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itle: 국가도 시장도 답이 아니다
Subtitle: 사회복지에 관한 아나키스트적 관점
Date: 1997
Source: From Chapter 3 of Twenty-First Century Anarchism: Unorthodox Ideas for a New Millennium (edited by Jon Purkis and James Bowen)

개론

1장에서 나는 영국에서 복지국가 개념의 발전을 요약하고, 그 발전 도상에 사회적 통제가 중요한 동인이었음을 강조할 것이다. 그리고 나는 국가가 복지에 개입함으로써 누가 이득을 보는 것인지를 실증할 것이다. 나는 복지가 권력기구로만 취급될 수 있음을 제안하고, 국가로부터 분리된 참여적 대안의 당위성 뿐 아니라, 이러한 대안이 국가가 없는 사회의 창조가 시작될 수 있음을 보일 것이다.

인용

국가가 사회의 모든 기능을 흡수하는 것은, 걷잡을 수 없고 편협한 개인주의를 필연적으로 옹호한다. 시민들 중 국가에 대한 의무를 지는 사람이 늘어날수록, 그들은 자연스럽게 서로에 대한 책임으로부터 벗어나게 한다.

페트르 크로포트킨, <상호부조>

영속적으로 계속 성장하는 무자비한 정치적 관료제 권력이 인간의 삶을 요람에서 무덤까지 감시하고, 보호한다. 그리고 인간의 연대적 협동의 앞길에 커다란 장애물을 두고 새로운 발전의 가능성을 전부 배제한다.

루돌프 로커, <아나키즘적 조합주의 : 이론과 실천>

서문

20세기는 국가개입주의의 시대였다. 그리고 그 시대는 감시와 규제를 통해 인민 생활의 많은 측면에 영향을 주는 시대다. 이 침범의 상당부분은, 인민들이 다른 대안은 더 끔찍할 거라 믿었기에 정당화된다. 인민들은 국가가 많은 측면에서 이득이 된다 믿는다. 특히 국가주도복지에 있어서 그러했다. 그리고 이러한 복지국가의 상은 전후 사회민주주의적 합의에 의한 성취로 떠받들어졌다. 복지국가의 다양한 기둥들이 세워졌을 때, 그 동인은 뚜렷한 하나만이 있는 것은 아니었지만 그 ‘진보적’ 성격이라는 것, 즉 사회적 응집력을 신장하고, 자본주의의 가장 끔찍한 불평등을 상쇄한다는 것은 타우니, 티트머스, 크로스랜드의 레토릭의 일부였다. 이들은 국가를 사회정의 신장의 수단으로 보았고, 복지국가가 영국을 사회주의 도상에 올려둔다고 보았다. 모든 사람들이 좌파의 더 급진적인 관점을 공유한 것은 아니었기에, 복지국가는 언제나 유의미한 지지를 받아왔다. 많은 사람들은 사회서비스에 대한 공적 지출은 복지에 있어서 일정부분 평등을 건설했다고 믿는다. 복지국가에 대한 의구심은 주로 우파로부터 제기되었다. 이들은 공적 지출을 줄이고 부자들이 자기 돈을 마음대로 쓸 수 있는 능력을 증대시키고자 했다. 하지만, 더 자세히 들여다보면, 복지국가는 처음에 바라보았던 것 보다 평등, 권한, 사회정의를 덜 제공한다. 국가주도복지는 권력을 가진 자의 성공적인 사회통제 수단으로써, 평등과 정의의 실현에는 거의 기여하지 않는다.

역사와 기원

복지국가의 근간

오늘날의 복지국가는 300년 전(15세기 말~16세기)에 민족국가의 발흥과 확립 이후 사회 통제를 목적으로 이루어진 입법에 근간하고 있다. 중세 상호부조적 공동체의 붕괴와 급격한 인구증가는 16-17세기에 갓 등장한 정부들에게 새롭고 두려운 문제가 되었다. 거지와 부랑자들의 수가 늘어나면서, 사회적 불안에 대한 우려가 도덕적 의무감과 결합하여 방임주의를 진압했다. 일반적으로 2차대전의 집단경험에서 발흥했다 여겨지는 복지국가에 대한 논의를 300년 전에서부터 시작하는 것이 이상해보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영국에는 복지에 대한 국가개입의 긴 역사가 있다. 그 시작은 1572년의 구빈법에서 시작한다 하겠다. 튜더 왕조시기부터 시작된 영국의 국가 복지 정책에 대해 한 작가는 ‘1700년 영국을 복지국가라 부르는 것은 전혀 시대적 오기가 아닐 것이다.’라 결론지은 바 있다.

초기 구빈법의 입법은 지역 교구들이 빈자를 구원하기 위해 수입을 늘릴 권리를 주었다. 그와 동시에 구걸을 금지하고, 부랑에 대한 처벌을 명문화했다. 이에 더하여 구빈원의 건립이 시작되었다. 1610년, 구빈원의 설립이 ‘도적과 무법자와 게으를 거지들과 다른 게으르고 무질서한 자들을 수감하고, 교정하며, 일하도록 만들기 위’한 목적으로 의무화된 이후 그 수는 더 늘어났다. 16세기 후반, 의회는 지도층의 행동에 대해 관대한 입장을 취하기 시작했다. 이를테면 의회는 대금업을 합법화하고, ‘하위 질서’의 예의와 사회적 행동을 규율하는 법령들을 통과시켰다. 입법자들이 도덕과 공공질서에 목적을 두고 있었다는 것은 명확해졌다. ‘이 모든 것은 구빈법이 경제적 조정자가 아니라 도덕적, 사회적, 정치적 조정자로 설계되었음을 보여준다.’

그리고 이 때 비로소 자신의 잘못이 없어도 일자리를 찾지 못하는 당당한, 혹은 노동하는 빈민과 나태하거나 위험한 빈민 사이의 차이가 생겨났다. 후자에 대한 집착은 간간히 부랑자들이 안정과 질서를 해할 것이라는 위협에 대한 신경질적 두려움으로 드러났다. 이 두려움은 부랑자들이 실제로 가져오는 반란의 위협보다는, 사회적 낙인과 부랑자들의 경범죄에서 비롯되었다. 사회적 분할은 ‘납세자’와 ‘수혜자’라는 범주를 낳은 지역 예산으로 인해 더 격화되었다. 이 두 집단 사이의 경계선은 유동적이어서, 경제적 상황에 따라 언제라도 ‘납세자’들이 쉽게 ‘수혜자’가 되는 상황이었는데도 말이다.

현대 복지국가의 발전

튜더와 스튜어드 왕조의 구빈법은 소규모 농촌 공동체에는 알맞았다. 그리고 산업혁명의 발흥과 농촌 공동체의 전통적 구조를 파괴한 도시 프롤레타리아트의 등장 전까지 빈민구제의 기반이 되었다. 1832년의 개혁법에 따라 권력을 쥔 산업자본가와 기업가 계급은 통제 가능한 인적 자원 풀을 요구했다. 그들에게 ‘지역교구의 빈민구제에 근거한 구체제는 노동자를 과잉보호하고, 납세자의 소중한 자원으로 노동대중에게 경쟁의 바람을 피할 방도를 제공하는 것’이었다.

1831년의 구빈법 개정안은 그 악명높은 구빈원을 중심으로, 더 공공연히 가혹한 체제를 만들었다. 하지만 산업도시의 급격한 확대는 공중보건의 위험과 범죄율의 급증을 가져왔고, 이는 1848년의 공중보건법, 1856년의 경찰법, 그리고 보건, 교육, 고용 부문에서 그 어느 때보다 활발한 복지 입법을 불러왔다.

1890년대에는 이전의 입법적 조건, 노동자 계급조직의 압력과 국가적 퇴보에 대한 공포가 결합하여 다양한 정부 행동에 대한 요구로 드러났다. 비스마르크는 복지 개혁을 통해 노동계급 운동을 자본주의 체계 안으로 혼합할 가능성을 보여주었다. 하지만 보어전쟁 징집병들이 보여준 끔찍한 위생상태와 독일과 미국과의 경제적 경쟁에서의 패배가 초래한 세기말적인 불확실성은 부패한 사회 체계에 대한 개혁 요구를 촉발했다.

이와 같은 국가적 개입에 대한 요구는 20세기 초의 자유주의 정부들이 산재보상, 국가 교육과 급식, 노령연금, 아동노동제한, 건강보험과 실업보험 등 사회 복지의 다양한 측면을 포괄하는 법령들을 통과시키게 하였다. 이러한 개혁 확대를 통해 영국은 1911년에 이르러 초기 국가 복지 체계를 갖추게 되었다. 이러한 체계를 만든 이유는 불명확하다. 하지만 이것이 과거에 이야기된 바 자선활동과는 크게 관계가 없음은 분명했다. 현대의 연구는 다음과 같이 이야기한다.

“내외부적 압력이 증가하는 상황에서 현존하는 자본주의 경제체계를 최대한 유지하고자하는 열망이야말로 자유주의 개혁의 근원적이고 가장 중요한 동기였던 것으로 보인다.”

자본주의의 성질 변화에 적응함에 있어, 국가적 개입의 지속적이고 양질적인 증가에 적응함에 있어, 19세기 말과 20세기 초의 정부들은 중앙집권에 반대하고 질서를 거부한다 여긴 기구들에 대한 공격을 시작했다. 교육위원회는 철폐되었고, 지역교육청으로 대체되었다. 보다 자유주의적이고 인본주의적인 체제를 가지고 있던 지방자치는 중앙정부로 대체되었다. 2차 세계대전 전까지 자유주의적 개혁은 국가주도 복지의 핵심으로 남아있었다. 2차 세계대전기에는, 공공 생활의 모든 영역이 국가의 통제 아래로 들어갔다. 이처럼 높은 수위로 진행된 중앙의 통제와 전후 노동당 정부들의 성립은 복지국가가 다음 단계로 진화하게끔 하였다.

전후 복지국가

우리가 지금 아는 것과 같은 복지국가가 좌파의 비호 아래 성립한 것은 우연이 아니다. 사회주의 운동에는 국가를 지향하거나, 국가를 거부하는 두 가지 조류가 있었다. 하지만 이 중 권력을 잡은 것은 페이비언협회와 사민주의자들의 국가주의였다. ‘사민주의 개량주의자들과 혁명적 사회주의자들은 시장의 아나키를 관료적 합리성으로 대체하고자 했다.’ 사회주의는 사회 경영과 연관되기 시작했고, 자주경영을 향한 투쟁은 지엽적인 것이 되어갔다. 사회주의적 신념은 국가적 자원의 합리적 관리와 이를 위한 산업의 대규모 국유화 전술에 관한 것이 되었고, 영국 좌파의 핵심적 이념이 되었으며, 강한 중앙정부의 정치적 통제의 필요성에 관한 믿음이 되었다. 2차 세계대전 중만해도 노동운동의 서로 다른 조류들은 서로 갈등하고 있었지만, 1차 대전 전기에 존재하던 조합주의 등 반국가 조류는 1940년대에 그 힘을 소진했다. 1945년에는, 노동자의 주된 의제는 페이비언 사회주의였다. 이것은 과학적, 경제적, 기술적, 정치적 전문가들의 승리를 알리는 신호였다. 전쟁 중의 기술적 진보와 비상시국에서 강화된 관료구조는 그 이전에는 꿈도 꾸지 못했던 단계의 정도의 사회 통제가 가능하게끔하였다. 케인즈주의적 수요관리는 경제를 통제할 수단을 제공한 것처럼 보였고, 사회주의자들에게는 그것이 자본가들을 저지하는 수단으로 보였다. 앤서니 크로스랜드에 따르면, 국가는 더 이상 단순한 자본가의 집행위원회라 볼 수 없으며, 이제는 (사회적) 국가로써 스스로의 방침을 결정하고 있다고 말한다. 전후 호황과 개입주의적 미국을 등에 업고 사회자본주의의 가능성은 모두에게 소비를 지지하는 복지 시스템을 위해 수요를 신장하는 소비사회를 제공해주었다. “복지국가는 자본주의의 재생의 전제조건이었다. 복지국가 안에서 자본주의는 새롭고 유익한 모습으로 보일 수 있었다. 자본주의는 더 이상 업격한 관리자가 아니라 모든 좋은 것의 제공자로 보였다..”

필요충족자로써 국가의 역할이 증대하면서 복지는 모든 것을 망라하게 되었다. 여전히 복지는 위로부터 집행되는 것이었고, 복지국가는 업격한 하향식 구조였다. 하지만 심지어 노동계급의 주거구역이 ‘적절한 생활을 만들기 위한 전문가의 아이디어’에 따라 철거당하는 와중에도, 사회통제적 요소들은 다소 불명확해졌다. 국가는 모두를 위해 무언가를 재공할 수 있었다. 이에 대한 대가는 총체적 행정 사회의 비자유였다. 하지만, 마르쿠제가 지적한 것처럼 ‘정신과 지식은 필요의 충족에 반하는 요구를 이야기하지 않는다.’

전후 호황이 끝났을 때, 복지국가의 낭비에 대한 문제가 공개적으로 질의되었다. 사회민주주의적 국가에 대한 요구의 증가는 국가를 경제적으로 불안정하게 만드는 것처럼 보였다. 그 이유는 역설적으로 요구 충족이라는 동일한 이유에 기인했다. 하지만 복지국가가 위기에 놓였을 때, 1970년대에 노동당이 사회민주주의를 구원하기 위해 기구화해둔 위기관리기제가 작용했다. 그리고 보수당 정권은 복지국가를 철폐하는 것이 아니라 요구충족에 대한 요구를 특정한, 사회적으로 더 가치있는 구성원들에게 제한하려 했다.

결과적으로 사회복지의 모든 측면에서 사회 통제의 요소들이 더 명확히 드러나게 되었다. 공적 지출 삭감의 시도가 실패하는 와중, 국가는 점점 더 많은 부를 사회의 더 부유한 영역에 집어넣고 있었다.(그러면서 사회의 빈곤한 영역은 도덕적 십자군들을 이용해 공격하고 있었다.) 이는 복지기금을 편모가정에 부하를 늘리고, 남성을 다시금 경제적 생산자로 돌려놓으려는 시도에서 굉장히 명확하게 드러났다. 복지의 제공자(납세자)들과 복지의 수혜자들을 분할하는 체계는 부가 집중되면 될수록 더욱 명확해졌다. 중산계급은 공고해졌고, 복지체계는 경제적으로 지속 불가능해보였다.

사회통제의 요소가 점점 더 명확해진 것만큼이나, 복지국가라는 개념이 그 창조자들의 꿈을 충족하는 것이 실패로 돌아간 것도 더 명확해졌다. 국가가 복지의 제공자로 존재하는 것의 효과에 대한 문제를 더 논해보도록 하자.

복지국가의 효과

영국에서의 복지국가 개념은 전후 사회민주적 합의의 최대 성과이자 1930년대라 불리우는 벌거벗은 자본주의의 야만성으로부터의 탈피라 불리운다. 복지국가에 대한 숭배는 너무나도 굉장해서, 정확히 얼마나 복지국가가 효과적인가? 복지국가가 평등을 촉진하는가? 복지국가가 정말로 부의 분배에 영향을 주고 있는가? 같은 질문을 던지는 것 마저 어렵다. 그리고 지난 20여년간 이 영역에 대한 연구가 이루어졌음에도, 이 질문에 대한 명확한 답을 찾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이 질문에 답하는 것을 어렵게 하는 것 중 하나는, 선호를 선호와 비교하지 않는 것이다. 전술한 것처럼, 전후세계는 많은 지점에서 전쟁 전의 세계와 달랐다. 자본주의는 소비주의로 재구성되었다. 산업은 국유화되었다. 정부가 경제에 개입하기 시작했다. 국가 관료제가 성장했다. 기술, 직업적 엘리트가 만들어져서 고수익과 높은 명성을 누릴 수 있었다. 경제의 영역에서, 부의 총량이 증가한 것은 분명했다. 하지만 복지국가의 등장이 그 분배에 기여했는가는 불명확하다. 예를 들자면, 1924년 3/4분기에서 1951년 2/4분기까지 하위 80%의 대중은 그들의 부를 2.5배 증대시켰지만, 이것이 복지국가의 재분배적 효과에 근거한 것인지는 말하기 어렵다. 실제로, 이후 20년간 이 지표는 크게 변하지 않는다. 이 시기는 전후 복지국가가 부의 분배에 진지하게 도전하였다 여겨지는 시기인데 말이다. 르 그랑은 1980년 영국에서 하위 50%의 인구가 차지하는 부의 비중은 1949년과 차이가 없다고 주장한다. 다르게 말하면, 설혹 빈자의 삶의 질이 증대되었다 하더라도, 이것은 파이가 커져서이지, 파이의 분배가 개선되어서는 아닌 것이다. 빈부의 격차는 줄어들지 않았고, 인민들은 자신의 계급체계에 머무는 경향을 보였다. 로이스 브라이슨은 이에 대하여 “이는 마치 인민들이 천천히 움직이는 에스컬레이터에 탄 것과 같다”고 말한다. 만약 국가주도 복지가 일말의 재분배 효과를 가졌다면, 이것은 부자에게서 빈자로 재분배된 것이 아니다.

가장 부유한 인구에서 조금 덜 부유한 인구로의 부의 재분배가 지속적으로, 유효하게 진행되었다는 것은 분명해보일지 몰라도, 빈곤한 인구는 상대적으로 그 재분배의 대상이 아니었다. 부의 재분배의 요체는 가장 부유한 사람들로부터 조금 부유한 사람으로의 재분배였다.

1984년까지, 상위 10%가 시장의 부 중 53%를 소유하고, 하위 50%가 6%만을 소유하고 있었다.

지난 15년 간, 영국에서 가장 빈곤한 사람들의 입지는 점점 악화되었다는 것이 사실이다. 사실, 우파가 주장하는 바 ‘낙수효과’가 모든 이를 더 낫게 만들 것이라는 이론에 대한 반례는 충분하게 많다. 하지만 이에 대한 비판은 여전히 단지 국가 복지 예산을 증대시키는 것으로만 제시되고 있다. 이 과정에서 복지의 본성이 무엇인지에 대한 질문은 자연스럽게 배제된다. 무주택 가정의 수가 93,000 가정으로 늘어나고, 기초생계보장선 이하의 소득을 가진 사람이 300만에 근접하고 있는 것은 비극이지만, 더 충격적인 통계는, 1979년의 보수당 집권 전, 30년의 국가주도 복지의 시기에도 여전히 56,750 가정의 무주택자가, 2,090,000명의 기초생계수급자가 있었다는 것이다.

로이스 브라이슨의 책 <복지와 국가 : 누가 수혜를 받는가?>는 국가 주도 복지의 분배 효과에 대한 연구의 개괄을 담고 있다. 영국뿐 아니라 유럽 대륙, 스칸디나비아, 오스트랄라시아 등의 복지에 대한 연구를 조망하면서, 국가 주도 복지의 대부분의 영역에서 더 부유한 사람들이 그렇지 못한 사람들보다 더 많이 수혜를 받는다는 것을 보여준다. 이는 특히 건강보험과 ‘그 수혜가 소득에 가장 체계적으로 상관되는 공공성’이라 불리는 교육 등에서 더욱 크게 드러난다. 그리고 건강보험의 경우, 영국에서 빈자가 부자보다 보건 문제에 있어 더 고통받는다는 것을 보여주는 다양한 보고서들이 존재한다. 성과 연령을 막론하고, 계급 간의 사망률이 크게 차이가 난다. 비숙련 육체노동자들의 아이들은 태어나서 생후 1개월까지의 기간 동안, 전문직의 아이들보다 두 배의 영아 사망률을 가진다.

건강보험에 관해서는, 사회경제적으로 가장 상위에 있는 그룹이 하위그룹보다 10%더 많은 국민건강보험 수혜를 받고 있다. 이 불평등은 주거의 영역에서도 드러난다. 공공주거는 더 가난한 사람들에게 주거 보조를 제공해주었지만, 세금을 통해 효과적으로 부유한 주택소유자들에게 편향된 체제를 유지한다.

르 그랑은 이와 같은 불균형이 다음에 근거한다고 말한다.

부유층은 사회서비스를 이용할 시간이 많다.

부유층은 이러한 서비스들을 전용할 능력이 있다.(특히 교육의 영역에서)

부유층은 주어진 사회서비스를 이용할 가능성이 높고, 예산 삭감에 직면하더라도 그것을 유지할 수 있다.

마지막 부분은 지난 15년 여간 정부가 진행한 국가주도 복지에 대한 공격을 생각하면 더욱 의미심장하다. 빈자들은 복지국가에서 상대적으로 조금밖에 받지 못했고, 퇴보의 시기에 그들은 그나마 받고 있는 것이라도 지키기 위해 투쟁해야 했다. 브라이슨은 사회학적으로, <마태오가 전한 복음서>에서 따온 바, 마태오의 원칙이라 이를 명명한다. ‘가진 사람은 더 받아 넉넉하게 되겠지만 못 가진 사람은 그 가진 것 마저 빼앗길 것이다.’

브라이슨은 서비스 제공 뿐 아니라 재정적 지원이나 직업적 보조에 대해서도 이야기한다. 브라이슨은 각기 다른 방식에 따른 실질적 효과는 국가와 시대에 따라 다를 수 있을 것이라 언급하면서도, ‘세금체계의 복잡함을 파고들면, 재정적 복지, 직업적 복지, 사회적 복지 모두가 마태오의 원칙에 부합함을 알 수 있다. 필연적으로 이 모든 형태의 복지체계는 현재의 사회적 계급체계를 강화한다.’고 말한다. 그렇기에 복지국가가 사회정의와 부의 재분배에 긍정적으로 기여했다고 주장하는 것에는 의문이 가해진다. 복지의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국가 개입을 통해 이루어져야 한다는 광범위한 견해에는 사실상 근거가 없다. 오히려 국가는 현존하는 계급체계를 유지하고, 가난한 이들을 사다리의 아래에 두기 위한 노력을 계속해왔다. 이것은 우리에게 사회복지를 재건하기 위한 진정한 시도는 국가의 바깥에서 구성되어야 한다는, 국가주도 사회복지의 대안으로 향해야 한다는 것을 보여준다.

복지와 아나키

국가에 대한 반대 - 우파? 좌파?

지금까지 나는 국가 주도 복지의 요체는 사회 통제임을, 그리고 국가복지는 그것이 약속한 바, 평등과 부의 재분배를 신장하지 못함을 이야기해왔다. 만약 우리가 국가주도 복지가 망령임을 인정한다면, 그 대안은 무엇인가? 우파, 혹은 ‘자유시장주의자’들은 흔히 국가가 시장 기능을 자유롭게 두어야 한다고 주장한다.(자유지상주의자들이나 아나키즘적 자본주의자들은 국가를 철폐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부를 가진 자에게는 모든 것이 허용되어야 하고, 이에 대한 정부의 개입이(혹은 정부 자체가) 없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상태가 어떠한 형태로라도 복지를 유지하는데 충분한 수단을 제공하지 못할 것이라는 추정은 충분히 근거가 있는 것이다. 복지는 가격에 의한 분배를 지향하는 현존 시장 체계를 악화시킬 것이기 때문이다. 이에 더하여 제약되지 않은 이윤추구는 아마도 생태적으로 올바른 사회적, 경제적 체제를 만들지 못할 것이며, 현재의 환경 파괴의 수준은 여전할 것이고, 심지어 더 심해질 수도 있다.

또 다른 대안은 수혜자 참여와 노동자 민주주의의 증대를 통해 복지에 있어 국가의 이득을 최소화 하는 것이다. 다르게 말하면, 국가로부터 통제력을 되찾는 것이다. 이러한 방식은 사회복지 문제의 해결책이 더 많은 재원에서 온다는 것에 회의적인 이들에게 매혹적으로 다가온다. 페미니스트들이나, 생태주의자들이나, 국가를 지지하지 않는 좌파들은 복지의 우선고려사항을 비용과 중앙 계획이 아니라 참여로 돌리는 것이 그 제공을 크게 증진시킬 것이라고 제안해왔다.

참여는 실질적이고 잠재적인 복지체계의 사용자들과 다른 시민들이 복지의 발전과 조직, 운영에 개입하는 것이다. 이것은 복지의 탈중심화화 지역화라는 필연적 귀결을 낳는다. 현실적으로, 복지에의 참여는 지역적으로 이루어져야 한다. 지역 보건소에서, 지역 학교에서, 지역 부동산에서, 지역 사회서비스 사무소에서, 아니면 오래된 방식으로, 민중의 집에서 말이다.

유사한 맥락에서, 복지 분배의 중산계급 편향에 대한 최초의 비판가 중 한명인 브라이언 아벨-스미스는 아래와 같이 제안한다.

“우리는 병원을 현대적 방식으로 새로 지을 수 있을 것이다. 골목마다 침상 몇 개를 가진 외래진료소나 보건소를 짓는 방식으로 말이다. 우리는 정신적 결핍을 초래하는 공동주택을 철거하고 작은 방을 가진 새로운 빌라를 지을 수 있다. 우리는 고령자를 위한 기관들을 철거하고 그들에게 적당한 집을 제공할 수 있다. 우리는 장애를 가지거나, 나이가 들거나, 아픈 이들을 위한 재택 근무를 제공할 수 있다.”

그리고 이것이 복지를 사회 통제의 구속복으로부터 해방하여 그 수혜자들의 손에 쥐어주는 첫 단계가 될 것이다. 참여를 위한 전술은 이미 오래전부터 존재해 왔다. 자본주의 아래에서, 그 자원을 국가에 의존하여 기능해야 한다는 것 때문에 활성화되지 못했을 뿐이다. 하지만 식량 배분, 주거, 생산, 서비스 제공이 협동을 통해 가능하다는 수많은 예시들이 있다. 자체 건설 주거는 항상 있어왔다. 신협과 지역 사업체는 항상 있어왔다. 지역 자치위원회도, 임차인 운동도 항상 있어왔다. 자기 조력 그룹도, 각 병원별로 이루어지는 보건복지의 참여 실천도 항상 있어왔으며, 자유의지주의적 교육에 대한 실험과, 여성의 쉼터나 여성 전용 보건소도 있어왔다. 이러한 공식적 실험들에 더하여, 현실적으로 대부분의 돌봄노동은 국가 바깥에서, 주로 여성에 의하여, 무급이거나 저임금으로 이루어지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공식적이고 비공식적인 복지 약정에 의해 생성된 환경은 그 자체로 유익하다. 그것은 제공하는 값비싸고 질나쁜 관계가 아니다. 이는 특히 보건분야에 있어 적용될 수 있다. 고령자, 정신질환자, 말기 환자들은 수용시설에 치워져 ‘전문가’의 의견에 의존하는 것보다 공동체나 가족과 함께할 때 더 행복할 수 있다. 또한 돌봄받는 사람에게 정확하게 그 이득이 간다는 것 외에도, 기관의 해체는 그곳에서 일하는 돌봄도녿자들에게도 도움이 된다. 콜린 워드는 “기관의 직원들은 그 수용자들과 마찬가지로 피해자이다”라고 말한 바 있다.

이 참여적이고 탈중앙적인 접근이야말로 지난 백여년간 국가의 힘이 커지는 것을 비판해온 아나키스트들에게 와닿는 것이다. 하지만 이 접근이 아나키스트들이 선호할만한 것이고, 현재의 중앙집중적이고 전문가 편향적인 체계보다 더 발전된 체계이지만, 많은 논객들. 심지어 탈중앙화의 지지자들마저도 여전히 선호하는 국가의 지속적 이득에 대해 회의적이어야 할 이유는 분명히 있다.

국가를 고발한다.

우선 제기하고 싶은 것은, 국가는 정적이지 않다는 것이다. 국가의 현재 위치는 지역의 자주성을 흡수하고, 엘리트 집단의 입지를 강화하면서 얻어진 것이다. 이러한 파괴적 역동성을 벗어나서 존재하는 국가는 없다. 1970년대의 스웨덴을 흠망하는 복지국가의 수호자들조차도 ‘행정적 효율’을 위해 지방정부의 역할을 잘라낼 수밖에 없었고, 이는 지방자치에 직접 참여할 가능성의 축소를 수반하였다는 것을 인정할 수밖에 없다. 그리고 이는 그들이 대변하는 세력으로부터 권위를 부여받아 높은 지위와 수익과 계층적 지위를 즐기는 엘리트들의 성장을 촉발한다.

하지만, 아나키스트들은 국가의 본질에 대해 비판하는 것 만큼이나 국가가 대변하는 것에 대해서도 비판한다. 우리는 국가가 권력관계, 계급체계, 제도적 폭력에 기반한 하향식 조직의 전형이기에 국가에 특정한 공격을 가한다. 그리고 우리는 국가가 아나키스트들이 공격해온 권력 관계와 지배의 체계의 존재를 지지하기에 국가를 공격한다. 아나키스트들의 궁극적인 목적은 모든 권력관계가 철폐된 사회, 혹은 ‘아나키’를 건설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아나키스트들은 국가를 무언가 특별한 것으로 바라보지 않고, 오히려 권력관계의 체계가 현현한 것이라 바라본다. 그렇기에 아나키스트들은 국가를 무너트리는 유일한 길은 다른 관계를 건설하는 것이라 바라본다. 역으로 말하면, 국가가 존재하는 한 ‘자유로운’ 사회는 있을 수 없다. 국가의 존재 자체가 다른 사회적 권력관계들의 존재를 정당화하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아나키스트들에게 있어 참여와 탈중앙화의 이상은, 그것이 얼마나 유의미하거나 중요한지와는 무관하게, 그 자체만으로는 불충분하다. 단지, 그것은 국가의 대안을 묘사하는 데 핵심적인 요소들일 뿐이다.

사회를 어떻게 정의하더라도, 사회적 계급체계에서 특권을 가진 자들 뿐 아니라, 그 모든 구성원을 보살피고 행복한 삶을 이룰 역량은 그 정의에서 빠져서는 안된다. 그렇기에 복지는 단지 사회적 부가기능이 아닌 사회의 본질적인 부분이 되어야 한다. 이는 사회가 그 무엇보다도 복지를 제공하기 위해 조직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아나키즘은 공동체 구성원에 대한 일상적 복지의 제공을 다시 공동체에 돌려주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로써 복지는 단지 체계나 체계 안의 노동자들에 의해 제공되는 기능이 아니라, 공동체와 인민들의 일상의 일부가 될 것이다. 이와 같은 방식으로 복지는 개인들이 스스로를 발전시키는 방식이 될 것이다. 복지는 학습의 과정이자 성장의 과정이다. 이 과정을 통해 우리는 고령자, 연소자, 아픈 자, 죽어가는 자를 젊고 역량있는 사람들의 시야에서 치워내는 것이 아니라, 사회 안에 포괄하는 방법을 학습할 수 있을 것이다. 이 과정을 통해 우리는 전문가와 기구에 기대는 것이 아니라 우리 스스로의 복지적 필요에 대한 인식을 심화시키고, 그것을 충족하는 방법을 알아낼 수 있다. 사회복지에 있어 직접행동은 미래의 자유롭고 생태적인 사회를 건설하는데 핵심적 요소다. 그리고 이러한 사회를 만들고자 하는 모든 운동의 핵심적 교리가 된다.

[직접행동]은 각각의 개인이 스스로에 내재된 숨겨진 힘을 깨워내고, 자신감과 자기주도권을 느낄 수 있게 하는 방법이다. 이것은 개인이 사회의 통제력을 직접적으로 확보하는 수단이다. 직접행동은, 간단히 말하자면, ‘효과성’이나 ‘대중성’과 같은 잣대로 수인되거나 거부될 수 있는 ‘전술’이 아니다. 직접행동은 도덕적 원칙이고, 이상이며, 감수성이다. 직접행동은 우리 삶과 행동과 전망의 모든 영역을 충만하게 할 것이다.

국가주의는 이러한 관점을 약화시키고자 지배와 복종의 체계를 위한 물질적, 심리적 조건을 만들어낸다. 그리고 이것이야말로 국가의 존재가 복지 사회와 공존이 불가능한 이유가 된다.

사회복지와 아나키스트적 대안

국가의 존재가 복지사회와 공존 불가능하다는 주장에 대하여 국가가 없는 사회가 그 구성원들에게 충분한 복지를 제공하는 것이 가능하겠냐는 질문이 나오는 것은 합리적이다. 국가체가 필요하다고 보이는 몇 가지 문제들이 분명히 존재하고, 그것은 아래와 같다.

복지 문제의 규모

광범위한 협력의 필요성

전문성의 필요성

하지만 이 영역들 역시 아나키스트적 대안의 일부로 보일 수 있다. 복지의 문제가 거대한 것일 수 있지만, 이것은 많은 부분에서 현재 경제 체제의 결과물이다. 그리고 국가복지 역시, 이 경제체계가 존재하는 한 문제를 완화할 수 없다. 이미 명시한 것처럼 계급으로 분화한 사회에서 나타나는 복지의 불평등을, 자본주의가 환경에 행하는 잠재적으로 끔찍한 효과들을 보면 이것이 사실이라는 것이 드러난다. 더하여 만약 국가주도복지가 대부분의 경우 사회 통제와 동치된다면, 그리고 만약 사회 통제가 참된 복지의 안티테제라면, 대규모의 국가적 복지가 매혹적으로 보이더라도, 이는 장기적으로는 반생산적이라 여겨져야 한다. 인민의 복지에 대한 의존도를 높이고, 그들이 복지를, 타인의 지시를 받아들이게 해서는 안된다. 복지에 관한 많은 문제들은 국가적 층위에서는 해결될 수 없고, 개인이나 공동체의 층위에서만 해결될 수 있다. 인간 복지 필요의 거대한 규모는, 그를 쪼개어보면 작은 필요의 총합인 것이고, 지역 층위에서 해결하는 것이 더 낫다.

아나키스트들은 조직이나 협력에 반대하지 않는다. 우리는 오히려 코뮌의 연방과 같은 대안을 제시한다. 이 코뮌들은 인간이 그 조건에 대한 최대의 통제를 가능하게 하고, 그 연방을 통해 광범위한 영역의 문제와 대응할 수 있게 한다. 이러한 상호부조적 공동체가 그 요체로써 최소의 기초적 생활을 제공하기 위한 기능을 한다고 상정할 때, 복지 제공의 최소 기준은 크게 문제가 되지 않는다. 특히 공동체의 모든 구성원들이 그 생산물에 동등한 권리를 가진다면 말이다. 자원의 다름이 여전히 존재하겠지만, 이것은 연방적 협력체를 통해 해결할 수 있다.

전문성과 기술은 자본주의와 국가가 제공한 틀 바깥을 상상하기 어려운 영역이다. 그리고 이 영역에 대한 회의를 표하는 것은 많은 사람들에게 아나키스트들이 과거 회귀적 태도를 취하고 있다고 보이게 한다. 하지만 아니다. 아나키즘은 자주 산업시대 이전의 ‘황금기’로의 회귀를 원하는 것으로 받아들여진다. 그리고 이러한 발상을 하는 아나키스트들이 일부 있는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대부분의 경우, 이러한 비판은 올바르지 않다. 아나키스트들이 그들이 제시하는 대안의 가능성을 보이기 위해, 그리고 더 ‘아나키스트적’인 조직의 방식이 결코 ‘인간의 본성’에 반하는 것이 아니고, 오히려 대부분의 문화에서 특정시기에 번성했음을 제시하기 위해 역사를 돌아보는 것은 사실이다. 자본주의의 대리인들이 호선한 합리성의 도구들은 과학과 기술의 발전에 있어 분노의 정도를 증가시켜왔다. 과학의 지속적인 적용은 결과적으로 더 많은 사람을 죽이는 최적의 방식을 만드러냈다. 그리고 무엇보다 과학과 기술을 평범한 사람들로부터 분리시켜 엘리트들의 손에 쥐어주는 것은 결국 직간접적인 통제와 이윤의 수단을 쥐어준 것과 같다.

이러함에도 불구하고, 어떠한 것, 특정한 발견, 방법론, 노동의 형태의 사용과 집행을 비판함에 있어 발견, 방법론 등의 그 자체를 비판할 필요는 없다. 앞서 말했듯이, 그 구분선은 언제나 명확하지는 않다. 과학적이고 기술적인 발전은 일반적으로 윤리의 문제를 중점적으로 고려하지는 않기 때문이다. 하지만, 과학과 기술이 이성의 도구로써 윤리적이고 생태적인 맥락에 놓였을 때, 이것은 인류가 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최고의 방식이 된다. 예방은 치료보다 낫기에, 만약 우리가 보다 생태적으로 조화로운 방식으로 살게 된다면, 우리가 고통받는 많은 질병들은 사라질 것이다. 그리고 이것은 궁극적으로 공중보건이 된다. 특정분야의 전문가나 기술 수준이 높은 사람에 대한 필요는 계속 존재할 것이다. 이는 이러한 사람들을 훈련하고 평가할 기관이 필요하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고 학습의 해방이라는 것이 학술기관이나 전문가 양성소의 폐지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이 기관들은 비계급적이고 비권위적인 방식으로 재구성하는 것이다. 그렇기에 이 기관들은(길드나 생디칼에 입각하여 조직되고) 전문가들의 지도나, 관료기구를 필요로 하지 않을 것이다. 이러한 경향성을 상쇄하는 구조들이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물론 사실 이러한 전문가들에 대한 필요가 그렇게 많지는 않을 것이다. 하지만 아나키즘의 목적은 국가와 자본주의에 대한 현실적인 대안을 제시하는 것이고, 인민은 한 순간에 파괴 불가능하고, 완전히 균형잡히고, 완전히 합리적이 되지는 않으니까 말이다.

여기에서 저기까지

우리가 오직 대안적 관계를 건설하는 것으로만 국가를 붕괴시킬 수 있다는 개념은 복지의 주도권 문제에 중요한 시사점을 준다. 이것이 상호부조와 협동의 원칙에 근거해 만연한 계급체계에 도전할 수 있는 수단이기 때문이다. 이에 근거하여 래디컬 페미니스트들은 전통적으로 분리주의적이고 여성에게만 주어지는 복지를 주장하는 것이 ‘복지의 제공자와 수혜자의 관계를 비계급체계적이고 민주적인 복지구조 안에서 새롭게 구성하여 다시금 구식이고 계급적인 복지 기구에 도전하기 위함’이라고 말한다. 과거에, 앞서 간략히 언급한 실험과 프로젝트들은 정치적 전망의 부족으로 약화되어 왔다. 이 그룹들이 특정한 문제를 직면하여 모일 때(일반적으로 공동체 운동의 경우에 그러했는데) 그 주된 기능은 이미 구성된 권위로부터 무언가를 얻어내기 위한 것이었다. 결과적으로 이들은 그 목적을 달성하면(혹은 실패하면) 해산했고, 공동체에 주어지는 서비스의 구조를 급진적으로 바꾸려는 시도를 하지 못했다. 그리고 보다 장기적인 프로젝트 사업은 급진적 사회비평에 이르지 못하였고, 이는 다른 프로젝트와 연계하여 진정으로 국가권력을 상쇄할 세력을 만들지 못하게 하였다. 두 경우 모두에 있어 각 그룹들은 단지 변화의 가능성만을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이 위치하고 있는 자유의지주의적 전통에 대해서도 생각해야 한다. 더욱 광범위하고, 대단히 중요한 사회적, 정치적 의제들은 이 작업을 시작하는 데 도움이 될 것이다. 몇몇 캐나다 활동가들은 다음과 같이 제안한다.

“다양한 시민의 조직이 사회에 대한 포괄적 전망을 가지고, 그들의 특정한 투쟁을 이에 연관시키는 것은 중요하다. 식량 협동조합, 주거 협동조합, 생태주의 그룹 등은 새로운 사회적 연결망을 구성하고, 이를 통해 새로운 사회의 근간을 놓을 수 있다. 집단적 행동을 선택하기 위한 시민의 자주성의 증대는 노동계급이 그들의 동네를, 그들의 도시를 장악하는 것을 공고히 하는데 필요불가결한 것이다. ”


이러한 접근방식은 국가권력을 무력화하기 위한 새로운 활동태와 이론의 가능성을 제시한다. 이러한 활동은 매우 어려울 것이다. 필요한 자원을 확보하는 것도 그러할 것이고, 국가주도 복지가 점점 더 납세자의 집으로 보이기 시작하면서, 복지 수혜자들에게는 장기적으로 포기 외의 선택지가 없을 것이라는 것에서 더욱 그러하다. 하지만 이것은 국가주의적 선택지의 한계 속에서, 포기보다는 나은 대안임에는 분명하다. 그리고 이것은 진정으로 비국가주의적인 복지 공동체를, 정치꾼들과 관료와 전문가들에 의존하지 않는 공동체의 건설을 시작하는 수단이 될 수 있을 것이다. 다시금 크로포트킨을 인용하자면, “국가가 존속하여 개인과 지역의 생활을 분쇄하고, 모든 인간의 행동을 장악하거나 ... 국가의 파괴를 통해 개인과 집단의 생동적인 주도권과 자유로운 합의의 원칙에 기반하여 수천개의 중심에서 새로운 삶을 시작하거나다. 선택은 당신의 것이다!”

결론

아나키스트들에게 자본주의를 극복하려는 좌파의 시도가 실패한 것이 국가의 성장으로 이어졌다는 것은 역설적으로 보인다. 자치와 권한부여는 더 이상 관료의 펜대를 통해서 이루어지지 않고, 시장의 ‘보이지 않는 손’에 의해 이루어진다. 복지가 국가의 손에 있는 이상, 복지는 사회 통제의 다른 형태로 전용될 수밖에 없다. 그리고 우리가 시작하면서 인용한 크로포트킨의 말처럼, 우리의 복지를 국가에 넘겨주는 것은 우리 안에 내재한 사회적 역량을 약화시키고 우리가 누구에게도 의존하지 않고 원자적인 개인이라는 억지를 부리는 것이 가능하게 한다. 이는 신화에 불과하다. 복지국가에서, 부유한 자가 국가주도복지로부터 가장 수혜를 받는다는 것을 고려할 때 더욱 분명해진다. 이 의존과 비의존의 신화 어딘가에서 인간에게 꼭 필요한 것, 즉 돌봄과 협동을 위한 우리의 역량은 실종된다. 사회복지를 제공하는 것에 관한 국가의 실패는 사회 복지라는 개념 그 자체를 약화시키는 것이 아니라, 국가의 역할을 부인하는 데에 사용되어야 한다. 복지는 권력의 분배와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 그리고 그렇기에 국가주도복지는 언제나 최소한의 성과를 낼 수밖에 없다. 동시에 우리는 시장이라는 이름으로 국가주도복지를 삭감하는 것에 대한 환상에 빠져서는 안된다. 대안이 없는 시장은 가라앉거나 헤엄치거나의 양자택일일 뿐이다. 그리고 가라앉는 것은 빈곤, 궁핍, 심지어 죽음을 의미한다. 국가로부터 복지를 해방하는 시도를 우파 자유 시장주의자들에게 맡길 수는 없다. 복지국가에 대한 민주적이고 참여적인 대안의 필요성이 지금보다 더 시급한 적은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