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itle: 성 자유
Subtitle: 왜 그것을 두려워하는가
Date: 1962년

성 자유를 신념하고, 진지하게 대변하며 실행하는 자들은 언제나 소수였다. 모든 문명사회의 남성과 여성 다수에 대해 적용 가능한 하나의 일반화가 있다면, 그것은 그들이 다른 무엇보다, 심지어 죽음보다 성 자유를 더 두려워한다는 것이다. 이것은 인간 본성에 관한 중대한 미스터리라 할 수 있다. 더 적확하게는, 이 영역은 프로이드와 라이히부터 마르쿠제와 브라운까지의 심리학자들이 가장 진지하고 깊게 탐구해온 영역이기도 하다.

서머힐 학교의 창립자인 A. S.닐은 어느 문명사회에서 남성이 두려움이나 처벌에 대한 걱정 없이 동성애를 행할 수 있는지 질문 받은 적이 있다. 닐은 그러한 장소는 없다고 말했다. 이에 더하여 닐은 남성이 처벌에 대한 걱정 없이 이성애를 행할 수 있는 장소도 알지 못한다고 말했다. 알버트 엘리스 박사에 따르면, 동성애자들은 그들이 반-동성애적 문화에서 살기에 고통 받는다고 생각하지만, 사실 우리가 반-성애적 문화에 살기 때문에 모두 고통 받는다는 것이다.

현대의 심리학을 제쳐놓고, 직관적이고 단순하게 바라보자. 왜 “서민”들이 성 자유를 두려워하는가? 그들은 어떠한 비합리적인 터부에 복종하고, 타인에게 부과하려 하는가? 그들은 뻔한 말로 대답할 것이다. 서민들은 “성 자유는 아나키와 질서의 붕괴를 낳을 것”이라고 말한다.

이 뻔한 말을 뻔하게 부정하게 전에, 잠시만 생각을 돌려보자. 현대 아나키즘을 건설한 미하일 바쿠닌은 『신과 국가』에서 “신”이 없이 국가는 불가능하다고 서술한 바 있다. 그는 프랑스 공화국과 미국을 예로 들었다. 이 두 국가는 모두 자유사상가와 무신론자에 의해 건국되었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통치의 실질적 문제를 맞닥트리면서 “신”이라는 관념을 빠르게 받아들였다. 빌헬름 라이히의 『성 혁명』과 『파시즘의 대중심리』는 국가주의와 권위주의는 일반적으로 교조주의와 섹스에 대한 공포와 융합함을 드러낸다. 반면 반국가주의와 자유의지주의적 태도는 일반적으로 자유사상과 친 섹스적 태도를 가진다. 아도르노의 걸작 『권위주의적 성격』은 라이히의 명제에 대한 통계적 증거를 제시한다. 통치자는, 그의 신민들이 미신적이고 종교적이며 섹스를 두려워할 때 더 쉽게 복종을 강요할 수 있다.

그 이유는 이해하기 쉽다. 섹스에 대한 부정은 거의 불가능한 일이다. 그리고 예수회가 프로이트보다 더 전에 알아차린 것처럼, 금욕주의자가 스스로의 육신을 “정복”했다고 생각하는 그 순간에도, 욕망은 다른 방향에서 그의 안에 침투하여 그를 장악한다. 그렇기에 성 부정의 필연적 결과는 죄악감이다. “선하다”고 믿는 것을 행하지 못하는 것으로부터 오는 특별한 죄악감이다. (중세의 수도승들은 이 행하지 못함은 “영혼의 어두운 밤”이라 칭하곤 했다.) 그리고 죄악감에 휘말린 인간은 조종하고 강제하기 쉽다. 자존감이야말로 자주성과 반란의 전제조건이지만, 죄악감에 휘말린 인간은 자존감을 가질 수 없기 때문이다. 현대의 광고는 마치 보석을 감싸고 있는 자물쇠마냥 이 사실을 감싸고돈다. “B.O."광고나 ”44킬로그램짜리 약골“ 광고부터 당신을 ”전부 깨끗하게“ 만들어 줄 비누 광고까지, 광고들은 자기 의심과 죄악감을 함축하고 있다. 그리고 이 죄악감은 광고주의 만병통치약을 통해 치료될 수 있을 것이다. 비록 그 죄악감을 만들어낸 것도 광고주와 광고대행사지만 말이다.

무엇보다, “통치(정부)”란 무엇인가? 통치란 A를 B가 통제하는 것이다. 다르게 말하자면, 한 인간의 의지가 다른 인간의 의지에 대하여 부차화되는 것이다. 우리는 통치되지 않는 사회는 불가능하며, 이 의지의 부차화는 필요불가결하며 불가변적이라고 배워왔다. 그리고 우리는 이를 수인해왔다. 하지만 인류학은 다른 이야기를 한다. 인류학자 케슬린 고프는 “사회적 형태로써의 국가는 인류사의 200분의 1 정도의 기간에만 존속했다… 아마도 국가는 인간 사회의 형태 중 가장 짧은 기간만 존재한 것일지도 모른다.”[1] 우리가 아나키라 부르는 것, 이를테면 자발적 연합이 나머지 200분의 199를 차지한다. 그렇기에 래트레이 테일러가 『역사에서의 성Sex in history』에서 적은 바, 이 국가 전 단계의 사회는 성적으로 억압되지 않았고, 성 자유를 두려워하지 않았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니다.

인간의 강요된 순종, 즉 국가의 의지에 대한 사회적 예속은 총체적 스트레스로 이어진다. 현대 정신병리학은 모든 생명(원형질)은 겔(총 확산)과 솔(총 수축) 사이의 전기-규소적 평형을 포함하고 있음을 분명히 한다. 그리고 달팽이나 거북이에게서, 공포에 움츠리는 인간 유아에게서 가시적으로 드러나는 것처럼, 스트레스는 수축을 유발한다. 이 물리적 신체의 수축은 우리가 “불안”이라 부르는 것이다. 수축이 만성적이 되면, 그것은 근육에 영향을 주어 “등이 굽은” 모양을 만들어낸다. (배우들이 겁먹고 몰락한 인간을 표현할 때 이러한 모양을 이용한다.) 이 “패배의 자세”는 모든 국가에 의해 지배되는 상황에서 드러난다. 반면 폴리네시아나 아메리카 원주민들(식민시대 전)처럼 국가가 존재하지 않는 경우, 두드러지게 적게 드러난다.

하지만 물리적인 “움츠러든 공감각”의 순종적 측면인 “만성불안”은 방어적 태도와 통제의 철학을 낳는다. 그리고 통치(정부)는 이 통제의 충동을 가장 세련된 방식으로 활용하는 것이며, 전쟁이야말로 가장 잔혹하고 궁극적인 통제의 형태가 된다. 어떠한 정부도 그 신민들을 전쟁에 몰아넣지 않고 한 세대 이상을 유지하지 못했다. 평화주의자인 간디에 의해 세워진 정부조차, 그의 죽음 이래 8차례의 전쟁을 치렀다. 오래 지속되는 정부의 경우, 평균 1세기에 4회의 전쟁을 치렀다.

아무 농부나 붙잡고 물어보라. 거세마는 종마보다 통제하기 쉽다. 노예국가였던 최초의 정부는 이를 위해 성 억압을 창조했다. 노예들에게 죄악감과 자괴감을 심어주어 위압하기 쉽게 만듦과 동시에, 성 억압은 근육의 수축 그 자체가 된다. 그로덱이 『그것에 관한 책The Book of the It』에서 보여주었듯, 인간은 복근을 수축하지 않고는 의식에서 욕망을 제거할 수 없다. 닐이 말하는 것처럼 성 억압은 “심각한 복통”이다. 성기가 그 활발한 활동을 멈추게 하는 유일한 길은 그것을 복부의 장갑으로 활동을 죽이는 것뿐이기 때문이다. 빌헬름 라이히는 이것의 궁극적 함의를 잘 보여준다. 라이히는 “문명화된” 인간의 성질이라 할 수 있는 만성적 근육 수축은 물리적 고통과 정신적 불안의 과정이라 지적한다. 이를 통해 우리는 사회적 행동의 두 가지 거대한 미스터리를 이해할 수 있다. 왜 성 억압이 받아들여졌는지, 그리고 왜 정부가 받아들여지는지 말이다. 전자는 기쁨을 없애고, 후자는 종의 파괴를 가져온다. 복종은 몸에 각인된다. 유아기, 아동기, 청소년기를 거쳐 계속되는 반성애적 교육은 근육의 긴장상태를 만들어 반란시도를 고통스럽게 만든다. 이것이야말로 동성애자들과 성해방적 이성애자들이 두드러지게 “신경질적”인 이유다. 이들은 사회적 비난과 동시에 그들의 근육이 예속과 복종을 강요하는 “비난” 역시 감내해야 한다.

프로이트의 비관론은 내가 물리적으로 묘사한 과정에 대한 심리학적 이해로부터 비롯한다. 프로이트는 “인간은 스스로의 수인(囚人)이다”라는 우울한 결론을 최종적으로 도출한다. 하지만 근래의 사상가들은 이와는 다소 다른 결론을 내린다. 라이히의 『성 혁명』, 브라운의 『죽음에 맞선 삶』, 마르쿠제의 『에로스와 문명』은 모두 “억압 없는 문명”을 꿈꾼다. 그리고 이 세 책 모두 그 문명은 국가가 없는 문명이어야 함을 인지한다.

망쿠스 콜로라도의 살해와 코키셰(Cochise)의 배신이 발발하기 전까지, 아파치부족의 사회는 이러한 자유로운 문화의 예시를 보여준다. 결혼 전까지 모든 부족원은 성적으로 자유로웠고 원하는 만큼 즐길 수 있었다. (이혼한 이후에도 동일한 수준의 자유가 부여되었다.) 그리고 만약 부족장이 원하는 바에 동의하지 않는 부족원이 있다면, 그는 다른 아파치 부족에 가입하거나 그의 동지들과 함께 새로운 부족을 시작할 수 있었다. (코키셰가 미국 정부와 협정을 맺었을 때 제로니모가 한 것이 이것이다.) 이로써 아파치 부족은 아나키스트들이 자유 연합이라고 부르는 형태로 묶였으며 어떠한 권위주의적 국가 체계도 갖추지 않았다.

기술적으로 더욱 진보한 사회에서도 동일한 원칙은 적용될 수 있다. 프루동의 유명한 아나키즘에 관한 공식인 “국가를 경제기구로 격하하는 것”은 기본적으로 자발적인 계약에 따른 조직으로 비자발적이고 압제적인 국가권위를 대체하는 것이다. 이러한 체계에서, 개인이 어떠한 자발적 연합에 가입하건 간에 그것은 본인의 자유의지의 표현이 된다. (자유의지에 반한다면, 가입을 하지 않을 것이다.) 이러한 비 국가 문명은 비 국가 모임, 부족, 씨족들과 마찬가지로 성적으로 자유로울 것이다. 성적 억압은 어떠한 사회적 기능도 가지지 못할 것이다. 죄책감과 복종을 창조할 이유가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사회상은 “유토피아적”으로 보일지 모르겠지만 그렇지 않다. 그리고 노먼 브라운이 말한 것처럼 인류의 생존 자체가 “유토피아적 망상”이 되어버린 현대사회에서 “유토피아주의”는 비난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노버트 웰너가 예측하고, 케이틀린 고프와 알리 마르쿠제가 기뻐하면서도 두려워한 것처럼, 자동화는 노동의 필요성이 거의 없는 풍요의 사회를 가능하게 했다. 현대 과학의 두 위대한 성취, 즉 원자력과 자동화는 전통적 인간상을 그 종언으로 몰아붙이고 있다. 만약 우리가 개인으로써 살아남을 수 있다면, 우리의 문화는 살아남을 수 없다. 인간 대중이 더 이상 “피땀 어린 노동으로” 생존해야할 필요가 없다면, 사회적 억압의 주된 지지대는 무너져 내린다. 물론 대규모 실업과 거대한 굶주림은 과거에도 발생했고, 그럼에도 지배계급은 여전히 지배계급으로 남을 수 있던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우리가 지금 바라보고 있는 대규모 실업은 이전의 “공황”에 따른 실업을 아득히 초월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에 대한 희망도 구원도 없다. 새로운 일자리는 생기지 않을 것이다. 물론 지배계급은 이로 인한 굶주림이 역사적 수준에 이르도록 내버려 둘 것이다. 그리고 물론 근육적으로 억압된 대중은, 복종과 자기부정으로 조건 지어진 대중은, 일부 반란분자를 제외하고는, 언제나 그러했던 것처럼 이를 수인할 것이다. 하지만 언젠가는, 아마도 식인이 시작될 즈음에는, 억압에 근거한 문화의 체계는 붕괴할 것이다. 그리고 험프티 덤프티가 그러한 것처럼, 누구도 그것을 다시 세우지 못할 것이다. 지금 살아있는 자들은 이것을 볼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미래(그런 것이 있다면)의 억압되지 않은 인간들은 우리의 시대를 돌아보고 우리가 어떻게 정신병원에 가지 않고 살아남았는지 놀랄 것이다. 그리고 정신병원에 가게 된 사람들이 이 억압의 문명의 자연스러운 귀결로 여겨질 것이다.


[1] The Decline of the State, by Kathleen Gough. Correspondence Publishing Company. 196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