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드 소냐(NEFAC-보스턴)
아나키즘과 페미니즘의 불완전한 결합
<래디컬 페미니즘 재정의하기>에 대한 답변
Red Sonja
<북동부 아나키스트>4호에 실린 트레이시 해리스의 <래디컬 페미니즘 재정의하기>라는 기사는 혁명적 페미니즘에 관한 토론의 기조발제였다. 나는 이 논쟁을 이어가고자 한다. 해리스의 기사는 이 논쟁에서 다루어야할 세 가지 중요한 측면을 드러낸다. 그 측면은 다음과 같다. 우리는 (1) 가부장제와 래디컬 페미니즘을 혁명적으로 재정의해야 하고, (2) 지배의 형태가 어떻게 연결되어 있는지 드러내야 하며, (3) 실천의 영역에서 래디컬 페미니즘을 재정의해야 한다. 나는 해리스의 주장이 다문화적 자유주의에 불과하고, 계급적 분석이 결여되어있다고 바라본다. 해리스는 혁명적 페미니즘을 백인 우월주의를 공격하는 전략으로(전략이라는 것 부터가 문제적이다) 재정의하고자 한다. 이를 위해 해리스는 압제의 상호연결을 인지하는 분석을 지지한다. 혁명에 있어, 백인 우월주의를 공격하는 것은 분명히 중요한 문제다. 하지만 이것이 여성에 대한 압제와 무슨 상관인가?
혁명적 페미니즘의 힘은 그 이론이 독자적인 분석과, 자체적 요구와, 여성을 착취하는 모든 사회 · 경제 · 문화적 방식에 대한 혹독한 비판을 통해서만 확보할 수 있다. 아나키스트들이 계급체계와 지배에 대해 분명한 비판적 시각을 가지려한다면, 흔히 “삼중 억압”이라 불리는 것을 끝내려 한다면, 이 억압들이 교차하는 지점에 집중하는 것이 가장 혁명적 잠재력이 높다 할 것이다.
<래디컬 페미니즘 재정의하기>는 캐론 패트먼을 빌어 가부장제를 “‘사회계약’에 기반한 권력의 정치적 체계”라 정의한다. 패트만은 이 ‘사회 계약’이 창조되었을 때, 여성의 예속과 남성의 통치가 확립되었다고 말한다. 이것은 논쟁의 여지가 없지만, 가부장제의 기원이 무엇인가는 논의의 핵심이 아니다. 남성에 의한 문명 사회를 만들어낸 것이 부르주아 혁명임은 분명하다. 프랑스 혁명과 미국 혁명에서 여성이 배제된 것은 잘 알려져 있다. 또한 공적 영역과 사적영역의 분할 역시 여성이 복종적 위치에 놓이게 한 것은 맞지만, 이 분할이 패트만이 말하는 바 사회계약의 교섭 과정에서 만들어진 것인지는 불명확하다. 하지만 사회계약의 ‘루소적’ 개념에 의존하여 여성에 대한 세계적 착취 현상을 설명하려 하지는 말자. 세계적이고 단일한 ‘가부장제’가 존재하여 세계적으로 사회 · 경제 · 문화적 관계들에 영향을 준다는 가정 아래에서는 어떠한 것도 할 수 없다. 여성은 단일한 집단이 아니고, 여성의 억압에 대한 우리의 서구적 이해는 세계의 다른 영역에서 살아가는 인민의 삶을 담아낼 수 없다. 하지만 우리는 일반적으로 여성들이 세계 각지에서 가장 낮은 사회적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 것에 대해 큰 그림은 이야기할 수 있고, 페미니스트들은 이 모순과 수십년간 씨름해왔다.
“제2파” 페미니스트들이 ‘가부장제’라는 말을 만들어낸 이후, 페미니즘 운동은 이 단어의 불명확성에 고통받아왔다. 가부장제를 분쇄하고자 하는 혁명주의자들이 그 운동을 조직하는 것은 더욱 불가능했다. 얼마 전 혁명적 아나키스트들은 가부장제라는 주제를 놓고 이틀간의 컨퍼런스를 개최했다. 하지만 이 컨퍼런스에서 아나키스트들은 “가부장제”에 대해 무엇을 해야할 지에 대한 결론을 내릴 수 없었다. 그들은 가부장제라는 단어를 무엇이 여성을 억압하고 있는지를 설명하는 유용한 단어로 연마하고자 하는 노력하였지만, 그 정의에 대해서도 의견이 갈라졌다. 가부장제를 “형제애적 지배”라 정의하는 사람도(패트만 등), “자본주의적 가부장제”라 바라보는 사람도(마리아 미스), 벨 훅스처럼 “백인우월주의적, 자본주의적, 가부장적 사회체제”라 바라보는 사람도, 셰일라 로보텀처럼 가부장제라는 단어 자체를 잘못된 것이라 부정하는 사람도 있었다. 나는 “가부장제”라는 단어가 부족하고 부정확하기는 하지만,(가부장제는 문자적으로 “아버지에 의한 지배”를 뜻하기 때문에) 어쨋건 역사적 틀을 가진 지속성을 드러내며, 다행스럽게도 보편적 상수가 아니다. 그리고 “가부장제”라는 단어는 페미니스트들에 의해 여성의 지위를 묘사하는 도구로 여겨져왔고, 그렇게 하기에는 충분히 유용한 단어다.
<래디컬 페미니즘 재정의하기>는 분명히 가부장제를 납득이 가는 방식으로 정의하는 데에 있어 유의미한 진전이다. 하지만 나는 이 논쟁을 혁명적 아나키즘의 방향으로 끌어가고자 한다. 그 이름에 곡겪는 것을 피하면서, 아나키스트들이 이해하지 못하는 페미니즘의 내적 특수성을 명확히 하는 것 역시 중요하다. 우리는 “래디컬 페미니즘”의, 아나키즘적 페미니즘이나 사회주의적 페미니즘과는 분명히 다른 독자적 역사를 이해하지 않고 그것을 재정의할 수 없다.
대부분의 페미니즘 문건들은 사회에서 여성의 입지에 관해 상당히 다른 관점을 제시한다. 보수적 페미니즘은 성에 따른 노동의 분할은 자연스러운 것이며 여성의 예속적 역할이 “생물학적 운명”이라 바라본다. 자유주의적 페미니즘은 현 체제 안에서, 혹은 현 “사회계약” 안에서 남녀의 평등한 입지를 추구한다. 전통적 마르크스주의 페미니즘은 사적 영역에서의 여성 착취를 무시하며, 궁극적으로 가부장제의 존재를 부정한다. 래디컬 페미니즘은 전통적 마르크스주의나 사회주의의 여성주의적 관점 부족에 대응하여, 자유주의적 페미니즘의 개량주의에 대응하여 등장했다. 래디컬 페미니스트들은 가부장제가 가장 중요한 압제라 바라보고, 젠더와 섹슈얼리티가 문화적으로 건설된 사회적 구조라는 비판적 관점을 최초로 제시했다. 이들은 마르크스주의자들과 달리 계급사회가 철폐된다해도 여성에 대한 압제는 남아있을 것이라 믿는다. 하지만 래디컬 페미니스트들은 계급적 분석이 결여되어 있다. 이들은 인종, 계급, 민족 등을 불문하고 모든 여성이 동일한 압제를 겪는다 말한다. 또한 우리는 아나키스트로써 래디컬 페미니즘이 국가에 대한 비판이 결여되어있다 문제제기할 수밖에 없다. 일부 래디컬 페미니스트들은 여성만으로 이루어진 정부가 사회의 만병통치약이 될 것이라 제안한다. 또한 이들의 이데올로기는 생물학적 결정론에 입각하여 여성이 본디 남성보다 우월하다 바라보기도 한다. 만약 우리가 정말로 래디컬(급진적) 페미니즘을 재정의하고 싶다면, 우리는 이 단어를 사용하지 말아야 한다. “혁명적 페미니즘”이라는 단어가 더 적합할 것이다.
사회주의적 페미니즘은 래디컬 페미니즘과 여성착취에 대한 계급적 분석을 묶어내려 한다. 이들은 계급질서(자본주의)와 가부장제가 모두 철폐되어야 여성이 비로소 자유로워질 것이라 주장한다. 아나키즘적 페미니즘은, 그 대오가 아주 작기는 하지만, 사회주의적 페미니즘과 유사한 관점을 가진다. 하지만 이들은 사회주의적 관점에 더하여 위계와 권위의 총합인 국가를 여성 억압의 세 번째 열이라 바라본다. 우리는 가부장제, 자본주의, 국가가 상호작용함으로써 우리가 철폐하고자 하는 억압들을 만들어내는 정확한 과정을 확인할 필요가 있다. 아나키즘적 페미니즘은 넓은 의미로 모든 형태의 지배에 대한 비판이다. 이는 “다문화적 페미니즘”의 분석과 유사하지만 더 반자본주의적이며 반국가주의적이다. 이렇게 본다면, <래디컬 페미니즘 재정의하기>는 이미 아나키스트들이 가지고 있는 입장을 다시 강조한 것이다. 혁명적 실천은 “지배의 근절에 집약되어야 한다”는 것 말이다.
여러 형태의 지배가 서로 연결되어 있다는 분명한 증거는, 해리스의 에세이에서 벨 훅스, 안젤라 데이비스, 급진적 젠더폐지론자인 안젤리나 그림케를 인용하고 미국의 역사적 예시를 제시한 부분에서 잘 드러난다. 아나키스트들은 간헐적으로 인종, 계급, 성별이라는 “삼중 억압”에 대한 우리의 비판점을 제시하고자 노력해왔다. 이를 위해 우리는 “모든 형태의” 지배에 대한 전반적 비판을, 특히 자본주의와 국가를 노골적인 비판을 진행했다. 우리의 논쟁은 “래디컬 페미니즘 운동”을 향한 것이 아니라, 이 문제들을 극복하는 과정에서 아나키즘 운동이 그 실천의 방법론을 갱신해오지 못한 것에 대한 것이 되어야 한다.
<래디컬 페미니즘 재정의하기>는 이 관점을 견지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전략적 출발점으로 백인 우월주의를 꺼내면서 “억압의 위계”를 발굴해내 버린다. 삼중억압이 있는 것은 분명하고, 우리는 가부장제나 백인 우월주의를 단순한 모순이나 계급분석의 후순위로 둘 수 없다. 가부장제나 백인 우월주의는 “자본의 분할 책동”으로 기능하지만, 그렇다고 자본에 온전히 의존적인 것은 아니다. 백인우월주의, 식민주의, 인종주의가 여성에 대한 압제에 있어 부차적인 것은 아니다. 우리는 백인 좌파들이 가지고 있는 이 끔찍한 생각에 지속적으로 도전하고, 파멸을 향해 달려가는 혁명적 분석에서 오류를 제거해야 한다. 하지만 압제를 바라보는 데에 있어 계급적 시각을 포기하는 것은, 우리가 보기에 그저 다문화적 자유주의를 모방하는 것에 불과하다. 벨 훅스가 말한 것처럼 “계급에 근거한 분석은 내가 작업을 시작하는 지점이다.”
<래디컬 페미니즘 재정의하기>에서 상당히 가치가 있는 부분은 그 문건이 북아메리카에만 집중했다는 것이다. 이러한 분석 방법론은 흔한 것은 아니지만, 북아메리카의 사회적 조건은 독특한 것이고, 그곳에서 혁명을 준비하는 데 있어 유럽이나 제3세계의 예시를 드는 것은 도움이 되지 않는다. 해리스의 인종 분석과 백인 우월주의에 대한 투쟁을 혁명의 기폭제로 사용하자는 분석은 이 입장에 기인하고, 그렇기에 훌륭한 출발점이 된다. 일부 백인 아나키스트들과 백인 좌파들은 흑/백 문제가 노력 없이 스스로 풀릴 것을 기도한다. 미국에서의 혁명적 투쟁은 진정한 연대와 원칙적 동맹, 확고한 장기적 작업을 필요로 하고, 백인 혁명가들과 백인 아나키스트들이 이 분할을 극복할 필요가 있다. 이는 백인 혁명적 페미니스트들에게도 마찬가지이며, 이것이야말로 해리스가 중점을 두고 있는 부분이다. 하지만 해리스는 그 와중에도 혁명적 페미니즘을 백인 우월주의를 공격하는 협소한 “전략”으로 재정의한다. 물론 백인 우월주의에 대한 공격이 페미니스트 의제의 부분이고 한 구획을 차지할 필요성이 있는 것은 분명하다. 하지만 혁명적 페미니즘의 모든 영역을 백인 우월주의에 대한 것으로 재정의하는 것은 사회에서 여성에 대한 억압이 어떻게 기능하는지를 분석하고, 무엇보다 그것을 어떻게 극복할지에 대한 유의미한 토론을 불러일으키지 못한다. 혁명은 하나의 압제에 집중하는 것만으로 이루어질 수 없다. 그리고 ‘진정한’ 급진적 페미니즘이 말해야 하는 것은 이와 같다. 혁명의 출발점은 여러 가지가 있고, 혁명적 페미니스트들이 역사로부터 배운 것은, 여성 착취의 문제가 이 중 가장 먼저 해태된다는 것이다.
혁명적 페미니즘과 이로부터 아나키스트들이 배울 수 있는 교훈을 재점검하는 시도에서, 가장 필요하다 말할 수 있는 것은 계급적 분석을 유지하는 것이다. 해리스는 “페미니즘은 더 이상 라이프스타일로써의 선택이 될 수 없고, 정치적 책무로 받아들여져야 한다. 이 정치적 책무에 집중하고, 억압에 대한 저항에 집중하는 것이 우리에게 혁명적 실천이 되고, 페미니즘에 대한 협소하고 진부한 관점의 나락을 피할 수 있게 할 것”이라 말한다. <래디컬 페미니즘 재정의하기>는 페미니즘을 그 라이프스타일에 대한 틀로부터 건져내고자 한다. 하지만 교육, 언어, (자유주의적 반인종주의의 고통의 원인이 되고 있는)심리학과 같은 문화적 맥락에 천착한 서구 페미니즘은, 어떠한 문화적 진보보다 더 핵심적일 경제적 생산관계에 대한 이해를 결여하고 있다. 그렇다고 해서 페미니즘의 목적을 여성에 대해 가해지는 억압에 대한 분석과 무관한 영역까지 확장시키는 방식으로는 페미니즘을 그 틀로부터 건져낼 수 없다. 페미니스트 운동의 강점은, 최소한 혁명적 페미니즘의 강점은, 그 자기 주도성으로부터 나와야 한다. 우리가 서구 페미니즘의 역사로부터 배울 수 있는 교훈은 다음과 같다. 남성은, 우리의 동지들이라 할지라도, 우리가 예의바르게 요청한다고 해서 우리에게 존엄과 자유를 쥐어주지 않는다. 그 목적을 더 큰 대의에 포괄시키는 여성운동은 계급투쟁, 반식민투쟁, 민족투쟁의 통일전선 속에서 배신당할 것이다. 알제리, 쿠바, 베트남, 중국, 소련에서 진행된 반식민주의적이고 혁명적이었던 투쟁들을 보라. 반식민투쟁이나 혁명이 성공한 경우라 하더라도, 그 투쟁들이 여성의 투쟁으로부터 무엇을 얻었건 간에, 여성은 방편적으로 경제를 재편할 필요성을 들어 “부차적” 영역에서 착취당하거나, “가족으로 돌려보내졌다.”
물질적 생산관계에 구체적 변혁이 없는 한, 성별 간 관계에 대한 의식수준이 아무리 높아지더라도, 그 의식수준은 경제적 현실의 무게를 견디지 못한다. “생산”이라는 단어가 불쾌하다면, 이를 사적영역, 즉 가족 안에서 여성에 의해 이루어지는 노동을 포함하는 것으로, 로보텀이 말하는 바 “섹슈얼리티를 통한 자기 재생산”을 포괄하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문화적, 사회적 의식화와 공적 영역과 사적 영역에 관한 사회적 분할과 노동에 있어서의 성별분할에 대한 공격이 동시에 이루어질 때에야 여성에게 무언가를 쥐어주는 혁명적 변혁이 가능할 것이다.
나는 구체적 행동의 방법론으로 “삼중억압”이 교차하는 지점에 대해 집중하여 이 교차점을 드러내는 방식을 대안으로 제시한다. 반빈곤운동의 영역은 성적 억압과 인종적 억압이 주거, 노동, 복지의 문제에 모두 얽혀있는 좋은 예시가 될 것이다. 여성 복지에 있어 최근 입법된 결혼 장려금법, 공공주택 사업에서 미혼 여성을 제약하는 법규는 모두 가장 끔찍하고 가장 인종차별적인 방식으로 가부장제를 드러내고 있다. 왜 수감자 중 흑인이거나 히스패닉이고 가난한 소녀들이 그토록 빠르게 늘어나는지를 바라보아도 유의미할 것이다. 이것이 21세기를 위한 혁명적이고 페미니스트적인 전략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