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itle 아나키즘과 한국의 독립운동사상
#subtitle 아나키스트의 관점에서
#lang ko
#pubdate 2025-11-27T10:39:50
#authors 김성국
#topics 역사, 한국사, 아나키즘, 동아시아, 반식민주의, 스페인 내전, 일제 강점기, 한국, 하기락, 크로포트킨, 막스 슈티르너
#notes 우당 이회영 선생 탄생 151주년 기념 학술회의 자료집에서 발췌한 논문과 본 논문에 대한 토론문입니다.
*** I. 연구 구상 : 목적, 주장, 한계
아나키즘과 독립운동사상의 관계를 폭 넓게 접근하기 위해서는 당대 아나키즘의 세계적 조류와 한국적 수용이라는 배경을 토대로 아나키스트들이 구체적으로독립운동을 어떻게 전개하였는가를 검토해야 한다.이 과제는 실로 방대한 것이므로 이 글에서는 가급적 기존 연구와의 중복을 피하고, 아나키스트적 관점에서, 즉, 내재적 시각에서 몇몇 국한된 그러나 대표적인 사건들에 초점을 맞추어 논의를 진행할 것이다. 이와 더불어, 이 글은 (본 학술대회의 취지를 부분적으로나마 따른다는 의미에서) 한국 아나키스트 독립운동의 지도적 구심점 역할을 수행하였던 우당 이회영의 아나키즘을, 비록 매우 간략한 요약에 불과하지만, 정리하여 아나키스트로서 그의 정체성에 관한 시비를 해소하고 나아가 그의 선구적 업적을 재확인함으로써 아나키스트 독립운동의 위상을 더욱 확고히 하고자 한다.
이 글의 주제와 관련하여 이미 여러 선행연구가 존재한다. 특히 최근 김영범(2010)과 김명섭(2017a, 2017b)은 매우 체계적이고 설득력 있는 연구 성과를 제시한다. 나는 기본적으로 혁명운동으로서 한국 독립운동을 파악하는 김영범(2010)의 접근방식을 따르고, 한국 아나키스트들의 독립운동을 그 사상적 특성과 관련하여 4가지 시기별 단계적 차원에서, “허무주의에서 자유연합주의로, 아나르코 꼬뮤니즘과 만주 독립기지 건설구상, 국제연대투쟁에서 민족통일전선으로 그리고 대한민국 좌우연합정부에의 참여”로 구분하는 김명섭(2017b)의 관점을 지지한다.
나의 글에서 제기되는 강조점을 몇 가지 지적하자면 다음과 같다, 무엇보다도 아나키스트 혁명사상에서 평등의 가치도 매우 중요하지만 기본적으로 자유를 최고의 핵심적 가치로 간주한다. 물론 자유와 평등 두 가지 가치는 모두 중요하다. 그러나 공산주의 독립운동노선과의 차별성을 부각시키기 위해서는 아나키즘의 자유 지향성을 확립하는 것은 필수적인 이념적 과제이다. 나아가 아나키스트의 혁명적 독립운동에서 나타난 개인주의 및 허무주의에도 보다 적극적인 의미를 부여하여 아나키스트 독립운동의 외연과 내포를 확대·심화할 것이다. 그리고 한국의 선구적 아나키스트들인 이회영, 신채호, 류자명 등이 아나키즘에 깊은 관심을 가지고 이에 상당히 경도된 시점을 3·1운동 직후로, 기존의 연구보다도, 다소 앞당겨 파악한다. 그렇게 되면, 이 세 사람의 차후 활동이 매우 자연스럽게 이해될 수 있다. 아울러 아나키스트는 공산주의자와는 달리 코민테른의 지배나 간섭을 받지 않은 자주노선을 견지했고, 이러한 맥락에서 당시 일제에 의해서 합법적 단체로서 인정받은 신간회의 활동을 아나키스트들이 정면으로 비판한 사실 또한 적극적으로 평가한다.[1]
이 글은, 방법론적으로는, 아나키스트 혁명운동의 성격과 그것의 자유에 대한 강조를 각종 선언문이나강령을 고찰하여 확인한다. 물론 나는 기존 사료에 충실하되, 현재의 사료가 실증적으로 제시하지 못하는 쟁점(예컨대, 아나키즘에로의 입문과 경도시점)에 대해서는 사회학적 혹은 역사적 상상력을 동원하여 추론할 것이다. 아나키스트들은 모두가 투철한 사상가요 이론가였지만, 신채호를 제외하고는, 체계적인 (연구)형태의 글을 남겨 놓지 않았기 때문에 몇몇 회고록이나 관련 인물들의 증언에 의존하여 연구를 진행해야 하는 한계를 갖는다. 그러나 시대적 상황이나 현실적 조건과 같은 구조적인 외생적 변수들을 감안하면 새로운 해석의 가능성을 발견할 수 있다.
이미 아나키스트 독립운동에 관한 아나키스트적 관점의 연구들도 꾸준히 축적되고 있다. 그러나 여전히 시대착오적이며 소아병적인 맑스주의 혹은 레닌주의/스탈린주의적 시각에 입각하거나, 수구적 민족주의에 시대착오적으로 경도되어 아나키즘의 진면목을 외면한 피상적 분석에 머무르는 연구들도 없지 않다. 합당한 비판은 연구의 생산적 활력이 되지만, 무지와 악의에 입각한 비판은 역사 왜곡이라는 책임을 면하기 어렵다. 이 글을 통해서 아나키스트 독립운동사는 과거의 차원에서 뿐 아니라, 현재와 미래라는 관점에서도 진지하게 탐구될 필요가 있는 현재진형형의 역사라는 사실을 밝히고 싶다.
국내외에 걸쳐 아나키즘이라는 사상과 운동에서 그 최고의 이념적 가치는 자유해방(즉, 개인적 자유와 그 자유의 확산으로서 사회적 해방)이며, 그 실천적 방법은 직접행동이다. 직접행동의 원리는 모든 아나키스트로 하여금 역사적 현실이 요구하는 혁명운동이나 혁명적 수단(개별적 암살과 파괴 혹은 집합적 무장투쟁 등)을 활용하게 만들었다. 그러나 같은 혁명운동 대열이라 할지라도, 아나키즘은 (자유보다는) 평등을 우선시하면서 집합주의적/전체주의적 혹은 국가주의적 지향성을 가진 맑스-레닌주의와는 역사적으로 항상 적대적인 긴장-갈등-투쟁관계를 형성하였다. 한국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개인적 자유의 가치가 불안정한 오늘 한국의 현실에서 아나키스트들이 각별히 명심해야 할 사안이다.
이 글은 ‘조선의 아나키즘은 혁명사상 이었고, 조선의 아나키스트들은 혁명가이었으며, 따라서 아나키스트 독립운동은 혁명운동 이었다’고 주장한다. 아나키즘은 제국주의와 강권적 군국주의를 거부하고, 기존 봉건적 질서와 불평등한 자본주의체제를 극복하면서 자유의 신사회를 건설하려는 민족혁명운동이자 사회혁명운동이었다. 혁명이념이자 혁명운동으로서 아나키즘은 식민지체제라는 특수한 환경 속에서 민족혁명이라는 당면 과제와 더불어 미래를 위한 사회혁명의 기반 구축에도 매진하였다. 민족혁명이 당면한 현실적 과제였다면, 사회혁명은 민족혁명과 병행하면서도 민족혁명 이후에 요구되는 장기적인 미래사회 건설을 목표로 하는 것이었다.
조선 아나키스트들은 이 과제를 한편으로는 암살, 파괴, 군사행동과 같은 무력투쟁으로 수행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자유연합의 조직 활동과 공동체 건설에 매진하는 직접행동의 전사였다. 요컨대, 아나키스트들은 자주인 혹은 자유인으로서 모든 일에 각자가 주체가 되어 직접 참여하는 민중직접혁명의 기수이다. 그러나 아나키스트 혁명가는 혁명 전후의 정치권력 획득에 연연하는 혁명정치꾼이 결코 아니다. 영화 [아나키스트]의 마지막 나레이션을 통해서 비장한 삶을 아름답게 바친 선배 아나키스트들의 영혼을 위로하고 싶다.
“혁명가란 저 강 건너 멀리 아름다운 땅에서, 이 더러운 세상을 향해 불어오는 한줄기 미풍이라 했다. 우리는 이리로 불어와, 희미한 향기만을 남기고, 암흑 속으로 사라져 갈 뿐이다.”
이제 나는 이 글을 통해서 이 암흑을 밝히고, 그 향기를 보존해야 하는 소명을 느낀다.
*** Ⅱ. 아나키스트운동의 회고
먼저 해방 이후의 한국 아나키스트운동사에 대한 간략한 회고를 통해서 이 글의 역사적 맥락을 현재진행형으로 구축하고자 한다.
18세기 서구에서 시작되었던 아나키즘과 아나키스트운동은 1930년대 후반 스페인혁명이 미국, 영국, 프랑스 등의 소위 자유민주체제의 선진국과 스탈린의 배신 속에서 좌절된 이후 역사의 무대에서 사라진 듯 했다. 그러나 1968년 프랑스 5월 혁명과 그 정신을 잇는 신사회운동(new social movements, 예컨대 생태운동, 지역공동체운동, 여성운동, 평화운동 등)의 물결을 타고 서서히 부활하였다. 특히 1980년대 인터넷의 비약적 발전과 함께, 아나키즘은 인터넽 상의 자유해방운동(John Perry Barlow의 Declaration of Cyberspace Independence 및 Richard Stallman의 GNU선언, Open Source 운동 등)을 주도하면서 세계적으로 확산되었다. 이에 더하여 1980년대 말 소련-동구사회주의권의 해체와 함께 기존 자본주의나 자유주의의 한계를 극복할 수 있는 대안이념으로서 아나키즘은 새롭게 주목받고 부각된다. 현재 아나키즘과 아나키스트운동은 각종 지역공동체 및 협동조합운동, 지역화폐 및 새로운 화폐/금융질서운동, 여성운동 및 생태운동(anarcho-feminism, eco-anarchism), 새로운 정치 및 정당운동(예컨대 서구의 해적당) 등의 핵심적 가치로 자리 잡고 있다. 최근 가상화폐 열풍을 일으킨 블록체인(blockchain)기술도 이미 2002년 Crypto Anarchist Manifesto를 작성한 Timothy May를 비롯한 일단의 아나키스트들이 이론적으로 그 철학적, 정치적, 사회문화적 차원을 정당화하고 있다(Ludlow, 2002).
한국에서도, 해방직후부터[2] 신 사회 건설을 목표로 정치적으로는 유림과 하기락을 중심으로 독립노농당을 창립하고, 사회적으로는 대중/농촌운동을 확산시키기 위해서 이을규와 이정규가 중심이 되어 자유사회건설자연맹을 설립하고 농촌자치연맹과 노동자치연맹을 조직하였다. 자유사회건설자연맹은 후일 국민문화연구소를 중심으로 사업을 전개하였고, 이문창을 구심점으로 하여 방영준, 이민형,김명섭 등이 여기서 아나키즘의 불씨를 계속 살려 나가는 역할을 수행한다. 독립노농당은 후일 (양일동의 민주통일당과) 최갑용, 정화암, 하기락 등이 설립한 자주인연맹(1972년)을 중심으로 [한국아나키즘운동사]를 편찬하고[3] 그 아나키스트활동의 맥을 유명종, 정인식, 김영찬 등이 계승한다. 1988년에는 이미 세계적 무대에서 활동하던 하기락의 주도로 세계아나키스트대회 겸 국제평화회의를 한국에서 개최하는 쾌거를 이루기도 하였다. 현재 국민문화연구소에 참여하는 엄기선은 1970년대부터 일찍이 자주인연맹에 관련하였고, 70년대 말 당시 대학생이었던 조세현과 한국 비트코인 개척자의 한 사람인 신항식은 아나키즘에 관심을 갖고 하기락과 엄기선을 접촉하였다. 한국 학생운동이 맑스-레닌주의나 친북이념의 좌경화로 기울어지기 전에 짧은 기간이나마 이 시기 일부 이념서클에서 그람시를 비롯한 문화사회주의나 아나키즘에 대한 관심이 고조되었던 것으로 알고 있다.
1990년대부터는 하기락의 인도를 받으면서 새로운 아나키스트운동으로서 (임해수, 박연규, 하영우 등의) 대구아나키즘연구회와 (김성국, 조광수, 조세현, 박명규 등의) 부산아나키즘연구회가 창립되었다, 2001년에는 한국아나키즘학회(회장으로 김성국, 박홍규, 강동권, 이덕일, 김영범, 조광수)가 창립되어 지금까지 연구운동을 지속하며, 강동권의 이학사를 거점으로 출판운동도 전개되고 있다. 그 결과 아나키즘에 대한 대중적 인식도 꾸준히 개선되고 있으나, 아직도 그 수준은 결코 만족스럽지 못하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지식인 사회 및 학계에서나 문화예술계(특히 영화부문)에서 아나키즘은 매우 적극적 평가를 받고 있는 것 같다.
그러므로 해방 이후 한국의 아나키스트 활동을 결코 과소평가해서는 안 된다. 좌우세력의 협공과 군사독재체제의 철권이라는 엄혹한 환경에서도 그 명맥을 유지한 것만으로도 성공이다. 동아시아에서 현재 중국의 아나키스트활동 및 아나키즘은 공산주의체제에서 거의 전멸한 상태이나 최근 아나키즘에 대한 학술 차원의 연구는 꾸준히 이루어진다.[4] 전후 일본도 마찬가지로 고립분산적인 개인 중심의 활동으로 명맥을 유지할 뿐이다. 이에 비하면 한국의 아나키스트운동은 활발하고 대중적 기반도 미약하나 조금씩 갖추어 나가며, 연구 활동은 역사분야에 치중해 있지만, 이론적으로는 성숙한 단계에 도달해 있다. 구미의 경우는 연구 및 출판(Anarchist Studies 년 2회 출간)을 중심으로 훨씬 체계적인 활동을
지속적으로 전개하고 있기는 하나 분파활동이 심하여 그 핵심적 맥락과 추세를 파악하기가 쉽지 않다. 실천면에서는 반세계화운동에 적극 참여하고 있으나, 과거의 파괴적 이미지를 재생시키는 장단점을 지닌다. 따라서 국제적 활동수준과 비교해 보더라도, 한국은 취약하나마 아마 세계에서 유일하게 전국규모의 아나키즘학회도 있고, 국민문화연구소와 같은 오랜 운동단체도 있으며, 최근 연구 및 출판활동에서도 꾸준한 축적과 성과를 거두고 있으므로 이제는 자신감을 회복할 시기라 생각한다.
왜 한국의 아나키스트는 이래야 하는가? 무엇보다도 그리고 참으로 독특하게도, 한국의 선배 아나키스트들은 거의 모두가 살신성인의 위대한 인격을 갖춘 걸출한 독립운동가로서 대한민국 창건의 주역이요 공로자라는 전 세계적으로 유례가 없는 혁명가집단이라는 사실이다.[5] 그러므로 오늘의 한국인들이 아나키즘 자체의 진수를 제대로 이해하고 나아가 그것의 21세기적 적합성을 인식하며, 아나키스트들이 민족해방운동/독립혁명운동에 공헌한 혁혁한 사실을 (학교교육을 통해서!) 깨닫게 된다면 한국아나키즘의 위상과 국내외 공간은 앞으로 더욱 제고·확산될 것이다. 특히 한국아나키스트들은 서구아나키즘에 맹종하는 추종주의를 배격하고, 동아아시아(노장/불가/유교) 아나키즘의 정신을 기반으로 한국적 특수 환경과 조건에 대응하여 독립노농당 창당이라는 창조적 파괴를 감행하는 세계아나키즘운동사에 유례없는 일대 혁명적 전기를 이루었다. 이회영, 신채호, 류자명을 비롯한 조선아나키스트들의 치열하고, 비장하며, 선구적인 과거 업적 위에서 오늘의 우리 아나키스트가 있고, 내일의 우리 아나키스트 미래를 개척할 수 있다.
일찍이 아나키즘에 대한 무지가 횡행하던 시절에도 대학자 신용하(1984: 2711; 1990: 147)는 단재 선생의 사회사상을 연구하면서, “일본 제국주의 침략 하에서 한국독립운동 노선 중에 무정부주의 사상과 운동이 존재했던 것이 엄연한 객관적 사실이며.....한국사회사상사의 유산을 풍부하게 정리하기 위해서도 신채호의 무정부주의 독립사상은 여러 연구자들에 의하여 깊이 고찰될 필요가 있을 것”이라고 주장하면서, “민족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한국인이 만든 사회사상 중의 중요한 한 흐름을 나타내는 것”이라 평가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학계에서 아나키즘은 주목을 별로 받지 못하였고, 비아나키스트 혹은 반아나키스트 연구자들에 의해서 소개된 아나키즘은 모순적이고, 시대착오적인 것으로 묘사되었다. 물론 아나키스트 하기락(1980)은 학자로서 아나키즘에 대한 몰이해와 편견이 지배한 그 척박한 시대에도 외롭지만 당당하게 아나키즘의 진면목을 제대로 전달하였다.
예를 들면, 신채호의 아나키즘에 대한 당대의 일반적인 견해는, 장을병(1980:)이 기술하듯이, “그가 무정부주의를 신봉한 것은 민족주의 사상과 실천적인 독립운동의 전개과정에서 채용한 일시적인 방편이었지, 궁극적으로 민족을 포기하고 국제주의를 지향하는 일반 무정부주의자들의 교조주의적인 입장이나 주장과는 판이했다”고 제시한다. 무정부주의의 수용을 한낱 방편 혹은 수단으로 격하 간주하는 것이 당대의 지적 분위기였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하기락(1980: 21, 22)은 ”민족주의와 아나키즘은 이것 아니면 저것이라는 양자택일의 관계가 아니라, 이것이 저것으로 내실화하는 보완관계에 있는 것이다. 단재의 경우 감성적 민족주의란 원색의 바탕 속에 아나키즘이란 이념적 내실이 성숙해 갔다고 평하는 것이 옳을 것이다“고 참으로 통렬하고도 정확하게 지적한다. 아울러 ”단재가 ‘주의를 위한 조선’이 아니라 ‘조선을 위한 주의’가 되자고 강조할 때, 그 이른바 조선은 추상적 조선이 아니라 민중의 조선이요, 조선의 실체인 민중의 해방을 위한 주의가 되어야 한다는 것을 강조한 것이다. 그것은 곧 다름 아닌 아나키즘의 명제“라고 설명하였다. 나아가 하기락은 ”우리는 또한 반체제·반봉건·반권력·반권위를 사상적 뼈대로 하는 아나키즘의 원류를 우리나라 전통 속에서는 조선 실학에서 찾아 볼 수 있을 것이다“고 제시하여 아나키스트의 차후 연구 과제를 남겨두는 동시에 아나키즘의 실질적이고 실용적 차원을 강조하였다. 하기락이 무정부주의라는 관행적 표현 대신에 아나키즘이라고 호명한 것 또한 아나키즘에 대한 그의 선견지명과 통찰력을 보여준다.
한편, 방영준, 박홍규, 박연규, 구승회 및 김성국을 비롯한 해방 후 2세대 아나키스트들은 1996년 [아나키·환경·공동체]를 공동으로 출간하여 아나키즘의 한국적 부활을 선언하였다. 이후 아나키즘 관련 연구들이 석·박사 논문을 비롯하여 각종 단행본 형태로 활발하게 생산된다. 한국아나키즘학회(김성국,강동권, 조세현, 방영준, 이덕일, 이문창, 이창언, 김성균, 윤용택, 정중규, 이소영, 임해수, 김민적, 강효숙)은 2013년 [지금, 여기의 아나키스트](이학사)를 출간하여 아나키즘의 현대적 과제와 그 구체적인 실천방안을 제시한다. 이제 세월은 흘러, 적어도 학계에서는 당당하게 아나키즘을 아나키스트의 관점에서 연구하고, 발표하는 것이 정상화되었다. 따라서 아나키스트 연구자들은 한국 아나키즘의 과거, 현재, 미래를 더욱 객관적으로 넓고, 깊게 그리고 미래지향적으로 탐구해야 하는 과제를 안고 있다.
*** Ⅲ. 아나키즘의 이해[6]
이 글의 취지에 부합하도록, 나는 아나키즘에 관한 여러 가지 규정과 정의, 설명과 해석 가운데서 아래 세 가지 관점에 주목하였다.
**** 1. 김용옥의 동아시아 아나키즘 인식
먼저 아나키즘의 정곡을 찌르면서, 동아시아 아나키즘의 심원성(深遠性)을 갈파하는 김용옥(2000: 72-73, 85)의 규정을 소개한다.
“아나키즘은 인(人)의 간(間)에 있어서 존재하는 모든 권력지향의 제도를 최소화시키려는 경향을 지닌 사유를 총칭하는 술어이다.....국가 없이도 사회는 성립할 수 있다. 2‧3백년만 거슬러 올라가도 인류역사의 삶의 양식의 대부분은 아나키스틱한 것이었다.....서구의 아나키즘이 별 볼일 없었던 것은 그들(푸르동, 바쿠닌, 크로포트킨)의 아나키즘 논쟁이 어디까지나 소시알리즘(socialism)의 한 제도적 측면으로서 시작되었기 때문에 인간세의 제도적 장치에 대한 현실적‧국부적 소론에 그치고 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아나키즘의 본질에 걸맞는 우주론이나, 세계관, 인간관, 특히 인성론에 대한 깊은 통찰을 결여하고 있기 때문이다. 동양의 모든 아나키즘은 인성론으로부터 출발한다. 그리고 인성론으로부터 출발한 심미적 구조까지를 포함한다. 바쿠닌은 그런 심미적 통찰에까지 이르지 못한 평등주의에만 열광해 있었다.....인류에게 순(純)하고 전(全)한 유일무이의 아나키즘(the only pure and holistic anarchism)은 타오이즘(Taoism)이다. 타오이즘만이 참된 아나키즘이다.....노자철학의 해석의 총체성은 항상 아나키즘의 본질로 환원된다.....소국과민(小國寡民)의 사상을 철저히 밀고 들어가면 우리는 두가지 래디컬리즘(radicalism)을 만나게 된다. 그 하나는 아나키즘이요, 다른 하나는 패시피즘(pacifism)이다. 아나키즘의 본질은 항상 패시피즘으로 귀착되게 마련이다.....아나키즘은 무정부주의가 아니다. 아나키즘을 마치 무질서를 지향하는 혼란주의와 동어의인 것처럼 곡해하는 것은 역사적으로 모든 진보주의(=사회주의, 공산주의)나 보수주의(=우파 반동주의, 국가주의)가 한결같이 국가라는 제도에 대한 불가치의적(不可置疑的) 신뢰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맑시즘 특히 레닌이즘은 아나키즘을 증오하였고, 모든 스테이티즘(statism) 그리고 우파 반동철학도 아나키즘을 혐오하였다. 아나키즘은 현실불가능한 로맨티시즘(romantic-
ism)의 타락 내지는 리버랄리즘(liberalism)의 환상으로 치지도외하였다. 왜냐? 아나키즘은 권력에 대한 근원적 부정을 내포하고 있었기 때문에, 권력을 지향하는 모두에게 공포스러운 것이었다. 허나 인류의 예지는 좌우가 동시에 증오하는데 숨어 있었다. 21세기는 바로 이 좌우가 모두 혐오하던 의식형태로부터 출발하지 않을 수 없다.”
김용옥의 평가는 아나키즘에 대한 이해가 얕았던 당시의 한국 상황에서 매우 정확할 뿐 아니라 호의적이다. 더욱이 그는 서구 아나키즘의 철학적 한계를 지적하면서, 노장주의로 대표되는 동양아나키즘에 내장된 보다 근원적인 우주론적 인식이 필요함을 역설하였다.[7] 특히 김용옥은 강권적 국가중심주의 혹은 국가우선주의를 반대하는 아나키즘의 특성을 강조한다. 사실 현존하는 좌우파 모두 국가우선주의/국가중심주의적 지향성을 보여준다. 국가주의에 대한 지지와 거부는 맑스-레닌주의 및 일반 사회주의와 아나키즘이 확연히 경계를 이루며 분기하는 지점이다. 아나키스트들이 정치(권력)혁명보다는 사회(가치)혁명에 더 큰 비중을 두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아나키스트들이 맑스의 프로레타리아독재(국가)론에 반대한 논리도 동일한 이유에서이다. 나아가 아나키즘의 궁극적 지향성을 평화주의와 연관시켜 지적한 것은 김용옥의 혜안이 아닐 수 없다. 아나키즘이 파괴를 일삼으며 무질서와 혼란을 조정하는 이념이 아니라 만인이 협동하여 조화를 이루는 평화주의 이념이라는 사실은 재삼 강조할 필요가 있다. 톨스토이나 간디의 비폭력주의 혹은 반폭력주의가 바로 평화주의 아나키즘이다. 기독교아나키즘도 동일한 맥락에서 이해될 수 있다.
**** 2. 콜린 워드의 실용주의적 접근 | 2. 콜린 워드(Colin ward)의 실용주의적 접근
다음으로 20세기 후반 춈스키(Noam Chomsky), 북친(Murray Boochin)과 더불어 세계 아나키스트운동의 삼대 지주의 한 사람이었던 영국의 아나키스트 콜린 워드(Ward, 2004: 10)의 명언을 알리고 싶다.
“아나키즘이라는 정치적‧사회적 이념은 두 가지 서로 다른 기원을 갖고 있다. 즉 아나키즘은 자유주의의 최종 산물인 동시에 사회주의의 최종 목표이다. 이 두 가지의 경우에, 아나키스트 활동가(propagandist)는 똑같은 문제에 직면한다. 즉 아나키스트가 개진하는 개념들은 일반적인 정치적 가설과는 너무나 다르고, 아나키스트가 제시하는 해결책은 현실과 너무나 동떨어져 있으며, 실제 현실과 아나키스트가 말하는 가능성 사이에는 너무나 큰 간극이 존재하기 때문에, 사람들은 아나키스트의 말을 진지하게 받아들일 수가 없다.....수년 동안 아나키스트 활동가로 일하면서 나는 한 가지 확신이 생겼다. 나와 함께 살아가는 시민들에게 아나키즘 사상을 심어줄 방법은, 지금과는 좀 다른 인류가 완벽한 조화를 이루며 살아가는 미래사회를 꿈꾸면서 기존의 사회를 통째로 거부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공동체를 이끌어가는 비공식적, 일시적 자주조직의 관계망에서 공통된 경험을 끌어내는 것이라는 확신 말이다.”
여기서 워드는 아나키즘의 “실용적 전환(Prgmatic or Practical Turn)”을 이룩한다.[8] 그(Ward, 2004:5)는 “아나키스트 사회, 곧 권위에 기대지 않고 자율적으로 조직되는 사회가 항상 존재하고 있었다”고 믿는다. 왜냐하면 “아나키즘은 미래사회에 대한 사변적인 전망이 아니라 일상의 경험에 뿌리박은 인간조직의 한 가지 양식”이기 때문이다. 아나키스트는 “역사의 낭만적 샛길‘로 빠져들기보다는 ”지배적 권력구조의 틈새로 대안“을 발견하고,”자유로운 사회를 건설하는재료“를 우리들 주변에서 모아야 한다.
워드식 실용주의 아나키즘을 쉽게 설명하자면, 비록 현실이 척박하더라도 아나키스트 유토피아의 싹은 여기저기서 자라고 있으므로 아나키스트는 이를 잘 가꾸어 키우는 자유의 대지 위에 아나키 사회를 확장해 나가자는 것이다. 실용적 아나키즘의 유토피아는 어디에도 없는 곳(nowhere)이 아니라, 지금 여기(now and here)에서도 발견할 수 있는 현실의 실천장이다.
이와 더불어 워드의 실용주의는 아나키즘 내부의 이론적 대립이나 갈등을 아나키스트 각 개인이 직접행동을 통하여 극복할 수 있다는 점을 강조한다(White, 2011). 즉, 양자의 상호보완성 혹은 통합가능성에 주목한다. 워드(1961: 3)는 한편으로 아나키스트 사회의 단기적 실현 가능성은 거의 희박하므로, 아나키스트들은 일상생활에서 몰나(Molnar, 1961)가 제안했던 끊임없는 투쟁 혹은 “영구저항(permant protest)”을 개인적 차원에서라도 수행해야 한다는 점을 인정한다. 다른 한편으로는 이와 같은 일상적이고도 개별분산적인 저항행위들이 아나키즘
의 전부가 아니며, 아나키스트는 사회를 변화시켜, 현재보다도 더 자유로운 사회를 만들겠다는 사회적 목표를 반드시 추구해야 한다고 역설한다. 워드는 아나키즘 내부의 개인주의적 전통과 사회주의적 전통 간에 존재하는 긴장을 존중하되, 그것은 이것이냐, 저것이냐의 양자택일의 문제가 아니라 이것도 저것도 모두 필요하다는 포용적 입장을 견지한다. 그러므로 워드(1997)는 생활양식 아나키즘과 사회적 아나키즘간의 논쟁에서 북친이 취한 권위주의적 입장에 비판적이다.
아나키즘에서 사회주의/사회적 아나키즘과 개인주의/개인적 아나키즘의 연결성을 추구한 워드의 입장은 다음의 선언에서 뚜렷이 표출된다.
“나는 협력적 행동을 기다리지 않는다. 왜냐하면 나 자신이 협력적 행동이기 때문이다. 나는 혁명을 기다리지 않는다. 왜냐하면 바로 나 자신이 바로 혁명이기 때문이다. 혁명이 도래하기 전에, 우리는 각자 혁명가가 되어야 한다. 대중을 결집시키기 전에 우리는 개인성을 보장해야만 한다.” (Levy, 2011: 7에서 재인용)
요컨대, 워드의 아나키즘은 지금 여기의 일상생활(everyday life)에서 개인들의 실제적 관심사(practical issues)인 교육, 교통, 도시계획, 주거, 식품 등을 개인들이 어떻게 자율적으로(individual autonomy) 그리고 자기조직화(self-organization)를 통해서 풀어 나가는지에 관심을 두는 실용적인 아나키즘이다. 그의 아나키즘은 정치적 변혁의 프로그램이라기보다는 개인들의 사회적 자기결정(social self-determination)이다.
**** 3. 하기락의 자주인/자유인 사상
끝으로, 아나키즘과 자유/자주의 궁극적 연관성을 보여주는 한국의 위대한 아나키스트의 한 사람인 하기락의 아나키즘이 있다. 하기락은 일생 동안 “자유의 추구와 실현을 위한 구도의 길”(김주완, 1998: 22)을 걸었다. 하기락(1987: 6) 자신도 “인간의 해방 또는 실존의 자유, 이것이 나의 철학적 테마요 목표”라고 토로한다. 그래서 나(김성국, 2007: 222-224)도 흔쾌히 하기락을 따라서 자유의 길을 찾아 나섰다. 하기락(월간조선 1993년 6월호 인터뷰)은 아나키스트를 자주인(自主人)이라고 부른다:
“자주인이 무엇을 하자는 거냐. 바로 자기 자신이 자기의 주인이 되는 거야. 개인이 스스로 자신의 주인이 된다는 것은 인간생활을 자유롭게 하고 정치권력이나 재벌의 압박을 배제할 수 있게 되는 길이지.....인간은 각각 고립된 존재가 아니라 다른 인간들과 더불어 공동으로 생활하는 사회 속에서 살 수밖에 없다. 그러나 사회는 어디까지나 인간의 생존을 가능케 하는 필요조건이지, 그런 조건 아래서 살다가 죽는 생존자 자신은 아니다...민족 또는 국가라는 개념과 같이 신체와 의식에 부담되어 있지 않은 전체 인격이란 것은 하나의 추상물에 지나지 않는다.....인간은 각각 최고의 가치를 지니고 있으므로 인간에게 있어서 빈부, 귀천, 남녀 등 일체의 봉건적 신분차별이 폐지되어야 하는것은 당연한 것이다.....내가 최고 가치라면 너 또한 최고 가치이다.....조선 시대 동학의 교주 수운 최제우(水雲 崔濟愚, 1824-1864)는 인내천 사인천여(人乃天事人天如)라고 가르쳤다. 사람이 곧 하늘이라 함은 인간이 최고의 가치라는 것을 의미한다. 그렇기 때문에 수운은 인간 차별을 용납할 수 없었던 것이다.....여기에 있어서 비로소 각인이 만인의 자유를 존중하고, 만인이 각인의 자유를 보장하는 아나키사회가 성립될 수 있는 것이다.....만인의 자유를 현실화 할 것. 이는 곧 인류의 구원한 숙제이자 또한 아나키즘의 과제이다.“
이상에서 제시된 내용을 통해서 우리는 아나키즘의 다양한 차원과 그것의 동아시아적 배경과 한국적 맥락을 파악할 수 있다. 아나키즘과 개인주의/자유주의 및 사회주의/맑스주의와의 이념적 친화성/상이성, 폭력적이고 억압적인 국가주의에 대한 반대, 평화주의적 차원 등에 특히 주목할 필요가 있다.
*** Ⅳ. 서구 아나키즘의 전개와 한국적 수용
서구 아나키즘은, 단순화의 위험이 있지만, 개인적/개인주의 아나키즘(individual anarchism)과 사회적/사회주의 아나키즘(social anarchism)으로 대별할 수 있다. 전자는 영국의 고드윈(Godwin), 독일의 슈티르너(Stirner), 미국의 터커(Tucker) 등에 의해서 발전된 것으로 개인의 자유로운 활동을 우선적이며 핵심적 가치로 간주하면서 체제내적 혹은 개혁주의적 실천도 수용한다. 반면 후자는 사회중심적 가치관에 입각하여 반자본주의적 계급투쟁이나 반체제혁명운동에 주된 관심을 쏟는다. 그러나 이 두 가지 유형의 아나키즘은 비록 개인적 자유와 사회적 해방을 각각 더 우선적이고, 핵심적인 당면과제로 간주한다는 점에서는 실천적 차이를 보이지만, 궁극적으로 양자는 상대의 가치나 목표를 자신의 핵심적 토대로 전제하지 않을 수 없는 이념적 구속성을 가진다. 따라서 양자는 상호배타적-대립적이라기보다는 보완적-포용적인 관계를 형성한다.[9] 개인적 자유 없는 사회적 해방이 공허한 것이라면, 사회적 해방이 없는 개인적 자유는 맹목적이다. 그래서 나는 아나키즘을 때로 자유해방주의라고 부르기도 한다. 이 해방이라는 개념에는 개인적 자유의 사회적 확산이라는 의미에서 평등의 개념이 깊고도 널리 깔려있다.
**** 1. 크로포트킨의 영향 | 1. 크로포트킨(Peter Kropotkin)의 영향
조선의 아나키스트들은 사회적 아나키즘 가운데서는 푸르동의 자유연합/연방주의와 관련된 내용에 주목하였고, 특히 크로포트킨의 아나르코 코뮤니즘(anarcho-communism)에 심취하여 혁명투쟁과 더불어 공동체 건설에도 많은
관심을 가졌다. 예컨대, 신채호는 바쿠닌, 프루동, 크로포트킨, 중국의 이석증, 유사복, 일본의 행덕추수 등의 무정부주의 저작들을 섭렵했으나, 이 중에서 크로포트킨으로부터 “단연 압도적인 영향”을 받았다(신용하, 1984: 287). 이 사실은 신채호가 인류의 5대 사상가로서 석가, 공자, 예수, 마르크스, 크로포트킨을 지명하고, “아아 크로포트킨의 [청년에게 고하노라]란 논문의 세례를 받자”고 권유하는데서 잘 드러난다. 신채호는 적자생존과 약육강식을 당연시 하던 당대의 경쟁중심적 사회진화론을 보완하는 크로포트킨의 상호부조론과 민중이 직접혁명을 선도해야 한다는 민중혁명론에 깊이 공감하였다. 그리고 신채호는 공판과정에서 “기성의 국체를 변혁하여 다같이 자유로서 잘 살자는 것”이라고 분명히 함으로써 평등보다는 자유의 가치를 더 우선시하였음을 알 수 있다.
**** 2. 슈티르너의 개인주의와 러시아의 허무주의 | 2. 슈티르너(Max Stirner)의 개인주의와 러시아의 허무주의
조선 아나키스트의 혁명적 독립운동은 주로 상기의 사회적 아나키즘에 의거하여 전개되었다. 그러나 1920년대 국내와 일본에서는 적지 않은 조선 아나키스트들이 독일 슈티르너의 개인주의 아나키즘과 러시아 허무주의자들의 허무주의 아나키즘에 심취하기도 하였다. 그 주요 내용과 주장을 살펴보자.
*먼저 박열 등이 1921년 결성한 흑도회(黑濤會)의 선언문인 「선언」에는 흑도회의이념적 성격, 즉 자아 중심의 개인주의가 아래와 같이 분명하게 제시되고 있다.*
1) 우리는 어디까지나 철저하게 자아에 산다. 일상의 일거일동이라도 그 출발을 모두 자아에서 구하지 않으면 안 된다. 우리는 철저한 자아주의자로서 인간은 서로 헐뜯는 것이 아니라 상부상조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과, 미워하지 않고 친하게 지내며 도울수 있다는 것을 발견하였다.
2) 우리는 사람마다의 자아를, 자유를 무시하고 개성의 완전한 발전을 방해하는 그 어떤 불합리한 인위적 통일에도 끝까지 반대하며 전력을 다해 그를 파괴하는 데 노력한다.
3) 우리에게는 아무런 고정된 주의는 없다. 인간은 일정한 틀에 박혀 있게 될 때 타락하고 사멸하는 것이다. 맑스와 레닌이 뭐라고 지껄였던, 크로포트킨이 뭐라고 말했던 우리에게는 필요 없다. 우리 길에는 우리의 귀중한 경험이 있고 방침이 있고, 또 뜨거운 피가 있다.
4) 우리들은 우리들 자신을 위하여 우리들 자신이 해야 할 일과 하지 않아야 할일을 우리 자신 스스로 규율한다. 외부에서 오는 어떤 강한 권력도 우리의 행동을 규율하는 일은 불가능하다.
5) 우리들은 자기를 희생하는 어떠한 일도 할 수 없다. 사회 인류를 위해 자기를 희생하라고 말하는 자들은 모두 예외 없이 위정가(爲政家)들이다. 그중에는 이른바 인도주의 등을 가장하는 사람도 있으나, 우리들에게 만일 자기희생이 있다면 그것은 자아에서 출발한 것일 뿐이다.
6) 우리들은 모두 자유롭다. 배고플 때는 먹고, 하고 싶을 때 하고, 울고 싶을 때 울고, 화날 때 화를 낸다.[……] 어떤 한 가지도 다른 데서 지휘를 받는 일은 없다. 마음 다한 곳에 감격이 있다. 자아의 강한 요구에서 생긴 것이라면, 그것이 우리들에게는 진이고, 선이며, 미이다. 우리에게는 소위 절대 보편(絶對普遍)의 진리대법칙(眞理大法則)이란 것은 없다. 그런 것들은 모두 자신의 내면적 요구의 진화 발전과 함께 변화해간다.
7) 우리들은 이 인성과 자연의 변화 중에 참된 질서가 있고, 참된 통일이 있는 것을 발견하였다. 이곳에 인간의 진화가 있고, 새로운 창조가 있다.
8) 이곳에서 우리들은 우리들 자신에 의한, 우리 자신의 입장을 분명히 선언하는 바이다.
이 선언문을 통하여 흑도회가 당시 일본의 아나키스트들에게 강력한 호소력을 가졌던 슈티르너류의 개인주의적 아나키즘을 전면적으로 수용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흑도회의 선언문을 관통하는 개인주의적 아나키즘의 주요 내용을 항목별로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1) 자아주의에서 출발하는 상부상조[10]
2) 자아의 발전과 자유를 부정하는 인위적 통일 거부
3) 반권위주의
4) 자율주의 혹은 자치주의에 입각한 자주인 사상
5) 자아가 아닌 다른 존재를 위한 희생 거부
6) 보편적 진리의 거부와 내면적 요구에 따른 행동
개인주의적 아나키즘은 흑도회의 선언에 이어서 국내에도 파급되어 1923년 1월 서울에서 김중한(金重漢},[11] 이윤희(李允熙) 등이 결성한 흑로회(黑勞會)의 선언에서도[12] 분명하게 제시되고 있다.
1) 우리들은 철저하게 자아를 생각하는 동시에 자아에 살고자 한다.
2) 우리들은 어디까지나 자유롭고, 우리들은 평생의 일거일동을 우리들의 이성과 감정하에 움직이고자 한다.
3) 우리들은 각자의 자유를 무시하고 개성의 자유 발전을 저해하는 인공적 조직에는 어디까지라도 반항하고 전력을 다하여 파괴하고자 노력한다.
4) 우리들은 기아의 자유밖에 없는 자본주의 본위의 경제조직 하에서 경제 봉건노예를 면하고자 한다.
5) 우리들에게는 고정 불변의 보통의 대 법칙은 없고 자유 합의와 자유 발의가 있을 뿐이다.
6) 우리들은 인간 파괴의 악성인 생존경쟁에 반하여 상호부조의 인간 사회를 향하여 돌진할 뿐이다.
아나키즘운동에서 일부 아나키스트들에게 개인주의와 허무주의가 강력하게 각인될 수 있었던 구체적인 시대적 특수성으로 다음과 같은 세 가지 요인이 지적될 수 있다.
1) 상해임시정부를 비롯한 민족주의 진영의 분열
2) 상해임시정부의 개량적‧타협적 민족운동 노선에 대한 회의
3) 권위주의적이고 집합주의적인 관점에서 개인적 자유를 경시하거나 비판하는 공산주의 이념의 거부
흑도회는 제3의 사상으로서 아나키즘의 입장에서 민족주의와 공산주의를 비판하였다. 한편으로는 좌파와 우파를 공격하는 것이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우파가 신봉하는 민족이라는 집단주의와 좌파의 신탁이 되고 있는 국가 혹은 공산당이라는 권력 집단을 개인의 자유와 자율성에 대한 위협이라는 차원에서 비판하는 것이었다. 1922년 8월 20일자 <흑도> 제2호에 실린 공산주의의 사적 유물론에 대한 비판에 의하면, “인류 사회는 생산력과 생산관계의 모순에 의한 생산양식의 변화로부터 발전하는 것이 아니라 개인이 사회적 구속과 억압으로부터 해방되고자 하는 본능적 욕구에 의해서 발전한다.” 개인의 자유연합과 상호부조에 의거하면서 자발적인 민중 주도의 밑으로부터의 직접적 사회혁명을 주창하는 아나키스트들은 중앙집권적 국가의 계획에 의거하여 이상사회를 건설하려는 공산주의 방법론을 결단코 수용할 수 없었다. 나아가 박열과 가네코 후미코는 허무주의적 아나키즘을 실천하기 위하여 아나키스트들을 주축으로 1923년 4월 불령사(不逞社)를 조직하였다.[13] 박열의 허무주의적 아나키즘이 구체적으로 주창한는 내용은 무엇인가? 1923년 12월 3일에 작성한 「나의 선언」을 중심으로 세 가지 핵심요소를 추출할 수 있겠다.(이하 김삼웅, 1996: 231~248에서 발췌 재인용)
1) 추악한 인간성에 대한 불신[14]
“상애호조, 공존공영, 이것은 결코 인류의 본성이 아니다. 따라서 자연의 대법
칙도 아니다. 또 신의 의지도 아니다. 극히 무의미하고 강렬한 우월욕, 정복욕, 지
배욕, 따라서 이 가장 추악하고 우매한 약육강식, 이것만이 인류의 빼놓을 수 없는
참된 본성이며, 따라서 또 자연의 대 법칙이며 신의 의지인 것이다.”
2) 만물에 대한 저주와 복수[15]
“인류의 이 [추악한] 본성을 근절할 수 없는 한 인류 사회의 개조는 전혀 일보도 전진할 수 없는 것이다. 어떠한 변혁이 또 어떠한 정책이 어떠한 이론 또는 설교가 이 저주스러운 인류의 본성을 근절할 수 있을 것인가. 그것은 모두 효험이 없다. [……] 문명은 원래 허위이다. [……] 자연은 [……] 네로 황제보다 잔인, 냉혹하다. [……] 나는 신에게 등을 돌린다. 그리하여 한없이 반역하는 것이다. 복수하는 것이다. [……] 가장 추악하고 어리석은 모든 인류여! 나는 한없이 너희들을 저주한다.[16] 그리고 영원히 반역하고 복수한다. 그리고 너희들 존재와 함께 너희들에게 속한 모든 것을 한없이 멸망시키고 말살할 것이다. 이것이 또 잔인, 냉혹한 자연의 대법칙에 대한 반역이며 복수임과 동시에, 그 악마와 같은 신에 대한 반역이며 복수인 것이다. 내 존재는 단지 이를 위한 존재일 뿐이다. 달리 존재의 의미는 없다.”
3) 파괴 혹은 허무의 미학 추구[17]
“독은 어디까지나 독으로 제거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다. 그 때문에 나는 너희들의 무기를 그대로 역용(逆用)하고자 한다. 멸하라! 모든 것을 멸하라! 불을 붙여라! 폭탄을 날려라! 독을 퍼뜨려라! 기요틴(guillotine)을 설치하라! 정부에, 의회에, 감옥에, 공장에, 인간 시장에, 사원에, 교회에, 학교에, 마을에, 거리에 [……] 모든 것을 멸할 것이다. 붉은 피로써 가장 추악하고 어리석은 인류에 의해 더럽혀진 세계를 깨끗이 씻을 것이다. 그리고 나 자신도 죽어갈 것이다. 거기에 참된 자유가 있고 평등이 있고, 평화가 있다. 참으로 선량하고 아름다운 허무의 세계가 있는 것이다. 아! 가장 추악하고 어리석은 모든 인류여! 모든 죄악의 원천이여! 바라건대, 너희들 자신의 멸망을 위해 행복 있으라, 허무를 위해 축복 있으라!”
이상과 같이 만물 절멸을 외치는 박열의 허무주의적 사상은 얼핏 보기에는 파괴를 위한 파괴나 심연으로 빠지는 허무에 대한 찬양으로 오해받을 여지가 적지않다. 그러나 그의 허무주의 선언을 덮고 있는 일종의 과장된 수사와 강렬한 메타포를 벗겨내고 보면, 우리는 긍정적‧건설적 요소도 발견할 수 있다. 1924년 5월경 박열의 법정 진술은 개인적 희생을 통하여 사회를 구원하겠다는 살신성인(殺身成仁)의 태도를 분명히 보여준다. “나의 계획을 골똘히 생각해보면, 소극으로는 나 하나의 생명을 부인하는 것이고, 적극적으로는 지상에 있는 모든 권력의 타도가 궁극의 목적이며, 또 이 계획의 참뜻이다.”(김삼웅, 1996: 153)
박열의 허무주의는 바쿠닌이 역설한 “창조적 파괴의 정신(passion for destruction is also a creative passion!”)을 계승하는 것이다. 마치 니체(Friedrich Nietzsche)의 초인처럼 박열도 충만된 자아의 힘으로써 현실을 거부하고, 그 현실의 심연에 자리 잡고 있는 허무주의 자체를 극복하려 했던 것이 아닐까? 혹은 하이데거(Heidegger, 2000)의 혜안을 빌려 20세기에는 이미 허무주의가 “인간의 정상적 상태normal state of man”로 확산됨을 예언한 것은 아닐까? 한 가지 확실한 사실은 박열은 결코 현실을 도피하는 은둔적, 퇴폐적 허무주의의 길은 가지 않았으며, 오히려 현실과 대면하는 저항적 허무주의를 선택하였다.
**** 3. 스페인혁명과 인민전선의 영향
서구의 아나키스트 운동사에서 스페인혁명 과정에서 태동한 인민전선은 한국의 아나키스트 독립혁명운동에도 큰 영향을 미쳐 좌우합작을 통한 혁명세력의 대동단결과 함께 임정참여라는 역사적 전기를 만든다. 간략히 인민전선의 형성 및 진행과정을 살펴보자.
주지하듯 인민전선은 1930년대 중/후반 당대의 저명한 지성인 영국의 조지 오웰, 프랑스의 앙드레 말로, 미국의 어니스트 헤밍웨이를 비롯하여 세계의 수많은 지식인과 젊은이들이 자유의 가치를 수호하고자 참여했던 스페인혁명 혹은 스페인내전 동안 형성되었다. 1936년 2월 총선에서 자유주의, 사회주의, 공산주의, 아나키즘 세력이 연합한 인민전선이 승리하면서 인민전선 공화정부가 수립되었다. 그러나 다섯 달 후 프랑코를 위시한 군부세력이 공화정부 타도의 기치를 내걸고 반란을 일으키는 것이 바로 스페인 내전의 시작이다. 프랑코가 영도한 ‘국민진영’에는 파시즘 세력인 팔랑헤당과 보수적 가톨릭교회, 자본가·지주계급이 합세하였다. 인민전선의 ‘공화진영’에는 자유주의, 사회주의 및 공산주의 그리고 노동조합을 토대로 한 아나키스트 세력이 함께 결집하였다.
국제적으로는 독일의 히틀러와 이탈리아 무솔리니가 프랑코의 ‘국민진영’을 적극적으로 지원한 반면, 공산주의 확산을 우려한 미국, 영국 그리고 프랑스는 불개입 노선을 취하며, 참으로 수치스럽게도, ‘공화정부’를 지원하지 않았다. 내전 초기 눈치를 살피던 소련의 스탈린은 최소한의 지원을 약속하지만, 결국에는 인민전선을 배반하는 분열행위를 일으킨다. 1937년 초 스탈린의 지령에 따라서 스페인 공산주의자들이 권력 장악을 기도하면서 전선 내부에서 분열이 발생하여 수많은 ‘무고한’ 공화군 전사들이 반역자나 스파이로 몰려 살해됐다. 공산주의자들의 야만적 행위가 속출하였다. 이에 아나키스트들은 격렬히 저항하였으나, 결국 상호분란인 ‘내전 속의 내전’을 치르면서 인민전선은 몰락하기 시작한다. 애통하게도, 아나키스트 세력의 거점이던 카탈루냐 바르셀로나에서 발생한 공산주의자와 아나키스트세력이 벌인 시가전인 비극의 ‘5월 사건’과 함께 아나키스트세력은 패배 한다. 여기에 저명한 아나키스트 이론가 아바드 데 산티안은 “네그린이 공산주의자들을 데리고 승리하든, 프랑코가 이탈리아·독일인을 데리고 승리하든 우리에게 그 결과는 다를 바 없다”고 처절한 심정으로 한탄하였다.[18]
한편 조선의 아나키스트들도 반파시스트세력으로서 인민전선과 관련된 소식, 특히 초기의 성공적 결성과 성과를 접하면서 연합전선의 필요성에 크게 고무되었다. 특히 코민테른의 지시가 아니라 독립혁명운동 제 세력들 간의 자발적이고 주체적인 합작운동을 주도한다는 사명감과 시대적 책무를 절감하였을 것이다. 아울러 현시점에서 성찰해 볼 때, 스페인 인민전선의 경험은 일찍이 아나키스트 바쿠닌과 아나키스트세력이 맑스와 공산주의세력의 획책에 의해서 제2 인터내셔날에서 추방된 것 과 유사한 사례를 기억하게 만든다. 더 거슬러 올라가면, 그러
한 결별 혹은 배신의 사례는 슈티르너와 엥겔스 및 맑스와의 관계나 푸르동과 맑스의 관계처럼 처음에는 상호이해를 이루다가 어느 시점에서는 단절되던 불행한 결말과 연결된다. 다행히 조선아나키스트들은 이 사실을 깨우쳤던지 코민테른의 직접적 영향 하에 있던 공산주의세력과는 합작을 도모하지 않았고, 그 결과 합작전선은 결국 성공하였다.
사실 서구의 아나키스트들은 이미 볼세비키혁명 직후부터 소련에서 전개된 반동적-독재적 지향성을 간파하여 볼세비즘이나 스탈린주의와는 일찌감치 결별하고 적대적 비판적 입장을 견지한다. 조선에서도 특히 만주지역에서 아나키스트들은 공산주의세력과도 대립·투쟁해야 하는 이중전선을 취하지 않을 수 없었다. 스탈린이 자행한 조선인들에 대한 강제이주 명령과 흑하 참변사건은 결코 쉽게 잊혀 져서는 안 될 것이다.
*** Ⅴ. 혁명운동으로서 아나키스트 독립운동
**** 1. 아나키스트 혁명운동의 특징
한국 독립운동의 성격은 여러 가지 관점(예컨대, 반제국주의/반식민지운동, 국권회복 등)에서 접근할 수 있다. 나는 혁명운동으로서 독립운동을 파악한다. 이 접근은 특히 독립운동과 아나키즘의 관련성을 이해하는데 매우 적합하다.
혁명운동으로서 독립운동의 핵심적 내용은 민족혁명과 사회혁명으로 구분할 수 있다. 여기서 주의해야 할 점은 같은 혁명적 독립운동을 추구하였지만 맑스-레닌주의를 신봉하던 공산주의자들과 아나키스트들의 혁명운동은 공유점도 있지만 그 기본적 가치와 목표 그리고 수단이 매우 상이하다는 것이다. 공산주의자들도 민족혁명을 주장하지만 그들의 민족해방전선이라는 것은 일차적으로 민족해방에 관심을 가질 뿐, 근원적으로는 계급해방을 추구하는 것이었다. 계급해방이라는 목표도 좋은 것이지만, 산업노동자가 주축이 되는 프로레타리아 계급이 제대로 형성되지 않아 혁명적 계급의식의 성숙할 여지가 없던 당시의 현실에서 그것은 이론적으로 모순되는 것이다. 공산주의자들의 민족혁명이란 결국 전 민족, 전 민중의 해방이 아니라, 오직 프로레타리아 계급(독재)를 위한 해방이었다.
사회혁명의 경우도 상이하다. 공산주의자들은 사회혁명에 우선적으로 선행하여 일정기간 프로레타리아 독재가 실시될 수 있는 공산당 지배의 정치혁명에 집중한다. 말이 프로레타리아가 주도하는 혁명적 독재이지, 실제로는 소수의 전문 공산당 관료가 지배하는 전체주의적 독재체제를 구축하는 것이었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아나키스트들은 그야말로 신분/성/계급의 구별 없이 전 민중, 전 민족이 강압적 식민지지배체제의 억압과 구속으로부터 해방되는 민족혁명을 추구하였다. 아나키스트는 기존의 (폭력적-억압적) 국가체제를 유지하는 정치혁명보다는 명실상부하게 개인들이 자유롭고 평등한 삶을 유지할 수 있는 사회혁명을 더욱 중시한다. 다시 말해, 정치지도자나 지배 권력만 교체하는 “눈 가리고 아웅"하는 식의 정치혁명이 아니라, 모든 강압적 권력을 견제하고, 축소하면서 개인들의 자유권 혹은 인권을 확대하는 사회혁명을 요구하는 것이다. 정치혁명은 사회혁명을 위해서 필요하고, 사회혁명을 위해 봉사해야만 하고, 사회혁명에 의해서 대체되어야 하는 것이다. 정치 권력자를 위한 정치혁명이 아니라 각각의 개인이 권력을 지니도록 하는 정치혁명이 필요한 것이다. 역사를 보라. 기존의 많은 혁명들은, 사회혁명을 바란 민중의 기대를 저버리고, 권력자만 교체하는 (반동적) 정치혁명으로 끝나지 않았던가? 혁명의 지도자가 독재자가 되고, 혁명집단이란 자들이 부정부패를 저지르는 지배 권력층이 된 사례는 부지기수이다.
나아가 혁명의 수단/방략에도 아나키스트와 공산주의는 의미심장한 큰 차이를 보인다. 아나키스트와 공산주의자들은 모두 무력투쟁을 지지하고 선호하였다. 그러나 공산주의자들은 강력한 중앙집권적 조직체계에 따라서 일사불란하게 상명하달을 수행하는 집단이었다면, 아나키스트들은 그야말로 각 개인의 자발적 의사를 토대로 조직하고, 실행하는 집단이었다. 공산주의자들은 지도부와 행동그룹으로 나뉘어 행동대원들만 현장 투쟁에 동원되었지만, 아나키스트의 경우에는 상하의 구별 없이 모두가 동등한 자격으로 결정에 참여하고 행동일선에 나갔다.
여기서, 특히 강조하고 싶은 사실이 있다. 거의 전 독립운동 기간에 걸쳐 (아울러 해방 이후에도 중소분쟁이 격화되기 전까지 상당기간 동안) 전 세계의 모든 공산주의자들은 소련과 그 산하 국제공산주의운동을 지배하던 무소불위의 막강한 세력이었던 코민테른의 철저한 지배와 감시체계 그리고 재정적-군사적 지원을 받으면서 활동할 수밖에 없었다. 이 외세 의존적이고, 사대주의적인 독립운동방식은 당시의 열악한 독립운동 상황을 고려하면, 일면 긍정적으로 이해할 수도 있지만, 그들의 활동이 일정한 틀 내의 엄청난 제약 속에서 비자발적으로 이루어졌다는 사실은 명심할 필요가 있다. 이와는 참으로 대조적이게도, 아나키스트들은 간헐적으로 중국과의 연대전선을 펼치고, 중국(장개석과 모택동 모두)으로부터 지원과 협조를 얻었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주체적이고 자율적인 것이었다. 아나키스트들은 시종 일관 반외세 의존적, 반사대주의적 입장에서 주체적 혁명운동을 전개하였다. 사정이 이럴진대, 아나키스트들은 고립무원의 상태에서 극도의 빈곤과 결핍 그리고 불안정과 위험한 악조건을 스스로 감내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구체적 사례를 들어보자. 중국에서의 두 차례 국공합작과 결렬, 한국의 신간회 조직/해체와 좌파의 참여 등에는 코민테른의 지시가 절대적으로 혹은 상당 부분작용하였다. 특히 해방직후 좌파세력이 하루 밤 사이에 반탁에서 신탁으로 돌연히 급선회한 배후에는 소련의 일방적 지시가 있었다. 소련의 이와 같은 후발 공산주의 혁명운동의 철저한 지배는 전 세계적으로 걸쳐 1960년대까지 지속되었다. 2차 세계대전 후 동구권 공산주의 지도자들을 소련의 꼭두각시라고 부르지 않았던가? 이후 티토의 자주노선, 중소분쟁과 모택동의 독립노선 및 김일성의
주체사상, 카스트로의 미소대립 활용 등이 소련의 헤게모니에 균열을 초래하기 시작하였다.
아나키스트들은 좌 소련, 우 미국이라는 강대국의 틈바구니에서 좌고우면하지 않고 독립운동의 독자노선을 추구하고자 노력했다. 해방 이후에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지난 시절의 역사는 슬프게도 이념적-정치적 제3세력에게는 기회를 주지않았다. 그렇지만, 그 덕분에 아나키스트들은 권력에 오염되지 않고, 지금까지 순수성을 유지하면서 혁명정신을 제대로 담지하고 있는지 모른다.
**** 2. 아나키스트 혁명적 독립운동의 전개
그렇다면 아나키스트 독립혁명운동은 구체적으로 어떻게 전개되었을까?
1) 혁명운동으로서 3·1운동의 영향
먼저 한국독립운동사에서 혁명운동으로서 3·1운동이 갖는 의미를 아나키즘과 관련하여 간략히 살펴보자. 3·1운동은 전 세계에 유례가 없던 악랄한 식민지지 배체제하의 거국적인 선구적 민족해방의 혁명운동이었다. 특히 그 혁명운동의 수단이 평화주의에 입각한 만세운동이었다는 점 또한 큰 의미를 갖는다. 여기서 (잘 알려진 윌슨의 민족자결주의 외에) 일찍이 안중근 장군이 선언한 동양평화론과 당시 중국과 일본에 열풍을 일으킨 톨스토이의 아나키스트적 반폭력 평화주의의 영향력도 지적해 두고 싶다. 반제국주의, 반식민주의, 민족해방과 세계평화를 목표로 하는 혁명운동이라면 그 수단 또한 평화적 방법이어야 하지 않겠는가? 아나키스트 직접행동은 예외적 상황을 제외하고는 항시 목적-수단의 합치를 요구한다. 오직 이 점에서 만이라도 3·1운동의 아나키스트적 차원을 발견해 보려고 한다면, 너무 조급하고 편협한 강조가 될까?
그러나 3·1운동의 (수단과 국제적 홍보 차원의) 성공과 (무수한 인명피해에도 불구하고 식민체제 변경이라는 목표달성의) 실패, 혹은 성공적 실패는 조선 아나키즘의 성장과 아나키스트 세력의 결집과 독자적 노선의 형성에 결정적 전기를 마련한다. 3·1운동 직후 대부분의 독립운동가들이 운동역량의 결집과 운동노선의 정립을 위해서 임시정부수립에 힘을 쏟았다. 나라를 홀랑 뺏긴 신세에 그래도 이름이나마 (임시)정부를 수립한다는 자부심을 충분히 이해해야 한다. 그러나 정부라는 관료제적 조직이 지닌 온갖 문제점(예컨대, 중앙집권화, 권력투쟁과 파벌화, 각종 분열과 갈등, 재정확보 문제 등)들을 예상한다면, 참으로 심사숙고하며 접근했어야 할 일이다. 이미 세 곳에서나 임시정부의 기치를 들었고, 그 추세와 귀추를 민감하게 지켜보는 국내외 세력들이 있었으니!
나는 3·1운동과 함께 조선아나키즘과 조선아나키스트가 본격적으로 생성되기 시작했다고 판단한다. 3·1운동 이전에도 아나키즘은 이미 중국과 일본에 널리 소개되어, 아나키스트 세력이 집결되고 있었다. 신사상과 신문물을 엄청나게 학습했던 이회영이나 신채호 등은 아나키즘을 충분히 숙지하고 있었을 것이다. 특히, 이회영과 신채호가 활동하던 당시의 (중국, 특히) 북경에는 북경대학을 중심으로 아나키즘이 맹위를 떨치고 있었다.[19] 중국공산당의 창립멤버나 지도자들 가운데서도 다수(리다이조, 마오쩌둥, 진덕수 등)가 아나키즘에 매료되었고, 중국의 대학자인 강유위, 장병린, 유사배 또한 아나키스트로서의 지향성을 뚜렷이 드러내고 있었다. 천성적으로 그리고 일찍부터 부자유나 억압을 거부한 이회영이나 신채호도 아나키즘의 장단점과 가능성 및 한계 등을 충분히 숙지하였을 것이다. 이미 아나키즘이 독립운동의 핵심적인 혁명적 방략이자 동시에 독립 후의 신사회 건설에 적합한 이념적 목표가 될 수 있을 것이라고 판단했을 것이다.
이와 같은 추론을 가능하게 만드는 사실은, 이 시기 이미 아나키스트의 길을 걷기로 결심한 유자명이 이회영, 신채호와 의기투합하여 같이 지내기도 하였다는점이다. 특히 유자명은 독립운동기 최고의 아나키스트 이론가로 공인될 만큼 그 능력이 걸출하였으므로 선구적-천성적 아나키스트 이회영이나 대학자 신채호와 함께 혁명적 독립운동과 관련된 이념적 논의를 주고 받으면서 각자는 아나키스트의 길을 걷기로 작정하였을 것이다. 그 직접적인 현실적 촉매작용은 평화적 수단을 사용한 3·1운동의 실패에 대한 반성, 전면적 무력투쟁의 필요성에도 불구하고 군사조직의 가능성 미비, 안중근 대장에 의한 암살이나 파괴와 같은 아나키스트적 의열투쟁의 엄청난 효과, 임시정부라는 권력기구의 등장과 이를 둘러싼 권력투쟁적 반목과 분열에 대한 실망, 소련 볼세비키 혁명의 변질과 공산주의 계열 민족주의 좌파노선에 대한 의구심 그리고 외교론이나 준비론을 외치는 민족주의 우파노선에 대한 불신이 이회영이나 신채호를 아나키즘에 더욱 가깝게 인도하고, 아나키스트의 길로 더욱 깊숙이 나아가게 만들었을 것이다.
바로 이와 같은 정황과 맥락이 이해되어야만 이회영의 1923년 아나키스트 선언을 제대로 이해 할 수 있다.즉, 이회영이 “나는 본래 벼슬을 원하지 않는 사람이며, 불평등한 신분제도도 본래 반대하던 사람이다. 독립을 하자는 것도 나 개인의 영화를 위한 욕심에서가 아니라 전체 민족이 평등하고 자유로운 행복한 생활을 누릴 수 있기 위해서이다. 그 목적을 달성할 수 있는 알맞은 제도와 조직의 구조를 생각해야 했고, 그 결과 얻어진 결론이 이것(아나키즘: 필자 주)이니, 나의 이 사상은 일관된 것이며 나의 독립운동의 방향이라고 믿는다. 그러므로 나의 생각이 무정부주의와 공통된다고 하여 나에게 사상적 전환을 했다는 의견에는 수긍할 수 없다. 나는 사심 없이 공정한 민족적 양심을 지닌 사람이라면 당연히 나와 같은 주장을 가질 것이라 생각한다. 그것을 무정부주의라고 한다면 우리나라의 독립운동은 무정부주의운동이어야 할 것이다”(이정규·이관직, 1985:17).
이회영의 혁명사상과 이론, 즉, 아나키즘이 “젊은 시절부터 쌓아온 경륜과 독립운동의 경험이 어우러져 생겨난 것”이라는 지적(장석홍, 2017: 22)에 나도 동의한다. 그러나 “우당은 사상적 차원이 아니라 방략적 차원에서 아나키즘을 받아들였던 것”이라는 예전부터 계속 제기되는 주장에는 동의하지 않는다. 이런 주장은 아나키즘을 부정적으로 그리고 매우 좁은 의미로만 해석한 결과이다. 최근 이회영의 아나키즘을 대동사상, 평화주의, 자유주의 등과의 연관 속에서 폭 넓게 이해하려는 연구들이 제시하듯 동아시아의 아나키즘은 이 모든 이념들과 선택적 친화력(selective affinity)을 가지면서 함께 공감·공명한다. 구체적으로 반론을 펴자면, 목표와 방략/수단을 이분법적으로 분리하는 것은 아나키즘의 원칙에 맞지 않는다. 거듭 강조하지만, 아나키즘의 암살·파괴의 혁명적 의열적 방략은 자유·평화·평등사회를 구현하기 위한 것이다. 혁명적 방략 없이 어찌 혁명적 목표가 이루어지겠는가? 방략과 목표는 동일 선상에서 추구되는 동일 합체이다. 이회영의 아나키즘은 이와 동시에 공동체를 건설하고, 자유연합의 조직을 운영하는 목표-수단 일치의 길도 실행하였다.
2) 아나키스트 혁명적 독립사상(1) : 조선독립혁명선언
아나키즘이 조선의 혁명적 독립사상에 가장 뚜렷하게 그 흔적을 남긴 것은 바로 조선혁명선언이다. 그 내용과 성격에 아나키즘이 강력하게 반영되었다는 사실 은 이미 널리 공인되었다. 신채호가 이 선언을 작성하면서 상호 깊은 친분을 쌓은 최고 아나키스트 이론가 류자명과 함께 지냈다는 사실에 다시 주목하고 싶다. 의열단의 김원봉은 이미 아나키스트로서 입지를 세운 류자명을 방문하여 입단을 권유하였고, 류자명은 1921년부터 정식으로 입단하여 아나키스트적 기획과 실천을 주도한다. 적어도 의열단이 1920년대 중반 이후 공산주의 세력에 의해서
분열을 겪고, 탈 아나키스트 노선으로 방향전환을 하기 전까지 실질적으로 의열단을 명실상부하게 “의열 투쟁의 의열단답게” 이끈 핵심인물이 류자명이다. 그러나 류자명은 끝까지 의열단원의 신분을 공식적으로 버리지 않고, 계속 유지하면서 나홀로 아나키스트적 활동을 전개하는 초지일관 신념의 아나키스트였다. 나는 초기 아나키스트노선의 의열단이야말로 초심에 충실한 진정한 의미의 의열단이라고 간주한다. 둑립운동사에서 우리가 의열단에 주목하고 칭송하고 존경하는 것은 그것이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아나키스트적 암살과 파괴활동을 맹렬히 전개하여 정의를 취하고자 하였기 때문이다. 아나키즘이 빠진 후기 의열단을 두고 선명성이나 치열성이 예전 같지 못했다고 평한다면 아나키스트의 아전인수가 될까?
조선혁명선언은 3·1운동의 독립선언문 중의 행동강령 [約法三章]과 비교할 때, 그 혁명적 성격이 더욱 뚜렷이 드러난다(무정부주의운동사편찬위원회, 1978:144~148). 삼일운동은 “정말 선혈을 산야에 뿌리는 처참한 항쟁이었다. 반면 일인의 인명 재산에는 털끝만한 손실도 없었다. 이러한 것이 약법삼장의 결과였다. 전국적 규모의 거족적 항쟁이었고, 전세계 피압박민족 투쟁사에 빛나는 한 페이지를 장식은 했지만, 강도 일본의 총검과 군화에 짓밟혀 이 운동은 단시일 내에 물거품처럼 꺼지고 말았다.” 민중을 위한 민중혁명 그리고 민중자신에 의한 민중직접혁명을 주창한 조선혁명선언은 민중을 혁명의 대본영으로 간주하면서 암살, 파괴, 폭동의 폭력을 그 혁명의 유일한 무기로 삼는다. 동서고금을 통털어 이처럼 강권에 맞서 당당하고도 치열하게 투쟁할 것을 요구하는 선언은 없으리다. 투철한 아나키즘의 정신을 가진 아나키스트가 아니라면 누가 이런 천하의 대문장을 만들겠는가?
따라서 조선혁명선언은 혁명사상인 아나키즘이 혁명운동으로서 조선독립운동을 공개적으로 규정한 최고최대의 걸작이 아닐 수 없다. 여기에는 반론의 여지가 없다. 물론 조선혁명선언에는 민족주의 혹은 민족혁명이라는 대의 또한 녹아들어 있다. 그러나 왜 위대한 신채호가 민족이라는 말보다는 민중이라는 말을 조선혁명선언에서 사용했을까를 깊이 숙고해 본다면 신채호의 아나키스트적 이념적 성숙/전환 과정을 읽을 수 있다. 위대한 민족주의자 신채호는 본인이 애지중지 갈고 닦으며 가슴 깊이 품어왔던 민족주의를 당면한 엄혹한 현실과 다가올 새로운 사회에 걸맞도록 성숙시키고자 아나키즘을 선택한 것이다. 그러므로 신채호로부터 아나키즘과 민족주의를 서로 대립되거나 배타적인 이념으로 양자 구분하거나 양자택일적 논리로 접근하는 것은 적합하지 못하다.
***** 3) 아나키스트 혁명적 독립사상(2): 허무당선언
1926년 1월 5일 (동아일보에 의하면) 허무당선언이란 문건이 서울 시내에 배포된다. 사건의 주인공은 윤우열인데, 그는 “1923년 이래 아나키즘운동에 가담하여 서울과 대구를 왕래하면서 동지를 규합하여 직접행동을 추구하였다(무정부주의운동사편찬위원회, 195-197). 허무당 선언은 조선혁명선언의 기조를 충실히 따르고 있다. 그 내용을 일부 소개한다.
“혁명을 앞에 둔 조선은 불안과 공포로 신음하고 있는 이 때를 당하여 퍽파 방화 총살의 직접행동을 주장하는 허무당은 분기하였다.....조선은.....최후의 비참한 절정에 서 있다.....이런 전율할 현상을 타파치 못하면 조선은 영원히 멸망할 것이다.....이 전율할 광경을 그대로 묵과할 수는 없다. 혁명의 봉화를 점하자.....이 전율할 광경을 파괴하는 방법은 직접행동이 있을 뿐 혁명은 결코 언어와 문자만으로 되는 것은 아니다. 유혈과 전사의 각오가 없이는 안된다.....허무당의 주장을 반대하는 자는 민중의 적이다.....허무당만세! 조선혁명만세!”
여기서 허무당선언 직후 1927년 국내에서 결성된 신간회 활동과 아나키스트들의 활동을 대비적으로 검토해 보자. 신간회는 결성되기 이전에 이미 정우회선언(1926년 4월) 등을 통한 예비 움직임의 기반을 갖는다. 좌우합작의 민족협동전선으로서 독립운동사에서 큰 의미를 지닌 것으로 부각되고 있는 신간회에 아나키스트들은 참여하지 않았을 뿐 아니라 적대적 비판의 입장을 취했다. 여러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신간회의 비무장투쟁노선의 타협주의적 혹은 합법적 독립운동을 아나키스트들은 결코 인정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민족주의자들은 부르주아적 타성을 버리지 못하고, 좌파는 코민테른의 지시를 받으면서 중앙집권적 프로레타리아 독재체제를 지향한다고 판단하였기 때문이다.
사실, 1927년 신간회 창립 이전부터 아나키스트들은 공산주의 진영에 대한 비판을 전개했다. 그 대표적인 사례의 하나가 바로 문학계에서의 ‘아나-볼’ 논쟁이다. 1925년 공산주의 계열의 문인들이 조선프롤레타리아예술가동맹(카프)을 결성하여 계급운동으로서의 문학’을 강조하기 시작하자, 김화산, 이향, 권구형 등의 아나키스트 문인들이 즉각 반론을 펼친다. 이에 임화 등의 카프 지도부는 “대중에게 부르주아 이데올로기를 주입시키고자 하는 예술파적 소시민”이라며 카프에서 아나키즘 계열 문인들을 모두 제거한다. 이 문학상의 논쟁은 자연스럽게 아나키스트와 공산주의자 간의 이념적 대립을 가속화 시켰다.
특히 오늘날에도 긍정적 평가를 받는 공산주의자와 민족주의 간의 연합 단체인 신간회가 결성되자 아나키스트들은 강도 높은 비판을 퍼붓는다. 그러나 당대의 아나키스트들은 좌우진영 모두를 겨냥하여 비판한다. 한편으로 사회진화론에 따른 계급적 불평등을 인정하고 지배권력을 추구하는 민족주의 세력을 인정하지 않고, 다른 한편으로는 중앙집중화된 프로레타리아 독재체제로서 볼셰비키식 정권을 추구하는 공산주의 세력도 진정한 혁명세력이 아니라고 비판했다. 구체적으로, 1927년 12월 23일 신간회 평양지부를 결성할 목적으로 공산주의자들이 준비 작업을 하자 아나키스트들은 신간회에 맞서 12월 22일 관서흑우회 창립대회를 개최하고, 아나키스트 잡지 「흑색전선」을 소개하고, 평양양화직공조합 등의 노동조합을 조직하면서 신간회에 대해서도 강도 높은 비판을 계속하였다. 이들은 공산주의 세력을 “적색 개량주의”라고 부르고 민족주의자와 공산주의자 간의 권력 다툼의 제물이 되는 민중을 “부처님 앞 고기”로 표현하는 풍자만화를 그리기도 했다. 1929년에는 자꾸만 커져가는 볼셰비키 진영을 경계하기 위해 전국적인 단일조직으로서 조선공산무정부주의자연맹을 결성하면서, “현재의 국가제도를 폐지하고 코뮌을 기초로 하는 자유연합적 사회제도의 건설”, “사유재산제도의 폐지”, “전 인류의 자유, 평등, 우애의 사회를 건설”하자는 결의문을 채택한다. 1928년에는 흑우회의 아나키스트들(원심창, 김병운, 이시우, 하경상, 한하연, 양병기, 최복선 등)이 신간회 동경지부 사무소에서 춘계운동회 개최를 비민족적으로 태평스럽게 준비하던 좌우의 유학생들을 습격하기도 하였다(무정부주의운동사편찬위원회, 1978: 230).
4) 아나키스트 혁명적 독립사상(3): 남화한인청년연맹 선언
1930년 4월 아나키스트들이 상해에서 조직한 남화한인청년연맹 또한 [조선혁명선언]의 대의를 따라서 혁명적 의열투쟁의 찬연한 불꽃을 일으키면서 민중직접혁명을 추구하였다. 이를 기반으로 국제적 연대조직인 항일구국연맹과 그 산하기구로 혁명적 수단을 동원하여 일체의 권력을 배격하는 흑색공포단이라는 행동대를 둔다. 남화연맹에는 중국의 아나키스트들 뿐 아니라 일본과 국내에서 맹활약하던 아나키스트 투사들, 예컨대,원심창, 나월환, 이하유, 박기성, 이현근 등이 대거 참여하였다. 그 선언문에서 “일본제국주의의 철쇄를 탈출하는 우리는 민중자신의 손으로 진실한 자유와 평등과 우애에 기초한 신사회를 건설해야 한다. 민중의 진실한 자유를 탈환하기 위해서 싸우는 형제자매들이여”라고 외친다. 민중의 직접행동으로 자유를 획득하고자 하였다. 아울러 그 규약에서도 “본연맹은 강령에 의해 사회혁명을 수행할 것을 목적”으로 한다고 명시한다. 남화한인청년연맹은 1937년 7월 7일 중일전쟁이 발발하자 조직을 재정비할 필요성을 느끼고 조직의 명칭을 조선혁명자연맹이라고 개칭한다. 이 명칭 변경에서 “혁명“이라는 말이 전면에 등장하는 것을 보더라도 아나키스트들의 혁명적 독립운동 정신은 역력하다.
아래의 강령과 규약 그리고 선언문을 통해서 자유를 강조하는 아나키스트 혁명사상을 인식해 보자. 이들의 전문을 그대로 길게 인용하는 이유는 자유 우선의 혁명적 아카키즘, 자유 중심의 혁명적 아나키스트라는 사실을 분명하게 드러내어 강조하기 위한 것이다.[20]
[강 령]
1. 우리들의 모든 조직은 자유연합의 원리에 기초함.
2. 일체의 정치적 행동과 노동조합지상운동을 부인함.
3. 사유재산제도를 부인함.
4. 위(僞) 도덕적 종교와 가족제도를 부인함.
5. 우리들은 절대 자유 평등의 이상적 새로운 사회를 건설함.
[규 약]
1. 본 연맹은 강령에 의해 사회혁명을 수행할 목적으로 함.
2. 본 연맹은 강령의 목적을 수행하기 위하여 연맹 전체가 승인하는 모든 방법을 채용하고, 다만 강령에 저촉 안 되는 본 연맹 각 개인의 자유 발의 및 자유합의에 의한 행동은 설령 본 연맹에 직접 관여 안 되는 것일지라도 그것에 대해서는 하등의 간섭을 안 한다.
3. 본 연맹은 자유의지에 의하여 강령에 찬동하고 전 맹원의 승인을 얻은 남녀로서 조직함.
4. 본 연맹 일체의 비용은 맹원이 부담함.
5. 본 연맹의 집회는 년회, 월회, 임시회로 하고, 다만 소집은 서기부에서 담당함.
6. 본 연맹의 사무를 처리하기 위하여 서기부를 둠. 단 맹원 전체의 호선에 의해서 선거한 서기 약간인을 두고 그 임기는 각 1년으로 한다.
7. 연맹원으로서 강령을 어기고 규약을 파괴하는 행동이 있을 때는 전 맹원의 결의를 거쳐 제명함.
8. 연맹원은 자유로이 탈퇴할 수 있음.
9. 연맹은 회합시 출석자 전체가 이미 승인할 때에 한해서 결석할 수 있다.
10. 본 규약은 매년 대회에 있어서 토의하여 만장일치로 통과된 수정안으로부터 정정(訂正)함을 얻음. (주석 17)
[선언]
친애하는 조선민족 여러분! 우리 조선이 일본제국주의의 강압으로 약탈당한 이래 우리 2천 3백만은 자유의 빛을 잃고 기아와 모욕으로 억눌려 날로 멸망의 구렁에 떨어져 가고 있다. 우리의 부모는 비운에 울고, 우리의 자녀들은 굶주림으로 울부짖고 있다. 그렇다면 우리의 자유는 영원히 소멸된 것인가? 아니다. 차마 멸망할 수 없어 울부짖는 민중의 소리에 분기하여 일본제국에 용감히도 알몸으로써 선한 수많은 선구자를 우리는 가지고 있다. 민족의 자유와 해방을 위해 제국주의 강권자에 철퇴를 가한 다수의 용사를 우리는 가지고 있다.
제국주의 옹호자인 모든 근대적 무기를 쥐고 있는 저들 일본군대와 적수공권으로 싸웠고, 또한 싸우는 중에 있는 우리의 선봉도 있다.
전 조선의 학생은 어린 학생까지 지금 분기하여 저들에게 선전을 포고하고, 싸우고 있지 않은가. 자유의 함성은 전원에서, 도시에서, 울려 퍼졌다. 학교에서, 공장에서 진동했다. 전 조선의 민중은 자유를 아직껏 망각한 적이 없다. 따라서 자유를 요구하고 독립을 요구한다. 우리는 어디까지나 자유를 요구한다. 우리 전 민중의 자유와 독립을 위해 우리는 최후까지 싸워나가자. 서로 손을 맞잡고 일본제국주의의 아성를 습파하고 다시 자유의 서광이 우리 머리위에 도래하도록 육탄으로 싸우자. 자유의 종은 울린다. 자유의 음성은 들려오고 있다.
그러나 민중 여러분, 형제자매들이여!
우리는 전 민중의 참된 자유를 요구한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 참된 자유를 요구할진대 우리는 참된 평등과 우애를 망각할 수 없다. 혈전으로 탈환한 우리 조선에 일찍이 우리 민중을 여지없이 착취, 압박 하다가 드디어는 일본제국에 이 강토를 송두리채 빼앗겨버린 그 제왕을 다시 떠받들 것인가. 전 민중의 백분의 일도 안되는 자본가 계급에 권력을 위임하여 전 민중을 다시 기아로 몰아넣은 일본 제국주의자로부터 우리의 자유를 탈환할 것인가? 영국의 압박으로부터 벗어나 독립한 소수 자본가가 대다수의 농민과 노동자를 착취하여 우리가 지금 제국주의하에서 받고 있는 미국을 건설하여 우리의 어린 시절을 임금의 철쇄로 결박하고 그 육혼을 소수자 앞에 헌상하게하기 위해 우리는 지금 제국주의 군대와 몸으로써 싸우는 것인가.?
또한 농민/노동자만의 당이니 안심할 수 있다고 자칭하여 당의 독재를 실행하면서 소수위원 또는 간부의 권력투쟁에 겨를이 없고 농민/노동자를 그들의 노예로서 전 민중에게 제국주의 이상의 강압과 절대 부자유를 강요하며, 법률 / 감옥 / 군대 / 사형으로써 그 권력투쟁을 증대시키는 공산러시아와 같은 암담한 국가를 건설하고자 함인가! 제국전제와 지주횡포로부터 민중을 구하고자 민중과 함께 혹은 공장에서 혹은 농촌에서 봉화를 올려 민중의 자유와 평등과 우애를 위해 몸으로써 싸운 수많은 진실한 혁명가, 민중의 벗을 학살, 투옥, 추방하고 감히 독재를 지속하려는 일당의 전제를 위해 우리는 지금 피를 흘려 일본정부의 강권과 최후의 실전을 포고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민중 여러분! 우리는 전 조선인의 자유와 평등과 독립, 우애를 추구하기 위해 궐기했다. 한 사람의 독재 제왕, 소수 자본가의 이익, 일개 당파의 정권을 옹호하기 위해 소학생까지 궐기한 것은 아니다. 일본제국주의의 철쇄를 탈출한 우리들은 민중 자신의 손으로 참된 자유와 평등과 독립, 우애에 근거한 신사회를 건설하지 않으면 안 된다.
민중의 참된 자유를 탈환하기 위해 싸우고자하는 뜻있는 형제자매여! 우리는 우리 전선의 배후에 숨어서 기회를 엿보고 권력을 횡탈하려하는 야심가를 부단히 주의하지 않으면 안 된다. 데모크라시를 주장하면서 정권을 장악하려 하는 자본가 사상 그것에 의해 장래의 대총통을 꿈꾸는 야심가, 하루라도 빨리 제국주의자의 정치기관에서 의원의 자리를 점령하고 현재 우리를 학살, 탄압하고 있는 조직 그대로를 탈취하여 자당이 그 대신 같은 권력을 행사하고자 공공연히 운동을 개시하고 있는 사회민주당, 공산당의 행위를 엄숙하게 배격, 박멸하지 않으면 안된다. 여러분 그들은 이미 우리의 자유해방을 요구하지 않고, 일본 제국주의로부터 탈취해야할 2천 3백만의 자유를 러시아에 팔아넘기려는 장사치이다.
민중 여러분! 전사가 되려는 형제자매여!
우리의 열열 불요한 직접행동이 반드시 머지않은 장래에 자유를 탈환하게 될 것을 우리는 잘 알고 있다. 따라서 이 광명의 기회가 나부끼려는 때를 당하여 우리는 우리 민족의 손으로 조선전토에 참된 자유해방과 평등 독립의 사회를 건설해야 한다. 촌락의 농민이나, 도시의 노동자가 자유연합으로 그것을 유지할 사회를 건설해야 한다. 현대사회의 인류발전의 사회혁명을 수행해야 한다.
여러분! 우리를 모욕 압박하는 저들 제국주의는 그 자국내에서는 자본주의의 형태로 농민과 노동자를 착취하여 기아의 황야로 구축하고 그들의 압박을 받은 민중이 반항하면 현재 우리에게 총구를 들이대고 있는 군대로 동시에 그들을 타살한다. 제국주의의 근본은 자본주의이며, 자본주의의 원천은 사유재산이다. 사유재산제도는 소수의 유산계급이 일하지 않고도 윤택한 생활을 할 수 있다. 따라서 마음껏 착취하기 위한 법률 / 감옥 / 군대를 보유하는 중앙집권정부를 건립하고 그들의 대리자로 하여금 견딜 수 없어 봉기하는 일반민중의 반항을 억누르며 그 제도가 영원히 유지되도록 노력하고 있다. 동시에 그들은 교육기관을 독점하여 사유재산제도가 올바로 나는 것을 어릴 때부터 가르쳐왔다.
따라서 민중은 사유재산을 획득하기 위한 경쟁을 하지 않을 수 없게 되어 이웃과 형제까지고 증오하고 편견과 질투를 품어 싸우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사유재산 그 자체가 있으므로 해서 친애하는 민중과 자매가 육체를 팔게 되고, 돈 있는 사나이는 그것을 멋대로 할 수가 있다. 사유재산이 있으므로 해서 살인을 하게도 되는것이다.
여러분! 사유재산은 실로 만악의 근원이다. 우리가 건설한 신사회에 있어 만약 사유재산을 박멸할 수 없다고 한다면 자유, 평등, 우애란 완전히 허언이 되고 만다. 법률, 감옥, 군대로 짜인 정부를 가진 국가조직은 야심가에게 용이하게 기회를 주는 바 되어 또다시 민중을 암흑의 구렁텅이로 몰아넣게 되는 것이다.
정부조직을 잔존시켰던 프랑스 혁명이나 러시아 혁명은 다같이 유산계급을 유리하게 했거나, 공산당에 이익을 주었을 뿐 민중에게 준 것이 무엇이 있었던가? 오직 기아와 탄압이 있을 뿐이 아니던가? 민중에게 미신을 부식하여 자유발의의 창조력을 박탈하고 지상권신에게 굴복시키므로 그 시대의 권력자의 노예가 되는 일만을
가르친 종교와 위도덕의 힘이 세계 도처에서 볼 수 있는 결혼제도, 가족제도의 계속적인 비애는 여러분의 이미 주지하는 바이다.
우리 조선민중이 조선에 건설할 사회는 이들 사회적 병든 사유재산, 국가정부의 조직 및 위도덕을 완전히 파괴한 후에야 비로소 건설할 수 있는 것이리라. 만물은 누구나가 내 것이라고 주장할 권리는 없다. 각인이 자기의 필요에 응해 취하고 자기의 능력에 따라 일하기의 절대 자유연합사회가 아니면 안 된다. 그렇게 되면 이미 금전의 필요는 없어진다. 농업과 공업을 과학적으로 종합하여 가장 유리하게 생산할 수 있는 농촌의 형식을 취한 도시이자, 도시와 같이 편리한 농촌이 각각 자유로 연합해서 이루어지는 지구상의 예술적 사회가 되지 않으면 안 된다. 각인이 자유의지로써 선택한 사회를 이루고, 또한 자유롭게 일할 수 있는 사회다. 그러므로 지능노동과 근육노동의 구별이 없어지고 각인이 마음껏 그 개성을 발전시킬 수가 있다. 누구도 일하기 싫은 사람이 없게 되는 것이다. 현재의 노동같이 단순한 동일 작업을 평생토록 반복하면서 쓰레기투성이의 공장이나 단조로운 농촌에서 불충분한 음식을 먹으면서 1일 10여시간 중노동을 하지 않을 수 없다면 누구나 싫어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종일 일하고도 처자식은 물론 자신조차도 끼니꺼리가 없으며, 더욱이 그것마저 내일의 실업이 걱정되어 마음 놓을 수 없는 생활을 한대서야 임금제도 아래서의 노동을 누가 좋아할 것인가?
전세계의 농민과 노동자는 이런 생활을 싫어하는 것이다. 정부 관리의 공장에 굳게 묶여있는 공산당 치하의 러시아 노동자가 오늘날 도처에서 동맹파업을 단행하고 또한 그 수가 점점 늘어나고 있는 것은 이 임금제도가 존속하는 데서 나오는 것이다. 우리 민중이 새로이 건설할 사회에 있어서는 화가가 그림을 그릴 때와 같이 조각가가 침식마저도 잊으면서 일하는 것과 같이 노동이 곧 예술이며, 예술이 곧 노동인 것이다. 이러는 데서 비로소 노동이 환희가 되는 것이며, 예술 또한 되살려지는 것이다.
이러한 신사회에 있어서는 종래와 같이 위도덕의 압박을 받아 양친이 임의로 아무 의식없는 소년소녀를 짝 지우는 결혼제도가 당연히 소멸될 것이다.
그들은 한갓 조선민족일 뿐 아니라 지구상의 한 지방인 조선에서 성장한 인류인 것이다. 따라서 타민족이 모든 것을 거절한 것도 아니고 또한 결코 타민족을 침략하여 자민족의 우월함을 과장할 일도 아니다. 그러므로 무장은 원칙상 불필요한 것이다. 그러나 자유/평등의 공동 농촌을 파괴하기 위해 구성된 군대가 세계상에 존
재하는 동안은 우리도 무장을 버릴 수 없다. 다시 말하면 세계가 완전하게 우리와 같은 정신과 조직을 지니게 될 때까지는 상당한 무장이 필요하다. 그러나 우리 농촌이 갖추어야할 무장은 결코 현재 우리를 박해하고 학살하여 소수자의 이익만을 수호하는 상비군은 아니다. 몇 사람의 수령에게 전속하는 노예의 군을 이르는 것은 아니다. 자유공동농촌의 무장은 남녀노소를 막론하고 전민봉기를 이르는 것이다. 장년자는 제1선에 진출하고 노인은 후방에서 일하고, 여자는 간호와 식량 비축을 위해 일하는 전체를 호위하기 위한 상호부조의 방위이다. 이렇게 해서 궐기한 각 농촌의 연합무장이다.
1917년 러시아의 한 지방인 우크라이나의 농민은 이러한 무장을 통해 농민으로부터 자유를 약탈하려는 공산당 적위군의 진압과 독일/오스트리아 연합군의 침략을 방어 격퇴하여 그 지방에 있어서의 농민과 노동자만의 자유공동 조직을 오랫동안 유지시켰었다.
친애하는 민중 여러분! 우리는 하루라도 빨리 일본제국주의를 조선 땅에서 격퇴하고 이러한 신사회를 건설하자! 우리 민중의 불굴의 직접행동에 의해, 전체적 봉기에 의해 일거에 그들을 축출해버리자. 압제하에 부여하는 자치나 참정권을 승인하는 것은 우리 스스로가 우리 자신을 그들에게 팔아넘기는 수작인 것이다.
정치적인 승인을 구하는 자치주의자 제군! 카나다는 지금까지도 영국의 속국이다. 인도인 또한 그것만을 유일의 목표로 한다면 언제 자유가 올 것인가? 자유는 우리의 손으로 탈환해야 한다. 빵을 만드는 이가 아니고서 먹을 수는 없다. 용감한 우리 청년 남녀 제군! 우리 무정부 자유주의자는 이러한 천지를 창조하자고 전 민중에게 제의하여, 함께 싸워 그 길을 개척하기 위해 노력하는 자이다.
만일 여러분이 진정한 해방을 조선민중에게 가져와 주는 것을 갈망한다면 우리와 함께 제국주의자와 기타 일체의 야심가, 원력자의 도배를 지상에서 말살하고자 하는 이 전투에 분연히 참가해야 할 것이다. 압박자의 지위에 있는 자를 모조리 타도하고 무정부자유의 신사회를 건설하기 위해 모이자!
청년아나키스트 기치 아래 모이자!
비록 그 실질적 활동기간이 짧았지만, 남화한인청년연맹이야 말로 일제하 민족독립 혁명운동에서 아나키스트들이 핵심세력이 되어 주도한 가장 빛나는 성과의 하나로 간주하고 싶다. 모든 주요 아나키스트들(특히 이회영, 유자명, 정화암, 원심창, 오면직, 이용준, 백정기, 이달, 김지강, 이강훈, 이규창, 박기성, 김광주,
엄형순 등)이 조직에 관여/참여하였고, 실질적으로 암살운동을 실행하였고, 외국인 아나키스트들과도 연대활동을 전개하였으며, 후일 전시공작대, 조선혁명자연맹을 통하여 임정에 합류하는 초석이었기 때문이다.
5) 아나키스트 혁명적 독립사상(4): 조선혁명자연맹과 임정참여
조선아나키스트들은 급변하는 시대상황(스페인혁명에서 인민전선의 성립 및 중일전쟁의 발생)에 대응하여 남화한인청년연맹은 조직을 개편하여 1937년 류자명을 위원장으로 하는 조선혁명자연맹으로 개칭/재탄생한다. 연맹은 동년 12월 김성숙 등이 조직한 조선민족해방운동자동맹과 함께 조선민족전선연맹을 결성한다. 과거 아나키스트들은 좌우합작을 지향한 신간회를 단호히 비판하였다. 그러나 시대적 요구가 절실해 지면서 아나키스트들은 그야말로 자주정신에 입각하여, 코민테른 추종자 공산주의세력은 배제하면서, 자율적으로 독립운동의 합작과 연대전선을 추구한다. 먼저 동일한 뿌리를 공유하고, 과거 공통의 혁명적 운동성향을 공유했던 좌파계열의 운동단체인 김창숙의 조선민족해방자동맹과 김원봉의 조선민족혁명당과 합작전선을 구축한다.
다음 단계로 보수적 성향을 지녔던 기존 임시정부와의 합작을 시도한다. 초기에는 불신의 긴장감이 돌았으나, 점차 합작운동의 필요성을 절감한 임정 측에서 실질적인 조직과 구성 면에서 대폭 양보하여, (그러나 임시정부라는 명칭은 그대로 유지하면서) 마침내 민족해방운동으로서 항일독립운동의 일사불란한 구심점이 마련되었다.
이를 두고, 아나키스트들이 본령에서 이탈한 것으로 비판하기도 한다. 즉, 무정부와 무국가를 부르짖는 아나키스트들이 정부라는 형태의 기구에 무원칙적으로 참여했다는 것이다. 이에 관해서는 이미 조목조목 반박을 하였지만(김성국, 2007), 여전히 이러한 인식이 일각에서 견지되고 있다는 사실이 안타깝다. 간단히 말하자. 아나키즘에는 본령이란 것이 존재하지도 않았고, 있을 수도 없다. 모든 아나키스트들이 절대적으로 따라야 할 어떤 아나키즘의 원리가 있다면 그것 자체가 비아나키즘적, 반아나키즘적 논리일 뿐이다. 둘째, 동아시아 아나키즘은 서구 아나키즘보다 더 심원한 내용과 지향성을 가진다. 셋째, 조선의 아나키즘은 그야말로 신채호가 정곡을 찔렀듯이, 아나키즘의 조선이 아니라, 조선의 아나키즘이 되어야 한다. 넷째, 식민지 조선이라는 특수한 혁명조건을 무시하는 순정아나키즘의 논리는 공리공담일 뿐이다. 끝으로, 임시정부는, 적어도 아나키스트에게는, 억압과 착취의 권력체제로서 국가/정부가 아니라, 혁명정부이었다.
임정참여 과정에서 드러난 아나키스트들의 자주적인 혁명투쟁을 간략히 소개해 보자. 신채호의 유고를 감안할 때, 아나키스트들은 1936년 초부터 민족전선을 주창하기 시작했다. 1936년 [남화통신] 11월호에서 류자명은 김구의 한국국민당을 대표하는 냉심(冷心)의 글에 대하여 “인민전선운동이 제3 국제의 책동에 의해 진전되고 있는 것처럼 단정하는 것은 마치 3·1운동이 윌슨의 민족자결주의 주장에 의해 일어난 것이라 하는 것과 똑같은 피상론”이라고 반박한다.
1937년 12월 조선민족전선연맹의 기관지 [조선민족전선]의 창간사에서 류자명은 조선민족과 중국민족의 연합전선의 필요성을 강조하면서, “조선인 혁명분자 중 중국의 항전을 자신의 생사관두로 여기지 않는 자는 없다.....조선의 혁명은 일본제국주의의 정치압박과 경제착취의 쌍중 고통으로부터의 해방을 요구하는 혁명이다. 그래서 조선의 혁명진영은 계급을 나누지 않고, 당파를 나누지 않는 전 민족의 단결을 필요로 한다”고 주창한다. 참으로 아나키스트다운 국제주의 선언이다. 계급 차이를 포괄하는 아나키스트 선언!
초기에 임시정부를 대표하는 한국국민당은 중국국민당의 민족전선 촉구와 함께 뒤늦게 동참한다. 그러나 임정측이 자신의 영도 하에 각 단체가 통합되기를 원했지만, 류자명이 그 대표의 일원이었던 연맹측은 각 단체의 연맹, 즉 연합형식의 조직을 원했다. 나는 1942년 아나키스트들이 임시정부에 합류한 것을 두고 임정에 통합흡수된 것처럼 해석하는 입장을 사실의 왜곡이라고 비판한다.
한국독립당, 조선민족혁명당, 조선민족해방동맹, 조선무정부주의자연맹의 4개 당파의 연합선언문을 보면, 좌우가 합심하여 “우리 한국 각 혁명집단 및 재 중국 자유 한국인들은.....한국이 독립국으로 건설되어야 하고, 한민족이 자유민이 되어야 함을 거듭 선포”한다. 자신들을 혁명단체라고 부르고 있다. 1944년 4월 24일의 4개 정파 선언에서도 “이번 임시의회에서 수정한 임시헌장은 우리 건국 이상에 부합할 뿐만 아니라. 현재의 독립운동이 요구하는 방향과도 일치되는 것이다. 그리고 이는 고귀한 혁명적 문헌이다. 동시에 이번의 정부 인선은 국내외의 명망 있는 혁명원로와 각 혁명당의 권위 있는 대표자들로 이루어 졌다”고 혁명가에 의한 혁명적 성취를 자축하였다.
물론 각 정파가 생각한 혁명의 의미와 내용은 다를 수도 있겠지만, 최소한 아나키스트들만큼은 진정한 혁명정신의 담지자였다고 추론한다. 류자명이 임정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지 않고, 항일투쟁의 일선으로 돌아 간 것을 두고도 시비가 있다. 류자명은 후방의 지도부에서 관료와 같은 사무직의 일을 수행하는 체질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의 과거 행적을 보더라도 그는 항시 자유롭게 이동하면서 현장에서 투쟁적으로 활동하는 직접행동의 실행가가 아니었던가? 류자명의 회고록에서도 나타나듯, 그는 이념상의 차이에도 불구하고, 개인적으로 김구 선생을 항상 존경하고 인간적 유대를 지속하였다. 그러므로 류자명의 후반기 소극적 참여는 임정의 비혁명성을 반대하였기 때문이 아니라, 임정 관련 일은 동지 아나키스트 유림이 더 적임자라고 간주하여 자신이 좋아하는 다른 일을 찾은 것으로 이해하는 것이 훨씬 논리적이고, 정확하다. 실제로 유림은 임정 내에서 맹활약하였을 뿐 아니라, 아나키스트의 혁명적 입장을 최대한 관철하고자 노력하였다.
예를 들어보자. 1944년 [임시의정원 회의록]에 기록되어 있는 건국강령개수에 대한 유림의 축사에는
“3·1운동의 결과 의정원과 정부가 생겼습니다. 그러므로 그것은 3·1운동과 일체입니다. 의정원에서.....독립운동 잘 추진시키는 것이 일이다 이겁니다. 그러면 과거는 어떻게 되어왔는가? 임시의정원과 임시정부는 독립운동과 한 덩이가 되지 않았다 입니다.....그것은 과거에 영도임무를 잘 수행하지 못하였다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오늘 해외 혁명역량을 정부와 의정원으로 끌어드려야겠다. 오늘 우리의 정부는 통치권을 행사하는 정부가 아니고 혁명의정원과 혁명정부가 되어야 겠다 입니다. 그런데 의정원 헌법을 보면 지금이 시기에 쓰기에 결함이 있다는 것입니다.....이 시대에 맞도록, 환경에 맞도록 고쳐야겠다는 것입니다. 그 구체방법은 31시대로 돌아가자는 것입니다. 3·1운동의 인도자들은.....특권을 요구하는 것이 없었고, 순전히 자유연합으로 된 것입니다. 우리도 오늘 오직 이렇게 하여야만 우리 앞에 일이 다 될 것이라 압니다.”
라는 아나키스트 특유의 입장과 가치가 반영되어 있다. 나는 유림이 이회영, 신채호, 류자명 등으로 면면히 이어져 온 아나키스트 이론과 실천(혁명운동, 임정비판, 자유연합)을 일관되게 관철했던 것으로 이해한다. 그는 직접행동의 아나키스트 답게 독립노농당이라는 전 세계에 유례없는 아나키스트 정당을 과감히 혹은 혁명적으로 창당하지 않았는가? 한국 아나키스트의 자유분방한 창조적 파괴 정신이다. 서구지향의 사대주의자나 찾음직한 “아나키스트 본령” 타령은 더 이상 거론할 필요가 없다.
*** Ⅵ. 결어: 아나키스트 이회영과 한국 아나키스트의 현 단계 과제
**** 1. 이회영의 아나키스트 정체성
1) 회의론에 대한 비판
손과지(2017: 108)는 “중국의 아나키즘 운동과 이회영”이라는 발표에서 “이회영은...중국동북에서 경학사와 신흥강습소를 조직하거나 영정하 개간사업을 추진하고 아나키즘 단체에 참여했지만, 그가 추구한 가장 중요한 목표는 민족의 독립과 자유였다.....그는 김창숙, 신채호 등과 교담하거나 또는 한인 아나키스트
청년들 즉 이을규, 이정규, 류자명, 정화암 등과 교류할 때 핵심문제는 독립운동의 방략이었다. 즉 어떤 방법을 이용할 것인가, 어떤 과정을 통해 조국이 독립을 획득하고 민족이 해방과 자유를 얻을 수 있을까 하는 것이었다. 당연히 이회영이 베이징에서 생활하던 이 시기는 아나키즘이 중국에서 광범위하게 전파되던 시기였다.....천두시우, 마우쩌둥, 리다자오, 차이위안페이, 루쉰 등도 모두 이 사조의 영향을 받았다.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이회영이 아나키즘의 영향을 받았던 것 또한 매우 자연스런 현상이다. 그러나 이회영이 비록 아나키즘단체의 조직과 활동에 참여하였다 하더라도 그가 아나키스트였다고 단정 짓는 것은 적절하지 않다”고 지적하면서 이회영의 사상은 아나키즘과는 큰 거리가 있고, 전통유학에 대한 소양을 지닌 이회영은 유가의 대동사상을 이상사회로 추구하였다고 주장한다. 왜냐하면 정통(?) 아나키즘의 교리와는 달리, 이회영은 국가, 종교, 결혼의 존재를 부정한 적이 없었고, 대동사상 또한 국가나 정부를 부정하지 않기 때문이다.
상기의 주장은 나름대로 대동사상과 이회영 간의 연관성을 지적하는 확장성을 가지지만, 매우 협소한 시각에서 아나키즘을 이해하고, 이회영의 사상 또한 너무 일면적으로 접근하는 한계, 직설적으로 표현하자면, 오류를 드러낸다. 이미 방략론의 문제점을 지적하였지만, 다시 한번 형식 논리상의 문제부터 거론해 보자.
(1) 방략/수단과 목적의 일치
아나키즘은 이회영의 최고 목표였던 민족의 독립과 자유를 위한 한낱 현실적 혹은 단기적 방편이나 수단이었을 뿐이라는 주장은, 기존 신채호 연구에서처럼, 숱하게 제기되었다. 무엇보다도 민족의 독립과 자유는 그 자체가 아나키즘의 최고 목표와 일치 부합될 수 있다. 민족은 왜 독립을 원하는가? 여기서 아나키즘과 맑스주의의 핵심적 차이가 드러난다. 맑스주의는 프로레타리아독재에 의한 계급평등을 위해서라고 주장하지만, 아나키즘은 (민족의 성숙으로서) 전 민중의 자유라고 외친다. 평등이냐 자유냐 하는 문제는 현실적으로 양자택일의 문제는 아니지만, 논리적으로나, 이론적으로는 우선관계가 성립될 수 있다. 맑스주의와 아나키즘은 둘 다 자유와 평등을 추구하지만 전자는 평등을, 후자는 자유를 더 우선적인 가치와 목표로 삼는다. 그렇다면 민족/민중의 자유를 위해서 민족의 독립을 추구한다는 사실은 바로 아나키즘의 목표가 된다. 결국 이회영에게 아나키즘은 목표이자 수단으로서, 아나키즘이 요구하는 목표-수단의 일치(prefigurat-ion) 논리를 제대로 반영하는 것이다. 아나키즘이 잠정적인 하나의 방략에 불과하였다면, 왜 해방 후에도 아나키스트들은 아나키즘이라는 이념적 지주와 아나키스트로서의 정체성을 버리지 않고 독립노농당을 창립하거나 자유사회건설운동을 전개하였을까?
(2) 자유와 해방의 자질 그리고 3·1운동
초기에 아나키즘에 심취하였다가, 볼세비키혁명의 성공과 함께 사회주의 강대국으로서 소련이 등장하면서 공산주의자가 된 사람들이 대다수였던 시기에도 불구하고, 사회주의의 유혹에 빠지지 않고, 사회주의와는 적대적 관계였던 아나키즘을 분명하고도 당당하게 표방한 이회영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겠는가? 나는 이회영은 성장과정에서 기질적으로 혹은 천성이 아나키스트적 자유해방의 가치를 내면화하였기 때문에, 매우 자연스럽게, 당면한 민족독립의 문제와 동시에 독립의 이유요 목표인 자유해방까지도 포괄하는 아나키즘에 이념적으로 가장 적합하고도 강력한 친화력을 느꼈던 것으로 이해한다. 이런 맥락에서 나는 이회영의 아나키즘에로의 본격적 입문과 경도시점을 삼일운동 전후로 파악하고 싶다. 그래야 3·1운동에 대한 반성과 새로운 결심, 임정에 대한 반대, 무장투쟁의 선봉이었던 신채호와의 의기투합 등이 더욱 자연스럽게 이해될 수 있다.
(3) 대동사상과 동아시아 아나키즘의 연관성
대동사상의 아나키즘적 차원은 유교아나키즘에 대한 논의를 통해서 이미 널리 알려졌다. 신채호나 이회영, 유림 등은 유교와 같은 조선의 전통사상을 부정하지 않았으며, 오히려 유교적 교양의 바탕 위에서 서구 아나키즘을 동아시아적 차원에서 수용했던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흔히 대동의 근원적 의미를 평등사상에서 찾지만 그것은 일차적 혹은 형식적 수준에서 대동을 이해 한 것이다. 평등은 자유와 대립되는 가치가 아니라 자유의 한 차원이기 때문이다. 무엇보다도 절대적-획일적 평등이란 불가능할 뿐 아니라 불필요하다. 평등은 자유를 구현하는 하나의 주요한 차원일 뿐이다. 자유가 전제/보장되지 않는 평등은 지옥이 될 뿐이다. 그러나 인간은 불평등 속에서도 자유를 누라면서 살 수 있다. 일찍이 중국의 캉유웨이는 공자의 대동세계를 근대적으로 검토하면서 도가나 불가의 아나키스트적 경지로까지 심화·확장하여 이해한다(김성국, 2015: 572~575). 대동의 동은 대동소이의 차원과 화이부동의 차원을 동시에 갖는다. 대동소이의 의미 풀이도 크게/거시적으로 보면 동이나, 좁게/미시적으로 보면 이라는 해석도 가능하다. 즉, 반드시 동이 좋고, 이가 나쁘다는 것이 아니다.
(4) 동아시아 아나키즘의 재인식
동아시아 아니키즘은 서구 아나키즘과는 상이한 성격과 내용을 가진다. 서구 아나키즘이 아나키즘의 정통이라고 간주하는 것은 아나키스트의 태도가 아니다. 어떤 만고불변이나 영원불멸의 지배적 교리나 권위적 원리가 아나키즘에 존재할 수 없다. 이회영이나 신채호는 당대의 격변하는 시대상황 속에서 나름대로 신구의 지식들을 엄청나게 공부하였다. 서구의 신문물에 유행 따라 맹종하는 그런 류가 아니다. 신채호의 표현을 빌리자면, 어떤 주의의 조선이 아니라, 조선의 주의를 탐구하는 창조적 변용의 지식인이었다. 어떤 서구의 아나키스트가 무국가, 무종교, 무결혼을 주창했다 할지라도, 그것이 전체 아나키스트의 생각도 아닐뿐더러, 그 진의는 항상 현실적으로 존재하던 당대의 강권적-억압적인 국가제도, 종교제도, 결혼제도를 부정한 것이지, 자유와 해방이 보장되는 국가, 종교, 결혼을 거부한 것이 결코 아니다. 물론 동아아시아 아나키즘은 각종 현실제도의 부정적인 성격을 간파하고 있었지만, 그것의 전면적 혹은 혁명적 거부를 주창하기보다는 그것이 지닌 유용함이나 불가피함도 통찰하였기 때문에 현실과의 거리두기나 조화를 모색하는 중도중용의 길을 제시한다. 물론 당대의 혁명적 아나키즘은 그 구체적 내용에 있어서 오늘날 후기 혁명시대의 비 혁명적 시각으로 보면 현실적합성이 부족한 것도 적지 않다. 그러나 국가주의나 자본주의의 근원적 모순과 문제점, 기존 도덕과 제도의 권위주의적이고 시대낙후의 문제점을 핵심적으로 지적한 것은 여전히 타당하다. 시대의 변화 발전과 함께 아나키즘도 변화 발전한다.
**** 2. 이회영 아나키즘의 차원
1) 타고난 아나키스트 혁명가
이회영이 일찍이 집안의 노비를 풀어주고, 또 그들과 대등한 인간관계를 유지하려고 했다는 사실은 그가 천성적으로 개인의 자유를 존중하고, 부당한 억압과 지배를 반대하는 기질의 소유자라는 점을 나타낸다. 동일한 억압과 착취의 식민지 조건 속에서도 왜 어떤 사람은 유독 아나키스트의 길을 걷게 되는가? 우연이나 노력에 의해서 결정되는 경우도 없지는 않겠지만, 그 사람의 타고난 천성과 자질이 크게 작용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따라서 이회영은 아나키즘을 알기 전에 이미 생래적으로 아나키스트로 성숙할 잠재력과 가능성을 충분히 지녔다고 판단할 수 있다. 모든 재산과 전 가족을 데리고 험난한 이국만리 타국 행을 결심한 것에서도 일제의 강권과 거기에 필연적으로 따를 부자유의 상황을 단호히 거부하는 직접행동의 혁명적 아나키스트라는 면모가 분명하게 드러난다. 이회영이 아나키스트를 자임하기 훨씬 이전에 각종 독립운동에 활발히 관여한 것도, 말보다는 행동이라는 아나키스트 직접행동주의를 발현한 것이다. 이회영이 고종의 망명을 두 차례에 걸쳐 시도한 것은 주지하듯 그가 보수적 복벽주의를 지녔기 때문인 것은 전혀 아니다. 독립운동의 상징적 구심점이 필요했다는 역사적 사실은 진지하게 인정되어야 한다. 당시 대다수 조선인의 신민적(臣民的) 의식수준이나 세계적 여론조성의 필요성, 혹은 영국과 같은 입헌군주제 국가의 성공적 성립 등과 같은 사실을 고려할 때, 고종망명 시도의 역사적 중요성은 결코 과소평가 될 사안이 아니고, 적극적으로 재평가되어야 한다.[21]
2) 혁명적 의열투쟁의 직접행동가
이회영은 각종 무력투쟁이나 암살기획과 실행에 직접 혹은 깊이 관여하였다. 신흥무관학교 운영, 공동체 건설, 다물단 및 항일구국연맹과의 연관, 아나키스트 세력 거점확보를 위한 만주행 등등이 행동가로서 이회영의 특성을 웅변으로 입증한다. 어떤 독립운동가들처럼 높은 자리에 앉아서 혹은 뒤에 숨어서, 자신은 직접 행동의 전면이나 일선에 나서지 않고, 남을 시키는 것과 같은 역할은 개인 이회영에게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다.
3) 국제주의자
이회영은 결코 배타적 민족주의자가 아니었다. 대의를 같이 하는 일본인 아나키스트들과도 연대하여 공동전선을 이룩하였고, 공산주의자들도 무조건 배척하지 않았다. 그의 독립운동은 조선민족을 위한 것만이 아니라 세계평화라는 더 큰 목표를 향한 것이다.
4) 자유연합주의자
자유연합은 가장 확연한 성격의 아나키스트 조직 원칙이다. 이회영도 깊숙이 참여한 남화한인청년연맹의 선언에 명백하게 표현되어 있다. 이회영이 임정을 반대한 핵심적인 이유도 바로 임정의 구태의연한 인물(지도자)중심의 위계서열적 분파지향적(권력투쟁적) 조직을 거부했기 때문이다. 류자명과 유림이 민족전선을 통해 임정에 합류하는 과정에서도 이 자유연합의 원칙은 최대한 관철되었다.
이상에서 소개된 매우 간결한 정리를 통해서 우리는 이회영의 아나키즘이 차후 한국 아나키스트운동이 추구하였던 거의 모든 핵심적 실천방안과 사상노선의 좌표가 되었음을 알 수 있다. 기존 유교 사상과 가치가 여전히 막강한 영향을 미치던 시기에 그리고 강대국 소련을 배후에 두는 사회주의/공산주의가 열광적 돌풍을 일으키던 상황에서 아나키스트라는 외로운 고군분투의 길을 선택한 이회영의 결단과 투쟁은 경배의 대상이 아니 될 수 없다.
**** 3. 현 단계 한국 아나키스트의 과제
아나키스트 독립혁명의 정신은 21세기 이 시점에서 어떻게 전개되어야 할까? 이는 다른 말로 표현하자면, 이회영, 신채호, 류자명 등등의 선배 아나키스트들이 지녔던 뜻을 어떻게 계승해야 하는 문제와 동일하다. 그러나 20세기와 함께 통상적 의미에서의 혁명의 시대는 끝났다. 특히 단순한 권력교체에 그치는 국가주의적 정치혁명은 더 이상 추구될 가치가 없다. 이제는 정치적 민주주의를 활용하여 최대한 직접민주주의를 실현하면서, 개인적 자유와 사회적 해방을 확대하는 사회혁명을 확산시키는 것이 핵심과제다. 낡은 도덕과 규범을 쇄신하고, 새로운 가치와 의식을 발흥시키는 일이다.
1) 말보다는 행동을! 자유해방을 위한 직접행동 전사
이에 나는 동지 아나키스트들을 위해서 다음과 같이 대답하고 싶다. 무엇보다도 행동하는 아나키스트, 직접 행동하는 아나키스트가 되어야 한다. 아나키즘에 관한 연구나 이론개발도 중요하지만, 행동 없는 아나키즘은 껍데기일 분이다.
그렇다면 그 행동을 인도하는 가치는 무엇인가? 자유이다. 개인적 자유와 그것이 사회적으로 확산되는 과정이 사회적 해방이다. 그러므로 개인적 자유와 사회적 해방은 하나로 연결된 성장성숙의 상호보완적 과정이다. 이 자유해방의 가치가 아나키즘의 핵을 이루어야 한다. 그래야 평등우선과 평등중심을 추구하는 맑스주의와 대각을 이루며 아나키스트의 정체성을 확보할 수 있다. 자유평등이 아니라 자유해방이다. 유물론적 혹은 물질적 평등에 집착하는 계급투쟁론은 시대착오이다. 아나키스트들은 협동에 기반 하는 화합의 기치를 높이 들어야 한다. 현실적으로는 평등민주주의가 아니라 자유민주주의를 우선적으로 수호해야 한다. 개인의 자유를 확대·신장해야 한다. 강압적이고, 일방적인 국가주의적 간섭과 개입은 최대한 거부해야 한다. 나아가 자유의 가치는 아나키스트의 조직원리로서 자유연합의 원칙과 연결되어야 한다.
2) 자유해방의 실행가
자유를 추구하는 직접행동은 구체적으로 어떤 활동에 우선적 관심을 가져야 하는가?
(1) 정치 활동: 아나키스트정당 수립
무엇보다도 세계 최초 아나키스트 정당인 독립노농당의 맥을 잇는 아나키스트 정당을 만들어야 한다. 그 정당은 기존의 부정부패로 얼룩진 권력정치를 거부하는 ‘반정치의 정치’를 목표로 삼아야 한다. ‘권력이 있는 곳에 정의는 없다’는 좌우명을 결코 잊지 말아야 한다. 당연히 자유연합의 조직원리가 적용되고, 위계서열이나 상명하복의 관행은 철저히 배격되어야 한다. 최근 서구에서 등장한 해적당이나 기타 실험정당의 탈권력지향적 정당형태를 참고해야 한다. 우선 사이버정당의 형태로 시작하는 것이 무리가 없을 것이다. 이를 위해서 기존 자주인연맹을 부활시켜 정치조직으로 전환하는 가능성도 모색할 수 있다.
(2) 대중운동의 전개: 협동조합운동/공동체운동
대중운동을 전개한다. 아나키사회의 작동 원리인 자치와 자율, 협동과 연대의 결집체로서 각종 협동조합 운동을 전개해야 한다. 노동운동도 이제는 협동조합운동이 되어야 한다. 노사간의 협동은 물론이고, 노노간과 노동자-시민간의 진정한 협동도 목표로 삼아야 한다. 구태의연한 계급투쟁론에 입각한 현금의 노자투쟁 방식은 폐기되어야 한다. 노조귀족주의나 노조반민주주의와 같은 폐습을 척결하기 위해서도 협동운동으로서 노동운동을 시도해야 한다. 가능한 많은 조직을 협동조합의 원리에 입각하여 구축할 필요가 있다.
(3) 교육과 선전: 학습과 홍보
"행동에 의한 선전(propaganda by deed)"이라는 고전적 아나키스트 원칙과 더불어 교육과 홍보에 의한 선전활동이다. 아나키스트들은 언제나 부단히 학습하고, 이 학습의 성과를 행동 및 말 (그리고 조직)에 의한 선전(Propaganda by both words/organization and deed) 활동에 주력해야 한다. 맹신적 전도사가 되어서는 안 되지만, 21세기 아나키스트 전사들은 언어와 행동으로써 상대방을 계몽, 설득할 수 있도록 자기수양과 자기실행을 게을리 해서는 안 된다.
(4) 미래 비전
최근 비트코인의 열풍과 더불어 블록체인 기술이 각광받고 있다. 이 배후에 아나키스트들이 있다는 사실을 아는가? 일단의 아나키스트들은 이미 Crypto Anarchist Manifesto를 전 세계에 알렸다. 블록체인기술은 개인의 자유를 수호하는데 불필요하고 방해가 되는 국가 및 중간세력의 개입과 간섭을 막아 줄 것이다. 협동을 통한 공유이익의 실현에도 기여할 수 있다. 물론 이 기술은 역사상의 모든 신기술처럼 악용될 수 있다. 기득권세력이 이 자유해방의 새로운 사회를 지향하는 역사적 조류를 무조건 일방적으로 막겠다고 안간힘을 쓰겠지만, 대세는 이미 거역하기 어려운 상황으로 반전하고 있다. 탈국가주의의 물결을 거슬러 현재 반동적인 민족주의 내지 수구적 국가주의자들이 테러와 전쟁의 위험성을 증가시키고 있지만 그것은 결코 지속가능한 역사발전이 아니기 때문에 조만간 소멸하고 말 것이다. 사해동포주의(Cosmopolitanism) 혹은 대동세계를 지향하는 세계주의는 언제나 아나키스트 평화주의의 지향점이다.
초기 인터넷의 자유와 창조성을 추구한 전설적 전사인 해커들, 사이버스페이스 독립선언에서부터 마이크로소프트라는 거대 독점세력에 저항하는 리눅스와 오픈소스 운동을 전개한 스톨만에 이르기 까지 이들은 모두 자유해방을 추구하는 아나키스트 정신의 소유자였다. 4차산업혁명의 총아로 주목받는 인공지능이나 휴머노이드와 같은 기계적 인간의 등장은 포스트-휴머니즘의 세계가 도래할 것임을 예고한다. 어쩌면 그것은 아나키스트들에게 새롭고 즐거운 도전의 기회를 줄 것이다. 이제 개인은 “인간”이라는 혹은 “인간예외주의”나 “인간중심주의‘라는 특권적 개념으로부터 자신을 해방시켜야 한다. 인간의 동물성, 인간의 사악성, 인간의 물질성과 기계성, 그리고 무엇보다도 인간의 허구성을 인식하여 각 개인의 다양한 차원을 자유롭게 이해하고, 인정하고, 성찰하며, 사랑할 수 있는 아나키스트적 전환의 계기를 만들 수도 있다(Cudworth and Hobden, 2018).
비장한 의열혁명을 추구하였던 선배 아나키스트들이 이룩한 역사의 선구자 역할을 21세기 오늘의 우리 한국 아나키스트들은 바로 지금 여기(Now and Here)의 일상에서부터 작고 ”조용한 혁명(Quiet Revolutions)"(Ward, 2004)을 통해서 계승해야 한다.
*** 토론문
***** “아나키즘과 한국의 독립운동사상:아나키스트의 관점에서”
**** 1. 총평
○ 한국 사회학계의 원로이자 해방후 한국아나키즘 2세대의 대표적 학자, 나아가 평화반핵군축시민연대의 공동회장 등 이론과 실천 모든 면에 앞장서 활동하시는 김성국 명예교수님의 평소 지론을 집대성한 노작을 감히 논평하게 됨에 큰 영광입니다.
○ 발표자는 일찍이 이회영과 신채호, 류자명, 박열 등 한국아나키스트들의 사상수용과 독창성, 독립운동에 끼친 영향 등을 자세히 분석하여 토론자를 비롯한 많은 후학들에게 큰 영감을 주셨습니다. 뿐만아니라 아나키스트독립운동가에 대한 일부 연구자들의 잘못된 관점, 즉 소아병적인 맑스주의/스탈린주의적 시각에
입각해 아나키스트운동을 재단하려 한다든지, 폭력적 테러리즘으로 민중 직접행동론의 진정성을 폄하하려는 시도, 창조적 파괴의 정신을 현실도피적·퇴폐적 허무주의로 오해하는 경향 등을 경계해야 한다고 주창한 바 있습니다. 이번 발표문 역시 ‘조선의 아나키스트들은 혁명가이었고, 따라서 아나키스트독립운동은 혁명운동이었다’는 논지를 분명히 밝히신 글이라 여겨집니다.
○ 이회영을 아나키즘보다는 유가의 대동사상을 이상사회로 추구하였다는 주장이 그를 매우 일면적으로 접근했다는 주장, 또한 그의 아나키즘 사상수용이 방략적 차원이 아니라 자유·평화·평등사회를 구현하기 위한 것이란 발표자의 주장에 전적으로 동감합니다. 이는 그의 일생과 아나키즘 수용과정, 독립투쟁과정에서의 독창성(즉 아나키스트독립운동의 정체성 확립)에 대한 토론자를 비롯한 여타의 역사학계 연구성과로서도 충분히 고증되는 바입니다.
○ 다만, 토론자로서 임무를 다하기 위해 몇 가지 질문을 드리겠습니다.
**** 2. 질의
○ 발표자는 “아나키즘에는 본령이란 것이 존재하지도 않았고, 있을 수도 없다.”, “식민지 조선이라는 특수한 혁명조건을 무시하는 순정 아나키즘의 논리는 공리공담일 뿐”이라고 주장하셨는데, 저도 공감하는 뜻을 밝힌 바 있습니다. 혹 콜린워드 등 최근 서구 아나키즘이론가들의 저서를 연구하시면서 ‘아나키즘의 본령’이란 이론을 접해보신 적이 있는지, 한국아나키스트들이 대한민국임시정부에 참여하거나 독립노농당 활동을 한 것이 아나키즘 본령에서 일탈했다는 주장이 과연 세계 아나키즘 이론사에 타당한 것인지요.
또한 1937년 11월 조선민족전선연맹의 창립을 추진한 한국아나키스트들이 투쟁강령으로 민주집권제를 채택한 것이 자유연합주의 원칙을 폐기한 것이고, 민족혁명을 1차혁명으로 규정하는 ‘단계적 혁명론’을 채택했다는 주장(이호룡, 『한국의 아나키즘-운동편』, 2015, 384~393쪽)이 타당한지도 가르침을 주시기 바랍니다.
○ 위와 관련하여 발표자는 “임시정부는 적어도 아나키스트에게는 억압과 착취의 권력체제로서 국가/정부가 아니라, 혁명정부이었다.”고 지적하시고, 류자명의 [조선민족전선] 창간사를 “계급차이를 포괄하는 아나키스트선언!”이라 높이 평가하셨습니다. 나아가 독립노농당 창당도 ‘자유분방한 창조적 파괴정신’으로 보셨는데, 과연 이회영, 신채호 선생도 그 노선에 찬동하셨으리라 보시는지요?
○ 발표자는 현 단계 아나키스트의 과제로서 먼저 아나키스트 정당수립에 주목하는 주장을 펼치셨습니다. 즉 기존의 부정부패로 얼룩진 권력정치를 거부하는 ‘반정치의 정치’를 목표로, “자유연합의 조직원리가 적용되고, 위계서열이나 상명하복의 관행이 철저히 배격되는” 탈권력지향적 정당형태를 제안하셨는데, 그 세계사적 롤모델을 갖고 계시는지, 그 단계적 실천과제는 무엇일지요. 나아가 협동조합운동과 공동체운동도 계급투쟁론이나 노조귀족주의 대신 협동운동으로서의 노동운동을 제안하셨는데, 그 실천을 위한 방안을 개괄적이나마 제시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 끝으로 현 남북대화, 북미평화체제로의 전환기에서 자유공동체적 평화통일을 위해 아나키스트들이 해야할 일들이 어떤 것이 있을지 가르침을 주시기 바랍니다. 이상입니다.
[1] 그렇다고 신간회의 성과를 과소평가하려는 것은 결코 아니다.
[2] 해방 후 아나키스트 활동을 기록하면서 지면의 제한으로 몇 사람만 거명하게 되어 안타깝고 죄송스럽게 생각한다.
[3] 강동권의 이학사에 의해서 수정·보수판이 곧 출간될 예정이다.
[4] 조세현(20010을 참고할 것.
[5] 최근에는 한국아나키스트독립운동가기념사업회도 조직하였다.
[6] II 장의 1, 2, 3절은 김성국(2015: 32, 35~37, 44~6)에서 부분적인 수정을 하면서전체를 재인용 하였다.
[7] 나는 김용옥의 지적에 자극을 받아 탈근대 아나키즘을 문명전환의 차원에서 서구 아나키즘과 노장 아나키즘의 결합/잡종화를 통해 재구축해 보려고 시도해 왔다. 그 결과의 하나가 아나키스트 자유주의(김성국, 2015)와 유아유심 개인주의(발표 준비 중)이다.
[8] 연구자에 따라서 워드의 입장을 “Practical”(Marshall, 2011: 17~19) 혹은 “Pragmatic”(White, 2011: 92)이라고 규정한다. 필자는 “실용적”이라는 번역을 택한다. 물론 조선말 한국에서 당대의 공리공담적 주자학이론을 비판하며 대두하였던 실학의 핵심정신의 하나인 실용의 역사적 의미를 강조하기 위한 것이다.
[9] 양자의 차이를 이론적으로 해소해 보고자 나(김성국, 1999)는 “사회적 생활양식 아나키즘“의 개념
을 탐구해 보았다.
[10] 흑도회는 현실 변혁을 위한 수단으로 크로포트킨이 주창한 상호부조를 강조한다. 1921년 7월 10일자 <흑도> 창간호에서 이강하는 「우리들의 절규」를 통하여, “상호부조는 우리들의 무기”이며, 이 무기로써 “그들 부르주아의 아성을 무너뜨리자”고 주장한다.
[11] 김중한은 “나 자신은 개인의 철저한 자유를 인정하고 나 자신의 의사대로 마음대로 살고 싶다”면
서 절대적 개인주의를 지향하였다.
[12] 자아중심주의 혹은 개인주의는 1924년 서울에서 흑기연맹黑旗聯盟에 의해서도 계승되고 있다. 흑기연맹의 창립 취지서를 보면, “자아의 확충을 저해하며 만인의 행복을 유린하는 모든 불합리한 제도를 근본적으로 파괴하고, 권력으로부터 결합된 조직을 철저히 배격”하고 있다.”(무정부주의운동사편찬위원회, 1978: 273)
[13] 박열은 허무 사상을 지닌 자신이 무정부주의 사상 연구회 등을 조직한 이유는 “무정부주의 사상의 선전, 그 실현은 내 허무 사상의 실현에 다다르기 위한 제일보라고 생각하였기 때문이다”라고 진술한다.(김삼웅 1996: 102에서 재인용)
[14] 인간의 추악성에 대한 박열의 판단은 직접적으로는 일본의 사회운동가들에 대한 실망으로부터 연유한다. 즉 동지를 배반하고 변절을 일삼으며, 부르주아 생활을 공격하면서도 남이 보지 않는 곳에서는 호사스러운 생활을 영위하며, 이론에 매달려 자기의 주장을 생활에서 실현하려고도 하지않던 당대의 많은 사회운동가들에 대하여 박열은 강한 불신을 느끼고 있었다. 오늘날에도 강남 좌파, 구찌 좌파에 대하여 실망하는 진정한 사회주의 운동가들도 적지 않을 것이다.
[15] 박열은 국가와 민중 그리고 자본가와 노동자를 동시에 저주하고 비난하며 불신한다. “국가는 하나의 거대한 괴물인 것이다. 이 괴물은 항상 민중을 잡아먹고 저작(咀嚼)하고 되씹는 것이다. 이렇게 민중은 국가의 강권 때문에 항상 협박당하며 유린당하고 있다. 게다가 민중 자신 또한 [……] 이 저주스런 강권의 작용을 지지하고 있다. [……] 인류의 최대 다수인 노동자계급은 그 생활과 운명이 일부 소수의 욕심이 한없는 흡혈귀인 자본가들의 악랄한 손아귀에 잡혀 있다. [……] 또 노동자들은 일면으로는 이 비굴한 복종자이면서 다른 면으로는 극히 악랄한 압제자임을 간과할 수 없다.”(김삼웅, 1996: 233~234)
[16] 그러나 박열이 인정하는 “정의를 사랑하고 옹호하는” 인류 집단도 있다. “수많은 열성적인 이상과 현재 사회제도의 근본적인 파괴를 요구하고 기획하는 많은 사회운동자, 노동운동자, 피정복민족의 독립운동자 등에 대해서 나는 아무래도 악의는 가질 수 없다. 오히려 그 진실과 용기를 깊이 사랑하고 존경한다.”(김삼웅, 1996: 243)
[17] 박열의 저주와 복수가 맹목적 파괴가 아니라 창조적 파괴라는 암시도 있다. “그러나 이 저주스러운 폭력에 기초를 두고 동류의 정복‧지배를 목적으로 하고 있는 인류 사회를 근본적으로 개조시키지 않으면 안 된다.”(김삼웅, 1996: 243)
[18] 1936년부터 1939년까지 3년 남짓 전개된 스페인내전은 35만명의 사망자와 50만명의 외국 망명자, 30만명의 수감자를 낳는 희생을 치렀고, 최종 승자가 된 프랑코는 이후 37년 동안 독재체제를 유지하였다. 아울러 아나키스트 운동과 아나키즘도 역사의 기억 속에 묻히기 시작했고, 30여년 뒤 1968년 프랑스의 5월 혁명과 함께 다시 부활의 기지개를 켜게 된다.
[19] 1917년부터 1927년까지 북경대 총장이었던 아니키스트 차이위안페이(蔡元培)를 중심으로 중국의 여러아나키스트들은 물심양면으로 한국의 아나키스트들을 도와주었다. 채원배 전총장의 자유정신을 기념하여 2007년 베이징대학에서는 자유전공학부인 ‘위안페이(院培)’학원을 신설하였다.
[20] 1929년 11월 국내에서 최갑룡, 채은국, 조중복, 유림 등에 의해 전국 조직으로 결성된 조선공산무정부주의연맹의 강령은 다음과 같다. 1. 현재의 국가제도를 폐지하고 코뮨을 기초로 그 자유연합에 의한 사회조직으로 변혁할 것, 2. 현재의 사유제산제도를 철폐하고 지방분산적 산업조직으로 개혁할 것, 3. 현재의 계급적 민족적 차별을 철폐하고 전 인류의 자유, 평등, 우애의 사회 건설을 기할 것.
[21] 이회영과는 별개의 문제로서 그리고 나도 개인적으로 결코 선호하지 않지만, 민족독립과 관련된 미래 통치체제의 하나로서 입헌군주제가 가질 수 있었던 시대적 의미를 일방적으로 무시해서는 안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