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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나키 대 아르키: 정당한 권위는 없다
촘스키가 틀린 이유
아르키: 아나키의 반대
아르키{1}의 사전적 의미는 내포된 계층으로 조직된 권위적인 요원들로 이뤄진 체계이다. 이것이 군주제, 과두제, 공화국, 봉건 국가 또는 그 어떠한 계층사회이던 간에 말이다.
아나키는 모든 계층과 권위를 반대하는 반면 아르키는 이 모든 것을 온전히 구현한다. 아나키는 통치자의 부재를 주장하지만, 아르키는 대중이 통치자를 떠받치고 따를 때 번창한다. 어떨 때는 소수의 통치자가 있고 (예. 군주제) 또 어떨 때는 다수의 통치자가 있다 (예. 사회민주주의).
계층은 통치자들의 사회적 지휘권과 대중의 지배를 위해 존재한다. 이 지배는 군대, 방위군, 경찰, 법원, 감옥, 공무원, 대중매체, 징세관 등 통치자들이 임명한 권위자들의 폭력을 통해 유지된다.
한 사람이 다른 사람에게 주는 모든 지시는 계층을 만들지 않는다. 전문가의 전문지식을 받아드리는 것은 계층을 만들거나 그를 당신의 지배자로 만들지 않는다. 당신의 지붕을 수리하는 수리공이나 당신의 음식을 만드는 요리사나 당신의 심장을 고치는 외과 의사는 중요한 상품을 제공한다는 이유로 당신보다 높은 계층에 놓일 필요가 없다. 비슷한 이유로, 자신을 억압하는 계층을 파괴하기 위해 폭력을 행사한다 해서 그 개인이 권위자가 되지는 않는다. 아르키를 파괴하는 것은 새로운 아르키가 아닌 아나키를 만든다.
“정당한 권위”에 대하여
권위와 계층을 정당화하기 시작하면, 당신은 아나키를 헐기 시작한다. 우리 모두 “모든 권력은 타락한다”라는 말을 들어봤을 것이다. 이는 빈말이 아니다; 아나키가 존재하는 이유이다.
권위를 정당화하는 것은 아르키의 존재를 허용한다. 당신이 그 어떤 이유로든 개인적으로 인정하는 권위를 정당화면 아나키스트라 자칭하는 것은 아무 소용이 없다. 그 어떠한 권위도 아나키에서는 정당하지 않다. 이게 부모자녀 관계라 할지라도 말이다.
당신이 권위를 정당화하는 순간, 당신은 권위에 힘을 쥐어주고 그 어떠한 명령이라도 절대적으로 복종해야 하는 기관으로 인식하고 여기서 그치지 않을 것이다. 권위의 본성 때문에 계속해서 팽창하려 할 것이다. 주변에 끼치는 파괴적인 영향을 되돌아보지 않고 항상 팽창한다. 권위는 해를 입힐 허가증이다. 권위를 정당화했을 당시 폭력적인 정권을 세우는 것이 당신의 원래 의도였는지는 상관없다. 이 권위는 해를 끼칠 것이고 이 권위를 정당화한 자들은 그 피해에 대한 책임이 (최소한 이론적으로) 있다.
아나키는 권위의 반대이다. 아닌 척하는 것은 뻔한 아나키에 대한 사칭이다.
전문성 대 힘 대 권위
많은 사람들은 전문지식을 권위로 혼동하고 이 혼동을 사용하여 아나키는 모든 권위를 반대하지 않는다고 고집한다. 그들은 아나키는 부당한 권위만을 반대한다고 말한다. 이들은 물론 누가 그 권위가 정당한지 정하는지 절대 설명하지 않는다. 이 결정은 또다른 권위를 통해 결정하는 것인가? 이 권위도 물론 정당화됐을 것이고? 그리고 이 권위는 누가 정당화하지? 아나키스트들이 이 ‘정당한 권위’에 대한 모순에 빠지는 것은 우습기 짝이 없다.
목수는 잘 만들어 심지어는 전문가일 수도 있지만, 이는 그를 권위자로 만들지 않는다. 그의 재주는 권위를 휘두를 권리를, 그 누구 위에 군림할 힘을 주지 않는다. 권위는 한 사람이 힘을 사용하는 고립된 사례가 아니다. 권위는 사람들 간에 지속되는 특정한 사회관계이다. 우리들의 계층사회에 의해 정당화된 강압적인 관계이다. 권위자가 그이 보살펴야 하는 약자들을 향해 권력을 휘두를 것이다. 이 약자들은 이 강력한 권위 앞에 무릎을 꿇고 명령을 절대적으로 따라야한다.
한밤중에 집으로 돌아가는 당신 앞에 누군가가 어두운 골목길에서 튀어나와 당신을 칼로 찌르려 한다는 상상을 해보자. 이에 반응한 당신은 자신을 보호하려다 가해자를 죽인다 하자. 이 때 당신은 단순히 당신의 힘을 사용했을 뿐이다. 이는 당신을 죽이려 한 사람보다 윗사람으로 만들지 않는다. 자기 자신의 목숨을 보존하려 실행한 이 단 한 번의 행위는 당신에게 연속살인을 저지를 신비한 권리를 부여하지 않는다.
비슷하게, 질주하는 트럭 앞을 가로지르는 아이의 손을 잡아 멈추려 할 때 당신은 권위를 행사하고 있지 않다. 당신은 단순히 힘을 사용하는 것이다. 생명을 보존하기 위한 일시적이고 충동적인 행동은 권위가 아니다. 당신이 돕고 있는 사람에 대한 소유권을 부여하지 않는다. 아나키는 체계적인 권위의 존재를 부정하지 일시적인 힘의 사용을 문제 삼지 않는다.
촘스키와의 관계
노암 촘스키 (Noam Chomsky)는 ‘돌진하는 차로부터 아이를 구하기’ 예를 자신의 ‘정당한 권위’라는 개념을 설명하기 위해 사용한다. ‘정당한 권위’라는 논리적 오류를 반복하는 사람들은 대개 촘스키의 부적절한 표현을 생각 없이 반복한다. 그가 말하길
“권위는, 정당화되지 않은 이상, 본질적으로 부당하고 이 정당성을 입증할 책임은 권위를 쥔 자들에게 있다.”
그는 누군가의 권위는 입증이 된다면 정당화돼야 한다고 고집한다. 하지만 물론, 그는 누가 권위자의 증거가 정당한지 정할 권위를 가졌는지를 설명하지 않는다…
그의 아나키의 정의는 본질적으로 잘못됐다. 그가 권위 대신 단순히 ‘힘’이라고 표현했더라면 온갖 계층적인 잡동사니를 임의적으로 정당화하고 그 잡동사니를 전혀 아닌 ‘아나키적’이라고 주장하는 촘스키의 시종은 그렇게 많이 않았을 것이다. 나는 그의 지지자들이 이 정의(定義)들을 사용해 일명 ‘야경국가’를 아나키적이라고 주장하는 것을 봤다. 야경국가는 시민들에게 군대와 경찰과 법정만을 제공하기 위해 존재하는 국가이다. 이것은 소정부주의이지 아나키가 아니다. 아나키스트 국가와 아나키스트 감옥은 가당찮은 발상이다.
우리가 순진하게 소정부주의는 바람직하다 인정한다고 해도 이는 결국 완전한 국가주의로 다시 돌아가게 된다. 정당화된 권위는 절대로 멈춰있지 않고 그 팽창을 막으려는 시도는 영원히 헛되다는 것이 증명됐다.
촘스키는 아나키가 무엇을 뜻하는지에 대한 좋은 출처가 되지 않는다. 그는 북미의 백인 중산층의 관심을 끌기 위해 아나키를 희석시키는 것을 주업으로 삼았다. 심지어 국가는 본질적으로 나쁘지 않다고, 그가 ‘진짜 민주주의’와 ‘투자에 대한 사회적 통제’ 라고 부르는 것을 통해 어떻게든 ‘개혁’할 수 있다고 주장하기까지 했다. 너무 많은 아나키스트들은 촘스키를 아나키에 대한 권위자로 본다, 사실 그는 소정부주의자임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또한 그는 자신의 강연과 글에서 아나키를 계몽주의와 고전자유주의에 비유한다. 그의 이런 성향은 계몽주의는 유럽 제국주의자들에 의한 아프리카의 분배와 끔찍하게 인종차별적이고 학살적인 사건들을 이끌었다는 점에서 특히나 서양중심적이다. 때문에 아나키를 역사의 권위주의적 장과 연관 짓는 것은 아마 바람직하지 않을 것이다… 물론 ‘아나키즘’이라고 불리는 정치운동이 유럽에서 시작한 것은 사실이지만, 아나키는 세계 방방곳곳에서 계몽운동 전과 후에, 유럽의 철학자들이 아나키로 돌아가기를 갈망하기 오래 전부터 이름 없이 번창했다.
나는 촘스키가 아나키스트라고 여기지 않기에 (그는 자명하게도 아니기 때문에) 내게는 그가 사용하는 정의는 중요하지 않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그 정의들은 아나키스트라고 자칭하는 많은 소정부주의자와 자유주의자에게는 중요하고 이들은 촘스키의 말을 처음 아나키를 접하는 사람들에게 반복하여 수 년 동안 지속되는 혼동을 유발한다.
구두 수선공의 전문성
권위의 아나키스트 정의에 대한 촘스키의 혼동의 근원은 아마 집산주의 아나키즘의 창시자 미하일 바쿠닌일 것이다. 그의 거칠고 미완성된 글 “권위는 무엇인가” (1870)에서 그는 ‘구두 수선공의 식견’에 대해 말하였다:
“그렇다면 이는 내가 모든 권위를 배제한다는 뜻인가? 나는 절대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구두에 관한 일이라면 나는 일을 구두 수선공의 권위에 맡긴다; 집이나 수로나 철로에 관한 일이라면 건축가나 엔지니어와 참고한다. 각 특정한 지식의 영역에 대해 나는 알맞은 전문가와 말을 나눈다. 하지만 나는 수선공이나 건축가나 과학자가 내 위를 군림하게 두지는 않는다 […] 하지만 나는 그 어떠한 무류한 권위도 인정하지 않는다, 특수한 상황에도 말이다. […] 때문에 고정되고 지속적인 권위가 아닌 상호적이고 일시적이고 그 무엇보다도 자발적인 권위와 종속의 끊임없는 교환만이 있다.”
“자발적인 권위와 종속”은 결국 모든 자유주의자가 지지한다고 말하는 것들이다. 그들은 자본주의는 사람들 간의 자발적인 계약이라고 주장한다. 그들은 노동자들이 임금이나 안전을 위해 자발적으로 사장이나 국가에 종속되는 것을 선택한다고 한다. 우리 아나키스트들이 정말로 이런 권위주의적인 사상을 배제하고 저항하고 싶다면 바쿠닌의 표현을 사용하는 것을 피해야 한다.
위 글을 통해 바쿠닌은 전문지식과 권위 간의 차이를 설명하려고 했지만 복잡하고 우회적인 방법으로 설명해 소정부주의자들이 수 대에 걸쳐 자신이 아나키스트라고 믿게 만들었고 아나키에 대한 잘못된 정의를 퍼뜨렸다.
그자는 유럽의 아나키스트 운동은 아직 초창기에 있었고 여러 정의들은 막 정리되고 있을 150년 전 서투른 주장을 펼쳤다. 이는 출판되지 않은 초안의 작은 일부일 뿐이었고 자주 원문이나 같은 저자의 다른 글들을 읽지 않은 사람들에 의해 아무 맥락 없이 인용된다.
당연히 우리는 역사상 모든 아나키스트들이 한 모든 말을 불변하는 아나키스트 문헌으로 여기며 전부 따를 필요는 없다. 바쿠닌의 반유태주의를 지지하지 않으니, 그가 대충 만든 수선공 같은 실수를 지지할 필요도 없지 않은가?
아나키의 목표를 희석하며
위에 언급한 차에 치일 뻔한 행인을 구하는 예는 단순히 권위와 아무 관련도 없다. 아나키적 관점에서 이해하는 권위에 대한 근본적인 왜곡이고 난 이 글을 통해 이 왜곡을 다룰 필요가 없는 주제가 되길 바란다. 왕정이던 신자유주의이던 파시즘이던,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뒤틀린 사상은 정당한 권위를 위하고 부정한 권위에 반대한다고 주장한다. 우리는 자유주의자들이 시리아나 이라크에서 학교 버스를 폭격하는 것은 ‘자유를 지키기 위한’ ‘정당한’ 행동이라고 주장하는 것은 허튼소리라는 것을 알면서 그들이 제시하는 아나키에 대한 거짓된 정의를 따를 필요가 있는가? 권위를 허락하는 순간부터 당신은 아나키를 지지하기를 그친 것이나 마찬가지이다.
촘스키가 하는 것처럼 ‘정당한 권위’를 지지하는 것은 주제에 대해 잘 모르는 사람들을 헷갈리게 하고 아나키즘의 기본을 이해하지 못하는 수많은 중산층 출신의 미숙한 아나키스트만 만들 뿐이다. 이들은 아나키즘에 대한 오해를 국가를 포함한 온갖 권위주의적 잡동사니를 아나키와 동일시하는데 사용한다. 이는 아나키즘과 자유주의를 나누는 선을 갈수록 희미하게 만든다. 그리고, 솔직히, 볼품없는 아나키스트들을 낳는다.
내가 하는 말에 대한 전형적인 예로 유명한 아나키스트 포럼의 자칭 ‘아나키스트’의 말을 인용하여 본 장을 마치겠다:
“나는 몇 가지 것들을 지속되게 하고 보호하는 권위는 필수라고 생각한다. 예를 들어, 나는 모든 사회가 따라야 하는 어떠한 방법으로도 제한될 수 없는 사회적 헌법은 좋은 것이라고 생각한다. 또한 개인의 자유를 보장하기 위한 성문화된 법도 존재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때문에, 나는 지금 존재하는 것과 같이 이러한 법들을 -좋은 수준의 교육에 대한 권리나, 일정한 수준의 주거나 의료훈련이나 건간관리에 대한 권리나, 공정한 재판을 받을 권리, 등- 보장하는 권위가 존재해야 한다 느낀다. 필연적으로 이 권위는 위 법/권리가 위반되는 상황을 바꿀 능력을 갖고 있어야 한다. 이로부터 나는 이 의무들을 착수할 잘 훈련된 자경대가 존재해야 한다고도 생각하게 된다 (물론 아나키스트 전통을 따라 가장 직접민주주의적이고 무효화 가능하고 책임감 있는 자경단이야 할 것이다).
이런 방식으로 나는 아나키스트 사회처럼 작동하지만 제한된 권위를 지닌 체계의 틀 안에서 작동하는 아나키스트 사회들의 연합으로 이뤄진 국가의 존재를 지지하게 된다.”
모두가 따라야 하는 헌법, ‘민주적’ 경찰, 국가, 권위를 지닌 체계. 이 어떤 것도 자유주의적 현실과 다를 것 없다. 이 사람은 아나키를 이해하고 있지 않으면서도 자기 자신을 아나키스트라고 해야 한다 느끼는데 … 자유주의 사회가 더 민주적이길 바래서? 말도 안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포럼 내 다른 ‘아나키스트’들은 위 글을 좋게 받아들였고 심지어 어떤 둘은 로자바를 원문에서 제시된 이상과 일치하는 ‘아나키스트 국가’라고 설명했다.
‘아나키스트 국가’. ‘아나키스트 국가’라니…
권위는 도덕적 위계이다
위계는 권위에 의존하는 인위적인 구조이다. 권위는 위계구도의 지배자가 명령을 내리고 피지배자는 그 명령을 (사회적으로 정당화된) 폭력을 피하기 위해 따르는 사회적으로 집행되는 규칙이다. 내가 내 상관에게 밥을 사거나 물에 빠진 것을 돕는 것은 그에 대한 권위를 행사하는 것이 아니다. 하지만 단순히 내 상관이라는 이유로 그는 나에 대한 권위를 끊임없이 행사하고 나는 그에게 끊임없이 종속된다. 나는 그의 지배를 받는다. 나는 제한됐다; 상사와 노동자 간의 위계의, 내 상사의 지속적인 권위의 지배를 받는다.
권위는 사람들을 지배자나 피지배자로 의도적으로 나누는 사회구조이다; 폭력과 ‘도덕성’이라는 개념을 사용하여 이 강압적인 체계를 유지하며 말이다. 상사에게 말대답하는 것, 그의 권위를 거부하는 것: 그것은 큰 도덕적 금기이다. 사회는 이 강압적인 조건화를 사용해 억압적인 관계를 유지하고 당신을 순종적인 상태에 머물게 한다. 체계는 그 법에 대항하는 그 어떠한 실질적인 반대를 용인하지 않을 것이다. 대신에 체계는 당신이 법을 의심 없이 받아들일 때까지 당신을 훈련시킬 것이다.
‘자유 시장’ 자본주의의 지지자들은 자본가와 노동자 간의 관계처럼 ‘자발적인’ 위계를 지지한다고 주장한다. 이는 약자들에 대한 체계적인 폭력을 정당화하려는 핑계에 불구할 뿐, 권위에 호소하는 과정이다. 이 위계들을 무시하기로 한다면 (예를 들어 일하기를 거부하거나 상사를 죽여 우리들의 노동의 진정한 가치를 쟁취하며 말이다) 우리는 여러 방법을 통해 사회의 처벌을 받을 것이기 때문에 이 위계들은 그 어떠한 관점으로 봐도 자발적이지 않다. ‘정당한 위계’와 ‘ 합법적인 권위’는 자본주의 아래 ‘자발적인’ 노동이라는 개념과 소름 끼치도록 비슷하다.
아나키스트 육아에 관하여
권위는 구조적으로 폭력적인 체계이다. 아이를 돕거나, 밥을 먹이거나, 수영장에 빠져 익사하는 것을 막는 행동과는 무관하다. 부모관계는 당신이 그렇게 만들려고 하지 않는 이상, 위계일 필요가 없다.
육아는 부모가 아이에게 권위를 행사하려 할 때에만 위계적이다. 아나키스트 부모는 아이를 그들의 권위주의적인 요구를 따르는 하급자가 아닌 자주적인 개인으로 대하는 방식을 사용할 것이다. 아나키스트 부모는 자기 자신을 권력자가 아닌 보호자로 생각하고, 부모의 권위를 ‘정당한 위계’라는 구실로 정당화하는 것은 핑계일 뿐이다. 정당하지 않다. 폭력을 사용해 아이를 통제하는 것은 아나키가 아니다. 부모는 아이를 키우기 위해 폭군이 될 필요가 없다.
동아프리카의 그레이트 리프트 밸리 (Great Rift Valley)에 있는 오늘날의 핫자 (Hadza)를 포함한 역사상 수많은 아나키스트 사회들은 부모관계는 산업 자본주의 사회의 폭력적인 독재가 될 필요가 없다는 것을 보여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은 소위 ‘아나르코-소정부주의자들’은 권위주의적 사회가 아이들에 대한 ‘소유권’을 ‘정당한 위계’로 삼는 것을 고집한다. 참으로 이상한 주자이다. 자신들의 아이들에 대해 귄위주의를 적용하는 것에 동의한다면 그들은 당연히 이를 타인을 지배하는데 사용하는 것에도 동의할 터이다. 단지 그들이 그렇게 선택했기에 아이들에 대한 지배가 아나키와 호환 가능하다고 주장하는 것이 황당할 뿐이다.
‘문명인’들은 모든 아이들이 갖고 있는 자유와, 놀이와, 탐구와 직접경험을 통한 배움에 대한 강렬한 소망을 완전히 무시하는 위험하고, 해롭고 권위주의적인 환경을 만드는 실수를 저지른다.
우리는 아이들을 금속 차(車)에 실어 학교에서 수년 동안 모르는 사람들로부터 엄격한 수업을 받게 한다. 아이들은 유년기 전부를 교실에서 교실로 옮겨지며 체계에 순종하고 교양있는 노동자로 만드는 강압적인 훈련을 받는다. 대부분의 아이들은 그 부모들이 산업문명의 위험들을 두려워한다는 이유로 바깥에서 놀지도 못한다.
산업문명은 간단히 말해 인간의 성장에 이롭지 못하다. 우리 사회를 위험, 권위, 공포, 강압, 처벌, 순응과 복종을 중심으로 조직하는 비뚤어진 방법들은 아이들이나, 사실 그 누구에게도, 강요돼선 안되는 것이다. 아나키스트로서 우리는 이런 권위주의적인 구조들을 해체해야지 이 구조들을 유지하기 위한 핑계를 만들어선 안된다. 아이들은 아나키가 필요하지 권위를 필요하지 않는다.
희석된 아나키
일부 사람들은 집산주의 아나키즘의 권위에 대한 어설픈 정의를 고집하여 온갖 위계를 정당화할 수 있다고 자발적으로 정한다. 그 다음, 이 수정주의는 더 넓은 아나키스트 영역에 들어가고 많은 집산주의 ‘아나키스트’들은 사실 소정부주의자에 불구하기 때문에 그 부족한 점들은 분석되지 않기 일쑤다. 소정부주의자들은 자기들이 물질적인 이득을 보는 한에서 권위에 대한 실질적인 문제를 느끼지 않는다. 안타깝게도 이 소정부주의자들은 진정한 아나키에 대한 이해는 불가해한 여러 아나키스트 공간에서의 대화를 주도한다. 권위주의적 체계 아래 나고 자란 대부분의 사람들은 한평생의 아르키가 그들에게 주입한 거짓된 안정감을 저버리는데 끔찍한 어려움을 겪는다. 때문에 ‘좋은 위계’ 같은 말도 안되는 생각이 위 공간에서 정상화되고 진정한 아나키가 꽃피는 것을 막는데 사용된다.
아나키스트들은 ‘권위’, ‘힘’ 그리고 ‘전문성’ 간의 차이를 확실하게 해 언어적 오해로 인해 소정부주의가 아나키를 억누르는 것을 막아야 한다.
‘정당한 권위’는 우리의 (사실 아주 쉽게 정의되는) 목표를 더 희석시키기 전에 폐기해야 하는 아나키에 대한 여러 근본적인 오해 중 하나이다. 우리는 필요 이상으로 복잡하게 생각을 하는 경향이 있는데, 이는 오로지 아나키로부터 멀어지고 우리의 가장 기본적인 목표가 무엇인지에 대해서도 사람들을 헷갈리게 하는 수정주의적 이론더미 만든다.
대량 학살을 주도한 모든 독재자는 자신들이 지지하는 위계들은 정당하다고 생각했다. 아나키스트들은 이보단 잘 할 수 있다. 아나키는 모든 아르키에 대한 전면적인 반대이고, 반대였고, 영원한 반대일 것이다.
당신이 타협을 하고 핑계를 대 위계를 만들 때, 당신이 하는 것은 더 이상 아나키가 아니다.
{1} 고대 그리스어 ἀρχή에서 유래한 접미사 아르키(archy)는 아나키 (anarchy)의 어원이 되는 “무-정부” (an-archy)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원문에서는 “국가”라는 단어보다 포괄적인 용어로 쓰이는데, 적절한 우리말 표현이 없어 본 번역본에서는 “아르키”를 그대로 사용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