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코뮤니즘이 아닌 상호주의인가?

2021년 8월 11일

      상호주의란 무엇인가?

      이것이 진짜 사회주의인가?

      그렇다면 왜 코뮌주의가 아닌 상호주의인가?

      계획 경제와 국가

역자주: 글쓴이가 제시한 권위주의적 국가권력의 특징이나 아나키즘적 코뮤니즘에 대한 관점은 일반적으로 받아들여지는 아나키스트들의 시각과는 꽤 큰 차이가 있으며, 다소 오해가 섞여 있습니다. 실제로 아나키즘적 코뮌주의자들은 희소성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다양한 메커니즘을 개발하고 제시해 왔습니다. 그럼에도 이 글은 상호주의 아나키즘의 특성을 소개할 수 있는 좋은 글이라고 생각해서 올립니다. 보다 더 자세한 내용은 《An Anarchist FAQ》의 I 섹션이나 아나키즘적-코뮤니즘 관련 다른 자료들을 참고해 주시기 바랍니다.

많은 사람들은 상호주의(Mutualism)가 무엇인지[1], 또, 왜 자본주의와 국가에 반대하는 사람들이 코뮌주의나 민주사회주의가 아닌 상호주의를 선택하는지 잘 알지 못합니다. 훌륭한 자료들이 많지만, 이 글에서는 가장 기본적인 내용을 높은 수준에서 설명하려고 합니다. 그렇다면 상호주의란 무엇일까요? 기대하십시오.

상호주의란 무엇인가?

상호주의는 급진적으로 분권화된 시장기반 사회주의의 한 형태입니다. 이 상호주의 경제에서는 대기업이 존재하지 않으며, 모든 사업체는 그곳에서 일을 하는 사람들(노동자들)이 집단적으로 소유합니다. 물, 전기, 인터넷 등 공공 시설은 그 시설을 직접 사용하는 지역 공동체가 소유합니다. 그리고 물론, 혼자 일하며 일인 공동체에서 살고 싶은 사람은 자유롭게 그렇게 할 수 있습니다.

모든 사기업과 공공 시설은 노동자들이 협력하여 민주적으로 운영됩니다. 이는 오늘날 노동자가 소유한 수백만 협동조합에서 이미 실행 중인 방식입니다. 공동체가 “무엇을 할지”를 정하고, 노동자들은 “어떻게 할지”를 결정합니다. 실제로 미국 상호주의자가 초기 노동자 소유 협동조합을 도입했으며, 이 협동조합이 얻어낸 높은 임금과 개선된 노동조건과 지역사회로 환원은 상호주의 실천의 가치를 증명합니다. 수백만 명의 노동자가 이 유산 덕분에 더 나은 삶을 살고 있습니다.

상호주의에는 사장도, 주주도 없기 때문에, 노동자들은 스스로가 생산한 가치를 완전히 보상받을 수 있습니다. 코널리(Connolly)가 말했듯, “이윤은 노동계급에게 지급되지 않은 임금이다.” 상호주의에서는 자본가들에 의한 체계적 잉여가치 착취를 끝낼 수 있습니다.

자본가에게 의존해 새 사업을 시작하는 데 드는 자본을 마련하지 않고, 상호주의자는 대신 전통적으로 신용조합에 의존해 왔습니다. 실제로 프루동(Proudhon)이 최초의 신용조합을 고안했고, 후대 상호주의자들이 그 아이디어를 발전시켰습니다. 북미(상호주의가 특히 강했던 지역)에서 신용조합이 유독 많이 자리 잡은 것도 상호주의의 유산 중 하나입니다. 가장 규모가 큰 신용조합들 중 많은 곳이 노동조합이 소유하고 있는 것도 우연이 아닙니다.

다만, 대부분의 현대 신용조합과 달리, 원래 상호주의적 아이디어는 노동자와 장인이 자금을 함께 모아 새로운 노동자 소유 기업의 창업을 지원하거나 기존 기업들을 매입해 협동조합으로 전환하는 것이었습니다. 이런 방식으로 초기 상호주의자들은 자본가들에게서 생산수단을 말 그대로 인수하여 자본가들을 대체하길 희망했습니다. 총을 쏘거나 피 한 방울 흘릴 필요 없이 말입니다.

모든 형태의 자유지상주의적 사회주의(libertarian socialism)와 마찬가지로, 상호주의 경제에는 기술을 저작권으로 속박하는 체제가 존재하지 않습니다. 토지와 천연자원들처럼, 인류가 축적해온 지식 역시 크로포트킨(Kropotkin)이 말한 “인류의 공동 유산(common heritage of humanity)”이며, 모든 사람에게 속합니다. 본질적으로 모든 기술은 오픈소스(open source)인 것입니다.

상호주의는 시장 기반이기 때문에 무엇을 생산할지를 수요와 공급 메커니즘이 결정합니다. 코뮌주의 경제처럼 중앙 계획가가 개입할 필요가 없습니다. 하지만 상호주의의 수요·공급 메커니즘은 자본주의나 국가사회주의가 실패한 제조의 전체 비용을—특히 생태적 비용—가격에 포함하도록 설계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자본주의와 달리, 상호주의 경제의 수요·공급 메커니즘은 국가나 기업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국가나 대기업에 의한 지속적 조작을 받지 않습니다.

개인적으로는 여기에 아나르코-생디칼리즘(anarcho-syndicalism)의 요소를 도입하는 것도 가치 있다고 봅니다. 저는 산업 전반을 아우르는 노동자 운영과 직접 민주주의 기반의 노동조직이 교육과 자격 인증을 담당하고, 최선의 관행과 안전 규정을 수립하며, 새로운 기술이 개발될 때 그 사용법을 교육하는 아이디어를 좋아합니다. 이러한 신디케이트(syndicate)는 각 분야의 발전을 위해 노력하는 과학자와 연구자들에게 전용 자금을 제공할 수도 있고, 신규 사업과 공공사업을 위한 신용조합의 후원자 역할도 할 수 있습니다.

이것이 진짜 사회주의인가?

일부 사람들은 “시장”이라는 단어를 듣자마자 즉시 “그건 사회주의가 아니다!” 라고 말합니다. 수십 년 동안의 냉전 선전이 미국인들에게 사회주의는 곧 “정부가 무엇인가를 한다”라는 뜻으로 주입해 왔기 때문입니다. 솔직히 말해서, 어리석은 일입니다.

사실, 상호주의는 마르크스주의나 아나키즘적-코뮤니즘보다 더 오래된 사회주의 학파입니다. 그 핵심 원칙은 “아나키즘”을 사상적 체계로 처음 만들어낸 푸르동이 발전시켰습니다. 아나키즘적-코뮌주의는 그보다 나중에, 바쿠닌(Bakunin)과 크로포트킨이 마르크스의 “순수 코뮌주의”를 푸르동의 국가로부터 해방된 사회 이상에 접목하려 하면서 생겨났습니다. 물론 이들은 마르크스의 권위주의적 변화 이론은 거부했습니다. 그리고 미국 상호주의자인 벤저민 터커(Benjamin Tucker)는 최초의 국제적 사회주의 조직인 제1인터내셔널(First International) 설립 멤버이기도 했습니다. 푸르동 역시 마르크스에게 가입을 초대받았지만, 마르크스의 권위주의적 사회주의를 원치 않아 거절했습니다. (그리고 이것 때문에 둘 사이에 갈등이 있었지만.. 그건 또 다른 이야기입니다.) 그러니 결론은 이렇습니다: 상호주의자들은 사회주의자이며, 마르크스보다도 이전부터 국제 사회주의 운동의 일부였다. 이는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그렇다면 왜 코뮌주의가 아닌 상호주의인가?

국가가 경제를 계획하지 않는 상황에서는 코뮌주의는 규모를 확장할 수 없습니다. 역사 속 대부분의 부족 사회는 마르크스가 “원시 코뮌주의(primitive communism)”라고 부른 형태의 사회구조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마르크스와 초기 코뮌주의자들이 간과한 것이 있었으니, 그것이 바로 사회적 통화(social currency) 개념입니다.

헤겔과 마르크스의 변증법적 역사관이 얼마나 인종차별적이고 본질적으로 제국주의적인지에 대한 긴 이야기를 할 수도 있습니다. 원주민 사회가 산업 자본주의나 지구를 파괴하고 대다수를 노예처럼 만드는 마르크스주의 사회보다 덜 “발전된” 것이 아닙니다. 변증법적 사고는 역사 발전을 전제로 하고, 유럽식 경제·정치 형태가 더 진보한 형태라고 가정하기 때문에 근본적으로 유럽중심적이고 인종차별적입니다.

다시 사회적 통화 개념으로 돌아가 보겠습니다. 인류학적 관점에서 사회적 통화란, 화폐처럼 실제로 교환되는 물건이 아니라, 상호부조에 기반한 작은 사회(부족, 마을 등)에서 사람들이 서로 누가 공동체를 돕고 누가 무임승차자인지를 기억하는 방식을 의미합니다. 무임승차자는 단기적으로는 용인될 수 있지만, 곧 공동체에 기여하도록 재촉받습니다. 예의 있는 힌트로 시작해서 점점 적극적인 압박이 되고, 끝끝내 추방에 이르기도 합니다. (단, 심각한 빈곤 상황이 아닌 대부분의 부족 사회의 증여경제에서는 장애인과 노인은 무임승차자로 취급되지 않으며, 가능한 범위에서 기여하고 공동체로부터 돌봄을 받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사회적 통화는 소규모 공동체에서만 가능합니다. 모두가 서로를 알고 누가 얼마나 기여했는지 머릿속으로 추적할 수 있을 때만 가능하죠. 규모가 마을이나 도시 수준으로 커지는 순간, 이러한 증여경제는 붕괴됩니다.

그 빈자리를 메우기 위해 등장하는 것이 바로 물리적 화폐, 투표, 추장, 왕, 그리고 국가입니다. 백만명이 넘는 도시의 시민들 사이의 사회적 통화를 매순간 따라가긴 어렵지만, 선출된 지도자나 왕, 국가 간의 관계를 따라가는 것은 쉽습니다. 즉, 정부의 정당성(legitimacy)이라는 개념은 일종의 사회적 통화입니다. 사람들이 세금과 의무라는 유지 비용을 감수할 가치가 있다고 느낄 때, 그 정부는 “정당하다”고 여겨집니다.

사회적 통화가 불필요해지는 유일한 상황은 완전한 탈희소(post-scarcity) 사회입니다. 크로포트킨과 초기 아나키즘적 코뮌주의자들은 우리가 빠르게 탈희소 사회로 향하고 있다고 믿었습니다. 《빵의 쟁취(The Conquest of Bread)》에서 크로포트킨은 탈희소에 도달하면 국가 없는 코뮌주의가 자연스럽게 실현될 것이라고 주장했습니다. 크로포트킨은 매우 훌륭한 사상가였고 그의 많은 주장들은 옳았습니다. 특히 상호부조가 진화과정에 끼지는 영향에 대한 그의 연구는 꼭 읽어봐야하는 글들 중 하나입니다. 하지만 그가 탈희소 사회가 실제로 가능하다고 본 점에서는 틀렸습니다. 우리는 유한한 행성에 살고 있기 때문에 희소성을 피할 수 없습니다. 특히 생물 종은 풍요가 생기면 다시 희소성이 생길 때까지 번식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녹색 혁명 이후 인구의 증가를 보십시오. 그러니 완전한 탈희소는 불가능합니다. 그리고 희소성이 존재하는 순간, 교환이 필요합니다. 교환, 즉, 거래가 있는 순간, 시장이 생깁니다. 시장이 존재하면 통화가 필요합니다. 그 통화가 국가가 발행한 화폐일 필요는 없지만, 그것이 조개껍데기일지라도 통화는 반드시 존재합니다. 이것이 역사상 모든 계획 경제 시도에서 공식적이든 비공식적이든 반드시 시장이 등장했던 이유입니다.

계획 경제와 국가

당신이 기차 공장에서 일한다고 상상해봅시다. 공장에서 기차의 모든 부품을 직접 생산하지 않는다면, 다른 제조업체로부터 부품을 공급받아야 합니다. 이런 공급망은 길고 복잡해집니다. 상호주의에서는 수요와 공급이 이런 문제를 해결합니다. 하지만 코뮌주의에서는 누군가가 이 모든 과정을 하나하나 정교하게 계획해야 합니다. 그리고 아나키즘적 코뮌주의 체제처럼 수요와 공급이 존재하지 않아 누구든 원하는 것을 가져갈 수 있는 상황이라면, 취미로 기차와 무관한 일을 하는 사람이 공급업체에 들러 중요한 부품을 잔뜩 가져가 버릴 수도 있습니다. 그러면 공장은 멈춰 서고, 기차가 납품되지 않아 도시 전체가 멈추게 됩니다.

산업 사회는 “누가 언제 무엇을 가져가는지”를 통제하는 메커니즘 없이는 유지될 수 없습니다.

이 문제는 크로포트킨이 글을 쓰던 당시에는 문제가 되지 않았습니다. 그 시기에는 장인(artisan) 중심의 경제였고 대부분의 생산이 한 작업장에서 이루어졌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오늘날에는 핵심적인 문제입니다.

현대 경제에서 코뮌주의는 계획 경제를 필연적으로 요구합니다. 이는 이름뿐이 아니라고 해도 사실상 국가를 의미합니다. 그리고 계획경제를 갖춘 국가사회주의는 역사상 시도될 때마다 대다수의 사람에게는 희소성(부족)을, 정당 엘리트에게는 특권을 가져왔습니다. 이는 단순한 부패의 문제가 아닙니다. 경제 계획은 정확히 맞추기 극도로 어렵고, 아주 작은 오류도 예측 불가능한 연쇄적 실패를 일으켜 대규모 기아를 초래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아나키즘 내부에서도 이 문제는 심각합니다. 예를 들어 아나키즘적 생디칼리즘은 경제 계획을 노동자 평의회에 맡깁니다. 그러나 경제를 계획하고 “누가 언제 무엇을 어디서 얼마나 받는지”를 결정하는 노동자 평의회는 금방 기술관료제(테크노크라시, technocracy)가 됩니다. 이는 자유민주주의 국가보다도 책임성이 떨어지는 경제 독재가 되기 쉽습니다. 사회 전체가 그들의 결정을 견제하거나 질문할 통로가 없기 때문입니다.

즉, 유한한 세계에서 코뮌주의를 확장하려면 중앙 계획이 필요하고, 중앙 계획은 결국 새로운 국가를 만들어 경제 독재를 구축한다는 의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코뮌주의는 본질적으로 권위주의적입니다. 따라서 무역, 통화, 시장이 반드시 존재하는 세계—그리고 이는 역사 속 모든 ‘공산주의 국가’에서도 항상 존재했습니다—에서 국가 없는 사회주의를 원한다면, 실제 가능한 선택지는 상호주의뿐입니다. 이것이 내가 수십 년의 연구 끝에 점차 아나키즘적 코뮌주의와 생디칼리즘을 떠나 상호주의자가 된 이유입니다.

[1] ‘상호주의’라는 단어는 두 생물이 상호작용하여 서로에게 이익을 주는 진화생물학 용어이기도 합니다. 개인적으로 매우 적절한 용법이라고 생각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