한 국제 아나키스트 연맹에 보낸 다른 글에서는 1) 국제적 조직 결성, 2) 동아시아 지역에 사상을 전파, 3) 노동조합과 같이 행동할 것, 4) 국제적인 총파업, 5) 에스페란토어 채용 등을 주장하고 있다. 이처럼 나름대로 거창한 얘기를 하고 있지만 실제로는 중국의 현실을 감안해 주로 사상을 전파하는 데 주력했다. 또한 그는 아나키즘 혁명을 이야기하고 있기는 하지만 중국의 혁명에 대해서는 거의 언급하지 않고 있다.[50]
스푸는 류스페이식 아나키즘과 달리 반反 복고주의 경향을 드러내는데, 이는 신세기파의 과학주의적 아나키즘의 영향을 받았기 때문이다. 그의 사상 가운데 신세기파의 영향이 가장 두드러지게 나타난 것은 교육을 통해 아나키즘 사회를 실현한다는 혁명 방법이다. 그는 신문 · 잡지 · 소설 · 화보 등을 이용한 노동자 교육을 강조했고, 노동자들의 교육수준이 향상되어 노동조합의 건설로 발전하기를 희망했다. 노동운동에 대한 그의 방침은 “단체를 조직하고, 지식을 향상한다”는 간단한 표어로 정리할 수 있다. 스푸는 아나르코 생디칼리슴을 받아들인다. 그는 아나르코 코뮤니즘을 실현하기 위한 한 가지 방법으로 생디칼리슴을 수용한다고 설명하지만, 아나키즘과 생디칼리슴의 결합은 나름대로 스푸 아나키즘의 특색을 보여준다. 실제로 1915년 3월 폐병으로 사망할 때까지 그는 각종 노동조합을 조직하는 데 가장 큰 정성을 쏟았다.
스푸가 병원에 입원했을 때 의사는 치료를 위해 그에게 육류와 계란 우유 등을 많이 섭취할 것을 권했다고 한다. 그러나 심사의 규약을 위반하지 않기 위해 스푸는 끝까지 채식주의를 고집했다. 또한 치료비가 부족해 제자들이 인쇄기를 팔아서 돈을 마련하려 하자 이를 완강히 거부했기에 병세가 더 악화되었다고도 한다. 스푸는 자신이 아나키즘과 함께 중국의 황토에 매장될 뿐이라는 말을 남기고 31세의 나이에 죽었다. 그의 시신은 저장성 시후 주변에 매장했으며, 묘비에 ‘스푸 묘’라는 세 글자와 함께 에스페란토어로 그의 생애를 기록했다. 스푸와 한때 논쟁을 벌였던 우즈후이는 그의 사망 소식을 듣고, “스푸 선생이 있음으로 해서 중국 아나키즘의 실현이 수백 년 앞당겨졌으나, 다시 그의 죽음으로 말미암아 아나키즘의 실현은 요원해졌다”며 크게 슬퍼했다.
스푸는 전형적인 배만혁명가에서 출발해 반강권주의를 주장하는 테러리스트가 되었다. 그리고 다시 도덕혁명을 주장하던 ‘심사’시기를 거쳐 최종적으로는 ‘민성사’를 중심으로 아나르코 코뮤니즘의 이론을 전파하고 아나르코 생디칼리슴을 실현하기 위해 분투하다가 생을 마감했다. 마지막 시기에는 도덕과 문화 문제에 큰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지만, 여전히 철저하게 심사의 규약을 준수했다. 스푸는 「신세기」를 통해 아나키즘을 이해했으나 말년에 노동조합운동에 몰두하면서 신세기파와 차이를 보인다. 비록 그의 사상에 독창적인 관점이 많지는 않으나, 「신세기」의 아나키즘을 선전하면서 조금은 새롭게 해석한 측면이 있다. 훗날 제자들은 그의 사상을 스푸주의라고 불렀다.
스푸의 생애를 보면 당시 아나키즘의 세계적인 흐름을 읽을 수 있다. 19세기 말 유럽을 휩쓴 암살 풍조가 쇠퇴하고, 20세기를 전후해서는 크로포트킨의 아나르코 코뮤니즘이 주류를 형성했다. 그리고 얼마 후 다시 아나키즘이 노동자들에게 전파되면서 아나르코 생디칼리슴이 세력을 얻는데, 이것이 시간 간격을 두고 차례로 중국에 들어와 영향을 미쳤다. 스푸는 바로 이 시기에 살았던 인물로, 이런 조류의 변화를 골고루 체험해 보여준 것이다. 덧붙이자면, 제1차 세계대전에 참전하는 문제를 두고 유럽의 아나키스트들이 반전파와 연합국 지지파로 분열했을 때, 신세기파와 스푸는 연합국을 지지하는 입장을 취했다. 이런 태도는 크로포트킨이나 르클뤼, 그라브 등이 연합국 지지파였다는 사실과 관련지어 생각할 때, 중국 아나키즘의 특징을 이해하는 데 암시하는 바가 많다.
스푸의 민성파는 비록 소수였으나 매우 결속력이 강한 조직으로, 위안스카이 독재 아래서 거의 유일하게 생존한 혁명파 집단이다. 위안스카이 정부의 탄압 때문에 쑨원의 국민당과 장캉후의 사회당이 해산한 후에도 스푸의 민성사는 여전히 살아남아 교육운동(주로 에스페란토어 전파 활동)과 노동운동 분야에서 일정하게 사회주의 운동세력을 유지했다. 스푸의 죽음으로 중국 아나키스트 운동은 잠시 침묵 상태에 들어갔으나 오래지 않아 신문화운동 시기에 다시 역사의 전면에 등장한다.
스푸가 후대에 미친 가장 큰 영향은 희생적이며 정열적인 실천 활동 그 자체에 있었고, 그 강한 이미지는 5 · 4운동 시기에 청년 아나키스트들의 모범이 되었다. 훗날 청년 아나키스트 황링숭앙은 “스푸 선생은 우리의 선각이며, 우리는 스푸 선생의 제자들”이라고 공개적으로 선언한다. 한마디로 스푸주의는 「신세기」 아나키즘을 재해석한 것이라고 말할 수 있으며, 그의 사상은 청말 아나키즘과 신문화운동 시기의 아나키즘을 잇는 가교 역할을 했다고 평가할 수 있다.
4. 스푸의 학생들과 신문화운동
스푸의 죽음을 전후해 중국 사회는 중요한 변화를 겪는다. 대외적으로는 유럽에서 발발한 제1차 세계대전의 결과로 청말 이래 중국 지식인들이 믿고 있던 사회진화론에 근본적인 회의가 일어났다. 이로 인해 적지 않은 지식인들이 적자생존식의 진화론에 의문을 품고, 그 가운데 일부는 상호부조의 진화론 즉 크로포트킨의 사상을 받아들였다. 대내적으로는 공화정치에 대한 실망감과 위안스카이 독재 및 군벌정부의 등장이 많은 사람들에게 정치에 대한 절망감을 심어주었다. 당시 중국의 진보적인 지식인들은 총체적인 사회 문화의 변혁이 없는 한 결코 민주국가의 이상을 달성할 수 없다고 믿게 되었다. 그들은 중국이 절실히 필요한 것은 단순한 사상 개혁이 아니라 사회윤리적 토대의 근본적인 혁신이라는 데 공감했다. 더욱이 진보적 지식인들에게 옛 권위와 투쟁하는 것은 더 이상 관념적이고 추상적인 문제가 아니라 현실 경험에 기반한 실제적이고 직접적인 것이었다. 이런 분위기에서 신문화운동이 일어난다.
신문화운동 시기 중국 아나키스트의 특징 가운데 하나는 정치 문제를 토론하는 것을 피하고 주로 도덕이나 교육 문제와 같은 문화운동에 전력했다는 것이다. 여기에는 현실 정치의 존재를 부정하는 아나키즘 본래의 특색 외에도 군벌정부의 압력 또한 적지 않은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 하지만 아나키즘이 종합적인 사상체계이고, 무정부 무국가만이 그들의 최고 목표가 아니며, 본래 인간의 자유를 방해하는 모든 권위에 저항하는 사상이라는 사실을 염두에 둔다면, 가족이나 종교와 같은 문화적 권위들 역시 국가 못지않게 중요한 타도 대상이 된다. 따라서 그들이 문화운동에 참여한 것은 전혀 이상할 것이 없는, 자연스런 현상이다.
1915년 「신청년」의 창간으로 시작된 신문화운동은 중국 현대사에서 새로운 이정표가 된 사건이다. 이 시기 옛 신세기파의 구성원이었던 리스쩡, 우즈후이, 차이위안페이 등은 국내에서 유법근공검학운동(留法勤工儉學運動 : 프랑스에 학생과 노동자들을 유학보내는 운동)을 전개해 스푸 사후 구심점이 없었던 중국 아나키스트 운동에 새로운 활력을 불어넣었다. 이 운동은 민국 초기부터 꾸준히 전개된 유학운동인데, 문화 교류 과정을 통해 중국 사회에 아나르코 생디칼리슴을 널리 알렸다. 그리고 제1차 세계대전에서 연합국이 승리하자, 적자생존이라는 독일식 논리를 상호부조라는 프랑스의 논리가 이긴 것으로 받아들였다. 이에 따라 민족주의와 국가주의 신념이 흔들렸고, 특히 부르주아민주주의에 실망하고 자본주의 체제에 회의하는 목소리가 높아졌다. 옛 신세기파는 앞의 유학운동 외에 중국과 프랑스에 대학을 설립하기도 했다. 이런 그들의 활동은 민국 시기 아나키스트 운동의 한 특색을 이루었으며, 20년대 후반에는 상하이노동대학을 건립하는 것으로 이어졌다.
베이징대학의 개혁은 신문화운동을 대표하는 또 다른 사건인데, 옛 신세기파와 청년 아나키스트들은 여기서도 활발한 활동을 펼쳤다. 차이위안페이가 베이징대학 총장이 된 후 널리 선전한 ‘노동’과 ‘호조互助’ 사상은 말할 필요도 없이 아나키즘 색채가 농후한 것이었다. 스푸도 아나키즘이란 노동과 호조일 뿐이라고 지적한 바 있다. 호조란 용어를 중국에 들여온 인물은 리스쩡으로, 그의 『호조론』(‘상호부조론’을 가리킨다) 번역본은 중국의 각종 잡지에 여러 번 연재되어 큰 호응을 불러일으켰다. 과거 옌푸의 『천연론』이 민족의 자강보존에 주력했으나 윤리와 도덕의식의 진화 문제를 소홀히 다루었다면, 리스쩡의 『호조론』은 진화 과정에서 혁명의 의의를 강조하고, 인류의 도덕 문제를 강조한 점에서 거리가 있다. 이러한 상호부조주의는 당시 사상계를 지배하던 경쟁적 민족주의 즉 사회다원주의를 비판할 수 있는 요소를 가지고 있었다. 그 후 중국 각지에서 호조란 이름을 단 사회단체나 잡지들이 등장한 것은 이 새로운 사상이 얼마나 광범위한 지지를 받았는지를 보여준다.
노동이란 용어 역시 지식인과 노동자의 신분 차별을 철폐하려고 한 것으로, 이 개념의 중심에는 육체노동과 정신노동의 결합을 의미하는 크로포트킨의 교육철학과 톨스토이의 범노동주의 사상이 자리잡고 있었다. 뿐만 아니라 이즈음 중국 사회를 풍미했던 신촌新村주의 · 공독工讀주의 · 공학工學주의 사조 역시 유법근공검학운동은 물론 호조와 노동의 정신과도 밀접한 관련이 있었다. 청년 아나키스트들은 이런 일련의 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당시 베이징대학은 차이위안페이의 요청으로 리스쩡과 우즈후이를 교수로 초빙했고, 대학 안에 북경대학동학검학회, 진덕회, 실사實社, 분투사奮鬪社, 북대세계어연구회 등 아나키즘 색채가 짙은 소단체가 연이어 조직되었다. 이 가운데 전형적인 아나키스트 모임인 실사의 주요 멤버 황링수앙과 어우성바이는 이 시기를 대표하는 청년 아나키스트다. 두 사람은 모두 광둥인으로 신문화운동이 시작되기 전부터 아나키즘을 받아들였다. 황링수앙은 스푸가 창간한 「민성」에 참여한 바 있으며, 어우성바이도 스푸가 만든 ‘광저우무정부주의동지사’의 일원이었다. 이들은 「자유록」을 발간해 젊은이들에게 아나키즘을 전파했다. 또 다른 아나키스트 위안쩐잉(袁振英) 역시 광둥인으로 홍콩에서 아나키즘 활동을 한 바 있으며, 베이징대학에 와서 황링수앙, 어우성바이와 함께 활동했다. 베이징대학을 중심으로 전개된 신문화운동에 상하이나 광저우에서 활동하는 스푸의 제자들이 대거 참여한 데서, 민성파 아나키스트들이 북상해 옛 신세기파와 결합했음을 알 수 있다. 졸업 후 황링수앙은 계속 베이징에 남아 활동했고, 어우성바이는 중국 아나키스트 운동의 본거지인 광저우로 돌아가 활동했다.
신문화운동의 대표적인 잡지 「신청년」에 적지 않은 아나키스트 글이 실린 사실도 신문화운동과 아나키즘의 밀접한 관계를 보여준다. 또한 아나키스트는 아니지만 「신청년」의 주요 필자로서 신문화운동을 이끌었던 천두슈(陳獨秀), 리따자오, 시엔시엔통(錢玄同), 저우쭈어런(周作人), 루쉰(魯迅)의 행적과 그들의 글들을 분석해보면 거의 예외 없이 아나키즘의 짙은 흔적을 찾을 수 있다. 그들이 내세운 우상 파괴 정신과 반국수주의 정신은 중국 아나키스트의 반권위주의 정신과 일맥상통하는 것이다.
그 후 베이징은 중국 아나키스트 운동의 중심지가 되었으며, 점차 전국적으로 세력이 확대되어 중국 아나키스트 운동의 전성기를 구가한다. 상하이에서 발간한 「진화進化」나 광저우에서 발간한 「민풍民風」은 대표적인 아나키즘 잡지이자 신문화운동의 선전지였다. 그 밖에도 전국 각지에서 수십 가지의 잡지가 출판되었고, 50여 개의 아나키스트 단체가 활동했다고 한다.[51]
당시에 개인주의적 아나키스트가 등장한 것도 흥미로운 일이다. 예를 들어, 베이징대학 학생이던 주치엔즈는 「분투」라는 잡지에서 허무주의 철학에 기초해 개인의 분투정신이야말로 최고의 가치라고 주장하면서, 개인의 절대자유에 다다르기 위해서는 우주에 존재하는 모든 조직을 뒤집어버려야 한다는 이른바 우주혁명을 제창했다. 그는 과학과 혁명을 대립 관계로 설정해 논리를 전개한다. 즉 아나르코 코뮤니즘과 볼셰비즘은 과학임을 내세우지만, 실은 둘 다 철저하지 못한 혁명이라고 비판했다. 그는 과학의 시대는 이미 끝났고 과학은 하나의 권위에 불과하므로, 본능의 충동에 따르는 혁명철학이 필요하다고 역설했다. 그의 분투파는 아마도 중국인 가운데 가장 먼저 볼셰비키를 비판한 그룹일 것이다.[52]
중국 아나키스트들이 기존 체제의 가장 근본적인 변화를 추구하는 급진성을 보인다는 점에서는 다른 나라의 아나키스트 운동과 일치하지만, 전통문화와 관련해 나타나는 강렬한 문화주의 의식은 주목할 만하다. 소위 전통문화에 강하게 집착하는 태도는 어설프게나마 전통과 아나키즘을 지속적으로 결합하려는 시도(천의파)나 그와 반대로 극단적인 단절을 주장하는 배타심리(신세기파)로 표출된다. 아나키즘은 기본적으로 반전통의 성향을 강하게 띤다. 따라서 신문화운동 시기에 제기된 반전통의 주장에 아나키스트가 적극적으로 가담한 사실은 그리 놀라운 일이 아니다.
신문화운동이 한창일 무렵 일부 아나키스트들은 사회혁명을 실현하는 더욱 실제적인 방법의 하나로 노동운동에 눈을 돌려 노동자에게서 혁명의 가능성을 찾으려고 했다. 물론 아나르코 생디칼리슴의 영향 때문이겠지만, 제1차 세계대전의 종결과 러시아 혁명의 성공이 그들에게 좀더 투쟁적인 실천의 장으로 눈을 돌리게 했을 것이다. 그들은 문화운동을 지식인만의 운동이라고 비판하면서 노동자 중심의 운동을 제창했다.[53] 그러면서 점차 운동의 무게 중심이 문화에서 경제로 옮겨가기 시작한다. 본디 그들의 문화혁명론이 가족과 국가, 삼강과 봉건 계급질서, 공자와 종교, 여성과 경제자립, 국수 문자와 봉건문화 등의 주제를 결합해 설명한 데서도 알 수 있듯이, 정치 및 경제혁명론과 불가분의 관계를 지니고 있었다는 점도 기억해야 할 것이다.
이른바 5 · 4사건으로 촉발된 5 · 4운동은 다른 사회사조와 마찬가지로 중국 아나키스트 운동에서도 중요한 변화를 초래했다. 5 · 4운동은 중국 아나키즘의 전성기와 일치하기 때문에 어떤 사람들은 아나키스트들이 이 운동을 주도한 대표적인 세력 중 하나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이 운동이 일어난 때는 볼셰비즘이 중국에 들어온 시기이기도 하다. 처음에는 아나키즘과 볼셰비즘을 구분하는 것조차 힘든 경우도 있었고, 이들이 함께 운동을 전개하기도 했으나 점차 균열이 생긴다. 아나키스트에게 매우 강력한 경쟁자가 등장한 것인데, 특히 1921년 7월 중국공산당을 창립할 무렵 그 갈등은 정점에 이르러 아나 · 볼 논쟁이 일어났다.
1919~1921년에는 진보 진영 안에서 사상 논쟁이 벌어져 자유주의자 · 국가사회주의자 · 아나키스트 · 마르크시스트가 각자 정치적 색채를 분명히 하고 자신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문화혁명의 기치 아래 모였던 이들이 정치노선의 차이를 분명하게 인식하면서 갈라선 것이다. 이때 아나키스트 또는 아나키즘적 성향을 띤 지식인들도 나름대로 현실 정치에 구체적인 문제를 제기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중국의 아나키스트들은 곧바로 어려운 선택의 갈림길에 서게 된다. ‘구망도존救亡圖存’의 위기의식 아래 형성된 정치적 민족주의라는 거대한 흐름과 맞서야 했기 때문이다.
제3장 한국 : 민족해방운동으로서의 아나키즘
1. 민족주의와 아나키즘 사이에서
1919년에 일어난 3 · 1운동은 한국 독립운동사에 획기적인 사건이다. 그리고 이 운동은 한국 아나키스트 운동이 출발하는 데도 중요한 영향을 미쳤다. 이 운동을 전후해 한인 독립운동가들이 여러 급진주의 사조를 받아들였으며, 그 가운데 하나가 아나키즘이기 때문이다. 보통 한국에서는 일본이나 중국과는 달리 1920년대 초부터 본격적으로 아나키즘을 수용했다고 본다. 그 전에는 일제의 식민지라는 특수한 상황으로 말미암아 정부를 부정하는 아나키즘 사상을 수용하기가 어려웠다는 것이다. 하지만 최근 이호룡은 3 · 1운동 이전에 이미 한인 독립운동가들 사이에 아나키즘이 널리 유포되어 있었다고 주장했다. 일본이나 중국과 마찬가지로 마르크시즘보다 일찍 수용되어 사회주의 사상계의 주류를 점했다는 것이다.[54] 이것이 사실이라면 동아시아 세 나라 모두 20세기 초에 아나키즘을 수용했다는 말이 된다. 그렇다 하더라도 3 · 1운동을 전후해 한국 아나키스트 운동이 역사의 전면에 등장했다는 점에 대해서는 큰 이견이 없을 것이다.
한국은 일제의 침략에 맞설 새로운 사상을 모색하는 과정에서 사회주의를 수용했다. 구한말 사회진화론이 한때 실력양성론을 이론적으로 뒷받침하면서 근대화운동을 이끌었지만, 1910년 국권을 상실한 다음에는 이 이론에 일제의 한국 지배를 정당화하는 요소가 있다고 자각하면서 민족해방운동의 하나로 사회주의에 주목한 것이다. 식민지 치하의 국내 한인들이 아나키즘을 받아들일 즈음 일본이나 중국에 거주하던 한인들도 이 사상을 받아들였다. 그런데 국내보다는 국외에서 벌이는 활동이 더 활발했다. 그 이유는 국내보다 사상 통제가 약한 국외에서 아나키즘 활동을 하는 것이 유리했기 때문일 것이다. 그렇다면 각 지역 한인들이 어떤 경로를 통해 아나키즘을 받아들였는지 일본 · 중국 · 한국의 차례로 간단히 살펴보자.
일본에서는 1917년 러시아 혁명을 전후해서 아나키스트를 자처하는 한인들(예를 들어, 한광수)이 나타났다. 그들은 아나키즘을 포함한 사회주의를 선전하고 단체를 만들었다. 주목할 만한 변화가 나타난 것은 3 · 1운동 후로, 이때부터 한인 유학생 모임이 친목단체에서 점차 이념 단체로 발전하는 경향을 보인다. 특히 3 · 1운동이 좌절되면서 개량적인 민족주의 운동보다는 급진적인 사회주의 운동을 선호하게 되었고, 20년대 한인 지식인들은 사회주의를 가장 매력적인 사상으로 바라보았다.
재일 한인 아나키스트 운동은 일본 아나키스트 운동과 밀접한 관련을 맺으며 발전했다. 과거 중국인 혁명가들이 고토쿠 슈스이의 영향을 크게 받았다면, 한인 혁명가들은 그의 제자 오스기 사카에에게 큰 영향을 받았다. 수용 시기가 달랐기 때문에 이런 차이가 나타났을 것이다. 20년대 초 한인 유학생 일부가 오스기 사카에 · 이와사 사쿠타로 같은 일본인 아나키스트와 접촉했고, 일본인 아나키스트 단체에 하나 둘 가입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1921년 11월에는 마침내 한인 유학생들이 독자적으로 ‘흑도회黑濤會’란 단체를 조직한다. 이것이 일본에서 결성된 초기의 대표적인 한인 아나키즘 이념서클이다. 이 단체에는 민족주의자와 공산주의자도 참가한 것으로 보인다.
흑도회는 일본인 아나키스트의 지도를 받아 박열, 김약수, 김판권 등이 결성한 단체로, 기관지 「흑도」를 발행했다. 그들은 약자인 한인의 동정을 일본 지식인들에게 알리기 위해 잡지를 발간하며 이 잡지는 국가적 편견과 민족적 증오 없이 한일 양 국민이 진정으로 융합하는 사회를 지향한다고 밝혔다. 이처럼 온건한 태도를 취하고 있지만, 1907년 일본인에 대한 적개심 때문에 한인들이 아주화친회에 가입하지 않았던 것과 비교한다면 상황이 많이 달라진 것이다. 아무튼 일본에서 한인 아나키스트 운동은 이 단체에서 출발한다.
중국에서 활동하던 한인 독립운동가들이 언제부터 아나키즘을 수용했는지는 분명하지 않다. 1911년 신해혁명이 일어난 즈음 많은 한인들이 중국에 건너가 이 혁명운동에 참가했는데, 그들 가운데 일부가 아나키즘을 접했을 것이다. 왜냐하면 1910년대 중국 사회를 풍미했던 대표적인 사회주의가 바로 아나키즘이기 때문이다. 1913년 중국 상하이로 건너온 신채호는 고토쿠 슈스이의 글은 물론 스푸의 글도 읽은 것으로 보인다. 또한 1917년 8월 상하이에서 건립한 신규식의 조선사회당은 비록 아나키스트 단체는 아니지만, 이미 한인 사회주의자나 아나키스트가 많이 있었음을 말해준다.
3 · 1운동의 영향으로 상하이에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세워졌다. 하지만 곧 정치노선의 차이가 드러나면서 민족주의 진영은 분열했고 강경파와 온건파가 대립하게 된다. 이즈음 러시아 혁명은 중국에 있던 한인 운동가들에게도 영향을 미쳐 아나키즘이나 볼셰비즘과 같은 사회주의 사상이 본격적으로 들어왔다. 어떤 사람들은 이때부터 신채호가 이미 아나키즘 활동을 시작했고, 그가 상하이에서 조직한 신대한동맹단과 잡지 「신대한」에서 아나키즘의 요소를 찾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 1920년에 베이징으로 온 신채호는 다음 해 1월 「천고天鼓」를 창간한다. 이 잡지는 일본 제국주의의 야만성을 비판하고, 무장투쟁과 한중연합전선의 필요성을 강조했다. 여기서 신채호는 민족주의적 역사의식과 더불어 제국주의와 국가주의를 부정하고 세계대동을 주장하는 등 아나키즘의 색깔을 선명히 드러낸다. 심지어 그는 같은 해에 흑색청년동맹 베이징 지부를 만들었다고도 한다. 이 무렵 한중협회가 창간한 「광명光明」과 텐진에서 한인이 발간한 「투보鬪報」 등도 아나키즘 색채가 짙은 잡지라고 알려져 있다. 이런 사실에 비추어 적어도 20년대 초에는 중국에서 한인 아나키스트들이 집단적으로 출현했다고 볼 수 있다.
중국 내 한인들이 아나키즘을 수용하는 데는 무엇보다 중국인 아나키스트와 직접 교류한 것이 중요한 역할을 한 듯하다. 예를 들어, 신채호는 「천고」를 발행할 때나 베이징대학 도서관을 이용할 때 중국인 아나키스트 리스쩡의 도움을 받았다. 그 후에도 신채호와 리스쩡은 계속해서 두터운 교분을 나눈 듯하다. 이러한 사실은 일제 패망 후 리스쩡의 도움을 받아 상하이에 조선학전관을 설립하고, 이곳에 신채호학사를 설치한 사실에서도 드러난다. 또 다른 한인 아나키스트 이을규, 이정규 형제도 중국인들의 도움을 받아 아나키즘 이론가로 성장할 수 있었다. 이정규는 크로포트킨의 여러 저작을 번역한 이론가로 ‘무정부주의연맹의 필봉’이라고 알려졌다. 그는 이상촌 건설운동이나 동아시아 지역 아나키스트의 연대에 관심이 많았으며, 훗날 중국 아나키스트가 주도한 각종 사회운동에도 적극 참여했다. 이정규의 형인 이을규도 같은 길을 걸었는데, 크로포트킨의 『청년에게 고함』 일부를 번역했다. 또한 유자명, 이회영, 정화암, 백정기 같은 독립운동가들도 비슷한 과정을 거쳐 아나키즘을 받아들였고, 1924년 4월 그들은 마침내 재중국 조선무정부주의자연맹을 결성한다.
한편 러시아의 맹인 시인 에로생코가 한인 운동가들에게 끼친 영향도 주목할 만하다. 구체적인 내용은 자세히 알려지지 않았지만 그가 동아시아 3국의 아나키스트와 교류를 나눈 사실은 자주 발견된다. 에로생코는 에스페란토 운동(세계어를 사용하자는 운동)을 활발하게 펼친 인물이다. 당시 에스페란토어는 민족주의의 장벽을 허물고 국제 연대를 꾀하기 위해 아나키스트들이 채용한 문화혁명의 한 수단이었다. 과거 일본의 오스기 사카에, 중국의 스푸 등도 사회혁명의 수단으로 에스페란토어를 전파하기 위해 노력했다. 한국인으로는 이정규가 이 활동에 적극적이었다.
그 밖에 베이징의 대학가를 중심으로 유기석, 심용해, 오남기, 정래동 등이 이끈 학생 활동도 있었다. 유기석과 심용해 등은 중국인 청년 아나키스트와 함께 흑기연맹을 조직하고, 아나키즘 이론 연구와 선전 활동에 열심이었다. 그들은 베이징 지역을 중심으로 활발하게 일어났던 아나키스트 운동과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었던 듯하지만 자세한 내용은 알려지지 않았다. 재중 한인 아나키스트들이 펼친 운동은 일본이나 한국보다 활발했다. 아마도 일본의 세력이 덜 미치는 곳이었고, 한인 혁명가들이 밀집해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국내에서는 이미 19세기 말 「한성순보」에 서유럽의 사회당이나 러시아의 허무당을 소개하는 기사가 실렸다. 20세기 초에는 「만국공보」 같은 중국 잡지나 량치차오, 고토쿠 슈스이의 저술 등이 들어오면서 테러리즘과 사회주의를 소개하는 글들이 알려졌다. 중국 여행객이나 일본 유학생 또는 국내에 거주하던 일본인 사회주의자들도 사회주의를 전파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다.[55] 아나키즘에 대한 국내 최초의 기록은, 신채호가 황성신문사에 재직하던 1905년 고토쿠 슈스이(당시에 그는 아직까지 마르크시스트였다)의 『장광설』을 읽은 후에 아나키즘에 공명했다는 것이다. 그 후 1917년의 러시아 혁명, 1919년의 3 · 1운동이 국내에 아나키즘을 포함한 사회주의를 전파하는 데 큰 자극이 되었음이 틀림없다. 하지만 초창기 한국에서는 마르크시즘 · 볼셰비즘 · 국가사회주의 · 아나키즘 등을 명확히 구분하지 못하는 일이 흔했다. 중국 사회와 마찬가지로 갑작스레 쏟아져 들어오는 외래 사조들을 제대로 파악하기란 쉽지 않았을 것이다. 당시 사회주의 사상은 과격사상이라고 알려졌다. 조금이라도 학식이 있다는 사람치고 사회주의를 운운하지 않는 사람은 없었지만, 사회주의를 정확히 이해하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았다.
1920년 4월에 조직된 조선노동공제회(한국 최초의 노동조합)의 기관지 「공제共濟」, 1922년 3월 창간된 한국 최초의 사회주의 잡지 「신생활」을 보면 아나키즘을 소개하는 기사가 적지 않다. 여기에 실린 기사는 주로 크로포트킨의 아나르코 코뮤니즘을 소개하는 것이지만 슈티르너의 개인주의 아나키즘도 다뤄지고 있다. 특히 조선노동공제회의 지도자인 고순흠은 아나키스트로 나중에는 일본과 제주에서도 활동했다.[56] 이 시기에 동아일보나 조선일보 같은 신문 지상에 아나키즘을 선전하다 체포된 사람들(장도원, 김경주 등)을 다룬 기사가 나타나기 시작한다. 1921년 10월(?)에는 일본에서 잠시 귀국한 재일 한인 아나키스트 박열이 흑로회를 조직했다고 전한다. 이런 산발적인 활동들은 결국 1924년 12월 서울에서 곽철, 한병희, 이창식 등이 흑기연맹을 조직하는 것으로 발전했다. 그러나 이 단체가 창립총회를 준비하던 중 해체되자, 다음 해 9월에는 서동성, 방한상 등이 대구에서 진우眞友연맹을 조직했다. 이 단체는 이른바 대역사건으로 구속된 박열을 지원하는 활동을 열심히 펼쳤다. 비록 일제의 탄압 때문에 조직 결성과 해체를 반복했지만, 국내에서도 아나키스트 운동이 서서히 자리를 잡아가고 있었다.
당시 민족해방의 논리로 아나키즘을 받아들인 한인 혁명가들은 일제에 저항하는 독립운동과 반권위주의를 주장하는 아나키즘 사이에 이론상 모순이 없다고 생각했다. 일제의 지배를 받는 한인들에게 국가를 부정하는 것은 곧 식민지 권력 타도를 선언하는 것과 마찬가지였기 때문이다. 아마도 민족해방을 추구하는 사람들에게 ‘무정부주의’란 용어는 일본 정부를 없애자는 말로 들렸을 것이다. 다시 말하면 한인 아나키스트에게 일제에 대한 투쟁은 곧 민족해방운동이자 아나키즘 사회를 건설하기 위한 투쟁이었다. 그리고 그들에게 민족해방은 곧 민중해방이자 계급해방을 의미했다. 사실 유럽에서도 민족해방 문제와 아나키스트 운동의 친밀성이 종종 나타난다. 예를 들어, 푸르동이나 바쿠닌도 한때 민족주의 정서를 뚜렷이 내비친 적이 있다. 하지만 주목할 만한 것은, 한인 아나키스트들이 유난히 민족주의 색채를 강하게 나타냈다는 점이다. 뿐만 아니라 정치나 정당에 대한 혐오감이 적었고 심지어는 정치 지향적인 모습조차 보였다.
일제시대 대표적인 민족주의자이자 아나키스트였던 신채호를 예로 들어 민족주의와 아나키즘의 관계를 좀 더 살펴보자.
2. 신채호는 아나키스트인가
신채호(1880~1936)가 일제시대 대표적인 민족주의자인 동시에 아나키스트라는 것은 무척 흥미로운 사실이다. 민족주의와 아나키즘이 시기를 조금 달리하기는 하지만 한 인물에게 동시에 구현되었다는 것은 한국 아나키즘을 이해할 때 반드시 살펴보아야 하는 중요한 문제다. 정도의 차이가 있기는 하지만 이런 경향이 대다수의 한인 아나키스트에게 고루 나타나기 때문이다.
신채호는 충청도의 가난한 선비 집안에서 태어나 어릴 때부터 한학을 공부했다. 청년이 되어 성균관에 들어간 그는 1905년에 박사가 되었고, 황성신문과 대한매일신보를 중심으로 구국운동을 벌였다. 그러나 1910년 결국 조선이 멸망하자, 중국과 러시아를 떠돌며 한인 독립운동에 참여했다. 1915년에는 베이징에서 신규식과 신한청년회를 만들고 박은식, 문일평 등과 함께 박달학원을 설립하기도 했다. 널리 알려진 바와 같이 이 시기의 신채호는 애국계몽운동을 통해 국권 회복을 추구했다. 그의 애국계몽운동은 민중 계몽을 통해 부강한 독립국가를 건설하는 것으로, 이런 민족주의는 유럽의 근대적인 정치체제를 지향하는 것이기도 했다.
신채호가 국수주의 관점에서 역사를 연구하게 된 것도 사대주의적인 역사 인식을 비판하기 위해서였다. 그런데 국수주의는 지배계층의 통치 수단으로 악용될 가능성이 높고, 종족주의로 빠져 자민족 우월주의로 흐를 가능성도 있었다. 일본의 사례가 이를 잘 보여준다. 하지만 그의 국수주의는 그런 위험으로부터 어느 정도 거리를 두고 있는 듯하다. 아마도 민중을 교화의 대상으로만 여기는 일부 엘리트주의에 심취한 이론가와는 달리 실제 현장에서 사상을 실천한 운동가였기 때문에 이런 균형이 가능했는지도 모른다.
1920년대 이전 신채호의 민족주의 사상에는 제국주의와 민족주의를 대립 관계로 인식하며, 제국주의자의 침략에 대항해 민족주의자의 저항을 정당화하는 논리가 어느 정도 마련되어 있었다. 이러한 그의 민족주의는 훗날 아나키즘에 쉽게 다가가도록 만든 한 가지 계기가 된 듯하다. 신채호가 ‘자강自强’에서 ‘혁명’으로 전화한 과정은 ‘민족’에서 ‘민중’의 존재를 발견하는 과정과 어우러진 것이었다.
신채호는 3 · 1운동의 결과 상하이에 임시정부가 수립되자 여기에 참여했다. 그는 임정에서 개량적인 민족주의 노선에 만족하지 못하고 무력항쟁을 주장하는 과격파의 일원이 되었다. 당시 그는 이승만과 안창호가 주장한 외교론이나 준비론과 같은 온건 노선을 비판하고 임시정부의 전면 개조를 주장했지만 새로운 이론적 대안을 제시하지 못하고 사상적으로 방황하고 있었다. 신채호가 아나키즘에 주목한 것은 이 무렵이다. 여기서 사상의 방황이란 그의 자강론(여기서 자강은 진화의 격의적인 번역어)에 내재된 자기모순을 의미한다. 즉 생존경쟁과 약육강식의 국제사회에서 강자만이 살아남고 약자는 도태된다는 자강론의 발상은 조선의 부강을 위해 민중의 자각을 요구하는 데는 유용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강자인 일본이 약자인 조선을 지배하는 것을 정당화하는 논리이기도 했다. 이런 자강론의 모순을 넘어서는 데 아나키즘은 매우 매력적인 대안을 제시한 듯하다. 아나키즘의 반강권 논리는 종족주의의 틀을 넘어서 약소민족의 국제 연대를 통해 반제국주의를 주장한다는 점에서 자강론에서 더욱 매력적이었다. 나아가 암살과 파괴 같은 폭력 수단을 긍정하는 아나키즘에서 일제에 저항하기 위한 무기도 발견할 수 있었다.
앞서 말한 것처럼 신채호가 아나키즘을 받아들이게 된 것은 중국 아나키스트들과 교류하면서부터다. 이들과의 접촉을 전후해 그는 크로포트킨, 고토쿠 슈스이, 스푸의 저작들을 두루 섭렵했던 것으로 보인다. 특히 크로포트킨의 『청년에게 고함』이나 고토쿠 슈스이의 『기독말살론』, 중국인의 「신세기」나 「민성」의 여러 논설들은 그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다. 그러던 중 1922년 겨울 의열단 단원이자 아나키스트인 유자명에게서 의열단 단장 김원봉을 소개받고, 그의 요청에 따라 다음 해 1월 〈조선혁명선언〉(일명 ‘의열단선언문’)을 발표했다. 이 선언문은 널리 알려진 것처럼 일본 제국주의에 대항하는 선언문 가운데 가장 과격하고 급진적인 것이다.
“강도 일본이 우리의 국호를 없이 하며, 우리의 정권을 빼앗았으며, 우리의 생존적 필요조건을 다 박탈했다”라고 시작하는 이 선언문의 핵심은 일제의 현 체제를 파괴하고 조선의 새 체제를 건설하자는 것이다. 이를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1) 이족 통치를 파괴해 고유적 조선을 건설한다. 2) 특권계급을 파괴해 자유적 조선 민중을 건설한다. 3) 경제적 약탈제도를 파괴해 민중적 경제제도를 건설한다. 4) 사회적 불균형을 파괴해 민중 전체의 행복을 위한 제도를 건설한다. 5) 노예적 문화사상을 파괴해 민중문화를 건설한다.” 신채호는 여기서 “파괴가 곧 건설”이라는 바쿠닌의 원리를 채용하기는 했지만, “모든 혁명은 민중 속에서 시작되었다”는 민중혁명론의 제창은, 엘리트주의를 비판해 평민주의를 주장함으로써 기존의 민족해방 이론을 한 단계 끌어올린 것이다. 또한 그가 “십만의 군대를 양성하는 것이 한 발의 폭탄만 못하며, 수천 장의 신문이나 잡지가 한 번의 폭동만 못할지니라”고 직접혁명을 주장한 것은 이승만의 외교론이나 안창호의 준비론에 내재한 엘리트주의를 겨냥한 것이기도 했다.
신채호의 〈조선혁명선언〉은 한마디로 직접행동의 방법을 채용해 의열단의 폭력투쟁을 이론화한 것이다. 비록 1924년 4월에 결성된 재중국 조선무정부주의자연맹에는 참석하지 못했으나, 그 전에 이미 모든 한인이 혁명운동에 참여하자는 이른바 민중직접혁명론을 제시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신채호의 아나키즘과 관련한 논쟁은 바로 이쯤에서 발생한다.
지금까지 신채호의 민족주의와 아나키즘에 대해 많은 연구가 이루어졌지만, 여전히 몇 가지 문제는 논란거리다. 그 중에서도 1) 왜 아나키즘을 수용했는가라는 사상적 배경에 대한 문제, 2) 언제부터 아나키즘을 신봉했는가라는 시점의 문제, 3) 신채호의 아나키즘을 민족해방운동과 관련해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라는 평가의 문제가 대표적인 것이다. 이제 기존 연구의 쟁점을 간단히 정리하고 필자의 생각을 간단히 제시하고자 한다.[57]
첫째, 신채호가 왜 아나키즘을 수용했는가라는 문제를 놓고 정치적 배경에 대해서는 대체로 일치하지만, 사상적 배경에 대해서는 이견이 있다. 정치적 배경으로는 3 · 1운동의 영향으로 민중의 힘을 자각했다는 점, 상하이 임시정부의 분열에 대한 환멸을 느꼈다는 점, 독립군의 항일운동이 난항을 겪었다는 점, 국민대표회의의 실패 등을 지적할 수 있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일부 민족주의자의 개량주의와 공산주의자의 사대주의에 강한 불만을 느꼈다는 것도 포함된다. 그리고 사상적 배경에 대해서는 기본적으로 사회진화론의 내부 모순을 자각하고 이를 극복하기 위한 대안으로 상호부조론을 흡수했다는 관점에서 해석하는 경향이 강하지만, 이견이 있다.
여기서 “(사회진화론에 기초한) 민족주의 이론의 내부 모순”에 대해서는 신용하의 정리를 참고할 만하다. 그는 “민족주의와 제국주의를 사회진화론에 의거해 모두 하나의 경쟁의 원리로서 해석한 것은 그의 제국주의에 대한 이론적 비판능력에 근본적인 한계를 설정하는 것이었다. 왜냐하면 제국주의를 국제간의 민족경쟁에서 적자 · 강자 · 우자 · 승자로 보는 것은 우승열패 약육강식의 사회진화론의 원리에 의거할 때에는 강권을 묵시적으로 인정하게 되며, 또한 제국주의와의 외경에서 패배한 민족의 도태를 ‘공례公例’로서 묵시적으로 인정하게 되는 요소를 내포하고 있기 때문이다”[58]라고 설명한다. 따라서 신용하는 신채호가 아나키즘의 상호부조론을 수용하여 사회 진화의 원동력은 경쟁이 아니라 상호부조라고 설명함으로써, 민족주의의 내부 모순을 극복하고 강권주의와 제국주의를 철저하게 비판할 수 있었다고 본다.
신일철도 이런 관점에 동의한다. 그는 “신채호의 전기 자강론에서는 자존경쟁을 통해 살아남은 자강의 강자만을 긍정할 뿐, 약자의 생존을 거의 무시해도 무방한 것이었다. 서구 계몽사상에서 비롯된 이와 같은 진보사관에서는 강자인 제국주의의 식민지 침략을 용인할 뿐만 아니라 약자 지배를 정당화시켜 약소민족의 역사의식이 될 수 없었다. 이에 그는 크로포트킨의 상부상조론을 수용해 그의 자강론에서 우승열패 대신 상부상조의 원리를 도입했다. 그는 무정부주의에서 일제강권 지배를 부정할 수 있는 논리와 약자의 생존권을 옹호하기 위한 상부상조의 원리를 취한 것이다”라고 말한다. 그리고 신채호의 “아我와 비아非我의 투쟁”사관이 “아와 비아의 상조”에 의한 국제적 연대성을 추구하게 된다고 풀이하고 있다.[59] 그런데 그는 신용하와 마찬가지로, 아나키즘을 추구하면 결국 민족주의를 부정하게 되므로 다시 한번 자기모순에 빠지게 되었다고 지적한다.
이와는 달리 김성국은 자강론적 사회진화론과 아나키즘적 상호부조론의 대립 관계에 의문을 제기한다. 그는 “신채호가 시민적 · 자강적 민족주의로부터 저항적 · 혁명적 민족주의를 거쳐 무정부주의에 이른 것은 사회진화론에 입각한 민족주의론의 내부 모순을 해결하기 위한 것이라기보다는 정규적인 무장독립투쟁의 출구가 봉쇄되던 당대의 현실적 조건의 변화에 대응하는 사회진화론과 민족주의의 자기성숙 과정”이라고 판단한다.[60] 다시 말하면 식민지 지배체제가 강화되면서 봉건적 사회 내부의 위기에 대응하는 시민적 민족주의보다는 제국주의의 침략에 따른 외부적 위기에 대응하기 위한 저항적 민족주의의 색채가 강화되는데, 그 과정에서 아나키즘을 수용했다는 것이다. 그는 신채호가 민족주의를 포기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더욱 적극적으로 발전시켰다고 본다.
둘째, 신채호가 아나키즘을 언제부터 신봉했는가라는 문제를 설명하면서 신용하는 “신채호가 〈조선혁명선언〉을 집필할 때 유자명 등을 통해 아나키즘을 알기 시작했고 이 선언에도 아나키즘적 요소가 다분히 투영되었으나 그는 여전히 민족주의자였지 아나키스트는 아니었다”고 단언한다. 그는 신채호가 아나키스트가 된 시기는 빨리 잡아도 1925년부터라고 보는 것이 합당하다고 주장한다. 이전의 시기는 민족주의 사상에 아나키즘의 방법을 포용한 혁명적 민족주의자의 시기였다는 것이다.[61]
신일철은 이정규의 회고에 근거해 1923년부터 신채호가 아나키스트임을 자임했다는 사실, 〈조선혁명선언〉에 이미 아나키즘의 민중직접혁명론이 나타나고 있다는 점에 주목한다. 하지만 그 역시 〈조선혁명선언〉을 분석한 결과 “이 선언의 사상적 논조는 어디까지나 이족 통치의 파괴에 집중된 민족주의 사상이며 그 투쟁 수단으로서 무정부주의적 테러리즘의 채용을 선언한 것에 불과하다. 그러나 이 선언을 계기로 신채호의 민족주의사상은 민족에게서 민중에게로, 국권주의적 국가에서 자유에로 옮아갔다”[62]고 보았다.
이와는 달리 김성국은 신채호가 1923년 이전에 이미 아나키스트로 전환했다고 판단한다. 이는 신채호가 1920년대 초에 이미 중국 및 한국 아나키스트와 활발히 교류했다는 사실에 기초한 것으로, 1920년 초부터 〈조선혁명선언〉을 집필한 시기 사이에 아나키스트가 되었을 것이라 추정하고 있다.[63] 한편 이호룡은 1920년대 이전에 이미 한인 사회에 아나키즘이 상당 정도 수용되었다고 주장하면서, 신채호 역시 3 · 1운동을 통해 민중의 저력을 실감해 아나키즘을 적극 받아들였고, 얼마 후 〈조선혁명선언〉에서 그 구체적인 사상을 표출했다고 보고 있다. 따라서 〈조선혁명선언〉을 집필하기 전에 아나키스트가 된 것으로 추정한다.[64]
셋째, 민족해방운동과 관련해 신채호의 아나키즘을 어떻게 평가할 것인가라는 문제를 보자. 우선 장을병은 신채호가 아나키즘을 신봉한 것은 민족주의 사상과 실천적인 독립운동을 전개하는 과정에서 채용한 일시적인 방편이었지, 궁극적으로는 민족을 포기하고 국제주의를 지향하는 일반 아나키스트들의 교조적 주장과는 다르다고 얘기한다.[65] 신용하도 민족주의자라는 관점에서 신채호를 파악하기 때문에 나름대로 민족해방운동과 아나키즘의 관계를 서술하면서 결국 신채호가 “만년에 민족주의를 더욱 심화 발전시키지 않고 무정부주의로 전환한 것은 이해하기 어려운 일”[66]이라고 말한다. 이 두 사람은 신채호가 서양 근대의 민족주의를 심화 발전시키지 못하고 크로포트킨에게 접근해 민족주의를 근본적으로 회의하게 된 것을 안타까워한다.[67]
이에 반해 하기락과 김성국은 민족주의와 아나키즘을 이것 아니면 저것이라는 양자택일의 관계가 아니라, 이것으로 저것을 내실화하는 상호보완 관계에 있는 것으로 파악함으로써 다른 의견을 내놓는다. 신채호의 경우 감성적 민족주의라는 원색의 바탕 속에 아나키즘이라는 이념적 내실이 성숙해갔다고 보는 것이다. 그들은 신채호의 민족주의가 역사적 조건의 변화에 대처하는 과정에서 크로포트킨의 아나키즘 또는 혁명적 진화론으로 성숙한 것으로 보아, 신채호의 아나키즘이야말로 그의 민족주의가 이른 최고의 단계라고 생각한다.[68] 이런 해석의 배경에는 아나키즘은 민족주의를 얼마든지 포용할 수 있으며, 처음에는 아나키즘이 민족주의의 틀 안에서 성장했지만, 나중에는 오히려 민족주의가 아나키즘을 통해 성숙했다는 관점이 깔려 있다.
이처럼 연구자들은 비록 몇몇 문제에서 의견을 달리하지만 모두 ‘민족주의’란 대명제와 관련해 아나키즘을 설명하려 한다. 이와 관련해, 영국 학자 크럼(John Crump)의 견해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그는 한국 아나키스트 운동을 다룬 글에서, 일본과 중국의 아나키즘과 비교해볼 때 한국의 아나키즘에는 민족주의 색채가 너무 짙다고 하면서 그 원인이 일본의 식민 통치에 있다고 파악한다. 이 점에서는 공산주의 운동 역시 예외가 아니라고 말한다. 하지만 이처럼 “충격적이며 일탈적인” 한국의 아나키즘은 특수한 것으로, 한국의 아나키즘은 민족주의에서 출발했고 민족주의 때문에 타락했다고 비판했다. 심지어 그는 아나키즘이 식민지 영토였던 지역에 제대로 뿌리내린 경우가 없다고까지 생각한다.[69] 물론 서양인의 눈에 한국 아나키스트 운동이 국제 아나키스트 운동사에서 매우 예외적인 경우로 비쳤기 때문에 이런 분석이 나왔을 것이다. 사실 한인 아나키스트의 내면에는 민족주의 의식이 지나치게 강렬하며, 정치 지향적인 경향까지도 내포하고 있었다. 따라서 크럼의 지적은 경청할 만하다. 하지만 우리는 서양의 아나키즘 원론의 잣대만을 가지고 동아시아 사회의 아나키스트 운동을 평가한다면 이 지역의 특수한 사정을 간과할 위험이 있다.
아나키스트들은 국제주의를 분명히 옹호한다. 왜냐하면 민족주의나 국수주의를 또 하나의 권력을 생산하려는 시도로 바라보기 때문이다. 그들은 기본적으로 민족국가란 절대다수인 일반 민중의 의지와 무관하게 일부 사회 엘리트의 이해를 위해 복무한다고 믿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적지 않은 아나키스트들은 민족해방투쟁이 유용하다고 믿고 있다. 민족해방운동가들이 추구하는 민족구가의 독립이 기본적으로는 권위적이지만 제국주의 열강이 식민지를 억압하고 착취하는 것보다는 낫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여기서 우리는 근대의 민족주의는 “영토와 국경을 확장하는” 침략적인 제국주의로 나타나기도 하고, “타민족의 간섭을 반대하는” 민족해방운동으로도 나타난다는 사실에 주목해서 민족주의가 무척 다의적인 개념이란 사실을 받아들여야 한다.
서양의 민족주의와 동아시아의 민족주의는 각 사회나 국가가 처한 특수한 상황에 따라 나름대로 제 기능을 수행했다고 볼 수 있다. 단순하게 말하면, 유럽의 민족주의는 보수적인 정치이데올로기 - 예를 들어 파시즘 - 와 결합하는 경우가 많았다면, 동아시아와 같은 제3세계의 민족주의는 급진적인 정치이데올로기 - 예를 들어 사회주의 - 와 결합하는 경우가 많았다. 즉 서양 열강의 제국주의적 위협과 봉건사회 내부의 구조적 위기는, 동아시아 사회에 서양과는 크게 다른 새로운 민족주의 경향을 불러일으켰다는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민족주의와 아나키즘의 결합 가능성을 엿볼 수 있다. 아나키즘은 종족주의적 민족주의를 반대하는 사상이지만, 동시에 종족주의를 비판해 새로운 민족주의의 해석 틀을 제시할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다. 종족주의와 같은 좁은 의미의 민족주의가 아닌 ‘구망도존救亡圖存’의 위기의 산물인 넓은 의미의 민족주의는 20세기의 시대조류였다. 그 넓은 틀 안에는 사회주의든 공산주의든 아나키즘이든, 또는 서양에서 들어온 그 어떤 사상이든 상관없이 수용할 여지가 있는 것이다.[70] 20세기 동아시아 사회에서 어떤 사조가 민족주의란 화두에서 자유로울 수 있었는가.
아나키즘이 동아시아 사회에 빠르게 자리 잡을 수 있었던 이유는 사회 내부의 절실한 요구가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앞장에서 언급했듯이 그 주요한 토양 가운데 하나가 진화론이다. 대다수의 연구자들이 동의하듯 근대 동아시아 사회에 가장 큰 영향을 준 외래사조는 진화론이었으며, 이는 당시 서유럽의 진화론이 전 세계에서 널리 유행했다는 사실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진화론의 맥락에서 볼 때 사회진화론이 상호부조론으로 이행된 것은 아나키즘이 사회진화론의 모순을 수정하는 기능과 동시에 민족주의를 재해석하는 역할을 담당했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1920년대 후반 신채호는 아나키스트 운동에 대단한 열정을 보였다. 그는 1927년 9월(?) 동방무정부주의연맹(이 단체의 존재는 명확하지 않다. 어쩌면 1928년 6월에 조직한 동방무정부주의자연맹과 같은 단체일지도 모른다)에 조선 대표의 자격으로 가입했다. 다음 해 4월(?)에는 조선무정부주의자 베이징회의를 열고 〈선언문〉(혹자는 동방무정부주의연맹에서 발표한 글이라고 한다)을 작성했다. “세계의 무산대중 그리고 동방 각 식민지 무산대중의 피와 가죽과 살과 뼈를 짜 먹어온 자본주의 강도제국 야수의 무리는 지금 그 창자와 빼가 터지려 한다”로 시작하는 이 선언문은 1) 불순한 조선민족운동 반대, 2) 모든 정치운동 부정, 3) 사이비 공산전제 배척, 4) 공산당의 애매한 사대주의 사상 청산 등을 주장했다. 그는 여기서도 〈조선혁명선언〉과 같이 파괴와 건설의 논리를 선전하고, 아울러 동아시아 각 국가의 동시다발적인 혁명을 주장했다.
당시 신채호는 크로포트킨의 글이 조선의 병에 가장 잘 맞는 약이라고 하면서도, ‘조선식 아나키즘’을 세워야 한다고 주장했다. 여기서 조선식 아나키즘이란 신채호 아나키즘의 특징을 보여주는 것으로 다음의 글에서 그 뜻의 실마리를 찾을 수 있다. “우리 조선 사람은 매양 이해 외에서 진리를 찾으려 하므로 석가가 들어오면 조선의 석가가 되지 않고 석가의 조선이 되며, 공자가 들어오면 조선의 공자가 되지 않고 공자의 조선이 되며, 무슨 주의가 들어와도 조선의 주의가 되지 않고 주의의 조선이 되려 한다. 그리하여 도덕과 주의를 위하는 조선은 있고 조선을 위하는 도덕과 주의는 없으니 이를 특색이라 칭하면 노예의 특색이다.”[71] 이처럼 그의 조선식 아나키즘은 사대주의를 비판하며 민족주체성을 강조하던 과거 국수주의적 사고의 연장선에서 이해할 수 있는 독특한 것이었다. 민족주의 사학을 제창할 때 전제주의와 봉건문화를 비판하면서도 한국인의 자주성 회복을 희망했던 것과 마찬가지로, 그는 아나키즘을 수용한 다음에도 여전히 전통문화에 대한 선별적 비판을 통해 조선의 특색과 서양의 아나키즘을 결합하려 했다. 여기서 우리는 류스페이의 이른바 ‘중국적 아나키즘’과 유사한 면을 발견하게 된다.
앞장에서도 잠시 언급했듯이, 상하이 시적 국수파의 지도자였던 류스페이는 전제주의와 봉건문화를 비판하고 중국 고대로 복귀할 것을 염원하면서 유럽의 문예부흥 시기가 중국에서도 재현되길 기대했다. 그리고 도쿄에서 아나키즘을 받아들인 후에는 다시 전통적인 원리를 근대적인 가치에 결합해 서양의 자본주의와 제국주의를 비판하는 동시에 아나키즘 사회혁명을 꿈꾸었다. 당시 류스페이는 국학과 아나키즘의 결합이라는 독특한 방법을 가지고 논리를 전개했다, 이런 특성은 신채호와 매우 비슷한 점이다.
한편 신채호의 아나키즘은 그의 문학작품에도 나타나는데, 『용과 용의 대격전』이 대표적인 작품이다. 이 소설은 민중을 착취하고 억압을 일삼는 지배자들이 사는 천국天國과 이들로 인해 고통 받는 피지배자인 민중들이 사는 지국地國을 설정하고, 지배자들의 충실한 하수인인 천국의 용 ‘미리’와 민중의 편에 서서 민중혁명을 준비하는 지상의 용 ‘드래곤’의 싸움을 그리고 있다. 이야기는 결국 민중의 상징인 드래곤이 상제의 아들인 예수를 죽이고 미리의 천국을 멸망시켜 지국의 민중혁명을 이루는 것으로 끝난다. 『용과 용의 대격전』은 작가의 아나키즘적 민중해방론을 문학작품 속에 잘 투영했다고 평가받는다. 그런데 여기에 신채호의 종교관이 드러나 있어 흥미롭다. 그는 이 소설에서 종교란 민중의 반역을 막기 위해 사용하는 마취제이며, 공자, 석가, 마호메트, 예수가 종교라는 마취제를 사용해 민중을 속였다고 말한다. 과거의 성인이라는 사람들이 바로 기득권층의 하수인에 불과했다는 것이다. 여기서 그의 반종교주의가 돋보인다. 그는 특히 예수를 민중의 기만자, 노예의 도덕을 선전한 자로 자주 묘사하는데, 이처럼 기독교를 집중적으로 비판한 것은 아마도 고토쿠 슈스이의 『기독말살론』의 영향 때문인 듯하다.[72] 신채호의 반종교론은 전통 비판과도 밀접한 관련이 있다.
1927년(?) 동방무정부주의연맹에 가입한 신채호는 선전기관과 폭탄제조소를 설치할 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나섰다. 그는 베이징 우편관리국에 있던 타이완인 린빙원(林炳文)과 짜고 지폐 200매를 위조해 현금으로 찾으려다 1928년 5월 일본 경찰에 체포되었다. 이 사건으로 신채호가 아나키스트로서 펼친 짧은 활동은 어이없는 종말을 맞게 된다. 그는 따렌재판소에서 10년형을 언도받아 뤼순형무소에서 복역했다. 재판정에서 자신은 “의심 없는 무정부주의자”임을 자처하며 법정투쟁을 벌인 신채호는 감옥에서도 아나키즘(에스페란토어)과 역사 연구에 몰두했다. 그러나 옥중 생활로 추위에 지쳐 병약해졌으며, 결국 뇌일혈로 쓰러졌다. 출옥을 불과 1년 반 남겨둔 1936년 2월, 그는 57세의 나이로 차가운 형무소 바닥에 누워 쓸쓸히 숨을 거두었다. 이로써 동아시아의 뛰어난 아나키스트 한 사람이 또 다시 사라졌다.
3. 한인 아나키스트들의 민족해방운동
일본, 중국, 만주, 조선에 거주한 한인 아나키스트들은 1920년대를 전후해 가장 활발한 활동을 벌였다. 지역별로 대표적인 활동 몇 가지를 살펴보자.
먼저 재일 한인 아나키스트 가운데 가장 유명한 인물은 박열(1902~?)이다. 그가 유명해진 것은 일본과 국내 운동에 영향을 미쳤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무엇보다 일본 천황을 암살하려 한 ‘대역 사건’에 연루되었기 때문이다. 그가 1921년 말 조직한 최초의 재일 아나키스트 조직 흑도회는 일본의 어느 댐 공사장에서 발생한 한인 노동자 집단학살 사건 등에 관여하면서 사회운동 단체의 면모를 드러냈다. 이즈음 박열은 1921년 10월(?) 잠시 귀국해 서울에서 흑로회를 조직하기도 했다. 하지만 1922년 말에 흑로회는 박열, 원종린 등이 이끄는 아나키스트 계열과 김약수 등의 볼셰비키 계열로 분열한다. 이에 박열은 흑우회黑友會와 불령사不逞社를 독자적으로 만들고, 「불령선인不逞鮮人」이란 잡지를 펴냈다. 이 이름이 문제가 되자 「현사회現社會」로 고쳐 다시 발간했다. 김약수 등도 따로 북성회北星會를 조직했는데, 여전히 흑우회가 압도적으로 우세했다.
박열은 운동 과정에서 점차 급진적인 투쟁 방법을 수용하면서 일본 황태자의 결혼식에 참석하는 요인을 암살할 계획을 세우기도 했다. 박열 일파는 더 나아가 일본 제국주의를 상징하는 천황을 제거하는 것이 한국과 일본을 위한 최상의 방책이라고 생각하고 직접행동을 결심했다. 그런데 1923년 9월 1일에 갑자기 간토대지진이 발생한다. 이 지진으로 23만 6천 명이라는 사상자가 발생했다. 이때 정부는 체제 위기를 벗어나기 위해 수천 명의 한인과 일본인 사회주의자들을 무참히 학살했다. 그 가운데에는 일본의 대표적 아나키스트인 오스기 사카에가 포함되어 있었고, 당시 박열도 예비검속으로 잡혀갔다. 그는 조사 과정에서 상하이를 통해 폭탄을 구입한 후 일본에서 테러를 모의했다는 혐의를 뒤집어쓰고 심문을 받았다. 이 사건은 대역 사건으로 확대되어 11명의 한인과 6명의 일본인이 체포되고 가혹한 처벌을 받았다.[73]
박열은 법정에서 가장 효과적으로 국가의 규율을 동요시키고 전 국민의 가슴을 두드려서 잠자는 영혼을 끌어내기 위해 혼자의 힘으로 대역 사건을 준비했다고 진술했다. 얼마 후 그는 사형을 언도받고 복역하던 중 무기징역으로 감형되어 장기수 생활에 들어간다. 그리고 박열의 옥중 투쟁, 박열의 일본인 연인 가네코 후미코(金子文子)의 사랑, 가네코 후미코의 옥중임신설과 의문의 죽음 등 숱한 화제를 뿌리며, 이 사건은 한국인과 일본인의 기억 속에 오래도록 지워지지 않았다.[74]
당시 박열의 사상은 아나키즘과 허무주의가 혼합된 것으로, 한마디로 정리하기가 쉽지 않다. 그는 어떤 글에서 노동을 계속하는 한 노동자를 착취하는 자본주의 사회는 유지도리 것이며, 일하지 않고 먹는 자도 계속 존재할 것이라면서 일하지 않고 놀고 먹는 것이 현 사회를 타도하는 첩경이라고 주장했다. 이처럼 묘한 논리는 허무주의적 아나키스트에게 종종 나타나는 현상이다. 그는 대다수의 아나르코 코뮤니스트와는 달리 인간의 품성을 불신했으며, 개인에 대한 불신은 민중에 대한 불신으로, 다시 테러와 파괴를 찬양하는 논리로 이어졌다. 그의 동료인 김중한도 “대우주의 존재를 부인하는 것이 대자연에 순응하는 것이라면 부르주아 계급을 죽이는 것도 사람에 대한 자비이며, 자기의 생을 부정함으로써 타인의 생을 부정하는 데서 대자연에 순응하고 다수의 사람을 구하는 결과가 된다면 타인을 죽여도 악이 아니고 도리어 선”이라고 주장했다.[75] 이런 주장들은 허무주의와 아나키즘이 뒤섞인 것으로, 중국인 주치엔즈의 초기 사상을 연상시킨다.
또한 일제의 식민지 지배 논리를 정면으로 반박하던 박열은 “천황이란 무엇인가? 국가란 인간의 신체, 생명, 재산, 자유를 끊임없이 침해하고, 유린하고, 겁탈하고, 위협하는 조직적 대강도단이다. 대규모 약탈주식회사이다. 법률은 국가라는 대강도단과 약탈사회의 권력을 증오하고 반항하는 자에 대한 위협이다. 의회는 국가라는 대강도단의 대표자회이다. 국가란 이 약탈회사 주주들의 대표자회이다. 천황과 국가란 이들 강도단과 약탈회사의 우상이며 신단이다”라고 선언했다.[76] 함께 체포된 일본인 연인 가네코 후미코도 “천황은 일본에서 태어난 인간에게 최대의 모욕이며, 천황의 존엄성을 입증하는 것은 국민이 노예임을 의미하는 것”이라 규정했다.
어떤 사람들은 일본인의 아나키즘이 국가주의에 반대해 천황제 부정으로 나아간 반면, 박열의 아나키즘은 민족적 분노에서 출발해 천황 암살로 나아갔다고 말한다. 사실 박열의 법정투쟁 과정을 보더라도 일본인에 대한 증오심과 조선인으로서의 자의식이 매우 강렬했음을 알 수 있다. 하지만 그의 민족주의적 경향만을 강조하고, 허무주의와 아나키즘의 영향을 부정하려는 이런 해석은 설득력이 부족하다. 그가 주도한 흑도회의 선언에도 이미 슈티르너의 개인주의적 아나키즘 경향이 나타나는데, 이것은 박열뿐 아니라 일본 내 한인 아나키즘에 자주 나타나는 특징이다.
한편 이즈음 국내에서도 윤우열이라는 청년이 〈허무당선언서〉(1925년)를 만들어 전국에 배포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이 글에서도 신채호의 〈조선혁명선언〉이나 박열의 법정 진술과 비슷한 급진적인 논리를 볼 수 있다.
대역 사건으로 침체했던 흑우회는 1926년 5월 기관지 「흑우」를 발행하면서 세력을 만회하려 했다. 흑우회 구성원 일부는 일본흑생청년연맹에 가입해 함께 활동했으며, 여러 출판물을 통해 국내는 물론 만주와 중국까지 통신망을 구축했다. 흑우회는 불령사로, 흑풍회로, 다시 흑우연맹으로 여러 차례 이름을 바꾸었다. 이즈음 재일 아나키스트 운동은 국내의 신간회 창립을 전후해 공산주의 세력과 대결하는 양상을 띠었는데, 그들의 논쟁은 결국 폭력사태를 불러왔다. 한편으로 이 시기의 한인 노동자들도 아나키즘적 노동운동을 시작했고, 그들의 연대 활동은 국내에도 영향을 미쳤다. 여기에서도 일본 노동운동과 마찬가지로 아나키스트와 볼셰비키의 투쟁이 일어난다.
다음으로 중국에 있던 한인 아나키스트들은 활발한 테러 활동을 벌였다. 그들은 독자적인 활동도 했지만, 쑨원의 국민당과 같은 혁명파의 지원을 받아 암살대를 조직하기도 했다. 당시 대표적인 테러 단체로 의열단이 있다. 의열단은 1919년 11월 만주 길림에서 김원봉이 조직한 급진 단체이다. “천하의 정의의 사事를 맹렬히 실행하기로 함”을 공약 1조로 하는 이 단체는 정의의 ‘의義’자와 맹렬의 ‘열烈’자를 따서 이름을 만들었다고 한다. 단장 김원봉은 급진적인 민족주의자로 독립운동의 투쟁 방법으로 테러를 받아들였다. 그는 “조선총독을 죽이기를 대대로 5~6명에 이르면 후계자가 되려는 자가 없을 것이고, 도쿄에 폭탄을 터뜨려 매년 2회 이상 놀라게 하면 그들 스스로 한국 통치를 포기하게 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의열단은 1) 조선총독 이하 고관 2) 군부(일본군) 수뇌 3) 타이완 총독 4) 매국노 5) 친일파 6) 일제 밀정 7) 반민족적 인사들을 암살 대상으로 정하고, 파괴할 시설물로 1) 조선총독부 2) 동양척식주식회사 3) 매일신보사 4) 각 경찰서 5) 기타 일제의 주요기관을 설정했다.
의열단은 활동무대를 베이징으로 옮겨와 상하이까지 세력을 확장하면서 아나키즘의 영향을 받기 시작했다. 그들은 혁명을 달성하기 위한 유일한 무기는 폭력이며, 파괴는 곧 건설이라고 믿었다. 20년대 초에는 이미 아나키즘을 받아들였는데, 여기서 유자명이란 인물의 역할이 주목된다. 바로 그가 신채호에게 부탁해 〈의열단선언문〉(앞서 언급한 〈조선혁명선언〉을 가리킨다)을 만들었는데, 이 선언문은 아나키즘과 의열단의 결합을 상징하는 글이다.
의열단의 지도자 김원봉은 1923년 1월 상하이와 베이징에서 오스기 사카에를 만나 도쿄 지부 설치에 합의하는 등 아나키즘 활동에 호감을 보였다. 그러나 점차 공산주의에 경도되면서 아나키즘과는 거리를 두게 된다. 그리고 1929년에 상하이 지부의 의열단 해체를 선언함으로써 사실상의 활동은 끝났다. 장지락은 자신이 아나키스트 그룹에 가입한 뒤에야 의열단의 단체 생활에 참가할 수 있었으며, 사실상 아나키즘이 의열단을 지배했다고 얘기한 바 있다. 그들은 굵직한 것만 해도 십여 차례나 암살 파괴 사건을 감행했다.
앞의 의열단과는 성격이 다른 순수한 아나키스트 단체들도 생겨났다. 1924년 4월 베이징에서 재중국 조선무정부주의자연맹이 조직되었는데, 신채호를 제외한 초창기 재중 한인 아나키스트들이 대부분 참여한 것으로 보인다. 그들은 「정의공보正義公報」라는 기관지를 발행했다고 하나, 원본은 현재 남아 있지 않다. 1927년까지 그들은 주로 기관지를 통한 선전 활동에 주력했으며, 한인 아나키스트 가운데 일부는 상하이로 진출해 테러 활동이나 노동운동에도 참여했다.
1928년 3월에는 재중국 조선무정부공산주의자연맹이 만들어져 그해 여름 기관지 「탈환」을 발간했다. 우리는 이 잡지를 통해 중국에 거주하던 한인 아나키스트의 생각을 그나마 엿볼 수 있다.[77] 식민지 지배를 받고 있는 조선을 ‘되빼앗자’는 의미의 탈환론은 그들의 다음과 같은 구호에도 나타난다. “빼앗긴 모든 것을 되찾자! 왜놈에게 빼앗긴 것은 왜놈에게서! 조선놈에게 빼앗긴 것은 조선놈에게서! 빼앗아온 모든 것은 영원히 내가 그 주인이다! 탈환 후의 사회는 자유의 무정부공산사회다!” 여기서 한인 아나키스트들은 민족주의자와 공산주의자의 민족해방운동을 부분적으로 지지하면서도 그들에 대한 이론적 비판도 병행했다.
「탈환」에서 아나키스트들은 일본의 제국주의를 대신해 권력을 장악하려는 불순한 세력이라며 민족주의자를 공격했다. 그들은 민족주의에 내재된 배타심리를 비판하면서, 민족주의자들이 추구하는 국가는 부르주아 민주주의와 자본주의 경제체제를 추구하는 또 다른 반동권력에 불과하다고 주장했다. 따라서 기본적으로는 민족주의자와의 연합은 부르주아에게 이용당할 뿐, 민중해방에는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민족주의의 비판은 그들과 연합하는 시기에도 계속되었다. 또한 이 잡지에는 러시아의 볼셰비키를 비판하는 글도 실렸다. 그들의 공산주의는 자본을 정부에 집중시키는 어용적, 강권적 공산주의에 불과하며, 진정한 공산주의라면 정부가 아닌 생산단체가 권리를 행사해야 한다는 내용 등이다. 이런 주장은 물론 아나르코 생디칼리슴의 원리에 따른 것이다.
덧붙이자면, 오장환은 탈환론을 다음과 같이 정리한다. “중국 내 한인 아나키스트들은 탈환론에서 일제의 조선 수탈을 논리적으로 규명하고 조선을 원위치시켜야만 하는 당위성을 주장했다. 이 논리를 뒷받침하기 위해 아나키즘의 국가와 정부 자체를 부정하는 이론을 차용한 것이다. 즉, 조선은 일제가 선전하듯이 소위 문화정치의 혜택을 받은 것이 아니라 조선민족은 노예의 상태하에 있음을 규정하고 이를 극복하고 자유 · 평등 · 박애 · 상호부조의 생존권이 있음을 주장했다. 이것은 이전의 3 · 1운동과 같은 타협적 투쟁 방법이 아니라 혁명적 투쟁 방법을 제시한 이론이다.”[78]
이호룡은 「탈환」과 같은 한인 아나키스트 잡지를 분석하면서 일제시대 민족해방운동은 민족주의와 공산주의라는 양대 사상구도로 펼쳐진 것이 아니라 아나키즘이라는 제3의 사상이 존재했다고 말한다. 그만큼 이런 아나키즘의 민족해방론은 사상사에서 의의가 크다는 것이다. 그런데 운동의 계속된 실패와 내부의 분열이 한인 아나키스트로 하여금 아나키즘 원리에서 이탈해 중앙집권조직과 민중독재론으로 나아가게 만들었으며, 그래서 해방 후에는 제3의 사상으로서의 기능을 상실했다고 본다.[79]
아울러 1920년대 후반 만주 지역에서 일반 대중을 대상으로 한 대규모 아나키스트 운동이 전개되었다는 사실은 매우 흥미롭다. 만주에서 한인 아나키스트들이 농민을 기반으로 이상사회 건설을 시도한 것이다. 그곳에는 교민 수십만 명과 많은 독립운동 단체가 있었고, 일제가 간접통치를 실시하여 국내에 비해 활동이 상대적으로 자유로웠다. 이곳 운동의 주역은 청년 아나키스트 김종진이다. 그는 상하이 임정의 분열을 보고 만주를 독립운동의 근거지로 할 것을 주장한 인물로, 유자명을 통해 의열단과, 황훈을 통해 다물단多勿團과 접촉을 시도한 바 있다. 그리고 상하이에서는 백정기의 소개로 아나키스트 이을규, 이정규, 정화암 들과도 교류했다. 1926년에 텐진에서 이회영을 만난 김종진은 이른바 ‘무정부주의 문답’을 통해 아나키즘을 수용하고, 이 문답의 내용을 기초로 만주에서 아나키스트 운동을 시작했다.
김종진은 1927년 10월 만주에 도착해 김좌진을 만났으며, 김좌진의 신민부新民部를 이용해 아나키즘적 코뮌사회를 건설하기로 했다. 그는 김좌진의 지지를 받으며 신민부 개편에 가담해 한족총연합회를 만들었다. 이 단체는 혁명 근거지 건설을 위한 여러 가지 사업을 토의했는데, 크로포트킨의 사상에 기초한 이상촌 건설 그리고 항일운동에서 공산주의를 배격하고 민족주의와 연합전선을 구축하는 방안 등을 모색했다. 이 연합회는 중앙집권조직을 거부하고 자유연합에 기초한 지방자치조직을 만들어서 독립운동사에 독특한 위치를 차지한다. 이즈음 만주의 한인 아나키스트들은 ‘재만 조선인무정부주의자연맹’을 조직하여 잠시 장밋빛 꿈에 젖어들었으나, 곧 한인 공산주의자의 공격을 받기 시작했다. 특히 김좌진이 박상실에게 저격당해 사망하자 이 운동은 위기를 맞는다.
당시 중국 본토에서는 한인 아나키스트들이 만주 지역의 활동을 지원하기 위해 대량 이주하려 했다. 그런데 만주에서 한인 공산주의자와 아나키스트의 분쟁이 계속되어 여럿이 피살되고 김종진조차 행방불명되자 계획은 불투명해진다. 아마도 김종진은 조직 내부의 분열 과정에서 피살된 듯하다. 더구나 일본이 만주에서 대규모 군사작전을 수행하자 이상촌 건설운동은 거의 불가능해졌다. 결국 이 지역에 거주하던 한인 아나키스트들은 1931년 8월 만주를 포기하고 중국 관내로 철수할 수밖에 없었다. 이로써 2년여에 걸친 만주의 아나키스트 운동은 끝내 실패로 돌아갔다. 이 운동의 실패에 심한 좌절감을 느낀 이회영이 다시 만주로 향하던 중 따렌에서 체포돼 고문으로 희생된 것도 얼마 후의 일이다. 한편 국내에서는 1924년과 1925년에 흑기연맹과 진우연맹이 서울과 대구에서 각각 조직되었다. 하지만 일제의 탄압으로 오래지 않아 해체되었다. 이처럼 남부지방의 아나키즘 활동은 실패했지만, 국내 아나키스트 운동은 다시 북부지방으로 확산되었다. 그리고 1926~1927년에 북부지방에서 조직된 아나키즘 단체가 20년대 후반의 운동을 주도하게 되었다. 여러 단체가 있었으나, 평양에서 조직된 관서흑우회關西黑友會와 그들이 주도한 ‘조선공산무정부주의자연맹’이 대표적인 것이다. 관서흑우회는 노동운동과 농민운동에 개입해 볼셰비키와 이론투쟁을 벌이는 한편 독자적인 조직을 모색했다. 이에 따라 노동조합 설립, 태업과 파업 주도, 노동야학 개설, 공동작업소 운영 등을 시도했고, 한편으로는 전국적인 조직망을 건설하기 위해 노력했다. 관서흑우회를 주목하는 것은, 그들이 점차 고조되는 공산주의운동에 대항하기 위해 전국적인 아나키스트 단체를 조직하려 했기 때문이다. 이렇게 하여 조선공산무정부주의자연맹이 태어나게 된다. 1929년 11월에 각 조직이 자발적으로 참여하여 결성한 이 단체는 국내 최초의 전국적인 단일조직으로, 기본적으로 공산주의에 대항하기 위한 조직이었다.
당시 국내 아나키스트들은 1927년의 신간회 결성과 맞물려 아나키즘 · 볼셰비즘(아나 · 볼 논쟁으로 약칭) 논쟁에 깊이 개입했다. 하지만 조선공산무정부주의자연맹은 그리 활발한 활동을 하지 못하고 일제의 감시를 피해 곧 지하로 잠복했다. 그 후에도 전국적인 아나키스트 단체를 결성하려는 시도가 몇 차례 있었다.
제4장 아나·볼 논쟁과 아나키스트 운동의 쇠퇴
1. 동아시아의 아나키즘 · 볼셰비즘 논쟁
러시아에서 볼셰비키 혁명이 성공하고 레닌 정부가 들어서자 동아시아 사회주의자들은 이를 새로운 희망으로 받아들였다. 자본주의 제도를 전복한 세계 최초의 사회혁명이었기에 사회주의자라면 누구나 이 혁명에 호기심을 가졌고 대체로 우호적인 눈길을 보냈다. 일본의 아나키스트 오스기 사카에도 아나키즘과 볼셰비즘은 근본적으로 다르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지만, 러시아 혁명의 진상을 충분히 파악하지 못했기 때문에 이 혁명이 일본의 사회에 가져올 긍정적인 효과를 은근히 기대했다. 그래서 정확한 정보를 얻기 위해 직접 상하이에 가서 수소문하기도 했다. 하지만 프롤레타리아 독재가 오히려 노동자와 농민의 권리를 빼앗고 이들을 강압적으로 통제한다는 사실을 알고는 볼셰비키 혁명에 대한 희망을 버리고 침묵한다. 뿐만 아니라 레닌 정부가 러시아 혁명에 적극 참가했던 아나키스트들을 정치적으로 탄압하고 있다는 사실이 전해지자 상황은 더욱 악화되었다. 결국 일본의 아나키스트들은 러시아 혁명을 통해 배울 것이 있다면 혁명이 어떻게 하면 실패할 수 있는가 하는 교훈뿐이라고 결론을 내린다.
일본 사회에 볼셰비키가 등장한 것은 아나키스트를 위협하려는 강력한 도전자가 출현했음을 의미했다. 그들의 등장은 곧 사회주의 운동의 분열을 낳았는데, 이러한 분열은 특히 노동운동 분야에서 두드러졌다. 이전까지 아나키스트 계열 노동조합과 마르크시스트 계열 노동조합은 이론상의 차이점에도 불구하고 어느 정도 단결을 유지하면서 정부의 탄압에 저항하고 있었다. 하지만 전국적인 노동조합을 건설하는 과정에서 조직과 운영방식을 놓고 충돌이 일어난다. 논쟁의 요점은, 전국노동조합의 조직 형태를 자율적인 조합의 연합으로 할 것인지 아니면 중앙집권적인 통일 조직으로 할 것인지의 문제였다. 타협점을 찾지 못하고 대립이 깊어지자 일본의 마르크시스트들은 1922년 7월 일본공산당을 창립하고, 곧이어 좌파 계열의 노동조합을 모아 총동맹을 결성했다. 오스기 사카에는 이런 행위를 비난하면서 과거의 동지였던 일본공산당 창설자 사카이 토시히코와 야마가와 히토시를 격렬하게 비판했다. 이는 메이지시대 양대 사회주의자였던 가타야마 센과 고토쿠 슈스이의 결별을 연상시키는 사건이다. 결국 아나키스트 계열의 노동조합도 독자적인 전국 조직을 구축해나가면서 아나 · 볼 논쟁을 시작했다.
중국에서도 일본과 거의 같은 시기인 1921년 7월, 중국공산당이 만들어질 무렵 아나키스트와 마르크시스트 사이에 아나 · 볼 논쟁이 벌어졌다. 프롤레타리아 계급정당 또는 프롤레타리아 계급독재가 필요한가 등의 문제를 놓고 양 진영이 맞선 것이다. 그런데 중국은 일본과는 상황이 다르다. 중국 사회는 20세기 초반에 아나키즘을 마르크시즘보다 먼저 수용했으며, 그 결과 아나키즘이 사회주의 사조 가운데 가장 앞서 나갔다. 1911년 신해혁명 후에는 스푸의 노력으로 한때 전국적인 조직망을 구축하는 수준까지 발전했다. 이와 달리 마르크시즘은 아나키즘보다 10여년 늦게, 즉 레닌의 볼셰비키 혁명이 성공한 다음에야 중국 사회에 본격적으로 수용되었다. 그리고 군벌의 위협에 대항하고 사회혁명을 추진한다는 대의명분 아래 두 파벌은 잠시 협조 관계를 유지했다.
중국의 아나 · 볼 논쟁은 일본과는 달리 노동운동 분야가 아니라 중국공산당을 창당하는 과정에서 먼저 나타났다는 점이 이채롭다. 자본주의가 충분히 발달하지 않은 중국에서는 노동조합 활동이 미진했기 때문에 일찍부터 이 분야에서 논쟁이 일어날 가능성이 적었던 것이다. 하지만 그보다는 러시아의 지원을 받아 당을 건설하려는 일부 마르크시스트와 아나키스트 사이에 먼저 논쟁이 일어났다. 1920년 9월 1일 천두슈는 「신청년」에 실은 〈정치를 말하다〉라는 글에서 아나키즘에 반대하는 글을 발표한다. 즉 국가 · 정부 · 법률을 단번에 폐지할 수는 없으며, 현실적으로 노동자가 권력을 집권하는 과정이 필요하다고 밝힌 것이다. 같은 해 말 그는 광저우의 법정학교에서 열린 ‘사회주의비평’이라는 강연에서 아나키즘을 본격적으로 비판한다. 이에 반발한 청년 아나키스트 어우성바이가 곧바로 천두슈에게 편지를 써서 강연에 의문을 제기함으로써 문제가 불거지게 되었다.
대부분의 논쟁이 그렇듯이, 처음에는 비교적 우호적인 분위기에서 토론을 벌였으나, 시간이 점차 지나면서 논쟁이 가열되고 더 많은 사람들이 가세하면서 사상투쟁의 성격이 분명해졌다. 전국의 주요 도시에서 아나 · 볼 논쟁이 일어났고, 논쟁은 당시 막 싹트고 있던 노동운동 분야로 확산되었다. 중국 사회에서는 노동운동조차 아나키즘 계열이 마르크시즘 계열보다 먼저 수용되었고 세력도 강했다. 따라서 마르크시즘 계열이 우위를 차지하기까지 적지 않은 시간이 걸렸다. 1920년대 전반기에 팽팽한 대결을 계속하다가 1925년 5월 광저우에서 열린 제2차 전국노동대회에 이르러서야 겨우 공산주의 노동운동이 아나키즘 노동운동을 앞지를 수 있었다고 한다.
한편, 한인의 경우는 1920년 초에 아나키즘과 볼셰비즘을 거의 동시에 수용했기 때문에 아나키스트와 공산주의자들은 민족해방운동의 방법을 둘러싸고 처음부터 대립했다. 국내에서는 조선노동공제회가, 일본에서는 흑도회가, 중국에서는 의열단이 각각 분열된 사실이 이를 보여준다. 국내에서는 1922년 여름부터 공산주의자들이 조선노동공제회를 개조하려는 과정에서 충돌이 일어났다. 얼마 후 공산주의자들은 조선노동연맹회를 결성했고 아나키스트들은 흑로회라는 단체를 조직했다. 재일 한인의 경우도 흑도회 안에 일찍부터 공산주의자가 섞여 있었고, 곧이어 분열을 겪은 아나키스트와 공산주의자는 흑우회와 북성회로 각각 나뉘어 각자 다른 길을 걷는다. 재중 한인들 사이에서는 처음에는 아나키즘 경향이 제법 강했는데, 1921년 상하이에서 이동휘 계열이 고려공산당을 창립한 후 공산주의자들이 대거 등장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한인 아나키스트들은 공산주의자와 합작하는 것을 포기하고 재중국 조선무정부주의자연맹과 같은 자신들만의 조직을 건설하기 시작했다. 이런 사상의 분화 과정에서 의열단이 갈라진 것이다.
한인 아나키스트들은 공산주의자들을 가리켜 혁명이라는 명분을 내세워 공산독재를 획책하는 또 하나의 사대주의자라고 비판했다. 기본적으로 자본주의를 타도하고 사유재산을 철폐해야 한다는 점에서는 같은 사회주의자였지만, 러시아의 볼셰비키에게 무조건 복종하는 태도에는 공감할 수 없었던 것이다. 아나 · 볼 논쟁이 격화되면서 한인 아나키스트들은 공산주의자들을 “씨도 없이 모조리 박살내야 한다”고 믿게 되었다. 이런 믿음은 공산주의자와 무력충돌을 벌이는 것으로 나타났다. 만주에서 김좌진 등이 공산주의자에게 살해되면서 이런 감정의 골은 더욱 깊어졌을 것이다.[80]
동아시아 3국의 아나 · 볼 논쟁은 사회환경에 따라 나름대로 특색이 있지만, 주요한 쟁점은 비슷했다. 논쟁의 핵심 내용을 정리하자면 대략 아래의 세 가지로 요약해볼 수 있다.[81]
첫째, 프롤레타리아 독재와 마르크스주의 국가론 문제 : 아나키스트는 국가란 소수가 다수를 지배하기 위해 만든 것으로 인류사회에서 죄악의 근원 가운데 하나라고 생각한다. 이 점에서는 부르주아 국가든 프롤레타리아 국가든 자유를 억압하는 강권이라는 점에서 차이가 없다. 러시아의 볼셰비키 역시 교육 · 언론 · 출판의 자유를 억압한다는 점에서 부르주아 정권과 다를 바가 없다. 특히 아나키스트들은 프롤레타리아 독재 문제에 관한 한 조금의 양보도 허락하지 않았다. 폭력으로 폭력을 제압하는 방식은 명분이야 어쨌든 본질이 같으므로 결과는 부정적이라고 믿었기 때문이다. 물론 프롤레타리아 독재를 운영하는 지도부의 존재 역시 부정했다.
이에 볼셰비키는 국가 문제는 고립적인 것이 아니며 물질 생산의 일정한 발전 단계에 나타나는 것으로 사람들이 임의로 창조하거나 폐기할 수 없는 것이라고 응수했다. 따라서 부르주아 계급을 타도하고 계급투쟁을 완수하기 위해 프롤레타리아 독재라는 과도기가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프롤레타리아 독재가 있어야만 부르주아의 음모를 분쇄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러시아에서는 그것이 소비에트이며, 이를 이끄는 지도부는 신경중추에 해당된다며 그 현실적인 필요성을 긍정했다. 볼셰비키는 “러시아에서 만약 크로포트킨의 자유조직으로 레닌의 노동정권을 대신한다면, 곧바로 부르주아가 세력을 회복해 제정의 복고를 피할 수 없을 것”이라고 단언했다.
둘째, 개인의 자유와 당의 규율 문제 : 아나키스트들은 “개인주의는 아나키즘의 좋은 친구”라는 관점에서 개인의 절대자유를 주장하고 공산주의의 집체주의를 포함한 모든 권위에 반대했다. 그 배경에는 인간의 본성은 선하다는 인식이 깔려 있으며, 이에 따라 상호부조를 적자생존보다 높이 평가했다. 상호부조주의에 기초해 자유를 추구하는 것이 사회발전의 원동력이라고 본 것이다. 아나키스트는 개인의 자유를 최고의 가치로 삼았기 때문에 조직의 규율이 개인의 자유를 침해할 경우 이를 가차없이 비판했다. 여기에는 볼셰비키의 민주집중제와 같이 다수가 소수의 자유를 억압하는 제도도 해당되었다. 아나키스트들은 개인의 자유로운 가입과 탈퇴가 보장되는 조직을 선호했다. 한편 혁명의 방법으로는 테러, 총동맹파업에서 교육을 통한 혁명론까지 다양한 방법을 모색했다.
이에 반해 볼셰비키들은 자유란 상대적인 것으로 사회의 제약을 받는다고 주장했다. 따라서 현재는 물론 미래의 사회에서도 개인의 절대자유는 불가능하며, 절대자유를 주장하는 아나키스트의 선전은 공상에 불과하다고 반박했다. 혁명 과정에는 권력의 집중이 반드시 필요하므로 개인의 자유가 제약받는 것은 어쩔 수 없다는 것이다. 한편 혁명의 방법으로는 당의 영도를 받는 프롤레타리아 전체 계급의 통일된 각종 전술로 자본주의를 타도할 것을 주장하며, 경제투쟁과 정치투쟁의 결합을 강조했다.
셋째, 생산과 분배 문제 : 아나키스트는 경제조직에서 생산자의 자주관리 원칙에 따라 이들 생산자들의 조합이나 공장이 생산물을 직접 처리하는 것을 기본으로 한다. 따라서 국가가 주도하는 중앙통제식 경제체제에 반대한다. 그들의 경제원칙은 평등주의에 기초한 “능력에 따라 일하고, 필요에 따라 분배한다”는 명제로 요약할 수 있다. 이런 자신감의 배경에는 혁명 후 잠시의 혼란은 있겠지만 노동 자체가 즐거워져 생산력이 매우 높아질 것이라는 낙관론이 깔려 있었다. 그리고 “마르크스가 『자본론』을 저술했다면, 크로포트킨은 『윤리학』을 저술했다”는 말이 암시하듯이 아나키스트는 경제 문제에서도 윤리적인 가치기준을 중시했다.
이에 반해 공산주의자들은 아나키스트의 주장이 자급자족식 경제체제의 발상으로 공상에 불과하며 전혀 과학적이지 않다고 일축했다. 그들은 사회주의가 자본주의를 타도한 후에도 결코 자본주의식 대생산제도에서 후퇴할 수 없으며, 사회주의 혁명 후에도 생산력의 발전에 한계가 있으므로 ‘노동에 따른 분배’를 해야지 ‘필요에 따른 분배’를 할 수는 없다고 주장했다. 당연히 분배는 공산당이 결정할 사항이었다.
아나 · 볼 논쟁은 이런 이론적인 경쟁 이면에 누가 더 효율적으로 사회 변혁의 대안을 제시할 수 있는가, 라는 실제적인 문제를 안고 있었다. 논쟁의 승패가 바로 드러난 것은 아니다. 논쟁이 한창이던 1920년대 전반은 동아시아 아나키스트 운동의 전성기였다. 그러나 얼마 후 볼셰비키의 우세로 돌아섰다는 것은 그들의 승리를 증명하기에 충분한 것으로 보인다. 일단 현실 정치의 문제에 그럴듯한 전략과 전술을 구사한 마르크시즘이 그렇지 못한 아나키즘을 밀어낸 것이라고 평가할 수 있을 것이다. 좀더 넓은 시각에서 바라보자면, 민족주의 고양과 국민국가 건설이라는 시대의 흐름에 적절히 부응한 공산당은 훗날 정치적 주도권을 차지할 수 있었지만, 민족주의와 국가주의를 일방적으로 거부한 아나키즘은 시대의 흐름에 낙오해 실패했다는 해석도 가능할 것이다.
그러나 현재의 관점에서 볼 때, 아나키즘 운동이 사상의 공상성 때문에 실패했다고 잘라 말하는 것은 다분히 결과론적인 해것으로 보인다. 왜냐하면 아나 · 볼 논쟁에서 아나키스트들이 제시했던 주요한 관점들이 지금도 유효하기 때문이다. 이 부분을 간단히 살펴보자.
첫째, 마르크시스트가 과학적 사회주의라는 이름 아래 중앙집권적 혁명정당 건립을 주장한 데 반해 아나키스트는 자유연합과 분권적인 조직원리를 제시했다. 그들의 조직원리가 현실에 적절한지에 대해서는 여전히 이론이 있을 수 있으나, 최소한 그들은 볼셰비즘에 내재된 권위주의적 일당독재의 출현을 정확하게 예측했다.
둘째, 사실상 일부 엘리트 집단이 주도하는 프롤레타리아 독재를 승인했던 마르크시스트에 대해, 아나키스트는 이런 시도는 결국 변질되며 모든 변혁운동은 반드시 그 운동 주체가 추진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인민을 위한’ 사회주의가 아니라 ‘인민의’ 사회주의를 제창했던 그들의 선언은 의미심장하다.[82]
셋째, 마르크시스트는 경제결정론과 역사유물론을 신봉했다. 그들의 결정론과 목적론적인 사고방식은 당시에는 설득력이 매우 컸으나, 오늘날의 관점에서 본다면 이런 경직된 사고방식은 많은 문제를 불러왔다. 한 시대의 승리자라고 해서 반드시 정의로운 것은 아니다. 과학임을 자랑하는 이론의 독재를 믿느니 차라리 그 목적을 포기하는 것이 낫다는 생각은 20세기의 역사가 우리에게 가르쳐준 교훈이다.
넷째, 마르크시스트들은 계급투쟁이 민족 문제, 여성 문제 같은 사회의 여러 모순을 한꺼번에 해결할 수 있는 관건이라고 믿은 것과 달리, 아나키스트는 가족 · 종교 · 국가 등 모든 권위가 자유를 억압하는 존재이므로 이들에 맞선 ‘전방위’의 투쟁을 강조했다. 그들은 계급 문제를 해결한다고 해서 기존 권력의 복잡한 그물망이 완전히 해체되지는 않을 것이라고 믿었다. 이런 지적들은 아나키스트들이 제시한 이상주의적 전망이 오늘날에도 여전히 유효하다는 사실을 보여준다.[83]
2. 동아시아 아나키스트 운동의 쇠퇴
일본의 아나키스트 운동은 오스기 사카에의 죽음을 기점으로 침체기로 들어서지만, 그의 희생 위에 건설된 노동조합운동은 오랫동안 세력을 유지했다. 1926년에는 국가의 탄압에 맞서기 위해 최초의 전국 조직인 흑색청년연맹과 전국노동조합자유연합을 구성했다. 하지만 내부 의견을 조정하는 데 실패해 1928년에는 순수 아나키즘을 고수하는 그룹과 생디칼리슴을 주장하는 그룹으로 분열했다. 1931년 만주사변을 기점으로 당국의 대대적인 탄압이 시작되자 상황은 더욱 악화되었다. 더구나 파시즘에 빠진 일본 정부는 중국 본토 침략과 전쟁이란 극한 상황으로 치달았고, 이에 저항하는 민족주의 열풍이 불었다. 따라서 국가주의와 민족주의에 반대하던 일본 아나키스트의 지위는 국내외적으로 크게 약화되었다.
이런 상황에서 일부 아나키스트들은 강력한 지도력 부재로 인해 아나키스트 운동이 침체했다고 보고, 중앙집권적인 조직을 건설하려고 했다. 그 결과 1933년 말 일본무정부공산주의자연맹이 결성되었고, 얼마 지나지 않는 1934년 1월에는 이 조직을 개편해 일본무정부공산당이 결성되었다. 그들은 중앙집권적 조직론과 민중독재론을 내세웠다. 이것은 중앙집권적 조직을 결성하고, 그 조직의 지도 아래 정치투쟁을 전개해 정치권력을 장악한다는 것과 민중들이 이상사회를 건설할 동안 반혁명세력의 반격을 분쇄하기 위해 민중독재를 실시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비록 자유 발의와 자유 토론, 의결에서의 만장일치제를 내세우고, 자율성의 원칙에 따라 다른 단체에게 강요하지 않는다는 규정이 있지만, 앞의 논리는 볼셰비키의 당 조직 건설과 프롤레타리아 독재를 연상하게 하는 것으로, 아나키즘 정신에서 크게 일탈한 것이었다.
한편 재일 한인 아나키스트 운동도 30년대에 들어와서 일제의 통제정책으로 말미암아 크게 위축되었다. 전쟁으로 한인 노동자의 수가 증가하면서 한때 동흥東興노동동맹 같은 노동단체의 활동이 두드러지기도 했다. 하지만 일본 정부의 좌파 탄압조치로 말미암아 한인 아나키스트가 발간한 「흑색신문」이 폐간되는 등 시련은 계속되었다. 결국 여러 노동조합 단체들이 차례로 해체되었다. 그럼에도 아나키스트들은 일본의 군국주의와 애국주의 논리를 비판하면서 아나키스트의 자유연합과 아나키즘의 민중화를 끊임없이 외쳤다. 또한 한인 아나키스트들 가운데 상당수가 일본무정부공산당에 가입해 활동했다. 그들은 자신들의 견해가 볼셰비키의 중앙집권주의나 프롤레타리아 독재와는 다르다고 주장했지만 이미 호소력을 크게 떨어졌다.
중국 아나키스트 운동도 이미 1924년부터 중요한 변화를 맞이했다. 중국공산당이 쑨원의 국민당과 합작하는 이른바 ‘국공합작’ 후에 원로 아나키스트의 대표격인 우즈후이, 리스쩡, 장징장, 차이위안페이 등이 모두 국민당에 가입하는 이른바 ‘안국安國합작’(아나키스트와 국민당의 합작)이 이루어졌다. 그들은 여전히 스스로 아나키스트라고 자부하면서 국민혁명이란 과도기를 거쳐 아나키즘 혁명으로 나아갈 것을 주장했다. 그들은 「혁명주보」라는 기관지를 발간하고, 여기서 나름대로 ‘분치分治합작론’ 또는 ‘전민全民혁명론’ 같은 새로운 이론을 제기하며, 국민당의 지원 아래 노동운동과 농민운동에 참여했다. 국민당에 가입한 우즈후이, 리스쩡 등은 국민당 극우파의 백색테러나 볼셰비키의 공격에 대비하여 중국과 한인 아나키스트를 보호, 지원했다.
하지만 원로 아나키스트의 정당 참여는 청년 아나키스트에게 큰 충격을 주었고, 그들의 반발은 만만치 않았다. 이미 스푸 생전에 우즈후이와 정당 참여 문제를 가지고 논쟁했고, 이 시기에는 화린(華林), 선쫑지우(沈仲九) 등 청년 아나키스트와 우즈후이 사이에 또 다시 논쟁이 일어났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상황이 어려워지자 적지 않은 청년 아나키스트들이 국민당에 가입했고, 일부는 공산주의자로 전향해 중국공산당에 가입하기도 했다. 하지만 대다수 아나키스트들은 여전히 신념을 지키며 아나키스트 운동을 전개했다.
1920년대 후반 중국의 아나키스트들은 일제의 대륙 침략과 공산당의 세력 확대를 저지하기 위해 동아시아 여러 나라의 아나키스트들과 국제적인 연대를 모색했다. 상하이노동대학 건설, 푸젠성 지역의 농민자위운동, 동방무정부주의자연맹 조직 등이 대표적인 활동이다. 그들의 활동을 간략하게 정리해 보자.
첫째, 상하이노동대학은 노동운동의 이론과 훈련을 쌓기 위해 만든 대학이다. 우즈후이, 리스쩡, 차이위안페이 등 중국인 아나키스트들이 주도했으며, 특히 선쫑지우, 우커강(吳克剛) 같은 청년 아나키스트가 실무를 담당했다. 중국인 외에도 한인 이정규, 이을규, 일본의 이와사 사쿠타로 등이 참여했다. 장제스(蔣介石) 국민정부의 지원과 통제를 받는 대학이라는 점에서 이와사 사쿠타로는 처음에 이 대학을 건설하는 데 반대했으나, 이정규 등은 아나키스트 운동의 확산을 위해 순수성에만 집착하지 말고 인식을 전환하자는 명분을 가지고 이 일을 추진했다. 그들은 일본의 이시카와 산시로나 프랑스인 르클뤼 같은 저명한 아나키스트를 초청할 계획도 세웠다. 상하이노동대학은 동아시아 아나키스트의 국제적 연대의 실험장이었으며, 교육으로 아나키즘 사회를 건설하자는 동아시아 아나키스트의 오랜 집념을 담은 뜻 깊은 공간이기도 했다.[84]
둘째, 푸젠성 농민자위운동은 농민운동의 하나로, 우크라이나의 마흐노식 무장자위조직과 같은 단체를 만들기 위해 시도한 것이다. 상하이노동대학에 참여한 사람들 중 일부가 이 농민운동에도 참여했다. 이곳에서 중국인과 한인 아나키스트들은 토비土匪와 공산주의자에게서 농민을 보호하기 위해 농촌 청년을 조직, 훈련했다. 이들이 향토조직과 무장자위조직을 만들고, 각종 자치 자활운동을 추진하도록 이끈 것이다. 그러나 1928년 토비의 공격으로 와해되었고, 화교의 재정 지원이 중단되자 결국 운동을 포기했다.[85]
셋째, 1928년 6월에 조직한 동방무정부주의자연맹은 명실상부한 동아시아 아나키스트 연합체이다. 이 단체에는 중국 · 일본 · 한국 · 타이완 · 베트남 · 인도 ·필리핀 7개국 대표 200여 명이 가입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들은 동아시아 각 나라의 아나키스트들이 단결해 국제적 연대를 강화하고 자유연합의 조직원리 아래 각 민족의 자주성과 각 개인의 자유를 확보하는 이상적인 사회를 건설하기 위해 매진할 것을 결의했다. 이 연맹은 리스쩡이 배후에서 지원했으며 기관지 「동방」을 펴낸 것으로 알려져 있지만 더 이상의 자세한 내막은 알지 못한다.[86]
이러한 활동을 볼 때, 아나키스트들은 일부가 국민당에 가입함으로써 운동에 제약을 받기도 했으나, 그래도 현실 정치와 일정한 거리를 두면서 활동에 매진했음을 알 수 있다. 하지만 대략 1929년을 기점으로 장제스의 국민당이 극우 노선을 걷자 양자의 합작은 종결되었다.
그런데 중국의 사정이 급격히 변하면서 재중 한인 아나키스트의 지위도 많이 흔들렸다. 더구나 국민당과 공산당의 양대 구도로 정계가 개편되자 한인 아나키스트들은 양자택일의 기로에 선다. 이들 가운데 일부는 중국의 원로 아나키스트에게 크게 의지했으므로 그들의 활동에 적극 동참했고, 일부는 독자적인 길을 걸었다. 그리고 1930년대 들어서면서 한인 아나키스트들은 새로운 활로를 모색하는 과정에서 남화한인연맹南華韓人聯盟을 만들었다. 이 단체는 민족주의운동이나 공산주의운동에 비해 규모는 작았지만 급진적인 투쟁은 주목할 만하다. 20년대 후반 신채호, 이정규, 이을규, 김종진 등이 잇달아 체포되거나 살해당하자, 유기석 같은 청년 아나키스트가 중심이 되어 만든 조직이다.[87] 그들이 출간한 「남화통신」에서는 과거와 마찬가지로 민족주의와 공산주의를 모두 비판했을 뿐만 아니라, 임시정부의 활동조차 세계 혁명의 관점에서 비판했다.
남화한인연맹은 주로 한중연합 투쟁을 전개했는데, 몇 개의 테러조직을 만들어 일제와 친일분자를 응징했다. 대표적인 활동으로 텐진 부두에서 일본 기선에 투탄, 텐진 일본영사관에 투탄, 상하이 친일정권의 왕징웨이 암살기도, 주중국 일본대사 암살기도, 한인 주구 옥관빈 · 옥승빈 형제 암살, 상하이 거류민회 부회장 이용로 암살 등을 들 수 있다. 하지만 정확히 어떤 조직이 이런 활동을 벌였는지는 그리 명확하지 않다.
일제의 대륙 침략이 전면전으로 발전하던 30년대 중반부터는 한인 아나키스트들의 관점에도 큰 변화가 나타났다. 과거 민족주의자와 공산주의자가 연합한 민족통일전선에 반대하던 태도를 버리고 현실 논리에 입각해 민족전선에 참가하기 시작한 것이다. 1937년에 재중 한인 아나키스트들이 결성한 조선혁명자연맹의 모습이 이를 잘 보여준다. 이 연맹의 회원 가운데 유림(柳林)과 유자명 등은 혁명과도기론을 내세우며 임시정부에 참가해 활동했다. 심지어 원칙적으로 군대를 부정하던 그들이 스스로 조선의용대에 참가하거나 한국청년전지공작대와 같은 군대를 조직해 항일전에 참가하기 시작했다.
당시 한인 아나키스트들이 보여준 이러한 태도는 사실상 정부와 국가의 존재를 인정한 것이었다. 따라서 일부 아나키스트들은 국민당에 가입해 항일전에 참가했으며, 다른 일부는 공산당의 민족통일전선에 호응해 공산군으로 항일전에 참가했다. 그들은 이런 방법으로 일제에 대한 직접투쟁에 나설 수 있었는데, 이런 일탈적인 행동은 일본과 중국의 아나키스트에게서는 찾아보기 힘든 현상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당시 그들은 민족주의자와 공산주의자 사이에서 자신의 목소리를 분명히 내지 못했다.[88]
국내에서도 1930년대 이후 아나키스트 운동은 일본의 전시 동원 체제 아래서 크게 위축되었다. 일제의 살벌한 탄압 때문에 사회주의 단체는 대부분 지하로 숨어들었고, 독서회 정도만이 겨우 명맥을 유지했다. 20년대 후반에 치열했던 아나 · 볼 투쟁 역시 30년대 초반까지 계속되었으나, 오히려 일제에게 탄압의 빌미를 제공해 양쪽 모두에게 막대한 손실을 입혔다. 1933년 국내 아나키스트 운동을 재건하려는 마지막 시도도 일본 경찰의 습격으로 좌절되었다. 그 후 아나키스트들은 간혹 언론 활동을 펴기도 했지만, 더 이상 역사의 전면에 부상하지는 못했다.
맺는 말
서양 아나키즘의 최고 목표는 개인이 절대자유를 향유할 수 있는 이상사회를 건설하는 것이다. 따라서 서양의 아나키스트들은 인간 본성에서 우러나오는 양심의 소리에 따라 자유를 추구했으며, 이에 방해가 되는 모든 권위와 권력에 맞서 싸웠다. 그들의 눈에 인류의 자유를 억압하는 대표적인 것은 바로 국가와 정부였다. 동아시아의 아나키스트들도 서양의 아나키즘을 받아들여 자기 나라의 정치체제를 분석하는 과정에서 이들과 비슷한 결론에 이르렀다. 하지만 그들은 개인보다는 사회 문제에 좀 더 많은 관심을 나타냈다는 점에서 서구와는 조금 다른 면모를 보인다. 그리고 동아시아 3국 사이에도 그들이 처한 상황에 따라 아나키즘의 내용에 약간의 차이가 나타난다. 아마도 서구적 근대와 동아시아 3국의 전통이 만나는 과정에서 빚어진 현상일 것이다.
일본의 아나키스트들이 부정하려 한 권력의 대표는 천황을 중심으로 한 근대적인 천황제였다. 따라서 천황제를 비판하는 것은 물론 천황 개인에 대한 테러 또한 멈추지 않았다. 그리고 일본이 한반도와 중국대륙을 침략하는 군국주의의 길을 걷자 반전운동을 전개하며, 동아시아 아나키스트의 연대를 통해 이를 저지하려고 했다. 이런 나름대로의 특성에도 불구하고 일본 아나키즘은 대체로 서유럽과 비슷한 길을 걷는다. 즉 일본 사회가 서유럽의 자본주의를 모방해 산업화에 성공하면서 제국주의 국가로 변모하자, 아나키스트들도 이에 대항해 반자본 · 반제 논리를 가지고 노동운동(총동맹파업)을 통한 부르주아 계급 타도와 사회주의 건설을 주장한 것이다. 하지만 반식민지 또는 식민지 상황에 놓인 중국과 한국은 상황이 달랐다.
중국에서 혁명가들이 아나키즘을 수용하고 처음 직면한 정치권력은 황제 중심의 전제군주제였다. 따라서 이들은 군주제를 타도하는, 이른바 배황혁명을 사회혁명의 첫 번째 목표로 삼았다. 그런데 1911년 신해혁명의 성공으로 황제체제가 붕괴되었음에도 불구하고 혁명의 내실을 갖추기도 전에 곧바로 군벌정치가 시작되었다. 이에 절망한 아나키스트들은 중국 사회의 토대를 근본적으로 바꾸기 위해 정치혁명을 넘어서 문화혁명을 생각하게 되었다. 그리고 신문화운동에 적극 참여해 전통문화를 전면적으로 비판하는 데 앞장섰다. 여기서는 도덕운동이나 교육운동을 사회혁명의 주요한 방법으로 채택했다. 물론 중국에서 점차 자본주의가 발달하자 그들 역시 눈을 돌려 노동자와 농민의 움직임을 주목한다.
한편 한국은, 일제의 식민지라는 주권조차 없는 특수한 상황에서 아나키즘을 받아들였기 때문에 운동의 시작 단계부터 색다른 모습을 보였다. 한인 아나키스트들은 일본 제국주의를 타도하고 민족의 독립을 쟁취해야 한다는 숙명적인 과제 아래 민족해방운동의 한 수단으로 아나키즘을 받아들였다. 따라서 그들의 운동은 처음부터 민족주의 사조와 밀접한 관련이 있으며, 정치 지향의 색채도 비교적 농후했다. 또한 그들은 한국뿐만 아니라 일본과 중국 등지에서도 활동했기 때문에 그 지역 아나키즘의 영향도 많이 받았다. 그래서인지 재일 한인 아나키스트가 이론을 중시했다면, 재중 한인 아나키스트들은 실천에 집착하는 경향을 보인다. 한편 한인 아나키스트들은 대중운동보다는 주로 테러와 파괴 같은 폭력수단에 의존해 운동을 전개할 수밖에 없었다.
이런 나라별 차이점에도 불구하고 동아시아의 아나키즘은 기본 정신에서는 서양의 아나키즘과 일치한다. 즉 동아시아의 아나키스트들은 민족주의자나 볼셰비키처럼 일부 엘리트의 지도나 일부 정치집단의 음모로는 이상사회를 이룰 수 없으며, 오직 민중의 자발적 참여를 통해서만 이룩할 수 있다고 굳게 믿었다. 따라서 그들은 선거를 통한 혁명이나 공산당과 같은 전위조직을 부정하고, 오직 민중 스스로 테러와 총파업, 또는 교육운동이나 이상촌 건설과 같은 방법을 통해 사회를 변혁시켜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들은 정치혁명을 부정하고 사회혁명을 강조했는데, 여기서 사회혁명이란 정치혁명은 물론 경제혁명과 문화혁명을 포괄하는 총체적인 것으로, 전통문화에 대한 변혁도 포함한다. 본래 아나키스트는 권위에 대항할 때 어느 하나에만 초점을 맞추는 것이 쓸데없는 일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기에 전방위의 투쟁을 추구한 것이다.
동아시아의 아나키스트들이 민족주의 고양과 국민국가 건설이라는 시대 흐름에 맞서 민족과 국가를 넘어서는 동아시아 민중연대를 주장한 것은 매우 인상적이다. 비록 현실 문제에 적절한 대안과 청사진을 제시하지 못하고 원리원칙을 고집한 것이 운동의 패인이라고 종종 지적되지만, 그래도 그들이 제시한 이상주의적 전망은 오늘날 우리에게 여전히 유효한 듯하다. 왜냐하면 그들이 던진 본질적인 문제들에 대해 우리는 아직도 답을 찾지 못했기 때문이다.
더 읽어야할 자료들
강만길 엮음, 『신채호』(고려대학교출판부, 1990)
단재신채호기념사업회 엮음, 『단재 신채호의 민족사관』(단재신채호기념사업회, 1980) 등
과거 한인 아나키스트에 관한 연구는 주로 신채호 개인에게 집중되었다. 따라서 그의 민족주의와 아나키즘을 다룬 글은 비교적 많다. 모두 열거할 수는 없고, 대표적인 논문집으로 이 두 권을 소개한다. 1~2편을 제외하면 신채호를 민족주의자로 조명하는 글들이다. 현재 신채호 외에도 박열 · 유자명 · 이회영 · 김종진 · 정화암 · 하기락 · 최갑룡 등 한인 아나키스트들의 회고록이나 전기들도 출판되어 있어 자료로서 가치를 가진다.
구승회 · 김성국 외, 『아나키 · 환경 · 공동체』(모색, 1995)
왜 다시 아나키즘인가라는 문제의식을 가지고 7명의 국내 아나키즘 연구자들이 쓴 10편의 논문을 실었다. 국내 최초의 아나키즘 연구서라는 의의 외에도 국내 학자들이 주로 어떤 문제에 관심이 있는지를 한눈에 보여준다는 데서도 의미 있는 책이다. 김성국의 아나키즘과 신사회운동, 방영준의 아나키즘의 이데올로기적 특성, 주원덕의 푸르동 연구, 이종훈의 바쿠닌 연구, 구승회의 에코 아나키즘, 박홍규의 아나키즘과 자유교육, 박연규의 아나키즘 미학과 상징 등이 그것이다. 필자들은 대부분 신진학자이며 서울, 대구, 부산 등에서 활동하는 아나키즘 연구회 회원들이다.
김경복, 『한국 아나키즘 시와 생태학적 유토피아』(다운샘, 1999)
한국 아나키즘 시를 연구한 작자의 박사학위 논문과 발표한 논문 몇 편을 모아 만든 책이다. 신채호, 권구현, 김화산, 신동엽 등의 시에 나타난 아나키즘을 작자 나름대로의 관점에서 해석하고 있다.
마루야마 마츠유키, 『중국 근대의 혁명사상』(예전사, 1989)
이 책의 전반부에 실린 중국 아나키즘에 대한 몇 편의 글(전통사상과 무정부주의, 유사배 전기, 민족주의 · 공산주의와 무정부주의를 다룬 논문)은 참고할 만하다. 마루야마마츠유키는 저명한 중국 근현대사 연구자로 전통사상과 근대화 문제에 관심을 가지고 있으며, 아나키즘의 문제도 그런 맥락에서 살피고 있다. 만약 류스페이(천의파)의 아나키즘에 관심이 있다면 이 책을 권하고 싶다. 한편 옮긴이 천성림은 류스페이의 사상을 다룬 논문 몇 편을 발표했는데, 그녀의 학위논문 〈신해혁명시기 국수학파에 관한 연구〉(이화여자대학교 박사학위논문, 1995)의 후반부에 일부가 실려 있다. 류스페이의 국수주의에 초점을 맞춘 논문이지만 그의 아나키즘을 이해하는 데도 도움이 된다.
무정부주의운동사 편찬위원회, 『한국아나키즘운동사』(형설출판사, 1978)
한국의 아나키즘에 관한 대표적인 고전으로 우선 이 책을 꼽을 수 있다. 이 운동사는 한인 아나키스트들이 직접 편찬한 것으로 자료집의 성격도 띤다. 내용 가운데 일부는 신뢰도가 떨어지고 다소 감정적인 문체로 되어 있지만, 그래도 한국 아나키스트 운동을 이해하려면 반드시 읽어야 할 책이다. 운동사의 전반부에는 일본과 중국의 아나키즘을 소개하고 있어서 도움이 된다. 그 밖에 하기락의 『탈환 : 백성의 자기해방의지』(형설출판사, 1985)는 앞의 책과 같은 선상에 있는 것으로, 주로 해방 이후 시기를 다루고 있다.
박제균, 〈중국 ‘파리그룹’(1907~1921)의 무정부주의사상과 실천〉(경북대학교 박사학위논문, 1996)
중국의 신세기파(파리그룹)에 대한 국내 연구로는 박제균의 연구가 대표적이다. 그는 학술지에 이와 관련한 논문을 몇 편 발표했다. 학위논문에 이런 내용이 잘 반영되어 있다. 논문에서 작자는 다양한 자료를 활용하여 신세기파의 사상과 활동을 꼼꼼히 파헤치고 있으며, 전통사상과 아나키즘의 관련성, 당시 여러 사회사조와 아나키즘의 관련성, 중국적 무정부주의의 특성 등에 주목하여 글을 전개하고 있다.
박환, 〈1920년대 재중한국인의 무정부주의운동과 ‘탈환’의 간행〉, 『만주한인민족운동사연구』(일조각, 1991)
박환, 〈남화항인청년연맹의 결성과 그 활동〉, 『한민족 독립운동사 논총』(박영석 교수 화갑기념논총, 1992)
국내 학계에서 비교적 일찍 한인 아나키스트 운동에 주목한 연구자로 박환과 오장환을 들 수 있다. 박환은 아직까지 이 주제를 다룬 독립된 저작을 내지는 않았지만 여기에 소개한 2편의 논문처럼 중국 내 한인 아나키스트 운동의 몇 가지 사례들을 뽑아 상세하게 분석했다. 그의 글들은 대략 윤곽만 알려졌던 역사 사실들을 구체화시켜 제시했다는 점에서 의의가 있다.
방영준 · 김경복 외, 〈아나키즘과 생태주의〉, 「오늘의 문예비평」 1998년 겨울호(세종출판사)
현대의 아나키즘 문제를 다룬 5편의 논문을 실었다. 아나키즘의 현재성, 생태 아나키즘과 문학, 아나키즘의 미학, 생태 아나키즘과 미술, 에코 아나키즘 등을 주제로 하고 있는데, 주로 역사적 관점에서 아나키즘을 다루던 방식에서 벗어나 현재의 문제를 다루었다.
오장환, 『한국 아나키즘운동사 연구』(국학자료원, 1998)
『한국아나키즘운동사』가 출판된 후 한국 아나키스트 운동을 다룬 단편적인 논문들이 여러 편 나오다가 90년대에 들어와 젊은 연구자들이 괄목할 만한 발전을 보여준다. 바로 이 책이 대표적인 저작이다. 저자는 프랑스에 유학해 한국 아나키스트 운동을 주제로 박사학위를 받았고, 몇 년 동안 이 학위논문을 다듬어 단행본으로 출간했다. 기본적으로 학술서적이지만 시기별 · 지역별로 아나키즘 운동을 깔끔하게 정리하고 있어 개설서의 성격도 갖추고 있다.
우드코크, 『아나키즘(사상편)』(형설출판사, 1981)
우드코크, 『아나키즘(운동편)』(형설출판사, 1981)
국내에 번역된 대표적인 아나키즘 이론서를 들라면 아마도 이 두 권의 책을 들 수 있을 것이다. 사상편에서는 고드윈, 슈티르너, 푸르동, 바쿠닌, 크로포트킨, 톨스토이 등 대표적인 서구 아나키스트들의 사상과 활동을 다루고, 운동편에서는 프랑스 · 이탈리아 · 스페인 · 러시아 등 서구의 아나키즘 운동을 나라별로 정리하고 있다. 이 책과 함께, 하기락이 옮긴 다니엘 게렝의 『아나키즘』(중문출판사, 1985)을 읽는다면 서양 아나키즘의 윤곽은 그릴 수 있을 것이다. 참고로 국내에 서양 아나키즘 연구자로는 이종훈, 김은석, 방영준 등이 있다.
이호룡, 〈한국인의 아나키즘 수용과 전개〉(서울대학교 박사학위 논문, 2000)
최근에 나온 그의 학위논문은 주목할 만하다. 아직 출판되지 않았으나 풍부한 자료를 바탕으로 사상사의 관점에서 한인 아나키즘 운동을 상세히 다루고 있다. 그는 한국에 아나키즘이 수용된 시기는 1920년대 전이며, 한국 근대사상사에서 아나키즘은 민족주의, 공산주의와 함께 제3의 사상으로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다고 주장한다. 앞의 오장환의 저서와 함께 한국 아나키즘 연구의 현수준을 보여주고 있다. 또한 그의 〈아나키즘〉[『한국사 시민강좌』(일조각, 1999)]이란 글은 한국 아나키스트 운동을 한 편의 논문으로 정리, 요약한 것이다. 한국의 사례를 깔끔하게 이해하는 데 도움을 줄 것이다.
자유사회운동연구회, 「아나키즘연구」창간호(국민문화연구소출판부, 1995)
서울 지역 아나키즘 연구자들이 활동하는 국민문화연구소에서 출판한 아나키즘 논문집이다. 이 가운데 주목할 만한 글은 김성국의 〈아나키스트 신채호의 시론적 재인식〉과 존 크럼의 〈동아시아에 있어서 아나키즘과 민족주의〉 2편이다. 김성국은 신채호의 민족주의와 아나키즘을 대립시켜 이해하는 기존의 해석 방법에 이의를 제기하고 민족주의와 아나키즘의 밀접한 관련성에 주목한다(『아나키 · 환경 · 공동체』에도 이 논문을 일부 수정해 실었다). 그리고 크럼의 글은 아마도 동아시아라는 범주를 가지고 아나키스트 운동을 다룬 유일한 글이 아닐까 싶다. 그는 한국 아나키스트 운동이 지나치게 민족주의적인 성격으로 말미암아 아나키즘 본래의 모습에서 크게 일탈했다고 비판한다.
조광수, 『중국의 아나키즘』(신지서원, 1998)
중국 아나키스트 운동에 대한 연구는 외국뿐 아니라 국내에서도 활발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국내에서 일반 독자가 쉽게 구해 읽을 수 있는 책은 드물다. 그런 이유에서 이 책은 도움이 된다. 비록 논문 몇 편을 모아놓은 것이어서 전체적인 흐름을 읽기에는 조금 부족하지만, 그나마 중국 아나키즘에 관해 현재 단행본 형태로 출판된 유일한 책일 것이다.
타마가와 노부아키玉川信明, 『아나키즘』(오월, 1991)
만화의 형식을 빌려 아나키즘을 간단명료하게 설명한 책이다. 타마가와 노부아키는 『중국의 흑기黑旗』와 같은 아나키즘 연구서를 펴낸 작가로, 여기에서는 아나키즘의 역사부터 현대의 아나키즘에 이르기까지 독자들이 궁금해할만한 내용들을 간추려 소개하고 있다.
〈21세기 자유 아나키즘〉, 「한겨레21」(제279호), 1999년 10월 21일
21세기 자유 아나키즘이라는 주제로 일곱 편의 기사가 실려 있다. 한국의 아나키즘 역사와 프랑스의 아나키스트 운동의 사례 등을 소개하고, 현대 사회에 나타나는 아나키즘의 경향을 진단하고 있다. 또한 이문창, 구승회 등과의 인터뷰를 통해 아나키즘과 공동체 운동, 에코 아나키즘에 대한 소개도 담고 있다. 영향력 있는 주간지에서 아나키즘을 주제로 특집이 만들어졌다는 점에서 이 사상이 21세기의 새로운 화두로 떠오르고 있다는 것을 실감할 수 있다.
http://dwardmac.pitzer.edu/anarchist-archives
Anarchy Archives
아나키즘의역사와 이론에 관한 문서 창고로, 저명한 외국 아나키스트의 전기 및 연구 성과는 물론 그들의 저작까지도 볼 수 있다는 일종의 아나키스트 도서관. 이 사이트를 통하면 유명한 국외의 아나키즘 관련 기관 및 단체와 연결이 가능하다.
http://www.feocities.com/capitohill/1931/links.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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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타 도움이 되는 책들
일본이나 중국 아나키스트 운동에 관한 본격적인 한글 연구서는 필자가 아는 바로는 거의 없다. 이 지역의 아나키스트 운동에 대한 지식을 좀 더 얻으려면 어쩔 수 없이 외국어로 된 원문을 읽어야 한다. 아래의 몇 권의 책이 도움이 되지 않을까 싶어 소개한다.
고마츠 류지小松隆二, 『日本アナキズム運動史』(青木書店, 1972)
곤도 겐지近藤憲二, 『一無政府主義者の回想』[平凡社, 1972(제2판)]
아키야마 기요시秋山清, 『日本の反逆思想-無政府主義運動小史』(現代思潮社, 1968)
『日本無政府主義運動史』第1編[(黒色戦線社, 1982(제2판)]
『日本無政府主義運動史』第2編[(黒色戦線社, 1979(제1판)]
하기와라 신타로萩原晋太郎, 『日本アナキズム労働運動史』(現代思潮社, 1969)
쉬샨광徐善廣 · 리우지안핑柳劍平, 『中国無政府主義史』(호북인민출판사, 1989)
뤼쩌路哲, 『中國無政府主義史稿』(복건인민출판사, 1990)
湯庭芬, 『中國無政府主義硏究』(법률출판사, 1991)
장준蔣俊 · 리싱즈李興芝, 『中國近代的無政府主義思潮』(산동인민출판사, 1991)
다마가와 노부아키玉川信明, 『中国の黒い旗』(晶文社, 1981)
사가 다카시嵯峨隆, 『近代中国アナキズムの研究』(研文出版, 1994)
Scalapino, R.A./Yu, G.T., The Chinese Anarchist Movement (Berkeley:Berkeley Univ. Press. 1961)
Zarrow, Peter., Anarchism and Chinese Political Culture (New York : Columbia Univ. Press, 1961)
Dirlik, Arif. Anarchism in the Chinese Revolution (Berkeley : California Univ. Press, 1991)
Krebs, Edward S. Shifu, Soul of Chinese Anarchism (Rowman & Littlefield, 1998)
[1] 고토쿠 슈스이는 마르크시스트에서 아나키스트로 전향한 인물로, 일본 군국주의에 대한 비판과 동아시아 혁명가들이 연대해야 한다는 주장은 인상적이다. 제국주의의 길을 걷던 일본 사회에서 처음으로 반제 · 반전의 기치를 들었다는 점이나 아나키즘을 노동운동과 결합했다는 점에서 높이 평가할 만하다. 그는 동아시아 아나키즘의 출발점에 서 있으며, 중국과 한국의 아나키스트에게도 깊은 인상을 남겼다. 중국의 류스페이나 한국의 신채호도 그를 통해 아나키즘을 처음 접했다. 비록 고토쿠 슈스이가 그의 제자인 오스기 사카에를 대신해 일본의 아나키스트 운동을 대표한다고 보기는 곤란하지만 일본 아나키즘의 특징을 살펴보기에는 충분하다.
[2] 스푸는 중국 아나키즘의 시작과 끝을 한꺼번에 농축시켜 보여준 상징적인 인물이다. 스푸는 중국 아나키스트의 전형이라고 일컬어지는 혁명가로, 몇 차례의 사상적인 변신을 했다. 처음에 종족주의적 혁명가로 출발해 나중에 아나키스트로 변화하는 일련의 과정에는 테러리스트의 뜨거운 열정과 청교도적인 엄격한 수도자의 이미지가 골고루 담겨있다. 본문에서도 언급하겠지만 그런 사상적 변신의 여러 단면들은 중국 아나키즘 운동의 몇 가지 경향을 고루 보여준다. 더구나 그의 사상은 중국적 전통의 단절과 서구적 근대의 수용이라는 중요한 문제를 담고 있다. 비록 젊은 나이에 요절했지만 스푸의 학생들은 중국 아나키스트 운동의 전성기를 구가했으며, 스스로 스푸의 제자임을 자처했다.
[3] 신채호도 민족주의자에서 아나키스트로 바뀐 인물이다. 다시 말하면 사회진화론에 기초한 민족자강론자에서 상호부조론에 기초한 반제국주의자로 변신한 인물이다. 왜 사회진화론자에서 상호부조론자로 바뀌게 되었는지, 나아가 그에게 민족해방과 아나키즘은 어떤 관련이 있는지가 무엇보다 주목된다. 여전히 그의 아나키즘 활동에 대한 평가는 이견이 많다. 하지만 필자는 그의 항일독립운동가로서의 위상과 관련해 조금은 의도적으로 이 글의 주인공의 한 사람으로 그를 선택했다.
[4] 마루야마 마사오丸山真男 · 가토 슈이치加藤周一, 『번역과 일본의 근대(翻訳と日本の近代)』(이산, 2000), 164~166쪽,
[5] 하기와라 신타로萩原晋太郎, 『日本アナキズム労働運動史』(現代思潮社, 1969), 10~14쪽.
[6] 고마츠 류지小松隆二, 『日本アナキズム運動史』(青木書店, 1972), 21~23쪽.
[7] Ibid, 23~26쪽.
[8] 무정부주의란 신조어가 생긴 지 얼마 지나지 않아 동아시아 아나키스트들은 이 말을 ‘무강권주의(無强權主義)’라는 의미를 가진 다른 말로 바꾸려고 했다. 경쟁자들이 무정부주의라는 말에 담긴 부정적인 이미지를 부각시키는 바람에 자신들에게 불리하게 작용하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한번 대중화된 개념은 쉽게 바뀌지 않는 법이다. 이런 번역어의 문제는 아나키즘뿐만 아니라 다른 용어들에서도 나타난다. 내셔널리즘을 민족주의(국민주의)로 번역하면서 생긴 개념의 혼란도 그런 예이다.
[9] 오카자키 세이로岡崎精郎, 〈幸徳秋水における東方問題〉, 「歴史学研究」 제145호, 36쪽.
[10] 이시모다 쇼石母田正, 〈幸徳秋水と中国〉, 『続 歴史と民族の発見』(東京大学出版社, 1953), 340쪽.
[11] 1904년 3월 1일 고토쿠 슈스이는 〈러시아 사회당에게 보내는 글〉을 「평민신문」에 발표했다. 이 글은 러시아의 플레아노프가 주도하는 「이스크라」에도 실렸다. 그리고 러시아 「이스크라」에 게재된 일본 노동자에게 보내는 답장이 같은 달 13일 「평민신문」에 실렸다. 이 사건은 일본과 러시아 사회주의자들이 반전동맹을 결성했음을 알리는 것이었다. 얼마 후 8월 14일에는 제2인터내셔널 제6차 회의에서 일본사회당 대표 가타야마 센과 러시아 사회민주당 대표 플레아노프가 연단에서 악수를 나눈다. 이에 고무된 고토쿠 슈스이는 9월 18일 「평민신문」에 ‘일 · 러 사회당의 악수’라는 글을 실어 “이 악수는 실로 세계 사회당 발전 역사에 영원히 대서특필될 중대사건‘이라고 흥분해 마지않았다.
[12] 하기와라 신타로萩原晋太郎, 『日本アナキズム労働運動史』, 23~25쪽.
[13] 일본에서는 에도 시대 사람인 안도 쇼에키를 전통시대 아나키즘의 선구자로 보기도 한다. 또 1882년에 다루이 도키치가 결성한 동양 사회당에서 아나키즘의 맹아를 찾기도 한다. 하지만 장자와 유사한 사상을 지닌 안도 쇼에키를 근대적 아나키스트로 보는 데는 무리가 있다. 동양사회당이란 정당 역시 세속의 빈부 문제를 타파하려 했다는 점에서 사회주의 색채를 띠지만 자유민권운동 좌파의 영향이 더욱 두드러진다. 따라서 이 둘을 근대적 아나키스트 운동의 시작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14] 『日本無政府主義運動史』 第2編(黒色戦線社, 1979), 15쪽.
[15] 이시카와 산시로石川三四郎, 〈日本無政府主義の由来〉, 『日本無政府主義運動史』 第1編(黒色戦線社, 1982), 제2판, 11~13쪽.
[16] 이시자카 고이치石坂浩一, 〈侵略主義者幸徳秋水の転向〉, 『近代日本の社会主義者と朝鮮』(社会評論社, 1993), 14~38쪽.
[17] 탕즈윈湯志均, 〈關于亞洲和親會〉, 『辛亥革命叢刊』, 第1輯(중화서국, 1980) 참조.
[18] 다케우치 젠사쿠竹内善作, 〈明治末期における中日革命運動の交流〉, 『中国研究』 5(1948), 77~78쪽.
[19] 후쿠다 노보루福田昇, 〈社会主義講習会與亞洲和親会〉, 『国外中国近代史研究22』(중국사회과학원 근대사연구소, 1993), 232~242쪽.
[20] 『상호부조론』은 크로포트킨이 1890년부터 1896년까지 런던에서 「19세기」 잡지에 영어로 기고한 글들을 모아 만든 책이다. 1902년에 단행본으로 출간되었는데, 원제목은 『상호부조 : 진화의 한 가지 요소』이다. 이 책은 진화론을 연구한 학술서의 성격을 띠었지만 당시 아나키스트 운동의 이론서로도 독보적인 위치를 차지했다.
[21] 덧붙이자면, 그 밖에 개인주의적(혹은 허무주의적) 아나키즘이 있다. 보통 슈티르너의 사상에서 기원을 찾는 개인주의적 아나키즘은 ‘나는 나’라는 관점에서 개인의 절대적 자유를 추구한다. 이들은 종종 테러를 직접행동의 주요 수단으로 삼았는데, 테러를 행하는 주체는 개인이며, 그 행위에 대한 책임도 전적으로 개인에게 있다고 믿었다. 동아시아 사회에도 개인주의적 아나키스트들이 많았는데, 일본의 후루타 다이지로, 중국의 주치엔즈, 한국의 박열 등이 대표적인 인물이다. 이들은 볼셰비즘은 물론 아나르코 코뮤니즘에 대해서도 서슴없이 비판했다.
[22] 이와사 사쿠타로는 대표적인 일본 아나키스트의 한 사람이다. 그는 도쿄법학원을 졸업하고, 1901년 미국으로 건너가 공부하던 중 아나키스트가 되었다. 고토쿠 슈스이가 대역 사건에 연루되어 사형을 언도받자 그는 이를 강력히 비판하는 항의문을 보냈다. 1914년 귀국한 후 정부의 감시를 받다가 1919년부터 아나키즘 활동을 개시했다. 순수 아나키즘 이론을 옹호한 그는 아나르코 생디칼리슴과 결함하는 데는 회의적이다.
[23] 이시카와 산시로는 대표적인 일본 아나키스트의 한 사람이다. 그는 도쿄법학원을 졸업한 후 「만조보」를 거쳐 고토쿠 슈스이의 평민사 활동에 참여했다. 기독교 사회주의자인 그는 1913년부터 정부의 탄압을 피해 장기간 유럽에 망명하기도 했다. 1920년 귀국한 후에는 아나르코 생디칼리슴을 선전하면서, 아나키스트의 단결을 호소했다. 그는 점차 정치운동을 부정하고 윤리운동으로 나아갔다.
[24] 고마츠 류지小松隆二, 『日本アナキズム運動史』, 52~54쪽.
[25] 〈大逆事件判決文〉, 『日本無政府主義運動史』第1編, 57~70쪽 참조.
[26] 고마츠 류지小松隆二, 『日本アナキズム運動史』, 64~66쪽.
[27] 마쓰모토 겐이치松本健一, 〈幸徳秋水と北一輝〉,『近代日本と中国』上(朝日新聞社, 1974), 247~267쪽.
[28] 이시모다 쇼石母田正, 〈幸徳秋水と中国〉, 『続 歴史と民族の発見』, 328쪽.
[29] 곤도 겐지近藤憲二, 『一無政府主義者の回想』(平凡社, 1972) 제2판, 5~14쪽,
[30] 고마츠 류지小松隆二, 『日本アナキズム運動史』, 76쪽.
[31] 고마츠 류지小松隆二, 『日本アナキズム運動史』, 121~124쪽.
[32] 현재까지의 연구에 따르면, 중국인 가운데 ‘무정부’란 용어를 처음 사용한 사람은 량치차오이다. 량치차오와 같은 개혁파 인사가 제한적이나마 아나키즘에 흥미를 느낀 사실은 청 왕조에 대한 절망감을 잘 보여준다. 새롭게 등장한 혁명파도 반청운동을 위해 허무당원의 암살과 폭동과 같은 수단에 큰 관심을 기울이고 있었고, 그 가운데 일부가 아나키즘에 접근했다[량치차오와 아나키즘에 대해서는 湯庭芬, 『中國無政府主義硏究』(법률출판사, 1991), 87~100쪽 참조.
[33] 장준蔣俊 · 리싱즈李興芝, 『中國近代的無政府主義思潮』(산동인민출판사, 1991), 25~26쪽.
[34] 양두성楊篤生, 〈理想的虛無黨諸言〉, 『無政府思想資料選』 上(북경대학출판사, 1984), 20~21쪽.
[35] 얀커燕客, 〈無政府主義序〉, 『無政府主義思想資料選』, 23쪽.
[36] 장지는 사회주의강습회를 조직한 인물로 성격이 아주 급했다. 그는 고토쿠 슈스이의 도움으로 에리코 말레테스타의 『아나키』, 아놀드 롤러의 『총동맹파업』을 번역해 중국에 소개했다. 이 책들은 아나르코 생디칼리슴의 대표작들로 그가 이 사상에 심취했음을 보여준다. 장지는 이른바 ‘옥상연설 사건’에 연루되어 체포되었으나 일본 아나키스트의 도움으로 프랑스로 탈출해 그곳에서 또다른 중국인 아나키스트 그룹인 세계사에 가담했다.
[37] 저명한 국학자이자 국수주의자인 장타이옌은 반강권과 문명 비판의 측면에서 아나키즘에 관심을 가졌다. 그러나 그가 아나키즘에 호감을 느낀 시간은 길지 않았다. 그는 공리 · 진화 · 유물 · 자연과 같은 아나르코 코뮤니즘의 핵심 개념을 회의하고 거부함으로써 다시 원래의 민족주의자로 돌아왔다. 장타이옌은 아마도 진화나 진보의 절대성을 강조하는 것이 개인의 주체성을 억압하는 결과를 낳는다고 생각한 듯하다.
[38] 장준蔣俊 · 리싱즈李興芝, 『中國近代的無政府主義思潮』, 69쪽.
[39] 근대 동아시아의 일부 지식인들은 서양의 신사조를 서양의 것으로만 생각하지 않고 전통문화와 관련지어 역사적 기원을 찾았다. 중국의 아나키스트들은 노자나 장자와 같은 고대 사상가에게서, 일본의 아나키스트들은 안도 쇼에키와 같은 에도시대의 사상가에게서, 한인 아나키스트들은 정약용과 같은 조선 후기의 실학사상가에게서 아나키즘의 사상적 기원을 찾기도 했다.
[40] 신찬申撰, 〈衡書三篇〉(國學問題), 「衡報」제10호(1908)
[41] 뚜안팡에게 투항한 류스페이는 상하이에서 선배이자 동료였던 장타이옌을 비난하기도 하고, 혁명가들의 모임을 밀고해 몇 사람이 체포당하게 만들기도 했다. 이에 동맹회원인 왕진파(王金發)가 그를 살해하려다 그만두었다. 아마 체포된 동료의 구출 문제 때문인 듯하다. 하지만 천의파의 또 다른 인물 왕궁취안은 1년 뒤 상하이 난징로에서 왕진파에게 저격당해 사망했다. 상하이를 떠난 류스페이는 뚜안팡에게 기대어 여러 곳을 전전하다가 사천에서 신해혁명이 일어난 날 뚜안팡이 자신의 군사들에게 살해되자 위험을 피해 잠적했다. 혁명 후 류스페이는 장타이옌과 차이위안페이 등의 도움으로 처벌을 면하고, 한 군벌 장군의 밑으로 들어갔다. 다시 위안스카이 밑에서 그의 군주제 부활운동을 지지해, 참모가 되었다. 위안스카이가 돌연 사망하자 또다시 사람들의 비난 속에 고립되었다. 베이징대학 총장이 된 차이위안페이는 그의 학식을 아깝게 여겨 베이징대학 교수로 임명해 고대문학을 담당하게 했다. 그러나 이때 그는 이미 회복 불가능한 숙환과 정신적 고통에 시달리고 있었으며, 사람들과의 교제도 끊은 상태였다. 1919년 5·4운동이 잠잠해질 즈음, 류스페이는 “나는 학문에만 종사했어야 했는데 괜히 정치에 관여한 것이 후회된다”는 말을 남기고 35년의 짧은 생애를 마쳤다. 한편 그의 아내 허쩐은 류스페이의 죽음에 충격을 받아 미쳤다고도 하며, 출가해 승려가 됐다고도 하나 확실하지 않다.[마루야마 마츠유키, 『중국근대의 혁명사상』(예전사, 1989), 68~74쪽 참조.]
[42] 뤼쩌路哲, 『中國無政府主義史稿』(복건인민출판사, 1990), 82~86쪽.
[43] 장준蔣俊 · 리싱즈李興芝, 『中國近代的無政府主義思潮』, 84~87쪽.
[44] 박제균은 프랑스 철학자 귀요의 자연도덕론이나 스페인 아나키스트 페레로의 교육사상이 리스쩡에게 끼친 영향을 주목한다[〈중국 ‘파리그룹’(1907~1921)의 무정부주의사상과 실천〉(경북대학교 박사학위 논문, 1996년) 참조].
[45] 일본에서는 가토 히로유키(加藤弘之)가 『인권신설』(1882)에서 가장 먼저 사회진화론을 소개했다. 그는 사회진화론을 이용해 과거에 자신이 선전했던 천부인권설을 부정했다. 생존경쟁과 자연도태 개념을 도입해 자연법과 평등원리는 망상이라고 비난하면서 자유민권론을 공격한 것이다. 그리고 애국심을 정당화하고 천황제 국가를 지지함으로써 결국 일본의 군국주의를 정당화하는 쪽으로 나아갔다. 이와 달리 나카에 초민은 진화신의 이름으로 진화론을 받아들여 자신의 자유민권사상에 이용했다. 그에게 진화는 좋은 것이기도 나쁜 것이기도 했다. 결과적으로 보면, 일본에서 사회진화론은 중국과는 달리 제국주의를 정당화하는 데 이용한 측면이 강했다(마루야마 마사오 · 가토 슈이치, 『번역과 일본의 근대』, 150~151쪽).
[46] 反, 〈國粹之處分〉, 「新世紀」제44호(1908).
[47] 曹世鉉(한), 〈二十世紀初的 反對國粹 和 保存國粹〉, 『文史知識』(中華書局, 1999), 114~119쪽,
[48] 일본학자 사가는 이 세 사람의 특징을 ‘문화적 보수주의자 류스페이, 과학주의자 리스쩡, 사대부적 서구화주의자 우즈후이’로 요약하고 있다[사가 다카시嵯峨隆, 『近代中国アナキズムの研究』(研文出版, 1994) 참조].
[49] 진덕회에서 주장한 새로운 도덕은 이미 「신세기」에서 연구된 바 있으며, 그 배경에는 문화의 변혁이 정치 변혁 성공의 관건이라는 의식이 깔려 있었다. 전덕회는 위안스카이의 탄압으로 해체되었으나 신문화운동 시기 베이징대학에 동일한 이름과 성격을 지닌 단체가 다시 등장해 명맥을 유지했다.
[50] 마루야마 마츠유키, 『중국근대의 혁명사상』, 106쪽.
[51] 쉬샨광徐善廣 · 리우지안핑柳劍平, 『中国無政府主義史』(호북인민출판사, 1989),142~153쪽 참조.
[52] 주치엔즈는 허무주의에 기초해 아나르코 코뮤니즘의 건설론과 조직론을 비판했다. 그는 중국의 크로포트킨주의자들이 파괴에 충실하지 않고 건설을 강조하는 태도, 조직을 긍정하는 태도, 분배 문제에서의 공산을 주장하는 것, 호조나 애타(愛他)와 같은 성선설에 입각한 관점, 노심과 노력의 결합 또는 교육으로 사회를 개조하려는 관점 등을 공격했다. 주로 파괴가 불철저하다는 이유로 아나르코 코뮤니즘을 비판한 것이다(사카이 히로부미坂井洋史, 〈近代中国アナキズムの批判〉, 『一橋論叢』 101~103(1989), 378~389쪽).
[53] 장준蔣俊 · 리싱즈李興芝, 『中國近代的無政府主義思潮』, 218쪽.
[54] 이호룡, 〈한국인의 아나키즘 수용과 전개〉제1장, 서울대학교 박사학위논문(2000) 참조.
[55] 이호룡, 〈한국인 아나키즘의 수용과 전개〉, 41~46쪽.
[56] 오장환, 『한국 아나키즘운동사 연구』(국학자료원, 1998), 29~56쪽 참조.
[57] 이 부분은 김성국, 〈아나키스트 신채호의 시론적 재인식〉, 『아나키 · 환경 · 공동체』(모색, 1996), 207~212쪽의 연구사 정리를 참조했다.
[58] 신용하, 〈신채호의 무정부주의 독립사상〉, 『신채호의 사회사상 연구』(한길사, 1984), 286쪽.
[59] 신일철, 〈신채호의 무정부주의 사상〉, 『신채호의 역사사상연구』(고려대 출판부, 1980), 206쪽,
[60] 김성국, 〈아나키스트 신채호의 시론적 재인식〉, 『신채호의 사회사상 연구』, 215쪽.
[61] 신용하, 〈신채호의 무정부주의 독립사상〉, 『신채호의 사회사상 연구』, 62~64쪽.
[62] 신일철, 〈신채호의 무정부주의사상〉, 『신채호의 사회사상 연구』, 203쪽. 한편 오장환은 〈조선혁명선언〉이 신채호가 아나키즘 성향을 처음 드러낸 글이라는 데 동의하면서도, 언제부터 분명한 아나키스트가 되었는지에 대해서는 유보적인 태도를 취한다(오장환, 『한국 아나키즘 운동사 연구』, 170쪽).
[63] 김성국, 〈아나키스트 신채호의 시론적 재인식〉, 『신채호의 사회사상 연구』, 215쪽.
[64] 이호룡, 〈한국인의 아나키즘 수용과 전개〉, 77쪽.
[65] 장을병, 〈단재 신채호의 민족주의와 무정부주의〉, 『단재 신채호의 민족사관』(단재신채호기념사업회, 1980), 29쪽.
[66] 신용하, 〈신채호의 무정부주의 독립사상〉, 『단재 신채호의 민족사관』, 270쪽.
[67] 한편 신일철은 “아나키즘적 민족주의로 전환된 신채호의 반강권적인 사회평균주의적인 자유국가관은 1900년대 자강주의적이고 강권국가의 자기극복의 산물”이라고 긍정적으로 평가하면서, “1900년대에 국가를 발견한 신채호의 민족주의 사상은 1920년대에는 사회를 재발견하게 된 것”으로 해석한다. 하지만 그 역시 민족주의와 아나키즘은 기본적으로 대립하는 것으로 보아 신채호에게서 이 양자간의 이론적 조화는 끝내 나타나지 않는다고 보고 있다(신일철, 〈신채호의 무정부주의 사상〉, 『신채호의 역사사상연구』, 207쪽).
[68] 하기락, 〈단재의 아나키즘〉, 『단재 신채호의 민족사관』, 21쪽. 김성국, 〈아나키스트 신채호의 시론적 재인식〉, 『신채호의 역사사상 연구』, 219쪽 참조.
[69] 존 크럼, 〈동아시아에 있어서 아나키즘과 민족주의〉, 『아나키즘연구』(국민문화연구소출판부, 1995), 104~108쪽.
[70] Dirlik, Arif. Anarchism in th Chinese Revolution(Berkeley : California University Press, 1991), 47~63쪽 참조.
[71] 신채호, 〈낭객의 신년만필〉, 「동아일보」 1925년 1월 2일.
[72] 고토쿠 슈스이는 『기독말살론』에서 예수의 실체란 이전부터 숭배하던 태양신의 다른 이름이며, 십자가도 생식기 숭배의 유물일 뿐이라고 비판했다. 신채호는 1920년대 중반에 이 책을 중국의 한 신문에 번역해서 소개했다.
[73] 〈朴烈事件判決文〉, 『日本無政府主義運動史』 第1編, 93~97쪽 참조.
[74] 무정부주의운동사 편찬위원회, 『한국아나키즘운동사』(형설출판사, 1978), 149~182쪽 참조.
[75] 오장환, 『한국 아나키즘운동사 연구』, 123쪽.
[76] 오장환, 『한국 아나키즘운동사 연구』, 119쪽.
[77] 이 단체와 잡지에 대해서는 박환, 〈1920년대 재중한국인의 무정부주의운동과 ‘탈환’의 간행〉, 『만주한인민족운동사연구』(일조각, 1991)를 참조.
[78] 오장환, 『한국 아나키즘운동사 연구』, 158쪽.
[79] 이호룡, 〈한국인의 아나키즘 수용과 전개〉, 232~237쪽 참조.
[80] 국내의 아나 · 볼 논쟁은 노동 · 농민운동 외에 문학계에서도 진행되었다. 아나 · 볼 논쟁은 대부분 비공개로 진행된 데 반해, 문학계의 논쟁은 공개적이었기에 지금도 자료가 남아 있다. 조남현은 이기영, 조명희, 임화 같은 카프 문인 또는 마르크시스트들은 모두 과거에 아나키즘을 체험한 인물들로 아나키즘과 마르크시즘을 혼동해 쓰고 있다고 지적한다. 이 말이 사실이라면 중국 아나 · 볼 논쟁에서 중국의 마르크시스트 대부분이 한때 아나키즘을 체험했고, 논쟁에서 아나키즘과 볼셰비즘을 충분히 구별하지 못했던 상황과 유사하다. 카프의 소수파인 김화산, 권구현, 이향 등 아나키스트와 다수파인 볼셰비즘 계열의 문학인들이 벌인 논쟁은 현장의 아나 · 볼 논쟁이 문학계에서 재현된 것이라 할 수 있다. 하지만 이 논쟁의 대표주자인 김화산이 내세운 아나키즘적 예술론은 아나키즘 원론을 충분히 이해하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민족해방의 현실을 외면한, 예술을 위한 예술론에 지나지 않는다는 비판이 있다(조남현, 〈한국근대문학의 아나키즘 체험 연구〉, 『한국문화』 12, 1~42쪽.
[81] 중국의 아나 · 볼 논쟁에 대해서는 조세현, 〈중국 5 · 4운동 시기 아나키즘-볼셰비즘 논쟁〉, 「역사비평」, 2000년 가을호(역사문제연구소), 326~344쪽 참조.
[82] 이종훈, 〈바쿠닌의 아나키즘에 관한 연구〉(서강대학교 대학원 사학과 박사학위논문, 1993년), 제5장 참조.
[83] 조세현, 〈중국 5 · 4운동시기 아나키즘-볼셰비즘 논쟁〉, 『역사비평』, 341~342쪽 재인용.
[84] 다마가와 노부아키玉川信明, 『中国の黒い旗』(晶文社, 1981), 267~270쪽.
[85] 무정부주의운동사 편찬위원회, 『한국아나키즘운동사』, 301~308쪽,
[86] 오장환, 『한국 아나키즘운동사 연구』, 141~144쪽.
[87] 이 단체의 조직과 활동에 대해서는, 박환, 〈남화한인청년연맹의 결성과 그 활동〉, 『한민족 독립운동사 논총』(박영석 교수 화갑기념논총, 1992) 참조.
[88] 1940년대에 중일전쟁이 본격화하면서 한인 아나키스트들은 일본에 맞서 직접 항전에 나섰다. 전지공작대가 대표적인 단체인데, 후에 광복군 제5지대로 편입했다. 일제 패망 후 그들은 한중무정부주의자대회를 개최하기도 했다. 그리고 일부는 대륙에 남고, 일부는 귀국해 해방 공간에서 활동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