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itle 국가의 철폐 #subtitle 아나키즘과 마르크스주의의 관점 #author 웨인 프라이스 #SORTtopics 강령주의, 조직지향적 아나키즘, 사회전망, 마르크스주의 #date 2007 #lang en #pubdate 2021-12-25T03:16:38 #notes 2007년 웨인 프라이스 동지가 출판한 서적을 아나키스트 연대가 번역 및 출판에 관한 저자의 허락을 받아 번역함.
Translated by C. Necromancy of 아나키스트 연대 ** 1부 : 국가를 대신하여 *** 1장. 국가를 고대박물관으로 보내자. 아나키스트들은 통치의 기본 구조인 국가를 철폐하고, 이를 국가없는 사회로 대체하는 것을 지지한다. 마르크스주의자들은 현존하는 자본주의적 국가를 철폐하고, 이를 곧 “사라져” 국가 없는 사회가 될 임시적 노동자 국가로 대체하는 것을 지지한다. 두 조류 모두는 마르크스의 동료 사상가였던 프리드리히 엥겔스가 『가족, 사유재산, 국가의 기원』에서 언명한 바, “생산자들의 자유롭고 평등한 결합에 기초하여 생산을 새로이 조직하는 사회에서는 전체 국가기구를 그것이 마땅히 가야 할 곳으로, 즉 고대박물관으로 보내 물레나 청동도끼와 나란히 진열할 것이다.”라는 말에 모두 동의할 것이다. 아나키스트와 마르크스주의자들은 국가에만 반대하지 않는다. 이들은 엥겔스의 언명이 함축하고 있는 바, 국가의 종말은 자본주의 경제의 · 노동계급에 대한 착취 · 계급사회의 종말과 함께 이루어져야 한다는 것에 동의한다. 이들은 자본주의 경제를 협력적 노동으로 이루어지는 집산화된 경제로 대체하고자 한다. 이것이 “생산자들의 자유롭고 평등한 결합”이고, 이것이 사회주의, 혹은 코뮌(공산)주의라 불리는 것이다. 오늘날 일반적으로 “사회주의”라는 단어는 국유화의 체제(보다 정확하게는, “국가 사회주의”의 계획)을 뜻하고 있지만, 아나키즘 운동의 주류는 언제나 스스로가 사회주의 운동의 좌익이라 말해왔다. 이는 현대 노동계급을 자본주의 철폐의 중심으로 바라본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는 사회가 살아남기 위해 필수적인 재화와 용역의 생산과정을 통해, 노동자들이 자본주의 기능의 중심이 되기에 그러하다. 이는 노동자들이 전략적으로 사회를 멈출 때, 새로운 사회를 시작할 수 있음을 의미한다. 자본가들은 노동자들을 착취하며, 이것이 노동자들이 착취를 끝장내는 것으로, 계급을 온전히 끝장내는 것으로 이익을 볼 수 있도록 한다. 모든 아나키스트들과 마르크스주의자들이 이 관점에 동의하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허버트 마르쿠제나 마오쩌둥과 같은 마르크스주의자들을 제외하면, 아나키즘적 코뮌주의자들이나 아나키즘적 조합주의자들은, 마르크스나 엥겔스와 이 관점을 공유하고 있다. 아나키스트들은 국가와 자본주의에 반대할 뿐 아니라, 모든 형태의 지배와 압제에 반대해왔다. 여성에 대한 남성의 지배, 아프리카계 아메리카인에 대한 유럽계 아메리카인의 지배, 라틴 민족에 대한 앵글로색슨의 지배, 피억압민족에 대한 제국주의자들의 지배, LGBT에 대한 이성애자들의 지배, 정치적/종교적 소수자에 대한 주류의 지배 등 말이다. 이에 대하여 마르크스주의자들은 보다 복잡한 관점을 가지고 있지만, 이들도 대부분의 압제의 형태에 반대해왔다. 오늘날의 아나키스트들과 마르크스주의자들은 노동계급이 자본주의 전복의 중심임에 동의하면서도, 이 다른 형태의 억압 역시 실질적인 것이며, 자본주의적 착취를 은폐하고 그 착취와 상호작용한다는 것에도 동의하고 있다. 이러한 비계급적 억압의 형태와의 투쟁은 “자유롭고 평등한 결합”을 위한 투쟁에서 필요불가결한 측면이라 할 수 있다. (내가 말하는 현대 노동계급, 혹은 “프롤레타리아트”는 생산수단의 소유자인 자본가들이 제공하는 금전을 위하여 그 노동력을 판매하는 이들을 의미한다. 임금을 위하여 일하는 자들, 재화와 용역을 생산하는 자들, 다른 사람을 고용하고 있지 않은 자들이 곧 노동자, 혹은 “프롤레타리아트”라 할 수 있다. “프롤레타리아트”는 고대 로마에서 하류 계급을 일컫는 단어에서 왔다. 이 단어는 “재생산(만)을 하는 자”를 의미했다. 마르크스는 이 단어를 사용하여 현대 자본주의 사회에서의 노동계급을 규정하였다. 이 개념어에 주부나 아동처럼 다른 노동자들에 의존하여 살아가는 자들이나, 은퇴자들과 실업자들을 포함한다면, 이것이 전체 노동계급이 될 것이다. 마찬가지로, “부르주아지”와 “자본계급”은 상호교환이 가능한 용어다. “부르주아”와 “자본가”가 부유한 기업 경영인들의 “공동체”를 일컫기 때문이다. 자본가들에 복무하는 중간관리계층도 존재한다. 이들의 하층은 화이트칼라 노동자와 같은 노동계급의 상층과 결합한다. 이렇게 형성된 사회 중간 계층은 때때로 “중간계급”이라 불린다. 그렇다고 이들이 독립적 계급이 되는 것은 아니지만 말이다.) 하지만, 아나키스트들과 마르크스주의자들이 자본주의나 다른 형태의 억압에 반대하면서도, 국가에 대한 입장이 둘 사이의 문제가 된다. 국가에 관한 문제에서 어떠한 입장을 취하는지가, 아나키스트인지 마르크스주의자인지를 결정한다. 어떠한 마르크스주의 이론가는 다음과 같이 쓴다. “참된 마르크스주의자와 거짓 마르크스주의자를 구분하게 해주는 것은 국가이론에 있어서이다.”(시드니 훅, 2002, 270p) 그리고 아나키스트들 역시 비슷하게 이야기한다. 현존국가를 수인하고, 그것을 더 민주적으로 만들어 자본주의의 극단성을 통제하기 위해(사슬의 날카로운 모서리를 연마하기 위해) 사용하고자 하는 자들이 있다. 이들은 자유주의자liberal이다. 기업을 국유화하고, 국가가 경제에 개입함으로서 자본주의에서 사회주의로의 점진적 변화하기 위하여 국가를 사용할 수 있다고 바라보는 자들도 있다. 이들은 개혁적 사회주의자, 혹은 사회민주주의자(혹은, 그들이 자칭하는 바, “민주사회주의자”)들이다. 자유주의자와 사회민주주의자의 영역은 겹친다. 그리고 스스로 혁명적 사회주의자, 혹은 공산주의자라고 자칭하는 자들이 있다. 이들은 현존 국가의 전복을 목표로 한다. 이들은 개혁적 투쟁을 지지하거나, 현존 국가에 요구하곤 한다. 이들을 개혁주의자들과 구분하는 것은, 혁명적 사회주의자들의 전략적 목표는 국가의 파괴라는 것이다. 마르크스주의자들은 현존 국가를 새로운 국가(“노동자 국가”, 혹은 “프롤레타리아 독재”)로 대체하고자 한다.(이 개념이 생각보다 더욱 모호하다는 것에 대하여, 최소한 후기 마르크스주의자들이 아닌 마르크스와 엥겔스의 관점에서는 그러하다는 것에 대하여 후술할 것이다.) 피억압민족이나 피억압인종의 민족주의자들 역시 새로운 국가를 건설한다는 유사한 목적을 가지고 있다. 이들은 국가 사회주의의 변종들로부터 영향을 받기도 한다. 반면, 아나키스트들은 국가없는 사회를 즉각적으로 이행할 것을 계획한다. 다르게 말해보자. 사회주의자들은 현존하는 것이건, 새롭게 건설할 것이건, 국가를 이용하여 새로운 사회를 건설하고자 하는 자들과 새로운 사회는 모든 국가에 반하여 건설되어야 한다고 믿는 자들로 나뉜다. 이는 결국 사회주의자는 국가 사회주의자이거나 자유의지주의적 사회주의자(대부분 아나키스트) 둘 중 하나임을 알 수 있다. (“자유의지주의적 사회주의”는 오래된 유럽의 용어이다. 그리고 이것은 미국에서 흔하게 사용하는 바, 중앙화되고 관료적인 국가를 중앙화되고 관료적인 기업으로 대체하는 것을 지지하는 우익 · 친자본주의적 “자유지상주의”와는 무관하다.) 아나키즘이 부활하면서 국가의 철폐라는 개념에 대한 관심 역시 높아졌다. 좌파 진영을 마르크스주의가 지배하고 있을 때, 국가의 철폐에 관한 문제는 사라졌었다. 마르크스주의자들이 건설한 국가는 해소되기는커녕 구조적으로 파시즘과 유사한, 무시무시한 전체주의 국가가 되었다. 서유럽과 미국에서, 공산당들은 대부분 실질적으로 개혁주의의 방법론을 따랐고, 현존국가 내에서의 활동을 지향했다. 언젠가 다가올 국가없는 사회에 대한 마르크스와 엥겔스의 사상은, 추상적인 것이, 환상이, 마치 주류 기독교회에서 죽은 자의 부활을 기다리는 것처럼 되었다. 국가없는 사회에 대한 사상은 마르크스주의자들의 실질적 계획이나 행동과 관계성을 상실했다. 1970년대, 마르크스와 바쿠닌의 분열 이후부터 아나키스트들은 마르크스주의 운동보다 더욱 좌측에 있었다. 하지만 1917년의 러시아 혁명 이후, 레닌주의자들이 아나키스트들을 밀어내고 극좌의 자리를 차지했다. 레닌주의자들(공산주의자들)은 마르크스주의가 혁명을 성사시킬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듯 했다. 혁명가들은 레닌주의 대오로 모여들었다. 1936년의 스페인 혁명은 서유럽에서 아나키스트들이 만들어낸 마지막으로 질러낸 환호성이었고, 또한 아나키즘의 끔찍한 실패이기도 했다.(그리고 이 실패의 원인은, 부분적으로는 그들 스스로의 오류에 기인했다.) 아나키스트들은 세계의 모든 노동운동에서 하찮은 규모가 되었다.(러시아 혁명과 스페인 혁명에 관해서는, 이후의 장에서 논의하도록 하겠다.) 이 상황은 변했다. 1989년, 동독의 인민들은 베를린 장벽을 무너트렸다. 소련은 붕괴했다. 소련의 국가 자본주의를 대체한 것은 다원적, 금융시장적, 전통적 자본주의였다. 중국의 경우, 공산당은 여전히 국가권력을 쥐고 있지만, 그들의 국가자본주의 체계를 시장경제로 전환했다. 유럽 각국의 공산당들은 평범한 개량주의 정당으로 변모하여 새로운 사회에 대한 요구를 버렸다. 한때 유럽 마르크스주의의 다른 분파를 자임했던 사회민주당들은 자본주의 이후 사회를 추구한다는 목적을 버린지 오래 되었고, 더 이상 마르크스주의자를 자임하지 않는다. 이러한 과정의 당연한 결과로, 마르크스주의에 대한 신뢰도는 크게 낮아졌다. 그렇다고 자본주의가 매력을 더한 것은 아니다. 오히려, 자본주의는 점점 더 잦은 공황을 경험하고, 점점 하강하여 갔다.(정확하게는, 러시아와 중국의 국가자본주의의 붕괴 역시 국제 자본주의 체계의 붕괴의 일부기도 했다.) 대규모 불만족은 지속되었다. 마르크스주의(또는 다른 형태의 국가 사회주의)를 바라보았던 사람들 중 다수는, 해방을 위한 다른 이정표를 찾기 시작했다. 이를테면, 대초원에서는 서구 제국주의에 대항하는 투쟁이 반동적 이슬람 권력(모든 이슬람이 필연적으로 반동적이라는 것은 아니다.)의 지도 아래에서 이루어지고 있다. 과거에 해당 지역의 반제국주의 운동은 급진적 사회주의-민족주의자들과 마르크스주의자들이 이끌었다. 마르크스주의의 쇠락은 사회주의의 또 다른 전통적 분파, 특히 아나키즘에 대한 관심의 증대를 가져왔다. 아나키즘은 더 이상 하찮은 규모가 아니다. 아나키즘은 사회주의와 압제에 대항하는 모든 운동의 주류 중 하나가 되었다. 아나키즘의 부흥과 함께, 마르크스주의의 자유의지주의적 민주주의, 인본주의, 반국가주의적 측면을 강조하는 자유의지주의적(혹은 자율주의적) 마르크스주의 역시 성장하였다. 국가의 철폐 문제는 아나키즘이나 자유의지주의적 마르크스주의의 성장과 함께 다시 수면 위로 올라왔다. 국가를 끝낸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어떻게 이것을 실현할 수 있는가? 국가가 전복된다면, 무엇으로 국가를 대체하는가? 국가의 철폐 이후에도 수행되어야 하는 국가의 기능이 있는가? 부르주아 국가와 국가없는 사회 사이에 이행기적 기구가 필요한가? 실제 혁명의 경험과 이 목표를 연관시킬 방법은 있는가? 국가의 철폐를 둘러싼 이러한 질문들이 이 책의 주요 주제다. 다른 주제가 있다면, 이 질문들에 아나키스트와 마르크스주의자들은 각각 어떻게 답할 것인가에 관한 것이 될 것이다. 우리는 이 주제들을 1871년의 파리 코뮌, 1917년의 러시아 혁명, 1936년의 스페인 혁명, 1930년대 초 독일에서의 반나치투쟁 등 혁명적 투쟁들을 참고하여 논의할 것이다. 두 번째 주제인 아나키즘과 마르크스주의의 비교는 어려운 일이다. 마르크스주의는 한 천재의 작업을 바탕으로 만들어졌고, 그렇기에 그 천재의 이름을 따 만들어졌다. 그의 지지자들은 그의 책들을 반드시 읽는다. 레닌, 트로츠키, 마오쩌둥 등의 다른 마르크스주의자들의 저작 역시 마찬가지다. 반면, 아나키즘은 그 창립자들이나 그들의 저작들과 훨씬 느슨한 관계를 가진 운동이다. 어떠한 아나키스트도 스스로를 프루동주의자나 바쿠닌주의자라고 부르지 않는다. 이들의 책은 거의 읽히지 않는다. 아나키즘은 몇몇 기본적 주제들을 중심으로 조직된 운동이지, 마르크스주의와 같은 명제들의 집합인 것이 아니다. 아나키즘은 필연적으로 방법론이 될 수밖에 없다. 하지만 마르크스주의자들 역시 아나키스트들 못지않게 광범위하고, 서로와 동의하지 않는다. 우리가 앞으로 볼 것처럼, 자유의지주의적 마르크스주의는 “프롤레타리아 독재”나 이행기 국가라는 관념에 대하여 아나키즘과 유사한 견해를 보인다. 나는 폴 굿먼이나 드와이트 맥도날드에 영향을 받은 평화주의적 아나키스트였다. 마르크스주의의 분파인 트로츠키주의자이기도 했다. 그리고 이제 나는 내가 계급투쟁적, 조직지향적(“강령주의적”) 경향을 가진 사회주의적 아나키스트라고 바라본다. 나는 아나키즘적 코뮌주의의 혁명적 전통에 입각하여 스스로를 정체한다. 나는 이러한 자기 정체화의 과정 속에서 항상 자유의지주의적 사회주의자이자 아래로부터의 사회주의의 신봉자였다. 마르크스주의를 학습한 아나키스트로서, 나는 마르크스주의의 이론과 실천에 아나키스트들이 배워야 할 가치가 상당히 많이 포함되어 있다고 본다. 다니엘 게랭을 인용하여 말하자면, “나는 투사적이고 혁명적인 아나키즘의 신봉자이”지만, “마르크스주의와 아나키즘의 사상에서 좋은 것들을 혼합하는” 것을 지지한다.(애브리치, 1995, p.468) 하지만 나는 마르크스주의가 일부 기초적 방법론에서 오류라고 바라보며, 이에 대하여는 후술하도록 하겠다. *** 2장. 국가란 무엇인가? 국가는 특정 지역의 지배적 세력으로서 계급 분할 사회에서 상류 계급의 이익에 복무하고, 그 외 계급의 위에 오롯하게, 고립되어 존재하는 관료적 · 군사적 기제다. 엥겔스는 『가족, 사유재산, 국가의 기원』에서 국가를 “무장한 인민 뿐 아니라 물질적 부속기구를, 감옥을, 모든 종류의 압제기구를 포함하고 있는 공적 세력”이라고 묘사한다. 국가의 관료들은 “사회 위에 서있는 사회 기구”이며, “스스로를 사회와 다르게 만드는 힘의 대변인”이다. 엥겔스는 “국가는 유산계급을 무산계급으로부터 보호하기 위한 조직”이라고 강조한다.[한국어 번역본 확보 필요] 아나키스트의 고전인 『국가 - 역사에서 국가의 역할』에서, 표트르 크로프트킨 역시 비슷하게 말한다. “국가의 개념은 사회를 지배하는 권력의 존재를 포함한다. 뿐만 아니라, 지방에 대한 지배를 중앙에 집중시키는 것, 즉 통치지역의 집중화, 사회적 삶의 많은 기능들을 몇몇 혹은 전체의 손에 집중시키는 것을 포함한다. 국가는 사회의 다양한 구성원들 사이에 완전히 새로운 관계가 발생하는 것을 전제로 한다. 국가의 입법과 경찰행정의 모든 기제는 특정 계급이 다른 계급을 지배하기 위하여 만들어진 기제이다.” (이 장에서 국가의 본질에 대하여 논하는 것은 맞지만, 나는 이 책에서 현대 마르크스주의자들이나 아나키스트들의 국가 이론을 다루지는 않겠다. 이에 관해서는 반 덴 베르그, 1988이나 해리슨, 1983을 보라.) 국가를 이와 같이 이해한다면, 자연스럽게 마르크스주의자 상당수가 동의하고 있는 국가 철폐의 한 방법론을 부정할 수밖에 없게 된다. 이들은 국가가 특정 계급이 다른 계급을 억압하는 기구이기에, 계급이 없는 사회에서 국가는 존재할 수 없을 것이라고 말한다. 압제자도 피압제자도, 착취자도 피착취자도 없는 사회는, 정의상 국가없는 사회가 될 것이라는 것이다. 이것은 마르크스주의에 대한 정확한 해석이다. 그리고 이 해석은 국가가 피착취계급을 지배하는 관료적이고 폭압적인 기구라는 설명을 무시한다. 국가가 이처럼 억압적이고 사회적으로 고립되어 존재하는 이상, 국가는 철폐될 수 없다. 이러한 국가기능을 유지하는 것은 단지 계급의 철폐를 방해할 뿐이다. 국가라는 사회적 기구로 조직된 엘리트는 새로운 지배계급이 될 것이다. 만약, 이론적으로나마 계급이 한번에 사라질 수 있다고 하더라도, 국가와 같은 폭압적이고 엘리트주의적인 기구는 계급을 재창조할 것이다. 소위 공산주의 국가의 경험은 복잡한 것이었지만, 이러한 일반화가 사실임은 충분히 보여주고 있다. 동시에 국가에 대하여 위와 같이 분석하는 것은 국가의 철폐라는 과업을 단순하게 만들 수 있다. 우리는 사회적 강제나 사회적 협력을 위한 필요를 철폐할 필요가 없다. 우리는 사회 위에 존재하며 사회적으로 고립된, 공무원, 정치인, 군인, 경찰 등의 특수신분들을 포함하고 있는 관료적 기제를 철폐하면 되는 것이다. 계급이 철폐된다면, 더 이상의 압제는 필요하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그 이후에도 사회적 기능들은 여전히 필요하게 될 것이다. 마르크스가 말하였듯, "공산주의 사회에서는 (...) 지금의 국가기능과 유사한 사회기능이 남아“있을 것이다. 만약 이러한, 현재 국가가 수행하는 기능들이 사회적으로 수행될 수 있다면, 국가는 철폐될 수 있으며, 청동도끼와 함께 고대박물관으로 보내어질 수 있다. 일부 아나키스트들은 압제당한 자들이 권력을 쟁취하려는 시도가 잘못된 것이라고 주장해왔다.(물론, 자본주의의 지지자들 역시 압제당한 자들이 권력을 쟁취해서는 안된다는 것에 동의하겠지만 말이다!) 반면, 나는 압제당한 자들이 권력을 쟁취하여 국가와 자본주의적 지배계급을 뒤집고 사회를 재조직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믿는다. 하지만 압제당한 자들이 국가권력을 쟁취하는 것을 목표로 하는 것은 오류다. 국가권력은 관료적-군사적 기제를 재창조할 뿐이기 때문이다. 국가일 필요가 없는 정치 체제는 “파레콘”(“참여 경제”)의 옹호자들에 의해 “행정제도”라고 불리워왔다. 다른 많은 이들처럼, 이들은 자본주의 국가를 인민평의회를 통해 조직된 정치 체제로 대체하고자 한다. (일부 급진주의자들은 “국가”가 아닌 “정부”를 지지한다고 말한다. 하지만 일반적으로 “정부”라는 단어는 “국가”와 동의어로 사용된다. “정부”라는 단어에는 많은 용처들이 있고, “국가”와의 관계를 묘사하는 것 역시 그 중 하나이다. 내가 “정부”라고 말할 때, 이는 국가의 표면을, 국가를 관리하고 대변하는 공적 행정부라는 국가의 임시적 인물들을 의미한다.) 인류가 존재해온 기간의 대부분에는 국가가 없었다.(바클레이, 1990) 인간은 국가가 건설되기 한참 전부터 존재했다. 호모 사피엔스(소위 “생각하는 인간”) 종은 500,000년 전부터 존재했다. 이 중 우리가 속해있는 아종인 호모 사피엔스 사피엔스는 50,000년 전부터 존재해왔다. 그리고 이 기간 중 다수에서, 인간은 소규모 수렵 채집(어로) 공동체에서 살았다. 누구도 토지, 식물, 동물 등을 “소유”하지 않았기에, 그 경제체제는 “코뮌주의적”이었다. 인간은 식량을 채집하고 소비하기 위하여 협력했다. 농업이 시작된 것은 단 10,000년 전일 뿐이다. 그 후에도 인간들은 작고, 단순한 마을에서 필연적으로 집체적인 생활을 영위했다. 국가는 5,000년 전까지는 시작하지 않았다. 이는 인류의 역사에 비교하자면, 어제 시작한 것과 같다. 이것은 국가가 인간 본성에 의하여 만들어진 것이 아님을 보여주는 중요한 사실이다. 만약 국가에 역사가 있다면, 국가는 그 시작이 기록된 것처럼 그 종말 또한 기록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는 당시보다 더 높은 생산성을 가지고, 소위 원시 사회의 직접 민주주의와 경제적 집체성을 회복할 수도 있을 것이다. 국가 전의 사회들에는 질서도, 심지어 강제성도 부족하지 않았다. 부족 공동체나 마을 공동체의 모든 남성 구성원들은 무장했다. 결정은 공동체 전체에 의해(일부의 경우 남성 전체에 의해) 직접 민주주의적으로 이루어졌다. 만약 개인들이 공동체의 결정을 따르지 않는다면, 공론의 압력이 그 행동을 교정할 수 있었다. 이 교정이 작동하지 않는다면, 조직되고 무장된 공동체가 그 의지를 강제할 수 있었다.(많은 경우 범법자를 그저 추방하곤 했다.) 공동체간의 갈등은, 불가피할 경우 전쟁을 통해 조정되었다. 전쟁은 매우 제한적이고 의식에 가까운 것이었다. 전쟁을 결정한 자들이 전쟁에서 싸웠다. 전쟁에 특화된 무장한 사람의 조직이 사회 전체 위에 군림하는 일은 발생하지 않았다. 국가는 계급사회의 발흥과 함께 시작되었다. 경제적 계급이 어떻게 등장하게 되었는가를 다루는 것은 이 책의 역량을 넘어서는 일이다.(혹은, 누구도 그것을 확실하게 할 수 없다.) 아마도 계급은 남성과 여성이라는, 노인과 청년이라는, 권위를 가진 샤먼과 나머지라는, 정복자와 피정복민이라는, 기존의 위계로부터 자라났을 것이다. 어느 순간, 사회는 인민대중의 생존에 필요한 것 이상을 생산할 수 있었고, 이로서 지배계급을 부양할 수 있는 잉여생산물이 생겨났다. 하지만 생산은 아직 모두에게 편안한 삶을 제공할 수 있을 만큼 충분하지는 않았다. 이것이 가능해진 것은 겨우 지난 수세기 전의 일이며, 그조차 가능성의 영역에서만 그러하다.(산업혁명이 일어난 것이 겨우 200년 전이라는 사실을 주지하자.) 잉여 생산을 통해 생활할 수 있는 것은 소수에 불과했다. 사회는 노동하는 다수와 그 노동을 착취하여 살아가는 소수로 나뉘었다. 기존의 분화는 더욱 깊어졌다. 국가는 계급 분화와 함께 만들어졌고, 국가와 계급은 서로가 서로의 근거가 되었다. 내부에서의 전쟁을 함축하고 있는 분열된 사회에서, 모든 남성 인민이 무장하는 것은 가능한 일이 아니게 되었다. 피억압대중은 무장해제되었다. 대중은 노예이자 천민이고 농노였기에, 그들의 주인들은 더 이상 대중에게 방어를 위임할 수 없었다. 지배자들은 무장한 강제집행관이라는, 이데올로기적 집행관(사제)이라는 직업계층을 만들어내었다. 이 갈등은 근대 자본주의 사회에서 정점에 이르렀다. 근대 자본주의 사회는 경쟁을 지배적 가치로 두었고, 만인의 만인에 대한 투쟁은 일상이 되었다. 노동자들은 사용자들과 갈등했다. 돈이 없는 자들은 돈이 많은 자들과 갈등했다. 각각의 자본가들은 다른 자본가들과 경쟁했다. 각국의 국내에서 인종과 민족들은 서로 갈등했다. 성별간의 갈등 역시 넘쳐난다. 미국에서는 매년 수천명의 여성이 남성과의 전쟁에서 얻어맏거나 살해당하고 있다. 각국의 자본가들은 타국의 자본가들과 갈등한다. 국제적 협력은 최소한에 그친다. “무장해제”를 향한 시도는 언제나 실패해왔고, 실패할 수밖에 없다. 전쟁에 대한 위협과 전쟁의 지속이야말로 민족국가의 핵심 기능이기 때문이다. 국가의 철폐는 혼돈을 낳을 것이라는 말이 있다. 이는 본말전도다. 국가는 자본주의적 혼돈의 필요조건이다. 경쟁과 갈등이 계속되는 사회에서는, 그 갈등을 봉합하기 위하여 국가가 반드시 필요하다. 이러한 조건에서 국가가 없다면, 사회는 산산조각 나 흩어질 것이다. 협동적이고, 사회화된 사회는 국가라는 화약통의 안전핀을 필요로 하지 않을 것이다. 사회는 현대 기술의 생산적 가능성을 이용하여 모두에게 편안한 삶을 제공할 수 있을 것이고, 사회적 의사결정에의 참여를 위한 충분한 자유시간을 마련할 수 있을 것이며, 창조적이고 고립되지 않은 노동을 모두에게 제공할 기회를 가질 수 있게 할 것이다. 이러한 계급없는 사회는, 더 이상 사회를 봉합하기 위한 국가를 필요로 하지 않을 것이다. (놀랍게도, 자본가들은 “아나키”라는 단어를 “혼돈”과 동의어로 사용한다. 하지만, 안/아르키는 어원상 “지배가 없음”을 의미한다.) 계급에 기반하고, 갈등이 넘치며 경쟁적인 사회에서 결정하고, 조정하는 체로서의 국가는 필수적인 존재다.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공산당선언』에서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현대의 국가 권력은 부르주아 계급 전체의 공동 업무를 관장하는 위원회에 지나지 않는다.” 사회 위에 폭압적인 권력으로 군림하는 기구만이 전체 상류계급(혹은 상류계급 중에서도 가장 권력을 가진 자들)의 이익을 위한 결정을 내릴 수 있다. 이를테면, 노동자들에게 최소한의 임금만을 주어 이윤을 유지하는 것이 모든 기업자본의 이익에 부합하는 것임은 분명하다. 하지만 모든 부르주아지가 이러한 정책을 채택하면 대규모 불만이 나올 수밖에 없고, 현대 산업을 유지하는 데에 필요한 교육과 동기부여의 수준을 낮출 수밖에 없으며, 내수시장을 파괴할 것이기도 하다. 하지만 각 기업의 사장들은, 이것을 알더라도 감히 임금을 올리지 못한다. 그렇게 하는 순간 그들의 이윤은 경쟁자들에 비하여 상대적으로 낮아질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여기서 국가가 등장하여 최저임금 입법을 하고, 전체 자본계급에게 이를 강제하여, 결과적으로 전체 자본계급의 이익에 복무한다.(물론, 지배계급의 일부, 이를테면 착취노동을 행하는 사용자들은 이 법을 회피할 방법을 찾아낼 것이고, 최저임금은 실제로 필요한 것보다 많이 부족하게 될 것이다. 이것이 자본주의다.) 자본가 계급 전체에게는 이익이지만 개별 자본가들과 그 그룹들이 행하지 않을 다른 행동들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모든 정부의 산업규제에 있어, 이는 동일한 방식으로 작동한다. 개별 자본가들은 정치적 · 경제적으로 무지한 경우가 잦기에, 체제를 유지하는 것보다 반동적 판타지를 충족하는 것을 선호하는 경우가 많다. 그렇기에 국가는 산업에 개입하여 자본가들을 자멸로부터 구원해야만 한다. 미국 역사에서 이에 관한 가장 적합한 예시는 프랭클린 루즈벨트의 뉴딜일 것이다. 상류계급은 루즈벨트를 증오했다.(이들은 루즈벨트를 “계급의 배신자”라고 부르기도 했다.) 하지만 대공황 당시, 자본주의를 자멸로부터 구원한 것은 프랭클린 루즈벨트였다. 루즈벨트는 경제에 대한 최소한의 국가 개입을 통하여 체제를 안정시키고 혁명을 회피했다.(물론 공황을 끝내기 위해 2차 세계대전을 필요로 하기는 했지만 말이다.) 국가는 단지 자본계급의 “집행위원회”일 뿐 아니라, 자본계급의 핵심적 보조수단이자 그 창조자이기도 한 것이다. 이것은 국가에 관한 자유주의적이고 사회민주주의적인 환상을 불러일으키기도 한다. 많은 사람들은 국가가 장기적으로 자본계급 전반의 이익에 복무하는 것을, 국가가 자본주의로부터 독립적으로 존재한다거나, 심지어 친노동자적이거나 사회주의적이 될 수도 있다고 혼동하게 된다. 나는 “다원주의”라는 주류 “정치학” 모델을 거부한다. 이 이론은 지배계급의 존재를 부정하고, 각자와 경쟁하는 다수의 엘리트들이 존재한다고 주장한다.(“폴리아키”) 세상에는 지배계급 내의 갈등이 있을 뿐 아니라, 노동조합, 농민조합, 교회, 평화운동 등 지배계급 외부의 사회적 이해관계들 역시 다양하게 존재하고 있고, 이 이해그룹들도 정부에 압력을 행사하고 있는 것은 맞다. 하지만 경제를 지배하는 주요 거대 사업체들을 운영하는 부유한 자들의 계층이 노동조합이나 게이 활동가 그룹들과 동등한 만큼 국가에 영향을 주는 이해그룹이라고 말하는 것은 우스운 일이다.(보다 세부적인 논박을 보고 싶다면, 밀밴드, 1969를 참조하라.) 언제나 사회와 국가를 지배해온 것은 자본계급(특히 가장 크고 강력한 자본계급의 일부)의 이해득실이었다. 마찬가지로, 나는 “토대”와 “상부구조”라는 마르크스주의 전통의 모델 역시 거부한다. 이 모델은 계급구조가 자율적 토대이며, 다른 모든 곳은 이 토대 위에 존재하고 이에 의존한다고 바라본다. 마르크스주의 역사학자인 엘렌 메익신스 우드는 “토대/상부구조의 비유는 언제나 가치보다 더 많은 오해를 낳아왔다.”고 적는다. 만약 국가가 자본주의 기능에 필수적인 것이라면, 어떻게 국가가 상부구조이고 토대가 아닐 수 있는가? 마찬가지로, 젠더, 인종, 민족, 생태 등 계급체제가 아닌 사회적 위계의 형태들은 상당히 많다. 이 서로 다른 지배의 체제와 하위체제들은 서로 포개어지며 상호작용한다. 이들은 사회적 총체로서 자본주의 계급구조를 떠받히는 동시에 그 계급구조에 의하여 떠받혀진다. 나는 계급체제가 사회 모든 것의 기저에 있다고 보기보다는, 계급체제가 사회의 작동 중심부에 있다고 바라보는 것을 선호한다.(인종, 젠더, 민족, 생태, 계급이 구체적으로 어떻게 상호작용하는지, 그리고 왜 이 중에서 계급이 중심에 있는지에 대하여 다루는 것은 이 문건에서 다루게될 범위를 초과하는 것이다.) 국가는 모든 위계적 체제의 “위에” 존재하면서 그 위계가 유지될 수 있도록 한다. 이를테면, 국가는 여성을 직접적으로 억압하는 법안을 만들 수 있다. 이를테면, 우파가 그토록 선망하는 낙태금지법을 보라. 지금까지도 미국국가는 임신 4개월 이상의 낙태권을 제약하고, 건강보험에서의 배제를 통해 낙태권을 부정하며, 원조라는 협박수단을 통해 타국의 낙태권에 반대해왔다. 하지만 지금 낙태는 합법이고, 여성의 차별을 금지하고 여성에 대한 차별시정조치 또한 존재한다. 국가의 여성 탄압의 주된 형태는 간접적 방법이다. 여성과 남성이 가부장제 아래에서 불평등함에도 모두를 평등하게 대우함으로서 실질적 불평등을 강화하는 것이다.(이러한 논지는 캐서린 맥키넌이 『페미니스트 국가이론을 향하여』(Toward a Feminist Theory of the State) 에서 제시한 바와 같다.) "법의 위풍당당함은 부자와 빈자가 똑같이 다리 밑에서 잠 잘 수 없도록 한다“는 유명한 말도 있지 않은가. 법(혹은 국가)이 강간피해자에게 그들이 동의하지 않았음을 합리적 의심을 넘어 증명하도록 요구할 때, 이는 남녀를 불문하고 평등하게 적용된다. 국가가 아동 성착취의 피해자들에게 수년이 지난 후에도 합리적 의심 이상의 증거를 제출할 것을 요구할 때, 이 역시 남녀를 불문하고 평등하게 적용된다. 하지만, 강간 피해자나 아동 성착취의 피해자가 될 가능성은, 여성에게 더 높이 존재한다. 마리아 미스는 노동자 착취라는 자본주의적 과정은 여성에 대한 남성의 착취 없이는 기능할 수 없다고, 그리고 이 두 착취 모두는 인류의 자연 지배와 본국에 의한 식민지 탄압에 필수적인 것이라고 결론짓는다. 미스는 자본주의와 가부장제가 별개인 것이 아니라, “자본주의-가부장제”라는 하나의 체제라고 느낀다. 국가는 자본주의-가부장제적 국가라 불리워야 한다. 미스는 “페미니즘 운동은 본질적으로 아나키즘 운동이다. 이 운동은 타인에 대한 착취나 지배로 살아가는 엘리트가 존재하지 않는 비위계적이고 비중앙화된 사회를 건설하고자 하기 때문이다.”라는 결론에 도달한다. 흑인에 대한 백인의 착취를 위하여, 국가는 인종주의적 법을 제정했었다. 미국 남부에는 “짐 크로우 법” 등의 격리 법령들이 존재했다. 자, 이제 흑인들에게도 투표권이 생겼고, 차별금지법과 차별시정조치가 생겼다. 그래도 경찰은 흑인들이 “흑인인 주제에 운전한다”면서 체포한다. 경찰들은 흑인들이 자기 집 계단처럼 소위 잘못된 장소에 있었다며 총격을 가하여 흑인 공동체에게 국가 폭력에 대한 공포를 불러일으키곤 한다. 그 와중 빈곤층에 대한 정부의 보조금은 극적으로 삭감된다. 결국, 부르주아 국가를 인종주의 국가라고, 민족제국주의 국가라고, 이성애중심주의 국가라고, 반생태주의 국가라고 부르는 것은 합당한 일이다. 내가 “부르주아 국가” 혹은 “자본주의 국가”라고 부르는 것은 이 모든 의미를 포괄하는 일이다. 내가 이것을 단지 “부르주아 국가”라고 부르는 이유는, 모든 억압의 형태들이 자본주의의 총체성 안에서 통합되고 맞추어지기 때문이며, 국가를 올바르게 묘사하는 모든 형용사들을 나열하는 것은 너무 길 것이기 때문이다. 지배계급은 국가를 자본주의적(가부장제적, 인종주의적) 개념을 확산시키는 수단으로 사용한다. 국가는 그 이데올로기가 사회 전체적으로 지배적이고 헤게모니적인 것이 되기를 바란다. 국가는 피억압대중의 억압이 자업자득이라는 것에 대한 전국적 합의를 만들어내기를 원한다. 학교는 많은 경우 국가의 기구다. 비국가적인 이데올로기의 전파수단은 교회, 신문, 텔레비전, 영화, 스포츠, 그리고 무엇보다 가족 등이 있다. 이것들이 그 자체로 나쁜 것은 아니지만, 여전히 지배계급이 부르주아 이데올로기를 확산시키는 데에 사용되고 있는 것은 분명하다. 계급사회를 안정적으로 유지하려면, 인민들이 자기가 ‘해야 하는 일’을 ‘하고 싶어지게’ 하는 것이 필수적이다. 국가의 무장력을 사용하는 것은 최종수단으로만 사용되어야 한다. 모든 사람의 뒤에 총구를 들이밀어야 하는 사회는 생존할 수 없다. 이러한 상황이 온다면, 지배자들의 이데올로기는 실패하고, 혁명이 발발하게 될 것이다. 전체주의적 자본주의 국가는 파시즘, 공산주의(볼셰비즘), 바트당 사회주의 등 지배적 이론을 가지기 마련이다. 그리고 이 이론들은 때로는 반자본주의적이라 자칭할 수도 있다. 이들은 단일정당을 이용하여 이데올로기를 확산시키고 대중의 지지를 동원해낸다. 미국과 같은 자본주의적 민주주의 국가들 역시 다소 느슨할 수는 있지만 자신만의 이데올로기를 가지고 있다. 애국주의, 민주주의, 자유, 자유기업, 반공주의(냉전기) 등이 그것이다. 때로는 종교적 가치 역시 제기된다. 요즈음에는 테러와의 전쟁이 중요한 이데올로기로 떠올랐다. 정당들은 지배계급의 경쟁을 대변하는 세력으로 대중들을 조직한다. 이들은 보수주의와 자유주의라는 경쟁적(이지만 자본주의를 옹호하는) 이데올로기를 확산시킨다. 투표가 열려 인민들은 그들이 사회를 운영하고, 자유와 진정한 민주주의 속에서 살아간다는 환상을 가지게 된다. 부르주아 국가는 군대와 감옥이라는 그 기본기능을 통하여 필연적으로 경제적 권력이 된다. 부르주아 국가는 세금을 수취하기 위해, 스스로를 유지하기 위해, 그들이 채용하고 있는 공무원들에게 돈을 지불하기 위해 권력이 필요하다. 국가는 합법적인 화폐를 만들 권력이 필요하다. 이것들만으로도 충분히 대단한 경제적 영향력이다. 국가는 태초부터 이것들과 다른 형태의 권력들을 이용하여 자본가 계급을 경제적으로 촉진한다. 이를테면 미국은 자국 시장을 보호하기 위한 해밀턴의 관세 정책, 미국의 신용을 보장하기 위한 국가 은행 등을 만들어왔다. 이러한 정책들은 부르주아지의 북부와 노예농장주의 남부(이들은 국가 은행이나 높은 관세, 철도회사에의 보조금 등 사업 친화적인 정책들에 반대했다.) 사이의 정치 투쟁에서 주요한 이슈가 되었다. 오늘날 미국에서 지배계급은 무제한의 자유 시장에 대한 교조주의로 악명이 높다. 하지만 미국의 지배계급은 지금까지 있어온 모든 정부 보조금과 세금 감면을 너무도 사랑해왔다. 특히 미국 지배계급은 미국의 “영구적 무장 경제”, 즉, 아이젠하워 대통령의 말을 빌리자면 “군산복합체”라 불리는 주요 기업들의 주머니로 국부를 이전하는 형태의 경제를 통해 이익을 보아 왔다. 미국은 대중적 압력에 응하여 노동권, 여성권, 환경보호 등을 위한 미약한 규제를 활성화하였다. 하지만 이 규제들은 언제나 서서히 무력해지고, 마침내 뒤집어져왔다. 이처럼 정부는 경제에 매우 큰 규모로 개입한다. 1930년대의 대공황은 케인즈가 옳았다는 것을 입증한다. 자본주의는 낮은 생산성과 낮은 고용율로 고착될 수 있었다. 당시에도, 지금도, 정부가 개입하지 않는다면 자본주의는 실패했을 것이다. 분노한 노동계급은 자본주의를 거부했을 것이다. 정부의 수요창출, 적자예산 편성, 화폐 공급의 통제라는 국가 정책이 자본주의 체계를 유지했다. 마르크스가 말한 것처럼, 국가는 지배계급의 “독재”다. 즉, 전체 인구 중 소수에 불과한 단일 계급이, 나머지 대중들을 지배하는 체제인 것이다. 국가는 이 지배를 강제한다. 전체 계급에 의한 독재(지배)는 한명이나 소수에 의한 독제와 같지 않다. 이를테면, 고대 그리스에서는 각 폴리스들은 전제군주정, 군사관료정, 과두정, 민주정 등 서로 다른 형태의 정부를 가지고 있었다. 그리고 이 모든 정부들은 노예소유 계급이 노예들을 통치하기 위해 조직한 방식들이었다. 아테네는 모든 시민들(이민자 가정 출신이 아닌 모든 자유민 남성들)에 의한 극단적이고, 직접적인 형태의 민주정을 가지고 있었다. 약40,000명 가량의 남성들이 총회에서 투표권을 가지고 있었고, 일반적으로 총회에는 수천명이 참석했다. 선출직은 매우 소수였다.(그리고 군사령관은 이 중 하나였다.) 대부분의 공직은 추첨으로 정해졌다. 이 체제는 매우 잘 작동했다. 하지만 아테네는, 그 민주주의가 아무리 놀라웠다 하더라도, 결국 노예소유주의 민주주의였다. 아테네의 민주주의는 가장 끔찍한 그리스 전제정만큼이나 노예들에 대한 계급적 독재, 혹은 민주적 독재였다. 이는 자본가 계급의 독재에 있어서 더욱 적확한 묘사다. 자본주의는 전제군주정 아래에서도, 경찰국가 아래에서도, 파시스트 전체주의 아래에서도, 다양한 형태의 제한된 민주주의 아래에서도 존재해왔다. 최초에 자본가들의 민주주의는 재산을 소유한 백인 남성들에게만 투표권을 주었다. 하지만 그들은 이 민주주의라는 사업에의 참여권을 서서히 재산, 성별, 인종을 넘어 확장시켰다. 자본가들에게 중요한 것은 소유권, 계약의 자유, 자유시장, 자본의 축적, 노동력에 대한 통제 등이다. 국가가 자본가들에게 이러한 것들을 보장하는 한, 그 국가는 구체적 형태와 무관하게 부르주아 국가다. 스탈린주의(소위 ‘공산주의’) 아래에서도, 국가는 재화의 생산, 내수 시장, 자본 축적, 노동계급의 부속화 등을 유지했다. 관료들이 개인적으로 기업 자산을 소유할 수는 없었다하더라도, 자본/노동의 관계는 강제되었다. 그렇기에 이 체제는 국가 자본주의다. 그렇기에 소련은 서구 자본주의와 다른 형태로 조직된 자본가 계급을 가졌을 뿐인 자본주의 국가다.(그리고 러시아에서는 이 차이마저 사라졌다.) 일반적으로 부르주아지는 제한된 민주주의를 선호한다. 자본가 계급 내에는 서로 다른 강령을 가진 경쟁 세력들이 존재한다. 노동계급에게 빵쪼가리를 조금 더 던져주어야 한다고 믿는 자들이 있고, 노동계급을 (사회보장정책을 축소하고 경찰 탄압을 확대하면서)개집으로 돌려보내려는 자들이 있는 것이다. 그리고 대의제 선거를 통해 이 경쟁세력들은 이 차이를 (그다지) 피흘리지 않고 좁힐 수 있다. 민주주의는 1인 독재에 비하여 만약 지도자가 위험할 정도로, 이를테면 히틀러처럼 비합리적이라면, 이 지도자를 더욱 쉽게 축출할 수 있다. 가장 중요한 것은 부르주아 민주주의가 노동자들에게 그들이 사회를 통제할 수 있고, 그들은 자유롭고 자기 통제력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라는 환상을 쥐어준다는 것이다. 매 2년, 혹은 4년마다 한 번씩 인민들은 투표소에 가 자기를 통치할 한 명, 혹은 두 명의 대리인을 고른다. 그리고 그들은 나머지 수백일을 일터에 있는 선출되지 않은 사장의 업무지시를 받는다. 부르주아 민주주의 치하에서 살아가는 것이 부르주아 전체주의 치하에서 살아가는 것보다는 노동자들에게 나을 수 있다. 부르주아 민주주의 치하에서는 최소한 자본가들에 대항하여 조직하기는 더 쉽고, 소수 관점(이를테면 아나키즘)을 듣기도 더 쉽다. 하지만 부르주의 민주주의는 그 최선에 있어서도 자본계급의 독재일 뿐이다. 국가는 부르주아 민주주의 치하에서조차 사회 전체 위에 군림하고, 국가의 집행부는 국가 전체 위에 군림한다. 아나키스트들은 국가가 자체적인 논리와 동인을 가지고 있다고 바라본다.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사회 각 계급들이 스스로 지배할 수 없을 때, 이를테면 노동자와 부르주아지 모두가 자기 요구를 발화할 만큼 강하지만 사회를 탈취하여 스스로 운영할 수 없을 때, 국가가 그 기층에 있는 계급들로부터 어떻게 유리되는지를 연구했다. 마르크스는 이것을 루이 나폴레옹 보나파르트의 독재에서 이름을 따와 “보나파르트주의”라고 칭했다. 하지만, 국가가 상대적으로 자율성을 가진다 하더라도, 부르주아의 기구라는 그 본성은 바뀌지 않는다. 국가는 언제나 자본주의의 통치, 사적소유권, 자본/노동의 관계를 강제한다. 국가는 사회의 이해관계를 전반적으로 보살필 수 있지만, 그 사회는 자본주의 사회다. 개량주의자들은 국가 내부, 특히 입법기구 내에서의 갈등을 지적한다. 이들은 차별금지법이나 최저임금법 등 인민들에게 유리한 법령들도 통과된다고 말한다. 이러한 예시를 바탕으로 이들은 국가가 노동대중과 자본가들이 경쟁할 수 있는 중립적 토양이라고 결론짓는다. 그리고 그렇기에 국가는 파괴되어서는 안 되고, 인민들이 국가를 잘 이용할 수 있도록 더욱 민주적이 되어야 한다.(라클라우, 무페, 1985) 이 주장은 잘못되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기업을 경영할 때에도 내부적 갈등은 존재한다. 노동자들의 압력을 마주했을 때, 노동조합의 조직을 막기 위해 경영진은 노동자들에게 양보할지 아니면 그들을 탄압할지를 두고 갈등한다. 경영진은 단체협약에 차별금지 조항을 넣거나 임금을 인상할 수 있다. 하지만 이것이 기업 경영의 본질을 바꾸지는 않는다. 이러한 협약 이후에도 기업은 여전히 자본주의의 도구이자 노동계급의 적이다. 기업은 국가와 마찬가지로 압력을 가해야 하는 대상이지 참가해야 할 집단은 아니다. 노동이사회의 결과들이 항상 마뜩찮은 것처럼, 사회민주주의자들의 정부 참여 역시 마찬가지다. *** 3장. 혁명이냐 개량이냐 1887년, 영국의 극작가 조지 버나드 쇼는 반국가주의를 비판했다. “나는 기계의 고장을 단순한 오류라 바라본다. 우리가 그 주인으로부터 기계를 탈취한다면, 기계는 우리에게 복무할 것이다. 국가라는 기계에는 결함이 있지만, 적들은 그 기계를 아주 잘 사용한다. 그리고 우리가 기계를 조금만 고친다면, 국가라는 기계는 우리에게도 잘 복무할 것이다.” 버나드 쇼는 아나키즘과 마르크스주의 모두에 반대하던 극단적 개량주의 집단인 페이비언 사회주의자였다. 페이비언 협회의 다른 지도자였던 베아트리스 웹과 시드니 웹처럼, 버나드 쇼는 계몽된 관료의 지도를 통한 점진적인 국유화를 통해 완전한 국가사회주의를 쟁취할 것을 추구했다. 페이비언 협회는 영국 노동당의 개량적 사회주의 노선(현재 이 노선은 폐기되었고, 자본주의적 자유주의로 대체되었다.)의 기초를 닦았다. 이들은 러시아 혁명이 대중의 무질서한 행동일 때에는 반대했지만, 혁명이 스탈린주의로 타락한 이래 그들은 러시아 국가의 열정적 지지자가 되었다. 이들은 스탈린이 국가라는 기계를 “조금만 고쳐서” 자애로운 관료들의 손에 두었을 때, 얼마나 잘 작동하는지를 보여주었다고 보았다. 이에 나는 다른 관점을 제시하고자 한다. 바쿠닌 이래 혁명적 아나키스트들은 자본주의의 분쇄 과정에서 국가를 전복하고, 분쇄하고, 근절할 것을 부르짖었다. 1871년의 파리 코뮌 이후, 마르크스도 동일한 결론에 이르러, “노동자 계급은 단순히 기성의 국가 기구를 접수하여 자기 자신의 목적을 위해 그것을 행사할 수는 없다”고 썼다.(『프랑스 내전』, 마르크스&엥겔스) 이 문장은 매우 중요한 것이었기에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이 문장을 『공산당 선언』의 서문에서 이 문장을 반복한다. 그리고 이것이 그들의 유일한 관점 변화가 드러난 부분이다. 마르크스는 피억압대중의 혁명적 목표는 “더 이상 예전처럼 관료ㆍ군사기구를 한편의 수중에서 다른 편의 수중으로 넘겨주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파괴하는 것”(『쿠겔만에게 마르크스가 보낸 편지』, 레닌 재인용) 이는 노동계급의 다수가 사회주의의 필요를 절감할 때, 무장반란이 일어나 국가를 파괴하여야 한다는 것이다. 국가는 자본주의 체계의 핵심 보조수단이다. 자본가 계급의 지배는 그 부도덕 때문에라도, 파괴되고 대체되어야 한다. 누군가는 명령을 내리고 누군가는 복종하는 체제. 누군가는 지배하고 누군가는 지배당하는 체제. 누군가는 잉여생산물로 살고 누군가는 그 잉여생산물을 고된 노동으로 생산하는 체제. 이 체제는 잘못되었다. 노동자 임금의 고저는 중요하지 않다. 자본주의의 근본적 오류는 빈곤이 아니라 소수의 다수에 대한 지배다.(물론 자본주의가 빈곤을 생산하는 것은 맞지만 말이다.) 자본주의는 남성의 여성에 대한 지배나 백인종의 유색인종에 대한 지배 등 다른 형태의 지배들을 지지하기도 한다. 나아가, 자본주의 경제는 안정적이지 않다. 이것은 때로는 거품을 창조하다가 어느 때에는 불경기로 향하는 등 경기를 따라 움직인다. 1970년대 이후, 국제경제는 전반적으로 침체했다. 대규모 군사지출이나 환경의 착취, 공적/사적 부채의 증대 등 인공적인 수단을 통해 겨우 또 다른 세계 대공황을 회피하고 있는 와중이다. 하지만 대공황의 위험은 언제나 상존한다. 자본주의는 빈곤한 국가들을 공고하고 균형잡힌 방식으로 산업화하는 데에 있어서도 무능함을 드러내었다. 자본주의 국가들은 세계 전역에서 전쟁을 일으키고 있다. 냉전이 끝나면서 핵무기는 그 어느 때보다 더 세계 전역에 퍼져나갔다. 강대국들은 여전히 핵무기 보유를 유지하고 있다. 전세계적이고 문명파괴적인 핵전쟁의 위협은 점증하고 있다. 자본주의적 산업주의는 자연의 균형을 망가트리고, 멸종을 불러오며, 자원을 고갈시키고, 오염을 증가시키며, 지구 온난화를 촉발하고 있다. 세계 2차 대전 이후 자본주의는 위험한 신기술들을 사용하면 새로운 풍요의 시대가 열릴 것이라는 느낌을 가져다주었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경제 위기가 생태 위기로 바뀌었을 뿐이다. 그리고 이 위기는 인류 문명 뿐 아니라 그 생존마저 위협하고 있다. 자본주의는 양적인 축적과 성장, 더 많은 수익을 향한 비합리적인 동력을 가지고 있다. 그 축적과 성장, 수익이 세계와 그곳에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어떠한 결과로 다가올지는 신경쓰지 않고 말이다. 간단하게 말하자면, 국가를 포함한 자본주의 체제는 비도덕적일 뿐 아니라 인류의 위협이기도 하다. 인류가 살아남아 문화적으로 성장하기 위해서는 자본주의 체제를 파괴해야 한다.(여기서 이야기하는 도덕적 주장들은 아나키스트적 주장들이다. 마르크스는 도덕적 동기들을 “유토피아적”이라 비판했다. 마르크스주의는 일반적으로 필요에 의한 동기를 이야기한다. 마르크스는 자본주의의 경제적 어려움과 전쟁에 대하여 이야기하였지, 환경에 대하여 이야기하지는 않았다.) 자본주의에서 국가없는 사회주의로 전환하는 것이 평화적이고 합법적이며 점진적인 방식으로 이루어진다면 좋겠다. 이것이 가능한 것이었다면, 모두는 이 방식을 택할 것이다. 일단 나는 그럴 생각이 있다. 토마스 제퍼슨이 <독립선언서>에서 혁명을 정당화하기 위하여 이야기한 것처럼 “진실로 인간의 심려는 오랜 역사를 가진 정부를 천박하고도 일시적인 원인으로 변경해서는 안 된다는 것, 인간에게는 악폐를 참을 수 있는 데까지는 참는 경향이 있다는 것을 가르쳐 줄 것이다. 그러나 오랫동안에 걸친 학대와 착취가 변함없이 동일한 목적을 추구하고 인민을 절대 전제 정치 밑에 예속시키려는 계획을 분명히 했을 때에는, 이와 같은 정부를 타도하고 미래의 안전을 위해서 새로운 보호자를 마련하는 것은 그들의 권리이며 또한 의무인 것이다.” 폭력혁명은 불확실한 것이고, 그에 수반하는 비용은 “우리의 생명과 재산과 신성한 명예를 걸”어야 할 정도로 거대하다. 하지만 자본가 계급이 지금의 권력을 쟁취한 것 역시 여러 혁명들을 통해서다. 이들은 영국에서 명예혁명을, 미국 독립혁명을, 프랑스 혁명을, 시몬 볼리바르 등에 의한 라틴아메리카 혁명을, 미국 남북전쟁을, 그리고도 더 많은 혁명들을 치루어냈다. 이제 부르주아지는 뻔뻔하게도 혁명이 부도덕하다고 비난한다. 우리가 원하는 것은 그 어느 때보다 더 큰 변혁이다. 모든 계급과 국가를 끝내는 것이다. 결국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그 어느 때보다 더 큰 봉기다. 페이비언주의자들은 노동자들이 서서히 투표에서 과반을 장악해갈 것이고, 이로서 부르주아 민주주의 정부 안에서의 권력을 확보할 것이라고 보았다. 그리고 그들의 당은 이렇게 확보한 국가에 대한 통제력을 활용하여 경제의 사회주의 강령을 도입할 수 있을 것이었다. 이는 “사회주의를 향한 의회적 방법”이라고 불렸다. 그리고 이러한 개량주의적 접근이 단 한번도 성공하지 못했고, 앞으로도 성공하지 못할 데에는 분명한 이유가 있다. 우선, 투표에서 승리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선거에는 많은 돈이 필요하고, 이로부터 이득을 얻는 것은 자본가들이다. 법적인 장애물들도 산적하다. 승자독식이라는 선거의 구조가 그러하다. 미국이야말로 최악의 법적 장애물들을 설계해 둔 곳이다. 선거구는 아주 섬세하게 개리맨더링 되어 현직 의원들은 항상 재선된다. 상원에는 각 주가 그 인구와 무관하게 2명씩의 의원을 보낸다. 이렇게 선거는 왜곡되고, 다수는 결코 변화를 만들 기회를 얻지 못한다. 미국의 대선을 보자. 각 주에서 다수를 차지하지 못하는 의견은 표로 세어지지도 않는다. 상원의원들의 임기는 6년이다. 임기가 종신인 판사들은 또 어떠한가. 더 크지만 선출되지 않는 정부인 대규모 관료제에 대해서는 말하지도 말자. 하지만 소위 사회주의(사민주의) 정당들은 유럽 등지에서 여러 차례 당선된 적이 있으니, 그 사례를 보자. 이들은 결코 모든 권력을 가지지 못한다. 의회와 법원과 관료집단과 군대가 이들을 가로막을 것이기 때문이다. 설혹 정부에 대한 통제를 온전히 가진다 해도, 이들은 경제를 통제하지 못한다. 이들은 자본주의 경제를 마주해야 한다. 그리고 이러한 경제체제 아래에서 사회주의 정책을 집행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만약 정부의 정책이 너무 급진적이라면, 자본가들은 정부에 압력을 넣을 방법을 수도 없이 가지고 있다. 정부가 자본가들의 “신뢰를 잃는 것”은 매우 위험한 일이다. 자본가들은 그 즉시 “파업”에 들어가 투자를 멈추고 재산을 해외로 보내고 공장을 닫을 것이다. 사회당 행정부가 이를 막기 위해 기업들을 확보할 수는 있지만, 이렇게 되면 그들의 개량주의는 사라지게 된다. 그렇기에 이러한 일이 발생할 경우, 정부는 자본가들에게 항복하고 최소한의 표어로만 존재하던 사회주의를 포기한다. 그렇지 않으면 그들은 다음 선거에서 내어쫓길 것이다. 자본가들의 “파업”은 중간계급과 실업자들을 양산하고, 이들의 표는 여당을 향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러한 일은 반복되고, 반복되고, 반복되어 왔다. 만약 자본가들께서 보시기에 사민주의자들이 너무 급진적이라거나, 자본가님들이 도저히 최소한의 개량조차 견디고 싶지 않으시다면 어떻게 되는가? 그렇다면 자본가들은 부르주아 민주주의와 그 이익을 포기한다. 그들은 미친놈들이 미친 듯이 타락한 중간계급과 고소득 노동자들의 대중운동을 조직하도록 돕는다. 이렇게 파시스트들이 세력화된다. 이들은 사회주의자들과 조합주의자들에게 테러를 행하고, 거리에서 사회주의자들을 내쫓고, 그 지도자들을 살해할 것이다. 인종적 혐오가 거리를 휩쓸 것이다. 군대는 쿠데타를 일으키라 선동당할 것이다. 선거는 취소될 것이다. 독재정부가 세워질 것이다. 파시스트들과, 혹은 파시스트들의 군대가 정부를 장악한 이후, 좌파들은 공격당하고 살해당할 것이다. 좌파진영이라는 이유로 활동가들은 물론 평범한 노동자들도 피 속에 놓일 것이다. 최악의 폭압이 수년간 몰아친 후, 제한적 민주주의가 재기동될 수도 있을 것이다. 좌파들이 온전히 길들여졌으니 말이다. 이것은 예측 따위가 아니다. 1920년대의 이탈리아, 1930년대의 독일과 스페인에서 일어났던 일이다. 1978년 칠레에서 아옌데 정부에 대해 벌어진 일이고, 중앙 아메리카에서도, 세계 방방곡곡에서 반복되고, 반복되고, 반복된 일이다. 이러한 파시스트 독재를 막을 수 있는 방법은 스스로와 스스로의 권리를 지키기 위해 투쟁할 준비가 된 노동자들이, 세계를 탈취하여 노동계급의 자주적 경영을 쟁취하는 것에 있을 뿐이다. 내가 관심을 두었던 첫 번째 선거는 1964년 민주당의 린든 B. 존슨과 공화당의 배리 M. 골드워터 사이의 대통령 선거였다. 이 선거야 말로 극우파의 공화당 장악의 시작을 알렸다. 나는 당시에 아직 투표연령이 아니었지만, 사회주의자들이 존슨을 지지해야 하는지에 대한 논쟁에는 관심을 기울였다. 당시 나는 골드워터는 베트남전쟁의 확전 등의 끔찍한 일을 할 것이기에 존슨을 지지해야 한다는, 더 온건하고 사민주의적인 관점이 옳다고 여겼다. 그리고 마이클 해링턴은 우익과 인종주의자들이 민주당을 떠나 공화당으로 모여들 것이고, 이로써 민주당은 노동조합과 흑인들과 급진주의자들의 정당으로 재창조되는 “정치적 재편”이 있을 것이라 주장했다. 존슨은 선거에서 완승했다. 그리고 그는 베트남전쟁을 크게 확전하고, 더 많은 군인들을 파병하고, 북베트남 폭격을 시작했다. 나는 환상에서 깨어났고, 깨달았다. “정치적 재편”을 기대하기에는 너무 일렀다. 극우파는 분명 공화당을 장악했지만, 민주당은 노동자와 피압제대중의 당이 되기는커녕, 마찬가지로 우선회하여 공화당 바로 좌측에 위치를 잡았다. 나는 존슨의 전쟁선동에 지쳤다. 그 이후 나는 어떠한 주요정당 후보에게도 투표한 적이 없고, 사실상 누구에게도 투표한 적이 없다. 두 번 속을 수는 없었다. 아나키즘과 마르크스주의 모두는 혁명적 분파와 개량주의적 분파를 가지고 있다. 누군가는 부르주아 국가를 파괴하려 하고, 다른 누군가는 현존 국가 속에서, 혹은 그 근방에서 변화를 추구한다. 이 둘 사이의 차이는 자본주의 아래에서 조금은 더 개선점을 추구하는 개량주의적 투쟁을 하냐 마냐의 문제가 아니다. 혁명주의자들은 일반적으로 체제 안에서의 개량을 위한 투쟁 역시 지지한다. 이 개량에는 임금의 인상, 단결권의 확보, 차별의 최소화, 시민적 자유의 확보 등이 있을 것이다. 개량은 좋다. 개량을 위한 투쟁은, 그것이 승리하건 아니건 간에, 노동자들에게 혁명의 필요성을 알게 해줄 수 있다. 하지만 혁명주의자들의 전략적 목표는 부르주아 국가의 철거에 있다. 아나키즘 운동 안에도 언제나 개량주의 분파는 존재해왔다. 스스로를 “아나키스트”라고 자칭한 첫 번째 인물인 피에르 조세프 프루동부터 시작하여 1960년대의 가장 저명한 아나키스트 저술가인 폴 굿맨까지 말이다. 이러한 아나키즘은 작은 사회적 변화들의 축적이, 서로와 관계를 맺는 새로운 방식들이, 새로운 사상이, 소규모 기구가 점진적으로 사회를 변혁할 것이라 믿는다. 누군가는 아나키즘이 권위주의 기구에 대한 영속적 저항이자 끝없는 투쟁이라고 바라본다. 이들은 사회는 결코 완전할 수 없고, 인류는 언제나 갈등과 실패와 불완전을 가질 것이라고 지적한다. 이는 옳다. 인간 발전의 한계를 미리 아는 것은 불가능한 것이지만 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논증은 새롭고, 전반적으로 더 나은 사회를 구성할 가능성과 부딪히지 않는다. 수세대에 걸쳐 우리는 다양한 사회 체계를 보아 왔다. 계급도 국가도 없던 수렵채집 사회부터 노예제 사회까지, 봉건제부터 자본주의까지 말이다. 그렇다면 다른 사회 체계를 추구하지 못할 이유는 무엇인가? 이 변화가 마지막 변화여야 하는가? 우리가 철폐하고자 하는 것은 인간의 불완전함이 아니다. 우리는 민족국가들이 부르짖는 핵전쟁의 위협이라도 철폐하고자 하는 것이다. 어떠한 아나키스트들은 점진적 변화의 결과로 새로운 사회가 올 것이고, 이 사회는 아나키즘적 코뮌주의 사회와 어느 정도 유사할 것이라 말한다. 이들 중에는 스스로가 혁명주의자라 말하는 이들도 있다. 어쨋건 이들은 자본주의가 아닌 다른 사회로의 변혁을 꿈꾸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들은 그저 고전적 개량주의자일 뿐이다. 이들은 하나의 사회 체계에서 다른 체계로 이행하는 데에 있어 질적인 단절이 필요하지 않다고 바라본다. 이들은 그저 자본가 계급을 우회하려 할 뿐이다. 이들은 국가가 자본주의에 개입하지 않을 것이라고 믿는다. 이들은 국가에 맞설 필요를 부정한다. 자본주의 국가에 적응해버린 아나키즘의 최악의 예시는 1차대전 발발과 함께 드러났다. 그들의 민족국가 정부를 지지했던 마르크스주의 지도자들처럼, 크로포트킨을 포함한 일부 유명한 아나키스트들은 제국주의 전쟁의 협상국을 지지했다. 개인주의적 아나키스트인 미국의 벤자민 터커 역시 협상국을 지지했다. 아나키즘적 조합주의자들이 건설했던 프랑스의 노동조합 연맹(CGT, 역자 주) 역시 그러했다. 다행스럽게도, 마르크스주의자들과는 달리 다수의 아나키스트들은 전쟁에 반대했다. 에리코 말라테스타는 크로포트킨 등이 “아나르코-정부주의자”라며 준엄한 비난을 퍼부었다. 그리고 이러한 사태들은 왜 아나키스트들이 제국주의 국가에 대하여 가장 날카로운 비판을 내어놓아야 하는지를 보여주었다. 개량주의적 아나키즘 분파의 주요한 경향성은 생산자/소비자 조합과 소규모 코뮌과 같은 대안적 기구를 건설하려 한다. 이러한 기구들을 건설할 요인은 여러 가지가 있겠으나, 개량주의적 아나키스트들은 이를 전략적으로 바라본다. 이들은 조합과 코뮌을 건설하고, 확장하고, 연방을 건설하여 그것이 자본주의와 국가를 대체하도록 하려 한다. 이러한 전략은 프루동이 가장 먼저 제시하였다. 이러한 전략은 선한 국가를 상정하지는 않지만(물론 이들 중 일부는 그것을 상정한다.), 최소한 국가가 중립적이어서 대안기구가 국가를 탈취하는 것을 허용할 것이라고 상정한다. 이들은 국가와 자본주의에 맞서 혁명을 일으키기보다는, 그 둘을 평화롭게 우회하려 한다. 국가 체제를 이용하고자 하는 자들은 항상 그렇다. 프루동 스스로부터가, 인생의 말년에 입법부 선거에 출마하여 당선되었고[1], 아무런 결과도 내지 못했다. 프루동은 지속적으로 권력자, 정치인, 공작들을 만나 그의 열망을 도울 것을 호소하려 했다. 협동조합과 대안기구들은 좋다. 이것들은 그 구성원들과 공동체에 많은 선을 행할 수 있다. 소비자 협동조합이나 노동조합은 어떠한 기업이건 잘 경영할 수 있다. 이러한 가능성은 민주적이고 협동적인 경제의 가능성을 논할 때 훌륭한 근거가 될 수도 있다. 하지만 혁명가들은 전략으로써의 대안기구 이론을 거부한다.(왜인지는 모르겠지만, 이 전략은 혁명적인 “이중권력” 개념과 혼동되곤 한다. 이 개념에 대해서는 러시아 혁명에 관한 장에서 다시 논하도록 하겠다.) 역사적 사례들을 보았을 때 협동조합의 주된 문제는 협동조합이 실패요인이 그 성공에 있다는 점이다. 협동조합이 성과를 거두면 그들은 자본주의의 부차적 형태로 편입된다. 생활협동조합은 건강한 식품을 팔겠지만, 비조합원들에 대한 착취로 그러할 수 있게 된다. 노동자 협동조합이 성과를 거두면, 그 조합원이 되는 데에는 너무 큰 비용이 들게 된다. 협동조합의 오래된 구성원들은 더 큰 이윤을 위해 기업질서에 복무하기를 원할 수도 있다. 다른 형태의 조합들은 그저 자본주의에 섞여든다. 나는 주거 협동조합에서 산다. 이 협동조합은 몇몇 은퇴한 기업가들과 학교 이사장들이 경영한다. 전문 경영인을 고용할 필요는 전혀 없다. 하지만 다른 모든 주거 협동조합과 공동주택들과 마찬가지로, 이것은 자본주의 체제에 위협을 주지 못한다. 가장 성공적인 아나키즘적 코뮌주의 공동체는 이스라엘의 키부츠 공동농장이다. 키부츠는 자본주의를 위협하기는커녕, 팔레스타인인의 소유를 훔쳐가는 시온주의적 식민주의의 핵심 부품이 되어 왔다. 만약 협동조합과 집단농장과 대안기구들이 자본주의에 위협적인 것이 되면 어떻게 되는가? 자본가들은 그것을 알아차리지 못할 정도로 멍청하지는 않다. 시장은 국가보다도 더한 자본가의 놀이터다. 성공하기 위해서는 적응이 필요하다. 너무 “대안적인” 기구들은 은행에서 대출을 받지도 못하고, 홍보가 허락되지도 않고, 사거나 팔 생산물을 구하지도 못할 것이다. 자본가들은 위협이 충분해지는 순간 협동조합의 사악함에 대하여 떠들어댈 것이다. 대충 협동조합이 자유시장경제를 위협한다고 말하면 되니까 말이다. 국가는 협동조합을 제약하거나, 심지어 불법화하는 법령을 통과시킬 수 있다. 이를테면, 수년 전 대규모 은행들은 신용협동조합에 대한 불평을 늘어놓기 시작했다. 신용협동조합은 조합원들이 소유하고 있는 비이윤적 은행기구로서 노동조합이나 다른 대중조직들의 후원을 받아왔다. 신용협동조합은 꽤나 잘 굴러갔다. 대자본가들의 은행은 신용협동조합이 세금과 규제로부터 너무 자유롭다고 주장했다. 이들은 신용협동조합을 더 많이 규제하는 법을 원했다. 그리고 그렇게 되었다. 이는 단지 작은 예시일 뿐이다. 협동조합과 다른 대안 기구들은 여러 장점들을 가지고 있다. 하지만 이것들은 자본주의 전복의 전략으로는 작동할 수 없다. 이들은 결코 국가에 대한 대중적이고 직접적인 투쟁을 대체하지 못한다. 아나키즘적 개량주의는 절대적 평화주의와 겹치는 바가 있다. 레오 톨스토이나 폴 굿먼 등의 많은 아나키스트들이 평화주의를 옹호한 바 있다. 평화주의를 거부하는 것은 폭력을 “지향”한다는 것이 아니다. 99.99%의 인류는 때로는, 불행하게도, 폭력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비평화주의적 아나키스트들도 그러하다. 오늘날 대부분의 아나키스트들은 정치인, 부자, 경찰, 대중을 향한 폭력, 즉 “테러리즘”을 거부한다. 1차 세계대전 전, 19세기 무렵에는 소수의 아나키스트들이 테러리즘의 방법론을 사용하여 몇몇 왕족과 귀족을 죽이기도 했다. 우리 시대에는, 스스로 아나키스트라 정체하고 있는 유나바머가 편지폭탄을 통해 사람들을 날려버리곤 했다.(주로 가난한 사람들이었다. 부자들은 편지를 열어줄 사람을 고용한다.) 이러한 행동은 평범한 사람들을 운동 바깥으로 밀어냈다. 그리고 이들은 그 반동으로 국가의 압제를 지지하기 시작했다.(9/11 테러 이후 미국에 벌어졌던 일을 생각해보라.) 1891년, 크로포트킨은 아나키스트들의 테러리즘에 대한 경험을 다음과 같이 소회한다. “...혁명을 이루는 것은 이러한 영웅적 행동이 아니다. 혁명은 그 무엇보다도 대중의 운동이다. (...) 수세기간의 역사를 가진 기구들은 수 파운드의 폭탄으로 파괴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이러한 행동의 시간은 지나갔고, 아나키즘적이고 코뮌주의적인 사상이 대중에 침투할 시간이 다가왔다.”( <라 리볼테>1891년 3월호) “테러리즘”에 대한 거부는 평화주의를 정당화하는 것이 아니다. 물론, 혁명의 시기라 해도 비폭력적 수단이 유효할 때가 있다. 파업투쟁 중 노동을 중단하거나, 다른 편의 군인들을 설득하기 위해 “선전”하는 것처럼 말이다. 하지만 비폭력의 한계는 분명하다. 비폭력은 갈등이 제한적일 때에는 작동할 수 있다. 간디가 영국을 인도 바깥으로 몰아낸 것은, 영국이 독립 인도에 영국 자본을 계속 투자할 수 있음을 알았기 때문인 것처럼 말이다. 하지만 봉합이 불가능한 갈등도 분명히 존재한다. 이러한 경우에는 결국 끝까지 투쟁하여야 한다. 자본가들이 노동계급에 대한 지배를 지속하거나, 노동계급이 이를 뒤집거나, 중간은 없는 것처럼 말이다. 비폭력은 나치와 같이 무자비한 적들에게는 유효하지 않다. 비폭력 시위대를 죽이고 죽이고 죽일 준비가 되어있는 적들은, 비폭력운동을 언제라도 때려부술 수 있다. 1950년대의 남아프리카공화국에서 이러한 일이 일어났고, 이 투쟁은 결국 무장봉기로 이어졌다. 코소보인들은 세르비아에 대한 비폭력투쟁을 수년간 시작했고, 마찬가지의 결과만을 낳았다. 마틴 루터 킹의 운동이 미국 지배계급의 개입과 보호 없이 남부의 백인 권력에 마주했다면, 유혈사태는 피할 수 없었을 것이다. 비폭력운동은 보통 전국단위, 혹은 세계단위의 뉴스를 이용하여 자기 이야기를 퍼트린다. 그리고 충분히 억압적인 체제라면, 비폭력투쟁에 대한 뉴스를 막는 것은 어렵지 않다. 비폭력 역시 폭력이라는 배경에 기반하고 있다. 영국이 간디의 비폭력운동을 탄압하지 못했던 이유는, 그들이 2차 세계대전을 치루며 약해졌기 때문이다. 일본군이 영국군을 압박하였기 때문이다. 영국 제국주의자들은 간디가 실패한다면 폭력적인 민족해방투쟁을 마주해야 함을 인지하고 있었다. 그런 것 보다는 인도 국민회의와 거래하는 것이 나았던 것이다. 마찬가지로, 마틴 루터 킹의 민권 운동 역시 말콤X로 상징되는 대규모 폭력의 위협에 기반하고 있었다. 그리고 이는 북부 게토들의 반란(혹은, 소위 폭동)에서 현실로 드러났고, 차별금지법의 제정으로 이어졌다. 민권법이 제정되었다 하더라도, 그 법은 정부가, 법원과 경찰과 같은 국가폭력을 이용하여 유지하는 것이다. 비폭력은 폭력이 없이는 아무 것도 아니다.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혁명주의자였다. 하지만 개량주의적 마르크스주의의 단초는 마르크스의 이론에 깊이 뿌리내리고 있다. 마르크스는 독일의 신문 편집장으로서, 프러시아 국가와 무해한 자유주의자들에 맞서 가장 철저한 부르주아 민주주의를 확보하기 위해 투쟁하는 십자군이었다. 마르크스가 혁명적 사회주의자(마르크스주의자)가 되기 전에도 그러했고, 그 후에도 마찬가지였다.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영국에서 의회 민주주의의 확장을 꾀하던 노동운동이었던 차티스트 운동의 지도자들과 밀접한 관계를 맺었다. 마르크스와 엥겔스의 전략은 급진적으로 민주적인 부르주아 민주주의 국가를 쟁취하는 것이었다.(당시 유럽의 준봉건주의적이고 전제주의-관료주의적이던 체제를 생각하면, 이 쟁취를 위해서도 혁명들이 필요했을 것이기는 하다.) 이러한 부르주아 민주주의 국가에서, 노동자들은 그들의 민주적 권리를 이용하여 대표를 선출하고, 그 대표들이 (공산당선언 2장 마지막 부분에 나온 것과 같은)사회주의 강령을 건설하자는 것이었다. 『공산당선언』은 “노동자 혁명의 첫걸음은 프롤레타리아트를 지배 계급으로 끌어올리는 것과 민주주의를 쟁취하는 것”이라 적고 있다. 그리고 이것은 “국가, 즉 지배 계급으로 조직된 프롤레타리아트”가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마르크스주의에서 말하고 있는 바, 사멸할 국가는, 이 국가인 것이다. 1871년의 파리 코뮌에서 마르크스는 파리의 노동자들이 정치적 구조를 재조직하기 위해 무엇을 하였는지를 보았고, 그곳에서 무언가를 배웠다. 마르크스는 파리 코뮌이 72일간 무엇을 하였는가를 통하여 국가와 혁명에 관한 더 깊은 이해를 도출해내었다.(이에 대해서는 다음 장에서 더 깊이 다루도록 하겠다.) 그는 사회주의를 투표로 얻어내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결론을 내렸다. “사회주의를 향한 의회적 방법”따위는 없다. 가장 민주적인 자본주의 국가라 해도 결국 타도되어 코뮌적 구조로 대체되어야만 하는 것이다. 하지만 마르크스는 이 새로운 깨달음을 바탕으로 그의 정치를 재편하지는 않았다. 오히려 마르크스는 현존 국가 안에서의 작업을 더욱 강조했다. 그는 국제노동자협의회(1인터내셔널)이 모든 국가에서 노동자정당을 건설하고 선거에 출마할 것을 제안했다.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파리 코뮌에서 노동자들이 정치권력을 확보할 필요성을 실증하였다고 주장했다. 노동자들은 자신만의 정당을 만들어 모든 부르주아 정당으로부터 결별해야만 했다. 노동계급은 이 당으로 조직되어 선거에 출마함으로서 권력을 노릴 수 있을 것이었다.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1871년 8월의 인터내셔널 런던대회에서 “정치적 행동과 노동계급”이라는 결의안을 채택하기에 이른다. 9년 뒤, 마르크스는 프랑스 노동자 정당의 창당에 다음과 같은 글을 보냈다. “집단적 수용은 오직 자주적 정당으로 조직된 생산자 계급(프롤레타리아트)의 혁명적 행동으로만 가능하다. (...) 그렇기에 보편선거권은 지금까지의 사기 도구에서 해방의 도구로 변화할 것이다. 프랑스의 사회주의적 노동자들은 조직과 투쟁의 수단으로 선거에 참여할 것을 결정했다. (...)” 이 강령은 아나키스트들의 반대를 누르고 채택되었다. 아나키스트들은 단지 노동자들의 사회주의 정당이 선거를 조직과 투쟁의 수단으로 사용할 것을 결정하였다고 해서 선거가 부르주아적 사기의 수단을 넘어선 해방의 도구가 될 수는 없다고 보았다. 선거주의 전략의 성격과 조직적 문제에 대한 갈등을 제쳐두더라도, 선거주의 전략은 마르크스와 아나키스트들 간의 주된 정치적 갈등이 되었다. 마르크스는 아나키스트들이 선거를 통한 노동자들의 집권과 문제제기의 중요성을 무시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아나키스트들을 “정치적 무관심주의자”들이라고 비난했다. 아나키스트들 역시 마찬가지로 마르크스주의자들이 자본주의 국가에 항복했고, 선거운동과 그 당선이 운동을 부패하게 만드는 효과를 무시한다고 비난했다. 선출의원들은 더 나은 생활조건과 부자 앞에서 손바닥을 비비는 것에 익숙해진다. 단지 선거에 출마하기만 한다고 해도, 정당들은 그 과정에서 국가를 운영하고 자본주의 경제의 방향을 제시하기 위한 정책들을 제시해야 한다. 결국 이들은 부르주아 정치인들처럼 생각하게 되는 것이다. 평화의 시기에, 대부분의 노동자들은 혁명적이지 않다. 그들의 표는 곧 그들의 개량주의적 의식의 총체와 같다. 엥겔스의 말년 동안 활동했던 영국의 마르크스주의자 윌리엄 모리스 등 일부 마르크스주의자들은 이러한 반선거주의에 동의했다.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유럽 각지에 사회민주주의 정당들을 건설하는 과정에서 그들의 정적이라 할 수 있는 개량주의자들과 효과적으로 동맹했다. 마르크스와 그 지지자들은 혁명을 위한 노동자 정당을 건설하고자 하였고, 그 동맹세력은 혁명을 예방하기 위하여 그 정당을 건설하고자 한 것이다. 나는 대체 마르크스와 엥겔스의 선거 전략이 무엇이었는가를 모르겠다. 마르크스는 가끔씩, 영국이나 미국 등의 일부 국가에서는 노동자 정당이 평화롭게 권력을 확보할 수 있으리라 본다고 말했다. 과연 그렇게 되었을지는 의문이다. 하지만 마르크스는 이것이 “노예소유주들의 반란”이 이에 뒤따를 것이라 예견함으로서 이 주장들을 보조했다. 그는 링컨이 민주적 절차에 따라 미국의 대통령으로 당선되었을 때를 이야기한다. 노예소유주들은 투표를 수인하지 않고 봉기했다. 그들은 우수한 장교들을 가지고 있었고, 정부를 전복하고 미국을 분열시키고자 했다. 피튀기고 쓰라린 내전이 뒤이었다. 마르크스는 산업화된 세계 대부분에서(당시의 기준으로 이는 유럽을 의미한다.) 푝력혁명이 아마도 필연적일 것이라 바라본다. 자본가들은 평화롭고 민주적인 변화를 용인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내가 잘 모르겠는 것은, 대체 마르크스가 어떻게 선거에서의 승리가 혁명으로 이어진다고 보았는지에 대한 부분이다. 엥겔스는 노동자들은 유산계급으로부터 독립된 당으로 조직되는 만큼 그 정치적 준비 정도를 드러낼 수 있다고 적었다. “보통선거권은 노동계급의 성숙 정도를 보여주는 징표이다. 보통선거권이라는 온도계가 노동자들의 비등점을 가리킬 바로 그때, 노동자들과 자본가들은 자기들이 무엇을 할 것인가를 알게 될 것이다.” 솔직히 말해서, 이는 부적당해보인다. 반면, 엥겔스는 선거가 국가와 경제를 바꾸지 못한다는 것을 인지한다.(선거는 대중의 의견의 지표 “이상이 될 수 없다”) 반면.... 그리고 또 무슨 ‘반면’인가? 우리는 마르크스주의적 선거주의에 대한 1세기 이상의 경험을 가지고 있다. 역사적 증거는 반선거주의자들이 옳다는 것을 드러낸다. 독일 등지에서 사회민주주의자들은 그들이 혁명적이고 마르크스주의적이라고 주장한 당을 건설했다.(영국 노동당은 그렇지 않다. 이 당은 단 한 순간도 스스로가 혁명적이라거나 마르크스주의적이라고 주장한 적이 없다.) 말은 번지르르했다. 이들은 다수의 정치인들을 의회로 보냈고, 평범한 노동자보다 훨씬 잘 사는 당 관료들의 관료제를 건설했으며, 그 아래에서 노동조합 내 관료주의를 건설했다. 이들은 기관지를 펴내고 노동자들을 위한 대중모임들을 후원했다. 이것들이 어떻게 혁명적 변혁을 이끌 수 있는지는 그다지 고려되지 않았다. 이들은, 언젠가 자본주의 경제는 공황에 빠질 것이고, 노동자들이 “끓는점”에 도달하면, 그때 혁명이 오리라 믿었다. 언젠가는 말이다. 많은 관료들은 이것이 일상활동과는 무관하다고 여겼다. 한때 엥겔스의 가까운 동료였던 에두아르드 베른슈타인을 필두로 한 공개적 개량주의 경향이 등장했다. 베른슈타인은 사회주의의 최종목표를 포기하고, 일상적 이익을 위한 제한적 투쟁을 진행하자고 주장했다. 그리고 1914년, 유럽 전역과 세계 각처에서 제국주의 전쟁이 발발한다. 독일, 프랑스, 영국 등지에서, 한때 서로를 동지라 불렀던 사회주의 정당들이 서로에 대한 전쟁에 찬성하기 시작했다. 많은 좌파들(이를테면 블라디미르 일리이치 레닌)은 이 상황에 크게 충격 받았다. 전쟁을 비판했던 사회주의자들도 있었지만, 일부 극좌파들을 제외하면, 이들 역시 찬전파 형제자매들을 비난하지 못했다. 전쟁 이후, 주요 사민주의자들은 러시아 혁명을 방해하고, 독일이나 이탈리아 등지에서 발발한 혁명을 무너트리고자 했다. 독일 사회민주당의 지도부는 군대와 동맹하여 로자 룩셈부르크와 칼 리프크네히트, 다른 많은 혁명적 사회주의자들을 살해했다. 전간기를 거쳐가면서, 사회민주주의자들은 나치를 포함한 파시스트들의 발흥을 막지 못했다.(독일과 스페인에서 사민주의자들이 파시즘과의 투쟁에서 어떻게 실패했는가는 이후에 논하도록 하겠다.) 2차 세계대전 이후 사민주의자들은 냉전기 미제국주의의 완전한 지지자가 되었다. 아직도 그들은 새로운 사회 체계를 향한 어떠한 주장도 내어놓고 있지 않다. 그들 안에 남아있는 “사회주의” 혹은 “노동”은, 오직 그 이름뿐이다. 이들은 정중앙의 약간 왼쪽에 존재하는 자본주의 정당들일 뿐이다. 1차 세계대전 동안, 레닌과 다른 사회주의자들은 사민주의가 실패했음을 깨달았다. 레닌은 마르크스주의에서 혁명적 정신을 되살려, 다시 시작하고자 했다. 레닌의 볼셰비키가 러시아 제국의 권력을 확보한 이후, 레닌은 공산주의 인터내셔널(코민테른)을 창설하여 세계 각처에 지부(당)을 건설하고자 했다. 코민테른에 가맹하고자 하는 당에게는 그 유명한 21개 조항을 준수해야 했다. 하나는 선거에 참여하는 것이었다. 레닌은 선거가 평화롭고 합법적인 사회변혁을 가져올 것이라 믿지 않았다. 하지만 그는 선거에 출마하는 것이 공산당의 혁명적 선전을 위한 기회를 제공할 것이라 믿었다. 만약 당선되어 의원으로 활동한다면, 이는 정치 선동을 위한 더 나은 장을 제공할 것이었다. 공산당의 후보들은 계속해서 외쳐야 했다. “혁명이 필요하다! 노동계급의 혁명만이 사회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 레닌은 선거에서 공산주의자들이 개량주의 정당을 적극적으로 비판하는 동시에 지지할 수도 있다고 보았다.(최소한 당대에, 사민주의정당들은 스스로가 사회주의자라고 자처하고는 있었다는 사실을 기억하자.) 공산주의자들은 대중주의적 개량주의자들을 지지하여, 그들이 사회주의적 공약을 지키지 못한다는 사실을 드러내어야 했다. 레닌은 공산주의자들이 사민주의자들을 지지하는 것은 “밧줄이 목매달린 자를 지지하는 것”과 같다고 말한다. 전세계적으로 한때 아나키스트였던 이들을 포함한 절대 다수의 혁명적 경향의 활동가들이 코민테른에 매료되었다. 최초에 이 공산주의자들은 선거를 이용하자는 레닌의 의지에 반대했다. 레닌과(트로츠키 등 그의 볼셰비키 동료들)이 초기 공산주의 운동의 우파를 형성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잘 알려지지 않았다. 레닌은 좌파 공산주의자들에 대한 유명한 문건, 『공산주의에서의 “좌익” 소아병』을 펴냈다. 이 논쟁에서 의회와 선거 참여에 관한 문제는 기존 노동조합에의 (비판적)참여의 문제와 혼재되어 제시되었다. 이 문건에서는 다루지 않았지만, 같은 맥락에서 제기되었던 문제는 민족해방투쟁에 대한 (비판적)지지여부였다. 이 문제들을 동일선상에서 바라볼 필요는 없다. 나는 노동조합에 참여하는 것이나, 제국주의에 맞서 억압민족의 자기결정권을 지지하는 것에 참여하는 것에 있어서는 레닌이 옳았다고 생각한다. 물론 선거에 있어서는 틀렸지만 말이다. 어쨌든 레닌은 코민테른에서 벌어진 논쟁에서 완승했다. 이후 일부 좌파 공산주의자들은 인터내셔널에서 분열하여 다른 문제에 집중하기 시작했다. 그 문제는 러시아 공산당이 건설한 일당독재(당-국가)에 대한 반대였다. 좌파 공산주의자들은 당과 국가가 아닌 평의회(소비에트)가 노동자 지배의 기저여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들은 평의회 공산주의자라 불리기 시작했다. 공산당의 선거 역사는 사민주의자들의 그것만큼이나 암울하다. 단 하나의 차이가 있다면, 공산당은 스탈린 치하 러시아 관료제의 대외정책에서의 이득을 위해 조종되었다는 것이라 하겠다. 이것을 제외하면, 공산당은 선거 과정에서 부패했다. 혁명이 머지않았다고 여겨지던 잠시간, 당은 혁명적 메시지를 확산시키는 데 집중할 수 있었다. 하지만 평화의 시기에, 당 지도부는 그 시기에 적응한다. 당은 유권자들을 만족시키기 위한 실질적 개량 정책을 내어놓는다. 그러는 동안 전업 공산당 정치인들과 사무국이 등장한다. 그리고 소련의 최종 붕괴와 함께 공산당들 역시 자기 결정권 속으로 내던져졌다. 공산당들 모두는 소위 혼합경제라 불리는 개량주의 강령을 채택했다. 이는 자본주의의 유지보수일 뿐이었다. 공산주의자들은 그저 새로운 사회민주주의자일 뿐이다. 프루동 이래, 선거라는 방법론을 시도해본 아나키스트들은 간헐적으로 등장했다. 저명한 아나키스트 저술가인 머레이 북친은 아나키즘에 가치있는 기여를 한 사람인 것은 분명하다. 특히 아나키즘과 생태주의 이론을 접합시키는 데에 있어 아주 큰 기여를 하기도 했다. 하지만 북친은 “자유의지주의적 지방자치주의”라 불리는 강령을 만든 사람이기도 하다. 이 방법론의 핵심은 각 지방자치단체에서 선거에 출마하여 지역 공동체를 직접 민주주의로 운영되는 자유의지주의적 코뮌으로 바꾸어내는 것이다. 이는 미국에서 연방주의가 여전히 유효하고, 그 느슨한 연방 속에서 혁명이 없는 급진적이면서도 평화로운 변화가 가능하리라는 믿음에 근거하고 있다. 자유의지주의적 지방자치주의에 입각한 선거전술이 끔찍하게 실패하였다는 것은 놀라운 일도 아니다. 그 시도가 이루어졌던 마을과 도시 정부는 여전히 연방정부와 주정부의 일원이고, 국가를 구성하고 있다. 지방정부가 행하는 것 중 너무 급진적인 것이 있다면, 상위 정부와 법원은 언제고 그것을 뒤집을 수 있다. 지역 자본가들은 언제고 공동체로부터 철수하여 지역 경제를 파괴할 것이다. 지자체는 법정관리에 들어갈 것이고 말이다.(뉴욕 주가 뉴욕 시의 예산 과정을 압수한 것을 보라.) 간단히 말해서, 이 모든 선거 전략들은 마르크스가 말한 것처럼 “단순히 기성의 국가 기구를 접수하여 자기 자신의 목적을 위해 그것을 행사”하려는 시도에 불과하다. 혁명적 아나키스트들이 이야기해온 것처럼, 선거라는 방법론은 제대로 작동해본 역사가 없다. 모든 선거가 유용하지 않다는 것은 아니고,(이를테면 국민투표 같은 경우는 유용할 수 있다.) 혁명적 아나키스트들이 전술적 필요를 위해 선거에 출마하면 안된다는 것도 아니다. 단지 선거주의를 전략으로 두는 것은 오류라는 것이다.(미국의 상황에 대하여 이야기하는 것은 아니다. 다수의 미국 좌파들은 민주당을 지지해왔다. 그리고 민주당은 미국의 자본주의적 제국주의, 전쟁예산, 인종주의의 두 번째 기수로 존재해왔다. 민주당을 지지하는 모든 시도는 그저 역겨울 뿐이다.) 개량주의자들은 반선거주의가 실제로 반란을 일으켜내지 못하는 이상 아무것도 남길 수 없다고 주장해왔다. 이들의 주장에 따르면, 반선거주의는 혁명의 준비가 되기 전까지 평범한 사람들의 일상생활을 개선할 수 없다. 하지만 노동계급과 피억압대중의 삶에 있어 대부분의 개선은 비선거적 투쟁을 통해 이루어졌다. 이를테면, 30년대 미국에서 노동자들은 대규모 노동쟁의들에 참여했고, 실업자들을 조직하고, 노조를 결성하고, 대규모 파업에 나섰으며, 공장을 점거하고, 대규모 집회를 개최했다. 조합주의자들은 구사대, 백골단, 경찰, 군대와의 격렬한 전투를 이어갔다. 그 결과로 이들은 단결권을 얻었고, 기업과 정부로부터 얻어야할 것들을 얻어냈다. 오늘날 노동조합이 취약해진 것은 이러한 투쟁적 대중행동 노선을 포기하고 로비에 전념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노동조합에 대한 분명한 지지를 표명한 최초의 사회주의 사상가는 마르크스였다. 당시 프루동은 노동조합과 파업을 혐오했다.) 대중적 급진화의 파고는 50년대 후반에 다시금 몰아쳤고, 70년대 중반까지 지속되었다. 이 급진화는 짐 크로우법이 통과되고, 남부의 아프리카계 미국인들이 합법적으로 격리되면서 시작되었다. 이 법은 대중의 비폭력적인 “시민불복종”(혹은, 그저 위법행위라고도 한다.)을 불러일으켰다. 북부의 도시에서는 “폭동”이 일어났다. 그 결과로, 법적 격리는 철폐되었고, 아프리카계 미국인들의 투표권이 인정되었으며, 차별금지법과 차별시정조치가 법제화되었다. 그러던 중 베트남전쟁에 대한 반전운동이 시작되었다. 이 운동은 공개적 병역거부와 비공식적 병역회피, 대중집회, 대학 캠퍼스 점거와 파업, 시위 대오의 폭력과 군경의 더 큰 폭력, 탈영, 항명, 프래깅 등을 포함하고 있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베트남 민족주의자들이 미군과 그 꼭두각시(남베트남)에 대하여 가한 군사적 압력도 있었다. 전쟁이 끝나기도 전에 징병은 종말점을 맞이했다. 미군은 철수해야 했다. 대통령 녹취록이 공개된 지금에 와서야, 우리는 닉슨이 북베트남에 핵무기를 투하하려 했지만, 이를 시행하였을 경우 그것이 캠퍼스에 미칠 영향이 두려워 하지 못했다는 것을 알게되었다. 그리고 닉슨이 옳았다. 우리는 백악관을 무너트렸을 것이다. 당대의 반란적 운동 중에는 LGBT 해방운동 역시 있었다. 이 운동은 뉴욕시 크리스토퍼가의 한 바에서의 반란으로 시작을 알렸다. 트렌스젠더와 게이 매춘부들(가장 무시되는 이들)은 경찰의 폭력에 맞받아쳤고, 전국적 운동을 촉발했다. 이후 ACT-UP 동지들을 비롯한 여러 동지들이 에이즈환자에 대한 진료거부에 맞선 아나키스트적인 직접행동을 진행했다. 여성해방운동 역시 등장했다. 반인종주의와 반전운동을 통해 경험을 쌓은 많은 여성 활동가들이 이 운동에 몸담았다. 이들은 운동사회 속에서조차 2등시민이 되어버리는 것에 대하여 환멸을 느끼고 평등한 조직을 건설하고자 했다. 시위와 집회, 의식화그룹들이 주요한 역할을 맡았다. 노동계급투쟁 역시 확대되었다.(그리고 이것은 당대를 바라볼 때 무시되는 경우가 많다.) 주요 산업에서의 비공인파업들이 몰아쳤다. 이 파업들은 주로 흑인 노동자들이 주도했다. 이 중 가장 유명한 것은 우편노동자들의 파업이 있을 것이다. 노동조합은 정부주도 고용과 건강보험을 확보할 수 있었고, 이것에도 흑인노동자들이 포함되게 만들 수 있었다. 마틴 루터 킹이 암살당한 것이, 아프리카계 미국인 청소노동자들의 투쟁을 지지하기 위해 멤피스에 있을 때라는 것을 잊어버리는 사람은 참으로 많다. 물론 이 투쟁들에서 합법적인 선거운동들이 한 역할도 분명히 있다. 정치인들이 분노한 인민들의 앞으로 달려와 그들의 지도자라고 주장하지 않았는가. 결국 이러한 배신은 성공했고, 운동은 붕괴했다. 국가를 파괴하고 자본주의를 무너트리는 혁명적 계획은 단지 장기적 목표로 그치지 않는다. 대중투쟁이 극단적이고 투쟁적이며 권위를 무시하고 비타협적인 분노를 표출할 때, 즉 최대한 혁명적일 때, 지배계급은 그제야 개량을 허용한다. 지배계급은 노동계급을 두려워할 줄 알아야 한다. 친절하고 길들여진 합법적 야당 따위는 그들에게 압력을 가할 수 없다. 지배계급은 그저 무시할 뿐이다. 소규모의 혁명적 전위집단 역시 마찬가지다. 하지만 급진적인 대규모 운동은 그 누구도 얻지 못할 만큼을 얻어낼 것이다. 이것이 노동계급이 혁명주의적이어야 할 마지막 이유다. 우리의 적들은 노동자들이 많은 약점을 가지고 있다고 말한다. 이들에게 노동자들은 인종주의적이고, 성차별적이며, 애국적이고, 종교적으로 근본주의적이다. 이들에게 노동자들은 자기보다 낮은 이들을 업신여기고, 더 나은 이들을 선망한다. 이들에게 노동자들은 상류계급에 편입되고자 하는 무의미한 열망을 가지고 있으며, 일반적으로 강력한 지도자가 그들을 구원해줄 것을 열망한다. 그리고 아마 많은 부분이 사실일 것이다. 하지만, 노동자들이 다른 계급보다 더 인종주의적이고 성차별주의적이며 애국적이거나 하다는 근거는 없다. 그렇기에 여기에서 문제가 도출된다. 노동계급이 이 약점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무엇이 필요한가? 바로 진정한 적들에 대항한 투쟁이다. “한 인민이나 계급이 스스로 주인됨에 걸맞아지게끔 하는 방법은 무엇이겠는가? 오직 투쟁만이 그렇게 할 수 있다. 오직 민주적 권력을 위한 투쟁을 통해서만, 그들은 스스로 학습한다. 그들은 투쟁을 통해서만 그 힘을 다룰 수 있을만큼의 수준으로 스스로를 향상시킨다. 그 어떠한 계급에게도, 다른 길은 열려있지 않다.”(The two souls of socialism. In E. Haberkern (ed.) Socialism from Below. NJ: Humanities Press. Pp. 2–33. www.ana.edu.au/polsci/Marx/contemp/pamsetc/twosouls) *** 4장. 마르크스주의적 이행기 국가 마르크스는 『고타강령 비판』에서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자본주의 사회와 공산주의(코뮌주의 - 역자 주) 사회 사이에는 전자에서 후자로의 혁명적 전환의 시기가 놓여있다. 또한 이 시기에 상응하는 정치적 이행기가 있으니, 이때의 국가는 프롤레타리아트의 혁명적 독재 이외의 다른 것일 수가 없다.” 이 언명에서 마르크스가 자본주의 국가를 철거하고, 그 자리에 새로운 노동자국가를 건설하려 했다는, 하지만 이 역시 더 나은 독재가 아니었다는 해석이 도출된다. 어쨋건 이 독재적 국가는 어떻게든 “사멸”할 것이다. 아나키스트들은 이 개념에 반대했다. 아나키스트들은 자본주의 국가를 즉각적으로 계급이 없고, 국가도 없으며, 화폐도 없고, 군대도 없는 코뮌주의 사회로 전환할 것을 요구했다. 마르크스주의와 아나키스트적 관점 모두에는 일말의 진실이 담겨있다. 하지만 둘 모두는 진실 전체를 다루지 않는다. 특히, 마르크스에 대한 자유의지주의적 해석은 사실 다수 아나키스트들의 관점과 유사하기도 하다. 자본주의로부터 온전히 사회주의(코뮌주의)적인 체제로 넘어가는 과정에서 이행기가 있어야 한다는 발상은 거의 “상식적”인 것으로 보인다. 혁명 중에는, 그리고 혁명 이후 상당 기간 동안에는 반혁명세력과 방해공작으로부터 새 사회를 방어해야 할 필요가 발생할 것이다. 어떤 경우건 간에, 자본주의라는 사회가 길러낸 다수의 사이코패스들과 반사회분자들이 다른 이들을 해치는 것을 예방할 필요는 있을 것이다. 이 모든 것들은 방어와 안전을 제공할 유사국가기구의 필요성을 제시하는 듯하다. 나아가 인민대중들이 자본주의 아래에서 성장했다는 사실을 잊어서도 안 된다. 물론 인민대중들이 새로운 체계가 제시하는 이상에 끌리기도 하겠지만, 여전히 물질적 동인 역시 필요하다. 이러한 사회는 온전한 코뮌주의에 비해서는 약간 부족한 것이다.(마르크스는 하위 단계 코뮌주의와 고등의 완전한 코뮌주의 단계를 구분했다.) 국가의 사멸이라는 개념조차 어느 정도는 말이 되는 바가 있다. 시간이 지날수록, 자본가 계급의 규모와 영향력은 줄어들 것이고, 이들은 새로운 사회에 점진적으로 통합될 것이다. 구체제는 사멸하고, 그 잔재는 축출될 것이다. 이렇게 되었을 때 부르주아지를 억제할 필요는 없어질 것이다. 혁명이 국제적으로 확산되고 내전들에서 승리한 이후, 군대의 필요성은 사라질 것이다. 풍족하고 건강하며 행복한 사회에서, 반사회적 행동들은 빠르게 사라질 것이다. 경찰식 통제의 필요성 역시 빠르게 사라질 것이다. 그러면서도 노동대중의 사회운영 참여는 점점 더 증가할 것이다. 인민들은 더 많은 교육을 받게 될 것이고, 참여를 위한 여가시간 역시 늘어날 것이다. 이렇게 모두가 통치에 참여한다면, (인민과 유리된) 정부는 사라질 것이다. 지난 혁명들 모두에서 인민들은 대중봉기에 참여했다. 결국 그들 중 일부가 새로운 지도자가 되고, 나머지는 일상으로 돌아갔다. 하지만 오늘날 우리가 확보하고 있는 기술력을 사회주의적 사회 체제와 결합할 때, 인민들은 더 많은 자유시간을 가지게 될 것이다. 혁명 이후 대중의 참여는 계속 증대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이행기 개념, 이행기적 노동자국가, 국가의 사멸 등이 제대로 작동하지 않았음을 알고 있다. 마르크스주의자들이 세워냈던 국가들은 사멸하기는커녕 끔찍한 전체주의국가로 변모했다. 전체주의적 국가자본주의 체제로 75년이 지난 후, 소비에트 연방은 사멸하지 않고 붕괴했다. 중공은 여전히 존재하지만, 그들의 경제는 사적소유에 기반하고 있다. 이행기국가와 이행기 경제 이론은 국가 공산주의의 선동가들과 마르크스주의적 비평가들이 75년의 전제왕정을 이데올로기적으로 정당화하는 용도로 사용되었다. 소련이 노동자의 사회주의 지상락원이라고 바라보지 않았던 이들이라도, 최소한 소련이 타락한 노동자 국가라고, 후기자본주의 사회라고, 사회주의로의 도상에 있는 사회라고 바라보았다. 이 이론가들은 실제로는 자본주의적이고 제국주의적인 국가였던 소비에트 연방이 어쨌든 자본주의적 서방과는 다르고, 더 낫다고 바라보았다. 그렇기에 이들은 서방에 대항하여 소련을 지지하였고, 냉전 기간 중 소련의 편에 섰다. 마르크스는 “프롤레타리아트의 독재”를 옹호했다. 이 어구가 의미하는 것은 자본주의 국가를 전복한 이후, 노동계급이 전체 계급으로써 자본가들과 그 주변부 지배할 시기가 있을 것이라는 것이다. “프롤레타리아트의 독재”가 노동계급의 민주적 자기조직과 대치하는 개념인 것은 아니다.(생각해보라. 부르주아들의 독재와 부르주아 민주주의는 호환이 되는 개념이 아닌가.) 마르크스와 마르크스주의자들이 “프롤레타리아트의 독재”를 통해 하고자 했던 말의 의미는 드레이퍼가 논의한 바 있다.(드레이퍼, 1987) 드레이퍼는 마르크스와 엥겔스가 의미한 것은 노동자가 계급으로써 집행하는 민주적 지배라고 말한다. 드레이퍼는 단 한 명의 예외를 제외하면, 레닌과 트로츠키의 시기를 살아가던 모든 마르크스주의자들은, 이 지배를 소수에 의한 억압적 지배라 해석했다는 것을 보여준다. 이러한 해석은 “프롤레타리아트의 독재”를 반대하였던 개량주의자들과 이에 찬성하였던 레닌주의자들 모두가 공유하고 있는 해석이었다. 앞서 말한 단 한 명의 예외는 로자 룩셈부르크였다. 룩셈부르크는 “프롤레타리아트의 독재”를 노동자의 민주적 계급 통치라는 의미로 해석했다. 룩셈부르크의 해석은 자유의지주의적 마르크스주의자들에게 큰 영향을 주었다. 마르크스의 전통적 개념에 따르면, 소위 프롤레타리아트의 독재라 하는 것은 이전의 계급 독재와 특정한 방식에서 분명히 다른 것이었다. 프롤레타리아트의 독재는 소수 계급이 다수 대중에 대하여 행하는 지배가 되지 않을 것이었다. 이 독재는 다수 대중, 즉 노동자들과, 노동자들의 지도에 따를 농민과 같은 다른 피억압계급들이 소수 계급(자본가)에 대하여 행하는 지배가 될 것이다. 프롤레타리아트의 독재는 지배계급의 권력을 유지하려하지 않을 것이고, 오히려 모든 계급을 계급없고 국가없는 사회주의로 해소해내려 할 것이다. 이러한 차이들이 있기에 나는 노옹자의 지배를 독재라 표현하는 것이 그다지 유용한 것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이는 독재라는 단어가 내포하고 있는 의미가 시대에 따라 바뀌었고, 이 단어가 더 이상 계급적 지배라는 의미로 사용되지 않는다는 사실과는 별개이다. 더 이상, 그 누구도, 독재가 민주주의와 호응한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리고 무엇보다, 공산당 정부들이 지난 세월 동안 “프롤레타리아 독재”라는 단어를 사용하여 프롤레타리아트에 대한 공산당의 독재적 지배를 표현해오기도 했고 말이다. 앞서 말한 것처럼, 고대 노예제 국가도, 현대 자본주의 국가도 다양한 형태를 가질 수 있다. 이들은 민주주의적일 수도 있고, 폭압적일 수도 있다. 많은 마르크스주의자들은 이것이 노동계급의 지배에 있어서도 마찬가지라고 주장해왔다. 즉, 노동자들이 가장 민주적이고 코뮌적인 노동자 평의회 체계를 통하여 지배할 수 있는 것처럼, 소수 혁명 정당의 지배나(레닌이 그러했던 것처럼) 1인의 전체주의적 지배(스탈린이 그러했던 것처럼)을 통하여 지배하는 것 역시도 가능했던 것이다. 레온 트로츠키나 아이작 도이처처럼 소비에트 러시아가 민주적이지는 않지만, 어쨌든 사회주의 국가였고 노동자국가였다고 주장하던 이들이 이러한 주장을 사용한다. 하지만, 노동계급은 노예주나 자본가들과는 다르다. 노동계급은 산업 내에 어떠한 자산도 가지고 있지 않다. 노동계급은 노예를 소유하고 있지도, 주식을 가지고 있지도 않기에 정부의 보호가 필요하지 않다. 프롤레타리아트가 사회를 운영할 수 있는 방식은 집단적이고, 협력적이며, 민주적인 방식 뿐이다. 현대 기술 사회는 점점 더 집단화되어간다. 산업에 있어 집단화된다는 것은 그 자체로 사회주의적인 것은 아니다. 자본주의 역시 그 거대하고 준독점적인 기업 안에서 집단화된다. 결국 문제는, 누가 이 집단화된 경제를 통제하는 가에 있다. 전통적 자본가들이 경제를 통제해야 하는가? 아니면 국가 관료가? 혹은 노동계급 전체가? 만약 누군가가 경제를, 노동자들을 “위해” 운영한다면, 결국 노동대중은 언제나 있던 그 자리, 사회의 바닥에서 사장들의 지시를 받아가며 착취당하는 그 자리에 남아있게 될 것이다. 만약 노동자들이 사회를 국가와 계급과 모든 형태의 지배를 철폐하는 도상으로 전환하려 한다면, 사회를 운영하는 것은 노동자들 스스로여야 한다. 노동계급은 민주적이이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노동계급은 자유로울 수 없다.(물론, 노동계급의 자주경영의 형태는 다양할 수 있다.) 혁명 이후(이행기 단계)에 하여야 할 일에 대한 마르크스의 상은 1971년 봄 파리 코뮌의 노동대중으로부터 구성되었다. 파리 코뮌에 대한 글은 매우 많기에, 나는 단지 짧게 요약만 하고자 한다. 1870년, 루이 나폴레옹의 프랑스와 오토 폰 비스마르크의 독일제국간의 전쟁이 발발했다. 프러시아의 군대는 프랑스군을 박살냈고, 나폴레옹을 생포했다. 프랑스의 보수정치인들은 공화국을 선포했고, 프랑스 상당부분을 점령하고 있던 독일인들과 항복협상을 하고자 하였다. 이들은 반동적이고 근왕주의적인 지방정치인들로 의회를 구성하기 위한 선거를 열었다. 하지만 파리의 노동대중들은 게르만 침략자들에게 항복하려하지 않았다. 파리 노동자들은 국민위병을 통해 무장했다. 프랑스 부르주아지는 무장하고, 스스로 조직한 파리의 노동자들을 그래도 여전히 자본계급을 대변하고 있던 독일 점령군보다 더 두려워했다. 자본주의 국가와 파리 노동대중 사이의 내전이 발발했다. 파리의 대중들은 권력을 쟁취했고, 대혁명기의 파리 코뮌을 본따 파리를 “코뮌”이라 선포했다. 하지만 결국 자본가들의 정부는 독일의 협력을 얻어 파리 노동자들을 진압했다. 수만의 노동자들이 살해당하고 수천이 수감당하는 유혈진압이 열렸다. 하지만 파리 코뮌은 72일간 지속되었다. 마르크스는 파리의 코뮈날레들이 한 일과 할 수 있던 일들에 크게 감명받았다. 즉, 파리 코뮌에서 그가 관측한 경향성과 파리 코뮌이 제시한 다른 미래가 그것이었다. 『프랑스 내전』에서 마르크스는 파리 코뮌의 급진적 민주주의의 방법론을 다음과 같이 묘사한다. 관료들을 지역구획에 따라 선출된 공무원들로 대체한다. 이 선출 공무원들은 유권자들에 의하여 언제라도 소환될 수 있어야 하고, 노동자 다수보다 더 많은 임금을 받아서는 안 된다. 싱비군은 인민 자경대(국민위병)으로 대체될 것이다. 경찰은 임명직이 아니라, 지역의 인민들이 직접 통제하게 될 것이다. 입법부로부터 독립된 행정부는 없어질 것이다. 모든 지역 마을, 촌락, 도시가 이러한 초민주주의적 체제로 운영되고, 각 지역의 대표단을 중앙도시로 보내고, 각 도시의 대표단을 파리로 보내어 전국적 협력체를 구성하였다. 경제적으로는 파리의 노동자와 빈민을 구휼하기 위한 규제안들이 통과되었다. 제빵노동자들의 야간노동이 금지되었고, 부채가 탕감되었다. 자본가들이 버리고 도망간 공장과 작업장은 노동자들이 운영하도록 되었다. 노동자 자주경영기업을 만들고자 하는 열망은 분명히 있었지만, 그것을 조직할 시간이 없었다. 마르크스는 파리 코뮌의 반국가적 방법론에 대하여 『프랑스 내전』 초안에 다음과 같이 명확히 요약했다. “이는 국가 그 자체에 대항한 혁명이었다... 인민을 위하여 인민이 사회적 삶을 유지하는 것이었다. 파리 코뮌은 지배계급의 일부 세력의 권력을 다른 세력으로 넘겨주는 혁명이 아니었다. 오히려 파리 코뮌은 계급적 지배라는 끔찍한 장치를 파괴하는 혁명이었다.”(프내전) 아나키스트들은 1871년의 파리 코뮌에 대한 분석에 있어 마르크스에 동의했고, (아마도 아니겠지만)마르크스가 아나키스트들의 반국가적 해석을 도용했다고 비난하기도 했다. 바쿠닌은 파리 코뮌이 “용감하고, 명확하게 표현된 국가에 대한 부정”이었다고 찬미한다.(바쿠닌, 1980) 엥겔스는 마르크스가 파리 코뮌에 대하여 쓴 것을 검토하는 과정에서 두 가지의 모순되는 언급을 남긴다. 1891년, 엥겔스는 “사회민주주의적 속물”들에게 “프롤레타리아트의 독재가 어떤 것인가를 알고 싶은가? 파리 코뮌을 보라.”고 일갈했다. 엥겔스는 독일사민당 내에서 성장하고 있던 우익 세력에게 노동계급의 지배의 혁명적 관점을 마주하라고 말하면서, 동시에 코뮌의 급진적 민주주의가 지배(“독재”)였다고 말하고 있다. 하지만 1875년, 엥겔스는 파리 코뮌의 경험에 기반하여 당의 강령을 바꿀 것을 제안하는 편지를 쓴 바가 있다. “국가에 대해서는 단 한 마디도 입 밖에 내서는 안 되며, 특히 더 이상 본래의 의미에서의 국가가 결코 아닌 코뮌 이래로는 그렇습니다. 우리는 국가를 게마인베센으로 대체하는 것을 제안합니다. 이것은 프랑스어인 “코뮌”을 대체할 수 있는 오래된 독일어가 될 것입니다.” 이를 인용한 이후, 레닌은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만약 강령에 대한 수정이 가능해진다면, 오늘날 ‘마르크스주의’의 주도 세력들이 얼마나 ‘아나키즘’에 대하여 울부짖을 것인가”(국가와 혁명) 그렇기에 엥겔스에게 있어 파리 코뮌은 “프롤레타리아트의 독재”(혹은, 노동계급의 지배)임과 동시에 “더 이상 본래의 의미에서의 국가가 결코 아니”기도 한 것이다. 파리 코뮌은 노동자들과 유리된, 노동자들 위에 존재하는 사회적 조직이 아니기에 국가라고 부를 수 없다. 파리 코뮌은 소수가 착취당하는 다수를 착취하는 것이 아니라, 다수가 이전까지 착취하던 소수를 통제하는 것이었기에, 국가가 아니다. 이러한 이중성은 평의회 공산주의자인 폴 매틱에 의해서도 제기되었다. 그는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 승리한 노동계급은 새로운 국가를 구성하지도 않을 것이며, 기존 국가의 통제력을 확보하지도 않을 것이다. 그들은 다만 그 독재를 집행할 것이다 ... 이전의 국가와 유사한 기능을 하더라도, 이 (노동계급의) 독재는 새로운 국가가 되지 않을 것이다 ... 사회주의는 국가를 통해 실현되지 않는다. 국가는 노동계급의 자기 결정이라는 사회주의의 본질을 배제하기 때문”(매틱, 1983)이라고 쓰고 있다. 이것이야말로 중요한 지적이다. 마르크스주의적 관점을 통해 바라보더라도, 노동자 국가 같은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레닌의 책 『국가와 혁명』은, 레닌의 저작 중 가장 자유의지주의적인 책으로 잘 알려져 있다. 이 책은 주로 마르크스와 엥겔스가 국가에 대하여 쓴 거의 모든 것들에 대한 해석을 담고 있다. 레닌은 이 책을 집필하는 과정에서 러시아 혁명의 심화에 영향을 받았다. 러시아 혁명이 심화되는 과정에서 소비에트(평의회)들은 파리 코뮌의 경험을 더 큰 규모로 다시 시도할 것을 요구했다. 이 요구는 레닌이 권력을 잡고, 혁명이 권위주의적으로 변모하기 전에 이루어진 것이었다. 이 책에서 레닌은 마르크스주의의 주도세력들이 아나키스트들을 (레닌이 일컫는 바) 잘못된 이유(부르주아 국가의 파괴와 국가없는 사회라는 목표에 대한)로 비판하고 있다는 비난을 가한다. 레닌은 “혁명 이후에 사멸할 것은 프롤레타리아 국가거나 준국가”라고 썼다. “마르크스에 의하면, 프롤레타리아트는 사멸할 국가만을, 그러기 위해 구성되어 건설과 동시에 사멸하기 시작할 국가만을 필요로 한다.” “온전하고 공고하게 도입된 민주주의는 ... 부르주아 민주주의에서 프롤레타리아 민주주의로, 억압자의 민주주의에서 피억압계급의 민주주의로, 특정한 계급을 억누르기 위한 ‘특수한 권력’으로서의 국가에서 다수의 인민, 즉 노동자와 농민의 일반적 권력에 의한 억압자의 억압으로의 전환”하는 것이고, “코뮌은 국가가 되기를 포기할 것”이며 “이행기 동안 ... ‘국가’는 여전히 필요할 것이나, 그것은 이행기적 국가일 것이다. 이 국가는 문자 그대로의 국가가 아닐 것이다.” 레닌은 완전하게 국가가 없는 사회를 이루는 데에는 많은 시간이 걸릴 것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그는 이 이행과정은 혁명 직후 시작할 것이라 보았다. 다수 노동인민은 혁명 이후 즉각적으로 사회를 운영하는 데에 참여하고, 이전의 지배계급을 제압할 것이라고 말이다. 사실, 혁명 이전 레닌의 볼셰비키 당의 강령은 “모든 권력을 소비에트에”로 요약할 수 있었다. 노동자의 산업통제, 소비재를 분배하는 여성위원회, 토지를 분배하는 농민위원회 등 말이다. 그리고 이 강령은 반국가적 관점에 호응하는 것이었다. 러시아 아나키스트들은 일반적으로 볼셰비키의 강령이 최소한 아나키스트적 가치에 친화적이라고 보았다. 그렇기에 이들은 혁명 과정에서 레닌주의자들과 동맹을 맺었다. 이처럼 마르크스와 엥겔스의 프롤레타리아트 독재와 이행기 국가에 대한 관점은 자유의지주의적이고 반국가적인 방식으로 해석될 수 있다. 평의회 공산주의자들이나 레닌 역시 이와 같은 해석을 내어놓았다. 하지만 이러한 마르크스주의에 대한 자유의지주의적 해석은 역설적으로 마르크스주의자들이 건설해낸 전체주의적 국가와 모순된다. 스탈린주의적 독재의 지지자들 역시 마르크스의 『프랑스 내전』과 레닌의 『국가와 혁명』을 읽었다. 이 책들을 읽고 어떻게 국가 자본주의를 옹호할 수 있었던 것인가? 그 이유는 다음과 같다. 마르크스와 엥겔스, 레닌이 언명한 바들은 모순적이다. 반권위주의적 해석이 얼마나 실제로 정확한지는 명확하지 않다. 상술한 것처럼, 레닌은 『국가와 혁명』에서 노동자 국가는 즉각적으로 사멸하기 시작할 것이라고 말한 바 있다. 하지만 그는 이 노동자 국가가 완전히 사라질 것이라 말한 바 없다. 그렇기에, 레닌은 그의 가장 자유의지주의적인 저작에서조차, 국가는 영구히 존재할 것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엥겔스는 『프랑스 내전』에 대한 1891년의 서문에서 파리코뮌이 국가를 즉각적으로 끝내었다는 입장을 수정한다. “국가는 최선의 경우라도 계급 투쟁에서 승리한 프롤레타리아트가 물려받을 악덕일 뿐이다. 승리한 프롤레타리아트들은, 파리 코뮌에서와 같이, 새롭고 자유롭고 사회적인 환경에서 자란 세대가 국가의 잔재를 쓰레기 더미 위에 던져버릴 수 있을 때까지 그 최악의 부분을 잘라내는 것을 선택할 수밖에 없다.” 이러한 개념에서, 국가는 프롤레타리아트의 독재라 불리게 된다. 혁명은 단지 “최악의 부분”을 “잘라낼” 수 있을 뿐이고, 국가 그 자체는 한 세대 이상을 존속하게 되는 것이다! 나아가, “국가의 사멸”이라는 개념 그 자체에도 문제가 있다. 이 개념은 역사가 노예제에서 봉건제로, 봉건제에서 자본주의로 자동적으로 진보한다는 마르크스주의적 경향성에 호응한다. 이 관점에서, 노동계급 안에서의 계급의식은 자동적으로 생길 것이며, 필연적으로 사회주의로 귀결하게 될 것이다. 이 경향의 근원은 마르크스로 돌아가고, 아마도 마르크스가 헤겔로부터 도출한 사적유물론에 따라 역사가 필연적 귀결로 나아간다는 것에 기인할 것이다.(헤겔 철학과 프러시아 전제주의를 보라.) 마르크스주의의 이러한 경향성은 선택과 자유의지를, 사회주의 혁명에 반드시 필요한 도덕적 시각을 부정한다. (이것이 마르크스의 마르크스주의에 내재된 유일한 경향성이라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사적유물론은 그 주된 경향성이고, 사회민주주의와 스탈린주의 양측 모두에게 지배적인 관점이기도 하다.) 노동자국가(혹은 준국가)가 정말로 자동적으로 사멸할 것인가? 국가적 요소들이 자기들끼리 뭉치려는 경향은 없을까? 관료층이 국가적 기구를 만들어내고, 결국 새로운 지배계급이 되지는 않을까? 구지배계급에 저항할 필요성에 따라 건설한 군사적 · 경찰적 요소가 권위주의적이고 국가주의적으로 변모하게 되지는 않을까? 마르크스주의적 공식에 따르면, 혁명적 활동가들은 새로운 국가를 건설하기 위하여 최선의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 새로운 국가를 철폐하는 것은 자동적으로 일어나도록 내버려 두어야 한다. 하지만 생각해보자. 국가를 만들기 위해 최선의 노력을 기울인다면, 우리가 얻게 될 것은, 아마도, 음, 국가일 것이다. 우리는 국가를 철폐하기 위해서도 무언가를 해야 한다. 새로운 준국가(이건 무엇이건)은 철폐되어야 한다. 일부 국가적 기능들(이를테면, 반혁명군에 맞서 싸울 수 있는 군대)을 만들 필요가 있다고 해도, 이것이 새로운 국가로 공고해지는 것에 맞서 싸울 의식적 계획을 만들어낼 필요가 있다. 국가주의적 경향에 대응하고, 이 경향성을 필요최소로 억제하고, 사회를 국가가 없는 방향으로 추동하기 위한 일관되고 즉각적인 노력이 필요하다. 이 준국가에서의 규칙은, 최대한 자발적인 자주경영을 촉진하고, 이를 위해 일시적으로 필요한 최소만큼의 강제와 중앙화를 동원하는 것이다. 국가주의적 경향성을 견제하기 위해 필요한 것은, 새롭게 만들어질 평의회가 다당제적이고, 다양한 경향성을 포함하며, 민주적으로 운영되도록 하는 것이다. 이는, 정치적 결사의 자유를, 정치적 다원주의를 허용하는 것이다. 혁명 중에는, 그리고 혁명 이후에는 혁명적 노동자들 내에서도 다양한 정치적 관점들이 난립할 것이다. 혁명적 아나키스트 조직을 구성하여야 하는 주된 이유는 이 과정에서 권위주의적 정당들(사민주의자들부터 레닌주의자들까지)과 투쟁하기 위해서이다. 아나키스트들은 조직되어야 한다. 이 조직을 통해 노동자들이 새로운 주인님이 아니라 아나키스트들을 선택하도록 설득하여야 한다. 하지만, 아나키스트 조직은 다른 조직(권력을 추구하는 정당)들과 맞서기 위해서만 존재해서도 안된다. 아나키스트 조직은 다른 정치적 경향성과 협력하기도 하여야 한다. 이를테면, 북미는 거대하고 복잡한 사회다. 하나의 정치조직이 모든 정답을 갖추고, 모든 투사들을 끌어들이지는 못한다. 그렇기에, 아나키스트 조직은 노동자 민주주의를 향해 전진하는 모든 조직들과 동맹을 맺어야 할 필요가 있다. 정치 조직에는 두 가지 종류가 있다. 우선, 상대적으로 협소한, 강령에 따르는, “정당”과 같은 조직이 있을 것이다. 이 조직은 강령에 따라 자발적으로 연합한 조직이다. 그렇기에 그 구성원들 사이에서 강령에 대한 상대적으로 높은 동의수준을 가지고 있게 될 것이다. 다른 한편에는 광대한 대중조직이 있다. 노동조합, 지역연합, 노동자 평의회 같은 것 말이다. 대중조직에는 다양한 사람들이 포괄되며, 가입에는 최소한의 요건만이 필요하다. 이를테면, 노동조합에 가입하기 위해서는, 노동조합이 있는 사업장에서 일하거나, 그 산업에서 일하면 된다. 이 요건을 제외하면, 대중조직의 구성원들은 정치나 종교와 같은 것들에 대하여 동의하지 않을 가능성이 높다.(최소한 경영진은 노동조합에 가입하지 못한다. 그리고 이것이 노동조합이 최소한 계급적 기구일 수는 있도록 한다.) 이 두 종류의 조직을 혼동하지 않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일이다. 이를테면, 스탈린주의자들은 그들의 협소한 정치조직이 다면적 성격을 가진 노동계급을 대변하고 있는 양 이야기한다. 일부 아나키스트들은 대중조직에 동화되는 과정에 집중하느라 대중을 혁명으로 설득하기 위한 내부투쟁의 필요성을 무시하는 오류를 범하곤 한다.(아나키스트들이 조직의 형태에 대한 논쟁을 한다는 것이 이상하게 들릴 수는 있다. 아나키스트들이 조직에 반대한다는 오해가 널리 퍼져있기 때문이다.) 마르크스는 사회주의에서 다원적 민주주의의 가치에 대하여 아무 것도 쓰지 않았다. 물론, 마르크스가 이 가치를 부정하지는 않았겠지만 말이다. 마르크스 이후의 마르크스주의자들은 노동자의 진정한 이해관계를 대변할 수 있는 당은 오직 하나의 당 분이라는 개념을 만들어냈다. 그리고, 마르크스의 사상만이 노동자들 대변할 수 있다고 말하는 것은, 마르크스의 방향과 전혀 맞지 않는 것이다. 레닌은 그의 당이 진정한 노동계급의식을 가진 유일한 당이라고 확신했다. 실제 노동자들의 의식이 무엇이건 간에 말이다. 『국가와 혁명』이 당이나 당들의 역할에 대하여 어떠한 언급도 하고 있지 않다는 것은 잘 알려져 있다. 레닌이 평생을 당 건설에 바쳤다는 것을 생각해보면, 참으로 이상한 생략이라 하겠다. 레닌은 당이 무대 뒤에 있어야 한다고 상정했을 수도 있고, 당 그 자체도 사멸할 것이라 여겼을 수도 있다. 어떠한 경우를 상정하더라도, 레닌은 다당제 민주주의를 생각하지 않았다. 러시아 혁명이 진행되는 과정에서 야당들은 여러 가지 이유들로 하나하나 불법화되었다. 아나키스트들은 탄압당했다. 논의상의 편의를 위해 이러한 탄압이 혁명 중에 필연적인 것이었다고 상정하더라도, 레닌주의자들은 “어쩔 수 없이” 그 필연을 행한 것이라 볼 수 있다. 공산당의 지도부 한 명은, 공산주의에는 충분히 여러 당이 존재할 수 있다고, 하나의 당은 권력을 잡고, 다른 당들은 감옥에 있을 수 있다고 빈정대기도 했다.(아나키스트들이 노골적으로 다원적 민주주의를 옹호한 것은 아니다. 하지만 그들은 자율적 연합을 조직할 자유를 요구했다.) 이후에 논의하겠지만, 러시아 혁명은 볼셰비키가 홀로 이루어낸 것이 아니다. 러시아 혁명은 레닌주의자들과 아나키스트를 포함한 다른 세력들의 동맹이 이루어낸 것이다. 이 통일전선의 해소와 일당독재로의 전환은 혁명의 타락을 알리는 중대한 이정표가 되었다. 언젠가, 새로운 과제들과 조직방법론이 등장함에 따라 당들이 사멸할 수도 있다. 일부 지역 공동체는 합의에 기반한 의사결정 방법론을 사용할 수도 있다. 혁명적 조직들의 통일전선이 그 도상으로 향하는 한 걸음이 될 수도 있다. 다양한 지역들은 각자의 조건에 따라 각자의 정치를 조직할 수 있다. 하지만, 아나키즘은 결코 완전히 조화로운 사회를 만들고자 하는 것이 아니다. 사람들은 여전히 이해관계와 고민지점들을 두고, 다양한 사상을 두고, 서로 다른 열망들을 두고 다툴 것이다. 그러면서도 그들은 언제나 한데에 모여 각자의 의견을 표현하고, 타인을 설득하고자 노력할 필요성을 느낄 것이다. 아마도, 마르크스주의가 전체주의적인 경향을 가지게 된 요체는 그 중앙집중주의에 있을 것이다. 마르크스부터 레닌까지, 모든 마르크스주의자들은 언제나 중앙집중적 경제 · 정치 기구의 필요성을 강조해왔다. 이는, 권력이 중앙에 집중되어야 하고, 이를 바탕으로 소수의 사람들이 결정을 내려야 한다는 의미였다. 마르크스에게 있어 이 중앙집중성은 정치적으로, 경제적으로 결정되는 것이다. 정치적으로 마르크스는, 독일의 주요 혁명적 민주주의자로서, 독일을 분열시키고 있던 소형 영방국가들의 혼란에 반대했다. 마르크스는 선출된 의회가 단일하게 운영하는 통일 독일의 필요성을 부르짖었다. 이러한 통일 독일에서는 지방 귀족들을 몰아내고, 전국적 내수시장을 만들어 자본주의가 자유롭게 경제를 진보시킬 수 있을 것이었다. 마르크스는 프랑스의 자코뱅주의로 대표될 수 있는 급진적인 중앙집중적 민주주의의 전통을 따랐다.(이는 급진적 민주주의자들이 제퍼슨주의를 따라 탈중앙화된 연방을 주장하고, 보수주의자들이 헤밀턴주의를 따라 중앙화된 유사왕정을 주장하던 미국의 상황과는 달랐다. 물론, 제퍼슨의 급진적 민주주의는 백인만을 위한 것이었다.) 1848년 유럽혁명의 실패 이후,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공산주의자동맹 중앙위원회에의 성명』을 썼다. 이 성명서에서 그들은 부르주아 민주주의자들이 옹호하는 바 “연방적 공화국”을 비난하면서, “노동자들은 단일하고 불가분한 공화국을 위해 투쟁할 뿐 아니라, 가장 단호하게 집중된 권력을 국가 권력의 손에 쥐어주기 위하여 투쟁해야 한다.”고 말했다.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중앙집권을 위하여 투쟁했던 프랑스 혁명가들의 예시를 들었다. 하지만 1885년, 그러니까 파리 코뮌 이후, 엥겔스는 다음과 같은 주석을 달았다. “... 이 문장은 오해에 기반한 것이었다... 우리는 이제 1791년의 프랑스 혁명 기간 동안, 모든 부처와 지구, 지자체의 행정부는 해당 지역의 인민들이 선출한 이들을 포함하고 있었다는 것을, 이 선출직들은 전국적 법령의 제약 아래에서 온전히 자유롭게 행동하였다는 것을 인지한다. 이러한 지역적인 자치는 미국의 그것과 유사하다. 그리고 이것은 혁명의 가장 강력한 도구가 되었다. ... 이는 정치적 · 민족적 중앙집권과 모순적이지 않다...” 엥겔스는 이러한 지방자치를 파괴하고, 하향식 임명직 지방관료 체계로 대체한 것이 나폴레옹이었음을 적시한다. 내가 보기에 엥겔스는 이 문장을 애매모호하게 끝맺었다. 엥겔스가 말한 것이, 연방주의가 민족대단결과 반드시 모순적인 것은 아니라는 것인가? 아니면 엥겔스는 중앙집중화가 어쨋건 지역적 자치와 호환가능하다고 말한 것인가? 나는 잘 모르겠다. 하지만, 엥겔스는 이 질문을 거의 재론하지 않았고, 그 이후로 이것이 마르크스주의 이론에 영향을 끼친 바는 없다. 이 주제에 관하여 논할 때, 파리 코뮌에 관한 마르크스의 저작들은 자주 인용된다. “개량주의적” 마르크스주의자인 에두아르드 베른슈타인은 파리 코뮌에 관한 마르크스의 입장이 아나키스트/탈중앙주의자인 프루동의 입장과 유사하다고 말하면서 마르크스를 공격한다. 레닌은 이를 분연히 부정하면서 마르크스가 언제나 중앙주의자였다고 주장한다. 사실, 마르크스는 중앙집권/탈중앙화의 문제에 대하여 명확히 언급한 적이 없다. 파리 코뮌에 관한 마르크스의 저작은, 분명히 탈중앙주의적 관점과 흡사하다. 하지만, 마르크스가 이 결론을 도출하였는지는 분명하지 않다. 엥겔스와 마르크스는 코뮌이 빠르게 행동하여 혼란 상태에 있던 반동세력을 공격하지 못하였다고 비판한다. 이들은 코뮌이 프랑스 은행의 금을 확보하지 않았다고 비판한다. 레닌과 같은 이들은 이러한 언명을 근거로, 마르크스는 보다 중앙집권화되고 독재적인 파리 코뮌을 원했다고 주장한다. 일부 아나키스트들과 달리 마르크스는 파리에서 발생했던 지역 총회(이 지역 총회는 18세기의 프랑스 혁명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다.) 부활 시도에 대해 논하지 않았다. 마르크스는 파리 코뮌 내의 지역 클럽의 중요한 역할도 논의하지 않았다. 사실,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지역적이고 직접적이며 대면에 기반한 민주주의의 중요성을 제기하지 않았다. 이들이 이야기하는 노동계급 민주주의는 언제나 노동계급이 통제할 수 있는 선출직 관료들에 대한 논의에서 멈추었다. 이는 결국 가장 민주적인 대의민주주의를 의미하는 것이다. 이들은 결코 노동자들이 자신의 기구와 공동체에 대해 행사하는 일상적 통제를 이야기하지 않았다. 마치 그들에게 이러한 통제는 발생하지 않은 것 같았다. 마지막으로, 파리 코뮌에 대한 서술은 경제적 · 기술적 중앙화에 관한 마르크스의 믿음과 무관하다.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자본주의적 대공장과 대기업으로부터 큰 영향을 받았다. 이들은 대공장과 대기업이 기술적 진보라고 보았다. 대공장은 생산성의 증대를 가져온다. 이는 대도시를 건설할 수 있게 하고, 이 안에는 대규모의, 중앙집중화된, 프롤레타리아 대중이 거주할 것이다. 이 거대한 세력은 사회주의 혁명을 이루어낼 것이다. 이것이 『자본론』이 말하고자 하는 바라 하겠다. 사회주의는 이러한 기저 위에 건설될 것이고, 더욱 대규모의 산업을 만들어낼 것이다. 물론, 마르크스는 대규모 산업이 노동자들을 더 잘 통제하기 위하여 만들어졌다는 사실을, “자본의 집중과 중앙화”는 생산성 증대가 아닌 금융적 이유에서 이루어지는 경우가 잦다는 사실을 인지하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르크스는 이 요인들이 장기적으로는 기술과 생산성의 진보에 복무한다고 믿었다. 『공산당 선언』에서,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중앙집중화의 가치에 대한 믿음에 근거한 사회주의 강령을 제시한다. “프롤레타리아트는 자신의 정치적 지배를 이용하여 부르주아지로부터 모든 자본을 차례차례 빼앗고 모든 생산 도구를 국가의 손안에, 즉 지배 계급으로 조직된 프롤레타리아트의 손안에 집중시키며 될 수 있는 대로 빨리 생산력을 높이게 될 것이다.” 이 선언은 10개 조항의 강령으로 뒷받침된다. “5. 국가 자본과 배타적인 독점권을 가진 국립 은행을 통해 국가의 손안에 신용을 집중시키는 것. 6. 운송 수단을 국가의 손안에 집중시키는 것. 7. 국영 공장의 수와 생산 도구를 늘리고, 공동 계획에 따라 토지를 개간하고 개량하는 것. 8. 모두에게 똑같은 노동 의무를 부과하고 산업 군대, 특히 농업을 위한 군대를 키워 내는 것.” 1850년의 『공산주의자동맹에의 성명』 역시 국유화와 중앙집중화를 위한 요구가 제기된다.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그들의 강령의 여러 부분을 바꾸는 과정에서도, 완전히 중앙집중화된 경제라는 목표를 포기하지 않았다. 이것이 마르크스와 엥겔스가 국가의 숭배자였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오히려 이들은 『공산당 선언』의 2부를 국가 경제가 중앙집중화되고 계층화된다면, 국가는 국가로 존재하기를 포기할 것이라 선언하며 마무리한다. “발전을 거치는 가운데 계급적 차이가 사라지고 모든 생산이 연합된 개인들의 손안에 집중되면, 공권력은 그 정치적 성격을 잃어버리게 될 것이다.” 안타깝게도, 이 무언가를 더 이상 국가라 부르지 않더라도, 생산을 그 손안에 집중한 “전 민족의 광범위한 연합”은, 사회의 나머지 위에 군림하는 중앙집중화된 관료기제가 된다. 그러니까, 국가다. 이 산업군대의 구성원들, 그러니까 노동할 것에 “책임이 있는”(강제된) 이들이 중앙의 계획자들과 공통된 이해관계를 발견하지 못할 수도 있다. 그렇기에 혹여 있을 노동자들의 반란을 막기 위한 경찰이나 군대를 재건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그리고 이렇게, 공권력은 그 “정치적”(국가주의적) 성격을 재건하게 될 것이다. 레닌에 대해서는 더 말할 것도 없다. 레닌은 언제나 “중앙주의자”라고 자칭했다. 레닌이 (개별 민족국가의 연방적 결합이라는 의미에서)연방주의를 옹호하던 때에도 그는 이것이 완전한 중앙집중화로 향하는 도상에서의 임시적 방법일 뿐이라 여겼다. 레닌의 당과 국가는 “민주집중제”의 원칙에 따라 운영되도록 설계되었다. 레닌은 『국가와 혁명』이 담고 있는 자유의지주의적 문장들 속에서도 그가 중앙집중적 경제를 신봉함을 분명히 했다. 그가 지향하는 경제 모형은 근대 제국주의, 특히 독일 국가에서의 전시 “국가독점자본주의” 모형이었다. 그는 독일의 체신 체계를 선망했을 뿐 아니라, 정부와 자본주의적 요소를 결합하는 대규모 중앙집중적 기업을 선망했다. 레닌은 만약 제국주의-자본주의 국가가 노동계급의 국가로 대체되고, 이와 같은 형태의 중앙집중화된 기업을 운영할 수 있다면, 이것이야말로 사회주의로의 일보전진이 될 것이라 말한다. 이러한 조건 아래에서 “모든 시민들은 국가가 고용한 피고용인으로 변할 것이다. ... 모든 시민들은 피고용인이자 단일한 범국가적 ‘신디케이트’의 노동자가 될 것이다. ... 사회는 총체적으로 하나의 사무소이자 하나의 공장이 될 것이다...” 레닌은 이 단일거대공장 안에 상당 기간 동안 “기술자, 감독관, 회계사”를 비롯한 다른 관료들이 있어야 할 것이라고 예견했다. 이 관점의 국가자본주의적 요소에 대해서는 더 강조할 것도 없다. 사회가 감독관과 관료들을 가진 하나의 거대한 공장이나 사무소가 된다니! 혁명의 확산이 실패하고, 외침과 내전이 계속되고, 러시아 전역에서 극도의 빈곤이 퍼져나갔다. 그리고 이러한 압력 아래에서, 국가자본주의적 요소들은 레닌의 자유의지주의적 측면들을 압도하고, 전체주의적 악몽이 되었다. 마르크스주의적 강령과는 다르게, 크로포트킨은 브리태니커 백과사전에 기고한 글에서 “아나키스트들은 국가에 경제적 생활의 주된 원천들(토지, 광산, 철도, 금융, 보험 등)을 넘겨주거나, 산업의 통제권을 넘겨주는 것은 국가가 이미 가지고 있는 기능들(교육, 종교, 국방 등)과 결합하여 새로운 폭압의 기구를 만들어낼 뿐이라고 여긴다. 국가자본주의는 관료제와 자본주의의 힘을 강화시킬 뿐”이라고 언급한다. 1세기쯤 지나 돌이켜볼 때, 누가 옳았었는지는 자명하게 보인다.
*** 5장. 국가의 아나키스트적 대안 국가가 집행하던 기능 중, 최소한 3가지는, 최소한 혁명 이후 일정기간 동안은, 필요할 것이다. 영토에 대한 군사적 방위, “범죄적” 반사회 행동에 대한 대응, 사회의 총체적 협력이 그것이다. 아나키즘은 이 기능들을 어떻게 수행할 것인가? 그것도 국가가 없는 상태에서 말이다. 앞서 언급한 백과사전 기고문에서, 크로포트킨은 아나키즘 사회에서는 “자율적 연합이 국가의 모든 기능을 대체할 것이다. 자율적 연합은 무한정 다양한 집단과 연방들이 지역적, 국가적, 국제적으로 임시적이건 영속적이건, 생산 · 소비 · 교환 · 통신 · 보건위생 · 교육 · 상호보호 · 영토 방위 등 각각의 목적을 위해 상호결합된 연결망”이라고 말한다. 이 연합들은 각자와 합의를 도출할 것이다. 이들은 보다 탈중앙적이고 지역주도적인 방향으로 발전할 것이다. 이들은 자본주의를 사회주의적 협동조합과 비영리적 생산으로 대체할 것이다. 크로포트킨은 평화로운 세계로의 즉각적 도약을 기대하지 않았다. 국가가 수행하던 특정 기능들은 일정기간 수행되어야 할 필요가 있다. 아나키즘 사회에서는, “상호 보호와 영토 방위”를 위한 연합이 있어야 할 것이다. 모든 혁명적 아나키스트들은 혁명 기간 중 무장세력의 필요성에 대하여 동의하여 왔다. 그들은 국가가 운영하는 정규군이 아니라, 인민의 자발적 무장과 노동자 민병대의 게릴라 전술을 옹호했다. 이러한 군사력은 노동자 평의회에 의하여 협력적으로 조직되고 감독되어야 했다.(오늘날 “민병대”는 우익들이나 지하디스트들이 조직한 무장집단을 포괄하는 모든 비정부적 무장세력을 칭하는 말로 변하였다. 하지만 나는 이 단어를 무장한 인민이라는 전통적 의미로 사용하고 있다는 것을 먼저 이야기하겠다.) 아나키스트들은 군사력을 조직해왔다. 그리고 그 중에는 매우 효과적인 것도 있었다. 러시아 혁명기, 네스토르 마흐노는 우크라이나 농민들의 게릴라군을 조직했다. 이 부대는 여러 “백군”들과의 전투를 승리했고, 트로츠키가 이끄는 “적군”의 배신에 겨우 패배했다. 스페인 혁명/내전기에는, 부에나벤투라 두루티 등이 이끌던 아나키스트 분견대들이 파시스트 군대에 맞서 이겨내었다. 멕시코에서 사파타가 조직한 군대 역시 자유의지주의적 군사력의 예시라고 볼 수 있겠다. 아나키즘은 현재 지배계급의 집행위원회로 기능하고 있는 정규상비군을 스스로 무장한 민주적 인민들로 대체할 것이다. 이는 수세기 전, 부족 민주주의 시대부터 존재해오던 개념이다. 고대 아테네의 직접 민주주의 체제에서, 모든 (남성) 시민들은 군인이기도 했다. 그들이 총회를 통해 전쟁을 의결했다면, 이 시민들은 스스로 무장을 갖추었다. 다른 누군가를 전쟁에 보내는 것을 의결하는 현대와는 다르지 않은가. 루소는 고대 그리스를 흠망했다. 그리고 그는 당시 이와 유사한 직접 민주주의와 무장한 시민들을 갖추고 있던 스위스 역시 흠망했다. 루소는 전업 군인들의 발흥이 곧 전업 “대표자”들의 정부가 발흥하는 것을 이끌었다고 보았다. 인민들은 정부의 주요 과업에 참여하는 것을 포기하게 되고, 이에 따라 더욱 예속되게 된다. 미국 독립 혁명 과정에서, 영국의 전업군인들은 반쯤은 자원입대자이고, 나머지 절반은 민병대이던 오합지졸들에게 패배했다. 혁명가들은 전업 정규군을 너무나도 혐오하였다. 이들은 펜실베니아, 델라웨어, 매사추세츠, 노스 캐롤라이나, 매릴랜드의 헌법에 “상비군은 자유에 대한 위협이기에 유지하지 않는다”는 조항을 삽입했다. 이들은 헌법의 권리장전 2조를 작성했다. “잘 규율된 민병대는 자유로운 주의 안보에 필수적이므로, 무기를 소장하고 휴대하는 인민의 권리는 침해될 수 없다.” 이 조항은 오직 경찰과 군대만이 총기를 휴대하기를 원하는 국가주의적 리버럴들에게 장애물이 되었고, 군대를 해산하고 민병대를 두는 것에는 반대하고 있는 우파들의 성지가 되었다. 자본주의적 민주주의자들이 자경단의 기치를 포기하면서, 이 기치는 사회주의 전통에 포함되었다. 파리 코뮌 이래로, 마르크스와 아나키스트들 모두는 인민들을 보호할 수 있는 것은 전업 정규군이 아닌 민병대라는 교훈을 얻었다. 마르크스는 “파리 코뮌의 첫 번째 법령은 상비군을 철폐하고, 이를 무장한 인민들로 대체하는 것이었다”고 선언한다. 독일 마르크스주의당의 창립자인 베벨은 제국 상비군을 민병대로 대체하자는 선전을 진행했다. 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기 전, 프랑스의 개량주의적 사민주의자 장 조레스는 『새로운 군대』를 집필했다. 그는 드레퓌스 사건 이후 발발한 프랑스의 반동적 장교 쿠데타에 대한 혐오를 바탕으로 군대를 오직 방어적 성격을 가진, 지역적으로 징병된 민병대로 대체하자고 주장했다. 조레스는 개량주의자였기에, 이것을 자본주의 사회를 위하여, 리버럴 정부가 집행하여야 한다고 제안했다. 노동자 민병대는 마르크스주의의 혁명적 분파에 의해서도 추켜올려졌다. 특히 레닌은 국제중재재판소나 군축과 같은 자유주의적 정책이 제국주의 국가라는 환상을 퍼트린다고 말하면서, 그 대책으로 노동자 민병대의 상을 제시했다. 러시아 혁명이 발발할 무렵, 레닌은 자본가들이 자신이 고용한 노동자의 무장 훈련에 소요하는 비용을 지불할 것을, 모든 경찰을 노동자의 순찰대로 대체할 것을, 모든 장교들을 선출할 것을 요구했다. 적위대나 게릴라군으로 조직된 노동자의 자발적 조직은 공산주의자들이 권력을 확보하는 초기 단계에서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였다. 하지만, 공산주의자들은 민주적이고 민병대 전통에 기반한 군대를 조직하지 않았다. 그 대신 그들은 중앙집중적이고 상비군적이며 징병제에 기반한 적군을 건설하고, 최고 사령관으로 레온 트로츠키를 임명했으며, 옛 차르 군대의 장교 수만명을 재임명했다. 공산주의자들은 그들이 최초의 이상을 폐기한 것이, 러시아의 후진성과 무지를 비롯한 여러 객관적 조건들에 기인한, 필연적인 것이었다고 말한다. 이것이 사실이건 아니건 간에, 네스토르 마흐노와 아나키스트들은 같은 조건을 두고 우크라이나에서 게릴라군을 조직하였다. 앞서 언급하였듯이 마흐노우슈치나는 우익 군세를 수차례 격퇴하였으며, 수년간 적군을 저지해내었다. 2차 세계대전 동안에도 게릴라군은 부차적일지라도 중요한 역할을 수행하였다. 이를테면 프랑스의 레지스탕스, 이탈리아의 유격대, 유고슬라비아 · 알바니아 · 그리스 등지에서 발발했던 동유럽의 게릴라 투쟁, 러시아와 우크라이나의 빨치산 투쟁, 중국 · 동남아시아 등지에서 발발하였던 반일 게릴라 투쟁 등이 있었다. 세계대전 이후에도 게릴라전은 중국, 유고슬라비아, 알바니아, 쿠바 등지에서의 공산주의 혁명에서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다. 그리고, 러시아 군이 이식한 공산당 정부들과는 달리, 이들 국가의 공산당 정부는 소련으로부터 독립적으로 움직였음을 알 수 있다. 게릴라 전술은 알제리의 프랑스 독립 전쟁에서도 활용되었고, 일본, 프랑스, 미국에 대항하던 베트남인들 역시 게릴라에 기반한 투쟁을 상당히 많이 진행하였다. 베트남이 미군에 대항하여 싸우고, 마침내 격퇴한 것은 60년대의 세계적 급진화의 주요한 요인이 되었다. 게릴라 전략에 대한 믿음이 좌파의 신념 속에 자리잡히게 되었다. 게릴라 투쟁은 좌파의 전유물로 그치지 않았다. 아프가니스탄에서는 주로 이슬람 근본주의자들로 구성된 게릴라 전사들이 러시아 군을 몰아냈다. 이것은 결국 소련의 최종적 붕괴를 끌어내는 주요한 요인이 되었다. 현재 이라크에서는 민족주의자들과 이슬람주의자들은 미국에 대항하여 게릴라전을 펼치고 있다. 일부 국가들은 민병대와 게릴라 전술을 국방 계획의 핵심으로 두고 있다. 스위스는 중세로부터 현재까지 단 한번도 민병대 체계를 포기한 적이 없다. 다수의 남성 인민들은 단시간의 군복무를 거친다. 남성 시민들이 소총이나 기관총을 보유하는 것은 법적 의무이다.(스위스는 세계에서 가장 높은 총기 소지율을 가지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스위스의 범죄율은 매우 낮다.) 스위스의 전업 군인의 수는 매우 적다. 흥미롭게도, 이스라엘의 군 편제는 스위스 체계에 영향을 받았다. 식민주의적 정착국가인 이스라엘은 대규모의 상비군을 감당할 수 없지만, 전쟁 발발시 소규모 인구를 빠르게 동원할 수 있어야 하는 조건을 가지고 있다. 이스라엘은 대규모 예비군 전력과 지역 예비군 본부에 흩어져 있는 총기와 탄약을 탈중앙적 방어가 아닌 긴급 동원 체계로 사용한다.(이스라엘의 인구 규모를 보았을 때, 동원된 예비군을 소집 장소에서 필요한 지역으로 이송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다.) 게릴라 전술을 국방 계획에 포함시킨 다른 국가는 유고슬라비아였다. 인민 방어 체계는 정규군과 공존했다. 유고슬라비아는 빠르게 동원되어 종심 방어를 펼치거나, 게릴라전 체계로 전환할 수 있는 지역 예비군 체계를 완비하고 있었다. 유고슬라비아의 헌법은 어떠한 상황에서도 항복하는 것을 금지하고 있었다.(무기를 구하기가 쉬웠다는 것은 티토 사후 유고슬라비아 내전에서 그토록 많은 피가 흐른 요인 중 하나였다.) 스웨덴이나 북한 역시 이 방법론을 국방계획에 포함하고 있다. 민병대는 무장한 인민의 군대의 한 형태다. 민병대는 지역적 방어 전술이나 종심방어전술과 함께 운용되곤 한다. 이는 자신의 터전을 직접 지키는 것을, 적이 진군하는 한발 한발마다 그 대가를 치르도록 만드는 접근법을 의미하는 것이다. 하지만, 이스라엘이 증명하고 있듯이, 이 방법론은 국민방위군 형태의 예비군을 빠르게 동원하는 수단으로 이용될 수도 있다. 게릴라 전술은 적의 소모를 강요하는 기습전 전술을 의미한다. 하지만, 지역의 민병대는 게릴라로 전환할 수 있다. 중국과 베트남에서 목격한 것처럼, 정규전이 발발하면 게릴라 부대는 통합할 수도 있다. 역으로 대규모 정규군이 소규모 게릴라(빨치산) 부대로 분열할 수도 있다. 정규군이 소수 정예부대를 이용하여 게릴라전과 유사한 특공전술을 사용할 수도 있다. 무장한 시민군의 전투 형태는 매우 유연할 수 있을 것이다.(징병이냐 모병이냐의 문제는 군대의 형태와는 별개의 문제라 하겠다.) 70년대 후반으로부터 80년대 초반까지, 유럽의 평화운동가 일부는 핵무기나 미군의 도움이 없이 서유럽을 소련으로부터 지킬 수 있는지에 대한 문제를 제기했다. 유럽에서 핵전쟁이 발발한다면, 설혹 그 전쟁이 “제한적”이라도 유럽 아대륙을 파괴하리라는 것은 자명했다. 핵이 배제된 재래식 정규전이 벌어진다고 하더라도, 유럽 아대륙은 불타오를 것이었고 말이다. 평화운동가들은 자유주의 진영의 군사전문가들과 상담했고, 게릴라전의 역사를 검토한 후, 유고슬라비아, 스위스, 스웨덴 등지의 방어 계획을 살펴보았다. 이들은 그 결과로 지금의 주제와 유사한 몇몇 제안들을 내어놓았다.(Alternate Defense Commission, 1983; Barnaby & Boeker, 1982; Mackay & Fernbach, 1983; Roberts, 1976; Smith, 1982). 이들이 제안한 것은 군대의 구조를 가진 비핵화된 방어 계획과 공격보다는 방어역량을 우선시한 군수 계획을 수립하여 타국에 대한 위협을 명확히 낮추자는 것이었다. 이들은 정규군의 역할을 국경 방어로 제한하여 침략자들의 소모를 강요하고 민병대를 동원할 시간을 벌어야 한다고 제안했다. 인민대중은 민병대로 조직되어 수년간의 반복적 군사 훈련을 받을 것이다. 그리고 지역에는 무기고와 방공호가 분산되어 건설될 것이다. 배급되는 무기는 단지 권총이나 소총에 한정되는 것이 아니라, 지대공미사일이나 이와 유사한 사격통제장치가 있는 미사일까지 확장되어야 할 것이다. 한 두명의 민병대 병사만 있더라도, 이러한 무기를 운반하고, 탱크나 전투기에 맞설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종심방어나 게릴라 전술은 토양 등의 조건을 고려하여 충분히 계획될 수 있다. 암살이나 사보타주 등을 포함한 도심 게릴라 전술 역시 언급된다. 시민의 비무장저항 역시 비폭력적 방법론으로 제안되는 방법론이기도 하다. 이 비무장저항에는 파업, 태업, 비협조, 평화시위, 선전전 등이 있을 수 있다. 게리 하트는 미군을 스위스나 이스라엘의 시민군 체계로 전환하고자 하는 발상을 제안한 바 있다. 그는 콜로라도주의 민주당 상원의원이었고, 대통령 후보였으며, 상원 국방위원회의 구성원이기도 했다. 하트는 그의 책 『미니트맨 : 인민의 군대를 재건하기』(1998)에서 전업 정규군의 규모를 2/3 이상 축소하고, 소규모의 기동성 있는 군대로 전환하자고 제안한다. 삭감된 병력은 시민의 예비군, “국민민병대”로 대체되어야 할 것이다. 교육의 일부로서 보편적 기초 군사 훈련을 진행하지만, 예비군(“민병대”)에의 참여는 온전히 자발적일 것이다. 하트는 잘 훈련되고 장비를 갖춘 예비군은 현대 군사 작전 대부분을 수행할 수 있을 것이라 믿는다. 그는 이 체계에서 걸프전과 같은 공세적 대외정책은 불가능 할 것이라 이해하고 있다. 예비군은 시민공동체와 직장에 결속되어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하트는 상선들의 건조 방식을 예로 들면서, 이 상선들이 필요할 때에는 상선 항해자들이 운용하는 해군 함정으로 바뀔 수 있는 것임을 이야기한다. 무장한 인민이라는 개념에 대한 약사를 짚어간 목적은, 이 개념이 훌륭한 역사를 가지고 있으며, 민주주의와 사회주의 전통 모두에 근거하고 있음을, 서유럽과 미국의 전문가들이 진지하게 고려한 것임을, 아주 오랫동안 정규군을 이겨온 경험이 있음을 보여주기 위한 것이었다. 물론 이것이 무장한 인민의 군대가 제대로 작동하리라고 입증하지는 못한다. 하지만, 최소한, 유의미하고 훌륭한 근거는 제공하리라 본다. 비국가적 사회 역시도 이러한 계획을 도입할 수 있다. 이 사회가 어떠한 군사체계를 도입할지는 혁명 과정에서 이용한 군사적 형태에 따라 달라질 것이다. 특히, 어떠한 종류의 내전이, 얼마나 심각하게 발발할 것인가에 따라 매우 크게 달라질 것이다. 무장한 인민의 군대는 자유의지주의자들이 원해온 것보다 더 중앙집중적으로 구성될 수 있다. 원칙적으로, 군대는 최대한 탈중앙적이고 민주적으로 구성되어야 하며, 오직 필요최소한만 중앙집중적 직업군인의 형태를 가져야 한다는 것이다. 결국 이는 실증적 균형과 의식적인 정치의사결정의 문제다. 우리가 목표로 두어야 할 것은 내적으로 민주적(장교의 선출을 포함)인 혁명적 군대를 두고, 이를 공동체와 산업단위에 직접적으로 결속하게끔 하며, 직업군인을 최소한으로 유지하는 것이다. 특수부대는 일상생활을 바탕으로 구성될 수 있을 것이다. 이를테면, 지금조차도, 은퇴한 공군 파일럿들은 민항기의 파일럿이 되면서 공군 예비역으로 남아있곤 한다. 해커나 컴퓨터 기술자들 역시 마찬가지로 조직될 수 있을 것이다. 혁명적인 아나키스트 사회에서는 핵무기나 대량파괴무기를 사용할 수 있어서는 안될 것이다. 이러한 무기들은 비도덕적이고, 시민들을 학살한다. 이러한 무기들은, 우리가 함께 해야만 하는, 타국의 노동자와 농민들을 겨냥하고 있다. 무엇보다 이 무기들은 자살적이다. 우리의 핵공격은 핵반격을 낳을 뿐이다. 핵무기를 가지고 있다는 사실 그 자체가, 위협을 느낀 적의 핵 선제타격을 유도한다. 핵의 일방적 사용조차 세계를 낙진으로 뒤덮어 폭격을 지시한 자와 폭격을 당한 자 모두를 죽음으로 내몬다. 레이건 정부의 수석 군축협상가(결코 평화주의자일리 없는 이력임을 알 수 있다)였던 폴 니츠는 미국이 “일방적으로 핵무기를 포기해야”한다고 선언했다. 그는 핵무기는 위험하고, 비싸며, 부도덕할 뿐 아니라, 불필요하다고 주장한다. 재래식 무기의 정확도가 크게 향상된 이상, 미국 정부는 비핵적 방식으로도 모든 목표물을 파괴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렇기에 핵무기고는 방어와 공격 양면에서 불필요한 것이라는 것이었다. 자유로운 사회를 방어하는 최대의 수단은 폭탄이나 군사조직이 아니라 정치여야 한다. 다른 땅의 인민대중에게 발화하는 목소리여야 한다. 우리가 핵무기를 해체했다는 사실 그 자체야말로 강력한 정치적 메시지가 될 것이다. 이 사실이야말로 “우리는 자본주의 국가가 만들어낸 지옥의 폭탄을 파괴한다. 우리는 당신들을 파괴할 능력을 포기한다. 우리는 새로운 사회를 만들고 있다. 당신 나라의 지배자들이 우리에게 핵무기를 사용할 수 없게 만들라! 그들의 무장을 해제하라! 국가를 전복하라! 자유세계에서 우리와 함께하자!”라는 외침이 된다. 혁명은, 특히 국제 제국주의의 중심인 미국에서의 혁명은 세계 전체에 어마어마한 정치적 충격을 안겨줄 것이다. 우리를 파괴하라 명령받은 외국군들이 혁명에 “감염될” 것이다. 외국 정부는 자유 북미에 군대를 보내기 두려워할 것이다. 설혹 파병한다 해도, 그들은 게릴라전을, 종심방어를, 사보타주를, 비폭력 저항을, 혁명적 선동을 마주할 것이다. 이것이 우리의 “저지력”이다. 자유야말로 최선의 방어가 될 것이다. 민병대는 “범죄”, 즉, 해이한 사람들의 반사회적 행동을 통제하는 아나키즘적 계획의 일부가 될 수도 있다. 민병대는 거리를 순찰하고 평화를 유지하는 것에서 시작하는 경찰의 역할 대부분을 차지할 것이다. “범죄 감시” 프로그램들을 보라. 범죄를 통제하고 반사회적 범죄를 막아내는 데에 있어, 지금의 제한적 조건 하에서도, 대중의 참여는 매우 효과적인 것이 될 수 있다. 많은 사람들은 아나키즘의 주요 과제가 경찰을 일소하는 것이라 잘못 생각하곤 한다. 그들은 아나키즘이 지금의 사회와 같지만, 경찰이 없는 사회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이러한 사회에는 노동 대중을 향한 혼란과 폭력이 난무할 것이고, 결과적으로 새로운 국가가 만들어내는 조직적 범죄가 재건될 것이다. 물론 자본주의 친화적인 “자유지상주의자”들 중, 이러한, 국가만 없을 뿐 다른 모든 것이 동일한 사회를 지향하는 자들이 있기는 하다. 사회주의적 아나키스트들은 이러한 것이 아니라, 모든 영역에서 완전히 다른 사회를 추구한다. 하지만 이러한 완전히 다른 사회에서도, 이전의 자본주의 사회가 만들어낸 반사회적, 비도덕적, 공격적인 분자들의 문제는 당분간 존재할 것이다. 아나키스트들은 복수나 처벌이 사회적 목표인 것은 아니지만, 인민들을 보호할 필요는 수인한다. 앞서 인용한 크로포트킨의 글 역시, “상호 보호”를 위해 구성된 연합체에 대하여 이야기하는 것처럼 말이다. 이 연합이 어떻게 작동할지는 지역적 조건에 따라 다를 것이다. 각 공동체와 지역들은 서로 다른 방법론을 차용할 것이다. 범죄와 경찰, 법원, 감옥의 문제를 다룸에 있어 주된 문제는 모든 탄압을 즉각적이고 완전히 철폐하는 것이 가능한지의 여부가 아니다. 오히려 중요한 문제는, 우리가 국가를 없앨 수 있냐는 것이 될 것이다. 노동대중 위에 군림하며 노동대중과 맞서는 관료적 “사법정의”의 체계를, 확고한 법원을, 변호사를, 대규모 경찰청을, 공격적 개인들에게 공격당하지 않는 채로 대체할 수 있는가? 사회주의적 아나키즘은 범죄 통제와 사회 질서의 유지를 지역적 자치 공동체가 통제하게 되어 각각의 공동체들이 다양한 방식을 실험하게 되는 것을 추구한다. 벤자민 터커가 1893년에 쓴 것처럼, “이웃을 침해하는 방식으로 사회적 법규를 침해하는 행위를 지속할 개인들에 대해서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 아나키스트들은 국가가 철폐된 자리에 자발성에 기반한 방어 연합이 남아, 필요한 모든 방법을 동원하여 침략자들을 쫓아낼 것이라 주장한다.” 모두가 성자가 되지 않더라도, 반권위주의적 사회주의 아래에서 범죄율이 줄어들 것이라는 말은 분명하게 할 수 있다. 풍족하고 완전고용이 확보된, 최소한의 소득이 보장된, 협력을 향한 사회적 압력이 존재하는 소규모 공동체에서, 재산 관련 범죄는 분명히 줄어들 것이다. 공동체가 자유코뮌주의를 달성하는 수준 만큼, 재산 관련 범죄는 사라질 것이다. 공동체 창고에서 자유롭게 가져갈 수 있는 물건을 훔칠 이유는 없지 않겠는가? 자유를 지향하는 사회에서는 현재 불법이라 치부되는 “피해자없는 범죄”와 같은 행동들 상당수가 합법화될 것이다. 우리는 인민들이 선하게 행동하도록 강제할 권리가 없다. 도덕법은 없어질 것이다. 합의한 성인들간의 성행위를 규제하는 법은 없어질 것이고, 소위 “사회적 중독”을 막기 위한 마약금지법이나 금주법은 철폐될 것이다. 그리고 이렇게 하면, 지금 체포되는 사람 중 대다수는 더 이상 체포되지 않을 것이다. 우리가 마약 중독이나 알코올 중독을 근절하기 위한 노력을 중단하겠다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이 노력은 AIDS 확장을 막기 위한 노력과 마찬가지로, 입법이 아닌 공중보건의 문제로 바라보아야 한다. 이 노력은 교육과 공공의료, 그리고 필요한 경우 합의할 공동체적 규제를 통하여 이루어질 것이다. (마약이 완전히 금지되어있기에, 우리는 마약의 판매를 규제할 수 없다. 그리고 그 결과는 마약을 사는 것을 매우 쉬운 일로 만든다.) 만약 중독자들이 의료기관의 통제를 통해 마약을 구할 수 있다면, 그들이 마약을 구할 돈을 마련하기 위해 범죄를 저지르지 않아도 될 뿐 아니라, 마약산업 전체가 무너지게 될 것이다. 금주령 철폐 이후 마피아들의 밀주산업이 무너진 것처럼 말이다. 빈곤, 인종주의, 성차별이 사라진 사회에서는 마약중독, 알코올 중독, 성폭력 역시 줄어들 것이다. 지금만 보아도, 범죄는 대부분 사회적 조건의 결과물이지, 경찰행위나 정책의 결과물이 아니다. 이를테면, 미국에서 가장 낮은 범죄율을 가지고 있는 주는 노스 다코타 주다. 노스 다코타 주는 살인이나 폭력적 범죄, 강도, 수감자 비율 등에서 가장 낮은 수준을 보여주고 있다. 1994년, 노스 다코타 주의 폭력범죄율은 인구 10만명 당 100건 미만이었다. 동시기 캘리포니아의 폭력범죄율이 인구 10만명 당 1,000건 이상이었다는 것과 비교해보면, 그 이질성을 더 잘 알 수 있다. 1995년, 노스 다코타 주 전역에서는 8건의 살인이 일어났다. 사람들은 문을 열어두고, 자전거와 차를 시건하지 않고 당당하게 지냈다. 노스 다코타의 차량보험료는 전국 최저수준이다. 범죄율은 15년 전과 마찬가지 수준이다. 결과적으로, 경찰력은 다른 어느 곳보다 적다. 1995년까지 노스 다코타 주는 부검을 위한 의료검사부서를 필요로 하지 않았다. 뉴욕 타임즈는 1996년 9월 21일의 기사에서, “노스 다코타 주 가석방 심사위원회의 위원을 보는 것은, 동화 속 요정을 보는 것과 같다”고 말하고 있다. 이 기사는 노스 다코타 주의 낮은 범죄율을 설명하기 위하여 여러 가능성들을 제시한다. 심지어 뉴욕 타임즈는 노스 다코타 주가 춥기 때문에 그렇다는 주장마저 내세운다. 언급된 가능성들 중 더 유의미한 것은, 노스 다코타 주의 주민들은 대부분 소규모 농촌 공동체에 살고 있다는 점일 것이다. 스피릿 레이크 수 족의 부족 판관은 “노스 다코타에서 범죄율이 매우 낮은 이유는, 이곳의 사람들이 서로 가까운 관계를 맺고 있다는 것이다. 은행 강도나 미심쩍은 자가 온다면, 그는 눈에 띌 수밖에 없다”고 말한다. 기사에서 언급된 다른 이유들은 안정적인 부모, 낮은 이혼율, 상호부조적 확장가족 등이 있다. 마지막으로, 노스 다코타 주의 실업율은 미국 전체 평균의 절반 정도로 매우 낮다. 노스 다코타는 결코 유토피아가 아니다. 노스 다코타 인들처럼 전통적인 방식으로 살아가고 싶어하지 않는 이들도 매우 많을 것이다. 다만, 내가 이야기하고 싶은 것은, 매우 밀접한 관계를 유지하는 공동체로 이루어진 사회와, 완전고용과, 상호부조적인 사회적 관계는 경찰력을 최소화하고도 범죄율을 낮게 유지할 수 있다는 것이다. 뉴욕 타임즈는 “노스 다코타는 전반적으로 명예로운 체계를 가지고 있다”고 기사를 마무리한다. 우리도, (전반적으로)명예로운 체계에 기반한 사회를 건설할 수 있다. 아나키스트 공동체 역시 규칙과 규제(“법”이라 불러도 좋다)를 가지고 있을 것이다. 그리고 이것들은 인민 총회를 통해 승인될 것이다. 지역에 기반한 노동대중들이 가담한 공동체 자경단을 통한 대중의 참여가 그 집행을 담보할 것이다. 공립학교의 운영위원회가 임명한 건널목 지킴이나, 자경단에게 호신술을 가르칠 호신술 전문가와 같은 특수분야의 전문가들도 있을 것이다. 법의학 연구소가 있을 수도 있다. 일부 공동체는 지역 보안관 제도 같은 것을 가지기로 결정할 수도 있다. “파레콘”과 같은 후기국가주의를 지지하는 샬롬(2004)은 시민군이 적합한 체제가 아니라고 주장한다. 그는 그 직무를 위해 특별히 훈련된, 민주적으로 통제되는 경찰은 언제라도 필요할 것이라고 바라본다. 그럴 수도 있다. 하지만, 일반적 노동대중에 적대하는 특수경찰부대를 만들 이유는 전혀 없다. 폭력적이고 반사회적인 행동을 하는 개인들은 여전히 존재할 것이다. 특히 혁명 이후의 시기에는, 이전의 자본주의 사회가 뒤틀어놓은 이들이 여전히 다수 존재할 것이니 더욱 말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우리가 지켜야 할 기본적인 원칙은, 사회는 스스로를 보호할 권리가 있지만, 그를 위해 인민들을 징벌할 권리는 없다는 것이다. 우리가 반사회분자들로부터 스스로를 보호할 수는 있지만, 그러기 위해서는 복수와 앙갚음이라는 고전적 관념들을 포기해야 한다. 개별 피해자들은 여전히 복수를 원할 것이다. 하지만 이 복수심에 사회의 정책이 근거해서는 안 된다. (징벌에 반대한다는 것이 개인적 책임에 반대하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반사회분자들이 과거의 피해자들인 것은 맞지만, 그 행동에 대해서는 책임을 져야 한다. 이 책임을 질 때에만, 그들이 피해자됨을 벗어날 수 있을 것이다.) 피의자를 검거하면 공동체 법정이 그들을 소환하여 선출되거나 채용된 판사 앞에 그를 세울 것이다. 배심원단은 공동체 구성원 전체의 총회로 구성되거나, 혹은 그 일부일 것이다. 그리고 이 법정은 오직 형사사건만을 다룰 것이다. 공동체 구성원 내부에서 발생하는 민사 사건의 경우, 마찬가지로 법정에 가거나, 양측 모두의 동의를 구한 독립된 조정관을 이용할 수 있을 것이다.(오늘날의 기업간 분쟁 대부분 역시 법정보다는 조정관을 통하여 해결되는 경우가 많다.) 판사들은 공동체의 규칙을 따를 것이고, 다른 판사들이 행한 이성적 판단의 판례들을 참조할 것이다. 특정한 개인이 반사회적 행동을 범했을 때, 공동체는 가해자와 피해자 사이의 화해와 배상을 통해 그 효과를 중화시키고자 시도할 것이다. 공공 서비스가 제공될 수도 있고, 직업이 제공될 것이며, 상담이 제공될 것이다. 수정된 형태의 감호조치를 취할 수도 있을 것이다. 가해자는 공동체 안에 살지만, 공동체의 감시를 받게 될 것이다.(감옥철폐운동을 하고 있는 몇몇 사람들은 이러한 방식이 투옥의 대체재가 될 수 있다고 바라본다. 그들 중 일부는 이미 이러한 방식들을 실험해보기도 했다. 모리스, 1976이나 페핀스키&퀴니, 1991을 참조하라.) 만약 이들의 행위가, 사회적 자위권이 필요할 정도로 심각한 것이라면, 이들은 공동체의 집단거주구역이나 (최후의 수단으로)구금 기구(소규모 감옥)에 구금될 것이다. 하지만, 감옥 다수는 철폐될 것이다. 우리의 사회에서 수감자들의 “교정”따위는 이루어지지 않는다. 수감자들은 수감 이후에 재범을 저지를 가능성이 오히려 더 높다. 감옥은 그저 사람들 다수를 거리에서 치워내기 위한 가장 값싼 수단일 것이다. “교정”이라는 것은 우리가 선하고 건강한 사회를 가지고 있다는 것을 상정한다. 그리고 “교정”을 통해 일탈자들과 범죄자들이 이 사회에 섞여들게 될 것이라는 것이다. 하지만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사회는 병든 사회다. 타인을 착취하여 앞서나간다는 반사회적 행동을 행한다는 점에서 대기업의 총수와 자동차 도둑은 동일한 것이나 다름없다. 남성의 폭력은 전쟁과 미디어를 통해 영광을 누린다. 중간계급의 풍요를 위하여 빈곤을 만들어낸다. 인종차별과 성차별은 만연하다. 빈자와 유색인종이 성공할 수 있는 길은 더 이상 없다. 마찬가지로, “교정”은 불가능하다. 감옥은 그저 범죄의 학교일 뿐이다. 하지만 진정으로 자유롭고 협동적인 사회에서라면, 범죄자의 교정은 실현가능한 목표가 될 수 있다. 사람에 가치를 두고, 인종차별과 성차별에 대항한 투쟁이 이루어지고, 협동이야말로 가장 중요한 가치가 되고, 모두가 좋은 일자리와 좋은 삶을 누릴 수 있는 사회에서, 반사회적 행동은 그저 일탈이 될 것이다. 이러한 사회에서만이, 반사회분자들이 행동에 대한 책임을 지고 사회에 합류할 것을 요청하는 것이 합당한 일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현대의 법정과 감옥에서는 이러한 일을 할 수 없다. 새로운 사회는, 이들의 문제를 해결할 최적의 방법을 찾기 위하여 최선을 다할 것이다. 교정보다 더 중요한 것은 장기적 예방이다. 혁명 직후에 자유로워진 인민들은 빈곤과 압제를 철폐하기 위한 과업을 수행할 것이다. 이들은 아동 학대와 아동 방치를 극복할 것이다. 냉혹한 반사회분자들 다수는 아동학대의 산물이다. 각 공동체가 운영할 대규모 사회복지는 모든 아동을 보호할 것이다.(켈러만, 1999) 문제가 있는 가정을 재결합하도록 돕기 위한 가능한 모든 수단을 사용할 것이다. 따뜻한 돌봄을 제공할 보육시설이 대안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 버림받거나 부모를 잃은 아동들은 공동체 주택, 청년주택, 공동체 치유 그룹 등에서 잘 살 수 있을 것이다. 사실, 많은 아동(혹은 청소년) 들은 가족을 떠나 청년 주택에서 살 수 있다면, 그렇게 하고 싶어할 것이다. 위험한 아동(폭력적인 반사회 행동을 할 위험이 있는 청년)을 식별하기 위한 특별한 노력이 기울여질 것이다. 공동체 기구는 폭력성의 징후를 보여주는 어린이들을 최대한 빠르게 확보할 것이다.(자본주의 사회에서 이러한 행동은 인종차별의 정당화기제가 된다. 하지만, 우리가 이야기하는 것은 탈자본주의 사회다.) 이들에 대한 특별치료, 교육, 의료는 이들이 권위주의 사회에서나 존재할 수 있는 비도덕적 괴물로 전락하는 것을 예방할 수 있을 것이다. 국가가 없이 사회주의적 아나키즘 사회는 어떻게 협동을 만들어낼 수 있는가? 경제적 계획이나 기업의 규제는 일정부분 존재할 것이다. 이러한 계획이나 규제는 “사물에 대한 행정이지, 사람에 대한 것은 아니”라 표현할 수 있을 것이다.(사람의 협력이 없이 어떻게 사물에 대한 “행정”을 할 수 있을지 상상하기는 어렵지만 말이다.) 지역 층위(공동체나 공장)에서 협동은 총회에 모인 사람들이 될 것이다. 높은 층위의 연방에는 총회가 선출한 대의원들이 출석할 것이다. 이들은 경제적 협력과 같은, 그들이 선출된 이유를 다루는 데에 집중할 것이다. 모든 혁명들이 우리에게 준 해답은 언제나 같았다. 모든 혁명들에서는 인민위원회가 등장했다. 이러한 인민위원회들 중에는 대면을 통해 이루어지는 직접민주주의 방식으로 운영된 위원회들도 있었다. 프랑스 대혁명기에 구성된 지역총회나 러시아 혁명기에 건설되어 독일이나 이탈리아에서도 이를 본따 건설된 현장노동자의 공장위원회 등 말이다. 지역 기반의 자치공동체들은 대의원들을 중앙으로 파견했다. 이 중앙조직들 역시 상급 위원회들에 대의원단을 파견했다. 1936년의 스페인 혁명, 1956년의 헝가리 혁명과 그 뒤를 이은 동유럽의 혁명 시기에 이러한 노동자(혹은 노동자 · 농민 · 군대) 위원회들이 등장했다. 1970년대의 칠레 투쟁, 그리고 그 뒤를 이은 남미의 투쟁들에서 노동자 평의회가 등장했다. 샬롬은 “다층 평의회” 체계를 제안한다. 각 공동체 단위로 형성될 초급 평의회는 모든 성인 공동체 구성원들(25~50명)로 구성될 것이다. 50명 이내의 규모를 유지하는 것은 대면 토론과 숙의를 통한 의사결정을 위해 필수적인 것이 될 것이다. 이러한 평의회들은 역시 50명 이내로 구성된 2단계 평의회로 대의원단을 파견할 것이다. 이 과정을 한 나라 전체를 구성할 수 있을 때까지 반복하자는 것이다. 아나키스트들과 달리, 샬롬이 제시하는 “다층 평의회”에서의 대의원단은 초급 평의회의 의사결정에 구속력을 갖지 않는다. 그 구속력이 없는 이상, 대의원이 마음을 바꾸고 결정을 바꿀 수 있는 것인데 말이다.(아나키스트들은 결정의 속도를 크게 낮추는 한이 있더라도, 상급 평의회의 결정은 하급 평의회의 승인을 받아야 한다는 주장을 하기도 한다.) 지역 공동체나 공장위원회를 통한 직접 민주주의에 뿌리내린 평의회 체계는 유연한 급진적 민주주의를 통한 사회적 협동을 가능하게 한다. “지도자”에 대한 인민의 통제력은 유지될 것이다. 관료들의 교체는 잦아질 것이다. 서로 다른 당(혹은 당이 아닌 정치조직)들은 그들이 확보한 지지의 수준만큼 대변될 수 있을 것이다. 인민의 정치적 의견 변화는 보다 쉽고 빠르게 반영될 것이다. 그렇기에, 당(혹은 비정당)들의 입지는, 특히 소수로 시작하여 영향력을 확장할 혁명적 조직의 위상은 평화롭게 바뀔 수 있을 것이다. 새로운 평의회 체계의 구체적 구성방식은 혁명 중에 준비되어야 하고, 구체적인 조건에 따라 달라질 수 있어야 한다. 누군가는 이 평의회가 주로 지역공동체에 기반하여야 한다고 주장한다. 아나키즘적 조합주의 전통에 입각한 다른 누군가는 평의회가 공장, 사무실, 작업장에 기반하여야 한다고 주장한다. 선출과 대의의 방법은 지역마다 다양할 수 있다. 그리고 이것이 연방적 평의회 체계의 장점이기도 하다. 아나키스트들은 공장과 공동체 모두에서 직접민주주의에 기반한 지역의 자치기구의 중요성을 신봉한다. 파견대의원들을 포함한 고등의 연방들은 존재할 것이지만, 이 연방 역시 일상적 직접민주주의(“삶의 방식”으로서의 민주주의)에 그 뿌리를 두고 있어야 한다. 인류가 존재해온 기간의 대부분 동안, 우리는 수렵-채집부족부터 부락까지 다양한 소규모 공동체에서 살아왔다. 초기 도시들은 수만 규모의 인구를 가지고 있었다. 수백만이 살아가는 도시라는 개념은 산업혁명이 만들어낸 현대적 개념이다. 아나키스트들은 탈중앙주의자로서 현대 도시와 후기 산업시대의 생활조건의 이점을 탈중앙화된 직접 민주주의와 혼합하고자 한다. 민주주의가 단지 대표자를 결정하여, 그 대표자가 다른 곳에서 우리를 위해 정치적이 되도록 하는 기제 이상이 되기 위해서는, 이러한 혼합이 필요하다. 민주주의는 인민의 일상적 의사결정에 뿌리를 박아야 한다. 토마스 제퍼슨은 뉴잉글랜드의 마을 평의회에 깊은 인상을 받았다. 제퍼슨은 자치군들을 더 작은 분구로 나누어 그 분구들에 교육과 민병대, 경찰, 도로유지보수, 사법, 상급 자치구에 관한 선거 등의 통제권을 주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모든 사람이 그가 살아가는 분구-공화국의 방향을 공유하고 있다면, 그를 통하여 더 상급의 자치구들의 방향을 조금이라도 공유할 수 있다면, 그가 1년 중 하루의 선거일 뿐 아니라 일상적 삶 속에서 통치의 일부라고 느낄 수 있다면, 그 사람은 카이사르나 나폴레옹같은 자가 자기 힘을 앗아가는 것을 보느니 차라리 심장이 뽑혀나오는 것을 감내할 것이다.” 특정한 기구에서 탈중앙주의와 중앙집권주의의 균형을 맞추는 것은 실무적 문제다. 우리는 지역 코뮌을 필요로 하는 만큼 국제적 조직도 필요로 한다. 원칙적으로, 연방주의는 이 둘 모두를 가능하게 할 것이다. 하지만 적절한 균형이 무엇인지를 알아내는 것은 사회적 실험을 통해서만 가능할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필요최소의 중앙집권을 제외하고, 최대한 높은 수위의 탈집중화가 필요하다는 것이 기본적 원칙임은 분명하다. 마르틴 부버 역시, 문제작 『유토피아로 가는 길』(1958)을 통해 이와 같은 것을 지적한다. 그는 “우리는 중앙집중을 추구해야 한다. 하지만 지방에게로 과업을 넘겨야할 때는 도래할 것이다. 우리는 각 지방에 최대한의 주도권을 남겨두어야 한다”던, 러시아 혁명기의 레닌을 인용하고, 다음과 같은 첨언을 남긴다. “‘우리는 중앙집중을 추구해야 한다. 하지만...’으로 말을 시작하는 대신, 말을 한 바퀴 돌려 ‘우리는 중앙집중을 벗어나야 한다. 하지만 혁명적 필요에 따라 중앙으로 과업을 넘겨야 할 때가 있을 것이다. 이 필요가 객관적이고 임시적인 수준을 넘지 않도록 주의하자’라고 했다면, 그것이야말로 진정한 사회주의적 태도일 것이다.” 정확하다. 마르크스주의적 관점과 달리, 혁명의 도중에 조차, 우리는 일시적으로 필요할 때에만 중앙집권적 태도를 취해야 한다. 탈중앙화되고, 연방으로 결합한 민주주의 체계라 할지라도, 모든 사람이 자신의 모든 시간을 투자하여 모든 결정과정에 참여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바버는 『강한 시민사회, 강한 민주주의』에서 참여적 정치를 “강한 민주주의”라 부르면서, 그 목적은 “모든 사람들이 자기 시간의 일부로 통치행위에 대한 책임의 일부를 지는 것”이라고 말한다. 사회적 협력을 위해 사회를 “대표”하여 모든 기구 위에 군림하는 “주권”기구를 필요한 것은 아니다. 이를테면, 현대 사회에 세계 정부 같은 것이 있는가? 국제적으로, 우리는 “아나키” 상태에 있는 것이다. UN 결의안은 강대국들이 동의할 때에만 작동한다. 하지만 우리는 여전히 세계 모든 지역의 사람들에게 편지를 보낼 수 있다. 각국의 우정체계가 그러도록 합의했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비행기도 세계 전역을 날고, 기업들은 세계 전역에서 사업을 벌이며, 인터넷은 세계 전역에서 작동한다. 세계를 하나로 묶기 위한 규칙을 만들기 위한 국제 회의들은 만연한 민족주의 속에서도 개최된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을 주관하는 세계 정부 같은 것은 없다.(크로포트킨이 이러한 지점을 지적하기도 했다.) 자본주의적 민주주의 내에서도, 국가가 모든 기구 위에 군림하는 무제한적 힘을 가지지고 있지 않다. 미국 국가는 “교회와 국가를 엄격히 분리”해야 하기에, 교회를 후원하거나, 재정을 지원하거나, 개입하지 않는다. 교회는 수백만의 삶에 영향을 끼치는 거대 기구다. 그리고 이론적으로 교회는 국가와 같은 층위에 있지 그 아래에 있지는 않다. 마찬가지로, 시민권이라는 것이 보장된다는 것은, 극단적인 상황이 아닌 한, 정부가 통제하지 않는 영역이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최소한 이론상은 그러하다. 실질적으로, 많은 기본권들은 침해당하고 있다.) 길드 사회주의자들은 자유로운 사회주의는 국가사회주의의 중앙집중적 방식이 아니라, 다원주의적인 방식으로 산업을 조직해야 한다고 주장한다.(콜, 1980; 패트먼, 1970; 타우니, 1948) 더 최근의 주장을 보자면, 존 번하임은 그가 추첨제라고 부르는 극단적 다원주의를 주장한다. 현재 중앙의 다기능 기구가 행하고 있는 전국적, 도시적 결정들은 “통제기구의 지침이 없더라도, 스스로 협상하고, 협상이 실패할 경우 유사사법적 조정을 이용하여 서로 협동하는 자율적인 특별기구들에 의해 이루어질 수 있다.” 이는 공원과 거리와 도서관의 운영, 규제의 신설, 보건 서비스, 미화 등이 독립적으로 운영될 수 있음을 의미한다.(번하임, 1989) 번하임의 모델에서, 각 기구의 방향은 공동체 전체가 아닌 그에 직접적으로 영향을 받는 모두에 의하여 결정되어야 한다. 선출된 지도위원회도 있어서는 안 될 것이다. 지도위원회는 그에 영향을 받는 사람들 중에서 추첨될 것이다. 오늘 우리는 배심원단을 추첨으로 뽑고 있다. 그리고 이것이 고대 아테네의 민주주의에서 공무원과 위원회를 선출할 때에 작동하였던 방식이기도 하다. 이렇게 하면 우리는 인구분포에 따른 관점 차이가 반영되는 “통계적 대의 민주주의”를 가질 수 있을 것이다. 전업 정치인 대신 평범한 사람들이 그들의 삶을 지배하는 기구들을 직접 관리할 기회를 가지게 될 것이다. 다시 한 번 이야기하지만, 이러한 형태들은 지역과 민족성에 따라 각자 다르게 실험해볼 수 있는 것이다. 일부 지역들은 대중조직이 하나의 조직으로 통합되어 총괄적으로 사회를 운영하는 더 견고한 연방 체계를 선호할 수도 있을 것이다. 다른 지역에서는 서로 평등한 조직들이 필요할 때에만 합의를 통해 협력하는 느슨한 연결망을 선호할 수도 있을 것이다. 번하임이 주장하는 것 같은 극도의 다원주의를 성취하기 위해 추첨제가 필요충분조건인 것은 아니다. 바버(2003) 역시 선출직 대표자들을 대치하기 위한 여러 기구들을 실험해보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아나키즘에 대한 흔한 비판 하나를 이야기해보자. 아나키즘은 모든 사람이 언제나 선해지는 것이 가능하다고 상정한다는 비판을 자주 받는다. 그렇기에 아나키즘은 인간 본성의 부정적 측면을 거부하는 너무 이상주의적인 이데올로기라 불린다. 아나키즘이 모든 인간은 협동적이고 자주경영적인 사회에 적응할 것이라 믿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하지만, 아나키즘은 모든 사람이 완벽해질 수 있을 것이라 가정하지 않는다. 오히려, 아나키즘은 언제나 인간은 믿을 수 없는 존재라고 믿어왔다. 그렇기에 어떠한 인간도 다른 사람 위에 군림하는 권력을 가져서는 안되는 것이기도 하고 말이다. 아브라함 링컨은 노예제에 대해 말하면서 “누구도 다른 사람의 동의 없이 그를 지배할 만큼 훌륭하지는 않다”고 말한 바 있다. 아나키스트들은 여기에서 더 나아가, 심지어 동의가 있더라도, 누구도 타인을 지배할 만큼 훌륭하지 않다“고 믿는다. ”모든 권력은 부패한다“는 것이야말로, 아나키스트들의 근본적인 신념이다. 그렇기에 아나키스트들이 탈중앙화 · 다원주의 · 사상의 자유 · 언론의 자유 · 직접 민주주의 · 대의성의 최소화 · 권력이 누군가의 손에 쌓이는 것에 대한 예방을 옹호하는 것이다.(굿맨, 1965) 누군가는 불량사회는 어찌할 것인가?라고 물을 것이다. 아나키스트 연방이 존재하는 가운데, 특정 마을, 코뮌, 혹은 도시가 연방을 탈퇴할 권리를 행사한다고 생각해보자. 그리고 나서 이들이 오직 백인만을 구성원으로 받겠다고 선언하거나, 학교에서 창조설을 가르치거나, 다른 공동체들과 공유하는 강에 폐기물을 버린다면 어떻게 하겠는가? 이럴 때 국가가 나서서 각 공동체들이 공동선에 복무하도록 강제할 필요가 있는 것이 아닌가? 국가없는 사회에서는 어떻게 대처할 것인가? 충분히 유의미한 가정이다. 내가 자유의지주의적 사회주의 사회에서도, 인간들은 완전하지 않을 것이라는 것에 동의하기 때문에 더욱 그러하다. 나는 이러한 경우에 다른 지역 공동체들이 회의를 개최할 것이라 본다. 누군가는 이 회의에서 이 불량사회를 내버려두자고, 이들이 그냥 고여 썩어가게 두자고 제안할 것이다. 유색인종들은 다른 곳에서 살 수 있으며, 그들의 학교는 상급 교육기관에서 인정하는 학력이 되지 못할 것이다. 다른 이들이 그들의 폐기물을 치울 수도 있다. 최소한 그것이 탄압보다는 낫지 않겠냐는 제안이 있을 수도 있다. 반면 다른 누군가는 스스로만이 아니라 다른 이들까지 해하는 저 불량사회를 용납해서는 안된다고 선포할 것이다. 그리고 그를 위하여 지역 자경단을 동원하고, 적 공동체에 쳐들어가 그 정책을 바꾸게끔 하자고 주장할 수도 있다. 그리고 누군가는 이 두 주장이 너무 극단적이라며, 중간 어디엔가의 방식을 제안할 수도 있다. 그 공동체가 정책을 바꾸도록 설득하기 위한 선전활동이 조직될 수도 있고, 그 공동체 안에서 비폭력 시위를 개최하여 폭력적이지 않은 불편을 초래할 수도 있다. 그 공동체에 대한 경제적 보이콧은 무기 없이도 그들을 탄압할 수 있게 할 것이다. 각 지역연방들은 각자의 특정성에 따라 여러 정책들을 선택할 수 있을 것이다. 마르크스주의자 등은 아나키스트들이 완전히 자유롭고, 평화로우며, 협력적인 사회(마르크스가 말하는 바, “고등공산주의”)로 바로 건너뛸 수 있을 것이라 여긴다고 착각하고 있다. 이것이 아나키즘의 캐리커쳐다. 우리가 보아온 아나키스트들은, 일반적으로 (크로포트킨의 말을 빌리자면) 무장대중을 통한 “영역의 방위”와 “상호 보호”, 연방을 통한 사회적 협동의 필요성을 인정한다. *** 6장. 국가의 철폐에 있어 과학기술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대규모 산업의 시대에서, 국가를 철폐할 수 있을까? 평범한 사람들이 스스로의 사회 운영 역량에 대하여 신뢰하지 않게 되었다는 것을 제쳐두고 생각해보았을 때, 국가를 지지하는 주장의 핵심은 산업기술이 중앙집중화된 사회 질서를 요한다는 것일 것이다. 보수주의자들도, 리버럴들도, 마르크스주의자들도 이 관점을 공유한다. 어빙 루이스 호로비츠는 아나키스트 저작선집의 서문에서 다음과 같이 오만하게 말한다. “현대 산업생활이 국가 권위의 해소에 대한 아나키스트들의 요구와 양립할 수 없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은 매우 쉬운 일이다.” 1922년, 당시 레닌 다음으로 뛰어났던 러시아 공산주의 이론가였던 니콜라이 부하린 역시 비슷한 주장을 한 바 있다. 그는 『아나키와 과학적 공산주의』에서 아나키즘적 코뮌주의와 맑스주의적(“과학적”) 공산주의의 차이는 그 국가를 철폐한다는 “최종 목적”에 있는 것이 아니라고 적고 있다. 부하린은 자유주의자들이나 개량주의적 사회주의자들(이를테면, 호로비츠)과 달리, “미래에는 계급이 없을 것이다. 계급적 억압도 없을 것이다. 그렇기에 이 억압의 기구인 국가도 없을 것이”라고 믿었다. 그가 보기에 두 조류의 실질적 차이는 (1)이행기 국가(“프롤레타리아트 독재”의 필요성과 (2)모두에게 충분한 만큼 생산하기 위해 사회적 생산을 확장할 방법에 있었다. “이에 대한 우리의 이상적 해결책은 생산의 중앙화에 있다. 질서정연하게 대규모로 산업을 조직하고, 나아가 세계 경제 전체를 조직하는 것이다. 반면 아나키스트들은 생산력을 높이기는커녕 낮추기만할 뿐인 소규모 코뮌과 소규모의 탈중앙화된 생산을 추구한다.” 부하린은 이런 식으로 중앙화되고 관료적이며 국가적인 구조를 세계적 규모로 확장하는 것을 끝없이 옹호한다. 이탈리아의 아나키스트 루이지 파브리는 부하린의 글에 대한 반론을 작성했다. 이 반론에서 파브리는 러시아 공산당의 독재가 사멸하기는커녕 “새로운 지배계급”이 운영하는 “국가 자본주의” 체제가 될 것이라 예견하는 등 여러 예리한 지적을 남겼다. 이 지적이 1922년에 나온 것은 그저 놀라울 따름이다. 그는 마르크스주의가 이윤동기에 의해 만들어진 자본주의적 중앙집중을 찬미한다 비판한다. 자본가들은 투기를 위해, 노동자들에 대한 감시와 통제를 위해, 시장과 원자재의 독점을 위해, 국제경쟁력을 향상시키기 위해, 이외에도 수많은 제국주의적이고 독점자본주의적인 이유로 중앙집중화를 실현한다.(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세계화의 시대에, 자본의 중앙집중화는 그 어느 때보다 깊게 이루어지고 있다. 기술적으로는 굳이 그럴 필요까지는 없는데 말이다.) 하지만, 파브리는 아나키스트들이 반드시 탈중앙화된 생산을 지지하여야 한다고 말하지는 않았다. 아나키스트들이 원하는 생산은 협동하는 공동체들의 연방과 노동자 자주경영으로 운영되는 산업에 알맞은 생산이었다. 그렇기에 아나키스트들은 생산의 탈중앙화를 최대한 옹호한 것이다. 하지만, 만약 특정 산업에서 일정 부분 중앙화가 필요한 것이라면, 그 필요를 부정할 수는 없다. 아나키스트의 관점은 “생산의 조직에도 반영되어 있다. 아나키스트들은 생산의 조직이 가능한 많이 탈중앙화되는 것을 추구한다. 하지만 이것이 모든 곳에서, 모든 상황에 대하여 적용되어야 하는 절대적 규칙인 것은 아니다. 애초에 자유의지주의적 질서라는 것은 이러한 단일한 해결책의 가능성을 부정한다.” 기술을 고려할 때, 이 언명은 앞서 인용한 부버의 언명과 정치적으로 유사하다. 그리고 이것이야말로 아나키스트적 방법론에서 중요한 원칙이다. 마르크스주의자들은 중앙집중적으로 조직된 현대 산업기술에 해방의 가능성이 있다고 주장한다. 이들은 현대 산업기술이 인류 역사상 처음으로 모든 빈곤과 굶주림과 착취를 끝낼 수 있게 만들었다고 말한다. 그리고 이것은 옳다. 모두가 풍족하고 즐길거리가 풍부한 세상을 만드는 것은 가능해졌다. 그리고 이것은, 앞서 언급한 것처럼, 모든 사람이 의사결정구조에 참여할 수 있는 가능성을 만들어낸다. 친자본주의적인 정치 경향들(보수주의와 자유주의)은 자본주의가 모든 생산적 기술을 만들어낸 것이기에 유지되어야 한다고 말한다. 오늘날에 와서는, 심지어 사회민주주의자들 조차도 약간의 개량만을 주장할 뿐 황금알을 낳아줄 부르주아 거위의 배를 가르려 하지 않는다. 마르크스주의자들은 세계 각지에서(심지어 산업화된 제국주의 국가들에서도) 지속되고 있는 빈곤과 절망, 경제적 불안정을 지적한다. 부르주아 거위는 황금알을 낳지만, 그 황금알을 향유하는 것은 소수일 뿐이라는 것이다. 마르크스주의자들은 기술이 “자본”이 되는 것이 아니라, 노동대중이 공유하는 사회적 생산수단이 된다면, 기술은 오직 인간의 후생을 위해서만 사용될 것이라고 말한다. 자본주의는 새로운 사회로 대체되어야 하지만, 이 사회는 새로운 운영방식을 가진 자본주의적 생산형태를 유지할 것이라는 것이다. 이러한 산업주의의 찬양자들에게는 안타깝게도, 현대 기술은 단지 기술독점의 문제 외에도 여러 문제들을 가지고 있다.(커머너, 1972) 부르주아 거위의 황금알은 방사성 황금알이다. 누구도 황금을 먹을 수 없다. 반복해서 말하지만, 현대 기술은 우리가 숨쉬는 공기와 우리가 먹는 음식을 오염시킨다. 현대기술은 지구 전체를 덥히고 있다. 현대기술은 가뭄과 홍수를 만들어내고 있다. 현대기술은 동식물 종들을 멸종시키고, 열대우림을 파괴하고 있다. 현대기술은 플라스틱이나 방사성 물질과 같은 쓰레기를 생산한다. 현대기술은 재생불가능한 자원을 고갈시킨다. 현대 기술은 파괴적인 무기를 만들어낸다. 단 한 번의 전쟁이, 지구상 모든 생명체를 멸종시킬 수 있다. 우리의 산업 생활이 얼마나 석유와 천연가스, 석탄, 그리고 그 부산물에 의존하고 있는지를 생각해보라. 우리의 운송체계는 가솔린으로 굴러간다. 우리의 음식은 석유화학 비료와 농약의 대규모 사용으로 생산된다. 우리의 옷은 석유에서 추출한 합성수지로 만들어진다. 우리의 집은 천연가스와 석유를 통해 난방을 가동한다. 전기는 석탄과 석유로 만들어진다. 의류부터 가구, 주거까지 다양한 것들에 우리는 플라스틱을 사용하고 있다. 하지만 석유, 천연가스, 석탄은 제한된 재생불가 자원이기에, 언젠가는 고갈될 것이다. 십수년 내로 국제 석유 공급은 감소하기 시작할 것이다. 화석연료의 사용은 대기를 오염시켜 온실효과를 유발할 것이고, 해안가 도시들은 물에 잠기고, 가뭄이 확산될 것이다. 플라스틱은 자연적으로 사라지지 않는다. 플라스틱 쓰레기는 아주 오래 남아있을 것이다. 기름 유출 사고들은 지역 생태계를 파괴할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이 자원이 우리 삶을 구성하도록 놔두고 있다! 생태주의자들도 거의 언급하지 않는 현대 기술의 악덕도 있다. 우선, 공장 노동자들에 대한 악영향이 있겠다. 직장 내의 오염이나 높은 산재율 역시 물론 문제지만, 노동자와 기계와의 관계 그 자체도 충분한 문제다. 일반적인 공장 작동 방식은 노동자들의 창의력을 촉진하는 것이 아니라, 노동을 생각없이 반복적인 작업으로 만든다. 노동자들은 기계에 종속되고, 그들의 노동은 기계의 작동 비용에 따라 정의된다. 현대 기술의 다른 단점은 소비재의 질, 과대해지는 도시의 규모, “높은 삶의 질”의 본질 등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공해를 막으려는 법 몇 개를 만든다고 되는 일이 아니다. 산업사회의 기술적 근간에는, 우리가 물리적으로 어떻게 생산하고 어떻게 재화와 용역을 분배할 것인지에 대한 결정에는 변혁이 필요하다. 현대 산업기술의 문제는, 그 기술이 금전적 이익을 생산하기 위해 혈안이 되어, 노동자나 환경에 대한 영향을 무시한 채 자본을 축적하고 성장하는 자본가라는 소수에게 독점되었다는 것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이러한 것들은 자본주의의 태생적 문제들이다. 사회적 소유와 이윤이 아닌 사용가치에 기반한 생산은 반드시 필요한 것이지만, 그것만으로 충분한 것은 아니다. 마르크스주의자들은 단순히 자본주의 국가를 장악하여 사회주의를 건설하는 데에 이용할 수 없으며, 국가를 다른 구조로 대체하여야 한다고 말한다. 그리고 그들은 자본주의적 경제 체제 역시 전복하고 대체해야 한다고 인정한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대부분의 마르크스주의자들은 현존 기술만큼은, 최소한의 변혁도 필요없이 사용될 수 있는 것이라고 여긴다. 그 정반대의 위치에 산업 기술 전체가 폐기되어야 한다는 결론을 내린 일부 아나키스트와 급진주의자들이 있다. 이들은 전기, 차량, 석유공정, 발전, 항공, 텔레비전, 컴퓨터, 심지어는 현대 의약도 철폐되어야 할 것으로 여긴다. 인류는 산업혁명 이전의 기술수준으로 돌아가야 한다. 인류의 기술수준은 최소한 중세 수준으로 회귀하여야 할 것이고, 나아가 농업혁명 이전으로 돌아가 수렵-채집 사회로 회귀할 필요가 있을 수도 있다. 이 “원시주의자”라 불리는 기술혐오자들은 마르크스주의자들의 기본적 명제를 공유하는 평범한 기술성애자들이다. 원시주의자들은 현대 기술은 오직 중앙집중화(대규모의, 반생태주의적이고, 인간소외를 불러오며, 위계적으로만 조직가능한 방향)를 지향할 수밖에 없다고 바라본다는 명제를 마르크스주의자들과 분명히 공유하고 있다. 마르크스주의자들은 과학기술이 그것을 요구한다고 생각하기에 중앙집중을 주장한다. 원시주의자들은 과학기술이 중앙집중을 요구한다고 생각하기에 과학기술을 반대한다. 과학적이고 현대적인 산업기술이 반드시 중앙집중화되고 권위주의적이어야 한다는 관점을 거부하는 제3의 관점도 있다. 이 관점은 크로포트킨으로부터 시작하여, 루이스 멈포드, 폴 굳먼, E.F.슈마허, 머레이 북친 등에서 드러난다. 이들은 “원시주의자”들만큼이나 현재의 기술사용에 비판적이다. 이들은 산업문명은 도덕적 · 생태적 · 인간적으로 막다른 길에 다다랐으며, 인류의 파괴를 불러오고 있다고 입을 모은다. 하지만 이들은 과학기술이 진정으로 인간적인 사회를 건설하는 데 사용될 수 있다고 믿는다. 이를 위해, 기술은 다른 형태로 사용되어야 한다. 이들은 여러 대안적 기술의 예시를 들어 그들의 관점을 뒷받침하고 있다. 하나는 현대 기술이 (마르크스주의자들이 지적하는 것처럼)매우 생산적일 뿐 아니라, 매우 유연해질 가능성 역시 가지고 있다고 본다. 다양한 대안에너지원(석탄, 석유뿐 아니라 알코올, 풍력, 목재, 태양열, 조력, 지열까지)들은 소수의 거대한 엔진을 돌릴 수도 있지만, 많은 탈중앙화된 작은 엔진들을 돌려 광범위한 지역의 공동체들에 전력 · 난방 · 광원 등을 공급할 수 있다. 로빈스가 보여준 것처럼, 가정과 산업에서의 제대로 된 에너지 보존법이 현재 낭비되고 있는 에너지 상당수를 절약할 수 있다는 것에 대해서는 말할 것도 없다. 대공장은 거대한 기계를 사용하지만, 소규모 동력기계들 역시 존재하며, 이는 공동체 작업장에서도 사용할 수 있다.(미국의 공장들은 평균적으로 40~60명을 고용한다. 미국에서 가동중인 275,000개의 생산 공장 중, 10%만이 100명 이상을 고용하고 있다.) 오늘날의 운송수단은 주로 차량, 트럭, 석유동력선, 항공기, 철도 등이 있다. 하지만 현대 기술을 이용하면 철도의 이용을 확장할 수도 있고, 전차를 재부설할 수도 있고, 전기자동차를 상용화할 수도 있으며, 안전한 비행선과 거대한 범선을 지을 수도 있을 것이다. 오늘날 강철로만 만들 수 있는 것들은, 현대 기술을 이용하면 알루미늄이나 플라스틱이나 특수처리된 목재로 만들 수도 있게 될 것이다. 거대한 메인프레임 컴퓨터가 있는 것처럼, 소형 PC나 더 작은 컴퓨터들도 만들 수 있다. 인터넷은 제국주의적 기업들이 세계 전역의 사업들을 통제할 수 있도록 하였다. 하지만 인터넷은 광범위한 개별 PC 사용자들의 상향식 협력도 가능하게 한다. 거대한 공장식 농업기업이 식량을 생산할 수 있는 것처럼, 소규모 유기농 농장이나 도시 한복판의 소형온실에서도 식량을 생산할 수 있다. 신문을 인쇄공장에서 출력할 수 있는 것처럼, 소규모 언론사들의 데스크탑에서도 출력할 수 있다. 40년도 더 전에, 폴 굿먼과 퍼시벌 굿먼은 『코뮤니타스』에 기고한 글에서 “역사상 처음으로 우리는 잉여기술을, 자유선택의 기술을 가지게 되었다. 우리는 중앙집중할 수도 있고, 탈중앙할 수도 있게 되었다. 우리는 인구를 집중할 수도 있고, 분산시킬 수도 있게 되었다. 만약 우리가 도시와 농촌을 농업사회적 삶의 방식으로 재결합하기를 원한다면, 이제는 할 수 있다. 우리는 구세대적 내수 산업으로 돌아갈 수도 있다. 모든 지역에서 구할 수 있는 소형 발전기가, 싸고 우수한 소형 기계가, 각 기계가 생산한 부품들을 모으고 조립할 수 있는 쉬운 수단들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굿먼 일가의 글은 새로운 기술 운동이 시작하기 전에 기술된 것이다. E.F.슈마허는 1999년의 글을 경제 개발 지원사업에 대하여 조사하는 것으로 시작한다. 그는 개발지원금은 소수의 지역 유지와 정부 관료들에게 돌아가, 댐 건설, 공장 건설, 공항 건설 등의 거대 건설 사업으로 이어졌다는 것을 밝혀냈다. 이러한 건설 사업은 “제대로 진행되”더라도, 지역 문화를 극적으로 망가트렸다.(그리고 이후에 발생할 종교 근본주의-민족주의 운동의 불씨가 되었다.) 이 거대한 건설 사업들이 “선진적”이고 자본집약적인 기술을 사용했기에, 이 건설 사업에는 소수의 사람들만이 채용될 수 있었다. 그리고 이 건설은 생태를 파괴했다. 슈마허는 이러한 기술을 대신하여 인민이 자기 속도에 맞추어 발전할 수 있도록 도울 기술을 개발할 것을 제안한다. 이러한 기술은 자본이 희소하지만 노동은 풍족한 국가들에 제공될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기술은 그가 “중간 기술”이라 부르는, 전통적 기술과 현대 대량생산법 사이 어딘가에 있는 것이어야 한다. 슈마허와 그 동료들은, 소가 끄는 목제 쟁기를 사용하는 농부들에게 트랙터를 제공할 것이 아니라, 더 나은 철제 쟁기와 마구를 제공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태양열로 작동하는 철제 오븐을 제공하거나, 지역원산 자재를 사용한 소규모 주거의 건축법을 제공할 수도 있을 것이다. 이들의 생각은 최신의 과학 기술을 사옹하여 소형 기계, 소형 엔진, 지역적 노동과 자원에 기반해 지역적 필요를 충족할 수 있는 도구들을 개발해야 한다는 것에 있었다. “중간 기술” 산업은 세계 전역에서 발전해왔다. 슈마허와 그 동료들은 “작은 것이 아름답다”는 슬로건을 부유한 국가에도 적용하기 시작했다. 이제 이러한 형태의 기술은 “적합 기술”이나 “대안 기술”(혹은 “공동체 기술”, “부드러운” 기술, “해방 기술”)이라 불린다. 이러한 시도는 현대 기술 원칙이 탈중앙화되고, 생태적이며, 천연자원을 보존하며, 노동자 통제에 걸맞는 방식으로 만들어질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칼 헤스와 그 동료들 역시 워싱턴D.C.의 빈민구역에서 탈중앙화되고 공동체 지향적인 기술의 가능성을 보여주었다. 이들은 옥상에 수경재배식 비닐하우스를 짓고, 그곳에서 채소를 재배했다. 그리고 지하에는 수족관을 두어 생선을 길렀다. 이들은 소규모의 자급자족적 박테리아분해 화장실을 만들었고, 이를 통해 모인 분뇨를 비료로 사용했다. 이들은 고양이 사료 캔을 사용하여 태양열 발전기를 만들었다. 이것은 직접민주주의적으로 운영되는 공동체 조직을 건설하는 것과 함께 이루어졌다. 이 작업은 지역자급기구(Institute for Local Self-Reliance)를 통하여 지속되었다. 이는 도시가 대안적 기술과 지역적 경제계획을 통해 산업적으로 자급적인 공동체로 변모할 수 있음을 보여준다. 대안 기술의 이론가들은 다양한 정치적 지향을 가지고 있다. 로빈스(Lovins)와 같은 이들은 분명히 친자본주의적이다. 헤스나 세일과 같은 이들은 중립적이다. 북친은 사회주의적(소규모 공동체) 아나키즘을 표방한다. 굿먼은 자신이 “공동체 아나키스트”이며 “혼합경제”를 지지한다고 밝혔다. 슈마허는 일종의 탈중앙주의적 사민주의자였다. 슈마허에게 영향을 준 것은 길드 사회주의자였던 R.H.타우니였다. 슈마허와 같은 기술 전문가들은 마르크스주의자들이 정치경제적으로 한 측면만을 강조한다고 비판하면서도, 기술과 규모에 있어서의 변화가 가장 중요한 것인 양 주장하곤 했다. 소규모 대안 기술은 혁명적 변혁이라는 총체적 계획에 있어 중요한 부분이지만 유일한 부분인 것은 아닌데 말이다. “작은 것은 아름답다”는 대안 기술 운동은 이론과 실천 양면에 있어 많은 것을 보여주었다. 탈중앙화되고 인간적인 기술은 실질적으로 선택할 수 있는 것이다. 대안기술주의자들은 중앙집중적 생산이 언제나 가장 효율적이라는 자본주의적 신화를, 마르크스주의자들이 온전히 받아들인 그 신화를 거부한다. “효율적”인 것이 “가장 이윤을 많이 남기는” 것도, “소수의 정치적 통제에 가장 유효한” 것도 아니라면 말이다. “효율성”은 사용가치가 있는 재화와 용역에 대한 생산성이다. “효율성”은 노동대중의 창조적이고 충만한 삶에 대한 생산성이다. “효율성”은 균형잡힌 생태에 대한 생산성이다. 생산의 중앙집중이 증가하는 것은 분명히 “규모의 경제”를 통해 더 적은 비용으로 생산이 가능하도록 만든다. 하지만, 생산비용이 줄어드는 만큼, 운송과 분배의 비용은 증가한다. 그렇기에 대공장이, 대규모 자원의 공급을 통해, 거대 기계와 대규모 노동자들을 이용하여 생산하는 것은 생산의 비용을 분명히 낮춘다. 하지만, 이를 위해서는 세계 전역에 퍼져있는 원자재들을 모아야 하고, 이것을 중앙 공장으로 가져와야 한다. 이 과정에서 자원을 저장하고 운송하는 비용이 들어간다. 공장 주변에는 살기에는 너무 많은 노동자들이 필요하기에, 장거리 통근을 위한 비용도 들어간다. 생산된 생산물들은 다시 세계 전역으로 운송되어 소비자들에게로 향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포장되고, 컨테이너박스에 담겨, 각 지역의 창고들에 저장되어야 하고, 기차 · 트럭 · 선박 · 항공기 등을 통하여 운송되어야 한다. 이 모든 통근, 포장, 저장, 운송은 자원을 소모한다. 그렇다면 우리의 상상력을 반대편 극단으로 가져가보자. 다수의 소규묘의 흩어진 작업장들이 소규모 발전기와 동력기관을 사용하여 생산한다고 해보자. 이들은 지역에서 공급되는 원자재를 사용할 수 있고, 지역의 중고 생산물을 재활용할 수도 있을 것이다. 오직 소규모의 노동자들만 필요로 할 것이기에, 통근 거리는 줄어들 것이다. 소규모 지역 공장이나 작업장에서 생산한 물건들은 지역적으로 소비될 것이기에, 포장, 운송, 저장 비용 역시 감소할 것이다. 생산이 지역적 필요에 따라 조직될 것이기에, 생산양은 단기 수요를 탄력적으로 반영할 수 있을 것이고, 재고 관리의 필요성을 줄일 것이다. 지역적 생산과 중앙집중적 생산 중 무엇의 비용이 더 적게 드는가에 대해서는, 각 생산물에 대한 각각의 구체적 계산이 필요하다. 그리고 이 계산에는 생산비용 뿐 아니라 분배의 비용도 포함되어야 할 것이다. 탈중앙주의자였던 랄프 보르소디는 20년대와 30년대를 거치며 위와 같은 주장을 제기했다. 보르소디 일가는 공여지에서, 거의 자급자족적으로 운영된 농장을 운영했다. 이들이 이러한 삶을 선택한 것은 우리의 “흉측한 문명”에 대안을 건설하겠다는 문화적이고 정치적인 목적에 의한 것이었다. 이들은 당시 최신으로 개발되었던 도구들을 활용한 소규모 노동이 대량생산보다 더 효과적이라는 놀라운 사실을 밝혀냈다. 그들이 직접 농사지어 깡통에 담은 토마토는, 토마토를 밀봉하는 노동시간을 표준 임금에 맞추어 환산한다 하더라도 가게에서 산 토마토 캔보다 더 쌌다. 그는 식품, 의복, 주거에 소요되는 다른 물건들의 가격도 계산해보았다. 보르소디가 추정하기로는, 총생산량 중 1/3 정도는 중앙집중적으로 생산하는 것이 더 효율적이지만, 나머지 2/3은 자가 생산이 더 적은 비용을 소요했다. 보르소디는 개인주의적 정치 계획을 가지고 있었기에, 중간규모의 공동체나 지역적 연방을 통한 생산이 비용을 더 절감할 수 있을 것이라는 것은 고려하지 않았다. 물론, 자본주의 경제학자들은 이런 계산을 하지 않는다. 하지만 적합기술을 지지하는 이들은 현대 산업 생산의 다수가 지역적으로 생산될 때 더 효율적이라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그리고 그 규모는, 보르소디가 추정하는 것보다 더 클 것이다. 중앙집중적 대량생산의 효율성을 추정하는 데에 있어, 중앙집중주의자들은 그 대량생산이 생태계를 얼마나 왜곡하는지를 고민하지 않는다. 대량생산은 폐기물을 양산하고, 재생불가능한 자원들을 써 없앤다. 이들이 계산하는 바 생산의 비용에는 환경을 정화하기 위한 사회적 비용은 포함되어 있지 않다. 오염은 “외부”비용으로 취급되어, 기업이 아닌 공동체에 비용이 전가된다. 일반적으로, 대공장은 같은 종류의 폐기물을 한 지역에 집중하여 폐기한다. 같은 양의 폐기물이 생산되더라도, 소규모 공장 다수가 여러 지역에서 조금씩 생산하는 것보다 정화비용이 더 많이 든다. 나아가, 지역적으로 계획된 경제에서는 공동체가 폐기물을 점검하고, 이를 재활용할 방법을 고민하도록 만든다. 이전까지는 그 유지성 때문에 포기하지 못하고 있던 플라스틱은 지역 공장에서 새로운 상품으로 재생산될 수도 있을 것이다. 인간이나 동물이 생산하는 유기적 폐기물은 지역 농장에서 비료로 사용될 수 있을 것이다. 산업 생산에서 효율성의 문제는 인간이 생산과정에 어떻게 조직되는지의 문제를 포함하고 있다. 기계로 노동하는(혹은 기계에 의해 노동당하는) 인간은 기계와 필연적으로 관계를 맺게 된다. 노동자들이 지휘체계 말단에서 복무하는 이상, 산업은 중앙집중적이고 위계적이다. 산업 안에서 노동자들은 지시를 수행하고, 지시받은 일을 한다. 이 과정에서 주도권은 최대한 조금 주어진다. 컨베이어벨트 안팎에서 이루어지는 노동은 분단위의 미세 과업으로 분할된다. 자본가들은 이윤동기에 의해 추동된다. 그리고 이 동기는 그들이 심지어 노동자들이 보다 민주적인 생산통제를 하게끔 허가하게 만든다. 자본가들은 산업심리학자나 사회학자를 고용하여 인간의 생산과정에 대한 실험을 하도록 하였다. 이 실험에는 노동을 보다 흥미로운 것으로 만드는 과업을 더하거나 순번에 따라 다른 일을 해보게끔 하는 제도를 만들고, 아니면 전체 노동 과정에 대한 더 구체적인 사항을 전달하는 것 등이 포함되어 있었다. 지난 십 수년간, 이러한 실험의 결과는 더 민주적인 노동이 생산의 증대를 가져오고, 노동자의 사기를 증진시키며, 이직과 결근을 줄이고, 직업 만족도를 개선한다는 것을 증명했다. 실험들은 공장의 라인 노동자들, 사무직 노동자들, 연구직 노동자들, 영업직 노동자들 등 다양한 직종의 노동자들을 대상으로 행해졌다. 다양한 학력 분포의 노동자들을 대상으로 이루어지기도 했다. 가장 극단적인 “실험”은 유럽과 미국의 집단적 계약에 대한 연구일 것이다. 이 연구는 노동자들을 집단으로 고용하고, 그들 스스로가 기계를 어떻게 사용할 지를 조직한 뒤 임금의 분배를 자율적으로 결정하도록 하였다. “노동자들의 참여가 커질수록 생산성 수준이 높아진다는 추정은 거의 확정된 사실이라 불러도 무방하다. 광범위한 문헌적 탐구는 노동자의 경영참여가 더 높은 생산성을 가져온다는 명제를 긍정하고 있다.” 이러한 사회 실험들은 논리적으로 노동자 민주주의를 지지할 수밖에 없다. 그리고 이것이야말로, 이러한 실험들이 자본주의 하에서는 실질적 의미를 가지지 못하게 된 이유다. 실험의 결과는 노동자들이 현장 층위에서, 일상적으로 산업을 통제할 수 있음을 입증한다. 만약 그게 사실이라면, 자본가들이나 관료들, 국가가 필요한 이유가 없지 않은가. 탈중앙화와 민주화가 그토록 효율적인데도 자본가들이 이 방식을 채택하지 않는 이유가 바로 저것이다. 물론, 그들이 가끔 탈중앙화와 민주화를 채택하기도 한다. 자본가들은 반복적으로 생산을 민주화하려 시도해왔다. 대기업들이 경영과정을 독자적이고 더 작은 집단으로 분할하는 결정을 내리기도 했다. 대부분의 거대 기업들은 모든 생산을 직접 행하기보다는 소규모 하청사들로 분할하는 것을 선택한다. 평범한 회사에서도 탈중앙화된 기술을 이용하기도 한다. 하지만 이 모든 것에는 한계가 분명하다. 기업들은 노동자들을 지배해야만 한다. 그렇지 않으면 그들은 자본가라 불릴 수 없을 것이다. 만연한 경쟁은 기업들이 시장에서 지배적 지위를 확보하도록 추동한다. 한 기업이 성장하지 않으면, 경쟁 기업이 그를 잡아먹을 것이다. 이것이야말로, 재정과 권력이 중앙집중을, 위계질서를, 거대화를 추구하는 이유라 하겠다. 그렇기에, 자본가들은 중앙집중과 위계질서와 거대화에 복무하는 기술을 찾아 헤매는 것이다. 국가 없는 사회가 탈중앙화와 민주주의와 소형화에 복무하는 기술을 원한다면, 이러한 기술은 언제나 가능하다. 문제는 기술이 아니라 사회의 형태에 있다. 혁명 이후 노동자들은 즉각적으로 사회를 재조직하고, 기술을 재생산할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계급관계가 재건될 것이기 때문이다. “파레콘” 지지자들은 “균형잡힌 직업 복합체”를 건설하여 각 직업이 정신노동과 육체노동 모두를 포괄할 수 있게 재정의 되어야 한다고 제안한다. 이것이 모두의 직업만족도를 가능한 평등하게 만들 것이기 때문이다. 노동자들과 인민대중은 우리가 지금 가지고 있는 생산과정에서 출발하여 이를 더 자주경영에 친화적인 방식으로, 정신노동과 육체노동의 분할을 철폐할 수 있는 방식으로, 더 창조적이고 흥미로운 노동으로, 사회적 사용가치에 따라 생산할 수 있는 방식으로, 생태적으로 안전하고 건강한 방식으로 재창조해나갈 것이다. 많은 마르크스주의자들이 그다지 신경쓰지 않는 문건, 『반뒤링론 : 오이겐 뒤링씨가 과학에서 일으킨 변혁』에서 엥겔스는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모든 개인이 자유롭지 않은 한, 사회는 스스로 자유로워질 수 없다. 그렇기에 옛 생산 방식은 혁명화되어야 한다. 이전의 분업은 사라져야 한다. 그 자리에는 생산이 군림하는 자의 수단이 되는 대신 해방의 수단으로 조직되어, 각 개인에게 자기의 육체적 · 정신적 역량을 모든 방향으로 개발하고 최대한 실현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할 것이다. 이를 통하여 생산적 노동은 짐이 아니라 즐거움이 될 것이다.” 이것이야말로 혁명을 해야할 이유다.
*** 7장. 코뮌주의 사회 실험 마르크스의 이행기 국가 개념은 이행기 경제 개념과 연관되어 있다. “우리가 여기서 관계하고 있는 것은 자기 자신의 기초 위에서 발전한 공산주의 사회가 아니라 거꾸로 바로 자본주의 사회에서 생겨난 공산주의 사회이며, 그러므로 그 모태인 낡은 사회의 모반이 모든 면에서, 즉 경제적, 윤리적, 정신적으로 아직도 들러붙어 있는 공산주의 사회이다.”(『고타강령비판』) 마르크스가 무슨 말을 하려는 것인지 알 것 같다. 마르크스는 “공산주의 사회의 더 높은 단계”를 자본주의의 철폐 이후 바로 건설하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믿었다. 일정 기간, 생산력이 더 높아지기 전의 “공산주의 사회의 첫 번째 단계”동안 노동자들이 여전히 노동한 양에 따라 임금을 받는 체계가 필요할 것이라는 뜻이다. 가치 법칙으로 운영되는 시장이 유지될 것이고, 이 시장은 의식적 계획경제로 점차 이행할 것이다. 이 이행기 동안 “프롤레타리아트의 독재”가 필요할 것이다. 그리고 이 독재는, 보통 새로운 국가로 해석된다.(마르크스의 “공산주의 사회의 첫 번째 단계”를 “사회주의”로, “공산주의 사회의 더 높은 단계”를 “공산주의”로 표현한 것은 레닌이었지 마르크스가 아니었다. 오늘날의 좌파들은 대부분 레닌의 표현을 승인한다. 하지만 나는 “사회주의”를 “공산주의”를 포괄하는 더 광범위한 단어로 사용한다.) 하지만 아나키스트들은 크로포트킨 당시부터 지속적으로 완전한 코뮌주의 경제로 즉시 이행하는 것은 가능하며, (현대의 집단적 생산과정 속에서, 각 노동자의 노동 가치를 계측할 수 없기에)자본주의와 사회주의 사이 어딘가에 존재하는 이행기 체계는 작동하지 않을 것이며, (완전한 코뮌주의가 즉시 도입될 수 있기에)불필요하다고 주장해왔다. 바쿠닌은 아나키즘적 코뮌주의라는 궁극적 목표 이전에 이행기를 둘 수 있다고 믿었던 것으로 보인다. 바쿠닌 사후, 바쿠닌의 친구였던 제임스 기욤은 바쿠닌의 혁명 이후 사회에 대한 관점을 정리했다. 바쿠닌은 자유의지주의적 코뮌주의라는 목표를 달성하는 것은 충분한 생산성을 확보하는 것에 달려있다고 보았다. “이행기 동안, 각 공동체는 집단적 노동의 생산물을 분배함에 있어 스스로 최선이라고 생각하는 방식을 결정할 것이다.”(『Bakunin on Anarchism』) 하지만 마르크스나 바쿠닌의 시대로부터 아주 오랜 세월이 지났다. 그 시대 이후 자본주의는 기술의 개발을 통해 극도로 높은 생산성을 달성했고, 이 생산성은 자유의지주의적 코뮌주의 사회를 건설하기에 충분하다. 만약 사회주의(코뮌주의)의 건설 과정에서, 자본주의의 잔재를 모두 치워낸다면 더욱 그러할 것이다. 자동차를 그렇게 다양한 디자인으로 뽑아내는 것이 아니라, 그 다양성을 (사회가 합의한 수준으로) 줄이고, 철도 · 버스 · 전차 등을 늘리면 되지 않겠는가. 무엇보다, 사람들이 공동체 안에서 일하면서 일과 생활이 통합될 수 있지 않겠는가. 국제 사회주의의 승리는 무기 생산에 소모되는 천문학적 자원을 생산적으로 돌릴 수 있게 할 것이다. 중간관리직이나 보험업, 광고업 등 더 이상 필요하지 않게 될 직업도 있을 것이다. 더 많은 사람들이 자유롭게 생산할 수 있게 될 것이고, 노동 강도는 낮아지면서도 더 많이 생산할 수 있게 될 것이다. 혁명 이후의 사회는 매우 높은 수준의 생산성을 담보하는 기술을 가지고 시작할 것이고, 자본주의적 비효율을 청산할 것이며, 더 많은 생산적 노동력을 활용할 수 있는 것이다. 기술 발전이 심화하는 것을 기다리지 않고 즉시 자유의지주의적 코뮌주의를 적용하여야 한다고 주장할 수도 있다. 현대 기술의 잠재적 생산성은 매우 크다. 전체 사회의 노동량 중 매우 일부만 사용하더라도 모든 사람에게 높은 삶의 질을 보장할 수 있을 정도다. (이를테면, 농업 생산성을 보라. 전체 인구의 1%가 생산하는 농업 생산량은 북미 전체 인구를 풍족하게 먹일 수 있을 정도다. 인류사의 오랜 기간 동안, 이 정도의 생산량을 확보하기 위해서는 99%가 농업생산에 종사해야 했다.) 그렇다면 무슨 일이 벌어질 것인가? 누구도 의식주의 결여를 메우기 위해 일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사람들은 로봇이 모든 노동을 하는 동안 멍하게 있는 것으로 만족하지 않을 것이다. 사람들은 행동하고 싶어할 것이다. “필수적인” 노동보다 노동을 지망하는 사람이 많아질 것이다! 직업을 “만들어내”고 노동과 놀이가 결합된 창조적 생산이 필요하게 될 것이다. 활동(단지 “노동”이라고 부를 수는 없을 것이다)은 인간의 가능성을 실현하는 방향으로 이루어질 것이다. 아마 그럴 수도 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이 매우 생산적인 기술은, 즉각적으로 모두가 향유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세계 대부분은 아직 산업화되지 않았다. 혁명 이후의 사회에서는 한때 압제당하던 민족들이 생태적으로 유지가능한 방식으로, 지역 인민들의 필요에 따라 발전할 수 있도록 도와야 할 것이다. 산업화된 국가들(이전의 제국주의 국가들) 역시 현존 기술을 생태주의적이고 자주경영이 가능한 방식으로 변혁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더하여, 혁명에 대한 저항은 파괴적인 내전을 불러올 수도 있다. 혁명이 승리한 이후, 재건 역시 필요할 것이다. 또한, 혁명이 세계 전역으로 확산하는 데에 시간이 걸린다면, 자유로운 사회 옆에 자본주의 국가가 존재하는 일도 발생할 것이다. 그렇기에 무기 생산 역시 여전히 필요할 것이다. 이 모든 것들은 노동자들이 매우 생산적이어서 소비에 제약이 없을 사회를 건설하는 데에 시간이 걸릴 것임을 보여주고 있다. 전반적인 생산량이 충분히 늘어날 때까지, 사회의 생존에 필수적인 노동을 하도록 노동자들에게 동기를 부여하는 것은 문제가 될 수 있다. 노동자들은 필수적인 노동을 최대한 창조적이고 흥미로운 활동으로 전환해갈 것이다. 혁명은 이데올로기적 동기를 부여할 것이다. 혁명을 통해 건설할 작은 공동체를 기반으로 살아갈 때, 자기 노동의 가치를 발견하기는 더 쉬워질 것이다. 물론 인민의 심리가 하룻밤 사이에 바뀌지는 않을 것이다. 그렇기에, 사람들이 노동을 지속하게 하기 위한 보상동기가 필요하다는 주장도 제기되곤 한다. 바쿠닌은 이행기 체계도 아니고 완전한 코뮌주의로의 즉각적 이행도 아닌 제 3의 입장을 가지고 있었다고 알려져 있다. 바쿠닌은 실험적 경제라는 입장을 가지고 있었다. 자본가들의 자본은 수용될 것이고 경제는 협력적이고 집산화된 형태로 노동자들에 의하여 민주적으로 운영될 것이다. 하지만 이것을 구체적으로 어떻게 집행할 지는 시간과 장소에 따라 달라야 할 것이었다. 아나키즘적 코뮌주의자인 에리코 말라테스타는 혁명 이후라 하더라도, 모두가, 대부분의 노동자들이 자유의지주의적 코뮌주의에 설득될 것이라 기대해서는 안된다고 적고 있다. 아마도 혁명은 통일전선의 일종으로 이루어질 것이다. 애초에, 모두에게 자유의지주의적 코뮌주의를 강요하는 것은 그 사상 자체에 대한 모독이지 않은가. 착취적 방식을 제외한 여러 방식들이 실험되어야 하고, 이 실험의 과정에서 사람들은 본인들에게 가장 잘 맞는 방식을 찾아낼 것이다. 말라테스타는 “생산수단의 소유와 활용에 있어, 생산물의 분배에 있어 가능한 모든 방법을 동시다발적으로, 여러 지역에서 실험해보아야 한다. 그리고 이 방식들은 모아내고 수정하는 과정에서, 어떠한 형태(들)이 가장 알맞은 것인지를 알 수 있을 것이다. (...) 새로운 특권이 결성되는 것을 막아내고 있는 이상, 최적해를 찾아낼 시간은 충분할 것”이라고 쓰고 있다.(『말라테스타의 생애와 사상』) 그는 또한 “우리는 아나키를 하나의 방법론으로 바라보아야 한다. 아나키는 인민들이 시행착오를 통해 가장 만족스러운 해결책을 찾아내는 것 그 자체를 의미한다. 아이들을 어떻게 교육해야 하는가? 모른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부모와 교사, 이 문제에 관심있는 모두가 모여 논의하고, 관점에 따라 합의하거나 분열하면서, 최선이라 생각하는 방법론을 적용하는 것이다. 그리고 적용의 결과 그 방식이 최선이었다면, 그 방식을 도입하면 된다. 다른 모든 문제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라고 적는다. 모든 산업 각각에 맞는 단 하나의 최선의 방법이 있지는 않을 것이다. 제강 산업과 교육을 같은 방식으로 조직할 수는 없지 않겠는가. 지구상 모든 문화와 지역에 맞는 단 하나의 최선의 방법도 있지 않을 것이다. 민족의 역사나 전통, 기후, 천연자원에의 접근성 등이 모두 다르기 때문이다. 다원주의적인 연방 체계를 구성하는 최대의 장점은 서로 다른 지역에서 서로 다른 방식을 실험할 수 있다는 것이다. 다른 지역의 사례들로부터 배울 수도 있다. 이러한 사회는 “이행기” 사회라 불릴 수도 있다. 정확하게는, 언제나 변화 도상에 있는, 언제나 이행중인 사회 말이다. 우리는 다양한 사회적 형태를 실험해볼 수 있을 것이다. 다만, 그 실험에는 특정한 제약이 있어야 한다. 어떠한 사회적 형태라 하더라도 민주적이고, 탈중앙화되고, 협동적이며 비착취적이어야 한다는 제약이 그것이다. 그리고 정확하게는, 이러한 사회적 형태에서야말로 비로소 사회적 실험이 지속될 수 있을 것이다. 전술하였던 부버와 파브리를 떠올려보자. 새로운 사회 구성의 원칙은 최대한 탈중앙적, 민주적, 협동적이어야 하고, 중앙집중과 위계질서는 필요최소만을 두어야 한다는 것이다. 폴 굿먼이 말한 것처럼 “우리의 정치적 표어는 다음과 같다. 가능한 모든 곳에서, 모든 방식으로, 최대한 탈중앙화하라. 하지만 어디서, 어떻게, 얼마나에 관한 것은 실증적으로 결정되어야 한다. 이것들에 대한 답은 연구와 실험을 통해서만 내어놓을 수 있다.”(이 지점에 있어 나는 굿먼에게 상당히 많이 영향을 받았다. 하지만 굿먼은 개량주의자였기에, 이 사회를 실험적이고 점진적으로 바꾸어나갈 것을 원할 뿐, 노동계급의 혁명을 주장하지는 않는다. 나는 말라테스타나 바쿠닌, 마르크스의 입장을 따라, 혁명이 필수적이라고 생각하며, 이 실험은 혁명 이후에 이루어질 것이라고 바라본다.) 서로 다른 공동체, 지역, 민족들은 각자의 조건에 맞추어 반권위주의적 사회주의의 다양한 모형들을 실험할 것이다. 이러한 모형 중 하나는 우리가 앞서 언급한 자유 코뮌주의 경제가 될 것이다. 모두가 돈을 위해서가 아니라 생명력이나 책임감, “게을러지지” 않고 싶어서 노동하는 사회말이다. 일부가 노동을 거부한다면, 어쩌라는 것인가? 사람들은 가장 힘든 일을 순번제로 할 것이고, 풍부한 생산물에 대한 소비는 무료로 이루어질 것이다. 사람들은 창고에서 원하는 만큼을 가져갈 수 있을 것이고, 언제나 필요 이상이 주어질 것이기에 그 누구도 필요한 것 이상을 가져가지 않을 것이다. 희소한 재화는 배급될 것이기에, 지금보다 더 높은 생활수준을 유지할 만큼의 생산량이 담보되어야 할 것이다. 배급되어야 할 재화가 너무 많다면, 사회는 흔들릴 것이기 때문이다. 수십년간 유지되어온 이스라엘의 키부츠야말로 이러한 것이 가능하다는 실례가 되겠다. 혹은, 사회주의적 공동체가 노동자들의 노동시간에 비례한 노동전표를 발행할 수도 있다. 노동전표의 양은 몇몇 업종들에 대한 인센티브를 유지하기 위해 조정될 수 있을 것이다. B.F.스키너는 『월든 투』에서 소규모 사회주의 공동체가 작동할 방식으로 이러한 방식을 제시한 바 있다.(물론, 그의 모형은 그다지 민주적이지는 않다.) 자유의지주의적 코뮌주의 모형과 비슷하기라도 한 모형을 바라보면, 재화의 생산과 소비에 있어 협동을 어떻게 조직할지에 대한 의문이 떠오를 수밖에 없다. 민주적 방식으로 선출되거나 선임된 이들에 의한 다소간의 중앙 계획이 있을 수도 있을 것이다. 중앙 계획의 비중을 너무 키우면, 이것은 경직된 관료제와 권위주의로 전락할 위험을 가지게 될 것이다. 반면, 이 비중을 너무 낮추면, 우리는 시장의 부활을 보게 될 수도 있을 것이다. 경제 계획을 탈중앙화된 민주주의와 결합할 수도 있을 것이다. 초기의 테네시 밸리 정부가 그 예시가 될 수 있을 것이다. 카스토리아디스는 “계획 공장”이라고 불리는 계획 기제를 활용할 것을 제안한다. 이 계획 공장에서는 경제 계획을 제안할 것이고, 노동자 평의회의 연방에서 이 계획을 논의하고 결정하게 될 것이다. 마이클 알버트와 로빈 해널은 “탈중앙화된 사회주의적 계획경제”, 혹은 “참여경제”(“파레콘”)를 제안한다. 각 지역의 소비 평의회가 수요를 정리할 것이고, 공장 평의회도 생산에 필요한 원자재를 정리할 것이다. 공장 평의회는 가능한 생산량을 공지할 것이다. 몇 번의 실험과 상호 조정을 거치면, 소비자과 생산자들은 서로를 고려하게 될 것이고, 소비자들의 수요와 생산자들의 역량의 균형은 맞추어질 수 있을 것이다. 소비자와 생산자 모두는 결국 같은 사람이라는 지점에서 더욱 그러할 것이다. 결국 중앙에서 계획을 세우는 관료들이 없더라도(이 과정의 집행을 돕는 “집행위원회”는 있을 수 있겠지만) 계획은 자체적으로 도출될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계획을 통하여 국가주도의 관료적 계획이나 소위 “시장 사회주의”에서 발생할 위험을 회피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이 사회에서는 아이들과 장애인, 고령자 등을 제외하고는 일한 양에 따라 보상을 받을 것이기에, 코뮌주의 사회라고 부를 수는 없을 것이다. “파레콘”이 제시하는 바 “보수”의 체계는 마르크스가 “공산주의 사회의 첫 번째 단계”에 대하여 이야기한 것과 비슷하다. 하지만 파레콘주의자들과 마르크스의 결정적 차이는, 마르크스는 이러한 체계가 기본적인 (부르주아지 없는) 부르주아 원칙의 지속이 될 것이라는 것을 명확히 인지하였다는 것이다. “동일한” 노동량이 동일한 생산물량으로 교환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는 이러한 원칙을 완전한 코뮌주의가 달성되기 이전에 존재할 수 있는 일시적인 시기의 원칙이라고 여겼다. 경제적으로 자유코뮌주의적 영역을 넓혀가면서, 사람들의 노동에 대하여 “보상하는” 사회를 상상할 수는 있다. 자본주의 아래에서도, 도로 · 공립학교 · 도서관 · 소방 · 수도 등은 “자유롭게” 이용 가능하다. 이러한 재화들은 공동체적으로 가격을 지불하여 모두에게 접근성을 보장하는 것이다. 사회주의 사회는 이 “자유로운” 영역을 확장하는 것일 수도 있다. 노동량/노동여부와 무관하게 기초적인 식량 · 의복 · 주거를 제공하는 사회 말이다. 굿먼은 이러한 (“기본소득”의 일종으로서의) 자유 코뮌주의 체계가 시장 등 다른 경제 체제와 공존할 수 있다고 주장한 바 있다. 사회보장 영역에서의 일자리를 모두가 가질 수 있도록 하고, 그 일자리에서 특정 기간 동안 일한 모든 사람에게 평생의 소득을 보장하자는 것이다. 자동화의 도움이 있다면, 사실 사회보장 영역의 노동마저 필요성이 없어질 수도 있을 것이다. 이 영역은 자발적 복무나 매우 적은 추가 수당을 받는 사람들로 운영될 수 있을 것이다. 포토풀로스 역시 “코뮌주의적 원칙”으로 작동하는 “필수유지영역”과 “비필수유지영역”을 구분하여 둘 것을 제안한다. 각 노동자들은 자기 노동에 대하여 필수유지 쿠폰과 비필수유지 쿠폰을 받게 될 것이다. 전자는 노동자들이 행할 필수유지산업에서의 최소한의 노동에 대한 것이 될 것이고, 후자는 각 노동자들이 행하는 노동의 양에 대한 것이 되어 재화의 수요와 공급을 조정하는 인공적 “시장”같은 것이 될 것이다. 이러한 이중 체계를 고민할 수도 있지만, 나는 이에 더하여 생산성의 증대에 따라 필수유지영역을 더욱 확장시켜 거의 모든 재화와 용역을 다루도록 해야할 필요를 느낀다. 그리고 이것이 “코뮌주의 사회의 더 높은 단계”가 될 것이다. 계획의 대상 영역이 작을수록, 대중 참여의 난이도는 쉬워질 것이다. 지역 공동체는 생산과 소비를 매우 쉽게 조율하고, 일상적 마을 총회를 통해 계획을 결정할 수 있을 것이다. 미국 정도 규모의 국가에 대한 계획을 하는 것은 훨씬 어려운 일이 될 것이고, 결국 관료주의적 편향을 극복하기 어려워질 것이다. 그렇기에, 계획경제의 성공을 위해서는 최대한의 탈중앙화가 필요한 것이다.(알버트와 해널은 계획이나 기술에 있어 공동체의 탈중앙화의 필요를 거부한다. 나는 이것 역시 그들의 파레콘 계획에 있어 오류라고 믿는다.) “탈중앙화된 시장 사회주의”라 부를 법한 모델도 있을 수 있다. 공동체 정부에 의하여 규제되는 시장은 있을 수 있지만, 대기업이나 국영기업은 존재할 수 없을 것이다. 노동자들은 노동력을 사용자에게 판매하지 않을 것이고, 따라서 착취는 없을 것이다. 노동자 자주경영 기업(생산자 협동조합), 소비자 협동조합, 소규모 개인사업자들, 수공예 상점, 공동체운영 기업, 가족 농장 등이 경제를 구성할 것이다. 녹색당원 일부와(스프레트나크 & 카프라, 1986) 달(1985)이 이러한 개념을 지지했다. 이러한 “시장 사회주의”는 상당 기간 동안 국가가 운영하는 경제를 조직할 수 있는 실질적 방법론이라 여겨져 왔다. 그 지지자들은 생산자 협동조합의 체계를 상정한 것이 아니라, 중앙이 시장을 섬세하게 모방하는 계획경제를 바라본 것이었다. 하지만 그들의 목적과 별개로, 그들의 주장 다수는 유용하다. 시장을 이용하는 것은 중앙 계획을 최소한의 규제 수준으로 제약할 수 있도록 할 것이다. 반면, 이 모델의 반대자들은 시장사회주의가 연대를 무너트리고, 이기심을 촉발하고, 불평등을 심화하며 자본주의를 재건할 것이라 말한다. 유고슬라비아의 국가공산주의는 이 모형을 따랐다. 그들의 공장은 사회적으로 소유되고 노동자 평의회가 운영하며, 전업 관리자들을 채용했다. 임금 수준과 이윤분배는 기업 내적으로 이루어졌다. 기업은 (독재정이었던) 국가의 규제 아래에서 내수 시장 내에서 경쟁했다. 이 체계는 경기변동 · 실업 · 기업간의 수익 불평등 · 지역간 불평등(이는 결국 티토 사후 발흥한 광적인 민족주의에 기름을 부었다.) 등이 그것이었다. 하지만, 이 체계는 최소한 전통적 자본주의 국가들만큼은 작동했고, 공산주의자들의 국가 계획경제 보다는 잘 작동했다.(티토주의가 붕괴하고, 유고슬라비아 내전이 발발한 이후 이 체계가 어떻게 되었는지에 대해서는 추가 연구가 필요할 것이다.) 나는 이러한 체계에 대해 매우 회의적이다. 이 체계에서 경제는 그다지 민주적으로 운영되지 않고, 오히려 궁극적으로는 통제불가능한 시장에 의하여 운영된다. 이 체계에 대하여 언급한 것은, 혁명 이후의 사회실험에서 가능한 예시들을 나열하는 작업의 일부라 보아도 좋다. 앞서 언급하였듯이, 시장경제 아래에서조차 생산자나 소비자들의 조합이 직접 운영하지 못해본 산업이나 기업은 사실상 없다고 보아도 무방하다. 1956년 설립되어 스페인의 바스크 지역에서 매우 성공적으로 운영되고 있는 몬드라곤 협동조합을 보라. 이 협동조합에는 생산기업, 도소매 협동조합, 신용협동조합, 기술학교 등이 포함되어 있다. 생산자와 소비자 협동조합에 대해 다루고 있는 글 역시 여럿 있다.(이를테면, 린덴펠트 & 로스차일드-휘트, 1982를 참조하라) 다시 말하지만, 협동조합은 매우 잘 작동한다. 그리고 너무나도 잘 작동하여 자본주의 체계에 아예 융합되기까지 한다. 피억압국가에서도 이러한 형태의 기업은 잘 작동하였다.(매슬레니코프, 1983) 나는 이러한 모형들을 지지하지도 반대하지도 않는다. 나는 아나키즘적 코뮌주의로 전진할 수 있도록 하는 모든 형태의 운동을 지지한다. 하지만, 그 중 무엇이 최선인지는 잘 모르겠다. 조건이 잘 갖추어진다면, 이 모든 것들은 제대로 작동할 수 있을 것이다. 나는 혁명 이후 각각의 다른 지역들이 각각의 모형들을 시도해보았으면 한다. 이러한 시도야말로 세계가 배울 수 있는 사회 실험이 될 것이다. 혁명 이후의 사회가 “이행기적”이라 바라보아서는 안 된다. 혁명 이후의 사회는 언제나 이행기적 과정에 놓이게 될 “실험적 사회”가 될 것이라 보아야 한다. 실험적 사회라는 아나키스트적 방법론은 단지 경제에만 국한되는 것이 아니다. 인류의 역사 깊은 곳에 그 뿌리를 박고 있는 여성에 대한 억압은 언제나 계급 착취의 다양한 형태와 함께 작동해왔다. 여성에 대한 억압은 사회가 아동을 길러내는 방식과, 우리가 사회화되는 방식과, 우리의 젠더와 깊게 연관되어 있었다. 모든 혁명에는 가장 억압된 노동계급을 포함하여 이루어져야 하고, 그렇지 않은 혁명은 실패할 것이다. 혁명이 여성을 배제한 채로 마법과 같이 이루어지더라도, 사회 변혁의 모든 영역에 여성을 포함하지 않는다면, 그 사회는 다시금 계급사회로 전락할 것이다.(스탈린주의 혁명이나 민족주의 혁명조차, 혁명의 과정에서 여성을 조직했다. 물론 새로운 주인님이 등장한 이후, 여성의 지위는 다시 이전의 상태로 돌아갔다.) 자본주의의 철폐는 자본가 계급의 철폐를 가져올 것이다. 하지만 성차별적 가부장제의 철폐는 남성의 철폐가 아니라 남성과 여성 사이의 새로운 관계의 건설을 가져올 것이다. 성애를 어떻게 나눌 것인가? 어떻게 결합하고 어떻게 아이를 기를 것인가? 이것에 대한 답을 우리가 제시할 수는 없다. 우리는 여성이 남성에게 경제적으로 의존하지 않는 자유로운 사회를 건설할 뿐이다. 이러한 사회에서 여성은 잠재력을 최대한 끌어올릴 것이다. 아이에 대한 궁극적인 책임은 공동체가 질 것이고, 부모가 아이에 금전적으로 묶이지 않도록 할 것이다. 이러한 전제 위에서, 서로 사랑하고 관계맺을 각자의 방식을 발견하는 것은 그 공동체의 여성과 남성에게 달려있을 것이다. 자발적 연합과 자유 협동조합에 기반한 사회에서, 경제적으로 독립적인 여성들은 스스로의 자유를 쟁취하고, 남성우월주의에 맞서 스스로의 권리를 쟁취할 수 있을 것이다. 이 과정에서 여성해방에 동조하는 남성과의 동맹도 가능할 것이다. 성차별주의, 젠더역할, LGBT에 대한 억압 등은 투쟁 속에서 철폐될 것이다. 민주적 공동체는 젠더 간의 새롭고 더 자유로운 관계를 고민할 것이다. 이 속에서 남성이나 여성이 되는 것이 무엇인지, 자신과 같거나 다른 젠더에게 매력을 느낀다는 것이 무엇인지, 어떠한 젠더가 되고 싶은지에 대한 문제들이 재고려될 것이다. 자유로운 인민들은 사회실험을 통해 인종, 민족, 문화 간의 관계를 재정립할 것이다. 다시 말하지만, 노동계급의 가장 억압된 분자들을 조직하지 않는 혁명은 불가능하다. 미국의 경우라면, 아프리카계 미국인들, 라틴 아메리카계 미국인들, 아시아계 미국인들, 아메리카 원주민들, 이외의 유색인종들이 이 범주에 포함될 것이다. 북아메리카에서의 혁명은 다인종 · 다민족 · 다언어의 노동계급을 포괄하여 이루어져야 하고, 그 혁명의 선두에는 가장 억압된 이들이 서야 한다. 혁명은 빈곤과 빈민가, 실업과 노동현장의 끔찍함을 철폐할 것이다. 반권위주의 혁명은 억압당한 인종과 민족들이 스스로를 스스로가 원하는 방식으로 조직하는 것이 가능하게 할 것이다. 혁명이 또 다른 억압적 사회로 전락하지 않기 위해서라도, 이렇게 되어야만 한다. 인종주의나 백인우월주의와의 지속적 전투를 치루어내지 않는다면, 옛 위계질서는 다시 등장할 것이고, 계급구조와 착취는 부활할 것이다. 특정 인종이 자기만의 공동체와 자기만의 연방으로 분열하고 싶다면, 그렇게 하면 된다.(국가 없는 사회에서는 분리독립의 대상이 될 국가는 존재하지 않을 것이니 말이다.) 다른 인종과의 공존에 함께하고 싶은 이들이 있다면, 그렇게 하면 된다. 인종차별에 반대하는 모든 동지들이 그것을 지지할 것이다. 하나의 연방 안에서, 사회 전체와 권리들을 공유하면서도, 분리된 “인종”의 조직으로 남고 싶어하는 이들이 있다면, 그렇게 하면 된다. 연방적으로 결합된, 다원주의적인, 실험적 사회에서는 이 모든 것들이 가능할 것이다.
*** 8장. 국가없는 세계 죽은 백인이 생각해낸 유럽적이고 서구적이 사상이 세계의 다른 지역에서는 유효하지 않을 것이라는 비판을 듣게 되곤 한다. 아나키즘과 마르크스주의는 유럽에서 제일 먼저 만들어진 것이 사실이다. 그리고 대부분의 현대 정치 사상들 역시 그렇다. 이는 자본주의와 산업주의가 유럽에서 발흥하여 세계를 뒤덮었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민족주의, 민주주의, 노동계급투쟁 등의 사상이 유럽에서 제일 먼저 만들어졌다. 그리고 이것들은 유럽적 사상인 것이 아니라 인간적 사상이 되었다. 이러한 사상들은 각 문화에 맞추어 다양한 형태로 발현한다. 모든 사람은 자신들의 문화에 대하여 반동적이면서 동시에 자유의지주의적이고 민주주의적인 태도를 보여준다. 아마도 모든 사람들이 서로 다른 계급적, 민족적, 젠더적 억압의 역사를, 이 억압에 대한 저항의 역사를 가지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자본주의적 산업화가 세계 전역으로 확산하는 과정에서, 인민들은 저항의 수단을 찾아 헤매었고, 유럽에서 먼저 고통받아오던 이들의 사상을 수용하여 각자의 전통과 사상으로 체화해내었다. 이렇게 자유의지주의적 사회주의가 등장한다. 오늘날 아나키즘은 세계 전역에 퍼져있다. 라틴 아메리카 전역에는 1900년대 후반과 20세기 초반에 그러했던 것처럼, 아나키스트들이 널리 퍼져있다.(니카라과의 민죽국가주의자들인 산디니스타민족해방전선은 그들의 상징색으로 흑색과 적색을 사용한다. 이 색이 니카라과의 노동운동의 상징색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색에서 알 수 있듯이, 그 노동운동은 아나키즘적 조합주의자들이 촉발한 것다.) 아프리카 전역에도, 한국, 일본, 중국 및 중동에도 아나키스트들이 퍼져있다. 구소련의 아시아 부분에도 아나키스트들이 있다. 마르크스주의에 대한 신뢰는 많이 떨어졌고, 세계전역의 인민들은 대안적인 급진 사상을 찾고 있다. 자본주의의 세계화와 함께, 국제 노동계급은 지금껏 겪어보지 못한 상황을 마주하게 되었다. 가장 빈곤한 국가에도 산업 프롤레타리아트가 형성되었다. 컴퓨터와 운송수단의 발전으로 국제 시장은 그 어느 때보다 밀접하고 가까워졌다. 국제 프롤레타리아트 혁명이라는 역사적 이상은 그 어느 때보다 만국의 노동자들에게 현실적으로 다가오고 있다. 국가주의자들의 최후의 보루는 중앙집중화 된 세계정부의 필요성에 대한 주장이 되었다. 이는 특정한 부분에 특화된 다양한 국제 기구(이를테면 유니세프나 무역협력체)를 주장하는 것이 아니다. 자발적인 국제적 연맹체(UN과 비슷하지만, 국가가 없는 UN)를 이야기하는 것도 아니다. 아나키스트들은 국제주의자이자 반민족국가주의자로서 이러한 국제연맹체에 대하여 반대하지 않는다. 국가주의자들이 말하는 바 세계정부는 군대와 경찰을 가지고 세계를 지배하는 국제적인 국가다. 이러한 세계정부는 끔찍한 관료주의적 악몽이 될 것이다. 이 세계정부의 필요성에 대한 주장들을 검토해보자. 먼저, 전쟁을 철폐하기 위해 세계정부가 필요하다는 주장이 있다. 민족국가의 정부가 도시국가 사이의 전쟁을 멈춘 것처럼, 국제 국가는 민족국가들 사이의 전쟁을 멈출 것이라는 것이다. 하지만, 지역적 전쟁들을 멈춘 것은 정부가 아니었다. 통일국가와 그 정부는 경제적 · 사회적 축적이 증대한 결과물이었다. 통합되지 않은 민족국가 내에서도 전쟁은 가능하다. 이러한 전쟁은 내전(혹은 민족해방전쟁, 혁명전쟁)이라 불린다. 역사상 가장 끔찍했던 전쟁중 하나는 미국 내전(남북전쟁)이었다. 미국이라는 국가 정부를 설치한 것은 남북전쟁을 막지 못했다. 국제 정부를 설치한다해도, 그것은 국제적 “내전”을 막지 못할 것이다. 전쟁을 멈추기 위하여 필요한 것은 민족적 압제를 철폐하는 것이다. 처절한 국제 자본주의적 경쟁을 철폐하는 것이다. 제국주의를 철폐하는 것이고 부유한 지배계급의 이익에 복무하는 민족국가를 철폐하는 것이다. 전쟁은 민족적 압제와 착취를 위하여 발발한다. 그리고 이 압제와 착취는 자본주의 체제 하의 민족국가라는 경쟁적 체계 속에서 이루어진다. 협동에 기반한 국가없는 세계에서는 전쟁이 존재할 이유가 없을 것이다. 민족국가는 지배계급의 이익에 따라 전쟁을 선포하기 위하여 존재한다. 이것이야말로 민족국가가 존재해야 할 주요한 이유였다. 현존 국가를 유지하지 않으면서 오히려 더 크고 강력한 국가를 만들어내는 것은, 전쟁을 철폐하기 위한 방법이 아니라, 전쟁을 일으키기 위한 방법이 될 것이다. 사회주의적인 국제 경제 계획을 중앙에서 집행하기 위하여 세계정부가 필요하다는 주장도 있다.(니콜라이 부하린 역시 이러한 주장을 제기했다.) 그러니까, 남부 아프리카와 그린란드에 있는 공장 모두가, 이를테면, 제네바의 본부에서 관리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놀라운 비효율성이다! 이러한 개념은 현대의 경제 제국주의가 침략적 필요에 의하여 만들어낸 세계 경제의 과도한 중앙집중성을 인정하고 있는 것이다. 미국 방직기업들은 방글라데시의 여성들을 고용한다. 이것은 미국인들이 바느질하는 법을 몰라서 그런 것이 아니다. 방글라데시인들을 고용하는 것이 더 싸기 때문이다. 반면, 반권위주의적 사회주의자들은 인민들이 필요한 만큼의 식량, 에너지, 의복, 주거, 지역기반 산업 등을 스스로 생산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최소한 대륙단위로는, 그 거주민들에게 충분한 자원이 존재한다. 그것으로도 부족하다면, 여전히 각 지역간의 교역은 가능할 것이다. 교역의 규모가 크지 않을 것이기에, 무역협회와 제한적 국제기구를 통해 이를 관리할 수 있을 것이다. 극좌파들 역시 세계 정부의 필요성을 주장하기도 한다. 세계 혁명을 완수한 다음이라도, 이전까지 제국주의 국가였던 부유한 국가와 이전까지 칙취당하고 있던 가난한 국가는 존재할 것이다. 그렇기에 모든 인류가 평등해질 때까지 유지되는 세계 단일 국가를 통하여 부유한 국가들이 가난한 지역과 부를 공유하게 하여야 한다는 주장이 이루어지는 것이다. 트로츠키주의자인 시모어는 “맨하탄 부촌에 설치된 아나키즘적 코뮌과 인도의 농촌에 설치된 아나키즘적 코뮌”은 결코 같을 수 없다면서, “중앙정부에 의하여 국제적으로 계획된 사회주의 경제”가 필요할 것이라 주장한다.(시모어, 2001) 마오주의자인 아바키안 역시 국제적 독재가 형성되지 않는다 할지라도, 이전까지의 제국주의 국가에 설치된 아나키즘적 코뮌은 그저 “제국주의가 수행하던 억압과 착취를 ‘코뮌화’할 뿐”이라 말한다. 이러한 계획은 실질적 문제를 지적하고 있는 것은 맞지만, 동시에 전세계적 혁명 독재를 의미하는 바, 끔찍한 생각이다. 북미, 서유럽, 일본 등지에서의 국제적 “프롤레타리아” 독재는 아프리카나 서인도제도에서 노동자 민주주의로 드러나지 않을 것이다. 이 국제적 전체주의 국가가 이들 국가를 지배하기 시작할 것이다. 북미/유럽 등지의 혁명이 “제 3세계”에게 해줄 수 있는 최선은, 그저 물러나는 것이다. 서구 국가들이 아시아, 아프리카, 라틴 아메리카에 불공정 무역을 강제하고, 불평등한 투자를 멈추고, 피억압민족의 고혈을 빨아먹기 위해 고안해낸 파멸적 국제 금융의 부채를 탕감한다면, 이들 제 3세계는 손수이 발전할 수 있을 것이다. 아니, 단지 국제 부채의 탕감만으로도 제3세계의 발전은 가속할 것이다. 가난한 이들이 산업화된 국가의 과학기술을, 국제 저작권료를 내지 않고 사용할 수 있게 “허가”하는 것만 해도 그러할 것이다. 이러한 뺄셈적 원조 말고도, 부유한 국가들은 빈곤한 국가가 스스로의 방식으로 “산업화”하는 것을 도울 것이다. 반권위주의적 사회주의 사회를 건설함으로서 스스로 자유로워진 사람들은 매우 이상주의적이 되어 타인을 돕고 싶어질 가능성이 높다. 자본주의적 과대 생산을 종식시키고, 군수 생산에 소요되는 대규모 지출을 없애는 것은 다양한 목적으로 사용할 수 있는 잉여자원들을 제공할 것이다. 동시에, 가난한 국가를 돕는 것은 부유한 국가의 이익에도 부합한다. 빈곤한 이들 사이에 고고히 솟은 사회주의의 낙원이라는 유토피아는 존재할 수 없다. 빈곤은 불안정성을 촉발하고, 계급 사회의 부활의 기반을 닦을 것이다. 가난한 이들의 고통은 반동적이고 반계몽주의적인 이데올로기(민족주의, 종교 근본주의, 스탈린주의)의 발흥을 촉발할 것이다. 빈곤은 가난한 국가들 간의 전쟁을 촉발할 것이고, 이 전쟁에는 부유한 국가도 끌려들어가게 될 것이다. 부유한 국가로 향하는 이민의 파도를 낳아 부유한 국가가 인구와 환경 사이의 생태적 균형을 달성하기 어렵게 만들 것이다.(물론 이러한 것이 국가가 만들어낸 국경을 바탕으로 이민을 제약하려는 시도를 정당화할 수는 없다.) 간단히 말해서, 구 제국주의 국가들이 빈곤한 국가를 돕는 것은, 그들의 이익을 위한 것이기도 하다. 앞서 언급하였듯이, 실천적인 탈중앙주의적 기술은 빈곤한 국가가 스스로의 방식으로 개발하는 것을 돕기 위해 고안되었다. 거대한 댐이나 공장, 도시와 마천루, 최신식 공항으로 이들을 “산업화”하는 것은 그저 그들의 새로운 주인님인 민족 부르주아지와 국가 관료들의 배를 불릴 뿐이다.(동시에 서구 은행에의 부채를 늘릴 뿐이기도 하다.) 이러한 원조 대신에 서구의 자유의지주의적 사회주의 국가들은 중간 기술을 도입하기 위한 자본을 제공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지역 인민들과 함께 이러한 개발을 집행하는 과정에서 생태적으로 균형잡히고 민주적으로 수행되는 빈곤으로부터의 탈출을 달성할 수 있을 것이다. 탈중앙주의는 개발된 세계와 모순되지 않는다. 오히려 탈중앙주의야말로 개발의 전제라 할 수 있다. 세계 전역에서 사람들은 자기 자신과 자신이 사랑하는 이들을 보살피기 위하여 노동한다. 하지만 이들의 노동과 생산성을 빨아 배를 불리는 것은 자본가 계급이다. 언제나 어디에서나, 국가는 군대와 경찰, 공무원과 관료, 법원과 세금, 정치인들을 사용하여 자본가 계급과 손을 맞잡고 나아간다. 모든 이들은 이러한 끔찍한 지배를 끝낼 역량을 갖추고 있다. 자유와 자주경영은 전 세계를 위한 것이다. ** 2부. 국가와 혁명, 그리고 반혁명 *** 9장. 러시아 혁명 국가의 본성과 국가를 다른 것으로 대체할 수 있다는 가능성에 대하여 논의하는 것은 추상적인 이론으로 보일 수도 있다. 하지만 국가에 대한 이러한 관점은 대중혁명의 경험들을 통하여 혁명적 인민들이 정치 이론가들에게 가르치는 방식으로 만들어진 것이다. 마르크스와 엥겔스, 초기 아나키스트들은 1848년의 혁명과 파리 코뮌의 시기를 경험했다. 이후의 마르크스주의자들과 아나키스트들은 1905년과 1917년의 러시아 혁명에 참여했고, 1차 세계대전 이후의 유럽 혁명에 참여했다. 이 혁명들은 혁명운동가들이 국가를 어떻게 이해했는지에 따라 성공하기도, 실패하기도 했다.(그리고 대부분 실패했다.) 혁명가들은 혁명에 대하여 학습한다. 우리는 혁명이 어떻게 일어났고, 어떻게 성공했고, 어떻게 실패했고, 어떻게 배반당했는지 알아야 한다. 우리의 비혁명적 일상 속에서, 혁명이 어떻게 발발했고, 혁명의 시기에 어떻게 평범한 인민들이 봉기하여 압제자를 몰아냈고, 어떻게 수백만 인민들이 국가 없는 사회를 만들어 삶을 자유롭게 변혁하고자 하였는가를 보는 것은 영감을 주는 일이다. 특히, 아나키스트들이 참여한 두 혁명들에 대하여 학습하는 것은 매우 가치있는 일이 될 것이다. 이 혁명들은 패배하였을 지라도, 대중의 투쟁을 통해 자유의 창조적 형태들을 만들어내었다. 많은 역사학자들은 혁명을 한 국가를 새로운 국가로 대체하는 과정으로 표현한다. 아나키스트들은 혁명에서 가장 흥미로운 부분은 노동자들이 옛 지배자들을 몰아내고 스스로 사회를 조직하는 “해방의 축제”라고 바라본다. 새로운 국가를 건설하는 과정은 반혁명일 뿐이다. 2부에서 나는 세계를 뒤흔든 두 개의 혁명을 검토하여 다른 봉기들에 예시를 제공하고자 한다. 하나는 1917년부터 1921년까지의 러시아 혁명이고, 다른 하나는 1936년부터 1939년까지의 스페인 혁명이다. 나는 또한 마찬가지로 세계를 뒤흔든 비혁명적 투쟁이었던 30년대 초반 독일에서의 반나치 투쟁에 대해서도 다루려 한다. 러시아 혁명은 1917년 2월(정확하게는 3월이었지만, 당시 러시아는 유럽 일반에 비하여 2주 가량 늦은 구식 달력을 이용하고 있었다.)에 발발했다.(1905년에도 러시아에서는 혁명이 발발했었다는 것을 유념할 필요가 있다. 이 혁명은 패배하였지만, 1917년 혁명의 기반을 닦았다.) 러시아 혁명은 국제 여성의 날에 페트로그라드 시에서 시위에 나선 여성 노동계급으로부터 시작하였다. 사회주의 정당들은 여성들이 더 나은 시기를 기다릴 것을 촉구했다. 하지만 여성노동자들은 굶주렸고, 그들의 가족도 굶주렸으며, 그들은 분노하고 있었다. 이들의 시위는 반란이 되어 페트로그라드의 남성 노동자들과 군인, 인근 지역의 농민들에게 확산되었다. 당시 러시아 제국은 전제군주(차르)가 통치하는 후진적이고 봉건적인 농업국가에 국제 자본주의가 침투하여 가장 근대적인 산업 형태와 대공장을 이식한 상태였다. 이 이상하고 비효율적인 혼합 체제는 3년간의 세계 1차 대전에 의하여 혹사 상태에 빠졌다. 오만하고 봉건적 정신상태를 가진 장교들이 교육받지 못한 농민 출신의 병사들을 지휘하던 러시아군은 고도로 산업화된 경제로 뒷받침되는 잘 조직된 독일군을 마주해야 했다. 1914년 이래, 러시아군과 러시아 경제는 어마어마한 압력 아래에 있었고, 사실상 붕괴되어가고 있었다. 러시아 제국은 군대에게 식량도, 의복도, 의약도, 수송도 제공할 수 없었지만, 영불 자본가들에게 복무하기 위한 전쟁에 지친 군대를 계속 투입하고 있었다. 결국 러시아군은 반란을 일으켰다. 수천의 병사들이 탈영했고, 공세에 투입되는 것을 거부했고, 폭동을 일으켰으며, 독일 병사들과 친밀함을 유지했으며, 프래깅을 일으켰다. 군대의 폭동과 노동자의 반란이 차르를 몰아냈다. 도시에서의 반란은 파업과 공장점거의 끝없는 물결로 드러났다. 노동자들은 공장이나 사무실의 모두를 포함한 총회를 열었고, 생산의 지속을 보장할 수 있는 선출직 위원회를 두었다. 그와 동시에 노동자들은 지역 평의회에 파견하기 위한 대의원들을 선출하기도 했다. 소비에트는 “평의회”를 러시아어로 쓴 것이다. 노동자들은 1905년의 혁명을 시도할 당시 소비에트를 건설하였던 것을 기억하고 있었다. 최초에 소비에트/평의회는 단지 파업위원회인 것으로 보였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소비에트는 정부의 기능들을 접수하기 시작했다. 경찰들은 거리와 경찰서에서 쫓겨났다. 치안 유지 기능은 무장한 노동자들의 분대의 손에 들어왔다. 전화 교환소나 철도 운수나 인쇄 공장의 노동자들은 소비에트의 집행위원회의 허가가 없이는 “공식적인” 명령을 따르지 않았다. 소비에트는 대의기구였지만, 그 어떠한 의회보다 훨씬 더 민주적이었다. 소비에트는 노동현장에 뿌리내리고 있었다. 소비에트의 대의원들은 선거로 소환될 수 있었다. 대의원들은 원칙적으로 노동계급이었고, 부패할 여지가 거의 없었다. 하지만 이 민주적 느슨함이 소비에트의 약점을 구성했다. 소비에트는 목소리를 낼 기회가 없던 인민들의 회의였고, 토론과 연설의 장소이기도 했다. 그렇기에 인민들은 집행위원회를 구성하고 있던 소규모 지식인 그룹(당 관료)들의 의견에 따르게 될 위험을 가지고 있었다. 집행위원회는 특정 집단에 유리하게 구성될 위험을 크게 가지고 있었다. 무엇보다, 소비에트가 자본주의 사회의 의회보다 더 노동계급의 의견을 반영하였다 하더라도, 여전히 대의기구였기에 노동자들의 의견이 대의원단 구성에, 그리고 대의원단이 선출하는 집행위원회의 구성에 반영되기까지 약간의 시간이 필요했다. 소비에트의 한계는 사업장, 혹은 지역인민의 총회가 대의원단을 선출하고 감시하는 구조를 만드는 것으로 상당부분 극복할 수 있는 것이었다. 하지만 그 어떤 정당도 이에 관심을 두지 않았다. 혁명은 확산되었다. 군인들과 수병들은 총회를 열고, 위원회를 선출하고, 노동자들의 소비에트에 가맹한 자신들의 소비에트에 대의원들을 파견하였다.(노동자들은 군인들을 자기 편에 두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 아주 잘 알고 있었다.) 가을이 되기 전까지, 러시아 전역에는 900여 개의 소비에트가 세워졌다. 이들은 서로 관계를 맺고 있었다. 첫 번째 ‘범러시아 노동자 · 군인 · 농민 소비에트’는 1917년 6월 페트로그라드에서 열렸고, 다음으로는 10월에 열렸다. 노동자들의 공장위원회는 최초에 자본가들과 경영진이 생산을 사보타주 하고 있지 않은지 감시하는 역할로부터 출발했다.(실제로, “노동자 자주 통제”의 러시아어는 단지 “감시”라는 의미만을 가진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노동자들은 공장을 장악하고 스스로 운영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는 러시아어로 “노동자 자주경영”이라 불렸다. 노동자들은 공장위원회를 통하여 농민들이나 다른 산업부문에 접촉하여 원자재를 확보했다. 이들은 생산이 지속될 수 있도록 했다. 이들은 공장에 충분한 규율이 유지되도록 담보할 기구를 두었다. 이들은 임금 계획을 수립했다. 이들은 소비에트 중앙이나 다른 공장과 공조하여 생산물이 분배되도록 하였다. 이들은 그들의 공장이 “국유화”되었다고 말하기 시작했다. 여기서 “국유화”는, 국가가 공장을 운영한다는 것이 아니라, 공장이 자본가들로부터 수용되어 사회적으로 소유되고, 노동자들 스스로가 경영하는 것으로 변하였음을 의미한다. 노동자들이 생산을 운영하는 것이 효율적이었는지에 관해서는 1917년 이래로 지속적으로 논의되어 왔다. 혁명이 시작되기도 전부터 러시아 경제는 붕괴하기 시작했고, 오히려 이것이 혁명의 원인이었다. 물론, 노동자들에게는 경험이 부족했고, 실수를 하곤 했다. 생산의 유지는 생산노동자들이 화이트 칼라 노동자가, 전문가가 계속 노동하게 할 수 있었는지에 따라 다른 결과를 내었다. 하지만 자본가들과 친자본가적 중간관리자들은 노동자 조직의 최소한의 단초만 보인다해도 생산을 사보타주하곤 했다. 바로 이것이 노동자 자주경영을 필요하게 한 이유였지만, 마찬가지로 노동자 자주경영을 어렵게 한 것이기도 했다. 하지만 이러한 장애들에도 불구하고, 노동자들이 경영하는 공장들은 생산을 분명히 증대시킨 것으로 보인다. 더 중요한 것은, 농민들이 반란을 일으키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러시아가 농업기반적이고 미개발된 국가였던 이상, 대다수의 군인들은 농민이었다. 농민들은 농민위원회를 조직하고, 마을 회의에서 회합을 가지고, 토지를 분할했다. 이들은 지주의 집에 쳐들어가 그들의 가구와 가축을 나누었다. 그리고 그들의 집을 불태웠던 젠트리의 집을 불태우기도 했다. 농촌에서의 혁명은 느리게 확산되었지만, 한번 불붙는 순간 매우 섬세하게 진행되어 봉건적 지주제를 끝장냈다. 러시아 전역에 협동조합들이 건설되었다. 도시에서는 소비자 협동조합이 등장했고, 교외에서는 소비자/판매자 협동조합이 건설되어 농민들이 중개상 없이 물건을 사고팔 수 있도록 하였다. 당시 볼셰비키들은 협동조합이 중간계급과 부농에 복무한다고 비판하였다. 하지만 레닌은, 그의 말년이 되어서야 협동조합이 사회주의를 건설하는 데에 있어 중요한 요소였지만 볼셰비키들이 이를 간과하였다고 말한다. 거대한 러시아 제국의 이음매가 무너지고 있었다. “민족의 감옥”이라 불릴 정도로 민족국가들과 소수민족들(폴란드, 우크라이나, 조지아, 유대인, 카자크족 등이 러시아 인구의 과반을 차지했다.)을 포괄하고 있던 러시아 제국에서, 이들이 독립이나 자치를 요구하기 시작했다. 이들 민족들은 지역 정부를 수립하고, 러시아어가 아닌 자기들의 민족언어로 행정을 처리하기 시작했다. 2월 혁명을 조직하고, 소비에트나 대중 총회, 공장위원회, 평의회를 만든 것은 정당들이 아니다. 가장 혁명적인 정당조차도 인민들을 따라가지 못했고, 즉각적인 파업투쟁이나 대중투쟁을 하지 말라고 조언했다. 정당들이 대중에 뒤처진 것은 그들의 잘못만은 아니다. 1905년 이래 12년간 제정당들은 특정한 형태의 혁명을 부르짖었지만, 인민 대다수는 이에 응답하지 않고 비혁명적으로 남았다. 당시에 사회주의 정당들은 노동대중보다 앞서 있었고, 소규모 그룹들을 조직하면서 그들의 사상을 (레닌의 말을 빌리자면) “끈질기게 설명”했다. 그리고 마침내 인민들이 혁명으로 터져나왔을 때, 정당들은 여전히 수년간 계속되어 온 “끈질기게 설명”하는 단계에 남아있었다. 정당들이 당시의 급격하고 급진적으로 변화한 상황에 맞추어 자기 방향성을 재정비하는 데에 시간이 걸렸던 것은 불가피한 일이었다. 하지만 정당들이 인민들에 뒤처지게 된 원인 중, 그들의 중앙집중성과 보수주의가 있었다는 것 역시 사실이다. 이를테면, 1905년 소비에트가 처음으로 건설되었을 때, 볼셰비키 당은 소비에트의 해산을 촉구했다. 그들이 소비에트를 통제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나아가, 레닌주의적인 볼셰비키나, 더 온건한 멘셰비키나 이론과 강령상 사회주의 혁명을 반대했다. 이들은 사회가 “단계적”으로 발전할 것이라고 믿었다. 그리고 러시아는 여전히 봉건적이었기에, 사회주의 혁명을 위해 러시아는 자본주의-민주주의 혁명의 단계를 거쳐야 하는 것이었다. 그렇기에 이들은 노동자의 공장 점유나 생산의 사회화 같은 자본주의의 제약을 넘어선 대중행동을 다룰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다. 2월 혁명은 “자발적” 혁명이라 불리곤 한다. 이러한 명명은 혁명이 정당에 의하여 계획되지 않는 한, 그 혁명은 의식적이지 않고 비합리적이며 자연스러운 과정일 뿐이라는 엘리트주의적 의식에서 비롯한다. 하지만 현실은, 인민들은 스스로가 하는 일을 정확하게 인지하고 있으며, 그 과업을 잘 이행했다는 것이다. 사회주의 정당의 평당원이거나 그 정당들의 선전을 수년간 들어온 평범한 사람들이 지도력을 보여주었다. 이들은 서로로부터 용기를 얻어가며, 위로부터의 변화를 믿지 않고, 수년간 들어온 사상에 기대어 희망하고 행동하기를 멈추지 않았다. 이들은 수세기간 이어져온 전제군주제를 전복하고, 인민민주주의적 조직을 전국적으로 건설하였으며, 공장을 확보하기 시작했고, 토지를 위한 농민 전쟁을 시작했다. 하지만 그것이 새로운 사회로 귀결지어지지는 못했다. 2월 혁명 이후, 차르는 사라졌지만 자본가와 지주들은 남아있었다. 군대와 전쟁도 남아있었다. 차르의 위치에는 임시정부라는 이름의 새로운 국가가 들어섰다. 이 정부는 친자본주의적이고 근왕주의적인 정치인들로 구성되어, 오래된 관료주의와 장교집단, 금융과 대기업에 의존하고 있었다. 임시정부는 서유럽의 제국주의 정부와 동맹하여 전쟁을 지속했다. 그리고 이러한 자본주의적-관료적-제국주의적 국가 기제야말로 공산주의 국가의 기반을 놓았다. 결과적으로, 러시아는 두 개의 정부, 혹은 준정부를 가지게 되었다. 이는 양두정치, 혹은 이중권력이라 불렸다. 공식적인 임시정부는 대중의 지지를 거의 받지 못하였다. 임시정부가 존재할 수 있던 이유는 소비에트의 개량적 사회주의 지도부들이 지지했다는 이유뿐이었다. 다른 한 편에는 군대와 무장한 노동자들을 포함한 대중들의 지지를 확보하고 있던 소비에트가 있었다. 하지만 소비에트 내에서 다수는 개량적 사회주의를 지지하였고, 개량적 사회주의자들은 그들이 받는 지지를 임시정부를 향한 지지로 전용했다. 인민들과 정당들이라는 두 세력 사이에는 문제가 있었다. 노동대중(이 중 오직 2~5%만이 도시노동자들이었고, 나머지는 농민들이었다.)들은 가장 선진적인 사상과 가장 후진적인 편견들을 동시에 가지고 있었다. 이들은 자유를 원하면서도 지도자들이 대신 생각해줄 것을 원했다. 이들은 사회주의를 원하면서도 사적 소유를 원했다.(농민들의 경우, 토지의 사회적 소유를 원한 것이 맞지만, 그 토지를 가구들에 분배할 것을 원했다.) 이들은 종전을 원하면서도 애국자이기도 했다.(애국주의는 인민대중과 소수 지배계급 사이에 공통 이해관계가 있다고 주장한다.) 이들은 사회를 합리적으로 재조직하기를 원하면서도 종교적 미신이나 반유대주의에 빠져있었다. 이들은 사회주의 정당의 대표자 후보들에 투표하면서도 정당들간의 차이를 거의 인지하지 못했다. 최소한 초기에는 그러했다. 정당들은 다양한 계급들의 결정체였다. 이들은 대중 의식의 정수(민주주의, 자유, 사회주의를 향한 열망)와 그 저점(누군가가 우두머리가 되어주기를 원하는 열망)의 혼합체였다. 정당들이 인민들에게 새로운 사상을 교육한 것은 분명하지만, 궁극적으로 그들은 인민들의 후진성에 의존했다. 정당들에 대하여 말하자면, 그들 중 일부는 온전히 친자본주의적이었다. 개량주의적 마르크스주의자들이었던 멘셰비키를 포함한 이 정당들은 준봉건적 차르 체제에 맞선 혁명을 이끌었어야 했다. 하지만 그들은 그렇게 할 수 없었다. 자본가들은 대출금이나 사업계약이라는 이름으로 봉건 세력과 너무 많이 엮여있었다. 자본가들은 농민들의 봉기를 두려워했다. 이 봉기는 자산의 재분배로 귀결할 것이고, 그것은 노동자들에게 영감을 주어 자본가들의 자산을 앗아갈 것이기 때문이었다. 나아가 러시아 자본가들은 금융 · 투자 · 문화적 측면에서 유럽 자본주의에 묶여있었다. 그리고 러시아가 총체적으로 후진적인 상태였던 것과 달리 유럽은 사회주의 혁명이 무르익고 있었다. 그렇기에 차르 시절에는 그토록 반란적으로 보였던 자본가들의 자유주의 정당들은 2월 혁명 이후 빠르게 보수적으로 태세를 전환했다. 우파세력이었던 지주, 전제주의자, 반유대주의자들은 친자본주의적 자유주의자들과 영합하여 입헌민주당으로 대변되는 반동 세력을 구성했다. 초기 임시정부는 이들이 주도적으로 구성하였다. 하지만 이들의 대중기반은 상류계급이었고, 노동자와 농민을 대표하는 소비에트에서는 거의 지지받지 못했다. 대중 세력은 주로 3개의 사회주의 정당을 지지했다. 그 중 가장 규모가 큰 당은 사회혁명당이었다. 사회혁명당은 마르크스주의자라기보다는 “대중주의자”(“나로드니키”)였다. 대중주의는 도시 노동계급이 아닌 대중의 힘이 사회를 바꿀 것이라 믿는 정형적이지 않은 이데올로기였다. 이들은 농민 조직이 바로 사회주의로 진보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사회혁명당의 활동가들은 협동조합 건설에서 중요한 역할을 맡았다. 역사적으로, 대중주의 활동가들은 폭탄을 던지고, 귀족들을 암살하고는 했다. 물론 큰 효과는 없었다. 이들의 전력은 모호했고, 사회혁명당의 당원들은 자유주의자와 하등 다를 바 없는 우파(이를테면 알렉산드르 케렌스키)부터 아나키즘적 사회주의자들에 가까울 정도의 좌파(최대주의자)까지 광범위했다. 바로 이 모호함에 힘입어 사회혁명당에는 모든 종류의 온건 자유주의적 기회주의자들이 유명해질 기회를 꿈꾸며 모여들었다. 이들의 농민친화적 태도 역시, 대부분의 노동대중들이 사회주의자들 사이의 차이를 거의 인지하지 못하던 당대에 사회혁명당을 최대 정당으로 만드는 데에 기여하였다. 그 다음으로 규모가 큰 좌파 정당은 사회민주당의 개량주의 분파인 멘셰비키였다. 멘셰비키는 사회혁명당과 사회민주당이라는 마르크스주의 정당 두 개 중 가장 우익적인, 혹은 가장 온건한 입장을 가지고 있었다. 전술하였듯이 멘셰비키는 러시아가 자본주의 혁명을 치루고 있는 중이고, 자본주의적 진보를 이행하는 중이며, 그렇기에 자본주의 정치인들이 주도권을 쥐어야 한다는 이데올로기적 입장을 가지고 있었다. 멘셰비키는 자본주의 혁명을 먼저 진행하고, 다가올 언젠가 사회주의 혁명을 진행해야 한다는 “2단계 혁명”을 믿었다. 이들은 노동조합을 조직하고, 이를 바탕으로 민주적 의회에서의 야당이 된다는 완전히 비현실적인 계획을 가지고 있었다. 이들은 부르주아 국가를 청산하고자 시도하지 않았고, 오히려 그 건설을 목표로 했다. 그럼에도 이들의 강령은 사회혁명당의 그것보다 더 공고하였기에, 이들은 더 규모가 큰 사회혁명당을 압도할 수 있었다. 나는 멘셰비키들과 사회혁명당 우파들을 “개량주의자”라 이른 바 있다. 이는 그들이 자본주의에 맞선 혁명에 반대하기 때무닝었다. 하지만, 이들은 차르에 맞선 혁명은 지지했고, 이를 이루기 위하여 오랜 시간 투쟁하기도 했다. 이들은 국제적 기준으로 보았을 때 사회민주주의 운동의 중도좌파 세력으로 스스로 정체했다. 즉, 이들은 혁명을 말하면서도 모호하고, 거의 개량주의적인 방식으로 행동해왔다. 이들은 중도에 위치한 사회주의자였고, “중도주의자”라 부르는 것이 가장 정확한 명칭일 것이다. 다른 마르크스주의 정당으로는 레닌이 이끄는 볼셰비키가 있었다.(레닌은 “볼셰비키”나 “사회민주당”의 이름을 버리고 “공산주의자”라 자칭해야 한다고 주장했고, 이들은 그렇게 하였다.) 이들은 오랫동안 다가올 혁명이 자본주의적 민주주의 혁명일 것이고, 이를 통하여 자본주의적 진보의 시기가 열릴 것이라 바라보았다. 하지만 이들은 멘셰비키들과 달리 자본가들이나 자본가들의 정당이 이를 수행할 수 있을 것이라 바라보지 않았다. 혁명은 노동자 계급정당이 농민 정당과의 협력으로 이끄는 것어야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들은 멘셰비키들이 그러한 것처럼, 혁명은 자본주의의 경계 안에 머물 것이라 바라보았다. 이들 역시 부르주아 국가를 건설하고자 했다. 이는 “2단계 혁명”의 수정안이라 할 수 있었다. 러시아에서 혁명이 자유주의적 자본주의의 경계를 넘어 노동자들이 공장을 확보하고, 국가가 산업을 국유화할 수 있을 것이라 바라보았던 유일한 마르크스주의자는 트로츠키였다. 그리고 이러한 러시아 혁명이 생존하기 위해서는, 혁명을 유럽 전역으로 퍼트려야 할 것이었다.(“영구 혁명론”) 1917년, 레닌은 혁명이 사회주의 정책으로 나아갈 것이라는 결론에 도달했다. 그는 여전히 러시아가 자본주의 단계를 건너뛰기에는 너무 후진적이라고 바라보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러시아 혁명이 국제 혁명의 일부가 될 수 있을 것이라 여기기 시작했다. 레닌은 그의 관점으로 볼셰비키를 설득했다.(그리고 이에 호응하여 트로츠키가 볼셰비키에 입당했다.) 그 어떤 러시아 마르크스주의 정당도 사회주의 혁명을 계획한 바가 없었음을 기억하자. 이들은 사회주의를 어떻게 조직할 것인지에 대해서도, 노동자들이 산업을 어떻게 운영할 수 있을 지에 대해서도, 농민들이 평화롭게 집단농업을 조직할 방법에 대해서도 논의한 바 없다. 물론, 마르크스주의자들이 사회주의에 대해 가지고 있던 중앙집중적 상을 고려할 때, 논의가 그 자체로 차이를 만들지는 않았을 수 있지만 말이다. 러시아의 주류 정치 경향 중 가장 세가 작았던 것은 아나키스트들이었다. 러시아 아니키즘의 위대한 이론가 표트르 크로포트킨은 러시아로 돌아왔지만, 당시 크로포트킨은 1차 대전에 대한 찬전으로 인하여 급진주의자들의 신뢰를 잃은 상태였다. 2월 혁명 전까지 아나키스트들은 조직도, 언론도 가지고 있지 못했다. 혁명 이후 그들은 가능한 빠르게 두 도시에서 연맹들을 건설했다. 그리고 이 연맹들은, 마르크스주의 정당들만큼이나 분열에 시달려야 했다. 반조직적 개인주의자들과, 크로포트킨적인 아나키즘적 코뮌주의자들(코뮌 건설을 강조했다), 아나키즘적 조합주의자들(산업 내에서의 활동과 노동자 자주경영을 주장했다)의 차이에 대해서는 더 말할 것도 없다. 이들 중 가장 조직지향적이었던 것은 아나키즘적 조합주의자들이었다. 이들은 상당수의 노동자들 사이에서 세력을 건설해내었다. 이들은 소비에트의 한계를 인지하면서도 소비에트에 참여했다. 아나키스트들이 혁명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 것은 맞지만, 이들은 단 한 순간도, 우크라이나의 경우를 제외하면 볼셰비키들과 규모와 영향력 양면에서 비슷해져 본 적도 없었다. 중도주의/개량주의적 사회주의자들은 자유주의적 입헌민주당의 취약함을 인지하면서도, 그들의 정권 붕괴하도록 내버려두지 못횄다. 만약 입헌민주당이 붕괴한다면, 다음으로 책임을 져야할 것은 자신들이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사회주의자들은 스스로의 판단마저 거스르면서 자본주의 정부에 참여하여 그 정부를 유지하려 하였다. 그리고 이것이야말로 소위 “인민전선” 정부라 불리게 될 것의 초기적 예시라 할 수 있겠다. 자본주의 정당들과의 동맹을 유지하여야 한다는 명분으로 사회주의자들은 사회주의 정책을 집행하지 않는 것을 정당화하였다. 그와 동시에 자본가들은 사회주의자들을 자본주의적 정책에 대한 욕받이로 이용했다. 자유주의자와 사회주의자들의 연립정부 역시 최소한의 자유주의적 민주주의 정책을 수행하지 못했다. 이들은 제헌의회 선출을 위한 선거를 구성하지도, 지주들의 토지를 농민들에게 지급하지도, 피압제 민족에게 자주를 제공하지도, 노동시간을 일 8시간으로 단축하지도 못했다. 이들은 전쟁을 끝내는 것마저도 실패했다.(대신, 이들은 새로운 “공세”를 조직하여, 수많은 러시아 군인들의 생명을 무의미하게 앗아갔다.) 이 정부가 성공한 것은, 썩어빠진 구조가 그저 부평초처럼 흘러다니면서, 어떠한 것도 해결하지 못하고, 어떠한 것도 안정시키지 못하는 상태를 유지하는 것 뿐이었다. 2월부터 10월까지의 수개월동안, 러시아 인민들은 점점 혁명적 좌파로 변모하기 시작했다. 볼셰비키당의 규모와 영향력은 증대해갔다. 아나키스트들의 규모와 영향력 역시 마찬가지였고, 볼셰비키들은 이를 우려했다. 사회혁명당 좌파의 세력 역시 커졌고, 결국 사회혁명당은 분열했다. 사회주의 정당 3개 중 자본주의적 임시적부를 완전히 거부한 것은 볼셰비키 뿐이었다. 이들은 소비에트를 대안적 국가권력이라고 바라보았다. 레닌은 소비에트가 볼셰비키 당에게 권력을 가져다줄 수 있는 수단이 될 수 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이에 대하여 멘셰비키들은 레닌이 “아나키스트”라는 비난을 반복했다.) 레닌의 계획은 『임박한 파국, 그것에 어떻게 대처할 것인가』등의 문건에서도 볼 수 있듯, 자기모순적이었다. 레닌은 독일 전시경제 모델에 따라 경제를 중앙화하고, 주요 산업을 군사국가의 조정 아래에서 통합할 것을 주장하면서 동시에 중앙화된 경제가 소비에트 · 공장위원회 · 노동조합 등 노동자 조직에 의하여 운영되고 감시되는 것을 원했다. 레닌은 탈중앙적이고 연방적인 소비에트의 본성과 중앙집중적이고 국가독점적인 경제 사이의 모순을 인지하지 못했다. 공산주의자들이 대중의 지지를 충분하게 확보한 이후, 이들은 군사 반란을 조직했다. 공산당는 임시정부를 해산하고 그 권력을 공산당과 그 동맹세력이 다수를 차지하고 있는 전러시아소비에트대회로 이관했다. 이렇게 10월 혁명이 이행되었다. 대중 투쟁이 이어져온 수개월간, 10월 혁명은 다수의 지지로 이루어진 것이었다. 이 지지는 공산당의 지배를 향한 지배가 아니라, 소비에트가 임시정부를 대체하는 것에 대한 것이었다. 전술하였던 것처럼, 10월 혁명과 초기 소비에트 정부가 통일전선이 수행한 집체적 노력의 결과였다는 것은 잘 알려져있지 않다. 서로 다른 역사를 가지고 있던 좌익 사회주의자들을 통일전선의 대오로 끌어들인 것은 볼셰비키들 자신이었다. 군사반란은 사회혁명당 좌파의 지지를 등에 업고 조직된 것이었다. 새로운 체제에서 레닌이 선포한 농업 정책은 사회혁명당의 그것을 훔친 것이었다. 사회혁명당 좌파는 연합 소비에트 정부의 소수세력으로서 공산당 정부에 합류했다. 이들은 모든 소비에트 기구에, 심지어 체카에마저 인사를 파견했다. 아나키스트들은 임시정부를 반대하는 투쟁에 있어 공산주의자들과 입장을 같이했다.(하지만 아나키스트들은 “모든 권력을 소비에트에!”라는 구호에 대해서는 미묘한 입장을 보였다. 이 구호가 권위주의적 방향으로 해석될 여지가 충분하기 때문이었다.) 아나키스트들은 10월 혁명에 참여했다. 군사반란을 조직한 군사 위원회 안에는 최소한 4명의 아나키스트들이 있었다. 소비에트의 권위를 인정할 것을 거부하는 제헌의회를 해산시킨 군사력을 이끈 것은 아나키스트 수병이었다. 소비에트에 참여한 아나키스트 대의원들은 대부분 공산주의자들과 같은 입장을 표했다. 아나키스트들은 스스로가 공산당-사회혁명당 좌파의 연합을 비판적으로 지지한다고 여겼다. 아나키스트들은 실질적으로 체제와 연합을 이루고 있었다. 하지만 볼셰비키들은 이 연합을 유지하는 데에 흥미가 없었다. 사회혁명당 좌파가 없었다면 공산당의 농촌 기반은 거의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였음에도, 레닌은 처음부터 이러한 연정에 반대했다. 그리고 도시와 군대에 식량이 모자라게 되었을 때, 공산당이 농민들에 대하여 사실상의 전쟁을 선포하면서, 사회혁명당 좌파와의 분열이 발생했다. 볼셰비키들은 농촌에서의 계급 투쟁에 관한 비현실적이고 교조적인 이론과 일반적으로 권위주의적인 전망에 입각하여 농민들의 식량을 몰수했다. 만약 볼셰비키가 농민 소비에트가 세금을 거두도록 하고, 식량 공급에 대하여 시장을 허용하는 보다 합리적인 정책을 사용하였다면, 더 많은 이들이 배불릴 수도 있었고, 연정을 유지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사회혁명당 좌파와의 분열을 야기한 또 다른 이유는 공산당이 독일과 체결한 브레스트 리토프스크 조약이었다. 이 조약은 러시아 인민 다수를, 특히 우크라이나 인민 전체를 독일에 넘겼다. 레닌은 당시 니콜라이 부하린이 이끌고 있던 좌파 공산주의자 분파의 반대를 무릅쓰고 조약의 체결을 밀어붙였다.(트로츠키는 조약에 찬성했지만, 이는 그가 이것이 옳았다고 여겨서가 아니라, 레닌과의 분열을 원치 않았기 때문이었다.) 사회혁명당 좌파와 좌파 공산주의자들은 혁명 전쟁을, 최소한 게릴라전의 형태로라도 지속하기를 원했다. 이들은 러시아 인민들의 전쟁피로도가 의미하는 것은 새로운 혁명군은 외침세력과 반혁명 군대에 맞선 혁명전쟁의 열기를 불러일으키는 것으로만 건설될 수 있다는 것이라 주장했다.(그리고 이것은 적군의 건설과정에서 실제로 일어난 일이다.) 독일군이 실제로 취약했다는 것을 볼 때, 조약 반대파의 말은 옳았을 수도 있다. 트로츠키의 전기작가인 아이작 도이처나 보수 역사학자 파이프스 역시 이와 같이 주장한다. 하지만 레닌은 조약 체결의 필요성을 강하게 느끼고 있었다. 레닌은 사퇴 협박으로 당지도부가 그를 지지하게 만들었고, 당내 다수의 의견을 묵살했다. 볼셰비키 내에서 이루어진 논의들의 기록을 살펴보면, 이들은 이 결정이 사회혁명당 좌파와의 분열을 야기할 것이라는 고려는 거의 하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소비에트 안에 오직 하나의 당만이 남게 되었을 때, 소비에트는 필연적으로 생명력을 잃고 정당-국가의 확장판으로 전락하는 것임에도 말이다. 아나키스트 역시 브레스트-리토프스크 조약을 거부했다. 1918년 3월, 4차 전러시아소비에트대회에 조약 체결에 대한 안건이 상정되었을 때, 대회에 참석하고 있던 14명의 아나키스트 대의원들은 반대투표했다. 그리고 아나키스트들은 탄압당하기 시작했다. 4월 11일, 체카는 모스크바에 위치해있던 26개의 아나키스트 사무소를 공격했다. 500명 이상의 아나키스트들이 체포되었고, 40명 이상이 살해당하거나 부상당했다. 연정은 끝났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부분의 아나키스트들은 러시아 내전에서 우익 백군에 맞서 공산주의자들과 함께 싸웠다. 아나키스트들은 백군에 맞선 우크라이나의 저항에서 주요한 역할을 맡았다. 네스토르 마흐노는 우크라이나 게릴라군을 조직해내었다. 전술한 것처럼, 마흐노우슈치나는 백군 부대 2개를 패퇴시켰고, 러시아 적군을 막아냈다. 아나키스트 활동가들은 게릴라군 내부에서 교육과 선전기구를 조직했다. 이들은 공산주의자들이 통제하지 않는 자유 소비에트의 체계를 건설했다. 마흐노군은 공산주의자들과 2번의 동맹을 체결하여 외침과 백군 반동들에게 맞섰다. 그리고 마침내 인민의 군대가 적군의 배신에 의하여 무너지고, 대규모 체포와 학살의 대상이 되고, 거짓선전에 당하게 되었을 때, 마흐노 등 일부 지도부만이 서유럽으로 탈출할 수 있었다. 1918년 6월, 사회혁명당 좌파는 공산당에 맞서 반란을 일으켰다. 이 반란은 공산당 정권을 전복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그들의 정책을 바꾸기 위한 반란이었다. 공산당 정권에 대한 불만이 이미 널리 퍼져있었고, 사회혁명당 좌파의 세력은 산업 전반과 지역 방위군 사이에 존재했기에, 이들이 원했다면 권력을 손에 쥐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었을 수도 있다.(파이프스, 1990) 하지만 이들은 권력을 원하지 않았고, 공산당이 권력을 가지도록 내버려두었다. 공산주의자들은 권력을 이용하는 데 거리낌이 없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사회혁명당 좌파의 지도부는 투옥되었다. 만약 사회혁명당 좌파가 권력을 쥐고, 즉각적으로 소비에트의 재선출을 요구하고, 좌파 정당들 간의 자유로운 논의를 촉발했다면, 러시아의 역사는 달라졌을 수도 있다. 1921년, 내전은 거의 끝나가고 있었다. 이 때, 페트로그라드를 방위하는 “크론슈타트” 요새의 수병들이 반란을 일으켰다. 이들은 소비에트 내에서의 다원적 민주주의의 재건과 농민정책의 완화를 요구했다. 아나키스트들과 크론슈타트 지역 공산주의자들은 반란에 참여했다. 볼셰비키 정부는 군대를 동원하여 수병들을 진압하고, 포로로 잡힌 수병들을 학살하였으며, 이들이 백군 반동세력의 첩자라는 거짓선전을 자행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공산당은 농민정책을 완화하여 이들이 자유롭게 거래할 수 있도록 하였다. 경제는 전반적으로 자본주의적 수단들을 허용하기 시작했다.(레닌이 이른 바 신경제정책, 혹은 “국가 자본주의”) 하지만 노동자들이 운영하는 협동조합을 허용하거나 장려하려는 노력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경제적 허용과 균형을 맞추기 위하여 공산당은 다른 모든 정당에 대한 불법화를 강화하였고, 당내 반대세력 역시 불법화하였다. 전체주의적 국가 자본주의를 떠받히기 위한 법적 토대가 만들어졌다. 그리고 2년 뒤, 레닌은 병으로 죽었고, 트로츠키는 “좌익반대파”라 규정되어 당에서 축출되었다. 스탈린과 (이제는 우파가 된)부하린은 농업 진흥 정책을 바탕으로 지배세력이 되었다. 그리고 1929년, 스탈린은 부하린을 정치적으로 박살냈고, 제약이 없는 독재자가 되었다. 그는 농업의 강제적 집산화 정책을 펼처 수천의 죽음을 야기했다. 그는 노동자에 대한 국가적 압제(사실상의 노예화)를 통하여 산업경제를 억지로 건설하면서 수천의 죽음을 야기했다. 30년대 후반 스탈린은 대숙청을 시작했고, 수백만을 투옥하고 살해하면서 관료를 새로운 지배계급으로 만들어내었다. 결국 스탈린은 트로츠키와 부하린을 포함하여 레닌이 만든 중앙위원회의 잔존 구성원들을 모두 죽였고, 고참 볼셰비키의 생존 구성원들을 거의 다 죽였으며, 수백만의 노동자 농민을 죽였다. 2천만 이상의 사람들이 죽었다는 추정이 있을 정도로 말이다. 그리고 스탈린은 이를 통하여 공산주의의 이상을 죽였다. 러시아 혁명의 중요한 부분들은 여러 혁명들을 거치면서 계속 반복되었다. 이중권력의 시기에는 인민위원회, 작업장 평의회, 농민 조합, 협동조합, 지역 총회와 대중의 민주적 기구들이 등장하여 옛 국가와 새로운 중앙집중화된 국가 모두의 대안으로 존재하면서 위기에 대한 비국가적 해결책이 될 수 있을 가능성을 보여준다. 그리고 자유주의자들의 우유부단함이 시작된다. 자유주의자들은 친자본주의적이기에, 근본적으로 반동적인 자본주의 체계에 묶여 보수 세력으로부터 단절하지 못한다. 이들은 설혹 부르주아 국가를 비판하더라도, 그 대리인으로 남는다. 그리고 온건 사회주의자들의 아무 말 대잔치가 시작된다.(개량주의자들도, 유사혁명가 중앙주의자들도 마찬가지다.) 이자들은 자유주의자들과 단절할 수도 없고, 단절하고 싶어하지도 않는다. 어쩌면 “아무 말 대잔치”라는 표현은 이들을 묘사하기에는 너무도 착한 단어일 수도 있다. 자유주의자들과 온건 사회주의자들은 언제나 우익에 항복했고, 그 지지자들을 배신해왔다. 이들은 국가를 철폐한다는 사상을 거부한다. 그리고 공산주의자들이나 민족주의자들이 등장하여 새로운 중앙집중적 국가를 건설해낸다. 물론, 이 건설 과정이 단순히 러시아 혁명의 복제판인 것은 아니다. 1917년 이후 공산주의자들은 소비에트 유형의 민주적 평의회들의 지지를 등에 업어본 적이 없다. 그 당시부터 공산주의자들이 권력을 잡은 것은 비프롤레타리아 군대를 등에 업고서였다.(동유럽 대부분에서, 이 군대는 러시아 군대였고, 베트남에서는 농민에 기반한 중국 인민군이었다.) 군대가 없을 때, 공산주의자들은 개량주의자들마냥 아무말 대잔치를 벌인다. 노동자 평의회 체제보다는 전통적인 자본주의 국가가 낫다거나 말이다. 이러한 것이야말로, 레닌주의가 무언가 새로운 것으로 변화하였음을 보여주는 증거라 하겠다. 마오주의자들은 “2단계 전략”의 새로운 버전을 개발했다. 먼저 부르주아 국가를 건설하고, 이들은 다가올 언젠가 사회주의를 건설한다는 최초의 형태에 그 부르주아 국가를 통제하는 것은 공산당이어야 한다는 새로운 개념을 더하였다.(그리고 이들은 이것을 “신민주주의”라 부른다.) 이 버전에서 “사회주의”가 의미하는 것은 공산당이 통제하는 부르주아 국가가 언젠가 산업을 국유화하는 것을 의미하게 된다. 그리고 이것은 국가 자본주의의 정확한 정의이고, 때로는 중국 공산당 스스로도 이것을 인정한다. 이 체계에서는 국가가 당의 독재를 유지하면서 산업의 탈국유화(사유화)를 결정하는 것도 가능하게 되었다. 여기 오늘의 중국이 있다. 아나키스트들은 조직도, 준비도 부족했다. 네스토르 마흐노를 포함한 다수의 러시아 아나키스트들은 아나키스트들이 공산주의자들이나 다른 정치세력과 진지하게 경쟁하려 한다면, 더욱 협력을 강화하고 자주적 규율을 갖출 필요가 있다는 결론에 도달했다. 1918년 10월 그레고리 막시모프는 “우리 아나키스트들과 조합주의자들은 너무도 조직되지 못했고, 너무 허약했다. 우리가 이것이 일어나도록 허용했다”는 결론을 내린다. 나는 이 정세분석에 아나키스트들에게는 이론과 전략, 그리고 전술을 유연하게 가져갈 의지가 필요했다는 것을 추가하고자 한다. 러시아 혁명에서 아나키스트들은 전술의 천재였던 레닌에게 완전히 휘둘렸다. 이 경험을 바탕으로 마흐노 등은 그들이 망명하여있던 파리에서 “강령”을 작성하여 아나키스트들이 민주적으로 단일한 행동과 강령을 가진 하나의 조직을 구성할 것을 촉구했다. 최초에 레닌과 트로츠키, 그리고 볼셰비키들은 혁명이 성공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혁명을 서유럽으로 확산하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리고 실제로 유럽에서 혁명은 발발했다. 독일에서는 노동자 평의회가 전제정을 전복했다. 프랑스 군의 절반은 반란을 일으켰다. 북이탈리아에서는 노동자 평의회들이 건설되었다. 헝가리와 보헤미아에는 “소비에트 공화국”이 선포되었다. 하지만 이 모든 시도들은 패배했다. 그리고 이 패배는 많은 부분 개량주의자들과 중앙주의적 사회주의자들의 배신에, 혁명적 좌파의 경험 부족에 기인했다. 하지만 제국주의 국가들은 너무 약하고 분열되어 있어 새로운 러시아 국가를 무너트리지는 못했다.(물론, 그 침략이나 반혁명군 지원을 통해 이를 이루려는 시도는 있었다.) 결국 소비에트 연방은 위태로워졌다. 공산주의자들은 여전히 집권하고 있었지만, 러시아는 황폐화되었다. 러시아는 세계대전을 치루었고, 혁명을 치룬 다음, 내전까지 겪어야 했다. 산업 인프라는 못쓰게 되었다. 노동계급의 수는 이전의 4분의 1까지 떨어졌다. 러시아 각지에서는 기근이 횡행했다. 인민들은 기세를 잃고 탈정치화되었다. 아나키스트들은 당시 러시아의 이러한 상황이 레닌주의자의 오류가 낳은 것이라고 주장한다. 농민들에 대한 탄압은 농민들이 생산을 줄이게 하였고, 정치에 대한 흥미를 잃게 만들었다. 노동자들의 창의성을 촉발하지 못하였기에 산업의 생산성은 줄어들었다. 다른 정당들(과 당 내 다른 세력들)을 금지한 것은 인민의 탈정치화를 가속시켰다. 하지만 혁명 이후 러시아가 겪어야 했던 후진성, 빈곤, 고립은 물리적 사실이었다. 그리고 이 조건들이 볼셰비즘의 권위주의적 경향을 촉발했다. 이러한 문제를 안고 있던 노동자 · 농민들이 그 권력을 잃은 것은, 반혁명군에게건 “내부의 적”에게건 그 권력을 넘겨준 것은, 새로운 계급사회의 발흥은 필연적인 것이었을 수 있다. 나는 오랫동안 레닌을 연구해왔고, 두 가지의 결론을 내렸다. 하나는 레닌에게는 전체주의 국가를 건설하려는 의도가 없었다는 것이다. 레닌은 이후의 스탈린과는 달랐고, 그가 노동자의 지배라 부른 것을 진정으로 원했다. 그리고 레닌은 진정으로 그 노동자의 지배를 국제 노동계급의 혁명을 통해 확장하고자 하였다. 레닌이 말년이 되었을 때, 그는 국가와 당 안에서 관료주의의 비대화에 불편함을 느꼈지만, 체계를 원천적으로 재구성하는 것 외에는 해결책을 떠올릴 수 없었다. 결국 레닌이 행한 최후의 정치행동은 트로츠키와 연대하여 스탈린을 제거하고자 시도하는 것이었다. 볼셰비키 당 내에서 권위주의적 정책에 반대하는 반대파들이 항상 존재하였다는 것 역시 중요하게 바라보아야 한다. 좌익 공산주의자, 노동자반대파, 민주집중주의자 등이 레닌의 정책에 대하여 그러했고, 좌익(혹은 트로츠키주의)(더하여 우익)(부하린주의)반대파가 스탈린의 정책에 대하여 그러했다. 내가 레닌에 대하여 내린 또 다른 결론은, 레닌과 볼셰비키당은 권위주의적이었고, 스탈린주의적 전체주의의 토양을 놓았다는 것이다.(앞서 말한 당내 반대파들은 패배했고, 트로츠키를 제외한 모든 반대파 지도부들은 스탈린에게 굴복했다.) 앞서 주장한 것처럼, 레닌은 볼셰비키당을 중앙집중에 기반하여 건설했다. 당을 중앙집중적으로 운영하고, 국가를 중앙집중적으로 운영하며, 경제를 중앙집중적으로 운영하는 것 말이다. 레닌에게 노동자 평의회가 운영하는 산업이라는 개념은 전문가들이 계획하는 하향식 경제로 나아가기 위한 발판에 불과했다. 레닌은 다른 마르크스주의자들처럼 지역적 직접 민주주의에 뿌리내린 사회주의라는 개념을 가져본 적이 없다. 레닌은 농민들에게 토지가 가야 한다는 것을 지지하였지만, 이를 단지 중앙집중적 집산화로 이행하는 수단으로만 보았다. 레닌은 소수민족의 자주성을 주장하였지만, 이를 단지 중앙집중적 다민족국가로 향하는 단계라 보았다. 나아가, 비록 집권 전의 레닌이 하나의 당만이 존재하는 정당-국가를 옹호해본 적이 없다고는 하지만 마찬가지로 레닌은 다당제에 기반한 노동자 민주주의를 옹호해본 적도 없다. 레닌이 가지고 있던 혁명국가의 모델은 “프롤레타리아트와 농민의 혁명적 독재”였다. 프랑스 혁명 이후 자코뱅이 건설하였던, 급진적 정당이 운영하는 자본주의 국가와 비견할 만한 것이라 하겠다. 레닌은 마르크스주의가 절대적 진실이라 믿었고, 그가 이 진실을 알고 있다고 믿었다. 이러한 계시를 받은 레닌은 자신이 걸어가는 길이 올바르다는 것을, 그 길에 반대하는 자들을 쳐내는 것이 올바르다는 것을 의심하지 않았다. 본인이 옳았기에, 레닌은 다른 정당들로부터 무언가를 배우거나, 그들의 주장을 자기 국가에 적용할 필요를 느끼지 못했다. 무엇보다, 레닌의 정치에는 무자비함이 가득했다. 레닌은 이전 혁명들의 “온건함”을 반복하지 않으려 했고, 그에 따라 모든 정치적 반대파들을 무제한적으로 쳐낼 준비가 되어 있었다. 레닌은 체카를 만들었고, 그들에게 조사 · 판단 · 징벌의 권한을 부여했다. 레닌은 다른 정당들이나 공산당 내 반대파를 금지했고, 이러한 단일 정당 · 단일 세력 국가를 건설하기 위하여 체카를 사용했다. 레닌은 농민들에 대한 전쟁을 선포했다. 물론 이 무엇도 수천만을 학살한 스탈린과 비교할 수는 없다. 하지만 최소한 스탈린주의 국가의 밑그림은 그렸다고 할 수 있겠다. 러시아 혁명기에 진지하고 잘 조직된 아나키즘적 사회주의 조직이 있었다고 상상해보자. 1918년 말, 볼셰비키 당은 불공정한 평화 조약을 두고 거의 분열할 뻔 했다.(그리고 좌익 공산주의자들은 레닌의 중앙주의 세력에 비하여 공장위원회에 더 우호적이기도 했다.) 사회혁명당 좌파는 거의 집권 직전까지 갔었다. 강력한 아나키스트 조직은 소비에트 내에서 좌익 공산주의자들이나 사회혁명당 좌파와 동맹을 구성할 수 있었을 것이고, 세계사를 바꿀 수 있었을 것이다. 혹은, 내전이 끝난 후인 1921년, 농촌지역 상당수는 반란을 일으켰고, 페트로그라드에서는 총파업이 일어났으며, 크론슈타트에서는 아나키스트의 영향을 받은 군사반란이 일어났다. 만약 러시아에 아나키스트 전국조직이 있었다면, 세 번째 혁명을 성사시킬 수도 있었을 것이다. 물론 이는 가능성에 불과하다. 하지만 아나키스트들과 대중주의자들이 레닌주의자들보다 더 못하였을 것이라 보지는 않는다. *** 10장. 스페인 혁명 마오주의자들은 중국 혁명을 학습한다. 피델리스타들은 쿠바 혁명을 학습한다. 트로츠키주의자들은 러시아 혁명을 학습한다. 그렇다면 아나키스트들은 스페인 혁명을 학습하여야만 할 것이다. 스페인 혁명은 1차 세계대전 이후 벌어진 최후의 노동계급 봉기였고, 2차 세계대전의 전초전이었다. 그리고 스페인 혁명은 오늘날의 투쟁과 닮은 점이 많기도 하다. 아나키스트들은 스페인 혁명에서 큰 역할을 수행했다. 노동계급의 절반, 그리고 스페인의 산업 중심부 카탈루냐의 거의 모든 노동계급은 아나키스트들의 노동조합(CNT)로 조직되었다. 농민들의 다수는 아나키스트에게 영향을 받았다. 혁명 과정에서 아나키스트들은 본인들의 장점을 보여주었다. 아나키스트들은 의용군을 이끌었고, 집단농장을 조직하였으며, 노동자에 의한 산업의 직접관리를 건설했다. 스페인의 아나키스트 문학은 이러한 실질적 성취들에 고취되었다. 하지만 스페인의 아나키스트들은 혁명 과정에서 심각한 취약성을 보여주기도 했다. 아나키스트 지도부들은 원칙과 강령을 포기할 필요가 있다고 여겼다. 이들은 부르주아지들과 스탈린주의자들과 영합하여 자본주의 정부에 장관으로 취임했고, 노동자와 농민의 혁명이 완결되는 것을 막아섰다. 이들은 국가를 분쇄하기는커녕, 국가에 합류했다. 그리고 이들은 프랑코의 파시스트 군대에 패배했다. 이 아나키스트들을 보다보면, “또 다른 혁명에서 아나키스트들이 같은 실수를 반복하지 않으리라는 법이 어디 있는가”라는 질문이 떠오른다. 그리고 이 질문에 대해 답하기 위해 우리는 이들이 왜 그러한 오류를 범하였는지, 그리고 다가올 혁명에서 오류의 반복을 피하기 위해 무엇을 해야하는지를 점검할 필요가 있다. 스페인 혁명은 “스페인 내전”이라 불리기도 한다. 하지만 이를 내전(국가 내에서의 갈등)이라 부르는 것은, 그것이 품고 있는 계급간의 갈등이라는 혁명적 성격을 은폐한다.(이는 미국 혁명을 “독립전쟁”이라고 부르는 것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스페인 혁명의 시작을 1931년으로 바라보는 견해가 있다. 알폰소 13세(현 스페인 국왕의 펠리페 6세의 증조부)가 퇴위하고, 스페인 2공화국이 성립되었다. 그 이후 5년간 봉기와 반란, 대규모 파업이 이어졌고, 공화국 정부는 이를 극심하게 탄압했다. 1936년 1월에는 3만명 이상의 노동자와 좌파들이 수감된 상태였다. 2월에 열린 선거에서는 보수정당이 권력을 내려놓고, 자본주의-자유주의(“공화파”) 정당과 사회당의 연정이었던 인민전선이 다수당이 되었다. 조직된 아나키스트들은 인민전선에의 참여를 거부했고, 공식적으로 선거를 거부했다. 하지만 이들은 자신들의 입장을 선전하지 못했고, 아나키스트 노동조합에 가입한 노동자 다수조차 인민전선에 투표했다. 인민전선에 대한 환상에 빠지지 않은 노동자 · 농민들이라 할지라도, 최소한 인민전선이 계급전쟁이 낳은 수만의 수감자들을 사면하겠다는 공약은 지키리라 희망했다.(이러한 비판적 지지가 최선의 정치적 입장이었을 수는 있다. 하지만 아나키스트들은 스스로에게 솔직할 필요는 있었다.) 선거와 취임 사이에 놓은 4일간, 노동자들은 스스로 감옥을 부수고 사면을 집행했다. 하지만 자유주의적/사회주의적 민주주의자들의 연정은 흔해빠진 우유부단한 개량주의 체제였고, 토지를 분배하지도, 노동조건을 개선하지도, (정부차원의 지원을 받고, 정치적으로 매우 반동적이었던)가톨릭 교회의 힘을 제약하지도, 장교단으로부터 파시스트들을 청산해내지도 못했다. 이들이 할 수 있던 것은 노동자들의 파업과 시위에 경찰이나 군대를 투입하는 것 뿐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본가들은 인민전선이 너무 허약하다고 보았다. 노동계급을 분쇄하기 위해서는 더욱 강한 힘이 필요했다. 1936년 7월, 군대가 반란을 일으켰다. 이 반란에는 전통적 근왕주의자들의 세력과 새로운 세력인 파시스트(팔랑헤)들이 참여했다. 거의 모든 스페인 부르주아지는 반란을 지지했다. 모로코 식민지에서 대군을 데려온 프란시스코 프랑코와 그 동맹자들은 빠르게 쿠데타의 승리를 쟁취하고, 독재 체제를 구축할 것을 기대했다. 당장 1933년 독일에서 히틀러가 정권을 잡을 때에는, 독일의 노동자 정당(사회민주당과 공산당)은 저항하지 않았고, 자유주의적 민주주의자들도 이를 내버려 두었기 때문이었다.(이에 대해서는 다음 장에서 상술하도록 하겠다.) 인민전선 정부는 어쩔 줄 몰라했다. 이들은 군사 반란 자체의 존재를 부인했고, 프랑코와 협상을 시도했다. 군대와 경찰은 파시스트들의 손에 떨어졌고, 정부는 붕뜬 상태가 되었다. 자본가들과 대지주들은 사업체와 토지를 버리고 프랑코를 지지하러 나섰다. 자본주의 정당의 정치인들은 단지 (트로츠키가 일컫는 바)“부르주아지의 그림자”로 전락했다. 하지만, 스페인의 노동자들은 독일과는 다르게 저항했다. 이들은 거의 무장하지 못한 채로 군사반란을 저지했다. 대중들은 병영을 포위하고 군인들이 반란에 가담하는 것을 막았다. 정부는 노동자들이 무장하는 것에 반대했다.(심지어 강제로 무장을 해제하려 시도했다.) 인민들은 본인들이 가지고 있던 무기를 모으고, 총기상점에서 무기를 징발하고, 경찰과 군인들로부터 무기를 탈취했다. 광부들은 다이너마이트를 가져왔다. 병영 주변의 거주민들은 스스로 자기 집을 불태웠다. 파시스트들이 거리에 배치해둔 기관총들은 탈취되어 그들을 막는 데에 사용되었다. 노동조합은 민병대를 조직하여 전투를 준비했다. 파시스트들이 쉽고 빠르게 승리하는 것을 막은 것은 정부의 신묘한 계책이 아니라 노동자와 농민들의 자발적 저항이었다. 결국 파시스트들은 3년에 걸친 장기간의 내전을 치루어야 했다. 파시스트-군사 정권과 공화국(“충성파”) 정부 사이의 이중 권력과 더불어 공화주의 세력 내에도 이중 권력이 존재했다. 공식적인 국가기구는 일시적으로 무력해졌고, 파시스트들과 싸우면서 경제를 운영한 것은 대중의 조직이었다. 혁명의 핵심 의제는 대중조직과 공화국 국가 사이의 관계였다. 공화국 측에서 주요했던 자본주의 정권은 두 개가 있었다. 마드리드에 위치한 스페인 공화국 정부와 바르셀로나에 도읍한 카탈루냐 지역정부가 그것이었다. 카탈루냐 지역은 스페인에서 가장 산업화된 지역이었고, 지역의 노동계급과 농민들은 아나키즘에 깊게 경도되어 있었다. 카탈루냐인들은 바스크인들과 마찬가지로 문화적 자치와 (아마도)민족해방을 향한 투쟁의 전통을 가지고 있었다. 공화국은 카탈루냐 지역에 일정부분의 자치를 허용한 지역 정부, 제네랄리다트를 선사해주었다. 제네랄리다트와 지역인민전선 체제 역시 일시적으로 흔들렸고, 경찰-군대를 거의 다 확보하고 있던 파시스트 군사 반란세력과 노동자 · 농민 세력 사이에서 갈팡질팡하고 있었다. 공화국은 군사력을 잃었고, 권위주의 노선을 따르는 군대를 재건할 수 있을 때까지는 노동자 민병대에 의존할 수밖에 없었다. 노동자 계급 정당과 노동조합들은 민병대를 구성하여 파시스트들과의 전선을 형성하고 유지했다. 민병대들은 어느 정도의 내적 민주성을 가지고 있었고, 장교와 사병 사이에 임금이나 근무 조건의 격차를 두지 않았으며, 장교를 선출했고, 정치 토론을 깊게 가져갔다. 이 즉발적 혁명군이 비효율적이고 헐렁하게 작동한 것은 분명히 맞다. 하지만 (조지 오웰이 주장하는 것처럼) 이것은 민병대가 경험이 부족하고 질보다는 평등주의를 우선하는 원칙으로 구성되었기 때문이었다. 시간이 지날수록 민병대는 점점 더 효율적이고 자주적 규율을 지키기 시작했다. 그리고 만약 정부와 노동조합 지도부가 그 뒤통수를 후려치지 않았다면, 더 효율적이고 규율잡힌 군사력이 되었을 것이다. 공화국이 통제하고 있던 도시에서 경찰의 역할을 수행한 것이 거리를 순찰하던 무장한 노동자들의 위원회였다는 것도 특기할만 하다. 스페인 자본가들의 경제적 파업과 사보타주에 대하여, 스페인의 노동자들은 산업을 탈취하고 스스로 운영하기 시작했다. 스페인 전역의 공장과 작업장 대다수에서는 직원 위원회가 구성되었다. 노동자들이 스스로 임금을 결정하였다. 노동조합들을 통하여 협업이 조직되었다. 전화, 철도, 석유, 전기, 미용, 섬유 산업의 재조직은 단지 작은 예시일 뿐이다. 노동자들은 산업을 집단적이고 효과적으로 운영했다. 노동자들은 군수산업을 시작하였다. 혁명이 패배한 후, 노동자들로부터 자산을 다시 몰수한 자본가들은 그들의 자본이 잘 관리되었고, 심지어 더 개선되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내가 아는 한, 스페인 혁명은 농민들이 자발적으로 토지의 집산화를 선택한 유일한 혁명이었다. 농민들은 단순히 토지를 몰수하고 그것을 각자에게 분배하는 것에서 그치지 않고, 그 토지를 협동조합을 통해 모아내어 민주적이고 자주적으로 운영되는 집단농장으로 만들어내었다. 소농들은 각자의 토지를 합병하여 운영했다. 화폐의 사용을 제한하거나 철폐하는 실험이 이루어졌다. 이는 공화국 지역의 절반 이상의 토지에 대하여 이루어졌고, 1,700개 이상의 지역 집단농장이 건설되었다. 하지만 러시아 혁명에서와는 다르게, 이 민병대와 노동자 자경단, 집산화된 공장과 집단농장은 소비에트와 같은 총체적 구조물로 모아지지 못했다. 스페인식 이중권력의 특이점은 취약한 부르주아 정부에 대하여, 흩어진 대중 조직의 집단이 역으로 균형을 맞추고 있다는 데에 있었다. 스페인 혁명은 두 가지(혹은 2.5가지) 방향으로 나아갈 수 있었다. 개량주의냐, 꾸준한 혁명이냐(아니면 중앙집중주의냐)의 방향이 그것이었다. 해외의 자유주의자들은 개량주의적 주장이 상식적이라고 여겼다. 이 관점에 따르면 중요한 것은 “반파시스트” 세력의 단결이었다. 그렇기에 스페인은 프랑코에 대한 투쟁을 승리할 때까지 공화국 정부를 지지하고 혁명을 보류해야 했다. 무엇보다, 이렇게 해야만 미국, 영국, 프랑스 정부로부터의 지지를 확보하고, 그들과의 무역을 통해 군수물자를 구매할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었다. 이들은 공식적인 스페인 정부와 거래하고자 하였지, 혁명적 총체 같은 것과 거래하지는 않을 것이었다. 이것이 파시스트들이 반란을 일으키기 한참 전부터 스페인 좌파들이 구성해낸 “인민전선” 정책이었다. 이 정책은 내전이라는 극단적 상황에 대한 임시방편이 아니라, 장기적인 전략이었다. 이는 사민주의자, 스탈린주의자, 아나키스트, 그 외의 모든 노동계급 조직들이 자본주의에 맞서 동맹하자는 “통일전선” 전략과는 다른 것이었다. 인민전선은 노동자 조직이 자본주의 정당의 자유주의 세력과 단결할 것을 제안했다 .통일전선과 인민전선 모두가 동맹과 단결을 주장한 것은 맞지만, 통일전선이 계급간의 분열을 강조한 것과는 다르게 인민전선은 이것을 부정했다. “인민”이라는 단어는 노동자와 모든 피착취대중(농민, 여성, 소수민족 등)을 일컫는 말로 사용될 수 있다. 하지만 자유주의자들과 개량주의자들은 이 단어를 애매하게 사용하여 피착취대중과 착취자들을 함께 쿢어 모든 인간을 이르는 말로 전용하였다. UGT를 통하여 조직노동자의 절반을 이끌고 있던 사회당은 인민전선을 지지했다. 공화국의 자유주의자들 역시 이 관점을 지지했다. 물론, 이들은 전쟁 “이후에” 자신들이 혁명을 지지할 것이라 말하지는 않았다. 스페인 공산당 역시 이 관점을 분명하게 지지했다. 세계 전역에서, 그리고 당연히도 스페인에서 공산당은 스탈린주의적 관료주의의 영도 아래, 운동의 극좌에서 극우로 이행했다. 이들은 사민주의자들이나 다른 좌익 경향성들이 “사회적 파시스트”이며, 이들이 독일에서 나치에 대항하여 사민주의자들과 통일전선 구성을 거부한 것은 파시스트만큼이나 나쁘다고 비난했다. 이렇게 공산당은 인민전선의 가장 강력한 지지자가 되었다(러시아 국가가 독일에 맞서 프랑스 · 영국 제국주의와 동맹하려 한 것과 일맥상통한다.). 내전 초기, 공산당의 세력은 매우 작았다. 하지만 러시아가 스페인 정부에 무기를 팔고자 하던 유일한 외국이 되면서 공산당의 영향력은 증대했다. 러시아는 무기 가격 중 일부를 인민전선 정부에 공산당을 포함시키고, 공산당원들을 요직에 앉히는 것으로 받고자 하였다. 그러는 동안 공산당은 보수적 중산계급 내에서 세력을 키워가고 있었다. 무기 판매의 대가로 스페인 정부에는 러시아 “고문단”이 배치되었고, 공산당원들이 경찰과 군대의 요직에 임명되었다. 공산당은 비밀경찰이나 사설감옥 등의 자체적 기구를 건설하기 시작했고, 심지어 스페인 공화국 경찰마저 이들을 통제할 수 없었다. 공산당은 좌파 세력 중 그들에게 정치적으로 반대하던 이들을 납치하고, 고문하고, 살해했다. 이를테면 POUM의 안드레스 닌이 있겠다. 공산당은 스페인에서 트로츠키주의자들과 아나키스트들의 대우는 러시아에서와 같을 것이라 선언했다. 개량주의적 방법론이 해외 자유주의자들에게 아무리 합리적으로 들렸을지라도, 이 방법론에는 주요한 취약성 몇 개가 내포되어 있었다. 인민전선 전략의 문제 중 하나는, 인민전선을 통해 혁명전쟁을 배제한 이상, 공화국은 정규군을 상대로 승리할 방법을 결코 제시할 수 없었다는 것이다. 파시스트들은 경험이 많은 전업 장교들과 훈련이 잘 된 사병들과, 압도적인 공군과, 제식병기와, 독일과 이탈리아로부터의 안정적인 보급을 가지고 있었다. 공화주의자들은 정규군을 아예 새로 만들어야 했고, 무기도 충분하지 않았다. 두 군대가 정면으로 충돌하면, 파시스트들이 승리할 것이었다. 그리고 그렇게 되었다. 혁명전쟁 전략 아래에서, 전쟁의 승리 여부는 최소한 단지 총탄의 개수에서 벗어나, 사기와 정치의 문제로 확장할 수 있었을 것이다. 혁명군과 혁명을 지지하는 노동대중의 사기를 증진시키고, 파시스트 군대의 사기를 저하시키며, 적진 내에서의 항명을 유도해내어야 했다. 그리고 이것은, 이를테면, 농민들에게 토지를 보장해주는 것을 통해 이루어질 수 있었다. 당시 스페인은 농업국가였다. 파시스트 군대의 사병들은 대부분 농민이었다. 이들에게 토지를 약속하는 것은 파시스트 군대의 내분을 불러왔을 수 있었다. 하지만 공화국 정부는 정확히 그 반대를 행했다. 이들은 집단농장을 법과 군대로 공격하고, 집단농장을 부수어 지주와 부자들의 권리를 보장했다. 개량주의 전략의 또 다른 취약점은, 영국 · 프랑스 · 미국 정부는 결코 공화주의자들을 원조하지 않을 것이라는 데에 있었다.(프랑스 정부가 사회주의자 레옹 블룸이 이끄는 인민전선 체제였음에도 말이다.) 이들은 “비개입합의”에 동의했고, 스페인 내전의 양측 어디에도, 심지어 스페인의 “합법” 정부에도 무기를 판매하지 않기로 합의했다. 이들은 충성파의 승리가 노동자 혁명을 불러올 것이라 우려했다. 이들은 영국과 프랑스 사업가들이 스페인과 역사적으로 관계를 가지고 있었기에, 파시스트들의 승리가 자국에 영향을 줄 것이라 우려했다. 그리고 그들은 옳았다. 프랑코 정권은 2차 세계대전 중 중립을 유지했다. 나치 독일과 파쇼 이탈리아 역시 비개입을 선언했다. 하지만 이들은 프랑코군에 군사적 원조를 쏟아부었다. 스페인의 사회주의자들과 공산주의자들은 프랑스 노동자들이 (사회당과 공산당이 함께 하고 있던)자국 정부에 압력을 넣어줄 것을 호소했다. 하지만 이들은 프랑스 인민전선이 자본주의에 굴복한 것에 대하여 공개적으로 비판하지 못했다. 스페인이 혁명적 방법론을 택하였다면, 이는 아랍과 스페인령 모로코에서의 민족자결주의를 촉발하였을 것이다. 파시스트 군대의 기지는 대부분 북아프리카의 스페인 식민지에 위치해있었다. 그들 군대 사병들의 대다수는 아랍인이었다. 아랍민족에게 자주(자치와 독립에 대한 선택권)를 제안하고, 모로코에 민족주의 선동가들을 파견하는 것이야말로 파시스트 군대에 대한 가장 강력한 타격이 되었을 것이다. 모로코 민족주의자들은 실제로 이것을 제안했고, 이에 호응하여 일부 아나키스트들이 이러한 전술을 제안했다. 하지만 이것은 프랑스와 영국의 제국주의자들을 위협하는 것이었다. 프랑스와 영국의 자본가들은 아랍 식민지에 민족자주의 예시가 등장하는 것을 두고 볼 생각이 없었다. 스페인 인민전선 정부는 서구 제국주의자들에게 아양을 떨어야 했고, 그들이 가지고 있는 무기를 내려놓았다. 그렇다고 해서 개량주의 전략이 공화국 지역에서의 내전 위협을 회피하는 데에 도움이 된 것도 아니다. 자본주의 국가의 재건과 그 권력의 재확보가 필연적으로 다가왔다. 노동자와 농민의 조직들이 국가에 도전하지 않을 수는 있겠지만, 국가는 그들에게 도전해야 했다. 이중권력 상황은 어느 방향으로건 해소되어야 하는 것이다. 그렇게 조금씩 체제는 인민위원회의 권력을 앗아가기 시작했다. 정규군이 건설되고, 경찰이 재건되고, 이들이 무장하기 시작했다. 민병대에는 무기와 탄약이 주어지지 않았고, 이들은 조금씩 정규군에 흡수되기 시작했다. 산업의 자주경영과 사회화는 무시되었고, 산업은 다시 자본가들의 손에 쥐어지거나 국영화되었다. 집단농장은 물리력을 통하여 분쇄되었다. 좌파 언론에 대한 정부의 감시가 강화되었고, 수감과 처형을 포함한 정치적 탄압이 확산하였다. 좌파들이 파시스트들의 첩자라고 비난하는 공산당의 선전이 몰아쳤다. 파시스트 반란이 개시된지 11개월이 지난 1937년 5월, 사태는 정점에 도달했다. 정부는 아나키스트 노동자들이 관리하고 있던 바르셀로나 전화교환소를 빼앗으려 하였다. 노동자들은 이에 맞서 총파업과 봉기를 선포했고, 바리케이드를 건설하였으며, 바르셀로나의 통제력을 확보했다. 이대로 간다면 노동자와 농민들이 카탈루냐의 권력을 탈취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아나키스트와 좌파들의 지도부는 노동자들에게 정부의 모호한 약속을 믿고 업무로 돌아가라고 설득했다. 정부는 좌파에 대한 탄압을 시작했고, POUM을 법외정당화하였고, 그 지도부를 수감했다. 노동자들은 패배했다. 개량주의적 방법론은 공산당과 사회당 우익이라는 명확한 지지세력을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혁명적 방법론에 대한 주요 지지세력은 없었다. 몇몇 세력들은 중앙집중적 방법론을 발전시켰다. 이들은 공식적으로는 혁명을 지지했지만, 실천적으로는 개량주의자들에 도전하지 않았다. 사회당 좌파와 POUM(통합마르크스주의노동자당)의 입장이 바로 이러했다. POUM은 트로츠키주의자부터 부하린주의자까지 공산당에서 숙청된 소수파 그룹들의 연합에서 출발했다. POUM은 카탈루냐에서 상당히 큰 규모를 가지고 있었다. 물론 아나키스트들보다는 그 세력이 작았지만, 공산당이나 사회당보다는 더 큰 세력을 가지고 있었다. POUM은 자체적인 민병대를 운용했다.(조지 오웰이 복무한 민병대가 이것이었다.) POUM은 정당들 중 가장 혁명적인 입장을 가지고 있었지만, 마찬가지로 인민전선을 지지했고, 카탈루냐의 자본주의 정부에 참여했다. 안타깝게도 스페인 아나키스트들 역시 중앙집중화를 전략으로 채택하고 있었다. 스페인 아나키스트들은 러시아 등지의 경우와는 다르게 전국적으로 조직되어 있었다. 이러한 조직은 1차 세계대전 후 아나키즘적 조합주의에 입각한 노동조합을 장악하려는 개량주의적 조합주의자들과 공산주의자들의 위협을 막아내기 위해 건설되었다. 이들은 소규모 자발적 그룹들의 연방이었던 FAI(이베리아 아나키스트 연방)을 건설했다. FAI의 구성원들은 CNT의 조합원이어야 했다. FAI는 정기 총회를 통해 결정을 내렸다. FAI주의자들은 “민주집중주의자”가 아니었고, 자신이 속해있는 조직에, 그리고 각자들의 조직에 충실했다. 그렇기에 이들은 공통의 입장을 가지고 조직의 결정을 스스로 준수하는 경우가 많았다. 스페인 아나키스트들은 스스로가 “전위”라고 여겼다. 여기에서 “전위”는 이들이 스스로를 엘리트라 여겼다는 것이 아니라, 이들이 스스로가 “선진적” 사상을 가진 “선봉”이라 여겼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들은 지도자가 되고자 한 것이 아니라 “영향력 있는 투사”가 되고자 했다. 그리고 아마도 그러했기에, 이들이 실제 지도부를 민주적으로 통제하지 못하였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들이 만들어내었던 세계에서 가장 민주적인 구조가 불명확한 계획을 메울 수는 없었다. 수년간의 논의는 잡단농장과 노동자들의 자기 경영을 위한 토대를 쌓았다. 그러나 1936년 그들이 처한 상황을 헤쳐나가기 위한 전략적 고려는 거의 없었다. 1936년 7월, 카탈루냐 노동자들은 지역의 파시스트 반란을 진압했다. FAI가 이끌고 있던 CNT는 바르셀로나와 카탈루냐 지역의 통제권을 확보했다. 카탈루냐 제네랄리타트의 수장이었던 루이스 콤파니스는 CNT-FAI의 지도부를 사무실로 초대했다. 오랜 시간 아나키스트 투사로 활동했고, 그 모임에 참여했던 가르시아 올리베르에 따르면, 콤파니스는 CNT-FAI가 “도시의 주인”임을 인정했다. 그 자리에서 그는 CNT-FAI가 원한다면 사임하겠지만, 그들이 함께 일할 수도 있다고 제안했다. 교활한 부르주아 정치인에게 이러한 제안은 단지 국가와 자본주의를 재건하기 위한 첫 단계에 불과했다. 이는 콤파니스의 이후 행보를 보면 더욱 확실해진다. 하지만 아나키스트 노동자들의 지도부는 너무 순진했고, 그 제안을 받아들여 제네랄리타트의 장관으로 입각하고, 중앙정부에 합류했다.(가르시아 올리베르는 법무부 장관이 되었다. ‘아나키스트’ 주제에 말이다.) 이후 가르시아 올리베르는 이 결정이 “아나키스트 독재를 의미하는 자유의지주의적 코뮌주의와 협력을 의미하는 민주주의 사이”에서 하나를 선택한 것이라 주장한다.(『Lessons of The Spanish Revolution』, 버논 리차즈, 1972) 맞다. 만약 CNT-FAI가 권력을 잡았다면, 그 체제는 일당 독재, 혹은 “혁명적 전체주의”가 될 수 있었을 것이다. 이 주장에는 일말의 진실이 담겨있다. CNT에 가입하였던 노동자들은 FAI주의자들이나 노동조합 지도부를 따랐을 수는 있지만, 그렇다고 그들이 모두 아나키스트였던 것은 아니다. 노동계급과 농민 사이에 아나키즘이 아닌 다른 정치적 경향성이 존재하기도 했다. 중간계급에 대해서는 더 말할 필요도 없다. 카탈루냐 바깥에서, CNT는 사회당이 이끄는 UGT에 비하여 규모적으로 더 작았다. 그렇다면 아나키스트들이 그들의 정치를 스페인의 노동자 · 농민 · 빈민들에게 강요할 권리는 없는 것이 아닌가? 그렇기에 아나키스트 지도부는 개량주의자들이나 자유주의자들과 함께할 수밖에 없다고 바라보았다. 이들은 “협업을 의미하는 민주주의”를 선택했다. 이들은 이론적으로는 옳았을 수 있다. 그리고 현실에서는, 이 주장들은 그저 상황적 압력에 굴복한 것을 합리화하는 주장일 뿐이다. 이들의 결정은 아나키스트들이 국가와 자본주의의 권위주의적이고 비민주적인 본성에 대해 설파하던 것을 스스로 명확하게 부정하는 것이었다. 대부분의 아나키스트들은 이 방침에 대해 불만을 가졌지만, 대안을 제시하지 못했다. 이들은 CNT와 FAI에 충실했기에, 내부투쟁을 원하지 않았다. 그렇기에 아나키스트들은 그저 본업으로 돌아가 민병대에서 파시스트들과 싸우거나, 공장위원회를 조직하거나, 집단농장에서 농사짓거나 했을 뿐이었다.(위대한 혁명적 아나키스트 부에나벤투라 두루티 역시 마찬가지의 행동을 취했다.) 몇몇은 아나키스트들이 정부에 참여하는 것에 반대하였지만, 혁명을 향한 다른 방침을 제시하기에는 충분하지 않았다. 아나키스트들이 정치적 · 도덕적으로 결벽하게 남는 것으로는 충분하지 않았다. 군사행동과 경제는 협력적으로 운영될 수밖에 없는 것이었다. 만약 현존 국가와 협력하지 않을 것이라면, 누구와 협력해야 하는가? 하지만 당시를 고려하자면, 민주적이고 동시에 혁명적인 분명한 대안이 있었다. 공장위원회, 집단농장, 자경단, 민병대, 인민위원회들이 연방적으로 결합하는 것이 그것이었다. 카탈루냐 CNT-FAI는 이러한 조직들에게 즉시 총회를 개최하고, 대의원단을 선출하게끔 호소하여 대의원대회를 개최하였어야 했다. 아나키스트건, 사민주의자건, 스탈린주의자건, 부르주아 정당의 지지자건, 그 어떤 정치적 경향성을 가지고 있건 간에, 그들이 노동대중 속에서 확보한 지분만큼 대변될 수 있도록 하였어야 했다. 당시였다면 아마도 가장 혁명적인 조직이 대중의 지지를 얻었을 것이다. 아나키스트들은 바르셀로나에서, 카탈루냐 전역에서 이러한 인민평의회의 연방을 조직할 수 있었다. 그리고 스페인 전역에서 카탈루냐의 혁명적 예시를 따라 유사한 평의회를 개최하라 요청할 수 있었다. 이들은 사람들에게 노동자 조직의 통일전선이 민주적 형태로 구성될 수 있음을 보여줄 수 있었다. 이들은 “공화국”이라는 무기력하고 버려진 자본주의 국가에 대한 대안을 제시할 수도 있었다. 스페인에서, 트로츠키와 그의 추종자들은 노동자 평의회의 상을 주장한 적이 있었다. 트르츠키주의자들이 이 평의회를 그들의 당이 집권하기 위한 수단적이고 도구적인 것으로 바라보았음은 분명하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이들이 스페인에서 평의회의 개념을 제시했다는 것이다. 트로츠키는 러시아 혁명에서 소비에트가 투쟁의 결집을 위한 평의회로 작동하기 시작하고, 마침내 권력을 확보하는 것을 바라본 경험에 기반하여 이 개념을 도출했다. 혁명기가 끝나갈 무렵, 스페인 아나키스트의 조직이었던 “두루티의 친구들”은 유사한 관점을 도출해내었다. 이 조직은 두루티 민병대의 전 구성원 중 국가 상비군화 정책에 반대하던 이들이 아나키스트 언론인이었던 자이메 발리우스와 함께 건설하였다. 이들은 CNT-FAI 지도부의 협조주의 정책을 비난하고, 혁명을 부르짖었다. 1938년, 이들은 『신선한 혁명을 향해』라는 성명서를 통해 “다소 다른 형태의 아나키즘”을 제안했다. 이들은 “혁명 훈타나 방어위원회의 건설”을 제안했다. 이러한 기구는 민병대와 노동자 자경단의 협력을 조직하고, 전선 배후의 파시스트들을 축출하고, 국제 관계를 조정할 것이었다. 그 과업을 이룰 수 있을 때까지 위의 기구는 현존 체제 내에서 실천하면서 반파시스트 군사투쟁을 돕거나 군수품 생산에 복무할 수 있을 것이었다. 안타깝게도, 두루티의 친구들에 관하여 가장 잘 저술한 책(『The Friends of Durruti group: 1937—1939』, 아구스틴 기야몬)은 이 입장이 권위주의적 사회주의와 유사한 것이자, 소수 전위정당의 독재를 옹호하는 것이며, 그러한 정당들과의 연정을 옹호하는 것이라고 잘못 서술하고 있다. 기야몬은 “혁명 훈타를 ‘다른 이들’이 부르는 말로 표현하자면, 전위라거나 혁명정당”이라고 기술하고 있다. 하지만 두루티의 친구들은 당-국가를 주장하지 않았다. 이들이 말하는 바 방어위원회는 민주적으로 운영되어야 했다. “혁명 훈타의 구성원들은 조합 조직 내의 민주적 투표로 선출되어야 한다.” 이 과정에서 조합들은 자유 자치구의 연방 속에서 협업하게 될 것이었다. 이들의 관점은 작업장 총회나 인민총회보다 조합의 우위를 이야기한다는 점에서, 여전히 전통적인 조합주의적 관점에 얽매여 있었던 것은 분명하다. 하지만 이 관점은 실질적으로 평의회적 방법론에 매우 가까운 방법론이었다. 만약 두루티의 친구들이 더 일찍 조직되었다면, 이들은 아마도 POUM 좌파나 소수의 트로츠키주의자들, 그리고 다른 아나키스트들과 동맹하여 혁명적이고 민주적인 훈타를 건설하기 위한 투쟁을 진행했을 것이다. 하지만 1938년은 너무 늦었다. 혁명은 이미 정치적으로 패배했고, 파시스트들이 공화국군을 무너트리는 것도 시간문제였다. 트로츠키주의자들은 스페인에서의 경험을 바탕으로 아나키즘에 대한 비판을 확립했다. 아나키스트들은 평의회 체계를 조직하는 데에 실패했고, 오히려 자본주의 정부에 참여했다. 트로츠키주의자들은 이것이 아나키스트 이론의 결함에 의거한 것이라고 말한다. 아나키스트들은 모든 국가에, 그러니까 자본주의 국가 뿐 아니라 “노동자 국가”에도 반대하고, 이들이 본질적으로 같으며 모두 나쁘다고 바라보았다. 하지만 스페인에서의 경험은 투쟁을 조직하고, 파시스트들을 타격하고, 서로 다른 정치적 입장들을 대표하고, 외국과 관계를 정립하기 위한 사회적 기구가 필요하다는 분명한 사실을 확인시켜주고 있었다. 트로츠키주의자들은 이로부터 국가의 필요성을 도출한다. 하지만 아나키스트들은 노동자 국가의 필요성을 인식하지 못했기에, 노동자 국가와 차이가 없는 자본주의 국가에 참여한 것이었다. 나는 이 비판이 어느 정도 논리적이라고 생각한다. 아나키스트들은 권력의 필요성을 반대하거나, 최소한 과소평가해왔다. 억압된 이들은 스스로 조직하여 억압자들을 몰아내고, 반혁명적 파시스트 세력을 타격할 것이기 때문이었다. 혹은, 아나키즘은 권력에 대하여 모호한 태도를 취했다. 아나키스트들은 노동자들이 국가를 건설하지 않으면서도 권력을 확보할 필요성을 이해하지 못했다. 스페인 아나키스트들은 전국조직이나 논의를 위한 충분한 시간 등의 장점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이것을 혁명의 준비를 위해 사용하지 못했다. 혁명이 도래하였을 때, 이들은 CNT-FAI의 독재적 당-국가를 건설하거나, 자본주의 정부에 합류하는 것 외의 대안을 만들어내지 못했다. 반면, 트로츠키주의자들이나 마르크스주의자들의 주장은 노동자와 인민의 평의회를 국가의 일종으로 바라볼 때에만 올바르게 기능할 수 있다. 말장난처럼 보일 수 있지만, 코뮌은 역사상 그 어떠한 “국가”와도 다르다. 코뮌은 인민 다중의 자기 조직이지, 사회 위에 군림하는 소수의 조직이 아니다. 코뮌의 억압적 기능은 오직 이전의 착취계급을 향해서만 사용되며, 모든 억압을 끝내는 도상 위에 존재할 것이다. 코뮌은 “노동자 국가”가 아니고, 그것이 될 수도 없다. “노동자 국가”는 존재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당시 트로츠키와 그 추종자들은 그들의 역사에서 가장 자유의지주의적인 상태였다. 이들은 스탈린주의적인 전체주의 국가인 러시아가 노동자 국가의 일종이라 바라보면서도, 그 관료국가를 전복하고, 다당제 소비에트/평의회의 체계로 그것을 대체할 것을 촉구했다. 그리고 시간이 지나면서, 트로츠키주의자들은 평의회-국가 사상을 상당부분 포기했다. 정통파 트로츠키주의자들은 쿠바 국가(일당제, 일인 독재)의 무비판적 지지자가 되었다. 이들은 러시아의 아프가니스탄 침공을 지지하고, 스탈린주의 국가의 붕괴를 “반혁명”이라 비난하는 자들이 되었다. 소련이 “노동자 국가”가 아니라 국가자본주의라고 칭하는 비정통파 트로츠키주의자들도 있지만, 이들 역시 레닌과 트로츠키 당시의 소련은 긍정하고 있다. 흥미롭게도 스페인 트로츠키주의를 이끌었던 그란디소 무니스는 아마도 아나키즘의 영향을 받았을 것으로 추정된다. 그는 두루티의 친구들의 이론적 지도자였던 하이메 발리우스의 친한 친구였고, 심지어 그는 멕시코에서 망명해있는 동안 같이 살기까지 했다 (기야몬, 1996). 이것이 아마 무니스가 트로츠키주의적 "퇴보한 노동자 국가" 이론을 거부하고 러시아에 대해 국가자본주의적 분석을 한 것과, 그가 전위당을 부정하고 나섰던 요인이었을 것이다 (홉슨&타보르, 1988). 무니스는 동시에 적어도 스탈린주의 러시아가 국가자본주의 체제였다는 것에 동의했던 트로츠키의 미망인인 나탈리아 세도바와 친구이기도 했다. 보르디가주의자 (권위주의적 극좌 경향) 로 일컬어지는 기야몬 (1996) 은 두루티와 친구들이 혁명적 프로그램과 이를 위한 조직의 필요성 (전위)을 "아나키즘적 관용어" 와 "정통 마르크스주의적 가정" 에 의거해 재창조하고 있다고 보았다. 이것이 사실일지라도, 그들이 아나키즘적 전통에 의거해 그렇게 했다는 것이 중요할 것이다. 그리고 이는 평의회들의 연방이 혁명을 조직하는 개념이 오랫동안 아나키즘의 한 부분이었기 때문에 사실이 아니다. 주요 아나키스트 조직들이 그들의 활동을 이어나가지 못하고 실패한 것은 다른 문제다. 아나키즘이 운동적으로서 스페인에서 실패했다고 말할 수 있지만, 마르크스주의 또한 그렇게 잘 됐다고 볼 수는 없다. 전체적으로 마르크스주의자들은 자유주의적 부르주아 국가에 아나키스트만큼이나 (혹은 더) 적극적으로 투항했다. 사회주의자들은 국가주의적 개량주의에 찌들어갔고, 중도주의 POUM 이 새로운 국가의 필요성을 외치며 혁명적 마르크스주의자들의 위치를 차지했으나, 실질적으로는 구체제에 합류했다. 스탈린주의 스페인 공산당은 그냥 반동이었다 (정작 스탈린주의자라 할지라도, 여러 정당들의 평당원들의 순진한 이상주의를 부정하는 것은 아니었다). 트로츠키주의자들은 POUM 내 중도주의자들에게 자리를 잃었고, 작은 두 정파로 나뉘어 다시는 대중적 영향력을 행사하지 못했다. 오직 작은 마르크스주의자 조직 (트로츠키주의자들) 과 아나키스트 조직 (두루티와 친구들 그리고 몇몇 조직) 들만이 부르주아 국가와의 협조를 거부하고 평의회들의 연방을 조직하는 데에 찬성했다. 노동계급은 국가를 새로운 대중권력의 조직으로 대체해야 한다는 것을 이해하지 못한 그들의 조직들 때문에 큰 대가를 치렀다. 그러나 스페인 혁명 패배의 실질적은 효과는 수 세대에 걸쳐 거대한 국제적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던 아나키즘의 마지막 기회를 쓸어버리는 것이었다. 스페인 아나키스트들은 그들 스스로의 약점뿐만이 아니라 객관적 요인들로 인해 국제운동과 해방에 대한 희망을 후퇴시킨 패배를 겪었다. 아나키스트들은 다른 국가들에도 조직을 갖추고 있었지만, 스페인이 산업중심지에서 파시즘에 맞서 싸우는 마지막 희망이었다. 많은 세계의 투쟁하는 사람들에게 나치즘과 파시즘을 이겨내는 유일한 희망은 서방, 혹은 러시아 제국주의를 지원하거나 그 둘 모두를 지원하는 것으로 결정지어졌다. 자유의지주의적 사회주의가 다시 유의미한 세력으로 재부상하기 까지는, 서구 민주주의와 스탈린주의가 동시에 충분히 무너지는 긴 시간이 필요했다. *** 11장. 독일에서의 나치즘과의 투쟁 스페인 혁명 역사로 되돌아오기 전, 나는 1933년 독일에서의 파쇼 반혁명 (특히 나치즘의) 의 승리에 대해 논해보겠다 (글루크스타인, 1999; 게렝, 1973; 트로츠키, 1971). 스페인 반혁명은 노동계급의 조직들을 파괴했기 때문에 파시스트적이라 할 수 있겠지만, 내전으로 몰고 가도록 한 것은 군사 쿠데타였다. 나치즘은 대중운동을 통해 권력을 잡았고, 독일군이 방관하고 있었다는 점에서 더 "순수한" 형태에서의 파시즘이었다. 또 다시 파시즘에 맞선 투쟁은 급진주의자들의 국가에 대한 관점의 충돌을 만들어냈다. 1930년대의 독일에서의 가장 핵심적인 문제는 바로 부르주아 민주주의 국가 (바이마르 공화국) 와 파시스트 국가 간의 관계에 대한 것이었다. 공산당은 극좌적 의미에서 그들은 (두 파시즘 종류들 모두) 동일하다고 여겼기 때문에 나치즘에 맞서 특별히 싸울 필요는 없다고 여겼다. 사민당의 경우 그들이 파시즘과 완전히 다르다고 생각했고, 따라서 파시즘이 집권하는 것을 막기 위해 부르주아 민주주의 제도를 활용할 수 있다고 믿었다. 사실 이것들은 부르주아 국가의 두 가지 형태인데, 하나는 (제한된) 민주주의 체제이고 또 한 가지는 독재 체제라는 점에서 다르긴 하나 모두 자본주의의 지지자들이란 것에서 비슷하다. 부르주아 민주주의를 뒤엎어버리는 "정치혁명" 은 "사회혁명" 이 아니었다. 정부의 형태 자체는 완전히 뒤엎어진 것이나, 국가의 기본적인 형태와 자본주의 체제 자체는 변하지 않는 것이었다. 자본가 계급은 상류층으로 남았다. 이는 노동자들이 나치즘에 맞서 부르주아 민주주의적 권리를 지키는 것이 필요는 했지만, 부르주아 민주주의 국가체제에 의존해 나치즘에 저항하는 것은 실수라는 것을 의미했다. 오늘날에는 정치적 보수주의의 부상과 미국 지배계급 내부에서 극우의 지배, 그리고 온건한 부르주아 정치인들의 패배라는 현상이 나타나고 있다. 세계적으로 봤을 때, 그들의 정책은 "신자유주의" 라고 불려왔다. 이것이 1930년대 파시즘이 좌파를 찍어 누르고 일어난 조건들과 비슷하다고 보는 것은 과장일 것이다. 그리고 북아메리카에서의 진짜 파시스트들의 위협은 과거 유럽에서의 그것과 똑같지는 않다. 그러나 지금, 나치즘과 여러 다른 형태의 파시즘과 맞서는 투쟁에서 제기된 것과 비슷한 문제들은 분명 대두되고 있다. 많은 자유주의자들은 우익 공화당의 억압적이고 군국주의적 정책들 때문에 이미 파시즘 아래에 있거나 파시즘이 되어 갈 것이라는 두려움 아래에서 살아가고 있다. 이는 실수다. 우리는 부르주아 민주주의 아래에서 살고 있고, 그리고 억압적이고 군국주의적인 것이 부르주아 민주주의다. 미국에는 아직 선거가 열리고 (물론 엄청난 사기에 가깝지만), 노동조합이 있고, 자유로운 의사표현과 좌익 조직들 (많은 제한들이 있지만) 이 있다. 파시즘 아래에 이런 것들은 존재하지 않는다. 우리가 아직 거대한 파시즘적 위협에 직면한 상황은 아니기 때문에, 지금이야말로 아나키스트들과 자유의지주의적 사회주의자들이 과거에서 교훈을 배울 최적의 시기이다. 하지만 우선 이탈리아에서의 파시즘 부흥에 맞선 투쟁에 대해 간략히 설명이 필요하다. 1920년대 초, 1차 세계대전 참전병사들로 구성된 깡패들이 우익 조직으로서 결성되기 시작했다. 과거 사회주의자였던 베니토 무솔리니는 이들을 파시스트당으로 들여왔고, 부자들로부터 지원을 받았다. 그는 이 깡패들을 활용해 노동조합 본부와 좌익 정당들의 집회를 공격했다. 여러 아나키스트들은 파시스트 깡패들에 맞서 통일전선을 요구했다 (Rivista Anarchia, 1989). 아나키스트들은 그들이 확보한 생디칼리즘 노동조합을 갖추고 있는 정도의 분명한 소수였다. 그들은 파시스트들과 물리적으로 싸우고, 노동자들의 조직을 방어하며, 파시스트들을 거리에서 쫓아내기 위한 노동조합들과 좌익 정당들에 대한 단결과 행동을 요구했다. 아나키스트들과 아나키즘적 조합주의자들은 그들이 맺을 수 있는 동맹들과 함께 파시스트들과 싸우면서 그 요구를 직접 수행했다. 그들이 몇몇 도시들에서는 우익 깡패들을 패퇴시키는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그들은 좌익 정당들에 의해 방해받았다. 사회당 (이탈리아의 사민주의자들) 은 겁을 잔뜩 먹었고, 이른바 '평화 조약' 이라고 불리는 협정을 파시스트들과 1921년 8월에 체결하며 사실상의 무장해제를 감행했다. 이탈리아 공산당은 그 당원들에게 아나키스트들과 함께 싸우지 말 것을 명령했고, 통일전선의 개념을 비난했다. 그 당시 공산당을 이끌던 사람은 아마데오 보르디가 (이후 코민테른에서 추방된다) 였다. 그의 권위주의적 종파주의는 아래에서 논의된 제 3기 이론, 스탈린주의의 선구자였다. 효과적인 반대파가 없는 상황 속에서 부르주아와 국왕의 지지를 받고 파시스트들은 권력을 잡았다. 표면적으로나마 민주적 제도를 유지하는 것처럼 보이던 시절을 지나가며, 그들은 노동자들을 대량학살하며 전체주의 국가를 수립했다. 이탈리아 파시즘은 히틀러의 모델이 됐다. 이제 독일에서의 배경이다. 1차 세계대전은 독일이 러시아를 이기고 서방의 동맹국가들이 독일을 이기는 것으로 끝을 맺었다. 혁명의 물길이 전 유럽을 휩쓸기 시작했지만, 대부분의 역사책에서는 빠져 있다. 오직 러시아 제국에서만 혁명가들이 권력을 잡고 유지했다. 동유럽의 일부 지역에서는 그들이 잠시 권력을 잡기도 했다. 이탈리아에서는 노동자들이 북부의 대부분을 장악했으나, 두려움이 넘쳐흐르는 사회민주당에 의해 배반당했다. 핵심 국가는 독일이었다. 1918년, 노동자들과 병사들은 성공적으로 구 왕정을 뒤엎었다. 독일의 도시들, 산업들, 군 기지들은 노동자들과 사병들로 구성된 평의회들이 장악했다 (하르만, 2003) 다시 한 번 노동계급은 국가를 급진적 민주적 평의회들 (독일어로 Raete) 로 대체할 수 있음을 증명했다. 그러나 사민당 지도부들은 군대, 국가, 자본주의를 유지하기 위해 군 지도부와 거래를 했다. 사민당의 명령 아래에 혁명은 피에 물들었고, 이에는 로자 룩셈부르크의 죽음 또한 포함됐다. 불안정한 바이마르 공화국이 수립됐다. 1923년, 새로 나타난 공산당이 또 다른 독일 혁명을 시도했지만 경험부족과 모스크바로부터의 잘못된 지시 (스탈린주의화가 되어 있던) 로 인해 실패했다. 1920년대 후반기에는 혁명이 일어나지 않을 것이란 것이 확실했지만, 그렇다고 해서 국가가 안정되어 있던 것도 아니었다. 가장 큰 하나의 정당은 사민당이었는데, 그들은 집권했다 퇴진하기를 반복했다. 오늘날과는 달리 사민당은 스스로를 사회주의자라 칭하며 새로운 사회를 위해 싸우는 조직으로 자신들을 정의했다. 그들의 노동자 당원들은 그들을 믿었다. 그들의 관료적 지도부들은 합법수단, 의회주의, 평화로운 노사협약을 믿으며 체제 내에서 일하는 것에 전념했다. 그들의 왼쪽에는 공산당이 있었는데, 크기는 했지만 여전히 사민당보다는 작았다. 가장 혁명적인 노동자들이 그들에게 소속되어 있었다. 로자의 후예였던 독립적인 사상가들은 이 시기, 당에서 쫓겨났다. 그 관료주의는 완전히 스탈린의 지시에 따를 뿐이었다. 중도파에는 여러 자유주의 정당들과 온건 자본주의 정당들이 있었는데, 가톨릭 중앙당의 경우가 대표적이다. 시간이 가면 갈수록 그들은 그들의 지지기반을 극우에 넘겨주게 된다. 이는 전직 군인, 흥분을 만끽한 깡패들과 다양한 집단들이 원인이었다. 국가사회주의독일노동자당이 가장 거대한 정당이 됐다. 그 이름은 민족주의적 독일인들과 사회주의적 노동자들 모두에게 매력적인 것이었다. 한 편으로 그들은 국가적 자존심을 끌어올리며, 독일은 사회주의자들이 군에서 배후중상을 부려 전쟁에서 패배했다고 주장했다. 또 한편으로는 그들은 부자들에 대한 증오심을 불러일으켰으나 이는 유대인들에 대한 적개심으로 돌려졌다 (나치가 그들을 진짜 부자들에게 팔아넘길 수 있도록 내버려두고). 1929년의 경제붕괴와 대공황 이후, 국가사회주의자들 (혹은 나치) 은 급격히 성장했다. 그들은 모든 계급에서, 특히 몰락한 중소상공업자, 학자, 자영업자, 화이트 칼라 노동자, 관료, 교사, 기술자, 무직 대학 졸업자, 부자들에 대해 분노하고 있으나 가난한 자들을 혐오하는 자들, 반자본주의적이지만 그들 스스로가 프롤레타리아로 전락하는 거을 두려워하는 중산층에서 성장했다. 혁명적인 상승기간 동안 많은 사람들이 노동계급 정당으로 눈을 돌렸다. 화이트 칼라 노동자들의 노동조합 결성이 있기도 했다. 그러나 좌익진영은 자신들이 사회적 상황을 해결 할 수 있는 능력이 없음을 증명했고, 사람들은 고통을 끝낼 수 있는 권력을 가진 그 어떤 것이던 찾기 시작했다. 아돌프 히틀러의 공약은 모순적인 약속들과 헛소리들로 가득 차 있었지만, 적어도 그는 듣기 좋은 말과 함께 직접적인 행동을 약속했다. 히틀러에게 승리하는 데에 있어 가장 중요한 문제는 실질적 권력의 중심, 특히 주요 자본가들과 장군들의 지지를 얻는 것이었다. 파시스트들은 그들 스스로 그 일에 착수했다. 처음에 대기업들은 파시스트들을 원하지 않았다. 같은 조건이라면 자본가 계급은 제한적인 민주주의를 선호했다. 이것이 그들 내부 세력들 간의 갈등을 피 흘리지 않고 해결할 수 있도록 했기 때문이다. 이는 사민주의자들이나 자유주의자들과 같은 반대파들이 자신들에게 협력하도록 만든다. 이는 대중이 대중 스스로가 국가를 이끈다고 착각하게 만든다. 그러나 대공황 시기 독일에서는 모든 것이 통제를 넘어서기 시작했다. 대기업들은 노동자들의 평균적인 삶의 질을 낮추고 이윤을 올리기 위해 노동조합과 노동자 정당들을 타격해야 했다. 그리고 동유럽과 천연자원들이 있는 곳, 다른 이윤을 불러일으킬 수 있는 곳으로 확대하는 것을 원했다. 그리고 이는 장군들의 욕구와도 맞아떨어졌다. 그들은 사회적 질서를 원했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은 나치를 고용할 준비가 되어 있었다. 이런 상황 속에서, 나치는 권력을 잡을 준비가 됐다. 나치는 자본가들에게 왕정과 관료적 경찰국가와 같은 그저 또 다른 권위주의적 국가 그 이상의 것을 제시했다. 그들에게는 절박한 중산층 인구의 대중운동이 있었고, 노동자 정당과 노동조합을 확실히 타격하는 데에 사용할 수 있었다. 그들은 수천 명의 제복 입은 깡패들을 조직해 노동자들과 싸울 준비를 하고, 노동자들의 조직을 박살내고, 노동자들의 삶의 질을 끌어내렸다. 나치는 그저 선거에서만 활동하지 않았다. 그들은 노동자들의 집단행동을 직접 공격했고, 거리에서 사민주의자들을 두드려 팼고, 그들의 신문이 판매되는 것을 막고, 정적을 암살하고, 공포정치를 형성했다. 경찰은 그들을 통제하지 않았다. 판사들은 그들을 솜방망이 처벌로 봐줬다. (근본적인 문제는 나치들에게의 제공된 "언론의 자유" 가 아니라 그 누구도 그들의 살인적 법외적 행위를 막지 못한 것에 있다.) 자라나는 파시스트들의 위협에 맞서기 위해 사민당의 관료들은 오래되고 검증된 방법을 사용하고자 했다. 그들은 국가사회주의자들을 또 다른 선거에 나서는 정당 이상이하로 보지 않았다. 사민당은 선거에 나섰고, 의회에서 활동했다. 그들은 그들의 조직을 지켰고, 그들의 노동조합, 그들의 신문, 그들의 노동자 지역조직을 지켰다. 그들은 국기단이라 불리는, 실제로는 거의 단 한 번도 사용되지 않았던 무장노동자들의 자위조직인 국기단을 조직했다. 그들은 나치즘을 합법적 선거로 물리치지 못할 이유가 없다고 보았다. 조금 더 미래로 가서, 1932년에는 또 한 번의 중요한 대통령 선거가 있었다. 히틀러가 참여했다. 공산당도 그들의 당수를 출마시켰다. 보수주의자들은 나이 많은 왕정주의자 장군인 폰 힌덴부르크를 출마시켰다. 사민당은 히틀러를 막는 것이 중요하다고 여겼고, 이는 선거주의를 통해 이루어질 수 있다고 보았다. 그들은 폰 힌덴부르크를 지지했고, 파시스트가 아닌 차악으로서 보았다. 그들의 슬로건은 "히틀러를 타격하고 힌덴부르크를 뽑자!" 였다. 폰 힌덴부르크는 대통령으로 당선됐다. 여러 사건들이 있던 이후, 그는 히틀러를 수상으로 임명했고, 그것으로 기나긴 어둠이 시작됐다 (드래퍼, 1972). 폰 힌덴부르크는 나치가 아니었다. 그는 이 무지렁이들이 존경받는 인물들을 통해 통제될 수 있다고 바라보았다. 히틀러가 그의 차악이었다. 독일인들은 단 한 번도 다수표를 줬던 적이 었지만, 그들은 그럼에도 권력을 가져갔다. 우리는 조직된 노동계급의 사활이 걸린 극단적 상황 속에서조차도 선거주의는 작동하지 않음을 볼 수 있다.파시즘에 맞선 투쟁은 선거전술의 틀 바깥에서 이뤄졌어야만 했다. 또 다른 핵심은 나치들이 부상 할 때, 수백만 명의 혁명적 노동자들이 스탈린주의 관료주의에 의해 묶여있던 공산당의 행동이었다. 안타깝게도 공산당은 20년대와 30년대 초, 모스크바에서 채택된 미친 방침으로 인해 완전히 방향성을 상실했다. 이 방침들은 제 3기라고 불리는 혁명적 시간대로 세계가 접어들었다고 이야기했다. 제 1기는 1차 세계대전 이후의 혁명적 기간이며, 제 2기는 그 이후의 개량주의적 정치가 적합했던 안정기이며, 바로 지금이 제 3기라는 것이었다. 개혁을 위한 투쟁은 내팽개쳐졌다. 공산당은 사민당 주도 노동조합에서 탈퇴하고 그들만의 극도로 혁명적인 노동조합 (하지만 작은)을 만들었고, 지금이 바로 최후의 혁명적 전투의 시기라고 바라봤다. 이 정책은 절대다수의 노동자들이 여전히 사민당과 그들이 주도하는 노동조합에 소속되어 있었고, 그들은 1918년과 1923년 혁명의 실패 이후 혁명에서 한 발자국 물러서 있었다는 사실을 간과하고 있었다. 이는 당면한 파시즘에 맞서 노동자들의 당면한 민주적 권리를 지키는 과제를 무시한 것이지, 혁명적 시도를 한 것이 아니다. 이러한 접근을 뒷받침하는 이론은 "사회파시즘" 이론이었다. 여기서는 파시스트들만이 파시스트인 것이 아니라, 공산당 이외의 모든 정당들과 조직들 또한 파시스트라고 하는 것이었다. 이는 "사회파쇼" 인 사민당 또한 또 다른 종류의 파시즘으로 포함했다 (아나키스트들은 "아나키즘적 파쇼" 였다). 스탈린은 "파시즘은 사민주의의 적극적인 지원에 기반을 둔 부르주아 계급의 전투 조직이다. 객관적으로 사민주의는 파시즘의 온건파이다. 이 조직들은 서로 모순되지 않는다. 그들은 대척점이 아니라 쌍둥이이다." 라고 세계에 선언했다. 개량주의자들과 자유주의자들, 사민주의자들까지도 자본주의를 지지한다는 것은 사실이다. 그들의 약점으로 인해 그들은 파시즘이 자라나고 권력을 잡는 것을 용인했다. 하지만 그들이 파시스트들이라고 이야기하는 것은 이것과는 전혀 별개의 문제다! 사민주의자들은 부르주아 민주주의를 유지하는 데에 있어 이해관계가 있었다. 그들의 정당, 그들의 노동조합, 그들의 다른 모든 조직들은 오로지 선출된 정부, 언론의 자유, 조직의 자유의 존재 아래에서만 존재할 수 있었다. 파시스트들은 반면 선거와 마찬가지로 노동자들의 조직을 파괴하고자 했다. (비록 히틀러가 집권하기 이전의 일이지만, 파시스트 이탈리아가 그 명확한 선례다.) 스탈린주의자들에 의해 사민주의자들이 파시스트로 결정된 이상, 나치에 맞선 그 어떤 연합도 형성될 수 없었다. 그리고 실제로 공산주의자들은 사민당에 맞서 나치와 연합하여 어느 한 지역의 사민당 정부에 반대하는 주민투표를 지지하기도 했다. 부르주아 민주주의 또한 파시즘적이고 파시즘의 통치와 다를 바 없다는 이유 덕분에, 나치에 맞서 민주적 권리를 수호하고자 하는 그 어떤 노력도 있을 수는 없었다. 그들은 부르주아 민주주의 아래에서는 노동자들이 그들의 노동조합과 정당을 가질 수 있었고, 진짜 파시즘 아래에서는 그 모든 것들이 파괴되고 불법화되며 지도자들이 살해됐을 것이란 것을 무시했다. 이는 분명 큰 차이다! 즉, 핵심은 부르주아 민주주의를 수호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존재할 수 있도록 하는 노동자 민주주의적 요소를 수호하는 것이었어야 했다. 사민당과의 그 어떤 동맹도 거부하는 것이 괴상한 일인 것처럼 보이자, 공산당은 "아래로부터 통일전선"을 요구했다. 이는 사민당 지도부들이 아니라 사민당 평당원들과 일반 지지자들과 동맹을 맺겠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사민주의자 노동자들이 사민당 지도부를 지지하도록 만든 것은, 그들이 공산당이나 다른 정당의 지도부나 정당을 지지하지 않고 그들의 지도부를 지지했기 때문이다. 그들은 그들의 지도부와 조직을 공산당을 지지하기 위해 버리고자 하지 않았다 (통일전선과는 별개로 사민당을 탈당하고 공산당에 입당할 준비를 했던 소수를 제외하고). 이러한 상황들은 (제 3기와 사회 파시즘 이론) 시대의 객관적 분석에 기반을 둔 것이 아니라 러시아 관료들의 필요에 의해 나타난 것이다. 소련은 급격한 산업화와 농업의 집산화를 실행하고 있었다. 이 광란에 가까운 추진은 구 혁명가들에 대한 거대한 내부적 숙청과 더불어 수백만 명의 과로와 기아로 인한 사망자들을 낳았다. 공산주의 정당들에 대한 국제적인, 초좌파적인 방침은 러시아 내부 정치적 상황을 반영한 것이었다. 사민당은 합법적이고, 선거주의적인 전술에 모든 것을 쏟아부었고 공산당은 미친 전술에 의해 막혀있었다. 모든 다른 조직들과 경향들은 작고 미약했으며, 여기에는 아나키스트들 또한 포함됐다. 트로츠키주의자들을 예시로 들면, 그들은 고작 수백 명의 지지자들을 가지고 있을 뿐이었다. 다만 지적이고 현실적인 대안적 지향을 제안한 당대 트로츠키의 저술을 보면 흥미로운 점이 있다. (아나키스트들이 트로츠키로부터 배울 점이 있다고 주장하는 것은 논쟁의 여지가 있다. 아나키스트들이 자유의지주의적인, 인본주의적인 마르크스주의자들과 공통점이 있다고 이야기하는 것은 적잖게 나오는 이야기지만, 이건 또 다른 의미이다. 트로츠키 [와 레닌] 는 아나키스트들과는 다른 [중앙집권적 경제를 통해 운영되는 중앙집권적 국가를 통제하는 중앙집권적 정당의 통치] 목표를 가지고 있었으나, 그들의 수단은 아나키스트들과 겹치는 면이 있다. 왜냐하면 (고립되고 빈사 상태에 빠진 레닌주의자들인 스탈린주의자들과는 달리) 트로츠키와 레닌은 정말, 정말로 국제 노동계급의 혁명을 바랬기 때문이다. 그들은 노동계급이 스스로 자본주의에 맞서 조직하고, 그것을 전복시키기 위한 전술과 전략을 매우 진지하게 고민하고 고안했다. 그러한 전술과 전략들은 많은 경우 여러 방면에서 아나키스트들의 약점이 되기도 했다. 레닌주의자들의 목표가 그들의 정당이 권력을 잡도록 하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그들은 그것을 노동계급 혁명을 원했기 때문에 그렇게 한 것이며, 이는 단 한 순간도 노동계급의 조직적 혁명을 조직한 적이 없던 스탈린주의자들과는 다르다. 간단히 말해서 트로츠키의 수단은 자유의지주의적 사회주의자들의 그것과 겹치기는 하나, 그의 최종적 목적은 분명 달랐다. 이러한 수단들에 대해 주의 깊게 분석한다면 나치즘에 맞선 투쟁과 같은 상황에서 아나키스트들에게 유용한 수단이 나타날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이 트로츠키주의, 혹은 마르크스주의 전체에 동의한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트로츠키는 좋은 이유와 나쁜 이유로 공산주의자들에게 글을 썼다. 좋은 이유로는 공산주의자들 중에는 다수의 혁명적 노동자들이 포함되어 있었다는 점이다. 나쁜 (혹은 어리석은) 점은 그가 여전히 그의 지지자들과 함께 독일과 러시아의 공산당으로 돌아갈 수 있다고 생각한 것이었다. (그가 그의 평생을 스탈린주의에 맞서 싸우기는 했지만, 그는 스탈린주의가 무엇인지, 그리고 그가 그것에 어떤 것을 기여했는지 결코 완전히 이해하지 못했다.) 그는 공산주의자 노동자들에게 나치즘은 그저 또 다른 권위주의적 운동이 아니라는 것임을 경고했다. 기존의 부르주아 정당들 또한 파시스트들이라는 단정은 나치 (진짜 파시스트들인) 들 또한 그들과 다를 바 없게 보이도록 했다. 나치즘이 자본주의를 대체하려 하지는 않았고, 거대 자본가들은 나치 아래에서 꽤 잘 살아갔다. 하지만 이는 대중운동이었다. 국가권력과 이것이 결합한다면, 이는 독특한 형태의 억압이 될 것이었다. 이는 노동자들의 조직을 완전히 파괴할 것이었다. 이는 노동자들의 지도자들뿐만이 아니라 평조합원들까지 살해하려 들 것이었다. 모든 마을과 이웃에 공작원들이 있을 것이었고, 모든 스포츠와 체스클럽, 모든 상점에 또한 마찬가지일 터였다. 그는 그렇게 경고했다. "노동자, 공산주의자들이여, 그대들은 수십만, 수백만이지만 그 어디로도 떠날 수 없다. 그대들을 위한 여권은 충분하지 않다. 파시즘이 권력을 잡으면 그대들의 두개골과 척추를 전차마냥 짓밟을 것이다. 그대들의 구원은 무자비한 투쟁에 있다. 오직 사민주의 노동자들과의 전투적 단결만이 승리를 가져올 수 있다. 서두르자, 노동자, 공산주의자들이여, 그대들에게 시간은 얼마 남지 않았다!" (트로츠키, 1971, p. 163) 그는 공산주의자들에게 사민주의자들과의 동맹을 제안할 것을 제안했고, 거부한다면 사민주의자 지도자들을 공개하라고 제안했다. 이 노동계급 동맹 (통일전선) 은 현실적인 목표를 가지고 있을 것이다. 그 정당들과 그들의 노동조합들과 여러 조직들은 서로를 나치의 공격으로부터 방어할 것에 동의할 것이다. 모든 도시와 모든 마을에서 그들은 통합방어위원회를 구성할 것이다. 그들은 상호 순찰을 통해 나치를 거리에서 몰아낼 것이다. 파시스트 본부를 찾아내고, 그들에 맞서 싸움을 이어나갈 것이다. 그들은 상점들과 일터에 위원회를 형성하고 그들이 파시스트들 지원하는지 확인하며, 지원한다면 그것을 멈추기 위해 조치를 취할 것이다. 그들은 파시스트들이 지역적으로나 국가적으로 권력을 장악했을 때 총파업을 위한 공동계획을 세울 것이다. 이 모든 것은 실용적이고 탄탄했다. 트로츠키는 나치에 맞서는 상황 속에서 방어위원회와 공장위원회가 러시아 혁명기의 소비에트들처럼 (원래 파업 위원회였던), 처음에는 소수였지만 최고의 계획과 투쟁성을 갖췄기에 우위에 섰던 혁명가들처럼 될 것을 소망했다. 그러한 위원회들은 사회주의로의 전환을 향한 계획들을 세울 수 있을 것이다. 상황들이 진행될수록 그들은 혁명의 본령을 따라갈 것이다. 그들 부르주아 국가의 틀 자체를 평의회 제도로 전환할 지도 모를 것이다. 트로츠키는 공산주의자들과 사민주의자들의 통합을 주장하지는 않았다. 그는 두 세력이 공동 후보를 내거나 공동 선전물을 내는 것을 원하지는 않았다. 이는 동맹이었지, 통합이 아니었다. "따로 행진하며, 함께 타격하자!" 라고 그는 말했다. 노동자들은 혁명주의자들과 개량주의자들이 함께 움직이는 것을 보고 그들을 서로 비교한 뒤, 혁명주의자들을 고를 것이라 그는 여겼다 (공산주의자로 보이는 사람들을). (1) 혁명주의자들이 개량주의자들과 분리되어 명확한 계획을 세우고 스스로 혁명의 깃발을 올리기 위해서, 그리고 (2) 대중행동과 노동조합, 대중운동에 개량주의자들과 함께 동참하면서 혁명적 움직임이 가장 좋은 것이라 설득하기 위해서 이는 중요했다. 이러한 생각들이 우리에게는 상식적으로 보일 수 있다. 이탈리아의 아나키스트들이 근본적으로 주장했던 것, 파시스트에 맞선 상호방어를 위한 노동자 조직들의 연합과 비슷한 것이기 때문이다 (노동계급의 위에 공산당을 집권시키겠다는 트로츠키의 궁극적 목표를 무너뜨리는 것이긴 하지만). 계급에 맞서는 계급. 주목할 만한 것은 공산당이 재기했던 사회파시즘 이론 (그렇게 불릴 수 있는 정도라면) 에 대한 저항이었다. 공산당 지도부는 사민당이 1918년 혁명을 배반했으며, 룩셈부르크를 포함한 많은 공산주의자들을 살해했고, 지역 경찰 지도부를 포함해 부르주아 정부에 한 자리를 얻으면서 선거에 나가 당선됐으며, 억압적 법안에 대한 책임을 지고 있고 지금도 그렇다고 짚었다. 모든 것은 사실이었으나, 그러나 그것이 사민주의자들이 파시스트들이라는 근거가 되지는 않는다. 사민주의자들은 여전히 부르주아 민주주의에 기대고 있었으며, 이는 나치가 부르주아 민주주의를 (자본주의가 아닌) 파괴하려 했던 것과는 대조된다. 나치에 맞서, 트로츠키는 "악마와 그 할머니" 와도 동맹을 맺을 것이라 천명했고, 심지어는 혁명주의자들을 억압했던 사민주의자들과도 그럴 것이라 이야기했다. 그는 이솝우화 형식으로 우화를 썼다. "하루는 소를 파는 상인이 소들을 도축장으로 끌고 왔다. 그리고 도살자가 날카로운 칼을 들고 가까이 다가왔다. '우리가 대열을 좁혀서 저 처형자를 뿔로 돌격해 몰아내자.' 소들 중 한 마리가 제안했다. '저 도살자가 우리를 이곳으로 끌고 온 상인보다 더 나쁘다고 말할 게 있다면 이야기해 봐.' 라고 마누일스키 [스탈린의 코민테른 비서] 에게 정치적 교육을 받은 소들이 답했다. '그 이후에 상인을 상대할 수 있을 거야.‘ '아무것도 하지 않을 거야.' 소들이 그들의 강령에 확신에 차 말했다. '넌 우리의 적을 좌익으로부터 보호하려 애 쓰고 있어. 넌 네 스스로 사회도살자임을 인증한 거야.‘ 그리고 그들은 대열을 좁히는 것을 거부했다" (트로츠키, 1971, p. 293). 나치들은 어느 정도 합법적으로 권력을 쥐었다. 그들은 그 이후 모든 선거와 정당을 폐지했고, 이는 노동자 정당들과 부르주아 정당들 모두 포함된 것이었다. 그들은 그들을 지원하는 자본가들을 기쁘게 만들기 위해 노동조합을 불법화했고 노동조합의 지도부를 체포했으며, 노동자 정당들의 지도부와 심지어는 그 평당원들까지 체포했다. 자본가들과 장군들을 만족시키기 위해, 그들은 그들의 좌익적 목소리를 믿었던 자신들의 지지자와 당원들 또한 살해했다. 그들은 모든 마을, 스포츠 클럽, 공장에 그들의 지지자들을 꽂아 넣었다. 서서히 (트로츠키가 예상했듯), 그들의 중산층 지지자들은 나치의 거대 자본의 지지를 받기 위한 행동들에 의해 배반당했다. 나치는 대중운동에 대한 필요성을 상실했다. 그렇게 되면 그 정권은 또 다른 관료적 경찰국가로 전락하고, 특수한 투쟁심 또한 잃을 것이었다. 하지만 그것은 미래에 있을 일이었다. 당장 정권은 인류 역사상 그 누구도 견줄 수 없는 범죄를 저지르기에는 충분히 강했다 (홀로코스트와 그 다른 것들). 이는 미국, 영국, 러시아 제국주의가 마침내 그 강대한 힘을 통해 나치를 타격하도록 만들었다. 공산당과 사민당은 나치가 권력을 잡을 때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총파업도 없었고, 반란도 없었다. 그들은 거의 신음조차도 내지 않고 무너졌다. 사민주의자들은 그들이 불법화되기 직전, 나치의 외교 정책에 의회에서 찬성표를 던졌다. 이는 노동계급에게 막대한 패배가 되었고, 그 영향은 지금까지 남아있다. 살해되거나 체포되지 않은 사민당 지도부들은 서방으로 망명을 떠났다. 그들은 연합군이 또 다른 부르주아 민주주의를 수립할 때 다시 돌아왔다. 살아남은 공산당원들은 러시아로 떠났다. 많은 이들은 스탈린에 의해 살해당했다. 다른 몇몇은 러시아군과 함께 돌아와 그들만의 전체주의적인 국가자본주의 국가를 동부 독일에 세웠다. 공산주의 정당들은 그들의 이론과 실천에서의 실수를 분석하고자 하는 시도를 하지 않았다. 그들은 그들이 했던 모든 것이 옳았다고 판단하고 행동했다. 그리고 그들은 조금 더 우익적 방향으로 전환했다. 그들은 통일전선을 지나 인민전선으로 움직였다. 이는 계급을 넘나드는 동맹이었고, 노동자 정당들뿐만이 아니라 자유주의적 부르주아 정당들과의 동맹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이는 어떠한 사안에 대한 일시적 동맹이 아니었다. 이는 통합된 정치권력을 확보하기 위한 장기적인 동맹인 것처럼 보였다. 이는 그들의 실천이 부르주아 파트너와의 동맹을 유지하기 위해 친자본주의적 수준에서 더 나아가지 못한다는 것을 의미했다. 하지만 자본주의 정당은 항상 다른 자본주의자들이나 파시즘의 공격에 취약했다. 파시즘은 자본가 계급 (혹은 그 기반)을 위협하지 않았고, 그 대신 노동계급과 그 조직들을 위협했다. 인민전선 정부는 프랑스에서 권력을 잡았다. 우리는 스페인에서의 인민전선이 만들었던 효과를 볼 수 있었고, 이번에는 심지어 아나키스트들 까지 포함되어 있었다. 트로츠키는 마침내 공산주의 정당들이 희망이 없다는 것을 인지했고, 그들에게 다시 합류하고자 하는 시도를 포기했다. 그는 소련 관료주의에 맞선 노동자들의 혁명을 촉구했다. 그는 다당제, 민주적 소비에트를 주장했다. 그러나 그는 여전히 스탈린주의 러시아가 자본주의로부터 수호되어야 할 노동자 국가라고 믿었고, 국유화 된 생산수단들을 노동자 국가의 조건으로 인정했다. 그는 새로운, 네 번째 인터내셔널을 만들었고, 그 시도는 완전히 실패했다. 후기트로츠키주의자들은 각각 사민주의나 스탈린주의의 한 종류가 되거나, 둘 모두의 종류가 되었다.흥미롭게도 스페인 트로츠키주의를 이끌었던 그란디소 무니스는 아마도 아나키즘의 영향을 받았을 것으로 추정된다. 그는 두루티의 친구들의 이론적 지도자였던 하이메 발리우스의 친한 친구였고, 심지어 그는 멕시코에서 망명해있는 동안 같이 살기까지 했다 (기야몬, 1996). 이것이 아마 무니스가 트로츠키주의적 "퇴보한 노동자 국가" 이론을 거부하고 러시아에 대해 국가자본주의적 분석을 한 것과, 그가 전위당을 부정하고 나섰던 요인이었을 것이다 (홉슨&타보르, 1988). 무니스는 동시에 적어도 스탈린주의 러시아가 국가자본주의 체제였다는 것에 동의했던 트로츠키의 미망인인 나탈리아 세도바와 친구이기도 했다. 보르디가주의자 (권위주의적 극좌 경향) 로 일컬어지는 기야몬 (1996) 은 두루티와 친구들이 혁명적 프로그램과 이를 위한 조직의 필요성 (전위)을 "아나키즘적 관용어" 와 "정통 마르크스주의적 가정" 에 의거해 재창조하고 있다고 보았다. 이것이 사실일지라도, 그들이 아나키즘적 전통에 의거해 그렇게 했다는 것이 중요할 것이다. 그리고 이는 평의회들의 연방이 혁명을 조직하는 개념이 오랫동안 아나키즘의 한 부분이었기 때문에 사실이 아니다. 주요 아나키스트 조직들이 그들의 활동을 이어나가지 못하고 실패한 것은 다른 문제다. 아나키즘이 운동적으로서 스페인에서 실패했다고 말할 수 있지만, 마르크스주의 또한 그렇게 잘 됐다고 볼 수는 없다. 전체적으로 마르크스주의자들은 자유주의적 부르주아 국가에 아나키스트만큼이나 (혹은 더) 적극적으로 투항했다. 사회주의자들은 국가주의적 개량주의에 찌들어갔고, 중도주의 POUM 이 새로운 국가의 필요성을 외치며 혁명적 마르크스주의자들의 위치를 차지했으나, 실질적으로는 구체제에 합류했다. 스탈린주의 스페인 공산당은 그냥 반동이었다 (정작 스탈린주의자라 할지라도, 여러 정당들의 평당원들의 순진한 이상주의를 부정하는 것은 아니었다). 트로츠키주의자들은 POUM 내 중도주의자들에게 자리를 잃었고, 작은 두 정파로 나뉘어 다시는 대중적 영향력을 행사하지 못했다. 오직 작은 마르크스주의자 조직 (트로츠키주의자들) 과 아나키스트 조직 (두루티와 친구들 그리고 몇몇 조직) 들만이 부르주아 국가와의 협조를 거부하고 평의회들의 연방을 조직하는 데에 찬성했다. 노동계급은 국가를 새로운 대중권력의 조직으로 대체해야 한다는 것을 이해하지 못한 그들의 조직들 때문에 큰 대가를 치렀다. 그러나 스페인 혁명 패배의 실질적은 효과는 수 세대에 걸쳐 거대한 국제적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던 아나키즘의 마지막 기회를 쓸어버리는 것이었다. 스페인 아나키스트들은 그들 스스로의 약점뿐만이 아니라 객관적 요인들로 인해 국제운동과 해방에 대한 희망을 후퇴시킨 패배를 겪었다. 아나키스트들은 다른 국가들에도 조직을 갖추고 있었지만, 스페인이 산업중심지에서 파시즘에 맞서 싸우는 마지막 희망이었다. 많은 세계의 투쟁하는 사람들에게 나치즘과 파시즘을 이겨내는 유일한 희망은 서방, 혹은 러시아 제국주의를 지원하거나 그 둘 모두를 지원하는 것으로 결정지어졌다. 자유의지주의적 사회주의가 다시 유의미한 세력으로 재부상하기 까지는, 서구 민주주의와 스탈린주의가 동시에 충분히 무너지는 긴 시간이 필요했다. *** 11장. 독일에서의 나치즘과의 투쟁 스페인 혁명 역사로 되돌아오기 전, 나는 1933년 독일에서의 파쇼 반혁명 (특히 나치즘의) 의 승리에 대해 논해보겠다 (글루크스타인, 1999; 게렝, 1973; 트로츠키, 1971). 스페인 반혁명은 노동계급의 조직들을 파괴했기 때문에 파시스트적이라 할 수 있겠지만, 내전으로 몰고 가도록 한 것은 군사 쿠데타였다. 나치즘은 대중운동을 통해 권력을 잡았고, 독일군이 방관하고 있었다는 점에서 더 "순수한" 형태에서의 파시즘이었다. 또 다시 파시즘에 맞선 투쟁은 급진주의자들의 국가에 대한 관점의 충돌을 만들어냈다. 1930년대의 독일에서의 가장 핵심적인 문제는 바로 부르주아 민주주의 국가 (바이마르 공화국) 와 파시스트 국가 간의 관계에 대한 것이었다. 공산당은 극좌적 의미에서 그들은 (두 파시즘 종류들 모두) 동일하다고 여겼기 때문에 나치즘에 맞서 특별히 싸울 필요는 없다고 여겼다. 사민당의 경우 그들이 파시즘과 완전히 다르다고 생각했고, 따라서 파시즘이 집권하는 것을 막기 위해 부르주아 민주주의 제도를 활용할 수 있다고 믿었다. 사실 이것들은 부르주아 국가의 두 가지 형태인데, 하나는 (제한된) 민주주의 체제이고 또 한 가지는 독재 체제라는 점에서 다르긴 하나 모두 자본주의의 지지자들이란 것에서 비슷하다. 부르주아 민주주의를 뒤엎어버리는 "정치혁명" 은 "사회혁명" 이 아니었다. 정부의 형태 자체는 완전히 뒤엎어진 것이나, 국가의 기본적인 형태와 자본주의 체제 자체는 변하지 않는 것이었다. 자본가 계급은 상류층으로 남았다. 이는 노동자들이 나치즘에 맞서 부르주아 민주주의적 권리를 지키는 것이 필요는 했지만, 부르주아 민주주의 국가체제에 의존해 나치즘에 저항하는 것은 실수라는 것을 의미했다. 오늘날에는 정치적 보수주의의 부상과 미국 지배계급 내부에서 극우의 지배, 그리고 온건한 부르주아 정치인들의 패배라는 현상이 나타나고 있다. 세계적으로 봤을 때, 그들의 정책은 "신자유주의" 라고 불려왔다. 이것이 1930년대 파시즘이 좌파를 찍어 누르고 일어난 조건들과 비슷하다고 보는 것은 과장일 것이다. 그리고 북아메리카에서의 진짜 파시스트들의 위협은 과거 유럽에서의 그것과 똑같지는 않다. 그러나 지금, 나치즘과 여러 다른 형태의 파시즘과 맞서는 투쟁에서 제기된 것과 비슷한 문제들은 분명 대두되고 있다. 많은 자유주의자들은 우익 공화당의 억압적이고 군국주의적 정책들 때문에 이미 파시즘 아래에 있거나 파시즘이 되어 갈 것이라는 두려움 아래에서 살아가고 있다. 이는 실수다. 우리는 부르주아 민주주의 아래에서 살고 있고, 그리고 억압적이고 군국주의적인 것이 부르주아 민주주의다. 미국에는 아직 선거가 열리고 (물론 엄청난 사기에 가깝지만), 노동조합이 있고, 자유로운 의사표현과 좌익 조직들 (많은 제한들이 있지만) 이 있다. 파시즘 아래에 이런 것들은 존재하지 않는다. 우리가 아직 거대한 파시즘적 위협에 직면한 상황은 아니기 때문에, 지금이야말로 아나키스트들과 자유의지주의적 사회주의자들이 과거에서 교훈을 배울 최적의 시기이다. 하지만 우선 이탈리아에서의 파시즘 부흥에 맞선 투쟁에 대해 간략히 설명이 필요하다. 1920년대 초, 1차 세계대전 참전병사들로 구성된 깡패들이 우익 조직으로서 결성되기 시작했다. 과거 사회주의자였던 베니토 무솔리니는 이들을 파시스트당으로 들여왔고, 부자들로부터 지원을 받았다. 그는 이 깡패들을 활용해 노동조합 본부와 좌익 정당들의 집회를 공격했다. 여러 아나키스트들은 파시스트 깡패들에 맞서 통일전선을 요구했다 (Rivista Anarchia, 1989). 아나키스트들은 그들이 확보한 생디칼리즘 노동조합을 갖추고 있는 정도의 분명한 소수였다. 그들은 파시스트들과 물리적으로 싸우고, 노동자들의 조직을 방어하며, 파시스트들을 거리에서 쫓아내기 위한 노동조합들과 좌익 정당들에 대한 단결과 행동을 요구했다. 아나키스트들과 아나키즘적 조합주의자들은 그들이 맺을 수 있는 동맹들과 함께 파시스트들과 싸우면서 그 요구를 직접 수행했다. 그들이 몇몇 도시들에서는 우익 깡패들을 패퇴시키는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그들은 좌익 정당들에 의해 방해받았다. 사회당 (이탈리아의 사민주의자들) 은 겁을 잔뜩 먹었고, 이른바 '평화 조약' 이라고 불리는 협정을 파시스트들과 1921년 8월에 체결하며 사실상의 무장해제를 감행했다. 이탈리아 공산당은 그 당원들에게 아나키스트들과 함께 싸우지 말 것을 명령했고, 통일전선의 개념을 비난했다. 그 당시 공산당을 이끌던 사람은 아마데오 보르디가 (이후 코민테른에서 추방된다) 였다. 그의 권위주의적 종파주의는 아래에서 논의된 제 3기 이론, 스탈린주의의 선구자였다. 효과적인 반대파가 없는 상황 속에서 부르주아와 국왕의 지지를 받고 파시스트들은 권력을 잡았다. 표면적으로나마 민주적 제도를 유지하는 것처럼 보이던 시절을 지나가며, 그들은 노동자들을 대량학살하며 전체주의 국가를 수립했다. 이탈리아 파시즘은 히틀러의 모델이 됐다. 이제 독일에서의 배경이다. 1차 세계대전은 독일이 러시아를 이기고 서방의 동맹국가들이 독일을 이기는 것으로 끝을 맺었다. 혁명의 물길이 전 유럽을 휩쓸기 시작했지만, 대부분의 역사책에서는 빠져 있다. 오직 러시아 제국에서만 혁명가들이 권력을 잡고 유지했다. 동유럽의 일부 지역에서는 그들이 잠시 권력을 잡기도 했다. 이탈리아에서는 노동자들이 북부의 대부분을 장악했으나, 두려움이 넘쳐흐르는 사회민주당에 의해 배반당했다. 핵심 국가는 독일이었다. 1918년, 노동자들과 병사들은 성공적으로 구 왕정을 뒤엎었다. 독일의 도시들, 산업들, 군 기지들은 노동자들과 사병들로 구성된 평의회들이 장악했다 (하르만, 2003) 다시 한 번 노동계급은 국가를 급진적 민주적 평의회들 (독일어로 Raete) 로 대체할 수 있음을 증명했다. 그러나 사민당 지도부들은 군대, 국가, 자본주의를 유지하기 위해 군 지도부와 거래를 했다. 사민당의 명령 아래에 혁명은 피에 물들었고, 이에는 로자 룩셈부르크의 죽음 또한 포함됐다. 불안정한 바이마르 공화국이 수립됐다. 1923년, 새로 나타난 공산당이 또 다른 독일 혁명을 시도했지만 경험부족과 모스크바로부터의 잘못된 지시 (스탈린주의화가 되어 있던) 로 인해 실패했다. 1920년대 후반기에는 혁명이 일어나지 않을 것이란 것이 확실했지만, 그렇다고 해서 국가가 안정되어 있던 것도 아니었다. 가장 큰 하나의 정당은 사민당이었는데, 그들은 집권했다 퇴진하기를 반복했다. 오늘날과는 달리 사민당은 스스로를 사회주의자라 칭하며 새로운 사회를 위해 싸우는 조직으로 자신들을 정의했다. 그들의 노동자 당원들은 그들을 믿었다. 그들의 관료적 지도부들은 합법수단, 의회주의, 평화로운 노사협약을 믿으며 체제 내에서 일하는 것에 전념했다. 그들의 왼쪽에는 공산당이 있었는데, 크기는 했지만 여전히 사민당보다는 작았다. 가장 혁명적인 노동자들이 그들에게 소속되어 있었다. 로자의 후예였던 독립적인 사상가들은 이 시기, 당에서 쫓겨났다. 그 관료주의는 완전히 스탈린의 지시에 따를 뿐이었다. 중도파에는 여러 자유주의 정당들과 온건 자본주의 정당들이 있었는데, 가톨릭 중앙당의 경우가 대표적이다. 시간이 가면 갈수록 그들은 그들의 지지기반을 극우에 넘겨주게 된다. 이는 전직 군인, 흥분을 만끽한 깡패들과 다양한 집단들이 원인이었다. 국가사회주의독일노동자당이 가장 거대한 정당이 됐다. 그 이름은 민족주의적 독일인들과 사회주의적 노동자들 모두에게 매력적인 것이었다. 한 편으로 그들은 국가적 자존심을 끌어올리며, 독일은 사회주의자들이 군에서 배후중상을 부려 전쟁에서 패배했다고 주장했다. 또 한편으로는 그들은 부자들에 대한 증오심을 불러일으켰으나 이는 유대인들에 대한 적개심으로 돌려졌다 (나치가 그들을 진짜 부자들에게 팔아넘길 수 있도록 내버려두고). 1929년의 경제붕괴와 대공황 이후, 국가사회주의자들 (혹은 나치) 은 급격히 성장했다. 그들은 모든 계급에서, 특히 몰락한 중소상공업자, 학자, 자영업자, 화이트 칼라 노동자, 관료, 교사, 기술자, 무직 대학 졸업자, 부자들에 대해 분노하고 있으나 가난한 자들을 혐오하는 자들, 반자본주의적이지만 그들 스스로가 프롤레타리아로 전락하는 거을 두려워하는 중산층에서 성장했다. 혁명적인 상승기간 동안 많은 사람들이 노동계급 정당으로 눈을 돌렸다. 화이트 칼라 노동자들의 노동조합 결성이 있기도 했다. 그러나 좌익진영은 자신들이 사회적 상황을 해결 할 수 있는 능력이 없음을 증명했고, 사람들은 고통을 끝낼 수 있는 권력을 가진 그 어떤 것이던 찾기 시작했다. 아돌프 히틀러의 공약은 모순적인 약속들과 헛소리들로 가득 차 있었지만, 적어도 그는 듣기 좋은 말과 함께 직접적인 행동을 약속했다. 히틀러에게 승리하는 데에 있어 가장 중요한 문제는 실질적 권력의 중심, 특히 주요 자본가들과 장군들의 지지를 얻는 것이었다. 파시스트들은 그들 스스로 그 일에 착수했다. 처음에 대기업들은 파시스트들을 원하지 않았다. 같은 조건이라면 자본가 계급은 제한적인 민주주의를 선호했다. 이것이 그들 내부 세력들 간의 갈등을 피 흘리지 않고 해결할 수 있도록 했기 때문이다. 이는 사민주의자들이나 자유주의자들과 같은 반대파들이 자신들에게 협력하도록 만든다. 이는 대중이 대중 스스로가 국가를 이끈다고 착각하게 만든다. 그러나 대공황 시기 독일에서는 모든 것이 통제를 넘어서기 시작했다. 대기업들은 노동자들의 평균적인 삶의 질을 낮추고 이윤을 올리기 위해 노동조합과 노동자 정당들을 타격해야 했다. 그리고 동유럽과 천연자원들이 있는 곳, 다른 이윤을 불러일으킬 수 있는 곳으로 확대하는 것을 원했다. 그리고 이는 장군들의 욕구와도 맞아떨어졌다. 그들은 사회적 질서를 원했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은 나치를 고용할 준비가 되어 있었다. 이런 상황 속에서, 나치는 권력을 잡을 준비가 됐다. 나치는 자본가들에게 왕정과 관료적 경찰국가와 같은 그저 또 다른 권위주의적 국가 그 이상의 것을 제시했다. 그들에게는 절박한 중산층 인구의 대중운동이 있었고, 노동자 정당과 노동조합을 확실히 타격하는 데에 사용할 수 있었다. 그들은 수천 명의 제복 입은 깡패들을 조직해 노동자들과 싸울 준비를 하고, 노동자들의 조직을 박살내고, 노동자들의 삶의 질을 끌어내렸다. 나치는 그저 선거에서만 활동하지 않았다. 그들은 노동자들의 집단행동을 직접 공격했고, 거리에서 사민주의자들을 두드려 팼고, 그들의 신문이 판매되는 것을 막고, 정적을 암살하고, 공포정치를 형성했다. 경찰은 그들을 통제하지 않았다. 판사들은 그들을 솜방망이 처벌로 봐줬다. (근본적인 문제는 나치들에게의 제공된 "언론의 자유" 가 아니라 그 누구도 그들의 살인적 법외적 행위를 막지 못한 것에 있다.) 자라나는 파시스트들의 위협에 맞서기 위해 사민당의 관료들은 오래되고 검증된 방법을 사용하고자 했다. 그들은 국가사회주의자들을 또 다른 선거에 나서는 정당 이상이하로 보지 않았다. 사민당은 선거에 나섰고, 의회에서 활동했다. 그들은 그들의 조직을 지켰고, 그들의 노동조합, 그들의 신문, 그들의 노동자 지역조직을 지켰다. 그들은 국기단이라 불리는, 실제로는 거의 단 한 번도 사용되지 않았던 무장노동자들의 자위조직인 국기단을 조직했다. 그들은 나치즘을 합법적 선거로 물리치지 못할 이유가 없다고 보았다. 조금 더 미래로 가서, 1932년에는 또 한 번의 중요한 대통령 선거가 있었다. 히틀러가 참여했다. 공산당도 그들의 당수를 출마시켰다. 보수주의자들은 나이 많은 왕정주의자 장군인 폰 힌덴부르크를 출마시켰다. 사민당은 히틀러를 막는 것이 중요하다고 여겼고, 이는 선거주의를 통해 이루어질 수 있다고 보았다. 그들은 폰 힌덴부르크를 지지했고, 파시스트가 아닌 차악으로서 보았다. 그들의 슬로건은 "히틀러를 타격하고 힌덴부르크를 뽑자!" 였다. 폰 힌덴부르크는 대통령으로 당선됐다. 여러 사건들이 있던 이후, 그는 히틀러를 수상으로 임명했고, 그것으로 기나긴 어둠이 시작됐다 (드래퍼, 1972). 폰 힌덴부르크는 나치가 아니었다. 그는 이 무지렁이들이 존경받는 인물들을 통해 통제될 수 있다고 바라보았다. 히틀러가 그의 차악이었다. 독일인들은 단 한 번도 다수표를 줬던 적이 었지만, 그들은 그럼에도 권력을 가져갔다. 우리는 조직된 노동계급의 사활이 걸린 극단적 상황 속에서조차도 선거주의는 작동하지 않음을 볼 수 있다.파시즘에 맞선 투쟁은 선거전술의 틀 바깥에서 이뤄졌어야만 했다. 또 다른 핵심은 나치들이 부상 할 때, 수백만 명의 혁명적 노동자들이 스탈린주의 관료주의에 의해 묶여있던 공산당의 행동이었다. 안타깝게도 공산당은 20년대와 30년대 초, 모스크바에서 채택된 미친 방침으로 인해 완전히 방향성을 상실했다. 이 방침들은 제 3기라고 불리는 혁명적 시간대로 세계가 접어들었다고 이야기했다. 제 1기는 1차 세계대전 이후의 혁명적 기간이며, 제 2기는 그 이후의 개량주의적 정치가 적합했던 안정기이며, 바로 지금이 제 3기라는 것이었다. 개혁을 위한 투쟁은 내팽개쳐졌다. 공산당은 사민당 주도 노동조합에서 탈퇴하고 그들만의 극도로 혁명적인 노동조합 (하지만 작은)을 만들었고, 지금이 바로 최후의 혁명적 전투의 시기라고 바라봤다. 이 정책은 절대다수의 노동자들이 여전히 사민당과 그들이 주도하는 노동조합에 소속되어 있었고, 그들은 1918년과 1923년 혁명의 실패 이후 혁명에서 한 발자국 물러서 있었다는 사실을 간과하고 있었다. 이는 당면한 파시즘에 맞서 노동자들의 당면한 민주적 권리를 지키는 과제를 무시한 것이지, 혁명적 시도를 한 것이 아니다. 이러한 접근을 뒷받침하는 이론은 "사회파시즘" 이론이었다. 여기서는 파시스트들만이 파시스트인 것이 아니라, 공산당 이외의 모든 정당들과 조직들 또한 파시스트라고 하는 것이었다. 이는 "사회파쇼" 인 사민당 또한 또 다른 종류의 파시즘으로 포함했다 (아나키스트들은 "아나키즘적 파쇼" 였다). 스탈린은 "파시즘은 사민주의의 적극적인 지원에 기반을 둔 부르주아 계급의 전투 조직이다. 객관적으로 사민주의는 파시즘의 온건파이다. 이 조직들은 서로 모순되지 않는다. 그들은 대척점이 아니라 쌍둥이이다." 라고 세계에 선언했다. 개량주의자들과 자유주의자들, 사민주의자들까지도 자본주의를 지지한다는 것은 사실이다. 그들의 약점으로 인해 그들은 파시즘이 자라나고 권력을 잡는 것을 용인했다. 하지만 그들이 파시스트들이라고 이야기하는 것은 이것과는 전혀 별개의 문제다! 사민주의자들은 부르주아 민주주의를 유지하는 데에 있어 이해관계가 있었다. 그들의 정당, 그들의 노동조합, 그들의 다른 모든 조직들은 오로지 선출된 정부, 언론의 자유, 조직의 자유의 존재 아래에서만 존재할 수 있었다. 파시스트들은 반면 선거와 마찬가지로 노동자들의 조직을 파괴하고자 했다. (비록 히틀러가 집권하기 이전의 일이지만, 파시스트 이탈리아가 그 명확한 선례다.) 스탈린주의자들에 의해 사민주의자들이 파시스트로 결정된 이상, 나치에 맞선 그 어떤 연합도 형성될 수 없었다. 그리고 실제로 공산주의자들은 사민당에 맞서 나치와 연합하여 어느 한 지역의 사민당 정부에 반대하는 주민투표를 지지하기도 했다. 부르주아 민주주의 또한 파시즘적이고 파시즘의 통치와 다를 바 없다는 이유 덕분에, 나치에 맞서 민주적 권리를 수호하고자 하는 그 어떤 노력도 있을 수는 없었다. 그들은 부르주아 민주주의 아래에서는 노동자들이 그들의 노동조합과 정당을 가질 수 있었고, 진짜 파시즘 아래에서는 그 모든 것들이 파괴되고 불법화되며 지도자들이 살해됐을 것이란 것을 무시했다. 이는 분명 큰 차이다! 즉, 핵심은 부르주아 민주주의를 수호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존재할 수 있도록 하는 노동자 민주주의적 요소를 수호하는 것이었어야 했다. 사민당과의 그 어떤 동맹도 거부하는 것이 괴상한 일인 것처럼 보이자, 공산당은 "아래로부터 통일전선"을 요구했다. 이는 사민당 지도부들이 아니라 사민당 평당원들과 일반 지지자들과 동맹을 맺겠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사민주의자 노동자들이 사민당 지도부를 지지하도록 만든 것은, 그들이 공산당이나 다른 정당의 지도부나 정당을 지지하지 않고 그들의 지도부를 지지했기 때문이다. 그들은 그들의 지도부와 조직을 공산당을 지지하기 위해 버리고자 하지 않았다 (통일전선과는 별개로 사민당을 탈당하고 공산당에 입당할 준비를 했던 소수를 제외하고). 이러한 상황들은 (제 3기와 사회 파시즘 이론) 시대의 객관적 분석에 기반을 둔 것이 아니라 러시아 관료들의 필요에 의해 나타난 것이다. 소련은 급격한 산업화와 농업의 집산화를 실행하고 있었다. 이 광란에 가까운 추진은 구 혁명가들에 대한 거대한 내부적 숙청과 더불어 수백만 명의 과로와 기아로 인한 사망자들을 낳았다. 공산주의 정당들에 대한 국제적인, 초좌파적인 방침은 러시아 내부 정치적 상황을 반영한 것이었다. 사민당은 합법적이고, 선거주의적인 전술에 모든 것을 쏟아부었고 공산당은 미친 전술에 의해 막혀있었다. 모든 다른 조직들과 경향들은 작고 미약했으며, 여기에는 아나키스트들 또한 포함됐다. 트로츠키주의자들을 예시로 들면, 그들은 고작 수백 명의 지지자들을 가지고 있을 뿐이었다. 다만 지적이고 현실적인 대안적 지향을 제안한 당대 트로츠키의 저술을 보면 흥미로운 점이 있다. (아나키스트들이 트로츠키로부터 배울 점이 있다고 주장하는 것은 논쟁의 여지가 있다. 아나키스트들이 자유의지주의적인, 인본주의적인 마르크스주의자들과 공통점이 있다고 이야기하는 것은 적잖게 나오는 이야기지만, 이건 또 다른 의미이다. 트로츠키 [와 레닌] 는 아나키스트들과는 다른 [중앙집권적 경제를 통해 운영되는 중앙집권적 국가를 통제하는 중앙집권적 정당의 통치] 목표를 가지고 있었으나, 그들의 수단은 아나키스트들과 겹치는 면이 있다. 왜냐하면 (고립되고 빈사 상태에 빠진 레닌주의자들인 스탈린주의자들과는 달리) 트로츠키와 레닌은 정말, 정말로 국제 노동계급의 혁명을 바랬기 때문이다. 그들은 노동계급이 스스로 자본주의에 맞서 조직하고, 그것을 전복시키기 위한 전술과 전략을 매우 진지하게 고민하고 고안했다. 그러한 전술과 전략들은 많은 경우 여러 방면에서 아나키스트들의 약점이 되기도 했다. 레닌주의자들의 목표가 그들의 정당이 권력을 잡도록 하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그들은 그것을 노동계급 혁명을 원했기 때문에 그렇게 한 것이며, 이는 단 한 순간도 노동계급의 조직적 혁명을 조직한 적이 없던 스탈린주의자들과는 다르다. 간단히 말해서 트로츠키의 수단은 자유의지주의적 사회주의자들의 그것과 겹치기는 하나, 그의 최종적 목적은 분명 달랐다. 이러한 수단들에 대해 주의 깊게 분석한다면 나치즘에 맞선 투쟁과 같은 상황에서 아나키스트들에게 유용한 수단이 나타날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이 트로츠키주의, 혹은 마르크스주의 전체에 동의한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트로츠키는 좋은 이유와 나쁜 이유로 공산주의자들에게 글을 썼다. 좋은 이유로는 공산주의자들 중에는 다수의 혁명적 노동자들이 포함되어 있었다는 점이다. 나쁜 (혹은 어리석은) 점은 그가 여전히 그의 지지자들과 함께 독일과 러시아의 공산당으로 돌아갈 수 있다고 생각한 것이었다. (그가 그의 평생을 스탈린주의에 맞서 싸우기는 했지만, 그는 스탈린주의가 무엇인지, 그리고 그가 그것에 어떤 것을 기여했는지 결코 완전히 이해하지 못했다.) 그는 공산주의자 노동자들에게 나치즘은 그저 또 다른 권위주의적 운동이 아니라는 것임을 경고했다. 기존의 부르주아 정당들 또한 파시스트들이라는 단정은 나치 (진짜 파시스트들인) 들 또한 그들과 다를 바 없게 보이도록 했다. 나치즘이 자본주의를 대체하려 하지는 않았고, 거대 자본가들은 나치 아래에서 꽤 잘 살아갔다. 하지만 이는 대중운동이었다. 국가권력과 이것이 결합한다면, 이는 독특한 형태의 억압이 될 것이었다. 이는 노동자들의 조직을 완전히 파괴할 것이었다. 이는 노동자들의 지도자들뿐만이 아니라 평조합원들까지 살해하려 들 것이었다. 모든 마을과 이웃에 공작원들이 있을 것이었고, 모든 스포츠와 체스클럽, 모든 상점에 또한 마찬가지일 터였다. 그는 그렇게 경고했다. "노동자, 공산주의자들이여, 그대들은 수십만, 수백만이지만 그 어디로도 떠날 수 없다. 그대들을 위한 여권은 충분하지 않다. 파시즘이 권력을 잡으면 그대들의 두개골과 척추를 전차마냥 짓밟을 것이다. 그대들의 구원은 무자비한 투쟁에 있다. 오직 사민주의 노동자들과의 전투적 단결만이 승리를 가져올 수 있다. 서두르자, 노동자, 공산주의자들이여, 그대들에게 시간은 얼마 남지 않았다!" (트로츠키, 1971, p. 163) 그는 공산주의자들에게 사민주의자들과의 동맹을 제안할 것을 제안했고, 거부한다면 사민주의자 지도자들을 공개하라고 제안했다. 이 노동계급 동맹 (통일전선) 은 현실적인 목표를 가지고 있을 것이다. 그 정당들과 그들의 노동조합들과 여러 조직들은 서로를 나치의 공격으로부터 방어할 것에 동의할 것이다. 모든 도시와 모든 마을에서 그들은 통합방어위원회를 구성할 것이다. 그들은 상호 순찰을 통해 나치를 거리에서 몰아낼 것이다. 파시스트 본부를 찾아내고, 그들에 맞서 싸움을 이어나갈 것이다. 그들은 상점들과 일터에 위원회를 형성하고 그들이 파시스트들 지원하는지 확인하며, 지원한다면 그것을 멈추기 위해 조치를 취할 것이다. 그들은 파시스트들이 지역적으로나 국가적으로 권력을 장악했을 때 총파업을 위한 공동계획을 세울 것이다. 이 모든 것은 실용적이고 탄탄했다. 트로츠키는 나치에 맞서는 상황 속에서 방어위원회와 공장위원회가 러시아 혁명기의 소비에트들처럼 (원래 파업 위원회였던), 처음에는 소수였지만 최고의 계획과 투쟁성을 갖췄기에 우위에 섰던 혁명가들처럼 될 것을 소망했다. 그러한 위원회들은 사회주의로의 전환을 향한 계획들을 세울 수 있을 것이다. 상황들이 진행될수록 그들은 혁명의 본령을 따라갈 것이다. 그들 부르주아 국가의 틀 자체를 평의회 제도로 전환할 지도 모를 것이다. 트로츠키는 공산주의자들과 사민주의자들의 통합을 주장하지는 않았다. 그는 두 세력이 공동 후보를 내거나 공동 선전물을 내는 것을 원하지는 않았다. 이는 동맹이었지, 통합이 아니었다. "따로 행진하며, 함께 타격하자!" 라고 그는 말했다. 노동자들은 혁명주의자들과 개량주의자들이 함께 움직이는 것을 보고 그들을 서로 비교한 뒤, 혁명주의자들을 고를 것이라 그는 여겼다 (공산주의자로 보이는 사람들을). (1) 혁명주의자들이 개량주의자들과 분리되어 명확한 계획을 세우고 스스로 혁명의 깃발을 올리기 위해서, 그리고 (2) 대중행동과 노동조합, 대중운동에 개량주의자들과 함께 동참하면서 혁명적 움직임이 가장 좋은 것이라 설득하기 위해서 이는 중요했다. 이러한 생각들이 우리에게는 상식적으로 보일 수 있다. 이탈리아의 아나키스트들이 근본적으로 주장했던 것, 파시스트에 맞선 상호방어를 위한 노동자 조직들의 연합과 비슷한 것이기 때문이다 (노동계급의 위에 공산당을 집권시키겠다는 트로츠키의 궁극적 목표를 무너뜨리는 것이긴 하지만). 계급에 맞서는 계급. 주목할 만한 것은 공산당이 재기했던 사회파시즘 이론 (그렇게 불릴 수 있는 정도라면) 에 대한 저항이었다. 공산당 지도부는 사민당이 1918년 혁명을 배반했으며, 룩셈부르크를 포함한 많은 공산주의자들을 살해했고, 지역 경찰 지도부를 포함해 부르주아 정부에 한 자리를 얻으면서 선거에 나가 당선됐으며, 억압적 법안에 대한 책임을 지고 있고 지금도 그렇다고 짚었다. 모든 것은 사실이었으나, 그러나 그것이 사민주의자들이 파시스트들이라는 근거가 되지는 않는다. 사민주의자들은 여전히 부르주아 민주주의에 기대고 있었으며, 이는 나치가 부르주아 민주주의를 (자본주의가 아닌) 파괴하려 했던 것과는 대조된다. 나치에 맞서, 트로츠키는 "악마와 그 할머니" 와도 동맹을 맺을 것이라 천명했고, 심지어는 혁명주의자들을 억압했던 사민주의자들과도 그럴 것이라 이야기했다. 그는 이솝우화 형식으로 우화를 썼다. "하루는 소를 파는 상인이 소들을 도축장으로 끌고 왔다. 그리고 도살자가 날카로운 칼을 들고 가까이 다가왔다. '우리가 대열을 좁혀서 저 처형자를 뿔로 돌격해 몰아내자.' 소들 중 한 마리가 제안했다. '저 도살자가 우리를 이곳으로 끌고 온 상인보다 더 나쁘다고 말할 게 있다면 이야기해 봐.' 라고 마누일스키 [스탈린의 코민테른 비서] 에게 정치적 교육을 받은 소들이 답했다. '그 이후에 상인을 상대할 수 있을 거야.‘ '아무것도 하지 않을 거야.' 소들이 그들의 강령에 확신에 차 말했다. '넌 우리의 적을 좌익으로부터 보호하려 애 쓰고 있어. 넌 네 스스로 사회도살자임을 인증한 거야.‘ 그리고 그들은 대열을 좁히는 것을 거부했다" (트로츠키, 1971, p. 293). 나치들은 어느 정도 합법적으로 권력을 쥐었다. 그들은 그 이후 모든 선거와 정당을 폐지했고, 이는 노동자 정당들과 부르주아 정당들 모두 포함된 것이었다. 그들은 그들을 지원하는 자본가들을 기쁘게 만들기 위해 노동조합을 불법화했고 노동조합의 지도부를 체포했으며, 노동자 정당들의 지도부와 심지어는 그 평당원들까지 체포했다. 자본가들과 장군들을 만족시키기 위해, 그들은 그들의 좌익적 목소리를 믿었던 자신들의 지지자와 당원들 또한 살해했다. 그들은 모든 마을, 스포츠 클럽, 공장에 그들의 지지자들을 꽂아 넣었다. 서서히 (트로츠키가 예상했듯), 그들의 중산층 지지자들은 나치의 거대 자본의 지지를 받기 위한 행동들에 의해 배반당했다. 나치는 대중운동에 대한 필요성을 상실했다. 그렇게 되면 그 정권은 또 다른 관료적 경찰국가로 전락하고, 특수한 투쟁심 또한 잃을 것이었다. 하지만 그것은 미래에 있을 일이었다. 당장 정권은 인류 역사상 그 누구도 견줄 수 없는 범죄를 저지르기에는 충분히 강했다 (홀로코스트와 그 다른 것들). 이는 미국, 영국, 러시아 제국주의가 마침내 그 강대한 힘을 통해 나치를 타격하도록 만들었다. 공산당과 사민당은 나치가 권력을 잡을 때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총파업도 없었고, 반란도 없었다. 그들은 거의 신음조차도 내지 않고 무너졌다. 사민주의자들은 그들이 불법화되기 직전, 나치의 외교 정책에 의회에서 찬성표를 던졌다. 이는 노동계급에게 막대한 패배가 되었고, 그 영향은 지금까지 남아있다. 살해되거나 체포되지 않은 사민당 지도부들은 서방으로 망명을 떠났다. 그들은 연합군이 또 다른 부르주아 민주주의를 수립할 때 다시 돌아왔다. 살아남은 공산당원들은 러시아로 떠났다. 많은 이들은 스탈린에 의해 살해당했다. 다른 몇몇은 러시아군과 함께 돌아와 그들만의 전체주의적인 국가자본주의 국가를 동부 독일에 세웠다. 공산주의 정당들은 그들의 이론과 실천에서의 실수를 분석하고자 하는 시도를 하지 않았다. 그들은 그들이 했던 모든 것이 옳았다고 판단하고 행동했다. 그리고 그들은 조금 더 우익적 방향으로 전환했다. 그들은 통일전선을 지나 인민전선으로 움직였다. 이는 계급을 넘나드는 동맹이었고, 노동자 정당들뿐만이 아니라 자유주의적 부르주아 정당들과의 동맹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이는 어떠한 사안에 대한 일시적 동맹이 아니었다. 이는 통합된 정치권력을 확보하기 위한 장기적인 동맹인 것처럼 보였다. 이는 그들의 실천이 부르주아 파트너와의 동맹을 유지하기 위해 친자본주의적 수준에서 더 나아가지 못한다는 것을 의미했다. 하지만 자본주의 정당은 항상 다른 자본주의자들이나 파시즘의 공격에 취약했다. 파시즘은 자본가 계급 (혹은 그 기반)을 위협하지 않았고, 그 대신 노동계급과 그 조직들을 위협했다. 인민전선 정부는 프랑스에서 권력을 잡았다. 우리는 스페인에서의 인민전선이 만들었던 효과를 볼 수 있었고, 이번에는 심지어 아나키스트들 까지 포함되어 있었다. 트로츠키는 마침내 공산주의 정당들이 희망이 없다는 것을 인지했고, 그들에게 다시 합류하고자 하는 시도를 포기했다. 그는 소련 관료주의에 맞선 노동자들의 혁명을 촉구했다. 그는 다당제, 민주적 소비에트를 주장했다. 그러나 그는 여전히 스탈린주의 러시아가 자본주의로부터 수호되어야 할 노동자 국가라고 믿었고, 국유화 된 생산수단들을 노동자 국가의 조건으로 인정했다. 그는 새로운, 네 번째 인터내셔널을 만들었고, 그 시도는 완전히 실패했다. 후기트로츠키주의자들은 각각 사민주의나 스탈린주의의 한 종류가 되거나, 둘 모두의 종류가 되었다. ** 3부. 결론 : 혁명적 민주주의 *** 12장. 민주주의냐 국가냐 위에서 언급한 것처럼, 모든 봉기들은, 그것이 혁명적이었건 반혁명적이었건 간에, 관료주의적이고 군사주의적인 자본주의 국가를 국가없는 사회로, 자주경영의 사회로, 참여적인 사회로 대체할 가능성을 제기해 왔다. 이러한 경향성을 무엇이라 묘사하면 좋을까? 마르크스주의에 대한, 국가 사회주의 전반에 대한 신뢰는 지속적으로 하락해왔다. 직접적이고 대면적인 정치적 · 경제적 자주경영을 개념화할 수 있는 대안적 방식이 필요한 시기가 되었다. 많은 좌파들은 민주적 혁명이라는 또 다른 전통으로 고개를 돌렸다. 민주주의는 자본주의 사회의 권위주의에 반대하는 토양이라 볼 수 있다. (Laclau & Mouffe, 1985; Morrison, 1995; Mouffe, 1992, 1996; Trend, 1996; Wood, 1995). 사회주의는 급진적 민주주의를 확보하기 위한 수단이 될 수도 있는 것이다. 급진적 민주주의가 사회주의를 확보하기 위한 수단이 되는 것이 아니라 말이다. 계급적으로 “민주주의”는 두 가지 상호모순적 의미를 가지고 있다. 민주주의는 현존 국가를 정당화하는 기제일 수도 있고, 혁명적 대중해방의 전통일 수도 있다. 위에서 주어진 민주주의일 수도 있고, 아래에서 건설한 민주주의일 수도 있다. 민주주의의 이상은 아름답다. 그렇기에 현존하는 “민주주의” 국가들이 민주주의를 주요 이데올로기로 둔다. 주기적 선거와 (상대적) 표현과 결사의 자유는 실질적으로 소수가 다수를 지배하는 사회를 정당화하는 기제로 사용된다. 자본주의적 민주주의는 지배자의 각 세력들이 상대적으로 평화롭게 다툼을 종식시키기 위해 사용된다. 민주주의는 반란적 대중의 세력을 체제 내로 끌어들이는 기제로 사용된다. 하지만 민주주의는 지배계급에 대한 압제당한 이들의 울부짖음이기도 하다. 민주주의는 평범한 사람들이 사회 구성에 참여하여 통제권을 가져와야 한는 외침이다. 이러한 이상은 부족 평의회를, 고대 아테네를, 영국과 미국, 프랑스의 부르주아 혁명을, 미국의 민권운동을 거쳐 오늘날 수백만의 인민이 사랑해 마지않는 이상으로 자리잡았다. 민주주의는 인민의 투쟁이 흘린 피로 지배자들로부터 빼앗아온 권리다. 민주주의는 국가를 판단하는 준거다. 민주주의는 국가를 반대할 근거다. 수세기 동안 “민주주의”는 급진적 개념임과 동시에 계급적 개념이었다. 고대 그리스에서 민주주의는 부유한 귀족이 아닌 가난한 대중의 통치를 의미했다. 플라톤은 귀족정을 찬미하면서 민주정을 비난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귀족정에 일부 민주적 요소(대의제)를 가미한 혼합 정부를 원했다. 루소 등의 계몽사상가들은 대면적 공동체에 근거한 직접 민주주의를 주장했다. 미국 독립전쟁 말기, 대부분의 건국의 아버지들은 민주주의라는 개념을 끔찍하게 여겼다. 이들은 가난한 다수가 부자의 부동산을 약탈할 법을 만들 것이라고, 화폐의 가치를 떨어트려 부채를 탕감해낼 것이라고 여겼다. 이들은 새로운 사회의 민주적 요소들을 통제하기 위하여 헌법을 만들었다. 이러한 과정을 거치면서, “민주주의”라는 단어는 급진성과 계급성을 내포한 채로 확산되어갔다. 사회주의적 아나키즘을 가장 극단적이고 공고하며 전면적인 민주주의라 바라보는 사람으로서, 이러한 이론적 발전은 흥미로운 것이다.(프라이스, 2000) 폴 굿먼이나 노엄 촘스키 같은 이들은 그들의 아나키즘이 제퍼슨으로부터 존 듀이까지 이어져 온 민주주의 전통의 연장선이라고 주당한다. 19세기 미국의 아나키스트였던 벤자민 터커는 “아나키스트들은 단지 극단적인 제퍼슨주의적 민주주의자일 뿐”이라고 말한 바 있다.(크리머맨&페리, 1966) 엠마 골드만의 전기 작가는, 엠마가 “단지 극단적인 연방주의적 민주주의자”였다고 말한다. 조지 버나드 쇼가 아나키즘을 공격하기 위해 쓴 글에서 그는 “아나키즘은 민주주의를 최대한 밀어붙이는 것을 의미”한다고 말한다. 현대의 아나키스트인 머레이 북친은 “자유로운 사회는 민주적이지 않을 수 없다”고 쓰고 있다. 하지만 아나키즘과 민주주의의 역사적 관계는 매우 애매모호한 위치에 놓여있다. 이 둘 모두가 얼마나 모호하고 결론이 미정인 상태로 있어왔는지를 고려해보면, 놀라운 일은 아니다. 아나키스트 역사학자인 조지 우드콕은 아나키즘은 민주적이지 않고 “귀족적”이라고 말한다. 마르크스주의 역사학자인 할 드레이퍼는 아나키즘이 반민주주의적이라고 공격한다.(아래를 보라) 국가없는 사회를 구상함에 있어 민주주의를 거부한 것은 아나키스트만 있는 것이 아니다. 레닌은 『국가와 혁명』에서 “민주주의는 국가”이기에, “국가의 철폐는 민주주의의 철폐를 의미한다”고 적고 있다. 레닌의 목적이 민주주의가 없는 사회를 건설하는 것이었다고 말하는 것은, 레닌이 실제로 그러한 사회를 건설해버렸다 해도, 분명한 오류이지 않겠는가. 하지만, 나는 아나키스트들이 민주주의와 어떠한 관계를 맺어야 하는가에 집중하여 논의를 풀어내고자 한다. “아나키스트”라는 단어를 가장 먼저 사용했다고 알려진 저작 『소유란 무엇인가』에서 프루동은 노골적으로 그가 민주주의자라 불리는 것에 반발했다. “몇몇 독자들이 보내온 편지에서 그들은 ‘당신은 민주주의자다’라고 말한다. ‘아니다.’ ‘그렇다면 당신은 무엇인가?’ ‘나는 아나키스트다.’”(우드콕, 1962) 하지만 수년 후, 프루동은 국가를 자발적으로 연합한 생산자 조합, 즉 “민주주의적 사회 공화국이라는 공통분모로 묶인 광대한 연방”이라는 민주적 형태로 대체할 것을 옹호한다. 아나키즘은 두 가지 의미로 존재하는 민주주의에 대하여 독특한 관점을 제시한다. 자유주의자들과 사회민주주의자들은 민주주의를 신봉하며 스스로 “민주사회주의자”라고 자칭한다. 하지만 이들은 체계에 매우 비판적인 동시에 민주주의 이론의 신비로운 측면에 굴복한다. 이들은 현존국가가 민주주의적이라 바라보면서, 이를 수정하고, “더 민주적”으로 만들고자 한다. 그 반대편에는 권위주의적 혁명세력(스탈린주의자, 급진적 민족주의자 등)이 있다. 이들은 미제국주의가 만들어내는 민주주의라는 환상에 빠지지 않는다. 하지만 이들의 목적은 국가를 새로운 국가로 바꾸어 그 지배권을 가져오는 데에 있다. 이들은 대중의 자주경영을 목적으로 두는 것을 거부한다. 아나키스트들은 현존국가가 민주적이기에(혹은 그래야 하기에) 그것을 지재해야 한다는 주장을 거부하면서 해방 기제로서의 민주주의라는 관점을 유지할 수 있다. 하지만 이를 위해 아나키즘과 민주주의는 함께 받아들여져야 한다. 이 문제를 명확히 하기 위하여, 나는 먼저 민주주의의 관점에서 아나키즘을 비판하고, 아나키즘의 관점에서 민주주의를 비판해보고자 한다. 로버트 달의 『민주주의와 그 비판자들』은 민주주의 민주주의에 관하여 명확하고 사려 깊은 서술을 하고 있는 저서다. 달은 주장을 전개하기 전에, 민주주의에 “반대되는” 두 가지 경향에 대하여 논한다. 하나는 아나키즘이고, 하나는 “후견주의”다. 달은 아나키즘이 “순수하게 자발적인 연합체만으로 구성된 사회, 국가없는 사회”라고 정의한다. 이는 충분히 옳다. 그는 이 연합체들이 민주주의와 마찬가지로 잘 운영될 것이라고 첨언한다. 그리고 이것은 아나키즘이 민주주의에 반대하는 것이 아니라 “민주주의 국가”에 반대하는 것임을 명확히 한다. 안타깝게도, 달은 “국가”가 무엇인지 설명하지 않는다. 달이 의미하는 바 “국가”는 분명하게도 “조직적 억압의 주된 수단”인 것이다. 달은 어느 정도의 억압은 필요하다고 주장하면서, 모든 사회적 억압에 반대하는 아나키스트들이 잘못되었다고 주장한다. 새로운 사회 건설의 목적은 “억압을 최소화하고, 만족을 극대화하는 것”이어야 할 것이다. 나는 그의 목표에 근본적으로 동의한다. 아나키즘적 자유를 쟁취한 이후 수 세대가 지난 후에야 어쩔지 모르겠지만, 새롭게 건설된 아나키스트 사회는 미치광이 살인마들이나 조직된 반혁명분자들의 폭력을 통제할 수단이 필요할 것이다. 하지만, 달은 이누이트족과 같은 비문명 사회가 국가없이도 천여년간 만족스럽게 존속하였다는 사실을 인정하면서도, 이러한 사회가 어떻게 국가가 없이 억압에 대한 사회적 필요를 만족시킬 수 있었는지는 고려하지 않는다.(아나키스트의 관점은 바클리(1990)을 보라) 앞서 언급하였듯, 아나키스트들은 국가를 경찰, 감옥, 군대, 정치적 관료제 등의 특별한 억압 기구를 통하여 소수 계급이 사회를 통제하기 위하여 만들어진 정치적이고 군사적인 기구라고 정의한다. 아나키스트들이 주장하는 것은, 이 관료적이고 사회적 소외의 원천인 국가라는 기구를 철폐하는 것이 가능하다는 것이다. 아나키스트들이 “민주주의 국가”를 비난하는 것은, 그것이 억압적이기 때문인 것이 아니다. “국가”는 “민주주의”적일 수 없기 때문이다. 국가라는 억압의 기구는, 본질적으로 사회 위에 군림하며 반사회적인 기구다. 국가는 소수 지배계급이 다수 피지배계급을 억압하는 것에 복무할 수밖에 없다. 달은 이 문제를 직접적으로 다루지는 않지만, 그의 책의 요점은 이 문제와 분명한 연관성을 가진다. 그는 현대 사회는 비문명사회의 부족들이나 후기 도시국가들에 비하여 너무 크고 복잡하기에, 대면적이고 직접적인 민주주의에 기반을 두고 운영될 수 없다고 주장한다. 그는 민주주의를 대규모로 운영하기 위해서는 대의제를 “발명”할 필요가 있었다고 말한다. 그는 현대 사회에서는 대의적 정부(국가)만이 민주주의를 가져올 수 있었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이는 양면적으로 해석될 수 있다. 대의제는 민주주의 같은 무언가가 현대의 대규모 민족국가에서 성립할 수 있도록 한 것이 맞다. 하지만 이 대규모 민족국가라는 것은 그 자체로서 ‘민주주의’라고 불리는 소수에 의한 지배가 성립할 수 있도록 하고 있는 것도 맞다. 우리는 직접적이고 참여적인 민주주의 대신에, 인민들의 실질적 의사결정을 가로막고 있는 선출정치인들과 정부 관료 계층을 가질 수 있게 되었다. 소극적인 시민들은 “대표자”들이 그들 대신 정치적이 될 수 있도록 하는 선거를 가질 수 있게 되었다. 우드(1995)는 미국 건국의 아버지들이 대의제를 필요로 할 만큼의 거대 공화국을 두는 것의 장점은 대의제를 통해 대중의 열정에 거름막을 둘 수 있게되는 것이라고 주장했다는 것을 지적한다. 물론, 어느 정도의 대의제는 필요할 수 있다. 아나키스트들은 연방주의자이기에 이러한 주장에 일반적으로 동의한다. 사회적 맥락을 다르게 구성한다면 “대의제”와 민주주의의 여러 요소들은 매우 다른 것이 될 수 있다. 그리고 이를 위해 아나키스트들은 크게 두 방향에서의 사회적 변혁을 제안한다. 하나는, 압제자와 피압제자가 모두 사라진 평등한 사회를 건설하거나, 불평등한 관계를 평등하게 재정의하는 것이다. 부가 평등하게 분배되고, 모든 억압을 철폐할 때, 사회는 더 이상 서로 적대적인 세력들간의 알력에 끌려다니지 않게 될 것이다. 사회를 묶어내기 위하여 국가는 필요하지 않다. 국가가 없을 때, 만족을 극대화하고 억압을 최소화하는 것은 더 쉽게 달성할 수 있다. 두 번째로, 아나키스트들은 인민총회를 통하여 실현되는 직접민주주의에 사회가 뿌리를 두어야 한다고 바라본다. 이는 사업장에서, 공동체에서, 다른 자율적 연합에서 모두 동일하게 적용되어야 한다. 지역적으로 이루어지는 결정이 많을수록, 중앙에서 내리는 결정은 줄어들게 된다. 인민들이 직접 민주주의를 더 선명하고 일상적인 삶의 방식으로 경험하면 할수록, 인민들은 대의원 총회에 파견한 대의원들을 실질적으로 통제할 수 있게 될 것이다. “만약 전체 인민들이 실질적으로 자신의 주인이라면, 통치하는 자도, 통치당하는 자도 존재하지 않게될 것이다... 국가는 사회와 같은 위치로 격하될 것이고, 산업적 조직 뒤로 사라지게 될 것이다.”(게랭, 1970) 달 역시 이러한 주장을 인지하고 있었고, 이에 일정 부분 동의했다. 그는 사회적 · 정치적 불평등을 경감할 방법을 찾아 헤맸다. 그는 지역 공동체 층위에서의 의사결정과, 이를 위한 참여의 증대를 옹호한다. 그는 사회가 경제를 소유하고 규제하지만, 기업들의 경쟁은 존재하는 민주적 사회주의를 지지한다. 다른 “시장 사회주의” 지지자들과 달리, 달은 기업은 노동자들에 의하여 민주적으로 운영하여야 한다고 주장한다. “노동 대중의 일상생활에서 권위주의적 기구들이 가지는 중요성을 과소평가하고, 경제적 기업구조의 통제에 더 민주주의적인 체제를 도입하는 것의 결과를 과소평가하는 것은 실책이 될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마르크스주의자들이나 아나키스트들과 달리 사회의 혁명적 변혁의 필요성을 부정한다. “시장 사회주의”라는 단어 자체가, “사회주의”이면서도 경제가 민주적 의사결정으로 운영되는 것이 아니라 시장에 의하여 운영되는 것임을 보여주고 있지 않은가. 달은 우리의 사회가 매우 불평등하다는 것에 동의하면서도, 이 사회가 소수의 지배 아래에 있다는 것은 부정한다.(그 소수가 서로 경쟁하기 때문이다.) 그가 “폴리아키”라고 부르는 이 사회는 불완전하다. 하지만 그는 여전히 이 사회가 민주적이고, 지지할 가치가 있다고 말한다. 결과적으로, 그는 민주주의가 현존 자본주의 국가를 정당화하는 것을 수인한다. 문제는, 달이 현실을 들어 그의 이론을 뒷받침하고자 할 때마다, 언제나 현존 부르주아 민주주의 국가를 이야기한다는 것이다. 이들을 모형으로 삼는 것은 민주주의의 가능성을 제한적으로 바라볼 수밖에 없도록 만든다. 이 지점에서, 오히려 아나키스트들은 역사적 혁명들에 집중한다. 머레이 북친은 18세기 종교 개혁 시기의 농민반란부터 현대 산업노동자들의 반란까지, 여러 혁명들을 검토했다. 이 과정에서 그는 이 모든 혁명들이 국가를 공동체적인 자주적 조직으로 대체하였음을 발견한다. 압제당한 인민들은 언제나 대면적이고 직접적인 민주적 총회와, 소환가능하고 제한적인 위임만을 받은 대의원대회를 조직하여 왔다. 앤디 앤더슨은 1956년의 헝가리 혁명의 교훈을 다음과 같이 요약한다. “이후 수년간, 혁명가들이 고심해온 중요한 문제들은 단순한 의문점들로 압축되었다. 헝가리 혁명의 강령에 동의하는가, 아니면 반대하는가? 노동자의 자주적 생산 관리에 동의하는가, 아니면 반대하는가? 노동자 평의회를 통한 통치에 동의하는가, 아니면 반대하는가?” 이탈리아의 위대한 아나키스트 에리코 말라테스타 역시 반국가주의와 민주주의의 관계를 제시했다. 말라테스타는 아나키즘의 개인주의적이고 반조직적인 경향성에 반대하면서, 아나키스트들이 자신의 조직을 만들고, 노동대중의 자주적 조직을 촉진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1920년대에, 말라테스타는 우리가 논의하고 있는 주제에 관한 짧은 글 두 개를 저술했다. 그 중 하나의 제목은 이 글의 주제를 여실히 드러내고 있다. “아나키스트 : 민주주의자도, 독재자도 아닌 이들” 말라테스타는 자본주의적 민주주의 국가는 독재를 선호한다고 믿었다. 그리고 그렇다면 아나키스트들은 민주주의의 이론을 바탕으로 민주주의를 공격할 수 있을 것이었다. “민주주의가 가장 끔찍한 것은, 민주주의는 최소한 교육적 관점에서는 최선의 독재를 선호한다는 것이다. 민주주의는 거짓이다. 현실에서 민주주의는 소수가 특권계급의 이익을 보장하는 귀족정이다. 우리는 자유와 평등의 이름으로 이에 맞설 것이다.” 이에서 알 수 있듯이, 민주주의에 대한 말라테스타의 반대는 정확하게 자본주의와 국가의 합리화 이데올로기로서의 민주주의를 향하고 있다. 그러면서 말라테스타는 이러한 민주주의가 주장하는 바 다수에 의한 통치의 원칙을 비난한다. “우리는 다수에 의한 통치도, 소수에 의한 통치도 지지하지 않는다. 우리는 민주주의도, 독재도 지지하지 않는다. 우리는 자유로운 합의를 지지한다. 우리는 아나키를 지지한다.” “소수에 대한 권리를 존중하는 위에서 이루어지는 다수에 의한 통치”는 민주주의의 원칙이다. 자본주의 아래에서, 이러한 원칙은 착취와 압제를 정당화하는 기제로 전용되어 왔다. “다수에 의한 통치”은 언론 통제 등을 통하여 다수 대중의 여론을 규정할 수 있는 지배적 소수에 의한 통치가 된다. “소수에 대한 권리”는 부자들의 소유 일부라도 가져오려는 다수의 노력을 무산시키는 기제가 된다. 하지만 “다수에 의한 통치”와 “소수에 대한 권리”는 소수의 지배와 그를 뒤따르는 선입견에 찬 대중들을 막아내는 울부짖음이기도 하다. 말라테스타는 가장 계몽된 소수에 비하여 다수가 잘못되었을 가능성이 더 높다고 지적한다. 그렇기에 말라테스타는 만약 다수가 통치한다면, 다수는 소수를 지도할 것이고, 다수의 의지를 소수에 강요할 것이다. 그리고 이것은 소수에 의한 통치만큼이나 옳지 않은 것이다. 만약 다수가 소수를 통치한다면, 그 다수가 소수에 대한 권리를 존중할 것이라는 신용은 어디에서 올 수 있는가? 이러한 이유에서, 말라테스타는 다수에 의한 통치를 원칙적으로 거부한다. 시민사회운동진영의 자유의지주의자들은 집단적 의사결정이 불필요한 살므이 영역 역시 많다는 주장을 오랫동안 해왔다. 이러한 영역들, 이를테면 성적 지향과 같은 영역들에서, 다수가 소수를 통치할 권리는 없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은 “서로 합의한 성인”들이 비이성애적 성행위를 할 권리를 지지한다. 토마스 제퍼슨은 종교 자유에 대하여 주장하면서 “내 이웃이 20명의 신들을 모시건, 신을 믿지 않건, 그것은 나에게 해를 끼치지 않는다. 그들의 신앙은 내가 돈을 잃게하지도, 내 다리를 부러트리지도 않는다.”고 말한다. 아나키스트들은 다수에 의한 통치의 영역 바깥에서 이러한 자주적 의사결정을 행하는 자발적 연합의 범위를 크게 넓히고자 하는 것이다. 하지만, 집단적 의사결정이 필요한 영역은 여전히 남아있을 것이다. 이를테면, 공동체는 새로운 도로 건설을 시행할 것인지에 대한 결정을 내릴 필요가 있을 것이다. 만장일치야말로 최선이겠지만, 합의가 이루어지지 않을 수 있다. 다수와 소수로 의견이 나뉠 수 있다. 이것은 자발적 연합의 문제인 것은 아니다.(물론, 자발적 연합이기에 그 구성원들은 언제나 공동체를 해소하고 다른 곳으로 갈 자유가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다른 공동체들이 도로를 건설할지 말지를 결정할 필요가 사라지지는 않는다.) 도로 건설이 이루어지냐 마느냐는 중요한 것이 아니다. 다수가 도로 건설을 조직하였을 때, 건설에 반대하는 소수는 건설에의 참여를, 노동력이나 사회적 부를 분배할 것을 요청받을 수 있을 것이다. 그들이 동의하건 아니건, 이들은 원하지 않는 새 도로가 건설된 공동체에서 살아가게 될 것이다. 이러한 것을 만드는 것은, 경찰에 의한 억압이 아니라 현실에 의한 억압이다. 이러한 결정은 집단적으로 이루어져야 한다. 만약 의사결정이 다수결 투표로 이루어져서는 안 되는 것이라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이러한 결정은 만장일치로 이루어져야 한다고 공동체가 결의할 수는 있다. 하지만 모두가 동의하지 못한다면 어떻게 하는가? 이러한 경우 소수가 사실상의 비토를 행사할 수 있게 되고, 이는 소수에 의한 통치로 귀결될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소수가 “합의를 방해하지 않기” 위하여 발언하지 않기로 결의할 수도 있다. 이것은 그들의 공개적으로 반대할 권리를 부정하는 것이다. 나는 공동체나 조직이 합의에 기반하기로 결정할 권리를 부정하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해서 다수결이 원칙적으로 권위주의적이지는 않다고 바라본다. 말라테스타는 다수에 의한 아래에서 소수가 가질 수 있는 권리가 대체 무엇이겠냐는 의문을 제기한다. 소수의 관점을 가진 사람들은 모든 의사결정에 참여할 권리를 가진다. 이들은 다수를 자기 관점으로 끌어올 노력을 집행할 권리를 가진다. 한 번의 투표에서 패배한다 하더라도, 계속 참여하여 새로운 다수파가 될 방법을 강구할 권리를 가진다. 언젠가 이들이 충분한 공동체 구성원들을 설득해낼 때, 새 도로를 건설하는 것은 오류였다고 규정될 것이고, 이 도로를 무너트리거나 최소한 다른 도로의 건설은 막을 수 있게 될 것이다. 다른 문제들에 있어서는 이들이 다수일 수도 있는 것이고 말이다. 소수에 대한 권리를 보장하는 것은 다수에 의한 통치에서 핵심적인 부분이다. 공동체 구성원들에게 소수의 의견을 들을 기회가 주어지지 않은 채 이루어지는 의사결정은 실질적 의사결정이 아니다. 자본주의적 민주주의가 자행하는 소수 관점에 대한 탄압(무력으로의 탄압이건, 돈과 미디어 장악력의 부족에 의해 이루어지는 탄압이건)은 소수 지배계급이 지배당하는 다수에게, 그들이 통치하고 있다는 환상을 심어주는 주요한 기제다. 동시에, 다수에 의한 지배(민주주의)는 그 어떠한 소수에 의한 독재보다 소수에 대한 권리를 안전하게 보호할 수 있다. 다수에 의한 지배와 소수에 대한 권리는 서로 반대하는 것이 아니라, 서로 필요충분한 것이다. 말라테스타는 민주주의에 대응하는 개념으로 “자유로운 합의”를 제시한다. 하지만 이 둘은 서로 대응하는 것이 아니다. 사람들은 언제나 자유롭게 자발적인 연합을 구성하는 것에 합의할 수 있다. 이는 우표를 교환하는 것부터 신발을 생산하는 것까지, 모든 영역에 걸쳐 가능하다. 하지만 그 이후에 어떻게 이 연합을 운영하는가? 사람들은 모든 것에 완전히 동의하지 않을 수 있다. 만장일치가 이루어지지 않을 때마다 연합을 해산하는 것 말고 다른 방식도 가능하지 않을까? 그리고 그 방식이 민주주의다. 아나키스트들은 민주주의 국가를 지지하지 않지만, 민주주의 사회는 지지할 수 있다. 아나키즘은 국가 없는 민주주의다. 비국가적 민주주의 아래에서도 위계질서를 구성하고자 하는 경향은 발현할 수 있다. 하지만 모든 사회구성체를 재단하기 위하여 그 사회구성체가 자체적으로 위계적 요소를 가지고 있다거나, 위계질서를 구성할 위험을 가진다는 등의 절대적 준거를 사용하는 것은 분명한 오류다. 그리고 이러한 사회구성체가 제 아무리 매력적인 것이라도, 일부 순수주의자들은 이 구성을 거부할 것이다. 반면 나는 가능한 탈중앙적이고 비위계적이며, 최소한의 필요를 만족할만큼만 중앙집중적이고 위계적이어야 한다는 기준을 제시한다. 나는 어느 정도의 중앙집중은 필요하다고 상정한다. 그리고 이 집중의 정도는, 그것을 해소하기 위한 인민들의 노력과 함께 서서히 사라져갈 것이다. 결국 문제는 최대한 인민들이 참여할 수 있는 사회를 건설하는 것이다. 국가 없는 사회에도 갈등은 존재할 것이다. 아나키즘이 인간의 모든 불협화음들을 해결하지는 않을 것이다. 몇몇 평의회에서 다수파가 소수파의 이해득실을 무시한 채 자기 의견을 관철시키기도 할 것이다. 이러한 경우에 소수파는 자기 권리를 위하여 조직하고, 다수파를 설득하고, 아마도 파업이나 불복종같은 투쟁의 방법론을 사용하여야 할 것이다. 반면 다른 평의회에서는 뛰어난 웅변가들과 영향력있는 가문과 같은 소수파가 지배력을 행사할 것이다. 이 때 다수파는 더 많은 민주주의를 위하여 조직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어딘가에서는 선출직 관료들이 지배력을 행사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경우 이들에 반대하는 자들을 선출하기 위한 운동을 조직할 수 있을 것이다. 단순하게 말하자면, 아나키즘적 코뮌은 결코 비위계공식 같은 것으로 만들어지는 완전히 조화로운 사회가 아니다. 아나키즘적 코뮌주의 사회는 “자유의 대가는 영원한 불침번”(토마스 제퍼슨)이라는 말에 따라 운영되는 것이다. 아나키즘적 코뮌에서는 민주주의가 삶의 방식이 되어0 활발한 토론과 조직이 이루어질 것이다. 이것이 중요한 이유가 무엇인가? 이를 알기 위해 우리는 급진주의자들이 아나키즘을 내포하지 않은 민주주의 이론을 개발할 때 발생한 것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이러한 이론은 대부분 “민주사회주의”를 다른 말로 쓴 것과 크게 다르지 않다. 결국, 개량주의적 국가사회주의에 그치는 것이다. 이를테면, 데이비드 트렌드의 『급진민주주의』는 사실상 미국의 개량주의적 민주사회주의자들의 기고문이나 다름없다. 이들은 그들의 사회주의가 국가주의라 인지하고 그것을 부끄러워하지만, 결국 대안이 없기에 경제에 개입하기 위한 수단으로 현존국가를 사용하고자 하는 것이다. 진정으로 급진적인 민주주의 이론은 현존 자본주의 국가가 민주적이라는 것을 강력하게 부정하여야 한다. 사회적으로 소외된 관료적이고 군사적인 국가 체계를 반대하여야 한다. 그리고 그 대신에 총회와 연합들의 민주적 연방체가 필요하다고 주장하여야 한다. 그렇지 않는다면, 이는 결국 우리 사회와 국가의 반민주주의적 본성을 호도하는 것일 뿐이다. 샹탈 무페와 그녀의 동료들은 사회주의를 포함하는 급진적 민주주의 이론을 개발하고자 큰 노력을 기울였다. 무페는 그녀가 이르는 바 “급진민주주의”가 현존국가의 대안이 될 수 없고, 현존국가의 연장선에 있음을 분명히 한다. “우리가 지지하는 것은 일종의 ‘급진적인 리버럴 민주주의’다. 이것은 리버럴 민주주의 체제에 반대하는 것도 아니고, 사회의 새로운 정치적 형태를 제시하는 것도 아니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무페는 오직 “국가”에 반대하여 “시민사회”를 반대하는 자들과 논의할 때에만 국가의 문제를 직접적으로 다룬다. “시민사회”가 자본주의, 가부장제, 인종주의의 영역이며, 국가로부터의 구원을 위한 토양이 될 수 없음을 보이는 것은 어렵지 않다. “시민사회”는 압제자와 피압제자 사이의 긴장으로 인하여 발생하는 갈등을 내재하고 있다. 무페는 국가 역시 갈등을 내재하고 있기에, 국가를 부정하는 것은 잘못되었다고 주장한다. 이를테면, 그녀는 국가가 젠더 차별을 금지하는 법안을 통과시키거나, 지주에 대하여 농민을 보호하는 법안을 통과시킬 수 있다고 말한다. 물론 그럴 수 있다. 하지만, 다시금 말하지만, 기업의 경영진도 노동자들에게 임금을 인상해주곤 한다. 노동자들의 투쟁이 그것을 강제하거나, 임금을 인상해주는 것이 노동조합이 생기는 것보다 장기적으로 더 싸다고 느낄 때 그러하다. 하지만, 이러한 임금인상이 있다고 해서, 그 인상의 이유가 무엇이건 간에, 경영진은 여전히 자본가이자 노동자들의 적이다. 경영진 역시도 서로 성향이 나뉠 수 있다. 하지만 이 서로 다른 성향은, 결국 피압제자들을 어떻게 더 잘 탄압할 수 있는가에 대한 성향일 뿐이다. 어떠한 경영진도, 마찬가지로 어떠한 국가도 노동자나 여성, 농민의 친구일 수 없다. 경영진이나 국가나, 그들을 움직이게끔 하는 방법은 외부로부터의 압력이지 그들과의 결합이 아니다. 에르네스토 라클라우와 샹탈 무페는 국가가 “시민사회”에 반대할 때도 있다는 것을 첨언한다. 국가가 “사회 위에 군림하도록 강제되어진 관료적 돌연변이”인 억압적 체제도 있다는 것이다. 결국, 이들은 미국과 같이 다수가 지지하는 체제를 가진 국가에서, 국가는 사회 위에 군림하는 관료적이고 군사적인 돌연변이가 아니라고 주장하는 것과 마찬가지다. 그리고 이것은 많은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주장이다. 이러한 주장을 할 수는 있지만, 이것이 어떻게 “급진적”일 수 있는지는 모르겠다. 민주주의 이론에 아나키즘이 필요한 것처럼, 아나키즘 역시 민주주의를 필요로 한다. 역사적으로, 아나키즘에도 권위주의적 경향이 존재했다. 아나키스트들은 꽤나 자주 개량주의에 빠져들어 현존국가를 지지하거나, 스탈린의 혁명적 국가를 지지하곤 했다. 폴 굿먼이나 노엄 촘스키를 개량주의자라고 부르는 것은 합당한 일이 될 것이다. 머레이 북친의 선거주의에 대해서는 앞서 논의한 바 있다. 혁명적 상황을 마주하여 자유주의적 자본주의 정부에 장관으로 합류한 1930년대 스페인 아나키스트들 역시 마찬가지였다. 러시아 혁명 이후 볼셰비키에 합류한 아나키스트들도 있었다. 1960년대에는 『해방』지의 아나키즘적 평화주의자들은 카스트로나 호치민의 옹호자가 되었다. 이러한 예시는 수도 없이 많다. 마르크스주의 역사학자 할 드레이퍼는 아나키즘의 근본적 문제는 아나키즘이 민주주의를 거부하는 것에 있다고 말한다. 그는 아나키즘의 본질은 개인의 우월성과 개인이 원하는 모든 것을 행할 권리에 있기에, 소수의 지배계급도, 심지어 민주적인 다수에 의한 통제도 거부한다고 보았다. 그는 아나키즘은 아래로부터 통제되는 민주주의 사회가 가장 완벽한 사회주의적이고 민주주의적인 통제 아래에 있을지라도 그것을 거부한다고 말한다. 드레이퍼는 “원하는 것을 행하지 못하고, 가지지 못하는 모든 사람은 정부에 맞서, 혼자서라도, 반란을 일으킬 권리가 있다”는 프루동을 인용하면서 “사회로부터 제약되지 않는 ‘자유’를 누릴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은 전제군주 뿐”이라고 말한다. 드레이퍼는 상호부조적 연합을 조직하여 그 독재관으로 군림하는 계획을 담은 프루동의 개인적 노트나 매우 중앙집중적으로 구성된 비밀 “형제단”을 통해 대중운동을 흑막에서 통제하겠다는 바쿠닌의 판타지를 들면서 이것이 아나키즘적 권위주의의 증거를 발견하였다고 말한다. 아나키스트 전통에 권위주의적 측면이 존재하는 것은 분명하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아나키즘의 이론과 실천 양면에 자유의지주의적이고 민주주의적인 측면 역시 있다는 것을 부정할 수는 없다. 사회주의적 아나키스트들은 “민주주의”라는 단어의 사용여부와 무관하게 관료기구를 자주적 연합(즉, 민주주의)으로 대체할 것을 주장해왔다. 그리고 내가 주장해왔던 것처럼, 개인과 소수에 대한 권리를 강하게 옹호하는 것은 민주주의나 다수에 의한 지배와 필연적으로 충돌하는 것이 아니다. 아나키스트들은 민주노조를, 인민군을, 자주경영적 집단농장을, 노동자 협동조합을 건설해왔다. 마르크스주의 역시 민주주의적 측면과 권위주의적 측면 모두를 가지고 있음은 분명하다. 하지만 마르크스주의의 주류 경향이라 할 수 있는 사회민주주의와 스탈린주의는 권위주의적 국가주의였다. 마르크스주의와 아나키즘 중에서 더 민주적이고 자유를 지향하는 이론과 전통을 가진 것은 아나키즘이었다. 또한, 아나키스트들은 마르크스주의자나 레닌주의자들과는 다른 방식으로 아나키스트 이론가들을 바라본다. 우리는 “아나키스트”지 “프루동주의자”도 아니고 “바쿠닌주의자”도 아니다. 아나키즘은 역사적 위인들에게 결속되어 있는 것이 아니고, 그들의 오류를 부정하는 데에 거리낌이 없다. 하지만 아나키즘이 태생적으로 민주주의에 적대적인 것이 아닐지라도, 아나키즘은 민주주의와 모순된 관계를 맺어왔다. 개인주의적 아나키즘의 경향성이야말로 이 측면에서 최악인 것이었고, 귀족정을 정당화하는 것으로 귀결한다. 아나키스트들은 아나키즘을 극단적인 혁명적 민주주의로 바라볼 필요가 있다. 아나키즘에 약점들이 있다는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그 약점들은 아나키즘 전통 내부에서 충분히 교정할 수 있다. 아나키즘의 목적 관료적 · 군사적 국가기제를 최대한 탈중앙화된 인민총회와 연합의 연방으로 대체하는 것에 있다. 이는 국가 없는 민주주의를 의미한다. 현존 국가의 제약 안에 머물면서 현존 국가를 “더 민주주의적”으로 만들고자 하는 다른 정치사상들(“민주사회주의” 혹은 “급진민주주의”)은 “민주주의”가 소수에 의한 지배를, 가부장적이고 인종차별주의적인 자본주의와 관료국가를 정당화하도록 용인하는 것과 다름없는 것이다.
[1] 프루동은 프랑스 2월 혁명 이후 펼쳐진 제헌의회 선거에 출마하였지만 낙선하였고, 그해 6월의 보궐선거에서 작업장들의 대표자로 당선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