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에르 조제프 프루동

경제적 모순들의 체계 혹은 빈곤의 철학 제2권

1846년

    제9장 제6기무역 균형

      . 자유무역의 필요성

      . 보호의 필요성

      . 무역수지 균형 이론

    제10장 제7기신용

      . 신용 관념의 원천과 계통이 관념에 관한 모순적 편견들

      . 신용 기관들의 발달

      . 신용의 거짓말과 모순. 그 파괴적 효과, 그것이 가지는 빈곤화 능력

    제11장 제8기소유권

      . 소유권은 경제적 계열 바깥에서는 해명이 불가능하다. 상식의 조직에 관해, 혹은 확실성의 문제

      . 소유권 확립의 원인들

      . 소유권은 어떻게 타락하는가

      . 소유권에 의한 신 가설 증명

    제12장 제9기공동체

    나의 벗 공산주의자 빌가르델에게

      . 공동체는 정치경제학에서 생긴다

      . 고유한 것과 공통인 것의 정의

      . 공산주의 문제의 입장

      . 공동체는 그 목적을 시작으로 간주한다

      . 공산주의는 공동체의 형상이고 원형인 가족과 양립 불가능하다

      . 공동체는 분배의 법 없이 불가능하며, 분배에 의해 멸망한다

      . 공동체는 조직의 법칙 없이 불가능하며, 조직에 의해 멸망한다

      . 공동체는 정의 없이는 불가능하며, 정의에 의해 멸망한다

      . 절충적이고, 똑똑하지 않고 분간이 안 되는 공동체

      . 공동체는 빈곤의 종교다

    제13장 제10기인구

      . 생식과 노동에 의한 사회의 파괴

      . 빈곤은 정치경제학의 소행이다

      . 인구 균형의 원리

    제14장 요약과 결론

제9장 제6기무역 균형

. 자유무역의 필요성

자신의 규제 조치들의 효과성에 속고 자신의 내부에서 프롤레타리아트에 대한 보상을 찾기에 절망한 사회는 외부에서 프롤레타리아트에 대한 보장책들을 찾기에 나선다. 이런 것이 사회적 진화에서 대외무역의 국면을 가져오는 변증법적 운동으로서, 이 국면은 곧바로 절대적 자유와 금지라는 모순되는 두 이론으로 정식화되며, 무역균형이라고 불리는 유명한 공식으로 해소된다. 우리는 이 관점들 각각을 차례로 살펴볼 것이다.

대외무역이 판로를, 따라서 노동을 증대하고, 따라서 또한 임금을 증대해 인민에게 아주 헛되이, 아주 불행하게 자신을 위해 구상된 조세의 보충 수단을 제공해주어야 한다는 생각보다 더 합당한 것은 좀처럼 없다. 노동이 독점으로부터 세금으로, 그리고 권리 청구의 명목으로 획득할 수 없었던 것을 다른 데서 무역으로 끌어낼 것이다. 그리고 인민에게서 인민으로 조직된 생산물의 교환은 빈곤을 완화해줄 것이다.

그러나 독점은 자신이 감당해야 하지만 실제로는 감당하지 않는 부담에 대해 보상을 받아야 한다는 듯이 노동 자체의 이름과 이익으로 교역의 자유에 반대하고, 민족 시장의 특권을 주장한다. 그러므로 사회는 한편으로 조세, 공안 기구, 그리고 무역 자유로써 독점을 길들이려는 경향을 띤다. 다른 한편으로 독점은 사회적 경향에 반발하고, 거의 언제나 납부액의 비례성, 임금의 자유 토론, 관세로써 이를 무효화하는 데 도달한다.

모든 경제 문제 중에 보호 원칙의 문제보다 더 열띤 논쟁이 벌어진 것은 없었다. 어떤 것도 언제나 배타적인 경제학파의 정신을 더 두드러지게 하지 않는다. 이 학파는 이 점에 관해 자신의 보수적 습성을 벗고 갑자기 표변해 무역 균형에 결연히 반대 선언을 했던 것이다. 다른 데서는 어디서나 경제학자들이 모든 독점과 재산권의 잠들지 않는 수호자들로서 수세를 취해 신출내기들의 주장을 유토피아적인 것으로 멀리하는 데 급급한 반면, 금지 문제에서는 그들 자신이 공격을 시작했다. 그들은 마치 독점이 자신들에게 처음 나타난 듯이 독점에 고함을 쳤다. 그리고 그들은 전통, 지방 이익, 보수적 원칙들, 주권자의 정책, 모두 말해서 상식에 정면 공격을 했다. 그들의 파문과 그들이 했다는 증명에도 불구하고 금지 체제는 오늘날 영불英佛 친선의 선동은 아랑곳없이 콜베르와 필리프 2세의 미움 받는 시대에 그랬던 것만큼 활기차다. 이런 점에서 한 세기 전 사람들이 경제학파라고 명명했던 것 같은 종파의 웅변이 하는 말마다 내세우는 것의 반대를 증명하며, 공산주의자들의 선전과 같은 불신으로 받아들여진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러므로 나는 이 저서에서 채택한 진행 방식에 맞게 우선은 금지 체제의 당파들에 반대해 무역 자유가 필연일 뿐 아니라 경제적 필연에 속한다는 것을 증명해야 하고, 둘째로는 반反 보호주의 경제학자들에 반대해 그들이 독점의 파괴로 간주하는 바로 이 자유가 오히려 모든 독점들의 수립에 주어진 마지막 손길이고, 중상주의적 봉건성의 공고화이며, 모든 빈곤과 같이 모든 폭정들의 연대성이라는 점을 증명해야 한다. 나는 이 이율배반에 대한 이론적 해법, 모든 세기에서 알려진 무역수지 균형이라는 이름의 해법으로 끝을 맺을 것이다.

무역의 절대적 자유를 편들어 내세우는 논리들은 알려져 있다. 나는 그것들을 그 모든 논조에서 받아들인다. 그러므로 그것들을 몇 쪽에 걸쳐 환기하는 것으로 충분할 것이다. 경제학자들 스스로 말하게 하자.

“세관들이 알려져 있지 않다고 가정해보라. 어떤 일이 일어났을까?”

“우선, 피비린내 나는 무한한 전쟁이 적어질 것이다. 사기와 밀수의 위법 행위가 존재하지 않을 것이고 이들을 처벌하기 위해 만든 형법들도 없을 것이다. 상공업 대결 상대로서의 이해관계에서 나오는 민족적 대결 관계는 미지의 일일 것이다. 정치적 국경선만 있을 것이다. 생산물들은 영토에서 영토로 질곡 없이 유통하며, 생산자들의 최대 이익을 가져다줄 것이다. 교역은 광범위하게 정착되었을 것이다. 충색, 궁핍은 예외적 사실들일 것이다. 판로는 가장 넓은 의미에서 존재하고, 각 생산자는 전 세계를 시장으로 삼을 것이다. …”

나는 여기서 환상으로 전락한 이 묘사를 축약한다. 그 저자 픽스 씨는 다른 점에서 보면 그 환상에 속지 않았다. 인류의 행복은 세관원들같이 별것 아닌 것에 집착하지 않았다. 그리고 세관이 결코 존재하지 않았다면, 노동 분업, 기계, 경쟁, 독점, 그리고 공안 기구만으로 어디서나 억압과 절망을 창조하기에 충분했을 것이다.

이어지는 말은 어떠한 비난을 받을 내용도 아니다.

“이 시기에 각 정부의 한 시민이 다음과 같은 말을 들어 왔다고 가정하자.”

“나는 내 동포들의 번영을 앞당기고 증진할 수단을 찾았다. 그리고 나는 내 구상의 결과들의 탁월성을 확신하므로 내 정부는 이를 즉각 아주 엄격하게 적용할 것이다. 장래에 당신들은 우리 제품들 중 어느 것들은 더 이상 가지지 않을 것이고, 우리도 당신들의 제품 중에 어떤 것들 이상은 가지지 않을 것이다. 우리 국경선은 상품들에 전쟁을 벌일 군대, 어떤 상품들은 완전히 배척하고 다른 상품들은 무서운 액수를 받고 받아들일, 감히 들어오고 나갈 모든 것에 지불을 시키고, 행렬, 수송 차량, 짐 꾸러미, 상자, 그리고 작은 갑까지 찾아가고, 상인을 몇 날 몇 시간 동안 국경선에서 멈추어 있게 하며, 웃옷과 살가죽 사이에 들어와서도 나가서도 안 되는 무언가를 찾아내기 위해 때로는 그의 옷을 벗길 군대로 둘러싸일 것이다.”

“장총과 칼로 무장한 이 군대에는 앞의 것보다 더 무서운, 펜으로 무장한 다른 군대가 짝을 이룬다. 그 군대는 항시 규제를 하거나 규제를 시킬 것이다. 온갖 명령, 통지문, 안내문으로 상인을 계속 골탕 먹일 것이다. 파수를 서면서도 그 상인은 자기 상품을 몰수와 벌금에서 구할 수 있다고 항상 확신하지는 못할 것이다. 그리고 두 군대 중 어느 쪽과 분쟁을 하지 않으려면 개별 적용이 그에게 필요할 것이다. 그리고 이 모두를 당신은 지구 반대편에서처럼 당신의 나라에서도 발견할 것이다. 그리고 당신은 멀리 갈수록 장애물과 위험을 많이 만날 것이다. 그러나 이런 조합을 통해 당신은 당신의 동포들에게 판매하는 데 확신을 품으며, 이들에게는 외부에서 구매하는 것이 금지된다. 당신은 경쟁을 하지 않으려고 작은 독점, 엄청난 시장을 포기하는 거래를 할 것이며, 국내 소비의 주인이 될 것이다. 소비자에 대해 말하자면, 관심을 기울여 보면 된다. 그는 더 비싸게 지불할 것이고, 향유는 더 적게 할 것이다. 이는 그가 공적인 것, 즉 정부가 새롭고 효과적인 방식으로 보호하려고 하는 공업과 상업에 행하는 희생이다.”

나는 모든 지성들을 만족시키기 위해서 이 부정적인, 그리고 아마 너무 시적인 논지를 아주 길게 보고했다. 공중 앞에서 자유는 노예 상태의 빈곤의 그림보다 자신을 더 잘 방어하지 못한다. 그럼에도 이 논지 자체는 아무것도 증명하지 못하고, 아무것도 설명하지 못한다. 자유무역의 필요성을 이론적으로 증명하는 일만 남는다.

무역 자유는 각각의 사회를 그 민족적 단위에서 그리고 인류 전체의 일부를 이루는 것으로 고려하든, 그 안에서 자유로운 개인들의 군집, 자신들의 인신에 대해서처럼 재화에 대해서도 주인인 자들의 군집만을 보든, 경제 발전에, 그리고 인류의 행복 창조에 필요하다.

그리고 우선 여러 민족들은 서로에 대해 거대한 개체들과 같아서 이들 사이에서 지구의 활용이 나누어졌다. 이 진실은 세상만큼이나 오래된 것이다. 땅을 아들들에게 나누어 준 노아의 전설은 다른 의미를 가지는 것이 아니다. 땅이 수만 구획으로 나누어져서 그 각각에서 밖으로 나가지도 않고 이웃과 소통하지도 않으면서 하나의 작은 사회가 살아가는 것이 가능했는가? 그러한 가설의 절대 불가능성을 확신하려면 부자만이 아니라 소박한 장인의 소비에 쓰이는 물건들의 다양성에 주목하고 이 다양성이 고립에서 얻어질 수 있었는지를 자문해 보기만 하면 된다. 근본으로 곧장 가보자. 인류는 진보적이다. 이야말로 인류의 독특한 모습이고, 인류의 본질적 특성이다. 그러므로 독방 체제는 인류에게 적용 불가능했으며, 국제무역은 우리의 완성 가능성의 제1조건이며 필요 불가결 조건이었다.

그러므로 단순 노동자처럼, 각 민족은 교환을 필요로 한다. 인류가 부, 지성, 그리고 존엄에서 상승하는 것은 바로 교환에 의해서일 뿐이다. 우리가 동일한 사회의 여러 구성원 간의 가치의 형성에 대해 말한 모든 것이 마찬가지로 사회들 서로 간에 대해서도 참이다. 그리고 각 정체政體가 그 품 안에서 발달하는 이율배반들의 점진적 해결을 통해 그 정상적 형성에 도달하는 것처럼, 인류가 자신의 단일한 형성을 향해 행진하는 것 또한 민족들 간의 유사한 방정식을 통해서다. 그러므로 민족과 민족 간의 무역은 어느 사회도 인류에서 파문당하지 않도록, 집단적인 모든 활동들과 전문성들의 톱니바퀴를 도와주고, 모든 종족이 하나의 가족 이상을 이루지 않고 지구가 하나의 작업장 이상을 이루지 않는, 경제학자들이 예견한 시대를 가속화하도록 가능한 한 자유로워야 한다.

자유무역의 필요성에 대한 그에 못지않게 결론적인 증명은 개인적 자유에서, 그리고 사회가 독점체들로 구성되는 사회의 체제에서 도출된다. 우리가 제1권의 강의[1]에서 보여준 것처럼 이 체제 자체는 우리의 본성과 우리 노동자들의 조건의 필연이다.

개인 전유와 시민적 평등의 원리에 따르면, 법은 생산자와 생산자의 어떠한 연대도 인정하지 않고 기업가의 임금 노동자에 대한 연대도 인정하지 않아서, 어떠한 사업가도 자신의 개별 독점의 이익에서 다른 독점체들의 종속이나 제약을 주장할 권리가 없다. 그 결과는 사회 각 구성원이 자신의 뜻대로 자기 소비에 필요한 물건들을 공급받고 자신의 산물을 그가 발견하는 구매자에게, 그런 값에 판매할 무제한의 권리를 가진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모든 시민은 자기 정부에 이렇게 말할 근거를 지닌다. 소금, 철, 담배, 육류, 설탕을 내가 당신에게 제안하는 값에 내게 양도하든지, 내가 조달하는 것을 그냥 놔두라. 내가 왜 당신이 그것들에 납부하도록 강제하는 웃돈으로써 나를 파멸시킬 산업들, 내게서 도둑질하는 사업가들을 지탱해주지 않으면 안 되는가? 각자는 자신의 독점 안에, 각자는 자신의 독점을 위해, 그리고 무역 자유는 모든 사람을 위해!

그러므로 민주적 체제에서는 영주권과 왕권에 원천을 두는 제도인 세관은 역겹고 모순적이다. 자유, 평등, 재산권이 단어들이고 헌장은 쓸모없는 종잇장이든지, 아니면 세관이 인권과 시민권의 영원한 유린이다. 또한 영국의 선동의 소음에서 프랑스의 민주적 신문들은 일반적으로 폐지론적 원칙의 입장을 취했다. 자유! 이 이름으로 민주주의는 흔들리는 붉은 깃발 앞에 선 황소처럼 격분한다.

그러나 무역 자유의 전형적인 경제적 이성은 집단적 부의 증가, 그리고 각 개인을 위한 행복의 증대로부터 민족과 민족 간의 교역이라는 사실에서만 도출되는 이성이다.

집단적 노동자가 자신의 생산물을 교역하는 것이 이득이 된다는 것을 사회가 의문시할 수는 없다. 이 교역을 통해 소비는 더 다양해져서 결과적으로 더 낫기 때문이다. 다른 한편, 노동의 헌법과 정치적 협정에 따를 때 독립적이고 비연대적인 시민들이 모두 개인적으로 외국 산업의 공급물에서 이득을 볼 권리를 지니며, 거기서 그것들 각각의 독점에 대비한 보장책을 구할 권리가 있다는 것은 더구나 논란의 여지가 없다. 그러나 그때까지 사람들은 가치들의 ‘교환’밖에 감지하지 못하며, ‘증대’가 있다는 것을 알지 못한다. 이를 발견하려면, 다른 측면에서 사물을 바라볼 필요가 있다.

교환을 이렇게 정의할 수 있다. 산물들의 생산에 분업의 법칙을 적용하는 것. 노동 분업이 가치물들의 생산과 배증의 거대 영역인 것처럼, 교환에 의한 소비의 분화는 바로 이 가치물들의 가장 정력적인 흡수 수단이다. 한마디로, 산물들의 다양성에 따라, 그리고 교환에 따라 소비를 나누는 것은 소비할 역량을 증대하는 것이다. 노동을 그 파편적 작업들로 나누면서 그 생산적 역량을 증대하는 것과 마찬가지다. 서로 모르는 두 사회, 매년 각각 2억 프랑의 가치물을 소비하는 두 사회를 가정하자. 우리가 가정하는 이 두 사회가 산물들처럼 서로 다르고, 자신들의 부를 교환하게 되면, 일정 시간이 지난 후에 소비의 총액은, 인구가 변함이 없을 때 더 이상 2억 프랑이 아니고 2억5000만 프랑일 것이다. 한마디로, 두 나라의 주민들은 일단 관계를 맺고 나서는 자신들의 산물의 대체에 지나지 않을 단순한 교환에 한정되지 않을 것이다. 다양성이 이쪽과 저쪽에 토산물을 포기하는 일 없이 외국 산물을 향유하게 초대할 것이다. 이는 이쪽과 저쪽에 동시에 노동과 행복을 증대해줄 것이다.

이와 같이 민족들의 조화와 진보에 필요하고 독점의 성실성과 정치적 권리들의 통합성에 필요한 무역 자유는 또한 개인들과 국가에는 부와 행복 증대의 원인이다. 이 일반적 고려는 자유무역을 편들어 언급하는 것이 가능한 모든 긍정적 이유들, 내가 일찍이 받아들이며, 이에 대해 그 장점을 강변하는 것이 쓸데없다고 보며, 게다가 내가 아는 아무도 그 명백성에 대해 논란하지 않는 이유들을 담고 있다.

요컨대, 국제무역 이론은 개인들 간 경쟁 이론의 연장일 뿐이다. 경쟁이 산물들의 저렴한 가격만이 아니라 저렴한 가격에서 진보의 자연스러운 보장책인 것처럼, 노동의 증대, 그리고 노동이 창출하는 행복의 증대와는 독립적으로 국제무역은 각 민족의 그 자신의 독점들에 대항한 자연스러운 보장책이다. 이는 능숙한 정부의 손에서 모든 규제 법률과 상한보다 더 강력한 고등 산업 공안의 수단이 될 수 있는 보장책이다.

무수한 사실들, 기괴하거나 우스운 도발들이 다음으로 이 이론을 정당화해준다. 보호책이 독점에 소비자를 무방비 상태로 넘겨줌에 따라, 극히 이상한 무질서, 극히 맹렬한 위기들이 사회를 뒤흔들고, 노동과 자본을 위험에 처하게 하는 것을 보게 된다.

“석탄, 철, 양모, 짐승들의 인위적 고가격은 어떤 이들의 이익을 위해 공동체 사회에 징수하는 조세일 뿐이다. 어떤 노력을 하든, 문제는 언제나 약속은 항상 하지만 이런 방식으로는 될 수가 없으므로 결코 있을 수 없는 개선 조치들을 염두에 둘 때 민족이 그런 부담들을 언제까지 스스로에게 부과할 것인가 하는 점이다”하고 블랑키 씨는 말한다.

“금수禁輸 체제는 나머지 유럽에서처럼 영국의 방식에 따라 조직된 우리의 어떤 산업들에 자본의 이익을 위해 인위적이고 위험한 추진력을 거의 배타적으로 가하는 경향을 띨 뿐이다. 그것은 생산을 과장하며, 동시에 언제나 보복이 따르는 외제 수입에 부과하는 질곡을 위해 소비를 제약한다. 그것은 대외 경쟁의 도전을 국내 경쟁의 광포한 투쟁으로 대체한다. 민족들 간 노동 분업의 행복한 효과를 파괴한다. 그들 간의 오랜 적대성을 유지한다. … 노동과 자본을 너무 자주 갈라놓는 깊은 분열을 조장하고, 일꾼들을 갑작스럽게 격하시켜 극빈층을 낳는다.”(「주르날 데 제코노미스트」, 1842년 2월)

블랑키 씨가 지적한 보호 체제의 이 모든 효과는 진실이고, 무역 자유에 가해지는 질곡에 불리한 이야기가 된다. 유감스럽게도 우리는 곧 그 효과들이 자유 자체로부터 그에 못지않은 강도로 생겨나는 것을 보게 될 것이다. 그래서 악을 치료하기 위해 블랑키 씨와 함께 병원病源을 절대적으로 퇴치해야 한다는 결론을 내려야 한다면, 국가, 재산권, 산업, 정치경제학에 한꺼번에 반대하는 결론을 내릴 필요가 있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아직까지 이율배반에 도달하지 않았다. 인용문을 계속 따라가 보자.

“특권, 독점, 보호는 불행한 일꾼에게는 예외가 되지만, 잇따라 겹쳐져서 모든 노동의 목표인 생산물의 분배에서 기괴한 현상을 불러왔다. 어디에서도 자유는 작용 역량에 관한 바람직한 수준을 지나친 적이 없다. 질곡들은 사기를 낳았다. 도둑질, 거짓말, 폭력은 그 일의 보조 수단들이다. 탐욕은 오늘날 부끄러움도 없이 모두의 희생으로 축적할 수단을 권리로 주장한다. 투쟁은 어디에나 있고, 조화는 어디에도 없다.”

“그러나 우리 자신이 달려가는 곳은 그렇게 재앙적인 결과다. 인민이 아직 아무것도 아닌 나라에서는 사람들은 착취의 이런 확고부동함을 이해하지 못한다. 그러나 인민이 전부가 되는 나라에서 왜 인민의 목소리가 들리지 않는 채로 있는가? 경제적 토론에서 인민의 이름이 왜 결코 발설되지 않는가? 이성이 세상을 다스려야 한다고 사람들이 외친다. 그러므로 프랑스 민족이 오늘날 거의 완전히 채식 식단을 대할 처지로 전락한 것은 이성의 이름으로 된 것인가? 프랑스 민족이 지성의 기적들 중에서 입을 옷도, 웃옷도, 신발도 교환 수단도 없는 채로 있는 것, 감자가 이미 이들의 위생에서 밀을 대체하는 것, 끝으로 노동이 오늘날 영국에서처럼 소비에 대한 생산의 초과분을 점점 덜 남기는 것은 이성의 이름으로 된 것인가? 임금에 비한 산물의 가격을 결코 걱정하지 않으면서 때로는 이 사람들에게, 때로는 저 사람들에게 먹잇감처럼 시장을 넘겨주는 것은 이성인가!”

“18년 전부터 프랑스 민족은 육류를 먹지 못하고 있다. 매일 각 개인에게 해당하는 몫은 급감한다. 그리고 권리 청구를 할 때마다 55프랑의 가격이 생산자에게 필요하다고 우리에게 차갑게 말한다! 필요하다고! 먹을 것을 못 먹는 것이 어떤 이들의 재산에 필요하다고!”[뒤사르(H. Dussard), 「주르날 데 제코노미스트」, 1842년 4월]

확실히 그 그림은 윤색된 것은 아니다. 그리고 경제학자들이 자신들의 유토피아에 대한 관심에 몰두해 있을 때 이들에게 진실을 말하게, 사회적 빈곤에 관해 온전한 진실을 말하게 하려는 것이다. 그러나 그토록 비난받는 보호의 원칙이 정치경제학의 구성 원칙으로서 길 위의 어디서나 마주치는 독점 말고 다른 것이 아니라면, 이 원칙이 재산권 자체, 이 독점의 종교인 재산권이라면, 나는 경제학자들의 위선에 대해서는 아니어도 이들의 비일관성에 대해 분노할 권리가 없는가? 독점이 그토록 역겨운 것이라면 왜 그 발판을 공격하지 않는가? 왜 한 손으로는 향을 바치고, 다른 손으로는 그것에 칼을 빼어 드는가? 왜 이런 꼼수를 쓰는가? 토지든, 산업 자본이든, 제조 공정이든 모든 배타적 활용, 모든 전유는 독점을 이룬다. 이 독점은 왜 그것의 경쟁 상대인 해외 독점이 자신에게 경쟁을 걸어오기 위해 등장하는 날부터만 역겨운 것이 되는가? 왜 토착민이 외국인에게 행사하는 독점보다 동포가 동포에게 행사하는 독점이 덜 존경스러운가? 프랑스에서 정부는 왜 루아르의 석탄 담합을 감히 직접 공격하지 않으면서, 자국민에 맞서 신성동맹의 무장을 촉구하는가? 내부의 적에 맞서 왜 외부의 적의 이런 개입이 있는가? 영국 전체는 오늘날 교역의 자유를 위해 일어섰다. 이 나라의 산업 독점자들이 토지 독점자들에 반대해 러시아인, 이집트인, 미국인들에게 행한 호소를 말할 것이다. 공격하는 것이 정말로 독점이라면, 왜 이런 반역이 필요한가? 영국의 수백만 명의 맨손은 수천 명 귀족에 맞서기에 충분하지 않은가?

자유무역 연맹Ligue의 가장 영향력 있는 구성원 중 한 분인 시니어(Senior)[2] 씨는 이렇게 외쳤다. “일꾼들에게 전적으로 진실성을 지닌 말로서 정부가 제조업과 상업에 제공할 방향에서 선제 조치를 취했으며, 이런 괴상한 횡령을 어떤 사람들의 (실질적 혹은 가상적) 이익을 위해 활용했다고 말할 때, 양허한 모든 독점 중에 가장 악착같이 수호하는 독점이 생존수단의 독점이라는 것을 그들이 발견할 때, 자신들에게 가장 뻔뻔한 박탈을 가하고, 지배하는 계급에게 가장 크고 가장 직접적인 이익을 주는 것이 바로 그 독점임을 그들이 알 때, 우리는 그들이 이 해악을 섭리에 따른 재난으로 견딜 것인지 아니면 불의의 슬픈 결과로 바라볼 것인지를 정부에 묻는다. 이성이 그들을 후자의 판단으로 유도한다면, 그들의 분노는 어떤 형태를 취할 것인가? 그들은 복종할 것인가, 아니면 자신들의 역량 속에서 이 오랜 침해의 재분배를 추구할 것인가? 그리고 그들의 힘은 무서운 것이 되기에 충분히 큰가?”

“이 모든 질문에 대답하기는 쉽다. 영국 인구는 도시들에 모여 살고 정치 토론에 익숙해진 수백만 개인으로 이루어진다. 그들은 우두머리를 두고 있고, 고유한 언론을 가진다. 그들은 조합이라고 칭하는 단체들로 조직되어 그 각각이 공직자, 집행권, 심의권을 가진다. 그들은 각 사회의 필요를 위한 기금, 그리고 결합된 모든 사회들의 일반적 필요를 위한 기금을 가진다. 그들은 오랜 관습 덕에 담합을 금지하는 법들을 피하고, 국가의 권위에 맞서 싸우고 도전하는 데 익숙하다. 그러한 인구는 번영 시에도 무섭다. 불행 시에는 심지어 그 불행을 정부 탓으로 돌릴 수 없을 때에도 천배는 더 무서울 것이다. 그러나 이 빈곤을 입법의 탓으로 돌릴 수 있다면, 노동자들이 실수 때문이 아니라 도둑질과 압제 때문에 지배 계급을 고발할 수 있다면, 그들이 지주의 지대에, 농장주의 이득, 혹은 캐나다 삼림업자의 이득에 자신들이 희생되는 것을 본다면 그들의 분노의 효과에는 어떤 한계가 지정될 수 있는가? 우리의 부, 우리의 정치적 보장 혹은 우리의 헌법마저 그러한 갈등에서 벗어날 것이라고 우리는 확신하는가?”

이 장광설에서 폐지론자들 위로 곧장 다시 떨어지지 않는 것은 한마디도 없다.

누가 일꾼들에게 세관을 폐지함으로써 그들을 구원하기를 원하는 것처럼 둘러대는 독점이 이 폐지로부터 새로운 기운을 받아야 했다고 말할 때, 사람들이 실토하려고 하는 것과는 아주 다르게 뿌리 깊은 독점이 시장의 배타적 제공만이 아니라 특히 토양과 기계류의 배타적 활동에, 자본의 확산되는 전유專有에, 산물의 매점買占에, 교역의 자의성에도 있다고 말할 때, 그들이 이차 취득 거래의 투기에 희생되었고, 손발이 묶여 자본의 지대에 넘겨졌으며 그로부터 파편적 노동의 파괴적 효과, 기계류의 압박, 경쟁의 재앙적인 요동, 그리고 조세의 이 사악한 조롱이 생겨나는 것을 그들에게 보여줄 때, 그 다음으로 보호관세의 폐지가 어떻게 특권의 망을 확장하고, 박탈을 배가하고, 프롤레타리아트에 맞서 모든 나라의 독점들을 결탁시키기만 했는지를 그들에게 보여줄 때, 선거로 선출된, 그리고 왕조의 부르주아지가 자유를 구실로 이 거짓과 약탈의 체제를 유지하고 공고히 하고 준비하는 데에 극히 큰 노력을 했다고, 이 체제를 지키기 위해 교수 자리가 만들어지고, 보수가 제안되고 지급되고, 궤변론자들이 고용되고, 신문들이 매수되고, 정의가 부패하고, 종교가 동원된다고, 계획도 위선도 폭력도 자본의 폭정에 빠짐이 없었다고 그들에게 이야기할 때, 결국 그들이 분노에 휩싸이지 않을 것이라고, 일단 복수의 주인들이 되고서 그들이 사면을 하면서 안식할 것이라고 생각하는가?

시니어 씨는 덧붙였다. “우리는 이렇게 경보를 발하는 것을 유감으로 여긴다. 우리는 그럴 필요성에 탄식하고, 우리가 하는 역할은 결코 우리의 마음에 맞지 않는다. 그러나 우리는 우리가 가정한 위험들이 우리를 위협한다고 굳게 믿으며, 우리의 의무는 공중에서 우리 신념의 기초를 알리는 것이다.”

그리고 나 역시 경보를 울리는 것을 유감으로 여긴다. 그리고 내가 행하는 고발자의 이 직무는 내 성정에 맞는 가장 끄트머리의 것이다. 그러나 진실이 말해지고, 정의가 행해질 필요가 있다. 그리고 부르주아지가 자신을 위협하는 모든 악들을 당할 만했다고 내가 믿는다면, 내 의무는 부르주아지의 죄책의 증거를 확립하는 것이다.

그리고 정말로, 경제학자들이 독점을 세관원의 복색 복장에서만 보고 거부하는 반면, 내가 그 가장 일반적인 형태로 추적하는 이 독점은 무엇인가? 이는 자본도 재산도 보유하지 않는 사람에게는 노동과 운동의 금지, 공기와 빛과 생존 수단의 금지다. 이는 절대적 박탈, 영구적 죽음이다. 옷도 신발도 셔츠도 빵도 고기도 없는 프랑스다. 포도주도 철도 설탕도 연료도 없는 것이다. 끊임없이 기근으로 낙담하고, 형언할 수 없는 빈곤의 공포에 넘겨진 잉글랜드다. 빈곤해지고, 퇴화되고 야만과 야생으로 돌아간 종족들이다. 그러한 것들이, 무슨 특권이건 그 특권에 의해 얻어맞고 비상을 억압당할 때 자유가 표현되는 무서운 표징들이다. 베르길리우스가 지옥에 둔 대리석 왕좌 위에 결박당한 이 위대한 죄인의 음성을 듣는 듯하다.

불행한 테세우스가 앉아 있으니 영원히 거기 앉아서

큰 목소리로 그림자들을 뚫고 선포하네.

정의를 배우고, 신들을 모욕하지 않기를 배우라.

Sedet, aeternumque sedebit

Infelix Theseus, et magna testatur voce per umbras,

Discite justitiam moniti, et non temnere divos!

오늘날 세상에서 가장 상거래를 많이 하는, 정치경제학이 보호하고, 성별하고, 신앙 고백하는 모든 종류의 독점에 가장 많이 집어삼켜진 민족이 보호에 반대해 온통 그리고 한 사람처럼 들고일어났다. 정부는 온 인민의 갈채를 받으며 관세 폐지를 명했다. 프랑스는 경제적 선전에 넘어가서 영국의 방향을 따르고 유럽 전체를 따르는 쪽으로 이끌리기 일보 직전이다. 이 위대한 혁신의 결과들을 연구하는 것이 할 일이다. 그 기원은 우리가 보기에는 불신을 일으키지 않기에는 결코 충분히 순수하지 못하고, 그 원리는 충분히 심오하지 못하다.

. 보호의 필요성

내가 자유무역 이론에 맞서 아주 새로운 이성들, 내가 홀로 그리고 처음으로 알아챈 사실들밖에 내세울 것이 없다면, 내가 이 이론에서 솟아나게 할 모순은 내 고집의 위안거리일 뿐이며, 역설을 이용해 나를 두드러지게 내세우려는 도가 지나친 질투심일 뿐이라고 생각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이 편견은 내 이야기가 신뢰를 아주 잃게 하기에 충분할 것이다.

하지만 나는 보편적 전통, 극히 항상적이고 극히 진실한 신념을 수호하려는 것이다. 나로서는 경제학자들 자신에 대한 의문, 그들이 보고하는 사실들에 대한 반감을 지닌다. 내가 설명하고, 또 나를 정당화해 주는 것은 이 반감, 이 의문, 이 전통이다.

자유를 이야기하면서 내가 방금 이야기한 픽스 씨는 조심성과 신중함 그리고 절제로 가득 찬 작가이고 세(Say) 학파의 가장 머리가 깬 경제학자들 중 한 사람으로서 그 자신이 다음의 말로 자신의 먼젓번 명제에 반대되는 것을 내놓았다.

“어떠한 차별도 인정하지 않는 진보 경제학자들은 심오한 신념이 일으키는 민첩함과 모든 기력을 다해 진행하기를 원한다. 그들은 세관, 독점 그리고 이것들을 지탱하는 인원을 한 방에 쳐부수기를 원한다. 그러한 개혁의 결과들은 어떤 것일까?”

“외제 직물, 가공된 철과 금속들을 관세 없이 들어오게 하면 소비자들은 적어도 일정 시간 동안은 형편이 좋을 것이며, 어떤 산업들은 거기서 큰 이윤을 보게 될 것이다. 그러나 이런 순간적이고 예기치 못한 변화는 엄청난 재앙을 그 산업에 유발할 것이 확실하다. 엄청난 자본이 비생산적으로 될 것이다. 수십만 일꾼이 갑자기 일자리와 빵이 없는 처지가 될 것이다. 영국과 벨기에는 예를 들어서 프랑스의 소비 절반을 힘 안 들이고 조달할 수 있을 것이다. 이는 그만큼 국내 제조업을 축소시킬 것이지만, 또한 생산을 계속할 입장에 있는 제련소 주인들에게 상당한 피해도 일으킬 것이다. 직물 산업에 대해서도 같은 결과를 보게 될 것이다. 영국, 벨기에, 독일은 자신들의 제품으로 프랑스를 범람시킬 것이다. 그리고 이런 이례적인 수입에 직면한 우리 공장들 대부분은 지체 없이 궤멸할 것이다. 어떤 나라도 그러한 경험을 감히 하지 못했다. 단 하나의 산업 분야에서도 하지 못했다. 아담 스미스의 이론을 추종했고 아직도 극히 열렬히 추종하는 국가 공무원들은 이런 성격의 사업 앞에서 후퇴했다. 그리고 나로서는 그 사업이 위험과 위협으로 가득한 것을 발견한다고 실토한다.”

이 이야기들은 충분히 정력적이고 충분히 명확하지 않은가? 그 저자가 물적인 사실 앞에 멈추지 않고 이론적으로 자기 공포감의 동기를 도출하지 않은 것이 유감스럽다. 그의 비판은 내 비판이 획득하지 못할 권위를 누릴 것이다. 그리고 아마도 무역 균형의 문제는 세의 제자이자 친구인 한 1급 경제학자에 의해 해결되어 여론에 기준을 제공했고, 민족들 간에 진정한 연합의 기초를 마련했다.

그러나 픽스 씨는 경제 이론에 물들고, 그 확실성을 과신해서 그 모순에 대한 예감을 넘어서 가지 못했다. 사람들이 말해 온 경악스러운 프로그램 후에 픽스 씨가 이 이상한 생각으로 끝을 맺을 용기를 지녔다고 누가 믿겠는가. 이는 이론의 탁월성, 그리고 그것의 응용 가능성을 조금도 훼손하지 않는다!

나로서는 이를 다시 말하지 않을 수 없다. 내가 오래 살수록 사람들의 여론을 더 깊이 있게 만들며, 그럴수록 나는 우리가 초자연적인 숨결에 영감을 받은 예언자의 종족으로서 우리를 살리는 신의 넉넉함에 대해 말하는 예언자들이라는 것을 발견한다. 하지만, 아 슬프도다! 우리 안에는 신만 있는 것이 아니다. 짐승도 있어서, 그 광포한 또는 어리석은 암시들이 우리 이성을 끊임없이 흔들고, 우리의 열심을 헤매게 한다. 그러므로 인류의 운명의 신은 내게 신을 가상하도록 강제한다. 또한 가설을 보완하기 위해 사람 안에는 동물의 왕국 전체가 살아 숨 쉰다는 것을 내가 인정할 필요가 있다. 유신론은 그 보조 명제로서 윤회설을 지닌다.

뭐라고! 항상적이고 보편적인 사실에 의해, 인간 기력의 자연발생적 결과로서 일어나지 않을 수 없는 것에 의해 논박되는 이론이 여기 있다. 그리고 우리에게 바로 이 사실들에 대한 철학을 제시하는 것으로 시작해야 했지만, 이 사실들을 이해하지 못하고 물리쳐 버린 이 이론을 사람들은 의심할 바 없다고, 탁월하다고 선언한다. 그 추종자들이 프랑스에, 영국에, 벨기에에, 독일에, 유럽 전체에 그리고 세계의 5개 대륙에 적용될 수 없다고 선언하는 이론이 여기 있다. 엄청난 재앙을 야기하지 않고서, 엄청난 자본을 비생산적으로 만들지 않고서, 수십만 일꾼에게서 빵과 일자리를 빼앗지 않고서, 한 나라의 제조업 절반을 죽이지 않고서는 적용될 수 없다는 것은 적용 가능하지 않다는 말이기 때문이다. 이는 내가 말하건대, 정부의 바람과는 달리 18세기, 17세기, 예전의 모든 세기들에서처럼 19세기에도 적용될 수 없는 이론이고, 내일도, 내일모레도, 이어지는 여러 세기에도 적용될 수 없는 이론이다. 언제나 지구상의 각 지점에서, 민족적, 개인적 활동들의 효과에 의해, 독점들의 형성에 의해, 그리고 다양한 풍토에 의해 이익의 엇갈림과 경쟁 관계가 생겨날 것이며, 따라서 죽거나 노예가 되지 않으려면 결탁과 배제가 생겨날 것이다. 그리고 사람들은 그 학파의 명예를 위해 그에 못지않게 이 이론을 적용할 가능성도 꾸준히 강변한다!

인내하라고 그들은 우리에게 말한다. 교역 자유로부터 야기된 악은 일시적일 것인 반면, 그로부터 나올 선은 영구적이고 헤아릴 수 없으리라는 것이다. 후세를 향한 이 행복의 약속은 아무것도 그 실현을 보장하지 못하고, 실현이 되더라도 의문의 여지없이 다른 재앙들에 의해 상쇄될 것인데, 이 약속이 내게 무슨 의미가 있는가? 예를 들어서 우리가 우리 제조업자에게 100킬로그램 당 359프랑 50상팀을 지불하는 레일을 영국이 우리에게 100킬로그램 당 150프랑에 제공할 것이고, 국가는 이 시세에서 2억 프랑을 벌었으리라는 것, 외국 가축들을 우리 시장에 받아들이기를 거부하는 것은 우리의 육류 소비를 인당 25퍼센트 줄였으며 공중의 건강이 이에 영향을 받는다는 것, 외제 비단의 도입은 바지 한 벌 당 평균 1프랑의 가격 인하를 가져와서 납세자들의 주머니에 3000만 프랑을 남겨 주리라는 것, 설탕에 대한 관세는 실제로 탈세자들에게만 이익을 준다는 것, 주민들이 서로 창문으로 마주보는 두 나라가 만리장성에 의해서보다 서로 더 갈라지는 형편에 처하는 것이 터무니없다는 것을 아는 것이 내게 무슨 의미가 있는가? 내가 말하노니, 금수 정책으로 인한 빈곤의 광경에 마음이 동한 후에 비보호가 유발할 헤아릴 수 없는 해악에 대한 고려 때문에 내 열정이 다시 식게 되는 마당에 이 모든 비난이 내게 무슨 의미가 있는가? 우리가 영국의 철을 취하면, 이로써 2억 프랑을 벌 것이다. 하지만 우리의 공장들은 무너질 것이고, 우리의 제철 산업은 해체되고, 5만 명의 노동자는 일자리도 빵도 없는 처지가 된다! 이익은 어디 있는가? 이 희생을 치른 후에 우리가 영구적으로 낮은 가격에 철을 가지게 되리라는 것이라고들 말한다. 나는 이런 말을 듣는다.

우리의 자손들이 우리 덕에 이 그늘을 얻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좀 더 일하고 죽지 않기를 선호한다. 내 자식들을 위한 배려는, 그들이 조상들 중에 쿠르티우스[3]를 꼽는 즐거움을 가지도록 내가 구렁텅이에 몸을 던지는 데까지 갈 수는 없다. 아아! 내 입장이 변했다면, 내가 내 자유와 생존을 위태롭게 하지 않으면서 이 유익한 제안들을 받아들일 수 있었다면, 적어도 내가 후손들에게 약속된 이득에 확신을 가졌다면, 내가 저항했다고 사람들이 믿겠는가?

시의적절한 질문, 즉 곧 알게 되겠지만 영구적인 질문이 모든 논쟁을 지배하며, 보호의 추종자들과 자유무역의 추종자들을 갈라놓는다. 유토피아를 만드는 자들을 아주 경멸하는 경제학자들은 여기서 유토피아를 만드는 이들처럼 움직인다. 그들은 자신들도 실토하는 불확실하고 즉각―이는 사회에는 ‘영구적으로’를 의미한다―실현이 불가능한 행복의 가능성과의 교환으로 위대한 희생, 엄청난 파괴, 들어보지 못한 빈곤을 요구한다. 그리고 그들은 자신들의 계산을 사람들이 신뢰하지 않는 데 분노한다. 그렇다면 그들은 왜 더 이상 난관을 결연하게 공략하지 않는가? 왜 그들은 (노동 분업, 기계, 경쟁과 조세에 대해 시도했던 것처럼, 그래서 아주 성공적이었던 것처럼) 특정한 독점들의 폐지에서 나올 해악에 대해 상쇄물은 아니라 해도 적어도 진통제를 발견하려고 시도하지 않는가? 자! 여러분, 문제로 들어가라. 왜냐하면 지금까지 당신들은 통보의 물결에 매달렸기 때문이다. 자유무역 이론이 여러 정부와 민족들의 혐오에도 불구하고, 폐단의 보편성과 영구성에도 불구하고 어떻게 적용 가능한지, 즉 이롭고 합리적인지를 보여 달라. 당신들의 의견으로는 이 이론이 당신들이 방금 말한 이 엄청난 재앙을 일으키지 않고, 프롤레타리아트에게 독점의 멍에를 지우지 않고, 자유, 평등, 민족들의 개성을 위태롭게 하지 않고 어디서나 실현되려면 무엇이 필요할 것인가? 민족들 간의 새로운 법은 어떤 것일까? 자본가와 노동자 간에 어떤 관계들을 창조할까? 정부는 노동에 어떤 개입을 할까? 이 모든 연구들은 당신들 소관이다. 이 모든 설명에 대해 당신들은 우리에게 빚을 지는 것이다. 아마도 당신들의 이론의 경향상 당신들 자신이 의심할 나위 없이 사회주의자들의 새로운 종파다. 비난을 결코 두려워하지 말라. 공중은 당신들의 보수적 의도를 너무 확신하며, 사회주의자들에 관해 말하자면, 그들은 당신들에게 이런 시비를 걸기에는 당신들이 자신들의 대열에 있는 것을 보면 너무 행복해한다.

하지만, 내가 무엇을 하는가? 경제학자들만큼의 결백성을 지닌 추론자들을 성나게 하는 것은 별로 너그럽지 못하다. 대부분에게는 생소한 일이겠지만 그들에게 차라리 그들이 모순을 일으킬 때마다 옳다는 것, 그리고 그들의 자유무역 이론이 구체적으로 자유로운 독점의 이론이기 때문에 비로소 장점을 가진다는 것을 보여주자.

무역의 자유가 통신과 교역에 대한 일체의 질곡을 제거해 바로 이에 따라 그 장場을 더 자유롭게 만들고, 자본의 영역을 확장하고, 경쟁을 일반화하고, 각 민족의 빈곤을, 그리고 금융 귀족 집단을 사해동포적인 사안으로 만들어, 그 광범위한 망이 이후로는 연속성의 단절도 해소도 없이 그 연대적 그물 안에 인류 전체를 포괄하게 하는 것이 자명하고 대낮처럼 명확하지 않은가?

왜냐하면, 결국 노동자들이 타키투스가 말하는 게르만인들처럼, 유목 생활을 하는 타타르인, 목자인 아랍인, 그리고 반半 야만 상태의 모든 민족처럼 각자 자기 몫의 땅을 받아서 스스로 자신들의 소비 물품 모두를 생산해야 하고 그들 서로 간의 교환을 통해 전혀 소통하지 않는다면, 부자도 빈자도 전혀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아무도 이익을 보지 않겠지만, 또한 아무도 망하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민족들이 이번에는, 그 구성 요소들인 가족들처럼 모두 자체적으로 자신들을 위해 생산해 어떠한 무역 관계도 유지하지 않는다면, 사치와 빈곤은 우리가 여기서 경제적 전염이라고 아주 잘 표현할 수 있는 교환의 이 이동 수단을 타고 한 민족에서 다른 민족에게로 옮겨 갈 수 없으리라는 것이 여전히 상식적이다. 부 그리고 재산의 불평등을 한꺼번에 창조하는 것이 무역이다. 풍요와 빈곤은 무역으로 계속 진행해 간다. 그러므로 무역이 중단되는 곳에서는 동시에 경제 활동도 중단되며, 부동성과 일반적 범용함이 지배한다. 이 모두는 아주 간단하고, 아주 통속적인 상식이고, 결정적인 명증성을 띠어서 경제학자들에게는 인식에서 벗어난 것이다. 왜냐하면 경제학자들의 특성은 결코 상반물의 필요성을 인정하지 않는 것이어서 그의 운명은 언제나 상식의 바깥에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자유무역의 필연성을 증명했다. 우리는 자유가 어떻게 더욱 폭을 넓힐수록 상업 민족들에게 억압과 강도짓의 새로운 원인이 되어 가는지를 보여줌으로써 이 이론을 보완하려고 한다. 그리고 우리의 말이 우리 신념에 응답한다면 우리는 도버해협 저편의 우리 이웃들이 아주 요란하게 시도한 개혁의 의미를 드러내게 될 것이다. 우리는 일체의 경제적 신비화 중 가장 큰 신비화를 발가벗기게 될 것이다.

보호 체제에 맞서 조직된 십자군 원정에서 은자 피에르의 역할을 한 세(Say)의 주된 논리는 이런 삼단논법에 있다.

“대전제. 산물들은 산물들에 의해서만 지불되며, 상품들은 상품들로만 구매된다.”

“소전제. 금, 은, 백금, 그리고 모든 금속 가치물은 노동의 산물이고, 기름, 철, 비단, 천, 실, 수정 등과 같은 상품들이다.”

“결론. 그러므로 모든 상품 수입은 등가의 수출로 청산되어 대가로 제공되는 상품의 일부가 척도재로 구성되는지에 따라 어떤 점에서도 이익이 있을 수 있다고 믿는 것은 터무니없다. 정반대로, 금과 은은 그 유일한 서비스가 다른 것들에 유통과 교환 수단으로서 쓰이는 것으로 귀결되는 상품이라서 어느 구석에든 이익이 존재할 경우 그 이익은 산물을 제공하는 것보다 더 많은 산물을 타민족으로부터 들여오는 민족에게 돌아간다. 그리고 사람들이 말하듯 관세로써 노동 조건을 평준화하려 하기보다는 가장 절대적인 자유로써 이를 평준화할 필요가 있다.”

결과적으로 세는 그의 유명한 원리, 산물은 산물로만 지불된다는 원리의 보조 정리로서 다음 명제들을 제시한다.

1. 한 민족은 수입한 산물의 총계가 수출한 산물의 총계를 초과하는 만큼 이익을 본다.

2. 이 민족의 상인들은 그들이 받는 대가물의 가치가 그들이 바깥으로 수출한 상품들의 가치를 초과하는 만큼 더 이익을 본다.

중상주의 체계의 당파의 논리와 역인 이 논리는 아주 명확하고, 아주 결정적이고, 보호주의 체제의 파괴적 효과가 이 논리를 도와주어 독립성과 진보를 자부하는 모든 위정자들, 어떤 가치라도 있는 모든 경제학자들은 이를 채택했다. 반대되는 견해를 옹호하는 자들에게는 더는 대꾸하지 않으며, 이들을 웃음거리로 돌린다.

“사람들은 일반적으로 산물이 산물로 지불된다는 것을 잊는다. … 영국인들은 물론 우리에게 싼값으로 산물을 줄 수 있다. 나는 그들이 우리에게 그 산물들을 공짜로 주는 데 동의할지 알지 못한다. 교환할 것이 아무것도 없는 사람들과는 거래하지 않는다. … 프랑스가 신의 없는 이웃에게 승리해 자신을 위해 일하도록 강제한다면, 영국이 매년 우리 생각에 너무 비싸게 지불하도록 하는 것을 공물을 바치기 위해 무료로 보내준다면, 보호주의자들은 일관성이 있으려면 반역이라 외쳐야할 것이다. 우리가 공언하는 바는 우리에게 너무 강한 추론이 있다는 것이다. 우리의 적들은 두 날을 가진 무기를 다룬다. 1815년처럼 영국이 우리를 덮치면, 그들은 파멸을 외친다. 우리가 그렇게 가설을 세우듯이 영국이 우리에게 주면, 그들은 더 세게 외친다.”(「주르날 데 제코노미스트」, 1842년 8월)

그리고 같은 잡지의 1844년 11월호, 1845년 4월호, 6월호, 7월호에서 대단한 재능을 가진, 최고로 너그러운 박애에 가득 찬, 놀랍게 여겨지겠지만 최고로 평등주의적인 관념에 이끌린 한 경제학자가, 수용할 수 없는 한 논제 때문에 그의 갑작스러운 유명세가 생긴 것이라면 내가 더 찬양할 사람으로서, 모든 경제학자 공중의 갈채를 받으며 다음을 증명하기를 떠맡았다.

노동 조건을 평준화하는 것은 교환을 그 근원에서 공경하는 일이라는 것.

한 나라의 노동이 더 유리한 고장의 경쟁에 압살될 수 있다는 것은 진실이 아니라는 것.

보호 관세가 생산 조건을 균등화하지 않는다는 것은 꼭 맞는 말이라는 것.

자유는 이 조건들이 그럴 수 있는 만큼 이 조건들을 평준화한다는 것.

교역에서 가장 많이 이익을 보는 것은 가장 불리한 나라들이라는 것.

자유무역 연맹과 로버트 필은 그들이 다른 민족들에게 주는 예에 의해 인류에 지대한 공헌을 했다는 것.

그리고 그 반대의 것을 주장하고 옹호하는 모든 이들은 시시포스를 따르는 이들이라는 것.

확실히 랑드Landes의 바스티아 씨는 대담함과 그의 논변의 침착함으로 경제학자들을 놀라게 했으며, 자유무역에 관한 관념이 아직 유동적인 이들을 고정시킨 것을 자부할 수 있다. 나로 말하자면, 바스티아 씨의 『경제적 역설Sophismes économiques』보다 더 교묘하고, 더 간결하고, 더 양심적이고, 더 솔직한 진리의 분위기가 나는 역설은 어디서도 만나본 적 없다고 공언하는 바다.

그렇기는 하지만 나는 만약 우리 시대의 경제학자들이 즉흥성을 덜 계발하고, 논리성을 좀 더 계발했다면, 피레네의 코브던Cobden des Pyrénées의 논리의 해악을 더 쉽게 간파했으리라고, 산업국 프랑스를 장벽 일체를 폐지해 영국을 따르도록 이끌기보다는 ‘조심하자!’고 적었을 것이라고 감히 말한다.

산물은 산물로만 구매된다! 이야말로 물론 웅장한, 논박 불가능한 원리로서 이 때문에 나는 세에게 동상이 세워지기를 바랄 것이다. 나는 이 원리의 진리성을 가치 이론을 제시해 입증했다. 나는 이에 더해 이 원리가 재산의 평등의 기초라는 것, 그리고 생산과 교환에서 균형의 기초라는 것을 증명했다.

하지만 삼단논법의 두 번째 항으로서 화폐로 주조된 금과 은이 다른 상품과 마찬가지로 상품이라고 덧붙일 때, 이는 잠재적으로만 참인 사실을 언명하는 것이다. 결과적으로 부정확한 일반화를 하는 것이며, 정치경제학 자체가 화폐에 대해 제공하는 기초 관념들 때문에 이는 부정된다.

돈은 교환 수단으로 쓰이는 상품, 즉 우리가 보여준 것처럼 으뜸 상품, 특출한 상품으로서 언제나 공급보다 수요가 많고, 모든 다른 상품을 능가하며, 모든 지불에서 받아들여질 수 있고 따라서 모든 가치물, 모든 산물, 모든 가능한 자본을 대표하는 것이 된 상품이다. 실제로, 상품을 가진 자는 그렇다고 아직 부를 가진 것은 아니다. 교환 조건, 까다로운 조건, 잘 알듯이 수천의 기복과 수천의 우연에 종속된 조건을 충족하는 일이 남아 있다. 그러나 화폐를 가진 자는 부를 가진 것이다. 왜냐하면 그는 가장 관념화되면서도 가장 실질적인 가치를 보유하기 때문이다. 그는 모든 사람이 갖기를 원하는 것을 가진다. 그는 이 유일한 상품을 통해서 원할 때는 가장 유리한 조건에, 그리고 가장 좋은 기회에 다른 모든 상품을 취득할 수 있다. 한마디로 그는 돈에 의해 시장의 주인이 된다. 상업에서 돈의 소유자는 옴브레 게임에서 으뜸 패를 뽑은 자와 같다. 모든 카드는 서로 간에 위치 가치와 상대 가치를 가진다고 물론 주장할 수 있다. 심지어 게임은 모든 카드의 서로에 대한 교환에 따르지 않고는 행해질 수 없다고도 덧붙일 수 있다. 그렇다고 해서 으뜸 패가 다른 색상을 취하지 못하는 것은 아니다. 그리고 으뜸 패들 중에 처음 것들이 다른 것들을 없애지 못하는 것도 아니다.

모든 가치물이 돈으로 정해지고 구성된다면, 각 상품이 직접 그리고 손실 없이 다른 상품과의 교환에서 받아들여진다면, 국제무역에서 수입이 수출을 초과하는지 아닌지를 아는 것은 완전히 상관없을 것이다. 이 질문 자체는 한쪽 가치물들의 총계가 다른 쪽 가치물들의 총계를 초과하면 모를까 더는 의미가 없을 것이다. 그럴 경우에는 마치 프랑스가 20프랑 동전을 1파운드스털링과, 혹은 40퀸틀의 쇠고기를 30퀸틀의 쇠고기와 교환하는 것과 같을 것이다. 첫째 거래에서는 프랑스는 20% 이익을 보았을 것이고, 둘째 거래에서는 25% 손해를 보았을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세가 한 민족이 수입하는 상품들의 가치가 수출하는 상품들의 가치를 초과하는 만큼 이익을 본다고 말한 것은 옳았을 것이다. 그러나 그런 것은 무역의 실제 조건에서는 결코 들어맞지 않는다. 수입과 수출의 차액은 오직 척도재의 일정량이 그에 대해 잔금으로 주어져야 하는 상품들로만 이해된다. 그런데 이 차액은 결코 상관없지 않다.

이는 중상주의 체제의 당파들이 완벽히 이해한 것이다. 이들은 돈의 특권의 당파 말고 다른 것이 아니다. 그들은 금속만 부로 간주한다고들 귀에 못이 박히게 반복한다. 순전히 중상모략이다. 중상주의자들은 우리와 마찬가지로 금과 은이 부가 아니고, 교환의 전능한 수단, 결과적으로 행복을 이루는 모든 가치물들의 대표, 행복을 주는 부적이라는 점을 안다. 그리고 제유법에 따라 여러 민족들이 다른 어떤 산물보다 모든 부를 응축하고 실현하는 종류의 산물을 부라고 불렀을 때, 논리는 그 민족들에 결여되지 않은 것처럼 그들에게도 결여되지 않았다.

경제학자들은 게다가 돈의 보유에 붙는 이득을 오해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들의 모든 글을 통해 알 수 있는 것처럼, 그들이 금과 은 상품의 이 본의를 이론적으로 전혀 고려할 줄 몰랐으므로, 그들이 거기서 대중적인 편견밖에 보지 못했으므로, 끝으로 그들의 눈에는 화폐로 주조된 소재가 통상적 상품일 뿐이어서 휴대가 더 간편하고, 더 희소하고, 덜 변질된다는 것 때문에만 교환 수단으로서 취해지는 것이므로 경제학자들은 자신들의 이론 때문에, 거두절미하고, 자신들의 화폐에 대한 무지 때문에, 상업에서의 그 진정한 역할을 오해하도록 유도되었다. 그리고 세관을 반대하는 그들의 전쟁은 근본적으로 돈을 반대하는 전쟁일 뿐이다.

나는 가치를 다룬 장에서, 돈의 특권은 돈이 애초부터 그리고 아직도 생산자들의 손안에서 유통하는 유일한 정해진 가치물이라는 데서 생긴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나는 남김없이 다루어진 이 문제를 여기서 재론하는 것이 무익하다고 믿는다. 하지만, 척도재를 보유하는 자, 돈을 빌려주거나 파는 직업을 행하는 자는 왜 이것만으로 모든 생산자들에 대해 주목되는 우월성을 취득하는지, 끝으로 은행은 왜 상업의 여왕인 것처럼 공업의 여왕인지를 말해진 것에 따라 이해하기는 쉽다. 그리고 이는 특별히 다음 장에서 고찰할 대상일 것이다.

이런 고려 사항들은 정치경제학의 가장 기초적이고 가장 부인할 수 없는 기정사실들에 기초를 두어, 일단 세의 삼단논법에 도입되면서 그의 자유무역과 판로 이론 전체가 그의 제자들에게 경솔하게 수용되어 그들이 맹비난하는 것 자체, 소비자들의 약탈, 독점의 무한한 확장으로만 나타난다.

우선 이 반대 명제의 이론적 예증을 추적하자. 그 다음에는 응용과 사실들로 가게 될 것이다.

세는 민족들 사이에서 돈은 개인들 사이에서와 같은 효과를 가지지 않는다고 주장한다. 나는 세가 오직 돈의 진짜 본성을 몰랐기 때문에 내놓은 이 명제를 적극 부정한다. 돈의 효과는, 비록 민족들 사이에서는 덜 명백한 방식으로 그리고 특히 덜 직접적인 방식으로 생겨남에도 불구하고 단순 개인들 사이에서와 정확히 같다.

모든 종류의 상품을 끊임없이 사들이고, 교환으로 돈밖에 내놓지 않는 어느 민족의 경우를 가정하자. 나는 앞에서 인용한 경제학자가, 영국이 만일 우리에게 산물을 공짜로 내준다면 보호주의자들은 일관성을 유지하기 위한 반역이라고 외쳐야할 것이라고 말할 권리를 가진 것처럼, 이런 극단적 가정을 할 권리를 가진다. 나는 동일한 절차를 활용하며, 반대 체제의 불가능성을 부각하기 위해서 모든 것을 사들이고 아무것도 팔지 않는 한 민족을 가정하는 것으로 시작한다. 경제학 이론들에도 불구하고 모든 사람은 그 의미를 안다.

어떤 일이 일어날 것인가?

귀금속으로 이루어지는 이 민족의 자본 부분이 유출됐다면, 판매하는 민족은 구매하는 민족에게 저당물을 매개로 다시 이를 돌려보낼 것이다. 말하자면, 이 민족은 세습 재산이 결여된 로마의 프롤레타리아처럼 살기 위해 자신을 팔 것이다.

이에 뭐라고 대답하는가?

모든 사람이 두려워한다는 바로 그 사실에 의거해 대답한다. 돈이 한편으로 희소해지고, 다른 한편으로 풍부해져서 금속 자본이 판매하는 민족들로부터 구매하는 민족에게로 재유입되리라는 것, 이 민족은 돈의 낮은 가격으로 이익을 볼 수 있으리라는 것, 그리고 이 인상과 인하의 번갈아 듦이 균형을 다시 가져오리라는 것이다.

그러나 이 설명은 가소롭다. 돈은 신의 이름으로 공짜로 주어질 것인가? 모든 질문이 거기 있다. 빌린 금액의 이자가 아무리 약하고 아무리 가변적이라도, 이 이자가 웬만큼 된다는 조건에서는 이는 언제나 구입만 하고 판매는 결코 하지 않으면서 자기 자신의 상인에게서 끊임없이 돈을 꿀 생각을 하는 민족이 천천히든 급속히든, 연속적이건 간헐적이건 퇴화함을 기록할 것이다.

이제 바로 우리는 어떤 나라가 저당에 종속될 때 무엇이 되는지를 살펴볼 것이다.

이처럼 세가 아주 현명하게도 과도한 수입에서 두려워해야할 유일한 것으로 지적한 민족 자본의 포기, 이 포기는 불가피하다. 그것은 참으로 자본의 물적 이전에 의해서가 아니라 자산 소득의 이전에 의해, 그리고―정확히 같은 것인―소유권의 상실에 의해 실행된다.

그러나 경제학자들은 우리가 방금 가정한, 그리고 그들에게 너무 명백하게 잘못이 돌아가는 극단적인 경우를 인정하지 않는다. 그들은 어느 민족도 오로지 돈만 가지고 거래하지 않는다는 것, 그러므로 저당물이 아니라 실물에 관해 추론하는 데 한정할 필요가 있다는 것을 고찰한다. 자기들의 적을 반박하기 위해 그 원리들을 마지막 결과까지 밀고 가는 것이 좋다고 본 후에 그들은 사람들이 자신들과 마찬가지로 이를 활용하는 것을 견디지 않을 것이다. 이는 사람들이 이 원리들을 끝까지 밀고 가려고 시도한 이래로 그들이 더 이상 자신들의 원리를 믿지 않는다는 나름의 자백을 내포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경제학자들과 함께 실재의 터 위에 서자. 그리고 적어도 그들의 이론이, 중용에 의해 이를 취할 때 참인지를 알아보자.

그런데 나는 동일한 포기의 움직임이, 그 강도는 덜할지라도 그 취득물 전체에 대해 돈으로 지불하는 대신 수입국이 그 중 일부를 자기 자신의 산물로 변제할 경우에 발현될 것이라고 주장한다. 수학적 명증성을 띤 한 명제를 모호하게 하는 것이 어떻게 가능한가? 프랑스가 매년 영국 산물 1억 프랑 어치를 수입하고 영국으로 9000만 프랑 어치의 자국 산물을 재발송한다면, 9000만 프랑 어치의 프랑스 상품이 9000만 프랑 어치의 영국 상품을 충당하는 데 쓰이고, 그 나머지 영국 상품은 다른 나라들에 대해 발행된 환어음으로 변제가 이루어질 경우를 제외하면 돈으로 변제될 것이다. 환어음은 저당물에서 나온다. 이는 그러므로 프랑스가 자신의 자본 1000만 프랑 어치를 매각하는 것, 그리고 아주 낮은 가격에 그렇게 하는 것과 같을 것이다. 왜냐하면, 차입이 일어날 경우에는 얼마 되지 않는 돈이 큰 저당물을 대가로 주어지리라는 것이 명확하기 때문이다.

경제학자들의 또 하나의 오류다.

돈을 다른 상품들과 까닭 없이 동일시한 후에 보호의 반대자들은 돈에 대한 인상과 인하의 효과를 다른 종류의 산물들에 대한 인상과 인하의 효과들과 동일시하며 그에 못지않게 심각한 혼동을 범한다. 그들의 자유무역 이론이 주로 기초로 삼는 것이 이 혼동이므로 논의를 명확히 하기 위해 우리가 원리들로 거슬러 올라가는 것이 필요하다.

우리가 제2장에서 말한 것인데, 돈은 가변적이지만 구성된 가치다. 다른 산물들, 적어도 엄청난 다수는 그 가치가 가변적일 뿐 아니라 자의에 내맡겨진다. 이는 돈이 한 장소에서 그 양이 달라질 수 있어서 같은 액수를 가지고서 다른 상품을 때로는 더 많이, 때로는 더 적게 획득할 것임을 뜻한다. 그러나 그 질서에는 변함이 없는데, 나는 독자에게 이런 형이상학적 용어들을 사용하는 것에 대해 용서를 구한다. 즉 화폐 상품의 비례성의 변이에도 불구하고 이 상품은 모든 지불에서 받아들여지는 유일한 상품임에는 조금도 달라지는 것이 없고, 모든 다른 상품들의 종주宗主이며, 그 가치가 말하자면 일시적인, 그러나 실질적인 특권에 의해 사회적으로, 정규적으로 그 진자 운동 중에 정해지는 상품, 결과적으로 그 우세성이 불가항력적으로 확립되는 상품이라는 것이다.

밀 가격이 갑자기 오르고 일정 시간 이례적인 가격을 유지한다고, 그러는 동안 돈은 그 가치의 3분의 1 또는 4분의 1로 낮아진다고 가정해보라. 그러면 결과적으로 밀은 돈의 자리를 차지할 것이며, 밀이 돈의 값을 매길 것이며, 세금, 상업, 채권, 국채 이자를 납부하고 모든 거래를 청산하는 데 사용될 수 있을 것인가? 단연코 아니다. 급진적 개혁으로 산업 조직에서 생산된 모든 가치물이 화폐로 조성되고 정해지기 전까지(이 조성이 확정적일 수 있다면), 돈은 그 왕권을 유지한다. 그리고 부를 축적하는 것이 권력을 축적하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은 돈에 대해서뿐이다.

그러므로 경제학자들이 이 모든 개념들을 혼동해, 돈이 한 나라 안에서 희소하다면 가격 인상에 의해 호출을 받아 다시 돈이 그 나라로 들어간다고 말할 경우에, 나는 이것이 바로 이 나라가 종속되는 증거라고, 그 나라의 자본의 포기는 이것으로 이루어진다고 대답한다.

그리고 우월한 수출에 의해 한 지점에 축적된 금속 자본이 어쩔 수 없이 그 나라를 빠져나가 텅 빈 지점들로 되돌아가 그곳들에서 사용처를 찾는다고 그들이 덧붙여 말할 때, 나는 이 회귀가 바로 수입하는 민족들의 쇠퇴의 신호이고, 그들이 끌어들인 금융 왕권의 기별이라고 대답한다.

게다가, 상업에 의한 민족들의 종속이라는 아주 중요한 현상은, 경제학자들이 사실의 표면에만 멈추었고 법칙들과 원인들을 조사하지 않았다는 바로 그것만으로 경제학자들에게 간과되었다. 사태의 물적 측면에 대해서라면 그들은 이를 감지했다. 그들은 그 의미와 논리적 결과에 대해서만 오해했다. 이 점에 관해, 다른 모든 점들에서처럼 그들을 압도하는 모든 증거들이 수집되어 있음을 여전히 그들의 글에서 발견하게 된다.

내가 1845년 7월 29일자 「데바Débats」 지에서 읽은 것은 1844년 프랑스의 수출 가액이 수입 가액보다 4000만 프랑 적었으며, 1843년에는 이 차이가 1억6000만 프랑이었다는 것이다. 다른 해들은 이야기하지 말자. 나는 중상주의 체계에 불시의 반격을 가할 이 기회를 놓치지 않은 그 기사의 저자에게 프랑스가 지불한 거스름돈으로 쓰인 이 현금 2억 프랑이 어떻게 되었는지를 질문한다. 우리나라 안에서 자본의 가격 인상은 그 자본이 되돌아오게 했을 것이다. 세에 따르면 바로 이것이 그가 대답해야 하는 말이다. 실제로 자본은 되돌아온 듯하다. 정치 및 산업의 모든 언론은, 이 투기 분야만 여기서 인용하기로 한다면, 우리의 철도에 투자된 자본의 3분의 1이 스위스 자본, 영국 자본, 독일 자본이었다는 것, 이 철도의 행적 자문 회의들은 부분적으로 외국인들로 구성되고 외국인들이 주재했다는 것, 그리고 여러 노선들, 그 중에서도 가장 생산적인 노선인 북부 노선이 외국인들에게 주어졌다는 것을 우리에게 가르쳐주었다. 이는 명확한가? 비슷한 사실들이 영토의 모든 지점에서 일어난다. 알자스의 거의 모든 담보 채무가 바젤 자본가들에게 이익이 되게 기채되었고, 이를 매개로 반출된 민족 자본이 외국 검인이 찍혀 돌아와서 옛날 그 주인들이던 자들을 노예화한다.

그러므로 금속 자본들은 되돌아왔는데, 공짜로 되돌아온 것이 아니다. 사람들은 이를 시인한다. 그런데 그 자본들이 돌아와서 무엇과 교환되는가, 즉 대여되는가? 상품들과 교환되는가? 아니다. 우리의 수입이 언제나 수출보다 큰 상황에서 이 수출을 그나마 유지하려면 우리는 계속 수입을 억제하지 않을 수 없으니 말이다. 그러므로 돈은 소득이 아무리 적어도 외국인들에게는 자신들의 자본의 이 용도가 필요치 않은 우리의 상품을 구입하는 것보다 나으니 이자 소득으로, 돈으로 교환된다. 우리의 상품은 그들이 결국에는 우리의 돈과 같이 가지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의 상속 재산을 매각하며 우리나라에서 외국인의 임차인이 된다. 그 후에 우리가 수입을 많이 할수록 더 부자가 된다는 것을 어떻게 이해하는가?

어려움의 매듭은 여기에 있으며, 독자는 이를 힘들이지 않고 이해할 것이다. 또한 그러한 논쟁에서 사실들이 가질 수 있는 매력에도 불구하고 사실들은 분석에 발걸음을 양보해야 한다. 그러므로 내가 잠시 동안 순수 이론에 머무는 것을 양해해 주시기 바란다.

바스티아 씨는 자유무역의 아킬레우스로서, 갑작스러운 출현으로 동료들을 눈부시게 한 사람이다. 그는 교역에서 돈의 주권적 역할을 오해하고 모든 경제학자들과 마찬가지로 화폐의 규칙적으로 진자 운동하는 가치와 상품들의 자의적 등락 운동을 혼동해 세를 따라서 아마도 상업란이 생소한 사람을 혼동시킬 수 있을 궤변의 미로에 뛰어들었지만, 그 미로는 가치와 교환의 참된 이론의 횃불로 아주 쉽게 빠져나올 수 있는 것이어서 곧 경제 학설들의 비참함만을 알리는 것이다.

바스티아 씨는 말한다. “A와 B 두 나라가 있다. A는 B에 대해 온갖 장점을 보유한다. 당신은 이로부터 노동이 A에 집중되고 B는 아무 일도 못하는 무능에 처한다고 결론을 내린다.”

누가 집중과 무능에 대해 말하는가? 그 문제에 솔직하게 들어가자. 두 나라가 그 고유한 능력대로 비슷한, 혹은 적어도 같은 종류의 물품을 생산하지만, 한 나라가 더 풍부하게 그리고 낮은 가격에 만들고, 다른 한 나라는 적은 수를 비싸게 만든다고 가설로 두자. 가설에 따르면 이 두 나라는 서로 아무런 관계도 갖지 않았다. 그러므로 그때까지 한 나라에 노동이 집중되고 다른 나라에 무능함이 있다고 말할 여지는 없다. 그들의 인구와 산업이 그들 각각의 능력에 비례함은 명확하다. 그런데 이 두 나라가 상업으로 관계를 맺게 될 때 어떤 일이 벌어질지를 아는 것이 중요하다. 그런 것이 가설이다. 당신은 이를 받아들이는지를 말하라.

“A는 구매하는 것보다 훨씬 많이 판매한다. B는 판매하는 것보다 훨씬 많이 구매한다. 나는 논박할 수도 있을 것이지만, 당신의 터전 위에 선다.”

논박하라, 부디! 절대 양보 말라. 이 거짓된 관대함은 비열하고 의심을 남긴다.

“그 가설에서 노동 수요가 A 나라에서 아주 많아지고 곧 값이 오를 것이다. 철, 석탄, 토지, 식품, 자본 수요가 A에서 아주 많아지고, 곧 그것들의 값이 오를 것이다.”

“이 시기 동안 노동, 철, 석탄, 토지, 식품, 자본 모두가 B 나라에서 아주 방치되며, 곧 모두 값이 낮아진다.”

“A는 언제나 판매하고 B는 끊임없이 구매해, 척도재는 B에서 A로 넘어간다. A에는 그것이 풍부하고, B에는 희소하다.”

이것이 바로 핵심이다. 이제 B가 A의 저가격을 어쩔 수 없이 이용할 수밖에 없어 자국의 모든 돈을 지출했으니 어떤 일이 일어날 것인가?

“그러나 척도재의 풍부함, 이는 말하자면, 다른 모든 물건을 사려면 척도재가 많이 필요하다는 말이다. 그러므로 A에서는 아주 활발할 수요에서 오는 실질적 인상에 귀금속의 과잉 비율로 인한 명목적 고가가 더해진다.”

“척도재의 희소성, 이는 물건을 살 때마다 척도재가 별로 필요치 않다는 말이다. 그러므로 B에서는 명목적 저가격이 실질적 저가격과 결합한다.”

바스티아 씨의 결론에 도달하기 전에 잠시 멈추어 서자. 문체의 명확함에도 불구하고 이 작가는 번번이 그를 설명해 줄 논평자를 필요로 할 것이다. 실질적인 만큼 명목적인 저가격은 B국에서 A와의 관계에 따라 생겨나는 것인데, 이는 A의 생산적 우월성의 직접적 효과이면서 그 원인보다 결코 더 위력 있게 될 수 없는 효과다. 다시 말해, 각각 고려된 두 나라에서 교환 가능한 가치들의 진자 운동이 어떠하든, 임금, 석탄, 철 등이 B에서 인하되는 동안 A에서 인상된다면, B에서 지배하는 이른바 저가격은 A에서 발현되는 고가격이라는 것에 결코 경쟁이 되지 못한다는 것이 명백하다. 앞의 것은 뒤의 것의 결과인 데다 A의 산업인들은 언제나 시장의 주인임에 변함없으니 말이다.

실제로 임금, 즉 임의의 모든 산물은 결코 A에서는 그 나라를 위해 산물을 수출하는 기업가들의 수요, B의 시장 상태에 따라 조절되는 수요를 강제할 수 없다. 다른 한편, B에서 생겨나는 가격 인하는 이 나라의 사업가들에게 A의 경쟁자들에 대한 투쟁의 수단이 결코 될 수 없다. 이 가격 인하는 수입의 결과이지, 그 토지의 천연자원의 결과가 아닌 것이다. 이런 점에서 수입국의 사정은, 추가 아래에 도달해서 움직이려면 외적인 힘이 추를 다시 올려주기를 기다리는 시계와 같다. 바스티아 씨는 돈을 다른 종류의 상품들과 동일시해서 지속적 운동을 발견했다고 믿었다. 그리고 이 항등식은 참이 아니므로 그는 관성만을 만났을 뿐이다.

우리의 저자는 계속해서 말한다. “이런 상황에서 산업은 A를 포기하고 B에 정착하게 될 온갖 동기, 내가 이렇게 말할 수 있다면, 네제곱을 한 동기를 가질 것이다. 아니면, 진실에 다시 들어가기 위해 산업은 이 순간을 기다리지 않았을 것이라고, 자연은 급격한 이동을 싫어한다고, 원래부터 자유 체제에서 산업은 점진적으로 공급과 수요의 법칙에 따라, 즉 정의와 유용성의 법칙에 따라 A와 B 사이에 나누어 분포했을 것이라 말하자.”

이 결론은 반박의 여지가 없을 것이며, 우리가 A의 명목적 고가격과 B의 실질적 저가격 사이에 슬쩍 집어넣은 고찰이 아니었다. 바스티아 씨는 B의 시장 가격표를 A의 시장 가격표에 종속되게 만드는 인과관계를 못 보고는 귀금속이 A에서 B로, B에게서 A로, 마치 수평을 이룬 물이 균형을 재확립하고 빈 곳을 메워주는 것 외의 목적 없이, 다른 결과 없이 거니는 것같이 움직인다고 상상했다. 그가 말하지 않은 것이 더 명확하고 참된 것이었다. B의 일꾼이 자기 임금이 감축되고 일감이 A의 상품 수입 때문에 줄어드는 것을 볼 때, 그는 자기 나라를 떠나 스스로 A로 일하러 갈 것이며, 이는 아일랜드인들이 영국으로 간 것과도 같다. 그들이 A의 일꾼들에게 가할 경쟁에 의해 점차 자신들의 조국을 멸망시키는 데 기여할 것이며, 동시에 그들은 이민 간 나라 안에서 일반적 빈곤을 증가시킬 것이다. 그러면 거대한 재산과 거대한 빈곤이 어디서나 다시 득세해 균형이 확립될 것이다. … 말로써 실행된 이상한 매혹의 힘이다! 바스티아 씨는 스스로 B 나라의 쇠퇴를 막 확인했다. 그리고 인상과 인하, 상쇄, 균형, 수평, 정의, 대수代數로 시달린 정신은 검은 것을 희다고 보고, 아리만(Ahriman)[4]의 소위所爲를 오르마즈드(Ormazd)[5]의 소위로 간주하고, 이 명백한 쇠퇴 중에서 회복만을 감지한다!

A의 산업인들이 B와의 무역으로 부유해져서 자신들의 자본으로 더는 무엇을 할지 모르게 될 때, 그들이 그 자본을 B로 가져갈 것이라고 당신은 말한다. 그러나 이는 그들이 집, 토지, 목재, 하천, 목초지를 구입하러 B로 가리라는 뜻이다. 거기서 그들이 영지를 만들고, 소작인과 농노를 선택할 것이고, 사람들이 가장 존경하는 권위인 돈에 힘입어 영주와 군주가 될 것임을 뜻한다. 민족의 부는 조국을 떠났다가 이 위대한 봉신들과 함께 외국인 지배와 극빈층을 데리고 다시 돌아올 것이다.

게다가 이 혁명이 완만하게 행해지든 급작스레 행해지든 별로 중요하지 않다. 바스티아 씨가 아주 잘 말하듯이 급작스러운 이행은 자연이 혐오하는 것이다. 상업적 정복의 척도는 침략하는 민족들과 침략을 받는 민족들에서 나타나는 원가의 차이다. 또한 새로운 귀족 계층이 바깥으로부터 들어오든, 아니면 그들이 동포와 외국인 사이의 중개인으로 일하는 가운데 대금업과 은행에 의해 부유해진 토착민으로 이루어지든 별로 중요하지 않다. 내가 말하는 혁명은 본질상 외국인들의 이민 유입에도, 토양의 반출에도 관련되지 않는다. 대외무역의 작용 아래 인민이 두 계급으로 분단되는 것, 옛날에는 자유로운 나라, 그 주민들이 종속화의 다른 원인들만 아니면 평등한 상태로 있을 수 있던 나라 안에서의 중상주의적 봉건제의 고양, 이것이 바로 이 혁명의 본질이고, 불리한 조건에서 행해진 자유무역의 불가피한 결실이다.

그러니 뭐라고! 우리는 프랑스 토양이 해협을 건너 템스 강에서 소멸되는 것을 보지 못할 것이므로, 우리의 정부, 우리의 법, 우리의 관심에서 아무것도 달라지지 않을 것이므로, 우리와 교역을 하는 모든 민족들에게서 내보내진 이주민 집단이 우리의 3500만 주민이 사는 장소에 나타나지 않을 것이므로, 당신에 따르면 아무것도 달라지지 않을 것이다! 나라의 전리품은 담보 채권의 모습으로 다시 나타나 민족을 귀족들과 농조들로 나눌 것이며, 우리는 잃는 것이 없을 것이다! 자유무역의 효과는 기계, 경쟁, 독점과 조세의 작용을 강화하고 증진하는 것일 것이다. 그리고 정복된 노동자 대중이 외국 침입 덕택으로 자본의 자비에 맡겨질 때, 그들은 침묵을 지켜야할 것이다. 빚을 진 나라가 스스로를 팔고, 조국에 매춘 행위를 시키는 것 말고 더는 수단이 없어질 때, 그 나라는 경제학자들의 탁월한 천재성 앞에서 치욕을 당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내가 우발적으로 과장하는가? 정치적으로 자유로운 나라 포르투갈, 자신의 왕, 자신의 신앙, 자신의 헌법, 자신의 언어를 가진 나라가 매수엔 조약과 자유무역에 의해 영국의 소유물이 된 것을 모르는가? 영국식 경제주의는 우리에게 벌써 역사의 감각을 상실하게 했을 것이다. 그리고 민족적 노동의 수호자의 상상적 양식을 빌려서 보르도 사람이 옛날 엘레오노르 드귀엔(Éléonore de Guyenne) 밑에서 했던 것처럼 프랑스를 영국인에게 새로이 개방하기를 원하는 것이 사실일까? 우리나라 안에 어떤 음모가 존재해서 마치 텍사스의 상인들이 최근 자신들의 나라를 미국에 판 것처럼 우리를 유럽의 은행 귀족 집단에 팔려는 것이 진실일까?

다음은 가장 공신력 있는, 그리고 보호주의적 편견의 혐의가 가장 적은 우리 신문들 중 하나에서 발췌한 것이다. “텍사스 문제는 근본적으로 돈 문제다. 텍사스는 재력이 없는 나라로서는 엄청나게 큰 빚을 졌다. 그 나라의 채권자들은 거의 모두 그 나라의 영향력 있는 시민들이었다. 그리고 이들의 주목적은 그들의 채권을 상환 받는 것이었고, 누구에게 상환 받느냐는 별로 중요하지 않았다. 그들은 다른 팔 것이 없어서 나라의 독립을 흥정했다. 그들에게는 미국이 멕시코보다 훨씬 더 빚을 갚아 줄 상태에 있는 것으로 보였다. 그리고 그들이 당장 텍사스의 채무를 떠안는 데 동의했다면, 합병은 오래전부터 기정사실이었을 것이다.”(「콩스티튀시오넬Constitutionnel」, 1845년 8월 2일)

이것이 바로 기조 씨가 막기를 원했던 것이고, 반대 세력이 텍사스와 관련해서 그의 교섭에 대한 보고를 그에게 요구해 왔을 때 그가 법정에서 설명할 수 없었던 것이다. 이 재상이 그의 웅변 재능에 걸맞은 웅장한 이 논제를 발전시키는 데 착수했더라면, 그의 다수의 장사꾼들에게 얼마나 공포를 일으켰겠는가? 상업적 영향력은 민족들에게는 뼈대만 앙상하게 남게 하는 죽음이다!

내가 여기서 그에게 아주 큰 감사를 표명하고 싶은 것인데, 바스티아 씨는 지극히 순수한 사회주의에 세뇌되었다. 그는 무엇보다도 그의 나라를 사랑한다. 그는 평등의 교리를 소리 높여 선포한다. 그가 아주 큰 헌신성을 가지고 자유무역의 대의를 신봉했다면, 그가 자유무역 연맹 관념들의 선교사가 되었다면, 이는 그가 많은 다른 이들처럼 자유라는 이 위대한 낱말에 끌린 것이다. 이 낱말은 그 자체로 모호하고 불확정적인 자생성만을 표현하는 것으로서 진리와 정의의 영원한 적인 모든 열광주의에 경이롭게 부합하는 것이다. 물론 자유는 민족들에게도 개인들에게도 평등을 내포한다. 그러나 이는 자유가 정의되면서, 자유가 법으로부터 그 형태와 권능을 부여받으면서 그런 것일 뿐, 자유가 야만인들에게서 그렇게 존재하는 것같이 모든 확정성을 결여한 채 방치된 상태로 있는 한에서는 절대로 그렇지 않다. 이런 의미에서 자유는 경제학자들의 경쟁처럼 모순적 원리, 불길한 애매함일 뿐이다. 우리는 그 새로운 증거를 취할 것이다.

바스티아 씨는 이렇게 고찰한다. “결국 우리가 교역에서 지불하는 것은 자연의 선물이 아니라 인간의 노동이다. 우리 집에서 일꾼 한 사람을 부른다. 그는 톱을 들고 도착한다. 나는 그의 일당으로 2프랑을 지불한다. 그는 나에게 판자 25개를 만들어 준다. 그 톱이 발명되지 않았더라면, 아마도 판자 하나도 만들지 못했을 것이고, 나는 그에게 더 적은 일당을 주었을 것이다. 톱에 의해 생성된 쓸모는 그러므로 나에게는 자연의 무료 선물이다. 아니, 이는 내가 모든 형제들과 함께 조상들의 지능으로부터 공동으로 받은 유산의 한 몫이다. … 그러므로 보수는 생산자가 시장에 내놓는 쓸모와 비례하지 않고 그의 노동과 비례한다. … 그러므로 결국 자유무역은 그 목적이 모든 민족에게 자연의 무료 효용을 누리게 만드는 것이어서 어느 민족에게도 손해를 결코 끼칠 수 없다.”

나는 로시, 슈발리에, 블랑키, 뒤누아예, 픽스 제씨諸氏와 그 밖의 순수한 경제학 전통의 수호자들이 바스티아 씨의 이 학설, 일체의 독점을 일거에 물리치고 무로 돌리고 노동을 가치의 유일하고 최고인 심판자로 만드는 이 학설에 대해 생각한 것을 모른다. 잘 생각해보라. 바스티아 씨의 명제를 공격할 사람은 내가 아니다. 내 눈으로 볼 때 그 명제는 평등 자체의 멋 부린 문장이며, 결과적으로 경제학자들이 이해하는 의미에서 자유무역의 정죄가 거기에 있는 것이다.

내가 지불해야 하는 것은 자연의 무료 효용이 아니라 노동이다! 이런 것이 사회경제의 법칙, 아직 잘 안 알려진 법칙이, 오늘날까지도 노동 분업, 기계, 경쟁 등 이런 여러 종류의 신비들로 감싸인 채로 있어, 그것들의 대립에 따라 조금씩 발견되도록 한다. 바스티아 씨는 스미스의 참된 제자로서 마땅히 그래야 하는 것, 결과적으로 그렇게 되는 것을 우수하게 인식하고 나타냈다. 즉, 그는 그렇게 있는 것을 완전히 잊었다. 노동의 법칙, 교환에서의 평등이 진실로 실행되려면, 경제적 모순들이 모두 풀릴 필요가 있다. 우리를 사로잡는 문제와 관련해서 이는, 연합association의 바깥에서 무역자유는 언제나 힘의 횡포에 불과하다는 뜻이다.

이처럼 바스티아 씨는 톱의 사용이 어떻게 모두에게 무료 선물이 되었는지를 아주 잘 설명한다. 그러나 오늘날 우리의 독점적 법률들을 가지고서 톱이 알려져 있지 않다면, 발명가는 즉시 특허를 받아서 그 장비의 이득을 있는 대로 취할 것이 확실하다. 그런데 이런 것이 바로 토지, 기계, 자본, 그리고 모든 작업 도구들의 조건이다. 그리고 바스티아 씨는 경쟁을 독점에 대립시키고 열대 지방들을 온대 지방들에 대립시키면서 우리에게 다음과 같이 말할 때, 완전히 잘못된 가정에서 출발한다. 아니, 그는 부당하게 미래를 기대한다. “행복한 기적에 의거해 모든 경작 가능한 땅들의 비옥도가 상승한다면, 이 현상의 이득을 취할 것은 결코 농업인이 아니라 소비자다. 왜냐하면 그것은 풍부함, 저가격으로 풀릴 것이기 때문이다. 밀 10리터마다 들어가는 노동은 더 적을 것이며, 농업인은 이를 다른 모든 산물에 포함된 더 적은 노동하고만 교환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더 나아가서

“A는 자연의 혜택을 받은 나라이고, B는 자연의 푸대접을 받은 나라다. 나는 교역이 두 나라 모두에 이롭지만 특히 B 나라에 이롭다고 말한다. 왜냐하면 교역은 쓸모를 쓸모로 교환하는 것이 아니라 가치물을 가치물로 교환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A는 같은 가치에 더 많은 쓸모를 내놓는다. 산물의 쓸모는 자연이 거기에 만들어준 것, 노동이 거기에 만들어준 것을 포괄하는 반면, 가치는 노동이 거기에 놓은 것에만 상응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B는 자신에게 아주 유리하게 거래를 한다. A의 생산자에게 단지 그의 노동만 갚아주어 그는 거래를 넘어서 주는 것보다 더 많은 자연적 쓸모를 받는다.”

그렇다. 다시 한 번, 당신에게 나는 목청껏 외칠 것이다. 가치를 만드는 것은 노동이지, 당신이 방금 말했듯이, 그리고 당신을 이해하지도 못하면서 당신에게 갈채를 보내는 당신의 동료들 모두가 가르치듯이 공급과 수요가 아니라고. 서로 지불되고 교환되는 것은 노동이지, 토양의 무료 효용이 아니다. 그리고 당신은 당신의 선의와 당신 관념의 비일관성을 이보다 더 잘 입증해 주는 어떤 것도 말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러한 조건에서 교역의 가장 절대적인 자유는 언제나 이익이 되며, 결코 해롭게 될 수 없다. 그러나 독점, 산업의 여러 특권, 자본가의 선취권, 소유의 주인 된 권리, 이런 것들을 당신은 폐지했는가? 당신은 단지 그것들을 폐지할 수단만을 가지는가? 당신은 그것들의 폐지의 가능성, 필요성도 믿는가? 나는 당신에게 의사를 표명하라고 촉구한다. 왜냐하면 여러 민족들의 안녕과 자유가 걸린 문제이기 때문이다. 그러한 문제에서 애매한 말은 반역이 된다. 민족 영토의 특권, 그리고 개별 소유권이 당신에 의해 전제될 것인 한에서 당신 입으로 말하는 교역의 법칙은 거짓말일 것이다. 모든 나라의 생산자들 간에 동의가 이루어진 연합과 연대, 즉 자연의 선물들의 공유, 그리고 노동의 산물들에만 대한 교역이 없는 한, 대외무역은 종족들 간에 노동 분업, 임금 제도, 경쟁, 그리고 모든 경제적 매개체들이 개인들 간에 작동시키는 노예화와 종속의 현상을 재생하기만 할 것이다. 당신의 자유무역은, 내가 힘차게 가해지는 약탈이라고 말하는 것을 당신이 좋아하지 않는다면, 속임수일 것이다.

자연은 혜택을 본 민족들을 일반적 연합으로 가져가기 위해 침입과 정복에 족쇄를 채우는 자연적 장애물로써 이 민족들을 분리했다. 그리고 당신은 보증을 취하지 않고 이 장애물들을 치운다! 당신은 자연의 예방 조치들을 쓸모없는 것으로 판단한다! 당신은 자기 나라에 속하기를 원치 않는 소비자의 이기심을 충족해 주려고 한 민족의 독립을 건다! 내부의 독점에 대해 당신은 외부의 독점만 대립시킬 수 있다. 여전히 독점인 것이다! 그래서 당신의 모순의 악순환에서 맴도는 것이다! 당신은 우리에게 노동이 노동을 교환할 것이라고 약속한다. 그리고 교환에서는 독점과 교환되는 것이 독점이라는 것, 그리고 노동의 적인 브렌누스(Brennus)가 슬그머니 저울에 칼을 올려놓았다는 것이 드러난다!

진실과 실재의, 법과 사실의 혼동, 전통과 진보의 적대가 최선의 정신들을 끊임없는 당혹함에 내던지는 그 당혹감은 바스티아 씨에게서 가장 통속적인 실제의 사물들에 대한 분별력까지 빼앗은 듯하다. 다음은 그가 자신의 논제를 증명하려고 보고하는 사실이다.

한 제조업자가 맨체스터의 상공회의소에서 이렇게 말했다. “옛날에 우리는 직물을 수출했습니다. 그리고 이 수출은 실 수출에 자리를 내주었습니다. 실은 천의 원재료입니다. 그 다음에는 실의 생산 장비인 기계 수출에 자리를 내주었습니다. 나중에는 우리가 기계를 제작하는 데 들어가는 자본의 수출에, 끝으로 우리가 가진 자본의 원천인 우리 일꾼들과 산업의 재능을 가진 이들의 수출에 자리를 내주었습니다. 이 모든 노동 요소들은 차례로 작동시키기에 가장 유리하다고 보이는 곳, 생존이 더 저렴하고, 생활이 더 쉬운 곳에서 작동해 왔습니다. 그리고 오늘날 프로이센, 오스트리아, 작센, 스위스, 이탈리아에서 엄청난 제조업들이 영국 자본을 가지고 창설되어, 영국 일꾼들을 고용하고 영국 엔지니어들에 의해 경영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야말로 자유무역의 경이로운 정당화 이유가 아닌가? 프로이센, 오스트리아, 작센, 이탈리아는 세관의 보호를 받고 보유 금속의 수량이 미미해 그 구매에 제한을 받아 영국의 산물을 할인 혜택 아래서만 받아들였고, 지불할 수 있던 것만을 취했다. 영국 자본들은 족쇄가 채워지고, 견딜 수가 없어서 자신의 나라를 빠져나가 이 접근 불가능한 나라들에 귀화해서 오스트리아 자본, 프로이센 자본, 작센 자본이 되어 해외 이주로써 그 운명의 불의를 교정해간다. 과거에 이 자본들을 멀리했던, 그리고 지금은 그들을 보호하는 바로 그 세관들의 보호 아래, 자본 보유자들이 노동에 별로 소질이 없기 때문에 원주민들의 노동의 도움을 받아 그 자본들은 시장을 장악하고, 모국에 경쟁을 걸고, 연이어서 그 모든 산물을 우선은 직물을, 그 다음은 실을, 그러고 나서는 기계를, 그러고 나서는 특히 위험한 것, 고리대를 격퇴한다. 그리고 노동 조건의 이 평준화 작업에서, 각 민족이 그 이웃의 산물을 교환의 평등 조건 아래서만 받아들일 필요성, 이웃의 자본을 대여가 아닌 투자의 명목에서만 받아들일 필요성을 소리 높여 알리는 이 사실에서 무역 자유를 편드는 논리를 발견한다! 내가 아무것도 더 이상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든지, 아니면 바스티아 씨가 연합과 임금 제도, 대금업과 합자회사같이 극히 어울리지 않는 것들을 새삼 혼동하든지 하는 것이다.

무역수지 균형 이론에서, 다른 모든 이론에서와 마찬가지로 경제학자들을 길 잃게 한 모순은 그 때문에 바스티아의 정신을 타격했다. 한때 그는 그 현상의 두 측면을 파악하는 듯했다. 유감스럽게도 논리는 프랑스에서 아직 별로 알려지지 않은 것이어서 원리들의 대립이 그로 하여금 종합해 결론을 짓도록 했지만, 그는 하나가 거짓으로 입증된다면 다른 하나는 필연적으로 참이라는, 수학에서만 참이 되는 수학자의 공리와 관계를 맺었다.

그는 이렇게 말한다. “사람은 소비하기 위해 생산한다. 그는 생산자이면서 소비자다. … 그러므로 우리가 개인적 이익을 고려한다면, 우리는 그 이익이 이중적임을 분명하게 인식한다. 판매자로서 우리는 고가격, 그리고 결과적으로 희소성에 이익을 가진다. 구매자로서는 저가격, 혹은 같은 것인, 물건의 풍부함에 이익을 가진다.”

거기까지는 관찰과 추론상 흠잡을 데 없다. 그러나 난점이 생겨나는 것이 바로 그 지점이기도 했다. 바스티아 씨의 통찰력에 설치된 올무는 기만적인 이 대립 아래 숨겨져 있었다. 실제로 나는 생산자인 나와 소비자인 내 이웃 간에, 혹은 그 반대의 경우에도 어느 편을 들지 말하지 않는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그 문제를 인격화해서는 안 되며, 오히려 이를 일반화할 필요가 있다. 그러므로 동시에 소비자들이기도 한 한 민족의 생산자들과 또한 그 생산자들이기도 한 바로 이 민족의 소비자들 간에 어느 편을 들까? 논리가 없을 때는 상식이 이 범주들 중 이것 또는 저것을 선호하는 것이 터무니없는 일이라고 말해준다. 이 범주들은 카스트가 아니라 상관적 기능들을 지칭해 똑같이 모든 사람을 포괄한다. 그러나 정치경제학이라는 이 불화의 과학은 이런 총체로써 사물을 볼 줄 모른다. 정치경제학에서는 사회 안에 이익과 권리상 대립하는 개인들밖에 없다. 불행히도 바스티아 씨는 감히 선택을 했고, 길을 잃었다.

“두 이익이 서로 모순되니, 그중 하나는 필연적으로 사회 이익 일반과 일치해야 하고 다른 하나는 이에 상반되어야 한다. …” 그리고 바스티아 씨는 소비자의 이익이 생산자의 이익보다 일반적으로 더 사회적이므로 정부들은 이런 측면에서 보호 조치를 기울여야 한다는 것을 아주 길게, 그리고 아주 현학적으로 증명한다. 나는 이 질문을 자격 있는 독자들에게 제기하노니, 지금 경제학자들에게 결여된 것이라고는 추론할 줄 아는 것임이 입증되었는가?

당신 스스로 이것을 말했다. 소비자의 이익은 생산자의 이익과 사회 안에서 동일하다고, 결과적으로 국제무역의 문제에서 개인에 대해서처럼 사회에 대해서 추론할 필요가 있다. 그러면 당신은 이 두 이익을 어떻게 서로 분리할 수 있었나? 당신은 한 소비자가 그의 산물 말고 다른 물건을 가지고서 구매한다고 상상할 수 없다. 그렇다면 당신은 한 민족이 그 민족의 돈을 가지고 구매하든 그의 산물을 가지고 구매하든 상관없다고 어떻게 주장하는가? 이 체제의 결과가 생산 없는 소비, 즉 파멸이니 말이다. 소비자, 사회는 구입하는 것의 저가격으로부터 그 사회가 자신의 구매를 동등한 가치를 체화한 일정량의 산물로써 충당하는 만큼만 이익을 본다는 것을 당신은 어찌 잊는가?

나는 당신이 매달리는 것을 안다. 당신은 당신이 생산이라고 부르는 개별적 이익을, 당신이 소비라고 칭하는 사회적 이익에 대치시킨다. 그리고 당신이 최대 다수의 이익을 최소수의 이익보다 선호하므로, 당신은 생산을 소비에 제물로 바치기를 주저하지 않는다. 그리고 당신의 의도는 훌륭하다. 나는 이를 법적으로 인정한다. 그러나 당신은 구슬을 틀렸다고, 검은 구슬이라 말하기 원했을 때 흰 구슬 쪽에 투표했다고, 당신에게 사회는 이기주의로 파악되었고, 거꾸로 이기주의는 사회로 파악되었다고 덧붙인다.

자유무역에 열린 어떤 나라에서 수입과 수출의 차이가 단 한 품목에서 나온다고 가정하자. 그 품목의 생산은 보호가 되어 있었다면 그 민족을 이루는 3000만 명 중에 2만 명을 먹여 살린다고 하자. 당신의 체제에서 이 2만 명의 생산자들의 개별 이익은 3000만 명 소비자들의 이익을 이길 수 없고, 이겨서도 안 된다. 그리고 외국 상품은 받아들여져야 한다. 내 견해로는, 반대로 외국 상품은 토산품으로 변제될 수 있는 것이 아니라면 배척되어야 한다. 그리고 이는 단체 이익의 관점에서가 아니라 사회 자체의 이익에서 그렇다는 것이다. 나는 그 이유를 말했으며, 이를 두 마디 말로 환기하기만 하면 될 것이다. 화폐 가치는 뭐라고 해도 다른 가치와 같은 가치가 아니라는 것, 그리고 한 민족은 그 금속 자본을 가지고서, 가장 이상화되고 가장 굳건한 그 가치물을 가지고서 그 실체, 그 생명 그리고 그 자유를 상실한다는 것이다. 바늘에 찔린 상처 때문에 피를 계속 흘리는 한 사람은 물론 한 시간 내에 죽지 않을 것이고, 보름 안에 죽을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피의 유출이 목을 통해 생겨나든, 작은 엄지를 통해 일어나든 중요치 않을 것이다. 이처럼 독점적 이기주의에도 불구하고, 각자에게 그의 재물들, 그의 노동과 근로의 결실에 대한 완전한 처분권을 보장하는 소유 법률에도 불구하고 같은 민족의 구성원들은 모두가 연대해 있다. 정의의 관계이면서도 경제의 관계인 이 관계는 당신을 어떻게 벗어났는가? 당신은 당신의 글 속에서 튀어 오른 이율배반을 어떻게 감지하지 못했는가?

학파적 편견들의 한심한 효과다! 바스티아 씨는 사회의 거대한 지평 아래 자신이 위치한다고 믿으면서, 이기심이라는 좁은 관점에서 자유무역의 문제를 판단하면서 그 본질상(나는 세관의 변칙성과 성가심을 결코 옹호하지 않는다) 토산품의 등가의 양도에 의해 외산품의 변제를 보장해주는 이론, 그것 없이는 외산품의 구매가 어떤 가격에서 이루어지든지 실상은 빈곤화일 뿐인 이론을 부족 이론théorie de la disette이라고 부른다. 그리고 그는 외부에서 오는 모든 상품들이 척도재로만 변제될 경우라도 그의 면세를 요구하는 이론을 풍요 이론théorie de la l'abondance이라 칭한다. 결국 금리 생활자들에게만 이익이 되고, 나태함을 강화하는 결과가 될 뿐인 이런 종류의 자유가 마치 교역 없는 소비, 방만한 향락, 자본의 파괴가 아니라는 듯이 말이다. 이 길로 일단 들어서면, 끝까지 이 길을 통해 가야 했다. 그리고 억제의 당파에 적용된 단지 그 저자에게 우스꽝스러운 시시포스주의sisyphisme라는 바로크적 호칭은 이 기나긴 욕설을 끝내려고 나왔다.

자유로운 독점 이론, 이는 일종의 풍요 이론이다. 아, 정말. 철학자들도 사제들도 존재하지 않는다면, 인간적 몰상식과 맹신을 재 보기에는 경제학자들로 충분할 것이다.

모든 관세를 동시에 폐지하라고 경제학자들은 말한다. 그리고 관세 인하가 일반적일 경우 모든 산업이 이익을 볼 것이다. 부분적 고통은 없을 것이다. 민족의 노동은 증가할 것이며, 당신은 외국인을 뒤쫓을 수 있을 것이다. 블랑키 씨가 화려한 논변으로 에밀 드 지라르탱 씨라는, 노동의 민족성 원칙을 수호하고자 한 우리나라 기자들 중 유일한 사람을 침묵시킨 것은 이런 유아적 이성을 가지고 한 것이다.

물론, 한 나라의 모든 산업인들이 원재료를 더 저렴한 가격에 조달할 수 있더라도, 그들 각각의 조건은 아무것도 달라지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이는 어떤 점에서 난점을 건드리는가? 각 민족 안에서 민간 산업들의 균형이 아니라 민족들의 균형이 문제다. 그런데 나는 위에서 행한 고찰을 다시 논한다. 이 일반적 인하, 이틀 치 노동과 동등한 가치로 과거에 우리에게 사흘이 걸린 것을 가지는 이 이득은 우리가 무엇의 덕을 보는 것일까? 우리 자신의 노력 덕분일까, 아니면 수입 덕분일까? 그 대답은 의심스럽지 않다. 이는 수입 덕분일 것이다. 그런데, 염가의 원재료가 외부에서 온다면, 원재료의 운송비용으로 증가한 우리의 노동을 외국의 산물에 더하게 되는데 우리가 어찌 외국인과 경쟁할 수 있을까? 그리고 외국인이 우리에게 누리게 하는 가격 인하가 우리를 그에 맞서 싸우는 상태로, 즉 그의 산물을 우리의 산물로 지불하는 상태로 둔다는 것이 모순을 내포한다면, 우리는 그의 발송품을 어떤 상품으로 변제할 것인가? 물론 우리의 돈으로 변제한다. 그렇다면, 돈이 다른 상품처럼 하나의 상품이라는 것을 증명하라. 아니면 모든 상품이 돈과 등가가 되게 하라. 그렇지 않으면 입을 다물라. 당신은 말썽꾼이고 경솔한 자일뿐이다.

곡물을 면세로 하자고 영국의 자유무역 연맹원들이 농부들에게 외친다. 그러면 서비스 가격이 어디서나 낮아져서 영국 밀의 생산이 덜 비싸질 것이며, 소작인, 지주 그리고 일용 노동자는 이익을 볼 것이라고 한다. 하지만 다시 한 번 말하노니, 이는 영구 운동 기관보다 조금도 덜하지 않으며, 이를 입증해 보일 가치가 있다. 영국에서 서비스의 가격 인하가 아메리카와 흑해산 밀 수입 때문이라면, 영국 밀의 생산은 어떻게 러시아나 아메리카 밀의 생산에 맞서 싸울 수 있을까? 결과가 원인을 어떻게 이길 수 있을까? 외국산 밀의 가격은 수요에 비례해 상승하지 않을까? 경쟁에 비례해 감소하지 않을까? 그것은 시장의 모든 진자 운동을 따르지 않을까? 영국에서 밀의 생산 비용이 아메리카 밀의 수입이라는 사실 때문에 10리터당 3프랑이 감축된다면 아메리카가 떠받치는 영국 생산은 아메리카에 그 가격을 처음보다 3프랑 더 낮추게 강제할 것이다. 하지만 영국은 결코 이런 수단으로 이득을 되찾을 수 없을 것이다. 내가 무슨 말을 하는가? 영국에서 모든 가격이 인하된다면, 영국 상품들의 가격 인하는 자신들의 곡물의 우수성을 점점 더 확신할 미국인들에게 이익을 줄 것이다. 다시 한 번 말하노니, 그 반대를 증명해보라. 아니면 당신의 말을 주워 담으라.

블랑키 씨는 말한다. 우리나라에 철, 석탄, 직물, 우리 노동의 모든 원재료를 도입하자. 그러면 우리 산업들 각각에는 사탕무 설탕이 보호관세를 벗어난 후에 그 생산에 일어난 일이 닥칠 것이다. 우리나라의 산업들은 능력이 증강될 것이다. 블랑키 씨의 단언에는 불행한 일이지만, 사탕무 설탕 제조자들은 이렇게 주장했다. 그들이 제조에서 획득한 진보는 해외 경쟁 덕분이 아니라 자신들의 노력 덕분, 자신들의 지능 덕분이라고, 이 진보는 한마디로 그들 자신의 기금에서 취했지, 외국인의 원조에서 취한 것이 아니라고 말이다. 블랑키 씨의 체제에서 보호는 가장 절제된 것이라도 한 나라의 산업에 해가 되어야 한다. 정반대로 보호 덕분에 이 산업은 (이 산업을 보장해주는 것은 이 산업 자신이다) 번영한다. 이처럼 몇 년 안에 아마 산업이 프랑스에서 9만 방추에서 15만 방추로 상승한 것을 보아 왔다. 그리고 상무부에 따르면, 6만 방추가 이 순간에 주문되어 있다. 달리 어떻게 그럴까? 프랑스의 설탕 산업을 앤틸리스의 설탕 산업과 연합시키지 않고, 어떻게 해외 산업의 저가격이 우리 산업의 전진을 도와줄 수 있을까? 한 사탕무 설탕 제조업자는 그 반대를 내게 말할 것이며, 나는 이를 믿지 않을 것이다. 블랑키 씨는 해외 경쟁이 자극제로 작용해 우리 산업을 더 창의적으로 만들 것이라고, 따라서 우리의 제조업을 더 성과 높게 만들 것이라고 단지 이해했는가? 이 경우에 해외 산물의 도입은 정부의 손 사이에 있는 상업적인 공안 수단일 뿐이다. 그렇게 실토하라. 그러면 그 대의大義는 이해가 된다. 더 이상 논쟁거리는 없다.

이번에 내가 무역의 절대적 자유를 가지고서는 민족들 간의 균형이 파괴되고, 균형이 없이는 진정한 부는 없으니 그러한 자유는 민족적이고 개인적인 독점의 유지와 함께 부의 원인이 아닐 뿐만 아니라 가격 상승과 부족의 원인이라는 것을 증명했다면, 경제학자들은 내게 이런 새로운 세심한 측면을 제기한 명예를 돌려줄 것인가?

프랑스는 자신의 포도주에 대해 어떠한 경쟁도 두려워하지 않는다. 온 세상이 프랑스 포도주를 요구한다. 이런 관계 속에서 보르도 사람들, 상파뉴 사람들, 부르고뉴 사람들은 무역의 자유로 이익을 볼 수밖에 없다. 나는 심지어 우리의 포도주 산업이 나라 인구의 5분의 1을 차지해 장벽의 완전 철폐가 우리에게는 이득의 거대한 모습으로 등장한다는 데도 동의한다. 그러므로 포도원 주인들은 만족할 것이다. 자유무역은 그들의 포도주 가격을 낮추는 효과를 가지지 않을 것이다. 정반대로 이는 그 값을 올리는 일일 것이다. 그러나 경작자들과 산업인들은 이 가격 인상에 대해 무슨 생각을 할 것인가? 인당 소비는 이미 파리에서는 95리터에 지나지 않는데, 60리터로 내려갈 것이다. 포도주를 커피 마시듯이 작은 커피 잔과 작은 유리컵으로 마실 것이다. 이는 프랑스인들에게는 끔찍할 것이다. 우리 포도주는 우리와 같은 토양에서 성장하는 바로 그 점 때문에 다른 사람들보다 우리에게 더 필요하다. 해외 판로는 이 포도주를 우리에게서 빼앗아갈 것이다.

그런데, 사람들이 우리에게 제공하는 보상은 무엇인가? 확실히 이는 영국과 벨기에의 포도주는 아니다. 더 실질적이지만 그에 못지않게 인민에게 접근 불가능한 포르투갈, 헝가리, 알리칸테나 마데이라산 포도주도 아니고, 홀란드의 맥주도 아니고, 알프스 오두막의 요구르트도 아니다. 우리는 무얼 마실 것인가? 우리는 철, 석탄, 철물류, 천, 수정, 육류를 더 저렴한 값에 가지게 될 것이라고 경제학자들이 말한다. 이는 말하자면 한편으로, 우리가 포도주를 더는 가지지 못할 것이고, 다른 한편으로 입증된 것처럼 우리가 외국인의 산물에 경쟁할 수 있는 것은 외국인의 산물로써가 아니니 일자리를 더는 가지지 못하리라는 것이다.

상호적으로 영국의 일꾼들은 자신들을 위해 빵, 포도주, 그리고 다른 식품들의 가격을 낮추어 갈 것이지만, 동시에 영국이 생산하는 석탄, 철 그리고 모든 물건들의 가격은 상승할 것이다. 그리고 해외 경쟁에 직면해 자신들의 일자리를 보전하기 위해 그들이 언제나 새로운 임금 삭감을 겪어야할 것이므로 그들에게는 프랑스의 일꾼들에게 닥친 것과 같은 일이 닥칠 것이다. 그들은 자신들의 산물도 우리의 산물도 구매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니 자유에서 누가 이익을 보았을 것인가? 독점자들, 오직 독점자들, 금리생활자들, 자본의 성장으로 먹고사는 모든 이들, 한마디로 빈자들을 만드는 모든 자들로서 이들의 카스트는 제1급 품질의 토지가 소작인에게 남겨주는 초과분, 가장 풍부한 광산이 광업인에게 남겨주는 초과분, 가장 생산적인 개발이 산업인에게 남겨주는 초과분을 삼키기에 충분히 수가 많아서 노동이 더 열등한 토지에, 그리고 더 열등한 개발 사업에 도달하는 것을 자신의 소득을 포기하지 않고는 허락할 수가 없다. 서로 맞물린 이 독점체들의 체제를 무역의 자유라고 부르는데, 이 안에서 생산 수단의 보유자는 일꾼들에게 이렇게 말하는 듯하다. 그대는 그대의 노동으로 내게 초과분을 남겨줄 수 있을 한에서 노동할 것이다. 그대는 그 이상 멀리 가지 않을 것이다. 자연은 각 지대의 거주자가 우선은 그의 자연 산물로 생존하기를 원했으며 그러고 나서는 그가 잉여의 도움으로 자기 나라가 산출하지 않는 물건들을 획득하기를 원했다. 반대로 독점의 구도 속에서는 노동자는 세계적인 한량의 농노에 불과하다. 폴란드의 농민은 영국의 주인을 위해 파종한다. 포르투갈인, 프랑스인은 세상의 모든 한량을 위해서 포도주를 생산한다. 감히 말하자면, 소비는 조국에서 추방된다. 노동 자체는 금리의 제한을 받아 협소하고 노예적인 특기로 전락해 더 이상 조국이 없다.

이처럼 교환 불평등이 장기적으로 구매하는 민족들을 파멸시킨다는 것을 발견한 후에 우리는 또한 그것이 판매하는 민족들도 파멸시킨다는 것을 발견한다. 균형이 일단 깨지고 나면 전복이 모든 부분에서 느껴진다. 빈곤은 그것을 초래한 자에게 반발한다. 그리고 전쟁에서 정복을 하는 군대는 결국 승리 중에 소멸하듯이, 무역에서 가장 강한 인민은 결국 가장 심하게 착취를 당하고 만다. 이상한 반전이다! 세는 우리에게 자유 교역에서 일체의 이득은 가장 많은 것을 받는 자에게 속한다고 말한다. 그리고 사실, 이득을 가장 적은 손해라는 의미로 받아들이면 세는 완전히 옳았다. 소비하지 않고 생산하는 것보다 생산하지 않고 소비하는 것이 고통을 덜 겪는 것이다. 모든 것을 상실한 후에 모든 것을 재탈환할 노동이 남는 만큼 더욱더 그렇다.

영국은 오래전부터 바스티아 씨가 지목한 그 A 나라다. 그 나라만으로 세계에 다수의 물건을, 그것도 다른 모든 나라들보다 더 나은 조건에서 조달할 능력이 있는 나라다. 여러 민족들의 불신을 도처에서 감싸는 관세에도 불구하고 영국은 자기 우수성의 결실을 거두었다. 여러 왕국들을 고갈시켰고 땅의 금을 자기에게 끌어왔다. 그러나 동시에 빈곤이 지구상의 모든 지점들로부터 영국을 찾아왔다. 못 들어보던 재산의 창출, 모든 소지주들의 갈취, 민족의 3분의 2를 빈곤한 카스트로 전환시킨 것, 이야말로 산업적 정복이 영국에 가져다준 것이다. 터무니없는 이론으로 여러 정신들에 변화를 주고, 악의 원인을 은폐하려고 노력해도 소용없다. 강력한 음모가 자유주의의 탈을 쓰고 경합하는 민족들을 파멸적인 혼동으로 끌어들이려 해도 소용없다. 사실이 여러 사회에 교훈을 주도록 남아있다. 그리고 언제나 정의에 대한 일체의 침해가 희생자와 동시에 강도에게도 타격을 준다고 확신하는 데는 이 사실들을 분석하는 것으로 충분할 것이다.

내가 무엇을 더 말하겠는가? 자유 독점의 추종자들은 자신들의 원칙을 끝까지 추구할 수 있는 데 대한 만족도 가지지 않으며, 그들의 이론은 그 자체의 부정에 다다른다.

곡물에 대한 조세에 이어서 영국이 우리의 대혁명의 길에 들어가서 모든 영지의 매각을 명하고, 오늘날 눈에 안 띄는 소수의 손에 집중된 토지가 영국 농업 인구의 상당 부분을 이루는 400만~500만의 주민들 사이에 나누어진다고 가정해보자. 확실히 이 절차는 이미 몇몇 경제학자들이 예견한 일로서 한동안 영국을 그 끔찍한 빈곤으로부터 구원해 주는 데 최상일 것이며, 강제 노동 수용소에 대한 행복한 보완물일 것이다. 그러나 이런 위대한 혁명적 조치가 시행되어 영국 시장이 계속 과거처럼 외부로부터의 곡물 및 다른 농산물에 열려 있게 된다면, 새로운 지주들은 자신들의 땅 위에서 살며 거기서 빵, 보리, 육류, 낙농품, 달걀과 채소를 얻지 않을 수 없고, 그들의 생산은 외국에서 수입되는 같은 성질의 물품 생산보다 비싸게 먹히니 교역을 할 수가 없거나 손해를 보면서 교역을 하게 되어, 내가 말하노니 이 지주들은 옛날 우리 농민들처럼 아무것도 구매하지 않고 스스로 자신들에게 필요한 모든 것을 생산하도록 채비를 갖출 것이다. 장벽들은 폐지될 것이다. 그러나 농촌 인구는 욕심을 억제해 마치 장벽들이 폐지되지 않은 듯 할 것이다. 그런데, 그러한 것이 보호 체제의 제1원인이었다는 것을 아는 데는 많은 통찰이 필요하지 않다. 경제학자들은 자신들의 수치와 웅변으로써 이 원을 어떻게 벗어나려고 생각하는지 말할 수 있을까?

화폐의 본질이 오해되어, 인상과 인하가 돈에 미치는 효과가 상품들에 미치는 효과와 아무런 분별도 없이 비견되고 독점이 산물들의 가치에 미치는 영향은 도외시되고, 이기주의가 어디서나 사회적 이익을 대체하고, 한량들의 연대가 노동자들의 연대의 폐허 위에 세워지고, 원칙 안에 모순이 있고, 무엇보다도 민족성이 특권의 제단 위에서 희생되는 것, 이런 것들이야말로 내가 틀리지 않았다면, 우리가 자유무역 이론에 관해 저항할 수 없는 증거를 가지고 부각시킨 것이다.

내가 아주 고귀한 경제학자들에게 이 유토피아에 대한 반증을 계속할 필요가 있는가? 나 자신이 극히 이상한 환각에 빠진 것이든지, 아니면 불편부당한 독자가 지금 아주 환멸을 느낀 것이 분명해서 적들의 논리가 그에게 아주 역겹게, 철학도 진정한 과학도 결여된 것으로 여겨져서 내가 겨우 그 이름들과 본문들을 인용하기를 감행하는 정도밖에 안 되는 것이다. 내 비평이 증거의 힘으로 결국 불손하게 된 것이 아닌가 생각한다. 그리고 공개적 토론으로, 어엿한 자존심을 자극하기보다는 나는 천 번이라도 그들을 회한의 정적 속에 방치해 두기를 택하겠다.

그러나 우리는 아직 모든 것을 말하지 않았다. 게다가 의견은 별로 명쾌하지 못하고 이름들의 권위는 우리 가운데 아주 강력해서 내가 이렇게 인정하는 것이 다행이라고 보는 바, 그 의도는 탁월하지만 그 수단들은 모순적이고 불길하다고 내가 주장한 학파에 맞서 싸울 수밖에 없는 치열함에 대해 사람들은 나를 용서할 것이다.

마티외 드 동발(Mathieu de Dombasles) 씨는 우리의 최상급 농학자들 중 한 사람으로서 보호 체제의 철학적 이유를 아주 잘 간파했다. 그리고 그는 독창성과 재치로 가득한 양식良識을 가지고서 장 바티스트 세의 이론에 맞서 싸웠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물론 상품들이 원시 사회들에서처럼 단순히 교환된다면 세 씨는 완전히 옳을 것이다. 그러나 상품들은 쌍방에서 판매되고 구매되어 왔다. 잔돈으로 쓰이는 금과 은이 있었고, 화폐가 차액을 변제했다. 그러면 저가격은 무엇이 중요한가? 우리가 우리의 구매에 대해 농산물이나 공산물이 아니라 귀금속으로 지불하는 순간부터 우리는 점차 우리의 토지 재산을 매각하며, 정말로 외국의 속국이 된다. 왜냐하면, 우리가 언제든 지불할 것을 가지기 위해서는 금과 은은 재매입하거나 담보를 잡게 할 필요가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첫 번째 입장은 상업에 의해서는 불가능하다. 그러므로 두 번째 입장이 남으며 이는 본래적으로 말해서 노예 신분이다.

뒤누아예 씨가 도덕 및 정치 과학 아카데미의 회의가 한창 진행 중일 때 분개해 일어난 것은 정치경제학 자체의 관념에서 끌어낸 이 반증 불가능한 연역에 반대해서다.

그는 화가 나서 이렇게 말했다. “동발 씨는 지성이 가장 강하고 가장 건전한 분들에 속하고, 우리나라의 가장 순수한 성품을 가진 분들 중 한 분으로서 다르구(d'Argout) 씨와 마찬가지로 보호 체제의 추종자다. 그러나 무오류인 것은 아무것도 없다. 그리고 가장 행복하게 재능을 타고난 이들이 오해를 받는 일이 생겨날 수 있다.”

별로 의원답지 못한 이런 암시는 왜 하는가? 판로 이론은 일체의 이성이 바보가 되고 싶지 않으면 자기 앞에 머리를 조아려야 했다는 것을 그리도 확신하는가?

사람들은 말할 것이다. 이 이론의 확실성은 도덕 및 정치 과학 아카데미에서 확보되며, 아카데미가 그에 대한 책임을 진다고. …당신은 왜 이런 말을 덧붙이지 않는가? 아카데미 밖에는 음모꾼, 말썽꾼, 혐오스럽고 뒤누아예 씨에게 회초리를 맞을, 그리고 레이보 씨가 쓸 전기의 주인공이 될 공산주의자들밖에 없다고.

이에 대해 나는 대답할 말이 없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공산주의적 유토피아의 침입에 대한 산업적 자유의 수호자인 도덕 및 정치 과학 아카데미에, 어떻게 다르구 씨와 동발 씨가 바로 공동체에 반대한다는 이유로 무역 자유에 반대하는 것이 되는 것인지를 질문할 것이다. 장벽을 낮추는 것은 노동자들의 공동체가 아니라면, 적어도 개발자들의 공동체다. 이는 벌써 평등의 시작이다. 그런데 다르구 씨와 동발 씨는 한 목소리로 자급자족chacun chez soi, chacun pour soi을 외친다. 우리는 근심이 충분히 많으며, 아무와도 약탈의 공동체에 들어가기를 원하지 않는다. 게다가 동발 씨는 이런 고찰도 한다. “이익들의 분화로부터 다양한 민족들 간에 실질적인 사회는 있을 수 없다는 결과가 나온다. 연이은 사회들의 단순한 군집밖에 없고, 그것밖에 있을 수 없다. … 민족들의 특수 이익 바깥에 인류의 일반 이익이란 무엇인가?”

명시적인 것은 바로 이런 것이다. 인민들 간 공동체는 불가능하므로 인민들 간 관세 폐지는 불가능하다고 동발 씨는 말한다. 그러면 다르구 씨, 동발 씨가 본능적으로 그런 것처럼 원리상 공동체의 적인 도덕 및 정치 과학 아카데미는 어떻게 자유무역의 문제에서 공동체의 편을 들었는가?

뒤누아예 씨는 말한다. “그 저명한 농학자는 그 체계를 사실로 바라보는 데 국한되지 않는다. 그는 이를 이론상으로 수호하기에 착수했다.”

이론과 실천, 실천과 이론. 이야말로 뒤누아예 씨가 하는 모든 추론의 중심 사항들이다. 이는 그의 구세주deus ex machina다. 날마다 경제 원리들은 사실에 입각해 반박된다. 실천. 원리들 덕분에 기정사실은 파멸적이다. 이론. 실천에 의거해 이론을 끊임없이 변명하고, 이론에 의거해 실천을 변명하면서 결국에는 상식을 무죄로 선언하고, 심판관은 언제나 스스로 옳다고 확신한다.

그러면 어떤 이론에서 뒤누아예 씨는 금수 문제에 관해 지주의 실천을 저버리고 공동체의 편임을 선언하도록 유도되었는가?

그는 말한다. “사실상, 무역 관계들이 활기를 띠기 시작한 시대부터 어디서나 외국 상품의 금지로 시작했다.”

우선 이 사실을 기록하자. 그리고 사실과 대립되는 이론을 옹호하면서 자신의 공산주의의 정당화를 유토피아로 시작한다는 것에 주목하자. 뭐라고! 도덕 및 정치 과학 아카데미는 연합에 관련된 논문 공모전에 관해 발표한 보고서에서 응모 경쟁자들이 역사를 너무 고려하지 않았다고 불평했으며, 이 보고서의 30분의 1에 해당하는 저자인 뒤누아예 씨는 역사에 반대되는 원리를 옹호하는 데 일생을 바친다! 그러므로 아카데미 회원이 되면서부터 역사는 더 이상 아무 의미도 없다!

“해외 경쟁을 물리치는 것만큼 자연스럽고, 허락되는 일도 없어 보였다. 인구의 탐욕적 본능, 정부의 세무 이익, 민족적 민첩성, 두려움, 증오, 질투, 복수와 보복에 대한 애호, 모든 종류의 악감정들이 이 수단의 사용으로 몰고 간 것 같다. 가장 악한 대의들을 뒷받침해 좋은 이유를 발견하는 데 언제나 능숙한 인간 정신의 자연적 명민함이 이 수단의 사용에 결국 색칠을 할 줄 알았던 것이다.”

이것이 바로 동발 씨처럼 취급된 인류다. 동발 씨는 스스로 보호주의자라고 선언한다. 이 사람은 아카데미의 견책을 받을 만한 타락한 천재다. 인류는 자유무역에 관해 뒤누아예 씨와 다르게 생각했다. 악당, 해적, 위조자의 종족으로서 간접세와 세관의 모든 해악을 입을 만한 종족이 인류다.

내가 그에게 이렇게 말하는 것을 허락해 주기를 바라며 말하건대, 뒤누아예 씨는 우리의 악의에 너무 많은 위력을 부여하며, 동시에 우리의 정신에 너무 많은 명예를 돌린다. 나는 우리의 기구들 중 어느 하나도 악한 생각을 타고났다고 믿지 않으며, 절대적 오류를 타고났다고도 믿지 않는다. 그리고 인간의 명민함의 절정은 사회적 결의에 대한 핑계를 사후적으로 발명하는 것이 아니라, 진정한 동기였던 것이 무엇인지를 발견하는 것이다. 보편적 찬성이 각 인민의 둘레에 보장의 원을 그린 것은 잘못한 일인가? 뒤누아예 씨가 그의 용어로 그 문제를 이렇게 제시했다면, 물론 그는 더 신중하게 답변했을 것이다.

“그 체제에 정당한 이유가 있었다는 것, 이는 논박 불가능하다. 나아가 일이 더 규칙적이고 더 합당한 흐름을 취했더라면 그랬을 것보다 확실히 무한히 덜한 진보이고, 특히 덜 행복하게 지도된 진보나마 그것이 일정한 진보를, 심지어 상당한 진보를 막지 않았다는 것, 이는 더구나 논박될 수 없다.”

그를 아주 나쁜 패거리에 넣어서 유감이지만, 뒤누아예 씨는 꼭 공산주의자들, 무신론자들처럼 사고한다. 물론 문명은 전진했다고, 물론 종교와 재산권은 나름 존재 이유가 있다고 그들은 말한다. 하지만 왕도, 사제도 없고, 가족의 기초인 재산권도 없다면, 타락과 육肉에 맞서 싸울 필요성에 대한 이 무서운 교리가 없다면 우리의 진보는 얼마나 더 빨랐을까! …부질없는 후회다. 금지 조치들은 그들 시대에 재산권, 왕정 그리고 종교와 같이 국가들의 치안의 필요 불가결한 구성 부분이며, 그 국가들의 번영의 조건 중 하나다. 그러므로 문제는 금지 조치들 그 자체를 논하는 것이 아니라, 또한 그것들의 운명이 다했는지를 아는 것이다. 가장 통속적인 이 비판의 원리를 오해한다면 도덕 및 정치, 역사 과학 아카데미의 회원이라는 것이 무슨 소용인가?

뒤누아예 씨는 그 다음으로 보호 체제에서 창조된 이익들의 갈라짐을 고발한다. 이는 사물을 정반대로 해석하는 것이다. 이익들의 갈라짐은 보호에서 태어난 것이 아니다. 그것은 노동 조건의 불평등과 독점에서 유래한다. 그것은 세관 설치의 원인이지 결과가 아니다. 인민들이 서로에 대해 자신을 보호하는 일에 유념하기 전에는 폴란드의 밀 평야처럼, 보르도 그리고 부르고뉴의 포도밭처럼 영국에 석탄과 철분을 함유한 침전물이 존재하지 않았는가?

“일정한 관련 속에서, 그리고 일정한 시기에 자극제로 작용한 다른 특권들의 예대로 금지 조치들은 장려책일 수 있었다고, 그것들은 자본가들의 망설임을 극복하고 이들이 유익하지만 운에 맡기는 사업들에 뛰어드는 것을 도왔다고 가정해도 된다.”

금지 조치들처럼 산업에 대한 자극제로 작용한, 그렇지만 금지 조치들과 마찬가지로 이론이 정죄하는 이 다른 특권들이 무엇인지를 질문해도 되는가? 어디서나 원래 우리는 독점을 만나게 된다고 로시 씨는 우리에게 말한다. 물건들의 자연 가격을 변화시키는 것, 그럼에도 무언의 합의에 의해 공고화되고 일반화되면서 재산권이 된 것은 이 독점이다. 그런데 재산권이 그 정당한 이유를 가졌다는 것은 논박 불가능하다. 나아가 그것이 일정한 진보를 막지 않았다는 것, 심지어 자극제로 작용했다는 것은 더구나 논박을 당할 수 없다. 그러나 재산권이 일정 지점까지는 사실로 설명이 가능하면서 원리이자 절대적 원칙으로 단언되는 것, 이야말로 내가 비일관성을 범하지 않으려면 금지 조치의 모든 적에게 금하는 것이다. 세 번째로 뒤누아예 씨는 공산주의자다.

뒤누아예 씨는 다음으로 그의 적들의 대열에 분열의 씨앗을 뿌리려고 한다.

“최근 기회에 민족적 사업의 이름으로, 그리고 민족적 사업의 이익을 위해 벨기에와의 무역 연맹에 격렬히 반대해 싸우는 일정 수의 산업들이 수많은 다른 이들에 의해 논박되고, 고발되고, 봉변을 당했다.”

거기에 무슨 놀랄 것이 있는가? 이는 자유와 보호의 이율배반이 비극으로 드러난 것이었다. 각 당파가 불관용과 자기 이익에서 나온 악의를 가지고 등장해 전투, 고함, 상해와 추문이 있었던 듯하다. 그러한 북새통 속에서 경제학자들의 역할은 누구의 편도 들지 않는 것이었다. 그들은 모두에게 어떻게 자신들이 얼간이였고 모순의 희생자였는지를 보여주어야 했다. 독점에 대항한 독점, 도둑들에 대항한 도둑들! 과학이 하는 평화의 말을 사람들이 듣기를 거절한다면, 과학은 물러서 있을 수밖에 없었다. 경제학자들은 일꾼의 권리가 문제일 때는 내부 독점의 옹호자들로서, 한량의 소비가 문제일 때는 해외 독점의 변론자들로서 이익들의 투쟁 이론을 찬성하는 입장을 취하는 데만 신경을 썼다. 이성을 말하는 대신에 그들은 불을 지폈고 금수론자들의 저주를 끌어들이고 그들을 더 완고하게 만드는 데만 성공했을 뿐이다. 그들의 행실은 이 상황에서 진정한 학자의 자격이 없었으며, 그들이 비난을 기고한 신문들은 그들의 믿을 수 없는 맹목성의 증거로 남을 것이다.

뒤누아예 씨는 말한다. “정부가 민족에게 혜택을 주는 것만으로 외국인들에 대해 적대적임을 드러낸다.”

이는 인도주의적 국수주의다. 이는 마치 유명한 격언, ‘저마다 자기 집에서, 저마다 자기를 위해’가 전쟁 선포라고 말하는 것과 같다. 그리고 의견이 분분함에도 불구하고 모두가 사회의 일들에서 어떻게 엮이는지를 보라! 우리 경제학자들이 영국의 자유, 우리의 발에 채워진 사슬을 벗기면서 우리의 팔을 자르는 이 자유를 품에 안는 것은 그 재상이 영국의 연합을 품에 안고 어떤 대가를 치르고서도 이를 수호하는 그 순간이다. …사적 이익도 민족적 이익도 욕하지 말자. 특히 우리나라를 너무 사랑하는 것을 조금도 두려워 말자. 나는 뒤누아예 씨가 이에 충격을 받지 않은 것에 놀랐는데, 동발 씨는 각별히 실천적인 이성을 가지고, 간단한 양식良識이 민족들에게 일찌감치 자신들이 소비하는 물건을 외국인에게서 구매하기보다 생산하는 것이 더 낫다는 것을 느끼해 해주었다고 말했다. 왜냐하면, 외국 상품들의 초과분의 거절은 아주 간단히 자신의 소득과 더불어 자신의 기금을 먹어 치우기를 거부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오늘날 혼란이 초래된 환상, 모든 것을 스스로 생산한다는 환상에 대해 말하자면, 그것은 여전히 우리가 가지는, 상업적 봉건제의 이 감염에 대한 유일한 보장책이라는 것을 제대로 인정할 필요가 있다. 상업적 봉건제는 영국에서 태어난 후에 콜레라처럼 유럽에 침투하려는 위협을 가한다.

그러나 자유무역 이론은 구별도 유보도 인정하지 않는다. 이것에는 토지와 노동 수단의 독점과 더불어 시장의 공유, 즉 귀족 집단의 결탁, 노동자들의 일반적 예속, 빈곤의 보편성이 필요하다.

뒤누아예 씨는 보호가 인민들 간 경쟁의 행복한 효과를 멈추며, 이로써 산업의 일반적 진보에 장애물을 놓는다고 불평한다.

나는 벌써 이와 관련해서, 금수의 문제가 상업적 고급 공안의 문제이며, 언제 금수를 확대해야 하는지, 언제 이를 제한해야 하는지 판단하는 것은 정부의 일이라고 대답했다. 게다가 금수 체제가 인민들 간에 경쟁을 제거해 문명으로부터 그 행복한 효과를 빼앗는다면, 이는 동시에 문명을 그 파괴적 효과로부터 보전해 준다는 것이 명확하다. 상쇄가 있다.

끝으로 뒤누아예 씨는 보호주의의 요새에 자신의 논리의 해자를 두른 후에 공격을 감행하기로 결심한다. 다음은 우선 그가 그의 적들의 이유를 어떻게 고려하는가 하는 것이다.

“같은 나라의 내부에서 모든 광산들은 똑같이 용이하게 개발될 수 없다. 모든 경작자들은 똑같이 비옥한 토양을 경작하지 못한다. 모든 공장이 똑같이 좋은 위치를 잡은 것이 아니다. 모든 공장이 무료의 자연 동력을, 혹은 같은 출력의 동력을 활용하지 않는다. 모든 공장이 똑같이 똑똑하고 잘 훈련된 인구를 고용하지 않는다. 조건들이 극히 동일한 곳에서 새로운 양식, 새로운 절차, 완벽화 그 어느 것이든 수많은 원인이 우발적으로 조건들을 달라지게 할 수 있다.”

아주 좋다. 음, 그렇다면! 이론은 무엇을 말하는가? 그의 상쇄의 체계는 무엇인가? 이 다양한 생산 수단의 소유가 벌써 독점이니 이론은 이 모든 독점들에 의해 창조된 불평등들을 평준화하는 데 어떻게 착수할 것인가? 당신의 동료 바스티아 씨의 표현에 따라 교역을 하러 오는 이 모든 생산자들 간에 그들 각자에 의해 그의 산물이 넣어진 노동은 어떻게 지불을 받는 유일한 물건일 것인가? 어느 날 파리에서 오렌지를 생산하는 자가 어떻게 같은 때에 포르투갈에서 오렌지 한 상자를 생산하는 자만큼 부유할 것인가? 왜냐하면, 당신에게서 대중의 양식이 기다리는 것이 바로 이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는 금수 체제의 정당화 논리는 아니라 해도 그것의 원리이고, 구실이다.

이론들의 공허함! 뒤누아예 씨는 물러선다. 힘껏 어려움을 이겨내는 대신 그는 어려움이 존재하지 않음을 확인하려 한다. 그리고 그의 이성은 경제학자들이 상상한 가장 강력한 것임을 우리는 당연히 시인할 필요가 있다. 세관이 모든 나라들의 내부에서, 프랑스, 독일, 아메리카 등에서 폐지되었다고 그는 말한다. 그리고 이 나라들은 상태가 좋았다. 모든 인민들 간에, 외부에서도 마찬가지로 왜 그렇지 않을 것인가?

아! 당신은 왜냐고 묻는다! 즉, 당신은 그만큼 기정사실의 의미를 모른다는 것, 당신이 그 완성을 촉발하는 사실들의 의미를 예견할 줄 모른다는 것이다. 그리고 당신의 모든 이론은 모호한 유비에 의존한다! 당신은 일어난 일을 보지 못했고, 듣지 못했고, 이해하지 못했다. 그리고 당신은 일어날 일에 대해 예언자의 확신을 가지고서 말한다. 당신은 왜 내부처럼 외부에서도 세관을 폐지하지 않을지를 묻는다! 나는 당신의 질문에 세 마디 말로 대답하려고 한다. 인민들 간에는 독점들의 공동체도, 부담의 공동체도 없다는 것, 각 나라는 그 품 안에서 독점과 조세들에 의해 발달한 빈곤을, 외국인의 독점과 조세 조치에 의거해 더 악화시키지 않아도 충분히 가진다는 것이다.

나는 민족들 간에 그들 각각의 영토에 대한 독점에서 오는 불평등에 관해 충분히 말했다. 그러므로 여기서는 조세의 관점에서 자유무역의 문제를 고려하는 데 국한할 것이다.

문명화된 사회에서 생겨나는 모든 유익한 서비스는 이 산물이 공적 부담들 중에 지원하는 비례적 몫을 나타내는 일정 조세의 부담을 지고서 소비에 도달한다. 이처럼 생테티엔에서 스트라스부르로 보내진 석탄 1톤은 모든 비용을 포함해서 30프랑의 비용이 든다. 이 30프랑 중에서 4프랑은 수운세라 불리는 직접세를 나타내며, 이는 생테티엔에서 스트라스부르로 가는 데 석탄 산물이 지불해야 하는 것이다.

그러나 4프랑의 금액은 석탄 1톤이 지불하는 모든 부담을 나타내지 않으며, 내가 석탄의 간접세라고 부를 것으로서 또한 계산에 넣는 것이 타당한 다른 비용들도 있다. 실제로 26프랑은 스트라스부르에 제공된 석탄의 총가액의 필수 요소를 이루는 것으로, 광산을 개발하는 자본가에게 전액이 지불되는 이자에서부터 배를 목적지까지 이끄는 역마 담당자와 수운업자에게 돌아가는 임금으로 구성된다. 그런데 이 임금들은 또 분해되어 마찬가지로 두 부분으로 나누어지는데, 하나는 노동의 가격인 부분이고, 다른 하나는 조세에서 각 노동자의 납부 몫을 나타내는 부분이다. 그래서 이 분해를 될 수 있는 대로 멀리 추진하면 아마도 발견하게 될 것은 30프랑에 팔리는 1톤의 석탄이 그 상업적 가치의 약 3분의 1, 즉 10프랑의 세 부담을 진다는 것이다.

그 나라가 생산자들에게 이례적인 비용을 부담시킨 후에 그들의 산물을 그 나라에 아무 지불도 하지 않은 외국 생산자들의 산물보다 우선 구입하는 것이 정당한가? 나는 아니라고 답할 테면 해 보라고 누구에게든 도전한다.

프로이센의 석탄을 25프랑에 가질 수 있을 스트라스부르의 소비자가 30프랑을 지불하는 프랑스에서 조달할 의무를 지거나 프로이센의 석탄을 획득하기 위해 새로운 세금을 납부할 의무를 지는 것이 정당한가?

이는 이렇게 질문하는 것과 같다. 스트라스부르의 소비자는 프랑스에 속하는가? 그는 프랑스인 자격에 부속하는 권리를 누리는가? 그 자신은 프랑스를 위해서 그리고 프랑스의 보호 밑에서 생산하는가? …그러므로 그는 그의 모든 동포들과 연대 관계를 가진다. 그리고 그들 고객층이 프랑스 사회의 보호 아래서 획득된 것처럼 그의 개인적 소비도 그들의 판로 일부를 이룬다. 그리고 이 연대성은 회피할 수 없다. 왜냐하면 그것이 존재하기를 그치기 위해서는 정부를 제거하고, 행정, 군대, 법무 그리고 모든 그 부속물들을 제거하고 산업인들을 그들의 자연 상태에 다시 처하게 하는 것으로 시작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이는 명백히 불가능한 일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우리의 민족 자본을 지탱 불가능한 무역에서 상실하고 싶지 않다면, 외국인에 맞서 집단을 이루도록 의무를 부여하는 것은 부담의 공동체이며, 프랑스 사회의 경제적 조건이다. 나는 새로이 시민적 연대성의 이 원리에 누구든 반대론을 펴 보라고 도전한다.

그러므로 국내 세관들이 프랑스에서 폐지되었을 때, 민족적 독점체들의 중앙 집중의 주된 결과들 중 하나였던, 그리고 86개 도départements 사이에 무역 자유의 이득을 크게 감소시키는 빈곤의 증대는 논외로 하고, 바로 이 도들 사이에는 조세의 비례적 배분과 부담의 공동체가 있었다. 그래서 부유한 지방들은 더 납부하고, 가난한 지방들은 덜 납부해 지방들 간에 일정한 상쇄가 행해진 것이다. 여느 때처럼 부의 증대와 빈곤의 진전이 있었다. 하지만, 적어도 모든 것이 호혜적이었다.

지구상의 민족들 간에는, 그 민족들이 여러 정부들로 나누어지고 비연대적인 동안에는 그와 같은 일은 일어날 수 없을 것이다. 경제학자들은 물론 군주들에게 전쟁을 걸고, 왕조들을 전복하고, 여러 정부들을 도시 집행관의 기능으로 전락시키고, 국가들의 구분을 보편적 왕정으로 대체하겠다는 의도를 지니지 않는다. 그들은 인민들을 연합시키는 비밀, 즉 경제적 모순들을 해결하고 자본을 노동에 종속시키는 비밀을 훨씬 더 모른다. 그런데 이 모든 조건들을 결합할 것이 아니라면 무역의 자유는 민족들에 대한, 노동계급에 대한 음모에 불과하다. 누군가가 내게 설득력 있는 이유를 들어 이 문제에서 나머지 모든 문제에서처럼 내가 틀렸다는 것을 증명한다면 나는 행복할 것이다.

그러므로 보호가 필요성에 의해 명령되고, 전쟁 상태에 의해, 즉 여러 독점들의 보편적 인정에 의해 정당화되는 것을 본 후에 세관의 문제를 토론하지 않을 수 없어 우리는 이 문제가 여전히 정치경제학과 법에 기초를 둔다는 것을 다음과 같이 발견한다. 세관의 존재는 민족 독립에, 그리고 재산권의 헌법적 보장에 연결되는 것과 마찬가지로 조세의 징수, 그리고 시민적 연대성의 원리에 긴밀히 연결된다.

그러므로 나는 어째서 보호를 요구하는 산업인들을 단지 이기주의와 독점으로 고발할 것인가? 자유를 달라고 외치는 자들은 그럼 그렇게 순수한가? 어떤 이들이 그 나라를 착취하고 약탈하는 동안에 나는 나라를 팔아먹는 것만 생각하는 자들을 구원자로 간주할 것인가? 그리고 내가 내 입장에서 친영파 관세 폐지론자들을 반역 행위로 고발할 이유는 조금도 없을까? 이와 관련해서 나는 동발 씨의 명예로운 한 마디를 환기할 것인데, 이는 내게 가슴 위의 납덩이와 같이 남아 있었으며 나는 그 신비를 결코 간파하지 못했다. 그는 슬픔을 품고 이렇게 적었다. “나는 어느 프랑스인이 이 주제에 관련된 질문들 몇 가지에 대해 말하고 싶어 하는지, 혹은 아예 온전한 진리를 발견하고 싶어 하는지 모르겠다.”

세관은 민족과 민족 사이에 무역이 확립되는 곳 어디서나 존재한다. 야만 민족들도 문명인들과 마찬가지로 세관을 실행한다. 세관은 역사에서 산업과 동시에 나타나기 시작한다. 그것은 노동 분업, 기계, 독점, 경쟁, 조세, 신용 등과 같은 명목으로 사회의 구성 원리들 중 하나다. 나는 그것이 언제나 지속되어야 한다고, 적어도 그것의 현재 형태로 지속되어야 한다고 말하지 않는다. 하지만 나는 그것을 생겨나게 한 원인이 언제나 지속될 것이라고 단언한다. 따라서 거기에는 사회가 영구적으로 해결해야 하는, 그리고 이 해결의 밖에는 여러 사회들에 기만과 상호적 빈곤만이 있게 되는 이율배반이 있다고 단언한다. 정부는 명령을 내려 그 관세선들을 폐지할 수 있다. 이 폐지는 원리상으로 무슨 의미가 있으며, 우리가 그 기관器官들일 뿐인 숙명에 무슨 의미가 있는가? 노동과 자본의 적대가 그것으로 누그러질 것인가? 그리고 세습 귀족과 프롤레타리아트의 전쟁이 일반화될 것이므로, 풍요와 빈곤의 전파가 더 이상 장애물을 만나지 않을 것이므로, 신하 신분의 사슬이 그물처럼 세상에, 그리고 단일한 후원 아래 군집한 모든 민족들에 던져질 것이므로 산업적 연합의 문제가 풀렸고 사회적 균형의 법칙이 발견되었다고 감히 말할 것인가?

몇 가지를 더 고찰하고, 벌써 너무 길어진 이 단락을 끝맺겠다.

우리의 모든 경제학자들 중 가장 인기가 있는 사람이지만, 동시에 교역의 절대 자유의 가장 열렬한 촉진자인 블랑키 씨는 그의 책 『정치경제학사Historie de l'économie politique』에서, 에스파냐의 왕들인 카를 5세와 펠리페 2세가 정책의 기준으로서 무역 균형의 체제와 그 필수 불가결한 보조물인 세관을 처음으로 채택했다고 해서 후세의 저주를 받게 했다. 확실히 이 비행非行으로 카를 5세와 펠리페 2세가 티베리우스와 도미티아누스보다 나빴다고 하더라도, 그들이 에스파냐 전체와 유럽 전체를 공범으로 두었다고 시인할 필요가 있다. 후세의 눈으로 볼 때 그들의 범죄를 경감해야 하는 상황인 것이다. 이 군주들이 그들 세기의 대표자들로서 그들의 배타적 민족성 체제에서 그렇게 크게 잘못했는가? 블랑키 씨가 우리에게 대답할 것이다.

그는 어떻게 에스파냐가 신세계의 발견이 그 나라에 가져다준 엄청난 부 덕분에 옛 산업에서 휴식을 취하면서 우선은 무어인들을 추방하고, 다음으로 유대인들을 추방하고, 마지막으로 그 음란함과 게으름 때문에 짧은 시간 내에 멸망했고, 모든 민족들 중에 가장 궁핍한 민족이 되었는지를 보여 주기 위해 한 장章을 할애한다. 언제나 구매를 하고, 결코 판매를 하지 않아서 에스파냐는 그 운명을 피할 수 없었다. 블랑키 씨는 이를 말하고 이를 증명한다. 이는 그의 저작에서 아름다운 부분들 중 하나다. 카를 5세와 펠리페 2세가 어떤 수단으로든 에스파냐에 일하도록 강제할 수 있었더라면 그들이 에스파냐의 진정한 수호신, 조국의 아버지들이 되었으리라는 것은 진실이 아닌가? 유감스럽게도 카를 5세와 펠리페 2세는 사회주의자도 경제학자도 아니었다. 그들은 20개의 조직 및 개혁 체계를 결코 가용한 것으로 가지고 있지 않았으며, 자본이 에스파냐에서 빠져나가는 것이 그리로 되돌아오게 하는 것의 4승을 한 것만큼 더 옳다고 믿지 않도록 했다. 그 시대의 모든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그들은 척도재가 빠져나가는 것이 민족의 부가 흘러나가는 것과 대등하다는 것, 언제나 구매하고 결코 판매하지 않는 것이 망하는 가장 손쉬운 길이라면 많이 구매하고 적게 판매하는 것은 덜 급속하지만 마찬가지로 확실한 멸망의 인자임을 모호하게 감지했다. 그들의 배타적 체제, 혹은 더 제대로 말해 노동에 대한 강제권 체제는 성공하지 못한다는 것에 나는 동의한다. 그러나 나는 다른 체제를 활용하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주장한다. 나는 이에 관해 블랑키 씨가 가진 그 모든 창의적 지략에 호소한다.

두 가지가 에스파냐 왕들에게 결여되었다. 금을 맡은 민족에게 일을 시키는 비밀, 이는 금을 만드는 비밀보다 아마 더 알 수 없는 비밀이다. 그리고 종교가 모든 것에 우선하는 나라에서의 종교적 관용의 정신이다. 풍요로운 가톨릭 국가 에스파냐는 그 나라의 종교와 예배 행위 때문에 미리 저주를 받았다. 카를 5세와 펠리페 2세가 세운 장벽들은 백성들의 게으름으로 뒤집어져서 외국의 침입에 약한 저항만을 했으며, 두 세기가 못 되어 영웅들의 인민이 라사리요(Lazarillo)[6]의 인민으로 변해 있었다.

블랑키 씨는 에스파냐가 교역 때문이 아니라 그 무행동 때문에, 장벽들의 폐지 때문이 아니라 장벽들을 세움에도 불구하고 가난해진다고 말할 것인가? 블랑키 씨는 아주 훌륭하고 아주 열띤 웅변으로 별일도 아닌 것들을 부각시킬 줄 아는 자로서 이런 반론을 제기할 능력이 있다. 장벽을 세우는 것을 예방하는 일은 내 의무다.

생산하지 않고 소비하는 것은 제대로 말해서 파괴라는 점, 따라서 비생산적 방식으로 돈을 쓰는 것은 파괴라는 점, 이런 목적으로 자신의 상속지를 걸고 돈을 빌리는 것은 파괴라는 점, 손해를 보고 일하는 것은 파괴라는 점, 손해를 보고 판매하는 것은 파괴라는 점에 사람들은 동의한다. 그러나 내놓을 수 있는 상품보다 더 많은 상품을 구매하는 것은 여전히 손해를 보면서 일하는 것이고, 자신의 상속 재산을 먹어 버리는 것이며, 자신의 재산을 파괴하는 것이다. 이 재산이 밀수입으로 달아나든, 정식 계약으로 달아나든 무슨 상관인가? 세관이든, 장벽들이든 무슨 상관인가? 문제는 자신이 세상의 주인이 되게 해주는 상품, 노동과 교역을 통해서만 되돌아오게 할 수 있는 상품을 양도하면 자신의 자유를 매각하는 것임을 아는 것이다. 그러므로 나는 에스파냐가 카를 5세와 펠리페 2세 치세에 자신의 금을 외국 산물과의 교역에서 내주는 데 국한한 경우 행한 일을, 우리가 2억 프랑의 외국 산품을 1억6000만 프랑의 국내 산품 더하기 4000만 프랑의 우리 화폐와 교환할 경우에 우리 자신이 행하는 일과 동일시할 권리가 있다.

경제학자들은 원리들에 관해 너무 다급한 처지에 있을 때, 세세한 사항들에 몰두하고, 소비자의 이익과 개인의 자유에 관해 서툰 말장난을 하고, 인용문들로 우리를 현혹한다. 그들은 세관의 남용, 그 번거로움, 그 기분 상함을 고발한다. 그들은 언제나 독점의 더 큰 자유로 결론을 맺기 위해 독점과 분리 불가능한 악을 부각시킨다. 블랑키 씨는 한 저명한 기자에게 무궁무진한 재치로 대답해, 세관이 거머리 한 마리에 5상팀을 징수하고, 독사 한 마리에 15상팀, 기나나무 1파운드에 25상팀, 감초 1킬로그램에 마찬가지 액수 등을 징수하는 것을 보여주면서 독자들을 아주 웃겼다. 모든 것이 납세 물품이라고, 건강한 자를 불행하게 만드는 치료 수단까지도 관세를 납부한다고 그는 썼다. … 블랑키 씨는 우리가 먹는 육류에까지, 우리가 마시는 포도주에까지, 우리를 감싸는 직물류에까지 무엇을 더하지 않았는지? 하지만 왜 무언가가 관세를 납부할 필요가 있는데, 모든 물건이 관세를 납부하지 않을 것인가? 그러므로 과장하고 말장난을 하는 대신, 끝으로 어떻게 국가가 조세 없이 유지될 것인지, 어떻게 인민이 노동 없이 생존할 것인지를 말하라!

바닷가에서 이용되는 철물과 철판의 경우에, 샤를 뒤팽 씨가 보조금 체제를 농상업 일반 협의회에서 강조한 것에 대해 「주르날 데 제코노미스트」 지는 1846년 1월호에서 이렇게 성찰했다. “샤를 뒤팽 씨는 항해의 모든 필요를 충족하기 위해 프랑스에 충분히 많은 공장이 있다고 주장한다. 문제는 거기 있지 않다. 이 공장들은 벨기에나 영국에서와 마찬가지의 저가격에 철을 제공할 수 있으며, 제공하려고 하는가?”

문제는 바로 그것이다. 한 민족이 노동을 해서 생존하느냐 아니면 돈을 빌려서 죽느냐 하는 것이 상관없는 일인가? 프랑스가 외국인에게서 낮은 가격에 취할 모든 것을 스스로 생산하기를 포기해야 한다면, 우월한 산업들도 포기하지 않을 이유가 없다. 그리고 우리가 우리를 외면하는 고객층을 다시 우리에게로 불러오기 위해 행하는 모든 노력은 아주 오해를 받는다. 끝까지 추진된 금지 원칙은 뒤사르(Dussard) 씨가 말했듯이 외국 산품을 심지어 무조건 거부하는 데까지 나간다. 하지만 반反 금지 원칙은 다른 한편으로 더 저렴한 가격에서도 민족의 노동을 그치게 하는 데까지 나간다. 그리고 경제학자들은 그 대안을 넘어 오르는 대신에 그 대안을 수용하고 선택한다! 얼마나 가엾은 과학인가!

경제학자들의 아우성을 가장 많이 일으킨 정책적 조치는 영국에 맞서 나폴레옹이 착수한 대륙봉쇄였다. 이 전쟁 기계 안에 있던 거대하면서 사소한 것은 치워버리자. 이 기계는 의문의 여지없이 방진方陣 수비와 같은 정확성을 가지고 조정하는 것이 불가능했던 것이지만, 그 원리에서는 완벽하게 설계된 것이다. 이는 내 생각으로는 나폴레옹의 천재성을 보여주는 가장 놀라운 증거들 중 하나다. “그 행동은 내게 유리한 것으로 판명되었다”고 그는 세인트헬레나에서 말했다. 그만큼 그는 자기 영광의 이 불멸의 명목에 가치를 부여했으며, 그만큼 그는 워털루에서 패전하면서도 적의 가슴을 단칼에 찔러 죽였다는 생각으로 유배지에서 위안을 삼기를 좋아했다.

「주르날 데 제코노미스트」(1844년 10월)는 나폴레옹을 정당화해 주는 모든 이유들을 모은 후에, 그 행동이 나폴레옹에게 해가 된 것으로 판명되었다는 결론을 끌어낼 수단을 발견했다. 그 잡지가 제시한 동기들은 다음과 같은 것들이다. 나는 아무것도 변경하지 않고 과장하지도 않는다.

대륙봉쇄는 유럽이 그 혼수상태에서 벗어나지 않을 수 없게 했다는 것, 그 황제의 통치 시기에서부터 대륙의 산업적 움직임이 비롯된다는 것, 이 새로운 사태 전개에 따라 프랑스, 에스파냐, 독일, 러시아가 영국의 물품 조달 없이 지내기를 배웠다는 것, 나폴레옹이 상상한 배제 체제에 맞서 봉기한 후에 그 나라들은 저마다 자신의 입장에서 이를 활용하기 시작했다는 것, 단 한 사람의 생각이 이와 같이 모든 정부들의 생각이 되었다는 것, 영국을 그 산업에서만이 아니라 그 금수적인 장치들에서도 모방하면서 그들은 어디서나 국내 제조업자들에게 자국 시장을 남겨준다는 것, 그래서 영국은 나폴레옹이 갱신한 이 보편적 봉쇄로 인해 어느 때보다 심각하게 위협을 당해 판로를 잃게 될 각오를 하고, 이제 장벽의 철폐를 소리 높여 요구하고, 절대적 무역 자유를 위한 괴상한 회담들을 소집하고, 이 전술적 변화에 따라 관세 폐지 운동에 숙적 관계인 민족들을 끌어들이려 노력한다는 것이다. 허스키슨(Huskisson) 씨는 자치공동체 회의chambre des communes에서 이렇게 말했다. “보호 체제는 영국에게는 시효가 끝난 발명 특허다.” 동발 씨는 이렇게 대답한다. “그렇다. 그 특허장은 공유 재산으로 들어왔다. 그 이유 때문에 영국은 이를 더 이상 원하지 않는다.” 나는 이것이 영국이 그것에 어느 때보다 더 집착하는 것을 정확하게 증명해 준다고 덧붙여 말한다.

관세 폐지 동맹자들 측에서 우리 경제학자들을 가장 많이 건드리는 것은 이들이 모든 외국 산품에 대해 수입 관세의 폐지를 요구하고 그 반대는 요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 반대는 요구하지 않는다! 이는 방문권le droit de visite을 상기시킨다. 그 반대는 없다는 것이다! 우리 프랑스인, 독일인, 포르투갈인, 에스파냐인, 벨기에인과 러시아인은 어떻게 이런 무사무욕의 증거에 저항할 수 있는가?

관세 폐지 동맹의 변호자인 바스티아 씨는 이렇게 적고 있다. “그러한 끈질긴 노력, 그러한 진실한 열정, 그러한 생명력, 그러한 행동, 그러한 동의가 단 하나의 목적, 이웃 인민들을 속여서 함정에 빠뜨리는 목적만을 가진다는 것을 어떻게 상상하겠는가? 나는 관세 폐지 동맹의 웅변가들의 담화를 300편도 더 읽어 보았다. 나는 이 강력한 협회에서 발간한 엄청난 수의 신문과 팸플릿을 읽어 보았는데, 그러한 가정을 정당화해 줄 한마디 말도, 무역 자유를 위해서는 영국 인민에게 세계를 착취하도록 보장해주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을 그로부터 도출할 수 있는 한마디 말도 보지 못했다.”

바스티아 씨가 잘못 읽었거나 이해를 못 한 듯하다. 왜냐하면 관세 폐지 연맹의 발행물에서 관세 폐지 동맹원들의 수사修辭에 관해 바스티아 씨 못지않게 유식한 한 경제학자가 발견한 것은 다음과 같다.

“이 신문들, 이 팸플릿들은 미묘한 사항들과 궤변으로 오염되어 있다. 그것들은 많은 경우 같은 사람이 쓴 글인데도 서로 뻔뻔스럽게 모순을 이룬다.”

“관세 폐지 동맹원들은 인민을 향해 말할 때는 애덤 스미스를 근거로 삼아 말한다. 밀의 자유로운 수입은 빵 값을 낮출 것이며, 동시에 제조된 산물들의 상당한 수요에 따라서 노동 임금을 높일 것이다.”

“자본가들에게는 이렇게 말한다. 생필품 가격 하락은 임금을 낮추고, 판로의 크기에 비례해 우리의 이윤을 상승시킬 수 있게 해줄 것이다. … 게다가 임금 수령자들이 요구가 많은 이들로 드러난다면, 우리는 언제나 기계와 증기력의 도움으로 그들 없이 지낼 수 있을 것이다.”

“그들은 지주를 향해서 말하는가? 그럴 때 그들은 스미스는 놔두고 리카도를 취한다. 그들은 무역 자유가 영국의 밀 가격을 외국 시장들의 가장 낮은 가격 수준으로 낮추는 것이 아니라 반대로 외국의 밀이 영국 밀과 같은 수준이 되게 상승시키는 결과를 초래할 것임을 증명하려고 애쓴다. … 그리고 섬나라인 대영제국의 위치는 언제나 지주들에게 엄청난 특권, 독점을 보장해줄 것이다.”

“소작인들을 설득하기 위해서는 이렇게 말한다. 관세 폐지 동맹은 그들에 맞서서 싸움을 거는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독점으로 이익을 보는 것은 그들이 아니기 때문이다. 굶주린 자들에게 조세를 징수하는 것은 지주다. 밀에 대한 관세를 폐지하는 날, 의회는 소작료에서 비례적인 감축을 명령할 것이다. … 다른 한편, 역학力學은 우리가 그 증인이 되는 진보보다 더 경이로운 진보를 할 시점에 있다. 머지않아 들판의 노동은 생명이 없는 원동기들에 의해 수행될 것이다. 모든 경우에 물품 가격의 감축은 임금도 낮출 수 있게 해줄 것이다. 그리고 모든 산물은 소작인들에게로 되돌아올 것이다. …”[비달(Vidal), 「독립 평론」, 1846년 1월 25일]

하지만 담화들이 하는 것이 무엇이며, 말들이 무슨 의미를 가지는가? 판단할 필요가 있는 것은 사실들이다. 적힌 사실보다 사실이 더 정확하다(potius quod gestum, quam quod scriptum). 영국 인민은 그 영토에서 나는 천연 산물에 제조 산물의 비례적인 양이 더해지고 거기에 자국 산물과의 교환으로 외부에서 공급된 산물의 새로운 비례분 덕분이 아니라 철물류와 직물의 배타적 판매에 의한 세계의 착취 덕분에, 자국의 고객층의 돈 말고 다른 돈을 되돌려주는 일 없이, 생존의 발판 위에 놓였다. 영국에서 자본주의와 임금 제도를 과도하게 발달시켜 영국을 파멸시킨 것은 이런 비정상적 착취다. 그리고 그러한 것이 영국이 관세를 방패로 삼아 자국의 뚫리지 않는 자본의 갑옷을 입고 세계에 감염시키려 노력하는 해악이다.

레옹 포셰 씨가 인용한 영국의 한 노동자는 연회에서 이렇게 말했다. “작년(1844)에 우리는 6억3000만 프랑 가치에 해당하는 실과 직물을 수출했다. 이것이 바로 우리나라 번영의 주된 원천이 되는 것이다. 그러나 외국 시장들이 우리에게 닫히면서 임금 하락이 생겨난다. … 방적공들 중에 한 명이 내수를 위해서 일하는 반면 다섯 명이 외국인을 위해 일한다. 그리고 직조공들은 외부 시장으로 가는 천을 여섯 필 짜는 반면 내수용으로는 단 한 필만 짠다.”

이것이 바로 하나의 예로 정식화된 것으로서 대영제국의 경제다. 영국의 인구가 2200만 명이라고 가정하자. 영국의 직조공을 고용하는 데는 외국인 1억3200만 명이 필요하고, 그 방적공에게 일을 주는 데는 외국인 1억1000만 명이 필요하며, 영국의 모든 산업들에 대해 이와 같은 비율이 된다. 이는 더 이상 교역이 아니라 극단적인 노예살이이면서 극단적인 독재다. 관세 폐지 동맹원들의 모든 장광설은 비례의 법칙, 단일 사회에 대해서만이 아니라 인류 전체에 대해서도 참인 법칙, 정치경제학의 지고의 법칙의 이 명백한 위배에 부딪쳐 부서진다.

의문의 여지없이 영국 노동자들의 산물이 오로지 외부에서 들여온 물품으로 변제되고 그들에 의해 소비된다면, 교역이 영국 상인들과 다른 민족들 사이에서만이 아니라 그들과 그들의 임금 수령자들 사이에서도 노동의 법칙에 순응한다면, 마찬가지로 제한된 산업적 특수성의 비정상 상태에도 불구하고 그 악은 상업적으로 말해서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누가 영국의 상황에 대한 허위를, 거짓말을 못 보는가? 영국 노동자들이 일하는 것은 다른 민족들의 산물을 소비하기 위해서가 아니다. 그 수출은 항상 상승하는 척도재의 반입으로 영국에 유리하게 변제되는 것이 절대로 필요하다. 영국은 아무에게서도 실도, 직물도, 석탄도, 철도, 기계도, 철물도, 모직물도 기다리지 않는다. 나는 심지어 곡물도, 맥주도, 육류도 기다리지 않는다고 말할 것인데, 영국이 겪는 결핍은 귀족 계층의 독점의 결과로서 실질적이라기보다는 인위적인 것이다. 곡물법 개혁 후에 영국의 수입收入은 한편으로 줄어들 것이지만 다른 한편으로 곧바로 늘어날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영국에서 벌어지는 현상은 이해 불가능하고, 터무니없을 것이다. 영국이 외부에서 끌어들이는 소비 물품, 차, 설탕, 커피, 포도주, 담배를 보자면, 영국이 대가로 내놓을 수 있는 제조 물품의 양에 비하면 별것 아니다. 형성된 조건에서 영국이 살 수 있으려면, 영국과 거래하는 민족들은 면, 모, 마, 아마, 비단을 방적하지도 직물을 짜지도 않겠다고 약속하는 것, 그 민족들이 영국에게 철물의 특권과 더불어 해양의 독점을 양보하는 것, 결국 그 민족들이 현대의 개혁자들 중 가장 유명하고 미친 사람 푸리에가 조언하듯이 영국인들의 위원회를 수용하는 것, 영국인들이 지구의 배달부가 되는 것이 필요하다. 이 모든 것은 가능한가? 그리고 이 모두가 불가능하다면, 영국인들과의 교역의 호혜성은 무역의 절대적 자유 체제 속에서 어떻게 참일 수 있을까? 끝으로 다른 민족들을 희생시키지 않고 영국의 상황은 어떻게 유지될 수 있는 것인가?

영국인들이 중국에 들어간 이래로 그들은 중국인들에게 비금지의 원칙을 실행하게 한다. 옛날에 척도재의 반출은 천하 제국에서 엄격히 금지되었다. 지금은 금화, 은화가 자유롭게 나간다. 「주르날 데 제코노미스트」(1844년 1, 2월)는 이 주제에 관해 이렇게 의견을 표명했다. “영국은 중국으로부터 원하던 것을 얻었으며, 북경에 대사를 두는 값비싼 명예를 포기한다. 그리고 그 영향력을 두려워할 수 있을 모든 정치적 인물ㅇ르 이렇게 불평의 소리도 나오지 못하게 하면서 멀리한다. 다른 한편, 영국은 여러 조약들에 추가 조항을 넣는 데 동의했는데, 이는 원래 영국이 자국의 것으로 배타적으로 유보했던 모든 이점을 모든 국가에게 부여하는 조항이다. 이런 외면적 양보 덕분에 영국은 중국에서 유럽의 외교관들과 상인들, 심지어는 아메리카의 외교관과 상인들의 존재를 쓸데없게 만들었다. 그러나 영국은 중국 시장의 혜택을 차지하는 거의 유일한 나라가 되는 데 지장이 없도록 일을 처리했다. 왜냐하면 관세를 조절하고 무역에 개방된 다섯 항구들에서 관세의 적용을 주관할 것이 영국이기 때문이다. 이 관세들이 특히 영국이 경쟁을 두려워하지 않는 품목들에 대해서 완화된 것은 말할 필요도 없다.”

그럼 좋다! 경제학자들은 이런 신의 없는 충직성에 대해 뭐라 말하는가? 영국이 자유무역 이론을 가지고서 요구하는 것, 이는 교역자들이 아니라 오로지 구매자들이라는 것이 충분히 확인되었는가?

1845년 「정치경제학 연감L'annuaire de l'Économie politique」은 1845년 「경제 평론Revue économique」의 불길한 예견을 확증했다. 거기서 이런 구절을 읽게 된다.

“중국과의 조약은 아직 영국인들에게 그로부터 기대하는 혜택을 낳지 않았다. 영국인들은 수년 전부터 천하의 제국에 해로운 엄청난 무역수지에 따라 척도재가 그 나라에서 아주 희소해져서 이 나라와의 모든 거래가 불가능하게 될 것을 진지하게 두려워하기 시작한다.”[7]

그리고 결론적으로 픽스 씨는 다른 날 다음과 같은 글을 발표했다. “중국의 운명은 인도의 운명과 다르지 않을 것이다. 영국이 이 방대한 지역들에서 가지는 소유물의 원천은 다양한 인민들에 대한 예속화와 착취를 명령한 역겹고 악명 높은 이 정책에 관련된다.”

이 모든 사실을 우리에게 이야기해주는 경제학자들, 우리에게 이 모든 것을 말해주는 그들은 금수론자들, 그리고 신의 없는 알비옹Albion[8]의 상품들을 불신하는 이들을 황송하게도 놀려대지 않는가? 나는 이렇게 선언한다. 나는 어느 프랑스인이 이 주제와 관련 있는 문제들에 관해 아주 온전한 진리를 말하려고, 혹은 심지어 발견하려고 하는지를 모르겠다는 동발 씨의 발언에 충격을 받았으므로, 조급한 마음으로 경제학자들이 대답하기를 기다린다. 왜냐하면, 내가 그들의 적이기는 하지만, 내가 옳건 그르건 그들의 이론이 지니는 신용을 파멸시키는 데 관심이 있다고 사람들이 보기는 하지만, 나는 그 과학을 분열시키는―심지어 ‘그 과학을 영예롭게 하는’이라고 말하자―위대한 여러 학파들 중 하나가 우리의 자존심 강한 나라 안에서 우리의 영원한 적수인 나라의 비밀 요원으로 행세하는 것으로 쾌활한 마음에서 그리고 거짓 관대함의 움직임으로써 자신을 드러내는 것은 그 과학에는 재앙이라고 간주한다.

모든 사람은 무역의 자유를 위한 영국의 선동이 우선은 단지 곡물의 독점에 반대해 이끌어진 것임을 안다. 산업이 감축의 모든 수단을 다 동내고 나서, 과거에는 노동자의 급료에 잔돈으로 쓰이던 구빈세가 폐지되고 나서, 제조업자들은 곡물 관세의 개혁을 요구하면서 필수품 가격을 낮추려고 했다. 그들의 생각은 처음에는 더 멀리 진행되지 않았다. 그리고 그들이 그들 입장에서, 즉 영국 산업 전체의 입장에서 더 이상 보호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는 것, 농업의 도전을 아주 잘 수용할 수 있다는 것을 이해하게 된 것은 지주들이 그들에게 제기한 항의에 따라서였을 뿐이다. 제조업자들은 서로 이렇게 말했다. ‘그러므로 더 이상 부분적 개혁이 아니라 일반적 개혁으로 밀고 나가자.’ 이는 이로운 동시에 논리적일 것이다. 이는 최상으로 여겨질 것이다. 일순간 자리를 빼앗긴 재산가들은 다른 사항들에 관해 스스로 개혁할 것이고, 영국의 프롤레타리아는 새로이 세계에 대해 견지되는 산업 전쟁으로 인해 자신의 모호한 평등의 기대를 벗어날 것이다.

관세 폐지 연맹이 실토하든 부인하든, 연맹은 무역 자유를 통해 여러 민족들의 예속화로 나아간다. 그리고 사람들이 우리에게 그 웅변자들의 박애주의를 자랑할 때 신실한 영국이 그 경전들과 선교사들을 가지고서 도처에서 약탈과 강도짓을 시작했음을 우리가 잊어버리게 해야 했다. 경제학자들은 대영제국의 반反 금수론 선동에 대한 프랑스 언론의 긴 침묵에 놀랐다. 그리고 나 역시 그에 놀랐지만, 아주 다른 동기 때문에 놀랐다. 우리 이웃들의 입장에서는 이 체제의 가장 큰, 그리고 가장 완전한 적용에 불과한 것을 사람들이 무역수지 균형 체제의 엄숙한 포기로 간주한다는 것, 이 거대한 영국인의 희극을 사람들이 유럽의 경찰에 고발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이 희극에서는 이론가라고 하는 자들이 도버 해협 이쪽 편의 바보들이자 저쪽 편의 친구들로서 우리에게 희생자 역할을 맡도록 하려고 애쓰는 것이다.

수입하는 민족들, 착취당하는 민족들. 대영제국의 위정자들이 경이롭게도 아는 것이 바로 이것이다. 이들은 자신들의 산물을 무력으로 세계에 강요할 수가 없어서 세계의 다섯 대륙에서 자유무역의 광산을 파헤치기 시작했다. 로버트 필은 연단에서 이렇게 실토했다. “우리가 곡물법을 개혁하는 것은 더 낮은 가격에 생산하기 위함이다.” 그리고 프랑스 의회에서 인용된 이 발언은 갑자기 우리들 사이에서 관세 폐지론에 관한 열심을 잠재웠다. 로버트 필의 개혁이 충분히 보호주의적인 특성을 보존하며 해외 시장에서 자신의 패권의 기초를 놓기 위해 사용하기 원하는 또 하나의 무기에 불과하다는 것은 거의 모든 프랑스 언론[9]의 고백에서 확인된 채로 있었다.

자유무역, 즉 자유 독점은 자본과 산업의 거대 봉건 신하들의 신성동맹이며, 지구상의 각 지점에서 노동 분업, 기계, 경쟁, 독점 및 경찰에 의해 시작된 과업을 완수해 소산업을 짓뭉개고, 프롤레타리아트를 최종적으로 복속시켜야 하는 괴물 박격포mortier monstre다. 이는 시초에는 문명의 자생적 산물이던, 그러나 문명이 자신의 법칙들에 대한 의식을 획득하자 곧 소멸해야할 약탈과 빈곤의 체제를 지구의 모든 표면에서 중앙 집중화하는 것이다. 이는 소유권이 그 힘과 그 영광 안에 있는 것이다. 그리고 수백만의 노동자들이 굶주리는 것, 수많은 무고한 피조물들이 젖먹이 때부터 죽을 때까지 억압을 겪고, 수많은 딸들과 부인들이 매춘부가 되고, 수많은 영혼들이 팔리고, 수많은 성품들이 시드는 것은 이 체제의 완성을 가져오기 위한 것이다! 경제학자들이 이 미로에서 출구를 알고, 이 고역의 끝을 안다면! 하지만 아니다. 언제나! 결코! 저주받은 자의 시계처럼, 경제적 묵시록의 되풀이다. 오! 저주받은 이들이 지옥을 불태울 수 있다면!

. 무역수지 균형 이론

무역 자유의 문제는 오늘날 아주 중요해져서 그로부터 결과로 나오는, 인류에게 선과 악이 되는 두 계열의 결과들을 해설한 후에 나는 그 해법을 알리기를 그만둘 수 없다. 이처럼 내 증명을 보완해서 희망컨대 내가 차후의 일체의 토론을 독자의 밝은 눈으로 볼 때 쓸모없는 것으로 만들었기를 바란다.

옛사람들은 자유무역의 참된 원칙들을 알았다. 그러나 그들은 현대인들이 이론에 대해 자만을 드러내는 것만큼 이론에 별 호기심이 없어서 내가 알기로 이런 점에서 자신들의 관념을 결코 요약하지 않았다. 그리고 곧바로 전통적 진리가 모호하게 되는 데는 경제학자들이 그 문제를 독차지하게 된 것으로 충분했다. 무역수지 균형이 한 세기의 파문破門 후에 자유와 평등의 이름으로, 역사와 만민법의 이름으로 모든 기정사실의 옹호자들이 아주 자유롭게 유토피아주의자라는 칭호를 붙여주는 자들 중 한 사람에 의해 증명되고 옹호되는 것을 본다면 가슴이 아플 것이다. 이 증명은 내가 가능한 한 짧게 하려고 신경 쓸 것인데, 이는 내 적들의 의식과 마찬가지로 사색에 내가 내놓을 마지막 논지일 것이다.

무역수지 균형의 원리는 다음의 둘로부터 종합적으로 나오는 결과다. 1. 세의 공식, 산물들은 산물들로만 구매된다는 공식에서 나오는데, 바스티아 씨는 이 공식에 대해 보수는 생산자가 시장에 가져다 놓는 쓸모에 비례하지 않고 이 쓸모에 내포된 노동에 비례한다는 논평을 했으며, 이 논평을 한 첫 번째 영예는 아담 스미스에게 돌아간다. 2. 리카도의 지대 이론에서 나온다.

독자는 첫째 항목에 대해 충분히 교화되었다. 그래서 나는 둘째 항목으로 넘어간다.

우리는 리카도가 지대의 원천을 어떻게 설명했는지 안다.

리카도의 이론은 철학적 관련 사항에서는 아쉬운 지점을 남기지만, 그렇다고 해서 우리가 뒤에 가서 제11장에서 보여줄 것처럼 소작료 불균등의 원인에 관해 덜 정확한 것도 아니다. 리카도가 말했다. 처음에 사람들은 1급 토지에, 같은 지출로 더 큰 수확량을 내는 토지에 우선 매달릴 수밖에 없다고. 이 토지의 산물이 인구를 먹여 살리는 데 불충분해지면서 2급의 토지 개간에 착수하며, 이런 식으로 3급, 4급, 5급 그리고 6급의 토지들까지 계속해 가지만 여전히 토지의 산물이 적어도 경작 비용에 상당한다는 조건에서 그렇게 한다.

동시에 토지 독점은 확립되기 시작해서, 모든 지주는 그가 토지의 개발을 맡긴 대리인에게 토지의 경작이 생산물로 내놓을 수 있는 것에서 경작 노동자의 임금을 뺀 것, 즉 개발 비용을 뺀 것만큼을 소작료로 요구했다. 그래서 리카도에 따르면, 본래적 의미의 지대는 가장 비옥한 토지 산물이 열등한 품질의 토지들에 대해 가지는 초과분이다. 그 결과 소작료는 더 낮은 품질의 토지로, 이런 식으로 해서 더 이상 비용을 충당해 주지 않는 토지에 도달할 때까지 옮겨 가지 않을 수 없을 때만 열등한 토지들에 적용되는 결과가 된다.

이러한 것이 아마도 가장 철학적이지는 않지만 소작료 확정의 점진적 진행 과정을 설명하는 가장 간편한 이론이다.

이 점에 동의하고 나서, 모든 사회주의 학파의 작가들과 함께 토지의 소유권이 집단적인 것이 되어 각 농업인은 그의 땅의 비옥도에 따라서가 아니라, 바스티아 씨가 아주 잘 말하듯이 그의 산물에 들어간 노동의 양에 따라서 보수를 받는다고 가정하자. 이 가설에서 1급 토지가 아르팡 당 100프랑의 총가액을 낸다면, 이는

1급 토지 100프랑

2급 토지 80프랑

3급 토지 70프랑

4급 토지 60프랑

5급 토지 50프랑

총계 60프랑

개발 비용을 아르팡 당 50프랑이라고 가정하면, 5아르팡에 대해서는 250프랑

개발 전체에 대한 순생산은 110프랑

그리고 공동 소유자인 개발자 각 사람에 대해서는 22프랑

각종 토지의 개발 비용들이 다를 경우에 경작의 모든 다양한 형태들에 대해서처럼 같은 기준이 적용된다. 나아가 연합의 체제에서는 생산물과 서비스의 이 연대성 덕분에 개별 산물이 비용을 충당하지 못하는 토지들에 경작을 확장하는 것이 가능할 것이다. 이는 독점에서는 불가능한 일이다.

이 모두가 사회주의자의 꿈일 뿐임을 나는 잘 안다. 소유주의 일상 관행에 의해 반박되는 유토피아다. 그리고 이성이 관습에 대해 무능력하므로 노동에 따른 분배가 장기적으로 사람들 사이에 확립될지도 걱정이다.

그러나 소유권과 정치경제학이 민간 산업의 열정과 같은 열정을 가지고 배척하는 것을, 모든 민족은 그들의 영토에서 난 산물을 서로 교역하는 것에 관한 경우에는 이를 바라는 것으로 의견 일치를 이루었다. 그 경우에 그들은 서로를 독립적인 주권자로, 리카도의 가설에 따라 불균등한 품질의 토지를 개발하지만, 서로 간에 사회주의자들의 가설에 따라 지구의 개발 이용을 위해 하나의 거대한 회사를 이루어 그 각 구성원이 토지 전체에 대해 분리되지 않은 소유권을 가지는 개체들로 간주했다.

그리고 다음은 그들이 추론한 것이다.

산물들은 산물들로만 구매된다. 즉, 산물은 그 쓸모에 비례하지 않고, 이 쓸모에 들어간 노동에 비례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불균등한 토질 때문에 A 나라가 50의 노동에 100의 산물을 내는 반면에 B 나라는 80만을 내놓는다면, A는 자신의 모든 수확물에서 10%를 B에게 채워주어야 한다.

이 할당은 정말로 교역의 순간에만, 또는 말하듯이, 수입에서만 요청된다. 그러나 원리는 존속하며, 이를 부각시키기 위해서는 두 민족 간에 교역이 되는 다양한 가치물들을 단일한 표현으로 가져가기만 하면 된다. 밀을 예로 들어보자.

비옥도가 같지 않은 두 나라 A, B가 있다. A에서는 일꾼 2만 명이 밀 100만 말을 생산한다. B에서는 그 절반밖에 생산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밀은 B에서는 A에서보다 두 배가 더 비싸다. 실제로는 일어나지 않는 일이지만 이론에서는 아주 잘 수용되는 일을 가정해보자. 근본적으로 가장 다양한 무역은 다양한 형태에서 유사한 가치물의 교역 말고 다른 것이 아니니 말이다. 말하자면, B 나라의 생산자들이 그들의 밀을 A 나라의 밀과 교환하기를 요구한다고 가정하자. 밀 한 말이 밀 한 말의 대가로 주어진다면, 하루치 노동의 대가로 주어질 것이 이틀 치 노동일 것임이 명확하다. 소비 면에서 그 효과는 전무할 것이다. 결과적으로 어느 쪽에도 실질적 손해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두 수량에 내포된 가치가 그로부터 다른 쓸모의 형태로, 혹은 화폐의 형태로 도출될 수 있게 하라. B에서 생산된 모든 가치물이 그 곡물의 가치에 비례하므로, 다른 한편 B가 내놓는 국정 화폐가 B에 제시될 때는 어떠한 지불에서도 B는 이를 거절할 수 없으므로 우선은 산물들의 유사성 때문에 실재가 없는 비교에 불과했던 교역, 이 교역이 효력이 있게 된다. 그리고 B는 A와의 무역에 내놓는 모든 가치물에 대해 정말로 50%를 잃는다. 교역이라고 하는, 말하자면 아주 형이상학적이고 아주 대수학적인 이 조치는 사회경제학에서 하나의 관념이 몸, 형체, 그리고 물질의 모든 속성을 취하는 조직이다. 이는 무로부터의 창조다.

그 결과들은 무한히 달라질 수 있다. A의 생산자들이 B의 시장으로 와서 B의 생산자들에게 경쟁을 걸 능력을 획득한다고 가정하자. 그들이 판매할 밀 한 말마다 50%의 이득, 즉 B의 연간 산물의 절반을 그들에게 가져다주어서, A 나라가 우선은 유통하는 가치물들을 정복하고 그 다음은 그 도움으로 투자된 가치물, 그리고 끝으로 그 숙적의 토지 자본을 정복하는 데 20~30년이면 충분할 것이다.

그런데, 이야말로 여러 민족들의 상식이 원하지 않던 일이다. 이 민족들은 실무적으로 그들 중 가장 불리한 민족들이 가장 유리한 민족들에게 이들의 지대 초과분에 대해 해명을 요구할 권리가 없다는 것을 인정해 왔다. 이 완화된 태도에는 이 순간에 도출하는 것이 쓸데없는 이유들, 게다가 각자가 생각을 해본다면 발견하게 될 이유들이 있었다. 그러나 무역이 문제가 되었던 경우에 각자는 자신의 원가와 자신의 적수의 원가를 계산하는 일에 착수했다. 그리고 모든 민족이 특혜 관세를 제정해서, 그것 없이는 교역을 하는 데 동의해서도 안 되고 동의할 수도 없게 된 것은 이 계산에 따른 것이다. 이야말로 진정한 원리이며, 세관의 철학이다. 그리고 이야말로 경제학자들이 원하지 않는 것이다.

나는 통속적으로 무역수지 균형이라고 불리는 이 균형 법칙의 필요성을 길게 증명함으로써 독자들을 모욕하지 않을 것이다. 이 모든 것은 어린이라도 낯을 붉힐 만큼 간단하고, 진부한 것이다. 경제학자들에 관해 말한다면, 나는 그들이 장황한설명이 필요 없을 정도로 충분히 계산이 빠르다고 가정한다.

지금 관세가 끊임없이 절대적 금수에서 완전한 면세까지 각 나라의 필요, 여러 정부들의 현명함, 독점체들의 영향, 여러 이익들의 대립, 민족들의 불신에 따라 진자 운동을 하면서, 그럼에도 한 균형점을 향해, 그리고 기술적 용어를 사용하자면 차별관세를 향해 수렴한다는 것이 진실이 아닌가? 그것을 엄밀하고 충실하게 획득하는 것이 가능하다면 실질적 연합, 민족들의 물적 연합association in re을 표현하는 일일 것이며, 세의 경제 원리의 엄격한 집행일, 그런 차별관세 말이다.

그리고 우리 사회주의자들은, 너무 오랫동안 우리의 망상에 지배받아 왔지만 우리의 논리에 의해 결국 보호주의 원리, 연대의 원리를 일반화해 그 원리를 국가들로부터 시민들에게로 내려가게 한다면, 사뭇 투명한 방식으로 노동의 이율배반들을 풀고 우리가 우리의 관념의 원조 말고 다른 원조 없이, 법칙의 권능 말고 다른 권능 없이, 숫자 말고 다른 강제와 영속의 수단 없이 영원히 자본을 노동에 복속시킨다면, 우리는 우리 시대의 문제, 옳건 그르건 인민에 의해, 그리고 몸을 움츠리는 경제학자들에 의해 노동의 조직이라고 불리는 이 문제의 해결을 이상하게도 전진시킨 것이 아닐까?

경제학자들은 세관에서 이유 없는 금지만을 보며, 보호에서 특권만을 보며, 차별관세에서 무제한의 자유를 향한 첫걸음만을 본다고 고집을 부린다. 모두는 예외 없이 절대적 금수로부터 보증부 자유로 진보해서 행복한 결과를 얻게 되었으므로 새로운 진보에 의해 모든 관세가 제거되고, 무역, 즉 독점이 그 모든 질곡에서 구원을 받을 때는 이 결과는 증가하기만 할 것이라고 상상한다. 우리의 모든 국회의원들, 기자들, 장관들조차 이런 한심한 환상을 공유한다. 그들은 하나의 부정에서 다른 부정으로의 논리적 운동, 자발적 고립으로부터 자기 자신의 포기로의 이행을 진보라고 본다. 그들은 실명失明으로부터 시각까지의 거리만큼 멀리 떨어진 것이 중용으로부터 종합까지의 거리라는 것을 모르면서도 진보가 두 모순 항의 결과라는 것을 이해하지 못한다. 그들은 길에서 멈추어 서고 중용으로 취급받는 것을 두려워한다.

이와 관련해서 나는 내가 차별관세 또는 무역수지 균형이라 부르는 것, 자유와 독점의 종합적 표현인 이것이 어떤 점에서 중용의 조직과 다른지를 설명해야 한다.

장벽의 철폐 후에 프랑스의 수출이 일반의 기대, 그리고 모든 개연성에 상반되게 그 수입과 똑같다고 가정하자. 경제학자들에 따르면 무역수지 균형의 추종자들은 만족해야할 것이다. 그들은 아무 불평거리도 더 이상 없을 것이다. 나는 이것이 중용일 것이며, 결과적으로 우리는 아직 셈이 끝나려면 멀었을 것이라고 말한다. 왜냐하면, 이미 말해진 것에 따르면, 우리가 우리의 상품들로, 우리나라의 화폐로 우리나라의 시세대로 결제하는 외국 상품들이 외국에서 우리 상품들보다 더 비싸지 않은 것을 우리에게 보장해주는 것은 아무것도 없기 때문이다. 그럴 경우에 우리는 언제나 손해를 보고 노동할 것이다. 또한 수출의 수치가 수입의 수치보다 못 미쳐서 정부가 균형의 재확립 필요성을 확신해 이런 목적으로 우리의 시장에서 외국의 특정한 상품들을 배제하고 그 상품들이 우리나라에서 생산되는 것을 장려한다고 가정하자. 이는 여전히 중용에 속할 것이며, 이에 따라, 잘못된 계산일 것인데, 노동 조건을 평준화하는 대신에 완전히 임의적인 수치들 간의 균형만을 확립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내가 알기로 균형보다 더 중용을 닮은 것은 없지만, 근본적으로는 그보다 더 다른 것도 없다. 그리고 여기서 미묘한 사항들을 길게 파고들어 길을 잃지 않도록 나는 딱 한 번, 중용이 양극단의 부정이지만, 긍정도 없고, 아무런 지식도 없고, 제3항, 참된 항에 대한 어떠한 규정도 없는 부정인 반면, 종합적 지식, 관념들의 참된 중용pondération은 과학이고 제3항의 정확한 규정이며, 진실의 이해로서 그 반대의 것들에 의해서만이 아니라 그 자체로, 그리고 그 자체를 우해서 그러하다는 것만 주목하게 하는 데 그칠 것이다.

오늘날 여전히 경제학자들을 눈멀게 하는 것은 이 중용, 절충 및 교조주의의 이 잘못된 철학이다. 그들은 보호가 일시적 전복, 비정상적 우연의 결과가 아니라 여러 정부에 그럴 수밖에 없게 하며, 영구적으로 그렇게 하도록 할 실질적이고 파괴될 수 없는 원인의 결과라는 것을 알지 못했다. 생산 수산의 불평등에, 그리고 다른 상품들에 대한 화폐의 우위에 있는 이 원인은 옛사람들에 의해 감지되었다. 역사는 이 원인이 일으킨 여러 혁명과 파국들로만 가득하다.

현대에, 그리고 중세에 홀란드인들의 재산, 한자와 롬바르디아 도시들, 피렌체, 제노바, 그리고 베네치아의 번영은 그들이 세계의 모든 지점에서 도모한 무역에 의해 그들의 이익이 되도록 실현된 엄청난 차액이 아니라면 어디서 왔는가? 균형의 법칙은 그들에게 알려져 있었다. 그들의 항상적인 염려의 대상, 그들의 근면과 노력의 목표는 언제나 이 법칙을 위배하는 것이었다. 이 모든 공화국들은 이들의 천과 양념에 대한 교환으로 은과 금 말고는 그들에게 줄 것이 없는 여러 민족들과의 관계에 의해 부유해지지 않았는가? 그 기회에 그들의 고객층을 이룬 민족들은 망하지 않았는가? 귀족층이 빈한한 상태로 전락하고 봉건제가 끝난 것은 이 시기부터가 아닌가?

시대의 흐름을 거슬러 올라가보자. 카르타고와 티로스의 풍요로움에 대한 기초를 놓은 것이 무역이 아니라면 무엇인가? 무역, 이는 곧 상사商社들과 교역의 체계로서, 그 계정들은 언제나 혐오 대상인 이 투기자들에게 유리하게 야만인들의 무지와 순진함을 틈타 빼앗은 다량의 금속으로 수지를 맞추었다. 한순간 중상주의 귀족정이 지중해 모든 연안에서 발달해 세계의 제국을 장악하기 일보직전이었다. 그리고 이 순간, 역사의 가장 엄숙한 이 순간은 스키피오에서 시작해 루터와 레오 10세에 와서야 끝나는 이 기나긴 퇴보의 출발점이었다. 때는 오지 않았다. 귀족층, 토지 봉건제는 당시에 로마인들로 대표되어 산업에 대한 최초의 전투에 승리했고, 프랑스 혁명에서야 치명타를 입은 것 같다.

현재는 금융 세습 귀족들의 차례다. 마치 다가올 자신들의 패배를 예감한 듯, 그들은 서로 인정하고 서로 단합하고 자신들의 질과 비중에 따라 등급을 나누고 서열을 만들며, 노동자의 전리품에서 각자의 몫을 정하고 그 유일한 목표가 프롤레타리아트의 확정적 복속인 평화를 공고히 하는 데만 몰두했다. 이 신성동맹에서 여러 정부들은 서로 연대 관계가 되고 해소되지 않는 친선으로 엮여서 독점의 위성체들에 불과하다. 절대군주와 입헌군주, 대공, 백작, 러시아 귀족, 그리고 변방 총독들, 대지주, 대산업인, 대자본가, 행정부, 법원, 교회의 공무원들, 한마디로 일을 하는 대신 세비, 연금, 주식 투기, 공안과 광신으로 살아가는 모든 이들, 공동 이익으로 단합을 이루고 이미 지평선에 으르렁대는 혁명의 폭풍에 의해 곧 결집한 이들은 필연적으로 노동에 대한 자본의 이 광대한 음모에 가담해 있다.

당신들은 이를 생각했는가, 프롤레타리아들이여?

그러한 것이 진정 여러 정부들과 귀족정들의 비밀스러운 생각인지 내게 묻지 말라.[10] 이는 상황에 속하며, 숙명적이다. 세관은 오로지 경제학자들에 의해 민족적 독점체들에 주어진 보호로 간주되고, 균형 법칙의 아직은 불완전한 표현으로는 결코 간주되지 않아서, 이제부터는 세계를 담는 데 더 이상 충분하지 않다. 독점체에는 더 큰 보호가 필요하다. 어디서나 동일한 독점의 이익이 이를 요구하며, 온갖 방법으로 장벽들의 파괴를 촉발한다. 로버트 필의 개혁으로, 관세 동맹의 끊임없는 확장으로, 벨기에와 프랑스 간의 단지 연기된 관세 동맹으로 세관의 울타리들은 거대한 두세 구획으로 정리될 것이며, 완전한 자유, 더 긴밀한 단합의 필요는 지체 없이 느껴질 것이다. 땅 위의 모든 경찰, 모든 부르주아지, 모든 왕조들이 서로 협력하는 것은 노동계급의 무지에도 불구하고, 이들이 처해 있는 버림받은 상태와 분산성에도 불구하고 이들을 억제하는 데는 지나친 것이 아니다. 끝으로 위계의 원리에 따라 수많은 직업과 특권들로 분산된 중간 계급의 공모, 가장 똑똑한, 담합을 위해 지휘자, 십장, 사무원, 감독이 된 일꾼들의 기용, 언론의 변절, 다른 한편으로 분열과 빈곤. 수많은 원인들이 결합해 비생산적 계층을 난공불락으로 만들어 퇴폐의 기나긴 시기가 인류에게 시작될 것이다.

두 번째로, 당신들은 이를 생각하지 못했는가, 프롤레타리아들이여?

게다가 이제부터 민족들의 균형을 차별관세, 다르게 말해서 무역수지 균형이라는 더 잘 이해되고 더 정확한 실무에 기초시키려고 하는 것은 쓸데없는 수고일 것이다. 왜냐하면 두 가지 중 하나가 일어날 것이기 때문이다.

문명이 봉건제와 농노제의 세 번째 시기를 통과해 가야 한다면, 세관 제도는 경제학자들이 아주 우습게도 그렇게 상상했듯이 독점을 섬기기는커녕 독점체들의 담합에 대한 장애물, 그들의 발달과 존재에 대한 장애물이다. 이 제도가 폐지되는 것이 필요하고, 폐지될 것이다. 이 폐지의 조건들을 조정하고 독점자들의 이익을 조화시키는 것만이 문제다. 그런데 독점자들은 이런 종류의 타협에서 깨지며, 프롤레타리아의 노동은 거기서 퇴직 수당으로 소용된다.

반대로 사회주의가 과학의 성년복을 입고 그 유토피아를 포기하고, 자신의 우상들을 불태우고 노동 앞에서 자신의 철학적 고집을 낮추면서, 자유무역의 문제에 관해 이 순간까지 로버트 필에게 명예를 돌리며 심벌즈를 흔드는 것밖에 모르는 사회주의가 이성과 경험을 통해 사회 질서를 형성하는 데 진지하게 유념한다면, 노동 조건들의 평준화는 국경선에서 상품들이 통관할 때 더 이상 작동할 필요가 없다. 그것은 모든 생산자들 사이에 작업장들 속에서 스스로 완성된다. 공장들의 연대라는 사실 덕분에 민족들 간의 연대가 존재한다. 회사와 회사 간에 성립하는 균형은 사실상 온 세계에 존재한다. 세관은 쓸모없고 밀수는 불가능하다. 여기서 균형의 문제 혹은 가치들의 비례성 문제는 민족들 간의 평등 문제와도 같다. 그 문제는 조사와 사후적 계수가 아니라 노동으로 풀 수 있다. 게다가 이행기 몇 년 동안 세관선의 유지가 유익하다고 판단된다면, 관세를 정하는 것은 무역 정보 담당이 할 일일 것이다. 관세의 징수에 관해서는 나는 행정의 경험을 기꺼이 참조할 것이다. 그런 상세한 사항은 내 구상에 들어가지 않는다. 내가 국제무역의 종합적 법칙을 입증해 보이고, 독자가 절대적 금수의 위험에 대해서 그리고 한계 없는 자유의 거짓말에 대해서 한꺼번에 경계하도록 그 적용의 최종적 양태를 지적하는 것으로 충분하다.

무역수지 균형의 형이상학적 성격에 관해 몇 마디 더 이야기하고 끝맺는다.

무역수지 균형의 원리가 우리가 가치를 다루면서 정한 명증의 조건들을 충족하기 위해서는 그것은 무역의 자유와 노동의 보호를 한꺼번에 조화시켜야 했다. 그런데 이는 차별관세의 확정을 통해 일어나는 일이다. 한편으로 그 역사적 원천이 조세의 원천만큼 별로 명예롭지 못한 이 관세는 사람들이 남용적 통행료로 간주하는 경향을 띠는 것으로, 실제로 자유에 평등의 조건을 부과하면서 자유를 인정하고 확정하기만 한다. 다른 한편 이 관세의 징수는, 언제나 정확히 정해진다고 가정하면, 노동을 충분히 보호한다. 노동에 대해 대등한 힘들 간의 경쟁을 불러일으켜 그로부터 그것이 내놓을 수 있는 것을 요구하고, 그것이 내놓을 수 있는 것만을 요구하기만 하는 까닭이다.

그러나 이 조화, 이 균형은 또한 아주 새로운 속성들을 얻으며, 그 종합적 본성 덕에 온전한 자유도 절대적 금지도 일으킬 수 없던 효과를 불러온다. 다시 말해 이는 자유와 금수를 결합한 장점들 이상을 제공하는 동시에 그 폐단들을 멀리한다. 균형 없는 자유는 물론 저가격을 가져왔지만 미약한 이득만을 제공한 모든 개발 사업들을 불모로 만들었다. 이는 언제나 빈곤화였다. 절대적 배제에까지 밀어붙여진 보호는 독립을 보장했지만 고가격을 유지하는 것이었다. 같은 노동의 양으로 산물들의 한 종류만을 획득하는 것이 고가격인 것이다. 무역의 상호성에 의거해 인간들의 변덕과는 독립된 물적인 실제적 연대가 창조된다. 노동하는 인민들은 그들이 거주하는 어느 지대에서나 모두가 똑같이 자연의 재화들을 향유한다. 각 인민의 힘은 배가되고 그 행복도 동시에 배가되는 듯하다. 노동 수단의 연합은 비용을 모두에게 배분함으로써 독점에서는 접근 불가능한 토지들을 생산적으로 만들 수단을 제공해, 더 많은 산물이 사회에 획득된다. 끝으로 무역수지 균형은 민족들 간에 곧게 지켜져서 결코 보호와 자유방임처럼 예속과 특권으로 타락할 수 없다. 그리고 이는 무역수지 균형의 진리성과 유익한 영향을 증명하기를 다한다.

그러므로 무역수지 균형은 명증의 모든 조건을 채운다. 그것은 우월한 관념 안에 자유와 보호의 상반된 관념들을 포괄한다. 이 둘에 생소한 속성들을 누리며, 이 둘이 가지는 폐단의 어느 것도 제시하지 않는다. 의심할 것 없이 이 종합을 적용하기 위해 현재 사용 중인 방법은 결함이 있으며, 그 원천에서부터 야만적이고 세무적인 냄새가 난다. 그 원리가 참되다는 데는 변함이 없다. 그리고 이를 오해하는 것은 자기 나라에 대해 음모를 꾸미는 것이다.

이제 더 고차적인 고려 사항으로 올라가보자.

변증법적 절차들에서 그런 것을 본다고 우리에게 여겨지는 것처럼 관념들이 자체적으로 구성되고 분해되고 일반화되고 단순화된다고 상상한다면 이상한 환상 속에 있는 것이다. 절대 이성 안에서 우리의 비교 능력 덕분에, 그리고 우리 오성의 필요를 위해 우리가 분류하고 차별화하는 이 모든 관념들은 똑같이 단순하고 일반적이다. 감히 말하자면, 그 관념들은 존엄성과 잠재성에서 동등하다. 그것들은 모두가 지고의 자아에 의해(지고의 자아가 추론을 하는지?) 그의 추론의 전제나 결과로, 회전축이나 반경으로 간주될 수 있을 것이다.

사실, 우리는 우리 관념들의 일종의 발판을 딛고서만 과학에 도달한다. 그러나 진리 그 자체는 이런 변증법적 형상들과는 독립적이며, 우리 정신의 조합들에서 자유롭다. 운동, 인력, 원자들의 연합의 법칙들이, 우리의 이론들이 그 법칙들을 표현하는 수단이 되는 계수 체계와 독립적인 것과 마찬가지다. 그렇다고 해서 우리의 과학이 거짓이라거나 의심스러운 것은 아니다. 단지 진리 그 자체는 우리의 과학보다 무한히 더 참되다. 예를 들어 모든 가능한 계수 체계에서 참인 원자 비율들같이 우리의 눈을 벗어나는 무한개의 관점들에서 참인 것이다.

확실성에 관한 연구들에서 인간 인자의 본질적으로 주관적인 이 특성, 궤변론자들이 그렇게 믿었던 것처럼 의문을 정당화하지 않는 특성은, 조만간 그 역할이 일꾼의 자발성에는 아무것도 남겨놓지 않을 기계처럼 사상가를 무뎌지게 할 일종의 기계 체계에 매이지 않으려면 특히 눈에서 놓치지 않는 것이 중요하다. 우리는 잠시 무역수지 균형의 예로써 우리의 인식의 주관성이라는 사실을 확인하는 데 국한할 것이다. 나중에 가서 우리는 새로운 지평, 새로운 세계를 이 무한 논리에서 발견하고자 할 것이다.

사회경제학에서 아주 흔한 경우에 의해, 무역수지 균형의 이론은 말하자면 가감승제의 보통의 어떤 산술적 조작의 특정한 응용에 불과하다. 그런데 합, 차, 곱, 몫의 이 네 표현 중 어느 것이 가장 간단하거나 가장 일반적이냐고 내가 묻는다면, 인수로 취해진 숫자 3과 숫자 4, 혹은 그 곱인 숫자 12 중 어느 것이 가장 오래된 것이냐고 묻는다면, 나는 곱셈을 하면서 말하는 것이 아니고 숫자들이 거기서 서로 만난다는 오로지 그것에 의해 이 곱셈도 포함하는 영원한 산술을 하면서 말하는 것이다. 뺄셈에서 나머지, 나눗셈에서 몫이 이를 형성하는 데 소용된 숫자들보다 더 복잡한 비율을 가리키는지 아니면 덜 복잡한 비율을 가리키는지를 묻는다면, 내가 의미 없는 질문을 던지는 것처럼 여겨진다는 것이 참이 아닌가?

그러나 그러한 질문들이 엉뚱하다면, 이 산술적 비율들을 형이상학적 또는 상업적 언어로 번역하면 그것들의 각자의 질을 변경한다고 믿는 것도 똑같이 엉뚱하다. 사람들 사이에 공평하게 자연의 공짜 선물을 ‘배분’한다는 것은 ‘교환’하거나 ‘생산’한다는 관념과 마찬가지로 무한 이성에서는 기초적인 관념이다. 그렇기는 하지만, 우리가 그에 대한 우리의 논리를 믿는다면, 이 관념들 중 첫째 것은 나머지 둘을 따라오며, 우리가 첫째 것을 실현하기에 도달하는 것은 심지어 이 둘의 성찰된 조성에 의해서일 뿐이다.

나는 영국에서 노동이 60의 지출에 100을 생산한다고 가정한다. 러시아에서는 80에 대해 100을 생산한다. 우선 두 산출량을 더하고(100+100=200), 다음으로 지출액을 더하고(60+80=140), 그 다음으로 이 두 액수 중에 작은 것을 큰 것에서 빼고(200-140=60), 그 차액을 2로 나누면, 그 몫 30은 무역수지 균형에 의해 두 생산자가 연합한 후 각 생산자가 얻을 순이익을 가리킬 것이다.

우선은 계산을 들여다보자. 그 계산에서 100, 200, 60, 80, 140, 2, 30이라는 숫자들은 일정한 도출에 따라 서로를 낳는 것 같다. 그러나 이 발생은 오로지 우리의 지적 시각의 효과다. 이 숫자들은 실질적으로 바라보는 방식에 따라 필연적으로 간단하기도 하고 복잡하기도 한 각 계기, 각 비율이 다른 계기, 비율들과 동시대의 것이고 아주 필연적으로 그것들과 조율이 되는 한 계열의 항들일 뿐이다.

이제는 사실들로 가보자. 러시아에서도 영국에서도 사회경제학이 토지의 지대, 개간 비용, 교역, 수지 균형 등으로 칭하는 것은 숫자 100, 200 등으로 표현되는 추상적 관계들의 경제적 실현이다. 감히 말하자면, 이는 자연이 우리를 위해 이 숫자들 각각에 위치시킨, 그리고 노동과 무역을 통해 우리가 도출하려고, 운명의 항아리에서 뽑으려고 노력하는 도전들이고 경품들이다. 그리고 이 숫자들 모두의 관계가 필연적 방정식을 가리키는 것처럼 지구상에서 그들의 공존이라는 사실, 그리고 동시에 그들의 토양의 다양한 품질, 그들의 도구들의 성능이 큰가 작은가 하는 것만으로도 영국인들과 러시아인들은 연합을 이룬다고 말할 수 있다. 민족들의 연합은 정신의 법칙의 구체적 표현이며, 이는 필연적 사실이다.

그러나 이 법칙을 완성하기 위해서, 이 사실을 낳기 위해서 문명은 극단적으로 완만하게 진행하며, 엄청나게 긴 길을 지나간다. 우리가 이 절의 서두에 다양한 토질을 나타낸 100, 80, 70, 60, 50이라는 숫자들이 연산을 할 방정식, 내가 뭐라 하는가? 연산이 벌써 된 방정식, 그러나 우리에게 암묵적으로 전제된 방정식만을 정신에 제시하고 모두가 이 방정식의 결과인 숫자 72로 해소되는 반면, 사회는 우선은 이 다섯 가지 토질의 독점을 받아들이면서 다섯 범주의 특권들을 창설하는 것으로 시작한다. 이것들이 평등이 찾아오기까지 서로 간에 노동자들 위에 형성되며 노동자들의 희생으로 살아가는 귀족 계층을 이룬다. 곧 이 독점들은 그들의 질투심 많은 불평등에 의해 보호와 자유의 투쟁을 불러오며, 이로부터 결국 통일과 균형이 생겨나야 한다. 인류는 그 최면술사의 명령에 저항하는 몽유병자처럼 의식 없이 천천히, 걱정하고 당황하면서 영원한 이성의 명령을 완수한다. 그리고 인류에 의한 이 신적 정의의 마지못한 실현은 우리가 우리 안에 있는 진보라고 부르는 것이다.

이처럼, 인간 안의 과학은 참된 것에 대한 내적 관조다. 참된 것은 하나의 메커니즘의 도움으로만 우리의 지성을 사로잡는데, 우화에서 도덕성이 형상화되고 극화된 것을 보는 것처럼 이 메커니즘이 그것을 확장하고 치장하고 주조하고, 그것에 몸과 얼굴을 부여하는 것 같다. 나는 심지어 우화에서 변장한 진리와 논리의 옷을 입은 진리 사이에 본질적 차이가 없다고까지 감히 말할 것이다. 근본적으로 시가詩歌와 과학은 같은 기질을 가지며 종교와 철학은 다르지 않다. 그리고 우리의 모든 체계들은 모두 비슷한 크기, 색깔, 형상, 재료의 금속 조각들로 수를 놓은 것과 같으며, 예술가의 일체의 환상에 양분으로 제공될 수 있다.

그러므로 내가 결국 오직 내 약함을 증언해주는 지적 고집을 왜 부릴 것이며, 내 지성의 모호한 기초 위에 흩어진 빛나는 점들을 태양들처럼 키워서 내 판단을 그르치게 하는 장점만을 가진 상상력의 얼간이로 왜 자진해서 남을 것인가? 내가 과학이라고 부르는 것은 내게는 장난감들의 군집이고, 어린애 같은 행동들의 진지한 조합으로서 내 정신 안에서 지나가고 끊임없이 다시 지나가는 것에 불과하다. 사회와 자연에 관한 이 위대한 법칙들은 우주를 흔들기 위한 신의 손을 지탱하는 지렛대들인 것으로 내게 보이는데, 이는 내가 유념하지 않는 다른 무한한 사실들처럼 단순한 사실들이고 실재들의 바다 속에서 잃어버린 사실들이며, 원자들보다 내 주의를 더도 덜도 끌 만한 것이 아니다. 그 광채와 신속함이 나를 짓누르는 이 현상들의 연속, 차례차례 내 넋을 빼앗고 나를 겁에 질리게 하는 이 인류의 희비극은 오직 홀로 비극을 복잡하게 하고, 시간을 늘릴 능력을 가지는 내 생각의 바깥에서는 아무것도 아니다.

그러나 관찰의 토대 위에 인류가 사회와 자연을 그려보는 수단이 되는 이 경이로운 저작들을 세우는 것이 인간 이성의 본령이라면, 인간 이성은 진리를 창조하지 않고, 존재의 무한한 형태들 안에서 자기 마음에 가장 잘 드는 형태를 선택하기만 한다. 따라서 인간 이성의 작업이 가능하려면, 인간 이성 측에서 비교와 분석의 시작이 있으려면 진리, 온전한 숙명 전체가 주어지는 것이 필요하다. 그러므로 무언가가 도래한다고, 무언가가 생겨난다고 말하는 것은 정확하지 않다. 우주에서처럼 문명에서도 모든 것은 태곳적부터 움직인다. 이처럼 균형 법칙은 이웃하는 두 들판의 지주들 사이의 관계가 확립되는 순간부터 발현된다. 제한, 금지 그리고 후한 인간의 환상을 가로질러 우리가 그 법칙을 발견할 줄 몰랐다면 이는 그의 잘못이 아니다.

사회경제학 전체가 이와 같다. 어디서나 종합의 관념은 그 적대적 요소들과 동시에 기능한다. 그리고 우리가 인류의 진보를 끊임없는 탈바꿈으로 상상하는 반면, 이 진보는 실제로는 하나의 관념의 다른 관념에 대한 점진적 우세, 마치 우리를 감추는 베일들이 알아채지 못하게 벗겨지는 듯이 여겨지는 우세를 점하고 점진적으로 단계를 밟는 것에 불과하다.

이런 고찰들로부터 다음과 같이 결론을 내릴 필요가 있으며, 이는 이 절의 요약이면서 더 고차적인 해결책의 고지일 것이다.

노동에 의한 사회의 조직 공식은 이기주의에 의해 발견되고 증오에 의해 지탱되고, 거짓된 철학에 의해 욕을 먹으며 민족들 간에 노동과 행복의 조건들을 균등화하는 이 균형 법칙처럼 단순하고 그처럼 원시적이며 그처럼 쉽게 이해되고 적용될 수 있는 것이어야 한다는 것.

과학의 과거와 미래를 한꺼번에 포괄하는 이 지고의 공식은 사회적 이익들과 개인적 자유를 똑같이 만족시켜 주고, 경쟁과 연대, 노동과 독점을, 한마디로 모든 경제적 모순들을 조화시켜야 한다는 것.

이 공식은 인류의 비인격적 이성 안에 존재하며, 오늘날에도 그리고 여러 사회들의 시초에서부터 인류의 이성을 구성하는 부정적 관념들 각각처럼 움직이고 기능을 수행한다는 것. 문명을 살리고, 자유를 확정하고, 진보를 다스리고, 수많은 진자 운동과 파국들 중에 우리를 확실한 노력으로 평등과 질서를 향해 옮겨주는 것이 이 공식이라는 것.

노동자들과 자본가들이 잔혹한 투쟁에서 기진맥진해도 소용없다. 파편적 분업, 기계, 경쟁 그리고 독점이 프롤레타리아트를 괴멸시켜도 소용이 없다. 여러 정부들의 악행과 조세의 허위, 특권층의 음모, 신용의 기만, 지주들의 횡포와 공산주의의 환상이 여러 민족들에게 예종, 부패 그리고 절망을 배증해도 소용없다. 인류의 수레는 굴러간다. 그 숙명적 길 위에서 멈추지도 후퇴하지도 않는다. 그리고 여러 담합들, 기근, 파산은 지구상의 합쳐진 표면 위의 알프스와 안데스 산맥의 꼭대기들보다 그 엄청난 수레바퀴로 가는 길에서 덜 나타난다. 신은 저울을 손에 들고서 평온하고 장엄한 태도로 나아간다. 그리고 길의 모래는 보이지 않는 미동만을 그 두 고원에 새긴다.

제10장 제7기신용

우리의 동시대인 한 사람에게, 아무도 감히 그의 지성과 성실성을 의심하지 않는 가운데, 심지어 그의 모순들에 대해 그를 비난하는 것―이는 전혀 대응도 아니었다―말고 다른 방식으로 사람들이 대응하지 못하는 가운데 극히 상반되는 관념들을, 극히 어울리지 않는 경향들을 하나씩 표현하는 일이 주어졌다. 이 사람은 드 라마르틴(de Lamartine) 씨다.

그리스도교인이면서 철학자, 왕당파이면서 민주주의자, 귀족이면서 민중, 보수주의자이면서 혁명가, 예감과 후회의 사도 드 라마르틴 씨는 19세기의 살아있는 표현이고, 모든 극단들 사이에 걸려 있는 이 사회의 인격화다. 획득하기 쉬운 것 한 가지가 그에게 결여되는데 그것은 자신의 모순들에 대한 의식이다. 그의 별이 모든 적대 관계를 표현하도록, 그리고 의문의 여지없이 또한 보편적 화해의 사도가 되도록 점지했다면, 드 라마르틴 씨는 우선 우리에게 아주 큰 광채를 가지고서 나타난 것인, 거룩한 전통들과 고귀한 기억들의 시인인 채로 변함이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드 라마르틴 씨는 그가 고발자이면서 동시에 기관이기도 한 이율배반의 이 광대한 체제를 자기 조국에 설명할 책무를 진다. 드 라마르틴 씨는 그가 취한 입장 때문에, 내가 말하건대 그의 비일관성의 부담 아래서 죽을, 혹은 그의 모든 가설들을 조화시킬 형벌에 처해졌으며, 그는 그가 대표하는 상반된 견해들보다 더 높은 데 그 원천이 있는 이 판결에 항소하지 못할 것이다. 끝으로 『아가雅歌의 신부新婦』[11]처럼 그는 자신의 천재성의 성숙에 더 이상 어울리지 않는 자기 자신에 대한 무지에서 벗어날 수 있는가? 그는 자신의 역할의 모든 위대함을 의식하고 그들만이 그 비밀을 보유하므로 그의 비켜남에 갈채를 보낼 수 있는 오직 그자들의 목소리를 받아들일 수 있는가? 웅변가, 정직한 사람, 위대한 시인인 그가 우리 진영으로 오면 좋으련만. 그러면 우리는 그에게 우리가 누구인지를 말해줄 것이며, 우리는 그에게 그 자신의 생각을 드러내줄 것이다. “네가 알지 못하겠거든 양 떼의 발자취를 따라 목자들의 장막 곁에서 너의 염소 새끼를 먹일지니라!(Si ignoras te, egredere, et pasce hoedos tuos juxta tabernacula pastorum!)”

사회주의자들! 미래를 상실한 계몽자들, 암흑의 나라를 탐구하는 데 헌신한 개척자들, 그 오해받은 저작이 아주 드문 동감을 일깨우고 다중에게 불길한 징조같이 보이는 우리. 우리의 사명은 세상에 신심들, 법칙들, 신들을 다시 건네주지만 우리 자신은 우리의 과업이 완수되는 동안 신앙도, 희망도, 사랑도 보전하는 일이 없는 것이다. 사회주의자들이여, 우리의 가장 큰 적은 유토피아다! 경험의 횃불을 들고 결연한 발걸음으로 행진하면서 우리는 우리의 지시, 전진만을 알아야 한다. 우리 가운데 얼마나 많은 이가 사라졌는데, 아무도 이들의 운명에 눈물 흘리지 않았다! 우리가 길을 터주는 세대들은 흔적만 남은 우리의 무덤 위를 즐겁게 지나간다. 현재는 우리를 파문하고, 미래는 우리에 대한 기억을 지니지 않으며, 우리의 존재는 이중 허무 속에 잠긴다.

그러나 우리의 노력은 상실되지 않을 것이다. 과학은 우리의 영웅적 회의주의의 과실을 딸 것이며, 후세는 우리가 있었다는 것도 모른 채 우리의 희생으로 우리를 위해 만들어지지 않은 행복을 누릴 것이다. 전진! 이것이 바로 우리의 신이고, 우리의 신념이고, 우리의 열광이다. 우리는 한 사람씩 쓰러질 것이다. 마지막 사람까지 새로 온 자의 삽이 노병의 시체를 흙으로 덮을 것이다. 우리의 종말은 짐승들의 종말과 같을 것이다. 우리는 순교에도 불구하고 사제가 장송곡, 〈하느님이 성자들의 뼈를 지키신다!〉를 부르러 갈 사람들 중에 결코 들지 않는다. 우리를 따르는 인류와 분리되어 우리 자신이 인류 전체가 되자. 우리의 힘의 원리는 이 지고의 이기주의에 있다. 학자들이 우리를 멸시할 테면 하라고 해라. 그들의 관념은 그들의 용기 수준이다. 그리고 우리는 그들의 책을 읽어서 그들의 평가가 없이도 괜찮은 법을 배웠다. 그러나 어떠한 모순에도 놀라지 않는 시인에게, 노래하는 자, 늙은 음유시인, 문명으로부터 배척당한 자들에게, 그리고 어느 날 그들의 추억에 관해 명상하러 올 자에게 평안이 있기를! 시인이여, 벌써 망각이 둘러싸는 자들, 그러나 지옥도 죽음도 두려워하지 않는 자들이 당신에게 인사한다! 귀를 기울이라.

날이 새기 두 시간 전이었다. 밤은 추웠다. 바람이 히스가 무성한 땅을 가로질러 휘파람 소리를 냈다. 우리는 산마루의 말안장처럼 들어간 부분을 벗어나 침묵 가운데 식생과 생물이 눈에 띄지 않게 숨을 내쉬는 황량한 곳들을 가로질러 갔다. 갑자기 우리는 자기 생각을 회상시키는 사람의 목소리처럼 그늘진 목소리를 들었다.

노동 분업은 노동자들의 저열화를 일으켰다. 이것이 내가 기계와 작업장 안의 노동을 요약한 이유다.

기계는 노예들, 그리고 임금 수령자들의 작업장만을 낳았다. 이것이 내가 경쟁을 일으킨 이유다.

경쟁은 독점을 낳았다. 이는 내가 국가를 형성하고 자본에 압류를 가한 이유다.

국가는 프롤레타리아에게 새로운 노예제가 되었다. 그래서 나는 이렇게 말했다. 한 민족에게서 다른 민족에게로 노동자들은 서로 손을 내민다.

그리고 모든 부분으로부터 피착취자들에 맞서 담합하는 것이 착취자들인 것은 다음과 같다. 토지는 곧 노예들의 병사兵舍에 불과할 것이다. 나는 노동이 자본에 의해 출자되고, 각 노동자는 기업가가 되고 특권을 받게 될 수 있기를 바란다!

우리는 자신에게서 이 새로운 모순을 의미할 수 있었던 것을 염려해 우리는 이 말들에서 멈추었다. 낮은 목소리가 우리의 흉곽에서 다시 울렸다. 그렇지만 우리의 귀는 마치 어느 보이지 않는 존재가 우리의 환경으로부터 발언한 것같이 들었다. 우리의 눈은 맹수의 눈처럼 밤중에 번뜩이는 특성을 내보이며 우리의 모든 감각은 열정과 알려지지 않은 예민함으로 활기를 띠었다. 가벼운 떨림, 이는 놀람에서도 두려움에서도 온 것이 아닌데 우리의 사지를 타고 흘렀다. 어떤 액체가 우리를 감싼 것같이, 생명의 원소가 각자에서부터 다른 이들을 향해 비추어져서 우리의 존재를 공통의 끈으로 엮어 매는 것같이, 그리고 우리의 영혼들이 서로 간에, 혼동 없이 하나의 거대한 영혼, 조화롭고 동감하는 영혼을 이룬 듯이 여겨졌다. 저 위의 번개처럼 하나의 우월한 이성이 우리의 지성을 비추었다. 우리 생각들의 의식에는 우리 안에서 타인들의 생각에 대한 통찰이 결합되었다. 그리고 이 긴밀한 교류로부터 우리 가슴속에는 의견 일치의 즐거운 감정이 태어났으며, 그렇다고는 해도 이 감정은 그 표현과 동기에서 다채로웠다. 우리는 우리 자신이 더 결합되고 더 분리 불가능하며 그렇기는 하지만 더 자유롭다고 느꼈다. 순수하지 않은 어떤 사상도, 충직하고 관대하지 않은 어떤 감정도 우리 안에 일깨워지지 않았다. 한순간의 이 황홀경 속에, 여러 성격들을 지워버림 없이 이들을 사랑으로써 이상理想에까지 고양시킨 이 절대적 일치 안에, 우리는 사회가 그럴 수 있는 것, 사회가 그래야 하는 것을 느꼈다. 그리고 불멸의 삶인 신비가 우리에게 계시되었다. 매일, 말도 필요 없고 어떤 신호도 보낼 필요 없이, 내면에서 명령에도 복종에도 닮은 어떤 것도 겪지 않고 우리는 마치 우리 모두가 운동의 원소들이면서 기관들인 듯이 경이로운 총체를 이루어 일했다. 그리고 저녁 무렵 우리가 점점 우리의 거친 인성으로, 이 어둠의 생활로 옮겨져서 그 안에서는 모든 사상이 노력이고, 모든 자유가 분리이고, 모든 사랑이 관능주의이고, 모든 사회가 무지한 접촉인 그런 때가 되자 우리는 생명과 지성이 우울한 유출에 의해 우리의 품으로부터 벗어난다고 믿었다.

인간의 삶은 모순으로 짠 천이다. 이 모순들 각각은 그 자체가 사회적 체제의 기념물이고 공공질서와 가족들의 행복의 요소다. 이 기념물, 요소는 극단적인 것들의 이 신비적 연합에 의해서만 생성되는 것이다.

그러나 사람은 그 발현의 총체에서, 그리고 그 이율배반들의 완전한 비움 후에 고려될 때 여전히 하나의 이율배반을 제시하는데, 이는 지상의 아무것에도 더 이상 대응하지 않아서 이승에서 해결책 없이 남는 것이다. 이는 사회 안의 질서가 아무리 완벽하다고 가정하더라도 결코 쓰라림과 권태를 완전히 쫓아내지는 못할 이유다. 이 세상에서의 행복은 우리가 언제나 추구할 형벌에 처해진, 그러나 자연과 정신의 벗어날 수 없는 적대가 우리의 입지 바깥에 두는 이상이다.

저편의 세계에 인간의 삶의 계속이 있는지, 혹은 지고의 방정식이 무無로의 회귀에 의해서만 우리에게 실현되는지, 이는 내가 모르는 것이다. 오늘날 아무것도 내게 이것도 저것도 단언하도록 허락해주지 않는다. 내가 말할 수 있는 모든 것은 우리가 우리에게 도달하도록 주어진 것보다 더 멀리 생각한다는 것, 그리고 살아있는 인류가 도달할 수 있는 마지막 공식, 인류의 모든 앞선 입장들을 포괄해야할 공식은 여전히 새롭고 형언할 수 없는 조화의 첫 번째 항이라는 것이다.

신용의 예는 우리가 우리 운명의 문제는 끝없는 이 재현을 이해하도록 하는 데 도움을 줄 것이다. 그러나 문제의 밑바닥에 들어가기 전, 신용에 관해 일반적으로 유포된 편견들에 관해 몇 마디를 하고 신용의 목적과 기원을 잘 이해하기를 시도해보자.

. 신용 관념의 원천과 계통이 관념에 관한 모순적 편견들

신용의 출발점은 화폐다.

제2장에서 행복한 상황들의 총체에 의해 어떻게 금과 은의 가치가 처음으로 형성되었는지, 어떻게 화폐는 모호하고 진자 운동을 하는 모든 가치들, 즉 사회적으로 형성된 것도 아니고 공식적으로 확립된 것도 아닌 가치들의 전형이 된 것인지를 보았다. 이 기회에 모든 산물들의 가치가 일단 정해지고, 고도로 교환 가능하고 수용 가능하게 되면서, 한마디로 모든 지불 시에 화폐처럼 되면서 사회가 어떻게 이 사실만으로 상업적 관점에서 이룰 수 있는 경제 발전의 가장 높은 정도에 이르는지가 입증되었다. 사회경제학은 이때 더 이상 오늘처럼 교환과 관련해서 단순한 형성의 상태에 있지 않을 것이다. 그것은 완성의 상태에 있을 것이다. 생산은 확정적으로 조직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벌써 교환과 유통은 그렇게 될 것이다. 그리고 일꾼은 부를 정복해 차지하고 자신의 행복을 보장하는 데 때로는 원가를 줄이기도 하면서, 때로는 노동을 분업화하고, 더 나은 절차들을 발견하고, 새로운 소비 품목을 발명하고, 그 적수들을 억누르고, 그들의 공격을 버텨내고 하면서 생산하는 것으로, 끊임없이 생산하는 것으로 충분할 것이다.

바로 그 장에서 우리는 화폐와 관련한 사회주의의 몰이해를 지적했다. 그리고 우리는 이 발명품을 그 원리로 소급하면서 우리가 귀금속들 중에 억눌러야 했던 것은 관습이 아니라 특권이라는 것을 보여주었다.

실제로 모든 가능한 사회에서, 심지어 공산주의 사회에서 생산자도 소비자도 그의 권리를 유린하지 않으려면, 그리고 재분배를 불공정하게 하지 않으려면 교환의 척도가 필요하다. 그런데 가치들이 일반적으로 임의의 연합 방식에 의해 형성되기까지, 물론 모든 산물들 가운데 그 가치가 가장 공신력 있고 가장 잘 규정되고 가장 덜 변질되는 것으로 여겨질, 그리고 이런 장점에 보존과 운반이 크게 용이하다는 장점을 결합할 어떤 산물이 전형典型으로, 즉 다른 모든 가치물의 유통 수단이자 본보기로 취해지는 것이 필요하다. 그러므로 정말로 특권을 지닌 이 산물이 모든 야심가들의 목표물, 노동자의 시각에서의 낙원, 독점의 수호신이 되는 것, 모든 금지령에도 불구하고 이 귀중한 부적이 질투심 많은 권력의 눈에 띄지 않으면서 손에서 손으로 유통되는 것, 귀금속들의 대부분이 척도재로 소용되어 이렇게 해서 그 진정한 용도에서 벗어나 화폐의 형태에서 잠자는 자본, 소비 바깥의 부가 되는 것, 이런 교환 수단의 자격에서 금이 이번에는 투기물로 취해지고, 엄청난 상업에 기초로 소용되는 것, 끝으로 여론의 보호를 받고, 공중의 호의에 감싸여 권력을 정복하고, 동시에 공동체를 끝장내는 것이 불가피하다! 이 무서운 잠재 능력을 파괴할 수단은 그러므로 그 기관을, 내가 거의 그 보관인이라고 한 것을 파괴하는 것이 아니다. 이는 그 원리를 일반화하는 것이다. 이 모든 명제는 기하학의 정리들처럼 이제부터는 잘 입증되고, 엄밀하게 서로 연관되어 있다.

금과 은, 즉 가치로 형성된 첫 상품인 이것들은 그러므로 다른 가치들의 척도이며, 보편적 교환 수단으로 취해져서 모든 상업, 모든 소비, 모든 생산이 이에 의존한다. 금과 은은 사회성과 정의의 성격들을 가장 높은 정도로 획득했다는 바로 그 이유로 권력, 왕권, 그리고 거의 신성과 동의어가 되었다. 금과 은은 상업적 생명, 지성, 덕성을 대표한다. 동전으로 가득 찬 상자는 성스러운 방주, 마술 항아리로서 거기서 퍼낼 수 있는 권력을 가진 자들에게 건강, 부, 즐거움 그리고 영광을 준다. 노동의 모든 산물이 화폐와 같은 교환 가능한 가치를 가졌다면 모든 노동자는 화폐 보유자들과 같은 장점들을 누릴 것이다. 각자는 생산 능력 안에 고갈되지 않는 부의 원천을 보유할 것이다. 그러나 돈의 종교는 폐지될 수 없다. 아니, 더 제대로 말하면 가치들의 일반적 형성은 이성과 인간적 정의의 노력으로써만 가동될 수 있다. 그때까지는 돈의 보유는 부의 보장된 신호이며, 돈의 결여는 빈곤의 거의 확실한 신호다. 그러므로 돈이 사회의 인지印紙를 붙인 유일한 가치물이고, 상업에서 시세를 가지는 유일한 화폐 주조용 금속 상품이므로 돈은 일반적 이성으로서 인류의 우상이다. 상상력은 금속에 의해 발현된 집단적 사유思惟의 효과인 것을 소급해서, 모든 사람은 행복을 그 진정한 원천에서 찾는 대신에, 즉 모든 가치물의 사회화에서, 새로운 화폐적 형상들의 끊임없는 창출에서 찾는 대신에, 돈, 돈을, 언제나 돈을 획득하는 데 오로지 몰두했다.

목표를 직접 겨냥하는 대신, 계열의 첫 번째 항에 도달한 것, 각 산물을 가지고 계속해서 새로운 화폐를 만드는 대신 할 수 있는 최대한 그 제조 방식의 완성을 통해, 그 다음으로는 그 발행의 용이성을 이용해, 그리고 끝으로 허구들을 이용해 금속 화폐를 배증하는 데만 신경을 쓴 것은 근본적으로 생존 수단의 수요, 교환과 판로의 수요 말고 다른 것이 아닌 척도재의 이 보편적 수요에 대응하기 위한 것이었다. 명백히 이는 부의 원리에 관해, 화폐의 성격에 관해, 노동의 목표와 교환의 조건에 관해 오해하는 것이었다. 사회에서 벌써 변질하기 시작한 왕정 체제를 그 가치물들에서 재형성해서 문명에서 퇴보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러한 것이 신용 기관들을 낳은 모관념이다. 그리고 그러한 것이 우리가 이 모든 기관들을, 심지어 구상에서부터 적대성을 띠게 만드는 그 오류를 더 이상 입증할 필요가 없는 근본적 편견이다.

그러나 우리가 몇 번 이를 말할 기회를 가졌듯이, 인류는 불완전한 관념에 복종하는 때에도 그 시각에서 틀리지 않는다. 그런데 놀랍게도 인류는 후퇴를 통해 부의 조직으로 진행해 가면서 그 진화적 존재의 조건에 관해서 인류에게 행하도록 주어진 것만큼 잘, 그만큼 유용하게, 그만큼 틀림없이 작업해 온 것을 보게 될 것이다. 퇴행적 신용 조직은 예전의 모든 경제적 발현물들과 같이 산업에 새로운 도약을 하게 해 줌과 동시에 정말로 빈곤의 심각화를 확정해 주었다. 그러나 결국 사회 문제는 새로운 날에 생성되었고, 오늘날 더 잘 알려진 이율배반은 다음번의 온전한 해결에 대한 희망을 남긴다.

이처럼 신용의 최종 목표, 그러나 현재까지 감지되지 않은 목표는 돈의 도움으로, 그리고 돈의 원형에 따라 아직 진자 운동을 하는 모든 가치물을 형성하는 것이다. 그것의 직접적이고 공언된 목표는 사회 내 질서의, 그리고 노동자들 중에서의 행복의 최고 조건인 이 체제를 금속 가치의 더 넓은 확산으로 보충하는 것이다. 이 새로운 관념의 촉진자들은 서로 이렇게 말했다. 돈이 곧 부라고. 그러므로 우리가 모든 사람들에게 돈을, 많은 돈을 마련해줄 수 있다면 모든 사람은 부자가 될 것이다. 그리고 땅의 모든 표면에서 신용 기관들이 발달한 것은 이 삼단논법에 따른 것이다.

그런데, 신용의 궁극적 목표가 논리적이고 자명한, 그리고 결실이 많은 관념을 제시하고 한마디로 진보적 조직 법칙에 순응하는 만큼, 유일하게 구해지고 유일하게 원해지는 그 직접적 목적은 환상으로 가득하고 그것이 가진 현 상태에 대한 지향 때문에 위험으로 가득하다는 것이 명확하다. 왜냐하면 돈은 다른 상품들과 마찬가지로 비례성의 법칙에 종속되어, 돈의 양이 증가하는 동시에 다른 산물들이 비례적으로 증가하지 않는다면 돈은 그 가치를 상실할 것이고, 결국 사회적 부에 아무것도 더해지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반대로 척도재와 함께 생산이 어디서나 증가하고 인구가 같은 보조를 따른다면 생산자들 각자의 상황에는 아직 아무것도 달라지지 않는다. 그리고 두 경우에 요구되는 해결책은 한 음절도 전진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선험적으로 신용의 조직이 그것이 제안된 조건들에서 사회적 문제의 해결책을 포함한다는 것은 참이 아니다.

신용의 계통과 존재 이유를 이야기한 후에 우리는 그 출현에 관해서, 즉 과학의 범주들 안에서 신용에 할당되어야 할 서열에 관해서 해명해야 한다. 우리가 정치경제학이 별로 깊이가 없고 앞뒤가 맞지 않는다는 점을 특히 여기서 지적해야 한다.

신용은 판로 이론의 결과인 동시에 모순이다. 그 최종 결론은 우리가 보았듯이 상업의 절대적 자유다.

나는 우선 신용이 판로 이론의 결과이며, 그런 것으로서 이미 모순적임을 말한다.

사회의 환상적인 동시에 실질적인 이 역사에 관해 도달한 지점에서 우리는 모든 조직 절차들과 균형 수단들이 하나씩 무너지고 끊임없이 예전보다 더 긴급하고 더 살인적인 것으로서 가치의 이율배반을 재현하는 것을 보아왔다. 그 진화의 제6기에 도달해서 사회적 화신은 자신을 밀어붙이는 확장 운동에 복종해 대외무역에서 판로, 즉 자신에게 결여된 평형추를 구한다. 현재 우리는 사회적 화신이 그 기대에서 환멸을 겪고 나서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필요한 이 평형추, 이 판로, 이 교환의 보장을 내부의 국내 상업에서 구하는 모습을 보게 될 것이다. 사회는 신용에 의해서, 말하자면 자기 자신의 세계에 틀어박힌다. 사회는 생산과 소비가 자신에게 적합하고 동일한 것들이어서, 무한정의 분출을 통해서가 아니라 자기 자신 안에서 그 균형을 발견해야 한다는 점을 이해한 것 같다.

모든 사람들이 오늘날 노동을 위해 신용 기관들을 요구한다. 이는 블랑키 씨, 볼로프스키 씨, 슈발리에 씨 등 경제적 가르침의 수장들의 인기 있는 논제다. 이는 드 라마르틴 씨, 수많은 보수주의자와 민주주의자들, 사회주의를 배척하고 그와 함께 노동의 조직이라는 괴물을 배척하면서도 진보를 표방하는 거의 모든 이들의 견해다. 신용! 신용! 광대한 사상을 지닌 이 개혁자들, 긴 안목을 지닌 이들이 외친다. 신용은 우리가 필요로 하는 모든 것이라고. 노동에 대해 말하자면, 이는 인구와 마찬가지다. 노동도 인구도 충분히 조직화된다. 생산은 그것이 무엇이든 부족함이 없을 것이다. 그리고 정부는 이 소란에 어리둥절해져서 그 느리고 바보 같은 몸짓으로 저당법 개혁을 위해 정부 위원회를 임명하면서 여태껏 있었던 가장 무서운 신용 기계의 기초를 놓는 것을 의무로 삼았다.

그러므로 언제나 동일한 후렴구다. 돈! 돈! 노동자에게 필요한 것은 돈이다. 돈이 없으면 노동자는 절망에 빠진다. 빵이 없는 일곱 아이의 아버지가 그런 것처럼 말이다.

그러나 노동이 조직되면, 그것은 어떻게 신용을 필요로 하는가? 그리고 신용의 찬양자들이 주장하는 것처럼 그 조직에 없는 것이 신용 자체라면 어떻게 노동의 조직이 완벽하다고 말할 수 있는가?

왜냐하면 결국 우리의 질투심 있는 독점, 비연대적 생산, 그리고 요행에 좌우되는 상업의 체제에서 소비자에게 한 산물에서 다른 산물로 가는 데 운반 수단으로 소용되는 것이 돈, 오직 돈인 것처럼, 신용은 돈의 이 속성을 크게 적용해 생산자에게 그가 산물들을 팔기를 기다리면서 그의 산물들을 실현하는 데 소용된다. 돈은 판로, 부, 행복의 실제적 실현이다. 그것의 신용은 예상된 신용이다. 그러나 이 경우와 저 경우에 우두머리가 언제나 판로이듯, 생산에서 소비로 가기를 원할 경우에 우선 지나갈 필요가 있는 것이 판로이듯, 신용의 조직은 국내에서 판로의 조직과 대등하며, 결과적으로 경제 발전의 질서에서 자유무역 혹은 해외 판로의 이론이 곧바로 따른다는 것이 결과로 나온다.

그리고 신용이 소비보다는 생산을 유리하게 해준다고 말하는 것은 아무것에도 도움이 되지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렇게 해서는 난점을 후퇴시키기만 할 것이기 때문이다. 실제로 경제학의 여섯 번째 마당인 판로를 넘어서 거슬러 올라가면 그 총체가 생산, 즉 공안, 독점, 경쟁 등을 표현하는 모든 다른 범주들을 연속적으로 만나게 된다. 그래서 결국 신용이 판로를 예상하고 판로의 결과인 모든 것을 예상한다고 단순히 말하는 대신, 신용이 피신용자에게서 독점, 경쟁, 자본, 기계, 노동 분업, 가치물의 중요성에 힘입어 그의 적수들을 이길 그런 능력을 가정한다고 여전히 말해야 할 것이다. 이는 논지를 약화시키기는커녕 강화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소비의 필요에 대한, 따라서 소비 가능 산물에 주어야할 규모에 대한 정확한 지식 없이, 임금의 기준 없이, 가치물들의 비교 방법 없이, 자본의 권리들의 제한 없이, 시장의 치안 없이―이 모든 것이 당신의 이론들에는 혐오스러운 것들이다―당신은 진지하게 신용, 즉 판로, 판매, 분배, 한마디로 행복을 조직하기를 어떻게 배려할 수 있는가? 나는 이 문제를 신용의 조직자들이 어떻게 풀어 가는지 지켜보겠다. 당신이 복권福券을 조직하겠다고 말한다면, 좋다. 하지만 신용을 조직하겠다고, 당신이, 신용을 정당화해줄 수 있는 어떤 조건도 수용하지 않는 당신이! 나는 당신에게 할 테면 해보라고 도전한다.

그리고 모순을 막거나 완화하기 위해 당신이 이 모든 문제들이 해소되었다고 주장한다면, 내가 말하건대 판로가 어디서나 대체로 생산자에게 열린다면, 상품의 판매가 보장된다면, 이득이 확실하다면, 임금과 가치라는 아주 가변적인 이것들이 규율이 잡힌다면 결과적으로 호혜성, 연대, 연합이 존재하게 된다. 이 경우에 신용은 무익한 공식, 무의미한 말에 불과하다. 노동이 조직된다면―내가 말해 온 모든 것은 노동의 조직이다―신용은 더 이상 재료에 주어진 첫 번째 밑그림에서부터 소비자에 의한 산물의 파괴까지를 포괄하는 유통 자체 말고 다른 것이 아니다. 나는 공통적 사상의 영감을 받아 가치의 정상적 측정을 향해 행진하고 일체의 그 질곡으로부터 벗어나는 유통을 말하는 것이다.

판로의 보충 혹은 예상으로서 신용의 이론은 그러므로 모순적이다. 현재 다른 관점에서 이 이론을 고찰해보자.

신용은 돈을 성인 반열에 올리는 것이고, 임의의 모든 상품에 대한 돈의 왕권을 선언하는 것이다. 따라서 신용은 반反 금수론 체제의 가장 명백한 부인이고 무역수지 균형에 대한 경제학자들 측의 의심의 여지없는 정당화론이다. 그러므로 경제학자들은 일단 자신들의 관념을 일반화하기를 배우고, 어느 민족이 구매하는 상품들은 돈으로 지불할지 아니면 그 자신의 산물들로 지불할지가 그 민족에게 상관없다면 어떻게 그 민족에게 돈이 필요한지, 노동하는 민족이 기진맥진하는 것은 어떻게 그리될 수 있는지, 어떻게 그 민족에게서 소비하지 않는 유일한 산물, 즉 돈에 대한 수요가 언제나 있는지, 어음, 은행권, 지폐같이 돈의 부족을 보충해 주기 위해 이날까지 상상된 모든 교묘한 것들이 어떻게 이 필요를 나타내고 더 감지될 수 있게 하기만 하는지를 우리에게 말해주기 바란다. 참으로, 반금수론적 열광주의는 오늘날 경제학자 종파를 가리키는 것으로서 돈의 상업을 퍼뜨리고 신용 기관들을 배증하는 데 헌신하는 이례적인 노력과는 별개로 더는 이해가 되지 않는다.

다시 한 번 묻노니 신용이란 무엇인가? 이론은 이렇게 대답한다. 투하된 가치를 빼내서 전에 그랬던 불활성 상태로부터 바로 이 가치를 유통 가능하게 만들 수 있도록 하는 것이다. 더 간단한 언어로 말해보자. 신용은 자본가가 교환이 어려운 가치물들의 보관을 대가로 가장 교환이 잘 되는, 따라서 모든 것들 중 가장 귀중한 상품, 돈을 선불하는 것이다. 치에슈코프스키(Cieszkowski) 씨에 따를 때 모든 교환 가능한 가치물을 미결 상태로 붙잡아 두는 돈, 그것 없이는 가치물들 자체가 금지를 당하는 돈, 다른 모든 산물을 측정하고 지배하고 주변화하는 돈, 자신의 빚을 소멸시키고 채무에서 벗어나게 해주는 유일한 수단인 돈, 개인들에게처럼 민족들에게 행복과 독립을 보장해주는 돈, 끝으로 권력일 뿐 아니라 자유, 평등, 소유권, 모든 것이기도 한 돈을 선불하는 것이다.

이야말로 인류가 만장일치의 찬성으로 이해한 것, 경제학자들이 누구보다 더 잘 알지만 가장 정력적으로 공언된 자신들의 원칙과 모순되게 왠지 모를 자유주의의 환상을 지탱하기 위해 우스운 맹렬함으로 끊임없이 맞서 싸우는 것이다. 신용은 노동자의 손에 그를 죽일 수단, 돈을 건네주면서 노동을 구원하기 위해 발명되었다. 그리고 여기서 출발해서 산업 민족들 간에는 돈의 장점은 아무것도 아니라고, 그 민족들에게는 계정을 상품으로 청산하든, 현금으로 청산하든 중요하지 않다고, 그 민족들이 고려해야할 것은 저가격뿐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국제무역에서 귀금속들이 그 우세성을 상실한 것이 사실이라면, 이는 말하자면 국제무역에서 모든 가치물이 같은 정도의 확정성에 도달했고, 돈과 마찬가지로 수용이 가능하다는 것, 다른 말로 하면 교환 법칙이 발견되고 노동이 민족들 간에 조직된다는 것이다. 이 법칙을 정식화할 때, 이 조직을 설명할 때, 신용을 말하고 노동자 계급을 위해 새로운 사슬을 벼리는 대신, 국제적 균형의 원리의 응용에 따라 교역하지 않으므로 파멸하는 이 모든 산업인들에게, 일이 부족하므로 굶어 죽는 이 일꾼들에게 그들의 산물이 어떻게, 그들의 수공품이 어떻게 이것이 은행권이나 돈일 때처럼 자신들의 소비를 위해 처분할 수 있는 가치물인지를 가르쳐주기 바란다. 뭐라고! 경제학자들에 따르면 민족들의 상업을 지배하는 원리는 사적 산업에는 작용할 수 없을 것이다. 어째서 그런가? 왜? 신의 이름으로 그 이유, 증거를 대라!

신용의 관념 자체의 모순, 신용을 조직하는 기획의 모순, 신용 이론과 자유무역 이론 간의 모순. 이는 우리가 경제학자들을 비난해야할 모든 것인가?

신용을 조직한다는 생각에 경제학자들은 또 다른 한 생각, 그에 못지않게 비논리적인 생각을 더한다. 이는 국가를 신용의 조직자이자 군주로 만든다는 생각이다. 저명한 로(Law)는 국가 작업장의 창설과 산업의 공화제화를 준비하면서 이렇게 말했다. 국가의 일은 신용을 제공하는 것이지 이를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다. 이는 금융적 봉건제에 격분하는 모든 이들, 정부의 절대 권력으로 이를 대체하기를 원하는 모든 이들을 기쁘게 하기 위한 훌륭한 격언이다. 그러나 두 부류의 사람들에게 반대 방향으로 해석되는 애매한 격언이다. 한 무류는 세무와 예산 담당 공무원들이다. 이들에게는 인민의 돈을 국가의 금고에 가져오는 모든 수단은 선이다. 그들만이 거기서 퍼내어 쓸 수 있기 때문이다. 다른 한 부류는 내가 거의 정부 수용收用이라고 하는 것을 주창하는 당파다. 이들에게는 공동체만이 득이 될 수 있다.

그러나 과학은 기분 좋게 해주는 것에 관심이 없고, 가능한 것을 구한다. 그리고 우리의 반反은행적 열정, 우리의 절대주의적이고 공산주의적인 성향은 과학의 눈에는 사물의 내밀한 이성을 이길 수 없다. 그런데 국가로부터 모든 신용을, 그리고 따라서 모든 보증을 도출하려는 관념은 다음의 문제에서 드러날 수 있다.

국가, 비생산적 기관이고, 재산도 자본도 없는 인격으로서 저당물로 그 예산만을 내놓고, 언제나 차입자이고, 언제나 파산자이고, 언제나 빚을 잔뜩 지고, 자신과 함께 모든 사람을, 따라서 자신의 전주錢主들을 개입시키지 않고는 투자할 수 없으며, 그 바깥에서 모든 신용 기관들이 자생적으로 발달한, 그 국가는 자신의 자원, 보증, 자신의 창도성, 자신이 부과하는 연대성에 의해 보편적 출자자, 신용의 창조자가 될 수 있는가? 그리고 그럴 수 있을 때 사회는 이를 허용할 것인가?

이 문제가 긍정적으로 풀린다면, 사회가 자유무역을 통해 프롤레타리아트를 해방시킨다는 유토피아를 포기하고 자신에게로 돌아가 자본을 그것을 생산하는 노동으로 되돌림으로써 생산과 소비 간의 균형을 재확립하기를 구할 때, 신용에 의해 발현된 사회의 서원을 충족할 수단을 국가가 보유하는 결과가 될 것이다. 국가는 신용을 형성하면 가치물 구성의 등가물을 획득한 셈이 될 것이다. 경제 문제는 풀릴 것이고 노동은 해방되고, 빈곤은 격퇴될 것이다.

국가를 그 독재 공산주의적 성향에도 불구하고 신용의 창조자이자 분배자로 만들자는 제안은 그러므로 큰 중요성을 띠며, 우리의 모든 주의를 끌 만하다. 우리가 도달해 있는 지점에서 경제 문제들은 더 이상 한계를 가지지 않으므로 이 제안에 걸맞은 규모에서가 아니라 세부 내용을 오직 보충해줄 수 있는 깊이와 일반성을 가지고서 취급하기 위해 이 제안을 두 기간으로 나눌 것이다. 하나는 신용에 관해서 국가의 모든 과거를 포괄하는 신용 이론이 포함하는 것, 따라서 국가에 의해서든 자유로운 자본에 의해서든 신용 조직에서 기대할 수 있는 것을 확정하는 것을 목표로 삼게 될 기간이다. 이는 두 번째와 세 번째 절의 소재일 것이다.

경제학자들이 최근 시대에 산업과 관련해서는 국가에 그런 능력이 있음을 부인한 후에 신용에 관해서 국가에 기꺼이 인정해주었던 조직 능력을 평가하기 위해 선행하는 것들을 호출하는 것으로 충분했다면, 우리는 논리 대신에 우리의 적대자들에게 더욱 감흥을 줄 수 있는 경험을 들이미는 것밖에 할 수 없는데, 그 부분은 우리의 적대자들에 반대하는 것으로는 너무 아름다울 것이다.

그들에게 우리는 이렇게 말할 것이다. 국가는 재산도 자본도 가지지 않으며, 한마디로 국가가 그 신용 증서의 기초로 삼을 것을 가지지 않는다는 것이 경험에서 증명된다고. 국가가 동산 가치물과 부동산 가치물로 소유하는 모든 것은 오래전부터 투자되어 있다. 국가가 자기 자산 외에 진 채무로서 민족이 국가 대신 그 이자를 지불하는 것은 프랑스에서 40억 프랑을 넘는다. 그러므로 국가가 신용의 조직자, 은행의 기업가가 된다면 이는 그 자신의 재원을 가지고서는 안 되고 피통치자들의 재산으로 될 수 있다. 이로부터 국가에 의한 신용의 조직 체제에서는 허구적 혹은 암묵적인 일정한 연대성에 의거해, 시민들에게 속하는 것은 국가에 속한다. 그러나 그 역은 아니다. 그리고 루이 15세의 접정자가 이 군주에게 그의 왕국을 가리키면서 “폐하, 이 모두가 폐하의 것입니다”라고 말한 것은 옳았다고 결론을 내릴 필요가 있다.

시민들의 재물에 대한 국가의 이 상급 소유 원리는 공적 신용의 진정한 기초다. 왜 헌장은 이에 대해 말하지 않는가? 왜 입법, 언어, 관습은 오히려 그에 상반되는가? 왜 공공 재산과 개인 재산의 이 연대성 이론을 슬쩍 도입하기를 구하면서 국가의 모든 종주권 밖의 시민들에게 그들의 재산을 보장해주는가? 그리고 이 연대성이 권력의 우위와 창도성의 체제에서 존재하지 않고, 존재할 수 없다면, 이것이 허구일 뿐이라면 국가의 보증은 무엇이 되는가? 그리고 국가에 의해 주어지는 신용은 무엇인가?

거의 진부한 단순성과 공격할 수 없는 실재성을 가진 이 고려 사항은 신용 문제 전체를 지배한다. 내가 이따금 새로운 집요함을 가지고 이 문제로 되돌아오는 데 사람들은 놀라지 않을 것이다.

국가에 재산이 없는 것만이 아니다. 국가에 생산은 더구나 존재하지 않는다. 국가는 비생산적인 자들의 카스트다. 국정 지폐에 가치와 확실성을 줄 수 있는 이익이 예상되는 어떤 산업도 국가에 의해 영위되지 않는다. 이제부터는 국가가 생산하는 모든 것은 공익사업에서든, 가정이나 개인 소비품에서든 그 값어치의 세 배의 비용이 든다는 것이 보편적으로 인정된다. 한마디로 국가는 비생산적 공안 기관으로서, 그리고 국가의 일로 삼은 집단적 사업 부분에 대한 생산자로서 오직 보조금으로 살아간다. 어떻게, 어떤 마법적인 힘에 의해, 어떤 들어보지 못한 변형에 의해 국가는 갑자기 그 중 한 푼도 소유하지 않는 자본의 처분자가 될 것인가? 어떻게 비생산적인 존재 자체인 국가, 따라서 저축이 본질상 불쾌한 것이 되는 국가가 국립은행가, 보편적 출자자가 될 것인가?

그러므로 재산의 관점에서처럼 생산의 관점에서도 국가가 목소리를 한껏 높여 이를 공언하고 그 조항들을 명령하는 것이 허락되는 날까지 조심스럽게 그 중재자가 되는, 그리고 자신에게 유리하도록 활용하는 암묵적 연대의 가설로 되돌아갈 필요가 있다. 왜냐하면 이 거대한 기계가 작동하는 것을 보기 전에 나는 민간 자본의 도움으로 형성되는, 그리고 그 경영이 단지 공무원들에게 위탁되는 은행업이 단지 문제라고 생각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한 사업은, 그것이 상업에 자본을 더 싼 값에 장만해줄 때에도 모든 유사한 사업들과 어떤 점에서 다를 것인가? 이는 국가를 위한 새로운 재원을, 국가가 거기에 자기 것은 아무것도 넣지 않으면서 창출하는 일일 것이다. 권력의 손아귀에 상당한 액수를 놔두는 위험이 아니라면 나는 진보가 거기서 얻을 것, 사회가 거기서 얻을 것을 보지 못한다. 국가에 의한 신용의 조직은 사물의 토대로 더 가야 한다. 그리고 사람들은 내가 조사를 추진해가는 것을 허락해줄 것이다.

그렇고말고, 국가는 가장 큰, 가장 불멸의 수입을 올리니, 조세를 가지니 자본을 소유한다고들 말한다. 국가가 이 조세를 몇 상팀 추가로 올려야 했다면, 그래서 이를 신용의 가장 방대한 작동들을 결합하고 실행하고 보증하는 데 사용할 수 없는가? 심지어 조세 증가에 의존하지 않더라도 국가가 민족의 제한된, 혹은 무제한의 보증 아래서, 민족 대표자들의 투표에 힘입어 농공은행의 완전한 체제를 창설하지 못하게 막는 것이 무엇인가?

그러나 둘 중 하나다. 신용을 일반 이익을 핑계로 국가의 이익이 되게 독점의 대상으로 삼겠다는 것이거나, 아니면 국립은행이 오늘날의 프랑스 은행과 같이 그 나라 모든 은행가들과 공동으로 기능하는 것을 인정하는 것이다.

전자의 경우에 상황은 개선되기는커녕 악화될 것이며, 사회는 즉각적인 해체를 향해 진행할 것이다. 국가의 손아귀에 신용을 독점하는 것은 어디서나 민간 자본의 가장 정당한 권리인 이자를 낳을 권리를 부인해 믹나 자본을 폐지하는 불가피한 효과를 가질 것이기 때문이다. 국가가 출자자이고 농공상업의 유일한 할인자로 선언된다면, 자신들의 자본에 의지해 살아가고 이후로는 소득을 먹는 대신 원금을 축내지 않을 수 없게 되는 수천 자본가들과 금리 생활자들을 국가가 대체한다. 나아가 자본을 쓸모없게 만들어서 국가가 그것의 형성을 멎게 한다. 경제적 진화의 제2기 저쪽으로 퇴보하는 것이다. 정부, 입법부, 민족에게 그런 일을 추진할 테면 해 보라고 과감하게 도전할 수 있다. 이쪽 편에서는 사회가 어떠한 능력으로도 뒤집을 수 없을 금속 벽으로 인해 멈춘다.

내가 거기서 말하는 것은 결정적이며, 미지근한 사회주의자들의 모든 기대를 뒤엎는다. 이들은 공산주의까지 가는 일 없이 끊임없는 독단으로써 가난한 계급들의 이익이 되도록 때로는 보조금, 즉 부자들의 행복에 대한 사실상의 참여, 때로는 국가 작업장, 따라서 특권화된 작업장, 즉 자유로운 산업의 멸망을, 때로는 국가에 의한 신용의 조직, 즉 민간 자본의 철폐, 저축의 불임성을 창조하기를 원할 자들이다.

그러한 고려 사항들에 구애받지 않는 이들에 대해 말하자면, 내가 여기서 그들에게 그들이 신용에 손을 대기 전에 풀어야할 모순들의 아주 긴 계열을 환기시켜줄 필요 없이, 자본에 전쟁을 걸고 투자를 금지하면 그들이 가치물의 발굴과 연대가 아니라 유동자본의 철폐, 교환의 폐지, 노동의 금지에 빠르게 도달하리라는 것에 그들이 주목하게 하는 데에 당분간 한정할 것이다. 자본의 생산성이 작동하는 방식에 불과한 돈의 상거래는 필연적으로 가장 자유로우며 가장 파악이 불가능하다고 말하고 싶고, 독재에 가장 저항적이고, 공동체에 가장 반발하고, 따라서 중앙 집중과 독점을 받아들일 가능성이 가장 없다. 국가는 은행에 규칙들을 부과할 수 있다. 어떤 경우들에서는 특수한 법률들로써 그 행위를 제약하거나 쉽게 해줄 수 있다. 국가는 자체적으로, 자기 자신의 계정으로도, 공공의 계정으로도 은행가들을 대체하고 그들의 산업을 독차지할 수 없을 것이다.

국가를 정말로 신용의 군주이고 처분자로 만든다는 관념은 실행 불가능하며, 그것의 터무니없음을 입증해주는 얼마나 많은 고려 사항들을 내가 침묵하고 지나치는가! 그러므로 두 번째 가설, 경쟁의 가설, 혹은 더 제대로 말해 국가의 협조 가설에 집착할 수밖에 없다. 특히 신용의 여전히 모호한 몇 가지 부분들, 이는 국가의 창도성을 요구하며 민간 자본들이 아직은 싹틔우지 못했고 달성하지도 못했던 부분들에 관해서는 그러하다.

국가에 의한 신용이라고 요란하게 공고된 이 조직, 그리고 사물의 힘에 의해 국가에서 나오는 모든 것처럼 어떤 입법적 조작으로, 그리고 마찬가지로 공안 부처로 전락하는 조직과 우리가 말하는 것은 거리가 멀다는 데에 동의할 필요가 있다. 왜냐하면 위태로움을 초래하고 국가에 선천적인 불신을 공유하지 않으려면 중앙은행이 행정 집단에 들어갔을 때에도 그 작동의 독립성 전체, 그 은행의 이익과 국가의 이익의 완전한 분리를 보전해야 했으므로 그러한 은행은 언제나 왕국의 금융 제1가일 뿐이기 때문이다. 이는 국가에 의한 신용의 조직이 결코 아닐 것이다. 거듭 말하건대 국가는 노동도, 신용도, 아무것도 조직한다는 것이 불가능하다.

그러므로 국가는 그 태생적 빈곤과 함께, 그 본질인 비생산성과 함께, 빚을 지는 습성과 함께, 즉 창의적 능력에 가장 반대되는 모든 특질들, 국가를 신용의 군주가 아니라 불신의 전형으로 만드는 특질들과 함께 남으며, 영원히 남아야 한다. 모든 시기에 모든 민족들에게서 국가가 끊임없이 자신의 품에서 신용이 샘솟게 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차입을 조직하는 일에 매달려 있는 것을 보게 된다. 스파르타는 보물을 가지지 않아서 차입 기금을 조성하기 위해 단식을 단행했다. 아테네는 미네르바에게서 황금 망토와 보석을 빌렸다. 수용, 갈취, 거짓 화폐가 폭군들의 통상적 수단이었다. 아시아의 도시들은 금융의 모든 비밀에 익숙했는데, 덜 야만적인 방식으로 나아갔다. 그 도시들은 우리가 하는 것처럼 차입했으며, 조세로 빚을 갚았다.[12] 역사도 전진해 감에 따라 국가에서 차입의 기술이 완성되어 가는 것을 보게 된다. 신용을 제공하는 기술은 아직도 나타나야 할 참이다. 흔히 탕감을 받기 위해 국가는 자신의 대차대조표를 내놓을 필요에 처했다. 프랑스에서만, 그리고 287년이 흐르는 동안 오지에(Augier) 씨는 국가에 의해 행해진 파산이 총 아홉 건임을 발견했다. 그 역사가는 이렇게 덧붙였다. “우리의 모든 왕들 아래서, 그리고 로마 가톨릭 동맹의 시대의 영구적인 탕감, 아니면 1351년 왕인 장(Jean)에 의해 이 탕감 수단이 발명되면서부터 즉위 때마다의 간헐적인 비슷한 탕감의 크고 작은 수단들을 고려함 없이.”

실제로 그렇지 않을 수 있었나? 그리고 신용과 국가의 이 둘의 어쩔 수 없는 적대성을 고려하기 위해 그리 많은 이성이 필요한가? 국가는 누가 뭐래도, 무슨 짓을 해도, 시민들의 보편성과 같은 것이 아니고 결코 같지 않을 것이다. 따라서 국가의 재산은 더 이상 개별 재산들의 총합과 일치할 수 없을 것이며, 같은 이유에서 국가의 의무는 각각의 납세자에게 공통이고 연대적인 것이 될 수 없을 것이다. 얼마 동안 여론을 혼란시키고, 국정 지폐에 돈의 신용과 동등한 신용을 주고, 교묘한 수단과 은폐의 힘으로 이 정부의 거짓말을 지탱하는 일에 끝장을 보기 바란다. 여전히 당나귀에 사자 가죽을 씌우기만 할 것이며, 더 적은 당혹감 속에서 당신은 가면무도회가 그 뒤에 혼란과 큰 공포만 남기고 사라지는 것을 보게 될 것이다. 인류보다 두 세기를 앞서간 예언적 사색에서 국가의 일은 신용을 제공하는 것이지 신용을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고 적었을 때, 로(Law)가 본 것은 노동자들의 실질적 연합이었다. 이는 모든 적대 관계의 화해의 결과인 경제적 연대, 산업적인 거대한 통일로 국가를 대체해 소비자에게처럼 생산자에게 신용과 만족을 유일하게 제공할 수 있는 이 경제적 연대였다. 애매한 문장에 속아서 가면을 사람으로 간주하고 국가를 사회로 간주한 로는 모순적 가설을 실현하는 일에 착수했다. 그는 틀림없이 실패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리고 재간 있는 투기자가 곧 자신의 경험의 종말로 도달한 것은 이 엄청난 파국 속에서 프랑스에는 행복이었다. 우리는 이 거대한 기만에 관해 재론할 기회가 있을 것이다. 그 기만의 발명자는 우리가 척도재의 유통, 혹은 같은 것으로서 신용의 발달을 가져온다고 상상하게 해 준 수단이 되는 다양한 허구들에 관해 말할 때의 첫 번째 얼간이였다.

. 신용 기관들의 발달

신용은 정치경제학 전체에서 가장 어려운 부분이지만 동시에 가장 신기하고 가장 극적인 부분이다. 또한 그 주제로 간행된 저작들의 수가 많고 그 중 어떤 것들은 높은 위상[13]을 지님에도 불구하고 나는 이 엄청난 문제가 아직 그 모든 크기에서, 따라서 그 모든 단순성에서 파악되지 않았다고 감히 말한다. 영원한 논리의 수단인 사람이 점차 일련의 기념물들에 힘입어 하나의 순전한 추상인 신용을 실현해 가는 것을 특히 여기서 보게 될 것이다. 그 전에 인간이 노동 분업, 위계, 경쟁, 독점, 조세, 무역의 자유 등 추상적 관념들의 이 모든 몽환을 실재들로 전환시키는 것을 우리가 본 것처럼 말이다. 진정한 역사철학은 경제적 국면들의 발달에 있다고 마침내 확신하는 것, 그리고 가치의 구성이 문명의 회전축이고 인류의 문제로서 결연하게 나타나는 것을 보는 것은 신용이 일으키는 다양한 문제들을 연구하면서다. 우리는 사회가, 오지에 씨의 행복한 표현에 따르자면, 우주가 태양 주위를 맴도는 것처럼 금화 주위를 맴도는 것을 볼 것이다. 왜냐하면, 신용은 우리가 지금까지 연구한 국면들과 같기 때문이다. “같은 작가의 언어를 빌리자면 이는 인간 의지의 적자嫡子가 아니다. 이는 인간 사회 안의 하나의 필요, 급양의 필요와 마찬가지로 절박한 필요다. 이는 여전히 선천적인, 섭리적 혹은 숙명적으로 지적인 힘이며, 미래의 사물들 혹은 어두운 혁명들을 자신의 일로 삼는다. … 권력들과 왕들은 움직이고, 돈은 그것들을 끌고 간다. 섭리가 하는 행위를 풍자함 없이 이런 말이 된다.”

하지만 우리는 이를 거리낌 없이 말하자. 역사철학은 결코 보쉬에의 계승자들이 수많은 예들을 제공한 이 반쯤 시적인 환상들에 있지 않다고. 그것은 사회경제학의 모호한 길들 안에 있다. 일하는 것과 먹는 것, 이는 예술가인 작가들에게는 실례가 되겠지만 사람의 유일한 뚜렷한 목적이다. 그 나머지는 직업을 찾는 사람들 혹은 빵을 요구하는 사람들의 오고 감일 뿐이다. 이 겸허한 강령을 충족하기 위해 속세의 평민은 모든 철학자들, 학자들, 시인들이 걸작을 만드는 데 쏟은 천재성보다 더 많은 천재성을 쏟았다.

우리가 아직 그런 예를 인용한 적 없고, 이 사상의 변신들에 별로 익숙하지 못한 독자를 엄습할 이상한 것인 신용은 그 가장 앞선 표현을 입고서 벌써 종합적인 공식으로 제시된다. 이는 그것이 아직 이율배반이 되지 못하게 막는 것, 경제적 진화의 순서에서 일곱 번째의 이율배반이 되지 못하게 막는 것이다. 치에슈코프스키 씨가 한 저작물, 내가 응용 형이상학의 애호자들에게 읽기를 아무리 추천해도 지나치지 않은 저작물에서 입증한 것처럼 신용은 입장, 반대 입장, 그리고 구성으로 연이어 발달하면서, 따라서 긍정적이고 완전한 관념을 낳으면서 그 최고의 시기에 도달한다. 그러나 우리가 때가 되면 증명할 것처럼, 정기적으로 형성된 이 종합은 말하자면 부차적인 차원의 것일 뿐이다. 이는 아직은 모순이다. 이처럼 관념들은 물체들처럼 무한히 구성되고 분해되며, 그러면서도 과학은 어느 것이 물체인지 아니면 단순 관념인지를 결코 말할 수가 없다. 관념들과 물체들은 모두가 동일한 단순성을 띠며, 우리에게는 그들의 비교 혹은 다른 물체, 다른 관념들과의 관계에 놓임에 따라서만 복잡해 보인다.

그러한 것이 신용이다. 그것이 탄생 시에 단순하게 보이던 것에서 상반된 것을 제시하면서 둘로 나뉘는, 그 다음에는 상반된 것과 결합하면서 복잡해지고, 이 결합 후에는 그 최초의 발생 순간처럼 단순하고, 기초적이고, 모순적이고, 무력한 것으로 다시 나타나는 관념이다. 그 증거들에 도달할 때다.

신용은 세 계열의 기관들로 발달한다. 앞의 두 계열은 서로 상반되고, 세 번째 계열은 그 둘을 긴밀한 결합으로 요약한다.

첫 번째 계열은 환어음, 저축 금고를 관련시킬 필요가 있는 예금 은행을 포함하며, 끝으로 담보나 저당을 기초로 한 대출을 포함하는데, 공영 전당포가 한 예를 제공한다.

이 연속되는 조작들을 통해, 사람들은 돈에게 우선은 길을 쉽게 해주고, 거리를 단축시키고, 그러고는 돈 자체를 집 안에 덜 틀어박혀 있게, 생성되는 것을 덜 겁내게 해서 모든 사람들에게 더 접근 가능하게 만들기를 원했다. 더 명확한 용어로는 돈을 더 저렴한 값에 가지기 위해 한편으로는 환어음으로 운송을 절약하고, 또 한편으로는 예금 은행을 통해 재료의 마모와 환전을 절약하는 데 신경을 썼다. 끝으로 돈에 담보와 저당의 보증을 제공해 안전 보장으로써 척도재를 끌어들였다.

환어음을 통해서, 내가 보유하는 돈 혹은 내가 파리에 있는 동안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내게 지불되어야 하는 돈이 마치 내가 그것을 쥐듯이 내 처분에 맡겨진다. 그리고 역으로 내가 파리에서 보유하고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지불해야 하는 금액이 상트페테르부르크에 존재한다.

이 조합은 무역의 어쩔 수 없는 결과다. 이것은 결과가 원인을 따르듯이 생산과 교역을 따라서 진행한다. 그리고 나는 역사에서 환어음 발명의 일자를 찾아 이 일자를 대략 12세기나 13세기로 고정하는 경제학자들의 집착을 납득하지 못한다. 환어음은 그것의 작성이 아무리 야만적이고 변칙적이라 해도, 두 나라가 서로 관계를 맺고서 일정 금액이 차입자의 단순한 인정이나 대여자의 권유로 한 나라에서 다른 나라에 지불될 수 있는 날부터 존재한다. 이처럼 오지에 씨와 함께 토비[14]에 대한 지불 의무 증서, 그의 친척 가바엘이 서명하고 그것을 소지한, 발행인은 전혀 모르는 토비에게 바로 그 가바엘이 결제한 지불 의무 증서를 환어음으로 보는 것을 아무것도 막지 못한다. 전설에 따르면 아시아에서 기원전 5~6세기에 생겨난 듯한 이 사실은 이 시기에 환 및 할인 업무들이 라게스와 니네베 사이에서 조직되지 않았음을 보여준다. 하지만, 그 원리는 그때부터 알려졌고 그 결과는 쉽게 끌어낼 수 있었다. 이는 당장 우리의 논제에 충분한 것이다.

모든 사람은 환의 장점을 안다. 그리고 환이 얼마만큼의 척도재를 대신하는지를 안다. 마르세유의 한 상인이 리옹의 한 상인에게 1000프랑을 지불할 의무가 있고, 리옹의 상인은 보르도의 한 상인에게 1000프랑을 지불할 의무가 있다. 리옹의 상인이 자신의 채권을 상환 받고 동시에 빚을 갚으려면 그는 보르도의 자기 특파원에게 마르세유의 상인에 대한 환어음을 발급해서 보낸다. 이 환어음은 결과적으로 마르세유 사람과 리옹 사람의 이중 보증 아래 1000프랑을 대표한다. 같은 조작이 동일한 환어음으로 보르도의 상인과 툴루즈의 다른 상인 간에 반복될 수 있을 것이다. 이는 환어음에 주어지는 보증을 세 배로 해줄 것이다. 그리고 이런 식으로 무한히 계속되어 그 증권의 보증성, 그리고 따라서 그 견고성, 그 상업적 가치는 계속 상승해 그 만기에 도달해서 지불하도록 제시되기까지 한다. 그러므로 환어음은 화폐의 진정한 대체물이며, 그 약속이 배서의 경로에 의거해 점진적 보증을 획득하는 만큼 더욱 확실한 대체물이어서 어떤 경우에는 제1품질의 상업 어음이 돈보다 선호되기도 한다.

예금 은행과 함께 사람들은 또 하나의 추상으로 올라갔다. 이는 계산 화폐와 통용 화폐의 구분이다.

돈은 모든 물질 및 상품처럼 마모, 변질, 절도 그리고 사기에 종속된다. 다른 한편, 화폐의 다양성은 그 유통의 장애물이며, 결과적으로 곤경의 새로운 원인이다. 공공 예금을 창조해 이 어려움들을 사라지게 했다. 그 예금에서는 모든 종류의 화폐가 그 본원적 가치대로, 그리고 당좌 계정에서의 수수료를 공제하고서 받아들여지고 예금의 총액까지 주조 화폐로 상환 가능한 물표로 대체되었다. 1609년 세워진 암스테르담 은행은 예금 은행의 모델로 인용된다.

이처럼 돈은 본원적 가치가 없는 지폐로 대체되어 부스러기와 마모에도, 수수료에도 구애받지 않고, 한마디로 결손을 겪지 않고, 그리고 가장 큰 용이성을 가지고서 유통될 수 있었다.

그러나 이처럼 척도재의 길을 평탄하게 해준 것은 별것 아니었다. 이를 궤 속으로부터 나오게 할 수단을 발견하는 것이 필요했다. 이를 마련하는 데 사람들은 소홀하지 않았다.

돈은 특별한 상품으로서 그 가치가 가장 공신력 있고, 가장 잘 평가된 산물이다. 따라서 교환의 매개이고, 모든 가치 평가의 원형이다. 그렇다고는 해도 이 탁월한 특권들에도 불구하고 돈은 부가 아니다. 돈만으로는 우리의 행복을 위해서 아무것도 할 수 없다. 그것은 말하자면 부를 구성해야 할 요소들의 지도자, 분위기 메이커일 뿐이다.

자본가는 그의 재산이 돈으로 이루어진 자이므로 자신의 기금을 투자하고, 이를 교환하고, 이를 가능한 만큼 많이 생산적으로, 돈을 생산하는 것으로, 즉 모든 종류의 물건을 생산하는 것으로 만들 필요가 있다. 그리고 자신의 금화를 떨어버릴 이 필요를 그는 절실히 느끼는데, 가진 것이 땅, 집, 기계 등으로 되어있는 자본가가 자신의 사업을 위해 금화를 장만할 필요를 느끼는 것과 마찬가지로 절실히 느낀다.

그러므로 이 두 자본가들이 자신들의 자본에 생산을 시키려면, 그들이 자본을 연합할 필요가 있다. 그러나 연합은 그 사람에게는 필요한 것인 만큼 혐오스럽다. 그리고 산업인도, 돈을 가진 자도 서로 친하게 지내기를 구하면서도 연합을 이루는 데는 동의하지 않을 것이다. 하나의 수단이 그들의 혐오감을 강압하지 않고도 그들의 욕망을 만족시키도록 등장한다. 이는 척도재의 보유자가 산업인에게 자신의 기금을 대여하되 담보로 이 산업인의 동산 및 부동산 자본, 그리고 이에 더해 이득이나 이자를 받는 것이다.

요컨대 이러한 것이 신용의 최초의 발현이다. 혹은 그 학파가 말하듯이 신용의 명제다.

화폐는 그것이 다른 상품들 위로 아무리 높이 있어도 곧바로 교환의 수단으로서는 무게, 부피, 마모, 변질, 희소성, 운송의 곤란함 등 상당한 불편함을 지닌 것으로 나타나며, 돈을 그 자체로 본다면, 주권자의 서명이 있고 언제나 그리고 어떤 종류의 산물에 대해서도 수용될 수 있는 이 담보의 도움으로 누구나 모든 가능한 재화들을 조달할 확신을 가지게 되니, 그 소재와 가치에서 신용의 완벽한 담보가 된다고 하더라도 가치들의 대표물이자 유통 수단으로서 바로 이 돈은 단점들을 가지며 아쉬움을 남긴다는 것, 한마디로 신용의 불완전한 증표라는 것이 된다.

상업적 재능이 그 모든 노력을 기울이는 것을 우리가 보게 될 것인데, 이는 척도재의 이 고유한 폐단을 바로잡으려는 것이다.

두 번째 항, 신용 기관들의 정반대 계열은 먼저 계열의 역, 어떤 의미에서는 부정이다. 그것은 유통 은행과 할인 은행 그리고 은행권, (불환) 지폐papières-monnaie, 태환 지폐monniae de papière, 국정 지폐assignat 등과 관련된 모든 것을 포괄한다. 다음은 이 발생의 메커니즘이다.

내가 이 형이상학적 공식들을 끊임없이 환기하는 것을 얗해해 주시기 바란다. 나는 벌써 앞의 모든 국면들을 이 공식들로 가져갔으며, 그 공식들 안에 또한 신용의 다양한 형태들을 넣었다. 이에 대해 성찰한다면, 첫눈에 아주 흉해 보이고 우리의 문학적 관습에 아주 생소한 이 장치가 결국 우리에게 역사의 열쇠를 주어, 의식과 확실성을 가지고 우리 조직의 본능적이고 굴곡이 심한 사업을 추진할 수단을 유일하게 제공하는 사회의 대수학, 지적인 수단이라는 것을 이해할 것으로 나는 희망한다. 게다가 우리 민족은 벌써 민족을 위협하는, 그리고 16년 전부터 민족에게 받아들이게 만들려고 애를 쓰고 있지만 아주 한심하게도 성공하지 못한 정치적 추락을 피하려면 그 타락한 문학의 비루함, 썩어빠진 논단과 상업 언론의 수다를 포기할 때다.

은행권은 그 배후에 담보물, 즉 그것이 대표하는 척도재를 가지고 있어서 아직은 결코 허구가 아니다. 이는 아주 간단히 하나의 추상이다. 즉 그것을 실현하고 구체화하는, 그리고 그 존재가 은행권의 보증을 이루는 사실이나 물질에서 떨어진 하나의 진실이다. 이 나라에서 은행권은 화폐의 행복하고 편리한 대용물이지만, 화폐를 증식시키는 것은 아니다. 그런데, 그러한 것은 환어음과 예금 인정을 조합시켜 은행권이 이제부터 취득할 능력이다.

환어음이 지불 시에 화폐처럼 받아들여지니, 다르게 말하면 그것이 모든 종류의 산물과 교환될 수 있으니, 그것은 또한 돈과도 교환될 수 있다. 이로부터 유통 은행, 즉 상업 어음을 수수료의 이득을 보면서 할인해주는 할인자의 직업이 나온다.

자신의 어음으로 돈을 만든 상인은 그러므로 이런 조작 없이는 그에게 잠자는 자본으로, 따라서 비생산적 자본으로 남아있을 자본을 처분 가능한 것으로 보유하는 입장에 놓인다. 환어음 총액을 가지고 그는 새로운 가치물을 생산하고, 서비스를 확대하고, 임금을 지불하고, 상품들을 결제한다. 생산에서의 신속성, 산물의 증대, 자본의 증식, 이런 것들이 할인의 결과물들이다.

그러나 산업가의 예를 따라서, 그 기술이라고는 금화를 종이돈으로 교환하고 종이돈을 금화로 교환하는 것뿐인 은행가는 자기 자신이 보증을 서서 자기 자신의 집을 근거로 종이돈을 제공할 수 있다. 즉 명목적인 것이든 그것을 제시하는 보유자에게 상환 가능한 것이든 물표를 제공할 수 있다. 실제로 은행가는 그 상업 기금이 100만 프랑 수준이어서 이 100만 프랑을 40일이라는 평균 만기의 어음과 교환한 후에 3주가 지나고 나면 금고에 1상팀도 없게, 따라서 새로운 할인을 하기가 물질적으로 불가능하게 될 수 있다. 그런데 이 은행가가 척도재로 복귀시킬 확신을 가지는 증서 이상을 현금 대신에 보유하지 않으므로 그는 이 복귀를 근거로 환어음을 발급할 수 있다. 즉 사람들이 통속적으로 은행권이라고 부르는 것을 창조할 수 있다. 이 은행권은 상거래자에게 진짜 화폐처럼 수용될 것이며, 그렇기는 해도 모든 환어음처럼 상환의 약속이 될 뿐일 것이다.

이처럼 은행권은 여전히 신용의 처음 시대에 창조된, 그러나 말하자면 제곱을 한 환어음이다. 이는 환어음들로 인수된 가치들에 대해 서명이 된 환어음이다. 바로 거기서 허구가 시작된다. 게다가 이 조작보다 더 논리적인 것도 없다. 쉽게 알 수 있듯이 이는 예치와 할인의 조합된 두 원리로부터 결과로 나온다. 그렇기는 하지만, 그 가장 정당한 결과들 안에서 추구된 은행권은 기괴한 남용, 신용 자체의 뒤집힘을 가져온다.

실제로, 그리고 이론만을 참조할 때, 모든 상업 어음은 은행가가 직업상 예측해야 하는 그런 우연한 사태들을 제외하고는 요구불이거나 만기형으로 상환되어야 하니, 은행가가 그 증서들의 현금 복귀와 자신의 은행권이 제시되는 것을 일치시키는 배려를 한다는 조건, 몰릴 경우에는 일반적 상황에 대해 유예를 규정하는 배려를 한다는 조건에서는, 자신에 대해 사람들이 할인할 가치물을 가져오는 만큼의 환어음을 발행하고 은행권을 발행하는 것을 아무것도 막지 않는다는 것은 명확하다. 수학적으로 이 이론은 흠잡을 데 없다. 은행업자들의 환어음은, 내가 감히 이런 인쇄업자의 용어를 사용한다면, 그가 할인한 어음의 이면 인쇄retiration일 뿐이니 말이다. 그래서 우리는 이 극단적 결과에 도달하며, 은행의 상거래는 무일푼으로 행해질 수 있다. 이를 위해서는 시스몽디 씨가 섬세하게 언급한 것처럼 상인이 은행가에게 신용을 요구하는 대신에 은행가 자신에게 신용을 주는 것으로 충분하다. 더 있다. 은행이 돈 대신에 할인하러 오는 상인들에게 자신의 돈주머니에 대해 발급된 환어음을 건네주게 하는 원리는 곧장 화폐의 부정, 상거래로부터의 화폐의 축출을 가져온다. 그 후로는 한 기업의 이득이 어떨 것인지 상상해보라. 주권자로부터 주어지는 특권에 힘입어 한 제국의 모든 상거래를 포괄할 수 있고, 극히 작은 금 조각도 보유하지 않으면서 금의 위력을 중화시키고, 모든 가치물들의 환업무를 수행하며, 수십 억 프랑의 자본에서 순이익을 끌어낼 수 있는 기업의 이득 말이다!

우리 생각에 따르면, 그러한 것이 저명한 로가 그의 왕립은행 아이디어에까지 도달한 추론의 계열이었다. 이는 처음에는 금고에 아무것도 가지지 않고 오로지 (관념에 실체를 부여하기 위해) 미시시피 강의 거대한 개발에만 의존해 상업어음 전체를 할인했던 것 같고, 그 은행이 현금에 대한 교환으로 내놓을 유가증권을 통해서 만큼이나 척도재를 점점 대체해 나온 그 은행의 은행권 유통을 통해서 국가의 금고들 안에 있는 왕국의 금속으로 된 모든 부를 끌어들였던 것 같다. 로는 그의 관념들의 논리에 이끌려서, 그리고 국가의 상위 보장에 의한 자기 체계의 도덕성을 확신해서, 실질적 담보를 제공하지 않고도 신용을 줄 능력이 그에게는 일상적인 명상의 주제였는데, 자신의 어리석은 관념을 진지하게 받아들였는가, 아니면 그를 대담한 사기꾼으로만 보아서는 안 되는가? 이야말로 놀라운 모험의 단순한 해설을 하면서 내가 감히 판단하지 않을 것이다. 확실한 것은 오늘날 경제학자들이 정치경제학의 철학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처럼 로도, 그 시대의 누구도 신용 이론을 철저히 보유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무언가가 로에게 핑계가 될 수 있다면, 이는 선의善意다. 경제학자들이 거기서 아무것도 보지 못하면서 자유무역, 무한 경쟁, 누진적이고 공정한 조세, 신용 조직 등 그들의 유토피아를, 즉 독점의 긍정에 의한 독점의 부정을 추구하는 경탄할 만한 경솔함이다.

로의 체계에 관해서는 어떠하든지 간에, 신용 이론에서 돈의 사용이 돈의 불사용을 가져온다는 것이 과학에 알려진 것임은 변함없다. 그리고 한 유명한 경제학자 데이비드 리카도가 화폐가 완전히 배제된 다른 유통 및 할인 체계를 만든 것 또한 이 이론을 응용한 것이다. 그러므로 이와 같이 우리는 출발점에서 예금 은행, 즉 상인에게 현금을 배송하기 위해 은행이 그가 보유한 현금을 요구하는 것으로 시작하는 체계를 가진다. 이는 돈을 전혀 보유하지 않는 자 누구에게나 신용의 무효를 함의하는 것이다. 터무니없다. 이론의 다른 한편에서 우리는 유통 은행, 즉 돈을 만들기 위해서는 그 가치가 전무한 정사각형 종이만 있으면 충분하다는 결론을 내는 체계를 가진다. 터무니없다.

이 터무니없음은 화폐의 원리로, 가치들의 구성 이론으로 거슬러 올라가 유통 은행의 원리를 모든 종류의 산물에 적용해 일반화한다면 더욱 부각된다. 실제로 은행가가 환어음을 자신에 대해 발행하고 그런 식으로 허구적인, 그러나 실질적인 것으로 받아들여지는 가치를 상거래에 넣는 것처럼, 모든 산업 기업가, 모든 상인은 공모자의 도움으로 그가 결코 하지 않은 인도분에 대해, 그가 보유하지도 않은 산물에 대해 환어음을 발행할 수 있다. 그래서 이 메커니즘을 가지고서 은행권들은 상업 수요에 따라 증식해 국가는 산물을 가지지도 못하고 1상팀의 가치도 보유하지 못한 채 수천억의 거래의 움직임에 도달할 것이다. 할인 은행의 원리의 이 적용은 상업에서는 빈번한데, 거기서는 이를 유통이라는 단어로 지칭한다. 이는 부적절한 용어이지만, 허구를 가지고 돈을 만들면서 최후의 수단에 호소하는 사람의 입장을 특정 짓는 데 사용하기로 사람들이 동의한 용어다. 공화정에서 국정 화폐의 반복된 발행은 다른 것이 아니었다.

그런데 이 메커니즘의 모순을 이해했다기보다는 어렴풋이 느끼고 약 한 세기가 지난 후부터도 수많은 다른 정치경제학의 폐단처럼 이를 극단적인 것들 간의 타협 말고 다른 방법으로는 여전히 치유할 줄을 몰랐다.

두 조작 방식[15]이 겸해졌으며, 모든 능숙한 솜씨는 중용의 입장을 유지하는 데 있다. 이처럼, 은행이 예금 은행으로서 그리고 동시에 유통 및 할인 은행으로서 기능하면서 설명 없이 그 금속 가치물 이상으로 4분의 1에서 3분의 1까지 은행권을 발행할 수 있다는 것이 양해되는데, 경제학자들은 이 울타리를 벗어나지 못한다. 거기서 일상 관행은 멈추고 정치경제학은 더 멀리 나가지 못한다.

그러므로 신용의 세 번째 조합, 즉 돈을 매개로 구성되지 않은 가치들의 유통을 마련할 세 번째 양식을 시도할 일이 남았다. 왜냐하면, 앞의 두 양식 간의 상반성, 경제학적 혼합물이 풀지 못하는 상반성이 존재하니, 이는 다른 두 항을 조화시켜 이것들을 보완하고 완성하는 세 번째 항이 자리 잡아야 한다는 신호다. 그러한 것은 치에슈코프스키 씨가 시도한 작업이다.

그는 지금까지 우리가 신용의 수단들로서 다음의 것을 보유하지만 이는 서로 분리된 것이라고 말한다.

① 화폐, 완벽한 담보이지만 신용의 불완전한 신호.

② 은행권, 불완전하거나 오히려 무효인 담보이지만 신용의 완벽한 신호.

그 안에서 유통의 매체가 한꺼번에 그리고 동일한 정도로 돈과 같은 완벽한 담보, 은행권과 같은 완벽한 신호, 게다가 이익의 법칙에 따라 토지와 자본처럼 생산적이고 따라서 실업을 할 가능성이 없는 조합을 발견하는 것이 중요하다.

이 조합이 존재한다고 치에슈코프스키 씨는 대답한다. 그리고 그는 가장 아름다운 철학적 언어로, 그리고 가장 완전한 경험으로 이를 입증해 보인다. 이는 그것을 경제학자들과 철학자들에게 거의 이해가 안 되는 것으로 만들어줄 두 특질이다. 치에슈코프스키 씨의 관념들에 대한 마찬가지로 신속한 설명에서 나는 이 작가에게 피해를 줄 수밖에 없다. 그렇기는 하지만 나는 나 자신의 관념들을 그의 관념들에 몇 차례 더해 그의 체계에 대한 일별을 제공하고자 할 것이다.

한 번 더 원리들로 거슬러 올라가보자.

화폐는 모든 상품들 중에 그 가치가 아무리 가변적이라도 결국에는 구성되고 평가되는 유일한 상품이다. 귀금속들이 모든 산물에 대한 공통의 평가자로 이용되는 것은 귀금속들의 이 특권에 속하는 것이다.

신용의 궁극적 목표는 모든 가치들의 구성에 도달하는 것이다. 즉, 그 가치들을 화폐화된 금과 은처럼 모든 지불 시에 수용 가능하게 하는 것이다. 이는 명백히 분배의 문제를 푸는 것, 노동의 법 위에 평등을 기초시키는 것, 그리고 같은 발걸음으로 인류를 개인적 자유와 가능한 연합의 최고 정도로 가져가는 것이다.

우리는 사회의 화신이 이 결과에 도달하기 위해서 동화assimilation을 통해 진행한다고 말했다. 즉 이어지는 추상들과 허구들을 수단으로 모든 생산된 가치를 돈의 예에 따라 유통 가능하게 만드는 경향을 띠지만 그럼에도 사전적 평가의 조건은 없다. 그 밖에 가치의 몸이 물리적으로 손을 바꾸는 것은 별로 중요하지 않다. 유통을 위해서는 재산권의 이전이 있는 것으로 충분하다. 이처럼 은행권은 은행에 쌓인 부의 일부분을 표현하는 한편 그 보유자에게는 이 은행권에 적힌 금액의 실제적 보유와 동가다. 마찬가지로 이처럼 판매되는 상품의 규정되고 수용되는 가격은 환어음의 형태에서 화폐가 될 수 있다.

그러므로 판매되고 양도된 가치물을 대표하는 돈만이 아니라, 돈을 대표하는 은행권만이 아니라, 끝으로 환어음과 기한이 정해지고 인수를 거부할 수 있는 다른 채권들만이 아니라, 판매되지 않은 가치물들, 이 가치물들의 생산에 소용되는 노동 수단들, 토지, 노동 자체도 유통의 이득에 어떻게 참여하게 할지, 어떻게 신용에 도움이 되게 할지를 질문하게 된다.

그리고 다음은 치에슈코프스키 씨가 대답하는 것이다.

소득에서만큼 자본에서도 한 민족의 동산으로 이루어진 부와 부동산으로 이루어진 부를 평가한 후, 재산권들을 보유자의 보장을 위해 나누어떨어지는 부분(물건 가치의 절반, 3분의 1, 혹은 4분의 1)을 공제한 다음, 교환 가능하고, 조세 납부와 모든 성격의 지불에서 수용 가능한 은행권으로 만든다면, 이 새로운 유통 매개에서 다음을 가지게 될 것이다.

① 완벽한 담보, 이 담보는 은행의 지금地金과 금궤들처럼 존재하는, 실질적이고 더 이상 허구적이 아닌 자본일 것이기 때문이다.

② 완벽한 신호, 휴대성이 뛰어나고, 본원적 가치가 무일 것이기 때문이다.

③ 생산적 화폐, 생산 전체에서 자본들의 소유권일 것이기 때문이다.

게다가 이 은행권들은 화폐의 사용을 폐지하지 않을 것이다. 이는 화폐의 사용을 단지 줄이고 이를 부차적 역할로 제한할 것이다. 이는 은행권과 불환 지폐의 허구를 그치게 하지 않을 것이지만, 화폐와 신용 증서는 말하자면 새로운 유가증권 창조에 표준으로 소용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새로운 유가증권들은 그 구성 원리들에 관해 유기적 조합의 저 높이에서 그것들을 지배할 것이며, 그것들을 정당한 한계 안에 잡아둘 것이다.

저자는 그 다음으로 이 방대한 가치물의 발권의 출발점이 되는 중앙 기관의 조직에 관해, 부차적 은행들의 위계에 관해, 취해야할 예방 조치, 따라야할 진행 경로, 뒷받침이 되는 예들에 관해 길고 상세한 내용에 들어간다. 그는 자신의 기획에서 이를 4분의 3은 이해하고, 자기 멋대로 손질해 엄청난 유명세를 타고 그 저자를 망각하게 하는 어떤 허깨비 위정자에게 동의하는 것 말고는 빠뜨린 것이 없다.

끝으로 이 재미난 저작에 관해 모든 것을 말하자면, 저자의 친구이자 동포인 콩세르바투아르 데 자르 에 메티에의 비교 입법 교수가 토지 신용의 조직 기획을 퍼낸 출처가 바로 거기다. 이는 높은 위상의 기획으로, 가장 저명하고 이 문제에서 가장 유자격한 사람들의 가입을 받은 기획이다.

그러므로 그와 같은 것이 모든 가능한 신용 기관들의 정상적이고 완벽한 발달이다. 생산된, 그리고 생산 가능한 모든 가치물, 투자된 모든 자본과 토지를 포괄하는 이 이론을 넘어서는 것은 아무것도 없으니 말이다.

첫 번째 진화 : 환어음, 담보부 대출, 예금 은행.

두 번째 진화 : 유통 및 할인 은행, 신용 증서, 불환 지폐, 국정 지폐.

세 번째 진화 : 이자를 낳는 은행권으로 대표되는 모든 자본의 구출.

치에슈코프스키 씨의 체계는 앞의 두 개의 필연적 결과인데 그것은 실현될 것인가? 사회를 사로잡는 경제적 운동만 참조하자면, 이를 믿을 수 있다. 프랑스에서 모든 관념들은 저당의 개혁에, 그리고 토지 신용의 조직에 속하는데, 다소 비판받는 형태에서 이 체계의 적용을 강제로 끌어들인다. 치에슈코프스키 씨는 진정한 예술가에게 기획의 이상을 그려주었다. 그는 사회의 모든 궁극적 개혁들이 종속하는 경제 법칙을 묘사한다. 그 이후로 응용의 다채로운 형태들과 세부 사항의 변경들은 별로 중요하지 않다. 그 관념은 이론가로서의 자격에서, 그리고 심지어 실현의 경우에는 예언자로서의 자격에서 그의 것이다. 치에슈코프스키 씨는 한마디로 사회 조직의 가장 진기한 국면들 중 하나를 이야기했다. 여기서 역사 안에 공백이 존재하는 것은 가능하다. 이 공백은 과학에는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사회는 감각보다 더 정신에 의해서 살아간다. 실행에서 교차를 행하는 것이 사회에 때로 허락되는 것은 그런 이유에서다.

이제 신용의 아주 자생적이고 아주 논리적이기도 한 이 경이로운 운동을 성찰해보자. 그리고 이 섭리적 필연성의 증거를 부각시키려 노력해보자. 왜냐하면 이제부터 우리는 우리가 발걸음마다 마주치는 이 두 항, 사람이 그 비자발적 중개자인 것으로 보이는 이 두 항을 결합할 수 있기 때문이다. 내가 말하노니 오지에 씨를 아주 크게 놀라게 하고 인간의 무오류성의 가장 덜 애매한 증거인 이 필연성의 두 항인 것이다.

화폐가 없는 것이 가능했는가? 인간 노동의 모든 산물 간에 다른 것들보다 더 상업적인 가치를 지닌 어떤 산물이 발견되지 않는 것이 가능한가를 묻는 각과 같은 질문이다. 금과 은 대신에 사회가 공통의 평가 척도로서 밀, 철, 비단 혹은 가치가 더 큰, 가변성을 지닌, 그리고 유통이 더 어려운 다른 모든 상품을 채택했다면 진보가 다소 늦어졌을 수 있다는 것을 지나가면서 관찰하기로 하자.

화폐는 일단 발명이 되고 나서 일반적 탐욕의 대상물, 부자에게나 가난한 자에게나 가장 필요한 물건이 되지 않을 수 있는가?

그리고 척도재의 더 많은 양을 제작하는 것이 문제를 푸는 대신에 이를 미루기만 하니, 돈의 척도로 모든 자본과 산물을 평가한 후에 이것들을 추려내어 돈처럼 유통시키려고 노력하지 않는 것이 가능한가?

이것을 용감하게 말하자. 이 모든 것은 불가피했다. 이 모든 것은 운명의 책에 적힌 것처럼 인간의 뇌에 적혔다. 이 순간부터 인류가 따라가는 길은 참된 길이었으며, 인류가 한 작업은 정당화되었다. 한순간 사회주의가 교회의 입에서 표출되어 경제적 정신에 맞서 반란을 일으켰고 이자를 받는 대출을 금지해 사회들의 진행을 멈추고 싶어 하는 것 같았다. 이는 섭리 자체에 의한 섭리의 부정과 같았다. 이교도들에서는 지속적으로 작동하는 보편적 이성에 맞선, 기독교적이 된 보편적 양심의 항의와 같았다. 언제나 로마 가톨릭주의의 기초였던 사회주의는 그때부터 인류가 완벽한 신용 조직을 가지고서도 충만한 경쟁을 하면서 전진하지 못한 것처럼 전진하지 못하리라는 것, 빈곤과 풍요만 각자 나름대로 전진하리라는 것을 예감했다. 그래서 더 완전한, 덜 이기적인, 그리고 특히 덜 환상적인 법칙을 주장했다. 불행히도 로마와 공의회들이 인기라는 잘못된 정신에 떠밀려 자본을 엄벌하고 이자를 금지했던 시대에 자유가 정복되어야 했다. 그리고 이 정복이 재산권에 의해, 그리고 따라서 이자에 의해서만 성취될 수 있었으므로 교회는 자신의 벼락을 거두고 그 파문을 연기하지 않을 수 없었다.

우리 세기의 질병은 금에 대한 목마름, 즉 신용의 필요다. 이에 무슨 놀라운 것이 있는가? 위선적 도덕, 허기진 문학, 그리고 퇴보적 민주주의가 은행의 지배와 금송아지 숭배에 격렬히 항의해도, 이 똑똑하지 못한 저주들은 관념의 승리의 행진을 비난하는 것뿐이다. 시나이 이래로 금송아지는 인류가 숭배하는 신, 강한 신, 불굴의 신으로서, 모세처럼 산 위에서 먹는 것과 마시는 것을 잊는 사색가들 사이에서만 불신자들을 발견한다. 이스라엘은 금 더미 앞에 엎드려, ‘이스라엘아, 너를 종살이에서 구해낸 하느님이시다’하고 외쳤을 때 틀리지 않았다. 그리고 모세도 자기 백성이 여전히 금보다 우월한 능력을 인정하기를 원해서, 야훼처럼 그들에게 자유와 부의 창조적인 힘, 한마디로 노동을 보여주었을 때 틀리지 않았다.

그러나 현자가 말하듯, 모든 일에는 때가 있다. 씨 뿌릴 때가 있고 거둘 때가 있다. 맘몬을 위한 때가 있고 야훼를 위한 때가 있다. 자본을 위한 때가 있고 평등을 위한 때가 있다. 경제적 창세기에서 황금 숭배는 노동 숭배에 선행해야 했다. 또한 오지에 씨가 아주 옳게 언급한 것처럼, 신용의 모든 진보는 독재에 대해 거둔 승리다. 마치 자본을 가지고서 우리에게 자유고 도출된 것처럼 말이다.

환어음, 예금 은행, 화폐들의 환전, 이자부 대출, 공적 차관, 당좌계정, 허구적 척도재, 복리, 그리고 그로부터 도출되는 부채 상각 절차는 태곳적부터 알려진 듯하다. 배서에 의한 환어음의 전달 가능성, 영속적 공공 부채의 창출, 신용의 고급 조합들은 더 근대적인 발명품인 것 같다.[16] 철 화폐에서부터 국정 지폐, 그리고 정기 수령금 수령권까지 신용이 표현되는 이 모든 절차는 엄청나게 큰 기계, 그 작동이 세상처럼 오래된 단 한 마디, 푀누스foenus, 이자로 정의될 수 있는 기계의 부속들로 간주되어야 한다. 그리고 이상하기는 하지만 더 이상 우리를 놀라게 할 수 없는 것은, 이자부 대출의 발명이 자본에 속하는 것이 아니라 노동 자체에, 그리고 노예 노동에 속한다는 것이다. 어디서나 그리고 모든 시대에 이자부 대출이 검과 방패보다 무서운 공격 및 방어 무기가 될 수 있음을 발견하는 것은 억압받는 기술자들이다. 어디서나 여러 민족을 상대로 내리치기도 하고 낫게도 하며, 잃기도 하고 되살리기도 하는 그 신들린 검을 겨누기를 기다리며 대금업으로부터 착취당하는 것은 특권 카스트들, 귀족층, 왕실, 성직자 계층이다.

“십자군 원정의 결과로 자본, 토지, 그리고 노역에 얽매인 사람에게 닥친 부동성이 지체 없이 사라졌다. 최초의 자유로운 금화는 빌릴 수 있었던 최초의 금화였다. 그러나 최초의 청산 기금이 최소였다면, 생산은 이를 복리複利로 만들었고, 운동이 시작되었다. 부를 획득하는 데 노동과 지력밖에 가진 것 없는 계급은 동업조합 체제에서 무서운 단체를 결성했다. … 상인들은 연맹을 결성했다. 그들의 군집, 그들의 조합들이 도시가 되었다. 도시들은 증가했고 반란이 유력한 세력에 따라붙는다. 그리고 독립은 언제나처럼 봉기의 결실이었다. … 해양 도시들은 국경을 열었다. … 연합체는 영국, 인도, 스웨덴, 노르웨이, 러시아, 덴마크에 지점을 두었다. 함부르크, 브레멘, 뤼베크, 프랑크푸르트, 암스테르담은 한자(hanssen, 연합) 도시라는 이름으로 유명했다. 양허를 취득하기 위해 연맹은 군주들에게 돈을 빌려주었고, 그렇게 시민권과 특권을 취득했다. … 그리고 불평이 제기되면, 연합은 자신이 발생시킨 노는 일꾼들의 투덜댐, 자신이 굶긴 민중의 빈곤이 군주들에게 자비를 구하도록, 그들 나라에서 이 외국인 주인들에게 새로운 특권, 즉 새로운 억압 수단을 제공하면서 다시 불러들이도록 강제할 때까지 모든 상거래를 중단시켰고, 항구들을 폐쇄했다. 이런 상황에서 한자 연맹 앞에서 왕들은 떨었다. … 끝으로 비밀 협회들, 돈의 프리메이슨회, 연맹의 지회에 입회하려면 거쳐야 하는 입회식, 고문拷問, 레반트 지역의 제노바와 베네치아의 상사商社들이 그랬던 것처럼 도시들의 품 안에 건설된 진정한 요새들이 있었다.”(오지에, 『공공 신용의 역사』)

두어 마디 말로 해서, 도시들이 공권력을 창조했다. 그리고 이 힘에 정기적으로 급료를 주기 위해서 도시들은 부담금을 스스로 부과했다. 이는 공적 수입의 기원이었다. 왕들은 이 혁신을 모방하기를 서둘렀다. 그리고 그들이 언제나 차입을 했으므로 공적 수입에 이어서 차입의 연속에 의해 공공 부채가 지체 없이 형성되었다. 이처럼 우리는 신용이 노동과 농노제의 품에서 태어나고 발달하는 것을 본다. 그 다음으로 그것은 자유에 의해 성장하며, 때가 되면 정복자와 군주가 된다. 이때 국가는 우선은 자신의 비생산적 소비를 증가시켜 점점 멸망하기 위해, 나중에는 자신의 소유를 증식하기 위해, 그리고 끝으로 새로운 봉건제에 집착하기 위해 이를 채택한다.

오지에 씨는 계속해서 이렇게 말한다. “곧이어 왕들은 자치 공동체들의 예를 따라 돈을 가지고 전쟁에 착수했다. 루이 11세는 돈에 대해 건전하게 생각한 최초의 왕이다. 그는 세르다뉴와 루시용 백작령을 저당 잡고 아라곤의 장(Jean)에게 금화 30만 닢을 대여했다. 그는 또한 영국의 헨리 6세에게 금화 2만 닢을 대여하고, 담보로 칼레Calais 시를 받았다. … 이처럼 황폐화시키는 전쟁에 뒤를 이은 것은 자본의 전쟁이었다.”

“1509년에 루이 12세는 막시밀리아노에게 속한 베로나의 주둔군 비용을 지불하는 책임을 맡았다. 그는 이 금액, 그리고 막시밀리아노가 아직도 그에게서 빌릴 수 있을 금액들에 대한 담보로 베로나의 두 성채와 발레지오 광장을 그에게 넘겨야 한다고 요구했다. … 그런데, 선한 왕 루이가 그 도시가 그에게 속해야 한다는 조건에서 주둔군 비용을 지불한다면, 우리는 막시밀리아노 황제가 이 차입에서 얻는 것이 자기 사람들을 빌려주는 것이 아니라면 무엇인지를 묻는다.”

그 시대의 역사가들이 돈 없는 막시밀리아노라고 별명을 붙인 바로 그 막시밀리아노는 브뤼주에서, 이 빚진 군주가 백성들에게 끊임없이 부과한 조세에 의해 짓이겨진 플랑드르의 정부를 포기하게 될 때까지 이 도시의 부르주아들에 의해 약국에 사흘 동안 갇혀 있었다. 끝으로 우리는 교황 레오 10세와 그의 예를 따른 성직자 집단 전체가 교회들의 패물, 성기聖器, 성인들의 유골을 그것도 유대인들에게 저당 잡히는 것을 보았다. 이는 옛날에 페리클레스가 라케데모니아 사람들과 전쟁하던 때에 미네르바에게서 황금 망토와 보석들을 빌리는 것을 본 것과도 같다.

1789년의 혁명은 무엇이었나? 자본의 회수다. 귀족층과 성직자 계층의 특권들은 사회적 자본의 대부분을 양도 불가능하고 분리 불가능한 것으로 만들었다. 그리고 한꺼번에 그 청산과 유통화를 명한 명령은 진정한 농지법이었다. 게다가 혁명의 목표, 실질적이고 실토된 목표는 이것 말고 다른 것이 아니었고 다른 것일 수도 없었다. 뒤를 이어서 생겨난 이 모든 공화주의적이고 제국주의적인 소문, 이에 대해서는 하나의 기억밖에 남은 것이 없는데 이는 이를 잘 증명해 주었다. 그리고 그러한 것은 여전히 우리가 눈으로 볼 때 정치경제학으로 대표되는 자본과 사회주의로 대표되는 노동 간에 벌어진 전투의 쟁점일 것이다. 나는 단지 오늘날 정반대의 모든 외관에도 불구하고 노동이 옛날보다 사뭇 더 나은 부분을 가진다는 점을 고찰할 것이다. 하지만 그 이유를 말할 순간은 아직 오지 않았다.

제3신분이 다른 신분들에 대해 가한 대금업에 의해 일반적 해방에 주어진 강력한 충동과 별개로, 신대륙 발견으로 유럽에 던져진 금속의 영향, 유통 은행, 그리고 합자회사의 영향을 잊지 말자. 학문, 예술, 산업의 진보 등 부르주아들의 고유의 업적을 더해 보라. 그러면 당신은 1789년에 시에예스(Sieyès)가 세상에다 대고 제3신분이 전부이고 성직자 계층과 귀족층은 아무것도 아니라고 확언하게 되면서, 귀족들의 우두머리이자 교회의 장자인 전제 군주가 어떻게 한 평민의 이 선언에 법의 힘을 부여하는 것이 필요했는지를 이해하게 될 것이다.

그에 대해 의문을 품는 것은 더 이상 허용되지 않는다. 신용, 즉 노동과 진자 운동하는 가치들을 일종의 생산적 통화로 만들고 결과적으로 가장 절대적인 자유가 마련해줄 수 없는 이 판로를 국내에 열어주는 조합들의 총체인 신용은 노동 해방, 집단적 부의 증대, 개인적 행복의 가장 능동적인 원리들 중 하나다.

그리고 인류의 천재성이 창조한 생산, 교환, 분배, 실질적 연대의 여러 수단들을 성찰해볼 때, 모든 것이 잘되어 간다고, 사회는 프롤레타리아를 위해 충분한 일을 했다고, 가난한 이들이 존재한다면 그 잘못은 그들 탓일 뿐이라고 아는 이들의 낙관주의에 덜 놀라게 된다. 그리고 우리는 사회주의의 불평이 조금의 근거라도 갖는지를 스스로 의문시하기 시작한다.

독자들께서는 이 요점 정리에서 잠시 나를 따라와 주기 바란다.

개인적 자유는 보장된다. 노동자는 주인이 그의 저축을 나무라는 것을 더는 두려워하지 않는다. 각자는 자신의 노동과 자신의 근로의 산물을 자유로이 처분한다. 정의는 모두에게 동일하다. 헌법이 재산권 체제에서 논란이 될 수 없는 보수保守와 질서의 동기에서 납입금을 선거권의 조건으로 했다면, 이 조건이 물적인 데 위치하고 사람들을 구분하는 데 위치하지 않으며, 게다가 모든 사람은 운명의 부름을 받은 것이므로 이런 관점에서 여전히 선거법은 조세와 마찬가지로 평등법이며 따라서 흠잡을 데 없고 인민을 위해 만들어진 것이되 인민을 초월한 제도라고 말할 수 있다. 게다가 국가 자체는 단순 일꾼, 프롤레타리아에게, 부르주아, 예전에는 그와 같은 프롤레타리아이자 단순 노동자였지만 지금은 안락함과 존엄한 자리에 도달한 그의 예를 따르도록 초청한다. 국가는 노동자에게 저축 금고, 그 후에는 퇴적 금고, 더 나중에는 합자회사, 연합 등을 제공한다. 프롤레타리아는 그의 손에 놓인 수단들을 활용할 줄 안다면 언젠가는 자신의 자본으로써 그가 비난하는 자본가의 위력을 상쇄하고 자신의 노동으로써 극히 방대한 산업들과 겨루며, 끝으로 여러 세기 전부터 아주 확실한 방식으로 권력의 축소를 출범시킨 부의 이 주권에 참여하기를 정당하게 희망할 수 있다. 그러므로 노동계급의 불편과 불만에 원인을 제공한 것은 실질적으로 수단들이 결여된 것보다는 이상한 기호嗜好, 무질서와 무규율의 관습, 그 계급이 감염된, 그리고 그 계급에게 모든 연합과 조화의 관념을 배척하게 한 이기주의, 그 계급을 가득 채운 터무니없는 학설이 아닐까?

나는 프롤레타리아를 그 태생에서부터 파악한다. 왜냐하면 사회가 그에게 골몰하는 것은 이 순간부터, 요람에서부터이기 때문이다.

그에게 유아기에 필요한 돌봄을 보장해주기 위해 사회는 그에게 우선 탁아소를 열어준다. 당분간 탁아소를 빈자를 위한 신용 기관과 동일시하는 것을 허락해주기 바란다. 이처럼 젖먹이 아이는 벌써 은행의 채무자다. 왜냐하면 사회의 이 섭리에서 이익을 보는 것은 그의 엄마라기보다는 그이기 때문이다.

탁아소를 나오면 그는 어린이집에 받아들여진다. 나중에 그는 모든 인간 지식의 요소들을, 심지어 그리기와 음악의 요소들을 그를 위해 만들어진 학교들에서 받아들일 것이다.

수습의 날이 찾아온다. 이는 가까이서 들여다보면 노동자 생애의 모든 기간 중 가장 고통스럽다. 그러나 이 모든 비애는 그 나이의 즐거움과 순진함, 그의 엄마의 껴안음, 그의 아빠의 조언, 막 시작되는 인생 전체의 엄청난 희망이 뒷받침되는 그 아이에게는 가볍게 여겨지리라!

18세가 되면, 그는 노동자이고, 자유롭다. 그는 사람이 되기 시작한다. 벌써 그는 사랑을 하고, 몇 년 안에 결혼할 것이다.

초등학교가 줄 수 있는,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많은 양의 수습과 약간의 강의의 도움을 받은 지식, 그리고 팔다리만을 가지고 있는 이 스무 살 노동자가, 내가 말하건대 좋은 영감에 순종해 자신의 노년을 위한 연금, 그가 죽게 될 경우 아내와 자녀들이 살아갈 재원을 마련하려고 신경을 쓴다고 가정하자.

우선 그에게 저축 금고가 열려 있다. 월 5프랑이면, 예금은 연말에 60프랑이 될 것이다. 20년이 지나 그 노동자가 한창 일할 나이이고 이성의 힘도 가장 강할 때, 그의 저축 총액은 1200프랑으로 올라갈 것이고, 이자가 더해지면 대략 2000프랑의 가용 자본, 즉 4%의 이자에 80프랑의 소득을 이룰 것이다.

이제 바로 이 노동자가 마흔 살이 되어 선견지명이 가장의 첫째 의무인 때가 되어, 이 80프랑의 소득을 소비하는 대신에 생명보험 금고에 넣는다고 가정하자. 3%의 보험료율에 이는 2666프랑의 금액이 되며, 자신이 죽을 경우 그의 처와 자녀들에게 이 금액을 보장해주는 것이다. 그리고 이는 그가 저축 금고에 보유하는 2000프랑과 더하면 벌써 이 선견지명을 가지고 현명한 아버지가 41세에 죽는 경우에 3666프랑의 보장된 자본을 이룰 것이다. 반대로 이 사람이 과거처럼 계속해서 매월 5프랑에 그가 인출하고 투자한 앞의 금액의 이자를 더한 만큼을 저축 금고에 넣고 20년을 더 산다고 하자. 60세에 그는 거의 7000프랑의 자본, 장성한 자녀들을 대하게 될 것이며, 더 일하고 싶지 않다면, 궁핍을 모르는 노년을 맞을 것이다.

이제 더 큰 규모에서 이 흥미로운 가설을 발전시키자.

우리의 대도시들 파리, 리옹, 루앙, 낭트 중 한 곳에서 노동자 1000명이 저축과 보험의 장점으로부터 이익을 볼 결심을 하고 그들 간에 공제회를 만든다고 가정하자. 그 주목적은 질병과 실업의 경우에 각자에게 생계유지와 함께 예금의 지속을 보장하는 방식으로 서로 돕는 것이다. 우선 합쳐진 그들의 예금에서 나오는 자본으로 이 노동자들은 그들 간에 생명보험 회사를 아주 잘 이룰 수 있을 것이며, 이 회사는 그들에게 이런 종류의 회사들의 모든 장점을 제공하면서 동시에 운영 이득을 남겨줄 것이다. 말하자면 그들은 다른 식으로 발견할 수 없는 훨씬 저렴한 가격에 스스로 보험을 할 수 있으리라는 것, 아니면 같은 보험료로 더 큰 액수를 보장하리라는 것이다.

이와 같이 한 노동자는 40년간의 눈에 띄지 않는 절약으로 4000프랑을 모음과 동시에 또한 자기 가족에게 그의 저축에서 나오는 이자와 함께 또 다른 3000프랑을 보장해줄 수 있을 것이다. 즉 모두 해서 7000프랑으로서 그가 60세, 아직 건장하고 노동할 수 있는 나이에 죽게 될 경우에 그는 이를 자기 처에게 남겨줄 것이다. 7000프랑, 이는 수많은 처녀들의 지참금이다.

이 예는 우리에게 신용의 허구들의 가장 행복한 용도들 중 하나를 보여준다. 실제로 보장된 총액은 계약 지속 기간 중 임의의 순간에 이를 고려할 경우 대부분 실현 불가능한 허구적 자본일 뿐임이 명확하다. 그러나 사회에 허구적인 이 자본은 그렇다고 해서 피보험자 각자에게 조금도 덜 실재인 것은 아니니, 각 피보험자의 사망 시에 최소의 부분만큼씩 상속으로밖에 상환 가능하지 않은 것이다. 생명보험은 환어음과 은행권의 유비물로서 지금地金에 근거를 두는 대신 회수回收에 근거를 둔다.

끝으로 이렇게 조직된 노동자들의 공제회가 20~30년 동안 유지되고, 갱신되고, 발달한다고 가정하자. 이 공제회가 갑자기 힘을 모아 수백만 프랑을 처분할 수 있는 순간이 올 것이다. 부지런하고 정신이 말짱한 사람들, 인내와 절약으로 30년 동안 단련된 사람들이 그런 힘을 가지고서 무엇을 도모하지 못할 것인가! 그리고 그러한 경영이 3세대나 4세대 동안 유지되고 새로운 종교처럼 어디에나 전파된다면 세계를 개혁하고 틀림없이 평등을 가져올 것임이 명백하지 않은가?

이런 종류의 가정들을 무한히 변형하고 조합할 수 있으며, 언제나 도달하게 될 결론은, 프롤레타리아가 변함없이 가난하다면 이는 그가 부유해지려는 수고를 하고 싶지 않은 것이라는 것이다.

하지만 맙소사! 이 결론은, 우리가 미쳤다면 이는 우리가 현명하지 않은 것이라고 말하는 것과 맞먹는다. 그리고 우리가 고통을 겪는다면 이는 우리가 건강이 좋지 않은 것이라고 말하는 것과 맞먹는다. 의문의 여지없이 우리의 공법, 우리의 민법과 상법, 우리의 경제학, 우리의 신용 기관들은 프롤레타리아트가 빈곤에서 벗어나고 이 역겨운 자본에 대한 종살이에서, 정신 착란의 제1원인인, 물질의 이 악명 높은 멍에에서 해방되는 데 필요한 것을 백만 번 포함한다. 그러나 이 해방의 법칙을 파악하려면, 초월적 개념의 도움으로 대금업의 원에서 벗어날 필요가 있다. 그리고 우리가 도달한 한계에서, 신용의 이 경이로운 국면에서 우리는 그 어느 때보다도 대금업에 처박혀 있다. 조금 있으면 우리는 프롤레타리아의 잘못, 자본가의 잘못, 그리고 섭리의 잘못을 고려할 것이다.

이 순간까지 신용의 형태들이었던 것, 그 형태들이 될 수 있는 것을 말한 후 그것들 모두에 공통인 공식에 대해 말할 것이 우리에게 남는다. 이 공식은 신용의 절차가 정의에 대해서 가지는 관계를 정치경제학에 대해서 가진다. 나는 회계를 이런 말로 지칭하고자 한다.

신용은 회계의 아버지다. 회계는 채권자 없이 채무자가 있을 수 없고 그 역도 성립한다는 원리에 그 모든 비밀이 있는 과학이다. 이는 산물들은 산물들에 의해 획득된다는 경구의 번역이며, 정치경제학의 근본적 적대성을 새로운 표현으로 다시 가져오는 것이다.

로마인들의 회계에 관한 다음의 상세 내용을 흥미 없이는 읽지 못할 것이다.

“고대 로마인들은 각자 장부를 가지고 있어서 거기에 채무와 채권, 일종의 당좌 거래들을 기록하는데, 거기에 그들은 또한 관계를 가지는 사람들의 이름 밑에 각자의 부채acceptum와 자산expensum을 기입했다. 우리에게서 분개장이 법에 규정된 형태로 빨간 줄로 그어진 것 없이 기록될 경우에 그렇듯이 이 장부들은 정의를 입증했다. 그것들 중 하나는 이서장(移書帳, nomen transcriptium), 이서 기록부라고 불렸고, 이는 원장元帳이다. 이 원장에 항목들을 올리기 전에 로마인들은 우리처럼 일계장에 이를 적어 놓는다. 일계장은 키케로의 『프로 로시오pro Roscio』에서 감독controle을 말하는 것으로서 아드베르사리아adversaria라는 이름으로 지칭된다. 이서장으로의 이기移記는 적어도 매월 행해지며, 한편에는 지불한 것expensum을 옮겨 적고 또 한편에는 받은 것acceptum을 옮겨 적는다. 끝으로 이 장부들은 실질적으로 부채doit와 자산avoir에 의거해 작성되어 라티오네스rationes라고 불렸다. 당사자들 간에 행해진 모든 것을 설명raison해야 했기 때문이다. 그러한 것이 가계부livre de raison 혹은 원장이라는 명칭의 기원일 것이다. 그리고 또 레시외르 클로펭클로팡les sieurs Clopin-Clopant, 아르파공 에 콩파니Harpagon et compagnie 같은 상호raison sociale라는 말의 기원도 된다. 일정 금액의 채무를 지고 싶으면, 빚을 썽 하는 자가 자신의 장부에 그가 채권자로 삼을 의향을 가진 자에게서 받은 자산을 기재했다. 빚을 준 사람 쪽에서는 자기 장부에 그의 채무자로 삼고자 한 자에게 준 자산을 기입했다. 이는 결과적으로 상업 전문 용어에서 우리가 대변과 차변이라고 부르는 것이었다. 장부들의 일치에서 계약이 나왔다.”(오지에, 『공공 신용의 역사』)

이 평행 관계에 주목하자. 차변에 기록하다débiter, 채무자 노릇하다faire débiteur, 빚지다devoir, 채무자다être débiteur. 대변에 기록하다créditer, 채권자 노릇하다faire créancier, 신용하다(croire, 이 말은 프랑스어에서는 라틴어 credere의 어의를 상실했다), 신뢰하다, 완전한 지불 때까지 향유와 소유를 시키다, 한마디로 채권자다. 우리가 주인과 종의 관계를 아주 강렬하게 표현하는 섬기다servire와 보존하다servare, ‘노예다’ 혹은 ‘노예 노릇하다’의 상관성을 특기한 것은 이런 것이다. 매일 사회적 건축물이 솟아오르는 기반이 되는 관념들의 대립은 나중에 가서 제도들의 계승에 의해 이것이 사실로 정식화되어야 했던 것처럼 처음부터 정식화되었다.

대변, 차변, 구매와 판매 등 우리가 신용에 배정한 궁극적 목적, 생산과 교환 간의 균형을 수립하는 목적을 아주 잘 표현하는 대립 외에 복식부기라 불리는 부기는 우리에게 또 다른 대립을 드러내준다. 이는 사람과 사물의 대립이다.

상인은 그와 거래 관계를 맺는 사람들 각각에 대해 대차貸借를 이용해 계정 하나씩을 개설한 후에 또한 그가 받을 수 있고 인계할 수 있는 가치물의 본성별로 역시 대차를 이용해 또 하나씩의 계정을 개설하며, 그는 이를 네다섯 개의 큰 범주로 분류한다. 금전 출납 계정, 환 계정, 일반 상품 계정, 잡계정인데, 이것들은 청산이나 재고 조사 시에 손익 계정이라는 단일 계정으로 해소된다. 손익은 상인에게는 경제학자들이 총생산과 순생산이라고 부르는 것을 표현하는 것이다.

창세전부터 준비되어 우리의 지성과 활동이 생겨나려고 함에 따라 우리의 지성을 옥에 가두고 우리의 활동을 꼼짝 못하게 위협하는 요새, 보루, 성채들의 엄청난 포위를 말하지 않을 것인가? 자유가 어느 쪽을 향하든지 그것은 곧 이 경제적 숙명들 중 어느 것에 의해 예측하지도 못한 중에 붙잡힌다. 구제 수단의 외양을 띠면서 자유를 그 졸라맴에서 벗어나지도, 그것들의 굴레 바깥을 의식하지도 못하게 하는 가운데 속박하고 예속화하는 숙명들 말이다. 상업, 농업, 이해하는 기술로서의 계산술이 발명되기 전에 언어는 모든 정치 및 경제 제도에 앞서 자생적으로 생성되어 결과적으로 차후의 편견들의 영향에서 벗어난 것으로서, 이 언어가 벌써 노동, 대여, 교환, 신용, 채무, 내 것과 네 것, 가치, 그리고 균형의 모든 관념들을 표현했다. 경제학이 존재했다. 그리고 칸트는 극히 투박한 경험주의에만 믿음을 두는 것으로 거드름을 피우는 경제학자들과는 반대로, 그가 경제학에 몰두했더라면 틀림없이 정치경제학을 순수과학의 반열에 올렸을 것이다. 즉 원리들의 구성에 따라서, 그리고 사실과는 독립적으로 선험적으로 가능한 과학 말이다.

내가 다루는 것과 같은 주제에서는 모든 것은 새롭고 뜻밖일 수밖에 없었다. 나는 오랫동안 아담 스미스에서부터 슈발리에 씨에 이르기까지 정치경제학의 교육에 쓰이는 저작들에서 왜 어디서도 상업 부기에 대한 언급이 되고 있지 않은지를 탐색했다. 그리고 나는 부기, 혹은 좀 더 겸손히 말해 장부의 작성이 바로 정치경제학이라서 이른바 경제학이라는 잡동사니의 저자들, 실제로는 장부 작성에 관한 다소간 분별력 있는 논평자들에 불과한 자들이 이를 알아채는 것이 불가능했다는 것을 결국 발견했다. 또한 나의 놀람은 처음에는 극단적이었지만, 수많은 경제학자들이 부채와 자산에 대해, 한마디로 장부의 작성에 대해 전혀 이해하지 못해 계산에 아주 어두운 자들이라는 것을 확신할 수 있었을 때 일거에 중단되었다. 독자 여러분을 심판관으로 삼는 바다.

정치경제학이란 무엇인가? 사회의 여러 계정들의 과학(이 단어에 동의하자), 부의 생산, 분배, 소비의 일반적 법칙들의 과학이다. 이는 밀을 생산하는 기술도 아니고, 포도주를 만들고, 석탄을 추출하고 철을 제조하는 등의 기술도 아니다. 이는 기술과 직업의 백과사전이 아니다. 이는 한 번 더 말하건대 부가 사회 안에서 창출되고 증대하고 교환되고 소비되는 일반 절차들에 대한 지식이다.

가능한 모든 산업들에 공통인 이 일반 절차들에 개인들의 행복, 민족들의 진보, 재산들의 균형, 대내외적 평화가 의존한다.

그런데 산업 시설마다, 상사 대리점마다 생산에, 상품 발송과 입고에 종사하는 일꾼들과 별개로, 한마디로 말해서 전문 노동자들과 별개로 상급 고용자, 감히 말하자면 일반법의 대표자, 경제 사상의 기관, 생산, 유통, 소비의 일반적 절차의 관점에서 그 시설 내에서 벌어지는 모든 것에 유의하는 책임자가 있다. 이 고용자는 회계원이다. 제대로 이해된 노동 분업의 효과를 감정하고 기계가 어떤 절약을 해 줄지, 기업이 그 지출을 충당할지 못 할지, 판매가 얼마나 이익을 내는지, 최선의 판로는 무엇인지, 즉 어떤 고객이 소비 수준이 높은지, 어떤 다른 고객들을 불신해야 하는지, 어떤 곳에서 고객이 생겨나게 할 희망을 가질 수 있을지를 말할 수 있는 것은 그 사람, 오직 그 사람이다. 경쟁의 조작들을 따르기에, 독점의 결과들을 예상하기에, 등락을 미리 알아차리기에 가장 좋은 위치에 있는 것은 그 사람이다. 끝으로 상업적이고 금속으로 된 가치물들의 운동과 자본의 유통에 관해 현지의 사정과 외부의 사정을 환어음, 수수료 계정을 통해 아는 것은 그 사람이다. 회계원은 결국 진정한 경제학자로서 거짓 문필가 일당이 그도 모르는 새에 그의 이름을 훔쳤고, 그들 자신도 정치경제학이라는 이름으로 그토록 시끄럽게 떠든 것이 장부 작성에 관한 객쩍은 수다일 뿐이었다고는 조금도 의심해 본 적이 없다.

상업 부기는 형이상학의 가장 아름답고 가장 행복한 응용 중 하나다. 그 대상물과 분야에서 그것이 아무리 제한되었더라도 과학이라는 이 호칭을 쓰는 것이 합당하기에 이는 과학이며, 그 정확성과 확실성에서 결코 산수와 대수에 양보하지 않는 과학이다.

나는 누가 한 수학자에게 이런 문제를 제안했다고 가정한다.

모든 상인이 그의 조작들에 대해 보존해야 할 수기 표시들로 어떤 판매, 구매, 어떤 수입, 지출, 어떤 이윤, 손실, 어떤 협상, 거래, 척도재의 이동이나 자본의 이전도 그 부정이 문서상으로 당장 드러나지 않게 숨겨지고, 변질되고, 왜곡되고, 증감될 수 없는 그런 기록의 조합을 찾아내는 것, 그래서 법 앞에서, 그리고 제3자와 대면해서 만약 제3자와 법이 엄격한 태도를 취하고자 할 경우에 그 상인의 책임이 완전히 보장되도록 하는 것.

이 수학자는 도움을 받을 곳이 수치들밖에 없다면 확실히 아주 당황할 것이다. 그런데 그런 것은 바로 상법 제8조, 제9조가 푼 문제다.

“제8조, 모든 상인은 분개장을 가지고서 매일 그의 채권과 채무, 상업상의 조작, 증권 매매, 인수 혹은 배서, 일반적으로 어떤 명목에서든 그가 접수하고 지불하는 모든 것을 제시하고 매월 그 회사의 지출에 쓰인 금액을 밝힐 의무가 있다. 이 모두는 상업에서 통용되지만[17] 필수 불가결하지는 않은 다른 장부들과는 별개다.”

“그는 그가 접수한 전달 문서들을 철해 놓고 그가 발송하는 문서들을 장부에 복제해 놓을 의무를 진다.”

“제9조, 그는 매년 사서 증서로 그의 동산 및 부동산 증권, 채권, 채무에 대한 재고를 조사하고 매년 이 용도로 마련된 특별 장부에 그 목록을 복제해 놓을 의무를 진다.”

음, 그건 그렇다고 해 두고! 이 두 조문은 정치경제학의 모든 프로그램을 포함하지 않는가? 그리고 사람들이 수단으로만 간주하는 한에서는 훌륭하지만 거기서 정의와 사회의 원리를 보기를 원한다면 혐오스러운 이 일상 관행을 과학으로 정립한 후에, 그들이 스스로 모방하는, 그리고 그들의 주인인 이 상인들에게 경제학자의 자격으로 충고하는 것은 우습지 않은가?

그렇다면 상법전이 열 줄로 모든 상인에게 지시한 것 말고 경제학자는 무엇을 더 아는가?

상법전은 상품 가격에 관해서도 임금률에 관해서도 아무런 속단을 하지 않았다. 이 조항을 상인의 자의에 맡겨 놓는다. 그에게 단지 얼마가 되었든 그가 지불한 금액을 계정에 올리도록 명령한다. 그래서 가치는 그 자체가 공동의 척도로 측정 불가능하며 전적으로 공급과 수요에 의존하는 것이라고, 까다롭고 신실한 논평자들인 경제학자들이 우리에게 말하는 것 아닌가?

상법전은 상업회사들 장章에서 민법전 1832조 이하의 학설을 전개하며 이렇게 말한다. “회사는 두 명 이상의 사람들이 그로부터 낭로 수 있을 이익을 목적으로 무언가를 공유하기로 합의하는 계약이다.” 그러므로 상법전은 노동만으로는, 그리고 노동 자체로는 회사의 대상물, 상업의 재료가 될 수 없다고 가정한다. 자본은 생산적이고 사회 질서는 독점에 기초를 둔다고 경제학자들이 가르치는 것은 이런 것이 아닌가?

이런 평행선을 더 멀리 밀고 나가는 것은 쓸데없는 일이다. 공공 신용과 조세의 문제들은 여전히 국가에 적용된 상업 부기의 문제들이다. 경제학자들이 이를 이해하는 방식을 볼 때 정치경제학의 한 장으로 삼을 만한 것이 없었다. 만약 정치경제학이 여전히 상업의 철학, 장부 작성의 철학이라면! 하지만 전혀 그렇지 않다. 정치경제학은 그것만으로도 1000권의 실체를 담고 있는 상법전 제8조, 제9조에 대한 거창한 주석일 뿐이다.

그러므로 나는 다음과 같이 간추려서 말할 것이다.

상법전은 모든 채권자는 채무자를 전제로 하며 그 역도 성립한다는 형이상학적 원리를 응용하고 모든 상인에게 그의 채권과 채무, 그리고 그의 영업을 매일 기록할 의무를 과하면서 신용의 진정한 기초를 놓았고 미래의 평등의 저항할 수 없는 수단을 창조했다고.

그러나 부기는 그 자체로 결코 가치들의 척도를 내포하지 않는다는 것, 그것은 부채와 자산의 항들로 표현되는 양들의 크기와는 상관없는 채로 있다는 것, 그것이 아주 빈번히 활용하는 산술처럼 냉정한 그것은 상인의 풍요와 마찬가지로 멸망을, 주인의 정의와 마찬가지로 일꾼의 횡령을 확증할 용의가 있다는 것에서, 입법자가 재산의 불안정의 법칙을 만들고자 했다는 결론이 나오지는 않는다. 그리고 경제학자들은 단지 편견만이 아닌 것을 판단으로 받아들이면서, 일상 관행이 전혀 알 수 없는 것, 더 잘 공부했다면 결국 거짓이라고 공언했을 것을 일상 관행에 말하게 하면서 철학자의 사명을 저버린 동시에 비평가로서의 자격도 상실했다.

상업 장부들은 상인이 비용을 들여서 점포에 보관할 의무를 진 청렴한 증인들이다. 그가 사기꾼이면 그를 고발하고, 지불 불능의 경우에 그가 정직한 사람이면 그를 정당화해 줄 용의가 있는 납세 독촉인들의 회사처럼 말이다. 경제학자들은 아주 피동적인 이 역할, 대수적인 증인의 이 초연함에서 교환에는 법칙이 없다는 결론을 내렸다. 반대로 참된 철학자라면, 교환의 법칙 자체가 발견된다면 그와 같은 수단들을 가지고 평등이 구원된다고 결론을 내릴 것이다.

상업 부기는 온 세계를 포괄해야 하며, 사회의 원장元帳은 개인들이 존재하는 수만큼, 가치를 가진 것으로 생겨나는 다양한 품목들의 수만큼 많은 개별 계정들을 가져야 한다.

이 공정한 시대가 올 때 정치와 대의 체제, 절충적인 경제와 공동체적 사회주의는 경멸을 받을 만큼 받게 될 것이다. 그리고 왕정, 민주주의, 귀족정, 신정 등 이 모든 참주정의 동의어는 새로운 젊은 층에게는 형식적 특질들, 갈고리 모양의 원자들, 문장紋章 과학, 신학자들의 방언처럼 이상한 것들로 여겨질 것이다.

. 신용의 거짓말과 모순. 그 파괴적 효과, 그것이 가지는 빈곤화 능력

섭리는 사람을 신용이라는 경이로운 길로 인도해 사회의 품 안에 곤궁의 전파와 지속을 위한 일반적 보험 기관을 만드는 것을 목적으로 삼은 듯하다.

지금까지 우리는 정치경제학이 진화할 때마다 주인과 임금 생활자 사이를, 자본가와 노동자 사이를 구분하는 홈이 더 깊이 파이는 것을 보아 왔다. 기계들과 경쟁, 독점, 국가 조직, 조세 면제와 마찬가지로 금수 등 인간 재능이 노동계급의 위안을 위해상상한 모든 것은 끊임없이 특권의 이익으로, 그리고 노동의 점점 더 짓누르는 억압으로 전환되었다. 지금 세워진 업적을 공고화하고 적의 기습에 맞서 위치를 요새화하고 빼앗긴 자의 공격에 맞서 소유자를 보장해주는 것이 중요하다. 그러나 이 보험에 그 보험료를 지불하는 것은 여전히 약탈당한 자의 일일 것이다. 이렇게 쓰여 있는 것과 마찬가지다. 모든 것은 노동자에 의해, 그리고 모든 것은 노동자에 맞서(Tout par le travailleur, et tout contre le travailleur).

일꾼들, 노동자들, 경작자들, 생산하는 사람들에게 다정함이 넘치는 어조로 이렇게 말한다. “우리가 이 저축 금고들을 세운 것은 당신들을 위해서, 당신들의 노년의 위안을 위해서입니다. 오세요. 당신들이 절약한 것을 가져오세요. 우리는 이를 잘 지키고 확실히 지켜드릴 겁니다. 우리는 그에 대한 이자를 드릴 겁니다. 당신들은 우리의 지대 수령자들일 것이고 우리는 당신들의 채무자일 것입니다. 농부들이여! 당신들은 고리채를 쓰고 있으며, 당신들이 결코 갚지 못하므로 당신들은 수탈을 당합니다. 우리의 저당 은행으로 오세요. 우리는 법률 행위로 당신들에게서 아무것도 취하지 않을 겁니다. 우리는 결코 상환을 요구하지 않을 겁니다. 그리고 작은 이자로 36년, 45년, 50년 후에 당신은 해방될 겁니다. 제조업자들, 상인들, 산업인들이여! 당신들에게는 돈이 없습니다. 하지만 당신들은 당신들의 공장, 도구, 집, 고객, 재능, 성실성이 금이 들어있는 광석임을 모릅니다! 우리는 이 모래를 씻고 그것이 숨기는 귀금속을 빼낼 것입니다. 그리고 채취가 행해졌을 때 우리는 약간의 할인을 거쳐 모든 것을 당신들에게 줄 겁니다. 가부장들이여! 당신은 당신이 죽고 난 다음 당신 딸들에게 줄 지참금, 부인에게 줄 정기 수령금, 어린 자녀들에게 줄 유산을 보장받길 원하십니까? 우리는 당신들에게, 당신이 등록한 날로부터 우리가 당신에게 지급해야할 금액에 대해 당신의 나이에 비례한 이자만을 요구할 겁니다.

그리고 당신은 노동할 것이고, 걱정 없이 살 겁니다. 그리고 금이 넘쳐날 겁니다. 당신은 부자일 것이고, 부자이면서 행복할 겁니다. 왜냐하면 당신은 노동, 판로, 정기 수입, 세비, 상속 재산, 이윤을 어디서나 가질 것이기 때문입니다!”

한마디로 나는 이 발판을 뒤엎고, 신용의 신화를 무로 돌린다.

신용은 본질상, 지향상 복권처럼 언제나 주는 것보다 많은 것을 요구하며, 그러지 않을 수 없다. 그러지 않는다면 그것은 신용이 아닐 것이다. 그러므로 언제나 대중에 대한 약탈이 있다. 그리고 은폐 수단이 무엇이든, 자본에 의한 노동의 일방적 약탈이 있다.

그리고 우선 신용은 모든 사람들에게 제시될 때는 거짓말을 한다. 한편으로 손님 끌기를 잘하고, 수다스러운 경제학자는 우리에게 이렇게 말한다.

“정직한 사람이고, 명예감에 취해있고, 자기 말에 진실하고 자기 약속을 반드시 지키는 자만이 신용을 누리기를 갈망할 수 있다. 신용과 신뢰는 동의어다. 그런데 성실성이 존경받는 곳, 그리고 검증된 도덕성을 가진 사람들을 향해서가 아니라면 어떤 장소에서, 그리고 누구를 향해서 신뢰가 존속할 것인가? 마찬가지로 풍부한 재원을 갖추고 훌륭한 정신으로 관리되는 신용 기관들이 관대하게 제공하는 것에 누가 충격을 받지 않을까? 이 신용 기관들의 임무는 실제로 노동 수단, 크건 작건 간에 기업들의 필수 생존 수단, 산업의 힘줄, 다른 말로 자본을, 그것들을 스스로 값있게 활용하려고 하지 않거나 그렇게 할 줄을 모르는 혹은 그럴 겨를이 없는 소유자들의 손으로부터 그것들을 활용하기에 더 적합하거나 더 활용할 의향을 지닌, 그리고 확실한 다른 손들로 넘기는 것이다. 그러므로 잘 조직된 신용이 있는 곳에 지성을 노동 사랑과 합치고 산업적 적성을 성실성에 합치는 사람은, 시간이 흐름에 따라 안락을 정복하고, 시간이 흐름에 따라 옛 시인이 중용이라고 칭한, 영국인들이 독립이라는 이름으로 지칭하는 이 입장을 취할 수단이 그에게 결여되지 않았으리라고 확신한다. 일단 그곳에 도달한 후 사람들은, 몇몇 예외는 있어도, 통상적인 시대에는 자발적으로 멈추어 서서 저 너머를 추구하지 않고 그들의 천막을 친다. 그러나 예외들 자체에 대해서는 그 예외들이 이 점에서 우월한 경우에, 우월한 본성들에 대해 신용을 가지고서 사회적 지위의 가장 높은 수준인 이 산업상의 가장 높은 위치로 상승하기가 그들에게 쉬우며, 거기서부터 온몸으로 국가의 가장 저명한 작업들로 옮겨간다. 우리의 자유주의 사회에서 수많은 눈부신 예들을 우리가 발견하는 것처럼 말이다. 여러분, 15년 전부터 두 명의 상인, 상업의 길을 따라서 상승한 두 사람이 국가의 존엄한 자리들 중 최고의 자리에, 각료 협의회 의장의 자리에 오른 것을 여러분은 보았다!”(슈발리에, 〈정치경제학 강의〉, 1845년 개회 연설)

이제 철학자이면서 엄격한 경제학자인 이의 말에 귀를 기울이고, 강의를 잘 음미해보자.

“신용은 결코 미래에 대한 예상, 자본을 창출하는 모양을 띠면서 옮기기만 하는 이재학理財學의 기만이 아니다. 신용은 안정적이고 저당 잡힌 자본을 유동자본이나 저당을 벗어난 자본으로 탈바꿈시키는 것이다. 그러므로 신용이 기대되는 것에 기대는 것이 아니라 실물에 기대는 것이 필요하다. 그것은 가설이 아니라 담보를 요구한다. … Ex nihilo nihil fit, 무에서는 아무것도 없다. 그러므로 당신이 창조하기를 원하면, 당신의 재료를 내놓아보라, 그리고 창조의 수단으로서 창조되어야할 것을 내놓지 말라. 왜냐하면, 이는 악순환일 뿐이기 때문이다. … 신용을 침식하는 내밀한 악, 이는 수단 대신 목표물을 할인한다는 것이다.”(치에슈코프스키, 『신용과 유통에 관해』)

표현으로는 경탄할 만하지만, 논리로는 절망적이다! 이와 같이 신용은 선하고 건전한 경제에서는 결코 누구에게도 주어지지 않고 담보에만 주어진다. 신용은 저당 잡힌 자본을 유동자본으로 탈바꿈하는 것이라고 아주 웅장하게 정의되지만 임의의 자본을 돈으로 교환하되 취소할 수 있는 교환을 하는 것, 환매권부 매각을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명칭의 어원에도 불구하고 신용은 불신이다. 아무것도 보유하지 않는 사람은 결코 신용을 취득하지 못할 것이니 말이다. 정반대로 살기 위해 쓰이도록 강요를 받아 자신의 노동을 8일, 15일, 혹은 30일 동안의 신용으로 영원히 기업가에게 제공할 것은 그 사람이다!

그리고 사람들은 신용이 마치 담보가 가능한 자본을 소유하는 자들에게만 접근 가능한 상품의 유통 말고 다른 것이 아니라는 듯이 우리에게 신용을 조직하라고 말한다! 그러므로 신용의 담보를 조직하라고 말하라. 왜냐하면 없는 것은 그것이기 때문이다. 신용의 담보, 알겠는가? 즉 토지, 산업 및 노동의 소유다. 신용은 실물에는 결코 결여되지 않을 것이다. 물物에 대한 신뢰는 한정이 없다. 사람에 대한 신뢰, 인간들에 대한 신용은 어디서나 결여된다. 그러므로 다시 한 번 말하노니 창조해야할 것은 특히 신용의 담보, 개인들에 대한 신뢰의 동기들이다. 노동을 개화하기 전에 노동에 신용을 주라고 말하는 것은 객차의 그림자 안에 승객들의 그림자를 운송하기 위해 철도의 그림자를 건설하는 것이다.

이와 같이 그 본질적 조건에 따라 신용은 노동자에게 접근 불가능하며 마치 그것이 존재하지 않는 듯이 그의 운명에 직접적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 그것은 항상 깨어있는 용이 지키는 헤르페리데스의 황금 사과로, 자신의 방패에 메두사의 머리를 담보물로 가지고 있는 강한 사람만 그것을 따낼 수 있다. 신용은 가난한 자들, 일용 노동자들, 프롤레타리아들에게는 아무 할 일이 없다. 신용은 그들에게는 신화다. 왜냐하면 신용은 기대되는 것이 아니라 실물에만 기댈 수 있고 기대야 하기 때문이다. 신용은 법학자들이 말하는 것처럼 물적이며 인적이지 않다. 이 규준이 뒤집히고 반대로 취해질 수 있으려면 자본에 대한 노동의 반발에 의해 전유된 모든 부가 집단적 부로 주장되고 사회에서 나간 자본들이 사회로 다시 들어갈 필요가 있다. 한마디로 이율배반이 해소될 필요가 있다. 그러나 그럴 때 신용은 진보의 부차적 기관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그것은 보편적 연합에서는 사라지고 없을 것이다.

신용이 거짓말을 하니 이는 신용이 도둑질을 하는 것이다. 이 두 관념의 관계는 비생산성과 빈곤의 관계처럼 필연적이다. 실제로 신용은 돈의 왕권과 자본의 생산성―신용이라는 명칭으로 노동자의 예속화를 완성하기 위래 화합하고 단합해 가는 두 허구―에 관한 가장 큰 규모의 조직이다.

원리로 돌아가길 게을리 하지 말자.

자본가와 노동자 사이에 지배권과 종속이 있는 것처럼, 다른 말로 자본이 사회 안에 불가피한 봉건제를 시작하는 것처럼, 돈과 다른 상품들 사이에는 역시 지배권과 하급 지위가 있다. 물건들의 위계는 인간들의 위계를 재생산한다. 리카도의 체계 혹은 치에슈코프스키의 체계에 따라 모든 교환이 은행권 혹은 담보 해제가 가능한 자본의 소유권을 매개로 행해질 때에라도 금속 화폐는 여전히 깊은 한가함과 왕의 무사태평 중에 신용을 지배하는 숨겨진 신일 것이다. 유통하는 가치물들이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 가장되는 것은 그것의 형상을 따라서이니 말이다. 화폐는 언제나 그것들에 척도로 소용되니 말이다. 그 검인이 말하자면 어음 위에 찍힐 것이니 말이다. 어음은 사람들이 언제나 그리고 자발적으로 돈으로 상환 가능하게 할 수 있을 것이라는 이유에서만 여론에 대해 신인도를 취득하고 상거래에서 신용을 취득할 것이니 말이다. 끝으로 허구의 이 일반성에도 불구하고 가치물들의 실제적 구성은 예전보다 더 앞선 것이 아닐 것이니 말이다.

실제로 국가의 재산에 대해, 그리고 나라의 모든 부동산에 대해 담보 설정된 수십억 프랑의 정기 수령금 수령권을 발매하는 이 중앙은행에 의해 무엇이 얻어질 것인가? 엄청난 토지 대장을 만들어서 그것에 따라 돈으로 평가된 토지 자본과 노동 수단이 유동화되고 전달 가능해지고 한마디로 유통에 던져 넣어지면서도 금화 한 닢도 격식도 필요 없을 것이다. 오늘날 프랑스에서 이야기되는 유통의 규모인 40억 프랑 대신에 이 유통은 급속히 200억이나 300억 프랑에 도달할 것이다. 그리고 원리들의 명례를 위해 덧붙일 필요가 있는 것은, 담보물의 다양함으로 이 엄청난 유통의 재료는 감가하지 않으리라는 것이다. 사람들은 모든 상품을 금과 같은 명목으로 지불 시에 받아들여지는 것으로 만들 가치 구성의 허깨비를 보게 될 것이다. 그러나 화폐화된 자본들이 상거래에 들어가려면 그 명목 가치의 사전적인, 보장된 감가를 겪어야할 것이니 사람들은 이 구성의 실질을 보지 못할 것이다.

그러므로 신용은 모든 사회적 가치들의 비례성을 확정하면서 그 가치들을 그 자연적이고 정당한 율로 형성한다는 정치경제학의 목표를 완수하지 못하는 것이 증명된 것으로 내게 여겨진다. 정반대로 신용은 동산과 부동산의 가치물들을 담보 해제하면서 척도재에 대한 그것들의 종속성을 선언하기만 한다. 그것은 거침없는 유통을 창출하는 대신 척도재의 왕권과 다른 재화들의 종속성을 확인하며 모든 가치물들에 대해 그것들을 유통 가능하게 만들 목적으로 그것들에게 겪게 하는 공제로써 통행료를 책정한다. 한마디로 신용은 그것을 둘러싼 여러 모호한 것들의 문제를 치우기만 하고 해결하는 것은 아니다.

이는 게다가 치에슈코프스키 씨가 실토하는 것이다.

그는 이렇게 말한다. “신용과 유통의 개발 이용, 이는 민족의 가장 관념화되고 가장 일반화된 가치물들의 개발 이용이다. 이는 말하자면 산업이다. 하지만 어떤 특정 총가치와 직접적 가치에 대해서가 아니라 모든 가치의 일반적 요체에 대해서, 모든 실제적 부의 승화된 산물에 대해서 작동하는 산업이다. 그 산물의 추출 후에 그 정화의 잔여물이 찌꺼기 이상으로 내놓는 것은 거의 아무것도 없다.”

그러므로 다음과 같은 것이 바로 신용의 조작이다. 그것은 광석 안의 금 부스러기처럼 불완전하게 교환 가능한 가치물들(노동 수단들과 산물들)을 단일한 전형(돈)에 가져가서 부를 일반화하고 정화하는 것으로 (6의 값이 나가는 것을 4로 평가함으로써) 시작한다. 그러고 나서 중앙 기관에, 신비가 완수되는 돈의 궁전에 이 모든 일반화되고 정화된 가치물을 수렴시킨다.

마지막으로 그 조작을 모든 면에서 고찰하면서 검토해보자.

우선 신용은 그 자체가 담보로 잡힌 자본들처럼 다양한 형태를 화폐에 주면서 금속 가치물에 어떠한 감가도 가하지 않는다. 금과 은은 그 가격과 잠재성을 보존한다. 신용 증서는 아무리 그것들과 동등해도, 심지어 어떤 의미에서는 이자를 낳으니 그보다 더 우월해도 그것들의 소유권을 빼앗지 않는다. 정반대로 담보로 잡힌 자본을 그것들처럼 유통 가능하게 만들어서 서로 간의 비율을 표시하기만 한다. 증대된 것은 금속의 양을 두 배로 하거나 갑자기 10억 프랑의 국정 지폐를 발생할 때 그렇게 되는 것처럼 화폐 상품이 아니다. 운동에 놓이는 것은 사회적 부의 무한한 다양성과 그것의 무수한 형태와 함께 사회적 부 자체다. 이는 정치경제학의 궁극적 목표인 가치의 이 절대적 형성을 향한 새로운 발걸음, 결국 거대한 발걸음이다. 실제로 이 형성을 확정적으로 만들려면 신용에서 위계를 평등으로 대체하고, 모든 가치물을 유통 가능한 것으로 만들기만 하면 된다. 공제화 할인의 이득 속에서만이 아니라 액면가대로 말이다. 이것이 화폐의 본질적 특성이다.

그런데 신용이 신용이기를 중단하지 않고, 즉 상호성, 연대 그리고 연합으로 탈바꿈하지 않고, 한마디로 이자의 예속을 사라지게 하지 않고는 뛰어넘을 수 없는 것은, 그 너머로 노동자와 자본가가 평등해지고 비슷해지는 이 간격이다.

이자, 대금업, 고위 성직록 취득권, 십일조 혹은 내가 예전에 그렇게 불렀듯이 횡재권은 자본의 필수적 특성, 그것의 특권의 표현, 따라서 신용의 필수 불가결 조건이다. 이 이자는 토지 및 동산 자본들의 담보 해제에 의해, 그리고 정기 수령금 수령권의 창조에 의해 중단되는가? 그러기는커녕 더 큰 규모에서 더 큰 일반성, 규칙성, 확고함을 가지고 작용한다. 그러므로 사회적 구성에서 아직 아무것도 달라지지 않았다. 그리고 사회적 구성의 기초인 적대는 활동과 에너지의 가중만 입었다.

그런데 이 메커니즘은 무엇으로 이루어지며, 이자의 속성은 무엇인가?

이는 사회 안에서 순생산이 총생산을 넘어 존재하기를 바라는 것, 허구적 자본, 명목적 부, 수입이 선행하지 않는 지출, 있을 수 없는 자산을 끊임없이 창조하는 것이다. 이는 한마디로 불가능을 가정하는 것, 그리고 결과적으로 생산하는 자들과 허구에 따라서 신용을 받는 자들의 손에서, 생산하지 않고 같은 허구에 따라서 신용을 주는 자들의 손으로 끊임없이 부를 흘러 들어가게 하는 것이다. 이는 세 번, 네 번 모순된 것이다.

그러므로 금속 가치물, 유일하게 구성된 가치물이고, 모든 교환에서 수용 가능한 가치물인 금속 가치물을 가용한 것으로 처분하는 자본가는 내가 말하건대 노동자를 돕고, 상업과 생산을 촉진하고 공적 재산에 그가 할 만큼 기여하기를 원해서 그의 고객들의 재산권을 담보로 잡고, 그들에게 돈이든 자신에 대한 환어음이든 교부한다. 이는 그의 이득을 두 배로 높여주는 것이다. 이 모든 것을 이자를 통해서 하는데, 이는 끊임없이 대출된 것과 동일한 척도재를 은행에 돌아오게 하는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이자 지불 의무가 없어지는 것도 아니다. 그리고 대금업에 의해 되돌아오는 대출된 금액이 계속해서 다시 대출되는 것처럼, 토지, 가옥, 그리고 모든 민족적 동산은 은행가들의 이익을 위해 담보로 잡히고 저당 잡히는 일이 곧 일어난다. 이 양도 운동은 아주 속도가 빨라져서 이를 천체 운동에만 비교할 수 있다. 프라이스(Price) 박사는 기원 원년부터 1772년까지 복리로 투자된 10% 부가세는 지구 크기의 별 1억5000만 개가 보유할 수 있을 만큼보다 많은 금을 산출할 것이라고 계산했다.

돈은 언제나 대출되자마자 재포착되고 따라서 언제나 더욱 간곡하게 요청되는 것인데 부족해지는가? 은행가는 자신의 신용표인 지폐를 발행하는데 이는 작은 사고들과 어떤 계산 착오들에도 불구하고 척도재와 마찬가지로 그에게 지체 없이 돌아오며, 언제나 증가된 수요를 가지고서 돌아온다.

담보로 지원을 받는 은행 지폐는 이제 그만하면 충분하지 않은가? 정기 수령금 수령권을 창조한다. 자본에서 남는 것 전부를 유통에 넣는다. 부채 상각의 새로운 조합들을 발명한다. 대출의 가격, 계약 비용을 낮춘다. 기한을 연장한다. … 그러나 결국 자본이 무료로 대출되는 것은 불가능하므로, 자본이 교부된 대로 돌아올 수는 없으므로, 끝으로 자본의 이자는 아무리 작을지라도 자본 자체는 이득을 보면서 무한정으로 재생산할 순간부터 언제나 노동이 생산자에게 남기는 초과분을 초과하므로, 한 민족 안에서 노동이 말하자면 계속해서 자본의 이익에 종속될 필연성, 계속해서 또한 파산과 빈곤이 균형을 재확립할 필연성이 있다.

프라이스 박사와 그의 제자 피트(Pitt)는 복리를 기초로 계산하던 때에 그들이 신용의 모순을 수학적으로 입증해 온 것을 알아채지 못했다. 형태들의 다양성, 조합들의 미묘함, 운송의 용이성, 상환에 부여된 관대함, 이 모두는 아무 소용이 없다. 균형은 신용을 자기 자신에게 되돌아오게 하는 조건에서만, 즉 자본가와 노동자를 같은 정도로 채권자들과 채무자들로 만든다는 조건에서만 존재할 수 있다. 이는 독점 체제에서는 불가능한 일이다.

그러니 돈이라는 낡은 우상이 은퇴하게 될 이 보편적인 자본의 담보 해제, 이 정기 수령금 수령권의 지배가 가장 속히 올지어다. 그리고 우리는 시인들이 신의 연인이자 자연의 여왕으로 묘사하는 인류가 유녀遊女처럼 눈에 불을 켜고 목을 헐떡이며 노름 탁자 앞에 앉아 노름을 위해 생산하고, 여전히 노름을 위해 구매, 판매, 투기하는 것을 보게 될 것이다. 그때 노동 수단들은 노름에 거는 판돈이면서 동시에 노름의 도구들이 되어 있을 것이다. 시장들은 증권시장으로 전환될 것이고, 도로들은 위험한 장소로 전환될 것이다. 항해는 해적질일 것이다. 모든 예술과 모든 과학은 가짜 열쇠, 도둑질을 위해 장만하는 끌, 집게, 톱의 제조 공장 같을 것이다. 그리고 섬뜩한 자살 사건들, 잔혹한 복수극, 해체, 약탈, 무정부 상태가 있을 것이다. 그런 다음에는 피로에 지쳤지만 만족하지 않은 사회는 지옥 같은 원무圓舞를 다시 시작할 것이다.

오지에 씨는 이 무서운 미래의 모습에 관해 이렇게 소리친다. “관습이 후안무치함을 끌고 와서 인간 가족의 군집이 공평을 비웃는 법의 지배를 받고 모든 시대에 정직한 사람들이 정착시키고자 추구한 정의에 맞서 위선적으로 결탁한 도둑들이나 체계적인 파산자들의 본거지가 될지 두려워해야할 것 아닌가? 끝으로, 과거에도 유례없는 도덕관념이 아메리카의 여러 주들에서 48시간 동안 본 것, 한꺼번에 100개 은행의 도산, 정부의 도산, 그리고 이어서 그 광경에는 없던 것, 하루 안에 모든 시민의 도산을 영구적으로 재현하고 실현하게 될 것을 두려워해야할 것 아닌가? 도형徒刑을 위한 꿈같은 요정 이야깃거리, 새로운 장르의 농지법 종류다!”

어떻게 이를 더 의심하는가? 독점 체제에서 신용의 조직은 사회의 미래를 운에 맡기는 것이다. 이는 민족들의 돈을 몽땅 거는 것으로서 끊임없이 잃고 끊임없이 파산에 사로잡히게 되는 것이다. 사회 안에서 총생산과 순생산의 차이가 빈곤의 유일한 진정한 원인으로서 과학의 요란함과 장식의 변화 때문에 은폐되어 감지되지 않은 채로 지나가는 반면, 산업 역학의 진보, 경쟁의 투쟁들, 거대 회사들의 형성, 의회의 선동, 교육, 조세, 식민지 개척, 대외 정책의 문제들이 공공의 관심을 흡수하고 그 거대한 이익으로부터 관심을 흩어놓는 반면, 신용은 가치물들의 일반화에 힘입어, 그것들의 담보 해제와 단일 창고에 들어있는 그것들의 풍부함에 힘입어 빈곤의 체제를 폭로하고 우리에게 우리 사회 질서의 수학적 불가능성을 입증할 준비를 한다.

정치경제학은 가치들의 형성의 방향으로 사회의 움직임을 인도하면서 사회에 관해 영구 운동의 문제, 기계공들과 경제학자들이 한마음으로 해결의 조건을 보유하지 않으므로 풀리지 않는 문제라고 선언하는 문제를 풀기를 갈망한다. 운동은 영구적일 수 있지만, 한 가지 조건에서 그렇다. 이는 자생적이라는 것, 그 기계 외적인 힘이 아니라 내적 힘에 의해서 생산된다는 것이다. 이처럼 우주에는 운동의 영구성이 있다. 거기서 운동은 물질 내적인 힘, 인력引力에서 나오기 때문이다. 이처럼 생명은 동물 안에서 영구적이다. 유기체에 내적이고 유기체를 창조하고 일정한 정도로 요소들을 지배하는 힘에서 나오기 때문이다. 그리고 조직으로써 자신에게 방해가 되는 것조차 증대시키는 것이 생명의 본성인 것처럼, 생명이 분자적 인력에 짓눌리고, 자생성이 다른 자생성에 짓눌릴 때가 온다. 그러나 생명은 인력과 똑같이 영구적이다.

그러한 것이 또한 사회에 활기를 주고 사회를 발달시키는 힘, 자생적이고 불멸인 힘, 말하자면 우리의 모순들은 그 흔들림일 뿐인 힘이다. 신용의 가설에서 사람은 특권에서, 오직 특권에서만, 그리고 언제나 특권에서, 즉 소외에서 생산력, 노동에 내적이어야 하고 따라서 사회의 내장 안에 거주하는 이 힘이 나오게 한다. 신용이 그것의 모든 조합들을 가지고서 숙명적으로 부동성과 죽음에 도달하는 것이 놀라운가? 신용에 의거해 노동에 자극을 주는 것으로 여겨지는 특권, 그 특권은 노동자가 생산을 하면서 특권의 이익이 되도록 멸망하지는 않으면서 빼앗기는 시간만큼만 지속할 수 있다. 그리고 복리 이론에 따라 노동에 대출된 자본은 14년마다 두 번 지불되어야 한다는 것이 입증되므로, 신용의 완전한 조직에서 노동은 14년마다 그가 운동시킨 자본을 상실한다는 결과가 된다. 그 결과는 자본에 대해서 균형이 파산으로밖에 확립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말하자면 사회 발전의 법칙은 신용의 법칙과 전혀 같지 않다는 것, 그리고 우리가 세계를 진행하게 만드는 원리와 합치하려면 소유하는 자들의 소유를 박탈하는 데서 시작해야 하리라는 것이다. 우리의 앞선 모순들이 풀리지 않는 한 이는 불가능한 일이다.

그러므로 이제 상상이 가능한 모든 공식들로써 신용은 기대되는 것이 아니라 실물에 기대야 한다는 것, 신용은 가설이 아니라 담보를 요한다는 것을 말하고 반복할지어다. 이 모든 이론은 특권의 일상 관행에 자리를 차지하는 누구에게나 난공불락의 이론이지만, 결국에는 자본들을 사회에서 총체로 고려할 때 자기 자신 말로 다른 담보를 가지지 않으며, 서로 간에 신용을 줄 경우에는 자신들의 실물 말고 다른 담보를 가지지 않으며, 서로 간에 신용을 줄 경우에는 자신들의 실물 말고 다른 실물에 기댈 수 없으니 이 이론은 근본적으로 무능하고 허위를 확신하는 입장이 된다. 로(Law)가 신용의 이 모든 몽환을 일거에 뛰어넘어 신화 위에 그 기초를 두게 하려고(물론 원가를 통해 상상들을 파악하는 것이 필요했다) 했을 때, 그리고 이론은 참으로 신용이 물적이어야 한다는 것을 가르쳐준다고 말했을 때, 우리 세기의 이론가들보다 더 많은 솔직함을 보여주었다. 그러나 사회에서 이자의 진행은 숙명적으로 차입자의 지불 불능을 가져와서, 물적인 것으로 시작하는 신용이 결국 완전히 인적인 것이 되는 것, 에스파냐에 있는 성들에 기대게 되는 것이 불가피하다. 그때부터 채무자가 다른 어떤 사람인 것보다 국가의 공직자인 것이 더 낫다. 도덕적 담보의 문제에서 국가의 공직자가 가장 확실하다. 그리고 이 채무자가 전능하니, 결과적으로 다른 어떤 채무자와는 반대로 신용을 받는 대신 신용을 주는 것이 그다.

가능하다면, 이 사람이 당시에 아무도 그 비밀을 알지 못한 이 모든 모순들의 와중에 어떤 정신적 고통에 사로잡혀야 했는지를 상상해보라. 결국에 그가 미라보가 말한 것처럼 이 모든 조합들이 붕괴에, 무서운 파산에 도달하는 것을 보았을 때 나중에 어떤 현기증에 쓰러져야 했을지 상상해보라. 우리에게는 로라고 하는 이 우수한 지능을 가진 사람, 불가능한 건축물인 사회의 영구 운동을 신용으로써 추구한 대담한 모험가이자, 경이로운 정확성을 가지고 추론하면서 그 논리 자체로 인해 여전히 모순으로, 무로 인도된 그가 어떤 자였는지를 이해하는 데는 역사상 유례없는 50년 이상의 철학적 발전이 우리에게 필요했다. 이 사람이 그를 이해한다고 믿은 자들에게 경탄을 받고, 그를 이해하지 못한 자들에게는 욕설을 들어야할 사람인지 판단해보라! 로는 물론 현자의 돌로서 왕국에서 왕국으로 퍼뜨린 이 무서운 이율배반에 대한 모호한 감을 지녔다. 왜냐하면 우리는 그가 미시시피에 대한 그의 주식 가치에 관해 환상을 품었다고 인정할 수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에게는 이론이 논박한 의심을 고려하는 것이 불가능했다. 그리고 사태들에 의해 압박을 받고 통속적인 일상 관행에서 결코 멀어지지 않았다고 확신한 그는 형이상학적 경험을 위해 제국을 붕괴시키고 나중에 모두의 저주를 짊어지고 물러날 것을 무릅쓰고 미지의 것에 손을 댈 결심을 했다. 내가 이 사람에게서 가장 경탄하는 점, 로를 내 눈으로 볼 때 정말 역사적 인물, 이상적 인물로 만들어주는 점은, 그가 그러한 경험은 그것을 겪는 고통의 값어치가 있다고 믿었고 주저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결국 로는 결코 사회 자본을 훼손하지 않았으며, 이를 옮기기만 했다. 노동은 안녕의 닻으로 변함이 없었다. 인민은 그 실험을 하는 데서 아무 위험도 무릅쓰지 않았다. 탐욕적이고, 한가하고, 타락한 귀족 계층에 대해 본다면, 로의 염려를 받을 만한 그런 자격이 그들에게는 없었다. 그런 점에서 사기꾼들과 얼간이들의 제거만이 있을 것이었다.

로의 관념들은 아무에게도, 심지어 저자에게도 이해되지 못했다. 그리고 그 후로 이에 대해 말해 오고 아직도 말하는 역사가들과 똑같이 경제학자들도 그 신비를 더 잘 꿰뚫은 것으로 보이지 않는다. 그러므로 경험이 재현될 필요가 있다. 그리고 그 시도가 지극히 일반적이도록, 어떠한 행운도 그것을 피해 가지 않도록 모든 것은 오늘날 경이로운 총체를 이루어 채비를 갖춘다. 치에슈코프스키 씨와 볼로프스키 씨는 주된 탐험 대장들이다. 담보물 법을 개정하고 토지 신용을 조직할 책임을 맡은 위원회를 구성하는 위원들이 탐험대를 이룬다. 오지에 씨는 대재앙에 대해 미리 우는 예레미야다. 정치경제학, 금융, 강의와 사법司法의 거봉들이 공적 호의에 힘입어 과학과 이해관계의 이름으로 발언하면서 그들의 관념을 국가의 거대 권력자들에게 채택되도록 하고, 입법자에게 강의를 한 후에 민주주의, 귀족정 그리고 왕정을 담은 우리의 낡은 짐 꾸러미에 은행주의bancocratie, 파산의 통치를 더했을 때 누가 감히 불평할 것인가?

신용은 조세와 마찬가지로 위선자이고, 독점과 마찬가지로 약탈자이고, 기계들과 마찬가지로 노무자다. 미묘하고 완만한 감염처럼 그것은 인민 대중에게 예전 재앙들의 더 집중화되고 더 국지화된 효과를 퍼뜨리고 확장하고 분산시킨다. 그러나 그것이 신앙심, 노동, 진보, 연합, 박애 등 어떤 가면을 쓰고 있든지 신용은 도둑이고 살인자이며, 산업적 봉건제의 근원이고 수단이고 목적이다. 히브리 사람들의 입법자가 그의 인민에게 다른 민족들에게는 신용을 주더라도 그들로부터 결코 신용을 받지 말라고 권고했을 때, 이런 조건에서 그들에게 지배와 제국을 약속했을 때 그는 이 모든 깊은 내용들을 헤아린 것이다.

그리하여 많은 민족이 너희에게 돈을 꾸겠지만,

너희가 남에게서 돈을 꾸는 일은 없을 것이다.

많은 민족이 너희의 다스림을 받겠지만,

너희가 남의 다스림을 받지는 않을 것이다.

―신명기 15장 6절

야훼에게는 흔히 불충성하고 맘몬에게는 언제나 신실한 유대인들이 이 계명은 결코 어긴 적이 없다. 그리고 오늘날 모세의 약속이 성취되었는지를 볼 수가 있다.

신용은 직접적으로 생산자만을 타격해 작동하는 것이 아니라 간접적 방식으로 소비자에게 정률세로 부과되는 식으로 작동한다. 이야말로 신용의 작용이 보통 사람에게는 지각 불가능한 것으로 남고 여론을 일으키지 않는 이유다. 생산이라는 분화된 이익은 여기서 모든 조세 문제에서와 마찬가지로 소비라는 집단적 이익을 이긴다. 힘은 집중됨으로써 증강한다고 말하는 것처럼―합쳐진 힘이 더 크다(vis unita major)―나누어진 짐은 덜해 보인다고 말할 수 있다. 그리고 신용의 마력과 지속은 이 원리 위에서 확립되었다. 모든 사람은 돈을 따면 노름에서 벗어나겠노라고 다짐하고 자신에게 부담을 지우는 이익을 공중에게 전가해 신용을 요구하는 데 의견 합치를 이룬다. 아무도 파괴적 효과를 쫓아버리는 데 신경 쓰지 않는다. 이런 복권에서 운세는 은행가가 언제나 따도록 조합된다는 것, 결국 항상적으로 은행에 결합하고 마는 몇몇 행복한 이들을 제외하고는 생산물의 부가세가 보편적이고 상호적이라서 각 생산자는 그가 자기 자신의 신용의 무게를, 나쁜 양심의 짐을 혼자서 지는 경우나 마찬가지로 짊어진다는 것을 사람들은 성찰하지 않는다.

그러나 신용의 보편성 때문에, 그 조합들의 다양함 때문에 각자는 출자자이면서 출자를 받은 자가 되고, 신용을 주기도 하고 받기도 하며 앞의 경우에는 수당을 받고 뒤의 경우는 이를 지불하는 식이 되어 이런 진정한 유통에 의해 조건들이 평등화되고, 그것이 사람들 간에 가능한 만큼 상호적으로 보장되는 것이 가능하지 않을까 하고 말한다.

나는 이 반론이 아무리 유치해도 신용의 악순환, 이 평등주의적 유통이라고 하는 것의 수학적 불가능성을 밝히 드러내기 위해 이를 보고한다. 게다가 한 사람 이상의 금융가, 한 사람 이상의 신용 조직자가 이 유토피아에 속아 넘어갔다. 그러므로 독자들이 공통으로 이 유토피아를 들고 나오는 것은 내가 그것에 대답하는 것이 그러하듯이 용서받을 만하다.

우리가 신용이라 명명하는, 그리고 사람들이 우리에게 그것에서 아주 멋들어진 기적을 기다리게 하는 사회적 이율배반들의 현 시기에 아직 아무것도 조직되지 않았음을 상기하자. 노동은 파편화된 분업에 넘겨져 있다. 작업장은 장인 제도와 임금 제도에 넘겨져 있고, 시장은 경쟁과 독점에 넘겨져 있다. 사회는 세무적, 의회적 위선에 넘겨져 있다. 이런 상황에서 사람들이 가정하는 그런 균형이 확립될 수 있으려면 큰 자본들이 미약한 임금 노동자들에게 속하는 것이, 2급 자본은 상급 일꾼들에게 속하는 것이, 그리고 가장 미미한 자본, 따라서 가장 적은 정기 수령금은 노동자들 중 가장 높은 보수를 누리는 자들에게 속하는 것이 필요할 것이다. 그러나 이 모두는 모순적이고, 불가능하고, 터무니없다. 가장 많이 버는 자들은 필연적으로 가장 큰 저축을 할 자들, 사람들이 창설하겠다고 주장하는 보편적 합자회사에서 가장 많은 주식을 가질 자들이다. 그럴 때 각각의 임금 노동자가 바퀴 하나에 달라붙어 하루 1프랑 25상팀을 버는 불행한 자에서부터 공직자 명부에서 1200만 프랑을 받는 국가 원수까지 국가의 채권자 명부에, 정기 수령금의 큰 장부에 실리는 것이 무슨 상관인가? 임금의 부조리에 당신은 소득의 부조리를 더하는 것뿐일 것이다. 이는 블랑키 씨의 참여 기획에서와 같을 것인데, 거기서 참여하는 조합원들은 봉급 외에 이득의 명목으로 하루 18상팀의 몫을 받을 수 있다. 그러므로 우리가 먼저 행한 일반적 고찰로 되돌아갈 필요가 있다. 신용이 진정한 균형 수단이 될 수 있으려면 균형이 작업장에서, 시장에서, 국가에서 사전에 확립될 필요가 있다. 한마디로 노동이 조직될 필요가 있다. 그런데 이 조직은 존재하지 않으며, 더구나 사람들은 이를 배척한다. 그러므로 신용에서 기대할 것이 없다.

이 모순을 환히 밝히기 위해 신용의 몇 가지 개별적인 경우들을, 그 중에서도 특히 이익보다는 자선에서 태어난 경우들을 조사해보자. 왜냐하면 우리가 이를 언급할 기회를 가지겠지만 자선은 신용의 가족에 속하고, 이는 신용의 형태들 중 하나이며, 신비적 자생성에서 나와 이성의 이끌림을 받으면서부터 그것은 신용의 모든 법칙에 종속하기 때문이다.

나는 탁아소에서부터 시작한다.

정말로 내가 신성한 이 재단들을 욕할 생각은 조금도 없다. 파리 시가 그 가장 저명한 시민들 중 한 사람인 미라보 씨의 개명하고 적극적인 열정에 감사해야할, 아기 예수의 가호 아래 위치한 재단들이다. 빈곤의 근원은 전적으로 사회적이다. 이는 모든 사람의 범죄다. 그러나 자선 사업들은 인적人的이고 무료다. 그리고 빈곤 계급의 신체적, 정신적 해방을 마련하는 일에 일생을 바치는 수많은 선한 사람들의 미덕을 무시한다면 나는 용서받을 수 없을 것이다.

그러므로 아무것도 봐주지 말아야하는 이 책에서 내가 어쩔 수 없이 하게 되는 분석에 대해 나를 용서해주고, 내 이성의 불굴성에 의거해 내 가슴의 지독함을 판단하지 말기 바란다. 내가 감히 말하노니, 내 감정은 언제나 친구들과 적들이 자신들이 그러하기를 바랄 수 있었던 그런 감정이었다. 내 글로 말한다면, 아주 어두워 보여도 결국 사람으로 존재하는 것, 그리고 사람에게서 나오는 모든 것에 대한 내 동정심의 표현일 뿐이다.

다음은 탁아소 선전을 위해 공중에 보급된 네 쪽짜리 작은 인쇄물에서 읽을 수 있는 내용이다.

엄마가 가정 바깥에서 노동을 하고 또 행실이 훌륭한 두 살 미만 가난한 아기들의 탁아소

“탁아소는 아침 다섯 시 반에 열고 저녁 여덟 시 반에 닫습니다. 엄마는 그날 필요한 속옷과 함께 아기를 데려옵니다. 식사 시간에는 아기에게 젖을 먹이러 오고 저녁에는 아기를 찾아갑니다. 젖 뗀 아기는 어린이집의 어린이처럼 작은 바구니를 가집니다. 가난한 여성들 중에 선발된 보모가 아기들을 돌봅니다. 의사가 매일 탁아소를 방문합니다. 엄마는 아기가 가는 날마다 20상팀을 보모에게 보냅니다. 탁아소에 맡길 아기가 둘인 엄마는 두 아기에 대해 30상팀만 냅니다.”

감독과 소장인 부인들, 그리고 의사와 운영위원들의 이름이 뒤에 이어진다.

나는 태생, 교육, 그리고 재산으로 가장 두드러진, 더 나은 사회가 그들에게 그 수녀들의 협력자와 동료가 되게 해주기를 기다리며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그 자매들을 돕는 그런 구제수녀가 되는 여성들의 자선이, 내 마음을 꿰뚫고 감동시킴을 실토한다. 그리고 이 고귀한 부인들이 그 많은 사랑으로써 완수하는 의무, 아무도 그들에게 부과하지 않은 의무들에 대해 말하자면 풍자나 멸시의 냄새가 나는 단 한 마디 말이라도 내 펜에서 튀어 나온다면 나는 내가 싫을 것이다. 오, 거룩하고 용감한 여성들이여! 당신들의 가슴은 시대를 앞섰소! 그리고 당신들의 노력에 대한 쓸데없는 공론에 책임이 있는 것은 한심한 실천가, 거짓 철학자, 거짓 학자들인 우리들이오. 당신들은 언젠가 당신들의 보상을 받을 수 있을 것이오! 하지만 당신들은 지옥에서 불러일으켜진 변증법이 내게 곧 당신들에 관해 말하도록 강제할 것을 영원히 무시할 수 있을 것이오!

어째서 엄마들이 집 밖에 나가 생계를 벌어야만 하는 두 살 미만의 가난한 아기들을 위해 행해지는 자선 사업에서, ‘행실이 훌륭하다’는 이런 우울한 제한이 있단 말인가! 의문의 여지없이 노동을 권장하고, 절약을 돕고 좋은 행실을 보상하고 그러면서 무질서를 촉진하는 일이 없기를 바란 것이다. 하지만 그러면 누가 배제를 당할 것인가? 엄마일까 아니면 아기일까? 게다가 이 엄마의 비행은 그 가난한 아기가 방치와 가난보다도 치료받을 필요가 더 큰 재앙 아닌가?

하지만, 아, 슬프도다! 자선은 그것이 우발적으로 움직이고 해악보다 선을 결국 더 적게 만들고 싶지 않다면, 신용처럼 그 수혜자를 선택해야 한다. 자선은 때로는 어린이집과 탁아소처럼 무를 수 있는 조건으로, 때로는 병원처럼 회수가 안 되는 조건으로 하는 일종의 배치와 같지 않은가? 하지만 모든 경우에 그것이 향하는 사람들이 이를 값어치 있게 할 줄을 더 잘 알고, 스스로든 그 자손들에 의해서든 언젠가 자신들의 의무를 인정할 용의를 가지게 되는 만큼 더욱 효과적인 것이 되는 배치다. 자선, 가슴은 이성이 우리에게 말하는 만큼 구제불능인 자들에 대한 온기가 없다. 신용이 파멸한 상인을 위한 자본을 가지지 않는 것과도 같다. 또한 사람들이 자선에 관해 쓴 모든 책은, 자선은 무엇보다 앞서 똑똑하게 보여야 한다는, 말하자면, 순전한 손실로 행해지지 않으려면, 그리고 또한 비생산적 소비와 파괴로 타락하지 않으려면 담보 없이 제공되어서는 안 된다는 이 격률로 가득하다.

이처럼 자선은 신용의 이미지이면서 신용처럼 거짓말쟁이이고 노랑이다! 도덕가들이 외견상으로 아주 대립되지만 완벽하게 동일한 이 둘, 자선과 대금업의 유사성으로부터 옛날의 신학을 결코 피해 가지 못한 이 숙명적인 결론을 도출할 줄 몰랐다는 것은 이상하다. 이는 자선이 진정으로 초인적 미덕, 반사회적, 파괴적, 무정부적 원리, 인간에게 적이 되는 미덕이라는 것이다. 우리가 말하건대, 아직도 세상에 사랑과 희생의 전능에 의한 갱생을 설파하는 미슐레(Michelet) 같은 저명한 작가들이 있다는 것은 이상하다.

뭐라고! 당신은 이성을 활용하지 않고는, 즉 당신의 자선과 희생을 단순한 교환적 정의, 신용의 조직으로 변환하지 않고는 헌신의 사업도 실천할 줄 모르고 자선을 행할 줄도 모른다. 그리고 우리가 당신에게 바로 이 신용을 조직하고, 노동을 조직하고, 정의를 창조하고, 자선을 똑똑하게만 만들 것이 아니라 분별 있게 만들라고 말할 때, 당신은 때로는 중상주의를, 때로는 유토피아를 외친다! 당신은 우리가 냉담하다고 비난하며 이기주의에 희생 제물을 드린다고 꾸짖는다. 우리가 당신과 함께 사랑과 신앙에 불을 지피는 대신 모든 것을 계산에 종속시키고자 하기 때문이다! 당신은 위선적인 자선을 산술보다 선호한다. 그런데 위선적인 자선도 곧 바보짓이 되지 않으려면 산술 없이는 될 수 없다! 하지만 자선, 희생, 포기가 당신이 불평등을 사랑하고 당신의 겸손한 행색 밑에 까다로운 고집을 숨기고 있고 당신이 재산소유자라는 것 때문에만 당신에 의해 옹호된다는 것을 누가 모르겠는가? 글쎄! 당신의 자선, 이제 이를 정당화해보라. 그것을 옹호해보라.

탁아소에서는 벌써 엄마의 좋은 행실을 담보로 요구하는 것으로는 결코 충분하지 않다. 이 가난하고 아기들을 책임진 엄마에게 납부금을 부과하는 것이 필요하다. “엄마는 보모에게 아기가 가는 날마다 20상팀을 낸다. 그리고 엄마가 두 아이를 맡기면 30상팀을 낸다.” 이제 계산해보자. 맡기는 데 30상팀, 속옷과 세탁에 10상팀, 엄마가 탁아소에까지 가야 하는 모든 이동을 위한 신발에 10상팀, 모두 해서 50상팀을 90상팀이나 1프랑의 하루 일당에 대해 탁아소가 징수한다. 여기에 이 엄마가 살림을 태만히 하고, 남편을 위해서도 자신을 위해서도 아무것도 안 한다는 것을 더해 보라. 그러면 당신은 가난한 여성들에게 탁아소의 이득은 0이라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그렇지 않을 수 있는가? 없다. 보육, 세탁, 아기에게 주어지는 그 밖의 돌봄이 무료라면, 엄마는 젖을 주기만 하면 된다면, 탁아소는 곧 상당한 조세, 진정한 구빈세의 구실이자 대상이 될 것이며, 이렇게 해서 합법적, 비합법적 모성과 인구의 증가에 장려책이 주어질 것이니 말이다. 현대 사회들의 이 스핑크스에 말이다. 그러므로 자선은 여기서 두 가지를 해야 한다. 그리고 그 두 가지는 양립할 수 없는 것들이다. 가난한 이들의 아기를 돌보는 일, 그리고 가난한 이들에게 아기를 만들게 장려하지 않는 일. 이는 바로 맬서스의 문제다. 생존 수단이 인구를 증가시키는 일 없이 생존 수단을 끊임없이 증가시키는 것이다. 자선의 사도들이여! 당신들은 경제학자들처럼 터무니없다.

그리고 이 대조에 주목하라. 행실이 좋고 일을 해서 그 아기가 탁아소에 받아들여진 엄마는 사람들에게 적선을 받는 모양새인데, 그녀가 보모들에게 20수(1프랑)의 일당을 줄 때는 그 자신이 이로써 그들에게 더 큰 선을 행하는 것이다. 나는 이따금 신문을 읽다가 가난한 이들을 위해 뽑는 복권에 대한 보도를 본다. 그 복권 기사들은 일반적으로 자선을 행하는 부인들의 손에서 나온 미담들로 구성된다. 말하자면, 상류사회의 기독교인이 자비로운 부인이 부자의 임무는 빈자를 향해 재산의 손실을 보전해 주는 것이라고 이해하고, 빈자들의 근로와 약탈의 결실인 1만 파운드의 연금을 누리면서 빈자들에게 마땅히 돌려주어야할 금액의 약 5퍼센트에서 10퍼센트를 돌려주고[18] 의무 이상의 선행으로 희생의 공로를 즐긴다는 것이다. 당신의 자선은 위선과 대금업일 뿐임이 명확한가? 아! 각자 자기 일이나 신경 쓰라. 가난한 이들을 위한 당신의 성금 모금자들은 당신이 인민을 유인해서 그들의 상속 재산을 집어삼키는 데 동원하는 유녀들이다. 귀부인들은 스스로를 위해 일하고 가난한 이들도 자신들을 위해 일하기를 바라며, 정의는 헌신보다 세상의 행복을 위해 더 값어치 있지 않은지 일단 알기를 바란다!

누가 우리를 자선에서 구할 것인가? 프롤레타리아의 순진함을 끊임없이 남용하는 이 신비화에서, 노동과 자유에 맞선 영구적인 이 음모에서 말이다.

나는 어린이집, 공중 휴게소, 무료 (수습 과정처럼 무료다!) 학교들을 지나서 공영 전당포mont-de-piété에 도달한다. 여기서 나는 이 쓸모 있는 재단을 생각한 사람들에 대한 깊은 존경에서 새로이 항의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사람들이 나를 체계적인 인간 혐오자라고 비난하지 않도록, 그리고 내가 고발하는 것이 관념들, 이론들 그리고 이 관념들과 이론들에서 태어난 제도들이라는 것이 잘 입증되도록 공영 전당포에 관해 가장 유리한 가설, 즉 인민의 돈, 저축 금고에 예치된 돈은 오직 인민에게 신용 대출하도록 공영 전당포에 받아들여진다는 가설에서 출발할 것이다.

그러므로 나는 공영 전당포에 투자한 자본의 이자가 100프랑에 3프랑 50상팀으로 저축 금고의 예금자에게 지불되는 이자와 같다고 가정한다.

그래서 3프랑 50상팀

사무실, 사무원, 점포 등 비용 100프랑에 0.5프랑 50상팀

바깥으로 내보내진 물건 가액 33%―예치된 총량 중 10분의 1만이 방치되고 그 기관에 의해서든 예치자 자신에 의해서든 인가받은 상인에게 실제 가격보다 16% 낮게 판매된다고 가정하면, 10개의 예치물에 배분되는 이 손실은 1프랑 60상팀

총계 5프랑 60샅임

도덕성 :

신용 이론을 가지고서 100프랑에 3프랑 50상팀으로 대출하는 노동자는 5프랑 60상팀에 차입한다. 차액은 2프랑 10상팀이며, 그만큼을 그는 이자에서 손해 본다. 12%에 대출하는 공영 전당포도 있다. 그 수익금이 성스러운 사업에, 병원 등의 유지에 쓰인다는 구실에서다. 이는 정확히 한 사람에게서 피를 20온스 뽑고, 설탕물 한 잔을 보상으로 제공하는 것과 마찬가지다. 인민이 전당포에 누더기 옷을 가져오지 않게 하려면 공영 전당포의 이자가 높아지는 것이 좋다고 말하는 데까지 나갔다. 또 하나의 위선적인 엉터리다. 그러면 왜 공영 전당포를 아주 없애지 않는가? 왜 이 거룩한 기관들의 문에 “여기서는 신의 사랑과 인류의 선을 위해 살인합니다”라고 써 붙이지 않는가?

그러나 오늘날 가장 많은 투표자를 모으고, 내가 가장하지 않고 말하건대 모든 관계에서 투표자들의 지지를 받을 자격이 있는 기관은 저축 금고다. 정부가 쓸모 있는 일을 했다고 실토하는 것을 너무 힘들어하는 우울한 정신의 사람들은 이 주제에 대해 가장 어리석은 반론을 내놓았다. 그들은 저축이 탐욕을 가져온다고, 아내가 남편 모르게 절약을 하는 데서 발견할 수 있는 손쉬움 탓에 가정의 평화를 교란한다고 말한다. 그들은 먹고살 것도 벌지 못하는 자에게 어떻게 저축하는 것이 가능하냐고 물었다. 그리고 어떤 이성적 모습을 결여하지 않으려고 그 원리 자체를 공격하지 않으며 그 저자들의 나쁜 양심을 보여주는 데만 소용이 된 천 가지 허튼소리가 있었다.

“1843년 12월 31일에 공탁소가 왕국의 주요 제조업 도시들의 저축 금고에 지불해야 할 잔고 액수는 다음과 같았다.”

생캉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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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55,000(프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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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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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0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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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루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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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81,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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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비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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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8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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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75,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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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태티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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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6,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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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브드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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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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랭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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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13,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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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412,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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뮐루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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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81,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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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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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589,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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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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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158,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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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미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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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784,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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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브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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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86,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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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모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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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67,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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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개 도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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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6,217,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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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자 주) 합계는 36,717,000프랑이 되어야 맞는다.

내가 이 상세 내용을 빌려 온 출처인 픽스 씨는 이렇게 덧붙인다. “이야말로 그 모든 갈래를 가진 우리의 주요 산업들을 대표하는 영토 전체에서 선택된 지점들이다. 이 여러 저축 금고들의 보조를 참조할 때 모든 범주의 일꾼들이 예금에 참여한 것을 보게 된다. 이는 어떠한 노동계급도 특별히 빈곤을 겪고 절약을 할 능력을 박탈당하지 않았음을 증명하는 것이다. 저축 금고들의 보고가 포함하는 상세 내용은 이 단언을 충분히 확인해준다. 예금자들 중에는 극히 다양한 직종의 일꾼들만 있는 것이 아니라 민간인 신분의 모든 구분nuances들이 제시된다. 이는 남자들, 모든 연령의 여자들, 미성년들, 독신자들, 약혼한 개인들 등이다.”

이 결과들을 대면한 픽스 씨는 이렇게 질문한다.

“이는 진보를 실현하기 위한 우리의 제도들과 우리 경제 체제의 효율성을 증언해 주지 않는가?”

그리고 그는 선의에서 이렇게 대답한다.

“이 사실들은 그것이 아무리 위안이 되더라도 노동계급의 상황이 만족스럽다는, 노동자들의 조건이 행복하다는, 어떠한 개선도 실현할 것이 없다는 결론으로 우리를 이끄는 것과는 거리가 멀다. 그런 언명들은 물러갈지어다! 이 세상에는 한없는 자선, 모든 우수한 정신을 가진 자들의 명상, 그리고 이 두 가지 노력에서 나오게 될 실천적 수단들이 치유할 수 있는 것보다 더 많은 빈곤이 있다. 고통에 시달리는 것은 너무나도 실질적일 따름이다. 결코 이를 사라지게 하지 못할 것이다. …”

하지만 끝으로 픽스 씨가 방금 주장한 것처럼 정치경제학이 부의 진보를 실현하는 데 효과적이라면, 그것이 그가 지금 단언하는 것처럼 빈곤을 사라지게 하는 데 무능하다는 것은 어디서 나오는 것인가? 그리고 그는 이 명백한 모순을 어떻게 설명하는가?

픽스 씨는 좀 더 나아가 이렇게 덧붙인다. 나는 곧 그의 결론으로 간다. 이는 지상의 행복이 우리의 미래 운명과 잘 어울리지 않는다는 것이다. 말하자면 정치경제학은 경제학자들에게 수수께끼이며, 픽스 씨는 이를 짐작하지 못한 것이다.

독자들이여, 나는 당신이 그보다는 더 앞서 있다고 감히 기대한다.

픽스 씨가 아주 현명하게 고찰했듯이 모든 범주의 일꾼들이 저축 금고의 예금에 참여하며, 예금자들 중에는 모든 성性의, 모든 연령의 그리고 모든 조건의 개인들이 있다. 이는 모든 조건이 부의 수단으로서 동등하다는 것, 모든 연령, 사회생활의 모든 순간에 사람은 생산자일 수 있고, 자신의 행복을 만드는 장인이 될 수 있다는 것을 증명해준다. 이처럼 새로이 입증되는 것은, 저축 금고에서 여러 기능들의 등치성과 빈곤의 비정상성이다. 그런 것이 우리의 첫째 논점이다.

그러나 산업상의 각 범주마다 노동 분업, 기계, 위계적 조직, 독점의 이득, 조세의 편파적 배분, 신용의 거짓말은 무수한 희생자들을 내며, 다중多衆을 위해 인간 노동의 노력, 입법자의 선견지명, 그리고 정의와 공평의 모든 조합들을 쓸모없게 만든다. 그런데 이 세상에서의 행복 실현에 의해 생산에서 균형이 결여되면 그것은 또한 분배에서도 결여된다는 필연성이 있다. 그리고 현재의 운명과 미래의 운명 간에 존재할 수 있는 대립성에 대해 우리가 걱정하지 않고 적어도 확실한 것은, 현재의 운명은 그 자신과 합치하지 않는다는 것, 그리고 이 불합치는 정치경제학에서 나온다는 것이다.

저축 금고의 보고서들이 예금자들의 복리에 대한 증거를 제공한다는 것을 우리는 기꺼이 인정한다. 그러나 바로 이 보고서들이 동시에 비예금자들의 빈곤에 대한 증거를 제공한다면 정치경제학을 편들어주는 것으로 증명된 것이 무엇이 있을까? 파리에 있는 40만 명의 인부들과 종들 중에 12만4000명만 저축 금고에 등록되었다. 나머지는 등록되지 않았다. 그러면 이들은 임금을 어떻게 사용하는가? 두 가지 예가 우리에게 이를 가르쳐줄 것이다.

파리에서 일정 수의 인쇄공은 하루에 5프랑에서 10프랑을 벌고 1년 내내 노동한다. 상당수는 3프랑에 미치지 못하고 2개월간 휴식을 누린다. 리옹에서는 어떤 비단 직공들은 집에서 여러 작업을 가지고 있어서 인적 노동과 그들이 고용하는 인부들의 노동에 의해 5에서 6프랑의 소득을 올릴 수 있다. 다중은 평균적으로 남자 2프랑, 여자 1프랑을 넘지 못한다. 나는 이 두 직종에서 멈춘다. 누구든 내게 파리에서 하루에 3프랑을 못 버는 성인의 생존이 어떨 수 있는지, 리옹에서 1프랑에서 2프랑의 가변적인 임금을 받는 인부의 생존이 어떨 수 있는지를 말해주기 바란다. 이 사람들이 전혀 절약하지 않는다는 것에 우리는 놀라며, 이들이 극빈자 명부에 등장하지 않는 만큼 더욱 놀라게 된다. 그러나 참으로 말해서 이 사람들은 결연하게 난관을 극복하고 나서 공식적인 자선 한 줌을 받는 자들이나 마찬가지로 더 이상 불평할 것이 없는가?

당신은 이렇게 말할 것이다. ‘이는 활동력, 절약, 지성을 두 배로 해야 할 경우다. 이는 급여를 가장 적게 받는 인부들을 위해 바로 설립된 저축 금고들과 다른 예방기관들을 활용해야 할 경우다.’ 저축 금고는 빈자의 예금 은행이며 모든 은행들이 그렇게 시작한 것처럼 빈자들에게 복리의 경로를 가기 시작하게 만든다는 관념은 행복한 관념이었다.

이처럼 저축 금고는 빈곤에 대한 공식적 선언, 일종의 조사일 뿐이다. 그리고 그것이 빈곤에 대한 치료 수단으로 소용되기를 사람들은 바란다! 저축 금고는 그 금고에 아무것도 낼 것 없는 자들에게는 냉정하며 저축 금고가 만들어진 것은 바로 이들을 위해서다! 나는 도덕가들이 스스로 그렇게 어리석어지도록 40년간 노력한 후에 프롤레타리아에게 지성, 활동 그리고 모든 도덕적 미덕들을 요구할 용기를 가지는 것에 더는 놀라지 않는다! 지나가기로 하자.

저축 금고의 파괴적 효과는 두 종류다. 사회에 관련된 것, 그리고 개인들에 관련된 것이다.

사회와 관련해서 저축 금고는 자본의 생산성이라는 허구에 기초해 이 허구의 재앙적인 효과들을 드러내는 가장 명확한 증거다. 모든 저축 금고의 예금이 10억 프랑이 되는 것으로 드러날 때, 이는 3.5%의 이율에서는 예산에 3500만 프랑의 조세를 더하고 납세자들에게 이를 분산하는 셈이 될 것이다. 그런데 누가 이 조세를 납부할 것인가? 민족이다. 즉 대부분은 가장 가난한 계급, 저축 금고에 아무것도 가지지 못하는 계급, 그보다 작은 부분은 이자를 지불받아야할 절약하는 계급, 그리고 최소의 부분은 부유한 계급이다. 이처럼 저축은행은 약탈을 출발점으로 한다. 이 약탈이 없다면 저축은행이 존재하지 않을 것이니 말이다. 그리고 약탈당한 자들에게 이렇게 말한다. 저축 금고에 넣으세요! 당신은 왜 저축 금고에 넣지 않으세요?

국가가 예금 은행의 전통에 충실하게, 그의 보호에 맡겨진 기금에 손을 대지 않고 이를 보전한다고 가정하자. 20년이 지나면, 복리 때문에 국가가 받았을 10억 프랑이 아니라 20억 프랑을 상환해야할 것이다. 그러므로 결국 국가에는 아무 이득도 없이 상환할 금액의 절반의 불가피한 파산이 있을 것이다. 이 가설에서 안전 보장이 파괴되어 그 제도는 불가능하다.

그러나 국가가 그렇게 불리한 조건에 놓일 수 없으리라는 것은 명백하다. 그러므로 국가는 아무것도 떠맡지 않으려면 인민이 절약한 돈을 공공 서비스에 배정해야할 것이다. 이는 저축 금고를 언제나 열린 차입으로 전환하고 계속 입금과 출금의 운동을 하도록 하지만 완전히 상환 불가능하게 하는 것이다. 선량한 사람들은 저축 금고의 설립에서부터 여러 차례에 걸쳐, 정부가 공황이 일어나는 날 자신들의 기금을 돌려달라고 요구하러 올 예금자들의 쇄도에 대응하는 것이 불가능한 입장에 처하게 될 것에 대한 두려움을 증언했다. 한 유명한 팸플릿 작성자는 심지어 이를 가지고서 정부에 반대하는 비판문을 썼다. 마치 정부의 목표가 바로 상환할 수 없는 상태에 처하는 것이어서는 안 된다는 듯이! 마치 불상환이 그 기관의 필요이면서 사물의 질서의 가장 소중한 보장책 중 하나이기도 한 것이 아니라는 듯이! 이는 「주르날 데 데바」(1845년 12월 30일)가 내가 생각하기에 슈발리에 씨가 쓴 기사에서 아주 잘 이해하고 공식적으로 인정한 것이다. 예금 총액이 내가 10억 프랑이 되어야 한다고 가정한 최대치에 일단 도달했다면, 정부는 그 사실에 의거해서, 그리고 양원兩院의 협조 없이 10억을 차입하고 지출했을 것이다. 민족 대표자들은 결코 그 이익을 위한 투표를 거절하지 않을 것이다. 언론이 투표도 없고 감독도 없을 경우에는 유일하게 남아있을 6000만이나 7000만 프랑의 이자를 제외하고라도 권력의 실험실에서 증발할 위험을 무릅쓰는 이 10억 프랑을 감지하지 못하면서, 정부가 행하지 못하도록 기각된, 400만 명에게 절약을 해주지도 않을 정기 수령금 전환을 위해 큰소리를 지르는 것은 한심한 일이 아닌가?

예금자들 쪽에서 저축 금고는 그에 못지않게 정력적이고 그에 못지않게 확실한 빈곤의 촉매제다. 왜냐하면, 저축 금고가 어디서도 빈곤을 완화하기는커녕 이를 배분하고, 이 배분을 통해 빈곤을 증가시키기 때문이다. 이는 염증을 일으키는 국부적 질환인데, 보편적이고 만성적인 무기력 상태로 전환되는 것이다. 사람들은 가난한 이에게 이렇게 말한다. 더 고생해, 허리띠를 졸라매, 굶어, 더 가난하고, 더 빈곤하고 더 헐벗어. 결혼하지 마, 사랑하지 마. 너의 포기에 힘입어 주인이 평안히 잠자고, 마지막 날 자선 시설이 너를 덮칠 일이 없도록 말이야.

그러나 내가 이 긴 내핍의 결실을 거둘 것을 누가 내게 보장하는가? 생명이 연장되어 감에 따라 생존 확률은 낮아진다. 그리고 내게 현재의 재화, 물적 재화의 희생을 요구하는 것은 점점 낮아지는 행운을 쫓기 위한 것이다! 생명은 다시 시작되지 않으며, 내 저축은 다른 이력의 준비가 될 수 없을 것이다. 현자, 실천적 철학자는 고독한 탐욕의 40년 동안에 쌓인 1000개의 금화보다 매주의 향락을 선호한다. 이런 체제를 가지고서는 자기 상속인을 위해서만 축적하는 것임을 거의 확신하는 만큼 그게 더 낫다. 당신은 이렇게 말한다. 향락은 덧없다고. 행복과 건강을 이루는 이 생의 충만은 드문 간격으로만, 그리고 아주 짧은 순간 동안만 느껴진다. 한마디로 행복은 이 세상의 것이 아니다. 심오한 도덕가들은 반대로 생은 바로 영혼과 감각들이 욕망과 탐욕의 극에 달하는 이 급한 순간들에 있으며, 이 존재의 도취를 단 한 번이라도, 1분간이라도 안 자가 산 것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면 무엇인가! 당신이 나에게 삶을 사는 것을 금하는 것은 나를 근근이 연명하게 하려는 것인가? 그리고 저세상의 삶이 없다면?

요컨대, 저축 금고의 박애적이고 공개적인 목표는 일꾼을 위협하는 사고들, 흉작, 질병, 실업, 임금 삭감 등에 대비해 재원을 융통해주는 것이다. 이런 관련 속에서 저축 금고는 칭송할 만한 선견지명과 선한 감정을 증명해준다. 그러나 그것은 일꾼의 빈곤에 대한 진정한 원인들인 자본주의적 압제와 일반적 비연대성의 공개적 고백이고 거의 탐욕스러운 전횡의 승인이다.

저축 금고의 경제적이고 비밀스러운 목표는 유보금을 수단으로 해서 매일같이 일꾼에게 닥치고 그를 절망에 빠뜨리는 불행을 그의 전 생애에 걸쳐 분산시켜 생존 수단을 위한 소요, 결탁과 파업을 예방하는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 저축 금고는 자연과 예기치 못한 사태를 이겨내는 법을 터득한다는 점에서 진보다. 그러나 또한 그것은 세상에 가해지는 죽음이고, 노동자의 미학적 쇠퇴다. 최근 시대에 사람들은 저축 및 퇴직 금고를 일꾼들에게 의무화해 이들에게 임금에 대한 공제가 이 목적을 위해 행해지도록 하라는 말을 많이 했다. 그러한 법을 만들어보라. 그러면 급작스러운 빈곤과 극단적인 빈곤을 멀리하면서도 노동자 카스트의 열위劣位를 사회적 필연으로, 국가의 헌법으로 만들게 될 것이다.

끝으로, 저축 금고의 정치적이고 왕조적인 목적은 그것에 사람들이 요구하는 신용으로써 인구를 사물의 질서에 묶어두는 것이다. 이는 안정, 시민적 평등 그리고 산업에 대한 권력의 종속을 향한 새로운 발걸음이다. 하지만 동시에 이기주의, 그리고 신용의 기만을 촉발하는 것이다. 모두에게 노동과 자연의 산물에 대한 실질적이고 사회적인 소유를 마련해주는 대신 저축 금고는 그것에 보장을 제공하지 않고 축적 본능을 발달시키기만 하니 말이다.

그런데 저축 금고가 불평등의 원인들을 조금도 건드리지 않는다면, 빈곤에서 그 강도强度를 빼고 연장延長을 더해 빈곤의 특성을 변경시키기만 한다면, 저축 금고에 의해 세습 귀족층과 프롤레타리아트의 분리가 더 심화된다면, 저축 금고가 독점의 성화라서 독점의 효과들이 이를 태어나게 한 것이고, 이것이 독점을 폐지할 것이라면, 저축 금고는 노동계급의 안녕이 방주이며, 엄청난 혁신이 그로부터 나올 것이라고 여전히 말할 수 있는가?

저축 금고를 계승하는 것이 퇴직 금고, 공제회, 생명보험 회사, 톤틴tontine 연금 등이다. 그 원리가 불운을 각 개인의 인생 전체에든, 일정 수의 조합원에게든 분산시키는 것으로 환원되는, 그러나 해악을 그 근원에서 공략하는 일이 없고, 진정한 호혜성의 관념으로도, 심지어 단순한 복구의 관념으로도 상승하는 일이 없는 모든 조합들이다.

로드리그(O. Rodrigue) 씨의 퇴직 금고에 관한 기획에 따르면, 모든 일꾼은 21세부터 45세까지 그 금고에 불입을 하도록 가입될 것이다. 그리고 연금은 45세부터 65세까지 수령되기 시작할 것이다.

이 연금의 최소액은 60프랑일 것이다.

그런데 21세에 모집한 1000명의 개인 중 절반 이상은 55세가 되기 전에 죽는다. 그러므로 이는 마치 500명에게 불행한 노년을 면제해주기 위해 섭리의 질서에서는 아무 두려워할 것 없는 나머지 500명에게 보상금을 지불시키는 것과 같다. 가난한 500명 대신 1000명을 모집할 것이다. 그러한 것이 이 모든 복권의 법칙이다. 드 라마르틴 씨는 사람들이 가난한 이들의 돈으로 가난한 이들에게 적선한다고 불평하고, 퇴직 기금이 예산에서 취해질 것을 요구했을 때 이 모순을 느꼈던 것이다. 불행히도 그 치료법은 해악보다 더 나빴다. 구빈세였던 것이다! 인민의 안녕과 극빈자의 행복을 위해서라면 이를 바라서는 안 되었다. 이를 바라지도 않았다.

생명보험은 기업가가 그에게 미리 지불되는 연금을 통해 피보험자의 사망일에 얼마의 금액을 그 상속인에게 지급한다고 약속하는 다른 종류의 착취다. 이는 원금 상환 불능 연금의 역逆이다. 그러한 기업들은 특히 다수의 피보험자에 의해서 유지될 수 있으므로, 결과적으로 생명보험에서는 오래 사는 이들이 일찍 죽는 이들에 의해 착취당하는 결과가 된다. 언제나 악의 배분은 악에 맞선 보장책으로 제시되는 것이다. 언제나 연장적 관계가 집약적 관계를 대체하는 것이 비밀의 전부다. 나는 보험자들 측의 파산 위험, 지급을 받기 위해 벌여야 하는 소송, 어떠한 불운에 의해서든 보험료 납입을 계속하지 못할 형편에 처하게 될 경우에 다년간의 희생을 감내한 것을 상실할 가능성은 제쳐 놓는다.

그러니 필연적으로 소수인 특정 개인들이 구제와 선견지명의 기관들에서 끌어내는 완전히 인적인 이득이 무엇이든, 빈곤에 대처하는 이 기관들의 무능은 수학적으로 증명된다. 모든 기관들은 도박과 같은 방식으로 작동하면서 그 기관들이 몇몇 사람에게 마련해주는 이득을 대중에게 짊어지게 만든다. 그래서 이성이 가르쳐주는 것처럼, 그리고 악의 보편성이 요구하는 것처럼, 구제회사들은 실은 구제를 필요로 하는 모든 이들을 구제해야 하지만 아무도 구제하지 않을 것이고, 와해될 것이다. 평등과 함께 상부상조도 사라질 것이다. 또한 공제회들이 일정한 안락 수준에 있는 일꾼들을 대상으로 하는 만큼만 유지된다는 것, 그것들이 가장 많은 도움을 받을 자들, 가난한 이들을 거기 받아들이자고 말할 때부터 쓰러지거나 아예 불가능하게 된다는 것은 경험적 사실이 아닌가?

저축 금고, 상부상조, 생명보험은 이미 일정한 수준의 안락을 누리면서 거기에 보장을 더하기를 바라는 이들에게는 훌륭한 것들이지만 가난한 계급에게는 완전히 결과가 없는 것, 그렇지 않으면 아예 접근 불가능한 것으로 남아있다. 안전보장은 다른 모든 상품처럼 값이 나가는 상품이다. 그리고 이 상품 가격이 구매자의 빈곤에 따라서가 아니라 그것이 보장해주는 금액의 크기에 따라서 낮아지므로, 보험은 부자들에게는 새로운 특권으로, 그리고 가난한 이에게는 잔인한 풍자로 해소된다.

이 검토를 다른 작동 영역에서 취한 예, 신용이 일으키기를 지향하는, 그리고 국가의 개입에 의해서든 독점의 작용에 의해서든 실현하기가 절대로 불가능한 것을 더 잘 부각시킬 한 예로 끝내도록 하자.

나는 제6장에서 자본의 수익, 다른 말로 이자부 대출의 기원과 이론을 설명했다. 나는 이 이론이 어떻게 개인들 간의 거래 문제에 관한 한에서는, 그리고 관심이 단지 약소한 배당만큼 증가한 자본을 재형성하는 데 한정되는 한에서는 참이지만 이자의 지속성을 가지고 사회에 적용될 때는 완전히 거짓이 되는지를 말했다. 그 이유는 그렇게 되면 순생산이 총생산을 넘는 것으로 계산되기 때문이라고 나는 덧붙였다. 이는 사회에서는 모순되고 불가능한 것이다.

그런데 신용은 사회에 총생산에 대한 순생산의 초과, 그리고 이자의 지속성 원리를 사회에 적용해 조건들을 평등화하려는 시도 말고 다른 것이 아니다.

국가가 운하 건설에 착수한다고 가정하자. 그 건설은 착공 후 3000만 프랑이 들 것이다. 정부가 이 3000만 프랑을 예산에서 취한 후 운하에 소요된 금액의 이자를 물리는 방식으로 항해세의 세율을 정한다면 이는 마치 납세자들에게 운하에 대해 두 번 지불하게 하는 것과 같을 것이다. 운하의 이용은 유지비용을 제외하고는 무료여야 한다. 그러한 것이 국가 지출의 경제적 원칙이다.

실제로는 일이 그런 식으로 일어나지 않는다. 우선 국가가 필요한 자본을 보유하는 일이 드물다. 그리고 그 자본을 국가가 단번에 조세로 마련하는 것이, 특히 공익 목적을 위한 지출이 아주 높은 비율로 증가한 이래로 불가능하므로 이 자본을 차입으로 구하는 것이 더 편리하고 덜 번거롭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차입을 하면 납세자들은 3000만 프랑을 내놓는 대신 그 이자만 지불할 것이고, 이자는 크기가 작아서 예산상으로는 사라지는 것으로 보일 것이다. 그러나 차입은 독점법의 조항들로, 그리고 대금업의 법 원리에 따라 조성될 것이므로, 한마디로 자본은 대출자에게 이득과 함께 상환되어야할 것이므로 차입은 영구 정기 수령금으로 전환되어, 말하자면 운하는 영구적으로 지불을 받고 영구적으로 납부 대상이 되거나 아니면 이자가 단지 40, 50년 혹은 99년 동안만 개발 이용에 대한 배당금과 함께 지불되어, 말하자면 정해진 기간 동안 운하의 가격이 두 번, 세 번, 혹은 네 번 납부되거나 할 것이다. 통상적으로 대출자들은 미리 배당금을 챙기며, 검사장 때문에 이자를 미리 빼고 대출하는 대금업자처럼 80, 70 혹은 60만을 내놓으면서 국가가 100의 상환 의무를 지게 한다.

이에 따라서 차입을 하는 국가는 채무를 상환하려면 납세에 손을 대거나 새로운 차입을 하지 않을 수 없는데, 납세를 활용하기는 불가능하고, 새로운 차입은 앞선 차입과 같은 방식으로 행해지고 부분밖에 수령되지 않은 것을 전체로 삼아야 해서 채무를 증가시키기만 할 것이다. 오늘날 모든 사람이 이를 알며, 특히 대출자들은 그러하다. 그러므로 끊임없이 빚을 지는 국가는, 그렇다고 해서 어디서 언제나 차입할 데를 발견하게 되는가? 이는 바로 국가가 채무를 짐에 따라 더 나은 조건을 내세우지 않을 수 없다는 데서 온다. 그래서 국가에 관련해서 어떤 의미에서는 상환 가능성이 낮아짐에 따라 신용이 늘어난다는 것이 맞는 일이다. 다음은 이 현상에 대한 설명이다.

1815년에 프랑스의 채무가 10억 프랑이어서 국가가 그 차입을 90%에 이행한다고 가정한다. 1830년에는 채무가 20억 프랑으로 올라서, 국가는 또한 대출자를 찾을 수 있었지만 80% 조건의 대출자를 찾을 수 있었다고 가정한다. 이 체제에서 국채가 민족 산출 총량을 흡수할 경우에만 국가의 신용에 끝이 있다. 그러나 그럴 때 국가는 파산에 의해 허구가 된 차입에서 해방되어 모든 사람은 지불을 받게 되고 국가의 신용은 옛날보다 더 좋아진다. 영국에서 공공 채무의 이자는 7억을 넘는데 이는 대략 수입의 6분의 1이 된다. 1789년에서 1815년의 사태와 같은 일련의 사태들이 영국의 채무를 두 배로 만들면, 영국의 가정마다 매년 국채를 위해 4개월 치의 노동을 지불해야할 것이다. 이는 의문의 여지없이 불가능한 일이지만, 영국에 닥칠 수 있는 가장 행복한 일이다.

한때는 사람들이 부채 상각으로 국가를 해방시킬 수단을 발견했다고 생각했다. 이 발명품에 관해서는 모든 것이 말해졌으며, 나는 여기서 기억을 위해서만 언급한다. 부채 상각은 숨바꼭질이다. 거기서 국가는 그 신용과 신용 상실에 한꺼번에 투기해, 국채들이 액면가 아래로 떨어질 때는 발행한 국채를 낮은 가격에 마련한 자본을 통해서 환매한다. 그래서 이 부채 상각 조작으로 한편으로 국가는 하락세일 때 투기하는 데에, 따라서 자기 자신의 신용을 상실하는 데에 관심을 둔다. 다른 한편 국가는 새로운 차입을 마련하고 신용을 높이기 위해 상승세일 때 투기할 필요, 따라서 상환 불가능한 상태에 처할 필요가 있다. 사람들이 옛날에 아주 크게 찬양했던 이 유치한 행동은 천 가지 다른 것들 중에 위정자의 심각한 업무들을 알리는 데 도움이 될 수 있다.

그런데 국가에 일어나는 일은 사회에도 마찬가지로 일어난다. 사회는 신용에 의해 두 카스트로 나누어진다. 끊임없이 신용을 주는 카스트와 신용을 받는 카스트다. 그러나 국가에서는 그 작동이 단일하고 중앙 집중화된 반면, 사회에서는 신용은 수백만 차입자들과 자본가들 사이에 무한히 나누어진다. 게다가 그 결과는 언제나 동일하다. 3세기 동안에 국가의 사기 파산이 아홉 건, 센Seine 상업재판소에 매달 등록된 파산 건수가 100건이다. 이 공신력 있는 수치를 보면 신용이 인민들의 경제에 하는 작용을 알 수 있다.

끊임없는 파산, 간헐적인 사기 파산, 그래서 이런 것이야말로 사회에 대해서, 그리고 국가에 대해서 신용의 결론이다. 다른 쟁점을 결코 찾지 말라. 금융 과학은 부채 상각 금고를 상상하면서 당신에게 그 모순을 드러내주었다. 이제부터는 인류의 삶이 경제적 범주들 말고 다른 법칙들에 복종한다는 것이 확인된다. 예를 들어 인류가 신용에 의해 살았고 발전했다는 것이 참이라면, 국가는 30년마다, 그리고 사회는 계속적으로 멸망해야할 것이니 말이다.

그러나 인류의 삶은 불멸이다. 그러나 부와 행복, 자유와 지성은 계속 진보하는 중이다. 그러나 실질적 신용이 우리에게 끊임없이 죽음을 선고한다면, 매번 도산에 이어 언제나 되돌아오는 인적 신용은 우리를 성공적인 노력의 선두에 둔다. 그리고 그 문명의 작품은 언제나, 우리의 공식들을 믿는다면 해체되기 직전이고 죽음의 법 아래에서 다시 이어지는데, 과학에도 불구하고, 이성에도 불구하고, 필연에도 불구하고 알 수 없는 기적에 의해 계속된다.

제11장 제8기소유권

. 소유권은 경제적 계열 바깥에서는 해명이 불가능하다. 상식의 조직에 관해, 혹은 확실성의 문제

소유권 문제는 인간 운명의 문제 다음으로 이성이 다루려고 나설 수 있는 가장 큰 문제이고, 이성이 해결에 도달할 마지막 문제다. 실제로 신학적 문제, 종교의 수수께끼는 해결된다. 앎의 가치와 정당성을 대상으로 하는 철학적 문제는 풀린다. 사회 문제가 남는다. 이는 앞의 두 문제와 하나를 이룰 뿐이며, 그 해결은 모든 사람의 견해로는 본질상 소유권과 관련이 있다.

나는 이 장에서 소유권 그 자체의 이론, 즉 그것의 기원, 정신, 지향, 다른 경제적 범주들과의 관계에서의 소유권 이론을 설명할 것이다. 소유권의 자기 표방을 확인하는 것, 즉 모순들의 온전한 해결 후에 마땅히 그래야 하는 것으로서의, 그리고 매일 그렇게 되어가는 것으로서의 소유권을 확정하는 일은 내가 말한 것처럼 사회 구성의 마지막 국면이고 새로운 작업의 대상으로, 그 작업은 그 설계를 얼핏 보여주고 기초들을 놓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소유권 자체의 이론을 잘 이해하려면, 사물을 위에서 파악하고, 철학과 정치경제학의 본질적 동일성을 새로운 측면에서 제시하는 것이 필요하다.

문명이 산업의 관점에서 산물들의 가치를 구성하고 노동을 조직하는 것을 목적으로 삼고, 사회는 이 구성과 이 조직 말고 다른 것이 아닌 것처럼, 철학의 대상은 앎의 가치를 확정하고 상식을 조직화하면서 판단에 기초를 놓는 것이다. 그리고 사람들이 논리라고 부르는 것은 이 확정과 이 조직 말고 다른 것이 아니다.

논리, 사회, 말하자면 언제나 이성인 이런 것들은 그러므로 우리 인간 족속의 운명으로서 그 발생적 기능들인 활동과 지성에서 고려된 것이다. 이처럼 인류는 그 계속적 발현에 의해 살아 있는 논리인 것이다. 경제적 사실마다 정신의 법칙의 표현이라고, 오성 안에는 앞서서 경험에 있지 않았던 것이 없는 것처럼, 사회적 실천에는 이성의 추상에서 유래하지 않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고 이 저서의 서두에서 우리에게 말하게 한 것이 이것이다.

사회는 그러므로 논리와 마찬가지로 이성과 경험의 합치를 가장 중요한 법칙으로 삼는다. 이성과 경험을 합치시키고, 이론과 실천의 통일로 나가는 것, 이것이야말로 경제학자도 철학자도 똑같이 마음먹는 것이다. 이야말로 행동하고 생각하는 모든 사람에게 부과되는 제1계명이자 최후의 계명이다. 의문의 여지없이 아주 단순한 외양을 가진 이 공식에서만 이를 바라본다면 아주 쉬운 조건이며, 사람이 그에 순응하기 위해서만큼 그로부터 빠져나가기 위해서 창세 때부터 행해 온 모든 것을 고려한다면 비범하고 지극한 노력이다.

그러나 우리가 이성과 경험의 이 합치라는 것으로, 혹은 우리가 명명한 것처럼 상식의 조직이라는, 그 자체가 논리일 뿐인 것으로 이해하는 것은 무엇인가?

나는 우선 판단이 직관적, 직접적 명증성을 가진 사물에 적용되고 그 지각이 연역도 연구도 요하지 않는 사물에 적용되는 한에서 그 판단을 상식이라고 부른다. 상식은 본능 이상이다. 본능은 그 확정에 대한 의식을 결코 가지지 않는 반면, 상식은 자신이 원하는 것을 알고 왜 원하는지를 안다. 상식은 신앙도, 재능도, 관습도 아니다. 이것들은 스스로를 판단하지도 않고 스스로를 인지하지도 않는다. 반면에 상식은 그 주변의 모든 것을 인지하고 판단하듯 스스로를 인지하고 판단한다.

상식은 모든 사람들에게서 동등하다. 여러 관념들에 최고 정도의 명증성과 가장 완벽한 확실성이 상식으로부터 찾아온다. 철학적 의심을 일으킨 것은 상식이 아니다. 상식은 이성과 경험이 한꺼번에 체계적으로 결합된 것이다. 다시 한 번 말하지만 이는 판단이면서도 변증법 없고 계산 없는 판단이다.

그러나 상식은 그것이 직접적 명증성을 가진 사물에만 가해진다는 바로 그 점 때문에 일반적 관념들, 명제들의 연관에, 따라서 방법과 과학에 거리낌을 준다. 그래서 사람이 사색에 몰두할수록 그는 상식과, 그래서 확실성과 멀어지는 것 같다. 그러니 상식에 의해 동등한 사람들이 어떻게 자연스럽게 그들이 꺼리는 바 되는 과학에 의해 여전히 동등한 사람들이 될 것인가?

상식은 증대도 축소도 될 수 없다. 그 자체로 고려된 판단은 언제나 똑같고 언제나 자신과 같고 동일하기를 그만둘 수 없다. 다시금 말하지만 상식 바깥에서 여러 역량들의 동등함을 유지할 뿐 아니라 그 역량들에서 상식 이상으로 앎을 높이는 것이 어떻게 가능한가?

이 어려움은 처음 보기에는 아주 끔찍하지만 가까이서 바라보면서부터 사라져 버린다. 판단 능력 혹은 상식을 조직한다는 것은 본디 말하면 정신이 아는 것에서 모르는 것으로 여러 판단들의 연속에 따라 가는 데서 수단이 되는 일반적 절차들을 발견하는 것이다. 그 판단들은 모두 고립적으로 본다면 직관적이고 직접적인 명증성을 지니지만, 그 총체는 이 진행 없이는 획득하지 못할 공식, 따라서 상식의 통상적 위상을 뛰어넘는 공식을 제시한다.

이처럼 우리 지식의 전체 체계는 상식에 기초를 둔다. 그러나 그것은 개별적인 것과 직접적인 것에 한정되어 그 단순한 시선의 일반을 포괄할 수 없는 상식, 그리고 이에 도달하려면 단순한 시선을 분리할 필요가 있는 상식 위로 무한히 상승한다. 단 한 걸음에는 밭고랑의 폭밖에 넘어가지 못하고 같은 움직임을 일정 회수 반복해 지구를 순회하는 사람처럼 말이다.[19]

이성과 경험의 합치, 상식의 조직, 언제나 동일한 판단이 최절정의 사색으로 올라가는 일반적 절차들의 발견, 이런 것들이 인류의 주요 작품, 지구상에서 완수되는 가장 광대하고 가장 복잡하고 가장 극적인 돌발 사건을 태어나게 한 작품이다. 확립되는 데 그렇게 긴 시간을 들이고 그렇게 많은 잠재력을 펼쳐 보이는데 멀리서라도 따라가는 과학, 종교, 사회는 없다. 이 위대한 작업이 30세기 전부터 시작되어 이제 겨우 확정되기에 이를 정도다. 책 20권으로도 그 역사를 이야기하기에 간신히 충분할 정도다. 나는 몇 쪽에 그 주요 국면들을 그려볼 것이다. 이 요약은 소유권의 출현을 설명하는 데 필요 불가결하다.

상식의 조직은 사전에 다른 문제, 확실성의 문제 해결을 가정한다. 확실성은 두 종류의 상관물, 주체의 확실성, 객체의 확실성으로 나누어진다. 다른 말로 하면, 사상의 법칙을 추구하기 전에 생각이 되는 존재, 그리고 생각하는 존재의 실재에 대해 확신해야 했는데, 이것 없이는 아무것도 아닌 법칙을 탐구할 위험성을 무릅쓰게 될 것이다.

이 거대한 논쟁의 첫 번째 계기는 그러므로 자아가 자신을 인정하는 데로 나아가고, 말하자면 자신을 만져보고, 자기 판단의 출발점을 찾는 계기다. 그 자아는 ‘나는 누구인가’를 자문한다. 아니, 오히려 ‘나는 그 어떤 것인가?’ ‘나는 내가 있다는 것을 확신하는가?’하고 자문한다. 이야말로 상식이 대답해야할 첫 번째 질문이다.

그리고 이는 상식이 아주 경탄을 받는 이 판단, ‘나는 생각한다. 그러므로 나는 존재한다(Je pense, donc je suis)’로써 실질적으로 대답한 질문이다.

나는 생각한다. 이것으로 충분하다. 나는 내 존재에 대해 확신하기 위해 더 알려고 할 것이 없다. 내가 이 점에서 배울 수 있을 것이라고는, 어떠한 존재도 내가 그것을 긍정하지 않으면 증명되지 않는다는 것, 따라서 자아 없이는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자아. 이는 상식의 출발점이며, 철학의 첫 번째 질문에 대한 상식의 대답이다.

이처럼 상식, 아니, 생각하고 말하는 미지의 파악 불가능한 본성, 결국 자아는 증명되지 않는다. 그것은 나선다. 그 첫 번째 판단은 그 자신에 대한 신임의 행위다. 사고의 실재성은 그에 의해 원초적 사실fait-principe로, 필연으로, 끝으로 공리로 선언되며, 그 바깥에서는 추론을 할 여지가 없다.

그러나 판단력의 결핍에서든, 관념의 미묘함에서든 어떤 사상가들은 상식의 이 언명이 벌써 너무 대담하다고 보았다. 그들은 상식이 그 명분을 만들기를 바랐다. 우리가 생각하고 우리가 있다는 것을 누가 우리에게 보장하느냐고 그들은 말했다. 내적 감각의 권위는 무엇인가? 그것의 모든 가치가 그 자생성 자체에서 나오는 언명이란 무엇인가?

이와 관련해서 긴 논쟁이 시작되었다. 상식은 이 유명한 판결로 거기에 종지부를 찍었다. 의문 자체에 제기되는 의문은 터무니없고, 탐구의 정당성을 목표로 삼는 탐구는 모순적이고, 그러한 회의주의는 반反 회의적이고 단지 반증이 될 뿐이며, 우리가 생각하고 우리가 알기를 바라는 것은 사실이며, 우주와 영원을 포괄하는 이 사실에 관해 논쟁할 여지가 있을 수 없을 것이며, 따라서 유일하게 할 일로 남는 것은 사고가 어디로 인도할 수 있는지를 아는 것이므로 피론(Pyrrhon)과 그의 종파는 자아의 존재에 관해서 자아를 안심시키는 부조리의 철학에 의해 인정받을 것이다. 게다가 그들의 견해는 그 본령상 상식에 모순이 있음을 확신하므로 상식으로부터 파문을 당한다.

이 전문前文이 힘에 넘침에도, 어떤 이들은 여전히 항의를 해야 하며 그 개정안을 마련해야 한다고 믿었다. 진정한 회의론자는 그들의 의심의 실재성을 의심하는 자들이 아니다. 그러한 ‘회의론은 웃음거리다’라고 그들은 주장했다. 의심의 내용의 실재성, 그리고 더구나, 이는 아주 다른 것인데, 이 내용이 실재하는지를 입증할 수단들의 실재성을 의심하는 것이 그들이다.

“그렇다면 이는 마치 종교가사고의 현상이고 자아의 사건이니 당신이 종교들의 존재를 의심하지 않는다고, 다만 종교들의 대상의 실재만, 더구나 이 대상을 확정할 가능성만 의심한다고 말하는 것과 같군요. 아니면 당신은 가치의 진자 운동이 일반적 사고의 현상이고 집단적 자아의 사건이니 그 운동에 대해 의심하지 않으며, 다만 가치들의 실재성 자체, 더구나 그 크기에 대해 의심한다고 말하는 것과 같군요”하고 상식이 대답했다. 그러나 사람에 관련해서, 예를 들어 가치의 실재가 가치의 법칙일 뿐이고 가치의 법칙일 수밖에 없는 것처럼 사물의 실재가 사물의 법칙과 구분되지 않는다면, 그리고 당신이 동의하지 않을 수 없는 것처럼 사물의 법칙이 이 법칙을 확정하고 창조하는 자아 없이는 아무것도 아니라면, 의심의 실재성과 의심하는 내용의 실재성에 대한 당신의 구분은 그에 따르는 ‘아포르티오리à fortiori’와 똑같이 터무니없다. 우주의 자아는 사고에 의해 동일하게 되고 서로 꼭 들어맞게 된다. 그러므로 다시 한 번 우리의 과제는 자아가 자신과 관련해서 오류로 이끌릴 수 있는지, 그 기능들의 발휘에서 자아는 교란에 영향을 받는지, 이 교란의 원인들은 무엇인지, 우리 관념들의 공통 척도는 무엇인지, 그리고 당장에는 비非자아라는 이 개념, 자아가 행동에 들어가자마자 자아를 포착하는 그것, 그리고 자아가 분리되는 것이 불가능한 그것의 가치는 무엇인지를 탐구하는 것이다.

이처럼 상식의 판단으로는, 확실성의 형이상학적 이론은 가치의 경제적 이론과 유사하다. 더 낫게 말한다면 이 두 이론은 하나의 이론을 이룰 뿐이다. 그리고 의심의 실재성을 인정하면서도 의심의 내용의 실재성, 따라서 이 내용을 확정할 가능성을 부정하는 회의론자들은 가치의 진자 운동을 긍정하면서 이 진자 운동을 확정할 가능성, 따라서 가치의 실재성 자체를 기각하는 경제학자들을 닮았다. 우리는 경제학자들의 이 모순을 정당히 평가하지 못했으며, 가치가 수요와 공급 사이에서 일련의 진자 운동에 의해 사회에서 결정되는 것처럼, 진리도 이와 똑같이 우리에게서 언명하는 이성과 확인하는 경험 간의 일련의 파동에 의해 형성된다는 것, 의심 자체로부터 점차로 확실성이 형성된다는 것을 곧 보게 될 것이다.

이처럼 획득되고 확정된 주체의 확실성은 그러므로 인지 법칙의 탐구로 넘어가기 전에 우리 우주와의 모든 관계의 기초인 대상의 확실성을 확정할 것으로 남아 있다. 이는 상식의 두 번째 정복, 철학 작업의 두 번째 계기였다.

우리는 우리 자신 안에 갇혀 있는 한에서는 감각하고, 사랑하고, 추론하고, 행동하고 결국 존재할 수 없다. 자아가 그 기능들에 도약의 자극을 주는 것, 자신의 존재를 펼치는 것, 자신의 무가치함에서 어떤 식으로 벗어나는 것, 나선 후에는 대립하는 것, 즉 존재하거나 자아와 다른 것으로 보이는 미지의 존재, 한마디로 비아非我와 관계를 맺는 것이 필요하다.

조금 후에 우리의 이성이 그 두 기초 위에서 강화되어 불가항력적으로 가정할 신, 무한의 존재, 내가 말하건대 신은 그 본질이 모두를 포괄하므로 살고 자신을 알기 위해 자기 밖으로 나갈 필요가 없다. 그의 존재는 자신 안에서 온전히 펼쳐진다. 그의 사고는 내성적이다. 그에게서 자아는 비아를 자아로서만 파악한다. 왜냐하면 둘 다 무한이며, 무한은 필연적으로 단일하며, 따라서 신에게서 시간은 영원과 동일하고 행동함은 원함과 동의어이며, 사랑은 자기 말고 다른 대상이 없고 다른 결정하는 원인이 없기 때문이다. 신이란 완벽한 이기利己, 절대적 고독, 지상至上의 집중이다. 이 모든 관련에서 인간의 역의 본성인 신은 스스로에 의해, 그리고 반대 세력 없이 존재한다. 아니, 그보다는 비아를 자신 바깥에서 찾는 대신 자신 안에 만든다. 그는 구별이 되지만 여전히 자아다. 그의 생명은 다른 어느 것에도 의존하지 않는다. 그가 자신을 알고 살아가고 모든 것이 존재하면서부터 모든 것이 그에 의해 증명된다. ‘나는 존재하는 자(Ego sum qui sum)’라고 그는 말한다. 신은 정말로 이해할 수 없는, 지워지지 않는, 그리고 그러면서도 필요한 존재다. 이성이 이를 말하기를 꺼리더라도 이를 말하지 않을 수 없는 입장임에는 차질이 없다.

유한의 존재, 사람은 다르다. 사람은 스스로에 의해 존재하는 것도, 스스로의 안에 존재하는 것도 아니다. 사람 개인에게는 그의 이성이 성찰하고 그의 생명이 깨어나고 그의 영혼이 그의 기관器官들처럼 자신의 생존 수단을 길어내는 주변 환경이 필요하다. 그러한 것이 적어도 우리가 우리 존재의 발달을 의식하는 방식이다. 이 점은 피론 추종자들의 모순을 전혀 고집하지 않는 모든 이들이 실토하는 바다.

그러므로 이 현상의 의미를 인식하고 의식이 우리에게 우리의 존재에 필요한, 그러나 우리의 존재와는 독립적인 외적 실재로서 제시하는 이 비아의 특질을 정하는 것이 중요하다.

그런데 회의론자들은 자아가 이성적으로 자기가 존재하는 것을 의심할 수 없음을 인정하자고 말한다. 무슨 권리로 자아는 외적 실재, 자신이 아닌, 자신에게는 투시 불가능함이 분명한, 비아라고 칭하는 실재를 긍정할 것인가? 우리가 우리 바깥에서 보는 물체들은 정말로 우리 밖에 있는가? 그리고 그것들이 우리 바깥에 존재한다면 그것들은 우리가 보는 그런 것인가? 감각이 자연의 법칙들에 대해 우리에게 말해주는 것은 자연에서 오는가? 아니면 자연이 그 자신의 품으로부터 투기投企하는 것을 자연의 바깥에서 우리에게 보여주는 우리의 사고 활동의 산물일 뿐인가? 경험은 무언가를 이성에 더하는가? 아니면 이성이 그 자신에 발현된 것일 뿐인가? 끝으로, 이 비아의 실재성 혹은 비실재성을 입증할 어떤 수단이 있는가?

상식이 단독으로는 결코 하지 않은 이 이상한 질문은 우리 족속을 영예롭게 한 가장 심오한 천재들에 의해 제거되고, 웅변, 현명함과 경이롭게 다양한 형태들로 전개된 것으로서 무한히 많은 체계와 추리들을 일으켰는데, 그것들에 대해 두꺼운 책을 쓴 저자들에게서는 이해하기가 아주 어려운 것들이지만 그것들을 몇 개의 선으로 치환해 이에 관한 하나의 관념을 생성할 수가 있다.

우선 어떤 이들은 비아가 존재하지 않는다고 주장했다. 이는 자연스러웠고 사람들은 이를 예상해야 했다. 자아에 대립하는 비아, 이는 나타나서 타인이 가진 것을 뒤흔드는 사람과도 같다. 이 타인의 최초의 움직임은 그러한 이웃을 부정하는 것이다. 나 밖에서는 물체도 자연도 출현물도 없고, 나 말고 다른 본질은 없다고 그들은 말했다. 모든 것은 정신 안에서 일어난다. 물질은 추상이다. 우리가 뭔지 모르는 경험의 담지자로서 우리가 보고 연명하는 것은 스스로 결정이 되면서 바깥으로부터 그 본성상 창조할 것을, 더 정확히 말한다면 되어갈 것을 받아들인다고 상상하는 우리의 순수 활동의 산물이다. 영혼에 관해서는 존재하는 것, 산출하는 것, 그리고 되어가는 것은 동의어이니 말이다.

그러나 우리는 좋든 싫든 간에 앎에서 연역과 습득이라는 두 양식을 구분한다고 상식은 관찰한다. 연역을 통해 정신은 실제로 배우는 모든 것을 창조하는 것 같다. 수학이 그러하다. 반대로 습득을 통해서는 정신은 끊임없이 그 과학적 진보에서 멈추어서, 그 원인이 충분히 비자발적이고 자아의 주권 밖에 있는 끊임없는 흥분의 도움으로만 진행한다. 그러므로 무시하는 것이 불가능한 이 현상을 유심론에서는 어떻게 설명할까? 모든 과학이 자아에서만 나온다면 과학은 자생적이고 그 기원부터 완전하며, 모든 개인들에게서 동등하고, 같은 개인 안에서 존재의 모든 순간에 있는 것이 아닌가? 끝으로 오류와 진보를 어떻게 설명하는가? 문제를 푸는 대신에 유심론은 이를 멀리한다. 가장 잘 습득되고 가장 의심할 바 없는 사실들, 즉 자아의 경험적 발견들을 무시한다. 이성에 고문을 가한다. 유지되기 위해서는 정신의 부정적 증언을 부정하면서 자기 자신의 원리를 의심하지 않을 수 없다. 유심론은 모순적이고 받아들여질 수 없다.

그때 다른 것들이 등장했다. 이것들은 물질만이 존재한다고, 추상인 것은 정신이라고 주장했다. 자연 외에는 아무것도 참이 아니고 아무것도 실재가 아니라고 그들은 말했다. 우리가 보고, 만지고, 세고, 무게를 달고, 측정하고, 변형할 수 있는 것만이 존재한다. 물체와 그 무한의 변경 형태들만 존재한다. 우리 자신은 물체, 조직되고 살아있는 물체다. 우리가 영혼, 정신, 양심 혹은 자아라고 부르는 것은 이 유기체의 조화를 나타내는 데 소용되는 존재자일 뿐이다. 물질에 내재하는 움직임을 통해 주체를 낳는 것은 물체다. 사고는 물체의 변형 형태다. 지성, 의지, 덕성, 진보는 특정 차원의 결정물들, 게다가 그 본질이 우리에게 알려지지 않은 속성들일 뿐이다.

상식은 대답한다. 그러나 만일 사탄이 갈라져서 서로 싸우면 그 나라가 어떻게 유지되겠느냐(si satanas in seipsum divisus est, quomodo stabit)?[20] 유물론적 가설은 이중의 불가능성을 제기한다. 자아가 비아의 조직의 결과와 다르지 않다면, 사람이 자연의 정점, 주인이라면, 그것이 그 가장 높은 제곱을 한 자연 자체라면 어떻게 자연을 반박하고, 괴롭히고, 개조할 능력을 가지는가? 자연의 자기 자신에 대한 이 반응, 산업, 과학, 예술 등 자연 바깥의 모든 세상을 낳는, 그리고 그 유일한 목적이 자연을 정복하는 것인 반응을 어떻게 설명하는가? 끝으로, 유물론자들이 오직 신앙만을 두는 우리의 감각의 증거에 따를 때 물질 법칙 바깥에서 생성되는 것에 어떻게 물질적 변경을 가할 것인가?

다른 한편, 사람이 조직된 물질일 뿐이라면 그의 사고는 자연의 반사다. 그렇다면 물질은, 자연은 어떻게 그렇게 자신을 잘 모르는가? 종교, 철학, 의심은 어디서 나오는가? 뭐라고! 물질이 전부이고, 정신은 아무것도 아니다. 그리고 이 물질이 그 최고의 발현에, 그 지상至上의 진화에 도달했을 때, 그것이 사람이 되었을 때, 결국 그것은 자신을 더 이상 모른다. 그것은 자신에 대한 기억을 상실한다. 그것은 방황하고 마치 물질이, 경험 자체가 아닌 듯이 경험의 도움으로만 행진한다! 그러면 자기 자신을 잊는 이 자연은, 그 존재의 충만에 도달하면서부터 자신을 알기를 배울 필요가 있는, 자신을 모르기 위해서만 지적으로 되는, 그리고 이성을 획득하는 바로 그 순간에 그의 무오류성을 상실하는 이 자연은 무엇인가?

유심론은 사실들을 부정하면서 그 자신의 무능 아래 굴복한다. 사실들은 그들의 증거로 유물론을 짓뭉갠다. 이 체계들이 스스로를 확립하려고 노력할수록 그들의 모순을 드러낸다.

그때 독실한 분위기와 명상에 잠긴 표정으로 신비주의자들이 왔다. 정신과 물질, 사고와 연장은 별개로 존재한다고 그들은 말했다. 그러나 우리는 우리 자신을 통하지 않고는 이를 알지 못한다. 계시로써 그것들의 실재성을 우리에게 증언해주는 것은 신이다. 그리고 모든 것들이 신에게서 창조되었고 모든 것이 신 안에 존재하는 것처럼, 우리의 지성이 그것들을 볼 수 있는 것도 우리의 지성이 유래하는 무한의 정신인 신 안에서다. 이처럼 자아에서부터 비아로의 이행이 설명되어 정신과 물질의 관계들은 분별 가능해진다.

처음으로 신에 대한 질문이 나왔다. 청중들의 주의는 배가되었다.

의문의 여지없이 정신은 정신하고만 소통의 관계를 가질 수 있어서, 정신인 신 안에서 그의 작품들인 물적 사물들을 우리에게 보여주는 데 능숙하다. 유감스럽게도 이 체계는 악순환과 선결 문제 요구의 오류에 의존한다. 한편, 신을 믿기 전에 우리는 우리 자신을 믿을 필요가 있다. 그런데 우리는 우리의 자아를 느끼지 못하며, 외적 반응이 우리에게 느끼게 하는 만큼밖에는, 즉 우리가 비아非我를 인정하는 만큼밖에는 우리의 존재를 확신하지 못한다. 이것이 바로 문제다. 계시에 관해 말한다면, 계시는 그 추종자들에 따를 때 기적에 의해서, 그 수단들이 자연에서 취해지는 신호에 의해서 행해졌다. 그런데 우리가 사전에 세상의 존재에 대해, 그 법칙의 항상성에 대해, 그 현상들의 실재성에 대해 확신하지 않으면 계시에 대해 어떻게 판단하며 계시를 어떻게 믿는가?

그러므로 신비주의는 주체와 객체의 필연성을 인식한 후 그것들을 하나씩 그 기원에 의거해 설명하기를 구한다는 중요한 면을 지닌다. 그러나 신비주의자들에 따를 때 나와 마찬가지로 지적이고, 비아와 마찬가지로 실재적인 제3항인 신일 이 기원을 사람들은 정의하지 않고, 증명하지 않고, 설명하지 않는다. 정반대로 그것을 세상에서, 그리고 사람으로부터 분리시켜 지성에 접근 불가능하게, 따라서 비진실로 만든다. 신비주의는 신비화다.

논쟁이 거기 있었다. 유신론자들과 불신자들, 유심론자들과 유물론자들, 회의론자들과 신비주의자들은 의견 일치에 도달할 수 없어 세상은 믿기밖에 할 줄 모른다. 심각한 분위기와 겸허한 정신으로 아무런 과장 없이 과거의 누구보다 가장 능청맞고 가장 교묘한 어느 철학자가 말을 시작할 때 사람들은 아무 말 없이 자기 모습을 바라보았다.

그는 자아와 비아의 실재성을, 그리고 신의 존재를 인정하는 것으로 시작했다. 그러나 그는 추론이나 경험의 경로를 따라서는, 자신의 밖에 있는, 그렇지만 그가 인정하지 않으려 해도 인정할 수밖에 없는 것에 대해 확신하기가 자아에게는 근본적으로 불가능하다고 주장했다. 그렇다. “물체들은 존재한다”고 그는 말한다. 우리에게서 앎이 형성되는 방식이 이를 증명한다. 그러나 이 물체들, 이 비아를 우리는 그 자체로는 알지 못하며, 경험이 이와 관련해서 우리에게 전해주는 것이라고는 오로지 우리의 밑바탕에서 나온다. 이는 우리 정신의 고유한 열매로서 그것의 외적 지각에 의해 일으켜져서 사물들에 그 고유의 법칙, 그 범주들을 적용하며, 그러고는 그것이 자연에 부여하는 이 형태가 자연의 형태라고 상상한다. 그렇다. 역시 우리는 신의 존재, 주권적 본질을 믿어야 한다. 이는 도덕에 대한 강제 이행 수단으로, 우리의 생에는 보완물로 소용된다. 그러나 지고의 존재에 대한 이 믿음은 역시 우리 이성의 공준, 우리의 무지의 필요를 위해 상상된 아주 주관적인 가설에 불과하며, 우리의 변증법의 필요성을 제외하면 아무것도 이 가설을 증명해주지 않는다.

이런 말들에 대해 긴 웅성거림이 일어났다. 어떤 이들은 자신들이 그것을 입증하지 못하는 형벌에 처해진 입장에서 그것을 믿기를 포기했다. 다른 이들은 이성보다 높은, 믿음의 동기들이 있다고 주장했다. 이들은 믿음을 위해 그 자생성 밖에는 가지지 않는 믿음, 그 대상이 단순한 이성의 형식으로 환원되는 믿음을 거부했다. 앞의 사람들은 비판철학자의 비일관성을 공개적으로 고발했다. 거의 모든 이들이 누구는 유심론에, 누구는 유물론에, 누구는 신비주의에 빠졌으며, 각자 가장 마음에 드는 체계를 위해 이 철학자의 고백을 이용했다. 끝으로 어떤 사람이 고결한 가슴으로 감동한 영혼을 가지고 소음을 잠재우고 자신에게 주의를 끌기에 도달했다.

그는 신랄하게 이렇게 고찰했다. 우리의 판단의 열쇠를 발견했노라 주장하고 순수 이성을 자처하는 이 철학은 절대로 통일성을 결여하며 그 비일관성에 의해서만 빛을 낸다고. 사람들은 말한다. 아무것으로도 증명이 안 되지만 바로 대단원을 위해 도래하는 이 신은 무엇인가? 사고에 재료를 제공하는 일도 없이 사고를 촉발하는 것 말고 다른 기능을 가지지 않은 이 객관성은 무엇인가? 자아, 자연, 신이 사람들이 그렇게 믿는 것으로 보이는 것처럼 존재한다면 그들은 직접적이고 상호적인 관계를 맺고 있으며 이 경우에 우리는 그것들을 알 수 있다. 이 관계들은 무엇인가? 반대로 이 관계들이 전무하다면, 혹은 사람들이 여전히 그렇게 주장하듯이 그것들이 순전히 주관적이라면 사람들은 어떻게 비아의 실재성, 그리고 신의 존재를 감히 단언하는가?

자아는 본질상 능동적이다. 그러므로 그것은 어떠한 자극도 필요하지 않다. 그것은 과학의 원리들을 보유하고 이를 알고 행하며, 창조적 잠재력을 누리며, 그것 안에서 당신이 경험이라고 부르는 것은 진정한 분출이다. 새로운 관념에 대해 경험하고, 자신의 경험의 대상 자체를 창조하고, 이와 같이 자기 자신의 사고에 적합한 가치를 산출하는 일꾼처럼 우주 안에서 자아는 비아의 창조자다. 따라서 그는 자신 안에 강제 이행 수단을 지니며, 자연의 증거도, 신성의 개입도 필요로 하지 않는다. 자연은 결코 괴물이 아니다. 일꾼을 발현시키는 작품이니 말이다. 자아와 마찬가지로 실재하는 비아는 자아의 산물이고 표현이다. 그리고 신은 자아와 비아를 동일한 현상성 안에 결합하는 추상적 관계에 불과하다. 모든 것은 서로 맞물리고 서로 연관되고 서로를 설명한다. 경험, 이는 기록된 과학, 주체에서 발현된, 그리고 주체에 의해 재발견된 사고다.

처음으로 철학은 체계를 수립해 왔다. 이 순간까지 철학은 하나의 모순에서 다른 모순으로 부정과 배제를 통해 진행하며, 즉 동의할 수 없는 것을 제거하며 진자 운동만을 했다. 기껏해야 그것은 그 여러 명제들을 동시에, 그러나 그것들을 풀 희망도 능력도 없이 연명하기를 시도했다. 이 난관이 극복되었다. 새로운 탐구의 시기가 시작되었다.

어떤 사람이 대답한다. 우리가 이해해 온 결론에 아무 할 말이 없을 것이며, 그 결론이 요약하는 체계는 사람이 무언가를 안다는 것, 그리고 이것은 언제나 의문시되는 것인데 그 사람에게는 경험에 앞서 단 하나의 관념이 존재한다는 것, 이것이 입증된다면 난공불락일 것이다. 그때는 사람이 배우는 것은 그가 연역하기만 한다는 것임을 사람들은 의식할 것이다. 그는 그가 증험하는 것을 재발견하는 것이다. 그러나 자아가 스스로는 아무 관념도 가지지 않는다는 것은 참이 아니다. 그가 과학을 선험적으로 창조할 수 있다는 것은 참이 아니다. 그리고 나는 의견을 먼저 말하는 자에게 그의 건축물의 초석을 놓을 테면 놓아보라고 도전한다.

그는 영감을 얻은 목소리로 이렇게 덧붙였다. 다음은 이성과 경험이 내게 가르쳐준 것이라고. 자아와 비아를 결합하는 관계는 결코 사람들이 말하듯이 친자 관계도 인과관계도 아니다. 이는 공존 관계다. 자아와 비아는 서로 대면해 동등하고 분리 불가능하지만, 상급의 원리, 둘 다를 낳는 주체-객체, 한마디로 절대 안으로가 아니면 환원 불가능하게 존재한다. 이 절대는 자아와 비아의 창조자인 신 혹은 니케아 신경이 말하는 것처럼 유형무형有形無形한 모든 것의 창조자인 신이다. 이 신, 이 절대는 그 본질 안에 사람과 자연, 사고와 연장을 포괄한다. 왜냐하면, 그 홀로 존재의 충만을 지니며, 그는 만유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성의 법칙들과 자연의 형태들은 동일하다. 어떠한 사고도 실재의 도움 없이는 발현하지 않으며, 역으로 어떤 실재도 지성으로 꿰뚫어지는 것으로만 나타난다. 이야말로 경험과 이상의 경이로운 이 합치, 당신에게 정신을 자연의 변형 형태로 간주하고 그 다음에는 자연을 정신의 변형 형태로 차례로 간주하게 하는 이 합치가 나오는 근원이다. 자아와 비아, 인류와 자연은 똑같이 남아있고 실재한다. 인류와 자연은 절대 안에서 공시적共時的이다. 그것들을 구분하는 유일한 것은, 인류 안에서 절대가 의식을 가지고 전개되는 반면 자연에서 그것은 의식 없이 전개된다는 것이다. 이처럼 사고와 물질은 분리 불가능하고 환원 불가능하다. 그것들은 존재들에 따라 불균등한 비율로 발현하며 절대의 구성 원소들 각각이 피조물들에서 순차적으로 열등성으로, 혹은 우세성으로 자신을 드러낸다. 이는 무한의 진화이며, 형태들, 본질들, 의지들, 잠재 능력, 덕성 등을 끊임없이 뽑아내는 것이다.

어느 순간 이 체계는 유권자들의 지지를 빼앗아가는 것으로 보였다. 자아와 비아의 절대 안에서의 융합, 창조를 구성하는 사고와 존재의 이 구분과 동시에 분리 불가능성, 정신의 끊임없는 뽑아냄, 그리고 끝없는 규모에서의 존재들의 발전이 모든 사람의 넋을 빼앗았다. 이 열광은 번개처럼 지나갔다. 한 새로운 변증론자가 갑자기 일어나 이렇게 말했다. 이 체계는 한 가지만 필요로 한다. 이는 증거다. 자아와 비아는 절대 안에서 혼동된다. 이 절대는 무엇인가? 그 본성은 무엇인가? 그것이 발현하지 않고 절대의 자격에서 그것이 발현하는 것조차 불가능하니 우리는 그 존재에 대해 어떤 증거를 가질 수 있는가? … 사람들은 이렇게 덧붙인다. 사고와 존재는 절대 안에서 동일한 것들로서 분리 불가능하고 상동相同임에도 불구하고 창조 안에서 환원 불가능하다. 무엇에서 이를 아는가? 우리에게 유일하게 실재인 것은 법칙임이 인식되니, 법칙들의 동일성은 본질들의 동일성, 실재들의 동일성을 내포하지 않는가? 신비적이고 투시 불가능한 절대에 의존하는 것이 무슨 소용이며, 신이라는 이 늙은 괴물을 재생산하는 것이 그것들의 법칙의 시인된 동일성에 의해 완전히 화해된 두 항을 화해시키는 데 무슨 소용이 있는가? … 자연과 인류는 절대의 발전이다. 절대는 왜 발달하는가? 어떤 원리에 힘입어서, 그리고 어떤 법칙에 따라서? 이 발달의 과학은 어디 있는가? 당신의 존재론, 당신의 논리는 무엇인가? 그리고 같은 법칙들이 물질과 사고를 다스린다면, 다른 하나를 알기 위해 하나를 연구하는 것으로 충분하다. 과학은 당신이 뭐라고 말하든 당신 자신의 말에 따르면 선험적으로 가능하다. 그러므로 당신은 왜 과학을 부정하며 우리에게 그 자체로는 과학이 아니어서 아무것도 설명해주지 않는 경험만을 우리에게 내놓는가?

그는 이렇게 덧붙인다. 자! 나는 절대에 의지하지 않고, 사고와 존재의 동일성에 집착하면서 구별되는 것으로 받아들여질 수 없는 것, 정신과 물질, 즉 관념의 두 측면을 당신이 구분하므로 당신의 눈을 벗어나고 당신이 발견할 수 없던 이 발달의 과학을 건설할 책임을 맡는다.

그리고 이 철학의 거인이 이원론 자체에 의거해 영원한 이원론을 뒤집는 것에 착수하는 것을 우리는 본다. 모순 위에 동일성을 세우는 것, 무에서 존재를 끌어내는 것, 그의 유일한 논리의 도움으로 자연과 사람을 설명하고 예언하고, 무엇인가 하면 창조하는 것 말이다! 그 이전에 다른 어느 누구도 그렇게 깊이 존재의 내적 법칙들을 꿰뚫지 못했다. 누구도 이성의 신비들을 그렇게 활기 띤 빛으로 밝히지 못했다. 과학 전체가 아니고 논리 전체도 아니라면 적어도 과학과 논리의 열쇠인 공식을 내놓는 데 그는 성공한다. 그러나 이 논리 자체를 그 작자가 경험을 끊임없이 가까이해서만, 그리고 경험에서 그의 재료를 빌려 와서만 건설할 수 있었다는 것, 그의 모든 공식들은 관찰을 따랐지만 결코 관찰에 선행하지 않았음을 사람들은 아주 빠르게 눈치 챘다. 그리고 사고와 존재의 동일성 체계 후에 철학에서 더 이상 아무 기다릴 것이 없었으므로, 원은 닫혔으므로, 경험 없는 과학은 불가능하다는 것, 자아와 비아가 상관적이고 서로에게 필요하고 상대방 없이는 의식이 불가능하므로 그것들은 동일하다는 것, 그들의 파악 불가능한 절대 안으로의 환원과 마찬가지로 그들의 동일성은 우리 지성의 관점, 이성의 가정假定으로서 특정한 경우들에서는 추론에 쓸모 있지만 조금도 실재성은 없다는 것, 끝으로 반대되는 것들의 이론은 우리의 의견을 통제하고 우리의 오류를 발견하고 진리의 본질적 특성을 확정하는 데는 비할 데 없는 잠재력을 지니지만 자연의 유일한 형태가 아니고, 경험의 유일한 계시, 따라서 정신의 유일한 법칙이 아니라는 것이 영원히 입증되었다.

그러므로 우리는 데카르트의 ‘나는 생각한다cogito’에서 떠나 여러 체계들의 끊이지 않는 계열을 따라 헤겔의 ‘나는 생각한다’로 다음과 같이 되돌아왔다. 철학적 혁명이 완수되었다. 새로운 움직임이 시작될 것이다. 그 결론들을 취해서 판결을 내리는 것은 상식이 할 일이다.

그런데 상식은 무엇이라 말하는가?

앎에 관련해서. 존재는 우리가 첫째로 자아의 의식, 둘째로 비아의 계시라 부르는, 해소될 수 없이 연결된 두 계기에서만 자신에게 계시가 되니, 앎에서 궁극적으로 완수된 단계마다 이 두 결합된 계기를 내포하니, 이 이원론이 끊임이 없고 환원 불가능하니, 그것 바깥에서는 주체도 객체도 존재하지 않으니, 하나의 실재는 본질상 다른 하나의 현존에 연결되니, 그것들을 환원하는 것만큼 그것들을 고립시키는 것도 터무니없으니, 두 경우에 이는 진리를 완전히 부정하고 과학을 제거하는 것이니, 우리는 우선 과학의 특성이 불가항력적으로 이성과 경험의 합치라는 것이라고 결론을 지을 것이다.

확실성에 관련해서. 앎의 원천적 이원성에도 불구하고 객체의 확실성은 근본적으로 같으니, 주체의 확실성은 반反회의주의적인 피론 추종자들에 맞서 의심 밖에 놓였으니, 이 점에서 판단된 사물의 힘이 있으니, 경험은 비아의 음미인 만큼 자아의 확정이니, 이는 이성의 만족을 위해 충분하다. 우리가 우리의 존재를 확신하는 것처럼 우리는 물체들의 존재에 대해 확신을 갖는 것 말고 무엇을 더 바랄 수 있는가? 그리고 주체와 객체가 동일한지 아니면 단지 딱 맞아 들어가는지, 과학에서 우리의 관념을 자연에 빌려주는 것이 우리인지, 아니면 우리에게 자기의 관념을 주는 것이 자연인지를 탐구하는 것이 무슨 소용인가? 이런 구분을 통해 여전히 자아와 비아가 고립적으로 존재할 수 있다고 가정하면서 말이다. 이는 사실이 아니며, 혹시 그것들이 분해될 수 있다면, 이는 모순을 내포하는 것이다.

끝으로 신에 관련해서. 이는 우리의 영혼과 자연의 법칙, 혹은 이 두 관념을 하나의 관념에 포함시킨다면 창조의 법칙으로서, 존재에서 의식으로, 자생성에서 반사로, 본능에서 분석으로, 무오류성에서 오류로, 유類에서 종種으로, 영원에서 시간으로, 무한에서 유한으로, 이상에서 실재로 가는 등의 진행에 따라 배열되는 것이니, 논리적 필연성에서 결과적으로 모두가 불변적으로 그러나 다른 비율로 자아와 비아로 구성되는 존재들의 연쇄는 정반대의 두 항 사이에 포함된다. 하나의 항은 범인凡人이 창조자 혹은 신이라고 명명하는 것으로서 무한, 자생성, 영원, 무오류성 등의 모든 특성을 결합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사람으로서 진화적, 반사적, 잠정적, 교란과 오류에 종속된 존재라는 반대되는 모든 특성들을 끌어 모으고, 그 선견지명은 주된 속성을 이룬다. 절대 과학, 즉 가장 높은 제곱을 한 본능이 신성의 본질적 속성인 것처럼 말이다. 그러나 사람은 우리에게 이성과 경험을 통해 한꺼번에 알려진다. 신은 반대로 우리에게 여전히 이성의 공준으로서만 계시된다. 한마디로 사람은 있고, 신은 가능하다.

그러한 것이 철학의 작업들에 관해서 상식의 두 번째 판단이다. 철학 자체에 의해 제공된 재료들에서 동기들을 퍼 온 판단, 최종 판단으로서 이성은 경험 없이는 아무것도 할 수 없음을, 그리고 신에 관해서 우리에게는 사실의 증거, 실험적 증명 말고 아무것도 더 부족하지 않음을 철학이 인정한 날, 그리고 철학이 망토로 얼굴을 가리면서 세상에 작별을 고하고 철학에 대해 끝났다(consummatum est)고 공언된 날에 명확히 생성된 판단이다.

세상 어디서나 이원론이 터져 나오는 것을 우리가 보는데, 이원론을 부정하는 것이 가능한가? 아니다.

존재들의 진행을 부정하는 것이 가능한가? 역시 안 된다.

그런데, 이 진행의 법칙이 알려지고, 마지막 항이 주어졌을 때, 첫 번째 항이 존재하는 것, 그리고 이 첫 번째 항이 마지막 항의 대척점인 것은 이성적 필연이다. 이와 같이 무한의 존재, 우리가 그 안에서 살고 움직이고 존재하는(in quo vivimus, movemur et sumus) 위대한 전체, 지고의 유類, 인간이 끊임없이 그로부터 빠져나오려는 경향을 띠고 자신의 적대자로서 대립하는 그 유, 이 영원한 본질은 끝으로 철학자들의 절대가 아닐 것이다. 그 반대자인 사람처럼 , 그것은 자아와 비아, 주체와 객체, 영혼과 몸, 정신과 물질의 구분에 따라서만, 즉 역시 유적인 두 측면에서 정반대의 대립으로의 구분에 따라서만 존재할 것이다. 게다가 신의 속성들, 능력들, 발현들은 논리가 숙명적으로 신을 믿게 유도하는 것처럼, 그리고 무한자에게 적절한 것처럼 사람의 속성들, 능력들 그리고 결정들의 역이다. 이제부터는 그 가설의 진리성에는 그것의 실현, 즉 사실적 증거 말고 부족한 것이 없다. 그러나 이 모든 연역은 그 자체로 회피 불가능하다. 그리고 논거들에 의해 그것이 거짓으로 입증되었다면, 원초적 이원론은 사라졌을 것이고, 사람은 더 이상 사람이 아닐 것이고, 이성은 더 이상 이성이 아닐 것이고, 피론주의는 지혜가 될 것이고, 부조리가 진리일 것이다.

그러나 이야말로 인도주의적 철학을 떨게 만드는 것이다. 그 철학에는 그 모든 범신론적 환상처럼 절대성이 아주 잘못 입혀졌다. 사람이 신이면서 절대라는 것을 발견했다고 믿어 아주 큰 기쁨을 느꼈다. 아주 기진맥진하고 수많은 체계들을 크게 열망한다. 그래서 신에 맞서, 사람에 맞서 그 자신의 학설들로부터 결론을 끌어낼 용기를 가지지 못한다. 이 최면술 걸린 철학은 중간 항들이 필연적으로 극단들을 전제로 한다고, 마지막 것은 첫 번째 것을 부르고, 유한은 무한을, 종은 유를 부른다고, 이 무한, 그것을 분할하는 유한만큼 실재적인 이것, 자신의 품에서 유출하는 점진적 창조의 대조에 의해 이번에는 종이 되는 이 지고의 유, 이 신, 끝으로 인간의 적대자인 신은 절대일 수 없다는 것, 이는 바로 그것을 가능하게 하는 것이라는 것, 가능하다면, 그것이 어떤 사실에 상응하는지를 찾을 필요가 있다는 것, 그리고 사람 안에 그것을 풀어낸다는 핑계로 이를 부정하는 것은 우리의 전투적 본성을 무시하고, 사람의 위에, 아래에, 그 둘레에 이해할 수 없는 공허를 창조하는 것이라서, 철학은 사람을 없애지 않으려면, 그의 우상이 멸망하는 것을 보지 않으려면 이 공허를 채우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을 감히 실토하지 않는다.

나로서는 이를 말하는 것이 유감이다. 왜냐하면 나는 그러한 공언이 나를 사회주의의 가장 지적인 분파로부터 갈라놓는다고 느끼며, 내가 생각하면 할수록 우리 인류에 대한 이 신격화에 가담하는 것은 내게는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이는 근본적으로 새로운 무신론자들에게서 종교적 공포의 마지막 메아리일 뿐이고, 인도주의라는 이름으로 신비주의를 소생시키고 성화聖化해 과학에 편견을, 도덕에 관습을, 사회경제에 공동체를, 즉 무기력과 빈곤을, 논리에 절대를, 부조리를 다시 가져가는 것이다. 내가 말하노니 이 새로운 종교를 받아들이는 것은 내게는 불가능하다. 사람들은 내가 그 신이라고 말하면서 그것에 관심을 갖게 하려고 헛되이 애를 쓴다. 그리고 여전히 무한하지만 절대적이지는 않은 존재, 그 안에 자유와 지성, 자아와 비아가 특수한 형태, 상상할 수 없지만 필연적인 형태로 존재하는 존재, 이스라엘이 야훼에 맞서 싸운 것처럼 죽을 때까지 싸우는 것이 내 운명인 존재의 가설을 그럴듯하게 받아들일 필요가 내게 있는 것은, 내가 논리와 경험의 이름으로 이 종교를 그것의 모든 선행자들과 마찬가지로 버리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이다.

그 과학의 주체와 객체는 발견되었다. 사고와 존재의 진리는 공신력 있게 확인되었다. 그 방법을 발견하는 일이 남아있다.

철학은 앎의 대상과 정당성에 관한 다소 비난을 받는 그 연구에서 끊임없이 다시 찾아오는, 더 가까이서 연구되면 상식의 탐구의 자연적 수단들임이 곧바로 인정되는 일정한 변증법적 형태들을 자신이 알지 못하는 사이에 따른다는 것을 지체 없이 알아차렸다. 과학 및 예술의 역사는 이 생각하는 기계들의 발명, 우리의 모든 지식의 진정한 수단들, 여기서는 그 주요한 것들만 알리는 데 그칠 것인 과학적 수단들scientiarum organa의 발명보다 더 재미나는 어떤 것도 제공하지 않는다.

모든 것의 첫째는 삼단논법이다.

삼단논법은 그 본성과 기질 면에서 유심론적이다. 그것은 정신의 긍정이 물질의 긍정을 지배하고, 자아의 도취가 비아를 무시하게 하고 말하자면 경험을 향한 일체의 접근을 거부하는 철학적 탐구의 계기에 속한다. 이는 신학의 인기 있는 논거, 선험의 기관, 권위의 공식이다.

삼단논법은 본질상 가설적이다. 일반 명제와 보조 명제 혹은 한 개별적 경우가 주어졌을 때, 삼단논법은 엄밀한 방식으로 결과를 도출하는 것을 가르치지만 이 결과의 외인적 진리성을 보장하지는 않는다. 그 자체로 전제들의 진리성을 보장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삼단논법은 하나의 명제를 다른 명제와 엮는, 그러나 그 진리성을 증명하지는 못하는 수단으로서의 쓸모밖에 내놓지 못한다. 그것은 계산과 마찬가지로 올바르게, 그리고 정확하게 묻는 것에 대답한다. 그것은 결코 문제를 제기하는 법을 가르쳐주지 않는다. 삼단논법의 규칙을 내놓은 아리스토텔레스는 이 수단을 맹신하는 바보가 아니었으며, 그 메커니즘을 분석한 것처럼 그 결점을 지적했다.

이처럼 삼단논법은 변함없이 선험에 의거해, 하나의 편견에 의거해 진행해 나가면서 어디서 오는지를 모른다. 관찰과는 별로 친하지 않아서 자신의 원리를 설명하기보다는 제시한다. 한마디로 과학을 발견하기보다는 창조하는 경향을 띤다.

변증법의 둘째 도구는 귀납이다.

귀납법은 삼단논법의 역 또는 부정이다. 비아의 전적인 긍정인 유물론이 유심론의 역 또는 부정인 것과 같다. 모든 사람이 베이컨이 권장하고 추천한 이 추론 형태를 안다. 그에 따르면 이는 과학들을 갱신할 것이었다. 그것은 일반에서 개별로 내려가는 삼단논법과 반대로 개별에서 일반으로 거슬러 올라가는 것이다. 그런데 개별적인 것이 그 무한히 다양한 측면들에 따라 무수히 많은 범주들로 분류될 수 있고, 귀납의 원리는 전에 확인해 두지 않은 것은 아무것도 가상하지 않는 것이므로, 그것이 어디서 오는지를 모르는 삼단논법과는 반대로 귀납법은 자신이 어디로 가는지를 결코 모른다. 그것은 땅에 남아있고, 상승하지도, 끝에 도달하지도 못한다. 그러므로 삼단논법처럼 귀납법도 이미 알려진 진리를 증명하는 데서만 위력을 가진다. 그것은 발견하는 데서는 힘이 없다. 오늘날 프랑스에서 사람들은 관찰들이 풍부하게, 그리고 놀라운 급속함으로 축적되는 바로 그 순간에 철학 정신이라고 명명하는 것의 부재, 즉 고등 변증법 수단들의 결여가 과학을 정태적으로 붙잡아 놓는다는 것을 알아차린다. 또한 베이컨 이래로 성취된 진보들은 사람들이 아주 여러 번 반복했듯이 귀납법 덕분이 결코 아니라 고대 철학이 우리에게 물려준, 그리고 관찰들이 확인, 변경 혹은 파괴하기만 한 소수의 일반적 편견들에 대해 유지된 관찰 덕분이라고 하는 말이 참이다. 우리가 우리의 술책을 다 써먹은 것 같은 현재에 귀납법은 멈추어 서고 과학은 더 이상 진행하지 않는다.

두 마디 말로 한다면 귀납법은 모든 것을 경험론에 주고, 삼단논법은 모든 것을 선험에 주어서, 지식은 두 개의 무 사이에서 진자 운동을 한다. 사실들이 증대되는 동안 철학은 길을 잃고, 경험은 너무나 흔히 상실된 채로 있다.

이 순간에 필요해지는 것은 삼단논법과 귀납법의, 따라서 개별적인 것과 함께 일반적인 것의 속성들을 결합해서, 이성과 경험을 동시에 다루면서 한마디로 우주를 구성하고 무로부터 모든 존재를 나오게 하는 이원론을 모방해 언제나 틀림없이 적극적 진리를 유도할 새로운 수단이다.

그러한 것이 이율배반이다.

하나의 관념, 하나의 사실이 모순적 관계를 제시하고 상반되는 두 계열로 그 결과들을 전개한다는 것만으로 기다릴 새롭고 종합적인 관념의 추출이 있다. 그러한 것이 삼단논법과 귀납법의 대립과 조합으로부터 형성되는 새로운 기관器官들의 보편적인, 따라서 무한히 달라지는 원리이며, 이 기관은 누가 뭐라 하든지 고대인들이 단지 얼핏 짐작하기만 한 것이고 칸트는 그 계시자였고, 그의 계승자들 중에 가장 심오한 사람인 헤겔에 의해 아주 큰 위력과 터뜨림으로 가동되었던 것이다.

이율배반은 자기가 어디서 오는지, 어디로 가는지, 그리고 자기가 지니고 가는 것이 무엇인지를 안다. 그것이 내놓는 결론은 사전의 명증 조건도, 궁극적 명증 조건도 없이도 참이며, 그 자체로 참이고, 그 자체에 의해 참이며, 그 자체를 위해 참이다.

이율배반은 필연성의 순수 표현이고, 존재들의 내적 법칙, 정신의 기복起伏 운동의, 따라서 정신의 진보의 원리이고 개인 안에서처럼 사회 안에서 생명의 필요 불가결 조건이다. 우리는 이 책의 흐름에서 이 경이로운 수단의 메커니즘을 충분히 알렸다. 아직 말하지 않고 남아있는 것은 우리가 다룰 부분들에서 연이어서 자리를 잡을 것이다.

그러나 이율배반이 속일 수도 없고 거짓말할 수도 없다고 해도 그것은 진리 전체가 아니며, 이 수단에 한정될 때, 상식의 조직은 이율배반에 의해 정해지는 개별 관념들의 배열을 상상의 자의에 맡긴다는 점에서, 그것이 결코 그 유도, 종도, 진행도, 진화도, 끝으로 체계, 즉 바로 과학을 구성하는 것도 설명하지 않을 것이라는 점에서 불완전할 것이다. 이율배반은 여러 개의 돌들을 자를 것이지만, 이 돌들은 흩어진 상태로 있을 것이다. 결코 건축물은 없을 것이다.

그래서 지극히 피상적인 관찰만으로도 인체의 기관들의 짝을 지은 분포를 보여주기에 충분하다. 하지만 상반되는 것들의 거대한 법칙의 진정한 화신인 이 이분법밖에 모르는 자는 아주 복잡하지만 단일한 우리 조직에 대해 아는 것과는 거리가 멀 것이다. 또 한 가지 예가 있다. 선분은 자기 자신에 대립하는 한 점의 운동에 의해 이루어진다. 평면은 선분의 유사한 운동에서 태어나며, 입체는 평면의 비슷한 운동에서 태어난다. 수학은 이 이원론적 통찰로 가득하다. 그렇다고 해서 이원론은, 사용되는 것이 그뿐이라면 수학을 이해하는 데 조금도 덜 척박하지 않다. 이원론에 의거해 선분의 관념으로부터 삼각형의 관념을 도출하려 시도해보라. 양, 질 등 상반된 개념들로부터 일곱 빛깔의 광선, 일곱 음색의 음계의 관념을 추출하려 시도해보라. … 이처럼 관념들은 그들의 모순적 관계들에 따라 개별적으로 정해진 후에 여전히 그것들을 군집화하고, 모양을 만들고, 체계화하는 법칙을 필요로 한다. 이 법칙이 없다면 그 관념들은 최초의 천문학자들의 변덕이 환상적인 별자리들로 결합할 수 있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서로 덜 생소한 것은 아닌 별들처럼, 고립된 채로 남아있을 것이다. 뉴턴과 허셜 같은 이들의 더 심오한 과학이 하늘에서 그 별들을 조율해주는 관계들을 발견하기까지 그랬을 것이다.

이율배반에서 결과로 나올 수 있는 것과 같은 과학은 사람과 자연의 이해에는 결코 충분하지 않다. 그러므로 마지막 변증법적 수단이 필요해진다. 그런데 이 수단은 진행, 분류, 그리고 계열의 법칙이 아니면 무엇일 수 있는가? 그 일반성 안에 삼단논법, 귀납법, 이율배반 자체를 포괄하고 음악에서 성악이 화음에 대해 가지는 관계를 이율배반에 대해 가지는 법칙 말이다.

이 법칙은 신이 동물들과 식물들을 종류에 따라 창조하는 창세기의 제1장을 다시 읽을 때 확신할 수 있는 것처럼 모든 시대에 알려진 법칙으로서 특히 현대의 박물학자들에 의해 조명되었다. 이 법칙은 수학에서 최고의 자리에 있다. 철학자들은 예술가들처럼 이를 미美와 진眞의 순수 본질인 것으로 선포했다. 그러나 내가 아는 누구도 그 이론을 내놓지 않았다. 그러므로 이 목표를 위해서 다른 저작을 참조하게 하는 나를 양해해줄 것이다. 그 저작에서는 의문의 여지없이 내가 적성보다는 선한 의지를 더 많이 증명한 것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21]

자연적 군집들에 의한 관념들의 진행, 계열, 연합, 이런 것은 상식의 조직에서 철학의 마지막 발걸음이다. 다른 모든 변증법적 수단들은 그것으로 환원된다. 삼단논법과 귀납법은 고등 계열에서 떨어져 나오고 다양한 의미로 고려된 파편들일 뿐이다. 이율배반은 중간 지점들과 내부적 운동에 대해서는 사상한, 작은 세계의 양극의 이론과 같다. 그 계열은 관념들의 모든 가능한 분류 형태를 포괄한다. 그것은 일체이며 다양성이고, 자연의 참된 표현이고 따라서 이성의 지고의 형태다. 하나의 계열에 관련지어질 수 있는, 혹은 계열로 분산될 수 있는 것 말고는 아무것도 정신에 분별 가능하게 되지 않는다. 그리고 우리에게 고립된 것으로 나타나는 모든 피조물, 모든 현상, 모든 원리는 우리에게 분별 불가능한 것으로 남는다. 감각들의 증언에도 불구하고, 사실의 확실성에도 불구하고 이성은 그것의 선행자들, 결과들, 그리고 보조 정리들, 즉 계열, 가족을 재발견하기까지는 이를 배척하고 이를 부정한다.

이 모든 것을 더 감각 가능하게 하기 위해 본 장의 대상이 되는 문제 자체, 소유권에 그것을 응용하자.

이 절의 개요에서, 소유권은 경제적 계열의 바깥에서는 분별 불가능하다고 말했다. 이는 소유권이 정신적, 형이상학적 혹은 심리학적인 어떤 선험에 의해서도(삼단논법의 공식), 입법적 혹은 역사적인 아포스테리오리à posteriori에 의해서도(귀납의 공식), 내가 소유권에 관한 논문에서 한 것처럼 그 모순적 본성의 해설에 의해서조차도(이율배반의 공식) 충분한 방식으로 이해되지 않고 설명되지 않음을 의미한다. 유비적인, 유사한 혹은 들어맞는 발현물들의 어떤 질서에 소유권이 정리되는지를 인식할 필요가 있다. 한마디로 그 계열을 재발견할 필요가 있다. 왜냐하면 고립되는 모든 것, 그 자체로, 그 자체에 의해, 그리고 그 자체를 위해서만 자신을 언명하는 모든 것은 충분한 존재를 누리지 못하며 분별 가능성과 지속성의 모든 조건들을 모으지 못하기 때문이다. 모든 것 안에서의, 모든 것에 의한, 그리고 모든 것을 위한 존재도 필요하다. 한마디로 내적 관계들에 외적 관계들을 합칠 필요가 있다.

소유권은 무엇인가? 소유권은 어디서 오는가? 소유권은 무엇을 원하는가? 이야말로 철학의 흥미를 가장 높은 정도로 끄는 문제다. 탁월하게 논리적인 문제, 사람과 사회와 세계가 그 해결에 의존하는 문제다. 왜냐하면 소유권 문제, 이는 다른 형태에서 확실성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소유권은 사람이고 소유권은 신이고 소유권은 모든 것이다.

그런데 이 무서운 문제에 법률가들은 그들의 선험을 중얼거리며 대답한다는 것이다. 소유권은 사용하고 남용할 권리, 점유와 전유에 의해 발현되는 의지의 행위에서 결과로 나오는 권리다. 법률가들이 우리에게 절대 아무것도 가르쳐주지 않는다는 것은 명확하다. 왜냐하면 전유가 사람의 운명의 성취에, 그리고 그의 근면의 행사에 필요함을 인정한다면, 그로부터 결론을 내릴 수 있는 것이라고는 전유가 모든 사람에게 필요해서 보유는 동등해야 한다는 것, 그래서 언제나 변화하고 이동 가능하며 증가와 감소를 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보유자들의 동의에도 불구하고 이는 소유권의 부정 자체다. 선험적 추론자들인 법학자들의 체계에서 소유권은 자기 자신과 합치하기 위해서 자유처럼 상호적이고 양도할 수 없는 것이어야 할 것이다. 그래서 모든 취득, 즉 전유권의 모든 궁극적 행사는 동시에 취득자 쪽에서는 자연권의 향유로 드러날 것이며, 그의 동류들에 대해서는 횡령으로 드러날 것이다. 이는 모순적이고 불가능한 것이다.

경제학자들은 공리주의적 귀납에 근거해 그들의 순서가 되어 나서서 우리에게 말한다. 소유권의 기원은 노동이라고. 소유권은 노동하면서 살 권리, 자신의 저축, 자본, 지력과 근면의 결실을 자유롭게 주권적으로 처분할 권리다. 그들의 체제가 더 굳건한 것이 아니다. 노동, 실질적이고 생산성 있는 점유가 소유권의 원리라면 노동하지 않는 자의 소유권은 어떻게 설명하는가? 임대료를 어떻게 정당화하는가? 노동에 의한 이 소유권의 형성으로부터 노동 없는 보유권을 어떻게 도출하는가? 30년간 견지된 노동으로부터 영구적 소유권이 나온다고 어떻게 납득하는가? 노동이 소유의 원천이라면, 이는 말하자면 소유권이 노동의 보수라는 것이다. 그런데 노동의 가치는 무엇인가? 그 교환이 소유권에 아주 기괴한 불평등을 가져오는 산물들의 공통 척도는 무엇인가? 소유권은 실질적 점유의 지속 시간에, 노동의 지속 시간에 한정되어야 한다고 말할 것인가? 그렇다면 소유권은 인적이며, 양도 불가능하고, 이전(상속) 가능하기를 그친다. 이는 더 이상 소유권이 아니다. 법률가들의 이론이 순수한 자의라면 법률가들[22]의 이론이 순수 일상 관행이라는 것이 온당하지 않은가? 게다가 그 이론은 그 결과들에 따라 아주 위험한 것으로 나타나서 환히 드러나자 거의 곧바로 버려졌다. 그중에서도 라인 강 저편의 법률가들은 거의 모두가 선점先占의 체계로 돌아왔다. 변증법의 나라에서 거의 믿기지 않는 일이다.

신비주의자들, 이성을 공포스럽게 여기는 이 사람들, 사실이 언제나 그 사실이 존재하는 것만으로 충분히 설명되고 정당화한다는 이 사람들의 횡설수설에 대해서는 무엇이라 말하는가? 그들은 말한다. 소유권은 사회적 자생성의 창조물, 섭리의 법칙, 그 효과라고. 섭리 앞에서 우리는 신에게서 나오는 모든 것 앞에서처럼 우리 자신을 낮추는 것밖에 할 일이 없다. 아! 인류가 자생적으로 원한 것, 높은 이의 허락을 받아서 성취하는 것보다 더 존경할 만하고, 더 공신력 있고, 더 필요하고, 더 거룩한 것을 발견할 수 있을까?

이처럼 종교는 그 나름대로 소유권을 성화聖化해 간다. 이 조짐에서 이 원리의 견고성이 약하다는 것을 판단할 수 있다. 그러나 사회, 다르게 말하면 섭리는 공공선의 관점에서만 소유권에 찬성할 수 있었다. 섭리에 대해 표해야할 존경심을 결여하지 않으면서 그때 그 배제 행위들이 어디서 나오는지를 묻는 것이 허락되는가? … 공공선이 절대로 소유권들의 평등을 요구하지 않는다 해도, 적어도 그것은 소유권자 쪽의 일정한 책임을 내포한다. 그리고 가난한자기 적선을 요구할 때 십일조를 달라고 하는 것이 주권자다. 그러므로 소유권자가 그 누구라도 결코 고려하지 않고 인정하지 않는 주인이면서 아무리 별 것 아닌 것에 대해서도 이를 나누어 가지는 것은 어디서 연유하는가?

이 모든 관점에서 소유권은 분별 불가능하다. 그리고 소유권을 공격한 자들은 그들의 비판이 조금도 효과가 없으리라는 것을 계산했을 수 있듯이 사람들이 그들에게 응답하지 않으리라는 것도 미리 확신할 수 있었다. 소유권은 사실로 존재한다. 그러나 이성은 소유권을 정죄한다. 여기서 실재와 관념을 어떻게 화해시키는가? 사실 안에 이성을 어떻게 통하게 할까? 이야말로 우리가 할 일로 남는 것이고 아무도 아직 명확하게 이해하지 못한 듯한 것이다. 그렇기는 하지만, 소유권이 그렇게 초라한 수단에 의해 옹호될 것인 한에서 소유권은 위험에 처할 것이다. 그리고 새롭고 더 위력 있는 사실이 소유권에 대립되지 않을 것인 한에서, 소유권에 대한 공격은 미미한 항의일 뿐일 것이고, 거지들을 불러 모으고 소유권자들을 성나게 하는 데만 좋을 것이다.

끝으로 새로운 논리의 도움으로 진행해 나가면서 다음과 같이 말하는 비판이 나왔다.

소유권은 사실상으로, 권리상으로, 본질적으로 모순이다. 그리고 소유권이 무언가인 것은 바로 이 이유 때문이다. 실제로,

소유권은 점유권이며, 동시에 배제의 권리다.

소유권은 노동의 대가이고, 노동의 부정이다.

소유권은 사회의 자생적 산물이고, 사회의 해체다.

소유권은 정의의 기관이고, 도둑질이다.

이 모든 것에서 어느 날 변형된 소유권이 적극적인, 완전한, 사회적이고 참된 관념일 것임이 결과로 나온다. 옛 소유권을 폐지할 소유권은 모두에게 똑같이 실질적이고 이롭게 될 것이다. 그리고 이를 증명하는 것은, 다시 한 번 말하지만 소유권이 모순이라는 것이다.

이 순간부터 소유권은 알려지기 시작했다. 소유권의 내적 본성은 베일이 벗겨졌고 그것의 미래는 예측되었다. 그럼에도 비판은 그 과업의 반을 충족하지 못했다고 말할 수 있었다. 소유권을 확정적으로 구성하기 위해서, 그로부터 그 배제적 특성을 빼내기 위해서, 그리고 그것에 종합적 형태를 부여하기 위해서 그 자체를 분석한 것으로 충분하지 않았고, 소유권은 그것의 한 특정한 계기일 뿐인 관념들의 질서, 그것을 둘러싸고 그 바깥에서는 소유권을 이해하기도, 영향을 끼치기도 불가능한 계열을 재발견할 필요가 있었다. 이 조건 없이는 소유권은 현상을 유지하면서 사실로서 공격 불가능하고, 관념으로서 분별 불가능한 채로 남는다. 그리고 이 현 상태에 반대해 착수된 모든 개혁은 사회와 관련해서 아마도 부모 살해가 아니라면 회피일 수밖에 없었다.

실제로 우리가 글을 쓰는 순간에 소유권은 여전히 우리의 과학에서는 우리의 경제적 관습에 대해서와 마찬가지로 법적 성격을 띤다고, 소유권 밖에서는 최근 시기에 사회주의에서 시도한 노력들에도 불구하고 아무것도 알지 못하고 아무것도 상상하지 못한다는 것, 법률학에서도 상공업에서도 쟁점을 발견하지 못한다는 것, 소유권이 파괴되고서 사회는 끝없는 조직 해체로 떨어진다는 것, 소유권을 그 이율배반적인 본성에서 알기를 배운 후에 우리는 소유권이 그 확정적 공식을 어떻게 실현할 것인지, 현 질서로부터 어떻게 세상에서 아무것도 우리에게 그 관념도 알려주지 않는 새로운 질서가 나올 것인지를 더 잘 알지 못한다는 것, 내가 말하노니 사람들은 이 모든 것을 생각하고서 오로지 이율배반의 장점에 의거해 어떻게 우리의 경험과 이성을 한꺼번에 고갈시키는 현 제도로부터 우리가 마찬가지로 관념들과 사실들을 결여하는 사회적 형태를 정하는 것에 도달할지를 질문한다는 것을 감히 성찰해보기 바란다.

이를 인식할 필요가 있다. 이율배반은 그 자체로 소유권인 것을 입증하면서 그 결론을 말했다. 그것은 그것을 넘어서 나갈 수 없다. 또 하나의 논리적 건축물이 필요하며, 소유권이 여러 항목들 중 하나일 뿐인 진행 대열을 발견하고 그 바깥에서는 소유권이 고립된 사실, 고독한 관념으로만 나타나서 언제나 상상이 불가능하고 척박한 채로 있는, 그러나 그 안에서는 소유권이 자기 자리를 다시 잡아서 그에 따라 그것의 진정한 형태가 조화롭고 참된 전체의 필수 부분이 되고, 그 부정적 특질들을 상실해 평등, 상호성, 책임, 질서의 긍정적 속성들을 다시 띠게 될 계열을 구성할 필요가 있다.

이처럼 우리가 화폐라는, 우리에게 고립되고 경제학자들의 책들에서 보조역할자도 없는 것으로 나타나는 이 사실, 이런 이유로 현재까지 설명이 불가능한 것으로 남은 이 사실의 역할과 철학적 의미를 우리가 발견하기를 원했을 때, 우리는 화폐가 그로부터 떨어진 하나의 고리라고 가정한 연쇄를 연구했고, 이 단순한 가설에 의거해 우리는 어려움 없이 화폐가 우리의 산물들 중 첫 번째 것으로서 그 가치는 사회적으로 구성되었으며, 이런 이유로 모든 다른 산물에 전형으로 소용된다는 것을 발견했다. 또한 이처럼 우리가 조세라는 또 하나의 고립된 사실, 정치경제학에서 아주 많은 아우성의 대상인 이것의 본성을 알고 그에 대해 하나의 이론을 만들 필요가 있을 때, 우리는 비생산적 노동자들, 즉 그 보수가 결코 교환에 의해 생겨나지 않고 다른 노동자들의 고용은 늘어나고 있는데 그 고용은 줄어들고 있는 노동자들을 유類로서 거기에 들어가게 해서 노동자들의 대가족을 완성하기만 하면 되었다.

마찬가지로 소유권의 충분한 이해에 도달하기 위해, 사회 질서에 대한 관념을 취득하기 위해 우리는 두 가지만 하면 된다. ⑴ 소유권이 그 부분을 이루는 모순들의 계열을 확정한다. ⑵ 일반적 방정식을 이용해 이 계열의 실증적 공식을 제시한다.

우리의 희망 사항이 우리를 속이지 않는다면, 우리는 곧 이 과업의 첫 번째 부분을 완수할 것이다. 소유권은 가치의 진자 운동을 확정하는 일반적 사실들 중 하나다. 그것은 노동 분업에서 시작해서 공동체로 끝이 나서 모든 가치들의 구성으로 해소되는 자생적 제도들의 긴 계열의 구성 부분이다. 벌써 우리도 경제적 모순들의 체계에서, 뒤집어 본 융단처럼 우리 미래 조직의 뒤집어 본 이미지를 보여줄 수 있을 것이다. 그래서 우리의 작품에 마지막 손질을 하고 문제의 두 번째 부분을 풀기 위해 우리는 말하자면 바로잡기를 실행하기만 하면 될 것이다.

그러므로 원리상, 모든 단독의 존재, 즉 분리되지 않거나 공모자가 없는 존재는 그 자체로 분별 불가능하다. 이는 정신과 물질과 같이, 모든 발현되지 않은, 혹은 같은 말이지만 계열별로 나누어지지 않은 본질들과 같이, 오성에 접근 불가능한 것, 정신에게는 감정, 신비로 해소되는 것이다. 벌써 논리가 우리로 하여금 믿게 강제하는 무한의 존재는 관찰이 그 존재를 확인해준 후에도 여전히 사람에게 마치 존재하지 않는 듯할 것이다. 그의 안에 있는 아무것도, 그의 밖에 있는 아무것도, 그가 그 근원이자 버팀목이 되지만 그것과 근본적으로 구분되는 영원도, 편재遍在도, 전능도, 무한의 과학도, 창조도, 진보하는 인류도, 집중과 고독에 종지부를 찍지 못해서, 그러한 존재는 영원히 미지로 남을 것이다. 그리고 이성이 이 점에서 우리에게 명하는 것이라고는 부정, 혹은 같은 말이지만 신앙이다.

그러므로 삼단논법, 귀납법, 이율배반, 계열은 지성의 완벽한 무기를 이룬다. 다른 어떤 변증법적 수단도 그 이상으로 발견될 것이 없다는 것은 알기가 쉽다.

삼단논법은, 말하자면 관념을 위에서 아래로 전개한다.

귀납법은 이를 아래에서 위로 재현한다.

이율배반은 이를 정면으로 그리고 측면으로 파악한다.

계열은 이를 추적하고 견고성과 깊이에서 이를 꿰뚫는다.

앎의 장場은 다른 차원들이 없어서 다른 방법이 없다. 이제부터 우리는 논리가 만들어졌고 상식이 조직되었다고 말할 수 있다. 그리고 노동의 조직은 상식의 조직의 불가피한 계係이므로 사회가 곧 그 확실하고 확정적인 구성에 도달하지 않는 것은 불가능하다.

. 소유권 확립의 원인들

소유권은 경제적 모순들의 연쇄에서 여덟 번째 서열을 차지한다. 이 점은 우리가 처음으로 확인할 것이다.

소유권의 기원은 선점에도, 노동에도 관계될 수 없다는 것이 증명된다. 이 견해들 중 첫 번째 것은 현상이 현상의 설명으로 주어지는 악순환일 뿐이다. 두 번째 것은 본질적으로 소유권에 파괴적이다. 노동을 지고의 조건으로 한다면, 소유권이 확립되는 것은 완전히 불가능하다. 소유권을 집단적 원망願望의 행위로 거슬러 올라가게 하는 이론에 관해 말하자면, 이는 이 원망의 동기들에 관해 침묵한다는 결함을 가진다. 그런데 정작 알아야할 것은 이런 동기들이다.

이 이론들이 별개로 볼 때 여전히 모순에밖에 도달하지 않지만, 그럼에도 그것들 각각이 일말의 진리를 포함한다는 것은 확실하다. 그리고 그것들을 고립시키는 대신에 세 이론 전체를 함께, 종합적으로 연구한다면 거기서 참된 이론, 말하자면 소유권의 존재 이유를 발견하게 될 것이라고도 추측할 수 있다.

그렇다. 그러므로 소유권은 참여와 공동체의 모든 관념을 배제하는 주권적, 실질적 점유에서 시작한다. 아니, 발현한다. 그렇다. 또한 이 점유는 그 합법적이고 공신력 있는 형태에서 노동 말고 다른 것이 아니다. 이것 없이 어떻게 사회가 소유권을 양도하고 존경하게 만드는 데 동의했겠는가? 그렇다. 끝으로 사회는 소유권을 원했으며, 세상의 모든 입법은 오직 소유권을 위해서만 행해졌다.

소유권은 점유에 의해, 즉 노동에 의해 확립되었다. 소유권의 보전을 위해서가 아니라 노동자들의 교육을 위해 이를 자주 환기할 필요가 있다. 노동은 잠재성으로 소유권을 포함했고, 그 법칙들의 진화를 통해 소유권을 발생시켜야 했다. 노동이 산업들의 분리, 다음은 노동자들의 위계, 다음은 경쟁, 독점, 공안 등을 낳은 것처럼 말이다. 이 모든 이율배반은 노동의 이어지는 지위들과 같은 명목에서 노동에 의해 그 영원한 길 위에 심어진 푯말들로서, 그 종합적 결합으로써 사람들의 진정한 권리를 정식화할 운명을 띤 것이다. 그러나 사실은 권리가 아니다. 소유권은 점유와 노동의 자연적 산물로서 예상과 침해의 원리였다. 그러므로 그것은 사회에서 인정되고 합법화될 필요가 있었다. 노동에 의한 점유와 법적 강제라는 이 두 요소는 법학자들이 그들의 주석에서 까닭 없이 분리한 것으로서, 소유권을 구성하기 위해 결합되었다. 그런데 이 양도의 섭리적 동기들, 이것이 경제 체제에서 어떤 역할을 하는지를 아는 것이 우리에게는 중요하다. 그런 것이 이 절의 목표일 것이다.

우선 소유권을 확립하기 위해 사회적 동의가 필요했음을 증명하자.

소유권이 국가에 의해 인정되고 합법화되지 않는 한, 그것은 사회 외적인 것으로 남는다. 그것은 아버지의 인정, 호적부 등록, 그리고 세례식에 의해서만 가족, 도시, 그리고 교회의 구성원이 된다고 여겨지는 어린이와 같은 위치에 있다. 이런 형식들이 없으면 어린이는 동물들의 증식과 같다. 이는 쓸모없는 구성원, 비열하고 예속된, 고려를 받을 자격이 없는 영혼이다. 이는 사생아다. 이처럼 사회적 인정은 소유권에 필요했으며, 모든 소유권은 원시적 공동체를 내포한다. 이 인정 없이 소유권은 단순한 점유로 남고 아마도 처음 온 자에게 논박을 당하는 채로 있을 것이다.

칸트[23]는 이렇게 말한다. “어느 사물에 대한 권리는 내가 다른 모든 사람들과 (원시적인 혹은 차후의) 보유 공동체 안에 있는 물건의 사적사용의 권리다. 왜냐하면 이 공동 소유는 내가 다른 모든 소유자에게 그 물건의 사적사용을 금지할 수 있는 유일한 조건이기 때문이다. 이 소유의 가상이 없이는, 실제로 그 물건의 소유자가 아닌 내가 어떻게 그것을 소유하고, 이용하는 자들에 의해 침해를 당할 수 있는지 상상하기가 불가능할 것이기 때문이다. 내 개인적 혹은 일방적 심판은 타인에게 그 물건의 사용을 스스로 금하게 의무화할 수 없다. 그러므로 그것은 공동 소유로 결합된 심판들에 의해서만 의무화될 수 있다. 그렇지 않다면 마치 사물이 나에 대해 의무를 진 듯이 사물에게 있는 권리를 상정할 필요에 처할 것이고 그로부터 결국 이 사물의 모든 소유자에 대한 권리가 도출될 것이다. 정말로 터무니없는 상상이다.”

이와 같이 칸트에 따르면 소유권, 즉 점유의 합법성은 본래 공동 소유를 내포하는 국가의 동의에서 나온다. 그렇지 않을 수 없다고 칸트는 말한다. 그러므로 소유권자가 자신의 권리를 국가에 감히 대립시킬 때마다 국가는 그 소유권자에게 협약을 환기시켜 언제나 이런 최후통첩으로 분쟁을 끝낼 수 있다. 내 주권을 인정하고 공익이 주장하는 바에 굴종하든지, 아니면 나는 당신의 소유권이 법의 보호 아래 위치하기를 중단했다고 선언하고 그것에서 내 보호를 철회한다.

이로부터 입법자의 정신에서 소유권이라는 제도는 신용, 상업, 독점 제도와 마찬가지로 균형을 목적으로 만들어진 것이라는 말이 나온다. 이는 우선 소유권을 조직의 요소들 중에 배치하고, 그것을 가치들의 구성의 일반적 수단들 중 하나로 지적하는 것이다. “어느 사물에 대한 권리는 내가 다른 모든 사람들과 보유 공동체 안에 있는 물건의 사적 사용의 권리다”라고 칸트가 말했다. 그러므로 이 원리 덕분에 소유권을 박탈당한 모든 사람은 모두의 권리의 수호자인 공동체에 이를 호소할 수 있고 호소해야 한다. 그 결과로 사람들이 말한 것처럼, 섭리의 시각에서는 조건들은 균등해야 하는 것이 된다.

이는 리드(Reid)와 똑같이 칸트도 다음의 구절에서 명확히 이해하고 표현한 것이다. “지금 하나의 기금을 소유할 능력은 어디까지 확장하는지를 묻는다. 그것을 자신의 잠재성 안에 지닐 능력만큼 멀리까지, 즉 그것을 전유할 수 있는 자가 그것을 수호할 수 있는 만큼 멀리까지다. 마치 그 기금이, 당신이 나를 지킬 수 없다면 당신은 더 이상 나에게 명령할 수 없다고 말하는 것과 마찬가지다.”

그렇기는 하지만 나는 이 구절이 소유권에 선행하는 소유에 대해 이해되어야 할 말인지 확신하지 못한다. 그 취득은 사회 안에서만 결정적이라고 칸트가 덧붙였기 때문이다. 자연 상태에서는 그것은 임시일 뿐이다. 그러므로 이로부터 내릴 수 있는 결론은, 칸트의 생각에서 취득은 일단 사회적 동의에 의해 결정적이 된 후 사회적 보호 아래서 무한히 증대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는 개인이 홀로 자기 소유권을 지키는 곳인 자연 상태에서는 일어날 수 없는 일이다.

어떻든지, 칸트의 원칙으로부터 적어도 자연 상태에서 취득은 각 가족에 대해 그 가족이 지킬 수 있는 모든 것으로, 그 가족이 경작할 수 있는 것으로 확장한다고, 혹은 가족 수에 따라 경작 가능한 표면을 나눈 부분과 동등하다고 하는 것이 나온다. 취득분이 이 몫을 넘어선다면 곧바로 그 가족이 수호자를 보유하는 것보다 더 많은 적들을 만나니 말이다. 그런데 자연 상태에서 이처럼 제한된 이 취득은 아직은 임시적일 뿐이므로, 국가는 그 임시성을 중단시켜 그들의 취득을 결정적으로 만들어 취득자들의 상호 적대성을 근절하기를 원했다. 그러므로 평등은 소유권의 형성에서 비밀의 생각, 입법자의 주요 목표였다. 이 체계에서 유일하게 합당한 것, 유일하게 받아들일 수 있는 것은 내 소유권의 보장책이 내 이웃의 소유권이라는 것이다. 나는 더 이상 대여자와 함께 ‘나는 소유하므로 소유한다(possideo quia possideo)’고 말하지 않으며, 철학자와 함께 ‘나는 당신이 소유하므로 소유한다(possideo quia possides)’고 말한다.

우리는 그에 따라서 소유권에 의한 평등이 신용, 독점, 경쟁, 혹은 다른 모든 경제적 범주에 의한 평등과 똑같이 괴상하다는 것, 그리고 이 점에서 섭리의 화신은 소유권으로부터 가장 귀중한, 그리고 가장 예기치 않던 결실들을 따내면서도 그렇다고 해서 그의 희망에서 덜 속은 것은 아니며, 불가능한 것에 집착했다는 것을 보게 될 것이다. 소유권은 경제적 진화에서 그에 앞서는 모든 계기들보다 더 많은 진리도, 적은 진리도 포함하지 않는다. 그것들처럼 소유권은 같은 비율로 행복의 발전과 빈곤의 증대에 기여한다. 소유권은 질서의 형태가 아니며, 질서와 더불어 변화하고 사라져야 한다. 철학자들의 확실성에 관한 체계들은 그들의 통찰에 대한 논리를 풍성하게 한 후에 반란을 일으키고 상식의 결론들 속에서 사라진다.

그러나 끝으로 소유권의 성립을 주관한 생각은 훌륭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성립을 정당화하는 것, 소유권이 부를 섬기는 그것, 소유권을 가져온 적극적이고 결정적인 이유들이 무엇인지를 탐구해야 한다.

우선 경제적 운동의 일반적 특성을 환기해 보자.

제1기는 산업들을 분리해 땅 위에 노동을 시작하고, 자연의 박대를 그치고 사람을 그의 원래의 빈곤에서 빼내고, 그의 움직이지 않는 능력을 적극적이고 활동하는 능력으로 전화하는 것을 목표로 삼았다. 이런 능력들은 그에게 그만한 행복의 수단이었다. 우주의 창조에서처럼 무한의 힘이 나누어졌다. 이처럼 사회를 창조하기 위해 섭리의 화신이 노동을 나누었다. 이 분업에 따라 평등이 복수성 내의 동일성으로서가 아니라 다양성 내의 동가성으로서 발현하기 시작한다. 사회적 유기체가 원리로 구성되고, 씨앗이 생기를 주는 충동을 받았고, 집단으로서 사람이 존재하게 된다.

그러나 노동 분업은 일반화된 기능들과 분할된 기능들을 전제로 한다. 이로부터 노동자들 간에 조건의 불평등이 나온다. 어떤 이들은 낮아지고 다른 이들은 높아진다. 그리고 제1기부터 산업적 적대 관계가 원시적 공동체를 대체한다.

차후의 모든 진화는 한편 기능들의 균형을 가져오고, 다른 한편 언제나 산업과 행복을 발달시키는 경향을 띤다. 반대로 섭리적 노력이 어떻게 언제나 빈곤과 부, 무능과 과학의 동등하고 대립하는 진보에 도달하는지를 우리는 보아 왔다. 제2기에는 자본과 임금 제도, 이기적이고 해로운 분배가 나타난다. 제3기에는 악이 상업 전쟁에 의해 심각해진다. 제4기에는 악이 독점에 의해 일반화된다. 제5기에는 그것이 국가의 성별聖別을 받는다. 국제무역과 신용은 그들의 차례에서 적대 관계에 새로운 도약을 일으킨다. 나중에 자본의 생산성이라는 허구가 여론의 위력에 의해 거의 실재가 되어 새로운 위험이 사회를 위협한다. 이는 자본의 범람에 의한 노동 자체의 부정인 것이다. 이론적으로 소유권이 탄생하는 것은 이 순간, 이 극단적 상황으로부터다. 그러한 것이 우리가 잘 알아야 할 이행이다.

현재까지 경제적 진보의 궁극적 목적을 사상捨象하고 이를 단지 그 자체로 고려하자면, 사회가 행하는 모든 것은 독점을 위해서, 그리고 독점을 반대해서 번갈아 가며 행한다. 독점은 그 둘레로 다양한 경제적 요소들이 움직이고 순환하는 회전축이었다. 그렇기는 하지만 그 존재의 필연성에도 불구하고, 그것이 자신의 발달을 위해 행한 무수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독점을 공언하는 보편적 동의의 권위에도 불구하고 독점은 아직 임시적일 뿐이다. 칸트가 말하듯이 그것은 권리 보유자가 그것을 활용하고 수호할 줄 아는 만큼만 지속할 것으로 여겨진다. 그것이 때로는 종신의, 그러나 판매 가능하지 않은 직업들에서처럼 죽음에 의해 정당한 권리를 갖고서 중단되기도 하고, 때로는 특허증에서처럼 제한된 시간으로 축소되기도 하고, 때로는 비행사非行使에 의해 상실되기도 하는데, 이는 아직도 아랍인들에게서 통용되는 연별 소유와 같은 시효의 이론들을 일으킨 것이다. 다른 때에는 독점은 군사적 토대 위에서 건축할 허가 등에서와 같이 주권자의 의지로 취소할 수 있다. 이처럼 독점은 실질이 없는 형태일 뿐이다. 독점은 사람에게 매달리며, 물질을 취하지 않는다. 이는 물론 생산하고 판매할 배타적 특권이며, 아직은 노동 수단들의 양도, 토지의 양도가 아니다. 독점은 이윤의 고려로만 사람의 관심을 끄는 일종의 임대료다. 독점자는 어떠한 산업에도, 어떠한 노동 수단에도, 어떠한 거주지에도 집착하지 않는다. 그는 세계주의자이며, 만능이다. 그가 돈을 버는 조건에서는 그에게 중요한 것은 별로 없다. 그의 영혼은 지평선의 어느 점에도, 물질의 어느 입자에도 얽매이지 않는다. 그에게 재산의 수단으로서 독점을 부여한 사회가 그를 위해 이 독점을 생의 필연으로 만들지 않는 한 그의 존재는 모호한 상태로 있다.

그런데, 독점은 그 자체로 아주 불안정하고, 모든 침입에, 경쟁의 모든 모욕에 노출되고, 국가에 의해 고통을 받고, 신용에 의해 압박을 받고 독점자의 가슴에 조금도 걸리지 않아서 끊임없이 투기의 작용 아래 비인격화하는 경향을 띤다. 그래서 인류는 끊임없이 자본의 일반적 철수에 의한 금융 폭풍우에 넘겨져서 노동 자체로부터 벗어나고, 그 행진에서 퇴보하기가 쉽다.

실제로 독점은 신용의 성립 이전, 은행의 지배 이전에 무엇이었나? 이득의 특권이었고, 주권이 아니었다. 수단에 대한 특권이라기보다 산물에 대한 특권이었다. 독점자는 그가 거주하는 땅, 그러나 그가 실질적으로 소유하지 않는 땅에는 낯선 사람으로 남았다. 그가 자신의 개발 이용을 배가하고, 그의 공장들을 확장하고, 땅에 땅을 더해도 소용이 없었다. 그는 언제나 주인이라기보다 관리인이었다. 그는 사물에 결코 자신의 특성을 새겨 넣지 않았다. 그는 사물을 결코 자신의 형상대로 만들지 않았다. 그는 그것들을 그것들 자체로 좋아하지 않았다. 오직 그것들이 그에게 주어야했던 가치로만 좋아했다. 한마디로 그는 독점을 목적으로서가 아니라 수단으로서 원한 것이다.

신용 기관들이 발달한 후에는 독점의 조건은 훨씬 더 나쁘다.

연합시키는 것이 중요했던 생산자들은 연합을 이루는 데 완전히 무능하게 되었다. 그들은 노동의 취미와 정신을 상실했다. 이는 노름꾼들이다. 경쟁의 열광에 그들은 룰렛의 열정을 결합한다. 은행 지배는 그들의 특성과 관념을 바꾸었다. 옛날에 그들은 서로 간에 주인과 임금 수령자로, 봉신과 봉건 군주로 살았다. 지금 그들은 차입자와 대금업자, 따는 자와 잃는 자로서만 자신을 안다. 노동은 신용의 입김에서 사라졌다. 실질 가치는 허구적 가치 앞에서 자취를 감추고, 생산은 투기 앞에서 자취를 감춘다. 토지, 자본, 재능, 노동 자체는, 일정 부분 아직도 노동과 만나지만, 판돈으로 소용된다. 특권들, 독점들, 공무들, 산업에 대해 사람들은 더는 염려하지 않는다. 사람들은 부를 노동에 요구하지 않고, 주사위를 던지는 것에서 그것을 기다린다. 신용이 고정된 기초를 필요로 한다고 이론은 말했다. 그리고 신용이 모든 것을 뒤흔든 것은 바로 다음과 같은 것이다. 그것은 담보에만 등을 기댄다고 이론은 덧붙였다. 그리고 이 담보물들을 운용한다. 그것은 보증 수단들을 찾는다. 그리고 실물에서밖에 보증 수단을 보고 싶지 않은 이론에도 불구하고 담보를 통하게 만드는 것은 사람이고, 사람이 없다면 담보는 절대로 효력이 없고 무효일 것이니 신용의 담보는 언제나 사람이므로, 사람이 실물에 더 이상 집착하지 않으면 사람이라는 보증 수단과 함께 담보는 사라지고 신용은 허구가 아니라는 것을 자랑해도 소용없던 그것인 채로 남게 된다.

신용은 한마디로 자본을 배내지 않을 수 없어 결국 사람 자체를 사회와 자연으로부터 빼냈다. 이 보편적 이상주의에서 사람은 더 이상 흙에 집착하지 않는다. 그는 보이지 않는 권능에 의해 공중에 떠 있다. 땅은 주민들로 덮여 있다. 어떤 이들은 풍요 속에 헤엄치고, 다른 이들은 빈곤으로 끔찍한 모습을 보인다. 그리고 땅은 누구에게도 소유되지 않는다. 당을 경멸하는 주인들과 땅을 증오하는 봉신들밖에 없다. 왜냐하면 그들은 자기들을 위해 땅을 경작하지 않고 아무도 모르는 표, 그들이 결코 보지 못할 표, 땅이 자신에게 속한다는 것을 의심하지도 않으면서 아마도 땅을 쳐다보지도 않고서 지나갈 표를 지닌 자들을 위해 경작하기 때문이다. 토지의 보유자, 즉 지대 수령 권리증을 지닌 소유자는 고물상과 닮았다. 그는 자기 서류 가방에 소작지, 목초지, 풍부한 수확, 탁월한 포도밭을 가지고 있다. 그에게 무슨 상관인가! 그는 모든 것을 10상팀을 더 받으면 내놓을 채비가 되어 있다. 아침에 그의 재물들을 인수한 것처럼 저녁이면 그것들을 애착도 후회도 없이 내놓을 것이다.

이처럼 자본의 생산성이라는 허구에 의해 신용은 부富라는 허구에 도달했다. 토지는 더 이상 인류의 작업장이 아니다. 그것은 은행이다. 그리고 이 은행이 끊임없이 새로운 희생자들을 만들어 내서 이들이 노름에서 잃은 소득을 노동에 다시 요구하지 않을 수 없게 되고, 이로 인해 자본의 실물성을 지탱하지 않을 수 없게 되는 일이 일어나지 않는 것이 가능하다면, 파산이 이따금 이 지옥과 같은 난장판을 중단시키러 찾아오지 않는 것이 가능하다면, 허구가 자신의 증서를 배증하는 동안 담보의 가치는 항상 낮아져서 실물적 부는 무가 될 것이며, 등가된 부는 무한히 증가할 것이다.

그러나 사회는 퇴보할 수 없다. 그러므로 멸망하지 않으려거든 독점을 구해낼 필요가 있다. 이상적 향락에 빠질 채비가 된 인간 개체성을 구할 필요가 있다. 한마디로 독점을 공고화하고 확립할 필요가 있다. 독점은 말하자면 독신이었다. “나는 그가 결혼하기를 원한다”고 사회가 말한다. 그는 토지의 신하, 자본의 착취자였다. 나는 그가 토지와 자본의 주인이고 신랑이 되기를 원한다. 독점은 개인에 머물렀다. 이제부터는 그는 온 족속에 뻗어 갈 것이다. 그에 의해 인류는 영웅들과 거물들만 지녔다. 장래에는 왕조들을 지닐 것이다. 독점이 가족으로 받아들여진다면 사람은 자기 토지에, 자기 산업에, 마치 자기 아내와 자녀에 집착하듯 집착할 것이며, 사람과 자연은 영원한 애착으로 결합될 것이다.

신용이 사회에 만들어 준 조건은 실제로 상상할 수 있는 가장 역겨운 것, 사람이 가장 많이 남용하는 동시에 가장 적게 소유할 수 있는 조건이었다. 그런데 섭리의 견해에서는, 인류와 지구의 운명에서 사람이 자신의 작업 도구, 일반적으로 토지로 대표되는 도구에 대한 보전과 애착의 정신으로 생기를 띠는 것이 좋았다. 왜냐하면 사람에게 중요한 것은 단지 토지를 착취하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경작하고, 꾸미고, 사랑하는 것이다. 그런데 고갈시키고 더럽히는 허구에 대해 강화시키고 고결하게 하는 실물을 대립시켜, 독점을 소유권으로, 내연 관계를 결혼으로, 그녀를 그대의 것으로 선언하는 것propriamque dicabo으로 바꾸지 않고 달리 어떻게 이 목적을 달성할 것인가?

그러므로 독점에서 준비되는 혁명은 특히나 토지의 독점을 염두에 둔다. 왜냐하면, 모든 소유권들이 구성되는 것은 토지 독점의 예에 따른 것이고, 토지 소유권의 모델을 따른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전유는 조건부이고, 잠정적이고, 종신인 것에서 영구적이고, 이전 가능하고, 절대적인 것으로 될 것이다. 그리고 소유권의 불가침성을 더 잘 수호하기 위해 재물들은 미래에는 동산과 부동산으로 구별될 것이다. 그리고 그 이전, 양도, 서로 간의 수탈을 규율하기 위해 법률들이 만들어질 것이다.

요컨대 소유지에 의한, 즉 사람의 토지에 대한 극히 긴밀한 결합에 의한 담보의 형성, 독점의 영속성과 이전 가능성에 의한 가족의 형성, 끝으로 재산들 간의 평등 원칙으로서 지대의 형성, 이런 것들이 집단적 이성에서 소유권 성립을 결정한 동기들이다.

⑴ 신용은 실물 보증을 요구한다. 모든 경제학자들은 이 점에서 의견이 일치한다. 이로부터 신용을 조직하기 위해서는 담보를 형성할 필요가 나온다.

그러나 실물 보증은 동시에 인적 보증이 아니라면 무효다. 나는 이를 충분히 설명했다고 생각한다. 이로부터 또한 신용을 발달시키려면 독점을 소유권으로 전환할 필요성이 나온다. 경제적 진화의 순서에서 소유권은 신용의 사전 조건임에도 불구하고, 소유권이 신용으로부터 탄생한다. 이는 담보가 차입의 전제 조건임에도 불구하고 담보가 차입에 따라 나오는 것과 마찬가지다. 이는 오지에 씨가 자기 책의 유감스럽게도 너무 짧은 결론에서 다음과 같이 의견을 표명할 때 내게 말하고자 했던 것으로 보이는 것이다.

“자유 소유권 없이는 담보는 없다. 소유권 없이는 실물 신용은 반드시 없다. … 신용의 작동 가운데 살아가는 여러 민족들은 그들의 담보, 신용의 기초를 이루는 소득의 종류의 형성에서 다양한 시련을 겪는다. …”

실제로 특권을 지닌 자가 차입을 하는 과정에서 그의 사업체를 담보로 삼게 되기 전까지는, 그를 자기 명령 아래 일하는 노동자들의 고용주, 동업자들과 자기 자신의 이름으로 그들의 이익을 위해서, 그리고 자신의 재산을 위해서 활동하는 회사의 경영자로만 볼 수 있다. 독점권은 자본 이자와 이익에 대한 특권과 함께 그의 인격에 수여된다. 그러나 영속성과 이전 가능성의 보장은 없으며, 사업에 언제나 적극적으로, 그리고 몸소 참여한다는 조건에서 수여된다. 그에게 물건에 대한 권리는완벽하게 존재하지 않는다. 사업주는 적어도 양심상 유죄가 되지 않고는 일정한 공동체적 특성을 여전히 띤 소재를 위험에 처하게 하고 침해할 수 없을 것이다. 이는 그가 여전히 사업상의 특권만을 누리며 결코 소유권을 지니지 않기 때문이다. 끝으로 독점자는 일종의 수임자였다. 신용의 필요성이 그를 왕으로 만든다.

실제로 특권 보유자가 생산 수단에 담보를 설정함으로써 작은 공화국의 반장, 전권 공사의 자격으로서만 행동하는 것이 가능했는가? 확실히 그렇지 않다. 차입자에게 부과되는 그러한 조건은 그를 그의 하급자에게 종속시키는 것이니 그의 이득의 축소였을 것이다. 그것은 사회 계약의 해소, 둘째 국면으로의 퇴보였던 것이다.

그러므로 사회가 신용에 의해 어쩔 수 없이 독점자에게 그의 독점권을 담보로 차입할 권리를 그의 노동하는 동료들에 대한 고려 없이 인정해주는 것만으로 그를 소유권자로 만들었다. 신용이 상업의 전제이고, 독점이 경쟁의 전제인 것처럼 소유권은 신용의 전제다. 실무에서는 이 모든 것들은 불가분이고 동시적이다. 그러나 이론에서는 그것들은 구별이 되고 계기繼起하는 것이다. 그리고 분업이 거의 언제나, 그리고 거의 필연적으로 기계의 사용을 가정하는 것처럼 독점이 거의 언제나, 그리고 거의 필연적으로 소유권을 수반함에도 불구하고, 기계가 노동 분업이 아니듯이 소유권은 독점이 아니다.

개인에게처럼 사회에도 이 새로운 장치로부터 심각한 결과가 초래될 수밖에 없었다.

우선, 불안정한 자격을 영구적 권리로 바꾸어서 사회는 그 근면성에 대한 더 진지하고 정신적인 집착에, 행복에 대한 더 심오하고 사려 깊은 애착에, 다라서 이익에 대한 더 적은 악착스러움, 더 심오한 인도적 감정, 상속지에 대한 숭배 형태인 고향 땅의 시가詩歌 등, 미미한 노동자들에게 확장되어 모든 세대를 집결시키고 조국을 이루는 것들에 소유권자 측에서부터 의존해야 했으며, 실제로 의존했다. 조국은 소유권에 그 기원을 둔다. 이처럼 뒤이어 출현한 공산주의자들은 소유권을 파괴함으로써 온 힘을 다해 경제학자들이 자유무역으로써 그렇게 하는 것과 같이 종족들, 언어, 기후의 차이를 파괴하려고 애쓴다. 공산주의자들이나 경제학자들이나 모두 민족도 조국도 더 이상 원하지 않는다. 이처럼 배타적인 두 종파는 그들의 적대와 증오에도 불구하고 근본에서는 언제나 일치한다. 의견 상의 적대는 희극일 뿐이다.

그러므로 나는 사회가 소유권자에게 독점권을 영속적으로 보장해 줌으로써 동시에 프롤레타리아의 안전 보장에 노력한다고 말한다. 자본을 소유자의 실체 자체로 만들어서, 사회는 그와 함게, 그리고 그를 위해 노동하는 모든 이들을 그가 더 이상 동료로 간주하지 않고 자녀로 간주할 것을 기약한다. 자녀들 말이다! 이는 통속 언어로 주인이 그의 명령을 받는 자들에게 부여하는 이름이다. 원시 언어들에서는 그것은 각 민족의 공통 명칭이었다. 이스라엘의 자녀들, 미스라임의 자녀들, 아수르의 자녀들이 곧 그런 것이다. 소유권자는 선량한 가장으로서 이와 같이 모두의 재물을 관리하는 위치에 있었다. 사적 이익은 사회적 이익과 혼동되었다. 모든 것을 말하자면 사회는 소유권을 반포해 가부장제를 조직하고 기품 있게 만들었다고 믿었다. 세습이 되고서야 이는 매각하고 교환할 능력에 의해 변경되어 안정성의 새로운 보장이 되었다. 소유권의 최고 표현인 그러한 세습 군주제는 선거의 투쟁을 배제해 내부적으로 내전을 막았고 외부적으로 그 민족을 인격화했다.

개인의 측면에서는 개선은 덜 눈에 띄었다.

소유권에 의해 사람은 확정적으로 그의 소유지를 소유하고, 그 땅의 주인임을 선언한다. 의식의 확실성, 심오한 사항들에 관한 이론에서 보았듯이 자아가 도약해 세상을 포괄한다. 그리고 사람과 자연의 이 일치에서, 이런 종류의 자기 자신의 양도에서 그의 인격은 약해지기는커녕 기력을 배가한다. 아무도 소유권자보다 더 성격이 강인하고 더 예지력이 있지 않다. 영혼의 배출로 정의할 수 있는, 소유에 의해 증대하며, 흘러나올수록 더욱 넘치는 사랑처럼 소유권은 인간 존재에게 보탬이 되며, 그를 힘과 존엄성에서 높여준다. 부자, 귀족, 거물, 소유권자, 주인님 혹은 마님sire, 이 모든 이름은 동의어다. 사랑에서처럼 소유권에서도 소유하기와 소유되기, 능동과 피동은 언제나 같은 것을 표현할 뿐이다. 하나는 다른 하나 없이 가능하지 않으며, 사람이 그때까지는 일방적 의무에 묶여 있었으나 이제 그가 자연과 더불어 체결해 온 쌍무적 계약에 매혹되어 그 자신의 모든 것, 그리고 그 자신의 값어치를 느끼고 존재의 충만을 즐기는 것은 오직 이 호혜성에 의해서다. 그리고 그러한 것이 사람의 가슴 안에서 소유권이 수행하는 혁명이며, 그의 애착을 물질화하기는커녕 그것을 영화靈化하는 혁명이다. 그가 순소유권을 용익권과, 특출한 초월적 권한을 단순 소유와 구분하기를 배우는 것은 이때다. 그리고 독점이 도달할 수 없던 이 구별은 인류의 해방을 향한, 그리고 영혼과 신체를 한꺼번에 억압하는 빈약한 재물의 공동체보다는 의지들의 결합이고, 원리들의 일치인 연합을 향한 한 걸음을 더 내딛는 것이다.

소유권의 실험은 행해졌다. 소유권을 부정하려면 역사 전체를 거짓이라고 반박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우리는 신용에 대해 말하면서, 프랑스 혁명은 농지법을 위한 봉기였을 뿐이라고 말했다. 그런데 근본적으로 농지법은 소유권의 수여가 아니고 무엇인가? 자격 없고 무능하게 된 두 카스트 대신 그 자리에 인민을 소유권자로 만들어서 민족은 엄청난 재원을 마련했는데, 이는 그 민족에게 차례로 승리의 지출을 보조하고 실패의 비용을 지불할 수 있게 해주었다. 오늘날 우리 사회의 도덕을 지탱하고, 투기 거래가 야기하는 끊임없는 해체에 제동을 거는 것은 여전히 소유권이다. 상인, 산업가, 자본가 자신은 언제나 소유권을 염두에 둔다. 모두가 경쟁과 독점의 피로에서 쉬기를 열망하는 것은 소유권 안에서다.

⑵ 그러나 소유권의 심오한 의미가 발견되는 것은 특히 가족 안에서다. 가족과 소유권은 서로에게 기대며 그들을 하나로 묶는 관계에 의해서만 양측 다 의미와 가치를 가지면서 병진한다.

소유권과 함께 가족의 역할이 시작된다. 살림은 사람들이 이를 우스운 것으로 만들려고 노력해도 소용이 없는 것으로, 아주 이상적인 것인데, 이 살림이 여성의 왕국이고, 가족의 기념비다. 살림을 제거해보라. 부부 사이의 끌림의 중심인 이 가정의 돌을 빼내 보라. 남녀 쌍들만 남고 가족은 더 이상 없다. 대도시에서 노동계급이 점점 주거의 불안정, 살림의 쓸모없음, 소유권의 결여로 내연 관계와 방탕한 생활로 추락하는 것을 보라! 아무것도 소유하지 않았으며, 아무것에도 집착하지 않고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존재들은 아무것도 보장할 수가 없어서 결혼을 해도 소용없다. 아무것도 없이 약혼하는 것보다 약혼하지 않는 편이 낫다. 그래서 노동계급은 야비함에 처할 운명이다. 이는 중세에 영주의 초야권이 표현한 것이고, 로마인들이 프롤레타리아의 결혼을 금지한 일이 표현한 것이다.

그런데 주위 사회와 관련해서 살림살이는 소유권의 기초이자 요새가 아니라면 무엇인가? 살림은 처녀가 꿈꾸는 첫 번째 것이다. 그토록 끌림에 대해 말하면서 살림을 폐지하기를 원하는 자들은 여성의 본능의 이런 타락을 잘 설명해야 할 것이다. 나로서는 생각하면 할수록 가족과 살림 밖에서는 여성의 운명을 더욱 고려할 수가 없다. 유녀遊女냐 살림살이하는 여자냐(여종 말고 살림을 하는 여자 말이다). 나는 그 중간을 알지 못한다. 그러니 이 양자택일이 무슨 그렇게 굴욕적인 면을 가지는가? 살림의 운영, 소비와 저축에 관련된 모든 것의 책임을 진 여성의 역할이 남성의 역할, 작업장의 지휘, 즉 생산과 교환의 다스림을 고유한 기능으로 삼는 그 역할보다 열등한가?

남자와 여자는 노동의 두 구성 원리로서 서로에게 필요하다. 결혼은 그 해소 불가능한 이원성에서 경제적 이원론, 주지하듯이 소비와 생산이라는 일반적 용어들로 표현되는 이원론의 화신이다. 양성의 적성들, 한쪽은 노동, 다른 쪽은 지출인 적성들이 규율되어 온 것은 이런 관점에서다. 그리고 양쪽 중 한쪽이 자신의 의무를 게을리 하는 결합에 화 있을진저! 부부가 서로에게 약속한 행복은 비애와 고통으로 변할 것이다. 그들 스스로를 탓해야 할 것이다!

여자들만 존재한다면, 그들은 멧비둘기들 무리처럼 함께 살아갈 것이다. 남자들만 있다면, 그들은 독점 위로 솟아오르고 투기 거래를 포기할 아무런 이유도 가지지 않을 것이다. 그들 모두가 주인이든 고용자이든 노름 탁자에 앉아 있거나 멍에를 메고 억눌린 것을 보게 될 것이다. 그러나 사람은 남자와 여자로 창조되었다. 이로부터 살림과 소유권의 필요성이 나온다. 양성이 결합하도록 하라. 이 신비로운 결합으로부터, 모든 인간 제도들 중 가장 놀라운 것으로부터 곧바로 상상할 수 없는 기적에 의해 소유권, 공동의 상속지를 개인 주권들로 나누는 일이 생겨난다.

살림, 이야말로 그러므로 모든 여성에게는 경제 질서에서 재화들 중 가장 바람직한 것이다. 소유권, 작업장, 자영 노동, 이야말로 여성과 함께 모든 남성이 가장 많이 바라는 것이다. 사랑과 결혼, 노동과 살림, 소유권과 가정생활, 독자께서 잘 알 수 있게 여기서 이 말을 감히 보충해주면 좋겠다. 이 모든 말들은 등가이고, 이 모든 관념은 서로에게 호소하며 철학자에게는 하나의 체계 전체를 계시해주는 것처럼 미래의 가족을 이룰 사람들을 위해 행복의 장기적 전망을 창조해준다.

이 모두에 관해 인류는 만장일치를 이룬다. 그렇지만 사회주의는 예외다. 사회주의만이 그 관념들의 물결 중에서 인류의 만장일치에 항거한다. 사회주의는 살림이 너무 비용이 많이 들기 때문에 이를 폐지하기를 원한다. 가족이 조국에 손해를 끼치므로 이를 폐지하기를 원한다. 소유권이 국가에 손해를 끼치므로 이를 폐지하기를 원한다. 사회주의는 여성의 역할을 변화시키기를 원한다. 사회가 여성에게 확립해준 여왕으로부터 코티토 여신의 무녀를 만들고자 한다. 나는 이와 관련해서 사회주의자들의 관념에 대한 직접 토론에 들어가지 않을 것이다. 사회주의는 연합에 관해서처럼 결혼에 관해서 아무런 관념도 가지지 않는다. 그리고 그의 모든 비판은 아주 공공연한 무지의 실토, 권위도 위상도 없는 논거 제시의 종류로 끝난다.

실제로 사회주의자들이 알려진 수단들의 도움으로 각 살림에 안락함과 심지어 사치를 제공하는 것이 가능하다고 믿는다면 살림에 반대해 들고일어나지 않으리라는 것, 그들이 시민적 감정과 가정적 애착을 일치시킬 수 있다면 가족을 정죄하지 않으리라는 것, 그들이 아무것도 아닌 것인 고동의 부만이 아니라 완전히 다른 것인 보편적 부를 일구는 비밀을 지닌다면 그들은 시민들이 공동생활과 마찬가지로 개별 생활도 하도록 놔둘 것이고 살림에 관한 논쟁으로 공중을 피곤하게 하지 않으리라는 것은 명백하지 않은가? 사회주의자들의 실토로부터 결혼, 가족, 소유권은 행복에 강력하게 기여하는 것이다. 그들이 해야 할 유일한 비난은 그들이 이것들을 어떻게 공공선과 일치시킬지를 모른다는 것이다. 나는 묻는다. 이것이 바로 진지한 논거 제시인가 하고. 마치 그들이 개별적 무지로부터 인간 제도들의 궁극적 발전에 반대하는 결론을 내릴 수 있는 것처럼! 마치 입법자의 목적이 각자에게 결혼, 가족, 소유권을 실현해 주는 것이 아니고 폐지하는 것도 아닌 것처럼 말이다!

내 의견을 너무 확장하지 않기 위해 나는 그 문제를 그 주요 측면들 중 하나인 상속 측면에서 다루는 것으로 만족할 것이다. 우리는 그 다음으로 시인이 말하는 것처럼 일반화할 것이다. 하나로부터 모두를 배워라(Ab uno disce omnes).

상속은 살림의 희망이다. 가족의 버팀벽이고 소유권의 마지막 이유다. 상속이 없다면 소유권은 말뿐이다. 여성의 역할은 수수께끼가 된다. 공동의 작업장에서 남성 일꾼들과 여성 일꾼들이 무슨 소용인가? 플라톤이 본성을 교정해 그의 공화국에서 사라지게 하려고 했던 양성의 이 구별은 왜 있는가? 경제적 이원성의 형상인 인간 존재의 이 이중성, 살림과 가족 밖에서는 진정한 중복인 이것을 어떻게 해명할 것인가? … 상속 없이는 남편도 부인도 더 이상 없을 뿐 아니라 조상들도 자손들도 없다. 내가 무엇을 말하는가? 심지어는 방계 혈족도 없다. 시민적 우애라는 최상의 비유에도 불구하고 온 세상 사람들이 내 형제라면 내게는 더 이상 형제가 없는 것이 명확하니 말이다. 이럴 경우에는 사람이 주위 동료들로부터 고립된다면 자기의 쓸쓸한 개체성의 무게를 느낄 것이며, 사회가 가족들의 해체와 작업장들의 혼동에 의해 인대와 내장을 빼앗겨 말린 미라와 비슷하게 되어 가루로 화할 것이다.

그러나 사회주의는 용기를 가진다. 그런 별것 아닌 것에 놀라지 않는다. 순수 사회주의가 조국 없고 가족 없는 인류를 원하는 것처럼 반半 사회주의자로서 상속 없는 가족을 원하는 루이 블랑 씨는 『노동의 조직』에서 이렇게 적었다.

“가족은 신에게서 나오고, 상속은 사람들에게서 나온다!”

이는 물론 가족이 더 낫고 상속은 더 나쁘다는 것을 입증하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모든 사람들은 블랑 씨의 문체를 안다. 신성神性을 편드는 그의 끊임없는 주장은 히브리어에서 고운 밀가루 빵을 신들의 빵이라고 말하듯이 시적인 최상급일 뿐이다. 이는 게다가 블랑 씨가 명확히 이해하도록 제시하는 바다.

“가족은 신과 같이 거룩하고 불멸이다. 상속은 변화해 가는 사회, 그리고 죽는 사람들과 동일한 비탈길을 따라갈 운명이다.”

비교, 대조법, 4구 병렬문, 문체의 우아함 등 내가 블랑 씨에 대해 분노하는 바인 상식에 정반대인 관념 말고는 부족한 것이 없다. 상속이 필요한 것은 사람들이 죽기 때문이고, 사회가 변형되기 때문이다. 여러 세대들을 끊임없이 휩쓰는 운동에 그 세대들을 지탱하는 불멸성의 원리를 대립시킬 필요가 있는 것은, 가족이 결코 멸망해서는 안 되기 때문이다. 가족이 끊임없이 죽음에 의해 분할된다면, 매일 아침 가족이 재형성되어야 한다면 아무것도 아버지를 자녀에게 다시 연결해 주지 않을 것이니 가족은 무엇이 되겠는가? 상속에서 당신을 경악시키는 것은 나는 안다. 당신에 따르면 상속은 불평등을 유지하는 데에만 소용이 있다. 그러나 불평등은 상속에서 나오지 않는다. 그것은 경제적 갈등에서 나온다. 그것은 경제적 갈등에서 나온다. 상속은 사물을 발견하는 바대로 취한다. 평등을 창조하라. 그러면 상속은 당신에게 평등을 가져다줄 것이다.

생시몽주의는 상속과 가족의 연결성을 알았다. 이 둘 다를 금했다. 사회주의라고도 공산주의라고도 감히 공언하지 않는 선진 민주주의는 상속을 가족으로부터, 수단을 목적으로부터 분리하고, 자신이 비웃는 정부의 절충론과 마찬가지로 유치한 절충론에 뛰어들면서 천재성을 입증했다고 믿었다. 블랑 씨가 그토록 아름다운 발견에 대해 으스대는 것은 신기하다.

“사람들은 생시몽주의자들에게 말했다. ‘상속이 없으면 가족도 없다.’ 그들은 대답했다. ‘그래, 좋다. 가족과 상속을 파괴하자.’ 생시몽주의자들과 그들의 적들은 똑같이 반대 방향으로 틀렸다. 진리는, 가족이 어떠한 가설에서든 파괴될 수 없는 자연적 사실인 반면 상속은 사회의 진보가 사라지게 만들 수 있는 사회적 협정이라는 것이다.”

가족과 가족을 보호하는 상속에서 연합에 대한 장애물을 보고, 상속처럼 자생적이고 보편적인 사회적 협정이 자연적 사실이 아니라고 상상하는 저들은 모두가 틀렸다. 민주주의자들, 신적인 일들의 위대한 이야기꾼들, 레퀴엠의 위대한 애호가들은 인간의 의식에서 나오는 것이 동거와 발생처럼 자연적이 아닌지 생각하는 기색을 보이지 않는다. 자연은 그들에게는 물질이다. 그들의 말을 믿는다면 인류는 그 성향의 자생성에 복종해 자연으로부터 빗나갔다. 인류를 그리로 다시 가져올 필요가 있다. 그러면 어떻게 그렇게 하는가? 자연적 사실로써? 아니다. 민주주의자들은 그렇게 일관적이 되는 데 집착하지 않는다. 협정으로써다! 왜냐하면, 민주주의자들이 상속을 대체한다고 말하는 재산 상속 불능aminmorte 체제보다 더 협정에 따른 것이 무엇인가?

“지금까지 가족 문제와 상속 문제를 절대적으로 연결된 문제로 간주하게 한 원인들을 잘 고려할 수 있는가? 현 사회 질서에서 상속은 가족과 분리 불가능함을 아무도 의심하지 않는다. 그리고 그 이유는 바로 우리가 맞서 싸우는 이 사회 질서의 폐단 안에 있다. 왜냐하면 한 젊은이가 가족을 떠나 세상에 들어간다고 할 경우, 그가 재산 없이, 그리고 그의 재능 말고 다른 추천 사항 없이 세상에 나선다면 온갖 위험들이 그를 기다리기 때문이다. 발걸음마다 그는 장애물을 발견할 것이다. 그의 인생은 영속적이고 무서운 투쟁 중에 소진될 것이다. 그 투쟁에서 그는 아마도 승리할 것이지만 패배할 큰 위험을 무릅쓴다. 이야말로 아버지의 사랑이 예견해야 할 일이다.”

좋다! 아버지의 사랑이 이를 대비해 주기를 그만둔다면, 누가 그를 위해 이를 대비해줄 것인가? 민주주의자들은 말한다. 이는 보이지 않고 만져지지 않고 불멸하는, 전능의, 온전히 선한, 온전히 현명해서 모든 것을 보고, 모든 것을 하고 모든 책임을 지는 이 존재다. 이는 국가다!

“우리가 살아가는 환경을 바꾸라. 사회를 섬기러 나서는 모든 개인이 거기서 자기 능력의 자유로운 사용처, 그리고 집단적 노동의 참여에 들어갈 수단을 발견할 것을 확신하게 하라. 아버지의 선견지명은 이 경우에 사회적 선견지명으로 대체된다. 그리고 이는 마땅히 그래야 하는 것이다. 아이에게는 가족의 보호가 있어야 하고, 성인에게는 사회의 보호가 있어야 한다.”

그렇다. …을 바꾸라. …하도록 하라. 사회의 선견지명으로 아버지의 선견지명을 대체하라! 내가 당신 글을 읽지 않았다면 당신의 공적을 기대했을 것이다. 당신이 아직 개인들의 노동을 국가의 노동으로 대체할 수 없는 것은 큰 유감이다! 국가가 개인들 대신에 결혼하고, 아이들을 낳고, 이들을 부양하고, 필요한 것을 마련해줄 수 없다면 얼마나 큰 재앙인가! 하지만 내가 무슨 말을 하는가? 자유 노동 그리고 남녀 한 쌍의 출산은 자연스러운 일이 아닌가? 그리고 상속은 관습적인 일 아닌가?

당신에게 다음과 같이 말해 오는 이 아버지에게 무엇이라고 대답할 것인가? 내가 유언장을 쓸 때는, 단지 내 상속인으로 세운 자들만을 위해서 쓰는 것은 아니다. 나를 위해서도 쓰는 것이다. 내 마지막 의사의 행위는 내가 살기를 중단한 후에도 내 재물을 계속 향유할 형태이며, 내가 떠나는 사회 안에 남아 있는 방식이며, 사람들 사이에서 내 존재의 연장이다. 나를 내 자녀들과 결합해 주는 것, 우리들 간에 애착, 공통의 의무를 가져오는 것은 연대의 끈이다. 당신은 내게 당신의 선견지명을 자랑하면서 그 대가로 내게 내 재물을 요구한다. 나는 간부층보다는 나 자신을 더 믿는다. 당신은 모든 것을 쓸모 있는 때에 생각하기에는 너무 염려를 많이 한다. 게다가 나는 당신을 알지 못한다. 그러므로 스스로 국가라고 부르는 당신은 누구인가? 누가 당신을 보았으며, 당신은 어디 머무는가? 당신의 보장 수단들은 어떤 것들인가? 아아! 당신은 당신의 사제들의 신을 닮았으며, 사람들이 당신에게 땅을 준다는 조건에서 하늘에 약속을 한다. 그러므로 끝으로 지혜와 최고의 능력을 가진 당신을 한번 보여 달라!

상속의 폐지는 공화주의적인 모든 백일몽처럼 어디서나 사람의 자유행동을 권력의 솔선적 강제력으로, 실질적 존재를 이성적 존재로, 생명과 자유를 그 슬픈 영향력이 거의 모든 사회적 재앙들의 원인이었던 괴물로 대체하는 것인 이 허황된 이데올로기에서 나온다.

블랑 씨는 계속해서 말한다. “방계 계승의 남용은 보편적으로 인정된다. 이 계승은 폐지될 것이며, 이를 구성하는 가치들은 공유 재산으로 선언될 것이다.”

그러나 방계 계승을 폐지하려면, 소유권을 폐지하는 데서 시작할 필요가 있다. 나는 당신에게, 이것 없이 방계 계승에 손을 대려면 대 보라고 도전한다. 당신은 신탁 유증, 원금 회수 포기 조건, 환매, 기부를 옹호할 것인가? 뭐라고! 나는 내 재산을 모든 사람에게, 즉 국가에 남겨 줄 능력을 가질 것이며, 그것을 누군가에게 줄 수 없을 것이다! 나에게는 노동하고, 저축을 하고, 자본을 형성하고, 부동산을 취득하고, 다른 모든 이에 대해 배타적으로 이를 향유하는 것이 허락될 것이다. 그리고 내가 이를 처분하고 내게 없는 자연적 가족 대신에 입양 가족을 구성해 내 행복을 증대하는 것이 중요할 때, 나는 아무 주인도 아닐 것이다! 그러니 소유권자인 것이 내게 무슨 소용일 것인가? 당신은 공산주의자인가? 과감히 말해 보라. 우물쭈물하지 말라. 당신의 신성, 공화국, 정부 등 당신의 시적인 산문에서의 갈고리이고 바보들을 위한 미끼일 뿐인 위대한 말들의 허구로 우리를 더는 피곤하게 하지 말라.

“오늘날 자기 자녀들에게 남겨줄 것을 아무것도 가지지 않은 가난한 자, 그 가난한 자는 가족은 가지는가? 그가 가족을 가진다면, 그 가족은 우리가 처한 불순한 환경에서 일정한 점까지는 상속 없이도 존재할 수 있다. 그가 가족을 가지지 않는다면, 당신의 제도들을 정당화하라. 그리고 서둘러라 … 가족은 특권일 수 없을 것이다. …”

미사여구로다! 상속은 부자의 가족에서처럼 가난한 자의 가족에서도 존재한다. 이 신성하고 양도 불가능한 권리를 프롤레타리아는 결정적으로 우리의 대혁명에서 전취戰取했으며, 이를 귀족 계층의 약탈에 대한 넘을 수 없는 장벽으로 대치했다. 그와 같이 옛날에 로마의 평민은 오랫동안 귀족들에게만 남겨졌던 혼인권jus connubii, 가족권을 획득해 세습 귀족의 전횡에서 해방되었다. 가난한 자에게 부족한 것은 더 이상 상속이 아니라 유산이다. 상속을 폐지하는 대신 차라리 상속자 부재déshérence를 근절하는 데 신경 쓰라. 왜냐하면 “가족은 특권일 수 없을 것이다”라고 말하는 것은 당신 자신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가족권이 보통 권리가 아니라 보편 권리인 것, 상속이, 따라서 유산이 그것에 필요한 것은 이 때문이다. 상속이 아직 모든 사람에게 실효적이지 못하다고 해서 상속을 금지하는 것은 물질주의적이고 반혁명적인 방향으로 추론하는 것이다. 이는 마치 프랑스가 불행한 아일랜드에 대한 동정심 때문에 감자만 먹고 물만 마시도록 처분하는 것과 같다.

“가족을 상속에까지 이끌라. 곧 당신은 사회적 이익과 가족적 이익 사이에 심연이 파이는 것을 볼 것이다.”

하지만 다시 한 번 말하건대, 이 적대 관계는 어디서 오는가? 상속 그 자체에서인가, 아니면 유산의 불평등에서인가? 당신은 말한다. 상속이 있으면 유산은 오랫동안 모든 사람에게 실재일 수 없다. 더구나 실재가 될 수 없다. 누가 당신에게 그렇게 말했는가? 상속이 소유권, 독점, 경쟁처럼 아주 오랫동안 노동에 반대하는 자본을 섬긴 후, 자본을 반대하는 노동에 의해 방향 전환이 될 수 없을 것인지 당신은 어찌 아는가? 하지만 당신은 경제적 모순들을 별로 잘 분별하지 못해서, 그 모순들과 하나씩 싸워서 그것들이 오늘날 내놓는 결과들과 반대의 결과들을 낳게 만든다는 생각은 당신에게 들지 않을 것이다. 그러기는커녕 당신이 가진 이데올로기라고는 그 모순들을 지워버리는 경향을 띨 뿐이다. 사회과학에서 사회의 원리들을 지우고 문명에서 문명화하는 기관들을 제거하는 것, 그런 것이 당신의 철학이다! 또한 민주주의자들은 그것을 별로 자세히 들여다보지 않을 것이다. 사회주의자들은 당신이 그들에게 할 양보로 넋을 잃을 것이다. 애국적 언론은 당신의 웅변을 축하할 것이며, 모든 것은 가능한 민주주의들 중 가장 현명한 민주주의에서 최선으로 갈 것이다.

완화된 사회주의자들은 승계권을 공격한다. 그것을 평등의 보전 수단으로 삼을 줄 모르기 때문이다. 푸리에주의자들과 생시몽주의자들은 가족을 공격한다. 그들의 체계가 사적 산업, 내적인 삶, 그리고 자유 교환과 양립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공산주의자들은 소유권을 공격한다. 소유권이 어떻게 서비스의 상호성에 의해 남용되기를 그만둘 것인지를 모르기 때문이다! 무지의 고백! 이는 개혁 종파를 자처하는 모든 종파의 논지로서, 그 자체 안에 그 논지의 반증을 담고 있으며 그것만으로도 우리를 인도주의적 설교에 싫증내게 하기에 충분하다.

⑶ 신용이 보증되고, 가족이 형성되고, 승계권이 모두에게 주어지고 그래서 각자가 자기 차례에 가장이 될 수 있도록, 그리고 아무도 유산을 빼앗기지 않도록 소유권을 분배하는 일이 남았다. 그러나 땅을 어떻게 분배할까? 어떻게 몫을 정할까? 유산의 평등을 어떻게 유지할까? 땅은 수많은 세습 재산들에 충분할 것인가? 아니면 그것은 경작자에게만 남겨지고 산업인, 비생산 활동자, 상인 등은 소유권에서 배제될 것인가? 이전, 보상, 청산은 어떻게 행해질 것인가? 노동은 어떻게 조정될 것인가? 결실 등의 분배는 어떻게? 경제 문제들은 모두 소유권에서 재현되는 것을 우리는 안다.

그리고 사회는 그 수효, 깊이, 난점, 엄청난 상세 내용으로 아주 질리기 만드는 이 모든 질문들에 지대rente라는 단 한 마디로 대답한다.

독자의 정신에 어떤 의문도 남기지 않도록 나는 제1권에서 조세에 대해 한 것처럼 지대에 대해 진행해 갈 것이다. 나는 지대의 구성에 포함된 유기적 관념이 이어지는 세 계기에 따라 발달하며 그중 마지막 계기는 필연적으로 다른 두 계기와 연결되어 수평화 작업으로 해소되는 것을 보여줄 것이다.

그러면 우선, 지대란 무엇인가?

지대는 이자와 가장 많이 닮았다. 그럼에도 그것은 이자가 노동에서 탄생하고 저축에 의해 축적된 자본에만 붙는 반면에 지대는 노동의 보편적 소재, 모든 가치의 원초적 기저인 땅에 적용된다는 점에서 이와 본질적으로 다르다.

자본의 고유성은 이득을 보면서 그것을 재형성하기에 충분한 시간당 이자만 내놓는 것이다. 일체의 이론적 증명의 밖에서 이자가 점진적으로 낮아지는 것은 이를 충분히 증명해 준다. 이와 같이 자본이 희소할 때는, 담보가 가치가 없고 보증도 없을 때는, 이자는 영속적이고 때로는 이례적인 율로 올라간다. 자본이 풍부해짐에 따라 이자는 감소한다. 그러나 그것이 결코 사라질 수 없으므로, 돈의 대여가 모든 위험은 자본가의 것이고 이득은 차입자의 것인 단순 교환이 될 수는 없으므로, 일정 율에 도달한 이자는 감소하기를 중단하고 변형된다. 영속적인 소득으로부터 그것은 웃돈을 가지고서 연불에 의한 상환이 된다. 이때 이자는 이론이 그에 배정하는 역할에 다시 들어간다.

그러므로 자본 혹은 대여된 물건이 소진되거나 밀, 포도주, 돈 등에서 그런 것처럼 사용에 의해 사라지면, 이자는 마지막 연불금과 함께 소멸할 것이다. 반대로 자본이 사라지지 않으면 이자는 영속할 것이다.

지대는 결코 사라지지 않는 자본, 즉 토지에 대해 지불되는 이자다. 그리고 이 자본이 소재와 관련해서 어떠한 증대도 될 수 없고 단지 그 이용과 관련해서 무한한 개선만 가능하므로 대여mutuum의 이자 혹은 이득은 자본의 풍부성에 의해 끊임없이 감소하는 경향을 띠는 반면, 지대는 토지 이용의 개선을 가져오는 산업의 완성에 의해 언제나 증가하는 경향을 띠게 된다. 따라서 결국, 이자는 자본의 중요도에 비례하는 반면, 토지와 관련해서는 소유권은 지대에 의해 평가된다.

본질상 그러한 것이 지대다. 그 도달점과 그 동기에서 이를 연구하는 것이 중요하다.

그 제도의 출발점에서 지대는 소유권의 보수다. 이는 소유권자의 새로운 권리가 그에게 부여하는 관리 역할에 대해 소유권자에게 지불되는 수당이다. 나는 사회가 특권 보유자의 조건을 노동과 신용의 이익상 변화시킬 필요성에 관해 본 절의 제1번에서 말한 것을 재론하지 않을 것이다. 나는 경제적 진화의 제7기에 허구가 실재를 사라지게 했고, 인간 활동이 허공중에 소실될 위협을 가해 사람을 자연에 더 강력하게 붙잡아두는 것이 필요해졌다는 것을 환기하는 것으로 그친다. 그런데 지대는 이 새로운 계약의 대가였다. 그것이 없다면 소유권은 명목적 자격, 순전한 명예상의 구분일 뿐일 것이다. 그런데 문명을 가져오는 최고의 이성은 이런 분야의 자존심을 결코 구사하지 않는다. 말이 아니라 실물로써 지불하고 약속을 이행한다. 운명의 예상에서 소유권자는 사회 유기체의 가장 중요한 기능을 이행한다. 이는 그가 자기 소유권을 값있게 하도록 호출해 내는 자들, 나태하고 질투심 많은 임금 노동자로부터 그의 자녀가 될 자들이 그 주위로 끌려가고 모이고 몸을 맡기는 행동 중심이다.

게다가 기분 나쁘지만 말할 필요가 있는 것은, 노동계급이 누리는 행복에 비해 연금 생활자들의 행복과 안락에 대한 크나큰 환상이 일반적으로 품어진다. 하루에 30수를 받는 인부는 지대 10만 파운드를 받는 부유한 소유권자의 마차가 지나가는 것을 보면서, 그런 사람은 자기보다 백배나 행복하다고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지대는 노동 없이 살아가고 모든 향락거리를 조달할 수단이라고만 본다. 그리고 자신의 모든 소득을 지출하는 것을 일종의 사회적 의무로 삼는 명사들의 도덕성을 칭찬한다. 이로부터 인민의 한 사람에게는 부도덕할 뿐 아니라 부당한 질투와 증오의 근원, 타락과 낙담의 적극적 원인이 생긴다.

그러나 사물을 높은 데서, 그리고 그 확고부동한 진실에서 바라보는 자에게는, 지대 수령자는 조직되어 가는 사회에서 사회적 경제의 수호자, 지대에 의해 형성된 자본의 관리인일 뿐이다. 모든 노동이 초과분, 일부는 생산자의 행복을 증진하는 데로 향하고 일부는 생산적 기금을 개량하는 데로 향할 초과분을 남겨야 한다는 이론에 따르면, 자본은 자연이 우리에게 준 소유지를 노동을 통해 확장한 것이라고 정의할 수 있다. 개발 이용이 가능한 토지는 좁은 한계 안에 포함된다. 지구 전체는 벌써 우리가 왜인지 모르지만 그 안에 갇혀 있는 우리처럼 여겨진다. 일정량의 보급품과 물자가 우리에게 주어지며, 이를 통해 우리는 좁은 거주지를 꾸미고, 확장하고, 덥히고, 청소한다. 모든 자본 형성은 그러므로 우리에게는 터전의 정복과 등가다. 그런데 소유권자는 탐험대장으로서 모험에서 이익을 보는 첫 번째 사람이다. 결과적으로, 그리고 보유자들의 단견, 느슨함 혹은 방탕함에 의해 생겨나는 자본의 엄청난 손실에도 불구하고, 그런 일들이 일어나는 것은 이래서다. 지대의 대다수는 새로운 개발 이용에 쓰인다. 프랑스는 운하와 철도에 20억 프랑을 지출하려고 한다. 이는 마치 그 영토에 도道 반쪽을 더하는 것과도 같다. 어디서 이런 경이로운 확장이 나오는가? 집단적 저축, 지대에서 나온다.

그 소득이 수령권자에 의해 비생산적으로 소비되는, 그러나 다수의 평균적 재산들 앞에서 미미해지는 거대한 재산들의 몇 가지 예를 인용하는 것은 아무 쓸모도 없다. 그 추문이 노동을 격분케 하고 빈곤층을 웅성거리게 하지만 그에 대한 처벌은 기대되는 경우가 드문 이 예들은 이론을 확인해 준다. 그 임무를 오해하면서 단지 자기 재산의 관리에 한 몫 하는 일 없이 이를 파괴하는 것만을 위해 사는 소유권자는 자신의 태만을 머지않아 참회한다. 저축을 전혀 하지 않으므로 곧 그는 차입을 하고, 빚을 지고, 소유권을 잃고, 때가 오면 빈곤에 빠진다. 모욕당한 섭리는 결국 잔인한 방식으로 보복한다. 나는 재산들이 생겨나기도 하고 없어지기도 하는 것을 보았다. 그리고 나는 언제나 소유권을 취득하는 것만큼이나 거의 마찬가지로 어려운 것이 그것을 보전하는 노고라는 것, 이 보전은 절제와 절약을 내포한다는 것, 결국 소유권자, 선량한 관리자, 현명한 회계의 운명은, 소득이 동등하다면 동일한 선견지명과 질서의 정신을 가질 노동자의 운명보다 결코 위에 있지 않다는 것을 관찰했다. 지대의 전액 소비와 소유권의 보전은 서로 배타적인 것들이다. 보전을 하려면 소유권자는 저축하고 자본화하고 확장하지 않을 수 없다. 즉, 노동에 더 많은 공간과 자유를 제공하지 않을 수 없다. 달리 말하면, 그가 노동으로부터 산물로 받은 것을 자본으로 돌려주지 않을 수 없다. 입법자의 예상으로는 소유권자는 동정을 받을 만하지도 질투를 받을 만하지도 않다. 자신을 쓸모 있게 만들 줄 아는 사람, 노동이 우리 행복의 필수적 부분을 이룬다는 것, 모든 남용적이고 무질서한 소비는 고통과 후회를 초래한다는 것을 이해하는 사람, 소유권이 이 사람 손에서 저 사람 손으로 넘어가면서 소유권자가 자신에게 불충하면 곧바로 그를 죽이는 식으로, 소유권자를 배려하지 않으면서 자신의 법칙을 완수한다는 것을 아는 사람, 이 사람은 자기를 소비자로만 생각하고 정의만을 열망한다면, 소유권을 바라지도 않고 아쉬워하지도 않는 것이라고 나는 말한다.

로마 사회를 망치고 이탈리아에 사는 사람이 없어지게 한 것은 야만인들보다도 지대의 잘못된 사용 탓이 훨씬 더 크다. 중세에 귀족층의 소유 상실을 가져온 것은 이 남용이며, 신용이 그 다음으로 그 수단이었다. 매일 수많은 파멸을 일으키고 끊임없이 이 사람에서 저 사람에게로 소유권을 이전하는 것 역시 소유권의 똑같은 우둔함이다. 이와 같이 그 진화의 첫 순간부터 지대의 이론은 피할 수 없는 수학적 확실성을 얻는다. 그 법칙은 강압적이어서 이를 인식할 줄 모르는 이에게는 불행이 돌아간다! 상속물로서의 지대는 이성과 권리에 근거를 둔다. 그것은 파괴하는 데 신경 쓸 필요가 있는 특권이 결코 아니다. 그것은 보편적으로 만드는 것이 중요한 기능이다. 사람들이 지대에 대해 비난하는 소비의 남용에 그것은 수단일 뿐인데, 이 소비의 남용을 지대의 탓으로 돌릴 수는 없다. 그것은 사람의 자유의지에서 나오며, 도덕가의 꾸짖음을 받게 된다. 사회경제학은 결코 이를 다루지 않는다. 여기서 무질서는 사람을 고발한다. 제도는 나무랄 데 없다.

우리는 문제의 두 번째 면을 다룬다.

지대가 소유권의 보수라면, 이는 경작에 대한 부당 징수다. 왜냐하면 노동 없이 보수를 주는 것이어서 생산, 분배 및 교환에 관한 사회경제학의 모든 원리를 위반하기 때문이다. 지대의 기원은 소유권의 기원처럼 말하자면 경제 외적이다. 그것은 심리적, 도덕적 고려 사항들에 자리 잡으며, 이런 고려 사항들은 부의 생산에는 아주 멀찍이만 관계있고 심지어 부의 이론을 뒤엎기까지 한다. 이는 소유권자에게 이롭게 다른 세계로 놓인 다리이며, 소작인은 이 다리 위로 그를 따라가는 것이 금지된다. 소유권자는 반신半神이다. 소작인은 언제나 사람일 뿐이다.

진정한 남용, 소유권에 내재하는 모순이 있는 것은 우리가 뒤에 가서 입증할 것처럼 거기, 이 논리적 대립 안이다. 그러나 우리가 배운 것처럼 이 모순은 다음의 화해의 예고다. 그리고 이는 우리가 역사의 한두 시기 앞을 내다보면서, 그리고 지대의 궁극적 목적지를 직접 인식시키면서 증명하려고 하는 것이다.

교환가치가 쓸모 있는 가치와 역방향인 것처럼, 영속적 소득에 대해서 사회가 소유권자에게 행한 경매 낙찰에서 주인의 이익은 차지인의 이익과 반대 방향이니, 소유권자에게 지불할 지대는 일련의 진자 운동에 의해 확정되며 이 모두는 균형 공식으로 해소되어야 한다. 그러므로 그 제도의 상위 관점에서 차지인이 소유권자에게 갚아야 할 것은 무엇인가! 지대의 몫은 얼마여야 하는가? 왜냐하면, 지대의 문제는 언제나 새로운 형태를 띤 가치의 문제일 뿐임이 벌써 명백하기 때문이다.

리카도의 이론은 이 문제에 대답을 한다.

사회가 시작할 때, 땅 위의 새로운 존재인 사람이 그의 앞에 엄청나게 큰 숲밖에 대하지 못했고, 땅이 광활했고, 산업이 태어나기 시작하던 때, 지대는 영零이었을 수밖에 없다. 아직 노동에 의해 모양이 지어지지 않은 땅은 쓸모 있는 물건이었다. 그것은 교환가치가 아니었다. 공유였으며, 사회의 것이 아니었다. 가족들의 배증과 농업의 진보는 조금씩 토지의 가격을 느껴지게 했다. 노동은 토양에 가치를 부여하게 되었다. 이로부터 지대가 태어났다. 동일한 용역의 양으로 들판이 더 많은 결실을 낼 수 있을수록 그 들판은 더 높이 평가되었다. 또한 소유권자들의 경향은 언제나 토지의 산물에서 차지인의 임금, 즉 생산 비용을 뺀 전체를 차지하는 것이었다.

이처럼 소유권은 노동을 따라와서 노동에서 산물 중 실질 비용을 초과하는 모든 것을 빼앗는다. 소유권자가 신비한 의무를 다하고 소작인에 대해 공동체를 대표하면서 차지인은 섭리의 예정에서는 자기가 정당한 임금 이상으로 거두는 모든 것을 사회에 보고해야 할 책임을 진 노동자에 불과하며, 차지 및 분익 소작, 가축 임대차, 장기 임대차 등의 제도는 사회의 이름으로 소유권자와 차지인 사이에 일어나는 계약의 진자 운동 형태들이다. 지대는 모든 가치물들과 마찬가지로 공급과 수요에 좌우된다. 하지만 또한 모든 가치물과 마찬가지로 지대는 그 정확한 크기를 가지며 이는 소유권자에게는 이익이고 경작자에게는 손해가 되도록 산물에서 생산 비용을 공제한 총액으로 표현된다.

그러므로 그 본질과 목적지 때문에 지대는 분배 정의의 수단이며, 경제적 천재가 평등에 도달하기 위해 작동시키는 천 가지 수단 중 하나다. 이는 소유권자와 차지인에 의해 모순적으로, 가능한 한 충돌 없이, 상위의 이익을 위해 작성되는 엄청난 토지 대장으로, 그 최종 결과는 토지 개발자들과 산업인들 간에 토지 소유를 평등하게 하는 것이어야 한다. 지대는 한마디로 모든 노동자, 모든 사람, 소유자들을 토지와 그 결실에 대해 평등하게 만들어야 할 아주 요망되는 농지법이다. 소작인에게서 그가 자기 것으로 간주하지 않을 수 없는, 그리고 그가 배타적으로 그 주인이라고 믿는 산물 초과분을 빼앗으려면 이런 소유권의 마법 정도는 필요했다. 지대는, 더 제대로 말해서 소유권은, 농업의 이기심을 깨뜨렸으며 어떠한 권능도, 어떠한 토지 분점도 생겨나게 할 수 없을 연대성을 창출했다. 소유권에 의해 모든 사람들 간의 평등은 확정적으로 가능하게 된다. 지대가 개인들 간에 민족들 간의 세관처럼 작동해서 불평등의 모든 원인들, 모든 핑계들이 사라지고, 사회는 이 운동에 추진력을 줄 지렛대 이상을 기다리지 않는다. 어떻게 신화적인 소유권자를 진짜 소유권자가 계승할 것인가? 어떻게 소유권을 파괴하면서 사람들이 모두 소유권자가 될 것인가? 그런 것이 이제부터 풀어야 할 문제이지만, 지대 없이는 풀 수 없는 문제다.

왜냐하면 사회의 화신은 이데올로그들이 하는 식으로 척박한 추상에 의거해 진행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는 왕조의 이익도, 국가 이성도, 선거권도, 대의제 이론도, 인도적, 애국적 감정도 걱정하지 않는다. 그는 언제나 자신의 관념들을 인격화하거나 실현한다. 그의 체계는 일련의 화신化身과 사실들로 전개되며, 사회를 구성하기 위해 그는 언제나 개인을 향한다. 신용의 위대한 시기 후에 사람을 땅에 묶어두는 것이 필요했다. 사회의 화신은 소유권을 제정한다. 그 다음으로는 지구의 토지를 측량해 토지 대장을 만드는 것이 필요했다. 떠들썩하게 집단적 작업을 공표하는 대신 그는 개인 이익들을 싸우게 하며, 소작인과 지대 수령자의 전쟁으로부터 사회에는 가장 불편부당한 심판이 생겨난다. 현재, 소유권의 도덕적 효과는 획득되었고, 남은 일은 지대를 분배하는 것이다. 마을 의회를 소집하고, 당신의 웅변가들과 연설가들을 부르고, 경찰을 강화하고, 이런 독재 지구에 의해 세상을 놀라게 하지 않도록 조심하라. 단순한 교환의 성호성이 은행의 몇몇 장치들의 도움을 받으면, 충분할 것이다. … 가장 단순한 수단들을 큰 효과를 발휘하게. 이는 사회와 자연의 지고의 법칙이다.

소유권은 독점을 제곱한 것이다. 이는 독점처럼 자생적, 필연적, 보편적 사실이다. 그러나 소유권은 여론의 호의를 입는 반면 독점은 경멸의 감정으로 보인다. 우리는 이 새로운 예를 통해, 사회가 투쟁에 의해 성립되는 것처럼 과학은 논쟁에 의해 추진을 받아서만 진행된다고 판단할 수 있다. 이처럼 경쟁은 차례로 높여졌다가 조롱을 당했고, 조세는 경제학자들에게 필요한 것으로 인정되었지만 그들에게 못마땅하게 여겨졌고, 이자부 대출은 정죄되었다가 이어서 찬양되었고, 무역수지 균형, 기계, 노동 분업은 공중의 칭찬과 저주를 차례로 불러일으켰다. 소유권은 신성하고 독점은 낙인이 찍혔다. 우리의 편견과 비일관성의 끝을 언제나 보게 될 것인가?

. 소유권은 어떻게 타락하는가

소유권에 의거해 사회는 유익하고, 칭찬할 만하고, 게다가 불가피한 사고를 실현했다. 나는 사회가 어찌할 수 없는 필연성에 복종하면서 불가능한 가설에 뛰어들었음을 증명하려고 한다. 나는 소유권의 성립을 주관한 어떠한 동기들도 잊거나 약화시키지 않았다고 생각한다. 나는 심지어 이 순간까지도 알려지지 않은 이 동기들에 총체와 명증성을 부여했노라고 감히 말한다. 독자께서는 내가 본의 아니게 누락할 수 있었던 것을 보충해 주시기 바란다. 나는 독자의 모든 추론을 수용하고 아무런 논박을 할 생각도 없다고 미리 말씀드린다. 그러나 이어서 독자께서는 양심에 손을 얹고서, 내가 하려고 하는 역逆증명에 대답할 것을 발견하면 내게 말해 주시기 바란다.

의심의 여지없이 집단적 이성은 일련의 섭리적 제도들에 따라 독점을 공고화하는 것을 금하는 운명의 질서에 복종하면서 자기 의무를 다했다. 그 행실은 나무랄 데 없으며, 나는 그를 비난하지 않는다. 인류가 가진 능력의 가장 큰 발휘는 그것에 복종할 줄 아는 것인 것처럼, 집단적 이성에 있는 숙명적인 것을 인식할 줄 아는 것은 인류의 승리다. 그러므로 집단 이성이 소유권을 제정해 그것의 명령을 따랐다면, 비난받을 일이 전혀 없다. 그의 책임은 면해진다.

그러나 이 소유권은 사회가 어쩔 수 없이, 그리고 제약을 받아, 말하자면 양성화陽性化한 것으로서, 그것이 지속하리라고 누가 우리에게 보장하는가? 이를 저 위에서 구상했고, 거기에 무엇이든 더하거나 빼거나 변경하지 못했던 것은 사회가 아니다. 사람에게 이를 수여하면서 사회는 소유권에 그 장점과 단점을 남겨 두었다. 그것을 구성하는 폐단들에 대해서도, 소유권을 파괴할 수 있는 상위의 힘들에 대해서도 대비하지 않았다. 소유권 자체가 부패 가능하다면 사회는 이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고 이에 아무것도 할 수 없다. 이 소유권이 더 강한 원리의 공격에 노출되면, 사회는 더구나 이에 아무것도 할 수 없다. 소유권이 운명의 딸이니, 실제로 사회는 소유권의 고유한 폐단을 어떻게 치료할 것인가? 그리고 사회 자체가 소유권에 의해서만 존속하고, 소유권 이상의 것은 상상하지 못하는데 사회가 어떻게 소유권을 더 높은 관념에 맞서 보호할 것인가?

그러므로 다음은 소유권 이론이 무엇인가 하는 것이다.

소유권은 섭리적 필연에서 나온다. 집단 이성은 이를 신에게서 받아 사람에게 주었다. 지금 소유권이 그 본성상 부패가 가능하거나 불가항력에 의해 공격 가능하다면, 사회는 책임이 없다. 그리고 누구든지 이 힘으로 무장하고서 소유권과 싸우려 나설 자에게 사회는 굴복하고 복종해야 한다.

그러므로 우선 소유권이 그 자체로 부패 가능하고 파괴를 초래하는 것인지, 둘째로, 경제적 병기 창고에 소유권을 이길 수 있는 수단이 존재하는지를 아는 것이 중요하다.

나는 이 절에서 첫째 문제를 다룰 것이다. 우리는 궁극적으로 소유권을 집어삼키겠다고 위협하는 적이 어떤 것인지를 찾아볼 것이다.

소유권은 사용하고 남용할 권리, 한마디로 하면 독재despotisme다. 독재자가 그것을 파괴할 의도를 가지는 것으로 추정되는 것이 전혀 아니다. 이는 사용하고 남용할 권리라는 말로 이해해야 할 것이 아니다. 파괴를 위한 파괴는 소유권자 쪽에 있는 것으로 예단되지 않는다. 언제나 그가 자신의 재물을 어떻게 사용하든지 그에게는 편의와 쓸모의 동기가 있음이 가정된다. 남용에 의해 입법자는 소유권자가 그의 재물의 사용에서 이 잘못된 사용에 대해 결코 추궁을 당하지 않으면서, 누구 앞에서도 그의 오류에 대해 책임을 지지 않으면서 오류를 범할 권리를 가진다고 말하고자 한 것이다. 소유권자는 언제나 그의 최대 이익이 되게 행동하는 것으로 여겨지며, 사회가 그에게 그의 독점물을 사용하고 남용할 권리를 준 것은 이 이익 추구에서 그에게 더 많은 자유를 남겨주기 위한 것이다. 그러므로 거기까지는 소유권의 권한은 나무랄 데 없다.

그러나 이 권한이 단지 개인을 존중하는 것으로만 양허되지 않았음을 환기하자. 양허의 동기들에 대한 해설에는 모두가 사회적인 고려 사항들이 존재한다. 그 계약은 사회와 사람 사이에 쌍무적이다. 이는 정말이고, 소유권자들로부터도 실토되어서, 그들의 특권이 공격을 받을 때마다 그들은 사회의 이름으로, 오직 사회의 이름으로 이를 수호한다.

그런데 소유권의 독재는 사회에 만족을 주는가? 왜냐하면, 그렇지 않다면, 호혜성이 환상이라서 협정은 무효일 것이며 조만간 소유권이나 사회는 멸망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나는 질문을 반복한다. 소유권의 독재는 사회에 대한 의무를 이행하는가? 소유권 독재는 선량한 가부장으로서 사용하는가? 그는 본질상 올바르고, 사회적이고, 인간적인가? 바로 이것이 질문이다.

그리고 나는 이에 대해서 반증을 두려워하지 않고 대답한다.

개인적 자유의 관점에서 소유권의 양허가 필요했던 것이 의심할 바 없다면, 법적인 관점에서 소유권의 양허는 양수자 쪽에서는 이행하거나 이행하지 않는 것이 그에게 임의 선택인 일정한 의무를 내포하므로 근원적으로 무효다. 그런데 비의무적인 조건의 성취에 기초를 둔 일체의 협정은 의무를 부여하지 않는다는 원칙 덕분에, 우리가 앞서서 확정한 목적에서 특권 보유자와 국가 간에 체결된 암묵적인 소유권 계약은 명백히 환상이다. 그것은 비호혜성에 의해, 쌍방 중 한쪽의 피해에 의해 무효화된다. 그리고 소유권 문제에서 의무의 이행은 양허 자체가 그것만으로 철회되지 못하면 요구 가능한 것일 수 없으므로, 따라서 정의定義에 모순이 있고, 협정에 비일관성이 있다. 계약자들은 그 후에 그들의 협약을 유지하는 데 집착한다면, 사물의 힘은 그들이 쓸데없는 일을 한다는 것을 그들에게 증명해주는 일을 떠맡는다. 그럼에도 그들의 적대 관계의 숙명은 그들 간에 불화를 가져온다.

모든 경제학자들이, 영토의 파편화가 농업 생산에 폐단이 됨을 지적한다. 이 점에서 사회주의자들과 의견 일치를 이루면서 그들은 큰 규모에서 작동하고 기술의 위력적 공정 절차를 적용하고 물자를 크게 절약해서 생산물을 아마도 두 배, 네 배로 늘릴 총체적 개발을 환호하며 보게 될 것이다. 그러나 소유권자는 “나는 금한다veto”고 말한다. 나는 원치 않는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는 그의 권리이므로, 세상에 아무도 수탈에 의한 것과 다르게 이 권리를 바꿀 수단을 알지 못하고, 수탈은 무無이므로, 입법자, 경제학자, 프롤레타리아는 미지의 일 앞에서 기겁하고 물러서며, 멀리서 약속된 수확에 인사하는 데 만족한다. 소유권자는 성격상 공공선을 시샘한다. 그는 소유권을 상실하지 않고는 이 악을 청산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므로 소유권은 노동과 부에 장애물이 되고, 사회경제에 장애물이 된다. 이에 놀라는 것은 경제학자들과 법조인들 말고 없다. 나는 어떻게 긴말하지 않고 단박에 이 사실을 그들의 정신에 넣어줄 수 있을지를 찾는다.

우리가 각자 하루에 지출할 돈이 56상팀밖에 없어서 가난하다는 것은 참이 아닌가? 그렇다. 이는 슈발리에 씨의 대답이다.

더 나은 농업 체계가 물자비용에서 10분의 9를 절약할 것이며, 생산물을 네 배로 해주리라는 것은 참이 아닌가? 그렇다. 이는 아서 영(Arthur Young) 씨의 대답이다.

프랑스에는 소유권자 600만, 토지세 납세 의무자 1100만, 그리고 필지 1억2300만이 있다는 것이 참이 아닌가? 그렇다. 이는 뒤누아예 씨의 대답이다.

그러므로 소유권자 600만, 토지세 납세 의무자 1100만, 그리고 필지 1억2300만이 없어야 질서가 농업에서 지배하고 인당 하루 56상팀 반 대신 우리가 2프랑 25상팀을 가지게 된다. 이는 우리를 모두 부자로 만들어줄 것이다.

그리고 이 1억4천만의 공공의 부에 대한 반대 세력은 어째서 있는가? 노동에서의 협력이 소유권의 매력을 파괴할 것이므로, 소유권 밖에서 우리의 눈은 아무것도 보지 못했고, 우리의 귀는 아무것도 듣지 못했고, 우리의 심장은 아무것도 이해하지 못했으므로, 끝으로 우리는 소유권자들이므로.

소유권자가 기사다운 자유분방함으로 과학의 권유에 양보하고 노동에 그 생산물을 개량하고 늘리는 것을 허락한다고 가정하자. 그로부터 엄청난 선이 일용 노동자와 시골 사람들에게 생겨날 것이며, 그들의 피로는 절반으로 줄어들어 생필품 가격의 인하에 의해 두 배로 지불받는 입장이 될 것이다. 그러나 소유권자는 말한다. 아주 딱 떨어지는 이득을 포기한다면 나는 아주 바보 같을 것이다! 100일의 노동 대신 나는 50일만 지불할 것이다. 이익을 볼 것은 프롤레타리아가 아니라 나다―하지만 그러면 프롤레타리아는 한 번 더 실직할 것이니, 이전보다 더 불행하리라는 것을 생각하라―그것은 내게는 관계없다고 소유권자가 대꾸한다. 나는 내 권리를 이용하는 것이다. 남들은 할 수 있으면 재산을 사라고 해라. 아니면 그들이 수천 명, 수백만 명이라면 다른 데 가서 재산을 구하라고 해라!

모든 소유권자는 가슴 깊숙이 이런 살인적인 사고를 조장한다. 그리고 경쟁, 독점, 신용에 의해서처럼 침투가 항상 확장되므로, 노동자들은 끊임없이 땅에서 제거되는 처지에 놓인다. 소유권은 땅의 인구 축소다.

그러므로 이처럼 소유권자의 지대는 산업의 진보와 결합되어 노동자의 발밑에 독점에 의해 파인 구덩이를 심연으로 바꾸어 놓는다. 악은 특권과 함께 심각해진다. 소유권자의 지대는 더 이상 가난한 이들의 상속 재산이 아니다. 말하자면 경작 비용이 결제된 후 남는 농산물의 이 부분으로서 토지 같은 축적된 자본을 생산에 끊임없이 제공되는 것으로 우리에게 보여주는 이 아름다운 이론에 따르면 노동에 새로운 개발 이용의 소재로서 언제나 소용될, 그리고 더 많이 노동할수록 더 확장되는 것으로 보이는 부분 말이다. 지대는 소유권자에게는 그의 음탕함의 담보물, 그의 고독한 향락의 수단이 되었다. 그리고 남용하는 소유권자가 자선과 도덕 앞에서는 유죄이지만 법 앞에서는 무죄임에 변함없고 정치경제학에서는 공격이 불가능한 채로 있는 것에 주목하라. 자신의 소득을 먹어 치우는 것! 무엇이 그보다 더 아름답고, 더 고귀하고, 더 합법적인가? 명사들의 견해에서처럼 인민의 견해로도 비생산적 소비는 탁월하게 소유권자의 덕목이다. 사회의 모든 곤경은 이 사라지지 않는 이기주의에서 유래한다.

토지의 개발 이용을 쉽게 하고 여러 지방이 서로 관계를 갖게 하려면 도로, 운하가 필요하다. 이미 설계도는 되어 있다. 이쪽의 가장자리, 저쪽의 길쭉한 땅, 나쁜 땅 몇 헥타르를 희생시킬 것이고 그러면 길이 열린다. 그러나 소유권자는 울리는 음성으로 외친다. 나는 원치 않는다고. 그리고 이 무서운 거부권 앞에 집정관은 옛날에 감히 강행하지 못했다. 그러나 결국 국가가 과감히 대답했다. 나는 원한다고! 하지만 이 영웅적 결정을 내리기 전에 얼마나 주저했을 것이며, 얼마나 두려웠을 것이며, 얼마나 고뇌했을 것인가. 얼마나 조정을 했을 것이며, 어떤 과정을 거쳤겠는가! 인민은 이 권위적 조치에 비싼 값을 지불했으며, 그 촉진자들이 소유권자들보다 훨씬 더 어리둥절했다. 왜냐하면 그 결과를 계산할 수 없어 보이는 선례가 성립된 것이기 때문이다! … 이 루비콘 강을 건넌 후 다리는 끊어질 것이라고, 그 정도로 그칠 것이라고 다짐했다. 소유권에 폭력을 가하는 것, 웬 조짐인가! 스파르타쿠스의 그늘이 덜 무서워 보였다.

자연적으로는 덜 비옥한 토양의 깊숙한 곳에서 우연이, 그리고 우연에서 태어난 과학이 연료의 보고를 발견했다. 이는 자연의 공짜 선물로서 공동의 주거지 토양 밑에 놓여서 각자는 자기 몫을 청구할 권리를 지닌다. 그러나 소유권자가 도착한다. 단지 경작을 위해서만 그에게 토지의 양도가 행해졌던 것이다. “당신들은 지나가지 못할 것이다.” “당신들은 내 소유권을 범하지 못할 것이다!”하고 그는 말한다. 이 예기치 못한 경고에 학자들 사이에서 큰 논쟁이 벌어진다. 어떤 이들은 광갱이 경작지와 같지 않아서 국가에 속해야 한다고 말한다. 다른 이들은 소유권자가 지상과 지하의 소유권을 가진다고 주장한다. “토지를 보유하는 자는 누구나 위로 하늘까지, 그리고 아래로 지옥까지가 다 그의 것이다(Cujus est solum, ejus est usque ad inferos)”라고 주장한다. 왜냐하면 소유권자가 어둠의 왕국에 배치된 새로운 심술궂은 문지기로서 입구를 막을 수 있다면 국가의 권리는 허구일 뿐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수탈로 돌아갈 필요가 있을 것이다. 국가는 이를 어디로 가져갈 것인가? 국가는 양보한다. 뒤누아예 씨의 입술을 빌려서 트롤롱 씨의 뒷받침을 받으며 이렇게 말한다. “과감하게 단언하자. 옛날에 광갱을 왕의 소유라고 말한 것이 옳지 못하고 합당하지 못한 것처럼, 광갱을 민족의 소유라고 말하는 것은 옳지 못하고 합당하지 못하다. 광갱은 본질상 토지의 부분을 이룬다. 보통법이 지상의 소유권은 지하의 소유권을 내포한다고 말한 것은 완전한 상식을 가지고 한 말인가? 실제로 그 분리를 어디서 중단할 것인가?”

뒤누아예 씨는 별것 아닌 것을 가지고 고뇌한다. 그러니 누가 때로 상속에서 1층과 2층을 나누는 것과 같이 광갱을 지표면과 분리하는 것을 막는가? 이는 루아르 데파르트망에서 석탄 지대의 소유권자들이 아주 잘 행한 일이다. 그곳에서 지하물의 소유권은 거의 어디서나 지표면의 소유권과 분리되었고, 주식회사 주식처럼 일종의 유통하는 가치로 변형되었던 것이다. 누가 또 광갱을 갱도가 필요한 새로운 땅으로 간주하는 것을 막는가? 하지만 뭐라고! 나폴레옹, 트롤롱 씨, 뒤누아예 씨는 이렇게 갈채를 보낸다. 더는 재론할 것이 없다. 뭔지 모를 사소한 유보 조건에서 협상이 벌어졌다. 소유권자들은 황제의 너그러움을 입었다. 그들은 이 은혜를 어떻게 인식했는가?

나는 벌써 한 번 이상 루아르 광산의 담합에 관해 말할 기회를 가졌다. 마지막으로 이를 재론한다. 왕국의 석탄 광맥으로 가장 풍부한 곳인 이 데파르트망에서 개발 이용은 우선 가장 돈이 많이 들고 가장 터무니없는 방식으로 행해졌다. 광업의 이익, 소비자들과 소유권자들의 이익은 채굴이 총체적으로 행해질 것을 요구했다. “우리는 원치 않는다”고 몇 해인지 모를 여러 해 동안 소유권자들이 거듭 말했다. 그리고 그들은 무서운 경쟁을 했으며, 광산의 황폐화가 그 첫 비용을 지불했다. 그들은 그럴 권리가 있었는가? 당연히 그렇다. 그들이 권리에서 벗어난 행동을 하는 것에 대해 국가가 나쁘게 생각하는 것을 살펴보자.

결국 소유권자들, 적어도 그 대부분은 의견 합치에 도달했으며, 연합을 이룬다. 의문의 여지없이 그들은 이성에, 보전, 좋은 질서, 사적 이익만큼이나 일반 이익이라는 동기에 양보했다. 이제부터 소비자들은 저가로 연료를 얻을 것이며, 광산업자들은 정규 노동자를 얻을 것이며, 임금은 보장될 것이다. 공중에게서 얼마나 우레와 같은 박수갈채가 나오는가! 학계에서 얼마나 찬사가 쏟아지는가! 이 아름다운 헌신이 얼마나 꾸며지는가? 사람들은 그 모임이 사업권들을 함께 묶는 것을 금하는 법의 조문과 정신에 순응하는지 알아보지 않을 것이다. 사람들은 그 모임의 장점만을 볼 것이며, 입법자가 인민의 행복 말고 다른 것을 원하지도 않았고 원할 수도 없었다는 것, 인민의 안녕이 최고의 법이어야 한다(Salus populi suprema lex esto)는 것을 제대로 증명할 줄 알 것이다.

기만이다! 우선 소유권자들이 담합하면서 쫓는 것은 이성이 아니다. 그들은 힘에만 복종한다. 경쟁이 그들을 심연에 빠뜨림에 따라 승리자의 편에 줄을 서서 자신들의 증대하는 무리에 힘입어 반대자들의 패주를 가속화한다. 그러고 나서 연합은 집단적 독점으로 형성된다. 상품 가격은 증대한다. 이런 것이 소비에 가해지는 것이다. 임금은 낮아진다. 이런 것이 노동에 가해지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공중은 불평한다. 입법자는 개입하려고 한다. 하늘은 벼락을 치겠다고 위협한다. 검찰은 담합을 금하는 형법 제419조를 내세우지만 이는 모든 독점자가 연합을 이루는 것을 허용하며, 상품 가격에는 어떠한 조치도 규정하지 않는 조항이다. 행정부는 1810년 법에 호소한다. 이는 개발 이용을 촉진하고자 해서 사업권들을 분할하면서도 오히려 통합에 반대되기보다는 호의적인 것이다. 그리고 논문, 판결, 논증들을 가지고서 어떤 변호사들은 담합이 정당한 권리라는 것을 증명하고, 다른 변호사들은 담합이 권리가 아니라는 것을 증명한다. 그러나 소비자는 이렇게 혼잣말한다. 내가 투기 거래와 경쟁의 비용을 지불하는 것이 정당한가? 내게 최대의 이익이 되게 소유권자에게 무상으로 주어졌던 것이 내게 그렇게 비싸게 되돌아오는 것이 정당한가? 요금표를 정하도록 하라! 소유권자들은 “우리는 그런 것을 원하지 않는다”고 대답한다. 그리고 나는 국가가 아무것도 풀지 못하는 것인 권위적 조치, 아니면 모든 것을 버리는 것인 보상금에 기대지 않고 다른 방식으로 그들의 저항을 이겨내려면 이겨내 보라고 도전한다.

소유권은 소유에서만이 아니라 생산에서도 비사회적이다. 노동 수단의 절대적 여주인인 그는 불완전하고, 사기성 있고, 역겨운 생산물만을 내놓는다. 소비자는 더 이상 대접받지 못한다. 그는 자기 돈을 도둑맞는다. 사람들은 농촌의 소유권자에게 말한다. “당신은 이 과일들을 따기까지, 이 밀을 솎아 내고, 이 건초를 말리기까지 며칠을 기다릴 줄 모르셨나요? 이 우유에 물을 타지 않고, 당신의 나무 술통을 씻어내고, 당신의 수확물을 더 잘 돌볼 줄 모르셨나요, 덜 안아 들고 더 잘할 줄 모르셨나요? 당신은 과부하에요. 당신의 상속 재산 일부를 내려놓으세요.” “무슨 뚱딴지같은 소리요!” 소유권자가 빈정거리는 기분으로 대답한다. “엉성하게 밭갈이를 한 20아르팡이 같은 시간을 들이고 비용은 두 배로 쓴 10아르팡보다 언제나 더 많은 수확을 낸단 말이오. 당신의 체계대로 하면 토지는 사람들을 한 번 더 먹여 살릴 것이오. 하지만 사람들이 더 많이 있는 것이 나에게 뭐냔 말이오? 내 소득이 중요하지. 내 생산물의 품질로 말하자면 그 생산물은 언제나 먹는 이들에게는 충분히 양호할 것이오. 당신은 재주 있는 것으로 생각하지만, 상담 선생님, 당신은 어린아이일 뿐이오. 판매에 내놓을 만한, 그것도 공정한 가격에 판다면 소유권자인 것이 무슨 소용이냔 말이오? … 나는 원치 않습니다.”

“음, 그렇다면! 당신은 경찰이 그 의무를 행하도록 하라고 말하시겠군요! … 경찰 말이오! 당신은 경찰의 행동은 바로 악이 실행되었을 때 시작된다는 것을 잊는군요. 경찰은 생산을 감독하는 대신 생산물을 검사합니다.” 소유권자가 양심 없이 경작하고, 수확하고 제조하도록 허가한 후 등장해 푸른 과일을 집어 들고, 혼합된 우유 단지, 불순물이 섞인 맥주와 포도주 통을 쏟아 붓고 금지된 고기들을 쓰레기장에 내다 버린다. 이 모든 일이 경제학자들과 민중의 박수갈채를 받는 가운데 행해진다. 이들은 사람들이 소유권을 존중하기를 바라지만 교환이 자유인 것을 견디지 못한다. “이봐, 야만인들! 이 불순한 산물들의 소매를 유발하는 것은 소비자의 빈곤이란 말이오. 당신이 소유권자가 악하게 행동하는 것을 막지 못한다면, 왜 당신은 가난한 자가 열악하게 살아가는 것을 막는 것이오? 굶어 죽느니보다 복통을 앓는 편이 낫지 않소?”

이 산업인에게 가난한 이의 빈곤, 아이들과 어린 여자아이들의 무경험을 놓고 투기 행위를 하는 것을 비열한 짓이라고 말해 보라. 그는 당신 말을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무모한 과잉 생산에 의해, 잘못 계산된 사업에 의해, 그가 자기 자신의 재산을 가지고 그의 일꾼들의 생존을 위태롭게 한다고, 그의 이익은 관심사가 아니라 해도 그 주위에 운집한 수많은 가족들의 이익은 고려되어 마땅하다고, 그의 자의적인 선심에 의해 그 주위에 낙심, 비굴함, 증오를 만들어 낸다고 하는 것을 그에게 증명해 주어라. 소유권자는 화를 낸다. 전설을 흉내 내어 이렇게 말한다. “내가 주인이 아닌가? 그리고 내가 누군가에게 선하므로 당신은 내 선량함을 모두를 위한 권리로 삼겠다는 것인가? 내게 복종해야 하는 자를 내가 배려하는 것이 필요한 일인가? 이 집은 내 집이다. 내가 내 사업 운영을 위해 하는 것이 좋은 일에 대해서는 나만이 심판관이다. 내 일꾼들이 내 노예들인가? 내가 제시하는 조건이 그들 맘에 안 들고, 더 나은 조건을 발견하면, 가라고 하라! 나는 그들을 축하해줄 첫 번째 사람일 것이다. 아주 훌륭한 박애주의자들이여, 누가 당신들이 작업장을 여는 것을 막는가? 만들어서 모범을 보여 달라. 당신들이 덕성을 설교하면서 영위하는 이 감미로운 생활 대신에 공장을 지어서 일을 시작해 보라. 끝으로 땅 위에서 당신들에 의해 연합이 결성되나 보자. 나로 말하자면 나는 그런 빌어먹을 짓은 온 힘을 다해 거부한다. 조합원들이라니! 차라리 파산하고 말지, 차라리 죽고 말지!”

이와 같이 소유권은 사람과 사람을 독점보다 백배는 더 갈라놓는다. 입법자는 현저하게 사회적인 관점에서 소유에 더 강한 보장책들을 제공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독점자에게는 영속적으로 그의 약탈의 매일의 결과물을 보장해 주면서 노동자한테는 희망마저 빼앗는 입장에 선다. 어떤 거대한 소유권자가 작은 소유권자를 억제하기 위해 자기 힘을 남용하지 않는가? 어떤 존귀한 몸의 학자가 그의 영향력과 그의 후원자로부터 이득을 취하지 않는가? 자문 의견에서 공신력을 얻은 어느 철학자가 번역, 재검토 혹은 논평을 구실로 철학에서 세금을 징수할 수단을 찾아내지 않는가? 어떤 장학사가 알파벳 입문서를 팔지 않는가? 정치경제학은 모든 주식 장사에서 자유로우며, 종교는 모든 성직 매매에서 자유로운가? 나는 인쇄소장인 영예를 누렸으며, 12절 판 다섯 장짜리 교리문답서 12권을 30수에 팔았다. 그 아래로 그곳의 주교가 종교 서적 독점권을 취해 교리문답서 가격은 15상팀에서 40상팀으로 올랐다. 주교 전하는 이 한 품목에 대해 매년 5만 프랑의 순이익을 실현한다. 어떤 문제는 어떤 서생에게 승리의 기회를 주기 위해서만 학술원에서 논문 공모에 부쳐졌다. 어떤 작문은 훌륭한 학설을 공표하는, 즉 어떠어떠한 작자들을 향해 아첨의 예술을 행하는 그런 서생에게서 나온 것이라서 비로소 상을 받았다. 작위를 지닌 학문이 평민의 학문의 길을 막아선다. 떡갈나무가 달대더러 자신에게 예를 표하라고 강요한다. 종교와 도덕은 석고와 석탄처럼 특권을 이용해 서로 착취한다. 특권은 우수상마저 공략하며, 청년층의 장려와 학문의 진보를 위해 마자랭 극장에서 수상을 한 자들은 학술적 봉건제도의 표상일 뿐이다.

그리고 이 모든 권위적 남용, 이 독직, 이 비열한 짓들은 불법적 남용이 아니라 합법적 사용, 소유권의 아주 합법적인 사용에서 나온다. 의문의 여지없이 어느 상품의 자유 유통, 또는 조달품의 인수를 위해 필요한 검사를 하는 공무원은 이 검사를 위조할 권리를 지니지 않는다. 도한 그들이 검사에 나서는 것은 이런 식이 아닌가? 그러한 행위는 당국의 기관원들의 덕성에는 역겨울 것이고 형법전의 공소 대상이 될 것인데, 나는 그 문제를 다루지는 않을 것이다. 하지만 승인하는 자는 그의 승인이 필연적으로 그의 수단에 따른 것이니 그가 만들 줄 아는 것 말고 더 잘 승인할 수 있는 것은 없다는 데 누구나 수긍할 것이다. 그런데 감독관과 검사관에게는 다른 이들에게서는 승인할 책임을 맡은 것을 그들 스스로 만드는 것이 전혀 금지되지 않으므로, 더구나 그들의 승인을 받아야할 것에 참여하고 관심을 갖는 것이 전혀 금지되지 않으므로, 그리고 모든 종류의 서비스에서 임금과 이득은 합법적이므로, 따라서 대학과 주교들에게 맡겨진 어떤 저작물을 승인하거나 불승인하는 임무는 주교들과 대학 사람들의 이익이 되도록 독점을 형성하는 결과가 된다. 그리고 법률이 모순을 일으켜 그것을 막겠다고 하면, 법보다 위력적인 사물의 힘이 이를 끊임없이 다시 불러들이고, 정부 대신 우리는 매수買收와 허구 이상을 지니지 못한다.

한 가난한 일꾼이 자식이 없어 고심하는 아내를 두고 있는데, 산파가 절망적으로 의사의 도움을 요구한다. 의사는 200프랑이 필요하다고 말한다. 그렇지 않으면 움직이지 않겠다는 것이다. “맙소사! 내 살림살이는 200프랑 값어치도 안 되는데”하고 그 일꾼이 즉답한다. “그러니 내 아내가 죽든지 아기, 아내 그리고 나, 우리 모두 벌거벗고 나가든지 해야겠군요!”

신에게서 기쁨을 얻는! 이 산부인과 의사는 그래도 훌륭한 사람이고, 친절하고 침울하고 부드러운 사람으로서 여러 학회와 자선단체의 회원이었다. 그의 벽난로 위에는 히포크라테스의 동상이 있으며, 그는 아르탁세르세스의 선물도 거절하는 사람이다. 그는 어린아이를 슬프게 할 위인도 못 되었으며, 고양이를 위해서 희생을 할 사람이었다. 그의 거절은 모진 마음에서 나온 것이 아니다. 이는 전술이었다. 사업에 능한 의사에게 헌신은 한철에 지나지 않는다. 고객층이 확보되고 명성이 일단 쌓였으면 부자 손님을 기다리며, 허장성세의 기회가 아니고는 귀찮은 사람들을 멀리한다. 이처럼 무조건 환자들을 치료해야 할 때 그는 어디 있을 것인가? 재능, 명성은 귀중한 소유권으로서 낭비하지 말고 활용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

내가 인용한 모습은 그래도 양반이다. 내가 이 의료 문제를 속속들이 파헤친다면 얼마나 섬뜩할 것인가! 그것이 예외라고 내게 말하지 말기 바란다. 나는 모든 사람을 빼 준다. 나는 소유권을 비판하는 것이지 사람들을 비판하는 것이 아니다. 소유권은 아르파공에게서도 빈첸시오 드 폴에게서도 언제나 잔혹하다. 그리고 의료 체제가 조직되기까지 의사도 학자, 변호사, 예술가와 마찬가지일 것이다. 이는 그 자신의 자격에 의해, 소유권자의 자격에 의해 타락한 존재일 것이다.

이는 그의 시대에는 너무 선인이었던 이 재판관이 이해하지 못한 것이다. 그는 양심의 분노에 휩싸여 하루는 변호사 협회에 공적으로 비난을 표출하려고 했다. 이 변호사들이 모든 종류의 사건을 쉽게 맡는 것은 부도덕하고 수치스러운 일이라는 것이다. 이 비난이 상부에서 출발해 언론에서 주장되고 논평되었다면, 아마도 변호사라는 직업에 대한 비난이 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명예로운 그 단체는 비난에 의해 망할 수 없었고, 소유권도 비난으로 죽을 수 없으며, 언론은 자기 자신의 독으로 죽을 수가 없다. 게다가 사법관직은 변호사 협회와 연대 관계가 아닌가? 변호사 협회처럼 소유권에 의해, 그리고 소유권을 위해 설립되지 않았는가? 판결하는 것을 금지당한다면 페랭 당댕(Perrin Dandin)[24]은 무엇이 되겠는가? 그리고 소유권이 없다면 무엇에 대해 쟁송할 것인가? 변호사들의 회는 그래서 들쑤셔졌다. 언론, 펜으로 하는 변호사 행위가 말로 하는 변호사 행위를 구원하러 왔다. 소요는 자기도 모르게 공공 양심의 기관이 된 경솔한 사법관이 궤변에 영예로운 벌금을 매기고 그에 의해 자생적으로 모습을 드러낸 진실을 취소하기까지 요란한 소리를 내며 커져 갔다.

하루는 한 장관이 공증 제도를 개혁하겠다고 공표한다. “우리는 누가 우리를 개혁하는 것을 원하지 않는다”고 공증인들이 외친다. “우리는 트집을 잡는 사람들이 아니다. 변호사들에게 말하라. 공증인은 특히 정직하고 흠잡을 데 없는 사람이다. 고리대금에는 낯설고, 공탁금의 수호자, 사망자의 의지의 충실한 통역자, 모든 계약의 불편부당한 심판자로서 그의 공부는 소유권의 성역이다. 그런데 소유권이 그에게서 유린된다니! 아냐, 아니야…” 그리고 정부는 그 장관의 몸으로 실패의 고배를 들었다.

다른 사람이 머뭇거리며 말한다. “나는 나한테서 5퍼센트의 이자를 받는 채권자들을 뒤엎어 버리고, 4퍼센트만을 받을 다른 채권자들로 대체하고 싶다.” 금리 생활자들이 기겁해서 절규한다. “생각해 보았나? 당신이 말하는 이자는 지대다. 이는 지대로서 형성된 것이며, 당신이 이를 축소할 것을 제안할 때 이는 마치 당신이 보상 없는 수탈을 제안하는 것과 같다. 수탈하고 싶으면 하라. 그러나 법 그리고 사전 보상이 필요하다. 그러면 무엇인가! 돈이 계속해서 그 가치를 상실한다는 것이 주지의 사실일 때, 오늘의 1만 프랑의 지대가 등기 시에는 8000프랑의 가치에 지나지 않을 때, 반증 불가능한 결과에 의해 이 지대는 금속으로 된 자본이 아니라 부동산을 대표하니 자신의 지대를 보전하기 위해 소득의 증가를 요구하는 것이 매일 그 소유권이 감소하는 금리 생활자의 일일 때, 태환을 말하는 것은 이때다. 태환, 이는 파산이다! 그리고 정부는 한편으로 모든 채무자와 마찬가지로 상환을 통해 자유로워질 권리가 있다고 확신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자신의 채무의 성격을 확신하지 못하고, 소유권자의 소란에 위협을 느껴 무엇을 풀어야 할지를 몰랐다.

이와 같이 소유권은 더 다수의 머리들에 분산되면 될수록 더욱 비사회적이 된다. 소유권을 완화하고 인간화해야 할 것으로 여겨지는 집단적 특권이 바로 소유권을 그 흉측한 모습대로 보여주는 것이다. 분할된 소유권, 비인격적 소유권은 소유권들 중 최악의 소유권이다. 용간한 뒤 게클랭(du Guesclin)이 프랑스를 구해냈을 때의 유명한 침략자 무리들보다 전리품에 더 탐욕을 부리고 더 무서운 용병 대부대들이 프랑스를 덮고 있음을 오늘날 누가 그로부터 알아채지 못하는가!

소유권 공동체를 연합으로 보지 않도록 조심하자. 개인 소유권자는 아직 염님, 정의, 수치가 통하는 것으로 드러날 수 있다. 집단 소유권자는 피도 눈물도 없고 후회도 없다. 이는 환상적이고 불굴이며, 모든 격정과 사랑에서 벗어난 존재, 맷돌이 돌면서 곡식을 짓이기는 것처럼 자기 관념의 원 안에서 움직이는 존재다. 소유권이 사회적이 될 수 있는 것은 결코 공유됨으로써가 아니다. 모든 사람을 죽이는 것으로 결코 격노를 치료하지 못한다. 소유권은 무한한 공동 참여가 아니라 그 원리의 변혁에 의해서 끝날 것이다. 그리고 이는 맹목적인 만큼 다루기 힘든 어떤 사람들이 인민에게 설교하는 민주주의, 보편적 소유권의 체제가 사회를 창조하기에 무능력한 이유다.

모든 소유권 중에 가장 혐오스러운 것은 재능을 구실로 한 소유권이다.

예술가에게 시대와 사람들을 비교해, 여러 세기에 걸친 예술작품의 불평등은 특히 사회의 진자 운동에서, 신념들과 정신 상태의 변동에서 나온다는 것, 그 사회에 그 예술가라는 것, 그와 그의 동시대인 사이에는 필요와 관념의 공동체가 존재해서, 그로부터 그들의 의무와 관계의 체계가 생겨나서, 공적은 임금처럼 언제나 엄밀하게 규정될 수 있다는 것, 취향의 규칙, 발명, 작문, 그리고 실행의 법칙이 발견되어 예술은 그 예지적 특성을 잃고 몇몇 예외적 본성을 지닌 자들의 특권이기를 중단할 시대가 오리라는 것을 증명해 주라. 이 모든 관념은 예술가에게는 과도하게 우스운 것으로 여겨질 것이다.

그에게 이렇게 말해 주라. “당신은 입상을 만들었고 내게 그것을 사라고 제안한다. 나는 물론 그러고 싶다. 하지만 이 입상이 정말로 입상이라면, 내가 그 값을 내려면 내가 입상을 본 적도 없고 입상을 만들 능력도 전혀 없지만 단 하나의 측면에서 내가 발견할 수 있을 시詩와 조형의 어떤 조건들을 결합해야 한다. 이 조건들이 충족되지 않으면 당신이 어떤 어려움을 이겨 냈더라도, 당신의 예술이 내 직업보다 아무리 우월해 보여도, 당신은 쓸모없는 작품을 만든 것이다. 당신의 작업은 아무 가치가 없다. 그것은 그 목적을 달성하지 못하고, 당신의 무능을 명백히 보여 주어 내 유감을 자극하는 데나 소용이 될 뿐이다. 왜냐하면 확립해야 할 것은 나와 당신의 비교가 결코 아니라 당신의 작업과 당신의 이상 간의 비교이기 때문이다. 그 후에 당신은 성공할 경우에 얼마를 달라고 해야 할지를 나에게 물을 것인가? 이 값은 필연적으로 내 능력에 맞추어지며, 내 지출을 정수로 나눈 몫으로 정해진다고 당신에게 대답한다. 그런데 이 비율은 무엇인가? 바로 입상이 당신에게 들이게 했을 비용의 등가다.”

그런 말을 들은 예술가가 그 힘과 정당성을 느끼는 것이 가능하다면, 그때에는 그에게서 이성이 상상력을 대신하는 것이다. 그는 더 이상 예술가가 아니기 시작할 것이다.

구체적으로 이런 부류의 사람들에게 충격이 되는 것은 감히 그들의 재능을 값으로 매긴다는 것이다. 그들의 말을 들어 보면, 무게와 크기는 예술의 존엄성과 양립 불가능하다. 모든 것을 상품화하는 이 광기는 퇴폐하는 사회의 신호로서 그 사회에서는 더 이상 걸작이 만들어지지 않을 것이다. 걸작을 알아볼 줄 모르기 때문이다. 그리고 내가 예술인들의 정신을 그들이 쫓아가지 못할 추론과 이론이 아니라 사실에 의거해 계몽시키고 싶은 것은 이에 관해서다.

지난 전람회에 예술가 약 1800명이 예술품 4200점을 보냈다. 이 예술품들(입상, 그림, 초상, 부조 등) 각각의 상업적 가치를 평균 300프랑으로 계산하면 누구나 진가보다 훨씬 밑으로 본 것이 아님을 확신한다. 그러므로 126만 프랑의 총가치가 1800명 예술가의 산물이라고 하자. 대리석, 화폭, 금박, 액자, 모델, 학습, 연습, 구상 등에 지출한 돈이 평균 100프랑이라고 가정하자. 그리고 3개월간 작업을 한다고 하자. 순 84만 프랑이 남는다. 즉 인당 90일에 대해 466프랑 65상팀이다.

그러나 전람회에 보내지는 4200점은 그중 절반에 가까운 작품이 심사위원회에 의해 제거되어도, 바로 그 작가들의 판단에 그해 동안의 예술적 생산의 최상이고 가장 아름다운 작품들이라는 것, 이 생산물 중 상당 부분은 초상화로 이루어지며, 아주 넉넉한 그 보수는 예술작품들의 시가를 훨씬 초과한다는 것, 전시된 물품의 상당량이 팔리지 않은 채로 있다는 것, 이 전시 마당 바깥에서는 다수의 제작자들이 전람회의 가격표보다 훨씬 낮은 가격에 작업한다는 것, 비슷한 관찰 내용이 음악, 무용, 모든 예술 범주에 적용된다는 것을 생각한다면, 예술가의 평균 임금은 1200프랑에 못 미친다는 것, 산업 인구에 대해서처럼 예술가 인구에 대해서도 행복 수준은 슈발리에 씨의 위압적인 공식, 1인당 하루에 56상팀이라는 것으로 표현되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그리고 빈곤이 대조에 의해 더욱 부각되고 예술가의 기능은 아주 사치에 속하므로, 어떠한 빈곤도 예술가의 빈곤만 못하다는 것은 속담으로 들어갔다. 내 슬픔과 같은 슬픔이 있는지(Si est dolor, sicut dolor meus)!

그리고 사회경제학 앞에서 예술 작업과 산업상의 작업은 어째서 이렇게 동등한가? 생산물의 비례성 밖에는 부가 없으며, 본질상 평등과 비율인 부의 최고 표현인 예술은 바로 이에 의해 평등과 인간적 우애의 상징이 되는 것이다. 고집쟁이가 반발해 도처에서 자기 위신을 내세우고 특권을 만들어도 소용없다. 비례는 휘어짐 없이 있다. 노동자들은 서로 간에 연대성을 유지하고 있으며, 자연은 그들의 침해를 벌할 책임을 맡는다. 사회가 사치품에 자기 생산물의 5퍼센트를 소비한다면, 이 생산에 그 노동자들의 20분의 1을 고용할 것이다. 사회에서 예술가들의 몫은 그러므로 필연적으로 산업인들의 몫과 동등할 것이다. 개인적 재분배는 사회가 단체들에 이를 방치한다. 왜냐하면 개인에 의해 모든 것을 실현하는 사회는 그의 동의 없이는 개인을 위해 아무것도 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한 예술가가 총보수에서 자기 혼자만을 위해 100개의 몫을 챙긴다면, 그를 위해 매춘을 하거나 짚더미 위에서 죽는 그의 동료들 99명이 있다. 이 계산은 증권거래소의 청산과 마찬가지로 확실하고, 확인된 것이다.

그러므로 예술가들은 이를 알도록 하라. 그들이 말하듯이 흥정을 하는 것은 식품상인이 아니다. 물건의 가격을 정한 것은 필연 자체다. 어떤 시기들에서 예술품 값이 레오 10세, 로마 황제들, 그리고 페리클레스의 세기들에서처럼 올랐다면 이는 존재하기를 중단한 특혜적인 특수 원인들에 관련되었다. 이탈리아 예술가들에게 지불해 준 것은 그리스도교 세계의 금과 면죄 공물이었다. 황제들 치세 때 그리스 예술가들에게 지불해 준 것은 정복당한 민족들의 금이었다. 페리클레스 치세 때 그들에게 지불해 준 것은 노예들의 노동이었다. 평등이 찾아왔다. 자유 학예는 노예제를 다시 가져오면서 그 이름을 포기하기를 원하는가?

재능은 통상적으로 총애를 잃은 본성의 특성으로, 그에게서는 적성들의 부조화가 이상한, 괴기스러운 특수성을 낳는다. 손이 하나도 없는 사람은 배로 글을 쓴다. 이것이 바로 재능의 이미지다. 또한 우리는 모두 예술가로 태어난다. 우리의 영혼은 우리의 얼굴처럼 언제나 그 이상에서 다소 떨어져 있다. 우리의 학교들은 성장을 인도해 본성의 기형들과 교정하는 성형 기관들이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교육은 점점 보편성, 재능과 지식들의 균형을 지향해 간다. 또한 바로 그렇기 때문에 예술가는 그와 호화로운 공동체를 이룬 사회에 둘러싸여서만 가능하다. 예술의 문제에서 사회가 거의 모든 것을 한다. 예술가는 그의 찬양을 불러일으키는 불구의 존재보다는 애호가의 머리에 있다.

소유권의 영향 아래 예술가는 그의 이성에서 타락하고, 그의 도덕관념에서 문란하고 그의 동료들에 대한 멸시의 감정으로 가득 차서 그 멸시의 선전이 그를 단지 값이 나가게, 판매 가치가 있게 그리고 존엄성은 없게 만들어 주는데, 이런 그는 이기심의 불순한 이미지다. 그에게서 아름다운 도덕은 진부한 사안이고 모양내는 일이다. 의와 명예의 관념은 그의 가슴에서는 뿌리를 내리지 못하고 미끄러진다. 그리고 사회의 모든 계급 중에 예술가 계급이 강한 영혼에서도, 고귀한 품성에서도, 가장 빈약하다. 만약 사회 직업들을 의지의 세기, 감정의 위대성, 격정의 위력, 진리와 정의에 대한 열의, 학설들의 가치에 대해 행해진 추상에 힘입어 문명에 가한 영향력에 따라 배열하면 사제들과 철학자들이 제1순위에 나타날 것이다. 그 다음이 위정자들과 장수들, 그 다음이 상인들, 산업인들, 경작자들이다. 끝으로 학자들과 예술가들이 된다. 사제는 그 시적인 언어를 구사하면서 자신을 신의 살아 있는 신전으로 간주하는 반면, 철학자는 스스로에게 ‘너의 모든 행위가 모범이요 규준으로 소용될 수 있도록 행위하라’고 말하는 반면, 예술가는 자기 작품의 의미에 무관심한 채로 있다. 그는 결코 그가 내세우고 싶은 전형을 그 작품에 인격화하기를 구하지 않는다. 그는 이를 사상捨象한다. 그는 아름다움과 숭고함을 펼치면서 이를 경배하지 않는다. 그는 그리스도를 화폭에 담지만 성 이그나티오스처럼 그를 자기 가슴에 두지 않는다.

그 본능이 언제나 아주 확실한 인민은 입법자들과 영웅들에 대한 기억을 간직한다. 예술가들의 이름은 별로 개의치 않는다. 참 오랜 기간 그 불손한 순진함 속에서 마치 인생의 이 채색공을 자신의 악의 선동자, 자기의 억압의 공모자로 인정한 듯이 그들에게 반감과 멸시만을 느낀다. 철학자는 사치 예술에 대한 인민의 이 불신을 그의 책에 기록했다. 입법자는 사직 당국에 이 예술들을 고발했다. 종교는 같은 감정에 순종해 그들을 파문으로 징벌했다. 예술, 즉 사치, 쾌락, 관능, 이는 사탄의 작품들과 화려함으로, 그리스도인을 영원한 저주에 넘겨준다. 그리고 일반적 타락이 다른 어떤 계급이나 마찬가지로 존경할 만하게 해 준 한 계급의 사람들, 결국 자신의 권리를 사용한 이 사람들을 비난하려는 마음 없이 나는 그리스도교의 신화가 정당화된다고 감히 말한다. 어느 때보다 더 예술은 공중의 빈곤에 대한 영구적 도발이며, 방탕함에 대한 가면이다. 소유권 때문에 사람에게 있는 최선의 것은 끊임없이 사람이 가지는 최악의 것이 된다. 최선의 것의 타락은 최악의 비극이다(corruptio opimi pessima).

경제학자들은 끊임없이 인민에게 반복한다. “노동하라. 노동하라. 저축하라. 자본화하라. 때가 오면 소유권자가 되어라.” 마치 이렇게 말하는 것과 같다. “일꾼들이여, 당신들은 소유권의 신입 회원들이다. 당신들 각자는 주머니에 자신을 교정할 회초리를 넣고 다니며, 이는 언젠가는 다른 이들을 교정하는 데 소용될 수 있다. 소유권을 얻을 때까지 노동으로 일어서라. 그리고 인간의 살을 맛보았을 때에는 다른 고기는 더 이상 원치 않을 것이다. 그러면 당신의 기나긴 절욕을 보상하게 될 것이다.”

프롤레타리아트로부터 소유권으로의 추락! 노예 신분으로부터 폭정으로, 즉 플라톤에 따르면 여전히 노예 신분으로의 추락! 그렇기는 하지만, 그럴 필요가 있다. 노예 신분의 조건은 더는 견딜 수 없다. 행진해서 임금 생활자 신분에서 해방되고 자본가가 되고 폭군이 될 필요가 있다! 그럴 필요가 있다. 프롤레타리아들이여, 알겠는가? 인류에게 소유권은 선택 사항이 결코 아니며, 운명의 절대 명령이다. 당신은 당신 주인들을 예속화함으로써 그들이 당신에게 부과하는 종살이에서 속량된 후가 아니면 자유롭지 않을 것이다.

어느 여름 아름다운 일요일에 대도시 인민은 그들의 어둡고 습한 집을 떠나 들녘의 활기차고 순수한 공기를 찾아간다. 하지만 무엇인가! 더 이상 들녘이 없는데! 토지는 천 개의 빽빽한 조각으로 분할되고 긴 밭둑들이 가로지른다. 토지는 더 이상 없다. 밭의 모습은 도시민에게는 극장과 박물관에밖에 존재하지 않는다. 새들만이 공중 높은 데서 실재하는 경치를 관조한다. 이 빗질된 땅 위의 한 오두막을 비싼 돈을 지불하고 사는 소유권자는 그의 들이라고 칭하는 잔디 조각을 이기주의자요 고독한 자로서 즐긴다. 이 구석 말고는 그는 가난한 자처럼 토지로부터 추방된다. 자신의 고향에 가 보지 못했다고 할 사람이 얼마나 많은가! 순결한 남편들이여, 우리가 잔인하게 유린하는 이 가엾은 자연을 재발견하려면 그의 숭고한 포옹을 즐기기보다 더 멀리 사막으로 갈 필요가 있다.

우리를 자유롭게 해야 했던 소유권, 이 소유권은 그러므로 우리를 죄수들로 만든다. 무슨 말인가? 그것이 우리를 서로에 대해 신하와 폭군으로 만들어 우리를 타락시킨다.

사람들은 임금 생활자 신분이 무엇인지 잘 아는가? 그것은 지휘권만큼이나 그 이상으로 자신의 편견에 집착하는 주인, 그 존엄이 특히 ‘이것을 내가 원하므로 나는 명령한다(sic volo, sic jubeo)’는 것을 내세우고 결코 자신의 말을 해명하지 않는 데 있는 주인 밑에서 일하는 것이다. 얼마나 자주 이를 멸시하고 비웃는가! 임금 생활자 신분, 그것은 끊임없이 남들의 생각을 연구하면서 스스로는 아무 생각도 가지지 않는 것, 일용할 빵과 일자리를 잃을 두려움 말고 다른 자극제를 모르는 것이다.

임금 생활자는 그의 용역을 빌리는 소유권자가 이런 연설을 하는 것을 듣는다. “당신이 해야 할 것은 당신과 조금도 관계없다. 당신은 그것을 감독할 것이 전혀 없으며, 당신은 책임지지 않는다. 일체의 관찰은 당신에게 금지된다. 당신에게는 임금 외에는 아무 이득도 기대할 것이 없다. 어떤 요행도 기대할 것이 없고, 어떤 비난도 두려워할 것이 없다.”

기자에게 이와 같이 말한다. “우리에게 당신의 기사를 내놓아라. 그리고 괜찮다면, 직분도 내놓아라. 당신이 말해야 할 것은 이런 것이고, 당신이 침묵해야 할 것은 이런 것이다. 당신이 우리의 관념, 우리의 목적과 수단에 대해 무슨 생각을 하든, 언제나 우리의 의견을 돋보이게 하라. 이는 당신을 해할 수 없으며, 당신에게 근심을 끼칠 수도 없다. 기자의 특성은 무기명이라는 것이다. 이는 당신의 급료 1만 프랑과 10건의 정기구독의 대가다. 이는 괜찮은가?” 그러자 그 기자는 중상모략하는 예수회원처럼 한숨을 쉬며 대답한다. “나도 살아야 해요!”

변호사에게는 이렇게 말한다. “이 찬반의 건은 내가 운을 걸기로 결심한 경기다. 그리고 이를 위해 나는 당신 직업을 가진 사람을 필요로 한다. 당신이 아니라면 당신의 동료, 당신의 적수가 맡게 될 것이다. 그리고 내가 이기면 금화 1천 닢이, 내가 지면 500프랑이 있다.” 그러자 그 변호사는 머뭇거리는 양심에게 “나도 살 필요가 있어!”하고 말하며 존경의 표시로 고개를 숙인다.

사제에게는 이렇게 말한다. “300번의 미사를 위한 돈이 여기 있소. 당신은 작고한 자의 도덕성에 전혀 신경 쓸 것 없소. 그는 타인의 재물을 손에 가득 쥐고, 사람들의 저주를 짊어지고 위선 가운데 죽어서 신을 전혀 보지 못할 개연성이 있소. 이는 당신의 일이 아니오. 우리가 돈을 냅니다. 계속 말해 봐요.” 그러자 사제는 눈을 하늘로 향하며, “아멘, 나도 살아야죠”하고 말한다.

공급업자에게 말한다. “우리에게는 소총 3000정, 검 1만 자루, 총알 1000퀸틀, 화약통 100개가 필요하다. 이걸 가지고 할 수 있는 것은 당신 상관할 일이 아니다. 그 모든 것이 적에게 넘어갈 수 있다. 하지만 20만 프랑의 이득이 있을 것이다.” 공급업자는 대답한다. “좋소. 저마다 자기 본업이 있고, 모든 사람은 살아야 하지요!” 사회를 둘러보라. 그러면 보편적 절대주의를 확인하고 나서 당신은 보편적 비열함을 인정할 것이다. 이 비굴한 체제의 부도덕함이 얼마인가! 이 기계화 안에 얼마나 불명예가 있는가!

사람이 무덤에 다가갈수록 그 소유권자는 화해 불가능한 것으로 드러난다. 이는 죽을 때까지 회개하지 않음의 무서운 신화에서 그리스도교가 그린 것이다.

친지들에게 손해를 끼치면서까지 그가 이익을 주고자 하는 가정부는 그의 배려에 분노한다는 것, 교회는 충분히 부유하다는 것, 정직한 사람은 기도가 필요 없다는 것, 그의 일가친척은 가난하고 부지런하고 정직하다는 것, 일가친척 중에는 일으켜 세워 줄 용감한 소년들이 있고, 지참금을 줄 처녀들이 있다는 것, 그들에게 재산을 남겨 주면 그들의 감사를 받고, 여러 세대에 선행을 한다는 것, 유언장이 여러 가족의 결합과 번영에 도움이 된다는 것이 법의 정신이라는 것을 이 늙은 색정광 또는 신자에게 지적해 주어라. “나는 원치 않아!”하고 소유권자가 건조하게 대답한다. 그리고 유원장의 추문은 재산의 부도덕성을 뛰어넘는다. 그런데, 최고 원위의 한 분지分枝인 이 영지 수여 및 전수 권리의 변경을 시도해 보라. 그러면 당신은 그 순간 다시 독점에 빠지게 된다. 당신은 소유권을 용익권으로, 지대를 종신 연금으로 바꾸는 것이다. 당신은 소유권자의 독재를 국가의 절대주의로 대체하고, 그러면 그 둘로부터 하나가 된다. 봉건적이고 양도 불가능한 소유권으로 돌아가서 자본의 유통을 멈추고 사회를 퇴보시키든지, 아니면 공동체로, 무無로 빠진다.

그 사람에게 소유권의 모순은 유언장에서 끝나지 않는다. 상속으로 넘어간다. 죽은 자가 산 자를 붙잡는다고 법이 말한다. 이와 같이 소유권의 치명적인 영향은 유언자로부터 상속인에게 넘어간다.

한 가부장이 고풍스러운 저택에 그가 키운 일곱 아들을 남긴다. 그의 재산의 전수는 어떻게 행해질 것인가? 두 체계가 등장하며, 이 둘이 차례로 시도되고, 교정되고, 변경되지만 여전히 성공하지 못한다. 무서운 수수께끼가 아직도 풀려야할 것으로 있다.

장자권 아래서는 소유권이 장자에게 돌아간다. 다른 여섯 동생들은 가재도구를 받고 아버지의 소유지에서 쫓겨난다. 아버지가 죽으면 그들은 그 땅 위에서는 이방인이고, 재산도 신용도 없다. 안락한 삶으로부터 이행 과정도 없이 빈곤 상태로 넘어간다. 자녀들에게 아버지는 양육자였다. 동생들은 큰형을 적으로 볼 수밖에 없다. … 장자권에 반대하는 온갖 것이 말해졌다. 그 체계의 반대를 살펴보자.

몫을 평등하게 나눌 때에는 모든 자녀가 상속 재산을 보전하고, 가족의 계속성을 유지하도록 부름을 받는다. 그러나 한 사람에게만 충분한 것을 일곱 명이 어떻게 소유할까? 경매가 일어나서 상속자인 가족은 소유를 잃는다. 현금을 주고서 상속자가 되는 것은 낯선 사람이다. 상속 재산 대신 자녀들 각 사람은 돈을 받으며, 곧 아무것도 가지지 못하게 될 확률이 99대 1이다. 아버지가 살아 있는 한에서는 가족이 있었다. 지금은 모험가들밖에 없다. 장자권은 적어도 이름의 계속성을 보장해줄 것이다. 이는 그 노인에게는 그의 조상들에 의해 세워지고 그의 손으로 보전된 기념물이 그의 일족 내에 남아 있을 보장 수단이었다. 몫의 평등은 가족이라는 신전을 파괴했다. 성주신들은 더 이상 없다. 정주 소유권과 함께 문명인들은 유목 생활의 비밀을 발견했다. 그러니 상속권이 무슨 소용이었는가?

상속권을 판매하는 대신 상속인들이 이를 분할한다고 가정하자. 토지는 쪼개지고, 잘리고, 깊이 파인다. 경계석을 세우고, 도랑을 파고, 바리케이드를 치고, 소송과 증오의 씨를 뿌린다. 소유권이 조각으로 갈라지고 통일성이 깨진다. 어떤 부분을 바라보든지 소유권은 사회의 부정, 그 목적의 부정에 도달한다.

이와 같이 소유권은 사람과 자연의 거룩한 결합을 완성해야 했던 소유권이 혐오스러운 매매춘에 도달할 뿐이다. 술탄은 그의 노예를 사용하고 남용한다. 토지는 그에게는 색욕의 수단이다. … 나는 여기서 하나 이상의 비유를 찾아내며, 심오한 유비를 발견한다.

양성 관계에서 결혼을 내연 관계와 구분하는 것은 무엇인가? 모든 사람이 이 둘의 차이를 감지한다. 그 문제가 도덕관념의 방탕함과 소설들의 뻔뻔스러움에 의해 모호해진 한에서 그것을 고려할 처지에 있는 사람들이 별로 없을 것이다.

그것은 자녀들인가? 비합법적 교제가 가장 다산성이 큰 합법적 결합만큼, 그리고 그것처럼 자녀를 잘 생산하는 것을 보게 된다. 그것은 지속성인가? 독신자들 다수는 30년간 한 사람의 애인을 두며, 이 애인은 처음에는 욕을 먹고 품위가 떨어지지만 때가 되면 그의 별 볼 일 없는 애인 위에 군림하고 그를 타락시킨다. 게다가 결혼의 계속성은 물론 의무적이기는 하지만 결혼이 그의 성격의 아무것도 상실하지 않으면서 이혼을 통해 임의 선택이 될 수 있다. 계속성은 의문의 여지없이 사랑의 맹세이고, 가족의 희망이다. 그러나 이는 결코 결혼에 필수는 아니다. 결혼은 언제나 혼배성사를 훼손하지 않고도 일정한 원인들로 해서 중단될 수 있다. 끝으로 그것은 결혼식, 보좌 신부와 사제 앞에서 선언된 네 마디 말인가? 그러한 형식이 사랑, 불변성, 헌신을 위해 어떤 효능을 가질 수 있는가? 마라는 장자크처럼 숲에서, 태양 앞에서 그의 가정부와 결혼했다. 그 거룩한 남자는 진심으로 혼약을 했으며, 그의 결합이 시의회가 연서連署한 경우와 마찬가지로 올바르고 존경스러웠다는 것을 의심하지 않았다. 마라는 생의 가장 중요한 행위를 공화국의 개입 없이 하는 것이 옳다고 판단했다. 그는 루이 블랑 씨의 관념들에 따라서 자연적 사실을 협약 위에 두었다. 그러므로 우리 모두가 마라처럼 이런 방법을 활용하는 것을 누가 못하게 막는가? 그리고 이 결혼이라는 말이 뜻하는 것은 무엇인가?

결혼을 구성하는 것은 사회가 약속의 순간에 거기 있는 것만이 아니라 부부의 동거가 지속되는 한에서 사회가 거기에 현존한다는 것이다. 내가 말하건대 사회만이 부부 각자를 위해 상대방의 서약을 받는다. 사회만이 그들에게 권리를 준다. 사회만이 이 권리를 공신력 있게 만들 수 있으니 말이다. 그리고 계약자들에게 상호 의무만 부과하는 것 같으면서도 사회는 실제로는 스스로를 위해 규정을 한다. “우리는 서로 간에 결합되기 전에 신 안에서 결합된다. 성인들의 자녀는 짐승과 야만인이 하는 식으로 결합될 수 없다”고 토비는 사라에게 발한다. 사회의 가시적 기관인 사법 당국에 의해, 그리고 사회를 대표하는 증인들 앞에서 성별된 이 결합에서 사랑은 자유이고 호혜적이라고 가정되며, 우연한 결합에서와 마찬가지로 후세가 예상된다. 사랑의 계속성은 바래며, 촉발되지만 보장되지는 않는다. 관능 자체는 허락된다. 차이라고는, 이 차이가 심연이지만, 내연 관계에서는 이기심만이 결합을 지배하는 반면, 결혼에서는 사회의 개입이 이 이기심을 순화純化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결과를 보라. 간음을 응징하고 거짓 선서를 벌하는 사회는 내연녀에 대한 내연남의 고소를 받지 않는다. 그러한 사랑은 개들의 짝짓기나 마찬가지로 사회를 고려하지 않는다. 개들과 음행하는 자들은 성 밖에 있으리라(foris canes et impudici)! 사회는 질색을 하며 그런 것을 외면한다. 사회는 내연남의 과부와 고아를 저버리며, 상속에서 이들을 결코 인정하지 않는다. 사회의 눈에 엄마는 창녀이고, 그 아이는 개새끼다. 마치 한 여인에게 이렇게 말하는 듯하다. “당신은 나 없이 몸을 맡겼다. 당신은 나 없이도 스스로를 지킬 수 있고 먹고살 것을 마련할 수 있다.” 아이에게는 “너의 아빠는 쾌락을 위해 너를 낳았다. 너를 입양하는 것은 내게 마땅치 않다.” 결혼을 훼손하는 자는 결혼의 보장을 권리로 청구할 수 없다. 그러한 것이 사회의 법, 엄격하지만 정당한 법으로, 이를 욕하는 것은 사회주의적 위선, 순결한 사랑과 외설적 사랑을 한꺼번에 원하는 자들이나 할 일이다.

사람의 극히 개인적이고 극히 자발적인 행위에 대한 사회적 개입의 이 감정, 사랑을 순결하게 만들어 이를 증진하는 현존하는 신에 대한 규정할 수 없는 이 존경은 부부에게는 알 수 없는, 그리고 알려지지 않은 애정의 원천이다. 결혼에서 남자는 모든 여자의 애인인데, 이는 결혼에서만 그를 모든 여성에 동감으로 결합해 주는 진정한 사랑을 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는 자기 아내밖에는 모르며, 아내밖에 몰라서 더욱 사랑하는데, 이는 이 육체적인 배제 없이는 결혼은 사라질 것이고, 사랑도 이와 함께 사라질 것이기 때문이다. 플라톤적 공동체는 현대의 개혁자들이 더욱 쉽게 다시 요구하는 것인데 이는 사랑을 주지 않으며, 사랑의 죽은 머리caput mortuum만을 제시한다. 이 육신과 영혼의 공산주의에서는 사랑은 확정이 되지 않아 추상과 꿈의 상태로 있기 때문이다.

결혼은 사랑의 참된 공동체이며, 모든 개인 소유의 전형이다. 사람들, 물건들과의 모든 관계에서 사람은 사회와만, 즉 결국은 자기 자신과, 자기 안에 있는 이상적이고 거룩한 존재와만 진정으로 계약을 맺는다. 자아, 사회에 대한 이 존경, 성서에서 말하듯 우리의 모든 행위에, 우리의 모든 사고에 현존하는 신에 대한 이 두려움을 파괴해 보라. 그러면 사람은 자기 영혼과 정신, 자기 능력을 남용하고 자연을 남용해 그 사람이 더럽혀지고 오염되어, 거역할 수 없는 타락에 의해 방종자, 폭군, 불쌍한 자가 된다.

그런데 사회의 신비로운 개입에 의해 불순한 사랑이 순수한 사랑이 되고, 무질서한 간음이 평화롭고 거룩한 결혼으로 변화하듯, 경제 질서에서 그리고 사회의 규정들에서 소유권, 돈을 받고 자본을 파는 것은 사회적이고 합법적인 소유의 첫 번째 계기일 뿐이다. 그때까지는 소유권자는 누리기보다는 오히려 남용을 한다. 그의 지복至福은 음란한 공상이다. 그는 조르기만 하고 소유하지 않는다. 소유권은 여전히 옛날에는 모욕당한 농노를 격앙시켰고 프랑스 혁명이 폐지할 수 없었던 영주의 이 역겨운 권리다. 이 권리의 지배 아래 모든 노동 산물은 더럽다. 경쟁은 방탕에 대한 상호 자극이다. 재능에 주어진 특권은 몸을 파는 행위의 임금이다. 헛수고이겠지만 국가는 경찰력을 이용해 아버지들이 그들의 자녀를 인정하고 그들의 작업의 부끄러운 소산에 표시를 할 것을 의무화하고 싶을 것이다. 그 자국은 지워지지 않는다. 사악함에서 수태된 개새끼는 그 작자의 파렴치함을 공표한다. 상업은 운명이 정해진 노예 거래에 불과하다. 어떤 노예는 부자들의 쾌락용으로, 다른 노예는 인기 있는 비너스 숭배용으로 말이다. 그리고 사회는 사랑에 낙심한 각자가, 정직한 사람은 그의 사랑이 배반당했으므로, 행운아는 연애의 다양함이 사랑의 보충물이 되므로, 거기에 뛰어들어 통음 난무에 뒹구는 매춘 알선의 광대한 체제다.

남용! 사람의 사악한 짓! 이렇게 법률가들은 외친다. 우리를 질투하게 하고 탐욕적이게 하는 것, 우리의 격정을 뛰게 하는 것, 우리의 악의를 그 궤변으로 무장시키는 것은 소유권이 아니다. 반대로 소유권을 더럽히고 타락시키는 것이 우리의 격정이고 우리의 악이다.

나는 내연 관계가 사람을 더럽히는 것이 아니라, 사람이 격정과 악으로 내연 관계를 더럽히고 부패시킨다고 누가 내게 말해주는 것만큼은 좋아할 것이다. 그러나 박사님들이여, 내가 규탄하는 사실들이 소유권의 본질인가, 아닌가? 법적 관점에서 그 사실들은 일체의 사법적 조치를 면하는 은신처에 놓여 나무랄 데 없지 않은가? 나는 돈을 위해 매문賣文을 하는 이 기자를 재판관에게 넘겨 법정에 소환하게 할 수 있는가? 자기 말 중 어떤 것을 악에게 팔기도 하는 이 변호사, 자기 기도 중 어떤 것을 악에게 팔기도 하는 사제는? 가난한 자가 미리 요구되는 보수를 내놓지 않는다고 해서 그를 죽게 놔두는 의사는? 화류계 여성을 위해 자기 자녀들을 낙담케 하는 늙은 호색한은? 나는 내 조상들의 추억을 폐하고 후세를 마치 근친상간이나 간통에서 나온 것처럼 조상도 없는 자들로 만들어 줄 경매를 막을 수 있는가? 나는 소유권자가 소유하는 것 이상으로 그에게 보상해 주지 않고, 즉 사회를 멸망케 하지 않고 그가 사회의 필요에 부응하도록 강제할 수 있는가?

소유권은 소유권자의 범죄에 대해 무죄라고 당신은 말한다. 소유권은 그 자체로 선하고 쓸모 있다. 그것을 타락시키는 것은 우리의 격정과 우리의 악이다.

이와 같이 소유권을 구하기 위해 당신은 그것을 도덕과 구분한다. 그에 이어서 왜 그것을 사회와 구분하지 않는가? 이는 바로 경제학자들의 추론이다. 로시 씨는 말한다. 정치경제학은 그 자체로 선하고 쓸모 있다고. 하지만 그것은 도덕이 아니라고. 그것은 모든 도덕성에 대한 사상捨象을 진행한다. 도덕의 상위 법칙에 따라 그의 이론을 남용하지 않고, 그의 가르침을 이용하는 것은 우리가 할 일이다. 마치 이렇게 말하는 것과 같다. 정치경제학, 사회의 경제학은 사회가 아니다. 사회의 경제학은 일체의 사회에 대한 사상을 진행한다. 사회의 상위 법칙에 따라 경제학의 이론을 남용하지 않고 경제학의 가르침을 이용하는 것은 우리가 할 일이다! 무슨 혼돈인가!

나는 단지 경제학자들과 함께 소유권은 도덕도 사회도 아니라는 것을 주장하는 것만이 아니고 또한 소유권은 그 원리상 도덕에, 사회에 정반대라는 것, 이는 정치경제학 이론이 사회 이익에 정반대이기 때문에 정치경제학이 반사회적인 것과 마찬가지라는 것을 주장한다.

정의에 따르면, 소유권은 사용하고 남용할 권리, 즉 사람이 자기 인신과 제물에 대해 가지는 절대적이고 책임지지 않는 지배권이다. 소유권이 남용할 권리이기를 중단한다면, 소유권이기를 중단할 것이다. 나는 소유권자에게 허락된 남용 행위들의 범주에서 예들을 취했다. 합법성, 나무랄 데 없는 소유권에 속하지 않은 것 중 무엇이 거기서 일어나는가? 소유권자는 자기 재화를 그에게 좋아 보이는 자에게 주고, 불이야 하고 외치는 일 없이 이웃이 불타 죽게 놔두고, 공익에 반대하고, 자기 상속 재산을 낭비하고 일꾼을 착취하고 갈취하며, 불량하게 생산하고 불량하게 판매할 권리를 가지지 않는가? 소유권자는 그의 소유권을 잘 이용하도록 현명하게 강제될 수 있는가? 그는 남용을 하는 데서 방해받을 수 있는가? 내가 무슨 말을 하는가? 소유권은 바로 그것이 남용적이므로 입법자에게 더욱 성스러운 것으로 있는 모든 것이 아닌가? 경찰이 그 사용을 결정하고, 그 남용을 처벌하는 소유권을 상상하는가? 그리고 마지막으로 법이 내연 관계에 정직성을 도입하면서 내연 관계를 파괴하는 것처럼 누가 소유권에 정의를 도입하려고 한다면 소유권을 파괴하게 될 것임이 명백하지 않은가?

그러므로 소유권은 원리와 본질상 부도덕하다. 이 명제는 이제부터 소유권 비판에 가담한다. 따라서 소유권자의 권리들을 정하면서 도덕의 권리들을 남겨 두지 않은 법전은 부도덕의 법전이다. 법률학, 권리에 대한 학문이라고 하는 이것은 소유권자의 항목들을 집성한 것 말고 다른 것이 아니며, 부도덕하다. 그리고 소유권의 자유롭고 평화로운 남용을 보호하기 위해 제정된 정의, 이 남용에 반대하려고 하는 자들에 맞서 강한 손을 빌려주도록 명하는 정의, 소유권의 침해 사항들을 되돌리겠다고 감히 주장할 만큼 대담한 누구든지 마음 아프게 하고, 불명예로 낙인찍는 정의, 그런 정의는 추악하다. 무가치한 첩 때문에 부정父情에서 밀려난 한 아들이 그의 상속권을 박탈하고, 그에게 불명예를 주는 행위를 파괴한다면, 그는 정의 앞에서 책임을 질 것이다. 고발당하고 유죄를 인정하고, 유죄 판결을 받아서 그 창녀가 소유를 얻는 동안에 그는 감옥에 가서 소유권에 명예로운 벌금을 낼 것이다. 그러면 여기서 부도덕성은 어디 있는가? 불명예는 어디 있는가? 정의 쪽에 있는 것이 아닌가? 이 사슬을 계속 펼쳐 보자. 그러면 우리는 곧 우리가 찾는 모든 진실을 알게 될 것이다. 남용적인 소유권, 부도덕한 소유권일지라도 이 소유권을 보호하기 위해 제정된 정의는 추악할 뿐만이 아니다. 형법적 강제 이행은 추악하며, 철창과 교수대는 추악하다. 그리고 이 모든 계열을 포괄하는, 이 역겨운 계통이 나오는 소유권은 추악하다.

소유권을 수호하기 위해 무장한 판사들, 소유권을 고발하는 자들에게 영구적 위협이 되는 열정을 가진 검사들, 나는 당신들에게 호소한다. 당신들은 그런 식으로 당신의 양심을 굴복시키고 당신의 판단력을 부패하게 하는 소유권에서 무엇을 보았는가? 의심의 여지없이 소유권보다 높은, 소유권보다 당신의 존경을 받기에 더 합당한 어떤 원리가 당신에게 소유권을 그렇게 소중하게 만드는가? 소유권의 작품들이 그것을 추악하다고 공언하는 때에 당신은 어떻게 소유권이 거룩하고 신성하다고 선포하는가? 어떤 고려, 어떤 선입견이 당신에게 와 닿는가?

이는 인간 사회의 장엄한 질서로서 당신이 모르지만 소유권이 그 흔들림 없는 기초가 된다고 가정하는 질서인가? 그런 소유권은 당신에게 질서 그 자체이니, 게다가 소유권은 그 본성상 남용적, 즉 무질서하고 반사회적임이 증명되니 그렇지 않다.

이는 당신이 그 법칙들을 이해하지 못하지만 그 구상을 경외하는 필연 또는 섭리인가? 분석에 따르면 소유권은 모순적이고 부패 가능해 그 자체로써 필연의 부정이며 섭리에 대한 손상이니 그렇지 않다.

이는 높은 데서 인간의 빈곤들을 고려하고 악에 의거해 선을 마련하려고 하는 고급 철학인가? 철학은 이성과 경험의 합치이며, 경험의 판단에서처럼 이성의 판단에서도 소유권은 유죄 판결이 되니 그렇지 않다.

이는 종교일까? 아마도!

. 소유권에 의한 신 가설 증명

신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소유권자는 일절 없을 것이다. 이는 정치경제학의 결론이다.

그리고 사회과학의 결론은 이것이다. 소유권은 지고의 존재의 범죄다. 사람에게는 단 하나의 의무, 단 하나의 종교만 있다. 이는 신을 부인하는 것이다. 이것이 크고 첫째가는 계명이다(Hoc est primum et maximum mandatum).

사람들 중에 소유권의 성립은 선택과 철학의 사항이 결코 아니었음이 증명된다. 그것의 기원은 왕정의 기원, 언어와 숭배 행위의 기원처럼 완전히 자생적, 신비적이어서 한마디로 신적이다. 소유권은 종교와 권위의 외피 아래서 어디서나 우리 고집 센 종자를 지배하는 본능적 믿음의 거대한 가족에 속한다. 소유권은 한마디로 그 자체가 종교다. 소유권은 그것의 신학인 정치경제학을 가진다. 그것의 결의론은 법학이다. 그것의 신화론과 그것의 상징은 정의와 계약들의 외적 형태들에 있다. 소유권의 역사적 기원은 모든 종교의 기원처럼 어둠 속에 숨는다. 그 자체에 대해 질문을 받을 때 그것은 그 존재의 사실에 의거해 대답한다. 그것은 전설로써 설명이 되며, 증거들로 비유를 제시한다. 끝으로 소유권은 모든 종교처럼 발달의 법칙에 종속한다. 이처럼 소유권을 차례로 게르만인과 아랍인에서처럼 사용과 거주의 단순한 권리로, 유대인에서처럼 영구적으로 양도 불가능한 상속 재산의 소유로, 중세 때처럼 봉건적이고 장기 임대차적 소유권으로, 로마인들이 알고 우리가 오늘날 안 것처럼 거의 절대적이고 소유권자의 의지로 유통이 가능한 소유권으로 본다. 그러나 벌써 소유권은 그 절정에 도달하고 쇠퇴로 접어든다. 합자회사에 의해, 새로운 담보법들에, 공익을 위한 수용에, 농업 신용의 혁신에, 임대차[25]에 관한 새로운 이론들 등에 공격을 받아 소유권이 곧 그 자체의 그림자에 불과할 순간이 다가온다.

이런 일반적 모습에서 우리는 소유권의 종교적 특성을 무시할 수 없다.

이 신비적이고 진보적인 특성은 특히 소유권이 그 고유한 이론가들에게 유발하는 기이한 환상, 소유권을 발달시키고 개혁하고 개선할수록 그 멸망을 진전시킨다는, 누구나 실제로는 그것을 덜 믿을 경우에 그것을 더욱 많이 믿는다고 언제나 상상한다는 환상, 게다가 모든 종교에 공통인 환상에서 드러난다.

그래서 사도들 중 가장 철학자다운 성 바울로의 그리스도교는 벌써 더 이상 성 요한의 그리스도교가 아닌 것이며, 토마스 아퀴나스의 신학은 아우구스티누스와 아타나시우스의 신학과 같지 않다. 그리고 보탱(Bautin), 뷔셰(Buchez), 라코르데르(Lacordaire) 씨의 로마 가톨릭은 부르달루(Bourdaloue)와 보쉬에(Bossuet)의 로마 가톨릭이 결코 아니다. 그들이 옛 관념들을 질식시키는 때에 이를 확장시킨다고 상상하는 현대의 신비가들에게 종교는 거의 인간적 우애, 민족들의 일치, 지구의 경영에서의 연대와 조화에 불과하다. 종교는 무엇보다도 사랑, 언제나 사랑이다. 파스칼은 우리 시대 신자들의 에로틱한 열망에 분노했다. 신은 19세기에 가장 순수한 사랑이다. 종교는 사랑이다. 도덕은 역시 사랑이다. 보쉬에에게는 그 교리로부터 자선과 자선의 업적들이 흘러나올 것이니 그 교리가 전부였던 반면, 자선은 현대인들에 의해 제1의 자리에 놓이며, 그 교리는 그 자체로는 사소하고 그 모든 가치를 그 내용, 즉 사랑, 아니, 더 우아하게는 도덕에서 끌어오는 공식으로 전락한다.

그렇기 때문에 종교의 진정한 적, 모든 시대에 그것의 열망을 위해 가장 애쓴 자들은 언제나 거기서 철학적 의미를 찾고 이성과 신앙의 일치라는 이 불가능한 작업에 헌신한 최초의 사람들 중 하나인 성 바울로의 맹세에 따라 그것을 이성적인 것으로 만들려고 애를 써 가면서 종교를 가장 많은 열정을 가지고 해석한 자들이다. 내가 말하건대 종교의 진정한 적들은, 그들이 종교를 무덤으로 밀고 간다는 것을 알아차리지 못한 채 종교를 그들이 그 원리들이라고 부르는 것으로 가져가겠다고 주장하는 이 준합리주의자들, 종교를 죽이는 문자로부터 해방한다는, 즉 종교의 본질인 상징주의로부터 해방하고 살리는 정신에 따라, 다른 말로 하면 의심하는 이성과 증명하는 과학에 따라 종교를 가르친다는 구실로 전통을 끊임없이 손질하고 신앙을 왜곡하며 성서의 의미를 비틀면서 교리의 눈에 안 띄는 변질에 의해 그 교리의 형식적 부정에 도달하는 준합리주의자들이다. 키케로의 어원 설명에 의거해 이 거짓 논리학자들이 말한다. 종교는 인류의 연결이라고. 반면에 그들은 종교가 사회 법칙의 표시, 상징이라고 말해야 했을 것이다. 그런데 이 상징은 매일 비판의 마찰에 의해 마모되어 실증과학만이 확인하고 도달할 수 있는 실재의 기대만이 남는다.

마찬가지로 소유권은 일단 사람들이 그 본래의 잔혹성을 지켜 주기를 중단하자, 그것을 규율하라고, 그것을 도덕에 종속시키라고, 그것을 국가에 복속시키라고, 한마디로 그것을 사회화하라고 말하자 몰락해 가고 멸망한다. 내가 말하건대 소유권은 진보적이므로, 그것의 관념이 불완전하고, 그것의 본성이 아무런 확정적인 것도 가지지 않으므로, 그 총체만이 진정한 관념을 내놓을 수 있는 계열의 주된 계기이므로, 한마디로 그것은 종교이므로 열망한다. 사람들이 보전하는 것처럼 보이는 것으로서 실제로는 소유권의 이름으로 추구하는 것은 더 이상 소유권이 아니다. 그것은 과거에 전례 없는 새로운 형태의 소유로서 사람들이 우리에게 언제나 물 자체에서 찾을 필요가 있는 것, 즉 그 의미와 그 위상을 물의 기원이나 목적에서 가정하게 하는 이 논리적 환각에 따라 소유권에 가정되는 원리나 동기들로부터 도출하려고 애를 쓰는 것이다.

그러나 소유권이 종교라면, 그리고 모든 종교처럼 그것이 진보적이라면 또한 모든 종교처럼 그 고유하고 구체적인 목적을 지닌다. 그리스도교와 불교는 고행의 종교, 또는 인류 교육의 종교들이고, 무함마드는 숙명의 종교다. 철학 자체는 이성의 종교다. 그러면 여러 종교들 중 가장 완강한 이 특정 종교, 다른 모든 종교를 타락으로 이끌, 그럼에도 제일 마지막으로 멸망할 이 종교, 그 관객들이 더 이상 믿지 않는 이 종교, 소유권은 무엇인가?

소유권이 점유와 개발 이용에 의해 발현되니, 지배권과 상속에 의한 독점을 강화하고 확정하는 것을 목적으로 삼으니, 지대를 통해서 노동 없이 수확하고 담보를 통해서 보증 없이 위험을 인수하니, 사회에 복종하지 않으니, 그 규칙은 마음대로이니, 그것은 정의에 의해 멸망해야 하니 소유권은 힘의 종교다.

종교적 우화들이 그것을 증언해 준다. 소유권자인 카인은, 창세기에 따르면, 창으로 땅을 정복하고, 경건함으로 위장하고, 소유권을 마련하고 가난한 자, 프롤레타리아, 그처럼 아담의 아들인 아벨, 그러나 낮은 카스트의 비천한 조건의 사람을 죽인다. 이 어원들은 교훈적이다. 이 어원들이 모든 주석자들보다 그 천진함으로 더 많은 것을 말한다.[26] 사람들은 언제나 같은 언어를 말했다. 언어의 일치 문제는 그 언어가 표현하는 관념들의 동일성에 의해 증명된다. 음성과 문자의 다른 형태들에 관해 논쟁하는 것은 우습다.

이처럼 우화에, 그리고 분석에 따르는 것처럼 문법에 따르면 힘의 종교인 소유권은 동시에 종살이의 종교다. 그것이 무기를 든 손에 탈취 당하느냐 아니면 배제와 독점을 통해 진행해 가느냐에 따라 두 종류의 예속을 낳는다. 하나는 고대의 프롤레타리아트로서 정복이라는 원시적 사실, 또는 인류 아담이 카인과 아벨로, 세습 귀족과 평민으로 폭력적으로 분단된 원시적 사실의 결과다. 또 하나는 현대의 프롤레타리아트로서 경제학자들의 노동자 계급이며, 이들은 우리가 본 것처럼 지배권, 상속 그리고 지대에 의한 독점의 성별이라는 중대한 사실에서 모두 요약되는 것이며, 경제적 국면들의 발달에 의해 초래된다.

그런데 소유권, 즉 그 가장 단순한 표현으로 하면 힘의 권리는 오랫동안 그 원초적 조잡성을 간직할 수 없었다. 첫날부터 자신의 얼굴 모습을 구성하고, 본모습을 숨기고, 여러 변장으로 자신을 숨기기 시작했다. 원리상 강도, 도둑과 동의어인 소유권자라는 이름은 장기적으로 소유권의 눈에 안 띄는 변형에 의해, 그리고 종교적 문체에서 아주 흔한 이 미래 예상들 중 하나에 의해 도둑과 강도의 바로 정반대가 되었다. 나는 다른 저작에서 소유권의 이 변질을 이야기했다. 나는 이를 약간 발전시켜 재현하려고 한다.

타인 재물의 약취掠取는 입법자들이 마치 도둑질을 때로는 벌하고 때로는 권장하기를 원한 듯이 그 잔혹성과 교묘함의 정도에 따라 세심하게 구별하고 분류한 무수한 수단들로 행해진다. 이와 같이 사람들은 공로公路에서, 단독으로 혹은 무리를 이루어 불법 침입, 가택 침입 등으로 살인강도를 저지른다. 단순 절취로, 공문서나 사문서 위조로, 위조 화폐 제작으로 그렇게 하기도 한다.

이런 종류는 힘이나 공공연한 사기 말고 다른 수단 없이 작업하는 모든 도둑들을 포괄한다. 산적, 강도, 해적, 육지와 바다의 도적들이다. 옛 영웅들은 이 영예로운 이름들에 긍지를 가졌고 그들의 직업을 돈이 생기는 것만큼이나 고귀한 일로 간주했다. 니므롯, 테세우스, 이아손과 그의 아르고호 원정대, 입다, 다윗, 카쿠스, 로물루스, 클로비스와 그의 메로빙거 왕조 계승자들, 로베르 가스카르, 오트빌의 탕크레드, 보에몽과 대부분의 노르만 모험가들은 강도와 도둑이었다. 강도질은 중세 귀족들의 직업 전체였고, 유일한 생존 수단이었다. 영국이 그 모든 식민지들을 가지는 것은 이들 덕분이다. 야만 민족들이 노동을 싫어한다는 것을 누구나 안다. 그들의 눈에 명예는 생산하는 것이 아니라 취하는 것이다. 저주의 형태로 그들은 서로 “너 밭 갈 수도 있어!”라고 말한다. 도둑의 영웅적 성격은 아킬레스에 대해 말하는 호라티우스의 이 문구에서 표현된다. “그는 법률들이 자신을 위해 만들어진 것을 부인하며, 팔의 힘으로 모든 것을 요구한다(Jura neget sibi nata, nihil non arroget armis).” 그리고 유대인들이 다윗에게 적용하고, 그리스도교인들은 그리스도에게 신비적으로 적용한 “닥치는 대로 치고받아(Manus ejus contra omnes)”라는 야곱의 이 유언에 표현된다. 이 약탈 성향은 모든 시대에 무인의 직업에 내재했다. 그리고 나폴레옹이 워털루에서 패했다면, 그의 영웅들의 강도질에 대해 징벌이 내려진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최근에도 브로사르(Brossard) 장군은 “나는 창과 방패로써 금, 포도주, 그리고 여자들을 가진다”고 말했다.

오늘날 도둑은 성서로 무장한 강자로서 늑대들과 하이에나들처럼 쫓긴다. 경찰은 그의 고귀한 산업을 죽였다. 법전의 조항들을 보면 그는 그의 특수성과 죄질에 따라 징역에서부터 단두대에 이르기까지 신체형과 명예형을 받는다. 볼테르가 노래한 정복의 권리는 더 이상 용인되지 않는다. 민족들은 이 점에서 서로에 대해 극단적인 과민성을 띤다. 국가의 양허나 협조 밖에서 행해지는 개인적 점유에 관해서 우리는 그 예를 더는 보지 못한다.

사람들은 사기, 신임의 오용, 복권 추첨과 도박으로 도둑질을 한다.

이 두 번째 도둑질은 정신의 섬세함을 날카롭게 해 주고 젊은이들 중에서 발명의 재능을 촉진하려는 목적에서 스파르타에서 평가되었고 리쿠르고스의 찬성을 받았다. 이는 돌론, 시논, 오디세우스, 야곱에서부터 도이츠[27]에게까지 고대와 현대의 유대인들, 보헤미아인들, 아랍인들, 그리고 모든 야만인들 범주다. 야만인은 부끄럼 없이, 뉘우침 없이 훔치는데 이는 그가 타락했기 때문이 아니라 천진난만하기 때문이다. 루이 13세, 루이 14세 때에는 도박에서 속임수를 써도 수치를 당하지 않았다. 이는 규칙의 일부가 되었으며, 정직한 사람들도 재산의 훼손을 교활한 기교로써 교정하는 데 스스럼이 없었다. 오늘날에도, 모든 나라에 걸쳐 크고 작은 상거래에서 거래를 할 줄 아는 것, 말하자면 세상을 속일 줄 아는 것은 농민들에게서 크게 고려되는 종류의 장점이다. 아이 딸린 여성의 제일가는 장점은, 그에게 판매하는 자들 혹은 끊임없이 임금과 가격을 압류해 고용하는 자들을 털 줄 안다는 점이다. 그리고 폴 루이가 말했듯이 우리가 모두 교태 부리는 여자들의 자식이 아니라면, 우리 모두는 적어도 탕녀들의 자식이다. 정부가 얼마나 힘들게 복권의 폐지를 체념하며 받아들였는지를 우리는 안다. 가장 비싼 소유권들 중 하나를 상실했던 것이다. 몰수가 우리의 법에 불명예를 주기를 중단한 지 아직 60년이 안 되었다. 모든 시대에 살인하는 강도에게 처음 드는 생각과 마찬가지로 처벌하는 사법 당국의 첫 번째 생각은 그의 희생자를 헐벗기는 것이었다. 우리의 모든 조세, 우리의 모든 세관법은 도둑질을 출발점으로 삼는다.

야바위꾼, 사기꾼, 약장수, 신의 이름으로 말하거나 사회를 대표하는 자는 부적을 파는 자처럼 특히 자기 손의 솜씨, 자기 정신의 교묘함, 웅변의 마력과 상상의 커다란 다산성을 활용한다. 그의 재능은 탐욕을 제대로 흥분시킬 줄 아는 데 있다. 또한 입법자는 재능과 친절함에 대한 존중을 보여주기를 원해서 완력과 고의만 활용해서 저지르고 가장 무서운 벌을 초래하는 범죄들의 범주 아래에 명예형이 아니라 교정적인 벌만 받는 경범의 범죄를 만들었다. 얼마나 괴상한 유심론인가!

사람들은 고리대금으로 도둑질한다.

옛날에 교회에서 아주 혐오스럽고 우리 시대에 아직도 아주 가혹하게 처벌받는 이 종류는 생산의 가장 정력적인 분야들 중 하나인 이자부 대출과 결코 구분되지 않으며 금지되는 도둑질과 허가된 도둑질 간의 이행을 이룬다. 또한 고리대금업은 그 애매한 본성 때문에 법률과 도덕에 수많은 모순을 일으키는데, 이는 법조계, 금융계 및 상업계 사람들이 아주 교묘하게 활용하는 모순들이다. 이처럼 담보를 받고 10%로 대부하는 고리대업자는 적발되면 엄청난 벌금을 문다. 같은 이자를 징수하는 은행가는 참으로 이자 명목이 아니라 수수료 명목으로라면 왕실 특권에 의해 보호받는다. 금융에 의해 저질러지는 모든 종류의 절도를 열거하려면 너무 길 것이다. 고대의 모든 민족들에게서 환전상, 은행가, 징세 청부인은별로 명예롭지 않은 것으로 여겨졌음을 말하는 것으로 충분할 것이다. 오늘날 자본가들은 자기들의 자금을 어떤 경우에는 국가에, 어떤 경우에는 상업에, 3, 4, 5%의 이자에 투자하는데, 즉 대부의 정당한 가격 이상으로 은행가들과 고리대업자들보다 덜 높은 이자를 징수하는 사람들로서 사회의 꽃이다. 이는 여전히 같은 체계다. 도둑질의 완화가 우리의 미덕을 이룬다.

사람들은 지대, 임대료, 집세, 임대의 형성으로 도둑질한다.

지대는 그 원리와 목적지로 고려해 보건대 모든 사람이 보증과 종신 보장을 받는 토지 소유권자가 될 수단인 농지법이다. 그 중요성으로 말하자면 이는 생산자의 임금을 초과하고 공동체에 속하는 결실의 몫을 대표한다. 조직 기간 동안 이 지대는 언제나 사실에 의거해 설명되는 바와 같이 개인화에 의해 발현하는 사회의 이름으로 소유권자에게 지불된다. 그러나 소유권자는 지대를 받는 것 이상의 일을 한다. 그는 그것을 혼자 누린다. 공동체에는 전혀 내놓지 않는다. 그의 차지인과 아무것도 나누지 않는다. 그는 집단 노동의 산물을 거기에 자기 노동을 넣지 않으면서 집어삼킨다. 그러므로 절도, 말하자면 합법적 절도, 그러나 실질적인 절도가 있는 것이다.

기업가가 일꾼에게서 그의 임금에 대해 무언가를 유보하거나 그에게 돌아가는 것 이상의 이익금을 징수할 때는 언제나 상공업에 절도 행위가 있다.

나는 가치를 다루면서 모든 노동은 초과분을 남겨야 한다는 것을 증명했다. 그래서 노동자의 소비가 언제나 같다고 가정할 때 그의 노동은 생계 수단 이상으로 언제나 더 큰 자본을 창출해야 할 것이다. 소유권 체제에서 본질상 집단적인 노동의 초과분은 지대처럼 온전히 소유권자에게 넘어간다. 그런데 공유물의 변장한 전유와 사기성 약취 사이에 차이는 어디 있는가?

이 약취의 결과는, 집단적 산출에서의 자기 몫을 끊임없이 기업가에게 몰수당하는 노동자는 언제나 궁핍한 반면, 자본가는 언제나 이윤을 본다는 것, 본질적으로 동등한 가치물의 상거래, 교환은 6프랑의 가치가 나가는 것을 3프랑에 구매하고, 3프랑의 가치가 있는 것을 6프랑에 판매하는 기술에 불과하다는 것, 소유권이 힘의 종교인 것처럼 소유권의 존중에 의해 유지되는 이와 같은 상태, 이 체제를 지탱하고 격찬하는 정치경제학은 도둑질의 이론이라는 것이다. 노동은 그것이 생산하는 부에 참여한다고, 최근에 도덕 및 정치 과학 아카데미에서의 담합에 관한 연설에서 블랑키 씨가 말했다. 그러므로 노동이 거기 참여하지 않는다면 이는 옳지 않다. 그리고 그것이 옳지 않다면 이는 절도 행위이며, 소유권자들은 도둑들이다. 그러므로 경제학자들이여, 명확히 말하라!

그러므로 정의는 옛 시인들이 황금시대라고 부른 부정적 공동체를 벗어나면 힘의 권리다. 조직에 눈뜬 사회에서 능력들의 불평등은 가치 관념을 일깨운다. 가치는 공로와 재산 간의 비율 관념을 유발한다. 그리고 이때 제1의, 그리고 유일한 인정된 공로는 힘이므로 가장 공로가 커서 최선의 사람aristos로서 가장 큰 몫에 대한 권리를 가지는 것은 가장 강한 자(aristos, 아레스arês의 최상급, 마르스 신의 고유 이름)다. 그리고 이 몫이 그에게 거절된다면 아주 자연스럽게 그는 이를 탈취한다. 이로부터 모든 물건에 대한 소유권을 가로채는 것까지는 한 발짝밖에 안 된다.

그러한 것이 영웅적 권리였으며, 이는 적어도 기억하기로는 그리스인과 로마인들에게서 그들의 공화국의 마지막 시대에까지 보전된 권리다. 플라톤은 『고르기아스』에서 그럴싸한 이유들로 힘의 권리를 주장하는 칼리클레스라는 자를 소개하며, 평등tou isou의 옹호자인 소크라테스는 논리보다는 웅변으로 이를 반증한다. 사람들은 위대한 폼페이우스가 곧잘 화를 내며, 그러던 어느 날 무심코 이런 말을 했다고 이야기한다. “무기를 들 때 나는 법을 지키는 것이다!” 이 모습은 야심과 양심이 서로 싸우는 사람, 영웅적인 격언, 도둑의 속담으로 자기의 격정을 정당화하려고 하는 사람을 그린다.

힘의 권리에 뒤이은 것은 꾀의 권리였는데, 이는 앞의 것의 타락이고 정의의 새로운 발현일 뿐이었다. 이는 그 일에 뛰어나지 못하고 거기서 너무 손해를 보는 영웅들에게 혐오를 받은 권리다. 오이디푸스와 스핑크스의 잘 알려진 고사는 승리자가 전쟁에서처럼 패자의 생명의 주인이라고 하는 이 교묘함의 권리에 대한 언질이다. 기만적인 제안으로 적수를 속이는 데서의 능숙함은 역시 그 보수를 받을 만한 것으로 여겨졌다. 그러나 능수능란한 자들이 강자들을 잔혹하고 야만적이라 부르며 멸시하는 동안, 벌써 의義의 참된 감정을 드러낸, 그렇기는 하지만 앞뒤가 맞지 않는 것에 불과한 반응에 의해 강자들은 여전히 선의와 단순성을 자랑했다.

그 시대에 말에 대한 존경과 맹세의 준수는 논리적 엄격함보다는 문자적 엄격함에 속했다. 12동판법은 이렇게 말한다. ‘혀가 말할 것처럼, 권리는 그럴 것이다(Uti lingua nuncupassit, ita jus esto).’ 태어나는 이성은 형태보다 근본에 덜 집착한다. 그 확실성 전체를 이루는 것은 형태, 방식이라는 것을 본능적으로 감지한다. 지략, 더 좋게 표현하자면 불성실한 말이 고대 로마의 정치 거의 전체가 되었다. 다른 많은 예들 중에서도 비코는 몽테스키외도 이야기한 예를 인용한다. 로마인들은 카르타고인들에게 그들의 재물과 도시의 보전을 의도적으로 사회, 국가를 뜻하는 civitas라는 말을 사용해 보장해 주었다. 반대로 물적 도시 urbs로 알아들은 카르타고인들은 그들의 성벽을 재건하기 시작해 협정을 위반했다는 이유로 로마인들에게 공격을 받았다. 로마인들은 그 일에서 영웅적 권리를 따라 애매한 말로 적들을 속인 후에 불의한 전쟁을 수행한다고 생각하지 않았던 것이다. 현대 외교는 이 고대의 관습에 아무것도 변화시키지 않았다.

법률이 금하는 바와 같은 절도에서 힘과 술수는 그것들만 부속물 없이 사용된다. 허가받은 도둑질에서는 이 힘과 술수는 무언가 쓸모로 위장되는데, 이 쓸모는 그 희생자들을 갈취하기 위한 도구처럼 사용된다.

폭력과 교활함에 대한 직접적 호소는 일찍이, 그리고 만장일치로 배척되었다. 문명을 형성하며 문명을 구분하는 것은 힘을 포기하는 데서의 이 민족들의 의견 일치다. 어느 민족도 아직 노동, 재능 그리고 소유로 위장된 도둑질에서 벗어나는 데 도달하지 못했다.

힘의 권리와 술수의 권리는 『일리아드』와 『오디세이』의 여러 시들에서 음유시인들이 찬미하던 것으로서 그리스 공화국들에 영감을 불어넣었고 로마법들을 그 정신으로 채웠으며, 그것들은 이로부터 우리의 도덕관념과 우리의 법전들로 넘어왔다. 그리스도교는 그에 아무런 변화도 가하지 않았다. 종교로 자리매김한 그리스도교는 처음부터 철학을 적대하고 과학을 멸시해 종교적 본질에 속할 모든 것을 수용하는 데 소홀할 수 없었다. 이렇게 해서 성 마태오와 성 바울로 안에서 평등과 상식을 공언한 후 그리스도교는 점점 그 주위에 처음에는 금했던 미신을 끌어 모았다. 다신론, 이원론, 삼원론, 마법, 강신술, 위계, 왕정 체계, 소유권, 땅의 모든 종교들과 혐오스러운 것들이다.

도덕과 관련 있는 모든 것에 대한 고위 성직자들과 종교회의들의 무지는 광장과 집정관들의 무지에 필적했다. 그리고 사회와 권리에 대한 이 심각한 무지는 교회를 타락시킨 것이고 영구히 그 가르침에 불명예를 주는 것이다. 게다가 불성실이 일반적이었다. 그리스도교의 모든 종파가 그리스도의 계율을 무시했다. 모든 종파가 그 교리에서 오류를 범했으므로 도덕에서 오류를 범했다. 모든 종파가 거짓된 명제들로 죄가 있으며, 사악함과 살인으로 가득 차 있다. 스스로를 무오류라고 하는, 그리고 맡겨진 것을 보전할 줄 몰랐던 교회는 사회에 용서를 구해야 할 것이다. 그의 개혁적이라고 하는 자매 교회들은 수치를 당할 것이다. … 환멸을 느끼지만 관대한 인민은 유의할 것이다.

이와 같이 인습적 권리인 소유권은 절충론이 진리와 다른 것처럼, 가치가 가격표와 다른 것처럼 정의와 다른 것으로서 불의의 두 극단인 잔혹한 힘과 허위의 술수 사이의 일련의 진자 운동에 의해 형성되는데, 그 둘 사이에서 대립하는 자들이 언제나 하나의 협정을 체결한다. 그러나 정의는 타협에 따라온다. 협정은 조만간에 실물을 표현할 것이다. 참된 권리는 끊임없이 궤변적이고 자의적인 권리로부터 벗어난다. 개혁은 지성과 힘의 투쟁에 의해 행해진다. 그리고 그 출발점이 야만성의 어둠 속에 있는 이 광대한 운동, 사회가 소유와 가치의 종합적 관념으로 상승하는 날 효력을 상실하는 이 운동, 본능적으로 수행되는 이 변혁과 혁명의 총체, 그 과학적이고 최종적인 해법을 추구하는 이것을 나는 소유권의 종교라고 부른다.

그러나 자생적이고 진보적인 소유권이 종교라면 이는 왕정 체계, 교황권처럼 신권에 속한다. 마찬가지로 조건과 재산의 불평등, 빈곤은 신권에 속한다. 거짓 맹세와 도둑질은 신적 제도에 속한다. 사람에 의한 사람의 착취는 신의 천명이고 표명이다. 참된 유신론자들은 소유권자들이다. 소유권의 옹호자들은 모두 신을 두려워하는 사람들이다. 그들이 소유권에 관한 불화에 따라 서로에게 행하는 사형 및 고문형 선고는 힘의 신에게 바치는 인신 희생 제물이다. 반대로 소유권의 종말이 임박했음을 선포하고 예수 그리스도, 그리고 성 바울로와 함께 소유권의 폐지를 촉발하고, 부의 생산, 소비, 분배에 관해 추론하는 자들은 아나키스트와 무신론자들이다. 평등을 향해, 과학을 향해 가시적으로 행진해 가는 사회, 그 사회는 신의 끊임없는 부정이다.

소유권에 의거한 신 가설의 증명, 그리고 사람의 신체적, 정신적, 지적 완성을 위한 무신론의 필요성, 이런 것은 우리에게 풀어야 할 숙제로 남는 이상한 문제다. 약간의 말이면 충분할 것이다. 사실은 알려졌으며 우리의 증명은 행해졌다.

세기의 주된 관념, 오늘날 가장 통속적이고 가장 공신력 있는 관념은 진보 관념이다. 레싱 이래로 사회적 신념들의 기초가 된 진보는 여러 사람들의 정신 속에서 옛날에 계시가 하던 것과 동일한 역할을 한다. 사람들은 레싱이 계시를 부정한다고 하겠지만 실제로는 이를 다른 말로 번역하기만 한 것이다. 라틴어 revelatio는 그리스어 apokalupsis와 마찬가지로 축어적으로 펼쳐짐, 진보를 뜻한다. 그러나 종교적인 고대는 신 자신이 사건 이전에 이야기한 역사 안에서 이 펼쳐짐을 보였던 반면, 현대인들의 철학적 이성은 기정사실의 계기繼起에서 이를 본다. 예언은 역사철학의 반대가 아니라 그것의 신화다.

그러므로 인류의 발달이라는 것은, 점점 더 커지는 의식과 함께할 경우에 우리의 가장 심오하고 가장 포괄적인 관념이다. 언어와 법률들의 발달, 종교와 철학의 발달, 경제적, 산업적 발전, 힘, 술수 그리고 인습에 의한 정의의 발달, 학문과 예술의 발달인 것이다. 그리고 모든 종교를 포괄하고, 모든 철학에 대립하고, 한편으로 계시에 근거하고, 다른 한편 고행에 근거하는 그리스도교, 즉 이성과 경험에 의한 사람의 교육을 믿는 그리스도교, 이는 그 전체가 진보의 상징화다.

진보에 대한 이 절정의 관념, 다산성이고 고도로 합리적인 관념을 대면해 또 하나의 관념이 지속하며, 다시 활기를 띠는 것 같다. 이는 거대한, 수수께끼 같은, 궁창의 심오한 존재들이 망원경으로 통찰이 안 되는 것처럼 우리의 변증법적 수단들로 통찰이 안 되는 관념으로서 신 관념이다.

신이란 무엇인가?

신은 가설상으로 영원하고, 전능하고, 무오류이고, 부동이고, 자생적인존재, 한마디로 모든 능력, 속성, 발현 형태에서 무한한 존재다. 신은 무한한 능력으로 상승한 지성과 활동이 숙명 자체에 적합하고 숙명 자체와 동일한 존재다. 최고의 법, 최고의 자유, 최고의 필연(Smma lex, summa libertas, summa necessitas)이다. 그러므로 신은 본질상 반진보적이고 반섭리적이다. 말해진 것은 행해진 것Dictum factum이라는 것이 그의 표어이고 그의 유일무이한 법이다. 그리고 그에게서 영원은 섭리를 배제하므로, 무오류성은 오류의 지각을 배제한다. 그리고 결과적으로 악의 지각을 배제한다. 그 하시는 일 모두 거룩하도다(sanctus in omnibus operibus suis). 그러나 신은 모든 방향에서의 무한한 품성에 의해 고유한 정의定義를 획득하며, 따라서 그를 자기 적대자로 의식하는 유한하고 진보적이고 섭리적인 존재에 대한 그의 대립에서 결과로 나오는 존재 가능성을 획득한다. 신은 한마디로 그 개념 안에 아무 모순적인 것도 가지지 않아서 가능하며, 우리의 이성의 본의가 아닌 이 가설을 입증할 여지가 있다.

이 모든 관념은 그 정신적, 지적 구성에서 고려된 인간 존재의 분석을 통해 우리에게 제공되었다. 그 관념들은 반증되지 않는 변증법에 따라 우리의 우발적 본성과 우리의 지구상에서의 기능의 필연적 가정으로서 등장했다.

나중에 가서, 우리가 처음에는 존재의 단순 가능성으로만 상상했던 것이 환원 불가능한 이원론과 존재들의 진행 과정 이론에 의해 어떤 개연성의 크기로 상승했다. 우리는 이원론적 실체에 관해 펼쳐지는, 그 이성과 마지막 항이 우리에게 이미 주어진, 과학에 이제부터 획득되는 진보적 창조라는 사실이, 그 근원에서 또 다른 사실, 자생성, 효과성, 확실성을 무한하게 가지는 본질, 그 모든 속성이 결과적으로 인간의 속성과는 역逆이 될 본질이라는 사실을 내포한다는 것을 확인했다.

그러므로 이 개연적 사실, 이성이 요구하고, 관찰이 시사하는 필요 불가결의 이 존재, 그러나 아무것도 아직 증명하지 못하고, 모든 경우에 그 무한성과 그 고독성이 우리에게 이해할 수 있다는 희망을 빼앗는 이 존재를 밝히 드러낼 일이 남는다. 증명 불가능한 것을 증명하고, 접근 불가능한 것을 통찰하고, 한마디로 유한한 인간의 시야에 무한을 놓는 일이 남는다.

첫눈에 보기 불가해하고, 그 항목들에서 모순적인 이 문제는 누가 이를 성찰하는 수고를 들인다면 그 안에서 모든 모순이 사라지는 다음 정리定理로 환원된다. 숙명과 진보 간에 등식을 만들어서, 무한의 존재와 진보적 존재, 서로에게 들어맞지만 일치하지는 않고 반대로 서로 역이 되며 서로 침투하지만 혼동되지는 않는 이 두 존재가 서로 간에 표현과 법칙으로 소용되면서, 우리에게 그것들을 구성하는 정신과 물질이 그러하듯, 그러나 다른 차원에서 존재의 불가분하고 환원 불가능한 두 측면으로 순서에 따라 나타나게 한다.

사회과학에서 관념들은 모두가 똑같이 영구적이고 진화적이며, 똑같이 단순하고 복잡하며, 똑같이 격언식이면서 종속적이라는 것을 우리는 보았으며 그에 대해 한 번 이상 언급하도록 유의했다. 초월적 지성에게는 경제 체제에 원리도, 결과도, 증명도, 연역도 없다. 진리는 연관 조건 없이 하나이고 동일한데, 이는 그것이 어디서나 무한의 측면에서, 그리고 무한의 이론들과 체계들에서 진리이기 때문이다. 일련의 명제들은 단지 교육적인 해명에 의해서 발현한다. 사회는, 그 뇌 속에 학문이 살고 있어서 학문을 그 총체에서 끌어안고 처음도 끝도 없이 의식하고 모든 부분에서 동시에 그리고 또렷하게 파악하며, 그 부분들에서 각각 동등한 명증성과 우선성을 발견하는 학자와 같다. 그러나 바로 이 사람은 학문을 만들기를 원하는가? 그는 어쩔 수 없이 이를 말로, 명제들로, 연설로 연이어서 펼쳐낸다. 즉 어쩔 수 없이 불가분한 전체로 그에게 나타나는 것을 하나의 진행 과정으로 제시할 수밖에 없다.

이처럼 자유, 평등, 네 것, 내 것, 장점과 단점, 대변과 차변, 종과 주인, 비율, 가치, 경쟁, 독점, 조세, 교환, 노동 분업, 기계, 세관, 지대, 상속 등등의 관념들, 모든 범주들, 모든 대립물, 경제적 어휘에서 세상의 시초부터 명명된 모든 종합들은 이성에서는 동시대적이다. 그렇기는 하지만 우리에게 접근 가능한 학문을 구성하려면 이 관념들은 그것들이 서로를 낳는 것을 우리에게 보여주는 이론, 시작, 중간, 끝을 가지는 이론에 따라 배열될 필요가 있다. 인간적 실천에 들어가서 효과적인 방식으로 실현되려면 바로 이 관념들은 진자 운동을 하는 일련의 제도들이 천 건의 예기치 않은 사건들과 긴 모색 과정을 대동하는 것으로 등장해야 한다. 한마디로 학문에 절대적이고 초월적인 진리와 이론적 진리가 있는 것처럼, 사회에는 숙명과 섭리, 자생성과 반사성이 같이 있어서 이 두 권능의 두 번째 것이 상시적으로 첫 번째 것을 대체하려 노력하지만 언제나 실제로는 같은 구실밖에 하지 못한다.

숙명은 그러므로 존재와 관념의 한 형태이며, 연역, 진보는 다른 한 형태다.

그러나 숙명, 진보, 이는 자연이 알지 못하는 언어적 추상들로서 거기에서는 모든 것이 실현되거나 실현되지 않는다. 그러므로 인류 안에는 불가분이지만 구분되는, 대립적, 적대적이지만 영구적으로 환원 불가능한 숙명적 존재와 진보적 존재가 있다.

본능적이고 불수의적인 자생성을 띠고 신체적, 사회적 유기체의 법칙에 종속된, 완전한 영구성을 부여받은, 그 항목들이 움직이지 않는, 그 총체에서 불가항력적인, 그리고 발달과 성장을 통해 자신을 완성하고 실현하는 피조물들로서 우리가 살고 성장하고 죽는 한, 우리가 일하고 교환하고, 사랑 등을 하는 한, 우리는 숙명적 존재다. 그 안에서 우리는 숨 쉬고 움직이고 살아간다(in quo vivimus, movemur et sumus). 우리는 동물, 식물, 돌들보다 덜하지도 더하지도 않은 자격으로 그의 실체, 그의 영혼, 그의 몸, 그의 형체다.

그러나 우리가 관찰하고 성찰하고 배우고 이에 따라서 행동하는 한, 우리가 자연을 우리에게 종속시키고 우리 자신의 주인이 되는 한, 우리는 진보적 존재이며 사람들이다. 생산하는 자연natura naturans인 신은 사회의 기초, 영원한 실체다. 그리고 생산되는 자연natura naturata인 사회는 자기 자신으로부터 영속적으로 방출되는 숙명적 존재다. 생리학은 불완전하게라도 유기적 생명과 관계적 생명의 잘 알려진 구분에서 이 이원성을 나타낸다. 신은 사회 안에 존재하기만 하는 것이 아니다. 자연 전체에 있다. 그러나 신이 진보적 존재와의 대립에 의해 지각되는 것은 사회 안에서일 뿐이다. 그 진화를 통해 원초적 범신론을 중단시키는 것은 사회이고, 인간이다. 그리고 이는 사회도 인간도 결코 연구하지 않으면서 생리와 물질 안으로 뛰어들고 흡수되는 박물학자가 점차 신성의 감정을 상실하는 이유다. 그에게는 모든 것이 신이다. 즉 신은 전혀 없다.

본성상 다른 신과 인간은 그러므로 그 관념과 행위에 의해, 한마디로 그 언어에 의해 구분된다.

세계는 신의 의식이다. 신 안에 있는 의식적 관념이나 사실들은 인력, 운동, 생명, 수, 크기, 일체, 대립, 진행 과정, 계열, 균형이다. 이 모든 관념들은 영구적으로, 따라서 계승, 예견, 오류 없이 의식되고 만들어지는 것이다. 신의 언어, 그의 관념들의 표상은 모든 존재들, 그리고 그들의 현상들이다.

사람에게 있는 의식적 관념이나 사실은 주의, 비교, 기억, 판단, 추론, 상상, 시간, 공간, 인과관계, 아름다움, 절정, 사랑과 증오, 슬픔과 즐거움이다. 이 관념들을 사람은 특정한 신호들로써, 언어, 산업, 농업, 학문과 예술, 종교, 철학, 법률, 정부, 전쟁, 정복, 결혼식과 장례식, 혁명, 진보로써 바깥에 산출한다.

신의 관념들은 자연처럼 신에게서 오는, 심지어는 자연의 의식일 뿐인 사람, 신의 관념들을 그의 모든 관념의 원리와 재료로 삼으며 자신의 존재 안에 신적 실체를 변환하고, 끊임없이 자기 것으로 만드는 사람에게 공통이다. 그러나 사람의 관념들은 우리의 진보를 이해하지 못하는 신, 우리 상상의 모든 산물이 괴물이자 무로 보이는 신에게는 낯설다. 그런 이유로 사람은 신의 언어를 자기 자신의 언어처럼 말하는 반면, 신은 인간의 언어를 말할 줄 모른다. 그리고 그들 간에 어떠한 대화도, 어떠한 협정도 가능하지 않다. 그런 이유로 인류 안에서 신으로부터 오는, 신에게서 멈추거나 신에게 돌아가는 모든 것은 인간에게 적대적이고 인간의 발달과 완성에 해롭다.

신은 세상을 창조하고 말하자면 사람을 자기 품으로부터 내쫓는다. 그가 무한의 권능이며 그의 본질은 진보를 영구적으로 낳는 것이기 때문이다. 로마 가톨릭 신학은 “영원한 아버지는 그녀가 스스로를 똑같이 높다고 여기던 때에 아이를 낳는다(Pater ab aevo se videns parem sibi gignit natum)”고 말한다. 신과 인간은 그러므로 서로에게 필요하며 둘 중 하나는 다른 하나가 동시에 사라지지 않으면 부정될 수 없다. 절대적이고 부동인 법칙이 없다면 진보는 무엇일까? 숙명이 바깥으로 펼쳐지지 않는다면 그것은 무엇일까? 신의 활동이 갑자기 중단된다고 가정해 보자. 창조 세계는 혼돈한 존재로 들어간다. 형태 없는 물질, 관념 없는 정신, 분간이 안 가는 숙명으로 되돌아가는 것이다. 신은 움직임을 중단하고, 더는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나 신과 사람은 그들을 연결해 주는 필연에도 불구하고 환원 불가능하다. 도덕가들이 경건한 욕으로 사람과 사람과의 전쟁이라고 부른 것, 근본적으로는 사람의 신에 대항한 전쟁, 성찰의 본능에 대항한 전쟁, 준비하고 선택하고 때를 기다리는 이성의 맹렬하고 치명적인 격정에 대항한 전쟁일 뿐인 것이 그에 대한 반박할 수 없는 증거다. 신과 인간의 존재는 그들의 영원한 적대에 의해 증명된다. 이것이야말로 숭배 행위들의 모순, 때로는 페드르가 비너스에게 자기 가슴에서 이폴리트의 사랑을 빼내도록 간청하듯, 인간에게 아량을 베풀어 유혹에 넘겨주지 말도록 신에게 간청하고 때로는 다윗의 아들이 왕위에 오르면서 그러듯이, 우리가 여전히 성령의 미사들에서 그러듯이 신에게 지혜와 지성을 요구하는 숭배 행위들의 모순을 설명해 주는 것이다. 이것이야말로 마지막으로 대부분의 내전과 종교 전쟁, 관념들에 대해 행해진 박해, 관습에 대한 열광, 학문에 대한 증오, 진보에 대한 공포 등 우리 인류를 괴롭히는 모든 악들의 제1원인을 설명해 주는 것이다.

사람은 사람으로서 결코 자기 자신과 모순된 입장에 있을 수 없다. 그는 자기 안에 있는 신의 저항에 의해서만 교란과 찢어짐을 느낀다. 사람에게는 자연의 모든 자생성, 숙명적 존재의 교사敎唆, 우주의 모든 신들과 악마들이 한데 모인다. 이 권능들을 종속시키고, 이 무정부 상태를 바로잡기 위해 사람은 자기의 이성, 자기의 진보적 생각밖에 가지지 않는다. 그리고 이야말로 절정의 비극을 구성하는 것으로서 그 반전反轉이 총체적으로 모든 존재들의 지난 이유를 이룬다. 자연과 인간의 운명은 신의 형태 변화다. 그러나 신은 무진장이며 우리의 투쟁은 영원하다.

그러니 신비성과 종교를 공언하는 것, 신을 들추어내거나 신이 자기 것이라고 주장하는 모든 것, 원시적 무지를 향해 퇴보하려고 애쓰는 모든 것, 육신의 만족과 격정의 숭배를 권장하는 모든 것이 소유권의 패거리이고 평등과 정의의 적임을 드러낸다고 해서 놀라지 말자. 우리는 인간의 모든 적들, 감각, 가슴, 상상력, 고집, 게으름, 의심이 인간에 맞서 음모를 꾸미는 전투의 전야에 있다. 그 기름 부은 자를 거슬러 세상의 왕들은 들썩거린다(Astiterunt reges terrae adversus Christum)! … 소유권의 원인은 왕조들과 교황권, 우민 정치와 궤변, 비생산자들과 기생자들의 원인이다. 어떠한 위선도, 어떠한 유혹도 이를 옹호하는 데 아껴지지 않을 것이다. 인민을 끌어들이기 위해 그들의 빈곤에 대해 동정하는 것에서 시작할 것이다. 인민에게서 사랑과 온유함을 부추길 것이다. 이는 용기를 느슨하게 하고 의지를 시들게 할 수 있는 모든 것이다. 철학적 성찰과 학문 위로 행복한 본능을 높여줄 것이다. 그러고는 그들에게 민족적 영광을 설교할 것이다. 그들의 애국심을 뜨겁게 데울 것이다. 그들에게 그 민족의 위인들에 대해 말할 것이다. 그리고 여전히 금지된 이성의 숭배를 착취자들의 숭배로, 귀족들의 우상 숭배로 조금씩 대체할 것이다.

왜냐하면 인민은 자연처럼 그 관념들을 실현하기를 좋아하기 때문이다. 이론적 문제들보다는 사람들의 문제를 선호한다. 인민이 페르디난트에게 반기를 든다면 이는 마차니엘로에게 복종하기 위한 것이다. 인민에게는 라파예트, 미라보, 나폴레옹, 반신半神 같은 자들이 필요하다. 장군 복장을 입히지 않는 한 대신의 인사도 받지 않을 것이다. 또한 우상들에 대한 숭배가 얼마나 번창하는지를 보라! 사회를 조직하고자 하면서 부엌 하나도 만들 수 없었던 위인들인 푸리에와 선한 이카리아인[28]에 대해 열광하는 자들을 보라. 민주주의자들, 위대함과 공적이 법정에서 승소하는 데에 있다고 보며, 전날 밤 필리포스로부터 금을 받아 챙기고 방패를 전쟁터에 던지고 달아날 데모스테네스라는 사람의 목소리를 듣고 카이로네이아로 달려가는 아테네인들처럼 언제나 라인강 유역을 달려갈 준비가 되어 있는 이들을 보라.

관념들, 원리들, 기정사실의 분별에는 아무도 관심이 없다. 우리는 벌써 고대의 지혜를 너무 많이 가지는 것 같다. 그 민주주의는 루소의 민주주의다. 왕당파와 정통 왕조파는 루이 14세에 대해 꿈꾼다. 부르주아들은 루이 르 그로(루이 6세)에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사제들은 그레고리우스 7세에서야 멈추어 선다. 사회주의자들은 예수에게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이는 가장 멀리 소급될 사람이다. 이런 보편적 쇠약함 중에 공부는 파편적 노동처럼 사람이 무뎌져 가는 방식에 불과하다. 비판은 무미건조한 소극笑劇으로 전락했다. 모든 철학은 유효 기간이 지난다.

이 한 예만 인용하자면, 이는 바로 우리가 몇 달 전에 인민의 벗이라는 한 학자가 역사와 진보를 가르치겠다고 공언하며 애가조와 디오니소스 찬가조의 문장들의 홍수를 헤집고서 다음과 같은 한심한 판단만을 사회 문제에 대해 표명할 줄 알았던 때에 본 것이다.

“공산주의에 대해 말한다면 한마디로 족하다. 소유권이 폐지될 마지막 나라, 이는 바로 프랑스다. 이 학파의 어떤 사람이 말했듯이 소유권이 도둑질이라 해도 내일 소유권을 포기하지 않을 소유권자 2500만 명이 여기 있다.”

이 비꼬는 언사의 작자는 미슐레(Michelet) 씨로서 그는 콜레주 드 프랑스의 교수이고 도덕 및 정치 과학 아카데미의 회원이다. 그가 빗대어 말한 어떤 사람은 바로 나다. 미슐레 씨는 내가 화를 내는 일 없이도 나를 거명할 수 있었다. 소유권에 대한 정의는 나의 것이며, 내 야심이라고는 내가 그 의미와 이해된 바를 이해했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이다. 소유권, 이는 도둑질이다! 천년의 세월에 이와 같은 두 마디가 말해진 바 없다. 나는 지상에서 이 소유권에 대한 정의 말고 다른 재산이 없다. 그러나 나는 이 정의를 로스차일드의 수백만 금보다 더 소중하게 생각하며, 감히 말하건대 이 정의는 루이필리프 정부의 가장 대단한 사건일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면 누가 미슐레 씨에게 소유권의 부정이 필연적으로 공산주의를 함의한다고 말해 주었는가? 그는 프랑스가 세계에서 마지막으로 소유권이 폐지될 나라라는 것을 어떻게 아는가? 왜 소유권자 2500만 명 대신에 3400만 명이라고 말하지 않았는가? 우리가 제도들을 고발하는 것처럼 사람들을 고발한다는 것을 그는 어디서 알았는가? 그리고 그가 프랑스를 소유하는 2500만 명의 소유권자들이 내일 소유권을 포기하지 않으리라고 덧붙여 말할 때, 누가 그에게 이를 위해 그들의 찬성을 필요로 한다고 가정할 권리를 주는가? 미슐레 씨는 다섯 행으로 다섯 배는 터무니없이 말하는 재능을 가졌다. 그는 의문의 여지없이 내가 옛날에 소유권을 장차 옹호할 그 누구에 대해서건 행한 예언을 실현하는 데 집착했다. 그러나 역사를 40년간 공부한 후에 알량한 학문이랍시고 19세기에 본능에 의한 해방을 설교하게 된 사람에게 무엇이라 대답해 줄 것인가? … 다른 사람이 미슐레 씨와 논쟁할 것이다. 나는 그를 연대기로 돌려보내는 바다.

제12장 제9기공동체

나의 벗 공산주의자 빌가르델[29]에게

친애하는 빌가르델에게,

그대의 지난 두 출판물이 나왔을 적마다 받았으며 이에 대해 그대에게 감사한다.

나는 『이익들의 일치Accord des intérêts』를 그대의 아주 예리한 정신, 그대의 생기 있고 가벼운 생각, 언제나 회의적이고 빈정거리는 표현을 내게 갖추게 해 줄 매력을 느끼며 읽었다. 실제로 공산주의적인 글에서 작가의 상상력과 재능이 아니라면 무엇을 찾겠는가?

『사회 이념사Histoire des idées sociales』에서 내게 충격을 준 것은 〈현대 사회주의자들보다 앞서고 뛰어난 고대 사상사들과 철학자들〉이라는 부제목이다. 나는 거기서 순진함보다는 악의를 훨씬 적게 발견한다는 것을 실토한다. 우리의 주의를 위한 아름다운 권고는, 부디 진보 관념에 세뇌된 공중에게 문명이 소유권의 기초 위에서 발달함에 따라 우리들 사이에 발명이 약화된다는 것을 알려 주고, 지붕 위에서 그 밖에 참된 것, 즉 사회주의는 플라톤과 피타고라스로부터 퇴락하고 있다는 것을 외쳐 달라는 것이다! 그리고 공산주의 출판물 서두에 웬 독자에 대한 예고냐는 말인가! 친애하는 빌가르델, 그대는 팔랑스테르를 들락거렸다. 그리고 그대는 별로 약지 못하다!

하지만 나는 그대가 소유권과 반대 방향으로 구상된 모든 개혁 프로젝트에 일반적으로 붙이는 유토피아라는 이름을 아주 좋아한다. 사실상, 그리고 권리상 사회주의는 이성과 사회적 실천에 영구적으로 항의하면서 아무것도 될 수가 없고, 아무것도 아니다. 자유무역에 대한 이 질곡을 경제학자들은 시간을 가지고 이겨 내길 희망하며, 이는 항상 재연되는 것인데 사회주의는 이를 결코 역행하지 않는다. 사회주의를 위해 특정된 시간은 없다. 사회주의는 영구적인 연기의 형벌에 처해졌다. 친애하는 빌가르델, 나는 그대가 이 다행스러운 발견을 한 것을 축하한다.

내 생각에 그대는 또한, 그리고 무한히 옳은 말인데, 공중은 사회주의의 모든 가지들을 공동체라는 고대의 줄기에 잡아맨다고 말한다. 그대 자신이 우선 생시몽의 유토피아를 조사하고, 나중에는 푸리에의 그것을 조사한 후 이 사람들이 선의가 아니거나 중도에 멈추어 선 것을 발견하고 공산주의자가 된 것은 그 때문이다. 실제로 모든 시대에 개혁자들이 무엇에 대항해 일어섰나? 소유권에 대항한 것이다. 그런데 소유권의 부정은 공산주의다. 가장 가난한 이카리아 사람은 아리스토텔레스 같은 사람처럼 이 결과에 도달할 수 있다. 그리고 당신의 현실적 신앙고백은 완전히 이 추론의 숙명성에 의존한다.

그러니 왜 당신은, 소유권에 아주 소리 높여 항의하는 내가 당신의 모범을 모방하지 않는다고 생각하는가? 그리고 어ᄄᅠᇂ게 가장 결연한 부정에도 불구하고 나는 고대인들보다 뒤떨어진, 현대 사회주의자들 중에 가장 뒤떨어진 자의 입장에 있는가? 소유권을 허무는 것, 이는 아름답고 고상했다. 하지만 그 다음으로 어떤 형이상학인지 내가 모르는 것의 이름으로 공동체를 배척하는 것, 그보다 더 앞뒤가 안 맞는 것이 있을 수 있는가? 6년 전부터 나는 이 애매한 선언을 지속하고 있다. 당황하고 불신하는 사회주의에 내가 무슨 대답을 해야 하나?

친애하는 빌가르델, 그대가 공산주의에 대한 나의 비연대를 높이 인정한 것에 감사한다. 그에 대한 내 변명은 내가 당신의 저작들에서 그 모든 요소들을 발견하는 만큼 더욱 쉬워질 것이다. 그대는 이렇게 말한다. 사회주의나 공산주의는 지속적 방식으로 쇠퇴하며, 그것이 유토피아, 즉 무이기 때문에 쇠퇴한다고. 사회가 와서, 자기 내면의 관념들을 단언하고 실현함에 따라, 그리고 경험 안에서 자리 잡음에 따라 사회주의는 달아난다. 입법자가 의의 법칙들을 발견하고 인류의 순수 본질이 발현함에 따라 소유권이 변경되는 것과 마찬가지다. 이것이야말로 사회주의와 정치경제학이 차례로 확인했고 우리가, 그대와 내가 그 중 하나로부터, 다른 하나로부터 그런 것처럼 받아들이는 것이다.

그러므로 나는 그대와 마찬가지로 공산주의자다. 친애하는 빌가르델, 하지만 단지 가설에 따라서이고, 내가 소유권을 부정하는 한에서 그렇다. 소유권을 쳐부수었으니, 공산주의 가설을 입증하는 것이 중요하다. 이때 공산주의가 소유권처럼 계속적인 쇠퇴 중에 있음을, 그것이 유토피아적임을, 즉 아무것과도 같지 않음을, 그것이 재생하기를 시도할 때마다 소유권의 흉내로 해소된다는 것을 발견하며 나는 나 자신과 의견을 일치시키기 위해, 경험에서처럼 이성에도 충실하기 위해 지금까지 소유권에 반대해서 그랬던 것처럼 공동체에 반대하는 결론을 내리지 않을 수 없다. 그리고 내가 오늘날 사회주의자들 중 가장 뒤떨어진 자의 입장이라면, 이는 내가 유토피아에서 벗어나는 반면 그들은 거기 머물기 때문이다.

이 이중의 부정은 오류에서, 혹은 억지에서 오는 것인가? 친애하는 빌가르델, 나는 이렇게 만들어진 것이 사회의 본성 자체라고 굳게 믿는다. 그리고 나는 그대가 나와 함께 사회주의적 신탁의 절정으로부터 사물의 실천적 고찰로 내려가길 원치 않는다면 이에 대해 당신을 설득하는 데 절망하지 않는다. 그대는 다만 내가 그대에게 내 이유들을 설명할 때 주장하는 것이 내 견해가 아니라는 것만 기억하라. 내가 설명하는 것은 당신 자신이고, 내가 정당화하는 것은 당신의 명분이고, 내가 당신의 신앙고백과 화해시키는 것은 당신의 암시와 당신의 비방이다. 우리는 두 거짓말 위에 살고 있다! … 사람들이 모순적이라고 고발하는 것이 나라는 것은 이상하다! 내가 우리의 본성의 이 모순을 증명하는 일로 인생을 보내는데 말이다.

. 공동체는 정치경제학에서 생긴다

공산주의 유토피아에 대해 나를 지켜준 첫 번째 것, 그러나 이 유토피아에 대해 다소 비난을 받는 추종자들이 의심하지 않는 것, 이는 공동체가 사회주의가 그와 맞서 싸우는 것을 사명으로 삼는, 그리고 내가 소유권자의 일상 관행의 묘사라고 정의한 정치경제학, 이 자칭 과학이라는 것의 범주들 중 하나라는 것이다. 소유권이 독점을 제곱한 것인 것처럼, 공동체는 국가의 고양高揚, 경찰에게 영광을 돌리는 것 말고 다른 것이 아니다. 그리고 국가가 독점에 대한 반작용으로 제5기에 등장한 것처럼, 똑같이 우리가 도달한 국면에 공산주의는 소유권을 저지하기 위해 나타난다.

하지만 공산주의는 역의 구도에서 정치경제학의 모든 모순을 재생한다. 그 비밀은 생산, 교환, 소비, 교육, 가족의 사회적 기능들 각각에서 개인을 집단적 인간으로 대체하는 데 있다. 그리고 이 새로운 진화가 아무것도 화해시키지 못하고, 여전히 아무것도 풀지 못하므로 이는 선행자들과 마찬가지로 숙명적으로 사악함과 빈곤에 도달한다.

이처럼 사회주의의 운명은 완전히 부정적이다. 공산주의 유토피아는 국가의 경제적 여건에서 나와 이기주의적이고 소유권자적인 일상 관행의 반증이다! 이 점에서 참으로 이는 틀림없이 일정한 쓸모가 있다. 아무것도 아닌 것의 무언가에 대한 대립이 철학에 쓸모 있는 것처럼 이는 사회과학에 쓸모 있다. 사회주의는 무의미한 말의 나열이다. 나는 경제학자들이 이를 감지하지 못한 것에 놀란다. 공동체는 경쟁, 조세, 세관, 은행처럼 정치경제학의 분야에 속한다. 공동체는 노동 분업, 집단적 힘, 일반적 비용, 주식회사와 합자회사, 저축 금고와 보험 금고, 유통 은행과 신용 은행 등등의 이론들의 근본에 있다. 공동체는 한마디로 공간처럼 어디에나 있다. 그리고 아무것도 아니다.

플라톤의 아틀란티스에서부터 카베의 이카리아에까지 모든 사회적 유토피아들은 그들의 의미에서 추궁을 받는데, 하나의 이율배반을 다른 이율배반으로 대체하는 것으로 환원된다. 모든 유토피아들에서 발명성에 관한 공적은 영이다. 과장된 이야기는 거기서 미미한 부속물일 뿐이다. 그리고 저자들에게서 당신이 지적한 유토피아적 능력의 퇴화에 관해 말하자면, 퇴화는 오로지 경험이 그들에게 부과하는, 그리고 그만큼 그들 쪽의 배교에 해당하는 교정 사항들에서 나온다. 게다가 이 작가들은, 나는 그들의 의도를 오해하지 않으려고 하는데, 그들은 모두가 경제학자들, 인류가 고통스럽게 산을 기어올라 그곳에서 변신해야 하는 반면 그 산을 다시 내려가는 독창성을 띠는 변장한 소유권자들인 경제학자들의 따분한 표절자들이다.

그리고 내가 공산주의자가 될 것은 이 때문이다! 그러나 이는 불가능한 것을 피하기 위해 기괴한 것에 뛰어드는 셈일 것이며, 로욜라를 두려워한 나머지 칼리오스트로를 껴안은 셈일 것이다.

. 고유한 것과 공통인 것의 정의

어떤 사람이 공산주의에 지대한 공헌을 했다면, 이는 분명 1840년에 『소유란 무엇인가』라는 제목으로 출간된 책의 저자다. 누구보다도 소유권에 대한 적으로서 나는 공산주의 조직의 가능성에 관해 의견을 표명할 권리를 가진다. 그러므로 사실들과 용어들에 합의하고 순서에 따라 진행하자.

친애하는 빌가르델, 사회의 가장 미묘한 문제들에 내가 형이상학의 까다로운 형태들을 끊임없이 끌어들이는 것은 마지못해 하는 것이다. 그리고 몰리에르의 어떤 인물을 상기시키는 이 무겁고 스콜라적인 발걸음은 그대만큼이나 내게도 우스워 보인다. 하지만 뭐 어떤가! 당신의 과단성 있는 지성은 가장 빠른 관념들을 재빨리 포착하는 반면, 나는 불행히도 가장 굼뜬 이해력의 소유자다. 직관과 자생성은 나에게 없다. 즉흥성은 내게 전무하며, 내 정신은 추론의 목발 없이 한 걸음도 내딛을 수 없다.

태양, 공기 그리고 바다는 공유다. 이 물건들의 향유는 가능한 공산주의의 가장 높은 정도를 제시한다. 아무도 거기에 표지석을 세울 수도, 분할할 수도, 경계선을 정할 수도 없다. 거리의 엄청남, 꿰뚫어볼 수 없는 깊이, 영속적인 불안정성이 겨우 그것들을 전유의 대상에서 빼낼 수 있었다. 우리를 분열과 전쟁으로 밀고 가는 이 본능의 힘은 그와 같이 아주 크다! 그러므로 이 첫 번의 관찰, 과학에는 소중한 것인 이 관찰로부터, 소유권은 규정되는 모든 것이고 공동체는 규정되지 않는 모든 것이라는 결과가 나온다! … 그 후에 공산주의의 출발점은 어떤 것일 수 있는가?

인류의 거대한 토목 건조물들은 자연의 위력의 이 경제적 성격에 참여한다. 도로, 공공 광장, 교회, 박물관, 도서관 등은 공유다. 그것들의 건축 비용은 비록 이 비용의 배분이 동등한 것과는 거리가 멀어 각자가 자기 재산에 정확히 반비례해 기여함에도 불구하고 공유가 되었다. 이에 따라 특기할 소중한 것으로서 사람들은 평등과 공동체가 같은 것이 아니라는 점을 안다! … 어떤 경제학자들은 심지어 공익 시설물이 더 활발한, 그들에 따르면 더 부지런하고 덜 비싼 민간 산업에 의해 경영되어야 하리라고 주장한다. 그럼에도 이 점에 사람들이 동의하지는 않는다. 그런 물건들의 사용에 관해서는 이는 변함없이 공유로 있다. 이런 종류의 것들이 전유되어야 한다는 생각은 누구에게도 들지 않았다.

군인들은 수프를 공동으로 먹는다. 그들은 빵과 고기를 배급받으며, 무기 장비를 별도로 받아서 각자가 이에 관한 책임을 진다. 영창과 내무반, 훈련과 작전들 역시 그들에게 공통이다. 그들 중 누군가가 자기 가족 수당, 그것을 팔아넘긴 브로커의 전도금을 받는다면, 그는 결코 이를 그의 동료들에게 알릴 의무는 없다. 군인 생활은 충분히 명백한 공산주의의 성격을 띠어서 여기저기서 전유의 어떤 면모들이 섞인다. 100명이 사는 식당에서 손님들이 서로 접촉하지만 고립된 채로 있는 것은 이래서이다. 이로부터 나는 또 다른 이 원리를 도출한다. 물질에만 관련되는 공동체는 공동체가 아니라는 것이다. 공산주의를 이기려면 나를 둘러싼 것으로부터 정신적으로 분리되는 것으로 충분하다. 이는 심각한 사실이며, 유토피아의 미래를 위한 심각한 걱정을 끼치는 사실이다!

인습적인 삶은 더 심오한 공산주의의 삶이었다. 거기서는 공동 침실, 구내식당, 기도, 노동, 모든 재물, 공동 취득 재산, 취득 재산이 공유였다. 사도행전의 흔히 인용되는 구절과 공동 수도 기관들의 일반적 정신에 따르면 완성의 극치는 온전한 초연함, 절대적 소유권 포기였다. 『사막 교부들의 삶Vies des pères du désert』에서 그들이 이 이상에 도달하기 위해 몰두하는 훈련들을 읽을 수 있다. 그러나 주목할 만한 모순 때문에, 공동체의 어떤 설립자들, 성 파코미우스와 성 안토니우스 같은 이들은 초연함에 지나치게 신경을 쓴 나머지 형제들을 고립시키기에, 즉 공산주의적 포기로부터 개체성이 재탄생하게 하기에 이르렀다. 이는 이처럼 훈련된 형제들에게 수도자 혹은 은자들이라는 이름을 붙여주게 한 것이다. 공동체는 이기주의에 닿는다!

결혼은 모든 신분 중 공동체를 위해 가장 많은 자원을 제공하는 신분이다. 그러나 개별적 경우에 따라 공동생활을 위한 결혼의 이 적합성은 본질상 성의 구별에 관련되어 조직의 완벽한 동일성은 체계에 덜 유리한 것으로 여겨진다. 이를 확증해 주는 것은 결혼으로 형성된 종류의 공동체, 사람들이 가족이라는 이름으로 지칭하는 공동체가 본질상 모든 낯선 사람에게 배타적이라서 남편, 아내 그리고 자녀들과 아울러 부부의 아버지들과 어머니들을 좀처럼 부양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는 속담으로 “내리사랑은 있어도 치사랑은 없다”고 말하게 하는 것이다. 이처럼 공동체는 일정 크기에서만 적용 가능할 것이다. 사회의 형성 원리이기는커녕 사회에서 부차적 역할밖에 하지 않을 것이다. 적어도 그러한 것이 결혼 이론과 실무의 증언이다. 입법자는 이 관념에 따라서 결혼 계약들에서 부부 재산제와 공동 재산제를 구별했고, 후자에서 공산주의의 다양한 정도를 또한 구체화한 것이다. 그러면 공산주의 원칙의 적용 수단은 무엇인가? 이야말로 아는 것이 필요 불가결하면서도 아무도 아직 말할 줄 몰랐던 것이다.

끝으로 결혼은 공동체와 연합을 구분할 기회를 제공해, 두 배우자가 가슴과 머리에서는 완전히 결합한 상태이면서 재산에서는 분리되고 주거와 살림에서는 공산주의이고, 이에 더해 상거래에서는 연합을 이룰 수 있도록 했다. 이 모두가 다소간 정규적인가 아니면 남용적인가 하는 것은 이 순간에 중요하지 않다.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사회생활이 그 극단들인 소유권과 공동체 사이에서 어떻게 진자 운동을 하며 소문에 따른다면 정치경제학과 마찬가지로 사회주의로부터도 멀리 떨어진 제3항을 찾는지를 잘 아는 것이다.

양성兩性을 위한 교육 기관들에서, 식사, 일과 시간과 레크리에이션 시간은 공동이다. 그러나 우리가 벌써 관찰할 기회를 가졌던 모든 것보다 더 중대한 것으로서, 노동은 개인적이다. 왜냐하면 그것이 개인적이 아니라면 교육은 무효일 것이기 때문이다.

모든 사람은 수도원들에서 독서, 즉 교육이 어떤 것이었는지를 안다. 이 의무를 다하기 위해 단 한 권의 책으로, 단 한 사람의 낭독자로 충분했다. 계시의 체계에서는 신앙이 귀로 들어와서fides ex auditu 지성은 피동적인 채로 있다. 교육은 최고도의 공동 교육이다. 이때 공산주의는 침묵으로 표현된다. 상급자, 상부의 사상 기관이 말하고 신참자는 듣고 복종한다. 종교 기구의 완성은 대상자에게 일률적 교리를 주입하고, 이를 언제나 같은 용어, 같은 공식으로 제시하고, 우연히 그가 거기서 어떤 근심을 드러낸 경우 요지부동하게 예견된 결론에 도달하도록 그의 정신을 지도하는 것이다. 이 점에서 로마 가톨릭 전통의 충실한 제자들이며, 모든 공동체, 모든 종교에 필수적인 규칙의 까다로운 준수자인 예수회원들을 사람들이 아주 어리석음에 비난한 점은 공산주의적 규율의 이 정신이다.

우리의 학교들에는 어떤 차이가 있는가! 초등학교에서부터 사범학교에까지 사람들은 학생들을 혼자서 일하도록 끊임없이 훈련시킨다. 때로 모두에게 동일한 작문을 제공하는 경우 각자가 그 작문을 따로, 그리고 경쟁적으로 취급하기를 요구하며, 젊은이에게 스스로 생각하게 하는 데에 집착한다. 그에게 학문의 공통적 근본을 가르치면서도 그가 그 학문을 익힐 것을 요구하며, 그의 발명 능력을 촉진한다. 말하자면 그에게 천재의 이기주의, 여러 견해들의 소유권을 갖도록 부추긴다. 그리고 그의 풋내기 학식이 독창적, 개인적, 반란적인 형태를 취할수록, 사람들은 그의 성공에 박수갈채를 보내며, 그런 사람을 만들어 낸 것을 자축한다. 부모들과 스승들은 그들의 선불금을 잃지 않은 것을 기뻐한다. 그리고 사람들은 이 학생의 괴상한 관념들이 아마도 언젠가 공동체를 뒤집어엎을 것을 알고 이 학생에 대해 그가 젊을 때의 지출들의 값을 했다고 말한다. 그런데 교육이 문학적, 학문적인 것에서 작업적인 것이 된다면, 젊은이들을 주도성과 발견의 능력을 지닌 독창적인 사람들로 만들려는 이 강박관념을 가지고서 공산주의 원칙으로부터 점점 멀어진다는 것, 형제애로 결합된 노동자들 대신에 우리는 결국 애국심과 불굴의 성격을 지닌 국민만을 가지게 되리라는 것이 명확하다. 나는 이 끔찍한 문제에 관해 공산주의 사상가들의 사색을 호소한다.

우리가 이 급한 조사를 진행해 감에 따라 사람들이 그들의 정치, 종교, 산업, 군사, 교육 기관들에서 다양한 비율로 소유권의 원칙과 공동체의 원칙을 혼합한 것을 본다. 그리고 이 모두는 자생적으로, 때로는 필요에 의해, 때로는 이기심에 의해 행해졌고 심지어 때로는 우연에 의해, 적어도 이렇다 할 의도 없이 행해졌다고 말할 것이다.

이처럼, 국가의 임금 수령자들은 그들의 서비스를 받는 공동체에게서 임금을 받으면서 그들이 서로 결합하는 데서 발견할 수 있을 장점에도 불구하고 각자 따로 살아간다. 아주 값비싸고 비용이 많이 드는 살림살이는 비생산자들이 선호한다. 그렇지만 이들이 고정된 보수를 가지고서 그들의 지출을 합치는 것은, 그 수입이 아주 불안정하고 아주 불균등한 산업인들보다 더 쉬울 것이다. 아마도 언젠가 국가의 임금 수령자들은 그들의 소비를 중앙 집중화하는 데 동의할 것이다. 그러기 전까지는 그들이 모든 사람들처럼 공산주의 체제를 혐오한다는 것, 그들이 가족생활을 모든 생활 중 가장 즐거운 것으로 간주한다는 것이 확실하다. 이는 존엄성과 고귀함의 감정의 효과인 것처럼 타락하고 야만적인 성정性情의 효과일 수 있다. 나는 이 점에서 판단을 내리기에 충분한 이유들을 발견하기를 기다리며 모든 추측들을 받아들인다.

우리가 그의 교육의 시기에, 그의 공민적이고 종교적인 의무 이행에서, 그리고 공적 기능의 행사에서 반半공산주의적인 것으로 보아 온 사람이 공업, 상업, 농업에서는 완전히 소유권자가 된다. 그는 오로지 독점적인 방식으로 생산하고 교환하고 소비하며, 공동체와는 드문 관계밖에 유지하지 않는다. 저항할 수 없는 본능 혹은 역사의 가장 뒤로 소급된 시기로 거슬러 올라가는 매혹적 편견의 효과로 모든 일꾼은 사업에 착수하기를 갈망하며, 모든 동료는 숙련자가 되기를 원하며, 옛날에 모든 평민이 귀족이 되기를 꿈꾸었듯이 모든 날품팔이 농민은 날마다 이어서 일하는 것을 꿈꾼다. 그리고 나를 놀라게 하는 만큼 당신의 성급함을 흥분시킬 것으로서 아무도 분할의 단점, 살림의 부담, 소산업의 불완전성, 고립의 위험을 모르지 않는다는 점에 주목하라. 인성은 모든 고려 사항들보다 더 강하다. 이기심은 복권 추첨의 위험을 공동체의 구속보다 선호하며, 정치경제학 정리들을 우습게 여긴다.

요약하자면, 공동체는 우리를 근원에서 사로잡으며, 자연의 거대한 위력들에 견주어 우리에게 숙명적으로 과해진다. 그 본질로 말한다면 공동체는 정의定義를 싫어한다. 그것은 평등과 같은 것이 아니다. 물질과 전혀 관계없으며, 자유의지에 전적으로 의존한다. 연합과 구별되고 이기심을 건드린다. 산업이 막 태어나기 시작하고 노동이 그 첫 밑그림을 그려낼 때, 인성은 공동체와의 투쟁에 들어가며, 공동체는 그때 이후로 우리에게 집 문턱 위에서, 그리고 부부의 침대에서까지 벌서 불완전하고 하강하는 것으로 나타난다. 나중에 우리는 공동체가 자유주의적이고 활기찬 교육과 양립 불가능하다는 것을 발견한다. 끝으로 공동체는 임금을 받는 직업들에서 급속히 쇠퇴하고 자유노동에서 완전히 사라진다. 이 모두는 우리 본성의 자생성에서 만큼이나 사물의 필연에서 결과적으로 나온다. 경제학자들은 오래전부터 이를 인정했다.

뒤누아예 씨는 무한히 옳게 이렇게 외친다. “인간 사회의 정신에서 모든 개성, 모든 집단적, 중간적 존재를 제거하고 그 안에 다른 모든 존재들이 필연적으로 잠기는 거대한 일반적 존재만 존속하게 두어야 하는가? 사람들이 그래도 옹호하겠다고 주장하는 자유를 이 폭력적인 집중과 어떻게 조화시키는가? 심지어 이 집중과 사람들이 획득하겠다고 마음먹는 진보와 통일을 어떻게 조화시키는가? 사회적 혹은 민족적인 거대 단위에 의해 달성되어야 할 다른 것들이 훨씬 더 많다는 것을 말하기를 주저하지 말자. 한 거대한 민족이 정말로 위대하고 정말로 하나이기 위해서는 민족적으로 움직일 줄 아는 것으로는 충분치 않다. 또한 무엇보다 앞서 민족을 구성하는 사람들이 개인들로서, 가족들로서, 연합체들로서, 주민 공동체들로서, 지방들로서 적극적이고 노련할 필요가 있다. 그것들이 이 다양한 측면들에서 가치를 획득했을수록 그들은 민족의 몸으로서 더욱 가치를 가진다.”

나는 사회주의에 이 말을 심사숙고하라고 권고한다. 이 말에는 모든 유토피아주의자들의 글보다 더 많은 철학과 더 많은 진정한 사회과학이 있다.

공동생활의 특수한 장점들에 관해서 말하면, 다음과 같은 것이 이 점에서 일반 여론인 것처럼 보인다.

행복 수준이 평등할 때, 노동, 교환, 소비가 완전한 독립 상태에서 행해진다면, 그 조건은 최선으로 판단된다.

노동이 공동으로 수행되고 소비가 사적 소비로 남으면, 그 조건은 벌써 덜 좋지만 아직은 참을 만한 것으로 보인다. 이는 대부분의 인부들, 하위 공무원들의 조건이다.

노동, 살림, 수입과 지출의 모든 것이 공동이 된다면, 삶은 따분하고, 지치게 하고, 역겨운 것이 된다.

그러한 것이 반공주의적 편견으로, 어떠한 교육으로도 불식할 수가 없고 심지어는 교육에 의해, 이 교육이 어떻게 원리를 변경할 수 있을지를 발견할 수 없으면서 강화된다. 끝으로 이는 소유권자들과 똑같이 공산주의자들도 세뇌된 것으로 보이는 편견이다. 이것 없이 그들의 주저를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그러면 그들이 서로 간에 자신들의 관념을 실현하는 것을 누가 막으며, 그들이 기다리는 것은 무엇인가? 내 이성을 공산주의 원칙에 복종시키기 위해 나는 한 가지 증거만을 요구한다. 두 가정, 남편들, 아내들, 자녀들이 완벽한 공동체 안에서 섞여 함께 살아가는 것을 내게 보여주기 바란다.

하지만 공산주의는 그 자체가 이해되지 않는다. 공산주의는 아직 세계에서 그 역할이 어떤 것이어야 하는지를 이해해야 한다. 인류는 술 취한 사람처럼 한편에서는 소유권, 다른 한편에서는 공동체, 이 두 심연 사이에서 주저하고 비틀거린다. 문제는 인류가 이 좁은 길, 머리가 현기증에 사로잡히고 발은 힘이 빠지는 이 길에서 어떻게 벗어날 것인지를 알아내는 것이다. 공산주의 작가들은 그 점에 무엇이라 대답하는가?

. 공산주의 문제의 입장

카베 씨의 어떤 제자들은 사회과학의 존재 혹은 가능성에 대해 말하는 것을 듣고는 하루는 그들의 스승에게 편지를 써서 공동체의 교리를 과학적으로 해명해 달라고 부탁했다. 그들은 『이카리아』라는 소설도, 태양의 도시나 팔랑스테르도 아무 과학적인 힘이 없다는 것을 발견한 것이다. 카베 씨는 그들에게 「포퓔레르Populaire」 1844년 11월호에서 대답했다.

“나의 원리는 우애요.

나의 이론은 우애요.

나의 체계는 우애요.

나의 과학은 우애라.“

카베 씨는 다음으로 이 신도송에 주석을 달았다. 이는 감동적이었고 숭고했다.

그러니 우애! 이것이야말로 카베 씨에 따르면 공산주의적 가르침의 근본이고 모양이고 실체다. 왜냐하면, 이를 인정하는 것이 옳은데, 카베 씨는 생시몽과 푸리에처럼 학파의 우두머리이기 때문이다. 성 바울로는 그의 교리에 대해 묻는 불신앙의 유대인들에게 대답하면서 굉장한 풍자로 이렇게 말했다. “나는 한 가지만 아노라. 이는 십자가에 달린 예수로다.” 카베 씨는 성 바울로처럼 말한다. 그는 신참자들에게 말한다. “나는 한 가지만 아노라. 이는 우애로다.”

나는 이렇게 카베 씨에게 느닷없는 질문을 던진 시민들이 그의 대답에 만족했는지 모르겠다. 하지만 그들의 질문은 적어도 아주 합리적이었다고 나는 말할 수 있다. 그들은 틀림없이 친애하는 빌가르델 그대에게서 배운 대로 “개인 소유는 모든 사회에서 다소 제한된 용도를 가지며, 사용하고 심지어 남용할 권리는 대체 가능한 물건 혹은 완전히 개인적인 물건에 관해 용인될 수 있다”는 것을 느꼈다. 그러므로 그들은 공유의 물건을 고유한, 혹은 인적인 물건과 분리하는 구분선이 무엇인지, 그리고 이 분리를 어떻게 진행해야 할지를 아주 이치에 맞게 물은 것 같다. 왜냐하면 그대가 어디선가 말하듯이 “배타적 소유의 권리는 그 한계를 지니며 게다가 개인들의 자유를 방해하지 않고도, 아니, 최대 다수의 자유를 보장하기 위해서는 사람들이 일반적으로 믿는 것보다 더 좁을 수 있다”면, 소유의 공동체 역시 한계를 지니며 이 한계는 최대 다수의 자유를 방해함이 없이도, 아니, 각자의 자유를 보장하기 위해서 마찬가지로 제약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면 공동체, 그리고 개인 소유의 한계는 무엇인가? 이것이야말로 카베 씨에게 의견을 구하는 이들이 물은 것이다.

그러나 이것이 바로 또한 카베 씨가 자기 원칙을 속이지 않고, 자기 깃발을 버리지 않고 대답할 수 없었던 것이다. 왜냐하면 공동체가 개인 소유와 뒤섞이거나 그것에 의해 침투된다면, 소유권에 의해 제한된다면, 공동체이기를 중단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사람들은 어떤 원리에 의해 이 혼합 혹은 침투가 행해질 것인지, 어떤 이론에 따라 비율이나 분량을 정할 것인지를 묻는다. 또한 카베 씨는 궁금해 하는 자들에게 이런 불수리의 이유를 내밀어 속 깊은 외교관임을 드러냈다. 나의 원리, 나의 이론, 나의 체계, 나의 학문, 나의 방법, 나의 학설 등, 이는 우애다. 카베 씨는 이것 말고 아무것도 말할 것이 없다. 그리고 나는 그가 이를 어떤 눈썰미의 위력으로, 어떤 표현상의 승리로 단박에 발견했는지 경탄한다.

그런데, 수많은 것들을 포함하는 이 우애라는 말을, 플라톤과 함께 그에 못지않게 말해주는 것이 많은 공화국으로, 아니면 푸리에와 함께 더 많은 것을 말해주는 인력으로, 아니면 미슐레 씨와 함께 모든 것을 포괄하는 사랑과 본능으로, 아니면 다른 이들과 함께 모든 것을 모으는 연대성으로, 아니면 끝으로 루이 블랑 씨와 함께 신의 전능함과 동의어인 국가의 위대한 창도력으로 대체하라. 그러면 이 모든 표현들이 완벽히 등치라서 자기에게 제기된 문제에 「포퓔레르」 저 높은 데서 “나의 학문은 우애다”라고 대답하면서 카베 씨가 사회주의 전체를 편들어 말한 것을 알게 될 것이다.

우리는 실제로 모든 사회주의 유토피아들이 예외 없이 카베 씨의 아주 짧고 아주 절대적인, 그리고 아주 명시적인 해명, “나의 학문 등등, 이는 우애로다”하는 것으로 환원되는 것을 증명하게 될 것이다. 누구든 거기에 단 한 마디의 주석이라도 덧붙이기를 감행하는 자는 즉시 배교와 이단에 빠질 것이며 이는 말하자면 플라톤도 영지주의자들도, 초대 교부들도, 발도파도, 모어도, 캄파넬라도, 바뵈프도, 오언도, 생시몽도, 푸리에도, 그들의 계승자 카베 씨도 자기들의 원리의 도움으로 사회를 설명할 힘이 없으며, 더구나 사회에 법칙을 제시할 힘이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우애, 사랑, 인력 등 동등한 힘을 가진다고 우리가 주장하는 이 모든 표현들 중에 어떻게 카베 씨는 첫 번째 것을 선호했는가?

이는 설명할 만한 주제다.

. 공동체는 그 목적을 시작으로 간주한다

공동체가 종교와 마찬가지로 노력해야 할 첫 번째 것은, 어떠한 제도도 확실하고 최종적이지 못하게 하는 논쟁 정신을 틀어막는 것이다. 그러므로 나는 카베 씨에게, 그가 인민의 손에서 국가의 고삐를 받았을 때, 모든 정당이 그의 부권적 독재 아래 융합될 때, 모든 젊은이가 의심하는 자, 질문하는 자, 논쟁하는 자가 되도록 배우는 이 혐오스러운 체제인 보편 교육 체제를 무자비하게 가차 없이 뒤집어 놓으라고 권고한다.

사람들은 카베 씨가 왜 낭트의 공산주의자들에게 사회 원리를 설명하면서 예를 들어 이렇게 말하지 않았느냐고 묻는다. “나의 원리, 이는 인력이다”, “나의 이론, 이는 인력이다”, 아니, “나의 체계, 이는 사랑이다” 등등. 한마디로 왜 그는 우애를 선택했는지를 묻는 것이다.

그런데 내가 카베 씨를 놀라게 하려 한다고 그가 상상하지 않도록, 그리고 그가 절충주의를 잘못 써서 “나의 체계, 이는 사랑, 인력, 본능, 우애 등 한꺼번에 모든 것이로다”하고 대답하지 않도록, 나는 1844년 11월의 「포퓔레르」에 실린 정의가 진정 초월적인 개념에서 나왔다는 것, 그것만으로도 공동체적 학문을 포함할 뿐 아니라 모든 사회주의적 학문을 포함했으며, 카베 씨가 “나의 원리, 나의 체계, 나의 학문, 이는 우애”라고 말한 것은 무한히 옳다는 것을 증명할 것이다.

친애하는 빌가르델, 그대가 아주 잘 알아낸 것처럼, 신화시대부터 공동체가 점차 인간 제도들에서 사라졌다면, 이 사실로 인해 공동체는 이를 플라톤에서 연구하든, 아니면 모어에서, 바실리아드에서 혹은 이카리아에서 이를 선호하든, 스스로 성립되고 보전될 수 없는 형태이며, 그것을 살리는 무언가를, 이를테면 어떤 원리를 필요로 한다는 것이 증명된다. 이 요소, 이 활력을 주는 효모는 카베 씨에 따르면 우애다. 하지만 우리는 어떻게 공동체를 낳는가? 사회주의의 심오한 과학이 나타나는 것은 이 지점이다.

내가 다양한 개혁 추진자들에게 저마다의 유토피아를 실현하기 위해 사용하려고 하는 수단들에 관해 질문하면, 모든 이들이 만장일치로 이렇게 대답한다. 사회를 재생하고 노동을 조직하기 위해서는 이 조직의 과학을 보유하는 사람들에게 재산과 공적 권위를 줄 필요가 있다고. 이 본질적 교리에 모든 사람이 동의한다. 여론의 보편성이 있다. 사회주의 종파들의 친구들의 돈주머니에 대한 끝날 줄 모르는 호소는 이 관념에서 출발한다. 그러나 개혁자들이 사업주들이 되어 권력을 효과적으로 사용하려면 이 권력에 커다란 창도력을 주는 것이 좋다. 이는 블랑 씨의 체계다. 그런데 어떤 조건에서 권력은 가장 큰 힘을 취득하는가? 민주적으로 구성된다는, 혹은 공화국의 권력이라는 조건에서다. 이는 플라톤, 루소, 『나시오날Le National』 등의 체계다. 정치 개혁은 사회 개혁의 의무적 예비 단계다. 그러나 왜 입헌 군주제보다, 원로원보다 민주주의인가? 사람들이 연대적이라 이들을 정치적, 법적으로 평등하게 해주는 것이 좋기 때문이다. 이는 내 생각에 셰프뷜리에(Cherbuliez) 씨가 창설한 연대하는 사람들의 연합의 체계다. 사람들은 무엇에서부터 연대하는가? 그들의 모든 움직임을 묶어주는 공통의 법칙, 인력 아래서 살아가는 데서 연대한다. 이는 푸리에의 체계다. 우리가 최근에 겨우 알게 된 이 인력은 무엇인가? 이는 바로 우리가 아주 오래전부터 아는 사랑이고, 자비다. 이는 미슐레 씨의 체계다. 사람들이 서로 사랑하고 서로 미워하고, 자석의 양극처럼 서로에게 끌리고 서로를 배척하는 것은 어떻게 되는 것인가? 이는 모든 사람들이 형제라는 것이다. 이는 카베 씨의 체계다.

우애, 이는 그러므로 가장 중요한 사실이고, 자연적이고 우주적인, 생리적이고 병리적인, 정치적이고 경제적인 거대한 사실로서 이것에 원인에 대한 결과처럼 공동체가 매여 있다. 말의 유비類比, 이는 사회주의의 방법, 이론, 변증법이다. 친애하는 빌가르델, 그대는 열두 가지 중추적 감정들, 그리고 대조되는 일련의 집단들이 거기에 무언가를 더하는지를 말할 수 있다. 아마도 이 일련의 공허한 말들에서 더 많은 수의 중간 항들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확실한 것은, 이것이 언제나 우애에 도달하며 이 우애는 우리에게 인종들의 차이, 인류 일치의 원리와 기초에 의해 명확히 발현된다는 것이다. ‘우애 아니면 죽음을!’ 이야말로 국민 공회Convention nationale[30]의 소유권자들이 그렇게 하도록 내버려 두었더라면 로베스피에르가 프랑스에 설명했을 것이다. 이야말로 이 위대한 사람의 계승자인 카베 씨가 운명의 책에서 들뜬 기분으로 읽었던 것이다. 그대가 뭐라고 하든지 옛날과 현대의 유토피아주의자들 중 아무도 과학의 비밀을 더 앞서 간파하지 못했다.

그러면 제1, 제2, 제3의 원인들에 대한 이 경이로운 분별지를 가지고 문장을 구성하는 비길 데 없는 능숙함을 갖추고서 사회주의는 어찌하여 사람들을 더 낫게, 더 행복하게 만들 수도 없으면서 세상을 근심하게 하는 데만 이르렀나? 왜냐하면 결국 정치경제학이 그 업적에 따라 평가될 수 있다면, 사회주의는 오늘날 그 무능에 따라 평가될 커다란 위험을 겪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일상 관행의 비정상성에 대해 한 것처럼 유토피아의 불임성에 대해 고려하는 것이 중요하다.

인간의 사회성의 진보에 관해 성찰한 누구에게든, 실질적 우애, 입법자의 배려와 도덕가의 주의를 오직 끌 만한 이 가슴과 이성의 우애, 그리고 종족적 우애, 그것의 육적인 표현일 뿐인 이 우애는 내가 말하건대 결코 사회주의자들이 믿듯이 사회 완성의 원리, 사회 진화의 규칙이 아니다. 그것은 사회의 목표이고 열매다. 문제는 정신과 가슴의 형제이면서 어떻게 우리가 전쟁을 벌이지 않고 서로 잡아먹지 않고 살 것인가를 알아내는 것이 아니다. 이 문제는 문제도 아닐 것이다. 오히려 본성상 형제들이면서 우리가 또한 어떻게 감정에 의해 형제가 될 것인가, 우리의 이익들이 우리를 갈라놓는 대신 어떻게 우리를 결합시킬 것인가 하는 문제다. 이것이야말로 유토피아가 근시안으로 만들지 않은 모든 사람에게 단순한 양식이 계시해주는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가 경제적 모순들의 그림을 가지고 증명해 보인 것처럼, 문명화시키는 제도들의 발달이 격정들에 교란을 일으키고 사람들에게서 탐내는 식욕과 화를 내는 식욕에 불을 붙이고 이 신의 천사들을 사나운 짐승들로 만드는 불가피한 결과를 가지니, 쾌락의 운명을 지닌 초라한 피조물들로부터 맹렬한 사움이 일어나고 무서운 상처가 생겨나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피조물들 간에 평화 조약의 기초를 놓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러면 노동은 어떻게 배분될까? 교환 법칙은 어떤 것일까? 정의의 강제 이행 수단은 무엇일까? 배타적 소유는 어디서 시작되며, 어디서 끝나는가? 공동체는 어디까지 확장되는가? 어떤 비율로 이 요소는 집단적 유기체의 부분을 이루는가? 어떤 형태로, 그리고 어떤 법칙에 따라, 한마디로 어떻게 우리는 형제가 될 것인가? 그러한 것이 공동체의 사전적 문제이면서 최종적 목표이기도 한 것이다.

이와 같이 우애, 연대, 사랑, 평등 등은 여러 이익들의 화해, 즉 노동의 조직과 교환의 이론에서밖에 나올 수 없다. 우애는 모든 형태의 연합과 정부의 목표인 것처럼 공동체의 목표이지 원리가 아니다. 플라톤, 카베, 그리고 이 사회주의의 두 최고 권위자에 이어서 우리에게 생산과 교환의 법칙들을 가르치는 대신 우애, 연대, 사랑을 가지고서 유토피아를 만들기 시작하면서 권력과 돈을 요구하는 자들, 이 모든 사람들은 내가 말하노니 결과를 원인으로, 결론을 원리로 간주하는 것이다. 그들은 속담이 말하는 것처럼 천장에서부터 집짓기를 시작한다. 왜냐하면, 다시 한 번 말하건대 우애로 충분하다면 누가 사회주의자들이 서로 연합하는 것을 막는가? 이를 위해 장관의 허가, 의회의 법률이 필요한가? 그러한 감동적인 광경이 세상을 감화할 것이며, 유토피아만을 위태롭게 할 것이다. 이 헌신은 공산주의적 용기를 넘는 것일까?

이야말로 그들이 이를 고려할 상황에 있지 못하면서 우연히 카베 씨에게 질문하게 된 시민들이 가슴 밑바닥에서 느낀 것이다. 그러나 스승이 그들에게 “나의 원리, 이는 우애로다”하고 대답한 것 역시 아주 뛰어난 전술을 가지고 한 것이었다. 왜냐하면 이런 뒤집음 없이는 공산주의는 더 이상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카베 씨는 이 결정타 뒤에 사람들이 그에게 우애의 원리는 무엇인지를 묻지 않으리라고 확신했다. 이는 무한히 이어지는 문제들에 몸을 던지는 것일 테고 이를 끝낼 필요가 있었을 것이니 말이다.

. 공산주의는 공동체의 형상이고 원형인 가족과 양립 불가능하다

우리는 공동체의 기원, 그것이 문명에서 어떻게 발현되는지, 어떤 문제가 풀어야할 것으로 공동체에 주어지는지, 그리고 어떤 변증법을 공동체가 활용할 줄 아는지를 말했다. 우리는 이제 공동체를 그 업적에서, 그 유토피아의 설명에서 나타내 주려고 한다.

한편으로 어떤 것들의 공동체가 물리적으로 필요한 것처럼 다른 어떤 것들의 공동체는 물리적으로 불가능하다는 것이 증명된다.

게다가 소유권의 침해와 원시적 야만 시대를 지나서 생존한 아주 소수의 공산주의적 제도들의 유지, 이는 투기가 절대로 쓸데없이 들어가지 않은 특정한 경제적 필요성의 결과이기도 한 것처럼 특정한 정신적, 정서적 성향의 결과였다는 것이 확인된다. 소유권과 공동체의 적대 관계가 정확한 방식으로 정해지고, 어떤 사람들이 통속적인 고려 사항들을 넘어서 올라가, 어떤 이들은 새로운 제도들을 부추기는 정신을 짓밟고, 다른 이들은 황금시대의 기억들을 짓밟으면서 이런저런 경향을 체계적으로 쳐부수고 첫 번째 사람은 공동체에서 나온 모든 것을 공동체로 되돌릴 필요가 있다고 주장하고, 두 번째 사람은 전유될 수 있는 모든 것을 계속 전유할 필요가 있다고 주장하기 시작하는 것을 보게 되는 것은 경험과 성숙한 성찰의 여러 세기가 지난 후일뿐이다. 이로부터 모순적인 두 유토피아가 나오는데, 하나는 항상 달아나는 공동체의 유토피아이고 또 하나는 끊임없이 커지는 소유권의 유토피아다. 소유권은 결코 그것이 그렇게 되기를 갈망할 것으로서 온전하고 절대적이지 못했다. 또한 공동체는 완전하지 않았다. 그리고 참된 공산주의자는 참된 소유권자처럼 이성적 존재다.

확실히 나는 공산주의가 그 적용에서 그 원리를 한계에까지 밀어붙일 욕구를 가진다고 가정할 때 공산주의에 호의적이다. 그러나 이는 엄밀한 이유로는 충분치 않다. 가능하다는 것이 무엇인가? 의무로 제시되는 공동체와 동시에 의무로 제시되는 개성 사이에 무엇이 이를 결정할 것인가? 내가 어떤 경우에서든 다른 것보다는 어느 하나의 것에 양보해야 한다는 것을 누가 내게 증명해줄 것이며, 어떻게 그것을 증명해줄 것인가? 내가 아무리 공산주의자라도 전유나 공유가 꺼려지는 것들이 무엇인지를 인식하기 위한 원칙은 언제나 내게 필요하지 않은가? 그러고부터는 공동체가 그것을 구성하고 그것을 결정하는 원칙을 필요로 하니 공동체는 그 자체로는 아무것도 아니며 소유권도 아무것도 아님은 참이 아닌가?

사실로 가 보자. 나는 모든 것들 중 일반 여론이 공동체의 암초라고 간주하는 데 의견 일치를 보는 것, 가족으로 시작한다.

공산주의 신문 「뤼마니테르l'Humanitaire」는 여성들의 공유에 명확히 찬성함을 공표했다. 카베 씨는 공동체의 문제를 남겨 놓으면서, 이를 배척하지도 인정하지도 않으면서 임시로 결혼과 가족을 유지한다고 선언했다. 페쾨르 씨는 자기 나름대로 일부일처제를 다른 속셈 없이 찬성한다고 공언하며, 친애하는 빌가르델, 나는 그대가 아무것도 더 요구하지 않는다고 가정하기에는 너무 별 볼 일 없는, 비너스를 섬김에서도 그녀의 밤 전쟁에서도 굼뜬(in venerem segnis nocturnaque bella) 동료라고 믿는다. 나는 이 불일치에 놀랄 권리를 가지지 않는가? 페쾨르 씨는 결혼이라는 표제에 관해 카베 씨보다 덜 공산주의자다. 카베 씨는 「뤼마니테르」보다 덜 공산주의자이고, 「뤼마니테르」는 확실히 모두 중에 가장 논리적이다. 나는 누구를 믿을 필요가 있는가? 내가 추론에다가 사회주의자들 중에 아주 두드러진 왕성한 식욕만을 참조한다면 「뤼마니테르」와 함께 가족과 결혼을 반대한다. 내가 양성 간 혼숙이 사랑을 파괴함을 성찰한다면 사랑을 위해 하나의 예외를 받아들이지 않을 수 없는데, 이는 천 가지 다른 예외를 끌어들이는 것이다. 이야말로 내가 방향을 잃은 것이고 자의恣意에 무방비로 넘겨진 것이다. 무엇인가! 공산주의자들이 벌써 공유하는 관념으로 서로 결합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들은 우리의 정치적 대표자들로서 온건한 공산주의자들과 극단적 공산주의자들로 나누어진다! 그들 중에 좌파, 우파, 그리고 교조주의자들이 있다! 그렇다면 공동체의 기조(Guizot)는 누구인가?

가장 이성적인, 가장 현실적인, 따라서 가장 덜 앞선 공산주의자들, 그리고 그대, 친애하는 빌가르델은 이 중에 들어가는데, 이들은 공동체가 사람이 아니라 물건에 해당한다는 것을 고찰하면서 결혼 문제에 관해서는 궁지에서 벗어난다고 믿는다. 그대는 카르포크라테스를 따라서, 모든 것은 공유omnia communia이지만 모두가 공유는 아니라고non omnes communes 말한다.

결혼의 단조로움에 약간의 다양함으로 맛을 내는 것이 가능하다고 믿은 그대의 위대한 계시자인 플라톤과 영지주의자들, 마니교도, 생시몽주의자들 그리고 푸리에는 이 점에서 자아의 불가침성을 잊었다면 빈약한 추론가들이었음을 인정할 필요가 있다. 그러나 그들이 생각하기에는 사랑을 하는 것은 하나의 재물이고, 많은 사람들에게 재물들 중 가장 큰 재물인 것이다. 그리고 바로 거기에 어려움이 있다. 왜냐하면, 내가 여성의 인격을 존중해야 한다고 해서, 어떻게 그가 나에게 그 물건의 공동체를 거부할 수 있는가? 나는 그의 형제가 아닌가? 그는 나의 자매가 아닌가?

부탁하노니 하나의 해결책이 내게 가지는 중요성을 생각해 보라. 그리고 그 결과들을 성찰해 보라. 이는 내가 그대에게 흔들리지 않는다고 확언하는 결과들이니 말이다. 어떻게 공동체가 사랑의 문제에서 적용될 것이며, 양성 관계에 관해 관습법은 무엇일까? 어떤 경우에도 범죄나 경범죄가 있을 수 있을 것인가, 왜 그런가? 초대 그리스도교인들 중 어느 사람은 한 아름다운 여성과 결혼한 것으로 알려졌는데 그를 교회로 인도하지 않아 이기주의로 비난받았다. 그는 사과했고 자기 아내를 공동체가 마음대로 하도록 해서 모략하는 자들을 어리둥절하게 했다. 그런데 공동체가 남편을 강제할 수 있다면, 아내도 마찬가지로 강제할 수 있다. 선착자先着者는 심지어, 공동체가 부재할 경우에, 이 아내에게서 형제 된 의무를 요구할 수 있고, 그가 거부하면 자기 손으로 복수할 수 있다. 공산주의에 도대체 강간, 유혹, 근친상간 혹은 간음이 있을 수 있는가? 이 모두에 관해 나에게 증명, 그리고 증명의 증거가 필요하다는 것을 다시 한 번 유념해 달라.

당신이 플라톤의 원리를 충분히 받아들이고 양성의 완전한 공동체를 찬성하는 의견을 공언한다면, 당신은 바로 세상에서 가장 자유로운 것인 사랑을 의무화하고 성매매를 강간으로 대체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면 우애, 예의 바름, 상호 간 애정은 어디 있는가?

당신이 사람들의 동의가 언제나 즐김에 선행해야 하리라고 유보 조건을 둔다면, 공동체는 선택 사항에 불과하다. 우리는 선호, 매수, 독점에 빠진다. 어떤 이들에게는 일부다처, 다른 이들에게는 무혼이 행해져서 모두에게 부정不貞이 일어난다. 이는 현 체제로서 푸리에게 다른 이름으로 규율화한 것이다. 양성의 임의 선택적 공동체를 인정하는 사회주의 종파들은 문명을 모방해 재능과 자본의 권리, 혹은 결국에 가서는 힘의 권리를 유지하는 바로 그 종파들이다. 재물의 나눔에서의 불평등, 사랑의 나눔에서의 불평등, 이것이야말로 이 위선적인 개혁자들이 원하는 것이다. 이들이 남들에게 명령하고 자기들은 즐긴다는 조건에서는 이들에게 정의, 이성, 과학은 아무것도 아니다. 이들은 결국 소유권의 변장한 추종자들이다. 그들은 공산주의를 설교하는 것으로 시작해서 자기들의 배를 불리기 위해 공동체를 수용한다.

끝으로 만약 당신이 결혼의 불가침성을 주장한다면, 그것만으로 거대한 공동체 중에 하나의 새로운 공동체를 창조하는 것이다. 국가 내의 국가imperium in imperio인 것이다. 당신은 가족을 도입하는 것이고, 가족의 불가분리적 특성으로서 살림, 소유권, 상속 등 일련의 양립 불가능하고 모순된 것들 모두를 도입하는 것이다.

공동체는 사물에만 해당되고 사람에게는 해당되지 않는다고 그대는 말한다. 이것이 바로 한판의 속임수라고 말하는 것을 나에게 허락해 달라. 사람들의 공동체 혹은 단체는 사물의 매개에 의해 생겨난다. 사람들이 서로 잡아먹는 것이 아니라면 공동체는 같은 물건들의 사용에 의해 같은 물건들의 사용에 의해 서로 간에 성립한다. 이처럼 내 침실, 내 침대, 내 옷의 공동체는 내 의사에 반해서 취득된 것으로 내 인격을 공유로 한다, 즉 성서의 언어로 그것을 더럽히고 억압한다. 나의 노동, 나의 애착, 나의 즐거움에 관계되는 모든 것도 마찬가지다. 나는 더 먼 공동체, 예를 들어 태양계 공동체, 나라나 언어 공동체 같은 공동체 안의 내 동류들과 함께하는 만큼 더욱 순수하고 더욱 자유롭고, 더욱 침해되지 않는다. 반대로 그들이 플라톤의 방식과 같은 더 가까운 공동체 안에서 나와 함께하는 만큼 더욱 불경하고 덜 존엄하다. 그대는 사랑에서 상호 동의가 필요하다고 본다. 부부 공동체는 이 원리 위에서 세워진다. 그런데 나의 것인 이 아내가 심지어 자발적으로 다른 사람과 통한다면, 그 여자가 성매매를 하는 시간에 내 잠자리에 함께하고 내 품에서 잠을 잔다면 그 여자가 내게 성매매를 시키고 나를 수치스럽게 하는 것이 맞지 않은가? 그 여자는 비열한 매춘부의 냄새를 풍긴다(Foeda lupanaris tulit ad pulvinar odorem)! 죄인의 죽음 말고 아무것도 나에게 그러한 모욕을 갚아줄 수 없다. 그리고 공동체가 그것을 허가한다면 나는 공동체에 반기를 든다. 메스트르 백작은 말한다. 사람의 입김은 그의 동류에게, 신체와 정신에 치명적이라고. 여성들의 공동체는 전염병의 조직이다. 썩 물러가라, 공산주의자들이여! 그대들의 현존은 내게 악취이며, 그대들의 시각은 내가 밥맛을 잃게 한다.

생시몽주의자들, 푸리에주의자들, 그리고 가장 순수한 부끄러움, 섬세함, 영성을 가지고 자유로운 사랑을 허락할 수 있다고 자부하는 남창男娼들의 체제로 속히 넘어가자. 비천한 사회주의의 서글픈 환상, 망상에 사로잡힌 탕자들의 마지막 꿈이다. 변심에 의해 격정이 치솟게 해 보라. 곧바로 육체가 정신에 폭압을 행사한다. 연인들은 서로에게 쾌락의 도구에 불과하다. 마음들의 융합에 감각의 억누를 수 없는 욕망이 뒤를 잇는다. 그리고 모든 쾌락에는 마찰이 생긴다. 이런 것들을 판단하는 데는 인기 있는 비너스에 대한 세심한 조사를 생시몽처럼 거칠 필요는 없다.

공동체가 없든지 아니면 가족이 없고 따라서 사랑이 없든지 둘 중 하나다. 그리로 돌아올 필요가 있다.

모두가 우리에게 사회들의 유기적 요소로 보여주는 가족과 함께 사람의 개성은 그 규정적 성격을 띠고, 모든 기력을 획득하고 점점 이기주의로 돈다. 이는 레굴루스 같은 자나 사도를 자칭하며 자기 자녀와 아내를 공공 자선 기관에 방치해 행위의 권위를 떨어뜨릴 어떤 광인의 고립된 예가 아니다. 시조가 되는 사람은 곧 부성 자체에 의해 집중되고 사나워진다. 그는 우주의 적이다. 그의 동료들은 그에게 모두 낯선 자들로, 적들로 보인다. 결혼과 부성은 이웃에 대한 애착을 사람에게서 증진해 주어야할 것으로 여겨지지만 그의 질투심, 불신, 증오를 살려줄 뿐이다. 가부장은 독신자보다 이익에 더 악착같고, 더 가차 없고, 더 비사교적이다. 신을 사랑하는 나머지 사람들을 미워하게 되는 이 신자들과 비슷하다. 가부장에게는 언젠가는 그를 계승할, 그리고 그의 뒤에 일련의 세대들을 계속해 갈 자들의 어린 시절을 보호하기에 너무 많은 소망과 이기심의 에너지란 있지 않다는 것이다. 사람을 가르치는 데는 하루는 충분하지 않다. 수년간의 고된 작업과 긴 저축이 필요하다. 사람은 자신의 생존을 위해 자연과 투쟁 중이며 자기 자녀의 미래를 위해 사회 전체와 투쟁 중이다. 공동체가 이 적대 관계를 파괴할 것이라고 그대는 말한다. 공동체가 가족을, 그리고 결과적으로 인류를 파괴하거나 공동체의 해체자인 가족을 용인할 줄밖에 모른다면 어떻게 그렇게까지 하게 될 것인가?

가족의 반공산주의적, 내가 거의 반사회적이라고까지 말한 이 특성은 자녀들과 아내들에게서 순진무구하게 드러난다. 나는 소유권자의 아들들이 일꾼의 아이들과 사소한 공통점을 가지기보다는 마치 일꾼을 비추어 주는 태양이 귀족들의 빛남을 손상시키는 듯이 그들 또래의 놀이를 멸시하고 재산 관리인의 운명을 감수하는 것을 보았다. 아내들로 말한다면, 이들이 자기들의 살림이라 부르는 작은 나라의 주권자가 되기 위해서만 결혼하기를 갈망한다는 것은 통속적인 진실이다. 아내에게서 그의 평화로운 행정이고, 의기양양한 소풍을 떠나는 출발점인 살림을 빼앗아 보라. 그 순간부터 그는 그대에게 충실할 이유를 더 이상 가지지 않으며, 그대에게 속하기를 그만둔다. 결혼은 그 외적인 속성을 상실해 여성에게 추상, 우연한 연결이 되어, 이는 아무런 실물에도 뒷받침되지 않아서 처음 싫증이 나는 때에 해체될 것이다. 공동체는 기껏해야 성매매 여성들과 수녀들에게 좋은 것이어서 가모家母에게는 불쾌하다. 공동 살림 여성과 유녀 사이의 차이는 표현에 있을 뿐이다. 고대에는 이 둘을 같은 말로 지칭했다.[31]

이카리아에서는(카베 씨에게로 돌아오는 것은 내게 언제나 새로운 기쁨이다) 뜰과 정원이 딸린 집마다 한 가족이 산다. 갑자기 규정에 세 가지 예외로 다음과 같은 것들이 있다. ⑴ 가족의 분리, ⑵ 주거의 분리, ⑶ 살림의 분리. 이것이 다가 아니다. 카베 씨가 이카리아인들에게 하도록 하는 네 끼(푸레에는 일곱 끼를 약속했다)의 식사 중 두 끼는 작업장에서 행해진다. 이는 아침과 점심이다. 세 번째 식사는 공화국 식당에서 공동으로 행해진다. 네 번째인 밤참은 가정에서 행해진다. 왜 이런 구분을 두는가? 왜 동료들과의 식사, 공민적 식사, 그리고 가정 식사가 있는가? 왜 언제나 공동으로, 아니면 언제나 따로따로 먹지 않는가?

그대는 사적 소비를 찬성하기로 결심하는가? 살림의 매력이 무엇보다 아내의 재능에 관계되므로, 향유하는 기술은 생산하는 기술에 결코 못지않게 어려우므로 탁월한 가정주부를 둘 그런 사람은 같은 소득으로 그의 집에 두 배의 행복과 즐거움을 발견할 것이다. 그러므로 조건들은 더 이상 동등하지 않다. 이는 옳을 것인가? 그대가 그렇다고 한다면, 나는 그대에게 소비와 생산은 결국 같은 것인데 왜 그대는 노동에 소비와 같은 규칙을 적용하지 않느냐고 묻는다. 한마디로 왜 각자의 행복은 그가 향유하는 능숙함에 비례하는 것처럼 그가 생산하는 부지런함에 비례하지 않을 것인가?

하지만 그렇게 무모하게 만들어진 예외의 이 결과는 공동체 자체의 폐지일 것이다. 그러므로 규칙을 재론할 필요가 있다. 그리고 공동생활을 보전하려면 사적 생활을 금지할 것인가? … 하지만 그러면 공동체는 사물에서 사람에게로 넘어간다는 것, 이 수평화의 체계로는 모든 사람이 노예화되고 부정해진다는 것을 그대에게 환기시키는 바다. 그리고 나는 그대에게 반대해 무서운 적인 자유가 솟아오르는 것을 본다. 무엇인가! 우리는 세관, 특권, 그리고 모든 장벽을 제거할 것이며, 소유권 증서를 불태우고, 울타리를 넘어뜨리고 상속지의 경계석을 뽑아내고 자유를 방해하는 모든 것을 파괴할 것이다. 그러면 우리는 스무 명 미만의 사람들이 노동하고 잡담하거나 술 마시기 위해, 공화국의 청사에서 공화국 경찰이 감시하는 곳 말고 다른 곳에서 모일 수 없을 것이다. 아! 나는 그대가 곧 독재자, 괜찮다면 심지어 가부장이 되는 것을 보고 싶다. 하지만 나는 그대에게 그대의 이론을 실천할 테면 해 보라고 도전한다.

공동체 혹은 사회주의가 카베 씨의 오류에 책임이 없다고 말하는 것이 무슨 소용인가? 그와 다르게 말하는 자들 모두가 여전히 그와 같이 추론한다는 것이 증명된다면? 예를 들어 팔랑스테르에서는 소유권자들 대신에 합창대원들만 있으니 노동이 공동으로 개인적 창도성 바깥에서 수행된다. 개별적인 작은 방을 용인함에도 불구하고 주거는 공동이고, 살림도 공동이고 식사도 공동이다. 결혼은 거짓 맹세와 변심의 모든 돌발 가능성에 노출되어 선택 사항으로 남는다. 다른 유토피아주의자들은 도시들을 파괴하고, 지상에서 테베의 금욕주의자들처럼 가족들을 고립시키고, 각 살림에 경작하고 보고해야 할 작은 소유지를 할당한다. 또 다른 유토피아주의자들은 인구를 거대한 중심지들에 묶어 놓기를 선호하며, 거기로부터 노동자들의 여러 조들이 영토의 모든 지점으로 기관차를 타고 달려간다. 이 모두는 다소간 이론에 기초한 것이고, 다소간 공산주의적이고 사회적인 것으로서 우리의 시간을 잡아먹을 권리는 없다. 방법, 과학은 절대로 공연히 거기에 들어가지 않을 것이 확실하다.

1846년에 비평가가 이 모든 지저분한 것을 치울 의무가 있다고 스스로 믿으려면 우리가 어느 정도의 지적인 하락에 도달해 있을 필요가 있는가! 하지만, 참으라! 이런 빈곤은 사회를 괴롭히는 해충으로서 사회는 논쟁의 불꽃으로 이로부터 정화되어야 한다. 장뇌, 살사, 수은이 약사의 기술에 힘입어 공중 건강의 가장 소중한 매체들이 되어 의료의 천재를 영구적으로 영예롭게 한다면, 인간 오류에 대한 비판, 지적 부패를 치료하는 기술 역시 가치를 지닐 수 있다. 편견이 아주 터무니없고, 생겨나는 유토피아가 아주 밥맛 잃게 하는 것일지라도 말이다.

. 공동체는 분배의 법 없이 불가능하며, 분배에 의해 멸망한다

그러므로 공동체와 함께 가족은 멸망한다. 그리고 가족과 함께 신랑과 신부, 아버지와 어머니, 아들과 딸, 형제와 자매라는 명칭들도 사라진다. 일가친척과 인척 관계, 사회와 하인 신분, 공공생활과 사생활의 관념들은 희미해진다. 관계들과 사실들의 모든 질서가 사라진다. 사회주의는 어떤 식으로 자신을 표현하든지 숙명적으로 이 단순성에 도달한다! 관념들을 설명하고 관계들을 정하고 권리들, 의무상의 원칙들을 정식화하는 대신 그것들을 폐기하는 이상한 이론이다! 공산주의는 과학이 아니다. 그것은 무로 돌리기다!

이카리아의 유식한 작가는 어떤 경우들에 대해서 자기 집에서 가족끼리 공화국의 화물차와 식품 담당자들이 차리는 저녁 식사를 할 허가를 내준다.

나는 또 물어볼 것이다. 왜 각 살림이 자기 음식물을 공동의 작업장에서 완전히 가공된 채로 가져오는 대신에 조리하는 것을 허가하지 않느냐고 말이다. 공동체는 익힌 고기에 집착하는가 날고기에 집착하는가? 데운 파이에 집착하는가 찬 파이에 집착하는가? 아니면 어떤 절약의 동기인가? 이 경우에는 입법자에게 이렇게 말할 것이다. “나를 빼 주세요, 그리고 내 식사의 가치와 같은 가치를 현물로 그리고 내 선택에 따라 내게 주세요.” 거기에 다시 말할 것이 무엇일까?

그러므로 우리는 당좌 계정들로, 산물들의 분배와 평가 규칙의 필요성으로, 말하자면 공동체의 해체로 돌아왔다. 왜냐하면 모든 당좌 계정은 차변과 대변으로, 달리 말하면 네 것과 내 것으로 균형을 맞춘다. 모든 분배는 개인주의의 동의어다. 세는 공유인 채로 있는 자연적 부는 그 말의 경제적 의민에서 분배된 것이 아니라고, 만약 자연의 모든 산물과 노동도 마찬가지라면 판매 가치는 0일 것이며, 그로부터 나오는 결과는 그것과 함께 사라질 것이며, 더 이상 정치경제학은 없을 것이라고 옳게 말했다. 또한 공산주의자들은 결코 분배하지 않는다. 그들의 과학은 거기까지 가지 않는다. 그들은 배급한다. 그들이 폐지하는 것은 사회과학의 새로운 범주, 즉 가치, 교환, 등치, 정의, 구매와 판매, 상거래, 유통, 신용 등등이다. 공산주의는 생존하기 위해 수많은 말, 관념, 사실들을 제거해서 공산주의의 배려로 교육받은 백성은 말하고 생각하고 행동할 필요를 더 이상 가지지 않을 것이다. 이는 활동성도 감정도 없이 우애의 … 바위에 나란히 붙어 있는 굴들일 것이다. 공산주의란 얼마나 지적이고 진보적인 철학인가!

그렇지만 잘 정돈된 공동체 안에서는 정확성을 가지고, 모든 종류의 산물에 대해 소비의 필요와 생산의 한계를 알아야 할 것이다. 가치들의 비례성은 소유권에 기초를 둔 사회들에 대해서만큼 공산주의 사회들에 대해서도 부의 지고의 조건이다. 그리고 사람이 그것을 고려하기를 거절한다면, 숙명이 그를 위해 계산해줄 것이며, 어떤 오류도 일어나게 하지 않을 것이다. 각 산업 조합은 그러므로 자기 인원과 수단에 비례하는 몫을 손해와 손상을 공제하고서 제공해야 할 것이다. 거꾸로 각각의 제조업과 국가 기관은 다른 생산 원천들로부터 모든 종류의 공급 물자를 그 필요에 비례해 계산된 것으로 받을 것이다. 그러한 것이 노동과 균형의 필요 불가결 조건이다. 이는 칸트가 말했더라면 가치의 정언명법, 절대 명령이다.

이와 같이 우리는 적어도 작업장, 조합, 도시들과 지방들에 대해 회계를 수립해야 할 것이다. 정의의 순수 표현인 이 회계는 왜 무리들에 대해서와 똑같이 개인들에게 적용되지 않을 것인가? 왜 거대 국가 기관에서 시작된 분배는 사람들에게 내려가지 않을 것인가? 노동자들은 사회보다 서로 간에 정의의 필요성을 덜 가지는가? 이 결정을 완벽히 하려면 하위 분할만 하면 되는 때에 왜 권리의 결정에서 멈추는가? 실례하지만, 이 자의성의 이유는? 그대가 감히 고백하려 하지 않으므로 내가 그대 대신 대답할 텐데, 이는 그러한 회계를 하게 되면 모든 사람이 자유로워져 더 이상 공동체는 없을 것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개인 노동이 평가되고 인당 소비가 계산되는 공동체는 무엇인가?

이처럼 공동체는 모든 상업 회사처럼 장부를 가지지 않고서는 안 된다. 그러나 공동체는 조합들에게만 계좌를 개설하고 사람들에게는 계좌를 개설하지 않는다. 공동체에는 약간의 정의는 필요하지만 많은 정의는 치명적이다. 공화국은 그 재산 목록을 만들 것이다. 시민의 대차 대조표를 작성하는 것은 국가 안보에 대한 범죄일 것이다! 민족과 지방들은 가치의 절대 법칙에 따라 교역을 할 것이다. 그러나 누구든 같은 원리를 자기 자신에게, 그리고 남들에게 적용하려고 시도하는 자는 위조 화폐 제조자로 간주되고 사형을 당할 것이다. 자기 안에 사회 정의를 인격화해 공동체를 폐지하는 일일 것이다!

하지만 내가 무슨 말을 하는가? 사회주의는 계산하지 않으며, 계산을 거부한다. 정치경제학보다 더하지도 덜하지도 않게 사회주의는 가치의 공측 불가능성을 단언한다. 그것이 아니라면 자신의 여러 유토피아들을 거치며 추구하는 것이 교환 법칙에 의해 주어진다는 것을 이해할 것이다. 이 법칙의 공식을 구할 것이다. 그리고 신학이 그 신화들의 의미를 발견하고 나서 그러듯이, 철학이 그 논리를 구성하고 나서 그러듯이, 사회주의는 가치의 법칙을 찾고 나서 스스로를 알게 될 것이며, 존재하기를 그만둘 것이다. 분배의 문제는 현재까지 어떠한 사회주의 작가에 의해서도 정면으로 논의되지 않았다. 그 증거는 모두가 경제학자들처럼 분배의 규칙의 가능성에 대해 부정적으로 결론을 내렸다는 것이다. 어떤 이들은 “각자에게 그의 능력에 따라, 각 능력에는 그 공적에 따라”를 표어로 삼았다. 그러나 이들에 따를 때 능력의 척도는 무엇인지도, 노동의 척도가 무엇인지도 말하기를 삼갔다. 다른 이들은 노동에, 그리고 능력에 새로운 평가 요소인 자본, 달리 말하면 독점을 더했다. 그리고 그들은 자신들의 뜻밖의 주장으로 가장 많은 주목을 끎에도 불구하고 자신들이 문명의 비열한 표절자들일 뿐임을 한 번 더 증명했다. 끝으로 세 번째 견해가 형성되었는데, 이는 이런 자의적인 타협을 피하기 위해 분배를 배급으로 대체하고 “사회적 자원의 규모에서 각자에게 필요에 따라”를 명문으로 삼는다. 이에 의해 노동, 자본 그리고 재능은 과학에서 제거된 처지가 된다. 동시에 산업적 위계와 경쟁은 제거된다. 그리고 노동자들을 생산적 노동자와 비생산적 노동자로 구분하는 것은 모든 사람이 공무원이 되면서 사라진다. 화폐는 최종적으로 금지되고, 이와 함께 가치를 대표하는 모든 표시도 금지된다. 신용, 유통, 무역 수지 균형은 이 보편적 우애의 왕국에서는 의미를 잃은 말에 불과하다! 그리고 나는 진정한 공적을 가진 사람들로서 이 허무한 단순성에 사로잡힌 자들을 안다!

친애하는 빌가르델, 그대는 말했다. 공동체는 사회주의의 숙명적 종말이라고! 그리고 사회주의가 아무것도 아니고 결코 아무것도 아니었으며, 영구히 아무것도 아닐 것임은 이 때문이다. 왜냐하면, 공동체는 본성상 그리고 그 정신에서 부정, 과거에 대한, 현재와 미래에 대한 부정이기 때문이다.

. 공동체는 조직의 법칙 없이 불가능하며, 조직에 의해 멸망한다

공산주의의 계획보다 만들기 더 쉬운 것도 없다.

공화국은 모든 것의 주인이다. 공화국이 사람들을 배분해 개간하고, 경작하고, 창고와 지하 저장고와 실험실을 짓고, 궁전, 작업장, 학교를 건축한다. 의식주에 필요한 모든 것을 제조하고 교육과 공연을 사람들이 생각하기에 모두 무료로, 그리고 그 나라의 재원의 범위 안에서 제공한다. 각 사람은 국가의 일꾼이고 국가의 경리에 따라 노동한다. 국가는 아무에게도 급료를 지불하지 않지만 가부家父가 그의 자녀들에 대해 하는 것처럼 모든 사람을 돌본다. 그러한 것이 거의 이 탁월한 카베 씨의 유토피아와 같다. 이는 그리스, 이집트, 시리아, 인도, 라틴, 영국, 프랑스, 미국의 공상가들의 유토피아에 약간의 변경을 가해 갱신한 것이다. 페쾨르 씨가 여러 변형들을 가지고 재생하고 우리의 젊은 민주주의의 대표자인 루이 블랑 씨가 자기 생각과는 다르게, 그러나 완전히 자신도 모르게는 아니게 이끌려 간 유토피아다. 단순하고 항변의 여지가 없는 것으로서 이 메커니즘이 적어도 모든 사람의 이해력 범위 안에 있다는 장점을 가지는 것을 사람들이 부인하지 못한다. 또한 저자들의 글을 읽을 때, 그들이 노동 시간, 복장의 선택, 그 밖의 환상적인 세부 내용에 대해서밖에 논쟁을 기다리지 않는다는 것을 감지하게 된다. 이는 체계에는 아무것도 달라지게 하는 것이 없다고 그들은 덧붙여 말한다.

그러나 이 체계는 유토피아주의자들의 말로는 간단해도 사람이 자유로운 존재이고 경찰과 공동체에는 반항하는 존재라는 것, 개인적 자유에 폭력을 가하는 모든 조직은 개인적 자유에 의해 멸망하리라는 것을 성찰한다면 갑자기 풀 수 없는 복잡함을 지니게 된다. 또한 사회주의 유토피아들에서는 전유專有가 항상 재론되고 우애에 대한 존중 없이 공동체 질서를 교란하는 것을 보게 된다.

우리는 카베 씨가 저녁에 가정에서의 밤참을 허락하는 것을 보았다. 이 양보에 카베 씨는 또 하나의 양보를 더한다. 일요일에는 모든 사람이 자유다! 각자는 원하는 곳에서, 자기 집에서, 식당에서, 또는 들판에서, 내키는 대로ad libitum 저녁 식사를 한다. 착하고 응석을 받아 주는 엄마처럼 이카리아의 입법자는 이따금 공산주의의 엄격함을 양보할 필요성을 느꼈다. 그는 시민들에게 그들이 단지 형제들이기만 한 것이 아니라 또한 사람들임을 환기시키기를 원했다. 일요일에는 그들에게 자유를 준다!

카베 씨는 한 발 더 나아간다. 농업에 관해서 그는 작은 사업, 거의 작은 소유권이라고 할 것을 복권시킨다. 이카리아에서 농업인은 공화국의 차지인으로서 자기 오두막집과 텃밭을 가지고 아내와 자녀들과 단독으로 산다. 나는 다수의 공산주의자들이 이 체계를 배척한다는 것을 안다. 이 체계에는 경제학자들도 동의하지 않는다. 그러나 나는 카베 씨가 이단이라면 그의 모든 비방자들도 마찬가지로 이단이라고 주장한다. 왜냐하면 내가 단지 형태상의 차이만이 존재함을 증명한다면 그대는 그들 사이에 원리상의 차이가 있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단도직입적으로, 모든 조직은 공산주의적 조직이건 다른 조직이건 필연적으로, 모든 분배가 임금의 비례성과 개체성을 내포하는 것처럼 노동의 자유와 개성을 내포한다는 것을 증명하자. 이는 언제나 공동체의 불가능성에 도달하는 것이다.

산업 조직의 가장 위력 있는 첫 번째 관할 영역은 산업들의 분리, 다른 말로 하면 노동의 분업이다. 자연은 기후의 차이로 인해 이 분업을 예고했고 선험적으로 그 모든 결과를 정했다. 인간의 천재성이 그 나머지 일을 행했다. 이처럼 인류는 유통과 교환이 태어나는 모체인 이 위대한 분업의 법칙을 적용해서만 자신의 일반적 필요들을 충족한다. 게다가 여러 민족들이 이 원초적 분업으로부터 자신들의 독창성과 특성을 받았다. 여러 인종들의 모습은 결코 사람들이 생각할 수 있을 것처럼 생식에 의해 보전되는 지울 수 없는 모습이 아니다. 이는 해외 이주의 효과와 관습의 변경에 의해서 비로소 사라질 수 있는 자연의 도장이다. 그러므로 노동 분업은 단지 생산 기관으로서 작용하는 것이 아니다. 정신과 신체에 핵심적 영향력을 행사한다. 노동 분업은 우리의 노동만큼이나 우리의 교육의 형태다. 이 모든 관계에서 우리는 그것이 부의 창조자인 것과 마찬가지로 사람의 창조자라고, 사회만큼이나 개인에게도 필요하다고, 후자와 관련해서처럼 전자와 관련해서도 노동의 분업은 발휘할 수 있는 모든 위력과 강도를 가지고서 적용되어야 한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분업의 법칙을 적용하는 것은 개인주의를 조장하는 것이고, 공동체의 해체를 촉발하는 것이다. 이 결과를 피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실제로, 잘 경영된 공동체 안에서 각 산업에 제공할 노동의 양은 알려지며, 노동자들의 수도 알려지니, 게다가 노동은 각자로부터 임금의 조건이자 모두에 대한 보장 수단으로만 요구되니 공동체는 자연 법칙에 저항하고 그 작용을 억제하고 그 효과를 방지할 어떤 이유를 가질 것인가? 그리고 정부에 다음의 제안을 하고자 하는 시민에게 대답할 말이 무엇인가?

“내가 속한 집단이 제공할 서비스의 액수는 1000이다.

연간 노동 일수는 300이다.

우리는 50명이다.

나는 약속한다. 그리고 나는 여기 첨부하는 논문에 의거해 내 제안이 어떤 식으로든 공화국에 이로울 수밖에 없음을 증명한다. 말하자면 나는 총소비에서 내게 돌아오는 몫을 보증금으로 매일, 매월, 매년 정부의 형편에 따라 내게 할당되었을 수 있는 집단적 노동의 부분에 10분의 1을 더한 것을 제공하기로 약속하며, 그 대가로 내 위험을 스스로 지면서 자유롭게 되기를, 혼자서 일하기를 요구하는 바다.”

이 시민은 노동 해방을 요구해 오며, 자유에 대한 십일조세를 납부하겠다고 맹세하는데, 그는 혐의자로 선언될 것인가? 개인적 자유는 개인적 자유들의 총계로 구성되는 일반적 자유의 이름으로 금지되어야 할 것인가? 이 금지의 동기는 무엇일까? 내 존재의 매력이고, 그것 없이 노동은 고역이고 삶은 긴 죽음이 되는 자유여! 인류가 태초부터 싸운 것은 너를 위해서다. 우리가 이 새로운, 그리고 거대한 혁명의 작업 중에 있는 것은 너의 지배를 위해서다. 그러니 너는 사회의 독재 아래서는 양심의 죽음일 뿐일 것인가? 그리고 너를 잃어버릴까 두려워 매일 내가 너를 제물로 바치는 것이 필요할까?

노동의 자유는 그것이 전유를 내포하므로, 그리고 전유와 함께 독점, 고리대금, 소유권, 사람에 의한 사람의 착취를 내포하므로 동의될 수 없다고 말할까? 나는 곧장, 자유가 이런 남용 행위들을 낳는다면 이는 교환 법칙의 잘못이고, 가치 구성의 잘못, 그리고 소비자들 간에 평등을, 기능들 간에 균형을 주장하는 분배 이론의 잘못이라고 대답한다. 그런데 여기서 분배에 반대하는 것은 누구인가? 누가 온 힘을 다해 가치 이론과 교환 법칙을 배격하는가? 공산주의다. 그래서 공산주의는 노동의 자유에 분배의 법칙이 필요할 것이기 때문에 이를 배척한다. 그리고 다음으로 노동의 공동체를 보전하려는 목적으로 분배를 거부한다. 웬 횡설수설인가!

노동의 조직, 노동의 분업 혹은 자유, 산업들의 분리, 이 모든 용어는 동의어다. 그런데 공동체는 산업들의 분리에 의해 멸망한다. 그러므로 공동체는 필수적으로 무기체적이다. 조직 붕괴에 의해서만 존재할 수 있고 지상에서 다시 태어날 것이다. 왜냐하면, 산업인들을 분리하지 않는 산업들의 분리, 이익들을 갈라놓지 않는 노동의 분업을 어떻게 상상할 것인가? 어떻게 책임 없이, 그리고 따라서 개인적 자유 없이 노동의 능률과 수익의 충실성을 보장할 것인가? 노동은 분화될 것이라고, 산물만이 공유일 것이라고 그대는 말한다. 악순환이고, 선결 문제 요구의 오류이고, 무의미한 말의 나열이고, 터무니없는 소리다. 나는 방금 소비가 분화되지 않고서 노동이 분화될 수 없다는 것, 다른 말로, 분업의 법칙은 분배의 법칙을 내포한다는 것, 그리고 이 분배는 네 것과 내 것의 동의어인 차변과 대변에 의해 진행하므로 공동체에 대해 파괴적이라고 하는 것을 증명했다. 이처럼 개인주의는 공동체의 품 안에서, 생산물들의 분배에서, 그리고 노동의 분업에서 숙명적으로 존재한다. 그것이 무엇을 하더라도 공동체는 멸망을 선고받는다. 공동체는 가치의 문제를 해결하는 것을 정의의 손에 양보하든지, 아니면 우애의 겉모습 밑에 힘의 독재 대신 수의 독재를 만들든지 하는 선택지밖에 가지지 않는다.

사회주의가 아벨의 살해에서부터 리브드제의 총살에까지 조직의 거대한 문제에 관해 내뱉은 모든 말은 돌팔이의 웅변 연습까지는 아니더라도 절망과 무능의 외침일 뿐이었다. 어제도 오늘도, 사회주의에서도 소유권자 당파에서도, 아무도 사회경제의 모순들을 풀지 못했다. 그리고 조직과 개혁의 이 모든 시도들은, 친애하는 빌가르델이여, 내가 여기서 우리가 천 번 함께 동의하는 것을 이야기하는 것일 뿐인데, 세상처럼 오래된 진리, 그들이 그 이름도 발음할 줄 모르는 진리를 다가올 과학의 이름으로 에누리하면서 공중의 순진한 믿음을 이용하는 자들이다.

생산자는 그의 노동에서 자유일까 아닐까? 아주 단순한 이 질문에 사회주의는 감히 대답하지 않는다. 사회주의는 어느 편에 서든지 진 것이다. 노동의 분업은 풀 수 없는 끈으로 산물의 수학적 분배에 묶여 있고, 생산자의 자유는 소비자의 독립성에 묶여 있다. 노동 분업, 가치들의 비례성, 재산의 평등을 없애 보라. 그러면 백억 명의 부자들과 강자들을 먹여 살릴 능력이 있는 지구가 야만인 몇 백만 명도 먹여 살리는 데 충분하지 못할 것이다. 자유를 없애 보라. 그러면 사람은 자기를 속인 희망의 사실을 무덤에까지 끌고 가는 불쌍한 강제 노역자일 뿐이다. 생존의 개인주의를 없애 보라. 그러면 당신은 인류를 거대한 군락으로 만드는 것이다.

그러나 노동의 분업을 긍정하라. 그러면 공동체는 일률성과 함께 사라진다. 자유를 긍정하라. 그러면 경찰의 신비는 국가 종교와 함께 무너진다. 조직을 긍정하라. 그러면 그 불가피한 결과가 사람들의 공동체인 재물의 공동체는 망측한 악몽에 불과하다.

노동 분업을 가지는 공동체, 자유를 가지는 공동체, 조직을 가지는 공동체는, 맙소사! 빛과 성명과 지성의 속성들을 가진 혼돈이다. 그리고 그대는 내가 왜 공산주의자가 아닌지 묻는다! 반의어 사전을 부디 찾아보라. 그러면 내가 왜 공산주의자가 아닌지 알게 될 것이다.

. 공동체는 정의 없이는 불가능하며, 정의에 의해 멸망한다

“비아는 객관화되는, 자신에 대립하는, 그리고 자신을 남으로 간주하는 자아다”라고 어떤 철학자가 말했다. 주체와 객체는 동일하다. A는 A와 같다.

모든 철학 체계에 기초로 소용되는 이 원리, 사색에서는 여전히 참이라고 간주할 수 있는 이 원리는 또한 경제학의 출발점이며 분배적 정의의 제1공리다. 이 관념 질서에서 A는 A와 같다. 즉 실현된 노동은 생각된 노동과 수학적으로 동등하다. 따라서 일꾼의 임금은 그의 생산물과 동등하며, 소비는 생산과 동등하다. 이는 자기 자신과만 교환할 뿐인 집단적 노동자에게서, 그의 동류들에게서 격리되어 혼자서 온 인류가 된 사람에게서 그런 것이나 마찬가지로, 다른 생산자들과 교환하는 개인에게도 맞는 말이다. 집단적 노동자에게서 임금은 생산물과 동등하다. 따라서 모든 생산자들의 생산물은 서로 간에 동등하며, 그들의 임금도 같다. 거기에 조건과 재산의 평등 원리가 있다.

이처럼 평등은 집단적 인간에게서는 전체가 부분들의 총합과 동등하다는 것 말고 다른 것이 아니다. 이는 그 다음으로 자유를 수단으로, 산업 조합들과 시민 계급들 간에 성립한다. 끝으로 평등은 서서히, 그리고 무한한 진자 운동에 의해 개인들 간에 성립한다. 그러나 평등은 각 개인이 인류를 대표하므로, 그래서 인간이 인간과 동등하여 생산물이 모든 사람들 간에 생산물과 같게 되어야 하므로 결국은 보편적이 되어야 한다.

그러한 것은 공동체의 관점이 아니다. 공동체는 수치를 싫어하며, 산술은 공동체에는 치명적이다. 공동체는 우주의 법칙, ‘모든 것을 중량과 수와 크기에 따라서(Omnia in pondere, et numero, et mensura)’가 또한 사회의 법칙이라는 데 동의하지 않는다. 공동체는 한마디로 평등을 수용하지 않으며, 정의도 결코 수용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공동체가 선호하는 원리는 무엇인가? 우리는 그것을 말했다. 카베 씨에 따르면 우애다. 그리고 내가 실토할 필요가 있는 것은, 이 어리석은 말의 옹호자들 중에는 영예로운 카베 씨보다 훨씬 덜 결백한 사람들도 있다는 것이다.

이 심오한 이론가들이 확언하는 것은, 평등과 정의는 소유권과 적대의 관계일 뿐이며 이는 사랑과 헌신의 법칙 아래 사라져야 한다는 것이다. 이 새로운 나라에서 주는 것은 받는 것과 동의어다. 행복은 몸을 아끼지 않는 것에 있다. 이기심의 경쟁을 헌신의 경쟁이 계승한다. 그러한 것이 사회주의의 고등 관념, 이를 심화하는 것이 우리의 의무가 되는 관념이다. 왜냐하면, 이 고등 관념 덕분에 우리는 의, 불의, 권리, 의무, 준수 사항, 손해 등등 모든 하위 관념들을 잃기 때문이다. 고등 관념에서 고등 관념으로, 우리는 더 이상 관념을 가지지 않는 것으로 끝낼 것이다.

원시인이 자신의 물질적 성향에 내맡겨질 때, 예수 그리스도 자신이 피에르 르루(Pierre Leroux)에 따를 때 불완전하게밖에 알지 못할, 그리고 공산주의자들이 자신들의 교리의 기초로 삼은 동류에 대한 이 신비로운 사랑을 미미하게 느낀다는 것은 항상 그렇다. 전쟁 상태는 인류의 주된 상태다. 서로에게 헌신하기 전에 사람들은 서로 잡아먹는 것으로 시작한다. 이웃의 희생은 언제나 이웃에 대한 희생에 선행한다. 식인종과 우애는 경제적 진화의 두 극단이다. 각 개인이 그의 삶에서, 그리고 그의 삶의 각 순간에 인류의 이 두 면모를 재현한다는 것을 덧붙이자.

이처럼 우애는 우리 안에서 천사가 야수에게 승리를 거두는 것이 표현되는 것으로서, 자생적 감정이라기보다는 교육과 노동의 결실로 개발된 감정이다. 그러므로 우애를 교육하는 체계는 무엇인가? 우리가 수많은 우애의 훈계를 들은 후에 아직도 이 문제를 제기하는 신세에 처한다는 것은 이상하다.

공산주의자들은 우애가 오로지 설득에서 태어나야 하는 것처럼 추론한다. 예수 그리스도와 사도들은 우애를 설파했다. 사람들은 우리에게 우애를 설교한다. 사람들은 우리에게 말한다. 형제가 되라고, 그렇지 않으면 너희는 적이 될 것이라고. 당신의 선택은 자유가 아니라고. 우애 아니면 죽음! 이 진퇴양난 앞에 사람은 결코 망설이지 않았다. 그는 죽음을 선택했다. 이는 그의 잘못인가?

나는 내가 어떤 사물의 필연성에 대해 가지는 신념이 어떻게 이 사물의 동인이 될 수 있는지 이해하기는 불가능하다. 이 증명이 내게 자유를 원하도록 만드는 데 소용될 수 있었다고 해도, 자유의 탁월성이 내게 증명되어서가 아니라 사람을 자유롭게 하는 조건들을 내가 결합하므로 나는 자유롭다. 마찬가지로 사람들은 그들의 운명에 대해 취득할 지식에 힘입어서만이 아니라 사회 안에서 조화를 구성하는 경제적, 정치적, 혹은 다른 조건들 덕분에 불화에서 조화로 넘어갈 것이다. 그리스도의 목소리에 인류는 사랑으로 전율하고 다정함에 눈물 흘렸다. 성스러운 열정이 영혼들을 사로잡았다. 이는 긴 피로의 반응적 효과, 결과였다. 이 정서는 지속 시간이 짧았다. 그리스도교의 불화는 우상 숭배의 증오를 초월했다. 우애는 꿈처럼 흩어졌다. 이를 지탱할 아무것도 예견되지 않아 참말로 우애를 먹여 살릴 양식이 결핍되었기 때문이다. 상황은 아직도 마찬가지다. 우애는 언제나 그랬던 것처럼 오늘날에도 생존을 위해 그것을 낳는 원리를 기다린다. 사회주의는 자신이 이 조건을 충족하고 우애를 설파하는 데 충분하다고 생각하는가?

이와 같이 우리는 허공에 집을 짓는다. 우리는 지정된 길을 따라 한 단계씩 가는 대신 공중을 가로질러 도달하기를 원하는 약속된 땅을 눈앞에 두고 비참하게 멸망한다. 우애는 존재하지 않는다. 이는 보편적으로 인정된다. 그리고 사회주의는 우애의 요소들을 찾는 대신 말을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고 상상한다. “우애가 있으라!”하고 말한다. … 하지만 우애는 있을 수 없다.

어떤 이들은 우애의 모습들을 우애 자체로 간주해 예의, 부드러운 어조, 관대한 교육이 불러일으키는 감정들, 미래 세대에 대해 친절하고 애착을 보이는 도덕관념이 누구도 사회적 신뢰를 남용해 헌신과 우애의 법칙을 배반한다고 가정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는다고 확언한다. 이들은 척도재를 지폐로 대체하고 담보물을 증표로 대체하면서 척도재의 사용을 폐지했다고 상상하는 경제학자들을 닮았다. 그러나 지폐는 그것이 담보로 뒷받침되는 만큼만 가치를 띤다. 마찬가지로 세련됨, 예의, 헌신의 맹세는 이것들을 지탱하는 담보의 조건에서만 가치를 지닌다. 그러니 이 담보가 어디 있는지 내게 말해 주기 바란다! 우정, 존경, 신뢰, 의무감을 갖게 하는 성심誠心을 생겨나게 하는 것은 호혜성의 확실성, 혹은 같은 것이지만 개인적이고 합법적으로 취득된 행복에 대한 인적 존엄과 독립의 감정이다. 그곳에서 종교가 개성과 소유권의 일체의 감정을 배제하는 데 신경을 썼던 수도원들의 번지르르한 언행은 그렇다면 우애에 속한 것인가? 아니다. 아니다. 이 형제들은 그들 스스로가 서로를 존중하기에는 너무 별 볼 일 없는 자들이었다. 그리고 겸손과 자기희생이 규칙인 종교적 공동체들의 예를 통해 사람들은 자아의 낮춤이 언제나 자선의 파멸을 초래하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러한 것이 이 수도회 창설자들의 커다란 오류였다. 신은 그들의 선의를 감안해 이들에게 평화를 베풀었지만 그 체계는 이제부터 심판을 받는다. 수사들의 무례함, 나태, 방탕함은 여러 세기 전부터 속담이 되었다. 종교적 공동체들, 심지어 노동을 그들 규율의 필수 부분으로 삼은 공동체들의 이 모든 해악은 정의 밖에서 우애를 찾는 이 잘못된 이론에서 나왔다.

역사의 증언에 그 이론은 그 증거를 덧붙인다. 노동자들의 사회가 정의 없이 지내고 애정의 분출에 의해서 오로지 지탱될 수 있으려면 한 가지가 필요할 것이며, 이것 없이는 우애는 그 순간에 멸망할 것이다. 이는 곧 개인의 무오류성과 범죄 불가능성이다. 어떤 사람이 책을 출판할 계획을 가진다. 누가 종이, 조판, 인쇄, 제본, 판매, 우송료를 선투자할 것인가? 아무고 공동체 말고 다른 곳에는 속하지 않으며, 모든 노동 수단, 모든 원재료, 모든 생산물과 이익이 공동체에 속하니 의심할 것 없이 공동체다. 그러나 공동체는 이 글을 인쇄하면서 쓸모없는 지출에 노출된다. 누가 이를 보증할 것인가? 원고를 검사하기 위해 검열관들을 지명할 것인가? 그렇다면 언론은 더 이상 자유가 아니다. 인쇄를 투표에 부칠 것인가? 이는 투표자들이 바로 그들이 읽도록 하려고 하는 책을 아는 것을 전제로 한다. 저자가 충분한 수의 예약 구독자를 얻기를 기다릴 것인가? 우리는 판매와 교환, 차변과 대변의 체계, 공동체의 부정에 들어간다.

풀 수 없는 어려움이 얼마나 많은가! 얼마나 모순이 많은가! 공동체가 사려 깊다면, 자신을 위해 보증을 요구해야 한다. 즉 자기 바깥의 소유를 인정하고 자기 자신의 해체를 공표해야 한다. 저자가 정말로 충심을 가지고 헌신적이라면 그는 혼자서 자기 저작에 대한 책임을 져야 한다. 즉 헌신으로써 공동체와 갈라서야 한다. 그러나 그가 자신에게도 자신 바깥에도 희생할 수 있고 바칠 수 있는 아무것도 가지지 못한다면 이 헌신 자체에서 어떻게 행위를 만들어낼 것인가? ‘가지지 않은 것은 누구에게도 줄 수 없다(Nemo dat quod non habet).’ 이렇게 말하는 것은 복음서이고 예수 그리스도 자신이다. 당신이 아무것도 내놓지 않은 데서는 아무것도 취할 수 없다. 그리고 모든 사람들 중에 희생을 가장 잘할 수 있는 자는 공산주의자가 아니다. 이는 소유권자다. 내가 그렇게 진부한 진실을 새로운 것으로 제시할 필요가 있는가?

그러므로 공동체는 그 모든 경로를 거쳐 자살에 도달한다. 가족의 전형에 맞게 구성되어 가족과 함께 해체된다. 분배 없이 나아갈 수 없어 분배에 의해 멸망한다. 조직화하지 않을 수 없어 조직이 공동체를 죽인다. 끝으로 공동체는 희생을 전제로 한다. 그리고 희생의 질료와 형상을 한꺼번에 제거해 공동체는 자신의 생존에 필요한 계열을 구성할 수 있기는커녕 자신의 진화의 첫 항도 제기할 수 없다.

나에게 무언가와 합치되는 무언가를 달라. 그 대상이 파악되는 관념, 분석이 되고 내가 이해할 수 있는 사실 말이다. 그러면 나는 이 사실을 인정할 것이고, 이 관념에 동의할 것이다. 그러나 그대는 무無에서만 상상이 되며, 무와만 화해하고, 무에 의해서만 존속하는 공동체에 대해 내가 무어라 말하기를 바라는가?

. 절충적이고, 똑똑하지 않고 분간이 안 되는 공동체

우리는 이를 처음부터 말했다. 먼저 감각에 없었던 것으로 지각되는 것은 없다(Nihil est in intellectu, quod prius non fuerit in sensu)는 그 학파의 원리에 맞게 소유권자의 관행에서 재발견되지 않는 것은 사회주의적 유토피아에는 아무것도 없다. 사회주의는 그 자신에게 고유한 것을 아무것도 가지지 않는다. 사회주의를 구별해 주고 형성해 주고 사회주의를 사회주의이게 하는 것, 이는 사회주의가 차용해 온 것의 자의성과 부조리다.

이처럼 공동체는 무엇인가? 이는 개인적 인성과 창도성의 흡수에까지 밀어 붙여진 국가의 경제관념이다. 그런데 공산주의는 국가의 본성과 향방을 이해하지도 못했다. 체면을 차리기 위해 이 범주를 점령하는 공산주의는 이 관념에 대해 그 반동적인 면만을 파악했다. 경찰 조직을 산업 조직의 전형으로 간주해 그 무능력함을 드러냈다. 국가는 그 고용자들의 서비스를 주권적으로 처분하면서 그 대가로 이들을 먹이고, 재우고, 연금을 준다고 말해진다. 그러므로 국가는 농업과 공업을 실행할 수도 있고 모든 노동자를 부양하고 연금을 줄 수 있다. 사회주의는 정치경제학보다 천 배는 더 무식해서 국가에 노동의 다른 범주들을 다시 들어가게 하면서 이것만으로도 생산자들을 비생산자들로 전환한다는 것을 알지 못했다. 사회주의는 공공 서비스가 바로 공공적이거나 국가에 의해 실행되기 때문에 그 값어치보다 훨씬 비용이 더 든다는 것, 사회의 경향은 그 수를 끊임없이 줄이는 것이어야 한다는 것, 개인의 자유를 국가에 종속시키기는커녕 개인의 자유에 종속시킬 필요가 있는 것이 국가이고 공동체라는 것을 이해하지 못한다.

사회주의는 그 모든 흉내에서 마찬가지로 진행했다. 가족은 사회주의에서 사랑과 헌신에 근거한 공동체의 전형을 제공했다. 곧바로 사회주의는 공업과 농업처럼 가족을 국가에 옮겨 놓기를 서둘렀다. 그리고 가족들의 구별은 독점들의 구별이 독점 공동체에 자리를 내준 것처럼 가족 공동체에 자리를 내주었다.

사회주의가 가족을 공유에 흡수하기 전에 가족 안에는 무엇이 있었나? 결혼, 양성의 분리에 의한 사람의 자신과의 결합, 고독 속의 사회, 독백 속의 대화가 있었다. 이는 인간 개성의 절정이었다. 사회주의는 그 안에서 자신의 원리 위반만을 보았다. 야만인들의 음탕함과 위기에 빠진 문명 안에 간음이 빈번함을 구실로 가족을 제거하고, 사랑의 불가침성을 짝짓기의 면허로 대체해 모든 것을 치료했다.

사람의 개성이 사랑과 노동 안에 이렇게 억압된 마당에, 노동의 조직과 생산물의 분배로 가는 길은 쉬워 보였다.

노동을 조직하고 분배하는 것, 그보다 더 쉬운 것이 무엇인가? 의문의 여지없이 노동의 분업은 약할 대로 약한 정도로 여러 직업들을 집단들의 것으로 만들어 주고 집단들 내에서는 개인들의 것으로 만들어 준다는 점에서 반공反共이다. 또 의문의 여지없이 공동체는 그러한 분배를 피할 수 있다면 더 완벽할 것이다. 그러나 노동의 전유의 이 폐단은 생산물의 소유 포기에서 사라질 것이다. 아무도 노동 수단의 보유를 배타적으로 취할 수 없고, 노동 산물도, 그 유통도, 그 분배도 그럴 수 없어서 공동체는 건재하며 이때부터 정부의 할 일이라고는 가장 많이 생산하고 가능한 한 적은 비용으로 생산하는 것일 뿐이다.

그러나 노동 분업의 문제는 단지 가장 많은 액수의 산물을 실현하는 데만 있지 않다고 정치경제학이 고찰했다. 이는 또한 노동자를 위해 신체적, 정신적 혹은 지적 손해 없이 이 양을 실현하는 것에도 있다. 그런데 노동자의 지성은 노동이 더 분화될수록 그만큼 더 백치 상태로 쏠린다는 것, 그리고 거꾸로 사람이 더 많은 것들을 자신의 조합 안에 끌어안고 실행의 싫증남과 세부 사항의 주의는 다른 이들에게 넘길수록 그의 이성은 더욱 강화되고 그의 천재성은 높아지고 지배하게 된다는 것이 증명된다. 그러므로 파편적 분업의 필요성과 여러 능력들의 온전한 발달을 어떻게 화해시킬까? 이는 각 시민에게 권리요 의무인 발달이고, 모두에게 평등한 조건이지만 개성을 고양함으로써 공산주의의 죽음인 발달이다.

이 점에서 사회주의는 경멸받을 돌팔이만큼 초라한 논리가라는 것이 드러났다. 파편적 분업에 사회주의는 조각들 위에 조각들을, 절편切片에 절편을, 무미건조한 일에 소란스러움을 가해 장면들의 절단을 추가했다. 사회주의는 노동자들 모두가 일반화와 종합을 하는 자들이 되기를 갈망하는 것은 원하지 않는다. 이런 구분은 특권화 된 본성을 가진 자들을 위해 남겨 둔다. 이들을 때로는 소유권자들과 같은 식으로 착취자들로 만들고―“각자에게 그의 능력에 따라, 각 능력에는 그 공적에 따라”―때로는 노예들을 만든다. “처음 온 자는 마지막에 온 자와 같을 것이고, 마지막에 온 자는 처음 온 자와 같을 것이다.” 사회주의는 노동의 분업이 재산의 진보와 평등의 수단인 동시에 지성의 진보와 평등의 수단이라는 것을 몰랐다. 아니, 그보다는 너무 잘 알았다. 이 평등이 의무적 희생을 자유로운 희생으로 대체하므로 사회주의는 온 힘을 다해 자신에게 혐오스러운 이 평등을 배척한다. 그리고 때로는 능력을 파편적 노동 위에 위치시키기도 하고 때로는 이를 그 밑에 내던지기도 하는 것은 이 때문이다. 플라톤에서처럼, 팔랑스테르에서처럼 이카리아에서, 결국 사회주의 서적들 어디에서나 학문과 예술은 특산물과 동업조합처럼 취급받는다. 어디서도 이것들이 교육이 모든 사람에게서 발달시켜야 할 능력들로 나타나는 것을 보지 못한다. 친애하는 빌가르델, 그대는 사회주의를 책에서와 마찬가지로 그 사람들에서 안다. 진실을 증언해 달라. 사회주의는 지력知力의 평등을 믿는가? 헌신을 요구하는 사회주의는 조건의 평등을 원하는가? 나는 교조적 사회주의를 말하는 것인데, 사회주의에서 그대는 허영심과 우둔함 말고 다른 것을 마주쳤는가? 내가 욕을 하는 것인지 말해 보라.

그렇지만 사회주의는 하나의 발견을 했는데, 이는 사람의 마음을 끄는 작업의 발견이다.

정치경제학은 세상에 관찰과 경험의 과학으로 스스로를 드러내면서 그 첫 마디로 노동의 신성함을 선포했다. 종교들의 권위에 반대해 정치경제학은 노동이 결코 신의 저주가 아니며 먹는 것, 마시는 것, 사랑, 놀이, 공부와 마찬가지로 우리에게 필요한 삶의 조건이라고 말했다. 세, 데스튀트 드 트라시, 조지프 드로즈(Joseph Droz), 애덤 스미스 등의 저작은 이런 관념으로 차 있다. 정치경제학은 노동을 편들고 북아프리카 나라들의 타성과 유태의 신화에 반대하는 철학 사상의 항거다. 사회와 사람에게 필요한 노동이 정신과 신체를 강화하며 도덕관념과 건강의 수호자이고, 부의 생산자이고, 진보의 원리이며 인간 활동의 발현으로서 그 자체로는 주관적인 면에서는à parte subjecti 아무런 괴로운 점을 가지지 않으며, 때로 피로와 싫증을 수반하게 되는 입장이라도 이는 오로지 노동이 적용되는 사물의 질에서, 물적 측면에서à parte rei, 혹은 실행에서의 절도의 결핍에서 나온다는 것이 거기서 따라 나오며, 경제학자들은 이를 아주 잘 감지했다. 파편적 분업과 그 결과인 행위의 일률성은 경제학자들에 의해 아주 열띠게 지적된 것으로서 지겨운 것이 된 노동의 아주 잘 알려진 예들이다. 그러므로 무엇을 하는 것이 중요했는가? 노동의 소재가 제공할 수 있는 흉측한 것을 제거하거나 덮고 신체와 정신을 한꺼번에 만족시키는 방식으로 실무를 지도하는 것이다. 그러는 대신에 사회주의는 사람의 마음을 끄는 작업을 발명했다.

우선, 노동은 사회주의가 말하는 바에 따르면 극단적 분할로 더 즐겁고 더 쉽게 되어 음악, 노래, 정중한 대화, 낭송, 장면들의 짧은 지속 시간, 동작의 연속과 시합에 의해 지속적인 축제로 탈바꿈할 것이다. 그러한 것은 카베 씨가 이카리아에 세운 체제로서 그는 이 점에서 플라톤, 캄파넬라, 매블리, 모렐리, 푸리에 등 모든 위대한 스승들과 의견이 일치한다. 사회주의는 자신의 바보들을 경이롭게도 알아서 이들에게 온갖 여흥을 마련해 준다. 자정에 신부의 창 밑에서 악기 연주로 신부의 잠든 감각을 깨울 때 세레나데를 부르는 자들이 사랑을 대하는 방식으로 사회주의는 노동을 대한다. 이런 다양한 즐길 거리에 「프라테르니테」 1845년 1월호는 노동에 따르는 고려 사항과 상호 감시를 더한 것을 덧붙인다. 사회주의는 노동에서 완전히 벗어나는 것보다 더 나은 것을 요구하지 않을 것이며, 사회주의가 노역을 단축시키고, 줄이고, 변화시키고, 양념을 치고, 맛을 내고 끝으로 견책과 위반 시 징역의 형벌로 의무화하는 것은 매력적인 노역이라는 이 이상에 도달하는 데서 처하는 불가능성 때문임이 명확하다! 매력적인 노동의 발명자들은 얼마나 무서운 천재들인가!

하지만, 친애하는 선생님들이여, 바로 여러분이 모방의 기질이 아주 강하니, 그러므로 내가 여러분에게 말하려 하는 것, 세상만큼 오래된 것에 유의하라. 노동은 노동이 그 한 형태인 사랑과 마찬가지로 그 안에 매력이 있다는 것, 다양함도, 짧은 연속 잡업도, 음악도 담소도, 행진도 부드러운 말도, 경쟁 관계도, 경찰도 필요치 않으며 단지 자유와 지성이 필요할 뿐이라는 것, 그것이 요하는 생명과 정신의 배출로 우리의 관심을 끌고, 우리를 기쁘게 하고, 우리가 열정을 갖게 한다는 것, 그리고 노동의 가장 큰 적이 오락이듯이 노동의 가장 강한 보조물은 수확이라는 것이다. 게으름의 권장과 한량 생활의 수립을 위해서라면 우리 각자를 위한 노동의 총량이 줄어들기는커녕 끊임없이 늘어나는 것이라고 발표하라. 끝으로 결혼에 의해서처럼 노동에 의해서 사람의 개성은 끊임없이 그 최고의 기력과 독립성을 띠게 된다고 알려라. 이는 공산주의의 마지막 개연성을 제거하는 것이다. 이 모든 진리는 경제학의 A, B, C이고, 노동의 순수 철학이고, 사람의 자연사自然史에서 가장 잘 입증된 부분이다.

사회주의는 헌신, 우애, 공동체, 매력 있는 노동의 그 유토피아들을 가지고서도, 여전히 자기가 파괴한다고 자부하면서도 끊임없이 모방하는 소유권자의 적대 관계에 얼마나 못 미치는가!

사회주의는 이를 제대로 파악하자면 악의 공동체이고, 개인의 잘못들을 사회에 전가하는 것이고, 각자의 모든 규정 위반들 간의 연대성이다. 반대로 소유권은 그 지향하는 바가 재화의 교환적 정의이며, 악이 개인에게서 나오는 한에서 악의 비연대성이다. 이 관점에서 소유권은 정의 지향, 사람들이 공동체에서는 만나기 어려운 이것에 의해 구분된다. 활동과 타성을 서로 연대를 맺지 않게 하고, 개인적 책임, 사회 법칙의 지고의 강제 이행 수단을 창조하고 도덕관념의 신중함, 공익에 대한 열정, 의무에 대한 복종, 서로 간의 존중과 신뢰, 이웃에 대한 사심 없는 사랑을 수립하기 위해, 이 모든 것을 보장하기 위해, 돈, 불평등과 정복의 상징인 이 추악한 돈이 공산주의적인 모든 준비와 처방 약물보다 백 배나 효율적이고, 청렴하고 확실한 수단이다.

우화 작가가 언어에 대해 말하듯이 연설가들은 돈에 대해 말했다. 그들은 사회의 모든 선과 모든 악을 동시에 돈 덕분인 것으로 말했다. 도시들을 건설하고, 전투에서 이기고, 상업을 행하고, 여러 재능들을 장려하고, 노동에 급료를 주고 사회의 여러 계정들을 변제하는 것은 돈이라고 어떤 이들이 말했다. 우리의 모든 악의 효모, 우리의 모든 배반의 원리, 우리의 모든 비열함의 비밀인 것이 돈, 돈에 대한 집착, 빌어먹을 돈에 대한 탐욕auri sacra fames이라고 다른 이들이 대꾸했다. 이 찬사와 비난이 참이라면, 화폐의 발명, 시스몽디 씨에 따르면 가장 놀라운 발명이고 내 견해로는 경제적 천재가 만든 가장 다행스러운 발명인 이것은 분석에 모순을 제기할 것이다. 결과적으로 이는 기각되고 더 도덕적이고 더 참된 상위 개념으로 대체되어야 할 것이다. 그러나 그렇지 않다. 귀금속, 척도재, 그리고 은행권은 그 자체로는 선의 원인도 악의 원인도 아니다. 진정한 원인은 가치의 불확실성에 있다. 가치의 구성은 우리에게는 상징적으로 돈 안에서 질서와 행복의 실현인 것으로 보이며, 가치의 불규칙적 진자 운동은 다른 산물들 안에서 모든 약탈과 빈곤의 원리인 것이다.

사회적으로 정해진 제1의 가치물인 돈은 그러므로 모든 노동자를 위해 노동과 임금의 완벽한 보증 수단을 탄생시킬 가치들의 일반적 구성의 날까지 선의 연대성과 악의 비연대성, 다른 말로 하면, 개인적 책임과 정의의 가장 완벽한 기관으로 드러난다.

당신은 내가 내 형제들의 노동, 근면, 섬세함에 신뢰를 두기를 바란다. 경찰을 조직하고 상호적인, 게다가 해롭고 불가능한 염탐 제도를 만들 필요는 없다. 우리 각자를 위해 행복이 오로지 노동에서 나와서 노동의 크기가 행복의 정확한 크기가 되고, 노동의 산물이 제2의 양심처럼, 그리고 청렴한 양심처럼 되어서 그 증언이 사람의 각 행위를 그 공로와 과실에 따라 처벌하거나 보상하게 하라. 가치들을 비교하는 사다리나 표를 만들어서 예전의 진자 운동과 미래의 진자 운동을 한꺼번에 보여 주도록 해서 이를 통해 생산자가 언제나 과잉 생산도 재앙도 두려워하지 않고 자기의 사업 운영을 가장 이익이 되는 방식으로 할 수 있도록 하라. 끝으로 모든 가치에 그것들 중 하나와의 비교에서 도출된 공통의 표현을 제공해 이것이 모든 거래를 위한 척도로 쓰이게 하라. 그러한 조건에서 노동자는 자기 스스로의 주인이 되고 가장 완벽한 독립성을 누려서 또한 가장 완벽한 보증을 제공하리라는 것이 온당하지 않은가?

그 다음으로 자연의 장애가 촉구하는, 그리고 인류의 명예가 명령하는 모든 사전 대비와 자선 수단을 취하도록 하라. 이는 권리가 거절한 것을 사랑으로 벌충하는 것뿐일 것이다. 그러면 누가 이를 막으려고 애를 쓰겠는가? 그러나 그러한 보충은 그 모든 도덕성, 따라서 그 가능성을 권리의 사전적 인정에서 끌어낸다는 것, 정의 없이는, 네 것과 내 것의 정확한 정의 없이는 자선은 부당 징수가 되고 우애는 불가능하다는 것을 기억하도록 하라.

돈의 지배는 정의와 우애의 기초인 가치들의 이 민주주의로의 이행이다. 돈, 그리고 돈이 낳는 신용 기관들은 산업적 가치물들을 척도재의 존엄성을 갖도록 높여서 범죄 수치를 낮추었다. 돈과 신용 기관들은 어디서나 판로를 열고 유통을 용이하게 해 요행을 축소했고, 안전 보장과 함께 온정과 헌신을 증대했다.

왜 신은 사람 개인을 창조하는 대신 세상에 인류 한 종을 가져다놓았는가? 이 질문은 철학자가 어떤 견해를 갖든 그 철학자의 관심사다. 그런데 공산주의는 이에 대답할 수 없다. 공산주의의 관점에서는 인류의 창조라는 것이 터무니없이 때문이다.

『이카리아』의 저자는 로마 가톨릭 신앙에 대한 편견에서든 유럽 관습에 대한 존중에서든 페늘롱을 본받아 자기 공화국에서 일부일처제를 보전했고, 다른 사항들에서 이 예외를 보상받았다. 카베 씨는 어디서나 부동성을 창조하고, 자생성과 환상을 내쫓는다. 여성용 모자 제조인의 기술, 보석 세공인, 장식업자의 기술 등은 반反공동체적이다. 카베 씨는 지도자로서 복장의 불변성, 가구의 일률성, 동시에 하는 체조, 공동 식사 등등을 규정한다. 이에 따르면, 이카리아에는 왜 이카르 노인 혹은 카베 씨와 그의 아내 한 사람, 한 쌍 이상이 존재할 것인지 알 수가 없다. 이 모든 사람들이 다 어디 쓸데가 있는가? 같은 식으로 재단이 되고 옷을 입힌 꼭두각시들의 끝날 줄 모르는 이 반복이 무엇에 쓸데가 있는가? 인쇄업자들이 하는 식으로 여러 책을 찍어내지 않으며, 같은 일을 되풀이하면서 결코 동일한 것을 두 번 만들지 않는 자연은 진보적이고 앞을 내다보는 존재를 만들기 위해 수천억의 다양한 개체들을 태어나게 하고, 이 무한한 다양성으로부터 자연에게는 유일한 주체인 사람이 생겨났다. 공산주의는 자연의 이 다양함에 한계를 부과한다. 자연에게 이렇게 영원한 존재가 대양에게 말하듯 말한다. 너는 여기까지 올 것이며, 더 멀리는 가지 못할 것이다. … 공동체의 인간은 일단 창조가 되면 영구적으로 창조된 것이다. … 푸리에주의가 과학을 부동의 것으로 만들겠다고 주장한 것은 이런 식이 아닌가? 카베가 복장에 대해 행하는 것을 푸리에는 진보에 대해 행했다. 둘 중 어느 쪽이 더 인류의 감사를 받을 만한가?

더 확실하게 자신의 목적에 도달하기 위해 이카리아인은 공공 정신을 규제하고 새로운 관념들에 대해 조치를 취한다. 이카리아에는 코뮌 신문, 도 신문, 나라 신문이 있다. 이는 교회 안에 교리문답, 복음서, 전례서가 있는 것과 같다. 생각할 자유, 이는 의회에 대해 제안할 권리다. 다수의 견해는 여론으로 여겨진다. 우리의 의회들에서 이성이 중요한 것처럼 이성은 논박되지 않는다. 신문은 국가의 비용으로 인쇄되고 무료로 배포되어 의결 건들을 보도하고 소수파의 수를 알리며, 그 이유들을 분석한다. 그 후에 모든 것이 말해진다. 과학과 문학 책들은 제작되어 대표단에 의해 출판된다. 선전은 다른 누구의 몫도 아니다. 실제로 모든 것이 공동체에 속하므로 아무도 자기 것을 가지지 않으며 허가되지 않은 책의 인쇄는 불가능하다. 달리 뭐라 말해야 할 것인가? 모든 선동적 관념은 그러므로 원천적으로 봉쇄되며 우리는 결코 언론의 위반 사항들을 보지 못한다. 이는 예방 경찰의 이상이다. 이와 같이 공산주의는 논리상 관념들의 불관용으로 인도된다. 그러나 자비를 베풀어 달라! 관념들에 대한 불관용은 사람들에 대한 불관용이다. 이는 배제이고, 소유권이다!

공동체, 이는 소유권이다! 이는 더 이상 이해되지 않는다. 그렇지만 이는 부인할 수 없다. 한 번 살펴보라.

똑똑하지 못하고 퇴보적인 모든 편견들 중에 공산주의자들이 가장 많이 품는 편견은 독재다. 산업 독재, 상업 독재, 사회생활과 사생활에서의 독재, 어디에서나 독재, 이런 것이 시나이산 위의 구름처럼 이카리아의 유토피아 위를 떠돈다. 사회 혁명을 카베 씨는 제도들의 발달과 지성들의 협력의 가능한 결과로 생각하지 않는다. 이 관념은 그의 위대한 가슴에는 너무 형이상학적이다. 플라톤과 모든 계시자들에게 동의하고 푸리에, 아무것도 발견하게 남겨 두지 않은 사회과학의 독재자인 이 사람에게 동의하고 끝으로 블랑 씨, 그리고 인민의 의사에 반해 인민의 행복을 마련해 주고 권력에는 가능한 한 최대의 창도력을 주기를 원하는 7월의 민주주의에 동의하는 카베 씨는, 어떤 인물, 영웅들, 메시아 그리고 이카리아인들의 대표의 자문, 의지, 고귀한 사명에 의한 개혁을 도래하게 한다. 카베 씨는 대중 선거에서 정기적으로 선출되는 의회의 토론에서 새로운 법률이 태어나게 하기를 삼간다. 이는 너무 완만한 수단이며, 모든 것을 위태롭게 하리라는 것이다. 그에게는 한 사람이 필요하다. 모든 개인적 의지들을 제거한 후 그는 그 의지들을 하나의 지고의 개성에 집중한다. 이는 집단적 사고를 표현하는 것이며 아리스토텔레스의 부동의 원동자처럼 하위의 모든 활동들을 솟아나게 한다. 이와 같이 관념의 단순한 발달에 의해 우리는 불가항력적으로 공동체의 이상은 절대주의라고 결론을 내리게 된다. 그리고 핑계를 대기 위해 이 절대주의가 일시적일 것이라고 넌지시 말해도 소용이 없을 것이다. 어떤 것이 단 한 순간 필요하다면 그것은 영구히 그렇게 될 것이니, 이행은 영구적이다.

공산주의는 유감스럽게도 소유권자의 일상 관행을 빌려 온 것으로서, 노동의 싫증, 삶의 권태, 사고의 제거, 자아의 죽음, 무의 단언이다. 공산주의는 본성상으로처럼 과학상으로 허무주의, 공유, 부동성, 밤, 침묵과 동의어다. 이는 실질의 반대이고, 창조자, 빛의 신이 그 위에 우주를 설계한 컴컴한 심연이다.

. 공동체는 빈곤의 종교다

이 종교라는 말에, 그리고 각자에게 그에 합당한 평가를 해 주기 위해 나는 여기서 종교적 견해의 문제에서는 『사회적 관념들의 역사Historie des idées sociales』의 저자, 모렐리의 재건자, 캄파넬라의 번역자[32]보다 더 순수하고 흠잡을 데 없는 사람을 알지 못한다는 것, 친애하는 빌가르델 그대가 하는 것보다 더 많은 자유와 더 적은 선입견을 가지고 신에 관해 의견을 표명하기가 불가능하다는 것을 선언하는 것을 의무로 간주한다. 공산주의가 그대에게서는 강한 정신을 가지는 것으로 인식되므로 공산주의는 미신에서 벗어나는 결과가 되는가?

친애하는 빌가르델, 그대는 이를 처음으로 인정한 사람인데, 공동체는 진보하는 중이다. 즉 공동체의 시대가 멀어질수록 공동체를 상기하는 유토피아주의자들은 끊임없는 변경 사항들을 줌으로써 공동체가 다시 찾아오도록 노력한다. 경험이 소유권을 정죄함에 따라 소유권의 이론가들이 그것을 개선하고 그것을 원만한 것으로 만들려고 노력하는 것처럼 말이다. 이처럼 공산주의의 퇴보는 말하자면 이론에서만 지적된다. 소유권의 진보는 반대로 이론과 실천에서 모두 표현된다. 그러나 진보가 있으면서부터 필연적으로 변혁, 긍정적이고 종합적인 관념의 도래, 따라서 신화적 관념의 제거, 종교적 신앙의 폐지가 있다. 이 제일의 특성상 공동체 안에서 소유권에서처럼 종교를 인식하지 않는 것은 불가능하다.

사실들이 이 합당한 편견을 뒷받침해 준다.

종교성의 짙은 안개는 오늘날 모든 개혁주의자들의 머리 위에 드리워진다. 이들이 왕조 지지자들과 경제학자들처럼 더 잘 보존하기 위해서 개혁을 설파하든, 공산주의자들처럼 모든 것을 되살리기 위해서 우선 모든 것을 파괴하기를 원하든 말이다. 그대의 친구 카베는 낙원과 영원한 천부天父에 야유를 보내면서, 그럼에도 우애를 천상의 것이고 신성한 것이라고 부르면서 종교의 본질로 자랑한다. 그리고 우리는 그에게서 우애가 얼마나 심오한 비밀인지를 보았다. 페쾨르 씨는 모든 긍정적 종교들(부정적 종교란 무엇인가?)을 불경하다고 선언하며 자기의 공동체를 신의 공화국Réqublique de Dieu이라 칭한다. 우리는 다음으로 신新그리스도교인들과 반反그리스도교인들을 본다. 반그리스도교인들은 르루 씨에 따르면 생시몽주의자들과 푸리에주의자들이다. 반半공산주의적 민주주의는 로베스피에르의 고백, 신과 영혼 불멸에 집착한다. 중도파의 선진적 기관지인 「나시오날」은 인민의 영적 이익에 관해 설교한다. 이는 그 잡지가 정신이 지극히 없다는 것을 보여주는 문제다. 경제학자들은 신앙의 품 안으로 도피한다. 이를 그들은 맬서스주의 이론의 방향에서 해석하고 변경한다. 사법관들은 프랑스적 자유에 대한 그들의 헌신을 맹세하면서도 비오 9세의 초자연적이고 섭리적인 선출에 대해 신에게 감사를 돌린다. 왕조적 반대당과 보수당파 둘 사이에서 드 라마르틴 씨는 종교와 신앙심만을 호흡한다. 대학은 자신의 신조를 말하고 교회보다 더 신실함을 자처한다. 심지어 붉은 남자가 튈르리 공원에 다시 출현해,

땅에 입 맞추고 나서

예수회원의 모자를 놓는다

는 말까지 있다.

그러므로 공동체는 종교다. 하지만 무슨 종교인가?

철학에서 공산주의는 생각도 하지 않고 추론도 하지 않는다. 논리, 변증법, 형이상학을 싫어한다. 배우지도 않고 믿는다. 사회경제학에서 공산주의는 수를 헤아리지도, 계산하지도 않는다. 조직을 할 줄도, 생산할 줄도, 분배할 줄도 모른다. 노동은 공산주의에는 수상쩍으며, 정의는 두려움을 준다. 그 스스로 초라하고, 모든 주문 사항, 모든 실현, 모든 법칙과 양립 불가능하고, 자신의 관념을 가장 낡은 전통에서 빌려 오고, 모호하고, 신비적이고, 규정이 불가능하고, 사치를 증오해 절제를 설파하고, 자유를 두려워해 복종을, 선견지명이 싫어서 정적주의를 설파해 이는 어디서나 결핍이고 언제나 결핍이다. 공동체는 느슨하고 무기력하게 만들며, 발명이 빈약하고, 실행력이 빈약하고, 볼품이 없어서 공동체는 빈곤의 종교다.

내가 사치라고 명명해 오고 있는가? 정치경제학은 이 점에서 아무런 정확한 것도 내놓지 않아서 유토피아는 아무것도 취할 것을 지니지 않았다. 그리고 카베 씨는 뜻밖의 상황에 처했으며, 고르디우스의 매듭을 베는 새로운 알렉산드로스로서 용감하게 입장을 취했다. 그는 사치를 금한다. 사치는 절대 안 된다! 유행과 몸치장을 타도하자! 여성들은 인공 깃털을 지닐 것이다. 다이아몬드는 유리 장신구로 대체될 것이다. 부티 나는 양탄자, 고급 가구는 말과 마차처럼 국가에 속할 것이다. 이는 질투심을 일으키지 않을 것이다. 복장은 일단 모두에 대해 주권자의 자문 의견에 의해 규제될 것이다. 스무 개 정도의 모형에 맞춘 옷은 허리 모양을 내고 언제나 맞는 크기를 보전하도록 고무처럼 탄력적일 것이다. 고집과 부패를 위해 창조된 이 엉뚱한 환상들에 노동과 공공 재산을 잃어버리는 것이 무엇에 좋은가?

이처럼 생각한 것이 피타고라스, 리쿠르고스, 플라톤, 제논, 디오게네스, 예수, 그리고 에세네파, 영지주의자들과 에비온파, 세네카, 모든 교부들, 모든 도덕가들, 트라피스트 수도자들, 오언주의자 등등이었다.

그렇지만 이 사치 문제에 대해 사회주의 전통은 만장일치인 채로 있지 않았다는 것을 말할 필요가 있다. 어떤 이들은 에피쿠로스주의자들처럼 분열을 일으켰다. 이들로부터 생시몽주의자들, 육肉의 복권의 장본인들과 푸리에주의자들, 사치와 색욕의 추종자들이 모든 양태, 종류와 경우로(in omni mode, genere et casu) 나왔다. 이들은 전자의 사람들이 겸허함과 중용을 위해 하겠다고 위협하는 모든 것을 신입자들에게 부, 사치, 호화로움, 쾌락, 웅장함 측면에서 해 주겠다고 약속하는, 더 낫고 매력 있고 더 이득이 되는 전술을 발견했다. 이 분리는 아무런 놀랄 것이 없다. 이는 모든 취향을 위해 필요했으며, 이쪽이든 저쪽이든 아무것도 무릅쓰지 않았다. 신청자들은 항상 들어올 것이다. 심지어 비판을 받는 영예를 얻은 것을 자랑할 수 있었으니 그만큼 세상은 어리석다.

사치와 관련해서 금욕주의적 사회주의건 쾌락주의적 사회주의건, 사회주의의 오류는 가치에 대한 잘못된 관념에서 나온다. 생산물의 비례성 법칙에 따르면 사치품은 생산이 마지막에 이루어지고 부의 구성에 더 미미한 양으로 들어가는 물건들을 가리키는 데 쓰이는 순전히 상대적인 표현이다. 사회경제학의 이 기초적 관념에 따르면, 사치를 금지하기를 원하는 것만큼 이를 통상적이고 쉽게 만들라고 말하는 것도 터무니없다. 한편으로 가치들의 계열을 무시해 신비화에 도달하는 것이며 다른 한편으로 이 계열을 손상시켜 이는 빈곤을 명하는 것에 해당하니 말이다.

사치의 적들을 당황하게 하는 것으로서 그 변명자들이 우애를 저버리고 가장 완고한 이기주의를 표방함으로써만 응답한 것, 이는 분배가 행해질 방식이다. 모든 사람이 평등하고 자기 것을 아무것도 가질 수 없는 사회에서 다이아몬드의 치장, 진주 팔찌는 분할될 수 없어서 그 소유권자를 위해 새로운 특권, 일종의 귀족 계층을 창조하는 물건일 것이다. 그런데 우리가 보석들에 대해 말하는 것을 다른 천 가지 것들에 대해 말할 수 있다. 사치품은 희소성을 원리로 삼음에도 불구하고 무한히 다양하다. 그러한 남용을 공동체 안에서 용인할 수단은? 그리고 지금 나는 여러분에게 이를 묻는다. 공동체의 어리석음을 비웃는 여러분 모두에게 말이다. 하늘이 여러분에게 이카리아인들의 체제를 만들 것을 촉구했다고 하더라도, 여러분은 어떻게 이 입장에서 벗어나겠는가? 여성들의 애교, 젊은이들의 환심을 사려는 언동, 모든 영혼을 사로잡고 있는 쾌락에 대한 절제되지 않은 욕망, 이미 소유권이 있지 않다면 만족되기 위해 소유권을 필요로 하는 이 욕망을 생각해 보라. 확실히 다이아몬드가 유리알들보다 더 비용이 들지 않는다면 선한 이카리아인은 이를 아무에게도 거절하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희귀하고 어려운 하찮은 것들이 자기주장과 질투, 불화의 얼마나 무진장한 주제인가! 여러분은 그 분배를 추첨에 방치하는가? 이는 밀수를 조장하는 것이다. 자극을 받은 모든 부문의 보석상, 금은 세공인, 여성용 모자 제조인, 사치품과 퇴폐적인 물품을 만드는 장인들이 곧 반공 조합을 결성할 것이다. 안녕의 유일한 수단은 금지다. 부정한 비빌론의 부는 불길에 던져지거나 공화국의 행렬에 쓰도록 몰수될 것이다.

그렇지만 곤경에서 벗어날 쉽고 단순한 한 가지 수단이 있었다. 이는 자연에 (내다 버려) 분배하는 대신 등가에 의한 분배 체제를 채택하는 것이었다. 각 노동자가 자기 산물을 양도하고 …의 물표를, 그에게서 상품으로 받아진 가치만큼을 그가 받도록 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는 이 수단에 의해 자기 소비의 유일한 심판자가 된다. 그렇게 된다면 지출은 취향에 따라 달라져서 사치품의 분배는 저절로 아무런 질투도 일으키지 않고 행해진다는 것이 명백하다. 왜냐하면 모든 것은 값이 지불되고 누구에게도 선호가 주어지지 않기 때문이다. 유행이 어느 물건에 달라붙으면, 곧 가격 인상이 뒤따른다. 그리고 사회가 이 물건에 세금을 매겨, 사치품은 경제의 원소가 된다. 포도 농산물 및 공산품에 관련해서 그러한 것이 근본적으로 허가세, 직접세, 유통세와 매출세의 정신이다. 어디에서나 우리가 가까이서 들여다볼 때에는 사회에 균형으로 향하는 경향, 언제나 공산주의적 관성과 소유권자의 무정부성에 의해 반대를 받고 질식을 당하는 경향이 나타난다.

유감스럽게도 화폐가 태곳적부터 아주 인기 있게 만들어 준 이 분배 체제에 공동체는 카토처럼 자기 자신의 손으로 찢어지지 않고서는 의존할 수 없다. 일체의 가치 척도는 개성의 순수한 표현이고 전유의 공식적 선언이다. 화폐는 공산주의의 사망 진단서다. …

공동체는 빈곤의 종교다. 유토피아주의자들은 이에 동의하지 않을 수 없다. 경제학자들은 이를 소리 높여 가르친다.

로시 씨는 이렇게 말한다. “나는 『정치경제학 강의』에서 노동자들의 각 가정이 어떻게 상호 부조와 공동 지출의 공평한 체제로 자신의 조건을 개선할 수 있는지를 보여 주었다. 이는 바로 연합과 동료 관계의 정신에 요구하는 것이 온당한 것이다. 이 한계(궁핍의 한계) 안에서 종교적 공동체들과 수도원들의 예는 제안하기가 아주 좋다. 왜냐하면 고립은 지출할 것을 별로 가지지 않은 자들, 선투자를 할 수 없는 자들, 도매로, 유익한 때에 공급 물자를 구입하고 가정 경제에 많은 배려와 많은 시간을 쓸 수 없는 자들에게는 치명적이기 때문이다. 가난한 자들에게는 살림살이 단위들의 수를 늘리는 것은 바보짓이다. 그리고 아내와 자녀를 가진 남자들에게는 적당하지 않고, 가족 정신을 파괴하는 경향을 띨 절대 공유의 삶을 꿈꾸는 일 없이 부분적 공동체, 구매, 조달, 난방, 식사, 상호 부조의 공동체가 있으며, 이는 아무런 불가능한 것도, 부도덕한 것도 없고 그 조합에 의해 노동자 계급들의 이해력을 넘어서지도 않는 공동체다. 그 공동체들이 체계를 만드는 사람들의 공상에 귀를 기울이는 대신 그들의 공정성과 자연적 감각만을 참조한다면 이 사실적 질서 안에서 이미 실현된 실험들을 어렵지 않게 배가시키고 확장할 수 있을 것이다. 이는 결코 소음을 내지 않으며, 광휘를 발하지 않고 완수되기 위해 사회의 흐름을 멈추는 여호수아도 필요로 하지 않는다. 그러나 이는 또한 중죄 재판소로도, 샤랑통 정신병원으로도 인도하지 않는 길들이다. 다소간에 그들의 노동도, 그들의 생활 전체도, 사람에게서 더 개인적인 것과 가족에게서 더 내밀한 일도 공동의 일로 두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들의 이익, 지출, 소비, 물질적이고 외적인 가정생활의 일부를 상호 부조의 목적에서 공유로 두기 위한 다섯, 여섯, 열 가족의 자발적이고 일시적인 조합들은 노동자들에게 행복의 수단일 뿐 아니라 교육과 도덕성의 수단일 것이다.”

그대는 들었는가? 공동체는 일반 비용 절감 이론의 적용으로서 빈곤의 한계 안에서만 인정이 가능하며, 가난한 자에게만 좋다. 또한 거기에는 노동도, 생활 전체도, 가족도, 자유도, 이익도 두어서는 안 되고 단지 그 지출의 일부만 두어야 한다. 그러나 일단 저축에 의해 형편이 나아지고 나서는 공동체를 피하라고 그는 그대에게 말한다. 공동체는 프롤레타리아트의 형태라는 것이다.

그렇다. 로시 씨, 당신은 가난한 자들에게 특정한 지출들을 공동으로 하는 것을 권장하면서, 비용 절감의 원리가 절약의 강력한 수단이라면 이는 같은 정도로 빈곤의 틀림없는 수단이라는 뜻으로 말할 때 옳은 말을 하는 것이다. 실제로 이 이론, 물건들의 가격을 무한히 절감하는 이 기술은 공동체의 체계에서는 소유권의 체계에서처럼 부의 부정 자체 말고 다른 것이 아니라는 것을 누가 모르는가?

사회가 비용 절감에서 구하는 것은 불모의 축적 동기에 의해서가 아닌 새로운 창조를 위한, 즉 언제나 더 큰 생산과 소비를 위한 원가 절약이다. 반대로 소유권은 그 배타적이고 질투하는 지배를 무한히 확장하고 자기 주위에 사막과 공허를 창조할 수단밖에 보지 못한다. 이는 순생산과 총생산의 구분을 일으킨 것으로, 전자는 이익, 즉 소유권적 배제를 표현한다. 후자는 집단적 행복을 가리킨다. 이처럼 시스몽디가 아주 한심스러운 그림을 그린, 30만~40만 명의 주민을 먹여 살릴 수 있을 로마 근교 농지agro romano 소유권자들은 그 땅을 경작하기보다는 목초지로 놔두는 것이 자기들에게 더 이익이 됨을 발견했다. 산업인들처럼 그들의 이익은 일꾼들을 두지 않는 데 있다. 그들은 ‘가능한 한 많은 것을 가능한 한 많은 수의 사람들이 생산하고 소비하게 하기’를 문제로 삼지 않는다. 이것이 정말로 경제 문제다. 그들은 다음의 반사회적 격률을 규칙으로 삼는다. ‘가능한 한 큰 순생산을 실현한다. 즉, 그들 주위에 노동과 임금을 제거한다.’

공동체는 공동체를 구별해 주는 열광적 태도로 이 소유권자의 일상 관행을 자기 것으로 만들어 정확하게 소유권처럼 추론한다. 비용 절감의 이론에서 모든 사람을 위한 노동을 줄일 수단만을 보며, 그러한 감축이 한계가 없을 것이며, 필연적으로 무위, 절대적 궁핍에 도달할 것임을 감지하지 못한다.

합승마차는 확실히 완전히 공산주의적 취향에 따른 경제적인 차량이다. 각 가족에게 말과 1두 2륜 마차를 줄 정도로 부유한 사회를 가정하자. 합승 마차의 존재 이유는 무엇일 것이며, 그것의 경제는 무엇을 의미할 것인가? 그것의 상대적인 쓸모에도 불구하고 개별 마차를 대체한 합승 마차는 부의 진보이기는커녕 반대로 부의 감소를 가르쳐 준다는 것이 제대로 된 이야기가 아닌가? 그런데 이것이야말로 바로 공산주의가 행하는 것이다. 소유권 식으로 궤변을 부려서 당신에게 이렇게 말한다. 이 수백만의 살림살이가, 괘종시계, 금으로 된 손목시계, 옷장, 의자, 탁자, 그림, 부조, 서재, 난로, 등잔불과 촛대, 식기류와 부엌세간, 6개월간의 내의류, 갈아입을 의복과 외투, 온갖 보석과 용구들이 무슨 소용인가? 이 소동, 이 방탕함은 다 무슨 소용인가? 반면에 우리가 공동체로 산다면, 우리는 만찬실에서 포부르동으로 웅장하게 시간을 알리는 종을 치는 훌륭한 괘종시계, 오페라에서처럼 빛나는 샹들리에, 500명이 앉을 수 있는 탁자, 서른 말들이 솥, 그리고 의회의 장면들과 공화국의 승리의 모습들이 유화로 그려진 벽을 가지게 될 것이다!

음! 그대들을 해방시켜 준다는 사람들의 놀림감이 되는 선량한 사람들아, 보석상, 시계공, 주조공, 조각가, 고급 가구 세공인, 등잔불 제작자, 난로 제작자, 유리 세공인, 인쇄업자, 여성용 모자 제조인들이 무슨 소용인가. 당신이 부를 금한다면 노동이 무슨 소용인가? 인류가 무슨 소용인가? 아니, 공동체가 무슨 소용인가? 그대들은 공동체 없이도 충분히 헐벗고, 충분히 불쌍하지 않은가!

내가 공산주의에 대한 불평을 다 쏟아내려면 멀었다. 나는 여러 나라 인민의 산업적 자유를 해하려는 영국 경제학자의 음모에 이 순간 공산주의가 내미는 뜻밖의 원조에 대해 아무것도 말하지 않았다. 한편으로 『데모크라시 파시피크Démocratie pacifique』는 장벽의 철폐에서 팔랑스테르로의 전진만을 보며, 다른 한편 『포퓔레르』는 루이필리프가 코브던에게 행한 초청을 그리스도교 신자들에게 이야기해 주며, 우리나라의 독립을 위해 위협이 되는 이 사실로부터 강자들과 부자들이 노동 계급을 위해 무언가를 할 날이 다가온다는 결론을 끌어낸다.

그러나 나는 모든 것을 이야기할 수는 없을 것이다. 게다가 내가 말한 것은 이론을 위해서는 충분할 것이다. 친애하는 빌가르델, 사회주의의 사실과 행적에 대해 말한다면 지난 여러 세기들에서처럼 우리 세기에도 그대와 나는 이야기하기를 포기한다. 그 과제는 내 인내심을 넘어설 것이며, 이는 너무 많은 빈곤, 너무 많은 파렴치한 것들을 들추어내는 일일 것이다. 비평가로서 소유권의 부정에 의해 사회 법칙들의 탐구를 진행해야 했던 나는 사회주의자의 맹세자에 속한다. 이런 관계 속에서 나는 내가 처음에 한 언명들을 부인할 것이 아무것도 없다. 그리고 나는 다행스럽게도 내 선행자들에게 충실하다. 실현과 진보의 사람으로서 나는 온 힘을 다해 머릿속이 텅 비고 무능하고 부도덕하고, 바보들과 사기꾼들을 만들기에만 적당한 사회주의를 거부한다. 사회주의가 20년 전부터 과학을 공언하면서 아무런 난점도 해결하지 못하고 세상에 행복과 부를 약속하면서도 스스로는 적선으로만 생존하고, 아무것도 생산하지 않으면서 엄청난 자본을 집어삼키는 모습을 보여주는 것은 이런 식이 아닌가?

나로 말한다면, 공언하노니, 대낮을 구하고 비판에 맞서 싸우는 대신 골목길의 침침함 속에 숨는 이런 지하 선전에 직면해서, 이 파렴치한 관능주의, 이 진흙탕 문학, 이 고삐 풀린 거지 행세, 일부 노동자들을 얻기 시작하는 정신과 가슴의 이 마비에 직면해서 사회주의적 불명예에서 깨끗하며, 다음과 같은 두 마디 말로 과거, 현재 그리고 미래의 모든 조직 유토피아들에 관해 내 신앙 선언과 내 기준을 밝힌다.

노동을 조직하기 위해 권력과 자본에 호소하는 자는 누구든지 거짓말을 한 것이다.

노동 조직은 자본과 권력의 권리 박탈이어야 하기 때문이다.

제13장 제10기인구

. 생식과 노동에 의한 사회의 파괴

“웅변가 에밀리안(Emilian)의 아버지, 에피테르세스(Epithersès)는 그리스에서 이탈리아를 향해 다양한 상품과 여러 여행객을 실은 배로 항해해 가는데, 저녁나절에 모레Morée와 튀니스 사이에 있는 에키나데스 군도 근처에서 바람이 멎었고, 그들의 배는 팍소스Paxès 근처로 떠내려갔다. 그곳 해변에 닿아서 어떤 승객은 잠들고 어떤 승객은 깨어 있고 다른 승객들은 먹고 마시고 있었고 팍소스 섬에서 누군가가 타문(Thamoun)을 크게 부르는 소리가 들려왔다. 이 소리가 모두를 놀라게 했다. 바로 이 타무스(Thamous)는 그들의 조타수이며, 이집트 사람이었다. 승객 몇 사람 말고는 그 이름을 아는 사람은 없었다. 두 번째로 이 음성이 들려왔는데 이는 타문을 무서운 음색으로 부르는 것이었다. 아무도 대답하지 않았고 조용히 벌벌 떨고 있었다. 세 번째로 이 음성이 들려왔는데, 이는 전보다 더 무서웠다. 이에 타무스가 대답했다. ‘나 여기 있고, 그대는 나에게 무얼 요구하오, 내가 무얼 해주기를 바라는 거요?’ 그때 이 소리가 더 크게 들렸다. 그에게 팔로데스Palodès에 가게 되면 위대한 신, 판(Pan)이 죽었다고 발표하라고 명령하는 것이었다!”

“이 말을 듣고는 에피테르세스는 선원들과 승객들이 모두 탄복하고 놀랐다고 말한다. 그들 간에 그 음성이 명한 것을 숨기는 것이 좋은지 밝히는 것이 좋은지를 의논했다는 것이다. 타무스는, 그들이 순조로운 바람을 맞는다면 그에 대해 한마디도 말하지 말고 항해해 나가야 하지만, 바람이 멎게 된다면 들은 것을 이야기하겠다는 것이 그의 의견이라고 말했다. 이제 그들이 팔로데스에 가까이 갔을 때 바람도 없고 해류도 없었다. 그래서 타무스는 뱃머리에 올라 해안을 바라보며 명령을 받은 대로 위대한 판이 죽었다고 말했다. 이 말이 끝나기 무섭게 깊은 신음과 큰 탄식이 한 사람이 아니라 여러 명이 함께 내는 소리로 땅에서 들려왔다.”

“이 소식은 많은 이들이 현장에 있었기에 급속히 로마에 퍼졌다. 그래서 당시의 황제였던 티베리우스는 이 타무스를 데려오라고 사람을 보냈다. 그리고 그가 하는 말을 들어 본 후에 그 말을 믿게 되었다. 그의 궁전과 로마에 있는 학자들에게 이 판이 누구냐고 물어서 그는 판이 헤로도토스와 키케로가 『신들의 본성』 제3권에서 전에 적은 대로 메르쿠리우스와 페넬로페의 아들이라는 것을 알아냈다.”

“아무튼 나는 그를 유다이아에서 박사들과 사제들, 모세 율법의 수도자들의 질투와 악행에 의해 치욕스럽게 살해당한, 신자들의 위대한 구세주로 해석한다. 그리고 그 해석은 부적절하지 않은 것 같다. 왜냐하면 그는 우리의 전부인지라 정당한 권리로 그리스어로 판이라 불릴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의 모든 정체, 우리가 사는 전부, 우리가 가지는 전부, 우리가 바라는 전부가 그이고, 그에게서이고, 그로부터이고, 그에 의해서인 것이다. 그는 사랑 많은 목자 코리동(Corydon)이 증언하듯이 그의 양떼만이 아니라 양떼의 목자들에 대해서도 사랑과 애정을 가진 선한 판, 위대한 목자다. 그가 죽었을 때 불평, 탄식, 한숨, 공포와 한탄이 하늘, 땅, 바다, 지옥 할 것 없이 우주의 온 조직에 퍼져갔다. 내 이런 해석에는 시대가 들어맞는다. 왜냐하면 아주 선하고 아주 위대한 판, 우리의 유일한 구세주는 로마에서 티베리우스 황제가 다스리던 때 예루살렘에서 죽었기 때문이다.”

이 찬양할 만한 이야기, 아주 심각한 어조로 말해지고 아주 신실한 성찰로 끝나는 이 이야기가 플루타르코스에 기초를 둔 것으로서 라블레의 펜에서 나온다고 누가 믿겠는가? 그러나 타무스가 발표한 신탁을 예수 그리스도에게 적용한 것에서 영원한 적들인, 독점과 유토피아에 의해 죽음을 당한 사회의 상징을 누가 알지 못하겠는가? 그리고 바로 이 타무스에서 그 글들이 가장 많은 걱정의 씨를 뿌렸고 섭리를 더욱 의심하게 한 사람, 맬서스를 누가 알아보지 못하겠는가?

그리스도가 인류의 화신이듯 고대사는 현대사의 모습이다. 사회가 타무스의 배처럼 경제적 숨결에 의해 야만에서 문명으로 옮겨지면서 소유권자의 해협을 통과한 후에 공산주의의 구덩이 위를 헤매 오고 있다. 맬서스는 우리에게 사회가 죽어간다고, 사회가 죽었다고 외치는 조타수다. 그의 부활에 대한 신앙을 아직 받아들이지 못했으므로 판 신을 애도하는 영혼들은 인류의 살아있는 표현이고, 인류의 예감과 슬픔의 기관들인 우리의 모든 웅변가들과 우리의 작가들이다. 이는 라므네, 라마르틴, 미슐레 같은 사람들이다. 이는 우리의 경제학자들, 정치인들, 그리고 우리의 신비가들, 시스몽디, 블랑키, 뷔레, 기조, 티에르, 코르므냉(Cormenin), 바로(O. Barot), 뷔셰, 라비냥(Ravignan) 신부와 라코르데르(Lacordaire) 신부, 리옹(Lyon) 및 샤르트르(Chartes) 예하, 쉬(E. Sue) 등등이다.

그렇다. 정말로 사회는 그 종말에 닿았다. 위대한 신 판은 죽었다. 영웅들의 그림자들이 탄식하고 지옥의 악마들이 전율하는구나. 판은 죽었다. 사회는 해체 상태로 떨어진다. 부자는 자기의 이기심 안에 문을 닫아걸고 있으며 대낮의 밝은 빛에서 자기 부패의 결실을 숨긴다. 불성실하고 나태한 종이 주인에 대해 음모를 꾸민다. 부자에게 존엄성이 더 많고, 가난한 자에게 겸손이 더 많고, 충직함은 어디에도 없다. 학자는 과학을 재산으로, 그를 인도해 주는 지하통로로 간주한다. 그는 과학에는 조금도 관심이 없다. 정의를 의심하는 법률가는 그 격률들을 더 이상 이해하지 못한다. 사제는 더 이상 회심을 야기하지 못하고 유혹자가 된다. 군주는 황금열쇠를 왕홀로 삼았다. 그리고 인민은 절망한 영혼, 우울해진 지성을 가지고 명상하고 침묵한다. 판은 죽었다. 나는 당신에게 이를 타무스와 맬서스처럼 말한다. 사회는 바닥에 도달했다. 애도는 서둘러 끝내라. 그리고 우리 해부자들에게 이 시체가 인도되어 있으니 사체를 부검하자.

문명의 가장 놀라운 현상, 경험에 의해 가장 잘 증언되고 이론가들에게 가장 적게 이해되는 현상은 빈곤이다. 문제는 이보다 더 주의 깊게, 더 애써서 연구되지 않았다. 항구적 빈곤은 논리적, 역사적, 신체적, 정신적 분석에 종속되었다. 사람들은 이를 자연의 네 번째 시대로서 과, 속, 종, 변종으로 나누었다. 사람들은 그 효과, 원인, 필요, 전파, 목적지, 그 정도에 대해 길게 이야기했다. 사람들은 그것의 생리학과 치료를 행해 왔다. 그에 관해 쓰인 책들의 제목만으로도 한 권 분량을 채울 것이다. 사람들이 그에 대해 말한 나머지, 그 존재를 부정하기에 이르렀다. 이 긴 탐구에 이어 지금 빈곤이 정의 불가능한 것들, 이해되지 않는 것들의 범주에 속하는 것을 겨우 감지하기 시작하는 정도다.

이처럼 빈곤은 꿰뚫어 볼 수 없으나 언제나 현존하는 신성처럼 그 불신자들과 신자들을 가진다. 빈곤은 심지어 냉담자들을 가지는데, 이는 그것의 진보에 적지 않게 기여하는 것이다. 설령 슬픔과 죽음일지라도 감정이나 감각에 의해서만 알게 된 것을 부인하도록 언제나 이성에 의해 유도되는 사람의 운명은 이상한 운명이다! 내 기억이 틀리지 않는다면 엘레아학파는 운동을 부정했다. 스토아학파는 슬픔을 부정했다. 부활과 윤회의 추종자들은 죽음을 부정한다. 유심론자들은 물질을 부정한다. 유물론자들은 신을 부정한다. 회의주의자들은 서로를 비웃는다고 자처했지만, 부정과 비웃음에도 불구하고, 세상은 그렇다고 해서 공간을 가로질러 웅장한 경주를 계속하기를 덜한 것이 아니다. 슬픔과 죽음은 희생자들을 덜 만들어낸 것이 아니고, 신들에 대한 숭배는 성공을 덜 거둔 것이 아니다. 박애주의자들은 빈곤을 비웃어 보라. 우리는 그 재발을 확신한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새로운 재앙을 끌어들이고 싶지 않다면 이 상형문자를 해독하려고 노력하자.

빈곤은 철학이 이를 나중에 사회에서 추방하고 싶다면 이성에서 제거해야 할 마지막 허깨비다. 하지만 허깨비는 무엇인가? 이를 파악하고, 이를 설명하고, 이에 대해 방어하는 것이 어떻게 가능한가? 허깨비의 원인, 본질, 발달, 그 사고事故들과 양태들에 대해 어떻게 말할까?

빈곤은 사회의 질서에서 악이다. 하지만 악이란 무엇인가? 라므네 씨는 말한다. 악은 한계라고. 그런데 또 한계란 무엇인가? 객관적 실물이 없는 정신의 개념이다. 이는 기하학적인 점과 선처럼 이성적 존재다. 한계는 그 자체가 한계가 없으므로, 그 정의는 정의되지 않은 유일한 것이므로 아무것도 아니다. 그러므로 라므네 씨의 체계에서 악은 논리적 존재자, 실체가 없는 관계다. 악의 존재를 단언하는 것은 부정의 실재를, 무의 실재를 단언하는 것이다. 그러면 슬픔을 어떻게 설명하는가? 우리에게 외치게 하고 눈물 흘리게 하는, 우리에게서 싫증과 증오를 자극하는, 심지어 우리에게 죽음을 주는 이 계속적 경험을 어떻게 설명할까? 내가 무엇이라 말하는가? 악이 한계 말고 다른 것이 아니라면 이는 존재의 결정 자체다. 사물은 감각이 가능해지고 분간될 수 있게 하는 것이고, 아름다움과 존재의 필수 전제 조건이다. 이는 우리 감각과 관념의 지고의 조건이며, 필연적 존재다. 악은 한마디로 선이다. 이상한 정의다!

더 잘 파악하기 위해 덜 일반화하기를 선호한 뷔레에 따르면, 빈곤은 부富의 보상이다. 빛이 생겨라fiat lux! 더 솜씨 좋은 자들이 이를 설명할 수 있으면 해보라고 하라. 나로 말한다면, 내 확신은 저자 자신도 자기 말을 이해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빈곤 계층의 원인, 이는 생산물의 부족, 즉 빈핍이라는 것. 이는 슈발리에 씨의 견해다. 빈곤 계층의 원인, 이는 너무 많은 소비, 즉 역시 빈핍이라는 것. 이는 맬서스의 견해다. 나는 저자들로부터 이 명제 말고 다른 것을 결코 끌어내지 않으면서 본문들을 무한히 배증할 수 있을 것이다. 꾸란의 첫 구절, “신은 신이다”와 쌍벽을 이룰 만한 명제다. 빈곤은 빈곤이다. 악은 악이다. 빈곤은 종교처럼 반철학적이고 비합리적인 무엇인가라는 것, 이는 허깨비이고, 신화라는 것이 참이 아닌가?

그 결론은 이런 전제들을 지닐 만하다. 생산을 늘리고, 소비를 억제하고, 아이를 덜 낳는 것, 한마디로 빈자가 아니라 부자인 것, 이것이야말로 빈곤과 싸우기 위해 이를 가장 잘 연구한 자들이 우리에게 말할 줄 아는 모든 것이고, 이것이야말로 정치경제학의 헤라클레스의 기둥들이다!

하지만, 숭고한 경제학자들이여, 당신들은 인구를 증가시키지 않으면서 부를 증대하는 것은 일손의 수를 증가시키면서 입의 수를 감소시키고 싶어 하는 것처럼 터무니없는 것임을 망각한다. 생각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더 이상 상식도 가지지 못할 것이니 부디 생각을 좀 해 보자. 가족은 사회경제학의 심장, 소유권의 필수적 대상, 질서를 구성하는 요소, 노동자가 자신의 모든 야망, 자신의 모든 노력을 끌고 가는 지고의 선이 아닌가? 그것 없이는 노동자가 사기꾼과 도둑이기를 더 좋아해서 노동하기를 중단할 그런 것이 아닌가? 반대로 그것과 더불어 노동자가 당신들의 경찰이라는 멍에를 감수하고, 당신들의 세금을 납부하고, 입을 봉하고, 빼앗아 가도록 놔두고, 독점을 통해 산 채로 껍질을 벗기도록 놔두고, 독점의 사슬 위에서 체념해 잠들고, 인생의 3분의 2의 시간 동안 영원하기 때문에 인내력을 가진다고 사람들이 말하는 창조주와 유사하게 자기 인격에 저질러지는 불의를 더 이상 감지하지 못하는 것이다. 가족이 없다면, 사회는 없고, 노동도 없다. 프롤레타리아트의 소유권에 대한 이 영웅적 종속 대신에 사나운 짐승들의 전쟁이 있는 것이다. 그러한 것이 경제적 조건에 따르면 우리의 첫 번째 입장이다. 그리고 당신이 이 순간에 그 필연성을 발견하지 못할 것이라면, 내가 당신을 독점, 신용, 소유권의 이론들로 돌려보내는 것을 허락해 달라.

지금 가족의 목적은 자녀 출산이 아닌가? 이 자녀 출산은 사람의 생명 발달의 필연적 결과가 아닌가? 이는 획득된, 말하자면 젊음, 노동 그리고 후생에 의해 그의 신체 기관들에 축적된 힘에 비례하지 않는가? 그러므로 인구를 배증하는 것은 생존 수단 배증의 불가피한 결과다. 그러므로 끝으로 생존 수단의 상대적 비율은, 무익한 입을 제거함으로써 증가하기는커녕, 내가 곧 입증하기를 희망하는 것처럼, 그러한 제거가 지고의 대상물이고 노동의 필수 불가결 조건인 가족의 파괴에 의해서밖에 행해질 수 없다면, 불가항력적으로 감소하는 경향을 띨 것이다.

이처럼 생산과 인구는 서로에 대해 결과와 원인이 된다. 사회는 동시에, 그리고 같은 원리에 힘입어, 부와 사람들 수에서 발달한다. 이 관계를 변경할 필요가 있다고 말하는 것은, 피제수와 제수가 언제나 같은 비율로 증가하고 감소하는 조작에서 마치 당신이 그 몫을 두 배로 하라고 말하는 것과도 같다. 당신이 주장하는 것이 무엇인가? 젊은이들이 사랑을 하기를 그만두라는 것, 프롤레타리아는 50세가 되어서야 결혼을 하든가 아예 하지 말라고 하는 것, 가족은 하나의 특권이라는 것인가? 이 경우에 당신의 소유권들을 수호하기 위해 효과적인 수단을 취하라. 당신의 병정들의 수를 두 배로 늘려라. 창녀들의 수를 늘려라. 성매매 보조금을 창설하라. 일부다처제, 창녀와의 결합, 게다가 심지어 남색, 편견이 비난하는, 그러나 과학은 그 불임성을 고려해 받아들여야 할 모든 종류의 사랑을 추진하라. 왜냐하면 가족이 있으면 부의 진보를 멈추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바로 그 이유 때문에 빈곤의 진보를 멈추는 것이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이 두 항목은 해소될 수 없는 결혼의 끈으로 서로 연결된다. 이것들을 분리하고자 하는 것에는 모순이 있다.

이처럼 빈곤은 신비적이고 필연적인 것, 우리가 그 존재도 부재도 생각하지 않는 것이다. 선처럼 악도 우주의 원리들 중 하나다. 우리는 바로 마니교에 들어와 있다!

하지만, 끝으로 사회 안에서 악은 어떻게 표현되는가? 빈곤의 공식은 어떤 것인가?

맬서스는 공신력 있는 문서 더미에 의존해서, 첫째로 인구가 예를 들어 생존 수단의 부족 같은 아무런 장애물을 만나지 않는다면, 25년마다, 심지어 18년마다 두 배로 쉽게 늘어날 수 있을 것임을 증명했다.

세는 이 기간을 더 단축시킨다. 그는 인구가 억제되지 않는다면 26년마다 세 배로 늘어나리라는 것을 발견했다.

로시 씨는 이 우아한 공식에서 같은 생각을 표현한다. “하나가 둘을 낳고 새로 태어난 이들이 각각 먼저의 단위와 같은 생산력을 가진다면, 둘이 넷을 낳을 것이고, 넷은 여덟을 낳을 것이고, 이런 식으로 계속된다. 그러므로, 추상적으로 말해서 맬서스는 반박이 불가능한 원리를 제시했다.”

이제부터는 의심할 것 없는 이 첫 번째 사실과 별개로, 맬서스는 그에 못지않게 확실한 다른 원리를 제시한다. 인구가 기하급수에 따라 2, 4, 8, 16, 32… 등으로 증가하는 경향을 띠는 반면에, 생존 수단의 생산은 단지 산술급수에 따라 1, 2, 3, 4, 5, 6… 등으로 증가할 뿐이라는 것이다. 이는 어쩔 수 없이 이런 결론, 모든 나라에서 인구의 일부는 끊임없이 빵이 없어서 죽는다는 결론을 유도하는 것이다.

맬서스는 이 두 번째 명제가 즉시 입증되는 것으로 나타나려면 발표되는 것으로 족하다고 주장했고 따라서 그 증명은 생략했지만, 나는 생존 수단의 1, 2, 3, 4… 의 산술급수가 어떻게 인구의 2, 4, 8, 16, 32, 64… 의 기하급수의 보조 정리인지를 보여 주면서 그의 침묵을 보충하려고 한다.

사람의 생식은 무엇에 관련되는가? 씨의 배출, 남자가 허락하도록 끊임없이 자극을 받는, 그에게서 어떤 노력도 요하지 않는 배출이지만, 정반대로 그의 생명의 지고의 선, 그의 노동의 목적, 그의 운명의 필요인 것이다. 그러나 그가 스스로 자기 생존 수단을 마련할 능력이 있게 될 날까지 이 씨앗을 배태, 수유, 급양 등의 비용으로 10년, 15년, 20년, 심지어는 25년 동안 그의 부모가 소비하는 것의 12, 15, 20, 심지어 50퍼센트의 비용이 들 것이다. 그런데 같은 부부가 자녀를 넷, 여섯, 열 또는 열둘을 낳는다고 한다면, 수학적 명증성을 가지고서, 그리고 엄청난 통계를 작성할 필요도 없이, 여행자들의 이야기를 참조하고 연대기들을 찾아볼 필요도 없이 이 부부의 후생은 그것들을 꽉 채울 이유 자체에 의해 12, 15, 20, 30, 50, 심지어 80퍼센트가 감소할 것이다.

그리고 자녀들 각각은 학교를 졸업하고 수습생으로 보내지자마자 그의 아버지가 했던 것을 자기 생각을 가지고 행할 입장이 되므로, 그의 모든 욕구와 그의 모든 희망은 그를 이런 모방을 하도록 몰고 가므로, 절제는 그에게서 노동할 마음을 빼앗고 그가 질서와 절약의 정신을 잃게 하는 것 말고 다른 결과를 가지지 않을 것이므로, 결과적으로 사람들의 출산이 이긴다. 여전히 뒤쳐진 상태로 있는 부의 생산을 끊임없이 이긴다. 그리고 생식에 의한 인류의 발달의 위력, 그리고 노동에 의한 인류 발달의 위력은 서로 간에 다음의 급수들과 같다.

2, 4, 8, 16, 32, 64, 128, 256…

2, 3, 4, 5, 6, 7, 8, 9…

내가 반복해서 말하는데, 맬서스는 이 두 급수를 구분했다. 적어도 내게는 그가 그 연대성과 동일성을 명확히 이해한 것으로 여겨지지 않으며, 이 부분에 대해서는 그의 이론을 위해 보충하는 것이 유익하다. 게다가 사실들, 즉 천 가지 끔찍한 형태, 보기 무서운 모습들terribiles visu formoe로 발현되는 인간의 빈곤, 기근, 전쟁, 전염병, 질병, 방탕 등은 매일 맬서스가 엄청난 학식을 가지고서 증명한 것과 같이 이 법칙의 정확성을 확증해 준다. 수수께끼, 허구 혹은 환각이 그러한 에너지를 가지고서 표현되고 그렇게 저항할 수 없는 사실들의 위력을 가지고서 입증되는 것을 본 적이 있는가?

그러므로 사회의 질서에서는 자연의 질서에서처럼 빈곤이 숙명적이다. 그로부터 자신을 지키고 싶은 것은 로그의 법칙이 우리 편한 대로 달라지기를 바라는 것이고, 산술이 진리이기를 중단하기를 바라는 것이다. 두 급수가 서로 필연적 관계로 연결되며 근본적으로 동일한 관념을 표현하고 동일한 사실을 드러내고 처음부터 자리 잡은 동일한 영원한 법칙, ‘성장하고 배가하라’는 것을 드러내므로 우리가 자연이 움직이도록 놔둔다면, 자녀의 과잉 생산에 의해 우리가 빈곤에 빠진다는 것, 우리가 자연에 저항하거나 환상적인 보충 조치로써 자연을 속인다면, 우선 우리가 가장 절박한 운명에서 빠져나오게 되고, 곧 가족을, 그리고 이와 함께 노동을 증오하게 되며, 악폐들의 역의 계열로 빠지게 된다는 것이 불가피하다.

이것이야말로 그 가장 명확하고 가장 모호한, 가장 결정적이고 가장 절망하게 하는 표현에서 정치경제학의 최종 신화이고 소유권의 왕관이고 노동과 가족의 우화다. 인류는 자신의 생기를 주는 능력들의 행사에 의해 소진되고 멸망한다. 그의 자살에 끝이 있을 수 있다면, 인류는 존재하기를 그치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경제 이론이 경험을 멀찍이서 따라가면서 빈곤이라는 말을 발설했을 때, 이는 우리 발달의 내적 법칙, 우리 존재의 본질, 우리 생명의 형태를 표현한 것이다. 인구의 급속한 증가, 생존 수단의 더 늦은 증가는 같은 관념, 유일무이한 현상의 두 측면이다. 이는 천체들의 운동을 주관하는 모든 법칙들처럼 확실한 법칙, 따라서 대수 방정식처럼 불굴이고 무자비한 법칙의 신비로운 공식이다. 이런 관점에서 불쌍한 사람의 불평과 박애주의자의 임시방편은 우리에게 얼마나 유치하고 쩨쩨해 보이겠는가! 숙명은 우리를 살게 하며, 우리를 쓸어 간다. 그것이 우리에게 주는 즐거움에 대해 대가를 지불받는다. 우리가 외치고 탄식할 것이 무엇인가? 그리고 자신들의 관념들의 연결성을 파악할 능력이 없어 어떤 때에는 우리에게 자녀를 더 많이 낳으라고 말하고 어떤 때에는 덜 낳으라고 권고하는 이 경제학자들이 우리에게 원하는 것은 무엇인가? 마치 인간 생식의 이 두 형태가 서로 회복할 수 없이 엮이지 않았으며, 우리의 사전 대비에 의한 빈곤 때문에 자연의 경솔함으로부터 우리에게 닥치는 빈곤을 대체하는 데에 이익이 있다는 듯이 말이다!

하지만, 의심할 바 없이 맬서스의 이중 법칙에 대해 아무 대답할 것이 없을 것이라고 사람들은 내게 말할 것이다. 그리고 인구와 부에서의 인간 발달의 이 불평등이 나무랄 데 없는 확실성을 지닌 것이라면, 그것이 참된 관념에 적절한 것처럼 완전하고 최종적인 관념의 성격을 띤다면, 이 법칙이 한마디로 명백한 모순이 아니라면, 우리는 어떠한 불평도 제기하지 않을 것이며, 경제적 숙명의 판결을 침묵 속에서 찬양할 것이다. 그런데 맬서스의 원리는 명백히 모든 이율배반들의 경우에 속한다. 그리고 당신 자신의 원리들에 따르면, 무오류라고 여겨지는, 반대되는 것들의 이 이론에 따르면, 인구와 생산에서의 진보의 적대 관계는 오로지 균형의 원리가 존재한다는 것, 그리고 이 원리를 발견하는 것이 과학이 할 일이라는 것을 증명한다.

뭐라고! 동물들 중에 오직 사람이 가장 영광스러운 특출함 덕에 노동자로 창조되었을 것이다. 섭리는 인간에게 땅을 소유하고 가족들로 조직을 이루라고 명령했을 것이다. 행복은 그에게는 노동과 사랑의 이 이중 기능의 행사에 놓였을 것이다. 그의 기력을 끊임없이 증대하고, 자신의 산업적 다산성을 발달시키고, 자신의 모든 동정심을 도약하게 하는 일이 그에게 맡겨진 것은 이 때문이다. 그리고 이 웅장한 약속을 실현할 때가 찾아올 때 결코 거짓말하지 않는 섭리는 갑자기 망측한 기만으로 탈바꿈할 것이다! 행복을 맛보기 위해 인류는 사투르누스처럼 자기 자녀들을 잡아먹어야 할 것이다! 사랑은 너무 빨리 가며, 노동은 너무 느리다! 사회 유기체는 아주 잘못 규율되고 아주 잘못 구상되어 사람은 자기 살과 피의 끊임없는 손실을 통해서만 자신을 지탱할 수 있을 것이다! 사람은 재생산하기를 삼가는 편을 선호하지 않는 한에서는 살아가기 위해 멸망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이는 언제나 파멸과 빈곤인 것이다! 죽음은 인구와 생존 수단 사이에 균형을 재확립하고 사랑의 업적들을 노동의 업적들의 크기에 종속시키고 합리적 피조물들의 수를 가치들의 비례성에 종속시킬 책임을 맡은 정치경제학의 가장 위대한 벼슬일 것인가? 그러므로 자연이, 섭리가 우리의 의도대로 토지의 다산성을 증대시키면서 동시에 우리 종의 다산성을 제한하고, 우리의 유익한 때에 행해진 생식 능력을 제어해 이 무시무시한 박멸을 멈추는 것을 누가 막는가?

그러나 공리주의적 유물론자는 당신에게 이렇게 대답한다. 사람과 짐승을 사로잡는, 당신에게 항거하는 이 죽음의 법칙은 창조자, 파괴자, 복구자인 힌두의 브라만, 시바, 비슈누의 삼위일체에 의해 형상화된 자연의 위대한 진화, 과학에 의해 공신력을 가지고서 인정되는 진화, 영구적이고 불가항력적인 이원론에서 직접 나와서 더 이상 바랄 종합을 가지지 않는 진화 말고 무엇인가? 당신의 희망은 그러므로 근거가 없다. 여기서 이율배반은 해결책 없는 채로 남는다. 창조 세계는 생명이 먹이로 생명에게 던져지고, 끊임없이 죽음에서 다시 태어나는 광대한 전쟁터다. 식물계는 무기체 왕국 위에 심어져 이를 흡수하고 쉴 틈 없이 동화시키며, 순서에 따라 동물계의 생존 수단을 공급한다. 동물계의 무수한 종들은 서로에 의해, 그리고 인간에 의해 끊임없이 파괴되지 않는다면 곧 땅을 헐벗게 할 것이다. 사람은 자기 위에 아무것도, 천사도, 그를 잡아먹는 악마도 가지지 않으므로 자기 자신을 잡아먹는다. 식인 풍습은 자연 법칙의 강제 이행 수단이다. 그리고 섭리가 독점과 국가를 세우고, 소유권을 보장하고, 강자가 약자를 위험도 없고 후회도 없이 소비하게 허락하는 위계적 질서에 인간들을 종속시킨 것은 그 성취를 확보하기 위해서다.

이처럼 모든 것은 무한의 생존 수단에서 나와 그리로 다시 들어간다. 살아있는 존재들의 배출이 행해지는 행위는 생식이다. 조직이 끌어들이는 요소들이 공동의 저장고에 다시 들어가는 행위는 죽음이다. 왜 이 법칙에 대해 수군대는가? 우리의 권리 주장이 확장될 수 있다면 모두를 위해 재산 있는 노년층의 장점을 확보한 후에 우리는 또한 영구적인 생명과 개화開花를 요구해야 할 것이다. 노쇠로 인해 사멸하는 것은 실제로 빈곤으로 인해 사멸하는 것과 똑같이 불쾌하고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이니 말이다. 그러나 이럴 수는 없다. 불멸성은 무한히 증식할 능력과 함께 터무니없는 것이다. 그리고 극단적인 노령의 경계에까지 가는 평균적 수명 연장은 조금도 연기될 수 없는 격정의 연기를 요구할 것이므로 우리의 체제와 양립 불가능하고, 우리의 존재를 위태롭게 할 것이다. 섭리가 대량 학살에 바친 불쌍한 자들의 피는 사회적 건축물의 시멘트이고 그 톱니바퀴 위로 인간 메커니즘을 굴러가게 하는 기름이다. 희생자들의 이마에 꽃과 띠로 관을 씌워 주라. 그들의 희생에, 그들의 죽음에 갈채를 보내라. 그들이 죽으면서 당신의 경탄과 당신의 찬사의 정당한 공물을 가져가도록 하라. 하지만 그들을 제단으로부터 대속하려고 하지 말라. 그들이 당신을 위해 죽기에 지쳤다면, 그들을 위해 죽어야 할 것은 당신이기 때문이다.

당신은 이렇게 말한다. 섭리는 당신을 살해하는 대신 기회가 닿으면 이 생식적 열정을 중단시키고, 고삐를 채울 수 있지 않은가? … 경솔하다. 누가 노동자의 거세를 요구하는가! 그의 몸과 그의 영혼에서 활동과 천재성의 근원 자체를 고갈시킨 후 당신은 거기서 무슨 산물을 끌어낼 것인가? 당신은 곧 노동자의 의기소침 때문에 더 강한 생산의 이익을 상실할 것이며, 빈곤의 강도를 약화시키지 않고 당신은 종의 생존을 위태롭게 할 것이다. 이와 관련해서 그 스승이 우리에게 말하는 것에 귀를 기울여라.

“격정은 강하고 일반적이다. 그리고 격정이 약회되어 가면, 그것이 부족할 개연성이 있다. 그것이 초래하는 해악은 이 일반성과 이 기력의 필연적 결과다. 땅을 사람으로 채우는 것이 창조주의 목적이었다고 모든 것이 우리에게 믿도록 한다. 그러나 이 목적은 인구를 생존 수단보다 더 급속히 증가하게 함으로써만 달성될 수 있는 것 같다. 그리고 우리가 인식한 증가 법칙은 사람들을 지구 표면에 너무 급속히 퍼지게 하지 않았으니, 그 법칙이 그 대상에 어울리지 않게 만들어졌던 것이 아님은 충분히 명백하다. 인구가 급속히, 과도하게 성장하는 경향이 그 강도를 증대시키지 않는다면 생존 수단의 필요는 충분히 절박하지 않을 것이고, 인간 능력에 충분한 발달을 제공하지 않을 것이다.”[33]

나는 독자의 정신에 이런 다양한 고려 사항들이 어떤 효과를 낳을 것인지를 모른다. 나로서는 정치경제학의 관점에서, 그리고 우리가 도달한 끝에서, 한편으로 우리 목을 조르는 소유권을 가지고, 다른 한편으로 우리를 질식시키는 공동체를 가지고서, 대답할 것을 절대 아무것도 알지 못한다고 선언한다. 사실들은 환상을 가지는 것이 허락되기에는 너무 큰 소리로 말한다. 빈곤은 존재한다. 즉 생존 수단은 부족하다. 그리고 먹여 살릴 입은 너무 많다. 이는 이해할 수 없는 것이지만 결국 사실이다. 우리가 덧붙여 온 것은 그 주석에 불과하다.

그러므로 이와 같이 무한의 존재는 창조를 진행하면서 막다른 골목에 들어간 처지가 되었다. 그리고 우리 진보적이고 앞날을 예측하는 존재가 그의 무능의 형벌을 받는다. 필연은 우연 없이 지낼 수 없었다. 질서는 무질서에 의해 보전된다. 유기적 존재들은 무기체 세계처럼 운동의 영구성을 누리지 못한다. 그리고 영구적 행복의 관념에 모순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자연의 설명할 수 없는 취약성 때문에 이 영구성은 불가능하다. 우리의 기쁨은 눈물을 먹고 산다. 우리의 행복의 보증 수단은 빈곤이다. 이 대비가 이성을 위해 일치의 필요성을 내포한다는 것을 사람들은 부인하지 않는다. 그러나 이 일치, 선과 악이 상위의 사실로 해소되는 이 조건을 어디서 발견할 것인가? 어떻게 이를 상상할 것인가? 그리고 고생하느냐 즐기느냐, 존재냐 비존재냐의 이 이원론을 넘어 우리는 무엇을 상상할 수 있는가? 행복과 고통은 아我와 비아非我와 마찬가지로, 정신과 물질과 마찬가지로 세계의 두 극으로서, 그것을 넘어서는 더 이상 종합이 없고, 관념이 없다. 그것들 없이는 세계 자체가 없으니 말이다. 이러하다면, 우리 운명의 비밀을 더 찾으려고 해야 할 것이 무엇인가? 노동이 무슨 소용이며, 우리의 희망은 어떤 것일 수 있는가? 우리의 운명은 빈곤이다. 우리의 노동은 빈곤이다. 우리의 희망은 빈곤이다. 사회주의는 그 과제의 반밖에 채우지 못했다. 빈곤의 원인들로서 돈, 경쟁, 독점, 결혼, 가족, 소유권, 자유와 정의를 폐지한 후 이 공동체의 위선에서 멈추는 대신 그것은 또한 노동을 금지하고 절망을 설파해야 했다. 사회주의는 자살을 그 최종 교리로 삼는다. 왜냐하면 산업, 학문, 예술에서 언제나 발전하는 것이 인류의 법칙이라면 진로 중에 내딛는 발걸음마다 자기 피로 도장을 찍는 것은 사람에게 필연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그가 점점 더 쓰라린 죽음을 맞는 것, 죽음이 그의 감정의 섬세함, 그의 애정의 생생함, 그의 작업들의 다산성, 그의 열심의 깊이, 그의 쾌락의 기쁨을 속죄하게 하도록 하는 것은 필연이다. 생명만큼 많은 형태를 취해 사람의 심장, 감각기관들, 이성을 공략하고 그 사람을 백만 번 제거하는 죽음 말이다. 죽음! 이것이야말로 우리의 궁극의 이유이며, 이야말로 세계의 신이다! 사람의 최후는 짐승과 같다(Finis est hominis sicut jumenti). 그런데 우리가 무에서 빼내어진 것이 오로지 죽기 위해서라면 우리에게, 우주에게 그로부터 빠져나올 필요성은 어디 있었는가? 창조, 생명, 필연, 섭리, 신과 인간, 모두가 부조리하다.

이게 무슨 정신 착란인가! 이와 관련해서 그리스도교인 경제학자들은 다시 일어선다. 웬 불경한 발광인가! 그들은 말한다. 그렇다. 사람의 최후는 짐승들의 최후와 같으며, 맬서스의 법칙은 사람을 차별하지 않는다. 하지만 이 법칙은 현 생애만 포괄한다. 우리의 진정한 생명은 결코 이승이 아니다. 우리를 나타나게 하고 사라지게 하고 선과 악을 불균등하게 배분하고 개인처럼 종種에게 닥치는 우리 운명의 이 불완전성은 궁극적 생명의 실험, 준비, 전주곡 말고 다른 것이 아니며 다른 것일 수 없다. 우리는 거짓말하지 않으며, 우리 내장의 밑바닥에 행복의 욕구와 함께 불명성에 대한 예감을 놓아둔 자의 말을 보증으로 삼는다. 마지막 숨을 내쉰 후 영혼의 영속성, 더 나은 세계에서의 부활, 이야말로 자연의 보완물이고 생명의 목적이고 섭리의 정당화다.

내가 그에 관해 무언가를 보도록 하는 것까지는 아니라고 해도 단지 내 이성에 그것을 접근 가능하게 할 수 있다면 이 위로가 되는 유토피아를 내가 사랑의 마음으로 받아들일 것이며, 열정을 가지고 이를 포옹해야 할 것이다! 하지만 우주 바깥에, 피조물 계열의 바깥에 무엇이 있을 수 있는가? 내가 그 일부가 되는 저주의 세계가 무한과 같다면, 당신은 내가 이 기쁨의 세계를 어디에 위치시키기를 바라는가? 시간 바깥의 시간, 공간 바깥의 공간, 필연 바깥의 이성을 어디서 발견하는가? 슬픔이 더 이상 도발하지 않고 자극하지 않는 선은 어떻게 상상하는가? 자아와 비아의 절대적 분리, 물질과 정신의 분리를 내포하는, 내 오성의 모든 원리를 질식시키는 불멸성을 어떻게 형상으로 떠올리는가? 영혼 불멸의 가설은 확실성의 기초를 뒤집는다. 끝으로, 내가 그 일부가 되는 분해된 창조 세계와 마찬가지로 현저한, 신적 무능의 증거는 어떻게 내게 불가능한 존재에 기초를 둔 분간이 안 되는 혁신의 담보가 될 것인가?

기하급수에 따른 인구 증가, 산술급수에 따른 생존 수단의 증가, 이 정리는 대수학의 모든 정리들과 마찬가지로 증명된다. 한마디로 정치경제학은 인류에게 사형 선고를 내렸고, 섭리에 유죄 판결을 내렸고, 필연의 오류를 입증했고, 자연에 낙인을 찍었다. 이야말로 내 이성이 나로 하여금 고백하게 하는 것, 내 감각들이 내게 보고, 만지고, 느끼게 하는 것이다. 사람들이 내 고통을 누그러뜨리려고 내게 말하려 하는 모든 것은 그 고통을 더 아프게 만드는 데 소용될 뿐이다. 그리고 내 비탄은 이를 극복하기 위해 상상된 모든 이유들에서 더 심각한 것으로 소생한다. 아니면 정치경제학은 중상모략을 한 것이다. 그리고 어떻게 이를 확인하는가? 숫자의 법칙이 정치경제학을 정당화할 때 어디서 이를 반증할 논리들을 찾는가? 사실들이 정치경제학의 편일 때 이를 거짓이라고 반박하는 증거들은 어디 있나? … 아니면 자연, 필연, 신 그리고 인간은 무의 꿈들일 뿐이다. 우주는 한편의 악몽이다. 이 밤에 얼마나 황당한 논리이며, 이 죽음에 웬 철학인가!

그렇지만 나는 최종 분석을 시도할 것이다. 체형을 선고받은 죄인처럼 내 판결문의 낭독을 즐기기 위해서일 뿐일지라도 말이다. 나는 마치 내가 더 발견할 수 있는 듯이, 마치 과학의 금언들, 백 세기의 증언에 호소하는 것이 가능한 법정이 있는 듯이, 내부에서 나를 사로잡는, 외부에서 나를 짓뭉개는 사실을 구한다. 모든 희망에 역행하는 희망 안에서(In spem contra spem)! 불행한 자여, 절망에 굳게 맞서라. 정치경제학은 나를 하도 많이 속여서 나는 그것에 이 불신의 증거를 보여 주어야만 할 의무가 있다. 그 밑에 신비가 있다. 그리고 내가 다시 시도하는 데는 정치경제학이 이를 들먹이는 것으로 충분하다. 정치경제학은 죽음이 그것을 도와주러 오는 것 아닐까? 그런데 죽음이 이 보조자를 빼앗긴 채 단 한 걸음만 후퇴한다면, 죽음이 이 후퇴하는 행진으로 정치경제학보다 내가 우위에 서게 해 줄지 누가 아는가?

정치경제학은 우리에게 이렇게 말한다. “나는 여러분 모두에게 빵을 줄 수 없소. 왜냐하면 여러분은 내가 여러분 시중을 들 수 있는 것보다 더 빠르게 오기 때문이오. 이는 소집을 받은 자들은 많지만 뽑힌 자들은 별로 없는 이유요!”

너무 많은 그의 젖먹이들에 대해 핑계를 대기 전에 정치경제학은 자기가 의무를 이행했음을 증명할 필요가 있다. 우리는 일찌감치 죽음에 바쳐진다. 정치경제학은 우리의 형 집행을 준비하고, 청원하고, 가속화한 것이 아닐까? 정치경제학의 실책을 완화해 주는 데 소용이 되는 이 빈곤은 부분적으로 그것의 작품이 아닐까? 범죄가 쓸모 있는 자가 범죄를 저지른다(Is fecit cui prodest)! 정치경제학은 우리를 사멸시키는 데 관심을 가진다. 정치경제학은 거짓말을 했다.

. 빈곤은 정치경제학의 소행이다

나는 아직 빈곤이 무엇인지 전혀 모른다. 하지만 나는 한 가지는 확신한다. 그것이 생산보다 앞 시대에 오며, 노동의 척박성이 이를 허가하기 전에 우리를 덮친다는 것이다. 이 사실은 맬서스가 이야기한 사실들 중 어느 것이나 마찬가지로 증명된 것으로서 내가 이 작가의 이론에 들이대기를 원하는 유일한 사실이다. 이는 내가 이 이론을 완전히 뒤엎기에 충분할 것이다.

나는 우선 인류의 존재에서 두 주요 시기를 구분한다. 야만 상태는 본질적으로 정태적인 시대로서 사람이 노동을 몰라서 토양의 자연 산물로, 그리고 동물들의 날고기로만 살아가는 시대다. 그리고 문명은 본질적으로 진보적인 시대로서 사람은 근면해지고, 재료를 변형시키면서 자기 산물로 생존한다.

앞선 시기에 빈곤, 즉 보급품의 고갈과 일차 필요 물품의 부족은 그 사람의 게으름, 그의 여러 능력들의 일반적 무기력을 직접적이고 즉각적인 원인으로 한다. 생산적 노동을 통해 무기력에서 나온 이 빈곤을 완전히 제거하는 것은 아니라도 적어도 연기하는 것이 가능했으므로, 사람이 자연력을 취해 자연력이 줄 수 있는 모든 것을 내놓도록 하기 오래전에 빈곤이 생겨났으므로, 그러한 빈곤이 너무 이른 시기에 생겨났다는 것, 합당한 시간에 앞서 생겨났다는 것, 따라서 그것이 비정상이라는 것이 명확하다. 그리고 야만 상태에서 사람의 무기력은 영원하니 또한 시기적으로 앞섬에도, 그리고 이에 의해 빈곤의 비정상성에도 영속성이 있다.

이야말로 우리가 정치경제학을 야만 민족들을 죽이고 급감시키는 빈곤의 원인이라고 고발하는 경우에 그것이 자기를 방어하기 위해 아주 옳게 말할 내용이다. 정치경제학은 이렇게 대답할 것이다. 조금 더 뒤에 가서 그의 노력의 에너지와 지성에도 불구하고 빈곤이 문명인을 다시 사로잡는 것이 가능하다고. 그러나 인간이 빈곤을 멀리하기 위해 그에게 달려 있는 모든 것을 행하지 않은 한, 그의 노동으로써 그가, 말하자면 섭리에게 독촉하지 않았을 한에서는 그 사람은 학문을 비난하고 불평을 발설할 권리를 지니지 않는다고. 그는 자기 자신의 소위인 불행을 겪으며, 이 불행에 대해 자연과 섭리는 그에게 항의한다. 한 세기가 못 되어 미국의 유럽인들은 이 광대한 대륙의 원주민 모두가 수천 년 동안 거두어들인 부와 행복보다 더 많은 것을 창출했다. 그리고 미국의 새로운 인구가 25년마다 두 배로 늘고 또 두 배로 늘기를 계속하면서 이 인구는 그의 경이로운 활동을 통해 홍인종들의 야만 상태가 이전에 창출한 비참한 자들보다 더 많은 행복한 자들을 만들어 냈다고 말할 수 있다. 아메리카가 숨긴 부와 행복의 보물들은 물론 인간이 이를 취한 수고의 값어치가 있었다. 그리고 30세기 동안 인간이 절제했다면 이에 대해 책임을 질 것은 정치경제학도 섭리도 아니다.

그러므로 인간의 빈곤에는 불의 없이 자연에 미룰 수 없고 여러 세대들의 신속함에도 불구하고 오직 인간의 무기력에서 유래하는 몫이 있다.

현재 문명인을 사로잡는 빈곤이 또한 야만인의 빈곤과 마찬가지로 필연적으로, 그리고 언제나 때 이른 것이 아닌지, 그것이 그 정당한 시간에 앞서 생겨난 것이 맞지 않는지, 그리고 그것이 노동의 부재가 아니라 노동의 조직적 해악을 유일한 원인으로 한다는 것이 맞는 말이 아닌지를 아는 것이 중요하다. 이 경우에 문명인도 야만인과 마찬가지일 것이다. 그의 빈곤은 오직 그에게만 속할 것이다. 그는 그 자신이 필요한 일을 하지 않았고 그의 근면으로써 그를 구제할 필요를 독촉하지 않은 한에서 자연을 비난할 수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야만인의 빈곤이 온전히 그의 능력들을 둔함에 의존하는 것처럼 문명인의 빈곤은 질서의 결여를 유일한 원인으로 하는 것이 맞다면, 완벽한 조직적 상태에서는 인간의 분별력이 다른 어떤 방식으로 개입해 어떠한 인위적 조치든지 동원해서 균형을 재확립할 필요 없이, 빈곤이 다시금 일정 시간 연기될 뿐 아니라 인구와 생산 사이에 수준을 재확립할 구체적 힘이 존재할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인류가 이 가설을 입증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사람들은 느낀다. 그러한 가설이 진실이 된다면 빈곤은 인간의 무기력에서 유래하는 것이든, 산업 조직의 해악을 원인으로 하는 것이든, 무한히 피해지게 될 것이며, 우리 운명의 문제, 세계 운명의 문제는 완전히 다른 면에서 등장하게 될 것이다.

그런데, 이 중요한 입증을 우리는 그 부제목 ‘빈곤의 철학’이 충분히 정신을 환기시키는 이 저작물에서 행했다.

노동은 부의 원리이고 가치들을 창조하고 측정하고 비율을 만들어 주는 힘이라고 우리는 말했다. 측정하고 비율을 만들어 주는 것, 이는 또한 분배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노동은 모든 헐벗음을 겪을 위험에 대해 사람을 보장해 주어야 할 것으로 보이는 다산성과 동시에 균형의 잠재력을 지닌다.

그러나 효과를 나타내려면 노동은 정해지고 규정될, 즉 조직될 필요가 있다. 왜냐하면 우리가 여러 번 언급한 것처럼 관념들에는 분별 가능성과 발현의 하나의 조건만 있는 것처럼, 사물들에는 효능과 지속성의 하나의 조건만 있기 때문인데, 이는 규정이 된다는 조건이다. 노동이 규정되지 않는 한, 그 조직이 마지막 손길을 받지 못한 한, 이는 모호하고 척박한 힘이며, 분간이 안 가는 관념이다.

그러므로 노동의 기관器官들은 어떤 것들인가? 다른 말로 하면 인간 노동이 가치를 생산하고 구성하며 빈곤을 추방하는 형태들은 어떤 것들인가? 왜냐하면, 오늘날 노동과 빈곤은 질서와 무질서처럼, 정의와 약탈처럼, 존재와 무처럼 서로 반대된다는 것이 충분히 명백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런 노동의 형태들과 범주들을 우리는 열거했고, 그에 대해 비판했다. 이는 노동 분업, 기계, 경쟁, 독점, 국가 혹은 중앙 집중, 자유무역, 신용, 소유권과 공동체다. 노동이 자신 안에 부를 창조할 수단들을 소유한다면, 이 수단들은 그것들에 고유한 적대성 때문에 그만큼의 새로운 빈곤의 원인들이 될 가능성을 가진다는 것이 우리의 분석 결과로 나왔다. 그리고 정치경제학이 이 적대성의 언명 말고 다른 것이 아니므로, 바로 이에 의해 정치경제학은 극빈층의 존재 긍정과 조직이라는 것이 사실로 드러난다. 그러므로 노동이 어떻게 원시적 빈곤을 추방할 것인가를 아는 것은 더 이상 문제가 아니다. 그것은 오래전에 사라졌다. 문제는 우리가 어떻게 노동의 고유한 폐단에서, 혹은 더 제대로 말해서 노동의 잘못된 조직에서, 정치경제학에서 나오는 극빈층을 제거할 것인가다.

산업 진화의 첫 순간에 여러 산업의 분업 혹은 분리가 나타난다. 토지는 텅 비고 모호한 상태를 중단한다. 노동자들로 뒤덮이고 전유에 의해 비옥해진다. 노동은 분업을 통해 초자연적 다산성을 획득한다. 그러나 동시에 이 분업이 행해지는 방식으로 인해 노동이 일꾼을 무뎌지게 만들면서 노동은 급속히 자기 자신의 밑으로 추락하고 불충분한 가치만을 내놓는다. 생산물의 풍부함 덕에 소비를 유인한 다음 임금의 미약함 때문에 노동은 일꾼에게 부족해진다. 빈곤을 추방하는 대신 이를 다시 불러들인다. 노동 분업은 집단적 존재에게 유해한 산업들이 이를 실행하는 자들에게 작용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작용한다. 집단에 풍부함을 마련해 주면서 중독시키고, 생명으로 초대한 후에 죽음에 다시 빠뜨린다.

그러므로 여기서 빈곤은 노동의 고유한 해악이다. 부족을 일으키는 것은 자연도 섭리도 아니다. 균형을 결여하는 것은 경제적 일상 관행이다. 비난할 필요가 있는 것은 그것뿐이다. 파편적 분업에서 결과로 나오는 모순이 더 고도의 조합을 통해 극복될 수 없음을 아무것도 증명해 주지 않는 만큼 더욱더 그렇다.

정치경제학 자체는 이를 감지했다. 그리고 새로운 기관인 기계에게 도와달라고 서둘러 호소한 것은 이 때문이다.

분업에 결합된 기계들의 도움으로 50평방리외(800평방킬로미터)의 면적에 거주하는 10만 노동자는 야만인 10억 명보다 더 많이 생산한다. 이 야만인들은 땅을 긁기 위한 손톱만 가지고서, 먹잇감을 잡기 위한 손, 이를 공격하기 위한 발만 가지고서 또한 생존을 위해 지구 면적의 열 배가 되는 토지 면적을 필요로 할 것이다. 그리고 산업적 발명의 한계는 획정이 불가능하므로 또한 이런 측면에서 노동은 무제한의, 따라서 미지의 정도로 가속화될 수 있는 다산성을 누린다는 것이 확실하다.

그러므로 기계는 분업에 의해 야기된 결함을 복구하고 빈곤을 이겨내 가는 것 같다. 이는 아무것도 아니다. 기계와 더불어 주인과 임금 수령자들, 자본가와 노동자의 구별이 시작된다. 파편적 노동이 노동자에게 초래한 신경의 무뎌짐에서 기계 역학에 의해 구원을 받아야 했던 노동자가 오히려 거기 점점 더 깊이 빠져든다. 그는 인간적 특성과 함께 자유를 상실하고 도구의 조건에 빠진다. 수장들에게는 행복이 증대하고, 하급자들에게는 해악이 증대한다. 카스트들의 구분이 시작되고 기괴한 경향, 사람들을 배증하면서도 사람들 없이 해 나가고자 하는 경향이 나타난다. 이와 같이 보편적인 곤란이 심각해진다. 이미 파편적 분업에 의해 예고된 빈곤은 공식적으로 세상에 등장한다. 이 순간부터 빈곤은 사회의 영혼과 신경이 된다.

그러므로 여기서 빈곤을 야기하는 것이 사람들의 과잉 생산인가, 아니면 빈곤은 오히려 잘못된 조작의 결과인가? 모든 지점에서 생존의 필요, 따라서 노동할 필요가 느껴지니, 그리고 노동의 공급은 수요에 의해 추월되니 노동이 부족한 것은 아니다. 모든 부분에서 판로가 없고, 돈을 지불한 사람들이 없고, 임금이 없어서 값이 떨어지는 산물의 공급 과잉에 대해 불평을 하니 생존 수단도 부족하지 않다.

그러므로 인류는 문명적 모습의 떠돌이 야만 습성을 다시 띠고서 그의 무기력에서 나오는 빈곤을 그의 조합들에서 나오는 빈곤으로 변화시키기만 했다. 사람은 그의 힘을 열 배로 키워주는 노동의 분업 때문에, 이를 백 배로 키워주는 기계 역학 때문에 사멸한다. 옛날에 잠과 게으름 때문에 사멸했던 것과 마찬가지다. 인류의 해악의 첫째 원인은 언제나 그 자신에게 있다. 그런데 운명을 탓하며 외치기 전에 극복할 필요가 있는 것은 이 원인이다.

그 귀족주의적 경향에 대해 사회는 자유, 경쟁을 대립시킨다. 그러면 무슨 일이 일어나는가? 이를 시야에서 놓치지 말자. 이를 우리에게 가르쳐 주려고 수고한 자들, 이들은 빈곤의 사도들인 경제학자들이다. 노동자를 해방시키는 경쟁은 계산할 수 없는 부의 증대를 낳는다. 노동의 자유를 목적으로 한 혁명에 이어서 다수 인민에게서 한 세대 내내 빈곤이 물리쳐진 것을 사람들은 보았다. 그렇다면 나는 경제학자들에게, 파편적 분업에 의해 생겨나고 일정 지점까지 기계 역학에 의해 억제된 빈곤이 아무런 숙명적인 것도 가지지 않은 것들과 마찬가지로, 기계에 뒤따라서 자본과 임금 노동의 제도 후에 찾아온 빈곤도 불가항력적 원인에 조금도 관련되지 않았다는 증거를 보여줄 것이다. 우리가 전진해 갈수록 빈곤은 우리에게 더욱 우발적이고 비정상적인 특성을 가지고서, 자연의 비인도성이 아니라 우리의 미숙함에 대해 증언해 주는 간헐 증상과 악화를 일으키며 나타난다.

실제로 위에서 바라볼 때, 대중 사이의 경쟁은 무엇인가? 이는 말하자면 완전히 형이상학적인 힘으로서 노동의 산물들이 끊임없이 가격이 낮아지고, 혹은 같은 것이지만 계속해서 양이 증가하게 해주는 힘이다. 그리고 경쟁의 수단들은 기계적 개량과 배분적 조합들과 마찬가지로 무한하므로 또한 경쟁의 생산적 잠재력은 강도와 연장에서 한계가 없다고도 말할 수 있다.

특히 고려할 한 가지는, 경쟁 때문에 부의 생산이 결정적으로 사람들의 출산에 앞선다는 것이다. 이는 맬서스가 생존 수단의 진보와 인구의 진보 간에 확립한 관계를 경제적 비상식으로, 거꾸로 된 이론으로 만들어 주는 것이다.

나는 이 점에 대해 독자의 주의를 촉구한다.

경쟁에 의해 각 생산자는 언제나 더 낮은 가격에, 말하자면 언제나 소비자의 수요보다 더 많이 생산하고, 따라서 매일 저녁 사회에 그 다음 날의 생존 수단을 제공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므로 그러한 체제에서 생존 수단의 총계가 인구의 필요 미만으로 떨어지는 것이 어떻게 가능한가?

나는 고립된 두 사람이 용구를 가지지 않으면서 짐승들처럼 빈약한 먹을거리를 얻으려고 싸우면서 2에 해당하는 가치를 내놓는다고 가정한다. 이 두 불쌍한 사람이 체제를 바꾸어 분업에 의해, 그로부터 나오는 기계 역학에 의해, 그리고 뒤따라오는 경쟁심에 의해 그들의 노력을 합친다고 하자. 각자가 단지 자신을 위해 생산하는 것이 아니라 그의 동료를 위해서도 생산을 하니 그들의 생산물은 더 이상 2와 같지 않을 것이고, 4와 같을 것이다. 노동자 수가 두 배로 되어 분업이 이 배증에 비례해 전보다 더 심화되고 기계들이 더 위력이 있게 되고, 경쟁이 더 치열해지면 그들은 16을 생산할 것이다. 그들의 수가 네 배가 되면, 64를 생산할 것이다. 노동 분업, 기계, 경쟁 등에 의한 산물의 이런 배가는 경제학자들이 여러 번 입증한 것이다. 거기에 그들 이론의 긍정적인 면이 있으며, 이는 그들 모두의 의견이 일치하는 점이다. 그러나 실무는 사회가 마지막 개혁으로써 그 모순을 해결하지 못할 동안에는 이론이 기대하게 하듯이 해줄 수 없을 것이다.

그러므로 인류의 생식적 재생산의 잠재력이 1, 2, 4, 8, 16, 32, 64… 등의 급수로 표현된다면, 산업적 재생산의 잠재력은 1, 4, 16, 64, 256, 1024, 4096…의 급수로 표현되어야 할 것이다. 다른 말로 하면 조직된 사회에서 생산은 노동자 수의 제곱으로 증가한다. 우리를 가르치는 것은 정치경제학 자체다. 그 모든 책들은 이런 내용으로 가득하다. 그리고 고착된 생각, 인구의 배증이라는 생각에 사로잡힌 맬서스가 그것을 망각했다면 그의 동료들은 왜 이를 기억하지 못했는가? 왜냐하면 맬서스가 확정한 인구와 생존 수단 사이의 증가 비율은 산업, 즉 분업, 기계 역학, 경쟁, 교역 등이 절대로 무이고 집단적 힘이 존재하지 않는 무기체 사회에 대해서만 수긍될 수 있고, 맞물려 있으며 산업들의 관리와 교역에 기초를 둔 사회, 각 사람이 수백만 소비자를 위해 생산하면서 수백만 생산자로부터 공급을 받는 사회에 대해서는 결코 수긍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어떤 농학자들이, 그리고 이들에 이어 어떤 맹목적인 사회주의자들이 사중적(四重的, quadruple produit)이라는 것으로 말하고자 한 것을 이렇게 이해할 필요가 있다. 인구와 발달의 정도가 주어진 어느 나라가 지금 생산하는 것의 두 배, 세 배, 네 배를 생산할 수 있다는 것은 참이 아니다. 산출은 필연적으로 인구에 비례하며 인구는 이번에는 분업의 정도, 기계들의 힘, 유통 활력 등을 정해준다. 그러나 참인 것, 과학이 인식하고 증명하는 것, 이는 인구의 증가가 두 배면 생산의 증가는 네 배이며, 사회가 경제 법칙에 복종할 만큼 오랫동안, 그리고 지구의 표면적이 이 증가분을 포함할 만큼 멀리까지 이런 식으로 무한히 계속 늘어난다는 것이다.

유감스럽게도 경제 제도들의 적대성은 그것들이 충돌 없이 그 효과를 내도록 허락하지 않는다. 그로부터 노동에 대한 실망이 나오고, 그로부터 빈곤의 기습이 나온다. 이처럼 경쟁은 그 긍정적이고 사회적인 면을 이용해 물건의 가격을 무한히 낮추고, 따라서 가치들의 총계를 끊임없이 늘리며, 생산을 인구보다 앞서게 하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그러나 그 부정적이고 이기적인 측면 때문에 경쟁은 그것이 초래하는 가격 하락이 한편에서는 승리자에게만 이득을 주고, 패배자를 일자리와 자원이 없이 방치하니 부에서 빈곤으로 방향을 전환한다. 이론은 경쟁이 모든 사람을 부유하게 해주어야 한다고 말한다. 그러나 실제는, 사회적 유기체의 불완전성 때문에 경쟁이 일반적이 된 곳에서는 부유하게 된 자들과 꼭 같은 만큼의 불행한 자들이 있음을 증명해 준다. 이는 우리가 행한 비판 후에 의심하는 것이 불가능한 것이다.

여기서 비난할 필요가 있는 것은 그러므로 제도의 고유한 해악, 관념의 부족함이다. 이제부터는 빈곤의 이 필연성, 방금 우리를 망연자실함에 빠지게 한 것이 결코 절대적이 아님이 증명된다. 그 학파가 말하듯 이는 우발적 필연성이다. 일체의 개연성에 상반되게 사회는 사회의 안녕을 이루어 주어야 할 그것 자체로 고통을 받는다. 언제나 빈곤은 때 이른 것이며, 언제나 극빈층은 미리 생긴다. 무기력 때문에 흉년을 맞는 야만인과 반대로 빈곤은 행동 때문에 우리에게 찾아오며, 우리의 노동은 끊임없이 궁핍을 더해 준다. 경제학자들은 필연을 비난하기 전에 그들의 일상 관행을 개혁하는 것으로 시작하도록 하라. 의사여, 그대를 치료하시오(Medice, cura te ipsum).

이 재검토를 계속하고 일반적 결론을 표명하는 것으로 내게는 충분할 이 장에 내 저작 전체를 다시 실을 필요는 무엇인가? 나는 사회가 자기를 피하는 이 균형을 이 공식, 저 공식에서, 이 제도, 저 제도에서 찾고 있으며, 그런 시도를 할 때마다 같은 비율로 자기의 호사豪奢와 자기의 빈곤을 성장하게 만드는 것을 보여 주었다. 일단 공동체에 도달하면 사회는 그 출발점에 놓인다. 경제적 진화는 완성되었고, 탐구의 장은 고갈되었다. 균형은 도달될 수가 없어서 여러 이론들을 종합해 노동에 그 효능을 주고 그 기관器官 각각에 잠재력을 주는 전체적 해결에만 희망이 남아 있다. 그때까지는 빈곤이 나태함에 묶여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극빈층은 노동에 불가항력적으로 묶인 채로 남아있다. 그리고 우리의 섭리에 맞선 모든 불평은 우리의 아둔함을 증명할 뿐이다.

헐벗음이 계속해서 풍부함에서 결과로 나오고, 노동의 금지가 노동할 필요의 영속적인 결과인 우리의 경제는 진실로 이상한 경제다! 군주의 칙령에 의해 50만 명의 기생자들이 갑자기 비생산자 명단에서 지워져서 작업장과 경작지로 보내지면 복리의 증가 대신에 우리는 빈곤의 증가를 보게 될 것이다. 비생산자 계급에는 고용도 소득도 없는 50만 명이 있을 것이다. 기업가, 소유권자, 산업 수뇌 계급에는 섬겨야 할 기생자가 50만 명 줄어들 것이고, 이미 크게 배증되어 있는, 그리고 임금이 아주 낮은 노동자 계급에는 경쟁자가 50만 명 더 있을 것이다. 일손의 가격은 낮아지고, 생산물의 수량은 늘어나고, 시장은 축소된다. 프롤레타리아트에게는 절제와 노예 상태가 진전되고 소유권 계층에게는 사치와 고집이 진전되는, 이런 것이 이성이 우리에게 공공 안녕의 조치로 가르쳐주는 개혁의 결과들일 것이다. 우리는 더 부유해질 것이기 때문에 바로 그 이유로 더 가난해질 것이다. 그리고 자신들의 마법서에서 아무것도 이해하지 못하는 경제학자들이 결혼의 경솔함, 사랑의 시기가 좋지 않음, 뭐랄까, 부부의 외설적 행동을 비난하는 것을 보게 될 것이다!

사실들이 쇄도하고 축적되고 사방에서 정치경제학에 맞서 외쳐도 소용없다. 이를 이야기하고, 전개하고, 주석을 다는 작가들은 아무것도 보지 않기 위해서만 눈을 가지고, 아무것도 듣지 않기 위해서만 귀를 가지며, 진실을 숨기기 위해서만 지성을 가지는 듯하다. 소유권, 고리대, 조세, 경쟁, 기계, 파편적 분업은 인구가 넘쳐나기 전에 인구를 억제한다. 50만의 배급 말고는 생존을 위해 가진 것 없는 100만의 사람들이 어떻게 될 것인지에만 매달리고 있는 경제학자는, 왜 50만 명이 100만 명에게 족할 것을 가지고 살아갈 수 없는지를 자문해 보지 않는다. 선량왕 장 2세 때에는 프랑스 인구가 1200만 명이었다. 루이 14세 때에는 1600만 명이었고, 루이 16세 때에는 2500만 명, 오늘날은 3400만 명이다. 이 모든 시대에 가난한 자들, 엄청난 수의 가난한 자들이 있었던 것은 변함없다. 가난한 이들에 맞서 만들어진 잔혹한 법률들이 이를 증명해 준다. 그런데 이 시대들 중 어느 시대에 프랑스 사회가 그 수단들을 고갈시켰다고 말할 수 있는가? 10세기 전에 프랑스는 그 생산을 20배로 할 수 있었다. 제3신분은 게으름의 혐의가 없었다. 어디서 극빈층이 나왔는가?

경제학자들에게 26년 만에 인구가 두 배로, 심지어 세 배로 증가하는 가장 괄목할 예들을 제공한 것은 미국이다. 그런데 한 세기 혹은 한 세기 반 전부터 미국에서 인구가 26년마다 두 배, 세 배로 늘었다면, 생산은 적어도 같은 시기에 두 배, 세 배로 늘었던 것이 명확하다. 그리고 이 경과 시간 중에 인구는 생산을 쫓아가기만 했다고 말할 수 있다. 미국 인구의 진보를 아주 잘 해설한 맬서스가 어떻게 마찬가지로 다른 상황들에서 생존 수단의 병행적 진보를 방해하거나 중단시키는 원인들을 연구하지 않았는가?

“아! 미국의 경우는 예외적이다. 미국은 처녀국이었다”고 그 경제학자는 대답한다.

처녀국이라! 하지만 그 나라 땅은 이로쿼이 족들과 휴런 족들을 위해 쓰였는데, 이들은 아메리카 대륙 발견 이전에 벌써 우리가 오늘날 그러듯이 부보다 출산에서 더 빠르게 나아갔고, 단순한 사냥꾼들로서 오래전부터 산업을 영위하는 유럽인들이 아직 증식을 하면서도 부유해지기를 중단하지 않은 바로 그곳에서 불쌍한 자들로 있었던 것이다. 처녀국이라고! 차라리 산업적 위계의 부재 덕분에, 아메리카 식민자들의 이 평등 덕분에, 이 평등은 당신의 경제적 전행 절차들의 작용 속에 벌써 사라지기 시작하는 숲들이 만들어 준 간격으로 보호를 받아서 노동자는 어디서나 자기 소출 전체를 누리고, 언제나 쓸모 있는 작업을 행해 18년마다 인구가 두 배가 됨에도 불구하고 부자가 될 수 있었고, 부자로 자신을 유지할 수 있었다고 말하라. 아메리카의 예는 단지 인류가 인구 문제에서 할 수 있는 것만 입증해주는 것이 아니다. 또한 사람의 잠재력이 생산 문제에서 어디까지 갈 수 있는지도 보여준다. 저곳에서는 아주 명백하고 아주 공신력 있는 이 병행이 다른 곳에서는 왜 지탱될 수 없었는가? 이런 질문을 하는 이유는 여기서는 병행적인 진보만큼 진보의 신속성이 중요하지 않기 때문이다. 처녀국이라! 확실히 영국, 스위스, 독일의 개척자가 살아오고 인구가 배증한 것은 이 영구적인 숲들에 불을 질러서가 아니다. 이는 노동에서, 내가 말하건대 노동에서 나온 것이다. 우선은 적절하게 분화되고, 그 다음은 점점 자본과 기계를 동반해서, 유통을 통해 가치를 늘리고, 아직 기생 계급과 독점에 의해 척박하게 되지 않은 노동에서 나온 것이다. 그 증거는, 유럽에서 수입된 정치경제학이 이 나라에서, 토지와 공간이 누구에게도 결핍되지 않고 노동이 자본의 노예살이, 은행가의 중개, 경찰의 감독을 거치지 않고 그 자체로 이익이 되는 곳인 이 나라에서, 다소 너무 일찍 기능하기 시작해 인민이 정치경제학을 굴러가게 놔두고, 단지 그 톱니바퀴를 돌리기만 하면 되었다는 것이다. 신용은 낮은 데서 흘렀고, 은행들은 도약했고, 개발자인 자본은 집어 삼켜졌고 미국인은 노동과 평등으로 자기 재산을 추구했다. 의문의 여지없이 이 경이로운 진보가 덜 민첩한 걸음으로 갈 날이 올 것이다. 하지만 그때와 마찬가지로 의문의 여지없이 인구는 제약과 빈곤 없이, 정치경제학, 불안정과 도둑질의 이론인 이것이 이 조화를 깨러 오지 않는다면, 자생적으로 그 도약의 속도를 늦출 것이다.

뷔레(E. Buret), 그리고 그의 뒤에 픽스(M. Fix) 씨는 50년 전부터 프랑스에서 국부가 다섯 배로 늘어난 반면 인구는 절반도 늘어나지 않았음을 관찰한다. 이 계산에서 부는 인구보다 열 배는 빠르게 전진했을 것이다. 빈곤이 비례적으로 축소되는 대신에 증가한 것은 어디서 유래하는가?

부를 생존 수단과 혼동하지 말라고 경제학자는 말할 것이다. 부는 노동의 산물로서 사람에게 영양분과 마찬가지로 쾌락에서 어떤 가치든지 가지는 모든 것으로 구성된다. 생존 수단은 이 부에서 생활의 유지에 특별히 더 소용이 되는 부분이다. 그런데 맬서스의 산술급수를 이해할 필요가 있는 것은 부의 이 부분에 대해서다.

우스운 구분, 가치들의 비례성 이론에 따라 앞서 반증된 우스운 구분이다. 생존 수단은 필연적으로 부의 다른 부분들과 관계가 있으며, 50년 전부터 프랑스의 소득이 다섯 배로 늘어났다면 프랑스는 다섯 배 더 소비한다고 말하는 것은 엄밀히 참이다. 사회 안에서 모든 가치들은 서로 측정이 된다. 즉 서로 결제를 해주며, 서로 지탱을 해준다. 사치품의 생산은 바로 생존 수단이 충분한 양이 된다는 것을 증명해 준다. 결국 이 사치품의 값이 지불된 것은 이 생존 수단이 돈이나 다른 가치물로 지불된 것처럼 생존 수단으로 지불되었으니 말이다. 50년 전부터 1차 필수품의 물건 가격이 상대적으로 증가한 것은 감지했는가? 정반대로 상대 가격은 오히려 약화도니 것 같다. 그리고 생존 수단이 포도주처럼 인민에게 결핍된다면 그 잘못은 포도원이나 포도 재배 농부에게 있지 않다. 포도 재배 농부는 판매할 수 없다고 불평하니 말이다. 그 잘못은 정치경제학에 있다.

게다가 인간의 행복은 풍요와 다채로움으로 이루어져서 우리가 사치라고 부르는 것은 근본적으로 진정한 저축일 뿐임을 누가 모르는가? 날고기와 몇 가지 끔찍스러운 음료로 살아가는 야만인은 한 달 새에 나라의 1평방리외(16평방킬로미터)의 자원을 거덜 낼 것이며, 그 부양에 숲의 사람들이 모르는 백만 가지 물건을 요하는 문명인은 4헥타르의 땅 위에서 생존할 것이다. 그의 사치는 야만인의 나체 생활에 필요한 것보다 삼사천 배 좁은 공간에서 유지도리 수 있다. 사치는 피부, 눈, 귀, 콧구멍, 상상, 기억에 의해 양식을 섭취하는 기술로 생리학적으로 정의될 수 있다. 빈곤은 반대로 유일 기능, 위胃의 기능으로 축소된 생활이다. 무슨 말인가? 심지어는 우리의 음식을 천 가지 형태로 배증하고 우리에게 더 잘 먹도록 가르치지만, 실상은 우리에게 절약의 원천이 아닌, 세네카가 그의 황당한 과장에서 아가리의 기술이라고 부른 요리법도 없다. 요리는 노동 후에 부족에 대비한 우리의 가장 소중한 보조 수단이다. 그리고 프롤레타리아가 너무 많이 먹어서 대가족에게 부담이 되는 것은 바로 그가 충분히 소비하지 않기 때문이다.

나는 그러므로 내 질문을 강조할 권리가 있다. 우리의 부는 다섯 배로 늘었고, 우리의 인구는 50퍼센트만 늘었는데, 어떻게 아직도 우리들 중에 가난한 자들이 있는가? 후세를 걱정하고 지구상에서 얼마의 주민이 살 수 있을지를 찾기 전에 내게 대답해 주기 바란다.

영국에서 구빈세는 다음과 같았다.

연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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액수(파운드스털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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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민 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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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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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78,8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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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872,9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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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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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870,8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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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978,8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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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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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00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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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00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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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에 따르면 극빈층이 시기상 앞서는 것이 맞는가, 맞지 않는가? 그리고 이 수치들이 한편으로는 공식적인 수치들로서 물론 내가 주는 의미를 지닌다는 증거는 1833년 이래로 영국에서 사람들이 맬서스의 이론을 적용하려고 시도했다는 것, 즉 소득도 임금도 소유하지 못하는 자들을 사멸하게 방치한 것, 그리고 이 관념의 첫 번째 결과는 강제 노동 수용소의 창설이었고, 최종적으로는 곡물법의 개혁, 즉 빵 값의 자의적인 인하였다는 것이다. 사람들은 독점의 폭력적 폐지가 빈곤을 완화하는 데에 큰 효과를 지닐 수 있다고 상상했다. 미래는 이 화려한 개혁이 포함한 합리적이고 유익한 것을 말해줄 것이다. 그러나 경제학자들은 대부분이 자유무역 동맹의 지지자들로, 암묵적으로 빈곤이 자녀들의 과잉 생산 말고 다른 원인들을 가진다는 것을 그에 못지않게 인정했다. 그들이 독점에 의해 실행된 약탈의 명세서를 작성하기 시작했고, 그래서 이를 마무리했으니 말이다!

나는 프랑스의 범죄에 관한 「주르날 데 제코노미스트」(1846년 1월)의 한 기사에서, 모든 종류의 범죄 및 경범 건수가 기간별로 다음과 같았다는 것을 읽는다.

기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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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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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26~18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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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8,7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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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29~18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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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6,08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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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32~18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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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6,1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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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35~18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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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1,2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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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38~18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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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5,06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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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41~18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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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1,6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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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재미있는 통계의 저자는 다음과 같은 말로 결론을 짓는다.

“범죄와 경범의 건수는 그러므로 급속하고 가속화된 방식으로 증가한다. 이처럼 인구의 인 평균 증가가 1000분의 5도 채 안 되고 더 늦어지는 경향을 띠는 반면, 1000을 기준으로 한 연평균 증가는 범죄 종류별로 다음에 달한다.”

“인구의 증가가 늦추어지는 반면 범죄 및 경범 건수는 증가하는 경향을 띤다. 그리고 이 증가는 프랑스에만 특별히 해당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심지어 여러 이웃나라들에서보다 프랑스에서 덜하다.”

증가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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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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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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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적 사안에 대한 범죄 및 경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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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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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덕관념에 대한 범죄 및 경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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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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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에 대한 범죄 및 경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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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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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유 재산에 대한 범죄 및 경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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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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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건수가 무수한 삼림 관련 경범 외의 위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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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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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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범죄와 경범은 자살, 질병, 신경의 무뎌짐과 마찬가지로 빈곤이 흘러가는 문들이다. 공식 수치에 따르면, 인구의 평균 증가는 1000분의 5인데, 범죄의 증가는 총계가 31.2여서 극빈층은 우리에게 맬서스 이론에 따라 우리가 기다릴 여지를 가진 것보다 6과 4분의 1배 빠르게 도달하는 결과가 된다. 이 불비례는 무엇에 관련되는가?

같은 것이 다른 방식으로 증명된다. 일반적으로 여러 민족이 극빈층의 사다리에서 부의 사다리에서와 같은 순위를 차지한다. 영국에서는 다섯 명에 한 사람이 궁핍한 자다. 벨기에의 북데파르트망에서는 여섯 명에 한 명이 그렇다. 프랑스에서는 아홉 명에 한 명이다. 에스파냐와 이탈리아에서는 서른 명에 한 명이다. 터키에서는 쉰 명에 한 명이다. 러시아에서는 백 명에 한 명이다. 아일랜드와 북아메리카는 피차 예외적이고 상반되는 입장에 처해 있는데, 전자는 두 명에 한 명 이상인 놀라운 비율이고, 후자는 천 명에 한 명 그리고 그 미만도 될 수 있는 비율이다. 이처럼 정치경제학이 규칙적으로 작동하는 밀집한 인구를 가진 모든 나라에서 빈곤은 전적으로 소유권에 의해 노동 계급에 야기된 적자로 이루어진다.

1789년 이전에 보호소에서 발견되고 부양되는 자녀들의 수는 40,000명이었다.

1800년에는 51,000명으로 상승했다.

1815년에는 67,966명으로 상승했다.

1819년에는 99,346명으로 상승했다.

1834년에는 129,699명으로 상승했다.

나는 1846년의 수치가 얼마인지 모른다. 이 해의 「주르날 데 제코노미스트」는 연평균 사생아 수를 75,870명으로 보도한다. 이로부터 위의 급수에 따라 현재 보호소에서 부양되는 사생아 수는 16만 명보다 적지 않다는 결론을 내리는 것이 허락된다. 1789년에서 1846년까지 인구는 반도 늘지 않았다. 반면에 부는 다섯 배 늘었고, 도덕관념도 개선되었다. 그리고 사생아 수는 네 배로 늘었다! 무엇을 말해야 하는가? 매년 가족에 대한 권리, 혼인권jus connubii이 박탈된 소년, 소녀가 32만 명 있고, 인구가 정체한 상태로 있는 가운데 소유권의 침략 행위들은 한눈에 보아도 프롤레타리아트를 키운다는 것이다.

나는 다른 데서(제4장) 경제학자들이 관찰한 평균 신장의 감소를 언급했다. 의심되는 것으로 물리칠 수 없는 이 사실은 노동을 중단시키고 생존 수단을 사라지게 하는 흉작에 따라 갑자기 생겨나는 것과 같은 우발적인 빈곤이 아니라 종 전체에 닥치고 사회라는 몸의 모든 지체들을 심각하게 공격하는 체질적이고 만성적인 빈곤을 증언한다. 확실히 여기에는 호기심을 활발하게 자극하면서 맬서스의 원리로는 전혀 설명이 안 되는 무언가가 있다. 빈곤은 수단이 없는 개인들에 닥쳐서 살아 있는 사람 수에서 가난한 자들을 빼내는 데 만족하지 않고 종의 집단에 영향을 주고 연대적인 고생을 통해 그 생명에 영향을 주는 결과가 될 것이다. 인류가 미지의 악, 생존 수단의 부족보다 더 높은 데서 오는 악으로 죽는다는 것을 한 번 더 말해주는 증거다. 우리에게 이 악이 무엇인지를 한번 말해줄 텐가?

사람들은 이 사실에 평균 수명의 연장을 대치시킨다. 능숙한 통계학자들도 확인했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나는 인민에 관해서 이 수명 연장이 가지는 환각적인 점을 보여 주었다. 나는 두 건의 관찰을 조화시키고 설명하는 한마디 말만 덧붙일 것이다. 내가 주장하듯이 우리의 소유권 조직에서 극빈층이 계속해서 노동보다 앞서 생겨나는 것이 참이라면, 이 미리 생겨남이 갑작스러운, 때 이른 죽음에 의해 발현되든 아니면 단지 때 이른, 그리고 오랫동안 겪는 고뇌에 의해 발현되든 상관이 없다. 그러므로 이에 따르면, 평균 수명의 수치가 유지되고 심지어 올라가면서도 빈곤이 항상 커지는 것이 가능할 것이다. 왜냐하면 여기서 죽는 자들이 병 없이 산 시간보다 그들의 나이는 덜 중요하기 때문이다. 우리가 경제학자들에게 그들의 통계를 이해하는 법을 가르쳐 주는 것도 필요한가?

더 많은 증거들을 축적하는 것은 쓸데없는 일이다. 사실은 모든 사람에게 알려져 있다. 각자는 이를 질문하고 거기서 결과들을 도출할 수 있다. 빈곤이 시기상으로 앞서는 것, 이야말로 야만 상태를 가르쳐주는 모습인 것처럼 소유권 체제를 가르쳐주는 모습이며, 내가 맬서스에게 들이대고 그의 이론을 허무한 것으로 만드는 중대하고 보편적인 사실이다.

압도적인 다수의 사실들에 의해 확증된 과학의 자료들에 따르면, 인구는 그 비율이 2인 기하급수에 따라 증가하는 경향을 띠는 반면에, 이 인구의 작업인부의 생산은 그 비율이 4인 기하급수에 따라 증가하는 경향을 띤다. 그러나 실무에서는 이 비율은 뒤집힌다. 인구의 증가 잠재력은 1, 2, 4, 8, 16, 32, 64…의 기하급수에 의해 변함없이 표현되는 반면, 생산의 증가 잠재력은 1, 2, 3, 4, 5, 6, 7…의 산술적 계열로만 표현된다.

그러면 무엇인가! 경제학자들이여, 당신들은 감히 우리에게 빈곤을 말한다! 그리고 당신들에게 당신들 자신의 이론의 도움을 받아 인구가 두 배로 늘어나면 생산은 네 배로 늘어난다는 것, 따라서 빈곤층은 사회경제의 교란에서만 생길 수 있다는 것을 증명해줄 때, 당신들은 대답 대신 문제로 제기하는 것이 터무니없는 것, 인구가 생산을 초과함을 비난한다!

당신들은 우리에게 빈곤을 말한다! 그리고 당신들에 따른다면 인구의 초과가 극빈층을 정해 준다고 하지만 극빈층이 인구보다 훨씬 더 빠른 급수로 증가하는 것, 따라서 저 아래에 당신들이 감지하지 못하는 비밀의 원인이 존재 한다는 것을 당신들의 통계를 손에 들고서 보여줄 때, 당신들은 모르는 체하고 맬서스의 이론을 끊임없이 앞세운다!

당신들은 인구 증가의 이 잠재력을 사회주의를 막는 방패로 삼는다! 그리고 옛날 사람들인 우리가 어려운 과제, 그리고 당신들이 방치한 과제, 애덤 스미스, 리카도, 장 바티스트 세, 심지어 맬서스 같은 이들의 과제에 다시 착수해 약탈적인 원리를 당신들 눈앞에 폭로할 때, 우리가 당신들에게 인류는 언제나 빵과 토지가 모자라기 전에 습격을 당한다는 것을 증명할 때, 당신들 면전에서 우리가 소유권자의 횡령, 자본주의적 허구, 상인의 도둑질의 메커니즘을 전개할 때, 당신들은 아무것도 보지 않기 위해 눈을 감고, 아무것도 듣지 않기 위해 귀를 막고, 양심에 굴복하지 않기 위해 가슴을 닫는다! 세기의 악이 당신들에게는 가난한 자의 권리보다 더 소중하며 당신들 패거리의 이익이 과학의 이익보다 앞선다!

그러면 좋다! 당신들이 경솔함과 인구를 외치는 한에서는 우리 쪽에서는 위선과 강도질이라고 외칠 것이다. 우리는 당신들에게 노동자들에 대한 불신을 지적해줄 것이다. 그리고 우리를 살해하는 착취와 우리를 더럽히는 치욕에 대해 책임을 져야 할 사람들은 당신들, 오직 당신들이다. 우리는 어디서나 천둥소리로 거듭 말할 것이다. 정치경제학은 빈곤의 조직이며, 도둑질의 사도들, 죽음의 제공자들은 경제학자들이라고.

오늘날 모두에 대해, 그리고 모두에 맞서, 논리에 맞지 않게, 그리고 경험에 맞지 않게 가치의 불안정성, 생산물들의 공측 불가능성, 산업적 힘들의 균형 상실을 주장하는 자는 누구인가? 경제학자들이다. 분배의 불평등, 교환의 자의성, 경쟁의 함정, 파편적 노동의 압제, 기계들의 갑작스러운 이행을 옹호하는 자는 누구인가? 경제학자들이다. 비생산적 질서의 우세, 자유무역의 거짓말, 신용의 신비화, 소유권의 남용 행위를 뒷받침하는 자는 누구인가? 경제학자들이다. 영국의 사주를 받아 이 무정부, 사기와 강탈의 체제를 우주에 적용하려고 자유무역 연맹을 결성하는 자는 누구인가? 여전히 경제학자들이다.

그리고 완화와 평화의 언어를 구사해 감히 다음과 같이 쓰는 것은 당신들이다.

“가장 반대되는 학파들이 노동자들을 미혹하려고 음모를 꾸민다고 사람들이 말하지 않을까? 어떤 이들은 그들에게서 더 나은 미래에 대한 모든 희망을 빼앗아 이들을 화나게 하고, 다른 이들은 이들을 유혹하는 믿을 수 없는 이론들을 이용해 무질서로 가도록 자극한다. 끝으로 더 인간적이기도 하고 더 현명하기도 하면서 노동자들에게 괴상한 권리에 대해서도, 숙명적 필연에 대해서도 말하지 않는 사람들이 있다. 이 사람들은 그들에게 온전한 진실을 감히 말하지 않거나 말할 줄을 모른다!”

그러므로 일단 이 진실을 말하라. 그것이 순전히 당신들 입에서 나온다고.

“그렇다. 임금은 최소한의 필요를 초과할 수 있다. 그렇다. 노동자에게 절약이 가능하다. 노동자가 어떤 제조업 지구에서 고생한다면, 노동자가 명예로운 안락 가운데 살아가는 다른 제조업 지구들도 있다. … 어디서 이런 차이가 나오는가? 핵심적이고 주된 원인이 둘 있는데, 이는 신경제학자들과 자칭 박애주의자들의 모든 불평보다 강한 원인들이다. 그 차이는 노동자들의 행실에서, 그리고 인구와 유동 자본의 비율에서 나온다.”

로시 씨, 내가 선생에게 정말로 이 말을 하겠소. 선생에게는 심장이 없소. 선생은 다른 이들보다 사려 깊지도 못하고 용감하지도 못하오. 선생은 진정한 원인들에는 입을 다무는군요.

노동자들을 미혹한다고! 이는 기조 씨의 과격파들을 닮았다. 과학자들이여, 우리를 가르치라. 그러면 우리는 미혹되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참된 것 말고 아무것도 말하지 않도록 하라. 당신들의 얼버무림은 당신들 머리 위로 떨어질 것이기 때문이다.

일꾼의 행실은 악하다고! 그럴 수 있다. 그리고 이는 아마도 사람들이 그를 정당하게 대우해 주지 않은 데서 나올 것이다. 그리고 정말로 그가 받는 임금의 크기가 문제다. 그러고 나서 우리에게 그의 행실을 말하라. 그러므로 선생, 하루 열네 시간의 노동이 얼마의 가치를 가지는지를 말해 달라. 그리고 선생이 일꾼의 노동에 관해 오류를 범하는 것을 두려워한다면, 가슴에 손을 얹고 선생은 선생의 노동을 얼마로 산정하는지 말해 달라. 우리는 선생의 수치를 척도로 삼을 것이다.

유동 자본은 인구와 무관하다! 소유권은 자본이 유통하는 것을 막는다. 실제로 소비자가 그 스스로 4에 제공하던 것을 구입하는 데 5를 지불해야 한다면 그것이 어떻게 유통될 것인가?

“질서, 절약, 도덕성이 결여된 일꾼은 빈곤의 누더기를 결코 떠나지 못할 것이다. 이에 인구가 …라고 덧붙여 말하라.” 결혼의 사려분별에 대한 권고가 이어진다.

늘 꾸지람이고, 늘 이 가난한 일꾼의 행실 탓이다! 그러니 위선자는 아직 죽지 않았다! 우리의 후견인이 우리의 재물을 취하는 것은 우리가 무능하고 형편없는 강도들이기 때문이다. 한량이 노동자의 육체노동의 수고를 먹어 치우는 것은 그가 살아가는 법을 가르쳐 주기 위한 것이다! 그렇다면 자비와 절제의 선교사들이여, 솔선수범하는 것으로 시작하라. 가자. 아들들은 여집사를 떠나고, 아버지들은 하녀들과 헤어지고, 결혼과 성매매의 연령은 모든 사람에게 늦추어지도록 엄격한 형벌을 만들라. 왕에서부터 군속에까지 모든 종류의 서비스에 가격표를 만들고, 돈의 이자는 정당한 율로 되돌리고 토지의 지대는 모두에게 배분되게 하라! 그러면 우리는 경제학자들의 천재성과 선의를 믿을 것이다!

월리스(Wallace), 콩도르세, 고드윈, 오언의 공산주의적 가설들에 대답하면서, 그리고 빈곤의 직접적 원인에 관해 그에게 해명해 줄 수 있는 아무것도 거기서 찾아내지 못해 끊임없이 자기의 기하급수로 되돌아와서 정직한 초조함에서 다음과 같이 외쳤을 때, 맬서스는 진심이었다. “하지만 어떻게 공동체에서 생산이 인구 수준을 붙잡을 것인가? 태어나는 것을 막는 장애물 없이 어떻게 인류가 굶주림으로 죽지 않을 것인가?”

우리가 입증한 것은 오늘날 완전히 다른 것이다. 이는 바로 맬서스가 생각지도 못한 것, 즉 조직된 사회 안에서 부와 생존 수단의 생산은 인구 자체보다 더 급속한 진전을 이룬다는 것이다. 빈곤을 설명할 필요가 있는데, 맬서스처럼 분간할 수 없는 공식, 신화에만 다다르는 동어반복으로써가 아니라 우리 견해로는 극빈층의 직접적이고 체계적인 원인인 소유권자의 일상 관행을 정당화함으로써 설명할 필요가 있다. 우리의 모든 경제학자들, 영국, 프랑스, 그리스도교, 유물론, 절충론 경제학자들이 50년 전부터 그 찬양자요 행상인이 되기를 기뻐했으므로 사람들은 산술급수의 맬서스식 어리석음을 가지고 우리를 침묵시킨다고 믿는가?

하지만 우리는 아직 우리 적대자들의 마지막 논리를 듣지 못했다. 승리의 개가를 너무 서둘러 부르지 말자.

로시 씨는 다시 일어나면서 말한다. “우리 제도들의 해악, 조건들의 과도한 불평등, 토양의 고갈될 수 없는 비옥성, 지구 표면에 남아 있는, 그리고 해외 이주로 채울 수 있는 엄청난 빈 공간에 관해 사람들은 우리에게 무엇을 말하고 있는가? 이 모든 것은 문제의 밑바닥에 닿지 못함이 명백하다. 왜냐하면 우리가 이 모든 점들에 관해 가장 큰 양보들을 한 후에 어떤 결과가 나올까? 이는 단지 하나 이상의 나라에서 고통과 불행의 다른 원인들이 가부장들의 유죄가 되는 경솔함에 더해지게 된다는 것, 그리고 과도한 인구들이 흔히 더 나은 정부 아래서, 더 공평한 사회 조직 안에서, 더 활발하고 더 자유로운 상거래 안에서, 혹은 더 큰 해외 이주 체제 속에서 일시적인 완화를 발견할 수 있으리라는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재생산의 본능이 사려분별과 높고 어려운 도덕성에 의해 결코 고삐가 채워지지 않는다면 이 모든 수단들은 결국 고갈되리라는 것, 그러면 해악을 완화시킬 일시적 치료 수단도, 이를 누그러뜨릴 진통제도 더 이상 없는 만큼 해악이 더욱 현저하게 되리라는 것이 덜 진실인가?”

모든 경제학자들은 로시 씨의 이 생각으로 몰려든다.

맬서스의 마지막 편집자는 이렇게 말한다. “우리는 이 관찰을 중대한 것으로 간주한다. 모든 어조의 사회주의자들에게 충고한다. 사회 상태를 완벽하게 할수록 맬서스의 주장을 뒤집지 않는다면 인구의 과잉은 더욱 두려워해야 할 것이 된다.”

그러나 당신, 현명하게 군다는 조건에서 우리에게 하늘의 도움을 약속하는 당신은 그렇다면 당신의 격률을 실천하는 것으로 시작하라. 사회는 부조화를 이룬다. 당신이 해 온 양보가 이를 가정한다. 우선 사회에 균형을 만들어 주어라. 그리고 쓸데없는 일을 하게 될 것을 두려워 말고 어떤 일이 일어날지 기다려라. 당신은 완전히 가설적인 동향 예측에만 매달리며, 이에 대해서는 아무도 인구가 지구상에 넘쳐 나리라는 동향 예측이 제시된다고 단언할 수 없다. 그리고 당신은 끊임없이 당신을 급감시키는 실질적인 악에서 눈을 돌린다. 나는 당신에게 이렇게 말한다. “현재를 치료하는 것에서 시작하라. 그리고 섭리에 대한 당신의 신앙이 결코 조롱이 아니라면 미래를 좀 덜 염려하라.” 당신은 말한다. “인류는 이로써 일시적 위안밖에 얻지 못할 것”이라고. 누가 이를 당신에게 확언하는가? 노동에서 균형이 성립되어도 인구와 부에서의 인류 발전의 조건은 달라지지 않을 것이라는 점을 당신은 어떻게 아는가?

벌써 사람들은 당신에게 섭리적 제도 안에서 생산이 인구보다 더 빠르게 행진하는 것을 보여 주었다. 기근에 눈물짓는 대신 당신이 당신의 논제를 위해 이 법칙을 이용하는 데 조금도 유념하지 않은 것은 놀랍다. 실제로 평등의 체제에서 노동은 사랑보다 더 빠르게 가서 당신은 약간의 일반화 뒤에 어떻게 토지가 산출물을 받아들이고 모든 사람을 거주하게 하기에 충분할 것인지를 질문할 수 있었다. 아마도 그럴 때 우리는 이렇게 대답하는 것으로 만족했을 것이다. “신은 위대하고 섭리는 여러 조합을 만드는 데 능하다. 의심할 바 없이 이 순간에 우리가 놓치고 있는 무언가가 있다. 우리의 활동 영역이 우리의 능력과 비례가 맞지 않는다는 것은 이상할 것이다! … 그러므로 당신의 통계를 교정한 후에 우리가 또한 당신의 논리들을 다시 세울 필요가 있는가?”

이와 같이 방금 인구를 위한 빵이 결핍될 것을 두려워한 경제학자가 이 측면에서는 안심하고서 숙박 장소 때문에 염려하려고 한다. 그는 우리에게 이렇게 말할 것이다. “그렇지만 우주에 한계가 있으니 인구에도 한계를 둘 필요가 있다. 25년마다 두 배가 된다면 다섯 세기가 못 되어 지구상에는 1000억 명이 있게 될 것이다. 즉 일어서서 모두가 서로 몸이 닿게 땅을 채우게 되는 데 필요한 사람 수보다 더 많을 것이다! 이는 빈곤이 아닐 것인가? 아마 헐벗음과 기근보다 더 견딜 수 없는 빈곤 말이다. …”

경제학자여, 그대의 말을 제지한다. 그대가 제기해 온 문제는 확실히 철학자의 명상거리로 훌륭하지만 방금처럼 더 이상 인구와 생산 사이의 문제가 아니라, 인구와 세상 사이의 문제다. 나는 그대의 취하를 법적으로 인정한다. 그러므로 더 멀리 나가기 전에 다음을 인정하자.

노동은 그 모든 기관器官들을 종합하고 규율한 것으로 우리의 생존 수단을 언제나 우리의 필요보다 많은 양으로 배증할 능력, 따라서 인구의 증가가 얼마가 되든 우리의 행복을 끊임없이 증가시킬 능력을 보유한다는 것.

빈곤은 옛날 야만 시대에는 게으름에서 나오던 것과 마찬가지로 문명 시에는 오로지, 경제적 적대 관계에서 나온다는 것.

이처럼 극빈층은 정규적인 사회에서는 더 이상 두려워할 것이 아니어서 풀어야 할 유일한 문제는 ‘인구와 지구 사이의 균형 법칙은 무엇인가?’라는 것.

이 결론들, 그리고 이 결론들을 끝맺는 문제는 정치경제학의 추락의 소위所爲다.

. 인구 균형의 원리

인구 문제는 그것만으로 책 두 권이 필요할 것이다. 공간이 부족하며 독자를 속이지 않고서는 해결을 더 미룰 수도 없다. 그러므로 책 대신에 여기서 하나의 강령만 제시해야 한다면, 그리고 이 빈약한 시론試論이 더 웅변적인 것에 영감을 줄 수 있다면, 나를 용서해 주기 바란다! 진실한 개혁자인 나는 내가 진리를 차지하는 것에 개의치 않는다. 나는 제자들이 아니라 조력자들을 구한다.

인구 문제는 경제학자들에 의해 사람들과 생존 수단 사이에 제기된 것으로서 그 해결은 의심스러운 것일 수 없었다. 이는 죽음이었다. 온갖 수단을 동원해(per fas et nefas) 죽이거나 태어나지 못하게 막는다. 이것이야말로 좋든 싫든 맬서스 이론이 도달해야 할 곳이다. 이야말로 여러 민족들의 실천이어야 할 것으로서, 빈곤에 맞서 일반적으로 채택되고 권고되는 해독제다. 소유권과 독단의 원칙에 충실하게 정치경제학은 소유권과 권위에 기초를 둔 모든 입법처럼 끝나야 했다. 헌장을 내놓고, 법전, 전례 법규, 공식들을 펼쳐 보여주고 난 후에 남은 일은 그 강제 이행 수단을 찾아내는 것이었으며, 이 강제 이행 수단을 정치경제학은 힘에서 구했다. 맬서스의 이론은 정치경제학의 형법전이다.

반대로 진정한 경제학인 사회경제학은 무엇을 말하는가? 이는 모든 유기체는 자신 안에서 균형을 찾아내야 하며, 그 요소들의 무정부 상태에 맞서 예방책이나 억압을 쓸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그것은 우리에게 이렇게 외친다. “당신의 모순들을 풀어라. 가치들의 비율을 확립하라. 교환 법칙, 정의 자체인 이 법칙을 찾아라. 그러면 우선 당신은 복리를, 그리고 이 복리에 이어서 상위의 법칙, 지구와 인류의 조화를 발견하게 될 것이다.”

우선 경제적 자의성으로부터 인구 문제에 관해 어떻게 도덕의 타락이 나오는지를 보여주자.

가치들 사이에 비례의 법칙이 존재하지 않고, 노동의 조직도, 분배의 원칙도 존재하지 않는다는 가설로부터 정의는 하나의 말이고, 평등은 괴물이며, 모든 사람을 위한 행복은 그 실재가 결코 이승에서는 존재하지 않는 낙원의 꿈이라고 말할 수밖에 없으며, 결국 이 잘못된 자료에 의해 부에서의 진보는 언제나 인구의 진보에 뒤처진 채로 있다고 주장하도록 유도된 정치경제학은 사랑에서의 사려분별, 결혼의 연기, 그리고 보조적인 모든 예방 수단이라는 말로 결론을 내리지 않을 수 없다. 자연 자체가 무서운 탄압으로 인간의 무분별을 보충해 주는 것을 보고 싶지 않으면 그렇다고 덧붙여 말했다.

그런데 정치경제학의 말로 자연이 우리를 위협한 이 탄압 수단들은 무엇이었는가?

1순위로는 소유권자의 사회에서, 그리고 그 해석자인 맬서스에게서 기근, 페스트, 전쟁이 소유권의 고귀한 작업의 집행자들로 등장한다. 그리스도교인과 무신론자, 경제학자와 박애주의자 등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오늘날에도 그런 것이 실제로 인구의 자연적 배출구라는 것을 확신하는가! 그들은 체념하면서 운명의 요약적 정의를 받아들이며, 그들을 치는 손을 침묵으로 찬양한다. 이는 이기심의 논리들을 그 무기력함으로 지지하는 이성의 정적주의다.

그렇기는 해도 그러한 원인들 때문에 창출된 균형은 심각한 비정상 상태를 사회 안에 드러낸다는 것이 명백하다. 그러나 이는 바로 우리의 관심을 끄는 지점이다. 기근, 전쟁, 페스트는 정상적, 자연적이고 섭리적인 균형의 원인들로서 어떤 점에서, 왜, 어떻게 이성에 받아들여질 수 없는가? 우리와 함께 외관상 아주 명확한 것들에 관해 잠시 성찰해 보아야 한다. 우리가 우리 차례에서 만들어 내야 할 이론의 확실성이 이에 달려 있다.

사회가 조직된 존재라는 것이 참이라면, 그 안에서 생명이 어떠한 추진력이나 외적 반발력의 도움 없이 여러 기관器官들의 자유롭고 조화로운 작동에서 나오는 것이 맞다면, 결과적으로 식량 부족, 전염병, 학살 등 인구를 가끔씩 급감시키는 것들은 균형의 수단이기는커녕 반대로 내적 부조화, 경제의 교란의 징후들인 것이다. 기근과 막힘은 소비와 다혈증이 인체에 대해서 의미하는 것을 사회에 대해서 의미하며 맬서스가 이 현상들을 특징짓기 위해 사용한 장애물들이라는 용어는 그가 유기체, 경제 그리고 체계인 것에 대해 가지는 관념이 얼마나 잘못된 것인지를 보여준다.

그런데, 기근과 다른 자연의 탄압 수단이라고 하는 것들에 관해 우리가 말하는 것은 인간이 이 파괴 작업에서 섭리를 도우려고 노력하는 모든 유사한 수단들에 적용되어야 한다. 고대의 모든 인민들이 활용하고 여러 철학자들이 권장한 영아 유기, 옛날 종교와 도덕관념에 의해 성별되고 아직도 동방에서, 그리고 모든 야만인들에게서 지배적인 낙태와 거세 같은 것들이다. 이런 관습들은 그들에게 모범으로 소용된 듯한 재앙과 똑같이 경제적 무정부 상태의 증거들일 뿐이다. 상식과 논리는 거기서 영원한 경찰의 수단들, 균형 수단들을 보기를 싫어한다.

이런 원리들이 확인되었으니 최근 시대에 인구의 과잉과 식량의 부족에 맞서 상상된 다양한 보험 체제들의 장점을 알아보고, 이에 따라 더 정확한 방식으로 우리가 찾는 법칙의 특정 성격을 정하는 것은 쉬운 일이다.

나는 맬서스부터 시작한다.

맬서스는 그에 따르면 인구의 과잉을 예방하고 억제하는 자연적 원인들을 분석하고, 이 모든 수단들, 어떤 것들은 잔혹하고 어떤 것들은 부도덕한 이 수단들 중에 어떤 것도 섭리의 탓으로 돌려질 수 없고, 이성으로써 받아들여질 수도 없음을 발견하고서 자연의 이 무능함 혹은 이 상상할 수 없는 폭력에 불복해 인간의 자유의지에 항소했다. 그는 인류가 스스로에게 섭리로 쓰이는 것이 우리 인류의 운명인 것처럼 존엄이라고, 자신의 출산을 정당한 한계 내로 제한하는 것이 사람이 할 일이라고 주장했다. 결혼을 서른 살이나 마흔 살까지 연기하는 것, 이것이야말로 맬서스가 그의 순진한 영혼으로 인구와 그 범람에 대해 더 유익하고 더 철학적이고 더 도덕적인 것으로 상상한 것이다. 사랑의 억제, 가슴의 기근이 그에 의해 위胃의 기근에 대치되었다. 이는 그의 순결한 언어로 그가 물리친 살인이나 외설 등 신체적 억제의 모든 형태들에 대립해 도덕적 억제라고 부른 것이다.

맬서스의 관념들은 장 바티스트 세, 로시, 드로즈 등 경제학자들 중 가장 저명한 이들에게, 그리고 난점에 대한 출구를 발견하지는 못하면서도 쾌락의 황홀감보다 금욕의 영웅적 행위를 더 높은 곳에 위치시킨 모든 이들에게 받아들여졌다. 근본적으로 우리가 뒤에 가서 보여줄 것처럼, 맬서스의 이론이 그 이론을 사람들이 그 이래로 제안한 모든 것보다 우월하게 해주는 위대하고 고상한 무언가를 가진다는 것을 부정할 수 없을 것이다. 현재로서는 우리는 특히 이 이론이 어디에 결함이 있는지를 확인해야 한다.

우선 그의 거대하고 중대한 결함은 억제수단contrainte이다. 이 이름만으로 벌써 모순이 튀어나온다. 자연은 사람에게 하나를 하도록 자극한다. 사회는 그에게 다른 것을 명령한다. 내가 사랑에 굴복하면 나는 빈곤으로 위협을 받고, 내가 사랑에 저항하면 나는 그에 못지않게 비참하다. 차이라고는 신체적인 것과 정신적인 것의 차이다. 내가 어느 면에서 바라보더라도 침통함과 고뇌만 발견하게 된다. 이런 것이 균형인가?

다른 한편, 맬서스가 제안하는 치유책은 모름지기 섭리에 대한 고발, 자연에 대한 불신의 행위인 것이다. 나는 그리스도교 경제학자들이 그러지 않도록 조심하지 않은 것에 놀란다. 왜냐하면 여기서는 종교와 사회가 배척하는 비합법적 쾌락만 문제가 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허락된 결합도 문제가 된다. 무슨 말인가? 모든 도덕가들이 좋은 도덕관념의 가장 확실한 보장책으로 간주하는 것, 젊은이들의 결혼에 관한 문제다. 이제부터 맬서스의 이론을 가지고서는 결혼은 과년한 처녀들과 늙은 호색한들을 위해서만 행해질 뿐이다. 이런 따분한 결혼식으로 그것이 거의 꺼져 갈 때에만 그 연정에 귀 기울이는 것이 허락된다면 사랑의 부드러운 화살을 스무 살에 느끼는 것이 무슨 소용인가? 그리고 그렇게 슬픈 결과를 위해 인간의 사려분별로 신의 작품들을 교정할 필요성을 원리로 제시하는 이론이 무슨 이론인가!

끝으로 맬서스의 치유책은 실행 불가능하고 무력하다. 한편으로 인생의 시기들을 옮길 수 있다는 희망, 젊은이가 활기를 잃고 노인이 회춘하게 할 수 있다는 희망을 진지하게 가질 수 없으니, 그리고 다른 한편으로 소유권 체제에서 맬서스의 이론은 직접 결혼을 재산 소유자의 특권으로 만들게 유도하니 사실상, 권리상으로 실행 불가능하다. … 빈곤이 사람들이 상상하듯이 인구의 과잉을 직접적 원인으로 하지 않고 독점의 징수 행위를 직접적 원인으로 한다면 그것은 우리의 체제와 같은 체제에서는 인구가 증가하든 감소하든 틀림없이 생겨날 것이니 무능하다. 이 언명에 대한 증명은 이 책의 면마다 발견된다. 이를 재론하는 것은 쓸데없는 일이다.

헷갈리게 감지되지만 생생하게 느껴지는 맬서스 이론의 모순들은 총체적 흥분을 야기했다. 반대자들의 동기는 언제나 현명하지 않았으며, 우리가 보게 될 것처럼 훨씬 덜 순수했다. 그러나 정치경제학은 인구 원리가 폐지해야 했던 파렴치한 일들, 그리고 그 반대로 그 재발을 촉발했던 그것들의 연대성을 결국 받아들이는 만큼 더욱 이 이론에 대해서밖에 불평할 것이 없었다.

맬서스 말고 모든 사람이 예견할 불가피한 이행에 의해, 도덕적 억제 수단은 가장 결연한 맬서스주의자들의 펜 끝과 의도에서 지체 없이 쾌락에 별로 무겁지 않은, 기껏해야 수치심에만 걱정을 끼칠 수 있을 순수하게 신체적인 억제 수단이 되었다. 이와 관련해서 맬서스의 마지막 편집자는 이렇게 말한다. “빈곤(인구라고 읽어라)을 예방하는 절제의 이 다양성은 생리(쾌락이라고 읽어라)의 법칙들을 무시하지 않을 경우에 부도덕하다는 것이 증명되지 않는다.” 그 영예로운 작가가 그의 학설의 이런 해석에 언제나 항의했음에도, 사랑의 문제에서는 꾸밈이 없는 공중이 맬서스의 이론을 이해한 것은 이런 의미에서다.

실제로 도덕이 무엇이냐고, 부도덕이 무엇이냐고, 혼자 있을 때는 도덕적인 것이 입맞춤에서는 어떻게 부도덕한 것이냐고 그에게 말할 수 있겠다. 철학자들의 언어는 사람을 몸과 영혼의 이중적인 추상으로 만들었지만 사람은 하나다. 그러니 그가 정신적으로 출산을 삼가든지 아니면 신체적으로 출산을 삼가든지, 삼감이 있다는 조건에서는, 특히 삼감이 제때에 일어난다는 조건에서는 무슨 상관인가? 당신이 무엇을 하든 정신은 언제나 신체에 있고, 신체는 언제나 정신에 있다. 이 모든 것에 있는 유일한 것이 핵심이다. 이는 자녀를 안 만드는 것이다. “너는 많은 일을 염려하고 걱정하는구나. 그러나 필요한 것은 한 가지 뿐이다.(Turbaris erga plurima, porro unum est necessarium)!”

도덕적 억제, 신체적 억제. 그러므로 이것이야말로 극빈층의 원인들에 관해, 그리고 그 치유책에 관해 19세기에 경제학자들의 과학이, 절충론자들의 도덕이, 그리고 이 신중한 대학인들의 철학이 우리에게 말할 줄 알았던 것 전부다. 그중 로욜라(Loyola)라는 하나의 이름이 종교계를 웅성거리게 하고, 덕 있는 사람들의 낯을 붉힌다! 사제들의 독신, 그리스도교적 처녀성을 조롱하고 이것들을 자연과 도덕에 대한 모욕이라고 비난한 후 더 이상 감히 결혼을 권장하지도, 금욕을 권고하지도 못하는 이 위선자들은 연인과 부부에게 도덕적 억제를 설파한다! 그리고 그들은 예수회원들을 맹렬히 비난한다! 산체스(Sanchez), 레모스(Lémos), 에스코바르(Escobar), 부젠바움(Busenbaum) 그리고 그대, 축복받은 리구오리(Liguori)여, 탄압하고 벌하기 위해서만 악을 아는 자들이여, 물러가라. 정치경제학은 너희 모두를 지워버린다. 옛날에 우리의 그리스도교 교부들은 그들의 거처에서 축복받은 나뭇가지들을 써서 성상 앞에서 화재, 우박, 흉작, 집단 사망을 경계해 지극히 높은 자의 자비를 구했다. 나는 어린 시절 이 가족 기도문을 외웠다. 나는 어디서나 농민들 부부의 침대 위에 그리스도상이 걸려있는 것을 보았다. 이는 하늘의 화와 땅의 재앙을 막기 위한 무식하고 광신적인 인민의 의존 수단이었다. 시대가 전진했다. 이성은 해방되었다. 우리는 빈곤의 원인이 자녀의 과잉 생산이라는 것을 배웠다. 대낮에 젊은 신부를 둘러싸고 그의 눈에 들이닥치고 그의 가슴을 여생 동안 채울 미신의 딸랑이 대신에 이제부터는 경찰관이 그에게 가정의 의무의 상징으로 정치경제학에서, 그리고 공창公娼의 은어에서만 이름을 가지는 피임 도구를 제공해줄 것이다! …치욕이다!

그렇지만 추론해 가자. 더 추론해 가자. 부도덕은 우리 머리카락에까지 올라왔다. 저명한 라부아지에(Lavoisier)는 대도시의 구덩이들에서 가난한 오물 수거인을 덮치는 질식사에 대한 치료법을 찾기 위해 극도로 혐오스러운 것들을 마다하지 않았다.

도덕적 억제책은 갑자기 신체적 억제책이 되었으며 자기 식대로 인구 문제를 해결해 결혼한 사람들에게 쓸모 있는 실무에 속하는 것이 맞다면, 이 쓸모는 자유로운 사람들에게도 덜하지 않다. 그런데 (이는 여기서 경제학자들이 예견하지 못한 사물의 부도덕한 측면이다) 쾌락이 출산이라는 결과 없이 그 자체로 원해지고 추구되면 결혼은 있으나 마나 한 제도가 된다. 젊은이들의 삶은 불임의 육체관계 안에서 영위된다. 가족은 소멸하고 가족과 함께 소유권도 소멸한다. 경제적 운동은 해결책 없는 상태로 남고, 사회는 야만시대로 돌아간다. 맬서스와 도덕적 경제학자들은 결혼을 접근 불가능한 것으로 만들었다. 의사醫師 경제학자들은 결혼을 쓸모없는 것으로 만든다. 이 사람들이나 저 사람들이나 빵의 결여에 애정의 결여를 더하며, 사회적 끈의 해체를 촉발한다. 그리고 이야말로 극빈층을 예방하는 것이라 부르는 것, 빈곤의 억제라는 말로 이해하는 것이다. 심오한 도덕가들이다! 심오한 정치인들이다! 심오한 박애주의자들이다!

예기치 않은 이 계시에, 맬서스 이론에 대한 이 이상한 주석에 대해 여론이 전보다 더 많은 에너지를 가지고 일어났다. 도덕가들은 그들의 선의에 놓아진 덫에 대해 불쾌감을 표시했다. 사회주의자들은 맬서스의 원리에 제안된 타협이 환상이라는 것을 발견했다. 전부냐 아니면 전무냐, 그들은 외쳤다. 신체적 억제책은 한심한 기만, 안전 확보 없는 타협, 생리에 대한 위반, 사랑에 대한 모욕이다. 그리고 경제적 중용과 반대로 사회주의는 그 유토피아들을 만들기 시작했다.

① 푸리에의 체계. 인위적 혹은 비만에 의한 불임.

과학이 감히 눈길을 보내는 영예를 받지 못한 이 체계는 우선은 아주 충격적인 선결 문제 요구의 오류를 내보여서 이 저자가 그의 농담을 얼마나 진지하게 취급하는지를 모른다면 저자 쪽에서 익살을 부린다고 믿게 할 수 있을 것이다. 무엇을 말하는 것인가? 이 점에서 맬서스의 제자인 푸리에에 따르면 생존 수단의 상대적 부족이 빈곤을 낳으므로 그것을 늘리라는 것이다. 소비를 두 배로, 네 배로 하라고 푸리에는 대답한다. 이는 과잉의 다산성을 면하고 굶어 죽지 않는 틀림없는 수단이다. 이 위대한 사람은 우리에게 용감하게 말한다. 당신들은 두 끼 식사로 살 수 없다. 일곱 끼니를 먹어라. 그러면 만족을 얻을 것이다.

주지하듯이 이는 바로 그 경제학자가 요구하는 것이다. 그러나 소비를 두 배로, 네 배로 늘리는 수단, 필수품이 부족할 때 사치를 제공할 수단은? 여기서 푸리에는 일련의 대조되는 집단들을 제시한다. 그의 계산에 따르면 이들은 즉각 생산물을 네 배로 할 것이다. 그러나 오늘날 인정되는 것은, 푸리에가 쓰기로 나선 것들의 첫 마디 말도 몰랐다는 것이다. 그는 가치의 관념을 가지지 않는다. 그는 분배 이론도 교환 법칙도 보유하지 않는다. 그는 정치경제학의 어떠한 모순도 풀지 않았다. 그는 이 모순들의 의미를 짐작하지도 못했다. 그는 빈곤의 원인들이 모두 자본의 우세와 노동의 종속에서 유래한다는 것을 몰랐다. 그러기는커녕 자본, 노동, 재능이라는 그의 공식 안에 이 우세와 이 종속을 성별한다. 그와 그의 학파는 이율배반들의 종합에서 자본과 소유권보다 높은 원리에서 노동자 해방을 구하는 대신 자본의 원조와 권력의 호의를 간청하기를 그치지 않았을 때, 언제나 이 모순적 여건에 따라 움직였다. 푸리에는 끝으로 맬서스처럼 그가 풀어야 했던 문제를 인류와 지구 사이에 위치하게 하는 대신 이를 인구와 생존 수단 사이에 두었을 때 문제의 본성을 오해했다. 사중적四重積에 관해 나는 위에서, 이것이 부의 진보의 이론에 의해 팔랑스테르주의 학파의 글들에서 넘쳐나는 이 수천의 몰상식 중 하나였음을 보여주었다. 그 반증이 비판을 부끄럽게 해 줄 허튼소리인 것이다.

그러나 인구 문제에 대한 푸리에주의의 해결책에는 해야 할 더 심각한 비난이 있다. 이는 그 부도덕성이 인정된 정신, 고도로 조직 해체적이고 반사회적인 지향이다. 나는 내 생각에 병적인 경우의 일반화 말고 다른 것 아닌 비만의 방식이 사람들이 가정하는 효과를 가질지를 검토하지 않는다. 생리학은 내 분야가 아니다. 나는 그 가설을 받아들인다.

제11장에서 소유권의 역할과 지향이 무엇인지를 찾으면서 우리는 그 독특하고 신호가 되는 모습으로 가족의 형성을 발견했다. 푸리에주의는 소유권의 수호자로 나선다. 그런데 푸리에주의는 소유권의 원인도 대상도 모를 뿐 아니라, 이 원인들을 부정하고 이것들을 폐지하기를 원한다. 푸리에주의는 소유권의 유기적 요소인 살림살이의 부정이고 소유권의 영혼인 가족의 부정이고 변형된 소유권의 형상인 결혼의 부정이다. 그리고 푸리에주의는 왜 이 모든 것을 폐지하는가? 푸리에주의가 소유권의 부정적 측면만을 인정하기 때문이고, 결혼과 가족에 의해 발현되는 정상적이고 거룩한 소유 대신 푸리에주의는 완전한 성매매를 열렬히, 온 노력을 다해 추구한다. 이는 인구 문제에 대한 푸리에주의적 해결책의 모든 비밀이다. 푸리에는 말한다. 창녀들은 백만 명에 한 명도 어머니가 되지 않는다는 것이 증명된다고. 반대로 살림살이, 가사의 돌봄, 혼인의 순결성은 출산을 현저하게 조장한다. 그러므로 인구의 균형은 우리가 부부로 결합하고 배타적으로 다산을 촉진하는 대신 모두가 성매매자가 된다면 발견된다. 자유 사랑, 불임의 사랑, 이는 모두 … 그때 이후로 살림, 일부일처, 가족은 무슨 소용인가? 노동을 주술로 만들고 사랑을 체조로 만드는 것, 이는 웬 꿈인가! 이는 팔랑스테르의 꿈이다!

사회주의는 정치경제학이나 마찬가지로 인구 문제에 관해 죽음과 치욕을 발견했다. 노동과 수치는 유토피아의 위선자들의 입술을 태우는 말들이고 단순한 자들의 눈에서 그 학설들의 비천함을 숨기는 데만 소용되는 말들이다. 나는 이 종파들의 사도들이 어느 정도까지 그들의 파렴치함을 의식하는지 모른다. 그러나 나는 사람에게서 자기 말에 대한 책임을 면제해 주는 데 동의하지 않을 것이고, 자기 행동에 대한 책임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② G… 박사의 체계. 태아의 적출 혹은 배아의 제거.

이 절차는 자궁에서 특별히 마련된 수단으로 거기 착상되었을 배아와 태아를 부모의 의사에 반해 끄집어내는 것이다. 내가 그 원고를 읽은, 그리고 그 저자가 공중에게 누리도록 하는 데 지체할 수 없는 상세한 논문에서 G… 박사는 정치경제학만큼이나 철학에서 도출된 추론에 의해 사람은 자기의 출산을 제한할 권리와 의무를 가진다는 것, 이 주제에 아직 어떤 의문이 남아있을 수 있다면 이는 원리에 대한 것이 아니라 양태에 대한 것임을 증명한다.

G… 박사는 말한다. 내가 수입 부족 때문에, 맬서스가 그렇게 주장하듯이 내 독신자 신세를 견딜 권리가 있다면 나는 동일한 이유로 내가 결혼한 사람이라면 독신으로 돌아가고 교회가 승인하고 맬서스 후에 모든 경제학자들이 인정하는 것처럼 내 아내와의 일체의 관계도 삼갈 권리가 있다.

이 절제가 생식과 빈곤을 예방하는 것에서만 그 자체로 장점을 가진다면, 내가 배우자에게 의무를 이행하는 것을 그만두지 않고 신체적 억제책의 추종자들이 인정하는 것처럼, 게다가 논리가 증명해주는 것처럼 임신을 예방하는 체외사정retraite으로 충분할 수 있다.

그러나 임신이란 그 자체로 무엇인가? 정충의 극미동물이 형성된 수컷 기관에서 암컷 기관으로 넘어가서 단지 그곳에서 발달하는 것이다. 극미동물이 자궁에 들어간 후나 들어가기 전에 내가 그 발달을 멈추게 하는 것, 이는 독신이 범죄라면 여전히 동일한 범죄다. 독신이 무죄라면 동일한 행위는 상관이 없고 무죄다. 그러므로 나는 임신이 내게 해롭다면 임신을 예방하는 것처럼 억제할 권리와 의무를 가진다.

그렇다면, 임신의 순간에 내게 주어진 내 출산에 대한 권능을 나는 그에 뒤이은 순간에 보전하며, 그 다음 날, 그 다음 주, 다음 달에도 보전한다. 왜냐하면 내가 그 현상이 완수된 순간, 더구나 그것을 막으려는 내 의사에 반해서 완수된 순간에 그 사실에 대한 아무 지식도 가질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억제에서 일어난 지체遲滯는 태아를 위해 내 권리에 시효를 정할 수 없다.

나는 이 추론을 밀고 나갈 수고를 독자에게 맡긴다.

결국 아주 정직한 사람이고 속세의 사람인 것처럼 훌륭한 논리학자인 G… 박사의 체계는 파리에서 그것을 전문 분야로 삼아 거기서 급속히 재산을 모으는 외과 의사들에 의해 비밀리에 추종된다. 이 살인자들의 단도는 자궁의 밑바닥에까지 태아를 찾아간다. 아기가 살해되거나 그 꼭지에서 떨어지면 자연은 저절로 죽은 열매를 내버리며, 이는 경제적 언어로 ‘인구의 과잉을 예방한다’고 불리며, 신문의 문체로는 ‘잘못을 감춘다’고 불린다. 지방 도시들에서 의사들, 산파들이 이 산업을 모방해 불행한 자들을 세상에 내보내는 것은 범죄이며, 자녀의 수를 제한하는 것은 양심의 의무라는 고급 경제 원리에 따라 배설촉진제 장사를 한다. 그리고 맬서스보다 더 맬서스주의적인 경찰은 임금 문제를 토론하는 스무 명의 일꾼 집회를 적발할 줄은 알아도 이런 영아 살해에는 눈을 감는데, 이 문제에 인구 원리에 관해 경찰 못지않게 눈을 뜬 배심원단은 수많은 정상참작거리를 발견한다.

G… 박사의 체계는 팔랑스테르의 에로스-바쿠스적 불임의 보완물인 것처럼 경제학자들의 도덕적이고 신체적인 억제책의 불가피한 보완물이다. 이 모든 학설들은 절망적인 관능주의의 마지막 노력으로서 관련이 되고 연대성을 띤다. 그것들은 인구의 증가가 정규적 사회 안에서 생존 수단의 증가보다 더 빠르다는, 같은 편견에서 출발한다. 그 결과들을 본다면, 이는 변함없이 같은 결과들이다. 빈곤, 악, 범죄의 증가, 가족 유대의 해체, 경제 운동의 퇴보, 가난한 자들, 고아들, 노인들, 모든 쓸데없는 입의 강제적인 금지. 살인의 정당화, 우애와 정의에 대한 파문.

③ 날짜피임 체계Système des interruptions. 이것을 나는 아주 단순한 예방법으로 이해하지만, 그 성공에 관해서는 사람들이 전혀 의견 일치를 보이지 않으며, 이는 월경 이전과 이후 여드레에서 열나흘 동안 성교를 삼가는 것이다. 여성은 규정된 시기 외에는 자연적 불임이라고들 말한다.

이런 종류의 절제는 완전히 신체적 억제책의 취향에 들어간다. 나는 어느 수준까지 생리학과 경험이 이 방법의 유용성을 확증해 주는지 모른다. 게다가 나는 이에 대해 경제적 관점에서만 관심을 둔다.

그러므로 나는 그러한 실무의 효과가 사회와 관련해서 똑같이 치명적일 것이라고, 빈곤과 관련해서 앞의 것들의 효과와 똑같이 비효과적일 것이라고 말한다. 이런 값을 지불하지 않고 즐기는, 그리고 적발되지 않고 죄를 짓는 손쉬운 수단을 가지고서는 수치심은 어리석고 불편한 편견에 불과하며, 결혼은 방해가 되고 무익한 관습에 불과하다. 가족에 대한 존중은 짓밟힐 것이다. 소년, 소녀들은 유년기부터 달콤한 신비에 입문해 곧 영혼의 힘과 인격의 존엄성을 상실할 것이다. 미지의 도덕관념으로 타히티 사람들의 도덕관념보다 더 나쁜 것이 문명사회에 성립할 것이다. 노동은 투기 앞에서 낮아질 것이다. 그리고 빈곤에 대해서 각자는 색정적인 독신자에게서 피난처를 찾아낸다고 믿을 것이지만, 빈곤은 독점, 고리대, 파편적 분업, 기능들과 적성들의 불평등에 의해 유지되어 새로이 토양의 인구 소멸, 자본의 불임성 그리고 종족의 쇠퇴로 자연의 원수를 갚아줄 것이다. 사회적 진리는 거기서 발견될 수 없다. 우리는 무엇을 더 깊이 파고들 필요가 있는가?

④ 3년 수유 체계.[34]

이 체계의 저자는 일부다처제, 일처다부제, 동성애, 낙태 등등, 우리가 부분적으로 열거한 바 있는 터무니없고 부도덕하고 야만적인 이론들을 버리는 것으로 시작한다. 그는 ‘자신의 열매를 잉태하고 보전하는 것이 여성의 주된 임무(Accipere aut tueri conceptum est maximum ac proecipuum munus foeminarum)’라는 로마법을 가지고 임신과 분만에 대한 모든 장애물을 비난하고, 창세기의 “생육하고 번성하라. 땅에 충만하라”는 계명을 유보 조건 없이 찬양한다.

그리고 인구의 가능한 증가는 자연적 증가가 아니라는 것을 원리로 제시하면서 게다가 신은 한 여자에게 한 남자만 점지했으며, 반대로 한 남자에게 한 여자만 점지했다는 것, 그의 눈에는 이미 첫째가는 위대한 제약을 이루는 이것을 고려하면서 그는 다수의 권위와 사실들에 의거해 다음을 증명하는 데 매달린다.

⑴ 인생은 일정 수의 정해진 시기들, 임신기, 수유기, 성장기, 번식기, 노화기로 나누어진다는 것, ⑵ 이 시기들 중에 젖의 분비는 3년간이 되며, 이 기간 동안에는 젖을 먹이는 여성에게서 유방과 자궁 간의 적대 관계에 의해 자연적 불임이 있다는 것이다. 끝으로 그는 각각의 여성이 만 스물한 살에 결혼하고 자녀 각각에게 3년간 젖을 준다면, 인구는 증가하는 대신 오히려 줄어들고 소멸하는 경향을 띨 것이라고 결론을 내리고 단언한다.

이 저작은 아주 큰 학식에서 나온 것이고, 르루의 『사회 평론Revue sociale』에서 정당한 찬사와 함께 인용된 것으로서 순수한 도덕성, 고상한 철학, 인민에 대한 심오한 사랑을 확연히 나타낸다. 그러나 우리 생각에 따른다면 장점을 이루는 것은 저자가 가진 관념이다. 이는 그 법칙에 따라, 그리고 그 자연적 시기에 이루어지는 출산 자체에서 출산의 한계들을 구한다는 관념인 것이다.

실제로 결혼의 정신적 나이를 앞당기든지 수유의 피로를 단축시켜 사람들의 재생산을 가속화하는 것보다 더 쉬운 것도 없다. 살인, 영아 살해 혹은 낙태에 의해서든 거세와 방탕함에 의해서든 이를 억제하는 것보다 더 쉬운 일이 없는 것과 마찬가지다. 그러나 여기서는 다산성을 과도하게 자극하는 것도, 억제하는 것도 관심사가 아니다. 우리는 자연이 우리의 오류에 의해 더 이상 반대를 받지 않으면서 우리 인류의 행복을 마련해 주었으며 자기 자신과 합치를 이루었는지를 탐구한다. 그런데 루동(Loudon) 박사에 따르면, 한편으로 수유의 자연적 시기가 3년이고, 다른 한편, 유방의 기능과 자궁의 기능 간에 비양립성이 있어서 같은 여성이 평생 동안 자연의 규정에 따르면 세 명이나 기껏해야 네 명의 자녀만 낳을 수 있다면, 결과적으로 인구는 결혼 전에, 그리고 번식기 동안 죽는 자들을 빼면 인구는 정태적이 될 것이며, 심지어 자발적으로 후퇴하게 될 것이다. 이런 것이 루동 박사의 견해다.

그러므로 여기서는 예방도 없고, 억제도 없고, 장애물도 없다. 균형이 사회의 도덕관념과 경제에 아무런 폐단도 없이 사물의 본성에서 나온다.

유감스럽게도 이 이론은 그 원리상으로는 아주 합리적이지만 오로지 생리학적이고 완전히 사회경제학 바깥에 있다는 회복할 수 없는 결함을 가진다. 이로부터 루동 박사에 대해 의료계의 동료들이 할 필요가 있을 비난, 우리의 자격에 속하는 것은 아닌 이 비난과는 상관없이, 이로부터 우리가 그의 체계에 속하는 것으로 보려고 하는 악들이 나온다고 나는 말한다.

우선 이 체계는 수유의 법칙이 결코 관찰되지 않았다면 저자 자신의 결론에 따를 때 어떻게 인류가 증가할 수 있었는지를 짐작하지 못한다는 의미에서 보수주의와 심지어 자의성이 뚜렷한 특성을 제시한다. 인구가 첫 번에 균형을 찾았다면 더 이상 증가할 여지는 없었다. 그러니 인구에게 증가할 여지가 없었다면 생산에도 증가할 여지가 없었다. 그리고 이야말로 산업, 과학, 예술, 도덕관념이, 인류가 갇힌 것이다. 인류가 그 진로에서 제지당하면 더 이상 진보적이고 섭리적인 존재가 아니다. 인류는 변함없이 신으로 있으며, 짐승이다. 루동 박사의 실무를 당신 마음에 드는 인류의 시기에 적용한다면 문명은 3년 수유 덕분에 곧 멈추고 우리는 경계석들이 된다. 더 일찍 결혼하고 수유 기간을 18개월로 줄여서 이를 치유하기가 쉽다고들 말할 것인가? 나는 이것은 조롱하는 것이라고 대답한다. 사회의 진보는 이처럼 인간의 자의에 맡겨질 수 없다. 우리의 자유는 숙명의 한계 안에 포함되어야 하며, 우리의 본성은 늘어놓는 것이지, 초월하는 것도 다시 만드는 것도 아니다. 게다가 3년의 수유기가 젖먹이에게 필요 불가결하다면, 당신은 그에게 잘못을 하지 않으면서 젖을 뗄 수 없다. 반대로 이 3년이 필요 불가결하지 않다면, 이론은 무엇이 되는가?

이처럼 우리는 이미 더 이상 처음 볼 때 루동 박사의 체계가 우리에게 기대하게 한 이 자연 법칙, 홀로, 그리고 사람의 도움 없이 사회와 개인 생활의 모든 순간에 중단도, 불규칙한 요동도 없이 작용할 법칙을 발견하지 못한다. 이 체계에서는 모든 다른 체계들에서처럼 자연은 아무것도 계획하지 않았다. 그리고 사람이 갑자기 절제에 의해서든, 적출에 의해서든, 작업 중단에 의해서든, 성매매에 의해서든, 끝으로 생식기관을 희생시키는 수유 기관의 서비스 연장에 의해서든 그 생식의 진보에 개입하지 않는다면, 인구는 그 순간 범람하고, 식량은 부족하고 사회는 교란되고 죽는다! 이는 여전히 동일한 궤변이 아닌가?

그리고 어떻게 그 사회적 역할이 점점 커지는 여성들에게, 네 자녀의 어머니에게는 16년의 노예살이가 될 끝날 줄 모르는 이 수유 노동, 상당 부분 자녀들의 생명력에 무익한 노예살이의 노동을 부과할 것인가? 사람이 동물성의 억압에서 해방되도록 그에게 지성이 주어졌다면, 그가 자기 유기체의 법칙들을 해석하고 사회의 더 높은 법칙들에 따라 이를 변경할 자리가 여기가 아닌가? 나는 가난하고 헐벗은 유목민 안에 수유기의 연장이 있다고 생각한다. 거기서 아기는 너무 거친 음식을 섭취할 수 없어서 자기한테 젖을 먹이는 여자의 품 말고 다른 수단을 가지지 않는다. 그러나 노동이 우리에게 주는 행복과 함께, 사람이 동물들에게 행사하는 지배력과 함께, 동물들의 암컷이 사람에게 아주 소중한 젖 먹이는 여자가 되어 여성의 처지는 달라진다. 그러니 여성에게 60세기의 문명에 의해 폐지된 법칙들을 다시 지키게 하는 것은 정말로 여성을 짐승으로 퇴보시키는 것이다. 3년 수유는 여전히 하나의 빈곤으로 다른 빈곤을 대체하는 것이다. 이와 관련해서 루동 박사의 이론은 또한 부도덕성을 지닌다.

다시금 다른 모든 이론들처럼 맬서스의 잘못된 가설에서 태어난 이 이론도 해결하겠다고 나서는 난점을 더 잘 공략하지 못한다는 것을 언급하자. 3년 수유의 관습이 어디서나 자리 잡았다고 잠시 가정하자. 인구는 정체된 상태로 있으며 이는 경이롭다. 하지만 빈곤은 인구가 아니라 독점을 근원으로 하고 끊임없이 생산과 노동보다 앞서니 빈곤은 여전히 제 갈 길을 간다. 이처럼 빈곤이 계속해서 세상에서 사람들을 없어지게 해서, 곧 어쩔 수 없이 노동계급의 손실을 복구하기 위해 조혼과 수유기의 단축으로 인구를 촉진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이는 우리를 여전히 뒤죽박죽으로 만들어 놓는 것이다.

끝으로 3년 수유 체계는 또한 인구와 지구의 관계에서의 인구 문제를 더 애매한 상태로 둔다는 것을 볼 수 있다. 왜냐하면 둘 중 하나이기 때문이다. 3년 수유에도 불구하고 여성들이 여전히 인구가 증가하도록 충분한 자녀를 낳을 거시다. 그리고 이 경우에 이 증가의 한계는 어디일 것인가? 아니면, 인구가 정체 상태로 있거나 심지어 퇴보할 것이다. 그러면 인류 안의 모든 것이 정체하고 퇴보하게 되며, 이 정체에 의해, 이 퇴보에 의해 인류와 인류가 거주하는 행성의 관계는 무가 되고 사람은 땅에서 이방인으로 남는다. 이는 터무니없는 것이다.

요컨대, 경제학자들만큼이나 사회주의자들이 제안한 인구 문제를 위한 해결책은, 이들이 모두 잘못된 가설의 당파들이고 자연에 밀접하고 경제 질서에 본질적인 아무것에도 의존하지 않는 당파들이어서 모두 잘못되고, 모순적이고, 실행 불가능하고, 무능력하고, 부도덕하다. 사람이 자신의 산업 활동 영역에서 발견했다고 상상하는 것처럼 자신의 애정 활동 영역에서 생산하지 않으면서 즐기는 비밀을 발견하도록 하라. 그러면 우리는 우리가 노동에서 관찰한 것, 경쟁, 신용과 소유권을 사랑, 결혼, 그리고 가족에서 보게 될 것이다. 우리는 사랑이 발작적이고 신경질적인 흥분으로 바뀌는 것, 당황스러운 투기 거래가 교환을 계승하는 것처럼 혼거混居가 부부의 신실함을 계승하는 것, 사회가 독점 때문에 부패한 것처럼 여성들 때문에 부패하는 것, 정치 단체가 결국 부패에 빠지는 것을 보게 될 것이다. 이는 인류의 소행일 것이다.

그러므로 문제는 온전히 남아있다. 이제 우리가 할 일은 새로운 탐구를 시도하는 것이다.

인류의 인구는 1, 2, 4, 8, 16, 32, 64…의 무한한 기하급수에 따라 증가하는 경향을 띤다는 것이 증명된다.

다른 한편, 바로 이 인류의 자본과 부의 발달은 1, 4, 16, 64, 256, 1024, 4096…으로 무한히 나가는 더 빠른 급수를 따르며, 그 각 항은 앞의 급수의 상응하는 항의 수의 제곱으로 간주될 수 있다는 것이 증명된다.

이 두 급수는 평행을 이루고 연대 관계로서 풀 수 없는 연계로 서로 연결되는데, 서로를 원인과 결과로 활용하며, 게다가 엄밀한 진리를 표현하는 것보다는 경향을 서술하는 데 소용되는 것들로서 그 항들 각각에서 동일한 시기에 종속된다.

이 첫 번째 사항이 확인되었으니, 남은 것은 사람들과 생산물들로 지구의 전체 표면을 넘치게 하는 데서 두세 세기로 충분할 때 증가가 세상의 전체 지속 기간 동안 동일한 강도로 유지되기는 기하학적으로 불가능하니 생산물에서만큼 인구에서 인류의 증가하는 이 경향이 어떻게 스스로를 제한하는가 하는 것이다. 그런데 신이 우리에게 생육하고 번성하라고, 그리고 땅에 충만하라고 명령했다면, 그는 우리에게 경계를 넘어가라고 말하지 않았다. 그 계명의 내용이 홀로 이를 가르쳐 준다.

그러면 인구와 부에서 인류의 증가의 자연적 한계는 무엇인가?

우선 인구의 두 배 증가와 부의 상응하는 네 배 증가가 이루어지는 시기는 본질적으로 가변적이라는 것, 그 합법칙성이나 비정상성을 우리가 아직 전혀 탐색할 필요가 없는 다양한 원인들의 작용 속에서 그 시기는 차례로 14년, 18년, 20년, 25, 50, 100년, 500년, 1000년, 그리고 그 이상이 되는 것으로 밝혀졌다는 것을 관찰하자.

그런데 벌써 이 배증 시기의 유동성이 문제의 해결책을 포함한다는 것이 명백하다. 이 시기가 무한히 연장될 수 있다면 인구와 생산이 언제나 증가하면서 정체하는 상태로 있게 될 순간이 올 것이니 말이다. 유일하게 중요한 것은 그 시기의 연장을 결정하는 원인, 그리고 따라서 인류의 수치적 부동성을 결정하는 원인이 일체의 억제, 억압과 자의에서 해방된 사회 조직에 밀접하다는 것, 그것은 우리의 여러 능력들의 충분하고 자유로운 행사에서 나온다는 것이다. 중요한 것은 그로부터 결과로 나오게 될 균형이 인류 전체에서 느껴질 뿐 아니라 인류의 부분들 각각, 민족, 도시, 가족, 개인에게서도 느껴지는 것, 다소 먼 미래 시기에만이 아니라 역사의 모든 시기에, 사회생활과 개인 생활의 세기마다, 날마다, 매분 느껴지는 것이다.

그런데 아직 미지인 이 원인, 모든 외관상으로는 인류에게 더 현존하고, 사회와 인간에게 더 밀접한 것으로 존재할 이 원인을, 노동의 총합이 감소하는 대신 끊임없이 증가하며, 노동자들의 수에 비례해서만이 아니라 산업, 과학, 예술에서 성취되는 진보에도 비례해서 증가한다는 것, 그래서 행복의 증가는 진정으로 인간에게는 그의 과제의 증가를 표현할 뿐이라는 것이 증명된다면 우리는 틀림없이 파악할 것이다. 실제로 노동의 이 증가로부터 우선 생산물 배증의 시기는 끊임없이 연장되어 인류가 여전히 노동은 하면서도 아무런 축적을 하지 않고 더 이상 자본화를 하지 않는 순간이 온다는 결과가 될 것이다. … 인간의 생산은 그때 그 최대에 도달했을 것이다. 인구가 같은 발걸음으로 따라가면서 이 최대치에서 어떻게 멈출 것인지를 아는 일이 남을 것이다. 인구와 생산의 이 두 항목은 필연적으로 연결되며 연대적 관계에 있으니 말이다.

우선은 노동에 전념하자.

노동은 사람의 첫 번째 속성, 핵심적 성격이다.

사람은 노동자, 즉 창조자요 시인이다. 그는 관념들과 기호들을 내놓는다. 자연을 개조하면서도 자신의 밑천으로 생산하고, 자신의 실체로 살아간다. 이는 대중적인 문구인, 자기 노동으로 살아간다는 것이 의미하는 것이다.

사람은 그러므로 동물들 중에 유일하게 노동하며, 자연이 결코 만들지 않은 것들을, 신에게 그 능력들이 결여되므로 창조할 능력이 없는 것들을 존재하게 한다. 이는 인간이 그의 능력들의 특수성 때문에 신적 권능이 성추하는 것은 아무것도 하지 못하는 것과 마찬가지다. 신의 경쟁자인 인간은 신과 똑같이, 그러나 신과는 다르게 노동한다. 말하고, 노래 부르고, 글을 쓰고, 이야기하고, 계산하고, 계획을 세우고 이를 실행하고, 여러 이미지들을 만들어 내서 그것들로 자신을 그리고, 자기 존재의 기억할 만한 행위를 기념하고, 기념일들을 제정하고, 전쟁 때문에 화를 내고, 종교, 철학, 예술로써 자신의 사고를 부추긴다. 존속하기 위해 자연 전체를 사용한다. 이를 차지하고 자기 것으로 만든다. 인간이 하는 모든 일에서 그는 밑그림을 그리고, 의식과 취향을 둔다. 그러나 더욱 경이로운 것은 노동 분업에 의해, 그리고 교환에 의해 인류 전체가 한 사람처럼 움직인다는 것, 그렇지만 각 개인은 이 행위 공동체에서 자유롭고 독립된 입장이라는 것이다. 끝으로 의무들의 호혜성 때문에 사람은 자신의 사회성 본능을 정의로 전환하고, 자기 말에 대한 담보로 자신에게 형벌을 자초한다. 오로지 사람을 구분해주는 이 모든 것들은 노동의 형태, 속성, 법칙들이며, 우리의 생명의 방출, 우리 영혼의 유출로 간주될 수 있다.

동물들은 그들의 의식을 초월하는 이성의 지배 아래 움직인다. 인간만이 자기 노동을 의식하고, 자기의식의 도움으로 자기 이성을 형성하므로 노동한다. 우리가 비유로 노동자들이라고 이름 붙이는 동물들은 두 적대적 창조자들인 신과 인간 중 하나의 손 안에 있는 기계들일 뿐이다. 그들은 아무것도 의식하지 못하고 따라서 생산하지 않는다. 때로 그들을 우리에게 접근시켜 주는 것 같은 외적 행위들, 둥우리에서 살고 먹을 것을 비축하고, 옷을 해 입는 여러 동물들의 내재적 재능은 도덕성 면에서는 유기 생명체의 운동들과 구분되지 않는다. 그것들은 우선 완벽하며, 가능한 완성의 여지가 없다. 의식의 관점에서 누에의 소화와 그것의 천 짜기 사이에서 어떤 차이를 발견할 수 있는가? 알을 품는 제비는 어떤 점에서 집을 짓는 제비보다 열등한가?

그러므로 노동은 무엇인가? 아무도 아직 그것을 정의하지 않았다. 노동은 정신의 배출이다. 노동하는 것은 자기 생명을 지출하는 것이다. 노동하는 것은 한마디로 헌신하는 것이고 죽는 것이다. 유토피아주의자들은 우리에게 더 이상 헌신에 대해 말하지 않는다. 헌신은 노동이며 그 업적에 의해 표현되고, 측정되는 노동이다.

사람은 마라톤의 병사처럼 열심의 노력에서 자기 영혼을 소진하든, 우리 공장들의 인부처럼, 우리 들판의 농민처럼 50년, 60년의 노동으로 자기 생명을 소진하든 노동과 헌신으로 죽는다. 그는 노동하므로 죽는다. 아니, 더 제대로 말해 그는 노동자로 태어나므로 죽기 마련이다. 사람의 지상 운명은 불멸성과는 양립 불가능하다.

동물들은 그들의 생명을 지출하는 하나의 방식으로 그들에게는 인간과 공통인 것밖에 말할 것이 없다. 이는 생식이다. 어떤 종들에게서는 생명은 재생산의 순간까지 지속한다. 이 지고의 행위가 완수되면 개체는 죽는다. 그는 자기 생명을 소진했으며, 더 이상 생존 이유를 가지지 않는다. 꿀벌과 개미처럼 노동을 한다고 하는 종들에서는 성은 조금도 노동에 종사하지 않는 개체들에게 남겨진다. 일하는 것들은 성을 전혀 가지지 않는다. 사람이 종속시키는 동물들 중에 그가 자신과 함께 일하도록 하는 것들은 곧 활력을 상실한다. 그것들은 여리고 물러진다. 노동은 그것들에게는 조숙한 늙음과도 같다.

결과적으로 노동은 짐승들의 처지가 결코 아니다. 그리고 인간이 제거된다면 자연에는 절단, 쇠퇴, 그리고 이어서 죽음으로의 지향이라는 연속적 해결책이 있는 것은 이 때문이다.

자연에서는 균형이 파괴에 의해 성립한다. 초식동물, 설치류 등은 식물의 왕국에서 살며, 육식동물에게 먹이로 소용되지 않는다면 이를 곧 소진시킬 것이다. 육식동물들은 모든 것을 잡아먹은 후 서로를 잡아먹으며 결국 사멸할 것이다. 그러므로 멸종은 자연에서의 순환과 생명의 법칙으로 나타난다. 사람은 동물로서 같은 숙명에 종속된다. 그는 자기 생존 수단을 두고 고래, 상어, 늑대, 호랑이, 사자, 쥐, 독수리, 곤충들과 다투어 이 모두를 쫓고 죽인다. 결국 그는 자기 자신에게 전쟁을 걸고, 자신을 잡아먹는다.

그러나 보편적 생명의 원이 닫히는 것은 결코 이런 식이 아니며, 현대 화학이 우리에게 이런 면에서 계시하는 모든 것은 인간의 존엄성에 대한 모욕이다. 인간은 피와 살의 형태로 자기 자신의 실체를 섭취하는 것이 아니다. 빵의 형태로 섭취하는 것이며, 이는 그의 노동의 산물에서 나온 것이다. 이것은 나의 몸이니(Hoc est corpus meum). 노동은 빈곤의 예상을 멈추고 식인 풍습을 끝맺는다. 사납고 신적인 신화를 인간적이고 섭리적인 진리가 계승한다. 노동에 의해 사람과 자연 사이의 동맹이 형성된다. 그리고 자연의 영속성은 인간의 자발적 희생에 의해 보장된다. 주님이 맺는 언약의 피다(Sanguis foederis quod pepigit Dominus). 이처럼 종교적 전통은 경제적 진리에서 기한이 끝났다. 이는 예수 그리스도와 멜기세덱의 성찬 희생을 예고했으며, 이는 예전에는 아론과 노아의 희생이 표현한 것이고, 더 옛날에는 또한 토리드Tauride[35]의 인신 희생도 이를 가리켰다. 현대의 노동 제도는 이를 새로이 예고하고 선포한다. 우주는 사람이 사람을 먹는 원리 위에 세워졌다는 것이고 다른 말로 하면 인류는 스스로를 먹고 산다는 것이다.

그러나 인류가 자기 노동으로 먹고산다면, 말하자면 자기 자신의 생명을 먹고 산다면, 인류의 실체, 따라서 자신의 생명력은 필연적으로 그의 산업적 방출에 비례한다. 그런데 이 방출의 위력은 무엇인가?

우리는 정치경제학의 가장 중대한 사실로 철학자의 명상을 가장 자극할 만한 사실에 닿는다. 이는 노동의 증가, 혹은 더 제대로 말하자면, 가중을 말하고자 하는 것이다.

상업이 아무것도 아니고 각자가 모두 자신만을 위해 생산하는 때인 미분할의 시대에는 노동은 그 다산성이 최소에 있다. 부는 개인들의 수와 같이 증가한다. 그때에는 땅은 소수의 주민들만 부양할 수 있다. 야만인 앞에서는 땅이 줄어드는 것 같다. 인구는 끊임없이 맬서스가 지적한 비율에 따라 생산을 앞서 가는 경향을 띤다. 그리고 곧 모든 방면에서 그 한계를 밀어붙여 절정에 달하고 죽는다.

노동의 분업, 기계, 상업, 신용, 그리고 모든 경제적 장치와 함께 땅은 사람에게 무한한 자원을 제공한다. 이때 땅은 그것을 개발하는 자 앞에서 확장된다. 복리는 인구를 앞질러 간다. 부는 노동자 수의 제곱으로 성장한다.

그러나 인구와 생산의 이 이중적 운동과는 별도로 현재까지 경제학자들이 무시한, 그리고 사회주의는 더구나 보지 않으려고 한 또 다른 운동이 발현한다. 이는 내가 말해 온 것처럼 노동의 가중화다.

조직된 사회에서 노동의 총계는 분업, 기계 등에 의해 항상 감소하는 것으로 보임에도 반대로 집단적 노동자에게, 그리고 각 개인에게 계속해서 증가하며, 이는 경제 발전의 사실 자체에 의해 이에 비례한다. 그래서 과학, 예술, 그리고 조직에 힘입어 산업이 완성될수록 노동은 모든 사람에게 강도와 지속성(질과 양)이 증가하며, 따라서 상대적 생산은 감소한다. 그리고 이런 결과에 도달한다. 사회에서 생산물의 다양성은 노동의 배증과 동의어다.

이는 내가 이해시키려고 노력하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리카도의 이론으로 돌아가 보자. 품질이 다른 네 토지 A, B, C, D가 동일한 비용과 같은 면적에 대해서 A는 120, B는 100, C는 80, D는 60을 생산하고 있다고 하자. 이 네 토지의 지주들을 서로 비교해 본다면 첫 번째 지주는 부자이고, 두 번째 지주는 안락하고, 세 번째 지주는 수입과 지출을 맞추고, 네 번째 지주는 가난하다는 것이 명확하다. 그러나 집단적 인간에 대해서 이 재산의 불평등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이는 한편으로 사회가 제1급의 토지 경작으로부터 하급 토지의 경작으로 넘어갈수록 실제로 가난해졌다는 것이다. 이는 둘째로, 그 사회가 첫째 종류의 토지를 개발 이용하면서 만났던 복리를 보전하기 위해서는 그 사회는 같은 토지 표면적에 대해 토질이 어떠하든지 생산물을 증가하게 해 주는 작용 수단을 발명해야 했다는 것이다. 그런데 사회는 불균등한 토질이 야기한 빈곤을 극복했을 뿐 아니라 그 자본과 원시적인 복리를 증대시켰다. 사회는 이 복리를 처음 개간한 노동자들을 위해서만이 아니라 그에 뒤이어 나온 모든 이들을 위해 증대시켰다. 그러므로 인간은 점차 토양의 무기력을 보충하고 자기 실체의 항상 더 큰 양을 재료에 들어가게 하는 것이 필요하다. 한마디로 말하면 언제나 더 많은 노동을 제공하는 것이 필요하다. 사물을 어떤 식으로 바라보든지, 복리는 토지의 증가하는 불모성과 소비자들 수의 배증에도 불구하고 증대되어 제거할 것으로 남아 있을 특권과 교란 요인들을 제외한다면 노동의 총계 역시 사회와 각 개인에게 필연적으로 증대했다.

이 점에서 우리에게 환상을 갖게 하는 것은 기계의 도입으로 야기된 가치의 진자 운동이다. 순간적인 교란 후에는 언제나 우리에게 복리의 증대를 가져다주어 실제로는 우리의 업무의 축적만을 나타내는 반면에 휴식을 향해 내딛는 그만큼의 발걸음으로 우리에게 여겨지는 진자 운동이다.

실제로 기계는 무엇인가? 노동의 요약된 방식이다. 그러므로 기계가 발명될 때마다 과잉의 필요, 빈곤의 압박이 있는 것이다. 노동은 더 이상을 제공하지 않았다. 기계가 나타나 균형을 재확립한다. 흔히 심지어 휴식 시간을 마련해 준다. 이 관점에서 벌써 기계는 노역의 악화를 증명해 준다.

그러나 다시 한 번 묻노니 기계는 무엇인가? (나는 여기서 독자의 모든 주의를 촉구한다) 자신의 경찰, 예산, 인원, 비용 등을 가지고 직간접적으로 다른 모든 생산 중심들이 그에 종속하는 특정한 행위 중심으로서 모든 다른 생산 중심들 각각에 대해 그것은 하위 관련을 맺고 있다. 이처럼 기계는 이익의 원천인 동시에 지출의 구심점, 노예 신분의 근원이다. 왜냐하면 산업이 어떤 기계를 가동하든지 원동자는 여전히 사람이기 때문이다. 사람이 만드는 기구들은 사람이 그것에 전달해 주는, 그리고 그가 계속해서 갱신해 주지 않을 수 없는 잠재력 말고는 잠재력을 가지지 않는다. 사람이 기계에 더 많이 둘러싸일수록 그는 더 많은 감독과 수고를 자초하는 것이다. 조종사, 운전사가 한순간 기관차를 방치하면, 예언자가 말하듯이(바퀴들 안에 영이 있었다spiritus erat in rotis) 그 정신이 바퀴에 생명을 불어넣는 것 같은 경이로운 차량은 그 순간 멈춘다. 기사가 단 하루 방들을 방문하기를 그치면 그 차량은 여섯 주를 계속 가지 못할 것이다. 광부가 그것에 연료를 공급하기를 중단하면 결코 움직이지 않을 것이다.

그런데 결국 이 들어보지 못한 노력은 무엇을 지향하는가? 이 천재성의 발휘, 이 거인의 작업은 왜 하는가? 땅에서 우리에게 거절하는 부를 획득하기 위해서, 이전까지는 불모였던 지역을 비옥하게 하기 위해서, 그리고 36등급, 72등급의 토지를 활용하기 위해서다. 산업 시설은 사막의 개발 이용을 위한 가축 임대차다.

그러므로 우리가 새로운 발명마다, 개간 때마다 매번 앞서 획득된 복리의 수준으로 유지해 가기를 원한다면, 우리가 이 복리를 심지어 증대시키겠다고 한다면, 우리 각자가 마지막 토지의 개발 이용이 요하는 지출에서 자기 몫을 하는 것이 절대로 필요하다. 이것 없이는 처음에 가장 부유한 형편에 처한 자, 예를 들어 토지 A의 지주는 곧 가장 가난한 자가 될 것이다. 그러므로 결국 우리가 인구와 부에서 진보를 더 많이 이룬다면 우리의 노역 또한 더욱 가중될 것이다. 그토록 참된 명제에 더 우아한 공식을 제시하지 못하는 것을 아쉽게 생각한다.

나는 (제4장에서) 노동 증대의 증거로서 철도의 예를 인용했다. 거기서 노예 노동이 무섭게 증대하는 것을 보게 된다. 나는 광산에서 일어나는 일에 대해 한마디 할 것이다.

자연이 우리에게 식물 연료와 과학이 아직 파악할 수 없었던, 그러나 미래가 우리 앞에서 닫히는 것을 우리가 보고 싶지 않다면 곧 우리가 의존하는 것이 필요할 열과 빛의 보편적 매체 사이의 이행 단계로 마련해준 듯한 이 광대한 저장고 안의 석탄을 퍼내는 것보다 겉모양으로 보기에 더 간단하고 그보다 비용이 덜 드는 것이 무엇인가? … 그런데 노동이 첫 번째 노출을 공략하고 나자, 곧바로 하나의 산업, 하나의 과학이 엄청난 규모로 조직되어 갑자기 거기서 솟아난다. 나는 광물 개발이 포함하는 엄청나고 복잡한 작업의 세부 내용에는 들어갈 수 없다. 간단한 전문 용어가 내 목적에는 충분하다.

광산 인원에는 소장, 엔지니어, 사무원, 총감독, 채탄 광부, 수레꾼, 수레 미는 사람, 소 모는 사람, 하역 인부, 갱목 공사 인부, 수리공, 도로 작업자, 성토 인부, 석탄 운반차적재 인부, 마부, 광부, 선광 인부, 석탄 검수인, 물 검수인, 기계 운전자, 운전사, 석고 작업 인부, 돌 고르는 사람, 수공 노동자, 석고 작업자, 짐수레꾼, 대장장이, 석탄 운반차 작업자, 화물차 적재인, 석수와 하인이 있다. 물론 나는 잊어버린다. 루아르 광산의 외출 명세서상의 목록을 취했을 뿐이다.

그런데, 갱을 굴착하는 데, 도구를 만드는 데, 채굴에서 사용되는 자재를 운반하고 채취된 석탄을 운반하는 데 서비스를 제공하는 산업들을 추가하라. 연료의 부족 때문에 필요하게 된 이 모든 세계를 유지하기 위해, 이 모든 지출들에 직면하고 앞서 획득된 복리를 보전하기 위해, 같은 규모로 농업, 공업 및 상업 수익을 증대시키고 어디에서나 더 큰 노력, 새로운 지출을 촉발할 필요가 있었다. 그리고 가능하다면, 말해 보라. 원초적 노동은 얼마나 엄청난 양으로 증대되어야 했는가?

모든 산업상의 기업, 그리고 이를 대표하는 기계들은 땅과 마찬가지다. 이를 번영하게 하려면 항상 증가하는 자본이 필요하다. 이는 부가 소멸하고 복리가 사라지는 것을 보지 않으려면 노동자의 업무를 끊임없이 더해 줄 필요가 있다는 말이다. 기계의 도움으로 우리가 부유해져서 우리의 노동을 제거하거나 줄일 수 있다고 상상하는 것, 이는 운동의 영속성이 존재할 수 없는 곳에서 그것을 찾는 것, 끊임없는 퇴화에 종속되고 무기력한 존재들에서 운동의 영속성을 찾는 것이다. 이는 그 원인들보다 더 큰 결과들을 가정하는 것이다. 자연에서 아무것도 무에서 창조되지 않는 것처럼 경제 질서에서 사람은 그 자신의 품에서 끌어내는 것 말고 아무것도 생산하지 않는다. 그의 생명의 한계들이 그의 다산성의 한계들이기도 하다.[36]

이를 더 손에 잡히는 방식으로 제시하자. 프랑스의 연간 생산이 100억 프랑으로 평가된다고 하자. 프랑을 가치들의 비교의 계측 단위로 채택한다면, 인당 노동 총계는 394다. 그런데 프랑스에서 인구가 겨우 절반만큼도 증가하지 못한 반면 생산이 50년 전부터 두 배 이상이 되어서, 결과적으로 프랑스는 네 배가 더 부유해지면서 50년 전에 하던 것보다 네 배의 노동을 하는 것이 된다. 노역의 이 네 배는 노동 일수의 네 배를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산업과 기계 역학의 진보를 고려할 필요가 있으니 말이다. 나는 노동이 지속 시간에서만큼 강도에서 네 배가 되었다는 것, 증대는 영혼과 몸에 한꺼번에 자극을 가했다는 것을 말한다. 이는 총계에는 아무 변동도 주지 못하는 것이다. 기계들은 우리에게 일정한 수작업을 줄여 주고 보충해 주기만 한다. 기계들이 노동을 감축시키는 것이 아니라 노동을 옮기는 것이다. 우리가 이제까지 우리의 근육에 요구하는 것이 두뇌로 옮겨졌다. 신체에서 지성으로 옮겨지는 것이 행위의 양식이 아니라면 노동에서는 아무것도 달라지지 않는다. 그러므로 사람이 끊임없이 그에게 고유한 힘 덕분에 자연의 증가하는 관성과 그의 필요의 증대에 승리한다는 것이 증명된다면, 동시에 증명되는 것은 그의 노역의 총계가 항상 증가한다는 것이다.

노동의 이 계속적 증대를 증언해 줄 사실들은 풍부하며, 우리가 이 사실들을 보지 않고 도외시하는 부주의는 언제나 나에게 가장 큰 놀라움으로 닥친다.

파리, 리옹, 릴, 루앙 같은 산업 중심지들에서 평균 노동은, 지속 시간만 보면 열세 시간에서 열네 시간이다. 종업원들, 하인들과 똑같이 주인들도 이 노예의 노역에 참여한다. 어디에서나 상업에서는 일과 시간이 열여덟 시간에까지 도달하는 것이 드물지 않다. 아이들과 여성들도 결코 예외가 아니다. 입법자는 최근 몇 년간 산업이 어린이들과 여성들에게 지우는 끔찍한 노역에 분개했다. 언론은 법정에서 고발된 남용들에서 착취자들의 탐욕과 야만성밖에 볼 줄을 몰랐다. 아무도 이 착취자들이 결국 그 대리인일 뿐인 경제적 숙명을 고려하려고 애쓰지 않았다. 톱니바퀴들로 맞물린 우리 사회에서 노동은 자본과 마찬가지로 멈추지 않는다는 것, 자본이 복리 이자에 의해 증가하는 것처럼 노동은 분업과 기계에 의해 무한히 가중되는 것을 사람들은 보지 못했다. 노동과 자본은 창조와 시간처럼 언제나 도달될 수 없으면서 추구되는 것들이다. 그러나 생산이 너무 느려서 이것이 이자의 점진적 감소의 제1원인이므로 자본이 고리대에 의해 증대할 수 없고, 노동도 자연의 계속 증가하는 관성의 힘 때문에 분업에 의해 더 이상 생산적이 될 수 없는 시간이 온다. 이는 인류 안에서 미성년기가 성년기에 자리를 내주고, 숨을 헐떡이는 사회가 독점과 경쟁이 옛날에 그 사회에 그리도록 했던 엄청난 진자 운동 대신 미미한 진동 이상을 느끼지 못하는 시간, 평등이 불평등 자체 안에서 진전되며 생명에게 “너는 더 멀리 가지 못할 것이다!”하고 말하는 것 같은 시간이다. 네가 여기까지 오고 더 넘어가지 못하리니 네 높은 파도가 여기서 그칠지니라(Usque huc venies, et non procedes amplius, et hic confringes tumentes fluctus tuos).

노동의 악화를 더욱 두드러지게 하는 것, 심지어 다른 관점에서 이를 재생산하기만 하는 것은 교육의 증대된 요구들이다. 생산과 소비가 동일하고 맞물리는 두 항목인 것처럼 교육은 노동의 연습이자 행복의 연습으로 간주될 수 있다. 향유할 능력은, 생산할 능력처럼 과학과 연습을 필요로 한다. 그것은 심지어 잘 판단해 보자면 생산할 능력일 뿐이다. 그리고 사람의 재능과 그의 지식의 다양성에 대해 그의 필요와 수효와 본성에 따라 평가할 수 있다. 현대 사회에서 생명의 높이에 있으려면 과학적, 심미적, 산업적으로 엄청난 발달이 필요하다. 그래서 즐기기 위해서 비생산자는 생산자가 생산하기 위해 하는 거의 그만큼 노동할 필요를 지닌다. 특권층의 교육에는 25년이 충분하지 않다. 그러니 이 특권층이 다시 노동자가 될 때는 언제일까?

모든 생산자 계급 중에 오늘날 가장 힘을 덜 들이는 것은 농업 계급이다. 마지막으로 평등에 도달할 것도 이 계급이다. 다른 데서는 어디서나 상업과 공업 노동은 극히 작은 가중도 견딜 수 없는 수준에 도달해 있다. 그러나 여기서는 반대로 나는 감히 평등이 임박해 있다고 말한다. 평등이 노동자들 간에 아주 긴밀하게 존재하며 예오를 이루는 개인들, 주인들, 자본가들, 기업가들, 한마디로 귀족 부분은 5퍼센트를 넘지 않는다. 이 높은 머리들을 낮추는 것은 누구에게도 어려운 일일 수 없을 것이다.

모든 부분에서 엄청나게 비통한 불평이 노동의 과도함에 대해 치솟는다. 모든 부분에서 일군은 임금 상승과 일과 시간 단축을 위해 파업한다. 이는 명제를 내세우고 입증하는 것이 아니라 무뎌지게 만드는 것과 빈곤에 맞서 관성적 힘으로 항거하기만 하는 일꾼에게는 용서가 되는 일이다. 그러나 노동의 필요성을 설파하면서도 그들의 바보스러운 애도에 의해 노동에 대한 혐오감을 품는, 그리고 앞으로 나아가도록 밀어 주어야 일꾼에게 “그만하라”고 말하는 것 같은 박애주의 경제학자들에게는 한심한 일이다.

그러면, 우리가 더 많이 생산할 수 없다면 어떻게 빈곤을 치유할 것인가? 부의 증대 없이, 즉 신체적이건 지적이건 노역의 끊임없는 증대 없이 문명의 지난한 작업을 어떻게 추구해 나갈 것인가? 생산을 줄이고 물가를 높이면서 어떻게 빈곤층을 물러가게 할 것인가? 그 무식이 인기를 얻는 또 하나의 자격으로 보이는 지도자들에 의해 부추겨진 프롤레타리아가 실업 때문에 품귀品貴를 일으켰을 때 그를 위해 누가 지불해줄 것인가? … 우리가 처한 극단적 상황에서 임금의 모든 상승, 그리고 따라서 물가의 모든 인하가 불가능하게 된다면, 이는 혁명이 가깝다는, 퇴로가 우리에게 막혔다는 신호가 아닌가?

나는 노동의 끊임없는 가중화라는 웅장하고 정말로 예언적인 이 사실에 관해 내 생각을 더 펼치기를 원했지만, 시간이 없다. 그리고 내가 틀리지 않다면 독자는 내게서 형식상의 증명보다는 해결책을 더 기다린다. 증명은 독자가 맡아서 할 것이다. … 그러므로 노동이 그 분업이라는 사실 자체와 그것이 기계들에게서 받는 지원에 의해 인간에게 줄어드는 대신 항상 가중화된다는 것이 사회경제의 법칙이라면, 우리의 생명은 한정이 있고 우리의 연수와 날수는 헤아려질 때, 동일한 가치 증대를 위해 언제나 더 많은 시간이 우리에게 요구되는 결과, 부의 네 배 증가에, 그리고 인구의 두 배 증가에 필요한 시기는 무한히 연장되는 결과, 사회가 항상 행진해 가면서 정체 상태로 있게 되는 시간이 온다는 결과가 된다.

그러나 노동의 증대에 의한 생산의 감소는 어떻게 인구에 옮겨지는가? 이는 우리에게 고찰할 것으로 남는다.

첫 번째 사실이 성립되는 것으로 나타난다. 가치들의 창조를 주관하는 같은 힘, 같은 생명 원리가 또한 종의 재생산도 주관한다. 원시 언어는 이 점에서 인류의 직관을 증언한다. 성서에서 하늘과 땅의 사실들은 다음과 같다(Istaae sunt generationes coeli et terra), 야곱의 생의 행적들은 다음과 같다(Hoe sunt generationes Jacob) 등의 단어가 노동과 생식의 산물들을 표현하는 데 쓰인다. 프랑스어는 복수의 명칭 일oeuvres의 이중적 의미, 라틴어의 generatio와 히브리어의 ialad처럼, 노동과 사람을 말하는 의미에서 이 비유를 보전했다. 외설적 의미에서 취해진 일을 보다besogner라는 옛 단어는 같은 관념에서 도출된다. 노동과 사랑의 친척 관계는 얼빠진, 어리석은 멋과 활기를 잃은 존재에 대해서 말해지는 이 인기 있는 문장에서 더 심오하게 보인다. “그는 사랑 없이 노동한다.” 그리고 이 비유는 노동의 기계적 도구에까지 넘어왔다. 사람들은 살아 있는 모서리, 살아 있는 칼날이라고 말한다. 자르는 톱, 조이는 줄에 대해 사랑을 가진다고 말한다.

모두 직관과 감정에서 나온 이 관념의 결과는 노동과 사랑의 자연적 적대 관계다. 인민의 자생적 판단에 따르면, 사람의 생명은 두 출구 중 하나에서 나온다. 그중 하나는 다른 하나가 흘러나올 때 닫힌다. 여기서 경험은 본능의 계시를 확증해 준다. 산업적 능력은 번식 능력을 희생시킨 대가로 행사된다. 이는 도덕과 마찬가지로 생리학의 금언으로 통할 수 있다. 노동은 사랑에게는 냉각의 적극적 원인이다. 이는 모든 성욕 억제물 중 가장 강력한 것인데, 특히 그것은 정신과 몸에 동시에 영향을 주는 만큼 더욱더 강력하다.

나는 사람들이 세상의 경제에서 그 중요성을 볼 줄 몰랐기 때문에 별로 주목하지 않은 만큼 통속적인 진리성을 가진 사실에 대해 길게 내 이야기를 펼칠 필요가 없다. 이처럼 맬서스는 아메리카의 야만인들이 고난과 불안으로 가득 찬 삶을 영위하면서 사랑에는 미미하게 움직인다는 것을 관찰했다. 그러나 그는 이 불감증이 풍요와 휴식과 함께 빠르게 감소한다고 덧붙인다. 그렇지만 도덕적 억제책의 발명자인 맬서스는 인구 문제를 연구하는 데 40년의 힘든 삶을 바친 사람으로서 진정한 해결책으로 그를 이끌어줄 사실을 일반화하는 데 조금도 신경 쓰지 않는다. 게다가 맬서스는 노동 증가의 법칙을 인식할 줄 몰랐고, 이 법칙을 넘어서 부의 진보의 법칙, 그리고 이것과 인구 진보의 밀접한 연대 관계를 인식할 줄 몰랐던 때부터 이 사실로부터 거기 담겨 있는 모든 결과들을 어떻게 끌어낼 줄 알았겠는가?

또한 이처럼 경제학자들은 궁핍한 계급의 이상한 다산성을 찾아냈다. 방대한 지식을 가진 오귀스트 콩트 씨는 심지어 이 현상을 정치경제학의 가장 주목할 만한 법칙들 중 하나로 지적했다. 사람들은 궁핍이 별로 일하기 좋아하지 않는 그 본성에서 나오고, 가난한 자는 어떠한 지적인 지출도 없이 기계적 노역에 종속되어 언제나 아무리 그의 생존 수단이 빈약해도 자기의 한심한 후세를 보장하는 데 필요한 것보다 더 많은 힘을 보전한다는 것을 동시에 언급하지 않으려고 한다.

순결은 노동의 동료다. 나태함은 무기력의 속성이다. 명상하는 사람들, 열렬한 사상가들, 이 모든 위대한 노동자들은 사랑의 서비스에는 미미한 역량을 지닌다. 파스칼, 뉴턴, 라이프니츠, 칸트, 그리고 수많은 다른 사람들이 그들의 심오한 사색 중에 자신이 남자임을 잊었다. 여성은 그들을 간파한다. 이 강인함의 천재들은 여성에게 별 매력을 주지 못한다. 사랑스러운 베네치아 여인[37]이 장자크에게 말한다. “여자들은 그냥 두고 수학이나 공부해.” 격투기 선수가 연습과 절제로 원형 경기를 준비한 것처럼 노동하는 사람은 쾌락에서 도망친다. 포도주와 사랑의 약하게 만드는 즐거움을 끊는다(abstinuit venere et baccho). 미라보는 그의 체질의 강인함에도 불구하고 침실의 만용을 법정의 승리에 결합시키기를 원해서 사멸했다.

그런데 우리가 노동에서 언제나 우리의 조상들보다 낫게 되는 것이 필연적 법칙이라면, 사랑의 놀이에서 우리가 언제나 용기를 덜 가지는 것도 마찬가지 필연에서 나온다. 인구는 장기적으로 이 불가피한 냉각에서 어떻게 영향을 받지 않겠는가?

그러나 이는 여전히 억제책이고, 여전히 억압이고, 여전히 절단이라고 사람들은 틀림없이 말할 것이다. 뭐라고! 당신들은 자연을 마르게 하고 이를 인류 안에 균형을 창조하는 것이라고 부른다! 당신들은 다른 사람들에게서 생리적 수단들을 금지하고는, 생리학을 들먹인다! … 아니, 사람이 그리로 끌려가는 꼴을 겪을 것은 황소나 수퇘지처럼 코뚜레를 가지고 하는 것이 결코 아니다. 이는 이성과 자유에 의한 것이다. 노동으로 기진맥진해진 그는 사랑할 능력을 상실해서 빈곤을 바꾸기만 할 것이다. 그에 대해 섭리는 언제나 유죄일 것이다. 자연은 언제나 계모일 것이다. 그건 그렇고 처방의 효능을 누가 당신에게 보장하는가? 인구를 배증하는 것은 사랑에서의 사치가 아니다. 이는 오히려 절욕일 것이다. 몇 시간의 휴식이 자연에 그 모든 잠재력을 준다. 너무 오랫동안 억압된 격정은 더 맹렬한 기세로 터진다. 그리고 사람을 만들기 위해서 사랑에는 불티만 있으면 된다. 베르나르(Bernard), 예로니모(Jérôme), 오리게네스(Origène)[38]에게 노동, 단식, 철야, 고독으로써 육신을 복종시키기를 원하는 것은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았다. 이 잘못된 규율은 휴식, 미식美食, 여성과의 대화보다 더 많은 부정不貞을 만들어 냈다. 선택된 그릇인 성 바울로는 엄청난 피로 중에도 “나는 나를 괴롭히는 악마를 달고 다닙니다”라고 쓰지 않았는가?

이 열띤 불평에서 나는 히브리 사람들이 모세에게 사막의 빈궁 가운데 투덜대는 것을 듣는 것 같다. “우리에게 이집트의 고기와 생선, 오이와 멜론을 달라! 우리 영혼은 말라붙었고 우리는 이 만나를 원하지 않는다!”

관능적인 영혼들이여, 마음을 가라앉히라. 섭리는 그대들을 불쌍히 여겼다. 그대들은 고기를 원한다고! 싫어질 때까지 고기를 먹게 될 것이다.

독자는 우리에게 의심할 바 없이 경고했다. 노동이 사랑에 작용을 가할 것은 생리적이고 숙명적인 영향에 의해서가 결코 아니고 덕과 자유의 인상에 의해서라고. 잠시만 기다려 주면 우리의 논제는 완성될 것이다.

노동에서는 사랑에서처럼 가슴은 소유에 의해 매달린다. 반대로 감각들은 싫증을 낸다. 그 산업적 능력과 번식 능력의 행사에서 사람의 신체와 정신의 이 적대성은 사회적 기계의 추錘다. 사람은 그 발달에서 끊임없이 숙명에서 자유로, 본능에서 이성으로, 물질에서 정신으로 간다. 사람이 점점 괴로운, 그리고 혐오스러운 노동의 억압에서처럼 감각의 노예 상태에서 해방되는 것은 이 진보 덕분이다. 사람을 하늘을 향해 올리는 대신 언제나 진흙을 향해 숙이는 사회주의는 육신에 대해 쟁취한 승리에서 빈곤의 새로운 원인만을 보았다. 마치 기분 전환과 곡예에 의해 노동의 지겨움을 극복한다고 자랑하는 듯이 사회주의는 결혼의 단조로움을 애정의 숭배가 아니라 밀통과 배우자 변경으로 싸워서 이겨내려 했다. 이 더러움을 휘젓는 데 내가 아무리 혐오감을 느끼더라도 독자는 체념할 필요가 있다. 상식적인 몇 가지 진리를 확립하기 위해 내가 모든 논리의 장치를 활용할 필요가 있다면, 이것이 사람들을 돌볼 임무를 맡지 않은 내 잘못인가?

노동이 분화된 것 자체로 인해 노동자 각자에게 노동은 전문화되고 확정된다. 그러나 이 전문성이나 확정성은 집단적 노동에 비해 분수의 표현인 것으로 간주되어서는 안 된다. 이는 노예살이의 관점에 위치하는 것, 유토피아가 온 힘을 다해 카스트들의 복권에 노력하는 수단이 되는 원리를 채택하는 것이다. 전문성을 말하는 자는 끝이나 상단을 말한다. 어원이 이를 증명해 준다. spiculum(창), spica(못), speculum(거울), species(겉모습), aspicio(나는 본다) 등등. 같은 어근이 지적하는 행위, 바라보는 행위를 가리키는 데 사용된다. 노동에서 모든 전문성은 각 노동자가 사회경제의 총체를 지배하고 고찰하고 그 중심이면서 감독자가 되는 높은 곳의 정상이다. 그러므로 노동에서 모든 전문성은 관계들의 다양성과 다채로움 때문에 무한이다. 이로부터 결과적으로 각 노동자가 노동의 싫증과 혐오감을 극복하기를 배우는 것은 산업, 과학과 예술에서의 중앙 집중화되고 조율된 이행 체계에 의해서이지 결코 규율 없고, 전망 없는 동작들의 다양성에 의해서가 아니라는 것이 된다.

마찬가지로 결혼에 의해 사랑은 확정되고 개인화된다. 그리고 사람이 사랑의 물질주의와 단조로움을 이길 것은 역시 전부 도덕적인 이행들의 체계에 의해서, 감정들의 정화에 의해서, 사람이 자기 존재를 바친 대상의 숭배에 의해서다.

예술, 즉 사람에게서, 자기 아내와 자녀에게서, 자기 관념들에서, 자기 언설에서, 자기 행동에서, 자기 산물에서 아름다움의 추구, 진리의 완성, 이런 것이 노동자의 마지막 진화이고, 자연의 원을 영광스럽게 닫도록 점지된 국면이다. 미학, 그리고 미학 위에 도덕, 이것이야말로 경제적 건축물의 핵심이다.

인간적 관습의 총체, 문명의 진보, 사회의 여러 지향들이 이 법칙에 대해 증언한다. 사람이 하는 모든 것, 그가 사랑하고 미워하는 모든 것, 그에게 영향을 미치고 그의 관심을 끄는 모든 것이 그에게는 예술의 소재가 된다. 그는 노동의 마력에 의해, 말하자면 소재를 사라지게 하기까지 이를 구성하고 윤내고 이에 조화를 준다.

사람은 자연에 따라서는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 내가 감히 그런 식으로 내 생각을 표명한다면, 사람은 만드는 동물이다. 그가 손질하지 않았다면 아무것도 그의 마음에 들지 않는다. 그가 손대는 모든 것을 그는 배열하고 교정하고 정화하고 재창조할 필요가 있다. 자기 눈의 즐거움을 위해 그는 그림, 조각, 조형예술, 장식, 모든 부속물들의 세계를 발명하고 그에 대해 그는 그것이 그에게 상상의 필요물이고 그것이 그에게 마음에 든다는 것 말고는 그 이유와 쓸모를 말할 줄 모를 것이다. 자신의 귀를 위해 그는 자신의 언어를 다듬고, 음절 수를 세고, 발성 시간을 잰다. 그리고 그는 멜로디와 화음을 발명한다. 그는 강력하고 듣기 좋은 소리를 내는 교향악들을 만들며, 그가 이를 연주하게 하는 음악회에서 천상의 음악과 보이지 않는 정신들의 노랫소리를 듣는다고 믿는다. 단지 살기 위해 먹는 것이 그에게 무슨 도움이 되는가? 변장과 환상에 대한 그의 민감함에는 종류가 필요하다. 그는 먹고 사는 것을 거의 불쾌한 것으로 본다. 그는 배고픔에 조금도 양보하지 않으며 위와 타협을 한다. 자기 음식물을 풀 뜯어 먹듯 먹는 대신 스스로 굶어 죽을 것이다. 바위의 맑은 물은 그에게는 아무것도 아니다. 그는 신들의 음식과 신의 술을 발명한다. 그가 통제에 도달하지 못하는 자기 생활의 기능들을 그는 수치스럽고 정직하지 못하고 무식하다고 부른다. 그는 걷고 뛰기를 습득한다. 그는 잠을 자고 일어나고, 앉고, 옷을 입고, 싸우고, 스스로를 다스리고, 정당한 대접을 받는 방법을 알고 있다. 그는 심지어 끔찍한 것의 완성, 우스운 것의 극치, 추한 모습의 이상도 알아냈다. 끝으로 그는 서로 인사하고, 서로 존경을 표시하고 자신의 인격을 세심하게 숭배하며, 자기 자신을 신성으로서 찬미한다!

사람의 모든 활동들, 운동들, 언설들, 사고들, 산물들, 애착들은 이런 예술가적 특성을 지닌다. 그러나 이 예술 자체, 그것을 계시하는 것은 사물의 관습이며, 그것을 발달시키는 것은 노동이다. 그래서 사람의 근면이 이상에 접근할수록 그 자신도 감각 위로 더욱 상승한다. 노동의 매력과 존엄성을 이루는 것은 사고를 통해 창조한다는 것, 모든 메커니즘에서 해방된다는 것, 자신으로부터 소재를 제거한다는 것이다. 이 지향은 감각적 삶에 완전히 잠긴 어린이에게서는 아직 약하고, 자신의 힘과 유연성을 자부하는, 그러나 이미 정신의 장점에 민감한 젊은이에게서는 좀더 두드러지지만, 성숙한 사람에게서는 점점 더 발현된다. 이 일꾼들에게서 작품에 대한 오랜 열중이 자생적으로 예술가, 그에게 노동의 완성은 생존 수단만큼이나 절대적인, 예술가 그리고 외관상 인색한 전문 분야에서 갑자기 찬란한 전망들을 발견하는 예술가를 만들었다는 것을 누가 알게 되지 않겠는가?

그런데 사람이 그의 예술가적 본성에 의해 자신의 노동을 이상화하는 경향을 띠는 것처럼, 또한 그의 사랑을 이상화하는 것은 그에게는 하나의 필요 사항이다. 그의 존재의 이 능력을 그는 그의 상상력이 가지는 더 섬세하고 더 강력하고 더 매혹적이고 더 시적인 모든 것으로 꿰뚫는다. 사랑을 하는 기술은, 모든 사람에게 알려진 기술이고 모든 기술 중에 가장 많이 계발되고 가장 잘 느껴지는 기술로서 그 형태에서 풍부한 만큼 그 표현에서 다채로운 것인데, 로마 가톨릭의 위력의 시대 무렵 가장 크게 도약했다. 그것이 중세 전체를 채웠다. 그것은 현대 사회를 단지 극장, 소설, 사치 예술로 사로잡는데, 이 모두는 그것에 보조 수단으로 소용되기 위해 존재할 뿐인 것들이다. 끝으로 사랑은 예술의 소재로서 인류의 위대하고, 진지하고 거의 유일한 일이라고 나는 말했다.

그러므로 사랑은 결혼에 의해 확정되고 고정되자 곧바로 신체 기관들의 횡포에서 해방되기를 지향한다. 결혼은 사랑의 무덤, 즉 해방이라는 속담이 표현하고자 한 것은 사람이 그에 대해 첫날부터 그의 감각의 냉랭함에 의해 기별을 받는, 그리고 그에 관해 수많은 사람들이 아주 불쌍하게 환상을 가지는 이 절박한 경향이다. 그 언어가 언제나 구체적인 인민은 여기서 사랑을 억누를 수 없는 욕망의 폭력, 피에 붙은 불로 이해했다. 속담에 따를 때 결혼에서 꺼지는 것은 완전히 신체적인 이 사랑이다. 인민은 그의 타고난 순결에서, 그리고 무한한 섬세함에서 부부의 잠자리의 비밀을 드러내기를 원하지 않았다. 인민은 그 신비를 간파하고 그 경고를 유익하게 사용하는 수고를 각자의 지혜에 맡겼다.

그렇지만 진정한 사랑은 사람의 죽음에서 시작된다는 것, 정중함이 숭배로 바뀌는 것은 결혼의 필연적 효과라는 것, 모든 남편은 어떤 표정을 짓더라도 영혼 깊숙이에서는 우상 숭배자라는 것, 여성의 멍에를 벗어나기 위해 남자들 간에 공공연한 공모가 있다면 여성을 찬양하기 위해서는 암묵적인 협정이 있다는 것, 여성의 연약함만이 이따금 남자에게 제국을 다시 장악하지 않을 수 없게 한다는 것, 그리고 거기에 부부의 부드러움과 조화의 원리가 있다는 것을 인민은 알았다.

남자가 자기 아내를 자기 일을 사랑하듯이 정신적으로 사랑하는 것, 아내를 만드는 것, 꾸미는 것, 장식하는 것은 저항할 수 없는 필요, 그에게서 그의 근면의 진보, 그의 관념의 발달, 그의 감각의 세련화, 그의 애착의 섬세함으로부터 자생적으로 태어나는 필요다. 그가 아내를 사랑할수록 아내가 더 빛나고 고결하고 눈치 빠르기를 원하고, 아내를 걸작, 여신으로 만들기를 갈망한다. 아내 곁에서 그는 자기 감각을 잊으며, 자기 상상력 이상을 따르지 않는다. 그가 의식하고 그가 만진다고 생각하는 이 이상을 그의 손이 더럽히는 것을 두려워한다. 그는 옛날에 그의 욕구의 열정 가운데 그에게 전부인 것처럼 보였던 것을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간주한다. 인민은 살과 피를 환기시키는 모든 것에 대해 본능적인, 세련된 공포를 느낀다. 바쿠스적이고 성욕을 유발하는 흥분제의 사용은 성욕의 날을 세우는 것을 사랑으로 착각하는 동방 사람들에게서는 아주 흔하지만, 문명화된 종족들을 격분하게 한다. 이는 아름다움에 대한 모욕이고, 예술의 부조리다. 그러한 도덕관념은 독재의 그늘에서만, 카스트의 구별에 의해서만, 그리고 불평등의 도움으로만 생겨난다. 그런 것은 정의와 양립 불가능하다.

예술을 이루는 것은 선들의 순수함, 운동들의 멋, 음색들의 조화, 배색의 화려함, 형태들의 어울림이다. 이 모든 예술의 질은 또한 사랑의 속성들로서, 사랑 안에서 그 속성들은 순결, 수줍음, 겸손 등의 신비로운 명칭을 취한다. 순결은 사랑의 이상이다. 이 명제가 곧바로 받아들여지는 데는 이제부터 공언되기만 하면 된다.

노동이 증가함에 따라 예술은 언제나 직업에서 솟아나므로 노동은 그것이 가졌던 혐오스럽고 고통스러운 점을 상실한다. 마찬가지로 사랑은 그것이 강화됨에 따라 그 파렴치하고 외설적인 형태를 상실한다. 야만인이 짐승처럼 즐기고, 무지와 잠 속에서 즐기면서 살 때, 문명인은 점점 활동, 부, 아름다움을 구한다. 그는 근면하면서 예술가이고 순결하다. 게으름과 사치는 완전히 동일한 악이 아니라면 병렬된 악이다.

그러나 예술은 노동에서 태어나 필연적으로 쓸모에 의존하고 필요에 상응한다. 그 자체로 보면 예술은 이 필요를 충족하는 다소 우아한 방식일 뿐이다. 예술의 도덕성을 이루는 것, 노동에 그 매력을 보전해주는 것, 그것의 경쟁심을 일깨우고, 열정을 자극하고, 영광을 보장해주는 것은 그러므로 가치다. 마찬가지로 사랑의 도덕성을 이루고 그 색정을 끝내는 것은 자녀들이다. 부모 됨은 사랑의 유지이고, 그 강제 이행 수단이고, 그 목적이다. 그것이 획득되면 사랑은 그 경로를 다 밟은 것이다. 사랑은 사라진다. 아니, 더 제대로 말해 형태 변화를 일으킨다.

모든 노동자는 그가 선택한 전문 분야에서, 그리고 이 전문 분야의 척도에 따라 예술가가 되어야 한다. 비슷하게 여성에게서 태어나 그 여성의 무릎 위에서 먹여지고 키워진 모든 존재, 아들, 연인, 남편 그리고 아버지는 자신에게서 사랑의 이상을 실현하고 그 모든 형태들을 차례로 표현해야 한다.

노동의 이상화에서, 그리고 사랑의 거룩함에서 보편적 동의로 덕이라 칭한 것이, 혹은 누군가 말한 사람의 고유한 힘(가치)이 숙명적 존재, 신적 존재의 힘인 격정과 대립해서 생겨난다.

언어는 이 관계를 성별한다. 덕, 라틴어 vir-tus는 vir, 남자에게서 나온다. 그리스어로는 arétê 혹은 andréïa인데, 이는 arês 또는 anêr, 남자에게서 나온 것이다. 반의어는 라틴어 fortitudo인데 이는 fero, 휴대하다, fortis, 짐꾼, robus, 떡갈나무와 힘에서 나온다. 그리스어에서는 rômê인데, 이는 맹렬한 힘, 자연적 활력이다. 히브리어는 geborrah라고 하는데, 이는 gebar, 남자에서 나온다. 그리고 반대로 éïal은 생명력, éïl은 반추동물들의 수컷인데, 이로부터 élohim, 신이 나온다.

신적인 힘과 상반되게 남자의 덕은 그러므로 이상에 의한 자연으로부터의 해방이다. 이는 활동과 지식의 모든 영역에서 자유이고, 사랑이다. 덕의 반대는 추함, 불순, 불화, 무례함, 비굴, 제약이다.

남자가 숙명에서 벗어나 점차 자기 자신에 대한 완벽한 소유에 도달하는 것은 덕(이 낱말에서 이제부터 우리는 하나의 관념을 가진다)에 의해서다. 그리고 노동에서 매력이 자연스럽게 혐오를 계승하는 것처럼 사랑에서는 순결이 자생적으로 음란을 대체한다. 이 순간부터 사람은 그 모든 잠재력에서 성화되고, 노동에 의해 길들여지고, 예술에 의해 고상하게 되고, 사랑에 의해 영적으로 되어 그의 존재 안에서 자연의 산물인 모든 것에, 이성과 자유의지에서 나오는 모든 것에 명령하듯이 명령한다. 사람은 점점 더 신을 이긴다. 이성이 격정의 한가운데서 지배하며 이성에 이어서 균형, 즉 평온, 기쁨이 발현된다.

사람은 이때 더 이상 여성을 바라보고 격정의 눈물을 흘리는 불명예스러운 노예가 아니다. 그는 천사로서 그에게서 순결, 물질에 대한 멸시가 남성성과 동시에 발달한다. 노예적 노동이 사람에게서 침통하고 저주받은 무기력만을 낳는 것처럼 자유로운 노동은 과학, 예술, 정의에 의해 매력을 띠게 되어 매력적인 순결, 사랑을 낳는다. 그리고 곧 이 이상의 도움을 받아 정신이 언제나 육신을 이겨서 사랑의 완성이 여성에 대한 혐오를 낳는다.

그러므로 생식 작업에 대해 말한다면 사랑은 그 고유한 한계를 가진다. 부부의 색욕은 출산과 수유처럼 인생에서 그 시기가 있다. 그리고 이 새로운 진화에서 다른 모든 진화들에서처럼 자연의 사자使者이며 운명들의 찬양자인 사람은 법칙을 만들지 않는다. 그것을 발견하고 실행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나는 보편적 감정을 가지고 사람의 인생을 주요한 다섯 시기로 나눈다. 유아기, 청소년기, 청년기, 성욕 혹은 생식기, 그리고 성숙 혹은 노년기가 그것이다.

남자는 첫 시기 동안 여성을 엄마로서 사랑한다. 둘째 시기에는 누이로서 사랑하고, 셋째 시기에는 여선생님으로서 사랑하고, 넷째 시기에는 신부로서 사랑하고, 다섯이자 마지막 시기에는 딸로서 사랑한다.

사랑의 이 시기들은 경제생활의 비슷한 시기들에 상응한다. 유아기에는 남자는 말하자면 꺾꽂이 가지의 상태로만, 혹은 기계들의 제작과 유지를 위해 오래전부터 준비된 재료들로만 존재한다. 그는 사회의 희망, 담보, 저당물이다. 청소년기에 그는 수습생이다. 청년기에는 직인職人이다. 성욕기에는 마이스터다. 성숙기에는 노장이다. 이 이중적 진화는 남자에게서와 똑같이 여자에게서도 펼쳐진다고 덧붙일 필요도 없다.

사랑의 형태들은 산업에서의 등급들처럼 배타적이고 양립 불가능하다. 즉 동일한 개인에게서 동시에 존재할 수도, 같은 것에, 같은 사람에 변함없이 적용될 수도 없다. 산업인이 노동의 모든 요소들, 그를 끌어들이는 전문 분야의 모든 부분들을 차례로 통과해 가는 것처럼 그는 한꺼번에 특징적 사랑으로 그의 엄마, 그의 누이, 그의 여선생님, 그의 아내나 그의 딸밖에 사랑할 수 없다. 그가 이 자격들 중 하나의 자격으로 사랑하는 사람을 그는 결코 다른 자격으로는 사랑하지 않을 것이다. 우리에게 중복된 사랑에 대해 일정한 혐오감을 불어넣어 그것에 근친상간, 즉 부정不貞, 잘못된 사랑의 결정이라는 이름을 붙이면서 이 법을 제정한 것은 자연 자체다.

다른 사랑에 의해 제거된 모든 사랑은 우정이라는 일반적 범주에 들어가며 이는 애정의 격류에서 상실된다.

자기 여선생님과 결혼하는 남자(가장 일상적인 경우)는 일정 수준까지 규칙에 예외가 된다. 같은 사람을 성격이 다른 사랑으로 두 번 연이어 사랑한다는 의미에서 그렇다. 하지만, 자신의 신부와 사는 것처럼 여선생님과 살 수 있다는 의미에서 그런 것은 아니다. 이는 내연 관계 혹은 단순한 간음이라 불리는 일종의 근친상간을 이루며, 여성에 대한 가장 큰 모독인 것이다. 서로 다른 두 장소에서 사랑하는 것을 그가 선택할 수 있다는 의미에서도 아니다. 이는 간통이 되는 것이다. 게다가 자유로운 사랑, 자연적으로 결합에 선행하는 이 사랑은 결혼을 그 필연적 결과로 삼지 않는다. 서로 결혼하는 자들이 여러 사람에 대해 사랑을 느꼈던 것이 사회에, 그리고 사람들에게는 심지어 더 낫다. 그리고 이는 자유로운 사랑을 부부의 사랑과 구분하고 이것들을 서로 양립 불가능한 것으로 간주하는 데 충분하다.

사랑하는 이 한 사람이 다른 모든 사랑을 대신할 수 있으며, 자연에 의해 정해진 기한을 넘어 연장될 수 있다. 그러한 것은 자신의 효심을 늙을 때까지 보전하는 독신자다. 그러한 것은 또한 때가 되기 전에 홀아비가 되어 자식의 머리 위로 온갖 애정을 집중시키는 아버지다.

사랑의 이러한 형태들을 모르는 사람, 이러한 뉘앙스들을 전혀 구별하지 못하고 미묘한 점들을 파악하지 못하는 사람, 이런 사람은 사랑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는 것이다. 그는 사랑의 객설만 아는 것이고 사랑에 대해 소설가처럼 생각하는 것이다.

이처럼 노동과 사랑은 인생에서 병행하는 시기들에 진행된다. 초년기에 사람은 감각과 본능에 온통 매여 있어 결코 노동자로서 아직 들어가 있는 것이 아니다. 그는 받기만 하고 주지는 않으며, 소비만 하고 아무것도 생산하지는 않는다. 자기 엄마의 사랑에만 민감해서 그는 다른 어떤 감정도 모른다. 우정 자체를 그는 모른다.

곧 그는 그의 애정들을 생각하기 시작한다. 그는 예의범절의 형태들, 알고 행하는 것의 요소들을 배운다. 그는 학생이면서 수습생이 되었다. 그는 동무들을 가진다. 그리고 부화된 그의 서늘한 영혼에서 형제적 사랑의 부드러운 향기를 내쉰다.

이 매력적인 청소년기를 잇는 것은 청년기로서 순수하고 수줍어하는 사랑의 시대인 것처럼 경쟁심과 체육 경기의 시적인 시대다. 가을에 도달한 인간의 가슴에는 그의 푸르른 청년기에 처녀의 보호자, 동료, 순결의 동참자였던 것이 얼마나 기억할 일인가! 세기는 이 참된 즐거움을 불쌍히 여겼다. 사회주의와 낭만 문학은 우리의 세대를 발정한 상태로 해 놓았다. 철학은 예를 제시하며 재주 있는 여성들은 산파 역할을 한다. 그러나 방탕의 과잉은 그 자체가 이 이상理想의 필요성에 대한 증거다. 이것 바깥에서는 사람에게 행복도 존엄도 없다. 사회는 성애적 묘사들, 어떤 것들은 순수성을 빼앗고, 다른 것들은 격정처럼 끌려가며 그러나 언제나 경이로운, 따라서 덜 거칠고 덜 물질적인 세련미가 박힌 묘사들의 무더기 속에서 변신을 꿈꾼다. 그가 짓밟은 수치심의 나름대로의 순교자인 조르주 상드를 보라. 아스파시아와 같은 유녀이고 루크레티우스 같은 송사 작성자인 조르주 상드는 잔(Jeanne)을 써서 천재성의 이 반격으로써 그의 불순한 찬미자들의 저속한 격정에 항의한다.

그러나 신부가 신랑에게 주어질 시각의 종이 울린다. … 시작되는 것은 노동의 위대한 시기다. 이는 사람이 자기 능력들의 충만함을 즐기고 사랑이 그의 영혼의 모든 현을 진동하게 하며, 기억들의 현존이 그의 가슴의 모든 즐거움을 느껴지게 만들어 주는 순간이다. 아들, 형제, 연인, 신랑, 이제 곧 아버지로서 그는 어디서나 사랑하고, 포화 상태가 되도록 사랑한다. 그의 삶은 충만하다. 그는 천재성과 아름다움이 한창인 상태에 있다. 줄어드는 것밖에 할 수 없다. 그의 소원의 절정에 도달하자마자 사랑은 그에게 그 헌신성과 순수성을 잃는 것으로 보이며, 그의 모든 노력은 이제부터는 벌써 그를 피해 가는 이 이상을 붙잡아 두는 것을 지향할 것이다!

다산성의 시기는 10년에서 15년 펼쳐진다. 10년간의 결혼 경험은 그의 지성이 시들거나 그의 가슴이 타락하는 것이 아니라면 사람을 싫증나게 하기에 충분하다. 이 경우에 격정은 약해지는 대신 만족감에서 다시 태어나며 새로이 대상들을 구한다. 성적인 폭발이 불타오르는 것으로 다시 나타난다. 그리고 가족들 안에 번뇌와 부끄러움을 가져오는 이 폭풍이 터지는 것은 이런 식이다. 더 많은 사랑, 예술을 위한 예술과 같이 쾌락을 위한 쾌락이다. 남편은 아내를 향락의 기계로 만든다. 키르케는 오디세우스에게 활력을 주면서 동시에 그를 짐승으로 바꿔주는 일격을 가한다. 즐기고, 또 즐기고, 끝없이 즐기며, 공격, 공격. 이런 것이 더 이상 사랑하지 않는 이들의 비참한 처지다.

끝으로 쇠퇴의 시대가 온다. 이는 감정이 역방향으로 정해지는 시대다. 가부장의 가슴속에서 부부의 사랑을 계승하는 것은 장성하는 딸에 대한 형언할 수 없는 따뜻함의 감정으로, 이는 이 아버지의 가슴에서 쾌락의 마지막 흥분을 내쫓는다. 온전히 가족에 헌신하는 어머니는 그의 신랑에 대해 친구의 자격 이상을 바라지 않는다. 새로운 배반을 한 그 어머니는 예전에 자기 형제, 아버지, 인자한 어머니보다 선호했던 자를 이번에는 자기의 청소년 아들을 위해 돌보지 않는다. 우리는 자식에게 가장 큰 존경을 보여야 한다(Maxima debetur puero reverentia)! 선생 가족 면전에서 한 비밀스러운 음성이 부부에게 금욕을 권유한다. 아버지, 어머니들이여, 수치심이 그대들에게 명한다. 서로 떨어져라!

“만 18세가 안 된 남자, 만 15세가 안 된 여자는 혼약을 맺을 수 없다.”(민법, 제144조)

입법자는 신체적 역량에만 관심을 두었다. 주권자로서가 아니라 생물학자로서 말한 것이다. 그리고 또한 뒤떨어지는 것을 두려워하는 듯이 제145조에서 이렇게 덧붙인다.

“왕이 그 비용을 대는 것은 허락된다.”

다행히도 공공의 이성과 사물의 힘이 이 점에서 법령의 착오를 교정한다. 누구나 남자이고 먹고살 수단을 벌 때는 결혼한다. 교육을 마치는 데 필요한, 그리고 매력으로 충만한 연구로, 즉 내핍으로 채워져야 할 연기延期만이 사람의 머릿속에 들어온다.

그런데 결혼 시기와 관련해서, 자연에서 주어진 자유가 질서라고 상식적으로 믿지 않았다면, 반대 방향으로 취해진 같은 자유가 법이라고, 그리고 남자에게는 일단 결혼하면 생명의 온기가 다할 때까지 번식 능력을 행사할 의무가 있다고 말할 수 있는가?

인구의 가능한 증가는 그것의 자연적 증가와 같은 것이 아니라고 루동 박사는 아주 잘 말한다. 그렇지만 생식 잠재력의 지속은 반드시 그 활동성을 보여주는 척도는 아니다. 동물들 사이에서 암컷들은 임신과 수유 동안에는 몸을 피한다. 남자는 자기에게 고유한 법칙을 가진다. 그의 존엄성과 더 관계 깊은 법, 이는 그의 자녀들의 청소년기다. 나는 방금 자녀들에 대한 존중은 부모에게 금욕의 의무를 만들어 준다고 말했다. 더 심각한 고려 사항들도 이 법을 확증해준다.

그러면 우선 자녀들에 대해서는 정의正義가 있다.

사람은 사춘기 전부터 자신을 쓸모 있게 만들 수 있다. 교육은 제대로 말한다면 스승의 수업들을 수습생의 서비스로 교환하는 것일 뿐이다. 이는 점점 더 커져서 스승의 배려를 보상해 주면서 동시에 부모의 선지급을 충당하는 데 소용되는 서비스다. 이와 같이 수습 계약에서 우리에게 가르침의 참된 원리를 드러내주는 대중적 이성이 이를 원한다. 아이가 아무것도 생산하지 않는 한, 그의 생존 수단 전체가 그의 아버지의 부담인 한, 그는 아버지에 대해 아무런 권리가 없다. 그는 사람들이 그에게 공동 상속인을 생기게 하는 것에 불평할 수 없다. 그러나 그가 노동할 능력이 있게 되면서부터, 그가 부양하는 데 힘을 보탤 동생들이 주어지는 것은 그가 받은 것보다 더 많은 것을 그에게 요구하는 것이며, 그를 그가 낳지 않은 자들의 아버지로 만드는 것이며, 그를 가족에서 내쫓는 것이다. 그러므로 정의에 의해 지시된 자연적 한계가 자녀의 출산에는 있다. 수습의 이론에서 도출된 이 동기는 최고의 동기다.

부부 쪽에서는 순결은 겸손과 정직의 절박한 의무가 된다. 통념적 정당성을 이성적 정당성과 구분할 필요가 있는 것은 특히 이 지점이다. 마흔 살 무렵 남자는 감정의 시적 정취와 활력, 섬세함, 형태의 우아함과 순수함 등 그의 젊음을 구별해주던 것들을 잃기 시작하고 그의 존재 전체에 닥친 변화는 그에게 사랑을 포기하라고 명령한다. 그를 아주 순결하게 해주던 아름다움이 흐려져 가면서 즐거움이 변질해 파렴치로 된다. 노인들의 사랑은 왜 우습고 역겨운가? 이는 그것이 그 사랑을 미학적으로 정당하게 해주는 조건들을 결여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시든 감각에서 실현되어 이는 더 이상 사랑이 아니고, 사랑의 짐이다. 매달려 있는 침대 위에서 파리스와 헬레네가 함께 자는 것을 호메로스가 우리에게 보여줄 때, 그들은 간통에도 불구하고 아름답다. 불의의 죄인들인 젊음, 우아함, 정신은 여전히 그들을 진심의 베일로 덮어주는 것 같다. 그러나 사투르누스와 레아, 데우칼리온과 피라, 다윗과 아비삭은 나를 화나게 한다. 부부의 명목은 거기서 아무것도 아니며, 그들은 외설적이다.

남자는 사랑이 그에게 모순이 되면서부터 남편의 권리를 상실한다. 그의 아내가 그에게 거룩해지면서부터! 그들이 서로를 순수 정신으로 간주하면서부터. 왜냐하면 진실로 그들은 더 이상 몸을 가지지 않기 때문이다. 남자는 그의 감각의 퇴화가 그에게 금지하는 즐거움을 계속 맛본다면, 망측한 불꽃으로 그의 나머지 날들을 태울 것이다. 그의 사후의 연인들은 그를 그의 아내에게 역겹게 만들어줄 것이고, 그의 자녀들을 화나게 할 것이고 그에 대해 모두의 멸시를 불러일으킬 것이다. 그의 방탕한 노년은 불명예를 당할 것이다. 그의 아내는 그의 부끄러운 요구들 때문에 도도해져서 그를 노예로 취급할 것이다. 그의 이성은 치욕 중에 소멸할 것이다.

정의, 수치심, 존엄성 모두가 여기서 가부장에게 절제의 법이 된다. 그런데 이성이 마련해 둔 것인 노동이 자연의 고갈을 기다리지 않고 이를 달성한다. 오랜 노동으로 덕을 계발한 남자, 사랑이 격정의 횡포에서 벗어나 이를 아름다움과 동일시하는 남자는 스스로 애쓰지도 후회하지도 않고 옛날 그것들을 그에게 소중하게 해주었던 것과 같은 매력을 가지고 그의 섬세한 마음을 해치는 쾌락, 그의 자녀들에게 남겨진 재물로서 말고는 그에게 관심사가 아닌 쾌락을 포기한다.

이 원리에 따라, 결혼이 남자에게 만 28세에, 여자에게 21세에 성립하고 평등 가운데 유모의 활용은 사라지고, 수유 기간은 15개월이나 18개월로 줄어들고 가임기는 10년에서 15년으로 갈 수 있게 되면서 동일한 결혼에서 나오는 자녀의 수는 다섯 명 이상으로 많아지기가 어려울 것이다.

이 숫자로부터 다음을 공제한다면,

불임, 과부, 결혼의 지체, 사고, 임신 중절 1.5

결혼 적령기 이전 사망(오늘날 그 수치는 50%를 크게 초과한다) 2.5

독신 0.5

합계 4.5

약 30년 전의 각 기간 당 인구는 이렇게 10분의 1밖에 늘지 않아서[39] 두 배가 되는 것은 세 세기만에 일어날 것이다.

그러나 출생 수는 계속 감소하는 경향을 띠며, 두 배가 되는 기간은 두 가지 이유로 연장되는 경향을 띤다. ⑴ 노동의 끊임없는 증가와 새로운 도덕관념의 발달에 따른 가임 기간 단축, ⑵ 독신자 수 증가.

사회의 질서에서 비록 모두가 사랑을 할 운명이 예정되었을지라도 모든 남자가 결혼을 하고 아버지가 될 운명이 예정된다는 것은 참이 아니다. 단지 덕의 계발에 의해, 그리고 사랑을 위한 손실 없이 완벽한 동정을 지키며 살 수 있는 것은 남자의 특권이다. 또한 우리 세대를 괴롭히는 사랑의 어리석음이 일단 지나가면 처녀들의 수, 복음서에서 말하는, 천국을 위하여 스스로 고자 된(qui se castraverunt propter regnum coelorum) 자들은 매일 증가해야 한다. 그리고 결혼할 능력을 가지면서 독신의 희생에 동의할 자들이 누구인지 묻는다면, 나는 주저 없이 대답할 것이다. 오늘날 방종 가운데 사는 자들 자신들이라고. 그 동기와 대의大義에서 무효가 되어 버린 독신은 다시 명예롭고 순수하게 될 것이다. 그러한 것이 반대 항들의 법칙이며, 우리에게는 운명의 말 자체인 법칙이다.

그리스도교는 처녀성을 모든 덕목 위로 높여 그것을 사제들을 위한 의무로 만들었을 때 이런 미래를 예감한 것이다. 거기서는 다른 많은 것들에서처럼 그리스도교는 예언적이었다. 이는 성찰이 스스로 철학자들의 글에서 말하기를 기다리며 인민을 선동하도록 교황들의 입에서 표명된 사회적 자생성이었다. 그리스도교는 순결한 사랑, 진정한 사랑의 관념을 낳았다. 그것은 여성을 남자의 조합 결성자로도, 동등자로도 생각하지 않았으며, 인간의 분할되지 않은 부분으로 생각했다. 내 뼈 중의 뼈요, 내 살 중의 살이다(os ex ossibus meis, et caro ex carne mea). 인도인이 부부의 사랑을 형제의 사랑과 혼동하고, 아랍인이 이를 내연 관계 밑으로 일부다처제, 노예제에 의해 깎아내리고, 로마인은 어머니를 그 자녀들 각자의 몫과 같은 몫으로 상속에 들어가게 하는 법 안에서 아버지의 사랑에 부부의 사랑을 동화시킨 때에 그리스도교는 부부의 사랑을 다른 사랑들과 구분했다. 그리스도교는 끝으로 자발적 동정童貞에서 가장 순화된 형태를 세상에 계시했다. 이는 교회의 가르침에 따르면 영혼과 그리스도와의 신비로운 결합, 즉 지속적인 약혼 말고 다른 것이 아니다.

실제로 남자가 자기 어머니 안에서, 자기 누이 안에서, 자기 여선생님 안에서, 자기 신부 안에서, 자기 딸 안에서 찬양하는 것은 무엇인가? 이는 자기 자신, 인류의 이상으로서 그에게는 가장 매혹적이고 가장 부드러운 형태로 나타나는 것이다. 신화와 언어가 우리에게 이를 드러내 준다. 남자는 자신의 모든 미덕을 여성화했다. 그는 그 미덕들을 예배했는데, 이는 신들에게 하는 예배로서가 아니라 여신들에게 하는 예배로서 한 것이다. 테미스, 비너스, 히기에이아, 팔라스, 미네르바, 헤베, 케레스, 유노, 키벨레, 뮤즈, 곧 정의, 아름다움, 건강, 지혜, 웅변, 젊음, 농업(고대인들의 정치경제학), 부부의 신의, 모성, 학문과 예술이다! 이런 이름들과 이런 신성들의 여성은 어떠한 분석보다, 어떠한 증언보다 모든 시대에 여성이 남성에게 의미한 것을 더 잘 보여준다.

그런데 어떤 이들이 있는데, 이들은 미적 감각과 그것이 낳는 사랑이 아주 생기 있고 아주 순수해서, 말하자면 이들이 찬양하는 인간적 이상을 파악하기 위해 어떠한 형상이나 실재도 필요하지 않은 이들이다. 아니, 차라리 이 이상은 어디서나 마찬가지로 그들의 눈에 드러난다. 유명한 다윗이 스스로에 대해 말했듯이 그 영혼들에게는 추함이 존재하지 않는다. 그들의 영혼은 너무 고상하고, 그들의 지성은 너무 순수해서 이를 감지하지 못하는 것이다. 페늘롱, 빈첸시오 드 폴, 성녀 테레사, 수많은 동정녀들과 수많은 성인들이 그들이다! 이런 선택받은 가슴의 소유자들에게 신랑, 신부, 자녀는 쓸데없는 것들이다. 사랑의 가시적 형태들은 그들 밑에 있고, 그들을 돕기보다는 괴롭히는 것은 모습들이다. 그들은 반응 없이 사랑을 즐긴다. 온 인류는 그들에게 아버지, 어머니, 형제, 자매, 신랑, 신부, 아들, 딸을 대신해준다. 모든 다른 결합은 그들에게는 타락이고 형벌이다.

내가 논지를 지나치게 가다듬는다고 사람들이 주장한다면 나는 그만두겠다. 나는 노동의 가중화의 이 무서운 법칙에 매달리며, 이 항거할 수 없는 진보, 우리에게 끊임없이 자본과 행복을 늘리도록 승승장구하는 힘으로 밀어붙이면서 언제나 우리의 과제에 얼마 동안을 더해 주고, 우리의 짐에 약간의 알곡을 더해 주는 이 진보에서 도래할 것을 내게 말해주시기를 애원한다. 둘 중 하나다. 인류가 노동에 의해 성인들의 사회가 되든지, 아니면 독점과 빈곤에 의해 문명이 엄청난 프리아포스 신 축제일뿐이든지 할 것이다. 사물이 흘러가는 연장선상에서 그리고 노동과 임금의 처지들을 온통 바꾸는 개혁이 아니라면 노역의 일체의 증대, 따라서 부의 일체의 증대는 우리에게 곧 불가능해질 것이다. 토지가 우리에게 부족하기 오래 전에 우리의 생산은 멈출 것이다. 극빈층과 범죄는 언제나 증가할 것이다.

대부분의 문명국들에서 평균 노동 시간은 이미 열두 시간이다. 그런데 인구가 두 배로 늘어나려면, 사회에는 네 배의 생산이, 따라서 또한 네 배의 힘의 지출이 필요하다. 이 네 배 증가가 우리의 불평등한 사회에서 독점의 약탈과 소유권의 횡포를 가지고서 생겨나는 것이 가능한가? 사회경제의 현 조건에서 노동과 부의 이 증가가 불가능하다면, 노동자가 더 많은 것을 만들기를 사람들이 바란다면 노동자가 노예 상태에서 벗어나는 것이 절대 필요하다. 그러나 노동자를 야만 상태가 그의 능력들을 발휘하지 못하게 붙들어 놓는 억압에서 해방시키려면 노동자를 교육으로 훈련시키고 복리로 그를 고상하게 만들고, 덕으로써 그를 고양시킬 필요가 있다. 그런데 덕이란 무엇인가? 아름다움이란 무엇인가? 훈련이란 무엇인가? 노동이란 무엇인가? … 우리는 원을 맴돈다. 그러나 이 원은 인류의 원이고, 섭리의 원이다. 인류는 쓸모, 아름다움, 의로움과 거룩함에 의해 균형에 도달한다. 아카데미에서 제기한 문제, 물적 복리의 진보와 그 취향이 여러 인민의 도덕성에 어떤 영향력을 행사하는가 하는 문제는 다른 문제들과 함께 풀린다. 복리와 덕 사이에는 동일성이 있다.

제14장 요약과 결론

사람들은 뉴턴이 발견한 사항들의 엄청남을 표현하기 위해 그가 인간 무지의 심연을 드러냈다고 말한다.

여기서는 뉴턴은 없으며, 우주 과학에서 이 위대한 사람에게 후세가 배당하는 몫과 같은 몫을 경제학에서는 아무도 주장할 수 없다. 그러나 여기에 뉴턴이 전혀 짐작하지 못한 것이 있다고 나는 감히 말한다. 천상의 심오함은 우리 지성의 심오함만 같지 못하며, 우리 지성 안에서는 경이로운 체계들이 움직인다. 사람들은 천국과 지옥처럼 공간과 시간 바깥에 존재하는 새로운 미지의 영역, 그곳에 우리의 눈이 무언의 찬미로 바닥없는 심연에서처럼 뛰어든다.

마치 땅이 어떤 힘 때문에 안쪽 깊은 데서 하품하며 지하 세계의 거주지들과 신들에게 미움 받은 창백한 왕국을 드러내려 하는 것과 똑같았다.

그리고 위에서부터 엄청난 심연이 보였고 죽은 이들의 영은 빛이 들어가니 공포에 빠질 참이었다.

Non secus ac si qua penitus vi terra dehiscens

Infernas reseret sedes et regna recludat

Pallida, Dis invisa, superque immane barathrum

Cernatur, trepidentque immisso luine Manes.

베르길리우스, 『아이네이스』, lib.Ⅷ.

기기서 영원한 힘들이 서로 밀치고 서로 부딪치고 서로 균형 잡는다. 거기서 섭리의 신비들이 밝혀지고 숙명의 비밀들이 드러나 보인다. 이는 보이지 않는 것이 가시화되고, 만져지지 않는 것이 물적으로 되고, 관념이 실물, 지극히 환상적인 유토피아들보다 천 배는 더 경이롭고 더 웅장한 실물이 되는 것이다. 현재까지 우리는 그것의 단순한 공식에서 이 방대한 기계의 일치성을 보지 못한다. 이 거대한 톱니바퀴 장치의 종합은 여러 세대들의 행복과 빈곤을 부수고 새로운 창조물을 만드는 것인데, 이는 아직 우리를 피하고 있다. 그러나 벌써 우리는 사회경제에서 일어나는 어떤 것도 자연에 표본을 가지지 않는다는 것을 안다. 우리는 유례없는 사실들에 대해 끊임없이 특별한 이름들을 짓고, 새로운 언어를 만들지 않을 수 없다. 이는 초월적 세계로서 그 원리들은 기하학과 대수학보다 상위의 원리들이고, 그 위력들은 인력도, 어떠한 물리력도 드러내지 않지만 기하학과 대수학을 하위 도구들처럼 사용하고 자연의 위력들 자체를 그 재료로 삼는다. 끝으로 이는 시간, 공간, 발생, 생명, 죽음의 범주들에서 벗어난 세계로서 거기서는 모든 것이 영원하면서 현상으로 나타나고 동시적이면서 계기적이고, 제한적이면서 무제한이고, 무게를 잴 수 있으면서 잴 수 없는 것으로 보인다. … 내가 더 무엇을 말할 것인가? 이는 말하자면 사실에 대해 파악된 창조 자체다!

그리고 우리에게 우화와 같이 여겨지는, 우리의 판단 습관을 뒤집으며 끊임없이 우리의 이성을 반증하는 이 세계, 우리를 감싸고 우리를 꿰뚫고, 우리를 격동하면서도 우리가 영의 눈으로밖에 보지 못하고, 기호들로밖에 만지지 못하는 이 이상한 세계, 이는 사회이고, 우리들이다!

그 효과들, 즉 그 신호들에 의하지 않고 누가 독점과 경쟁을 보았는가? 누가 신용과 소유권을 만져 보았는가? 집단적 힘, 노동의 분업, 그리고 가치는 무엇인가? 그리고 그렇기는 하지만 이 모든 것보다 더 강하고 더 확실하고 더 분간이 잘 되는 것이 무엇이 있는가? 밟아 다져진 땅 위에 여덟 마리 말이 끄는, 그리고 옛날식 겉옷을 입은 남자가 모는 마차를 멀리서 보라. 이는 동물의 힘에 의해 네 바퀴로 움직이는 물질 덩어리일 뿐이다. 당신은 거기서 외관상 생리적 현상에 의해 정해진 기계 역학적 현상만을 발견할 것이다. 그 너머에서는 더 이상 아무것도 감지하지 못한다. 더 앞으로 꿰뚫어 보라. 이 남자에게 그가 하는 것, 그가 원하는 것, 그가 어디로 가는지, 어떤 생각에 힘입어, 어떤 명목으로 그가 이 수레를 굴리는지를 물어보라. 그러면 그 자신이 그의 행렬의 섭리이므로, 곧 당신에게 문서를, 그의 권위와 그의 섭리를 보여줄 것이다. 당신은 이 문서에서 그가 마차꾼이며, 이 자격으로 일정량의 상품 운송을 중량과 거리에 따라 행한다는 것, 그는 자신의 서비스에 대한 대가를 압류당하지 않으려면 일정한 도로와 일정한 시한 안에 길을 가야한다는 것, 이 서비스는 마차꾼 쪽에서는 물건들의 불가항력과 고유의 결함에서와는 다른 원인들에서 유래하는 손실과 손상에 대한 책임을 함축한다는 것, 차량의 가격에는 예기치 못한 사고에 대한 보험, 그리고 권리의 암초이면서 법률가들의 골칫거리인 천 가지 다른 세부 사항들이 포함되거나 포함되지 않는다는 것을 읽게 될 것이다. 내가 말하노니 이 사람은 손만 한 크기의 종잇장에 우리에게 무한의 질서, 경험과 순수 이성의 생각할 수 없는 혼합물로서 사람의 모든 천재성이 우주의 경험의 도움을 받아서도 사람이 집단적 삶에 들어가기 위해 개인적 생존을 떠나지 않았다면 발견하기에 무능력했을 질서를 계시해줄 것이다.

실제로, 노동, 가치, 교환, 유통, 소비, 책임, 소유권, 연대성, 연합 등의 이 관념들에 대한 전형은 어디에 있는가? 누가 그 표본들을 제공했는가? 반은 물질적이고 반은 분간이 되는 이 세계, 반은 필연이고 반은 허구인 이 세계는 무엇인가? 노동이라고 불리는 이 힘, 우리가 더 자유롭다고 스스로 믿는 만큼 더욱더 확실하게 우리를 이끄는 이 힘은 무엇인가? 우리를 거지지 않은 불꽃으로, 우리의 기쁨과 고통의 원인인 불꽃으로 태우는 이 집단적 삶은 무엇인가? 우리가 살아가는 한, 우리가 있는 한, 우리도 감지하지 못한 채로, 그리고 우리 능력들의 크기와 우리 산업의 전문 분야에 따라 모든 것이 역시 생각하고 혼자서 돌아가는 엄청난 기계의 생각하는 용수철, 생각하는 바퀴, 생각하는 톱니바퀴, 생각하는 저울추 등등인 것이다. 과학은 이성과 경험의 합치를 원리로 삼는다고 우리가 말했다. 그러나 과학은 경험도 이성도 창조하지 않는다. 이와 다르게 우리에게 아무것도 경험에 의해서도, 이성에 의해서도 선험적으로 주어지지 않는 과학, 인류가 모든 것을, 물 자체도 현상도, 보편 개념도 범주들도, 사실들과 관념들도 자기 자신 안에서 끌어내는 그런 과학, 끝으로 단순하게 모든 다른 과학처럼 실재에 대한 이성적인 묘사인 것이 아니라 실재와 이성의 창조 자체인 과학이 우리에게 나타난다!

이처럼 경제적 이성의 저자는 인간이다. 경제적 소재의 창조자는 인간이다. 경제 체제의 건축가, 이 역시 인간이다. 이성과 사회적 경험을 낳은 후에 인류는 자연과학을 건설한 것과 같은 방식으로 사회과학의 건설을 진행한다. 인류는 인류 스스로 한 경험과 이성을 일치시키며, 상상할 수 없는 기적으로 인류 안에서 모두가 유토피아로부터 원리와 행동들을 취할 때 인류는 유토피아를 배제함으로써만 스스로를 아는 데에 도달한다.

사회주의가 정치경제학에 항의하며 이렇게 말하는 것은 옳다. 당신 자신도 이해하지 못하는 당신은 일상 관행일 뿐이다. 그리고 정치경제학이 사회주의에게 이렇게 말하는 것도 옳다. 당신은 실재도, 가능한 실행 방도도 없는 유토피아일 뿐이다. 그러나 이것도 저것도 차례로, 사회주의는 인류의 경험을, 정치경제학은 인류의 이성을 부정하면서 둘 다 인간적 진실의 핵심 조건들을 위배한다.

사회과학은 사회적 이성과 실천의 일치다. 그런데 이 과학은 우리의 거장들이 희미한 불티만을 감지한 것으로서, 그 지고의 찬란함과 조화를 가진 것으로 이를 사색하는 것은 금세기에 할 일로 주어질 것이다.

그러나 내가 무엇을 말하는가? 협잡과 편견이 세상을 나누어 가지는 이 순간에 우리의 희망을 일으켜 세우는 것은 물론 중요하다! 우리가 맞서 싸워야 할 것은 불신이 아니라 자만심이다. 그러므로 사회과학이 전혀 만들어지지 않았다는 것, 그것은 아직 모호한 예감의 상태에 있다는 것을 확인하는 데서 시작하자.

맬서스에 대한 탁월한 전기 작가 샤를 콩트 씨는 이렇게 말한다. “맬서스는 정치경제학에는 일정한 한계 안에 갇혀 있는 만큼만 참인 원리들이 존재한다는 심오한 확신을 품었다. 그는 복잡한 원인들의 빈번한 조합에서, 원인과 결과들의 서로에 대한 작용과 반작용에서, 그리고 한계를 두거나 중요한 명제들 다수에 예외를 두어야 할 필요성에서 그 과학의 주된 난점들을 보았다.”

이것이야말로 맬서스가 정치경제학에 대해 생각한 것이며, 우리가 이 순간 출간하는 저작은 그의 관념의 증명일 뿐이다. 이 증언에 우리는 그에 못지않게 믿음직한 다른 하나의 증언을 결합한다. 도덕 및 정치 과학 아카데미의 최근 회의들 중 한 회의에서, 파벌의 이해관계에도, 무식한 반대자들이 불러일으키는 멸시에도 현혹되지 않는 정말로 우수한 사람인 뒤누아예 씨는 맬서스와 마찬가지로 솔직함과 고양된 감정을 가지고 같은 고백을 했다.

“정치경제학은 일정 수의 확증된 원리들을 가지고 있고, 정확한 사실들과 잘 도출된 관찰 사항들의 상당한 양에 의존하지만, 그럼에도 아직은 확고한 과학이 되려면 먼 것으로 보인다. 정치경제학 연구가 펼쳐져야 할 장의 넓이에 관해서도, 그 연구가 대상으로 삼아야 할 근본적 대상물에 관해서도 완전한 동의는 이루어져 있지 않다. 정치경제학이 포괄하는 작업들의 총체에 관해서도, 그 작업들의 잠재성이 연결되는 수단들의 총체에 관해서도, 그 어휘가 형성된 단어들의 대부분에 연결시킬 필요가 있는 정확한 의미에 관해서도 사람들은 동의하고 있지 않다. 세부적인 진리들을 풍부하게 가지고 있는 그 과학은 총체적으로 무한히 아쉬운 점을 남기며 과학으로서 성립되기에는 아직 먼 것으로 보인다.”

로시 씨는 뒤누아예 씨보다 한 술 더 뜬다. 그는 자신의 판단을 그 과학의 현대적 대표자들을 향한 비난의 형태로 정식화한다.

“모든 체계적 사상은 오늘날 경제학에서 포기된 것으로 보인다. 그렇지만 방법 없는 과학은 없다”고 그는 외친다(〈와틀리 씨의 강연에 대한 로시 씨의 보고Compte-rendu par M. Rossi du corus de M. Whateley〉)

블랑키, 볼로프스키, 슈발리에 씨는 모두 여러 사회들의 경제에 다소 심오한 눈길을 던진 자들인데 같은 말을 한다. 그리고 현대 유토피아들의 가치를 가장 좋게 평가한 작가인 피에르 르루는 「르뷔 소시알」의 각 면에 이렇게 쓰고 있다. “프롤레타리아트 문제의 해결책을 찾자. 우리가 그것을 발견할 때까지 끊임없이 찾자. 이는 우리 시대가 할 일 전부다!” 그런데 프롤레타리아트의 문제는 사회과학의 형성이다. 근시안의 경제학자들과 광적인 사회주의자들 말고는 없다. 이들에게 과학은 온통 “만들게 놔두고 유통하게 놔두라(Laissez faire, laissez passer)” 아니면 “사회적 자원의 규모에서 각자에게 필요에 따라”라는 공식으로 요약되며, 이들은 경제학을 소유한다고 자랑하는 자들이다.

그러니 사회적 진리의 이 지체遲滯는 이것만으로 경제학자의 기만을 조장하고 개혁자를 자처하는 자들의 착취에 신뢰를 주는 것인데, 이는 무엇에 관련되는가? 우리 생각으로는 그 원인은 벌써 아주 오래된, 철학과 정치경제학의 분리에 있다.

철학, 즉 형이상학, 혹은 이게 더 낫다면 논리학은 사회의 대수학이다. 정치경제학은 이 대수학의 실현이다. 장 바티스트 세도 벤담도 감지하지 못한 것이고, 경제학자들과 공리주의자들의 이름으로 도덕계 안에서 분열을 일으켰고 거의 동시에 정치와 철학에 반란을 일으킨 모든 이들이 감지하지 못한 것이다. 그렇기는 하지만, 이성의 철학, 이론은 노동보다, 즉 이성의 실천보다 더 확실한 어떤 감독을 바랄 수 있었는가? 그리고 역으로, 경제학은 철학의 공식들보다 더 확실한 어떤 감독을 바랄 수 있었는가? 내 가장 소중한 희망인데, 오늘날 가장 능숙한 건설자들이 모두 길고 힘겨운 수습 기간을 거쳐 교육을 받은 사람들인 것처럼, 도덕 및 정치 과학의 거장들이 작업장과 계산대에 있을 때가 멀지 않았다.

하지만 어떤 조건에서 하나의 과학이 존재할 수 있는가?

그 관찰의 장과 그 한계를 인식하고, 그 대상을 정하고, 그 방법을 조직한다는 조건에서다. 이 점에서 경제학자는 철학자처럼 자신을 표현한다. 방금 보고한 뒤누아예 씨의 말은 문자 그대로 리드(Reid) 책의 번역서에 대한 주프루아의 머리말에서 발췌한 것으로 보인다.

철학에서 관찰의 장은 자아다. 경제학에서 관찰의 장은 사회, 즉 역시 자아다. 사람을 알고 싶은가, 사회를 연구하라. 사회를 알고 싶은가, 사람을 연구하라. 사람과 사회는 서로를 주체와 객체로 이용한다. 두 과학의 병렬 관계, 동의성은 완벽하다.

그러나 이 집단적이고 개인적인 자아는 무엇인가? 아주 생소한 현상들이 벌어지는 이 관찰의 장은 무엇인가? 이를 발견하기 위해 유비적인 것들을 보자.

우리가 생각하는 모든 것들은 존재하고, 계기하거나 초월적인 세 역량 안에 배열되는 것으로 우리에게 여겨진다. 그 바깥에서 우리는 아무것도 상상하지도, 절대로 의식하지도 못한다. 이는 공간, 시간 그리고 지성이다.

모든 물체가 우리에게 필연적으로 공간 안에 있는 것으로 의식되는 것처럼, 또한 인과관계로 서로 연결되는 현상들이 우리에게 시간 안에서 서로 이어지는 것으로 보이는 것처럼, 순수하게 추상적인 우리의 표상들은 우리에 의해 우리가 지성인 혹은 지성이라고 명명하는 특정한 용기容器에 관련된다.

지성은 그 나름대로 공간과 영원성처럼 무한한 역량이다. 거기서 여러 세계들, 무수한 유기체들이 복잡한 법칙들에 따라 다양하고 예기치 못한 효과를 일으키며 움직인다. 그 웅장함과 조화로는 우주를 가로질러 창조자가 씨를 뿌린 세계들, 시간의 지속 중에 빛을 내고 꺼지는 유기체들과 동등하다. 정치학, 정치경제학, 법률학, 철학, 신학, 시학, 언어, 도덕관념, 문학, 미술, 자아의 관찰의 장은 자연의 관찰의 이중적 장인 공간과 시간보다 그것만으로 더 광대하고 더 비옥하고 더 풍부하다.

그러므로 시간과 공간과 같이 자아는 무한하다. 인간, 그리고 인간의 산물인 것은 공간을 가로질러 던져진 존재들 그리고 시간 안에서 계기하는 현상들과 함께 신의 삼중 발현을 이룬다. 이 세 무한, 무한의 무한한 표현들은 불가분리적으로 환원 불가능하게 서로 침투하고 서로를 지탱한다. 공간 혹은 연장延長은 운동 없이는 의식되지 않는 것이고 운동은 힘의 관념, 즉 자생성, 자아를 내포한다.

공간 안에서 우리에게 제시되는 것들의 관념은 우리의 상상에서 그림들을 이룬다. 우리가 시간 안에 그 대상들을 위치시키는 관념들은 역사 안에 펼쳐진다. 끝으로, 시간의 범주에도 공간의 범주에도 들어가지 않는 관념들이나 관계들로서 지성에 속하는 것은 체계들로 조율된다.

그림, 역사, 체계는 그러므로 유비적인, 아니 상동相同의 세 표현으로서 이에 의해 우리는 일정 수의 관념들이 우리의 정신에 완전히 대칭적이고 완벽한 것으로 제시된다는 점을 이해한다. 그렇기 때문에 이 표현들은 어떤 경우에는 혼동될 수 있다. 우리가 그것을 정치경제학의 역사로서 발견들의 일자가 아니라 이론들의 순서에 따라서 제시했을 때 우리가 이 저작의 서두에서 행한 것과 마찬가지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의 역량을 순수 사고의 사물들로, 혹은 칸트가 말하는 것처럼, 본체들로 의식하며, 의식하지 않을 수 없다. 우리가 다른 둘을 감각이 가능한 것들로, 혹은 현상들로 의식하는 것과 같은 방식이다.

그러나 공간과 시간은 아무런 실제적인 것이 아니다. 이는 외적 지각에 의해 자아에 각인된 두 형태다. 비슷하게 지성 또한 아무 실재적인 것도 아니다. 이는 경험이 자아에게 제시하는 관념들이 있을 경우에 유비에 의해 자아가 자기 자신에게 부과하는 형태다.

관념들, 직관이나 형상들의 획득 순서로 말한다면 우리는 그 전형들이나 실재들이 공간에 포함되는 것들에서 시작하며, 시간이 싣고 가는 관념들을 말하자면 날아가는 중에 붙잡기를 계속한다고, 끝으로 우리는 감각적 지각의 도움으로 갑자기 외적인 모델 없이 우리가 우리 지성이라고 칭하는 역량의 이 허상 안에 우리에게 나타나는 관념들이나 개념들을 발견한다고 여겨진다. 그러한 것이 우리 지식의 진보다. 우리는 감각적인 것에서 출발해 추상으로 상승한다. 우리 이성의 사다리는 땅에 발을 딛고, 하늘을 가로지르며 정신의 심오한 내용들로 상실된다.

이제 이 계열을 뒤집어서, 창조를 시간과 공간의 하등 영역들 안에 지성이라는 상위 영역의 관념들이 추락하는 것으로 상상하자. 이는 관념들이 원래는 순수한 것이었다가 이것들을 실현하고 표현하는 몸 혹은 기체(基體, substratum)를 취하게 되는 추락인 것이다. 이 관점에서 창조된 모든 사물, 자연의 현상들, 그리고 인류의 발현들은 때로는 고정되고 직선적인 구도인 공간에서, 때로는 굽어지고 유동적인 구도인 시간에서 우리에게 비물질적이고 부동인 정신의 투사로 나타날 것이다.

이로부터 서로 동등한, 그리고 정신 안에서 동시대적이고 조율된 관념들은 인류와 자연 안에 무질서하게 흩어져서, 국지화되고, 종속되고, 계속적으로 던져져서 원초적 설계와는 전혀 닮지 않은 그림들과 역사들을 이루게 된다. 그리고 인간의 모든 과학은 이 혼동 안에서 영원한 생각의 추상적 체계를 재발견하는 데 있다. 생물학자들이 유기체들과 무기체들의 체계를 재발견한 것은 이 종류의 복원에 의해서다. 사회가 우리에게 고립되고 비일관적이고 무정부적인 것으로 보여주는 사회경제의 여러 국면의 계열을 우리가 재확립하고자 시도한 것은 같은 절차에 의해서다. 우리가 착수한 주제는 정말로 경제학자들이 수집한 파편들에 따른 노동의 자연사다. 그리고 우리의 분석에서 나온 체계는 린네와 쥐시외(Jussieu)가 발견한 식물의 체계들, 그리고 퀴비에의 동물계와 같은 명목에서 참이다.

노동에 의해 발현된 인간적 자아, 이는 그러므로 철학의 구체적 형태인 정치경제학의 탐구 영역이다. 이 두 과학의, 혹은 더 제대로 말해서 이 두 회의론의 동일성은 이 책의 전체 흐름에서 우리에게 드러났다. 이처럼 관념들의 형성은 우리에게 기초적 범주들의 분화에서처럼 노동의 분업에서 나타났다. 그러고서 우리는 자유가 자연에 대한 인간의 작용에서 태어나는 것을 보았고, 자유에 이어서 인간이 사회와, 그리고 자기 자신과 맺는 모든 관계들이 생겨나는 것을 보았다. 결과적으로 경제학은 우리에게 한꺼번에 존재론, 논리학, 심리학, 신학, 정치학, 미학, 상징학, 그리고 도덕이었다.

그 학문의 영역이 인식되고 그 한계의 확정이 행해지고 나서 우리는 그 방법을 인식해야 했다. 그런데 경제학의 방법은 아직 철학의 방법과 같아, 노동의 조직은 우리 생각에 따르면 상식의 조직과 다른 것이 아니다.

이 조직을 구성하는 법칙들 중에 우리는 이율배반에 주목했다.

모든 참된 사고는 하나의 시간과 두 계기로 제시된다는 것을 우리는 고찰했다. 이 계기 각각은 다른 것의 부정이고 둘 다 상위의 관념 속에서만 사라져야 해서 결과적으로 이율배반은 생명과 진보의 법칙 자체이며, 영구적 운동의 원리다. 실제로 어떤 사물이 그 안에 있는 진화의 잠재력에 힘입어 바로 그것이 상실하는 모든 것을 보상받는다면, 결과적으로 이 사물은 파괴 불가능하며, 이를 지탱하는 운동은 영구적이다. 사회경제에서 경쟁이 끊임없이 만들어 내는 데 종사하는 것을 독점은 끊임없이 해체하는 데 종사한다. 노동이 생산하는 것을 소비는 집어삼킨다. 소유권이 차지하는 것을 사회는 빼앗는다. 이로부터 계속적 운동이 나오며, 인류의 영속적 생명이 나온다. 적대하는 두 힘 중 하나가 속박을 받아, 개인적 활동이 예를 들어 사회적 권위 밑에 짓눌린다면 조직은 공산주의로 타락하고 무에 도달한다. 반대로 개인적 창도성이 견제하는 힘을 결여한다면 집단적 유기체는 부패하고 문명은 카스트, 악과 빈곤의 체제에서 간신히 발걸음을 옮긴다.

이율배반은 인력과 운동의 원리이고, 균형의 이유다. 격정을 낳는 것, 모든 조화와 모든 일치를 해체하는 것은 이것이다.

그 다음으로 급수級數와 계열의 법칙, 존재들의 멜로디, 아름다움과 숭고함의 법칙이 온다. 이율배반을 없애 보라. 존재들의 진보는 설명이 불가능하다. 왜냐하면 이 진보를 낳을 힘이 어디에 있느냐는 말이다. 계열을 없애 보라. 세상은 목표도 관념도 없이 불모의 대립 항들의 혼합, 보편적인 들끓음에 불과하다.

우리에게 순수 진리인 이 사색들이 의심스럽게 여겨질지라도, 우리가 그에 대해 행한 적용은 아직 엄청난 쓸모가 있을 것이다. 이를 잘 성찰해 보기 바란다. 같은 사람이 같은 원리들과 같은 이론들을, 의심할 바 없이 다소간의 선의를 가지고, 그러나 또한 언제나 양심을 완전히 편안하게 하지는 못해도 격정을 일으키고 정신 안에 의심이 퍼지게 하기에 충분한 그럴듯한 이유들을 가지고 한꺼번에 긍정도 하고 부정도 하는 일은 인생에서 단 한 순간도 없다. 그러므로 원한다면 논리를 그냥 두자. 그러나 사물의 이중적 측면을 해명한 것, 추론을 불신하기를 배운 것, 어떻게 사람이 관념들에서 올바름과 가슴에서 정직함을 가질수록 그가 바보가 되고 엉터리가 될 위험을 더욱 무릅쓰는 것인지를 아는 것은 아무것도 아닌가? 우리의 모든 정치적, 종교적, 경제적 등등의 오해는 사물에 내재하는 모순에서 나온다. 그리고 그러한 것은 또한 사회에 원리들의 부패, 양심들의 매수 가능성, 신앙고백의 협잡, 의견들의 위선이 흘러나오는 원천이다.

현재 경제학의 대상은 무엇인가?

방법이 스스로 그것을 우리에게 가르쳐준다. 이율배반은 자연에서의 인력과 균형의 원리다. 그러므로 이율배반은 인류에서의 진보와 균형의 원리이며, 경제학의 대상은 정의다.

사회경제학이 관심을 가지는 유일한 것들인 순수하게 객관적인 그 관계들에서 고찰되었을 때 정의는 가치를 표현 방식으로 삼는다. 그런데 가치란 무엇인가? 실현된 노동이다.

애덤 스미스는 말한다. “각 물건의 실재적 가격, 각 물건이 이를 조달하고자 하는 자에게 실물로 초래하는 비용은 그것을 획득하기 위해 자신에게 부과할 필요가 있는 노동과 수고다. … 돈이나 상품으로 구입하는 것은 우리가 우리 이마의 땀으로 획득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노동을 통해 구입하는 것이다. 이 돈, 이 상품은 그때 노동의 같은 양의 가치를 포함한다고 가정되는 것으로, 우리가 교환하는 일정량의 노동의 가치를 포함한다. 노동은 모든 물건의 원초적 구매를 위해 지불된 화폐, 최초의 대가였다. 세상의 모든 부는 애초에 금과 은이 아니라 노동을 가지고 구매되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것들의 가치는 그것들을 소유하고 새로운 생산물들과 교환하려고 하는 자들에게는 정확히 그것들이 그들로 하여금 구매하거나 출자할 수 있는 상태로 해 주는 노동의 양과 같다.”

그러나 가치가 노동의 실현이라면 이는 동시에 산물들 간의 비교의 원리다. 이로부터 모든 경제학을 지배하는 비례성의 이론이 나온다. 애덤 스미스가 경험의 체계를 논리의 도움으로 추구하는 그 시대의 정신 안에 있었다면 그 이론으로 올라섰을 것이다.

그러나 사회 안에서 정의가 어떻게 발현되는가, 다른 말로 하면, 가치들의 비례성이 어떻게 성립하는가? 장 바티스트 세는 이렇게 말했다. 쓸모의 가치와 교환가치 사이의 진자 운동을 통해 성립한다고.

여기서 정치경제학에서는 노동과 관련해 그것의 주인인, 그리고 너무나도 흔히 그것의 학대자인 재정裁定의 원리가 나타난다.

과학의 출발에서 노동은 방법을 결여하고 가치의 정보가 없이 그 첫 번째 시도들을 겨우 더듬거리면서 부를 형성하고 물건의 가격을 정하기 위해 자유의지에 호소한다. 이 순간부터 두 잠재력이 싸움에 들어가며, 사회 조직의 위대한 작업이 시작되었다. 왜냐하면 노동과 자유의지, 이는 나중에 우리가 노동과 자본, 임금 제도와 특권, 경쟁과 독점, 공동체와 소유권, 평민과 귀족, 국가와 시민, 조합과 개인주의라고 부를 것이기 때문이다. 누구든지 논리학의 첫 번째 관념들을 받아들인 자에게는 영구적으로 되살아나는 이 모든 대립들이 영구적으로 풀려야 한다는 것은 명백하다. 그런데 이는 경제학자들이 결코 그렇게 이해하기를 원하지 않는 것이다. 이들에게 가치에 내재하는 재정의 원리는 모든 결정에 저항하는 것같이 보인다. 그리고 이것은 철학에 대한 두려움과 함께, 사회에 아주 치명적인 경제학의 지체를 유발한다.

존 램지 매컬럭(John Ramsay McCulloch)은 말한다. “절대적 가치를 말하는 것만큼 터무니없는 것이 절대적 높이와 깊이를 말하는 것이다.”

경제학자들은 모두 같은 것을 말한다. 그리고 사람들은 이 예를 통해 그들이 가치의 본성에 관해, 그리고 그들이 사용하는 단어들의 의미에 관해 얼마나 마음이 통하는 것과는 거리가 먼지를 판단할 수 있다. 절대라는 표현은 온전성, 완성, 혹은 충만, 따라서 정확성 그리고 올바름의 관념을 내포한다. 절대다수는 제대로 된 다수(절반 더하기 하나)이며, 이는 제한 없는 다수가 아니다. 마찬가지로 절대적 가치는 산물들 간의 정확한 비교에서 도출된 정확한 가치다. 세상에 그렇게 단순한 것은 없다. 그러나 이로부터 중대한 결과가 나오는데, 그것은 가치가 서로 비교 측정이 되어 결코 무작위로 진자 운동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이러한 것이 사회의 지고의 서원誓願이다. 이러한 것이 그 총체로 볼 때 그 종합이 틀림ㄹ없이 참된 가치를 낳는 모순들의 그림 말고 다른 것이 아닌 정치경제학 자체의 의미다.

이처럼 사회는 필연성과 임의성 사이에서 일종의 균형 잡기에 의해 점차 성장하며 정의는 도둑질에 의해 형성된다. 평등은 사회 안에서 단호한 수준으로서 생겨나지 않는다. 이는 모든 위대한 자연의 법칙들처럼 추상적인 사항이며, 그 안쪽과 그 바깥쪽에서 사실은 끊임없이 다소 크고 다소 규칙적인 호들을 그리며 진자 운동을 한다. 평등은 사회의 지고의 법칙이다. 그러나 이는 고정된 형태는 아니다. 이는 무수한 방정식들의 균형이다. 우리에게 평등이 경제적 진화의 제1기, 노동 분업에서부터 나타난 것은 이런 식이다. 그리고 그러한 것이 형상적으로 섭리의 입법에서부터 발현되었다.

애덤 스미스는 사회경제의 거의 모든 거대 문제에 관해 일종의 직관을 가진 자로서 노동을 가치의 근원으로 인정하고 분업 법칙의 마법적 효과를 묘사한 후에 이 분업에서 생겨나는 산물의 증대에도 불구하고 노동자의 임금은 증가하지 않는다는 것, 흔히 그 반대로 임금이 감소하고 집단적 힘의 이득이 결코 노동자에게 가지 않고 주인에게로 간다는 것을 관찰한다.

사람들은 아마도 이렇게 말할 것이다. “이윤은 노동의 특별한 종류, 감독과 지휘의 노동의 임금에 붙는 이름 말고 다른 것이다. 아니다. 그러나 이 이윤은 임금과는 본성이 다르고 다른 원리들에 규율되고, 감독과 지휘의 이 노동이라고 하는 것의 수량 및 본성과는 아무 관계도 가지지 않는다. 이윤은 완전히 활용된 자본의 가치에 따라 규율되고, 이 자본의 크기에 비례해서 그 크기가 다르다. … 이처럼 노동의 산물은 온전히 일꾼에게 속하지 않는다. 일꾼은 이를 소유권자와 나눌 필요가 있다.”

이것이야말로 애덤 스미스가 일이 어떻게 일어나는지를 냉정하게 우리에게 말해주는 것이다. “모든 것은 주인을 위해서이고, 일꾼을 위해서는 아무것도 없다.” 이를 불의, 약탈, 도둑질이라 불러도 경제학자는 동요되지 않는다. 약탈자인 소유권자는 이 모든 것에서 약탈당한 노동자와 마찬가지로 그에게는 꼭두각시로 여겨진다. 그리고 그들이 질투도 동정도 끌 만한 자들이 못 된다는 증거는, 노동자들은 배고파서 죽을 경우에만 권리를 주장한다는 것, 자본가, 기업가 혹은 소유권자는 일생에서 죽는 순간에도 조금도 뉘우침을 느끼지 못해 왔다는 것이다. 공공의 무식하고 잘못된 의식을 탓하라. 사람들은 옳을 수도 있고, 틀릴 수도 있다. 우리에게 여럿의 웅변보다 훨씬 더 나은 존재로서 애덤 스미스는 사실들을 고려하기만 한다.

이처럼 노동자들 중에서 한 특권 가진 자, “너희 형제들 중의 나자렛 사람(nazaraeum inter frates tuos)”을 지정하면서 사회적 이성은 집단적 힘을 의인화했다. 사회는 신화와 우의寓意에 의해 진행된다. 문명의 역사는 광대한 상징체계다. 호메로스는 영웅적 그리스를 요약한다. 예수 그리스도는 고통 받으며, 노력을 하는 가운데 길고 괴로운 아픔 속에서 자유, 정의, 덕을 갈망하는 인류다. 샤를마뉴는 봉건적 전형이다. 롤랑은 기사의 신분이다. 은자 피에르는 십자군이다. 그레고리우스 7세는 교황권, 나폴레옹은 프랑스 혁명이다. 마찬가지로 산업 기업가는 노동자 집단에 힘입어 자본을 이용하는 자로서 집단적 힘의 의인화다. 기계의 손잡이가 힘을 모으듯이 그 집단적 힘에서 그는 이윤을 흡수한다. 이는 정말로 영웅적인 사람, 노동의 왕이다. 정치경제학은 완전히 상징체계이고 소유권은 종교다.

애덤 스미스를 따라가자. 모호한 잡동사니 안에 흩어져 있는 그의 빛나는 관념들은 원초적 계시의 재탕으로 보인다.

“한 나라의 토양이 사적 소유가 됨에 따라 소유권자들은 다른 모든 사람들처럼 그들이 씨를 뿌리지 않은 데서 거두기를 좋아하며 토지의 자연적 산물에 대해서조차 임대료를 요구한다. 숲의 목재들에, 들판의 풀에, 그리고 땅의 모든 자연적 열매들의 추가의 값이 매겨지는데, 이는 공동 소유로 될 때는 일꾼에게 그것들을 채취하는 수고만이 드는 것이지만, 지금은 그에게 더 많은 비용이 드는 것이다. 그는 그것들을 수확할 허가를 얻기 위해 값을 지불할 필요가 있다. 즉 소유권자에게 그가 수확하는 것, 혹은 그가 소유권자 없이 그의 노동으로써 생산하는 것의 일정 몫을 소유권자에게 지불해야 한다.”

독점이 있다. 자본 이자가 있다. 지대가 있다! 애덤 스미스는 모든 계시 받은 자들처럼, 보기는 보아도 이해하지 못한다. 그는 이야기하지만 이해력을 가지지 않는다. 그는 신에게 영감을 받아 말하지만 놀라지도 않고 불쌍히 여기는 마음도 없다. 그리고 그의 말의 의미는 그에게는 수수께끼다. 얼마나 냉혈한의 마음으로 소유권자의 횡령을 말하는지! 토지가 아무것에도 쓸모없는 것으로 여겨지는 한, 노동이 이를 개간하지도, 비옥하게 만들지도, 활용하지도, 가치 있게 이용하지도 않은 한에서는 소유권은 이를 무시한다. 말벌은 꽃 위에 앉지 않으며, 벌통에 달려든다. 노동자가 생산하는 것은 그에게서 곧 빼앗아진다. 일꾼은 주인의 손에 있는 사냥개 같다.

노동으로 기진맥진한 노예는 쟁기를 발명한다. 말이 끄는 단단하게 만들어진 나무 이빨로 토지를 개간해 열 배, 백 배의 소출을 낼 수 있게 만든다. 주인은 한눈에 그 발견의 중요성을 파악한다. 그는 토지를 빼앗고, 소득을 차지하고, 그 아이디어마저 자기 것으로 만들고, 이 굉장한 선물에 대해 인간들의 찬양을 받는다. 그는 신들의 동등자로서 행세한다. 그의 아내는 님프이고, 케레스이고, 그는 트립톨레모스다. 빈곤은 발명하고 소유권은 거두어들인다. 왜냐하면 천재는 빈곤한 상태로 남아 있을 필요가 있기 때문이다. 풍요는 그를 질식시킬 것이다. 소유권이 세상에 해 준 가장 큰 봉사는 노동과 천재의 이 영속적인 불행이다.

그러나 이 낟알 더미로 무엇을 할까? 주인이 그의 말들, 소들, 그리고 노예들과 나누는 부는 얼마나 초라한가! 이득이라고는 쌀과 귀리 몇 줌 더 갉아먹는 것뿐이라면 부자인 것이 오죽도 필요하겠다!

한 노파가 이가 빠진 입에 풀칠하려고 낟알을 빻은 후 반죽이 시어지고 발효하고 재 밑에서 익어서 날 밀이나 구운 밀보다 비교도 할 수 없이 좋은 음식을 내놓는 것을 눈치 챈다. 기적이다! 매일 먹을 빵이 발견된 것이다. 다른 노파는 버려진 포도알을 항아리 안에 재어 놓고서 그 즙이 불꽃 위에서처럼 끓어오르는 소리를 듣는다. 액체가 그 불순물을 토해낸다. 붉고, 향이 강하고, 불멸의 빛을 발한다. 아하! 그것을 발견한 것은 소유권자의 애지중지하는 아들, 신들의 총애를 받는 아이, 젊은 바쿠스다. 주인이 몇 주일도 못 먹었을 것인데, 마시는 데는 1년도 족히 마실 것이다. 포도나무는 수확물, 토지처럼 전유가 된다.

매년 아주 많은 양의 공물을 가져다주는 이 무수한 양털로 무엇을 할까? 소유권자가 그의 정자 높은 곳에 침대를 올려놓을 때, 그의 화려한 천막을 서른 배로 늘릴 때 이 쓸모없는 사치품은 그의 무능을 증언해 줄 뿐이었다. 재물들은 넘쳐나고 이를 즐길 수가 없다. 얼마나 웃음거리인가!

한 양치기 처녀가 주인의 탐욕 때문에 헐벗은 채로 방치되었는데, 덤불 위에 양털 뭉치를 모아 놓는다. 이 양털을 꼬아서 균등하고 가는 실로 늘리고 이를 창끝에 잡아매고 엮어서 유연하고 가벼운 겉옷을 만들어 입는다. 이는 그를 경멸하는 여주인의 몸을 감싸는 기움질한 가죽보다 천 배는 우아하다. 이런 기적을 창조한 것은 아라크네라는 직조 여공이다! 곧 주인은 그의 어린 양들, 낙타, 염소의 털을 깎기 시작한다. 그는 아내에게 한 무리의 노예들을 주어 그의 명령에 따라 실을 잣고 옷감을 짜게 한다. 신들이 영감을 준 것은 더 이상 비천한 여종 아라크네가 아니다. 그것은 소유권자의 딸인 팔라스다. 그의 질투심은 아라크네를 굶겨 죽여 그에게 복수를 한다.

무에서 모든 것을 창조하는 노동, 그리고 언제나 자기가 결코 만들지 않은 것을 먹어 치우려고 도착하는 특권, 이 노동과 특권의 끊임없는 투쟁, 이는 얼마나 구경거리인가! 사람의 운명은 계속되는 행진인 것이다. 그는 언제나 늘 노동하고, 창조하고, 배가하고, 완성할 필요가 있다. 노동자에게 그가 발견한 것을 누리게 두라. 그는 자기의 관념 위에서 잠들 것이다. 그의 지성은 더 이상 전진하지 않는다. 이것이야말로 애덤 스미스에게 충격을 준, 그렇지만 그 차분한 역사가가 한마디 꾸지람도 하지 않은 이 악의 비밀이다. 비록 그는 이를 고려할 수 없었지만 신의 손길이 거기에 있다는 것, 노동이 땅을 채우는 날까지 문명은 비생산적 소비를 동력으로 한다는 것, 사람들 사이에 우애가 모르는 사이에 성립하는 것은 강탈에 의해서라는 것을 느꼈다.

사람은 노동할 필요가 있다! 이를 위해 섭리의 권고로 도둑질이 제정되고, 조직되고 성화되었다! 소유권자가 움켜쥐기를 게을리 했더라면, 프롤레타리아는 곧바로 생산하기를 게을리 했을 것이며, 미개 상태, 끔찍한 빈곤이 문 앞에 와 있을 것이다. 소유권이 취소된 폴리네시아 사람은 재물과 사랑을 완전한 공동체 안에서 누리는데 왜 노동을 하는가? 토지와 아름다움은 모두의 것이고, 자녀는 누구의 것도 아니다. 당신은 그에게 무엇 때문에 도덕, 존엄성, 인격, 철학, 진보에 관해 말하는가? 그리고 더 멀리 갈 것도 없이, 코르시카 사람은 그의 밤나무 밑에서 6개월간 식량과 잠자리를 얻는데 왜 그가 노동하기를 바라는가? 당신의 징병, 철도, 법정, 언론이 그에게 무슨 의미가 있는가? 밤을 까먹었으면 잠을 자는 것 말고 무슨 필요가 있는가? 코르시카 지사는 이 섬을 문명화하려면 밤나무들을 벨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더 확실한 방도는 밤나무들을 전유하는 것이다.

그러나 벌써 소유권자는 노동자의 실체를 잡아먹기에 더 이상 충분히 강하지 않다. 그는 자기가 총애하는 자들, 광대들, 보좌관, 공모자들을 부른다. 우리에게 이 무서운 음모를 드러내주는 것 역시 스미스다.

“어느 산물의 새로운 변형 때마다 이윤들이 늘어날 뿐 아니라 뒤에 이어지는 이윤이 앞서의 이윤보다 더 크다. 그것이 나오게 하는 자본이 필연적으로 언제나 더 크기 때문이다. 실제로 임금의 상승은 채무의 누적에서 단순 이자가 그런 것처럼 상품 가격에 작용하는 반면 이윤의 상승은 복리 이자처럼 작용한다. 예를 들어 직물 공장에서 아마의 삼빗질하는 자들, 실 잣는 여공들, 직조공들 등 인부들의 임금이 모두 하루에 2드니에가 오른다면, 직물 한 필의 가격을 단지 직물을 제조하는 인부들의 수에 그들의 노동일 수를 곱하고 2드니에를 곱한 만큼만 올릴 필요가 있을 것이다. 그 상품에 가해질 일손의 다른 정도를 각각에서 임금으로 해소되는 그 가격의 부분은 단지 이 임금 상승의 산술적 비율로만 오를 것이다. 그러나 이 일꾼들을 고용하는 모든 상이한 주인들의 이윤이 5퍼센트 상승하면 이윤으로 해소되는 가격의 부분은 수공의 상이한 등급 각각에서 이 이윤을 상승의 누진 비율로, 혹은 기하급수로 상승할 것이다. 삼빗질공의 주인은 그의 아마를 팔면서 재료와 그가 인부들에게 선지급한 임금의 총가액에 5퍼센트의 추가를 요구할 것이다. 실 잣는 여공들의 주인은 여공들의 임금 총액에 대해서처럼 그가 선지급한 빗질된 삼의 가격에 대해서도 5퍼센트의 추가 이윤을 요구할 것이다. 결국 직조공들의 주인은 그의 직조공들의 임금에 대해서처럼 삼실에 대해 그가 선지급한 값에 대해서도 5퍼센트를 요구할 것이다.”

이야말로 주피터―소유권자에서 시작해서 노예에서 끝나는 경제적 위계의 생생한 묘사다. 노동, 노동의 분업, 주인과 임금 노동자의 구별, 자본의 독점에서 지주, 금융가, 기업가, 부르주아, 마이스터, 작업반장의 카스트가 생겨나 지대를 소비하고, 고리대를 거두고 노동자를 압박하고 무엇보다도 착취와 빈곤의 가장 무서운 형태인 경찰력을 행사하는 일을 한다. 정치와 법의 발명은 오로지 소유권의 작품이다. 누마와 에게리아, 타르퀴니우스와 타나퀼은 나폴레옹과 샤를마뉴와 똑같이 귀족들이었다. “자기 백성들에게 두려움의 대상인 군주들, 이 나라들에서 다스리는 것은 주피터다(Regum timendorum in proprios greges, reges in ipsos imperium est Jovis)”라고 호라티우스가 말했다. 가난한 영혼을 괴롭히러 지옥의 모든 구석에서 달려온 지옥의 영들의 군단을 사람들이 말할 것이다. 그 영혼을 사슬로 끌고 잠과 먹을 것을 빼앗아라. 때려라. 불태워라. 불로 달군 집게로 집어라. 봐주는 것 없다. 동정하는 것 없다! 왜냐하면 노동자를 봐주면, 우리가 노동자를 정당히 대우해 주면, 우리에게는 남은 것이 없을 것이고 우리는 사멸할 것이다.

오, 맙소사! 그대가 그를 간수들에게 방치해 그들이 그를 아주 흠씬 두들겨 패 주고, 먹을 것은 노랑이의 손으로 주게 할 만한 무슨 범죄를 이 불행한 자가 저질렀는가? 그리고 당신들, 소유권자들은 섭리에게 선택받은 막대기들로서 규정된 한도를 넘지 말라. 그대들의 종의 가슴에 분노가 치밀어 오르고 그의 눈이 붉게 충혈되어 있다.

노동자들의 반란은 무자비한 주인들에게서 양보를 얻어낸다. 행복의 날, 환희 만세! 노동은 자유다. 그러나 무슨 자유인가, 이런! 프롤레타리아에게 자유는 노동하거나, 즉 더 빼앗기거나, 아니면 노동하지 않을, 즉 굶어 죽을 능력이다. 자유는 힘에만 이익이 된다. 경쟁을 통해 자본은 어디서나 노동을 짓누르며 산업을 독점체들의 방대한 담합으로 전환한다. 두 번째로 노동하는 평민은 귀족에게 무릎을 꿇는다. 자기 임금에 대해 논할 가능성도, 권리조차도 없다.

신탁은 이렇게 말한다. “주인들은 어디서나 그리고 언제나 무언의 동맹, 그러나 항상적이고 일률적인 동맹을 이루어 임금을 기존 율 이상으로 올리지 않는다. 이 규칙을 범하는 것은 배신행위다. 그리고 역겨운 입법으로 이 동맹은 용인되는 반면 일꾼들의 결탁은 가혹하게 처벌받는다.”

그러면 왜 스미스가 변질되지 않는 초연함에서 역겹다고 공언하기를 마다할 수 없었던 이 새로운 악이 있는가? 그렇게 괘씸한 불의가 아직도 필요했던 것일까, 그리고 사람들을 차별하지 않는다면 숙명은 오류를 저지른 것이고 섭리는 실패한 것일까? 우리는 독점에서 인류의 이 편파적 경찰을 정당화할 수단을 발견할 것인가?

우리가 사회적 감성주의 위로 올라가서 위에서 사실들, 사물의 힘, 문명의 내밀한 법칙을 고찰하기 원한다면, 왜 아니겠는가?

노동이란 무엇인가? 특권이란 무엇인가?

노동은 창조적 활동의 유비물로서 관념, 법칙이 그것을 꿰뚫지 못하는 한, 자기 자신을 의식하지 못하면서, 불확정적이고, 열매 맺지 못하는 것이지만 가치가 만들어지는 도가니이고 문명의 위대한 모태이며, 사회의 피동적 혹은 여성적 원리다. 자유의지에서 유래하는 특권은 개인화를 결정하는 전기 스파크, 실현하는 자유, 명령하는 권위, 숙고하는 두뇌, 지배하는 자아다.

노동과 특권의 관계는 그러므로 암컷과 수컷의 관계, 신부와 신랑의 관계다. 모든 민족에게서 여성의 간통은 언제나 남성의 그것보다 더 비난받아야 할 것으로 여겨졌다. 그것은 결과적으로 더 엄격한 형벌의 처분에 놓였다. 여러 형태들의 잔혹성에만 신경 쓰면서 그 원리를 망각하고 여성에 대해 행사되는 야만 행위만을 보는 자들은 『렐리아』의 저자의 이야기들에 등장할 만한 소설의 정객들이다. 일꾼들의 모든 규율 위반은 여성이 저지르는 간통과 유사하다. 그렇다면 법정 측에서 일꾼의 불평과 주인의 불평을 같은 호의로 받아들인다면, 인류가 그 바깥에서는 살 수 없는 위계적 끈이 끊어질 것이며 사회의 모든 경제가 멸망할 것임이 명백하지 않은가?

게다가 사실에 의거해 판단해 보라. 일꾼들의 파업 모습과 기업가들의 담합 행진을 비교해 보라. 거기에 정당한 권리의 불신, 선동, 소요가 있으며, 바깥으로는 외침과 떨림이, 안으로는 공포, 복종의 정신과 평화의 갈망이 있다. 반대로 여기서 계산된 결의, 힘의 감정, 성공의 확실성, 실행에서의 냉혈성이 있다. 그러므로 당신들 생각에 잠재력은 어디 있는가? 유기적 원리는 어디에? 생명은 어디에? 의심할 바 없이 사회는 모두에게 지원과 보호를 해 줄 의무가 있다. 나는 여기서 인류의 억압자들의 소訴를 제기하지 않는다. 하늘의 복수가 그들을 짓뭉개기를 바란다! 그러나 프롤레타리아의 교육이 완수될 필요가 있다. 프롤레타리아는 노동과 덕에 의해 불멸에 도달하는 헤라클레스다. 그러나 헤라클레스는 에우리스테우스의 학대 없이 무엇을 할 것인가?

여러 민족들의 이 파괴자가 로마 앞에까지 와서 진을 쳤을 때, 교황 성 레오 1세는 아틸라에게 물었다. “그대는 누구인가?” 그 야만인은 이렇게 대답했다. “나는 신의 채찍이오.” 교황은 말을 잇는다. “신에게서 우리에게 오는 모든 것을 우리는 감사함으로 받아들이노라. 하지만 그대는 그대에게 명해지지 않은 것은 행하기를 삼가라!”

소유권자들이여, 당신들은 누구인가?

이상한 일은 소유권이 자비, 정의, 사회경제의 이름으로 사방에서 공격을 받으면서도 자기의 정당화를 위해 이런 말로밖에 대답할 줄 몰랐다는 것이다. “나는 존재하므로 존재한다.” 나는 사회의 부정이고, 노동자의 약탈이고, 비생산자의 권리이고, 가장 강한 자의 이성이며 아무도 내가 그를 잡아먹지 않으면 살아갈 수 없다.

이 무서운 수수께끼는 가장 명민한 지성들을 절망케 했다.

“토지의 전유와 자본의 축적 이전에 노동의 전체 생산물은 일꾼에게 속했다. 그가 같이 나누어야 할 소유권자도 주인도 없었다. 이 상태가 계속되었더라면 노동 임금은 분업이 일으키는 생산적 잠재력의 이 모든 증가와 함께 증가했을 것이다. 극히 적은 노동량으로 생산된 그것들은 항상 더 적은 양으로 취득되었을 것이다.”

애덤 스미스는 이렇게 말했다. 그리고 그의 논평자는 이렇게 덧붙인다.

“나는 이자, 이윤 또는 임대료의 이름으로 다른 개인들의 산물을 차지할 권리가 탐욕의 먹이가 된다는 것을 잘 이해할 수 있다. 하지만 나는 한가한 사람의 풍요를 더해주기 위해 노동의 보수를 줄이면서 산업을 성장시키거나 사회의 부의 진보를 가속화할 수 있다고는 상상할 수 없다.”

스미스도, 그의 논평자도 알아채지 못한 이 공제의 이유를 우리는 인간 사회를 다스리는 준엄한 법칙이 새로이 그리고 마지막으로 조명되도록 다시 말해줄 것이다.

노동을 분업화하는 것, 이는 부속품들만 생산하는 것이다. 가치가 있으려면 조립이 필요하다. 소유권 제도 이전에 각자는 대양에서 그의 음식에 넣을 소금을 채취하는 물을 퍼내고, 기름을 짤 올리브를 따고, 철과 금을 함유하는 광석을 모으는 주인이다. 각자는 또한 그가 수확했을 것의 일부를 타인이 만든 물자의 등가량과 교환할 자유가 있다. 그때까지는 우리는 노동의 신성한 권리와 토지의 공동체에서 떠나지 않는다. 그런데 내가 내 인적 노동에 의해서든, 교환에 의해서든 자연의 모든 산물을 사용할 권리를 가진다면, 그리고 이렇게 취득된 소유가 완전히 합법적이라면, 나는 비슷하게 내가 노동과 교환을 통해 조달하는 다양한 요소들을 가지고 새로운 산물을 조립할 권리를 가지며, 이는 내 소유권이고 나는 다른 사람 모두에 배타적으로 이를 향유할 권리를 가진다. 나는 예를 들어 내가 소다를 추출할 소금을 통해, 그리고 내가 올리브와 참깨에서 짜는 기름을 가지고 내의를 세탁하는 데 적합한 화합물을 만들 수 있으며, 이는 내게는 청결과 위생의 관점에서 소중한 쓸모를 지닌다. 나는 심지어 이 화합물의 비밀을 간직하고, 따라서 그로부터 교환을 통해 정당한 이윤을 뽑을 수 있다.

그런데 비누 1온스의 제조와 100만 킬로그램의 제조 간에 권리의 관계에서 어떤 차이가 있는가? 크고 작은 양이 그 일의 도덕성에 무언가를 달라지게 하는가? 그러므로 소유권은 상거래처럼, 노동처럼 자연권으로서 세상의 아무것도 내게서 그 행사 권리를 빼앗지 못한다.

그러나 그 물건을 구성하는 재료들과 똑같이 내 배타적 소유권인 산물을 내가 조립한다는 것 자체에 의해 결과적으로 한 작업장, 사람들의 활용이 나에 의해 조직되고, 나와 같이 업무 관계에 들어가는 모든 이들에게 손해가 되면서 이익이 내 손에 축적되고, 당신이 내 사업에서 나를 대체하기를 갈망한다면 아주 자연스럽게 나는 나 자신을 위해 지대를 규정하게 된다. 당신은 내 비밀을 소유할 것이고, 나 대신 제작할 것이고 내 물레방아를 돌릴 것이고, 내 들판에서 수확할 것이고, 내 포도밭에서 수확할 것이지만 4분의 1, 3분의 1, 혹은 절반을 나누어 가질 것이다.

이 모든 사슬은 필연적이고 풀 수가 없다. 저 밑에 뱀도 악마도 없다. 이는 사물의 법칙 자체이며 상식의 명령dictamen이다. 상거래에서 약취掠取는 교환과 동일하다. 그리고 정말로 놀랄 일은, 약탈과 같은 체제가 당사자들의 선의에 의해서 용서가 될 뿐 아니라 정의에 의해 명령된다는 것이다.

어느 사람이 자기 이웃 숯장수에게서 숯 한 자루를 사고, 식품점에서 에트나산 황을 일정량 구입한다. 그는 약재상이 판 초석을 일정 비율 넣어 혼합물을 만든다. 이 모든 것에서 폭약이 나오고 그 100파운드는 성채 하나를 망가뜨리는 데 충분할 것이다. 그런데, 나는 묻는다. 목재를 숯으로 만든 나무꾼, 황을 모은 시칠리아의 목동, 운송을 행한 선원, 마르세유로부터 재발송을 한 중개인, 그것을 판 상인, 이들은 그 재앙의 공모자들인가? 그들 간에 폭약의 활용에서만이 아니라 내가 말하는 것이 제조에서도 조금의 연대성이라도 존재하는가?

그런데 각자 자기도 모르게 폭약의 생산에 협조한 다양한 개인들 간에 조금의 행위의 연관성도 발견하는 것이 불가능하다면, 같은 이유로 판매의 이익에 관해서 그들 간에 연관성과 연대성은 더구나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 그 사용에서 나올 수 있는 이익은 또한 전적으로 그 발명자에게 속한다는 것, 범죄나 과실에 따라 받아야 하는 것이 될 수 있을 처벌은 그에게 사적인 것이라는 점이 명확하다. 소유권은 책임과 동일하다. 동시에 소유권에 동의하지 않고는 책임을 언명할 수 없다.

그러나 이성이 사리에 어긋남을 찬양하라! 합당하고 그 기원에서 흠잡을 데 없는 바로 이 소유권은 그 행사에서는 명백한 악을 이룬다. 그리고 그것도 거기에 이를 변경시키는 어떠한 요소가 가담하지 않고 그 원리의 전개에 의해서만 그렇게 된다.

공업과 농업이 시장에 가져오는 산물들을 총체적으로 고찰해 보자. 폭약, 비누 같은 산물들은 모두 어느 정도든 일반적 창고에서 꺼낸 재료들로 조합한 결과물이다. 이 산물들의 가격은 변함없이 우선 여러 범주의 노동자들에게 지불된 임금, 둘째로 기업가와 자본가들이 요구한 이윤들로 구성된다. 그래서 사회는 두 계급의 사람들로 나누어져 있다. ⑴ 모든 소비 물품에 대한 독점권을 가지는 기업가, 자본가, 그리고 소유권자들, ⑵ 이 물건들을 사는 데 그 값어치의 반밖에 낼 수 없는 임금 수령자들이나 노동자들, 이는 그들에게 소비, 유통, 재생산을 불가능하게 하는 것이다.

애덤 스미스가 우리에게 이렇게 말해도 소용없다.

“단순한 공정성은 민족의 몸 전체를 입히고 먹이고 숙박시키는 자들이 그들 자신의 노동에서 스스로가 괜찮게 먹고 입고 거주하기에 충분한 몫을 가질 것을 요구한다.”

독점자들의 소유를 박탈하지 않고 이것이 어떻게 이루어질 수 있을까? 그리고 독점이 산업적 능력의 자유로운 행사의 필연적 결과인 경우에 어떻게 이를 막겠는가? 애덤 스미스가 수립하고자 했던 정의는 소유권 체제에서 실행 불가능하다. 그런데 정의가 실행 불가능하다면, 그것이 심지어 불의가 된다면, 그리고 이 모순이 사물의 본성에 밀접하다면 여전히 공정성과 인간성에 대해 말하는 것이 무슨 소용인가. 섭리가 공정성을 아는가, 아니면 숙명이 박애주의자인가? 우리가 지향해야 할 것은 결코 독점을 파괴하는 것이 아니고 노동을 파괴하는 것도 아니다. 독점체로 하여금 모두의 이익을 위해 누군가에게 남겨줄 재화들을 생산하게 하는 것은 독점의 모순이 불가피하게 만드는 종합에 의해서다. 이 해결책 말고는 섭리는 우리의 눈물에 냉담한 채로 있다. 숙명은 확고하게 제 길을 간다. 그리고 우리가 심각하게 앉아서 의와 불의에 관해 토론하는 반면, 우리를 생각에서 신처럼 모순되게, 우리의 언설에서 모순되고 우리의 행위에서 모순되게 만들어 준 신은 우리에게 웃음을 터뜨림으로 대답한다.

노동으로 자신을 실현하면서, 그리고 거대한 잠재력을 가지고 사회에서 자신을 표현하면서 모든 것을 그것이 있어야 할 것과는 역방향으로 도래하게 만들고 사회에 융단을 뒤집은 모습 혹은 동물의 뒤로 돈 모습을 보여주는 것은 우리 관념들의 이 본질적 모순이다. 사람은 노동 분업을 통해, 그리고 기계를 통해 점차 학문과 자유로 올라가야 했다. 그리고 분업과 자유를 통해 사람은 무뎌지고 노예가 된다. 조세는 재산에 비례해야 한다고 이론이 말한다. 그리고 정반대로 조세는 빈곤에 비례한다. 비생산자는 복종해야 하는데, 쓰라린 능멸에 의해 비생산자가 명령한다. 신용은 그 이름의 어원에 따르면, 그리고 그 이론적 정의에 따르면 노동의 제공자다. 실제로는 그것은 노동을 쥐어짜고 죽인다. 소유권은 그것의 가장 아름다운 특권의 정신에서 토지의 확장이며, 바로 이 특권의 행사에서 소유권은 토지의 금지다. 그 모든 범주들에서 정치경제학은 종교적 관념의 모순을 재생산한다. 사람의 생명은 동물성과 자연의 영속적인 해방이고 신에 대한 투쟁이라고 철학이 단언한다. 종교적 실천에서 생명은 사람의 자기 자신에 대한 투쟁이고, 상위의 존재에 대한 사회의 절대적 종속이다. “신을 네 마음을 다해 사랑하고 영생을 위해 네 영혼을 미워하라”고 복음서가 우리에게 말한다. 이성이 우리에게 명령하는 것의 정반대다.

나는 이 요약을 더 이상 써 나가지 않을 것이다. 내 길의 끝에 이르러 내 관념들이 아주 많이, 그리고 아주 격렬하게 밀려들어 벌써 내가 발견하는 것을 이야기하려면 새 책이 내게 필요할 정도이고, 연설의 예법에도 불구하고 나는 갑자기 중단하는 것 말고 다른 끝맺을 수단을 알지 못할 정도다.

내가 틀리지 않는다면 독자는 적어도 한 가지를 확신해야 하는데, 이는 사회적 진리가 유토피아에서도 일상 관행에서도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 정치경제학은 사회의 과학이 결코 아니며 창조 이전의 혼돈이 우주의 요소들을 담았던 것처럼 이 과학의 재료들을 담고 있다는 것이다. 이는 지구상의 우리 인류의 운명인 것으로 보이는 확정적 조직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우리의 모든 모순의 일반적 방정식을 만드는 것 말고 남은 일이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 방정식의 공식은 어떤 것일까?

벌써 우리에게는 이를 간파하는 것이 허락된다. 이는 교환 법칙, 상호성 이론, 우리 민사적이고 상업적인 회사들의 옛 형태들을 결정해 주는 체계로서 비판이 지적한 효능, 진보, 정의의 모든 조건을 충족하는 보증들의 체계, 더 이상 그저 통념적인 것만이 아니라 실재적인 사회로서, 파편적 분업을 학문의 수단으로 바꾸고, 기계들의 노예제를 폐지하고, 기계들의 등장의 위기를 예방하고, 경쟁을 이득으로 만들고, 독점을 모두를 위한 안전보장의 담보로 만들고, 자신의 원리의 잠재력에 의해 자본에 신용을 요구하고 국가에 보호를 요구하는 대신 노동에 자본과 국가를 종속시키고, 교환의 성실성에 의해 여러 인민들 간에 진정한 연대성을 창조하고, 개인적 창도성을 금지하지 않고, 가내의 절약을 금하지 않고 전유가 사회에서 빼돌린 부를 끊임없이 다시 가져다주고, 자본의 일 출입 운동에 의해 시민들의 정치적, 산업적 평등을 보장하고, 공교육의 방대한 체계에 의해 항상 수준을 높여 가면서 기능들의 평등과 적성들의 등가성을 마련해주고, 정의, 복리, 그리고 덕성에 의해 인간 양심을 갱신하면서 여러 세대의 조화와 균형을 보장해주는 사회, 한마디로 일거에 조직과 이행이면서 임시적인 것을 피하고 모든 것을 보장하며, 아무것도 저당 잡히지 않는 사회여야 한다.

상호성 혹은 소비 대차mutuum, 즉 현물 교환의 이론은 그 가장 단순한 형태가 소비 대출로서 집단적 존재의 관점에서는 소유권과 공동체라는 두 관념의 종합이다. 이는 사회가 여러 발명들과 체계들의 미로를 가로질러 그 원초적 관습으로 돌아가는 것, A는 A와 같다는 근본 명제에 대한 6000년의 명상의 결과 말고 다른 것이 아니니 이를 구성하는 요소들만큼 오래된 종합이다.

모든 것이 오늘날 이 엄숙한 복원을 위해 준비 중이다. 모든 것이 허구의 왕국이 지나갔다고, 사회는 그 본성의 진실성으로 다시 들어갈 것이라고 예고한다. 독점은 세상에 맞먹을 정도까지 부풀었다. 그런데 세상을 포괄하는 독점은 배타적인 것으로 남아 있을 수 없다. 그것은 공화제가 되거나 아니면 터지는 것이 불가피하다. 위선, 매수 가능성, 성매매, 절도가 공공 양심의 기초를 이룬다. 그런데 인류가 자신을 죽이는 것으로 살아가기를 배우지 않으려면 정의와 속죄가 다가온다고 믿을 필요가 있다.

벌써 사회주의는 그것의 유토피아들이 버티지 못한다는 것을 감지하고 실물과 사실에 매달린다. 사회주의는 파리에서 자기 자신에 대해 웃는다. 베를린, 쾰른, 라이프치히, 브레슬라우에서 논쟁을 벌이고 영국에서 생명의 전율을 한다. 대양 저쪽에서 천둥소리를 낸다. 폴란드에서 죽임을 당하고 베른과 로잔에서 정부 진출을 시도한다. 사회주의는 대중에 파고들어 완전히 다른 것이 되었다. 인민은 여러 학파의 명예를 별로 걱정하지 않는다. 노동, 과학, 행복, 평등을 요구한다. 무언가가 그 안에 있다는 조건에서는 체계는 인민에게 별로 중요하지 않다. 그런데 인민이 무언가를 원할 때는, 그리고 인민에게 그것을 어떻게 획득할 수 있을지를 아는 것 말고 중요한 것이 없을 때는 그 발견은 결코 시간을 끌지 않는다. 거대한 가장행렬이 내려오는 것을 볼 준비를 하라.

사제는 마지막으로 죄는 빈곤이며, 진정한 덕, 우리가 영원한 생명에 합당하게 해주는 덕은 종교와 신에 맞서 투쟁하는 것이라는 정신을 가져야 한다. 철학자는 자신의 고집, 철학의 눈썹supercilium philosophicum을 내려놓고 자진해서 이성은 사회이며, 철학을 한다는 것은 자기 손으로 작품을 만드는 것임을 배워야 한다. 예술가는 그가 옛날에 올림포스 산에서 그리스도의 마구간으로 내려왔으며, 이 마구간에서 갑자기 미지의 광채로 상승했다는 것, 그리스도교처럼 노동이 그를 재생케 해야 한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자본가는 은과 금이 진정한 가치물들일 뿐이며, 교환의 진실성에 의해 모든 산물이 같은 존엄성을 갖도록 상승해 생산자마다 자기 집에 조폐국을 가질 것이며, 생산적 자본의 허구가 일꾼에 대한 약탈을 행한 것처럼 조직된 노동은 자본을 다시 흡수하리라는 것에 유념해야 한다. 소유권자는 그가 사회의 지대를 징수하는 자일 뿐이며, 그가 옛날에 전쟁의 도움으로 토지에 대한 금지령을 둘 수 있었다면, 프롤레타리아는 이번에 조합에 의해 수확물에 대한 금지령을 두고 소유권의 시효를 만료시킬 수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군왕과 그의 거만한 수행원, 그의 군사, 그의 재판관들, 그의 자문관들, 그의 중신들과 비생산자들의 모든 군대는 노무자와 산업인에게 ‘자비를 베푸소서!’하고 서둘러 외칠 일이다. 노동의 조직은 권력의 종속과 동의어이며, 비생산자를 궁핍에 방치하고 권력을 수치와 굶주림 가운데 사멸하게 하는 것은 노동자 하기에 달린 일이기 때문이다.

이 모든 일이 예기치 못한, 기대하지 않은 새로운 사건, 인민의 격정이나 어떤 사람들의 노련함에서 나오는 결과가 아니라 사회가 순간적으로 방치되었던 태고의 관습으로 자생적으로 돌아감에 따라서 도래할 것이다. 그 방치의 원인은…

인류는 그 진자 운동을 하는 행진에서 끊임없이 자기 자신에게로 돌아온다. 인류의 진보는 그 전통이 다시 젊어지는 것일 뿐이다. 그 체계들은 외관상 아주 대립되지만 언제나 다른 여러 측면들에서 본 같은 기초를 제시한다. 문명의 운동에서 진리는 언제나 동일하고 언제나 옛것이고 언제나 새롭다. 종교, 철학, 과학은 드러나기만 한다. 그리고 이는 바로 인간 이성의 섭리와 무오성을 구성하는 것이다. 진보의 품 자체 안에서 우리 존재의 불변성을 보장하는 것이고, 사회를 그 본질에서 변질이 불가능하게 만드는 동시에 그 혁명에서 저항이 불가능하게 만드는 것이다. 그리고 전망을 계속 확장해 언제나 멀리에 마지막 해결을 보여주면서 우리의 신비로운 예감의 권위를 세워주는 것이다.

인류의 이 싸움에 관해 성찰할 때 나는 본의 아니게 그리스도교의 상징 체계에서 전투적 교회를 마지막 날에 승리하는 교회가 계승해야 한다는 것을 떠올린다. 그리고 사회적 모순들의 체계는 나에게 망각의 강 위에 놓인 마술의 다리처럼 나타난다.


[1] 제6장 Ⅰ을 말하는 것으로 보인다.-역자 주

[2] 나소 윌리엄 시니어(Nassau William Senior, 1790~1864), 영국의 경제학자-역자 주

[3] 고대 로마의 전설적 영웅 마르쿠스 쿠르티우스(Marcus Curtius). 전설에 따르면 땅에 균열이 생겼을 때, 점쟁이들이 로마의 가장 소중한 보물이 그 안에 던져지지 않으면 그 틈이 닫히지 않을 것이라고 했다. 쿠르티우스가 로마의 용감한 시민만큼 소중한 보물은 없다고 하면서 그 틈으로 뛰어들자 그 틈이 닫혔다.

[4] 조로아스터교의 악신. 페르시아어로 아흐리만이라고도 한다. 조로아스터교의 고대 신화에 등장하는 절대 악이자 근본적인 어둠을 상징하는 존재이다. 앙그라 마이뉴와는 분리된 존재였으나 후에 앙그라 마이뉴에 신격이 합치되었고, 선과 진실의 근원인 아후라 마즈다와 반대되는 신으로서 앙그라 마이뉴와 동일 개념이 되었다.-편집자 주

[5] 조로아스터교의 최고신으로 아후라 마즈다라고도 한다. 세상의 모든 선한 것들과 인간을 창조했다고 알려졌다.-편집자 주

[6] 1554년에 출간된 소설 『라사리요 데 토르메스의 삶, 그의 행운과 불운』의 주인공으로, 생존을 위해 비루한 삶을 사는 모습을 보여주는 인물이다.-역자 주

[7] 이 기사는 「주르날 데 제코노미스트」에서 그 후로 더 진실한 것으로 여겨지는 정보에 기초해 반박되어 왔다. 내 의견으로는 그 사실이 영국 정책의 필연적 결과인 만큼 더욱 의심의 여지가 없어 보인다. 필연성 앞에 가장 유식한 기자라고 해도 그 한 사람의 철회가 무슨 의미가 있는가?

[8] 영국을 지칭하는 옛 명칭-역자 주

[9] 부처部處에 맞서 싸우려고 한 신문들, 「주르날 데 데바le Journal des Débats」, 「시에클le Siècle」, 「쿠리에 프랑세 le Courrier français」는 바로 저명한 경제학자들에게 경제면을 맡긴 신문들이다. 부처의 현명함에 경의를 표하면서도 그 신문들은 자신들의 이론을 남겨두었다. 민주적 신문들로 말하면, 그 신문들이 아무것도 몰랐고, 아무것도 이해하지 못했으며, 일어난 일을 전혀 말하지 않았음을 보고해야 하는 것은 괴롭다. 그들은 카르파이타에 야영하러 갔던 것인가 보다!

[10] 벨기에 조약에 관해 국회에서 한 장관 연설은 그런 것이 아직은 우리나라에서 체제의 생각이 아님을 증명해준다. 상무부 장관 퀴냉그리덴(Cunin-Gridaine) 씨는 관세 폐지론의 유혹에 저항해 우선 모든 재야 언론에서, 그리고 일부 여당 언론에서 호의적으로 받아들여졌으며, 아마도 10월 29일 내각에 감사해야 할 가장 큰 도움을 프랑스에 주었다. 이 영예로운 협상가가 프랑스에 마련해주는 유예로 이익을 보는 프랑스가 결국 민족들 간의 자유와 평등의 진정한 원리들에 관해 깨달을 수 있기를 바란다!

[11] 아우구스탱 나달(Augustin nadal)의 1738년 작품-역자 주

[12] 오지에, 『공공 신용의 역사Historie du Crédit public』

[13] 나는 다른 것들 중에서도 총체와 독창성을 위해 오지에 씨의 간결하고 사물들로 가득한 저작 『공공 신용의 역사』(Paris, Guillaumin, 1842)를 인용할 것이고, 철학적 정신을 위해서는 치에슈코프스키 씨의 저작 『신용과 유통에 관해Du Crédit et de la Circulation』(Paris, Treuttel et Wurtz, 1859)를 인용할 것이다.

[14] 성서의 외경 『토비트서』의 주인공 토비트의 아들이다. 토비트가 가바엘에게 은 10달란트를 맡기면서 증서를 만들어 두 조각으로 찢어 가바엘과 각자 보관했는데, 토비는 그 증서를 아버지에게서 받아 은을 돌려받으려고 가바엘을 찾아간다.-역자 주

[15] 위에서 말한, 예금 은행과 유통 은행의 조작 방식을 말한다.-역자 주

[16] 이 모든 것들에 흥미로운 세부 내용을 제공하는 오지에 씨는 그 기원이 모두 페니키아라는 것, 그것들을 여러 세기 동안 보전한 후에 중세 말 그리고 르네상스 시대에 갑자기 재등장시킨 것이 유대 전통이라는 것을 믿는다. 나는 실토하건대 필연적 관념들의 민족들 간 전수라는 가설들을 별로 즐기지 않는다. 이 필연적 관념들은 이것들을 대표하는 대상물이 생성되자마자 곧 성찰에 의해 포착되는 것이다. 언어, 종교, 산업처럼 신용의 조합들도 그렇다. 민족마다 이웃의 도움 없이 그 자신의 필요의 본성과 정도에 따라 자신 안에서 자생적으로 이것들을 발달시킨다. 사회의 본질에 관련된 모든 것에 대해 어느 민족이건 장자권도, 발명의 우선권도 주장할 수 없다. 실질이든 허구든, 가죽이든 비단이든 조개껍질이든, 철이든 뭐든 화폐들이 금화와 은행권에 대해 가지는 관계는 남근상, 개, 양파 숭배가 주피터와 야훼의 숭배에 대해 가지는 것과 같은 관계다. 이는 종교 형태들처럼 여러 민족들의 자생성에서 나오는 선천적인 모든 신용 형태들로서 종교 형태들과 같이 더 지적인 개념과 더 높은 수준의 관념 앞에서 희미해질 것이다.

[17] 이런 장부들은 구매 및 판매 장부, 대차 장부, 금전 출납부, 재고 장부, 만기 증권 기록부, 문서 사본철 등이 있다.

[18] 1846년 3월 8일의 보도에 따르면, 아기 191명이 탁아소에 받아들여졌다. 이에 보모 14명을 더하면 205개 가정이 구제를 받는 것이다. 구제받는 가정마다 자선 기관에, 창설자들이 지불한 보조 납부금에 엄마가 지불해야 하는 20상팀의 일일 탁아비 외에 월 3프랑 50상팀의 비용이 들게 했다. 탁아소에 참여하는 자선가 수를 100명이라고 하면 그들 각자의 희생은 7프랑 17.5상팀이다.

[19] 변증법은 본래 정신이 하나의 관념으로부터 다른 관념으로 상위의 관념을 통해서 가는 행진, 하나의 계열이다.

[20] 『루가의 복음서』 11장 18절-편집자 주

[21] 『인류에서 질서의 창조Création de l'ordre dans l'humanité』, 1 vol. in-12, Paris, Prévôt, rue Bourbon-Villeneuve, 65; Guillaumin, rue Richelieu, 14.

[22] 문맥상 ‘경제학자들’의 잘못으로 보인다.-역자 주

[23] 『법 형이상학 원리Principes métaphysiques du droit』, 티소(Tissot) 번역.

[24] 라블레, 라신, 라퐁텐의 작품에 모두 등장하는 인물로, 무식하고 탐욕스런 재판관을 상징한다.-역자 주

[25] 트롤롱, 『임대 계약Contract de louage』(1권)을 보라. 거기서 그는 앞선 시대, 그리고 같은 시대의 모든 법학자들에 홀로 맞서, 임대차에서는 임차인이 물에 대한 권리를 취득하며 임대차는 물적 조치와 인적 조치를 동시에 일으킨다고 주장하는데, 이는 우리 생각에는 타당하다.

[26] Qaïn, 신실한 자, 창, 투창; qaneh, 라틴어 canna, 갈대, 창의 재료; qanah, 거룩한 자에 둘러싸이다. 획득하다; qiné, 닫아건 소유권자처럼 질투하다. Bal, 부정의 부사. bélimah, 전혀, 전무; bala, 소진하다. 낡다. 아무것도 아닌 것이 되다. habal, 사라지다; habel, 아무것도 아닌 사람, 무인 사람.

[27] 시몬 도이츠(Simon Deutz, 1802~1844), 독일에서 유대인으로 태어나 출세를 위해 로마 가톨릭으로 개종한 인물.-역자 주

[28] 영웅 탐험가 카베는 이카리아 섬에서 어떤 ‘선한 이카리아인’이 독재자를 타도한 후 공화국이 수립되어 있는 것을 발견했다.-역자 주

[29] 프랑수아 빌가르델(François Villegardelle, 1810~1856).-역자 주

[30] 1792년 9월 21일부터 1795년 10월 26일까지 운영된 프랑스 정치 체제.-역자 주

[31] Zonah는 히브리, 칼데아어로서 술집 여주인과 성매매 여성을 뜻한다.

[32] 빌가르델을 말함.-역자 주

[33] 맬서스, p.472. édition de Guillaumin.

[34] 『인구와 생존 수단 문제의 해결Solution du problème de la population et des subsistences』, par Ch. Loudon, Paris, 1842.

[35] 고대의 크림반도를 일컬음.-역자 주

[36] 사람들은 과학계에 한 영국 농학자의 경험들을 알려 왔다. 그로부터 나오는 결과는 현저하게 더 많은 수확을 얻지 않고 토지에 비료의 양을 두 배로 늘릴 수 있다는 것이다. 비슷한 증명을 하려면 19세기에 살 필요가 있었다. 죽으로 사람을 만들어 내지 않는다. 죽을 먹고 소화하는 것도 일정 정도로 한 사람의 실험 대상, 어린이가 필요하다. 마찬가지로 어떤 사람이 자기 생존 수단을 재생산하기 위해 충분한 분뇨를 내놓는다는 것을 증명할 때, 사람들이 더 앞선 것은 아닐 것이다. 땅이 필요하다. 밀 씨를 퇴비 더미에 뿌려라. 그대는 이를 준비된 토지에 뿌릴 경우보다 수확을 덜 하게 될 것이다. 또한 그것은 값도 덜 나갈 것이다. 그러므로 산물을 늘리려면 경작 가능 면적으로 늘리고, 노동을 늘려야 한다. 천연 비료나 인공 비료는 결코 부족하지 않을 것이다.

[37] 루소의 『고백Les Confessions』에 나오는 쥘리에타(Zuliett)를 말한다.

[38] 그리스도교의 교부들.-역자 주

[39] 가임 기간 15년을 수유 기간 18개월과 임신 기간 9개월의 합인 27로 나누면 6.7이 되고 여기서 4.5를 빼면 2.2가 되어, 한 세대에 10분의 1의 인구가 증가한다. 여기서 저자의 계산 방식은 불명확한 점이 있다.-역자 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