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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르주아 사회가 점점 더 혼란해지고, 국가가 붕괴하고, 유럽에 혁명의 도래가 다가오고 있음을 인지할 수 있는 가운데, 우리는 만국의 노동자들의 가슴에 그 어느 때보다 더 단결하고, 어깨를 맞대고 서며, 조직하고자 하는 열망이 차오르고 있음을 인지한다. 특히 코뮌의 패배 이후 모든 노동자 조직이 분쇄당한 프랑스에서, 이 열망은 어느 때보다 더 가시적이다. 프랑스의 거의 모든 산업지역에는 합의를 만들고 단결하고자 하는 운동이 존재한다. 심지어 농촌에서조차 노동자들은 스스로의 권리를 지키기 위한 목적에만 복무하는 기구를 만들고자 하는 요구를 만들어내고 있다.

지난 3년간 이 영역에서 노동자들이 만들어낸 결과는 놀랍다. 하지만 현존하는 혁명적 사회주의 정당이 수행중인 범죄적인 일들을 볼 때, 그리고 우리의 반대파들에 비해 미약한 우리의 자원을 바라볼 때, 다가올 혁명의 날에 구체제 질서의 해소를 향해 전진할 수 있는 실질적 세력을 만들기 위해 아직 우리에게 남아있는 과업을 솔직히 직시할 때, 우리는 남아있는 과업은 아직 어마어마하게 많으며, 우리가 이제야 겨우 진정한 노동운동을 만들어내기 시작했다는 것을 인정해야만 한다. 위대한 노동대중은 아직 3년 전의 잔재를 떨쳐내지 못했다. 스스로를 “노동자 계급정당”이라는 가식적인 이름으로 부르는 집산주의자들은 여전히 그들이 선거운동을 시작할 때 바라던 바, 노동자들의 폭발적 정치세력화를 만들어내지 못하고 있다. 그리고 노동자들이 급진당에 의존하면 의존할수록, 당은 기반을 얻기는커녕 오히려 잃게 된다. 아나키스트 그룹의 경우, 대부분의 그룹은 그들에게 이론적 선전의 영역과 구체적 행동의 영역에서 추동력과 활동력을 줄 수 있는 다수 노동대중과의 일상적 접촉을 만들지 못하고 있다.

이들이 원하는 것이 그것이라면, 그들이 그저 환상 속에 살도록 두자. 우리는 모든 과업을 그 전체로써 받아 안고자 한다. 그리고 미성숙한 승리를 선언하기 보다는 다음과 같은 질문을 던지고자 한다. 우리가 현재 조직을 더욱 발전시키기 위해 무엇을 해야 하는가? 전체 노동대중 내부에서 우리의 영향력을 확대하고, 이를 통해 혁명의 그 날에 노동계급의 열망을 쟁취할 의지적이고 불가침의 세력을 구성하기 위해서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

더 넓은 발전을 추구하는, 세력이 되고자 하는 모든 조직에게 있어, 운동의 최전선에 있는 사람들이 조직의 최종목적을 명확하게 하는 것은 중요한 일이다. 그리고 이 목적에 대한 합의가 이루어지면, 그 목적에 합치하는 행동방침을 구체화해야 한다. 이 중요한 지점은 지금까지 무시되어 왔지만, 더 멀리 나아가고자 한다면 반드시 필요한 일이다. 이러한 사전적 합의는 조직이 성공할 가능성을 만들기 위해 필요불가결한 전제조건이다. 하지만 지금까지 모든 조직들이 동일하게 진행하여 온 것이다. 보수당을, 보나파르트주의당을, 기회주의자들을, 급진당을, 이전 시대의 정치적 음모꾼들을 보라. 이 당들은 각각 잘 정제된 목적을 가지고 있었고, 그들의 행동 수단은 그 목적에 절대적으로 합치했다.

이 당들의 목적과 수단을 이 글에서 분석하는 것은 너무도 지리멸렬한 일일 것이다. 그렇기에 나는 하나의 예시를 들어 다른 모든 예시를 대신하려 한다. 급진당 혹은 비타협주의 당의 예시를 들어보도록 하자.

그들의 목적은 분명하다. 급진당은 프랑스에서 개인에 의한 통치를 철폐하고 미국의 모델에 따라 민주공화국을 설치하려 한다고 말한다. 그들은 상원을 철폐하고, 보편선거라는 단순한 방식으로 선출된 단원제를 구성하고, 정교분리를 이룩하며, 언론 · 시위 · 단결에 대한 절대적 자유를 확보하고, 지방자치와 국민군을 주장한다. 이것들이야말로 그들의 강령에 있어 가장 중요한 것들이다. “그리고 노동자가 이 체제에서 더 행복해질 것인가? 그리고 그 결과로써, 노동자가 사장의 자비에 기대는 임금 노동자가 되지 않을 수 있는가?” 이 문제들은 그들에게는 중요하지 않다. 그들은 이 문제는 나중에 정리될 수 있다고 말한다. 사회적 문제의 중요성은 민주적 국가가 만들어진다면 미래의 언젠가는 정리될 수 있는 것으로 격하된다. 현존하는 기구들을 전복하는 것은 그들에게 관심사가 아니다. 그들은 단지 그 기구들을 수정하고자 한다. 그리고 그들에 의하면, 입법기구는 이것을 매우 쉽게 할 수 있다. 급진당의 모든 정치 강령은 법령이라는 수단으로 압축될 수 있다. 그리고 그들에 의하면 이것은 권력을 현재의 권력자들에게서 빼앗아 급진당에게 넘겨준다면 다 해결될 것이다.

이것이 급진당의 목표다. 그 목표가 달성 가능한 것인지 여부는 제쳐두고,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그들의 수단이 그 목적과 합치하는가이다. 급진당은 정치적 개혁의 옹호자로써, 집권을 위한 작업을 하는 정당을 구성한다. 급진당은 통치력의 중심을 민주주의적 미래로 재정렬하는 것을 예상하면서, 최대한 많은 당원들이 국회에, 지방의회에, 다른 모든 정부기관에 선출되어 권력을 획득하는 것을 원하였다. 그들의 적은 현재 행정부였던 만큼, 그들은 행정부에 대항하는 조직을 만들어 행정부에 대항하는 전쟁을 담대히 선포하고, 그 몰락을 예비했다.

그들에게 소유는 신성불가침의 것이었다. 그리고 그들은 사적소유에 어떠한 수단으로도 반대하고 싶어 하지 않았다. 그들의 모든 노력은 정부에서 권력을 확보하는 것에 향해있었다. 그들이 인민에게 약속하는 경제적 개혁은 그저 현재 정부를 전복시키고 더 민주적 정부를 수립하는 목적에만 복무한다.

이 정치적 강령은 우리가 추구하는 것이 아니다. 우리에게 분명한 것은, 사적 소유의 체계를 선제적으로 변혁하지 않으면 실질적 사회변혁은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하지만, 강령 자체에 대해서는 비판적으로 바라보더라도, 우리는 급진당의 행동방침이 그 목적에 부합한다는 사실은 인정해야 한다. 목적이 있다면, 그것을 이루기 위한 조직이 필요한 것이다.

그렇다면 노동자 조직의 목적은 무엇인가? 그리고 어떠한 행동방침과 조직 방침을 적용해야 하는가?

프랑스 노동자들이 조직하고자 하는 목표는 단지 모호하게 이야기되고 있다. 하지만 의심의 여지가 없는 두 가지 지점이 있다. 노동자 총회는 이 지점들을 오랜 토론 끝에 도출해냈으며, 이를 바탕으로 노동자들의 승인을 받아냈다. 그 두 지점은 다음과 같다. 사적 소유에 대응하는 의미에서의 공동 소유―그리고 소유를 포함한 체제의 변혁은 오직 혁명적 수단을 통해서만 가능하다는 합의였다. 사적 소유의 철폐는 목적이고, 그 수단은 사회혁명이라 제시되었다. 이 두 지점은 노동자 운동의 전선에 있는 이들이 받아들여 적용하였다. 아나키즘적 코뮌주의자들은 이 두 지점들을 연마하여 더 광범위한 정치적 강령을 발전시켰다. 그들은 사적 소유의 완전한 철폐를 집산주의자들보다 더 강하게 주장했다. 그리고 아나키즘적 코뮌주의자들은 국가의 철폐와 혁명적 선전을 그들의 목적으로 포괄했다. 하지만 그 무엇보다 우리가 동의하고 있는 것은 (혹은 최소강령의 등장 전에 동의했던 것은) 노동자 조직의 목적은 경제적 혁명, 사회 혁명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노동자 총회의 이러한 결의 이후 새로운 세계가 열렸다. 프랑스 프롤레타리아트는 그들이 특정한 정부에 반대하는 것이 아니라고 선언한다. 프랑스 프롤레타리아트는 더 광범위하고 합리적인 관점을 드러냈다. 그들은 청색이건, 적색이건, 백색이건, 모든 자본의 소유자들에 대한 전쟁을 선포한다. 그들은 정당을 만들려 하지 않았다. 그들은 경제적 투쟁의 조직을 만들려 했다. 그들이 요구한 것은 민주적 개혁이 아니었다. 그들은 완전한 경제 혁명, 사회 혁명을 요구했다. 레옹 감베타나 클레망소는 더 이상 그들의 적이 아니었다. 그들의 적은 감베타들과 클레망소들을 포함한 자본이고, 자본을 유지하고 그에 복무하고자 하는 모두였다. 그들의 적은 사장, 자본가, 금융가와 같이 다른 이들을 팔아 살아가는, 그 부가 노동자의 피와 땀으로 만들어진 기생충들이었다. 그들의 적은 부르주아 사회 전반이었고, 그들의 목적은 그 사회를 전복하는 것이었다. 단지 정부를 전복하는 것으로는 부족했다. 문제는 그것보다 더 거대했다. 사회의 부를 확보하고, 그 부를 생산자, 노동자들에게 돌려주는 것이 필요불가결했다. 이를 위해 필요하다면, 부르주아들의 시체 위에서 그렇게 할 것이었다.

이렇게 목적이 확립된 이상, 행동의 수단은 자명하다. 노동자들이 자본에 대항한 전쟁을 선포한다고? 그것을 완전히 붕괴시키기 위해? 지금부터라도, 노동자들은 단 한 순간도 낭비하지 않고 준비해야 한다. 노동자들은 자본에 대항한 투쟁을 결의해야 한다. 물론 급진당조차도 혁명의 날이 하늘에서 뚝 떨어져 그들이 정부에 대한 전쟁을 선포할 것이라 기대하지는 않는다. 급진당은 언제나 유예도 휴식도 없이 투쟁을 계속한다. 그들은 전쟁을 시작할 기회를 하나도 놓치지 않는다. 그리고 만약 그 기회가 스스로 현현하지 않는다면, 스스로 만들어낸다. 그리고 그들은 이렇게 함에 있어 옳다. 매일같이 모든 기회에 이루어지는 국지전들의 지속된 반복, 전쟁의 반복이 아니고서는 결정적 전투와 승리를 준비할 수 없기 때문이다. 우리가 자본에 전쟁을 선포한 이상, 우리는 이 선전포고가 공허하게 끝나지 않도록, 부르주아지에 대해 동일한 일을 해야 한다. 우리가 자본에 대한 전투와 그 승리의 날을 예비하고자 한다면, 우리는 지금 이 순간부터 매 기회마다 국지전과 공격을 계속하여야 한다. 이를 통해 그들이 분노로 들끓고, 투쟁에 지치고, 그들의 사기를 떨어트려야 한다. 우리는 우리의 주적, 자본주의와 착취를 시야에서 놓아서는 안 된다. 그리고 우리는 적들의 분할책동에 넘어가서는 안 된다. 국가는 필요하다면 이 전쟁에 참전할 것이다. 자본을 타격하지 않고 국가를 타격하는 것이 불가능하다면, 반대로 국가를 타격하지 않고 자본을 타격하는 것도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이 전쟁에서 우리는 어떠한 행동방식을 택해야 하는가? 만약 우리의 목적이 단순한 전쟁의 선포라면, 우리는 단순하게 갈등만을 초래하면 된다. 이럴 정도의 수단은 우리가 이미 가지고 있다. 노동자들의 각개 집단은 그들의 현 위치를 지역적 조건에 맞추어 판단하고, 그 지역에 근거하여 봉기할 수 있다. 파업은 물론 소요와 행동의 수단이 될 것이다. 그리고 이에 대해서는 추후에 다루도록 하자. 그리고 아직 상상된 적이 없고, 표현된 적도 없는 수천가지 전술들이 이 갈등의 장에서 사용될 수 있을 것이다. 주된 것은 다음 개념을 드러내는 것이다.

우리가 전쟁을 선포하는 적은 자본이다. 그리고 우리는 우리의 모든 노력을 기울여 자본을 타격할 것이다. 우리는 우스꽝스러운 정당정치 캠페인과 논쟁에 현혹되지 않을 것이다. 우리가 준비하고 있는 위대한 투쟁은 필연적으로 경제적이며, 그렇기에 우리가 행동을 집중해야 할 영역은 경제적 영역이다.

우리가 스스로를 이 영역 위에 둘 때, 우리는 거대한 노동대중이 우리의 대오에 함께 모여 노동자 동맹의 깃발 아래로 모이는 것을 볼 것이다. 이로써 우리는 혁명의 그날 착취자들을 몰아낼 강력한 힘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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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논설에서 「반란Le Révolté」은 현재의 자본가들로부터 자본을 탈취할 사회혁명을 목표로 하는 모임은 필연적으로, 지금부터라도 스스로를 자본에 대항하는 투쟁의 중심에 두어야 한다는 것을 역설했다. 만약 그 모임이 다가올 혁명을 소유의 체제에 대항하는 것으로 꿈꾸며, 그 혁명의 표어는 자본가들로부터 사회적 부를 수용하는 것이 되어야 한다고 믿는다면, 그들의 투쟁은 모든 전선에서 자본가들에 대항하는 투쟁이 되어야 한다는 것을 보였다.

절대 다수의 노동자들이 자본의 소유자들이 그들에게 부과하고 있는 상황에 대해 충분히 인지하지 못하고 있다. 그들은 “노동자들은, 노동자들의 참된 적은, 사회의 적은, 진보의 적은, 자유의 적은 자본가들이라는 것을 아직 이해하지 못한다. 그리고 노동자들은 부르주아들에 의해, 부르주아 정치에만 기초한 끔찍한 전투에 동원되고 있다는 것을 아직 이해하지 못한다”고 말한다. 하지만 이것이 사실이라면, 정말로 노동자들이 가끔씩 환영을 쫓아 그 소득을 포기한다면, 노동자들이 너무 자주 다른 적들에게 신경을 쏟을 뿐 실제로 필요한 것은 자본가들을 무릎 꿇리는 것임을 자각하지 못하는 것이라면, 우리 또한 노동자들의 참된 적을 식별하지 못하고 환영을 쫓는 죄악을 범해온 것이다. 새로운 정당의 결성은 경제의 문제를 공론화하는 방식으로 올바르지 않다. 만약 노동대중의 다수가 경제적 문제에 대해 충분히 인지하지 못하고 있다면, 이 문제를 배경으로 격하시키는 것은 그 중요성을 노동자들에게 충분히 인지시키지 못한다. 만약 이러한 오해가 존재한다면, 우리는 이를 분쇄하기 위해 투쟁해야지, 이것을 보존하고 괴뢰화해서는 안 된다.

이러한 반대들은 제쳐두고, 자본주의에 대항하는 투쟁의 다양한 성격에 대해 논해보자. 물론 우리의 독자들은 이러한 논의가 신문지면에서 이루어져서는 안 되는 것임을 알 것이다. 이 논의는 노동자 그룹 내부에서, 지역적 상황에 대한 인지와 실질적 행동을 둘러싼 변화무쌍한 조건들을 기반으로 이루어져야 한다. 지난 기사 〈반란의 정신〉에서 우리는 지난 세기의 농민과 혁명적 부르주아지가 귀족과 왕족을 향한 사상의 조류를 발전시켜왔는지 보인 바 있다. 아일랜드의 농민 동맹에 관한 기사에서, 우리는 아일랜드 인민들이 지배계급에 대한 쉼 없고 무자비한 전쟁으로 조직할 때, 매일의 조건을 그 기저에 두었음을 보인 바 있다. 이와 같이 우리는 사장과 자본가들에 대항하는 투쟁을 각 지역에 적합한 방식으로 조직해야 한다. 아일랜드에서 완벽하게 통했던 방식은 프랑스에서는 그렇지 않을 수 있다. 그리고 한 국가에서 위대한 결과를 낳은 방식이 다른 나라에서는 그렇지 않을 수 있다. 무엇보다 활동가 그룹의 투쟁을 위한 최고의 방법은 신문지상의 충고를 통해 찾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 방법을 찾는 것은 각개 그룹의 지역적 조건에 따른 질문을 함으로써 이루어진다. 심도 있는 논의를 통해 이루어진다. 지역이 흥미를 가진 사건들로부터 영감을 받고 스스로의 상황을 상세히 관찰할 때 가장 적합한 투쟁의 방법론을 비로소 발견할 수 있다.

하지만 「반란」지가 의견을 제시하고자 하는 혁명적 투쟁의 전술이 하나 있다. 이것은 가장 우월한 방법은 아닐지 모른다. 오히려 단순히 유효한 전술일 뿐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 전술은 노동자들이 서로 다른 맥락에서 사용할 수 있는 무기이자 상황에 따라 언제라도 사용할 수 있는 무기이다. 이 무기는 파업이다.

파업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은 오늘의 맥락에서 더욱 중요한 일이다. 지난 얼마간, 관념론자들과 노동자의 거짓 친우들은 파업에 대한 은밀한 반대론을 펼쳐오고 있기 때문이다. 이들은 노동계급을 이러한 형태의 투쟁에서 치워내고 노동계급을 더욱 “정치적인” 길로 인도하려 한다. 그 결과는 최근 프랑스 전역에서 무너져 내린 파업들로 드러난다. 그리고 노동자의 해방은 노동자 스스로 이루어야 한다는 깃발을 써내려갔던 이들은 이제 투쟁과 거리를 유지하고 있다. 이들은 노동자들이 겪고 있는 빈곤으로부터도 거리를 유지했다. 이로써 이들은 헌병의 군도가, 현장감독의 나이프가, 판사의 판결문이 된다.

파업은 노동자를 해방하는 길이 아니므로 우리가 신경 써서는 안 된다고 말하는 것은, 오늘날 유행인 듯하다. 이 의견을 자세히 들여다보도록 하자.

물론 파업투쟁은 그 자체만으로 해방의 수단인 것이 아니다. 혁명을 통해서만, 사회의 부를 수용하여 모두가 사용하게 하는 것을 통해서만 노동자들은 그 사슬을 깨트릴 수 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노동자들이 혁명의 날까지 아무것도 하지 말고 기다려야 하는가? 혁명이 가능하게 하려면, 노동대중은 스스로를 조직해야 한다. 그리고 저항과 파업은 노동자들이 조직할 수 있는 훌륭한 수단이다. 더구나 이 전술은 오늘날 제시되고 있는 다른 전술들(노동자 대표단 구성, 노동자 계급정당 등)에 비해 우위를 가진다. 그 우위는 파업투쟁은 운동을 탈선시키지 않고, 운동의 주적인 자본가들을 향해 계속 겨누어진다는 것이다. 파업과 저항은 사회주의자들만을 조직하는 것이 아니라 (사회주의자들은 어쨌건 스스로를 조직할 것이다) 아직 사회주의자가 되지 못했지만 되어야만 하는 이들도 조직해낼 것이다.

파업은 모든 곳에서 발발하고 있다. 하지만 파업이 고립되고 각자도생하는 이상, 파업은 너무 자주 패배한다. 파업에 돌입하는 노동자들이 해야 하는 것은 스스로를 조직하고, 서로와 소통하며, 그 조직 건설에 도움을 주려는 이들을 포용하는 것이다. 이 과업은 중대하다. 노동자의 대의에 헌신하는 모든 이들에게는 해야 할 일이 많다. 그리고 이 조직적 과업의 결과는 운동에 참여한 모두에게 어마어마한 만족을 가져다 줄 것이다. 우리는 모든 도시의 각각의 직능에 대한 저항의 조직을 건설해야 한다. 우리는 착취자들과 싸우기 위한 저항기금을 건설해야 한다. 우리는 각 도시와 각 직능의 노동자들의 조직을 묶어내어 다른 조직과의 관계를 만들어야 한다. 우리는 국내적, 국제적 연방을 건설해야 한다. 노동자의 연대라는 개념은 단지 말로 그쳐서는 안 된다. 이것은 모든 직능과 국가에서 실현되어야 한다. 인터내셔널은 최초에 민족적, 지역적 선입견을, 직능간의 경쟁의식을 마주해야 했다. 그리고 아마도, 이 경쟁심리와 선입견을 극복할 수 있었다는 것이 인터내셔널이 우리에게 준 최대의 선물일 것이다. 우리는 서로 다른 나라와 직능의 노동자들이 처음에는 대립하다가도 곧 함께하는 것을 보았다. 그리고 이러한 결과는 당대의 거대한 파업투쟁으로부터 비롯한 조직을 통해 확보되었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 사장에 대한 저항의 조직을 통해 인터내셔널은 200만 이상의 노동자를 한데 모을 수 있었고, 부르주아지와 정부가 두려워한 강력한 세력이 될 수 있었다.

이론가들은 “하지만 파업은 단지 노동자의 이기적 이득만을 대변할 뿐”이라고 말한다. 노동자들을 파업으로 내모는 첫 번째 동인은 이기심이 아니다. 오히려 그 동인은 임금을 식량 가격 인상률만큼은 올려야 하는 절실한 필요, 즉 비참함이다. 만약 그 노동자가 파업기간 수개월의 궁핍을 견뎌낸다면, 이것은 소부르주아가 되고자 하는 욕심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다. 이것은 그 스스로가, 그 부인이, 그 자식들이 굶어죽지 않으려는 몸부림이다. 그리고 파업은 조직의 심장으로부터 비롯된 연대감을 발전시키는 데 복무한다. 이것은 이기심과는 완전히 다르다. 파업 중인 동지들과 푼돈을 나누어 사용하는 것은 흔히 목격되는 일이다. 얼마 전 바르셀로나의 건설노동자들은 일 9.5시간 노동을 위해 투쟁하는 파업대오에 임금의 절반 가량을 나누어주었다. (그리고 이 파업은 성공했다. 만약 입법을 통해 이를 얻어내고자 했다면, 이들은 여전히 일 11~12시간 노동에 시달리고 있었을 것이다.) 인터내셔널의 시대에 발생한 파업투쟁에서만큼 노동계급의 연대가 실현된 적은 역사상 어느 때에도 없다.

무엇보다, 파업에 대한 낙인에 반하는 최대의 증거는, 인터내셔널은 온전히 이기적인 전술을 주장했다는 것이다. 인터내셔널은 파업에서 피어났다. 부르주아들과 일부 야심가들이 인터내셔널을 의회투쟁으로 끌어낼 때까지, 인터내셔널은 파업대오의 조직에 그 뿌리를 두고 있었다. 그리고 이 조직은 지역 분회와 총회를 통해 현대 사회주의의 광범위한 원칙을 수립하고, 오늘날 우리에게 힘을 주었다. 소위 과학적 사회주의자들께는 죄송하지만, 오늘날 이야기되는 사회주의의 모든 개념들은 인터내셔널의 총회에서 천명된 것들이다. 파업투쟁의 실천은 인터내셔널 내 다른 분파들의 사회적 문제제기를 저해하지 않았다. 오히려 파업투쟁을 통해 이 문제제기들은 대중들에게 더 퍼져나갈 수 있었다.

파업이 혁명적 정신을 일깨우지 않는다는 이야기도 자주 되곤 한다. 오늘의 환경에 있어, 이것의 정반대야말로 사실이다. 오늘날의 파업투쟁은 언제나 군대의 투입, 폭력적 투쟁, 반란적 행동들을 포함하지 않는 것이 드물다. 누군가는 군인들과 싸우고, 다른 누군가는 공장으로 행진한다. 1873년 스페인에서, 알코이의 파업대오는 코뮌을 선포하고 부르주아지에게 사격을 가했다. 1877년 미국의 피츠버그에서, 파업대오는 거의 프랑스만한 영역을 점거하고, 총체적 반란의 전조가 되었다. 아일랜드에서, 농장노동자들의 파업은 국가와의 공개적 대립을 낳았다. 정부의 개입에 힘입어, 한 공장에서의 반란은 국가에 대한 반란이 된다. 오늘날 노동자들은 사격명령을 기다리는 군인들의 사선에 놓여있다. 하지만 파업을 억제하기 위한 군대의 활용은 군대의 사기를 낮출 뿐이다. 결과적으로 군인들은 무기를 내려놓고, 그의 형제들에 대한 싸움을 거부할 것이다.

결과적으로 파업 그 자체가, 일이나 빵이 없는 나날들이, 사치스러운 부르주아지의 거리에서 보내는 날들이 이 사회적 조화의 시대에 어떠한 집회보다도 더 강력한 사회주의적 선전이 될 것이다. 어느 날 오스트리아의 오스트라우에서의 파업대오가 도시의 모든 식량을 요구하고, 사회적 부에 대한 자신의 권리를 요구하는 것이 이 개념의 힘이다.

하지만 우리는 파업투쟁이 자본에 대항하는 전쟁의 유일한 동력이 아님은 명확히 해야 한다. 파업에 있어, 모든 투쟁은 노동자들에게 지워진다. 하지만 다른 집단들과 개인들 역시 수행해야 할 역할이 있다. 그리고 그들이 활동할 수 있는, 효과적일 수 있는 방법은 지역적 상황과 시대적 요구에 따라 달라질 것이다. 그들의 역할을 여기에서 논하는 것은 크게 의미가 없을 것이다. 각각의 그룹들은 적극적이고 효과적이 되기 위하여 노동자 운동의 대의를 강화하기 위한 새롭고 독창적인 방법을 발견할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다음 원칙에 합의하는 것이다.

혁명의 목적은 사회적 부의 수용이어야 한다. 그리고 현재 부를 소유하고 있는 자들과 대적하기 위해 우리는 조직해야 한다. 우리는 이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광대한 노동자의 조직을 만들기 위한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 저항의 조직과 자본에의 전쟁은 노동자 조직의 주된 목적이 되어야 한다. 그리고 그 방법론은 부르주아 정치의 무의미한 투쟁으로 그쳐서는 안 된다. 가능한 모든 수단을 통해 사회적 부를 독점하고 있는 자들에 대항하는 투쟁을 만들어야 한다. 그리고 파업은 훌륭한 조직수단이며, 가장 강력한 투쟁의 무기다.

만약 우리가 다가올 몇 년 내에 이러한 조직을 만들 수 있다면, 다가올 혁명은 실패하지 않을 것이다. 인민의 소중한 피는 무의미하게 흐르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노예와 같은 노동자들은 이 투쟁에서 승리하고 평등, 연대, 노동에 기초한 인간사회의 새 시대를 열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