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티 토마스
막스 슈티르너와 아나키즘적 코뮌주의의 관계
서문
1884년 막스 슈티르너의 『유일자와 그 소유The Ego and Its Own』가 출판된 이래, 그에 대한 반응은 완전한 부정에서 무비판적 수용까지 다양했다. 슈티르너에 관한 이상하고 모순적인 이야기들이 논해지고 있다. 유명한 아나키즘적 조합주의자인 학자 노엄 촘스키는 슈티르너가 극도로 자유지상주의적인 자본주의자들(미국에서는 이들이 자유의지주의자라 오도된다)에게 영향을 주었다고 정의했다. 하지만 슈티르너의 사상을 아나키즘적 조합주의 조직의 근간으로 만든 사람 또한 존재한다. 불편함을 주기 위해 쓰인 책에 관하여 다양한 해석이 등장하는 것은, 아마도, 당연한 일일 것이다.
이 소책자의 목표는 위대한 독일 사상가의 이념을 탐색하고, 그것이 아나키즘적 코뮌주의자에게 어떠한 가치를 가지고 있는가를 탐색하기 위함이다. 슈티르너의 저작에 익숙한 몇몇 독자들은 이 글에 털을 곤두세우고, 슈티르너가 공개적으로 코뮤니즘을 비판했다고 이야기할지도 모른다. 물론 그러했다. 하지만 슈티르너가 비판한 코뮤니즘은 아나키스트들 역시 비판하는 바, 권위주의적 코뮤니즘이다. 아나키즘적 코뮌주의는 슈티르너의 시대에는 존재하지도 않았다. 그리고 슈티르너가 생각하고 있던 바 코뮤니즘은 수도원이나 병영의 코뮤니즘, 자기희생과 일반적 평등의 코뮤니즘이었다. 개인이 유일자로 스스로를 발전시킬 자유를 보장하는 코뮤니즘을 선호하는 사람들은 슈티르너와 비슷한 가치를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슈티르너의 사상
슈티르너는 그의 저작을 “나는 무엇을 고려해야 하는가”라고 질문하며 시작한다. 그는 개인이 처음에는 신이라는 대의를 고려하는 것으로 시작하여 인류의 대의를, 국가의 대의를, 진리를, 정의를, 그리고 수천가지 다른 대의들을 고려한다고 답한다. 하지만 개인이 고려하지 않는 유일한 대의는 그 스스로에 관한 것이다. 나의 대의는 고려의 대상이 아니다. 스스로의 대의를 주장하는 사람들은 이기적이라 치부된다. 그 대신에 개인들은 언제나 스스로의 대의 앞에 다른 대의들을 두라고 교육받는다. 우리는 스스로가 아닌 타인을 위해 일할 것을 강요받는다. 그러지 않으면 우리는 비도덕적 이기주의자가 된다. 우리는 이타적일 때 비로소 도덕적이 될 수 있다. 우리와 무관한 대의에 따르고, 그 대의에 복무할 때에야 말이다.
슈티르너는 이것을 온전히 부정한다. 슈티르너는 질문한다. “신은 그 스스로의 것이 아닌 다른 대의에 복무하는가? 신실한 이들은 아니라고 답할 것이다. 신은 총체적이므로, 그의 것이 아닌 대의는 존재할 수 없다. 그렇다면 인류는 그 스스로의 것이 아닌 다른 대의에 복무하는가? 인본주의자들은 아니라고 답할 것이다. 인류는 인류의 이익에만 복무한다. 인본적 대의가 아닌 대의는 있을 수 없다.”
보라. 신과 인류의 대의 역시 온전히 이기적이지 않은가. 신은 그 스스로만을 고려한다. 인간 또한 그러하다. 이에 슈티르너는 독자들이 이 위대한 이기주의자들을 본받아 스스로를 주된 안건으로 두기를 촉구한다. 즉, 의지적으로 에고이스트가 되라는 것이다. 슈티르너에게 모든 개인들은 절대적으로 유일하며, 개인이 의식적으로 에고이스트가 된다면, 그 개인은 그녀의 개인적 유일성을 포기하거나, 개인적 자발성을 제약하려는 모든 시도를 거부할 것이다. 이것은 개인의 이익보다 더 높은 것을 위한 복무 요청 역시 거부한다는 뜻이다. 높으신 존재나 대의에 대하여 스스로를 희생하는 이들은 속아 넘어간, 무의식적 에고이스트일 뿐이다. 이들은 그들이 복종하는 대의가 무엇이건 간에, 그 대의 아래에서 자신의 즐거움과 만족을 발견하지만, 인정하지 못하는 것뿐이다. 이들은 단지 에고이스트가 되고 싶지 않은 에고이스트일 뿐이다.
“개인의 모든 행동들은 암묵적이고, 비밀스러우며, 은밀하고, 내밀한 에고이즘이다. 하지만 이것이 에고이즘이기에 개인들이 스스로 인정하지 않고, 비밀로 두고, 공개하지 않아 결과적으로 무의식적 에고이즘이 되는 것뿐이다. 그렇기에 이것은 에고이즘이 아니라, 노예적 예속, 복무, 자기포기에 불과하다. 개인은 에고이스트이지만, 에고이즘을 부정하는 이상 에고이스트가 아니다.”
슈티르너는 그의 저작을 다음과 같은 울부짖음으로 시작하고 맺는다. “나는 어떠한 대의로부터도 비롯하지 않는다!” 이 괴테의 인용구는 오늘날 슈티르너의 것으로 더 유명하다. 슈티르너가 인용하지 않은 괴테의 시의 다음 절은 “그리고 세상은 나의 것이다”이다. 슈티르너에게 자신은 결코 이해될 수 없는 것이다. 우리 모두가 각각 지속적으로 자신을 소모하고 재생산하기 때문이다. 슈티르너는 이 자기 소모와 자기 창조의 과정을 공허를 창조한다고 언급한다. “이 과정이 공허하다는 것이 아니라, 내가 창조자로써 모든 것을 창조한다는 의미에서 공허하다.” 외적인 대의들은 언제나 개인들이 스스로를 가장 나중에 고려할 것을 요구한다. 이것이야 말로 개인을 아무것도 아닌 양 취급하는 것이고, 그 개인은 이에 적극적인 수용의 대상이 되어, 이 에고이스트들에게 이용되게 된다.
『유일자와 그 소유』는 3장으로 구성되어 있다. 슈티르너는 인간의 삶을 예시로 들어 인간 발전을 역사 발전의 3단계에 비교한다. 우리는 현실주의적 어린아이로써 탄생한다. 이 기간 동안, 어린아이들은 부모와 같은 물리적, 외적 힘에 굴복한다. 하지만, 어린아이들은 이 제약을 박차고 슈티르너가 언명한바 “정신의 발견”으로 향한다. 어린 아이는 그 지혜와 결심을 이용하여 그를 점검하던 물리적 힘을 회피한다. 이를 통해 우리는 현실적 유아기에서 이상적 청소년기로 이행한다. 물리적 외부 제약조건은 청소년들에게 더 이상 위협이 되지 못한다. 하지만 이제 그는 이성, 양심, 의식, 이상과 같은 내적 제약들을 경험한다. 유아는 삶의 땅 부분(현실적 부분)에 얽매인다면, 청소년은 하늘 부분(이상론적 부분)에 얽매인다. 에고이스트적 성년기에 돌입할 때에야, 이 개인은 외적인, 현실적인 제약조건과 내적인, 이상론적인 제약조건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다. 슈티르너는 이를 다음과 같이 요약한다.
“내가 물질과 정신의 뒤에 있는 스스로를 발견하기에, 나는 이후에 생각-지혜의 뒤편에서 그것의 창조자이자 주인인 나 스스로를 발견해야 한다. 영혼의 시간에, 사상은 그것이 나를 뛰어넘을 때까지 자란다. 사상은 내 주변을 배회하며 마치 열병을 앓아 보는 환등상처럼 나를 경련시킨다. 끔찍한 힘이다. 사상은 마치 유령과 같이 스스로 형태를 가진다. 신, 황제, 교황, 조국 등을 보라. 내가 그 형상을 파괴한다면, 그리고 그것을 다시 나의 것으로 만든다면, 나는 ‘오직 나만이 유형의 것이다’라고 선언할 것이다. 그리고 이제 나는 세상을 나의 것이라, 나의 소유라 선언한다. 나는 모든 것을 나의 것이라 선언한다.”
그리고 슈티르너는 역사 발전의 맥락에서 위 세 개의 시기를 정의한다. 고대의 현실적 세계, 근대의 이상주의적 세계, 그리고 아직 오지 않은 에고이스트적 미래로 말이다. 기독교 이전의 세계는 현실적 유년기에 대응하고, 기독교 세계는 이상적 청소년기에 대응한다. 세속주의의 도래와 함께, 근대 사회는 종교에 의한 사고의 지배로부터 벗어났다고 주장한다. 슈티르너는 그렇지 않다고 말한다. 근대성은 종교에 의한 지배, 즉 더 높은 고결한 것에 의한 지배를 더 증대시켰을 뿐이라는 것이다. 프로테스탄트 개혁을 보자. 종교개혁은 “자유의지의 종교”를 향한 문을 열어내어 교회의 권위로부터 사람들의 삶을 해방한 해방적 사건이었다고 칭해진다. 슈티르너는 종교개혁을 종교적 지배의 확장이자 강화라 바라본다. 개혁을 통해 종교는 그 이전까지 알려져 있지 않던 영역으로 침범했다. 로마 가톨릭 교회는 사제들이 결혼하지 못하게 했다. 프로테스탄트는 결혼을 종교적으로 만들었다. 같은 방식으로 로마 가톨릭 교회는 그 조직적이고 공식적인 사제와 전례를 통해 종교적 권위를 개인 바깥에 위치시켰다. 하지만 프로테스탄트는 사제와 전례를 철폐하고, “만인사제설”의 원칙에 따라 종교적 권위를 모든 신자에게 내재시켰다. 이러한 권위로부터 개인은 달아날 수 없다. 결과적으로 개인들은 내적 전쟁에 놓이고, 그 욕망을 충족하지 못하고, 내재화된 종교적 권위로 고통 받게 된다. 슈티르너는 이것을 시민과 비밀경찰의 투쟁에 비교한다.
슈티르너는 이러한 경향이 근대를 통틀어 지속되었다고 주장한다. 진보에 대한 이야기가, 더 자유로운 사회의 성취에 대한 이야기가, 과거의 낡아빠지고 죽은 가치와 전통으로부터 벗어나는 것에 대한 이야기가 많이 되고 있지만, 근대성은 권위를 확대하고 강화하여 더욱 불가침으로 만들 뿐이다. 이를테면, 인본주의의 발흥은 십자가에 못 박힌 신을 그 왕좌에서 끌어내렸지만, 동시에 그 왕좌를 인류에게 바쳤다. 하지만 인류는 너무나도 개념적인 것이어서 개인이 복종하기 어렵기에, 슈티르너는 인본주의는 종교와 같다고 주장한다. “모든 무신론자는 신실한 사람들이다.” 슈티르너는 인본주의가 신정주의보다 오히려 더 폭력적이라고 주장한다. 유령과 같은 인간성은 그 불신자들에게 더욱 공포를 주기 때문이다. 슈티르너에게 근대성은 오직 인민이 복종하는 추상(“망령”)의 수를 늘렸을 뿐이다.
슈티르너는 “자유롭다”고 자칭하는 사람들(현대적 용어로는 “진보적”이 되겠다.)이 성상파괴주의자인 양 비추어지는 것을 비난한다. 현실적으로 이들은 “가장 근대적인 근대인”일 뿐이기 때문이다. 슈티르너는 헤겔주의 좌파가 독일 철학을 지배하는 것에 비판적이었다. 또한 정치적, 사회적 사상에 만연한 자유주의를 비판했다. 슈티르너는 자유주의를 정치적 자유주의(오늘날의 고전적 자유주의), 사회적 자유주의(사회주의), 인본주의적 자유주의(인본주의)의 3종류로 구분했다. 정치적 자유주의는 개인을 국가 안에서 자유로운 시민으로 다루었고, 사회적 자유주의는 개인을 노동자로 다루었고, 인본적 자유주의는 개인을 인간으로 다루었다. 하지만 이 모든 다양한 자유주의는 개인의 특정한 부분을 강조하고, 다른 부분들의 복종을 요했다. 슈티르너에게, 모든 개인은 시민, 노동자, 심지어 인간 이상의 무엇이었다. 인간적 본성, 혹은 인간의 본질은 개인으로부터 분리될 수 없고, 그 위에 놓일 수도 없다. 한 본질이 개인 위에 놓이는 것은, 또 다른 망령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슈티르너는 어떠한 공통적 인간의 특성도 인간 위에 군림해서는 안 되며, 개인만이 그 스스로의 살과 피로 존재한다고 말한다.
슈티르너는 이 근대성 비판으로부터 에고이스트적 미래의 기대로 이행한다. 그는 개인들이 모든 신성한 개념들을 떨치고, 스스로를 권위의 사슬로부터 자유롭게 할 것을 주장한다. 해방은 다른 사람이 해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슈티르너는 자기 해방에 관해 쓰인 가장 유창한 아나키스트적 표현을 통해 스스로의 입장을 분명히 한다.
“자기해방과 해방의 차이는 다음과 같다. 오늘날의 ‘반대파’들은 ‘자유롭게 하는 것’에 목말라하고, 그것을 부르짖고 있다. 지배자들은 ‘적절한 때가 오면 백성들에게 해방을 선언’하려 한다! 적절한 때가 될 때까지 착한 아이가 되어야 한다. 만약 그렇지 않는다면, 적절한 때는 오지 않을 것이다. 그리스인들에게 때가 왔을 때, 그들은 폭군을 몰아냈다. 그리고 그 아이들에게 적절한 때가 왔을 때, 그들은 아버지로부터 독립했다. 만약 그리스인들이 그 폭군들이 자비롭게도 다수당 지위를 줄 때까지 기다렸다면, 아마도 어마어마하게 기다려야 했을 것이다. 분별 있는 아버지는 때가 오지 않는 아들을 집에서 내쫓을 것이다. 해방된 인간은 해방된 인간일 뿐이다. 해방노예일 뿐이고 사슬을 끌고 다니는 개일 뿐이다. 인간은 자유로 겉치장한 비자유인일 뿐이다. 사자의 가죽을 쓴 당나귀가 사자인 것은 아니다.
더 많은 사람들이 의식적 에고이스트가 되어갈수록, 그들은 그 개인성에 대한 물리적 · 영적 제약들을 거부할 것이다. 슈티르너의 에고이즘에 대한 개념은 에고이즘이라 불린 다른 철학과 분명히 다르다는 것을 지적할 필요가 있다. 슈티르너는 자신의 이해관계를, 이기심을 대변한다. 하지만 그는 이 단어를 일반적인 좁은 방식으로 사용하지 않는다. 슈티르너는 끊임없는 이윤 추구의 사도도 아니고, 고립이나 타인을 신경 쓰지 않는 이기심을 전도하지도 않는다. 슈티르너에게 자신의 이해관계는 각개 에고이스트들이 적극적으로 자기 주변의 세계를 자신의 소유물로 선언하는 것을 포함한다. 여기에서 슈티르너가 사용한 소유물이라는 단어가, 많은 독자들이 슈티르너를 오해하게 하였다. 하지만 슈티르너가 사용한 소유물이라는 단어는 제한적인, 경제적 단어가 아니었다. 오히려 슈티르너는 이 단어를 에고이스트와 유관하여 사용한다. 그렇기에 내가 어떠한 개념에 대하여 개인적 흥미를 가질 때, 나는 그것에 손을 뻗어 그 개념을 나의 소유물로 만드는 것이다. 의식적 에고이스트에게 무언가를 소유물로 만드는 유일하게 결정적인 요인은, 그것을 향해 손을 뻗어 가져올 의지다. 이러한 에고이스트적 소유물의 적극적 확보의 목적은, 개인들 자신의 즐거움이다. 슈티르너에게 다른 사람들 또한 (상호간의) 자기 즐거움의 도구가 된다.
“나에게 다른 개인은 식량일 뿐이다. 나는 그들을 섭취하고 이용한다. 우리는 서로에게 필요성이라는 오직 하나의 관계만을 가진다.”
슈티르너를 타인에 대한 착취의 대변자로 바라보는 이들은 쓰여 있는 것을 올바로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 슈티르너는 연인이나 카페에 가는 친구들, 놀고 있는 아이들을 예시로 들어 이러한 상호간의 자기즐거움이나 소비를, 그가 에고이스트 동맹이라 부르는 관계를 설명한다. 에고이스트 동맹은 그에 참여하는 이들이 에고이즘으로 비롯하여 자유롭고 자발적으로 맺는 관계다. 에고이스트들은 동맹을 이용하지만, 동맹은 그들을 이용하지 않는다. 동맹의 모든 구성원들은 그들의 의지로 관계를 꾸준히 갱신한다. 만약 어떠한 특정 구성원이 기대에 미치지 못하거나 부족하다면 동맹은 무언가 다른 것으로 격하된다. 슈티르너는 동맹을 사회 조직의 대안적 방법론으로, 에고이스트들이 “국가라는 배를 침몰시킨 후” 개별자의 자발성이 꽃필 수 있는 상태를 촉발할 수단으로 제시한다.
이것은 슈티르너의 사상을 극도로 단순히 요약한 것이다. 이로써 슈티르너의 에세이의 후반부에 대한 흥미를 불러일으키고 맥락을 제공하고자 함이었다. 슈티르너의 사상의 광범위함과 그 관점은 그를 요약하기 어렵게 만든다. 그리고 이 장 자체는 두 배는 더 길 수 있었다. 더 궁금한 사람이 있다면, 이 소문서 하단부의 추천독서 목록을 참고하기 바란다. 모든 사람은 슈티르너에 관해 얼마나 받아들이고, 그것으로 무엇을 할지를 결정해야 한다. 하지만 슈티르너는 그의 저작에 대한 이러한 해석들에 대해 “그것은 당신의 문제일 뿐, 내 가 알바는 아니다.”라고 답한다.
“나는 어떠한 대의로부터도 비롯하지 않는다!”
아나키즘적 코뮌주의자와 슈티르너의 관계
상대적으로 최근까지 슈티르너에게 영향을 받은 아나키스트들은 코뮌주의자가 아니었다. 미국에서 에고이즘의 가장 유명한 성원인 벤자민 터커와 그 동지들은 개인주의적 아나키스트 잡지 「자유」를 중심으로 연계했다. 실제로, 터커는 슈티르너의 책의 첫 번째 영어판 출판을 주동했다. 하지만, 그는 주류 아나키즘 전통에 입각한 사상가들에게도 큰 영향을 주었다. 1940년대에, 글래스고 아나키스트 그룹의 아나키즘적 조합주의자들은 슈티르너의 사상을 그 조직의 근간에 두었다. 그들은 슈티르너의 에고이스트 동맹에 관한 생각을 산업을 자유롭게 조직하는 방법으로 받아들였고, 이를 통해 조합주의를 “에고이즘의 응용”이라 설명했다. 아나키즘적 코뮌주의 활동가이자 만화가인 도날드 룸은 그 그룹의 구성원들에게 슈티르너를 소개받은 이후 의식적 에고이스트가 되었다. 엠마 골드만의 아나키즘은 슈티르너나 니체와 같은 사상가들로부터 영향을 받았다. 그녀의 책 『아나키즘과 다른 에세이들』[1] 서문에서, 엠마는 슈티르너의 철학은 “위대한 사회적 가능성을 포함하고 있다”고 밝힌다. 이후 슈티르너에 대해 비판적으로 변한 머레이 북친은, 어렸을 당시 “슈티르너의 개별성에 관한 유토피아적 시야는 점점 탈개인화되어가는 세상에서 개성 확립의 새로운 출발점이 되었다”고 쓴 바 있다.
분명하게, 사회에 근거한 아나키스트들도 슈티르너의 사상에 관심을 가져왔다. 그리고 오늘날에도 그러하다. 혁명가들조차 개별성의 적들 사이에서 길을 잃고 자기희생을 부르짖고 있는 세상에서, 슈티르너의 비타협적 에고이즘은 신선한 한 숨과 같다. 많은 코뮌주의자들은 하느님 아버지, 하느님 국가, 하느님 기업을 부정하면서도, 그 자리에 하느님 공동체를 세워 넣고는 한다. 그리고 이것은 크로포트킨이 말하는 바, “그 이전 어느 것보다 무서운 신성이다.” 슈티르너에게 있어 이 모든 것은 망령이다.
코뮌주의적 에고이스트들은 인민, 대중, 또는 그 어떤 망령에도 복무하지 않는다. 그들은 그저 자신에게 복무한다. 그들 자신이 인민의 일부이고, 대중의 일부이기 때문이다. 우리들 자신이 행복하지 않은데, 어떻게 인류가 행복해질 수 있겠는가? 스스로 맑스주의적 슈티르너주의자라고 자처하는 ‘우리 스스로를 위한 베이 에어리어 그룹’은 “모든 혁명가는 자신에게만 의지할 수 있으며, 그래야 한다. 비이기적인 사람들은 언제나 그 충성을 다른 곳으로 옮겨갈 수 있다. 나아가, 가장 탐욕스러운 사람들이 그들 스스로의 혁명적 계획을 지킬 것임은 믿을 수 있다.”
국가와 자본의 권위를 파괴하지만, 도덕, 인간성, 권리, 이타성과 같은 고정된 개념들의 권위를 남기고자 한다면, 아나키스트들은 오직 반만을 달성하는 것이다. 에고이스트들에게 이러한 망령들은 더 끔찍하고, 더 가시적인 권위의 형태가 될 수 있는 망령이다. 이타주의는 우리 문명에 있어 그 무엇보다 치명적인 미신이다. 노동자들이 자본가를 배불리기 위해 매일 행하는 것이 이타적 행동이다. 여성이 남성을 “섬기기 위해 살아가는 것”이 이타적 행동이다. 이타주의의 범행은 끝이 없이 나열될 수 있으며, 의지적 에고이스트들에게 이타주의적 사회주의는 권위를 다른 권위로 변환시킬 뿐, 그것을 철폐하지는 못하는, 우스꽝스러운 소극笑劇에 불과하다. 에고이즘은 개인들이 어떠한 대가도 없이 죽어가는 것을 막고자 한다. 그리고 이 발상이 에고이즘적 코뮌주의자들의 반란과 수용에 대한 열망을 만들어낸다.
슈티르너의 망령에 대한 관점을 현대 사회의 가장 신성한 우상인 사적 소유에 대입하면, 이것은 거의 완전히 코뮌주의적이다. 얼마나 많은 개인들이 그들의 소유를 희생했고, 이 끔찍한 몰록이 얼마나 많은 삶을 망쳐놓았는가? 슈티르너는 사유재산에 관한 권리를 (그가 다른 일반적인 권리들에 대해 그러한 것처럼) 비웃었다. 슈티르너는 사적 소유는 그것을 확보하고 지킬 힘에 근거한다고 지적한다. 사유재산은 또 다른 망령에 지나지 않는다. 세상 전부가 에고이스트의 소유이거나 소유가 되기를 기다리고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다르게 말하자면, 코뮌주의적 에고이스트들은 삶을 총체적으로 수용하는 목적을 가진다. 슈티르너는 다음과 같은 훌륭한 문장을 통해 이를 시사한다. “나는 당신의 소유로부터 물러나지 않는다. 다만 나는 그것을 나의 소유라 바라본다. 나는 어떠한 것도 ‘존중’하지 않는다. 당신이 나의 소유물이라 부르는 것에 대해서도 똑같이 하도록 하라!”
또한 슈티르너는 노동의 분할이나 노동 그 자체와 같은 자본주의적 삶의 근본적 측면을 공격한다.
“모두가 스스로를 인간으로 구축하는 과정에 있어, 인간을 기계와 같은 노동량으로 격하한다. 모든 노동은 인간의 만족을 목적으로 가져야 한다. 그렇기에 인간은 노동의 주인이 되어야 하고, 그것을 총체적으로 행할 수 있어야 한다. 핀 공장에서 핀의 머리를 꽂기만 하는 노동자, 철사를 자르기만 하는 노동자에게 노동은 기계적이다. 그 노동자는 숙련되지 못한 채로 남고, 노동에 목적성을 가지지 못하고, 노동을 완성하지 못한다. 그 노동자는 다른 자의 손이 되어 이용될 뿐이다.”
슈티르너는 강제되고, 격하되고, 엄격한 자본주의적 노동이 아닌 인민이 에고이즘에 근거하여 참가하고 자기실현과 자기 즐거움을 확립할 수 있는 에고이스트적 노동을 제지한다. 에고이스트적 노동은 에고이스트 동맹을 통해 다른 에고이스트들과 함께 진행할 수 있지만, 각 구성원들은 의지적 에고이스트로 남아야 할 것이다. 슈티르너는 협동이 경쟁보다 더 만족스러울 수 있다는 것을 인지한다.
“쉼 없는 확보는 우리에게 숨을 쉴 시간을, 평온한 즐거움을 앗아간다. 우리는 우리의 소유로부터 즐거울 수 없다. 그렇기에 경쟁적이지 않고, 우리의 시간과 수고를 요구하지 않는 노동에 대한 합의는 언제나 도움이 된다.”
사회주의와 코뮌주의에 대한 주된 비판은, 슈티르너 당대의 사회주의와 코뮌주의가 개인을 무시했기에 성립한다. 이 이데올로기들은 추상적 사회에 인간의 소유권을 이양하고자 했다. 이는 어떠한 사람도 어떠한 것도 소유하지 못함을 의미한다. 권위주의적 사회주의는 자유경쟁(슈티르너는 이것이 자유로운 것이 아니라고 지적했다)의 문제를 치유하기 위해 모두로부터 모든 것을 외화한다. 이러한 종류의 코뮌주의는 코뮌(공동체)나 사회에 근거할 뿐, 슈티르너가 바란 바 동맹에 근거하지 않는다. 망령의 손에 소유를 이양하고 개인에게 아무 것도 남기지 않는 코뮌주의는 새로운 폭압 이상도 이하도 아니게 된다. 아나키즘적 코뮌주의는 이러한 에고이스트적 시야를 바탕으로, 코뮌주의가 코뮌 그 자체를 위한 것이 아니라, 모든 유일한 개별자들의 자기 즐거움과 자기실현의 수단임을 인지하여야 한다.
슈티르너의 에고이스트 동맹을 이해하는 것은 그의 사상을 반란적으로 이해하고, 주류 아나키스트의 혁명에 대한 관점과 연관 짓는 데 중요한 일이다. 슈티르너는 혁명을 거부하고, 반란을 선호한다. “혁명은 새로운 질서를 추구한다. 반란은 더 이상 질서정연하지 않을 것이며, 스스로 질서를 만들겠다는, 제도에 희망을 걸지 않겠다는 우리의 선언이다. 하지만 슈티르너는 집단행동의 해방적 가능성과 각 에고이스트의 개인적 반란을 묶어낼 필요를 인정한다. 슈티르너는 파업 행동의 가치에 대해 다음과 같이 언급한다.
“노동자들의 손에는 가장 놀라운 힘이 쥐어져 있다. 그리고 만약 그들이 그것을 정확히 인지하고 사용한다면, 무엇도 그들을 이길 수 없다. 그들은 단지 일하는 것을 멈추고, 노동의 생산물을 자신의 것이라 선언하고, 즐기면 된다. 이것이 노동쟁의의 관점이다. 국가는 노동의 예속에 의존한다. 노동자들이 자유로워진다면, 국가는 사라질 것이다.”
슈티르너는 에고이스트들이 단결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이 단결은 감상적 공감이나 오도된 도덕성 따위의 목적에서 비롯하는 것이 아니라 에고이스트들이 다른 온전히 실현된 개인들로부터 오는 즐거움을 누리기 위함에서 비롯해야 한다고 말한다. 참된 에고이스트적 개인은 에고이즘의 일반화로부터 지극한 즐거움을 누릴 수 있다. 공통된 이해관계를 가진 에고이스트간의 단결은, 그리고 모든 착취당하고 억압된 사람들의 개인적 이해관계에 기초한 단결은 이 억압을 끝낼 것이다. 의지적 에고이스트들에게 다른 아나키스트들이 이른 것처럼 사회혁명은 개인적 반란의 거대한 총체로써, 슈티르너가 이르는 바, 에고이스트 동맹이 영속적으로 “거대하고, 쉼없고, 당당하고, 무의식적이자, 자랑스러운 범죄”를 범하는 것이다. 반란의 범죄를, 수용의 범죄를, 혁명의 범죄를!
“먼 거리에서 천둥이 우르릉 거릴 때, 하늘이 조용해지고 우울해지는 것이 보이지 않는가?”
추천 도서
막스 슈티르너의 『유일자와 그 소유』. 슈티르너의 유일한 책이자 대표작. 불행하게도 아직까지 스테픈 T. 브링턴(Stephen T. Byington’s)이 번역한 단 하나의 영역본만을 읽을 수 있다. 울피 랜드스트라이커(Wolfi Landstreicher)는 가까운 시일 내 선보일 새 번역본 작업을 진행 중이다.
막스 슈티르너의 〈슈티르너의 비평가들Stirner’s Critics〉. 이 에세이에서 슈티르너(전반적으로 제3인칭으로 지칭한다)는 그의 철학을 일부 잘못 해석한 부분을 명확히 한다.
막스 슈티르너의 〈우리 교육의 잘못된 원칙The False Principle of Our Education〉. 『유일자와 그 소유』가 출간되기 전에 쓰인 이 기사에서 슈티르너는 사심 없는 학자를 배출하기 위한 귀족적 교육 방식의 휴머니즘과 유용한 시민을 배출하기 위한 민주적 사상파의 현실주의를 동시에 비판한다. 슈티르너는 후자를 편애하는 한편 교육의 목표는 대신 자유롭고 자기 창조적인 개인들을 양성하는 것이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엠마 골드만의 〈개인, 사회 그리고 국가The Individual, Society, and the State〉. 골드만의 가장 “슈티르너스러운” 에세이.
엠마 골드만의 〈도덕의 희생자Victims of Morality〉. 이 에세이에서 골드만은 도덕의 망령을 “성장에 해롭기 때문에 사람들의 마음과 마음에 활력을 주고 마비시키는” 거짓말이라고 공격한다.
“우리 스스로를 위한 베이 에어리어 그룹”의 『탐욕의 권리: 절대적인 모든 것을 요구하는 실용적 필요성에 관한 논문The Right to be Greedy: Theses on the Practical Necessity of Demanding Absolutely Everything』. 슈티르너와 마르크스의 혼합에 영감을 받은 짧은 활동 기간의 상황주의자적 그룹이다. 그룹은 “그 모든 의미에서 탐욕은 코뮌주의 사회의 유일한 기반이다. 결국 탐욕의 현재 형태는 탐욕이 충분하지 않은 것으로 밝혀졌기 때문에 사라지게 된다”고 주장한다.
“우리 스스로를 위한 베이 에어리어 그룹”의 『지능의 최소 정의The Minimum Definition of Intelligence』. 스스로의 비판적 자기 이론의 구성에 관한 논문과 결합 된 이데올로기와 고정 사상에 대한 비판이다.
오스카 와일드(Oscar Wilde)의 『사회주의 하에서의 인간의 영혼The Soul of Man [sic] Under Socialism』. 이 아름다운 에세이는 자유 공산주의의 가장 웅변적인 에고이스트적 방어책 중 하나이다. 와일드가 실제로 슈티르너를 읽었는지는 확실하지 않지만 그는 독일어를 읽을 수 있었고, 이 글과 『유일자와 그 소유』 사이의 문체의 유사성은 그것을 읽었을 가능성이 있는 것처럼 보인다. 어쨌든 이 아나르코 멋쟁이의 글은 진지한 에고이즘 학습자에게 귀중한 것이다.
존 F. 웰시(John F. Welsh)의 『막스 슈티르너의 변증법적 에고이즘 : 새로운 해석Max Stirner’s Dialectical Egoism: A New Interpretation』. 영어로 제공되는 슈티르너의 생각에 대한 가장 철저하고 일관된 탐구이다. 슈티르너의 철학 탐구, 사상가 벤자민 터커, 제임스 L. 워커 및 도라 마르스덴에 대한 그의 영향 및 슈티르너와 니체의 관계에 대한 조사를 다룬다.
[1] 국내에는 『저주받은 아나키즘』으로 출판됨.-역자 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