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로우
아나키즘과 그리스도교
“그리스도교 세계Christendom는 인류가 다시 네 발로 걷게 만들려는 노력이다. 또한 그리스도교 신앙을 없애기 위한 노력이자, 이것이 그리스도교라고 주장하면서 그것을 엉뚱하게 만들려는 노력이다. 그리스도교 세계의 그리스도교 신앙에서 십자가는 아이들의 장난감 말이나 나팔처럼 우스꽝스러운 것이 되어버렸다.”(키에르케고르)
정통 그리스도교의 의견에 따르면, 그리스도교의 교의는 질서, 권위, 국가 권력과 동의어다. 교회의 역사를 굉장히 가볍게 바라보기만 하더라도, 로마의 제국주의자, 르네상스 유럽의 전제주의자, 러시아의 스탈린주의자, 미국의 “민주주의자”들까지, 다양한 정치적 굴종의 체계를 확인할 수 있다. 그리스도교가 단지 권위를 지지하는 것 뿐 아니라, 권위의 존재를 전제하고 있음은 분명하다. 칼뱅(John Calvin)에게 있어서는 가장 잔혹한 폭군도 권위의 부재보다는 나은 상태였다. 루터(Martin Luther)는 농민반란에 대한 유혈진압을 축복한 것으로 유명하다. 그리스도교와 권위와 명령의 폐지를 추구하는 아나키즘 사이에서 그 어떤 연관성도 발견하지 못하는 것은 당연해 보인다. 레프 톨스토이(Leo Tolstoy)는 그의 그리스도교 아나키즘을 상술하면서, “나의 노력에 대한 암묵적이지만 꾸준한 음모론이 돈다”는 불평을 하였다. 그럼에도 그리스도교가 창시된 순간부터 세속적 권위와 교회의 권위 모두에 반대하는 조용한 흐름은 존재했다. 이 흐름은 권력의 남용에 대한 우연한 시위로 그치지 않고, 필연적으로 아나키적이었다. 그렇기에 내가 이 글을 쓰는 목적은 국가 권력의 윤리와 복음의 윤리 사이의 급진적 비호환성을 드러내고자함이다. 이것은 그리스도교에 관한 사회학을 건설하려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교의 사회경제학적 차원을 분리시켜 분석하고, 아나키즘만이 그리스도교 사상과 함께 할 수 있는 유일한 “반정치적 정치사상”임을 보여주고자 함이다. 성경적 교리와 역사상 다양하게 존재했던 그리스도교 아나키즘의 운동을 자세하게 보아야 할 것이다. 우선, 아나키즘에 관한 간략한 정의를 해보도록 하자.
기본적으로 아나키즘은 모든 형태의 사회적 계급체계와 공고하고 잔혹한 구조적 권위에 대한 극단적 회의주의라 할 수 있다. 엠마 골드만(Emma Goldman)은 그녀의 에세이 〈아나키즘〉에서 아나키즘을 “모든 정부는 폭력 위에 세워졌고, 그렇기에 정부가 나쁘고 해로울 뿐 아니라 불필요함을 말하는 이론”이라 정의한다. 하지만 아나키는 이것보다 더 광범위하다. 아나키즘은 권력의 본성이 필연적으로 악질이며, 모든 문화적, 경제적, 사회적, 정치적 권위의 억압적 형태는 폭력이나 벌칙의 협박으로 복종을 유지한다고 바라본다. 루돌프 로커(Rudolf Rocker)가 우아하게 설명한 것처럼, “권력은 파괴적으로밖에 작용하지 않는다. 모든 삶의 발현을 늘 법을 이용해 강제로 구속하고 있다. 그 지적 표현 형태는 생명 없는 도그마이며, 그 물리적 형태는 짐승 같은 무력이다. 그리고 그 과제를 알지 못하게 함으로써 지원자에 대해서도 무지의 낙인을 찍고, 원래는 최선의 재능을 부여받았다 할지라도 지원자를 바보에 짐승처럼 교묘하게 가로챈다. 모든 일을 기계적 질서에 억지로 따르게 하고자 늘 분투하는 사람은 적어도 자기 자신을 일개 기계로 만들며, 모든 인간적 감정을 잃어버리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아나키즘은 사회적 권위체계의 철폐가 평등과 개인적 자유의 사회를 확립하는데 필수적이라는 입장을 고수한다. 이러한 사회를 어떻게 건설할 것인가에 관한 이론은 복잡하고 다양하지만, 그것을 묶을 수 있는 가장 공통된 요소는 국가 권위주의를 자유로운 개인들의 비통치적 협동으로 대체하는 것이다. 일반적으로 이러한 대체는 자치적이고, 탈중심적이며, 직접민주주의적인 총회에 기초한 공동체와 그 연방의 형태를 가진다. 이 풀뿌리 공동체는 자기조력, 상호부조, 자발적 협동의 기능을 할 것이다. 그리고 연방을 통해 지역의 다른 자치 공동체들과 협동적으로, 초지역적으로, 세계적으로 연결될 것이다. 본질적으로, 주요 생산수단의 사회화와 경제적 자주경영이 핵심적 과제가 된다. 아나키즘의 목적은 현대 국가의 피라미드형 계급체계를 유기적 구체로 바꾸어내는 것이고, 권력을 진정으로 해소하는 것이다. 이것들이 아나키스트 사상의 근본적 원칙으로서 이 글의 핵심 논제가 될 것이다.
이제 동전의 뒷면을 한 번 보자. 이 논의는 신약과 구약에 담긴 성경적 자료에 관한 (아주) 제한적인 분석으로 시작한다. 사무엘 상을 보면 우리는 이스라엘의 사회구조가 전통적으로 아나키스트적이었음을 알 수 있다. 이집트로부터 해방된 이후, 이스라엘에는 부족공clan princes도, 귀족 가문도 모두 파괴되거나 사라졌다. 이스라엘의 신은 그 홀로 유일하게 이스라엘의 가장 높은 자라고 선언했다. 하지만 이것은 신정이 아니었다. 야훼는 지상에 어떠한 대리인도 보내지 않았고, 부족 총회가 공동체적 결정을 만들었다. 재난의 시기에 야훼는 “판관”을 임명하여 이스라엘을 이끌게 하였지만 이들은 영구적인 권위를 가지지 못했고, 그 역할을 다한 후에는 스스로 해산하여 인민에 합류했다. 이스라엘인들은 신의 뜻에 반하여 전제군주정을 결정했다. 그들은 효율성을 위해, 다른 지배적 문명과 발맞추어 왕을 원했다. 야훼는 그들의 요구를 수용하였지만 그들에게 정치권력의 본성에 대한 굉장히 정확한 경고를 남겼다.
“왕이 너희를 어떻게 다스릴 것인지 알려주겠다. 그는 너희 아들들을 데려다가 병거대나 기마대의 일을 시키고 병거 앞에서 달리게 할 것이다. 천인대장이나 오십인대장을 시키기도 하고, 그의 밭을 갈거나 추수를 하게 할 것이며 보병의 무기와 기병의 장비를 만들게도 할 것이다. 또 너희 딸들을 데려다가 향료를 만들게도 하고 요리나 과자를 굽는 일도 시킬 것이다. 너희의 밭과 포도원과 올리브 밭에서 좋은 것을 빼앗아 자기 신하들에게 줄 것이며, 곡식과 포도에서도 십분의 일 세를 거두어 자기의 내시와 신하들에게 줄 것이다. 너희의 남종 여종을 데려다가 일을 시키고 좋은 소와 나귀를 끌어다가 부려먹고 양떼에서도 십분의 일 세를 거두어갈 것이며 너희들마저 종으로 삼으리라.”(사무엘 상 8:11-17)
자크 엘륄(Jacques Ellul)이 쓴 것처럼, 이 구절은 세 가지 메시지로 압축된다. “⑴ 정치적 권력은 신에 대한 불신과 거부에서 비롯한다. ⑵ 정치적 권력은 언제나 독재적이고 과도하며, 불공정하다. ⑶ 이스라엘의 정치권력은 주변 왕국들에 대한 모방과 순응으로부터 확립되었다.”(『그리스도교와 마르크스주의L'idéologie marxiste chrétienne』) 나는 이것에 더하여 사회적 계급체계는 그 존재 자체로 착취와 계급분화와 불가분하다는 것을 말하고 싶다.
이는 성경 전체에서 일반적으로 나타나는 정치적 권력에 대한 정통성 부인이다. 베르나드 엘러(Vernard Eller)는 구약에서 전제정이 어떻게 대변되는지를 지적한다. 백성을 배불리고, 전쟁을 수행하며, 통치를 강화하는 등의 명군은 일관되게 우상 숭배적이며 불공정하고 폭군적인 학살자로 등장한다. 반면, 왕권이 약하고, 행정력이 흔들리며, 전쟁에 지고 백성의 부를 상실한 왕들이 위대한 왕이라 정의된다. 엘러는 이에 대하여 “이는 장기적으로 유일하게 성립 가능한 권력은 가장 약한 것이라는 의미이거나, 혹은 신실한 사람은 나쁜 정치적 지도자가 된다는 의미일 것이다.”라고 말한다. 이에 더하여 모든 왕은 그리스도교 신화에서 가장 카리스마적 존재인 예언자prophet와 함께 했다. 예언자들은 언제나 현존 권위에 대한 가장 가혹한 비판자였으며, 언제나 그 권위에 의한 탄압을 겪었다.(이사야, 에제키엘, 다니엘, 엘리야) 이 모든 것들은 반전제주의적이고 반국가주의적인 감정의 현현이라 하겠다.
신약으로 들어가면 우리는 두 가지 대조적인 경향을 볼 수 있다. 첫 번째 경향성은 표면적으로 정치적 권력을 지지한다. 바울로의 악명 높은 “하느님께서 주시지 않은 권위는 하나도 없고 세상의 모든 권위는 다 하느님께서 세워주신 것이기 때문입니다.”(로마인들에게 보낸 편지 13:1)를 보라. 다른 경향성은 권력에 대해 더 확실하고 격렬한 적대심을 보여준다. 이 경향성은 주로 복음서와 계시록에서 확연히 드러난다. 콘스탄티누스 이후 성서해석학자들은 국가에 관한 신학에 있어 성경의 몇몇 독립적 구절들, 이를테면 『로마인들에게 보낸 편지』 13장이나 빌라도 앞에서의 예수의 재판 등을 들어 계급체계적 지배의 신성한 합법성을 정당화하고자 하였다. 이러한 요인들을 고려하기 전에, 예수 스스로가 가지고 있던 권력에 대한 급진적으로 부정적인 태도를 바라보는 것은 유용할 것이다.
복음서는 예수가 공생활을 시작하였을 때 사탄의 유혹에 관하여 이야기한다. 악마는 예수를 세 번 유혹하였고, 그 중 마지막 유혹은 유의미하다. 악마는 다시 아주 높은 산으로 예수를 데리고 가서 세상의 모든 나라와 그 화려한 모습을 보여 주며 “당신이 내 앞에 절하면 이 모든 것을 당신에게 주겠소”하고 말하였다.(마태오의 복음서 4:8-9)
혹은 “저 모든 권세와 영광을 당신에게 주겠소. 저것은 내가 받은 것이니 누구에게나 내가 주고 싶은 사람에게 줄 수 있소. 만일 당신이 내 앞에 엎드려 절만 하면 모두가 당신의 것이 될 것이오.”(루가의 복음서 4:6-7) 엘륄이 그의 분석에서 말한 것처럼, 복음서들은 아마도 그리스 출신 그리스도교 공동체를 목표로 적혔을 것이기에, 복음서에서 정치적 권력이라고 하면 그것은 일반적 의미이지 로마나 헤로데 왕조를 특정하는 것은 아니다. 성경은 문자적으로 명확하게 정치적 왕국은 사탄의 것이며, 예수의 직접적인 추종자들과 최초의 그리스도인들에게 정치적 기구(오늘날 우리가 국가라 부르는 것)는 악마에게 속한 것으로써, 권력을 쥔 자들은 악마로부터 그 권력을 받은 것이었다.
정치적 권위에 관한 예수의 다른 발언은 『마태오의 복음서』 20:20-25에서 찾아볼 수 있다. 사도들이 예수와 함께 예루살렘으로 갔을 때, 몇몇 이들은 예수가 권력을 확보하고 유대인의 왕국을 건설해야 한다고 믿었다. 제배대오라는 남자의 부인이 그녀의 두 아들 야고보와 요한을 예수에게 보이고는 그 둘이 천국에서 예수의 오른쪽과 왼쪽에 앉게 해달라고 요청했다. 이 요청은 결국 야고보와 요한이 지도적이고 권위적인 위치로 승진하게 해달라는 요청이었다. 예수는 먼저 그 사도들에게 그들이 이해하지 못한다 말하고는,
“너희도 알다시피 세상에서는 통치자들이 백성을 강제로 지배하고 높은 사람들이 백성을 권력으로 내리누른다. 그러나 너희는 그래서는 안 된다. 너희 사이에서 높은 사람이 되고자 하는 사람은 남을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하고 으뜸이 되고자 하는 사람은 종이 되어야 한다. 사실은 사람의 아들도 섬김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라 섬기러 왔고 많은 사람을 위하여 목숨을 바쳐 몸값을 치르러 온 것이다.”(마태오 20:25-28)
위에 언급한 로커의 인용과 비교해보라. 큰 차이가 없음을 알 수 있다. 모든 정치적 체제는 그 신민들을 찍어 누르며, 압제가 아닌 정치적 권력은 존재할 수 없다.
물론 예수의 정치적 권력에 대한 말에 대해서는 단지 기초적 합의만이 존재할 뿐이다. 성경에는 비슷할 정도로 강력한 권력의 부정 요소들이 있다. 특히 로마 법정에서의 재판 부분이 그러하다. 이 부분에서 우리는 로마 국가와 신전 사제들에 관한 조롱을 읽을 수 있다. 네 개의 복음서에는 다소간 차이가 있지만, 엘륄은 이에 대해 “예수가 침묵하건, 권력자들을 비난하건, 그들을 도발하건 간에, 예수는 신의 권위 외에 어떠한 권위도 인정하기를 거부했다.”고 적는다. 카를 바르트(Karl Barth)와 같은 신학자들은 예수가 판결에 저항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가 그 판결을 합법적이라 받아들였다고 말하면서 이로부터 국가권력의 기저를 발견한다. 이러한 이해는 예수가 말한 “네가 하늘에서 권한을 받지 않았다면 나를 어떻게도 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므로 나를 너에게 넘겨 준 사람의 죄가 더 크다.”(요한 19:11)에 근거한다. 우리가 이 구절을 다른 성경 구절과 완전히 분리시켜 보지 않는 이상, 이 구절에서 예수가 말하는 것은 빌라도가 그 권력을 사탄으로부터 받았지 신으로부터 받지 않았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할 것이다. 나아가, 이러한 해석이야말로 예수가 이전에 말한 바, 그의 재판에 “어둠이 판을 치”고 있다(루가 22;52)는 것과 합치한다. 무엇보다 정치적이거나 종교적인 권위와 마주한 예수에 관한 모든 문서는 미묘한 조롱, 역설, 비협조, 무심함과 도전적인 태도를 보여준다. 예수는 분명히 게릴라는 아니었다. 하지만 그는 비폭력 저항을 실천하는 전적으로 톨스토이적Tolstoian 아나키스트였다.
성경은 꾸준히 정치에 대해 거부한다. 그리고 이것은 『요한의 묵시록』에서 가장 폭력적으로 표현된다. 묵시록은 다양한 해석의 여지를 담고 있는 논쟁적인 책이지만, 그리스도교 신학자들은 묵시록이 종말에 대한 예언적 표현인가를 두고 다소간의 다툼이 있다. 굳이 분석을 덧붙이지 않더라도, 계시록이 정치권력의 본질에 의한 인류의 불가피한 자기 파괴를 다루고 있음은 분명하다. 이는 검을 든 붉은 말의 기수로(그는 전쟁을 일으키고, 권력을 행사하며, 이로써 사람들이 서로 죽고 죽이게 한다.), 정치권력과 경제 권력을 대변하는 바빌론의 몰락으로 드러난다.
그러므로 우리는 성경이 정치권력을 부정하는 체계를 가지고 있음을, 정치권력의 유효성과 정당성의 결여를 증명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우리는 이러한 맥락상에서 로마서 13상과 같은 일부 독립적 구절을, 그리스도교 국가들이 꾸준히 지배체계 외 정치적 지배의 기저로 구체화해온 구절들을 바라보아야 한다.
“하느님께서 주시지 않은 권위는 하나도 없고 세상의 모든 권위는 다 하느님께서 세워주신 것이기 때문입니다.”는 말은 정치적 권위에 관한 결정적인 말로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그 진정한 의미로 받아들여야 한다. 이 말은 그리스도인들이 지배적 권력에 의해 폭력적으로 억압되던 당시 사랑을 행할 방식을 찾는 것이었다.
그렇기에 필연적으로 신약과 구약은 모두 꾸준히 정치권력을 거부한다. 어떠한 권력도 스스로 정당성을 가질 수 없다. 그리고 그 성격상, 정치적 권력은 언제나 신의 윤리와 모순될 수밖에 없다. 그렇기에 그리스도인들은 언제나 정치권력을 거부하고, 도전하며, 반대해야 마땅하다. 그리스도교 국가들이 항상 이 가르침을 뒤집고, 복무와 권력 사이의 차이를 모호하게 만들며, 복음과 국가 사이의 급진적 적대敵對를 거부하여 왔음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그럼에도 교회의 역사를 통틀어, 흉포한 권위의 비非정당성을 급진적으로 재확인하였기에 아나키스트적인 운동들은 산발적으로 일어나 왔다. 머레이 북친(Murray Bookchin)은 아나키스트 사상의 원천은 그리스도교에서 찾을 수 있다고 인정한다. 그리고 조지 우드콕(George Woodcock)은 아나키즘의 뿌리를 14세기의 이단적 천년왕국론자heretical millenarian Christian sects로 상정한다.
천년왕국 운동은 개혁기에 발발하여, 봉건제가 해체되고 가장 낮은 계급이 농노제의 시행에 대해 점점 더 반란적인 상황이 되어가던 시기의 유럽에 퍼져나갔다. 천년왕국론적 그리스도교는 넓게 보자면 국가와 교회의 권력에 직접적으로 도전하고, 종말론적apocalyptic 공동체에 기초한 사회를 만들고자 분투한 종말론적 공동체주의 운동이라고 할 수 있다. 케네스 렉스로스(Kenneth Rexroth)는 “우리는 이 거대한 영적 파도를 무언가 새로운 것이 아니라, 옛것의 재발견이라 생각해야 한다. 교조적인 구성체도, 신비주의적 신학도, 교황과 교회에 맞서 투쟁했다는 선정적 역사로써도 아니라, 삶의 방식으로 받아들여야 한다”고 말한다. 이 분파의 뿌리는 성 프란치스코(Saint Francis)나 존 볼(John Ball)과 같은 개인들의 사상으로부터, 자유정신의 형제회The Free Spirit Brethren나 후스 전쟁Hussite Wars에서부터 비롯한다. 하지만 이 글에서 나는 특히 아나키스트적인 세 가지 운동에 집중하고자 한다. 재세례파the Anabaptists 운동, 디거스Diggers 운동, 두호보르파Doukhobors 운동이 그것이다.
16세기 초, 재세례파 공동체의 소규모 비밀집회소는 북쪽과 서쪽 독일 전역에 퍼져나갔다. 재세례파는 국정교회(國定敎會, the established Church)만이 세례 성사와 성변화(聖變化, transubstantiation)를 주관할 수 있다는 권위에 대한 공격이었다. 1534년, 뮌스터 시는 재세례파 코뮌이 되었다. 로마 가톨릭 교인들과 루터교인들Lutherans은 도시에서 추방되었고, 그 자리는 봉건영지에서 가해지는 처벌로부터 도망쳐 나온 재세례파 난민들로 채워졌다. 뮌스터 시의 경제구조는 코뮌주의적이었다. 생산물의 공동체 소유가 실현되었고, 현금, 보석, 귀금속으로 구성된 자산은 공동 자산이 되었다. 생산의 코뮌화 역시 도입되었다. 아나키스트적 “선물 경제gift economy”를 통해 생활에 필수적인 노동을 하는 길드 구성원들은 임금을 받지 않고 일하고, 그 생산물을 공동자산에 편입시킨 후, 그 공동체 자산에서 자신이 필요로 하는 만큼을 자유롭게 가져갈 수 있었다. 하지만 자칭 뮌스터의 지도자 얀 보켈슨(Jan Bockelson)은 형제단 내의 평등을 설파했고, 코뮌은 빠르게 천년왕국론적 신학을 가지게 되었다. 보켈슨은 엄격한 법령들을 시행했고, 참수형에 대한 성애적 집착을 보여주었다. 뮌스터는 결국 봉건 영주들의 통합군에 의해 무너졌고, 대부분의 인민들이 학살당했다. 뮌스터의 내부 권력구조가 권위주의적이었지만, 그들의 교회와 국가의 권위에 대한 관계는 의심의 여지없이 아나키스트적이었다. 뮌스터의 목표는 완전한 정치적, 경제적, 신앙적 자치였다. 그리고 이것이 재세례파 운동이 강조한 윤리였다.
뮌스터 이후 재세례파 운동은 크게 셋으로 나뉘었다. 충성 서약도, 관청도, 징병도 거부하였지만 코뮌주의를 받아들이지 않은 평화주의자들, 코뮌주의를 받아들인 평화주의자들, 그리고 끝없는 탄압 끝에 사실상 멸종한 투사적 천년왕국주의자들. 뮌스터 이후 수년간 재세례파는 사냥당하는 방랑자들이었다. 그리고 그들이 어떠한 형태로도 공동체주의를 실현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었다. 후터파Hutterite와 메노파Mennonite 집단들은 모라비아Moravia에서 그들을 불쌍히 여긴 귀족들의 보호를 받을 수 있었고, 슬로바키아와 보헤미아에서 외곽지의 주거구역을 유지할 수 있었다. 당대의 기준에 비하면 그 공동체들은 놀라울 정도로 평등주의적인 방식으로 조직되었고, 국가와 교회를 “평범한 행정체가 역겨울 정도로 성장한 것”이라 보았다. 역사적으로 가장 오래 생존한 공동체주의 사회인 아우스터리츠Austerlitz에서는 생산과 소비의 영역에서 코뮌주의가 성공적으로 작동했다. 아우스트러츠 공동체는 스스로의 학교를 만들었고(물론 고등교육은 거부되었지만), 보육과 공중보건을 사회화하였으며, 그들의 생산과 분배의 체계에서 상당한 잉여자원을 만들었다. 제국과 교회의 헤게모니에 대한 재세례파의 부정은 궁극적으로 그들이 1622년 모라비아에서 추방되는 결과를 낳았다. 그리고 그들은 동유럽과 러시아 전역으로 흩어졌다. 또한 그들 중 다수는 미국과 캐나다로 이민을 떠났고, 퀘이커the Quakers, 메노파, 아미쉬the Amish 공동체와 같이 일시적으로나마 아나르코 코뮌주의적 공동체들을 만들었다.
이 운동들은 경제적, 정치적 거부를 하나로 묶어내었다는 장기적으로 중요한 결과를 가지고 있었다. 그리고 이 태도는 영국 내전기의 아나키즘적 그리스도교 운동과 비슷하다. 이러한 계급투쟁의 조건에서 제5왕국파the Fifth Monarchy Men, 수평파the Levellers, 소요파the Ranters 등의 급진적 집단들이, 무엇보다도 진정한 최초의 전기proto 아나키스트라 할 수 있는 디거스가 등장하게 된다. 디거스는 19세기의 아나키스트들처럼 정치적, 경제적 권력을 인식하였고, 정의의 실현을 위해서는 정치 혁명이 아닌 사회혁명이 필요하다고 믿었다. 디거스의 지도자였던 제라드 윈스탠리(Gerrard Winstanley)는 마치 톨스토이가 『신의 나라는 네 안에 있다The Kingdom of God Is Within You』에서 그러한 것처럼, 하느님의 말씀과 이성의 원칙을 인지했다. 정확하게는, 톨스토이가 윈스탠리로부터 상당히 많은 영감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
“이성은 어디에 머무는가? 이성은 모든 창조물 안에, 본질적으로, 특히 인간 안에 더, 내재되어 있다. 그렇기에 인간은 이성적 창조물이라 불린다. 이것이 인간 안에 있는 하느님의 왕국이다. 이성이 인간을 이끌게 두면 그는 다른 창조물의 영역을 침범하지 않고, 그가 대접받고 싶은 대로 타인을 대접할 것이다. 인간의 이성이 그에게, ‘오늘 너의 이웃이 굶주리고 헐벗지 않았는가? 그렇다면 그대는 그를 먹이고 옷 입힐지어다. 네가 내일 그렇게 될 수 있고, 그러면 그가 너를 도울 것이다.’라고 말할 것이기 때문이다.”
윈스탠리에게 사유재산(특히 농업경제에서 “주된 생산수단”이었던 토지)는 모든 부의 원천이었으며, 그렇기에 “모든 전쟁, 학살, 도둑질, 예속적 법령의 원인으로써 인간을 고통 받게 하는 것”이었다. 사유재산은 인류를, 민족을 분할하고 빈번한 전쟁의 조건을 만들어 이로써 국가가 번창하게 한다. 윈스탠리는 단지 주인과 치안판사 뿐 아니라 남편과 아버지들 역시 “그 안에 압제적 주인을 가지고 있어, 그들 아래에 있는 자(부인과 자식)들 역시 자유의 축복을 나눌 동등한 특권이 있다는 것을 알지 못한다.”고 말한다. 그는 그리스도를 보편적 자유라 불렀고, 그의 가르침에 근거한 자유로운 사회의 상을 그려냈다. 윈스탠리는 고대 이스라엘의 정치체제와 같이 국가가 오직 최종심의 법정 정도로만 국한되는 사회를 그린 것으로 보인다. 윈스탠리의 말 일부는 위대한 19세기 아나키스트들과 그들이 그린 사회적 자유와 유사한 점이 많다.
“이 보편적 평등이 모든 인간 사이에서 떠오를 때, 그 누구도 어떠한 창조물이 자신의 것이라거나 너의 것이라 말하지 못할 것이다. 이것이 나의 일이고 저것이 너의 일이라고 말하지 못할 것이다. 모두는 자신의 손으로 땅을 경작하고 가축을 길러야 할 것이다. 그리고 토지의 축복은 모두의 것이 되어야 한다. 누군가가 옥수수나 가축을 필요로 한다면, 그는 그것을 아무 창고에서나 가질 수 있어야 한다. 판매나 구매는 없어야 하고, 가격과 시장은 없어야 한다. 그리고 모두는 필요한 것을 만드는데 즐겁게 손을 보태야 할 것이고, 서로를 도와야 할 것이다. 다른 누군가를 지배할 수는 없어야 하고, 모든 이는 스스로의 주인이자, 동시에 올바름의, 이성의, 평등의 법칙을 따라야 한다. 이 원칙은 곧 주님이고, 모든 이의 안에 머물며, 그를 이끌어야 한다.”
윈스탠리는 극단적 평화주의자였고, 평화로운 예시를 통해 사회를 변혁할 수 있다고 믿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는 만약 디거스가 평등한 공동체를 만들고 공유지와 황무지를 경작할 수 있다면, 사랑의 공동체는 자연스럽게 빈자와 부자를 아울러 모든 영국 사회를 관통할 수 있을 것이라 믿었다. 디거스는 직접 행동의 한 종류를 사용했다. 그들은 남부 잉글랜드의 미사용지를 점거하고 그곳에서 자급자족을 위한 농사를 시작했다. 지역의 지주들과 국가 권위는 이 자급자족적 소규모 집단에 대항하는 동맹을 체결했다. 그리고 디거스는 그들이 견딜 수 있는 한 오랫동안 소극적 저항을 실천했지만, 결국 격렬히 분산 당했다. 물론 이 운동은 당대에는 사소하고 중요하지 않은 사건이었지만, 윈스탠리의 저서에 담긴 박식함과 철학은 현대의 사회주의자들과 아나키스트들에게 영향을 주었다.
윈스탠리와 비슷한, 그리고 아마도 가장 영향력 있는 그리스도인 아나키즘적 코뮌주의자로서, 어떠한 대중주의 조직보다 더 영향력 있는 개인은 톨스토이다. 톨스토이의 그리스도교 아나키즘, 혹은 “비저항(비폭력 저항)”은 종교적 저항에 대한 러시아의 풍족한 역사의 일부로써, 정의와 (영적인) 아름다움, 선함, 보편적 가치에의 복무를 둘러싼 문화적이고 철학적인 전통에 근거하고 있다. 톨스토이는 모든 권력을 악이라고 받아들이면서, 모든 폭력에 대한 무조건적 거부라는 지점에 도달했다. 톨스토이는 국가와 법률이 폭력에 근거하고 있다고 믿었고, 그 권위를 부정했으며 모든 억압적 기구의 철폐가 사회의 구성원이 자유롭게 국가의 요구에 참여하기를 회피함으로써 이루어져야 한다고 믿었다. 톨스토이는 “본질적인 논쟁자”였고, 그의 국가 권위에 대한 거부는 예수의 말과 닿아있었다. “그리고 따라서 그리스도인은 다른 이의 의지를 대리할 수도 없고, 임시적인 인간의 법률에 복종하거나 그렇게 하기로 약조하거나 특정한 때에 특정한 것을 하는 것을 포기할 수도 없다.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교적 사랑의 법칙이 그에게 무엇을 요할지 알 수 없고, 오직 그 삶의 목적에만 복무해야 하기 때문이다. 만약 그리스도인이 인간의 법률에 무조건적으로 복종한다면, 그것은 신의 법칙이 스스로의 삶의 유일한 법칙이 아니라 자백하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그렇기에 톨스토이적 코뮌은 권력을 철폐하고 비억압적인 인간관계에 근거한 유기적 공동체를 건설하고자 한다. 일부 코뮌들은 성공적이었고, 수년간 지속되었다. 하지만 대부분은, 레트록스가 말했듯, “지주들이 그들의 토지를 코뮌에 주고, 그 보헤미아인 동료들을 도시로 받아들여, ‘그들의’ 농민들이 옛 사회의 자궁에서 새 사회를 건설하도록 강제한, 희극적이면서 동시에 비극적인 사건”이었고, 공교회와 차르 권위의 짧은 명령으로 순식간에 압제되었다.
당대의 러시아에서 적극적이었던 유사한 그룹은 원시주의자이자 아나키스트였던 두호보르파, 혹은 “영적인 싸움꾼들”이었다. 종교적으로 예카테리나 대제가 진행한 정교회 개혁에 반대했다. 하지만 두호보르파 운동은 1895년 그들이 징병을 거부했을 때 물리적으로 충격을 받았다. 비폭력은 그들의 철학에서 핵심적 요소를 차지했고, 그들은 차르와 정교회는 신의 눈에 올바르지 않다고 판단했다. 두호보르파는 톨스토이를 계승했고, 톨스토이의 저작들은 운동의 지적 발전에 중요한 역할을 차지하였으며, 두호보르파가 국가적 처벌을 피해 캐나다로 피난할 때, 톨스토이가 그 비용의 일부를 제공하기도 했다. 캐나다에서 두호보르파는 세 그룹으로 나뉘었다. 시민권의 획득과 사유재산의 소유를 인정하기로 결정한 독립파, 공동체주의자, 그리고 급진적인 “자유의 아들들Sons of Freedom”이 그것이었다. 공동체주의자들은 실질적 지도자 표트르 베레그린(Peter Veregin) 아래에서 놀라운 풍요의 한때를 보냈다. 그리고 그들의 공동체주의적 경제체계는 상당한 부를 창출했다. 이 공동체적 구조는 공황기를 거쳐 점차적으로 줄어들었으며, 이들은 왕에게의 충성맹세를 거부하였다는 이유로 끊임없이 재배치되었다.
두호보르파의 가장 급진적인 분파였던 “자유의 아들들”은 베레그린의 반국가적이고 채식주의적인 교리를 극단적으로 표출했다. 베레그린은 지상의 낙원은 오직 “원시적 조건으로, 아담과 이브가 잃어버린 영적 단계로” 돌아감으로써만 이루어질 것이라고 적었다. 베레그린은 러시아 농민의 전통적 신비주의에 깊게 빠져 있었고, 자유의 아들들의 나체주의와 방화범으로서의 명성은 오늘날의 두호보르파에게는 즐거운 이야깃거리가 아니다. 두호보르파는 더 이상 공동체적 구조에서 살아가지 않지만, 그들의 교회는 여전히 비계급체계적이고 반권위주의적으로 남아있다.
이처럼, 성경적 문구의 분석과 그리스도교 아나키즘의 사회학적 구현으로부터 우리는 그리스도교와 아나키즘이 단지 상호보완적일 뿐 아니라 합리주의적 아나키즘의 이론적 근간이 그리스도교적 반란의 역사에 그 뿌리를 두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자주 반복되는 경구인 “권력은 부패한다. 절대 권력은 절대 부패한다”는 말은 그리스도교와 아나키즘 모두의 중심적 안건이다. 이 문건의 목적은 화해를 만들어내고자 함이다. 하지만 나는 아나키즘이 가끔은 모든 종교를 광적으로 적대한다는 것을, 바쿠닌(Mikhail Bakunin)이 볼테르(Voltaire)의 언명을 뒤집어 말한 것처럼 “신이 존재한다면, 그를 철폐할 필요가 있다”고 본다는 것을 일부러 무시했다. 사실 많은 아나키스트들, 특히 초기 아나키스트들은 신을 모든 권위가 그 정당성의 원천으로 두는 우월한 존재라고 바라보았다. 그리고 개인이 신 안에서 스스로를 일으켜 세우지 않으면 그들은 여전히 노예일 것이라고 여겼다. 이것은 신성한 권위의 본성에 대한 또 다른 논의를 요할 것이다. 그러나 나는 자크 엘륄이 그의 저서 『그리스도교와 마르크스주의』를 통해 “신도 주인도 없다”와 “나는 전능하신 아버지 하느님을 믿는다”는 말 사이의 호환성을 충분히 다루었다고 생각한다. 이 글에서는 그리스도교는 역사적으로 국가를 인정하게끔 왜곡되어 왔고, 이러한 왜곡의 파괴적 결과물들이야말로 초기 아나키스트들이 공격한 것이라고 밝히는 것만으로도 충분할 것이라 보인다.
그리스도교 아나키즘과 과학적 아나키즘 사이의 지적 연결은 분명히 중대하게 존재한다. 인간 본성에 대한 그리스도교적 인식은 사회적 권력관계의 총체적 해소와 같은 아나키즘의 유토피아적 경향성의 균형추가 될 수 있을 것이다. 마찬가지로 과학적 아나키즘은 그리스도교가 정통교리에 빠져 사회 변혁을 거부하지 않게끔 지렛대가 될 수 있다. 하지만 이러한 변증법은 아나키즘이 그리스도교가 필연적으로 확고하고 공고한 정치권력 구조의 유지를 전제하지 않는다는 것을 인지하고, 그리스도교가 아나키즘이 유일하게 성경과 합치하는 정치적 입장임을 인지할 때에만 가능하다. 그럴 때에만 그리스도인들이 아나키스트들의 옆에 함께할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