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새 논문들의 대상이 되는 주제에 들어가기 전에 하나의 가설, 의문의 여지없이 이상해 보이겠지만 그것 없이는 앞으로 나아가고 이해를 받는 것이 내게는 불가능한 하나의 가설을 고찰할 필요가 있다. 나는 신의 가설에 대해 말하고자 한다.
신을 가정하는 것은 그를 부정하는 것이라고 말할 것이다. 당신은 어째서 그를 긍정하지 않는가?
신성에 대한 믿음이 의심스러운 견해가 되었다면 이것이 내 잘못인가? 지고의 존재에 대한 단순한 의심이 이미 허약한 정신의 표상으로 주목된다면, 그리고 그것이 모든 철학적 유토피아 중에 세상이 더 이상 감내하지 않는 유일한 유토피아라면? 위선과 어리석음이 어디서나 이 거룩한 꼬리표 아래 숨겨져 있다면 이것이 내 잘못인가?
어떤 박사가 우주 안에서 미지의 힘이 항성들과 원자들을 이끌며 모든 기계장치를 움직인다고 상상한다면, 그에게 이 가정은 완전히 공연한 것으로서 자연스러운 것밖에 없다. 그것은 받아들여지고, 권장된다. 인력引力을 보라. 결코 입증하지는 못할, 그러면서도 발명자에게 영광이 되는 가설이다. 그러나 인간사의 흐름을 설명하기 위해 내가 상상할 수 있는 모든 조심성을 지닌 채 신의 개입을 가정한다면 나는 확실히 과학계에 심각성을 촉발할 것이고 가혹한 비평가들의 귀에 거슬릴 것이다. 그토록 우리의 진심은 섭리를 놀라울 만큼 불신해 왔고, 그토록 온갖 복장을 걸친 돌팔이들은 이 교리 혹은 이 허구를 매개로 수작을 떤다. 나는 우리 시대의 유신론자들을 보았고, 신성모독은 내 입술 위에 번져왔다. 나는 인민, 브리덴[1]이 신의 가장 좋은 벗이라고 부른 이 인민의 신앙을 고찰했으며, 나도 모르게 나오는 부정에 몸서리쳤다. 상반되는 감정들에 괴로워진 나는 이성에 호소했다. 그리고 수많은 교조적 대립 중에서 오늘날 나에게 그 가설을 주문하는 것은 이 이성이다. 신에게 적용되는 선험적 교조주의는 불모인 채로 있었다. 그 가설이 우리를 또 어디로 데려갈지 누가 알겠는가?
그러므로 나는 내 가슴의 침묵 속에서 일체의 인간적인 고려를 멀리하고 사회 혁명들의 신비를 공부하면서 신, 위대한 미지의 것이 나에게 어떻게 하나의 가설, 말하자면 필요한 변증법적 수단이 되었는지를 말하고자 한다.
Ⅰ
만일 내가 여러 모습을 띠며 달라져 가는 신의 관념이라면, 나는 이 관념이 무엇보다 먼저 사회적 관념이라고 본다. 그 말은 그것이 개인적 개념 형성이라기보다는 훨씬 더 집단적 사유의 신앙 행위라는 것이다. 그런데 어떻게, 그리고 어떤 계기로 이 신앙 행위가 생겨나는가? 이를 확인하는 것이 중요하다.
도덕적 · 지적 관점에서 사회 혹은 집단적 인간은 무엇보다도 행위적 자생성, 다른 말로 본능에 의해 개인과 구별된다. 개인은 그가 충분히 알고 가입을 거절하거나 동의할 수 있는 주인이 되는 동기에만 복종하거나 복종한다고 상상하는 반면, 한마디로 그는 스스로 자유로우며, 그가 자신을 이성적이고 교육을 잘 받았다고 생각할수록 그만큼 더 자유롭다고 판단하는 반면, 사회는 첫눈에 자의성과 기획의 기척을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그러나 조금씩 사회 바깥에 존재하는 상급 협의회의 지도를 받는 것으로 보이며 사회를 미지의 끝을 향해 불가항력으로 밀어붙이는 힘들에 종속된다. 군주정과 공화정의 수립, 카스트 구분, 사법 제도 등은 그 원칙을 가리키거나 그 이유를 제시하기보다 그 효과를 특기하는 것이 훨씬 더 쉬운 이 사회적 자생성의 그만한 발현이다. 보쉬에, 비코, 헤르더, 헤겔에 이어 역사철학에 투신한 자들의 일체의 노력 자체가 지그까지 사람의 일체의 움직임을 주재하는 섭리적 운명의 존재를 확증하는 것이었다. 또 나는 이와 관련해 사회는 움직이기 전에 결코 자신의 수호신을 일깨우지 않는 일이 없다는 것을 관찰한다. 마치 이미 그의 자생성이 결의한 것을 위로부터 명령받기를 원하듯이. 운세, 신탁, 희생제사, 대중적 갈채, 공적 기도는 나중에 사회의 이런 의도성의 가장 통상적인 형태이다.
이 신비적이고 아주 직관적이며, 또한 말하자면 초사회적인 능력은 사람들에게서는 조금 밖에나 혹은 전혀 감지되지 않지만 인류 위에서는 영감을 주는 신령처럼 떠 있는 것으로서 심리학 일체의 원초적 사실이다.
그런데 한꺼번에 개체적 취향과 집단적 충동에 복속한다는 점에서는 사람과 같은 다른 동물 종들과 달리, 사람은 자신을 움직이는 본능 혹은 운명을 인식하고 자기 자신의 생각에 기별奇別하는 특권을 지닌다. 우리는 뒤에 가서, 사람이 또한 그것을 꿰뚫고 심지어 그것의 명령에 영향을 미칠 능력도 소유함을 보게 될 것이다. 그리고 (거룩한 숨에 대한) 열광으로 황홀해지고 관통된 사람의 첫 번째 움직임은 자신이 의존함을 느끼는, 그가 신, 즉 생명, 존재, 영, 아니 더 간단하게 ‘나’라고 이름 붙이는 보이지 않는 섭리를 찬미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고대 언어에서 이 말들은 동의어이고, 동음어이기 때문이다.
‘나는 나이며, 나는 너와 협상한다’고 신이 아브라함에게 말한다. 또 모세에게는 ‘나는 (존재하는) 나이다’라고 말한다. ‘너는 이스라엘 자녀들에게 존재가 나를 보낸다고 말하라’고 한다. 존재와 ‘나’라는 이 두 말은 사람들이 말했던 가장 종교적인 원어에서는 같은 특성을 지닌다.[2] 게다가 모세라는 기관에 의해 입법자가 되는 여호와Ie-hovah가 자신의 영원함을 증언하고 자신의 본질로써 맹세할 때, 그는 맹세의 양식으로 ‘나’라고 말한다. 혹은 힘을 배가하여, ‘나, 존재’라고 말한다. 역시 히브리인들의 신은 모든 신들 중 가장 인간적이고 가장 자발적이며, 인류의 직관을 그보다 더 잘 표현하는 것은 없다.
그러므로 신은 인간에게 하나의 나로서, 순수하고 영원한 본질로서 나타난다. 군주가 신하 앞에 나서듯이 인간 앞에 나서며 때로는 시인, 입법자, 점쟁이의 입술로 무사musa, 노모스nomos, 누멘numen으로 스스로를 표현하고, 때로는 민중의 갈채로써 스스로를 표현한다. 민民의 소리는 신의 소리이다(vox populi vox Dei). 이는 어떻게 참된 신탁과 거짓된 신탁이 있는지를 설명해 줄 수 있기도 하다. 태어날 때부터 격리된 개인들은 왜 스스로 신의 관념에 이르지 못하는 반면, 그 관념이 집단적 영에 의해 제시되자마자 이를 냉큼 포착하는가. 끝으로 중국인들과 같은 정태적인 종족은 어떻게 해서 그 관념을 결국 잃어버리는가.[3] 우선, 신탁들에 대해 말한다면, 신탁의 일체의 확실성은 신탁에 영감을 불어넣는 보편적 의식에서 나온다는 것이 명확하고, 다음으로 신 관념에 대해 말하자면, 어째서 압류와 현상이 마찬가지로 그에 치명적인지를 쉽게 이해할 수 있다. 한편으로 소통의 결여는 영을 동물적 이기심에 흡수된 채로 놓는다. 다른 한편으로 운동의 부재는 사회생활을 조금씩 일상사와 기계 체제로 변화시켜 결국 자발성과 섭리의 관념을 제거한다. 이상한 일이다! 진보에 의해 망하는 종교는 또한 부동성에 의해서도 망한다.
군더더기가 되겠지만, 신성의 첫 번째 계시인 보편적 이성의 모호한, 말하자면 객체화된 의식과 관련해서 우리는 신의 실재성 자체 혹은 비실재성에 관해 절대 아무런 선입견도 가지지 않는다는 데 주목하자. 실제로 신이 집단적 본능 혹은 보편적 이성 말고 다른 것이 아님을 인정하자. 그러면 또한 이 보편적 이성이라는 것이 무엇인지를 알아야만 한다. 왜냐하면 이어서 보겠지만, 보편적 이성은 결코 개인적 이성 안에서 주어지지 않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사회적 법칙들에 대한 지식 혹은 집단적 관념들의 이론은 순수 이성의 근본 개념들로부터 도출됨에도 불구하고 아주 경험적이며, 결코 연역이나 귀납 혹은 종합을 거쳐 선험적으로 발견되지 않는다. 따라서 우리가 이 법칙들을 그 자신의 작품으로서 연결시키는 보편적 이성, 별개의 영역에서 순수 이성과는 구분되는 실재로서 존재하고 사유하고 일하는 보편적 이성은, 세계 체제가 수학 법칙들에 따라 창조됨에도 불구하고 수학과는 구분되는, 그리고 그로부터 수학만의 존재를 도출할 수는 없을 실재이듯이, 현대적 언어로 하면 바로 고대인들이 신이라고 불렀던 것이라는 결과가 된다. 그 말이 바뀐 것이다. 그것에 대해 우리가 아는 것은 무엇인가?
이제 신적 관념의 진화를 추적해 보자.
지고의 존재가 일단 최초의 신비적 판단에 의해 설정된 후 인간은 즉각 또 다른 신비주의인 유비analogie로써 이 주제를 일반화한다. 신은 말하자면 아직도 하나의 점에 불과하다. 곧 그는 세상을 가득 채울 것이다.
인간이 자신의 사회적 자아를 느끼면서 창조자에게 경배한 것처럼, 그는 동물, 식물, 연못, 기상氣象 그리고 우주 전체에서 충동과 의도를 발견하면서 각 물체에 그리고 전체에 그것을 주재하는 혼, 영 또는 신령이 있다고 본다. 사회라고 하는 자연의 가장 높은 정점을 신으로 만드는 이 귀납 추론을 가장 낮은 존재, 무생물이며 무기체인 물체들에까지 추구해 가는 것이다. 인간은 그러므로 창조의 상위 극으로 간주되는 집단적 자아로부터 마지막의 물질 원자에까지 신의 관념, 즉 인격적, 지성적 관념을 확장하는데, 이는 창세기가 신 자신이 하늘을 펼쳤다고, 즉 만물을 담는 용기인 공간과 시간을 창조했다고 우리에게 이야기해 주는 것과 같다.
이처럼 조물주인 신 없이는 우주와 인간은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이는 사회적 신앙고백이다. 그러나 또한 인간 없이 신은 생각되지 못할 것이다.―이 간극을 건너가자―신은 아무것도 아닐 것이다. 인류가 조물주를 필요로 한다면, 신, 신들은 그에 못지않게 계시자를 필요로 한다. 신통보神統譜, 천국과 지옥과 그 주민들의 역사, 인간 사고의 이 꿈들은 어떤 철학자들이 역으로 신의 꿈이라고 칭한 우주의 상대물이다. 그리고 사회의 작품인 이 신학적 창조물 안에 얼마나 웅장함이 있는가! 데미우르고스의 창조물은 지워졌다. 우리가 전능자라고 칭한 자는 패배했다. 그리고 수 세기 동안 유한한 인간들의 마법에 홀린 상상은 올림포스의 기적을 주시함으로써 자연의 광경으로부터 돌려졌다.
이 환상적 지역에서 내려오자. 가엾은 이성이 문을 두드린다. 그의 무서운 질문에 대답할 필요가 있다.
신이란 무엇인가? 하고 이성이 묻는다. 그는 어디에 있는가? 그는 몇 명인가? 그리고 그는 무엇을 원하는가? 그는 무엇을 할 수 있는가? 그는 무엇을 약속하는가? 그리고 보라, 분석의 횃불에 하늘과 땅과 지옥의 모든 신들이 내가 알지 못할 어떤 무체의, 불투명한, 부동의, 이해할 수 없는, 정의할 수 없는, 한마디로 존재의 모든 특성의 부정인 것으로 환원된다. 사실상 사람이 각 물체에 특수한 영이나 신령을 부여하든지, 우주를 유일한 권능에 의해 통치되는 것으로 의식하든지 그는 언제나 무조건적인, 즉 불가능한 존재자를 상정하고 그로부터 그가 달리 의식할 수 없다고 판단하는 현상들에 대한 어떠한 설명이든지 이를 도출하기만 한다. 신과 이성의 신비다! 자신의 우상 숭배 대상물을 점점 더 합리적으로 만들기 위해 신자는 그로부터 그를 실재하는 것으로 만들어 줄 모든 것을 계속해서 벗겨낸다. 그리고 논리와 천재성의 기적들이 있은 후에 존재의 특성들은 무無의 특성들과 같아진다. 이런 진화는 불가피하고 숙명적이다. 무신론이 일체의 변신론 근저에 있다.
이런 진보 과정을 이해시키도록 해보자.
만물의 창조자인 신이 의식에 의해 스스로 창조되자마자, 다시 말해 우리가 신을 사회적 자아의 관념에서 우주적 자아의 관념으로 높이자마자 곧바로 우리의 성찰은 완성을 핑계로 그 신을 파괴하는 데 착수한다. 신 관념을 완성한다! 신학적 교리를 청산한다! 이는 인류의 두 번째 환상이다.
분석 정신, 지칠 줄 모르고 끊임없이 질문하고 논박하는 사탄은 조만간에 종교적 교조주의에 대한 증명을 시도해야 했다. 그런데 철학자가 신 관념을 정하든 아니면 그가 이를 확정 불가능이라고 선언하든, 그가 이에 이성을 가지고 접근하든 아니면 그것을 이성에서 멀리 떼어놓든, 이 관념은 공격을 입는다고 나는 말한다. 사변이 멈추는 것은 불가능하니 장기적으로 신 관념은 반드시 사라진다. 그러므로 무신론 운동은 신학적 비극의 제2막이다. 그리고 이 제2막은 제1막에 의해 주어지며, 결과가 원인에 의해 주어지는 것과 마찬가지다. 시편의 시인은 하늘은 영원한 존재의 영광을 이야기한다고 말한다. 이렇게 덧붙이자. 그리고 하늘의 증언은 그를 권좌에서 내쫓는다고.
사실상 사람은 현상들을 관찰함에 따라 자연과 신 사이에서 중간자들을 본다고 믿는다. 이는 수효, 형상 그리고 계기繼起의 관계들이다. 유기적 법칙, 진화, 유비들이다. 이는 발현물들이 그 안에서 생겨나는, 혹은 서로를 변함없이 부르는 일정한 연관이다. 그는 자신이 그 일부를 이루는 이 사회의 발전에서 사적 의지들과 숙의들이 공동으로 무언가를 위해 들어간다는 것도 관찰한다. 그리고 그는 위대한 영이 세상에 직접, 그리고 몸소 작용하지 않으며, 자의적으로 변덕에 따라 작용하는 것도 아니고 감각적 힘이나 감각기관에 의해, 그리고 규칙에 따라 매개적으로 작용한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생각에 의해 인과의 사슬을 거슬러 올라가 그는 신을 균형 잡는 막대에서처럼 한쪽 끝에 가져다 놓는다.
모든 하늘 저 너머에 하늘의 신이 산다
이렇게 한 시인이 말한다. 이처럼 이론의 첫 번째 도약으로부터 지고의 존재는 동력, 바퀴통, 홍석虹石의 기능으로 전락하며, 좀 더 시시한 비유를 해본다면 군림하지만 다스리지 않는, 법률을 지키겠다는 맹세를 하고, 법률을 집행하는 장관들을 임명하는 입헌군주의 기능으로 전락한다. 그러나 자신을 매혹하는 신기루의 인상 때문에 유신론자는 이 우스운 체계에서 우상의 경이성의 새로운 증거만을 본다. 이 우상은 자신의 피조물들을 자신의 권능에 수단으로 봉사하게 하며, 인간들의 지혜를 자기의 영광으로 돌리게 한다고 본다.
곧, 영원한 존재의 왕국을 제한하는 데 만족하지 못해서 인간은 점점 더 신을 죽게 하는 존경으로써 그 왕국을 분점하기를 요구한다.
내가 영이고, 감각적이며 관념들을 내놓는 자아라면, 나 역시 절대적 존재에 몫이 있다고 유신론자는 계속하여 말한다. 나는 자유롭고, 창조자이고, 불멸하고, 신과 동격이다. 코기토 에르고 숨Cogito, ergo sum; 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 바로 이것이 ‘에고 숨 키 숨Ego sum qui sum : 나는 (존재하는) 나이다’의 보조 명제요 번역이다. 철학은 성서와 일치한다. 신의 존재와 영혼의 불멸성은 동일한 판단으로 의식에 의해서 주어진다. 전자에서 사람은 자신의 자아를 그 안에서 움직여 가는 우주의 이름으로 말하는 것이고, 후자에서는 자기 자신의 이름으로 말하는 것이다. 그러면서도 이 길과 저 길에서 같은 말을 되풀이한다는 것도 알아채지 못한다.
영혼의 불멸성은 신성으로부터의 진정한 분리이며, 오랜 간격 후에 그 최초의 출현 순간에는 옛 교리의 신자들에게는 이단으로 나타났지만 신적 위엄의 보완물, 행복과 영원한 정의의 필수적 전제물로 덜 간주된 것은 아니다. 영혼의 불멸성이 없으면 신을 이해하지 못한다고 정치 이론가들과 비슷한 유신론자들이 말한다. 정치 이론가들에게는 주권적 대표부와 어디서나 종신적인 공무원들이 왕정의 필수 조건이다. 그러나 학설들의 유사성이 정확한 만큼 관념들의 모순은 명백하다. 역시 영혼 불멸의 교리는 곧 철학적 신학자들의 걸림돌이 되었다. 이들은 피타고라스와 오르페우스의 세기부터 신적 특성들을 인간의 자유와, 이성을 신앙과 일치시키려고 쓸데없이 노력하는 이들이다! 불신자들을 위한 승리의 주제다! …그러나 환상은 그렇게 빨리 물러날 수 없었다. 영혼 불멸의 교리, 이는 바로 그것이 창조되지 않은 존재의 제한이었기 때문에 진보였다. 그런데 인간 정신이 진리의 부분적 획득으로 잘못을 범하더라도, 이는 결코 퇴보하지 않으며, 그 발걸음에서 이 꾸준함은 그의 불가오류성의 증거다. 우리는 그 새로운 증거를 획득할 것이다.
신과 닮음으로서 사람은 신을 자신과 닮게 만들었다. 수 세기 동안 혐오스러운 것으로 칭해진 이 상관성은 새로운 신화를 결정한 보이지 않는 힘이었다. 가부장들의 시대에 신은 인간과 연합했다. 지금 협적을 공고히 하기 위해 신은 인간이 되려고 한다. 그는 우리의 살, 우리의 용모, 우리의 열정, 우리의 기쁨과 고통을 취할 것이며, 한 여성에게서 태어나 우리처럼 죽을 것이다. 그러고는 무한의 이 낮아짐 후에 사람은 논리를 전환해 그때까지는 창조자라고 불렀던 자를 보전자, 구속자救贖者로 자신이 신의 이상을 더 키웠다고 주장할 것이다. 인류는 아직은 ‘신인 것이 나다’라고 말하지 않는다. 신은 내 안에 있다, 임마누엘, 신이 우리와 함께noniscum Deus 있다고. 그리고 철학이 고집을 가지고, 보편적 양심이 경악하면서 한 목소리로 ‘신들이 도망친다excedere deos’고 외친 순간, 열광적 찬미와 초인적 신앙의 열여덟 세기가 시작되었다.
그러나 숙명적인 종말이 찾아온다. 윤곽이 그려지는 모든 왕국은 감정에 호소하는 정치Demagogy로 끝날 것이다. 정의定義가 되는 일체의 신성은 복마전Pandemonium으로 해소된다. 그리스도 숭배는 인간 사상의 이 긴 진화의 종착점이다. 천사들, 성인들, 처녀들이 신과 함께 하늘에서 다스린다고 교리문답에서 말한다. 마귀들과 저주받은 자들은 영원한 형벌의 지옥에서 산다. 초세속적 사회에는 왼편과 오른편이 있다. 방정식이 완결될 때가 되었고, 이 신비적 위계질서가 땅으로 내려와 현실에서 나타날 때가 되었다.
연못에 자신을 비추어 보는 첫 번째 여자가 자기 자신의 모습을 끌어안기 위해 팔을 벌리는 것을 나타낼 때 밀턴[4]은 펜놀림마다 인류를 그린 것이다. 그대가 찬양하는 이 신, 오 사람이여! 그대가 만든 이 신, 선하고 정의롭고 전능하고 전지하고 불멸하며 거룩한 신, 이는 그대 자신이다. 이 완전함의 이상은 그대 양심의 열렬한 거울에 정화된 그대의 모습이다. 신, 자연과 사람은 동일한 존재의 세 모습이다. 사람은 천 번의 진화를 거쳐 자의식에 도달한 신이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사람은 스스로 신임을 느꼈다. 그리고 그리스도교는 참으로 신이자 참으로 인간의 종교이다. 애초부터 ‘나’라고 말한 신 말고 다른 신이 없다. ‘그대’ 말고 다른 신이 없다.
이런 것이 종교의 신비와 자신의 신비를 벗겨 내면서 시효가 끝나는 철학의 마지막 결론이다.
Ⅱ
그때부터는 모든 것이 끝난 것으로 보인다. 인류가 스스로를 찬양하고 자기 자신을 신비화하기를 그만두면서 신학적 문제는 영영 제거되는 것 같다. 신들은 떠났다. 사람은 더 이상 이기주의로 염려하고 죽을 필요가 없다. 내 주위로 얼마나 무서운 고독이 펼쳐지며, 내 영혼의 바닥을 파고드는가! 나의 고양高揚은 소멸과 닮았으며, 내가 신이 된 이래로 나는 자신을 더 이상 그림자로밖에 보지 않는다. 나는 언제나 나인 것이 가능하지만 나를 절대자로 간주하는 것은 내게 아주 어렵다. 그리고 내가 절대자가 아니라면 나는 관념의 절반일 뿐이다.
약간의 철학은 종교와 멀어지게 하며 많은 철학은 종교로 데려다준다고, 내가 모르는 어떤 냉소적인 철학자가 말했다. 이 관찰은 부끄럽게 만드는 관찰이다.
모든 과학은 이어지는 세 시기를 거치며 발달하는데, 이를 문명의 거대한 시기들에 비유해 종교적 시대, 궤변적 시대, 과학적 시대로 부를 수가 있다.[5] 이와 같이 연금술은 나중에 가서 화학이라고 불린, 그리고 그 확정된 구도構圖가 아직 발견되지 않은 과학의 종교적 시기를 가리킨다. 이는 점성술이 또 다른 과학적 건축물인 천문학의 종교적 시기를 이루는 것과 똑같다.
그런데, 보라. 60년간 현자의 돌을 조롱한 후에 화학자들은 경험에 이끌려 더 이상 감히 물체의 전이 가능성을 부정하려 하지 않는다. 반면에 천문학자들은 세계의 역학mécanique에 의해, 세계의 유기체학organique, 즉 바로 점성술 같은 그 무엇이 있지 않나 생각하게 된 것이다. 내가 방금 인용한 철학자의 예를 따라 약간의 화학은 현자의 돌을 외면하게 하고, 많은 화학은 현자의 돌로 데려다준다고, 그리고 비슷하게 약간의 천문학은 점성술자들을 비웃게 만들고 많은 천문학은 점성술사들을 믿게 할 것이라고 말해야 할 경우가 아닌가?[6]
나는 확실히 여러 무신론자들보다 기적에 대한 취향은 덜 가지고 있다. 하지만 나는 기적과 예언, 주술 등이 어떤 잠재적 힘들에 의해, 혹은 옛날에 그렇게 언급되었듯이 비의적 능력에 의해 생성된 이상한 효과를 말하는 왜곡된 이야기들일 뿐이라는 생각을 금할 수 없다. 우리의 과학은 아직 아주 잔혹하고 아주 악의로 가득 차 있다. 우리의 박사들은 그리 보잘것없는 지식에 대해 아주 큰 몰상식을 보여준다. 그들은 자신들이 전개하는 견해를 보호하기 위해 자신들에게 방해가 되는 사실들을 아주 뻔뻔하게 부정해서, 나는 이 강한 정신의 소유자들을 무당들과 마찬가지로 불신한다. 그렇다, 나는 확신한다. 우리의 조잡한 합리주의는 많은 과학 정신에 의해 정말로 경이롭게 될 시대의 출범이다. 우주는 내 눈에는 모든 것을 기대해야 할 마술의 실험실일 뿐이다…. 이렇게 말해 두고서 내 주제로 돌아간다.
그러므로 내가 종교적 진화들에 대해 행한 빠른 해설 후에 누군가 상상하기를 형이상학이 다음의 네 낱말, 신의 존재l’existence de Dieu, 영혼의 불멸에 관해 최종 답을 말했다고 생각하려 했다면 그는 잘못에 빠지는 것이다. 다른 데서도 그렇지만 여기서, 이성의 가장 선진적이고 가장 잘 확립된 결론, 신학적 문제를 영구적으로 해결한 것으로 여겨지는 결론은 우리를 시원始原의 신비주의로 데려가며, 불가피한 철학의 새로운 자료들을 함축한다. 종교적 견해들에 대한 비판은 우리로 하여금 오늘날 우리 자신에 대해, 그리고 종교들에 대해 웃음 짓게 한다. 그렇기는 하지만 이 비판의 요체는 문제의 재생산일 뿐이다. 인류는, 내가 글을 쓰고 있는 시점에, 인류에게 고대의 신 관념과 동등한 무엇인가를 인식하고 언명하기 직전에 있다. 그리고 이는 옛날처럼 더 이상 자생적 운동에 의해서가 아니라 성찰을 하며, 그리고 불가항력적인 변증법의 힘으로 그렇게 될 것이다.
나는 불과 몇 마디 말로 내 의견을 피력할 것이다.
철학자들이 주저하기는 했지만, 마침내 의견의 일치를 본 한 가지가 있다면, 이는 의문의 여지없이 지성과 필연성의 구분, 사유의 주체와 그 객체의 구분, 아我와 비아非我의 구분이다. 세속적 용어로 말하면, 정신과 물질의 구분이다. 나는 이 모든 용어들이 아무런 실질적이고 참된 것도 표현하지 않는다는 점, 그것들 각각은 유일하게 참이고 실재인 절대의 분리를 지칭할 뿐이라는 점, 그리고 별개로 본다면 그것들 모두는 똑같이 모순을 함축한다는 점을 잘 안다. 그러나 그에 못지않게 또한 확실한 것은, 우리에게 절대는 완전히 접근 불가능하다는 것, 우리는 오직 우리의 경험주의의 대상으로 들어오는 대립항들에 의해서만 절대를 안다는 것, 그리고 단일성이 우리의 신심을 획득할 수 있지만, 이원성은 과학의 첫째 조건이라는 것이다.
이와 같이 누가 생각하며 무엇을 생각하는가? 영혼은 무엇이며, 몸은 무엇인가? 나는 이 이원론을 회피할 테면 해보라고 말한다. 본질들도 관념들과 마찬가지이다. 전자는 자연 안에서 분리된 것처럼 보인다. 이는 후자가 오성 안에서 그런 것과 마찬가지이다. 그리고 신 관념과 영혼 불멸의 관념이 그 동일성에도 불구하고 철학에서는 계기적으로, 그리고 모순적으로 제기된 것과 동일하게 아와 비아는 절대 안에서 융합됨에도 불구하고 자연에서는 별개로, 그리고 모순적으로 제시된다. 그리고 우리는 생각하는 존재들과 동시에 생각하지 않는 다른 존재들도 대한다.
그런데 누구든지 이를 성찰하는 수고를 한 사람이라면, 오늘날 그러한 구분은 비록 실현되었더라도 이는 이성이 마주칠 수 있는 더 불가해하고 더 모순적이고 더 터무니없는 것임을 안다. 존재는 물질의 속성들 없이 스스로를 의식하지 않듯이 정신의 속성들 없이도 스스로를 의식하지 않는다. 그래서 정신이 시간, 공간, 운동, 확고성 등의 범주들 중 어떠한 것에도 해당되지 않아서 당신에게는 실재를 구성하는 모든 특성들을 상실한 것으로 여겨진다고 하며 당신이 정신을 부정한다면, 나는 나름대로 피동성 말고는 내게 아무런 상당한 것도 내놓지 않고, 그 형태 말고는 아무런 분간할 수 있는 것도 내놓지 않아서 조금도 (자발적이고 자유로운) 원인으로서 나타나지 않으며, 실체로서 완전히 종적을 감추는 물질을 부인할 것이다. 그리고 우리는 순수 관념론, 즉 무無에 도달한다. 그러나 무는 살아있고 사고를 하는 내가 알지 못하는 것들, 자신들 안에 시작된 종합 혹은 임박한 분리의 (어느 쪽인지 모를) 상태에서 존재의 모든 적대적 특성들을 결합하는 것들에게 혐오감을 준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원론, 우리가 그 항들이 거짓임을 완벽히 알지만 우리에게 참의 조건이어서 불가항력적으로 의무를 지우는 이원론으로 시작하지 않을 수 없다. 우리는 한마디로 데카르트와 함께, 그리고 인류와 함께 나에 의해, 즉 정신에 의해 시작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종교들과 철학들이 분석을 통해 분해되어 절대의 이론 안에 녹게 된 이래 우리는 정신이라는 것을 더 잘 아는 것이 아니며, 이 점에서 우리를 포위하는 모호성을 치장하는 언어의 풍부성에서만 옛날 사람들과 차이가 난다. 다만, 옛사람들에게 질서는 세상 바깥의 지성을 드러나게 한 반면에, 현대인들에게 그것은 오히려 세상 안에서의 지성을 드러내는 것 같다. 그러나 그 지성을 안에 두든지 바깥에 두든지, 질서에 힘입어 그 지성을 언명하는 순간부터 질서가 드러나는 곳 어디서나 그 지성을 인정하든지, 아니면 그것을 어디서도 인정하지 말아야 한다. 팔면체로 결정을 이루는 물체에 지성이 있다고 보는 것보다 『일리아드』를 지은 머리에 지성이 있다고 보는 것이 더 많은 이유가 있는 게 아니다. 그리고 역으로 마렝고에서 거둔 승리를 제1집정관을 고려하지 않고 전략적 조합 덕분이라고 하는 것만큼이나 조정자인 아我를 감안하지 않고 세상의 체계를 물리 법칙들에 관계시키는 것은 터무니없다. 둘 수 있는 차이라고는, 전자의 경우에서는 사고하는 자아가 보나파르트의 뇌에 자리 잡은 반면에 우주에 관련해서는 자아는 특수한 위치가 없이 편재한다는 데 있다.
유물론자들은 사람이 우주를 자신의 몸과 비슷하게 보아서 이 우주에 자신의 삶과 생각의 원리라고 가정한 자신의 영혼과 비슷한 영혼을 부여해 그 비교를 완수했다고, 그래서 신의 존재의 모든 논거들은 비교 항 자체가 가설적인 만큼 더욱 거짓된 유비로 전락한다고 말함으로써 반대 의견에 대해 우위를 점했다고 믿었다.
확실히 나는 다음과 같은 낡은 삼단논법을 옹호하지 않는다. 일체의 배치는 조율하는 지성을 가정한다. 그런데 우주 안에는 경탄할 만한 질서가 존재한다. 그러므로 세상은 하나의 지성의 작품이다. 이 삼단논법은 욥과 모세 이래로 아주 많이 논박을 받아서 해결책이 되기는커녕 풀어야 할 수수께끼의 공식일 뿐이다. 우리는 질서가 무엇인지를 완벽하게 안다. 그러나 영혼, 정신 혹은 지성이라는 말로 우리가 무엇을 말하고자 하는지를 우리는 절대로 모른다. 그러니 어떻게 우리가 하나의 현존으로부터 다른 것의 현존을 논리적으로 끌어낼 수 있는가? 그러므로 나는 더 풍부한 학식을 가진 자가 했다 해도 세상의 질서로부터 신의 존재 증명을 끌어냈다고 하는 것을 받아들이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나는 기껏해야 철학에 제안된 방정식만을 거기서 볼 것이다. 질서의 개념으로부터 정신의 언명까지는 메워야 할 형이상학적 심연이 놓여있다. 나는 또다시 문제를 증명으로 간주할 생각이 없다.
그러나 이는 이 순간에 중요한 것은 아니다. 나는 인간 이성이 숙명적이고 불가항력적으로 존재를 아와 비아, 정신과 물질, 영혼과 몸으로 구분하도록 이끌린다는 것을 확인하고자 했다. 그런데 유물론자들의 반론이 그것이 부정의 대상으로 삼는 바로 그것을 증명한다는 것을 누가 보지 못하는가? 사람은 자신 안에서 영적인 원리와 물적인 원리를 구분하니, 자신의 이중적 본질을 하나씩 선포하고 자기 자신의 법칙을 증명하는 자연 자체 말고 무엇이란 말인가? 그리고 유물론이 앞뒤가 안 맞는다는 점에 유의하자. 그것은 사람이 자유롭다는 것을 부인하며 부인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런데 사람이 자유를 덜 가질수록 그것이 하는 말은 더 중요성을 획득하고 진리의 표현으로 간주되어야 한다. 자신이 영혼이며 몸이라고 내게 말하는 이 기계의 말을 들을 때, 그러한 계시는 나를 놀라게 하고 어리둥절하게 함에도 불구하고 내가 볼 때 유물론자의 권위보다 비교도 안 되게 더 큰 권위를 띤다. 유물론자는 의식과 자연을 교정해 그것들이 다음과 같이 말하게 만들려고 시도한다. ‘나는 물질이며, 물질 말고 아무것도 아니다. 그리고 지성은 앎의 물질적 능력일 뿐이다.’
이번에는 내가 공세를 취해서, 몸들의 존재, 다시 말해 순수하게 몸을 지닌 자연의 실재성이 얼마나 무근거한 견해인지를 증명한다면 어쩔 것인가? 사람들은 이렇게 말한다. 물질은 불투과성이다. 무엇에 대한 불투과성인가? 나는 묻는다. 물론 자기 자신에 대해서다. 왜냐하면 이는 회피하고자 하는 것을 인정하는 일이 되기에 정신에 대해서라고 감히 말하지 못할 것이기 때문이다. 이에 대해 나는 이 두 가지 질문을 제기한다. 그것에 대해 당신이 아는 것은 무엇인가? 그리고 이것이 의미하는 바는 무엇인가?
1. 물질을 정의하는 수단이라고 주장되는 불투과성은 부주의한 물리학자들의 가설일 뿐이고, 피상적 판에서 도출된 거친 결론이다. 경험은 물질에 무한한 가분성, 무한한 팽창성, 지정 가능한 한계 없는 다공성, 열, 전기, 자기장에 대한 침투성, 동시에 그것들을 붙잡아 두는 성질, 부정형의 성질들, 친화성, 상호 영향, 수를 헤아릴 수 없는 변형이 있는 것을 보여준다. 이 모든 것은 불투과성의 무언가의 자료와는 별로 양립 가능하지 않다. 전기는 물질의 다른 어떤 성질보다 더 반발이나 저항의 관념으로서 불투과성으로 인도할 수 있는 것으로, 천 가지 상황에 따라 변하며 온전히 분자적 인력引力에 좌우된다. 그런데 이 인력보다 더 불투과성과 양립할 수 없는 것이 무엇인가? 끝으로 엄밀하게 물질의 투과성의 과학이라고 정의할 수 있는 과학이 존재하며, 이는 화학이다. 실제로 사람들이 화학적 조성이라고 칭하는 것은 투과와 어떻게 다른가.[7] …한마디로 물질로부터는 그 형태밖에 알 수가 없다. 실체에 관해서는 무無다. 그러므로 비가시적, 불가촉적이고, 강제 불가능하고 언제나 변화하고 언제나 달아나며, 생각에 오직 불투과성이라서 자신에 관해 그 변장한 모습만 보게 하는 존재의 실재성을 단언하는 것이 어찌 가능한가? 유물론자여! 나는 당신에게 당신 감각의 실재성을 증언하기를 허락한다. 그 감각들을 유발하는 것에 관해 말한다면, 당신이 그에 관해 말하는 모든 것은 다음의 상호성을 함축한다. (당신이 물질이라고 부르는) 무언가는 (내가 정신이라고 칭하는) 다른 무언가에 도달하는 감각들의 유발 요인이다.
2. 하지만, 외적 관찰에서 아무것도 정당화해 주지 않는, 참이 아닌, 물질의 불투과성이라는 이 가정은 어디서 나오며, 그 의미는 무엇인가?
여기서 이원론의 승리가 나타난다. 물질은 유물론자들과 대중이 상상하듯 감각의 증거에 의해서가 아니라 의식에 의해서 불투과성이라고 선언된다. 자아, 불가해한 자연은 자신을 자유롭고 독특하고 영원하다고 느끼고 자기 바깥에서 마찬가지로 불가해한 그러나 역시 독특한, 그 형질 변화에도 불구하고 영원한 다른 자연을 만나면서, 이 본질이 암시해 주는 감각과 관념 덕택에 비아非我가 연장延長을 가지고 불투과성이라고 선포한다. 불투과성은 형상적인 낱말로서, 사고, 절대의 분열이 또 다른 절대의 분열인 물적 실재성을 떠올리는 이미지다. 그러나 이 불투과성은 그것 없이는 물질이 사라지는 것으로서 결국 내적 감각의 자생적 판단, 정신의 … 형이상학적 선험, 입증되지 않은 가설일 뿐이다.
이처럼, 철학이 신학적 교조주의를 전복한 후에 물질을 정신화하건, 사고를 물질화하건, 존재를 관념화하건, 관념을 실재화하건, 실체와 원인을 동일시해 어디서나 힘을 대신 등장시키건,―모두 아무것도 설명하지 못하고 아무것도 의미하지 않는 문장들인데―언제나 철학은 우리를 영원한 이원론으로 데려가며, 우리 자신을 믿도록 우리에게 통첩을 보내면서 우리로 하여금 정신을 믿을 것이 아니라면 신을 믿도록 의무화한다. 정신을 자연에서 분리한 옛사람들과 달리 정신을 자연으로 다시 들어가게 하면서 철학은 다음의 유명한 결론, 연구의 모든 결실을 거의 다 요약한 결론으로 이끌렸다. 사람 안에서 정신은 스스로를 아는 반면에 다른 곳에서는 어디서나 정신은 스스로를 알지 못하는 것처럼 여겨진다. “사람 안에서 깨어있는, 동물 안에서 꿈을 꾸는 그리고 돌 안에서 잠을 자는 것…”이라고 한 철학자는 말한다.
철학은 그 마지막 시간에, 그러므로 자신의 탄생 때 알던 것보다 좀처럼 더 많이 알지 못한다. 마치 그것이 소크라테스의 말을 입증하기 위해서만 세상에 나타난 듯이 엄숙히 자신의 몸을 세마포로 덮으면서 우리에게 이렇게 말한다. 나는 내가 아무것도 모른다는 것을 안다. 나는 무엇을 말하는가? 철학은 오늘날 자신의 모든 판단이 똑같이 거짓되어도 똑같이 불가능하고 그렇지만 똑같이 필연적이고 숙명적인 두 가설, 물질과 정신 위에 기초를 둔다는 것을 안다. 그래서 옛날에는 종교적 불관용과 철학적 불화가 어디서나 흑암을 드리우면서 의문을 용서하고, 호색적 방종으로 초대한 반면에, 모든 사항들에 대한 부정의 승리는 더 이상 이런 의문도 허락하지 않는다. 일체의 질곡에서 벗어난, 그러나 자기 자신의 성공에 의해 정복된 사상은 자신에게 명확히 모순적이고 터무니없어 보이는 것을 긍정하지 않을 수 없다. 야만인들은 세상이 거대한 영의 보호를 받는 거대한 주물呪物이라고 말한다. 30세기 동안 시인, 입법자, 문명의 현자들은 세세로 철학의 등잔불을 전승해오면서 이 신앙고백보다 더 숭고한 것을 적은 적이 없다. 그리고 보라. 스스로를 철학이라 부른 신에 맞선 이 긴 음모의 끝에 해방된 이성은 야만적 이성으로서 이렇게 결론을 짓는다. 우주는 아我에 의해 객체화된 비아非我이다.
그러므로 인류는 숙명적으로 신의 존재를 가정한다. 그리고 우리 시대에 끝을 맺는 긴 기간 동안 인류가 자기 가설의 실재성을 믿었다면, 그 상상할 수 없는 물체를 찬양했다면, 이 신앙 행위에 사로잡힌 후에 인류가 자기 자신의 사상의 의인화일 뿐이라고 알고 있는 주권적 존재에 대한 이 견해를 뻔히 알면서도 더 이상 자유롭지는 않게 지속한다면, 인류가 자신의 마술적 주문을 재개하기 직전이라면, 그토록 놀라운 황홀경은 깊이 파고들 가치가 있는 무언가 신비적인 것을 감추고 있다고 믿을 필요가 있다.
나는 황홀경과 신비를 말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로써 신 관념의 초인적 내용을 부인하노라고 주장하지는 않는다. 새로운 상징주의의 필요성, 말하자면 새로운 종교의 필요성을 인정하는 것도 아닌 것과 마찬가지다. 왜냐하면, 인류가 신 혹은 자아나 정신의 이름으로 원할 모든 것을 긍정하면서 자기 자신을 긍정할 뿐이라는 점은 의문의 여지가 없기 때문이다. 인류가 그렇다면 스스로를 안다는 것 말고 다른 것으로서 스스로를 긍정한다는 점도 부인할 수 없을 것이다. 이는 일체의 변신론으로부터와 마찬가지로 일체의 신화로부터 나온다. 게다가 이 긍정은 불가항력적이므로 의문의 여지없이 그것은 가능하다면 과학적으로 확정하는 것이 중요한 비밀스러운 관계들에 관련된다.
다시 말해 무신론, 즉 인간주의는 그 비판적이고 부정적인 부분 모두에서는 참이지만, 자연의 인간 그 자체에 주목할 경우에, 인류가 신의 딸이고, 유출이고, 형상이고, 반영물이거나 말씀이라는 인류에 관한 이 첫 번째 언명을 외람된 판단으로 제쳐놓는 경우에 인간주의는 내가 말하건대 이처럼 자신의 과거를 부인하는 경우에는 또 하나의 모순에 불과할 것이다. 우리는 그러므로 인간주의에 대한 비판에 착수할 수밖에 없다. 즉, 인류가 그 총체로서, 그 발달의 모든 시기에서 고려될 때 신의 타원형의 환상적인 특성들도 제외하고 신적인 관념을 충족하는지, 인류가 존재의 충만성을 충족하는지, 인류가 스스로를 만족시키는지를 입증할 수밖에 없다. 우리는 한마디로 인류가 고대의 교리에 따라 신을 지향하는지, 혹은 현대인들이 말하는 것처럼 신이 되는 것이 인류 자신인지를 탐구하지 않을 수 없다. 아마도 우리는 결국 그 두 체계가 외관상으로 대립을 이룸에도 불구하고 동시에 참이며, 근본적으로 동일하다는 것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이 경우에 인간 이성의 무오류성은 그 집단적 발현에서, 성찰된 사유들에서처럼 상당한 정도로 확인될 것이다. 한마디로 우리가 신의 가설을 인간에 대해 입증하기까지 무신론적 부정은 확정된 내용을 가지지 못한다.
그러므로 해야 할 일로 남는 것은 신 관념에 대한 과학적, 즉 경험적 증명이다. 그런데 이 증명은 결코 시도된 적이 없다. 신학은 그 신화들의 권위에 관해 교리화하고 철학은 범주들의 도움을 받아 사유를 전개해서, 신은 초월적인, 즉 이성에 닿을 수 없는 개념 상태에 머물렀다. 그리고 가설이 여전히 존속한다.
내가 말하지만, 이 가설은 어느 때보다 활기차고 더 가차 없는 가설로서 존속한다. 우리는 이 숙명적 시기들 중 하나에 도달해있다. 이 시기에 사회는 과거를 경멸하고 미래를 고뇌하면서 때로는 새로운 신앙을 준비하는 수고를 몇몇 고독한 사상가들에게 맡기고 정신없이 현재를 끌어안고, 때로는 자신이 누리는 것들을 상실한 깊은 심연으로부터 신에게 외치고 구원의 신호를 요구하거나 아니면 자신의 혁명의 광경에서, 희생 제물의 내장에서 그러듯 자기 운명의 비밀을 찾는다.
재가 무엇을 더 강변할 필요가 있는가? 신의 가설은 정당하다. 왜냐하면 그것은 모든 사람에게 불가항력적으로 과해지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것은 누구도 비난할 수 없을 것이다. 믿는 자는 신이 존재한다는 가정에 관해 모름지기 내게 동의할 수밖에 없다. 부정하는 자도 이에 관해 내게 동의할 수밖에 없는데, 그 자신이 나보다 앞서 이 가정을 했으며, 일체의 부정은 그에 앞선 긍정을 함축하기 때문이다. 의심하는 자에 관해 말한다면, 그는 자신의 의심이 필연적으로 조만간 그가 신이라 부르게 될, 내가 모르는 그 무엇을 가정한다는 것을 이해하도록 잠깐 성찰하는 것으로 충분하다.
그러나 내가 내 사고의 사실로부터 신을 가정할 권리를 보유한다면 나는 신을 긍정할 권리를 정복해야 한다. 다시 말해, 내 가설이 불가항력적으로 부과된다면, 그것은 그 순간에는 내가 주장할 수 있는 모든 것이다. 왜냐하면, 긍정한다는 것은 확정한다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모든 확정은 참이기 위해서는 경험적으로 주어져야 한다. 실제로 확정을 말하는 자는 관계, 조건성, 경험을 말한다. 그러므로 신 개념의 확정이 우리에게 경험적 증명에서 나와야 하니 우리는 이 고귀한 미지의 탐구에서 경험에 의해 주어지지 않아서 가설을 넘어서는 모든 것을 신학의 모순들에 다시 빠지지 않도록, 그리고 결과적으로 무신론의 항의를 다시 일으키지 않도록 삼가야 한다.
Ⅲ
정치경제학 책에서 내가 모든 철학의 근본 가설로부터 어떻게 출발해야 했는지를 말하는 일이 남아있다.
그리고 우선, 나는 사회과학 권위의 기초를 놓기 위해 신의 가설을 필요로 한다. 천문학자가 세계 시스템을 설명하기 위해 외관에 전적으로 의존해 대중과 더불어 궁창의 하늘과 평평한 땅, 풍선처럼 큰 태양을 가정하고, 동양에서 서양까지 공중의 곡선을 그리면서 나중에 관찰에 따라 그가 출발점으로 삼지 않을 수 없는 자료를 수정은 하더라도 감각의 무오류성을 가정할 때, 사실상 천문 철학은 선험적으로 감각이 우리를 속인다는 것, 우리는 우리가 보지 못한다는 것을 인정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그러한 원리에 따를 때 천문학의 확실성은 어떻게 될 것인가? 그러나 감각들의 관계는 어떤 경우에는 수정되고 스스로 보완될 수 있어서 감각의 권위는 요지부동인 채로 있으며, 천문학은 가능하다.
마찬가지로 사회 철학은 선험적으로 인류가 그 행동에서 오류를 범할 수도, 속을 수도 있다는 것을 결코 인정하지 않는다. 그것이 없으면 인류의 권위, 즉 이성의 권위, 근본적으로 동의어인 인민 주권의 권위는 어떻게 될 것인가? 그러나 사회 철학은 인간적 판단들이 실제적이고 직접적인 판단에서는 언제나 참이면서도 관념들의 취득에 따라 언제나 일반 이성을 개인적 사유와 일치시키고 확실성의 영역을 무한히 확장하는 방식으로 서로 보완해 주며 잇따라 서로를 비추어 줄 수 있다고 생각한다. 이는 언제나 인간 판단의 권위를 긍정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성의 첫 번째 판단, 모든 정치적 헌법의 전문前文은 승인과 원칙을 구하는 것으로서 반드시 이런 것이다. 신은 존재한다. 이는 말하자면, 사회는 지도 의견, 사전 숙고, 지성을 가지고 다스려진다는 것이다. 이 판단은 우연성을 배제하는 것으로, 때문에 사회과학에 대한 가능성의 기초를 놓는 것이다. 그리고 개선과 진보의 목적으로 시도된, 사회적 사실들에 대한 모든 역사적, 실증적 연구는, 물론 나중에 가서 이 판단을 고려하기는 하겠지만 인민과 더불어 신의 존재를 가정해야 한다.
이처럼 사회들의 역사는 우리에게는 신 관념의 장시간의 확정에 불과하다. 사람의 운명은 점진적인 현시 과정인 것이다. 그리고 고대의 지혜가 모든 것을 신성의 자의적이고 환상적인 관념에 의존하게 만들어 이성과 의식을 억압하고 보이지 않는 주인에 대한 공포로 운동을 멈추었던 반면, 새로운 철학은 방법을 뒤집어 사람의 권위와 마찬가지로 신의 권위를 깨고 사실과 증거의 멍에 외에 다른 멍에를 수용하지 않아 모든 것을 그 문제들 가운데 최후의 문제로서 신학적 가설을 향해 수렴시킨다.
인간주의적 무신론은 그러므로 사람의 정신적, 지적 해방의 마지막 항, 결과적으로 철학의 마지막 국면으로서 모든 파괴된 교리의 재건 혹은 과학적 입증으로 가는 통로로 소용된다.
나는 신의 가설을 내가 말해 온 대로 역사에 의미를 부여하기 위해서만이 아니라 국가 안에서 과학의 이름으로 실행할 개혁을 정당화하기 위해서 필요로 한다.
우리가 신성을 사회에 외부적인 것으로, 사회의 운동들을 위에서부터 조절하는 것으로 간주하든지(완전히 허무하고 환상일 개연성이 아주 높은 견해), 사회 안에 내재하며 비인격적이고 무의식적인 이 이성과 동일하면서 본능처럼 문명을 진행시킨다고(자아의 비인격성과 무지는 지성의 관념에 혐오스러움에도 불구하고) 판단하든지, 끝으로 사회 안에서 수행되는 모든 것이 그 요소들의 관계로부터 나오든지(능동을 피동으로 바꾸고, 지성을 필연으로 만들며, 혹은 같은 말이지만 법칙을 원인으로 삼는 것이 장점인 체계), 언제나 그 결과로 사회적 활동의 발현은 우리에게 필연적으로 지고한 존재의 자의自意의 신호로, 아니면 일반적이고 비인격적인 일반 이성의 전형적인 종류의 언어로, 아니면 끝으로 필연의 말뚝으로 나타나서, 이 발현들은 우리에게 절대적인 권위를 지닐 것이다. 그것들의 계열은 정신에서처럼 시간상으로 연결되어, 완수된 사실이 수행해야 할 사실을 정하고 정당화한다. 과학과 운명은 일치한다. 생겨나는 모든 것은 이성에서 비롯되고, 역으로 이성은 생겨나는 것의 경험에 관해서만 판단을 내리기 때문에 과학은 정부에 참여할 권리가 있으며, 자문역으로서 그 자격의 근거를 이루는 것은 주권자로서 그것의 개입을 정당화해 준다.
모두의 투표에 의해 신적인 것으로 표현되고 인정되고 수용되는 과학은 세상의 여왕이다. 이처럼 신 가설에 힘입어 일체의 정태적 혹은 퇴보적 반대, 모든 신학에 의해 제안된 불수용의 모든 의도, 전통 혹은 이기심은 영구히 그리고 불가역적으로 제거되어 있다.
문명을 자연에 결합하는 연계를 보여주기 위해 나는 신神 가설을 필요로 한다.
실제로, 이 놀라운 가설은 자연 법칙과 이성 법칙의 동일성을 함축해 인간이 절대자에 동화되게 하는 것으로서 우리가 인간의 솜씨에서 창조적 작업의 보완물을 보도록 허락하며, 인간과 인간이 거주하는 지구를 연대하게 하며, 섭리가 우리를 배치한 이 영지, 그래서 부분적으로는 우리의 작품이 되는 영지의 개발 사업에서 우리가 만물의 원리와 목적을 의식하게 해준다. 그러므로 인류는 신이 아니라 해도 신을 계승한다. 혹은 다른 양식을 선호한다면, 인류가 오늘날 성찰로 행하는 것은 인류가 본능적으로 시작한 것, 그리고 자연이 필연으로써 완수하는 것으로 우리에게 보이는 것과 같다. 이 모든 경우에, 그리고 어떤 견해를 택하든, 하나는 의심할 수 없는 것으로 남는데 그것은 행동과 법의 일치이다. 지적인 존재들이자 지성을 가지고서 연출되는 우화의 배우들로서 우리는 우주와 영원을 향해 용감하게 결론을 내릴 수 있으며, 우리가 우리들 가운데 작업을 확정적으로 조직했다면, 고집스럽게 창조는 설명된다고 말할 수 있다.
이처럼 철학의 탐구 영역은 정해진 것이다. 전통은 미래에 관한 모든 사유의 출발점이다. 유토피아는 영영 배제된다. 자아에 대한 연구는 개인적 의식으로부터 사회적 의지의 발현들로 이송되면서 그때까지 박탈되었던 객관성을 획득한다. 그리고 역사는 심리학이 되고, 신학은 인류학이 되며, 자연과학들은 형이상학이 되어 이성의 이론이 지성의 공허가 아니라 폭 넓게, 그리고 직접적으로 관찰 가능한 자연의 무수한 형태들로부터 도출된다.
나는 견해가 같지 않은 수많은 파벌을 향한 내 선의를 증언하기 위해 신 가설을 필요로 한다. 나는 다음 이들의 한恨을 두려워하는 것이다. 유신론자들. 이들은 신의 대의를 위해 칼을 빼어들 채비가 되어있고, 나는 로베스피에르처럼 마지막 무신론자의 파괴에까지 단두대를 가동하면서도 이 무신론자가 자신일지 모른다고 의심하지 않는 그런 자를 안다. 신비가들. 이들은 드 라므네(de Lamennais), 키네(Quinet), 르루(Leroux) 등 제씨諸氏의 깃발 아래 행진하는 학생들과 여성들로 대부분 구성된 당파로서 ‘그 주인에 그 신하, 그 신에 그 백성’이라는 표어를 가지고 일꾼의 임금을 규율하기 위해 종교를 부흥하는 것에서 시작한다. 유심론자들. 이들은 내가 내 영혼의 온 힘을 다해 항거하는 것이 물질 숭배교인데도 내가 정신의 권리들을 무시한다면 물질 숭배교를 세운 것이라고 나를 고발하는 자들이다. 감각주의자들과 유물론자들. 이들에게 신적 교리는 제약의 상징이고 열정의 예속화 원리인데, 그들은 말하기를 그 바깥에서는 사람에게 기쁨도, 덕성도, 천재성도 없다. 절충주의자들과 회의주의자들, 모든 낡은 철학의 서적상書籍商이자 출판업자들이지만 스스로는 철학을 하지 않고 자신들의 허가 없이 생각하고 믿거나 단언하는 누구에게든지 반대하며 찬동과 특권을 가지고 광범위한 신도회에 가입한 자들이다. 끝으로 보수주의자들. 수구주의자, 이기주의자이며 위선자들로서 이웃에 대한 증오에 의거해 신의 사랑을 설파아고 노아의 홍수 이래로 세상의 여러 불행에 대해 자유를 고발하고, 자신들의 어리석음의 감정에 의거해 이성을 저주하는 자들이다.
그러므로 신앙의 경외를 받는 허깨비들을 모독하기는커녕 그것들을 대명천지에 드러나게 하기만을 열망하는 가설, 전통적 교리들과 의식의 편견들을 기각하는 대신에 단지 그것들을 입증할 것만 요구하는 가설, 배타적 견해들로부터 자신을 지키면서도 이성의 무오류성을 공리로 삼고, 이 풍성한 열매를 맺는 원칙 덕분에 적대적 종파들 어느 것에 대해서도 물론 반대하는 결론을 내리지 않을 가설을 고발하는 것이 가능하겠는가? 종교적, 정치적 보수주의자들이 내가 주권적 지성, 모든 질서정연한 사고의 원천인 그것의 가설로부터 출발한 마당에 사회질서를 교란한다고 비난하는 일, 내가 신 관념의 의미와 내용을 추구하는 마당에 반半그리스도교적 민주주의자들이 나를 신의 적이고 따라서 공화국의 배신자라고 욕하는 일, 그리고 내가 철학은 그 대상물 안에서, 즉 사회와 자연의 발현물 안에서 연구되어야 한다고 적확하게 주장하는 마당에 대학의 상인들이 자신들의 철학적 생산물의 무가치함을 증명한 무례함을 범했다고 내게 책임을 돌리는 일이 가능한 것인가?…
나는 내 문체를 정당화하기 위해 신 가설을 필요로 한다.
신, 세계, 영혼, 운명에 관한 모든 것에 대해 내가 처한 무지에서, 유물론자로서, 즉 관찰과 경험으로써 진행할 수밖에 없고 다른 언어가 존재하지 않으므로 신자의 언어로 결론을 내릴 수밖에 없으며, 내 공식들이 본의 아니게 신학적이어서 본래 의미로 받아들여져야 할지 아니면 비유로 받아들여져야 할지 알지 못하며, 신, 인간 그리고 사물에 대한 이 끊임없는 사색 중에 사유, 말, 행동이라는 세 범주가 포괄하는 모든 항들의 동의성을 겪지 않을 수 없으나 다른 측면보다 어느 한 측면에서 아무것도 단언하기를 원하지 않아서, 변증법의 엄밀성은 내가 사람들이 신이라 부르는 이 미지를 가정할 것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닌 것을 요구했다. 우리는 신성으로 가득 차 있다. 만물은 유피테르로 가득하다(Jovis omnia plena). 우리의 기념물, 우리의 전통, 우리의 법, 우리의 관념, 우리의 언어와 우리의 과학, 모두가 이 지워지지 않는 미신에 감염되어 있으며, 그 바깥에서는 우리는 말하고 행동하게 되어 있지 않으며, 그것 없이는 우리는 생각만 못하는 것이 아니다.
끝으로 나는 이 새로운 논문들의 출간을 설명하기 위해 신 가설을 필요로 한다.
우리 사회는 여러 사건들로 버거움을 자각하고 미래를 염려한다. 이 막연한 예감을 보편적, 내재적, 보기에 따라서는 영원한 그러나 비인격적인, 따라서 말 없는 이성의 도움으로만, 또는 그것이 필연이 인지된다는 것, 따라서 사회가 예감을 가진다는 것을 함축한다면 필연의 관념을 가지고서 어떻게 설명하는가? 그러므로 또다시 사회를 압박하며 사회에 상象을 제공하는 매체 혹은 야차夜叉의 가설이 남게 된다.
그런데, 사회가 예언을 할 때는 어떤 사람들의 입술로 스스로에게 질문하고, 다른 사람들의 입술로 스스로에게 답한다. 그리고 현자는 신 자신이 말했으므로 경청하고 신이 말했다는 것을 이해할 줄 안다.
도덕 및 정치 과학 아카데미는 다음과 같은 질문을 제기했다.
이윤이 임금과 가지는 관계를 규율하는 일반적 사실들을 정하고, 그것의 각각의 기복 운동을 설명한다.
몇 년 전에 같은 아카데미는 이렇게 물었다. 빈곤misère의 원인은 무엇인가? 이는 실제로 19세기가 하나의 사상, 평등과 개혁이라는 사상만을 가진다는 것이다. 그러나 정신은 원하는 곳 어디서나 숨을 쉰다. 많은 이들이 그 질문을 곱씹기에 착수했다. 아무도 대답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점술사 집단은 자신의 질문을 더 명확한 용어로 갱신했다. 작업장에서 질서가 지배하는지, 임금이 공정한지, 자유와 특권이 정당한 보상을 받는지, 교환의 모든 행위를 지배하는 가치의 개념이 경제학자들이 내놓은 형태로 충분히 정확한지, 신용이 노동을 보호하는지, 유통이 규칙적인지, 사회의 부담이 모두에게 동등하게 주어지는지 등등을 알고 싶어 한다.
그리고 실제로 빈곤이 소득의 부족을 직접적 원인으로 하므로, 불행과 악의의 경우들 외에 노동자의 소득이 어떻게 부족한지를 아는 것이 좋다. 한 세기 전에 그렇게 큰 소리를 냈고, 이상한 숙명에 의해 아카데미의 프로그램에서 마치 그것이 현대의 진정한 고갱이인 듯이 끊임없이 재생산되는 것은 언제나 재산의 불평등이라는 같은 문제다.
그러므로 평등, 그것의 원칙, 그것의 수단, 그것의 장애물, 그것의 이론, 그것이 지연되는 이유들, 사회악과 섭리적 악의 원인, 바로 이것들이야말로 불신의 냉소에도 불구하고 세상에 가르쳐줄 필요가 있는 것이다.
나는 아카데미의 보는 눈이 별로 심오하지 않으며, 로마 가톨릭 공의회와 마찬가지로 새로운 것에 대한 공포심을 지니고 있음을 잘 안다. 그러나 아카데미가 과거로 회귀할수록, 그것은 우리에게 미래를 비추어 주며, 결과적으로 우리는 아카데미의 영감을 더욱 믿어야 한다. 왜냐하면 진정한 예언자들은 자신들이 공언하는 것을 이해하지 못하는 자들이기 때문이다. 차라리 다음의 말을 들어보라.
아카데미는 말한다. 자발적이고 사적인 조합의 원리를 가지고 곤궁의 경감을 위해 할 수 있는 가장 쓸모 있는 적용 방식은 어떤 것인가?
그리고 또,
보험 계약의 이론과 원리들을 해설하고, 그 역사를 펴내고, 학설과 사실들로부터 이 계약이 취할 수 있는 발달 형태들과 현재 우리의 상업과 산업이 처한 진보 상태에서 행해질 수 있을 다양한 유익한 적용들을 도출해낸다.
정치 평론가들은 상업적 연대의 기초 형태인 보험이 사물들에서의 연합societas in re이라는 것, 즉 순전히 경제적인 관계에 기초를 둔 조건들이 인간의 자의恣意를 벗어나는 하나의 사회라는 데 동의한다. 그래서 보험, 혹은 이익들에 대한 상호 보장의 철학, 이는 실재적in re 사회들의 일반 이론에서 도출될 것인데, 이는 보편적 조합의 공식을 포함할 것이다. 이 공식을 아카데미에서는 아무도 믿지 않는다. 그리고 주체와 객체를 동일한 관점 안에 합쳐서 아카데미는 이익들의 조합 이론과 더불어 자발적 조합의 이론을 요구할 때에, 우리에게 가장 완벽한 사회가 어떤 것이어야 하는지를 드러내고, 이로써 자신의 신념에 더욱 상반되는 모든 것을 긍정한다. 자유, 평등, 연대, 조합을! 어떤 생각할 수도 없는 오해에 의해 그렇게 저명하게 보수적인 집단이 시민들에게 인간의 여러 권리에 대한 이 새로운 프로그램을 제안했는가? 이와 같이 가야파는 예수 그리스도를 부인하면서 구원을 예언했다.
이 질문들 중 첫 번째 것에 관해 45편의 논문들이 2년에 걸쳐 아카데미에 제출되었다. 그 주제가 여러 정신들의 상태에 경이롭게 부응했다는 증거다. 그러나 수많은 경쟁자들 중 누구도 상을 받을 사람으로 판정되지 못해서 아카데미는 경쟁자들의 부족을 들어 그 문제를 철회했지만, 실제로는 논문 공모의 실패가 아카데미가 품은 유일한 목표라서 더 기다리지 않고 조합을 주창하는 당파의 기대가 근거를 상실했다고 선언하는 것이 중요했던 것이다.
그래서 아카데미의 제씨는 그들이 삼발이 위에서 공고한 것을 회의실 안에서 부인한다! 그러한 모순은 나를 놀라게 할 것이 못 된다. 그리고 신은 내가 그들의 이런 행위를 범죄로 보지 못하게 말린다. 옛사람들은 여러 혁명이 무서운 징조로 선포되며, 다른 기적들 중에서 동물들이 말을 하는 기적도 있다는 것을 믿었다. 이는 위기의 순간에 대중들 안에서 갑자기 유통하는, 그리고 어떠한 인간적인 선행자도 없어 보이는 이 갑작스러운 관념과 이상한 이야기들을 지칭하기 위한 비유였다. 그만큼 그런 관념들은 통상적인 사법司法의 영역을 벗어난다. 우리가 사는 시대에 그러한 일은 얼마든지 일어날 수 있었다. 운명적 본능과 기계적 자생성에 의거해―가축들이 말을했다pecudesque locutae―조합을 선포한 후에, 도덕 및 정치 과학 아카데미의 선생들은 통상적인 분별력을 다시 되찾아 그들에게서는 일상 관행이 영감靈感을 반박하게 되었다. 그러므로 높은 분들의 견해를 사람들이 관심을 기울인 판단과 분별하는 법을 알도록 하자. 그리고 현자들의 이야기에서 이는 특히 의심할 바가 없으며, 그들의 성찰은 거기에 가장 적게 기여한다는 것을 확실한 것으로 간주하자.
그럼에도 아카데미는 자신의 직관과 아주 급작스럽게 결별하면서 약간의 후회를 느낀 것 같다. 성찰을 통해 더는 믿지 않는 조합의 이론 대신에 아카데미는 ‘주로 빈곤 계급의 복지와 도덕성과 관련해 페스탈로치의 훈육과 교육 체제에 관한 비판적 고찰’을 요구한다. 누가 아는가? 아마도 이윤과 임금의 관계, 조합, 노동 조직이 결국 교육 체계의 근저에 있으리란 것을. 사람의 생명은 끊임없는 도제 수업이 아닌가? 철학과 종교는 인류의 교육이 아닌가? 훈육을 조직하는 것은 그러므로 산업을 조직하고 사회 이론을 만드는 것이다. 아카데미는 제정신이 돌아온 순간에는 언제나 다음 질문으로 돌아온다. 말을 하는 것은 여전히 아카데미다.
물질적 행복의 진보와 취향은 인민의 도덕성에 어떤 영향을 미치나?
극히 외면적인 의미에서 볼 때 아카데미의 이 새로운 질문은 진부하고 기껏해야 달변가를 부추기기에 알맞다. 그러나 아카데미는 끝까지 자기 신탁의 혁명적 의미를 무시해야 해서, 자신의 주석에 쳐진 휘장을 걷어 올렸다. 그러니 아카데미는 이 에피쿠로스적 논제에서 어떤 심오한 것을 보았는가? 아카데미는 우리에게 말한다.
“사치와 향락 취향, 대다수가 그에 대해 느끼는 각별한 애호, 그에 전적으로 몰두하는 영혼들과 지성들의 경향, 이를 자신들의 모든 사업, 모든 노력과 모든 희생의 동기와 목표로 삼기 위한 개인들과 국가의 의견 일치는 이롭건 해롭건 예전에 사람들을 지배했던 것보다 아마도 더 강력한 행동의 원칙이 되는 일반적 혹은 개인적 감정들을 낳는다.”
도덕주의자들에게는 세기의 감각주의, 양심 팔아먹기, 그리고 정부를 수단으로 자행된 부패를 고발하기에 더없이 좋은 기회가 주어졌다. 그 대신에 도덕 과학 아카데미는 무엇을 하는가? 지극히 자동적인 평온함을 가지고 아카데미는, 사치가 아주 오랫동안 스토아학파와 금욕주의자들, 이 거룩함의 거장들에 의해 금지되어 온 것인데, 이것이 옛날 종교와 철학이 호소한 모든 행위 원칙들만큼이나 정당하고 순수하고 위대한 행위 원칙으로 등장하게 될 공무 분야를 신설한다. 아카데미는 우리에게 말한다. 행동의 동기(의문의 여지없이 지금은 오래되고 낡은), 섭리상으로 역사에서 탐욕이 그 뒤를 이은 행동의 동기를 확인하라. 그리고 처음 것의 결과에 따라 탐욕의 효과를 계산하라. 한마디로 아리스티포스가 자신의 세기를 앞서갈 뿐이라는 것, 그의 윤리는 제논과 토마스 아 켐피스의 윤리와 마찬가지로 승리해야 했다는 것을 증명하라.
그러므로 우리는 더 이상 가난하기를 원치 않는 사회, 자신이 부를 가지지 않는 한 옛날에 자신에게 소중하고 거룩했던 모든 것, 자유, 종교, 영광을 비웃는 사회, 부를 획득하기 위해서 온갖 수모를 겪고 온갖 비웃음을 사는 사회를 대면하고 있다. 이 쾌락에 대한 열렬한 갈증, 사치에 도달하려는 막을 수 없는 의지는 문명에서의 새로운 시대의 징후로서 지고의 명령이며, 그에 힘입어 우리는 빈곤을 근절하려고 노력해야 한다. 아카데미는 이렇게 말한다. 그 다음에 속죄와 절제의 계율, 희생과 포기, 행복한 비천함의 윤리는 어떻게 되는가? 저 세상에 약속된 보답에 대해 얼마나 불신하는 것이며, 복음을 얼마나 부정하는 것인가! 하지만 무엇보다도 황금열쇠를 시스템으로 간주한 정부를 얼마나 많이 정당화해 주는 것인가! 종교인들, 그리스도교인들, 세네카 류의 사람들이 어떻게 일제히 그런 부도덕한 격률을 선포했는가?
아카데미는 사상을 보완해 우리에게 다음과 같이 대답하려고 한다.
‘인신과 재산에 대한 침해의 소추와 처벌에서 형사 기구의 진보는 야만시대 이래 가장 세련된 민족들의 시대까지 문명의 여러 시대를 어떻게 이어 오고 획을 그어 오는지를 보이라.’
도덕 과학 아카데미의 범죄학자들이 자기 전제의 결론을 미리 내다보았다는 것이 믿어지는가? 매 순간 연구해야 할 사실, 아카데미가 형사 기구의 진보라는 말로 가리키는 사실은 혹은 교정矯正의 형태에서, 혹은 형벌에서 문명이 자유와 계몽과 부에서 성장함에 따라 발현되는 점진적인 완화일 뿐이다. 그래서 형벌 제도들의 원칙은 사회의 복지를 구성하는 모든 원칙에 반비례해서, 일체의 사법적 장치와 마찬가지로 형벌 체계의 모든 부분의 끊임없는 제거가 있으며, 이 운동의 최종 결론은 이런 것이다. 질서의 강제 이행은 공포도 처형도 아니고 따라서 지옥도 종교도 아니다.
기성관념을 얼마나 뒤집는 것인가! 도덕 과학 아카데미가 옹호할 사명을 지는 모든 것을 얼마나 부정하는 것인가? 그러나 질서의 강제 이행이 이 세상에서도 저 세상에서도 겪어야 할 처벌의 두려움에 더 이상 있지 않다면, 인신과 재산을 보호하는 보장책은 어디 있는가? 아니, 형벌 제도 없이 재산은 무엇이 되며, 재산 없이 가족은 무엇이 되는가?
이 모든 것을 전혀 모르는 아카데미는 동요 없이 이렇게 대답한다.
‘고대부터 우리 시대까지 프랑스 땅에서 가족 조직의 여러 국면들을 그려 보라.’
이는 이런 뜻이다. ‘가족 조직의 선행하는 진보에 의한 재산 평등, 자발적이고 자유로운 조직, 보편적 연대, 물적이고 화려한 행복, 교도소, 법정, 경찰, 유치장 없는 공공질서의 상태에서 가족의 생존 조건을 확인하라.’
극히 대담한 혁신자들의 예를 따라 사회 질서의 모든 원칙, 종교, 가족, 재산, 형사 제도를 의문시한 후에 도덕 및 정치 과학 아카데미가 또한 다음의 의문을 제기하지 않았다는 것에 대해 사람들은 아마도 놀랄 것이다. 가장 나은 정부 형태는 무엇인가? 실제로 정부는 사회에 대해 일체의 선제 움직임, 일체의 보장, 일체의 개혁이 나오는 원천이다. 그러므로 헌장에 명문화된 대로의 정부가 아카데미의 문제들에 대한 실천적 해결책을 내놓는 데 충분한지를 알아보는 일이 흥미로웠다.
그러나 신탁神託들이 귀납과 분석에 의해 진행된다고 상상하는 것은 신탁을 잘 모르는 일일 것이다. 그리고 정치적 문제가 요구되는 증명들의 조건이거나 보조 명제라는 바로 그 이유 때문에 아카데미는 이를 논문 공모에 부치지 못했다. 그리고 그러한 결론은 아카데미의 눈을 뜨게 해줄 것이며, 응모자들의 논문을 기다릴 것 없이 자신의 프로그램을 완전히 제거하기를 서둘렀을 것이다. 아카데미는 앞의 문제를 다시 내놓았다. 아카데미는 이렇게 혼잣말을 했다.
신의 작품들은 그 고유한 본질상 아름답다. 한결같이 바르다(justificata in semetipsa, 시편 19장 9절). 이는 한마디로 신에게서 나온 것이므로 참되다. 사람에 대한 사상가들은 길고도 좁은 섬광이 꿰뚫은 두꺼운 안개를 닮았다. ‘그러므로 우리와 관련해서 진리는 무엇이며, 종살이의 특성은 무엇인가?’
마치 아카데미가 우리에게 이렇게 말한 것 같다. 여러분, 여러분 존재의 가설, 시간, 공간, 운동, 사상, 사상의 법칙들의 가설을 입증해 보시오. 그 다음은 빈곤의 가설, 조건 불평등의 가설, 보편적 조합의 가설, 행복의 가설, 왕정과 공화정의 가설, 섭리의 가설을 입증해 보시오!…
이는 신과 인류에 대한 온전한 비판이다.
나는 저명하신 단체의 프로그램을 증거로 삼는다. 내 작업 조건을 제시한 것은 내가 아니다. 이는 도덕 및 정치 과학 아카데미다. 그런데, 나 자신이 무오류성을 타고나지 않았다면, 한마디로 내가 신이나 점쟁이가 아니라면 내가 이 조건들을 어떻게 충족할 수 있는가? 그러므로 아카데미는 신과 인간이 동일하거나 적어도 상관관계라는 것을 인정한다. 하지만 이 상관성이 어디 있는지를 아는 것이 문제이다. 그러한 것이 확실성 문제의 의미이며, 그러한 것이 사회철학의 목표이다.
그러므로 이처럼 신이 영감을 불어넣는 사회의 이름으로 아카데미는 질문을 한다.
같은 사회의 이름으로 나는 대답을 시도하는 예언자 중 하나다. 과제는 엄청나며, 나는 이를 완수한다는 약속을 하지 않는다. 나는 신이 나를 데려다주는 데까지 갈 것이다. 그러나 내 이야기가 어떤 것이든 그것은 결코 내게서 나오는 것은 아니다. 내 펜을 움직이는 사고는 내게 개인적인 것이 아니며, 내가 쓰는 것은 어느 것도 내 것이라고 할 수 없다. 나는 사실들을 내가 본 대로 전할 것이다. 나는 그 사실들을 내가 말한 것에 준해서 판단할 것이다. 나는 무엇이든지 그것의 극히 정력적인 이름으로 부를 것이다. 그리고 누구도 거기서 모독을 발견하지 못할 것이다. 나는 자유롭게, 그리고 내가 배운 점술의 규칙에 따라 이 순간에 현자들의 웅변적인 입술로, 그리고 인민의 알아들을 수 없는 아우성으로 의견을 표명하는 신의 소견이 우리에게 원하는 것을 구할 것이다. 그리고 내가 우리의 헌법에 의해 바쳐진 일체의 특권을 부정할 때, 나는 결코 몽니를 부리는 것이 아니다. 나는 보이지 않는 쇠꼬챙이가 우리를 떠미는 곳을 손가락으로 가리킬 것이다. 그리고 내 행동도 내 말도 성질을 돋우는 것은 아닐 것이다. 나는 안개를 일으킬 것이며, 내가 벼락이 치게 할 때, 나는 죄가 없을 것이다. 아카데미가 나에게 하도록 초대한 이 엄숙한 조사에서 나는 진리를 말할 권리밖에 없으며, 내가 생각하는 것을 말할 권리를 가진다. 내 사고, 내 표현 그리고 진리는 단 하나의 유일한 것일 수밖에 없다!
그리고 여러분, 독자님들, 독자 없이 작가가 없으니 여러분은 내 저작의 절반이다. 여러분 없이 나는 울리는 종에 불과하다. 여러분의 주의에 힘입어 나는 기적을 말할 것이다. 여러분은 사회라고 부르는 지나가는 이 회오리바람, 아주 무서운 소음과 함께 번찍임과 천둥과 음성이 솟아나는 이 회오리바람을 보는가? 나는 이 회오리바람을 움직이는 숨겨진 용수철을 여러분에게 손가락으로 만지게 하고 싶다. 그러나 이를 위해서는 여러분이 내 명령에 따라 순수 지성의 상태로 낮아질 필요가 있다. 사랑과 쾌락의 눈은 해골 안에서 아름다움을, 적나라하게 노출된 내장들에서 조화를, 검고 응고된 피에서 생명을 인식할 능력이 없다. 그래서 사회적 유기체의 비밀은 감정과 편견이 뇌를 흐리게 만드는 사람에게는 비문秘文이다. 그러한 극상極上의 경험은 고요하고 냉정한 숙고에서만 기대된다. 그러므로 여러분의 눈에 생명의 책장들을 넘기기 전, 내가 여러분의 영혼을 이 회의적 정화로 준비시키는 것, 소크라테스, 예수 그리스도, 성 바울로, 성 레미지오, 베이컨, 데카르트, 갈릴레이, 칸트 등 여러 민족의 위대한 스승들이 제자들에게 모든 시대에 요구했던 이 회의적 정화를 감수하라.
여러분이 누구이든, 곤궁의 누더기를 걸쳤든, 호화로운 사치의 옷을 차려 입었든 나는 풍요의 시커먼 연기도, 질서의 눈을 가진 빈곤의 독도 해를 입히지 못하는 빛나는 나신裸身으로 여러분을 데려간다. 부자에게 조건의 차이가 계산 착오에서 비롯된다는 것을 어떻게 설득할까? 빈자는 소유주가 선의를 가진다는 것을 걸망을 지고서 어떻게 상상하겠는가? 노동자의 빈곤을 파헤치는 것은 무위도식자에게는 극히 견딜 수 없는 소일거리다. 행복한 자를 정당하게 평가하는 것이 곤궁한 자에게 극히 쓴 약인 것과 마찬가지다.
여러분은 승진했다. 나는 여러분을 자리에서 쫓아낸다. 이제 여러분은 자유로운 몸이다. 이 제복을 입은 상태에서는 너무 많은 낙관주의, 너무 많은 종속성, 너무 많은 나태함이 있다. 과학은 사고가 떨쳐 일어나기를 요한다. 그런데 자리를 차지한 한 사람의 사고는 자기가 받는 보수에 있는 것이다.
아름답고 정열적이고 예술적인 여러분의 여주인은, 내가 그렇게 믿고 싶은 것이지만, 여러분에게만 보유된다. 즉 여러분의 영혼, 여러분의 정신, 여러분의 의식은 자연과 예술이 홀린 인간들의 영원한 형벌을 위해 만든 극히 매력적인 사치품 안에 들어간 것이다. 나는 여러분을 여러분 자신의 이 신적인 반쪽으로부터 분리한다. 오늘날 정의를 원하고 한 여성을 사랑하는 것은 너무한 일이다. 위대함과 명확함으로써 사고하려면 남자는 자신의 본성을 둘로 나누고, 자신의 남성적 위격 안에 머물 필요가 있다. 또한 내가 여러분이 처하게 한 상태에서는 여러분의 연인은 여러분을 더 이상 모를 것이다. 여러분은 욥의 아내를 기억하라.
여러분의 종교는 무엇인가? …여러분의 신앙을 잊으라. 그리고 지혜를 발휘해 무신론자가 되어라. 뭐라고! 하고 우리의 가설과 다르게, 아니, 우리의 가설 때문에 무신론자인 여러분은 말한다. 오래전부터 사람을 넘어선 인성, 이 생애를 넘어선 생애를 가정할 권리를 가지기 위해서는 자신의 사고를 신적인 것들 위로 올릴 필요가 있었다. 게다가 여러분의 후생 수준에 대해 두려워하지 말라. 신은 이성으로 자신을 무시하는 자에게 결코 화를 내지 않으며, 말로 자신을 찬양하는 자에게 관심을 두지 않는다. 그리고 여러분의 의식 상태에서 여러분에게 가장 확실한 것은 신에 대해 아무 생각도 하지 않는 것이다. 종교도 정부들과 같다는 것을 모르는가? 그 중 가장 완벽한 것은 모두를 부정하는 것이라는 점을? 그러므로 어떠한 정치적 환상도 종교적 환상도 여러분의 영혼을 사로잡지 않기를 바란다. 오늘날 이것이 바보도 변절자도 되지 않을 유일한 수단이다. 아! 나는 열정적인 청년기에 이렇게 말했다. 나는 공화국의 만종이 울리는 소리를 듣지 않으리라고. 그리고 우리의 신부님들은 흰 투니카를 걸치고 도리아식으로 교송交誦을 읊는 소리를 듣지 않으리라고. 오, 하느님, 사막의 바람이 신선한 산들바람이 되듯 우리의 종살이를 변화시키소서! …그러나 나는 공화주의자들에게 절망했고, 나는 더 이상 종교도 신부들도 모른다.
나는 아직도 여러분의 판단을 완전히 보장하기 위해 여러분의 영혼을 동정심에 무감각하고, 덕을 넘어서고 행복에 무관심하게 만들고 싶다. 그러나 이는 초심자에게는 너무 많은 것을 요구하는 일일 것이다. 여러분은 단지 동정, 행복과 덕은 조국, 종교, 사랑과 마찬가지로 가면일 뿐이라는 것을 기억하고 결코 잊지 말라….
나는 경제학이 실재함을 긍정한다.
이 명제는 오늘날 감히 의심하는 경제학자들이 별로 없는 것으로서 한 철학자가 여태껏 주장해 온 것 중 가장 대담한 명제이다. 그리고 연속되는 이 연구들은 내가 바라건대 인간정신의 가장 위대한 노력이 언젠가는 이를 보여주려는 노력일 것임을 입증할 것이다.
나는 또 한편으로 경제학, 모든 과학들 중 내 소견으로는 가장 포괄적이고 가장 순수하고 사실로 가장 잘 번역되는 경제학의 진보적 특성과 동시에 절대적 확실성을 긍정한다. 이 과학을 구체적으로 논리학이나 형이상학으로 만들고 옛 철학의 기초를 근원적으로 바꾸는 새로운 명제다. 다시 말해, 내게 경제학은 형이상학의 객관적 형태이고 실현이다. 이는 움직이는 형이상학, 지속성을 피해 달아나는 도면 위에 그려진 형이상학이다. 그리고 노동과 교환의 법칙에 몰두하는 자는 누구나 정말로, 그리고 특별히 형이상학자이다.
내가 서론에서 말한 것과 더불어 이는 놀라울 것이 전혀 없다. 사람의 노동은 신의 일을 계속하는 것이며, 신은 모든 존재를 창조하면서 바깥에 이성의 영원한 법칙들을 실현할 뿐이다. 그러므로 경제학은 반드시, 그리고 동시에 관념들의 이론이면서 자연적 신학이고 심리학이다. 이 첫인상만으로도 경제 문제들을 다루어야 하는 내가 사전에 신의 존재를 어째서 가정해야 했는지, 그리고 어떤 명목에서 단순한 경제학자인 내가 확실성의 문제를 해결하려고 열망하는지를 설명하기에 충분했다.
그러나 나는 서둘러 그것을 말하면서 여러 이론들의 앞뒤가 맞지 않는 총체, 사람들이 거의 100년 전부터 정치경제학이라는 공식 명칭을 붙여준 그것을 과학이라고 보지 않는다. 이는 그 명칭의 어원에도 불구하고 아직은 재산권의 법전이거나 태고 때의 일상 관행과 다른 것이 아니다. 이 이론들은 우리에게 경제학의 초급 개념들이나 제1부분만을 제시할 뿐이다. 이는 그 이론들이 재산권처럼 서로 간에 온통 모순되고 그중 태반이 적용 불가능하게 되는 이유이다. 어떤 의미에서는 스미스, 리카도, 맬서스, 세가 우리에게 전해주고, 반세기 전부터 자리를 잡고 있는 그러한 정치경제학의 부정인 이런 단언의 증거는 특히 본 논문에서 나올 것이다.
정치경제학의 부족함은 언제나 사색적인 정신들을 당황하게 했으며, 이들은 실천을 깊이 파고들기에는 지나치게 자신들의 공상을 사랑하고 실천을 그 명백한 결과로 평가하는 데 국한해 애초부터 현상 유지에 대한 반대 당파를 이루었으며, 문명과 그 관습에 대한 지속적이고 체계적인 풍자에 매달렸다. 반면에 모든 사회 제도의 기초인 재산권은 열렬한 옹호자들이 결코 모자라지 않았다. 이들은 실시자praticien라는 칭호에 의기양양해서 정치경제학의 훼방꾼들에게 계속 전쟁을 걸었으며, 용감하고 흔히 능숙한 손으로 일반적 편견과 개인적 자유가 합심해서 세운 구조물을 공고화하는 작업을 했다. 아직 진행 중인 보수주의자들과 개혁주의자들 간의 논쟁은 철학사에서 실재론자들과 명목론자들의 싸움과 비슷하다. 이편이나 저편에서 오류와 옳음은 동등하고, 경쟁심, 편협성과 견해들의 불관용이 오해의 유일한 원인이었다고 덧붙이는 것은 거의 쓸데가 없다.
이처럼 두 세력이 세상의 통치를 놓고 논쟁하며, 적대적인 두 숭배 대상, 즉 정치경제학이나 전통, 그리고 사회주의나 유토피아에 열이 올라 서로를 파문에 처한다.
그러므로 더 가시적인 말로 하여, 정치경제학이란 무엇인가? 사회주의란 무엇인가?
정치경제학은 오늘까지 부의 생산과 분배의 현상들에 관해, 즉 노동과 교환의 가장 일반적이고 가장 자생적이고 따라서 가장 공신력 있는 형태들에 관해 행해진 관찰들의 모음이다.
경제학자들은 그들이 할 수 있었던 한에서 이 관찰 사항들을 분류했다. 그들은 현상들을 묘사했고, 그것들의 돌발과 그 관계를 확인했다. 그들은 거기서 여러 상황들의 필연적 특성을 주목했고, 이것들을 법칙이라고 불렀다. 그리고 말하자면 사회의 가장 순진한 발현들에서 취한 이 지식들의 총체가 정치경제학을 이룬다.
그러므로 정치경제학은 부의 생산 및 분배와 관련해서 인류의 가장 명백하고 가장 보편적으로 신임 받는 관습, 전통, 실무와 일상 관행의 자연사自然史이다. 이런 자격을 가진 정치경제학은 사실적으로, 법적으로 스스로를 합당한 것으로 여긴다. 사실적이라는 것은 그것이 연구하는 현상들이 항시적, 자생적, 보편적이기 때문이며, 법적이라는 것은 이 현상들이 나름대로 가능한 가장 큰 권위인 인류의 권위를 지니기 때문이다. 이처럼 정치경제학은 과학, 곧 규칙적이고 필연적인 사실들의 추론되고 체계적인 지식의 자격을 지닌다.
비슈누 신과 비슷하게 언제나 죽고 언제나 부활하는 사회주의는 20여 년 전부터 대여섯 명 계시자들의 인간으로 만 번째 환생을 했다. 사회주의는 사회 현 체제의, 그래서 예전 모든 기구들의 비정상성을 주장한다. 문명화된 질서는 천박하고 모순되고 비효율적이라는 것, 그 자체로부터 억압, 빈곤, 범죄를 낳는다는 것을 주장하고 입증한다. 사회생활의 모든 과거를 모함한다고는 못 해도 고발하고, 온 힘을 다해 도덕관념과 제도들의 재형성을 추진한다.
사회주의는 정치경제학을 잘못된 가설이라고 선언하면서 극소수에 의한 대다수의 착취를 위해 발명된 궤변을 끝맺음하며, 열매로써 안다(a fructibus cognoscetis)는 경구를 활용해서 인간적 재난의 그림으로 정치경제학의 무능함과 공허를 입증해 보여준다. 이 재난에 정치경제학이 책임이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정치경제학이 거짓이라면, 각 나라에서 법과 관습의 과학인 법학도 거짓이다. 왜냐하면 네 것과 내 것의 구분에 기초를 두므로 그것이 정치경제학에서 묘사되고 분류된 사실들의 정당성을 가정하기 때문이다. 공법과 국제법의 이론들도 대의代議 정부의 모든 다양한 형태들과 함께 거짓이다. 개인적 취득과 의사意思들의 절대적 주권의 원칙에 의존해 있기 때문이다.
사회주의는 이 모든 결과를 수용한다. 여러 사람들이 부富의 생리학으로 간주하는 정치경제학은 사회주의가 볼 때 도둑질과 빈곤의 조직화된 실무에 불과하다. 글로 적힌 이성의 이름으로 법학자들에 의해 꾸며진 법학은 사회주의의 눈으로 볼 때는 법적이고 공식적인 약탈의, 한마디로 재산권의 붉은 제목들의 편찬에 불과하다. 이 두 과학으로 자처하는 것들인 정치경제학과 법 사이의 관계에서 볼 때, 이 둘은 사회주의가 하는 말로 한다면 사악함과 불화의 완전한 이론이다. 그 다음으로 부정으로부터 긍정으로 넘어가면서 사회주의는 재산권 원리에 조합 원리를 대립시킨다. 그리고 사회경제학을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새로 만들 힘, 즉 새로운 법, 새로운 정치, 옛 형태와는 정반대되는 제도들과 도덕관념을 새로 만들 힘이 있다고 자처한다.
이처럼 사회주의와 정치경제학 간의 구분선은 그어졌고, 그 적대성은 확연하다.
정치경제학은 이기주의의 성화聖化에 쏠린다. 사회주의는 공동체의 고양 쪽으로 기운다.
경제학자들은 정부들이 저질렀다고 고발해야겠다고 생각하는 자신들의 원리에 대한 약간의 위반을 제외하고는 기정사실에 관한 낙관론자들이다. 사회주의자들은 완수할 행동에 대한 낙관론자들이다.
전자의 사람들은 마땅히 그래야 하는 것이 지금 그러하다고 단언한다. 후자의 사람들은 마땅히 그래야 하는 것이 지금 그렇지 않다고 단언한다. 따라서 전자의 사람들은 이성에서 나올 뿐인 자신들에 대한 비판이 자신들의 편견에 빈번한 공격을 가함에도 종교, 권위 그 밖의 재산권의 동시대적이고 보수적인 원칙들의 수호자로서 나서는 반면, 후자의 사람들은 비록 완전히 부자유한 일정한 종교성과 사실들에 대한 별로 과학적이지 못한 멸시가 언제나 그들 학설의 가장 명백한 특성이기는 하지만 권위와 신앙을 거부하고 오직 과학에 호소한다.
게다가 이 두 부류는 하는 짓이 서툴고 거두는 열매가 없다고 서로를 끊임없이 비난한다.
사회주의자들은 반대자들에게 조건의 불평등, 독점과 경쟁이 기괴하게 연합해 영구적으로 사치와 빈곤을 낳는 이 상업적 방탕함을 고려하라고 요구한다. 그들은 경제 이론들이 언제나 과거에 맞게 형성되어 미래를 희망 없이 내버려 둔다고 비난한다. 한마디로 그들은 재산권 체제를 인류가 4천 년 전부터 항거하고 맞서 싸워 오는 무서운 환각이라고 말한다.
경제학자들 쪽에서는 사회주의자들에게 재산권, 경쟁, 경찰이 없어도 될 체제를 만들어 보라고 도전을 가한다. 그들은 손에 악보를 들고서, 모든 개혁 사업들은 사회주의가 폄하하는 바로 이 체제에서 빌려온 악보들의 랩소디, 사회주의가 그것 바깥에서는 하나의 관념을 구상하지도 정식화하지도 못할, 한마디로 정치경제학의 표절이었을 뿐임을 증명한다.
매일 이 심각한 과정의 악보들이 쌓이고 문제가 복잡해지는 것을 보게 된다.
사회가 경제적 일상 관행을 따라서 진행해 가고, 발을 헛딛고, 고생하고 부자가 되는 동안 사회주의자들은 피타고라스, 오르페우스 그리고 신비에 싸인 헤르메스 이래 정치경제학과 상충되는 자신들의 교리를 세우려고 노력한다. 약간의 조합 시도들이 여기저기서 그들의 관점에 따를 때 행해지기도 했지만 현재까지 이 드문 시도들은 재산 소유의 대양大洋에서 길을 잃어 결과도 없는 채로 남아있다. 그리고 마치 운명이 사회주의적 유토피아를 공격하기 전에 경제적 가설을 남김없이 활용하기로 결심한 듯이 개혁 당파는 자기 차례가 오기를 기다리면서 적들의 조롱을 씹어 삼키는 처지로 전락한다.
원인은 바로 여기에 있다. 사회주의는 문명의 병폐를 공박하기를 느슨할 틈 없이 하고, 날이면 날마다 정치경제학이 사람의 조화적 끌림을 충족하지 못하는 무능함을 확인하며, 요청에 요청을 계속 제시한다. 정치경제학은 모두가 하나씩 상식의 버림을 받으며 지나가고 사멸하는 사회주의 체계들로 서류를 채운다. 악의 끈질김은 한편의 불평을 조장하며 이와 동시에 개혁주의의 실패가 꾸준히 계속되는 것은 다른 편의 악의적인 조롱거리가 된다. 심판은 언제 내려질 것인가? 법정은 버려졌다. 그렇기는 하지만 정치경제학은 법정의 장점을 활용하며, 보증인도 내세우지 않으면서 세상을 계속 지도한다. 나는 소유한다, 그러므로 소유한다(possideo quia possideo).
관념의 영역으로부터 세상의 현실로 내려오면, 적대 관계는 더욱 심각하고 더욱 위협적으로 우리에게 나타날 것이다.
요 몇 년간 사회주의가 긴 태풍들의 자극을 받아 우리들 가운데 환상적으로 모습을 드러냈을 때, 모든 논쟁에서 그때까지 무관심하고 미지근한 태도를 보이던 사람들이 왕정주의적이고 종교적인 관념을 향해 두려움을 지니고 다시 달려들었다. 그 최후의 결말을 보인 것으로 사람들이 고발한 민주주의는 저주받고 억눌렸다. 보수주의자들의 민주주의자들에 대한 이 유죄선고는 재난이었다. 민주주의는 본성상 왕권을 대체할 능력이 없으면서 마찬가지로 사회주의 사상에 맞지 않는다. 민주주의의 운명은 언제나 결코 결말에 도달하지 못하면서 왕권에 맞서 음모를 꾸미는 것이다. 이는 곧 나타났으며 우리는 민주주의적 정치 논객들의 기독교 및 재산 소유 신앙에 대한 항거에서 날마다 증인이 되는데, 이 논객들은 이 순간부터 인민에게 버림받기 시작했다.
다른 한편으로, 철학은 정치 및 종교에 못지않게 사회주의에 생소하고 적대적인 것으로 드러났다.
왜냐하면, 정치 질서에서 민주주의는 수효의 주권을 원리로 하고 왕정은 군주의 주권을 원리로 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또한 의식의 문제에서 종교는 신이라 불리는 신비적인 존재, 그리고 이를 대표하는 사제에 대한 복종일 뿐인 것과 마찬가지로, 끝으로 경제 질서에서 재산권, 즉 개인의 노동 수단에 대한 배타적 지배권이 이론들의 출발점인 것과 마찬가지로, 철학은 이성의 선험à priori이라 자처하는 것들을 기초로 삼아서 자아 하나에 관념들의 발생과 절대 지배권이 있다고 보고, 경험의 형이상학적 가치를 부정하는, 즉 어디서나 객관적 법칙 대신에 자의恣意와 독재를 두는 쪽으로 숙명적으로 이끌렸기 때문이다.
그런데, 갑자기 사회의 품에서 태어나 선행자도 조부祖父도 없이 의식과 사회의 모든 영역에서 재정裁定 원리를 배척하고 유일한 진리로서 사실들의 관계를 대신 들여놓으며, 과거는 미래를 향해 도약하는 출발점으로만 활용하는 데 동의하는 학설, 그러한 학설은 기성 권위들의 반발을 불러일으키고도 남았다. 그리고 오늘날 이른바 여러 권위들은 그 내부적 불화에도 불구하고 단 하나의 권위를 이룰 뿐인데, 이는 자신들을 집어삼킬 태세가 되어있는 괴물을 물리치려고 단결한다.
임금의 부족함과 노동의 불확실성에 대해 불평하는 노동자들에게 정치경제학은 상업의 자유를 들이민다. 자유와 질서의 조건들을 추구하는 시민들에게 이데올로그들은 대의제로 응답한다. 고대 신앙을 빼앗겨 자신의 존재 이유와 목표를 요구하는 심약한 영혼들에게 종교는 섭리의 측량할 수 없는 비밀을 제안하고 철학은 의문을 남겨준다. 언제나 빠져나갈 구멍들이다! 가슴과 정신이 쉴 명백한 관념들은 전혀 없다! 사회주의는 굳은 땅을 향해 돛을 올리고 항구로 들어갈 때라고 외친다. 그러나 반사회적인 사람들은 항구가 없다고 말한다. 인류는 신의 가호 아래 사제들, 철학자들, 웅변가들, 경제학자들의 지휘에 따라 행진하며, 우리의 연안 항해는 영원하다.
이처럼 사회는 그 시초부터 거대한 두 당파로 나뉜다. 하나는 전통적 당파로서 본질상 위계적이며, 고려 대상이 되는 것에 따라 왕정 혹은 민주주의, 철학 혹은 종교라고 차례로 불리는 것인데, 한마디로 재산권이라 불린다. 또 한 당파는 문명의 위기 때마다 부활해서 무엇보다도 앞서 무정부적anarchical, 무신론적이라고, 즉 일체의 신적, 인간적 권위에 불복종한다고 공언한다. 이는 사회주의다.
그런데, 현대적 비판은 이런 종류의 갈등에서 진리는 상반되는 것들 중 하나를 배제하는 것에 있지 않고, 오직 그 둘의 화해에 있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내가 말하건대, 자연에서건 관념들에서건 일체의 적대 관계는 더 일반적인 하나의 사실, 혹은 반대자들을 흡수해서 말하자면 서로 일치시키는 복잡한 공식으로 해소된다는 것이 과학에서는 기정사실이다. 그러므로 상식을 가진 사람들인 우리는 의문의 여지없이 미래가 실현할 해결을 기다리며 투쟁 중인 힘들, 그리고 그들의 긍정적, 부정적 특성들을 분석함으로써 이 거대한 이행에 대비할 수 없을까? 그러한 작업을 정확성과 양심을 가지고 한다면, 설사 그것이 일거에 우리를 해결책에 도달하게 하지는 못할지라도 적어도 문제의 조건들을 우리에게 드러내주고 이로써 우리를 일체의 유토피아로부터 지켜주는 이루 헤아릴 수 없는 장점을 지닐 것이다.
그러므로 정치경제학에서 무슨 필연적인 것과 참된 것이 있는가? 정치경제학은 어디로 가는가? 정치경제학은 무엇을 할 수 있는가? 그것은 우리에게 무엇을 원하는가? 이런 것이 바로 내가 이 저작에서 확인하려고 마음먹은 것이다. 사회주의는 무슨 가치가 있는가? 동일한 탐구가 우리에게 이를 가르쳐줄 것이다.
왜냐하면, 결국 사회주의와 정치경제학이 추구하는 목표는 동일한 것, 즉 인간들 가운데의 자유, 질서 그리고 행복이니 이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채워야할 조건들, 즉 극복해야 할 난관들 역시 이 둘에 동일하며, 이쪽에서도 저쪽에서도 모색되거나 제안된 수단들을 가늠해 보는 일만 남기 때문이다. 그러나 또한 자신의 관념들을 실천에 옮기는 일은 지금까지는 정치경제학에만 주어진 것인 반면에 사회주의는 끊임없는 풍자에만 몰두해 왔으므로, 경제적 업적들을 그것들의 공로에 따라 평가할 때 우리가 이로써 사회주의자들의 열변을 그 정당한 가치로 환산해서 우리의 비판이 외관상으로는 특별하면서도 절대적이고 확정적인 결론을 취할 수 있을 것임이 그에 못지않게 명확하다.
이는 정치경제학의 고찰에 깊이 들어가기 전에 몇 가지 예로써 더 잘 이해시키는 것이 필수적인 사항이다.
우선 중요한 관찰을 언급하기로 하자. 논쟁 당사자들은 하나의 공통된 권위, 각자가 스스로 가지려고 하는 권위인 과학에 준거를 두는 데 동의한다는 것이다.
플라톤은 유토피아주의자로서 자신의 이상적 공화국을 겸손과 순화에 의해 그가 철학이라고 부른 과학의 이름으로 조직했다. 실천가인 아리스토텔레스는 같은 철학의 이름으로 플라톤의 유토피아를 반증했다.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 이래로 사회적 전쟁은 이처럼 진행된다. 현대 사회주의자들은 하나의 불가분한 과학 전체를 자신의 것으로 주장하지만 이 과학의 내용, 한계, 방법에 대해 동의를 이루지는 못한다. 경제학자들 쪽에서는 사회과학이 정치경제학일 뿐이라고 단언한다.
그러므로 우선 사회에 관한 과학이 어떤 것일 수 있는지를 인식하는 것이 중요하다.
과학은 일반적으로 말해서 있는 것ce qui Est에 대한 추론된 체계적 인식이다.
이 근본 관념을 사회에 적용해 우리는 이렇게 말할 것이다. 사회과학은 사회가 그래 온 것이 아니라 사회의 전체 생애에서, 즉 그 계기적 발현의 총체에서 사회가 그러한 것에 대해 추론된 체계적 인식이다. 왜냐하면 이유raison와 체계가 있을 수 있는 것은 바로 거기뿐이기 때문이다. 사회과학은 인류가 지속하는 어떤 기간에서만이 아니라, 그 요소들 중 어떤 것들에서만이 아니라, 그 모든 원리들과 그 존재의 전체에서 인류 질서를 끌어안아야 한다. 마치 사회 진보가 시간, 공간상 확장되어 갑자기 하나의 그림, 여러 시대의 연속과 현상들의 이어짐을 보여 주면서 그 연관성과 일치성을 발견할 그림에 모아지고 고정되듯이 말이다. 그러한 것이 살아있고 진보적인 전체 실재의 과학이어야 한다. 그러한 것이 논란의 여지없이 사회과학이어야 한다.
그러므로 정치경제학은 그 개인주의적 성향과 배타적인 언명들에도 불구하고 사회과학의 구성 부분이었으며, 그 안에서 그것이 묘사하는 현상들은 광대한 삼각 측량의 원초적 말뚝들, 유기적이고 복잡한 하나의 전체 요소들과 같은 것일 수 있다. 이런 관점에서 단순한 것에서 복합적인 것으로 가는 인류의 진보는 완전히 과학들의 진행에 순응할 것이며, 오늘날 정치경제학의 기초이자 대상을 이루는 거슬리고 아주 흔히 일탈적인 사실들은 우리에게 구체적인 가설들, 더 우월한 가설을 염두에 두고 인류에 의해 계기적으로 실현되는 가설들로 간주되어야 할 것이다. 그 우월한 가설의 실현은 모든 난점들을 풀 것이며, 정치경제학을 무효화하지 않고도 사회주의에 만족을 줄 것이다. 왜냐하면, 내가 서론에서 말한 것처럼, 자초지종을 살펴볼 때 우리는 인류가 자신을 어떤 식으로 표현하든지 잘못에 빠진다는 것을 인정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이제 이 점을 사실들에 의거해 더 명확히 해보자.
오늘날 가장 논란이 되는 문제는 반론의 여지없이 노동의 조직이다.
세례자 요한이 광야에서 회개하라고 설교한 것처럼 사회주의자들은 도처에서 세상만큼 오래된 이 혁신을 외친다. 노동을 조직하라. 그러면서도 그들에 따를 때 이 조직이 어떠해야 하는지를 결코 말하지 않는다. 아무튼 경제학자들은 이 사회주의자들의 떠드는 소리에서 자신들의 이론에 대한 침해를 보았다. 이는 사실상 마치 그들이 제일 처음 알아야 했던 것인 노동을 몰랐다고 사람들에게 비난을 받은 것과 같았다. 그러므로 그들은 적들의 도발에 우선은 노동이 조직화되며, 개인적 타산에서든, 남들과 회사를 이루어서든 생산을 하고 교환을 할 자유 말고 다른 노동 조직은 없다고 주장하는 것으로 대답했다. 회사를 이룰 경우에는 따라야 할 진행 경로가 민법과 상법에 의해 규정되었던 것이다. 그 다음으로는 이 주장이 반대자들에게 웃을 준비를 하게 하는 데만 소용되었으므로, 그들은 공세를 취해 사회주의자들이 허수아비처럼 흔든 이 조직에 대해 사회주의자들 스스로가 아무것도 이해하지 못했다는 것을 보여주면서 마침내 이는 사회주의의 새로운 괴물, 무의미한 말, 엉터리에 불과하다고 말했다. 경제학자들의 최근 글들은 이런 한심한 판단으로 가득 차 있다.
그렇기는 하지만, 노동의 조직이라는 말은 작업장의 조직, 군대의 조직, 경찰의 조직, 자선단체의 조직, 전쟁의 조직 같은 말들만큼이나 명확하고 합리적인 의미를 제시한다는 것이 확실하다. 이런 점에서 경제학자들의 논변은 한심한 부조리라는 도장이 찍혔다. 노동의 조직이 유토피아와 허깨비일 수 없다는 것도 그에 못지않게 확실하다. 왜냐하면, 문명의 최고 조건인 노동이 존재하는 순간부터 따라오는 것은 그 노동이 벌써 경제학자들이 좋다고 보는 것이 허락된, 그러나 사회주의자들은 혐오스럽다고 판단하는 그런 식의 조직에 종속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사회주의에 의해 정식화된 노동을 조직화하자는 제안과 관련해서 노동이 조직되어 있다고 하는 각하 사유가 남을 것이다. 그런데 이는 완전히 성립불가능하다. 노동에서 공급, 수요, 분업, 수량, 비율, 임금과 보장 중 아무것도, 절대로 아무것도 규칙화되지 않아서 모든 것이 오히려 자유의지의 변덕, 즉 우연에 넘겨지는 것이 유명하니 말이다.
우리로 말하자면, 우리가 사회과학에 대해 떠올린 관념에 인도를 받아서 사회주의자들에게 반대하고 경제학자들에게 반대해 노동을 조직할 필요가 있다고도, 노동이 조직화되어 있다고도 주장하지 않을 것이며, 노동은 조직화된다고 주장할 것이다.
우리는 노동이 조직화된다고 말한다. 즉 노동은 세상의 출발 이래로 조직화되는 중이며, 끝까지 조직화되어 갈 것이다. 정치경제학은 이 조직의 첫 번째 기초 지식을 가르쳐준다. 그러나 사회주의는 그것의 현재 형태로는 조직은 부족하고 일시적이라고 옳은 주장을 한다. 그리고 과학의 전체 사명은 얻어진 결과들과 완성되어 가는 중인 현상들을 보면서 즉각 실현 가능한 혁신이 어떤 것인지를 끊임없이 탐구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사회주의와 정치경제학은 서로 우스꽝스러운 전쟁을 벌이면서 노동의 조직이라는 동일한 관념을 밑바닥까지 추적한다.
그러나 둘 다 과학에 대한 불충성과 서로간의 중상中傷의 죄가 있는데, 한편으로 정치경제학은 자신의 이론 나부랭이를 과학으로 간주해 일체의 궁극적 진보를 부정하며, 사회주의는 전통을 부정하면서 사회를 발견할 수 없는 기초 위에 재구성하려고 시도하니 그렇다는 것이다.
이처럼 사회주의는 정치경제학에 대한 심오한 비판과 이 학문의 끊임없는 발달 없이는 아무것도 아니며, 여기서 그 학파의 유명한 경구를 써먹자면, 먼저 감각에 없었던 것으로 지각되는 것은 없다(Nihil est in intellectu, quod prius non fuerit in sensu). 사회주의자들의 가설에는 경제적 실무에서 재발견되지 않는 것은 없다. 반대로, 정치경제학은 아담 스미스와 장 바티스트 세가 수집한 사실들을 절대로 타당한 것으로 단언하면서부터 부적절한 랩소디에 불과하다.
또 다른 질문, 앞의 질문에 못지않게 논란이 되는 질문은 이자l'usure 혹은 이자부 대출에 관한 질문이다.
이자, 혹은 말하자면 활용의 값은 어떤 성질의 것이든 소유주가 자신의 것을 제공한 데서 뽑아내는 보수다. 신학자들은 이렇게 말한다. 당도하는 모든 것에 이자가 붙는다(Quidquid sorti accrescit usura est). 신용의 기초인 이자는 사회적 자생성이 자신의 조직적 작품에서 문제시하는 영역들 중에 1위로 나타나며, 그에 대한 분석은 문명의 심오한 법칙들을 드러낸다. 고대 철학자들과 교회의 교부들, 이들은 여기서 기독교 시대 초기 몇 세기 사회주의의 대표자들로 간주할 필요가 있는데, 특이한 비일관성에 의해, 그러나 그들 시대의 경제적 관념들의 빈약함에서 유래한 비일관성에 의해 소작은 인정하고, 돈의 이자는 정죄했다. 그들에 따르면, 돈은 비생산적이기 때문이다. 그들은 결과적으로 사용됨으로써 소모되는 물건, 그 중에 돈도 포함하는 물건의 대여와 소모되는 일 없이 그 산물로 사용자에게 이익을 주는 물건의 대여를 구분했다.
경제학자들은 세貰의 개념을 일반화해 사회의 경제에서 자본의 행동, 혹은 그 생산성은 그것이 임금으로 소비되든 수단의 역할을 보전하든 동일하다는 것, 따라서 토지의 소작을 금하든지 돈의 이자를 인정하든지 해야 한다는 것, 둘 다 같은 명목으로 특권의 보수, 대여의 보상금이기 때문에 그렇다는 것을 스스럼없이 보여주었다. 이 관념을 통하게 하고, 로마 가톨릭의 이자에 대한 파문으로 두려워하는 양심을 안심시키는 데는 열다섯 세기가 더 필요했다. 그러나 결국 증거와 일반의 의견은 대금업자 편이었다. 그들은 사회주의에 맞선 전투에서 승리했다. 그리고 엄청난, 논란의 여지없는 이익들이 이런 식의 이자의 정당성으로부터 사회에 돌아갔다. 이런 상황에서 사회주의는 모세가 오직 이스라엘 사람들을 위해서만 만들어준 법칙 “외국 사람에게는 꾸어 주고서 이자를 받아도 좋다. 그러나 동족에게서는 이자를 받지 못한다(Non foeneraberis proximo tuo, sed alieno)”를 일반화하려고 모색했지만 경제적 일상 관행에서 받아들인 한 관념, 즉 자본의 생산성 이론에까지 올려진 소작에 의해 패배했다.
그러나 경제학자들은 후에 사람들로부터 소작 그 자체를 정당화하고 자본의 소득 이론을 정립하라는 호출을 받아서 덜 행복했다. 이 점에 관해 그들은 우선 사회주의자들에 대항해 획득한 온갖 이득을 상실했다고 말할 수 있다.
의문의 여지없이, 그리고 나는 이를 인정하는 첫 번째 사람인데, 토지의 세는 돈의 세, 그리고 모든 동산 및 부동산 가치물의 세와 마찬가지로 자생적이고 보편적인 사실로서 우리 본성의 가장 깊은 곳에 원천을 두며, 그 정상적 발달에 의해 조직의 가장 위력적인 용수철 중 하나가 곧 되는 것이다. 나는 심지어 자본의 이자가 ‘일체의 노동은 초과분을 남기기 마련이다’라는 경구의 물화物化에 불과하다는 것도 증명할 것이다. 그러나 이 이론, 혹은 더 제대로 말해서 이 자본 생산성의 허구에 직면해 그에 못지않게 확실한 또 하나의 논제가 부상한다. 이는 최근에 최고로 노련한 경제학자들의 눈에 들어온 것이다. 일체의 가치는 노동에서 탄생하며 본질상 임금으로 구성된다는 것, 다시 말해 어떠한 부도 애초에 특권에서 나오는 것은 없으며 작업에 의해서만 나온다는 것, 결과적으로 노동만이 사람들 간에 소득의 원천이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소작의 이론 혹은 자본 생산성의 이론, 보편적 실무에 의해 확인되면서 정치경제학은 일상 관행 추종자의 자격에서 정당화하지는 못하면서 감수할 수밖에 없는 이론과, 우리에게 가치가 정상적으로 임금들로 구성된다는 것을 보여주며, 우리가 증명하겠지만, 숙명적으로 사회 내에서 순생산과 총생산의 등식에 도달하는 또 하나의 이론을 어떻게 조화시킬 것인가?
사회주의자들은 그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노동이 모든 소득의 원천이라는 원리를 취해서 그들은 자본의 보유자들에게 그들의 임대료와 이윤을 설명하라고 요구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경제학자들이 공통의 표현으로 임대료와 이자를 일반화해 첫 승리를 거두었으므로, 마찬가지로 사회주의자들은 더욱 일반적인 노동의 원리 아래 자본의 초야권들을 사라지게 함으로써 보복했다. 재산권은 송두리째 파괴되었다. 경제학자들은 침묵밖에 할 줄 몰랐다. 그러나 이 새로운 비탈 위에서 멈추지 못하고 사회주의는 공산주의 유토피아의 마지막 변경邊境에까지 미끄러져 갔다. 그리고 실천적 해결책이 없어서 사회는 자신의 전통을 정당화하지도 못하고, 약간의 결함만 있어도 사회를 수천 년 후퇴시킬 실험에 몰두할 수도 없는 처지로 전락했다.
그러한 상황에서 과학이 처방하는 것은 무엇인가?
확실히 그것은 자의적이고 파악할 수 없는 불가능한 정중앙에 멈추는 것이 결코 아니다. 더 일반화하고 제2의 원리, 사실, 우월한 법칙으로 자본의 허구와 재산권의 신화를 설명하는 것을 발견하고, 이를 모든 부의 기원을 노동에 두는 이론과 조화시키는 것이다. 바로 이것이 사회주의가 논리적으로 진행하고자 했다면 착수해야 했던 일이다. 실제로 노동의 실재적 생산성 이론과 자본의 허구적 생산성 이론은 둘 다 본질상 경제 이론이다. 사회주의는 경험으로부터도 변증법으로부터도 아무것도 끌어내지 못하고 그 모순을 보여주는 수고만을 했다. 왜냐하면 사회주의는 그 둘 중 아무것도 가지고 있지 않은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재판에서 일부분에 대해 한 문서의 권위를 수용하는 원고는 전체에 대해 이를 인정해야 한다. 서류들과 증언들을 떼어내는 것은 허락되지 않는다. 사회주의는 이자에 관해 정치경제학의 권위를 부정할 권리를, 가치의 분해에 관련해서 바로 이 권위를 발판으로 하면서 가졌는가? 아니다. 확실히. 사회주의가 그러한 경우에 요구할 수 있었던 모든 것은 정치경제학이 이 이론들을 조화시키는 임무를 맡거나 사회주의 스스로 이 까다로운 임무를 맡는다는 것이었다.
이 엄숙한 논쟁에 깊이 들어갈수록 전체 과정은 두 당사자 중 하나는 보기를 원하지 않는 반면, 다른 한 당사자는 진행해 가기를 거부하는 데서 나오는 것에서 비롯되는 것으로 여겨진다.
일반의 편익을 위해 정당한 사전적 보상을 매개로 하는 것이 아니라면 아무도 자신의 재산권을 박탈당할 수 없다는 것이 우리의 공법 원칙이다.
이 원칙은 다분히 경제적인 원칙이다. 왜냐하면 한편으로 그것은 사람들이 수탈하는 시민의 현저한 지배권을 가정하며, 그에 대한 가입은 사회적 협정의 민주적 정신에 따라 필연적으로 가정되기 때문이다. 다른 한편, 보수, 혹은 수탈당하는 부동산의 가격은 목적물의 본원적 가치가 아니라 수요와 공급, 한마디로 의견인 상업의 일반 법칙에 따라 정해진다. 사회의 이름으로 행해지는 수탈은 각자가 모두를 향해 동의하는 합의의 거래에 비유될 수 있다. 그러므로 물건의 가격이 지불되어야 하는 것만이 아니라 합의도 있어야 한다. 그리고 실제로 보상액을 산정하는 것은 그렇게 하는 것이다. 로마의 법률가들이 이런 유비類比를 취했다면 그들은 틀림없이 공공복리를 위한 수탈에 관해 덜 망설였다.
그러므로 그러한 것이 사회적 수탈권의 행사 보장 수단sanction, 보상액이다.
그런데, 실제로는 보상의 원칙이 적용되어야 할 때마다 적용되지 않을 뿐 아니라 그렇게 될 수도 없다. 이와 같이 철도를 개설한 법률은 레일이 차지할 부지의 보상액을 조문에 명시했다. 그 법률은 운송업이 먹여 살리는 이 다수의 산업들을 위해서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이들의 손실은 지주들에게 갚아진 부지의 가액을 훨씬 초과할 것이다. 마찬가지로 사탕무로 설탕을 만드는 제조업자들을 보상해주는 것이 문제이던 당시에 국가가 사탕무 산업이 먹여 살리던, 아마도 빈곤의 나락으로 떨어져갈 다수의 노동자들과 종업원들에게도 보상을 해주어야 한다는 생각은 누구의 머리에도 떠오르지 않았다. 그렇기는 하지만, 자본의 개념과 생산 이론에 따를 때 철도로 자신의 노동 수단을 빼앗기는 토지 소유자가 보상을 받을 권리가 있듯이, 마찬가지로 철도 때문에 투자한 자본이 무익해지게 된 산업인도 보상을 받을 권리가 있다는 것은 확실하다. 그러므로 그에게 보상을 해주지 않는 것은 어떤 이유인가? 오호라! 보상을 해주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이런 정의와 불편부당성의 체계를 가지고서는 사회는 아주 흔하게 행동하지 못하는 무기력에 빠질 것이며, 로마법의 부동 상태로 돌아갈 것이다. 희생자들이 필요해진다. …따라서 보상의 원칙은 방기되었다. 국가의 여러 시민 계급을 향한 불가피한 파산이 있다.
이에 관해 사회주의자들이 들이닥친다. 이들은 정치경제학이 대중의 이익을 희생시키고 특권을 창조할 줄밖에 모른다고 비난한다. 그리고 수탈의 법률에 토지법의 기초가 있는 것을 보여주면서 그들은 갑자기 보편적 수탈, 즉 공동의 생산과 소비라는 결론을 내린다.
그러나 여기서 사회주의는 비판으로부터 유토피아로 다시 빠지며, 사회주의의 무기력은 그 모순들에서 새로이 터져 나온다. 공공복리를 위한 수탈의 원칙이 그 모든 결과를 낳도록 발달해 사회의 완전한 재조직화를 가져온다면, 그 작품에 손을 대기 전에 이 새로운 조직을 확정할 필요가 있다. 그런데 내가 거듭 말하지만 사회주의는 과학으로서 생리학과 정치경제학 나부랭이밖에 가지고 있지 못하다. 또, 보상의 원칙에 맞게 시민들이 제공한 가치물에 대해 갚아주거나 적어도 보장을 해줄 필요가 있다. 한마디로 변동의 가능성에 대해 이들을 안심시킬 필요가 있다. 그런데 사회주의가 그 관리를 요구하는 공공 재산 바깥 어디에서 사회주의는 바로 이 재산의 보증인을 취할 것인가?
진실한 논리로 보면 이 굴레를 벗어나기는 불가능하다. 공산주의자들도 유연하고 평화를 애호하는 관념을 가진 어떤 다른 종파들보다 그 태도가 더 거침없어서, 어려움을 없애고 일단 권력을 잡기만 하면 모든 사람들을 수탈하고 아무에게도 보상하고 보장하지 않겠다고 다짐한다. 근본적으로 이는 부당할 수도 배신일 수도 없을 것이다. 재미있는 데물랭(Camille Desmoulins)이 로베스피에르에게 말한 것처럼 유감스럽게도 불을 지르는 것은 대답하는 것이 아니다. 그리고 사람들은 언제나 그런 논쟁에서는 불과 단두대로부터 돌아온다. 어디서나 그렇듯 여기서도 마찬가지로 거룩한 두 권리, 시민의 권리와 국가의 권리가 현존한다. 사회주의적 유토피아와 정치경제학의 잘려 나간 이론들보다 우월한 화해의 공식이 있으며, 이를 발견하는 일이 중요하다고 말하는 것으로 충분하다. 이 판국에 소訴를 제기하는 당사자들은 무엇을 하는가?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 오히려 사람들은 그들이 부당한 일들에 대해 말할 기회를 얻기 위해서만 문제를 제기한다고 말할 것이다. 나는 무슨 말을 하는가? 문제들이 그들에 의해 이해되기만 하는 것은 아니다. 그리고 공중이 사회와 인간 운명의 최고 문제들에 관해 대화를 하는가 하면, 사회과학의 실행자들은 정교회의 교회 분열파로서 원칙들에 동의하지 않는다. 이 연구들의 계기가 된 문제, 그 저자들이 그 폄훼자들과 마찬가지로 확실히 이해하지 못한 문제를 증언하라. 이는 이윤과 임금의 관계라는 문제이다.
뭐라고! 경제학자들, 아카데미는 자신도 그 용어들을 이해하지 못하는 문제를 공모에 부쳤을 것이다! 그러니 그러한 관념이 어떻게 아카데미에게 다가올 수 있었을까?…
자! 그렇다. 내가 내놓는 것은 믿을 수 없고 이상하다. 하지만 그런 것이 있다. 형이상학의 문제에 신화와 은유로만 대답하고 언제나 문제들을 풀지도 못하면서 재생산하는 이들인 신학자들처럼 경제학자들은 자신들이 제기하는 문제들에 그들이 어떤 식으로 그 문제들을 제기하게 되었는지를 이야기하면서만 대답을 한다. 그들이 그 이상으로 나갈 수 있다고 생각했다면, 그들은 더 이상 경제학자들이 아닐 것이다.
예를 들어서 이윤이란 무엇인가? 기업가가 자신의 모든 비용을 지불한 후에 그에게 남는 것이다. 그런데 비용은 노동 일과와 소비된 가치물들, 혹은 결국에는 임금으로 구성된다. 그러므로 노동자의 임금은 어떤 것인가? 그에게 줄 수 있는 최소의 것, 즉 알 수가 없다. 기업가가 시장에 내놓는 상품의 가격은 어떠해야 하는가? 그가 획득할 수 있을 최대의 것, 즉 여전히 알 수가 없다. 정치경제학에서는 상품과 노동일과가 값이 매겨질 수 있다고 가정하는 것조차도, 그것들이 평가될 수 있다는 데 사람들이 동의하는데도 불구하고 금지된다. 그리고 경제학자들이 하는 말로는 이는 평가가 본질적으로 자의적인 작업으로서 결코 확실한 결론에 도달할 수 없는 작업이라는 이유 때문이다. 그러므로 정치경제학에 따르면 어떤 경우에도 구해지지 않는 두 미지수의 관계를 어떻게 발견하는가? 이처럼 정치경제학은 해결 불가능한 문제들을 제시한다. 그리고 그래도 우리는 곧 정치경제학이 이 문제들을 제시하는 것은 불가피하다는 것, 그리고 우리의 세기가 그 문제들을 해결한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이것이 바로 내가 말하기를 도덕 과학 아카데미가 이윤과 임금의 관계를 공모에 부쳐 무의식적으로 말을 했다고, 예언하는 말을 했다고 한 이유이다.
하지만, 노동의 수요가 크고 노동자가 드물다면, 다른 한쪽에서 이윤이 낮아지는 동안 임금은 상승할 수 있으리라는 것, 경쟁의 밀물에 의해 생산이 과잉이 되면, 충색充塞과 손해를 보면서 판매하는 일이 있고, 따라서 기업가에게는 이윤이 없고 노동자에게는 일을 쉬어야 할 위험이 있으리라는 것, 기계가 발명되면 우선은 이것이 경쟁자들의 불씨를 꺼뜨리겠고 그 다음으로는 독점이 확립되어 노동자는 기업가에게 종속되고 이윤과 임금은 서로 역의 방향으로 가리라는 것이 사실이 아닌가? 하고 사람들은 말할 것이다. 이 모든 원인들과 다른 것들도 연구되고 평가되고 보상될 수 없는가?
오! 단행본들, 역사서들. 우리는 이런 것들을 아담 스미스와 장 바티스트 세 이래로 물리도록 보았다. 그리고 그 이상은 이들의 문장을 이리저리 변경하는 것밖에 없다. 그러나 아카데미가 그 문제에 다른 의미를 부여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그 문제가 이처럼 이해되어야 하는 것은 아니다. 이윤과 임금의 관계는 절대적 의미로 받아들여져야 하며 상업의 우발성과 이익 분할의 비결정적 관점에서 받아들여져서는 안 된다. 이 두 가지는 나중에 가서 자신들에 대한 해석을 받아들여야 한다. 설명을 하겠다.
생산자와 소비자를 단 한 명의 개인으로 보고, 그의 보수는 자연스럽게 그의 산물과 같다고 한 다음, 모든 노동은 초과분을 남긴다는 공리에 따라 이 산물에서 두 부분, 하나는 생산자에게 그의 선투입을 상환해 주는 것, 다른 하나는 그의 이윤을 나타내는 것으로 구분해 우리는 이 두 부분 중 하나가 다른 하나와 가지는 관계를 정해야 한다. 그렇게 하고 나면, 기업가와 임금 노동자, 이 두 인간 계급의 재산 비율을 거기서 도출하기가, 또한 일체의 상업적 기복起伏을 설명하기도 쉬울 것이다. 이는 증명에 따라붙는 일련의 보조 정리들일 것이다.
그런데 그러한 비율이 존재하고 평가 가능하게 되려면 반드시 내외적 법칙이 임금과 판매 가격의 구성을 지배할 필요가 있다. 그리고 현 상태에서 임금과 가격이 달라지고 끊임없이 오르락내리락하므로 가치를 변동시키고 등락시키는 일반적 사실, 원인이 무엇인지, 그리고 어떤 한계 내에서 이 등락이 행해지는지를 묻게 된다.
그러나 이 질문 자체는 여러 원리들에 상반된다. 왜냐하면 등락을 말하는 자는 반드시 가치의 무게중심이 끊임없이 가치를 데려다주는 평균 방향을 가정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아카데미가 이윤과 임금의 등락을 확정하라고 요구할 때 바로 이것은 가치를 확정하라고 요구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것이 바로 아카데미의 양반들이 배척하는 것이다. 그들은 만약 가치가 가변적이라면 바로 이에 의해 확정이 가능하다는 것, 가변성은 확정 가능성의 지표이고 조건이라는 것을 이해하려 들지 않는다. 그들은 가치는 언제나 변동하며 결코 확정될 수 없다고 주장한다. 이는 마치 “진자의 초당 등락 수, 진폭, 경험이 행해지는 곳의 위도와 고도가 주어졌을 때 진자의 길이가 정해질 수 없다, 이 진자가 운동 중이기 때문이다”라고 주장하는 것과 같다. 이런 것이 정치경제학의 제1신조이다.
사회주의에 관해 말한다면, 이는 그 문제를 더 잘 이해했다고도 이에 유념한다고도 보이지 않는다. 그것의 여러 기관들 중에 어떤 것들은 그 문제를 간단히 제쳐놓고 분배를 배급으로 대체한다. 즉 사회 유기체로부터 수와 측정을 추방한다. 다른 기관들은 당황해 도망치면서 임금에 보편적 투표를 적용한다. 이런 빈약함이 수천수만의 바보들을 발견한다는 것은 말할 것도 없다.
정치경제학의 유죄 선고는 맬서스의 다음 유명한 문구에서 정식화되었다.
“이미 점유된 세상에 태어난 한 사람을 만일 그의 가족이 먹여 살릴 수단이 없거나 사회가 그의 노동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면 이 사람은 내가 말하건대 음식물의 어느 한 몫이라도 달라고 할 조금의 권리도 없다. 그는 실질적으로 땅 위에서 잉여적 존재이다. 자연의 대향연에는 그에게 배정된 자리가 없다. 자연은 그에게 가 버리라고 명하며, 이런 질서를 스스로 집행하는 데 꾸물대지 않는다.”
그러므로 정치경제학의 필연적, 숙명적 결론, 내가 이런 차원의 연구에서 지금까지 알려지지 않은 증거를 가지고서 증명할 결론은 이런 것이다. 소유하지 못한 자에게 죽음을.
맬서스의 사상을 더 잘 파악하기 위해 거기서 웅변적인 겉칠을 벗겨내고 철학적 명제로 번역해보자.
“개인적 자유 그리고 그 표현인 재산권은 정치경제학에서 주어진다. 평등과 연대는 그렇지 않다.”
“이 체제 아래서는, 각자는 방해받지 않으며 자기 앞가림을 한다(chacun chez soi, chacun pour soi). 노동은 여느 상품처럼 등락을 겪으며, 이로부터 무산계급에는 위험이 따른다.”
“누구든 소득도 임금도 없는 자는 남들에게 아무것도 요구할 권리가 없다. 그의 불행은 그 사람 혼자에게 떨어진다. 운명의 장난으로 그의 운이 나쁜 것이다.”
정치경제학의 관점에서 이 명제들은 부정할 수 없다. 그리고 맬서스는 이것들을 아주 놀라운 적확성을 가지고 정식화했으며 일체의 비난으로부터 안전하다. 사회과학 조건들의 관점에서 바로 이 명제들은 근본적으로 그릇되고 모순적이기까지 하다.
맬서스의 오류, 더 제대로 말해서 정치경제학의 오류는, 먹을 것이 없는 사람은 죽어야 한다고 말한 것에도, 개인적 전유의 체제 아래서 일도 소득도 없는 이는 기아에 쫓기는 몸이 되고 싶지 않으면 자살로 생을 마감하는 것밖에 할 것이 없다고 주장한 것에도 있지 않다. 이런 것이 한편으로는 우리의 생존법칙이다. 이런 것이 다른 한편으로는 재산권의 결과이다. 그리고 로시[8] 씨는 이 점에 관해 맬서스의 양식良識을 정당화하기 위해 너무나 많은 수고를 했다. 정말이지 로시 씨는 아주 오랫동안 커다란 애정을 가지고, 자신의 동포인 마키아벨리가 『군주론』에서 세상 사람들이 경탄할 정도로 독재를 권장한 것과 같은 식으로 맬서스가 정치경제학을 권하고자 했다고 하는 옹호론을 편 것으로 짐작한다. 우리에게 빈곤함을 산업적, 상업적 자의恣意의 필요불가결 조건으로 바라보게 하면서 로시 씨는 우리에게 “이것이 여러분의 권리이고 여러분의 정의이고 여러분의 정치경제학이다. 이것이 바로 재산권이다”라고 외치는 것 같다.
그러나 천진한 골Gaul족은 이런 세세한 것들은 모른다. 그리고 프랑스에는 그의 흠 없는 언어로 말하는 것이 더 나았을 것이다. 맬서스의 오류, 정치경제학의 근본 해악은 일시적 조건, 즉 사회가 귀족 계급과 프롤레타리아 계급으로 나누어진다는 것을 최종적 상태로 단언하는, 특히 조직된, 따라서 연대적인 사회에서 어떤 사람들은 소유하고 노동하고 소비하는 반면 다른 사람들은 소유하지도 노동하지도 빵을 가지지도 못한다고 말하는 일반 논제에 있다. 끝으로 맬서스, 혹은 정치경제학은 인류가 누리는 무제한의 재생산 능력에서 인구와 생산 간 균형 법칙의 필연성, 따라서 존재를 도출하는 것만이 필요했는데도 동식물류보다 더하지도 덜하지도 않게 기아飢餓의 영구적 위협을 보면서 그 결론에서 길을 잃는다.
간단히 말해 맬서스의 이론은 정치경제학 전체를 터무니없는 것으로 전락시킨 것인데, 이것이 바로 이 작가의 위대한 공로이고, 그의 동료들 중 아무도 그가 세운 이런 공로를 고려하는 데 신경 쓰지 않았다.
사회주의에 관해 말한다면, 그것은 오래전부터 플라톤과 토머스 모어에 의해 한마디로 유토피아, 즉 무소재無所在, 공상空想으로 판단되었다.
그럼에도 인간 정신의 명예를 위해, 그리고 모두에게 정의가 돌아가도록 이를 말할 필요가 있다. 정치경제학도 입법학도 그 시초에서는 우리가 본 것과 다를 수 없었으며, 사회도 그 최초 위치에 멈추어 있을 수가 없다.
일체의 과학은 우선 자신의 영역을 확정하고 자기의 소재들을 생산하고 수집해야 한다. 체계에 앞서 사실들이 먼저이고, 기예의 세기에 앞서 박식博識의 세기가 먼저다. 다른 모든 과학이 그러하듯 시간의 법칙과 경험의 조건에 종속된 경제학은 사회에서 일들이 어떻게 일어나야 하는지를 탐구하기 전 이들이 어떻게 일어나는지를 우리에게 말해주어야 했다. 그리고 이 모든 일상 관행은 저자들이 그 난장판과 상충성에도 불구하고 아주 거창하게 자신들의 책에서 법칙, 원리, 이론이라고 부르는 것으로서 까다로운 부지런함으로 수집되고 엄격한 불편부당성을 가지고 서술되어야 했다. 이 과업을 완수하기 위해 그 과학의 나중의 진보가 요할 것보다 아마도 더 많은 천재성, 특히 더 많은 헌신이 필요했을 것이다.
그러므로 사회경제학이 오늘날에도 현실에 대한 지식이라기보다 오히려 미래를 향한 열망이라면, 이 연구의 요체들이 모두 정치경제학에 있다는 것도 인정할 필요가 있다. 그리고 나는 이 의견이 사상계의 엄청난 다수 의견이 되었다고 말하면서 내가 일반적 정서를 표현한다고 믿는다. 정말이지 현재에 대한 옹호자는 별로 없다. 그러나 유토피아에 대한 기피는 그에 못지않게 보편적이다. 그리고 모든 사람들은 진리가 이 두 용어, 보존과 운동을 화해시킬 공식에 있다는 것을 이해한다.
또한 아담 스미스, 장 바티스트 세, 리카도, 맬서스 그리고 이들의 괴상한 반박자들 덕분에 운명의 비밀, 부자의 방들atria Ditis이 드러났다. 자본의 득세, 노동자 탄압, 독점의 기계화가 모든 점에서 밝혀져서 여론의 시선 앞에서 뒷걸음질한다. 경제학자들이 관찰하고 묘사한 사실들에 관해 사람들은 추론하고 추리한다. 남용의 권리들, 악한 습관들은, 이것들을 살린 모호성이 지속된 만큼 오랜 기간 존중을 받다가 대명천지에 끌어내지자마자 일반의 질타를 받고 명운을 다한다. 사회의 통치는 공허한 이데올로기 안에서 사회 계약의 양식으로 습득되는 것이 아니라 몽테스키외가 사물들의 관계에서 분간한 대로 습득되어야 한다. 그리고 이미 상당히 사회적인 성향을 가진 좌파는 학자, 집정관, 법률가, 교수 심지어 자본가 그리고 산업계 수뇌 등 특권의 대표자이자 옹호자로 태어난 자들, 그리고 백만의 숙련 기술자들로 구성되며, 민족 내에서 의회의 여론 위에 그리고 바깥에 위치해 경제적 사실들의 분석에서 여러 사회들의 생명의 비밀을 파악하기를 추구한다.
그러니 정치경제학을 건축물을 세우기 위해 마련된 자재들이 즐비하게 놓인 광대한 평원으로 나타내자. 일꾼들은 열의에 가득 차고 일에 착수하려는 마음에 불타 신호를 기다린다. 그러나 건축가는 설계도도 놔두지 않고 사라졌다. 경제학자들은 수많은 것들에 대한 기억을 간직해 온다. 유감스럽게도 그들은 견적서의 그림자도 갖고 있지 않다. 그들의 각 조각의 기원과 역사적 내력, 그 제작비용, 어떤 목재가 최상의 대들보가 되는지, 어떤 흙을 써야 최상의 벽돌이 되는지, 작업 도구와 리어카에 얼마를 지출했는지, 목수는 얼마의 이익을 보는지, 석수는 얼마를 버는지를 안다. 그들은 어떤 것이 어디로 가야 하는지, 어디에 놓여야 하는지를 모른다. 경제학자들은 눈앞에 여기저기 던져진 걸작의 부분들을, 사지가 절단된 시인의 팔다리(disjecti membra poetoe)를 보고 있는 것을 외면할 수 없다. 그러나 그들에게는 현재까지 일반적 조감도를 재발견하는 것이 불가능했으며, 약간의 접근을 시도할 때마다 앞뒤가 안 맞는 것들에만 부닥쳤다. 결국 결과도 없는 조합에 절망해 그들은 과학의 건축상의 부적합, 혹은 그들이 말하듯이 그 원리들의 폐단들을 교리로 세우고 말았다. 한마디로 그들은 과학을 부정했다.[9]
이처럼 노동 분업은 그것 없이 생산이 거의 전무하다시피 될 것인데, 이는 오만 가지 폐단을 겪으며, 그중 최악은 노동자의 의기소침이다. 기계들은 저가격과 함께 충색充塞과 실업을 낳는다. 경쟁은 탄압을 가져온다. 조세는 사회의 물적인 연계로서 아주 흔히 화재나 우박에 맞먹는 무서운 도리깨일 뿐이다. 신용은 반드시 파산과 상관관계를 이룬다. 재산권은 여러 가지 남용의 온상이다. 상업은 주사위 놀이로 변질되고 거기서는 심지어 때때로 속이는 것이 허락된다. 간단히 말해서 질서가 어떻게 무질서를 제거하기에 이를지 모르는 가운데 무질서나 어디서나 질서와 같은 비율을 이루어(taxis ataxian diôkein) 경제학자들은 모든 게 아주 잘 되고 있다는 결론을 내리는 입장을 취했으며, 일체의 개선 제안을 정치경제학에 적대적인 것으로 간주한다.
그래서 사회적 건축물은 방치되었다. 군중이 공사장에 밀려들었다. 기둥들, 기둥 윗머리, 기둥 받침, 목재, 돌, 금속이 여러 몫으로 분배되고 추첨되었으며, 웅장한 사원을 위해 모아진 이 모든 재료들을 가지고 무식하고 야만적인 재산권이 오두막집들을 지었다. 그러므로 건축 설계도를 되찾는 것만이 아니라 입주자들을 내보내는 것도 중요하다. 이들은 자신들의 거주지가 훌륭하다고 주장하며, 복고restauration이라는 말 한 마디에 자신들의 문 앞에서 전투 대형을 취하는 자들이다. 그러한 혼동은 옛날 바벨에서도 없었다. 다행히도 우리는 프랑스어를 말하고 님로드의 동료들보다 더 용감하다.
은유를 그만두자. 역사적, 서술적 방법은 인식만 행할 필요가 있었던 한에서는 성공적으로 사용되었지만 앞으로는 쓸모없다. 수천 권의 단행본과 표들이 나왔지만 우리는 크세노폰과 헤시오도스의 시대보다 더 앞서지 못했다. 페니키아인들, 그리스인들, 이탈리아인들은 옛날에 우리가 오늘 하는 것처럼 일했다. 그들은 경제 기술의 모든 규칙들에 따라 자기 돈을 투자했고, 일꾼들에게 임금을 주었고, 영지를 넓혔고, 발송과 회수를 했으며, 장부를 적었고, 투기를 하고, 이차 거래를 하고 망했으며, 우리 못지않게 독점권을 차지하고, 소비자와 일꾼에게서 돈을 뜯어내는 데 능숙했다. 이 모든 것으로 관계들이 넘쳐났다. 그리고 우리가 영구적으로 우리의 통계와 수치들을 다시 들여다볼 때 우리는 언제나 눈앞에 혼돈, 부동의 한결같은 혼돈을 대할 것이다.
정말이지 사람들은 신화시대부터 우리의 대혁명 57주년인 현재까지 일반의 행복이 증가했다고 믿는다. 그리스도교는 오랫동안 이 개선의 주된 요인으로 통해 왔으며, 경제학자들이 현재는 자신들의 원리에 그 개선에 대한 일체의 영예를 구걸한다. 왜냐하면 결국 그리스도교가 사회에 미친 영향이 무엇이었느냐는 것이다. 생겨나면서부터 근본적으로 유토피아적인 그리스도교는 점차 일체의 경제적 범주들, 노동, 자본, 임대료, 이자, 거래, 재산권을 채택함으로써만, 한마디로 정치경제학의 최고 표현인 로마법을 신성화함으로써만 유지되고 확장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리스도교는 그 신학적 부분에서는 생산과 소비에 관한 이론들에 생소하면서 유럽 문명에서는 최근에 떠돌이 일꾼들에게 공제회와 프리메이슨, 일종의 보험 및 상조 계약이던 것이었다. 이런 관계 아래 그리스도교는 정치경제학에 아무런 빚도 지지 않으며, 그리스도교가 행한 선은 정치경제학에 의해 확실성의 증거로 호출될 수 없다. 자선과 헌신의 효과들은 경제의 영역 밖에 있고, 경제는 사회의 행복을 노동의 조직과 정의로써 획득해야 한다. 잉여에 대해서는 나는 재산권 메커니즘의 다행스러운 효과를 인정할 준비가 되어 있다. 그러나 나는 이 효과가 이 메커니즘이 본성상 낳게 되는 빈곤에 의해 완전히 덮이는 것을 관찰한다. 그래서 한 저명한 장관이 영국 의회 앞에서 얼마 전에 실토했듯이, 그리고 우리가 현 사회에서 이를 곧 증명하겠지만 빈곤의 진전은 부의 진보와 병행하고 이에 들어맞는다. 이는 정치경제학의 공로들을 완전히 무효화하는 것이다.
그래서 정치경제학은 그 격률에 의해서도 그 업적에 의해서도 정당화되지 않는다. 그리고 사회주의에 관해 말한다면, 그 모든 가치는 정치경제학을 확증한 것뿐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정치경제학에 대한 고찰을 재개할 수밖에 없다. 정치경제학만이 적어도 부분적으로 사회과학의 소재들을 담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이론들이 약간의 오류를 숨기고 있지 않은지를 증명하지 않을 수 없다. 그 오류를 시정하는 것이 사실과 당위를 화해시킬 것이고, 인류의 유기적 법칙을 드러내어 줄 것이고, 질서의 적극적 개념을 제공해 줄 것이다.
가치는 경제라는 건축물의 모퉁잇돌이다. 우리에게 자신의 일을 계속해 나가도록 위임한 예술가인 신은 누구에게도 이를 설명하지 않았다. 그러나 약간의 표시들을 보고서 사람들이 이를 짐작한다. 가치는 실제로 두 얼굴을 하고 있다. 하나는 경제학자들이 사용가치 혹은 가치 그 자체라고 부르는 것이다. 또 하나는 교환가치 혹은 여론상의 가치이다. 이 두 측면에서 가치가 낳는 효과, 그것이 결코 안정되지 않은 한에서, 혹은 더 철학적으로 표현해서 그것이 구성되지 않은 한에서 아주 불규칙적인 효과는 이 구성에 의해 완전히 달라진다.
그런데, 유용한 가치와 교환가치의 상관성은 어디 있는가? 구성된 가치라는 것은 어떻게 이해해야 하며, 어떠한 반전에 의해 이 구성이 실행되는가. 이는 정치경제학의 대상이자 목표이다. 나는 독자에게 앞으로 이어지는 것에 모든 주의를 기울일 것을 간청한다. 본 장은 이 저서에서 약간의 선의를 요하는 유일한 장이다. 내 편에서는 점점 더 단순하고 명확하게 하고자 노력할 것이다.
내게 약간의 도움이 될 수 있는 모든 것은 가치를 가진다. 그리고 나는 쓸모 있는 것이 풍부할수록 그만큼 더 부유하다. 이 점에는 아무 어려운 것도 없다. 우유와 고기, 과일과 곡식, 털, 설탕, 면화, 포도주, 금속, 대리석, 끝으로 토지, 물, 공기, 불과 태양은 내게 사용가치, 본성과 용도상 가치이다. 내 생존에 도움이 되는 모든 것들이 그것들 중 어떤 것들, 예를 들어 빛만큼 풍부하다면, 다시 말해 각종 가치들의 양이 무한정이라면 내 안녕은 영원히 보장될 것이다. 나는 일할 필요가 없을 것이며, 생각도 하지 않을 것이다. 이런 상태에서는 물건들에 언제나 효용이 있을 것이지만, 그것들이 가치를 띤다고 말하는 것은 더는 참이 아닐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가 곧 알아보겠지만 가치는 본질상 사회적 관계를 가리키기 때문이다. 그리고 우리가 유용성이라는 관념을 획득한 것은 그 자체가 오직 교환에 의해서, 사회로부터 자연으로 일종의 회귀를 시킴에 의해서이다. 문명의 모든 발전은 그러므로 끊임없이 새로운 가치들의 창조를 촉발해야 하는 인류가 처한 필요성에 관계된다. 마찬가지로 사회악들은 우리가 우리 자신의 관성에 맞서 벌이는 지속적인 투쟁에 그 제1원인을 가진다. 사람에게서 그의 사고에 촉구를 하고, 그의 사고를 사색적 생활에 맞게 만드는 이 필요를 없애보라. 그러면 창조의 작업반장은 네발 달린 동물의 첫 번째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효용가치는 어떻게 교환가치가 되는가? 왜냐하면, 가치의 두 종류는 생각 안에서는 (전자는 후자를 계기契機로 해서만 인식되므로) 동시적인데도 불구하고 계기繼起 관계를 유지한다는 것을 주목할 필요가 있기 때문이다. 교환 가능한 가치는 유용한 가치의 어떠한 반사에 의해 주어지는데, 이는 신학자들이 삼위일체에서 성부가 일체의 영원을 사색하면서 성자를 낳는다고 가르치는 것과 같다. 이 가치 관념의 발생은 경제학자들이 충분히 주의 깊게 주목하지 않았다. 이 점에 유념하는 것이 중요하다.
그러므로 내가 필요로 하는 물건들 중에 아주 많은 수가 자연에는 미미한 양으로밖에 존재하지 않거나 전혀 없으므로, 나는 내게 결여된 것의 생산에 협조하지 않을 수 없다. 그리고 나는 그렇게 많은 것들에 착수할 수 없으므로 다양한 직능을 가진 다른 사람들, 내 협력자들에게 그들의 산물 일부를 내 산물과의 교환으로 내게 양도하라고 제안할 것이다. 그러므로 나는 내 특정한 산물을 언제나 내가 소비하는 것보다 더 많이 가질 것이다. 마찬가지로 내 짝들은 각자의 산물을 그들이 사용하는 것보다 더 많이 가질 것이다. 이 무언의 협정은 거래에 의해 실행된다. 이때 우리는 두 가치의 논리적 계기繼起가 이론에서보다 역사에서 더 잘 나타나는 것을 보여줄 것이다. 산업이 사람들에게 어떤 교환이라도 생겨나게 해주기 전에 이들은 자연적 재화들(이는 사람들이 원시 공동체라고 부르는 것이다)을 차지하려고 다투면서 수천 년을 보낸 것이다.
그런데 자연적이든 산업적이든 모든 산물이 가지는 사람의 생존에 도움을 주는 능력은 특별히 효용가치라고 칭해진다. 그 산물들이 서로 대가로 제공될 수 있는 능력은 교환가치라고 칭해진다. 근본적으로 이는 같은 것이다. 후자는 전자에 대체代替의 관념을 더해줄 뿐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이 한가한 미묘함에서 나온 것으로 보일 수 있다. 실무에서는 그 결과들이 놀랍고, 번갈아가며 다행스럽다가 치명적이었다가 한다.
이처럼 가치에 설정된 구분은 사실에 의해 주어지며, 아무런 자의적인 것도 없다. 이 법칙을 자신의 행복과 자유의 이익이 되게 돌리는 것은 이 법칙을 감수하는 사람의 몫이다. 발라(Walras)[10] 씨라는 작가의 아름다운 표현에 따르면 노동은 자연의 인색함에 대해 선포된 전쟁이다. 이에 의해서 부와 사회가 동시에 생겨난다. 노동은 자연이 우리에게 주는 것보다 비교도 할 수 없이 더 많은 재화를 생산한다. 이처럼 프랑스의 제화업자들만 해도 페루, 브라질, 멕시코의 광산들을 합친 것보다 열 배는 더 많은 것을 생산한다. 그러나 노동은 자연적 가치들에 가하는 변형으로써 자신의 권리를 확장하고 무한히 배증해서 점차로 모든 부가 산업적 계통을 거쳐서 그것을 창조한 자에게 돌아가며, 1차 원료의 보유자에게는 거의 아무것도 남지 않게 된다.
그러므로 이러한 것이 경제 발전의 진행이다. 처음 순간에는 토지와 자연적 가치들이 전유된다. 그 다음에는 노동에 의한 조합과 분배가 완전한 평등에까지 계속된다. 우리의 길 위에는 여기저기 함정들이 파여 있고, 우리 머리 위에 칼이 매달려 있다. 그러나 일체의 위험을 물리치기 위해 우리는 이성을 가진다. 그리고 이성은 전능이다.
우연이나 부주의에 의해 교환이 생산자들 중 한 사람에게 금지되거나 그의 산물이 갑자기 쓸모없어지게 되면, 그의 창고가 가득 차 있는데도 그는 아무것도 소유하지 못할 것임이 유용한 가치와 교환 가능한 가치의 관계에서 나온다. 그가 희생을 많이 하고 생산을 하려는 만용을 많이 부렸을수록, 그의 빈곤은 더욱 심각할 것이다. 산물이 쓸모가 완전히 사라지는 대신 단지 축소되었다면, 이는 백 가지 형태로 일어날 수 있는 일인데, 노동자는 일자리를 박탈당하고 재앙을 겪어서 망하는 대신 가난해지기만 할 것이다. 남의 가치의 미미한 양을 대가로 받고 자기 가치의 다량을 내주어야 해서 그의 생존은 그의 판매의 적자와 같은 비율로 축소될 것이다. 이는 그를 안락함으로부터 궁색한 상태로 점차 이끌어갈 것이다. 끝으로 산물의 쓸모가 높아지거나 또는 그 생산에 드는 비용이 덜 나가게 된다면 교환의 저울은 생산자에게 유리한 쪽으로 기울 것이고, 그 생산자의 복리는 이렇게 해서 밭가는 자의 별 볼 일 없는 처지에서부터 일 없이 노는 자의 풍요로움으로 올라갈 수 있을 것이다, 이 감가와 부요화의 현상은 천 가지 형태로, 천 가지 조합으로 발현된다. 상공업의 열띤 그리고 난감한 역할은 여기에 있다. 경제학자들이 영원히 지속되리라고 믿는 것은 매복 작전으로 가득 찬 이 도박이며, 도덕 및 정치 과학 아카데미는 이윤과 임금의 이름으로 유용한 가치와 교환가치를 화해시키기를, 즉 일체의 유용한 가치들을 마찬가지로 교환 가능하게 하고, 역으로 일체의 교환 가능한 가치를 마찬가지로 유용하게 할 수단을 발견할 것을 요구할 때, 알지도 못하면서 요구하는 것이 그 도박의 폐지이다.
경제학자들은 가치의 이중적 특성을 아주 잘 부각시켰다. 그러나 그들이 마찬가지로 말끔하게 만들지 못한 것은 그것의 모순적 본성이다. 여기서 우리의 비판이 시작된다.
유용성은 교환의 필요조건이다. 그러나 교환을 제거해보라. 그러면 유용성은 무無가 된다. 이 두 용어는 불가분리적으로 연결된다. 그러니 모순은 어디서 나타나는가?
우리가 존재하는 한 우리는 노동과 교환에 의해서밖에 존속하지 못하며, 우리가 더 많이 생산하고 교환하는 그만큼 더 부유하므로 각자에게 그 결과는 그만큼 그의 교환을 늘리고 이로써 그의 향유를 늘리기 위해 유용한 가치를 가능한 최대로 많이 생산하는 것이다. 좋다! 가치 배가의 제1의 효과, 불가피한 효과는 가치들을 저렴하게 하는 것이다. 상품이 더욱 풍부할수록 그것은 교환에서 손해를 보고 상업적으로 감가한다. 노동의 필요성과 그 결과 사이에 모순이 있다는 것이 정말이 아닌가?
나는 설명을 향해 정면으로 달려가기 전에 독자에게 사실에 유의하도록 간청한다.
밀 스무 자루를 수확해 자기 가족과 함께 먹을 생각인 농부는 열 자루만 수확한 경우보다 두 배가 부유하다고 스스로를 판단한다. 마찬가지로 천 쉰 마를 짠 주부는 스물다섯 마밖에 짜지 못한 경우보다 두 배가 부유하다고 스스로 생각한다. 가정에 관련해서는 그들 둘 다 옳다. 그러나 외부 관계의 관점에서는 그들이 완전히 틀렸을 수 있다. 밀의 수확이 나라 전체에서 두 배라면, 스무 자루는 수확이 절반이었더라면 열 자루가 지녔을 가치보다 더 낮은 가치를 지닐 것이다. 또한 비슷한 경우에 천 쉰 마는 스물다섯 마보다 가치가 덜 나갈 것이다. 그래서 가치는 쓸모의 생산이 증가하면서 줄어들고, 생산자는 여전히 풍요해지면서도 빈곤에 이르게 될 수 있다. 그리고 이는 치료법이 없어 보인다. 안녕의 유일한 수단은 공산품이 모두 공기와 햇빛처럼 무한한 양이 되는 것일 것이기 때문이다. 이는 터무니없는 것이다. ‘내 이성의 신이여! 터무니없는 이야기를 하는 것은 경제학자들이 아닙니다’하고 장 자크[11]는 혼잣말했을 것이다. 자신의 정의定義에 충실하지 못한 것은 정치경제학 자체다. 거짓으로 말한 것은 사악함 그 자체다(Mentita est iniquitas sibi).
앞의 예들에서는 유용한 가치가 교환 가능한 가치를 초과한다. 다른 경우들에서는 더 작다. 그렇다면 같은 현상이 벌어지지만, 방향이 다르다. 저울은 생산자에게 유리하다. 그리고 당하는 것은 소비자다. 이는 특히 흉작 때 일어나는 일이다. 이때 생필품의 상승은 언제나 인위적인 면이 있다. 그 기술이라고는 별로 쓸모도 없는 물건에, 없어도 별 지장 없는 물건에 과장된 의견상의 가치를 부여하는 직업들도 있다. 그런 것은 일반적으로 사치품 공예들이다. 사람은 심미적 열정에 의해 그 소유가 자신의 허영, 선천적인 사치 취향, 아름다움에 대한 극히 고귀하고 존경받을 만한 사랑을 고도로 충족시키는 쓸데없는 것들에 욕심을 가진다. 이런 종류의 물건들의 제공자들이 투기를 하는 것은 이에 관해서다. 환상과 우아함을 강요하는 것은 유통에 세금을 부과하는 것 못지않게 역겹고 터무니없는 일이다. 하지만 이 조세는 몇몇 인기 있는 기업가들에 의해 징수되며, 일반의 환호가 이를 보호해주고, 그 공로라고는 아주 흔히 취향을 왜곡하고, 변덕을 생겨나게 하는 것뿐이다. 그때부터는 아무도 불평하지 않는다. 그리고 모든 여론의 정죄는 독점자들에게 돌아가는데, 이들은 재능 덕분에 천과 빵의 가격을 몇 상팀 올리게 된 자들이다. …
유용한 가치와 교환 가능한 가치에서 이 놀라운 대조를 표시한 것은 별 것이 아니다. 이 대조에서 경제학자들은 아주 단순한 것밖에 보지 못하는 데 익숙해져 있다. 이 단순성이라고 하는 것이 심오한 신비를 감추고 있다는 것을 보여줄 필요가 있다. 이를 간파하는 것이 우리의 의무이다.
그러므로 나는 모든 진지한 경제학자들에게 그 문제를 번역하거나 반복하는 것 말고 다른 방식으로 생산이 증가함에 따라 어떤 원인에서 가치가 감소하는지를, 그리고 역으로 산물이 감소함에 따라 바로 이 가치를 크게 만드는 것이 무엇인지를 말해 달라고 주문한다. 기술적 용어로 말하면, 유용한 가치와 교환 가능한 가치는 서로에게 필요한 가치들로서 서로 반비례한다. 그러므로 나는 왜 유용성이 아닌 희소성이 고가高價의 동의어인지를 묻는다. 왜냐하면, 상품들의 가격 상승과 가격 하락은 그 생산에 지출된 노동량과 독립적이기 때문이다. 이 점을 주목하자. 그 상품들에 드는 비용의 많고 적음은 물가 공시표상의 변동을 설명하는 데 조금도 도움이 되지 못한다. 가치는 자유의 여신처럼 변덕이 심하다. 유용성도 노동도 고려하지 않는다. 그러기는커녕 사물의 통상적 흐름에서 특정한 예외적 교란을 제외하면, 가장 유용한 물건들이 언제나 더 낮은 가격에 제공되어야 할 것 같다. 다시 말해, 가장 편안하게 일하는 사람들이 가장 좋은 보수를 받고, 자신들의 수고에 피와 땀을 쏟는 이들은 가장 나쁜 보수를 받는 것이 정당한 것 같다. 그래서 그 원리를 마지막 결과까지 따라가면, 세상에서 가장 논리적으로, 그 사용이 필요하고 수량이 무한정한 물건들은 무료여야 하고, 그 쓸모가 없고 희소성이 극히 큰 물건들은 측량할 수 없는 가격을 가져야 한다고 결론을 내리게 될 것이다. 그러나 아주 당황스럽게도 실무는 결코 이 극단을 인정하지 않는다. 한편으로 어떠한 인적 생산물도 결코 무한의 크기에 도달할 수 없다. 또 한편으로 가장 희소한 물건들은 어느 정도는 쓸모 있을 필요가 있으며, 그렇지 않으면 그것들은 어떠한 가치도 가질 수 없을 것이다. 유용한 가치와 교환 가능한 가치는 그러므로 비록 그 본성상 끊임없이 서로를 배제하는 경향을 띰에도 불구하고 서로 숙명적으로 연관된 상태로 있다.
나는 이 주제를 해명하기 위해 제시할 수 있을 입씨름의 반박으로 독자를 피곤하게 하지 않을 것이다. 가치 관념에 내재하는 모순에 관해 지목 가능한 원인도, 가능한 설명도 없다. 내가 말하는 사실은 사람들이 원시적이라고 칭하는 사실들 중 하나, 즉 다른 사실들을 설명하는 데 도움이 될 수 있지만 그 자체로는 단순체라고 부르는 것처럼 불가해한 사실이다. 그러한 것으로는 정신과 물질의 이원론이 있다. 정신과 물질은 별개로 본다면 각각이 정신의 특수한 관점을 가리키지만 어떠한 실재에도 부응하지 않는 두 항이다. 마찬가지로 사람에게 아주 다양한 산물들에 대한 필요가 이를 자신의 노동으로 조달할 의무와 함께 주어질 때 유용한 가치의 교환 가능한 가치에 대한 대립이 필연적으로 나오며, 이 대립으로부터 정치경제학의 문턱 자체에 관한 모순이 생겨난다. 어떠한 지성도, 어떠한 신적, 인간적 의지도 이를 막을 수 없을 것이다.
이처럼 기괴한 설명을 구하는 대신, 그 모순의 필연성을 충분히 확인하는 것으로 만족하자.
창조된 가치들이 얼마나 풍부하든, 그 가치들이 서로 교환되는 비율이 어떠하든 우리가 우리 생산물을 교환하려면 당신이 수요자인 경우 내 생산물이 당신에게 맞을 필요가 있고, 당신이 공급자인 경우 내가 당신의 생산물을 받아들일 필요가 있다. 왜냐하면 아무도 타인에게 자기 자신의 상품을 강요할 권리가 없기 때문이다. 유용성의, 혹은 같은 말이지만 필요의 유일한 심판자는 구매자이다. 그러므로 앞의 경우에서 당신이 적합성의 심판이다. 뒤의 경우에서는 나다. 번갈아 가며 누리는 자유를 없애보라. 그러면 교환은 더 이상 산업적 연대성의 실행이 아니다. 이는 강탈이다. 지나가는 말이지만 공산주의는 결코 이 난점을 정복하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자유와 함께 생산은 필연적으로 불확정적이다. 수량에서나 품질에서나 그러하다. 그래서 경제적 진보의 관점에서, 소비자들의 마음에 든다는 관점에서와 마찬가지로 그 평가는 영구히 자의적으로 남으며 언제나 상품의 가격은 요동칠 것이다. 잠시 모든 생산자들이 고정된 가격에 판매한다고 가정해 보자. 더 저렴하게 생산하거나 더 잘 생산해서 남들은 아무것도 벌지 못할 동안 많이 벌 사람이 있을 것이다. 어떤 식으로든 균형은 깨진다. 상업의 침체에 대비하기 위해 생산을 꼭 필요한 만큼으로 한정하기를 원하는가? 이는 자유를 유린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당신은 내게서 선택할 능력을 빼앗고 최대를 지불하도록 저주하기 때문이다. 당신은 경쟁, 염가廉價의 유일한 보장책인 경쟁을 파괴하고, 밀수를 유발한다. 이처럼 상업적 자의성을 막기 위해 당신은 행정적 자의성에 뛰어들 것이다. 평등을 창조하기 위해 당신은 자유를 파괴할 것이다. 이는 평등 자체의 부정이다. 당신이 생산자들을 단일한 작업장에 모은다면, 나는 당신이 이 비밀을 파악하리라 생각할까? 그것으로는 아직 충분하지 않다. 당신은 또한 소비자들도 하나의 공통 살림에 모아볼 필요가 있다. 하지만 그때 당신은 그 문제를 방기한다. 가치 관념을 폐기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다. 이는 노동을 폐기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불가능한 일이다. 그 관념을 확정하는 것이 중요하다. 개인적 자유를 죽이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것을 사회화하는 것이 중요하다. 그런데 유용한 가치와 교환가치 간의 대립을 일으키는 것은 사람의 자유의지이다. 자유의지가 존속하는 한 이 대립을 어떻게 해결할 것인가? 그리고 사람을 희생시키지 않는다면, 자유를 어떻게 희생시킬 것인가?…
그러므로 자유로운 구매자의 자격으로 나는 내 필요의 심판자이고, 물건의 적절성에 대한 심판자이고, 내가 매기고 싶은 가격의 심판자라는 것, 그리고 다른 한편으로 자유로운 생산자의 자격으로 당신은 실행 수단의 주인이고, 결과적으로 당신은 당신의 비용을 낮출 능력을 가진다는 것, 그것에 의해서만 자의성이 불가피하게 가치 안에 도입되며, 가치가 유용성과 의견 사이에서 진자 운동을 한다.
그러나 이 진자 운동은 경제학자들에 의해 완벽하게 특기된 것으로서 모순의 효과 말고는 아무것도 아니다. 이는 큰 규모로 옮긴다면 극히 예기치 못한 현상들을 낳는다. 3년간의 풍작은 러시아의 어떤 지역에서는 공적인 재난이다. 우리의 포도원에서 3년의 풍작이 어떤 포도원 주인에게는 재난인 것과 마찬가지이다. 나는 잘 모르지만, 경제학자들은 이 시련을 판로의 부족 탓으로 돌린다. 역시 판로는 그들 사이에서는 거대한 문제이다. 유감스럽게도 판로의 이론은 맬서스에게 들이대고자 했던 해외 이주의 이론과 같다. 이는 논점 선취pétition de principe의 오류이다. 판로가 가장 잘 마련된 상태도 가장 고립된 나라들처럼 과잉 생산에 종속된다. 파리와 런던의 증권시장보다 가격 인하와 가격 인상이 더 잘 알려지는 곳이 어디인가?
가치의 진자 운동과 그로부터 흘러나오는 불규칙적 효과들로부터 사회주의자들과 경제학자들은 각자의 입장에서 상반된 결과를, 그러나 마찬가지로 그릇된 결과를 도출했다. 전자는 정치경제학을 폄훼하고 이를 사회과학에서 제외하려고 말했다. 후자는 두 항 사이의 일체의 화해 가능성을 기각하고 여러 가치의 공측 불가능성, 따라서 운명의 불평등을 상업의 절대 법칙으로 언명하기 위해 말했다.
나는 양측에서 오류는 대등하다고 말한다.
1. 가치의 모순적 관념은 유용한 가치와 교환가치의 불가피한 구분에 의해 아주 잘 조명된 것으로, 이는 정신의 잘못된 인식에서 나오는 것도 아니고, 불량한 용어 사용에서 나오는 것도 아니고, 실무의 어떠한 착각에서 나오는 것도 아니다. 그것은 사물의 본성에 내재하며, 사고의 일반 형태, 즉 범주로서 이성에 과해진다. 그런데 가치 개념이 정치경제학의 출발점이므로, 그 과학의 모든 요소들은 그 자체로 모순적이고 서로 대립된다. 나는 미리 과학이라는 말을 사용한다. 그래서 각각의 문제에 관해 경제학자는 똑같이 반증 가능한 긍정과 부정 사이에 끊임없이 처하게 된다. 결국 현대 철학에서 성별聖別된 말을 사용하자면, 이율배반l'antinomie이 정치경제학의 본질적 특성, 즉 그것의 사형 선고이자 그것의 정당화론이다.
안티노미antinomie, 문자적으로는 반법反法인 이것은 원리상의 대립 혹은 관계에서의 적대를 말한다. 이는 모순 혹은 자가당착antilogie이 대화에서의 대립이나 상반성을 가리키는 것과 같다. 나는 이런 스콜라적 세부 사항, 아직도 대부분의 경제학자에게는 별로 익숙하지 않은 이것에 들어가는 데 대해 용서를 구한다. 이율배반은 하나는 긍정적이고 하나는 부정적인 두 얼굴을 한 법칙의 개념이다. 예를 들어 인력引力이라고 불리는 법칙이 그런 것이다. 이는 태양의 둘레를 행성들이 돌게 하며, 기하학자들은 이를 구심력과 원심력으로 분해했다. 또 물질의 무한 가분성 문제도 그러한데, 칸트는 이것이 동등하게 그럴듯하고 반증 불가능한 논리에 의해 부정이 되었다가 또 긍정이 될 수 있다는 것을 증명했다.
이율배반은 사실을 표현할 뿐이며, 정신에 거역할 수 없는 권위로 과해진다. 고유한 의미에서 모순은 터무니없는 것이다. 이율배반contra-lex과 모순contra-dictio 간의 이 구분은, 어떤 의미에서 관념과 사실의 일정한 질서에서 모순의 논리가 수학에서와 같은 가치를 더 이상 가지지 않는다고 말할 수 있었는지를 보여준다.
수학에서는 한 명제가 거짓으로 입증되면, 역의 명제가 참이고 그 반대도 성립하는 것이 규칙이다. 이는 수학적 증명의 위대한 수단이기도 하다. 사회경제학에서 이는 더 이상 그와 같지 않다. 이처럼 예를 들어 재산권이 그 결과들에 의해 거짓된 것으로 증명되었다고 해서 그 상반된 공식인 공동 소유communauté가 참이 되는 것은 아니며, 그것은 재산권과 동시에 그리고 같은 명목으로 부정 가능하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아주 우스운 강조를 하면서 사람들이 말했듯이 모든 진리, 모든 관념은 모순에서, 즉 동일 순간 그리고 동일 관점에서 긍정되기도 하고 부정되기도 하는 어떤 것에서 나온다는 것, 모순을 오류의 두드러진 표정으로 삼는 낡은 논리를 아주 멀리 기각할 필요가 있다는 말인가? 이 잠담은 신앙도 선의도 없이 자신들의 무례한 무익성을 유지하기 위해 회의주의를 영구화하려고 일하는 궤변론자들에게 걸맞다. 이율배반은 오인되자마자 곧 틀림없는 모순을 가져오므로, 사람들이 특히 각 사물을 그 효과에 따라 지칭하기를 좋아하는 프랑스어에서는 이를 서로 혼동했다. 그러나 모순도, 분석이 모든 단순 관념의 근저에서 발견하는 이율배반도 참의 원리는 아니다. 모순은 언제나 무효와 동의어이다. 때로는 같은 이름으로 불리는 이율배반은 실제로 진리의 선구자이다. 말하자면 진리에 재료를 공급한다. 그러나 이율배반이 진리는 아니며, 그 자체로 본다면 무질서의 동인動因이고, 거짓말과 악의 고유한 형태이다.
이율배반은 두 항으로 구성되는데, 그 두 항은 서로에게 필요하지만 언제나 상반되고, 서로를 파괴하는 경향을 띤다. 이 두 항 중 앞의 것은 정명제thèse, 입장이라는 이름을 얻었고, 뒤의 것은 반명제anti-thèse, 반대 입장이라는 이름을 얻었다는 것을 감히 덧붙일 생각이 거의 없지만 이 발걸음을 내디딜 필요가 있다. 이 메커니즘은 지금은 아주 잘 알려져서 초등학교 과정에서도 곧 모습을 드러내게 되리라 희망한다. 우리는 곧 이 두 영零의 조합에서 어떻게 하나가, 혹은 이율배반을 사라지게 하는 관념이 솟아나는지를 보게 될 것이다.
이처럼 가치에서는 교환될 수 없는 것은 유용하지 않고, 유용하지 않다면 교환 가능한 것은 없다. 사용가치와 교환가치는 불가분이다. 그러나 산업의 진보에 의해 수요가 달라지고 무한히 증식되며, 제조는 결과적으로 물건의 자연적 효용을 높이고 결국 일체의 유용한 가치를 교환가치로 전환하는 경향이 있는 반면, 다른 한편으로 생산은 그 수단들의 위력을 끊임없이 증대하고 언제나 그 비용을 낮추어 물건의 매매가치를 그 원초적 효용으로 되돌리는 경향이 있다. 그래서 사용가치와 교환가치는 끊임없는 투쟁 중에 있다.
이 투쟁의 효과들은 알려져 있다. 무역 전쟁, 판로 전쟁, 충색, 침체, 금수禁輸, 경쟁의 학살극, 독점, 임금의 삭감, 최대의 법칙, 운명의 극심한 불평등, 빈곤이 가치의 이율배반에서 유래한다. 여기서 그에 대한 증명을 하는 것을 면해 달라. 이는 다음 장들에서 자연스럽게 다시 나올 것이다.
사회주의자들은 이 이율배반의 끝을 아주 옳게 요구하면서도 그 원천을 오인하고 거기서 공적 권위의 명령에 의해서 복구할 수 있었던 상식의 착각만을 보는 잘못을 범했다. 이로부터 한심한 감상感傷의 폭발이 나온다. 이는 사회주의를 실증적 정신에게 아주 재미없는 것으로 만들었고 극히 황당한 환상을 전파해 매일같이 수많은 바보들을 만들어낸다. 내가 사회주의를 비난하는 점은 그것이 이유도 없이 생겨났다는 것이 아니라 아주 오랫동안 그리고 아주 완고하게 어리석은 채로 남아 있다는 것이다.
2. 그러나 경제학자들은 선험적으로, 그리고 그것도 모순적 자료, 혹은 더 제대로 말해서 이율배반적 자료에 힘입어 가치로부터 일체의 개혁 관념과 개혁 희망을 배척하는, 그에 못지않게 심각한 잘못을 했다. 사회가 그 가장 높은 적대의 시기에 도달했다는 바로 그것에 의해 화해와 조화가 임박했다는 것을 결코 이해하려고 하지도 않으면서 말이다. 그런데 이는 그 전문가들이 현대 형이상학이 밝혀준 내용들을 더 많이 고려했더라면 정치경제학의 주의 깊은 고찰이 이들에게 손가락으로 만지게 해주었을 것이다. 실제로 인간 이성이 아는 더 실증적인 모든 것에 의해 이율배반이 발현하는 곳에는 항들의 해소 전망이, 따라서 변혁의 알림이 있다는 것이 증명된다. 그런데 장 바티스트 세가 해설한 바와 같은 가치 관념은 정확히 이 경우에 들어온다. 그러나 경제학자들은 대부분 그리고 의식할 수 없는 숙명에 의해 철학적 움직임에 낯선 채로 있어 가치의 본질적으로 모순적인, 혹은 그들이 말하듯 가변적인 특성이 동시에 그 구성성의, 말하자면 그 상당히 조화롭고 확정 가능한 본성의 공인된 표징이라고 생각하기를 삼갔다. 다양한 경제학파에 어떠한 불명예가 돌아가든지 그 학파들이 사회주의에 했던 반대는 오직 그들 자신의 원리들에 대한 이 잘못된 개념에서 유래한다는 것이 확실하다. 천 가지 것들 중 하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