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에르 조제프 프루동

경제적 모순들의 체계 혹은 빈곤의 철학 제1권

1846년

    서론

    제1장 경제학에 관해

      . 여러 사회의 경제에서 사실과 법의 대립

      . 이론들과 비판들의 미흡성

    제2장 가치에 관해

      . 효용가치와 교환가치의 대립

      . 가치의 구성 : 부의 정의

      . 가치들의 비례성 법칙의 응용

    제3장 경제적 진화 제1기노동의 분화

      . 분화 원리의 적대적 효과들

      . 진통제의 무효. 블랑키, 슈발리에, 뒤누아예, 로시, 파시 등

    제4장 제2기기계들

      . 기계의 역할, 자유와 관련해서

      . 기계들의 모순자본과 임금 제도의 기원

      . 기계의 재앙적인 영향에 맞선 방지책

    제5장 제3기경쟁

      . 경쟁의 필요성

      . 경쟁의 파괴하는 효과와 경쟁에 의한 자유의 파괴

      . 경쟁의 치료법들

    제6장 제4기독점

      . 독점의 필연성

      . 독점에 의해 유발된 노동의 재앙과 관념들의 타락

    제7장 제5기공안 기구 혹은 조세

      . 조세의 종합적 관념이 관념의 출발점과 발달

      . 조세의 이율배반

      . 조세의 재앙적이고 불가피한 결과들(생필품, 사치 단속법, 농촌 산업 경찰, 특허 증서, 상표권 등)

    제8장 모순의 법칙에서 인간과 신의 책임에 관해, 혹은 섭리 문제의 해결

      . 인간의 죄책타락 신화의 해설

      . 섭리 신화의 해설신의 퇴보

서론

이 새 논문들의 대상이 되는 주제에 들어가기 전에 하나의 가설, 의문의 여지없이 이상해 보이겠지만 그것 없이는 앞으로 나아가고 이해를 받는 것이 내게는 불가능한 하나의 가설을 고찰할 필요가 있다. 나는 신의 가설에 대해 말하고자 한다.

신을 가정하는 것은 그를 부정하는 것이라고 말할 것이다. 당신은 어째서 그를 긍정하지 않는가?

신성에 대한 믿음이 의심스러운 견해가 되었다면 이것이 내 잘못인가? 지고의 존재에 대한 단순한 의심이 이미 허약한 정신의 표상으로 주목된다면, 그리고 그것이 모든 철학적 유토피아 중에 세상이 더 이상 감내하지 않는 유일한 유토피아라면? 위선과 어리석음이 어디서나 이 거룩한 꼬리표 아래 숨겨져 있다면 이것이 내 잘못인가?

어떤 박사가 우주 안에서 미지의 힘이 항성들과 원자들을 이끌며 모든 기계장치를 움직인다고 상상한다면, 그에게 이 가정은 완전히 공연한 것으로서 자연스러운 것밖에 없다. 그것은 받아들여지고, 권장된다. 인력引力을 보라. 결코 입증하지는 못할, 그러면서도 발명자에게 영광이 되는 가설이다. 그러나 인간사의 흐름을 설명하기 위해 내가 상상할 수 있는 모든 조심성을 지닌 채 신의 개입을 가정한다면 나는 확실히 과학계에 심각성을 촉발할 것이고 가혹한 비평가들의 귀에 거슬릴 것이다. 그토록 우리의 진심은 섭리를 놀라울 만큼 불신해 왔고, 그토록 온갖 복장을 걸친 돌팔이들은 이 교리 혹은 이 허구를 매개로 수작을 떤다. 나는 우리 시대의 유신론자들을 보았고, 신성모독은 내 입술 위에 번져왔다. 나는 인민, 브리덴[1]이 신의 가장 좋은 벗이라고 부른 이 인민의 신앙을 고찰했으며, 나도 모르게 나오는 부정에 몸서리쳤다. 상반되는 감정들에 괴로워진 나는 이성에 호소했다. 그리고 수많은 교조적 대립 중에서 오늘날 나에게 그 가설을 주문하는 것은 이 이성이다. 신에게 적용되는 선험적 교조주의는 불모인 채로 있었다. 그 가설이 우리를 또 어디로 데려갈지 누가 알겠는가?

그러므로 나는 내 가슴의 침묵 속에서 일체의 인간적인 고려를 멀리하고 사회 혁명들의 신비를 공부하면서 신, 위대한 미지의 것이 나에게 어떻게 하나의 가설, 말하자면 필요한 변증법적 수단이 되었는지를 말하고자 한다.

만일 내가 여러 모습을 띠며 달라져 가는 신의 관념이라면, 나는 이 관념이 무엇보다 먼저 사회적 관념이라고 본다. 그 말은 그것이 개인적 개념 형성이라기보다는 훨씬 더 집단적 사유의 신앙 행위라는 것이다. 그런데 어떻게, 그리고 어떤 계기로 이 신앙 행위가 생겨나는가? 이를 확인하는 것이 중요하다.

도덕적 · 지적 관점에서 사회 혹은 집단적 인간은 무엇보다도 행위적 자생성, 다른 말로 본능에 의해 개인과 구별된다. 개인은 그가 충분히 알고 가입을 거절하거나 동의할 수 있는 주인이 되는 동기에만 복종하거나 복종한다고 상상하는 반면, 한마디로 그는 스스로 자유로우며, 그가 자신을 이성적이고 교육을 잘 받았다고 생각할수록 그만큼 더 자유롭다고 판단하는 반면, 사회는 첫눈에 자의성과 기획의 기척을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그러나 조금씩 사회 바깥에 존재하는 상급 협의회의 지도를 받는 것으로 보이며 사회를 미지의 끝을 향해 불가항력으로 밀어붙이는 힘들에 종속된다. 군주정과 공화정의 수립, 카스트 구분, 사법 제도 등은 그 원칙을 가리키거나 그 이유를 제시하기보다 그 효과를 특기하는 것이 훨씬 더 쉬운 이 사회적 자생성의 그만한 발현이다. 보쉬에, 비코, 헤르더, 헤겔에 이어 역사철학에 투신한 자들의 일체의 노력 자체가 지그까지 사람의 일체의 움직임을 주재하는 섭리적 운명의 존재를 확증하는 것이었다. 또 나는 이와 관련해 사회는 움직이기 전에 결코 자신의 수호신을 일깨우지 않는 일이 없다는 것을 관찰한다. 마치 이미 그의 자생성이 결의한 것을 위로부터 명령받기를 원하듯이. 운세, 신탁, 희생제사, 대중적 갈채, 공적 기도는 나중에 사회의 이런 의도성의 가장 통상적인 형태이다.

이 신비적이고 아주 직관적이며, 또한 말하자면 초사회적인 능력은 사람들에게서는 조금 밖에나 혹은 전혀 감지되지 않지만 인류 위에서는 영감을 주는 신령처럼 떠 있는 것으로서 심리학 일체의 원초적 사실이다.

그런데 한꺼번에 개체적 취향과 집단적 충동에 복속한다는 점에서는 사람과 같은 다른 동물 종들과 달리, 사람은 자신을 움직이는 본능 혹은 운명을 인식하고 자기 자신의 생각에 기별奇別하는 특권을 지닌다. 우리는 뒤에 가서, 사람이 또한 그것을 꿰뚫고 심지어 그것의 명령에 영향을 미칠 능력도 소유함을 보게 될 것이다. 그리고 (거룩한 숨에 대한) 열광으로 황홀해지고 관통된 사람의 첫 번째 움직임은 자신이 의존함을 느끼는, 그가 신, 즉 생명, 존재, 영, 아니 더 간단하게 ‘나’라고 이름 붙이는 보이지 않는 섭리를 찬미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고대 언어에서 이 말들은 동의어이고, 동음어이기 때문이다.

‘나는 나이며, 나는 너와 협상한다’고 신이 아브라함에게 말한다. 또 모세에게는 ‘나는 (존재하는) 나이다’라고 말한다. ‘너는 이스라엘 자녀들에게 존재가 나를 보낸다고 말하라’고 한다. 존재와 ‘나’라는 이 두 말은 사람들이 말했던 가장 종교적인 원어에서는 같은 특성을 지닌다.[2] 게다가 모세라는 기관에 의해 입법자가 되는 여호와Ie-hovah가 자신의 영원함을 증언하고 자신의 본질로써 맹세할 때, 그는 맹세의 양식으로 ‘나’라고 말한다. 혹은 힘을 배가하여, ‘나, 존재’라고 말한다. 역시 히브리인들의 신은 모든 신들 중 가장 인간적이고 가장 자발적이며, 인류의 직관을 그보다 더 잘 표현하는 것은 없다.

그러므로 신은 인간에게 하나의 나로서, 순수하고 영원한 본질로서 나타난다. 군주가 신하 앞에 나서듯이 인간 앞에 나서며 때로는 시인, 입법자, 점쟁이의 입술로 무사musa, 노모스nomos, 누멘numen으로 스스로를 표현하고, 때로는 민중의 갈채로써 스스로를 표현한다. 민民의 소리는 신의 소리이다(vox populi vox Dei). 이는 어떻게 참된 신탁과 거짓된 신탁이 있는지를 설명해 줄 수 있기도 하다. 태어날 때부터 격리된 개인들은 왜 스스로 신의 관념에 이르지 못하는 반면, 그 관념이 집단적 영에 의해 제시되자마자 이를 냉큼 포착하는가. 끝으로 중국인들과 같은 정태적인 종족은 어떻게 해서 그 관념을 결국 잃어버리는가.[3] 우선, 신탁들에 대해 말한다면, 신탁의 일체의 확실성은 신탁에 영감을 불어넣는 보편적 의식에서 나온다는 것이 명확하고, 다음으로 신 관념에 대해 말하자면, 어째서 압류와 현상이 마찬가지로 그에 치명적인지를 쉽게 이해할 수 있다. 한편으로 소통의 결여는 영을 동물적 이기심에 흡수된 채로 놓는다. 다른 한편으로 운동의 부재는 사회생활을 조금씩 일상사와 기계 체제로 변화시켜 결국 자발성과 섭리의 관념을 제거한다. 이상한 일이다! 진보에 의해 망하는 종교는 또한 부동성에 의해서도 망한다.

군더더기가 되겠지만, 신성의 첫 번째 계시인 보편적 이성의 모호한, 말하자면 객체화된 의식과 관련해서 우리는 신의 실재성 자체 혹은 비실재성에 관해 절대 아무런 선입견도 가지지 않는다는 데 주목하자. 실제로 신이 집단적 본능 혹은 보편적 이성 말고 다른 것이 아님을 인정하자. 그러면 또한 이 보편적 이성이라는 것이 무엇인지를 알아야만 한다. 왜냐하면 이어서 보겠지만, 보편적 이성은 결코 개인적 이성 안에서 주어지지 않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사회적 법칙들에 대한 지식 혹은 집단적 관념들의 이론은 순수 이성의 근본 개념들로부터 도출됨에도 불구하고 아주 경험적이며, 결코 연역이나 귀납 혹은 종합을 거쳐 선험적으로 발견되지 않는다. 따라서 우리가 이 법칙들을 그 자신의 작품으로서 연결시키는 보편적 이성, 별개의 영역에서 순수 이성과는 구분되는 실재로서 존재하고 사유하고 일하는 보편적 이성은, 세계 체제가 수학 법칙들에 따라 창조됨에도 불구하고 수학과는 구분되는, 그리고 그로부터 수학만의 존재를 도출할 수는 없을 실재이듯이, 현대적 언어로 하면 바로 고대인들이 신이라고 불렀던 것이라는 결과가 된다. 그 말이 바뀐 것이다. 그것에 대해 우리가 아는 것은 무엇인가?

이제 신적 관념의 진화를 추적해 보자.

지고의 존재가 일단 최초의 신비적 판단에 의해 설정된 후 인간은 즉각 또 다른 신비주의인 유비analogie로써 이 주제를 일반화한다. 신은 말하자면 아직도 하나의 점에 불과하다. 곧 그는 세상을 가득 채울 것이다.

인간이 자신의 사회적 자아를 느끼면서 창조자에게 경배한 것처럼, 그는 동물, 식물, 연못, 기상氣象 그리고 우주 전체에서 충동과 의도를 발견하면서 각 물체에 그리고 전체에 그것을 주재하는 혼, 영 또는 신령이 있다고 본다. 사회라고 하는 자연의 가장 높은 정점을 신으로 만드는 이 귀납 추론을 가장 낮은 존재, 무생물이며 무기체인 물체들에까지 추구해 가는 것이다. 인간은 그러므로 창조의 상위 극으로 간주되는 집단적 자아로부터 마지막의 물질 원자에까지 신의 관념, 즉 인격적, 지성적 관념을 확장하는데, 이는 창세기가 신 자신이 하늘을 펼쳤다고, 즉 만물을 담는 용기인 공간과 시간을 창조했다고 우리에게 이야기해 주는 것과 같다.

이처럼 조물주인 신 없이는 우주와 인간은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이는 사회적 신앙고백이다. 그러나 또한 인간 없이 신은 생각되지 못할 것이다.―이 간극을 건너가자―신은 아무것도 아닐 것이다. 인류가 조물주를 필요로 한다면, 신, 신들은 그에 못지않게 계시자를 필요로 한다. 신통보神統譜, 천국과 지옥과 그 주민들의 역사, 인간 사고의 이 꿈들은 어떤 철학자들이 역으로 신의 꿈이라고 칭한 우주의 상대물이다. 그리고 사회의 작품인 이 신학적 창조물 안에 얼마나 웅장함이 있는가! 데미우르고스의 창조물은 지워졌다. 우리가 전능자라고 칭한 자는 패배했다. 그리고 수 세기 동안 유한한 인간들의 마법에 홀린 상상은 올림포스의 기적을 주시함으로써 자연의 광경으로부터 돌려졌다.

이 환상적 지역에서 내려오자. 가엾은 이성이 문을 두드린다. 그의 무서운 질문에 대답할 필요가 있다.

신이란 무엇인가? 하고 이성이 묻는다. 그는 어디에 있는가? 그는 몇 명인가? 그리고 그는 무엇을 원하는가? 그는 무엇을 할 수 있는가? 그는 무엇을 약속하는가? 그리고 보라, 분석의 횃불에 하늘과 땅과 지옥의 모든 신들이 내가 알지 못할 어떤 무체의, 불투명한, 부동의, 이해할 수 없는, 정의할 수 없는, 한마디로 존재의 모든 특성의 부정인 것으로 환원된다. 사실상 사람이 각 물체에 특수한 영이나 신령을 부여하든지, 우주를 유일한 권능에 의해 통치되는 것으로 의식하든지 그는 언제나 무조건적인, 즉 불가능한 존재자를 상정하고 그로부터 그가 달리 의식할 수 없다고 판단하는 현상들에 대한 어떠한 설명이든지 이를 도출하기만 한다. 신과 이성의 신비다! 자신의 우상 숭배 대상물을 점점 더 합리적으로 만들기 위해 신자는 그로부터 그를 실재하는 것으로 만들어 줄 모든 것을 계속해서 벗겨낸다. 그리고 논리와 천재성의 기적들이 있은 후에 존재의 특성들은 무無의 특성들과 같아진다. 이런 진화는 불가피하고 숙명적이다. 무신론이 일체의 변신론 근저에 있다.

이런 진보 과정을 이해시키도록 해보자.

만물의 창조자인 신이 의식에 의해 스스로 창조되자마자, 다시 말해 우리가 신을 사회적 자아의 관념에서 우주적 자아의 관념으로 높이자마자 곧바로 우리의 성찰은 완성을 핑계로 그 신을 파괴하는 데 착수한다. 신 관념을 완성한다! 신학적 교리를 청산한다! 이는 인류의 두 번째 환상이다.

분석 정신, 지칠 줄 모르고 끊임없이 질문하고 논박하는 사탄은 조만간에 종교적 교조주의에 대한 증명을 시도해야 했다. 그런데 철학자가 신 관념을 정하든 아니면 그가 이를 확정 불가능이라고 선언하든, 그가 이에 이성을 가지고 접근하든 아니면 그것을 이성에서 멀리 떼어놓든, 이 관념은 공격을 입는다고 나는 말한다. 사변이 멈추는 것은 불가능하니 장기적으로 신 관념은 반드시 사라진다. 그러므로 무신론 운동은 신학적 비극의 제2막이다. 그리고 이 제2막은 제1막에 의해 주어지며, 결과가 원인에 의해 주어지는 것과 마찬가지다. 시편의 시인은 하늘은 영원한 존재의 영광을 이야기한다고 말한다. 이렇게 덧붙이자. 그리고 하늘의 증언은 그를 권좌에서 내쫓는다고.

사실상 사람은 현상들을 관찰함에 따라 자연과 신 사이에서 중간자들을 본다고 믿는다. 이는 수효, 형상 그리고 계기繼起의 관계들이다. 유기적 법칙, 진화, 유비들이다. 이는 발현물들이 그 안에서 생겨나는, 혹은 서로를 변함없이 부르는 일정한 연관이다. 그는 자신이 그 일부를 이루는 이 사회의 발전에서 사적 의지들과 숙의들이 공동으로 무언가를 위해 들어간다는 것도 관찰한다. 그리고 그는 위대한 영이 세상에 직접, 그리고 몸소 작용하지 않으며, 자의적으로 변덕에 따라 작용하는 것도 아니고 감각적 힘이나 감각기관에 의해, 그리고 규칙에 따라 매개적으로 작용한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생각에 의해 인과의 사슬을 거슬러 올라가 그는 신을 균형 잡는 막대에서처럼 한쪽 끝에 가져다 놓는다.

모든 하늘 저 너머에 하늘의 신이 산다

이렇게 한 시인이 말한다. 이처럼 이론의 첫 번째 도약으로부터 지고의 존재는 동력, 바퀴통, 홍석虹石의 기능으로 전락하며, 좀 더 시시한 비유를 해본다면 군림하지만 다스리지 않는, 법률을 지키겠다는 맹세를 하고, 법률을 집행하는 장관들을 임명하는 입헌군주의 기능으로 전락한다. 그러나 자신을 매혹하는 신기루의 인상 때문에 유신론자는 이 우스운 체계에서 우상의 경이성의 새로운 증거만을 본다. 이 우상은 자신의 피조물들을 자신의 권능에 수단으로 봉사하게 하며, 인간들의 지혜를 자기의 영광으로 돌리게 한다고 본다.

곧, 영원한 존재의 왕국을 제한하는 데 만족하지 못해서 인간은 점점 더 신을 죽게 하는 존경으로써 그 왕국을 분점하기를 요구한다.

내가 영이고, 감각적이며 관념들을 내놓는 자아라면, 나 역시 절대적 존재에 몫이 있다고 유신론자는 계속하여 말한다. 나는 자유롭고, 창조자이고, 불멸하고, 신과 동격이다. 코기토 에르고 숨Cogito, ergo sum; 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 바로 이것이 ‘에고 숨 키 숨Ego sum qui sum : 나는 (존재하는) 나이다’의 보조 명제요 번역이다. 철학은 성서와 일치한다. 신의 존재와 영혼의 불멸성은 동일한 판단으로 의식에 의해서 주어진다. 전자에서 사람은 자신의 자아를 그 안에서 움직여 가는 우주의 이름으로 말하는 것이고, 후자에서는 자기 자신의 이름으로 말하는 것이다. 그러면서도 이 길과 저 길에서 같은 말을 되풀이한다는 것도 알아채지 못한다.

영혼의 불멸성은 신성으로부터의 진정한 분리이며, 오랜 간격 후에 그 최초의 출현 순간에는 옛 교리의 신자들에게는 이단으로 나타났지만 신적 위엄의 보완물, 행복과 영원한 정의의 필수적 전제물로 덜 간주된 것은 아니다. 영혼의 불멸성이 없으면 신을 이해하지 못한다고 정치 이론가들과 비슷한 유신론자들이 말한다. 정치 이론가들에게는 주권적 대표부와 어디서나 종신적인 공무원들이 왕정의 필수 조건이다. 그러나 학설들의 유사성이 정확한 만큼 관념들의 모순은 명백하다. 역시 영혼 불멸의 교리는 곧 철학적 신학자들의 걸림돌이 되었다. 이들은 피타고라스와 오르페우스의 세기부터 신적 특성들을 인간의 자유와, 이성을 신앙과 일치시키려고 쓸데없이 노력하는 이들이다! 불신자들을 위한 승리의 주제다! …그러나 환상은 그렇게 빨리 물러날 수 없었다. 영혼 불멸의 교리, 이는 바로 그것이 창조되지 않은 존재의 제한이었기 때문에 진보였다. 그런데 인간 정신이 진리의 부분적 획득으로 잘못을 범하더라도, 이는 결코 퇴보하지 않으며, 그 발걸음에서 이 꾸준함은 그의 불가오류성의 증거다. 우리는 그 새로운 증거를 획득할 것이다.

신과 닮음으로서 사람은 신을 자신과 닮게 만들었다. 수 세기 동안 혐오스러운 것으로 칭해진 이 상관성은 새로운 신화를 결정한 보이지 않는 힘이었다. 가부장들의 시대에 신은 인간과 연합했다. 지금 협적을 공고히 하기 위해 신은 인간이 되려고 한다. 그는 우리의 살, 우리의 용모, 우리의 열정, 우리의 기쁨과 고통을 취할 것이며, 한 여성에게서 태어나 우리처럼 죽을 것이다. 그러고는 무한의 이 낮아짐 후에 사람은 논리를 전환해 그때까지는 창조자라고 불렀던 자를 보전자, 구속자救贖者로 자신이 신의 이상을 더 키웠다고 주장할 것이다. 인류는 아직은 ‘신인 것이 나다’라고 말하지 않는다. 신은 내 안에 있다, 임마누엘, 신이 우리와 함께noniscum Deus 있다고. 그리고 철학이 고집을 가지고, 보편적 양심이 경악하면서 한 목소리로 ‘신들이 도망친다excedere deos’고 외친 순간, 열광적 찬미와 초인적 신앙의 열여덟 세기가 시작되었다.

그러나 숙명적인 종말이 찾아온다. 윤곽이 그려지는 모든 왕국은 감정에 호소하는 정치Demagogy로 끝날 것이다. 정의定義가 되는 일체의 신성은 복마전Pandemonium으로 해소된다. 그리스도 숭배는 인간 사상의 이 긴 진화의 종착점이다. 천사들, 성인들, 처녀들이 신과 함께 하늘에서 다스린다고 교리문답에서 말한다. 마귀들과 저주받은 자들은 영원한 형벌의 지옥에서 산다. 초세속적 사회에는 왼편과 오른편이 있다. 방정식이 완결될 때가 되었고, 이 신비적 위계질서가 땅으로 내려와 현실에서 나타날 때가 되었다.

연못에 자신을 비추어 보는 첫 번째 여자가 자기 자신의 모습을 끌어안기 위해 팔을 벌리는 것을 나타낼 때 밀턴[4]은 펜놀림마다 인류를 그린 것이다. 그대가 찬양하는 이 신, 오 사람이여! 그대가 만든 이 신, 선하고 정의롭고 전능하고 전지하고 불멸하며 거룩한 신, 이는 그대 자신이다. 이 완전함의 이상은 그대 양심의 열렬한 거울에 정화된 그대의 모습이다. 신, 자연과 사람은 동일한 존재의 세 모습이다. 사람은 천 번의 진화를 거쳐 자의식에 도달한 신이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사람은 스스로 신임을 느꼈다. 그리고 그리스도교는 참으로 신이자 참으로 인간의 종교이다. 애초부터 ‘나’라고 말한 신 말고 다른 신이 없다. ‘그대’ 말고 다른 신이 없다.

이런 것이 종교의 신비와 자신의 신비를 벗겨 내면서 시효가 끝나는 철학의 마지막 결론이다.

그때부터는 모든 것이 끝난 것으로 보인다. 인류가 스스로를 찬양하고 자기 자신을 신비화하기를 그만두면서 신학적 문제는 영영 제거되는 것 같다. 신들은 떠났다. 사람은 더 이상 이기주의로 염려하고 죽을 필요가 없다. 내 주위로 얼마나 무서운 고독이 펼쳐지며, 내 영혼의 바닥을 파고드는가! 나의 고양高揚은 소멸과 닮았으며, 내가 신이 된 이래로 나는 자신을 더 이상 그림자로밖에 보지 않는다. 나는 언제나 나인 것이 가능하지만 나를 절대자로 간주하는 것은 내게 아주 어렵다. 그리고 내가 절대자가 아니라면 나는 관념의 절반일 뿐이다.

약간의 철학은 종교와 멀어지게 하며 많은 철학은 종교로 데려다준다고, 내가 모르는 어떤 냉소적인 철학자가 말했다. 이 관찰은 부끄럽게 만드는 관찰이다.

모든 과학은 이어지는 세 시기를 거치며 발달하는데, 이를 문명의 거대한 시기들에 비유해 종교적 시대, 궤변적 시대, 과학적 시대로 부를 수가 있다.[5] 이와 같이 연금술은 나중에 가서 화학이라고 불린, 그리고 그 확정된 구도構圖가 아직 발견되지 않은 과학의 종교적 시기를 가리킨다. 이는 점성술이 또 다른 과학적 건축물인 천문학의 종교적 시기를 이루는 것과 똑같다.

그런데, 보라. 60년간 현자의 돌을 조롱한 후에 화학자들은 경험에 이끌려 더 이상 감히 물체의 전이 가능성을 부정하려 하지 않는다. 반면에 천문학자들은 세계의 역학mécanique에 의해, 세계의 유기체학organique, 즉 바로 점성술 같은 그 무엇이 있지 않나 생각하게 된 것이다. 내가 방금 인용한 철학자의 예를 따라 약간의 화학은 현자의 돌을 외면하게 하고, 많은 화학은 현자의 돌로 데려다준다고, 그리고 비슷하게 약간의 천문학은 점성술자들을 비웃게 만들고 많은 천문학은 점성술사들을 믿게 할 것이라고 말해야 할 경우가 아닌가?[6]

나는 확실히 여러 무신론자들보다 기적에 대한 취향은 덜 가지고 있다. 하지만 나는 기적과 예언, 주술 등이 어떤 잠재적 힘들에 의해, 혹은 옛날에 그렇게 언급되었듯이 비의적 능력에 의해 생성된 이상한 효과를 말하는 왜곡된 이야기들일 뿐이라는 생각을 금할 수 없다. 우리의 과학은 아직 아주 잔혹하고 아주 악의로 가득 차 있다. 우리의 박사들은 그리 보잘것없는 지식에 대해 아주 큰 몰상식을 보여준다. 그들은 자신들이 전개하는 견해를 보호하기 위해 자신들에게 방해가 되는 사실들을 아주 뻔뻔하게 부정해서, 나는 이 강한 정신의 소유자들을 무당들과 마찬가지로 불신한다. 그렇다, 나는 확신한다. 우리의 조잡한 합리주의는 많은 과학 정신에 의해 정말로 경이롭게 될 시대의 출범이다. 우주는 내 눈에는 모든 것을 기대해야 할 마술의 실험실일 뿐이다…. 이렇게 말해 두고서 내 주제로 돌아간다.

그러므로 내가 종교적 진화들에 대해 행한 빠른 해설 후에 누군가 상상하기를 형이상학이 다음의 네 낱말, 신의 존재l’existence de Dieu, 영혼의 불멸에 관해 최종 답을 말했다고 생각하려 했다면 그는 잘못에 빠지는 것이다. 다른 데서도 그렇지만 여기서, 이성의 가장 선진적이고 가장 잘 확립된 결론, 신학적 문제를 영구적으로 해결한 것으로 여겨지는 결론은 우리를 시원始原의 신비주의로 데려가며, 불가피한 철학의 새로운 자료들을 함축한다. 종교적 견해들에 대한 비판은 우리로 하여금 오늘날 우리 자신에 대해, 그리고 종교들에 대해 웃음 짓게 한다. 그렇기는 하지만 이 비판의 요체는 문제의 재생산일 뿐이다. 인류는, 내가 글을 쓰고 있는 시점에, 인류에게 고대의 신 관념과 동등한 무엇인가를 인식하고 언명하기 직전에 있다. 그리고 이는 옛날처럼 더 이상 자생적 운동에 의해서가 아니라 성찰을 하며, 그리고 불가항력적인 변증법의 힘으로 그렇게 될 것이다.

나는 불과 몇 마디 말로 내 의견을 피력할 것이다.

철학자들이 주저하기는 했지만, 마침내 의견의 일치를 본 한 가지가 있다면, 이는 의문의 여지없이 지성과 필연성의 구분, 사유의 주체와 그 객체의 구분, 아我와 비아非我의 구분이다. 세속적 용어로 말하면, 정신과 물질의 구분이다. 나는 이 모든 용어들이 아무런 실질적이고 참된 것도 표현하지 않는다는 점, 그것들 각각은 유일하게 참이고 실재인 절대의 분리를 지칭할 뿐이라는 점, 그리고 별개로 본다면 그것들 모두는 똑같이 모순을 함축한다는 점을 잘 안다. 그러나 그에 못지않게 또한 확실한 것은, 우리에게 절대는 완전히 접근 불가능하다는 것, 우리는 오직 우리의 경험주의의 대상으로 들어오는 대립항들에 의해서만 절대를 안다는 것, 그리고 단일성이 우리의 신심을 획득할 수 있지만, 이원성은 과학의 첫째 조건이라는 것이다.

이와 같이 누가 생각하며 무엇을 생각하는가? 영혼은 무엇이며, 몸은 무엇인가? 나는 이 이원론을 회피할 테면 해보라고 말한다. 본질들도 관념들과 마찬가지이다. 전자는 자연 안에서 분리된 것처럼 보인다. 이는 후자가 오성 안에서 그런 것과 마찬가지이다. 그리고 신 관념과 영혼 불멸의 관념이 그 동일성에도 불구하고 철학에서는 계기적으로, 그리고 모순적으로 제기된 것과 동일하게 아와 비아는 절대 안에서 융합됨에도 불구하고 자연에서는 별개로, 그리고 모순적으로 제시된다. 그리고 우리는 생각하는 존재들과 동시에 생각하지 않는 다른 존재들도 대한다.

그런데 누구든지 이를 성찰하는 수고를 한 사람이라면, 오늘날 그러한 구분은 비록 실현되었더라도 이는 이성이 마주칠 수 있는 더 불가해하고 더 모순적이고 더 터무니없는 것임을 안다. 존재는 물질의 속성들 없이 스스로를 의식하지 않듯이 정신의 속성들 없이도 스스로를 의식하지 않는다. 그래서 정신이 시간, 공간, 운동, 확고성 등의 범주들 중 어떠한 것에도 해당되지 않아서 당신에게는 실재를 구성하는 모든 특성들을 상실한 것으로 여겨진다고 하며 당신이 정신을 부정한다면, 나는 나름대로 피동성 말고는 내게 아무런 상당한 것도 내놓지 않고, 그 형태 말고는 아무런 분간할 수 있는 것도 내놓지 않아서 조금도 (자발적이고 자유로운) 원인으로서 나타나지 않으며, 실체로서 완전히 종적을 감추는 물질을 부인할 것이다. 그리고 우리는 순수 관념론, 즉 무無에 도달한다. 그러나 무는 살아있고 사고를 하는 내가 알지 못하는 것들, 자신들 안에 시작된 종합 혹은 임박한 분리의 (어느 쪽인지 모를) 상태에서 존재의 모든 적대적 특성들을 결합하는 것들에게 혐오감을 준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원론, 우리가 그 항들이 거짓임을 완벽히 알지만 우리에게 참의 조건이어서 불가항력적으로 의무를 지우는 이원론으로 시작하지 않을 수 없다. 우리는 한마디로 데카르트와 함께, 그리고 인류와 함께 나에 의해, 즉 정신에 의해 시작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종교들과 철학들이 분석을 통해 분해되어 절대의 이론 안에 녹게 된 이래 우리는 정신이라는 것을 더 잘 아는 것이 아니며, 이 점에서 우리를 포위하는 모호성을 치장하는 언어의 풍부성에서만 옛날 사람들과 차이가 난다. 다만, 옛사람들에게 질서는 세상 바깥의 지성을 드러나게 한 반면에, 현대인들에게 그것은 오히려 세상 안에서의 지성을 드러내는 것 같다. 그러나 그 지성을 안에 두든지 바깥에 두든지, 질서에 힘입어 그 지성을 언명하는 순간부터 질서가 드러나는 곳 어디서나 그 지성을 인정하든지, 아니면 그것을 어디서도 인정하지 말아야 한다. 팔면체로 결정을 이루는 물체에 지성이 있다고 보는 것보다 『일리아드』를 지은 머리에 지성이 있다고 보는 것이 더 많은 이유가 있는 게 아니다. 그리고 역으로 마렝고에서 거둔 승리를 제1집정관을 고려하지 않고 전략적 조합 덕분이라고 하는 것만큼이나 조정자인 아我를 감안하지 않고 세상의 체계를 물리 법칙들에 관계시키는 것은 터무니없다. 둘 수 있는 차이라고는, 전자의 경우에서는 사고하는 자아가 보나파르트의 뇌에 자리 잡은 반면에 우주에 관련해서는 자아는 특수한 위치가 없이 편재한다는 데 있다.

유물론자들은 사람이 우주를 자신의 몸과 비슷하게 보아서 이 우주에 자신의 삶과 생각의 원리라고 가정한 자신의 영혼과 비슷한 영혼을 부여해 그 비교를 완수했다고, 그래서 신의 존재의 모든 논거들은 비교 항 자체가 가설적인 만큼 더욱 거짓된 유비로 전락한다고 말함으로써 반대 의견에 대해 우위를 점했다고 믿었다.

확실히 나는 다음과 같은 낡은 삼단논법을 옹호하지 않는다. 일체의 배치는 조율하는 지성을 가정한다. 그런데 우주 안에는 경탄할 만한 질서가 존재한다. 그러므로 세상은 하나의 지성의 작품이다. 이 삼단논법은 욥과 모세 이래로 아주 많이 논박을 받아서 해결책이 되기는커녕 풀어야 할 수수께끼의 공식일 뿐이다. 우리는 질서가 무엇인지를 완벽하게 안다. 그러나 영혼, 정신 혹은 지성이라는 말로 우리가 무엇을 말하고자 하는지를 우리는 절대로 모른다. 그러니 어떻게 우리가 하나의 현존으로부터 다른 것의 현존을 논리적으로 끌어낼 수 있는가? 그러므로 나는 더 풍부한 학식을 가진 자가 했다 해도 세상의 질서로부터 신의 존재 증명을 끌어냈다고 하는 것을 받아들이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나는 기껏해야 철학에 제안된 방정식만을 거기서 볼 것이다. 질서의 개념으로부터 정신의 언명까지는 메워야 할 형이상학적 심연이 놓여있다. 나는 또다시 문제를 증명으로 간주할 생각이 없다.

그러나 이는 이 순간에 중요한 것은 아니다. 나는 인간 이성이 숙명적이고 불가항력적으로 존재를 아와 비아, 정신과 물질, 영혼과 몸으로 구분하도록 이끌린다는 것을 확인하고자 했다. 그런데 유물론자들의 반론이 그것이 부정의 대상으로 삼는 바로 그것을 증명한다는 것을 누가 보지 못하는가? 사람은 자신 안에서 영적인 원리와 물적인 원리를 구분하니, 자신의 이중적 본질을 하나씩 선포하고 자기 자신의 법칙을 증명하는 자연 자체 말고 무엇이란 말인가? 그리고 유물론이 앞뒤가 안 맞는다는 점에 유의하자. 그것은 사람이 자유롭다는 것을 부인하며 부인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런데 사람이 자유를 덜 가질수록 그것이 하는 말은 더 중요성을 획득하고 진리의 표현으로 간주되어야 한다. 자신이 영혼이며 몸이라고 내게 말하는 이 기계의 말을 들을 때, 그러한 계시는 나를 놀라게 하고 어리둥절하게 함에도 불구하고 내가 볼 때 유물론자의 권위보다 비교도 안 되게 더 큰 권위를 띤다. 유물론자는 의식과 자연을 교정해 그것들이 다음과 같이 말하게 만들려고 시도한다. ‘나는 물질이며, 물질 말고 아무것도 아니다. 그리고 지성은 앎의 물질적 능력일 뿐이다.’

이번에는 내가 공세를 취해서, 몸들의 존재, 다시 말해 순수하게 몸을 지닌 자연의 실재성이 얼마나 무근거한 견해인지를 증명한다면 어쩔 것인가? 사람들은 이렇게 말한다. 물질은 불투과성이다. 무엇에 대한 불투과성인가? 나는 묻는다. 물론 자기 자신에 대해서다. 왜냐하면 이는 회피하고자 하는 것을 인정하는 일이 되기에 정신에 대해서라고 감히 말하지 못할 것이기 때문이다. 이에 대해 나는 이 두 가지 질문을 제기한다. 그것에 대해 당신이 아는 것은 무엇인가? 그리고 이것이 의미하는 바는 무엇인가?

1. 물질을 정의하는 수단이라고 주장되는 불투과성은 부주의한 물리학자들의 가설일 뿐이고, 피상적 판에서 도출된 거친 결론이다. 경험은 물질에 무한한 가분성, 무한한 팽창성, 지정 가능한 한계 없는 다공성, 열, 전기, 자기장에 대한 침투성, 동시에 그것들을 붙잡아 두는 성질, 부정형의 성질들, 친화성, 상호 영향, 수를 헤아릴 수 없는 변형이 있는 것을 보여준다. 이 모든 것은 불투과성의 무언가의 자료와는 별로 양립 가능하지 않다. 전기는 물질의 다른 어떤 성질보다 더 반발이나 저항의 관념으로서 불투과성으로 인도할 수 있는 것으로, 천 가지 상황에 따라 변하며 온전히 분자적 인력引力에 좌우된다. 그런데 이 인력보다 더 불투과성과 양립할 수 없는 것이 무엇인가? 끝으로 엄밀하게 물질의 투과성의 과학이라고 정의할 수 있는 과학이 존재하며, 이는 화학이다. 실제로 사람들이 화학적 조성이라고 칭하는 것은 투과와 어떻게 다른가.[7] …한마디로 물질로부터는 그 형태밖에 알 수가 없다. 실체에 관해서는 무無다. 그러므로 비가시적, 불가촉적이고, 강제 불가능하고 언제나 변화하고 언제나 달아나며, 생각에 오직 불투과성이라서 자신에 관해 그 변장한 모습만 보게 하는 존재의 실재성을 단언하는 것이 어찌 가능한가? 유물론자여! 나는 당신에게 당신 감각의 실재성을 증언하기를 허락한다. 그 감각들을 유발하는 것에 관해 말한다면, 당신이 그에 관해 말하는 모든 것은 다음의 상호성을 함축한다. (당신이 물질이라고 부르는) 무언가는 (내가 정신이라고 칭하는) 다른 무언가에 도달하는 감각들의 유발 요인이다.

2. 하지만, 외적 관찰에서 아무것도 정당화해 주지 않는, 참이 아닌, 물질의 불투과성이라는 이 가정은 어디서 나오며, 그 의미는 무엇인가?

여기서 이원론의 승리가 나타난다. 물질은 유물론자들과 대중이 상상하듯 감각의 증거에 의해서가 아니라 의식에 의해서 불투과성이라고 선언된다. 자아, 불가해한 자연은 자신을 자유롭고 독특하고 영원하다고 느끼고 자기 바깥에서 마찬가지로 불가해한 그러나 역시 독특한, 그 형질 변화에도 불구하고 영원한 다른 자연을 만나면서, 이 본질이 암시해 주는 감각과 관념 덕택에 비아非我가 연장延長을 가지고 불투과성이라고 선포한다. 불투과성은 형상적인 낱말로서, 사고, 절대의 분열이 또 다른 절대의 분열인 물적 실재성을 떠올리는 이미지다. 그러나 이 불투과성은 그것 없이는 물질이 사라지는 것으로서 결국 내적 감각의 자생적 판단, 정신의 … 형이상학적 선험, 입증되지 않은 가설일 뿐이다.

이처럼, 철학이 신학적 교조주의를 전복한 후에 물질을 정신화하건, 사고를 물질화하건, 존재를 관념화하건, 관념을 실재화하건, 실체와 원인을 동일시해 어디서나 힘을 대신 등장시키건,―모두 아무것도 설명하지 못하고 아무것도 의미하지 않는 문장들인데―언제나 철학은 우리를 영원한 이원론으로 데려가며, 우리 자신을 믿도록 우리에게 통첩을 보내면서 우리로 하여금 정신을 믿을 것이 아니라면 신을 믿도록 의무화한다. 정신을 자연에서 분리한 옛사람들과 달리 정신을 자연으로 다시 들어가게 하면서 철학은 다음의 유명한 결론, 연구의 모든 결실을 거의 다 요약한 결론으로 이끌렸다. 사람 안에서 정신은 스스로를 아는 반면에 다른 곳에서는 어디서나 정신은 스스로를 알지 못하는 것처럼 여겨진다. “사람 안에서 깨어있는, 동물 안에서 꿈을 꾸는 그리고 돌 안에서 잠을 자는 것…”이라고 한 철학자는 말한다.

철학은 그 마지막 시간에, 그러므로 자신의 탄생 때 알던 것보다 좀처럼 더 많이 알지 못한다. 마치 그것이 소크라테스의 말을 입증하기 위해서만 세상에 나타난 듯이 엄숙히 자신의 몸을 세마포로 덮으면서 우리에게 이렇게 말한다. 나는 내가 아무것도 모른다는 것을 안다. 나는 무엇을 말하는가? 철학은 오늘날 자신의 모든 판단이 똑같이 거짓되어도 똑같이 불가능하고 그렇지만 똑같이 필연적이고 숙명적인 두 가설, 물질과 정신 위에 기초를 둔다는 것을 안다. 그래서 옛날에는 종교적 불관용과 철학적 불화가 어디서나 흑암을 드리우면서 의문을 용서하고, 호색적 방종으로 초대한 반면에, 모든 사항들에 대한 부정의 승리는 더 이상 이런 의문도 허락하지 않는다. 일체의 질곡에서 벗어난, 그러나 자기 자신의 성공에 의해 정복된 사상은 자신에게 명확히 모순적이고 터무니없어 보이는 것을 긍정하지 않을 수 없다. 야만인들은 세상이 거대한 영의 보호를 받는 거대한 주물呪物이라고 말한다. 30세기 동안 시인, 입법자, 문명의 현자들은 세세로 철학의 등잔불을 전승해오면서 이 신앙고백보다 더 숭고한 것을 적은 적이 없다. 그리고 보라. 스스로를 철학이라 부른 신에 맞선 이 긴 음모의 끝에 해방된 이성은 야만적 이성으로서 이렇게 결론을 짓는다. 우주는 아我에 의해 객체화된 비아非我이다.

그러므로 인류는 숙명적으로 신의 존재를 가정한다. 그리고 우리 시대에 끝을 맺는 긴 기간 동안 인류가 자기 가설의 실재성을 믿었다면, 그 상상할 수 없는 물체를 찬양했다면, 이 신앙 행위에 사로잡힌 후에 인류가 자기 자신의 사상의 의인화일 뿐이라고 알고 있는 주권적 존재에 대한 이 견해를 뻔히 알면서도 더 이상 자유롭지는 않게 지속한다면, 인류가 자신의 마술적 주문을 재개하기 직전이라면, 그토록 놀라운 황홀경은 깊이 파고들 가치가 있는 무언가 신비적인 것을 감추고 있다고 믿을 필요가 있다.

나는 황홀경과 신비를 말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로써 신 관념의 초인적 내용을 부인하노라고 주장하지는 않는다. 새로운 상징주의의 필요성, 말하자면 새로운 종교의 필요성을 인정하는 것도 아닌 것과 마찬가지다. 왜냐하면, 인류가 신 혹은 자아나 정신의 이름으로 원할 모든 것을 긍정하면서 자기 자신을 긍정할 뿐이라는 점은 의문의 여지가 없기 때문이다. 인류가 그렇다면 스스로를 안다는 것 말고 다른 것으로서 스스로를 긍정한다는 점도 부인할 수 없을 것이다. 이는 일체의 변신론으로부터와 마찬가지로 일체의 신화로부터 나온다. 게다가 이 긍정은 불가항력적이므로 의문의 여지없이 그것은 가능하다면 과학적으로 확정하는 것이 중요한 비밀스러운 관계들에 관련된다.

다시 말해 무신론, 즉 인간주의는 그 비판적이고 부정적인 부분 모두에서는 참이지만, 자연의 인간 그 자체에 주목할 경우에, 인류가 신의 딸이고, 유출이고, 형상이고, 반영물이거나 말씀이라는 인류에 관한 이 첫 번째 언명을 외람된 판단으로 제쳐놓는 경우에 인간주의는 내가 말하건대 이처럼 자신의 과거를 부인하는 경우에는 또 하나의 모순에 불과할 것이다. 우리는 그러므로 인간주의에 대한 비판에 착수할 수밖에 없다. 즉, 인류가 그 총체로서, 그 발달의 모든 시기에서 고려될 때 신의 타원형의 환상적인 특성들도 제외하고 신적인 관념을 충족하는지, 인류가 존재의 충만성을 충족하는지, 인류가 스스로를 만족시키는지를 입증할 수밖에 없다. 우리는 한마디로 인류가 고대의 교리에 따라 신을 지향하는지, 혹은 현대인들이 말하는 것처럼 신이 되는 것이 인류 자신인지를 탐구하지 않을 수 없다. 아마도 우리는 결국 그 두 체계가 외관상으로 대립을 이룸에도 불구하고 동시에 참이며, 근본적으로 동일하다는 것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이 경우에 인간 이성의 무오류성은 그 집단적 발현에서, 성찰된 사유들에서처럼 상당한 정도로 확인될 것이다. 한마디로 우리가 신의 가설을 인간에 대해 입증하기까지 무신론적 부정은 확정된 내용을 가지지 못한다.

그러므로 해야 할 일로 남는 것은 신 관념에 대한 과학적, 즉 경험적 증명이다. 그런데 이 증명은 결코 시도된 적이 없다. 신학은 그 신화들의 권위에 관해 교리화하고 철학은 범주들의 도움을 받아 사유를 전개해서, 신은 초월적인, 즉 이성에 닿을 수 없는 개념 상태에 머물렀다. 그리고 가설이 여전히 존속한다.

내가 말하지만, 이 가설은 어느 때보다 활기차고 더 가차 없는 가설로서 존속한다. 우리는 이 숙명적 시기들 중 하나에 도달해있다. 이 시기에 사회는 과거를 경멸하고 미래를 고뇌하면서 때로는 새로운 신앙을 준비하는 수고를 몇몇 고독한 사상가들에게 맡기고 정신없이 현재를 끌어안고, 때로는 자신이 누리는 것들을 상실한 깊은 심연으로부터 신에게 외치고 구원의 신호를 요구하거나 아니면 자신의 혁명의 광경에서, 희생 제물의 내장에서 그러듯 자기 운명의 비밀을 찾는다.

재가 무엇을 더 강변할 필요가 있는가? 신의 가설은 정당하다. 왜냐하면 그것은 모든 사람에게 불가항력적으로 과해지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것은 누구도 비난할 수 없을 것이다. 믿는 자는 신이 존재한다는 가정에 관해 모름지기 내게 동의할 수밖에 없다. 부정하는 자도 이에 관해 내게 동의할 수밖에 없는데, 그 자신이 나보다 앞서 이 가정을 했으며, 일체의 부정은 그에 앞선 긍정을 함축하기 때문이다. 의심하는 자에 관해 말한다면, 그는 자신의 의심이 필연적으로 조만간 그가 신이라 부르게 될, 내가 모르는 그 무엇을 가정한다는 것을 이해하도록 잠깐 성찰하는 것으로 충분하다.

그러나 내가 내 사고의 사실로부터 신을 가정할 권리를 보유한다면 나는 신을 긍정할 권리를 정복해야 한다. 다시 말해, 내 가설이 불가항력적으로 부과된다면, 그것은 그 순간에는 내가 주장할 수 있는 모든 것이다. 왜냐하면, 긍정한다는 것은 확정한다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모든 확정은 참이기 위해서는 경험적으로 주어져야 한다. 실제로 확정을 말하는 자는 관계, 조건성, 경험을 말한다. 그러므로 신 개념의 확정이 우리에게 경험적 증명에서 나와야 하니 우리는 이 고귀한 미지의 탐구에서 경험에 의해 주어지지 않아서 가설을 넘어서는 모든 것을 신학의 모순들에 다시 빠지지 않도록, 그리고 결과적으로 무신론의 항의를 다시 일으키지 않도록 삼가야 한다.

정치경제학 책에서 내가 모든 철학의 근본 가설로부터 어떻게 출발해야 했는지를 말하는 일이 남아있다.

그리고 우선, 나는 사회과학 권위의 기초를 놓기 위해 신의 가설을 필요로 한다. 천문학자가 세계 시스템을 설명하기 위해 외관에 전적으로 의존해 대중과 더불어 궁창의 하늘과 평평한 땅, 풍선처럼 큰 태양을 가정하고, 동양에서 서양까지 공중의 곡선을 그리면서 나중에 관찰에 따라 그가 출발점으로 삼지 않을 수 없는 자료를 수정은 하더라도 감각의 무오류성을 가정할 때, 사실상 천문 철학은 선험적으로 감각이 우리를 속인다는 것, 우리는 우리가 보지 못한다는 것을 인정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그러한 원리에 따를 때 천문학의 확실성은 어떻게 될 것인가? 그러나 감각들의 관계는 어떤 경우에는 수정되고 스스로 보완될 수 있어서 감각의 권위는 요지부동인 채로 있으며, 천문학은 가능하다.

마찬가지로 사회 철학은 선험적으로 인류가 그 행동에서 오류를 범할 수도, 속을 수도 있다는 것을 결코 인정하지 않는다. 그것이 없으면 인류의 권위, 즉 이성의 권위, 근본적으로 동의어인 인민 주권의 권위는 어떻게 될 것인가? 그러나 사회 철학은 인간적 판단들이 실제적이고 직접적인 판단에서는 언제나 참이면서도 관념들의 취득에 따라 언제나 일반 이성을 개인적 사유와 일치시키고 확실성의 영역을 무한히 확장하는 방식으로 서로 보완해 주며 잇따라 서로를 비추어 줄 수 있다고 생각한다. 이는 언제나 인간 판단의 권위를 긍정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성의 첫 번째 판단, 모든 정치적 헌법의 전문前文은 승인과 원칙을 구하는 것으로서 반드시 이런 것이다. 신은 존재한다. 이는 말하자면, 사회는 지도 의견, 사전 숙고, 지성을 가지고 다스려진다는 것이다. 이 판단은 우연성을 배제하는 것으로, 때문에 사회과학에 대한 가능성의 기초를 놓는 것이다. 그리고 개선과 진보의 목적으로 시도된, 사회적 사실들에 대한 모든 역사적, 실증적 연구는, 물론 나중에 가서 이 판단을 고려하기는 하겠지만 인민과 더불어 신의 존재를 가정해야 한다.

이처럼 사회들의 역사는 우리에게는 신 관념의 장시간의 확정에 불과하다. 사람의 운명은 점진적인 현시 과정인 것이다. 그리고 고대의 지혜가 모든 것을 신성의 자의적이고 환상적인 관념에 의존하게 만들어 이성과 의식을 억압하고 보이지 않는 주인에 대한 공포로 운동을 멈추었던 반면, 새로운 철학은 방법을 뒤집어 사람의 권위와 마찬가지로 신의 권위를 깨고 사실과 증거의 멍에 외에 다른 멍에를 수용하지 않아 모든 것을 그 문제들 가운데 최후의 문제로서 신학적 가설을 향해 수렴시킨다.

인간주의적 무신론은 그러므로 사람의 정신적, 지적 해방의 마지막 항, 결과적으로 철학의 마지막 국면으로서 모든 파괴된 교리의 재건 혹은 과학적 입증으로 가는 통로로 소용된다.

나는 신의 가설을 내가 말해 온 대로 역사에 의미를 부여하기 위해서만이 아니라 국가 안에서 과학의 이름으로 실행할 개혁을 정당화하기 위해서 필요로 한다.

우리가 신성을 사회에 외부적인 것으로, 사회의 운동들을 위에서부터 조절하는 것으로 간주하든지(완전히 허무하고 환상일 개연성이 아주 높은 견해), 사회 안에 내재하며 비인격적이고 무의식적인 이 이성과 동일하면서 본능처럼 문명을 진행시킨다고(자아의 비인격성과 무지는 지성의 관념에 혐오스러움에도 불구하고) 판단하든지, 끝으로 사회 안에서 수행되는 모든 것이 그 요소들의 관계로부터 나오든지(능동을 피동으로 바꾸고, 지성을 필연으로 만들며, 혹은 같은 말이지만 법칙을 원인으로 삼는 것이 장점인 체계), 언제나 그 결과로 사회적 활동의 발현은 우리에게 필연적으로 지고한 존재의 자의自意의 신호로, 아니면 일반적이고 비인격적인 일반 이성의 전형적인 종류의 언어로, 아니면 끝으로 필연의 말뚝으로 나타나서, 이 발현들은 우리에게 절대적인 권위를 지닐 것이다. 그것들의 계열은 정신에서처럼 시간상으로 연결되어, 완수된 사실이 수행해야 할 사실을 정하고 정당화한다. 과학과 운명은 일치한다. 생겨나는 모든 것은 이성에서 비롯되고, 역으로 이성은 생겨나는 것의 경험에 관해서만 판단을 내리기 때문에 과학은 정부에 참여할 권리가 있으며, 자문역으로서 그 자격의 근거를 이루는 것은 주권자로서 그것의 개입을 정당화해 준다.

모두의 투표에 의해 신적인 것으로 표현되고 인정되고 수용되는 과학은 세상의 여왕이다. 이처럼 신 가설에 힘입어 일체의 정태적 혹은 퇴보적 반대, 모든 신학에 의해 제안된 불수용의 모든 의도, 전통 혹은 이기심은 영구히 그리고 불가역적으로 제거되어 있다.

문명을 자연에 결합하는 연계를 보여주기 위해 나는 신神 가설을 필요로 한다.

실제로, 이 놀라운 가설은 자연 법칙과 이성 법칙의 동일성을 함축해 인간이 절대자에 동화되게 하는 것으로서 우리가 인간의 솜씨에서 창조적 작업의 보완물을 보도록 허락하며, 인간과 인간이 거주하는 지구를 연대하게 하며, 섭리가 우리를 배치한 이 영지, 그래서 부분적으로는 우리의 작품이 되는 영지의 개발 사업에서 우리가 만물의 원리와 목적을 의식하게 해준다. 그러므로 인류는 신이 아니라 해도 신을 계승한다. 혹은 다른 양식을 선호한다면, 인류가 오늘날 성찰로 행하는 것은 인류가 본능적으로 시작한 것, 그리고 자연이 필연으로써 완수하는 것으로 우리에게 보이는 것과 같다. 이 모든 경우에, 그리고 어떤 견해를 택하든, 하나는 의심할 수 없는 것으로 남는데 그것은 행동과 법의 일치이다. 지적인 존재들이자 지성을 가지고서 연출되는 우화의 배우들로서 우리는 우주와 영원을 향해 용감하게 결론을 내릴 수 있으며, 우리가 우리들 가운데 작업을 확정적으로 조직했다면, 고집스럽게 창조는 설명된다고 말할 수 있다.

이처럼 철학의 탐구 영역은 정해진 것이다. 전통은 미래에 관한 모든 사유의 출발점이다. 유토피아는 영영 배제된다. 자아에 대한 연구는 개인적 의식으로부터 사회적 의지의 발현들로 이송되면서 그때까지 박탈되었던 객관성을 획득한다. 그리고 역사는 심리학이 되고, 신학은 인류학이 되며, 자연과학들은 형이상학이 되어 이성의 이론이 지성의 공허가 아니라 폭 넓게, 그리고 직접적으로 관찰 가능한 자연의 무수한 형태들로부터 도출된다.

나는 견해가 같지 않은 수많은 파벌을 향한 내 선의를 증언하기 위해 신 가설을 필요로 한다. 나는 다음 이들의 한恨을 두려워하는 것이다. 유신론자들. 이들은 신의 대의를 위해 칼을 빼어들 채비가 되어있고, 나는 로베스피에르처럼 마지막 무신론자의 파괴에까지 단두대를 가동하면서도 이 무신론자가 자신일지 모른다고 의심하지 않는 그런 자를 안다. 신비가들. 이들은 드 라므네(de Lamennais), 키네(Quinet), 르루(Leroux) 등 제씨諸氏의 깃발 아래 행진하는 학생들과 여성들로 대부분 구성된 당파로서 ‘그 주인에 그 신하, 그 신에 그 백성’이라는 표어를 가지고 일꾼의 임금을 규율하기 위해 종교를 부흥하는 것에서 시작한다. 유심론자들. 이들은 내가 내 영혼의 온 힘을 다해 항거하는 것이 물질 숭배교인데도 내가 정신의 권리들을 무시한다면 물질 숭배교를 세운 것이라고 나를 고발하는 자들이다. 감각주의자들과 유물론자들. 이들에게 신적 교리는 제약의 상징이고 열정의 예속화 원리인데, 그들은 말하기를 그 바깥에서는 사람에게 기쁨도, 덕성도, 천재성도 없다. 절충주의자들과 회의주의자들, 모든 낡은 철학의 서적상書籍商이자 출판업자들이지만 스스로는 철학을 하지 않고 자신들의 허가 없이 생각하고 믿거나 단언하는 누구에게든지 반대하며 찬동과 특권을 가지고 광범위한 신도회에 가입한 자들이다. 끝으로 보수주의자들. 수구주의자, 이기주의자이며 위선자들로서 이웃에 대한 증오에 의거해 신의 사랑을 설파아고 노아의 홍수 이래로 세상의 여러 불행에 대해 자유를 고발하고, 자신들의 어리석음의 감정에 의거해 이성을 저주하는 자들이다.

그러므로 신앙의 경외를 받는 허깨비들을 모독하기는커녕 그것들을 대명천지에 드러나게 하기만을 열망하는 가설, 전통적 교리들과 의식의 편견들을 기각하는 대신에 단지 그것들을 입증할 것만 요구하는 가설, 배타적 견해들로부터 자신을 지키면서도 이성의 무오류성을 공리로 삼고, 이 풍성한 열매를 맺는 원칙 덕분에 적대적 종파들 어느 것에 대해서도 물론 반대하는 결론을 내리지 않을 가설을 고발하는 것이 가능하겠는가? 종교적, 정치적 보수주의자들이 내가 주권적 지성, 모든 질서정연한 사고의 원천인 그것의 가설로부터 출발한 마당에 사회질서를 교란한다고 비난하는 일, 내가 신 관념의 의미와 내용을 추구하는 마당에 반半그리스도교적 민주주의자들이 나를 신의 적이고 따라서 공화국의 배신자라고 욕하는 일, 그리고 내가 철학은 그 대상물 안에서, 즉 사회와 자연의 발현물 안에서 연구되어야 한다고 적확하게 주장하는 마당에 대학의 상인들이 자신들의 철학적 생산물의 무가치함을 증명한 무례함을 범했다고 내게 책임을 돌리는 일이 가능한 것인가?…

나는 내 문체를 정당화하기 위해 신 가설을 필요로 한다.

신, 세계, 영혼, 운명에 관한 모든 것에 대해 내가 처한 무지에서, 유물론자로서, 즉 관찰과 경험으로써 진행할 수밖에 없고 다른 언어가 존재하지 않으므로 신자의 언어로 결론을 내릴 수밖에 없으며, 내 공식들이 본의 아니게 신학적이어서 본래 의미로 받아들여져야 할지 아니면 비유로 받아들여져야 할지 알지 못하며, 신, 인간 그리고 사물에 대한 이 끊임없는 사색 중에 사유, 말, 행동이라는 세 범주가 포괄하는 모든 항들의 동의성을 겪지 않을 수 없으나 다른 측면보다 어느 한 측면에서 아무것도 단언하기를 원하지 않아서, 변증법의 엄밀성은 내가 사람들이 신이라 부르는 이 미지를 가정할 것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닌 것을 요구했다. 우리는 신성으로 가득 차 있다. 만물은 유피테르로 가득하다(Jovis omnia plena). 우리의 기념물, 우리의 전통, 우리의 법, 우리의 관념, 우리의 언어와 우리의 과학, 모두가 이 지워지지 않는 미신에 감염되어 있으며, 그 바깥에서는 우리는 말하고 행동하게 되어 있지 않으며, 그것 없이는 우리는 생각만 못하는 것이 아니다.

끝으로 나는 이 새로운 논문들의 출간을 설명하기 위해 신 가설을 필요로 한다.

우리 사회는 여러 사건들로 버거움을 자각하고 미래를 염려한다. 이 막연한 예감을 보편적, 내재적, 보기에 따라서는 영원한 그러나 비인격적인, 따라서 말 없는 이성의 도움으로만, 또는 그것이 필연이 인지된다는 것, 따라서 사회가 예감을 가진다는 것을 함축한다면 필연의 관념을 가지고서 어떻게 설명하는가? 그러므로 또다시 사회를 압박하며 사회에 상象을 제공하는 매체 혹은 야차夜叉의 가설이 남게 된다.

그런데, 사회가 예언을 할 때는 어떤 사람들의 입술로 스스로에게 질문하고, 다른 사람들의 입술로 스스로에게 답한다. 그리고 현자는 신 자신이 말했으므로 경청하고 신이 말했다는 것을 이해할 줄 안다.

도덕 및 정치 과학 아카데미는 다음과 같은 질문을 제기했다.

이윤이 임금과 가지는 관계를 규율하는 일반적 사실들을 정하고, 그것의 각각의 기복 운동을 설명한다.

몇 년 전에 같은 아카데미는 이렇게 물었다. 빈곤misère의 원인은 무엇인가? 이는 실제로 19세기가 하나의 사상, 평등과 개혁이라는 사상만을 가진다는 것이다. 그러나 정신은 원하는 곳 어디서나 숨을 쉰다. 많은 이들이 그 질문을 곱씹기에 착수했다. 아무도 대답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점술사 집단은 자신의 질문을 더 명확한 용어로 갱신했다. 작업장에서 질서가 지배하는지, 임금이 공정한지, 자유와 특권이 정당한 보상을 받는지, 교환의 모든 행위를 지배하는 가치의 개념이 경제학자들이 내놓은 형태로 충분히 정확한지, 신용이 노동을 보호하는지, 유통이 규칙적인지, 사회의 부담이 모두에게 동등하게 주어지는지 등등을 알고 싶어 한다.

그리고 실제로 빈곤이 소득의 부족을 직접적 원인으로 하므로, 불행과 악의의 경우들 외에 노동자의 소득이 어떻게 부족한지를 아는 것이 좋다. 한 세기 전에 그렇게 큰 소리를 냈고, 이상한 숙명에 의해 아카데미의 프로그램에서 마치 그것이 현대의 진정한 고갱이인 듯이 끊임없이 재생산되는 것은 언제나 재산의 불평등이라는 같은 문제다.

그러므로 평등, 그것의 원칙, 그것의 수단, 그것의 장애물, 그것의 이론, 그것이 지연되는 이유들, 사회악과 섭리적 악의 원인, 바로 이것들이야말로 불신의 냉소에도 불구하고 세상에 가르쳐줄 필요가 있는 것이다.

나는 아카데미의 보는 눈이 별로 심오하지 않으며, 로마 가톨릭 공의회와 마찬가지로 새로운 것에 대한 공포심을 지니고 있음을 잘 안다. 그러나 아카데미가 과거로 회귀할수록, 그것은 우리에게 미래를 비추어 주며, 결과적으로 우리는 아카데미의 영감을 더욱 믿어야 한다. 왜냐하면 진정한 예언자들은 자신들이 공언하는 것을 이해하지 못하는 자들이기 때문이다. 차라리 다음의 말을 들어보라.

아카데미는 말한다. 자발적이고 사적인 조합의 원리를 가지고 곤궁의 경감을 위해 할 수 있는 가장 쓸모 있는 적용 방식은 어떤 것인가?

그리고 또,

보험 계약의 이론과 원리들을 해설하고, 그 역사를 펴내고, 학설과 사실들로부터 이 계약이 취할 수 있는 발달 형태들과 현재 우리의 상업과 산업이 처한 진보 상태에서 행해질 수 있을 다양한 유익한 적용들을 도출해낸다.

정치 평론가들은 상업적 연대의 기초 형태인 보험이 사물들에서의 연합societas in re이라는 것, 즉 순전히 경제적인 관계에 기초를 둔 조건들이 인간의 자의恣意를 벗어나는 하나의 사회라는 데 동의한다. 그래서 보험, 혹은 이익들에 대한 상호 보장의 철학, 이는 실재적in re 사회들의 일반 이론에서 도출될 것인데, 이는 보편적 조합의 공식을 포함할 것이다. 이 공식을 아카데미에서는 아무도 믿지 않는다. 그리고 주체와 객체를 동일한 관점 안에 합쳐서 아카데미는 이익들의 조합 이론과 더불어 자발적 조합의 이론을 요구할 때에, 우리에게 가장 완벽한 사회가 어떤 것이어야 하는지를 드러내고, 이로써 자신의 신념에 더욱 상반되는 모든 것을 긍정한다. 자유, 평등, 연대, 조합을! 어떤 생각할 수도 없는 오해에 의해 그렇게 저명하게 보수적인 집단이 시민들에게 인간의 여러 권리에 대한 이 새로운 프로그램을 제안했는가? 이와 같이 가야파는 예수 그리스도를 부인하면서 구원을 예언했다.

이 질문들 중 첫 번째 것에 관해 45편의 논문들이 2년에 걸쳐 아카데미에 제출되었다. 그 주제가 여러 정신들의 상태에 경이롭게 부응했다는 증거다. 그러나 수많은 경쟁자들 중 누구도 상을 받을 사람으로 판정되지 못해서 아카데미는 경쟁자들의 부족을 들어 그 문제를 철회했지만, 실제로는 논문 공모의 실패가 아카데미가 품은 유일한 목표라서 더 기다리지 않고 조합을 주창하는 당파의 기대가 근거를 상실했다고 선언하는 것이 중요했던 것이다.

그래서 아카데미의 제씨는 그들이 삼발이 위에서 공고한 것을 회의실 안에서 부인한다! 그러한 모순은 나를 놀라게 할 것이 못 된다. 그리고 신은 내가 그들의 이런 행위를 범죄로 보지 못하게 말린다. 옛사람들은 여러 혁명이 무서운 징조로 선포되며, 다른 기적들 중에서 동물들이 말을 하는 기적도 있다는 것을 믿었다. 이는 위기의 순간에 대중들 안에서 갑자기 유통하는, 그리고 어떠한 인간적인 선행자도 없어 보이는 이 갑작스러운 관념과 이상한 이야기들을 지칭하기 위한 비유였다. 그만큼 그런 관념들은 통상적인 사법司法의 영역을 벗어난다. 우리가 사는 시대에 그러한 일은 얼마든지 일어날 수 있었다. 운명적 본능과 기계적 자생성에 의거해―가축들이 말을했다pecudesque locutae―조합을 선포한 후에, 도덕 및 정치 과학 아카데미의 선생들은 통상적인 분별력을 다시 되찾아 그들에게서는 일상 관행이 영감靈感을 반박하게 되었다. 그러므로 높은 분들의 견해를 사람들이 관심을 기울인 판단과 분별하는 법을 알도록 하자. 그리고 현자들의 이야기에서 이는 특히 의심할 바가 없으며, 그들의 성찰은 거기에 가장 적게 기여한다는 것을 확실한 것으로 간주하자.

그럼에도 아카데미는 자신의 직관과 아주 급작스럽게 결별하면서 약간의 후회를 느낀 것 같다. 성찰을 통해 더는 믿지 않는 조합의 이론 대신에 아카데미는 ‘주로 빈곤 계급의 복지와 도덕성과 관련해 페스탈로치의 훈육과 교육 체제에 관한 비판적 고찰’을 요구한다. 누가 아는가? 아마도 이윤과 임금의 관계, 조합, 노동 조직이 결국 교육 체계의 근저에 있으리란 것을. 사람의 생명은 끊임없는 도제 수업이 아닌가? 철학과 종교는 인류의 교육이 아닌가? 훈육을 조직하는 것은 그러므로 산업을 조직하고 사회 이론을 만드는 것이다. 아카데미는 제정신이 돌아온 순간에는 언제나 다음 질문으로 돌아온다. 말을 하는 것은 여전히 아카데미다.

물질적 행복의 진보와 취향은 인민의 도덕성에 어떤 영향을 미치나?

극히 외면적인 의미에서 볼 때 아카데미의 이 새로운 질문은 진부하고 기껏해야 달변가를 부추기기에 알맞다. 그러나 아카데미는 끝까지 자기 신탁의 혁명적 의미를 무시해야 해서, 자신의 주석에 쳐진 휘장을 걷어 올렸다. 그러니 아카데미는 이 에피쿠로스적 논제에서 어떤 심오한 것을 보았는가? 아카데미는 우리에게 말한다.

“사치와 향락 취향, 대다수가 그에 대해 느끼는 각별한 애호, 그에 전적으로 몰두하는 영혼들과 지성들의 경향, 이를 자신들의 모든 사업, 모든 노력과 모든 희생의 동기와 목표로 삼기 위한 개인들과 국가의 의견 일치는 이롭건 해롭건 예전에 사람들을 지배했던 것보다 아마도 더 강력한 행동의 원칙이 되는 일반적 혹은 개인적 감정들을 낳는다.”

도덕주의자들에게는 세기의 감각주의, 양심 팔아먹기, 그리고 정부를 수단으로 자행된 부패를 고발하기에 더없이 좋은 기회가 주어졌다. 그 대신에 도덕 과학 아카데미는 무엇을 하는가? 지극히 자동적인 평온함을 가지고 아카데미는, 사치가 아주 오랫동안 스토아학파와 금욕주의자들, 이 거룩함의 거장들에 의해 금지되어 온 것인데, 이것이 옛날 종교와 철학이 호소한 모든 행위 원칙들만큼이나 정당하고 순수하고 위대한 행위 원칙으로 등장하게 될 공무 분야를 신설한다. 아카데미는 우리에게 말한다. 행동의 동기(의문의 여지없이 지금은 오래되고 낡은), 섭리상으로 역사에서 탐욕이 그 뒤를 이은 행동의 동기를 확인하라. 그리고 처음 것의 결과에 따라 탐욕의 효과를 계산하라. 한마디로 아리스티포스가 자신의 세기를 앞서갈 뿐이라는 것, 그의 윤리는 제논과 토마스 아 켐피스의 윤리와 마찬가지로 승리해야 했다는 것을 증명하라.

그러므로 우리는 더 이상 가난하기를 원치 않는 사회, 자신이 부를 가지지 않는 한 옛날에 자신에게 소중하고 거룩했던 모든 것, 자유, 종교, 영광을 비웃는 사회, 부를 획득하기 위해서 온갖 수모를 겪고 온갖 비웃음을 사는 사회를 대면하고 있다. 이 쾌락에 대한 열렬한 갈증, 사치에 도달하려는 막을 수 없는 의지는 문명에서의 새로운 시대의 징후로서 지고의 명령이며, 그에 힘입어 우리는 빈곤을 근절하려고 노력해야 한다. 아카데미는 이렇게 말한다. 그 다음에 속죄와 절제의 계율, 희생과 포기, 행복한 비천함의 윤리는 어떻게 되는가? 저 세상에 약속된 보답에 대해 얼마나 불신하는 것이며, 복음을 얼마나 부정하는 것인가! 하지만 무엇보다도 황금열쇠를 시스템으로 간주한 정부를 얼마나 많이 정당화해 주는 것인가! 종교인들, 그리스도교인들, 세네카 류의 사람들이 어떻게 일제히 그런 부도덕한 격률을 선포했는가?

아카데미는 사상을 보완해 우리에게 다음과 같이 대답하려고 한다.

‘인신과 재산에 대한 침해의 소추와 처벌에서 형사 기구의 진보는 야만시대 이래 가장 세련된 민족들의 시대까지 문명의 여러 시대를 어떻게 이어 오고 획을 그어 오는지를 보이라.’

도덕 과학 아카데미의 범죄학자들이 자기 전제의 결론을 미리 내다보았다는 것이 믿어지는가? 매 순간 연구해야 할 사실, 아카데미가 형사 기구의 진보라는 말로 가리키는 사실은 혹은 교정矯正의 형태에서, 혹은 형벌에서 문명이 자유와 계몽과 부에서 성장함에 따라 발현되는 점진적인 완화일 뿐이다. 그래서 형벌 제도들의 원칙은 사회의 복지를 구성하는 모든 원칙에 반비례해서, 일체의 사법적 장치와 마찬가지로 형벌 체계의 모든 부분의 끊임없는 제거가 있으며, 이 운동의 최종 결론은 이런 것이다. 질서의 강제 이행은 공포도 처형도 아니고 따라서 지옥도 종교도 아니다.

기성관념을 얼마나 뒤집는 것인가! 도덕 과학 아카데미가 옹호할 사명을 지는 모든 것을 얼마나 부정하는 것인가? 그러나 질서의 강제 이행이 이 세상에서도 저 세상에서도 겪어야 할 처벌의 두려움에 더 이상 있지 않다면, 인신과 재산을 보호하는 보장책은 어디 있는가? 아니, 형벌 제도 없이 재산은 무엇이 되며, 재산 없이 가족은 무엇이 되는가?

이 모든 것을 전혀 모르는 아카데미는 동요 없이 이렇게 대답한다.

‘고대부터 우리 시대까지 프랑스 땅에서 가족 조직의 여러 국면들을 그려 보라.’

이는 이런 뜻이다. ‘가족 조직의 선행하는 진보에 의한 재산 평등, 자발적이고 자유로운 조직, 보편적 연대, 물적이고 화려한 행복, 교도소, 법정, 경찰, 유치장 없는 공공질서의 상태에서 가족의 생존 조건을 확인하라.’

극히 대담한 혁신자들의 예를 따라 사회 질서의 모든 원칙, 종교, 가족, 재산, 형사 제도를 의문시한 후에 도덕 및 정치 과학 아카데미가 또한 다음의 의문을 제기하지 않았다는 것에 대해 사람들은 아마도 놀랄 것이다. 가장 나은 정부 형태는 무엇인가? 실제로 정부는 사회에 대해 일체의 선제 움직임, 일체의 보장, 일체의 개혁이 나오는 원천이다. 그러므로 헌장에 명문화된 대로의 정부가 아카데미의 문제들에 대한 실천적 해결책을 내놓는 데 충분한지를 알아보는 일이 흥미로웠다.

그러나 신탁神託들이 귀납과 분석에 의해 진행된다고 상상하는 것은 신탁을 잘 모르는 일일 것이다. 그리고 정치적 문제가 요구되는 증명들의 조건이거나 보조 명제라는 바로 그 이유 때문에 아카데미는 이를 논문 공모에 부치지 못했다. 그리고 그러한 결론은 아카데미의 눈을 뜨게 해줄 것이며, 응모자들의 논문을 기다릴 것 없이 자신의 프로그램을 완전히 제거하기를 서둘렀을 것이다. 아카데미는 앞의 문제를 다시 내놓았다. 아카데미는 이렇게 혼잣말을 했다.

신의 작품들은 그 고유한 본질상 아름답다. 한결같이 바르다(justificata in semetipsa, 시편 19장 9절). 이는 한마디로 신에게서 나온 것이므로 참되다. 사람에 대한 사상가들은 길고도 좁은 섬광이 꿰뚫은 두꺼운 안개를 닮았다. ‘그러므로 우리와 관련해서 진리는 무엇이며, 종살이의 특성은 무엇인가?’

마치 아카데미가 우리에게 이렇게 말한 것 같다. 여러분, 여러분 존재의 가설, 시간, 공간, 운동, 사상, 사상의 법칙들의 가설을 입증해 보시오. 그 다음은 빈곤의 가설, 조건 불평등의 가설, 보편적 조합의 가설, 행복의 가설, 왕정과 공화정의 가설, 섭리의 가설을 입증해 보시오!…

이는 신과 인류에 대한 온전한 비판이다.

나는 저명하신 단체의 프로그램을 증거로 삼는다. 내 작업 조건을 제시한 것은 내가 아니다. 이는 도덕 및 정치 과학 아카데미다. 그런데, 나 자신이 무오류성을 타고나지 않았다면, 한마디로 내가 신이나 점쟁이가 아니라면 내가 이 조건들을 어떻게 충족할 수 있는가? 그러므로 아카데미는 신과 인간이 동일하거나 적어도 상관관계라는 것을 인정한다. 하지만 이 상관성이 어디 있는지를 아는 것이 문제이다. 그러한 것이 확실성 문제의 의미이며, 그러한 것이 사회철학의 목표이다.

그러므로 이처럼 신이 영감을 불어넣는 사회의 이름으로 아카데미는 질문을 한다.

같은 사회의 이름으로 나는 대답을 시도하는 예언자 중 하나다. 과제는 엄청나며, 나는 이를 완수한다는 약속을 하지 않는다. 나는 신이 나를 데려다주는 데까지 갈 것이다. 그러나 내 이야기가 어떤 것이든 그것은 결코 내게서 나오는 것은 아니다. 내 펜을 움직이는 사고는 내게 개인적인 것이 아니며, 내가 쓰는 것은 어느 것도 내 것이라고 할 수 없다. 나는 사실들을 내가 본 대로 전할 것이다. 나는 그 사실들을 내가 말한 것에 준해서 판단할 것이다. 나는 무엇이든지 그것의 극히 정력적인 이름으로 부를 것이다. 그리고 누구도 거기서 모독을 발견하지 못할 것이다. 나는 자유롭게, 그리고 내가 배운 점술의 규칙에 따라 이 순간에 현자들의 웅변적인 입술로, 그리고 인민의 알아들을 수 없는 아우성으로 의견을 표명하는 신의 소견이 우리에게 원하는 것을 구할 것이다. 그리고 내가 우리의 헌법에 의해 바쳐진 일체의 특권을 부정할 때, 나는 결코 몽니를 부리는 것이 아니다. 나는 보이지 않는 쇠꼬챙이가 우리를 떠미는 곳을 손가락으로 가리킬 것이다. 그리고 내 행동도 내 말도 성질을 돋우는 것은 아닐 것이다. 나는 안개를 일으킬 것이며, 내가 벼락이 치게 할 때, 나는 죄가 없을 것이다. 아카데미가 나에게 하도록 초대한 이 엄숙한 조사에서 나는 진리를 말할 권리밖에 없으며, 내가 생각하는 것을 말할 권리를 가진다. 내 사고, 내 표현 그리고 진리는 단 하나의 유일한 것일 수밖에 없다!

그리고 여러분, 독자님들, 독자 없이 작가가 없으니 여러분은 내 저작의 절반이다. 여러분 없이 나는 울리는 종에 불과하다. 여러분의 주의에 힘입어 나는 기적을 말할 것이다. 여러분은 사회라고 부르는 지나가는 이 회오리바람, 아주 무서운 소음과 함께 번찍임과 천둥과 음성이 솟아나는 이 회오리바람을 보는가? 나는 이 회오리바람을 움직이는 숨겨진 용수철을 여러분에게 손가락으로 만지게 하고 싶다. 그러나 이를 위해서는 여러분이 내 명령에 따라 순수 지성의 상태로 낮아질 필요가 있다. 사랑과 쾌락의 눈은 해골 안에서 아름다움을, 적나라하게 노출된 내장들에서 조화를, 검고 응고된 피에서 생명을 인식할 능력이 없다. 그래서 사회적 유기체의 비밀은 감정과 편견이 뇌를 흐리게 만드는 사람에게는 비문秘文이다. 그러한 극상極上의 경험은 고요하고 냉정한 숙고에서만 기대된다. 그러므로 여러분의 눈에 생명의 책장들을 넘기기 전, 내가 여러분의 영혼을 이 회의적 정화로 준비시키는 것, 소크라테스, 예수 그리스도, 성 바울로, 성 레미지오, 베이컨, 데카르트, 갈릴레이, 칸트 등 여러 민족의 위대한 스승들이 제자들에게 모든 시대에 요구했던 이 회의적 정화를 감수하라.

여러분이 누구이든, 곤궁의 누더기를 걸쳤든, 호화로운 사치의 옷을 차려 입었든 나는 풍요의 시커먼 연기도, 질서의 눈을 가진 빈곤의 독도 해를 입히지 못하는 빛나는 나신裸身으로 여러분을 데려간다. 부자에게 조건의 차이가 계산 착오에서 비롯된다는 것을 어떻게 설득할까? 빈자는 소유주가 선의를 가진다는 것을 걸망을 지고서 어떻게 상상하겠는가? 노동자의 빈곤을 파헤치는 것은 무위도식자에게는 극히 견딜 수 없는 소일거리다. 행복한 자를 정당하게 평가하는 것이 곤궁한 자에게 극히 쓴 약인 것과 마찬가지다.

여러분은 승진했다. 나는 여러분을 자리에서 쫓아낸다. 이제 여러분은 자유로운 몸이다. 이 제복을 입은 상태에서는 너무 많은 낙관주의, 너무 많은 종속성, 너무 많은 나태함이 있다. 과학은 사고가 떨쳐 일어나기를 요한다. 그런데 자리를 차지한 한 사람의 사고는 자기가 받는 보수에 있는 것이다.

아름답고 정열적이고 예술적인 여러분의 여주인은, 내가 그렇게 믿고 싶은 것이지만, 여러분에게만 보유된다. 즉 여러분의 영혼, 여러분의 정신, 여러분의 의식은 자연과 예술이 홀린 인간들의 영원한 형벌을 위해 만든 극히 매력적인 사치품 안에 들어간 것이다. 나는 여러분을 여러분 자신의 이 신적인 반쪽으로부터 분리한다. 오늘날 정의를 원하고 한 여성을 사랑하는 것은 너무한 일이다. 위대함과 명확함으로써 사고하려면 남자는 자신의 본성을 둘로 나누고, 자신의 남성적 위격 안에 머물 필요가 있다. 또한 내가 여러분이 처하게 한 상태에서는 여러분의 연인은 여러분을 더 이상 모를 것이다. 여러분은 욥의 아내를 기억하라.

여러분의 종교는 무엇인가? …여러분의 신앙을 잊으라. 그리고 지혜를 발휘해 무신론자가 되어라. 뭐라고! 하고 우리의 가설과 다르게, 아니, 우리의 가설 때문에 무신론자인 여러분은 말한다. 오래전부터 사람을 넘어선 인성, 이 생애를 넘어선 생애를 가정할 권리를 가지기 위해서는 자신의 사고를 신적인 것들 위로 올릴 필요가 있었다. 게다가 여러분의 후생 수준에 대해 두려워하지 말라. 신은 이성으로 자신을 무시하는 자에게 결코 화를 내지 않으며, 말로 자신을 찬양하는 자에게 관심을 두지 않는다. 그리고 여러분의 의식 상태에서 여러분에게 가장 확실한 것은 신에 대해 아무 생각도 하지 않는 것이다. 종교도 정부들과 같다는 것을 모르는가? 그 중 가장 완벽한 것은 모두를 부정하는 것이라는 점을? 그러므로 어떠한 정치적 환상도 종교적 환상도 여러분의 영혼을 사로잡지 않기를 바란다. 오늘날 이것이 바보도 변절자도 되지 않을 유일한 수단이다. 아! 나는 열정적인 청년기에 이렇게 말했다. 나는 공화국의 만종이 울리는 소리를 듣지 않으리라고. 그리고 우리의 신부님들은 흰 투니카를 걸치고 도리아식으로 교송交誦을 읊는 소리를 듣지 않으리라고. 오, 하느님, 사막의 바람이 신선한 산들바람이 되듯 우리의 종살이를 변화시키소서! …그러나 나는 공화주의자들에게 절망했고, 나는 더 이상 종교도 신부들도 모른다.

나는 아직도 여러분의 판단을 완전히 보장하기 위해 여러분의 영혼을 동정심에 무감각하고, 덕을 넘어서고 행복에 무관심하게 만들고 싶다. 그러나 이는 초심자에게는 너무 많은 것을 요구하는 일일 것이다. 여러분은 단지 동정, 행복과 덕은 조국, 종교, 사랑과 마찬가지로 가면일 뿐이라는 것을 기억하고 결코 잊지 말라….

제1장 경제학에 관해

. 여러 사회의 경제에서 사실과 법의 대립

나는 경제학이 실재함을 긍정한다.

이 명제는 오늘날 감히 의심하는 경제학자들이 별로 없는 것으로서 한 철학자가 여태껏 주장해 온 것 중 가장 대담한 명제이다. 그리고 연속되는 이 연구들은 내가 바라건대 인간정신의 가장 위대한 노력이 언젠가는 이를 보여주려는 노력일 것임을 입증할 것이다.

나는 또 한편으로 경제학, 모든 과학들 중 내 소견으로는 가장 포괄적이고 가장 순수하고 사실로 가장 잘 번역되는 경제학의 진보적 특성과 동시에 절대적 확실성을 긍정한다. 이 과학을 구체적으로 논리학이나 형이상학으로 만들고 옛 철학의 기초를 근원적으로 바꾸는 새로운 명제다. 다시 말해, 내게 경제학은 형이상학의 객관적 형태이고 실현이다. 이는 움직이는 형이상학, 지속성을 피해 달아나는 도면 위에 그려진 형이상학이다. 그리고 노동과 교환의 법칙에 몰두하는 자는 누구나 정말로, 그리고 특별히 형이상학자이다.

내가 서론에서 말한 것과 더불어 이는 놀라울 것이 전혀 없다. 사람의 노동은 신의 일을 계속하는 것이며, 신은 모든 존재를 창조하면서 바깥에 이성의 영원한 법칙들을 실현할 뿐이다. 그러므로 경제학은 반드시, 그리고 동시에 관념들의 이론이면서 자연적 신학이고 심리학이다. 이 첫인상만으로도 경제 문제들을 다루어야 하는 내가 사전에 신의 존재를 어째서 가정해야 했는지, 그리고 어떤 명목에서 단순한 경제학자인 내가 확실성의 문제를 해결하려고 열망하는지를 설명하기에 충분했다.

그러나 나는 서둘러 그것을 말하면서 여러 이론들의 앞뒤가 맞지 않는 총체, 사람들이 거의 100년 전부터 정치경제학이라는 공식 명칭을 붙여준 그것을 과학이라고 보지 않는다. 이는 그 명칭의 어원에도 불구하고 아직은 재산권의 법전이거나 태고 때의 일상 관행과 다른 것이 아니다. 이 이론들은 우리에게 경제학의 초급 개념들이나 제1부분만을 제시할 뿐이다. 이는 그 이론들이 재산권처럼 서로 간에 온통 모순되고 그중 태반이 적용 불가능하게 되는 이유이다. 어떤 의미에서는 스미스, 리카도, 맬서스, 세가 우리에게 전해주고, 반세기 전부터 자리를 잡고 있는 그러한 정치경제학의 부정인 이런 단언의 증거는 특히 본 논문에서 나올 것이다.

정치경제학의 부족함은 언제나 사색적인 정신들을 당황하게 했으며, 이들은 실천을 깊이 파고들기에는 지나치게 자신들의 공상을 사랑하고 실천을 그 명백한 결과로 평가하는 데 국한해 애초부터 현상 유지에 대한 반대 당파를 이루었으며, 문명과 그 관습에 대한 지속적이고 체계적인 풍자에 매달렸다. 반면에 모든 사회 제도의 기초인 재산권은 열렬한 옹호자들이 결코 모자라지 않았다. 이들은 실시자praticien라는 칭호에 의기양양해서 정치경제학의 훼방꾼들에게 계속 전쟁을 걸었으며, 용감하고 흔히 능숙한 손으로 일반적 편견과 개인적 자유가 합심해서 세운 구조물을 공고화하는 작업을 했다. 아직 진행 중인 보수주의자들과 개혁주의자들 간의 논쟁은 철학사에서 실재론자들과 명목론자들의 싸움과 비슷하다. 이편이나 저편에서 오류와 옳음은 동등하고, 경쟁심, 편협성과 견해들의 불관용이 오해의 유일한 원인이었다고 덧붙이는 것은 거의 쓸데가 없다.

이처럼 두 세력이 세상의 통치를 놓고 논쟁하며, 적대적인 두 숭배 대상, 즉 정치경제학이나 전통, 그리고 사회주의나 유토피아에 열이 올라 서로를 파문에 처한다.

그러므로 더 가시적인 말로 하여, 정치경제학이란 무엇인가? 사회주의란 무엇인가?

정치경제학은 오늘까지 부의 생산과 분배의 현상들에 관해, 즉 노동과 교환의 가장 일반적이고 가장 자생적이고 따라서 가장 공신력 있는 형태들에 관해 행해진 관찰들의 모음이다.

경제학자들은 그들이 할 수 있었던 한에서 이 관찰 사항들을 분류했다. 그들은 현상들을 묘사했고, 그것들의 돌발과 그 관계를 확인했다. 그들은 거기서 여러 상황들의 필연적 특성을 주목했고, 이것들을 법칙이라고 불렀다. 그리고 말하자면 사회의 가장 순진한 발현들에서 취한 이 지식들의 총체가 정치경제학을 이룬다.

그러므로 정치경제학은 부의 생산 및 분배와 관련해서 인류의 가장 명백하고 가장 보편적으로 신임 받는 관습, 전통, 실무와 일상 관행의 자연사自然史이다. 이런 자격을 가진 정치경제학은 사실적으로, 법적으로 스스로를 합당한 것으로 여긴다. 사실적이라는 것은 그것이 연구하는 현상들이 항시적, 자생적, 보편적이기 때문이며, 법적이라는 것은 이 현상들이 나름대로 가능한 가장 큰 권위인 인류의 권위를 지니기 때문이다. 이처럼 정치경제학은 과학, 곧 규칙적이고 필연적인 사실들의 추론되고 체계적인 지식의 자격을 지닌다.

비슈누 신과 비슷하게 언제나 죽고 언제나 부활하는 사회주의는 20여 년 전부터 대여섯 명 계시자들의 인간으로 만 번째 환생을 했다. 사회주의는 사회 현 체제의, 그래서 예전 모든 기구들의 비정상성을 주장한다. 문명화된 질서는 천박하고 모순되고 비효율적이라는 것, 그 자체로부터 억압, 빈곤, 범죄를 낳는다는 것을 주장하고 입증한다. 사회생활의 모든 과거를 모함한다고는 못 해도 고발하고, 온 힘을 다해 도덕관념과 제도들의 재형성을 추진한다.

사회주의는 정치경제학을 잘못된 가설이라고 선언하면서 극소수에 의한 대다수의 착취를 위해 발명된 궤변을 끝맺음하며, 열매로써 안다(a fructibus cognoscetis)는 경구를 활용해서 인간적 재난의 그림으로 정치경제학의 무능함과 공허를 입증해 보여준다. 이 재난에 정치경제학이 책임이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정치경제학이 거짓이라면, 각 나라에서 법과 관습의 과학인 법학도 거짓이다. 왜냐하면 네 것과 내 것의 구분에 기초를 두므로 그것이 정치경제학에서 묘사되고 분류된 사실들의 정당성을 가정하기 때문이다. 공법과 국제법의 이론들도 대의代議 정부의 모든 다양한 형태들과 함께 거짓이다. 개인적 취득과 의사意思들의 절대적 주권의 원칙에 의존해 있기 때문이다.

사회주의는 이 모든 결과를 수용한다. 여러 사람들이 부富의 생리학으로 간주하는 정치경제학은 사회주의가 볼 때 도둑질과 빈곤의 조직화된 실무에 불과하다. 글로 적힌 이성의 이름으로 법학자들에 의해 꾸며진 법학은 사회주의의 눈으로 볼 때는 법적이고 공식적인 약탈의, 한마디로 재산권의 붉은 제목들의 편찬에 불과하다. 이 두 과학으로 자처하는 것들인 정치경제학과 법 사이의 관계에서 볼 때, 이 둘은 사회주의가 하는 말로 한다면 사악함과 불화의 완전한 이론이다. 그 다음으로 부정으로부터 긍정으로 넘어가면서 사회주의는 재산권 원리에 조합 원리를 대립시킨다. 그리고 사회경제학을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새로 만들 힘, 즉 새로운 법, 새로운 정치, 옛 형태와는 정반대되는 제도들과 도덕관념을 새로 만들 힘이 있다고 자처한다.

이처럼 사회주의와 정치경제학 간의 구분선은 그어졌고, 그 적대성은 확연하다.

정치경제학은 이기주의의 성화聖化에 쏠린다. 사회주의는 공동체의 고양 쪽으로 기운다.

경제학자들은 정부들이 저질렀다고 고발해야겠다고 생각하는 자신들의 원리에 대한 약간의 위반을 제외하고는 기정사실에 관한 낙관론자들이다. 사회주의자들은 완수할 행동에 대한 낙관론자들이다.

전자의 사람들은 마땅히 그래야 하는 것이 지금 그러하다고 단언한다. 후자의 사람들은 마땅히 그래야 하는 것이 지금 그렇지 않다고 단언한다. 따라서 전자의 사람들은 이성에서 나올 뿐인 자신들에 대한 비판이 자신들의 편견에 빈번한 공격을 가함에도 종교, 권위 그 밖의 재산권의 동시대적이고 보수적인 원칙들의 수호자로서 나서는 반면, 후자의 사람들은 비록 완전히 부자유한 일정한 종교성과 사실들에 대한 별로 과학적이지 못한 멸시가 언제나 그들 학설의 가장 명백한 특성이기는 하지만 권위와 신앙을 거부하고 오직 과학에 호소한다.

게다가 이 두 부류는 하는 짓이 서툴고 거두는 열매가 없다고 서로를 끊임없이 비난한다.

사회주의자들은 반대자들에게 조건의 불평등, 독점과 경쟁이 기괴하게 연합해 영구적으로 사치와 빈곤을 낳는 이 상업적 방탕함을 고려하라고 요구한다. 그들은 경제 이론들이 언제나 과거에 맞게 형성되어 미래를 희망 없이 내버려 둔다고 비난한다. 한마디로 그들은 재산권 체제를 인류가 4천 년 전부터 항거하고 맞서 싸워 오는 무서운 환각이라고 말한다.

경제학자들 쪽에서는 사회주의자들에게 재산권, 경쟁, 경찰이 없어도 될 체제를 만들어 보라고 도전을 가한다. 그들은 손에 악보를 들고서, 모든 개혁 사업들은 사회주의가 폄하하는 바로 이 체제에서 빌려온 악보들의 랩소디, 사회주의가 그것 바깥에서는 하나의 관념을 구상하지도 정식화하지도 못할, 한마디로 정치경제학의 표절이었을 뿐임을 증명한다.

매일 이 심각한 과정의 악보들이 쌓이고 문제가 복잡해지는 것을 보게 된다.

사회가 경제적 일상 관행을 따라서 진행해 가고, 발을 헛딛고, 고생하고 부자가 되는 동안 사회주의자들은 피타고라스, 오르페우스 그리고 신비에 싸인 헤르메스 이래 정치경제학과 상충되는 자신들의 교리를 세우려고 노력한다. 약간의 조합 시도들이 여기저기서 그들의 관점에 따를 때 행해지기도 했지만 현재까지 이 드문 시도들은 재산 소유의 대양大洋에서 길을 잃어 결과도 없는 채로 남아있다. 그리고 마치 운명이 사회주의적 유토피아를 공격하기 전에 경제적 가설을 남김없이 활용하기로 결심한 듯이 개혁 당파는 자기 차례가 오기를 기다리면서 적들의 조롱을 씹어 삼키는 처지로 전락한다.

원인은 바로 여기에 있다. 사회주의는 문명의 병폐를 공박하기를 느슨할 틈 없이 하고, 날이면 날마다 정치경제학이 사람의 조화적 끌림을 충족하지 못하는 무능함을 확인하며, 요청에 요청을 계속 제시한다. 정치경제학은 모두가 하나씩 상식의 버림을 받으며 지나가고 사멸하는 사회주의 체계들로 서류를 채운다. 악의 끈질김은 한편의 불평을 조장하며 이와 동시에 개혁주의의 실패가 꾸준히 계속되는 것은 다른 편의 악의적인 조롱거리가 된다. 심판은 언제 내려질 것인가? 법정은 버려졌다. 그렇기는 하지만 정치경제학은 법정의 장점을 활용하며, 보증인도 내세우지 않으면서 세상을 계속 지도한다. 나는 소유한다, 그러므로 소유한다(possideo quia possideo).

관념의 영역으로부터 세상의 현실로 내려오면, 적대 관계는 더욱 심각하고 더욱 위협적으로 우리에게 나타날 것이다.

요 몇 년간 사회주의가 긴 태풍들의 자극을 받아 우리들 가운데 환상적으로 모습을 드러냈을 때, 모든 논쟁에서 그때까지 무관심하고 미지근한 태도를 보이던 사람들이 왕정주의적이고 종교적인 관념을 향해 두려움을 지니고 다시 달려들었다. 그 최후의 결말을 보인 것으로 사람들이 고발한 민주주의는 저주받고 억눌렸다. 보수주의자들의 민주주의자들에 대한 이 유죄선고는 재난이었다. 민주주의는 본성상 왕권을 대체할 능력이 없으면서 마찬가지로 사회주의 사상에 맞지 않는다. 민주주의의 운명은 언제나 결코 결말에 도달하지 못하면서 왕권에 맞서 음모를 꾸미는 것이다. 이는 곧 나타났으며 우리는 민주주의적 정치 논객들의 기독교 및 재산 소유 신앙에 대한 항거에서 날마다 증인이 되는데, 이 논객들은 이 순간부터 인민에게 버림받기 시작했다.

다른 한편으로, 철학은 정치 및 종교에 못지않게 사회주의에 생소하고 적대적인 것으로 드러났다.

왜냐하면, 정치 질서에서 민주주의는 수효의 주권을 원리로 하고 왕정은 군주의 주권을 원리로 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또한 의식의 문제에서 종교는 신이라 불리는 신비적인 존재, 그리고 이를 대표하는 사제에 대한 복종일 뿐인 것과 마찬가지로, 끝으로 경제 질서에서 재산권, 즉 개인의 노동 수단에 대한 배타적 지배권이 이론들의 출발점인 것과 마찬가지로, 철학은 이성의 선험à priori이라 자처하는 것들을 기초로 삼아서 자아 하나에 관념들의 발생과 절대 지배권이 있다고 보고, 경험의 형이상학적 가치를 부정하는, 즉 어디서나 객관적 법칙 대신에 자의恣意와 독재를 두는 쪽으로 숙명적으로 이끌렸기 때문이다.

그런데, 갑자기 사회의 품에서 태어나 선행자도 조부祖父도 없이 의식과 사회의 모든 영역에서 재정裁定 원리를 배척하고 유일한 진리로서 사실들의 관계를 대신 들여놓으며, 과거는 미래를 향해 도약하는 출발점으로만 활용하는 데 동의하는 학설, 그러한 학설은 기성 권위들의 반발을 불러일으키고도 남았다. 그리고 오늘날 이른바 여러 권위들은 그 내부적 불화에도 불구하고 단 하나의 권위를 이룰 뿐인데, 이는 자신들을 집어삼킬 태세가 되어있는 괴물을 물리치려고 단결한다.

임금의 부족함과 노동의 불확실성에 대해 불평하는 노동자들에게 정치경제학은 상업의 자유를 들이민다. 자유와 질서의 조건들을 추구하는 시민들에게 이데올로그들은 대의제로 응답한다. 고대 신앙을 빼앗겨 자신의 존재 이유와 목표를 요구하는 심약한 영혼들에게 종교는 섭리의 측량할 수 없는 비밀을 제안하고 철학은 의문을 남겨준다. 언제나 빠져나갈 구멍들이다! 가슴과 정신이 쉴 명백한 관념들은 전혀 없다! 사회주의는 굳은 땅을 향해 돛을 올리고 항구로 들어갈 때라고 외친다. 그러나 반사회적인 사람들은 항구가 없다고 말한다. 인류는 신의 가호 아래 사제들, 철학자들, 웅변가들, 경제학자들의 지휘에 따라 행진하며, 우리의 연안 항해는 영원하다.

이처럼 사회는 그 시초부터 거대한 두 당파로 나뉜다. 하나는 전통적 당파로서 본질상 위계적이며, 고려 대상이 되는 것에 따라 왕정 혹은 민주주의, 철학 혹은 종교라고 차례로 불리는 것인데, 한마디로 재산권이라 불린다. 또 한 당파는 문명의 위기 때마다 부활해서 무엇보다도 앞서 무정부적anarchical, 무신론적이라고, 즉 일체의 신적, 인간적 권위에 불복종한다고 공언한다. 이는 사회주의다.

그런데, 현대적 비판은 이런 종류의 갈등에서 진리는 상반되는 것들 중 하나를 배제하는 것에 있지 않고, 오직 그 둘의 화해에 있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내가 말하건대, 자연에서건 관념들에서건 일체의 적대 관계는 더 일반적인 하나의 사실, 혹은 반대자들을 흡수해서 말하자면 서로 일치시키는 복잡한 공식으로 해소된다는 것이 과학에서는 기정사실이다. 그러므로 상식을 가진 사람들인 우리는 의문의 여지없이 미래가 실현할 해결을 기다리며 투쟁 중인 힘들, 그리고 그들의 긍정적, 부정적 특성들을 분석함으로써 이 거대한 이행에 대비할 수 없을까? 그러한 작업을 정확성과 양심을 가지고 한다면, 설사 그것이 일거에 우리를 해결책에 도달하게 하지는 못할지라도 적어도 문제의 조건들을 우리에게 드러내주고 이로써 우리를 일체의 유토피아로부터 지켜주는 이루 헤아릴 수 없는 장점을 지닐 것이다.

그러므로 정치경제학에서 무슨 필연적인 것과 참된 것이 있는가? 정치경제학은 어디로 가는가? 정치경제학은 무엇을 할 수 있는가? 그것은 우리에게 무엇을 원하는가? 이런 것이 바로 내가 이 저작에서 확인하려고 마음먹은 것이다. 사회주의는 무슨 가치가 있는가? 동일한 탐구가 우리에게 이를 가르쳐줄 것이다.

왜냐하면, 결국 사회주의와 정치경제학이 추구하는 목표는 동일한 것, 즉 인간들 가운데의 자유, 질서 그리고 행복이니 이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채워야할 조건들, 즉 극복해야 할 난관들 역시 이 둘에 동일하며, 이쪽에서도 저쪽에서도 모색되거나 제안된 수단들을 가늠해 보는 일만 남기 때문이다. 그러나 또한 자신의 관념들을 실천에 옮기는 일은 지금까지는 정치경제학에만 주어진 것인 반면에 사회주의는 끊임없는 풍자에만 몰두해 왔으므로, 경제적 업적들을 그것들의 공로에 따라 평가할 때 우리가 이로써 사회주의자들의 열변을 그 정당한 가치로 환산해서 우리의 비판이 외관상으로는 특별하면서도 절대적이고 확정적인 결론을 취할 수 있을 것임이 그에 못지않게 명확하다.

이는 정치경제학의 고찰에 깊이 들어가기 전에 몇 가지 예로써 더 잘 이해시키는 것이 필수적인 사항이다.

. 이론들과 비판들의 미흡성

우선 중요한 관찰을 언급하기로 하자. 논쟁 당사자들은 하나의 공통된 권위, 각자가 스스로 가지려고 하는 권위인 과학에 준거를 두는 데 동의한다는 것이다.

플라톤은 유토피아주의자로서 자신의 이상적 공화국을 겸손과 순화에 의해 그가 철학이라고 부른 과학의 이름으로 조직했다. 실천가인 아리스토텔레스는 같은 철학의 이름으로 플라톤의 유토피아를 반증했다.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 이래로 사회적 전쟁은 이처럼 진행된다. 현대 사회주의자들은 하나의 불가분한 과학 전체를 자신의 것으로 주장하지만 이 과학의 내용, 한계, 방법에 대해 동의를 이루지는 못한다. 경제학자들 쪽에서는 사회과학이 정치경제학일 뿐이라고 단언한다.

그러므로 우선 사회에 관한 과학이 어떤 것일 수 있는지를 인식하는 것이 중요하다.

과학은 일반적으로 말해서 있는 것ce qui Est에 대한 추론된 체계적 인식이다.

이 근본 관념을 사회에 적용해 우리는 이렇게 말할 것이다. 사회과학은 사회가 그래 온 것이 아니라 사회의 전체 생애에서, 즉 그 계기적 발현의 총체에서 사회가 그러한 것에 대해 추론된 체계적 인식이다. 왜냐하면 이유raison와 체계가 있을 수 있는 것은 바로 거기뿐이기 때문이다. 사회과학은 인류가 지속하는 어떤 기간에서만이 아니라, 그 요소들 중 어떤 것들에서만이 아니라, 그 모든 원리들과 그 존재의 전체에서 인류 질서를 끌어안아야 한다. 마치 사회 진보가 시간, 공간상 확장되어 갑자기 하나의 그림, 여러 시대의 연속과 현상들의 이어짐을 보여 주면서 그 연관성과 일치성을 발견할 그림에 모아지고 고정되듯이 말이다. 그러한 것이 살아있고 진보적인 전체 실재의 과학이어야 한다. 그러한 것이 논란의 여지없이 사회과학이어야 한다.

그러므로 정치경제학은 그 개인주의적 성향과 배타적인 언명들에도 불구하고 사회과학의 구성 부분이었으며, 그 안에서 그것이 묘사하는 현상들은 광대한 삼각 측량의 원초적 말뚝들, 유기적이고 복잡한 하나의 전체 요소들과 같은 것일 수 있다. 이런 관점에서 단순한 것에서 복합적인 것으로 가는 인류의 진보는 완전히 과학들의 진행에 순응할 것이며, 오늘날 정치경제학의 기초이자 대상을 이루는 거슬리고 아주 흔히 일탈적인 사실들은 우리에게 구체적인 가설들, 더 우월한 가설을 염두에 두고 인류에 의해 계기적으로 실현되는 가설들로 간주되어야 할 것이다. 그 우월한 가설의 실현은 모든 난점들을 풀 것이며, 정치경제학을 무효화하지 않고도 사회주의에 만족을 줄 것이다. 왜냐하면, 내가 서론에서 말한 것처럼, 자초지종을 살펴볼 때 우리는 인류가 자신을 어떤 식으로 표현하든지 잘못에 빠진다는 것을 인정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이제 이 점을 사실들에 의거해 더 명확히 해보자.

오늘날 가장 논란이 되는 문제는 반론의 여지없이 노동의 조직이다.

세례자 요한이 광야에서 회개하라고 설교한 것처럼 사회주의자들은 도처에서 세상만큼 오래된 이 혁신을 외친다. 노동을 조직하라. 그러면서도 그들에 따를 때 이 조직이 어떠해야 하는지를 결코 말하지 않는다. 아무튼 경제학자들은 이 사회주의자들의 떠드는 소리에서 자신들의 이론에 대한 침해를 보았다. 이는 사실상 마치 그들이 제일 처음 알아야 했던 것인 노동을 몰랐다고 사람들에게 비난을 받은 것과 같았다. 그러므로 그들은 적들의 도발에 우선은 노동이 조직화되며, 개인적 타산에서든, 남들과 회사를 이루어서든 생산을 하고 교환을 할 자유 말고 다른 노동 조직은 없다고 주장하는 것으로 대답했다. 회사를 이룰 경우에는 따라야 할 진행 경로가 민법과 상법에 의해 규정되었던 것이다. 그 다음으로는 이 주장이 반대자들에게 웃을 준비를 하게 하는 데만 소용되었으므로, 그들은 공세를 취해 사회주의자들이 허수아비처럼 흔든 이 조직에 대해 사회주의자들 스스로가 아무것도 이해하지 못했다는 것을 보여주면서 마침내 이는 사회주의의 새로운 괴물, 무의미한 말, 엉터리에 불과하다고 말했다. 경제학자들의 최근 글들은 이런 한심한 판단으로 가득 차 있다.

그렇기는 하지만, 노동의 조직이라는 말은 작업장의 조직, 군대의 조직, 경찰의 조직, 자선단체의 조직, 전쟁의 조직 같은 말들만큼이나 명확하고 합리적인 의미를 제시한다는 것이 확실하다. 이런 점에서 경제학자들의 논변은 한심한 부조리라는 도장이 찍혔다. 노동의 조직이 유토피아와 허깨비일 수 없다는 것도 그에 못지않게 확실하다. 왜냐하면, 문명의 최고 조건인 노동이 존재하는 순간부터 따라오는 것은 그 노동이 벌써 경제학자들이 좋다고 보는 것이 허락된, 그러나 사회주의자들은 혐오스럽다고 판단하는 그런 식의 조직에 종속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사회주의에 의해 정식화된 노동을 조직화하자는 제안과 관련해서 노동이 조직되어 있다고 하는 각하 사유가 남을 것이다. 그런데 이는 완전히 성립불가능하다. 노동에서 공급, 수요, 분업, 수량, 비율, 임금과 보장 중 아무것도, 절대로 아무것도 규칙화되지 않아서 모든 것이 오히려 자유의지의 변덕, 즉 우연에 넘겨지는 것이 유명하니 말이다.

우리로 말하자면, 우리가 사회과학에 대해 떠올린 관념에 인도를 받아서 사회주의자들에게 반대하고 경제학자들에게 반대해 노동을 조직할 필요가 있다고도, 노동이 조직화되어 있다고도 주장하지 않을 것이며, 노동은 조직화된다고 주장할 것이다.

우리는 노동이 조직화된다고 말한다. 즉 노동은 세상의 출발 이래로 조직화되는 중이며, 끝까지 조직화되어 갈 것이다. 정치경제학은 이 조직의 첫 번째 기초 지식을 가르쳐준다. 그러나 사회주의는 그것의 현재 형태로는 조직은 부족하고 일시적이라고 옳은 주장을 한다. 그리고 과학의 전체 사명은 얻어진 결과들과 완성되어 가는 중인 현상들을 보면서 즉각 실현 가능한 혁신이 어떤 것인지를 끊임없이 탐구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사회주의와 정치경제학은 서로 우스꽝스러운 전쟁을 벌이면서 노동의 조직이라는 동일한 관념을 밑바닥까지 추적한다.

그러나 둘 다 과학에 대한 불충성과 서로간의 중상中傷의 죄가 있는데, 한편으로 정치경제학은 자신의 이론 나부랭이를 과학으로 간주해 일체의 궁극적 진보를 부정하며, 사회주의는 전통을 부정하면서 사회를 발견할 수 없는 기초 위에 재구성하려고 시도하니 그렇다는 것이다.

이처럼 사회주의는 정치경제학에 대한 심오한 비판과 이 학문의 끊임없는 발달 없이는 아무것도 아니며, 여기서 그 학파의 유명한 경구를 써먹자면, 먼저 감각에 없었던 것으로 지각되는 것은 없다(Nihil est in intellectu, quod prius non fuerit in sensu). 사회주의자들의 가설에는 경제적 실무에서 재발견되지 않는 것은 없다. 반대로, 정치경제학은 아담 스미스와 장 바티스트 세가 수집한 사실들을 절대로 타당한 것으로 단언하면서부터 부적절한 랩소디에 불과하다.

또 다른 질문, 앞의 질문에 못지않게 논란이 되는 질문은 이자l'usure 혹은 이자부 대출에 관한 질문이다.

이자, 혹은 말하자면 활용의 값은 어떤 성질의 것이든 소유주가 자신의 것을 제공한 데서 뽑아내는 보수다. 신학자들은 이렇게 말한다. 당도하는 모든 것에 이자가 붙는다(Quidquid sorti accrescit usura est). 신용의 기초인 이자는 사회적 자생성이 자신의 조직적 작품에서 문제시하는 영역들 중에 1위로 나타나며, 그에 대한 분석은 문명의 심오한 법칙들을 드러낸다. 고대 철학자들과 교회의 교부들, 이들은 여기서 기독교 시대 초기 몇 세기 사회주의의 대표자들로 간주할 필요가 있는데, 특이한 비일관성에 의해, 그러나 그들 시대의 경제적 관념들의 빈약함에서 유래한 비일관성에 의해 소작은 인정하고, 돈의 이자는 정죄했다. 그들에 따르면, 돈은 비생산적이기 때문이다. 그들은 결과적으로 사용됨으로써 소모되는 물건, 그 중에 돈도 포함하는 물건의 대여와 소모되는 일 없이 그 산물로 사용자에게 이익을 주는 물건의 대여를 구분했다.

경제학자들은 세貰의 개념을 일반화해 사회의 경제에서 자본의 행동, 혹은 그 생산성은 그것이 임금으로 소비되든 수단의 역할을 보전하든 동일하다는 것, 따라서 토지의 소작을 금하든지 돈의 이자를 인정하든지 해야 한다는 것, 둘 다 같은 명목으로 특권의 보수, 대여의 보상금이기 때문에 그렇다는 것을 스스럼없이 보여주었다. 이 관념을 통하게 하고, 로마 가톨릭의 이자에 대한 파문으로 두려워하는 양심을 안심시키는 데는 열다섯 세기가 더 필요했다. 그러나 결국 증거와 일반의 의견은 대금업자 편이었다. 그들은 사회주의에 맞선 전투에서 승리했다. 그리고 엄청난, 논란의 여지없는 이익들이 이런 식의 이자의 정당성으로부터 사회에 돌아갔다. 이런 상황에서 사회주의는 모세가 오직 이스라엘 사람들을 위해서만 만들어준 법칙 “외국 사람에게는 꾸어 주고서 이자를 받아도 좋다. 그러나 동족에게서는 이자를 받지 못한다(Non foeneraberis proximo tuo, sed alieno)”를 일반화하려고 모색했지만 경제적 일상 관행에서 받아들인 한 관념, 즉 자본의 생산성 이론에까지 올려진 소작에 의해 패배했다.

그러나 경제학자들은 후에 사람들로부터 소작 그 자체를 정당화하고 자본의 소득 이론을 정립하라는 호출을 받아서 덜 행복했다. 이 점에 관해 그들은 우선 사회주의자들에 대항해 획득한 온갖 이득을 상실했다고 말할 수 있다.

의문의 여지없이, 그리고 나는 이를 인정하는 첫 번째 사람인데, 토지의 세는 돈의 세, 그리고 모든 동산 및 부동산 가치물의 세와 마찬가지로 자생적이고 보편적인 사실로서 우리 본성의 가장 깊은 곳에 원천을 두며, 그 정상적 발달에 의해 조직의 가장 위력적인 용수철 중 하나가 곧 되는 것이다. 나는 심지어 자본의 이자가 ‘일체의 노동은 초과분을 남기기 마련이다’라는 경구의 물화物化에 불과하다는 것도 증명할 것이다. 그러나 이 이론, 혹은 더 제대로 말해서 이 자본 생산성의 허구에 직면해 그에 못지않게 확실한 또 하나의 논제가 부상한다. 이는 최근에 최고로 노련한 경제학자들의 눈에 들어온 것이다. 일체의 가치는 노동에서 탄생하며 본질상 임금으로 구성된다는 것, 다시 말해 어떠한 부도 애초에 특권에서 나오는 것은 없으며 작업에 의해서만 나온다는 것, 결과적으로 노동만이 사람들 간에 소득의 원천이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소작의 이론 혹은 자본 생산성의 이론, 보편적 실무에 의해 확인되면서 정치경제학은 일상 관행 추종자의 자격에서 정당화하지는 못하면서 감수할 수밖에 없는 이론과, 우리에게 가치가 정상적으로 임금들로 구성된다는 것을 보여주며, 우리가 증명하겠지만, 숙명적으로 사회 내에서 순생산과 총생산의 등식에 도달하는 또 하나의 이론을 어떻게 조화시킬 것인가?

사회주의자들은 그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노동이 모든 소득의 원천이라는 원리를 취해서 그들은 자본의 보유자들에게 그들의 임대료와 이윤을 설명하라고 요구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경제학자들이 공통의 표현으로 임대료와 이자를 일반화해 첫 승리를 거두었으므로, 마찬가지로 사회주의자들은 더욱 일반적인 노동의 원리 아래 자본의 초야권들을 사라지게 함으로써 보복했다. 재산권은 송두리째 파괴되었다. 경제학자들은 침묵밖에 할 줄 몰랐다. 그러나 이 새로운 비탈 위에서 멈추지 못하고 사회주의는 공산주의 유토피아의 마지막 변경邊境에까지 미끄러져 갔다. 그리고 실천적 해결책이 없어서 사회는 자신의 전통을 정당화하지도 못하고, 약간의 결함만 있어도 사회를 수천 년 후퇴시킬 실험에 몰두할 수도 없는 처지로 전락했다.

그러한 상황에서 과학이 처방하는 것은 무엇인가?

확실히 그것은 자의적이고 파악할 수 없는 불가능한 정중앙에 멈추는 것이 결코 아니다. 더 일반화하고 제2의 원리, 사실, 우월한 법칙으로 자본의 허구와 재산권의 신화를 설명하는 것을 발견하고, 이를 모든 부의 기원을 노동에 두는 이론과 조화시키는 것이다. 바로 이것이 사회주의가 논리적으로 진행하고자 했다면 착수해야 했던 일이다. 실제로 노동의 실재적 생산성 이론과 자본의 허구적 생산성 이론은 둘 다 본질상 경제 이론이다. 사회주의는 경험으로부터도 변증법으로부터도 아무것도 끌어내지 못하고 그 모순을 보여주는 수고만을 했다. 왜냐하면 사회주의는 그 둘 중 아무것도 가지고 있지 않은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재판에서 일부분에 대해 한 문서의 권위를 수용하는 원고는 전체에 대해 이를 인정해야 한다. 서류들과 증언들을 떼어내는 것은 허락되지 않는다. 사회주의는 이자에 관해 정치경제학의 권위를 부정할 권리를, 가치의 분해에 관련해서 바로 이 권위를 발판으로 하면서 가졌는가? 아니다. 확실히. 사회주의가 그러한 경우에 요구할 수 있었던 모든 것은 정치경제학이 이 이론들을 조화시키는 임무를 맡거나 사회주의 스스로 이 까다로운 임무를 맡는다는 것이었다.

이 엄숙한 논쟁에 깊이 들어갈수록 전체 과정은 두 당사자 중 하나는 보기를 원하지 않는 반면, 다른 한 당사자는 진행해 가기를 거부하는 데서 나오는 것에서 비롯되는 것으로 여겨진다.

일반의 편익을 위해 정당한 사전적 보상을 매개로 하는 것이 아니라면 아무도 자신의 재산권을 박탈당할 수 없다는 것이 우리의 공법 원칙이다.

이 원칙은 다분히 경제적인 원칙이다. 왜냐하면 한편으로 그것은 사람들이 수탈하는 시민의 현저한 지배권을 가정하며, 그에 대한 가입은 사회적 협정의 민주적 정신에 따라 필연적으로 가정되기 때문이다. 다른 한편, 보수, 혹은 수탈당하는 부동산의 가격은 목적물의 본원적 가치가 아니라 수요와 공급, 한마디로 의견인 상업의 일반 법칙에 따라 정해진다. 사회의 이름으로 행해지는 수탈은 각자가 모두를 향해 동의하는 합의의 거래에 비유될 수 있다. 그러므로 물건의 가격이 지불되어야 하는 것만이 아니라 합의도 있어야 한다. 그리고 실제로 보상액을 산정하는 것은 그렇게 하는 것이다. 로마의 법률가들이 이런 유비類比를 취했다면 그들은 틀림없이 공공복리를 위한 수탈에 관해 덜 망설였다.

그러므로 그러한 것이 사회적 수탈권의 행사 보장 수단sanction, 보상액이다.

그런데, 실제로는 보상의 원칙이 적용되어야 할 때마다 적용되지 않을 뿐 아니라 그렇게 될 수도 없다. 이와 같이 철도를 개설한 법률은 레일이 차지할 부지의 보상액을 조문에 명시했다. 그 법률은 운송업이 먹여 살리는 이 다수의 산업들을 위해서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이들의 손실은 지주들에게 갚아진 부지의 가액을 훨씬 초과할 것이다. 마찬가지로 사탕무로 설탕을 만드는 제조업자들을 보상해주는 것이 문제이던 당시에 국가가 사탕무 산업이 먹여 살리던, 아마도 빈곤의 나락으로 떨어져갈 다수의 노동자들과 종업원들에게도 보상을 해주어야 한다는 생각은 누구의 머리에도 떠오르지 않았다. 그렇기는 하지만, 자본의 개념과 생산 이론에 따를 때 철도로 자신의 노동 수단을 빼앗기는 토지 소유자가 보상을 받을 권리가 있듯이, 마찬가지로 철도 때문에 투자한 자본이 무익해지게 된 산업인도 보상을 받을 권리가 있다는 것은 확실하다. 그러므로 그에게 보상을 해주지 않는 것은 어떤 이유인가? 오호라! 보상을 해주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이런 정의와 불편부당성의 체계를 가지고서는 사회는 아주 흔하게 행동하지 못하는 무기력에 빠질 것이며, 로마법의 부동 상태로 돌아갈 것이다. 희생자들이 필요해진다. …따라서 보상의 원칙은 방기되었다. 국가의 여러 시민 계급을 향한 불가피한 파산이 있다.

이에 관해 사회주의자들이 들이닥친다. 이들은 정치경제학이 대중의 이익을 희생시키고 특권을 창조할 줄밖에 모른다고 비난한다. 그리고 수탈의 법률에 토지법의 기초가 있는 것을 보여주면서 그들은 갑자기 보편적 수탈, 즉 공동의 생산과 소비라는 결론을 내린다.

그러나 여기서 사회주의는 비판으로부터 유토피아로 다시 빠지며, 사회주의의 무기력은 그 모순들에서 새로이 터져 나온다. 공공복리를 위한 수탈의 원칙이 그 모든 결과를 낳도록 발달해 사회의 완전한 재조직화를 가져온다면, 그 작품에 손을 대기 전에 이 새로운 조직을 확정할 필요가 있다. 그런데 내가 거듭 말하지만 사회주의는 과학으로서 생리학과 정치경제학 나부랭이밖에 가지고 있지 못하다. 또, 보상의 원칙에 맞게 시민들이 제공한 가치물에 대해 갚아주거나 적어도 보장을 해줄 필요가 있다. 한마디로 변동의 가능성에 대해 이들을 안심시킬 필요가 있다. 그런데 사회주의가 그 관리를 요구하는 공공 재산 바깥 어디에서 사회주의는 바로 이 재산의 보증인을 취할 것인가?

진실한 논리로 보면 이 굴레를 벗어나기는 불가능하다. 공산주의자들도 유연하고 평화를 애호하는 관념을 가진 어떤 다른 종파들보다 그 태도가 더 거침없어서, 어려움을 없애고 일단 권력을 잡기만 하면 모든 사람들을 수탈하고 아무에게도 보상하고 보장하지 않겠다고 다짐한다. 근본적으로 이는 부당할 수도 배신일 수도 없을 것이다. 재미있는 데물랭(Camille Desmoulins)이 로베스피에르에게 말한 것처럼 유감스럽게도 불을 지르는 것은 대답하는 것이 아니다. 그리고 사람들은 언제나 그런 논쟁에서는 불과 단두대로부터 돌아온다. 어디서나 그렇듯 여기서도 마찬가지로 거룩한 두 권리, 시민의 권리와 국가의 권리가 현존한다. 사회주의적 유토피아와 정치경제학의 잘려 나간 이론들보다 우월한 화해의 공식이 있으며, 이를 발견하는 일이 중요하다고 말하는 것으로 충분하다. 이 판국에 소訴를 제기하는 당사자들은 무엇을 하는가?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 오히려 사람들은 그들이 부당한 일들에 대해 말할 기회를 얻기 위해서만 문제를 제기한다고 말할 것이다. 나는 무슨 말을 하는가? 문제들이 그들에 의해 이해되기만 하는 것은 아니다. 그리고 공중이 사회와 인간 운명의 최고 문제들에 관해 대화를 하는가 하면, 사회과학의 실행자들은 정교회의 교회 분열파로서 원칙들에 동의하지 않는다. 이 연구들의 계기가 된 문제, 그 저자들이 그 폄훼자들과 마찬가지로 확실히 이해하지 못한 문제를 증언하라. 이는 이윤과 임금의 관계라는 문제이다.

뭐라고! 경제학자들, 아카데미는 자신도 그 용어들을 이해하지 못하는 문제를 공모에 부쳤을 것이다! 그러니 그러한 관념이 어떻게 아카데미에게 다가올 수 있었을까?…

자! 그렇다. 내가 내놓는 것은 믿을 수 없고 이상하다. 하지만 그런 것이 있다. 형이상학의 문제에 신화와 은유로만 대답하고 언제나 문제들을 풀지도 못하면서 재생산하는 이들인 신학자들처럼 경제학자들은 자신들이 제기하는 문제들에 그들이 어떤 식으로 그 문제들을 제기하게 되었는지를 이야기하면서만 대답을 한다. 그들이 그 이상으로 나갈 수 있다고 생각했다면, 그들은 더 이상 경제학자들이 아닐 것이다.

예를 들어서 이윤이란 무엇인가? 기업가가 자신의 모든 비용을 지불한 후에 그에게 남는 것이다. 그런데 비용은 노동 일과와 소비된 가치물들, 혹은 결국에는 임금으로 구성된다. 그러므로 노동자의 임금은 어떤 것인가? 그에게 줄 수 있는 최소의 것, 즉 알 수가 없다. 기업가가 시장에 내놓는 상품의 가격은 어떠해야 하는가? 그가 획득할 수 있을 최대의 것, 즉 여전히 알 수가 없다. 정치경제학에서는 상품과 노동일과가 값이 매겨질 수 있다고 가정하는 것조차도, 그것들이 평가될 수 있다는 데 사람들이 동의하는데도 불구하고 금지된다. 그리고 경제학자들이 하는 말로는 이는 평가가 본질적으로 자의적인 작업으로서 결코 확실한 결론에 도달할 수 없는 작업이라는 이유 때문이다. 그러므로 정치경제학에 따르면 어떤 경우에도 구해지지 않는 두 미지수의 관계를 어떻게 발견하는가? 이처럼 정치경제학은 해결 불가능한 문제들을 제시한다. 그리고 그래도 우리는 곧 정치경제학이 이 문제들을 제시하는 것은 불가피하다는 것, 그리고 우리의 세기가 그 문제들을 해결한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이것이 바로 내가 말하기를 도덕 과학 아카데미가 이윤과 임금의 관계를 공모에 부쳐 무의식적으로 말을 했다고, 예언하는 말을 했다고 한 이유이다.

하지만, 노동의 수요가 크고 노동자가 드물다면, 다른 한쪽에서 이윤이 낮아지는 동안 임금은 상승할 수 있으리라는 것, 경쟁의 밀물에 의해 생산이 과잉이 되면, 충색充塞과 손해를 보면서 판매하는 일이 있고, 따라서 기업가에게는 이윤이 없고 노동자에게는 일을 쉬어야 할 위험이 있으리라는 것, 기계가 발명되면 우선은 이것이 경쟁자들의 불씨를 꺼뜨리겠고 그 다음으로는 독점이 확립되어 노동자는 기업가에게 종속되고 이윤과 임금은 서로 역의 방향으로 가리라는 것이 사실이 아닌가? 하고 사람들은 말할 것이다. 이 모든 원인들과 다른 것들도 연구되고 평가되고 보상될 수 없는가?

오! 단행본들, 역사서들. 우리는 이런 것들을 아담 스미스와 장 바티스트 세 이래로 물리도록 보았다. 그리고 그 이상은 이들의 문장을 이리저리 변경하는 것밖에 없다. 그러나 아카데미가 그 문제에 다른 의미를 부여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그 문제가 이처럼 이해되어야 하는 것은 아니다. 이윤과 임금의 관계는 절대적 의미로 받아들여져야 하며 상업의 우발성과 이익 분할의 비결정적 관점에서 받아들여져서는 안 된다. 이 두 가지는 나중에 가서 자신들에 대한 해석을 받아들여야 한다. 설명을 하겠다.

생산자와 소비자를 단 한 명의 개인으로 보고, 그의 보수는 자연스럽게 그의 산물과 같다고 한 다음, 모든 노동은 초과분을 남긴다는 공리에 따라 이 산물에서 두 부분, 하나는 생산자에게 그의 선투입을 상환해 주는 것, 다른 하나는 그의 이윤을 나타내는 것으로 구분해 우리는 이 두 부분 중 하나가 다른 하나와 가지는 관계를 정해야 한다. 그렇게 하고 나면, 기업가와 임금 노동자, 이 두 인간 계급의 재산 비율을 거기서 도출하기가, 또한 일체의 상업적 기복起伏을 설명하기도 쉬울 것이다. 이는 증명에 따라붙는 일련의 보조 정리들일 것이다.

그런데 그러한 비율이 존재하고 평가 가능하게 되려면 반드시 내외적 법칙이 임금과 판매 가격의 구성을 지배할 필요가 있다. 그리고 현 상태에서 임금과 가격이 달라지고 끊임없이 오르락내리락하므로 가치를 변동시키고 등락시키는 일반적 사실, 원인이 무엇인지, 그리고 어떤 한계 내에서 이 등락이 행해지는지를 묻게 된다.

그러나 이 질문 자체는 여러 원리들에 상반된다. 왜냐하면 등락을 말하는 자는 반드시 가치의 무게중심이 끊임없이 가치를 데려다주는 평균 방향을 가정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아카데미가 이윤과 임금의 등락을 확정하라고 요구할 때 바로 이것은 가치를 확정하라고 요구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것이 바로 아카데미의 양반들이 배척하는 것이다. 그들은 만약 가치가 가변적이라면 바로 이에 의해 확정이 가능하다는 것, 가변성은 확정 가능성의 지표이고 조건이라는 것을 이해하려 들지 않는다. 그들은 가치는 언제나 변동하며 결코 확정될 수 없다고 주장한다. 이는 마치 “진자의 초당 등락 수, 진폭, 경험이 행해지는 곳의 위도와 고도가 주어졌을 때 진자의 길이가 정해질 수 없다, 이 진자가 운동 중이기 때문이다”라고 주장하는 것과 같다. 이런 것이 정치경제학의 제1신조이다.

사회주의에 관해 말한다면, 이는 그 문제를 더 잘 이해했다고도 이에 유념한다고도 보이지 않는다. 그것의 여러 기관들 중에 어떤 것들은 그 문제를 간단히 제쳐놓고 분배를 배급으로 대체한다. 즉 사회 유기체로부터 수와 측정을 추방한다. 다른 기관들은 당황해 도망치면서 임금에 보편적 투표를 적용한다. 이런 빈약함이 수천수만의 바보들을 발견한다는 것은 말할 것도 없다.

정치경제학의 유죄 선고는 맬서스의 다음 유명한 문구에서 정식화되었다.

“이미 점유된 세상에 태어난 한 사람을 만일 그의 가족이 먹여 살릴 수단이 없거나 사회가 그의 노동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면 이 사람은 내가 말하건대 음식물의 어느 한 몫이라도 달라고 할 조금의 권리도 없다. 그는 실질적으로 땅 위에서 잉여적 존재이다. 자연의 대향연에는 그에게 배정된 자리가 없다. 자연은 그에게 가 버리라고 명하며, 이런 질서를 스스로 집행하는 데 꾸물대지 않는다.”

그러므로 정치경제학의 필연적, 숙명적 결론, 내가 이런 차원의 연구에서 지금까지 알려지지 않은 증거를 가지고서 증명할 결론은 이런 것이다. 소유하지 못한 자에게 죽음을.

맬서스의 사상을 더 잘 파악하기 위해 거기서 웅변적인 겉칠을 벗겨내고 철학적 명제로 번역해보자.

“개인적 자유 그리고 그 표현인 재산권은 정치경제학에서 주어진다. 평등과 연대는 그렇지 않다.”

“이 체제 아래서는, 각자는 방해받지 않으며 자기 앞가림을 한다(chacun chez soi, chacun pour soi). 노동은 여느 상품처럼 등락을 겪으며, 이로부터 무산계급에는 위험이 따른다.”

“누구든 소득도 임금도 없는 자는 남들에게 아무것도 요구할 권리가 없다. 그의 불행은 그 사람 혼자에게 떨어진다. 운명의 장난으로 그의 운이 나쁜 것이다.”

정치경제학의 관점에서 이 명제들은 부정할 수 없다. 그리고 맬서스는 이것들을 아주 놀라운 적확성을 가지고 정식화했으며 일체의 비난으로부터 안전하다. 사회과학 조건들의 관점에서 바로 이 명제들은 근본적으로 그릇되고 모순적이기까지 하다.

맬서스의 오류, 더 제대로 말해서 정치경제학의 오류는, 먹을 것이 없는 사람은 죽어야 한다고 말한 것에도, 개인적 전유의 체제 아래서 일도 소득도 없는 이는 기아에 쫓기는 몸이 되고 싶지 않으면 자살로 생을 마감하는 것밖에 할 것이 없다고 주장한 것에도 있지 않다. 이런 것이 한편으로는 우리의 생존법칙이다. 이런 것이 다른 한편으로는 재산권의 결과이다. 그리고 로시[8] 씨는 이 점에 관해 맬서스의 양식良識을 정당화하기 위해 너무나 많은 수고를 했다. 정말이지 로시 씨는 아주 오랫동안 커다란 애정을 가지고, 자신의 동포인 마키아벨리가 『군주론』에서 세상 사람들이 경탄할 정도로 독재를 권장한 것과 같은 식으로 맬서스가 정치경제학을 권하고자 했다고 하는 옹호론을 편 것으로 짐작한다. 우리에게 빈곤함을 산업적, 상업적 자의恣意의 필요불가결 조건으로 바라보게 하면서 로시 씨는 우리에게 “이것이 여러분의 권리이고 여러분의 정의이고 여러분의 정치경제학이다. 이것이 바로 재산권이다”라고 외치는 것 같다.

그러나 천진한 골Gaul족은 이런 세세한 것들은 모른다. 그리고 프랑스에는 그의 흠 없는 언어로 말하는 것이 더 나았을 것이다. 맬서스의 오류, 정치경제학의 근본 해악은 일시적 조건, 즉 사회가 귀족 계급과 프롤레타리아 계급으로 나누어진다는 것을 최종적 상태로 단언하는, 특히 조직된, 따라서 연대적인 사회에서 어떤 사람들은 소유하고 노동하고 소비하는 반면 다른 사람들은 소유하지도 노동하지도 빵을 가지지도 못한다고 말하는 일반 논제에 있다. 끝으로 맬서스, 혹은 정치경제학은 인류가 누리는 무제한의 재생산 능력에서 인구와 생산 간 균형 법칙의 필연성, 따라서 존재를 도출하는 것만이 필요했는데도 동식물류보다 더하지도 덜하지도 않게 기아飢餓의 영구적 위협을 보면서 그 결론에서 길을 잃는다.

간단히 말해 맬서스의 이론은 정치경제학 전체를 터무니없는 것으로 전락시킨 것인데, 이것이 바로 이 작가의 위대한 공로이고, 그의 동료들 중 아무도 그가 세운 이런 공로를 고려하는 데 신경 쓰지 않았다.

사회주의에 관해 말한다면, 그것은 오래전부터 플라톤과 토머스 모어에 의해 한마디로 유토피아, 즉 무소재無所在, 공상空想으로 판단되었다.

그럼에도 인간 정신의 명예를 위해, 그리고 모두에게 정의가 돌아가도록 이를 말할 필요가 있다. 정치경제학도 입법학도 그 시초에서는 우리가 본 것과 다를 수 없었으며, 사회도 그 최초 위치에 멈추어 있을 수가 없다.

일체의 과학은 우선 자신의 영역을 확정하고 자기의 소재들을 생산하고 수집해야 한다. 체계에 앞서 사실들이 먼저이고, 기예의 세기에 앞서 박식博識의 세기가 먼저다. 다른 모든 과학이 그러하듯 시간의 법칙과 경험의 조건에 종속된 경제학은 사회에서 일들이 어떻게 일어나야 하는지를 탐구하기 전 이들이 어떻게 일어나는지를 우리에게 말해주어야 했다. 그리고 이 모든 일상 관행은 저자들이 그 난장판과 상충성에도 불구하고 아주 거창하게 자신들의 책에서 법칙, 원리, 이론이라고 부르는 것으로서 까다로운 부지런함으로 수집되고 엄격한 불편부당성을 가지고 서술되어야 했다. 이 과업을 완수하기 위해 그 과학의 나중의 진보가 요할 것보다 아마도 더 많은 천재성, 특히 더 많은 헌신이 필요했을 것이다.

그러므로 사회경제학이 오늘날에도 현실에 대한 지식이라기보다 오히려 미래를 향한 열망이라면, 이 연구의 요체들이 모두 정치경제학에 있다는 것도 인정할 필요가 있다. 그리고 나는 이 의견이 사상계의 엄청난 다수 의견이 되었다고 말하면서 내가 일반적 정서를 표현한다고 믿는다. 정말이지 현재에 대한 옹호자는 별로 없다. 그러나 유토피아에 대한 기피는 그에 못지않게 보편적이다. 그리고 모든 사람들은 진리가 이 두 용어, 보존과 운동을 화해시킬 공식에 있다는 것을 이해한다.

또한 아담 스미스, 장 바티스트 세, 리카도, 맬서스 그리고 이들의 괴상한 반박자들 덕분에 운명의 비밀, 부자의 방들atria Ditis이 드러났다. 자본의 득세, 노동자 탄압, 독점의 기계화가 모든 점에서 밝혀져서 여론의 시선 앞에서 뒷걸음질한다. 경제학자들이 관찰하고 묘사한 사실들에 관해 사람들은 추론하고 추리한다. 남용의 권리들, 악한 습관들은, 이것들을 살린 모호성이 지속된 만큼 오랜 기간 존중을 받다가 대명천지에 끌어내지자마자 일반의 질타를 받고 명운을 다한다. 사회의 통치는 공허한 이데올로기 안에서 사회 계약의 양식으로 습득되는 것이 아니라 몽테스키외가 사물들의 관계에서 분간한 대로 습득되어야 한다. 그리고 이미 상당히 사회적인 성향을 가진 좌파는 학자, 집정관, 법률가, 교수 심지어 자본가 그리고 산업계 수뇌 등 특권의 대표자이자 옹호자로 태어난 자들, 그리고 백만의 숙련 기술자들로 구성되며, 민족 내에서 의회의 여론 위에 그리고 바깥에 위치해 경제적 사실들의 분석에서 여러 사회들의 생명의 비밀을 파악하기를 추구한다.

그러니 정치경제학을 건축물을 세우기 위해 마련된 자재들이 즐비하게 놓인 광대한 평원으로 나타내자. 일꾼들은 열의에 가득 차고 일에 착수하려는 마음에 불타 신호를 기다린다. 그러나 건축가는 설계도도 놔두지 않고 사라졌다. 경제학자들은 수많은 것들에 대한 기억을 간직해 온다. 유감스럽게도 그들은 견적서의 그림자도 갖고 있지 않다. 그들의 각 조각의 기원과 역사적 내력, 그 제작비용, 어떤 목재가 최상의 대들보가 되는지, 어떤 흙을 써야 최상의 벽돌이 되는지, 작업 도구와 리어카에 얼마를 지출했는지, 목수는 얼마의 이익을 보는지, 석수는 얼마를 버는지를 안다. 그들은 어떤 것이 어디로 가야 하는지, 어디에 놓여야 하는지를 모른다. 경제학자들은 눈앞에 여기저기 던져진 걸작의 부분들을, 사지가 절단된 시인의 팔다리(disjecti membra poetoe)를 보고 있는 것을 외면할 수 없다. 그러나 그들에게는 현재까지 일반적 조감도를 재발견하는 것이 불가능했으며, 약간의 접근을 시도할 때마다 앞뒤가 안 맞는 것들에만 부닥쳤다. 결국 결과도 없는 조합에 절망해 그들은 과학의 건축상의 부적합, 혹은 그들이 말하듯이 그 원리들의 폐단들을 교리로 세우고 말았다. 한마디로 그들은 과학을 부정했다.[9]

이처럼 노동 분업은 그것 없이 생산이 거의 전무하다시피 될 것인데, 이는 오만 가지 폐단을 겪으며, 그중 최악은 노동자의 의기소침이다. 기계들은 저가격과 함께 충색充塞과 실업을 낳는다. 경쟁은 탄압을 가져온다. 조세는 사회의 물적인 연계로서 아주 흔히 화재나 우박에 맞먹는 무서운 도리깨일 뿐이다. 신용은 반드시 파산과 상관관계를 이룬다. 재산권은 여러 가지 남용의 온상이다. 상업은 주사위 놀이로 변질되고 거기서는 심지어 때때로 속이는 것이 허락된다. 간단히 말해서 질서가 어떻게 무질서를 제거하기에 이를지 모르는 가운데 무질서나 어디서나 질서와 같은 비율을 이루어(taxis ataxian diôkein) 경제학자들은 모든 게 아주 잘 되고 있다는 결론을 내리는 입장을 취했으며, 일체의 개선 제안을 정치경제학에 적대적인 것으로 간주한다.

그래서 사회적 건축물은 방치되었다. 군중이 공사장에 밀려들었다. 기둥들, 기둥 윗머리, 기둥 받침, 목재, 돌, 금속이 여러 몫으로 분배되고 추첨되었으며, 웅장한 사원을 위해 모아진 이 모든 재료들을 가지고 무식하고 야만적인 재산권이 오두막집들을 지었다. 그러므로 건축 설계도를 되찾는 것만이 아니라 입주자들을 내보내는 것도 중요하다. 이들은 자신들의 거주지가 훌륭하다고 주장하며, 복고restauration이라는 말 한 마디에 자신들의 문 앞에서 전투 대형을 취하는 자들이다. 그러한 혼동은 옛날 바벨에서도 없었다. 다행히도 우리는 프랑스어를 말하고 님로드의 동료들보다 더 용감하다.

은유를 그만두자. 역사적, 서술적 방법은 인식만 행할 필요가 있었던 한에서는 성공적으로 사용되었지만 앞으로는 쓸모없다. 수천 권의 단행본과 표들이 나왔지만 우리는 크세노폰과 헤시오도스의 시대보다 더 앞서지 못했다. 페니키아인들, 그리스인들, 이탈리아인들은 옛날에 우리가 오늘 하는 것처럼 일했다. 그들은 경제 기술의 모든 규칙들에 따라 자기 돈을 투자했고, 일꾼들에게 임금을 주었고, 영지를 넓혔고, 발송과 회수를 했으며, 장부를 적었고, 투기를 하고, 이차 거래를 하고 망했으며, 우리 못지않게 독점권을 차지하고, 소비자와 일꾼에게서 돈을 뜯어내는 데 능숙했다. 이 모든 것으로 관계들이 넘쳐났다. 그리고 우리가 영구적으로 우리의 통계와 수치들을 다시 들여다볼 때 우리는 언제나 눈앞에 혼돈, 부동의 한결같은 혼돈을 대할 것이다.

정말이지 사람들은 신화시대부터 우리의 대혁명 57주년인 현재까지 일반의 행복이 증가했다고 믿는다. 그리스도교는 오랫동안 이 개선의 주된 요인으로 통해 왔으며, 경제학자들이 현재는 자신들의 원리에 그 개선에 대한 일체의 영예를 구걸한다. 왜냐하면 결국 그리스도교가 사회에 미친 영향이 무엇이었느냐는 것이다. 생겨나면서부터 근본적으로 유토피아적인 그리스도교는 점차 일체의 경제적 범주들, 노동, 자본, 임대료, 이자, 거래, 재산권을 채택함으로써만, 한마디로 정치경제학의 최고 표현인 로마법을 신성화함으로써만 유지되고 확장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리스도교는 그 신학적 부분에서는 생산과 소비에 관한 이론들에 생소하면서 유럽 문명에서는 최근에 떠돌이 일꾼들에게 공제회와 프리메이슨, 일종의 보험 및 상조 계약이던 것이었다. 이런 관계 아래 그리스도교는 정치경제학에 아무런 빚도 지지 않으며, 그리스도교가 행한 선은 정치경제학에 의해 확실성의 증거로 호출될 수 없다. 자선과 헌신의 효과들은 경제의 영역 밖에 있고, 경제는 사회의 행복을 노동의 조직과 정의로써 획득해야 한다. 잉여에 대해서는 나는 재산권 메커니즘의 다행스러운 효과를 인정할 준비가 되어 있다. 그러나 나는 이 효과가 이 메커니즘이 본성상 낳게 되는 빈곤에 의해 완전히 덮이는 것을 관찰한다. 그래서 한 저명한 장관이 영국 의회 앞에서 얼마 전에 실토했듯이, 그리고 우리가 현 사회에서 이를 곧 증명하겠지만 빈곤의 진전은 부의 진보와 병행하고 이에 들어맞는다. 이는 정치경제학의 공로들을 완전히 무효화하는 것이다.

그래서 정치경제학은 그 격률에 의해서도 그 업적에 의해서도 정당화되지 않는다. 그리고 사회주의에 관해 말한다면, 그 모든 가치는 정치경제학을 확증한 것뿐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정치경제학에 대한 고찰을 재개할 수밖에 없다. 정치경제학만이 적어도 부분적으로 사회과학의 소재들을 담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이론들이 약간의 오류를 숨기고 있지 않은지를 증명하지 않을 수 없다. 그 오류를 시정하는 것이 사실과 당위를 화해시킬 것이고, 인류의 유기적 법칙을 드러내어 줄 것이고, 질서의 적극적 개념을 제공해 줄 것이다.

제2장 가치에 관해

. 효용가치와 교환가치의 대립

가치는 경제라는 건축물의 모퉁잇돌이다. 우리에게 자신의 일을 계속해 나가도록 위임한 예술가인 신은 누구에게도 이를 설명하지 않았다. 그러나 약간의 표시들을 보고서 사람들이 이를 짐작한다. 가치는 실제로 두 얼굴을 하고 있다. 하나는 경제학자들이 사용가치 혹은 가치 그 자체라고 부르는 것이다. 또 하나는 교환가치 혹은 여론상의 가치이다. 이 두 측면에서 가치가 낳는 효과, 그것이 결코 안정되지 않은 한에서, 혹은 더 철학적으로 표현해서 그것이 구성되지 않은 한에서 아주 불규칙적인 효과는 이 구성에 의해 완전히 달라진다.

그런데, 유용한 가치와 교환가치의 상관성은 어디 있는가? 구성된 가치라는 것은 어떻게 이해해야 하며, 어떠한 반전에 의해 이 구성이 실행되는가. 이는 정치경제학의 대상이자 목표이다. 나는 독자에게 앞으로 이어지는 것에 모든 주의를 기울일 것을 간청한다. 본 장은 이 저서에서 약간의 선의를 요하는 유일한 장이다. 내 편에서는 점점 더 단순하고 명확하게 하고자 노력할 것이다.

내게 약간의 도움이 될 수 있는 모든 것은 가치를 가진다. 그리고 나는 쓸모 있는 것이 풍부할수록 그만큼 더 부유하다. 이 점에는 아무 어려운 것도 없다. 우유와 고기, 과일과 곡식, 털, 설탕, 면화, 포도주, 금속, 대리석, 끝으로 토지, 물, 공기, 불과 태양은 내게 사용가치, 본성과 용도상 가치이다. 내 생존에 도움이 되는 모든 것들이 그것들 중 어떤 것들, 예를 들어 빛만큼 풍부하다면, 다시 말해 각종 가치들의 양이 무한정이라면 내 안녕은 영원히 보장될 것이다. 나는 일할 필요가 없을 것이며, 생각도 하지 않을 것이다. 이런 상태에서는 물건들에 언제나 효용이 있을 것이지만, 그것들이 가치를 띤다고 말하는 것은 더는 참이 아닐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가 곧 알아보겠지만 가치는 본질상 사회적 관계를 가리키기 때문이다. 그리고 우리가 유용성이라는 관념을 획득한 것은 그 자체가 오직 교환에 의해서, 사회로부터 자연으로 일종의 회귀를 시킴에 의해서이다. 문명의 모든 발전은 그러므로 끊임없이 새로운 가치들의 창조를 촉발해야 하는 인류가 처한 필요성에 관계된다. 마찬가지로 사회악들은 우리가 우리 자신의 관성에 맞서 벌이는 지속적인 투쟁에 그 제1원인을 가진다. 사람에게서 그의 사고에 촉구를 하고, 그의 사고를 사색적 생활에 맞게 만드는 이 필요를 없애보라. 그러면 창조의 작업반장은 네발 달린 동물의 첫 번째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효용가치는 어떻게 교환가치가 되는가? 왜냐하면, 가치의 두 종류는 생각 안에서는 (전자는 후자를 계기契機로 해서만 인식되므로) 동시적인데도 불구하고 계기繼起 관계를 유지한다는 것을 주목할 필요가 있기 때문이다. 교환 가능한 가치는 유용한 가치의 어떠한 반사에 의해 주어지는데, 이는 신학자들이 삼위일체에서 성부가 일체의 영원을 사색하면서 성자를 낳는다고 가르치는 것과 같다. 이 가치 관념의 발생은 경제학자들이 충분히 주의 깊게 주목하지 않았다. 이 점에 유념하는 것이 중요하다.

그러므로 내가 필요로 하는 물건들 중에 아주 많은 수가 자연에는 미미한 양으로밖에 존재하지 않거나 전혀 없으므로, 나는 내게 결여된 것의 생산에 협조하지 않을 수 없다. 그리고 나는 그렇게 많은 것들에 착수할 수 없으므로 다양한 직능을 가진 다른 사람들, 내 협력자들에게 그들의 산물 일부를 내 산물과의 교환으로 내게 양도하라고 제안할 것이다. 그러므로 나는 내 특정한 산물을 언제나 내가 소비하는 것보다 더 많이 가질 것이다. 마찬가지로 내 짝들은 각자의 산물을 그들이 사용하는 것보다 더 많이 가질 것이다. 이 무언의 협정은 거래에 의해 실행된다. 이때 우리는 두 가치의 논리적 계기繼起가 이론에서보다 역사에서 더 잘 나타나는 것을 보여줄 것이다. 산업이 사람들에게 어떤 교환이라도 생겨나게 해주기 전에 이들은 자연적 재화들(이는 사람들이 원시 공동체라고 부르는 것이다)을 차지하려고 다투면서 수천 년을 보낸 것이다.

그런데 자연적이든 산업적이든 모든 산물이 가지는 사람의 생존에 도움을 주는 능력은 특별히 효용가치라고 칭해진다. 그 산물들이 서로 대가로 제공될 수 있는 능력은 교환가치라고 칭해진다. 근본적으로 이는 같은 것이다. 후자는 전자에 대체代替의 관념을 더해줄 뿐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이 한가한 미묘함에서 나온 것으로 보일 수 있다. 실무에서는 그 결과들이 놀랍고, 번갈아가며 다행스럽다가 치명적이었다가 한다.

이처럼 가치에 설정된 구분은 사실에 의해 주어지며, 아무런 자의적인 것도 없다. 이 법칙을 자신의 행복과 자유의 이익이 되게 돌리는 것은 이 법칙을 감수하는 사람의 몫이다. 발라(Walras)[10] 씨라는 작가의 아름다운 표현에 따르면 노동은 자연의 인색함에 대해 선포된 전쟁이다. 이에 의해서 부와 사회가 동시에 생겨난다. 노동은 자연이 우리에게 주는 것보다 비교도 할 수 없이 더 많은 재화를 생산한다. 이처럼 프랑스의 제화업자들만 해도 페루, 브라질, 멕시코의 광산들을 합친 것보다 열 배는 더 많은 것을 생산한다. 그러나 노동은 자연적 가치들에 가하는 변형으로써 자신의 권리를 확장하고 무한히 배증해서 점차로 모든 부가 산업적 계통을 거쳐서 그것을 창조한 자에게 돌아가며, 1차 원료의 보유자에게는 거의 아무것도 남지 않게 된다.

그러므로 이러한 것이 경제 발전의 진행이다. 처음 순간에는 토지와 자연적 가치들이 전유된다. 그 다음에는 노동에 의한 조합과 분배가 완전한 평등에까지 계속된다. 우리의 길 위에는 여기저기 함정들이 파여 있고, 우리 머리 위에 칼이 매달려 있다. 그러나 일체의 위험을 물리치기 위해 우리는 이성을 가진다. 그리고 이성은 전능이다.

우연이나 부주의에 의해 교환이 생산자들 중 한 사람에게 금지되거나 그의 산물이 갑자기 쓸모없어지게 되면, 그의 창고가 가득 차 있는데도 그는 아무것도 소유하지 못할 것임이 유용한 가치와 교환 가능한 가치의 관계에서 나온다. 그가 희생을 많이 하고 생산을 하려는 만용을 많이 부렸을수록, 그의 빈곤은 더욱 심각할 것이다. 산물이 쓸모가 완전히 사라지는 대신 단지 축소되었다면, 이는 백 가지 형태로 일어날 수 있는 일인데, 노동자는 일자리를 박탈당하고 재앙을 겪어서 망하는 대신 가난해지기만 할 것이다. 남의 가치의 미미한 양을 대가로 받고 자기 가치의 다량을 내주어야 해서 그의 생존은 그의 판매의 적자와 같은 비율로 축소될 것이다. 이는 그를 안락함으로부터 궁색한 상태로 점차 이끌어갈 것이다. 끝으로 산물의 쓸모가 높아지거나 또는 그 생산에 드는 비용이 덜 나가게 된다면 교환의 저울은 생산자에게 유리한 쪽으로 기울 것이고, 그 생산자의 복리는 이렇게 해서 밭가는 자의 별 볼 일 없는 처지에서부터 일 없이 노는 자의 풍요로움으로 올라갈 수 있을 것이다, 이 감가와 부요화의 현상은 천 가지 형태로, 천 가지 조합으로 발현된다. 상공업의 열띤 그리고 난감한 역할은 여기에 있다. 경제학자들이 영원히 지속되리라고 믿는 것은 매복 작전으로 가득 찬 이 도박이며, 도덕 및 정치 과학 아카데미는 이윤과 임금의 이름으로 유용한 가치와 교환가치를 화해시키기를, 즉 일체의 유용한 가치들을 마찬가지로 교환 가능하게 하고, 역으로 일체의 교환 가능한 가치를 마찬가지로 유용하게 할 수단을 발견할 것을 요구할 때, 알지도 못하면서 요구하는 것이 그 도박의 폐지이다.

경제학자들은 가치의 이중적 특성을 아주 잘 부각시켰다. 그러나 그들이 마찬가지로 말끔하게 만들지 못한 것은 그것의 모순적 본성이다. 여기서 우리의 비판이 시작된다.

유용성은 교환의 필요조건이다. 그러나 교환을 제거해보라. 그러면 유용성은 무無가 된다. 이 두 용어는 불가분리적으로 연결된다. 그러니 모순은 어디서 나타나는가?

우리가 존재하는 한 우리는 노동과 교환에 의해서밖에 존속하지 못하며, 우리가 더 많이 생산하고 교환하는 그만큼 더 부유하므로 각자에게 그 결과는 그만큼 그의 교환을 늘리고 이로써 그의 향유를 늘리기 위해 유용한 가치를 가능한 최대로 많이 생산하는 것이다. 좋다! 가치 배가의 제1의 효과, 불가피한 효과는 가치들을 저렴하게 하는 것이다. 상품이 더욱 풍부할수록 그것은 교환에서 손해를 보고 상업적으로 감가한다. 노동의 필요성과 그 결과 사이에 모순이 있다는 것이 정말이 아닌가?

나는 설명을 향해 정면으로 달려가기 전에 독자에게 사실에 유의하도록 간청한다.

밀 스무 자루를 수확해 자기 가족과 함께 먹을 생각인 농부는 열 자루만 수확한 경우보다 두 배가 부유하다고 스스로를 판단한다. 마찬가지로 천 쉰 마를 짠 주부는 스물다섯 마밖에 짜지 못한 경우보다 두 배가 부유하다고 스스로 생각한다. 가정에 관련해서는 그들 둘 다 옳다. 그러나 외부 관계의 관점에서는 그들이 완전히 틀렸을 수 있다. 밀의 수확이 나라 전체에서 두 배라면, 스무 자루는 수확이 절반이었더라면 열 자루가 지녔을 가치보다 더 낮은 가치를 지닐 것이다. 또한 비슷한 경우에 천 쉰 마는 스물다섯 마보다 가치가 덜 나갈 것이다. 그래서 가치는 쓸모의 생산이 증가하면서 줄어들고, 생산자는 여전히 풍요해지면서도 빈곤에 이르게 될 수 있다. 그리고 이는 치료법이 없어 보인다. 안녕의 유일한 수단은 공산품이 모두 공기와 햇빛처럼 무한한 양이 되는 것일 것이기 때문이다. 이는 터무니없는 것이다. ‘내 이성의 신이여! 터무니없는 이야기를 하는 것은 경제학자들이 아닙니다’하고 장 자크[11]는 혼잣말했을 것이다. 자신의 정의定義에 충실하지 못한 것은 정치경제학 자체다. 거짓으로 말한 것은 사악함 그 자체다(Mentita est iniquitas sibi).

앞의 예들에서는 유용한 가치가 교환 가능한 가치를 초과한다. 다른 경우들에서는 더 작다. 그렇다면 같은 현상이 벌어지지만, 방향이 다르다. 저울은 생산자에게 유리하다. 그리고 당하는 것은 소비자다. 이는 특히 흉작 때 일어나는 일이다. 이때 생필품의 상승은 언제나 인위적인 면이 있다. 그 기술이라고는 별로 쓸모도 없는 물건에, 없어도 별 지장 없는 물건에 과장된 의견상의 가치를 부여하는 직업들도 있다. 그런 것은 일반적으로 사치품 공예들이다. 사람은 심미적 열정에 의해 그 소유가 자신의 허영, 선천적인 사치 취향, 아름다움에 대한 극히 고귀하고 존경받을 만한 사랑을 고도로 충족시키는 쓸데없는 것들에 욕심을 가진다. 이런 종류의 물건들의 제공자들이 투기를 하는 것은 이에 관해서다. 환상과 우아함을 강요하는 것은 유통에 세금을 부과하는 것 못지않게 역겹고 터무니없는 일이다. 하지만 이 조세는 몇몇 인기 있는 기업가들에 의해 징수되며, 일반의 환호가 이를 보호해주고, 그 공로라고는 아주 흔히 취향을 왜곡하고, 변덕을 생겨나게 하는 것뿐이다. 그때부터는 아무도 불평하지 않는다. 그리고 모든 여론의 정죄는 독점자들에게 돌아가는데, 이들은 재능 덕분에 천과 빵의 가격을 몇 상팀 올리게 된 자들이다. …

유용한 가치와 교환 가능한 가치에서 이 놀라운 대조를 표시한 것은 별 것이 아니다. 이 대조에서 경제학자들은 아주 단순한 것밖에 보지 못하는 데 익숙해져 있다. 이 단순성이라고 하는 것이 심오한 신비를 감추고 있다는 것을 보여줄 필요가 있다. 이를 간파하는 것이 우리의 의무이다.

그러므로 나는 모든 진지한 경제학자들에게 그 문제를 번역하거나 반복하는 것 말고 다른 방식으로 생산이 증가함에 따라 어떤 원인에서 가치가 감소하는지를, 그리고 역으로 산물이 감소함에 따라 바로 이 가치를 크게 만드는 것이 무엇인지를 말해 달라고 주문한다. 기술적 용어로 말하면, 유용한 가치와 교환 가능한 가치는 서로에게 필요한 가치들로서 서로 반비례한다. 그러므로 나는 왜 유용성이 아닌 희소성이 고가高價의 동의어인지를 묻는다. 왜냐하면, 상품들의 가격 상승과 가격 하락은 그 생산에 지출된 노동량과 독립적이기 때문이다. 이 점을 주목하자. 그 상품들에 드는 비용의 많고 적음은 물가 공시표상의 변동을 설명하는 데 조금도 도움이 되지 못한다. 가치는 자유의 여신처럼 변덕이 심하다. 유용성도 노동도 고려하지 않는다. 그러기는커녕 사물의 통상적 흐름에서 특정한 예외적 교란을 제외하면, 가장 유용한 물건들이 언제나 더 낮은 가격에 제공되어야 할 것 같다. 다시 말해, 가장 편안하게 일하는 사람들이 가장 좋은 보수를 받고, 자신들의 수고에 피와 땀을 쏟는 이들은 가장 나쁜 보수를 받는 것이 정당한 것 같다. 그래서 그 원리를 마지막 결과까지 따라가면, 세상에서 가장 논리적으로, 그 사용이 필요하고 수량이 무한정한 물건들은 무료여야 하고, 그 쓸모가 없고 희소성이 극히 큰 물건들은 측량할 수 없는 가격을 가져야 한다고 결론을 내리게 될 것이다. 그러나 아주 당황스럽게도 실무는 결코 이 극단을 인정하지 않는다. 한편으로 어떠한 인적 생산물도 결코 무한의 크기에 도달할 수 없다. 또 한편으로 가장 희소한 물건들은 어느 정도는 쓸모 있을 필요가 있으며, 그렇지 않으면 그것들은 어떠한 가치도 가질 수 없을 것이다. 유용한 가치와 교환 가능한 가치는 그러므로 비록 그 본성상 끊임없이 서로를 배제하는 경향을 띰에도 불구하고 서로 숙명적으로 연관된 상태로 있다.

나는 이 주제를 해명하기 위해 제시할 수 있을 입씨름의 반박으로 독자를 피곤하게 하지 않을 것이다. 가치 관념에 내재하는 모순에 관해 지목 가능한 원인도, 가능한 설명도 없다. 내가 말하는 사실은 사람들이 원시적이라고 칭하는 사실들 중 하나, 즉 다른 사실들을 설명하는 데 도움이 될 수 있지만 그 자체로는 단순체라고 부르는 것처럼 불가해한 사실이다. 그러한 것으로는 정신과 물질의 이원론이 있다. 정신과 물질은 별개로 본다면 각각이 정신의 특수한 관점을 가리키지만 어떠한 실재에도 부응하지 않는 두 항이다. 마찬가지로 사람에게 아주 다양한 산물들에 대한 필요가 이를 자신의 노동으로 조달할 의무와 함께 주어질 때 유용한 가치의 교환 가능한 가치에 대한 대립이 필연적으로 나오며, 이 대립으로부터 정치경제학의 문턱 자체에 관한 모순이 생겨난다. 어떠한 지성도, 어떠한 신적, 인간적 의지도 이를 막을 수 없을 것이다.

이처럼 기괴한 설명을 구하는 대신, 그 모순의 필연성을 충분히 확인하는 것으로 만족하자.

창조된 가치들이 얼마나 풍부하든, 그 가치들이 서로 교환되는 비율이 어떠하든 우리가 우리 생산물을 교환하려면 당신이 수요자인 경우 내 생산물이 당신에게 맞을 필요가 있고, 당신이 공급자인 경우 내가 당신의 생산물을 받아들일 필요가 있다. 왜냐하면 아무도 타인에게 자기 자신의 상품을 강요할 권리가 없기 때문이다. 유용성의, 혹은 같은 말이지만 필요의 유일한 심판자는 구매자이다. 그러므로 앞의 경우에서 당신이 적합성의 심판이다. 뒤의 경우에서는 나다. 번갈아 가며 누리는 자유를 없애보라. 그러면 교환은 더 이상 산업적 연대성의 실행이 아니다. 이는 강탈이다. 지나가는 말이지만 공산주의는 결코 이 난점을 정복하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자유와 함께 생산은 필연적으로 불확정적이다. 수량에서나 품질에서나 그러하다. 그래서 경제적 진보의 관점에서, 소비자들의 마음에 든다는 관점에서와 마찬가지로 그 평가는 영구히 자의적으로 남으며 언제나 상품의 가격은 요동칠 것이다. 잠시 모든 생산자들이 고정된 가격에 판매한다고 가정해 보자. 더 저렴하게 생산하거나 더 잘 생산해서 남들은 아무것도 벌지 못할 동안 많이 벌 사람이 있을 것이다. 어떤 식으로든 균형은 깨진다. 상업의 침체에 대비하기 위해 생산을 꼭 필요한 만큼으로 한정하기를 원하는가? 이는 자유를 유린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당신은 내게서 선택할 능력을 빼앗고 최대를 지불하도록 저주하기 때문이다. 당신은 경쟁, 염가廉價의 유일한 보장책인 경쟁을 파괴하고, 밀수를 유발한다. 이처럼 상업적 자의성을 막기 위해 당신은 행정적 자의성에 뛰어들 것이다. 평등을 창조하기 위해 당신은 자유를 파괴할 것이다. 이는 평등 자체의 부정이다. 당신이 생산자들을 단일한 작업장에 모은다면, 나는 당신이 이 비밀을 파악하리라 생각할까? 그것으로는 아직 충분하지 않다. 당신은 또한 소비자들도 하나의 공통 살림에 모아볼 필요가 있다. 하지만 그때 당신은 그 문제를 방기한다. 가치 관념을 폐기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다. 이는 노동을 폐기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불가능한 일이다. 그 관념을 확정하는 것이 중요하다. 개인적 자유를 죽이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것을 사회화하는 것이 중요하다. 그런데 유용한 가치와 교환가치 간의 대립을 일으키는 것은 사람의 자유의지이다. 자유의지가 존속하는 한 이 대립을 어떻게 해결할 것인가? 그리고 사람을 희생시키지 않는다면, 자유를 어떻게 희생시킬 것인가?…

그러므로 자유로운 구매자의 자격으로 나는 내 필요의 심판자이고, 물건의 적절성에 대한 심판자이고, 내가 매기고 싶은 가격의 심판자라는 것, 그리고 다른 한편으로 자유로운 생산자의 자격으로 당신은 실행 수단의 주인이고, 결과적으로 당신은 당신의 비용을 낮출 능력을 가진다는 것, 그것에 의해서만 자의성이 불가피하게 가치 안에 도입되며, 가치가 유용성과 의견 사이에서 진자 운동을 한다.

그러나 이 진자 운동은 경제학자들에 의해 완벽하게 특기된 것으로서 모순의 효과 말고는 아무것도 아니다. 이는 큰 규모로 옮긴다면 극히 예기치 못한 현상들을 낳는다. 3년간의 풍작은 러시아의 어떤 지역에서는 공적인 재난이다. 우리의 포도원에서 3년의 풍작이 어떤 포도원 주인에게는 재난인 것과 마찬가지이다. 나는 잘 모르지만, 경제학자들은 이 시련을 판로의 부족 탓으로 돌린다. 역시 판로는 그들 사이에서는 거대한 문제이다. 유감스럽게도 판로의 이론은 맬서스에게 들이대고자 했던 해외 이주의 이론과 같다. 이는 논점 선취pétition de principe의 오류이다. 판로가 가장 잘 마련된 상태도 가장 고립된 나라들처럼 과잉 생산에 종속된다. 파리와 런던의 증권시장보다 가격 인하와 가격 인상이 더 잘 알려지는 곳이 어디인가?

가치의 진자 운동과 그로부터 흘러나오는 불규칙적 효과들로부터 사회주의자들과 경제학자들은 각자의 입장에서 상반된 결과를, 그러나 마찬가지로 그릇된 결과를 도출했다. 전자는 정치경제학을 폄훼하고 이를 사회과학에서 제외하려고 말했다. 후자는 두 항 사이의 일체의 화해 가능성을 기각하고 여러 가치의 공측 불가능성, 따라서 운명의 불평등을 상업의 절대 법칙으로 언명하기 위해 말했다.

나는 양측에서 오류는 대등하다고 말한다.

1. 가치의 모순적 관념은 유용한 가치와 교환가치의 불가피한 구분에 의해 아주 잘 조명된 것으로, 이는 정신의 잘못된 인식에서 나오는 것도 아니고, 불량한 용어 사용에서 나오는 것도 아니고, 실무의 어떠한 착각에서 나오는 것도 아니다. 그것은 사물의 본성에 내재하며, 사고의 일반 형태, 즉 범주로서 이성에 과해진다. 그런데 가치 개념이 정치경제학의 출발점이므로, 그 과학의 모든 요소들은 그 자체로 모순적이고 서로 대립된다. 나는 미리 과학이라는 말을 사용한다. 그래서 각각의 문제에 관해 경제학자는 똑같이 반증 가능한 긍정과 부정 사이에 끊임없이 처하게 된다. 결국 현대 철학에서 성별聖別된 말을 사용하자면, 이율배반l'antinomie이 정치경제학의 본질적 특성, 즉 그것의 사형 선고이자 그것의 정당화론이다.

안티노미antinomie, 문자적으로는 반법反法인 이것은 원리상의 대립 혹은 관계에서의 적대를 말한다. 이는 모순 혹은 자가당착antilogie이 대화에서의 대립이나 상반성을 가리키는 것과 같다. 나는 이런 스콜라적 세부 사항, 아직도 대부분의 경제학자에게는 별로 익숙하지 않은 이것에 들어가는 데 대해 용서를 구한다. 이율배반은 하나는 긍정적이고 하나는 부정적인 두 얼굴을 한 법칙의 개념이다. 예를 들어 인력引力이라고 불리는 법칙이 그런 것이다. 이는 태양의 둘레를 행성들이 돌게 하며, 기하학자들은 이를 구심력과 원심력으로 분해했다. 또 물질의 무한 가분성 문제도 그러한데, 칸트는 이것이 동등하게 그럴듯하고 반증 불가능한 논리에 의해 부정이 되었다가 또 긍정이 될 수 있다는 것을 증명했다.

이율배반은 사실을 표현할 뿐이며, 정신에 거역할 수 없는 권위로 과해진다. 고유한 의미에서 모순은 터무니없는 것이다. 이율배반contra-lex과 모순contra-dictio 간의 이 구분은, 어떤 의미에서 관념과 사실의 일정한 질서에서 모순의 논리가 수학에서와 같은 가치를 더 이상 가지지 않는다고 말할 수 있었는지를 보여준다.

수학에서는 한 명제가 거짓으로 입증되면, 역의 명제가 참이고 그 반대도 성립하는 것이 규칙이다. 이는 수학적 증명의 위대한 수단이기도 하다. 사회경제학에서 이는 더 이상 그와 같지 않다. 이처럼 예를 들어 재산권이 그 결과들에 의해 거짓된 것으로 증명되었다고 해서 그 상반된 공식인 공동 소유communauté가 참이 되는 것은 아니며, 그것은 재산권과 동시에 그리고 같은 명목으로 부정 가능하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아주 우스운 강조를 하면서 사람들이 말했듯이 모든 진리, 모든 관념은 모순에서, 즉 동일 순간 그리고 동일 관점에서 긍정되기도 하고 부정되기도 하는 어떤 것에서 나온다는 것, 모순을 오류의 두드러진 표정으로 삼는 낡은 논리를 아주 멀리 기각할 필요가 있다는 말인가? 이 잠담은 신앙도 선의도 없이 자신들의 무례한 무익성을 유지하기 위해 회의주의를 영구화하려고 일하는 궤변론자들에게 걸맞다. 이율배반은 오인되자마자 곧 틀림없는 모순을 가져오므로, 사람들이 특히 각 사물을 그 효과에 따라 지칭하기를 좋아하는 프랑스어에서는 이를 서로 혼동했다. 그러나 모순도, 분석이 모든 단순 관념의 근저에서 발견하는 이율배반도 참의 원리는 아니다. 모순은 언제나 무효와 동의어이다. 때로는 같은 이름으로 불리는 이율배반은 실제로 진리의 선구자이다. 말하자면 진리에 재료를 공급한다. 그러나 이율배반이 진리는 아니며, 그 자체로 본다면 무질서의 동인動因이고, 거짓말과 악의 고유한 형태이다.

이율배반은 두 항으로 구성되는데, 그 두 항은 서로에게 필요하지만 언제나 상반되고, 서로를 파괴하는 경향을 띤다. 이 두 항 중 앞의 것은 정명제thèse, 입장이라는 이름을 얻었고, 뒤의 것은 반명제anti-thèse, 반대 입장이라는 이름을 얻었다는 것을 감히 덧붙일 생각이 거의 없지만 이 발걸음을 내디딜 필요가 있다. 이 메커니즘은 지금은 아주 잘 알려져서 초등학교 과정에서도 곧 모습을 드러내게 되리라 희망한다. 우리는 곧 이 두 영零의 조합에서 어떻게 하나가, 혹은 이율배반을 사라지게 하는 관념이 솟아나는지를 보게 될 것이다.

이처럼 가치에서는 교환될 수 없는 것은 유용하지 않고, 유용하지 않다면 교환 가능한 것은 없다. 사용가치와 교환가치는 불가분이다. 그러나 산업의 진보에 의해 수요가 달라지고 무한히 증식되며, 제조는 결과적으로 물건의 자연적 효용을 높이고 결국 일체의 유용한 가치를 교환가치로 전환하는 경향이 있는 반면, 다른 한편으로 생산은 그 수단들의 위력을 끊임없이 증대하고 언제나 그 비용을 낮추어 물건의 매매가치를 그 원초적 효용으로 되돌리는 경향이 있다. 그래서 사용가치와 교환가치는 끊임없는 투쟁 중에 있다.

이 투쟁의 효과들은 알려져 있다. 무역 전쟁, 판로 전쟁, 충색, 침체, 금수禁輸, 경쟁의 학살극, 독점, 임금의 삭감, 최대의 법칙, 운명의 극심한 불평등, 빈곤이 가치의 이율배반에서 유래한다. 여기서 그에 대한 증명을 하는 것을 면해 달라. 이는 다음 장들에서 자연스럽게 다시 나올 것이다.

사회주의자들은 이 이율배반의 끝을 아주 옳게 요구하면서도 그 원천을 오인하고 거기서 공적 권위의 명령에 의해서 복구할 수 있었던 상식의 착각만을 보는 잘못을 범했다. 이로부터 한심한 감상感傷의 폭발이 나온다. 이는 사회주의를 실증적 정신에게 아주 재미없는 것으로 만들었고 극히 황당한 환상을 전파해 매일같이 수많은 바보들을 만들어낸다. 내가 사회주의를 비난하는 점은 그것이 이유도 없이 생겨났다는 것이 아니라 아주 오랫동안 그리고 아주 완고하게 어리석은 채로 남아 있다는 것이다.

2. 그러나 경제학자들은 선험적으로, 그리고 그것도 모순적 자료, 혹은 더 제대로 말해서 이율배반적 자료에 힘입어 가치로부터 일체의 개혁 관념과 개혁 희망을 배척하는, 그에 못지않게 심각한 잘못을 했다. 사회가 그 가장 높은 적대의 시기에 도달했다는 바로 그것에 의해 화해와 조화가 임박했다는 것을 결코 이해하려고 하지도 않으면서 말이다. 그런데 이는 그 전문가들이 현대 형이상학이 밝혀준 내용들을 더 많이 고려했더라면 정치경제학의 주의 깊은 고찰이 이들에게 손가락으로 만지게 해주었을 것이다. 실제로 인간 이성이 아는 더 실증적인 모든 것에 의해 이율배반이 발현하는 곳에는 항들의 해소 전망이, 따라서 변혁의 알림이 있다는 것이 증명된다. 그런데 장 바티스트 세가 해설한 바와 같은 가치 관념은 정확히 이 경우에 들어온다. 그러나 경제학자들은 대부분 그리고 의식할 수 없는 숙명에 의해 철학적 움직임에 낯선 채로 있어 가치의 본질적으로 모순적인, 혹은 그들이 말하듯 가변적인 특성이 동시에 그 구성성의, 말하자면 그 상당히 조화롭고 확정 가능한 본성의 공인된 표징이라고 생각하기를 삼갔다. 다양한 경제학파에 어떠한 불명예가 돌아가든지 그 학파들이 사회주의에 했던 반대는 오직 그들 자신의 원리들에 대한 이 잘못된 개념에서 유래한다는 것이 확실하다. 천 가지 것들 중 하나의 증명만으로 충분할 것이다.

학술원(도덕 및 정치 과학 아카데미가 아니다. 다른 곳이다)은 어느 날 자신의 권한을 벗어나 각 종류의 산업에서 노동의 사람 수와 날수를 곱한 평균에 따라 모든 상품에 대해 가치의 표를 계산하자고 제안하는 한 논문의 독회를 했다. 「주르날 데 제코노미스트Journal des Economistes」(1845년 8월)는 보기에 권한 남용인 이 통지문의 본문을 곧바로 가져다가 그 목표였던 가격표 프로젝트에 항의하고 자신이 참된 원리들이라 부르는 것을 재확립했다.

그 결론에서 이렇게 말했다. “가치의 척도, 가치의 측정 표준은 없다. 수학이 우리에게 항상적 운동, 원과 같은 면적의 정사각형은 없으며, 이런 정사각형과 이 운동은 결코 없을 것이라고 말하듯이 이를 말하는 것은 경제학이다. 그런데 가치의 측정 표준이 없다면, 가치의 척도가 형이상학적 환상도 아니라면, 결국 교환에서 주를 이루는 척도는 무엇인가? …이는 일반적 방식의 공급과 수요라고 우리는 말했다. 이것이 바로 그 과학의 결론이다.”

그런데 「주르날 데 제코노미스트」는 가치 척도가 없다는 것을 어떻게 증명했는가? 나는 성별된 용어를 사용한다. 나는 잠시 후에 가치 척도라는 이 표현이 불투명한 무엇인가를 가지며, 원하는 것, 말해야 하는 것을 정확히 하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줄 것이다.

이 잡지는 예를 들어 가며, 우리가 위에서 가치의 가변성에 관해 한 설명을 반복했지만 우리처럼 모순에 도달하지는 못했다. 그런데 세Say 학파의 최고로 특출한 경제학자들 중 한 분인 고명한 편집자가 더 엄격한 변증법적 습관을 가졌다면, 그가 사실을 관찰하는 것만 아니라 그 사실들을 낳는 관념들에서 그 설명을 구하는 데 능숙한 손을 썼다면 나는 그가 더 유보적인 태도로 의견을 표명했을 것이며, 가치의 가변성에서 그 과학의 결론을 보는 대신에 그것이 그 과학의 처음이라는 것을 스스로 인식했으리라는 점을 의심치 않는다. 가치에서 가변성은 사물이 아니라 정신에서 유래한다는 것을 성찰한다면, 사람의 자유가 그 법칙을 가지듯, 가치는 자신의 법칙을 가져야 한다는 것, 결과적으로 가치 척도의 가설은 사람들이 이처럼 의견 표명을 하니 아무런 비합리적인 것도 없으며, 정반대로 비논리적이고 성립 불가능한 것은 이 척도의 부정이라는 것이 이야기될 것이다.

그리고 사실, 가치를 측정하고 따라서 고정한다는 생각이 어디가 과학에 혐오스러운가? 모든 사람이 이 고정을 믿는다. 모두가 이를 원하고, 이를 추구하고, 이를 가정한다. 판매나 구매의 모든 제안은 결국 두 가치 간의 비교, 즉 말하자면 다소간 정당한, 그러나 실제적인 결정이다. 실재 가치와 거래 가격 간에 존재하는 차이에 관한 인류의 의견은 이렇게 말할 수 있는데, 만장일치이다. 수많은 상품들이 고정된 가격에 판매되게 하는 것이다. 그 가격들이 변화할 때까지도 언제나 가격이 고정된 상품도 있다. 빵이 그렇다. 두 생산자가 계좌로 서로 송금하면서 정해진 가격에 자신들 각각의 생산물의 일정량을 보낼 수 있다면, 열 명, 백 명, 천 명의 생산자가 마찬가지로 그렇게 할 수 있다는 것을 부정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런데 이는 바로 가치 척도의 문제를 해결한 일일 것이다. 각 물건의 가격이 논란이 되리라는 것에 나는 동의한다. 왜냐하면 논란은 우리에게 가격을 고정시킬 유일한 방식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결국 모든 빛이 충격에서 솟아나듯, 논란은 그것이 불확실성의 증거일지라도 거기에 끼어드는 다소간의 선의를 사상捨象한다면 가치들 간의 관계, 즉 그들의 측정치, 그들의 법칙을 발견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

리카도는 그의 지대 이론에서 가치의 공측 가능성의 웅장한 예를 제시했다. 경작 가능한 토지는 서로 간에 같은 비용을 들일 때 그들의 수확량의 관계와 같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그리고 보편적 실무가 이 점에서 이론과 일치한다. 그런데 적극적이고 확실한 이런 토지 평가, 그리고 일반적으로 모든 투하된 자본 평가 방식이 생산물에도 확장될 수 없다고 누가 우리에게 말하는가?…

사람들은 이렇게 말한다. 정치경제학은 결코 선험적인 것들에 의해 작동하지 않는다. 그것은 사실에 관해서만 발언한다. 그런데 가치 척도는 있지도 않고 존재할 수도 없다는 것을 우리에게 가르쳐 주는 것, 그러한 관념이 자연스럽게 제시되어야 했지만 그 실현은 완전히 괴상하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이 사실이고 경험이다. 공급과 수요, 이런 것이 교환의 유일한 척도이다.

나는 경험이 정반대의 것을 증명한다는 것, 여러 사회들의 경제적 운동에서 모든 것은 가치의 구성과 고정을 향한 경향을 가리킨다는 것, 이것이 바로 정치경제학의 정점이고 사회 내 질서의 최고 표징으로 정치경제학은 이 구성에 의해 변형된다는 것을 반복하지 않으려 한다. 이런 일반적 인식은 증명 없이 반복하면 맥이 빠질 것이다. 나는 당분간은 토론의 경계선 안에 남아있다. 그리고 나는 사람들이 가치의 유일한 기준이라고 주장하는 공급과 수요가 효용가치와 교환가치를 제시하고 그들을 화해시키는 데 도움을 주는 두 예식 형태 말고 다른 것이 아니라고 말한다. 이는 두 전극으로서 서로 연결하면 교환이라고 부르는 경제적 결합 현상을 발생시킨다. 전지의 양극처럼 공급과 수요는 정반대가 되고 끊임없이 상쇄하는 경향을 띤다. 물건의 가격이 커지기도 하고 소멸하기도 하는 것은 그것들의 적대 때문이다. 그러므로 물건들의 가격이 언제나 참된 가치의 표현, 정의의 표현이 되도록 하는 방식으로 이 두 힘의 균형을 맞추거나 타결시키는 것이 가능한지를 사람들은 알고 싶어 한다. 이에 따라 공급과 수요가 교환의 척도라고 말하는 것은 공급과 수요가 공급과 수요의 척도라고 말하는 것이다. 이는 결코 실무를 설명하는 것이 아니다. 이는 실무를 터무니없다고 공언하는 것이다. 그런데 나는 실무가 터무니없다는 것을 부인한다.

방금 나는 리카도를 한 특수한 경우에 대해 가치들을 비교하는 실증적 척도를 제시한 것으로 인용했다. 경제학자들은 더 훌륭한 일을 한다. 매년 그들은 통계표, 모든 가격표의 평균을 수집한다. 그런데, 평균의 의미는 무엇인가? 각자는 백만에서 우연히 취한 구체적인 하나의 작업에서 주를 이루는 것이 공급, 유용한 가치인지, 아니면 교환가치, 즉 수요인지를 가르쳐 줄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것을 의식한다. 그러나 상품 가격에서 일체의 과도함은 조만간 비례적인 저하로 이어지므로, 다시 말해 대금 공제의 이윤과 손실은 동일하므로, 전체 기간 동안 가격들의 평균을 생산물의 실재적이고 합당한 가치를 가리키는 것으로 타당하게 간주할 수 있다. 이 평균은 참으로 너무 늦게 달성된다. 그러나 앞서서 이를 발견할 수 없을지 누가 아는가? 그럴 수 없을 것이라고 감히 말하는 것은 경제학자인가?

그러므로 자의건 타의건 가치 척도를 구할 필요가 있다. 이를 명하는 것은 논리이며, 그 결론은 경제학자들에게 반대하는 것이면서도 사회주의자들에게 반대하는 것이기도 하다. 이 척도의 존재를 부정하는 견해는 비합리적이고 비이성적이다. 당신 마음이 내키는 한에서 한편으로 정치경제학은 사실의 과학이라고, 그리고 사실은 가치 결정의 가설에 반대된다고 말하며, 다른 한편으로 이 어려운 문제는 모든 적대 관계를 흡수할 보편적 조합에서는 더 이상 일어나지 않는다고 말하라. 나는 언제나 우파와 좌파에게 이렇게 대답할 것이다.

1. 원인 없는 사실은 생겨나지 않으므로 법칙이 없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교환의 법칙이 발견되지 않았다면, 잘못은 사실에 있는 것이 아니라 학자들에게 있다고.

2. 사람이 생존하기 위해 노동하고 자유로이 노동할 동안, 정의는 우애의 조건이며 조합의 기초라고. 그런데 가치의 결정 없이는 정의는 파행적이고 불가능하다고.

. 가치의 구성 : 부의 정의

우리는 가치를 그것의 상반되는 두 측면에서 안다. 우리는 그것을 전체적으로는 모른다. 우리가 이 새로운 관념을 취득할 수 있다면, 우리는 절대적 가치를 얻을 것이다. 그리고 학술원에서 읽힌 논문이 요구하는 것 같은 가치의 정가표가 가능할 것이다.

그러므로 부를 화학적 힘에 의해 영구적 구성 상태로 붙잡아진 질량으로, 그 안에서 새로운 요소들이 끊임없이 들어가서 상이한 비율로, 그러나 일정한 법칙에 따라 결합하는 것으로 상상하자. 가치는 이 요소들 각각이 전체의 부분을 이루는 비율적 관계(척도)다.

이로부터 두 가치가 도출된다. 첫째, 경제학자들은 곡물, 은, 지대 등에서 가치의 일반적 척도를 찾았을 때 완전히 오류에 빠졌다는 것. 이런 측정 표준은 여기나 거기나 없다는 것을 증명한 후에 가치에는 척도가 없다고 결론을 내렸을 때도 오류에 빠지기는 마찬가지라는 것. 둘째, 가치들의 비율은 계속 달라질 수 있지만 그렇다고 해서 하나의 법칙에 종속되기를 중단하는 것은 아니며, 그 법칙을 확정하는 것이 바로 요구되는 해결책이라는 것.

앞으로 알게 되겠지만, 이 가치 개념은 모든 조건을 충족한다. 왜냐하면, 그것은 그것이 가진 적극적이고 고정적인 것에서 유용한 가치, 그리고 그것이 가진 가변적인 것에서 교환가치를 동시에 포괄하며, 둘째로 일체의 확정에 극복 불가능한 장애물로 보이는 상반성을 중단시키기 때문이다. 게다가 우리는 이렇게 이해된 가치가 유용한 가치와 교환 가능한 가치라는 두 관념의 단순 병렬인 것과는 완전히 다르다는 것, 그것이 새로운 성질을 띤다는 것을 보여줄 것이다.

생산물들의 비례성은 우리가 세상에 행한다고 주장하는 계시가 결코 아니며, 우리가 과학에 가져온 혁신도 아닌 것은 분업이 아담 스미스가 그 기적을 설명했을 때 처음 듣는 이야기가 아니었던 것과 마찬가지다. 생산물들의 비례성은 무수한 인용으로써 증명하기가 우리에게 쉬운 것처럼 정치경제학의 저작 어디서나 나오는 통속적 관념이지만, 오늘까지 아무도 그에 합당한 지위를 돌려주는 데 유념하지 않았다. 그리고 이는 우리가 오늘날 하려고 착수하는 것이다. 우리는 덤으로 독자에게 우리가 독창성을 가진다는 주장에 관해 확신을 주기 위해, 그리고 겁이 많아 새로운 관념들에 별로 호의적이지 않은 정신들을 화해시키기 위해 이런 선언을 할 결심을 했다.

경제학자들은 가치 척도를 측정 표준, 스스로 존재하는 일종의 원초적 단위로서 미터가 모든 크기에 적용되는 것처럼 모든 상품에 적용되는 것으로만 이해하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여러 경제학자들에게는 또한 그러한 것이 실제로 돈의 역할이라고 여겨졌다. 그러나 화폐 이론은 필요 이상으로 돈이 가치 척도라기보다는 산술일 뿐이며, 통념적 산술이라는 것을 증명했다. 돈은 온도계가 열에 대해 가지는 관계를 가치에 대해 가진다. 온도계는 임의로 그어진 눈금이 있어서 열량의 저하나 축적이 있을 때를 잘 표시한다. 그러나 열의 균형 법칙은 무엇이며, 다양한 물체들에서 열의 비율은 무엇이며, 온도계에서 10도, 15도 혹은 20도의 상승을 일으키는 데 얼마의 양이 필요한가 하는 것은 온도계가 말하지 않는 것이다. 서로 동등한 눈금의 도수들이 동일한 열량의 추가에 상응하는지도 확실하지 않다.

그러므로 지금까지 가치 척도에 대해 품었던 관념은 부정확하다. 우리가 찾는 것은 사람들이 누차 말했듯이 가치의 측정 표준이 아니다. 이는 의미가 없다. 우리가 찾는 것은 생산물들이 사회적 부 안에서 서로 비율을 이루는 법칙이다. 왜냐하면 상품들의 인상과 인하를 좌우하는 것은, 정상적이고 합당한 인상과 인하인 한에서는 이 법칙에 대한 지식이기 때문이다. 한마디로 천체의 척도는 이 천체들 상호 간의 비교에서 나오는 관계를 의미하는 것처럼, 가치의 척도는 이 가치들의 비교에서 나오는 관계를 의미해야 한다. 그런데 나는 이 관계가 그 법칙을 가지며, 이 비교는 그 원리를 가진다고 말한다.

그러므로 나는 일정한 비율로 부의 요소들을 조합하는 힘, 그것들로 동질적 전체를 이루는 힘을 가정한다. 구성 요소들이 원하는 비율로 있지 않다고 해서, 조합이 덜 되지는 않는다. 그러나 모든 재료를 흡수하지 못하고 그것은 그중 일부를 무익한 것으로 내버릴 것이다. 조합을 발생시키고 다양한 물질들의 결합성이 정해주는 내적 운동, 사회 내의 이 운동은 교환인데, 그 초보적인 형태로 간주되는 사람과 사람 간의 교환만이 아니라 여러 사적인 산업들에 의해 생겨난 모든 가치들의 단일한 사회적 부로의 융합으로서의 교환이기도 하다. 끝으로 각 요소가 복합물 안에 들어가는 비율은 우리가 가치라고 부르는 것이다. 조합 후에 남는 초과분은 다른 요소들의 일정량의 부가에 의해 조합되지 않고 교환되지 않는 한에서 비가치non-valeur이다.

우리는 아래에서 돈의 역할을 설명할 것이다.

이 모두 그렇다고 할 때, 주어진 어느 시점에서 한 나라의 부를 이루는 가치들의 비율은 통계와 집계의 힘으로 정해지거나 적어도 경험적으로 근사될 수 있다고 사람들은 의식한다. 이는 화학자들이 경험에 의거해, 분석의 도움을 받아 물의 형성에 필요한 수소와 산소의 비율을 발견한 것과 거의 같다. 이 방식은 가치들의 결정에 적용될 때 거리낌을 주는 것이 전혀 없다. 이는 결국 회계의 문제일 뿐이다. 그러나 그런 작업은 아무리 재미있다고 해도 우리에게 가르쳐주는 바가 별로 없을 것이다. 한편으로 사실상 우리는 그 비율이 끊임없이 달라진다는 것을 안다. 다른 한편으로, 공적 재산의 한 장이 표가 작성된 장소와 시간에 대해서만 가치들의 비율을 제공하므로 우리는 그것으로부터 부의 비례성 법칙을 도출할 수 없으리라는 것이 명확하다. 이를 위해 필요한 것은 이런 종류의 작업만이 아니다. 그 절차가 신뢰할 만하다는 것을 인정하면 유사한 수천, 수백만 건의 작업이 필요할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경제학은 화학과 완전히 다르다. 경험으로 아주 아름다운 비율들을 발견하는 화학자들은 이 비율들이 어떻게 나온 것인지, 왜 그런 비율들이 정해진 것인지 알지 못하고 이 비율들을 결정하는 힘에 대해서도 알지 못한다. 반면에 사회경제학에서는 어떤 연구도 사후적으로 가치들의 비례성 법칙을 직접 알려줄 수가 없을 것인데, 이를 발생시키는 힘 자체에서 파악할 수 있다. 이제 이 힘 자체를 알려줄 시간이다.

아담 스미스가 그토록 웅변으로 치하했고 그의 후계자들은 무시한 이 힘은, 그에게 동등한 것으로서 특권을 제공하는 것인데, 이 힘은 노동이다. 노동은 생산자마다 양적으로 질적으로 다르다. 노동은 이 점에서 자연의 모든 위대한 원리들, 그리고 가장 일반적이고 그 작용과 공식에서 가장 단순한, 그러나 구체적인 다수의 원인들에 의해 무한히 변모하고 무수하게 다양한 형태들 속에서 발현하는 법칙들과 같다. 부의 모든 요소들을 생산하는 것, 그 요소들을 가변적이지만 확실한 비례성의 법칙에 따라 마지막 분자들까지 조합하는 것은 노동, 오로지 노동이다. 결국 생명 원리로서 부의 소재molem를 격동하고mens agitat, 이를 비례시키는 것이 노동이다.

사회, 혹은 집단적 인간은 그 향유가 그의 행복bien-être을 구성하는 무한한 물건들을 생산한다. 이 행복은 생산물의 양만이 아니라 그 다양성(품질)과 비율에 따라서도 발달한다. 이 근본적 조건으로부터 결과적으로 사회는 항시 그 생애의 매 순간 자신의 생산물들에서 생산의 잠재력과 수단에 비해 가장 강한 행복의 총계가 나타나는 비율을 구해야 한다. 풍부성, 다양성과 생산물들에서의 비율은 부를 구성하는 세 항목이다. 사회적 경제의 대상인 부는 예술의 대상인 미, 도덕의 대상인 덕성, 형이상학의 대상인 참과 동일한 생존 조건에 종속된다.

하지만 이 경이로운, 그리고 아주 필요해서 그것 없이는 인간 노고의 일부가 상실되는, 즉 무익하고 부조화하고, 거짓되고 결과적으로 궁핍, 무의 동의어가 되는 그런 비율은 어떻게 성립하는가?

우화에 따르면 프로메테우스는 인간 활동의 상징이다. 프로메테우스는 하늘에서 불을 훔치고 최초의 기술들을 발명한다. 프로메테우스는 미래를 예견하고 유피테르와 맞먹기를 원한다. 프로메테우스는 신이다. 그러므로 사회를 프로메테우스라 부르자.

프로메테우스는 하루 중 노동에 평균 10시간, 휴식에 7시간, 오락에 7시간을 사용한다. 자신의 일에서 가장 유익한 열매를 얻어내려고 프로메테우스는 그의 소비품 각각이 그에게 들어가게 하는 수고와 시간을 기록한다. 경험 말고는 아무것도 그에게 이에 관해 가르쳐줄 수 없으며, 이 경험은 그의 전 생애에 속할 것이다. 일하고 생산하면서도 프로메테우스는 그러므로 무한한 계산 착오를 겪는다. 그러나 결국 그가 많이 일할수록, 그의 행복은 더욱 섬세해지고 그의 사치는 이상화된다. 그가 자연에 대한 정복을 확장해 갈수록 그는 자기 자신 안에 생명과 지성의 원리를 강화하며, 그 실행만으로 그는 행복해진다. 그 일군의 첫 번째 교육이 일단 완수되고 그의 직업 활동에서 질서가 잡혀서, 그에게 일한다는 것은 더 이상 수고하는 것이 아니고, 살고 즐기는 것이라는 말이 맞는 말이다. 그러나 노동의 매력은 그 규칙을 파괴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 매력은 규칙의 결실인 것이다. 그리고 노동은 매력적이어야 한다는 핑계로 정의正義의 부정, 공동체로 결론을 짓는 자들은 정원에서 꽃을 꺾어서 계단 위에 꽃 장식을 하는 아이들과 닮았다.

사회 안에서 정의는 그러므로 가치들의 비례성 말고 다른 것이 아니다. 이는 생산자의 책임을 보장책이자 강제 수단으로 삼는다.

프로메테우스는 어떤 산물은 노동 한 시간이 들고, 다른 산물은 하루가, 일주일이, 일 년이 든다는 것을 안다. 그는 동시에 이 모든 산물이 그 비용의 증가에 의해 자신의 부의 진도를 이룬다는 것을 안다. 그러므로 그는 가장 비용이 덜 나가는 것들, 따라서 가장 필요한 것들을 조달해 자신의 생존을 보장하는 것에서 시작할 것이다. 그 다음은 그 보장을 얻음에 따라 사치품에 주목할 것이고 그가 현명하다면 항시 각 물건마다 그에게 드는 값의 자연적 계단에 따라 진행해 갈 것이다. 때로 프로메테우스는 계산을 틀릴 것이다. 아니면 감정에 휩싸여 때 이른 향락을 위해 즉각적 선을 희생시킬 것이다. 그리고 피와 물을 쏟은 후에 그는 굶주릴 것이다. 이처럼 법은 그 자체 안에 강제 수단을 보유한다. 그 법은 위반자가 곧 처벌받지 않고는 유린될 수 없다.

그러므로 세는 이렇게 옳게 말했다. “다른 모든 계급들로 구성되는 이 계급(소비자 계급)의 행복은 한 나라의 일반적 행복, 번영 상태를 이룬다.” 단, 그는 마찬가지로 모든 다른 계급들로 구성되는 생산자 계급의 행복도 한 나라의 일반적 행복, 번영 상태를 이룬다고 덧붙여야 했을 것이다. 마찬가지로 “각 소비자의 재산은 그가 구매하는 모든 것과 끊임없이 경쟁 관계에 있다”고 말했을 때, 그는 또한 이렇게 덧붙여야 했을 것이다. “각 생산자의 재산은 그가 판매하는 모든 것으로부터 끊임없이 공격받는다.” 말끔히 표현되는 이런 호혜성 없이는 경제 현상의 대부분이 분간할 수 없는 것이 된다. 그리고 나는 그럴 자리가 되면 이런 심각한 생략의 결과 어떻게 책을 쓰는 경제학자들 대부분이 상업의 균형에 관해 망발을 했는지를 보여줄 것이다.

나는 방금, 사회는 우선 가장 비용이 적게 드는, 따라서 가장 필요한 물건을 생산한다고 말했다. …그런데 생산물에서 필요성은 염가廉價와 상관관계임이 참인가? 그래서 이 두 낱말, 필요성과 염가는 다음의 두 낱말, 고가高價와 불필요가 동의어인 것과 마찬가지로 동의어인가?

노동의 각 산물마다 고립적으로 볼 때 사람의 생존에 충분할 수 있다면, 문제의 동의성은 의심할 바 없을 것이다. 모든 산물이 같은 성질을 지녀서 가장 비용이 적게 드는 것들이 우리에게 생산하기에 유리하고 따라서 가장 필요할 것이다. 그러나 산물의 유용성과 가격 간의 병렬 관계가 정식화되는 것은 이런 이론적 정확성을 가지고 되는 것은 아니다. 자연의 사리분별에 의해서든, 다른 모든 원인에 의해서든 필요와 생산 능력 간 균형은 이론 이상이다. 이는 사실로서 매일의 실천이 사회의 진보와 마찬가지로 증언하는 것이다.

사람의 탄생 다음 날, 문명의 출발일로 가보자. 가장 단순한 원초적인 산업들, 준비와 비용을 가장 적게 요하는 산업들은 다음과 같다는 것, 채취, 목축, 수렵, 어로, 그에 이어서 오랜 기간이 지난 후에 농업이 생겨났다는 것이 참이 아닌가? 그때 이래로 이 주요한 네 산업이 완성되었고, 또 점유되었다. 사실의 본질을 변질시키지 않는 한, 그러나 오히려 그 본질을 더 부각시키는 이중적 상황이다. 실제로 재산권은 언제나 가장 직접적인 쓸모가 있는 물건들, 만들어진 가치물에 우선적으로 붙여졌다. 그래서 점유의 진도에 따라 가치의 눈금을 표시할 수 있었을 것이다.

노동의 자유에 관한 저작물에서 뒤누아예[12] 씨는 네 가지 거대한 산업 범주를 구분하면서 이 원리에 적극적으로 집착해 이 범주들을 그 발달 순서에 따라, 즉 노동을 가장 적게 지출하는 것에서 가장 많이 지출하는 순으로 배열했다. 이는 다음과 같다. 위에 언급한 반半 야만적 기능들을 포함하는 채취업, 상업, 제조업, 농업. 저자가 마지막에 농업을 배치한 것은 심오한 이유가 있다. 왜냐하면 아주 오래되었음에도 이 산업이 다른 산업들과 같은 걸음으로 나아가지 않았음이 확실하다. 그런데 인류에서 사물의 계승은 결코 그 기원에 따라 정해져서는 안 되며, 전체의 발달에 따라 정해져야 한다. 농업은 다른 산업들보다 먼저 태어났을 수도 있고 모든 산업이 동시대적일 수도 있다. 하지만 농업은 나중에 완성될, 날짜상 마지막의 것으로 판단될 것이다.

이처럼 사물의 본성 자체가 그 자신의 필요만큼 노동자에게 자신의 행복을 구성하는 가치물들의 생산을 착수할 순서를 가르쳐주었다. 우리의 비례성 법칙은 그러므로 물리적인 동시에 논리적이고, 객관적인 동시에 주관적이다. 이는 최고도의 확실성을 띤다. 그 적용을 따라가보자.

노동의 모든 산물들 중에 어느 것도 달력보다 더 길고 더 인내하는 노력을 요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런데도 그 향유가 오늘날 저 저렴한 값에 얻어질 수 있는 것, 따라서 우리 자신의 정의에 따를 때 더 필요해진 것은 없다. 그러면 우리는 이 변동을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최초의 부족들, 겨울과 여름처럼 밤과 낮의 갈마듦으로 충분했던 이들에게는 별로 쓸모가 없었던 달력이 어떻게 결국 그렇게 필요 불가결하고 별로 비싸지 않고, 그렇게 완전하게 되었는가? 왜냐하면 기적적인 합치에 의해 사회경제에서 이 모든 형용어들이 나타나기 때문이다. 한마디로 우리의 비례 법칙에 따라 달력 가치의 가변성을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달력의 생산에 필요한 노동이 행해지고 가능하기 위해서는 사람이 자신의 최초 작업들에서, 그리고 그 직접적 결과였던 작업들에서 시간을 벌 수단을 발견할 필요가 있었다. 다시 말해, 이 산업들이 처음보다 더 생산적이 되거나 비용이 덜 들게 되는 것이 필요했다. 이는 곧 우선 채취 산업 자체에서 달력 생산의 문제를 풀 필요가 있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나는 갑자기 노력들의 행복한 조합에 의해, 노동 분업에 의해, 어떤 기계의 사용, 자연적 인자들의 더 나은 지휘, 한마디로 그의 근면에 의해 프로메테우스가 하루에 특정한 물건을 예전에 열흘에 생산했던 만큼 생산할 수단을 발견한다고 가정한다. 어떤 일이 이어질 것인가? 그 산물은 부의 요소들에 관한 표에서 위치가 바뀔 것이다. 다른 산물들에 대한 그것의 결합 잠재력affinité이 감히 말하자면 커져서 그것의 상대적 가치는 그만큼 줄어들었을 것이며, 100으로 평가가 되는 대신에 10으로밖에 평가가 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이 가치는 그렇다고 해서 덜하지 않을 것이며, 또 여전히 엄밀하게 결정될 것이다. 그리고 그것의 중요성의 수치를 홀로 고정해줄 것은 여전히 노동일 것이다. 이처럼 가치는 달라지며, 가치의 법칙은 부동이다. 게다가 가치가 달라질 수 있다면, 이는 그것이 본질상 동적인 원리를 가지는 한 법칙에 종속되기 때문이다. 즉 시간으로 측정되는 노동의 원리이다.

같은 추론이 모든 가능한 가치물과 마찬가지로 달력의 생산에도 적용된다. 나는 문명, 즉 부의 증대라는 사회적 사실이 우리 업무를 배증해 우리의 시간들을 점점 더 귀중하게 만들고 우리가 전 생애에 대한 끊임없는 상세한 기록을 하지 않을 수 없게 만들어 달력이 가장 필요한 물건 중 하나가 되었다는 것을 덧붙일 필요는 없다. 우리는 또한 이 경이로운 발견물이 그 자연적 보완물로서 가장 귀중한 우리의 산업들 중 하나인 시계 제조업을 일으킨 것도 안다.

여기서 아주 자연스럽게 한 가지 반론이 자리 잡는다. 이는 가치들의 비례성 이론에 반대해 제기할 수 있는 유일한 반론이다.

세, 그리고 그를 따른 경제학자들은 노동 자체가 가치 평가에 종속되어 다른 상품과 같은 상품이어서 결국 노동을 가치의 원리이자 동인으로 삼는 데는 악순환이 있다는 것을 관찰했다. 그러므로 희소성과 의견에 준거를 둘 필요가 있다고 결론을 내린다.

이 경제학자들이 거기서 경이로운 부주의를 입증했다고 내가 말하는 것을 이들이 허락하기를 바란다. 노동은 가치 있다valoir고 이야기된다. 상품 자체로서가 아니라 그 안에 잠재적으로 포함된 것으로 가정하는 가치들을 볼 때 그렇다는 것이다. 노동의 가치는 비유적 표현으로서 원인으로부터 결과에 관한 예상이다. 이는 자본의 생산성과 같은 명목에서 허구이다. 노동은 생산을 하고 자본은 값이 나간다. 그리고 일종의 생략법을 이용해 노동의 가치를 말할 때는 언어의 규칙에 상반됨이 없는 양다리 걸치기를 하는 것이다. 하지만 이론가들은 이를 현실로 간주하는 일을 삼가야 한다. 자유, 사랑, 야망, 재능과 같이 노동은 모호하고 그 본성상 불확정적이지만, 그 대상에 의해 질적으로 정의되는 것, 즉 그 산물에 의해 현실이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 사람의 노동이 하루 5프랑의 값어치가 있다고 말할 때, 이는 마치 이 사람의 일상적 노동의 산물이 5프랑의 값어치가 있다고 말한 것과 같다.

그런데, 노동의 효과는 끊임없이 가치의 구성 요소들인 희소성과 의견을 제거하는 것이며, 그 필연적 결과로 자연적인 혹은 모호한 (점유된 것이건 아니건) 쓸모들을 측정 가능한 혹은 사회적인 쓸모로 변형하는 것이다. 그 결과 노동은 자연의 인색함에 대해 선포된 전쟁인 동시에 재산권에 맞선 영원한 음모이다.

이 분석에 따르자면, 생산자들이 노동 분업과 교환을 통해 자연스럽게 서로 간에 형성하는 사회 안에서 고려도니 가치는 부를 구성하는 산물들의 비례 관계이다. 그리고 특별히 한 산물의 가치라고 부르는 것은 화폐적 문자로 일반적 부 안에서 이 산물의 비율을 가리키는 공식이다. 쓸모가 가치의 기초를 제공한다. 노동은 그 비율을 정한다. 가격은 우리가 연구해야 할 착시 현상을 제외하고는 이 관계를 드러내는 표현이다.

이런 것이 유용한 가치와 교환 가능한 가치가 진자 운동을 하는 중심이고, 이 점에 이 가치들이 뛰어들어 사라진다. 이런 것이 경제적 교환, 공업과 상업의 변덕을 지배하고 진보를 통할統轄하는 절대적인 부동의 법칙이다. 생각하고 노동하는 인류의 모든 노력, 개인적이고 사회적인 일체의 사유思惟는 집단적 부의 구성 부분으로서 이 법칙에 복종한다. 정치경제학의 운명은 그것의 모든 모순적 항들을 연달아 제시하면서 이 법칙을 알리는 것이었다. 비록 그 둘이 서로 근본적으로 다를 수 없음에도 불구하고 내가 잠정적으로 정치경제학과의 구분을 허락해 줄 것을 요구한 사회경제학의 대상은 이 법칙을 선포하고, 이를 어디서나 실현하는 것일 것이다.

가치들의 척도나 비례성의 이론은 평등의 이론 자체이다. 이에 주의하기 바란다. 실제로 생산자와 소비자의 동일성이 완전한 것을 보게 된 사회 안에서 한량에게 지불된 소득이 에트나 산의 화염에 던져진 가치와 같은 것처럼, 과도한 임금을 받는 노동자는 이삭 하나를 꺾은 대가로 빵 하나를 받는 수확인과도 같다. 그리고 경제학자들이 비생산적 소비라고 칭한 모든 것은 근본적으로 비례성의 법칙에 대한 침해일 뿐이다.

우리는 이어서 이 단순한 여건들로부터 사회적 화신이 조금씩 노동의 조직, 임금의 분배, 산물들의 가격 책정, 보편적 연대의 여전히 모호한 체계를 어떻게 도출하는지를 보게 될 것이다. 왜냐하면 사회 내의 질서는 가차 없는 정의正義의 계산 위에 확립되는 것이지 결코 수많은 저명한 사회주의자들이 오늘날 인민에게서 흥분시키려 노력하는 우애, 헌신, 사랑의 기생적 감정 위에 확립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예에 따라서 그들이 희생의 필요성을 설파하고 그 예를 제시하는 것은 소용이 없다. 이기주의가 더 강하고, 가혹함의 법칙, 경제적 숙명만이 이 이기주의를 길들일 능력이 있다. 인도주의적 열정은 문명의 진보에 호의적인 격동을 일으킬 수 있다. 그러나 이 감정의 위기는 가치의 진자 운동과 마찬가지로 정의를 더 강하게, 더 절대적으로 확립하는 것 말고 다른 결과를 가질 수 없을 것이다. 자연 혹은 천지신명은 우리의 심장을 불신했다. 사람의 동류에 대한 사랑을 결코 믿지 않았다. 그리고 나는 인간이 부끄러워하도록 말하지만 우리의 위선자들을 이를 알 필요가 있는데, 과학이 섭리의 관점들에서 사회들의 진행에 관해 우리에게 발견해 주는 모든 것은 신의 편에서 깊은 인류 혐오가 있음을 증언해준다. 신은 선하기 때문이 아니라 질서가 그의 본질이기 때문에 우리를 돕는다. 신은 세상이 선에 걸맞다고 판단해서가 아니라 자신의 지고한 지성의 종교가 그렇게 하도록 의무화하기 때문에 세상의 선을 마련해준다. 그리고 통속인이 그에게 아버지라는 부드러운 이름을 붙여주는 반면에, 역사가, 경제학자, 철학자에게는 그가 우리를 사랑한다고도, 우리를 생각해 준다고도 믿는 것이 불가능하다.

신의 이 절정의 무관심, 스토아적 평온함을 본받자. 그리고 자선의 계명은 언제나 사회적 선의 생산에서 실패했지만 순수 이성에서 합치와 덕의 조건들을 찾도록 하자.

산물들의 비례성으로 의식된 가치, 다르게 말해서 구성된 가치는 필연적으로 그리고 같은 정도로 불가분적이고 조화로이 결합된 쓸모와 매매 용이성을 가정한다. 쓸모를 가정하는 이유는, 이 조건이 없으면 그 산물이 그것을 교환 가능하게 해주는, 따라서 그것을 부의 한 요소로 만들어주는 이 결합 잠재성을 빼앗길 것이기 때문이다. 매매 용이성을 가정하는 것은 그 산물이 언제나 그리고 정해진 값에서 교환에 받아들여질 수 없다면, 그것은 비가치에 불과할 것이고, 아무것도 아닐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구성된 가치에서 이 모든 성질들은 전보다 더 크고 더 규칙적이고 더 참된 의미를 얻는다. 이와 같이 쓸모는 사물들이 우리의 향유와 우리의 탐색에 소용되는, 말하자면 이 타성적인 역량이 더 이상 아니다. 매매 용이성은 더구나 맹목적 환상이나 무원칙한 의견의 과장이 아니다. 끝으로 가변성은 공급과 수요 간의 악의로 가득 찬 논쟁으로 드러나기를 중단했다. 이 모두는 실증적이고 정상적인, 그리고 가능한 모든 변용 속에서 확정 가능한 관념에 자리를 양보하기 위해 사라졌다. 가치들의 구성에 의해 각 산물은, 이러한 유비를 설정하는 것이 허락된다면, 영양 섭취의 본능에 의해 발견되고 소화기관에 의해 준비되어 일반적 순환에 들어가는 음식물과 같다. 이 순환에서 그 음식물은 일정한 비율에 따라 살, 뼈, 체액 등으로 전환되어 몸에 생명, 힘, 그리고 아름다움을 준다.

그런데 쓸모 있는 가치와 교환가치의 대립하는 관념들로부터 우리가 구성된 가치나 절대적 가치의 관념으로 올라갈 때 어떤 일이 벌어지는가? 내가 감히 말하건대 끼워 맞춤, 상호 침투가 있다. 거기서 두 기초적 관념은 각각이 에피쿠로스의 꼬부라진 원자들처럼 서로를 붙잡고 서로에게 흡수되며 사라져서 자신들의 모든 긍정적 성질들을 더 높은 정도로 부여받고 부정적 성질들을 털어버린 복합물에 자리를 양보한다. 화폐, 1급의 상업증권, 국채 증서, 견고한 기업에 대한 주식같이 정말로 그런 가치는 이유 없이 과장될 수도 없고 교환에서 상실되지도 않는다. 그것은 산업적 특수성의 증대와 산물들의 증산이라는 자연 법칙에만 종속된다. 더구나 그러한 가치는 결코 거래, 즉 절충, 중용 혹은 혼합의 결과물이 아니다. 이는 완벽한 융합의 산물, 그 구성 인자들의 완전히 새롭고 독특한 산물이다. 물이 수소와 산소의 조합의 산물로서 그 구성 요소들과 완전히 다른 별개의 몸인 것과 같다.

반대가 되는 두 관념이 더 높은 차원의 제3의 관념으로 해소되는 것은 그 학파가 합명제synthèse라 칭하는 것이다. 그것만이 긍정적이고 완전한 관념, 우리가 보았듯이 정반대되는 두 개념의 이어지는 긍정이나 부정―이는 같은 것이기 때문―에 의해 얻어지는 관념을 제공한다. 이로부터 이론에서와 마찬가지로 응용에서도 중요한 이 보조 정리가 도출된다. 도덕, 역사 혹은 정치경제학의 영역에서 분석이 한 관념의 대립을 확인했을 때는 언제나 선험적으로 이 대립은 조만간 나타날 더 높은 관념을 숨긴다고 단언할 수 있다.

나는 대입 자격시험을 보는 모든 젊은이들에게 익숙한 관념들을 아주 오랫동안 주장한 것을 후회한다. 그러나 나는 이런 세세한 내용을 특정한 경제학자들에게 빚을 졌다. 이들은 내 재산권 비판과 관련애서, 내가 소유주가 아니라면 반드시 공산주의자라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 양도논법兩刀論法들을 계속 내놓았다. 이 모두가 정명제, 반명제와 합명제가 무엇인지를 알지 못했기 때문이다.

가치의 종합적 관념은 사회에서는 질서와 진보의 근본 조건으로, 블랑키[13] 씨의 표현을 사용하자면, “노동에서 가치의 보편적이고 부동의 척도를 보여주고 모든 물건이 그 물건의 매매 가치에 외적인 우발적 상황에 의해 촉발되는 현행 가격의 기복에 끊임없이 끌려가는 그 자연 가격을 가진다는 것을 보여주면서” 아담 스미스에게 모호하게 인식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 가치 관념은 아담 스미스에게는 아주 직관적이었다. 그런데 사회는 직관의 신앙에 근거를 두고 관습을 변화시키지 않는다. 사실의 권위에 따라서만 결심한다. 대립은 더 분별력 있고 더 명확한 방식으로 표현될 필요가 있었다. 장 바티스트 세는 그의 주요 해석자였다. 그러나 이 경제학자의 상상적 노력과 가공할 섬세함에도 불구하고 스미스의 정의는 그도 모르게 그를 지배하며, 그의 추론 어디서나 번뜩인다. 세는 이렇게 말한다.

“어떤 물건을 평가한다는 것은 그것이 사람들이 지정하는 다른 물건만큼으로 산정되어야 함을 선언하는 것이다. … 가치는 그것이 알려지지 않은 한은 모호하고 자의적이다. …” 그러므로 물건들의 가치를 인식하는, 즉 그것을 고정하는 한 방식이 있다. 그리고 이 인식이나 고정은 물건들 서로 간의 비교에 의해 행해지므로 어떤 물건이 다른 물건보다 더 가치가 있다거나 덜 가치가 있다거나 같은 가치가 있다고 선언할 수단이 되는 공통의 특성, 원리가 있다.

세는 먼저 이렇게 말한다. “가치의 척도는 다른 산물의 가치이다.” 나중에 가서 이 문장이 동어반복에 불과함을 인식하고는 이렇게 말을 바꾸었다. “가치의 척도는 다른 산물의 양이다.” 이는 역시나 별로 또렷하지 못하다. 게다가 이 작가는 보통 때는 아주 유려하고 확고한데 헛된 구분으로 동요한다. “물건들의 가치는 평가할 수 있다. 이를 측정할 수는 없다. 즉 부동의 알려진 명목과 그것을 비교할 수가 없는데, 이는 그런 것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물건들을 비교해서 평가하는 일로 귀결된다.” 다른 때에 그는 실질적 가치와 상대적 가치를 구별한다. “실질적 가치들은 사물의 가치가 생산 비용과 함께 달라지는 경우의 가치들이다. 상대적 가치들은 사물의 가치가 다른 상품들의 가치에 대한 관계상 달라지는 경우의 가치들이다.”

비교하고, 평가하고, 산정하는 것이 측정하는 것임을 깨닫지 못하는 천재의 이상한 관심사다. 모든 측정은 비교에 불과해서 비교가 잘 된다면 이 자체가 진정한 비율을 가리킨다는 것, 따라서 실질적 가치나 측정과 상대적 가치나 측정은 완전히 동일하다는 것, 모든 수량은 상호적으로 생겨날 수 있으니 어려움은 측정 표준을 찾는 일이 아니라 비교점을 확정하는 일로 귀결된다는 것이다. 기하학에서 비교점은 연장延長이며, 측정 단위는 때로는 원을 360개로 나눈 것이고 때로는 지구의 둘레, 때로는 사람 팔, 손, 엄지 혹은 발의 평균 길이다. 경제학에서 모든 가치들이 비교되는 관점은 노동이다. 우리는 아담 스미스 후에 경제학이라는 말을 했다. 측정의 단위에 관해 말하자면, 프랑스에서 채택된 단위는 프랑이다. 수많은 양식 있는 사람들이 40년 전부터 그렇게 간단한 관념에 반발하고 있는 것은 믿을 수가 없다. 그러나 그렇지 않다. 가치들의 비교는 그것들 간에 아무런 비교점이 없이, 측정 단위 없이 행해진다. 평등의 혁명적 이론을 끌어안기보다는 19세기의 경제학자들이 모두를 향해, 모두에 맞서 주장하려고 결심한 것은 바로 이것이다. 후세가 이를 두고 무어라 말할까?

나는 지금 괄목할 예들을 들어 이론에서 필요한, 가치들의 측정 혹은 비율 관념이 현실에서 매일 실현되었고 실현된다는 것을 보여주려고 한다.

. 가치들의 비례성 법칙의 응용

모든 산물은 노동을 대표하는 표시이다.

모든 산물은 결과적으로 다른 산물로 교환될 수 있으며, 이를 증명해 주는 보편적 실무가 존재한다.

그러나 노동을 제거해보라. 당신에게는 얼마간의 크기를 가진 쓸모 있는 것들로 아무런 경제적 성격도 아무런 인간적 표시도 띠지 않아서 서로 간에 같은 단위로 측정이 불가능한, 즉 논리적으로 교환 불가능한 것들만이 남는다.

돈은 다른 모든 상품과 마찬가지로 노동을 대표하는 표시이다. 이 자격으로 돈은 공통의 평가자이자 거래의 매개체로 소용될 수 있었다. 그러나 관습이 여러 귀금속에 준, 상거래에서 매개로 쓰인다는 특정한 기능은 순전히 통념적이며, 모든 다른 상품은 덜 편리하게, 그러나 마찬가지로 진정한 방식으로 이 역할을 충족할 수 있을 것이다. 경제학자들은 이를 인정한다. 그리고 사람들은 하나 이상의 예를 인용한다. 그러므로 금속에 일반적으로 부여된 화폐로 쓰일 이 선호의 이유는 무엇이며, 정치경제학에서 유례가 없는 돈의 이 기능적 특수성은 어떻게 설명되는가? 왜냐하면 유일한, 그리고 같은 종류의 여분도 없는 것은 무엇이든 바로 이에 의해 더 이해하기가 어렵고 흔히 심지어 전혀 이해되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돈이 떼어내지는 계열을 재설정하고 이에 따라서 돈을 그 진정한 원리로 환원하는 것이 가능한가?

이 질문에 대해 경제학자들은 그들의 관행에 따라 자신들의 과학 영역 바깥으로 뛰쳐나갔다. 그들은 물리학, 역학, 역사학 등을 했다. 그들은 모든 것에 관해 말했지만, 아무 대답도 한 것이 아니다. 그들은 이렇게 말했다. 귀금속들은 그 희소성, 밀도, 부패 불가능성 덕에 화폐를 위해 다른 상품들에서는 같은 정도의 것을 만나기 어려운 편리함을 제공한다. 한마디로 경제학자들은 자신들에게 제기된 경제의 문제에 대답하는 대신에 기술의 문제를 취급하기에 나섰다. 그들은 화폐로 소용될 금과 은의 기계적 적합성을 아주 잘 부각시켰다. 그러나 그들 중 누구도 알지도 이해하지도 못한 것은, 귀금속들에게 유리하게 그것들이 누리는 특권을 정한 경제적 이성raison économique이다.

그런데 아무도 주목하지 않은 것은 모든 상품들 중에 금과 은이 그 가치가 구성되기에 이른 최초의 상품들이라는 것이다. 족장 시대에도 금과 은은 흥정이 되었으며, 지금地金으로 교환이 되었지만 이미 지배를 향한 가시적 경향을 띠었고 두드러진 선호를 보유했다. 점점 더 군주들이 이를 빼앗아서 자신의 인장을 거기에 찍었다. 이 군주의 성별聖別로부터 화폐, 즉 탁월한 상품, 상업상의 온갖 요동에도 구애받지 않고 정해진 비례적 가치를 보전하며, 모든 거래에서 받아들여지는 상품이 탄생한다.

사실, 화폐를 구별해 주는 것은 금속의 견고성이 결코 아니다. 이는 강철의 견고성보다 약하다. 그 쓸모도 아니다. 곡식, 철, 기름, 그 밖에 금에 비하면 거의 천한 것으로 여겨지는 수많은 물질들의 쓸모보다 못하다. 희소성도 밀도도 아니다. 희소성도 밀도도 다른 재료들에 주어지는 노동에 의해서든 오늘날처럼 방대한 양의 철이나 구리를 대표하는 은행권에 의해서든 보충될 수 있었다. 금과 은의 독특한 면은 내가 반복해서 말하지만 그 금속적 성질들, 그 생산의 어려움, 그리고 특히 공적 권위의 개입에서 나오며, 금과 은은 일찌감치 상품으로서 고정성과 진품성을 정복했다.

그러므로 나는 금과 은의 가치, 특히 화폐의 제조에 들어가는 부분의 가치는 아마도 아직 엄격한 방식으로 계산되지는 않지만 아무런 자의적인 면을 가지지 않는다고 말한다. 나는 그것이 계속 변동할 수는 있지만, 다른 가치물들과 같은 식으로 감가를 겪지 않는다는 것을 덧붙인다. 가치가 본질상 확정 불가능한 것임을 돈을 예로 들어 증명하려고 부담한 모든 추론과 학식의 비용은 문제에 대한 잘못된 관념에서 유래한 논지 무시ab ignorantia elenchi의 역리paralogisme나 마찬가지다.

프랑스 왕 필리프 1세는 샤를마뉴의 투르Tours 파운드에 3분의 1의 합금을 넣으면서 자신만이 화폐 주조의 독점권을 보유하니 어느 산물의 독점권을 가진 모든 상인이 하는 일을 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사실, 필리프와 그의 계승자들에게 그토록 비난이 돌아간 화폐의 이 변조는 무엇이었나? 즉 공급과 수요는 가치의 기준이니 사실상 인위적인 희소성을 만들어서든 주조된 것을 매점해서든 평가를 올릴 수가 있고, 이로써 물건들의 가치를 올릴 수가 있으며, 이는 곡식, 포도주, 기름, 담배에 대해서와 마찬가지로 금과 은에 대해서도 참이라는 것, 이것은 상업상의 관행의 관점에서는 아주 정당한 추론이지만 경제학에서는 아주 잘못이다. 그렇기는 하지만, 필리프의 사기는 그의 화폐가 그 정당한 가치로 값이 떨어지고 그 자신이 자기 백성들에게서 벌어들였다고 믿은 모든 것을 잃기 전에는 발각되지 않았다. 모든 비슷한 시도들에 같은 결과가 뒤따랐다. 이 착각은 어디서 왔는가? 경제학자들은 이렇게 말한다.

금과 은의 양은 정말로 화폐 위조 때문에 늘지도 줄지도 않으므로 이 금속들과 다른 상품들의 비율은 결코 변동되지 않았으며, 따라서 국가 안에서 2의 값어치가 나가는 것을 4의 값어치가 나가게 하는 것은 군주가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는 것이다. 화폐를 변조하는 대신 그 양을 두 배로 하는 것이 왕의 권한이었다면, 금과 은의 교환 가능한 가치는 곧 여전히 비례성과 균형의 이유 때문에 절반으로 떨어졌을 것이라고도 생각할 수 있다. 그러므로 화폐의 변조는 왕으로부터 강제된 저축이었다. 파산, 사취詐取라고 말하는 것이 더 좋겠다.

놀라운 일은, 경제학자들이 원할 때에는 가치 척도의 이론을 아주 잘 설명한다는 것이다. 이를 위해서는 가치를 화폐의 문제로 삼는 것으로 충분하다. 그러므로 그들은 화폐가 상업의 성문법, 교환의 전형이며, 상품의 이름으로 모두가 사회적 강제 이행을 받아야 하고, 사실로는 아니더라도 적어도 법으로는 모든 종류의 거래에서 화폐로 받아들여져야 하는 모든 창조물들의 이 긴 사슬의 첫 고리라는 것을 그들은 어찌 모르는가? 오지에(Augier) 씨는 다음과 같이 아주 잘 말한다.

“화폐는 그 가치가 영구성의 이상에 가장 많이 접근하는 만큼만 과거 거래에 대한 확인의 눈금으로, 좋은 교환 수단으로 소용될 수 있다. 왜냐하면 그것이 보유하는 가치만을 교환하거나 구매하기 때문이다.”(『공공 신용의 역사Historie du crédit public』)

이 뛰어나게 지혜로운 고찰을 일반적 공식으로 번역하도록 하자.

노동은 각 개인의 산물이 전체와 비례하는 만큼만 행복과 평등의 보장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자신에게 있는 가치와 대등한 가치물만을 교환하거나 구입하기 때문이다.

가격 투기적이고 정직하지 못한 상업의 금지를 사람들이 소리 높여 외치는 것, 동시에 왕실의 불량 화폐 주조자의 시도에 목소리를 높이는 것이 이상하지 않은가? 어차피 이는 정치경제학의 근본 원리, 가치들의 자의적 불안정성을 돈에 적용하는 것이다. 세정 당국이 750그램의 담배를 1킬로그램으로 취급하려 한다면 경제학자들은 도둑질이라고 소리칠 것이다. 하지만, 같은 세정 당국이 특권을 이용해서 1킬로그램의 가격을 2프랑 올린다면, 그들은 이것이 비싸다고 생각하겠지만, 거기서 원칙에 반하는 것을 아무것도 보지 못할 것이다. 정치경제학이란 얼마나 꼬인 것인가!

그러므로 금과 은의 화폐화에는 경제학자들이 보고한 것 이상의 무언가가 있다. 비례성의 법칙의 성별, 가치들의 구성의 최초 행동이 있다. 인류는 전반적으로 무한한 점진적 단계에 따라 움직인다. 노동의 모든 산물이 그것들 모두를 똑같이 치환 가능하게 만들어주는 비율적 척도에 종속되어야 함을 이해한 후에 이 절대적 치환 가능성을 한 특수한 산물, 다른 모든 산물의 전형이자 주인이 될 산물에 부여하기 시작한다. 그리하여 자기 구성원들을 자유와 평등으로 올리기 위해 인류는 왕들을 만들기 시작한다. 인민은 자신의 횡재하는 꿈과 전설에서 언제나 금과 왕권만을 말할 때 이 섭리적 진행에 대한 복잡한 심사心思를 가진다. 그리고 철학자들은 이른바 도덕적인 훈계와 사회적 유토피아에서 금과 참주 정치에 맞서 동일한 굉음으로 소리를 울릴 때 보편적 이성에 경의를 표했을 뿐이다. “빌어먹을 황금욕(Auri sacra fames)!”, “빌어먹을 금!”이라고 한 공산주의자가 농담조로 외친다. 이는 이렇게 말하는 것과 맞먹을 것이다. 빌어먹을 밀, 빌어먹을 포도원, 빌어먹을 양. 왜냐하면 금, 은과 마찬가지로 일체의 상업적 가치는 정확하고 엄밀한 결정에 이르러야 하기 때문이다. 사업은 오래전부터 시작되었다. 오늘날 이는 눈에 띄게 진척된다.

다른 고려 사항들로 넘어가자.

경제학자들이 일반적으로 인정하는 공리는, 모든 노동이 초과분을 남겨야 한다는 것이다.

이 명제는 내게 보편적, 절대적 진리성을 띤다. 이는 비례성 법칙의 보조 정리로서 경제학 전체의 요약으로 간주할 수도 있다. 하지만 나는 경제학자들에게 양해를 구한다. 모든 노동이 초과분을 남겨야 한다는 원리는 그들의 이론에서는 무의미하며, 어떠한 증명도 될 수가 없다. 공급과 수요가 가치들의 유일한 기준이라면 어떻게 초과되는 것과 충분한 것을 알 수 있는가? 원가도 판매가도 임금도 수학적으로 정해질 수 없는데, 잉여, 이윤을 상상하는 것이 어떻게 가능한가? 상업 관행은 우리에게 그 말대로 이윤의 관념을 제공해 주었다. 그리고 우리는 정치적으로 평등하므로 각 시민은 자신의 인적 근면에서 이득을 실현할 평등한 권리를 가진다는 결론이 나온다. 그러나 상업의 운영은 본질상 불규칙하며, 반박할 여지도 없게 상업의 이득은 생산자의 소비자에 대한 자의적이고 강제적인 공제일 뿐, 더 나은 말은 없고 한마디로 이전移轉일 뿐이라는 것이 증명되었다. 이는 매년 적자 총액을 이득 총액과 비교하는 것이 가능하다면 곧 인식하게 될 것이다. 정치경제학의 의미에서 모든 노동이 초과분을 남겨야 한다는 원리는 우리 모두가 혁명으로 획득한, 이웃의 것을 훔칠 헌법적 권리의 성별 말고 다른 것이 아니다.

가치들의 비례성의 법칙만으로 이 문제를 설명할 수 있다. 나는 그 문제를 좀 높은 데서 바라볼 것이다. 그것은 내가 그에 걸맞은 크기로 다루기에 충분히 심각하다.

대부분의 철학자들은 문헌학자들과 마찬가지로 사회를 사람들의 군집을 지칭하는 데 소용될 하나의 이성적 존재, 혹은 더 좋은 말로 추상적 이름으로만 본다. 집단적 이름, 종류의 이름은 실체를 가리키지 않는다는 것, 이는 우리 모두가 첫 문법 수업과 함께 유아기부터 받아들인 편견이다. 이 주제에 관해 할 말이 아주 많을 것이다. 나는 내 주제로 한정한다. 진정한 경제학자에게 사회는 하나의 생물로서 고유한 지성과 활동성을 타고났으며, 관찰만이 발견하는 특수한 법칙, 그 존재가 물리적 형태로 발현하지 않고 그 모든 구성원들의 화합과 긴밀한 연대에 의해 발현하는 법칙에 지배를 받는 생물이다. 이처럼 방금 우화의 신이라는 상징으로 우리가 사회를 은유할 때, 우리의 언어는 근본적으로 비유적인 것을 지니지 않았다. 우리가 한 이름을 붙여 온 것은 사회적 존재, 유기적 종합적 단일체다. 노동과 교환의 법칙들에 관해 성찰한 사람이면 누구에게든지, 집단적 인간의 실재, 나는 거의 인격이라고 말했는데, 이것은 개체적 인간의 실재와 마찬가지로 확실하다. 차이라면 후자의 실재는 그 부분들이 물질적 일체성을 띤 유기체라는 면에서 감각기관에 제시된다는 것이다. 이는 사회에서는 존재하지 않는 상황이다. 그러나 지성, 자생성, 발달, 생명, 존재의 실재를 가장 높은 정도로 구성하는 모든 것은 인간에게처럼 사회에도 필수적이며, 이로부터 사회들의 통치는 과학, 즉 자연적 관계들의 연구이며 결코 기술, 즉 자의恣意가 아니라는 결과가 나온다. 이로부터 결국 사회 전체는 그것이 이데올로그의 손에 넘어가면서부터 쇠퇴한다는 결과가 나온다.

모든 노동이 초과분을 남겨야 한다는 원리는 정치경제학, 즉 소유권자의 관행에는 증명이 불가능한 것이지만 집단적 인간의 실재에 관해 가장 많이 증언해 주는 원리들 중 하나다. 왜냐하면, 이제 보게 되겠지만 이 원리는 그것이 사회에서, 개인들에게 자신의 고유한 법칙들로부터 혜택을 부여하는 사회에서 나온다는 이유 때문에 비로소 개인들에게 참이기 때문이다.

사실로 가 보자. 철도 사업은 국가보다 기업가들에게 훨씬 덜한 부의 원천이다. 그 관찰은 타당하다. 그리고 이는 철도만이 아니라 모든 산업에 적용된다고 덧붙여야 했을 것이다. 그러나 가치들의 비례성 법칙에서, 그리고 생산과 소비의 절대적 동일성에서 필수적으로 도출되는 이 현상은 쓸모 있는 가치와 교환 가능한 가치의 통상적 관념으로는 설명할 수 없다.

상품들을 마차로 운송하는 평균 운임은 창고에서 창고로 가는 상품 1톤, 1킬로미터 당 18상팀이다. 이 가격에서는 보통의 철도 사업체는 운송업체의 순이익과 거의 같은 결과인 10%의 순이익을 획득하지 못하리라고 계산된다. 그러나 철로 운송의 속도는 마차 운송 속도에 비해 제반 보정을 다 했을 때 4대 1이라는 것을 인정하자. 사회에서 시간은 같은 가치를 가지므로 같은 가격에서 철도는 마차에 비해 400%의 장점을 제시할 것이다. 그렇기는 하지만 이 엄청난 장점은 사회에는 아주 실재적인 것이면서도 운송업자에게는 같은 비율로 실현되는 것과는 거리가 멀다. 운송업자는 사회에 400%가 더한 가치를 누리게 해주면서도 자신은 10%를 빼내지 못한다. 실제로 사정을 좀 더 그럴듯하게 만들기 위해 철도가 25상팀으로 요금을 정하고, 마차는 18상팀이라고 가정하자. 철도는 그 순간 모든 주문을 잃을 것이다. 발송인, 수취인 등 모든 사람이, 필요하다면 (육로 운송 회사인) 말 브루크로, 짐배로 되돌아올 것이다. 사람들은 기관차를 버릴 것이다. 400%의 사회적 장점이 35%의 사적 손해에 희생될 것이다.

이 이유는 파악하기 쉽다. 철도의 속력에서 나오는 장점은 완전히 사회적인 것이고, 각 개인은 최소의 비율로만 그에 참여한다(이 시점에는 상품 운송만 생각한다는 것을 잊지 말자). 반면에 손실은 소비자에게 직접적, 인적으로 닥친다. 사회적 이득은 400에 해당해서 그 사회가 100만 명으로만 구성된다고 해도 각 개인에게는 만 분의 4다. 반면에 소비자에 대한 33%의 손실은 3300만의 사회적 적자를 가정할 것이다. 그래서 사적 이익과 집단 이익은 첫눈에 보기에는 아주 갈라지는 것 같지만 완전히 동일하고 적절하다. 그리고 이 예는 경제학에서 모든 이익들이 어떻게 서로 화해하는지를 이해시키는 데 벌써 소용될 수 있다.

이러하므로 사회가 위에서 가정한 이득을 실현하기 위해서는 철도의 요금이 마차 요금을 넘지 않거나 넘더라도 아주 조금만 넘는 것이 절대 필요하다.

그러나 이 조건이 충족되려면, 달리 말해서 철도가 상업적으로 가능하려면, 운송 가능한 물자가 적어도 투하된 자본의 이자와 철로의 보수비용을 충당하기에 충분히 풍부해야 한다. 그러므로 철도의 첫 번째 존재 조건은 활발한 유통이다. 이는 더 활발한 생산, 더 많은 양의 교환을 가정하는 것이다.

그러나 생산, 유통, 교환은 즉흥으로 움직이는 것들이 아니다. 또 노동의 다양한 형태들은 고립해서 독립적으로 발달하지 않는다. 그들의 진보는 필연적으로 연결되고 연대적이며, 비례적이다. 산업인들 간에는 적대가 존재할 수 있다. 그들의 뜻과 달리 사회적 행동은 하나이고, 수렴하며, 조화롭다. 한마디로 인적이다. 그러므로 결국 거대한 노동 수단들의 창조를 위해 지목된 날이 있다. 이는 일반적 소비가 그 사용을 지탱할 수 있는 날이다. 즉, 이 모든 명제들은 서로 번역이 되므로, 부대 노동이 새로운 기계들을 먹여 살릴 수 있는 날이다. 노동의 진보가 될 시간을 앞당기는 것은 리옹에서 마르세유로 내려가면서 자신만을 위해 증기선을 준비시키는 바보를 모방하는 셈일 것이다.

이 점들을 명확히 하면, 노동이 각 생산자에게 어떻게 초과분을 남겨야 하는지를 설명하는 것보다 더 쉬운 것도 없다.

그리고 우선 사회와 관련해서 프로메테우스는 자연의 품에서 나와 매력으로 가득한, 그러나 그가 노동함으로써 자연에서 벗어나기를 서두르지 않는다면 곧 비참과 고통이 될 게으름 속에 생명으로 깨어난다. 이 원초적 한가함 속에서 프로메테우스의 산물은 아무것도 없어서 그의 행복 수준은 짐승의 수준과 거의 동일하고, 0으로 표현될 수 있다.

프로메테우스는 일에 착수한다. 그리고 그의 첫날, 제2의 창조의 첫날부터 프로메테우스의 산물, 즉 그의 부, 그의 행복은 10과 같다.

둘째 날 프로메테우스는 자신의 노동을 분화하고, 그의 산물은 100이 된다.

셋째 날, 그리고 이어지는 날마다 프로메테우스는 기계들을 발명하고, 여러 물체들에서 새로운 쓸모를 발견하고, 자연에서 새로운 힘들을 발견한다. 그의 존재의 장은 감각 영역에서 도덕과 지성의 영역으로 확장되고, 그의 근면이 행하는 발걸음마다 그의 생산액은 상승하고 그에게 기쁨의 커짐을 알린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그에게 소비는 생산이므로 매일의 소비는 전날의 산물만을 취해서 다음 날에 산물 초과분을 남긴다는 것이 명확하다.

그러나 또한 이 중대한 사실에 주목하자. 사람의 복리는 노동의 강도, 그리고 산업들의 수가 많음에 정비례한다는 것, 그래서 부의 증과와 노고의 증가는 상관성을 가지고 평행하다는 것이다.

이제 각 개인이 집단적 발전의 일반적 조건들에 참여한다고 말하는 것은 그 명백성 덕분에 바보스럽게 보일 수도 있을 진리를 언명하는 것이다. 오히려 사회 안에서 소비의 두 일반 형태를 표시해보자.

사회는 개인과 마찬가지로 우선 자신의 인적 소비품, 시간이 그에게 점점 그 필요를 느끼게 만드는 물품, 그의 신비한 본능이 그에게 창조하라고 명하는 물품을 가진다. 이처럼 중세에 상당수의 도시에서 시청과 대성당의 건설이 어떤 대가를 치러서도 충족할 필요가 있는 광포한 열정이 된 결정적 순간이 있었다. 공동체 사회의 존재는 이에 달렸다. 안보와 힘, 공공질서, 집중화, 민족, 조국, 독립, 이런 것들이 사회의 생명을 구성하는 것이고, 사회의 정신적 기능들의 총체이다. 이런 것들이 표현되고 상징화되어야 했던 감정들이다. 옛날에는 예루살렘 사원이라는 행선지가 그랬다. 유대 민족의 진정한 팔라디움이다. 로마의 유피테르-카피톨리노 신전이 그러했다. 나중에는 말하자면 중앙 집중과 진보의 기관들인 자치 시 궁전과 신전 다음에 연못, 극장, 학교, 병원, 도로 등의 공익 시설물이 생겨났다.

공익 기념물들은 본질상 공용이고, 따라서 무료여서 사회는 이 거대한 작품에서 나오는, 그리고 노동에 안전을 보장해 주고 정신들에 이상을 제공해 산업과 예술들에 새로운 도약을 새겨주는 정치적, 정신적 이득으로써 선불을 회수한다.

그러나 가내 소비품들은 다르다. 이것들만이 교환의 범주에 들어온다. 이것들은 소비를, 즉 생산자에게 즉각적이고 이득을 포함한 상환을 허용해 주는 상호성의 조건에 따라서만 생산이 가능하다. 이 조건들을 우리는 가치들의 비례성 이론, 마찬가지로 원가의 점진적 축소 이론이라 칭할 수도 있을 이론에서 충분히 전개했다.

나는 이론에 의거해, 그리고 사실에 의거해 모든 노동이 초과분을 남겨야 한다는 원리를 증명했다. 그러나 이 원리는 산술 명제처럼 확실하지만, 온 세상에서 실현되려면 아직 멀었다. 집단적 근로의 진보에 따라 매일의 개인 노동은 점점 더 큰 산물을 획득하는 반면, 그리고 필연적 결과로 노동자는 동일한 임금을 가지고 날마다 더 부유해져야 하는 반면, 사회 안에는 이득을 보는 신분들과 쇠약해져 가는 신분들이 존재한다. 두 배, 세 배, 백 배의 임금을 받는 노동자들과 적자 상태인 노동자들이 있다. 끝으로 어디서나 즐기는 사람들과 고통 받는 사람들이 있으며, 산업적 기능의 괴물 같은 분화로 소비는 하고 생산은 하지 않는 개인들이 있다. 복리의 재분배는 가치의 모든 운동들을 따르며, 무서운 규모와 정력을 가지고서 비참과 사치로 그것들을 재생산한다. 그러나 어디서나 또한 부富의 진보, 즉 가치들의 비례성은 지배적 법칙이다. 그리고 경제학자들이 사회당파의 불평에 공적 재산의 점진적 증가, 그리고 가장 불행한 계급들의 형편이 나아짐을 내세울 때, 그들은 의심도 하지 않고 자신들의 이론에 유죄가 선고되는 진리를 선포한다.

왜냐하면 나는 경제학자들에게, 잠깐 마음의 침묵 속에서 자신을 격동하는 편견에서 벗어나 자신이 차지하거나 기다리는 일자리, 자신이 거들어 주는 이익, 자신이 야심을 두는 투표수, 자신의 허영심을 조장하는 특별함에 대한 고려 없이 오늘까지 모든 노동이 초과분을 남겨야 한다는 원리가 자신들에게 우리가 제기한 전제와 결과의 이 사슬을 가지고 나타났는지, 그리고 이 말에 의거해 그들이 가치들에 대해 공급과 수요를 조작해서 투기를 할 권리 말고 다른 것을 결코 의식하지 않았는지, 그들이 한편으로는 부와 행복의 진보를, 따라서 가치들의 척도를 주장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상거래의 자의성과 가치들의 공통 단위에 의한 측정 불가능성을 주장하는, 즉 존재하는 더 모순적인 것 모두를 동시에 주장하는 것이 정말이 아닌지를 자문해 보고 말할 것을 명하기 때문이다. ‘모든 물건의 가격이 두 배라면…’같은 터무니없는 가설이 강의에서 끊임없이 반복되는 것을 듣게 되고, 이를 정치경제학 저서들에서 읽게 되는 것은 이 모순 덕분이 아닌가? 마치 모든 물건의 가격이 물건들의 비율이 아니고 비율, 관계, 법칙을 두 배로 할 수 있다는 듯이 말이다! 끝으로 상업, 공업, 예술과 국가기관에서 사람마다 사회에 제공하는 봉사를 핑계로 끊임없이 자신의 중요성을 과장하고, 보수, 보조금, 거액의 연급, 큰 명예를 간청하는 경향이 있는 것은 정치경제학이 옹호하는 소유자의 비정상적인 관행 덕분이 아닌가? 마치 모든 서비스의 보수가 그 비용 총액에 의해 반드시 정해지지 않는다는 듯이 말이다. 왜 경제학자들은 온 힘을 다해 아주 간단하고, 아주 환히 빛나는 이 진리를 전파하지 않는가? 모든 사람의 노동은 그것이 포함하는 가치만을 구입할 수 있으며, 이 가치는 다른 모든 노동자들의 서비스에 비례한다는 것 말이다. 그들이 믿는 것으로 보이는 것처럼 노동이 초과분을 남겨야 한다면?…

그러나 여기서 내가 몇 마디 안 되는 말로 설명할 마지막 고려 사항이 제시된다.

장 바티스트 세는 모든 경제학자들 중 가치의 절대적 불확정성을 가장 많이 강조한 사람이고 또한 이 명제를 뒤집기 위해 가장 많이 수고한 사람이기도 하다. 내가 잘못 알지 않았다면, 모든 산물은 들인 비용만큼의 가치가 있다. 또는 같은 말로, 산물들은 산물들로 구입된다는 공식을 만든 사람이 그다. 이 아포리즘은 평등주의적 결과들로 충만한 것으로서 그 이래 다른 경제학자들에게 반박을 받아왔다. 우리는 그 긍정적인 면과 부정적인 면을 차례로 살펴볼 것이다.

모든 산물이 들인 비용만큼 가치를 가진다고 말할 때, 이는 모든 산물이 새로운 형태 아래 다양한 수량으로 소비되는 일정 수의 다른 산물들을 군집하는 집단적 일체라는 것을 뜻한다. 그 결과, 인간 근면의 산물들은 서로에 대해서 종류들이며, 각 산물을 구성하는 서로 동등한 요소들의 수와 비율에 따라 단순한 것으로부터 복잡한 것에 이르는 계열을 이룬다. 현재로서는 이 계열이 그 요소들의 등가성과 마찬가지로 임금과 재산의 균형에 의해 현실에서 다소 정확하게 표현된다는 것은 별로 중요하지 않다. 무엇보다 물건들의 비율, 경제 법칙이 문제다. 왜냐하면 여기서도 언제나 그런 것처럼 관념이 우선 그리고 자생적으로 사실을 낳으며, 사실은 자신에게 존재를 준 사상에 의해 인정을 받고 점점 수정되어 자신의 원리에 맞게 규정되기 때문이다. 자유롭고 경쟁적인 상업은 가치들의 비례성을 부각시키려는 목적을 가진 긴 재건 작업일 뿐으로서 민법이 이 비례성을 성별해 이를 사람들의 조건의 기준으로 삼기를 기다린다. 그러므로 나는 세의 원리, 모든 산물이 들인 비용만큼 가치를 가진다는 것이 동식물의 계열과 유사한 인간 생산의 계열을 가리키며, 그 안에서 기초 단위들(노동일들)은 동등하다고 평가된다는 것을 말한다. 그래서 정치경제학은 그 출발부터 그러나 모순에 의해서, 플라톤도 루소도 고대나 현대의 어떤 정치 논객도 가능하다고 믿지 않은 것, 조건과 재산의 평등을 단언한다.

프로메테우스는 경작, 포도 재배, 빵 만드는 일, 옷감 짜는 일을 돌아가면서 한다. 그가 어떤 작업을 행하든, 스스로를 위해서만 일을 하므로 그는 오직 같은 돈(그가 만든 산물들)만으로 소비할 것(산물들)을 사며, 그 측정 단위는 필연적으로 그의 노동일이다. 노동 자체는 변이가 가능하다는 것은 정말이다. 프로메테우스는 언제나 똑같이 좋은 컨디션은 아니며 순간순간 그의 열심, 생산성은 올라갔다 내려갔다 한다. 그러나 달라질 수밖에 없는 모든 것과 마찬가지로 노동은 그 평균을 가진다. 그리고 이는 우리에게 결국 하루 노동이 하루 노동을 지불하며, 더도 덜도 아니라고 말할 수 있게 해준다. 사회의 어느 시대의 산물들을 다른 시대의 산물들과 비교한다면 인류의 1억 번째의 하루가 첫 번째의 하루보다 비교할 수 없이 우월한 결과를 제공하리라는 것은 맞는 말이다. 하지만 집단적 존재의 삶은 개인의 삶과 마찬가지로 잘릴 수 없다고 말하는 것, 여러 날들은 서로 닮지 않았어도 분해 불가능하게 결합되며, 존재의 총체로 볼 때 노고와 기쁨은 그 날들에 공통된다고 말하는 것도 맞는 말이다. 그러므로 재단사가 하루의 가치를 내놓기 위해 직조공의 하루의 열 배를 소비한다면, 이는 직조공이 재단사 생애의 하루를 위해 자기 생애의 열흘을 내놓는 것과 같을 것이다. 이는 농부가 작성하는 데 한 시간이 들어가는 글을 위해 공증인에게 12프랑을 지불할 때 일어나는 일과 똑같다. 그리고 이 불평등, 교환에서의 이 해악은 사회주의자들이 드러낸, 그리고 경제학자들은 주인의 신호가 이를 소리 높여 인정하기를 허락해 주기를 기다려서 낮은 목소리로 실토하는 빈곤의 가장 강력한 원인이다.

교환적 정의正義에서의 일체의 오류는 노동자를 제물로 바치는 것, 사람의 피를 다른 사람의 몸에 넣는 것이다. …놀라지 말라. 나는 소유권에 도발적인 폭언을 쏟아 부을 생각이 없다. 나는 내 원리에 따를 때 인류가 결코 잘못에 빠진 것이 아니라고 생각하는 것도, 우선 소유권의 기초 위에 형성되어 자신의 미래적 조직 원리들 중 하나를 제시하기만 했다고 생각하는 것도, 소유권의 지배가 일단 타도되었으니 남은 일은 이 유명한 반대 명제에 일체성을 가져다주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도 아니다. 사람들이 소유권을 편들어 내게 들이밀 수 있는 모든 것을 나는 나에 대한 검열자들 누구보다 잘 안다. 이들에게 나는 변증법이 결여되었으니 마음을 제발 보여 달라고 요청한다. 노동이 그 측정 단위가 아닌 부가 어떻게 가치 있을까? 그리고 부를 창조하고 소유권을 정당화하는 것이 노동이라면, 한량의 소비를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산물이 사람에 따라 비용이 든 것보다 더 가치 있기도 하고 덜 가치 있기도 한 재분배 체계가 어떻게 충실한가?

세의 관념들은 토지법을 가져왔다. 보수 당파도 그의 관념들에 반대해 항의하는 마음이 급했다. 로시 씨는 이렇게 말했다. “부의 첫 번째 원천은 노동이다. 이 위대한 원칙을 선포하면서 산업 학파는 경제 원리를 명증했을 뿐 아니라 능숙한 역사가의 손에서 인류의 행진과 지구상에서 인류의 제도들을 따라가는 데 가장 확실한 안내자가 된다.”

로시 씨는 자신의 강의에서 이 심오한 발언을 한 후에 어째서 이를 어떤 잡지에서는 부인하면서 철학자이자 경제학자인 자신의 존엄을 공연히 위험에 빠뜨려야 한다고 믿었는가?

“부는 노동의 결과일 뿐이라고 말하라. 모든 경우에 노동은 가치의 척도이고 가격의 조절자라고 단언하라. 그러면 어떤 것은 불완전하고 다른 것은 절대적인 이 학설들이 모든 부분에서 제기하는 반론들을 그럭저럭 피하기 위해 당신은 좋건 싫건 노동의 개념을 일반화하고, 분석을 완벽히 그릇된 종합으로 대체하게 될 것이다.”

나는 로시 씨 같은 사람이 그렇게 서글픈 생각을 내비친 것을 유감으로 생각하지만, 내가 보고한 구절을 읽으면서 나는 다음과 같이 말하는 것을 금할 수 없었다. 과학과 진리는 더 이상 아무것도 아니다. 지금 사람들이 칭송하는 것은 상점이고, 상점 다음으로는 이 상점을 대표하는 절망한 입헌주의다. 그러니 로시 씨는 누구에게 말한다고 생각하는가? 그는 노동을 원하는가 아니면 다른 것을 원하는가? 분석을 원하는가 아니면 종합을 원하는가? 이 모두를 한꺼번에 원하는가? 그가 선택하길 바란다. 왜냐하면 결론은 그에게 반대되는 것이 불가피하기 때문이다.

노동이 모든 부의 원천이라면, 이것이 지구 표면에서 인간 제도들의 역사를 따라가기 위한 가장 확실한 안내자라면, 분배의 평등성, 노동 척도에 따른 평등은 어째서 법칙이 아닐까?

반대로, 노동에서 나오지 않는 부가 있다면, 그런 부의 보유는 어째서 특권일까? 어떤 것이 독점의 정당성인가? 그러니 이 비생산적 소비권 이론, 이 엿장수 마음대로인 사법, 이 놀고먹음의 종교, 선민選民 카스트의 신성한 특권을 설명해 보기 바란다!

지금 종합의 잘못된 판단들의 분석하라는 이 호소가 무엇을 의미하는가? 이 형이상학적 용어들은 같은 명제가 분석적인 것으로도 종합적인 것으로도 무차별하게 그리고 마음대로 될 수 있다는 것을 의심하지 않는 바보들을 세뇌하는 데만 적합하다. 노동은 가치의 원리이며 부의 원천이다. 이는 로시 씨가 원하듯이 분석적 명제다. 이 명제는 원시적 노동 개념과 이어지는 산물, 가치, 자본, 부 등의 개념들 간에 동일성이 있음을 증명하는 분석의 요약인 것이다. 그렇기는 하지만, 우리는 로시 씨가 이 분석에서 나오는 학설, 즉 노동, 자본, 토지가 부의 원천이라는 것을 기각한다는 사실을 안다. 로시 씨가 원하지 않는 바로 그러한 종합적 명제이다. 실제로 부는 여기서 세 가지 구별되는, 그러나 동일하지 않은 종류로 생겨나는 일반 관념으로 간주된다. 그런데도 이렇게 정식화된 학설은 로시 씨가 선호하는 것이다. 지금 우리가 그의 독점 이론을 분석적으로 만들고, 우리의 노동 이론을 종합적으로 만드는 것이 로시 씨의 마음에 드는가? 나는 그에게 이 만족을 줄 수 있다. … 그러나 나는 그토록 진지한 사람과 함께 그런 장난을 연장하는 것에 화를 낼 것이다. 로시 씨는 분석과 종합이 그 자체로는 절대로 아무것도 증명하지 못한다는 것, 중요한 것은 베이컨이 말했듯이 정확한 비교와 완전한 계수를 하는 것임을 누구보다 잘 안다.

로시 씨가 추상에 열을 올렸으니, 그는 그의 입에서 나오는 조금의 말이라도 그토록 존경하는 마음으로 받아들이는 이 경제학자 집단에게 무슨 말을 못 했겠는가.

“자본은 부의 재료인데, 이는 은이 화폐의 재료이고, 밀이 빵의 재료이고, 이 계열을 끝까지 거슬러 올라가 땅, 물, 불, 공기가 우리 모든 산물의 재료인 것과 마찬가지이다. 그러나 이 재료들에 주어진 각 쓸모를 차례대로 창조하고 결과적으로 그것들을 자본으로, 그리고 부로 변형하는 것은 노동, 노동밖에 없다. 자본은 노동, 즉 실현된 지성과 생명으로 되어있다. 동식물이 보편적 영혼의 실현들로 되어있는 것과 같고, 호메로스, 라파엘로, 로시니의 걸작들의 그들의 관념과 감정의 표현인 것과 같다. 가치는 인간 영혼의 모든 실현 형태들이 조화적 전체를 만들기 위해 균형을 이루어야 할 비율인데, 이 전체는 부이면서 우리를 위해 행복을 낳아준다. 아니, 차라리 우리의 기쁨의 신호이지 그 대상은 아니다.”

“가치 척도가 없다는 명제는 비논리적이고 모순적이다. 이 결과는 사람들이 그 명제를 수립했노라고 주장한 동기들 자체에서 나온다.”

“노동이 가치들의 비례성의 원리라는 명제에 반박할 수 없는 분석에서 나오므로 참이기만 한 것이 아니라 진보의 목적이고, 사회적 행복의 조건이고 형태이며, 정치경제학의 처음과 끝이다. 이 명제와 그 보조 정리들, ‘모든 산물은 들인 비용만큼의 가치를 가진다’, ‘산물들은 산물들로 구입된다’로부터 조건들의 평등의 교리가 도출된다.”

“사회적으로 구성된 가치 관념 혹은 산물들의 비례성의 관념은 그 밖에 다음을 설명하는 데 소용된다. ⒜ 기계적 발명은 그것이 일시적으로 창조하는 특권과 그것이 일으키는 교란에도 불구하고 결국은 어떻게 일반적 개선을 낳는지, ⒝ 경제적 절차의 발견은 그 발견자에게는 어떻게 해서 그가 사회에 마련해 주는 이득과 같은 이윤만큼의 값어치를 결코 가질 수 없는지, ⒞ 공급과 수요 간 일련의 진자 운동에 의해 각 산물의 가치가 어떻게 끊임없이 원가 그리고 소비 필요 수준으로 설정되며, 결과적으로 고정적, 실증적 방식으로 확정되어 가는지, ⒟ 집단적 생산이 끊임없이 소비 가능한 물건의 양을 늘리고, 결과적으로 하루의 노동이 점점 더 많은 급여를 지불받아 노동은 각 노동자에게 어떻게 초과분을 남겨 주어야 하는지, ⒠ 노고는 산업의 진보에 의해 줄어들기는커녕 어떻게 끊임없이 양적, 질적으로, 즉 강도와 어려움 면에서 모든 산업에 대해 증대하는지, ⒡ 사회적 가치는 어떻게 계속적으로 가상적 가치들을 제거하는지, 다른 말로 한다면 산업은 자본과 재산권의 사회화를 어떻게 진행시키는지, ⒢ 끝으로, 산물들의 재분배가 가치들의 구성에 의해 생겨난 상호 보장에 따라 조절되면서, 어떻게 조건들과 재산의 평등을 향해 사회를 밀고 가는지.”

“끝으로 모든 상업적 가치들의 계속적 구성의 이론이 노동, 부, 그리고 행복의 무한 진보를 함축하므로 사회적 운명은 경제적 관점에서 우리에게 드러났다. 끊임없이 각 산물을 위해 가능한 최소의 노동량으로 가치들의 가장 많은 양과 가능한 가장 큰 다양성을 낳아서 각 개인에게 신체적, 정신적 및 지적 행복 수준의 최대량을, 그리고 인류에게는 가장 높은 완전성과 무한의 영광을 실현해 준다.”

이제 우리가 노고가 없지는 않았으나 도덕 과학 아카데미가 제기한 질문의 의미를 정했으니, 이윤 및 임금의 진자 운동과 관련해서 우리 과업의 핵심적 부분을 시작할 때다. 노동이 전혀 사회화되지 않은 곳 어디서나, 즉 가치가 종합적으로 정해지지 않은 곳 어디서나 교환에는 교란과 불성실, 꾀와 매복 전술, 생산, 유통, 소비 방해, 비생산적인 수고, 보장의 결여, 강탈, 비연대, 빈곤과 사치가 있다. 그러나 동시에 정의를 달성하기 위한 사회적 화신의 노력, 조합과 질서를 향한 항상적 경향이 있다. 정치경제학은 이 거대한 투쟁의 역사 말고 다른 것이 아니다. 한편에서 실제로 정치경제학은 그것이 가치의 변칙들과 이기주의의 특권들을 성별하고 영구화한다고 주장하는 한에서는 정말로 불행의 이론이고 빈곤의 조직이다. 그러나 그것이 빈곤을 극복하기 위해 문명에 의해 발명된 수단들을 해설하는 한에서는, 이 수단들이 항상 독점의 배타적 이익으로 돌려져 왔음에도 불구하고, 정치경제학은 부富의 조직의 전문前文이다.

그러므로 사실들과 경제적 관행들의 연구를 재개해 그로부터 정신을 끌어내고 그 철학을 정식화하는 것이 중요하다. 이 작업 없이는 여러 사회들의 진행에 대한 아무런 정보도 획득할 수 없고 어떠한 개혁도 시도할 수 없다. 사회주의의 오류는 지금까지 환상적 미래를 분쇄하는 현실을 파악하는 대신 이에 투신해 종교적 백일몽을 지속해 온다는 것이다. 기정사실마다 일체의 변동 가설에 반대하는 추방 판결을 보는 것이 경제학자들의 잘못인 것과 마찬가지이다.

나로 말하자면, 나는 진정한 사회과학인 경제학을 결코 이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노동의 조직과 부의 재분배의 무서운 문제들에 선험적인 것들로 대답하는 대신 나는 인류의 비밀스러운 사상들의 저장소로서의 정치경제학에 질문할 것이며, 발생 순서에 따라 사실들이 말하게 할 것이며, 그 사실들의 증언을 거기에 내 것을 넣는 일 없이 이야기할 것이다. 이는 승리하는 역사이면서 동시에 한심한 역사일 것이다. 등장인물들은 관념들, 이론의 일화들, 그리고 공식들의 날짜들인 역사이다.

제3장 경제적 진화 제1기노동의 분화

정치경제학의 근본 관념, 지배적 범주는 가치이다.

가치는 공급과 수요 간의 진자 운동에 따라 그 실증적 결정에 도달한다.

결과적으로 가치는 연이어 세 측면으로 제시된다. 유용한 가치, 교환 가능한 가치, 그리고 종합적 가치 또는 사회적 가치, 이는 진정한 가치이다. 첫 번째 항은 모순적으로 두 번째 항을 낳는다. 그리고 그 둘의 총체는 상호 침투해 세 번째 항을 낳는다. 그래서 관념들의 모순 또는 적대가 경제학 전체의 출발점인 것으로 나타나며, 테르툴리아누스의 복음서에 대한 말을 패러디하자면 경제학이 터무니없기 때문에 나는 믿는다(credo quia absurdum). 사회들의 경제 안에는 명백한 모순이 있고서부터 잠재적 진리가 있다. 반대되기 때문에 나는 믿는다(credo quia contrarium).

정치경제학의 관점에서 사회의 진보는 그러므로 끊임없이 가치들의 구성 문제 또는 산물들의 비례성과 연대성의 문제를 푸는 데 있다.

그러나 자연에서 반대되는 것들의 종합이 그 대립과 동시대적인 반면, 사회에서는 대립하는 요소들은 긴 간격을 두고 생겨나고 길고 요란한 격동 후에야 해소되는 것 같다. 이처럼 언덕이 없는 골짜기, 오른쪽이 없는 왼쪽, 남극이 없는 북극, 한쪽 끝밖에 없는 막대기 또는 중간 토막이 없는 양끝 등의 예는 없고, 그런 생각조차 떠올릴 수 없다. 인체는 아주 완벽하게 반대되는 이분법을 가지고서 착상의 순간부터 온전하게 형성되었다. 인체는 나중에 인체를 본떠서 이를 덮어주어야 하는 옷처럼 하나씩 하나씩 구성되고 짜이는 것을 싫어한다.[14]

반대로, 사회에서는 정신에서처럼 관념이 단박에 활짝 발현되는 것과는 거리가 멀어서 일종의 심연이, 말하자면 반대되는 두 입장을 가르며, 반대되는 두 입장이 결국 인식되어도 사람들은 그렇다고 해서 종합이 무엇일지를 파악하지 못한다. 원시적 개념들이, 말하자면 시끄러운 논쟁과 열띤 투쟁에 의해 유익해질 필요가 있다. 피 흘리는 전투는 평화의 서곡일 것이다. 이 순간에 전쟁과 논쟁으로 지친 유럽은 화해하게 만드는 원리를 기다린다. 그리고 도덕 및 정치 과학 아카데미에 이윤과 임금의 관계를 규율하고 그 관계의 진자 운동을 정해주는 일반적 사실들은 무엇인지, 다른 말로 하자면, 노동과 자본 전쟁의 가장 두드러진 일화와 가장 주목할 만한 국면은 어떤 것인지 묻게 하는 것은 이 상황에 대한 막연한 느낌이다.

그러므로 내가 정치경제학이 그 모든 모순적 가설들과 그 애매한 결론들과 함께 특권과 빈곤의 조직에 불과하다는 것을 입증한다면, 나는 바로 그것에 의해 정치경제학이 암묵적으로 노동과 평등의 조직의 약속을 포함한다는 것을 입증한 셈이 될 것이다. 사람들이 말했듯이 모든 체계적 모순은 구성의 예고이며, 나아가 나는 이 구성의 기초들을 제시한 것이니 말이다. 그러므로 끝으로 경제적 모순들의 체계를 해설하는 것은 보편적 조합의 기초를 놓는 것이다. 집단 작업의 산물들이 어떻게 사회에서 나왔는지를 말하는 것은 그것들을 다시 사회에 들어가게 하는 것이 어떻게 가능한지를 설명하는 것이다. 생산과 재분배 문제들의 창세기를 보여주는 것은 그 해결책을 마련하는 것이다. 이 모든 명제들은 동일하며, 마찬가지 명백성을 가진다.

. 분화 원리의 적대적 효과들

모든 사람들은 원시 공동체 사회에서 평등한데, 헐벗고 무식하다는 점에서 평등하고, 그들 능력의 규정되지 않은 잠재성에서 평등하다. 경제학자들은 이런 모습들의 첫 번째 것만을 관습적으로 고려한다. 두 번째 것은 완전히 무시하거나 오해한다. 그렇기는 하지만, 현대의 가장 심오한 철학자들인 라로슈푸코(La Rochefoucauld), 엘베시우스(Helvétius), 칸트, 헤겔, 자코토(Jacotot)에 따르면, 지성은 개인들에게서 각자의 특성이나 고유한 적성을 이루는 질적 결정에서만 다른 반면, 지성이 가진 핵심적인 면, 즉 판단력은 모든 사람에게서 양적으로 동등하다. 이로부터 결과적으로 조금 먼저일 수도 있고 조금 나중일 수도 있지만 상황이 유리함에 따라 일반적 진보는 모든 사람을 원초적이고 소극적인 평등으로부터 재능과 지식의 적극적 동등성으로 이끌어 주어야 한다.

나는 이 심리학의 소중한 소여所與를 강조하는데, 그 필연적 결과는 역량의 위계가 향후 조직 원리와 법으로 받아들여질 수 없으리라는 것이다. 평등만이 우리의 기준이다. 그것이 우리의 이상이기도 한 것과 마찬가지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이를 가치 이론으로써 증명한 것처럼, 빈곤의 평등이 점진적으로 행복의 평등으로 전환되어야 함과 마찬가지로 영혼의 평등은 출발 시에는 공허만을 나타내어 소극적이지만 인류 교육의 마지막 단계에는 적극적으로 재생산되어야 한다. 지적 운동은 경제적 운동과 병행해 완수된다. 그 두 운동은 서로에게 표현되고 번역된다. 심리학과 사회경제학은 일치한다. 아니, 더 제대로 말하면, 이 둘은 각각이 다른 관점에서 같은 역사를 풀어낼 뿐이다. 이는 특히 아담 스미스의 위대한 법칙, 노동 분업에서 나타난다.

그 본질에서 볼 때 노동 분업은 조건과 지성의 평등이 실현되는 양태이다. 기능들의 다양성을 통해 산물들의 비례성, 그리고 교환에서의 균형을 일으키고 결과적으로 우리에게 부로 가는 길을 열어주는 것이 그것이다. 예술과 자연 어디서나 우리에게 무한을 발견하게 해주면서 그것은 우리에게 우리의 모든 작업들을 이상화하도록 유도하며, 창조적 정신, 즉 신성 자체, 신적 정신mentem diviniorem을 모든 노동자들에게 내재하고 감지될 수 있게 만들어준다.

그러므로 노동 분업은 지적 진보만큼이나 경제적 진화의 첫 단계이다. 우리의 출발점은 사람 족에서도 물건 쪽에서도 참이다. 그리고 우리의 해설 진행은 아무 자의적인 것도 없다.

그러나 노동 분업의 엄숙한 이 시간에 인류에게 태풍이 불기 시작한다. 진보는 결국 모든 지적이고 근면한 창조물을 붙잡아서 변모시켜야 함에도 불구하고 모두에 의해 평등하고 일률적인 방식으로 완수되지 않는다. 그것은 소수의 특권 보유자들을 장악하는 것으로 시작된다. 대중이 야만 상태에서 생존을 지속하거나 더 낮아지는 동안 이들은 여러 민족의 엘리트 집단을 이룬다. 아주 오랫동안 조건들의 자연적, 섭리적 불평등을 믿도록 하고, 카스트 제도를 낳고, 모든 사회들을 위계적으로 구성한 것은 진보 쪽의 이러한 인간관이다. 일체의 불평등은 부정에 불과해서 그 안에 부당성의 표시와 추락의 예고를 달고 있다는 것을 사람들은 이해하지 못했다. 더구나 상상하지 못한 것은 바로 이 불평등이 어떤 원인에서 우발적으로 나왔으며, 그 원인의 궁극적 결과는 불평등을 완전히 사라지게 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처럼 가치의 이율배반은 분업의 법칙에서 재생되어, 섭리가 우리 손에 쥐어 준 지식과 부의 첫 번째 그리고 가장 강력한 수단이 우리에게 빈곤과 어리석음의 수단이 된 형국이었다. 문명의 가장 오랜 두 질병인 귀족 집단과 프롤레타리아트의 원인으로 보아야할 이 적대의 새로운 법칙의 공식은 이렇다. 노동은 자신에게 고유한, 그리고 자신의 유익성의 첫째 조건인 법칙에 따라 분화해 자신의 목적의 부정에 도달하며, 스스로를 파괴한다. 다시 말해, 진보, 부, 평등의 필요 불가결 조건인 분업은 일꾼을 주변화하고, 지성을 쓸모없게 하고, 부를 해롭게 하고 평등을 불가능하게 한다.

아담 스미스 이래 모든 경제학자들은 분업의 법칙의 장단점을 표시했지만, 자신들의 낙관주의에 더 도움이 되기 때문에 단점보다 장점을 훨씬 더 강조했고 그들 중 누구도 법칙의 단점일 수 있는 것을 결코 궁금해 하지 않았다. 다음은 장 바티스트 세가 그 문제를 요약한 것이다.

“평생 동안 동일한 작업만을 하는 사람은 확실히 다른 사람보다 이 일을 더 잘하고 더 신속하게 하게 된다. 그러나 동시에 그는 신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나 다른 모든 작업을 수행할 능력이 적어진다. 그의 다른 기능들은 퇴화하며, 그 결과 개인적으로 고려된 사람의 쇠퇴가 생겨난다. 핀의 18분의 1부분밖에 만들어보지 못한 것은 자신에 대해서 할 슬픈 증언이다. 그리고 줄이나 망치를 평생 다루면서 자신의 본성의 존엄이 쇠퇴하는 것이 오직 일꾼이라는 것을 왜 상상하지 못할까. 신분상 자기 정신의 가장 섬세한 기능을 수행하는 것도 사람이다. … 결과적으로 작업의 분할은 사람의 여러 힘들의 능숙한 사용이라고, 이는 사회의 산물을 경이적으로 증대시킨다고, 그러나 개인적으로 볼 때 각 사람의 역량에서 무언가를 빼앗는다고 말할 수 있다.”(『정치경제학 개론Traité d'Écon. p. I.』)

이처럼 노동 다음으로 무엇이 부와 노동자들의 숙련 증대의 제1원인인가? 분업이다.

정신의 퇴폐, 그리고 우리가 끊임없이 증명하겠지만 문명화된 빈곤의 제1원인이 무엇인가? 분업이다.

어떻게 같은 원리가 그 결과를 엄격히 추구해 갈 때 정반대의 효과를 유도하는가? 아담 스미스 이전에건 그 이후건 어느 경제학자도 거기에 규명해야 할 문제가 있다는 것을 알아차리기만 한 것이 아니다. 세는 노동 분업에 선을 낳는 원인이 악도 낳는다는 것을 인정하기까지 한다. 그리고 산업 분리의 희생자들을 동정하는 약간의 말을 한 후 불편부당하고 충실한 해설을 한 것에 만족하고 우리를 그 상태로 방치한다. 그는 이렇게 말하는 것 같다. “일손을 분화할수록 노동의 생산 능력을 증진하지만 동시에 노동이 점진적으로 기계 동작으로 전락하면 지성이 무뎌진다는 것을 여러분은 알게 될 것입니다.”

노동 자체로써 역량을 가진 과두 지배 체제를 창조하며 숙명적으로 정치적 불평등을 가져오는 이론에 분노해 봐야 소용이 없다. 민주주의와 진보의 이름으로 미래에는 더 이상 귀족층도 부르주아지도 천민도 없으라고 강변해 봐야 소용이 없다. 경제학자는 운명의 불가측성을 가지고 이렇게 대답한다. “여러분은 많이 생산하고, 싼 값에 생산할 형벌에 처해졌소. 그렇지 않으면 여러분의 산업은 언제나 빈약할 것이고, 여러분의 상업은 무일 것이고, 여러분은 문명의 지휘권을 잡는 대신 문명의 꼬리를 따라갈 것이오.” 뭐라고! 우리 일반 사람들 중에 무뎌지기로 점지된 이들이 있을 것이고, 우리의 산업이 완성될수록 저주받은 형제들의 수가 늘어날 것이라고! … 아, 슬프도다! 이것이 경제학자의 결론이다.

일반적 사실로서, 그리고 원인으로서 노동 분업에서 한 법칙의 모든 특성을 오인할 수는 없다. 그러나 이 법칙이 근본적으로 역 관계이고, 서로 파괴하는 두 현상 질서를 지배하므로 또한 실토할 필요가 있는 것은, 이 법칙이 정밀과학에서는 알려지지 않은 종류의 것, 이상한 것으로서 모순적 법칙, 반反 법칙, 이율배반이라는 것이다. 선입견의 형태로 그런 것은 여러 사회의 경제 전체의, 이로써 철학의 단적인 특징 같다는 점을 덧붙이자.

그런데, 분업의 쓸모 있는 효과는 보전하면서 단점은 없애주는 노동의 재구성은 몰라도 그 원리에 내재하는 모순은 치료 방법이 없다. 그리스도의 죽음을 모의하는 유대 사제들의 말에 따르면, 가난한 자는 소유주의 재산을 보장해 주기 위해 멸망하는 것이 필요하다. 한 사람이 온 백성을 대신해서 죽는 편이 더 낫다(expedit unum hominem pro populo mori).[15] 나는 이 판결의 필요성을 증명할 것이다. 그 후에 부분품인 노동자에게 지성의 희미한 빛이 남는다면, 그는 정치경제학의 기준에 따라 죽는다는 생각으로 위안을 얻을 것이다.

양심을 도약시키고, 이를 점점 더 행복을 누릴 만한 것으로 만들어야 했던 노동은 파편적 분업에 의해 정신의 약화를 가져와서 인간을 자신의 가장 고귀한 부분으로부터 축소해―자본의 감축minorat capitis―그를 동물 상태로 내던진다. 이 순간부터 좌절한 사람은 거칠게 노동하고 결과적으로 거칠게 취급되어야 한다. 자연과 필연에 대한 이 판단을 사회는 실행할 것이다.

영혼을 빼앗긴 후에 파편적 노동의 최초의 효과는 지출된 지성의 양과 반비례해 증대하는 근무 시간의 연장이다. 왜냐하면, 산물은 양의 관점과 질의 관점에서 동시에 평가되어 어떤 산업상의 진화에 의해서든 노동이 한 방향으로 쏠리면, 다른 방향으로 상쇄되는 것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근무 시간이 하루 열여섯 시간에서 열여덟 시간을 초과하지 못하므로, 상쇄는 시간에 대해 행해질 수 없을 순간부터는 가격에 대해서 행해질 것이며, 임금이 하락할 것이다. 그리고 이 하락은 사람들이 우스꽝스럽게 상상한 것처럼 가치가 본질상 자의적이기 때문에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본질상 확정 가능하기 때문에 일어날 것이다. 공급과 수요의 투쟁이 주인에게 유리하게 끝날지, 임금 수령자에게 유리하게 끝날지는 중요하지 않다. 그러한 진자 운동은 잘 알려진, 그리고 수천 번이나 평가된 부대 상황에 따라 진폭이 달라질 수 있다. 확실한 것, 그리고 우리가 오로지 주목할 것은 보편적 의식이 십장의 노동과 쓸모없는 사람의 손놀림을 같은 율로 놓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일당에 대한 축소의 필요성이 있다. 그래서 노동자는 질적 저하를 일으키는 기능에 의해 영혼에 시달림을 겪은 후에는 틀림없이 또한 보수액의 보잘것없음에 의해 신체에도 타격을 입는다. 이는 복음서의 다음 이야기의 문자적 적용이다. 적게 가진 자에게서는 그가 가진 것까지 내가 빼앗으리라.

경제적 우발 상황에서는 정치의 아포리즘들과 같이 종교와 공정성을 조롱하는, 그리고 사람이 운명의 지시를 복종하느냐 벗어나느냐에 따라 그를 행복하게 또는 불행하게 만드는 가차 없는 이성이 있다. 확실히 우리는 오늘ㄴ라 수많은 존경할 만한 작가들의 영감의 원천이고, 부르주아지의 가슴을 파고들어 수많은 종교 재단에 의해 법의 엄격성을 완화하려고 애쓰는 이 그리스도교적 자선과는 멀리 떨어져 있다. 정치경제학은 정의밖에, 구두쇠의 돈주머니 같은 불굴의 닫힌 정의밖에 모른다. 그리고 내가 신은 인간의 반박자이고 섭리는 인간 혐오자라고 말할 수 있었던 것은 정치경제학이 사회적 자생성의 결과요 신적 의지의 표현이기 때문이다. 신은 우리에게 피의 무게대로, 그리고 우리의 흘린 눈물의 양대로, 우리 각자가 받은 교훈대로 지불하게 만든다. 그리고 설상가상으로 우리 이웃과의 관계에서 우리는 모두 신처럼 행동한다. 그러니 자신의 피조물을 위한 천부의 사랑은 어디 있는가. 인간의 우애는 어디 있는가.

별 수 있는가? 하고 유신론자들이 말한다. 사람은 타락하고 동물이 남는다. 창조주는 어떻게 그 안에서 자신의 형상을 인식하는가? 그리고 그가 그러하면 인간을 짐을 지는 짐승처럼 취급하는 것보다 더 간단한 것이 있을까? 그러나 시련은 항상 지속되지는 않을 것이며, 조만간에 노동은 개별화된 후에는 종합이 될 것이다.

그런 것이 섭리에서 정당성을 찾는 모든 이들의 일상적인 논리이며, 아주 흔히 이는 무신론에 새로운 무기를 제공하는 데 성공할 뿐이다. 그러므로 신은 우리가 수백만의 희생자들을 절감할 수 있었던 하나의 관념, 특수한 동시에 종합적인 노동의 분배를 가진 것을 6000년간 부러워했을 것이라고 말해야 한다! 반대로 그는 우리에게 그의 종들인 모세, 부처, 조로아스터, 마호메트 등을 통해 이 재미없는 의례들, 우리의 이성을 수치스럽게 하며 문헌상으로 나와 있는 것보다 더 많은 사람의 목을 베게 한 의례들을 주었을 것이다. 게다가 원시적 계시를 믿을 필요가 있다면, 사회경제학은 이 빌어먹을 과학, 신에게 남겨진 나무 열매, 사람에게는 만지는 것이 금지된 열매일 것이다! 이미 경제학이 발견한 것처럼 노동이 사랑의 아버지이고, 행복의 기관인 것이 참이라면 어째서 노동에 대한 이런 종교적 비난이 있는가? 하지만 지금 충분히 그렇게 보이듯이 우리의 진보가 우리에게만 달린 문제라면, 이 신성의 허깨비를 찬양하는 것이 무슨 소용이며, 이 허깨비가 설교로 우리를 추궁하는 감명 받은 자들의 무리를 통해 우리에게 아직도 무엇을 원하는가? 여러분 그리스도교인들, 개신교인들과 정교회 교도, 신 계시자들, 돌팔이들과 바보들 모두는 신의 자비에 관한 인간적 송가의 첫 구절에 귀를 기울여 보라. “노동 분업의 원리가 완전히 적용됨에 따라 일꾼은 점점 약해지고 점점 편협해지고 점점 의존적이 된다! 기술이 진보를 이루며, 장인은 ‘후퇴하네!’”(알렉시 드 토크빌, 『미국의 민주주의De la démocratie en Amérique』)

그러므로 결론을 예단하기를, 그리고 경험의 마지막 계시를 미리 판단하기를 삼가자. 신은 지금으로서는 우리에게 반대하는 면보다 호의적인 면이 더 적은 것 같다. 사실을 확인하기만 하자.

그러므로 정치경제학이 그 출발점에서 쓸모의 생산이 증대함에 따라 매매 가능성은 떨어진다는 이 신비적이고 음침한 이야기를 우리에게 들려준 것처럼 그 첫 번째 정거장에 도달해서는 우리에게 무서운 음성으로 이렇게 알려준다. 기술이 진보함에 따라 장인은 후퇴한다고.

관념들을 더 제대로 고정하기 위해 몇 가지 예를 들자.

야금업 전체에서 임금 수령자들 중 가장 덜 부지런한 이들은 누구인가? 기계 기사라고 부르는 바로 그 사람들이다. 작업 도구가 아주 경탄스럽게 완비된 이래로 기계 기사는 더 이상 줄질이나 대패질을 하는 사람이 아니다. 역학이라면 엔지니어들과 십장들의 일이다. 시골 대장장이는 때로는 자신의 위치상의 필요만으로 열쇠공, 농기구 제작자, 무기 제작자, 기계 기사, 마차 제작자, 수의사의 재능들을 결합한다. 훌륭한 사람들의 세계에서 이 사람의 망치 아래 있는 과학에 사람들은 놀랄 것이다. 이 사람에게 사람들은 언제나 조롱조로 달군 쇠라는 수식어를 붙여준다. 크뢰조Creusot의 일꾼은 10년 동안 자신의 직업이 제공해줄 수 있는 더 웅장하고 더 정교한 모든 것을 보아왔지만 자신의 현장을 떠나서는 극히 적은 서비스를 제공하고 생계를 꾸려야 하는 서툰 존재에 불과하다. 주체의 무능력은 기술의 완벽성에 정비례하며, 이는 야금업에서처럼 모든 신분들에 대해서 참이다.

기계 기사의 임금은 현재까지 높은 율로 유지되었다. 그것이 어느 날 낮아지는 것은 불가피하다. 노동의 별것 아닌 질이 이를 유지할 수가 없는 것이다.

나는 기계 기술을 예로 들었다. 자유 산업을 인용하기로 하자.

구텐베르크와 그의 동업자들 푸스트(Fust), 쇠퍼(schoeffer)는 노동 분업에 의해 자신들의 최고의 발명이 무지, 내가 거의 백치 상태라고 부르는 영역으로 추락하리라고 결코 생각하지 못했는가? 식자업의 다양한 분야에 결부된 다수의 일꾼들, 식자공, 인쇄공, 활자 주조공, 제본공, 지공紙工과 같은 이들만큼 지성이 빈약하고 무식한 사람들도 별로 없다. 에스티엔 일가의 시대에 아직 마주칠 수 있던 식자공은 거의 추상抽象이 되었다. 활자의 식자에 여성을 활용하는 것은 이 고귀한 산업의 핵심을 때려서 그 저열화를 완수했다. 나는 한 여성 식자공을 보았는데, 이 사람은 최상의 사람들 중 하나이면서도 읽을 줄도 모르고, 글자들을 모양 말고는 알지 못했다. 일체의 기술은 저자들과 주인들로부터 여전히 굴욕을 당하는 인쇄 작업반장과 교정인, 하급 학자들의 특성으로, 그리고 진정으로 예술적인 몇몇 일꾼들에게로 물러갔다. 인쇄는 한마디로 기계적 동작으로 추락해서 그 인원으로 본다면 더 이상 문명의 수준에 있지 않다. 곧 인쇄에는 기념물만이 남게 될 것이다.

나는 파리의 인쇄공들이 몰락으로부터 자구自救하기 위해 조합을 만들어 일을 한다고 말하고자 한다. 이들의 노력이 결코 공허한 경험론으로 소진되거나 불모의 유토피아에서 길을 잃을 수 없다면 말이다!

사적 산업 다음으로 행정을 보자.

공공 용역에서 파편적 노동의 효과는 그에 못지않게 무섭고 그에 못지않게 강렬하게 생겨난다. 행정 내 어디서나 기술이 발달함에 따라서 종업원 상당수가 자신의 처우가 줄어드는 일을 겪는다. 우체국의 한 배달원은 연봉으로 400프랑에서 600프랑을 받는다. 거기서 행정은 대략 은퇴를 위해 10분의 1을 유보한다. 30년의 근무 후에 연금, 아니 급부는 연 300프랑이고, 이는 수권자에 의해 호스피스에게 양도되어 그에게 잠자리와 수프, 그리고 빨래 서비스를 받을 권리를 준다. 이렇게 말하기 가슴 아프지만 나는 행정이 아직은 관대하다는 것을 발견한다. 하는 구실이라곤 걷는 것뿐인 사람의 급부가 얼마가 되기를 바라는가? 전설에서는 방황하는 유대인Jurif-Errant에게 5수sou밖에 주지 않는다. 우편 배달원은 20에서 30수를 받는다. 그 대부분이 가정을 가진다는 것이 정말이다. 지적 능력의 활용을 요하는 용역 부분에 대해서는 소장과 촉탁에게 남겨진다. 이들은 더 나은 급여를 받으며, 사람다운 일을 한다.

그러므로 자유 산업에서도 공공 용역에서도 사물은 노동자의 10분의 9가 나머지 10분의 1에게 짐을 지는 짐승으로 소용되게 배열된다. 이는 산업 진보의 불가피한 결과이며, 모든 부의 필요 불가결한 조건이다. 사람들에게 평등, 자유, 민주적 제도, 그리고 그 실현에 사전에 노동자들 관계에서의 완벽한 혁명을 전제로 하는 유토피아에 관해 말하기 전에 이 기초적 진실을 잘 고려하는 것이 중요하다.

노동 분업의 가장 주목할 결과는 문학의 몰락이다.

중세와 고대에 문인은 일종의 백과사전적인 박사이며, 궁정 시인과 시인의 계승자로서 모든 것을 알면서 모든 것을 할 수 있었다. 문학은 높이 있는 손으로서 사회를 다스렸다. 왕들은 작가들의 호의를 구했거나 이들의 무시에 대해 이들과 이들의 책을 불태워 복수했다. 이는 여전히 문학적 주권을 인정하는 한 방식이었다.

오늘날, 사람들은 산업인, 변호사, 의사, 은행가, 상인, 교수, 엔지니어, 도서관 직원 등이다. 더 이상 문인은 아니다. 아니, 누구든지 자기 직업에서 약간이라도 주목할 만한 정도에 오른 자는 이것만으로 그리고 필연적으로 먹물이 든다. 문학은 대입 자격과 마찬가지로 모든 직업의 기초적 부분이 되었다. 그 순수한 표현으로 환원된 문인은 공적인 작가이고, 모든 사람에게 임명된 문서 작성인이고, 그 가장 잘 알려진 종류는 기자이다. …

4년 전에 문장 소유권에 관한 법을 만든다는 이상한 생각이 여러 직업 단체 회의에서 생겨났다. 마치 이제부터는 점점 더 생각이 전부가 되고 문체는 아무것도 아닌 것이 되어가는 경향이 없다는 듯이 말이다. 감사하게도 의회의 웅변은 서사시와 신화처럼 이제 끝장이다. 극장은 사업가들과 학자들을 드물게만 끌어 모으고, 감식인들은 예술의 퇴락에 놀라는 반면, 철학자인 관찰자들은 사내다운 이성의 진보만을 본다. 이 어려운 골칫거리로 즐거워하기보다는 성가셔하는 이성 말이다. 소설에 대한 관심은 그것이 현실에 근접하는 만큼만 지탱된다. 역사는 인류학적 주해로 전락한다. 어디서나 결국 말을 잘하는 기술은 관념과 사실의 하위 보조물로 나타난다. 성질 급한 사람에게는 너무 두툼하고 너무 느린 이야기 숭배는 무시되고 그 인위적 조작은 날이 갈수록 매력을 상실한다. 19세기의 언어는 사실과 수치들로 구성되며, 가장 적은 단어로 가장 많은 것을 표현할 줄 아는 자들이 우리들 중에 가장 웅변적이다. 이 언어를 말할 줄 모르는 자는 누구나 무자비하게 능청맞은 이야기꾼으로 치부된다. 그에 대해서는 아무 생각도 없는 자라고 말한다.

막 생겨난 사회에서는 문文의 진보는 필연적으로 철학적, 산업적 진보에 앞선다. 그리고 오랫동안 이 둘을 표현해주는 것으로 소용된다. 그러나 사상이 언어보다 넘치는 날이 오며, 따라서 이날에는 문학에 보전된 우위는 사회에는 퇴락의 확실한 징조가 된다. 언어는 실제로 각 민족에게 그 타고난 관념들의 집결물이고 섭리가 그 민족에게 계시하는 백과사전이다. 그 민족의 이성이 관찰과 경험을 통해 자연을 직접 공략하기 전에 계발해야 할 영역이다. 그런데 한 민족이 자신의 어휘에 포함된 과학을 소진한 후에 우월한 철학을 통해 교훈을 추구하는 대신 시적인 외투로 몸을 감싸고 운율을 가지고 놀기 시작하면서부터 그런 사회는 망가졌다고 용감하게 선포할 수 있다. 그 사회 안의 모든 것이 예리하고 별 볼 일 없고 거짓되게 될 것이다. 그 사회는 심지어 자신의 화려한 모습 안에 바보처럼 좋아했던 이 언어를 보전하는 장점도 갖지 못할 것이다. 타키투스, 투키디데스, 마키아벨리, 몽테스키외 같은 천재들의 이행 경로로 행진하는 대신 사람들은 이 사회가 저항할 수 없는 추락으로 키케로의 웅장함으로부터 세네카의 섬세함으로, 성 아우구스티누스의 반대 명제들로, 그리고 성 베르나르의 말장난으로 떨어지는 것을 보게 될 것이다.

그러니 조금도 환상을 품지 말 것이다. 정신이 우선은 모두 말에 있다가 경험과 노동으로 옮겨가는 순간부터 본래 의미의 문인들은 우리 능력 중 가장 작은 것의 빈약한 의인화에 불과하다. 그리고 지적인 산업의 폐기물인 문학은 자신이 즐겁게 해주는 한량들, 자신이 매혹하는 프롤레타리아들, 권력을 둘러싼 재주꾼들, 권력을 삼가는 돌팔이들, 시나이의 확성기를 입에 대는 신권神權의 사제들, 그리고 인민 주권의 열광자들 중에서만 판로를 찾는다. 그 희귀한 대변자들은 인민 주권이 뱃부리의 높은 곳에서 떨어져 내릴 때를 기다리며 무덤들에 관해 호민관의 달변을 시도하는 신세로 전락해서 공중에게 그라쿠스와 데모스테네스의 패러디를 제공할 줄밖에 모른다.

그러므로 사회는 그 모든 권한 내에서 파편적 노동자의 조건을 무작정 낮추는 데 합의한다. 그리고 경험은 어디서나 이론을 확증하면서 이 노동자가 어머니 뱃속에서부터 어떠한 정치 개혁도, 어떠한 이익들의 조합도, 어떠한 공공 자선이나 교육의 노력도 그를 도와줄 수 없다면 불행에 처할 운명임을 증명한다. 이 최근 시대에 상상된 다양한 구체적 상황들은 이 상처를 치유할 수 있기는커녕 오히려 이를 덧나게 하고 감염시키는 구실을 할 것이다. 그리고 이에 관해 적은 모든 것은 정치경제학의 악순환을 명백히 증명할 뿐이다.

이는 우리가 얼마 안 되는 말로 증명하려고 하는 것이다.

. 진통제의 무효. 블랑키, 슈발리에, 뒤누아예, 로시, 파시 등

파편적 분업의 치명적 효과에 대해 제안된 모든 치료법은 둘로 환원되며, 이 둘도 첫 번째 것이 두 번째 것의 역逆이어서 하나를 이룰 뿐이다. 노동자의 행복과 존엄성을 높여주어 그의 정신을 고양하는 것, 또는 교육을 통해 그의 해방과 행복을 미리 준비해주는 것.

우리는 이 두 체계를 차례로 고찰할 것인데, 그중 하나의 대표자는 블랑키 씨이고, 또 하나의 대표자는 슈발리에(Chevalier) 씨다.

블랑키 씨는 조합과 진보의 사람이고, 민주적 성향의 문인이고, 프롤레타리아트에 대한 공감으로 환영받는 교수다. 1845년 취임 강연에서 블랑키 씨는 노동과 자본의 연합, 노동자의 이익 참여, 즉 산업 연대성의 시작을 안녕의 수단으로 선포했다. 그는 이렇게 썼다. “금세기는 집단적 생산자가 태어나는 것을 보아야 한다.” 블랑키 씨는 집단적 생산자가 집단적 소비자와 마찬가지로 오래전에 태어난 것을, 그리고 문제는 출산에 관련된 것이 아니라 치료에 관련된 것임을 망각한다. 집단적 소화로부터 나오는 피가 온통 머리, 배, 가슴으로 가는 대신에 팔다리에도 내려가게 하는 것이 중요하다. 나는 블랑키 씨가 자신의 넉넉한 생각을 실현하기 위해 사용하려고 마음먹은 수단이 어떤 것인지 모른다. 이것이 국립 작업장들의 창조인지, 국가의 합자회사인지, 아니면 기업가들의 수탈과 이들을 노동자 회사로써 대체하는 것인지 모르며, 아니면 끝으로 노동자들에게 저축 금고를 추천하는 것으로 만족할 것인지 모른다. 이럴 경우에 참여는 그리스의 매월 초하루로, 즉 그리스 달력에 없는 날로 영원히 연기될 수 있을 것이다.

아무튼 블랑키 씨의 생각은 일꾼들에게 수여하는 임금 인상으로 풀어진다. 이는 조합원들의 자격에서, 혹은 적어도 이해관계를 같이하는 사람의 자격에서 나오는 것이다. 그러면 노동자에게 이득 참여는 무엇에 해당할까?

방추를 15,000개 보유하고 노동자 300명이 일하는 방적공장은 평년에 2만 프랑의 이득을 내는 데 한참 못 미친다. 나는 뮐루즈의 한 산업인으로부터 알자스의 섬유 공장은 일반적으로 액면 가치 이하이며, 이 산업은 벌써 노동으로 돈을 버는 하나의 방법이 더 이상 아니고, 시세차를 이용해 돈을 버는 방법이라는 말을 전해 듣는다. 판매, 제값에 판매하느냐 비싸게 판매하느냐가 오직 문제이다. 제조하는 것은 판매 작업을 준비하는 수단일 뿐이다. 그러므로 내가 평균적으로 300명이 일하는 작업장별 2만 프랑의 이익을 가정할 경우 내 논리는 일반적이므로, 내가 맞으려면 2만 프랑이 있어야 한다. 그럼에도 이 수치를 인정하자. 2만 프랑의 공장의 이익을 300명의 300노동일로 나누면 각 사람의 1노동일에 대해 급료 22상팀 2밀리엠이 된다. 즉 일용 지출로 18상팀이 보충되는데, 이는 겨우 빵 한 조각이다. 이는 기업가들을 수탈하는 수고를 할 값어치가 있는가? 재산이 무한히 작은 주식으로 분할되고 더 이상 이익에 의해 지탱이 되지 못해서 기업들은 바닥짐이 없게 되고 폭풍에 대해 더 이상 안심할 수 없게 되는 만큼 더욱 취약한 장치들을 세우기 위해 공공 재산을 운용할 값어치가 있는가? 그리고 수탈을 하는 것이 아니라면, 몇 세기에 걸친 저축을 대가로 한 18상팀의 증액이라는 것이 노동계급에게 얼마나 빈약한 전망인가! 주기적인 실업이 노동자에게 주기적으로 절약해 모은 돈을 까먹게 하지 않는다고 할지라도, 그의 자본을 형성하는 데는 그보다 적은 돈이 들지 않을 것이기 때문에 그렇다.

내가 보고한 사실은 여러 방식으로 특기되었다. 파시(Passy)[16] 씨는 스스로 노동자들이 기업가와 조합을 이룬 노르망디의 방적공장 기록부에서 여러 가족의 10년 동안의 임금을 추출했다. 그리고 그는 평균 연 1200에서 1400프랑이 된다는 것을 발견했다. 그 다음 그는 공장주가 받은 값에 비례해서 급여를 받는 방적공들의 상황과 단순히 임금을 받는 노동자들의 상황을 비교했고, 이 차이가 거의 감지할 수 없을 만큼이라는 것을 인식했다. 이 결과는 예견하기 쉬웠다. 경제 현상은 추상적이고 숫자와 같이 알 수 없는 법칙에 따른다. 그 불멸의 조화를 교란하는 것은 특권, 사기, 자의성이었을 뿐이다.

블랑키 씨는 보아하니 사회주의 관념에 첫발을 내디딘 것을 후회해 자신의 말을 주워 담으려 조바심을 냈다. 파시 씨가 참여제 회사의 미흡성을 증명하던 학술회의에서 그는 이렇게 외쳤다. “노동은 조직이 될 수 있는 것이며, 인류의 행복을 군대의 행진과 같이, 그리고 아주 수학적인 정확성을 가지고서 규율하는 것은 국가에 달린 일인 것 같지 않은가? 이것이 바로 사악한 경향이고 아카데미가 아무리 맞서 싸워도 지나친 일이 아닐 환상이다. 왜냐하면 이는 괴물일 뿐 아니라 위험한 궤변이기 때문이다. 선하고 성실한 의도는 존중하자. 그러나 ‘노동의 조직’에 관한 책을 출판하는 것은 원과 같은 면적의 정사각형을 구하는 법이나 현자의 돌에 관한 상론詳論을 50분의 1만큼 재현하는 것이라고 말하기를 주저하지 말자.”

또, 열정에 휩싸여 블랑키 씨는 파시 씨가 벌써 아주 강하게 뒤흔든 참여의 이론을 다음의 예를 들어 멸망시키는 일을 완수한다. “다이(Dailly) 씨는 아주 개명한 농업인의 한 사람으로서 각 필지에 대해 계정을 만들고, 각 산물에 대해 계정을 만들었다. 그리고 그는 3년의 기간 안에 동일인이 결코 동일 면적의 토지에서 비슷한 수확을 하지 못했다는 것을 확인한다. 산물은 2만6000프랑에서 9000프랑 또는 7000프랑으로 달라졌고, 때로는 심지어 300프랑으로 내려가기도 했다. 예를 들어 감자 같은 어떤 품목들은 아홉에 하나 꼴로 사람을 망하게 하는 것도 있다. 그러니 이런 변동이 있는 마당에, 그렇게 불확실한 소득을 가지고서 어떻게 노동자들에게 규칙적인 분배와 일률적인 임금을 정하겠는가? …”

이에 대해서 각 필지에서 산물의 변동은 단지 일꾼들을 지주들에게 연합시킨 다음에 지주들을 서로 간에 연합시킬 필요가 있다는 것을 가리킨다고 대답할 수 있을 것이다. 이는 더 심오한 연대성을 확립하는 일일 것이다. 그러나 이는 바로 문제가 되는 것, 블랑키 씨가 성찰해 본 후에 확실히 무망한 것으로 판단하는 노동의 조직을 예상하는 일일 것이다. 게다가 연대성은 공동의 부에 한 푼도 더해주지 못하며 따라서 분업의 문제를 건드리지도 못한다는 것이 명백하다.

주인들의 총액, 그토록 부러움을 사며 아주 흔히 문제성이 있는 이익은 요구되는 임금과 실질 임금의 차이를 충당하는 것과는 거리가 멀다. 그리고 블랑키 씨의 옛 기획은 그 결과가 한심했고, 저자 자신은 부인하는 것이지만 제조 산업에는 도리깨일 것이다. 그런데, 노동 분업은 이제부터는 어디서나 확립이 되어 그 추론은 일반화되며, 우리는 결론적으로 빈곤은 태만의 효과인 만큼 노동의 효과이기도 하다고 말한다.

이에 대해 사람들은 다음과 같이 말하며, 이 논리는 민중 사이에서 큰 인기를 끈다. 용역의 값을 올리시오. 임금을 두 배, 세 배로 올리시오.

나는 이 인상이 가능하다면 이는 슈발리에 씨가 뭐라 말하든 명백한 성공을 거두는 것임을 시인한다. 나는 이 점에 관해 약간의 재론을 하게 된 데 대해 슈발리에 씨의 덕을 보았다.

슈발리에 씨에 따르면, 어떤 상품이든 그 값을 올리면, 다른 상품들도 같은 비율로 값이 오르며, 누구에게도 아무 이익이 되지 않을 것이다.

이 추론은 경제학자들이 한 세기도 더 전부터 되풀이하던 것으로서 낡은 만큼 거짓이기도 하다. 그리고 경제적 전통을 재건하는 것은 엔지니어의 자격으로서 슈발리에 씨의 일이었다. 사무장의 급여가 하루 10프랑이고 일꾼의 임금이 4프랑일 때, 각 사람의 소득이 5프랑씩 올랐으면, 재산의 비율은 먼저의 경우에는 100대 40이었지만 나중의 경우에는 100대 60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임금 인상이 굳이 추가액으로 행해지고, 지수로 행해지지 않으면 이는 평준화의 탁월한 수단일 것이다. 그리고 경제학자들은 사회주의자들에게 잘못 그리고 도매금으로 가한 무식하다는 비난의 되갚음을 당해도 쌀 것이다.

그러나 나는 그러한 논리가 불가능하며, 그런 가상은 터무니없다고 말한다. 왜냐하면 슈발리에 씨가 다른 데서 아주 잘 보았던 것처럼 노동일의 가격을 가리키는 숫자는 현실에 영향력이 없는 대수적 표상일 뿐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분배의 불평등을 시정하면서도 무엇보다도 인상시키려고 애를 쓸 필요가 있는 것은 화폐적 표현이 아니라 산물의 양이다. 그러기까지는 임금에서 일체의 인상 움직임은 밀, 포도주, 육류, 설탕, 비누, 기름 등에서의 인상 움직임 말고 다른 효과를 가질 수 없다. 왜냐하면, 임금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밀, 포도주, 육류, 기름의 원가이다. 이는 모든 물건들의 통합적 가격이다. 좀 더 나아가 보자. 임금은 부를 구성하는 요소들, 매일 다수 노동자들에 의해 재생산적으로 소비되는 요소들의 비례성이다. 그런데 사람들이 이해하는 의미에서 임금을 두 배로 올리는 것은 생산자 각자에게 그의 산물보다 더 큰 몫을 주는 것이다. 이는 모순이다. 그리고 인상이 소수의 산업들에만 해당된다면, 이는 교환에서의 일반적 교란, 한마디로 품귀를 유발하는 것이다. 내가 예단하는 일은 없어야겠다! 하지만 노동계급의 처지 개선을 위한 동정심에도 불구하고 임금 인상에 뒤따르는 파업들이 일반적 물가 인상을 가져오지 않기란 불가능하다는 것을 나는 공언한다. 이는 2 더하기 2는 4라는 것만큼이나 확실하다. 노동자들이 부에, 그리고 부보다 천 배는 더 소중한 자유에 도달하게 되는 것은 그러한 요령 때문이 결코 아니다. 노동자들은 무례한 언론의 호의에 뒷받침을 받으면서 임금 인상을 요구하는데, 이는 자신들의 진정한 이익보다 독점에 더 많이 봉사한 것이다. 질병이 그들에게 더 살을 에는 것으로 재발할 때에는 그들은 자신들의 무경험의 쓴 열매를 맛볼 수 있을 것이다!

임금 인상의 무익함 혹은 더 제대로 말해서 치명적 효과에 관한 확신을 가지고서, 그리고 그 문제가 완전히 유기적이고 전혀 상업적이지 않다는 것을 잘 느끼면서 슈발리에 씨는 그 문제를 거꾸로 본다. 그는 노동계급을 위해 무엇보다 교육을 요구하며, 이런 의미에서 거대한 개혁을 제안한다.

교육이라! 이는 노동자들에게 하는 아라고(Arago) 씨의 말이기도 하다. 이는 모든 진보의 원리이다. 교육이라! … 우리의 관심사인 문제의 해결을 위해 우리가 거기서 기대할 수 있는 것을 일단 알 필요가 있다. 아무도 의심하지 않는 것으로서 모두가 교육을 받는 것이 바람직한지를 알 필요가 있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가능한지를 알 필요가 있다고 나는 말한다.

슈발리에 씨 견해의 위상 전체를 잘 파악하기 위해서는 그의 전술을 아는 것이 필요 불가결하다.

슈발리에 씨는 우선은 그의 폴리테크닉 공부 때문에, 나중에는 그의 생시몽주의적 관계들 때문에, 그리고 최종적으로 그의 대학의 자리 때문에 오랫동안 그 학문에 맞게 사고가 형성되어 한 학생이 규칙의 의지 외에 다른 의지를 가질 수 있다는 것을 결코 인정하지 않는 것 같으며, 종파의 구성원은 교주의 사상 외의 다른 사상을 가질 수 있다는 것, 공무원은 권력의 견해 외의 다른 견해를 가질 수 있다는 것을 결코 인정하지 않는 것 같다. 이는 어떤 다른 방식만큼이나 존경받을 만한 질서를 구상하는 방식일 수 있다. 그리고 나는 이 주제에 대해 찬성도 비난도 표명할 생각이 없다. 슈발리에 씨는 그 자신의 개인적인 판단을 내놓을 필요가 있는가? 법칙으로 금해지지 않는 모든 것은 허용된다는 원칙에 힘입어 그는 선수를 쳐서 자기 의견을 말하기를 서두르다가, 그 다음에 그럴 만하게 되면 당국의 견해에 가서 붙는다. 슈발리에 씨가 입헌주의의 무릎에 정착하기 전 앙팡탱(Enfantin) 씨에게 빠졌던 것은 그래서이다. 장관이 철도의 건설, 국채의 전환, 발명의 특허, 문학적 재산권 등에 관해 어떠한 체계도 채택하기 한참 전에 그가 운하, 철도, 금융, 소유권에 관해 의견을 표명한 것은 그래서이다.

그러므로 슈발리에 씨는 대학 교육의 맹목적 찬양자와는 거리가 멀다. 그리고 새로운 질서가 되기까지 그는 자신이 생각하는 것을 말하기에 거리낌이 없다. 그의 견해는 가장 급진적인 것에 속한다.

빌맹(Villemain) 씨는 그의 보고서에서 이렇게 말했다. “중등교육의 목표는 사람들이 행정, 검찰, 법정 그리고 해군과 육군에서의 높은 계급과 학술적 전문직을 포함해 다양한 자유 직종에서 차지하고 수행할 모든 직위를 위해 선택을 하도록 미리 준비시키는 것이다.”

“중등교육은 어떤 사람은 농업인, 다른 사람은 제조업자, 이 사람은 상인, 저 사람은 자유 엔지니어가 될 사람들을 준비시키도록 사명을 띠기도 한다고 위에서 슈발리에 씨가 관찰한다. 그런데 교과 과정에서는 이 모든 세계는 잊힌다. 그 생략은 어느 정도 강하다. 왜냐하면 결국 다양한 형태의 산업 노동, 농업, 상업, 이는 국가 안에서 부속물도 아니고 우연도 아니기 때문이다. 그것은 몸통이다. … 대학이 자신의 이름을 정당화하고자 한다면 이런 방향에서 입장을 취할 필요가 있다. 그렇지 않으면 자신에게 맞서 산업 대학이 세워지는 것을 보게 될 것이다. … 이는 제단에 맞선 제단이 될 것이다. …”

그리고 천재적 관념의 본령은 그에 결부되는 모든 문제들을 해명하는 것이므로, 직업 교육은 슈발리에 씨에게 길을 만들어 주어 강의의 자유에 관한 성직자 집단과 대학의 분쟁을 해결해 줄 아주 신속한 수단을 제공해 준다.

“라틴어 구사법이 강의의 기초로 쓰임으로써 성직자 집단에게 아주 상당한 역할을 만들어 준다는 것을 인정할 필요가 있다. 성직자 집단은 대학만큼 라틴어를 잘 안다. 이는 그들 자신의 언어이다. 게다가 성직자 집단의 강의는 더 저렴하다. 그러므로 전일제 소小 신학교와 기관들에 상당수의 청년들을 끌어들이지 않는 것이 불가능하다. …”

결론은 오직 이런 것이다. 강의 소재를 바꾸라. 그러면 그대는 왕국을 탈 로마 가톨릭화 할 것이다. 그리고 성직자 집단은 라틴어와 성서밖에 모르고, 그중에는 공학 석사도, 농업인도, 회계사도 없으며, 그 4만 명의 신부들 중에 도면을 작성하고 못을 만들 줄 아는 사람은 아마 20명도 안 될 것이므로 가부장들이 산업과 예배서 중에 무엇을 선호할 것인지, 그리고 그들이 노동이 신에게 기도하는 가장 아름다운 언어라고 평가하지 않는지 금방 알 것이다.

이처럼 종교적 교육과 신성모독적 과학, 영적인 것과 세속적인 것, 이성과 신앙, 제단과 왕좌 간의 이 우스운 대립은 끝이 날 것이다. 이덧들은 이제부터는 무의미한 낡은 명목들이지만 공중이 이에 화를 내지 않는 동안에는 이것들로 공중의 순박한 마음을 여전히 즐겁게 해줄 수 있다.

슈발리에 씨는 이런 해결책을 강조하는 것도 아니다. 그는 종교와 왕실이 비록 언제나 다투지만 상대편 없이 존재할 수 없는 두 파트너라는 것을 안다. 그리고 결코 혐의를 일으키지 않으려고 그는 또 다른 혁명적 관념인 평등에 완전히 투신한다.

“프랑스는 에콜 폴리테크닉에 오늘날 들어가는 것보다 20배 많은 학생을 공급할 수 있다(지금은 평균이 176명인데, 3,520명이 될 것이다). 대학은 이를 원할 따름이다. … 내 의견이 어느 정도 무게가 있다면, 나는 수리적 적성이 사람들이 보통 그렇게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덜 특별하다고 주장할 것이다. 나는 파리의 길거리에서, 말하자면 무작위로 뽑은 어린이들이 타바로(Tabbareau) 대위의 방법에 따라 라 마르티니에르La Martinière의 강의를 성공적으로 따라갔던 것을 회상한다.”

중등교육이 슈발리에 씨의 관점에 따라 개혁되어 지금은 통상적으로 9만 명만이 이수하지만, 모든 프랑스 청년들이 이를 이수한다면, 수학 전공자 수를 3,520명에서 1만 명으로 올릴 수 있다는 것은 전혀 과장이 아닐 것이다. 그러나 같은 비율로 우리는 1만 명의 예술가, 문헌학자와 철학자를 얻을 것이고, 1만 명의 의사, 물리학자, 화학자, 박물학자를 얻을 것이고, 1만 명의 경제학자, 법률가, 행정가를 얻을 것이고, 2만 명의 공업인, 작업반장, 포도원 주인, 광산업자 등을 얻을 것이다. 모두 연당 10만의 역량으로서 대략 청년층의 3분의 1이다. 그 나머지는 전문 적성 대신에 혼합 적성만을 지녀서 어디서나 무차별적으로 분류될 것이다.

지성에 그렇게 강한 도약이 주어지면 평등의 진행이 가속화하리라는 것은 확실하며, 나는 그런 것이 슈발리에 씨의 복안이리라는 것을 의심하지 않는다. 그러나 바로 이것이 나를 걱정시키는 것이다. 역량들은 부족하지 않으며, 인구도 모자라지 않다. 그리고 문제는 어떤 사람들에게는 일자리를, 다른 사람들에게는 빵을 찾아주는 것이다. 슈발리에 씨는 우리에게 이렇게 말하는데 이는 소용이 없다. “중등교육은 사회에 자신들의 욕망을 충족할 일체의 수단이 결여되고 국가를 뒤엎는 데 관심을 가진 야심가들의 무리를 배출한다는 불평에 더 적은 꼬투리를 제공할 것이다. 그런 자들은 아무짝에도 쓸모없고 스스로 뭐든지 잘한다고 생각하며, 특히 공무를 잘 이끈다고 생각하는 자들로서 백면서생이고 응용 능력이 없다. 과학 공부는 정신을 덜 들뜨게 한다. 이는 정신을 계발하면서도 동시에 이를 규율한다. 그 공부는 사람을 실무적 삶에 적합하게 만든다. …” 이런 말은 가부장들에게 하기에 좋다고 나는 대답해줄 것이다. 정치경제학 교수는 자신의 직위와 청중들에게 더 많은 존경심을 가져야 한다. 정부는 매년 에콜 폴리테크닉에 입학하는 172명의 학생들에게 120개의 일자리만을 제공할 수 있다. 그러니 입학생 수가 1만 명이라면, 혹은 슈발리에 씨의 숫자를 취해 3500명만 되어도 얼마나 곤혹스러울까? 이제 일반화해 보라. 공무원 직위의 총 수는 6만, 즉 연간 공석은 3000이다. 슈발리에 씨의 개혁적 아이디어를 갑자기 채택해 5만 명의 구직자들이 정부를 에워싸는 것을 보게 되면 얼마나 기겁할까! 사람들은 공화주의자들에게 흔히 다음과 같은 반론을 제기하지만, 답변은 듣지 못했다. 모든 사람들이 투표권자가 될 때, 의원들이 더 나은 값어치를 할까, 그리고 프롤레타리아트는 더 선진화가 될까? 나는 같은 질문을 슈발리에 씨에게 한다. 학년마다 1만 개의 역량이 배출될 때 당신은 그것으로 무엇을 하겠는가?

이 재미있는 청년들을 정착시키기 위해 당신은 위계의 말단에까지 내려갈 것이다. 당신은 15년간 최고의 공부를 마친 그 청년을 데뷔시킬 것인데 오늘날처럼 공병 하사관, 해군 하사관, 대리, 감독관, 경비대장 등 후보 엔지니어의 계급들이 아니라 공병, 차량병, 준설 선원, 수습 선원, 땔나무 조달원, 세관원 등의 천한 일자리이다. 거기서 그는 죽음이 서열을 밝혀 주면서 그를 한 자씩 앞으로 보내주기를 기다릴 필요가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사람은 에콜 폴리테크닉을 나와 보방Vaubant 같은 역량이 되는데, 2등급의 도로 위에서 도로 보수공으로, 혹은 연대의 보병으로 죽을 수 있을 것이다.

아! 로마 가톨릭은 얼마나 더 현명한 것으로 드러났는가, 그리고 생시몽주의자, 공화주의자, 대학 구성원, 경제학자 등 여러분 모두를 인간과 사회에 대한 지식에서 얼마나 능가했는가! 신부는 우리의 생애가 여정일 뿐이라는 것, 우리의 완성은 이 세상에서는 실현될 수 없다는 것을 안다. 그리고 그는 하늘에서나 자신의 보완물을 발견해야 할 교육 제도를 땅 위에 수립하는 것으로 만족한다. 종교가 만들어준 사람은 자신의 지상 운명에 충분한 것을 알고, 행하고, 획득하는 데 만족해 정부에 결코 골칫거리가 될 수 없다. 그는 차라리 순교자일 것이다. 오 가상한 종교여! 그대를 그토록 필요로 하는 부르주아지가 그대를 무시해야 한단 말인가!

이런 보통 교육 방식이 얼마나 무시무시한 고집과 빈곤의 싸움에 우리를 던져 넣는지! 당신의 학생들이 일할 기관도 자본도 보유하지 않는다면 직업 교육은 무슨 소용일 것이며, 농업학교, 상업학교는 무슨 소용일 것인가? 그리고 나중에 실을 뮬 방적기에 잡아매러 가거나 유정 바닥에서 기름을 뽑아내러 가기 위해 스무 살이 되기까지 온갖 과학들로 머릿속을 가득 채우는 것이 무슨 필요가 있는가? 뭐라고, 당신의 고백으로는 매년 가능한 5만 명의 역량에 대해 3000개의 일자리만 있다는데, 당신은 아직도 학교들을 만들어야 한다고 말하다니! 차라리 당신의 배타와 특권의 체제, 세상만큼 오래된 체제에 머물러 있으라. 왕조들과 귀족 체제의 버팀목이고 술탄들의 카스트의 쾌락을 보장하기 위해 사람들을 거세하는 진정한 기계여. 당신의 수업에 수업료를 비싸게 내게 하라. 질곡들을 늘리라. 프롤레타리아의 자식이 배고픔으로 기다리지 못하게 입시 시간을 늘려서 들어오지 못하게 하라. 그리고 남의 삶을 위해 일하고, 포기하고, 단식하고, 대인들을 존경하고, 왕을 사랑하고 신에게 기도하기를 배우는 신학교들을 당신의 권한을 다해 보호하라. 왜냐하면, 무익한 모든 공부는 조만간 포기되는 공부가 되기 때문이다. 과학은 노예들에게는 독이다.

확실히 슈발리에 씨는 자기 생각의 결과를 알아차리지 못하기에는 너무 현명하다. 그러나 그는 마음속으로 이렇게 독백했으며, 그의 선한 의도에 갈채를 보낼 수밖에 없다. 무엇보다도 사람은 사람일 필요가 있다. 나중에 생존할 사람은 알게 될 것이다.

이처럼 우리는 섭리에 이끌려 모험을 하러 나아간다. 섭리는 우리에게 충격을 가함으로써만 기별을 한다. 이는 정치경제학의 처음과 끝이다.

슈발리에 씨와는 반대로 콜레주 드 프랑스의 정치경제학 교수인 뒤누아예 씨는 학사원l'Institut의 경제학자로서 누가 교육을 조직하는 것을 원하지 않는다. 교육 조직은 노동 조직의 한 변종이다. 그러므로 조직은 없다. 교육은 전문 직업이지 행정직이 아니라고 뒤누아예 씨는 관찰한다. 모든 전문직처럼 그것은 자유로워야 하며, 이에 변함이 없어야 한다. 우리들 중에 모든 활동을 국가로 집중시키고 흡수시킨다는 치명적인 이런 관념들을 투여한 것은 공동체이고, 사회주의이고, 혁명적 경향으로서, 그 주된 인자들은 로베스피에르, 나폴레옹, 루이 18세, 그리고 기조(Guizot) 씨다. 언론은 참으로 자유로우며, 기자들의 펜은 상품이다. 종교도 자유이고, 공중의 호기심을 제대로 자극할 줄 아는 길고 짧은 가운을 입은 모든 이들이 자기 주위에 청중을 모을 수 있다. 라코르데르(Lacordaire) 씨는 신도들을 두었고, 르루(Leroux) 씨는 자신의 사도使徒를 두었고, 뷔셰(Buchez) 씨는 수도원을 지녔다. 그러니 교육도 왜 자유이지 않겠는가? 피교육자의 권리가, 구매자의 권리처럼 의심할 수 없는 것이라면, 판매자의 한 변종일 뿐인 교육자의 권리는 그 상관물이다. 자유 중에 가장 귀중한 양심의 자유를 유린하지 않고는 교육의 자유에 손을 대는 것은 불가능하다. 또 국가가 모든 사람에게 교육을 제공해야 한다면, 곧바로 노동, 숙소, 그리고 식기들도 제공해야 한다는 주장이 나올 것이다. … 국가가 이를 어쩔 것인가?

뒤누아예 씨의 논증은 반증이 불가능하다. 교육을 조직하는 것은 각 시민에게 자유직 일자리와 안락한 임금의 약속을 제공하는 것이다. 이 둘은 동맥 순환과 정맥 순환처럼 긴밀히 연결된다. 그러나 뒤누아예 씨의 이론은 또한 진보가 인류의 일정한 엘리트에게만 참이며, 인류의 10분의 9에 대해서는 야만 상태가 항구적인 조건임도 함축한다. 뒤누아예 따르면, 종교, 위계 그리고 구걸의 세 시대로 발현되는 여러 사회의 본질을 이루는 것도 이것이다. 그래서 데스튀트 드 트라시(Destutt de Tracy), 몽테스키외, 그리고 플라톤의 체계인 이 체계에서 분업의 이율배반은 가치의 이율배반처럼 해결이 불가능하다.

실토하건대 교육의 중앙 집중화론자인 슈발리에 씨가 자유론자인 뒤누아예 씨에게 반박당하는 것을 보는 것은 내게 표현할 수 없는 기쁨이다. 뒤누아예 씨는 그 다음으로는 기조 씨와 대립한다. 기조 씨는 중앙 집권론자의 대표로서 자유를 원칙으로 삼는 헌장과 모순된다. 헌장은 대학 관계자들에게 짓밟힌다. 이들은 사제들에게 가서 가르치라고 말하는 복음서의 공식적 명령에도 불구하고 교육의 특권이 자신들에게만 있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경제학자들, 입법자들, 장관들, 학자들, 교수들과 사제들의 이 모든 파열음 위에 경제적 섭리는 복음서를 반박하면 이렇게 외친다. 너희 교육자들은 내가 당신들의 교육으로 무엇을 하기를 원하는가?

누가 우리를 이 고뇌로부터 빼낼 것인가? 로시 씨는 절충론으로 기운다. 너무 적게 분업이 되면 노동은 비생산적인 채로 변함없다고 그는 말한다. 너무 분화되면 노동은 사람을 무뎌지게 한다. 지혜는 이 극단 사이에 있다. 덕은 중도에 있다(in medio virtus). 유감스럽게도 이 중간적 지혜는 별것 아닌 빈곤이 별것 아닌 부에 더해진 것에 불과해서 그 조건은 결코 변경되지 않았다. 선과 악의 비율은 100 대 100 대신에 50 대 50에 불과하다. 이는 절충론의 가치를 단번에 알려줄 수 있다. 또 로시 씨의 중용은 위대한 경제 법칙과 정반대이다. 가능한 한 최소의 비용으로 가능한 한 최대의 가치량을 생산한다. … 그런데 노동은 극단적 분업 없이 어떻게 자신의 운명을 충족할 수 있는가? 괜찮다면 더 추궁해 보자.

“모든 체계, 모든 경제적 가설은 경제학자에게 속한다. 그러나 지적이고 자유롭고 책임 있는 사람은 도덕 법칙의 지배를 받는다. … 정치경제학은 물物들의 관계를 고찰하고, 거기서 결과들을 끌어내는 과학에 불과하다. 이는 노동의 효과가 무엇인지를 고찰한다. 응용을 할 때는 여러분은 노동을 목적을 중요성에 따라 적용해야 한다. 노동의 적용이 부의 생산보다 높은 목표에 반할 때는 그것을 적용해서는 안 된다. … 어린이들에게 하루에 열다섯 시간 일을 시키는 것이 민족의 부의 수단이었다고 가정하자. 도덕은 이것이 허용되지 않는다고 말할 것이다. 이는 정치경제학이 거짓임을 증명하는가? 아니다. 이는 여러분이 분리되어야 하는 것을 혼동함을 증명한다.”

로시 씨가 외국인들에게는 취득하기 아주 어려운 이 골 사람의 순진성을 좀 더 지녔다면, 그는 세비녜(Sévigné) 여사가 말하는 것처럼 아주 단순히 자신의 혀를 개들에게 던졌을 것이다. 그러나 교수는 뭔가를 말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잠자코 있지 않기 위해 말하고 말하고 말할 필요가 있다. 로시 씨는 그 문제 주위를 세 바퀴 돌고서 잠을 잔다. 이는 어떤 사람들에게는 그가 대답을 했다고 믿기에 충분하다.

확실히 자신에게 고유한 원리들에 따라 전개해 가면서 적시에 다른 과학에 의해 부정될 때, 이는 과학에는 이미 불쾌한 징후다. 예를 들어 정치경제학의 전제들이 도덕의 전제들과 반대 입장에 처할 때, 나는 도덕도 정치경제학과 마찬가지로 하나의 과학이라고 가정하기 때문이다. 그러니 인간의 지식으로 하는 주장들이 서로를 파괴한다면 인간의 지식은 무엇이며, 무엇에 자부심을 가질 필요가 있을까? 파편적 노동은 노예의 직업이지만 이는 진정으로 성과가 있는 유일한 노동이다. 분화되지 않은 노동은 자유인에게만 속하지만 그것은 비용도 충당하지 못한다. 한편에서는 정치경제학이 우리에게 말한다. 부자가 되어라. 다른 편에서는 도덕이 말한다. 자유인이 되어라. 그리고 로시 씨는 그 둘의 이름으로 말하면서 동시에 우리에게 충고하기를, 우리는 자유로울 수도 없고 부자일 수도 없다. 반씩만 그런 것은 그런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로시 씨의 학설은 인류의 이 이중적 성향을 충족하기는커녕 배타적이지 않기 위해 우리에게서 모든 것을 빼앗아 간다는 폐단이 있다. 이는 다른 형태에서 대의 체제의 역사이다.

그러나 적대 관계는 로시 씨가 본 것과는 아주 다르게 심각하다. 왜냐하면, 이 점에서 이론과 일치하는 보편적 경험에 따를 때 임금이 노동 분업에 비례해 축소되므로 파편적 노예제에 복종한다고 해서 우리가 부를 획득하지 못하리라는 것이 명확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사람들을 기계로 변화시키기만 할 뿐일 것이다. 두 세계의 노동자 인구를 보면 안다. 그리고 다른 한편으로 노동 분업 말고는 사회는 야만 상태로 추락하며, 또 명백한 것은 부를 희생시키면서 자유에 도달하지는 못하리라는 것이다. 아시아와 아프리카에서 모든 유목 종족들을 보면 안다. 그러므로 경제학의 이름으로, 그리고 도덕의 이름으로 분업의 문제를 풀 필요성과 절대 명령이 있다. 그런데 경제학자들은 어디 있는가? 르몽테(Lemontey)가 스미스의 관찰을 발전시켜 노동 분업의 정신을 빼놓고 살인적인 영향을 부각시킨 지 30년도 더 되는데, 무엇이라 대답했는가? 어떤 연구가 행해졌는가? 어떤 조합이 제안되었는가? 문제가 단지 이해되기만 했는가?

매년 경제학자들은, 내가 언제나 변함없이 쓸모없는 것이라고 보지 않았다면 더욱 찬양했을 정확성을 가지고서 유럽 여러 국가들의 상업적 운동을 검토한다. 그들은 몇 미터의 피륙, 몇 조각의 비단, 몇 킬로그램의 철이 제조되었는지를 안다. 밀, 포도주, 설탕, 육류의 인당 소비량을 안다. 그들에게 과학의 지선至善은 재고량을, 그리고 그들의 조합의 마지막 항을 발표하며 민족들의 총감독관이 되는 것이라고 사람들은 말할 것이다. 그렇게 많이 쌓여있는 물자들이 연구에 더 아름다운 전망을 제공해 주지 못했다. 사람들은 무엇을 발견했는가? 어떤 새로운 원리가 이 양으로부터 솟아 나왔는가? 그렇게 많은 오래된 문제들에 대한 어떤 해결책이 결과로 나왔는가? 연구에 어떤 새로운 방향이 나왔는가?

여러 다른 문제들 중에서 하나의 문제가 확정적 판단을 위해 준비된 것 같다. 이는 극빈paupérisme이다. 극빈은 오늘날 문명 세계의 모든 우발 사태 중에 가장 잘 알려진 것이다. 사람들은 그것이 어디서 나오는지, 언제, 어떻게 닥치는지, 그 비용이 무엇인지를 거의 안다. 사람들은 문명의 여러 정도들에 대한 극빈의 비율이 무엇인지를 계산했다. 그리고 동시에 오늘까지 극빈과 싸워온 수단이 되는 모든 구체적인 것들이 무력했다는 것을 사람들은 확신했다. 극빈은 종류들, 변형태들로 나누어졌다. 이는 완벽한 자연사自然史이며, 인류학의 가장 중요한 분야 중 하나이다. 좋다! 수집된 모든 사실들에서 반박이 불가능하게 나오는 것이지만 사람들이 모르는 것, 알고 싶지 않은 것, 경제학자들이 침묵으로 덮으려고 고집을 부리는 것은, 노동과 자본의 적대 관계가 존속하고, 이 적대 관계가 정치경제학의 절대적 부정으로만 끝날 수 있는 한, 극빈이 여러 사회에서 핵심적 구성 요소이고 만성적인 것이라는 사실이다. 경제학자들은 이 미로의 출로를 발견했는가?

이 마지막 사항은 잠깐 생각해 볼 가치가 있다.

원시 공동체 사회에서, 우리가 앞의 문단에서 고찰했던 것 같은 빈곤은 보편적 조건이다.

노동은 이 빈곤에 대해 선포된 전쟁이다.

노동은 우선은 분업에 의해 그 다음은 기계에 의해, 또 경쟁 등등에 의해 조직된다.

그런데, 그 조직이 어떤 사람들의 빈곤을 끊어지게 함과 동시에 숙명적이고 불가항력적인 방식으로 남들의 빈곤을 악화시키는 것이 정치경제학에서 우리에게 주어진 바와 같은 이 조직의 본질이 아닌지를 아는 것이 중요하다. 바로 이것이 극빈의 문제가 제기되어야 할 틀이 되는 항목들이고 바로 이것이 우리가 그 문제를 풀려고 시도한 방법이다.

그러므로 노동자들의 무사려, 그들의 게으름, 그들의 존엄성의 결핍, 그들의 무지, 그들의 방종, 그들의 조혼早婚 등에 관한 경제학자들의 이 영원한 수다는 무엇을 뜻하는가? 이 모든 해악, 이 모든 술주정은 극빈의 외피에 불과하다. 그러나 인류의 5분의 4를 숙명적으로 치욕에 붙잡아 놓는 원인, 제1원인은 어디에 있나? 자연은 모든 사람들을 똑같이 거칠게, 노동에 저항하게, 호색적이고 야만적이게 만들지 않았나? 귀족과 프롤레타리아는 같은 진흙에서 나온 것이 아닌가? 그러니 그리 많은 세월 후에, 그리고 산업, 과학, 예술상의 그리 많은 기적들에도 불구하고 행복과 예절이 모두의 상속 재산이 될 수 없었던 것은 왜인가? 사회적 부의 중심지인 파리와 런던에서 빈곤이 카이사르와 아그리콜라 시대만큼 끔찍한 것은 무엇 때문인가? 이 세련된 귀족 계층 곁의 대중은 어째서 그토록 무식한가? 사람들은 인민의 악덕을 고발한다. 하지만 상류 계급의 악덕이 덜한 것 같지 않으며, 아마 심지어 더 클 것이다. 원래의 흠은 누구에게나 동일하다. 다시 한 번, 문명의 세례가 모두에게 같은 효율을 가지지 않은 것은 어째서인가? 진보 자체가 특권이며, 마차도 필마도 없는 사람은 진흙탕을 걸을 수밖에 없는 것이 아닐까? 내가 말하는 것이 무엇인가? 완전히 헐벗은 사람에게는 평안의 욕구가 생기지 않는다. 그는 아주 낮게 추락해 가슴의 야망도 꺼졌다.

“일체의 사적인 장점들 중 가장 필요한 것, 다른 모든 장점들을 우리에게 차례로 제공해 주는 장점은 행복의 열정이며, 빈곤과 극단적 추락으로부터 빠져나오려는 격렬한 갈망이며, 저열한 상황에 만족하도록 허용하지 않는 자존심과 존엄성이다. … 그러나 그렇듯 자연스럽게 보이는 이 감정은 유감스럽게도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덜 통상적이다. 금욕적 도덕가들이 너무 행복 애호적이라고 제기하는 비난보다 아주 많은 일반인들에게 덜 걸맞은 비난도 별로 없다. 사람들은 그와 반대되는 무한히 더 정당한 비난을 제기할 것이다. … 사람들의 본성에도 아주 주목할 만한 부분이 있는데, 이는 그들이 계몽과 자질을 덜 보유할수록, 이를 획득할 갈망을 덜 느낀다는 것이다. 사람들 중에 가장 비참하고 가장 계몽이 덜 된 야만인들은 바로 필요를 제공하기가 가장 어려운 상대들이고 자신들의 처지로부터 벗어나려는 갈망을 불어넣기가 가장 힘든 상대들이다. 그래서 사람은 이미 자신의 조건을 개선하고 자신의 생존을 완전하게 할 필요, 내가 행복 애호라고 부르는 것을 어느 정도 절실히 느끼기 전에 노동을 통해 일정한 행복 수준을 마련했을 필요가 있다”(『노동의 자유에 관해De la liberté du travail』, tome Ⅱ, p.80)라고 뒤누아예 씨는 백번 옳게 고찰한다.

이처럼 노동계급의 빈곤은 일반적으로 그들의 가슴과 정신의 결여에서 나오거나 파시 씨가 부분적으로 말한 것처럼 그들의 정신적, 지적 능력의 취약함과 굼뜸에서 나온다. 이 굼뜸은 앞서 말한 노동계급이 아직 반은 야만 상태여서 자신들의 조건 개선의 갈망을 충분히 절실하게 느끼지 못한다는 것과 관련된다. 이는 뒤누아예 씨가 고찰하도록 한 것이다. 그러나 이 갈망의 부재가 그 자체로 빈곤의 결과이므로 빈곤과 평정심은 서로가 서로에게 원인과 결과이며, 프롤레타리아트는 원 안에서 맴돈다.

이 심연에서 빠져나오려면, 행복, 즉 임금의 점진적 상승이나 지성과 용기, 즉 능력의 점진적 발달이 필요할 것이다. 프롤레타리아트의 불행은 그러므로 아주 섭리적이며, 이를 소멸시키려 하는 것은 정치경제학이 처한 한계 내에서는 혁명적 돌풍을 유발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부자들의 이기심에 의해, 그리고 프롤레타리아트의 평정심에 의해 차례로 표출되는 보편적 의식이 지렛대와 용수철의 직무만을 행하는 자에게 인간의 보수를 주기를 거부하는 것은 윤리의 가장 고급 고려 사항에서 길어 올린 심오한 이유가 없지 않기 때문이다. 불가능한 일이지만 혹시 물적인 행복이 파편적인 노동자에게 닥칠 수 있다면, 뭔가 기괴한 일이 발생하는 것을 보게 될 것이다. 혐오스러운 작업에 종사하는 노동자들이 세상의 부로 배를 가득 채운 로마인들, 그 무뎌진 지성이 향락조차 발명해 낼 능력도 없어진 그들처럼 될 것이다. 교육이 없는 행복은 민중을 무디게 만들고, 태만하게 한다. 그런 고찰은 까마득한 태곳적부터 행해졌다. “여수룬은 부자가 되더니 반역자가 되었다(Incrassatus est, et recalcitravit)”고 신명기는 말한다. 게다가 파편적 노동자는 스스로를 이렇게 판단했다. 자신은 빵이 있고 쪽방에서라도 잠을 잘 수 있고 일요일에 술 취할 수 있다면 만족한다고. 다른 모든 조건은 그에게 해로울 것이고, 공공질서를 위태롭게 할 것이다.

리옹에서는 자치시 당국이 누리게 해 준 독점 덕택에 대학 교수들과 관청의 실장들보다 높은 월급을 받는 한 계급의 사람들이 있다. 이들은 갈고리 짐꾼들이다. 리옹의 어떤 항구들에서 선적과 하선의 요금은 리그Rigues, 혹은 갈고리 짐꾼 협회의 요금표에 따르면, 100킬로그램 당 30상팀이다. 이 요율에서는 한 사람이 하루에 12, 15프랑을 버는 일도 드물지 않다. 그러려면, 배에서 40에서 50자루를 창고로 들이기만 하면 된다. 이는 몇 시간의 일이다. 지성의 발달에 얼마나 유리한 조건인가! 부가 그 자체로 그리고 그것이 마련해 주는 여가로 정신을 진작해 주는 원리라면 아이들에게도 아비들에게도 그럴 것이다. 하지만 전혀 그렇지 않다. 리옹의 갈고리 짐꾼들은 오늘날 언제나 그랬던 대로 술주정꾼이고, 망나니이고, 잔혹하고, 게으르고, 이기적이고, 나사가 풀려 있다. 이를 말하기는 고통스럽지만, 나는 이 선언이 진실을 담고 있으므로 이 선언을 하는 것을 의무로 간주한다. 노동하는 계급들 중에서 행할 첫 번째 개혁은 어떤 이들의 임금은 낮추면서 동시에 다른 이들의 임금은 높이는 일일 것이다. 후자의 인민 계급에 속하려면 그들의 독점은 더 이상 존중받을 만하지 않으며, 특히 그것이 극히 거친 개인주의에만 소용될 때는 그러하다. 비단옷 입은 노동자들의 봉기는 갈고리 짐꾼들, 일반적으로 모든 강 사람들이 동정심이 없고, 차라리 적대적임을 발견했다. 항구 바깥에서 일어나는 어떤 일도 이들을 동요케 할 힘이 없다. 미리부터 독재를 위해 만들어진 짐을 지는 짐승들로서 이들의 특권을 유지해 주는 한에서는 결코 정치에 개입하지 않을 것이다. 그럼에도 이들의 핑계를 대 주기 위해 얼마 전부터 경쟁의 필요성이 요금표에 구멍을 내어 좀 더 사회성 있는 감정들이 이 집단의 본성에서 일깨워지기 시작했다는 것을 말해야겠다. 아직도 양념으로 약간의 빈곤만 줄여주면, 리옹의 갈고리 짐꾼 협회는 바스티유 진격에 나설 필요가 있을 때 엘리트 집단을 이룰 것이다.

요컨대, 사회의 현 체제에서 프롤레타리아트가 교육을 통해 행복에 도달하는 것도, 행복을 통해 교육에 도달하는 것도 불가능하고 모순적이다. 왜냐하면 인간 기계인 프롤레타리아는 훈련을 견디지 못하는 만큼 행복을 견디지 못한다는 것을 고려하지 않아도, 한편으로 그의 임금은 언제나 내려가는 경향보다 오르는 경향이 덜하다는 것, 다른 한편으로 그의 지성의 계발은 그가 이를 받아들일 수 있을 경우에도 그에게 쓸모가 없다는 것이 증명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에게는 야만 상태와 빈곤을 향한 계속적인 이끌림이 있다. 최근 몇 년간 프랑스와 영국에서 가난한 계급들의 운명을 개선해 주려고 어린이와 여성의 노동에 대해, 그리고 초등교육에 대해 시도한 모든 것이 급진주의의 숨은 의도의 결실은 아니라 해도 경제적 조건들을 뒤집는 방향으로, 그리고 기성 질서에 해를 끼치는 방향으로 행해졌다. 노동자 대중에게 진보는 언제나 일곱 봉인으로 닫힌 책이며, 인정사정없는 수수께끼가 해명되는 것은 입법적인 비상식에 의해서가 아니다.

게다가 경제학자들은 자신들의 낡은 관행을 되풀이한 나머지 사회의 일들에 대한 분별력까지 결국 상실했다면, 사회주의자들도 노동 분업이 일으킨 이율배반들 더 잘 풀었다고 말할 수 없다. 그와는 정반대로 그들은 부정否定에 멈추어 섰다. 왜냐하면 파편적 노동의 일률성에 각자가 직업을 하루에도 열 번, 열다섯 번, 스무 번 뜻하는 대로 바꿀 수 있는 이른바 다양성을 대립시키는 것은 언제나 부정적 입장에 있는 것이 아닌가? 마치 하루에도 파편적 실행의 대상을 열 번, 열다섯 번, 스무 번 바꾸는 것이 노동을 종합적으로 만드는 것처럼, 결과적으로 수작업 하루 일의 스무 조각이 예술가의 하루 일의 등가물을 제공할 수 있다는 것처럼 말이다. 이 산업적 줄타기 곡예는 노동자들을 책임성 있게, 직무들을 인적으로 만들 필요성 앞에서 사라질 것이라고 미리 단언할 수 있는데, 이 곡예가 실행 가능하다고 할지라도, 그것은 노동자의 신체적, 정신적, 지적 조건에 아무런 변화도 가져오지 않을 것이다. 기껏해야 그것은 분산을 통해 그의 무능력을 더욱 보장할 수 있을 것이며, 결과적으로 그의 종속성을 보장해 줄 것이다. 이는 게다가 조직가들, 공산주의자들 그리고 그 밖의 사람들이 실토하는 바다. 그들은 분업의 이율배반을 해결한다는 주장을 별로 하지 않아서 그들 모두는 노동의 위계, 즉 노동자들을 파편적 작업자와 총괄 관리자나 종합적인 작업자로 분류하는 것을 조직의 필수 조건으로 받아들이며, 모든 유토피아에서 재물 불평등의 영원한 기초 혹은 구실인 역량들의 구분이 중심축으로 인정된다. 개혁자들의 계획은 논리에 따르지 않고는 추천될 수가 없었고, 이들이 단순주의, 단조성, 일률성 그리고 노동의 파편성을 질타한 후에 종합으로서 다원성을 그 다음으로 제안하게 된다. 그러한 발명가들은 심판을 받으며, 학교로 되돌려 보내져야 한다.

하지만 그대, 비판자여, 독자는 의심할 바 없이 이렇게 물을 것이다. 당신의 해결책은 무엇인가? 노동자의 책임성, 인격성, 한마디로 전문성을 보전하면서 극단적 분업과 가장 큰 다양성을 하나의 복합적이고 조화적인 전체로 통일해야 하는 이 종합을 우리에게 보여 달라.

내 대답은 준비되어 있다. 사실들에 질문하라. 인류에게 자문하라. 우리는 더 나은 안내자를 둘 수 없다. 가치의 진자 운동 다음으로 노동 분업은 이윤과 임금에 가장 두드러진 방식으로 영향을 주는 경제적 사실이다. 이는 산업의 토양에 섭리가 심은 최초의 말뚝이고, 결국 각자를 위해 그리고 모두를 위해 권리와 의무를 정해 주어야 할 이 엄청난 삼각 측량의 출발점이다. 그러므로 우리의 지표들, 그 바깥에서는 우리가 길을 잃고 헤맬 수밖에 없는 지표들을 따라가자.

그대는 멀리 따라가라. 그리고 언제나 그 발걸음을 경외하라(Tu longe sequere, et vestigia semper adora).

제4장 제2기기계들

“나는 나라의 제조업 구역들에서 고통의 지속을 깊은 회한의 눈으로 보았다.”

의회의 개회사로 빅토리아 여왕이 한 발언이다.

어떤 것이 주권자들을 반성하게 하기에 적당하다면, 이는 인류의 재난에 다소 무감각한 구경꾼들인 그들이 사회의 구성 자체와 그들 권력의 본성에 의해 인민의 고통을 치유하는 것이 절대로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그들에게는 그에 골몰하는 것조차 금지된다. 경제학자와 대의代議 이론가들이 한 목소리로 말하는 것은, 노동과 임금의 모든 문제는 권력의 권한 밖에 머물러야 한다는 것이다. 왕좌들, 지배자들, 나라들, 권세들과 청상의 모든 군사들은 종교가 자신들에게 자리를 마련해 준 영광스러운 영역의 높은 곳에서 불순한 천기의 영향을 받지 않고서 사회들의 고통을 바라본다. 그러나 그들의 권력은 바람과 물에 뻗치지 못한다. 왕들은 인간들의 안녕을 위해 아무것도 할 수 없다. 그리고 진실로 이 이론가들의 말이 옳다. 군주는 혁명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유지하기 위해 세워졌다. 현실을 보호하기 위해서이지, 유토피아를 마련하기 위해서가 아니다. 그는 적대적 원리들 중 하나를 대표한다. 그런데, 조화를 창조하면서 그는 그 자신을 제거하게 될 것이다. 이는 그가 볼 때는 최고로 비헌법적이고 터무니없을 것이다.

그러나 이론들에도 불구하고 관념의 진보가 입법자가 원하지도 예견하지도 않은 것을 계속 필요한 것으로 만들도록 제도들의 외적 형태를 끊임없이 변화시키므로, 그래서 예를 들어 조세의 문제가 분배의 문제가 되고, 공익의 문제가 민족의 노동과 산업 조직의 문제가 되고, 금융의 문제가 신용 운용의 문제가 되고, 국제법의 문제가 세관과 판로의 문제가 되므로, 군주가 이론에 따를 때는 결코 그 일들에 개입해서는 안 되지만 이론상으로 예견이 되지 않은 채로 이 일들은 매일 그리고 불가항력적 움직임으로 통치의 대상이 되어 군주는 사람이 뭐라 하든 그가 발현되는 근원인 신성神性과 마찬가지로 가설, 허구에 불과하며 그 이상일 수는 없다.

그리고 결국 생겨나는 원리들과 제시되는 새로운 권리들 앞에서 군주, 그리고 그가 사명으로 수호해야 하는 이익이 축소되고 소멸되기는 불가능하므로 진보는 감지 불가능한 운동으로 정신들 안에서 성취된 후에 사회 안에서 격동에 의해 실현되며, 폭력은 그것이 받는 중상모략에도 불구하고 개혁의 필요 불가결sine qua non 조건이다. 봉기의 잠재성이 억압된 모든 사회는 진보하기에는 죽은 사회이다. 역사에는 이보다 더 잘 증명된 진리가 없다.

그리고 내가 입헌군주정에 대해 말하는 것은 똑같이 대의 민주정에 대해서도 참이다. 어디서나 사회 협약이 자신의 고유한 목적에 반해 작용하는 것을 아는 것도, 다르게 진행해 가는 것도 입법자에게는 가능하지 않은 가운데, 사회 협약이 권력을 결속해 주었고, 생명을 물리쳤다.

의회적, 군주적, 대의적 희극의 한심한 배우들이 그러므로 결국 여러분의 됨됨이다. 미래를 막는 부적들이다! 매년 인민의 넋두리가 여러분에게 닥친다. 사람들이 여러분에게 치유책을 요구할 때, 여러분의 지혜는 얼굴을 가린다! 특권, 즉 여러분을 창조하고, 매일 달라지는 가장 강한 이의 권리의 이 성별聖別을 떠받들어야 하나? 곧바로, 여러분이 고개를 끄덕이는 극히 작은 신호에 수많은 병사들이 일어나서 무장을 갖추고, 전투 대열을 이룬다. 그리고 인민이 수고에도 불구하고, 정확히는 수고 때문에 빈곤이 인민을 집어삼키는 것을 불평할 때, 사회가 여러분에게 생존하게 해달라고 요구할 때, 여러분은 거기다 대고 자비의 행위를 읊조린다! 여러분의 전체 기력은 부동성을 위한 것이고, 여러분의 모든 덕성은 열망으로 소멸된다. 파리 사람처럼 여러분의 아비를 먹여 살리는 대신 그분을 위해 기도를 드린다! 아아! 나는 여러분에게 이렇게 말한다. 우리는 여러분의 사명의 비밀을 알고 있다. 여러분은 우리가 살아가는 것을 방해하기 위해서만 존재한다. 그러므로 명령하지 말라(Nolite ergo imperare), 가 버려라! …

아주 다른 관점으로 권력의 사명을 구상하는 우리, 정부의 특별한 임무가 바로 미래를 탐구하고, 진보를 추구하고, 모두에게 자유, 평등, 건강, 부를 마련해 주는 것이기를 바라는 우리는, 용기를 가지고서 비판 작업을 계속하자. 우리가 사회의 악의 원인, 그 열병의 원리, 그 소요의 동기를 적나라하게 드러낼 때, 치유책을 실행하기에 힘이 우리에게 모자라지 않으리라고 확신하면서 말이다.

. 기계의 역할, 자유와 관련해서

산업에 기계를 도입하는 것은 분업의 법칙과는 반대로 달성되며 이는 이 법칙에 의해 심각하게 위태로워진 균형을 재확립하기 위한 것으로서 달성된다. 이 운동의 위상을 잘 알기 위해서, 그리고 그 정신을 파악하기 위해서 약간의 일반적 고찰이 필요하다.

현대 철학자들은 자신들의 연보年報를 수집하고 분류한 후에 자신들 작업의 본성 때문에 역사에도 몰두하도록 이끌렸다. 그리고 그들이 철학사가 역사철학과 근본적으로 같은 것임을 놀라움이 없지 않게 알았던 것, 이에 더해 겉모습이 아주 다른 이 두 사유思惟의 분야, 철학의 역사와 역사철학이 철학일 뿐인 형이상학의 개념들을 등장시킨 것에 불과하다는 것을 알았던 것은 그때이다.

그런데, 보편 역사의 소재를 수학, 자연사, 사회경제학 등 일정 수의 틀로 나누면, 이 분과들 각각이 또한 형이상학을 포함한다는 것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역사 전체의 마지막 세부 분야에까지 이는 마찬가지일 것이다. 그래서 철학 전체는 자연이나 사회의 모든 발견의 밑바탕에 깔려 있고, 여러 다른 크기도 품질도 수용하지 않고, 그 최고의 개념들로 오르기 위해 모든 패러다임을 똑같이 잘 활용할 수 있고, 끝으로 이성의 모든 전제들이 가장 일반적인 과학들에서와 똑같이 가장 미미한 산업에서도 발견되어 모든 장인을 철학자로, 즉 총괄적이면서 고도로 종합적인 정신으로 만들기 때문에, 그에게 그의 전문직종을 가르치는 것으로 충분할 것이다.

현재까지 철학은 부처럼 특정 카스트들에게만 한정되었던 것이 사실이다. 우리에게는 역사철학, 법철학 그리고 몇몇 다른 철학들도 있다. 귀족 찌꺼기의 다른 많은 것들과 마찬가지로 사라져야 할 일종의 전유專有이다. 그러나 이 엄청난 방정식을 완성하려면, 노동의 철학으로 시작할 필요가 있다. 그 다음 각 노동자는 이번에는 자신의 처지에 대한 철학을 착수할 수 있을 것이다.

이처럼 예술과 산업의 모든 산물, 정치적이고 종교적인 일체의 체제는 유기체나 무기체의 모든 창조물과 마찬가지로 철학의 한 실현, 자연적 혹은 실천적 적용일 뿐이어서 자연의 법칙과 이성의 법칙, 존재의 법칙과 관념의 법칙의 동일성이 입증된다. 그리고 우리 편에서 경제 현상들과 사상의 순수 법칙들과의 항상적인 일치성, 인간적 사실들에서의 실재와 관념의 등가성을 확인할 경우에 우리는 이 특정한 경우에 관해 이 영원한 증명을 반복하는 것뿐이다.

실제로 우리가 말하는 것은 무엇인가?

가치를 정하기 위해서, 다른 말로 하면, 그 자체 안에서 부의 생산과 분배를 조직하기 위해서 사회는 이성이 관념들의 생성에서 진행해 가는 것과 정확히 마찬가지로 진행한다. 우선 사회는 첫 번째 사실을 제시하고, 첫 번째 가설을 내놓는다. 이는 노동 분업으로, 그 적대적 결과들이 사회경제에서 흘러나오는 원천인 진정한 이율배반이다. 그 결과들이 정신 안에서 그로부터 도출될 수 있었던 것과 같은 방식이다. 그래서 산업적 운동은 전체적으로 관념들의 연역을 따라 이중의 흐름으로 나누어진다. 하나는 유익한 효과의 흐름이고, 다른 하나는 파괴적 결과들의 흐름이다. 이 둘이 똑같이 필요하며 동일한 법칙의 정단한 산물들이다. 두 얼굴을 가진 이 원리를 조화롭게 구성하고 이 이율배반을 풀기 위해 사회는 두 번째 원리를 솟아나게 한다. 여기에 곧바로 세 번째 원리가 뒤따를 것이다. 그리고 그런 것이 사회적 화신의 행진일 것이다. 이는 자신의 모든 모순들을 없애고서―인류 안에서 모순은 끝이 있다고 나는 생각하지만, 이는 증명된 것은 아니다―그가 예전의 자기 위치로 단박에 되돌아와서 단 하나의 공식으로 자신의 모든 문제들을 풀기까지 계속될 것이다.

우리의 해설에서 현실과 관념의 평행한 발달이라는 이 방법을 따를 때 우리는 이중의 장점을 발견한다. 우선, 유물론이라는 비난을 피하는 장점이 있다. 이 비난은 아주 흔하게 경제학자들에게 가해지는데, 이들에게는 사실이 사실, 물적 사실이라는 오로지 그 이유로 진리이다. 반면에 우리에게는 사실은 결코 물질이 아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이 물질matière이라는 말이 무엇을 말하는지 모르기 때문이다. 사실은 비가시적 관념들의 가시적 발현이다. 이런 자격에서 사실은 그것이 대표하는 관념의 수단에 따라서만 증명을 한다. 그리고 바로 이것이 우리가 쓸모 있는 가치와 교환가치를, 그리고 나중에는 노동 분업 자체도 부당하고 비非최종적인 것으로 기각한 이유이다. 경제학자들에게는 그것들이 모두 절대적 권위를 지님에도 말이다.

다른 한편으로 우리를 또한 유심론, 관념론 혹은 신비주의라고 고발할 수도 없다. 왜냐하면, 출발점으로서 관념, 우리가 모르고 또 태양이 무한의 허공에 존재할 경우 아무것도 아닌 빛처럼 전혀 반사되지 않는 한에서 존재하지 않는 관념의 외적 발현만을 인정하며, 선험적으로 신계보학적이고 우주계보학적인 모든 것, 본체, 원인, 아我와 비아非我에 관한 일체의 연구를 배격하면서 우리는 존재의 법칙을 추구하고 이성이 도달할 수 있는 만큼 멀리까지 그 모습들의 체계를 따라가기만 하기 때문이다.

의심할 바 없이 근본적으로 모든 지식은 신비 앞에 멈춘다. 예를 들어서 우리가 미지의 두 본질이며, 모든 현상들의 지탱자로 인정하는 물질과 정신이 그렇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신비가 지식의 출발점이라는 말이 아니고, 신비주의가 논리의 필요조건이라는 말도 아니다. 그와 정반대로 우리 이성의 자생성은 신비주의를 끊임없이 뒤로 밀치는 경향을 띤다. 그것은 선험적으로 일체의 신비에 항의한다. 신비는 이성에 부정당하는 것 말고 아무 소용이 없으며, 신비주의의 부정은 이성이 그 경험을 필요로 하지 않는 유일한 것이기 때문이다.

요컨대, 인간적 사실들은 인간적 관념들의 육화肉化이다. 그러므로 사회 경제의 법칙을 연구하는 것은 이성의 법칙에 대한 이론을 만들고 철학을 창조하는 것이다. 우리는 지금 우리 연구의 경로를 따라갈 수 있다.

우리는 앞 장의 끝부분에서 노동자를 분업의 법칙과 싸우게 내버려 두었다. 이 지칠 줄 모르는 오이디푸스가 어떻게 이 수수께끼를 푸는 일에 나설 것인가?

사회 안에서 기계들의 끊임없는 출현은 노동 분업의 반대 명제이고, 역의 공식이다. 이는 산업의 화신이 하는 파편적이고 살인적인 노동에 대한 항거이다. 실제로 기계는 무엇인가? 분업이 갈라놓은 노동의 다양한 분자들을 재결합하는 방식이다. 모든 기계는 복수의 조작들의 요약, 영역들의 단순화, 노동의 응축, 비용의 감축으로 정의될 수 있다. 이 모든 관련성에서 기계는 분업의 상태측이다. 그러므로 기계에 의해 파편적 노동자의 원기 회복, 일꾼의 노고 감소, 산물의 가격 인하, 가치들의 비율 변동, 새로운 발견을 향한 진보, 일반의 행복 증대가 있을 것이다. 한 공식의 발견이 기하학자에게 새로운 잠재 능력을 주는 것처럼 기계의 발명은 생산자의 힘을 배가시키는 일손의 단축이다. 그리고 노동 분업의 이율배반은 완전히 극복되지는 않을지라도 상쇄되고 중화될 것이라고 믿을 수 있다. 슈발리에 씨의 강의에서 기계의 개입으로 사회에 결과적으로 생기는 무수한 장점들을 읽을 필요가 있다. 이는 내가 독자에게 참고하도록 권하기를 마지않는 놀라운 그림이다.

기계들은 정치경제학에서는 노동 분업과 상충하는 입장을 취해 인간 정신 안에서 분석에 대립하는 종합을 대표한다. 그리고 곧 보게 되겠지만 노동 분업에서, 또 기계들에서 정치경제학 전체가 이미 주어졌듯이, 마찬가지로 분석과 종합이 있으면 논리학 전체가 되며, 철학이 된다. 노동하는 사람은 반드시 그리고 순서적으로 분업을 통해, 그리고 기기들의 도움으로 진행해 간다. 마찬가지로 추론하는 자는 반드시 그리고 순서적으로 종합과 분석을 하며, 그 이상은 아무것도, 절대적으로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 그리고 노동과 이성은 결코 그것을 넘어서 가지 않을 것이다. 프로메테우스는 넵튠처럼 세 걸음에 세상의 끝에 도달한다.

공리들처럼 단순하고 자명한 이 원리들로부터 엄청난 결과들이 도출된다.

지적인 작업에서 분석과 종합이 본질적으로 불가분하며, 또 한편으로 이론은 경험의 뒤를 밟아 쫓아간다는 조건에서만 정당해지는 것처럼, 분석과 종합을 결합하고, 이론과 경험을 계속 행동으로 결합하는 노동, 논리의 외적 형태이고 따라서 현실과 관념을 요약하는 노동이 새로이 교육의 보편적 양식으로 나타난다는 결과가 된다. 실행이 완성케 한다(Fit fabricando faber). 모든 교육 시스템 중에 가장 어처구니없는 것은 지성을 활동으로부터 분리하고 사람을 추상자와 자동기계라는 불가능한 두 존재로 쪼개는 교육 시스템이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슈발리에 씨, 뒤누아예 씨, 그리고 보통 교육의 개혁을 요구하는 모든 이들의 정당한 불평에 박수를 보내는 이유이다. 또한 이것이 바로 우리가 그런 개혁에서 기대한 결과들의 희망에 근거가 되는 것이다. 교육이 무엇보다도 실험적이고 실천적이어서 노동을 설명하고 요약하고 조정하기 위해서만 강론을 남겨둔다면, 상상력과 기억으로 배우지 못하는 자에게 눈과 손으로 배우게 해준다면, 곧 노동의 여러 형태들로 여러 역량들이 배증하는 것을 보게 될 것이다. 모든 사람이 무언가의 이론을 알게 되어 바로 이것으로써 철학적 언어를 알게 될 것이다. 모든 사람이 때에 따라, 일생에 한 번뿐일지라도 창조하고, 변경하고, 완성하고, 지성과 이해력을 입증해 보이고, 자신의 걸작을 생산할 수 있을 것이다. 한마디로 사람임을 내보일 것이다. 기억이 획득하는 것의 불평등은 능력들의 동등성에 아무 변화도 주지 않을 것이며, 천재는 우리가 볼 때 실제로 정신의 건강 이상의 것으로 보이지 않을 것이다.

18세기의 아름다운 정신을 가진 사람들은 오랫동안 천재성을 이루는 것에 관해, 그것이 재능과 어떤 점에서 다른지, 정신이라는 것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지 등에 관해 토론했다. 그들은 지적 영역에 사회 내에서 사람들을 갈라놓는 것과 같은 구분을 가져갔다. 그들에게는 국왕과 지배자들의 천재성, 제후의 천재성, 장관들의 천재성, 그리고 귀족의 정신, 부르주아의 정신, 도시 사람의 재능, 촌사람의 재능이 있었다. 등급의 맨 밑에서는 산업인들, 거의 윤곽이 그려지지 않은 영혼들의 거친 무리들이 선택된 자들의 영광에서 배제된 채로 있다. 이 모든 수사들은 여러 민족들의 지속적인 노예살이와 사물들의 질서 유지를 위해 왕실 이익, 문인들의 허영과 사회주의자들의 위선이 승인하려고 노력하는 이 망발들로 여전히 가득 차 있다.

그러나 정신의 모든 작업이 분석과 종합이라는, 구분은 되지만 필연적으로 불가분한 두 가지로 환원된다는 것이 증명된다면, 어찌할 수 없는 결과로 작업과 연구들의 무한한 다양성에도 불구하고 정신은 언제나 같은 화폭에 다시 그리기 시작하는 것뿐이라면, 천재는 많이 일하고 많이 사색하고, 많이 분석하고 비교하고 분류하고 요약하고 결론지은 제대로 된 사람일 뿐인 반면에, 편협한 존재는 자신의 능력을 발달시키는 대신 고질병적인 일상 관행에 빠져 있어서 자신의 지성을 관성과 자동 반응으로 죽였다. 실제로는 나이에 따라서만 다른 것을 본성이 다른 것으로 구분하고, 또 노동과 교육을 통해 날이 갈수록 지워져 가야 할 자생성의 우연들 혹은 발달의 여러 단계들을 특권과 배제로 전환하는 것은 터무니없다.

심리 수사학자들은 인간의 영혼을 왕실, 귀족, 부르주아 가문, 프롤레타리아트로 분류했는데, 그런데도 천재가 결코 보편적이 아니며, 그 특수성을 가진다는 것을 관찰했다. 결과적으로 호메로스, 플라톤, 페이디아스, 아르키메데스, 카이사르 등 그들에게는 모두가 그 부류에서 제일가는 자들로 여겨지는 이들이 그들에 의해 동등하다고, 그리고 분리된 여러 왕국들의 군주들이라고 선언되었다. 얼마나 앞뒤가 맞지 않는가! 천재의 특수성이 마치 지성의 평등의 법칙 자체를 드러내 주지 않는다는 듯이! 다른 한편, 천재의 산물의 성공의 항상성이 마치 그가 자신에게 생소한, 그리고 그가 신실성과 확신을 가지고 이를 따르는 한에서 그의 작품들의 완성을 보장해 주는 원리에 따라 작업한다는 것에 대한 증거가 아니라는 듯이! 천재에 대한 이 신격화는 언제나 쓸데없이 말이 많은 사람들이 뜬눈으로 꿈꾸던 것으로, 이것이 인간들의 완성 가능성에 대한 빛나는 증거가 아니라면, 인간 다수의 선천적 치기를 믿게 해줄 것이다.

이처럼 노동은 역량들을 차별화하고 산업들의 분화로 그들의 균형을 준비한 후에, 감히 말하자면, 기계들에 의한 지성의 무장을 완수한다. 역사의 증거들에 따르면, 분석에 따를 때 그렇듯이 경제 원리들의 적대로 유발된 비정상 상태들에도 불구하고 지성은 사람들 간에 잠재 능력, 명확성, 혹은 폭에 따라 차이가 나는 것이 아니라 우선은 특수성, 혹은 그 하가가 말하듯이 질적인 결정에 따라, 둘째로는 실행과 교육에 따라 차이가 난다. 그러므로 집단적 인간에게서처럼 개인에게서도 지성은 수습 이전에 완전히 형성된 채로 존재하는 존재자나 원기元氣이기보다는 생겨나고 형성되고 발달하는 능력quoe fit이다. 이성 또는 사람들이 붙이는 어떤 이름, 천재, 재능, 근면은 출발점에서는 벌거벗고 굼뜬 잠재성인데, 이는 점차 커지고, 강해지고, 색깔을 띠고, 자기 결정을 하고, 무한히 색채를 바꾼다. 그 획득물의 중대성에 따라, 한마디로 그의 자본에 따라 지성은 개인별로 다르며 언제나 다를 것이다. 그러나 원천에서는 모두에게 동등한 잠재 능력처럼 사회 진보는 끊임없이 자신의 수단을 완성해 가면서 결국에 가서는 이를 모두에게 또 동등하게 만드는 것이어야 한다. 그렇지 않고서는 노동은 어떤 이들에게는 특권인 채로 머물고, 다른 이들에게는 벌로 머물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노동 분업에서 그 전주前奏를 본 역량들의 균형은 기계들의 목적지에 있을 유일한 것은 아니며, 섭리의 시각은 이를 훨씬 넘어 뻗어간다. 경제 안에 기계를 도입함으로써 자유에 도약이 주어진다.

기계는 인간 자유의 상징이며, 자연에 대한 우리의 지배의 표징이며, 우리의 잠재 능력의 속성, 우리의 권리의 표현, 우리의 인성의 자유, 지성의 상징이다. 그러니 이것이야말로 인간 전체다. 왜냐하면 우리가 실체(정신 또는 물질)의 관점에서 고려된 인간 존재에 관한 일체의 사유를 신비적이고 분간이 안 가는 것으로 제쳐 놓는다면 우리에게는 두 범주의 발현물만 남기 때문이다. 이에는 첫째 범주로서 사람들이 감각, 의지적 행동, 열정, 매력, 본능, 감정이라고 부르는 모든 것이 포함되고, 다른 범주로는 주의, 지각, 기억, 상상, 비교, 판단, 추론 등의 이름으로 분류된 모든 현상이 포함된다. 유기체적 장치에 관해서는, 이 능력들의 두 차원의 원리 혹은 기초라기보다는 그것의 종합적, 적극적 실현이고 그 생생하고 조화로운 표현인 것으로 간주해야 한다. 왜냐하면, 인류가 자신의 적대적 원리들을 가지고서 행할 세기적 방출로부터 어느 날엔가 사회 조직이 결과적으로 생겨나야 하는 것처럼, 사람은 잠재성의 두 계열의 결과로 의식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이처럼 논리로서 제시된 후에 사회경제학은 자신의 일을 추구해 가면서 심리학으로서 제시된다. 지성과 자유의 교육, 한마디로 인간의 행복, 완벽하게 동의어인 모든 표현들, 이야말로 정치경제학과 철학의 공동 목표이다. 부의 생산과 분배의 법칙들을 확정하는 것은 객관적이고 구체적인 해설로써 이성과 자유의 법칙들을 증명하는 것이다. 이는 사후적으로 철학과 법을 창조하는 일일 것이다. 어느 쪽으로 몸을 돌리든 우리는 형이상학으로 충만하다.

이제 심리학과 정치경제학의 결합된 자료들을 가지고서 자유를 정의해보자.

인간 이성을 그 원천에서 투명하며 성찰을 하는 원자로, 어느 날 우주를 나타낼 능력을 가진 것으로, 그러나 첫판에는 일체의 형상 없이 텅 빈 것으로 구상하는 것이 허락된다면, 마찬가지로 자유를, 의식의 출범에서는 살아있는 한 점으로, 맥박이 뛰는 점punctum saliens으로, 모호하고 맹목적이거나 혹은 차라리 무심한 자생성으로, 그리고 일체의 가능한 인상, 마음먹기, 성향을 수용할 능력이 있는 것으로 간주할 수 있다. 자유는 움직이고 움직이지 않을 능력으로, 이는 어떠한 선택이나 결정에 의해서든(나는 여기서 결정이라는 단어를 수동적으로, 동시에 능동적으로 사용한다) 자신의 무관심으로부터 벗어나 의지가 될 능력이다.

그러므로 나는 자유가 지성과 마찬가지로 그 본성상 불확정적이고 비정형의 능력으로서 자신의 가치와 성격을 외부의 인상들로부터 기다린다고 말한다. 따라서 출발에서는 부정적이지만, 점차로 자기 결정을 하고 실행에 의해, 말하자면 교육에 의해 윤곽이 명확히 드러나는 능력이다.

적어도 내가 이해하는 바와 같은 자유라는 단어의 어원은 내 사상을 더 잘 이해시켜 줄 것이다. 어근은 lib-et, 그것은 ‘기쁘게 한다’(독일어 lieben ‘사랑하다’를 참조)다. 이로부터 lib-eri를 만들었다. 이는 아이들, 우리에게 소중한 자들로서 가족의 아버지의 자녀들에게 남겨진 이름이다. lib-ertas는 귀족의 아이들의 조건, 성격 혹은 성향이다. lib-ido는 신도, 법률도, 조국도 인정하지 않는 노예적 열정이고 licentia, 방종과 동의어이다. 자생성이 유익하게, 관대하게 혹은 선으로 자기 결정됨에 따라 우리는 그것을 libertas라고 칭했다. 반대로 그것이 해로운, 사악한 그리고 헐렁한 방식으로, 악으로 자기 결정됨에 따라 우리는 그것을 libido라고 불렀다.

유식한 경제학자 뒤누아예 씨는 우리의 것과 가깝게 그 정확성을 마침내 입증할 자유의 정의를 내놓았다.

“나는 사람이 자신의 힘을 실행하는 것을 원천에서 방해하는 장애물에서 해방됨에 따라 자신의 힘을 더 용이하게 활용할 사람이 획득하는 이 권능을 자유라 부른다. 나는 그가 힘을 쓰는 것을 방해하는 원인들에서 더 벗어날수록, 그가 자신으로부터 이 원인들을 멀리할수록, 그가 자신의 행동 영역을 확대하고 걸리적거리는 것을 거기서 치울수록 그만큼 더 자유롭다고 말한다. … 이처럼 어떤 사람의 지성이 어떠한 외적 폭력에 의해서도 교란 받지 않을 때뿐만 아니라 술에 취해 몽롱해지지도 않고, 질병으로 손상되지도 않고 실행의 결여에 의해 무능에 사로잡히지도 않을 때에도 자유로운 정신을 가진다고, 커다란 정신적 자유를 누린다고 말한다.”

뒤누아예 씨는 자유를 그 부정적 측면에서만, 즉 마치 오직 자유가 장애물로부터의 해방과 동의어일 뿐인 것처럼 보았다. 이렇게 보면, 자유는 사람 안의 능력이 아닐 것이며, 아무것도 아닐 것이다. 그러나 곧 뒤누아예 씨는 자신의 불완전한 정의를 밀고 나가면서도 그것의 진정한 측면을 파악한다. 이때 그는 마침내, 사람은 기계를 발명하면서 자신의 자유에 기여하는데 이는 우리가 우리 생각을 표명하듯이 그가 자유를 결정하기 때문이 아니라 뒤누아예 씨의 문체에 따라서 그가 거기서 어려움을 빼내기 때문이라고 말하기에 이른다. “이처럼 발화된 언어는 기호에 의한 언어보다 더 나은 수단이다. 그러므로 말로써 자기 생각을 표현하고, 그것을 타인의 정신에 새겨 넣는 것이 몸짓으로 하는 것보다 더 자유롭다. 글로 쓰인 말은 발화된 말보다 더 강한 수단이다. 그러므로 말을 눈에 형상화할 줄 아는 경우에는 그것을 단지 발화할 줄 아는 경우보다 이웃들의 정신에 작용하기에 더 자유로운 것이다. 인쇄기는 펜보다 200배에서 300배 더 강력한 수단이다. 그러므로 자기 생각을 인쇄물을 통해 확신할 수 있을 경우에는 이를 수기로밖에 발표할 수 없을 경우보다 타인들과 관계를 맺는 데 200배에서 300배 더 자유롭다.”

나는 이런 식으로 자유를 나타내는 방식이 포함하는 부정확하고 비논리적인 점을 모두 지적하지는 않을 것이다. 콩디야크(Condillac) 철학의 마지막 대표자인 데스튀트 드 트라시 이래로 철학 정신은 프랑스 학파의 경제학자들 사이에서 몽롱해졌다. 이데올로기에 대한 두려움이 그들의 언어를 빗나가게 했고, 그들의 저서를 읽어보면 사실에 대한 숭배가 이들에게 이론에 대한 감각까지 상실하게 했다는 것을 눈치채게 된다. 나는 뒤누아예 씨 그리고 그와 함께 정치경제학이 자유의 본질, 일체의 행위에 그 자체로 무관한, 따라서 좋건 나쁘건, 유익하건 해롭건 일체의 결정을 똑같이 할 수 있는 자생성, 힘, 기력인 이것의 본질에 대해 잘못 안 것이 아니라는 것을 확인하고 싶다. 뒤누아예 씨는 진리의 소재를 아주 잘 짐작해서 그 스스로 다음과 같이 적을 정도이다. “나는 자유를 하나의 교리로 간주하는 대신 하나의 결과로 제시할 것이다. 그것을 사람의 속성으로 만드는 대신 문명의 속성으로 만들 것이며, 자유를 확립하기에 적절한 정부 형태들을 상상하는 대신 그것이 우리의 모든 진보로부터 어떻게 태어날지를 최선을 다해 설명하려고 한다.”

그 다음 그는 그에 못지않게 옳은 말로 이렇게 덧붙였다.

“사람들은 이 방법이 권리와 의무, 정부가 행할 의무를 지는 것, 그리고 여러 민족들이 요구할 권리를 가지는 것 등만을 말하는 이 교조적 철학자들의 방법과 얼마나 다른지를 주목할 것이다. 나는 판결문식으로 사람들은 자유로울 권리가 있다고 말하지 않는다. 나는 사람들이 자유로운 것은 어떻게 해서 이루어지는가를 묻는 것에 국한한다.”

이 견해에 따르면, 뒤누아예 씨가 쓰고자 한 저작을 네 줄로 요약할 수 있다. 자유를 옭아매는 장애물과 이를 촉진하는 수단들(수단, 방법, 생각, 관습, 종교, 정부 등)의 검토. 뒤누아예 씨의 저작은 빠짐없이 정치경제학의 철학 자체였다.

그러므로 자유의 문제를 제기한 후에 정치경제학은 우리에게 모든 점에서 심리학이 제시하는 것, 언어의 유비들이 시사하는 것과 일치하는 자유의 정의를 제공해 준다. 그리고 이것이 바로 사람에 대한 연구가 어떻게 점점 더 자아에 대한 사색으로부터 현실에 대한 관찰로 옮겨졌는가 하는 것이다.

그런데, 사람 안에서 이성의 결정 사항들이 생각(선험적으로 상정된 간추린 생각, 혹은 원리, 개념, 범주, 그리고 부차적인 생각, 아니, 좀 더 특수하게는 획득되고 경험적인 생각)이라는 이름을 받아들인 것과 마찬가지로, 자유의 결정 사항들은 의지, 감정, 관습, 도덕관념이라는 이름을 받아들였다. 또 언어는 그 본성상 모양을 그리는 것이며, 제1의 심리의 요소들을 계속 제공해서 사람들은 생각에 생각이 사는 장소나 역량으로서 지성을 할당해주고, 의지, 감정 등에는 의식을 할당해 주는 습관을 지녔다. 이 모든 추상들은 오랫동안 철학자들에게 현실로 받아들여졌으며, 이들 중 누구도 영혼의 능력들의 모든 분포가 필연적으로 환상의 작품이라는 것, 그것들의 심리학은 신기루에 불과하다는 것을 알아차리지 못했다.

아무튼 우리가 지금 이 결정 사항들의 두 차원, 이성과 자유를 하나의 살아있는 이성적이고 자유로운 인간 안에서 조직에 의해 결합되고 융합되는 것으로 의식한다면, 우리는 곧바로 그것들이 서로에게 도움을 제공하고 서로에게 영향을 미친다는 것을 이해할 것이다. 오류로 혹은 이성에 대한 부주의로 자유가 그 본성을 보지 못해 잘못되고 치명적인 관습을 취하면 이성은 스스로 이를 감지하는 데 지체하지 않을 것이다. 사물의 자연적 관계에 부합하는 참된 관념들 대신에 자유는 편견만을 붙들 것이며, 이 편견이 오래 나이를 먹어 가면 의식에 더욱 소중해질 것인 만큼 그 다음에 지성으로부터 이를 떨쳐내기는 그만큼 더 어렵다. 이런 상태에서 이성과 자유는 위축된다. 이성은 그 발달에서 교란을 받고, 자유는 그 용솟음에서 억압이 된다. 그리고 사람은 사악해진다. 즉 악한 동시에 불행하다.

이처럼 모순적인 간파와 불완전한 경험을 따라 이성이 경제학자들의 입을 빌려 가치의 기준은 없다고, 상거래의 법칙은 공급과 수요라고 선포했을 때, 자유는 야심과 이기심과 도박의 열정에 빠졌다. 상거래는 일정한 치안 규정에 종속된 내기에 불과했다. 빈곤은 부의 원천들에서 나왔다. 사회주의는 그 자신이 일상 관행의 노예로서 그 원인들에 맞서 일어서는 대신 그 결과들에 대해 항의할 줄밖에 몰랐다. 그리고 이성은 아주 많은 악폐의 광경에 의해 자신이 잘못된 길을 갔다는 것을 인식해야 했다.

사람은 그의 이성과 자유가 일심으로 행진할 뿐 아니라 그 발달에서 결코 멈추지 않는 만큼만 행복에 도달할 수 있다. 그런데, 자유의 진보는 이성의 진보와 마찬가지로 무한하므로, 게다가 이 두 권능은 밀접히 연결되고 연대적이므로 자유는 그것이 사물의 법칙인 이성의 법칙에 순응해 결정될수록 그만큼 더욱 완전하다고, 그리고 이 이성이 무한하다면, 자유 자체는 무한하게 되리라고 결론을 내릴 필요가 있다. 다시 말해, 자유의 만개는 이성의 만개 안에 있다. 최고의 법에 최고의 자유다(summa lex, summa libertas).

이런 예비 고찰들은 기계의 역할을 잘 파악하고 경제적 진화의 연관을 부각시키기 위해 필요 불가결했다. 이런 점에서 나는 독자에게 우리가 결코 시간 순서에 따른 역사를 쓰지 않으며, 관념들의 계기繼起에 따른 역사를 쓴다는 것을 환기시키고자 한다. 경제적 단계나 범주들은 그 발현에서 동시대적이기도 하고 순서가 뒤바뀌기도 한다. 그리고 그렇기 때문에 언제나 경제학자들은 자신들의 관념을 체계화하는 데 극단적인 어려움을 겪었으며, 그렇기 때문에 다른 관련성에서는 가장 추천할 만한 그들의 저작이 혼돈 상태이다. 아담 스미스, 리카도, 그리고 장 바티스트 세의 저작들이 그러하다. 그러나 경제 이론들은 그렇다고 해서 오성 안에서 가지는 논리적 계기성과 계열이 덜하지 않다. 우리가 발견했다고 자부하는 것, 이 저작을 철학인 동시에 역사로 만들 것은 이 질서이다.

. 기계들의 모순자본과 임금 제도의 기원

기계들이 일꾼의 수고를 덜어 준다는 바로 그것 때문에 기계는 노동을 단축시키고 줄이며, 노동은 그런 식으로 날이 갈수록 공급이 많아지고 수요가 적어진다. 정말이지, 점점 물가의 하락이 소비를 늘려서 그 비율은 재확립되고 노동자는 다시 호출된다. 그러나 산업상의 완벽화는 쉴 틈 없이 이어지고 계속해서 사람의 노동을 기계 작업으로 대체하는 경향을 띠므로 결과적으로 서비스의 일부를 떼어내고 그래서 생산으로부터 노동자들을 제거하려는 항상적인 경향이 있게 된다. 그런데 경제 질서는 영적 질서와 마찬가지이다. 교회 바깥에서는 구원이 없고, 노동 바깥에서는 생존이 없다. 사회와 자연은 똑같이 가혹한 것들로서 이 새로운 판결을 집행하는 데 일치한다.

“새로운 기계 혹은 일반적으로 어떤 편리한 절차이든 그것은 이미 활동 중인 노동, 산업적 팔다리의 일부를 대체하며, 그 팔다리의 용역은 유익하게 대체되고 일이 없는 상태로 남는다”고 장 바티스트 세는 말한다. “그러므로 새로운 기계는 노동자들 일부의 노동을 대신하지만, 생산된 물건의 품질을 낮추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럴 경우에는 이를 채택하기를 삼갈 것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소득을 다른 곳으로 옮긴다. 그러나 그 궁극적 효과는 완전히 기계의 편이다. 왜냐하면, 산물의 풍부함과 원가의 미미함이 판매 가치를 낮추면, 소비자, 즉 모든 사람이 이로부터 이익을 볼 것이기 때문이다.”

세의 낙관론은 논리와 사실에 대한 불충이다. 여기서는 단지 기계의 한 대, 두 대, 세 대 도입에 의해 30세기가 흐르는 동안 일어난 몇 안 되는 우연한 사건들만 문제인 것이 아니다. 규칙적, 항상적, 그리고 일반적 현상이 문제이다. 세가 말하듯이 소득이 기계에 의해 옮겨진 후에, 해야 할 노동과 실행해야 할 교환이 남아있는 한, 그것은 다른 기계에 의해 그렇게 되고, 또 다른 기계에 의해, 그리고 언제나 다른 기계에 의해 그렇게 된다. 이야말로 그 현상이 제시되고 모습이 그려져야 할 방식이다. 그러나 이때 그것은 이상하게 모습을 바꾼다는 것을 이해하자. 소득의 이전, 노동과 임금의 제거는 만성적이고 영구적이고 소멸할 수 없는 도리깨이며, 때로는 구텐베르크라는 인물로 나타나기도 하고 그 다음에는 아크라이트의 모습을 입는 일종의 콜레라이다. 사람들은 그를 자카드(Jacquard)라고 칭하고, 나중에는 제임스 와트(James Watt)라고, 혹은 주프루아(Jouffroy) 후작이라고 칭한다. 얼마의 시간 동안 어떤 형태로 폭압을 부린 후에 그 괴물은 다른 모습을 취한다. 그 괴물이 떠났다고 믿는 경제학자들은 “그건 아무것도 아니었어!”라고 외치는 모습을 취한다. 자신들의 변증법의 무게 전체로 그 문제의 긍정적 측면을 떠받치는 조건에서 평온하고 만족한 그들은 빗나가는 측면에는 눈을 감는다. 그래도 사람들이 그들에게 빈곤을 다시 말할 경우에 노동자들의 무사려와 술주정에 관한 설교를 재개하는 것은 예외로 한다.

1750년 관찰―뒤누아예 씨가 관찰한 것이다―은 같은 종류의 모든 강제 노력의 크기를 제시한다. “그러므로 1750년에 랭커스터 백작령의 인구는 300,000명이었다.

1801년에 방적 기계의 개발로 인구는 672,000명이 되었다.

1831년에는 1,336,000명이었다.

옛날에 면 산업이 고용한 4만 명의 일꾼 대신에, 이 산업은 기계의 발명 이래로 1,500,000명을 고용한다.“

뒤누아예 씨는 이 노동에 고용된 일꾼들의 수가 이렇게 이상하게 늘어났을 때, 노동의 값은 한 배 반이 더 올랐다는 것을 덧붙인다. 그러므로 인구는 산업의 움직임을 따르기만 해서 그 증가는 정상적이고, 흠잡을 데 없는 사실이었다. 내 말은 무엇인가? 행복한 사실이라는 것이다. 사람들이 기계의 발달의 영예와 영광으로 이를 언급하니 말이다. 그러나 갑자기 뒤누아예 씨는 몸을 확 돌린다. 이 수많은 방적기들에 일이 곧 없어지게 되어 임금은 필연적으로 감소해야 했다. 기계들이 불러들였던 인구는 기계들에 의해 버려지는 처지가 되었다. 그리고 뒤누아예 씨는 그때 이렇게 말하는 처지가 되었다. 빈곤의 원인은 결혼의 남용이다. 영국의 상업은 엄청난 고객층의 간청을 받아 사방에서 일꾼들을 모집하고 결혼을 촉진한다. 일거리가 풍부한 한에서는 결혼은 훌륭한 것으로, 사람들은 기계의 이점으로 그 효과를 인용하기를 좋아한다. 그러나 고객층이 들쭉날쭉하면서, 일과 임금이 부족하면서부터 결혼의 남용을 외치며, 일꾼들의 무사려를 비난한다. 정치경제학, 즉 소유주의 독재는 결코 틀릴 수 없다. 틀리는 것은 프롤레타리아트여야만 한다.

인쇄업의 예는 언제나 낙관론적인 사상에서 몇 번 인용되었다. 책의 제작이 오늘날 먹여 살리는 사람들의 수는 아마도 구텐베르크 이전의 필사자들과 예술 제본가들의 수보다 천배는 많을 것이다. 그러므로 사람들은 만족한 기분으로, 인쇄업은 아무에게도 해를 끼치지 않았다고 결론 내린다. 비슷한 사실들이 무한히 인용될 수 있을 것이다. 그 중 단 하나의 사실도 배척할 수 없지만, 또한 문제가 한걸음도 나아가지 못했다. 다시 한 번 말하지만, 어떤 사람도 기계가 일반의 행복에 기여했다는 것을 부인하지 않는다. 그러나 이 의심할 수 없는 사실을 볼 때, 나는 경제학자들이 절대적 방식으로 절차들의 단순화가 결코 어떠한 산업에든 고용된 일손의 수를 줄이는 결과가 되지 못했다고 의견을 개진할 때 진리를 따르지 않는 것임을 단언한다. 경제학자들이 말해야 했던 것은 기계들이 노동 분업과 마찬가지로 현 사회경제 체제에서는 부의 원천이기도 하고 빈곤의 영구적이고 숙명적인 원인이기도 하다는 것이다.

“1836년 맨체스터의 한 작업장에는 방적기 아홉 대가 각각 방추 380개를 가지고서 방적공 네 명에 의해 운전되었다. 뒤이어 방차紡車의 길이를 두 배로 했고 각 방적기에는 680개의 방추를 달았다. 그래서 두 사람이면 이 방적기를 운전할 수 있게 되었다.”

이것이야말로 기계에 의해 일꾼이 제거된 데 대한 있는 그대로의 사실이다. 단순한 조합에 의해 직공 네 명 중 세 명은 제거된다. 50년 후의 지구상의 인구가 두 배로 늘고 영국의 고갱이 네 배가 되고 새로운 기계들이 만들어지고 영국의 제조업자들이 일꾼들을 다시 뽑는 게 무슨 소용인가? 경제학자들은 기계를 두둔하며 인구 증가를 이용할 생각인가? 그렇다면 맬서스의 이론을 포기하고 결혼의 과도한 다산성을 비난하기를 그칠 일이다.

“사람들은 거기서 멈추지 않았다. 곧 새로운 기계의 개량이 전에는 네 명을 요하던 작업을 단 한 일꾼으로 하게 해 준다.” 일손의 4분의 3의 새로운 감축이다. 전체적으로 인간 노동의 16분의 15의 감축인 것이다.

“볼턴Bolton의 한 공장 운영자는 이렇게 적었다. 우리 방적기들의 방차의 길이 연장으로 우리는 1837년에는 방적공을 35명 고용하던 데서 26명만 고용할 수 있게 된다.” 또 한 번의 노동자 말살이다. 희생자는 네 명 중 한 명꼴이다.

이 사실들은 1842년 『경제 평론Revue Économique』에서 발췌한 것이다. 그리고 비슷한 사실들을 지적하지 못하는 사람은 없다. 나는 인쇄기의 도입을 목격했으며, 내 눈으로 인쇄공들이 겪은 해악을 보았다고 말할 수 있다. 기계들이 설치된 15년에서 20년 전부터 일부 일꾼들은 식자업에 재취업했고, 다른 일부는 그 직종을 떠났고, 많은 사람들이 빈곤으로 사망했다. 산업적 기술 혁신에 따라 노동자들의 재형성이 행해진 것은 이런 식이다. 20년 전에 마차 운송사 80개가 보케르Beaucaire에서 리옹까지의 수운 서비스를 담당했다. 이 모두는 20대의 증기화물선 앞에서 사라졌다. 확실히 상업은 거기서 이익을 보았다. 그러나 이 수운 인구는 어찌 되었는가? 그들은 말이 끄는 배에서 증기화물선으로 자리를 옮겼는가? 아니다. 그들은 분류에서 제외된 모든 산업들이 가는 곳으로 갔다. 사라진 것이다.

게다가 내가 같은 출처에서 발췌한 다음의 문서들은 산업의 완성이 일꾼들의 운명에 미치는 영향에 대한 더 실증적인 관념을 제공해줄 것이다.

“맨체스터에서 주당 임금의 평균은 12프랑 50상팀(10실링)이다. 일꾼 450명 중에 25프랑을 버는 사람은 40명이 안 된다.” 그 기사의 작성자는 영국인이 프랑스인보다 다섯 배 많이 소비한다는 것을 언급하는 데 유념한다. 그러므로 이는 마치 프랑스의 일꾼이 주당 2프랑 50상팀으로 살아가야 한다는 것과 같다.

『에든버러 평론Revue d'Édimbourg』(1835) : “맨체스터의 샤프와 로버트의 마차는 (자신들의 임금을 낮추게 두고 싶지 않았던) 일꾼들의 조합 덕분이다. 그리고 이 발명이 무례한 조합 구성원들을 무섭게 벌했다.” 벌 받은 자들은 벌 받을 만했다. 맨체스터의 샤프와 로버트의 발명은 그 상황에서 나와야 했다. 일꾼들이 자신들에게 요구된 임금 감축을 받아들이기를 거부한 것은 확정하는 계기였을 뿐이다. 『에든버러 평론』이 띠는 복수의 기분으로 사람들은 기계들이 소급 효과를 가진다고 말하지 않을 것인가?

영국의 한 제조업자 : “우리 일꾼들의 불복종은 우리가 그들을 내보내고자 신경을 쓰게 했다. 우리는 사람의 서비스를 더 고분고분한 기기들로 대체하기 위해 상상할 수 있는 모든 지적 노력을 했고 또 촉발했으며, 우리는 끝에까지 왔다. 역학은 자본을 노동의 억압에서 구해냈다. 우리가 아직도 사람을 고용하는 곳 어디서나, 누가 우리를 위해 사람 없이 그의 업무를 수행할 수단을 발명해 주기를 기다리면서 임시적으로만 그러는 것이다.”

대상大商에게 사회가 곧 사람들 없이도 지낼 수 있으리라고 기쁨을 가지고 생각하게 유도하는 체제가 웬 체제인가! 역학이 자본을 노동의 억압에서 구해냈다니! 이는 마치 장관이 예산을 납세자들의 억압에서 구해내려 시도했다는 것과 정확히 똑같다. 허튼 소리다! 일꾼들이 당신에게 비용이 든다면, 그들은 당신의 구매자들이다. 당신에게 쫓겨나서 그들이 더 이상 당신의 산물을 소비하지 않을 때에는 당신의 산물로 무엇을 할 것인가? 또한 기계들의 반작용은 일꾼들을 짓이긴 후에는 지체 없이 주인들을 친다. 왜냐하면 생산이 소비를 배제하면, 곧 생산 자체가 멈출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1841년 4사분기에 네 번의 큰 도산이 영국의 제조업 도시에 닥쳐서 1,720명이 길거리에 나앉았다.” 이 도산의 원인은 너무 생산이 많은 데 있었으며, 말하자면 판로의 부족 혹은 사람들의 빈곤에 있었다. 역학이 자본을 또한 소비자들의 억압에서 구할 수 없다는 것이 얼마나 유감인가! 기계들이 제작하는 천을 구매하지 못하는 것이 얼마나 불행인가! 상업, 농업 그리고 공업이 땅 위에 사람이 없이도 행진해 갈 수 있다면 이는 사회의 이상일 것이다!

“요크셔의 한 교구에서 일꾼들은 9개월째 주당 이틀밖에 일하지 못했다.”―기계다.

“게스턴Geston에서 60,000파운드스털링으로 평가되는 두 공장이 26,600파운드스털링에 팔렸다.”―그 공장들은 판매할 수 있던 것보다 더 많이 생산했다. 기계다!

“1841년에 13세 미만 어린이들의 수는 제조업에서 줄어드는데, 이는 13세 이상의 아이들이 이들의 자리를 대신하기 때문이다.”―기계다. 성인 일꾼이 다시 수습공, 아이가 된다. 이 결과는 노동 분업의 단계에서부터 예견되었다. 우리는 노동 분업 중에 일꾼의 질이 산업이 완성되어 감에 따라 낮아지는 것을 보았다.

기사를 마치면서, 그 기자는 이런 성찰을 한다. “1836년부터 면 산업은 후퇴한다.” 즉 더 이상 다른 산업들과 관계를 가지지 않는다. 이는 가치들의 비례성 이론에 의해 예견된 또 다른 결과이다.

오늘날 일꾼들의 조합체와 파업은 영국의 모든 지점들에서 그친 것으로 보이며, 경제학자들은 질서로의 이 회귀를 정당하게 기뻐한다. 상식적으로도 그렇다. 하지만 일꾼들이 이후로는 더 이상 자신들의 자발적 실업의 빈곤을, 나는 적어도 이를 기대하고 싶은데, 기계들이 자신들에게 만들어준 빈곤에 더하지 않을 것이므로, 결과적으로 상황은 달라졌는가? 그리고 상황이 달라진 것이 없다면 미래는 언제나 과거의 슬픈 복제물이 아닐 것인가?

경제학자들은 공적인 행복의 그림을 자신들의 정신의 기초로 삼기를 좋아한다. 사람들이 이를 인정하고, 이들이 서로 간에 높이 평가해 주는 것은 주로 이런 표징에서이다. 그럼에도 그들 중에는 슬프고 부실한 상상력, 언제나 상승하는 번영의 이야기에 고집스러운 빈곤의 증거들을 들이댈 준지가 된 상상력도 없지 않다.

이처럼 테오도르 픽스(Théodore Fix) 씨는 1844년 12월에 일반적 상황을 이렇게 요약했다.

“민중들의 영양 상태는 19세기 초까지 아주 흔하던 흉작과 기근에 의해 유발된 그런 무서운 교란에 더는 노출되지 않는다. 작물의 다양성과 농업의 완성은 거의 절대적 방식으로 이 이중적인 도리깨를 퇴치했다. 1791년 프랑스에서의 밀 총생산량은 거의 4,700만 헥토리터로 평가되었다. 이는 종자를 제하고 주민 당 100.65리터이다. 1840년에는 같은 생산이 7,000만 헥토리터로 평가되었고, 개인당 100.82리터로서 재배 면적은 거의 혁명 전과 같다. … 가공 원재료는 식량과 적어도 같은 비율로 늘어났다. 그리고 직물의 양은 50년 전보다 두 배, 아마도 세 배 늘어났을 것이다. 기술적 공정의 완성이 이 결과를 가져왔다. …”

“금세기 초부터 평균 수명은 2~3년 길어졌다. 이는 안락함이, 혹은 뭐랄까 빈곤의 완화가 더 커진 논박할 수 없는 지표이다.”

“20년 동안 간접 소득액은 입법에서의 어떠한 무거운 변화 없이 5억4000만에서 7억2000만으로 올라갔다. 이는 세무 상의 진보보다 훨씬 큰 경제적 진보의 징후이다.”

“1844년 1월 1일, 예치 및 공탁 금고가 저축 금고에 3억5150만의 채무가 있고 파리가 이 총액에서 1억500만에 달했다. 그러나 그 기관은 12년 전부터 전혀 발전하지 않았다. 그리고 주목해야 할 것은 현재 저축 금고에 갚아야 할 3억5150만은 실현된 경제의 양 전체를 이루지 않는다는 것이다. 주어진 순간에 축적된 자본은 또 다른 행선지를 받아들인다. 1843년에 수도에는 일꾼 32만 명과 하인 8만 명이 살고, 일꾼 9만 명이 저축 금고에 2,547,000프랑을, 하인 3만4000명이 1,268,000프랑을 예금했다.”

이 모든 사실은 완벽히 참이며, 기계를 편들어 이로부터 끌어내는 결과는 더 이상 정확할 수 없다. 기계는 실제로 일반의 행복에 강력한 추진력을 가한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이으려고 하는 사실들은 그보다 진정성이 덜하지 않으며 거기서 나오는 기계를 반대하는 결과는 덜 정당하지 않을 것이다. 즉 기계가 빈곤의 끊임없는 원인이라는 것이다. 나는 픽스 씨의 수치들에 주의를 환기한다.

파리에 거주하는 일꾼 32만 명과 하인 8만 명 중에 저축 금고에 예금을 못 하는 일꾼이 23만 명, 하인이 4만6000명 있다. 이들을 자발적으로 빈곤에 노출되는 27만6000명의 흥청망청하는 사람과 막돼먹은 사람이라고 감히 주장하지 못할 것이다. 그런데 절약을 하는 자들 중에서도 저축 금고가 방종과 빈곤에서의 쉼터에 불과한 가난한 자들과 별 볼 일 없는 자들을 찾아볼 수 있으므로 자신의 노동으로 살아가는 모든 개인들 중에 거의 4분의 3이 저축 금고에 예금을 못 하기 때문에 무사려하고 게으르고 방종한 사람이거나 절약을 실현하기에 너무 가난한 사람들이라고 결론을 짓도록 하자. 다른 대안은 없다. 그러나 자선이 결여된 마당에 상식은 노동계급을 한 몫에 비난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어쩔 수 없이 우리의 경제 체제에 잘못을 돌려야 한다. 픽스 씨는 이 숫자들이 자신을 고발하는 것을 보지 못했는가?

시간이 가면서 모든, 혹은 거의 모든 노동자들이 저축 금고에 예금하기를 희망한다. 미래의 증언을 기다릴 것 없이 우리는 이 희망이 근거 있음을 현장에서 입증할 수 있다.

파리 제5구 구청장 베(Vée) 씨의 증언에 따르면 “복지국 감독처에 등록된 빈곤 가구의 수는 3만이며, 개인으로는 6만5000이다.” 1846년 초에 행한 조사에서는 8만8474명이라는 숫자가 나왔다. 그리고 가난하지만 등록하지 않은 가구들은 얼마나 되는가? 그만큼이다. 그러므로 18만의 빈곤 가구를 비록 공식적이지는 않지만 의심할 수 없는 숫자로 놓자. 그리고 외관상 안락하다 해도 궁핍하게 살아가는 모든 이들은 또 얼마일까? 그 두 배다. 파리에서 총 36만 명이 궁핍하게 살아간다. 다른 경제학자 루이 르클레르(Louis Leclerc)는 이렇게 적는다.

“사람들은 밀에 대해 말한다. 그러나 빵 없이 지내는 엄청난 인구는 없는가? 우리 조국에서 떠나는 일 없이 오로지 옥수수, 메밀, 밤을 먹고 사는 인구는 없는가?”

르클레르 씨는 그 사실을 알린다. 그에 대한 해석을 제시하자. 의심할 수 없는 것처럼 인구 증가가 주로 대도시에서, 즉 밀을 가장 많이 소비하는 지점들에서 느껴진다면, 인당 평균은 일반적 조건이 더 나아지지 않아도 증가할 수 있었다는 것이 명확하다. 평균이라는 것만 한 거짓말쟁이도 없다. 그 사람은 이렇게 계속한다.

“간접 소비의 증가에 대해서도 사람들은 말한다. 파리의 허장성세를 무죄로 하려 시도해 보아야 소용없다. 그것은 존재한다. 그 주인공이 있고, 의상이 있고, 문학이 있고, 변증법적이고 고전적인 논저들이 있다. … 프랑스는 진기한 포도주를 보유했다. 그것으로 무엇을 했는가? 이 찬란한 부는 어떻게 되었는가? 프로부스 이래 어디서 민족의 화신에 의해 보물들이 창조되었는가? 그리고 그렇더라도 포도주가 값비싼 곳 어디서나, 그것이 정규적인 체제 안에 들어가지 않는 곳 어디서나 일으키는 과도함까지 감안할 경우에, 훌륭한 포도주 왕국의 수도인 파리에서 인민이 내가 알지 못하는 왜곡되고 변질되고 구역질나고 때로는 혐오스러운 그 무엇으로 배를 채우고, 안락한 사람들은 자기 집에서 마시거나 아무 말 없이 유명한 레스토랑에서 그런 포도주를 받아들이고, 혼탁하고 보랏빛이 돌고 맛이 없고 그저 그렇고 비참한 포도주는 가장 가난한 농민, 부르고뉴와 투렌의 농민에게 끓여 증류하도록 하자고 말하는 것을 볼 때, 알코올이 우리 본성의 가장 절실한 필요물 중 하나라는 것을 선의로 의심할 수 있는가!”

나는 이 문단을 아주 길게 인용하는데, 이는 하나의 구체적 경우에 기계들의 폐단에 관해 말할 것이 있을 모든 것을 요약하기 때문이다. 인민과 관련해서는 포도주도 직물, 그리고 일반적으로 가난한 계급들의 소비를 위해 만들어진 모든 물품과 상품과 마찬가지이다. 언제나 동일한 것이 도출된다. 제조비용을 어떤 절차로든 낮추는데, 이는 ⑴ 더 행복하거나 더 부유한 동료들에 대항한 경쟁을 유리하게 하기 위해서, ⑵ 이 무수한 고객층에게 품질이 좋아지면서부터는 그 값을 무료로 할 수 없는 강탈물을 바치기 위해서이다. 포도주는 일상적인 경로로 생산되면 소비자 대중에게는 비용이 너무 비싸게 든다. 소매상의 포도주 창고에 그대로 남을 위험이 있다. 포도주 제조자는 그 난점을 회피한다. 경작을 기계화하지는 못하고, 약간의 부대 조치의 도움으로 그 귀중한 액체를 모든 사람이 얻을 수 있게 두는 수단을 발견한다. 어떤 야만인들은 흉년이 들면 흙을 먹는다. 문명사회의 일꾼은 물을 마신다. 맬서스는 위대한 천재였다.

평균 수명의 연장에 관해 나는 그 사실을 진실성을 인정한다. 그러나 동시에 나는 그 관찰에 결함이 있다고 공언한다. 이를 설명해보자. 1000만 명의 인구를 가정하자. 임의의 어떤 원인으로 100만 명의 개인이 평균 수명이 5년 늘어났고 나머지 900만 명은 전과 같은 방식으로 사망 추세가 계속된다면, 이 수명을 연장 전체에 배분할 경우에 평균 수명은 각자에게 6개월씩 늘어난 것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이른바 평균 행복의 지표인 평균 수명은 평균 교육과 마찬가지다. 지식수준은 끊임없이 상승한다. 이는 오늘날 프랑스에서 꼭 프랑수아 1세 시대만큼의 야만인들이 있지 않게 막아주는 것이다. 철도를 개설하겠다고 나선 돌팔이들은 관념의 유통을 위해 기관차의 중요성을 크게 떠들어댔다. 그리고 경제학자들은 문명화된 천진함을 언제나 노리고 있어서 이 어리석은 말을 되풀이하기를 빼먹지 않았다. 마치 관념들이 전파되려면 기관차들이 필요하다는 듯이! 그러나 관념들이 학사원으로부터 생앙투안과 생마르소로, 결국 어디든 이 많은 사람들이 여전히 빵보다는 관념을 빼앗긴 채로 살고 있는 곳으로 유포하는 것을 방해하는 것이 무엇인가? 공용 마차 교통과 작은 우체국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파리 시민 간의 거리가 14세기보다 더 먼 것은 어디서 유래하는가?

기계가 사회경제와 노동자들의 조건에 미치는 엇나가는 영향은 천 가지 방식으로 가해지며, 이 모두가 서로 연결되고 서로를 불러들인다. 노동의 중단, 임금의 삭감, 과잉 생산, 과잉 공급, 산물의 변질과 위조, 도산, 일꾼들의 등급 탈락, 인류의 질 하락, 끝으로 질병과 죽음이다.

테오도르 픽스 씨 자신은 50년 전부터 프랑스에서 남자의 평균 신장이 몇 밀리미터 줄었다는 것에 주목했다. 이 관찰은 방금 한 관찰에 맞먹는다. 이 감소가 누구에게 해당하는가?

1841년 3월 22일 도덕 및 정치 과학 아카데미에서 읽힌 법률의 결과에 관한 보고서에서 레옹 포셰(Léon Faucher) 씨는 이런 생각을 표명했다. “젊은 일꾼들은 창백하고, 허약하고, 몸집이 작고, 생각하는 것도 움직이는 것도 느리다. 14, 15세에도 정상적인 상태의 9, 10세 어린이보다 더 발육하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 그들의 지적, 정신적 발육을 본다면, 13세의 나이에 신의 관념이 없고 자신들의 의무에 관해 말하는 것을 들어본 적이 없는, 그리고 첫 번째 도덕 학교는 감옥이었던 이들을 보게 된다.”

이것이 바로 레옹 포셰 씨가 본 것으로서, 샤를 뒤팽(Charles Dupin)은 크게 낙담했고, 이에 그는 3월 22일 법률이 이를 치유하기에 무력하다고 선언한다. 우리는 입법자의 이 무능에 분노하지 말자. 악은 우리에게 태양만큼 필요한 원인에서 나온다. 그리고 우리가 들어온 궤도에서 일체의 분노는 모든 진통제와 마찬가지로 우리의 상황을 악화시킬 뿐일 것이다. 그렇다. 과학과 산업이 아주 경이로운 진보를 이루는 동안에는 문명의 무게 중심이 갑자기 달라지지 않으려면 프롤레타리아트의 지성과 행복이 누그러질 필요성이 있다. 안락한 계급들에서 수명이 연장되고 생활이 개선되는 동안에는 궁핍한 자들에게는 생활이 악화되고 수명이 단축되는 것이 숙명이다. 이는 최고로 사려 깊은, 말하자면 최고로 낙관적인 글들에서 나오는 결과이다.

드모르그(de Morogues) 씨에 따르면, 프랑스에서 750만 명이 1년에 91프랑밖에 지출할 것이 없고, 하루에는 25상팀밖에 없다는 것이다. 5수! 5수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 역겨운 후렴에는 무언가 예언적인 것이 있다.

잉글랜드에서(스코틀랜드와 아일랜드는 포함하지 않고) 구빈세는 다음과 같았다.

연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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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액(파운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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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당 인구(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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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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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78,8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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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872,9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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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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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870,8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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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978,8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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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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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00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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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00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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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므로 빈곤의 진보는 인구의 진보보다 빨랐다. 이 사실을 볼 때, 맬서스의 가설들은 어찌 되는가? 그리고 그런데도 같은 시기에 복리 수준의 평균이 증대한 것은 의심할 바 없다. 그렇다면 통계는 무엇을 뜻하는가?

파리 제1구의 사망률은 주민 52명당 1명이고, 제12구에서는 26명당 1명이다. 그런데 제12구에서는 빈곤층이 주민 7명당 1명인 반면, 제1구에서는 28명당 1명밖에 안 된다. 이는 픽스 씨가 아주 잘 관찰했듯이 파리에서도 평균 수명이 증진되는 것을 막지 않는다.

뮐루즈에서는 안락한 계급 자녀들의 평균 수명은 29세이고, 일꾼들 자녀의 평균 수명은 2세다. 1812년에 평균 수명은 같은 지역에서 25년 9월 12일이었다. 반면에 1827년에는 21년 9월에 불과했다. 그런데도 프랑스 전역에서 평균 수명은 늘어나고 있다. 이는 무슨 말인가?

블랑키 씨는 그러한 번영과 빈곤을 한꺼번에 해명할 수 없어서 어떤 부분에서는 이렇게 적는다. “생산의 증대는 부의 증대가 아니다. … 산업이 집중함에 따라 빈곤이 오히려 더 퍼져 간다. 자본에도 노동에도 아무 안전을 보장해 주지 않는 체제, 생산자들에게 산물을 배가시키도록 강제하는 동시에 이들의 당혹감을 배가시키는 것 같은 체제에는 무언가 근원적인 악이 있음이 분명하다.”

여기에는 아무 근원적인 악도 없다. 블랑키 씨를 놀라게 하는 것은 아주 단순히 그가 회원으로 있는 아카데미가 확정을 요구한 것, 경제적 진자, 가치가 번갈아 일률적인 박자로 선과 악을 때리기를 보편적 등식의 시간이 울릴 때까지 하는 진자 운동이다. 또 다른 비교가 허락된다면, 행진 중인 인류는 같은 발걸음으로 같은 순간에 박자를 맞춘 북소리에 따라 출발했지만 점점 간격이 흐트러지는 병사들의 열과 같다. 모두가 앞으로 간다. 그러나 머리부터 꼬리까지 길이가 끊임없이 길어진다. 그리고 뒤쳐지는 자들과 길 잃은 자들이 생기는 것은 운동의 필연적 결과이다.

그러나 이율배반에서 더 앞으로 뚫고 나갈 필요가 있다. 기계들은 우리에게 부의 증대를 약속했다. 그것들은 우리에게 약속을 지켰지만, 우리에게 동시에 빈곤의 증대도 선물했다. 기계들은 우리에게 자유를 약속했다. 나는 그것들이 우리에게 노예 상태를 가져다주었음을 증명하려 한다.

나는 가치의 확정이, 그리고 이와 함께 사회의 시련이 산업의 분화로 시작되었음을 말했다. 이 분화 없이는 교환도 부도 진보도 없을 것이다. 우리가 이 순간 통과하는 시기, 기계의 시기는 특정한 성격으로 구분된다. 이는 임금 노동제이다.

임금 노동제는 기계의 사용으로부터 곧장 나온다. 즉, 내 생각에 응당 있어야 할 표현의 일반성을 주자면, 자본이 생산 매체가 된다는 경제적 허구로부터 나온다. 결국 임금 노동제는 노동 분업과 교환의 뒤에 이 비용 절감이 어떻게 달성되든 비용 절감 이론의 강요된 상관물이다. 이 계보학은 우리가 그에 관해 몇 마디 하지 않기에는 너무 재미있다.

기계들 중 첫 번째, 가장 단순한, 가장 강력한 기계가 작업장이다.

분업은 노동의 다양한 부분들을 나누기만 해서 각자에게 가장 맞는 전문 분야에 종사하게 한다. 작업장은 각 부분의 전체에 대한 관계에 따라 노동자들을 군집화한다. 이는 그 가장 기초적인 형태에서 가치들의 안배이지만, 경제학자들에 따라서는 이는 찾아볼 수 없는 것이다. 그런데 작업장 때문에 생산이 증대해 가고, 동시에 적자도 증가해 간다.

어떤 사람이 생산과 그 다양한 부분들을 나누고, 이를 각각 한 노동자가 수행하게 하면 노동이 분화되지 않은 경우에 같은 수의 일꾼들이 내놓는 노동량보다 훨씬 많은 산물을 내놓는 힘의 배가를 얻게 된다는 것에 주목했다.

이 관념의 실마리를 붙들고서 그는 자신이 염두에 두는 특수한 물건을 위해 모인 노동자들로 영구적 집단을 이루면 더 지속적이고 더 풍부하고 비용은 덜 드는 생산을 달성하리라고 독백한다. 게다가 일꾼들이 동일한 장소에 모이는 것이 필요 불가결하지도 않다. 작업장의 존재는 이 접촉에 필수적으로 관리되지 않는다. 그것은 상이한 노동들의 관계와 비율, 그리고 이것들을 지도하는 공통의 생각에서 나온다. 한마디로 같은 곳에 모이는 것이 그 장점을 제공할 수 있고 이는 결코 무시되어서는 안 될 것이지만, 이는 작업장을 이루는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투기자가 자신과 협력하게 하기를 원하는 자들에게 하는 제안은 이런 것이다. 나는 당신이 나를 구매자나 중개자로 받아들이고자 한다면 당신에게 당신 산물의 배치를 영구적으로 보장한다. 거래는 아주 명백히 유리해서 그 제안은 틀림없이 받아들여진다. 일꾼은 거기서 노동의 지속성, 고정된 가격, 그리고 안정성을 발견한다. 기업가 쪽에서는 판매가 더 쉬워질 것이다. 더 유리하게 생산을 하므로 가격에 손을 댈 수 있다. 결국 그의 이득은 배치량 때문에 더 클 것이다. 기업가가 자신의 조합을 통해 사회적 부를 증진한 데 대해 축하하지 않을, 그리고 그에게 보상을 해준다는 데 투표하지 않을 공중과 행정관마저 있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나 우선 비용 감축을 말하는 자는 용역의 감축도 말하는 것이다. 정말로 새로운 작업장에서가 아니라 바깥에 남아있는 같은 직종의 일꾼들에 대해서 말이다. 또한 그 부수적 용역이 미래에는 덜 요구될 다른 많은 이들에 대해서도 그러하다. 그러므로 작업장의 일체의 형성은 노동자들의 축출에 상응한다. 이 단언은 아주 모순적으로 보여도 기계에 대해서처럼 작업장에 대해서도 참이다.

경제학자들은 이에 동의한다. 그러나 그들은 여기서 일정 시간이 경과한 후 그 산물의 수요가 가격의 인하에 비례해 늘어나서 노동 수요는 결국 전보다 더 커지고 말 것이라는 자신들의 영원한 기도문을 되풀이한다. 의심할 바 없이 시간이 가면 균형은 재확립될 것이다. 그러나 다시 한 번 말하지만, 이미 균형이 다른 지점에서 교란될 것이라면 균형은 이 지점에서 재확립되지 않을 것이다. 노동도 마찬가지이지만 발명 정신이 결코 멈추지 않기 때문이다. 그런데 어떤 이론이 이 끊임없는 학살을 정당화할 수 있을까? 시스몽디는 이렇게 썼다. “노무자 수를 지금의 4분의 1 또는 5분의 1로 줄이게 될 때는 신부, 의사 등도 4분의 1이나 5분의 1밖에 필요가 없을 것이다. 이들을 완전히 잘라낸다면, 물론 인류가 없이도 지낼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각 기계의 작업을 소비의 필요와 맞추려면, 즉 계속적으로 파괴되는 가치물들의 비율을 회복하려면 끊임없이 새로운 기계를 창조하고, 다른 판로를 열고, 결과적으로 용역들을 배가하고, 다른 일손들을 내쫓아서는 안 될지라도, 이는 실제로 일어날 일이다. 그래서 한편으로 산업과 부, 다른 한편으로 인구와 빈곤은 말하자면 줄을 지어서, 언제나 하나가 다른 하나를 끌어주면서 전진한다.

나는 기업가가 산업의 출범 시에는 나중에 가서 그의 일꾼이 된 동료들과 대등하게 관계를 가지는 것을 보여주었다. 실제로 이 원초적 평등이 주인의 유리한 위치와 임금 수령자의 종속성에 의해 급속히 사라질 수밖에 없었던 것은 이해할 만하다. 법률이 각자에게 사업권을, 또 혼자서 일하고 직접 자신의 산물을 판매할 능력을 보장해도 소용이 없다. 가설에 따르자면 이 후자의 수단은 실행 불가능하다. 작업장은 고립된 노동을 제거하는 것을 목표로 삼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흔히 말하듯 쟁기를 들어서 밭을 갈 권리에 대해 말한다면, 이는 농업과 산업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일을 할 줄 아는 것은 아무것도 아니고 정시에 도착할 필요가 있다. 상점은 토지와 마찬가지로 선점자에게 돌아간다. 한 기관이 발달하고, 자기 기초를 확장하고, 자본을 갖추고 고객층을 안심시킬 겨를이 있을 경우에, 일손밖에 없는 일꾼이 그렇게 우월한 힘에 맞서 무엇을 하겠는가? 이처럼 중세에 조합과 장인 제도가 확립된 것은 군주 권력의 자의적 행위에 의해서도, 우발적이고 잔혹한 횡령에 의해서도 아니다. 왕들의 칙령이 그것들에 법적 성별을 해주기 오래 전에 사물의 힘이 그것들을 만들었다. 그리고 1789년의 개혁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그것들이 백배는 더 무서운 힘으로 우리 눈앞에서 재형성되는 것을 보게 된다. 일이 그 고유의 성향대로 가게 내버려두라. 그러면 인류의 4분의 3의 노예화는 보장된다.

그러나 이것이 전부는 아니다. 기계 혹은 작업장은 노동자에게 주인을 섬기게 해 그를 저열화한 후에 그를 장인의 반열에서 인부의 반열로 전락시켜 그를 천하게 만들고 만다.

옛날에 손Saône 강과 론Rhône 강 유역의 인구는 대부분 말이나 노로 가는 배를 모는 훈련을 받은 선원들로 구성되었다. 증기선 노선이 거의 모든 지점에 개설된 지금 선원들은 대부분 그들의 직업으로 먹고살 것이 없어서 그들 생활의 4분의 3을 실업 상태로 보내거나 아니면 운전수가 된다. 빈곤은 아니라 해도 저열화하는 것이다. 이는 기계가 일꾼에게 행하는 고육지책이다. 왜냐하면 기계는 군수 품목과 마찬가지이기 때문이다. 대장 외에, 기계가 일을 시키는 자들은 종들, 노예들이다.

거대 제조업들이 설치된 이래 다수의 소산업체들은 가정으로부터 사라졌다. 50에서 75상팀 하는 인부들이 그들의 조부모만큼 지성을 가졌다고 믿는가? 뒤누아예 씨는 이렇게 이야기한다.

“파리에서 생제르맹까지 철도가 설치된 후에 르페크와 다수의 어느 정도 이웃한 지방들 간에 수많은 공용 마차와 객차들이 설치되어 이 시설물이 모든 예측과 달리 말의 활용도를 상당한 비율로 증가시켰다.”

모든 예측과 달리! 이런 것을 예측하지 못하다니 그는 한 사람의 경제학자일 뿐이다. 기계를 배증해보라. 당신은 고통스럽고 염증이 나는 노동을 늘리는 것이다. 이 경구는 노아의 홍수 때부터 있던 어떤 경구만큼이나 확실하다. 그러고 싶다면 우리 세기의 가장 아름다운 발명품을 향한 내 악의를 고발하라. 철도의 주된 결과가 작은 산업의 예속화 후에 길 닦는 인부, 거리 청소부, 짐꾼, 하역 인부, 짐마차꾼, 경비원, 지게꾼, 중량 계량인, 기름 치는 사람, 청소부, 운전사, 소방수 등등 저열화된 노동자 인구를 만드는 것이리라고 내가 말하는 것을 아무것도 막지 못할 것이다. 4000킬로미터의 철도는 프랑스에 5만 명의 농노를 더해 줄 것이다. 의심할 바 없이 슈발리에 씨가 직업학교들을 요구하는 것은 이런 세계를 위해서는 아니다.

아마도 사람들은 운송량이 날품팔이 수보다 비례적으로 훨씬 많이 증가했으니 그 차이는 철도에 유리하고, 결국 진보가 있다고 말할 것이다. 심지어 관찰을 일반화해 같은 추론을 모든 산업에 적용할 수도 있다.

그러나 노동자들의 예속화를 생겨나게 하는 것이 현상의 이런 일반성이다. 산업에서 제1의 역할은 기계에게 돌아가고, 제2의 역할이 사람에게 돌아간다. 노동에 의해 전개된 일체의 천재성은 프롤레타리아를 무디게 만드는 데 돌아간다. 4000만 주민 중에 노무자, 마부가 3500만을 헤아리게 될 것이나 우리 민족이 얼마나 영광된 민족이겠는가!

기계, 그리고 작업장과 함께 신권神權, 즉 권위의 원리가 정치경제학에 입장한다. 자본, 지배Maîtrise, 특권, 독점, 합자회사Commandite, 신용, 소유권 등이 경제 용어에서는 내가 모르는 그 무엇, 다른 데서는 권력, 권위, 주권, 성문법, 계시, 종교, 신, 끝으로 우리의 모든 빈곤과 우리의 모든 죄의 원인이자 원리이며, 우리가 정의하려고 시도할수록 우리를 피해가는 그 무엇의 다양한 이름들이다.

그러므로 사회의 현 상태에서 그 위계적 조직을 가진 작업장, 그리고 기계가 가장 소수인, 가장 일을 안 하고 가장 부유한 계급의 이익에 오로지 소용되는 대신 모두의 이익을 위해 활용되는 것은 불가능한가?

이는 우리가 고찰하려고 하는 것이다.

. 기계의 재앙적인 영향에 맞선 방지책

일손 감축은 가격 인하, 따라서 교환의 증대와 동의어이다. 소비자가 덜 지불한다면 그들은 더 많이 살 것이니 말이다.

그러나 일손 감축은 또한 시장의 축소와 동의어이기도 하다. 생산자가 덜 벌면 그는 덜 구매할 것이니 말이다. 그리고 실제로 일은 이런 식으로 진행된다. 작업장에 여러 힘들이 집중되는 것, 그리고 기계라는 이름으로 자본이 생산에 개입하는 것은 과잉 생산과 헐벗음을 한꺼번에 낳는다. 그리고 모든 사람들이 이 두 도리깨, 화재와 페스트보다 더 무서운 이 둘이 최고로 방대한 규모로, 그리고 집어삼킬 듯한 강도로 전개되는 것을 보았다. 그렇기는 하지만 우리가 후퇴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생산하고, 언제나 생산하고, 값싸게 생산하는 것이 필요하다. 그렇지 않으면 사회의 생존이 위태로워진다. 노동자는 분업의 원리로 정신이 무뎌질 위험을 피하기 위해 아주 많은 경이로운 기계를 만들었는데, 자기 자신의 작품에 의해 금지를 당하기도 하고 종속을 당하기도 하는 처지에 놓인다. 이런 대안에 반대해 어떤 수단이 제시된는가?

시스몽디 씨는 가부장적 관념을 지닌 모든 이들과 함께 노동 분업이 기계, 그리고 제조업과 더불어 포기되고, 가정마다 원시적 미분화未分化의 체제로, 즉 가장 문자 그대로 취한 의미에서 ‘저마다 자기 집에서, 저마다 자신을 위해(chacun chez soi, chacun pour soi)’로 돌아가기를 원한다. 이는 퇴보요, 불가능한 일이다.

블랑키 씨는 모든 산업의 집단적 노동자 이익을 위해 노동자 참여, 합자회사 설립의 기획을 가지고서 재도전한다. 나는 이 기획이 노동자들의 처지를 별달리 개선하지도 못하면서 공공의 재산을 위태롭게 했다는 것을 보여 주었다. 그리고 블랑키 씨 자신이 이런 감정에 가담한 듯하다. 사실, 이 노동자의 이익 배분 참여와 발명자, 기업가, 자본가의 권리들을 어떻게 화해시키겠는가? 그 중 한 부류는 거액의 선불을, 그리고 자신의 길고 끈질긴 노력을 보상받아야 하고, 또 한 부류는 끊임없이 자신이 벌어놓은 재산을 위험에 노출시키며 흔히 위험천만한 사업의 운수를 홀로 감당하고, 세 번째 부류는 어떤 식으로 자신의 저축을 잃지 않고서는 자신의 이자율 감소를 견디지 못할 것인데 말이다. 한마디로 노동자들과 주인들 간에 확립하기 원하는 평등과, 기관장, 합자회사 사장, 발명가에게서 빼앗을 수 없는 주도권, 그들에게는 이득의 배타적 전유를 아주 명확히 의미하는 이것을 어떻게 일치시키겠는가? 법률로써 모든 노동자들의 이익 분점을 인정할 것을 명령하는 것으로 사회의 해체를 선포하는 일일 것이다. 모든 경제학자들은 이를 아주 잘 감지해서, 자신들에게 처음에는 기획으로 다가왔던 것을 주인들에 대한 권고로 바꾸고 말았다. 그런데 임금 수령자가 기업가에 의해 자신에게 남겨질 것만을 이윤으로 취하는 한에서는 그에게 영원한 빈곤을 예상할 수 있다. 이와 다른 형편이 되는 것은 노동 소유자들의 권한에 속하지 않는다.

게다가 일꾼들을 기업가들에게 연합시킨다는, 다른 데서는 아주 칭찬할 만한 관념은 그 전제에서 명백히 그릇된 이 공산주의적 결론을 향한다. 기계의 결론은 사람이 노동을 할 필요 없이 부유하고 행복하게 만든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자연적 매체들이 우리를 위해 모든 것을 해야 하는 마당에 기계는 국가에 속하기 마련이고 진보의 목표는 공동체이다.

나는 공산주의 이론을 논할 자리에서 고찰할 것이다.

그러나 나는 지금부터 이런 유토피아의 추종자들에게, 그들이 기계에 품은 희망은 경제학자들의 환상일 뿐이며, 언제나 그것을 구하지만 줄 수 없는 자에게 요구하므로 발견하지 못하는 영구 운동과 같은 무엇이라고 경고해야 한다고 믿는다. 기계는 홀로 작동하지 않는다. 그 운동을 유지하려면 그 주위에 엄청난 서비스를 조직해야 한다. 그래서 결국 사람은 더 많은 기계에 둘러싸이는 만큼 자신에게 더 많은 용무를 만들게 되어, 기계를 가지고서 하는 일의 큰 문제는 그 산물을 분배하는 것이라기보다는 기계에 먹일 것을 보장하는 것, 즉 끊임없이 원동력을 갱신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 원동력은 공기, 물, 증기, 전기가 아니다. 그것은 노동, 즉 일자리이다.

철도는 그것이 지나는 모든 노선 위에서 바퀴 달린 차량, 여객 마차, 여행용품 판매자, 마구馬具 제조업자, 마차 제작업자, 숙박업자들을 제거한다. 나는 철길의 설치에 뒤이은 순간에 그 사실을 파악한다. 국가가 철도에 의해 밀려난 사업가들을 보전 조치 혹은 보상 원리에 따라 도로의 주인이자 개발자들로 만들어 준다고 가정하자. 내가 가정하기로 운임이 25퍼센트 낮아져서 이 모든 사업가들의 전체 소득이 같은 액수가 감소할 것이고, 이는 말하자면, 전체 차량 운행으로 먹고살던 사람들의 4분의 1이 국가의 아량에도 불구하고 문자 그대로 대책이 없게 될 것이다. 자신들의 결손에 대처하기 위해 그들은 하나의 희망밖에 가지지 않는다. 이는 노선 상으로 행해지는 운송량이 25퍼센트 늘거나 아니면 그들이 다른 산업 범주에서 일자리를 찾는 것이다. 이는 가설 상으로 그리고 사실 상으로 일자리들이 어디서나 차 있고, 어디서나 그 비율이 지켜지며, 공급이 수요를 채우기에 충분하니 우선은 불가능해 보인다.

그렇더라도 운송량이 증가하기를 원한다면 새로운 자극이 다른 산업들에서 노동에 주어질 필요가 있다. 그런데 이 과잉 생산에서 밀려난 노동자들을 고용하고 다양한 노동 범주들에 그들을 배분하는 것이 이론이 처방하는 것처럼 실행하기 쉽다는 것을 인정하더라도 아직은 계산이 틀린다. 왜냐하면 유통 종사 인원은 생산 종사 인원에 대해 100대 1000이라서, 4분의 1만큼 저렴한 유통으로, 다시 말해 4분의 1만큼 더 강력한 유통으로 전과 같은 소득을 올리려면 생산도 4분의 1만큼 보강할 필요가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즉 농업과 공업 병력에 차량 산업의 비례성을 가리키는 숫자인 25가 아니라 250을 더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 결과에 도달하려면 기계를 만들어야 하고, 더 나쁜 일은 사람을 만들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는 문제를 끊임없이 같은 지점으로 가져가는 것이다. 이렇게 모순에 모순이 겹친다. 기계 때문에 사람에게 모자라는 것은 더 이상 노동만이 아니다. 그 수적 미약함과 그 소비의 부족함 때문에 기계에서 부족한 것이 사람이기도 하다. 그래서 일자리의 부족과 일손의 부족, 산물의 부족과 판로의 부족이 모두 균형이 확립되기를 기다리고 있다. 그리고 우리가 철도에 대해 말하는 것은 모든 산업에 대해서도 참이다. 언제나 사람과 기계는 서로를 추구하지만, 사람은 휴식에 도달하지 못하고, 기계는 만족하지 못한다.

그러므로 역학力學의 진보가 어떤 것이든, 뮬 · 제니 방적기, 양말 직조기, 윤전기보다 백배는 더 경이로운 기계들을 발명할 때, 증기보다 백배는 더 강력한 힘을 발견할 때, 인류를 해방시키고 인류에게 여가를 만들어 주고, 모든 물건의 생산을 무료로 해 주기는커녕 노동을 배증하고 인구를 늘리고, 예속 상태를 심각하게 만들고 생활비를 점점 더 비싸게 하고, 명령하고 향유하는 계급을 복종하고 고생하는 계급으로부터 갈라놓는 심연을 파기만 할 것이다.

이제 이 모든 난점들이 극복되었다고 가정하자. 철도에 의해 가용하게 된 노동자들이 기관차의 유지 물자 공급이 요하는 이 서비스 증가에 충분하다고 가정하자. 보상이 분란 없이 행해진다고 할 때 아무도 고통을 겪지 않을 것이다. 정반대로 각자의 행복은 철길에 의해 교통에서 실현된 이득의 일부분만큼 증가할 것이다. 그러니 일이 이런 규칙성과 정확성을 가지고서 진행되지 못하게 누가 막느냐고 사람들은 내게 물을 것이다. 그리고 이처럼 모든 산업적 이행을 진행하는 것보다 똑똑한 정부에게 더 쉬운 일은 무엇인가 하고 물을 것이다.

나는 한편으로 인류가 향해 가는 목표를 보여주기 위해, 또 다른 한편으로는 인류가 거기 도달하기 위해 극복해야할 난점들을 보여주기 위해 그 가설을 있는 대로 멀리 밀고 갔다. 확실히 섭리적 질서는 기계와 관련해서 내가 말해온 방식으로 진보가 완수되는 것이다. 그러나 사회의 행진을 당황스럽게 하고 사회가 나쁜 데서 더 나쁜 데로 가게 하는 것은 바로 사회가 결코 조직되지 않았다는 것이다. 우리는 아직 그 진화의 둘째 국면에밖에 도달하지 못했고 벌써 우리는 우리의 길 위에서 노동 분업과 기계라는, 극복할 수 없어 보이는 두 심연을 만났다. 파편적 노동자가 지적 인간이라면 어떻게 그가 무뎌지지 않게 할까, 그리고 벌써 그가 무뎌졌다면, 어떻게 다시 지적인 생활로 돌아오게 할까? 둘째로, 노동자들 중에 이 이익 연대성을 어떻게 생겨나게 할까? 이 연대성 없이는 산업 진보는 가는 발걸음마다 재앙인데, 이 동일한 노동자들은 노동, 임금, 지성, 자유에 의해, 즉 이기주의에 의해 심각하게 분열되어 있게 된다. 끝으로 완수된 진보가 그 결과로 화해 불가능하게 만든 것을 어떻게 화해시킬까? 공동체에, 그리고 우애에 호소하는 것은 시간이 해결해 주기를 기대하는 것이다. 노동 분업과 기계의 서비스가 만든 것과 같은 창조물들 간에 공통점이 없고 우애는 존재할 수 없다. 적어도 현재와 관련해서 우리가 해결책을 추구해야 할 것은 이 측면에서는 아니다.

그렇다면! 악은 체제보다는 아직은 지성에 더 많으니 교육으로 돌아가서, 인민 교육에 힘쓰자.

교육이 유익하려면, 그것이 받아들여지기라도 할 수 있으려면 무엇보다도 먼저 땅에 씨를 뿌리기 전에 쟁기로 갈아 뒤집어서 엉겅퀴와 잡초를 뽑아내듯이 학생이 자유로울 필요가 있다. 게다가 최상의 교육 체계는 철학과 윤리에 관련해서도 직업 교육 체계일 것이다. 그런데 다시 한 번 말하지만 이 교육을 파편적 분업 그리고 기계들의 서비스와 어떻게 화해시킬까? 자신의 노동 결과에 의해 노예가 된, 즉 가구, 물건이 된 사람이 어떻게 같은 노동으로써, 혹은 같은 동작을 계속해서 인간이 다시 될 것인가? 이런 생각들이 역겹다는 것을, 불가능한 일이겠지만 프롤레타리아가 일정 정도의 지성에 도달할 수 있을 경우에 그는 우선 이를 사회를 혁명하고 공민적, 산업적인 모든 관계들을 바꾸는 데 활용할 것임을 어찌 사람들이 모르겠는가? 그리고 내가 말하는 것은 공허한 과장이 아니다. 노동계급은 파리에서, 그리고 대도시들에서 25년 전보다 그 관념 면에서 훨씬 더 우수하다. 그런데 이 계급이 결연히, 정력적으로 혁명적이지 않은지를 내게 말해주면 좋겠다! 그리고 그 계급은 정의와 질서의 관념을 획득해 감에 따라, 무엇보다 소유권의 메커니즘을 이해해 감에 따라 점점 더 혁명적이 될 것이다.

다시 한 번 나는 어원으로 돌아오는데 대한 허락을 구하는데, 내가 감히 말하자면, 언어는 노동자가 산업에 의해 비인간화된 후에 그 노동자의 정신적 조건을 명확히 표현하는 것으로 여겨진다. 라틴어에서 종살이의 관념은 사람이 물건에 하급화되는 관념을 내포한다. 그리고 나중에 중세의 법이 농노를 봉토에 결속된 것으로 공언한 때, 이는 servus라는 단어의 문자적 의미를 풀어 옮긴 것뿐이다.[17] 그래서 자생적 이성, 운명의 신탁조차 과학이 그 무가치함을 확증하기 전에는 하급 일꾼들을 정죄했다. 그 후에 섭리가 거부한 존재들을 위한 박애주의의 노력은 어떤 것일 수 있는가?

노동은 우리의 자유의 교육이다. 고대인들은 노예의 기예를 자유 기예와 구별했을 때 이 진리의 심오한 뜻을 알았다. 왜냐하면 직업에 따라 관념이 정해지고, 관념에 따라 도덕관념이 정해지기 때문이다. 노예 안의 모든 것은 낮춤의 성격을 띤다. 습관, 취향, 성향, 감정, 쾌락이 다 그렇다. 그 안에는 보편적 전복이 있다. 가난한 계급들의 교육에 매달린다! 그러나 이는 망가진 이 영혼들에 가장 매서운 적개심을 불어넣는 것이다. 이는 그들에게 노동이 그들을 참을 수 없게 한다는 관념, 자신들의 상태의 조야함과 양립 불가능한 감정들, 그들에게 그 감흥이 무뎌진 기쁨들을 불어넣는 것이다. 그러한 기획이 성공한다면 노동자를 사람으로 만드는 대신에 그를 악마로 만들어 놓을 것이다. 그러므로 감옥과 강제 노동 합숙소를 채우는 이 화상畵像들을 조사해서, 그들 대부분이 아름다움, 우아함, 부, 후생, 명예, 과학, 인간의 존엄성을 이루는 모든 것의 묵시가 이들을 너무 약하다고 보아서 이들의 정신을 빼놓고 죽이는 일을 당한 신민臣民들에 속하지 않는지 내게 말해 주기를 바란다.

“적어도 임금을 고정하고 모든 산업에서 업주들과 일꾼들에게 수용되는 요금표를 편찬하는 것이 필요할 것”이라고 가장 용기 없는 이들이 말한다.

이런 평화의 가설을 든 자는 픽스 씨다. 그리고 그는 다음과 같이 의기양양하게 대답한다.

“이 요금표들은 잉글랜드에서, 그리고 다른 곳에서 만들어졌다. 그 값어치를 사람들은 안다. 어디서나 받아들여지자마자 곧바로 위반되었다. 업주들에 의해서도 그리고 일꾼들에 의해서도.”

요금표 유린의 원인들은 쉽게 파악된다. 이는 기계들, 절차들 그리고 산업의 끊임없는 조합들이다. 요금표는 주어진 순간에 합의된다. 그러나 갑자기 새로운 발명이 생겨나 그 작자에게 상품 가격을 낮출 수단을 제공해준다. 다른 기업가들은 무엇을 할 것인가? 그들은 제조를 중단할 것이고, 일꾼들을 내보내든지 아니면 이들에게 임금 삭감을 제안할 것이다. 그들이 임금률을 낮추지 않고 경쟁자들보다 더 저렴하게 생산할 수 있게 해줄 수단이 되는 절차를 발견하기까지 이것이 그들이 취할 유일한 입장이다. 이는 일꾼들의 억압에 맞먹는 일일 것이다.

레옹 포셰 씨는 보상 체계에 이끌리는 것 같다. 그는 이렇게 말한다.

“우리는 어떠한 관심에서든 국가가 일반 의지의 대표자로서 어떤 산업의 희생을 명한다는 것을 의식한다.”―국가는 언제나 각자에게 생산할 자유를 주고, 일체의 침해에 맞서 이 자유를 보호하고 수호하는 순간부터 산업에 명령하는 것으로 여겨진다―“그러나 이야말로 극단적인 조치이고, 언제나 위험한 경험으로서 개인들을 위해 가능한 모든 관리 수단들을 수반해야 하는 것이다. 국가는 시민의 한 계급이 달리 생계 수단을 조달받기 전이나 새로운 산업에서 자신들의 지성과 손발을 활용할 일자리를 찾으리라는 것을 확신하게 되기 전에 이들을 먹여 살리는 일자리를 이 계급에게서 빼앗을 권리가 없다. 문명화된 나라들에서 정부가 공익을 목적으로 하더라도 소유주에게 정당한 사전 보상을 해주어 이해관계를 벗어나게 하지 않는 한에서는, 개별 소유를 취할 수 없다는 것은 원칙이다. 그런데 노동은 우리에게 들판이나 주택과 똑같이 정당하고 신성한 재산으로 보이며, 우리는 어떤 종류의 손실 보상도 없이 이를 수탈하는 것을 이해하지 못한다. …”

“그만큼 우리는 정부를 사회에서 일자리의 보편적 제공자로 나타내는 학설들을 괴상하다고 생각하며, 그만큼 우리는 공익의 이름으로 행해진 일체의 일자리 이동이 보상이나 이전의 수단으로만 행해지는 것, 개인들도 계급들도 국가 이성raison d'état에 희생 제물로 바치지 않는 것이 정당하고도 필요하다고 여긴다. 권력은 제대로 된 민족들에서는 언제나 이 편파적인 고통을 벌충해 주기 위해 제공할 시간과 돈을 가진다. 그리고 정부가 시세를 교란하는 경우에 일종의 복구나 보상을 제공해야할 의무를 지는 것은 바로 산업이 그로부터 나오며, 시민들의 자유롭고 개인적인 의욕에서 생겨나고 발달하기 때문이다.”

이것이 바로 명언이다. 레옹 포셰 씨는 뭐라 말하든 노동의 조직을 요구한다. 일체의 일자리 이동이 보상이나 이행의 수단으로만 행해지게 하고 개인들과 계급들이 결코 국가 이성에, 즉 국가의 최고법인 산업의 진보, 사업체들의 자유에 희생 제물로 바쳐지지 않게 하는 것은 의심할 것 없이 미래가 결정할 방식대로 사회 안의 일자리 제공자이며 임금의 수호자가 형성되는 것이다. 그리고 우리가 여러 번 반복한 것처럼 산업의 진보, 그리고 따라서 사회 안의 분류 제외와 재분류 작업이 계속되듯이, 찾아야할 것은 각각의 혁신에 대한 특정한 이행이 아니라 일반적 원리, 가능한 모든 경우에 적용 가능한, 그리고 스스로 그 효과를 일으키는 이행의 유기적 법칙이다. 레옹 포셰 씨는 이 법을 정식화하고 우리가 기술한 다양한 적대 관계들을 화해시킬 능력이 있는가? 없다. 그는 보상의 관념에 우선적으로 머물기에 말이다. 그는 말한다. 제대로 된 민족들 중에서 권력은 이 편파적 고통을 보상해 줄 시간과 돈을 언제나 가진다. 나는 포셰 씨의 넉넉한 의도에 유감을 품지만, 그 의도들은 내게는 전혀 실행 불가능해 보인다.

권력은 납세자들에게 빼앗는 것 말고 시간과 돈을 가지지 않는다. 조세로 등급 외로 밀려난 산업인들을 보상해 주는 것은 새로운 발명들에 도편 추방을 가하고, 총검으로 공산주의를 하는 것일 것이다. 이는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아니다. 국가에 의한 보상을 더욱 강변하는 것은 쓸데없다. 보상이 포셰 씨의 견해들에 따라 적용된다면, 이는 산업적 독재, 무하마드 알리의 통치 같은 것을 불러오거나 아니면 구빈세, 즉 공허한 위선으로 전락할 것이다. 인류의 행복을 위해서는 보상해 주지 않고 노동이 스스로 자신의 영원한 체제를 추구하게 하는 편이 낫다.

이렇게 말하는 사람들이 있다. 정부는 민간 산업이 설립되지 않고 개별 업체들이 도달하지 못할 지점들에 탈락한 노동자들을 재배치해야 한다. 우리는 재조림을 할 산들, 개간을 할 500~600만 헥타르의 땅, 파야 할 운하, 끝으로 당장의 일반적 용도로 추진할 수천 가지 사업이 있다. 픽스 씨는 이렇게 답변한다.

“우리는 독자 여러분께 용서를 구해 마지않는다. 하지만 아직 우리는 자본을 개입시켜야 한다. 이 땅들은 특정한 공유지를 제외하고는 미개간 상태인데, 이는 개발해 보아야 아무 순소출도 내주지 않을 것이고, 경작 비용도 충당하지 못할 개연성이 아주 높기 때문이다. 이 땅들은 개발에 필요한 자본을 소유하거나 소유하지 못한 지주들에 의해 보유된다. 전자의 지주는 이 땅을 개발하는 경우 최소의 이윤으로 만족할 개연성이 아주 높으며, 그는 사람들이 지대라고 부르는 것을 아마도 포기할 것이다. 그러나 그는 이 경작을 착수하면서 자신의 초기 자본을 상실할 것임을 발견했다. 그리고 다른 계산들이 그에게 보여준 것은 산물의 판매가 경작 비용을 충당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 그래서 모든 것이 제대로 조사되고서 이 땅은 미개간 상태로 남을 것인데, 이는 거기 투하한 자본이 아무 이윤도 내주지 못하고 상실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지 않다면 이 모든 땅들이 곧장 경작되었을 것이다. 저축은 오늘날 다른 방향을 취하며, 반드시 일정 정도는 토지 개발로 향할 것이다. 왜냐하면 자본들은 감정을 가지지 않고, 이해관계를 가지며 언제나 가장 확실하면서 가장 이문이 큰 사용처를 찾아가기 때문이다.”

이 추론은 아주 훌륭한 동기로 행해진 것으로, 카피르인들과 호텐토트인들에게 철도를 보유할 순간이 오지 않은 것과 마찬가지로 프랑스에는 아직 그 황무지를 개발할 순간이 오지 않았다는 말이다. 왜냐하면 제2장에서 말한 것처럼, 사회는 가장 쉽고, 가장 확실하고, 가장 필요하고, 자알 비용이 덜 드는 개발로 시작하기 때문이다. 개발이 비교적 덜 생산적인 것들을 활용해 내기에 이르는 것은 점진적일 뿐이다. 인류가 지표면 위에서 고생해오는 이래로 다른 일을 한 것이 아니다. 인류에게 같은 염려가 언제나 재현되는데, 그것은 발견을 해 가면서도 자기 생계를 보장하는 것이다. 사람들이 말하는 개간이 파멸적인 투기, 빈곤의 원인이 되지 않으려면, 다시 말해 그것이 가능하려면, 우리의 자본과 기계를 더 배가시키고, 새로운 공정을 발견하고, 노동을 더 잘 분화할 필요가 있다. 그런데 그런 조치를 취하도록 정부에 간청하는 것은 폭풍우가 다가오는 것을 보고는 신에게 기도하고 성인을 부르기 시작하는 농민들처럼 행동하는 것이다. 오늘날 거듭해서 말해도 지나치지 않은 것은, 여러 정부들은 신성의 대표자들이라는 것이다. 나는 거의 천상의 복수의 집행자라고도 말했다. 그런 정부는 우리를 위해 아무것도 하지 못한다. 영국 정부가 예를 들어서 강제 노동 수용소에 피난한 불행한 이들에게 일자리를 제공할 줄 아는가? 그리고 그 정부가 그럴 줄 알 때, 감히 그렇게 할 것인가? 스스로 도우면, 하늘이 그대를 도우리라! 신을 향한 대중의 불신의 이 표명은 우리에게 또한 우리가 권력으로부터 기대할 것을 말해준다. 그것은 아무것도 없는 것이다.

우리가 갈바리아[18]의 두 번째 쉼터에 도달해 쓸데없는 사색에 몰두하기보다 운명의 가르침에 더 주의를 기울이자. 우리의 자유의 담보는 우리의 천벌의 진행에 있다.

제5장 제3기경쟁

노동 분업이라는 백 개의 아가리를 가진 히드라와, 기계라는 길들여지지 않는 용 사이에서 인류는 어찌 될 것인가? 한 예언자가 2000년 전에 이렇게 말했다. 사탄이 희생 제물을 바라보고, 전쟁이 불이 붙었다. 노려보시면 민족들이 떠네(Aspexit gentes, etdissolvit). 기근과 페스트라는 두 도리깨로부터 우리를 보전하기 위해 섭리는 우리에게 불화를 보내준다.

경쟁은 이성의 이율배반들의 반半 지성이 궤변술을 낳아 거짓과 참의 성격들이 혼동되고 교리들 대신에 정신의 속이는 싸움들밖에 없는 이 철학의 시대를 나타낸다. 이처럼 산업 운동은 형이상학적 운동을 충실히 재현한다. 사회경제학의 역사는 철학자들의 저술 안에서 아주 온전하다. 항의하는 자들에게서처럼 믿는 자들에게서 판단력을 빼놓는 것이 가장 두드러진 특성인 이 흥미로운 국면을 공부해보자.

. 경쟁의 필요성

루이 레이보(Louis Reybaud) 씨는 직업상 소설가이고 때에 따라서는 경제학자인 사람으로, 그의 반개혁주의적 묘사들로 도덕 및 정치 과학 아카데미에서 자격을 인정받았으며, 시간이 흐름에 따라 사회적 관념들에 가장 반감을 가진 작가들 중 한 사람이 되었는데, 이 루이 레이보 씨는 그가 무엇을 하든 그렇다고 해서 바로 이 관념들에 깊이 세례 받지 않은 것은 아니다. 그가 터뜨리는 반대는 그의 가슴에도 그의 정신에도 있지 않고, 사실들에 있다.

레이보 씨는 『현대의 개혁자들에 관한 연구Études sur les Réformateurs contemporaines』에서, 감성의 폭발로 세상을 개혁할 수 있다고 믿은 그 학파의 창시자들의 용기만큼이나 사회적 비애의 광경에도 마음이 동요되어, 그들의 모든 체계에서 솟아나는 것은 조합l'association이라는 견해를 단호히 표명했다. 뒤누아예 씨는 레이보 씨에 대한 심판들 중 한 사람으로서 그에게 이런 증언을 해주었다. 이는 레이보 씨에게는 그 모양이 가볍게 풍자적인 만큼 더욱 아부를 하는 것이다.

“레이보 씨는 프랑스 학술원이 상을 내린 책에서 개혁주의의 주요한 세 체계의 해악들을 아주 정당하고 재능 있게 해설한 분으로, 그 체계들에 공통되고 기초가 되는 원리로서 조합이 좋다고 본다. 조합은 그가 보기에는 현대의 가장 큰 문제라고 선언한다. 그는 그것이 노동의 과실의 분배 문제를 풀도록 요청을 받는다고 말한다. 그렇다. 이 문제의 해결을 위해 권위는 아무것도 할 수 없고, 조합은 뭐든지 할 수 있을 것이다. 레이보 씨는 여기서 팔랑스테르의 작가처럼 말한다. …”

레이보 씨는 누구나 알 수 있듯이 조금 앞섰다. 낭떠러지를 알아차리지 못하기에는 너무 상식과 성실성을 타고나서 곧 그는 자신이 길을 잃었음을 느꼈고, 후퇴하기 시작했다. 나는 이 돌변을 범죄로 몰지 않는다. 레이보 씨는 부당함이 없이는 자신의 비유에 대해 책임지게 만들 수 없는 사람들 중 하나다. 그는 성찰하기 전에 말했으며, 물러섰다. 그보다 더 자연스러운 것이 있는가! 사회주의자들이 누군가를 공격해야 했다면, 이는 뒤누아예 씨다. 그는 이 이상한 찬사로 레이보 씨의 배교 선언을 촉발한 것이다.

뒤누아예 씨는 자신의 말이 헛수고가 아니었음을 즉시 알아챘다. “『개혁자들에 관한 연구』 제2판에서 레이보 씨는 자신의 표현들이 절대적인 것으로 제시할 수 있었던 것을 스스로 완화했다고 선량한 원칙에 영광을 돌리며 말했다. 그는 뭐든 할 수 있을 것이라 말하는 대신 많은 것을 할 수 있을 것이라 말했다.”

이는 뒤누아예 씨가 아주 잘 주목하게 했듯이 중요한 변경 사항이다. 하지만, 그래도 레이보 씨가 동시에 다음과 같이 쓰는 것은 여전히 가능했다. “이 징후들은 심각하다. 이것들을 노동이 자신에게 결여된 균형과 규칙성을 그 안에서 추구하는 혼동된 조직에 대한 예후로 간주할 수 있다. … 이 모든 노력의 근저에는 조합이라는 하나의 원리가 숨어있다. 이 조합을 불규칙적인 발현에 대해서 정죄하면 잘못하는 것이 된다.”

끝으로 레이보 씨는 스스로를 경쟁의 지지자라고 소리 높여 공언했다. 말하자면 그는 조합 원리를 결연히 포기했다. 왜냐하면 조합이라는 것을 상법전에서 정한 회사 형태들로, 트롤롱(Troplong) 씨와 들랑즐(Delangle) 씨가 우리에게 간략히 그 철학을 전해준 그런 것들로만 이해해야 한다면, 사회주의자들을 경제학자들과 구분할 필요, 조합을 추구하는 당파와 조합이 존재한다고 주장하는 당파를 구분할 필요가 더 이상 없기 때문이다.

레이보 씨가 자신이 아직 명확한 관념을 갖지 못한 듯한 문제에 대해 예, 아니오를 아무 생각 없이 말하게 되었다고 해서, 내가 그를 이 사회주의의 투기자들 중 하나로 분류한다고 상상하지 말기 바란다. 세상에 신비화를 일으킨 후에 곧바로 관념은 공공 영역에 속하므로 세상이 자기 길을 가게 하는 것밖에 더 이상할 것이 없다는 핑계로 후퇴하기 시작하는 그런 사람들 말이다. 레이보 씨는 내가 보기에는 오히려 바보들의 범주에 속한다. 그 중에는 정직한 사람들도 많고 정신이 훌륭한 사람들도 많다. 그러므로 레이보 씨는 내가 볼 때는 말할 줄 아는 정직한 사람(vir probus dicendi peritus), 양심적이고 능숙한 작가로서 잘 놀랄 수 있지만, 자기가 보고 느낀 것 말고는 결코 표현하지 않는다. 게다가 레이보 씨는 경제적 관념의 영역에 일단 자리를 잡아 지성에서 더 많은 명확성을, 그리고 추론에서 더 많은 적확성을 가진 만큼 스스로 덜 일관적일 수 있었다. 나는 독자에게 이 신기한 경험을 하도록 하려 한다.

내 말을 레이보 씨에게 들려줄 수 있다면 나는 그에게 이렇게 말할 것이다. ‘경쟁을 편드시오. 선생은 틀릴 것이오. 경쟁에 반대하는 편을 드시오. 선생은 그래도 틀릴 것이오. 이는 선생이 선생 책의 초판에서도 제4판에서도 실패하지 않았다고 확신하고 지적인 방식으로 선생의 감정을 정식화하는 데 성공한다면 나는 선생을 튀르고와 아담 스미스만큼의 천재적인 경제학자로 칠 것이오. 하지만 그렇게 되면 선생은 선생이 물론 잘 모르는 스미스와 닮은 셈일 것이며, 선생이 평등주의자일 것이라고 선생에게 경고하오! 내기를 하겠소?’

레이보 씨에게 자신과의 이런 종류의 화해를 하게끔 더 잘 준비시켜 주도록, 우선 내 입장과 아주 다르게 해로운 신랄함으로 그를 비난하는 까닭인 이 판단의 표변은 작가의 배신이 아니라 그가 그 통역자 역할을 했던 사실들의 배신이라는 것을 그에게 보여주자.

1844년 3월 레이보 씨는 착유성 씨 식물들에 관해서 한 논문을 썼는데, 이는 그의 고향인 마르세유 시에서 관심을 둔 주제이다. 거기서 그는 자유 경쟁에 관한, 그리고 참깨 기름에 관한 견해를 열띠게 표명했다. 저자가 수집한, 공신력 있는 것 같은 정보에 따르면, 참깨는 45에서 46퍼센트 착유가 되는 반면, 양귀비와 유채는 25에서 30퍼센트밖에 안 되고, 올리브는 20에서 22퍼센트밖에 안 된다. 이런 이유로 참깨는 북부의 제조업자들에게 못마땅해서 이들은 금지를 요구했고, 이를 얻어냈다. 그렇지만 영국인들은 기회를 노려서 이 귀중한 상업 분야를 빼앗을 준비를 하고 있다. 그 종자식물을 금지하면 기름은 비누에 섞여서, 혹은 다른 온갖 방법으로 우리에게 되돌아오리라고 레이보 씨는 말한다. 그러면 우리는 제조의 이득을 상실할 것이다. 게다가 우리의 해운업의 이익은 이 상업의 보호를 요구한다. 자그마치 4만 톤의 참깨가 관련된다. 이는 배 300척과 선원 3000명의 항해 장비를 가정하는 것이다.

이 사실들은 결론적이다. 25퍼센트가 아닌 45퍼센트의 기름. 이는 프랑스의 모든 기름보다 우월한 품질이다. 제1차적 필요 물품의 가격 인하, 소비자들, 배 300척과 선원 3000명을 위한 경제. 이것이야말로 상업의 자유가 우리에게 가질 가치이다. 그러므로 경쟁과 참깨 만세다!

그리고 이 빛나는 결과들을 더 잘 보장하기 위해 레이보 씨는 애국심에 이끌려 자기 생각을 곧장 추구하며, 우리가 보기엔 아주 현명하게도 정부는 운송을 위한 일체의 상호 조약을 이제부터 삼가야할 것이라고 관찰한다. 그는 프랑스 해운업이 프랑스의 상업 수출만큼 많은 수입을 행할 것을 요구한다. 그는 이렇게 말한다. “우리가 호혜성réciprocité이라고 이름 붙이는 것은 그 장점이 항해 비용이 더 낮은 측의 장점으로 남는 순전한 허구라고 그는 말한다. 그런데 프랑스에서 항해의 요소들, 선박의 구입, 선원 임금, 무기와 보급품 비용이 과도한 비율로, 다른 해양 민족들의 그것보다 높은 비율로 오르므로, 일체의 상호 조약은 우리에게는 포기의 조약에 상당한다는 것, 상호적 의견 일치의 행위에 찬성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알게 모르게 희생을 체념하는 것이 된다.” 여기서 레이보 씨는 호혜성의 재앙적 결과들을 부각시킨다. “프랑스는 50만 꾸러미[19]의 면화를 소비하며, 이를 우리의 부두에 가져오는 것은 미국인들이다. 프랑스는 엄청난 양의 기름을 사용하며, 그 운송을 행하는 것은 영국인들이다. 스웨덴 사람들과 노르웨이 사람들은 스스로 우리에게 철과 목재를 실어 온다. 홀란드인들은 치즈를 실어 온다. 러시아인들은 삼과 밀을 실어 온다. 제노바인들은 쌀을 실어 오고, 스페인 사람들은 기름을 실어 오고, 시칠리아 사람들은 유황을 실어 오고, 그리스인과 아르메니아인들은 지중해와 흑해의 온갖 물품을 실어 온다.”

명백히 그런 사정은 참을 수 없는 것이다. 왜냐하면 이는 우리의 상업 해운을 쓸모없게 만들고 말기 때문이다. 그러니 외국의 항해 운임이 낮아서 우리가 배제되는 경향이 있는 해양 작업장으로 서둘러 다시 들어가자. 외국 배들에 대해 우리 항구를 닫아걸자. 아니면 적어도 높은 세금을 매기자. 그렇게 하여 경쟁과 경쟁 해운업들을 타도하자!

레이보 씨는 경제학과 사회주의 사이에서 갈팔질팡하는 것이 그가 믿는 것보다 훨씬 더 무죄함을 이해하기 시작하는가? 자기의 놀란 의식을 진정시켜 준 데 대해 그는 내게 얼마나 감사해야 하겠는가!

레이보 씨가 아주 통렬히 불평하는 호혜성은 상업적 자유의 한 형태일 뿐이다. 거래의 자유를 충만하고 온전하게 만들어 보라. 그러면 우리의 깃발은 해수면에서 쫓겨난다. 우리의 기름이 대륙에서 그렇게 되는 것처럼 말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기름을 계속해서 우리 스스로 제조한다면 기름 값을 더 비싸게 지불할 것이고, 우리가 식민지 물품을 운송하기를 원한다면 그 값을 더 비싸게 지불할 것이다. 저가를 달성하려면 우리의 기름을 포기한 후에 우리의 해운업을 포기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연이어서 우리의 나사羅絲, 우리의 포목, 우리의 인도사라사, 우리의 철을 포기하는 것도 그만한 값어치가 있을 것이다. 그리고 고립된 산업이 반드시 너무 비싸게 비용이 들기 때문에, 우리의 포도주, 우리의 밀, 우리의 사료도 포기해야 한다! 특권이든 자유든 당신이 어느 편을 선택하든, 당신은 불가능한 것, 터무니없는 것에 도달한다.

물론 타협의 원리가 존재한다. 그러나 가장 완벽한 독재에서 나오는 것이 아닌 한 이 원리는 자유 자체보다 우월한 법칙에서 도출되어야 한다. 그런데 아무도 아직 정의하지 않은 것, 경제학자들이 진정으로 과학을 한다면 그들에게 내가 묻는 것이 이 법칙이다. 왜냐하면 나는 최상의 진심으로 세상의 모든 정신을 가지고 자유와 독점을 15행의 간격을 두고 번갈아 가며 설파하는 사람을 학자로 평할 수 없기 때문이다.

직접적, 직관적 증거에서 경쟁이 경쟁을 파괴한다는 것은 명백하지 않은가? 기하학에서 이보다 더 확실하고 더 항변의 여지가 없는 정리가 있는가? 그러므로 어떤 조건에서, 어떤 의미에서 자기 자신의 부정인 원리가 과학에 들어갈 수 있는가? 그것이 어떻게 사회의 유기적 법칙이 될 수 있는가? 경쟁이 필요하다면, 그것이 그 학파가 말하듯이 생산의 전제 조건이라면 그것은 어떻게 그토록 파괴적이 되는가? 그리고 그것의 가장 확실한 효과가 그것이 끌어들인 것들을 잃는 것이라면 그것이 어떻게 유익하게 되는가? 왜냐하면, 그것들을 따라 진행해 가는 폐단들이 그것이 가져다주는 선과 마찬가지로 사람의 행동에서 유래하는 우발 사태들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것들은 논리적으로 원리로부터 도출된다. 그리고 같은 자격으로 서로 마주보며 존속한다.

그리고 우선 경쟁은 다른 형태로 돌아온 분업 자체, 아니 그 제곱으로 높아진 분업이니, 분업과 마찬가지로 노동에 필수적이다. 그 분업은 집단적 힘에 적합하고 따라서 노동자의 인성을 작업장에 흡수시키는 경제적 진화의 제1기와는 더 이상 같지 않고, 노동의 각 세부 분과를 사람이 자신의 힘과 독립성을 가지고 위치하는 주권국처럼 만들어 자유를 탄생시키는 그런 분업이라고 나는 말한다. 경쟁은 한마디로 분업 내의, 그리고 분화된 모든 부분들 내의 자유이다. 그것은 가장 포괄적인 기능들에서 출발해서 파편적 노동의 하급 작업들에서까지 실현되는 경향을 띤다.

여기서 공산주의자들은 반론을 제기한다. 모든 사물에서 이용과 남용을 구분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유익하고 칭찬할 만하고 도덕적인 경쟁, 마음과 생각을 키워주는 경쟁, 고귀하고 관대한 경쟁이 있다. 이는 경쟁심이다. 그리고 이 경쟁심이 왜 모두의 이익을 목표로 삼지 않을 것인가? … 다른 경쟁, 치명적이고 부도덕하고 비사교적인 경쟁이 있다. 미워하고 죽이는 질투하는 경쟁, 이는 이기심이다.

공동체는 위와 같이 말한다. 잡지 「개혁Réforme」은 약 1년 전에 사시社是를 공표하면서 위와 같은 견해를 표명했다.

근본적으로 나와 생각이 같은 사람들에게 반대를 하는 데 내가 어떤 거리낌을 느끼더라도 나는 그러한 변증법을 받아들일 수 없다. 「개혁」지는 실재적이기보다는 문법적인 구분을 통해 모든 것을 화해시킨다고 믿으면서 의심 없이 중용, 즉 가장 나쁜 종류의 외교를 했다. 그의 논지는 정확히 노동 분업에 관한 로시 씨의 논지와 같다. 그것은 경쟁과 도덕을 대립시켜 하나를 다른 하나로써 제한하는 방식으로 그 둘을 제한하는 것이다. 이는 로시 씨가 도덕으로써 경제적 귀납들을 멈추고 제약해서, 필요와 상황에 따라 여기서는 쪼개고, 저기서는 재단하노라고 주장한 것과 같다. 나는 로시 씨에게 이 단순한 질문을 던져 그를 반박했다. 과학이 자기 자신과 불일치하는 것, 부의 과학과 의무의 과학이 불일치하는 것이 어떻게 가능할 수 있는가? 마찬가지로 나는 공산주의자들에게 묻는다. 그 발달이 가시적으로 유익한 원리가 어떻게 동시에 치명적일 수 있는가?

사람들은 이렇게 말한다. 경쟁심은 경쟁이 아니다. 나는 우선 이 구분이라고 하는 것이 그 원리의 일탈적 효과들에만 해당한다고 관찰한다. 이는 사람들이 혼동한 두 원리가 존재한다고 믿도록 만든 것이다. 경쟁심은 경쟁 자체 말고 다른 것이 아니다. 그리고 사람들이 추상적인 세계에 투신했으니 나도 자진해서 그것에 가담할 것이다. 목적 없는 열정적 용솟음이 없듯이 목표 없는 경쟁심은 없다. 그리고 모든 열정의 목적이 필연적으로 열정 자체와 유사해서, 연인에게는 여인, 야심가에게는 권력, 수전노에게는 금, 시인에게는 계관桂冠이 그러하듯 산업적 경쟁심의 목표는 필연적으로 이윤이다.

아니다. 노동자의 경쟁심의 목표는 일반 이익, 우애, 사랑이어야 한다고 공산주의자가 답한다.

그러나 이 순간에 문제로 삼는 사적 인간에 멈추는 대신 누구나 집단적 인간에만 몰두하려고 하니, 사회 자체를 말하자면, 사회는 부를 목표로 해서만 일한다고 나는 말한다. 안락, 행복은 사회의 유일한 목적이다. 그러므로 결국 사회는 인간이니, 온 인류는 각 사람 안에서 살아가니, 사회에 대해서 참인 것이 개인에 대해서도 어찌 참이지 않겠는가? 경쟁심의 직접 목적은 산업에서는 인적인 행복인데, 특히 일반적 행복이 인적 행복 없이는 아무것도 아니고 인적 행복으로부터만 결과적으로 나올 경우, 이 인적 행복이라는 경쟁심의 목표를 사림들이 일반적 행복이라고 부르는 이 요원하고 거의 형이상학적인 동기로 어떻게 대체하겠는가?

공산주의자들은 일반적으로 이상한 환상을 품는다. 이들은 권력의 열광자들이어서, 그들이 일종의 회귀를 통해 이 부를 창조한 노동자의 행복을 결과로 만들겠다고 주장하는 것은 중앙의 힘으로부터, 그리고 관련된 구체적인 경우에서는 집단적 부로부터이다. 마치 개인이 사회에 대해 사후적으로 존재하지, 사회가 그 개인에 대해 사후적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닌 듯이 말이다. 게다가 이 경우는 사회주의자들이 자신들도 모르게 자신들이 항거하는 체제의 전통에 지배받는 것을 우리가 보게 될 유일한 경우는 아니다.

그러나 무엇을 강조할 필요가 있는가? 공산주의자가 사물의 이름들, 사물의 정명(正名, vera rerum vocabula)을 바꾼 이래로, 그는 자신의 무능을 암묵적으로 실토하고 혐의를 벗는다. 이는 내가 공산주의자에게 대답의 전부로 다음과 같이 말하게 될 이유이다. 경쟁을 부인함으로써 당신은 논제를 포기한다. 이제부터 당신은 논의에서 대수롭지 않다. 언젠가 우리는 인간이 어느 수준까지 모두의 이익을 위해 희생해야 하는지를 탐구할 것이다. 지금 당장은 경쟁의 문제를 해결하는 것, 즉 이기심의 가장 높은 만족과 사회적 필요를 조화시키는 것이 중요하다. 우리에게 당신들의 도덕성은 은혜를 내려 주시오.

경쟁은 가치의 구성에, 즉 분배의 원리 자체에, 그리고 따라서 평등의 도래에 필요하다. 하나의 산물이 유일한 제조자에 의해서밖에 제공되지 않는 한, 이 산물의 실질 가치는 신비로 남는다. 생산의 몫을 숨기기 때문이건, 원가를 그 극단적 한계로 낮추는 데 대한 태만 혹은 무능 때문이건 그렇다. 이처럼 생산의 특권은 사회에는 실질적 손해이다. 그리고 노동자들의 경쟁으로서 산업의 공개성은 필요하다. 상상되며 상상 가능한 일체의 유토피아는 이 법칙에서 벗어날 수 없다.

확실히 나는 노동과 임금이 보장될 수 있고 보장되어야 한다는 것을 부정하기를 삼간다. 나는 심지어 이런 보장이 이루어질 시대가 멀지 않다는 희망을 품는다. 그러나 나는, 임금의 보장은 가치의 정확한 지식 없이는 불가능하며, 이 가치는 경쟁에 의해서밖에 발견될 수 없으며, 공산주의 기관들이나 인민의 명령에 의해서는 결코 발견될 수 없다고 주장한다. 왜냐하면, 입법자와 시민들의 의지보다 더 강력한 무언가가 여기 있기 때문이다. 사람이 자신을 향한 일체의 책임에서 면제될 때부터 자신의 의무를 다한다는 것은 절대 불가능하다. 그런데 자신을 향한 책임은 노동에 관해 필연적으로 타인들에 대한 경쟁을 내포한다. 1847년 1월 1일부터 노동과 임금이 모든 이에게 보장된다고 명령해보라. 곧바로 엄청난 이완이 산업의 열띤 긴장을 계승할 것이다. 실질 가치는 명목 가치 아래로 급속히 떨어질 것이다. 주화는 그 초상화와 인장에도 불구하고 명령 화폐assignats의 운명을 겪에 될 것이다. 상인은 덜 양도하는 대가로 더 많은 것을 요구할 것이며, 우리는 경쟁이 아직 3회전에 불과한 빈곤의 지옥 안에서 더 깊숙한 곳에 있는 방을 재발견할 것이다.

어떤 사회주의자들과 함께 노동의 매력이 언젠가는 이윤을 얻으려는 복심 없이 경쟁심에 양분으로 소용될 수 있다는 것을 내가 인정할 때, 우리가 연구하는 국면에서 이 유토피아가 무슨 쓸모가 있을 수 있을까? 우리는 아직 경제적 진화의 제3시대, 노동 구성의 세 번째 시대, 즉 노동이 매력적이라는 것이 불가능한 시기에 처해 있다. 왜냐하면 노동의 매력은 노동자의 고도의 신체적, 정신적, 지적 발달의 결과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발달 자체, 산업에 의한 인류의 이 교육은 바로 우리가 사회경제의 모순들을 가로질러 추구하는 목적이다. 그러니 노동의 매력이 아직은 우리에게 목표이자 종말인 마당에 어떻게 우리에게 원리와 지렛대로 소용될 수 있을까?

하지만 노동이 생명, 지성, 그리고 자유의 최고의 발현으로서 그 자체로 매력을 지닌다는 것이 의심할 바 없다 해도, 나는 이 매력이 이용의 동기와 완벽히 분리될 수 있으며, 따라서 이기심의 회귀와 분리될 수 있다는 것을 결단코 부정한다. 내가 양식을 위한 양식, 사랑을 위한 사랑, 예술을 위한 예술을 부정하는 것처럼 노동을 위한 노동을 부정한다는 말이다. 양식을 위한 양식은 오늘날 날림 문학을 낳았고, 생각 없는 즉흥물을 낳았다. 사랑을 위한 사랑은 남색, 자위, 성매매를 일으킨다. 예술을 위한 예술은 중국산 골동품, 만화, 추남 숭배를 불러온다. 사람이 노동에서 행함의 즐거움 이상을 추구하지 않을 때, 그는 곧 노동을 중단하고 논다. 역사는 이 타락을 증언해주는 사실들로 가득하다. 그리스인들의 경기, 이스트미아 경기, 올림픽 경기, 델포이 경기, 네메아 경기 같은 것들은, 노예들이 모든 것을 생산하던 사회의 행사들이다. 스파르타인들과 고대 크레타인들의 삶이 그들의 모범이었다. 체육장, 격투기장, 타원 경마장, 그리고 아고라 광장의 선동이 아테네인들에게 있었다. 플라톤이 자신의 공화국에서 전사들에게 할당한 일거리들이고 그 시대의 취미를 드러내줄 뿐인 것이다. 끝으로 우리의 봉건 사회에는 기마창 시합과 기마전이 있다. 이 모든 발명품들과, 팔라메데스의 트로이 포위 때 발명되었다고 하는 체스 게임에서부터 그랭고뇌르(Gringonneur)가 샤를 6세를 위해 그린 카드[20]까지 내가 침묵한 채 지나치는 다른 많은 발명품들이, 노동에서 진지한 쓸모의 동기를 제거하면서부터 노동이 어떻게 되는지에 대한 예시들이다. 노동, 참된 노동, 부를 생산하고 과학을 제공해주는 노동은 오랫동안 열정의 벗이고, 그 본성상 변덕스럽고 표변하고 무질서하기에는 너무 규칙과 안내, 그리고 희생을 필요로 한다. 이는 전적으로 쾌락과 향유, 즉 신비와 감정이 되기에는 너무 고상하고 너무 이상적이고 너무 철학적인 그 무엇이다. 사람을 짐승과 구별해주는 노동할 능력은 이성의 가장 깊은 바닥에 그 근원을 둔다. 그것이 어떻게 우리에게서 생명의 단순한 발현, 우리 분별력의 탐욕적 행위가 될 것인가?

지금 누가 우리 본성의 변형이라는 가설, 역사적 선례도 없고 오늘날까지 아무도 그에 대한 관념을 표현하지도 않은 그 가설에 탐닉한다면, 이는 그 가설을 옹호하는 자들에게도 분간이 안 가는 꿈, 진보의 전도, 경제학의 가장 확실한 법칙들에 주어지는 반증에 불과하다. 그리고 대답할 것이라고는 내가 그것을 논의에서 제쳐둔다는 것뿐이다.

사실만이 의미를 가지고 우리에게 소용이 될 수 있으니 사실 안에 머물러 있도록 하자. 프랑스 혁명은 정치적 자유를 위해서만큼이나 산업적 자유를 위해서 행해졌다. 그리고 프랑스가 1789년에 그 실현을 요구한 원리의 모든 결과들을 결코 알아차리지는 못했어도 그 맹세에서도 그 기대에서도 틀리지 않았다는 것을 소리 높여 말하도록 하자. 누구든 이를 부인하려고 하는 자라면, 내가 보기에 그는 비판의 권리를 상실할 것이다. 나는 원리상 2500만 명의 자생적인 오류를 내세우는 적수와는 결코 논쟁하지 않을 것이다.

18세기 말에 프랑스는 특권들에 지쳐서 어떤 대가를 치르고서라도 단체들의 무감각을 흔들어 깨우고 일꾼에게 자유를 주어 그의 존엄성을 높이고자 했다. 어디서나 노동을 해방하고, 천재를 자극하고, 산업인에게 1000명의 경쟁자들을 불러일으키고 그 혼자 자신의 나약함, 무지, 악의의 결과들을 짊어지게 해서 산업인을 책임성 있게 할 필요가 있었다. 1789년 이전부터 프랑스는 그 이행을 위해 성숙했다. 첫 번째 통과를 행한 영과를 누린 것은 튀르고였다.

그렇다면, 경쟁이 사회경제의 원리, 운명의 명령, 인간 영혼의 필요가 아니었다면, 왜 기업들, 장인 직분, 동업 조합 간부 직분을 폐하는 대신 그 모두를 복구하려 하지 않았나? 왜 혁명 대신에 개혁으로 만족하지 않는가? 변경으로 충분할 수 있었다면 왜 이런 부정을 했는가? 이 중도파가 완전히 부르주아지가 공감한 보수적 관념의 방향에 있었던 만큼 더욱 그렇지 않은가? 경쟁의 원리에 관해서는 중용의 체제, 반혁명적 관념을 대표한다는 것을 스스로 의심하지 않는 공산주의, 준사회주의적 민주주의가 민족의 다수가 선택한 혁명을 내게 설명할 수 있다면 설명해주기 바란다!

사태가 이론을 확증해 주었음을 덧붙여라. 튀르고 재상에서부터 활동과 행복의 증대가 민족 내에서 발현되기 시작했다. 역시 판단 기준은 아주 결정적이어서 모든 입법자들의 동의를 획득한 것 같았다. 산업과 상업의 자유는 우리의 헌법에서 정치적 자유와 같은 반열에 등장한다. 결국 60년 전부터 프랑스가 부의 진보를 이루는 데 덕을 본 것은 이 자유에서이다.

이 중대한, 그리고 아주 의기양양하게 경쟁의 필요성을 확립하는 사실에 이어 나는 서너 가지 다른 사실들, 일반성은 덜하면서 내가 옹호하는 원리의 영향을 더 잘 부각시킬 사실들을 인용해도 좋다는 허락을 구한다.

왜 농업은 우리들 중에서 그렇게 경이롭게도 뒤쳐졌는가? 아주 다수의 지방에서 민족적 노동의 이 중요한 분야에서 일상 관행과 야만성이 아직도 배회하는 것은 어디서 연유하는가? 인용할 수 있을 수많은 원인들 중에 나는 첫째로 경쟁의 결여를 본다. 농민들은 땅의 조각들을 서로 빼앗는다. 그들은 공증인 사무실에서 서로 경쟁한다. 들판에서는 하지 않는다. 그리고 그들에게 경쟁심, 공익을 말해 보라. 당신이 그들을 얼마나 놀라게 하는지! 국왕(그들에게 국왕은 국가, 공익, 사회와 동의어이다), 국왕이 자기 업무를 하고 우리는 우리 일을 할 것이라고 그들은 말한다! 바로 이것이 그들의 철학이고 그들의 애국심이다. 아! 국왕이 그들에게 경쟁자들을 불러일으킬 수 있다면! 유감스럽게도 이는 불가능하다. 산업에서는 경쟁이 자유와 재산으로부터 나오는 반면, 농업에서는 자유와 재산은 경쟁에 대한 직접적 장애물이다. 농민은 자신의 노동과 지성에 따라 보수를 받는 것이 아니라 토지의 질과 신의 호의에 따라 보수를 받아서, 경작할 때 임금을 최소로 지불하고, 선투자를 가능한 한 최소로 하는 것만 유념한다. 언제나 자기 식량들의 판로를 찾는 데 대한 확신을 가져서 그가 구하는 것은 토양의 개선과 산물의 품질보다는 자신의 비용 절감이다. 그는 파종을 하고 섭리가 나머지를 한다. 농업 계급이 아는 유일한 경쟁의 종류는 임대차 경쟁이다. 그리고 프랑스에서, 예를 들어 보스Beauce에서 그것이 유익한 결과를 가져온 것을 부정할 수 없다. 그러나 이 경쟁의 원리는 말하자면 간접적인 것으로서 경작자들의 자유와 재산권으로부터 직접 나오는 것이 아니므로, 이 경쟁은 그것을 유발한 원인과 더불어 사라져서 몇 개 지방에서 농업의 퇴화를 확인하려면, 아니면 적어도 그 진보를 멈추려면 아마도 차지농들을 지주로 만드는 것으로 충분할 것이다.

최근 몇 년간 열띤 논쟁을 일으킨 또 다른 집단적 노동의 분야는 공공 건설에 관련된 분야이다. 뒤누아예 씨가 아주 잘 말한다. “도로 건설을 지휘하기 위해서는 아마도 퐁제쇼세Ponts et Chaussées 학교를 갓 졸업한 엔지니어보다는 공병과 마부가 더 낫겠다.” 이 언급의 적확성을 입증할 기회를 가진 사람은 아무도 없다.

우리의 가장 아름다운 강들 중 하나가 그 수운의 중요성 때문에 유명한데, 거기에 다리를 건설하게 되었다. 공사를 시작할 때부터 강 사람들은 아치들이 너무 낮아서 수량이 증가하면 배가 통과할 수 없다는 것을 알아챘다. 그들은 공사 지휘를 맡은 엔지니어에게 그들이 관찰한 것을 말했다. 이 엔지니어는 대단한 존엄을 가지고서 이렇게 대답했다. ‘다리들은 위로 지나는 이들을 위해 만든 것이지 아래로 지나는 이들을 위해 만든 것이 아니오.’ 그 말은 나라 안에서 유명하다. 하지만 어리석음이 끝까지 옳은 것이 되기는 불가능하므로, 정부는 그 기관원의 과업을 재고할 필요를 느꼈고, 내가 이 글을 쓰는 순간에 다리의 아치들을 높이고 있다. 항로를 통과해 가는 데 관심 있는 상인들이 그 사업을 맡았더라면, 그들이 자신들에게 위험이 초래되는 것을 무릅쓰며 두 번을 재검토했을 것이라 믿겠는가? 퐁제쇼세의 젊은 학자들이 맡아서 한 같은 종류의 걸작품들로 책을 한 권 쓸 수 있겠다. 학교를 졸업하자마자 정년 보장을 받아 그들은 더는 경쟁에 의한 자극을 받지 않는다.

국가의 산업 역량의 증거로, 따라서 어디서나 경쟁을 폐지할 가능성의 증거로 연초煙草 행정을 들 수 있다. 거기서는 복잡한 것도 없고, 소송도 없고, 파산도 없고, 빈곤도 없다고들 말한다. 일꾼들은 보수를 충분히 받고, 교육 수준이 높고, 종교 설법을 듣고, 도덕을 갖추고, 저축으로 은퇴 후의 생활을 보장받은 자들로서 자유 산업이 고용하는 엄청난 대다수 일꾼들의 상태와는 비교도 안 되게 더 좋은 상태에 있다.

이 모든 것이 참일 수 있다. 나는 이를 모른다. 나는 연초 행정에서 일어나는 일에 관해 아무것도 모른다. 나는 지배인들로부터도 일꾼들로부터도 정보를 얻지 못했으며, 그럴 필요도 없다. 연초국에서 판매하는 담뱃값이 얼마인가? 얼마의 가치가 있는가? 당신은 이 질문 중 첫째 것에 답할 수 있다. 그러려면 처음 나오는 담배 가게에 들어가 보면 된다. 하지만 비교항이 없기 때문에, 여러 실험을 통해 담배 공사의 원가를 감독하는 것이 금지되고, 따라서 그 원가를 수용하는 것이 불가능하기 때문에 둘째 질문에 대해서는 당신은 내게 아무것도 말해 줄 수가 없다. 그러므로 독점으로 설립된 담배 사업은 반드시 사회에 수입을 가져다주는 것보다 더 많은 비용을 초래한다. 이는 자신의 산물로 생존하는 대신 보조금으로 살아가는 산업이며, 따라서 우리에게 모범을 제시하기는커녕 개혁해야 할 첫째가는 남용 형태들 중 하나이다.

그리고 내가 담배의 생산에 도입해야 할 개혁에 관해 말할 때, 나는 단지 이 산물의 가치를 서너 배로 만드는 엄청난 세금만 생각하는 것도 아니고, 어떤 사람들은 쓸모없을 만큼 비싼 봉급을 통해 귀족들로 만들어 주고 다른 사람들은 언제까지나 하급의 조건에 묶인 희망 없는 월급쟁이로 만들어주는 그 종업원들의 위계적 조직만 생각하는 것도 아니다. 나는 더구나 여러 공직의 특권과 이들이 먹여 살리는 기생자들의 세계 전체를 말하는 것도 아니다. 내가 무엇보다 염두에 두는 것은 유익한 노동, 일꾼들의 노동이다. 연초국의 일꾼이 결코 경쟁하지 않는다는 것, 그는 이득에도 손실에도 관심 없다는 것, 한마디로 그는 자유롭지 않다는 것, 오직 이것 때문에 그의 생산성은 반드시 미미하고, 그의 서비스는 너무 비싸다. 그런데도 정부가 그 봉급 받는 이들을 잘 대우해 주고, 이들의 행복에 신경을 쓰라고 하는데, 그러면 그런 기적이 어디 있는가? 특권의 모든 부담을 지는 것이 자유이며, 불가능한 일이겠짐나 모든 산업이 담배 산업처럼 취급받는다면, 보조금 재원이 결여되어 그 민족은 더 이상 수입과 지출의 균형을 맞출 수 없고 그 국가는 파산할 것임을 어째서 모르는가?

외국 산물에 관련된 예도 있다. 나는 정치경제학에는 생소한 한 학자 리비히 씨의 증언을 인용한다. “옛날에 프랑스는 스페인으로부터 소다를 매년 2000만에서 3000만 프랑 수입했다. 왜냐하면 스페인의 소다가 더 좋았던 것이다. 영국과의 전쟁 기간 내내, 소다의 가격, 따라서 비누와 유리의 가격은 끊임없이 올라갔다. 그래서 프랑스의 제조업체들은 이런 사태로 상당히 괴로움을 겪어야 했다. 르블랑(Leblanc)이 보통의 소금에서 소다를 추출하는 방법을 발견한 것이 이때였다. 이 공정은 프랑스에는 부의 원천이었다. 소다의 제조는 이례적으로 확장되었다. 그러나 르블랑도 나폴레옹도 그 발명의 이익을 누리지 못했다. 대륙 봉쇄의 장본인에 대한 사람들의 분노를 이용한 왕정복고 세력은 황제의 채무를 갚기를 거절했다. 황제의 약속이 르블랑의 발견을 재촉했던 것이다. …”

“몇 년 전에 나폴리 왕이 시칠리아 유황 상업의 독점 전환에 착수해, 엄청난 양의 유황을 소비하는 잉글랜드는 그 독점이 유지된다면 나폴리 왕에게 전쟁을 하겠다고 선전포고를 했다. 양국 정부가 외교 문서를 교환하는 동안, 열다섯 건의 발명 증서가 석고, 황철광, 그리고 영국에 풍부한 다른 광물질에서 황산을 추출하기 위한 것으로 발급되었다. 그러나 나폴리 왕과의 일이 정리되어 이 개발이 이어지지는 않았다. 단지 행해진 실험들에 따라 새로운 공정 절차에 의한 황산의 추출이 성공으로 이어질 것이라는 점이 소득으로 남았다. 이는 아마도 시칠리아가 이 유황을 가지고서 하는 상업을 제거할 것이었다.”

잉글랜드와의 전쟁을 빼놓고 보라. 나폴리 왕의 독점이라는 환상을 빼놓고 보라. 오래전부터 프랑스에서는 바다 소금에서 소다를 추출하려 하지 않았을 것이고, 영국에서는 그 나라가 가진 석고와 황철광산에서 황산을 추출하려 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런데 그러한 것이 바로 산업에 미치는 경쟁의 작용이다. 사람은 필요가 그를 근심하게 할 경우가 아니면 게으름에서 빠져나오지 않는다. 그리고 그에게서 천재성을 꺼뜨리는 가장 확실한 방법은 그를 온갖 염려에서 벗어나게 하고, 그에게서 이익과 그로부터 나오는 사회적 구별의 미끼를 빼앗으면서 그 주위에 ‘어디서나 평화, 언제나 평화(la paix partout, la paix toujours)’를 만들어주고, 국가에 그의 타성에 대한 책임을 넘기는 것이다.

그렇다. 현대적 정적주의에도 불구하고 이를 말할 필요가 있다. 인간의 삶은 영구적 전쟁이다. 필요와의 전쟁, 자연과의 전쟁, 동류들과의 전쟁, 따라서 자기 자신과의 전쟁이다. 우애와 헌신을 기초로 하는 평화적 평등의 이론은 이 세상의 재물과 즐거움에 대한 포기라는 로마 가톨릭 교리의 모조품에 불과하며, 거지 생활의 원리이고, 빈곤의 찬가이다. 사람은 자신의 동류를 죽을 정도로 사랑할 수 있다. 그는 그를 위해 노동할 정도로 그를 사랑하지는 않는다.

경쟁의 반대자들은 우리가 사실과 법에서 반증해 온 헌신의 이론에 다른 한 이론을 갖다 붙인다. 이는 앞의 이론의 정반대 이론이다. 왜냐하면 정신이 그 균형점인 진리를 오인할 경우에 두 모순 사이에서 진자 운동을 한다는 것이 정신의 법칙이기 때문이다. 반경쟁적인 사회주의의 이 새로운 이론은 권장의 이론이다.

노동과 산업에 대한 권장보다 외관상 더 사회적이고 더 진보적인 것이 무엇이 있는가? 그것을 권력의 가장 아름다운 속성 중 하나로 삼지 않는 민주주의자는 없다. 그것을 행복을 조직할 수단들 중 제일로 치지 않는 유토피아주의자는 없다. 그런데 정부는 그 본성상 노동을 지도하기에 아주 무능해서, 정부가 지급하는 일체의 보수는 공동 금고에 가해진 진정한 좀도둑질이다. 레이보 씨는 이런 귀납 추론의 본분을 우리에게 제공하려 한다.

어느 부분에서 레이보 씨는 이런 관찰을 한다. “수출을 장려하기 위해 주어지는 웃돈은 1차 원료의 수입을 위해 지불되는 세금과 같은 가격이다. 이득은 절대로 영零인 채로 변함이 없고, 광대한 밀수 체제에 대한 장려책이 될 뿐이다.”

이 결과는 불가피하다. 반입세를 없애보라. 앞에서 참깨와 관련해서 본 것처럼 나라의 산업이 고통을 겪을 것이다. 수출에 어떤 장려금도 주지 않으면서 세금을 유지하라. 나라의 상업은 외국 시장들에서 패배할 것이다. 이 폐단을 방지하기 위해서 장려금을 재개한단 말인가? 당신이 한 손으로 받은 것을 다른 손으로 돌려주는 것뿐이고, 당신은 산업에 대한 일체의 장려 조치의 마지막 결과, 무가치한 잔재caput mortuum인 사기를 유발하는 것이다. 이로부터 노동에 대한 일체의 권장, 산업에 제공되는 일체의 보수는 산물의 자연적 가격과는 달리 공짜 선물이고, 소비자들에게 징수되어 권력의 총애를 받는 자에게 아무 대가 없이 뇌물로 주어지는 것이라는 결과가 된다. 산업을 장려한다는 것은 그러므로 게으름을 장려하는 것과 근본적으로 동의어이다. 이는 부정행위 형태의 하나이다.

우리 해군의 이익을 위해 정부는 해운업자들에게 이들의 선박에 고용된 사람당 일정 보조금을 주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나는 계속 레이보 씨를 인용하는데, “신세계로 출발하는 배마다 60명에서 70명을 태운다. 이 숫자 중에 선원이 12명이고 나머지는 들판의 일에서 벗어난 촌사람들로서 생선 가공을 위한 일꾼으로 계약해 항해와는 생소한 채로 남아있고 선원으로서는 발과 위장밖에 가진 것이 없다. 그런데도 이 사람들은 해군 등록부의 직책에 등장하고 거기서 기만을 지속한다. 보조금 제도를 옹호하는 것이 중요할 때 이 사람들을 계산에 넣는다. 그것들은 큰 수를 이루고 성공에 기여한다.”

이는 무식한 재주라고 틀림없이 어떤 순진한 개혁자가 쓸 것이다. 좋다. 사실을 분석하고, 거기서 발견되는 일반적 관념을 도출하도록 하자.

원리상으로 과학이 인정할 수 있는, 노동에 대한 유일한 장려책은 이윤이다. 왜냐하면, 노동이 그 자신의 산물에서 자신의 보수를 얻을 수 없다면, 노동을 권장하기는커녕 가장 일찍 노동이 포기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바로 이 노동에 순생산이 따른다면, 이 순생산에 공짜 선물을 더하고 그래서 서비스의 값을 과잉 청구하는 것은 황당하다. 그러므로 나는 이 원리를 적용해 이렇게 말한다. 상업 해운이 1만 명의 선원만을 요한다면, 이에 1만5000명을 건사해 달라고 간청해서는 안 된다. 정부로서 가장 간단한 방법은 국가 선박들에 징집병 5000명을 태우고 이들이 군주에게 하듯이 그 상인들에게 하도록 하는 것이다. 상업 해운에 제공되는 일체의 장려책은 사기를 치라는 직접적인 초청이며, 뭐라고 해야 할까, 불가능한 서비스에 대한 임금의 제시이다. 항해, 훈련, 해양 상업의 모든 조건들이 쓸모없는 인원을 이렇게 갖다 붙이는 것과 걸맞은가? 그러니 선주가 자신이 필요로 하지 않는 인원들을 자기 배에 태우는 대가로 횡재를 제공하는 정부 앞에서 무엇을 할 수 있는가? 장관이 금고의 돈을 길거리에 내던진다면, 이를 주워가지는 내게 죄가 있는가?

이처럼, 주목할 가치가 있는 것으로서, 권장 이론은 희생 이론에서 곧바로 나온다. 그리고 사람이 책임을 지는 것을 원치 않아서 경쟁의 반대자들은 자신들의 관념의 치명적 모순에 의해 사람을 때로는 신으로, 때로는 짐승으로 만들 수밖에 없다. 그러고는 그들의 호소에 사회가 움직이지 않는 것에 놀란다! 가엾은 아이들! 사람들은 당신들이 아는 것, 그들이 언제나 그랬던 것보다 결코 더 낫지 않을 것이며, 더 못하지도 않을 것이다. 자신들의 개별 이익이 간청하면서부터 그들은 일반 이익을 저버린다. 나는 이들이 영예롭지 않다면 적어도 핑계를 댈 수는 있다고 본다. 때로 그들이 당신에게 빚진 것 이상을 당신이 그들에게 요구하고 때로는 그들이 받을 만하지 않은 보수를 주어 그들의 탐욕을 자극한다면 이는 당신의 잘못이다. 사람에게는 자기 자신보다 소중한 것이 없으며, 따라서 그는 자신의 책임 말고 다른 법칙을 지니지 않는다. 헌신의 이론은 보수의 이론과 마찬가지로 사기꾼의 이론으로서 사회와 도덕을 뒤엎는 이론이다. 그리고 당신이 희생에서든 특권에서든 질서의 유지를 기대한다는 오직 그것 때문에 당신은 사회 안에 새로운 적대 관계를 창조한다. 사람들의 자유로운 활동의 조화를 생겨나게 하는 대신 당신은 개인과 나라를 서로에게 생소하게 만든다. 결합을 명령하면서 당신은 불화를 불어넣는다.

요컨대, 경쟁 바깥에서는 이 대안밖에 남지 않는다. 권장, 신비화 또는 희생, 위선.

그러므로 경쟁은, 그 원리로 분석한다면, 정의의 영감을 주는 것이다. 그렇다고는 하지만, 우리는 경쟁이 그 결과에서는 부당하다는 것을 알아보려고 한다.

. 경쟁의 파괴하는 효과와 경쟁에 의한 자유의 파괴

천상의 왕국은 힘으로써 얻어지며 폭력적인 자들만이 이를 빼앗을 수 있다고 복음서는 말한다. 이 이야기는 사회의 암유暗喩이다. 노동에 의해 다스려지는 사회에서는 존엄성, 부, 그리고 영광이 경합에 부쳐진다. 그것들은 강자의 보수이며, 경쟁을 힘의 체제라고 정의할 수 있다. 옛날 경제학자들은 우선 이 모순을 알아채지 못했다. 현대인들은 이를 인정하지 않을 도리가 없었다.

“야만성의 마지막 정도의 상태를 풍요의 최고 정도로 올리기 위해서는 세 가지만이 필요하다고 아담 스미스는 기술했다. 평화, 적당한 세금, 그리고 관대한 공법justice 행정이다. 나머지는 모두 사물의 자연적 흐름에 의해 온다.”

이에 대해 스미스의 마지막 번역자인 블랑키 씨는 이런 음울한 주해를 단다. “우리는 사물의 자연적 흐름이 재앙적 효과를 낳으며, 생산의 무정부성, 판로를 위한 전쟁, 그리고 경쟁에서 해적 행위를 일으키는 것을 보아왔다. 노동 분업과 기계의 완성화는 인류의 노동하는 대가족을 위해 이들의 존엄을 위한 약간의 여가 시간의 획득을 실현해 주어야 했던 것인데, 여러 지점들에서 무뎌짐과 빈곤만을 낳았을 뿐이다. … 아담 스미스가 글을 썼던 때에 자유는 아직 그 당황스러운 모습과 남용을 가지고서 찾아오지 않았다. 글래스고의 그 교수는 자유의 달콤한 면만 예견했다. … 우리가 사는 시대라면 스미스는 시스몽디 씨처럼, 아일랜드와 잉글랜드 제조업 구역들의 슬픈 상태에 대한 증인인 것처럼 글을 썼을 것이다.”

그런데 알려지기로는 문필가, 정치인, 일상적 논객, 신자이며 반半 신자인 여러분 모두는 사람들을 세뇌시키는 사명을 받은 분들로서 예레미야를 옮긴 것으로 믿어지는 이 이야기들을 듣는가? 여러분이 문명을 어디로 이끌겠다고 하는지를 마지막으로 우리에게 말해줄 것인가? 어떤 조언을 사회에, 비상 상태에 처한 조국에 제공해줄 것인가?

하지만, 내가 누구에게 말한 것인가? 장관들, 기자들, 성당 관리인, 그리고 현학자들이다! 이분들이 사회경제의 문제들을 염려하는가? 이들이 경쟁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는가?

상업 전쟁으로 정신이 단련된 어떤 리옹 사람이 토스카나를 여행했다. 그는 매년 이 나라에서 50만 개에서 60만 개의 밀짚모자가 제작되어 모두 합치면 400만에서 500만의 가치를 이룬다는 것을 관찰한다. 이 산업은 보잘것없는 민중의 거의 유일한 밥벌이다. 그는 이렇게 혼잣말한다. “어째서 그렇게 쉬운 문화와 산업이 프로방스와 랑그도크로, 그 풍토가 토스카나와 같은 이곳들로 옮겨지지 않았는가?” 하지만, 한 경제학자가 이와 관련해서 이런 관찰을 한다. 토스카나의 농민들에게서 그들의 산업을 빼앗는다면, 그들은 생존하기 위해 어떻게 할 것인가?

검은 비단 천의 제조는 피렌체에는 그 비밀을 소중하게 지키는 전문 산업이 되었다. 관광객이 만족스럽게 이렇게 언급한다. “리옹의 한 숙련된 제조자가 피렌체에 정착하러 왔으며, 결국은 염색과 직조에 고유한 절차들을 파악했다. 이 발견은 피렌체의 수출을 감소시킬 개연성이 높다.”[퓔시롱(Fulchiron), 『이탈리아 여행기Voyage en Italie』]

옛날에는 누에를 키우는 일은 그것으로 먹고사는 데에 도움을 받은 토스카나의 농민들에게 방치되었다. “농업 회사들이 생겨났다. 그 회사들은 누에가 농민의 침실에서 충분한 공기도 못 얻고, 충분히 고른 온도도 보장받지 못하고, 누에를 키우는 일꾼들이 이를 그들의 유일한 직업으로 삼을 만큼 제대로 된 돌봄도 받지 못한다는 것을 뜻했다. 결과적으로 부유하고 지적이고 관대한 시민들은 공중의 갈채를 받으며 사람들이 누에 양성소[bigattières : 누에(bigatti)라는 말에서 유래]라 부르는 것을 건설했다.”(시스몽디)

그러면 이 누에 양성업자들, 검은 천과 모자를 만드는 제조자들이 일거리를 잃을 것인가를 여러분은 묻는다. 바로 그렇다. 그들이 제조하는 것보다 낮은 비용에 바로 그 제품들을 사들일 수 있으리라는 전제에서는 그렇게 하는 것이 이익이라는 것도 그들에게 증명해줄 것이다. 바로 이런 것이 경쟁이다.

경쟁은 그 살인적 본능을 가지고서 모든 노동계급에게서 빵을 빼앗으며, 그것을 단지 개량으로, 절약으로 볼 뿐이다. 경쟁은 비밀을 슬쩍 빼내며, 그러면서 이를 발견이라고 자부한다. 경쟁은 한 민족 전체에 손해를 끼치며 생산의 자연적 영역을 변경시킨다. 그러면서 경쟁은 자기 기후의 장점을 활용하는 것 말고 다른 일을 하지 않았다고 주장한다. 경쟁은 공정성과 정의의 모든 관념을 뒤집는다. 경쟁은 불필요하게 투입 자본을 배증해 생산의 실질 비용을 증가시키고, 제품의 품귀와 폭락을 차례로 일으키며, 법이 있을 자리에 도박을 두어 공공의 양심을 부패하게 하고, 어디서나 공포와 불신을 조장한다.

하지만 뭐라고! 이 잔혹한 성격 없이는 경쟁은 그 가장 행복한 효과를 상실할 것이다. 교환의 자의성과 시장의 비상 상황이 없다면 노동은 끊임없이 공장에 맞서 공장을 세우지 않을 것이고, 생산은 덜 헐떡거리며 그 기적의 어떤 것도 실현하지 못할 것이다. 경쟁은 자신의 원리의 유용성 자체로부터 악이 솟아나게 한 후에 새로이 악에서 선을 뽑아낼 줄을 안다. 파괴는 유용성을 낳으며, 균형은 요동에 의해 실현되고, 우리는 경쟁에 관해, 삼손이 자신이 쓰러뜨린 사자에 관해 말한 것을 말할 수 있다. 먹는 자에게서 먹는 것이 나오고, 강한 자에게서 단 것이 나왔다(De comedente cibus xilt, et de forti dulcedo). 인간 과학의 모든 영역에서 정치경제학보다 더 놀라운 것은 없는가?

그럼에도 우리가 볼 때는 불의한 욕설에 불과한 반어법적 운동에 양보하지 않도록 조심하자. 그 모순에서 확실성을 발견하는 것이 경제학의 본령이며, 경제학자들의 잘못이라면 이를 이해할 줄 몰랐다는 것이다. 그들이 경쟁의 이 문제에 손을 댄 이래 그들의 비판보다 더 빈약한 것은 없으며, 그들의 사고의 교란보다 더 슬프게 하는 것은 없다. 양심이 침묵하기를 원하는 것을 실토하도록 고문에 의해 강압을 받는 증인들을 말하는 것이다. 독자는 내가 경제학자들의 비밀 집회를 보여주어 ‘자유시장laissez-passer’의 논리를 눈앞에 보여준 데 감사할 것이다.

뒤누아예 씨는 논의의 문을 연다.

뒤누아예 씨는 모든 경제학자들 중에 경쟁의 긍정적 측면을 가장 열정적으로 끌어안은 자이며, 따라서, 그로부터 기대할 수 있듯이 모든 경제학자 중에 경쟁의 부정적 측면을 가장 못 파악한 자이기도 하다. 뒤누아예 씨는 그가 원리들이라고 부르는 것에서는 까다로워서, 정치경제학에서 예와 아니오가 동시에 같은 정도로 둘 다 참일 수 있다고 믿는 것과는 아주 거리가 멀다. 그를 찬양하기 위해서라도 이렇게 말하자. 그가 그의 학설에서 더욱 솔직하고 성실한 만큼 그러한 개념은 더욱 그에게 혐오스럽다. 그토록 순수하고 그토록 완고한 이 영혼 안에 나로서는 태양의 존재만큼 확실한 이 진리, 정치경제학의 모든 범주들은 모순들이라는 진리를 뚫고 들어가게 하기 위해 내가 무엇을 내놓지 않겠는가! 실천과 이론을 화해시키려 쓸데없이 기진맥진하는 대신, 이승의 모든 것이 그 장단점을 가진다는 일그러진 조롱에 만족하는 대신 뒤누아예 씨는 모든 이율배반이 풀리는 종합적 관념을 추구할 것이며, 오늘날 그의 모습인 역설적 보수주의자에서 우리와 더불어 투철하고 일관적인 혁명가가 될 것이다. 뒤누아예 씨는 이렇게 말한다.

“경쟁이 잘못된 원리라면, 2000년 전부터 인류는 잘못된 길을 걸어왔다는 말이 된다.”

아니다. 당신이 말하는 것처럼 그런 말이 되지 않는다. 그리고 당신의 편견 어린 언급은 진보의 이론 자체에 의해서도 반증된다. 인류는 자신의 원리들을 차례로 내놓으며, 때로는 긴 간격을 두고서 내놓는다. 인류는 표현이나 공식에서는 이 원리들을 잇달아 파괴하면서도 그 내용에 관해서는 결코 포기하지 않는다. 이 파괴는 부정否定이라 불린다. 왜냐하면 일반 이성은 언제나 진보해 끊임없이 앞선 관념들의 충만성과 충분성을 부정하기 때문이다. 경쟁이 가치 구성의 시기들 중 하나이며, 사회적 종합의 요소들 중 하나로서 그것이 원리상 파괴 불가능함에도 불구하고 그 실제적 형태에서는 폐지되고 부정되어야 한다는 것이 한꺼번에 참인 것은 이런 연유에서이다. 그러므로 여기서 누군가가 역사와 반대의 입장에 있다면, 이는 당신이다.

“나는 경쟁이 그 대상이 되는 비난에 대해 몇 가지 언급할 것이 있다. 첫째는 이 체제가 좋든 나쁘든, 파멸적이든 유익하든 아직은 실질적으로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 그것은 예외적으로 그리고 가장 불완전한 방식으로 말고는 어디서도 확립되지 않았다는 것이다.”

이 첫째 관찰은 의미가 없다. 경쟁은 경쟁을 죽인다고 우리는 시작하면서 말했다. 이 경구는 정의定義로 간주될 수 있다. 그러면 경쟁은 도대체 어떻게 완성될 것인가? 게다가 경쟁이 아직 그 온전한 모습으로 존재하지 않는다는 데 동의할 때, 이는 단순히 경쟁이 그 안에 있는 제거의 모든 잠재 능력을 가지고서 움직이지 않는다는 것을 증명해줄 것이다. 그러나 이는 그 모순적 본성에는 조금도 변화를 주지 않을 것이다. 경쟁이 발달할수록 경쟁자의 수를 줄이는 경향이 있다는 것을 알기까지 아직도 우리는 30세기를 더 필요로 한다는 말인가?

“둘째는, 사람들이 경쟁을 그리는 그림은 불충실하다는 것, 거기서 노동하는 계급들의 행복 자체를 포함해서 일반적 행복이 취한 외연을 충분히 고려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어떤 사회주의자들이 경쟁의 유익한 면을 무시한다면, 당신 쪽에서는 또 그 해로운 효과에 대해 아무 언급도 하지 않는다. 당신의 반대자들의 증언이 당신의 증언을 보완해 주면 경쟁은 환히 드러나며, 이중의 거짓말로부터 우리에게 진리가 그 결과로 나온다. 악의 심각성에 대해서 우리는 곧 우리가 알아야할 것을 보게 될 것이다.

“셋째는, 노동계급이 겪은 악은 그 진정한 원인들에 관련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경쟁 말고 다른 빈곤의 원인들이 있다면, 이는 경쟁이 그에 기여하지 못하게 막아주는가? 매년 경쟁에 의해 파멸한 산업인이 단 한 사람이라도 있었다면, 이 파멸이 그 원리의 필연적 효과라는 것이 인정된다면, 경쟁은 원리로서는 기각되어야 할 것이다.

“넷째는, 그것을 피할 고유한 주요 수단들은 임시방편이 결코 아닐 것이라는 것이다.”

이는 가능하다. 그러나 나는 제안된 치유책들의 부족이 당신에게 새로운 의무를 부과한다는 것, 이는 바로 경쟁의 해악을 예방할 가장 손쉬운 수단들을 연구할 의무라는 결론을 내린다.

“끝으로 다섯째는, 진정한 치유책들은 입법을 통해 해악을 치료하는 것이 가능한 한에서는 바로 그 해악을 낳았다고 비난받는 체제, 즉 점점 더 실질적이 되어가는 자유와 경쟁의 체제에 있으리라는 것이다.”

좋다! 나는 그러기를 바란다. 당신의 말을 따른다면 경쟁에 대한 치유책이 경쟁을 보편적으로 만드는 것이다. 그러나 경쟁이 보편적이려면, 모두에게 경쟁할 수단을 마련해줄 필요가 있다. 노동에 대한 자본의 지배를 파괴하거나 변경할 필요, 주인과 일꾼의 관계를 바꿀 필요, 한마디로 분업의 이율배반과 기계의 이율배반을 해결할 필요가 있다. 노동을 조직할 필요가 있다. 당신은 이 해결책을 내놓을 수 있는가?

뒤누아예 씨는 그 다음으로 더 나은 대의에 걸맞은 용기를 가지고 보편적 경쟁이라는 그 자신의 유토피아를 전개한다. 이는 그 저자가 머뭇거리며, 걸음마다 갈팡질팡하는 미로이다. 뒤누아예 씨는 이렇게 말한다.

“경쟁은 수많은 장애물을 만난다.”

실제로 경쟁은 아주 많은, 그리고 아주 강력한 장애물들을 만나서 그 자체가 불가능해질 정도이다. 사회의 체제에 내재하는, 그리고 따라서 경쟁 자체와 분리될 수 없는 장애물들을 정복할 수단이 있는가?

“공공 서비스 외에 정부가 그 실행을 다소 배타적으로 챙겨두어야 한다고 믿어온 일정 수의 전문직이 있다. 입법이 한정된 수의 개인들에게 독점권을 부여한 더 많은 수의 전문직이 있다. 경쟁에 방치된 직종들은 형식들과 제약들, 무수한 방해물들에 종속되며, 이는 많은 사람에게 접근성을 없애며, 거시서 경쟁은 무한한 것과는 거리가 멀다. 끝으로 다채로운, 물론 필요한 조세들에 종속되지 않은 사람은 없다. …”

이 모든 것이 의미하는 것은 무엇인가? 뒤누아예 씨는 의문의 여지없이 사회가 정부, 행정, 경찰, 조세, 대학, 한마디로 사회를 구성하는 모든 것 없이 지낼 수 있음을 뜻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사회는 반드시 경쟁에 대한 예외들을 내포하는 마당에 보편적 경쟁의 가설은 기괴하며, 그래서 우리는 다시 방임bon plaisir의 체제에 놓이게 된다. 이는 우리가 이미 경쟁의 정의에 의해 아는 것이다. 이런 뒤누아예 씨의 논리에 아무 진지한 것도 없는가?

옛날에 과학의 거장들은 일체의 선입관을 자신에게서 멀리하는 것으로 시작해서 사실들을 변조하거나 은폐하지 않고 이를 일반 법칙들로 가져가는 데 매달렸다. 아담 스미스의 연구들은 그것들이 나온 시대에는 통찰력과 높은 이성의 기적이다. 케네의 『경제표』는 그것이 아무리 분간할 수 없어 보여도 일반적 종합의 심오한 감정에 대해 증언한다. 장 바티스트 세의 위대한 논저의 서론은 전적으로 정치경제학의 과학적 성격들에 관해 전개된다. 그리고 거기서는 행마다 저자가 절대적 개념들에 대한 필요를 얼마나 느끼는지 보게 된다. 지난 세기의 경제학자들은 확실하게 과학을 이루지 않았다. 그게 아니라 열정과 선의를 가지고서 이 구성을 추구했다.

우리는 오늘날 이런 고귀한 생각들과는 거리가 멀다! 사람들이 추구하는 것은 더 이상 과학이 아니다. 옹호하는 것은 왕조와 카스트의 이해관계이다. 사람들은 자신들의 무기력이라는 바로 그 이유로 일상 관행을 고집한다. 사람들은 가장 저명한 이름들의 권위를 빌려 비정상적 현상들에 그것들이 지니지 않은 진실성을 각인시키는 일을 한다. 비난하는 행위들에는 이단 딱지를 붙인다. 세기의 경향들을 비방한다. 그리고 경제학자와 함께 추론한다고 주장하는 것만큼 그를 짜증나게 하는 것도 없다. 뒤누아예 씨는 심히 못마땅한 어조로 이렇게 적는다.

“현 시대에 특별한 것은 모든 계급의 동요이다. 그들의 걱정이고, 아무것에도 머물지 못하고 결코 만족하지 못하는 불가능이다. 가장 불행한 계급이 현실에서 불평할 것이 덜 있도록 사회가 노력을 많이 함에 따라 점점 더 불만이 많아지게끔 이들에게 가해지는 악마와 같은 작업이다.”

좋다! 사회주의자들이 정치경제학을 자극하기 때문에, 이는 육화된 악마들이다! 프롤레타리아에게 그가 노동과 임금에서 피해를 본다는 것, 그가 사는 환경에서 그의 빈곤에 대한 치유책이 없다는 것을 가르쳐주는 것보다 더 불경한 것이 있을 수 없는가?

레이보 씨는 그의 스승 뒤누아예 씨의 불평을 강조하면서 반복한다. 이사야의 두 날개 여섯 달린 천사들이 경쟁에 상투스Sanctus의 찬가를 부른다고 말한다. 1844년 6월 『현대의 개혁자들에 관한 연구』 제4판을 출간하던 순간에 레이보 씨는 그의 영혼의 고통 중에 이렇게 적었다. “우리는 사회주의자들에게 노동의 조직, 노동할 권리를 빚지고 있다. 그들은 감시 체제의 촉진자들이다. … 해협 양안의 입법부들은 조금씩 그들의 영향을 입는다. … 그리하여 유토피아가 설 땅을 얻는다.” 그리고 레이보 씨는 사회주의가 최상의 정신들에 미치는 비밀스러운 영향을 탄식하고, 사회주의와 논쟁을 벌인 자들조차 사로잡힌 불의불식간의 오염을 저주한다. 그리고 그는 그의 악인들에 맞선 고결한 정의의 마지막 행동으로서 『노동법Lois du travail』이라는 제목의 다음 책의 출판을 알린다. 이는 노동법이 노동할 권리와도 노동의 조직과도 아무 공통점이 없으며, 개혁 중 최선의 개혁은 방임하는 것임을 (그의 관념들의 새로운 진화는 없어도) 증명하려는 저작이다. 레이보 씨는 이렇게 덧붙인다. “또한 정치경제학의 경향은 더 이상 이론을 향하지 않고 실천을 향한다. 그 과학의 추상적 부분들이 지금부터는 고정된 것으로 보인다. 정의들에 대한 논쟁은 다 되었거나 거의 다 되었다. 가치, 자본, 공급 및 수요, 임금, 조세, 기계, 임대료, 인구 증가, 넘쳐나는 산물, 판로, 은행, 독점 등등에 관한 위대한 경제학자들의 업적들은 교조적 연구의 한계를 나타낸 듯하며, 학설들의 총체를 이루어 그 이상은 별로 기대할 것이 없다.”

달변Facilité de parler, 추론의 무능impuissance de raisonner, 이는 사회경제학의 창시자들에게 바치는 이 이상한 찬사에 관한 몽테스키외의 결론이었다. 과학은 만들어졌다! 레이보 씨는 그 설교를 한다. 그리고 그가 그렇게 큰 권위를 가지고 선포하는 것을 사람들은 아카데미에서, 대학 강단에서, 상원에서, 입법부에서 반복한다. 이를 신문들에 발표한다. 이를 국왕에게 신년사에서 말하게 하며 법정에서는 그런 주장을 하는 자들이 결과적으로 심판을 받는다.

과학은 만들어졌다! 그러니 우리 사회주의자들은 얼마나 어리석은가! 대낮에 해를 찾고, 손에 등불을 들고서 이 햇빛의 눈부심에 항의하다니!

그러나 여러분, 나는 진정한 후회와 나 자신에 대한 깊은 불신을 가지고서 여러분에게 약간의 해명을 요구하지 않을 수 없다. 여러분이 우리의 해악을 퇴치할 수 없다면, 적어도 우리에게 좋은 이야기를 들려주고, 증거를 주고, 우리에게 사의를 표명하는가? 뒤누아예 씨는 말한다.

“부富는 오늘날 예전 어느 때보다 무한히 더 잘 분배되는 것이 명백하다.” 곧바로 레이보 씨는 말을 받는다. “기쁨과 고통의 균형은 언제나 이승에서 재확립되는 경향을 띤다.”

그러니 뭐란 말인가! 당신들은 무슨 말을 하는가? 부가 더 잘 분배되고, 균형이 재확립된다고! 이 더 나은 분배에 대해 감사하게도 설명해줄 것인가? 오는 것이 평등인가, 아니, 가버리는 것이 불평등인가? 긴밀해지는 것이 연대성인가, 아니, 감소하는 것이 경쟁인가? 나는 당신들이 나에게 대답하지 않은 것을 그대로 면제해주지 않는다. 가죽을 남겨주지 않는다(non missura cutem). 왜냐하면, 당신들이 균형의 재확립과 더 나은 분배의 원인을 무엇이라고 지적하든 나는 그것을 열정적으로 끌어안고 이를 그 최종 결과에까지 추적할 것이다. 나는 이 연도를 무작위로 잡는 것인데, 1830년 전에 부는 더 열악하게 분배되었다. 그게 어떻다는 것인가? 당신들 말에 따르면, 오늘날은 더 잘 분배된다. 왜인가? 여러분은 내가 가려는 곳을 보라. 분배는 아직 완전히 공정하지 않고 균형은 절대로 정의롭지 않아서 나는 한편으로 어떤 것이 균형을 교란하는 장애물인지, 또 한편으로 어떤 원리에 의해 인류가 끊임없이 최악에서 차악으로, 선에서 최선으로 옮겨 가는지를 묻는다. 왜냐하면, 결국 이 비밀스러운 개량의 원리는 경쟁, 기계, 노동 분업, 공급과 수요 같은 것들일 수 없기 때문이다. 이 모든 원리들은 도덕 및 정치 과학 아카데미가 아주 잘 이해한 것처럼 순서에 따라 가치를 진자 운동시키는 지렛대들일 뿐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행복의 최고 법은 무엇인가? 진보의 이 기준, 이 잣대, 척도, 그것을 위반하는 일이 빈곤의 항상적 원인이 되는 이것은 무엇인가? 말해보라. 더는 거드름 피우지 말라.

당신들은 부가 더 잘 분배된다고 말한다. 당신들의 증명을 보자.

뒤누아예 씨 :

“공식 문서들에 따르면, 토지 자산 평가는 자그마치 1100만이다. 이 값을 지불하는 지주는 600만 명으로 추산한다. 그래서 4인 가족으로 칠 때, 토지 재산을 분유할 자들은 3400만 명 중에 2400만 명은 될 것이다.”

그러므로 가장 유리한 수치에 따를 때, 프랑스에는 1000만 명의 프롤레타리아가 있을 것인데, 이는 인구의 약 3분의 1이다. 이에 대해 당신들은 뭐라 말하는가? 이 1000만에 나머지 2400만의 절반, 재산이 저당 잡히고, 분할되고, 빈곤화되고, 한심한 상태로서 그것을 관리하는 것이 하나의 직업이 될 수 없는 이들을 더해보라. 그래도 당신들은 아직 위태로운 자격으로 살아가는 개인들의 수를 아직 구하지 못할 것이다.

“2400만 지주들의 수는 현저히 증가하는 경향을 띤다.”

나는 그 수가 현저히 감소하는 경향을 띤다고 주장한다. 당신들 생각에 어느 쪽이 진짜 지주인가? 세를 부과당하고, 저당 잡힌 명목적 보유자인가, 아니면 소득을 징수하는 채권자인가? 유대인 대금업자와 발Bâle 사람들이 오늘날 알자스의 진정한 지주들이다. 그리고 이 대금업자들의 탁월한 판단을 증명해주는 것, 이는 그들이 취득하는 데 신경을 쓰지 않고, 자신들의 자본을 투하하는 쪽을 선호한다는 것이다.

“지주들에 대략 150만의 영업 허가 받은 자들을 더해야 한다. 즉 4인 가구를 기준으로 하면 600만 명의 개인이 산업상의 기업에 주인으로서 이해관계를 가진다.”

하지만 우선 이 영업 허가를 받은 자들의 상당수가 지주라서 당신은 이중 계산을 한다. 그리고 영업 허가를 받은 상공인 수에서 기껏해야 4분의 1이 이득을 실현하고, 또 4분의 1은 수지를 맞추어 유지하며, 나머지는 항상 적자 상태라고 단언할 수 있다. 그러므로 우리가 실질적 소유주의 아주 문제성 있는 1200만에 더할 자칭 기업주 600만의 절반만을 취하자. 그러면, 우리는 프랑스인 총 1500만 명이 교육, 근면성, 자본, 신용, 소유 재산에 의해 서로 경쟁을 할 수 있는 상태에 있다는 결론에 도달할 것이다. 민족의 나머지, 즉 1900만 명에게는 경쟁은 앙리 4세의 솥단지 안의 닭처럼, 그들이 그 값을 낼 수 있는 계급을 위해 생산은 하지만 손을 대지는 못하는 요리인 셈이다.

또 다른 난점이 있다. 이 1900만 명에게는 경쟁은 접근할 수 없는 것으로 있는데, 이들은 경쟁자들의 용병이다. 옛날 같으면 농노들인 그런 사람들은 영주들을 위해 싸웠지만, 그들 스스로 깃발을 들 수도, 군대를 조직할 수도 없었다. 그런데 경쟁이 그 자체로 공통의 조건이 될 수 없다면, 경쟁이 위험이 될 뿐인 자들은 자신들의 봉사를 받는 남작들로부터 어떻게 보장을 요구하지 않겠는가? 그리고 이 보장책들이 이들에게 거절될 수가 없다면, 그것들은 어찌 경쟁에 대한 질곡 말고 다른 것이겠는가? 이는 주교들이 발명한 신의 정전停戰이 봉건적 전쟁에 질곡이었던 것과도 같다. 사회의 구성 체제에 의해 경쟁은 예외적인 것, 특권이라고 나는 방금 말했다. 지금 나는 어떻게 권리들의 평등을 가지고서 이 특권이 아직도 가능한지를 묻는다.

그리고 내가 소비자들과 임금 생활자들을 위해 경쟁에 맞서는 보장책들을 청구할 경우에 이것이 사회주의자의 꿈이라고 생각하는가? 당신들이 지옥의 작품을 완성했다고 비난하지 않을 당신들의 가장 저명한 동료들 두 사람의 말을 들어보라.

로시 씨는 제1권 16강에서, 위험이 너무 크고 보장책들이 불충분할 경우에, 말하자면 언제나 노동을 규율할 권리가 국가에 있음을 인정한다. 왜냐하면 입법자는 원칙과 법에 의거해 공공질서를 마련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는 불의의 사실들이 생겨나 자의적인 손으로 그것들을 물리치게 되기를 기다리지 않는다. 게다가 제2권 73~77쪽에서 바로 그 교수는 과장된 경쟁의 결과로서 금융, 토지 귀족 계급의 끊임없는 형성, 소규모 재산 소유 계층의 임박한 파국을 지적하면서 비상을 외친다. 블랑키 씨는 나름대로 (자신이 했던 말을 취소하고 물러선 이래로) 노동의 조직이 경제학에서 의사일정에 올라 있다고 선언한다. 그는 일꾼들의 이득 배당 참여와 집단적 노동자의 도래를 촉구하고, 끊임없이 독점, 금지 및 자본의 전제專制에 경종을 울린다. 들을 귀가 있는 자는 들으라(Qui habet aures audiendi audiat)! 로시 씨는 범죄학자의 자격으로 경쟁의 강도짓을 정죄하는 판단을 내린다. 블랑키 씨는 형사 공보관으로서 죄인들을 규탄한다. 이는 방금 레이보 씨와 뒤누아예 씨가 부른 이중창의 맞상대이다. 이분들이 호산나를 외칠 때, 그분들은 공의회의 주교들처럼 파문으로 화답한다.

그러나 사람들은 이렇게 말할 것이다. 블랑키 씨와 로시 씨는 경쟁의 남용만을 칠 생각이라고. 그들은 그 원리를 추방하기를 삼가며, 그 모든 일에서 그들은 레이보 씨, 뒤누아예 씨와 완전히 의견 일치를 이룬다고.

나는 두 교수의 명성을 위해 이런 구별에 항의한다.

사실, 남용은 모든 것을 침해했고, 예외가 규칙이 되었다. 트롤롱 씨가 모든 경제학자들과 더불어 상업의 자유를 옹호하면서, 운송의 결합이 입법자가 반드시 속수무책 상태에 처하며 사회경제의 가장 건전한 개념을 왜곡하는 것으로 보이는 행동들 중 하나라는 점을 인정했을 대, 그는 그러한 행동이 아주 예외적이며, 그것이 일반화되지 않는다고 믿을 여지가 있다고 독백하는 위안의 마음을 여전히 가졌다. 그런데 이 행동은 일반화되었다. 가장 일상적인 법률가는 오늘ㄴ라 모든 것, 운송(육상, 철로, 수상), 밀과 밀가루, 포도주와 화장수, 목재, 석탄, 기름, 철, 섬유, 소금, 화학제품 등이 완전히 경쟁에 의해 독점화된 것을 보려면 창밖으로 머리를 내밀어 보기만 하면 된다. 정치경제학의 쌍둥이 자매인 법학이 5년이 안 되어 자신의 중대한 예측이 부정되는 것을 본다는 것은 슬프다. 그러나 거대한 민족이 그렇게 빈약한 인재들에 움직이고, 자신을 그들의 글의 잡초 속에서 살아가게 하는 몇 가지 관념들을 주워 챙긴다는 것은 더 슬픈 일이다.

이론상으로 우리는 경쟁이 그 이로운 측면에서는 보편적이 되어야 하고, 그 최대의 강도로 이루어져야 한다는 것, 그러나 그 부정적 측면에서는 어디서나 그 마지막 자취까지 질식되어야 한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경제학자들은 이 제거를 실행할 계제가 있는가? 그들은 그 결과를 예측했으며 그 난점들을 계산했는가? 긍정한다면, 나는 감히 그들에게 다음의 경우를 해결하기를 제안하고자 한다.

담합의 협정, 아니 조합의 협정―법정에서 담합과 조합을 정의하기를 아주 당혹스러워하므로―은 동일한 회사에 루아르Loire강 유역의 모든 탄광을 결합해 왔다. 리옹과 생테티엔 자치단체들의 불평으로 장관은 이 기겁할 회사의 성격과 지향을 조사할 책임을 맡은 위원회를 임명했다. 좋다! 나는 그 장관에게 여기서 권력의 개입이 민법과 정치경제학의 지원을 받아서 무엇을 할 수 있는지 묻는다.

사람들은 담합에 항의하며 소리친다. 하지만 광산주들이 일반 비용과 개발 비용을 줄이고 더 잘 합의된 작업을 통해 자신들의 광산에서 더 유리한 몫을 끌어내려고 연합하는 것을 막을 수 있는가? 이들에게 옛날의 전쟁을 재개해 지출의 증대, 낭비, 포화 상태, 무질서, 가격 인하로 서로 망하게 하라고 명령할 수 있는가? 이 모두는 터무니없다.

그들이 그들의 자본의 이자를 얻도록 가격을 올리는 것을 막을 것인가? 노동자 측의 임금 인상 요구에 대해 그들을 수호해줄 경우, 합자회사에 관한 법을 개정해야 한다. 주식 거래를 금해야 한다. 그리고 이 모든 조치들이 취해졌을 때, 유역의 소유자인 자본가들이 다른 체제에서 투하된 자본을 상실할 수밖에 없게 되는 것은 부당한 일이므로, 그 자본을 보상해 주어야 한다.

그들에게 요금표를 부과할 것인가? 이는 최대 가격 법loi de maximum이다. 그러므로 국가가 착취자들 대신 나서서 자본, 이자, 사무실 비용 등을 계산하고, 광부들의 임금, 엔지니어와 소장들의 수당, 채굴에 사용된 목재의 가격, 재료비 지출을 조정하고 끝으로 이득의 정상적이고 합당한 수치를 정해야할 것이다. 이 모든 일은 장관의 명령으로 행해질 수 없다. 법이 필요하다. 입법자는 감히 특수한 산업에 대해 프랑스인들의 공법을 변경하고, 재산권의 자리에 권력을 가져다놓을 것인가? 그렇다면 둘 중 하나다. 석탄 상업이 국가의 손에 들어가든지, 아니면 국가가 채취 산업을 위해 자유와 질서를 조화시킬 수단을 발견하든지 할 것이다. 그리고 이 경우에 사회주의자들은 이 점에 대해 행해질 것이 모든 곳에 모방되기를 요구한다.

루아르 광산들의 담합은 피해 달아나는 것을 더 이상 허용하지 않는 틀에서 사회 문제를 제기했다. 경쟁, 즉 독점 그리고 이에 따르는 것이든지, 아니면 국가에 의한 개발, 즉 노동의 값을 비싸게 함과 계속되는 빈곤화, 아니면 끝으로 평등주의적 해결책, 다른 말로 하면 노동의 조직, 이는 정치경제학의 부정과 재산권의 종말을 내포한다.

그러나 경제학자들은 결코 이 갑작스러운 논리를 가지고서 진행하지 않는다. 그들은 필요성을 가지고 거래하기를 좋아한다. 뒤팽 씨는 (1843년 6월 10일의 도덕 및 정치 과학 아카데미 회의에서) “경쟁이 국내에서는 유익할 수 있지만, 민족과 민족 간에는 금지되어야 한다”는 의견을 피력한다.

막느냐, 방임하느냐, 이것이 바로 경제학자들의 영원한 대안이다. 그들의 재능은 이를 넘어서 가지 못한다. 그들에게 뭐든 막는 것도 모든 것을 허용하는 것도 할 일이 아니라고, 그들에게 요구하는 것, 사회가 기대하는 것은 화해라고 외쳐보아야 소용없다. 이 이중적 관념은 그들의 머릿속에 들어가지 않는다. 뒤누아예 씨는 뒤팽 씨에게 대답한다.

“이론을 실천과 구분할 필요가 있다.”

맙소사! 뒤누아예 씨가 그 자신의 저서에서 원리들에 대해 굽힐 줄 모르면서 상원에서의 실천에 관해서는 아주 융통성이 있다는 것을 누구나 안다. 하지만, 그래서 그가 감히 한 번은 자신에게 이런 질문을 제기하기 바란다. 나는 왜 끊임없이 실천을 이론으로부터 구분해야만 하는가? 왜 그 둘은 일치하지 않는가?

블랑키 씨는 인간적으로는 화해를 추구하고 평화적인 사람으로서, 학자 뒤누아예 씨를 지지한다. 즉 이론을 지지하는 것이다. 그럼에도 그는 뒤팽 씨와 더불어, 즉 실천과 더불어, 경쟁은 비난에서 면제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그만큼 블랑키 씨는 험담을 해서 불을 돋우는 것을 두려워한다.

뒤팽 씨는 자기 의견을 고집한다. 그는 경쟁의 책임으로 사기, 저울을 속여 파는 일, 어린이들의 착취를 든다. 그 모두가 의문의 여지없이 국내 경쟁은 유익할 수 있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서다!

파시 씨는 그의 통상적인 논리로써 언제나 부정직한 어떤 사람들은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게 한다. “인간성을 비난하라. 그러나 경쟁은 비난하지 말라”고 그는 쓴다.

첫마디부터 파시 씨의 논리는 그 문제와는 거리가 있다. 경쟁에 대해 비난하는 것은 그것의 본성에서 나오는 폐단들이지, 경쟁이 그 기회나 핑계가 되는 사기들이 아니다. 어느 제조업자는 하루 3프랑의 비용이 드는 일꾼을 1프랑밖에 주지 않는 여성으로 대체할 수단을 발견한다. 이 편법은 그가 가격 인하를 유지하고 자기 사업을 진행할 유일한 편법이다. 곧바로 여성 일꾼들에 그는 아이들을 추가할 것이다. 그러고는 전쟁의 필요 때문에 제약받아 점점 그는 임금을 낮추고 노동 시간을 늘릴 것이다. 여기서 죄인은 어디 있는가? 이런 논리는 백 가지 모양으로 재현되고 모든 산업에 적용될 수 있다. 그러면서도 인간성을 탓할 여지는 없다.

파시 씨 자신이 다음과 같이 덧붙일 때 이를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어린이들의 강제 노동에 관해 말하자면, 잘못은 부모들에게 있다.” 이 말은 정당하다. 그리고 부모들의 잘못이라, 누구 말인가? 이 웅변가는 계속 말한다.

“아일랜드에서는 경쟁이 전혀 없는데, 그럼에도 빈곤은 극단적이다.”

이 점에서 파시 씨의 통상적 논리는 지독한 기억력 부족에 배반당했다. 아일랜드에는 토지에 대한 보편적인, 완전한 독점과 임대료를 위한 무제한의 치열한 경쟁이 있다. 경쟁-독점은 불운한 아일랜드가 내딛는 걸음마다 끌어들이는 총알이다.

경제학자들이 인간성, 부모의 탐욕, 급진주의자들의 야단을 비난하느라 피곤해할 때, 그들은 프롤레타리아트의 행복이라는 그림으로 기뻐한다. 그러나 거기서도 그들은 서로 간에도 자신과도 의견 일치를 이루지 못한다. 그리고 그들의 관념의 무질서보다 경쟁의 무정부성을 더 잘 그려주는 것은 없다.

“오늘날 장인의 아내는 지난 세기의 귀부인이 감히 걸치지 못했던 우아한 드레스를 차려입는다.”(슈발리에) 그리고 자신의 고유한 계산에 따라 국민소득의 총계가 하루 개인당 65상팀이 될 것이라고 추산하는 것이 바로 슈발리에 씨다. 어떤 경제학자들은 심지어 이 숫자를 55상팀까지 낮춘다. 그런데, 이 총액에서 상류층의 재산을 구성할 것을 취할 필요가 있으므로 드모로그 씨의 계산에 따르면 프랑스인 절반의 소득은 25상팀을 넘지 않는다고 평가할 수 있다. 슈발리에 씨는 신비로운 감정의 고양 상태에서 이렇게 재론한다.

“하지만 행복은 욕구와 향유의 조화에, 필요와 만족의 균형에 있지 않나? 그것은 일정한 영혼의 상태에 있는 것이어서, 그 조건들을 정치경제학이 가로채서도 안 되고, 이를 탄생시킬 사명을 정치경제학이 가지지도 않은 것이 아닌가? 이는 종교와 철학의 작품이다.” 호라티우스가 우리 시대에 살고 있다면 슈발리에 씨에게 이렇게 말할 것이다. 경제학자여, 당신들은 내 소득이나 신경 쓰시오. 그리고 내 영혼을 돌보는 것은 나에게 맡기시오. 그가 내게 생명을 주고, 내게 부를 준다면, 나 스스로 덕을 마련하리라(Det vitam, det opes, oequum mi animum ipse parabo).

뒤누아예 씨는 새로 말을 꺼낸다.

“많은 도시들에서 축제일에 노동계급과 부르주아 계급을 혼동하기가 쉬울 수도 있겠다(왜 두 계급이 있나?). 그런 만큼 노동계급의 판이 추구된다. 음식에서도 그에 못지않은 진보가 있다. 먹을 것은 더 풍부하고 더 알차면서도 더 다채롭다. 빵은 어디서나 나아졌다. 육류, 수프, 흰 빵은 여러 공장 도시들에서 옛날보다 무한히 더 평범한 관습이 되었다. 끝으로 평균 수명은 35세에서 40세로 올라갔다.”

더 나아가 뒤누아예 씨는 마셜(Marshall)에 따라서 영국의 재산 사정의 그림을 그려준다. 이 그름에서 나오는 것은, 영국에서는 250만 가정이 1200프랑의 소득밖에 가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런데 영국에서 1200프랑의 소득은 우리에게는 730프랑에 해당한다. 이는 네 사람으로 나누면 각자에게 182프랑 50상팀이 되고, 하루에는 50상팀이 된다. 이는 슈발리에 씨가 프랑스인 각 사람의 하루 소득으로 보는 65상팀에 근접한다. 프랑스 사람이 더 나은 차이는 부의 진보가 프랑스에서 더 뒤쳐져서, 빈곤도 마찬가지로 덜하다는 것에서 오는 것이다. 경제학자들의 말이 무성한 묘사를 믿어야 할까 아니면 그들의 계산을 믿어야 할까? 블랑키 씨는 다음과 같이 시인한다.

“영국에서 극빈층은 정부가 이 끔찍한 노동 수용소들에서 피난처를 찾아야 할 정도로 늘어났다. …” 실제로 노동이 우습고 성과 없는 직업들로 이루어지는 이 노동 수용소라는 곳은, 사람들이 뭐라고 하건 고문 수용소일 뿐이다. 왜냐하면 곡물도 밀가루도 없는 방아를 휴식을 못 하게 하려는 유일한 목적으로, 그렇다고 해서 무위도식을 면하게 하는 것도 아니면서 돌리게 하는 것 같은 일만 한 고문은 이성적인 존재에게는 없기 때문이다. 블랑키 씨는 계속해서 말한다.

“이 조직(경쟁의 조직)은 노동의 모든 이윤이 자본 측으로 넘어가게 하는 경향을 띤다. … 맨체스터, 리즈, 스피탈필즈Spitalfields에서처럼 랭스, 뮐루즈, 생캉탱에서 일꾼들의 생존이 가장 불안하다. …” 그리고 일꾼들의 빈곤을 그린 무서운 그림이 이어진다. 남자들, 여자들, 어린이들, 처녀들이 당신 앞에 굶주린 채, 창백한 몰골로, 누더기를 걸치고, 생기 없이, 거친 태도로 지나간다. 그 묘사는 이런 모습으로 끝맺는다. “기계 산업의 인부들은 군대 모집에 병사를 더 이상 제공하지 못한다.” 이들에게는 뒤누아예 씨의 흰 빵과 수프가 이로움을 주지 못하는 것 같다.

비예르메(Villermé) 씨는 젊은 여성 일꾼들의 방종을 불가피하다고 간주한다. 동거는 그들에게 습관화된 생활이다. 그들은 사장, 사무원, 대학생에게 전적으로 후원을 받는다. 일반적으로 결혼이 부르주아지보다는 인민에게 더 큰 매력을 가짐에도 불구하고, 다수의 프롤레타리아들은 맬서스주의자들도 모르는 일인데, 가족을 두려워하고 급류를 따라간다. 이처럼 남성 인부들이 대포의 밥인 것처럼, 여성 인부들은 매춘의 밥이다. 이는 일요일의 우아한 옷차림을 설명해준다. 결국 왜 이 아가씨들이 부르주아 여성보다 정조를 지킬 의무가 있겠는가?

학술원에서 상을 받은 외젠 뷔레(Eugène Buret) 씨는 이렇게 말한다. “나는 노동계급의 몸과 영혼이 다 산업의 자의에 방치되어 있다고 단언한다.” 그는 다른 데서는 이렇게 말한다. “투기의 극히 미미한 노력이 빵 값을 파운드당 5상팀 그리고 그 이상으로 달라지게 할 수 있다. 이는 3400만 명의 사람에 대해서는 6억 2050만 프랑이 된다.” 지나가면서 하는 말이지만, 아주 유감스러워하는 뷔레가 독점자들의 존재를 대중적 편견으로 간주했다는 것에 주목하라. 이보시오, 궤변론자여, 당신이 그 일을 인정한다면 독점자이든 투기자이든 이름이 무슨 상관이겠는가?

그런 식의 인용은 몇 권이라도 채울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 글의 목표는 경제학자들의 모순을 이야기하고 사람들에게 결과 없는 싸움을 거는 것이 결코 아니다. 우리의 목표는 더 고상하고 존엄하다. 이는 경제적 모순들의 체계를 펼쳐 보여주는 것이다. 이는 완전히 다른 목표다. 우리는 그러므로 여기서 이 슬픈 검토를 끝낼 것이며, 끝내기 전 경쟁의 폐단들을 치료하기 위해 제안된 다양한 수단들을 일별하고자 한다.

. 경쟁의 치료법들

노동에서 경쟁은 폐지될 수 있는가?

개인의 인성, 자유, 책임은 제거될 수 있는지를 묻는 것도 그만한 가치가 있을 것이다.

경쟁은 실로 집단적 활동의 표현이다. 가장 고상한 의미에서 고려되는 임금이 노동자의 장단점, 한마디로 그의 책임의 표현인 것과 마찬가지다. 노동에서의 자유와 규율이라는 이 두 본질적 형태를 질타하고 이에 항거해도 소용이 없다. 임금의 이론 없이는 재분배도 없고 정의도 없다. 경쟁의 조직 없이는 사회적 보장도 없고 따라서 연대도 없다.

사회주의자들이 가정을 산업적 경쟁에 대립시키며 사회가 각자 자기 이익의 법칙에 의해 붙잡히는 일종의 담합체로서가 아니라 그 모든 구성원이 혈육의 정으로 연결되는 대가족으로서 정확하게 구성될 수 없는지를 스스로에게 질문할 때, 그들은 본질적으로 구분되는 이 두 가지를 혼동했다. 가족은, 감히 말하건대, 사회의 전형, 유기적 분자가 아니다. 드보날드(de Bonald) 씨가 아주 잘 관찰했듯이, 가족 안에는 단 하나의 도덕적 존재, 단 하나의 정신, 단 하나의 영혼, 성서에서처럼 거의 이렇게 말하겠는데, 단 하나의 살만 존재한다. 가족은 군주정과 귀족정의 전형이고 요람이다. 그 안에서는 권위와 주권의 관념들이 거주하고 유지되며, 이는 국가에서 점점 희미해진다. 고대와 봉건 시대의 모든 사회는 가족의 모델에 따라서 조직되었다. 그리고 현대의 민주주의는 바로 이 낡은 가부장 체제에 대항해 항거하고 반기를 든다.

사회의 구성단위는 작업장이다.

그런데, 작업장은 필연적으로 단체의 이익과 사익을 내포한다. 집단적 인간과 개인들을 내포한다. 이로부터 가족 내에서는 알려지지 않은 관계들의 체계가 생겨난다. 그 관계들 중에는 주인으로 대표되는 집단적 의지와 임금 수령자들로 대표되는 개인적 의지의 대립이 첫째 자리에 등장한다. 그 다음으로는 작업장과 작업장, 자본과 자본의 관계들, 다시 말해 경쟁과 조합이 온다. 왜냐하면 경쟁과 조합은 서로에게 의존하고 서로 지탱해주기 때문이다. 그것들은 하나 없이는 다른 하나도 없다. 서로를 배제하기는커녕 그것들은 엇나가지도 않는다. 경쟁을 말하는 자는 이미 공통의 목표를 가정한다. 그러므로 경쟁은 이기주의가 아니다. 가장 한심한 사회주의의 오류는 경쟁을 사회의 전복으로 간주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여기서 경쟁을 파괴하는 것이 문제일 수는 없을 것이다. 이는 자유를 파괴하는 것이나 마찬가지로 불가능한 일이다. 균형을 발견하는 것이 중요하다. 나는 기꺼이 치안police을 발견하는 것이라고 말하겠다. 왜냐하면 일체의 힘, 일체의 자생성은 개인적인 것이든 집단적인 것이든 결정을 받아야 하기 때문이다. 이런 점에서 경쟁은 지성, 자유와 마찬가지다. 그러니 경쟁은 어떻게 사회 안에서 조화롭게 결정될 것인가?

우리는 정치경제학을 대변하는 뒤누아예 씨의 대답을 들어보았다. 경쟁은 스스로 경정되어야 한다. 다시 말해, 뒤누아예 씨와 모든 경제학자들에 따르면, 경쟁의 폐단들에 대한 치료법은 여전히 경쟁이다. 그리고 정치경제학은 소유권, 사용과 남용의 절대적 권리의 이론이니 정치경제학이 달리 대답할 것을 지니지 않는다는 점은 명확하다. 그런데 이는 자유에 대한 교육이 자유에 의해 행해지고, 정신의 훈육이 정신에 의해서, 가치의 결정이 가치에 의해서 행해진다고 주장하는 것과도 같다. 모두 명백히 동어반복적이고 터무니없는 명제들이다.

그리고 실제로, 우리가 다루는 주제에 국한한다면, 눈에 띄는 것은 경쟁이 그 자신을 위해 실천되고 모호하고 불화를 일으키는 독립을 유지하는 것 말고 다른 목적을 가지지 않을 때 이는 아무 결과도 가졍로 수 없으며, 경쟁의 진자 운동은 영구적이라는 것이다. 경쟁에서 투쟁하는 것은 자본들, 기계들, 공정들, 재능과 경험, 즉 여전히 자본들이다. 그러므로 경쟁이 사익을 위해서만 행해지며, 그 사회적 효과들이 과학에 의해서도 결정되지 않고 국가에 의해서도 남겨지지 않았다면, 경쟁 안에는, 민주주의 안에서처럼 내전으로부터 과두 체제로, 과두 체제로부터 독재로, 그러고는 해체와 내전으로의 회귀로 끝없이, 그리고 쉴 틈 없이 가는 연속적 경향이 있을 것이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경쟁은 그대로 방치되면 결코 그 체제 형성에 도달하지 못한다. 가치가 그것을 사회화하고 정의하는 상위 원리를 필요로 하는 것과 마찬가지다. 이 사실들은 이제부터 우리가 비판으로 얻어진 것으로 간주하고 다시 돌아오지 않아도 될 만큼 충분히 잘 확인된다. 정치경제학은 경쟁의 치안에 관해서 경쟁 자체 말고 다른 수단을 가지지 않고 가질 수도 없어서 무능한 것으로 입증된다.

그러므로 사회주의가 그 해법을 어떻게 이해했는지를 알아볼 일이 남는다. 단 하나의 예가 사회주의가 가진 수단들의 면모를 제시할 것이며, 우리에게 그 점에서 일반적 결론을 내리게 해줄 것이다.

루이 블랑 씨는 아마도 모든 현대 사회주의자 중에, 특출한 재능으로 자신의 글에 공중의 관심을 가장 잘 모을 수 있었던 자일 것이다. 그의 책 『노동의 조직』에서 조합의 문제를 단 하나의 사항, 경쟁으로 가져간 후에 그는 주저 없이 경쟁을 폐지해야 한다고 공언한다. 이로 보건대 이 작가가 보통은 아주 식견이 높은 사람이지만, 정치경제학의 가치에 관해, 그리고 사회주의의 위상에 관해 환상을 품었다고 판단할 수 있다. 한편으로 블랑 씨는 어딘지 모를 곳으로부터 자신의 완성된 관념들을 받아들이고 자신의 세기에만 가치를 부여하고 역사는 무가치하다고 보면서 정치경제학을 그 내용과 형태에서 절대로 기각하여 조직의 재료 자체를 단념하며, 다른 한편으로 전 시대에 없던 모든 현실을 그 시대로부터 되살아난 경향들 탓으로 돌리고 이를 새로운 경향이라고 간주하며, 사회주의의 오로지 비판적인 본성을 오해한다. 그래서 블랑 씨는 우리에게 생생하고 불가능성에 사로잡히기 쉬운 상상의 광경을 제공해 주었다. 그는 천재성의 신성화를 믿었다. 하지만 그는 과학이 즉흥적으로 나아가지 않는다는 것, 아돌프 부아예, 루이 블랑, 혹은 장 자크 루소 등 어떤 이름으로 불리든지 경험에 아무것도 없는 순간부터 오성에도 아무것도 없다는 것을 알아차려야 했다.

블랑 씨는 이런 선언으로 시작한다. “우리는 두 대립된 원리의 얼마나 신비로운지 모를 짝짓기를 상상한 자들을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 경쟁에 조합을 접목하는 것은 빈약한 관념이다. 이는 환관을 양성구유자들로 대체하는 것이다.”

이 네 줄은 블랑 씨에게는 언제까지나 후회스러운 것이다. 이 말은 그의 책 제4판이 나오던 때에 그가 정치경제학에서처럼 논리학에서도 별로 진도를 나가지 못했다는 것, 이 분야에서나 저 분야에서나 그는 색맹처럼 생각했다는 것을 증명해준다. 양성구유는 정치에서는 바로 배제에 있다. 왜냐하면 배제는 언제나 어떤 형태로든, 그리고 같은 정도로 배제된 관념을 다시 가져오기 때문이다. 그리고 블랑 씨는 사람들이 그가 자신의 책에서 행한, 극히 상반되는 원리들인 권위와 권리, 소유권과 공산제, 귀족 정치와 평등, 노동과 자본, 보상과 헌신, 자유와 독재, 사상의 자유와 종교 신앙의 끊임없는 혼합을 통해서 진정한 양성구유자, 이중의 성性을 가진 논객이 그 자신 블랑 씨라는 것을 보여준다면 놀랄 것이다. 블랑 씨는 민주주의와 사회주의의 경계에 위치해서 공화국보다 한 등급 낮고, 바로(Barrot) 씨보다는 두 등급이 낮으며, 티에르(Thiers) 씨보다는 세 등급이 낮아서, 아직 그 자신이 무슨 말을 하고 무슨 일을 하든 교조주의자인 기조(Guizot) 씨의 4대 후손이다. 블랑 씨는 이렇게 적는다.

“확실히 우리는 권위의 원리에 파문을 외치는 자들에 속하지 않는다. 이 원리를 우리는 어리석으면서도 위험한 공격들에 맞서 수호할 천 번의 기회를 가졌다. 사회에서 조직된 힘이 아무것도 아닐 경우에 독재가 어디에나 있게 된다는 것을 우리는 안다. …”

블랑 씨에 따르면, 이와 같이 경쟁에 대한 치료법, 아니, 경쟁을 폐지할 수단은 권위의 개입, 개인적 자유를 국가로 대체하는 것에 있다. 이는 경제학자들의 체계의 역이다.

사회적 성향이 알려진 블랑 씨가 나더러 그를 반박해 졸렬한 전쟁을 걸었다고 비난한다면 나는 유감스러울 것이다. 나는 블랑 씨의 너그러운 의도를 정당하게 평가한다. 나는 그의 저서들을 좋아하고 읽으며, 특히 그의 『10년의 역사Historie de dix ans』에서 자기 당파의 구제불능의 궁핍을 발견하게 해 그가 행한 기여에 감사를 돌린다. 그러나 아무도 바보이거나 멍청이로 여겨지는 것에 동의할 수는 없다. 그런데 일체의 인간 문제는 제쳐두고, 이 보편적 항의인 사회주의와 블랑 씨의 공화국을 구성하는 낡은 편견들의 혼란 사이에 무슨 공통점이 있을 수 있는가? 블랑 씨는 권위에 호소하기를 그치지 않으며, 사회주의는 고도로 무정부적이라고 스스로 공언한다. 블랑 씨는 권력을 사회 위에 두며, 사회주의는 권력을 사회 밑으로 가게 하는 경향을 띤다. 블랑 씨는 사회생활을 높은 데서부터 낮추며, 사회주의는 그것을 밑에서부터 나타나서 발육하게 한다고 주장한다. 블랑 씨는 정치를 뒤쫓아 가며, 사회주의는 과학을 추구한다. 위선이 더 있다고 나는 블랑 씨에게 말할 것이다. “그대는 로마 가톨릭도, 군주정도, 귀족 신분도 원하지 않는다. 하지만 그대에게는 신, 종교, 독재, 검열, 위계, 신분의 구별과 서열이 필요하다.” 그리고 나는 그대의 신, 그대의 권위, 그대의 주권, 그대의 법적 신분, 그리고 그대의 일체의 대의적 신비화를 부인한다. 나는 로베스피에르의 향로도, 마라의 몽둥이도 원하지 않는다. 그대의 양성구유적 민주주의를 겪느니 차라리 현 상태를 지지한다. 16년 전부터 그대의 당파는 진보에 저항하고, 의견을 말하는 것을 막는다. 16년 전부터 그는 중도좌파의 극단에서 권력에 줄을 서 자신의 독재적인 원천을 보여준다. 그는 사임하거나 변신할 때이다. 권위의 냉혹한 이론가들이여, 당신들이 전쟁을 거는 대상인 정부가 당신들보다 더 지지를 받을 만한 방식으로 실현하지 못하는 어떤 것이 있다고 제안하는가?

블랑 씨의 체계는 세 가지로 요약된다.

1. 권력에 대한 거대한 창도력을 만들어준다. 즉 프랑스어로, 독재를 유토피아를 실현하기에 전능하게 만든다.

2. 국가의 비용 부담으로 공공 작업장들을 만들고 후원한다.

3. 국영 산업의 경쟁 아래 민간 산업을 소멸시킨다.

그리고 이것이 전부이다.

블랑 씨는 그것 하나로 다른 모든 것을 내포하는 가치의 문제를 다루었는가? 그는 이에 의구심을 품기만 한 것이 아니다. 그는 분배 이론을 내놓았는가? 아니다. 그는 노동자에게 무지, 부도덕, 그리고 빈곤의 영구적 원인인 노동 분업의 이율배반을 매듭지었는가? 아니다. 그는 기계와 임금 제도의 모순을 사라지게 했으며, 조합의 법들을 자유의 법들과 조화하게 했는가? 정반대로 블랑 씨는 이 모순을 성별한다. 국가의 독재적 보호 아래 그는 원리적으로 신분과 임금의 불평등을 인정하며, 이에 대한 보상으로 거기에 선거권을 덧붙인다. 자신들의 규칙에 투표하고, 자신들의 우두머리를 선출하는 일꾼들은 자유롭지 않은가? 투표를 하는 이 일꾼들은 그들 중에서는 명령도 임금 차이도 인정하지 않는 일이 일어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면, 정치적 평등을 유지하면서도 산업상의 역량을 지닌 자들을 만족시킬 아무것도 예견되지 않을 것이므로 작업장에는 해체가 파고들 것이며, 경찰이 개입하지 않으면 각자는 자기 사업으로 돌아갈 것이다. 이런 두려움은 블랑 씨에게는 진지한 것으로도, 근거 있는 것으로도 여겨지지 않는다. 그는 사회가 그의 생각이 틀렸다고 반박을 가하도록 혼란하게 되지 않으리라는 확신을 가지고 평온하게 시험을 기다린다.

그리고 아주 복잡하게 얽히고설킨 조세, 신용, 국제무역, 재산권, 상속의 문제들을 블랑 씨가 깊이 파고들었는가? 그리고 인구 문제는 그가 해결했는가? 아니다. 아니다. 아니다. 천만에. 블랑 씨는 난점을 해결하지 못할 때, 그것을 제거한다. 인구에 관해서 그는 이렇게 말했다. “번식력이 강한 것은 빈궁한 계층뿐이고, 사회적 작업장은 빈궁한 계층을 사라지게 할 것이므로, 이에 유념할 이유가 없다.”

시스몽디 씨가 보편적 경험의 뒷받침을 받아 그에게 이렇게 외쳐도 소용없다. “우리는 위임된 권력을 행사하는 자들에게 어떤 신뢰도 품지 않는다. 우리는 모든 단체가 개인적 이익에 의해 활기를 띠는 자들보다 자신의 사업을 더 못 하리라고, 지도자들 쪽에는 태만, 사치, 낭비, 정실情實, 연루되는 데 대한 두려움, 결국 사적 재산과 대비되는 공적 재산의 관리에서 보게 되는 일체의 결점들이 있을 것이라고 믿는다. 또한 우리는 주주총회에서는 부주의, 변덕, 태만을 보게 되리라고, 영리 사업은 그것이 심의회와 상인에 의존해야 한다면 끊임없이 위태롭고 곧 망하게 되리라고 믿는다.” 블랑 씨는 아무것도 이해하지 못한다. 그는 그의 문장의 울림에 도취된다. 사익, 이것을 그는 공적인 것에 대한 헌신으로 대체한다. 경쟁을 그는 경쟁심과 보수로 대체한다. 신과 권위, 천재에 대한 그의 신앙의 필연적 결과인 산업적 위계를 원칙으로 제시한 후 그는 신비적 능력들, 그의 가슴과 상상의 우상들에 빠져든다.

이처럼 블랑 씨는 쿠데타로, 아니, 오히려 그의 독창적 표현에 따른다면, 그가 권력에 만들어준 창도력의 적용으로 시작하며, 프롤레타리아트를 후원하기 위해 부자들에게 상당한 출연금을 부과한다. 블랑 씨의 논리는 아주 단순하다. 그것은 공화국의 논리다. 권력은 인민이 원하는 것을 할 수 있으며, 인민이 원하는 것이 참이라는 것이다. 사회의 극히 자생적인 경향을 억압하고, 그 극히 진정 어린 발현을 부정하고, 전통의 규칙적인 발달로써 행복을 일반화하는 대신에 노동과 소득을 옮긴다는 것은 사회를 개혁하는 이상한 방식이다! 하지만, 진실로 이런 눈속임이 무슨 소용인가? 그런 요령을 왜 부리는가? 뒤이어서 토지법을 채택하는 것이 더 간단하지 않았는가? 권력은 그 창도력 덕분에 갑자기 그 소유자들에게, 이행의 형태에 따라 보상은 해주지만 모든 자본과 노동 수단이 국가의 재산이라고 선언할 수 없었는가? 이 단호한, 그러나 충심의 성실한 조치에 의해 경제학의 들판은 청소가 되었다. 그 유토피아에 비용이 더 든 것도 아니었고, 블랑 씨는 그럴 때 어떤 장애물도 없이 사회의 조직으로 쉽게 진행해 갈 수 있었다고?

하지만 내가 무엇이라 하는가? 조직한다고! 블랑 씨의 유기적 작품 전체는, 말하자면 이 거대한 수탈 혹은 대체의 조치에 있다. 산업이 일단 옮겨지고 공화국의 것이 되고 거대한 독점이 형성되면 블랑 씨는 생산이 마음껏 나간다는 것을 조금도 의심치 않는다. 그는 사람들이 자신의 체계라고 부르는 것에 맞서 들고일어나는 것을 이해하지 못한다. 유일한 애로사항이다. 그리고 사실, 블랑 씨의 개념처럼 그렇게 철저히 무익하고 이해 불가능한 개념에 맞서 무엇을 제시할까? 그의 책의 가장 신기한 부분은 몇몇 불신자들이 제기한 반론들 중에서 선정한 글 모음이며 이에 그는 짐작건대 의기양양하게 답한다. 이 비판자들은 블랑 씨의 체계를 논박하면서 그들이 수학적인 한 점의 차원, 중량 그리고 모양에 관해 논의를 펴고 있는 것임을 몰랐다. 그런데 블랑 씨가 이끈 논쟁은 그에게 그 자신의 사색이 한 것보다 더 많은 것을 가르쳐준 결과가 되었다. 그리고 반론이 계속되었더라면 그가 발명했노라고 믿은 것, 노동의 조직을 결국 발견하게 되었으리라는 것을 사람들은 알아차린다.

그러나 결국 그 목표, 아주 협소하기도 하지만 블랑 씨가 추구한 목표, 즉 경쟁의 폐지와 국가가 후견을 맡고 후원하는 기업의 성공 보장이라는 이 목표는 달성되었는가? 나는 이 주제에 관해 재능 있는 경제학자 조지프 가르니에 씨의 성찰을 인용하려고 한다. 이분의 말에 약간의 논평을 덧붙이려고 한다.

“블랑 씨에 따르면, 정부는 도덕적인 일꾼들을 선택할 것이며, 그들에게 괜찮은 임금을 줄 것이다.” 이처럼 블랑 씨에게는 된사람des hommes faits이 명시적으로 필요하다. 그는 모든 종류의 성정에 작용을 한다고 환상을 품지 않는다. 임금에 관해서는 블랑 씨는 괜찮은 임금을 약속한다. 이는 그 크기를 규정하는 것보다는 수월하다.

“블랑 씨는 이 작업장들이 순생산을 낼 것이고 게다가 민간 산업에 대해 아주 훌륭한 경쟁을 벌여 민간 산업이 국영 작업장으로 전환하리라는 것을 가설로 인정한다.”

국영 작업장의 원가가 자유 작업장들의 그것보다 높으면 이는 어떻게 가능할까? 나는 제1장에서 한 방적공장의 일꾼 300명이 그들 모두 해서 그 사업가에게 2만 프랑의 정기적 순소득을 생산해 주지 못하며, 이 2만 프랑은 300명 노동자들에게 분배된다면 그들의 소득을 하루 18상팀씩밖에 올려주지 못한다는 것을 보였다. 그런데 이는 모든 산업에 대해서 진실이다. 일꾼들에게 괜찮은 임금을 주어야 하는 국영 작업장이 이 적자를 어떻게 메울 것인가? 경쟁심을 통해서라고 블랑 씨는 말한다.

블랑 씨는 극단적인 안도감으로 메종 르클레르Maison Leclaire를 인용한다. 이는 사업을 아주 잘하는 건물 페인트공 회사로, 그는 이를 자기 체계의 생생한 증거로 간주한다. 블랑 씨는 이 예에 다수의 비슷한 회사들을 추가할 수 있었을 것이다. 메종 르클레르와 똑같이 많은 것을 입증해줄, 즉 더 입증해주는 것은 아닐 회사들 말이다. 메종 르클레르는 집단적 독점체제로서 이를 감싸는 거대한 사회에 의해 유지된다. 그런데 사회 전체가 블랑 씨가 말하는 의미의, 그리고 메종 르클레르의 모형에 따른 독점체가 될 수 있는가를 아는 것이 중요하다. 이를 나는 적극 부정한다. 하지만 우리의 관심사인 문제에 좀 더 가까이 닿는 것, 블랑 씨가 몰두하지 않는 것은, 메종 르클레르가 그에게 제공한 분배 계산서를 볼 때 메종 르클레르의 임금이 일반적 평균치보다 훨씬 높아서 사회의 재조직화에서 행할 첫 번째 것은 메종 르클레르 식으로 그 일꾼들 간에든, 외부에 대해서든 경쟁을 불러일으키는 것이리라는 결과가 나온다는 것이다.

“임금은 정부에 의해 규율될 것이다. 사회 작업장의 구성원들은 이를 자기 마음대로 사용할 것이며, 공동생활의 반박할 수 없는 탁월성은 작업들의 조합으로부터 즐거움의 자발적 조합이 생겨나도록 하기를 지체하지 않을 것이다.”

블랑 씨는 공산주의자인가 아닌가? 바다에 표류하는 대신에 일단 그렇다고 공언하길 바란다. 그러면 공산주의가 그를 더 이해가 가게 해주지 않을지라도 적어도 그가 원하는 것을 알게될 것이다.

“몇몇 신문들이 블랑 씨에게 제기한 반론들에 관해 그가 판단을 내린 보론을 읽어보면, 그의 개념에 불완전한 것이 있음을 더 잘 알게 된다. 그것은 생시몽주의, 푸리에주의, 공산주의라는 세 아버지가 정치, 그리고 약간의, 아주 조금의 정치경제학의 협조를 받아서 낳은 딸이다.”

“그의 설명에 따르면 국가는 산업의 조정자, 입법자, 보호자일 뿐이며, 보편적 제조자도, 생산자도 아닐 것이다. 그러나 국가가 민간 산업을 파괴하기 위해 사회 작업장들을 배타적으로 보호하므로 그것은 불가항력적으로 독점체가 되며, 자신의 뜻과 달리 적어도 생산에서는 생시몽주의 이론으로 되돌아가게 된다.”

블랑 씨는 이를 부정할 수 없을 것이다. 그의 체계는 민간 산업에 반대해 이끌어진다. 그리고 그에게서 권력은 그 창도력으로써 일체의 개인적 창도성을 꺼뜨리고, 자유노동을 금지하는 경향을 띤다. 상반되는 것들의 짝짓기는 블랑 씨에게는 역겹다. 또한 그가 경쟁을 좋바에 희생시킨 후에 자유도 이에 희생시키는 것을 보자. 나는 그가 가족의 폐지를 들고 나오기를 기다린다.

“그럼에도 위계가 선출 원칙에서 나올 것이다. 이는 푸리에주의에서도 그렇고 입헌 정치에서도 그렇다. 그러나 역시 이 사회 작업장들은 법의 다스림을 받아서 단체들과는 다른 것일까? 단체들의 끈은 무엇인가? 법이다. 누가 법을 만들까? 정부다. 당신은 정부가 선하리라 가정한다. 좋다. 경험이 입증해준 것은, 정부는 산업의 무수한 사고들을 규율할 뜻이 전혀 없었다는 것이다. 당신은 우리에게 정부가 이윤을, 임금율을 고정해 주리라고 말한다. 당신은 노동자들과 자본들이 사회 작업장에 깃들이게 될 방식으로 정부가 이런 일을 행하리라 기대할 것이다. 그러나 당신은 공동생활, 팔랑스테르를 향한 경향을 가질 이 작업장들 간에 균형이 어떻게 성립될지를 우리에게 말하지 않는다. 당신은 이 작업장들이 내 · 외부 경쟁을 어떻게 회피할지를 우리에게 말하지 않는다. 그 작업장들이 자본에 비해 과잉인 인구에게 어떻게 공급을 할지, 제조업을 사회 작업장들은 들녘의 사회 작업장들과 어떻게 다를지, 그리고 그 밖의 많은 것들을 우리에게 말하지 않는다. 나는 당신이 “법의 구체적 효력에 따라서!”라고 답하리라는 것을 잘 안다. 그리고 당신의 정부, 당신의 국가가 법을 만들 줄 모른다면? 당신이 비탈길을 미끄러져 간다는 것, 당신은 살아있는 법과 유사한 어떤 것에 매달리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을 모르는가? 당신의 글을 읽어보면 이를 잘 알게 된다. 당신은 특히 당신의 체계에 적용될 수 있는 권력을 창출하는 데 몰두한다. 하지만 당신의 글을 주의 깊게 읽어본 후 나는 당신이 당신에게 필요한 것에 대한 명확하고 적확한 관념을 아직 가졌다고 생각하지 않음을 공언한다. 우리 모두에게처럼 당신에게 부족한 것, 이는 자유와 평등에 대한 진정한 관념이다. 당신이 무시하지 않았으면 하는 것, 당신이 아무리 조심해도 희생시키지 않을 수 없는 그것이다.”

“권력의 본성과 기능들을 몰라서 당신은 단 하나의 설명에 감히 머물지 못했다. 당신은 조금의 사례도 제시하지 못했다.”

“작업장들이 생산하는 기능을 한다는 것을 인정하자. 산물을 유통시키기도 하고, 교환을 행하기도 할 것은 상업 작업장들이다. 그러면 누가 가격을 조정할 것인가? 역시 법인가? 진실로 나는 당신에게 그렇다고 말한다. 당신에게는 시나이 산 위의 새로운 현현이 필요할 것이다. 그것이 없으면 당신은 그로부터 결코 당신의 최고 행정 재판소, 대의원 회의, 혹은 당신의 상원을 끌어내지 못할 것이다.”

이런 성찰들은 물리칠 수 없는 정당성을 띤다. 블랑 씨는 국가에 의한 조직을 가지고서 언제나 그가 시작해야 했던 곳을 거쳐서 결론을 내리지 않을 수 없다. 그리고 이는 그가 『경제학 연구étude de la science économique』라는 책을 쓰는 수고를 피하게 해주었을 것이다. 그의 비판자가 아주 잘 말한 것처럼 말이다. “블랑 씨는 정치적 전략을 구사하는 데 맞지 않는 문제들을 다루면서 정치적 전략을 만든 심각한 잘못을 했다.” 그는 정부를 독촉하려 했으며, 사회주의와 장광설을 늘어놓는 의회민주주의의 불상용성을 점점 더 잘 입증해 보여주는 것에만 성공을 거두었다. 그의 팸플릿은 우아한 면들로 장식이 되어 그의 문장을 영예롭게 한다. 그 책의 철학적 가치로 말하자면, 이는 그 저자가 각 면에 대문자로 ‘나는 항의한다(JE PROTESTE)’라는 한마디를 적는 데 국한했을 경우와 절대로 동일할 것이다.

요약해보자.

경쟁은 경제적 입장이나 국면으로, 그 원천을 볼 때 기계의 발명, 작업장의 형성, 일반적 비용 절감 이론의 필연적 결과이다. 그 고유의 의미와 경향으로 볼 때, 그것은 집단적 활동이 발현하고 행해지는 양상이며, 사회적 자생성의 표현, 민주주의와 평등의 상징, 가치 구성의 가장 정력적인 수단, 조합의 버팀목이다. 개인적 힘들의 발휘로서 그것은 그들의 자유 보장이고, 그들의 조화의 제1의 계기이고, 그들 모두를 결합하고 연대하게 하는 책임의 형태이다.

그러나 그대로 방치된, 상위의 효과적 원칙의 지도가 없는 경쟁은 모호한 운동, 산업적 역량의 목표 없는 진자 운동에 불과해서, 한편으로 우리가 작업장이 탄생시키는 것을 본 단체들과 후원 제도, 다른 한편으로 다음 장에서 문제가 될 독점이라는 이 똑같이 치명적인 양극단 사이를 영구히 우왕좌왕한다.

사회주의는 이 무정부적 경쟁에 합당하게 항거하면서 그것의 규율을 위한 만족스러운 대책을 아직 제안하지 못했다. 그리고 그 증거는 어디서나 빛을 본 유토피아들에서 제멋대로 방치된 가치의 결정과 사회화를 만나게 된다는 것, 그리고 모든 개혁은 혹은 위계적 단체로, 혹은 국가의 독점으로, 혹은 공동체의 독재로 귀결된다는 것이다.

제6장 제4기독점

독점, 한 물건에 대한 배타적 상거래, 개발 이용 혹은 향유.

독점은 경쟁의 자연적 반대물이다. 이 단순한 관찰은 우리가 언급한 것처럼 경쟁에 상반되는 것이 마치 조합과 우애라는 듯이 경쟁을 폐지하자는 생각을 가진 유토피아들을 몰락시키기에 충분하다. 경쟁은 집단적 존재에 생기를 불어넣는 생명력이다. 이를 파괴하는 것은, 그런 가정이 성립될 수 있다면, 사회를 죽이는 일일 것이다.

그러나 경쟁이 필요할 때부터 그것은 독점의 관념을 내포한다. 독점은 경쟁하는 각 개체의 본거지와 같으니 말이다. 경제학자들이 증명했고 로시 씨도 단호히 인정한 것은, 독점은 사회적 소유의 형태로서 그 바깥에는 노동도, 생산물도, 교환도, 부도 없다는 것이다. 일체의 토지 소유는 독점이다. 일체의 산업적 유토피아는 독점으로 형성되는 경향을 띤다. 그리고 이 두 범주 안에 포함되지 않은 다른 기능들에 대해서도 같은 말을 할 필요가 있다.

그러니 독점 그 자체는 불의의 관념을 내포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 안에는 인간의 것인 만큼 똑같이 사회의 것으로서 합당한 그 무언가가 있다. 이는 바로 우리가 고찰하려고 하는 원리의 긍정적인 면이다.

그러나 독점은 경쟁과 마찬가지로 반사회적이고 치명적이게 된다. 어떻게 해서 그런가? 경제학자들은 남용abus 때문이라고 답한다. 그리고 검찰관이 전념하는 것은 독점의 남용을 규정하고 처벌하는 일이다. 새로운 경제학파가 자랑하는 것은 바로 독점을 고발하는 일이다.

우리는 독점의 이른바 남용이라는 것이 합법적 독점이 부정적 방향으로 발달한 효과일 뿐이라는 것, 이는 그 원리로부터, 이 원리가 파멸되지 않고는 분리될 수 없다는 것, 결과적으로 이는 법률에는 접근 불가능하다는 것, 이 점에서 일체의 억압은 자의적이고 부당하다는 것을 보여줄 것이다. 그래서 독점은 사회의 구성 원리이자 부의 조건이고, 동시에 그리고 같은 정도로 약탈과 항구적 빈곤의 원리이기도 하며, 독점이 선을 생산할수록 그로부터 더 많은 악을 받게 되며, 독점이 없이는 진보는 멈추며, 독점과 함께 노동은 정지하고 문명은 사라진다.

. 독점의 필연성

이처럼 독점은 경쟁의 숙명적 끝으로, 경쟁은 스스로 끊임없이 부정함으로써 독점을 낳는다. 이 독점의 발생은 이미 그에 대한 정당화 논리다. 왜냐하면, 운동이 살아있는 존재에 내재하듯 경쟁이 사회에 내재하니 그에 뒤를 잇는, 그것의 목표이고 종착점인 독점은 경쟁과 마찬가지로 오랫동안, 기계적 공정과 산업의 조합들과 마찬가지로 오랫동안, 끝으로 노동 분업과 가치들의 구성이 필연이고 법칙일 것과 마찬가지로 오랫동안 합법적이고, 그런 상태로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독점의 논리적 발생이라는 사실만으로 독점은 정당화된다. 그럼에도 이 정당화는 별것 아닌 것으로 여겨질 것이며, 독점이 나름대로 스스로를 원리로서 내세울 수 없다면 경쟁을 완강하게 기각하도록 할 것이다.

앞의 장들에서 우리는 노동 분업이 특히 지성으로 간주되는 일꾼의 규격이라는 것, 기계의 창조와 작업장의 조직은 일꾼의 자유를 표현한다는 것, 그리고 경쟁에 의해 인간 혹은 지적인 자유는 행동에 들어간다는 것을 보았다. 그런데 독점은 승리한 자유의 표현이고, 투쟁의 상賞, 천재의 예찬이다. 이는 세상의 시초부터 완수된 모든 진보의 가장 강한 자극제여서, 방금 말한 것처럼 독점과 함께 존속하지 못하는 사회는 독점이 없이 결코 만들어지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므로 독점의 이런 이상한 장점은 어디서 오는가? 그 말의 어원과 그 사물의 통속적 측면은 우리에게 이를 알려주는 것과는 거리가 멀다.

독점은 근본적으로 인간의 자기 자신에 대한 전제정치일 뿐이다. 이는 본성에 의해 모든 생산자에게 주어진 자신의 능력들을 자기 마음대로 사용하고 자신의 생각을 자신이 선호하는 방향으로 발휘하고 그가 선택하고 싶은 전문 분야에 그의 수단들이 가지는 모든 역량을 투기하고 그가 장만한 수단들과 그의 저축으로 축적된 자본들을 그가 위험을 무릅쓰는 것이 좋겠다고 보는 사업에 단지 발견의 과실과 모험의 이득만을 향유한다는 명시적 조건에서 투입할 독재권이다.

이 권리는 자유의 본질에 속해서, 이를 부정하려면 사람을 몸, 영혼, 그의 능력들의 수행에서 훼손하게 되며, 개인들의 자유로운 비상에 의해서만 진보하는 사회는 탐험자들이 부족해지면 그 행진이 가로막히게 된다.

사실들의 증언을 통해 이 모든 관념들에 실체를 제공할 시간이다.

나는 한 마을 공동체를 안다. 그곳에는 태곳적부터 토지 개간을 위해서도 외부로의 통행을 위해서도 길이 존재하지 않았다. 연중 4분의 3의 기간에 일체의 식량의 반입과 반출이 금지되었다. 진흙과 늪지로 된 장애물이 외부인의 일체의 침입에 대해, 그리고 주민의 일체의 소풍에 대해 신성불가침의 마을을 지켜주었다. 늙은 말 한 필이 좋은 길로 가면서 지는 짐을 말 여섯 필이 날짜를 정해서 지고 가기에도 충분하지 못했다. 그곳의 촌장은 평의회의 뜻을 어기고 자신의 영토에 길을 내기로 결정했다. 오랫동안 그는 망신을 당하고, 욕을 먹고, 증오를 받았다. 물론 그때까지는 길 없이 지냈다. 마을 공동체의 돈을 지출하고, 경작자들로 하여감 갹출료를 내고, 짐수레를 끌고, 부역을 하는 데 시간을 소모하게 할 필요가 있었는가? 촌장님이 가난한 농부들의 희생으로 그 마을을 방문하러 올 도시의 친구들에게 그렇게 아름다운 길을 내려고 하는 것은 자신의 고집을 만족시키기 위한 것이었다. … 그럼에도 길이 만들어졌다. 그리고 농민들은 갈채를 보내게 되었다! 그들은 이렇게 말했다. 전에 우리는 서른 자루를 시장에 가져가는 데 말 여덟 마리를 썼고, 사흘을 쉬었지. 지금 우리는 말 두 마리로 아침에 출발해서 저녁때면 돌아오지. 그러나 이 모든 대화에서 촌장은 더는 문제가 안 된다. 일어난 일이 그가 옳다고 해준 이래 사람들은 그에 대해 말하기를 그친다. 나는 심지어 그가 그 일을 해주기를 대부분이 원했다는 것도 알았다.

이 촌장은 아리스티드Aristide에 갔다. 터무니없는 고함에 지쳐 그가 애초에 50년 동안 마을 사람들이 그에게 통행세를 낸다는 조건으로 자신의 비용으로 길을 내겠다고 제안했다고 가정하자. 게다가 각자는 과거처럼 들판을 가로질러 다닐 자유도 변함없이 가진다. 이런 거래에서 어떤 점이 사기성을 가지는가?

바로 이것이 사회와 독점자들의 역사이다.

모든 사람들은 동료 시민들에게 길이나 기계를 선물할 입장이 결코 아니다. 보통은 건강과 재물을 탕진한 후에 보상을 기다리는 것이 발명자다. 그러므로 아크라이트, 와트, 자카드를 비웃으면서 이들의 발견의 특권을 거절해보라. 그들은 틀어박혀 일할 것이며 아마도 자신들의 비밀을 무덤으로 가져갈 것이다. 소작인에게 그가 개간하는 토지의 소유를 거절해보라. 아무도 개간을 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이것이 바로 진정한 권리, 사회적 권리, 우애적 권리인가?”하고 사람들이 말한다. 원시 공동체가 끝날 때 양해가 되는 것, 필연의 결과인 것은 인간과 사회의 권리와 의무의 더 완전한 지성 앞에 사라져야할 잠정적인 것이다.

나는 어떤 가설 앞에서도 물러서지 않는다. 보자. 파고들자. 적들이 시인하는 바에 따를 때 문명의 첫 시기 동안 사물이 다르게 행해졌을 수 없다는 것은 벌써 중대한 논점이다. 이 시기의 제도들이 실은 사람들이 말했듯이 잠정적인 것에 불과한 것인지 아니면 사회에 내재하는 영구적 법칙의 결과인지를 알아내는 일이 남는다. 그런데 내가 이 순간 주장하는 논제는 일반적 경향과 정반대인 만큼, 그리고 곧 나 자신이 그것의 모순을 통해 그것을 뒤집어야 하는 만큼 더욱 어렵다.

그러므로 나는 누가 내게 사회 자체가 일체의 연대적이고 우애적인 거래를 배척하는 마당에 사회성, 우애, 그리고 연대의 원칙에 호소하는 것이 어떻게 가능한지를 말해주기를 기원한다. 각 산업의 시초에, 어떤 발견의 첫 희미한 빛이 떠오를 때 발명하는 사람은 혼자다. 사회는 그를 방치하고 뒤로 물러나 있다. 더 제대로 말해서 이 사람은 그가 품은 관념, 그리고 그가 그 실현을 추구하는 관념에 관련해서 그 홀로 사회 전체가 된다. 그에게는 더 이상 동업자도 협력자도 보증인도 없다. 모두가 그를 피해 달아난다. 그 홀로 책임을 지고, 그래서 그 홀로 투기의 이득을 차지한다.

사람들은 이렇게 강조한다. 이는 사회 측의 맹목성, 가장 신성한 자신의 권리와 이익, 미래 세대들의 행복의 방기이다. 그리고 투기자는 더 많은 정보를 갖거나 더 행복한 사람으로서 보편적 무지가 그에게 가져다주는 독점을 배신의 행위 없이 차지할 수 없다.

나는 이런 사회의 처신이 현재로서는 고도로 현명한 행위라고 주장한다. 미래에 관해서는 나는 사회가 그 일에서 실패하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줄 것이다. 나는 이미 제2장에서 가치의 이율배반의 해결을 통해 모든 유익한 발견의 이득은 발명자가 무엇을 하든지 사회보다 그 발명자에게 비교도 할 수 없이 작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나는 이 점에 관한 증명을 수학적 엄밀성의 정도까지 가져갔다. 나중에 나는 또, 모든 발견에 대해서 그에게 보장된 이득에 더해 사회는 자신이 잠정적으로든 영구적으로든 양허하는 특권들에 여러 종류의 반환 청구를 행한다는 것을 보여줄 것이다. 이는 대체로 특정한 사적 재산들의 과도함을 상쇄하며, 그 효과는 즉시 균형을 가져오는 것이다. 그러나 미리 하지는 말자.

그러므로 나는 사회생활이 보존과 발달이라는 이중의 방식으로 발현하는 것을 관찰한다.

발달은 개인적 기력들의 발휘에 의해 실행된다. 군집은 그 본성상 불임이고 피동적이고 일체의 혁신에 둔감하다. 감히 비교한다면, 이는 그 자체가 불임인, 그러나 양성구유적 사회에서 진정으로 남성 기관의 기능을 하는 사적 활동에 의해 창조된 싹들이 펼쳐지는 곳인 자궁이다.

그러나 사회는 개별 투기 행위들의 연대성을 피하고 일체의 혁신을 절대로 개인들의 위험 부담으로 두는 만큼만 보존된다. 쓸모 있는 발명들의 목록을 몇 장에 걸쳐 작성할 수 있을 것이다. 좋은 결말을 맺은 기업들만 계수된다. 어떤 숫자도 인간의 두뇌에서 매일같이 피어나는 수많은 잘못된 관념들과 경솔한 시도들을 표현해주지 않을 것이다. 하나의 건강하고 정당한 개념을 얻기 위해 수천 건의 괴상한 것들을 내놓지 않은 발명가, 일꾼은 한 사람도 없다. 이성의 불티 한 점을 위해 연기의 회오리를 일으키지 않은 지성은 한 사람도 없다. 인간 이성의 모든 산물을 두 부분으로 나누어, 한쪽에는 유익한 노동을 두고 다른 쪽에는 실수로 지출된 모든 힘과 정신, 자본과 시간을 두는 것이 가능하다면, 이 계산에서 첫 번째 부분에 실리는 양이 아마도 10억 분의 1퍼센트가 되는 것을 기겁하며 보게 될 것이다. 사회가 이 채무를 갚고 이 모든 파산을 청산해 주어야 한다면 어떻게 되겠는가? 사회의 보증으로 부보負保를 받아 자신에게 아무 위험 없이 상상력의 모든 변덕에 열광해서 매 순간 인류의 존재를 가지고 놀 수 있다면 노동자의 책임과 존엄은 또 어떻게 되겠는가?

이 모든 것으로부터 내가 결론을 내리는 것은, 처음부터 실시된 것은 끝까지 실시되리란 것, 그리고 이 점에 관해 다른 모든 점에 관해서와 마찬가지로 우리가 타협을 목표로 해야 한다면, 존재하는 것이 아무것도 폐지될 수 없다고 생각하는 것은 터무니없는 것이다. 왜냐하면 관념의 세계는 자연처럼 무한하고, 사람들은 언제나처럼 오늘날도 투기, 즉 오류의 종속되어 개인들에게는 항상 투기를 하려는 부추김이 있고, 사회에게는 자신을 불신하고 조심할 이유, 따라서 언제나 독점을 할 소지가 있기 때문이다.

이 진퇴양난에서 빠져나오기 위해 무엇을 제안하는가? 환수인가? 첫째로 환수는 불가능하다. 모든 가치가 독점화되면, 사회는 독점자들에게 보상을 해줄 재원을 어디서 취할 것인가? 사회의 담보는 무엇일 것인가? 다른 한편, 환수는 완전히 쓸모없을 것이다. 모든 독점체들이 환수되었을 때, 산업을 조직하는 일이 남을 것이다. 그 체계는 어디 있는가? 여론은 무엇에 고정되는가? 어떤 문제들이 해결되었는가? 그 조직이 위계적 양태의 것이라면 우리는 독점 체제에 다시 들어가는 것이다. 그것이 민주적 양태의 것이라면 우리는 출발점으로 돌아간다. 환수된 산업들은 공공 영역에, 즉 경쟁 체제에 속할 것이며 조금씩 독점체가 다시 되어갈 것이다. 끝으로 조직이 공산제적 양태의 것이라면, 우리는 하나의 불가능으로부터 또 다른 불가능으로 넘어가기만 한 것일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가 때가 되면 입증하려고 하는 것처럼, 공동체는 경쟁과 독점처럼 이율배반적이고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사회적 재산을 무한한, 따라서 치명적인 연대성에 결코 참여시키지 않도록 하려면, 발명과 사업가 정신에 규칙들을 부과하는 것으로 만족할 것인가? 천재적인 사람들과 바보들에 대한 검열 제도를 만들 것인가? 이는 사회가 미리 꼭 발견하는 것이 중요한 것을 안다고 가정하는 것이다. 기업가들의 사업 계획을 사전에 검토 받게 하는 것은 일체의 움직임을 선험적으로 금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다시 한 번 말하지만, 제안되는 목표와 관련해서 각 산업인이 자신의 인격 안에 사회 자체를 대표하고, 다른 모든 사람들을 합친 것보다 더 잘 그리고 더 멀리 보는, 그것도 아주 흔히 자신은 납득도 이해도 못 하는 가운데 그런 순간이 있기 때문이다. 코페르니쿠스, 케플러, 갈릴레이 등 뉴턴의 선배들이 당시에 교회로 대표된 그리스도교 사회에 성서가 틀렸다고, 지구는 돌고 태양은 부동이라고 말하러 왔을 때, 그들은 감각과 전통의 신앙을 가지고 자신들을 거짓이라고 반박한 사회에 대항해 옳은 편에 있었다. 그러면 사회는 코페르니쿠스 체계와의 연대를 받아들일 수 있었을까? 사회는 별로 그럴 수 없었으며, 그래서 이 체계는 그 신앙을 공개적으로 반박했고, 이성과 계시의 일치를 기다린 갈릴레이는 책임 있는 발명가들 중 한 사람으로서 새로운 관념의 증언으로 고문을 당한다. 나는 우리가 더 관용적이라고 가정한다. 그러나 이 관용 자체는 더 많은 자유를 천재성에 일치시키면서 우리가 우리 조상들보다 덜 신중할 생각이 없음을 입증해준다. 발명 증서는 쏟아져 나오지만, 정부의 보증은 없다. 소유권 증서는 시민들의 손안에 있다. 하지만, 토지 대장도 헌장도 그 가치를 보장하지 않는다. 가치가 나가게 하는 것은 노동이 할 일이다. 그리고 정부가 때로 나서서 돈 없는 탐구자들에게 공연히 맡긴 과학적인 사명, 그리고 그 밖의 사명에 관해 말한다면, 그것들은 강탈이고 또 하나의 부패이다.

사실상, 사회는 누구에게도 어떤 관념의 실험에 필요한 자본을 보장해주지 못한다. 법적으로 사회는 자신이 출자하지 않은 사업의 결과를 자기 것으로 주장하지 못한다. 그러므로 독점은 파괴가 불가능하다. 게다가 연대는 아무 쓸모도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각자는 자기의 환상을 위해 모두의 연대를 요구할 수 있고, 정부의 백지 서명을 획득할 동일한 권리를 가지므로, 사람들은 곧 보편적 자의성에, 즉 순전히 현 상태에 도달할 것이기 때문이다.

어떤 사회주의자들은 아주 불행히도, 내 양심의 온 힘을 모아 말하건대 복음적 추상 관념들에 영감을 받아 어려움을 다음과 같은 아름다운 격률로써 처치한다고 믿었다. 역량들의 불평등은 의무의 불평등의 증거이다. 당신은 자연으로부터 더 많이 받았으니 당신의 형제들에게 더 많이 주시오. 그 밖의 울림이 있고 감동적인 문장들로서, 공허한 지성들에 미치는 효과가 결코 모자라지 않고 그렇다고 해서 더 고결한 것으로 상상이 가능한 모든 것임이 조금도 덜하지 않은 문장들이다. 이 경이로운 격언들로부터 도출하는 실천적 공식은 각 노동자가 자신의 모든 시간을 사회에 내놓아야 하며, 사회는 가용한 자원의 범위에서 그에게 그의 필요를 충족하는 데 필요한 모든 것을 교환으로 제공해야 한다는 것이다.

나는 공산주의자 친구들은 나를 용서해 주기 바란다! 내 이성과 가슴에서 공동체, 공화주의, 그리고 모든 사회적, 정치적, 종교적 유토피아들, 사실과 비판을 멸시하는 이것들이 진보가 지금 극복해야 할 가장 큰 장애물이라는 것을 내가 어쩔 수 없이 확신하지 않는다면, 그들의 관념에 나는 덜 신랄할 것이다. 우애가 정의에 의해서만 확립될 수 있다는 것, 우리 연구의 목적이어야 하는 것은 오직 정의, 자유와 우애의 조건, 수단, 법칙이라는 것, 긴장을 늦추지 말고 가장 미세한 부분까지 그것의 결정과 공식을 추구해 갈 필요가 있다는 것을 어찌 이해하려고 하지 않겠는가? 경제적 언어가 친숙한 작가들은 재능의 우월성이 필요의 우월성과 동의어라는 것, 대중은 이미 받는 것 모두를 내놓도록 많은 고생을 하는 마당에, 통속적인 자들보다 활력 넘치는 인간됨을 가진 자들에게서 더 무언가를 기다리기는커녕 사회는 항상 이런 인물들이 내놓는 것보다 더 많이 받지 않도록 유의해야 한다는 것을 어찌 잊겠는가? 어디로 시선을 돌리더라도 항상 그로부터 금고의 장부로, 수입과 지출의 계정으로 돌아올 필요가 있다. 이는 적은 생산자들과 마찬가지로 거대한 소비자들에 맞서는 유일한 보장책이다. 일꾼은 끊임없이 자신의 생산보다 앞선다. 언제나 그는 신용을 취하고 빚을 지고 파산하는 경향을 띤다. 그는 끊임없이 세의 경구를 상기할 필요가 있다. 생산물은 생산물로만 구매된다는 것을.

고도의 역량을 가진 노동자가 미약한 자들을 생각해서 자기 임금의 절반으로 만족하고, 자신의 서비스를 무료로 제공하고, 인민의 말처럼 프로이센 왕을 위해, 즉 사회, 주권자, 혹은 내 형제들이라 칭하는 이 추상물을 위해 생산을 할 수 있으리라 가정하자. 이는 사회를 감정 위에 세우는 것이다. 이 감정은 내가 사람에게 접근 가능하지 않다고는 말하지 않지만, 원리상으로는 체계적으로 세워져도 거짓 덕성이고 위험한 위선일 뿐이다. 자선은 우리의 동류들에게 사고로 닥치는 신체장애를 보상해주는 것으로서 우리에게 명해지며, 나는 이런 관점에서 자선은 조직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나는 연대성 자체에서 나오는 자선이 단순히 다시 정의가 된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평등의 수단이고 균형의 법으로 간주되는 자선은 사회의 해체일 것이다. 평등은 사람들 사이에 엄격하고 확고한 노동의 법칙에 의해, 가치들의 비례성, 교환의 성실성, 기능들의 등가성에 의해, 한마디로 모든 적대 관계들의 수학적 해법에 의해 생겨난다.

바로 이것이 자선, 그리스도교인의 제일의 미덕, 사회주의자의 합당한 희망, 경제학자의 모든 노력의 목표인 자선이 헌법의 원리이자 법이 되면서부터는 사회악인 이유이다. 바로 이것이, 어떤 경제학자들이 합법적인 자선이 재산권의 침해보다 사회에 더 많은 악을 야기했다고 말할 수 있었던 이유이다. 사람은 그를 구성 부분으로 하는 사회처럼 자기 자신과 끊임없는 당좌 거래 관계에 있다. 그는 소비하는 모든 것을 생산해야 한다. 이는 일반적 규칙으로, 아무도 바로 그 사실에 의해 불명예를 입지 않고는 이에서 면제될 수 없다. 참으로 대다수 사람들의 상대적 열등성을 우애의 핑계로 공포한다는 것은 이상한 생각이다! 이 아름다운 선언 후에는 그 결과들을 이로부터 끌어내는 것밖에 남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곧 우애 덕분에 귀족정이 다시 찾아올 것이다.

일꾼의 정상 임금을 두 배로 올려보라. 그를 게으름으로 초청하는 것이고, 그의 존엄성을 모욕하고 그의 양심을 타락시키는 것이다. 그에게서 그의 노력의 합당한 대가를 빼앗아보라. 그의 분노를 일으키거나 자존심을 자극하는 것이다. 이 경우나 저 경우나 당신은 그의 우애의 감정을 변질시키는 것이다. 반대로, 사람들을 선하고 행복하게 하면서 이들을 연합시키도록 자연에 의해 점지된 양태일 뿐인 노동 조건을 누리게 해보라. 당신은 생산물은 생산물로만 구매된다는 경제적 보상 법칙으로 들어가는 것이다. 내가 자주 불평하는 것인데, 공산주의는 기능들과 적성들의 점진적 등가성을 기초로 삼는 사회의 부정 자체이다. 모든 사회주의가 호감을 가지고 접근하는 공산주의자들은 본성과 교육에 따른 평등을 전혀 믿지 않는다. 그들은 이를 주권적 명령으로 대신하지만, 그들이 무엇을 할 수 있든지 이는 실행 불가능한 명령이다. 사실의 관계에서 정의를 구하는 대신, 그들은 자신들의 감수성으로 이를 받아들인다. 이웃 사랑인 것으로 보이는 모든 것을 정의라 부르고, 끊임없이 이성의 사물과 감정의 사물을 혼동하면서 말이다.

그러면 왜 끊임없이 경제 문제에 우애, 자선, 헌신 그리고 신을 개입시키는가? 유토피아주의자들이 사회적 발현물들을 진지하게 연구하는 것보다 이 거대한 낱말들에 관해 이야기하기가 더 편한 것을 발견하는 것은 아닐까?

우애라! 당신 맘에 드는 한에서, 내가 형이고 당신은 동생인 조건에서, 우리 공통의 어머니인 사회가 내 몫을 두 배로 하면서 내 장자 자격과 내 서비스를 영예롭게 하는 조건에서 형제이다. 당신은 당신의 자원 규모에서 내 필요를 마련해 주겠다고 말한다. 나는 반대로 이것이 내 노동의 규모대로라고 이해한다. 그렇지 않으면 나는 노동을 그친다.

자선이라! 나는 자선을 부정한다. 그것은 신비주의에서 나온다. 당신이 내게 우애와 사랑에 대해 말해봐야 소용없다. 나는 당신이 나를 전혀 사랑하지 않는다는 것을 변함없이 확신한다. 그리고 나는 내가 당신을 사랑하지 않는다는 것을 아주 잘 느낀다. 당신의 우정은 가장된 것일 뿐이며, 당신이 나를 사랑한다면, 이는 이익 때문이다. 나는 내 몫 전체를 요구하고, 내 몫 외에 아무것도 요구하지 않는다. 당신은 왜 그것을 거절하는가?

헌신이라! 나는 헌신을 부정한다. 그것은 신비주의에서 나오는 것이다. 내게 부채와 자산, 내가 보기에 의와 불의의 유일한 기준인 것, 사회에서의 선과 악에 관해 말해 달라. 각자에게 그의 업적에 따라 우선 주어야한다. 그리고 때로 당신을 구제하기로 이끌린다면, 헌신하도록 나를 구속하는 것은 나를 죽이는 것이다!

신이라! 나는 신을 전혀 모른다. 이 역시 신비주의에서 나온다. 내가 당신에게 귀 기울이기 원한다면, 당신은 당신 이야기에서 이 단어를 삭제하는 것으로 시작하라. 왜냐, 3000년의 경험이 내게 이를 가르쳐 주었으니, 누구든 내게 신에 대해 말하는 자는 내 자유나 내 돈주머니를 노리는 것이다. 당신은 내게 얼마나 갚아야 하는가? 나는 당신에게 얼마나 갚아야 하는가? 바로 이것이 나의 종교요 나의 신이다.

독점은 본성과 사람에 따라 존재한다. 그것은 내 의식의 가장 깊숙이에, 그리고 우리의 개별화의 외적 사실에 한꺼번에 그 원천을 가진다. 우리 몸과 지성에서 모든 것이 특수성이고 속성인 것처럼, 우리 노동은 고유의 구체적 성격을 가지고 일어나며, 이런 성격이 노동의 지로가 가치를 이룬다. 그리고 노동이 재료나 실행 대상 없이 발현될 수 없듯이 사람은 필연적으로 사물을 부르므로, 독점은 지속이 과거에서 미래로 형성되는 것과 마찬가지로 틀림없이 주체에서 객체로 확립된다. 꿀벌, 개미, 그 밖의 동물은 사회를 이루어 살아서 개체적으로는 자동 반응밖에 타고나지 않은 것으로 보이며, 그것들에서 영혼과 본능은 거의 전적으로 집단적이다. 바로 이것이 이 동물들 중에는 특권과 독점의 여지가 있을 수 없는 이유, 가장 잘 성찰된 그들의 작업에서도 그들이 서로 상의하지 않고 토의하지도 않는 이유이다. 그러나 인류는 그 다원성 안에서 개별화되어 있어서 사람은 숙명적으로 독점자가 된다. 독점자가 아니면 그는 아무것도 아니다. 그리고 사회 문제는 모든 독점을 어떻게 폐지할 것인가가 아니라 어떻게 이것들을 화해시킬까를 아는 데 있다.

독점의 가장 주목할 만하고 가장 직접적인 효과들은 다음과 같은 것들이다 :

1. 정치 질서에서 인류를 가족, 부족, 도시, 민족, 국가들로 분류함. 이는 인종, 언어, 도덕관념과 풍토에 따라 구별되는 노동자들의 집단과 소집단으로 인류를 기초적으로 나누는 일이다. 인류가 완전히 지구의 주권자가 될 것은 조합에 의해서일 것처럼, 인류가 지구를 차지한 것은 독점에 의해서이다.

모든 입법자들이 예외 없이 구상한 바와 같은, 그리고 법률가들이 정식화한 바와 같은 정치적, 공민적 권리는 여러 사회의 이 애국적, 민족적 조직에서 태어난 것으로서 일련의 사회적 모순들에서 제일 광대한 분과를 이루며, 그 연구는 그것만으로 우리가 아카데미에 의해 제기된 산업경제 문제에 배정할 수 있는 시간의 네 배를 요구할 것이다.

2. 경제 질서에서 독점은 우선은 수단의 완성으로 일반적 부를 증대함으로써, 그 다음으로는 자본화함으로써, 말하자면 노동, 기계, 경쟁에 의해 획득된 노동의 쟁취물을 공고화함으로써 행복의 증대에 기여한다. 이 독점의 효과로부터 자본가가 생산자로, 자본이 생산의 요소로 간주되는 경제적 허구가 나온다. 그 다음으로 이 허구의 결과로서 순생산물, 총생산물의 이론이 나온다.

이런 측면에서 우리가 제시할 약간의 고려 사항들이 있다. 우선 장 바티스트 세를 인용하자.

“생산된 가치는 총생산물이다. 누가 그로부터 생산 비용을 공제한 후에는 이 가치는 순생산물이다.”

“한 민족을 한 집단으로 보자면, 이는 순생산물을 전혀 가지지 않는다. 왜냐하면, 생산물들은 생산 비용과 동등한 가치만을 가지므로, 이 비용을 빼는 경우에는 그 생산물들의 모든 가치를 빼는 것이기 때문이다. 민족적 생산, 연간 생산은 그러므로 언제나 조粗 생산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연소득은 총소득이다.”

“순생산은 다른 생산자들의 이익에 대비한 생산자의 이익이 문제일 경우에만 이해될 수 있다. 기업가는 생산된 가치에서 소비된 가치를 공제한 것으로부터 이윤을 올린다. 그러나 그에게 소비된 가치인 것은 생산적 서비스의 구매로, 그 서비스의 장본인에게는 소득의 한 몫이다.”(『정치경제학 개론Traité d'économie politique』, table analyt)

이 정의들은 나무랄 데 없다. 유감스럽게도 장 바티스트 세는 그 위상 전체를 느끼지 못했고, 어느 날 콜레주 드 프랑스의 그의 후계자가 이 정의들을 공격하리라는 것을 예견하지 못했다. 로시 씨는 민족들도, 기업가들도 전불 없이는 아무것도 생산하지 않으며, 장 비티스트 세의 공식이 옳다면, 무로부터는 아무것도 없다(ex nihilo nihil fit)는 공리는 더 이상 참이 아니라는 고려를 통해 한 민족에게 순생산물은 총생산물과 동일한 것이라는 장 바티스트 세의 명제를 반증했노라고 주장했다.

그런데 이는 바로 일어나는 일이다. 인류는 신을 본받아 무로부터(de nihilo hilum) 모든 것을 생산한다. 이는 인류 자신이 무의 산물이며, 인류의 사상이 무에서 나오는 것과 마찬가지다. 그리고 로시 씨는 중농주의자들과 함께 공업 세계의 산물을 동물, 식물 및 광물 세계의 산물과 혼동하지 않았더라면 그런 오해를 범하지 않았을 것이다. 정치경제학은 노동과 함께 시작한다. 그것은 노동을 통해 발달한다. 그리고 결코 노동에서 나오지 않는 모든 것은 순수한 유용성으로, 즉 인간의 행동에 종속된, 그러나 여전히 노동에 의해 교환 가능하게 되지 않는 사물의 범주로 돌아가서 정치경제학에는 근본적으로 생소한 것으로 남는다. 독점 그 자체는 집단적 의사의 순수 행위에 의해서 설정될지라도 이 관계들에 아무런 변경도 가하지 않는다. 역사에 따르면, 그리고 성문법에 따르면, 그리고 경제 이론에 따르면 독점은 노동의 사후事後에만 존재하거나 존재한다고 여겨지는 것이다.

세의 학설을 그러므로 불가침이다. 기업가에 관해 말해본다면, 그의 특수성은 언제나 그와 협력하는 다른 산업인들을 가정해서 그 이윤은 생산된 가치에서 소비된 가치, 그중에 기업가의 임금, 달리 말하면 그의 보수를 포함시킬 필요가 있는 이 소비도니 가치를 공제하고 남는 것이다. 모든 가능한 특수성들을 포함하는 사회에 관해 말한다면, 그 순생산물은 총생산물과 동일하다.

그러나 내가 세와 다른 경제학자들에게서 공연히 설명을 구한 한 가지 사항이 있으니, 이는 순생산물의 실재와 정당성이 어떻게 확립되느냐 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순생산물을 사라지게 하려면, 판매가가 동일할 때 일꾼들의 임금과 소비된 가치의 비율을 높이면 될 것이라는 점을 알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아무것도 순생산물을 임금에 대한 유보분, 또는 같은 것으로서 소비자들에 대해 행해진 징수와 구분하지 않는 듯해서, 순생산물은 힘에 의해 가해진, 그리고 정당한 권리의 모양새가 조금도 없는 강탈의 분위기가 강하다.

이 난점은 가치의 비례성 이론에서 이미 해결되었다.

이 이론에 따르면, 기계, 관념, 혹은 기금의 모든 개발자는 같은 비용으로 일정 종류의 생산물의 총계를 높이고, 따라서 시간을 절약해 사회적 부를 높여가는 사람으로 간주되어야 한다. 그러므로 순생산물의 합당성의 원리는 앞서 사용되는 절차 중에 있다. 새로운 조합이 성공하면 가치의 잉여가 있을 것이며, 결과적으로 이득이 있을 것이고, 이는 순생산물이다. 사업이 거짓된 기초 위에 지탱된다면 총생산물에 적자가 있을 것이며, 장기적으로는 도산과 파산이 있을 것이다. 기업가 측의 아무런 혁신도 없는 경우에도, 이 경우가 더 흔한 것인데, 산업의 성공은 실행에 의존하므로 순생산물의 기준은 변함없이 적용 가능하다. 그런데 독점의 본성에 따라 모든 사업은 기업가의 위험 부담으로 있어야 하므로 결과적으로 순생산물은 사람들 중에서의 노동과 지성이라는 가장 신성한 명목으로 그에게 속하는 것이다.

순생산물이 임금에 대해 사기를 쳐서 달성된 감축 때문이든, 다른 어떤 방식 때문이든 흔히 과도하다는 것을 환기시키는 것을 쓸데없다. 이야말로 원리가 아니라 인간의 탐욕에서 유래하며, 이론의 영역 바깥에 머무는 남용들이다. 게다가 제2장 Ⅱ에서 가치의 구성을 논하면서 나는 ① 순생산물이 어째서 결코 생산 수단들의 불균등에서 나오는 차이를 넘을 수 없는지, ② 각각의 새로운 발명에서 사회에 돌아가는 이득이 어째서 기업가에게 돌아가는 이득보다 큰지를 보여주었다. 나는 그 후로 완전히 해명된 이 문제들을 결코 재론하지 않을 것이다. 나는 단지 산업의 진보에 의해서, 한편으로 나뭇가지를 구성하는 나이테들이 나무가 굵어지며 중심에서 멀어짐에 따라 얇아지는 것처럼, 행복이 증가하는 동안에 산업인들에게 순생산물이 끊임없이 줄어드는 경향을 띰을 언급할 것이다.

순생산물, 노동자의 자연적 보수와 나란히 독점의 가장 행복한 효과 중 하나로 나는 가치들의 자본화를 지적했다. 이로부터 다른 종류의 이윤, 즉 이자 또는 자본 임대료가 생겨난다. 지대는, 비록 이자와 혼동됨에도 불구하고, 통속적 언어에서 이윤, 이자와 마찬가지로 소득이라는 공통의 표현으로 요약됨에도 불구하고, 이자와는 다른 것이다. 그것은 독점이 아니라 소유권에서 나오는 것이다. 그것은 특수한 이론에 관계되며, 우리는 이를 그때에 가서 말할 것이다.

그러면 모든 민족에게 알려졌으면서도 아직 아주 불량하게 정의된, 이자 혹은 대여의 가격이라고 칭하고 자본의 생산성이라는 허구를 일으키는 이 실재는 무엇인가?

모든 사람들은 기업가가 생산 비용을 계산할 때 이를 보통 다음의 세 부분으로 나눈다는 것을 안다. ① 소비된 가치와 지불된 서비스, ② 자신의 인적 보수, ③ 자기 자본의 감가상각비와 이자. 기업가와 자본가는 언제나 동일한 능력인 독점만을 표현함에도 불구하고 이 마지막 비용 범주로부터 이 둘의 구분이 생겨난다.

이와 같이 자본의 이자만을 내놓고 순생산물로는 아무것도 내놓지 않는 산업 기업은, 부에 더해주는 것이 아무것도 없이 자신의 가치를 변형시키는 결과만 초래하는 미미한 기업이다. 결국은 아무 존재 이유도 없고, 첫째 날에 방치되는 기업인 것이다. 그러니 이 자본의 이자가 순생산물의 충분한 보완물로 전혀 간주되지 않는 것은 어디에 기인하는가? 어째서 자본의 이자는 그 자체가 순생산물이 아닌가?

여기서도 경제학자들의 철학은 결함이 있다. 대금업을 옹호하기 위해 그들은 자본이 생산적이라고 주장했고, 비유를 실재로 바꾸었다. 소유권을 반대하는 사회주의자들은 그들의 궤변을 뒤집기가 어렵지 않았다. 그리고 이 논쟁으로부터 자본 이론에 대한 아주 큰 비호감이 생겨나서, 오늘날 인민의 정신에서 자본가와 한량은 동의어이다. 확실히 나는 결코 나 자신이 다른 많은 이들을 따라 주장한 것을 철회할 생각도 없고 자신의 의무를 아주 이상하게 무시하는 시민들의 계급을 복권시킬 생각도 없다. 하지만 과학과 프롤레타리아트의 이익 자체가 나의 첫 번째 주장들을 완성하고 참된 원리들을 주장하도록 내게 의무를 부여한다.

① 모든 생산은 소비를 목적으로, 즉 향유를 목적으로 행해진다. 사회에서 생산과 소비라는 상관어는 순생산물과 총생산물이라는 말과 마찬가지로 완전히 동일한 것을 지칭한다. 그러므로 노동자가 순생산물을 실현한 후, 이를 자신의 행복을 증진하는 데 사용하는 대신 자신의 임금으로 국한하고, 언제나 그에게 돌아오는 초과분을 새로운 생산에, 구매하기 위해서만 돈을 버는 수많은 사람들처럼 활용한다면, 생산은 무한히 증가하는 반면에 행복, 그리고 사회의 관점에서 추론할 때 인구는 현 상태로 변함이 없을 것이다. 그런데 산업상의 기업에 투하된, 순생산물의 축적에 의해 조금씩 형성된 자본의 이자, 이 이자는 한편으로 생산을 증대할 필요성과 다른 한편으로 행복을 증대할 필요성 간의 거래와 같다. 바로 이것이 어떤 산업 회사들이 주주들에게 그 기업이 아무것이나 취할 수 있기도 전에 배당금을 지불하는 이유이다. 인생은 짧고, 성공은 느린 걸음으로 온다. 한편으로는 노동이 명령하고, 다른 한편으로 사람이 즐기기를 원한다. 이 모든 요구들을 들어주려면 순생산물은 생산에 주어질 것이다. 하지만 그러는 동안에(inter-ea, inter-esse), 즉 새로운 생산물을 기다리면서 자본가는 즐길 것이다.

이처럼 순생산물의 수치가 부의 진보를 표시하므로 자본의 이자 없이는 순생산물은 쓸데가 없고 존재하지도 않을 텐데, 이 자본의 이자는 행복의 진보를 표시한다. 사람들 사이에 세워지는 정부의 형태가 어떤 것이든, 이들이 독점식으로 살든, 공동체를 이루어 살든, 각 노동자가 채권, 채무에 의해 열린 자신의 계정을 가지든 아니면 공동체가 그에게 노동과 쾌락을 분배하든 우리가 도출해 온 법칙은 언제나 성립할 것이다. 우리의 이자 계산은 그 법칙을 증언해주는 것 말고 다른 일을 하지 않는다.

② 순생산물에 의해 창조된 가치는 저축으로 들어가며, 가장 현저하게 교환 가능하고, 감가가 가장 잘 안 되고, 가장 자유로운 형태, 한마디로 유일하게 구성된 가치인 척도재의 형태로 자본화한다. 그런데, 이 자본이 지금의 자유로운 상태로부터 투자가 되면, 즉 기계, 건물 등의 형태를 취하면, 이는 여전히 교환이 될 수 있을 것이지만, 공급과 수요의 진자 운동에 전보다 훨씬 더 노출될 것이다. 일단 투자되면 그것은 어렵게만 빠져나올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소유권자의 유일한 방책은 개발일 것이다. 개발만이 투자된 자본에 그 명목 가치를 보전해줄 수 있다. 이렇게 변형된 자본은 마치 해운 사업에 걸어진 것과 같다. 이자는 자본의 보험료이다. 그리고 이 보험료는 자본이 풍부한가 희소한가에 따라 높기도 하고 낮기도 할 것이다.

뒤에 가서는 보험료를 자본 이자와도 구분할 것이며, 새로운 사실들이 이 이중성으로부터 나올 것이다. 이처럼 인류의 역사는 지성의 개념들의 끊임없는 구분일 뿐이다.

③ 자본의 이자가 노동자로 하여금 자신의 성과물을 누리게 하고, 그의 저축을 보장해 주기만 하는 것이 아니다. 이는 이 이자의 가장 경이로운 효과인데, 생산자에게 보상을 해주면서도 그가 끊임없이 일하고, 결코 멈추지 않게 만든다.

기업가가 자신에게 자기 자신의 자본가라면, 그는 이득으로 자신의 재원에 대한 이자를 뽑아내는 것에 만족할 수 있다. 하지만 그러면 그의 산업은 더 이상 진보가 없으며 따라서 고충을 겪게 될 것이 확실하다. 이는 자본가가 기업가와 다른 경우에 눈치 채게 되는 것이다. 그러면 이자가 빠져나감에 따라 이득은 제조자에게 절대로 무이므로 그의 산업은 그에게 계속적인 위험이 되며, 가능한 한 일찍 그로부터 벗어나는 것이 중요하다. 왜냐하면 행복은 사회에게 무한급수로 발달해야 하므로, 마찬가지로 생산자의 법칙은 그가 계속적으로 초과분을 실현한다는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그의 생존은 위태롭고, 단조롭고, 피곤하게 만드는 것이다. 그러므로 자본가에게 지불할 이자는 잠든 노예의 머리 위에 가해지는 식민지 개척자의 채찍과 같다. 행진, 행진! 일하라, 일하라! 하고 외치는 것은 진보의 목소리다. 사람의 운명이 그를 행복으로 밀어붙인다. 이것이 운명이 그에게 휴식을 금하는 이유이다.

④ 끝으로 돈의 이자는 자본 유통의 조건이며, 산업 연대성의 주된 인자이다. 이 측면은 모든 경제학자들에 의해 파악되었다. 그리고 우리는 신용에 대해 다루면서 특수한 방식으로 이를 다룰 것이다.

나는 다음을 증명했으며, 지금까지 누구보다 이를 더 잘 해냈다고 상상한다.

독점은 경쟁의 적대자이니 필요하다는 것.

독점 없이 사회는 결코 원시의 숲으로부터 나오지 못했을 것이며, 이것 없이는 급속히 퇴보했을 것이므로 독점이 사회에는 필수적이라는 것.

끝으로, 독점은 그것이 생산에 제공하는 순생산물로, 혹은 자본의 이자로 독점자에게 그의 예지와 노력이 받을 만한 행복의 증대를 가져다주는 경우에 생산자의 왕관이라는 것.

그렇다고 우리가 경제학자들과 함께 독점에 영광을 돌리고, 부유한 보수주의자들에게 좋도록 독점을 성별하려고 하는가? 내가 앞에서 이들을 옳다고 한 것처럼 이들이 다음에 나오는 것에 관해 나를 옳다고 한다는 조건에서 그러기를 바란다.

. 독점에 의해 유발된 노동의 재앙과 관념들의 타락

경쟁과 마찬가지로, 독점은 용어와 정의상으로 모순을 내포한다. 실제로, 소비와 생산은 동일한 것들이고, 판매는 구매와 동일한 의미이니, 판매나 개발의 특권을 말하는 자는 필연적으로 소비와 구매의 특권을 말하는 것이다. 이는 이것과 저것 모두의 부정을 가져온다. 이로부터 독점은 임금 생활자들에 대해 생산과 마찬가지로 소비의 금지를 선포한다. 경쟁은 내전이었으며, 독점은 포로들의 학살이다.

이 다양한 명제들은 모든 종류의 물리적, 대수학적 그리고 형이상학적 증거들을 결합한다. 내가 추가할 것은 증폭된 해설일 뿐일 것이다. 그것들을 말하기만 해도 증명하는 것이 된다.

사회 전체는 그 경제적 관계들에서 고찰하면 자연적으로 자본가와 노동자, 기업가와 임금 수령자들로 나뉘며, 이들이 그 눈금이 각자의 소득을 가리키는 자 위에 분포하고 있다. 이 소득이 임금, 이윤, 이자, 임대료로 이루어지든, 지대로 이루어지든 말이다.

사람들과 소득들의 이 위계적 분포로부터 나오는 것은 방금 이야기한 세의 원리, 한 민족 내에서 순생산물은 총생산물과 같다는 원리가 더 이상 참이 아니라는 것이다. 독점의 효과 때문에 판매 가격의 수치는 원가의 수치보다 훨씬 높으니 말이다. 그런데, 한 민족은 실제로 자기 자신 말고 다른 판로가 없으니 판매가를 납부해야 하는 것은 원가이므로, 결과적으로 교환, 따라서 유통과 생활이 불가능하다는 결과가 된다.

“프랑스에서 과학, 예술, 산업의 모든 분야에 퍼져 있는 2000만 명의 노동자들은 인간의 삶에 유용한 모든 것을 생산한다. 그들의 임금 합계는 가설에 따르면 200억에 해당한다. 그러나 독점자들에게 주어지는 이득(순생산물과 이자)으로 인해 생산물 합계는 250억이 지불되어야 한다. 그런데 그 민족은 임금 노동자와 임금 지급자들밖에 구매자들을 가지지 않고, 임금 지급자들은 남을 위해 지불하지 않으며, 상품 판매 가격은 모두에게 동일하므로, 유통을 가능하게 하려면 노동자는 자신이 넷밖에 받지 않은 것에 대해 다섯을 지불해야할 것이다.(『소유란 무엇인가Qu'est-ce que la propriété』, ch.Ⅳ)

그러므로 이것이 바로 부유함과 가난함이 관념에서만이 아니라 사실에서도 상관적이고 불가분이게 하는 것, 이 둘이 서로에 대해 경쟁적으로 존재하게 하는 것, 그리고 임금 노동자에게 부자는 가난한 자가 빼앗기지 않은 것을 가난한 자보다 조금도 더 소유하지 않는다고 주장할 권리를 주는 것이다. 독점이 이득과 이자의 비용을 계산한 후에 임금 노동자-소비자는 자신의 계산을 한다. 그리고 그에게 노동 계약상으로 100에 해당하는 임금을 약속하고서 실제로는 75밖에 주지 않은 것이 된다. 독점은 그러므로 임금 노동자 계층을 파산시키며, 그가 자신의 전리품으로 산다는 것은 엄격하게 참이다.

6년 전부터 나는 이 무서운 모순을 들추어냈다. 왜 그것은 언론에서 울려 퍼지지 않았는가? 왜 저명한 거장들은 견해를 표명하지 않았는가? 일꾼의 정치적 권리들을 달라고 하는 자들은 왜 일꾼에게 누군가 그것을 훔쳐갔다고 말하지 않는가? 왜 경제학자들은 침묵했는가? 왜?

우리의 혁명적 민주주의는 혁명들을 두려워하기 때문에 비로소 그러한 소란을 떨 뿐이다. 그러나 감히 직면하지 못하는 그 위험을 숨기면서 이를 증대시키는 데만 성공할 뿐이다. 블랑키 씨는 이렇게 말한다. “우리는 밸브를 교체하는 동시에 증기의 양을 늘리는 운전사들과 닮았다.” 독점의 희생자들이여, 마음을 가라앉히라! 당신을 괴롭히는 자들이 말을 들으려 하지 않는다면 이는 섭리가 그들을 치기로 결심한 것이다. 성서는 말한다. “그들이 귀 기울이지 않았으므로 신은 그들을 죽이고자 했다(non audierunt quia Deus volebat occidere eos).”

판매는 독점의 조건들을 충족하지 못해 상품들이 미어진다. 노동은 한 해 임금으로 15개월 동안에 걸쳐 소비하게 허락해주는 것을 생산했다. 그러므로 그는 연중 4분의 1은 놀아야할 것이다. 하지만, 그가 논다면 벌어들이는 것이 없을 것이다. 그는 도대체 어떻게 구매할 것인가? 그리고 독점자가 산물을 처분하지 못한다면, 그 기업은 어떻게 존속할 것인가? 작업장을 둘러싸고 논리적 불가능이 배가된다. 이를 드러내 주는 사실들이 도처에 있다.

외젠 뷔레는 이렇게 말한다. “영국의 양품업자들은 1년에 이틀 이상 먹지 못하게 되었다. 이 상태는 18개월을 지속할 것이다.” 그리고 그는 수많은 비슷한 경우들을 인용한다.

그러나 독점의 효과들의 광경에서 가슴을 아프게 하는 것은, 불행한 일꾼들이 자신들의 빈곤에 대해 서로를 비난하는 것을 보고, 이들이 서로 단결하고 서로 지탱해 준다면 임금의 삭감을 막을 것이라고 상상하는 것이다. 한 관찰자가 말한다. “아일랜드인들은 대영제국의 노동계급에게 해로운 교훈을 주었다. … 그들은 우리 노동자들에게 자신들의 필요를 동물적인 삶의 유지 수준으로 국한하고 야만인들처럼 생활을 연장하는 데 충분한 최소의 생계 수단으로 만족한다는 치명적인 비밀을 가르쳐 주었다. 이런 치명적인 예의 가르침을 받고 부분적으로는 필요성에 굴복한 노동계급은 자신들의 집에 제대로 가구를 갖추게 하고 집 주위에 행복에 보탬이 되는 괜찮은 편의시설들을 늘릴 이 칭송할 만한 고집을 잃어버렸나?”

나는 더 당황스럽고 더 바보스러운 것을 결코 읽은 적이 없다. 당신은 그들이 이 일꾼들을 무엇으로 만들기를 원하는가? 아일랜드인들이 왔다. 이들을 학살해야 했는가? 임금이 낮아졌다. 이를 거부하고 죽어야 했는가? 필요성이 명했다고 여러분 스스로 말했다. 그러고는 종잡을 수 없는 장면들, 질병, 흉한 모습, 타락, 무뎌짐, 그리고 산업적 노예 상태의 온갖 신호들이 생겨났다. 이 모든 재난들은 독점과 그 슬픈 선행자들, 경쟁, 기계 그리고 노동 분업에서 생겨났다. 그런데 당신은 아일랜드인들을 비난한다!

옛날에는 일꾼들은 나쁜 운을 탓하고, 인내하려고 마음먹었다. 이는 일자리가 충분하고 임금이 충분할 때 그들이 섭리에 대해 하는 감사의 상대측이다.

나는 레옹 포셰 씨가 「주르날 데 제코노미스트」(1845년 9월)에 발표한 논문에서 얼마 전부터 영국 일꾼들이 단결의 관습을 잃었다는 것을 발견한다. 이는 확실히 축하할 수밖에 없는 진보이지만, 이런 노동자들의 정신상의 개선은 특히 그들의 경제적 교육에서 나온다. 한 방적공이 볼턴 회의에서 이렇게 소리쳤다.

“임금을 좌우하는 것은 결코 제조업자들이 아니에요. 불황기에 주인들은 말하자면 필연이 손에 쥔 채찍일 뿐이에요. 그리고 그들이 원하든 원하지 않든, 그들이 내리치는 것이 필요해요. 규율하는 원리는 공급과 수요의 관계에요. 그리고 주인들은 이 권력을 가지지 않아요. … 그러므로 현명하게 행동합시다. 나쁜 운을 체념하고, 좋은 운은 활용할 줄 압시다. 우리 산업의 진보를 도와주면, 우리는 우리 자신에게만 유익할 뿐 아니라 온 나라에도 유익할 겁니다.” (박수갈채)

제대로 말한 것이다. 이야말로 정신이 바로 선 일꾼들, 모범 일꾼들이다. 임금을 규율하는 원리는 공급과 수요의 관계인데 필연의 채찍을 불평 없이 감수하다니 이 방적공들은 어떤 사람들인가! 레옹 포셰 씨는 매혹적인 순진함으로 이렇게 덧붙인다. “영국 일꾼들은 용감한 추론가들이다. 그들에게 거짓 원리를 제시해보라. 그러면 그들은 멈추지도 않고 두려워하지도 않고 마치 진리의 승리를 향해 행진하듯 이를 수학적으로 터무니없는 데까지 밀고 갈 것이다.” 나는 경제학적 선전의 모든 노력에도 불구하고 프랑스 일꾼들은 결코 이런 힘을 가진 추론가들이 아닐 것이라고 기대한다. 공급과 수요도, 필연의 채찍도 더 이상 그들의 정신을 사로잡지 못한다. 이런 비참함은 영국에는 결여되었다. 이는 해협을 건너가지 않을 것이다.

분업, 기계, 순생산과 이자의 조합된 효과에 의해 독점은 기하급수로 정복을 늘려 간다. 독점의 발달은 상공업과 똑같이 농업, 그리고 모든 종류의 산물을 포괄한다. 이탈리아의 몰락을 결정지은 토지 독점에 관한 플리니우스의 말을 모든 사람이 알고 있다. “라티푼디움이 이탈리아를 망쳤다(latifundia perdidere Italiam).” 로마의 들녘을 더 빈곤하게 하고 사람이 거주할 수 없게 하는 것, 영국이 경련을 일으키며 그 안에서 불안해하는 악순환을 이루는 것이 바로 이 독점이다. 인종 전쟁에 이어 폭력적으로 세워져서 아일랜드의 온갖 해악을 일으키고, 그 모든 달변으로도 이 미로를 가로질러 그가 불러 모은 자들을 인도할 능력이 없는 오코넬(O'Connel)에게 그리 많은 시련을 야기한 것이 그것이다. 위대한 감정과 수사는 사회의 해악들에 대한 가장 나쁜 치료법이다. 오코넬에게는 아일랜드와 아일랜드 사람들을 북해로부터 남극해로 실어 가는 것이 그들의 목을 조르는 독점을 장광설의 입김으로 쓰러뜨리는 것보다 쉬웠을 것이다. 일반 교단들과 설교들이 더 이상 손을 쓰지 못할 것이다. 종교 감정만으로 아일랜드 인민의 정신을 여전히 지탱해 준다고 해도, 교회의 멸시를 그토록 받는 약간의 이 신성모독적 과학이 교회의 지팡이가 더는 지켜주지 못하는 어린양들을 구해주러 오는 것이 시급하다.

상공업으로의 독점의 침입은 너무 잘 알려져서 내가 그 증거들을 모을 필요도 없다. 게다가 그 결과들이 그렇게 소리 높여 말하는 때에 그렇게 논리를 펴는 것이 무슨 소용인가? 노동계급의 빈곤에 대한 뷔레의 묘사는 당신을 억누르고 당신을 기겁하게 하는 환상적인 무언가를 지닌다. 이는 조서와 기소장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상상으로 믿을 수 없는 장면들이다. 부부가 모두 발가벗고 텅 빈 침실 바닥에 벌거벗은 자녀들과 함께 숨어 있다. 인구 전체가 벌거벗었으므로 일요일에 더 이상 교회에 가지 않는다. 고인에게 시체를 감쌀 수의도, 관과 장의사 비용을 지불할 것도 남아있지 않아서 시체들은 장례 없이 8일간 보관된다(그리고 주교는 지대로 40만에서 50만 파운드를 누린다). 가족들은 하수도에 모여들어 돼지들과 같은 방에서 살고, 산 채로 몸이 썩어 가거나 구덩이에서 백색증에 걸린 자들처럼 거주한다. 80대 노인들이 맨 널빤지 위에 벌거벗은 채 누워 잠을 잔다. 처녀와 창녀가 똑같이 벌거벗은 채로 꺼져 간다. 어디서나 절망이고, 소진이고, 배고픔, 배고픔이다! … 그리고 이 인민은 그 주인들의 범죄의 대가를 치르면서도 항거하지 않는다! 아니, 네메시스의 불길에 의해서! 인민이 더 이상 복수심을 가지지 않을 때, 섭리는 더는 없다.

독점이 저지르는 대량 학살은 아직 이를 노래하는 시인들도 없다. 우리의 뜨내기 시인들은 이 세상사에 어둡고 프롤레타리아를 위한 충심衷心이 없어서, 그들의 우울한 흥취를 달을 향해 계속 읊조린다. 그렇기는 해도 독점에 의해 생겨난 곤궁은 무슨 명상의 화두란 말인가!

월터 스콧(Walter Scott)은 이렇게 말했다.

“옛날 벌써 수년 전에, 마을 사람은 각자 암소와 돼지를 가졌고, 집 둘레에 울타리도 있었다. 단 한 사람의 농부가 오늘날 밭을 가는 곳에서 옛날에는 작은 농부들 서너 명이 살았다. 그래서 참으로 옛날의 서른 명의 농부보다 혼자만으로도 더 부유한 한 개인에 대해 지금은 스물아홉 명의 비참한 날품팔이들이 자신들의 머리도 팔다리도 쓸 일자리가 없이 있으며, 그 중 절반 넘게는 쓸모가 없다. 그들이 수행할 유일한 쓸모 있는 기능은 그들이 할 수 있을 때 그들이 사는 오두막집에 대해 연 60실링의 지대를 납부하는 일이다.”

뷔레가 인용한 한 현대 가요는 독점의 고독을 이렇게 노래한다.

골짜기에 물레방아는 조용하구나,

가족의 마음도 그렇지.

한 올의 연기에 늙으신 할아버지,

마른 손을 뻗으시고, 빈 아궁이는 할아버지 마음처럼,

쓸쓸하구나.

의회에 제출된 보고서들은 소설가, 시인들과 겨룬다.

“글렌셰일Glensheil 주민들은 던디Dundee의 골짜기 주변에서 옛날에 신체적 질의 우수성 덕에 그 모든 이웃들과 구별되었다. 남자들은 키가 컸고, 강인했고, 능동적이고 용기가 있었다. 여자들은 상냥하고 귀여웠다. 양성 모두 시와 음악에 대한 대단한 취미를 보유했다. 지금은 참 슬프구나! 오랜 빈곤의 시련, 오랫동안 충분한 음식과 괜찮은 의복 없이 지낸 것이 두드러지게 아름다웠던 이 족속을 심각하게 퇴화시켰다.”

바로 이것은 물론 노동 분업과 기계에 대한 두 장에서 우리가 지적한 치명적인 저열화다. 그리고 우리의 문인들은 마치 자신들의 천재성에 현실 감각이 결여된 듯이 회고적인 호의에 몰두한다. 그들 중 제일은 이 지옥 같은 길거리를 모험해본 후에 그 무리 안에서 추문을 일으켰다! 게으른 기생충들, 비열한 산문과 시의 밀매자들, 모두가 마르시아스의 임금을 받을 만한 자들이다! 오! 당신들의 형벌이 내 오해만큼 오래 지속될 것이라면, 당신들은 지옥의 영원함을 믿을 필요가 있을 것이다.

방금 우리에게 정의에 아주 제대로 기초를 둔 것으로 보였던 독점은, 임금을 허망한 것으로 만들 뿐 아니라 이 임금의 평가 자체에서 그와 대면해 거짓 직함, 거짓 자격을 지녀서 일꾼을 속이는 만큼 더욱 불의하다.

시스몽디 씨는 『사회경제학 연구Études d'économie sociale』에서, 한 은행가가 한 상인에게 그의 가치와의 교환으로 은행권을 내놓은 경우에 그는 그 상인에게 신용을 주기는커녕 반대로 그로부터 신용을 받는다는 것을 어느 정도 관찰한다. 시스몽디 씨는 이렇게 덧붙인다. “이 신용은 참으로 너무 짧아서 그 상인은 그 은행가가 신용을 얻기에 합당한지를 검토할 시간도 들이지 못한다. 신용을 주는 대신에 이를 요구하는 쪽은 상인이기 때문이다.”

이처럼 시스몽디 씨에 따르면, 은행 지폐의 발행에서 상인과 은행가의 역할은 뒤바뀐다. 채권자는 상인이고, 신용을 얻는 자는 은행가다.

유사한 일이 독점자와 임금 노동자 간에 일어난다.

사실상, 은행에 대한 상인처럼 자신들의 노동을 할인하기를 요구하는 것은 일꾼들이다. 권리상, 그들에게 보증금을 제공하고 보장을 해주어야할 것은 기업가이다. 나는 이해가 간다.

모든 사업 전개에서 그 성격이 무엇이든 기업가는 자신의 인적 노동 외에 관념 말고 다른 것을 자신의 것이라고 합당하게 주장할 수 없다. 여러 노동자들의 협력의 결과인 실행에 관해서는, 이는 집단적 역량의 효과로서 그 장본인들이 우두머리와 마찬가지로 행동에서 자유로워서는 그 우두머리에게 공짜로 돌아가는 것을 아무것도 생산할 수가 없다. 그런데, 기업가가 지불하는 개별 임금의 합계가 내가 말하는 집단적 효과와 등가인지를 아는 것이 중요하다. 왜냐하면 그렇지 않다면 세의 공리, 모든 산물은 그것이 요하는 비용과 등가라는 것이 위배되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이렇게 말했다.

“자본가는 논의된 값으로 일꾼들의 한나절 일에 대해 지불했다. 그 결과 그는 그들에게 아무런 채무가 없다. 정확히 말해서 그는 고용한 일꾼들 수에 한나절 임금을 곱한 것만큼을 지불했다고 말해야할 것이다. 이는 결코 같은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노동자들의 결합, 그들 노력의 수렴과 조화로부터 결과로 나오는 이 엄청난 힘, 그들의 작업장에서의 훈련에 의해 획득된 비용의 이 절약, 참으로 기업가에 의해 예견된, 그러나 자유로운 힘들에 의해 실현된 산물의 이 배증에 대해 그는 결코 지불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척탄병 200명이 한 기사의 지휘 아래 작전을 벌여 몇 시간 동안 오벨리스크를 그 발판 위에 세웠다. 한 사람이 200일 동안 그 일을 완수했으리라 생각하는가? 그렇다고 해도 기업가의 계산으로 임금의 합계는 두 경우에 동일하다. 왜냐하면 그는 집단적 힘의 이득을 자기 것으로 차지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는 그의 몫을 빼앗는 것이든지, 아니면 오류든지 둘 중에 하나다.”(『소유란 무엇인가』, ch.Ⅲ)

뮬 · 제니 방적기를 제대로 활용하려면, 기계 기사, 제작자, 사무원, 온갖 남녀 직공 작업반이 필요했다. 자신들의 자유, 안전, 자신들의 미래와 자녀들의 미래의 이름으로 이 직공들은 방적 일에 취업하면서 유보를 할 필요가 있었다. 그들이 기업가에게 양도한 신용장은 어디 있는가? 그들이 받은 담보는 어디 있는가? 뭐라고! 수백만의 사람들이 자신들의 손발을 팔았고, 자신들의 자유를 그 계약의 위상을 모른 채로 매각했다. 그들은 일자리가 유지되고 충분한 보수가 주어진다는 믿음에 따라 취업했다. 그들은 주인들이 생각으로 구상한 것을 자신들의 손으로 실행했다. 그들은 이 협조를 통해 사업의 동업자들이 되었다. 그리고 독점체가 교환을 더 이상 할 수 없거나 하기를 원하지 않아서 제조 활동을 중단하고 이 수백만의 노동자를 내보낼 때, 사람들은 이 노동자들에게 포기하라고 말한다. 새로운 공정에 의해 그들은 자신들의 노동에서 열흘 중 아흐레를 잃어버렸다. 그리고 그 보답으로 사람들은 그들에게 내리치는 필연의 채찍을 보여준다. 그렇다면 그들이 더 적은 임금으로 노동하기를 거절한다면, 그들이 벌하는 것은 자신들임을 사람들은 그들에게 증명해준다. 그들이 자신들에게 제시되는 가격을 받아들인다면, 그들은 이 고귀한 고집, 일꾼의 행복과 존엄을 만들어주는 격조 있는 편리품에 대한 이 취향을 상실하고, 부자의 동정에 찬성하는 것이다. 이들이 자신들의 임금을 올리기로 합의한다면, 사람들은 이들을 감옥에 처넣는다! 그들이 법정에서 자신들의 착취자들을 기소해야 하는데도, 법정은 상업의 자유에 대한 침해에 대해 이들에게 보복한다! 독점의 희생자들이 독점자들에게 돌아가야 할 벌을 받을 것이다! 오, 사람들의 정의여, 어리석은 유녀遊女여, 언제까지 그대의 여신 복장을 입고서 목 잘린 프롤레타리아의 피를 마실 것인가?

독점은 모든 것, 땅, 노동, 노동 수단들, 산물들, 그리고 산물들의 분배에 침입했다. 정치경제학 자체가 이를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로시 씨는 말한다. “당신은 거의 언제나 길에서 독점을 발견한다. 그것은 노동의 단순한 결과로 간주할 수 있는 산물이 결코 아니다. 이처럼 가격을 생산 비용에 비례시키는 경제 법칙은 결코 완전히 실현되지 않는다. … 이는 생산 수단들을 자신에게 종속시켜 둔 여러 독점체들 중 어느 것의 개입으로 심각하게 변경된 하나의 공식이다.”(『정치경제학 강의Cours d'Economie politique』, t.Ⅰ, p.143)

로시 씨는 독점이 문제인 경우에 과학이 명하는 모든 적확성과 정확성을 띠는 언어를 구사하기에는 너무 고고한 위치에 있다. 그가 많은 호의를 가지고서 경제적 공식들의 변경이라고 부르는 것은 노동과 교환의 근본적 법칙들의 오랜, 그리고 역겨운 위배일 뿐이다. 사회에서 순생산이 총생산을 넘어서 계산되어, 모순적이고 불가능한 일로서, 집단적 노동자가 자기 자신의 산물을 이 산물이 요하는 비용보다 높은 가격에 구입해야 하는 일, 생산과 소비의 자연적 균형이 깨어진 상태에 처하는 일, 노동자가 자신의 규율에 관해서처럼 자신의 임금 총액에 관해서도 속는 일, 행복의 진보가 그에게는 빈곤의 끊임없는 진보로 바뀌는 일은 독점의 효과에 의한 것이다. 끝으로 교환적 정의의 모든 관념이 변질되는 것, 사회경제학이 지금의 실증과학으로부터 진정한 유토피아가 되는 것은 독점에 의해서다.

독점의 영향 아래에서 정치경제학의 이런 왜곡은 사회적 관념들의 역사에서 아주 주목할 만한 사실이라서 우리는 여기서 몇 가지 예를 기록하지 않을 수 없다.

이처럼, 독점의 관점에서 가치는 유용성을 지닌 특정한 물건과 부 전체의 관계를 표현하는 데 도움을 주는 이 종합적 개념이 더 이상 아니다. 독점이 사물을 사회에 대해서가 아니라 자신에 대해서 산정해서, 가치는 그 사회적 성격을 상실하고, 모호하고 자의적이고 이기적이고 본질적으로 변동하는 관계일 뿐이다. 독점자는 이 원리에서 출발해 산물의 자격을 모든 종류의 예속으로 확장하고, 자본의 관념을 자신의 열정과 악이 전개하는 모든 하찮고 수치스러운 산업들에 적용한다. 세는 말한다. 한 유녀의 매력은 그 산물이 가치들의 일반적 법칙, 즉 공급과 수요를 따르는 기금基金이다. 정치경제학 저작의 대부분은 그러한 응용 예들로 가득하다. 그러나 성매매와 그로부터 나오는 하인 신분은 도덕의 질타를 받으므로 로시 씨는 정치경제학이 독점의 개입에 따라서 공식을 변경한 후에 이에 새로운 교정을 받게 해야 할 것이라는 점을 우리에게 관찰시킬 것이다. 그 결론들은 그 자체로 나무랄 데 없는데도 말이다. 왜냐하면 정치경제학은 도덕과 아무 공통점도 없기 때문에 그렇다는 것이다. 우리의 선, 사회의 선, 그리고 도덕의 배려가 요구하는 데 따라 이 공식을 받아들이거나 변경하거나 교정하는 것은 우리에게 달려있는 일이다. 정치경제학과 진리 사이에 얼마나 많은 것들이 있는가!

마찬가지로 순생산의 이론은 아주 현저하게 사회적, 진보적이고 보수적인 이론으로서, 내가 이렇게 말할 수 있다면, 이번에는 독점에 의해 개별화되었으며, 사회의 행복을 마련해야할 원리가 사회의 멸망을 유발한다. 독점자는 전체적으로 가능한 가장 큰 순생산을 추구해서 더 이상 사회 구성원으로서, 그리고 사회의 이익을 위해 움직이지 않는다. 그는 자신의 배타적 이익을 이 이익이 사회적 이익과 상반되든 그렇지 않든 염두에 두고 움직인다. 이런 시각의 변경은 시스몽디 씨가 로마 들녘의 인구 감소의 원인으로 지목하는 것이다. 아그로 로마노Agro romano의 산물에 대해서 그가 행한 비교 연구에 따르면, 그곳이 경작되는 경우에 총생산은 목초지로 방치될 때의 열두 배가 더 높다. 그러나 경작은 상대적으로 훨씬 더 많은 일손을 요하므로 그는 또한 바로 이 경우에 순생산은 더 적을 것이라는 점을 알았다. 지주들에게 피할 수 없는 이 계산은 그들에게 자신들의 땅을 미경작지로 두는 관습을 지키게 하는 데 충분했으며, 로마의 들녘에는 사람이 거주하지 않는다.

시스몽디 씨는 이렇게 덧붙인다. “로마의 여러 나라들의 모든 부분들은 중세의 그들의 번영의 기억과 현재의 황량함 간에 동일한 대조를 제시한다. 세레스Cères 시는 렌초 다 체리(Renzo da Ceri)로 유명해졌는데, 이 사람은 샤를 캥(Charles Quint)에 맞서 마르세유를 지켰고, 이어서 사부아 백작에 맞서 제네바를 지킨 사람이다. 이 도시는 적막강산에 불과하다. 오르시니가와 콜론나가의 모든 봉토에는 아무도 없다. 비코의 아름다운 호수 주위 숲들에서 인간 족속은 사라졌다. 그리고 14세기에 무서운 비코 총독이 거느리고서 아주 빈번히 로마를 떨게 한 군사들은 후손을 전혀 남기지 않았다. 카스트로와 론칠리오네는 당황한다. …”(『정치경제학 연구』)

실제로 사회는 가장 큰 총생산을 추구하고, 결과적으로 가능한 한 큰 인구를 추구한다. 사회에는 총생산과 순생산이 동일한 것이기 때문이다. 반대로 독점은 항상 가장 큰 순생산을 목표로 삼는다. 그것을 인류의 멸종을 대가로 해서만 달성할 수 있더라도 말이다.

독점의 바로 이 영향 아래 자본의 이익은 그 관념에서 왜곡되어 이번에는 사회에 죽음의 원리가 되었다. 우리가 설명한 것처럼, 자본의 이자는 한편으로 노동자가 자본을 새로운 창조에 보탬이 되게 하면서도 자신의 순생산을 향유하는 형태이고, 또 한편으로 이 이자는 부의 증대라는 관점에서 생산자들 간 물적 연대의 끈이다. 첫째 측면에서 이자의 합계는 자본의 총계 자체를 결코 초과할 수 없다. 둘째 관점에서 이자는 원금 상환 이상으로 제공된 서비스에 대한 보수로서의 웃돈을 포함한다. 어떤 경우에도 그것은 영속성을 내포하지 않는다.

그러나 독점은 인간 근면의 창조물이라고밖에 할 수 없는 자본의 관념을 자연이 우리에게 제공한, 그리고 모두에게 속하는 개발 가능한 기금이라는 관념과 혼동하고, 소유가 배타적, 주권적, 영속적이라는 조건에서만 존재할 수 있는 사회의 무정부 상태에 의해 그 강탈에서 혜택을 입어, 자본이 토지, 동물, 식물과 마찬가지로 그 자체 안에 고유의 활동을 가져서 이 활동이 자본가가 교환에서 다른 것을 가져오고 작업장의 작업에서 어떤 몫을 담당하는 것을 면제해준다는 것을 원리로서 제시했다고 스스로 상상했다. 독점의 이런 거짓 관념으로부터 고리대금의 그리스 이름인 토코스τόκος가 나왔다. 자본의 새끼 혹은 증분이라는 말이다. 이는 아리스토텔레스에게 이런 말장난을 할 여지를 준 것이다. 은전銀錢들은 결코 새끼를 낳지 않는다고. 그러나 대금업자들의 은유가 그 스타기라 사람의 농담을 누르고 우세를 차지했다. 대금 이자는, 그것이 모방한 원형인 지대처럼 영구적 권리로 선언되었다. 그리고 그것이 감가상각의 관념을 재현한 것은 나중에서야 원리로 반쯤 돌아감으로써 된 일이다.

이러한 것이 신학자들과 법학자들 사이에서 수많은 추문을 일으킨 이 수수께끼의 의미다. 이 수수께끼를 놓고 그리스도교 교회는 두 번 잘못을 범했다. 첫 번째는 모든 종류의 이자를 정죄한 잘못이고, 두 번째는 경제학자들의 정서에 편승해 자신의 옛 격언들을 부정한 잘못이다. 대금업 혹은 몰수권은 독점의 표현이면서 정죄이기도 하다. 이는 조직되고 합법화된 자본으로써 노동을 약탈하는 것이다. 이는 모든 경제적 일탈 형태들 중에 고대 사회를 가장 소리 높여 비난하는 일탈 형태이며, 그것의 수치스러운 지속은 자본가 계급 전체의 갑작스러운 보상 없는 소유권 박탈을 정당화해줄 것이다.

끝으로 독점은 일종의 보존 본능에서, 자신에 반대될 수 있는 조합 관념까지 왜곡했다. 또는 더 제대로 말해서 그 관념이 생겨나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오늘날 누가 사람들 사이에 사회가 어떠해야 하는지를 정의한다고 자부할 수 있을까? 법률은 민법상 사회의 두 종류와 네 변종, 그리고 단순한 합명회사부터 주식회사까지 그만한 수의 상법상의 회사도 구분한다. 나는 사람들이 이런 모든 조합의 형태들에 관해 쓴 가장 존경할 만한 논평들을 읽어 보았는데, 거기서 나는 둘 이상의 결합한 사람들이, 생산하고 소비하고, 발명하고 교환하고, 살고 죽는 모든 이에 맞서 자신들의 자본과 노력을 합치는 독점의 일상 관행의 한 응용밖에 발견하지 못했음을 공언한다. 이 모든 회사들의 필요 불가결 조건은 자본으로, 그것의 존재만이 그 회사들을 이루고, 그 회사들에 기초를 제공한다. 그 회사들의 목적은 독점, 즉 다른 모든 노동자들과 자본가들의 배제, 따라서 사람들에 관한 사회적 보편성의 부정이다.

이처럼 법전의 정의에 따르면, 원리상 모든 국외자가 자신의 단순한 요구로 참여할 수 있고 즉시로 조합원의, 심지어 관리인의 권리와 특권을 누릴 수 있는 능력을 가진다고 내세우는 상업 회사는 더 이상 회사가 아닐 것이다. 법원은 직무상 그 해산, 부존재를 공표할 것이다. 또 이와 같이 계약 당사자들이 아무런 출자금도 규정하지 않고, 각자에게 모두에 대해 경쟁할 명시적 권리를 남겨 주면서도 사업의 전문성, 자본, 이자, 이윤과 손실에 대해 말하는 것 없이 이들에게 노동과 임금을 호혜적으로 보장해주는 데 국한하는 회사의 행위, 그런 행위는 그 내용상 모순적이고 이유만큼이나 목적도 결여하며, 처음 불복하는 조합원의 불평으로 재판관에 의해 무효화될 것이다. 이렇게 작성된 협약들은 어떠한 법적 행위도 일으킬 수 없을 것이다. 모든 사람과 연합하고 있다고 스스로 말하는 사람들은 아무와도 연합하지 않은 것으로 간주될 것이다. 회사의 기금은 전혀 언급하지 않고 목적물도 지정하지 않고 조합원 간의 보장과 경쟁을 한꺼번에 말하는 문서들은 초월적인 협잡의 작품으로 통할 것이며, 그 저자는 검찰이 그를 정신병자로밖에 보지 않는 데 동의한다고 하면 비세트르Bicètre 병원으로 물론 보내질 수 있을 것이다.

그렇지만, 역사와 사회경제학이 더욱 진실한 것으로 제공하는 모든 것에 의해 인류는 그가 개간하는 땅 위에 벌거벗고 자본도 없이 내던져졌다는 것, 매일 모든 부를 창조해 왔고 또 창조하는 것은 인류이며, 인류에게서 독점은 노동자의 등급을 특정한 향유의 조건과 함께 지정하는 데 소용되는 상대적 관점에 불과하다는 것, 일체의 진보는 생산물을 무한히 배증하면서 그 비례성을 결정하는 것, 즉 노동과 행복을 분업, 기계, 작업장, 교육, 그리고 경쟁을 통해 조직하는 데 있다는 것이 진실로 확인된다. 현상들에 대한 가장 심오한 연구도 그 이상 아무것도 알아내지 못한다. 다른 한편, 인류의 모든 경향은 정치에서도, 민사법에서도 보편화를 향한다는 것, 즉 우리의 법전들이 정하는 바와 같은 회사 관념의 완전한 변형을 향한다는 것이 명백하다.

이로부터 내가 내리는 결론은, 각 조합원이 경제 이론에 따라 회사에 들어갈 때 아무것도 소유하지 않는 것으로 간주되어 조합원들의 출자를 더 이상 규율하지 않고 노동과 교환의 조건들만 규율하며, 등장하는 모든 이들에게 문호를 개방하는 회사 행위, 그러한 회사 행위는 진보의 표현 자체이고 노동의 유기적 공식일 것이니, 말하자면 인류에게 그 구성의 기초를 제공해 인류를 인류 자신에게 계시할 것이니 합리적이고 과학적인 것 말고 아무것도 없으리라는 것이다.

그런데, 법률가들과 경제학자들 중에서 이런 굉장한 생각, 그리고 아주 단순한 생각으로부터 천 리나 먼 데서 겨우 다가온 자는 누구인가? 트롤롱 씨는 이렇게 말한다. “나는 조합 정신이 과거에, 그리고 오늘까지 성취한 것보다 더 위대한 운명으로 부름을 받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 그리고 나는 과장된 것이라고 생각하는 그런 기대를 실현하기 위해 아무것도 시도하지 않았다고 실토한다. 조합이 벗어나서는 안 되는 정당한 한계들이 존재한다. 아니다! 조합은 프랑스에서는 모든 것을 다스리도록 부름을 받지 않았다. 개인 정신의 자생적 도약은 우리 민족의 활력이고, 그 독창성의 원인이다.”

“조합의 관념은 새롭지 않다. … 이미 우리는 로마인들에게서 상업회사가 독점, 매점, 공모, 단합, 해적 행위, 매수 가능성의 모든 매력을 가지고 나타나는 것을 안다. … 지휘권은 중세의 민법, 상법, 해양법을 채운다. 그것은 이 시대에는 회사에서 조직된 노동의 가장 능동적인 수단이다. … 14세기 중엽부터는 회사들이 주식에 의해 형성되는 것을 보게 된다. 그리고 존 로(John Law)의 파산 때까지 그 회사들이 계속 증대하는 것을 보게 된다. … 어떻게! 우리는 광산, 공장, 특허증, 신문들을 동원하는 것에 놀란다. 그러나 섬들, 왕국들, 거의 반구 전체를 동원한 지 2세기가 되었다. 우리는 기적을 달라고 외친다. 수백 명의 출자자들이 한 기업 주위에 몰려들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벌써 14세기에 피렌체 시 전체가 기업들의 수호신을 가능한 한 멀리 물리친 몇몇 상인들의 출자자였다. 그리고 우리의 투기 행위가 나쁘다면, 우리가 무모하고 부주의하거나 순진했다면, 우리는 입법자를 우리의 까다로운 요구로 괴롭히고 그에게 금지, 무효를 요구한다. 우리의 모든 것을 규율하려는, 심지어 이미 법전화된 것까지도 규율하려는 강박관념, 모든 것을 검토되고 교정되고 내용이 늘어난 문안들로 묶고, 모든 것을, 심지어 상업상의 기회와 실패까지도 관리하려고 하는 강박관념에서 우리는 기존의 수많은 법률들 속에서 이렇게 소리친다. 할 것이 무엇인가 있다고!”

트롤롱 씨는 섭리를 믿지만, 확실히 섭리의 사람은 아니다. 오늘날 토롤롱 씨가 논평을 통해 그 그림을 보여주는 결탁과 강탈의 관습에 식상해진 여러 정신들이 오늘날 주장하는 조합의 공식을 발견할 사람은 그가 아니다. 트롤롱 씨는 모든 것을 법조문 안에 엮기를 원하는 자들에게 화를 내고 이는 정당하다. 그리고 그 자신이 미래를 여 개 조항 안에 엮어 넣노라고 주장한다. 거기서는 가장 명민한 이성을 가진 자도 경제학의 불씨를 발견하지 못할 것이고, 철학의 그림자도 발견하지 못할 것이다. “모든 것을 규율하려는, 심지어 이미 법전화된 것조차 규율하려는 우리의 강박관념에서”라고 그는 쓴다. … 나는 법률가와 경제학자를 한꺼번에 그리는 이 모습보다 더 재미난 것을 도무지 모른다. 나폴레옹 법전이 제일 선두다! … 트롤롱 씨는 계속 말한다.

“다행히도 1837년과 1838년에 그리 요란하게 의제에 오른 모든 변화의 기획은 오늘날엔 잊혔다. 제안들의 충돌과 개혁적 의견들의 무정부 상태는 부정적 결과들을 가져왔다. 반동 세력이 주식 투기업자들에 반대해 준동하는 것과 동시에 공중의 양식은 기존의 법보다 훨씬 덜 현명한, 제국 국무원의 개념들보다 상업 관행과 훨씬 덜 조화를 이루고, 1830년 이후에 훨씬 덜 자유주의적이 된 수많은 공식적 조직화 계획들의 정당성을 인정했다! 지금 모든 것은 질서가 잡혔고, 상법전은 그 온전성, 탁월한 온전성을 보전했다. 상업이 이를 필요로 할 경우에, 그 법전에서 합명회사, 익명 회사, 주식회사 옆에 합자회사, 출자자들의 현명성에 의해서, 그리고 오직 사기 행위에 관한 형법 조항들에 의해서 자제가 되는 합자회사를 발견한다.”(트롤롱, 『민사상 그리고 상법상 회사들에 대한 주석Commentaire des sociétés civiles et de commerce』, 서문)

개혁 시도들이 무산되는 것을 보고 즐거워하고 탐구 정신의 부정적 결과들 덕분에 자신의 승리를 점치는 철학이 무슨 철학인가! 우리는 이 순간 트롤롱 씨에게 두 권 분량 책의 소재를 제공한 민사 및 상업상의 회사들에 대한 비판에서 더 깊숙이 들어갈 수 없다. 우리는 이 주제를 경제적 모순들의 이론이 완성되고 우리가 그것들의 일반적 방정식에서 조합의 프로그램을 발견할 때를 위해 남겨두겠다. 그때가 되면 우리는 옛사람들의 실무와 개념들을 감안해 이 프로그램을 발표할 것이다.

합자회사에 관해 한마디만 하자.

얼핏 보기에는 합자회사가 그 팽창 능력과 그것이 제시하는 변이의 용이성 때문에 그 모든 상업적, 공업적 관계들에서 한 민족 전체를 포괄하는 방식으로 일반화할 수 있다고 생각할 것이다. 그러나 이 회사의 구성에 대한 극히 피상적인 검토만 해도, 그 회사가 할 수 있는 종류의 출자자 수와 관련된 확장은 사회적 연계의 확장과 아무 공통점도 없다는 것을 아주 빨리 증명해 준다.

우선 합자회사는 다른 모든 상업상의 회사들처럼 반드시 유일한 사업에 국한된다. 이런 관계에서 이 회사는 자기 고유의 업종에 생소한 모든 업종들을 배제한다. 그렇지 않다면 합자회사는 그 성격이 달라진 것이다. 이는 새로운 회사 형태일 것이며, 그 정관은 특별히 이득에 대해서만이 아니라 노동의 배분과 교환의 조건들에 대해서도 규정할 것이다. 이는 바로 트롤롱 씨가 부정하는 것과 같은, 독점의 법리가 배제하는 것 같은 조합일 것이다.

합자회사를 구성하는 인원에 관해 말하자면, 이는 관리자와 주주의 두 범주로 자연스럽게 나누어진다. 관리자들은 아주 소수로서 기업의 발기인, 조직자, 주인 중에서 선임된다. 참말로 이들만이 조합원들이다. 주주들은 전권을 가지고서 회사를 관리하는 이 작은 정부에 비하면 모두가 서로 남남이고 영향력도 없고 책임도 없이 자신들의 투자액으로만 사업에 관계를 가지는 납세자로 구성된 사람들이다. 이는 웃돈의 대출자들이고, 조합원은 아니다.

이에 따르면, 왕국의 모든 산업은 합자회사들에 의해 개발될 수 있을 것이고, 각 시민은 그런다고 자신의 형편이 나아지는 일도 아닌데 자기 주식을 늘리기가 용이한 덕택에 이 합자회사들 전체 혹은 대부분에 관심을 가질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게 된다. 심지어 그의 형편이 점점 더 위태로워질 수도 있을 것이다. 왜냐하면, 다시 한 번 말하지만, 주주는 짐을 지는 짐승이고, 합자회사가 활용할 수 있는 재료이기 때문이다. 이 회사는 그 시민을 위해서 형성되는 것이 아니다. 조합이 실질적인 것이 되려면 그에 참여하는 자가 그것에 돈을 거는 자의 자격으로서가 아니라 기업가의 자격으로서 관계해야할 필요가 있고, 평의회에 발언권을 가질 필요가 있고, 그의 이름이 상호에 표현되거나 묵시적으로 담겨있을 필요가 있고, 끝으로 모든 것이 평등의 발판 위에서 그에 대해서 조정되어야할 필요가 있다. 그러나 이런 조건들은 바로 노동 조직의 조건들이고 이는 법전의 조항들에 결코 들어가 있지 않다. 그것들은 정치경제학의 궁극적 목적을 이루며, 결과적으로 결코 가상할 것이 아니라 만들어갈 것이다. 그리고 그런 것들로서 독점과는 근본적으로 양립 불가능하다.

사회주의는 그 이름의 허영에도 불구하고 지금까지 회사를 정의하는 데서 독점보다 더 행복하지 않았다. 심지어 사회주의의 모든 조직 계획이 항상 이와 관련해서 정치경제학의 표절자임을 보여주었다고 말할 수 있다. 블랑 씨는 내가 이미 경쟁과 관련해서 인용했으며, 우리가 위계적 원칙의 신봉자, 불평등의 공식적 옹호자, 공산주의를 설파하고, 자신이 알지 못하는 모순의 법칙을 부정하고, 그 위에 모든 권력을 자기 체계의 최종적 이유로 지정하는 자로 차례대로 본 사람인데, 이 블랑 씨는 우리에게 스스로 의혹을 품는 일 없이 정치경제학을 베끼는, 그리고 재산 소유자의 일상 관행의 악순환에서 항상 맴도는 사회주의자의 신기한 예를 제공해준다. 근본적으로 블랑 씨는 자본의 우세를 부인한다. 그는 심지어 자본이 생산에서 노동과 동등하다는 것을 부정한다. 이 점에서 그의 생각은 건전한 경제 이론들과 같다. 그러나 그는 자본 없이 지낼 수 없고, 자본 없이 지낼 줄도 모른다. 그는 자본을 출발점으로 하며, 국가의 합자에 호소한다. 즉 자본가들 앞에 무릎을 꿇고 독점의 주권을 인정한다. 이로부터 그의 변증법의 이상한 뒤틀림이 생겨난다. 나는 독자께서 이런 변함없는 인간성 이야기를 늘어놓는 것을 용서해 주기를 빈다. 하지만 사회주의는 정치경제학과 마찬가지로 특정한 수의 작가들로 의인화되었으니 나는 그 저자들을 인용하는 것밖에 달리 도리가 없다. 그 팔랑스테르주의자는 이렇게 말했다.

“자본은 생산에 협력할 능력으로서 다른 생산 능력들이 가지는 정당성을 가지는가, 가지지 않는가? 그것이 정당하지 않다면, 자본이 부당하게 생산에서 한몫을 주장한다면 이를 배제할 필요가 있으며, 자본이 받을 이익은 없다. 반대로 그것이 정당하다면, 자본은 이득에 대한 참여, 자본이 협력한 증대분에 대한 참여에서 합당하게 배제될 수 없을 것이다.”

그 문제가 더 이상 명확하게 제기되지 못했다. 블랑 씨는 반대로 그 문제가 아주 혼동된 방식으로 제기된 것을 발견한다. 이는 말하자면, 아주 혼동을 일으킨다는 것이고, 그는 거기서 의미를 찾기 위해 많은 고생을 한다.

우선 그는 누가 자신에게 “자본가에게 생산의 이득에서 노동자의 몫과 동등한 몫을 주는 것이 공평한지?”를 묻는다고 가정한다. 이에 대해 블랑 씨는 주저 없이 이는 부당할 것이라고 대답한다. 이 불의를 확인하기 위해 웅변적인 움직임이 이어진다.

그런데 그 팔랑스테르주의자는 자본가의 몫이 노동자의 몫과 동등해야 하는지, 그렇지 않아야 하는지를 묻지 않는다. 그는 단지 그가 몫을 차지할 것인지 만을 알고자 한다. 그리고 블랑 씨는 이에 대답하지 않았다. 블랑 씨는 계속해서 이렇게 말한다.

자본이 노동 자체처럼 생산에 필요 불가결하다고 말하기를 원하는가? 여기서 블랑 씨는 구분을 둔다. 그는 자본이 노동처럼 필요 불가결하다는 것을 인정한다. 하지만 노동만큼은 아니라는 것이다.

다시 한 번 말하지만, 그 팔랑스테르주의자는 수량에 관해서가 아니라 권리에 관해서 논란한다. 블랑 씨는 여전히 질문한다.

모든 자본가가 한량은 아니라는 뜻인가? 일하는 자본가들에게 관대한 블랑 씨는 왜 일하지 않는 자들을 그렇게 많이 생각하는지를 묻는다. 자본가의 비非인적 서비스, 그리고 노동자의 인적 서비스에 관한 장광설이 되풀이되고, 이는 섭리에 대한 호소로 끝난다.

세 번째로, 당신에게 묻는다. 당신이 자본의 참여가 생산에 필요 불가결함을 인정하므로 자본이 이득에 참여하는 것은 합당한가?

끝으로 블랑 씨는 그래도 이해를 했으며, 그가 자본에 이자를 인정한다면 이는 이행 수단으로서이고, 자본가에게 내리막길을 부드럽게 해주기 위한 것이라고 대답하기로 결심한다. 게다가 그의 기획은 사적 자본을 조합에 흡수시키는 것을 불가피하게 하는 것이어서, 더 많은 말을 한다는 것은 어리석은 짓이고 원칙을 포기해야 하는 짓일 것이다. 블랑 씨가 자신의 소재를 연구했다면, 그는 이 한마디밖에 대답할 것이 없었다. 나는 자본을 부정한다.

이처럼 블랑 씨는, 그리고 나는 그의 이름으로 모든 사회주의를 뜻하는데, 그는 첫 번째 모순에 의거해 자신의 책 제목 『노동의 조직』에서 자본이 생산에 필요 불가결하고, 따라서 자본은 조직화되어 노동처럼 이득에 참여해야 한다고 공언한 후에, 두 번째 모순에 의거해 조직의 자본을 기각하고 이를 인정하기를 거절한다. 세 번째 모순에 의거해 장식과 귀족 직함을 조롱하는 그는 시민 표창, 보수와 훈장을 조국에 크게 공헌한 문필가, 발명가, 예술가들에게 나누어준다. 그는 그들에게 등급과 존엄성에 따라 대우해준다. 이는 자본의 복권인데, 이자 그리고 순생산과 마찬가지로 실질적인 것이지만, 언제나 같은 수학적 정확성을 가지고서 하는 것은 아니다. 네 번째 모순에 의거해 블랑 씨는 평등의 원칙 위에 이 새로운 귀족 집단을 구성한다. 즉 그는 평등하고 자유로운 조합원들에게 지배인을 투표하게 하겠다고, 노동자들에게 놀고먹는 특권층을 뽑는 투표를 하게하고, 끝으로 강탈당하는 자들에게 강탈하는 자를 투표하게 하겠다고 주장한다. 다섯 번째 모순에 의거해 그는 이 평등주의적 귀족 집단을 거대한 힘을 타고난 권력의 토대 위에, 즉 독점의 다른 형태인 독재 위에 놓는다. 여섯 번째 모순에 의거해 예술과 노동에 대한 장려로 독점이 임금을 역량에 비례시키듯이 보수를 서비스에 비례시키려 시도한 후에 독점처럼 공동생활, 공동 노동과 공동 소비를 찬양하기 시작한다. 이는 그가 공동의 생산에 대해 징수한 국가적 장려금을 수단으로 삼아 독자 집단이 신경 쓰지 않는 진지하고 심각한 작가들이 공동의 무관심의 효과를 면하게 하려고 하는 것을 막지 않는다. 일곱 번째 모순에 의거해… 하지만 일곱 번째에서 멈추기로 하자. 일흔 일곱 번째에서 끝나지 않을 테니까 말이다.

블랑 씨는 인 순간 『프랑스 혁명사』를 준비하면서 정치경제학 연구에 착수했다고들 한다. 이 연구의 첫 결실은 그의 『노동의 조직』에 관한 팸플릿을 철회하게 하는 것이고, 이어서 권위와 정부에 관한 그의 모든 관념을 개혁하는 것이 될 것이다. 이를 대가로 블랑 씨가 쓴 『프랑스 혁명사』는 정말로 유익하고 독창적인 저작이 될 것이다.

모든 사회주의 종파는 예외 없이 동일한 편견에 사로잡혀 있다. 모두가 무의식적으로 경제적 모순에 영감을 받아 자본의 필요성 앞에서 자신들의 무능을 실토하게 된다. 모든 종파가 자신들의 관념을 실현하기 위해 권력과 돈을 차지하기를 기다린다. 조합에 관련한 사회주의의 유토피아들은 우리가 시작하면서 말했던 것의 진리성을 어느 때보다 더 부각시킨다. 사회주의에는 정치경제학에는 없는 것이 아무것도 없다. 그리고 이 끊임없는 표절은 둘 다의 돌이킬 수 없는 유죄이다. 어디서도 경제적 범주들의 발생으로부터 큰 굉음을 일으키며 도드라지는 이 모체가 되는 관념이 나타나는 것을 보지 못한다. 조합의 우월한 공식이 개인들의 계산의 대상인 자본에 전혀 관심을 주지 않고 오직 생산의 균형, 교환의 조건들, 원가의 점진적 감축 등 부의 진보의 유일한 원천인 것에만 적용된다는 것이다. 산업과 산업, 노동자와 노동자, 지방과 지방, 인민과 인민의 관계를 정하는 대신에 사회주의자들은 마치 독점의 새로운 집을 짓는 것이 중요하다는 듯이 언제나 노동자들의 연대의 문제만 생각하면서 자본을 갖추는 데만 신경을 쓴다. 세상, 인류, 자본, 사업계의 실무는 존재한다. 그 철학을 추구하는 것, 그것들을 조직하는 것 이상 할 일이 없다. 그리고 사회주의자들은 자본을 추구한다! 언제나 현실 바깥에서. 현실이 그들에게 결여된다는 것에 놀랄 것이 무엇인가?

이처럼 블랑 씨는 국가의 합자와 국영 작업장의 창설을 요구한다. 이처럼 푸리에는 600만을 요구했으며, 그의 학파는 오늘날에도 여전히 이 금액을 모으는 데 전념한다. 이처럼 공산주의자들은 자신들에게 권위와 금고를 가져다주는 혁명에 희망을 두며, 무익한 응모자들을 기다리느라 진이 빠진다. 자본과 권력은 사회에서는 부차적 기관들로서 언제나 사회주의가 숭배하는 신들이다. 자본과 권력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사회주의가 이것들을 발명할 것이다. 자본과 권력에 대한 열중으로 사회주의는 자기 자신의 항거의 의미를 완전히 무시했다. 더 나아가 경제적 일상 관행에 그렇게 참여하면서 항거의 권리까지 빼앗기는 것을 알아채지 못했다. 사회주의는 적대의 사회를 고발하며, 마찬가지의 적대에 의거해 그 개혁을 추구한다. 사회주의는 노동자들의 빈곤이 노동과 자본의 어색한 대립에서와 마찬가지로 자본들 서로 간의 경쟁에서 오지 않는다는 듯이 가난한 노동자들을 위한 자본을 요구한다. 마치 그 문제가 오늘날은 자본의 창조 이전에 그랬던 것과 똑같지는 않다는 듯이, 즉 아직도 여전히 균형의 문제는 아니라는 듯이, 끝으로―끊임없이 이 말을 다시 하자. 물리도록 다시 말하자―마치 이제부터는 문명이 내놓은 모든 원리들의 종합 말고 다른 것들이 중요하다는 듯이, 그리고 이 종합, 세상을 가져온 관념이 알려졌다면, 이를 명백히 하기 위해 자본과 국가의 개입이 필요했을 것이라는 듯이 말이다.

사회주의는 웅변술과 유토피아로 넘어가기 위해 비판을 포기하면서, 정치적이고 종교적인 음모에 끼어들면서 자신의 사명을 배반했고 세기의 성격을 무시했다. 1830년 혁명은 우리의 기를 꺾어 놓았고, 사회주의는 우리를 나약하게 만든다. 사회주의가 그 모순들을 되씹기만 하는 정치경제학처럼, 사회주의는 지성들의 운동을 만족시키기에 무능력하다. 사회주의가 사로잡는 자들 중에는 파괴해야할 새로운 편견 이상이 없고, 사회주의를 선전하는 자들 중에는 정체를 폭로해야할 협잡 이상의 것이 없다. 이는 사회주의가 거의 언제나 선의를 가지는 만큼 더욱더 위험한 것이다.

제7장 제5기공안 기구 혹은 조세

인류는 그 원리들에 대한 입장에서 마치 하나의 주권적 질서에 복종하는 듯하면서도 결코 후퇴하지 않는다. 깊은 골짜기에서 산꼭대기까지 비스듬한 굴곡을 따라 올라가는 여행자도 비슷하다. 인류는 지그재그로 길을 용감하게 따라가며, 확실한 발걸음으로 후회도 중단도 없이 목적지를 향해 행진한다. 독점의 모퉁이에 도달해서는 사회적 화신은 우울한 시선으로 뒤를 돌아본다. 깊은 성찰 중에 이렇게 독백한다.

“독점은 가난한 용병에게서 모든 것, 빵, 옷, 가정, 교육, 자유 그리고 안전을 빼앗았다. 나는 독점자가 납세하게 하겠다. 그런 대가로 나는 독점자가 자신의 특권을 보전하게 해주겠다.”

“토지와 광산, 숲과 하천, 이는 사람의 최초의 영지인데 프롤레타리아에게는 금지되어 있다. 나는 그것들의 개발에 개입할 것이고, 산물들 중에 내 몫을 취할 것이며, 토지 독점은 존중될 것이다.”

“산업은 봉건 상태에 빠졌다. 그러나 봉건 군주인 자는 나다. 영주들이 내게 공물을 바칠 것이며, 그들은 자신들의 자본의 이득을 보전할 것이다.”

“상업은 소비자에게서 폭리의 이윤을 징수한다. 나는 상업로에 통행료 징수소를 둘 것이고, 고지서에 날인을 하며, 그는 행선지를 증명하고 지나갈 것이다.”

“자본은 지성으로 노동을 이겼다. 나는 학교들을 열 것이다. 그러면 노동자는 스스로 똑똑해져서 자본가가 될 수 있을 것이다.”

“산물들에 유통이 결여되고, 사회생활은 억제된다. 나는 도로, 다리, 운하, 시장, 극장, 사원을 건설할 것인데, 이는 작업이면서, 부이면서, 판로일 것이다.”

“일꾼이 배고픔을 슬퍼하는 동안 부자는 풍요롭게 산다. 나는 빵, 포도주, 고기, 소금과 꿀에, 필수품에, 그리고 고가품에 세금을 붙일 것이며, 이는 가난한 이들을 위한 내 온정이 될 것이다.”

“그리고 나는 하천, 숲, 들녘, 광산, 도로에 경비를 임명할 것이다. 나는 세금 징수원과 어린이들을 위한 선생을 파견할 것이다. 나는 반항자들에 맞서 군대를 둘 것이고, 이들을 심판하도록 법원을 둘 것이고, 이들을 처벌할 감옥을 둘 것이고, 이들을 저주할 사제들을 둘 것이다. 이 모든 일자리는 프롤레타리아트에게 제공될 것이며, 독점을 하는 사람들에 의해 비용이 지불될 것이다.”

“이러한 것이 나의 확실하고 실효성 있는 의사이다.”

우리는 사회가 더 잘 생각할 수도 없고, 더 나쁘게 행동할 수도 없다는 것을 증명할 필요가 있다. 이는 내가 바라건대 사회 문제를 새로운 빛으로 밝혀줄 검토의 목적이다.

일반 공안 기구의 모든 조치, 행정과 사업의 모든 규칙은 모든 조세법과 마찬가지로 근본에서 귀족층과 프롤레타리아트 사이에 언제나 유린되고 언제나 재개되는 고대의 거래의 무수한 조항들 중 하나일 뿐이다. 여러 당파와 그들의 대표자들이 이에 관해 아무것도 몰랐다는 것, 심지어 그 당파들이 자신들의 정치 체제를 전혀 다른 관점에서 보았다는 것은 우리에게 별로 중요하지 않다. 우리가 그의 행위의 의미를 묻는 것은 입법자이건 군주이건 그 사람에게 묻는 것이 아니다. 그 행위 자체에 묻는다.

. 조세의 종합적 관념이 관념의 출발점과 발달

뒤에 이어질 내용을 더 명료히 하기 위해 나는 우리가 지금까지 따라온 방법을 약간 뒤집어서 조세의 상급 이론을 해설할 것이다. 그 다음으로 그것이 생겨난 이야기를 할 것이다. 끝으로 나는 그 모순과 그 결과들을 해명할 것이다. 조세의 종합적 관념은 그 기원에서의 구상처럼 지극히 광대한 발달에 재료를 제공해줄 것이다. 나는 그 증거들을 간추려 보여주면서 여러 명제들에 대한 단순한 진술로 그칠 것이다.

조세는 그 본질에서, 그리고 그 긍정적인 방향에서 아담 스미스가 비생산적이라는 이름으로 지칭한 종류의 공무원들의 분배 형태다. 물론 그는 누구나 그런 것만큼 사회 내에서 그들의 노동의 효용과 심지어 필요성에 대해서도 동의하기는 했다. 비생산적이라는 이런 수식어로 아담 스미스는 그 천재성을 가지고서 모든 것을 어렴풋이 느꼈고, 우리에게 모든 것을 하도록 남겨 주었는데, 그는 이 수식어로 이 노동자들의 산물이 부정적임을 뜻했다. 이는 무無라는 것과는 전혀 다른 것이다. 그리고 결과적으로 분배는 이들에게 교환과는 다른 양식을 따른다는 것을 뜻했다.

실제로 집단적 노동의 네 가지 거대 분야인 채취, 공업, 상업, 농업에서 분배의 관점에서 일어나는 일을 생각해보자. 각 생산자는 시장에 실질적인 산물을 가져오며, 그 수량은 다른 서비스나 상품들에 비해서든, 척도재에 비해서든 측정될 수 있고, 그 품질은 평가될 수 있고, 그 가격은 흥정될 수 있고, 끝으로 그 가치는 할인될 수 있다. 그러므로 이 모든 산업에 분배는 가치들의 비례성의 법칙에 따른 산물들의 상호 교환 말고 다른 것이 아니다.

공무원이라고 하는 자들에게는 비슷한 일이 생기지 않는다. 이들은 생계의 권리를 실질적인 쓸모가 있는 생산이 아니라 그들이 잘못도 없이 붙들려 있는 비생산성 자체를 통해서 취득한다. 그들에게 비례성의 법칙은 거꾸로다. 사회적 부가 네 가지 거대 산업 범주에 의해 제공되는 실제적 산물들의 수량, 다양성과 비율과 정비례로 형성되고 증가하는 반면, 바로 이 부의 발달, 사회 질서의 완성은 반대로 공안 기구의 인원에 관해서 점진적이고 무한한 감축을 가정한다. 그러므로 국가 공무원들은 정말로 비생산적이다. 이런 점에서 장 바티스트 세는 스미스처럼 생각했다. 그리고 그가 이 주제에 관해 자기 스승의 생각을 교정하려고 쓴 모든 것, 사람들이 그의 영광스러운 명목들 속에 넣는 미숙한 짓을 한 이 글들은 쉽게 알 수 있듯이 오직 오해에서 나온다. 한마디로, 정부 고용자들의 임금은 사회에서는 적자를 이룬다. 그것은 손실의 계정에 놓여야 하며, 산업 조직의 목표는 이 손실을 끊임없이 낮추는 것이어야 한다. 아담 스미스가 붙인 수식어가 아니면 다른 어떤 수식어를 그 다음에 권력층의 사람들에게 붙여 주겠는가?

그러니 이야말로 실질적 산물은 내지 않으면서 보통의 형태로는 결코 청산될 수 없는 서비스 범주, 교환 법칙 아래 들어가지 않고, 개별 투기, 경쟁, 합자의 대상이 될 수 없고, 어떤 종류의 상업의 대상도 될 수 없는 서비스 범주, 근본에서 모든 사람들에 의해 무료로 충족된다고 여겨지지만 노동 분업의 법칙에 의거해 그 일에 전념하고서 그 결과로 돈을 지불받는 소수의 전문적인 사람들에게 맡겨지는 서비스의 범주이다. 역사는 이런 일반적 자료를 확인해준다. 인간 정신은 각각의 문제에 대해 모든 해법을 시도하면서 공직도 교환에 종속시키려는 시도를 했다. 오랫동안 프랑스에서 사법관들은 공증인 등처럼 소송세를 받고서만 살았다. 그러나 비생산 계층에 대해 활용된 이런 분배 양식은 너무 비용이 많이 들고 너무 불편을 감수해야 한다는 것이 경험을 통해 입증되었고, 그래서 이를 포기해야 했다.

비생산적 서비스들의 조직은 여러 종류의 일반적 행복에 기여한다. 우선은 생산자들을 모두가 참여해야할, 따라서 모두가 어느 정도는 그 노예인 공적 업무에 대한 배려에서 해방시킨다. 둘째로는 사회 내에서 인위적인 중앙 집중, 산업인들의 미래적 연대의 형상과 전조를 창조한다. 끝으로 힘의 균형과 규율에 대한 최초의 시도를 한다.

이처럼 우리는 장 바티스트 세와 함께 사법관들과 그 밖의 공공 당국 관리들의 쓸모를 인정한다. 그러나 우리는 이 쓸모가 아주 부정적이라고 주장하며, 따라서 그 장본인들에게 아담 스미스가 붙여준 비생산적이라는 명목을 붙여야 한다고 주장하는데, 이는 어떤 비호감 때문이 아니라 실질적으로 그들이 생산자 범주로 분류될 수 없기 때문이다. 세 학파의 경제학자 가르니에(M. J. Garnier)가 아주 잘 말한다. “조세는 사회의 필요 수준까지 가능한 한 줄이는 것을 추구할 필요가 있는 몰수다.” 내가 인용한 작가가 자기 이야기의 의미를 성찰했다면, 그는 자신이 사용한 몰수라는 말이 비생산과 동의어라는 것, 결과적으로 조세를 거두어서 덕을 보는 이들은 정말로 비생산적이라는 것을 알았을 것이다.

나는 이런 정의를 강조한다. 누가 여전히 그 말을 놓고 논란을 벌이더라도 모든 사람들이 그것에 동의하는 만큼 내게는 논란의 여지가 더욱 없어 보인다. 그것은 세계에서 달성되어야할 가장 위대한 혁명의 씨앗을 품고 있기 때문이다. 나는 그 혁명이 비생산적 기능들을 생산적 기능들에 종속시키는 것, 언제나 요구되지만 결코 달성되지 않은 것으로서 한마디로 권위를 시민들에게 실질적으로 종속시키는 것이라고 말하고 싶다.

사회 내에서 질서가 우선은 뒤집힌 것처럼 드러나는 것, 위에 있어야할 것이 아래에 있는 것, 부각되어야할 것이 공허한 것으로 재단되는 듯이 보이는 것, 빛을 보아야할 것이 그늘로 내팽개쳐지는 것은 경제적 모순들의 발달의 결과이다. 이처럼 본질상, 자본처럼 노동의 보조물이고 부하인 권력이 사회의 적대 관계에 의해 생산적 기능들의 첩자, 재판관, 참주가 된다. 그 원래의 비천함이 복종을 명하는 권력이 군주이고 주권자이다.

어느 시대나 노동하는 계급들은 공직 카스트에 맞서 이 적대 관계에 대한 해법을 추구해 왔다. 이에 대해 경제학만이 열쇠를 제공할 수 있다. 노동의 권력에 맞선 이 투쟁의 결과로 나오는 진자 운동, 즉 정치적 선동은 때로는 중앙의 힘의 침체를 불러와서 사회의 생존까지 위태롭게 하기도 하며, 때로는 이 힘 자체를 과도하게 과장해 독재를 낳기도 한다. 다음으로 명령의 특권들, 그것이 야심가와 고집쟁이에게 주는 무한한 기쁨은 비생산적 직업을 일반적 선망의 대상으로 만들어서 새로운 불화 요인이 사회를 관통해, 이미 한편으로는 자본가들과 임금 노동자들로, 다른 한편으로는 생산자들과 비생산적인 자들로 갈라진 사회가 새로이 권력에 대해 왕당파와 민주주의자들로 갈라진다. 왕권과 공화국의 갈등은 우리 이야기의 가장 경이롭고 가장 재미있는 소재를 제공해줄 것이다. 이 저서의 한계는 우리가 그렇게 긴 일탈을 하게 허락해주지 않는다. 그리고 인간의 일탈 행동의 광대한 망의 이 새로운 부문을 지적한 후에, 우리는 조세를 이야기하면서 오로지 경제 문제로 논의를 한정할 것이다.

이러한 것이 그러므로 가장 간략하게 설명한 조세의 종합적 이론, 즉 내가 이런 친숙한 비유를 감히 해도 좋다면, 인류의 마차의 다섯 번째 바퀴인 것의 이론이다. 이는 아주 큰 소음을 내며, 사람들이 정부가 하는 스타일로 국가라고 부르는 바퀴다. 국가, 공안 기구 혹은 그 존재 수단인 조세, 이는 내가 거듭 말하지만, 정치경제학에서는 비생산자들이라 지칭하는 계급, 한마디로 사회적 하인 신분의 공식적 이름이다.

그러나 공공 이성은 이런 단순 관념에 한껏 도약해 닿지 못한다. 그래서 이 관념은 여러 세기 동안 초월적 개념의 상태에 머물러 있어야 한다. 문명이 그러한 정상을 넘어가려면, 무서운 폭풍우와 수없는 혁명을 통과해 갈 필요가 있으며, 그 각각에서 피를 뒤집어쓰면서 문명이 자신의 힘을 새롭게 한다고들 말할 것이다. 그리고 끝으로 자본으로 대표되는 생산이 완전히 비생산적인 기관인 국가를 종속시킬 시점에 있는 것으로 보이는 때에, 사회가 분개해 들고일어난다. 노동은 곧 자신이 자유로워지는 것에 북받쳐 운다. 민주주의는 권력의 하강에 전율한다. 정의는 추문을 규탄하며, 도망치는 신들의 모든 신탁은 극에 이른 악행이 거룩한 곳에 있다고, 시대들의 끝이 왔다고 공포감을 가지고 탄식한다. 그런 만큼 인류는 자신이 찾는 것을 결코 원하지 않는다는 것, 민족들 사이에 공황을 일으키지 않고는 조금의 진보도 실현될 수 없다는 것이 참이다!

그러니 이 진화에서 사회의 출발점은 무엇이며, 사회는 어떤 우회로를 이용해 정치 개혁에, 지출 절약에, 조세 배분의 평등에, 권력을 산업에 종속시키는 데 도달하는가? 이는 우리가 그 전개는 뒤에 이어질 것으로 남겨두고 약간의 말로 이야기하려고 하는 것이다.

조세의 원 관념은 대속代贖의 관념이다.

모세의 법에 따르면 각 사람의 장자長子가 야훼에게 속하는 것으로 여겨져서 희생 제물에 의해 대속되어야 하는 것처럼, 조세는 어디서나 소유주가 매년 주권자로부터 취하는 것으로 여겨지는 개간의 이득을 대속하는 수단이 되는 십일조나 왕의 특권의 형태로 제시된다. 이 조세의 이론은 누가 사회계약이라고 부르는 것의 구체적 조항들 중 하나일 뿐이다.

고대인들과 현대인들은 모두 다소 명시적으로 여러 사회의 법적 상태를 강자에 맞선 약자의 반작용으로 제시하는 데 동의한다. 이 관념은 플라톤의 모든 저작, 특히 『고르기아스』에서 주를 이루는데, 거기서 그는 논리보다 미묘한 말을 가지고 폭력에 맞선 법의 대의, 즉 귀족과 전사의 자유의지에 맞선 입법적 자유의지의 대의를 주장한다. 옳음의 증거가 양측에 동등한 이런 위험한 논쟁에서 플라톤은 고대 전체의 감정을 표현했을 뿐이다. 그보다 전에 모세는 땅을 분배하고, 세습 재산은 매각 불가능하다고 선언하고, 50년마다 일체의 담보물의 상환 없는 총체적 청산을 명해 힘의 침입에 맞서 방책을 세웠다. 성서 전체는 정의에 대한 찬가, 즉 히브리 양식에 따르면, 자선, 약자에 대한 강자의 관용, 힘의 특권의 자발적 포기에 대한 찬가다. 솔론은 채무의 일반적 폐지로 자신의 입법적 사명을 시작하고, 권리들과 유보 사항들, 즉 그 회귀를 막아줄 장벽들을 만들면서도 덜 반동적이지 않았다. 리쿠르고스는 더 멀리 나아갔다. 그는 개인 소유를 금했고, 균형을 더 잘 보전하려고 자유를 없애면서 사람을 국가에 흡수시키려 노력했다. 홉스는 아주 커다란 정당성을 가지고 전쟁 상태의 입법을 도출하면서 다른 경로로는 하나의 예외적인 독점을 둔 평등을 구성하기에 이르렀다. 그의 책은 대단히 비난을 받지만 이 유명한 반대 명제의 전개일 뿐이다. 1830년의 헌장은 1789년에 귀족에 맞선 평민에 의해 행해진 봉기를 성별하고, 현행 사회 체제의 진정한 밑바탕을 이루는 힘과 재능의 실질적 불평등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의 법 앞에서의 추상적 평등을 명령하면서 여전히 부자에 반대해 가난한 자를 편들고, 큰 자에 반대해 작은 자를 편드는 사회의 항거일 뿐이다. 판매, 구매, 임대차, 소유권, 대여, 담보, 시효, 상속, 기부, 증언, 아내들의 지참금, 미성년, 후견권 등등에 대한 인류의 모든 법은 힘을 가진 자들의 자유의지에 맞서 법적 자유의지에 의해 세워진 진정한 장벽이다. 계약의 존중, 말에 대한 신실성, 맹세의 종교는 유명한 리산드로스가 탁월하게 말한 것처럼 허구이고, 해골이다. 이것들로 사회는 강자들을 속이고, 강자들에게 재갈을 물린다.

조세는 아담 스미스가 공안 기구police라는 총체적 이름으로 지칭한, 그리고 내가 말했듯이 그 원 개념은 약자의 강자에 대한 반작용에 불과한 예방적, 강제적, 억압적, 보복적인 제도들의 이 거대한 가족에 속한다. 이는 우리가 오직 경제적 증거에 집중하기 위해 제쳐놓을 넘치는 역사적 증언들과는 상관없이 조세들에 대해 행해진 자연적 구분에서 결과로 생겨나는 것이다.

모든 조세는 거대한 두 범주로 나누어진다. ① 분배 혹은 특권 조세. 이는 가장 오래전에 확립된 것이다. ② 소비세 혹은 정률세. 그 경향은 앞의 범주를 흡수하면서 모든 이들 간에 공적 부담을 평등화하는 것이다.

우리에게서 토지세, 문과 창문세, 인적 부담금, 주택 가치세, 임대 수입세, 특허와 면허, 취득세, 백일조 취득세, 현물 공조 및 증서를 포함하는 첫 번째 종류의 조세는 주권자가 양허하거나 용인하는 모든 독점들에 대해 챙기는 사용료이다. 이는 우리가 말했듯이 가난한 자의 보상금이고, 재산권에 주어지는 통행 허가이다. 이는 모든 고대 왕정 국가들에서 조세의 형태이고 정신이었다. 봉건제는 그 아름다운 이상이었다. 그 체제에서 조세는 보유자가 지주나 보편적 출자자인 왕에게 지불하는 공조貢租에 불과하다.

나중에 공법이 발달하며 왕실, 주권의 가부장적 형태인 조세가 민주적 정신에 젖어들기 시작하면서, 조세는 모든 납세자가 공적인 일에 내야하는 납부금이 되고, 군주의 손에 들어가는 대신 국가의 금고에 들어간다. 이러한 진화에서 조세의 원리는 변함없이 그대로이다. 이는 아직 변형이 되는 제도가 아니다. 상징적 주권자를 계승하는 것은 실질적 주권자이다. 조세가 군주의 돈으로 들어가든 공동의 채무를 갚는 데 소용되든, 이는 언제나 사회가 특권에 맞서 요구하는 것일 뿐이다. 그것 없이는 조세가 왜 재산에 비례해 책정되는 지를 말하는 것이 불가능하다.

“모든 사람이 공공 지출에 기여한다면, 그보다 좋은 것은 없다. 하지만 부자는 왜 가난한 자보다 더 많이 납부할까? 그가 더 많이 소유하니 그것이 공정하다고들 한다. 나는 이런 정의를 이해하지 못하겠다고 실토한다. 둘 중 하나이다. 비례세가 힘센 납부자들을 편들어 특권을 보장하든지 아니면 비례세 자체가 악이다. 왜냐하면, 1793년 선언이 말하듯이 재산권이 자연권에 속한다면, 이 권리에 힘입어 내게 속하는 모든 것은 내 인신만큼 신성하기 때문이다. 이는 내 피, 내 생명, 나 자신이다. 누구든지 거기에 손을 대는 자는 내 눈의 눈동자를 범하는 것이다. 내 10만 프랑의 소득은 여공의 일당 75상팀처럼 불가침이고, 내 아파트는 그의 다락방처럼 불가침이다. 세금은 신체의 힘, 키, 재능에 비례해 배분되지 않는다. 그것은 더구나 재산권에 비례해 배분될 수 없다.”(『소유란 무엇인가』, ch.Ⅱ)

이런 관찰 사항들은 비례적 배분의 원리에 반대하려는 목표를 위해 가지는 원칙이 그 적용 시기를 가졌던 만큼 더욱 정당하다. 비례세는 역사상 유일 충성 서약hommage lige보다 훨씬 나중이다. 이는 실질적 납세 없는, 비공식적인 단순한 보여주기로 이루어진 서약이다.

두 번째 종류의 조세는 일반적으로 사람들이 일종의 반어법으로 간접 납부금이라는 이름으로 지칭하는 음료, 소금, 담배, 관세, 한마디로 과세되어야할 것, 산물에만 직접 부과되는 모든 조세를 포함한다. 그 이름이 진정 이치에 맞지 않는 이 조세의 원리는 논란의 여지없이 앞의 종류보다 이론상 더 근거가 훌륭하고 더 공정한 경향을 띤다. 또한 언제나 자신에게 이로운 것에 관해, 그리고 자신에게 해를 주는 것에 관해 속아 넘어가는 대중의 견해에도 불구하고 나는 주저 없이 이 조세가 배분과 징수를 제외하고는 유일하게 정상이라고 말한다. 여기서 나는 배분과 징수에는 전혀 관심을 두지 않는다.

왜냐하면, 방금 설명한 것처럼 조세의 참된 본성이 교환의 관습적 형태에서 벗어나는 일정한 용역들에 대해 임금이라는 특정 양식에 따라 값을 치르는 것이 맞는다면, 결과적으로 모든 생산자는 인적인 사용에 관해서는 이 용역들을 똑같이 누리므로 같은 몫으로 정산에 기여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각자에게 할당되는 몫은 그의 교환 가능한 산물의 일부분, 혹은 다르게 말하면, 그가 소비에 넘긴 가치들에서의 유보분일 것이다. 그러나 독점 체제에서, 그리고 토지세에서는 세무 당국은 산물이 교환에 들어가기 전, 심지어 그것이 생산되기도 전에 산물에 징수한다. 이는 생산 비용에 조세 총액을 넣고, 따라서 소비자가 조세를 내게 하고 독점은 해방해 주는 효과를 가지는 상황이다.

분배적 조세와 정률세의 의미가 어떠하든 한 가지는 긍정적인 것으로 남으며, 특히 이를 아는 것이 우리에게 중요하다. 조세의 비례성에 의거한 주권자의 의도는, 시민들이 옛 봉건적 원칙에 따라 피과세자들의 재산이 아닌 수에 비례해서 납세액을 계산하는 관념을 내포하는 인두세가 아니라, 자본이 자본가들보다 상위의 권위에 속한다는 것을 가정하는 것으로서 자본에 비례해서 공공 부담에 대해 과세한다는 것이었다. 모든 사람이 자생적으로, 그리고 만장일치의 동의로 그러한 배분을 공정하다고 본다. 그러므로 모든 사람이 자생적으로, 그리고 만장일치의 동의로 조세가 사회의 되찾기, 독점에 대한 일종의 대속代贖이라고 판단한다. 이는 영국에서 특히 두드러진다. 그곳에서는 특별법에 따라 지주들과 제조업자들은 수입에 비례해서 2억의 조세를 납부하며 이를 구빈세라고 부른다.

간단히 말해서, 조세의 실천적이고 실토된 목표는 인민의 이익이 되도록 부자들에게 자본에 비례한 회수를 행하는 것이다.

그런데 분석과 사실은 다음을 입증해준다.

분배적 조세, 독점의 조세는 소유하는 자들이 납부하는 대신 거의 전부 소유하지 않는 자들이 납부한다는 것.

정률세는 생산자를 소비자로부터 분리시켜 오직 소비자에게만 징세되는데, 이는 재산들이 절대로 동등하다면, 자본가에게 그가 납부해야할 몫밖에 남겨주지 않는다는 것.

끝으로 군대, 법원, 공안 기구, 학교, 병원, 양육원, 대피소와 교도소, 공직 일자리, 종교 자체, 사회가 프롤레타리아의 수호, 해방과 위안을 위해 만드는 모든 것은 우선은 프롤레타리아에 의해 지불되고 유지되며, 그 다음으로는 프롤레타리아에 맞서 운영되거나 프롤레타리아에게 상실된다. 그래서 프롤레타리아트는 우선은 자신을 집어삼키는 카스트, 자본가들의 카스트만을 위해 일했지만, 여전히 자신을 채찍질하는 카스트, 비생산자들의 카스트를 위해 일해야 한다.

이 사실은 이제부터는 아주 잘 알려지고, 나는 이 점을 정당하게 평가해야만 하는데, 경제학자들은 그 사실들을 아주 명백한 증거로 표명해서 나는 그들의 증명을 근본적으로 재론하는 것을 삼갈 것이다. 내가 밝히고자 하는 것, 그리고 경제학자들이 충분히 이해했다고 내게 보이지 않는 것은, 사회경제의 이 새로운 국면에 의해 노동자에게 만들어진 조건이 어떠한 개선도 될 수 없다는 것, 산업 조직, 그리고 따라서 정치 개혁이 재산의 평등을 가져올 경우를 제외한다면 공안 기구를 탄생하게 한 자선의 사상처럼 악은 공안 기구들에 내재한다는 것, 끝으로 국가는 귀족정이든 신정이든 왕정이든 공화정이든 어떤 형태를 띠든, 평등한 이들의 사회에 복종하고 이에 종속된 기구가 되지 않는 동안은 인민에게 불가피한 지옥, 내가 거의 합당한 저주라고 말한 것이리라는 것이다.

. 조세의 이율배반

나는 때로는 현 상태의 추종자들이 현재에 관해 우리가 충분한 자유를 누리고 있으며, 심지어는 사물의 질서에 반대하는 웅변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우리 제도들에 못 미친다고 주장하는 것을 듣는다. 나는 적어도 조세에 관해서는 완전히 이 낙관론자들과 견해를 같이한다.

우리가 보아 온 이론에 따르면, 조세는 독점에 대한 사회의 반작용이다. 이 점에서 여러 견해들이 일치한다. 인민과 입법자들, 경제학자들, 기자들과 소극笑劇 작가들이 각자의 언어로 사회사상을 드러내면서 서로 앞 다투어 조세는 부자에게 징세되어야 하고, 잉여와 사치품에 부과되어야 하고, 제일차 필수품은 면세해야 한다고 발표한다. 한마디로 조세를 특권자들을 위한 일종의 특권으로 만든 것이다. 이는 사실상 어떤 경우에도, 그것이 드러나는 어떤 형태로도 아무 가치가 없는 특권의 정당성을 인정하는 것이니 나쁜 생각이다. 인민은 이런 이기주의적 비일관성으로 고초를 겪어야 했다. 섭리는 자신의 사명을 게을리 하지 않았다.

그러므로 조세가 하나의 권리 청구로 구상된 순간부터, 그것은 자본에 징세되든, 더 특수하게 소득에 징세되든 능력에 비례해 설정되어야 했다. 그런데 나는 조세의 비례적 배분이 모든 재산들이 동등한 나라에서 세원과 징수에서는 차이가 나겠지만 채택할 바로 그런 배분이라서 세정 당국은 우리 사회에서 더 자유주의적인 기관으로 있다는 것, 이 점에서 우리의 도덕관념은 실질적으로 우리의 제도에 뒤쳐진다는 것을 관찰하게 할 것이다. 그러나 악인들과 함께 최선의 것들은 혐오스럽지 않을 수 없어서 우리는 인민이 결코 그 수준에 있지 않다는 바로 그 이유 때문에 평등주의적 조세가 인민을 짓누른다는 것을 보여줄 것이다.

나는 프랑스의 총소득을 4인 가족 당 1000프랑으로 가정한다. 이는 슈발리에 씨의 수치보다 약간 더 된다. 그는 일당이 63상팀, 즉 가구당 919프랑 80상팀이라고 보았다. 조세는 오늘날 10억 이상, 즉 총소득의 대략 8분의 1이어서 연 1000프랑을 버는 각 가구에 125프랑이 부과된다.

이에 따르면, 2000프랑의 소득자는 250프랑을 지불한다. 3000프랑의 소득자는 375프랑을 지불한다. 4000프랑의 소득자는 500프랑을 지불한다. 그 비율은 엄격하고 수학적으로 나무랄 데 없다. 세정 당국은 산술의 이름으로 아무것도 잃지 않는다고 확신한다.

그러나 납세자 쪽에서는 사정은 완전히 다르다. 입법자의 생각으로는 재산에 비례해야 했던 조세가 반대로 빈곤한 사람으로 갈수록 누진적이어서, 시민은 가난할수록 많이 낸다. 이는 내가 약간의 수치들로 이해시키려 노력하는 것이다.

비례세라면 세무서에서 소득별로 다음과 같이 납부해야 한다.

소득

|

1000

|

2000

|

3000

|

4000

|

5000

|

6000

|

납세액

(프랑)

|

125

|

250

|

375

|

500

|

625

|

750

|

그러므로 조세는 소득에 비례하여 이 계열에 따라 상승하는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각 소득 총액이 365 단위로 구성되고 그 각각은 납세자의 일당 소득을 나타낸다는 것을 반추한다면, 조세가 비례적이라고 더 이상 보지 않을 것이다. 그것은 동등하다고 볼 것이다. 실제로 1000프랑의 소득에 대해 국가가 조세로 125프랑을 징수하면, 이는 부과당한 가구에 45일의 생계를 빼앗는 것과 마찬가지다. 마찬가지로 납세액 250, 375, 500, 625, 750프랑은 소득액 2000, 3000, 4000, 5000, 6000프랑에 대응해 여전히 각 사람의 수익자에게는 45일치 봉급이 될 뿐이다.

나는 지금 이 조세의 평등이 괴상한 불평등이라고, 일당 소득이 더 크다고 해서 그것을 기초로 삼는 납세액이 더 크다고 상상하는 것은 이상한 환상이라고 말한다. 관점을 인적 소득에서 집단적 소득으로 옮겨보자.

독점의 효과에 의해 사회적 부가 노동자 계급을 방기하고 자본가 계급으로 옮겨 가서, 조세의 목표는 각 특권자에게 비례적 환수를 실행해 이 이동을 완화하고 침해에 맞서 반응하는 것이다. 하지만 무엇에 비례한다는 것인가? 의문의 여지없이 특권자가 너무 많이 받은 것에 비례한다는 것이고, 그의 소득이 대표하는 사회적 자본의 몫에 비례한다는 말이 아니다. 그런데 세정 당국이 8분의 1을, 이 8분의 1이 존재하는 곳에서 취하는 대신에 바로 그것을 되돌려 주어야할 자들에게 요구하는 경우에 조세의 목표는 놓쳐지고, 법은 웃음거리로 돌변한다. 마지막 조작은 이를 손에 잡히게 할 것이다.

프랑스의 1인당 소득을 일당 68상팀으로 가정하면, 임금 명목으로든 자기 자본의 소득으로서든 연 1000프랑을 받는 가장은 국민 소득의 네 몫을 받는 것이다. 2000프랑을 받는 자는 여덟 몫을 받는 것이다. 4000프랑을 받는 자는 열여섯 몫을 받는 것이다. 이런 식이다. 이에 따라서 1000프랑의 소득에 대해 125프랑을 세정 당국에 납부하는 일꾼은 공공질서에 반 사람 몫, 즉 그의 소득과 가계의 생계수단의 8분의 1을 내놓는 것이다. 반면에, 6000프랑 소득에 대해 750프랑만 납부하는 금리 생활자는 집단적 소득에서 17사람 몫의 이득을 실현하는 것이다. 혹은 다르게 말하면 조세를 내고 425퍼센트를 버는 것이다.

같은 진실을 다른 형태로 재현해보자.

프랑스에는 대략 20만 명의 선거권자가 있다. 나는 이 20만 명 선거권자가 납부한 세액이 얼마인지 모르지만 사람당 300프랑의 평균을 가정해, 20만 명 선거권자에 대해 6000만 프랑이라고 가정하고, 이에 우리가 그들의 간접 납세의 몫으로 4분의 1을 더할 때, 즉 7500만 프랑 혹은 (각 선거권자의 가구가 5인가구라고 가정할 때) 인당 75프랑이 유권자 계급이 국가에 납부하는 액수라고 할 때 진실에서 멀리 떨어진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예산은 1845년 『경제 연감Annuaire économique』에 따르면 11억600만으로, 10억3100만이 남는다. 이는 선거권이 없는 시민 각 사람에 대해 31프랑 30상팀이며, 부자 계급이 납부하는 세액의 5분의 2다. 그런데 이 비율이 공정하려면, 무선거권자 계급의 행복의 평균이 선거권자 계급의 행복의 평균의 5분의 2여야 할 것이다. 그리고 이는 참이 아니며, 4분의 3 이상이 모자란다.

그러나 우리가 선거권자 계급에 대해서 해 온 계산이 선거권자에 아주 유리하게 완전히 잘못되었다는 것을 성찰할 때 이 불비례는 더욱 충격적으로 보일 것이다.

실제로 선거권 행사를 위해 계산되는 조세들은 다음의 것들뿐이다. ① 토지세, ② 인적 주거세, ③ 문과 창문세, ④ 영업소세. 그런데 별로 달라지지 않는 인적 주거세를 예외로 하면 나머지 세 가지는 소비자들에게 전가된다. 그리고 모든 간접세들도 마찬가지다. 자본 소유자들은 소비자들로부터 이를 충당한다. 지주에게 직접 과세되고 총액이 1억5000만에 달하는 취득세는 예외다. 그런데 우리가 선거권자의 재산이 이 액수에서 6분의 1로 나타난다고 추정하면, 이는 많이 말하는 것인데, 직접 납세의 부분(4억900만)이 인당 12프랑이고 간접 납세의 부분(5억4700만)은 인당 16프랑일 때, 자신과 아내와 두 자녀가 밥을 먹을, 막노동할 힘밖에 가진 것 없는 일꾼의 몫은 112프랑이 될 동안에 다섯 식구로 된 가정을 가진 각 선거권자가 지불하는 조세의 평균은 265프랑일 것이다. 하류 계급에서는 28프랑이다. 이에 대해서 나는 다시 질문한다. 선거권 취득 최하 납세액 미만인 경우의 행복 수준은 이를 넘는 경우의 절반인가?

조세는 정기 간행물과 마찬가지다. 더 드물게 나올수록 그만큼 더 비싸다. 일간지는 40프랑의 비용이 들고, 주간지는 10프랑, 월간지는 4프랑이 든다. 다른 모든 것이 같다고 할 때, 이 간행물들의 구독료는 서로 간에 40, 70, 120의 비율로, 간행이 드물수록 비싸진다. 그런데 바로 조세의 진행이 그러하다. 이는 노동하고 생활할 권리에 대한 교환으로 각 시민이 지불하는 가입자 요금이다. 이 권리를 가장 낮은 비율로 활용하는 자가 더 많이 낸다. 좀 더 많이 활용하는 자가 덜 낸다. 많이 활용하는 자는 별로 내지 않는다.

경제학자들은 일반적으로 이 모든 것에 의견이 일치한다. 그들은 비례세를 그 원리만 공격해 온 것이 아니라 그 적용도 공격해 왔다. 그들은 거기서 비정상적인 것들을 지적했으며, 이것들은 거의 모두가 자본과 소득, 혹은 경작 면적과 지대의 비율이 결코 고정되지 않은 데서 비롯한다.

“서로 다른 품질의 토지들, 첫 번째 토지는 밀 8프랑, 두 번째 토지는 6프랑, 세 번째 토지는 5프랑을 생산하는 토지 소득에 대한 십일조 납세액이 있다고 하자. 조세는 가장 비옥한 토지에는 소득의 8분의 1을 요구할 것이고, 좀 덜 비옥한 토지에는 소득의 6분의 1을 요구할 것이고, 끝으로 그보다 덜 비옥한 토지에는 5분의 1을 요구할 것이다. 조세는 응당 그래야할 방향의 역방향으로 설정될 것인가? 토지 대신에 다른 생산 수단을 가정하고 다른 생산성을 가진 여러 산업 분야들에 적용되는 같은 가치의 자본들, 혹은 같은 차원의 여러 노동량들을 비교할 수 있다. 그 결론은 같을 것이다. 1000프랑을 버는 일꾼에게, 그리고 6만 파운드의 지대를 받는 예술가나 의사에게 10프랑의 동등한 인두세를 요구하는 데는 불의가 있다.”(가르니에, 『정치경제학 원리Principes d'économie qolitique』)

이런 성찰은 징수 방법이나 세원에만 해당하며 조세의 원리 자체를 공격하지 않음에도 아주 정당하다. 왜냐하면, 자본이 아니라 소득에 대해 배분이 행해진다고 가정할 때 재산에 비례해야 할 조세가 소비자의 부담인 것은 언제나 변함없기 때문이다.

경제학자들은 발걸음을 내딛었다. 그들은 비례세가 악하다는 것을 소리 높여 인정했다. 세는 이렇게 말한다.

“조세는 필요물에 대해 결코 징수될 수 없다.” 정말이지 이 저자는 필요물이 무슨 뜻인지를 정의하지 않는다. 그러나 우리는 이 생략을 보충할 수 있다. 필요물은 나라의 모든 생산물 중에 조세로 징수되어야 할 것을 공제한 후 각 개인에게 돌아가는 것이다. 프랑스에서 생산액이 반올림한 수로 계산해 80억이고, 조세가 10억일 때 각 개인의 필요물은 하루에 56상팀 반이다. 세에 따르면, 이 소득을 넘는 모든 것이 오직 과세될 수 있는 것이다. 그 미만인 모든 것은 세정 당국에 성스러운 것으로 남아야 한다.

같은 저자는 다른 말로 다음과 같이 말했다. “비례세는 공평하지 않다,” 아담 스미스는 이미 그에 앞서 이렇게 말했다. “부자가 공공 지출에 소득에 비례해서만이 아니라 그 이상에 대해서도 기여하는 것은 결코 터무니없는 것이 아니다.” 세는 이렇게 덧붙인다. “나는 더 멀리 나갈 것이다. 나는 누진세가 유일하게 공평하다고 말하기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가르니에 씨는 경제학자들의 마지막 교서 작성 담당자로서 이렇게 말한다. “개혁은 누진적 평등, 이렇게 말할 수 있다면, 기괴한 불평등일 뿐인 조세의 평등이라고 하는 것보다 훨씬 더 공정하고 훨씬 더 공평한 평등을 확립하는 경향을 띠어야 한다.”

이처럼 일반적 견해에 따르면, 그리고 경제학자들의 증언에 따르면, 두 가지가 밝혀진다. 하나는 그 원리상 조세는 독점에 반발하며, 부자에 맞서서 책정된다는 것, 또 하나는 실제에서 바로 이 조세가 그 목표에 충실하지 못하다는 것, 가난한 자를 우선 과세해 불의를 저지른다는 것, 그리고 입법자는 항상 더 공평한 방식으로 이를 배분하는 지향을 지녀야 한다는 것이다.

나는 다른 고려 사항들로 넘어가기 전, 이 이중적 사실을 확고히 확립할 필요가 있었다. 지금 내 비판이 시작된다.

경제학자들은 선배들로부터 물려받은, 그리고 오늘날도 온통 그들에게 칭찬이 돌아가게 해주는 정직한 사람들의 순박함을 가지고서, 그들이 현명하고 자유주의적인 정부의 극치라고 정부들에 지적해주는 조세의 누진 이론이 그 항목들 내에 모순적인 수많은 불가능성들을 품고 있다는 것을 인식하지 않으려고 했다. 그들은 세정 당국의 반대에 대해, 시대의 야만, 군주들의 무지, 카스트의 편견, 반역자들의 탐욕, 한마디로 그들에 따르면 조세의 누진을 반대하고 예산 앞의 평등을 성실한 실천에 걸림돌이 되는 모든 것이라고 비난했다. 그들은 그들이 누진세의 이름으로 요구하는 것이 모든 경제적 관념들의 전복이 아닌가를 한순간도 의심하지 않았다.

이처럼 그들은, 예를 들어서 조세가 비례적이라는 바로 그것 때문에 누진적이라는 것, 그러나 누진성은 우리가 본 대로 가장 큰 재산의 방향이 아니라 가장 작은 재산의 방향으로 진행되어 역으로 취해진다는 것을 알지 못했다. 경제학자들이 조세가 있는 모든 나라들에서 확고부동한 이 역전에 대한 명확한 관념을 가지지 못했다 해도, 그렇게 이상한 현상은 그들의 주의를 끌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그들은 그 원인을 탐구했으며, 결국 그들이 문명의 우연으로, 인간 통치의 풀 수 없는 난점들의 결과로 본 것이 정치경제학 전체에 내재하는 모순의 산물이라는 것을 발견했다.

1. 누진세는 자본에 적용되든 소득에 적용되든 독점, 로시 씨가 말하기를 우리가 사회경제학의 길 어디서나 만나는 이 독점, 산업의 진정한 자극제이고, 저축의 희망이고, 모든 부의 보전자이자 아버지이며, 그에 관해 우리가 결국 사회는 그것과 함께 존재할 수 없지만 그것 없이 있을 수 없었으리라고 말할 수 있었던 그 독점의 부정이다. 조세가 갑자기 의당 그래야 하는 것이 의심될 수 없는 것으로, 즉 각 생산자의 공공 부담에 대한 비례적 (혹은 누진적, 이는 같은 것이다) 납세가 된다면, 곧 지대와 이득은 어디서나 국가를 위해 몰수된다. 노동은 그 과업의 결실을 박탈당한다. 각 개인은 56상팀 반의 적절한 몫으로 찌그러지고, 곤궁이 일반적이 된다. 노동과 자본 간에 이루어진 협약은 해지되고 사회는 방향타를 빼앗기고 그 원점으로까지 후퇴한다.

아마도, 어느 순간에 누진의 효과를 중지시켜 자본 이득의 절대적 폐지를 막는 것이 손쉽다고들 말할 것이다.

절충론, 중용, 하늘과의 혹은 도덕과의 타협, 이는 그러므로 언제나 같은 철학일 것이다! 진정한 과학은 그런 식의 거래에는 질색이다. 투하된 모든 자본은 생산자에게 이자의 형태로 돌아가야 한다. 모든 노동은 초과분을 남겨서 모든 임금은 생산물과 동등해야 한다. 이런 법칙의 보호 아래 사회는 끊임없이 생산의 가장 큰 다양성에 의거해 가능한 행복의 가장 큰 총계를 실현한다. 이 법칙들은 절대적이다. 이를 유린하는 것은 살해하는 것이고, 사회를 손상시키는 것이다. 이처럼 결국 축적된 노동 말고 다른 것이 아닌 자본은 불가침이다. 그러나 다른 한편, 평등의 지향은 그에 못지않게 절대적이다. 그것은 각 경제 국면에서 상승하는 기력과 불굴의 권위를 가지고서 발현된다. 그러므로 당신은 노동과 정의를 한꺼번에 만족시킬 필요가 있다. 당신은 노동에는 점점 더 실질적인 보장책을 제공해야 하고, 정의는 양보도 모호함도 없이 마련해야 한다.

그 대신에 당신은 당신의 이론들을 끊임없이 군주의 양식으로 대체하는 것, 자의적 권력으로써 경제 법칙의 운행을 중단시키는 것, 그리고 공평성을 핑계로 임금에도 독점에도 똑같이 거짓말하는 것밖에 할 줄 모른다! 당신의 자유는 반쪽짜리 자유일 뿐이고, 당신의 정의는 반쪽짜리 정의일 뿐이고, 당신의 지혜 전체는 이 중간 항들에 있는데, 그 사악함은 이쪽 편의 주장에도 저쪽 편의 주장에도 정당성을 인정해 주지 않으므로 이중적이다! 아니, 당신이 우리에게 약속한 과학, 우리에게 부의 생산과 소비의 비밀들을 드러내 주면서 사회적 이율배반들을 애매함 없이 풀어주어야 할 과학들은 그럴 수 없다. 당신의 반半 자유주의적 학설은 독재의 법이고 당신에게서 후퇴의 치욕만큼 전진하지 못하는 무능력을 폭로한다.

사회가 그 경제적 선행자들에 의해 끌어들여진 사회가 가던 길을 되돌아올 수 없다면, 보편적 등식이 생겨날 때까지 독점이 그 소유에서 유지되어야 한다면, 어떤 변화도 조세의 세원에서 가능하지 않다. 단, 거기에는 다른 모든 모순처럼 소진되기까지 배척되어야 할 모순이 있다. 그러므로 당신들의 견해에 대해 용기를 가져라. 풍요에 대한 존경심을 가지고, 독점의 신이 정죄한 가난한 자를 위한 연민은 절대 품지 말라. 고용자는 먹고 살 것이 없을수록 더 많이 납부할 필요가 있다. 가지지 못한 사람은 가진 것마저 빼앗길 것이다(qui minus habet, etiam quod habet auferetur ab eo). 이는 필요하며, 숙명적이다. 거기에 사회의 평화가 달려 있다.

그럼에도 조세의 누진성을 되돌려서, 가장 많이 내놓는 자가 노동자가 아닌 자본가가 되도록 해보자.

나는 우선, 관습적인 징수 방식으로는 그런 전복은 실행 불가능하다고 본다.

실제로 조세가 활용 가능한 자본에 징수된다면, 이 조세의 총액은 생산 비용 중에 계산되는데, 그럴 경우 둘 중 하나다. 생산물이 판매 가치의 상승에도 불구하고 소비자에게 구매되고 결과적으로 생산자가 조세에서 면제를 받든지, 아니면 바로 이 생산물이 너무 비싸다고 여겨져서, 이 경우에 조세는 장 바티스트 세가 아주 잘 말했듯이 씨앗에 대해 부과되는 십일조와 같은 식으로 작용해 생산을 방해한다. 너무 높은 취득세가 부동산의 유통을 막고 기금이 주인을 바꾸는 것에 반대가 되어 기금을 덜 생산적으로 만드는 것은 이런 식이다.

반면에 조세가 생산물에 부과되면, 각자가 자신의 소비의 크기에 따라 무는 것은 정률세에 지나지 않는 반면, 조세의 공략 대상인 자본가는 보호된다.

게다가 누진세가 생산물에 기초하기도 하고 자본에 기초하기도 한다는 가정은 완전히 터무니없다. 같은 생산물이 어떤 보유자에게서는 10%의 조세를 부과당하고, 다른 보유자에게서는 5%만 부과당한다고 어떻게 생각하겠는가? 이미 담보 물권이 설정되고 매일 주인이 바뀌는 기금이, 합자에 의해서나 한 개인의 단독 재산에 의해서 형성된 자본이 어떻게 토지 대장에 의해 구별되어 그 가치나 지대에 비례해서가 아니라 지주의 재산이나 추정된 이득에 비례해서 과세될 것인가?

그러므로 마지막 수단이 남는다. 이는 각 납세자의 순소득이 어떻게 형성되든 순소득에 과세하는 것이다. 예를 들어서 소득이 1000프랑이면 10%를 납부한다. 소득이 2000프랑이면 20%를 납부한다. 소득이 3000프랑이면 30%, 이런 식으로 나간다. 소득 조사의 천 가지 난점과 골치 아픈 일을 제쳐놓고, 그 작업이 원하는 것처럼 쉽다고 가정하자. 좋다! 이야말로 내가 위선이고 모순이고 불의라고 고발하는 체계이다.

나는 첫째로 이 체계가 위선적이라고 말하는데, 이는 수용할 수 없는 일로, 부자에게서 가구당 국민생산의 평균을 넘는 소득의 온전한 몫을 취해가지 않는 한, 그것은 상상하듯이 조세의 누진성을 부의 방향으로 가져가지 않고 기껏해야 그 비율을 변경하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조세의 현재의 누진성은 1000프랑의 소득과 그 이하의 소득을 가진 자들에 대해 10, 11, 12, 13 등의 숫자와 같이 진행되고, 1000프랑의 소득과 그 이상의 소득을 가진 자들에 대해 10, 9, 8, 7, 6 등의 숫자와 같이 진행되어 조세는 항상 빈곤과 함께 증가하고, 부와 함께 감소하는 것이다. 특히 빈곤 계층에 과세되는, 그리고 부유 계층의 소득에도 마찬가지로 부과되는 간접세를 경감하기만 하면, 누진성은 참으로 빈곤층에게는 10, 10.25, 10.50, 10.75, 11, 11.25 등의 수치와 같을 뿐일 것이고, 부유층에게는 10, 9.75, 9.50, 9.25, 9, 8.75 등과 같을 뿐일 것이다. 그러나 이 누진성은 양쪽에서 아무리 덜 빠르게 진행하더라도, 여전히 그에 못지않게 같은 방향으로, 여전히 정의의 역방향으로 인도될 것이다. 그리고 이는 누진적이라고 하는 조세가 기껏해야 박애주의자들의 잡담거리나 될 수 있으면서 어떠한 과학적 가치도 없는 것이 되도록 만드는 것이다. 세법학에서는 그것에 의해 아무것도 달라지지 않는다. 속담이 말하는 것처럼 바랑은 언제나 빈자에게 찾아가며, 권력의 배려 대상은 언제나 부자다.

나는 이 체제가 모순이라고 덧붙인다.

실제로, 법률가들은 ‘주고서 압류하는 것은 가치가 없다’고 말한다. 그러므로 그 권리 보유자들이 얻는 유일한 이득이 소득과 함께 그 향유를 곧바로 상실하는 것인 독점을 성별하는 대신, 토지법을 곧장 명령하지 않는가? 각자가 자신의 노동과 근면의 결실을 자유로이 향유한다는 것을, 조세의 사실 혹은 경향에 의해 이 허락이 하루 56상팀 반의 배당에까지만 주어질 경우에 왜 헌법에 넣는가? 이는 정말로 법이 그렇게 규정하지는 않았겠지만, 누진성으로부터 필연적으로 나오게 될 것이다. 입법자는 우리의 독점을 굳게 해주면서 생산을 이롭게 하고, 산업의 신성한 불을 보살피고 싶었던 것이다. 그런데 아직 조합을 이루지 못해 우리만을 위해 생산하지 않는다면 우리가 생산을 하는 데 무슨 관심이 있을 것인가? 우리가 스스로 자유라고 선언한 후에 어떻게 사람들이 우리에게 우리의 자유를 무효화하는 것인 판매, 임대차, 교환의 조건들을 부과할 수 있는가?

어떤 사람이 지대 2만 프랑을 보유한 것으로 국가에 등록하고 있다. 조세는 새로운 누진성에 힘입어 그에게서 50%를 거둘 것이다. 이 세율에서 그는 자신의 자본을 회수해 소득 대신에 그 기금을 먹어 치우는 것이 더 유리하다. 그러므로 그것을 되돌려주도록 하라. 하지만 뭐라고! 되돌려주라고. 국가는 되돌려주도록 제약을 받을 수 없다. 그리고 국가가 그것을 다시 사들이는 데 동의한다면 이는 순소득에 비례할 것이다. 그러므로 2만 프랑 지대의 등록은 조세 때문에, 그가 그것을 스무 몫으로 나누어 이 경우에는 그에게 두 배를 가져다주도록 하지 않는 한, 국가에 의해 상환을 받고자 한다면 지대 수령자에게는 1만 프랑 넘는 가치를 가지지 않을 것이다. 마찬가지로 5만 프랑의 임대료를 생산하는 영지는 조세가 그 소득의 3분의 2를 차지하므로 그 값의 3분의 2를 상실할 것이다. 그러나 지주가 이 영지를 100개의 필지로 나누고, 이를 매물로 내놓으면 세정 당국의 공포가 더 이상 취득자를 멈추지 않게 되어 그는 자본 전체를 회수할 수 있을 것이다. 그래서 누진세에서는 부동산은 공급과 수요의 법칙을 더 이상 따르지 않으며, 그 실질 소득에 따라서 평가되는 것이 아니라 소유자의 자격에 따라서 평가된다. 그 결과는 거대 자본들이 감가되리라는 것, 별 볼 일 없는 것이 현안에 오르게 되리라는 것이다. 지주들은 자신들로서는 재산을 먹어치우는 것이 더 나을 것이기 때문에 부족한 지대를 회수하기보다는 서둘러 현금으로 실현할 것이다. 자본가들은 자신들의 기금을 환수할 것이고, 이를 고리대 이율로밖에 투자하지 않을 것이다. 일체의 거대 사업은 금지될 것이고, 일체의 외관상의 재산이 추적되고 필요의 수치를 넘는 일체의 자본이 금지될 것이다. 물리쳐진 부는 내적으로 침잠할 것이고, 암암리에만 바깥으로 나갈 것이다. 그리고 노동은 시체에 붙은 사람처럼 끝없는 짝짓기 중에 빈곤을 끌어안을 것이다. 그러한 개혁들을 구상하는 경제학자들은 개혁자들을 무시할 만하지 않은가?

누진세의 모순과 거짓말을 보여준 후에 내가 그 악함을 더 증명할 필요가 있는가? 경제학자들이 이해하고 그들에 이어 일정한 급진주의자들이 이해하는 바와 같은 누진세는 자본과 생산물에 징세된다면 실행 불가능하다는 것을 내가 방금 말했다. 그러나 자본, 생산물 그리고 소득의 순전히 이론적인 이런 구분이 세정 당국 앞에서는 무너지며, 우리가 지적한 바로 그 불가능성들이 여기서 그 치명적 성격을 가지고 다시 나타나는 것을 누가 모르는가?

한 산업인이 한 공정을 발견한다. 이를 수단으로 그 생산 비용에서 20퍼센트를 절약해서 그는 2만5000프랑의 소득을 올린다. 세정 당국이 그에게 1만5000프랑을 요구한다. 그래서 그 기업가는 조세의 사실에 의해 그의 공정이 20퍼센트를 절약해주는 대신 8퍼센트 이상 절약해 주지 않으니 가격을 올리지 않을 수 없다. 이는 마치 세정 당국이 저렴한 가격을 방해한 것과 같지 않은가? 이처럼 부자를 공략한다고 믿으면서 누진세는 언제나 소비자를 공략한다. 그리고 생산을 완전히 제거하지 않는 한 누진세가 소비자를 공략하지 않는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무슨 오산이란 말인가!

투자된 모든 자본은 끊임없이 이자의 형태로 기업가에게 되돌아가야 한다는 것이 사회경제학의 법칙이다. 누진세로는 이 법칙이 근본적으로 위배되는데, 누진의 효과에 의해 산업이 그 자본의 일부 혹은 심지어 전체의 손실을 입도록 자본의 이자가 낮아지는 것이다. 그렇지 않으려면, 자본의 이자가 조세 자체와 마찬가지로 누진적으로 상승해야할 것인데, 이는 터무니없다. 그러므로 누진세는 자본의 형성을 정지시킨다. 나아가 그것은 자본의 순환에도 대립한다. 실제로 누구든 활용할 재료나 토지 기금을 취득하기를 원한다면, 납세의 누진성 체제에서는 이 재료나 이 기금의 실질 가치가 아니라 그것이 초래할 조세를 고려해야할 것이다. 그래서 실질 소득이 4퍼센트이고 조세의 효과 혹은 취득자의 조건에 의해 이 소득이 3퍼센트로 축소되어야 한다면, 그 취득은 일어날 수 없을 것이다. 모든 이자를 허물어뜨리고, 그 범주들로써 시장에 교란을 일으킨 후에 누진세는 부의 발달을 중지시키고, 판매 가치를 실질 가치 이하로 축소한다. 그것은 사회를 왜소화하고 화석화한다! 무슨 폭정인가! 웬 조롱거리인가!

누진세는 그러므로 누가 무슨 일을 해도 정의의 거부, 생산의 금지, 몰수로 해소된다. 이는 무제한하고 고삐 풀린 자의성이 노동, 저축, 수단들의 완성으로써 공적인 부에 기여하는 모든 것에 대해 권력에게 주어진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참된 것을 만지는 경우에, 괴상한 가설들 가운데서 헤매는 것이 무슨 소용인가? 조세가 그렇게 기가 막힌 불평등으로 사회의 다양한 계급들에 과세된다는 것은 비례 원칙의 잘못이 아니다. 그 잘못은 우리의 편견과 도덕관념에 있다. 조세는 그것이 인적 작업들에 주어지는 만큼 공평성, 정확성을 가지고 진행된다. 사회경제학은 생산물을 공략하라고 조세에 명한다. 조세는 생산물을 공략한다. 생산물이 몸을 피하면, 자본에 과세한다. 그보다 더 자연스러운 것이 무엇인가? 조세는 문명에 앞서 가면서 노동자들과 자본가들의 평등을 가정한다. 필연의 확고한 표현으로서 그것은 우리가 교육과 노동에 의해, 그리고 우리의 기능들의 균형과 우리 이익들의 연합에 의해 평등해지고 자신에게 동의하도록 우리를 초청하는 것 같다. 조세는 사람과 사람 간에 구별하기를 거부한다. 그리고 우리는 그것의 수학적 엄밀성이 우리 운명들의 불화를 일으킨 것을 비난한다! 우리는 평등 자체에 우리의 불의에 고개를 숙일 것을 요구한다! … 시작하면서 조세에 관해서 우리가 우리 제도들보다 뒤떨어졌다고 내가 말한 것이 옳지 않았나?

또한, 입법자가 세법에서 누진세의 파괴적 결과들 앞에 멈추고, 비례세의 필요성, 불변성을 성별하는 것을 바라보자. 왜냐하면 행복의 평등은 자본의 유린에서 나올 수 없기 때문이다. 이율배반은 사회가 혼돈에 빠지지 않으려면 체계적으로 풀려야 한다. 영원한 정의는 결코 사람들의 모든 환상에 적응하지 않는다. 누가 범할 수는 있지만 자기 자신의 엄숙한 양도 없이는 결혼상대로 삼을 수 없는 여성처럼 정의는 우리 쪽에 우리의 이기심의 포기와 더불어 과학의 권리들인 자신의 모든 권리의 인정을 요구한다.

그 최종 목표는 우리가 보여준 바처럼 비생산자들의 보수이지만 그 원초적 생각은 노동자의 회복인 조세는, 그러므로 독점 체제에서는 순전한 항거로, 일종의 초법적 행위로 환원된다. 그 효과라고는 독점자를 그 소유에서 교란하면서 임금 노동자의 위치를 악화시키는 것이다. 비례세를 누진세로 변경한다는 생각을 말한다면, 혹은 더 제대로 말해서 조세의 누진성을 회복하려는 생각을 말한다면 이는 그 전체 책임이 경제학자들에게 돌아가는 큰 실수이다.

그러나 위협이 앞으로는 특권 위에 맴돈다. 조세의 비례성을 변경할 권능을 가지고서 정부는 원할 때에는 자본 보유자들의 소유를 박탈할 편리하고 확실한 수단을 수중에 가진다. 그리고 어디서나 이 거대한 제도, 사회의 기초이고, 수많은 논쟁의 대상이고, 수많은 법들의 대상이고, 수많은 아첨, 수많은 범죄의 대상인 소유권이 프롤레타리아트의 벌려진 아가리 위에서 실 끝에 매달려 있는 것을 보는 것은 끔찍한 일이다.

. 조세의 재앙적이고 불가피한 결과들(생필품, 사치 단속법, 농촌 산업 경찰, 특허 증서, 상표권 등)

슈발리에 씨는 1843년 7월에 조세를 주제로 다음 질문들에 달려들었다.

① 모두에게 요구하는가 아니면 국민 일부에게 우선적으로 요구하는가? ② 조세는 인두세를 닮았는가, 아니면 납세자의 재산에 정확히 비례하는가? ③ 농업은 제조업이나 상업보다 부담을 더 지는가, 덜 지는가? ④ 토지 재산권은 동산 재산권보다 정상 참작을 더 받는가, 덜 받는가? ⑤ 생산하는 자는 소비하는 자보다 더 호의를 입는가? ⑥ 우리의 세법은 사치 금지법의 성격을 띠는가?

이 다양한 질문들에 슈발리에 씨는 내가 이야기하려고 하는, 그리고 내가 그 소재에 관해 더 철학적인 것으로 마주친 모든 것을 요약하는 대답을 한다.

“ⓐ 조세는 보편성을 띠며, 대중에게 닥치며, 민족을 통틀어 취한다. 그럼에도 가난한 자들이 가장 많으므로 더 많이 거둘 것을 확신하고 가난한 자에게 쉽게 과세한다. ⓑ 사물의 본성에 의해 조세는 때로는 인두세의 형태를 띤다. 염세鹽稅가 그 증거다. ⓒ, ⓓ, ⓔ 세정 당국은 소비만큼 노동을 공략한다. 프랑스에서 모든 사람이 노동하기 때문이다. 토지 재산에는 동산보다 더 많이 과세하고, 농업에는 공업보다 더 많이 과세한다. ⓕ 같은 이유로 우리의 법들은 사치 금지법의 성격을 별로 띠지 않는다.”

뭐라고! 선생, 이것이 바로 과학이 당신에게 가르쳐준 전부라고! 조세는 대중에게 닥친다고 당신은 말한다. 그것은 민족을 한 덩어리로 파악한다고. 참 슬프도다! 우리는 이를 너무 잘 알 뿐이다. 하지만 악한 것, 사람들이 당신에게 설명을 구하는 것이 바로 이것이다. 정부는 조세의 세원과 배분에 매달리던 때, 모든 재산들이 동등하다고 믿을 수 없었고, 그렇게 믿지 않았다. 결과적으로 납세액이 동등할 것을 원할 수 없었고, 원하지 않았다. 그러면 왜 정부의 실무는 언제나 그 이론과는 반대인가? 이 어려운 경우에 대한 당신의 의견을 좀 말해 주려는가? 세무를 설명하고 정당화하거나 정죄해 달라. 당신이 어느 편을 들고 무언가를 말한다는 조건에서 당신이 좋을 대로 입장을 취해 달라. 당신 글을 읽는 자들은 사람들이며, 그들은 가난한 자가 가장 수가 많고, 이것이 조세가 더 많이 거둘 것을 확신해 그들에게 쉽게 과세하는 이유라고 하는 것 같은 명제들을 강단에서 말하는 박사에게 귀를 기울일 수 없으리라는 것을 기억하라. 아니, 선생, 조세를 규율하는 것은 수가 아니다. 조세는 빈자들 수백만에 수백만을 더한다고 해서 한 명의 선거권자를 이루지 못한다는 것을 완벽히 안다. 당신은 세정을 터무니없게 만들어서 그것을 혐오스럽게 만든다. 그리고 나는 세정이 이렇지도 않고 저렇지도 않다고 주장한다. 빈자는 부자보다 더 많이 낸다. 빈곤을 악만큼이나 혐오하는 섭리가, 빈궁한 자가 언제가 가장 많이 착취를 당하게끔 하는 방식으로 사물을 처리했기 때문이다. 조세의 악함은 우리를 평등으로 몰고 가는 천상의 징벌이다. 맙소사! 옛날에는 사도였던 정치경제학 교수가 이 계시도 이해할 수 있다면!

슈발리에 씨는 사물의 본성에 의거해 조세가 때로는 인두세 형태를 띤다고 말한다. 좋다! 어떤 경우에 조세가 인두세 형태를 띠는 것이 정당한가? 언제나 그런가, 아니면 결코 그렇지 않은가? 어떤 것이 조세의 원칙인가? 어떤 것이 그 목표인가? 말해 달라. 대답해달라.

그리고 세정 당국이 소비만큼이나 노동을 공략하며, 동산보다 토지 재산을 더 공략하고, 공업보다 농업을 더 공략한다는, 별로 주워 담을 만하지 않은 이 언급에서 우리가 어떤 가르침을 끌어낼 수 있는지 부디 알려 달라. 당신의 분석으로 단 하나의 관념도 그로부터 결코 나오지 않는다면, 거친 사실들의 이 끝없는 확인이 과학에 무엇을 의미하는지?

조세, 지대, 자본 이자 등이 소비에 대해 행하는 모든 징수는 일반 비용의 계산에 들어가고 판매 가격의 일부가 된다. 그래서 조세를 내는 사람은 언제나 거의 소비자다. 우리는 이를 안다. 그리고 더 많이 소비되는 물품이 또한 가장 많이 납부하는 물품인 것처럼 가장 많은 부담을 지는 사람은 가장 가난한 자들이라는 것이 필연적으로 일어나는 일이다. 이 결과는 앞의 결과처럼 불가피하다. 그러니 다시 한 번 묻노니, 당신의 세무적인 구별들이 우리에게 무슨 의미가 있는가? 과세 가능한 재료의 분류가 어떠하든, 자본을 소득을 넘어서 과세하는 것은 불가능하므로 프롤레타리아는 악과 억압을 견딜 동안, 자본가는 언제나 혜택을 볼 것이다. 나쁜 것은 조세의 배분이 아니다. 재화의 배분이 나쁘다. 슈발리에 씨는 이를 모를 수 없다. 그런데 왜 사물의 질서를 사랑하지 않는다는 의심을 받는 작가의 말보다 더 권위 있는 말을 하는 슈발리에 씨는 이를 말하지 않는가?

1806년부터 1811년까지(이 관찰은 다음의 관찰 사항들처럼 슈발리에 씨의 것이다) 파리에서 포도주의 연 소비량은 인당 160리터였다. 오늘날 이는 95리터를 넘지 않는다. 소매상에서 리터당 30에서 35상팀인 조세를 제거해보라. 그러면 포도주 소비는 곧장 95리터에서 200리터로 올라갈 것이다. 그러면 포도주 산업은 자신의 생산물을 가지고 어찌할 줄을 모르다가 판로를 가지게 될 것이다. 가축 수입에 매겨지는 관세 덕분에 육류 소비가 인민들에게서 포도주의 비율과 유사한 비율로 줄었다. 그리고 경제학자들은 프랑스 노동자가 영국 노동자보다 영양 공급을 덜 받으므로 노동을 적게 한다는 것을 당혹감을 가지고 인정했다.

노동계급에 대한 동정심에서 슈발리에 씨는 우리의 제조업자들이 외국 경쟁에서 약간 자극을 느끼기를 바라는 것 같다. 바지 한 벌 당 양모에 대한 1프랑의 조세 삭감은 소비자들의 주머니에 3000 여만 프랑을 남겨줄 것이며, 이는 염세의 납부에 필요한 액수의 절반이다. 셔츠 가격에서 20상팀이 줄어드는 것은 2만 명의 부대를 무장시키는 데 필요한 것에 맞먹는 절약을 만들어줄 것이다.

15년 전부터 설탕의 소비는 5300만 킬로그램에서 1억1800만 킬로그램으로 올라갔다. 이는 현재 인당 평균 3.5킬로그램이 된다. 이 진보는 설탕이 앞으로 빵, 포도주, 육류, 양모, 면화, 목재 및 기름과 함께 일차 필수품에 들어가야 한다는 것을 보여준다. 설탕은 빈자의 유일한 상비약이다. 이 품목의 소비를 인당 3.5㎏에서 7㎏으로 올리는 것은 지나칠 것인가? 100㎏에 49프랑 50상팀인 조세를 제거해보라. 그러면 당신의 소비는 두 배로 늘 것이다.

이처럼 생계 물자에 대한 조세는 천 가지 방식으로 가난한 프롤레타리아를 격동하고 괴롭힌다. 소금 값이 비싼 것은 가축의 생산에 해롭다. 육류에 대한 조세는 노동자의 섭취량을 더 줄인다. 조세와 노동계급이 느끼는 발효 음료에 대한 필요를 동시에 충족하기 위해 맥주 양조업자와 포도 재배자에게 만큼이나 화학자에게도 알려지지 않은 혼합물을 노동계급에 대접한다. 우리는 교회의 식이요법 처방을 아직도 필요로 하는가? 조세 덕분에 노동자에게는 1년 내내 사순절이다. 그리고 그의 부활절 만찬은 주교님의 성 금요일 금식 중 식사만 못하다. 어디서나 소비세를 폐지할 긴급성이 있다. 이는 인민을 기진맥진하게 하고 그를 굶긴다. 이는 급진주의자들만이 아니라 경제학자들의 결론이다.

그러나 프롤레타리아가 황제를 먹여 살리기 위해 금식하지 않는다면, 황제는 무엇을 먹을 것인가? 그리고 가난한 자가 황제의 벌거벗은 몸을 덮어주기 위해 자신의 외투를 잘라주지 않는다면, 누가 황제를 입혀줄 것인가?

이야말로 해결하는 것이 중요한 문제, 불가피한 문제이다.

슈발리에 씨는 그래서 ⑥ 우리의 조세법이 사치 금지법의 성격을 띠는지를 자문해 보고는 “아니, 우리의 세법은 사치 금지법의 성격을 띠지 않는다”고 대답했다. 슈발리에 씨는 우리의 세법에 있는 가장 좋은 것이 바로 이것이라고 덧붙일 수 있었을 것이며, 이는 참신한 말이면서 참말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슈발리에 씨는 그가 무엇을 하든 급진주의의 낡은 요소를 보존하는 자로서 어떤 당파에 대해서도 그를 위태롭게 할 수 없는 것인 사치를 질타하기를 선호했다. 그는 이렇게 썼다. “파리에서 특정한 마차들, 안장을 얹은 말이나 마차를 끄는 말들에, 종들과 개들에, 고기에 대해 징수하는 조세를 요구한다면, 이는 완전히 공정성을 띤 일이 될 것이다.”

그러므로 슈발리에 씨가 콜레주 드 프랑스에 진치고 있는 것은 마차니엘로(Mazaniello)의 정치를 논평하기 위해서인가? 나는 발Bâle에서 세무 표찰을 목에 건 개들을 보았다. 이는 견두세의 표시인데, 나는 조세가 거의 없는 나라에서 개들의 세금이 세입의 요소라기보다는 도덕 수업이고 위생 예방 조치였다고 믿었다. 1844년에 개들에 대한 조세는 (주민이 66만7000명인) 브라반트 전역에서 두당 2프랑 11.5상팀으로 6만3000프랑을 가져다주었다. 이에 따른다면, 동일한 조세는 프랑스 전역에서 300만 프랑을 걷어서 1인당 연 8상팀의 정률세 감면을 가져다줄 것이다. 확실히 나는 300만 프랑이 특히나 낭비하는 내각에서 경멸할 만한 것이라고 주장하는 것과는 거리가 멀다. 나는 입법 회의가 견세犬稅를 물리친 것을 유감으로 생각한다. 이는 예닐곱 분의 왕족에게 세비를 주는 데 언제나 소용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이런 성격의 조세가 질서의 동기보다는 세정상의 이익을 원리로 하는 면이 덜하다는 것, 결과적으로 세무 관점에서는 이를 무의미한 것으로 간주하는 편이 좋다는 것, 대다수의 인민이 좀 더 교화되어 짐승을 대동하는 것을 꺼리게 될 때에는 그것이 성가신 것으로서 심지어 폐지되어야 할 것임을 환기시킨다. 연간 8상팀, 도탄에 빠진 계층에게 무슨 위안이 되는가!

그러나 슈발리에 씨는 다른 재원들을 마련했다. 말, 마차, 종, 사치품, 결국 사치다! 사치, 이 한 마디 말에 얼마나 많은 것이 있는가!

단순한 계산으로 이 환상을 단칼에 쳐내자. 성찰은 뒤에 나올 것이다. 1842년에 수입에 대해 징수된 관세 총액은 1억2900만 프랑으로 올랐다. 이 1억2900만 프랑 중에, 일상적 소비 품목인 61개 품목이 1억2400만 프랑이고, 고가의 사치품 177개 품목은 5만 프랑[21]이다. 전자 중에서는 설탕이 4300만 프랑, 커피가 1200만 프랑, 면화가 1100만 프랑, 양모가 1000만 프랑, 기름이 800만 프랑, 석탄이 400만 프랑, 아마와 대마가 300만 프랑으로, 일곱 품목에 대해 모두 9100만 프랑을 냈다. 그래서 세액은 상품의 용도가 적고 소비가 드물수록, 더 섬세한 사치품일수록 낮아진다. 그리고 그럼에도 사치품들은 훨씬 더 많이 과세된다. 그러므로 일차 필수품에 대한 상당한 면세를 달성하기 위해서 사치품들에 대한 관세를 100배로 올릴 경우에, 달성하는 것이라고는 금지적 조세로 하나의 상업 분야를 제거하는 것일 것이다. 그런데 경제학자들은 모두 세관의 폐지에 찬성한다. 이는 의문의 여지없이 세관을 특권 부여로 대체하기 위한 것이 아닌가? … 이 예를 일반화해보자. 소금은 세무 당국에 5700만 프랑을 내고, 담배는 8400만 프랑을 낸다. 염세와 담배세를 폐지한 후에 그 적자를 사치품들에 대한 어떤 조세로 메울 것인지를 내게 손에 잡히는 숫자로 보여주기 바란다.

당신은 사치품을 과세하기를 원한다. 당신은 문명을 뒤집는다. 나로 말하자면, 사치품은 면세가 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경제적 언어로 사치 산품은 무엇인가? 전체 부에서 비율이 가장 낮은 산품들, 산업의 계열에서 마지막에 나오며, 그 창출이 다른 모든 산품들의 사전 존재를 가정하는 것들이다. 이런 관점에서 인간 노동의 모든 산물은 사치품이었다가 차례로 사치품이기를 중단해 왔다. 우리가 사치를 연대기적으로든, 상업적으로든 부의 요소들에서 후속 관계 말고 다른 것으로 이해하지 않는 것이다. 사치는 한마디로 진보와 동의어이다. 이는 사회생활의 매 순간 노동에 의해 실현된 최대 행복의 표현이며, 이에 도달하는 것은 모두의 운명이듯이 권리이기도 하다. 그런데 조세가 시간적 경과 중에 새로이 지어진 집과 새로이 개간된 들판을 존중하는 것처럼 신제품들과 귀중품들은 면세로 받아들여야 한다. 귀중품은 그 희소성이 끊임없이 낮아지도록 분투해야 하기 때문이며, 신제품의 모든 발명은 권장할 만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뭐라고! 당신은 사치품을 핑계로 새로운 시민 범주를 두고 싶은가? 그리고 당신은 살랑트와 파브리키우스의 열변[22]을 진지하게 받아들이는가?

주제가 우리를 그리로 데려가니, 도덕을 말하자. 당신은 모든 세기의 세네카 같은 이들이 귀찮게 되풀이한 이 진실, 사치는 도덕관념을 부패하게 하고 무르게 한다는 것을 틀림없이 부정하지 않을 것이다. 이는 사치가 관습을 교화하고 고상하게 하고 고귀하게 만든다는 것, 인민을 위한 첫째가는, 그리고 가장 효과적인 교육,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이상의 자극제인 것은 사치라는 것을 의미한다. 고대인들에 따르면 미의 세 여신은 벌거벗었다. 그들이 가난한 것을 어디서 보았는가? 우리 시대에 종교적 원리들이 결여되어 사회적 움직임을 살려 키워내고 하층 계급들에 이들의 존엄성을 드러내주는 것은 사치의 취향이다. 도덕 및 정치 과학 아카데미는 사치를 그 담화문들 중 하나의 주제로 잡았을 때 이를 잘 이해한 것이며, 나는 마음 속 깊이 아카데미의 지혜에 갈채를 보낸다. 실제로 사치는 이미 우리 사회에서 하나의 권리 이상이며, 이는 하나의 필요물이다. 그리고 결코 약간의 사치도 부리지 않는 이는 정말로 동정을 받을 만하다. 당신이 필요물이라고 기꺼이 칭하는 물건들에 인민의 향유를 한정하기를 원하는 것은 보편적인 노력이 점점 사치 물품을 대중화하는 경향을 띨 대다. 당신이 구분선을 더 깊게 파는 것은, 당신이 당신의 계단을 더 높이는 것이 당신이 사치를 공유해 신분들이 서로 접근하고 혼동되는 경우다! 일꾼은 애인에게 장신구를 사주기 위해, 어린 딸에게 목걸이를 사주고 아들에게 시계를 사주기 위해 땀 흘리고, 내핍하고, 고심한다. 그리고 그가 당신의 세금, 즉 당신의 벌금을 내지 않는 한 당신은 그에게서 이 행복을 빼앗는다!

그런데, 당신은 사치품에 과세하는 것이 사치 예술을 금하는 것이라는 점을 생각해 보았는가? 당신은 평균 임금이 2프랑에 못 미치는 견직물 직공, 50상팀을 받는 여성 모자 제조인, 끝날 줄 모르는 실업을 겪는 보석 세공인, 금은 세공사, 시계공, 40에퀴를 받는 하인들이 너무 많이 번다고 보는가? 음료에 대한 조세를 음료 소비자가 부담하듯이 당신은 사치세를 사치품을 만드는 일꾼이 부담하지 않는다고 확신하는가? 당신은 심지어 사치품이 더 비싸면 필수품이 더 저가가 되는 데 장애물이 되지 않는지, 그리고 가장 다수인 계급을 유리하게 해준다고 믿으면서 당신이 일반적 조건을 더 악화시키지 않는지 아는가? 참으로 아름다운 투기다! 노동자에게 포도주와 설탕 값으로 20프랑을 주고, 그에게서 그가 좋아하는 것에 관해 40프랑을 가져갈 것이란 말이다. 그는 자기 장화의 가죽을 사려고 75상팀을 벌 것이고, 가족을 1년에 네 번 들판에 데려가기 위해 마차비로 6프랑을 더 낼 것이다! 한 프티부르주아는 하녀, 세탁일 맡은 여자, 내의 관리자, 심부름꾼을 위해 600프랑을 지출한다. 그리고 더 제대로 되고 모든 사람의 마음에 드는 절약으로 그가 하녀를 한 사람 둔다면, 세무서는 생계 때문에 이런 절약의 생각을 벌할 것이다. 가까이서 살펴볼 때 경제학자들의 박애주의라는 것은 터무니없다!

그렇다고 해도 나는 당신의 환상을 만족시켜 주기를 원한다. 그리고 사치 금지법이 당신에게 절대로 필요하니, 나는 당신에게 그 방법을 가르쳐 주겠노라고 주장한다. 그리고 나는 내 체계에서는 그 징수가 쉬울 것이라고 당신에게 보증한다. 감독자도, 조세 사정관도, 포도주 감정인도, 시험자도, 검사원도, 징세관도 필요 없다. 조금의 성가심도, 가장 경미한 경솔함도, 강압도 없다. 법에 따라 장차 아무도 두 급여를 겸해서 받을 수 없다는 것, 모든 일자리에서 가장 센 보수도 파리에서는 6000프랑, 그리고 지방의 도시들에서는 4000프랑을 넘을 수 없다는 것이 규정되게 해야 한다. 아니, 뭐라고! 당신은 눈을 피하시는군! 그러니 당신의 사치 금지법은 위선일 뿐임을 실토하라.

인민을 안심시키려고 어떤 사람들은 조세에 상업적 일상 관행을 적용한다. 그들은 이렇게 말한다. 예를 들어 소금 값이 절반이 떨어지면, 편지 부치는 것이 같은 비율로 면세되면, 소비는 틀림없이 올라가고 수입은 두 배 이상이 될 것이고, 세무서는 돈을 벌 것이고 소비자도 같이 이득을 볼 것이라는 말이다.

나는 일어나는 일이 이런 예상을 확증한다고 가정하며, 이렇게 말한다. 편지를 부치는 것이 4분의 3만큼 저렴해지고, 소금이 무료가 된다면, 세무서는 여전히 돈을 벌 것인가? 분명 아니다. 그렇다면 우정 개혁이라고 부르는 것의 의미는 무엇인가? 각종 산물에 대해 자연적 요율이 있어서 그 이상에서는 이득이 폭리가 되고 소비를 줄이는 경향을 띠지만, 그 아래에서는 생산자에게 손해가 있게 된다는 것이다. 이는 이상하게도 경제학자들이 내팽개치는 가치의 결정과 닮았다. 그리고 이에 관해 우리는 이렇게 말한다. 그것은 가치가 진자 운동을 하는 양극단을 정하는 비밀스러운 힘이다. 그러므로 정당한 가치를 표현하는 중간 항이 있다.

확실히 말하건대 누구도 우편 서비스가 손해를 보면서 행해지기를 원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여론은 이 서비스가 원가에 행해져야 한다는 것이다. 이는 아주 초보적인 단순 논리여서 영국에서 편지 부치는 것을 면세하는 결과에 대해 힘겨운 조사에 들어갈 필요가 있었는지 사람들은 의아해한다. 무시무시한 숫자들과 확률들을 까마득하게 늘어놓는 것은 정신을 괴롭히는데, 이 모두가 프랑스에서 면세를 하는 것이 흑자가 될지 적자가 될지를 알기 위한 것이고 최종적으로 아무것에도 동의하지 않을 수 있기 위한 것이다. 입법 회의에 이렇게 말할 어떠한 양식을 가진 사람도 없었다. 대사의 보고서도 양국의 예들도 필요 없다. 수입이 지출 수준에 도달하기까지 우편 요금을 점차적으로 낮출 필요가 있다![23] 그러나 우리의 옛 골족 정신은 어디로 달아났는가?

하지만 사람들은 이렇게 말할 것이다. 조세가 소금, 담배, 우편, 설탕, 포도주, 육류 등을 원가에 제공한다면 소비는 의문의 여지없이 증대할 것이고, 개선은 엄청날 것이다. 하지만, 그렇게 된다면 조세 당국이 무엇으로 그 지출을 충당할 것인가? 간접세 총액은 약 6억 프랑이다. 당신은 국가가 이 조세를 어디서 징수하기를 원하는가? 세무 당국이 우편에서 벌어들이지 않는다면, 염세를 늘릴 필요가 있을 것이다. 소금도 면세를 한다면, 그 모든 것을 음료에 전가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이 긴 연속은 끝이 없을 것이다. 그러므로 국가든 민간 산업이든 산물들을 원가로 양도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따라서, 사치 금지법이 불가능한 것처럼, 누진세가 불가능한 것처럼 국가에 의한 불행한 계급들의 위안은 불가능하다고, 그리고 조세에 관한 당신의 모든 횡설수설은 경리계의 억지라고 나는 내 차례가 오면 대답할 것이다. 심지어 인구의 증가가 부담을 나누어서 각자에게 돌아가는 짐을 경감하리라는 희망도 당신은 가질 수 없다. 인구와 함께 빈곤도 증가하며, 빈곤과 함께 국가의 업무와 인원도 증가하기 때문이다.

1845~1846년의 회기 중에 하원에서 투표된 다양한 세법들은 인민의 행복을 마련하는 데서의 권력의 절대적 무능을, 그 권력이 어떤 것이든, 어떤 식으로 그 일에 임하든, 보여주는 그만한 수의 예들이다. 그것이 권력, 즉 신권과 재산권의 대표, 힘을 가진 기관이라는 것만으로도 그것은 필연적으로 불임성이고, 그것의 모든 행위에는 치명적인 기만이 각인된다.

나는 방금 편지 부치는 값을 약 3분의 1 줄이는 우편 요금 개혁을 인용했다. 확실히 동기만의 문제라면, 나는 이런 유익한 감축을 통과시킨 정부를 비난할 것이 없다. 한심한 세부적 비판으로 그 장점을 깎아 내리려고는 더더구나 하지 않을 것이다. 이는 일간지의 비열한 먹잇감이다. 충분히 부담이 되는 조세가 30퍼센트 줄어든다. 그 배분은 더 공평하고 더 규칙적이다. 나는 사실만을 보며, 이를 완수한 내각에 갈채를 보낸다. 문제는 거기에 있지 않다.

우선, 우편세에 대해 정부가 우리에게 누리게 하는 장점은 이 세금에 비례성, 즉 불의의 성격을 온전히 그냥 놔둔다는 것이다. 이는 더 이상 증명이 거의 필요 없다. 우편세와 관련한 감축의 이득이 무엇보다도 가장 가난한 자들이 아니라 가장 부유한 자들에게 획득이 되니 부담의 불평등은 전처럼 존속한다. 우편 요금으로 3000프랑을 내던 상업회사는 2000프랑 이상을 내지 않을 것이다. 그래서 그 회사가 상업으로 번 5만 프랑에 더할 것, 세무 당국의 선심에 덕을 볼 것은 1000프랑의 순이익이다. 농민, 일꾼 쪽에서는 1년에 두 번 군대에 간 아들에게 편지를 쓰고, 비슷한 횟수의 답장을 받을 텐데, 50상팀을 절약할 것이다. 우정 개혁은 조세의 공평한 배분의 역방향이라는 것, 슈발리에 씨의 요구에 따라 정부가 부자에게 징세하고, 가난한 자를 살피기를 원했다면 우편세는 감축이 필요했던 최후의 조세라는 것이 참말이 아닌가? 세정 당국이 자기 기관의 정신에 불충하게 재산 보유 계층에 선물을 줄 기회를 갖기 위해 빈곤층에는 별것 아닌 감세의 구실만을 기다린 것 같지 않은가?

이것이 바로 법안 심의자들이 말할 수 있었던 것, 그리고 그들 중 누구도 눈치 채지 못한 것이다. 당시에 비판은 내각을 향하는 대신에 권력의 본질을 향해 가해졌고, 권력과 함께 재산권에도 가해졌다는 것은 정말이다. 이는 더 이상 반대자들의 수를 헤아리지 않은 것이다. 오늘날 온갖 의견들이 진리에 반대한다.

그리고 지금 볼 때, 그것이 그렇지 않을 수 있었나? 아니다. 옛 조세를 보전한다면 아무도 진정시키지 못하면서 모든 사람에게 해를 주었을 것이니 말이다. 그리고 옛 조세를 경감한다면 “모든 프랑스인은 법 앞에―즉 조세 앞에―평등하다”고 하는 헌장의 제1조를 위배하지 않고는 시민의 범주별로 요율을 나눌 수 없으니 말이다. 그런데 우편세는 필연적으로 인적이다. 그러므로 이 조세는 인두세다. 그러므로 이와 관련해서 공평인 것이 다른 관점에서는 악이라서 부담의 균형은 불가능하다.

같은 시기에 정부의 심려로 또 다른 하나의 개혁이 실행되었으니 이는 가축 세율의 개혁이다. 그때까지는 가축에 대한 조세는 외국에서 수입될 때든, 도시에 들어갈 때든 두당으로 징세되었다. 이후로는 중량당 징세가 되어야할 것이다. 이 유익한 개혁은 오래전부터 요구되던 것으로서 부분적으로는 내가 기억하지 못하는 많은 기회들에서처럼 이 기회에도 가장 명예로운 열정을 보여준, 그리고 사회주의의 한가한 주장들을 뒤로 멀찍이 제쳐놓은 경제학자들의 영향 덕분이다. 그러나 여기서도 빈곤 계급들의 개선을 위해 법으로부터 결과적으로 나오는 선은 완전히 환상이다. 가축들에 대한 징세를 평등화, 정규화했다. 사람들 간에 이를 공평하게 배분한 것이 아니다. 연간 600킬로그램의 육류를 소비하는 부자는 정육점에 주어진 새로운 조건을 감지할 수 있을 것이다. 육류를 전혀 먹지 않는 엄청난 다수의 인민은 이를 전혀 눈치 채지 못할 것이다. 그리고 방금 내가 한 질문을 다시 하겠다. 정부가, 의회가 행한 것과 다른 일을 하는 것이 가능했나? 다시 한 번 말하건대, 아니다. 왜냐하면, 정육점 주인에게 “너는 네 고기를 부자에게는 킬로그램 당 2프랑에 팔고, 가난한 자에게는 10수에 팔라”고 말할 수 없기 때문이다. 당신이 정육점 주인에게서 얻어낼 것은 오히려 그 반대이다.

염화물도 마찬가지다. 정부는 농업에 이용되는 염화물을 5분의 4만큼 감세했으며, 변질을 조건으로 그렇게 했다. 어떤 기자는 내세울 만한 더 나은 것이 없어서 그에 대해 하나의 불평을 제기했다. 그 법 때문에 가축들보다 더 푸대접을 받는 이 가난한 농민들의 운명에 관해 탄식한 것이다. 세 번째로 나는 묻는다. 그것은 그렇지 않고 다를 수 있었나? 둘 중 하나다. 감세가 절대적일 때인데, 그럴 때에는 염세를 다른 세로 대체할 필요가 있다. 그런데 나는 프랑스의 모든 언론에 2분의 검토를 견디는 조세를 발명해 보라고 도전한다. 아니면, 감세가 부분적이어서 여러 물질들 전체에 대해 세금 중 일부를 보유하든지, 세금 전체를 폐지하되 여러 물질들 중 일부에 대해서만 적용하든지 하는 것이다. 전자의 경우에 감세는 농업에, 그리고 빈곤 계급에게 불충분하다. 후자의 경우에는 인두세가 존속하며, 엄청난 불비례가 있게 된다. 어떻게 하든지 징세를 당하는 것은 가난한 자, 언제나 가난한 자다. 모든 이론에도 불구하고 조세가 보유 혹은 소비된 자본의 비율대로만 될 수 없으며, 세정 당국이 다른 식으로 일을 진행하려 한다면, 진보를 막고, 부를 금지하고, 자본을 죽이는 셈일 것이니 말이다.

우리가 혁명의 이익을(혁명의 이익이 무엇인가?) 사회주의적 이익에 희생시킨다고 비난하는 민주주의자들은 어떻게 국가를 유일한 소유주로 만들지 않고서, 재물과 이익의 공유를 명하지 않고서 임의의 조세 체계로 인민을 위안하고, 자본이 빼앗는 것을 노동에 돌려줄 생각인지를 우리에게 말해야할 것이다. 내가 골치를 썩게 하려고 해봐야 소용없다. 그 모든 문제들에 관해서 가장 잘못된 상황에 놓인 권력과 신문들의 의견이 무한히 황당한 데로 흘러가는 것을 본다.

1842년에 아라고(Arago) 씨는 여러 회사들에 의한 철도 운영의 찬성론자였으며, 프랑스에서 다수가 그처럼 생각했다. 1846년에 그는 생각을 바꾸게 되었다고 말했다. 그리고 철도 투기자들을 별개로 하면, 시민 대다수가 아라고 씨처럼 달라졌다고 말할 수도 있다. 이 학자들과 프랑스의 우왕좌왕에서 무엇을 믿고 무엇을 할까?

국가의 경영은 나라의 이익을 의당 더 잘 보장해줄 것으로 여겨진다. 그러나 그것은 오래 걸리고, 돈이 많이 들고, 우둔하다. 나라의 운하화의 거대 역사役事에서 25년간의 실책, 계산 착오, 경솔, 100여 명에 의해 수백만 명이 내동댕이쳐진 일은 가장 회의적인 자들에게도 이를 입증해주었다. 심지어는 기사들, 행정부 구성원들이 산업에 관해서처럼 공공사업에 관해서도 국가의 무능을 소리 높여 공표하는 것을 보았다.

회사들의 경영은 나무랄 데 없다. 참으로 주주들의 이익의 관점에서 그렇다. 그러나 회사들이 하면 일반 이익이 희생되고, 투기, 조직된 독점에 의한 공공의 착취에 문이 열린다.

이상적인 것은 두 양식의 장점을 결합하면서 그 단점들의 어느 것도 나타내지 않는 체계일 것이다. 그런데 이 모순적인 성격들을 화해시키는 수단은? 아무 얻을 것도 잃을 것도 없는 신분이 보장된 이 공직자들에게 열정, 경제심, 통찰력을 불어넣어 줄 수단은? 회사에게 공익을 자신의 이익만큼 소중하게 만들고, 이 이익들이 정말로 자신의 이익이 되게, 그러면서도 회사가 국가와 구분되고 결과적으로 자신의 고유 이익을 가지기를 중단하지는 않게 할 수단은? 공직 세계에서 그러한 조화의 필요성, 그리고 따라서 가능성을 의식하는 이는 누구인가? 더구나 그 비밀을 간직하는 이는 누구인가?

그러한 경우에 정부는 언제나 그렇듯이 절충적 입장을 취했다. 정부는 일부 운영은 스스로 했고, 다른 일부는 회사들에 넘겼다. 즉 상반되는 것들을 조화시키는 대신 그것들 모두를 단지 갈등 속에 두었다. 그리고 아무것에서도 아무것에 대해서도 권력보다 정신을 더 많이도 더 적게도 가지지 않은 언론은 세 파로 나뉘어서 어떤 편은 내각의 타협을 만들고, 어떤 편은 국가의 배제를 편들고, 또 어떤 편은 회사들의 배제를 편든다. 그래서 오늘날에도 예전처럼 공중도, 아라고 씨도, 그들의 표변에도 불구하고, 자신들이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모른다.

프랑스 민족, 세 개의 권부를 가지고, 자신의 언론을 가지고, 학자 집단, 문학, 교육을 가진 이 민족은 19세기에 어떤 무리냐는 말이다! 우리나라에서 10만 명이 민족적 진보와 조국의 명예에 관련된 모든 것에 항상 열린 눈을 가지고 있다. 그런데 이 10만 명에게 공공질서에 관한 가장 간단한 질문을 던져보라. 그러면 당신은 모두가 동일한 어리석음을 향해 돌진해 가리라는 것을 확신할 수가 있다.

공무원들이 업적에 따라서 승진하는 것이 나은가, 연공서열에 따라서 승진하는 것이 나은가?

확실히 역량들의 이 이중적 평가 방식이 하나의 단일한 것으로 융합하는 것을 보기를 바라지 않는 이는 아무도 없다. 재능의 권리가 언제나 나이의 권리와 일치할 사회는 어떤 사회인가! ‘그러나 그러한 완전성은 유토피아적이다. 그 말에서 모순적이다’라고들 말한다. 그리고 그것을 가능하게 하는 것이 바로 그 모순임을 보는 대신, 대립하는 두 체제, 각각이 터무니없는 것으로 이끌면서 똑같이 참을 수 없는 남용을 일으키는 두 체제 각각의 가치에 관한 논쟁에 착수한다.

누가 내 업적을 평가할 것인가? 한 사람이 정부라고 말한다. 그런데 정부는 자신의 끄나풀에게만 업적을 인정한다. 그래서 공무원의 독립과 존엄을 파괴하는 선별적 승진은 안 된다. 이 부도덕한 체제는 안 된다.

다른 사람이 말한다. 그러나 연공서열은 의심할 것 없이 아주 존중할 만하다. 그것이 본질적으로 자발적이고 자유로운 것, 노동과 사고를 작동하지 않게 만드는 폐단, 권력과 그 대리자들에게까지 장애물을 만들어 주고, 재능과 담대한 추진력의 상을 무작위로 흔히 무기력하게 수여하는 폐단을 가진 것은 유감이다.

끝으로 누구는 타협을 한다. 정부에 일정 수의 자리에는 스스로가 재능 있다고 하고 아무런 시험의 필요도 없다고 보이는 사람들을 임의로 임명할 권능을 주고, 나머지 겉으로 보기에 무능하다고 정평이 난 이들은 차례가 되면 승진한다. 그리고 언론, 모든 주제넘은 별 볼 일 없는 이들의 늙은 조랑말로서 아주 흔히 재능도 없고 습득한 학문도 없는 젊은이들의 무료 작문으로 연명하는 언론이, 권력에 대한 기습을 재개해 여기서는 정실주의로, 저기서는 일상 관행으로 권력을 고발하는데, 사실무근은 아니다.

언론의 입맛대로라면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고 자부할 수 있을 자가 누가 있는가! 예산이 엄청나다고 꾸짖고 삿대질한 후에, 정말이지 실제로 먹고살 것 없는 공무원 부대를 위해 보수를 올려야 한다고 요구하는 언론이 있다. 때로 이는 언론을 통해 자신의 불평을 알리는 고등교육이든 초등교육이든 교육자 집단이다. 때로 이는 시골의 성직자 집단으로서 아주 빈약한 보수를 받아 추문과 독직의 풍부한 원천인 부정기적 사례금을 챙기지 않을 수 없다. 그리고 이는 행정을 맡은 모든 이들로서 잠잘 곳도, 입을 것도, 땔감도, 먹을 것도 없다. 이는 가족이 딸린 100만 명의 사람들로서 인구의 거의 8분의 1로, 이들의 빈곤은 프랑스에 수치가 되고 이들을 위해 한마디의 발언으로 예산 5억 프랑을 올릴 필요가 있을 것이다. 이 엄청난 인원 중에 단 한 사람도 군더더기가 아니라는 것에 주목하라. 반대로 인구가 늘어나면 이 인원은 비례해서 늘어날 것이다. 당신은 민족에게서 20억 프랑의 조세를 걷을 수 있는가? 당신은 4인 평균 920프랑의 소득에서 4분의 1이 넘는 236프랑을 국가의 다른 비용들과 함께 비생산자들의 급료를 지불하기 위해 취할 수 있는가? 그리고 당신이 이를 할 수 없다면, 당신이 당신의 지출을 청산할 수도 없고, 지출을 줄일 수도 없다면, 당신은 무엇을 요구하는 것인가? 당신은 무엇을 불평하는가?

그러니 인민이 이를 한번 알면 좋겠다. 권력의 장광설과 당파에 속한 이들이 독설로써 차례로 인민을 현혹하는 수단인 조세에서의 모든 삭감과 공평의 기대들은 그대로가 속임수다. 독점 체제에서는 조세가 삭감될 수도 없고, 그 배분이 공평할 수도 없다. 반대로 시민의 형편이 나빠질수록, 세 부담은 무거워진다. 이는 입법자가 밝힌 구상과 세정 당국의 반복되는 노력에도 불구하고 숙명적이고, 거역할 수 없다. 풍족하지 않거나 풍족하게 자신을 유지할 수 없는 누구든 자신의 빈곤에 비례해서 세금을 내는 것에 체념해야 한다. 여기 들어오는 자, 모든 희망을 버려라(Lasciate ogni speranza, voi ch'entrate).

그러므로 조세, 공안 기구, 이제부터 우리는 이 두 관념을 더 이상 나누지 않으려 한다. 이는 빈곤층의 새로운 원천이다. 조세는 앞서의 이율배반들, 노동 분업, 기계, 경쟁, 독점의 파괴적 효과를 악화시킨다. 그것은 노동자의 자유와 의식, 몸과 영혼을, 그것이 암시하는 기생, 괴롭힘, 사기 그리고 뒤를 잇는 형벌로써 공격한다.

루이 14세 때에 소금 밀수는 그것만으로 매년 가택 압수수색 3700건, 남성 2000명과 여성 1800명과 어린이 6600명의 체포, 말 1100마리 구류, 마차 50대 몰수, 갤리선에 대한 유죄판결 300건을 만들어냈다. 그리고 이는 악한 조세, 염세의 산물일 뿐이라고 역사가가 관찰한다. 그러니 조세 때문에 투옥되고, 고문을 받고, 재산을 박탈당한 불행한 이들의 총수는 얼마였을까?

영국에서는 네 가구 중 하나가 비생산자 가구이며, 부유하게 사는 것은 바로 이 가구다. 기생의 이 나병이 퇴치된다면 일하는 계급에 얼마나 득이 될까 생각해보라! 물론 이론상으로는 당신이 옳다. 현실적으로 기생의 제거는 재앙일 것이다. 영국 인구의 4분의 1이 비생산적이라면, 바로 이 인구의 또 다른 4분의 1이 이들을 위해 노동한다. 그런데 노동자들의 이 부분이 갑자기 자기들 산물의 용처를 잃는다면 어떻게 할 것인가? 터무니없는 가정이라고 당신은 말한다. 그렇다. 터무니없는 가정이다. 하지만, 아주 실질적인, 그리고 바로 터무니없기 때문에 당신이 인정할 필요가 있는 가정이다. 프랑스에서 상비군 50만 명, 신부 4만 명, 의사 2만 명, 법률가 8만 명, 세관원 2만6000명, 그리고 몇 십만인지도 모르는 온갖 종류의 다른 비생산자들이 우리 농장과 공장들의 엄청난 판로를 이룬다. 이 판로가 갑자기 막히면, 산업은 멈추고, 상업은 지불 정지를 선언하고, 농업은 산물 밑에서 질식한다.

그러나 한 민족이 그 무익한 입들을 처분했다고 해서 그 행진의 발이 묶이는 처지에 있는 것을 어떻게 상상하겠는가? 차라리 시간당 300킬로그램의 석탄 소비가 예상되었던 기계가 150킬로그램만을 공급하면 어떻게 힘을 상실하는지를 물어보라. 그러나 이 비생산자들을 처분할 수는 없으니 생산자들로 만들 수 없겠는가? 음, 어린이, 그러면 너는 어떻게 공안 기구, 독점, 경쟁, 그리고 네 사물의 질서를 이루는 모든 모순들 없이 지낼 것인지를 내게 말해주겠니? 들어보라.

1844년 리브드제Rive-de-Gier 분규[24] 때 앙셀므 페트탱(Anselme Pétetin) 씨는 『독립 평론Revue Indépen-dante』에 루아르 강 유역 석탄 개발의 무질서에 관해 온당함과 솔직함으로 가득 찬 두 논문을 발표했다. 페트탱 씨는 광산들을 통합하고 개발 사업을 중앙 집중화할 필요성을 지적했다. 그가 공중에게 알린 사실들은 권력 측에서 모르는 것이 아니었다. 권력은 광산들의 통합과 이 산업의 조직화를 염려했는가? 전혀 그렇지 않았다. 권력은 자유 경쟁의 원칙을 따랐고, 내버려두고 보았다.

이 시기 이래 석탄 개발자들은 조합을 결성했는데, 이는 소비자들에게 어떤 염려를 끼치지 않은 것이 아니다. 이 조합에서 연료 가격을 인상시키려는 비밀 계획을 본 것이다. 이 주제에 관해 수많은 민원을 접수한 권력은 경쟁을 가져오고 독점을 막기 위해 개입할 것인가? 권력은 그렇게 할 수 없다. 단결의 권리는 법에서는 결사의 권리와 동일하다. 경쟁이 우리 사회의 획득물이듯이 독점은 우리 사회의 기초다. 그리고 폭동이 없는 조건에서 권력은 내버려두고 볼 것이다. 다른 어떤 행동을 취할 수 있을까? 합법적으로 구성된 상업 회사를 금지할 수 있는가? 이웃들이 서로를 죽이도록 강제할 수 있는가? 그들에게 비용을 낮추지 못하게 금지할 수 있는가? 최대치를 정할 수 있는가? 권력이 이 중 한 가지를 한다면, 기성 질서를 뒤엎는 일일 것이다. 그러므로 권력은 어떠한 선제 조치도 취할 수 없을 것이다. 권력은 영업세, 면허, 토지세 납부, 그리고 재산권에 대해 설정한 다른 구속을 조건으로 독점과 경쟁을 한꺼번에 수호하고 보호하기 위해 세워진 것이다. 이런 조건들을 별개로 하면, 권력은 사회의 이름으로 내세울 어떤 종류의 권리도 가지지 않는다. 사회권은 정의되지 않았다. 다른 점에서 보면, 그것은 독점과 경쟁의 부정 자체일 것이다. 그러니 권력은 법이 규정하지 않고 정의하지 않은 것, 입법자가 인정한 권리들의 반대인 것을 어떻게 옹호할 것인가?

또한 리브드제 사태에서 석탄 개발자들에 대해 사회의 진정한 대표자로 간주해야 하는 자로서 광부가 자신의 임금을 수호하면서 독점자들의 상승에 저항하고, 단결에 맞서기를 감행했을 때, 권력은 그 광부를 사살하게 했다. 그리고 정치적 독설가들은 편파적이고, 잔혹하고, 독점체에 매수되었다고 그들이 말하는 당국을 고발했다. 내 의견에는, 이런 식으로 당국의 조치를 판단하는 것은 별로 철학적이지 않아 보이며, 나는 이런 방식을 온 힘을 다해 배척하노라고 선언한다. 사람을 덜 죽였을 수도 있고, 더 많이 죽였을 수도 있다. 여기서 주목해야 할 사실은 죽고 다친 사람의 수가 아니라 일꾼들의 탄압이다. 당국을 비판한 자들은 아마 그들의 검을 성급히 휘두르는 것과 사격의 정확성을 제외하면 당국처럼 행동했을 것이다. 그들은 진압했을 것이며, 달리 행동할 수 없었을 것이라고 나는 말한다. 그리고 무시하려 해보아야 소용없는 이치는 경쟁이 합법적이라는 것이다. 합자회사는 합법이고, 공급과 수요는 합법이고, 경쟁, 합자회사, 자유 상업으로부터 직접 결과로 나오는 모든 결과는 합법이다. 반면에 노동자들의 파업은 불법이다. 그리고 그렇게 말하는 것은 형법전만이 아니다. 경제 체제가 그렇게 말하고, 기성 질서의 필요성이 그렇게 말한다. 노동은 주권자가 아닌 한, 노예여야 한다. 사회는 그 대가로만 존속한다. 각각의 일꾼이 개인적으로 자신의 인신과 팔다리를 자유로이 놀린다면 이는 용인될 수 있다.[25] 그러나 일꾼들이 단결해 독점에 폭력을 가하려 시도한다면, 이는 사회가 허락할 수 없다. 독점을 없애보라. 그러면 당신은 경쟁을 폐지할 것이고, 작업장을 해체할 것이고, 도처에 해체의 씨를 뿌리는 것이다. 당국은 광부들을 사살하면서, 아버지로서의 사랑과 집정관의 의무 사이에 놓인 브루투스[26]와 같은 입장에 처했다. 자기 자녀들을 잃어야 했다. 아니, 공화국을 구해야 했다. 그 대안은 끔찍했다. 그렇다. 그러나 사회 협약의 정신과 문안이 그러하고, 헌장의 논조가 그러하고, 섭리의 질서가 그러하다.

이처럼 프롤레타리아트를 옹호하기 위해 세워진 공안 기구가 완전히 프롤레타리아트를 탄압하는 데 동원된다. 프롤레타리아는 숲에서, 하천에서, 산에서 쫓긴다. 지름길로 다니는 것도 금지된다. 곧 그는 그를 감옥으로 데려가는 자밖에 모르게 될 것이다.

농업의 진보는 인위적인 풀밭의 장점, 쓸데없는 목초지를 폐지할 필요성을 일반적으로 느끼게 만들었다. 어디서나 개간을 하고, 경작을 위탁하고, 공유지에 울타리를 친다. 새로운 진보 사항들이고, 새로운 부富다. 그러나 가난한 일용 노동자는 공유 재산 말고는 다른 재산이 없고 여름에는 암소와 몇 마리의 양을 길을 따라, 덤불을 가로질러서, 그리고 추수한 밭에서 풀을 뜯게 하다가 자신의 유일한 마지막 자원을 상실할 것이다. 지주, 공유 재산의 취득자 혹은 임차인들만이 이제부터는 밀, 채소와 함께 우유와 치즈를 팔 것이다. 오래된 독점체를 악화시키는 대신 새로운 독점체를 만든다. 도로 보수 인부마저도 도로변을 자신에게 속한 목초지로 남겨두고, 행정 소관이 아닌 가축을 거기서 쫓아낸다. 그로부터 무엇이 따르는가? 일용 노동자가 자신의 암소를 포기하기 전, 벌금을 물면서 풀을 뜯기고, 농작물 도둑질을 일삼고, 천 가지 소동을 일으키고, 벌금형이나 금고형을 받는다. 공안 기구와 농업의 진보가 그에게 무슨 보탬이 되는가? 작년에 뮐루즈 시장은 포도 도둑질을 막기 위해 포도원 주인이 아닌 모든 개인에게 낮에도 밤에도 포도밭을 따라서나 가로질러서 길을 통행하지 못하도록 금지했다. 이는 욕망과 후회까지 예방해주니 자비로운 예방 조치다. 그러나 공로公路가 토지 재산의 부속물에 불과하다면, 공유지들이 사유지들로 전환된다면, 공유지가 결국 사유지에 흡수되고 사유지처럼 보유, 개발, 임대, 매매된다면, 프롤레타리아에게 무엇이 남는가? 사회가 전쟁 상태에서 나와 치안 체제로 들어가는 것이 그에게 무슨 보탬이 되는가?

토지와 똑같이 산업도 그 특권들을 가진다. 법에 따라 성별된 특권들이다. 언제나처럼 조건과 유보 사항이 따른다. 그러나 또한 언제나처럼 소비자들에게는 큰 손해가 되는 특권이다. 그 문제는 흥미롭다. 우리는 이에 관해 몇 마디 말을 할 것이다.

나는 르누아르(Renouard) 씨를 인용한다. 르누아르 씨는 이렇게 말한다.

“특권은 규제에 대한 교정 수단이었다. …”

나는 그의 문장을 뒤집어서 그의 생각을 나타내도 된다는 허가를 르누아르 씨에게 요구한다. 규제는 특권의 교정 수단이었다. 왜냐하면, 규제를 말하는 자는 제한을 말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특권이 존재하기 전에 그것을 제한한 것을 어떻게 상상할 것인가? 나는 주권자가 특권들을 규칙들에 종속시키는 것을 이해한다. 그러나 그가 규칙들의 효과를 약화시키기 위해 아주 명시적으로 특권들을 만들었다는 것도 마찬가지로 이해가 가지는 않는다. 그러한 특권의 양허는 어떤 동기에 의해 나온 것도 아닐 것이다. 그것은 원인 없는 결과였다. 역사에서와 똑같이 논리에서도 법과 규칙들이 나올 때는 모든 것이 소유되고 독점되어 있다. 이 점에서 민법의 입법은 형법의 입법과 마찬가지다. 전자는 점유와 전유에 의해 유발된다. 후자는 범죄와 위법 행위의 출현에 의해 유발된다. 르누아르 씨는 모든 규제에 내재하는 구속의 관념에 집중해 특권을 이 구속의 보상으로 간주했다. 이것이 그에게 특권은 규제의 교정 수단이라고 말하게 한 것이다. 그러나 르누아르 씨가 덧붙이는 것은 그가 말하기를 원했던 것의 반대다. “우리 입법의 근본 원칙, 사회와 노동자 간 계약의 대가로서 일시적 독점 양허의 원칙은 언제나 세를 떨쳤다.” 근본적으로 이 독점 양허는 무엇인가? 단순한 인정, 선언이다. 사회는 새로운 산업을 촉진하고 그것이 약속하는 이득들을 누리기를 원해서, 자유 소작인과 협상하듯이 그 발명자와 협상한다. 그에게 일정 시간 동안 그의 산업의 독점을 보장해준다. 그러나 독점을 창조하지는 않는다. 독점은 발명의 사실 자체에 의해 존재한다. 그리고 사회를 이루는 것은 독점의 인정이다.

이 모호함을 떨쳐냈으니 나는 그 법칙의 모순들로 넘어간다.

“모든 산업 민족들은 사회와 발명자 사이의 계약의 대가로 일시적 독점의 수립을 채택했다. … 나는 모든 나라의 입법자들이 횡령을 저질렀다고 믿는 데 익숙하지 않다.”

르누아르 씨는 이 저작을 혹시 읽는다면 내가 그를 인용하면서 비판하는 것이 그의 생각이 아니라고 인정하는 나를 옳다고 할 것이다. 그 자신은 특허 증서들에 관한 법의 모순들을 느꼈다. 그가 주장하는 것은 이 모순을 일반 체계로 가져가자는 것뿐이다.

우선, 토지 독점은 영구적인 데 반해 산업에서는 왜 일시적 독점인가? 이집트인들은 더 일관성이 있었다. 그들에게는 이 두 독점이 똑같이 세습적, 영구적, 불가침이었다. 나는 글의 소유권의 영구성에 반대하며 사람들이 어떤 고려 사항들을 내세웠는지를 안다. 그리고 나는 그것들 모두를 인정한다. 그러나 이 고려 사항들은 토지 소유권에도 똑같이 적용된다. 더구나 이것들은 그에 반대해 사람들이 제시하는 모든 논리를 온전히 존속하게 한다. 그러니 입법자가 이 모든 차별을 두게 만드는 비밀은 무엇인가? 게다가 나는 이 비일관성을 거론하면서 욕하거나 빈정거리고 싶지 않다. 나는 입법자가 자발적이 아니라 필연적으로 결정한 것으로 인정한다.

그러니 가장 명백한 모순은 법 제4부 제30조 Ⅲ의 조항에서 나오는 모순이다. “증서가 그 산업적 용도를 적시하지 않은 원리, 방식, 체계, 발견, 이론적 혹은 순전히 과학적인 개념에 관한 것이라면, 그 증서는 무효다.”

그런데 원리, 방식, 이론적 개념, 체계는 무엇인가? 그것은 천재성의 고유한 결실이다. 그것은 순수한 의미에서 발명이고, 그것은 관념이다. 그것이 전부다. 용도는 거친 사실이고 아무것도 아니다. 이처럼 법은 증서의 이득에서 증서를 발급받을 자격을 갖춘 것 자체, 즉 관념을 배제한다. 반대로 용도, 즉 물적 사실, 플라톤이 말했을 관념의 복사본에는 증서를 준다. 그러므로 발명 증서라고 말하는 것은 잘못이다. 최초 점유 증서라고 말해야할 것이다.

우리 시대에 산수, 대수, 십진법을 발명했을 사람은 결코 증서를 취득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러나 바렘(Baême)은 그의 완수된 계산Comptes faits[27]으로 소유권을 얻었을 것이다. 파스칼은 그의 공기의 중량 이론으로 증서를 받지 못했을 것이다. 그 대신에 유리 장수가 기압계의 특권을 취했을 것이다. “2000년의 끝에 물을 끌어올리는 데 소용되는 아르키메데스의 나선이 기체를 내려가게 하는 데 활용될 수 있으리라고 우리의 동포 중 한 사람이 생각했다.―내가 인용하는 사람은 아라고 씨다―거기에 아무것도 변경하지 않고 나선을 물을 올릴 때처럼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돌리는 대신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돌리기만 하면 된다. 다른 물질들을 채운 큰 부피의 기체가 이처럼 물의 깊은 층 바닥에 놓인다. 기체는 올라가면서 정화된다. 나는 거기에 발명이 있었다고, 아르키메데스의 나선을 가지고 송풍기를 만들 수단을 알아낸 사람은 증서를 받을 권리가 있다고 주장한다.” 더 이상한 것이 있다면 이는 아르키메데스 자신이 자기의 나선을 활용할 권리를 사지 않을 수 없으리란 것이다. 그리고 아라고 씨는 이를 정당하다고 본다.

이런 예들을 늘어놓는 것은 쓸데없는 일이다. 법이 독점화하기를 원했던 것은 내가 방금 말한 바처럼 관념이 아니라 사실이다. 발명이 아니라 점용이다. 마치 관념이 그것을 나타내 주는 모든 사실들을 포괄하는 범주가 아니라는 듯이. 마치 방법, 체계가 경험들의 일반화, 따라서 고유하게 천재성의 결실, 발명을 이루는 것이 아니라는 듯이 말이다! 여기서 입법은 반反경제적인 것 이상이다. 그것은 바보와 만난다. 그러므로 나는 입법자에게 전유되지 않은 이론, 원리, 방법, 체계를 적용할 권리일 뿐인 자유 경쟁에도 불구하고 왜 어떤 경우들에서 바로 이 경쟁을, 원리를 적용할 이 권리를 금하는지를 물어볼 권리를 가진다. 르누아르 씨는 다음과 같이 아주 옳게 말한다.

“단체를 결성해 자기 경쟁자들을 더 이상 질식시킬 수 없다. 특허 증서들로 보상을 받는다.” 입법자는 왜 이 독점의 탄원에, 모두에게 속하는 이론들의 이 금지에 손을 들어 주었는가?

그러나 아무 말도 할 수 없는 자에게 노상 말해봐야 무얼 하나? 입법자는 정확히 하기 위해 우선권droit de priorité이라고 칭해야 할 소유권에 대한 이 이상한 적용을 했을 때, 자신이 어떤 정신으로 움직이는지를 전혀 몰랐다. 그러니 적어도 그가 우리 이름으로 독점자들과 체결한 계약 조항들에 관해 설명하기를 바란다.

나는 날짜와 그 밖의 행정, 세무 양식들에 관한 부분은 불문에 부치며, 이 조항에 다다른다.

“증서는 결코 발명을 보장하지 않는다.”

의심할 바 없이 사회 혹은 사회를 대표하는 군주는 발명을 보장할 수도 없고 해서도 안 된다. 14년간의 독점을 양허하면서 사회가 특권의 취득자가 되고, 결과적으로 보장을 제공하는 것은 특허가 할 일이니 말이다. 그러므로 입법자들은 어떻게 아주 영광스럽게 자신의 위임자들에게 이렇게 말할 수 있는가? “우리는 당신의 이름으로 발명자와 교섭했다. 그는 14년 동안 배타적 활용을 한다는 조건으로 그의 발견을 당신들과 향유할 의무를 진다! 하지만 우리는 발명을 보장하지 않는다!” 그리고 입법자들이여, 당신들은 무엇에 기대를 걸었던 것인가? 발명의 보장 없이 당신은 실질적 발견을 위해서가 아니라 가능한 발견을 위해서 특권을 양허하는 것이며, 그래서 산업의 들판은 쟁기가 발견되기도 전에 당신에 의해 양도되었다는 것을 당신들은 어찌 몰랐는가? 확실히 당신의 의무는 당신에게 신중하라고 명령했다. 하지만 누가 당신에게 얼간이 노릇을 할 임무를 주었는가?

이처럼 발명 증서는 날짜 약속도 아니고 예정된 양도다. 마치 법이 이렇게 말하는 것과 같다. 나는 토지를 최초 점유자에게 보장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 토질, 장소, 심지어 그 존재도 보장하지 않으며, 내가 그 토지를 양도해야 하는지, 그 토지가 전유에 들어갈 수 있는지를 내가 알지도 못한다! 입법권의 재미있는 행사다!

나는 법이 개입을 삼가야 할 탁월한 이유들을 가진 것을 안다. 그러나 개입해야 할 마찬가지 좋은 이유들도 가진다고 나는 주장한다. 그 증거는 이렇다.

르누아르 씨는 이렇게 말한다. “외면할 수 없고 막을 수 없는 것이 있다. 증서들이 노동과 천재성에 대한 합당한 보상인 동시에 돌팔이 행위의 수단이며, 수단이리라는 것이다. … 재주를 정당하게 평가하는 일은 공중의 양식에 달렸다.”

다음과 같이 말하는 것도 그만한 가치가 있을 것이다. 진정한 치료법을 거짓 치료법과 구분하는 것, 자연산 포도주를 불순한 포도주와 구분하는 것은 공중의 양식에 달렸다. 부토니에에서 자격이 되는 자에게 꽂아주는 장식과 별 볼 일 없는 자나 정부情夫에게 꽂아주는 싼 장식을 구분하는 것은 공중의 양식에 달렸다. 그러니 공안 기구가 공중의 양식에 의해 만들어져야 한다면 당신은 왜 국가, 권력, 권위, 공안 기구라고 불리는가?

“사람들이 말하듯이, 땅을 기진 자는 전쟁을 맞고, 마찬가지로 특권을 가진 자는 소송을 맞는다.”

음! 보증서라는 것이 전혀 없다면, 어떻게 위조물을 판정할 것인가? 누군가 당신에게 권리상으로 첫 번째 점유를 주장하고 사실적으로 유사성을 주장해도 소용없을 것이다. 물건의 품질이 그 실질 자체를 구성하는 경우 보증서를 요구하지 않는 것은 아무것에도 권리를 주지 않는 것이다. 이는 여러 공정을 비교하고 위조품을 확인할 수단을 버리는 것이다. 산업 공정의 문제에서 성공은 별것이 아니다! 그런데 이 별것 아닌 것이 전부다.

이 모든 것에서 나는 발명 특허에 관한 법은 그 동기상으로는 필요 불가결하지만 불가능하다고, 즉 그 경제에서 비논리적이고, 자의적이고, 불행을 초래한다고 결론을 내린다. 일정한 필요물들의 지배 아래 입법자는 일반 이익상 정해진 물건에 대해 특권을 부여한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가 독점에 백지 서명을 해주었다는 것, 그가 발견 도는 다른 모든 비슷한 것을 할 공중이 가진 기회들을 저버렸다는 것, 그가 경쟁자들의 권리를 보상도 안 해주면서 희생시켰고, 돌팔이들의 탐욕에 소비자들의 선의를 무방비로 넘겨주었다는 것이 드러난다. 그리고 계약의 허황됨에 미비점이 없도록, 그는 보증을 해주어야 했을 자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당신들 스스로 보증하라!”

나는 모든 시대, 모든 나라의 입법자들이 버젓이 알면서도 공공 경제의 회전축이 된 다양한 독점들을 성별하면서 강탈을 저질러 왔다고는, 르누아르 씨가 믿지 않듯이 믿지 않는다. 그러나 르누아르 씨는 모든 시대, 모든 나라의 입법자들이 자신들이 내린 명령에 관해 아무것도 이해하지 못했다는 데 대해 또한 내게 동의할 수 있을 것이다. 귀먹고 눈먼 사람이 종을 울리고 자기 교구의 시계를 조립하기를 배웠다. 그에게 종을 울리는 직분상 편리한 점이 있다면, 이는 종소리도 종의 높이도 그에게 현기증을 일으키지 않았다는 것이다. 내가 르누아르 씨와 함께 깊은 존경심을 표명하는 모든 시대, 모든 나라의 입법자들은 이 장님, 귀머거리를 닮았다. 이는 모든 인간의 광기들 중에 시계의 종을 치는 인형들이다.

이 자동인형들을 성찰하게 만드는 데 내가 끝까지 왔다면, 내가 그들에게 그들의 일이 다른 쪽 끝에서는 계속해서 짜면서 한쪽 끝에서는 풀어야할 저주를 받은 페넬로페의 베짜기임을 이해시킬 수 있다면 내게는 얼마나 큰 영광인가!

이처럼 증서들의 창조에 사람들이 박수갈채를 보내는 동안, 다른 사항들에 관해서는 사람들은 특권의 폐지를 요구하며, 언제나 동일한 고집과 동일한 만족을 가지고서 그렇게 한다.

오라스 세(Horace Say) 씨는 육류 상업이 자유이기를 바란다. 다른 이유들 가운데서 그는 아주 수학적인 이런 논리를 내세운다.

“사업에서 은퇴하기를 원하는 정육점 주인이 그의 터전에 대한 취득자를 구한다. 그는 작업 도구, 상품, 명성, 그리고 고객 집단을 계산에 넣는다. 하지만 현재 체제에서 그는 거기에 허유권, 즉 독점에 가담할 권리의 가치를 덧붙인다. 그런데 정육점 취득자가 그 권리에 대해 내놓는 보충적 자본은 이자를 동반한다. 이는 새로운 창조가 아니다. 그는 이 이자를 자신의 육류 가격에 넣을 필요가 있다. 그러므로 정육점 수의 제한은 육류의 가격을 낮추기보다는 높이는 성질을 띤다.”

“나는 지나가는 말로, 내가 정육점 매각에 관해 말하는 것은 매각권을 가진 어떤 담보권에도 적용된다고 거리낌 없이 단언한다.”

정육점의 특권 폐지를 위한 오라스 세 씨의 이유들은 반박의 여지가 없다. 게다가 그 이유들은 정육점 주인에게와 똑같이 인쇄업자, 공증인, 소송 대리인, 집행관, 서기, 경매 감정인, 중개인, 약사, 그 밖의 직종에도 적용된다. 그러나 그 이유들은 이 독점들을 채택하게 한 이유들, 상업과 공공 건강과 같은 안전, 진품 확인, 거래를 위한 규칙성의 필요에서 일반적으로 도출되는 이유들을 파괴하지 않는다. 그 목표는 도달되지 않았다고 당신은 말한다. 맙소사! 나도 안다. 정육점을 경쟁 체제로 두라. 당신은 썩은 고기를 먹을 것이다. 정육점의 독점을 만들어보라. 당신은 썩은 고기를 먹을 것이다. 이야말로 당신의 독점과 특허 증서의 입법에서 당신이 기대할 수 있는 유일한 과실이다.

오용이다! 하고 규제를 편드는 경제학자들이 외친다. 상업을 위해 감독 경찰을 창설하라. 공장의 상표를 의무화하라. 제품의 위조를 처벌하라.

그래서 문명이 들어선 길에서 어느 쪽을 돌아보아도 언제나 독점의 독재, 따라서 소비자들의 억압에 다다르든지, 아니면 경찰의 조치에 의한 특권의 소멸에 다다른다. 이는 경제에서 후퇴하는 것이고 자유를 파괴해 사회를 해체하는 것이다. 경이로운 일이다! 오용 행위들이 병을 옮기는 이처럼 그 자체의 치료책에서 재발해서, 입법자가 개혁을 거듭해 모든 위법을 처벌하고, 모든 사기 행위를 감시하고, 인신, 재산, 공공의 사무를 일체의 침해로부터 보장해주고 싶어도 그는 결국 비생삱거 기능들을 높은 수준으로 배가시켜 민족 전체가 그리로 넘어가고, 결국에는 생산을 할 사람은 아무도 남지 않을 정도가 될 것이다. 모든 사람이 경찰이 될 것이다. 산업 계급은 신화가 될 것이다. 그러면 아마도 질서가 독점에서 군림할 것이다. 르누아르 씨는 이렇게 말한다.

“공장의 상표들에 관해 제정할 법의 원칙은 이 상표들이 품질 보증으로 변형될 수 없고, 변형되어서도 안 된다는 것이다.” 이는 살펴본 것처럼 발명을 보증해주지 않는 특허 증서의 법의 결과다. 르누아르 씨의 원칙을 채택해보라. 그렇게 하면서부터 상표들은 무엇에 보탬이 될 것인가? 병의 코르크 마개에서 12도 포도주나 15도 포도주 대신에 소시에테 외노필[28]이란 말이나 그 밖의 아무런 공장 이름을 읽는다고 내게 무슨 의미가 있는가? 내가 신경을 쓰는 것은 상인의 이름이 아니다. 그것은 상품의 품질이고 공정한 가격이다.

정말로 사람들은 제조자의 이름이 양호한 제조인지 조악한 제조인지, 고품질인지 저품질인지에 대한 요약된 신호와 같을 것으로 가정한다. 그러므로 원산지 표시와 함께 유의미한 상표를 요구하는 이들의 견해에 왜 허심탄회하게 동조하지 않는가? 그러한 보류는 이해가 되지 않는다. 두 종류의 상표가 같은 목표를 지닌다. 후자는 전자의 설명이나 환언, 거래자의 광고의 요약에 불과하다. 다시 한 번 묻노니, 원산지가 무언가를 의미한다면, 상표는 왜 이 의미를 확정해주지 않는가?

볼로프스키(Wolowski) 씨는 그의 1843~1844년 개회연설에서 이 논제를 아주 잘 전개했다. 그 실체는 완전히 이 유비에 있는 것이다. 볼로프스키 씨는 이렇게 말한다. “정부가 양의 척도를 정할 수 있었던 것처럼, 질의 척도도 정할 수 있고, 정해야 한다. 이 척도들의 하나는 다른 하나의 필연적 보완물이다. 화폐 단위, 중량 및 크기의 체계는 산업적 자유에 어떠한 침해도 가하지 않았다. 상표의 체제도 더구나 이를 해하지 않을 것이다.” 볼로프스키 씨는 그 다음으로 과학의 군주들인 아담 스미스와 장 바티스트 세의 권위에 의지한다. 청중은 이성에 복종하는 것보다 권위에 훨씬 더 복종하니 언제나 유익한 사려분별이다.

내 생각을 말하자면 나는 볼로프스키 씨의 생각에 완전히 동조하는데, 이는 그 생각이 심오하게 혁명적이라고 보기 때문이다. 볼로프스키 씨의 표현에 따르면 상표는 품질의 척도 말고 다른 것이 아니어서 내게는 일반적인 요금표 작성과 같은 의미를 지닌다. 왜냐하면, 특정한 공공기관이 국가의 이름으로 표시를 하고 상품의 품질을 보증하든지 아니면 상표의 업무가 제조자에게 방치되든지, 상표가 상품의 내재하는 성분을 제시해야 하고 (이는 볼로프스키 씨의 말이다) 모든 뜻밖의 사태에 대해 소비자에게 보증해주어야 하는 순간부터 상표는 강제적으로 고정 가격으로 해소되기 때문이다. 그것은 가격과 동일한 것이 아니다. 비슷하지만 원산지와 품질이 다른 두 산물은 같은 가치를 지닐 수 있다. 부르고뉴 포도주 한 병은 보르도 포도주 한 병과 값이 같을 수 있다. 그러나 상표는 유의미해서 가격의 정확한 지식을 가져다준다. 그에 대한 분석을 제공해주기 때문이다. 한 상품의 가격을 계산하는 것은 그 상품을 구성 부분들로 분해하는 것이다. 그런데 제조 상표가 무언가 의미하기를 바란다면, 제조 상표가 해야 하는 일이 바로 이것이다. 우리는 그러므로 내가 말한 것처럼 일반적 요금표 작성을 향해 나아간다.

그러나 일반적 요금표 작성은 모든 가치들의 결정과 다르지 않다. 그리고 이야말로 그 원리, 그리고 그 지향에서 모순이 되는 정치경제학이 새로이 등장하는 것이다. 유감스럽게도 볼로프스키 씨의 개혁을 실현하려면 앞선 모든 모순들을 해결하고 더 높은 연합의 영역에 위치하는 것으로 시작할 필요가 있다. 그리고 볼로프스키 씨의 체계에 맞서서 그의 동료 경제학자들 대부분의 지탄을 불러일으킨 것은 이 해결책의 결여다.

실제로 상표 체제는 현 질서에서는 적용 불가능하다. 왜냐하면, 이 체제는 제조자들의 이익에 상반되고, 이들의 관습상으로는 꺼려지는 것이어서 권력의 강한 의지에 의해서만 존속할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공공기관이 상표를 붙일 책임을 맡는다고 잠깐 가정해보자. 그 담당자들은 음료의 상거래와 맥주의 제조에 개입하는 것처럼 노동에 매 순간 개입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음료와 맥주의 일 처리도 벌써 아주 즉흥적이고 성가셔서, 그들은 과세할 수량에만 관심을 쏟고 교환 가능한 품질에 대해서는 관심을 쏟지 않는다. 이 감독자들과 세무 사정인들은 사기를 처벌하고 예방하려면 모든 세세한 것들을 조사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그리고 어떤 사기인지를 입법자는 정의하지 못하거나 잘못 정의할 것이다. 그 사무가 끔찍한 것이 되는 것은 이런 점이다.

최악 품질의 포도주에 대해서는 실토할 사기는 없지만, 다른 품질에 대해서는 품질을 통과시키는 데 사기가 있다. 그러니 바로 당신은 포도주의 품질을 차등화하고, 이에 따라 품질 보증을 해야 한다. 혼합을 하는 것은 사기 치는 것인가? 샤프탈(Chaptal)은 포도주 제조술에 관한 논저에서 혼합을 상당히 유익한 것으로 추천한다. 다른 한편, 경험이 증명해주는 것은 서로 간에 다소 반대되거나 어울리지 않는 어떤 포도주들을 혼합하면 불쾌하고 불건강한 음료가 된다는 것이다. 당신은 바로 어떤 포도주들이 유익하게 혼합될 수 있고, 어떤 포도주들이 그럴 수 없는지를 말해야할 의무를 진다. 포도주들에 향을 뿌리고, 알코올을 타고, 물을 타는 것은 사기를 치는 것인가? 샤프탈은 이것도 추천한다. 그리고 모든 사람은 이 조제 행위가 때로는 이로운 결과를, 때로는 해롭고 역겨운 결과를 낳는다는 것을 안다. 당신은 어떤 물질이 어떤 경우에, 어떤 비율로 들어가는 것을 금할 것인가? 당신은 커피에 치커리를, 맥주에 포도당을, 포도주에 물, 사과주, 증류주trois-six[29]를 타는 것을 금할 것인가?

입법 회의는 금년에 포도주의 위조에 관해 만들고 싶었던 법의 비공식적 시안에서 그 문제의 풀 수 없는 어려움에 손을 들고 제정 작업 도중에 멈추어 섰다. 입법 회의는 물론 포도주에 물을 넣는 것, 그리고 18% 이상의 비율로 알코올을 넣는 것은 사기라고 선언하고, 이 사기를 위법 행위의 범주에 넣을 수 있었다. 입법 회의는 이데올로기의 영역에 있었다. 거기서는 곤란을 발견할 것이 없다. 하지만 모든 사람은 이런 엄격성의 배가에서 소비자의 이익보다는 세정 당국의 이익이 작용함을 보았다. 그러나 입법 회의는 사기를 감시하고 확인하기 위해 포도주 감정인, 사정인의 부대 창설 등을 감행하지 않았고, 새로이 수백만 프랑의 예산을 더하지 않았다. 그러나 상인, 제조자들이 포도주를 모든 사람이 마실 수 있게 하면서 이익을 실현할 유일한 수단으로 물을 타고 알코올을 타는 것을 금하면서 입법 회의는 생산의 감세로 판로를 확장하는 것을 하지 못했다. 입법 회의는 한마디로 포도주 위조를 추적하면서 사기의 한계선을 뒤로 물러나게만 했다. 입법 회의의 작업이 목표를 달성하려면 사전에 포도주 상업이 위조 없이 어떻게 가능한지, 인민은 위조되지 않은 포도주를 어떻게 구입할 수 있는지를 말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이는 입법 회의의 권능을 벗어나고, 그 역량을 벗어나는 일이다.

당신이 소비자가 그 가치에 대해, 위생성에 대해 보증을 얻기를 원한다면, 당신은 불가피하게 양호하고 성실한 생산을 이루는 모든 것을 알고 확정해야 하며, 매 시간 제조자의 현장에 입회해 사사건건 그를 지도하지 않을 수 없다. 제조를 하는 자는 더 이상 그가 아니다. 진정한 제조자는 당신, 국가다.

그래서 바로 당신이 함정에 빠진 것이다. 당신은 천 가지로 생산에 개입해 상거래의 자유를 얽매든지, 아니면 당신 홀로 생산자이고 당신 홀로 상인이라 선언하는 것이다.

전자의 경우에 모든 사람을 성가시게 해서 당신은 결국 모든 사람을 흥분하게 할 것이다. 그리고 조만간에 국가는 축출을 당하고 제조상표들은 폐지될 것이다. 후자의 경우에 당신은 어디에서나 개인적 선제 행동을 권력의 조치로 대체하는 것이며 이는 정치경제학의 원리들과 사회의 구성에 상반되는 것이다. 당신은 중도를 취하려는가? 이는 정실이고 족벌주의이고 위선으로, 여러 체제들 중 최악이다.

이제는 상표가 제조자의 할 일로 방치된다고 가정하자. 나는 그렇게 되면 상표들이 이를 의무화하더라도 점점 그 의미를 상실할 것이며, 결국에는 원산지 증명에 불과하게 될 것이라고 말한다. 상인, 제조업자가 허가될 수 없는 절차들을 활용해서 자신의 산업, 자신의 이윤, 자신의 생존의 비밀을 드러낼 것이라 상상하는 것은 상업을 잘 모르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 의미는 허위일 것이다. 그렇지 않도록 만드는 것은 공안 기구의 권한 밖이다. 로마 황제들은 자기 종교를 숨기는 그리스도교인들을 찾아내기 위해 모든 사람이 우상에 희생을 바치도록 의무화했다. 그들은 배교자와 순교자들을 만들어냈다. 그래도 그리스도교인의 수는 늘어나기만 했다. 마찬가지로 유의미한 상표들은 어떤 회사들에는 유익하지만 무수한 사기 행위와 탄압을 일으킬 것이다. 기대해야할 것이라고는 이런 것뿐이다. 제조자가 내적 구성, 즉 자기 상품의 산업적, 상업적 가치를 보여주게 하려면, 그에게서 경쟁의 위험을 제거해주고, 그의 독점 본능을 만족시켜줄 필요가 있다. 당신은 그럴 수 있는가? 그밖에도 소비자가 사기 행위의 처벌에 관심을 갖게 할 필요가 있다. 이는 생산자가 충분히 초연하지 않은 한에서는 불가능하기도 하고 모순적인 일일 것이다. 한편으로 타락한 소비자 중국이 있다고 하고, 다른 편으로는 쪼들리는 소매상인 영국이 있다고 하자. 이 둘 사이에 유해한 약품이 흥분과 취기를 만들어 주어서 세상의 모든 공안 기구들에도 불구하고 당신은 아편 상업을 보게 될 것이다. 모순적이다. 사회에서 소비자와 생산자는 한 사람일 뿐이다. 즉 둘 다는 그들에게 그 소비가 해로운 것을 생산하는 데 관심을 둔다. 그리고 각자에게 소비는 생산과 판매를 따르므로, 각자가 두 번째 이익에 대해서는 경계할지 모르지만 모두 첫째의 이익을 수호하기 위해 협약을 맺을 것이다.

공장 상표를 제안하는 생각은 옛날에 상한을 정하는 법들을 명했던 생각과 같은 줄기에서 나온다. 이는 여전히 여기서 정치경제학의 수많은 교차로들 중 하나가 된다.

상한을 정하는 법들은 모두가 흉년에 대처하려는 목적으로 그 장본인들에 의해 만들어지고 아주 훌륭한 동기를 부여받은 것이지만, 흉년을 더 악화시킨 것이 변함없는 결과임은 불변의 사실이다. 또한 경제학자들이 이 법들을 비난한 것은 그것이 불의하거나 악의를 지닌다는 점이 아니다. 이 혐오를 받는 법들은 미숙함과 현명치 못함에서 비롯된다. 그러나 그들이 이 법들에 반대해 내놓는 이론에는 얼마나 모순이 많은가!

흉년에 대처하려면, 생존 수단을 들여올 필요가 있다. 혹은 더 제대로 말하면, 생존 수단을 밝혀낼 필요가 있다. 그러기까지는 아무것도 재론할 것이 없다. 생존 수단이 생겨나게 하려면 이득으로써 소유자들을 끌어당기고 그들의 경쟁을 유발하고 그들에게 시장에서 완벽한 자유를 보장해줄 필요가 있다. 이 절차는 당신에게 극히 황당한 유사 요법으로 보이지 않는가? 사람들이 내게서 돈을 뜯어가기가 쉬울수록 내가 더 부유해질 것이라고 어떻게 상상하겠는가? 하게 내버려두고, 지나가게 내버려두라고들 말한다. 경쟁과 독점을 작동하게 내버려두는 것, 특히 흉년 때에, 그리고 심지어 흉년이 경쟁과 독점의 결과인 때에 그리하는 것. 웬 이런 논리가 있는가! 그러나 특히 웬 이런 도덕이 있는가!

하지만 그렇다면, 왜 제과업자들에게 요금표가 존재하듯이 임차인들에게 요금표를 만들어주지 않는가? 파종, 수확, 판매, 사료와 가축에 대해서는 신문, 공문, 영장에 대해 인지가 있고, 포도주 상인과 맥주 양조업자에게 공공 관리가 있는 것처럼 감독관 하나 없는가? 독점 체제에서 이는 골칫거리를 더하는 일일 것임을 인정한다. 그러나 불성실한 상업의 경향과 권력이 자신의 인원과 예산을 끊임없이 증대하려는 성향 때문에 수확물에 대한 조사 법령은 매일 더 필요 불가결해진다.

게다가 자유 경쟁과 상한 규정 중 어느 쪽이 흉작 시에 더 많은 해악을 일으키는지를 말하기 어려울 것이다. 그러나 당신이 어느 쪽을 선택하든, 그리고 당신은 양자택일을 피할 수도 없을 것인데, 환멸은 확실하며 재앙은 엄청나다. 상한 규정이 있으면, 물품은 숨어든다. 법의 효과 자체에 의해 공포감이 커져서 생존 수단들의 값은 오르고 또 오른다. 곧 유통이 정지되고 재앙이 따른다. 라지아(Razia)[30]처럼 지체 없고 무자비하다. 경쟁에서는 도리깨의 진행은 더 느리지만, 덜 치명적인 것은 아니다. 가격 인상이 식품을 끌어들이기 전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배고픔으로 기진맥진하거나 죽을 것인가! 식료품들이 온 후에 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바가지를 쓸 것인가! 이는 신에게서 교만에 대한 벌로 사흘의 페스트, 석 달의 기근, 혹은 삼 년의 전쟁이라는 대안을 제시받은 왕의 역사다. 다윗은 가장 짧은 것을 선택한다. 경제학자들은 가장 긴 쪽을 선호한다. 사람은 아주 한심해서, 말라가는 것을 뇌졸중으로 죽는 것보다 좋아한다. 그는 그렇게 해서는 죽지 않는다고 여긴다. 이야말로 상한 규정의 폐단과 자유 상거래의 혜택을 그토록 과장하게 한 이유이다.

게다가 프랑스가 25년 전부터 일반적 흉년을 감지하지 못했다면, 그 원인은 결코 원하기만 한다면 충만한 중에 공허를 만들어내고, 풍요 중에 기근을 만들 줄을 아주 잘 아는 상거래의 자유에 있지 않다. 그것은 거리를 단축시켜 국지적 결핍에 의해 교란된 순간 곧바로 균형을 회복하는 통신로의 완성에 기인한다. 사회에서 일반적 행복은 결코 개별 의지들의 결탁의 결과가 아니라는 이 슬픈 진리의 선명한 예다!

독점과 사회 사이, 즉 우리가 이 장의 Ⅰ에서 설명한 것처럼 자본과 노동 사이, 귀족 집단과 프롤레타리아트 사이의 이 환상적 거래 체계를 깊이 파고들수록 홉스와 마키아벨리, 이 독재의 이론가들이 몰랐던 지옥의 격언, ‘모든 것은 인민에 의해 인민을 거슬러서’라는 것에 따라 거기서 예견되고, 조정되고, 실행된 것을 더욱 발견하게 된다. 노동이 생산하는 동안, 자본은 거짓 다산성의 가면을 쓰고 즐기며 남용한다. 입법자는 중재를 제공하면서 특권을 받은 자에게 형제애적 감정을 환기하고 노동자에게 보증으로 감싸주기를 원했다. 그리고 지금 이익들의 숙명적 모순에 의해 이 보증들 각각이 형벌의 수단이라는 점이 드러난다. 이런 관점에서 가난한 자에 대한 국가의 범죄들, 그리고 그 무한히 다채로운 고문들을 이야기하려면 책 백 권, 열 사람의 생애, 그리고 철로 된 가슴이 필요할 것이다. 공안 기구의 주요 범주들에 대한 간략한 일별이 우리가 그 정신과 경제를 평가하도록 하는 데 충분할 것이다.

민법, 상법, 행정법들의 혼동으로 여러 사람들의 정신에 혼란을 일으키고 모순을 배증해 정당함의 관념을 더 모호하게 만들고, 이 체제를 설명하기 위해 통역자들의 한 계급을 필요하게 만든 다음 또한 위법 행위의 처벌을 조직하고 그들에게 벌을 내릴 필요가 있었다. 검찰은 비생산자들의 대가족으로 된 아주 부유한 위계로서 그 유지에 매년 프랑스에서 3000만 프랑이 들어가는데, 이는 빵이 사람의 생명에 그런 것과 마찬가지로 사회에 필요한 생존 원리가 되었다. 그러나 사람은 자기 손의 산물로 살아가는 반면, 사회는 자기 구성원들을 집어삼키고, 자기 자신의 살을 먹고 산다는 차이점이 있다.

어떤 경제학자들은 다음과 같이 계산한다.

지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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범죄자 비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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런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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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민 89명당 범죄자 1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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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버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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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민 45명당 범죄자 1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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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캐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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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민 27명당 범죄자 1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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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이 수치들은 정확성이 결여되며, 보기에는 아주 섬뜩하지만 공안 기구에 의한 사회적 타락의 실질적 정도를 표현하지 않는다. 여기서 결정할 것은 인정된 죄인들의 수만이 아니라, 위법 행위의 수다. 형사 법원의 임무는 독점 체제에서 인류의 도덕적 파괴를 부각시키는 데 소용이 되는 특정한 메커니즘일 뿐이다. 그러나 이 공식적 시현은 악의 전모를 포괄하는 것과는 거리가 멀다. 우리를 더 확실한 근사치로 이끌어 줄 수 있을 다른 수치들은 다음과 같다.

연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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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결 건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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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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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6,4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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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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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8,4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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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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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0,2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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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리 경범 재판 법원들은 다음과 같이 판결했다.

그 확대는 1846년까지 계속되었고, 경범죄건의 총수에 중죄 법원, 단순 경찰의 범죄 건수와 알려지지 않았거나 처벌받지 않은 위법 행위, 검찰관들의 말에 따른다면 그 수가 검찰이 기소하는 건수를 훨씬 초과하는 위법 행위들을 더한다고 가정해보자. 그러면 파리 시에서 1년에 주민 수보다 법률 위반 건수가 더 많다는 결론에 도달할 것이다. 그리고 이 위반을 한 것으로 추정되는 장본인들 중에서 반드시 7세 이하의 어린이는 유죄의 한계 바깥에 놓여서 제외할 필요가 있으므로, 각 성년 시민은 연간 3, 4회 기성 질서에 대해 유죄가 된다고 계산해야 할 것이다.

이처럼 재산 소유 체제는 파리에서 연간 100만에서 200만의 위법 행위의 수행에 의해서만 유지된다! 그런데 이 모든 위법 행위가 단 한 사람의 소행일 때, 이 사람은 이스라엘의 죄를 짊어진 속죄양일 것이라는 논리가 여전히 존속할 것이다. 검찰이 자신의 몫을 가지면서부터 죄인들의 수가 무슨 의미가 있는가?

폭력, 거짓 선서, 절도, 사기, 인신과 사회의 모독은 독점의 본질에 속하고, 그것들은 아주 완벽한 규칙성을 띠고 아주 자연스러운 방식으로, 아주 확실한 법칙에 따라 흘러나와서 그 범행을 계산의 대상으로 삼을 수 있었고, 인구수, 그 산업과 계몽의 상태가 주어질 경우 그로부터 엄밀하게 도덕성의 통계를 도출할 정도다. 경제학자들은 아직 가치의 원리가 무엇인지 모른다. 하지만 그들은 범죄의 비율을 소수점 몇째 자리까지 안다. 몇 천 명의 사람들, 몇 명의 범죄자들, 몇 건의 유죄 판결, 이런 것은 틀리지 않는다. 이는 확률 계산의 가장 아름다운 응용 예들 중 하나이며, 경제학의 가장 앞선 분야다. 사회주의가 이런 고발하는 이론을 발명했다면, 모든 사람이 비방이라고 외쳤을 것이다.

그 밖에 거기에 우리를 놀라게 할 무엇이 있는가? 빈곤이 사회 모순의 필연적 결과로서, 이자율, 임금의 수치 그리고 상업의 물가에 따라 수학적으로 정할 수 있는 결과인 것처럼, 범죄와 위법 행위는 바로 이 적대 관계의 또 하나의 효과로서 그 원인처럼 계산을 통해 평가가 가능하다. 유물론자들은 자유를 숫자들의 법칙에 이렇게 종속시키는 것에서 가장 멍청한 결과들을 끌어냈다. 사람이 그를 둘러싼 모든 것의 영향 아래 있지 않은지, 그리고 그를 둘러싼 것이 숙명적 법칙들에 지배를 받을 때, 그는 자신의 가장 자유로운 발현 행위에서 이 법칙들의 반격을 겪어야하는 것은 아닌지 하는 것들 말이다!

우리가 검찰의 설립과 유지에서 지적해온 바로 그 필연적 성격은 그 검찰의 도덕성에서도 만나게 되지만, 더 형이상학적인 측면에서도 만나게 된다.

모든 도덕가들의 의견에서 벌은 죄인의 개선을 가져다주며, 따라서 그의 저열화를 유도할 수 있을 모든 것에서 거리를 두는 것이어야 한다. 정신들의 이 행복한 지향에 맞서 싸우고, 고대의 가장 위대한 사람들의 영광이 되었던 시도들을 비방할 생각은 조금도 없다. 박애주의는 그 이름에 때로 달라붙는 비웃음에도 불구하고 후세의 눈에는 우리 시대의 가장 영예로운 특징으로 남을 것이다. 연기만 된 사형의 폐지, 상표의 폐지, 독방 수감 체제에 대해 행해진 연구, 감옥 내 작업장 설치, 내가 인용할 수도 없는 수많은 다른 개혁들이 우리의 관념과 도덕관념의 실질적 진보를 증언해준다. 그리스도교의 창시자가 절정의 사랑의 비약에서 그의 신비로운 왕국에 대해, 회개한 죄인이 무죄한 의인보다 더 높은 영광을 받을 곳으로 이야기한 것, 그리스도교적 자선의 이 유토피아는 우리의 불신자 사회의 맹세가 되었으며, 이런 면에서 지배적인 감정들의 만장일치를 고려할 때, 그러면 누가 이 맹세가 충족되지 못하게 막는지를 놀라서 궁금해 하게 된다.

아, 슬프도다! 이성은 여전히 사랑보다 더 강하며, 논리는 범죄보다 강인하다. 여기서는 모든 곳에서처럼 우리 문명 내의 풀 수 없는 모순이 지배한다. 환상의 세계 안에서 길을 잃지 말자. 실재를 그 흉측한 알몸 채로 껴안자.

범죄는 단두대가 아니라 수치를 만든다.

라고 속담은 말한다. 사람이 처벌을 받을 만했다는 조건에서 처벌을 받는다는 그것만으로 그는 저열화한다. 벌은 법전의 규정 때문이 아니라 처벌에 동기를 제공한 잘못 때문에 그를 경멸할 만한 자로 만든다. 그러니 형벌의 물적 성질이 무슨 의미가 있는가? 당신의 모든 교도소 체제가 무슨 의미가 있는가? 당신이 그것으로 행하는 것은 당신의 감성을 만족시키기 위한 것이지 당신의 검찰이 기소하는 불행한 자를 갱생하게 하는 데는 무력하다. 죄인은 벌을 받아 일단 낙인이 찍히면 화해가 불가능하다. 그의 오명은 지워질 수 없고, 그의 저주는 영원하다. 그렇지 않을 수 있다면, 벌은 위반 행위에 비례하기를 중단했을 것이다. 그것은 허구에 불과할 것이며, 아무것도 아닐 것이다. 빈곤 때문에 좀도둑질에 손을 댄 자는, 검찰에 기소되면 영원히 신과 사람들의 적으로 남는다. 그로서는 세상에 태어나지 않았더라면 더 나았을 것이다. ‘그는 차라리 세상에 태어나지 않았더라면 더 좋을 뻔했다(Bonum erat ei, si natus non fuisset homo ille)[31]’라고 그에게 말한 사람은 예수 그리스도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가 선포한 것에, 그리스도교인들과 무신앙인들이 함께한다. 수치의 용서할 수 없음은 복음서의 모든 계시들 중에 재산 소유 세계가 이해한 유일한 계시다. 이처럼 독점에 의해 자연으로부터 분리되고, 위법 행위와 벌의 어머니인 빈곤에 의해 인류로부터 분리되어, 노동이 먹여 살릴 수 없는, 그리고 남의 것을 빼앗기에 충분히 강하지 못한 평민에게 어떤 피난처가 남는가?

프롤레타리아트에 대한 이 공세적, 수세적 전쟁을 이끌기 위해서 공적인 힘을 필요 불가결했다. 집행 권력은 민사 입법, 행정, 그리고 형사 제도의 필요성에서 나온다. 그리고 거기서도 가장 아름다운 기대는 고통스러운 환멸로 바뀌었다.

입법자처럼, 시장처럼 그리고 재판관처럼 군주는 신적 권위를 대표하는 입장을 취했다. 가난한 자, 과부, 고아의 수호자로서 그는 왕좌를 둘러싸고 자유와 평등이 다스리게 하고, 노동을 도와주고 인민의 소리를 듣겠다고 약속했다. 그러자 인민은 사랑을 품고 권력의 팔에 안겼다. 그리고 권력이 자기에게 적이라는 것을 경험으로 느꼈을 때, 인민은 그 제도를 공격하는 대신에, 군주가 그 본성과 지향에서 비생산자들의 우두머리이고 가장 큰 독점자여서, 그도 모르게 인민을 위해 행동하고 대의를 취하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결코 이해하기를 원하지 않으면서 군주를 비판하는 데 착수했다.

정부의 형태에 대한 것이든, 조치들에 대한 것이든 일체의 비판은 이 본질적 모순에 도달한다. 그리고 이른바 인민 주권의 이론가들이 권력의 폭정에 대한 치료법은 대중 투표에서 권력이 나오게 하는 데 있다고 주장할 경우에, 그들은 다람쥐처럼 우리 안에서 맴돌기만 할 뿐이다. 왜냐하면 권력의 형성 조건들, 즉 권위, 재산권, 위계가 보존되는 순간부터 인민의 투표는 인민이 자신에 대한 압제에 찬성하는 것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이는 극히 멍청한 돌팔이 짓에 속한다.

권위의 체제에서, 그 기원이 군주적인 것이든, 민주적인 것이든 무엇이든, 권력은 사회의 고귀한 기관이다. 사회는 권력에 의해서 살고 죽는다. 모든 선제 행동이 거기서 나오며, 모든 질서, 모든 완성이 권력의 작업이다. 경제학의 정의들, 사물의 실재에 순응하는 정의들에 따르면 반대로 권력은 사회 조직이 무정형하게 줄이려는 경향을 띠어야할 비생산자들의 계열이다. 그러면 민주주의자들에게 그토록 소중한 권리의 원리를 가지고서 정치경제학의 맹세, 또한 인민의 맹세이기도 한 그것은 어떻게 실현될 수 있을까? 이 가설에서 모든 것이 되는 정부는 어떻게 복종하는 종, 하급 기관이 될 것인가? 군주는 어떻게 해야 이를 약화시키려는 목적에서만 권력을 받아들인 것이 될 것이며, 어떻게 질서를 목표로 자기 자신의 제거를 위해 일할 것인가? 그는 어떻게 오히려 자신을 강화하고, 인원을 늘리고, 끊임없이 새로운 보조금을 취득하고 결국에는 인민을 벗어난 모든 권력의 숙명적 종말로서 인민에 대한 종속성에서 벗어나는 데 몰두하지 않을 것인가?

인민, 특히 인민의 입법자들은 이들을 통해 자신의 의지를 권력에 알리면서 언제나 권력의 침해를 멈출 수 있을 것이라고, 그래서 인민은 군주의 역할과 주권자의 역할을 한꺼번에 완수할 것이라고들 말한다. 이야말로 짧게 말해서 민주주의자들의 유토피아이며, 그들이 프롤레타리아트를 남용하는 수단인 영원한 기만이다.

그러나 인민은 권력에 대항해서, 사회 자체의 원리인 권위와 위계의 원리에 대항해서, 자유와 재산권에 대항해서 법을 만들 것인가? 우리가 처해있는 가설에서 이는 불가능한 것 이상이다. 모순적이다. 그러므로 재산권, 독점, 경쟁, 산업적 특권들, 재산의 불평등, 자본의 우세, 위계적이고 압도적인 중앙 집중, 행정적 억압, 법적 자의성은 보전될 것이다. 그리고 정부가 그 원칙의 방향에서 움직이지 않는 것은 불가능하므로, 자본은 전처럼 사회의 신으로 변함없을 것이며, 언제나 착취당하고 언제나 비천해지는 인민은 자기의 주권 실험에서 자기 무력함의 증명만을 얻게 될 것이다.

권력의 추종자들, 왕조-공화정의 이 모든 이론가들은 서로 간에 전술에서만 차이를 가지는 자들로서 일단 일에 임해서는 어디서나 개혁을 제시한다고 헛되이 자부한다. 무엇을 개혁한다는 말인가?

헌법을 개혁하는가? 이는 불가능하다. 민족이 한 덩어리를 이루어 제헌의회에 들어갈 때, 다른 형태로 민족의 노예 상태를 찬성 표결하거나 민족의 해산을 명한 후가 아니면 거기서 나오지 않을 것이다.

황제의 업적이고 로마법과 관습의 순수한 실체인 법전을 다시 만든다는 것인가? 이는 불가능하다. 당신의 재산 소유에 관한 일상 관행, 그것 바깥에서는 당신이 아무것도 보지 못하고 이해하지 못하는 그 일상 관행의 자리에 무엇을 대신 갖다 놓아야 할까? 당신의 상상은 독점법의 원에서 벗어나기에 무력한데, 그 법 대신에 무엇을 가져다 놓아야 할까? 왕권과 민주주의, 고대 세계가 우리에게 물려준 이 두 무당이 헌법적 협상을 통해 신탁을 내리기를 시도한 50년 전부터, 군주의 지혜가 인민의 소리에 호응한 이래로 거기서 어떤 계시가 나왔으며, 어떤 질서의 원리가 발견되었는가? 특권의 미로에서 어떤 출로가 제시되었는가? 군주와 인민이 이 이상한 타협에 조인하기 전에 어떤 점에서 그들의 관념이 서로 닮지 않았는가? 그리고 그들 각각이 협정을 깨뜨리려고 애쓴 이래로 어떤 점에서 그들은 다른가?

공적 부담을 낮추고, 조세를 더 공평한 기초 위에 배분하는 것인가? 이는 불가능하다. 군대에 대해서처럼 조세에 대해서도 인민의 사람은 언제나 자기 몫보다 더 많이 내놓을 것이다.

독점을 규제하고, 경쟁에 고삐를 채우는 것인가? 이는 불가능하다. 당신은 생산을 죽이게 될 것이다.

새로운 판로를 여는 것인가? 이는 불가능하다.[32]

신용을 조직하는 것인가? 이는 불가능하다.[33]

상속을 공격하는 것인가? 이는 불가능하다.[34]

국립 작업장들을 창설하고, 일자리가 결여될 때 일꾼들에게 최저 생계를 보장해주고, 그들에게 이득에서의 몫을 할당해주는 것인가? 이는 불가능하다. 정부는 십일조세를 거두기 위해서만 산물에 관심을 두는 것처럼, 노동자들을 유혹하기 위해서만 노동에 관심을 둘 수 있는 것이 정부의 본성이다.

보상 체계로써 기계들의 재앙적 효과를 복구하는 것인가? 이는 불가능하다.

정신을 무디게 하는 파편적 분업의 영향에 규제로 맞서 싸우는 것인가? 이는 불가능하다.

인민에게 교육의 혜택을 누리게 하는 것인가? 이는 불가능하다.

상품과 임금의 요금표를 작성하고 주권적 권위에 의거해 물건들의 가치를 정하는 것인가? 이는 불가능하다. 이는 불가능하다.

사회가 비탄 가운데 간청하는 모든 개혁들 중에 어느 것도 권력의 권한에 속하는 것은 없다. 어느 것도 권력에 의해 실현될 수 없는데, 이는 권력의 본질이 개혁을 혐오하며, 신이 나눈 것을 합치는 일이 인간에게 주어지지 않기 때문이다.

적어도 정부의 선제 조치의 추종자들은 이렇게 말할 것이다. 당신들은 이율배반의 발달에 의해 약속된 혁명을 완수하려면 권력이 강력한 보조자가 되리라고 인정할 것이다. 그러면 왜 권력을 인민의 손에 갖다 주어 당신들의 견해를 아주 잘 뒷받침하는 개혁을 당신들은 반대하는가? 사회 개혁은 목적이다. 정치 개혁은 수단이다. 당신이 목적을 원한다면, 왜 수단을 배척하는가?

그런 것이 오늘날 모든 민주적 언론의 추론이며, 이에 대해 나는 결국 이 준사회주의적 신앙고백으로써 그 스스로 자기 이론의 공허함을 선포한 데 대해 내 온 영혼을 다해 감시한다. 그러므로 민주주의는 과학의 이름으로, 사회 개혁을 위한 준비로 정치 개혁을 요청하는 것이다. 그러나 과학은 자신에게 해로운 이 핑계에 항의한다. 과학은 정치와의 모든 연결을 단절한다. 그리고 과학은 정치에 의해서, 정치로부터 조금의 지원이라도 기다리기는커녕 정치를 배제하는 일을 시작해야 한다.

인간의 정신은 참된 것에 대한 친근성을 얼마나 적게 지니는가! 나는 지난날의 사회주의적인 민주주의가 끊임없이 자본의 영향력에 맞서 싸우기 위해 자본을 요구하고, 빈곤을 치유하기 위해 부를 요구하고, 자유를 조직하기 위해 자유의 포기를 요구하고, 사회를 개혁하기 위해 정부의 개혁을 요구하는 것을 볼 때, 내가 말하건대 민주주의가 사회 문제들이 제거되거나 해결된다는 전제에서 사회를 책임지는 것을 볼 때, 자기 의견을 구하는 이들의 질문에 대답하기 전에 이들의 나이, 신분, 가족, 이들의 삶의 모든 사건들에 대해 묻는 것으로 시작하는 점치는 여인의 말을 듣는 것처럼 여겨진다. 아아! 가련한 마녀, 당신이 미래를 안다면, 내가 누구이고, 내가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알겠지. 당신은 그것을 왜 내게 묻는가?

그러므로 나는 민주주의자들에게 대답하려 한다. 당신이 권력을 활용하는 법을 알고, 권력이 어떻게 조직되어야 하는지를 안다면, 당신은 경제학을 보유한 것이다. 그런데 당신이 경제학을 보유한다면, 당신이 그 모순들의 열쇠를 가진다면, 당신이 노동을 조직할 수 있다면, 당신이 교환의 법칙들을 연구했다면, 당신에게는 민족의 자본들도, 공적 힘도 필요하지 않다. 당신들은 오늘부터 돈보다 더 위력 있고, 권력보다 더 강하다. 왜냐하면 노동자들이 당신들과 함께하니 당신들은 그것만으로도 생산의 주인들이기 때문이다. 당신들은 상업, 공업, 농업을 유혹해 붙든다. 당신들은 사회 자본을 모두 배치한다. 당신들은 조세의 심판자들이다. 당신들은 권력을 저지한다. 그리고 당신들은 독점을 발로 밟는다. 당신들은 무슨 다른 선제적 권리, 무슨 더 큰 권위를 달라고 주장하는가? 당신이 당신의 이론을 적용하는 것을 누가 막아서는가?

확실히 아무리 일반적으로 추종되고 공인되더라도, 막아서는 것은 정치경제학은 아니다. 정치경제학에서는 모든 것이 참된 면과 거짓된 면을 가져서, 당신에게는 경제적 요소들을 그 총체가 더 이상 모순을 나타내지 않도록 결합하는 것으로 문제가 환원되는 것이다.

이는 민법도 아니다. 이 법은 경제적 일상 관행을 오직 그 장점만 가지고서 그 폐단들에도 불구하고 성별해서, 정치경제학 자체가 그런 것처럼 정확한 종합의 모든 요건에 맞게 굽혀질 수가 있고, 따라서 당신들에게 이롭거나 더 이상 이롭지 않을 수도 있는 것이다.

끝으로 이는 권력이 아니다. 적대 관계의 표현 뒤에서, 그리고 오직 법을 수호하기 위해서 만들어져서 스스로를 저버리지 않고는 당신을 막아설 수 없을 것이 권력이다.

그러니 다시 한 번 묻노니, 누가 당신들을 저지하는가?

당신들이 사회과학 지식을 보유한다면, 연합의 문제가 비생산자들만 조직하는 데 있지 않다는 것을 안다. 이 점에서는 다행히도 할 일이 별로 남아있지 않다. 그러나 여전히 생산자들을 조직해야 하고, 이 조직으로써 자본을 복종시키고 권력을 종속시키는 문제가 있다. 그러한 것이 우리가 감당해야할 전쟁이다. 자본에 대한 노동의 전쟁, 권위에 대한 자유의 전쟁, 비생산자에 대한 생산자의 전쟁, 특권에 대한 평등의 전쟁이다. 그 전쟁을 잘 끝맺기 위해 당신들이 요구하는 것은 바로 당신들이 맞서 싸워야할 그것이다. 그런데 권력에 맞서 싸우고, 그것을 축소하기 위해, 사회에서 그것에 맞는 자리에 그것을 갖다놓기 위해서는 권력을 휘두르는 자들을 바꾸는 것도, 권력의 운용에 약간의 변화를 주는 것도 아무 보탬이 되지 않는다. 오늘날 사회의 지배자인 권력이 그 노예가 되도록 하는 수단이 될 농업과 공업의 조합을 발견할 필요가 있다. 당신들은 이 조합의 비밀을 아는가?

하지만, 뭐랄까? 이것이 바로 당신들이 찬성하지 않는 것이다. 당신들은 위계가 없는 사회를 상상하지 못하므로, 권위의 사도들이 되어 있다. 권력의 숭배자들로서 당신들은 권력을 강화하고 자유를 입막음하는 데만 여념이 없다. 당신들이 애호하는 격률은 인민의 뜻에 어긋나게 인민의 선을 마련해줄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권력과 정치를 박멸해 사회 개혁을 진행하는 대신 당신들에게 필요한 것은 권력과 정치의 재형성이다. 그렇다면 당신들의 선의를 입증하는 일련의 모순들, 그러나 권력의 진짜 친구들인 귀족들과 왕당파, 곧 당신들의 경쟁자들이 그 환상을 잘 아는 모순들 때문에, 당신들은 권력의 이름으로 우리에게 지출에서 경제, 조세의 공평한 배분, 보편적 투표, 노동에 대한 보호, 무상 교육, 그리고 권위와 재산권에 상반되는 모든 유토피아를 약속한다. 권력도 당신들의 손안에서 몰락해 가기만 했다. 그리고 당신들이 결코 권력을 잡을 수 없었던 것은 그 때문이다. 브뤼메르 18일에 당신들에게서 권력을 빼앗는 데에는 네 명으로 충분했으며, 오늘날 당신들처럼 권력을 좋아하고 강한 권력을 원하는 부르주아지가 당신들에게 권력을 내주지 않을 것임은 이 때문이다.

이처럼 집단적 역량의 수단인 권력은 노동과 특권 사이의 중재자로 쓰이도록 사회에서 창출된 것으로서 숙명적으로 자본에 유혹당하고 프롤레타리아트에 맞서서 행사되는 처지에 있다. 어떤 정치 개혁도 이 모순을 해결할 수 없다. 정치가들이 실토하는 바로서 그러한 개혁은 권력에 더 많은 기력과 확장을 가져다줄 뿐이며, 위계를 뒤엎고 사회를 해체할 것이 아니라면 권력은 독점의 특혜에 손을 댈 수 없을 것이다. 그러므로 노동계급에게 문제는 권력과 독점을 한꺼번에 정복하는 것이 아니라 극복하는 데 있다. 말하자면 인민의 뱃속, 노동의 깊은 속에서부터 더 큰 권위, 자본과 국가를 감싸는, 이것들을 굴복시키는 더 강한 사실이 솟아나게 하는 데 있다. 이 조건을 결코 충족하지 못하는 모든 개혁의 제안은 또 하나의 도리깨, 한 예언자가 말한, 프롤레타리아트를 위협하는 보초를 서는 막대기virgam vigilantem일 뿐이다.

이 체제의 왕관은 종교다. 종교적 견해들의 철학적 가치를 여기서 다루고, 그 역사를 이야기하고, 그 해석을 구할 필요가 나에게는 전혀 없다. 나는 종교의 경제적 기원, 종교를 공안 기구에 묶어주는 비밀스러운 연계, 일련의 사회적 발현 현상들에서 종교가 차지하는 위치를 고찰하는 것에 그친다.

사람은 자신의 여러 능력들의 균형을 찾기에 갈급해서, 말하자면 자신 밖으로 몸을 던져 무한 속에서 이 주권적 조화를 찾는데, 그 실현은 그에게는 이성, 힘, 행복의 가장 높은 정도가 된다. 자기 자신과 일치할 수가 없어 그는 신 앞에서 무릎을 꿇고 기도한다. 그는 기도하며, 그의 기도, 신에게 부르는 찬송은 사회에 대한 모독이다.

신으로부터 내게 권위와 권력이 온다고 그 사람은 혼잣말한다. 그러므로 신과 군주에게 복종하자(Obedite Deo et principibus). 신으로부터 내게 법과 정의가 온다. 내 도움으로 왕들이 통치하며, 귀족들과 땅의 모든 재판관들도 그러하다(Per me reges regnant, et potentes decernunt justitiam). 입법자와 검찰 행정관이 말한 것을 존중하자. 노동을 번창시키고, 재산들을 일으키고 뒤엎는 이는 신이다. 그의 뜻이 성취되기를! 주신 분도 주님이시오, 가져가신 분도 주님이시니, 주님의 이름을 찬양할 뿐입니다(Dominus dedit, Dominus abstulit, sit nomen Domini benedictum). 빈곤이 나를 삼킬 때, 그리고 내가 의를 위해 박해를 당할 때 나를 벌하는 이는 신이다. 그의 자비가 우리를 정화시키려고 사용하는 매를 존경으로 받아들이자. 당신들은 하느님의 능력의 손 아래로 자기를 낮추어라(Humiliamini igitur sub potenti manu Dei). 신이 내게 준 이 생명은 나를 안녕으로 이끄는 시련일 뿐이다. 즐거움에서 달아나자. 슬픔을 사랑하고, 추구하자. 고행을 즐거워하자. 불의에서 오는 슬픔은 천상의 은혜다. 우는 자들은 행복하다(Beati qui lugent!). … 억울하게 고난을 당하더라도 괴로움을 참으면 그것은 아름다운 일이다(Haec est enim gratia, si quis sustinet tristitias, patiens injuste).

한 세기 전에 한 선교사가 금융인과 대영주로 구성된 청중 앞에서 설교하면서 이런 역겨운 도덕을 논박했다. 그는 눈물을 흘리면서 이렇게 외쳤다. “내가 무엇을 했습니까? 나는 가난한 이들, 내 신의 최상의 친구들을 몹시 슬프게 했습니다! 나는 빵이 없는 불행한 이들 앞에서 고행의 가혹함을 설파했습니다. 내가 신의 이야기를 그 우레가 치는 온 힘으로 터뜨려야 했던 것은 여기 내 시선이 힘 있는 자들과 부자들에게, 고통 받는 인류의 압제자들에게 꽂히는 이곳입니다!”

그럼에도 체념의 이론이 항거를 막는 데 사회에 도움을 주었음을 인정하자. 종교는 신성한 권리로 권력과 특권의 불가침성을 성별하면서 인류에게 그 길을 계속 가고, 그 모순들을 없앨 힘을 주었다. 인민의 눈을 가린 이 눈가리개가 없었다면 사회는 천 번이나 해체되었을 것이다. 사회가 치료받기 위해 누군가는 고통을 겪어야 했다. 그리고 종교는 애통해하는 자의 위로자로서 가난한 자가 고통을 겪도록 결정했다. 우리가 지금 처해 있는 이 자리에 있도록 인도한 것은 이 고통이다. 문명의 모든 기적은 노동자 덕분인데, 이 문명은 또한 자신의 미래와 생존을 노동자의 자발적 희생에 빚진다. 그는 원했기에 바쳐졌고, 그가 매를 맞음으로써 우리의 병이 나았다(Oblatus est quia ipse voluit, et livore ejus sanati sumus).

오, 노동자 인민이여! 상속권을 박탈당하고, 괴롭힘을 당하고, 금지를 당한 인민이여! 투옥되고 심판받고 살해당한 인민, 조롱당하고 낙인찍힌 인민이여! 고행에도 헌신에도 끝이 있다는 것을 그대는 모르는가? 그대는 때로는 종교에 의한, 때로는 권력에 의한 안녕을 설파하며 그대에게 기도하면서 기다리라고 말하는 신비주의의 이 웅변가들에게 귀를 기울이기를 그만두지 않을 것인가? 맹렬하고 울리는 이야기로 그대를 사로잡는 웅변가들 말이다. 그대의 운명은 신체의 힘도, 영혼의 용기도, 열광의 계시도, 어떠한 감정의 고양도 풀 수 없는 수수께끼다. 그대에게 그 반대의 것을 말하는 자들은 그대를 미혹하며, 그들의 이야기는 모두 울릴 준비가 된 그대의 구원의 시간을 뒤로 늦추기만 한다. 필연과 싸우는 열광과 감정은 무엇이며, 공허한 시가는 무엇인가? 필연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자연의 마지막 이성이며 물질과 정신의 순수 본질인 필연 자체 말고는 없다.

이처럼 가치의 모순은 자유의지의 필연에서 태어나 가치의 비례성이라는, 자유와 지성이 결합해 만드는 다른 필연으로 극복되어야 했다. 그러나 지적이고 자유로운 노동의 이 승리가 그 모든 결과를 낳으려면, 사회가 고통의 긴 사태들을 통과해 가야했다.

그러므로 노동은 자신의 역량을 증대하기 위해 분업할 필요가 있었고, 이 분업의 사실로 인해 노동자는 저열화와 빈곤화를 겪을 필요가 있었다.

이 원초적 분업은 수단들과 교묘한 조합들로 재구성될 필요가 있었으며, 이 재구성에 의해 종속된 노동자는 합당한 임금과 함께 그를 먹여 살리는 산업에 종사할 기회까지 상실할 필요가 있었다.

그때 경쟁이 소멸할 준비가 된 자유를 해방하러 나올 필요가 있었고, 이 구원이 노동자들의 광범위한 제거에 다다를 필요가 있었다.

옛날에 전사가 무기를 들고 귀족이 된 것처럼 자신의 기술에 힘입어 귀족이 된 생산자가 사람의 용맹성이 전쟁에서처럼 노동에서도 영예를 얻도록 깃발을 높이 들 필요가 있었고, 특권으로부터 곧바로 프롤레타리아트가 태어날 필요가 있었다.

그때 사회가 패배하고, 구걸을 하고, 쉼터가 없는 평민을 보호 아래 둘 필요가 있었고, 이 보호가 새로운 일련의 형벌로 전환될 필요가 있었다.

우리는 우리 길 위에서 또 다른 필요들을 만날 것인데, 이것들도 결국에는 일반적 방정식, 최고의 필요, 노동의 왕국을 영원히 세워야할 승리의 사실이 오기까지 먼저의 필요들처럼 더 큰 필요들 아래서 사라질 것이다.

그러나 이 해결책은 손질 한 번으로도, 헛된 타협에서도 나올 수 없다. 노동 없이, 그리고 자본 없이 생산하는 것이 불가능한 것처럼 노동과 자본을 연합시키는 것도 불가능하다. 권력과 평등을 제거하고 인민이 없고 공안 기구가 없는 사회를 만드는 것이 불가능한 것처럼 권력으로 평등을 창조하는 것도 불가능하다.

거듭해서 말하건대 더 큰 힘이 사회의 현재의 공식들을 뒤집는 것이 필요하다. 교묘하고 합법적인, 불멸의, 회피할 수 없는 조합을 통해 자본을 인민에게 종속시키고 인민에게 권력을 넘겨줄 것은 인민의 용기도, 인민의 투표도 아니고, 인민의 노동일 필요가 있다.

제8장 모순의 법칙에서 인간과 신의 책임에 관해, 혹은 섭리 문제의 해결

옛사람들은 세상에 악이 현존하는 것에 대해 인간 본성을 비난했다.

그리스도교 신학은 이 주제에 관해 자기 식대로 이야기를 늘어놓았을 뿐이다. 그리고 이 신학이 사회의 기원에서부터 우리에게까지 이어져 오는 모든 종교적 시기를 요약하므로, 원초적 배임의 교리는 인류의 동의를 얻어 바로 이에 의해 가장 높은 정도의 개연성을 획득한다고 말할 수 있다.

이처럼 고대적 지혜의 모든 증언들에 따르면 어느 민족이든 자신의 고유한 제도들을 탁월한 것으로 수호하고 이에 영광을 돌리므로, 악의 원인을 소급할 필요가 있는 것은 결코 종교도 아니고, 정부도 아니고, 여러 세대의 존경 덕분에 받아들여지는 전통 관습도 아니며, 사람의 의지의 원초적 일탈, 일종의 천성적인 사악함이다. 한 존재가 어떻게 일탈하고 원초적으로 타락할 수 있었는지를 아는 문제에서 옛사람들은 교훈적인 우화로 난점을 벗어났다. 이브의 사과와 판도라의 상자는 그 상징적 해결책들 중에 유명한 것으로 남았다.

그러므로 고대는 그 신화들 안에 악의 기원 문제를 제시하기만 한 것은 아니다. 고대는 주저함 없이 우리 종의 원초적인 범죄성을 단언해 또 다른 신화로 이를 해결했다.

근대 철학자들은 그리스도교 교리와는 반대로 그에 못지않게 모호한 교리, 사회의 타락이라는 교리를 들고 나왔다. 사람은 선하게 태어난다고 루소는 그의 단호한 문체로 외친다. 그러나 사회, 즉 사회의 형태들과 제도들이 그를 타락시킨다. 역설, 혹은 더 제대로 말해서 그 제네바 철학자의 항의는 이런 말로 정식화된 것이다.

그런데 이 관념이 고대적 가설의 전복에 불과하다는 것은 명백하다. 고대인들은 개별 인간을 비난했다. 루소는 집단적 인간을 비난한다. 근본적으로 이는 언제나 동일한 명제이고, 터무니없는 명제이다.

아무튼, 원리의 근본적 동일성에도 불구하고 루소의 공식은 바로 그것이 반론이었기 때문에 하나의 진보였다. 그것은 또한 열광적으로 받아들여졌으며, 자가당착과 비일관성으로 가득 찬 반동의 신호가 되었다. 이상한 일이다! 근대 사회주의가 소급되는 곳은 『에밀』의 저자[35]로부터 벼락을 맞은 비난 대상이다.

70년 혹은 80년 전부터 사회적 일탈의 원리는 루소를 베끼면서도 이 작가의 반사회적 철학을 온 힘을 다해 배격하는, 그러나 사회를 개혁하기를 열망한다는 바로 그것만으로 그들도 루소처럼 반사회적이거나 반사교적이라는 것을 깨닫지 못하는 다양한 종파들에 의해 활용되고 대중화되었다. 이 의사擬似 혁신자들이 장 자크를 따라서 왕정, 민주주의, 재산권, 공동체, 네 것과 내 것, 독점, 임금 제도, 공안 기구, 조세, 사치, 상업, 돈, 한마디로 사회를 이루는 모든 것, 그것 없이는 사회가 상상될 수 없는 것들을 정죄하고, 바로 이 장 자크를, 그가 모든 유토피아들의 공허함을 알아차린 후 문명의 대립을 지적함과 동시에 사회 바깥에서는 인류가 없음을 인정하면서도 사회를 반대하는 결론을 엄격하게 내렸다는 이유로 인간 혐오와 반리反理로 고발하는 것은 신기한 광경이다.

나는 중상모략자들과 표절자들의 말을 믿고 루소가 공연한 기이함의 욕구를 통해서만 자신의 논제를 끌어안았다고 상상하는 이들에게 『에밀』과 『사회계약론』을 다시 읽어볼 것을 권한다. 이 경탄할 만한 변증가는, 무한한 진보를 믿는 우리가 사회의 현재 조건을 정상적이고 확정적인 것으로서는 부정하기를 그만두지 않는 것처럼, 사회를 필요한 것으로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정의의 관점에서 사회를 부정하도록 인도되었다. 단, 루소가 정치적 조합과 자기 자신의 교육 체계에 의거해 사람을 그가 자연이라고 부른 것, 그리고 그에게는 사회의 이상인 것에 접근시키려 노력한 반면, 더 심오한 학파에서 교육을 받은 우리는 사회의 과제가 그 이율배반들을 끊임없이 푸는 것이라고 말한다. 이는 루소가 알 수 없었던 것이다. 이처럼 지금은 방치된 『사회계약론』의 체계를 제쳐놓고, 비판에만 관련된 것으로서 사회주의는 그것이 무슨 말을 하든 아직은 루소가 끊임없이 사회를 개혁하지 않을 수 없었던, 즉 사회를 끊임없이 부정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과 같은 입장에 있다.

루소는 한마디로 간략하고 확정적인 방식으로 사회주의자들이 상세하게, 그리고 진보의 매 순간에 거듭 말하는 것, 즉 사회 질서는 불완전하며 무언가가 거기에 항상 결여된다는 것을 공언하기만 했다. 루소의 오류는 이 사회의 부정에 있지 않으며, 그럴 수도 없다. 그것은 우리가 보여주려고 하는 것처럼, 그가 자신의 논지를 끝까지 따라가서 사회, 인간, 그리고 신을 한꺼번에 부정할 줄을 몰랐다는 데 있다.

아무튼 인간 무죄의 이론은 사회의 타락 이론과 짝을 이루어 결국 우세를 점하게 되었다. 사회주의의 엄청난 다수, 생시몽, 오언, 푸리에, 그리고 그들의 제자들, 공산주의자들, 민주주의자들, 모든 종류의 진보주의자들은 추락의 그리스도교 신화를 엄숙히 베어내고, 대신 거기에 사회의 이탈이라는 체계를 놓았다. 그리고 이 종파들 대부분이 그들의 명백한 무신앙에도 불구하고 아직 너무 종교적이고 너무 독실해서 장 자크의 작품을 완성해 악의 책임을 신에게까지 소급할 수 없었으므로, 그들은 신의 가설로부터 인간의 태생적 선함이라는 교리를 도출할 수단을 발견했으며, 사회를 더 심하게 비판하기 시작했다.

이런 반응의 이론적이고 실천적인 결과들은 악, 곧 내적이고 외적인 투쟁의 결과가 그 자체로 비정상적이고 일시적인 것이어서 교도소와 형무소들이 똑같이 일시적이라는 것, 인간에게는 태생적 악은 없으며, 인간이 살아가는 환경이 그의 성향을 타락시켰다는 것, 문명은 그 자신의 지향에 관해 잘못 생각했다는 것, 제약은 부도덕하다는 것, 우리의 열정은 거룩하다는 것, 향락은 거룩하며 우리에게 그것을 갈망하게 만드는 신이 거룩하므로 덕성 자체로서 추구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여성들이 철학자들의 달변을 도와주러 와서, 성서의 비유를 활용하자면 자궁에서 거의 나온 듯이(quasi de vulva erumpens), 반제약적 항의들의 홍수가 깜짝 놀란 공중에게 떨어졌다.

이 학파의 글들은 그 복음적인 문체, 그 우울한 유신론, 특히 수수께끼의 변증법으로 식별된다.

루이 블랑 씨는 이렇게 말한다. “사람들은 우리의 거의 모든 악에 대해 인간 본성을 비난한다. 이에 대해서는 사회 제도들의 악함을 비난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주위를 살펴보라. 얼마나 많은 적격자들이 일자리를 잃고 따라서 타락을 겪는가? 얼마나 많은 활동이 그 정당하고 자연스러운 목표를 찾지 못해서 요란스러운가! 우리의 열정이 불순한 환경을 통과해 가도록 강요당한다. 우리의 열정은 거기서 변질한다. 그에 무슨 놀라운 점이 있는가? 건강한 사람을 오염된 대기에 데려다 놓으면, 그는 거기서 죽음의 숨을 들이쉰다. … 문명은 잘못된 길을 만들었다. … 그렇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라고 말하는 것은 공평, 도덕, 진보에 대해 말할 권리를 잃는 것이다. 이는 신에 대해 말할 권리를 잃는 것이다. 섭리는 가장 거친 숙명론에 자리를 양보하고 사라진다.” 블랑 씨의 『노동의 조직』에는 신의 이름이 40번 거듭 나오지만 언제나 아무것도 말해주는 것이 없다. 블랑 씨의 이 책은 내가 보기에는 다른 어떤 것보다 앞선 민주적 의견을 대표하고 또 이를 반증해 그에게 영예를 돌리는 것을 내가 좋아하기 때문에 즐겨 인용한다.

이처럼 사회주의는 극단적 민주주의의 도움을 받아 타락의 교리를 부정하면서 사람을 신성화하고, 결과적으로는 이제부터 그 피조물의 완성에 무익한 신을 권좌에서 내쫓는 반면, 바로 이 사회주의가 정신의 나태함 때문에 섭리를 단언하는 입장에 다시 빠지는데, 그것도 사회주의가 역사의 섭리적 권위를 부정하는 바로 그 순간에 그렇게 한다.

그리고 사람들 중에서는 아무것도 모순만큼 성공의 기회를 가지지 못하므로, 공적 이성이 기울어 가는 동안 에피쿠로스의 갱신된 쾌락의 종교 관념이 민족적 수호신의 영감으로 받아들여졌다. 새로운 유신론자들을 로마 가톨릭 신자들과 구분하는 것은 이런 종교 관념에 의해서인데, 이들이 2년 전부터 로마 가톨릭 신자들을 반대하여 소리를 높인 것은 광신적인 견제의식에 의해서일 뿐이다. 이것이 오늘날 신의 이야기를 모두에게 하고, 교황을 야단치고, 섭리를 불러들이고, 교회를 놀라게 하는 양식이다. 다행히도 우리는 결코 무신론자가 아니라고, 하루는 「개혁」 지가 말했다. 그런 만큼 더욱이 그 잡지는 우리는 그리스도교인이 아니라고 비일관성을 더해 덧붙일 수 있었다. 펜을 잡는 이라면 누구나 인민을 열중하게 하려고 그 말을 받아들였다. 그리고 새로운 신앙의 첫째 신조는 무한히 선한 신이 자신처럼 선하게 사람을 창조했다는 것이다. 이는 사람이 신의 시선을 받는 가운데 역겨운 사회 안에서 사악하게 되는 것을 막아주지 못한다.

그렇기는 하지만, 이런 겉치레들―이런 종교적 의향들이라고까지 말하자―에도 불구하고 사회주의와 그리스도교 전통 사이, 인간과 사회 사이에서 시작된 싸움은 결국 신성의 부정으로 끝나야 한다는 것이 온당하다. 사회적 이성은 우리에게는 신 자체 말고 다른 것이 아닌 절대 이성과 구분되지 않으며, 사회를 이전의 국면들에서 부정하는 것은 섭리를 부정하는 것이고, 신을 부정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처럼 모순적인 두 개의 부정, 두 개의 긍정 사이에 놓인다. 하나는 고대 전체의 목소리로 사회, 그리고 사회가 대표하는 신을 논외로 하면서 오직 사람에게 악의 원리를 돌려준다. 다른 하나는 자유로운, 지적이고 진보적인 사람의 이름으로 항의하면서 사회적 취약성에, 그리고 그 필연적 결과로 창조적이고 영감을 불어넣는 사회의 화신에, 우주의 모든 교란의 원인을 돌린다.

그런데 사회 질서의 비정상 상태들과 개인적 자유의 억압이 특히 경제적 모순들의 작용에서 나오므로, 우리는 우리가 조명해 온 자료들을 보면서 다음을 탐구할 필요가 있다.

① 우리를 둘러싼 숙명이 우리의 자유에 아주 강압적이고 강제적이라서 이율배반들의 득세 아래 저질러진 법률 위반은 우리 탓이기를 중단하는지? 그리고 그렇지 않은 경우에 이 사람에게 해당하는 죄책은 어디서 비롯하는지?

② 완전히 선하고 전능하고, 완전히 현명한 가설적 존재에게 신앙은 인간 행위들의 높은 차원에서의 방향을 맡기는데, 이 존재 자신이 사회가 위험에 처한 순간에 부재한 것은 아닌지? 그리고 그런 경우에 이 신성의 미흡함을 설명하기.

간단히 말해 우리는 인간이 신인지, 신 자신이 신인지, 혹은 지성과 자유의 충만에 도달하려면 더 우월한 주체를 찾아야 하는지를 검토할 것이다.

. 인간의 죄책타락 신화의 해설

이기심의 법칙 아래 사는 한에서 사람은 자기 자신을 고발한다. 사회 법칙의 개념을 알 정도로 성장하면서 그는 사회를 고발한다. 이 경우든 저 경우든 인류를 고발하는 것은 여전히 인류이며, 이 이중적 고발에서 지금까지 더 명확한 것으로 나오는 것은 우리가 아직 지적하지 않은, 그리고 종교가 사람에게처럼 신에게도 있다고 보는 이상한 능력, 뉘우치는repentir 능력이다.

그러면 인류는 무엇을 뉘우치는가? 우리에 대해서도 후회하는 신은 무엇 때문에 우리를 벌하기를 원하는가? 왜 사람을 만들었던가 싶으시어 마음이 아프셨다. 야훼께서는 “내가 지어낸 사람이지만, 땅 위에서 쓸어버리리라”하고 탄식하셨다(Paenituit Deum quod hominem fecisset in terra; et tactus dolore cordis intrinsecus, delebo, inquit, hominem…).[36]

그 위반 행위들이 인류의 관념 형성에서 나오며, 인간은 정의가 요구하지 않은 영웅적 행위로 스스로 영예를 취하듯이 악을 공연히 그리고 제약 없이 완수함에도 불구하고, 인류가 자책하는 위반 행위들이 결코 인류의 경제적 곤경의 결과가 아님을 내가 증명해 보여준다면, 인간은 그의 양심의 법정에서 특정한 정상참작을 내세울 수 있지만, 그는 결코 자신의 위법 행위의 책임을 완전히 벗어날 수 없다는 것, 투쟁은 그의 이성만이 아니라 그의 가슴에도 있다는 것, 이는 여전히 그의 부조화적 조건을 시인하는 것인데, 그는 때로는 칭송받을 만하기도 하고 때로는 비난받을 만하기도 하다는 것, 끝으로 그의 영혼의 본질은 대립하는 매력들 간의 끊임없는 타협이며 그의 도덕은 사소의 체계라는 것, 한마디로, 그리고 이 말이 모든 것을 말해주는데, 절충론이라는 것이 따라서 나올 것이다.

내 증명은 곧 완수될 것이다.

우리의 자유에 앞서 법이 존재하는데, 이는 세상의 처음부터 선포되고,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 완전하게 만들어지고 사도들, 순교자들, 신앙고백자들과 동정녀들에 의해 설파되고 증언되고, 사람의 내장에 새겨지고 모든 형이상학보다 위에 있는 법이다. 이는 사랑이다.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하라고 예수 그리스도는 모세 다음으로 우리에게 말한다. 모든 것이 거기 있다.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하라. 그러면 사회가 완전해질 것이다. 네 이웃을 네 몸처럼 사랑하라. 그러면 군주와 목동의 구분, 부자와 빈자의 구분, 학자와 무식자의 구분이 사라질 것이고, 인간들의 모든 이익 다툼이 소멸된다.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하라. 그러면 행복이 노동과 더불어 미래에 대한 아무 근심도 없이 너의 날들을 채울 것이다. 이 법을 완수하고 행복해지기 위해서는 사람은 자기 마음의 끌림을 따르고 자기 동정심의 소리를 듣기만 하면 된다. 그는 저항한다! 그는 그 이상을 한다. 이웃보다 자신을 우선시하는 데 만족하지 못하고 항시 이웃을 파괴하는 작업을 한다. 이기심으로 사랑을 배반한 후 그는 불의로 사랑을 뒤집는다.

자비의 법에 불충한 인간은 아무런 필연성도 없이 사회의 모순들로부터 남에게 해를 입히는 그만한 수단들을 자기 몸에 갖추었다. 이기심 때문에 문명은 기습전 그리고 매복전이 되었다. 그는 불가항력의 경우 외에도 도발도 없이 핑계도 없이 거짓말하고 도둑질하고 살인한다. 한마디로 그는 고의로 악행을 저지르는 본성, 그리고 원할 때에는 선을 마찬가지로 공연히 수행할 줄도 알고 또 그 본성에 관한 말이 있게 한 것으로서 깊이만큼 이성도 가지고서 헌신할 줄도 아는 만큼 더욱 사악한 본성의 모든 성격들을 가지고 악을 수행한다. 사람은 사람에게 늑대이거나 신이다(Hoimo homini lupus, vel deus).

이야기를 너무 확대하지 않기 위해, 특히 내가 재론해야 할 문제들에 관해 아무것도 예단하지 않기 위해 먼저 분석된 경제적 사실들의 한계 안에 머문다.

노동 분업이 그 본성상, 종합적 조직의 그날까지 사람들 사이의 신체적, 정신적, 지적 불평등의 거역할 수 없는 원인이라는 것에 대해 사회도 양심도 어쩌지 못한다. 이야말로 필연적 사실로, 그에 대해서는 부자도 국가에 의해 온갖 궁핍한 처지를 배정받은 파편적 일꾼처럼 무죄다.

하지만, 이 숙명적 불평등이 어떤 이들에게는 귀족의 자격으로, 다른 이들에게는 천민의 자격으로 바뀐 것은 어디서 나온 것인가? 사람이 선하다면, 그가 자신의 선량함으로 완전히 형이상학적인 이 장애물을 제거할 줄 알지 못한 것, 사람들 간에 형제애의 끈을 조이는 대신에 가차 없는 필연이 이를 끊는 것은 어디서 나온 것인가? 여기서 사람은 자신의 경제적 무능에 관해, 입법상의 경솔함에 관해 변명할 수 없다. 그에게는 가슴을 가지는 것으로 충분했다. 어째서 노동 분업의 순교자들은 부자들에게 지원을 받고 영예를 받아야 했는데도 불순물로 내버려졌는가? 주인들이 때로는 노예들과 교대해 주고, 군주들, 행정관들 그리고 사제들이 산업인들과 서로 교대하고, 귀족들이 부역을 하는 농민들을 대신하는 것을 어떻게 전혀 보지 못했는가? 힘 있는 자들의 이 잔혹한 고집은 어디서 생겼는가?

그리고 그들 쪽의 그런 행실은 단지 자비롭고 우애롭기만 했던 것이 아님에 주목하라. 이는 가장 엄격한 정의에서 나온 것이었다. 집단적 힘의 원리 덕분에 노동자들은 평등한 사람이고, 그 우두머리들과 같은 동료 조합원들이다. 그래서 독점 체제에서도 행위의 공동체가, 파편적 개인주의가 교란한 균형을 다시 잡아 주어 정의와 자비가 겹친다. 그러므로 어떤 이들의 권위를 귀족 신분으로 바꾸고, 다른 이들의 복종을 평민 신분으로 바꾸려는 괴상한 시도를, 사랑의 본질적 선함이라는 가설을 가지고서 어떻게 설명하겠는가? 농노와 자유인 사이에 노동은, 흑인과 백인의 피부색처럼 언제나 지울 수 없는 선을 그었다. 그리고 우리 자신은 우리의 박애주의로 아주 큰 영광을 누리는데, 영혼의 근본에서는 우리의 선배들처럼 생각한다. 우리가 프롤레타리아를 위해 느끼는 동정심은 동물들이 우리에게 불어넣는 동정심과 같다. 여러 기관器官들의 민감함, 빈곤에 대한 두려움, 우리에게서 고통을 받는 모든 존재를 멀리하려는 고집, 이야말로 이기심에서 어떠한 우회 수단을 통해 우리의 자비심이 생겨나느냐 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결국―그리고 나는 이 사실만 들고 싶은데, 헷갈리겠지만, 그것이 사실이 아닌가?―자발적 선행은 그 원시적 관념상으로는 아주 순수한 것(eleemosyna, 동정, 부드러움)이지만, 결국 자선은 불행한 이에게는 실추의 신호, 공적인 낙인이 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사회주의자들은 기독교를 바로잡으면서 우리에게 사랑에 대해 말하기를 감행한다! 인류의 양심인 그리스도교 사상은, 인류가 불운한 자들을 위안해 주기 위한 수많은 제도들을 일으키던 때에 제대로 생겨났다. 복음적 계율을 속속들이 파악하고, 법적인 자비를 그것을 실행하는 자들에게처럼 그 대상이 될 자들에게도 명예롭게 만들기 위해 무엇이 필요했나? 고집을 덜 부리고, 탐욕을 덜 갖고, 이기심을 덜 부리는 것이다. 사람이 선하다면 자선의 권리가 어떻게 위반, 위법 행위, 그리고 범죄의 긴 사슬의 첫째 고리가 되었는지를 누가 내게 말해줄 수 있을까? 이 적대성이 헌신으로는 아니라고 해도, 단순한 정의의 완수로써 그 사람에게 자기 마음의 자비를 표현할 아주 아름다운 기회를 제공할 때, 여전히 사람의 악행에 대해 사회경제의 적대성을 감히 비난할 것인가?

자비는 수치와 불명예를 겪는다는 것, 왜냐하면 이를 요청하는 개인은 너무나도 흔히―참 슬프도다!―비행非行의 혐의를 받기 때문이라는 것, 도덕관념과 노동의 존엄성은 이를 추천하는 일이 드물다는 것을 나는 알며, 이 반론은 내게 가해질 수 있었던 유일한 반론이다. 그리고 사고와 불운보다 나태와 무관심 때문에 가난해진 자가 열 배는 더 많다는 것을 통계는 수치로 증명해 준다.

나는 너무나도 많은 사실이 그 진실성을 보여주는, 게다가 인민의 승인을 받은 이 고찰을 인정하지 않을 생각이 없다. 인민은 가장 먼저 가난한 이들을 나태함으로 고발할 사람들이다. 하층 계급에서 귀족 자격을 자랑하듯 병원에 가 본 적이 없다고, 그리고 극심한 곤경에서 공공 자선으로부터 아무 도움도 받은 적 없다고 자랑하는 사람들을 만나게 되는 것은 일상적인 일 이상이 전혀 아니다. 이처럼 부유한 자가 자신의 약탈 행위를 실토하는 것처럼 빈곤 계층은 그 무능함을 고백한다. 사람은 운명에 따라 그렇게 되기 전에 의지에 따라 폭군도 되고 노예도 된다. 프롤레타리아의 가슴은 부자의 가슴처럼 끓어오르는 관능성의 하수구이며, 방탕과 사기의 온상이다.

이런 뜻밖의 폭로에 나는, 사람이 선하고 자비롭다면 부자는 자비를 욕하는 반면 가난한 이는 이를 더럽히는 일이 어떻게 일어나는지를 묻는다. 이것이 부자의 판단력의 타락이라고 어떤 이들은 말하고, 가난한 이의 능력의 저열화라고 다른 이들은 말한다. 그러나 한편에서 판단력이 타락하고, 다른 한편에서는 능력이 저열화하는 일은 어디서 생기는 것인가? 참된 그리고 충심의 우애가 이편과 저편에서 고집과 노동의 결과들을 멈추지 않은 것은 어찌 된 것인가? 문장이 아니라 이성에 의거해 누가 내게 답해주기를 기원한다.

노동은 자신의 위력을 무한히 배가시키는 공정과 기계들을 발명하고, 또 경쟁 관계로써 산업적 재능을 자극하고, 자본의 이윤과 사업의 특권을 통해 자신의 정복 행위를 보장하고, 사회의 위계적 형성을 더 깊게 그리고 더 불가피하게 만들었다. 다시 한 번 말하지만, 이에 대해 누구도 비난해서는 안 된다. 그러나 나는 새로이 복음서의 거룩한 법을 증언한다. 사람의 사람에 대한 종속, 혹은 더 제대로 말하자면 노동자의 노동자에 대한 종속에서 아주 다른 결과들을 끌어내는 것은 우리에게 달렸다.

봉건적 삶과 가부장들의 삶의 전통은 산업인들에게 모범을 제공했다. 노동 분업과 생산의 다른 우발적인 일들은 가족의 위대한 삶에 대한 호소, 우애가 그에 따라 드러나고 발달해야 했던 준비 체계의 지표들일 뿐이었다. 직공장, 조합, 그리고 장자 상속권은 이 관념에서 구상되었다. 많은 공산주의자들도 이런 형태의 조합을 꺼리지 않는다. 그 이상이 패배하기는 했지만, 아직 전향하지 않으면서 오늘날도 여전히 그 대표자들로 자리매김하는 이들 사이에서 그토록 뿌리 깊은 것은 놀라운 일인가? 그러므로 위계가 노동의 조건에 불과했던 마당에 누가 자비, 결합, 헌신이 위계 안에서 유지되는 것을 막았겠는가? 병기를 든 사람들, 용감한 기사들이 동등한 무기를 들고 싸우면서 자신들의 비밀을 숨기거나 제한하지 않기만 하면 되었다. 남작들은 자신들이 독차지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산물들의 가장 저렴함을 위해서만 전력투구하며, 전쟁이 결국 자신들의 부를 증가시켜주는 결과를 가져올 뿐임을 확신하는 봉신들은 언제나 사업가 기질을 가지고, 열심히 일하고, 성실한 모습을 보여주기만 하면 되었다. 그러면 작업장의 우두머리는 자신의 군사들을 자기 이익만큼 그들의 이익이 되게 지휘하는 지휘관이며, 그들을 자신의 돈이 아니라 그들 자신의 서비스로 먹여 살리는 부양자였을 뿐이다.

이런 우애로운 관계 대신에 우리는 고집, 질투, 배신을 부렸다. 주인은 전설 속의 흡혈귀처럼 착취하고, 임금 노동자는 비천해지고, 또 주인에 맞설 음모를 꾸민다. 한량은 노동자의 골수를 집어삼키고, 농노는 오물 속에 웅크린 채로 증오를 할 기력밖에는 가지지 못한다.

“생산 작업에 이 사람들은 노동 수단을, 저 사람들은 노동을 제공하라는 부름을 받아서 자본가들과 노동자들은 오늘날 싸우는 중이다. 왜인가? 자의성이 그들의 모든 관계를 주관하기 때문이며, 자본가는 작업 도구를 조달하려는 노동자가 느끼는 필요에 투기하는 반면 노동자 쪽에서는 자본가가 자기 자본의 열매를 맺게 하려고 느끼는 필요에서 몫을 차지하기를 구하기 때문이다.”(블랑, 『노동의 조직』)

그러면 자본가와 노동자의 관계에 왜 이런 자의성이 있는가? 왜 이런 이익상의 적대 관계가 있는가? 왜 이런 상호 간의 증오가 있는가? 사실 자체에 의거해 사실을 영구적으로 설명하는 대신, 근본으로 가보라. 그러면 당신은 어디서나 제일의 동인으로서 법도, 정의도, 자비도 묶어둘 수 없는 향유의 열정이 있는 것을 발견할 것이다. 당신은 이기심이 끊임없이 미래를 할인하고[37], 그 괴물 같은 변덕에 노동, 자본, 생명과 모두의 안전을 희생시키는 것을 보게 될 것이다.

신학자들은 관능적인 것들에 대한 열띤 탐욕을 사욕(邪慾, concupiscence) 혹은 물욕(appétit concupiscible)이라고 명명했다. 그들에 따르면 원죄의 결과이다. 나는 지금으로서는 원죄가 무언지를 아는 데 별로 신경 쓰지 않는다. 나는 단지 신학자들의 물욕이 우리 시대의 지배적 동인으로서 도덕 및 정치 과학 아카데미에서 지적한 이 사치적 필요 말고 다른 것이 아님을 관찰한다. 그런데 가치들의 비례성 이론은 사치가 생산을 자연적 척도로 삼고, 예상되는 모든 소비는 차후의 등가의 박탈에 의해 충당되고, 사회 내에서의 사치의 과장은 빈곤의 증가를 필수적 상관물로 한다는 점을 보여준다. 지금 인간이 사치스러운, 그리고 예상되는 향락에 자신의 인적인 행복을 빼앗을 때에는, 자비의 동기에서 그리고 정의의 대의에서 나는 그 사람이 악하다고, 변명의 여지없이 악하다고 말한다.

보쉬에(Bossuet)에 따르면, 신이 사람의 내장을 만들던 때에 거기에 우선 선함을 넣었다. 이처럼 사랑은 우리의 첫째 법이다. 순수 이성의 지시 사항들은 분별력의 권유 사항과 마찬가지로 둘째와 셋째 순서로만 나온다. 이런 것이 우리 능력들의 위계질서다. 사랑의 원리가 우리 양심의 기초를 이루며 지성과 여러 기관들의 보조를 받는다. 그러므로 둘 중 하나다. 자신의 탐욕에 복종하기 위해 자비를 유린하는 사람이 유죄이든지, 아니면 이 심리가 거짓이고 사람에게는 사치적 필요가 자비와 이성과 동등한 것으로 작동해야 한다면, 사람은 무질서하고, 근본적으로 악하고, 존재들 중 가장 끔찍한 동물이다.

이처럼, 사회의 유기적 모순들은 사람의 책임을 덮을 수 없다. 그 자체로 본다면 이 모순들은 위계적 체제의 이론으로서, 사회의 최초 형태, 따라서 나무랄 데 없는 형태일 뿐이다. 그 발달의 이율배반 때문에, 노동과 자본은 끊임없이 종속과 동시에 평등으로, 의존과 마찬가지로 연대로 향한다. 하나는 공동의 부의 매개체이고 다른 하나는 유발자이자 수호자다. 이런 지적은 봉건 체제의 이론가들에게 혼란스럽게 감지되었다. 그리스도교는 협정을 공고히 하기 위해 적시에 등장했다. 우리들 가운데 후회를 유발하고 한 당파의 희망을 지탱하는 것은 여전히 오해받고 왜곡당하는, 그러나 그 자체는 무죄이고 합당한 이 조직의 감정이다. 이 체제가 운명의 예상 안에 있었으므로, 그것이 그 자체로 나빴다고는 말할 수 없다. 생리적 발달에서 태아 상태가 성년에 앞선다고 해서 그것을 나쁘다고 부를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다.

그러므로 나는 내 고발을 강조한다.

루터와 프랑스 혁명에 의해 폐지된 체제에서 사람은 자신의 생업의 진보가 허용한 만큼 행복할 수 있었다. 그는 그런 행복을 원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는 그것을 멀리했다. 노동은 불명예로 여겨졌다. 성직자와 귀족은 가난한 자를 집어삼키는 자들이 되었다. 자신들의 동물적 열정을 만족시키기 위해 그들은 가슴에서 자비를 꺼뜨렸다. 그들은 노동자를 멸망시켰고, 억압했고, 죽였다. 그리고 자본이 프롤레타리아트를 사냥하는 것은 우리가 아직도 보는 일이다. 경제 원리들의 파괴적 경향을 조합과 상호성에 의거해 누그러뜨리는 대신, 자본가는 필연성 없이, 그리고 나쁜 의도로 이를 과장한다. 그는 직공의 감각과 양심을 오용한다. 그는 이를 자기 술책의 종으로 만들고, 자기 판로의 제공자로, 자기 약탈 행위의 공범으로 만든다. 그는 직공을 자신과 완전히 비슷하게 만든다. 그리고 이때 그는 혁명들의 정의가 그것에 미치지 못할 것이라고, 할 테면 해보라고 도발할 수 있다. 괴상한 일이다! 빈곤 가운데 사는 사람, 그 영혼이 결과적으로 자비와 명예에 더 가까운 것으로 여겨지는 이 사람이 자기 주인의 부패를 함께한다. 주인처럼 그는 고집과 색욕에 모든 것을 내놓으며, 때로 그가 고통을 겪는 원인이 되는 불평등에 항의한다면, 이는 정의의 열정 때문이라기보다는 사욕의 경쟁 관계 때문에 그런 것이다. 평등이 극복해야할 가장 큰 장애물은 결코 부자의 귀족적인 고집에 있지 않고, 가난한 자의 제어할 수 없는 이기심에 있다. 그런데 당신은 그의 악의의 자발성과 계획성을 한꺼번에 개혁하기 위해 그의 태생적 선함을 믿는다!

루이 블랑은 이렇게 말한다. “현세대에게 주어지는 거짓되고 반사회적인 교육은 보수의 증가가 아닌 다른 데서 분발심과 권장의 동기를 찾는 것을 허락하지 않으므로, 임금의 차등은 기능들의 위계에 맞게 등급화될 것이다. 완전히 새로운 교육이 이 점에서 관념들과 도덕관념을 바꾸어 주어야 하는 것이다.”

기능의 위계와 임금의 불평등을 그것들이 가지는 가치대로 놔두자. 여기서는 저자에 의해 주어진 동기만 고려하자. 블랑 씨가 우리 본성의 선함을 단언하고 동시에 우리 성향의 가장 비열한 면인 탐욕에 달려드는 것을 보는 것이 이상하지 않은가? 참으로 당신이 자비에 대한 위반으로써 자비의 복원을 시작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판단하려면 악이 당신에게 아주 심오한 것으로 여겨질 필요가 있다. 예수 그리스도는 고집과 탐욕을 정면에서 창으로 공격했다. 아마도 그가 훈계한 탕자들은 거룩한 인물들이었을 것이다. 사회주의에 감염된 그리스도교 신자들 옆에 있는 자들 말이다. 하지만 그렇다면 끝으로 우리의 관념들이 어떻게 왜곡되었는지, 우리의 교육이 어떻게 반사회적인지를 말해 달라. 지금 사회가 운명에 의해 그려진 길을 따라왔으며, 인간의 범죄들에 대한 책임을 사회에 씌울 수 없다는 것이 입증되니 말이다.

정말로 사회주의의 논리는 경이롭다.

사람은 선하다고 그들은 말한다. 그러나 사람에게 악행을 삼가게 하려면 그를 악에 무관심하게 할 필요가 있다. 사람은 선하다. 그러나 그에게 선을 행하게 하려면, 그가 선에 관심을 갖게 할 필요가 있다. 왜냐하면, 그의 열정의 관심이 그를 악으로 가져다 놓는다면 그는 악을 행할 것이며, 이 동일한 관심이 그를 선에 무관심하게 하면 그는 선을 행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면 사회는 그 사람이 자기 열정의 소리에 귀를 기울인 것에 대해 그를 비난할 권리가 없을 것인데, 이는 그를 그의 열정으로 이끈 것이 사회가 한 일이기 때문이다. 자신을 귀찮게 한다는 이유로 자기 어머니를 살해하고, ‘트로이의 자루’[38]를 재현하기 위해 로마를 불태우게 한 네로는 얼마나 부유하고 귀한 본성을 가졌는가! 성매매를 조직한 엘라가발루스(Héliogabale)는 얼마나 예술가적 영혼을 가졌는가! 티베리우스는 얼마나 위력 있는 성품인가! 하지만 이 신적 영혼들을 타락시킨, 그러면서도 타키투스와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를 만들어낸 사회는 얼마나 역겨운 사회인가!

그러니 이야말로 사람의 무죄, 그의 열정의 거룩함이라 부르는 것이다! 늙은 사포(Sapho)[39]는 애인에게 버림을 받고는 부부관계의 규범으로 다시 들어간다. 사랑에 무관심한 그는 결혼으로 돌아온다. 그리고 그는 거룩하다! 프랑스어에서 거룩한 여자sainte라는 이 말이 히브리어에서 가지는 이중적 의미를 가지지 않는 것은 참으로 애석하다! 모든 사람은 사포의 거룩함에 관해 의견이 일치할 것이다.

나는 벨기에의 철도 보고서에서, 벨기에 행정부가 기계 기사들에게 1리외lieue를 갈 때의 평균 석탄 소비량인 95킬로그램에서 절약되는 100리터당 35상팀의 장려금을 지급했는데, 이 장려금이 아주 큰 결실을 맺어서 소비량이 95킬로그램에서 48킬로그램으로 낮아졌다는 것을 읽는다. 이 사실은 사회주의 철학 전체를 요약한다. 일꾼에게 조금씩 정의를 교육하고, 일을 장려하고, 임금의 인상으로, 공동 참여로, 포장과 보상으로 그를 헌신의 절정으로 고양한다. 분명히 나는 세상처럼 오래된 이 방식을 결코 헐뜯을 생각이 없다. 당신이 뱀과 호랑이들을 어떻게 길들이고 유익하게 만들든지 나는 이에 갈채를 보낸다. 그러나 당신의 짐승들이 비둘기라고는 말하지 말라. 왜냐하면, 내가 해줄 대답이라고는 당신에게 그들의 발톱과 이빨을 보여주는 일일 것이기 때문이다. 연료의 절약에 관심을 갖기 전에 벨기에의 기계 기사들은 연료를 반은 더 태웠다. 그러므로 그들이 행정부를 상대로 그와 반대되는 온갖 미덕을 실행하게 의무화하는 계약으로 묶였음에도 불구하고 그들 쪽에서는 무관심, 태만, 흥청망청함, 낭비, 아마도 도둑질이 있었을 것이다. 일꾼에게 관심을 갖게 하는 것이 좋다고 당신은 말한다. 나는 이에 더해 그것이 정당하다고 말한다. 그러나 나는 이 관심이 합의된 의무보다 사람에게 더 위력적이고, 한마디로 의무보다 위력적이어서 사람을 고발한다고 주장한다. 사회주의는 도덕에서 퇴보한다. 그리고 그리스도교를 일축한다. 그것은 자비를 더 이상 이해하지 않는데, 사회주의가 하는 말을 믿는다면 자비를 발명한 것이 사회주의일 것이다.

‘그렇지만 우리 사회 질서의 완성이 이미 얼마나 행복한 결실을 맺었는지를 보라’고 사회주의자들은 생각한다. ‘반박할 것 없이 현세대는 앞선 세대들보다 낫다. 그로부터 완벽한 사회가 완벽한 시민들을 만들 것이라고 결론을 내린다면 우리가 틀린 것인가?’ 타락의 교리 추종자들인 보수주의자들이 대꾸한다. ‘차라리 종교가 가슴들을 정화시켰으므로 여러 제도들이 이 영향을 간직한 것이 놀랍지 않다고 말하라. 지금은 종교가 그 과업을 완수하게 두고, 사회에 대해 걱정하지 말라.’

이처럼 두 견해의 이론가들이 끝없는 여담으로 말하고 받아치고 한다. 그들은 이쪽이든 저쪽이든 인류가, 성서의 표현을 쓰자면 여러 세대들 중에 하나의 항상적인 인류라는 것, 즉 인류 안에서 모두가 그 발달의 시기마다, 집단으로처럼 개인으로, 존재l'être가 아닌 되어 감le devenir이라는 같은 원리로 진행한다는 것을 이해하지 못한다. 그들은 부의 진보가 노동이 자연의 인색에 대해 벌이는 전쟁의 결실인 것처럼 한편으로 도덕의 진보가 동물성에 대한 정신의 끊임없는 정복이라는 것, 태생적 선함이 사회에 의해 상실된다는 관념이 태생적 부가 노동에 의해 상실된다는 관념만큼 터무니없다는 것, 열정과의 타협은 휴식과의 타협과 같은 의미에서 취해져야 한다는 것을 알지 못한다. 다른 한편 그들은, 인류에게 종교라는 사실에 의해서든, 다른 어떤 원인에 의해서든 진보가 있다면 체제 타락의 가설은 무의미이고 모순이라는 것을 조금도 이해하려 하지 않는다.

그러나 나는 내가 내려야할 결론에 관해 예상한다. 인류의 도덕적 완성은 물적 행복의 예를 따라서 악과 덕 사이, 장점과 단점 사이의 계속되는 진자 운동에 의해 실현된다는 것을 확인하는 것에만 관심을 기울이자.

그렇다. 정의 면에서 인류의 진보가 있다. 하지만 우리 자유의 이 진보는 온전히 우리 지성의 진보 덕분으로, 확실히 말해서 우리의 본성이 선하다는 것을 말해주는 어떤 것도 증명하지 않는다. 그것은 우리 열정에 영광을 돌리는 것을 우리에게 허가해 주기는커녕 그 우세를 틀림없이 파괴한다. 우리의 악의는 시간이 가면서 그 양식과 양태가 달라진다. 중세의 영주들은 대로 위의 나그네에게 강도질을 했으며, 그러고는 자기 성에서 그에게 호의를 베풀었다. 중상주의적 봉건성을 덜 잔혹했으며, 프롤레타리아를 착취하고 그에게 병원들을 지어준다. 둘 중 어느 쪽이 미덕의 상을 받을 만했다고 누가 감히 말하겠는가?

모든 경제적 모순 중에서 가치는, 다른 모순들을 지배하고 집약하면서 말하자면 사회의 왕홀―나는 거의 정신세계의 왕홀이라고 말한다―을 쥔 모순이다. 가치가 두 극인 유용성 가치와 교환가치 간에 진자 운동을 하면서 그 형성에 결코 도달하지 못하는 동안, 네 것과 내 것은 자의적으로 고정된 채로 변함이 없다. 재산상의 조건들은 우연의 결과다. 재산권은 불안정한 자격에 의존한다. 사회경제에서 모든 것은 임시적이다. 가치의 이 불확실성으로부터 사회성 있고 지적이고 자유로운 존재들은 어떤 논리적 귀결을 끌어내야 했는가? 이는 타협적인, 노동을 보호하고 교환과 낮은 가격을 보장하는 규칙들을 만드는 것이었다. 충심, 초연성, 가슴의 부드러움으로 의와 불의의 객관적 법들의 무지를 보충한다는 것은 모두에게 얼마나 행복한 기회인가? 그 대신에 상업은 어디서나 자발적 노력과 만장일치의 찬성으로 사행적射倖的 작업, 성공불 계약, 도박, 흔히 기습적이고 사기적인 투기가 되었다.

생존 수단의 보유자, 사회의 창고지기가 기근을 가장하고, 경보를 울리고, 인상을 부채질하지 않을 수 없게 만드는 것은 무엇인가? 공공의 부주의가 소비자를 그의 호의에 의존하게 넘겨준다. 약간의 온도 변화가 그에게 핑계를 제공해준다. 확실시되는 이익의 전망이 마침내 그를 타락시키고, 능숙하게 전파된 염려는 인구를 그의 그물에 몰아넣는다. 확실히 사기꾼, 도둑, 살인자 등, 사람들이 하는 말로 사회 질서에 의해 망가진 이 본성의 소유자들을 움직이게 하는 동기는 필요 외에 약탈자를 생기 있게 만드는 동기와 동일하다. 그러니 이 이익의 열정이 그대로 방치된다면, 어떻게 사회의 피해로 전환되는가? 예방적, 억압적, 강제적 법은 어떻게 끊임없이 자유에 제한을 부과해야 했는가? 왜냐하면, 이것이 바로 고발하는 사실이며,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기 때문이다. 어디서나 법은 남용에서 나온다. 어디서나 입법자는 사람을 해를 끼치지 못하는 무기력 상태에 놓지 않을 수 없는 처지에 있었다. 이는 사자에게 입마개를 씌우고, 수퇘지의 생식기를 봉쇄하는 것과 동의어다. 그리고 사회주의는 언제나 과거를 모방하면서, 그 자신이 다른 것을 주장하지 않는다. 실제로 사회주의가 요구하는 조직이 정의에 대한 더 강력한 보장, 자유의 더 완벽한 제한이 아니라면 무엇인가?

상인에 대한 특징적인 면은 모든 것을 혹은 대상으로, 혹은 거래 수단으로 삼는다는 것이다. 동료들과의 조합에서 탈퇴하고, 모든 이에 대해 연대의 끈이 없는 그는 모든 사실, 모든 의견, 모든 당파에 찬성과 반대를 한다. 하나의 발견, 하나의 과학이 그의 눈에는 스스로 자기 경쟁자들을 죽이기 위해 활용할 수 없다면 그로부터 피해야할, 없애 버리고 싶은 전쟁 무기다. 예술가, 학자는 대포를 조작할 줄 아는 포병으로서, 그는 이 사람을 자기 사람으로 만들지 못한다면 부패하게 만들려고 애쓴다. 상인은 논리가 참과 거짓을 마음대로 증명하는 기술이라고 확신한다. 정치적 매수, 양심의 거래, 재능의 창녀짓, 언론의 부패를 발명한 이가 그다. 그는 모든 거짓말, 모든 악행을 편드는 논리와 옹호자들을 찾아낼 줄 안다. 오직 그만이 정당의 가치에 대해 결코 환상을 품지 않았다. 그는 정당들을 모두 똑같이 활용 가능하다고, 즉 똑같이 엉터리라고 판단한다.

자신이 실토한 견해를 버렸다 다시 취했다 하면서 이를 존중하지 않고, 다른 이들에게 자신이 저지르는 불충을 신랄하게 추궁하면서 그는 자신의 권리 주장에서 거짓말을 하고, 자신이 아는 정보에서 거짓말을 하고, 자신의 재고 목록을 가지고 거짓말을 하고, 과장하고, 약화시키고, 값을 지나치게 높게 부른다. 그는 자신을 세상의 중심이라고 여기며, 그 밖에 모든 것은 하나의 상대적 존재, 가치, 진실을 가질 뿐이다. 거래에서는 교묘하고 교활해서 조항을 약정하고, 유보하고, 언제나 너무 많은 말을 했다가 충분히 말하지 않다가 하며 이랬다저랬다 한다. 간단한 것들을 가지고 말을 남용하고, 좋지 않은 일에 말려들지 않기 위해 일반화를 하고, 아무것도 내주지 않기 위해 구체화를 하면서 자신을 세 번 돌아보고, 결론적인 말을 하기 전에 일곱 번을 입을 다물고 생각한다. 결국 그는 결론을 내렸는가? 그는 자신이 쓴 것을 다시 읽어보고, 자신의 말을 해석하고 주석을 단다. 그는 자기 행위의 각 알갱이마다 심오한 의미를 찾아내고, 가장 명확한 문장들에서 그 문장이 말하는 것과 반대되는 것을 찾아내느라 자신을 괴롭힌다.

일꾼과의 관계에서 얼마나 무한한 기술을 부리며, 얼마나 많은 위선을 부리는가! 단순한 관리자부터 거대 사업가에까지 그들은 얼마나 그의 수고를 활용할 뜻을 품으며, 노동을 낮은 가격에 획득하려고 노동을 놓고 논쟁을 하게 만들 줄 아는가! 우선은, 기대하는 것이 있어서 주인이 심부름꾼을 받아들인다. 그 다음에는 약속을 하는데, 그는 고역을 시켜서 이 약속을 깎아내린다. 그 다음으로는 시험, 희생을 요구한다. 왜냐하면 그는 아무도 필요하지 않기 때문이다. 불행한 이는 지극히 낮은 임금으로 만족하면서 이를 인정해야할 것이다. 가장 약탈적이고 가장 잘못된 회계 규정에 따른 보수를 받는, 책무들과 끝없는 추가 부담들이다. 그리고 일꾼은 입을 다물고 고개를 숙이는 것이, 작업복 외투 밑에서 주먹을 쥐는 것이 필요하다. 왜냐하면 주인이 일을 빼앗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의 사기 행각으로부터 혜택을 볼 수 있는 이는 너무 행복하다. 그리고 이 역겨운 압착 행위는 사회가 아직 그것을 막고, 억제하고, 처벌할 수단을 발견하지 못했으므로 아주 자연발생적이고, 아주 순진하고, 일체의 고상한 충동을 벗어버린 것인데, 사람들은 이를 사회적 제약 탓으로 돌린다! 얼마나 사리에 어긋나는가!

상거래 대행업자는 독점의 전형이고 가장 고급의 표현이며, 상업의, 말하자면 문명의 요체다. 모든 직무는 상거래 대행업자의 직무에 의존하고, 거기 참여하거나 동화된다. 왜냐하면 부의 분배라는 관점에서 사람들 서로 간의 관계는 모두가 가치물의 교환으로, 즉 운반으로 환원되므로 문명은 상거래 대행업자 안에 의인화되었다고도 말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상거래 대행업자들에게 그들 직업의 도덕성에 관해 물어보라. 그들은 선의를 지닐 것이다. 모두가 당신에게 상거래 대행은 강도질이라고 말할 것이다. 사람들은 산업을 불명예스럽게 만드는 사기와 위조에 대해 불평한다. 상업, 나는 특히 상거래 대행을 말하는데, 이는 경쟁자들이건 담합을 한 자들이건 차례로 독점자들의 거대하고 영구적인 결탁일 뿐이다. 이는 더 이상 합당한 이윤을 목적으로 실행되는 기능이 아니다. 이는 사람과 산물들의 유통에 대해서처럼 모든 소비 물품에 대한 방대한 투기 조직이다. 이미 사기는 이 직종에서 용인된다. 얼마나 많은 운송장이 가필이 되고 지워지고 위조되는가! 위조 우표가 얼마나 많은가! 얼마나 많은 운송 중 손상이 감추어지거나 사기성을 가지고 타협되는가! 품질에 대한 거짓말이 얼마나 많은가! 제시되었다가 취소된 말들이 얼마나 많은가! 말소된 증명서들이 얼마나 많은가! 음모와 결탁이 얼마나 많으며, 배신은 또 얼마나 많은가!

상거래 대행업자, 즉 상인, 즉 사람은 노름꾼, 중상모략자, 돌팔이, 돈으로 움직이는 자이고, 도둑이고, 위조자다.

신新 신비가들은 이것이 우리의 적대적 사회의 결과라고 본다. 어떤 상황에서도 세기의 부패를 고발하는 첫 사람들인 상인들도 그렇게 말한다. 그 말을 믿는다면, 그들이 하는 일은 순수한 복수이며, 완전히 자신들의 의사에 반하는 일이다. 그들은 필연을 따르며, 정당방위의 경우에 해당한다.

이 상호 비난이 사람의 본성 자체를 공격한다는 것, 사회의 타락이라고 주장되는 것이 사람의 타락 말고 다른 것이 아니라는 것, 원리들과 이익들의 대립은 외적인 우연으로서 우리의 이기심의 흉악함과 우리 인류가 자랑하는 드문 미덕을 별 영향력도 없이 부각시키는 외적 우연일 뿐이라는 것을 알기 위해 천재의 노력이 필요한가?

나는 부조화적 경쟁과 그것이 제거를 일으키는 저항할 수 없는 결과를 이해한다. 거기에 숙명이 있다. 경쟁은 고급스럽게 표현하자면 노동자들이 서로 자극과 지탱을 해주는 힘으로 활용하는 수단이 되는 톱니바퀴 장치다. 그러나 경쟁을 그 진정한 본성으로 올려주어야 할 조직이 실현되기까지는 경쟁은 생산자들이 노동에서 서로를 돕는 대신에 노동을 통해 서로를 짓부수고 짓이기는 내전임이 분명하다. 여기서 위험은 임박해 있었다. 사람은 그 위험을 쫓아내기 위해 사랑이라는 지고의 법을 가졌다. 경쟁을 생산의 이익이 되게 그 극단적 한계까지 밀어붙이면서도 그 다음으로 그 살인적 효과를 공평한 분배에 따라 복구하는 것보다 더 쉬운 일도 없다. 그와는 거리가 먼 이 무정부적 노력은 노동자의 영혼과 정신처럼 되었다. 정치경제학은 사람에게 이 치명적 무기를 돌려주었으며, 그는 내리쳤다. 그는 사자가 죽이고 잡아먹기 위해 발톱과 턱을 사용하는 것처럼 경쟁을 활용했다. 그러니 내가 거듭 말하건대, 완전히 외적인 우연이 어떻게 선하고 부드럽고, 사회성 있다고 가정되는 사람의 본성을 바꾸었는가?

포도주 상인은 젤리, 누에, 명충나방, 물과 독들의 도움을 요청한다. 그는 자기 우두머리의 조합들을 통해 경쟁의 파괴적 효과들을 더한다. 어디서 이런 집착이 나오는가? 그의 경쟁자가 그에게 모범을 제시한 데서 나온다고 당신은 말한다! 그리고 이 경쟁자를 자극하는 사람은 누구인가? 다른 경쟁자다. 그런 식으로 우리는 사회를 한 바퀴 순회할 것이며, 그러고서 우리는 그 열정, 고집, 게으름, 탐욕, 불신, 질투의 무언의 합의를 통해, 이 혐오스러운 전쟁을 조직한 것은 대중이고, 대중 안에서도 구체적으로 각 개인이라는 것을 발견할 것이다.

자신의 주위로 노동 수단, 제작 재료, 그리고 일꾼들을 모아들인 후에 기업가는 산물에서 그가 지출했을 비용과 함께 우선은 자기 자본의 이자, 그 다음은 이윤을 되찾아야 한다. 이자부 대출이 결국 정착된 것, 이득이 그 자체로 볼 때 언제나 합법적인 것으로 통해 온 것은 이 원리 때문이다. 이 체계에서 여러 민족들의 공안 기구는 처음부터 이자부 대출의 내적 모순을 알아차리지 못해 임금 노동자들은 직접 자신에게 속하기보다는 주인에게 의존해야 했다. 군인이 영주에게 속하고, 부족이 가부장에게 속한 것과 마찬가지다. 이런 체제는 필요했으며, 완벽한 평등이 확립되는 순간까지 모두의 행복에 충분했다. 그러나 주인이 무질서한 이기심을 가지고서 하인에게 너는 나와 몫을 조금도 나눌 수 없을 것이라고 말하고 일거에 일자리와 임금을 빼앗았을 경우에 그 숙명은 어디 있으며, 그 핑계는 어디 있는가? 물욕을 정당화하기 위해 아직도 분기憤氣에 의존할 필요가 있을까? 조심하라. 인간 존재의 일련의 탐욕을 정당화하기 위해 후퇴한다면 당신은 그의 도덕성을 구원하는 것이 아니라 적에게 내어주는 것이다. 나로 말하자면 야수인 인간보다 죄인인 인간을 선호한다.

자연은 사람이 사회성을 가지도록 만들었다. 그의 본능의 자연발생적 발달은 때로는 그를 자비의 천사로 만들고, 때로는 그에게서 우애의 감정과 헌신의 관념까지 빼앗는다. 이익에 지쳐서 일반적 선을 위해 모의하며, 프롤레타리아트의 해방을 자신의 마지막 투기로 삼는 자본가를 보았는가? 운명의 총애를 받아 선행의 왕관 말고 부족한 것이 없는 사람들이 많다. 그런데 어떤 식품상이 부자가 되고서 원가에 판매하려고 나서는가? 어떤 제과점 주인이 사업을 그만두면서 고객과 업소를 점원들에게 방치하는가? 어떤 약사가 은퇴한다고 자기 약들을 그 가치대로 넘겨주는가? 자비에 그 순교자들이 있을 때, 어떻게 그 애호가들은 없는가? 전격적으로 일정 수의 산업을 무료로 수행하도록 개혁적인, 그러나 봉사에 적합한 지주, 자본가, 기업가들의 대회가 결성된다면, 사회는 단시간에 머리끝에서 발끝까지 개혁될 것이다. 그러나 무료로 노동을 하다니! … 이는 빈첸시오 드 폴, 페늘롱 같은 이들, 영혼이 언제나 초연하고 마음이 가난한 모든 이들에게 고유한 것이다. 이득으로 부유해진 사람은 자치 참사회원, 자선위원회 위원, 어린이집의 간부가 될 것이다. 그는 모든 명예직을 차지할 것이다. 효율적이지만, 그의 습관상으로는 꺼려지는 바로 그런 직위는 제외하고 말이다. 이윤의 희망 없이 노동하는 것! 이는 자신을 파괴하는 것이니 될 수 없다. 그는 이를 아마도 하고 싶을 것이다. 그럴 용기는 없다. ‘나는 더 좋은 것을 보고 찬성하지만, 더 나쁜 것을 따르노라(Video meliora proboque, deteriora sequor).’ 은퇴한 소유주는 참으로 사지가 절단된 쥐들을 씹어 먹기를 기다리며 이 쥐들을 위해 너도밤나무 열매를 모으는 부엉이다. 아주 오랫동안, 아주 자유롭게, 아주 충만하게 만족된 열정의 이 효과들에 대해 아직도 사회를 고발할 필요가 있는가?

그러니 누가 지고의 덕성들과 가장 끔찍한 범죄들을 한꺼번에 행할 능력이 있는, 이 다중적이고 거스르는 존재의 신비를 설명할 것인가? 개는 자기를 때리는 주인을 핥는다. 개의 본성은 충성이고 이 본성은 개를 결코 떠나지 않기 때문이다. 양은 자기를 속이고 잡아먹는 목자의 팔 안에 피신한다. 어린양에서 분리될 수 없는 성격은 온유와 평화이기 때문이다. 말은 그 길에 뻗어있는 부상자들과 사망자들을 그 빠른 발로 밟지도 않으면서 화염과 빗발치는 총탄을 건너뛴다. 말의 영혼은 그 관대함에서 불변하기 때문이다. 이런 동물들은 그 변함없고 헌신적인 본성 덕에 우리에게 순교자들이다. 자기 목숨을 걸고 주인을 지키는 종이 약간의 금을 얻으려고 그를 배반하고 암살한다. 순결한 신부가 싫증이 난다고 혹은 남편이 부재중이라고 그의 침대를 더럽히며, 루크레티우스에게서 우리는 메살리나를 발견한다. 지주는 아버지이기도 하고 폭군이기도 해서 망한 소작인에게 힘을 북돋워주고 되살려 주면서, 자신의 땅에서 너무 수가 많은 그의 가족을 떼어낸다. 이들은 봉건 계약의 신뢰 아래서 불어난 가족이다. 기사단의 귀감이고 모범인 전사는 진급하기 위해 동료들의 시체를 발판으로 삼는다. 에파미논다스와 레굴루스는 자기 병사들의 피로 거래를 한다. 얼마나 많은 증거들이 내 눈앞을 지나갔는가! 그리고 무서운 대조를 이루며 희생의 서원은 비굴함을 가장 많이 낳는다. 다시 한 번 묻지만, 내가 이런 분리에 대해 무엇을 탓할 필요가 있는가?

사회의 적대 관계 탓이라고 당신은 언제나 말한다. 사람이 그 안에서 지금까지 살아온 분리, 고립, 자기 동류들과의 적대 상대 탓이라고, 한마디로 그의 가슴의 이 소외 탓이라고. 이는 그가 사랑 대신 향락을 취하고, 보유 대신 재산권을 취하고, 노동 대신 고통을 취하고, 기쁨 대신 술을 취하게 한 것이다. 끝으로 이 거짓된 양심 탓인데, 그 후회는 원죄라는 이름으로 끊임없이 그를 추궁해왔다. 사람이 사랑을 하게 될 때는, 그가 자신의 기력에서 나오는 자생성만을 가지고 생산을 하게 될 때는, 그가 오늘날 차지하는 데에 열정을 내는 것처럼 내주는 것에 열정을 내게 될 때는, 그가 노동과 헌신에서 자신의 유일한 행복, 자신의 지고의 쾌감을 추구할 때는, 그가 자신과 화해해 자기 이웃과 자연을 적대 세력으로 간주하기를 그만둘 때다. 그럴 때 사랑이 정말로, 그리고 분열 없이 온전히 사람의 법이 되어 정의는 공허한 이름, 폭력과 눈물의 시대의 성가신 기억에 불과할 것이다.

확실히 나는 적대 관계라는 사실, 혹은 당신이 그렇게 명명하기를 좋아할 것처럼, 종교적 소외라는 사실을 무시하지 않으며, 사람이 그 자신과 화해해야할 필요성도 무시하지 않는다. 내 철학이라고는 화해들의 계속일 뿐이다. 당신은 당신 본성의 대립이 사회의 서두이고, 더 제대로 말하면 문명의 몸통이라는 것을 인정한다. 내가 그 의미를 구하는 것은 바로 그 사실, 그러나 당신이 이를 잘 주목해야 하는데, 파괴할 수 없는 사실이다. 확실히 우리가 인간 능력들의 불화와 조화를, 구분되고 나누어지고 역사에서 이어지는 두 시기로 간주하는 대신, 당신이 거기서 나와 함께 언제나 반대되고 언제나 화해하고 있지만 결코 완전히는 화해하지 않은 우리 본성의 두 측면만을 보는 데 동의한다면, 우리는 서로 의견 일치에 더 가까워질 것이다. 한마디로 개인주의가 인류의 원초적 사실이듯, 조합association은 인류의 보완적인 항이다. 그러나 이 둘 모두 끊임없이 발현되고 있고, 지상에서는 정의가 영원히 사랑의 조건이다.

이처럼, 타락의 교리는 이성과 인간 도덕성의 특정하고 일시적인 상태의 표현일 뿐만이 아니다. 그것은 상징적인 문체로 파괴 불가능할 만큼 놀라운 이 사실, 우리 인류의 죄책, 악을 향한 성향에 대한 자연발생적 고백이다. ‘죄인인 내게 화가 있도다(voe nobis quia peccabimus)!’하고 도처에서 모든 언어로 인류의 양심이 외친다. 이 관녀을 구체화하고 극화하는 종교는 우리의 영혼에 내밀하고 임박한 것을 세계의 바깥으로, 그리고 역사의 뒤로 잘 미룰 수 있다. 종교 쪽에서는 이는 지적인 신기루였을 뿐이다. 종교는 그 사실의 본질성과 영속성에 관해 착각하지 않았다. 그런데 설명해야할 것은 언제나 이 사실이며, 우리가 원죄의 교리를 해석하려고 하는 것도 이 관점에서다.

모든 민족은 자신들의 속죄 관습, 뉘우침의 희생 제사, 죄의 공포와 후회에서 탄생한 형벌 제도들을 가졌다. 사회적 자생성이 어떤 관념을 표현하고 희망을 건 곳 어디서나 이론을 건설하는 로마 가톨릭은 죄인이 자신의 뉘우침을 표현하고 신과 사람들에게 자기 잘못에 대한 용서를 구하고 더 나은 삶을 위해 준비하는 상징적이고도 효과적인 예식을 성사로 전환시켰다. 또한 나는 종교개혁이 회개를 내팽개치면서, 회심에 관해 궤변을 늘어놓으면서 오직 신앙에만 정당성을 띠게 해주는 덕성이 있다고 하면서, 끝으로 고해에서 성별聖別을 벗겨내면서 한 발 후퇴했으며, 진보의 법칙을 완전히 무시했다는 것도 주저 없이 말한다. 부정하는 것은 응답하는 것이 아니었다. 교회의 남용 행위들은 다른 많은 점들에서처럼 이 점에서도 개혁을 불렀다. 고해, 영벌, 죄의 용서, 은혜의 이론들은, 내가 감히 말하자면, 잠재적 상태에서 인류의 모든 교육 체계를 포함했다. 이 이론들을 발전시켜 합리주의로 밀고 갈 필요가 있었다. 루터는 파괴할 줄밖에 몰랐다. 사제에게 하는 고해는 회개가 저열화된 것, 자기 낮춤의 위대한 행위를 대신한 애매한 쇼였다. 루터는 교황청의 위선에 한술 더 떠서, 신과 사람들 앞에서의 원시적 고백(exomologoûmai tô théô … kaî humîn, adelphoï)을 독백으로 축소시켰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교의 의미는 상실되었다. 그리고 그것이 철학에 의해 복구된 것은 3세기 뒤였다.

그래서 그리스도교, 즉 종교적 인류가 인간 본성에 본질적인 사실, 인류가 원초적 배임이라는 말로 지칭한 사실의 실재성에 관해 틀릴 수 없었으니, 그리스도교, 인류에게 다시 이 사실의 의미를 물어보자. 은유에도 암유에도 놀라지 말자. 진리는 모습들과는 독립적이다. 그리고 우리에게 진리는 시에서 산문으로의 우리 정신의 끊임없는 진보 말고 달리 무엇인가?

그리고 우선, 적어도 진기한 이 원초적 배임의 관념이 그리스도교 신학에 그 상관물을 어느 정도 가지지 않는지를 탐구해보자. 왜냐하면 참된 관념, 총칭 관념은 고립된 구상에서 나올 수 없기 때문이다. 계열이 필요하다.

그리스도교는 타락의 교리를 첫째 항으로 제시한 후에 이런 더러움의 상태에서 죽은 모든 이들에게 신과의 돌이킬 수 없는 분리, 형벌의 영원함을 단언하며 자신의 생각을 추구했다. 그러고서 이 두 대립을 복권 혹은 은혜의 교리로 화해시키면서 자신의 이론을 완성했다. 이 이론에 따르면 신의 증오 안에서 태어난 피조물은 신앙과 회개가 효력을 갖게 만드는 예수 그리스도의 공로에 의해 화해한다. 이처럼 우리 본성의 본질적 타락과 그리스도의 희생에 자발적으로 참여해 대속함이 없을 경우의 형벌의 영구성, 이런 것이 요컨대 신학적 관념의 진화다. 둘째 주장은 첫째 주장의 결과다. 셋째 주장은 나머지 두 주장의 부정이고 변형이다. 실제로 체제의 악은 필연적으로 파괴 불가능해서, 그것이 끌어들이는 속죄는 상위의 능력이 전체적 갱신으로 운명을 깨뜨리고 파문을 중단시키러 오지 않는 한 그것처럼 영원하다.

인간 정신은 인간의 가장 실증적인 이론들 안에서처럼 종교적 환상들 안에서 언제나 하나의 방법밖에 가지지 않는다. 동일한 형이상학은 그리스도교의 신비도, 정치경제학의 모순들도 만들었다. 신앙은 자기도 모르게 이성에 속한다. 그리고 신적인, 또 인간적인 발현 현상들의 탐구자들인 우리는 이성의 이름으로 신학의 가설들을 입증할 권리가 있다.

그러므로 아주 규칙적인 형이상학적 해석에 의거해 보편적 이성이 위법 행위의 교묘함, 벌의 영원함, 은혜의 필연성을 단언하던 때에 종교적 교리로 정식화된 보편적 이성이 인간 본성에서 본 것은 무엇인가? 신학의 베일은 아주 투명해지기 시작해서 신학은 자연사와 완전히 닮는다.

지고의 존재가 모든 존재들을 만든 작업을 우리가 창조력과 무한의 실체의 유출, 경주傾注가 아니라 이 실체적 힘의 분화 혹은 차등화로 상상한다면, 유기체이건 무기체이건 각 존재는 우리에게 무한한 존재의 무수한 잠재적 가능태들 중 하나의 특수한 표상으로, 절대의 한 분리체로 나타날 것이다. 그리고 이 모든 개체들(액체, 광물, 식물, 곤충, 어류, 조류, 포유류)의 군집은 창조이며 우주일 것이다.

인간은 우주의 축소판으로, 자신의 인신 안에 존재의 모든 잠재적 가능태를, 절대의 모든 분리체를 요약하고 통합한다. 그는 그 갈라짐에 의해서만 존재하는 이 잠재적 가능태들이 묶음으로 결합하지만 서로 침투하거나 혼동되지 않는 곳인 절정이다. 그러므로 사람은 이 집합에 의해 정신이면서 물질이고, 자연발생이면서 성찰이고, 기제이면서 생명이고 천사이면서 야수다. 그는 독사처럼 중상모략하고, 호랑이처럼 다혈질이고, 돼지처럼 대식하고, 원숭이처럼 음탕하고, 개처럼 헌신적이고, 말처럼 관대하고, 꿀벌처럼 일하고, 비둘기처럼 일부일처주의이고, 비버와 양처럼 사회성이 있다. 그는 더구나 사람, 즉 이성적이고 자유로우며 교육을 받을 수 있고 완성될 수 있다. 사람은 주피터만큼 많은 이름을 누린다. 이 모든 이름을 그는 자기 얼굴에 써 놓고 다닌다. 그리고 그의 틀림없는 본능은 자연의 변형된 거울에서 그것들을 알아볼 줄 안다. 뱀은 이성에는 아름답다. 뱀을 역겹고 흉하다고 보는 것은 의식이다. 옛사람들은 현대인들과 마찬가지로 모든 지상의 잠재적 가능태들의 군집에 따라 인간의 이 체질을 파악했다. 갈(Gall)과 라바터(Lavater)의 저작들은, 감히 이렇게 말하자면, 인간적 융합의 해체 시도들이며, 우리의 능력들에 대해서 행한 분류이며, 자연에 대한 압축된 그림이었을 뿐이다. 사람은 결국, 사자굴 속의 예언자처럼 진정으로 짐승들에게 넘겨진다. 그리고 무언가가 후세에게 우리 시대의 비열한 위선을 지적해주어야 한다면, 이는 학자들, 편협한 유심론자들이 우리 인간을 왜곡하고 해부학을 뒤엎으면서 종교와 도덕을 섬겼다고 믿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사람 주위에 그의 관념들의 점진적 발출이 배가시키는 모순들에도 불구하고 그의 지배 아래 놓인 여러 잠재적 가능태들에, 혹은 도덕가들이 말하는 것처럼 그의 열정들에 다소간 도약의 기회를 주는 것이 그 사람에게 달린 일인지를 아는 것 말고는 중요하지 않다. 다시 말해, 고대의 헤라클레스처럼, 인간이 자신을 괴롭히는 동물성을, 그를 잡아먹으려고 언제나 준비하고 있는 것으로 보이는 지옥의 군대를 극복할 수 있는지를 아는 것 말이다.

그런데, 여러 민족들의 보편적 동의가 증언하고, 우리가 제3, 4장에서 확인한 것은, 사람이 그의 모든 동물적 교사敎唆를 사상하면 지성과 자유로, 즉 우선은 평가하고 선택할 능력, 그 다음으로는 선과 악에 무차별하게 적용 가능한 행동 역량으로 요약된다는 것이다. 우리는 게다가 서로에게 필연적 영향력을 행사하는 이 두 능력이 발달할 수 있고, 무한한 완성 가능성을 가질 수 있다는 점을 확인했다.

사회적 운명, 인간적 수수께끼의 풀이말은 그러므로 교육, 진보라는 말에서 발견된다.

그래서 자유의 교육, 우리 본능의 길들임, 우리 영혼의 해방이나 구원이야말로 바로 레싱(Lessing)이 증명한 것처럼 그리스도교 신비의 의미다. 이 교육은 우리의 모든 생명, 그리고 인류의 모든 생명에 속할 것이다. 정치경제학의 모순들은 해결될 수 있다. 우리 존재의 내밀한 모순은 결코 해결될 수 없을 것이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인류의 위대한 스승들, 모세, 붓다, 예수 그리스도, 조로아스터 모두 속죄의 사도들이었고, 회개의 살아있는 상징들이었던 것이다. 사람은 본성상 죄인이다. 즉 본질적으로 악행하는malfaisant 자가 아니라 오히려 잘못 만들어진malfait 자다. 그리고 그의 운명은 끊임없이 자기 자신 안에 자신의 이상을 재창조하는 것이다. 이는 화가들 중 가장 위대한 라파엘로가, 예술은 사물을 자연이 만들어준 대로가 아니라 그렇게 만들었어야 했던 대로 나타내는 데 있다고 말했을 때 심오하게 느낀 것이다.

그러므로 신학자들을 가르쳐주는 것이 이제부터 우리가 할 일이다. 왜냐하면 우리만이 교회의 전통을 계승하며, 우리만이 성서와 공의회들과 교부들의 의미를 보유하기 때문이다. 우리의 해석은 더 확실하고 더 신빙성 있는 것으로 존재하는 것, 사람들 중에서 원용될 수 있는 가장 큰 권위인 관념들의 형이상학적 해석, 그리고 사실들에 의존한다. 그렇다. 인간 존재는 악하다. 이는 그것이 비논리적이기 때문이며, 그의 구조가 사회의 모순들과는 독립적으로 존재의 잠재적 가능태들을 끊임없이 투쟁에 붙잡아놓는 절충일 뿐이기 때문이다. 사람의 생명은 노동과 고통, 사랑과 향유, 정의와 이기심 간의 계속적인 타협일 뿐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사람이 자신의 하등한 유혹들의 차원에서 행하는 자발적 희생은 그와 신의 화해, 그가 천복의 일치와 영원한 기쁨을 받을 만한 자격을 갖게 해주는 신과의 화해를 준비하는 세례다.

사회경제학이 노동에서 끊임없이 질서를 마련해주고, 인류의 교육을 촉진하면서 가지는 목표는 그러므로 가능한 만큼 평등에 의거해 자비를 필요 없게 만드는 것이다. 이 자비는 그의 노예들에게 명령할 줄 모르는 자비다. 또는 더 제대로 말해서, 그 줄기의 꽃처럼 자비가 정의에서 돋아나게 하는 것이다. 음! 자비가 사람들 사이에서 행복을 창조할 역량을 가졌다면, 오래전부터 그것을 입증했을 것이다. 그리고 사회주의는 노동의 조직을 추구하는 대신 이렇게 말하기만 하면 되었을 것이다. 조심하세요, 당신은 자비를 소홀히 하는군요.

그러나 슬프도다! 사람에게 자비는 초라하고, 부끄럽고, 무르고, 미지근하다. 그것은 움직이려면, 약초와 향이 필요하다. 그런 이유로 나는 배임, 영벌, 구원의 삼중 교리, 즉 정의에 의한 완전화 가능성의 교리에 집착했다. 이 세상에서의 자유는 언제나 도움을 필요로 하며, 천상의 호의의 로마 가톨릭 이론은 우리 본성의 비참한 것들에 대한 너무 실질적인 이 증명을 보완하기 위해 나온다.

신학자들이 말한다. 은혜는 태평의 질서에서 우리를 영원한 생명으로 이끌 수 있는 도움 혹은 수단 전체다. 즉, 사람은 경험의 끊임없는 지원에 의해서, 산업, 과학, 예술에 의해서, 기쁨과 고통에 의해서, 한마디로 몸과 영혼의 모든 실행에 의해서만 완성되고 문명화되고 인간화된다는 것이다.

일상적 은혜, 또한 의롭게 하고 성화聖化해 주는 은혜라고도 칭해지는 은혜가 있다. 이는 영혼에 내주하는 성질로서 천부적 덕성과 성령의 은사들을 포함하는 성질, 그리고 자비와 불가분의 성질로 상상된다. 다시 말해 일상적 은혜는 선의 우세성 중에서 사람을 질서와 사랑으로 인도하는 매력들의 상징이다. 이 매력들을 통해 사람은 자신의 나쁜 성향들을 죽이고, 자신의 영역에서 주인 자격을 유지하게 된다. 실제적 은혜라는 것은 질서 잡힌 열정의 도약을 촉진하고 일탈적 열정들과 싸우는 것을 도와주는 외적 수단들을 가리킨다.

성 아우구스티누스에 따르면 은혜는 본질상 무료이며, 사람에게서 죄에 앞선다. 보쉬에는 시와 달콤한 말로 가득 찬 문체로 같은 생각을 표현했다. ‘신이 사람의 내장을 만들 때, 거기에 처음으로 선함을 넣었다.’ 실제로 자유의지의 첫 번째 결정은 이 자연적 선함에 있다. 이에 의해 인간은 끊임없이 질서, 노동, 연구, 겸손, 자비, 그리고 희생을 향하도록 부추겨진다. 그러므로 성 바울로는 자유의지를 공격하지 않으면서 선의 성취에 관한 모든 것에서 신은 우리 안에 원함과 행함을 작동시킨다고 말할 수 있었다. 왜냐하면 사람의 모든 거룩한 열망은 그가 생각하고 느끼기 전부터 그의 안에 있으며, 그가 그 열망들을 위배할 때 느끼는 가슴의 구김살, 그가 그 열망들에 복종할 때 그에게 넘치는 희열, 끝으로 사회로부터, 그리고 교육으로부터 그에게 오는 모든 초대는 그에게 속하지 않기 때문이다.

은혜가 의지와 환희와 사랑을 가지고 주저함 없이, 그리고 돌이킬 수 없이 선으로 향하는 것일 때 이는 효력 있다efficace고 말해진다. 모든 사람은 갑자기 소명, 영웅적 행위를 결심하는 이런 영혼의 열정에 대해 알았다. 자유는 거기서 소멸하지 않는다. 그러나 그 예정 때문에 자유가 그렇게 결심하는 것이 불가피했다고 말할 수 있다. 그리고 펠라기우스파, 루터파 등이 은혜가 자유의지를 위태롭게 했고 의지의 창조력을 죽였다고 말한 것은 잘못이었다. 의지의 모든 결정은 필연적으로 그 의미를 지탱하는 사회로부터 오거나 그에게 길을 열어주고 그에게 그의 운명을 보여주는 자연으로부터 오니 말이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아우구스티누스파, 토마스파, 상응주의자들, 얀선, 토마생(Thomassin), 몰리나(Molina) 등은 자유의지와 은혜를 한꺼번에 주장하면서 이 두 항 사이에 실체와 양태 간에 있는 것과 같은 관계가 있다는 것을 보지 못하고 존재하지 않는 대립을 실토했을 때, 이상하게 오해를 받았다. 자유가 지성처럼, 모든 실체와 모든 힘처럼 정해지는 것, 그것이 그 양태와 속성들을 가지는 것은 필연이다. 그런데 물질에서는 양태와 속성이 실체에 내재하고 실체와 동시대적인 반면, 자유에서는 양태는 말하자면 외부적인 세 매체, 인간적 본질, 사고의 법칙들, 실행 혹은 교육에 의해 주어진다. 끝으로 은혜는 그 반대자인 유혹처럼 자유의 결정이라는 사실 자체를 가리킨다.

요컨대, 인류 교육에 관한 모든 현대적 관념들은 은혜의 로마 가톨릭 교의, 그 저자들에게는 은혜에 대해서나 그 자유의지의 결정의 원천에 대해서 말하면서부터 위협을 받는다고 믿은 자유의지에 관한 자신들의 관념에 따라서만 모호하다고 여겨진 교의에 대한 하나의 해석, 하나의 철학일 뿐이다. 우리는 반대로 자유가 그 자체로 모든 양태에 무관심하지만, 미리 정해진 질서에 따라 움직이고 형성될 운명에 처해져서 자기에게 사랑, 지성, 용기, 단호함과 성령의 모든 은사를 불어넣고 자기를 경험의 일에 넘겨주는 창조주로부터 첫 충동을 받는다고 단언한다. 그에 따라서 은혜는 필연적으로 선 충동적이라는 것, 은혜 없이는 사람은 어떤 종류의 선도 행할 능력이 없다는 것, 그럼에도 자유의지는 자연발생적으로 성찰과 선택을 하면서 자기 자신의 운명을 성취한다는 것이 된다. 이 모든 것에 모순도 신비도 존재하지 않는다. 사람은 사람으로서 선하다. 그러나 역시 은혜의 박사였던 플라톤이 묘사한 폭군처럼 사람은 천 마리의 괴물을 품고 있어서, 정의와 과학에 대한 숭배, 음악과 체육, 모든 우연한 은총, 그리고 신분에 어울리는 은총들이 그가 이를 이겨내도록 해주어야 한다. 성 아우구스티누스에게 있는 정의를 바로잡으라. 그러면 그것이 일으킨 논쟁들, 종교개혁을 빗나가게 한 논쟁들로 유명한 이 모든 은혜의 교의는 당신에게 명확성과 조화로 빛나는 것으로 나타날 것이다.

그리고 지금 사람은 신인가?

신학적 가설에 따르면, 신은 주권을 가진 절대적이고 고도로 종합적인 존재, 무한히 지혜롭고 자유로우며 따라서 불멸하고 거룩한 나로서, 사람, 창조의 통합이며, 창조에 의해 발현된 모든 물리적, 유기적, 지적, 도덕적인 잠재적 가능태들의 결합점인 완성 가능하고 오류를 범할 수 있는 사람은 그의 정신의 본성상 상상하게 되는 신성의 조건들을 결코 충족하지 못한다는 것이 상식적이다. 그는 신이 아니고 살아서 신이 될 줄도 모를 것이다.

더구나 참나무, 사자, 태양, 우주 자체, 절대의 분리체들은 신이 아니다. 인간 숭배와 자연 숭배는 일거에 뒤집힌다.

지금 중요한 것은 이 이론을 반증하는 것이다.

사회적 모순의 관점에서 우리는 사람의 도덕성을 평가했다. 이번에는 같은 관점에서 섭리의 도덕성을 평가할 것이다. 다시 말해, 사변과 신앙이 유한자들의 숭배 대상으로 넘겨주는 것과 같은 신은 가능한가?

. 섭리 신화의 해설신의 퇴보

신학자들과 철학자들은, 그들이 신의 존재에 대해 제시하는 세 가지 증명들 중에 보편적 동의를 첫 줄에 놓는다.

나는 이 논리를 기각하지도 받아들이지도 않으면서 검토했으며, 바로 직후에 이렇게 자문해 보았다. 보편적 동의는 신을 긍정하면서 무엇을 긍정하는가? 그리고 이 점에서 나는 언어들의 다양성이 이성의 비실재의 증거가 아닌 것처럼, 종교들의 차이가 결코 인류가 자기 바깥에 지고의 나가 있음을 긍정하면서 빠졌을 오류의 증거가 아니라는 것을 환기해야 한다. 신神 가설은 약화되기는커녕 숭배 행위들의 갈라짐 자체와 대립에 의해 강화되고 정착된다.

또 한 종류의 논리는 세계의 질서에서 도출되는 논리다. 이 점에서 자연이 자연발생적으로 사람의 목소리로 정신과 물질상의 자기 자신의 독특함을 주장해서, 의식이 그 모호한 직관 속에서 우리에게 정신이 사람에게 활기를 준다고 말하듯이 무한한 정신, 세계의 영혼이 우주를 다스리고 움직이는지를 알아내는 문제가 내게 남았다. 그러므로 덧붙여 말하는데, 만약 질서가 정신의 현존의 틀림없는 지표라면, 우주에서 신의 현존을 무시할 수 없을 것이다.

유감스럽게도 이 만약은 전혀 증명되지 않았고, 증명될 수도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한편으로 물질과의 대립에서 상상되는 순수 정신은 모순적 존재자로서 결과적으로 그 실재를 아무것도 증언할 수 없기 때문이다. 다른 한편, 수정, 식물, 행성계 같은 그 자체로 질서정연한 일정한 존재들이 우리에게 느끼게 하는 감각들로는 우리에게 동물들처럼 감정을 가진 존재를 대하는 감정을 갖게 하지는 않아서 우리에게 전혀 의식이 없다고 여겨지므로, 어떤 정신이 유황 막대에 있다고 할 이유가 없듯이 세계의 중심에 있다고 가정할 이유는 더 이상 없다. 그리고 정신, 의식이 어딘가에 존재한다면 이는 오직 사람 속이 될 수 있다.

아무튼, 세계의 질서가 신의 존재에 관해 아무것도 가르쳐주지 않는다 해도, 그것은 아마도 그에 못지않게 소중한 것, 우리의 탐구에서 푯말로 활용할 것을 우리에게 드러내준다. 이는 모든 존재, 모든 본질, 모든 현상이 그 성질들에서 결과로 나오는 법칙의 총체, 내가 (제3장에서) 숙명 또는 필연이라고 명명한 총체에 의해 서로 연관된다는 것이다. 그럴므로 무한한 지성이 존재해서 이것이 이 법칙들의 체계 전체, 숙명의 장 전체를 포괄한다면, 이 무한한 지성에 지고의 의지, 우주적 법칙들의 총체에 의해 영원히 정해져서 결과적으로 무한히 강하고 자유로운 그런 의지가 긴밀한 침투로 결합한다면, 끝으로 이 세 가지 것, 숙명, 지성, 의지가 우주에서 서로 간에 꼭 들어맞고 동일하다면, 지금까지 우리는 거리낌을 주는 어떤 것도 발견하지 못한 것이 명확하다. 그러나 이것이 바로 그 가설인데, 이는 증명할 일이 남아있는 신인동형론이다.

이처럼 인류의 증언은 이 신이 무엇일 수 있는지를 말하지 않으면서 신을 계시하는 반면, 세계 질서는 우리에게 숙명, 즉 원인과 결과의 절대적이고 결정적인 총체, 한마디로 신이 존재한다면 이 신에 관해 본 것과 알게 된 것 같을 법칙들의 체계를 계시한다.

유신론자들이 제안한 신 존재의 세 번째이자 마지막 증명, 이들이 형이상학적 증명이라고 명명하는 것은 범주들의 동어반복적 해석 말고 다른 것이 아니다. 이는 아무것도 증명해주지 않는다.

무언가가 존재한다. 그러므로 무언가는 존재한다.

무언가가 다중적이다. 그러므로 무언가는 하나다.

무언가가 무언가보다 나중에 온다. 그러므로 무언가는 무언가보다 앞에 온다.

무언가는 무언가보다 더 작거나 더 크다. 그러므로 무언가는 모든 것들보다 크다.

무언가는 움직인다. 그러므로 무언가는 원동자다. 등등 무한히 계속된다.

이야말로 오늘날에도 아직 여러 학부와 신학교들에서 공교육 장관의 이름으로, 주교 전하들의 이름으로 신의 존재에 대한 형이상학적 증명을 한다고 하는 것이다. 이야말로 프랑스의 청년층 엘리트가 학위증을 잃고 법률, 의학, 공학과 과학들을 배울 수 없게 되지 않으려면 교수들을 따라서 떨리는 소리로 1년간 읊어대는 형벌에 처해지는 것이다. 확실히 무언가가 놀라게 할 권리를 가진다면, 이는 그러한 철학을 가지고서도 유럽이 여전히 무신론적이 아니라는 것이다. 여러 학교들의 알아들을 수 없는 말과 병행해서 유신론적 관념의 지속은 기적들 중에서도 가장 큰 기적이다. 그것은 신성에 유리한 쪽으로 내세울 수 있는 가장 강한 편견을 이룬다.

나는 인류가 신이라고 부르는 것을 모른다.

나는 이런 이름으로 이해할 필요가 있는 것이 사람인지, 우주인지, 아니면 무언가 다른 비가시적 실재인지, 아니면, 이 말이 하나의 이상만 표현한다면, 이성적 존재인지를 말할 수 없다.

그럼에도 내 가설에 실체를 부여하고 내 탐구에 기준점을 부여하기 위해 나는 통속적 견해에 따라 신을 별개의, 도처에 현존하는, 피조물과 구별되는, 무한의 학식과 활동 그리고 불멸의 생명을 타고난, 그러나 무엇보다도 예견력이 있고, 의롭고, 악을 징벌하고, 미덕을 보상해주는 존재로 간주할 것이다. 나는 범신론적 가설을 위선이고 가슴이 없는 것으로 멀리할 것이다. 신은 인격신이든지 아니면 존재하지 않는다. 이 대안은 내가 모든 변신론을 도출할 공리다.

그러므로 현재로서는, 나중에 신 관념이 제기할 수도 있을 문제들에 신경을 쓰지 않는다면, 내가 사회에서 그 진화를 확인한 사실들을 볼 때, 사람들이 내 신앙에, 그리고 인류에 관련해서 제안할 그런 신의 행위를 내가 무엇이라고 생각해야 할지를 아는 것이 중요하다. 한마디로 내가 새로운 변증법의 도움으로 지고의 존재를 가늠하고 싶은 것은 증명된 악의 존재의 관점에서다.

악은 존재한다. 이후로는 이 점에 모든 사람이 동의하는 것 같다.

그런데, 악의 현존을 주권자로서 선하고 지혜롭고 강력한 신의 관념과 어떻게 일치시킬 것인지를 스토아학파, 에피쿠로스학파, 마니교도들이 물었다. 그 다음으로 무능이든 태만이든 악의든, 악이 세상에 들어오게 한 후 자신이 불완전하게 창조한 피조물들, 그래서 그들의 유혹의 모든 위험에 넘겨 준 피조물들에게 그들의 행위에 대해 어떻게 책임지게 할 수 있었는가? 끝으로 그는 의인들에게 죽음 후에 불변의 천복을 약속하니, 혹은 다른 말로 하면, 우리에게 행복의 관념과 욕구를 주니, 어떻게 우리에게 영원한 형벌에 노출되게 하는 대신에 이승에서부터 악의 유혹에 넘어가면서 그 행복을 즐기게 하지 않는가?

그러한 것이 그 고대적 논조에서의 무신론자들의 항의다.

오늘날에는 결코 그런 논란은 없다. 유신론자들은 자신들 체계의 논리적 불가능성을 더는 염려하지 않는다. 사람들은 신, 섭리를 어디서나 원한다. 이 신조에 대해 급진주의자들과 예수회원들 간에 경쟁이 있다. 사회주의자들은 신의 이름으로 행복과 덕을 설파한다. 여러 학파들에서 교회에 가장 소리 높여 반대하는 이들은 신비가들 중에 제일가는 이들이다.

고대의 유신론자들은 자신들의 신앙에 더 신경을 썼다. 그들은 이 신앙을 증명은 아니라도 적어도 합리적인 것으로 만들려고 노력했다. 그들의 후계자들과는 반대로 확실성 바깥에서는 신자에게 존엄성도 안식도 없다는 것을 잘 느꼈던 것이다.

그러므로 교부들은 불신자들에게, 악은 더 큰 선의 결핍일 뿐이며, 언제나 최선에 관해 추론한다면 생각을 고정할 수 있는 지지점이 없게 되어 이는 엉뚱한 것으로 곧장 인도한다고 대답했다. 실제로 모든 피조물은 필연적으로 유한하고 불완전해서 신은 그의 무한한 권능에 힘입어 끊임없이 자신의 완벽성을 더할 수 있다. 이 점에서 언제나 어느 정도로는 피조물 안에 선의 결핍이 있다. 상호적으로, 피조물이 아무리 불완전하고 유한하다고 가정하더라도 피조물이 존재하는 순간부터 그 피조물은 일정한 정도의 선을 누리며, 이는 그에게는 무無보다 낫다. 그러므로 사람이 자신이 할 수 있는 모든 선을 완수하는 만큼만 선하다고 여겨지는 것이 기준이라면, 신에 대해서는 그렇지 않다. 무한히 선을 행할 의무는 창조의 능력 자체에 모순이니 말이다. 완성과 피조물은 서로를 필연적으로 배제하는 두 항인 것이다. 그러므로 신은 각 피조물에게 주는 것이 적당한 완성의 정도에 대한 유일한 심판자였다. 이 점에서 그를 고발하려고 의도하는 것은 그의 정의를 비방하는 것이다.

죄, 즉 도덕적 악에 관해서는 교부들은 무신론자들의 반론에 대한 대답으로 자유의지, 구속, 의화(義化, justification)와 은혜의 이론들을 가졌다. 이에 관해서는 재론할 필요가 없다.

나는 무신론자들이 피조물에 본질적인 불완전성의 이론, 드 라므네 씨의 『개요Esquisse』에서 선명하게 재현된 이론에 절대적인 방식으로 대응한 데 대해서는 전혀 알지 못한다. 사실 그들이 그에 대답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왜냐하면, 악과 자유의지에 대한 잘못된 개념에 따라, 그리고 인류의 법칙들에 대한 깊은 무지 속에서 추론해서 그들은 자신들의 의심을 이기기 위해서든, 신자들에게 반증을 하기 위해서든 마찬가지로 이성이 결여되었기 때문이다.

유한과 무한의 영역을 벗어나 질서의 개념에 자리를 잡기로 하자. 신은 둥근 원, 내각이 직각인 정사각형을 만들 수 있는가? 물론이다.

신이 기하학의 법칙에 따라 세상을 창조한 후에 우리 정신에 원은 정사각형일 수 있다거나 정사각형은 원일 수 있다는 것을, 이 잘못된 견해로부터 우리에게 일련의 계산할 수 없는 해악들이 나오게 될 텐데도 넣었거나 단지 우리의 잘못은 없이 이를 믿게 했다면, 유죄일까? 역시 물론 그렇다.

좋다! 바로 이것이 신, 섭리의 신이 인류를 다스리는 데서 행한 것이다. 이것이 바로 내가 그를 고발하는 것이다. 6000년의 우울한 경험 후에 우리 유한한 인생들이 발견한 것이니 그는 영원 전부터 알았다. 사회 안에서 질서, 곧 자유, 부, 과학은 각각을 개별적으로 절대적인 것으로 간주한다면 우리를 빈곤의 나락으로 빠뜨리게 될 상반되는 관념들의 화해에 의해 실현된다는 것을 말이다. 그는 왜 우리에게 이를 전혀 알려준 적이 없는가? 그는 애초부터 우리의 판단력을 바로잡지 않았는가? 특히 우리의 이기심이 그 불의와 배신 속에서 불완전한 논리를 펼 핑계를 찾아야했을 때, 그는 왜 우리의 그런 불완전한 논리에 우리를 방치했는가? 이 질투하는 신은, 우리를 경험의 우연에 넘겨주면 우리는 뒤에 가서야 우리의 행복을 온전히 이루는 생의 안정을 찾으리란 것을 알았다. 그는 왜 우리 자신의 법칙의 계시로써 이 수습 기간을 단축하지 않았는가? 그는 왜 모순되는 견해들로 우리를 유혹하는 대신, 경험을 뒤집어서 우리가 이율배반으로부터 종합으로의 깎아지른 정상에 힘겹게 기어오르게 하는 대신 종합적 관념들의 분석을 통해 이율배반으로 넘어가게 하지 않았는가?

옛날에 사람들이 생각했듯이 인류가 겪는 악이 단지 모든 피조물에 있는 불가피한 불완전성에서 유래한다면, 더 제대로 말해서, 이 악이 우리의 존재를 이루는, 그리고 이성이 제어하고 인도하는 법을 우리에게 가르쳐 주어야할 잠재적 가능태들과 성향들의 적대성만을 원인으로 한다면, 우리는 불평을 제기할 권리가 없을 것이다. 우리의 형편은 그럴 수 있을 만한 것으로서 신은 정당화될 것이다.

그러나 우리 오성의 이 비자발적인 환상, 흩어버리기가 아주 쉬웠던 환상, 그 결과가 아주 무서운 것이어야 했던 환상 앞에, 섭리의 핑계는 어디 있는가? 여기서 은혜가 인간에게 없었던 것이 진실이 아닌가? 신앙이 자비로운 아버지이고 현명한 주인으로 표상하는 신이 우리를 우리의 불완전한 구상의 숙명으로 넘겨준다. 그는 우리의 발밑에 구덩이를 판다. 그는 우리가 눈을 가리고서 가게 한다. 그러고는 우리가 자빠질 때마다 우리를 흉악한 범죄로 벌한다. 내가 무슨 말을 하는가? 결국에는 여행에서 모두 상처를 입은 우리가 우리의 길을 인식하게 되는 것이 그의 뜻에 어긋나는 듯하다는 것이다. 마치 그가 우리에게 부과하는 시련 때문에 더 영리해지고 더 자유로워지는 것이 그의 영광을 침해하는 것인 듯이 말이다. 그러므로 신성으로부터 우리가 끊임없이 권리로 주장할 필요가 있는 것은 무엇이고, 60세기 전부터 천 가지 종교들의 도움으로 우리를 틀리게 하고 빗나가게 하는 섭리의 이 위성들이 우리에게 원하는 것은 무엇인가?

뭐라고! 신은 소식들을 전해주는 자들을 통해, 그리고 우리의 마음에 넣은 법을 통해, 우리 이웃을 우리 자신처럼 사랑하라고, 타인에게 그들이 우리에게 해주기를 원하는 것처럼 해주라고, 각자에게 응당 돌아가야 할 것을 돌려주라고, 일꾼의 임금에 대해 사기를 치지 말라고, 고리를 받고 꾸어주지 말라고 우리에게 명령한다. 그는 게다가 우리에게는 자비가 미온적이고 양심이 흔들거린다는 것, 조금의 핑계도 우리를 그 법에서 면제해 주기에 충분한 이유인 것으로 여전히 우리에게 보인다는 것을 안다. 그리고 이론들의 치명성 때문에 자비와 정의가 틀림없이 망할 수밖에 없는 바로 그곳에서 그가 우리를 상업과 재산권의 모순들 가운데 뛰어들게 하는 것은 그러한 심성들을 가지고서 하는 것이다! 우리의 이성에 그 필연의 지배하는 온 힘을 가지고 과해지는 원리들, 그러나 그 결과들이 이기심에 의해 채택되면 인간의 우애에 치명적인 원리들의 위상에 관한 우리의 이성을 밝혀주는 대신에 그는 이 남용된 이성을 우리의 열정에 종이 되게 한다. 그는 우리 정신을 유혹해 의식의 균형을 파괴한다. 그는 우리 자신의 눈으로 보기에 우리의 횡령 행위와 우리의 탐욕을 정당화한다. 그는 인간과 그의 동류와의 분리를 불가피하고 합당한 것으로 만든다. 그는 노동과 권리에 의한 평등을 불가능하게 하면서 우리들 간에 분열과 증오를 창조한다. 그는 우리에게 세상의 법인 이 평등이 사람들 간에는 옳지 않다는 것을 믿게 만든다. 그러고는 우리가 그의 이해할 수 없는 계명들을 실천할 줄 몰랐다고 해서 집단적으로 우리를 추방한다! 확실히 나는 섭리의 버림은 우리를 정당화해주지 않는다는 것을 증명했다고 믿는다. 하지만, 우리의 범죄가 무엇이든 우리는 섭리 앞에서 결코 유죄가 아니다. 그리고 우리 앞에, 우리보다 더 지옥에 걸맞았던 존재가 있다면, 나는 그에게 이름을 붙여줄 필요가 있다. 그는 신이다.

유신론자들이 자신들의 섭리 교리를 확립하기 위해 그 증거로 자연의 질서를 언급했을 때, 이 논리가 선결 문제 요구의 오류일 뿐임에도 불구하고, 적어도 그것이 모순을 내포한다고, 인용된 사실이 그 가설에 불리한 진술을 한다고 말할 수 없다. 예를 들어서 어떤 것도 세상의 체계에서 지고의, 지적이고 인격적인 원동자의 관념에 반대되는 어떠한 편견이라도 끌어낼 수 있는 조금의 변칙도, 극히 경미한 경솔함도 발견하지 못한다. 한마디로, 자연의 질서가 섭리의 실재를 결코 증명하지 못한다 해도, 이를 반박하지 않는다.

인류의 통치에서는 이는 완전히 다르다. 여기서 질서는 물질과 동시에 나타나지 않는다. 그것은 결코 세상의 체계에서처럼 일거에 영구히 창조된 것이 아니다. 그것은 인간 존재 자신, 질서화할 존재가 자연발생적으로 자기 자신의 기력에 힘입어, 그리고 경험의 간청으로 도출해야할 원리들과 결과들의 숙명적 일련에 따라 점진적으로 발달한다. 이 점에서 어떠한 계시도 그에게 주어지지 않는다. 사람은 미리 정해진 필연, 절대적이고 저항할 수 없는 질서에 종속된다. 이 질서가 실현되려면, 사람이 이를 발견할 필요가 있다. 이 필요성이 존재하려면, 사람이 이를 간파할 필요가 있다. 이 발명 작업은 단축될 수 있을 것이다. 하늘에서건 땅에서건 아무도 사람을 도와주러 오지 않을 것이며, 아무도 그를 가르치지 않을 것이다. 인류는 수백 세기 동안 자신의 세대를 집어삼킬 것이다. 인류가 숭배하는 신이 한번 와서 인류의 이성을 밝혀주고 그의 시현을 단축해주는 일 없이 피와 진창 속에서 기력이 고갈될 것이다. 여기서 신적인 조치는 어디 있는가? 섭리는 어디 있는가?

“신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그를 발명할 필요가 있을 것”이라고 종교들의 적인 볼테르는 말했다. 왜? 바로 이 볼테르가 덧붙여 말한다. “나를 모르타르 반죽 안에 갈아 넣는 데 관심 있는 무신론자 군주를 상대할 일이 있다면, 내가 그렇게 갈려 넣어지리라는 것을 확신하기 때문이다.” 위대한 정신의 이상한 망언이다! 그렇다면, 당신을 산 채로 불에 태우라고 신의 이름으로 고해 신부에게 명령을 받은 독실한 군주를 상대할 일이 있다면, 당신은 역시 불에 태워지리라고 확신하지 않을 것인가? 그러므로 적그리스도인 당신은 종교재판, 성 바르톨로메오 축일의 학살, 바니니와 브루노의 화형대, 그리고 갈릴래아의 고문 행위, 그리고 수많은 자유사상가들의 순교를 잊고 있는가? 여기서 사용과 남용 간에 구분을 하려 들지 말라. 왜냐하면, 신비적이고 초자연적인 원리, 모든 것을 포괄하며 모든 것을 정당화하는 원리로부터는, 신의 관념이 그런 것처럼 모든 결과가 합당하며, 신자의 열심만이 적당함의 유일한 심판자라고 내가 당신에게 대답할 것이기 때문이다.

루소는 이렇게 말한다. “나는 옛날에 사람은 누구나 정직한 사람이면서 신이 없이 지낼 수 있다고 믿었다. 그러나 나는 이 오류로부터 되돌아왔다.” 근본적으로는 볼테르의 추론과 같은 추론이고, 불관용에 대한 같은 정당화다. 사람은 선을 행하며, 자신을 감시하는 섭리에 대한 고려에서만 악을 삼간다는 것이다. 이 고려를 부인하는 자에게는 파문을 내린다는 것이다! 그리고 황당함을 메우기 위해 이처럼 보상해 주기도 하고 보복을 가하기도 하는 신성의 강제 이행을 우리의 덕에 대해 요청하는 바로 그 사람은 또한 인간의 태생적 선함을 신앙의 교리로 가르치는 사람이다.

그리고 나는 이렇게 말한다. 지적이고 자유로운 인간의 첫째 의무는 자기 정신과 자기 양심으로부터 신 관념을 끊임없이 축출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신은 만약 존재한다면 필수적으로 우리의 본성에 적대적이기 때문이며, 우리는 결코 그의 권위에 속하지 않기 때문이다. 우리는 그의 뜻과 다르게 과학에 도달하고, 그의 뜻과 다르게 행복에 도달하고, 그의 뜻과 다르게 사회에 도달한다. 우리가 이루는 진보마다 이는 우리가 신성을 짓이기는 승리다.

신의 길들을 예측할 수 없다고 더 이상 말하지 말라! 우리는 이 길들을 꿰뚫어보았으며, 거기서 피로 된 문자로, 신의 악의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면 무능의 증거들을 읽었다. 오래전에 낮추어진 내 이성은 점점 무한의 수준으로 높아진다. 시간이 가면서 그것은 자신의 무경험이 그에게서 빼앗는 모든 것을 발견할 것이다. 시간이 가면서 나는 불행을 만드는 장인이기를 점점 덜 하고, 내가 얻게 될 빛으로, 내 자유의 완성으로 나를 정화할 것이고, 내 존재를 이상화할 것이고, 창조주, 신의 동등자가 될 것이다. 단 한 순간의 무질서도 전능자가 막을 수 있었는데 막지 않은 것은 그의 섭리를 고발하고 그의 지혜를 실패하게 한다. 무식하고 버려지고 배반당한 사람이 선을 향해 성취하는 극히 작은 진보도 그를 한없이 영예롭게 한다. 신은 무슨 권리로 아직도 내게 이렇게 말하는 것인가? 내가 거룩하니 너도 거룩하라고. 나는 그에게 이렇게 대답할 것이다. ‘거짓말 하는 영이며 바보 같은 신이여, 당신의 나라는 끝났소.’ 짐승들 중에서 다른 희생 제물을 찾아보시오. 나는 거룩하지도 않고 결코 거룩해질 수도 없다는 것을 아오. 내가 당신을 닮았다면 당신은 어떻게 거룩할 것이오? 영원한 아버지, 주피터 또는 야훼여, 우리는 당신을 아는 법을 배웠소. 당신은 아담의 질투자, 프로메테우스의 폭군이며, 그런 것이었으며, 언제까지나 그럴 것이오.

이처럼 나는, 그릇이 도기장이에게 왜 나를 이렇게 만들었냐고 말하는 것을 금하면서 성 바울로가 반증한 궤변에 빠지지 않는다. 나는 나를 부조화된 피조물로, 앞뒤가 맞지 않는 조립물로 만들었다고 조물주를 결코 비난하지 않는다. 나는 이 조건에서만 생존할 수 있었다. 나는 그에게 이렇게 외치는 것으로 만족한다. ‘당신은 왜 나를 속이는가? 당신의 침묵으로 당신은 왜 내 안에서 이기심을 풀어놓았는가? 당신은 왜 내 오성에 놓아둔 적대적 관념들의 쓰라린 환상으로 내가 보편적 의심의 고문을 받게 했는가? 진리에 대한 의심, 정의에 대한 의심, 내 양심과 자유에 대한 의심, 당신 자신에 대한 의심, 오 맙소사, 그리고 이 의심의 결과로 나 자신과 그리고 내 이웃과의 전쟁이다. 지고의 아버지여, 이야말로 당신이 우리의 행복과 당신의 영광을 위해 한 일이며, 이야말로 태초부터 당신의 의지와 당신의 통치가 어떤 것이었는지를 보여주는 것이다. 이야말로 당신이 우리에게 먹인 피와 눈물로 주물러 만든 빵이다. 우리가 당신에게 사면을 요구하는 잘못들, 그 행위를 우리가 범하게 하는 것이 당신이다. 우리가 그로부터 구해 달라고 당신에게 간청하는 올무들을 당긴 것은 당신이다. 우리를 포위하는 사탄, 이 사탄은 당신이다.’

당신은 승리했으며, 우리 인류의 형상인 의인 욥을 그 몸과 영혼에 고문한 후 당신이 그의 솔직한 충심, 그의 사려 깊고 존경스러운 무지를 모욕했을 때 아무도 당신에게 감히 반박하지 않았다. 우리는 보이지 않는 폐하, 하늘을 천장 삼고, 땅을 발판 삼는 폐하 앞에서 허무와도 같았다. 그리고 지금 바로 당신은 왕좌에서 쫓겨나고 제거되었다. 아주 오랫동안 학자의 최종 결론, 재판관의 강제 이행 수단, 군주의 힘, 빈자의 희망, 뉘우치는 죄인의 피난처이던 당신의 이름, 이 표현할 수 없는 이름은 이제부터는 오해와 파문을 당할 운명에 처해 사람들 중에서 야유를 받을 것이다. 왜냐하면 신은 바보짓이고 비열한 짓이기 때문이며, 신은 위선이고 거짓말이기 때문이며, 신은 폭정이요 빈곤이기 때문이며, 신은 악이기 때문이다. 인류가 제단 앞에 엎드릴 것인 한에서 왕들과 사제들의 노예인 인류는 배척을 당할 것이다. 사람이 신의 이름으로 다른 사람의 설교를 받아들일 것인 한에서 사회는 거짓 선서 위에 세워질 것이고, 평화와 사랑은 유한자들 중에서 추방당할 것이다. 신이여, 물러나라. 오늘부터 당신에 대한 두려움에서 치유되고 지혜로워진 나는 손을 하늘로 높이 들고서 당신이 내 이성의 학대자이고 내 양심의 유령이라고 단언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나는 인류에 대한 신의 지배권을 부정한다. 나는 그의 섭리적 통치를 기각한다. 그런 것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은 인류의 형이상학적이고 경제적인 환각에 의해, 한마디로 우리 인류의 순교에 의해 충분히 확인되는 것이다. 나는 인간에 대한 지고의 존재의 판결을 거부한다. 나는 그에게서 그의 선하고, 관대하고, 자비롭고, 기꺼이 돕고, 보상해 주고, 복수를 행하는 아비, 왕, 심판관 자격을 빼앗는다. 섭리의 관념을 이루는 이 모든 특성은 문명의 자율성과 화해 불가능하며, 게다가 문명의 일탈과 재앙의 역사에 의해 거짓인 것으로 반박되는 인류에 대한 풍자화일 뿐이다. 신이 더 이상 섭리로 상상될 수 없다고 해서, 당신이 신에게서 인간에게 그토록 중요한, 인간이 주저 없이 신의 동의어로 만든 이 특성을 빼앗는다고 해서, 신이 존재하지 않고, 신학 교리의 허위성이 그 내용의 실재성 면에서 지금부터 증명되는 결과가 되는가?

아 슬프도다! 그렇지 않다. 신적 본질에 관한 선입견은 파괴되었다. 동시에 인간의 독립성이 확인된다. 이야말로 전부이다. 신적 존재의 실재성은 공격 대상 바깥에 변함없이 남아있으며, 우리의 가설은 여전히 존속한다. 섭리의 경우에 신이 그랬을 것이 불가능하다는 점을 증명해 보이면서 우리는 신 관념의 확정에서 첫걸음을 떼었다. 지금은 이 첫 번의 주어진 바가 그 가설에서 남는 것과 일치하는지를 아는 것, 따라서 지성의 같은 관점에서 신이 존재한다면 그 신이 무엇인지를 정하는 것이 문제다.

왜냐하면, 경제적 모순들의 영향 속에서 인간의 죄책을 확인한 후에 우리는 인간을 훼손된 상태로 두지 않으려면, 그리고 인간을 무시해도 상관없는 풍자거리로만 삼지 않으려면, 이 죄책의 동기를 설명해야 했던 것과 마찬가지로, 신에게서 섭리의 망상을 인식한 후에 어떻게 이 섭리의 결여가 제안된, 그리고 아무것도 아직은 거짓이라고 증명하지 않는 가설에 위배되지 않게 주권적 지성 및 자유의 관념과 조화를 이루는지를 탐구해야 한다.

그러므로 나는 신이 있다면 이 신은 결코 철학자들, 사제들이 만든 허수아비와 닮지 않았다고, 그는 분석, 예지, 그리고 인간의 독특한 특징인 진보의 법칙에 따라 생각하지도 행동하지도 않는다고, 반대로 그는 역방향의 행로를 따라 후퇴한다고, 신에게 있는 지성, 자유, 인격은 우리와 다르게 형성되었다고, 그리고 완벽하게 동기를 부여받은 이 자연적 독창성은 신을 본질적으로 반문명적이고, 반자유주의적이고, 반인간적 존재로 만든다고 단언한다.

나는 부정으로부터 긍정으로 가면서, 즉 반론들의 전진에서 내 논제의 진리성을 도출하면서 내 명제를 증명한다.

① 신은 무한히 선하고, 무한히 지혜롭고, 무한히 강력한 것 등으로밖에 상상될 수 없다고 신자들은 말한다. 모두가 무한의 반복이다. 그런데 무한의 완성은 진보에 무관심하거나 심지어 반동적인 의지의 소여와 화해할 수 없다. 그러므로 신은 존재하지 않든지, 아니면 이율배반들의 전개에서 끌어낸 반론은 무한의 신비에 대해 우리가 처한 무지만을 증명하든지 할 것이다.

나는 이렇게 추론하는 자들에게, 완전히 자의적인 견해를 정당화하려면 신비의 불가측성에 뛰어드는 것으로 충분하다고, 나는 실효성 없는 섭리의 신비만큼 섭리 없는 신의 신비도 좋아한다고 대답한다. 그러나 사실들이 존재할 때, 그러한 개연론을 호출할 여지는 없다. 경험의 실증적 공언에 집착할 필요가 있다. 그런데 경험과 사실들은 사회 내의 아무것도 외부적 선동, 섭리적 명령, 어떠한 초인적 사고에 대해서도 증언하는 일 없이, 그 법칙들이 도출되고 집단적 이성이 이를 발견함에 따라 그 체계가 실현되는 불굴의 필연에 인류가 그 발달에서 복종하는 것을 증명한다. 섭리를 믿게 만드는 것, 이는 필연 자체이며, 집단적 인류의 기초요 본질과 같다. 그러나 이 필연은 아무리 체계적이고 진보적으로 보여도 그것만으로는 인류에게서도 신에게서도 섭리를 이루지 않는다. 이에 대해 확신을 가지려면 사회 질서가 발현되는 끝없는 진자 운동과 음울한 암중모색들을 회상해보면 된다.

② 다른 논객들이 말을 가로막고 나와서 외친다. 이런 난해한 탐구가 무슨 소용인가? 더 이상 섭리도 없고, 무한한 지성도 없다. 우주에는 인간 바깥에 나도 없고 의지도 없다. 선에서처럼 악에서도 일어나는 모든 것은 필연적으로 일어난다. 원인과 결과의 불가항력적 총체는 인간과 자연을 동일한 숙명 안에 포괄한다. 그리고 우리가 우리 자신에게서 양심, 의지, 판단 등으로 부르는 것은 완전히 영원하고 부동인, 그리고 숙명적인 것의 개별적 우연들일 뿐이다.

이 논리는 앞의 것의 역이다. 그것은 완전히 강력하고 완전히 지혜로운 조물주의 관념을 필연적이고 영구적인, 그러나 무의식적이고 맹목적인 조율의 관념으로 대체하는 데 있다. 이 반론은 우리에게 이미 유물론자들의 변증법이 신자들의 그것보다 굳건하지 못하다는 것을 감지하게 한다.

필연이나 숙명을 말하는 자는 절대적이고 불가침한 질서를 말한다. 반대로 교란과 무질서를 말하는 자는 숙명에 더 꺼려지는 것으로 존재하는 모든 것을 단언한다. 그런데 세상에는 무질서가 존재한다. 어떠한 권능도 엮지 못하는 자연발생적 힘들의 도약에 의해 생겨난 무질서 말이다. 모든 것이 숙명적이라면 이런 것이 어떻게 있을 수 있는가?

하지만, 유신론과 무신론 간의 이 오래된 논쟁이 자유와 숙명, 사람들이 서로 모순되는 것으로 간주해 왔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은 두 항목에 대한 거짓된 관념에서 나오는 것을 누가 모르는가? 사람이 자유롭다면, 신은 더구나 역시 자유로우며 숙명은 말뿐이라고 어떤 이들이 말했다. 모든 것이 자연에서 연결된다면 자유도 섭리도 없다고 다른 이들이 재론했다. 그리고 각자는, 자유와 숙명이 이렇게 대립하고 있다는 주장이 활동이라는 사실과 지성이라는 사실에 대한 자연적 구분일 뿐 대조적인 구분은 아님을 결코 이해하지 못하고, 자신이 취한 방향으로 눈에 보이지 않을 때까지 논의를 진행해 가는 것이다.

숙명은 우주 형성의 절대 질서이고, 법칙이고 법전이고 운명이다. 그러나 이 법전이 그 자체로 주권적 입법자의 관념을 배제하기는커녕 아주 자연스럽게 이를 가상해서, 고대 전체는 이를 인정하기에 주저함이 없었다. 그리고 모든 질문은 오늘날에는 여러 종교들의 창시자들이 그렇게 믿었듯이 우주 안에서 입법자가 법에 앞서는가, 즉 지성이 숙명보다 앞서는가, 혹은 현대인들이 그렇게 생각하듯이 입법자를 앞선 것이 법인가, 다시 말해 정신이 자연에서 탄생하는가 하는 것을 아는 데 있다. 이전에나 이후에나 이 양자택일이 모든 철학을 요약한다. 일찌감치 정신의 후속성인지 사전성인지에 관해 논쟁해 보라. 하지만, 숙명의 이름으로 정신을 부정한다면 이는 아무것으로도 정당화되지 않는 배제다. 이 배제를 반증하려면, 그것이 기초로 삼는 사실 자체인 악의 존재를 환기하기만 하면 된다.

물질과 인력이 주어질 때, 세상의 체계는 그 산물이다. 이야말로 숙명적인 것이다. 상관적이고 모순적인 두 관념이 주어질 때, 하나의 구성이 따라 나와야 한다. 이야말로 여전히 숙명적인 것이다. 숙명에 꺼려지는 것은 그 방향이 오히려 특정한 영역에서 숙명의 달성을 가져다주는 것인 자유가 아니다. 그것은 무질서, 법칙의 실행에 질곡이 되는 모든 것이다. 세상에는 무질서가 존재하는가 존재하지 않는가? 숙명론자들은 무질서를 부인하지 않는다. 극히 이상한 실수로 이들을 숙명론자로 만들어준 것이 악의 현존이니 말이다. 그런데, 나는 악의 현존이 숙명을 증언해 주기보다는 숙명을 깨뜨리고, 운명에 폭력을 가하고, 그 잘못된, 그러나 자발적인 솟아오름이 법칙과 불일치하는 원인을 전제로 한다고 말한다. 이 원인을 나는 자유라고 부르는데, 나는(제4장 참조) 자유가 사람에게서 횃불로 쓰이는 이성처럼 그것이 숙명인 자연의 질서와 더 잘 조화되는 만큼 더욱 크고 완전하다는 것을 증명했다.

그러므로 숙명을 스스로 자유롭다고 느끼는 양심의 증언에 대립시키고, 그 반대로도 하는 것은 그 두 관념을 역으로 받아들인다는 것, 그리고 그 문제에 대한 지성을 조금도 가지지 않는다는 것을 입증한다. 인류의 진보는 숙명에 의한 인간 이성과 자유의 교육이라고 정의할 수 있다. 이 세 항이 실제로는 서로 지탱해주고, 숙명이 기초가 되고, 이성이 그 다음에 오고 자유가 정점을 이룰 때에, 이것들이 서로 배타적이고 조화될 수 없다고 간주하는 것은 터무니없다. 인간 이성이 지향하는 것은 숙명을 알고 꿰뚫는 것이다. 그리고 우리가 인류의 자연발생적 발달과 본능적 신념들에 대해 이 순간 스스로에게 행하는 비판은 근본적으로는 숙명에 대한 연구일 뿐이다. 이를 설명해보자.

활동성과 지성을 타고난 인간은 자신이 그 일부를 이루는 세상의 질서를 교란할 능력을 가진다. 그러나 그의 모든 벗어나는 행동은 예견이 되었고, 일정 한계 내에서 수행되어 이 한계가 일정 수의 오고 감 후에는 그 사람을 질서로 복귀시킨다. 세상 속에서 인류의 역할을 정하게 되는 것은 자유의 이런 진자 운동에 따른 것이다. 그리고 인간의 운명이 피조물들의 운명과 연결되니 인간으로부터 사물의 지고의 법칙으로, 그리고 존재의 근원들로 소급해 가는 것이 가능하다.

그래서 나는 더 이상 이렇게 묻지 않을 것이다. 사람은 어떻게 섭리적 질서를 유린할 능력을 가지며, 어떻게 섭리는 그가 그렇게 하게 놔두는가? 나는 다른 말로 질문을 제기한다. 숙명에서 만들어진 우주의 구성 요소인 인간이 어떻게 숙명을 깨뜨릴 능력을 가지는가? 숙명적 조직, 인류의 조직은 어떻게 우발적이고, 논리에 어긋나고, 소란과 파국들로 가득한가? 숙명은 한 시간, 한 세기, 천 년에 관련되지 않는다. 과학과 자유는, 그것들이 우리에게 도달하는 것이 숙명적이라면 왜 더 빨리 우리에게 오지 않는가? 왜냐하면, 우리가 기다림으로 시달릴 순간부터 숙명은 그 자신과 모순되기 때문이다. 악에 대해서는 숙명도 섭리도 없다.

한마디로 매 순간 그 품에서 일어나는 사실들에 의해 거짓으로 판명되는 숙명은 무엇인가? 이야말로 유신론자들이 자기 피조물들의 빈곤을 예견하지도 예방하지도 못하는 무한의 지성이 무엇일 수 있는지를 설명해야할 의무를 지는 것과 똑같이 숙명론자들이 설명해야할 의무를 지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이 전부는 아니다. 자유, 지성, 숙명은 근본적으로 존재의 상의한 세 측면을 지칭하는 데 쓰이는 적합한 세 표현들이다. 인 간 안에서 이성은 자기 한계를 느끼는 정해진 자유일 뿐이다. 그러나 이 자유는 여전히 그 결정의 원 안에서 숙명, 살아있고 인격적인 숙명이다. 그러므로 인류의 의식이 우주의 숙명, 즉 가장 높은 지소의 숙명이 무한의 자유에처럼 이성에 들어맞는다고 선포할 때, 이는 어떤 식으로든 정당한 하나의 가설, 그 검증이 모든 당파에게 과해지는 가설을 내놓는 것일 뿐이다.

③ 현재, 새로운 무신론자들인 인문주의자들이 등장해서 이렇게 말한다.

인류는 그 총체에서 신의 신비적 이름으로 사회적 화신에 의해 추구되는 실재다. 집단적 이성의 이 현상, 인류가 그 안에서 스스로를 성찰하면서 자신을 바라보고 자신의 운명을 주재하는 외적이고 초월적인 존재로 파악하는, 일종의 신기루인 이 의식의 환상은 분서되고 설명되었다고 말하자. 그리고 신학적 가설을 재연하는 것은 이제부터는 과학에서 퇴보하는 것이다. 오직 사회, 인간에게 집착할 필요가 있다. 종교에서 신, 정치에서 국가, 경제에서 재산권, 이런 것은 자신에게 생소하게 된 인류가 끊임없이 자기 손으로 자신을 찢어온 삼중 형태이며, 오늘날 인류가 버려야할 형태다.

나는 신성의 모든 언명이나 가설이 신인동형론에서 나온다는 것, 신이 우선 이상, 혹은 더 제대로 말해서 인간의 유령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인정한다. 나는 나아가서 신 관념이 과학, 노동, 나라에서 그것이 발현되는 곳 어디서나 이를 파괴하거나 적어도 종속시키는 것이 우리의 과제인 권위와 자의성의 원칙의 전형이고 기초라는 것을 인정한다. 또한 나는 인문주의를 반박하지 않으며 이를 계속한다. 신적 존재에 대한 그 비판을 사람에게 적용해 나는 다음과 같이 고찰한다.

사람은 자신을 신처럼 숭배하면서 자신에 대해 그 자신의 본질과 반대되는 이념을 설정했고, 주권적으로 완벽하다고 알려진 존재, 한마디로 무한자의 적이라고 스스로를 선언했다는 것.

사람은 결과적으로 그 자신의 판단으로는, 신을 제시해서 스스로를 부정하니 거짓된 신성에 불과하다는 것, 그리고 인문주의는 고대에 기원을 둔 모든 유신론들처럼 혐오스러운 종교라는 것.

자신을 신으로 삼는 인류의 이 현상은 인문주의의 용어로는 설명되지 않으며, 차후에 해석을 요한다는 것.

신은 신학적 개념에 따르면 우주의 주권적 심판관, 무오류이고 피조물들에 대해 책임 없는 왕, 인간의 분간이 가능한 전형일 뿐만이 아니다. 그는 영원하고 부동이고 도처에 편재하고 무한히 지혜롭고 무한히 자유로운 존재다. 그런데 나는 신의 이런 특성들이 인류의 상승하는 특성들을 몇 번이라도 제곱한 하나의 이상理想 이상, 하나의 승격 이상을 포함한다고 말한다. 나는 그 특성들이 그와 모순된다고 말한다. 자비가 정의에 모순되는 것처럼, 완성의 이상인 거룩함이 완전 가능성에 모순되는 것처럼, 입법 능력의 이상인 왕권이 법에 모순되는 것처럼 신은 인간에게 모순된다. 그래서 신적 가설은 인간적 실재에서 그것의 해결로부터 다시 태어날 것이며, 완벽한, 조화롭고 절대적인 존재의 문제는 언제나 배척되고 언제나 되돌아온다.

이 근본적인 이율배반을 증명하는 데는 정의들보다는 사실을 놓는 것으로 충분하다.

모든 사실들 중에 가장 확실하고 가장 항상적이고 가장 의심할 바 없는 사실은 확실히 사람 안에서는 지식이 점진적이고 체계적이고 반성적이라는, 한마디로 실험적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경험, 즉 항상성과 그 표상에서의 연관성의 강제 이행이 결여된 모든 이론은 그 자체로 과학적 성격을 결여한다는 것이다. 이런 점에 조금의 의심도 제기할 수 없을 것이다. 순수하다고 하는, 그러나 명제들의 연관에 종속된다고 하는 수학도 바로 이것 때문에 경험에 속하며, 그것의 법칙을 인정한다.

인간 과학은 획득된 관찰에서 출발해 진보하며, 한계 없는 영역 안에서 전진한다. 그것이 목표로 하는 한계, 그것이 실현해 가는 경향을 띠지만 결코 거기에 도달할 수는 없는, 오히려 끊임없이 그로부터 후퇴하는 이상은 무한이고 절대다.

그런데 사색이 이를 신 안에 있다고 가정하는 것처럼 마찬가지로 무한의 자유를 정해주는 무한의 과학, 절대의 과학은 무엇일까? 이는 실재와 기능을 한꺼번에 포괄함에도 불구하고 단지 보편적이기만 한 것이 아니라, 직관적이고 자연발생적이고, 모든 객관성처럼 모든 주저함을 깨끗이 벗어난 지식일 것이다. 확실하지만 시현해 주지는 않는 과학, 완전하지만 인기는 없는 과학일 것이다. 끝으로 그 형성에서 영구적이면서 그 부분들의 관계에서 일체의 진보적 특성을 상실한 과학일 것이다.

심리학은 동물들의 본능적이고 예감하는 능력들에서 이런 인지 양태의 수많은 예들을 수집했다. 일체의 교육과는 별개로 계산자이고 예술가로 태어난 어떤 사람들의 자연발생적 재능에서, 끝으로 무의식적 천재성에서 이론과는 독립적으로 만들어진 대부분의 인간 제도들과 원시적 기념물들에서 이를 수집했다. 그리고 천체의 아주 규칙적이고 아주 복잡한 운동들, 물질의 경이로운 조합들. 이 모두가 요소들에 내재하는 특정한 본능의 결과라는 것을 아직도 말하지 않을 것인가?

그러므로 신이 존재한다면, 그에게 속하는 무언가가 우주에서, 그리고 우리 자신에게서 우리에게 나타난다. 그러나 이 무언가는 우리의 가장 진실로 인정되는 경향들, 가장 확실한 우리의 운명과 극적인 대립을 이룬다. 이 무언가는 계속적으로 교육을 통해 우리의 영혼에서 지워지며, 우리의 관심이라고는 이를 사라지게 하는 것이다. 신과 인간은 서로를 알면서부터 서로를 피하는 두 본성이다. 그 둘 중 어느 것이, 혹은 둘 다 변형되지 않는다면 어떻게 화해할 것인가? 이성의 진보가 우리를 언제나 신성으로부터 멀리 떼어놓는 것이라면, 신과 인간은 어떻게 그런 이유로 동일할 것인가? 결과적으로 인류는 어떻게 교육을 통해 신이 될 수 있을 것인가?

다른 예를 들어보자.

종교의 본질적 성격은 감정이다. 그러므로 종교에 의해 사람은 신에게 이성을 부여하는 것처럼 감정을 부여한다. 나아가 그는 자기 관념의 일상적 진행에 따라 신에게서 감정이 과학과 마찬가지로 무한하다고 단언한다.

그런데, 이것만으로도 신에게서 감정의 질을 변화시켜, 인간의 감정과는 완전히 구별되는 특성으로 만드는 데 충분하다. 사람 안에서 감정은 말하자면 천 가지 다양한 원천들에서 흘러나온다. 사람은 스스로 모순을 일으키고, 스스로 교란을 일으키고, 스스로 분열한다. 그렇지 않으면 그는 스스로를 느끼는 것이 아닐 것이다. 반대로 신에게서 감정은 무한하다. 즉 하나이고, 고정되고, 투명하고, 일체의 폭풍을 넘어서고, 행복에 도달하기 위해 대조에 의거해 분노할 아무런 필요도 없다. 황홀경처럼 우리의 모든 능력을 빼앗는 특이한 감정이 순간적으로 다른 감정들에 침묵을 과할 때, 우리 스스로는 이런 신적인 느낌의 양태를 경험한다. 그러나 이런 황홀감은 언제나 대조의 도움으로만, 그리고 다른 데서 오는 일종의 촉발에 의해서만 존재한다. 그것은 결코 완전하지 않다. 혹은, 그것이 충만에 도달할 경우에 이는 불가분의 순간에 그 절정에 도달하는 별과도 같다.

이처럼 우리는 일련의 대립과 충돌, 내부의 전쟁에 의해서만 살고, 느끼고, 생각한다. 우리의 이상은 그러므로 무한이 아니라 균형이다. 무한은 우리와는 다른 것을 표현한다.

사람들은 이렇게 말한다. 신은 그에게 고유한 속성들을 가지지 않는다고. 그의 속성들은 인간의 속성들이며, 그래서 인간과 신은 유일하고 단일한 것이라고.

정반대로, 인간의 속성들은 신 안에서 무한해서 바로 이 때문에 고유하고 특정적이다. 유한이 존재한다는 것 때문에 특수성, 본질이 되는 것이 무한의 특성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모순적 관념의 실재를 부인하듯이 신의 실재를 부인하는 것, 과학과 도덕으로부터 이 파악할 수 없고 피로 물든 허깨비, 멀리 갈수록 더욱 우리를 쫓아오는 듯한 이 허깨비를 밀어내는 것. 이는 일정한 정도까지는 정당화될 수 있으며, 모든 경우에서 해로울 수는 없다. 그러나 신을 인류로 만드는 것은 신과 인간을 둘 다 헐뜯는 것이니 하지 말기를 바란다.

인간과 신적 존재 간의 대립이 환상이며, 그 대립은 개체적 인간과 인류 전체의 본질 간에 존재하는 대립에서 나온다고 사람들은 말할 것인가? 그렇다면, 사람들이 신성화하는 것이 인류이니, 인류는 진보적이지도 않으며, 이성과 감정에서 대조가 되지도 않는다고, 한 마디로 인류는 전체적으로 무한하다고 주장할 필요가 있다. 이는 역사에서만이 아니라 심리학에서도 거짓으로 판명되는 것이다.

인문주의자들은 외친다. 그것을 그런 식으로 이해해야 하는 것은 아니라고. 인류를 이상화하려면, 인류를 그 역사적 발달에서가 아니라 그 발현들의 총체에서, 마치 모든 인간 세대가 동일한 순간 안에 결합되어 단일한 인간, 무한하고 불멸인 인간을 이루는 듯이 생각할 필요가 있다.

즉, 투사投射를 파악하기 위해 실재를 버리는 것이다. 참된 인간은 실재의 인간이 아니라는 것, 인간의 이상인 진정한 인간을 찾기 위해서는 시간에서 벗어나 영원으로 들어갈 필요, 무슨 말인가 하면, 무한을 위해 유한을 버릴 필요, 신을 위해 인간을 버릴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우리가 아는 그런 인류, 발달해 가는 그런 인류, 한마디로 존재할 수 있는 그런 인류는 똑바르다. 사람들은 우리에게 그 전도된 이미지를 마치 얼음에서처럼 보여주며, 그러고는 우리에게 말한다. 이것이 바로 사람이다! 그러면 나는 이렇게 대답한다. 이는 바로 사람이 아니다. 이는 신이다. 인문주의는 가장 완벽한 유신론이다.

그러므로 신에게서 유신론자들이 가상하는 이 섭리는 어떤 것인가? 본질상 인간적인 능력, 신인동형론적 특성으로서 이 때문에 신은 사태의 진전에 따라 우리 다른 사람들이 연표와 역사의 시각에 따라 과거를 들여다보는 것과 같은 방식으로 미래를 들여다보는 것으로 여겨진다.

그런데 무한, 즉 과학 안의 자연발생적이고 보편적인 직관이 인류에게 혐오스러운 만큼, 섭리는 신적 존재의 가설에 혐오스럽다는 것이 자명하다. 신에게는 모든 관념들이 동등하고 동시적이며, 신의 이성은 이율배반과 종합을 분리하지 않으며, 신에게는 영원이 만물을 현존하고 동시대적인 것으로 만드는데, 이 신은 우리를 창조하면서 우리에게 우리 모순들의 신비를 계시할 수 없었다. 그리고 이는 바로 그가 신이고, 그가 그 모순을 못 보고, 그의 지성이 시간의 범주와 진보의 법칙 아래로 추락하지 않고, 그의 이성이 직관적이고, 그의 과학이 무한하기 때문이다. 신 안의 섭리는 모순 안의 또 다른 모순이다. 신이 진정으로 사람의 형상에 따라 만들어진 것은 섭리에 따른 것이다. 이 섭리를 제거해보라. 신은 인간이기를 중단하며, 인간도 그의 신성에 대한 주장을 모두 버려야 한다.

아마도 사람들은 신이 인류 안에서 일어나는 일을 모른다면, 무한의 과학을 가진다는 것이 그에게 무슨 소용이냐고 물을 것이다.

구분하자. 신은 질서에 대한 지각, 선에 대한 감정을 가진다. 그러나 이 질서, 이 선을 그는 영구적이고 절대적인 것으로 보며, 그가 연속적이고 불완전한 것으로 제시하는 것에서 이를 보지 않는다. 그는 그 결점들을 파악하지 않는다. 우리만이 지속을 측정할 수 있듯이 악을 보고 평가할 능력이 있는데, 이는 우리만이 악을 만들 수 있고, 우리의 생명이 일시적이기 때문이다. 신은 질서밖에 보지 못하고 느끼지 못한다. 신은 일어나는 일을 파악하지 못하는데, 이는 일어나는 일이 그의 밑에, 그의 지평의 밑에 있기 때문이다. 반대로 우리는 선과 악을, 일시적인 것과 영원한 것을, 질서와 무질서를, 유한과 무한을 한꺼번에 본다. 우리는 우리 안에서 그리고 우리 바깥에서 보며, 우리의 이성은 그것이 유한하므로 우리의 지평을 초월한다.

이처럼 유한하고 섭리적인 이성, 우리의 이성은 인간의 창조와 사회의 발달로 인해 직관적이고 무한한 이성인 신과는 모순에 놓이게 되었다. 그래서 신은 자신의 무한성을 모든 의미에서 상실하지 않고 인류의 존재라는 사실만으로 작아지는 것으로 보인다. 시간의 움직이고 기울어진 구도에 영원한 관념들이 투사된 결과로 나오는 점진적 이성으로서 인간은 신의 언어를 이해할 수 있는데, 이는 그가 신에게서 나오고, 그의 이성은 처음에는 신의 이성과 유사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신은 우리의 말을 이해할 수 없고 우리에게까지 올 수가 없는데, 이는 그가 무한하기 때문이며, 신이기를 중단하지 않고서, 자신을 파괴하지 않고서는 유한의 속성들을 입을 수 없기 때문이다. 신 안의 섭리 교리는 사실상, 권리상 거짓된 것으로 판명된다.

지금으로서는 같은 논리가 어떻게 인간의 신격화 체계를 공격하는 것으로 돌려지는지를 보기가 쉽다.

인간은 스스로는 그 이상의 역방향으로 발달하는 반면에, 신을 숙명적으로 그 속성들에서 절대적이고 무한한 것으로 놓아서, 인간의 진보와 인간이 신으로 상상하는 것 간에는 불일치가 있다. 한편으로 인간은 그의 구성의 절충 때문에, 그리고 그의 본성의 완성 가능성 때문에 결코 신이 아니며 신이 될 수도 없다는 것이 명백하다. 다른 한편, 지고의 존재인 신은 인류의 대척점이고, 인류가 그로부터 무한히 멀어지는 존재론적 정상이라는 것이 상식적이다. 신과 인간은 말하자면 존재의 적대적 능력들을 나누어 가져서 우주의 지휘권이 그 상으로 주어지는 게임 한판을 하는 것 같다. 한 존재에게는 자연발생성, 즉시성, 무오류성, 영원성이, 다른 존재에게는 예지, 연역, 운동성, 시간이 맡겨진다. 신과 인간은 끊임없는 실패 속에 서로를 붙잡고, 끊임없이 서로를 피해간다. 인간이 성찰과 이론 속에서 쉼 없이 행진하는 반면, 신은 그의 섭리적 무능 때문에 그의 본성의 자연발생성 안으로 후퇴하는 것으로 보인다. 그러므로 인류와 그의 이상 간에는 모순이 있고, 인간과 신 간에는 대립, 그리스도교 신학이 악마 혹은 사탄, 즉 반대자, 신과 인간의 적이라는 이름으로 우화화하고 의인화한 대립이 있다.

그러한 것이 현대의 비평가들이 고려하지 않은 것을 내가 발견하는 근본적 이율배반이다. 이를 무시하면 조만간 인간과 신의 부정에, 따라서 이 모든 철학적 주석의 부정에 도달해야 해서 종교와 열광주의로 가는 문을 다시 열게 되는 이율배반인 것이다.

신은 인문주의자들에 따르면 인류 자체, ‘개인적 나’가 보이지 않는 주인에게처럼 복종할 ‘집단적 나’ 말고 다른 것이 아니다. 그러나 그 초상이 원본에 대고 충실히 베껴졌다면 왜 이런 이상한 상像이 나오는가? 출생 때부터 자기 몸, 자기 영혼, 자기 우두머리, 자기 사제, 자기 조국, 자기 신분을 직접, 망원경 없이 아는 사람이 왜 자기를 알아보지 못하면서 신이라는 환상적 이미지로 거울에서처럼 자신을 보아야 했는가? 이런 환각의 필요성이 어디 있는가? 일정 시간 후에는 자신을 정화하고 바로잡는, 그리고 자신을 다른 존재로 착각하지 않고 확정적으로 자신을 그 모습대로 파악하는 이 탁하고 사팔뜨기의 눈을 가진 의식은 무엇인가? 사회 그 자체는 거기 현존해서 가시적이고, 손으로 만질 수 있고, 바라고 움직이고 하는데, 결국 사회는 사회로 알려지고 명명되는데 인간 쪽에서는 왜 이런 사회에 대한 초월적 고백을 하는가?

‘아니다, 사회는 존재하지 않았다’고들 말한다. 사람들은 군집이 되었지만, 결코 조합을 이루지 않았다. 재산권과 국가의 자의적 헌법, 그리고 종교의 불관용적 교조주의가 이를 증명한다.

순전한 수사학이다. 사회는 개인들이 노동과 말로써 소통하면서 호혜적 의무에 동의하고 법과 관습들을 탄생시켰던 날부터 존재한다. 의심할 바 없이 사회는 과학과 경제의 진보에 비례해 완성되어 가지만, 문명의 어느 시대에도 진보는 유토피아의 건설자들이 꿈꾸어 온 것과 같은 변모를 내포하지 않는다. 그리고 인류의 미래 조건이 아무리 탁월할 수밖에 없다 해도, 그것이 그 이전의 위치들의 자연적 계속, 필연적 결과이리라는 점은 조금도 덜하지 않을 것이다.

게다가 어떠한 조합 체제도 그 자체로는 내가 보여준 것처럼 우애와 정의를 배제하지 않지만, 정치적 이상은 결코 신과 혼동될 수 없었고, 실제로 모든 민족들에서 사회가 종교와 구별되었다는 것을 보게 된다. 전자는 목표로 간주되었고, 후자는 단지 수단으로 여겨졌다. 신이 사람들의 정의를 모면한 죄인들을 무덤 저 너머에서 기다리며 의식들을 다스리는 동안 군주는 집단적 의지의 집행자였다. 진보와 개혁의 관념 자체는 어디에도 없지 않았다. 결국 사회생활을 이루는 어떤 것도, 어떠한 종교적 민족에게서도 완전히 무시되거나 오해되지는 않았다. 그러니 사람들이 주장하듯이 신학적 가설이 인간 사회의 이상, 평등, 연대, 노동과 사랑에 의해 변모된 인류의 미리 생각된 전형 말고 다른 것을 포함하지 않는다는 것이 맞는다면, 왜 또다시 이런 사회-신성의 동어반복을 하는가?

확실히 어떤 선입견, 신비주의가 있어 그 기만이 내게 오늘날 무섭게 여겨진다면, 이는 더 이상 달아나는 로마 가톨릭은 아니며, 오히려 자의성이 섞이지 않기에는 너무 유식한 사색에 의거해 사람을 거룩하고 성스러운 존재로 만드는 인문 철학일 것이다. 사람을 신으로, 즉 자신의 의심스러운 도덕성에 대해 그가 끊임없이 내놓는 절망적인 증거들에도 불구하고 본질적으로 선하고 그 모든 권능에서 질서정연한 존재로 선포하고, 그의 악행을 그가 살아온 환경의 제약 탓으로 돌리고, 인류가 이 철학에 따라 그 자신을 그린 신화들에서 지옥과 낙원이라는 이름으로 제약과 고통의 시간과 행복과 독립성의 시대가 묘사되고 서로 대립되는 것으로 나타나므로, 그에게서 완전한 자유에 의해 가장 순수한 헌신의 행위들을 기대하는 것이다! 그러한 교리를 가지고서는 불가피한 것이지만, 사람이 종교의 품에 곧장 뛰어들려면, 자신이 신도 아니고, 선하지도 거룩하지도 지혜롭지도 않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으로 충분할 것이다. 그래서 결국 세상이 신의 부정에서 얻을 것이라고는 신의 부활일 것이다.

그러한 것이 내 생각에는 종교적 우화들의 의미는 아니다. 인류는 신을 자신의 창조주이자 주인으로, 자신의 다른 자아alter ego로 인정하면서 하나의 반대 명제에 의거해 자기 자신의 본질을 정하는 것뿐이다. 이는 절충적이고 대조물들로 가득 찬 본질로서 무한에서 유출되고 무한에 모순되며, 시간적으로 발달하고 아름다움과 질서의 감정의 인도를 받음에도 불구하고 그 모든 실수할 수 있는 이성에 의거해 영원을 갈망하는 본질이다. 모든 반대가 앞선 입장의 딸인 것처럼 인류는 신의 딸이다. 인류가 자신과 유사한 신을 발견한 것, 신에게 자기 자신의 속성들을 부여한 것, 그러나 언제나 그 속성들에 구체적 성격을 부여하면서, 즉 신을 자신과 모순되게 정의하면서 그렇게 한 것은 이 때문이다. 인류는 신이 인류에 대한 환영幻影인 것처럼 신에 대한 환영이다. 이 둘 각각은 상대방에 대해 존재의 원인, 이유, 그리고 목적이다.

그러므로 종교적 관념들을 비판함으로써 신적 자아의 개념이 인간 자아의 지각으로 환원되는 것을 증명한 것은 결코 충분하지 않았다. 인류 자체에 대해 비판함으로써 이 도출을 감독하고, 이 인류가 그의 외관적인 신성이 가상한 조건들을 충족하는지를 아는 것이 또한 필요했다. 그런데 그런 것은 인간적 실재로부터, 그리고 신적 가설로부터 한꺼번에 출발해 우리가 사회의 역사를 그 경제 제도들과 그 사상들에서 풀어내기 시작했을 때 엄숙하게 개시한 작업이다.

우리는 한편으로 사람이 그의 관념들의 적대성에 자극을 받으면서도, 일정 정도까지는 구실을 댈 수 있으면서도, 공연히 그리고 자기 열정의 동물적 치솟음 때문에 악을 이루는 것을 확인했다. 이는 자유롭고 지적이고 거룩한 존재의 성격에는 혐오스러운 것이다. 우리는 다른 한편, 인간의 본성이 결코 조화롭게 그리고 종합적으로 형성되지 않았고, 각 피조물에 특화된 잠재적 가능태들의 군집에 의해 형성된 것을 보여주었다. 이는 인간의 자유 때문에 저질러지는 무질서들의 원리를 계시해 주면서 우리에게 우리 인류의 비非신성을 입증해 주기를 완수한 상황이다. 끝으로 신에게 섭리가 존재하지 않을 뿐 아니라 섭리가 불가능하다는 것도 증명한 후, 다른 말로 해서, 무한의 존재에서 신적 속성들을 신인동형론적 속성들과 분리한 후, 우리는 옛날의 변신론의 주장들과는 반대로, 본질상 진보해 가는 운명인 인간의 운명에 관해 신에게 있는 지성과 자유가 영원성, 부동성, 그리고 무한성이라는 그의 특성의 결과로 대조, 일종의 제한과 축소를 겪었다고 결론을 내렸다. 그래서 사람은 신에게서 자신의 주권자이고 안내자인 존재를 찬양하는 대신 그에게서 자신의 적밖에 볼 수 없고 보아서는 안 되었다. 그리고 이 마지막 고찰은 우리가 불가항력적으로 인류의 신격화에 의거해 종교적 복고를 지향해 가는 것으로서 인문주의도 기각하게 하는 데 충분할 것이다. 열광주의의 진정한 치료법은 우리 생각으로는 인류를 신과 동일화하는 것이 아니다. 이는 사회경제학에서 공동체를, 철학에서는 신비주의와 현상 유지를 주장하는 것과 같다. 그 치료법은 인류에게 신이 존재하는 경우에 그 신이 자신의 적이라는 것을 증명해주는 것이다.

이런 조건들에서 나중에 어떤 해결책이 나올 것인가? 신은 결국 그 무언가인 것으로 밝혀질 것인가?

나는 도대체 이를 알게 될 것인지 모른다. 한편으로 내가 오늘 비논리적이고 모순적인 존재인 인간의 실재를 단언할 이유도, 상상할 수 없고 발현되지 않는 신의 실재를 단언할 이유도 없는 것이 맞는다면, 나는 적어도 이 두 본성의 철저한 대립에 의해 내 의식이 비자발적으로 가상하는 알 수 없는 조물주를 기대할 이유도 두려워할 이유도 없다는 것을 안다. 나는 내 가장 진정한 경향이 매일 이 관념의 사유思惟로부터 나를 멀어지게 한다는 것, 실천적 무신론은 이제부터는 내 가슴과 내 이성의 법칙이어야 한다는 것, 관찰 가능한 숙명으로부터 끊임없이 내 행위의 기준을 배워야 한다는 것, 일체의 신비적 지배권, 내게 제안된 일체의 신권을 배척하고 싸워 물리쳐야 한다는 것, 종교, 태만, 무지 혹은 종속에 의한 신으로의 회귀는 나 자신에 대한 공격이라는 것, 그리고 언젠가 내가 신과 화해해야 한다면, 이 화해는 내가 사는 한에서는 불가능하고 내가 그 화해에서 모든 것을 얻어내고 아무것도 잃을 것이 없는 것인데, 나의 파멸에 의해서만 성취될 수 있다는 것을 안다.

그러므로 결론을 내리자. 그리고 우리의 차후의 연구에 준거점으로 쓰여야할 기둥에 그 결론을 새겨 넣자.

입법자는 자연의 축약이고 모든 존재들의 절충인 인간을 불신한다. 그는 섭리, 무한의 정신 안의 인정할 수 없는 능력에 의지하지 않는다.

그러나 현상들의 계기繼起에 주의를 기울이고, 운명의 교훈에 순응하면서 그는 숙명에서 인류의 법, 인류의 미래는 끊임없는 예언을 구한다.

그는 또한 때로는 사람들 사이에서 신성의 감정이 약해지면, 천상의 열망이 점차적으로 경험으로부터의 연역에 자리를 양보하면서 물러나면, 인간과 신 사이의 점점 더 선명한 분리가 있다면, 우리 생명의 형태이자 조건인 이 진보가 무한의 그리고 따라서 비역사적인 지성의 지각을 벗어난다면, 전체적으로 말해서 정부 쪽으로부터의 섭리에 대한 호소가 나태한 위선이면서 자유에 대한 위협이라면, 그렇다고 해도 수많은 다양한 숭배 행위의 수립에 의해 발현되는 여러 민족들의 보편적 동의, 그리고 인류의 관념들, 발현물과 그 지향들을 공격하는 풀 수 없는 모순은 우리 영혼의, 그리고 이에 의해 자연 전체의 무한자와의 비밀스러운 관계, 그 확정이 일거에 우주의 의미와 우리 존재의 이유를 표현해줄 관계를 가르쳐준다는 것도 기억한다.


여기서 리비히 씨는 과학으로부터 가설적 원인들과 고대인들에 의해 인정된 모든 존재들, 가령 물질의 창조적 힘, 공空에 대한 공포, 주재하는 영 같은 것들을 추방한(p.22) 후, 곧장 화학적 현상들의 분간 가능성의 조건으로서 그에 못지않게 모호한 일련의 존재들, 생명력, 화학적 힘, 전기력, 인력 등을 받아들인다(pp.146, 149). 심리학자들이 자유, 상상, 기억 등의 이름으로 영혼의 여러 능력에 대해 행한 깨달음의 예를 따라 물체들의 속성에 대한 깨달음을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어째서 원소들에 집중하지 않는가? 원자들이 리비히 씨가 생각하는 것같이 자체적으로 중량을 가진다면, 어째서 그 원자들이 또한 자체적으로 전하를 지니고 살아있지 않을까? 신기한 일이다. 물질의 현상들은 영의 현상들처럼 그것들이 분간할 수 없는 힘들에 의해 생성되고 모순적 법칙들에 지배받는다고 가정할 경우에 비로소 분간이 가능해진다. 이는 리비히 씨가 쓴 책의 각 면마다 두드러진 것이다.

리비히 씨에 따르면, 물질은 본질상 불활성이며, 일체의 자생적 활동력을 상실한 것이다(p.148). 그렇다면 원자들이 중량을 가지는 것은 어찌 된 것인가? 원자에 내재하는 중량은 그 물질의 고유하고 영구적이고 자생적인 운동이 아닌가? 그리고 우리가 정지 상태로 간주하게 되는 것은 오히려 균형이 아닌가? 그렇다면 어째서 정의들이 부인하는 불활성을 가정하기도 하고 증언을 해 줄 것이 아무것도 없는 외적 잠재성을 가정하기도 하는가?

원자들이 중량을 가진다는 것으로부터 리비히 씨는 그것들이 분리 불가능하다고 결론을 내린다(p.58). 별 이상한 추론도 다 보겠다! 중량은 힘일 뿐이다. 즉 감각에 들어올 수 없으며 그 자체로는 그 현상들만을 인식하게 하는 사물이다. 결과적으로 분리와 비분리의 개념이 적용될 수 없는 사물이다. 그리고 이 힘의 존재로부터, 불확정적이고 비물질적인 존재의 가설로부터 분리 불가능한 물질성의 결론을 끌어내는 것이다! 그 밖에 리비히 씨는 우리의 지성으로는 절대 분리 불가능한 입자들을 상상하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실토한다. 게다가 그는 이 불가분리성이 입증되지 않는다는 것을 인식한다. 그러나 그는 과학에 이 가설이 없어서는 안 된다고 덧붙인다. 그래서 거장들의 실토로부터 화학은 경험에 낯선 만큼 정신에 혐오스러운 허구를 그 출발점으로 삼는다! 이 무슨 역설인가!

리비히 씨는 말한다. 원자들의 무게는 그것들의 부피가 다르므로 다르다. 그럼에도 화학적 등가물들은 원자의 상대적 중량을 표현한다는 것, 혹은 다른 말로 하면, 우리가 원자량 계산에 따라 원자로 간주하는 것은 여러 원자들로 구성되지 않는다는 것을 증명할 수는 없다. 이 모두는 더 많은 물질이 더 적은 물질보다 중량이 크다는 말이다. 그리고 중량이 물질성의 본질이니, 이로부터 엄밀하게 중량은 어디서나 자기 자신과 동등하므로 물질 내에 정체성도 있다고, 단순 물체들의 차이는 원자들의 결합의 상이한 양태로부터 유래하기도 하고 분자적 응축의 정도 차이에서 유래하기도 한다고, 근본적으로 원자들은 전이가 가능하다고 결론이 내려질 것이다. 이는 리비히 씨가 인정하지 않는 바다.

그는 이렇게 말한다. “우리는 한 원소가 다른 원소로 전환된다고 믿을 어떤 이유도 없다”(p.135). 그로부터 당신이 아는 것은 무엇인가? 이 전환을 믿을 이유는 당신이 그것을 알아차리지 못해도 아주 잘 존재할 수 있다. 그리고 이 점에서 당신의 지성이 당신의 경험 수준이라는 것은 확실하지 않다. 그러나 리비히 씨의 부정적 논지를 인정하기로 하자. 그러면 어떤 결과가 되는가? 지금까지도 줄일 수 없는 것으로 남아있는 56개의 예외 말고는 모든 물질이 끊임없는 변신을 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자연에서 힘의 단위, 계통의 단위뿐 아니라 실체의 단위를 가정하는 것이 우리 이성의 법칙이다. 게다가 일련의 화학적 복합물과 단순 물체들 자체가 우리에게 그렇게 하도록 불가항력적으로 이끈다. 그러므로 과학에 의해 열린 길을 끝까지 따라가기를 어떻게 거부하며, 경험 자체의 숙명적 결론인 가설을 인정하기를 어떻게 거부하는가?

리비히 씨가 원소들의 전이 가능성을 부인하는 것처럼 그는 싹들의 자생적 형성을 배척한다. 그런데 싹들의 자생적 형성을 거부해도 그것들의 영구성은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그리고 다른 한편으로 지질학에 의해 일체의 영구적인 것이 지구에 거주하지 않음이 증명되듯이 어느 주어진 순간에 동식물의 영구적인 싹들은 부모 없이 지구 표면에 튼다는 것을 인정할 수밖에 없다. 이처럼 자생적 세대들의 부정은 이 자생성의 가설을 가져온다. 형이상학은 그렇게 수모를 당하고 더 모순적인 어떤 것을 내놓는가?

그렇다고 해서 내가 화학 이론들의 가치와 확실성을 부인한다고 믿지 말 것이며, 내가 원자론을 터무니없는 것으로 여긴다거나 내가 자생적 세대들에 관한 에피쿠로스학파의 견해를 공유한다고 믿지 말 것이다. 내가 다시 한 번 지적하고 싶은 것은, 원리들의 관점에서 화학은 이성과 경험에 혐오스러운, 일정 수의 서로 파괴하는 허구들의 조건에서만 가능하므로 극단적 관용이 필요하다는 것뿐이다.

우리의 지적인 시각을 불신하자. 화학 이론들은 심리학 체계들과 마찬가지이다. 오성은 현상들을 검토하기 위해서 자신이 보지 못하고 결코 보지 못할 원자들에, 자신이 더구나 감지하지 못하는 자아에 대해서처럼 작용한다. 그것은 전체에 자신의 범주들을 적용한다. 즉 그것은 물질적이건 비물질적이건 근저에서 동일하고 분간할 수 없는 것을 구분하고, 개체화하고, 구체화하고, 계수하고, 반대한다. 정신과 마찬가지로 물질도 우리가 볼 때는 온갖 역할을 한다. 그리고 그것의 형질 변화가 아무런 자의성도 가지지 않으므로 우리는 이를 취해서 이 심리학 이론과 원자 이론을 건립하는 데 쓴다. 이 이론들은 통념의 언어에서 일련의 현상들을 우리에게 충실히 나타내 주는 한에서는 참된 이론들이지만, 그것들이 자신들의 추상물을 실현하고 문자를 토대로 결론을 내리겠노라고 주장하면서부터는 근본적으로 거짓된 이론들이다.

[1] 자크 브리덴(Jacques Brydayne, 1701~1767, 18세기 프랑스의 사제.)

[2] 여호와(Ie-hovah) 그리고 작문에서 야(Iah), ‘존재’ 이야오(Iao), 유피테르(iou-piter), 같은 의미, ah-iah, 히브리어로 ‘그는 있었다’. eî, 그리스어로 ‘그는 있다’, eî-nai, ‘존재하다’, an-i, 히브리어 그리고 격변화에서 th-i, ‘나’. e-go, io, ich, I m-î, m-e, t-ibi, te, 그리고 그 안에서 I, e, eï, oï라는 모음이 일반적 격을 나타내고 자음 m이나 n, s나 t가 인칭을 나타내는 모든 인칭대명사. 이런 유비들에 대해 논란을 벌이는 것을 나는 반대하지 않는다. 이 깊은 논의에서 문헌학자의 학문은 구름과 신비에 불과하다. 중요한 것, 그리고 내가 언급하는 것은 이름들의 음성학적 관계가 관념들의 형이상학적 관계를 드러내는 것 같다는 점이다.

[3] 중국인들은 기원전 5, 6세기 이래 그들 중에서 사라진 한 종교에 대한 기억을 전통으로 보전해 왔다[포티에(Pauthier), 『중국Chine』(Paris, Didot)을 보라]. 더욱 놀라운 일은, 이 이상한 민족이 원시적 숭배를 상실하면서 신성은 인류의 집단적 자아와 다르지 않다는 점을 이해한 것으로 보인다는 것이다. 그래서 2000여 년 전부터 중국은 세속적 신념을 가지고서 서양 철학의 마지막 결과들에 도달한 것이다. 『서경書經』에서는 이렇게 말한다. “하늘이 보고 듣는 것은 인민이 보고 듣는 것일 뿐이다. 인민이 상과 벌을 받을 만하다고 판단하는 것은 하늘이 벌하고 상을 내리고자 하는 것이다. 하늘과 인민 간에는 긴밀한 의사소통이 있다. 그러므로 인민을 다스리는 자들은 조심하고 신중해야 한다.” 공자는 같은 생각을 다른 방식으로 표현했다. “인민의 애정을 얻어라, 그러면 제국을 차지하게 될 것이다. 인민의 애정을 잃어라, 그러면 제국을 잃어버릴 것이다.” 그러므로 바로 이것이 세상의 일반적 이성, 순수하다고 여겨지는 의견이다. 다른 곳에서 계시가 그랬던 것과 같다. 『도덕경道德經』은 더 단호하다. 이 저작은 순수 이성의 간추려진 비판에 불과한 것으로, 거기서 철학자 노자는 지속적으로 ‘도’라는 이름으로 보편적 이성과 무한한 존재를 동일시한다. 내 의견으로는 노자의 책을 모호하게 만든 것은 바로 우리의 종교적, 형이상학적 관습이 아주 심각하게 차별화한 그 두 원소의 항상적 동일화다.

[4] 존 밀턴(John Milton, 1608~1674, 영국의 시인이자 청교도 사상가. 『실낙원』의 저자이다-편집자 주

[5] 오쉬스트 콩트(Auguste Comte), 『실증철학 강의Cours de philosophie positive』; 프루동, 『인류에서 질서의 창조de la Création de l'ordre dans l'humanité』를 보라.

[6] 나는 여기서 적극적 방식으로 물체들의 전이 가능성을 단언할 생각도, 그것을 연구 목적물로 지정할 생각도 없다. 더구나 학자들의 의견에 관해 어떠해야 한다고 말할 주장도 가지고 있지 않다. 나는 단지 화학적 철학의 가장 일반적인 결론들, 혹은 더 잘 말하자면, 그 이론에 버팀목으로 쓰이는 화해 불가능한 가설들을 예방 조치가 안 된 일체의 정신 안에 태어나게 하는 회의주의의 종류를 지적하고자 한다. 화학은 참으로 이성의 절망이다. 모든 면에서 그것은 환상에 손을 댄다. 그리고 경험이 우리에게 화학을 더 많이 알게 할수록, 화학은 더욱더 투시 불가능한 신비로 자신을 감싼다. 이는 얼마 전 리비히(Liebig) 씨의 화학에 관한 문집(Paris, Masgana, 1845, trad. de Bertet-Dupiney et Dubreuil-Hélion)을 읽은 것이 내게 암시해 준 성찰이다.

[7] 화학자들은 혼합을 조성과 구분하는데, 이는 논리학자들이 관념들의 연합을 그것들의 종합과 구분하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그렇기는 하지만 화학자들에 따르면 조성은 여전히 혼합 혹은 오히려 원자들의 우연하지 않고 체계적인 결집일 뿐이라는 것이 사실이다. 이 원자들은 그들의 배열의 다양성에 의해서만 다양한 혼합물을 생성할 것이다. 그러나 이는 아직은 완전히 공허한 가설일 뿐이다. 아무것도 설명하지 못하고 논리적이라는 장점도 가지지 않는 가설이다. 어떻게 원자의 조성과 형태의 순전히 수치상 혹은 기하학적 차이가 그렇게 다른 생리학적 성질들을 낳는가? 원자들이 불가분하며 불투과성이라면 그 역학적 효과에 한정된 그것들의 결합은 그 원자들을 본질상 불변하는 것으로 놔두지 않는가? 여기서 가정된 원인과 획득된 결과 간의 관계는 어디에 있는가?

[8] 펠레그리노 로시(Pellegrino Rossi, 1787~1848, 이탈리아 출신 프랑스 경제학자―역자 주)

[9] “여러 민족의 삶을 지배하는 원리는 순수 과학이 아니다. 계몽과 필요와 이익의 상태에 속하는 복잡한 자료들이다.” 1844년 12월 프랑스의 가장 명석한 정신들 중 한 사람인 레옹 포셰(Léon Faucher) 씨가 생각을 밝혔다. 할 수 있다면 이런 성격의 사람이 어떻게 자신의 경제적 신념에 의해 사회의 복잡한 자료가 순수 과학에 반대된다고 공언하게 되었는지를 설명하기 바란다.

[10] 오귀스트 발라(Auguste Walras, 1801~1866)를 가리킨다―역자 주

[11] 장 자크 루소(Jean-Jacques Rousseau)를 말한다. 그는 1755년 판 백과사전에서 ‘정치경제학’ 표제항을 맡아 집필했다.

[12] 샤를 뒤누아예(Charles Dunoyer, 1786~1862, 프랑스의 자유주의 경제학자)-역자 주

[13] 제롬 아돌프 블랑키[Jérôme-Adolphe Blanqui, 1798~1854, 프랑스의 경제학자, 장 바티스트 세(Jean Baptiste Say)의 제자]-역자 주

[14] 예리한 문헌학자 파울 아케르만 씨는 프랑스어를 예로 들어 언어의 각 낱말은 그 반대말 또는 저자가 말한 대로 그 반의어(antonyme)를 가져서 전체 어휘는 쌍쌍으로 배열되고 이원적인 방대한 체계를 이룰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었다(『Voy. Dictionnaire des Antonymes』, par Paul Ackermann, Paris, Brockhaus et Avenarius, 1842).

[15] 요한복음 18장 14절-역자 주

[16] 「Séance de l'Académie des sciences morales et politiques」, septembre 1845.

[17] 최고로 추천할 만한 권위자들의 견해에도 불구하고, 나는 노예가 노동을 위해 보전해 두는 전쟁 포로였다고 해서 농노, 라틴어로 servus가 servare로, ‘보존하다’에서 왔다고 하는 생각에 익숙해지지 못한다. 종살이, 혹은 적어도 머슴살이는 확실히 전쟁으로 두드러지게 증가하기는 했어도 그전부터 있었다. 게다가 사물의 원천이 그러하듯 관념의 원천이 그러하다면, 왜 serv-us 대신에 문법학적 연역에 맞게 serv-atus라고 말하지 않았을까? 내 생각에는 진정한 어원은 serv-are와 serv-ire의 대립에서 발견된다. 그 원래의 어간은 ser-o, in-ser-o, ‘연결하다’, ‘잠그다’이며, 그로부터 series, ‘이음’, ‘연속성’, ser-a, 프랑스어의 serrure(잠금), ser-tir(삽입하다) 등이 나온다. 이 모든 낱말은 주된 물건의 관념을 내포하며, 거기에 특정한 쓸모를 가진 물건으로서 부속물이 와서 붙는다. 이로부터 serv-ire, ‘쓸모 있는 물건인 것’, ‘다른 물건에 부차적인 물건인 것’, serv-are, 우리가 말하듯이, ‘잠그다’, ‘옆에 놓다’, ‘어떤 물건에 그 쓸모를 할당하다’, serv-us, ‘손에 용품, 집기를 들고 있는 사람’, 끝으로 ‘시종’이 나온다. servus의 반대말은 dom-inus(dom-us, dom-anium, 그리고 dom-are), 즉 ‘가장家長’, ‘집 주인’, ‘사람들(servat), 동물들(domat), 그리고 물건들(possidet)을 부리는 자’다. 그에 이어서 전쟁 포로가 노예살이를 위해 남겨졌다는 것, 노역을 위해 남겨진 자(servati ad servitium) 혹은 오히려 땅덩이에 박힌 자(serti ad glebam)라는 것이 놀랍게도 의식된다. 그들의 행선지가 알려져서 그들은 이름을 취한 것뿐이다.

[18] Calvary. 흔히 이야기하는 갈보리를 가리킨다. 복음서에서 예수가 십자가형을 당한 언덕이며, 골고타라고도 한다.-편집자 주

[19] 한 꾸러미는 평균 220㎏에 해당함-역자 주

[20] 타로 카드-역자 주

[21] 원문에 5만 프랑이라고 되어 있으나 500만 프랑이 맞는 것으로 보인다.-역자 주

[22] 살랑트Salente는 입법자에 의해 시민 생활이 엄격히 규제되는 유토피아로 상상되는 도시이며, 프랑스의 소설가 프랑수아 페늘롱(François Fénelon)이 지은 『텔레마크의 모험Les Aventures de Télémaque』에 나온다. 고대 로마의 장군 파브리키우스(Fabricius)의 열변은, 로마는 그리스의 문화에서 벗어나고 사치 성격의 예술을 버려야 로마의 역사적 사명을 감당할 수 있다는 취지의 연설이다. 이 두 이야기 모두 루소의 저작에 등장한다.-역자 주

[23] 천만다행히도 내각이 그 문제를 해결했다. 그리고 나는 내각에 진정한 찬사를 보낸다. 제안된 요금표에 따르면, 우편 요금은 1킬로미터에서 20킬로미터의 거리까지는 10상팀으로 낮아질 것이다. 20킬로미터에서 40킬로미터까지는 20상팀, 40킬로미터에서 120킬로미터까지는 30상팀, 120킬로미터에서 360킬로미터까지는 40상팀, 그 이상의 거리에 대해서는 50상팀으로 낮아질 것이다.

[24] 저임금과 장시간 노동에 항의한 광부들의 장기간 파업 사태-역자 주

[25] 수첩에 기록된 새 법은 일꾼들의 독립성을 더 좁은 한계 내로 가두었다. 민주 언론은 이 주제에 관해 권부의 사람들에게 분노를 터뜨렸다. 이들이 민주주의의 원칙들인 권위와 재산권의 원칙들을 적용하는 것 말고 다른 일을 했다는 듯이 말이다. 직업 대표부가 수첩에 관해 한 일은 불가피했으며, 누구나 이를 기대해야 했다. 민주주의가 독재에 도달하지 않기가 불가능하고, 종교가 이성적이 되기가 불가능하고, 열광주의가 관용을 보이기가 불가능한 것처럼 소유권의 원리에 기초를 둔 사회가 카스트의 구분에 도달하지 않기도 불가능하다. 이는 모순의 법칙이다. 우리가 이를 이해하는 데 얼마나 시간이 필요할까?

[26] 루키우스 유니우스 브루투스(Lucius Junius Brutus), 기원전 545~509. 기원전 509년에 로마 공화국 집정관이 되었다.

[27] 프랑수아 바렘의 저서 『Les comptes faits ou Le tarif général de toutes les monnoyes』.

[28] 포도주 판매 회사-역자 주

[29] 85%의 알코올 석 잔에 물 석 잔을 부어 여섯 잔을 만든 술-역자 주

[30] 델리 술탄 왕조의 유일한 여성 술탄-역자 주

[31] 마르코의 복음서 14장 21절-편집자 주

[32] 다음을 더 보라. tome Ⅱ, chap. Ⅸ.

[33] 같은 책, chap. Ⅹ

[34] 같은 책, chap. Ⅺ.

[35] 장 자크 루소를 말한다.-편집자 주

[36] 창세기 6장 6-7절.

[37] 가치 평가에서 미래에 실현될 가치를 현재의 가치에 비해 낮게 평가하는 것을 말한다. 금융에서 차입자에게 이자를 부과하는 근거가 된다. 현대에는 개발 사업에서 미래 세대의 권익을 침해하게 하는 원인이 된다고 비판받는 관행이다.-역자 주

[38] 단지 몇 줄만이 전해지는 고대 그리스의 서사시-역자 주

[39] 고대 그리스의 여자 시인-역자 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