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itle: 소유란 무엇인가?
Subtitle: 권리와 통치의 원리에 대한 연구 - 첫 번째 연구
Date: 1840년

    서 문

    제1장 이 책에서 사용하는 방법, 혁명의 이념

    제2장 자연권으로 간주되는 소유에 대하여. 소유의 동인動因으로서의 선점과 민법에 대하여

      제1절 자연권으로서의 소유에 대하여

      제2절 소유의 토대로서의 선점에 대하여

      제3절 소유의 근거이자 재가로서의 민법에 대하여

    제3장 소유권의 동인으로서의 노동에 대하여

      제1절 토지는 전유될 수 없다.

      제2절 보편적 동의는 소유를 정당화하지 않는다.

      제3절 시효취득은 결코 소유를 낳을 수 없다.

      제4절 노동에 대하여. 노동은 그 자체로는 자연의 사물들에 대하여 어떠한 전유 능력도 가질 수 없다.

      제5절 노동은 소유물의 평등에 귀착된다.

      제6절 사회에서 모든 임금은 평등하다.

      제7절 능력의 불평등은 재산의 평등의 필요조건이다.

      제8절 정의의 질서 안에서는 노동은 소유를 파괴한다.

    제4장 소유는 불가능하다

      첫 번째 명제 소유는 불가능하다. 왜냐하면 그것은 무에 대해 무엇인가를 요구하기 때문이다.

      두 번째 명제 소유는 불가능하다. 왜냐하면 소유가 용인되는 곳에서 생산은 효용가치 이상의 비용이 들기 때문이다.

      세 번째 명제 소유는 불가능하다. 왜냐하면 자본이 일정한 경우 생산은 소유가 아니라 노동에 비례하기 때문이다.

      네 번째 명제 소유는 불가능하다. 왜냐하면 그것은 살인 행위이기 때문이다.

      다섯 번째 명제 소유는 불가능하다. 왜냐하면 사회는 소유에 의해 자기 자신을 먹어치우기 때문이다.

      다섯 번째 명제에 대한 보론

      여섯 번째 명제 소유는 불가능하다. 왜냐하면 소유는 압제의 어머니이기 때문이다.

      일곱 번째 명제 소유는 불가능하다. 왜냐하면 소유는 자신이 취득한 것을 소비함으로써 잃어버리고, 저축함으로써 폐기해 버리며, 자본화함으로써 생산에 적대하기 때문이다.

      여덟 번째 명제 소유는 불가능하다. 왜냐하면 소유의 축적력은 무한대인 반면 소유가 작용을 미치는 수량은 제한되어 있기 때문이다.

      아홉 번째 명제 소유는 불가능하다. 왜냐하면 소유는 소유에 대해 무기력하기 때문이다.

      열 번째 명제 소유는 불가능하다. 왜냐하면 소유는 평등을 부정하기 때문이다.

    제5장 정의와 불의의 관념에 대한 심리학적 설명, 그리고 통치와 권리의 원리에 대한 규정

    제1부

      제1절 인간과 동물의 도덕 감각에 관하여

      제2절 사회성의 첫 번째 및 두 번째 단계에 대하여

      제3절 사회성의 세 번째 단계에 대하여

    제2부

      제1절 우리의 오류의 원인들에 대하여 : 소유의 기원

      제2절 공유제와 소유의 특징들

      제3절 제3의 사회형태의 결정결론

적 앞에서 우리의 요구는 끝이 없다.

Adversus hostem oeterna auctoritas esto

「12표법」

서 문[1]

브장송Besançon 아카데미의 회원 여러분께

파리, 1840년 6월 30일

여러분,

쉬아르Suard 부인이 창설한 3개년 연구지원금과 관련된 회합에서, 여러분은 다음과 같은 희망을 표명했습니다.

〈본 아카데미는 그 수혜자에게 자신이 지난 한 해 동안 수행한 여러 연구들에 대한 간결하고 명료한 보고서를 제출할 것을 요구한다.〉

여러분, 나는 이제 이 의무를 다하고자 합니다.

여러분의 동의를 청원할 때, 나는 〈가장 수가 많고 가장 가난한 계급의 물질적 · 도덕적 및 지적 조건을 개선할〉 수단을 위한 연구를 수행하고자 하는 나의 의도를 분명히 밝혔습니다. 이 생각이 자격 신청요건으로서는 아주 엉뚱해 보였음에도 불구하고 여러분은 흔쾌히 그것을 받아들여 주었습니다. 그리고 여러분이 나에게 기꺼이 베풀어 준 남다른 배려에 의해서 여러분은 이 엄중한 약속을 하나의 깰 수 없는 신성한 의무로 만들었습니다. 이후로 나는 내가 얼마나 훌륭하고 존경할 만한 분들을 상대하고 있는지를 깨달았습니다. 여러분의 학식에 대한 나의 존중, 여러분의 은혜에 대한 나의 감사, 여러분의 영예에 대한 나의 열의는 실로 무한한 것입니다.

우선, 온갖 의견과 체계들로 다져진 상궤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인간 및 사회에 대한 연구에 과학적 습성과 엄밀한 방법을 도입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확신하고 있기에, 나는 한 해를 문헌학과 문법학에 바쳤습니다. 언어학, 즉 말의 박물학은 모든 과학들 중에서도 나의 기질적 특성에 가장 알맞은 것이었으며, 또 내가 하고자 하는 연구와 가장 관계가 깊은 것으로 보였습니다. 비교 문법학의 가장 흥미로운 문제들 중 하나에 대해 그 당시 내가 작성한 논문[2]은 놀라운 성과를 거두지는 못했을지라도 나의 연구의 견실함을 보여주기에는 충분했습니다.

그 후에는 형이상학과 도덕론이 나의 유일한 관심사였습니다. 이 학문들은 여전히 그 대상과 경계가 제대로 규정되어 있지는 않지만 그래도 자연과학들과 마찬가지로 논증과 확실성을 받아들일 여지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된 나의 경험은 이미 나의 노고를 보상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내가 따르는 모든 스승들 중에서 내가 가장 큰 빚을 진 이는 바로 여러분입니다. 여러분의 협조, 여러분의 계획, 여러분의 지침은 나의 내밀한 소원이나 나의 가장 소중한 희망과 합치하였으며 끊임없이 나를 계도해 주고 내게 길을 열어주었습니다. 소유에 관한 이 연구는 바로 여러분의 사유에서 나온 것입니다.

1838년에 브장송 아카데미는 다음과 같은 문제를 제시했습니다. 〈자살의 수가 줄곧 늘어나는 것은 어떤 원인으로 돌려야 하며, 이 정신적 감염의 효과를 막을 적절한 수단은 무엇인가?〉

이것은, 덜 막연한 말로 표현하자면, 사회악의 원인은 무엇이며 그 해결책은 무엇인가를 묻는 것이었습니다. 여러분의 위원회가 응모자들이 자살의 직접적이고 개별적인 원인들뿐만 아니라 그 원인들 하나하나를 방지할 수단도 빠짐없이 열거했다고 공표했을 때, 여러분 스스로가 그 원인과 해결책을 인정했습니다. 그러나 다소 재치 있게 열거된 것 중 어느 하나도 악의 제일 원인에 대해서든 그 치유책에 대해서든 어떤 적극적인 교훈을 끌어낼 만한 것은 없었습니다.

1839년에, 학문적으로 표현될 때에는 늘 신랄하고 다채로운 여러분의 계획안이 한층 더 정교해졌습니다. 1838년의 콩쿠르는 사회적 질병의 원인들로서, 아니 좀 더 정확히 말하자면 사회적 질병의 증후군으로서 종교적 및 도덕적 원칙의 망각, 부에 대한 야욕, 향락에 대한 탐닉, 정치적 선동들을 지적했습니다. 이 모든 요소들을 여러분은 다음과 같은 하나의 명제로 묶었습니다. 「위생, 도덕, 가족적 · 사회적 관계와 관련된 일요 예배의 효용에 대하여.」

여러분, 당신들은 그리스도교의 언어로 사회의 참된 체계가 무엇인가를 묻고 있습니다. 한 응모자[3]는 일요 휴식제도는 조건들의 평등을 토대로 하는 정치제도와 필연적으로 결부되어 있다는 것, 이 제도는 평등 없이는 변칙이요 불가능이라는 것, 평등만이 고대로부터 내려온 이 신비한 일곱째 날의 휴식을 다시 꽃피울 수 있다는 것을 감히 주장하고 또 논증했습니다. 이 주장은 여러분의 동의를 얻지 못했습니다. 그 이유는 여러분이 응모자가 지적한 관련성을 부정하지는 않으면서도 조건들의 평등이라는 원리는 그 자체로 입증되어 있지 않기 때문에, 저자의 생각은 가정의 영역을 벗어나지 않는다고 정당하게 판단한 데 있었습니다.

마침내, 여러분은 평등이라는 이 기본적인 원리를 다음과 같은 용어로 콩쿠르에 내걸었습니다. 「자녀들 간의 평등한 재산 분할에 대해 법률이 지금까지 프랑스에서 초래한, 또 앞으로 프랑스에서 낳을 경제적 · 도덕적 결과들」

무게도 함축도 없는 상투적 문구에 구애되지 않는다면, 내가 보기에 여러분의 문제를 이해하는 방식은 다음과 같은 것입니다.

만일 법률이 한 아버지의 자식들 모두에게 공동 상속권을 줄 수 있다면, 그의 손자와 증손자들 모두에게도 평등하게 상속권을 줄 수 있지 않겠는가?

만일 법률이 가족의 경우에 차남들의 권리를 인정하지 않는다 할지라도, 상속권에 의해 종족, 부족 또는 국민의 경우에는 그것을 인정할 수는 없는가?

상속권에 의해서 평등이 사촌이나 형제들 사이에서와 마찬가지로 시민들 사이에서도 유지될 수는 없는가? 한마디로 말하자면, 상속의 원리가 곧 평등의 원리로 될 수 있을까?

이 모든 논점들은 일반적인 표현으로 요약하자면 다음과 같습니다. 즉 상속의 원리는 무엇인가? 불평등의 토대는 무엇인가? 소유란 무엇인가?

여러분, 오늘 내가 여러분에게 제출하는 연구의 목적이 바로 이것입니다. 만일 내가 여러분이 생각하는 취지를 제대로 포착했다면, 만인 내가 명백함에도 불구하고 앞에서 설명한 여러 이유들에 의해 오랫동안 무시되어 온 진실을 밝혀낸다면, 만일 내가 확실한 탐구 방법에 의해서 조건들의 평등이라는 학설을 확립한다면, 만일 내가 민법의 원리, 정의의 본질 및 사회의 형태를 확정한다면, 만일 내가 소유를 영원히 부정한다면, 여러분, 이 모든 영예는 바로 여러분의 몫이며 여러분의 도움과 고취 덕분입니다.

이 작업의 취지는 철학의 문제들에 체계적인 방법을 적용하고자 하는 것이며, 그 밖의 모든 의도는 모두 나와는 무관한 것이며 심지어 유해하기조차 합니다.

나는 법률학에 대해 이렇다 할 신뢰를 두지 않고 말했습니다. 나는 그렇게 할 권리가 있습니다. 그러나 만일 내가 이른바 이 과학적 학문이라는 것과 그것을 연마하는 사람들을 구별하지 않는다면, 나는 정당하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 법학자들은 힘들고 엄격한 연구에 몸을 바치고 있으며 지식과 능변에 의해서 동료 시민들로부터 여러 모로 존경을 받을 만합니다. 이들은 다만 한 가지 비난, 즉 자의적인 법률들을 지나치게 존중한다는 비난만을 감당하면 될 뿐입니다.

나는 경제학자들에게 가차 없는 비난을 가했습니다. 나는 솔직히 말해 대체로 이들을 좋아하지 않습니다. 그들이 쓴 글귀의 도도함과 공허함, 그들의 무례한 교만과 그들의 형언하기 힘든 오류들이 나를 격분시켰습니다. 그들을 인정하고 또 용인해 주는 자가 있다면 그들의 글을 읽어보아야만 합니다.

나는 가르치려 드는 그리스도교 교회 또한 신랄하게 비난했습니다. 나로서는 그렇게 해야만 했습니다. 왜 교회는 자기가 알지도 못하는 것에 대해 심판을 내렸을까요? 이 비난은 내가 입증하는 사실들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교회는 교리와 도덕에서 잘못을 저질렀습니다. 물리학과 수학의 논증이 이것을 보여줍니다. 이렇게까지 말하는 것은 나의 잘못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진실이라는 점은 확실히 기독교 세계에 불행한 일입니다. 여러분, 종교를 부흥시키기 위해서는 교회를 비난해야만 합니다.

여러분, 아마도 여러분은 내가 방법과 논증에 마음을 쏟은 나머지 형식과 문체를 너무 소홀히 했다고 유감으로 여길 것입니다. 나도 더 잘 해보려고 했지만 허사였습니다. 내가 보기에 19세기는 생성生成의 시대여서, 여기에서는 새로운 원리들이 고안되기는 하나 쓰인 것 중 그 어느 것도 오래가지 않습니다. 이것이, 내가 생각하기에, 오늘날 프랑스가 이렇게도 많은 재주꾼들을 거느리고 있으면서도 단 한 명의 위대한 저술가도 손꼽을 수 없는 이유입니다. 오늘날과 같은 사회에서 문학적인 영예를 추구한다는 것은 내게는 시대착오로 여겨집니다. 여신이 탄생하려는 때에 늙은 무녀를 내세운들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종막에 다가선 비극의 가련한 배우들이여,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선은 그저 파국을 앞당기는 일입니다. 우리들 중에서 가장 값진 자는 이 역할을 가장 잘 해내는 자입니다. 하지만! 하는 이 슬픈 성공을 더 이상 바라지 않습니다.

여러분, 어찌 내가 고백을 하지 않겠습니까? 나는 현존하는 모든 것을 증오하고 그것을 파괴할 계획을 품고 있으면서도 여러분의 찬동을 갈구하고 여러분에게 장학생 자격을 요청했습니다. 나는 냉정하고 정제된 철학 정신으로 이 연구 과정을 마칠 것입니다. 압박의 감정이 나를 화나게 한 것 이상으로 진리의 통찰이 나를 냉정하게 했습니다. 그리고 내가 이 연구에서 거두고자 하는 가장 값진 결실은 악과 그 근원에 대한 명쾌한 인식 - 이것은 열정이나 흥분보다 더욱 힘이 있습니다 - 이 가져다주는 이 평정심을 독자들에게 불어넣는 것입니다. 인간의 특권과 권위에 대한 나의 증오는 끝이 없었습니다. 아마도 나는 이따금 나의 분노 속에 인간과 사물을 뒤섞는 잘못을 저질렀겠지요. 지금으로서는 그저 경멸하거나 불평할 따름입니다. 증오하기를 그만두기 위해서 나로서는 깨닫는 것으로 충분했습니다.

여러분, 진리를 천명하는 일을 사명이자 기개로 삼는 여러분, 인민을 훈육하고 그들에게 무엇을 원하고 무엇을 두려워할지를 알려주는 것은 여러분의 몫입니다. 아직도 무엇이 자신들에게 옳은 일인지를 잘 판단하지 못하는 인민은 귀에 솔깃한 소리를 듣기만 하면 전혀 어긋나는 생각에도 당장 박수갈채를 보냅니다. 그것이 그들에게는 가능성의 한계이자 사고의 법칙인 것입니다. 그들은 일찍이 물리학자와 마술사를 구별하지 못했던 것과 마찬가지로 학자와 궤변가를 구별하지 못합니다. 〈어떤 소문도 정말 진짜처럼 여겨서 아무 이야기나 쉽게 믿고, 받아들이고, 긁어모으지요. 신기한 휘파람 소리나 방울 소리를 들으면, 사람들은 파리 떼가 양푼 소리를 듣고 모이듯 모여듭니다.〉[4]

여러분, 내가 평등을 희망하듯 여러분도 평등을 희망하시기를! 우리 조국의 영원한 행복을 위해서 평등의 전도사이자 선구자가 되시기를! 내가 여러분의 마지막 연구비 수혜자이기를! 여러분, 이것이야말로 내가 품을 수 있는 모든 소망 중에서 여러분에게 가장 값지고 내게 가장 영예로운 것입니다.

심심한 경의와 두터운 감사의 마음으로.

귀 아카데미 연구비 수혜자

피에르 조제프 프루동

이 편지를 전달받은 지 두 달 후, 아카데미는 8월 24일에 심의회를 열고 그 수혜자에게 다음과 같이 회답했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한 회원이 쉬아르 연구비 수혜자가 지난 6월에 『소유란 무엇인가?』라는 제목으로 출판하여 본 아카데미에 헌정한 소책자에 대해 아카데미의 주의를 촉구하고 있다. 동 회원은 아카데미가 이 출판물에 포함된 반사회적 교설들에 대한 책임을 정의와 귀감과 스스로의 권위를 걸고 공식적으로 부인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의견이다. 그리하여 그는 다음과 같이 요구한다.

1. 아카데미는 쉬아르 연구비 수혜자의 저서를, 아카데미의 승인 없이 출판한 점과 또 회원 각자의 원칙들에 정반대되는 견해를 아카데미의 견해인 양 돌린 점을 들어서 아주 공식적으로 부인하고 비난한다.

2. 수혜자에 대해, 만인 이 책의 제2판이 출판될 경우 거기에서 헌사를 삭제할 것을 엄중히 요구한다.

3. 아카데미의 이 판단은 간행물에 기록되어야 한다.

이 3개 조항은 표결에 붙여 채택되었다.

이렇게 단호한 부인이란 형태를 부여함으로써 더욱 단단해졌다고 그 당사자들이 생각한 이 가소로운 판결이 나온 후에, 나는 독자에게 우리 동포들의 지성을 우리 아카데미 회원들의 지성으로 측정하지 않도록 촉구하기만 하면 되었다.

사회과학이나 정치학에서의 나의 후원자들이 나의 〈소책자〉에 대해 파문을 선포하고 있을 때, 프랑슈-콩테에 살지도 않고 나와는 일면식도 없으며 내가 경제학자들에게 가한 너무도 격한 비난에 의해 개인적으로 공격받았다고 여길지도 모를 어느 한 사람, 인민의 모든 고통을 감지하고 인민의 사랑을 받으며, 권력에 아첨하지도 권력을 폄하하지도 않고 그저 권력을 계도하기에 힘쓰면서 그 권력으로부터 영예를 부여받은 박식하고 겸손한 한 저술가, 아카데미 회원이자 경제학 교수이고 소유의 옹호자인 블랑키Blanqui 씨가 동료들이나 장관 앞에서 나를 변호해 주었으며, 늘 무지한 만큼 늘 눈먼 사법의 횡포로부터 나를 구해주었다.

나는 내가 두 번째 연구를 출판했을 때 블랑키 씨가 영광스럽게도 내게 쓴 편지를 독자도 기쁘게 읽을 것으로 생각했다. 그것은 받는 이를 들뜨게 하는 동시에 쓴 이를 영예롭게 하는 편지였다.

귀하

소유에 대한 당신의 두 번째 연구를 기꺼이 내게 보내주신 데 진정으로 감사드립니다. 나는 그것을 첫 번째 연구를 접하고 당연히 느꼈던 것과 마찬가지로 흥미진진하게 읽었습니다. 나는 이처럼 중요한 저작에 일종의 선전책자와 같은 모양새를 주는 투박한 형식을 당신이 어느 정도 바로잡은 것을 기쁘게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당신에 대해 반신반의한 나로서는 당신의 의도에 대해 안심하는 데는 당신의 재능 외에 달리 아무것도 필요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사람이 자기 나라에 불을 붙이는 데는 참다운 지식을 그리 많이 소모할 필요가 없는 모양입니다. 〈소유란 도둑질이다!〉 이 거친 명제는, 만일 당신이 그 난폭한 솔직성을 계속 고집했다면, 부대 속에 든 것을 겉 상표만 가지고는 판단하지 않는 진지한 정신의 소유자들에게마저 혐오감을 불러일으킬 성질의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당신이 그 형식을 다소 완화했다고 하더라도 당신은 당신 학설의 기본에는 변함없이 충실하겠지요. 그리고 영광스럽게도 나를 이 위험한 예언에 적잖이 참여시켜 주셨지만, 나는 당신의 재능에 대해서는 물론 경의를 표하면서도 그 밖의 모든 점에서 나를 끌어들이는 그러한 연대를 수락할 수 없습니다.

나는 다만 한 가지 점에서 당신과 의견을 같이 합니다. 그것은 이 세상에서 모든 종류의 소유가 너무도 자주 남용되고 있다는 점입니다. 그러나 나는 이 남용에서 폐지를 결론짓지는 않습니다. 그렇게 한다는 것은 모든 질병을 단숨에 없애는 죽음과 너무나 흡사한 것입니다. 나는 더 앞으로 나아갈 것입니다. 물론 나도 모든 남용 중에서 소유권의 남용이야말로 가장 가증스러운 것이라고 당신에게 고백할 것입니다. 그러나 소유를 침해한다거나 더군다나 파괴하지 않고도 이 질병에 대한 치유책이 여전히 있습니다. 만일 현행 법률들이 소유권의 행사를 제대로 규제하고 있지 못하다면, 우리는 그 법률들을 개정할 수 있습니다. 우리의 민법은 꾸란이 아닙니다. 우리는 거리낌없이 민법에 대해 이의를 제기해 왔지 않습니까. 그러므로 소유권의 행사를 규제하는 법률들을 개정하면 됩니다. 그러나 배척하는 데는 신중합시다. 당연한 말이지만, 완벽하게 순결한 손을 가진 정직한 인간이란 있을 수 없으니 말입니다. 사람들이 자신이 그렇다는 것을 알지도 원하지도 않으며 눈치 채지도 못하면서 도둑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당신은 현 사회가 우리 조상으로부터 내려온 온갖 종류의 미덕과 악행을 그 구조 안에 지니고 있다고 인정하지 않습니까? 당신이 보기에, 소유가 다시 고쳐 만들 수 있고 또 굳이 말하자면 형이상학이라는 압연기에 넣어서 평준화시킬 수 있을 만큼 단순하고 추상적인 것입니까? 당신은 이 두 개의 멋지고도 역설적인 즉흥 저술에서 단지 순박하고 고집불통의 몽상가일 수 없을 만큼 뛰어난 실제적인 사항들을 이야기했습니다. 당신은 선동조의 거친 말들을 가지고 장난을 친다고 보기에는 경제 용어와 학술 용어를 너무나 잘 구사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당신은 『소유란 무엇인가?』에서 80년 전에 루소가 〈달랑베르에게 보내는 서한〉에서 보여준 바와 같이 정신과 학문을 웅장한 시적 표현으로 드러낸 것이라고 나는 믿습니다. 아무튼 이것이 나의 견해입니다.

이것이 내가 당신의 책에 대해 보고한 날, 아카데미에서 말한 내용입니다. 나는 사람들이 그 책을 법적으로 기소하려 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당신은 내가 어떤 요행으로 다행히 그것을 막을 수 있었는지 알 수 없을 것입니다.[5] 만일 검사가 즉 지적 사건의 사형집행인이 뒤쫓아와서 나를 앞질러 당신의 책을 공격하고 당신의 신상을 괴롭혔다면, 그것은 나에게 얼마나 큰 영겁의 고통이었겠습니까? 솔직히 말하건대 나는 정말 끔찍스러운 이틀 밤을 보냈습니다. 그리고 나는 당신의 책이 하나의 학술논문일 뿐 어떤 선동조의 선언문도 아니라는 것을 납득시키고 나서야 비로소 세속적인 완력을 저지할 수 있었습니다. 당신의 문체는 너무도 숭고해서 우리의 사회 질서에 대한 중요 문제들을 거리에서 돌을 던지면서 논하는 무분별한 자들에게는 전혀 쓸모가 없습니다. 그러나 조심하십시오. 그들이 갑자기 당신도 모르는 사이에 이 막강한 병기창에 들어와 자료를 뒤져내거나 당신의 힘찬 형이상학을 손에 넣은 어떤 거리의 궤변가가 그것을 굶주린 청중 앞에서 마구잡이로 해설하지 않는지 말입니다. 그것은 결론적으로 표절 행위일 것입니다.

당신이 지적한 바와 같은 소유권의 남용에 대해서는 나도 당신만큼 심정의 동요를 느낍니다. 그러나 나는 질서에 대해, 경찰관에게나 ㅁ나족을 줄 진부하고 성가신 질서가 아니라 인간 사회의 장엄하고 숭고한 질서에 대해 아주 깊은 애착을 지니고 있기 때문에, 어떤 남용들을 공경하는 데 때로는 망설이곤 합니다. 나는 한 손으로 뒤흔들어 놓아야만 했던 것을 다른 한 손으로 다시 일으켜 세우고자 했습니다. 노목의 가지를 자를 대에 열매를 맺을 봉오리를 다치지 않도록 조심해야만 합니다! 당신은 이것을 어느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습니다. 당신은 신중하고 교육받은 사람이며 사려 깊은 정신의 소유자입니다. 당신은 당신의 의도에 대해 의혹을 품을 자들을 안심시키려고 우리 시대의 광신자들에 대해 아주 강한 어조로 말했습니다. 그러나 결국 당신은 소유의 폐지(!)로 결론지었습니다. 당신은 인간의 지성을 움직이게 하는 가장 역동적인 지렛대를 파괴하고자 하며, 가부장적 온정을 가장 달콤한 환각이라고 공격하고, 단 한마디로 자본의 형성을 저지합니다. 그러면 우리는 이제 화강암 위에 기초를 세우는 것이 아니라 모래 위에 집을 짓게 됩니다. 내가 인정할 수 없는 점이 바로 이것입니다. 그래서 나는 당신의 책을, 멋진 구절들로 가득 차고 영감과 지식으로 빛나는 당신의 책을 비판했던 것입니다!

영광스럽게도 당신이 내게 공적으로 사적으로 전해 준 연구논문은 나빠진 내 건강을 회복해 당신과 함께 한 장 한 장씩 연구할 수 있기를 원합니다. 나의 유력한 소견을 당신에게 전할 수 있으리라고 나는 믿습니다. 우선은 당신이 내게 보내준 호의에 찬 말슴에 대해 당신에게 감사를 표하는 것으로 그칩니다. 우리는 둘 다 진지하다는 미덕을 갖추고 있습니다. 그러나 내게는 신중이라는 미덕이 더 필요합니다. 당신은 노동계급이 얼마나 뿌리 깊은 곤궁에 처해 있는지 알고 있습니다. 나는 얼마나 많은 격조 높은 심장들이 남루한 옷 속에서 고동치고 있는지를 압니다. 그리고 나는 저렇게도 이른 아침부터 일어나서 일하고 세금을 내고 우리나라의 힘을 키우는 저 수많은 충직한 사람들에게 누를 길 없는 우애의 공감을 느낍니다. 그들을 현혹시키려 하는 자도 있으나, 나는 그들에게 봉사하고 그들을 계도하고자 애쓸 것입니다. 당신은 그들에게 직접 쓰지는 않았습니다. 당신은 두 개의 멋진 선언서를 작성했습니다. 두 번째 것이 첫 번째 것보다 훨씬 절제되어 있습니다. 세 번째 것은 두 번째 것보다 훨씬 절제된 것으로 만드십시오. 그러면 당신은 평정과 불편부당을 그 첫 번째 사명으로 하는 과학의 반열에 들 것입니다.

그러면 이만, 내가 품은 가장 높은 평가를 당신에게 보냅니다.

파리, 1841년 5월 1일

블랑키

물론, 이 품위와 호소력을 지닌 서한에 대해서 나로서는 몇 가지 유보하고 싶은 점이 있다. 그러나 나는 고백하건대 적대자의 수를 불필요하게 늘리기보다는 서한의 말미에 담긴 예언 같은 것을 실현하고자 더 애썼다. 나는 많은 논쟁으로 이제 지치고 피로하다. 언쟁에 소비되는 지성은 전쟁에 쓰이는 지성과 같은 것이다. 그것은 지성의 낭비이다. 블랑키 씨는 소유권에 많은 남용이, 그것도 가증스러운 남용이 있다는 것을 인정한다. 나로서는 이러한 남용의 총체를 〈소유〉라고 부른다. 우리 두 사람에게 소유란 그 모서리들을 다듬어야 할 다면체이며, 그 작업은 이미 진행 중이다. 블랑키 씨는 그 형태가 여전히 다각형일 것(입증할 수는 없으나 수학적으로 허용되는 가정)으로 주장하는 반면, 나로서는 그 형태가 원형이 될 것으로 생각한다. 성실한 사람들이라면 누구나 서로를 인정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현 상황에서는 사람들이 소유의 폐지에 대해 응당 주저하리라고 나는 인정한다. 실제로 논쟁에서 이기기 위해서는, 우리의 정치적 신념들을 능히 집약하고 있으며 또 널리 수용되고 있는 한 원리를 뒤집기만 하는 것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대항할 수 있는 원리를 세우고 그 원리에 의거한 체제를 구성하는 것이 필요하다. 나아가서 이 새로운 체제가 그에 앞선 체제를 확립시켜 주었던 모든 도덕적, 정치적 요구사항들을 어떻게 충족시킬 것인가를 보여주지 않으면 안 된다. 따라서 내가 이미 입증해 온 것들이 확실한지 아닌지를 알려면 우선 다음과 같은 조건들이 갖추어져야 하리라.

소유 또는 모든 소유의 남용을 제외한 기존 제도들이 자리를 찾을 수 있을 뿐만 아니라 그것들 자체가 평등의 수단이 될 수 있는 어떤 절대적인 평등의 체제를 찾는 것, 즉 개인적 자유, 권력의 분할, 공적 관료조직, 배심원, 행정 · 사법 제도, 교육, 결혼, 가족, 상속에서의 균등과 통일성, 직계 빛 방계의 상속, 판매 및 교환의 권리, 유언권 그리고 심지어 장자長子의 권리 등의 체제, 소유권보다 더 잘 자본의 형성을 보장하고 만인의 열의를 유지하는 체제, 즉 플라톤과 피타고라스에서부터 바뵈프, 생시몽 및 푸리에에 이르기까지 지금까지 제기된 모든 결사의 이론들을 더욱 높은 관점에서 설명하고 보충하는 체제. 그리고 마지막으로, 과도기적인 수단으로 이용될 수 있으며 당장 적용될 수 있는 체제.

이와 같은 방대한 과업은 몽테스키외와 같은 사람 20명 정도의 노력을 요구한다는 사실을 나는 잘 알고 있다. 물론 단 한 사람에게 그 모든 것을 끝까지 다 해내도록 맡길 수는 없겠지만, 그 사람이 그러한 작업을 시작할 수는 있다. 그가 밟아나갈 길은 목표를 발견하고 결과를 확보하기에는 충분할 것이다.

제1장 이 책에서 사용하는 방법, 혁명의 이념

만일 내가 〈노예제란 무엇인가?〉라는 물음에 답해야만 한다면, 그래서 내가 한마디로 〈그것은 살인이다〉라고 답한다면, 나의 생각은 당장에 이해될 것이다. 인간에게서 사상, 의지 그리고 인성을 빼앗을 수 있는 권력은 곧 생사여탈의 권력이며, 한 인간을 노예로 만드는 것은 그를 살해하는 것과 다름없다는 사실을 보여주기 위해서 굳이 군말이 필요 없을 것이다. 그런데 나는 왜 〈소유란 무엇인가?〉라는 또 하나의 질문에 대해 〈그것은 도둑질이다〉라고 마찬가지로 답할 때마다, 내 답변이 잘 전달되지 못했다는 노파심에 시달려야 하는 것일까? 두 번째 명제는 사실상 첫 번째 명제가 모양을 바꾼 것에 불과한 데도 말이다.

나는 우리의 정부와 제도들의 원리 그 자체, 즉 소유의 문제를 논하려고 한다. 이것은 나의 권리이다. 나의 연구에서 도출되는 결론이 틀릴 수도 있다. 이것도 나의 권리이다. 이 책의 끝에 가서 도달한 사유를 나는 책의 첫머리에 놓고자 한다. 이 역시 나의 권리이다.

어떤 저자는 소유란 점유占有에서 나오며, 법률로 재가된 민법상의 권리라고 가르친다. 또 어떤 저자는 소유란 노동에 그 원천을 두는 자연권이라고 주장한다. 그리고 이 학설들은 서로 이율배반적임에도 불구하고 격려 받고 갈채를 받는다. 나는 노동도 점유도 법률도 소유를 창출할 수 없다는 것을, 그리고 소유란 원인 없는 결과라고 주장한다. 내가 비난받아 마땅한가?

얼마나 많은 불만의 목소리가 터져 나오는가!

〈소유, 그것은 도둑질이다!〉 93년(프랑스 대혁명의 공포정치시기를 뜻한다-옮긴이)의 구호일세! 혁명의 나팔일세!…

독자여, 안심하시라. 나는 결코 불화의 주모자도 아니며 폭동의 선동꾼도 아니다. 나는 며칠 앞질러 역사를 내다볼 뿐이다. 나는 우리가 헛되이 감추고자 애쓰는 진실을 드러낼 뿐이다. 나는 미래의 우리 정체政體에 머리말을 쓸 뿐이다. 당신에게 신성모독으로 보이는 이 정의定義 〈소유, 그것은 도둑질이다〉는 만일 우리의 고정관념이 그것을 이해할 수 있도록 허용하기만 한다면, 번개를 막는 피뢰침이 될 것이다. 그러나 얼마나 많은 이해관계와 편견이 그것을 가로막고 있는가! …아아, 슬프도다! 철학은 사건들의 흐름을 바꾸지 못할 것이며, 운명은 예언과는 무관하게 실행될 것이다. 그렇다 해도 정의가 실현되고 우리의 교육이 완성되어야 하지 않겠는가?

〈소유, 그것은 도둑질이다!…〉 이 얼마나 인간 사유가 본말전도된 것인가! 〈소유자〉와 〈도둑〉은 그것이 지칭하는 존재들이 서로 적대적인 한 늘 모순되는 표현이었다. 모든 어법들이 이 모순관계를 축성했다. 당신은 어떤 권위를 믿고 이 보편적 합의를 공격하고 세상 사람들의 말을 부인하는가? 여러 족속들과 여러 시대의 이성을 부인하다니 당신은 도대체 누구인가?

독자여, 내 보잘 것 없는 개성이 당신에게 무에 그리 중요한가? 당신처럼 나도 이성이 사실과 증거에만 몸을 굽히는 시대에 살고 있다. 나의 이름은 당신과 마찬가지로 〈진리의 탐구자〉[6]이다. 나의 사명은 〈증오도 두려움도 없이 말하라. 네가 아는 것을 말하라〉는 율법의 말씀에 기록된 대로이다. 우리 인류의 과업은 과학의 신전을 짓는 것이며, 이 과학은 인간과 자연을 포괄한다. 그런데 진리는 모두에게, 오늘은 뉴턴Newton과 파스칼Pascal에게, 내일은 골짜기의 목동과 작업장의 장인에게 드러날 것이다. 각자는 건물에 자기 몫의 돌을 쌓을 것이며 일이 끝나면 사라질 것이다. 영원성이 우리들의 앞에 있고 또 우리의 뒤를 따른다. 이 두 무한 사이에서, 지금 시대가 알고자 하는 인간의 위치란 무엇인가?

그러므로 독자여, 나의 직함과 나의 성격을 개의치 말고 나의 추론에만 몰두하라. 내가 보편적 오류를 시정하려 하는 것은 보편적 동의에 따라서이다. 내가 사람들의 의견에 맞서는 것은 사람들을 신뢰하기 때문이다. 용기를 가지고 나를 따라오라. 그리고 당신의 의지가 솔직하고 당신의 의식이 자유롭다면, 당신의 영혼이 두 명제를 종합해서 제3의 명제를 끄집어낼 줄 안다면, 나의 사상은 틀림없이 당신의 사상이 될 것이다. 당신에게 나의 마지막 결론을 먼저 내놓으면서 이 책을 시작하는 것은 당신에게 예고하기를 원했기 때문이지 당신에게 대항하고자 함이 아니었다. 왜냐하면 당신이 내 책을 읽는다면, 당신은 틀림없이 동의하지 않을 수 없으리라고 확신하기 때문이다. 내가 당신에게 말하고자 하는 바는 아주 단순하고 아주 명백하기 때문에 당신은 왜 진작 그것을 몰랐을까 하고 놀랄 것이며, 〈나는 그것을 생각조차 해보지 못했다〉라고 중얼거릴 것이다. 다른 사람들이라면 당신에게 자연의 비밀을 캐내고 숭고한 신탁을 전하는 천재의 광경을 보여줄 것이다. 그러나 당신은 여기서 〈정의〉와 〈권리〉에 대한 일련의 실험들만을 발견할 것이고, 당신이 지니고 있는 양식의 저울추와 잣대를 검증하게 될 것이다. 실험은 당신 눈앞에서 펼쳐질 것이고, 그 결과를 평가하는 것은 바로 당신 자신이다.

게다가, 나는 어떤 체계système도 세우지 않는다. 나는 특권의 종언, 노예제의 폐지, 권리의 평등 그리고 법의 지배를 요구한다. 정의正義, 오로지 정의, 이 논문의 요체는 바로 이것이다. 세계를 규율하는 노고일랑 남들에게 맡긴다.

나는 언젠가 〈왜 사회에 그토록 고통과 빈곤이 만연해 있는가?〉하고 자문한 적이 있다. 인간은 영원히 불행한 존재인가? 나는 개혁을 부르짖는 자들의 만병통치식 설명에 만족하지 않는다. 만연된 곤궁에 대해서 혹자는 권력의 비굴함과 무능을, 혹자는 음모론자들과 폭동을, 또 다른 혹자는 일반적인 무지와 부패를 고발한다. 연단과 지면에서의 이러한 끝없는 공방에 지친 나머지, 나는 스스로 문제를 파헤쳐 보길 원했다. 나는 학문의 대가들을 참조했으며, 철학, 법학, 정치경제학, 역사에 관한 백여 권에 달하는 책들을 독파했다. 이 많은 독서가 불필요한 시대에 살았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 학설들을 비교하면서, 반대 의견에 답변하면서, 논증들을 끊임없이 등식화하고 환원하면서, 수많은 삼단논법을 가장 치밀한 논리의 그물로 거르면서, 나는 정확한 정보를 얻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 이 험난한 노정에서 나는 여러 가지 흥미 있는 사실들을 수집했는데, 틈이 날 때마다 그것을 친구들이나 공중公衆과 나눌 것이다. 그러나 먼저 말해 둘 것이 있다. 요컨대 우리는 결코 〈정의, 형평, 자유〉라는 통속적이고도 신성한 단어들의 듯을 이해하지 못했다는 것을, 이들 각각에 대한 우리의 관념은 아주 모호했다는 것을, 그리고 이러한 무지가 마침내 우리를 갉아먹는 빈곤과 인류를 괴롭히는 온갖 재앙의 유일한 근원이었다는 것을 나는 우선 확실히 깨닫게 되었다.

이 묘한 결론에 나의 영혼은 전율했다. 나는 나의 이성을 의심했다. 나는 스스로 되묻곤 했다. 눈이 본 적도 귀가 들어본 적도 지력이 꿰뚫어 본 적도 없는 것을 네가 발견했다니! 가련한 이여, 너의 병든 두뇌에서 나온 환영幻影을 과학의 명징성으로 착각하고 전율하다니! 위대한 철학자들이 말한 것처럼, 실천 도덕률에 관한 한 보편적 오류란 있을 수 없다는 것을 너는 모르는가?

따라서 나는 내 판단을 검증해 보기로 마음먹었다. 내가 이 새로운 작업에 스스로 던져본 질문은 다음과 같은 것들이다. 인류가 그토록 오랫동안 그리고 그토록 널리 잘못 생각하는 것은 가능한 일인가? 인류는 왜 그리고 어떻게 잘못 생각하게 되었는가? 인류의 오류가 보편적인 것이라면 어떻게 치유할 수 있는가?

이러한 문제들 - 내 관찰의 확실성 여부는 이들 문제의 해결에 달려 있다 - 은 나의 분석에 그리 오랫동안 버티지 못했다. 인식의 대상 일반과 마찬가지로 도덕에서도 우리에게 가장 심각한 오류는 과학의 도그마라는 점을, 심지어 정의justice의 문제에서도 오류를 범한다는 것은 인간을 숭고하게 만드는 특전이라는 점을, 그리고 내게 돌아올 철학적 공로란 아주 사소한 것이라는 점을 나는 이 글의 제5장에서 보여줄 것이다. 사물을 명명하는 일은 별 것이 아니다. 중요한 일은 그 사물들이 나타나기 전에 깨닫는 것이다. 끝물에 이른 한 사상, 즉 누구나 깨닫고 있으며 설령 내가 오늘 공표하지 않으면 내일 다른 누군가가 선언할 그러한 사상을 표방함으로써, 나는 정식定式을 먼저 내놓은 것에 불과하다. 떠오르는 해를 처음 본 이에게 모든 찬사를 바칠 것인가?

그렇다. 조건의 평등은 권리의 평등과 같다고, 〈소유〉와 〈도둑질〉은 동의어라고, 재능과 봉사의 우월성이라는 구실 아래 얻은, 아니 차라리 빼앗은 사회적 탁월성이란 불의이며 강탈 행위라고 누구나 믿고 있으며 즐겨 말하고 있다. 내가 말하건대, 이러한 진실은 모든 이의 마음속에 새겨져 있다. 내가 할 일이라곤 그들로 하여금 그것을 깨닫게 하는 것이다.

본론으로 들어가기 전에 내가 따라갈 방도에 대해 한마디 할 필요가 있다. 파스칼이 기하학의 문제를 다룰 때 그 해결 방법 역시 스스로 고안했듯이, 철학의 문제를 푸는 데도 방법이 필요하다. 철학이 다루는 문제들이 그 결과 면에서 어찌 기하학의 문제보다 덜 중요하겠는가! 따라서 이 문제들을 해결하려면 어찌 더 깊이 있고 엄밀한 분석이 요청되지 않겠는가?

현대의 심리학자들이 말하는 것처럼, 정신에 받아들여진 일체의 인식은 바로 이 정신의 어떤 일반 법칙들에 의해 규정된다는 것, 달리 말하자면 우리의 오성悟性 안에 이미 존재하며 그 형식 조건을 이루는 어떤 유형들에 맞추어 형성된다는 것은 이제 의심할 나위가 없는 사실이다. 따라서 심리학자들은 정신이 어떤 생득적 〈관념들〉을 가지고 있지는 않지만 적어도 생득적 〈형태들〉을 가지고 있다고 말하는 것이다. 따라서, 일체의 현상은 〈시간〉과 〈공간〉 속에서 우리에게 인식되기 마련이다. 우리로 하여금 그 결과를 낳은 어떤 〈원인〉을 상정하게끔 하는 모든 사물, 즉 존재하는 모든 것은 〈실체substance〉, 〈양식〉, 〈수량〉, 〈관계〉 따위의 관념을 내포하고 있는 법이다. 달리 말하자면, 우리는 이성의 일반 원칙들 - 일반 원칙들을 넘어서면 무無의 세계가 있을 뿐이다 - 중 어느 하나와 관련을 맺지 않는 어떠한 생각도 품을 수 없다.

심리학자들에 따르면, 우리의 모든 판단과 관념은 불가피하게 이 기본 유형들로 회귀되기 마련이며, 우리의 감각은 이들 유형을 드러내 주기만 할 뿐이다. 이러한 오성의 공리들은 학교에서는 〈범주들〉이라고 가르친다. 이들 범주가 정신 속에 본원적으로 존재한다는 것은 오늘날 입증되고 있다. 남은 일은 그것들에 체계를 부여하고 그것들의 수를 헤아리는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범주를 10개로, 칸트는 15개로 구분했다. 쿠쟁(V. Cousin, 1792~1867, 프랑스의 철학자, 『철학 강의』를 남겼다-옮긴이) 씨는 범주를 세 개로, 두 개로 그리고 마침내는 한 개로 축소시켰는데, 이 교수님의 논박할 여지없는 영예는 범주들에 대한 참된 이론을 발견하지는 못했을지라도 적어도 이 문제 - 모든 형이상학의 가장 중요하고 아마도 유일한 문제 - 의 중요성을 누구보다도 잘 이해했다는 점일 것이다.

고백컨대, 나는 우리 오성의 〈관념들〉뿐만 아니라 심지어 〈형태들〉이나 〈법칙들〉의 생득성이라는 것을 믿지 않는다. 그리고 나는 레이드(T. reid, 1710~1796, 스코틀랜드의 철학자, 『공동 감각에 따른 인간오성론』의 저자-옮긴이)나 칸트의 형이상학은 아리스토텔레스의 형이상학보다 진실에서 훨씬 더 멀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여기서 이성에 대한 비판론 - 이는 오랜 작업을 요하는 일이며 일반인은 거의 관심이 없는 문제이다 - 을 개진하는 것은 나의 의도가 아니므로, 나는 우리의 가장 일반적이고 가장 긴요한 관념들, 즉 시간, 공간, 실체, 원인 따위가 정신 속에 본원적으로 존재하는 것이거나 적어도 정신의 구성에서 직접 유래하는 것이라는 가정을 받아들일 것이다.

그러나 이에 못지않게 참된, 그런데도 철학자들이 너무도 연구를 등한시해 온 하나의 심리학적 사실은 제2의 천성으로서의 습관이 새로운 범주적 형태들을 오성에 각인시킬 힘을 지니고 있다는 점이다. 이 형태들은 우리의 눈을 사로잡는 외양에 근거한 것인 만큼 대개의 경우 개관적 현실과는 거리가 먼 것이나 우리의 판단 작용에 미치는 영향력에 있어서는 앞에서 열거한 일차적 범주들만큼이나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 따라서 우리는 한꺼번에, 즉 우리 이성의 〈영원하고〉 〈절대적인〉 법칙에 의거하는 동시에, 사물에 대한 불완전한 관찰에서 비롯하는 대개는 오류투성이인 부수적 규칙들에 의거해서 추론하게 된다. 이것이야말로 거짓된 편견의 가장 비옥한 원천이며, 대개는 수많은 오류들에 늘 따라다니는 불가항력적인 원인이다. 이러한 편견에서 생긴 강박관념이 우리를 아주 무겁게 짓누르기 때문에, 우리는 때때로 우리의 이성과 정신이 배척하고 우리의 양심이 거부하는 어떤 원리와 싸우고 있을 때에도 우리도 모르게 그 원리를 옹호하고, 그 원리에 따라 추론하고, 심지어 그 원리를 공방하면서도 사실은 그에 복종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의 정신은 말하자면 어떤 테두리에 갇힌 채 그저 자신의 위를 맴돌 뿐이다. 새로운 관찰에 의해 우리가 새로운 관념을 얻고, 우리의 상상력에 붙어 다니는 환상에서 우리를 벗어나게 해주는 어떤 외부의 원리를 우리가 발견할 때까지 말이다.

오늘날 우리는 자기장磁氣場의 법칙 - 그 연원은 아직 밝혀지지 않았지만 - 이라는 것을 알고 있다. 요컨대 외부의 간섭을 받지 않을 경우 두 물체는 〈중력〉이라고 불리는 어떤 가속화된 추동력에 의해 서로 결합하는 경향이 있다. 버팀목이 없는 물체들을 땅에 떨어지게 하고, 그것들에 무게를 주고, 우리 자신을 우리가 살고 있는 땅에 붙들어 매주는 것이 바로 중력의 작용이다. 고대인들이 극지極地의 존재를 믿지 않았던 유일한 이유는 바로 이러한 원리에 대한 무지였다. 〈어찌하여 그대들은 보지 못하는가.〉 락탄티우스(Lactantius, 260~325, 그리스의 철학자-옮긴이)의 뒤를 이어 성 아우구스티누스는 말했다. 〈만약 우리 발밑에 사람들이 있다면, 그들은 하늘로 곤두박질치지 않겠는가?〉 자신의 눈에 보이는 대로 지구가 평면이라고 믿은 이 히포Hippo의 주교는 만약 여러 장소에서 천정점과 천저점을 직선으로 잇는다면 이 선들은 서로 평행이 될 것이며 위에서 아래로 향하는 모든 운동들은 바로 이 직선들의 방향이 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따라서 아우구스티누스는 별들이 하늘의 천장에 회전하는 횃불처럼 매달려 있으며 만일 그냥 내버려둔다면 불의 비가 오듯 땅에 떨어질 것이고, 땅은 세계의 아랫부분을 이루는 거대한 탁자와 같다는 식으로 당연히 결론지었다. 만일 누군가가 땅은 무엇으로 지탱되고 있느냐고 묻는다면, 그는 자신은 답을 모르지만 신에게 불가능이란 없지 않느냐고 답했을 것이다. 공간과 운동에 관한 성 아우구스티누스의 관념은 바로 이런 식이었다. 그 관념은 피상적인 관찰에서 나온 어떤 편견에 의해 주어진 것이며, 그에게는 판단의 일반적이고 정언적인 규칙이 된 것이다. 물체가 낙하하는 원인에 대해서 말하자면 그의 정신은 텅 빈 공간이나 다름없었다. 그는 물체는 떨어지기 때문에 떨어진다고 대답하는 것 외에 달리 할 말이 없었다.

우리의 경우, 낙하의 관념은 더 복잡하다. 낙하가 내포하는, 공간과 운동이라는 일반 관념들에, 원인이라는 상위 관념에 속하는, 중심을 향하는 인력引力 또는 방향이라는 관념이 더해진다. 그러나 물리학이 이 점에 관한 우리의 판단을 완전히 정정했다고 할지라도, 우리는 성 아우구스티누스의 편견을 여전히 일상에서 간직하고 있다. 예컨대 우리가 한 물체가 떨어졌다고 말할 때, 우리는 중력의 효과가 나타났다고 단순하고 일반적으로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그 운동이 땅을 향하여 그리고 〈위에서 아래로〉 이루어졌다고 특수하고 개별적으로 이해하는 것이다. 우리의 이성은 계몽되었으나 여전히 상상력에 의해 농락당하고 있으며, 우리의 언어는 언제까지나 교정 불가능해 보인다. 〈하늘에서 내려오다〉는 〈하늘로 올라가다〉 만큼이나 옳은 표현이 아니다. 그러나 이러한 표현은 인간이 언어를 사용하는 한 줄곧 남을 것이다.

〈위에서 아래로〉, 〈하늘에서 내려오다〉, 〈구름에서 떨어지다〉 따위와 같이 말하는 이 모든 방식이 위험한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일상생활에서 그것을 고칠 줄을 알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것이 과학의 진보를 얼마나 늦추었는지를 잠시라도 생각해보자. 물체가 낙하하는 진짜 원인을 아는 것이나 공간의 일반적 방향에 대한 관념이 적확한가 하는 것은 사실상 통계학, 기계학, 유체역학 도는 탄도학에 있어서는 별로 중요하지 않을지 모르나, 세계의 체계, 조수의 원인, 지구의 형태와 천체에서의 위치 따위를 설명하는 데에는 전혀 그렇지 않다. 이러한 문제들을 설명하려면, 가상의 테두리에서 벗어나야만 한다. 아주 오랜 옛날부터 솜씨 좋은 기술자, 탁월한 건축사, 능란한 포병이 있었다. 그들이 지구의 모양새나 중력에 대해서 잘못된 생각을 가지고 있다고 해서 그들의 기예의 발전이 저해되는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조만간 지표면에 세운 수직선들의 평행 상태라는 가정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현상들이 나타났다. 그리고 그 무렵에, 수백 년 동안 일상생활에서 통용되어 온 편견들과, 눈에 보이는 증거들에 어긋나는 새로운 견해들 사이에 투쟁이 시작되었다.

이렇게 한편으로는, 아주 그릇된 판단일지라도 그것이 고립된 사실들에 기초한 것이든 단지 외양에 기초한 것이든 항상 일정한 현실성réalités을 내포하고 있다. 물론 이 현실성이라는 다소 넓은 영역은 상당수의 추론을 허용해 주고, 이 현실성들을 넘어설 경우 우리는 부조리에 빠지고 말겠지만 말이다. 예컨대 성 아우구스티누스의 관념들 속에는 옳은 점이 있다. 물체는 땅으로 떨어진다거나, 물체의 낙하는 일직선이라거나, 태양이나 지구가 움직이고 있다거나, 하늘이나 땅이 돈다는 따위가 바로 그것이다. 이 일반적 사실들은 변함없는 진실이며 과학은 여기에 덧붙일 것이 없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모든 것을 설명해야 할 필요성은 우리로 하여금 더욱더 포괄적인 원리를 찾아 나서게 한다. 따라서 처음에는 지구가 평평하다는 견해가, 다음에는 지구가 세상의 중심이라는 학설이 잇따라 폐기되어야만 했다.

우리가 이제 물리적 자연에서 도덕 세계로 넘어가면, 여기에서도 우리는 마찬가지로 겉모습의 기만 및 자발성과 습관의 영향력에 종속되어 있다. 그러나 우리 인식 체계의 이 두 번째 부문을 특정 짓는 것은 한편으로는 우리의 견해에서 나오는 선과 악의 문제이고, 다른 한편으로는 우리를 괴롭히고 질식시키는 편견들을 고집하는 완고함이다.

중력의 원인이나 지구의 형태에 대해 우리가 어떤 학설을 믿든, 지구 물리학은 그로 인해 별로 손상을 받지 않는다. 우리의 사회 경제는 그로 인해 이익도 손해도 보지 않는다. 그러나 도덕적 자연의 법칙들이 관철되는 것은 우리들 안에서 그리고 우리들에 의해서이다. 그러므로 이들 법칙은 우리의 사려 깊은 참여 없이는, 다시 말하자면 우리가 그것들을 이해하지 않고서는 실행될 수 없다. 따라서 도덕률에 관한 우리의 탐구에 잘못이 있다면, 우리가 선을 원하면서도 악을 행할 것은 자명하다. 그 탐구가 단지 미흡할 뿐이라면, 일정 기간 동안은 우리 사회의 진보를 가로막지 않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장기적으로는 우리를 잘못된 길로 접어들게 할 것이며, 마침내 우리는 재앙의 심연에 빠지게 될 것이다.

가장 숭고한 인식이 우리에게 요청되는 것은 바로 이때이다(그리고 자랑스럽게 말하건대, 이러한 인식은 늘 어김없이 나타났다). 그러나 낡은 편견들과 새로운 관념들 사이의 뜨거운 투쟁이 시작되는 것도 바로 이때이다. 격변과 고뇌의 나날들! 같은 신념들과 같은 제도들을 가지고 온 세상이 행복했던 시절을 사람들은 기억한다. 어찌 이 신념들을 비난하고 어찌 이 제도들을 거부할 수 있었겠는가? 사람들은 이 복에 겨운 시기가 사회에 잠재되어 있는 악의 원리를 발전시키는 데 이바지했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싶어 하지 않는다. 사람들은 인간과 신들을 비난하고 지상의 강자들과 자연의 힘 탓으로 돌린다. 악의 원인을 자신의 이성과 자신의 마음속에서 찾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주인을, 경쟁상대를, 이웃을 그리고 심지어 자기 자신을 공격한다. 그리고 국가들은 서로 싸우고 서로 헐뜯고 서로를 말살하려 한다. 전면적인 인구 감소에 의해서 평형이 회복되고 병사들의 시체더미 위에서 평화가 다시 도래할 때까지 말이다. 이토록, 조상의 관습을 건드린다거나 창시자들에게서 하사받아 수백 년 동안 고스란히 지켜온 법률들을 바꾼다는 것은 인류에게는 아주 불경스러운 일이었다.

오랜 과거에서 나오지 않은 것 치고 칭찬할 만한 것이 없다(Nihil motum ex antiquo probabile est): 모든 새로운 것을 의심하라고 티투스 리비우스(Titus Livius, 고대 로마의 역사가-옮긴이)는 썼다. 물론 바꿀 필요가 없는 것이 인간에게는 더 좋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무엇을 위해서인가! 설령 인간이 날 때부터 무지하고, 아주 조금씩 교화되기 마련이라 할지라도, 그것 때문에 인간은 빛을 거부하고 이성을 저버리며 운명에 자신의 몸을 내맡겨야만 하는가? 흠 없는 건강이 병에서의 회복보다 더 낫다. 그러나 그것이 병자가 치료받기를 거부할 이유가 되는가? 개혁! 개혁! 아주 오랜 옛날에 세례자 요한과 예수는 외쳤다. 개혁! 개혁! 50년 전에 우리의 사제들은 외쳤다. 그리고 우리도 오랫동안 외칠 것이다. 개혁! 개혁!

우리 시대의 고통을 목격하면서 나는 자문했다. 즉 사회의 기초를 이루는 여러 원리들 중에 그 사회가 깨닫지 못하고 사회의 무지로 인해 더욱 더럽혀지고 온갖 악의 근원이 되어 버린 한 가지 원리가 있다. 이 원리는 세상에서 가장 오래된 것이다. 왜냐하면 가장 현대적인 원리들은 앗아가고 가장 오래된 원리들은 존중하는 것이 혁명들의 본질이며, 우리를 괴롭히는 악은 어떤 혁명들보다 시간적으로 앞서있기 때문이다. 우리의 무지 탓에 자라난 이 원리는 존중과 희구의 대상이 된 듯하다. 만일 그렇지 않았다면, 이 원리가 어찌 사람들에게 해를 끼치고 어찌 영향력을 발휘할 수 있었겠는가.

그러면 이 원리, 그 목적에서는 옳으나 우리의 이해 방식에 따르면 거짓인 이 원리, 인류만큼이나 오래된 이 원리는 무엇인가? 그것은 종교일까?

인간은 누구나 신을 믿는다. 이 도그마는 인간의 의식과 동시에 이성에 각인되어 있다. 인류에게 신이란 시원적인 사실이자 근본적인 관념이며 필연적인 원리이다. 마치 원인, 실체, 시간, 공간 따위의 범주적 관념들이 우리의 오성에서 그러한 것처럼 말이다. 마치 태양이 물리학의 모든 추론에 앞서서 감각 작용에 의해 우리에게 그 존재가 입증되듯이, 신은 우리 정신의 모든 추론에 앞서서 의식에 의해 우리에게 입증된다. 관찰과 경험에 의해 우리는 현상들이나 법칙들을 발견하게 되는 것이며 내밀한 감각만이 우리에게 존재들을 드러내 주는 것이다. 인간은 신이 있다는 것을 믿는다. 그런데 인간은 신의 존재를 믿음으로써 무엇을 믿는 것인가? 달리 말하자면 신이란 무엇인가?

이 신성divinité이라는 개념, 시원적이고 보편적이며 우리 인간에게 고유한 이 개념이 무엇인지를 인간의 이성은 아직 규정짓지 못하고 있다. 자연과 인과성에 대한 이해에서 우리가 한 걸음씩 나아갈 때마다 신의 관념은 확대되고 고양된다. 과학이 발전할수록 신은 커지는 듯하다. 신인동형론과 우상숭배는 유아기 정신의 필연적 결과이자 어린이와 시인들의 신학이었다. 만일 그것들을 행동의 준칙으로 삼지만 않았다면 그리고 의견의 자유를 존중할 줄 알았다면, 이는 순진무구한 오류에 그쳤을 것이다. 그러나 인간은 자신의 모습대로 신을 만들고는 자기 것인 양 차지하려 했다. 위대한 존재를 망가트린 것에 그치지 않고, 인간은 그것을 자신의 세습재산인 양, 자신의 부인 양, 자신의 물건인 양 취급했다. 이렇게 괴물 같은 모습으로 그려진 신은 어디에서나 인간과 국가의 소유물이 되었다. 종교에 의한 심성의 타락의 기원, 그리고 신앙에서 나오는 증오와 신성전쟁神聖戰爭들의 원천이 바로 이것이었다. 다행스럽게도, 우리는 신앙을 각자에게 맡기는 법을 배웠으며, 심성의 규범을 신앙의 바깥에서 찾고 있다. 신의 본질과 속성, 신학의 교설, 영혼의 운명 따위에 대해 판단을 내리는 데 있어서, 현명하게도 우리는 우리가 거부해야 할 것과 믿어야 할 것을 과학이 우리에게 가르쳐 주기를 기다리고 있다. 신, 영혼, 종교, 우리의 지칠 줄 모르는 성찰과 가장 불길한 방황의 변함없는 대상들, 늘 해결책을 못 찾는 치명적인 문제들, 이 모든 것에 대하여 우리는 여전히 잘못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우리의 오류는 적어도 중대한 결과를 초래하지는 않는다. 신앙의 자유가 보장되고 영적인 것과 세속적인 것 사이의 분리가 이루어짐으로써, 종교적 관념들이 사회의 진전에 미치는 영향력은 아주 소극적인 것이 되었으며 어떠한 법이나 정치적, 시민적 제도도 종교에 의존하고 있지 않다. 종교적 의무의 망각은 부패의 만연을 가져올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이 곧 만연된 부패의 필연적인 원인은 아니며 거기에서 파생되는 부수적인 현상일 뿐이다. 특히 여기서 우리의 관심사에 관한 한 이러한 관찰은 결정적이다. 인간들 사이의 조건의 불평등, 빈곤, 만연된 참상, 정부의 곤경 따위를 더 이상 종교의 탓으로 돌릴 수 없다. 더 높이 그리고 더 멀리 나아가서 원인을 찾아야 한다.

그러면 인간에게 종교적 감성보다 더 오래되고 더 심원한 것은 무엇인가?

인간 자신, 즉 영원한 대립 관계 속에서 서로 맞서는 의지와 양심, 자유 의지와 법이 있다. 인간은 자기 자신과 전쟁중이다. 그 이유는 무엇인가?

신학자들은 말한다. 〈태초에 인간은 죄를 범했다. 우리 인간은 아주 오래된 배반의 죄를 지었다. 이 죄 때문에 인간은 신의 은총을 잃었으며 오류와 무지가 늘 그를 따라다녔다. 옛 글들을 읽어보라. 당신은 어디서나, 여러 민족들의 끝없는 비참 속에서 이 악의 필연성에 대한 증거를 보게 될 것이다. 인간은 고통 받고 있으며 늘 고통 받을 것이다. 인간의 병은 물려받은 것이며 타고난 것이다. 진통제나 완화제를 써 보라. 치유책이 없을 것이다.〉

이러한 언사는 신학자만의 전유물이 아니다. 우리는 유물론 철학자들, 이 무한한 완결성의 신봉자들에게서도 유사한 말을 찾아볼 수 있다. 데스튀트 드 트라시(Destutt de Tracy, 1754~1836, 철학자, 『정치경제학 논고』를 남겼다-옮긴이)는 빈곤, 질병, 전쟁 따위는 우리의 사회 상태의 피할 수 없는 조건이자 거역할 수 없는 필요악이라고 단호하게 말한다. 요컨대, 〈악의 필연성〉이라 말하든 〈원죄〉라 말하든 그것은 근본적으로 같은 철학인 것이다.

〈최초의 인간은 죄를 범했다.〉 만일 성서주석자들이 이 말을 충실하게 해석했다면, 다음과 같이 말했을 것이다. 〈인간은 처음에는 죄를 범한다〉, 즉 인간은 잘못 생각할 수 있다고. 왜냐하면 〈죄를 짓다pécher〉, 〈오류를 범하다faillir〉, 〈잘못 생각하다se tromper〉 따위는 모두 같은 말인 것이다.

〈아담의 죄는 인간에게 세습되었다. 그 죄란 우선 무지였다.〉 사실 무지란 개인에게나 인류에게나 내재적인 것이다. 그러나 도덕과 정치까지 포함하는 많은 문제들에 있어서 이러한 인류의 무지는 치유되었다. 누가 우리에게 그 무지는 끝나지 않을 것이라고 말하는가? 인간은 진리를 향해 줄곧 진보했으며 빛은 어둠을 줄기차게 물리쳤다. 따라서 우리의 악은 치유 불가능한 것이 결코 아니다. 그런데 신학자들의 설명은 미흡한 정도를 넘어서 우스꽝스럽기조차 하다. 왜냐하면 그것은 결국 〈인간은 잘못 생각하기 때문에 잘못 생각한다〉라고 설명해야 하는데 말이다. 그러므로 인간이 자신이 알아야 할 모든 것을 알게 되면, 이제 인간은 잘못 생각하지 않으면서 고통 받지도 않을 것이라고 믿을 만한 이유가 있다.

만약 우리가 인간의 심장에 새겨져 있다는 이 법칙에 대해 박사님들의 고견을 묻는다면, 우리는 곧 다음과 같은 사실을 깨달을 수 있다. 즉 이들은 그 법칙이 무엇인지조차 모르면서 서로 논쟁을 벌였다는 것, 가장 중요한 문제들에 대해서는 머릿수만큼이나 의견이 각양각색이었다는 것, 최선의 통치형태, 권위의 원리, 법의 성격 등에 대해서는 어느 두 사람도 의견을 같이 하지 않았다는 것, 모두가 자신의 개인적 감각 - 각자는 자신의 개인 감각을 옳은 이성인 양 간주한다 - 이 가리키는 것에 몸을 맡긴 채 밑도 끝도 없는 바다의 풍랑에 떠밀리고 있다는 것 따위를 말이다. 그리하여 서로 어긋나는 이 뒤죽박죽의 견해들을 보고 우리는 말할 것이다. 〈우리 연구의 목적은 법칙, 즉 사회 원리를 규정하는 것이다. 그런데 정치인들, 즉 사회과학자들은 서로 견해가 일치하지 않는다. 따라서 오류는 바로 이들에게 있다. 그러나 모든 오류가 현실을 대상으로 하고 있으므로, 이들이 스스로도 모르는 사이에 가져다 놓은 진리가 발견되는 곳은 바로 이들의 책 속에서이다.〉

그런데 법학자와 정치논객들은 무엇에 대해 서로 이야기하는가? 〈정의〉, 〈형평〉, 〈자유〉, 〈자연법〉, 〈민법〉 등등에 대해서. 그러면 정의란 무엇인가? 그 원리와 성격과 형식은 어떠한가? 이 문제에 대해서 우리의 박사님들은 아무런 답변도 내놓지 못하고 있음에 틀림없다. 만일 그렇지 않다면, 이들의 학문은 명료한 원리에서 출발해서, 끝없는 개연론蓋然論에서 벗어났을 것이며, 논쟁은 막을 내렸을 것이 아니겠는가.

정의란 무엇인가? 신학자들은 모든 정의는 신에게서 나온다고 답한다. 이런 식의 답은 진실이지만 아무것도 가르쳐주지 않는다.

철학자들은 아마도 좀 더 잘 알고 있을 것이다. 정의와 불의에 대해서 그토록 많이 논의했으니 말이다! 불행하게도, 검토해 보면 그들의 학식은 정말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들은 태양을 향해 오오(!) 하며 빌고 있는 야만인들과 비슷하다. 오오(!)는 찬미, 사랑, 열정의 부르짖음이다. 그러나 태양이 무엇인가를 알고자 하는 사람이라면 오오(!)라는 감탄사에서 어떤 빛을 얻을 수 있겠는가. 정의의 문제에 관해서 우리의 철학자들이 처한 상태가 바로 이것이다. 그들은 말한다. 〈정의는 천상의 딸이요, 세상의 모든 인간을 비추는 빛이요, 우리 천성의 가장 아름다운 특전이요, 우리를 짐승과 구별시켜 주고 신에 다가가게 하는 것이다.〉 내가 묻건대, 이 경건한 축도는 무엇에 귀착하는가? 야만인들의 기도 소리 오오(!)에.

정의에 대해 인간의 지혜가 가르쳐 온 가장 합당한 말은 다음과 같은 유명한 경구 속에 담겨 있다. 〈남이 네게 해주길 원하는 것을 남에게 행하라. 남이 네게 하기를 원치 않는 것을 남에게 행하지 말라.〉 그러나 실천 도덕의 이러한 규칙은 과학에는 아무런 의미가 없다. 남이 나에게 해줄 것 또는 하지 않을 것을 내가 선택할 권리가 있는가? 나의 권리는 나의 의무와 동등하다고 말한들, 이러한 권리가 무엇인가를 동시에 설명하지 않는다면 아무런 의미가 없는 것이다.

더 정확하고 더 실증적인 그 무엇에 도달하도록 노력해 보자.

정의는 사회를 바로잡는 중심 별자리요, 정치 세계가 움직이는 축이며, 모든 거래의 규칙이자 원리이다. 〈권리〉의 이름을 빌리지 ㅇ낳고 인간들 사이에는 아무것도 이루어질 수 없으며, 정의에 호소하지 않고 아무것도 이루어질 수 없다. 정의는 법의 산물이 아니다. 이와는 반대로 법이란 이해관계를 가운데 두고 사람들이 만날 수 있는 각각의 상황마다 〈정당함〉을 선언하고 적용하는 일에 불과하다. 따라서 정당함이나 권리에 대한 우리의 관념이 바로 서지 못하고 불완전하거나 심지어 거짓일 경우, 우리의 모든 입법 조항들은 그릇될 것이며 제도들은 타락하고 정치는 길을 잃을 것이라는 사실, 즉 무질서와 사회악이 도래할 것이라는 사실은 명백하다.

우리의 오성에서의, 그리고 그 필연적 결과로서 우리의 행위에서의 정의의 왜곡이라는 이 가정은, 만약 정의의 개념과 그 적용에 대한 사람들의 견해가 고정불변이 아니고 시대가 변함에 따라 바뀌는 것이라면, 달리 말해서 우리의 관념들이 진보한다면, 이미 증명이 끝난 사실일 것이다. 아주 현란한 증거들을 통해서 역사가 우리에게 입증해주는 것이 바로 이것이다.

1,800년 전에 세계는 황제의 통치 아래서 노예제와 미신과 탐욕 속에 소진되어 가고 있었다. 사람들은 마치 오랜 향연에 취한 것처럼 망연자실한 채 권리와 의무의 개념조차 잊어 버렸다. 전쟁과 방탕에 의해 그들은 차례로 죽어 갔으며, 고리대와 기계(즉 노예)의 노동은 그들에게서 생계 수단을 앗아갔다. 이 만연한 퇴폐 속에서 가공할 야만 상태가 다시 나타나서 문둥병이 번지듯 폐허가 된 지방들로 번져 나갔다. 현자들은 제국의 멸망을 내다보았으나 치유책을 알지 못했다. 사실 그들인들 무엇을 생각할 수 있었겠는가? 이 노쇠한 사회를 구하려면 공적인 존중과 숭배의 대상들을 모두 바꾸고 1,000년 이상 이어져 온 정의에 의해 축성된 권리들을 모두 폐기해야만 했을 것이다. 사람들은 이렇게 말하곤 했다. 〈로마는 정치와 신들에 의해 정복을 완수했다. 예배나 공공 정신을 개혁하려는 어떤 시도도 어리석은 짓이고 신성모독일 것이다. 자신이 정복한 민족들에 관대한 로마는 그들을 쇠사슬로 묶어 놓으면서도 생명은 살려주었다. 노예는 로마의 부의 가장 비옥한 원천이었던 것이다. 따라서 민족들을 해방시킨다면, 이는 로마의 권리를 부정하는 일이자 로마의 재정 파탄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결국 향연에 빠지고 세상의 전리품으로 배를 채운 로마는 승리와 지배로 연명해 갔다. 로마의 사치와 방탕은 정복의 대가였으며 로마는 물러설 수도 그만둘 수도 없었다.〉 이렇게 로마는 사실들과 권리들을 자신의 편에 두었다. 로마의 권리 주장들은 모든 인습들에 의해 그리고 만민법에 의해 정당화되었다. 종교에서의 우상숭배, 국가 내의 노예제, 사생활에서의 쾌락주의, 이런 것들이 제도의 토대를 이루었다. 그 제도를 건드리는 것은 사회의 근저를 흔드는 일이었으며, 오늘날 우리식의 표현으로 말하자면, 혁명의 심연을 여는 일이었다. 아무도 그러한 생각을 품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류는 피와 사치 속에 죽어 갔다.

돌연히 한 사람이 나타나서 자신을 〈신의 말씀〉이라 칭했다. 오늘날 우리는 아직도 그가 누구인지, 어디서 왔는지, 누가 그에게 말씀을 심어 주었는지를 알지 못한다. 그는 가는 곳마다, 사회는 때가 다했다는 것을, 세상은 다시 태어나야 한다는 것을, 사제들은 독사이고 변호사는 무식쟁이이며 철학자는 위선자요 거짓말쟁이라고, 주인과 노예는 평등하다고, 고리대나 그와 유사한 모든 것은 도둑질이라고, 마음이 가난한 자와 순박한 자는 안식의 쉼터에 거할 것이나 돈 많은 자와 쾌락을 일삼는 자는 불에 타 죽으리라고 알리고 다녔다. 그리고 그는 더 놀라운 말들을 덧붙였다.

이 사람, 곧 〈신의 말씀〉을 사제들과 율법의 집행자들이 공공의 적으로 몰아 잡아들였다. 이들은 인민이 그의 죽음을 요구하도록 비밀리에 공모했다. 그러나 이들이 저지른 범죄의 절정이라 할 이 법률적 살인행위도 〈신의 말씀〉이 뿌린 사상을 막지 못했다. 그의 뒤를 이어 사도들이 방방곡곡으로 퍼졌으며 이른바 〈복음〉을 전파하고 수백만의 전도사를 길러냈다. 이들은 자신의 과업을 완수한 다음 로마식의 정의의 칼에 죽임을 당했다. 이 불굴의 포교, 학살자들과 순교자들 사이의 전쟁은 거의 300년 동안 계속되었으며, 마침내 세상은 개종했다. 우상은 파괴되고, 노예는 해방되었으며, 절제된 풍속이 방탕을 대신하고, 부에 대한 경멸은 어떤 경우 적빈赤貧에까지 이르렀다. 사회는 자신의 원리를 부정함으로써, 종교를 전복함으로써, 가장 신성한 권리들을 침해함으로써 구제된 것이다. 이 혁명에서 정의의 관념은 지금까지 누구도 꿈꿔보지 못한 그리고 다시는 돌이킬 수 없는 어떤 영역으로 들어섰다. 정의는 주인에게만 존재했었다.[7] 이제부터 정의는 하인들을 위해서도 존재할 것이었다.

그럼에도 새로운 종교가 모든 결실을 거두어들인 것은 결코 아니었다. 공공의 풍속은 어느 정도 개선되었고, 압제도 어느 정도 완화되었다. 그러나 〈사람의 아들이 뿌린 씨앗〉은 우상숭배자들의 가슴 속에 떨어져서는 거의 시적인 신화와 수많은 화근을 낳았을 뿐이다. 사람들은 〈신의 말씀〉이 가져다 준 도덕률과 통치 원리의 실질적인 결과에 관심을 두기는커녕, 〈신의 말씀〉의 출생, 신분, 위격位格 그리고 행적 따위에 대한 사변에 몰두했다. 사람들은 그가 남긴 잠언을 꼬치꼬치 따지고 들었으며, 풀 수 없는 문제들, 이해할 수 없는 경전들에 대한 기상천외한 논쟁으로부터 〈신학〉이 탄생했는데, 이는 차라리 〈절대적 불합리의 학문〉이라 할 만한 것이었다.

〈기독교적〉 진리는 사도의 시대를 넘어서지 못했다. 그리스인들과 로마인들이 주석을 달고 상징으로 장식한 〈복음서〉는 이교도의 우화로 가득 차고 글자 그대로 모순의 징표가 되었다. 오늘날까지도 〈무오류의 교회〉의 지배가 오랜 무지몽매만을 보여주었듯이 말이다. 〈지옥의 문〉은 항상 우세할 수만은 없으며, 〈신의 말씀〉은 재림할 것이고, 마침내 인간은 진리와 정의를 깨닫게 될 것이라고들 말한다. 그러나 그때가 되면 그리스와 로마식의 기독교는 종언을 고할 것이고 마찬가지로 과학의 빛 앞에서 몽상적인 견해는 사라질 것이다.

사도들의 후예가 타파하고자 했던 괴물들은 한때는 겁을 집어먹는 듯했으나 사제와 신학자들의 어리석은 광신 덕에 그리고 때로는 계획적인 공모 덕에 조금씩 다시 모습을 드러냈다. 프랑스에서 코뮌들이 해방되어 가는 역사는 국왕, 귀족, 성직자의 공모에도 불구하고 인민들에게서 정의와 자유가 줄기차게 확립되고 있음을 보여준다. 서기 1789년에 프랑스 국민은 신분으로 쪼개지고 헐벗고 고통 받으면서, 절대 왕정, 영주와 고등법원의 압제 및 성직자의 불관용이라는 삼중의 그물 밑에서 분투했다. 왕의 권리, 사제의 권리, 귀족의 권리 그리고 평민의 권리가 있었으며, 출생의 특권, 지방의 특권, 코뮌의 특권, 길드의 특권 그리고 직종의 특권이 있었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의 근저에는 폭력과 부도덕과 곤경이 있었다. 언제부터인가 사람들은 개혁을 말했다. 그러나 겉으로 개혁을 가장 크게 외치던 이들은 단지 이익을 얻을 심사에서 그것을 촉구했으며, 개혁에서 더 많은 것을 얻어야 할 인민은 한마디 말도 못한 채 별로 기대를 걸지 않았다. 오랫동안 이 가련한 인민들은 더러는 의심에서 더러는 불신에서 더러는 절망 때문에, 자신들의 권리에 대해 머뭇거렸다. 복종하는 오랜 관습이, 중세에 그토록 자부심에 넘쳤던 이 노쇠한 코뮌들에게서 용기를 앗아간 것이리라.

마침내 한 권의 책이 출판되었으며 모든 것은 다음과 같은 두 명제로 요약되었다. 〈제3신분은 무엇인가? 아무것도 아니다. 그들은 무엇이 되려 하는가? 모든 것이다.〉 어떤 이는 논평하는 형태를 빌어 다음과 같이 덧붙였다. 〈국왕은 무엇인가? 인민의 수임자이다.〉

이는 마치 돌연한 계시와도 같았다. 거대한 장막이 찢겨져 나가고 두터운 가리개가 눈에서 떨어져 나갔다. 인민은 추론하기 시작했다.

만일 왕이 우리들의 수임자라면, 그는 보고를 해야 한다.

만일 그가 보고를 해야 한다면, 그는 통제를 받아야 한다.

만일 그가 통제를 받는다면, 그는 책임을 져야 한다.

만일 그가 책임을 져야 한다면, 그는 처벌을 받을 수 있다.

만일 그가 처벌을 받을 수 있다면, 그의 공과에 따라서 이루어져야 한다.

시이예스(Emmanuel Joseph Sieyès, 1748~1836, 『제3신분이란 무엇인가』(1789)라는 소책자를 썼다-옮긴이)의 소책자가 출판된 지 5년 뒤에 제3신분은 모든 것이 되었으며, 국왕, 귀족, 성직자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았다. 1793년에 인민은 주권자의 불가침성이라는 헌법상의 허구에 만족하지 않고 루이 16세를 단두대로 보냈다. 1830년에 인민은 샤를 10세를 셰르부르Cherbourg로 몰아냈다. 이 두 경우에 인민은 범죄 행위를 판별하는 데는 잘못을 저질렀을지도 모르나, - 이는 사실상의 오류이리라 - 인민을 움직이게 한 논리는 법적으로 비난의 여지가 없는 것이었다. 주권자를 징벌함으로써 인민은, 나중에 7월 왕정의 정부가 스트라스부르Strasbourg 사건 때 루이 보나파르트Louis Bonaparte에 대해 취하지 않음으로써 모진 비난을 사게 될 바로 그 일을 해낸 것이다. 요컨대 인민은 죄값을 치러야 할 진짜 장본인을 공격한 것이다. 이것이야말로 공통법droit commun의 적용이며, 형법제도에서의 정의의 엄숙한 적용인 것이다.[8]

89년의 운동을 낳은 정신은 모순으로 가득 찬 정신이었다. 그것은, 옛것을 대체한 새로운 질서가 그 자체로는 체계적이고 계획적인 어떤 것도 가지고 있지 않다는 점을, 이 질서는 분노와 증오에서 탄생한 것으로서 관찰과 연구에 근거한 과학의 효과를 발휘할 수 없다는 점을, 한마디로 말해서 그 근본 토대가 자연과 사회의 법칙에 대한 심오한 인식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는 점을 보여주기에 충분하다. 따라서 우리는 사람들이 맞서 싸웠던 바로 그 원리들과 퇴치하고자 했던 모든 편견의 영향력을 공화국이 만든 이른바 새로운 제도들 속에서 다시 찾아볼 수 있는 것이다. 사람들은 즉흥적인 기분에서 영광스런 프랑스 혁명에 대해, 1789년의 갱생에 대해, 제도의 변화가 가져온 위대한 개혁들에 대해 말을 늘어놓는다. 거짓말! 거짓말!

물리적, 지적, 사회적 사실에 대한 우리의 관념이 우리가 행한 여러 시도의 결과로 완전히 달라졌을 때, 우리는 이 정신 운동을 〈혁명〉이라 부른다. 우리의 관념 속에서 단지 어떤 확장이나 수정만이 이루어졌다면, 이것은 〈진보〉일 따름이다. 말하자면, 프톨레마이오스의 천동설이 진보였다면, 코페르니쿠스의 지동설은 혁명을 이룩했다. 마찬가지로, 1789년에는 투쟁과 진보가 있었으나 어떠한 혁명도 없었다. 당시 도입된 개혁들을 살펴보면 이를 잘 알 수 있다.

그토록 오랫동안 군주의 이기심에 희생당했던 인민은 이제 자신만이 주권자라고 선언함으로써 영원히 군주로부터 해방될 것이라고 믿었다. 그러나 왕정이란 무엇이었나? 한 사람이 주권자이다. 민주정이란 무엇인가? 인민, 달리 말하자면 국민 다수가 주권자이다. 그러나 늘 인간의 주권이 법의 주권을 대신했으며, 의지의 주권이 이성의 주권을 대신했다. 말하자면 열정이 권리를 대신한 것이다. 의심할 나위 없이 만일 한 국민이 군주 국가에서 민주 국가로 넘어간다면, 그것은 하나의 진보이다. 왜냐하면 주권자의 수를 늘림으로써 이성이 의지를 대체할 더 많은 기회를 갖게 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아무튼 원리는 예나 지금이나 동일하다는 점에서 통치에서는 어떠한 혁명도 찾아볼 수 없다. 그런데 오늘날 우리는 가장 완벽한 민주주의에서도 사람들이 자유롭지 못할 수 있다는 증거를 가지고 있다.[9]

이것이 다가 아니다. 군주로서의 인민은 스스로는 주권을 행사할 수 없다. 그는 주권을 권력의 수임자들에게 위임할 수밖에 없다. 인민의 총애를 얻어내고자 하는 이들이 조심스럽게 열심히 되풀이해서 말하는 바가 바로 이것이다. 이 권력의 수임자들이 다섯이든 열이든 백이든 천이든 그 수효나 칭호가 무슨 의미가 있는가? 그것은 변함없이 인간의 통치이자 의지와 자의의 지배인 것이다. 이른바 혁명이라는 것이 과연 무엇을 혁명했는지 나는 묻지 않을 수 없다.

더구나 우리는 이 주권이 처음에는 국민공회Convention에 의해, 다음에는 총재정부Directoire에 의해 어떻게 행사되었으며, 나중에는 통령Consul에 의해 어떻게 침탈되었는지를 알고 있다. 황제, 인민의 경탄과 흠모를 한 몸에 받던 이 전능자는 결코 인민에 의지하려 하지 않았다. 그는 마치 인민의 주권을 우롱하려는 의도라도 있는 듯이 감히 인민에게 선거를, 달리 말해서 인민의 양도를, 이 양도할 수 없는 주권의 포기를 요구했으며, 결국 그것을 얻어 냈다.

그러면 주권이란 무엇인가? 말하자면 그것은 〈법을 만드는 힘〉[10]이다. 그러나 이는 사실 또 다른 부조리이며 전제주의의 유물이다. 인민은 국왕들이 자신들의 칙령을 〈짐의 뜻이 이러하므로〉라는 식의 문구로 합리화하는 것을 보아 왔다. 인민은 이제 자기 차례가 온 듯 법을 만드는 즐거움을 만끽하고자 했다. 지난 50여 년 동안 인민은 무수한 법을 생산했다(물론 어느 경우에나 그 대표자들을 통해서). 이러한 흥취는 끝날 줄을 모른다.

그런데 주권의 정의는 법의 정의 자체에서 나온다. 말하자면 법이란 〈주권자의 의지의 표현〉이다. 따라서 군주정 아래서 법은 국왕의 의지의 표현이며, 공화국에서 법은 인민의 의지의 표현이다. 의지의 수효만이 다를 뿐, 두 체제는 완전히 같은 것이다. 어느 쪽이나 마찬가지의 오류를 범하고 있다. 즉 법은 사실의 표현이어야만 하는데도 의지의 표현으로 남아 있는 것이다. 하지만 인민은 훌륭한 인도자들을 따랐다. 인민은 제네바의 시민을 선지자로 모셨고 『사회계약론』을 경전으로 삼은 것이다.

새로운 입법자들의 수사학 하나하나에는 어김없이 선입관과 편견이 드러난다. 인민은 수많은 배제와 특권 때문에 고통 받아왔다. 따라서 그 대표자들은 인민을 위해 다음과 같은 선언을 했다. 〈모든 인간은 날 때부터 그리고 법 앞에서 평등하다.〉 실로 애매하고 허풍 섞인 선언이다. 〈인간은 날 때부터 평등하다.〉 이 말은 인간은 누구나 신장과 미모와 재능과 성품이 같다는 의미인가? 아니다. 따라서 여기서 말하고자 한 것은 정치적 · 시민적 평등이다. 따라서 〈모든 인간은 법 앞에서 평등하다〉고 말하는 것으로 충분했다.

그러면 법 앞에서의 평등이란 무엇인가? 1790년 헌법도, 1793년 헌법도, 국왕이 하사한 헌장(Charte, 1814년의 헌장을 말한다-옮긴이)도, 의회가 동의한 헌장(1830년의 헌장을 말한다-옮긴이)도 그것을 정의할 줄을 몰랐다. 어느 것이나 재산과 서열의 불평등을 가정하고 있으며 권리의 평등이란 그림자도 찾아볼 수 없다. 이 점에 대해 우리는 우리의 모든 헌법이 인민 의지의 충실한 표현이었다고 말할 수 있다. 다음에서 그 증거를 보여주겠다.

일찍이 인민은 행정이나 군대의 관직에서 배제되어 있었다. 그런데 사람들은 인권선언에 다음과 같이 자못 장엄한 조항을 끼워 넣고는 경탄할 만한 일을 했다고 믿었다. 〈모든 시민은 평등하게 공직에 등용될 수 있다. 자유로운 인민은 자신들이 선출되는 데 있어서 미덕과 재능 외에 다른 특권적 배려를 인정하지 않는다.〉

확실히 사람들은 이 멋진 일에 찬사를 보냈음에 틀림이 없다. 그러나 사람들은 어리석은 짓에 찬사를 보낸 셈이리라. 뭐야! 입법자이자 개혁자인 주권자 인민은 공직에서 보수만을, 잘라 말하자면 금전적 행운만을 보지 않는가! 그리고 인민이 시민의 공직 담임권에 대해 입법화한 것은 그 공직을 이윤의 원천으로 보았기 때문이 아닌가! 거기서 얻을 것이 없었다면 이러한 규정이 왜 필요했겠는가? 사람들은 천문학자나 지리학자가 아니면 비행사가 될 수 없다고 규정하지는 않으며, 벙어리가 비극이나 오페라에 출연하는 것을 막지는 않는다. 이 점에서 인민은 여전히 왕들의 본을 따르고 있다. 국왕들과 마찬가지로 인민은 잇속이 있는 자리를 자기 친지나 아첨꾼에게 주려 한다. 그런데 이익을 챙기는 자는 인민이 아니고 바로 인민의 위임자, 대표자들이다(여기서 왕들과 인민 사이의 유사점은 절정에 달한다). 그래서 위임자들은 양순해 빠진 자신의 주권자의 의지를 거스르지 않으려고 조심한 것이다.

인권선언의 이 모범적인 조항은 1814년과 1830년의 헌장들에서도 재확인되었는데, 몇 가지 유형의 시민적 불평등을, 달리 말해서 법 앞에서의 불평등을 전제하고 있다. 공직은 그것이 가져다주는 평판과 보수에 의해서만 그 값이 매겨진다는 점에서 서열의 불평등이며, 재산의 평등을 바랐다면 공직은 보상이 아니라 의무가 되어야 한다는 점에서 부의 불평등이며, 법은 〈재능과 덕성〉을 말하면서도 정작 그것이 무엇인지를 규정하지는 않았다는 점에서 배려의 불평등이다. 제정기에 덕성과 재능이란 황제에 대한 충성과 군사적 용맹 이외에 아무것도 아니었다. 이는 나폴레옹이 신흥 귀족을 만들어 옛 귀족과 결합시켰을 때 명백해졌다. 오늘날 200프랑의 세금을 내는 이는 덕성이 있는 자이며, 재능이 있는 자는 점잖은 소매치기이다. 이것은 이제 평범한 진실이 되었다.

마침내 인민은 소유권을 신성한 것으로 만들었다. …신이여, 용소하소서. 저들은 자신이 하는 일을 모르나이다. 보라, 지난 50년 동안 인민은 이 가련한 어리석음의 대가를 치르고 있다. 그런데, 인민이, 그들의 목소리는 신의 목소리이며 그들의 의식은 오류를 모른다던 바로 그 인민이 어찌하여 잘못 생각했는가? 어떻게 자유와 평등을 찾으면서도 저들은 특권과 예속에 다시 빠졌는가? 늘 그렇듯이 옛 제도를 흉내냈기 때문이 아닌가.

예전에, 귀족과 성직자는 자발적 부조나 무상 증여의 형태로만 국가의 재정에 기여했다. 이들의 재산은 설령 채무 변제를 위해서라도 차압할 수 없었다. 반면에 평민은 타이유taille 세稅와 부역에 짓눌렸으며, 때로는 국왕의 세리들에게 때로는 영주와 교회의 세리들에게 끝없이 시달렸다. 가장 열악한 이들은 물건처럼 취급되었으며 유언을 남길 수도 상속인이 될 수도 없었다. 이들은 종물취득법에 의해 노역과 산출이 주인에게 귀속되는 동물과 다를 바가 없었다. 인민은 〈소유자〉의 조건이 모두에게 같기를, 누구나 〈자신의 재산을, 자신의 수입을, 자기 노동과 근면의 결실을 자유롭게 향유하고 처분할 수 있기〉를 원했다. 인민이 소유를 발명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그 소유가 귀족이나 성직자에게 주어진 것과 같은 자격으로 자신들에게 주어져 있지 않았기 때문에 인민은 이 권리의 균등을 법제화했다. 가혹한 소유 형태들, 부역, 상속불능, 지배권, 공직에서의 배제 따위는 사라졌으며 향유의 형태가 변경되었다. 그러나 근본은 변하지 않고 남았다. 권리의 할당에서 진보가 있었으나, 혁명은 없었던 것이다. 1789년의 운동과 1830년의 운동이 차례로 공인한, 현대 사회의 세 가지 근본 원리가 있다. 그것은 ⑴ 〈인간 의지의 종주권〉, 바꿔 말하자면 〈전제주의〉, ⑵ 〈부와 서열의 불평등〉, ⑶ 〈소유권〉이다. 이것은 정의를, 즉 주권자들과 귀족과 소유자들의 수호천사라고 항상 모든 사람들이 말하는 바의 정의, 사회 전체의 일반적, 시원적, 정언적 법칙으로서의 정의를 훨씬 넘어서는 것이다.

〈전제주의〉, 〈시민적 불평등〉, 〈소유〉 따위의 개념들이 정의라는 시원적 관념에 부합되는 것인지 아닌지를, 즉 그 개념들이 비록 사례와 장소와 인간관계에 따라 다양하게 표출되기는 하지만, 정의의 관념에서 나오는 필연적 산물인지 아니면 차라리 여러 사물들이 뒤섞이고 관념들이 하릴없이 결합된 데서 생긴 사생아인지를 알 필요가 있다. 그런데 정의란 특히 통치에서, 사람들의 지위에서 그리고 사물의 소유에서 구체적인 모습을 드러내는 것이므로, 우리는 모든 사람들의 합의와 인간 정신의 진보를 판단 기준으로 삼아 다음과 같은 점을 밝혀야 한다. 우선 어떤 조건 아래 통치가, 시민들의 지위가, 사물의 소유가 정당한가를. 다음에는, 위의 조건을 만족시키지 못하는 사항들을 배제하고 나면 한꺼번에 드러날 것, 즉 정당한 통치, 정당한 시민의 조건, 사물의 정당한 소유란 무엇인가를. 그리고 마지막으로, 정의란 무엇인가를.

인간의 인간에 대한 권위란 정당한가?

모든 사람은 답한다, 아니라고. 인간이 지닌 권위는 법의 권위일 따름이며, 법은 정의와 진실의 표현이어야 한다. 통치 행위에서 중요한 것은 개인의 의지가 아니다. 통치란 한편으로 옳은 것과 정당한 것을 발견해서 법을 만드는 일이며, 다른 한편으로 이 법의 집행을 감독하는 일이다. 나는 여기서 우리의 입헌정부 형태가 이 조건을 만족시키는지 아닌지를 따져보려는 것이 아니다. 예컨대 장관들의 의지가 법의 선언 및 해석과 관련이 있는지를, 우리 의원님들이 수적 우위보다 이성의 힘에 의해서 토론에서 이기고자 하는지를 따져보려는 것이 아니다. 훌륭한 통치에 대해서 내건 관념이 내가 정의한 바와 같다면 나는 그것으로 족하다. 이러한 생각은 옳다. 그러나 동양 사람들이 보기에 자신들의 군주들의 전제주의만큼 정당한 것이 없었다는 사실을, 고대인들은 심지어 철학자들까지도 노예제를 정당하다고 여겼다는 사실을, 중세에 귀족, 수도원장 및 주교들은 노예를 갖는 것을 정당하다고 생각했다는 사실을, 루이 14세는 〈짐이 곧 국가다〉라고 말하면서 자신이 옳다고 생각했다는 사실을, 나폴레옹은 자신의 뜻을 거영하는 자를 국사범으로 취급했다는 사실을 우리는 잘 알고 있다. 정의의 관념이 군주나 통치 문제에 적용될 경우, 항상 오늘날의 관념과 같았던 것은 아니었다. 정의의 관념은 줄기차게 발전하고 점점 더 정교해지면서 마침내 지금의 상태에 이르렀다. 그러면 정의의 관념은 이제 막바지 단계에 이르렀는가?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거기에 도달하기 위해 넘어야 할 최후의 장애물은 우리가 여태 고이 간직해 온 소유권이라는 제도에서 유래하는 것이다. 따라서 통치의 개혁을 완수하고 혁명을 이룩하기 위해서 우리가 공격해야 하는 것은 바로 이 제도이다.

정치적, 시민적 불평등은 정당한가?

어떤 이는 그렇다고, 어떤 이는 아니라고 대답한다. 그렇다고 답하는 이들에게 나는 다음과 같은 사실을 환기시킬 것이다. 즉 인민이 출생과 신분의 모든 특권을 폐지했을 때 당신네들이 그것을 좋은 일로 여긴 것은 아마도 당신네들이 그로 인해 이득을 얻었기 때문이라는 사실을 말이다. 그러면 이들은 왜 서열과 인종의 특권과 더불어 부의 특권도 폐기되는 것을 원하지 않았는가? 이들은 말하기를, 정치적 불평등이란 소유에서 연원하는 것인데 소유제도 없이는 어떤 사회도 존속할 수 없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가 막 거론한 문제는 결국 소유의 문제로 환원된다. 한편, 아니라고 답한 이들에게 나는 다음과 같은 물음을 던지는 것으로 그칠 것이다. 정치적 평등을 누리기를 원한다면 소유를 폐지하시오, 그리하지 않을 것이면 왜 불평하는가?

소유는 정당한가?

모든 사람이 아무 주저 없이 답할 것이다. 그렇다, 소유는 정당하다고. 내가 여기서 모든 사람이라고 말하는 것은 문제를 완전히 이해하고 아니오라고 답한 사람이 여태껏 한 사람도 없었기 때문이다. 물론 근거 있는 답변이 쉬운 것은 아니었다. 시간이 지나야만 그리고 경험이 쌓여야만 해결책을 얻을 수 있었다. 오늘날에는 이러한 해결책이 주어져 있으며, 그것을 이해하는 일은 우리의 몫이다. 나는 그 해결책을 입증하려는 것이다.

우리가 논증을 진행하는 방식은 다음과 같다.

Ⅰ. 우리는 누구와도 논쟁하지 않고 누구도 반박하지 않으며 어떤 것에도 이의를 달지 않는다. 우리는 소유를 옹호하는 모든 추론을 근거가 있는 것으로 받아들이며, 단지 소유의 원리를 탐구하고 그 원리가 소유에 의해 충실하게 표현되어 있는가를 입증하는 것으로 만족할 것이다. 사실 소유란 정당성 여부에 의해서만 변론될 수 있는 것이기 때문에, 정의의 관념 - 아니면 적어도 정의에 대한 의향 - 이 반드시 소유에 대한 모든 논증의 한가운데에 자리 잡고 있어야 한다. 그리고 다른 한편으로 소유란 물질적으로 감지되는 사물들을 대상으로 한 것이므로, 정의는 저절로, 달리 말하자면 은연중에 객체화되어서 대수학 공식의 형태로 나타나야만 한다. 이러한 검토 방식에 의해서 우리는 소유를 옹호하기 위해 여태껏 동원된 모든 추론 방식은 〈그것이 무엇이든 간에〉 항상 그리고 필연적으로 소유의 평등에, 즉 소유의 부정에 이르게 된다는 깨달음에 즉시 이르게 된다.

이 책의 첫 부분은 두 장章으로 이루어져 있다. 하나는 점유占有, 즉 우리의 권리의 토대에 관한 것이고, 다른 하나는 소유와 사회적 불평등의 원인으로 간주되는 노동과 재능에 관한 것이다.

이 두 장의 결론은 한편으로 점유권은 소유를 〈금지한다〉는 것이고, 다른 한편으로 노동권은 소유를 〈파괴한다〉는 것이다.

Ⅱ. 따라서 소유란 필연적으로 평등이라는 정언 명제 아래서 우리의 머릿속에 구상되는 것이기 때문에, 우리는 이러한 논리의 필연성에도 불구하고 왜 평등이 존재하지 않으면 안 되는가를 물어야만 한다. 이 새로운 연구 역시 두 개의 장으로 이루어진다. 첫 번째 장에서 우리는 소유라는 사실을 그 자체로 고려하면서, 이 사실의 현실성과 가능성 여부를 탐지해 볼 것이다(왜냐하면 소유라는 것은 상반되는 두 가지 사회주의적 형태, 즉 평등과 불평등이 모두 가능하다는 모순을 내포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면 우리는 기묘하게도 소유란 마치 우연한 사건처럼 나타나는 것이어서 수학적인 견지에서 볼 때 제도나 원리로는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발견할 것이다. 따라서 학교에서 사용되는 공리 - 즉 〈현실태에서 가능태로의 추론은 유효하다(ab actu ad posse valet consecutio)〉라는 명제 - 는 소유에 관한 한 허구임이 드러난다.

끝으로, 마지막 장에서 우리는 심리학의 도움을 받아 인간 본성의 근저에까지 뚫고 들어감으로써 〈정의〉의 원리와 형식 그리고 특성을 밝혀낼 것이다. 우리는 사회의 유기적 법칙을 명확히 설명할 것이며, 소유의 기원, 소유가 확립된 이유와 오래 지속된 이유, 그리고 가까운 미래에 소유권이 소멸될 이유를 밝힐 것이다. 나아가 우리는 마침내 소유란 도둑질과 같다는 것을 밝힐 것이다. 그리고 인간의 종주권, 조건의 불평등, 소유라는 이 세 가지 편견은 사실은 하나일 뿐이며 서로 대체 가능하다는 사실을 보여준 다음에, 우리는 모순의 원리에 따라 이 사실로부터 별 어려움 없이 통치와 권리의 토대를 추론할 것이다. 우리의 연구는 여기서 멈출 것이며, 나머지는 새로운 저작의 몫으로 넘길 것이다.

우리가 몰두하고 있는 이 주제의 중요성은 모든 이의 시선을 끈다. 엔느캥(Hennequin, 1780~1840, 프랑스의 변호사, 정치인, 『입법 및 판례 논고』를 썼다-옮긴이) 씨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소유는 시민 사회를 창출하고 보존하는 원리이다. …소유는, 새롭다고 뽐내는 그 어떤 설명들도 즉각적으로 해명되기 힘든 근본적인 문제들 중의 하나이다. 왜냐하면 인간의 모든 도덕성은, 따라서 인간 제도의 모든 권위는, 만일 소유를 원인이나 결과라는 측면에서 고찰할 때 소유가 사회 질서의 원인인가 아니면 결과인가라는 문제에 달려있기 때문이다. 이 점을 결코 잊어서는 안 되며, 문필가든 정치인이든 그것을 확신하는 것이 중요하다.〉

위의 말은 희망과 신념을 가진 모든 인간에 대한 도전이다. 그러나 평등이라는 대의가 아무리 아름답다고 해도, 누구도 소유의 옹호자들이 던진 도전을 받아내지 않았으며 아무도 싸움을 벌일 단호한 용기를 품지 못했다. 거만한 법률학의 거짓 지식과 소유가 빚어낸바 정치경제학의 엉터리 경구가 가장 고결한 지성까지도 혼란에 빠트리고 있다. 〈평등은 환상이다!〉라는 말이 인민의 자유와 이익의 가장 유력한 벗들 사이에 합의된 일종의 군호軍號인 것이다. 이토록 가장 거짓된 이론들과 가장 황당한 유추들이, 다른 점에서는 탁월했을지 모르지만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대중적 편견에 굴복한 정신들을 지배하고 있는 것이다. 평등은 날마다 전진한다(fit oequalitas). 자유의 병사들이여, 승리의 전야에 우리의 깃발을 버릴 것인가?

평등의 옹호자로서 나는 증오도 분노도 없이 철학자에게 어울리는 독립심과 자유인으로서의 평상심과 단호함을 지니고 말할 것이다. 이 장엄한 투쟁에서 나의 몸을 비춰주는 빛을 내가 모든 이의 마음속에 비출 수 있기를, 그리고 나의 성공적인 논증에 의해서 설령 평등이 칼로써 승리하지 못했다 할지라도 펜으로써 승리했다는 사실을 입증할 수 있기를!

제2장 자연권으로 간주되는 소유에 대하여. 소유의 동인動因으로서의 선점과 민법에 대하여

정의定義

로마법은 소유를 〈법의 이치가 허용하는 한에서 사물을 사용하고 남용하는 권리(jus utendi et abutendi re sua, quatenus juris ratio patitur)〉라고 정의한다. 어떤 이는 여기서 〈남용하다abuser〉라는 단어는 무절제하고 비도덕적인 남용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권한의 절대성을 표현하는 것이라고 말하면서 그 말을 정당화하려 했다. 그러나 이는 소유를 신성화하기 위해 꾸며낸 헛된 구별에 불과하며, 예측하기도 억제하기도 힘든 향유의 광기에 맞서기에는 무기력한 구별일 따름이다. 소유자는 자기의 과일을 밭에서 썩게 내버려둘 수 있고, 자기 밭에 소금을 뿌릴 수 있으며, 모래 위에서 소젖을 짜고, 포도밭을 황무지로 바꿀 수 있으며, 채소밭을 공원으로 만들 수 있다. 이 모든 일은 남용인가, 아닌가? 소유의 영역에서는 사용과 남용이 어쩔 수 없이 뒤섞인다.

93년 헌법의 모두冒頭에 실린 인권선언에 따르면, 소유란 〈자신의 부, 자신의 소득, 자신의 노동과 근면의 결실을 마음대로 향유하고 처분할 수 있는 권리〉이다. 나폴레옹 법전 제544조에 따르면, 소유란 〈법률과 규정에 의해 금지되지 않는 한 사물을 가장 절대적인 방식으로 처분할 수 있는 권리〉이다.

이 두 정의는 로마법의 정의에 귀착된다. 말하자면 소유자에게 사물에 대한 절대적인 권리를 인정한다는 점에서 모든 정의가 일치하는 것이다. 그리고 나폴레옹 법전에 명시된 제한 규정 즉 〈법률과 규정에 의해 금지되지 않는 한〉이라는 구절에 대해 말하자면, 그것은 소유를 제한하려는 것이 아니라 한 소유자의 권한이 다른 소유자의 권한을 침해하지 않도록 하려는 의도에서 나온 것이었다. 요컨대 그것은 한계를 설정하는 것이 아니라 원리를 확인하는 것이다.

소유는 다음과 같이 구별된다. 즉 ⑴ 무조건의 소유, 사물에 대한 지배자나 영주의 권리 따위, 흔히 말하는 〈허유(虛有, nue-propriété)〉와 ⑵ 〈점유possession〉이다. 뒤랑통(A. Duranton, 1782~1866, 프랑스 법학자, 『프랑스 법 강의』를 썼다-옮긴이)에 의하면 〈점유는 사실적 상황이지 법적 상황이 아니다〉. 툴리에(C. Toullier, 1752~1835, 프랑스 법학자, 『민법론』으로 유명-옮긴이)는 〈소유는 권리, 즉 법적 능력이고 점유는 사실事實이다〉라고 말한다. 주택임차인, 차지농, 주식보유자, 용익권자 등은 점유자인 반면, 빌려 주고 사용을 허락하는 주인, 용익권자의 사망에 의해서만 향유권을 되찾는 상속인은 소유자이다. 굳이 이런 식의 비유를 이용한다면, 연인은 점유자이고 남편은 소유자이다.

소유에 대한 이러한 이중의 정의 - 권한으로서의 소유와 점유로서의 소유 - 는 매우 중요하다. 우리가 이야기할 바를 이해하려면 이를 잘 파악하고 있어야만 한다.

점유와 소유의 구별에서 두 종류의 권리가 나온다. 첫째, 〈물物 안에서의 권리(jus in re)〉이다. 이는 내가 획득한 소유를 그것이 누구의 손에 있든 관계없이 요구할 수 있는 권리이다. 이는 내가 소유자가 될 것을 요구하는 권리이다. 이를테면, 배우자들이 서로의 인신이 대해 가지는 권리는 물 안에서의 권리이며, 두 약혼자의 권리는 아직 물에 대한 권리에 불과하다. 첫 번째 경우에는 점유와 소유가 결합되어 있으나, 두 번째 경우에는 허유虛有만을 포함한다. 노동자라는 자격으로 나는 자연과 근면이 가져다 준 부에 대한 점유권을 가진다. 그러나 프롤레타리아로서의 나는 아무것도 향유하고 있지 못하며, 따라서 나는 물에 대한 권리를 근거로 물 안에서의 권리를 요구하고 있는 것이다.

물 안에서의 권리와 물에 대한 권리 사이의 이러한 차이는, 아주 방대한 범위에 걸쳐 모든 것을 포괄하는 중요한 두 사법적 범주, 즉 〈점유권 반환소송possessoire〉과 〈소유권 확인소송pétitoire〉 사이의 유명한 구분의 토대이다. 〈소유권 확인소송〉은 소유에 관련된 모든 것에 걸쳐 이루어지는 반면, 〈점유권 반환소송〉은 점유에 관련된 것이다. 소유에 대한 고발장을 씀으로써 나는 사회 전체에 대해 소유권 확인소송을 제기하고 있는 것이다. 나는 현재 점유하고 있지 않은 사람들도 점유하고 있는 사람들과 마찬가지 자격으로 소유자라는 사실을 증명할 것이다. 그러나 이로부터 소유는 모두에게 분할되어야 한다는 결론을 끌어내는 것이 아니라, 나는 공공 안전이라는 이유에서 소유는 모두를 위해 폐지되어야 한다고 요구할 것이다. 내가 이 소송에서 진다면 우리에게는, 즉 여러분 프롤레타리아 모두와 나에게는 목을 매다는 일밖에 남아 있지 않다. 우리는 더 이상 국민들의 정의에 대해 요구할 것이 없는 것이다. 왜냐하면 소송법 제26조의 힘찬 문체가 말하듯이, 〈소유권 확인소송에서 소송을 취하당한 청구인은 더 이상 점유권 반환소송을 제기할 수 없도록〉 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와는 달리 내가 이 소송에서 이긴다면, 그때 우리는 소유가 우리에게서 앗아간 재산에 대한 향유권을 회복할 목적으로 점유권 반환소송을 다시 시작해야만 할 것이다. 나는 우리가 이러한 극단에까지 이르기를 원치 않는다. 그러나 소송법이 〈점유권 반환소송과 소유권 확인소송은 결코 중첩될 수 없다〉고 규정하고 있으므로, 이 두 소송은 한꺼번에 이루어질 수 없다.

소송의 핵심에 들어가기 전에 여기서 선결적인 몇 가지 견해들을 소개하는 것이 유익하지 않을까 한다.

제1절 자연권으로서의 소유에 대하여

인권선언은 소유에 대하여 인간의 자연적이고 소멸될 수 없는 권리라고 말한다. 이들 권리는 〈자유〉, 〈평등〉, 〈소유〉, 〈안전〉이라는 네 가지로 축약된다. 93년의 입법자들은 어떤 방법에 따라 이렇게 나누었는가? 그들은 아무것도 따르지 않았다. 그들은 주권이나 법률을 논할 때와 마찬가지로 일반적인 견해에 따라 그리고 자신들의 의견을 좇아 원리를 세웠을 뿐이다. 그들은 만사를 손으로 더듬으면서 단숨에 해치웠다.

만일 우리가 툴리에의 견해를 따른다면, 〈절대적 권리는 다음의 세 가지로, 즉 ‘안전’, ‘자유’, ‘소유’로 환원된다〉. 이렇게 이 렌느Rennes의 교수님은 평등을 제외시켰다. 어떤 이유에서인가? 〈자유〉가 평등을 포함하기 때문인가, 아니면 〈소유〉가 평등을 용납하지 않기 때문인가? 『민법 해설』의 저자는 이 점에 대해 침묵으로 일관할 뿐, 여기에 토론해 볼 여지가 있다는 것조차 염두에 두지 않는다.

그런데, 이 세 가지 또는 네 가지의 권리를 서로 비교해 보면, 소유는 다른 권리들과 전혀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요컨대 대다수 시민들에게 있어서 소유란 가능태로서만, 즉 잠재되어 있을 뿐 발휘되지는 않는 능력으로 존재한다는 점을, 소유를 누리는 자들에게 있어서 소유는 자연권의 이념과는 걸맞지 않게도 어떤 거래와 변용의 대상이 된다는 점을, 현실적으로 정부나 법원이나 법률은 소유를 전혀 존중하지 않는다는 점을, 그리고 마지막으로 모든 사람들은 자발적이자 만장일치로 소유를 몽상으로 간주한다는 점을 알 수 있다.

자유는 침해될 수 없다. 나는 자유를 팔수도 양도할 수도 없다. 자유의 양도나 자유의 정지를 대상으로 하는 어떤 계약이나 계약 조건도 무효이다. 자유의 땅에 발을 디딘 노예는 그 즉시 자유인이 된다. 사회가 치한을 잡아서 그에게서 자유를 빼앗을 때, 이는 사회의 정당방위이다. 범죄에 의해서 사회적 협약을 깨트린 자는 누구나 자신이 사회의 공적이라고 선언한 셈이다. 타인의 자유를 침해한 사람은 이들로 하여금 자기의 자유를 빼앗아 가라고 강요한 셈이다. 자유는 인간 상태의 첫 번째 조건이며, 자유를 부정하는 것은 인간의 자격을 부정하는 일이다. 그러고서도 어찌 인간임을 증명할 수 있겠는가?

마찬가지로, 법 앞에서의 평등은 어떠한 제한도 어떠한 예외도 갖지 않는다. 프랑스인은 누구나 평등하게 공직에 진출할 수 있다. 바로 이것이 이러한 평등이 이루어진 곳에서는 많은 경우에 출신이나 연륜이 특혜의 사유가 되지 않는 이유이다. 가장 가난한 시민도 가장 고귀한 자를 법정에 불러 세울 수 있으며 재판에 이길 수 있다. 백만장자 아합Achab 이 나봇Naboth의 포도밭에 성을 세웠을 때, 법정은 경우에 따라서 엄청난 비용이 들더라도 이 성을 파괴하도록 명령할 수 있으며, 포도밭을 원상태로 돌려놓도록 할 수도 있고, 나아가서 침탈자에게 손해배상을 청구할 수 있다. 법에 따르면 정당하게 취득한 모든 소유는 그 값어치나 소유자의 수락 여부와 관계없이 존중되어야 하는 것이다.

1815년의 헌장에 몇몇 정치적 권리들을 행사하기 위해서는 재산과 능력에서의 일정한 조건이 요구된다고 규정되어 있다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정치논객들은 누구나 입법자의 의도가 특권을 확립하려는 것이 아니라 보장책을 취하려는 것이라는 점을 알고 있다. 법이 정한 조건을 충족시키기만 하면, 시민은 누구나 유권자가 될 수 있고 유권자는 누구나 피선거권자가 될 수 있다. 일단 획득한 권리는 만인에게 평등한 것이다. 법은 사람도 투표권도 차별하지 않는다. 여기서 내 의도는 이 체계가 최선인가를 검토하는 것이 아니다. 현장의 정신에 비추어 볼 때 그리고 모든 사람이 보기에, 법 앞에서의 평등이란 절대적인 것이고 자유와 마찬가지로 어떤 거래의 대상도 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지적하는 것으로 내게는 충분하다.

안전권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사회는 그 구성원들에게 어떤 어중간한 보호나 반쪽짜리 방어를 약속한 것이 아니다. 사회의 구성원들이 사회에 대해 책임을 지고 있듯이, 사회는 사회의 구성원들에 대해 온전히 책임을 진다. 내게 별 부담이 안 된다면 당신의 보증을 서겠다든지, 아니면 내게 위험이 되지 않는다면 당신을 보호해 주겠다는 식으로 사회가 그 구성원들에게 말하지는 않는다. 만난고초를 무릅쓰고 당신을 지킬 것이고, 당신의 목숨을 구할 것이며, 당신의 복수를 해주고 나는 죽을 것이라는 식으로 사회는 말하는 법이다. 국가는 개개 시민의 이익을 위해 온 힘을 다한다. 국가와 시민을 서로 잇는 의무는 절대적인 것이다.

소유의 경우는 이와 얼마나 다른가! 소유는 모두에게 숭배 받으면서도 아무에게도 인정받지 못한다. 법률, 습속, 관습, 공적 및 사적 의식 등 이 모두가 소유의 죽음과 소유의 파탄에 공조하고 있다.

군대를 유지하고 공사를 집행하며 공무원들을 먹여 살리는 데에 드는 비용을 마련하기 위해서 정부는 세금을 거두어야 한다. 모든 사람이 이러한 지출에 각자 제 몫을 부담한다면 더 바랄 나위가 없으리라. 그런데 왜 부자는 가난한 자보다 더 지불하여야 하는가? 그것은 정당하다, 왜냐하면 부자는 더 많이 가졌기 때문이라고 사람들은 말한다. 분명히 말하거니와 이런 식의 정의를 나로서는 이해할 수가 없다.

우리는 왜 세금을 내는가? 각인에게 자유, 평등, 안전, 소유와 같은 자연권의 행사를 보장해 주기 위해서, 국가의 질서를 유지하기 위해서, 그리고 유용하고 쾌적한 공공 시설물을 설치하기 위해서이다.

그런데 부자들의 생명과 자유를 지키는 것은 가난한 자들의 생명과 자유를 지키는 것보다 비용이 더 많이 드는가? 침략과 기근과 역병이 판치는 시기에, 국가의 구호를 기다리지 않고 위험을 피한 대지주와 온갖 재앙들에 무방비 상태인 초가집에 남아 있는 날품팔이 농민 중에서 어느 누가 더 걱정거리인가?

질서는 수공업자나 도제에 의해서보다 유복한 부르주아에 의해서 더 위협받는가? 그런데 경찰은 돈 많은 유권자 20만 명보다 일자리 없는 노동자 수백 명에 더 신경을 쓰지 않는가.

고액 금리생활자는 국경일을, 청결한 거리를, 멋진 기념물을 가난한 자들보다 더 많이 즐기는가? 그런데 부자는 대중적인 위락시설 어떤 곳보다 자신의 전원주택을 더 좋아하고, 오락을 즐기고자 할 때도 보물 따먹기 기둥 같은 것은 바라지 않지 않는가.

결국 둘 중의 하나이다. 즉 누진과세란 고액 납세자들의 특권을 보장해 주고 공고히 해주는 제도이거나 아니면 그 자체 일종의 부당 행위인 것이다. 왜냐하면 93년의 헌법이 선언한 것처럼 소유가 자연권에 속한다면, 이 권리에 의해 나에게 속한 것은 나의 신체만큼이나 신성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나의 피요, 나의 생명이고 나 자신이며, 그것을 건드리는 자는 누구나 나의 눈동자를 찌르는 셈이다. 내 수입 10만 프랑은 점원 아가씨의 일단 75상팀과 마찬가지로 신성한 것이며, 나의 아파트도 그녀의 다락방도 중요하기는 마찬가지이다. 세금은 개인의 힘과 신장과 재능에 비례해서 할당되는 것이 아니다. 더구나 재산에 비례해서 할당될 수는 없는 것이다.

따라서 국가가 나에게서 많이 가져간다면, 국가는 나에게 더 많이 돌려주거나 아니면 더 이상 나에게 권리의 평등을 운운하지 말아야 한다. 왜냐하면 그렇지 않다면 사회는 소유를 지키기 위해서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소유를 조직적으로 파괴하기 위해서 만들어진 셈이기 때문이다. 국가는 누진과세 정책에 의해 스스로 도당의 수령이 된다. 정기적인 약탈 행위의 모범을 보이는 것은 바로 국가이다. 따라서 끔찍한 강도들, 즉 직업적 시기심에 사로잡힌 국가가 말살하겠다고 공언하는 바로 그 혐오스런 도당의 우두머리로서, 중죄재판소의 피고인석에 앉아야 하는 것은 바로 국가 자신이다.

그러나 우리가 재판소나 병사들을 필요로 하는 것은 바로 이 도당들을 제압하기 위해서이다. 정부는 보험회사라기보다는(왜냐하면 정부는 보장을 해주지는 않는다), 차라리 보복과 응징을 위한 회사이다. 이 회사가 요구하는 가입금, 즉 세금은 소유에 비례해서, 달리 말해서 정부에게서 급료를 받는 보복꾼과 응징꾼들에게 개개 소유자가 요구하는 노고에 비례해서 할당된다.

여기서 우리는 절대적이고 양도 불가능한 소유권으로부터 아주 멀리 있다. 그리하여 부자와 빈자는 서로 간에 불신과 전쟁의 상태에 놓인다! 그러면 그들은 왜 서로 싸우는가? 소유 때문에. 소유란 필연적으로 소유에 대한 전쟁을 부르지 않는가! 부자의 자유와 안전은 빈자의 자유와 안전으로 인해 해를 입지 않는다. 오히려 이 둘은 서로를 북돋우며 서로를 지탱한다. 이와는 반대로 부자의 소유권은 빈자의 소유 본능에 맞서 쉴 틈 없이 보호되어야 한다. 이 얼마나 모순인가!

영국에는 구빈세가 있다. 누군가 나에게도 이런 종류의 세금을 내라고 한다. 그러나 내가 지닌 자연적이고 소멸될 수 없는 소유권과 1,000만에 달하는 비참한 자들을 괴롭히는 기근 사이에 어떤 관계가 있는가? 종교는, 우리에게 형제들을 도우라고 요구할 때, 입법의 원리를 내세우는 것이 아니라 자선이라는 겉치레를 내세운다. 기독교 윤리가 내게 지운 선행의 의무는, 어느 누구를 위해서 하물며 구빈 시설을 위해서 내 뜻과 상관없이 요구되는 일종의 정치적 납세가 되어서는 안 된다. 나는, 만약 내 마음에서 우러난다면 그리고 이웃의 고통을 보고 어떤 동정심을 느낀다면, 자선을 행할 것이다. 철학자들이 즐겨 말하는 이 동정심이라는 것을 나는 거의 믿지 않지만 말이다. 요컨대 나는 사람들로부터 강요당하는 것을 원치 않는다. 어떤 이도 다음과 같은 격언, 즉 자유에 대한 원래의 정의라 할 이 금언을 넘어서까지 정의롭도록 강요당해서는 안 된다: 〈타인의 권리를 해치지 않는 한에서 너의 권리를 즐기라〉. 요컨대 나의 재산은 내 것일 뿐 아무에게도 속하지 않는다. 나로서는 신학상의 제3의 덕이 개입하는 것을 원치 않는다.

프랑스에서는 누구나 5%의 저리低利 공채전환conversion을 요구한다. 이는 소유자들 중 일부의 희생을 요구하는 것이다. 공적 필요가 있을 경우 사람들은 그렇게 할 권리가 있다. 그러나 이 경우 정의는 어디에 있으며, 1815년의 현장이 약속한 〈사전 보상〉은 어디에 있는가? 사전 보상은 없을뿐더러 아예 불가능하기조차 하다. 왜냐하면 만일 희생된 소유에도 보상금이 주어진다면, 공채전환은 아무런 의미가 없기 때문이다.

오늘날 국가는 공채소유자에 대하여, 에드워드 3세에게 포위된 칼레Calais 시市가 그 도시의 명사들에 대해 취했던 것과 비슷한 태도를 취하고 있다(백년전쟁 당시 칼레 시는 영국군에 의해 포위되었다-옮긴이). 승리한 영국은 칼레 시의 유력 인사들을 넘겨받는 조건으로 주민들의 목숨을 살려주겠다고 약속했고, 외스타슈Eustache를 비롯한 몇 명이 희생되었다. 이들로서는 숭고한 일을 한 것이며, 우리의 장관님들은 공채소유자들에게 이 일화를 들려주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시 당국은 이들을 적군에게 넘겨줄 권리가 있는가? 아니 절대로 그렇지 않다. 안전권은 절대적인 것이고 조국은 누구에게도 희생을 요구할 수 없다. 적의 사정권 안에서 보초를 서는 병사도 이 원칙에서 예외가 되지 않는다. 한 시민이 보초를 서고 있을 때, 조국 역시 그와 더불어 위험에 노출되는 것이다. 오늘은 이 사람이, 내일은 저 사람이 당번병이다. 위험과 희생은 모두에게 닥치는 것이며, 도주하는 것은 시역죄이다. 누구도 위험에서 빠져 나올 권리가 없으며, 누구도 희생양이 될 수 없다. 〈한 사람이 백성을 위하여 죽는 것은 유익하다〉라는 가야바의 금언(「요한 복음」 18장 14절-옮긴이)은 하층민과 참주들에게서, 즉 사회의 양극단에서 나온 말이다.

영구 채권rente perpétuelle은 그 본질상 되사기가 가능하다고 말한다. 이 민법상의 금언은, 국정에 적용될 경우, 노동과 부의 자연적 평등으로 돌아가기를 원하는 자들에게는 바람직하다. 그러나 소유자의 관점에서 볼 때 그리고 공채전환론자들의 입을 빌려 말하자면, 그것은 지불불능자의 언어이다. 국가는 단순한 차용자가 아니라 소유의 보증인이며 수호자이다. 국가는 가능한 최고의 안전을 제공함으로써, 가장 견고하고 아무도 침해할 수 없는 향유를 보장한다. 어떻게 국가가 자신을 신뢰하고 있는 채권자들의 희생을 강요하면서, 이들에게 소유의 보장과 공공질서에 대해 말할 수 있다는 말인가? 이러한 경우에 국가는 빚을 갚아야 하는 채무자가 아니라, 말하자면 주주들을 궁지에 몰아넣어서 원래 약속과는 달리 이들로 하여금 원래 자본금에서 나오는 이자의 20,30, 40%를 손해 보게 만드는 주식회사와 같다.

이것이 다가 아니다. 국가란 사회의 약정에 의해서 공통의 법률 아래 결합된 시민들의 총체이다. 이 약정은 모든 이들이 자신의 재산을, 즉 갑은 밭을, 을은 포도원을, 병은 임차지를 가질 수 있도록 보장해 주며, 이와 마찬가지로 부동산을 사들일 수도 있었지만 국가 재정을 원조하려고 그 돈으로 채권을 사들인 공채소유자에게는 금리를 보장해 준다. 국가는 정당한 보상금 없이는 한 에이커의 밭도, 한 모퉁이의 포도원도 요구할 수 없으며, 하물며 지대를 내리게 할 권한도 없다. 어떻게 국가가 공채 이자를 인하할 권리를 갖겠는가? 이 권리가 정당성을 얻으려면 공채소유자가 자신의 자산을 다른 어딘가에 마찬가지로 유리하게 투자할 수 있어야만 한다. 그러나 공채소유자가 국가로부터 벗어날 수 없는 이상, 그리고 공채 이율 인하의 원인 즉 좀 더 값싸게 차용할 수 있는 능력이 국가에 있는 이상, 어떻게 공채소유자가 원하는 유리한 투자처를 발견할 수 있겠는가? 이것이 소유의 원리에 기반을 둔 정부가 공채소유자의 동의 없이는 공채를 되살 수 없어야 하는 이유이다. 공화국에 대부해 준 기금은 다른 유형의 재산들이 존중되는 한에는 누구도 손댈 수 없는 재산이다. 강제적으로 되사기를 하는 것은 공채소유자에게는 사회적 협약을 파기하는 일이며, 이들을 법의 테두리 바깥에 두는 일이다.

공채 이자율 인하에 대한 모든 논쟁은 다음과 같이 요약된다.

질의 │ 100프랑 정도의 공채 증서를 가진 4만 5,000의 가정을 빈곤에 빠트리는 일은 정당한가?

답변 │ 700~800만의 납세자들에게, 이들이 3프랑만 내면 되는데, 5프랑을 내게 하는 일은 정당한가?

우선, 이런 식의 답변이 질의에 대한 옳은 답이 되지 않는다는 것은 명백하다. 그러나 그 허점이 더 잘 드러나게 하기 위해서 답변을 다음과 같이 바꾸자. 100명의 머리를 적에게 내줌으로써 10만 명을 구할 수 있는데도, 이들 10만 명 모두의 목숨을 위험에 노출시키는 것이 정당한가? 독자여, 여러분이 판단하시라.

이 모든 것을 현상 유지를 원하는 자들은 완벽하게 이해하고 있다. 그럼에도 조만간 공채 이자율의 인하가 단행될 것이다. 그러면 소유권은 침해당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달리 해볼 방도가 없기 때문이며, 권리로 간주되면서도 사실상 권리가 아닌 소유권은 법적으로 소멸될 것이기 때문이며, 현실의 불가피성, 양심의 규범, 물리적 · 수학적 필연성 등이 결국은 우리 사법부의 이러한 환상을 깨부술 것이기 때문이다.

요약해 보자. 자유란, 마치 삼투불가능성이 물체의 속성이듯이, 인간의 속성이라는 점에서 절대적 권리이며, 존재의 필수 조건이다. 평등이란 평등 없는 사회가 있을 수 없다는 점에서 절대적 권리이다. 안전이란, 모든 인간에게 자신의 자유와 생명이 타인의 그것만큼 귀중하다는 점에서 절대적 권리이다. 이 세 가지는, 사회에서 각 구성원은 그가 준 것만큼 받는다 - 즉 자유에는 자유로, 평등에는 평등으로, 안전에는 안전으로, 육체에는 육체로, 영혼에는 영혼으로 - 는 점에서 말하자면 더 보탤 수도 더 뺄 수도 없는 절대적인 것이다.

그러나 소유란, 그 어원학적 추론이나 법리상의 정의에 따르자면, 사회의 외부에 있는 권리이다. 왜냐하면 만일 개개인의 재산이 사회적인 것이라면 조건은 분명히 모두에게 평등할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소유란 인간이 사회적 재산을 절대적인 방식으로 처분할 수 있는 권리이다〉라고 말하는 것은 모순이다. 소유를 위해서는 그렇지 않다. 따라서 소유가 〈자연적〉 권리라고 할지라도, 이 자연권은 〈사회적인〉것이 아니라 〈반反 사회적인〉 것이다. 소유와 사회는 불가항력적으로 서로를 거부한다. 두 소유자를 서로 결합시키는 것은 자석을 같은 극끼리 맞붙이는 것만큼이나 불가능하다. 사회가 사라져야 하거나 아니면 사회가 소유를 말살해야 하거나 둘 중의 하나이다.

소유가 자연적이고, 절대적이며, 소멸될 수 없고, 양도할 수 없는 권리라면, 왜 사람들은 어느 시대에나 소유의 기원에 대해 그토록 큰 관심을 가졌는가? 소유를 특정 짓는 특성들 중의 하나가 바로 그 점에 있기 때문이 아닌가. 자연권의 기원이라니! 도대체 누가 자유권, 안전권 및 평등권의 기원을 탐구했겠는가? 그 권리들은 우리가 존재하는 것과 마찬가지 이유에서 존재하는 것이다. 그것들은 우리처럼 태어나고, 살고, 죽는다. 그러나 소유란 정말로 이와는 다른 것이다. 마치 주체가 없어도 기능은 존재하듯이, 법률에 의해서 소유는 소유자 없이도 존재하는 것이다. 소유는 아직 잉태되지 않은 인간에게도 이미 세상을 뜬 80대의 사람에게도 존재한다. 그러나 영원성 및 무한성과 연결된 듯이 보이는 이 놀라운 특전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소유가 어디서 유래하는지를 알 수 없다. 박사님들은 서로 어긋나는 말만을 우겨대고 있다. 이들의 견해가 일치하는 한 가지 점은 소유권의 확실성은 그 기원의 진실성 여부에 토대를 두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러나 이러한 일치는 그들 모두가 비판을 면할 길이 없다는 것을 의미할 따름이다. 왜 이들은 기원의 문제를 완전히 해결하기 전에 그 권리를 인정했는가?

어떤 이들은 소유권의 정당성 문제에 조금이라도 이의를 제기하길 꺼려하며, 터무니없고 말썽을 일으킬 소지가 있는 소유권의 역사를 돌이켜 보려 하지 않는다. 그들은 소유란 이미 하나의 사실이며, 항상 그러했으며 또 앞으로도 줄곧 그러하리라고 말하는 것으로 만족하려 한다. 현학자 프루동(J.-B.-V. Proudhon, 1758~1838, 저자 프루동의 사촌 형으로 디종 대학 법학교수-옮긴이)이 자신의 『용익권 논고』에서 소유의 기원이라는 문제를 현학적인 무용지물인 양 취급하면서 논의를 시작한 것도 바로 이 때문이다. 만일 내가 나의 동료 시민들이 충분한 소유를 누리는 것을 보았다면, 나 역시 평화에 대한 애착심에 고무되어 이러한 바람에 기꺼이 동조했을 것이다. 그러나 …절대 아니다. …나는 거기에 절대 동의하지 않는다.

소유권이 가진 정당성의 토대는 두 가지, 즉 〈선점(先占, occupation)〉과 〈노동〉으로 귀결된다. 나는 이 두 가지에 대해 차례로 그 모든 측면을 아주 자세하게 검토할 것이다. 사람들이 어떤 논거를 내세우든지 간에, 나는 그것으로부터, 소유가 정당하고 가능하려면 평등을 필요조건으로 가져야만 한다는 논박할 수 없는 증거를 끌어낼 것이라는 점을 독자들에게 환기시키고자 한다.

제2절 소유의 토대로서의 선점에 대하여

나폴레옹 법전에 대한 심의를 위해 국가참사회가 소집한 회합들에서 소유의 기원과 원리에 대한 어떤 논쟁도 제기되지 않았다는 사실은 주목할 만하다. 소유 및 종물從物 취득권에 관한 제2편, 제2권의 모든 조항들은 아무런 토의도 수정도 없이 통과되었다. 다른 문제들에 대해서는 법률 고문관들을 그토록 힘들게 했던 보나파르트가 소유에 대해서는 덧붙일 말이 없었다. 그러나 놀랄 일은 아니다. 일찍이 이 세상에서 가장 독자적이고 가장 제멋대로였던 그 사람의 눈에는, 권위에 대한 복종이 가장 신성한 의무이듯이 소유는 제일의 권리여야만 했다.

〈선점〉의 권리, 즉 〈최초 점유자〉의 권리는 사물에 대한 현실적, 물리적, 효과적인 점유에서 나오는 권리이다. 내가 어떤 땅을 선점했다고 치자. 그러면 그것에 반하는 것이 입증되지 않는 한, 나는 그 땅의 소유자로 간주된다. 원래 이러한 권리는 상호적일 경우에만 정당성을 얻을 수 있는 것으로 인정된다. 이는 법학자들도 모두 동의하는 바이다.

키케로Cicero는 땅을 거대한 극장에 비유하고 있다. 〈극장이 공공의 재산인 것처럼 실은 각자가 차지한 자리가 마땅히 그의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Quemadmodum theatrum cum commune sit, recte tamen dici potest ejus esse eum locum quem quisque occuparit)〉. 이 구절은 고대가 소유의 기원에 대해 우리에게 남긴 가장 철학적인 사유의 전부이다. 키케로의 말을 들어보자. 극장은 모두에게 공유된 것이다. 각자가 거기에서 선점한 자리는 〈자기의 것〉이라고 말해진다. 즉 명백히 그 자리는 〈횡령된〉 자리가 아니라 〈점유된〉 자리이다. 이러한 비유는 소유를 무효화하며 더 나아가서 평등을 함축한다. 나는 극장에서 아래층 입석에 한 자리, 위층 좌석에 한 자리, 천장 층에 한 자리를 모두 차지할 수 있는가? 아니다. 그것은 게리온(Geryon,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거인으로 헤라클레스에 의해 죽임을 당함-옮긴이)처럼 동시에 여러 장소에 존재할 수 없는 한 불가능하다. 키케로에 따르면, 누구나 자기에게 필요한 것 이상을 가질 수 없다. 이것이야말로 〈무엇이든 각자에게 속한 것이 그의 것(suum quidque cujusque sit)〉이라는 그의 유명한 금언, 그러나 지금까지 아주 이상하게 적용되곤 했던 바로 그 금언의 참된 해석이다. 각자에게 속한 것은 각자가 점유할 〈능력〉이 있는 것이 아니라 각자가 점유할 〈권리〉가 있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무엇을 점유할 권리가 있는가? 우리의 노동과 우리의 소비에 필요한 것 만큼이다. 땅과 극장에 대한 키케로의 비유가 바로 이것을 입증한다. 이에 따르면 누구나 마음대로 자기 자리를 차지할 수 있고 그것을 아름답게 꾸밀 수 있으며 그것을 좋게 고칠 수도 있다. 그러나 그의 행위는 결코 그와 타인을 갈라놓는 선을 넘어서는 안 된다. 키케로의 교의는 평등권으로 귀결된다. 왜냐하면 선점한다는 것은 용납한다는 것을 의미하는 만큼, 그 용납이 상호적이고 또 반드시 그래야만 하는 것이라면 점유란 평등해지기 때문이다.

그로티우스(H. Grotius, 1583~1645, 네덜란드의 역사가, 법학자-옮긴이)는 역사에서 설명을 찾는다. 그런데 사람들이 자연적이라고 말하는 권리의 기원을 자연이 아닌 다른 곳에서 찾는 것은 어떤 추론 방법인가? 그것은 곧 고대인들의 방식이다. 요컨대 사실이 존재한다, 따라서 그것은 필연적이다, 따라서 그것은 정당하다, 따라서 선례들 역시 정당하다는 식이다. 그러나 살펴보자.

〈태초에는 모든 것이 공유였으며, 나뉘어 있지 않았다. 모든 것이 모두의 재산이었다.…〉 이것으로 충분하다. 그로티우스는 어떻게 해서 이 원시공동체가 결국은 야망과 탐욕으로 끝났는가를, 그리고 왜 황금시대가 철의 시대에 자리를 내주었는지 등등을 우리에게 이야기하고 있다. 따라서 소유는 우선 전쟁과 정복에, 다음에는 조약과 계약 등에 그 기원을 가진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이 조약과 계약들이, 최초의 공동체의 의사에 따라서, 즉 첫 인간들이 동의할 수 있었던 유일한 분배규칙과 그들이 알고 있는 유일한 정의의 형태에 따라서, 부를 평등하게 나누었는가? 만일 그렇다면 기원의 문제는 왜 이후에 평등이 소멸되었는가 하는 문제로 표현된다. 아니면 이 조약과 계약들이 무력에 의해 약자들에게 강제된 것인가? 만일 그렇다면 이는 무효이다. 후대 사람들의 암묵적인 동의는 결코 이를 정당화하지 못한다. 우리는 항구적인 불공평과 사기의 상태에 살고 있을 뿐이다.

사람들은 조건의 평등이 처음에는 자연 안에 있었는데, 어떻게 해서 자연 밖의 상태로 되었는지를 결코 깨닫지 못할 것이다. 이러한 일탈이 왜 일어났는가? 동물의 본능은 종種의 차이만큼이나 변하지 않는 것이다. 따라서 인간 사회에서의 원시적이고 자연적인 평등을 가정하는 것은 현재의 불평등이란 이 사회의 자연 상태에 가해진 외부의 침해라는 사실(소유의 옹호자에게는 납득될 수 없는 사실)을 암묵적으로 인정하는 것이다. 그러나 나로서는 다음과 같이 결론을 내린다. 만일 신이 최초의 인간들을 평등한 조건들 안에 놓았다면, 그것은 신이 이들에게 준 하나의 지침, 즉 인간들이 다른 차원에서 실현하길 신이 바라는 모델이라는 것이다. 마치 신이 인간의 영혼에 불어넣어 준 종교적 감성을 인간이 여러 가지 형태로 계발하고 표현하는 것처럼 말이다. 인간은 항구적이고 변함없는 한 가지 본성만을 가지고 있다. 인간은 본능에 의해 그 본성을 따르고, 반성에 의해 그것에서 멀어지며, 이성에 의해 다시 그리로 돌아온다. 우리가 지금 귀로에 서 있지 않다고 감히 말할 자가 누구인가? 그로티우스는 인간이 평등에서 나왔다고 말한다. 나는 인간이 평등 안으로 다시 돌아갈 것이라고 말할 것이다. 인간은 어떻게 평등에서 나왔는가? 인간은 어떻게 다시 평등으로 돌아갈 것인가? 나중에 살펴볼 것이다.

레이드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주프루아Jouffroy 씨의 번역본, 제4권, 363쪽).

〈소유권은 결코 자생적인 것이 아니라 획득된 것이다. 그것은 인간의 품성 그 자체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행위에서 나오는 것이다. 법률학자들은 양식을 가진 인간이면 누구나 만족할 만한 방식으로 소유의 기원을 설명했다. 토지는 자비로운 하늘이 인간들에게 생활에 쓰도록 준 공동 재산이다. 그러나 이 재산 및 거기서 나오는 생산물을 나누는 일은 인간들이 할 몫이다. 누구나 ‘다른 이들을 해치지 않으면서’ 그 중 ‘일부’를 차지할 수 있도록 필요한 힘과 지성을 하늘로부터 부여받았다.〉

〈고대의 도덕론자들은, 토지가 선점되어 다른 이의 소유가 되기 이전에 그 토지의 산물들에 대해 인간이 가지는 공통의 권리를 극장에서의 권리에 적절히 비교했다. 누구나 극장에 들어서면서 비어 있는 자리를 차지할 수 있으며, 상연 시간 내내 그 자리를 지킬 수 있는 권리가 있다. 아무도 이미 자리를 자은 관객들을 내쫓을 권리는 없는 것이다. 토지는 전능하신 하느님께서 인류 전체의 노동과 안락을 위해 한없는 배려와 선의로 하사하신 거대한 극장과도 같은 것이다. 누구나, 다른 이들에게 해를 끼치지 않는 한, 관객으로 거기에 자리 잡을 권리가 있으며 배우로서 역할을 맡을 권리가 있다.〉

레이드의 학설의 결론은 다음과 같다.

1. 각자가 차지한 부분이 타인에게 손해가 되지 않기 위해서는, 그 부분이, 나누어 가져야 할 재산의 총량을 공동분배자들의 수로 나눈 몫과 같아야 한다.

2. 자리의 수는 항상 관객의 수와 같아야만 한다. 어느 한 관객도 두 자리를 차지할 수 없으며, 한 배우가 여러 가지 배역을 맡아서도 안 된다.

3. 관객이 들어오고 나감에 따라 자리의 수는 모두에게 같은 비율로 줄어들거나 늘어난다. 왜냐하면 〈소유권이란 결코 자생적인 것이 아니라 획득된 것〉이기 때문이라고 레이드는 설명한다. 따라서 절대적인 것은 없다. 따라서 소유권의 구성 요소를 이루는 취득 행위는 우연적인 사실일 뿐이며, 우연적인 취득 행위 자체는 그것이 지니지도 않은 불변성을 소유의 권리에 전이해 주지 못한다. 에든버러Edinbourg의 교수님께서 아래와 같이 덧붙일 때, 아마도 그가 이해한 바가 바로 이 사실일 것이다.

〈생존의 권리는 생존의 수단을 확보할 권리를 포함한다. 말하자면 죄 없는 자의 생명이 존중되어야 한다는 정의의 준칙은 그에게서 생명을 보존할 수단을 빼앗지 말아야 한다는 준칙을 포함한다. 이 두 가지는 마찬가지로 신성한 것이다. …타인의 노동을 방해하는 행위는 그에게 쇠사슬을 채우거나 그를 감옥에 가두는 것과 같은 성격의 부당 행위를 저지르는 짓이다. 결과는 같은 종류이며 같은 분노를 유발시킬 것이다.〉

이리하여 이 스코틀랜드 학파의 시조는 재능과 근로의 불평등을 전혀 고려하지 않은 채, 노동수단의 평등을 선험적으로 상정하며, 나아가 〈잘하는 자는 잘 대접받으리라〉라는 늘상 같은 금언에 따라 개인의 복리에 대한 배려를 노동자 각자에게 내맡겨버린다.

철학자 레이드에게 결여된 것은 원리에 대한 이해가 아니라 그 결과를 따르는 용기이다. 만일 생존권이 평등하다면, 노동권도 평등하며 마찬가지로 선점권도 평등하다. 만일 소유를 구실로 해서 섬의 주민들이, 그 섬에 정박하려는 가련한 난민들을 갈고리로 쫓아 버린다면 그것은 범죄행위가 아닌가? 이러한 야만 행위는 생각만 해도 몸서리가 쳐진다. 소유자들은 자기 섬에 터 잡은 로빈슨 크루소처럼, 문명의 파고에 휩쓸려 와서 소유의 바위에 매달리려는 프롤레타리아들을 창과 총으로 몰아내고 있다. 〈내게 일거리를 주시오, 나를 내쫓지 마시오, 얼마든지 당신이 주는 봉급대로 일을 하리다〉라고 프롤레타리아는 절망적으로 소유자에게 외친다. 〈네 수고는 이제 필요 없어〉라고 소유자는 창끝과 총신을 내보이면서 답한다. 〈그러면 집세라도 깎아 주시오. 먹고 살려면 수입이 있어야 합니다. 일거리가 없는데 어떻게 당신에게 집세를 내겠소?〉라고 하소연한다. 그러면 〈그건 내 알 바 아니야〉라는 답이 따른다. 이렇게 이 가련한 프롤레타리아는 격랑에 휩쓸려버리거나 행여 소유의 나라에 들어서려 하면 소유자들이 그를 향해 방아쇠를 당긴다.

우리는 지금까지 유심론자의 말을 들었다. 이제 유물론자의 말을, 그리고 다음에 절충론자의 말을 들어보자. 이렇게 철학계를 일주하고 나서 우리는 법학 쪽으로 넘어갈 것이다.

데스튀트 드 트라시에 따르면 소유는 천성에서 나오는 필연이다. 이러한 필연에서 나오는 곤란한 결과들을 부정한다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리라. 그러나 이 결과들은 일종의 불가피한 악이기는 하지만 원리 자체를 무효화하지는 않는다. 따라서 소유에서 파생하는 폐해들 때문에 소유 자체를 거역하는 것은 삶을 불평하는 것만큼이나 슬기롭지 못한 일이다. 왜냐하면 삶을 부정하는 데서 오는 가장 확실한 결과는 곧 죽음이기 때문이다. 이 거칠고 냉혹한 철학은 적어도 하나의 솔직하고 엄정한 논리를 약속한다. 이 약속이 채워질 것인지 살펴보자.

〈우리는 소유의 조건에 대해 아주 진지하게 따져 보았다. …마치 이 세상에서 무엇이 소유이며 무엇이 소유가 아닌지를 판정하는 일이 우리에게 달린 듯이 말이다.… 어떤 철학자들과 입법자들의 말을 들어보면, 사람들이 마치 주어진 어떤 순간에 자발적으로 그리고 아무런 동기도 없이 ‘너의 것’, ‘나의 것’이라고 말할 생각이 든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너의 것’, ‘나의 것’은 결코 발명된 것이 아니다.〉

철학자여, 당신은 너무나도 현실론자이다. 〈너의 것〉, 〈나의 것〉이라는 말은 내가 〈너의〉 철학, 〈나의〉 평등이라고 말할 때처럼 반드시 주체의 확인을 나타내는 것은 아니다. 〈너의〉 철학이라는 표현은 철학하는 너라는 뜻이며, 〈나의〉 평등이라는 표현은 평등을 공언하는 나라는 뜻이다. 그러나 〈너의 것〉, 〈나의 것〉이라는 표현은 대개의 경우 관계를 지칭한다. 〈너의〉 나라, 〈너의〉 교구, 〈너의〉 재단사, 〈너의〉 우유 배달인, 〈나의〉 호텔 방, 〈나의〉 극장 좌석, 〈나의〉 동료, 국민방위군 안에서의 〈나의〉 대대 등등이다. 첫 번째 의미에서 우리는 〈나의〉 노동, 〈나의〉 재능을, 그리고 때로는 〈나의〉 미덕을 말할 수 있지만 결코 〈나의〉 위대함, 〈나의〉 위엄이라고 말할 수 없다. 두 번째 의미에서만 우리는 〈나의〉 밭, 〈나의〉 집, 〈나의〉 포도밭, 〈나의〉 자본금이라고 말할 수 있다. 마치 은행 점원이 〈나의〉 금고라고 말하는 것처럼 말이다. 한 마디로 말해서 〈너의 것〉과 〈나의 것〉은 개인적인, 그러나 평등한 권리의 표식이고 표현이다. 우리의 외부에 있는 사물들에 적용될 때, 이 표현들은 소유가 아니라 점유, 기능, 용익用益 등을 나타낸다.

우리 저자님(드 트라시-옮긴이)의 이론 전체가 이 가련한 애매성에 기반을 두고 있다는 사실을 사람들은 결코 믿지 않을 것이다. 설령 내가 그것을 아주 명료한 텍스트로 입증한다고 할지라도 말이다.

〈계약이라는 것이 있기 이전에 사람들은, 홉스Hobbes가 말하는 것처럼, ‘전쟁’ 상태에 있었던 것이 아니라 ‘고립’ 상태에 있었다. 이 상태에서는 고유한 의미에서의 정당한 것, 부당한 것이 없었다. 한 사람의 권리는 다른 사람의 권리와 아무 상관이 없었다. 모두가 저마다 욕구만큼의 권리를, 그리고 어떤 외부의 간섭도 없이 이 욕구를 충족시킬 의무를 느낀다.〉

이 체계를 받아들이자. 그것이 진실인가 거짓인가는 중요하지 않다. 아무튼 데스튀트 드 트라시의 의도는 평등을 말하려는 것이다. 이 가정에 따르면 인간은 고립 상태에 있는 한 서로에게 아무것도 빚지고 있지 않다. 인간은 누구나 타인의 욕구를 염두에 두지 않고 자신의 권리를 충족시킬 권리를, 그 결과 자신의 힘과 능력에 따라서 자연에 대해 자신의 영향력을 행사할 권리를 갖는다. 그러나 여기서 나오는 필연적인 결론은 개인들 사이에서의 부의 가장 커다란 불평등이다. 따라서 조건의 불평등은 여기서 고립과 야만의 고유한 특성이다. 이는 말하자면 정확히 루소Rousseau의 체계와 정반대인 것이다. 계속해 보자.

〈암묵적이든 명시적이든 계약이 맺어질 때여야 비로소 이 권리들과 이 의무에 제약이 가해지기 시작한다. 바로 이때에만 정의와 부정의가, 즉 그때까지는 필연적으로 평등했단 갑甲의 권리와 을乙의 권리 사이의 균형이 탄생하는 것이다.〉

〈권리는 평등했었다〉라고 그는 말하는가. 이 말은 사실 누구나 타인의 욕구를 조금도 고려하지 않고 자기의 욕구를 충족시킬 권리가 있었다는 말에 다름 아니다. 달리 말하자면 누구나 평등하게 서로를 해칠 권리를 가졌다는 것을, 그리고 간계와 무력 이외에는 다른 권리가 없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게다가 사람들은 전쟁과 약탈에 의해서 뿐만 아니라 강탈과 횡령에 의해서 서로를 해친다. 그런데 사람들이 〈암묵적인 또는 명시적인 계약들〉을 맺기 시작하고 일종의 균형을 수립했던 것은 바로 무력과 간계를 사용하는 이 평등한 권리를, 즉 서로를 해칠 수 있는 이 평등한 권리 - 이야말로 부의 불평등과 악의 유일한 원천이다 - 를 제거하기 위해서였다. 따라서 이 계약들과 이 균현은 모두에게 행복의 평등을 보장해 주고자 하는 것이었다. 모순의 법칙에 따른다면, 고립이 불평등을 낳는다면, 사회는 필연적 결과로 평등을 낳을 것이다. 사회에서의 균형이란 강자와 약자의 평준화이다. 왜냐하면 이들이 서로 평등하지 않은 한, 이들은 서로에게 이방인이고 어떠한 결합도 이루지 못한 채 적으로 남을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조건의 불평등이 필요악이라면, 이는 고립 상태에서 그러하다. 왜냐하면 사회와 불평등은 서로 양립할 수 없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인간이 사회를 만들게 되어 있다면, 인간은 평등을 지향하도록 되어 있다. 이 준엄한 결론은 결코 물리칠 수 없는 것이다.

사정이 이러하다면, 어째서 균형이 확립된 이후에도 줄곧 불평등이 증대되는가? 정의의 지배라는 것이 어째서 늘 고립의 지배에 불과한가? 데스튀트 드 트라시는 이에 대해 뭐라고 답하는가?

〈‘욕구’와 ‘수단’, ‘권리’와 ‘의무’, 이 모든 것은 의지력에서 유래한다. 인간이 아무것도 원하지 않으면, 아무것도 가질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욕구와 수단을, 권리와 의무를 가진다는 것은 무엇인가를 ‘소유하는 것’이고 ‘점유하는 것’이다. 그것들 모두가 그토록 다양한 소유물이다. 가장 일반적인 말로 표현하자면, 이들 자체가 우리에게 속하는 사물들인 것이다.〉

일반화해서 표현된 말이라고 치더라도 이는 아주 부끄럽고 애매한 주장이다. propriété라는 단어는 두 가지 뜻을 갖는다. ① 그것은 사물을 사물답게 하는 어떤 성질, 그 사물만의 고유하고 다른 것과 구별되는 어떤 특성을 가리킨다. 삼각형의 속성들propriétés, 수의 속성들, 자석의 속성들이라고 말하는 것은 바로 이런 의미에서이다. ② 그것은 지력이 있고 자유로운 존재가 어떤 사물에 대해 행사하는 지배적인 권리를 가리킨다. 법학자들이 사용하는 용례가 바로 이것이다. 그러므로 〈철은 자석의 propriété(속성)을 갖고 있다〉라는 구절에서 쓰이는 propriété라는 단어는 〈나는 이 자석에 대한 propriété(소유)를 갖고 있다〉라는 구절에서 쓰이는 propriété라는 단어와 동일한 관념을 불러일으키지는 않는다. 불쌍한 이에게, 너는 팔과 다리를 〈가지고 있으므로〉, 소유propriété를 〈가지고 있다〉라거나, 너를 억누르는 고통이나 네가 노천에서 잠을 잘 권한 역시 소유물propriétés이라고 말한다면, 이는 말장난에 불과할 것이며 몰인정한 정도가 아니라 우롱에 가까울 것이다.

〈소유의 관념은 인격의 관념에만 기반을 둔 것이다. 소유의 관념이 탄생하자마자, 그것은 필연적으로 그리고 불가피하게 인격이라는 관념의 전체성 안에서 자라난다. 한 개인이 자신의 ‘자아moi’를, 즉 자신의 인신 및 향유하고 고뇌하고 활동할 자신의 능력을 깨닫자마자, 그는 필연적으로 이 ‘자아’야말로 그가 움직이는 신체들 즉 기관, 힘, 기능 따위의 배타적인 소유자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 인위적인 소유, 협약에 따른 소유가 존재하므로, 자연적이고 필연적인 소유도 존재해야 할 것이다. 인위 속에는, 자연 속에 그 원리를 갖고 있지 않은 어떠한 것도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철학자들의 선의와 추론은 경탄을 금할 수 없다. 인간은 propriété를 가진다. 즉 이 용어의 첫 번째 의미에서 인간은 속성을 가진다. 인간은 그것에 대한 propriété를 가진다. 즉 이 용어의 두 번째 의미에서 인간은 지배력을 가진다. 따라서 인간은 소유자propriétaire라고 하는 속성propriété을 소유propriété하고 있다는 것이다. 권위 있는 데스튀트 드 트라시만을 염두에 둔다면, 내가 여기서 어찌 이와 같은 엉터리 말에 낯을 붉히겠는가! 그러나 사회 및 언어의 기원에 관한 이러한 유치한 혼동은, 최초의 관념들 및 최초의 언어들과 더불어 형이상학과 변증법이 탄생했을 때, 누구에게서나 찾아볼 수 있는 사실이었다. 인간이 〈나의 것〉이라고 부른 모든 것은 그의 정신 속에서 그의 인신과 동일시되었다. 인간은 그것을 자신의 소유로, 자신의 부로, 자기 자신의 일부분으로, 자기 육체의 한 조각으로, 자기 영혼의 한 기능으로 간주했던 것이다. 사물을 점유한다는 것은 육체와 정신의 재능에 대한 소유와 동일시되었고, 바로 이 헛된 비유에 토대를 두고 소유권이, 즉 데스튀트 드 트라시가 그토록 우아하게 말한 〈기예技藝에 의한 자연의 모방〉이 자리 잡게 된 것이다.

그러나 이 섬세한 공론가가 어째서 인간은 자기 재능의 소유자조차도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지 못했는가? 인간은 힘과 덕성과 능력을 가지고 있다. 이 힘과 덕성과 능력은 인간이 살고 깨닫고 사랑하도록 자연이 부여해 준 것이다. 인간은 이것들에 대한 절대적인 지배권을 갖고 있지 않으며 단지 용익권자用益權者에 불과하다. 그리고 인간은 이 용익권을 자연의 규칙에 순종하면서만 행사할 수 있다. 만일 인간이 자신의 재능의 소유자라면, 굶주림과 추위에 시달리지 않을 것이다. 인간은 원 없이 먹고, 불길 속을 걸어다닐 것이며, 산을 들어올리고, 1분 안에 수백 리를 갈 것이며, 치료받지 않아도 의지의 힘만으로 낫고, 불사의 존재가 될 것이다. 만일 인간이 나는 무엇인가 알고 싶다고 말한다면 그는 알게 될 것이고, 사랑하고 있다고 말하면 사랑을 누릴 것이다. 뭐라고! 인간은 결코 자기 자신의 주인이 아닐진대, 하물며 자기 소유도 아닌 것들의 주인이 되고자 하다니! 인간은 자연의 산물들을 이용할 수 있다. 그는 그것들을 이용해야만 살아갈 수 있으니 말이다. 그러나 인간은 그것들에 대한 소유자로서의 특권은 가질 수 없다. 소유자라는 칭호는 단지 비유에 의해서 그에게 붙여진 것일 뿐이니 말이다.

요약해 보자. 한편에는 자연과 기예에서 나오는 외적인 〈재산들〉이, 다른 한편에는 인간의 〈힘〉과 〈재능들〉이 있다. 그런데 데스튀트 드 트라시는 이 두 가지 모두를 〈소유물〉이라고 부르면서 하나의 공통된 표현으로 뭉뚱그린다. 그가 소유권을 마치 불변의 법칙인 양 확립하고자 하는 것은 바로 이러한 모호함을 이용해서이다. 그러나 모든 소유물들 가운데에는 기억, 상상력, 힘, 아름다움 등과 같이 〈생득적인〉 것이 있는 반면, 밭, 물, 숲 등과 같이 〈획득적인〉 것이 있다. 자연 상태나 고립 상태에서는 가장 수완이 좋고 가장 힘이 센 사람들, 즉 생득적 소유의 측면에서 가장 우월한 이들이 획득적인 소유물을 배타적으로 취득할 수 있는 기회를 가장 많이 갖게 마련이다. 그런데 인간이 균형과 정의를 발명하고 암묵적이든 공식적이든 여러 계약을 맺는 것은 바로 이러한 침탈 행위와 그로부터 연유하는 전쟁을 미연에 막기 위해서이다. 이는 말하자면 생득적 소유물들의 불평등을 가능한 범위에서 획득적 소유물들의 평등으로 치유하는 일이다. 분배가 평등하지 않는 한, 공동분배자들은 서로 적으로 남으며, 계약은 다시 시작될 것이다. 이렇게, 한편에는 고립과 불평등과 적대감과 전쟁의 약탈과 학살이, 다른 한편에는 사회와 평등과 우애와 평화와 사랑이 있다. 어느 한편을 선택하자.

『정치 경제의 철학』의 저자인 조제프 뒤탕(J. Dutens, 1765~1848, 중농주의 경제학의 옹호자-옮긴이) 씨는 물리학자요 기술자이자 기하학자이자만, 법학자로서는 이류급이고, 철학자로서는 삼류급 인물이다. 자신의 책 속에서 그는 소유를 옹호하기 위해서 총대를 매고 나서야 한다고 믿었다. 그는 형이상학은 데스튀트 드 트라시에게서 빌려온 듯하다. 그는 스가나렐(Sganarelle, 몰리에르의 희극에 나오는 작중인물-옮긴이)을 연상시키는 어조로, 다음과 같이 소유를 정의하는 것으로 시작한다. 〈소유란 어떤 물건이 고유하게 어떤 이에게 속하는 권리이다.〉 이는 글자 그대로 해석해 보면, 소유란 소유의 권리라는 뜻이다.

의지, 자유, 인성 따위에 대해 미사여구를 늘어놓고, 그리고 〈자연의 빗물질적인〉 소유물과 〈자연의 물질적인〉 소유물을 구별하고(이 구별은 데스튀트 드 트라시의 생득적 소유물과 획득적 소유물의 구분을 연상시킨다) 나서, 조제프 뒤탕 씨는 다음 두 가지의 일반 명제로 결론을 맺는다. ① 소유는 인간 모두에게 있어 자연적이고 양도할 수 없는 권리이다. ② 소유물에 있어서의 불평등은 자연의 필연적인 결과이다. 그리고 이 두 명제는 다음과 같은 더 단순한 명제로 바뀐다. 즉 모든 인간은 불평등한 소유에 대한 평등한 권리가 있다.

그는 시스몽디(Sismondi, 1773~1842, 스위스의 경제학자, 『정치경제학 연구』를 썼다-옮긴이) 씨가 토지의 소유는 법이나 협약 외에는 결코 다른 근거를 갖지 않는다고 썼다고 비난한다. 그러고 나서 그는 소유에 대한 인민의 존중심에 대해 언급하면서, 〈양식을 지닌 인민은 사회와 소유자들 사이에 체결된 ‘원초적 계약’의 성격을 알고 있다〉고 말한다.

그는 소유를 점유와, 공동체를 평등과, 정의로운 것을 자연적인 것과, 자연적인 것을 가능한 것과 혼동한다. 그는 어떤 때는 이 다른 관념들을 서로 같은 것으로 취급하고, 어떤 때는 그것들을 구별한다. 사정이 이러하니 그를 이해하는 것보다 그를 논박하는 것이 몇 백 배 더 쉬울 정도이다. 처음에는 『정치 경제의 철학』이라는 그 책의 제목에 끌렸지만, 나는 저자의 모호한 장광설 속에서 아주 진부한 관념들만을 발견했을 뿐이다. 이것이 내가 이 책에 대해 더 이상 말하려 하지 않는 이유이다.

쿠쟁 씨는 자신의 『도덕 철학』(15쪽)에서 우리에게 모든 도덕, 법률, 권리는 〈자유롭기 위해서는 자유롭게 남으라〉는 계명 속에 주어져 있다고 가르친다. 브라보! 선생, 나도 될 수만 있다면 자유롭고 싶나이다. 그는 계속한다.

〈우리의 원리는 참되고 선하며 사회적이다. 거기에서 모든 결론을 끌어내는 일을 망설이지 말자.〉

〈① 만일 인성이 신성한 것이라면, 그것은 인간의 전반적인 성품에서, 특히 인간의 내적 행위에서, 인간의 감정과 사고와 의지적 결단에서 그러하다. 여기에서 철학, 종교, 예술, 산업, 상업에 대한 존중이 그리고 자유의 모든 산물들에 대한 존중이 나온다. 나는 단순히 관용이 아니라 존중이라고 말한다. 사람들은 권리를 관용하는 것이 아니라 권리를 존중하기 때문이다.〉

나는 이 철학 앞에 머리를 조아리는 바이다.

〈② 나의 자유는 신성한 것으로서 외적인 행위를 위해서는 육체라 불리는 도구를 필요로 한다. 따라서 육체는 신성함을 지니며 그 자체 신성불가침한 것이다. 여기서 개인적 자유의 원리가 나온다.〉

〈③ 나의 자유는 외적인 행위를 위해서는 어떤 무대나 어떤 재료가, 달리 말하자면 어떤 재산이나 어떤 사물이 필요하다. 따라서 이러한 사물 또는 재산은 마땅히 나의 인성처럼 불가침한 것이다. 예컨대, 나의 자유의 외적인 발현을 위해 필요하고 유용한 도구가 되어 버린 어떤 물건을 내가 획득해서, 이 물건은 누구에게도 속하지 않으므로 나의 것이라고 말한다고 하자. 그때부터 나는 그 물건을 정당하게 점유하게 된다. 따라서 점유의 정당성은 두 가지 조건에 의존한다. 첫째, 나는 자유롭다는 조건에서만 점유한다. 행동의 자유를 앗아가면, 당신은 내게서 노동의 원리를 파괴하는 것이다. 따라서 노동에 의해서만 나는 재산이나 사물을 나의 것으로 가질 수 있다. 내가 그것을 점유하는 것은 내가 그것을 나의 일부로 만듦으로서이다. 따라서 행위의 자유가 소유권의 원천이 된다. 그러나 이것만으로는 점유를 정당화하기에 충분하지 않다. 모든 인간은 자유롭고 누구나 노동에 의해 재산을 자기 것으로 가질 수 있다. 이것은 인간은 누구나 소유에 대한 권리를 갖는다는 것을 의미하는가? 전혀 그렇지 않다. 정당하게 점유하기 위해서는 자유로운 존재로서 노동하고 생산할 수 있는 것만으로는 불충분하고, 재산을 남보다 먼저 차지하는 것이 필요하다. 요컨대, 노동과 생산이 소유권의 원리라면, 가장 먼저 선점한다는 사실이 그 필수불가결한 조건인 것이다.〉

〈④ 나는 정당하게 점유한다. 따라서 나는 나의 재산을 내 뜻대로 사용할 권리가 있다. 따라서 나는 그 재산을 양도하거나 변형시킬 권리가 있다. 왜냐하면 자유의 행위가 일단 나의 양도 행위를 허용한 이상, 나의 양도 행위는 내가 살아있을 때나 마찬가지로 내가 죽은 뒤에도 신성한 것으로 남기 때문이다.〉

결론적으로, 쿠쟁 씨에 따르면, 소유자가 되기 위해서는 선점이나 노동에 의해서 점유를 해야 한다는 것이다. 나는 여기에 이러한 행위가 적시에 이루어져야만 한다고 덧붙이고 싶다. 이유는 명확하다. 만일 제일 먼저 온 자가 모든 것을 다 선점한다면, 제일 나중에 온 자는 무엇을 차지하겠는가? 외적 행위를 위한 수단을 가지고 있다고 할지라도 그 자료들을 얻지 못한다면, 그러한 자유들은 어떻게 될 것인가? 서로가 서로를 집어삼킬 수밖에 없지 않겠는가? 이는 참으로 끔찍스러운 극한 상황이다. 위대한 천재성은 작은 것들을 무시하기 때문에, 이 신중한 철학자께서도 도무지 예견하지 못한 결론이 바로 이러한 것이다.

쿠쟁 씨가 선점과 노동이 각각 소유권을 창출할 수 있는 능력이 있다는 점을 부정하고는 소유권을 그 두 가지가 마치 혼인 관계처럼 결합한 데서 나오는 것으로 간주한다는 사실을 또한 지적해 두자. 쿠쟁 씨에게 자주 나타나는, 그러나 그 누구보다도 쿠쟁 씨가 조심해야만 하는 절충주의적 곡예술 가운데 하나가 바로 여기에서 발견된다. 사고의 혼동과 견해의 변덕을 넘어서 진실을 발견할 수 있게 해주는 유일한 수단인 분석, 비교, 소거消去, 환원 등의 방법을 취하는 대신, 그는 모든 체계들을 하나로 뭉뚱그린 다음에 이것은 옳고 저것은 그르다는 식으로 선언을 한다. 그리고 그는 〈자, 진리가 바로 이것이다〉라고 말한다.

그러나 내가 이미 밝혔듯이, 나는 여기서 논박을 하려는 것이 아니다. 이와는 반대로 나는, 소유를 옹호하기 위해 고안해 낸 모든 가설들 속에서 소유에 역행하는 평등의 원리를 찾아낼 것이다. 앞에서 말한 것처럼, 나의 모든 논증은 다음의 한 가지로 귀결할 것이다. 즉 모든 추론의 근저에는 이 불가피한 대전제, 즉 평등이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다. 소유의 원리가 경제학, 법학, 통치론 등을 그 모든 요소에서 훼손시키고 결국은 잘못된 길로 인도하고 있다는 점을 언젠가 내가 보여주길 원하는 것처럼 말이다.

그런데, 만약 인간의 자유가 신성한 것이라면, 그것은 누구에게나 동등한 자격으로 신성하다는 점, 인간의 자유가 외적인 행위를 위해서 즉 생활을 위해서 소유를 필요로 한다면, 이러한 물질의 전유는 누구에게나 마찬가지로 필수적이라는 점, 만일 내가 이러한 전유의 권리에서 존중받기를 원한다면, 나 역시 타인의 전유권을 존중해야만 한다는 점, 그리고 결론적으로 설혹 무한의 영역에서는 자유의 전유하는 힘이 그 자체 외에는 한계가 없다고 할지라도, 유한의 영역에서는 바로 이 힘이 자유들의 수효와 그것들이 차지하는 공간과의 수학적 관계에 의해서 제한을 받는다는 점 등은 쿠쟁 씨의 견해에 따른다면 진실이어야 하지 않는가? 그리하여 만일 한 사람의 자유가, 그와 동시대인인 어떤 다른 사람의 자유가 자신과 같은 몫의 재료를 차지하는 것을 막을 수 없는 것이라면, 그러한 자유는 더욱이 미래의 어떤 이의 자유로부터도 이러한 능력을 앗아갈 수 없는 일이 아니겠는가? 왜냐하면 개체는 사라져도 보편은 존속하며, 영원한 전체의 법칙은 그 현상적인 일부분의 변동에 좌우되지 않으니 말이다. 따라서 이 모든 것으로부터 우리는, 자유를 부여받은 한 사람이 태어날 때마다 다른 사람들은(상호 의무에 의해서) 서로 조밀하게 군집해야 하고, 만일 그 신참자가 결국 상속인이 된다면 그의 상속권이란 (전임자와 자기 자신의) 누적된 권리가 아니라 선택의 권리일 뿐이라고 결론짓지 않을 수 있겠는가?

나는 쿠쟁 씨의 설명을 그 문체까지 흉내 내며 따라왔는데, 사실 나는 이에 대해 부끄러움을 느낀다. 이렇게 단순한 것들을 말하기 위해 그렇게도 거창한 용어들과 그렇게도 요란한 구절들이 필요하단 말인가? 인간은 살기 위해 노동한다. 따라서 인간은 생산의 도구와 재료들을 필요로 한다. 이 생산의 필요에서 인간의 권리가 나온다. 즉 이 권리는 인간이 그와 유사한 협정을 맺은 그의 동료들에 의해서 보장받는 것이다. 10만 명가량의 사람들이 프랑스라는 커다란, 그러나 주민이 모자라는 지역에 자리 잡는다. 이때 토지 자본에 대해 각자가 가지는 권리는 10만 분의 1에 해당한다. 점유자의 수가 늘면 그에 반비례해서 각자의 몫은 줄어든다. 따라서 주민의 수가 3,400만에 달한다면, 각자의 권리는 3,400만 분의 1이 될 것이다. 자, 이제 경찰, 정부, 노동, 교환, 상속 따위를 배열하자. 그러면 노동 수단은 늘 평등할 것이고, 각자는 자유로울 것이며, 사회는 완벽해질 것이다.

소유의 옹호자들 중에서 쿠쟁 씨는 가장 멀리 나아갔다. 경제학자들에 맞서서 그는 선점이 먼저 이루어질 경우에만 노동이 소유권을 낳을 수 있다고 주장했다. 그리고 법학자들에 맞서서 그는 민법은 자연법을 규정하고 적용할 수는 있으나 자연법을 창출할 수는 없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소유권은 소유가 존재한다는 사실에 의해서만 입증된다. 이 점에 있어서 민법은 단지 선언적인 가치를 지닐 뿐이다〉라고 말하는 것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이는 사실의 정당성 자체에 이의를 제기하는 이들에게는 아무런 답변도 주지 못한다는 것을 자인하는 일에 불과하다. 무릇 권리란 스스로 정당화되거나 아니면 그에 앞선 어떤 권리에 의해 정당화되어야 한다. 소유도 이러한 양자택일에서 예외가 아니다. 그렇기 때문에 쿠쟁 씨는 소유의 토대를 그가 인성의 〈신성함〉이라고 부른 것 속에서 아니면 의지가 사물을 자신의 일부로 만드는 행위 속에서 찾으려 했던 것이다. 〈일단 인간의 손에 닿으면, 사물들은 자신을 변화시키고 인격화시키는 어떤 특성을 인간에게서 받아들인다〉고 쿠쟁 씨의 제자들 중 하나가 말했다. 나로서는 이 같은 마술을 조금도 믿지 않으며, 인간의 의지보다 덜 신성한 그 어떤 것도 알지 못한다고 밝혀두는 바이다. 그러나 이 이론은 비록 심리학으로서나 법학으로서는 아주 빈약한 것이지만, 법의 권위나 노동만을 토대로 한 이론들보다는 훨씬 철학적이고 훨씬 심오한 어떤 성격을 띠고 있다. 지금까지 우리는 우리가 논하고 있는 이론이 무엇에 귀착되는지를, 즉 어떻게 평등 - 그 이론이 자신의 온갖 용어들을 통하여 표현한 바가 바로 이것이다 - 에 귀착하는지를 살펴보았다.

그러나 아마도 철학은 사물을 너무 높은 데서 바라보기 때문에 그만큼이나 현실적이지 못한 듯하다. 사변의 높은 정점에 서면 인간들은 너무나 왜소해 보여서 형이상학자로서는 인간들 사이의 차이점을 식별하지 못하는 모양이다. 그리고 조건의 평등은 숭고한 일반론의 관점에서는 참된 금언들 중 하나이지만, 사회생활 및 거래의 일상사에서 그것을 엄밀하게 적용한다는 것은 우스꽝스럽고 심지어 위험한 일일 것이다. 물론 사물을 극단으로 몰고 가거나 지나치게 규정짓지 말라고 우리에게 충고하는 도덕군자나 법률학자들의 현명한 절제력은 본받을 만하다. 그들이 말한 것처럼, 어떤 논리라 할지라도 거기에서 치명적인 결론들을 끄집어내어 그 논리를 완전히 뒤집어엎는 일이 전혀 불가능하지는 않을 터이니 말이다. 민법상의 모든 정의는 위험하다. 왜냐하면 그것이 파기될 수 없다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기 때문이다(Omnis definitio in jure civili periculosa est: parum est enim ut non subverti possit). 조건의 평등. 소유자의 귀에는 끔찍스러운 도그마요, 죽어가는 가난한 이의 침상에서는 위안을 주는 진실이요, 해부학자의 메스 아래서는 소름끼치는 현실인 이 조건의 평등은 정치적, 시민적, 산업적 질서 안에서는 단지 사람을 우롱하는 불가능성이자 근사한 미끼요 악마의 거짓말에 불과하다.

독자들의 의표를 찌르는 것이 결코 나의 방침이 아니다. 말과 행동을 둘러대는 이들을 나는 주검만큼이나 혐오한다. 이 글의 첫 장에서부터 나는 나의 사상과 나의 바람이 무엇과 관련된 것인지를 누구나 알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 아주 간결하고 단호하게 적어 나갔다. 이보다 더 진솔하고 더 대담하게 쓰기는 어려우리라고 사람들은 인정해 줄 것이다. 따라서 철학자들의 경탄할 절제력과 도덕학 및 정치학 박사님들이 그토록 권장하는 중용이라는 것이, 사실 원리 없는 과학의 부끄러운 특성이자 변명의 낙인에 불과할 날도 멀지 않다고 확언한다고 해서 도가 지나치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기하학에서와 마찬가지로 법률과 도덕에서도 공리公理는 절대적이고, 정의定議는 확실한 것이며, 가장 극단적인 결론도 그것이 엄밀하게 연역된 것이기만 하면 법칙이 된다. 이 얼마나 가엾은 교만인가! 우리는 우리의 천성에 대해 아무것도 알지 못하고, 우리의 천성을 모순된 사변들로 가득 채우며, 순진한 무지 속에서 감히 다음과 같이 외친다. 〈진리는 의심 안에 있다. 최선의 정의는 아무것도 정의하지 않는 것이다.〉 법학의 이 유감천만한 불확실성이 법학의 대상 자체에서 오는 것인지 아니면 우리의 편견에서 오는 것인지를, 그리고 사회적 사실들을 설명하기 위해서는 마치 코페르니쿠스가 프톨레마이오스의 체계를 뒤집었듯이 우리의 가설을 바꾸는 것으로 충분한지 아닌지를 우리는 언젠가 알게 될 것이다.

그러나 만약 내가 지금 당장 이 법학 자체가 소유의 영역을 정당화하기 위해서 끊임없이 평등을 논하고 있다는 사실을 보여준다면, 사람들은 무엇이라고 말할 것인가? 사람들은 이에 대해 무엇이라고 답할 것인가?

제3절 소유의 근거이자 재가로서의 민법에 대하여

포티에(R. Pothier, 1699~1772, 프랑스의 법학자, 『점유권과 소유권에 대하여』를 썼다-옮긴이)는 소유권이 왕권과 마찬가지로 신의 권리에서 나온 것으로 믿는 듯하다. 그는 소유권의 기원을 신에게까지 소급한다. 〈제우스로 거슬러 올라가서(Ab Jove principium)〉라는 식이다. 그는 우선 다음과 같이 말한다.

〈신은 우주 및 우주 안의 만물에 대한 최고의 지배권을 가진다(Domini est terra et plenitudo ejus, orbis terrarum et universi qui habitant in eo). 신이 땅과 땅에서 사는 온갖 피조물들을 창조한 것은 인간을 위해서이며, 신은 자신에 종속하는 지배권을 인간에게 주셨다. ‘주의 손으로 만드신 것을 다스리게 하시고, 만물을 그 발 아래 두셨으니’라고 다윗은 말한다. 신은 자신이 만든 최초의 우리 조상들에게 다음과 같은 말씀을 은총으로 남기셨다. ‘생육하고 번성하며 땅에 충만하라.’〉

이 거창한 서설을 듣다 보면, 인류는 하나의 거대한 가족과도 같고 형제다운 결합 안에서 살며 존경할 만한 아버지의 보호 아래 있다고 누구인들 믿지 않겠는가? 그러나 신이여! 형제들은 서로 싸우지 않는가! 아비들은 자식을 저버리지 않는가! 자식들은 탕아가 아닌가!

〈신은 인간에게 땅을 하사하셨다〉-그런데 어찌해서 나는 아무것도 얻지 못했는가? 〈신은 자연을 내 발 아래 두셨다〉-그런데 나는 내 머리를 둘 장소도 없구나! 〈번성하라〉고, 신은 그의 통역자 포티에의 입을 빌어 우리에게 말씀하신다. 아! 현명한 포티에여, 그 일은 말처럼 그렇게 쉬운 일이다. 그러나 포티에여, 새에게 둥지를 지을 이끼를 주어야 할 것 아닌가.

〈인류가 번성함에 따라 인간들은 땅과 그 땅에서 나는 많은 것들을 서로 나누었다. 각자에게 돌아온 몫은 이때부터 배타적으로 각자에게 속하게 되었다. 이것이 소유권의 기원이다.〉

점유권이라고 말하는 것이 낫지 않은가. 사람들은 공동체 안에서 살았다(그 공동체가 적극적인 것이든 소극적인 것이든 그것은 중요치 않다). 그때는 사적 점유조차 없었으므로, 소유란 결코 있을 수 없었다. 인구의 증대는 생필품을 불리기 위해서 노동을 점차로 강화했으며, 사람들은 노동하는 자가 자기 노동의 산물의 유일한 소유자라는 것에 합의했다(이 합의가 공식적인 것이냐 암묵적인 것이냐는 중요하지 않다). 이것은 사람들이 앞으로는 노동하지 않고는 살 수 없다는 바로 그 사실에 대해 순전히 선언적인 합의를 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따라서 평등한 생필품을 얻기 위해서는 노동의 평등을 제공해야만 하고, 노동이 평등하기 위해서는 평등한 노동수단을 제공해야 한다는 것이 필연적이었다. 노동하지 않고 힘이나 책략으로 타인의 생필품을 침탈한 자는 누구든 평등을 파괴한 자이며 스스로를 법 위에 그리고 바깥에 둔 자였다. 더 많은 활동을 한다는 구실로 생산수단을 독점한 자는 누구나 마찬가지로 평등을 파괴한 자였다. 이렇게 평등이란 권리의 표현이었으므로, 평등을 침해한 자는 누구나 〈정의를 어긴〉 자였다.

이리하여, 노동과 더불어 사적 점유 즉 〈물物 안에서의 권리〉가 탄생했다. 그러나 어떤 물 안에서인가? 그것은 명백히 땅 안에서가 아니라 생산물 안에서였다. 옛날에 아랍인이 늘 이해했던 방식 그리고 카이사르Caesar나 타키투스(Tacitus, 로마의 역사가, 『게르마니아』를 남겼다-옮긴이)가 남긴 문헌에 따르자면 일찍이 게르만족이 이해했던 방식이 바로 그것이다. 시스몽디 씨는 말한다. 〈기른 가축에 대한 기른 이의 소유권을 인정하고 있던 아랍인은 하물며 밭에 씨를 뿌린 자와 수확물을 놓고 다투지 않았다. 오히려 그들은 왜 평등한 다른 인간이 마찬가지로 씨를 뿌릴 권리를 갖지 못하는지를 이해할 수 없었다. 이른바 선점자의 권리에서 나오는 불평등은 어떠한 정의의 원리에도 입각해 있지 않다고 그들은 보았다. 그런데 땅이 일정 수의 주민들 사이에 완전히 분할되면, 이 주민들만이 나머지 국민들에 맞서서 독점권을 갖게 된다. 아랍인들은 이러한 독점에 결코 순응하려 하지 않았다. …〉

도처에서 사람들은 땅을 분할했다. 물론 나는 그 결과 노동하는 자들 사이에 더욱 강고한 조직이 생겼으며, 확고하고 지속적인 이 분배수단이 더 많은 편익을 제공한다는 점을 인정한다. 그러나 이러한 분할이 어떻게 누구나 양도불가의 점유권을 가진 어떤 사물에 대한 이전 가능한 소유권을 각자에게 보장해 줄 수 있을 것인가? 법률적 용어로 표현하자면, 점유자에게서 소유자로의 이러한 변용은 법률적으로 불가능하다. 그것은 점유권 반환소송과 소유권 확인소송이 초심 재판의 심급審級에서 겹쳐지는 것을 의미하며, 나아가서 땅을 함께 나누고 있는 공동분할자들 사이의 아마도 상호적일 양도 행위가 자연권에 기반을 둔 동의라는 것을 의미한다. 확신하건대, 처음으로 법률을 만든 자들이기도 한 최초의 농민들은 지금의 법학자들만큼 학식을 갖추지 못했던 모양이다. 그들은 사적 점유권을 절대적 소유권으로 변형시키는 데서 오는 결과들을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 그들이 조금이라도 학식이 있었다면, 이처럼 큰 실수를 저지르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나중에 〈물 안에서의 권리〉와 〈물에 대한 권리〉 사이의 차이를 준별해 낼 이들이 왜 이 차이점을 소유권의 원리 자체에는 적용하지 않았는가?

여기서 법학자들에게 그들 자신의 금언을 환기시켜 보자.

소유권에 기원이 있다면, 그것은 단 한 가지일 뿐이다. 소유권은 오직 하나의 원인으로부터만 생겨날 수 있다(Dominium non potest nisi ex una causa contingere). 나는 여러 가지 자격으로 점유할 수 있다. 그러나 나는 단 한 가지 자격으로만 소유자가 될 수 있다. 그것이 여러 원인들에 의해 우리에게 주어질 수 있다고 해도 바로 그 여러 가지 원인들 때문에 그것이 우리의 것이 될 수는 없다(Non, ut ex pluribus causis idem nobis deberi potest, ita ex pluribus causis idem potest nostrum esse). 여기에 내가 개간했고, 경작하고 있으며, 그 위에 집을 지은, 나와 나의 가족과 가축을 먹여 살리는 땅이 있다고 하자. 나는 이 땅을 ① 최초의 선점자의 자격으로, ② 노동하는 자의 자격으로, ③ 나에게 그 땅을 할당해 준 사회계약의 덕으로 점유할 수 있다. 그러나 이 자격 요건들 중 어느 것도 나에게 소유권을 주지는 않는다. 만일 내가 중요한 것은 선점권이라고 우긴다면, 내 쪽이 당신보다 먼저 선점했다고 사회는 응수할 것이다. 만일 중요한 것은 내가 노동했다는 사실이라고 우긴다면, 그것은 단지 당신이 점유한다는 바로 그 조건에서일 뿐이라고 사회는 응수할 것이다. 만일 내가 중요한 것은 계약이라고 우긴다면, 그 계약은 엄밀히 말하자면 용익권자로서의 자격을 확립해 주었을 뿐이라고 사회는 응수할 것이다. 그럼에도 소유자들이 내세우는 것은 단지 이러한 자격들일 뿐이다. 그들은 결코 다른 자격들을 찾아내지 못했다. 물론 어떤 권리든 그 발생적 기원은 그 권리를 누리는 인간 안에 있다(포티에가 우리에게 가르쳐 준 바가 바로 이것이다). 그러나 태어나서 죽어가는 인간 안에, 그림자같이 스쳐 지나가는 이 대지의 자식들 안에는, 외부의 사물들에 관한 한 소유의 권리가 아니라 점유의 자격만이 존재할 뿐이다. 그렇다면 그 발생적 기원이 존재하지 않는 곳에서 어떻게 사회가 자기 자신에 맞서는 권리를 용납할 수 있었는가? 어떻게 사회는 점유를 부여하면서 소유의 양도에도 동의하였는가? 어떻게 법률은 이러한 권리의 남용을 재가하였는가?

독일인 안킬론(F. Ancillon, 1767~1837, 저술가, 정치철학자-옮긴이)은 이에 대해 다음과 같이 답한다.

〈몇몇 철학자들은 다음과 같이 주장한다. 즉 인간이 자연의 대상, 이를테면 밭, 나무 따위에 자신의 힘을 쏟음으로써 그가 얻게 되는 권리는 그 대상 자체에 대해서가 아니라 그가 거기에 가져다준 변화 및 그가 거기에 부여한 형태에 대해서일 뿐이라는 것이다. 공연한 구별이다! 만일 형태가 대상으로부터 분리될 수 있다면, 사람들은 그것을 인정할 것이다. 그러나 이는 거의 언제나 불가능하므로, 인간의 힘을 가시적인 세계의 여러 부분에 적용하는 것은 소유권의 첫 번째 기초이며 재산의 최초의 기원이다.〉

공연한 구실이다! 만일 형태가 대상에서 분리될 수 없고 소유가 점유에서 분리될 수 없다면, 점유는 분할되어야 한다. 즉 소유의 조건들을 부과할 권리는 어떤 경우에나 사회가 쥐고 있는 것이다. 차지한 영지가 1만 프랑의 총 수입을 낳고 이 영지가 분할될 수 없다고 가정하자(이는 정말 이상한 경우일 것이다). 그러고 나서 경제적인 계산에 따라 각 가정의 연평균 소비가 3,000프랑이라고 가정하자. 그러면 이 영지의 점유자는 가족의 부양에 필요한 3,000프랑과 운영비 일체를 제외하고도 1만 프랑에 맞먹는 보상을 사회에 지불하고서 그것을 이용해야만 훌륭한 가장으로서 처신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보수는 지대가 아니라 차라리 배상금이라 할 만하다.

그러면, 아래와 같은 법규를 제정한 이 정의正義란 과연 무엇인가?

〈노동에 의해 사물은 형태를 바꾸는 것이며, 따라서 형태와 질료는 대상이 파괴되지 않는 한 분리될 수 없는 것이라는 점을 고려하여, 사회가 상속권을 포기하든지 아니면 노동하는 자가 자신의 노동의 결실을 포기해야만 한다.〉

〈다른 모든 경우에는, 질료의 소유가 종물취득從物取得의 규정에 의해서 그 질료에 부가된 것들의 소유를 수반하지만(손실에 대한 배상을 공제하고), 이때에 원래의 물에 대한 소유를 수반하는 것은 종물에 대한 소유라는 점을 고려하여, 노동에 의한 전유권은 개개인에 맞서서는 결코 허용되지 않을 것이다. 그것은 사회에 맞서서만 허용될 것이다.〉

법률학자들이 소유에 대해서 추론하는 방식은 늘 이런 식이다. 법률은 인간들 사이의 권리를, 각인에 대한 각인의 권리와 모두에 대한 각인의 권리를 확고히 하기 위해 제정된다. 요컨대, 비례식이 항이 네 개 미만일 때도 성립한다는 듯이, 법률학자들은 마지막 항을 고려로 넣지 않는다. 인간이 인간에 대립하는 한, 소유는 소유에 대해 균형추가 되고 이 두 힘은 서로 평형을 이룬다. 인간이 고립되자마자, 법률학은 오류에 빠지고, 테미스(Themis, 법의 여신-옮긴이)는 저울판을 놓쳐버렸다.

렌의 교수님, 현명하신 툴리에의 말을 들어보자.

〈선점에 의해 취득되는 이 우선권이 어떻게해서 줄곧 존속할 수 있으며 또 최초의 선점자가 점유를 그만둔 이후에도 요구될 수 있는, 안정적이고 항구적인 소유로 될 수 있는가?〉

〈농업은 인류의 번식의 자연적인 결과였다. 그리고 역으로 농업은 인류의 번식을 촉진했으며 항구적인 소유권의 확립을 필요로 했다. 수확에 대한 확신이 없었다면, 누가 밭을 갈고 씨를 뿌리는 노고를 다했겠는가?〉

밭을 가는 이를 안심시키기 위해서는 그에게 수확에 대한 점유를 보장하는 것으로 충분했다. 스스로 경작하는 한, 토지에 대한 그의 선점권을 인정해 주었던 것이다. 이것이 그가 권리로서 바랄 수 있는 모든 것이었으며, 이것이 문명의 진보가 요구하는 모든 것이었다. 그러나, 소유! 소유! 선점하지도 경작하지도 않은 땅에 대한 횡령권, 그 누가 이 권리를 부여할 권위를 지녔단 말인가? 그 누가 이 권리를 요구할 수 있는가?

〈농업만으로는 항구적인 소유를 확립하기에 충분하지 않았다. 실정법이 필요했으며, 그 법을 집행하기 위해서는 사법관들이 필요했다. 요컨대 민법상의 상태état civil가 필요했다. 인류의 증가는 농업을 필요하게 만들었다. 농사짓는 이에게 자기 노동의 결실을 보장해 주자는 요구가 항구적인 소유권과 그것을 보호하는 법률들의 필요를 느끼게 했다. 따라서 민법상의 상태의 성립을 가져온 것은 바로 소유의 덕이다.〉

그렇다, 여러분이 만들어 놓은 바와 같은 우리의 민법적 상태의 성립, 전제정에서 군주정과 귀족정을 거쳐서 오늘날 민주정에 이른, 그러나 항상 압제적인 민법적 상태의 성립을 말이다.

〈소유의 끈이 없었다면 사람들을 법이라는 유익한 속박에 묶어두는 일이 불가능했을 것이다. 그리고 항구적인 소유가 없었다면 땅은 줄곧 광대한 삼림으로 남아 있었을 것이다. 따라서 명쾌한 저술가들의 뒤를 좇아 다음과 같이 말하자. 만일 일시적 소유, 즉 선점에 의한 우선권이 시민 사회의 성립에 앞서는 것이라면, 우리가 오늘날 알고 있는 바와 같은 항구적인 소유는 민법의 소산이라고. 일단 획득되고 나면 소유는 소유자의 행위에 의하지 않고는 결코 소멸하지 않는다는 점, 소유자가 사물에 대한 점유나 보유를 상실한 이후에도 소유는 보존된다는 점, 그리고 소유는 제3자의 수중에 들어갈 수 있다는 점을 격률로써 확립해 준 것이 바로 민법이다.〉

〈따라서 원시 상태에서는 뒤섞여 있었던 소유와 점유는 민법에 의해서 뚜렷하고 독자적인 두 가지 사실로 되었다. 이 두 가지 사실은 법률용어의 어법에 따르면 어떠한 공통점도 없다. 여기서 우리는 어떤 엄청난 변화가 소유에 일어났는가를, 그리고 시민들이 소유의 성격을 어떻게 변화시켰는가를 알 수 있다.〉

따라서 법률이란 소유권을 제정함에 있어서 결코 심리적 사실의 표현도, 자연 법칙의 전개도, 도덕 원리의 적용도 아니었다. 법률은 그 단어가 갖는 모든 효력에 있어서 그 권한들을 넘어선 어떤 권리를 창출했던 것이다. 법률은 하나의 추상, 은유, 허구를 실현했다. 그것도, 그로 인해 어떤 일이 일어날지 예견해 보지도 않고, 그에 따른 애로점들을 고민해 보지도 않은 채, 심지어 바람직한 일인가 아닌가를 따져보지도 않은 채 말이다. 법률은 이기주의를 재가했으며, 기괴한 주장들을 늘어놓았다. 법률은 마치 밑 빠진 독을 메우고 지옥을 채울 힘을 가지기나 한 듯이 불경한 희구들을 끌어 모았다. 맹목적인 법률, 무자비한 인간의 법률, 법률이 아닌 법률, 이것이 사회의 수호신인 양 줄곧 부활되고 복권되고 갱신되고 강화되면서 민중의 의식을 혼란케 하고 지배자들의 정신을 어지럽히고 국민들에게 온갖 재앙을 몰고 왔다. 그리스도교가 비난했던, 그러나 성서를 읽을 능력이 없었던 만큼이나 자연과 인간을 연구할 열의도 거의 없었던 무지한 성직자들이 신격화한 것이 바로 이러한 법률이다.

그런데 법률은 소유권을 창출하면서 어떤 지침을 따랐는가? 어떤 원리가 법률을 인도했는가? 법률의 기준은 무엇인가?

그것은 너무나 놀랍게도 평등이었다.

농업은 토지 점유의 토대이자 소유의 우연적 원인이었다. 이것은 농사짓는 이에게 생산수단을 동시에 보장해 주지 않는 한, 그에게 그의 노동의 결실을 결코 보장해 줄 수 없기 때문이다. 강자의 침탈로부터 약자를 보호하고 약탈과 사기를 제거하기 위해서 점유자들은 그들 사이에 항구적인 구획선과 넘을 수 없는 장벽을 쌓을 필요를 느꼈다. 해마다 인구는 늘어나고 경작자들의 탐욕 또한 더해갔다. 사람들은 야망이 넘지 못한 표석을 세움으로써 그것을 억제해야 한다고 믿었다. 이리하여 공공의 안전과 각자의 평온한 향유에 필요한 평등에 대한 요구에 의해서 땅을 차지하기 시작했다. 물론 할당된 몫이 결코 지리적으로 평등한 것은 아니었다. 절대적인 평등을 가로막는 많은 권리들이 있었다. 이들 권리란 한편으로는 상속, 증여, 교환 등(어떤 것들은 자연에 근거를 두고 있었으나 잘못 해석되고 심지어 잘못 적용되었다)이었고, 다른 한편으로는 출생과 지위의 특권들처럼 무지와 폭력에 따른 비합법적인 창안물들이었다. 그러나 원리는 어느 경우에나 항상 동일했다. 요컨대 평등이 점유를 재가했듯이, 또한 평등이 소유를 재가한 것이다.

농사짓는 이에게는 해마다 씨를 뿌릴 밭이 필요했다. 미개인들에게 있어서, 해마다 서로 다투고 싸우는 일을 되풀이하거나 이곳에서 저곳으로 끝없이 그들의 집과 가족과 기구를 실어 나르는 대신, 양도할 수 없는 일정한 세습재산을 각자에게 할당하는 것보다 더 편하고 더 간단한 방책이 있겠는가?

원정에서 돌아온 병사는 그가 조국에 바친 봉사 때문에 무일푼이 되는 일이 없어야 했으며 그의 유산을 되찾아야만 했다. 따라서 소유는 의향만으로(nudo animo) 보존되고 소유자의 동의와 행위에 의해서만 상실된다는 것이 관례로 되었다.

한 가족이 사멸했을 때 토지의 분배를 다시 하는 일이 없어야 했으며 할당의 평등은 세대가 바뀌어도 그대로 보존되어야만 했다. 따라서 자식들과 친척들이 망자亡者와 맺고 있는 혈족 및 인척 관계의 정도에 따라서 그들의 조상을 계승하는 것이 자연스럽고 정당하게 보였다. 여기에서 우선, 단 한 사람의 상속인만을 인정하는 봉건적이고 가부장적인 관습이 생겼고, 나중에는 평등의 원리를 이와는 정반대로 적용함으로써 자식들 모두에게 아버지의 재산 상속을 인정하게 되었으며, 더 나아가 우리 시대에 와서는 장자상속권이 결정적으로 폐지되었다.

그러나 본능에 따른 조직의 이 조야한 형태들과 참된 사회과학 사이에 어떤 공통점이 있다는 말인가? 통계, 토지대장, 정치 경제 등에 대해 조금도 식견이 없었던 사람들이 어떻게 우리에게 입법의 원리를 전수해줄 수 있다는 말인가?

현대의 어느 법학자는 말한다. 법률이란 사회적 필요의 표현이자 사실의 선언이며, 입법자는 법률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기술할 뿐이라고. 이러한 정의는 전혀 정확하지 않다. 법률이란 사회적 필요들을 충족하는 데 따라야 하는 준칙인 것이다. 인민이 법률을 표결하는 것도 입법자가 법률을 표명하는 것도 아니며, 학자가 법률을 발견하고 명문화할 뿐이다. 그러나 사실상 법률은 애초에는 〈필요의 표현〉이자 그 필요를 충족하는 수단들에 대한 지침일 수밖에 없었으며 지금까지도 그 외에 달리 아무것도 아니었다. 샤를 콩트(Ch. Comte, 1782~1837, 프랑스의 경제학자, 『소유론』의 저자-옮긴이) 씨가 자신의 책의 절반이나 할애해서 입증하고자 했던 바가 바로 이것이다. 법률학자들은 기계처럼 충직하고, 완고하고, 철학적 사고와는 거리가 멀고, 자구字句의 의미에 얽매인 나머지 선의는 있으나 통찰력이 부족한 사람들의 사려 깊지 못한 희구에 불과했던 것을 마치 과학의 결정판인 양 간주했다.

소유권의 옛 창시자였던 이 법률학자들은 세습재산을 보존하는 영속적이고 절대적인 권리, 두루 통용된다는 이유로 그들에게는 공평하게 보였던 이 권리가 그 재산을 양도하고 매각하고 증여하고 획득하고 상실할 권리르 초래한다는 사실을 예견하지 못했다. 또한 그들은 자신들이 그 권리를 통해 확립하고자 했던 목적이었던 평등 자체가 바로 그 권리에 의해 파괴될 수도 있다는 사실을 예견하지 못했다. 설령 이 사실을 예견할 수 있었다고 해도, 그들은 그것을 고려로 넣지 않았을 것이다. 목전의 필요가 우선이었으며, 따라서 그러한 경우에 흔히 일어나기 마련이듯이, 곤란한 점들이 우선은 너무 사소해 보여서 그냥 지나쳐 버렸던 것이다.

순진한 입법자였던 이 법률학자들은, 비록 소유란 의향만으로 보존되는 것이라 할지라도, 바로 그 소유가 세를 놓고 임대하고 이자를 빌려주고 거래를 통해 이익을 남기고 지대를 설정하고 농지에 세금을 매길 권리들처럼 의향으로 보존되더라도 그 실체는 다른 곳에서 점유되는 권리들을 수반한다는 것을 예견하지 못했다.

우리의 법률을 만든 족장들인 이 법률학자들은 만일 상속권이 할당의 평등을 보존하도록 자연적으로 주어진 방식과는 다른 그 어떤 것이라면, 가정들은 곧 가장 파국적인 배제의 희생물이 될 것이고 사회는 자신의 가장 신성한 원리들 중 하나에 의해 속속들이 침탈당해서 풍요와 빈곤 속에서 저절로 소멸될 것이라는 사실을 예견하지 못했다.[11]

이들 법학자는 또 이런저런 따위를 예견하지 못했다. 그러나 내가 이 점을 자꾸 들추어낼 필요가 있을까? 결과들은 저절로 드러날 것이며, 또 지금은 법전 전부를 통째로 비판할 때도 아니다.

고대 민족들의 소유의 역사는 우리에게는 이미 고증과 호기심의 대상 외에 아무것도 아니다. 사실이 권리를 낳지 않는다는 것은 법 해석의 준칙이며, 소유 역시 이러한 준칙을 피할 수 없다. 따라서 소유권의 보편적 인정이 소유권 자체를 정당화하지는 않는다. 인간은 유성의 기원과 천체의 운행에 대해 잘못 생각했듯이, 사회의 구성, 권리의 성격, 정의의 적용 등에 대해 잘못 생각했다. 인간의 해묵은 견해들을 신조로 받아들일 수는 없다. 인도인들이 네 개의 카스트로 나누어져 있다는 것, 나일 강과 갠지스 강 연안에서는 토지가 혈통과 직책의 존귀성에 비례해서 분배되었다는 것, 그리스인과 로마인은 소유를 신들의 가호 아래 두었으며 경계표지와 토지대장 작성이 그들에게는 종교적 의식들을 동반했다는 것, 이러한 사실들이 우리에게 무슨 중요성이 있는가? 특권의 형태들이 다양했다는 사실이 불의를 정당화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음탕한 비너스 신의 신비가 부부 사이의 정결에 반하는 어떤 것도 증명하지 않듯이, 소유의 신 주피터의 숭배가 시민들 사이의 평등에 반하는 어떤 것도 증명해 주지 않는다.

소유권을 증명하는 인간의 권위는 무효이다. 왜냐하면 소유권은 필연적으로 평등에 의존하는 만큼 그 자체의 원리와 모순되기 때문이다. 소유권을 재가해 준 종교의 동의는 무효이다. 왜냐하면 어느 시대에나 사제는 군주에게 봉사했으며, 신들은 항상 정치인들이 원하는 바대로 말해 왔기 때문이다. 흔히 소유의 덕으로 돌려지는 여러 사회적 이익들은 소유를 변호하기 위해 동원될 수 없다. 왜냐하면 그러한 이익들은 모두 점유의 평등이라는 원리에서 나오는 것이기 때문이다(사람들은 점유와 소유를 잘 구별해 내지 못했다).

그렇다면, 소유에 대한 아래와 같은 장광설의 진정한 의미는 무엇인가?

〈소유권의설정은 인간의 제도들 중 가장 중요한 것이다…〉[12]

그렇다, 군주제가 가장 영예로운 제도이듯이 말이다.

〈대지에서의 인간의 번영의 첫째 원인이요…〉

왜냐하면 사람들이 마치 정의를 소유의 원리인 양 생각하기 때문에.

〈…소유는 인간이 품은 야망의 정당한 목적, 그의 생존의 희망, 그의 가족의 안식처, 즉 한마디로 말하자면 가정과 도시와 정치적 공동체의 초석이 되었다.〉

점유만이 이 모든 것을 낳는다.

〈모든 사회 제도와 모든 시민적 제도의 영원한 원리이자…〉

그렇다, 소유란 영원하다. 일체의 부정否定이 그러하듯이. 자, 이것이 소유에 토대를 둔 모든 제도와 법이 사멸하게 될 이유이다.

〈자유만큼 값진 재산이고…〉

돈 많은 소유자에게는 말이다.

〈사실상, 거주할 수 있는 땅의 경작을 가져다주며…〉

경작하는 이가 소작인이 아니라고 해서 땅이 더 형편없이 경작되겠는가?

〈노동의 보장과 기품을 주며…〉

소유로 말미암아 노동은 하나의 조건이 아니라 하나의 특전이 된다.

〈정의의 적용이다…〉

재산의 평등이 없는 정의란 도대체 무엇인가? 거짓 분동分銅을 가진 저울이 아닌가.

〈모든 도덕과〉

굶주린 배는 하등 도덕을 모른다.

〈모든 공공질서는〉

그렇다, 소유의 보존은 말이다.

〈소유권에 의거한다.〉

존재하는 모든 것의 버팀목, 존재해야 하는 모든 것의 걸림돌, 이것이 바로 소유이다.

이제 요약해서 결론을 이끌어내자.

선점은 평등에 이를 뿐만 아니라 소유를 〈가로막는〉 것이다. 왜냐하면 인간은 누구나 자신이 존재한다는 사실만으로 선점권을 가지기 때문이며 살기 위해서는 경작하고 노동할 재료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또 다른 한편으로는 선점자의 수가 출생과 사망에 의해 계속 변하므로 일손이 요구하는 자재의 분량도 선점자의 수에 따라 달라진다. 따라서 선점은 항상 인구에 종속되는 것이며, 마찬가지로 점유란 법적으로 결코 고정될 수 없으며, 점유가 소유로 변모한다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하다.

따라서 선점자는 누구나 당연히 점유자 또는 용익권자가 되나, 소유권자로서의 자격은 가질 수 없다. 용익권자의 권리란 다음과 같은 것이다. 그는 자신에게 맡겨진 사물에 대한 책임이 있다. 그는 사물의 보존과 개발을 염두에 두면서 일반적인 용도에 따라서 그것을 이용해야만 한다. 그는 결코 사물을 변형시키거나 축소하거나 망가트릴 권리가 없다. 그는 자신이 결과물을 거두는 동안에 다른 이가 사물을 이용할 수 있도록 그 용익권을 나눌 권리가 없다. 한마디로 말하자면, 용익권자는 사회의 감시 아래 있으며 노동의 조건과 평등의 법칙에 종속되어 있는 것이다.

따라서 〈사용하고 남용할 권리〉라는, 소유에 대한 로마인의 정의는 무효화된다. 이러한 정의는 폭력이 낳은 배덕이며, 여태껏 민법이 재가한 것 가운데 가장 기괴한 주장이다. 인간은 자신의 용익권을 사회로부터 받는 것이며, 사회만이 항구적인 방식으로 점유권을 행사하는 것이다. 개인은 사라지지만 사회는 죽지 않는다.

이 너무나 당연한 진실을 토론하느라 나의 영혼은 얼마나 깊은 혐오에 사로잡히는가! 우리는 오늘날 이러한 진실들을 의심하는가? 이 진실들이 승리하도록 하기 위해서 또다시 싸워야 할 것인가? 이성으로 되지 않는다면 완력으로 이 진실들을 우리의 법률 속에 도입할 수 있는가?

〈선점권은 만인에게 평등하다.〉

〈선점의 척도는 의지意志에 있는 것이 아니라, 공간과 수의 가변적 조건들에 있다. 따라서 소유는 성립할 수 없다.〉

어떤 법전도 일찍이 표명한 적이 없는 것, 어떤 헌법도 일찍이 허용한 적이 없었던 것이 바로 이것이다! 민법이나 만민법이 모두 반대한 것이 바로 이러한 공리이다!

그러나 다른 체제를 내세우는 이들의 항의 또한 들린다. 〈노동! 소유를 구성하는 것은 노동이다.〉

독자여, 속지 말기를. 소유의 이 새로운 토대는 첫 번째 것보다 더 못한 것이다. 나는 이제 독자들의 양해를 구하면서, 사태를 한층 더 명쾌하게 펼쳐 보이고 나서 독자들이 여태껏 들어온 어떤 것보다 더 부당한 주장을 논박할 것이다.

제3장 소유권의 동인으로서의 노동에 대하여

현대 법률학자들은 너 나 할 것 없이 경제학자들이 말한 것을 근거로 원초적 선점의 이론은 너무 파괴적이라고 폐기하고 나서 소유는 노동에서 나온다는 이론에 전적으로 매달렸다. 우선, 이는 순환 논법에 의한 망상이었다. 쿠쟁 씨는 노동하기 위해서는 선점해야만 한다고 말했다. 따라서 나로서는 선점권은 모두에게 평등하므로 노동하기 위해서는 평등에 따라야만 한다고 말했다. 장-자크 루소는 외쳤다. 〈‘이 벽은 내가 지었다. 나는 이 땅을 나의 노동에 의해 얻었다’라고 부자들이 말하는 것은 허사이다. 우리는 이들에게 ‘누가 당신에게 벽을 지을 건축선建築線을 허가했소? 우리가 당신에게 억지로 시키지 않는 노동을 가지고 무슨 근거로 보상받기를 원한다는 말이요?’라고 반문할 수 있다.〉 이 추론 앞에서 모든 궤변들이 무너질 것이다.

그러나 노동설을 내세우는 이들은 자신들의 체계가 법전과 완전히 모순되며 법전의 모든 조항과 규정들은 원초적 선점이라는 행위에 근거한 소유를 상정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한다. 만일 노동만이 그 결과로 나타나는 전유專有에 의해서 소유를 낳는다고 하면, 민법전은 거짓말이고 헌장憲章은 허위이며 우리의 모든 사회제도는 권리의 침해일 것이다. 노동권에 대해서 뿐만 아니라 소유 행위 자체에 대해 우리가 이 장章과 다음 장에서 벌여야 할 토의에서 아주 명쾌하게 도출될 결론이 바로 이것이다. 앞으로 우리는 한편으로 우리의 입법이 자가당착이라는 것을, 그리고 다른 한편으로 새로운 법규는 그 자체의 원리나 현재의 입법과 어긋난다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이다.

나는, 소유권을 노동에서 찾는 학설이 소유권을 선점에서 찾는 학설과 마찬가지로 재산의 평등을 함축한다고 주장했다. 따라서 독자는 내가 어떻게 재산과 능력의 불평등에서 이 평등의 법칙을 도출해 낼 수 있을까 무척 궁금할 것이다. 곧 만족스러운 답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우선 소유의 원리로서 선점 대신 노동이 들어선 이 놀라운 과정에 대해 독자들의 관심을 환기시키고 나서, 소유자들이 상투적으로 내세우는 몇 가지 편견들 - 입법에 의해 재가되긴 했지만 노동을 내세우는 학설에 의해 완전히 뒤집혀진 편견들 - 을 검토해 보는 것이 좋을 듯하다.

독자여, 당신은 피고인에 대한 심문을 방청한 적이 있는가? 그의 술책, 농간, 핑계, 둘러대는 짓을 보았는가? 진술할 때마다 반격을 당하고 혼동에 빠지며, 인정사정없는 판사에 의해 들짐승처럼 내몰리고 온갖 가정假定으로 추궁을 당한 나머지, 그는 고집하고, 고쳐 말하고, 앞의 말을 뒤집고, 모순된 말을 늘어놓는다. 그는 삼단논법의 72가지 형식을 고안해 낸 사람보다 천 배나 더 미묘하고 정교한 변증술의 온갖 책략을 다 동원한다. 자기 권리를 정당화하려는 소유자들이 하는 짓이 바로 이런 식이다. 그는 처음에는 답변을 거부하고 항의하고 도전한다. 다음으로 그는 논쟁을 피할 수 없으면 궤변으로 무장하고, 무시무시한 포병대를 주위에 배치하고, 포화를 터트리면서 선점, 점유, 시효취득, 계약, 오랜 관례, 보편적 동의 따위를 차례로 그리고 동시에 내세운다. 여기서 지게 되면 소유자는 상처 입은 멧돼지처럼 방향을 바꾸고 격렬하게 부르짖는다. 나는 선점 이상의 것을 했다. 나는 노동했고, 생산했고, 개량하고 변형시켰으며, 〈창조했다〉. 이 집, 이 밭, 이 나무는 모두 내 손으로 만든 것이다. 가시덤불을 포도밭으로, 잡목을 무화과 숲으로 바꾼 것은 바로 나다. 기근의 땅에서 오늘날 수확을 거두는 것은 바로 나다. 나는 나의 땀방울로 이 땅을 기름지게 했으며, 나에게서 일당을 받지 못했으면 굶어 죽었을 이들에게 대가를 지불했다. 누구도 나만큼 노고와 비용을 들이지 않았으니 누구도 나와 나누어 가질 수 없다.

그대는 노동을 했다. 소유자여! 그런데 그대는 원초적 선점에 대해 무엇이라고 말했는가? 뭐라고! 그대는 그대의 권리에 대해 확신이 없었는가, 아니면 사람들을 속이고 정의를 우롱하길 원했는가? 어서 그대의 변론 수단을 내놓아라. 판결은 항소가 허용되지 않으며 변상을 해야 하는 문제라는 것을 그대는 알지 않는가.

그대는 노동을 했다! 그러나 그대가 어쩔 수 없이 노동을 하는 것과 그대가 공유물을 차지하는 것 사이에 무슨 관련이 있다는 말인가? 땅에 대한 권리는 공기나 빛에 대한 권리와 마찬가지로 시효취득에 의해 소멸될 수 없다는 것을 그대는 모르는가?

그대는 노동을 했다! 그러면 그대는 한 번도 다른 이들에게 노동을 시킨 적이 없는가? 그런데 그대가 이들을 위해 노동하지 않으면서도 얻어낼 수 있었던 것을 이들은 어찌해서 그대를 위해서 노동하면서도 잃어야 한다는 말인가?

그대는 노동을 했다! 아주 이른 때부터, 그러나 그대가 한 일을 보자. 우리는 수를 세고, 무게를 달고, 분량을 헤아릴 것이다. 이는 벨사살(Balthazar, 구약 「다니엘서」 5장에 나오는 바빌론의 마지막 왕자-옮긴이)에 대한 심판이리라. 왜냐하면 내가 이 저울, 이 수준기水準器, 이 잣대에 의해 맹세코 판단하건대, 만일 그대가 어떤 방식으로든 타인의 노동을 자기 것으로 삼았다면 그대는 마지막 카르테롱(quarteron, 4분의 1 파운드-옮긴이)까지도 반환해야 할 것이기 때문이다.

물론, 선점의 원리는 포기된 지 오래이다. 이제 더 이상 〈땅은 맨 먼저 차지한 사람의 것이다〉라고 말하지 않는다. 소유권은 처음의 참호 속으로 기어들어가서 자신의 오랜 금언을 저버린다. 정의는 부끄러움을 무릅쓰고 자신의 격언을 번복하고, 자신의 눈을 가렸던 덮개를 붉어진 뺨 위로 고통스럽게 끌어내린다. 그런데 사회 철학의 이러한 진보가 이루어진 것은 단지 어제의 일이다. 거짓말을 물리치는 데 50세기라니! 이 탄식의 나날 동안 얼마나 많은 강탈이 정당화되고 얼마나 많은 침략이 영예를 얻었으며 얼마나 많은 정복이 축성되었는가! 얼마나 많은 방심한 이들이 재산을 빼앗겼고 얼마나 많은 가난한 이들이 쫓겨났으며 얼마나 많은 굶주린 이들이 부로부터 배제되었는가! 얼마나 많은 반목과 전쟁! 국민들 사이의 방화와 살육! 마침내, 시간이 흐르고 이성이 계도된 덕분에 이제 토지는 결코 경쟁의 전리품이 될 수 없으며, 달리 장애 요인이 없는 한 태양 아래 모든 이들에게 각자의 몫이 돌아간다는 사실을 사람들은 인정한다. 각자는 자기의 산양을 울타리에 맬 수 있고, 암소를 풀밭에 끌고 갈 수 있으며, 땅의 한 모퉁이에 씨를 뿌릴 수 있고, 화덕에서 빵을 구울 수 있다.

천만에, 누구나 그렇게 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나는 도처에서 〈노동과 근면에 영광 있으라! 각자의 능력에 따라 각자의 몫을, 각자의 성취에 따라 각자의 능력을〉이라는 외침을 듣는다. 그런데 나는 인류의 대부분이 다시 무일푼이 되는 것을 본다. 마치 어떤 이들의 노동이 다른 이들의 노동 위에 우박처럼 내리 퍼붓듯이 말이다.

〈문제는 해결되었다〉고 엔느켕 씨는 외친다. 〈노동의 딸인 소유는 법률의 후견 아래에서만 현재와 미래를 향유한다. 소유의 기원은 자연권에서 나오며 그 권한은 민법에서 나온다. 실정법들은 〈노동〉과 〈보호〉라는 두 가지 이념의 결합에서부터 유래한다.…〉

아! 〈문제가 해결되었다니! 소유가 노동의 딸이라니!〉 그러면 종물취득권, 상속권, 증여권 따위는 단순한 선점에 의해서 소유자가 될 권리가 아니라면 도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성년成年, 친권, 후견, 금치산 등에 대한 당신네의 법률은 이미 노동하는 자가 선점권, 즉 소유를 취득하거나 상실하게 될 여러 조건들이 아니면 무엇이란 말인가?

여기서 법전에 대한 세세한 논의에 빠져들 수는 없으므로 나는 소유를 옹호하는 가장 통상적인 편견 세 가지를 검토하는 것으로 만족하려 한다. ① 〈전유appropriation〉, 즉 점유에 의한 소유의 형성, ② 〈사람들의 동의〉, ③ 〈시효취득〉. 그러고 나서 나는 노동이 일하는 자 개개인의 조건에 대해서 뿐만 아니라 소유 자체에 대해서 미치는 영향에 대해 살펴볼 것이다.

제1절 토지는 전유될 수 없다.

〈경작지는 인간이 창조한 것이 아니라 자연이 인간에게 무상으로 준 것이므로 천부적인 부의 하나로 간주되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이 부는 공기나 물처럼 옮겨 다니는 것이 아니고 밭처럼 고정되고 제한된 공간이기 때문에, 그리고 어떤 이들이 다른 모든 이들을 배제하고 이 부를 자기 것으로 할 수 있었으며 다른 이들이 이러한 전유 행위에 동의했기 때문에, 하늘이 준 무상의 재산이었던 토지는 사회적인 부가 되었고, 따라서 그것을 이용하려면 대가를 지불해야만 한다〉(세 H. Say, 『정치경제학』).

경제학자들은 법률과 철학에 관한 한 최악의 부류에 속하는 권위자들이라고 말한다면 잘못일까? 자연의 재산들, 즉 신이 창조한 부가 어떻게 사유재산이 될 수 있는가? 이 문제를 명확하게 제기한 이는 바로 이 학파의 비조이다. 그리고 그는 여기에 아주 모호한 답을 주고 있으며, 사람들은 그것이 저자의 무지에서 나온 것인지 악의에서 나온 것인지를 더 이상 알지 못할 정도이다. 내가 묻건대, 도대체 무엇이 토지의 비유동성을 전유의 권리와 관련시켰는가? 토지와 같이 〈제한적이고〉 〈옮겨 다닐 수 없는〉 사물이 물이나 빛보다는 더 쉽게 횡령의 손길에 노출된다는 사실을 나는 잘 알고 있다. 공기보다는 땅에 대해서 소유권을 행사하기가 더 쉬운 것이다. 그러나 문제는 더 쉬우냐 더 어려우냐가 아닌데, 세는 가능성을 권리로 간주하고 있는 것이다. 사람들은 왜 땅이 바다나 공기보다 더 많이 전유되었는가를 묻지 않는다. 사람들이 알고 싶어 하는 것은 어떤 권리에 의해서 인간이 〈스스로 창조하지도 않고 자연이 무상으로 준〉 이 부를 자기의 것으로 하였는가 하는 점이다.

따라서 세는 자신이 제기한 문제에 대해 전혀 답을 주지 못한다. 설령 그가 문제를 해결했다고 한들, 설령 그가 우리에게 준 설명이 논리가 궁색하기는 하지만 그럭저럭 만족스럽다고 한들, 누가 이 땅 - 인간이 전혀 만들지 않은 이 재산 - 에 대해서 사용료를 거둘 권리가 있는가라는 문제가 남는다. 토지의 차지료는 누구에게 돌아가야 하는가? 물론 토지를 만든 이에게다. 토지는 누가 만들었는가? 신이다. 그러면 소유자여, 뒤로 물러서라.

그러나 토지를 만든 이는 그것을 팔지 않고 그냥 주었으며 어떤 이의 승낙도 받지 않았다. 어떻게 조물주의 모든 자식들 가운데 누구는 장자로 누구는 서자로 취급당할 수 있겠는가? 원래는 할당된 몫이 공평했는데, 어떻게 나중에 조건이 불평등해졌는가? 세는 공기와 물도 〈옮겨 다닐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었다면 마찬가지로 횡령되었을 것이라고 추정하고 있다. 말이 난 김에 이러한 추정은 단순한 가설 이상의 것이며 하나의 현실이라는 점을 지적해 두자. 공기나 물은 자주 횡령 당했다. 물론 가능할 때마다가 아니라 허용될 때마다 그렇기는 했지만 말이다.

희망봉을 돌아 인도로 가는 길을 발견한 포르투갈인들은 그들만이 항로의 소유권을 가진다고 주장했다. 이 권리에 이의를 제기한 네덜란드인들이 이에 대해 자문을 구하자 그로티우스는 바다는 전유될 수 없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 특별히 『해양의 자유에 대하여De Mari libero』를 썼던 것이다.

수렵 및 어로권은 언제나 영주나 소유자들에게만 주어졌다. 오늘날 정부나 시市 당국은 허가료와 임대료를 무는 사람은 누구에게나 수렵권과 어로권을 허용하고 있다. 수렵과 어로를 규제하는 것은 더할 나위 없이 좋은 일이다. 그러나 경매로 그것을 나누는 것은 공기나 물에 대한 독점권을 설립하는 일이다.

여권이란 무엇인가? 여행자의 인격을 모두에게 소개하는 것이며 여행자와 여행자의 소지품에 대한 안전을 보장하는 것이다. 가장 좋은 물품이라도 변질시키고자 혈안이 된 세리稅吏들은 여권을 밀정 행위와 징세의 수단으로 삼았다. 이것은 여행하거나 돌아다닐 권리를 파는 일이 아닌가?

소유자의 허가 없이 그 토지에 있는 샘에서 물을 긷는 일은 금지되어 있다. 왜냐하면 종물취득권에 의해 샘물은 그것에 저촉하는 점유가 없는 한 그 땅의 소유자에게 속하기 때문이다. 또 세금을 내지 않고 소유자의 집에서 하루를 머무는 것도, 소유자의 동의를 얻지 않고 정원이나 뜰, 과수원을 쳐다보는 것도, 주인의 뜻을 어기고 뜰과 울타리 안을 거니는 것도 금지되어 있다. 그런데 누구나 자기 집에 틀어박혀 있는 것은 허용된다. 이러한 모든 금지는 토지에 대해서 뿐만이 아니라 물과 공기 따위에도 해당하는 온갖 종류의 신성시된 금기들이다. 프롤레타리아인 우리 모두는 소유로부터 파문 당한다. 땅과 물, 공기와 불로부터 우리들은 유배되었도다(Terra, et aqua, et acre, et igne interdicti sumus).

여러 요소들 가운데 가장 견고한 것을 자기의 것으로 하기 위해서는 다른 세 가지를 자기의 것으로 해야만 했다. 그러기에 프랑스의 법과 로마의 법은 지표의 소유는 지상과 지하의 소유를 포함한다(Cujus est solum, ejus est usque ad coelum)라고 명기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만일 물과 공기와 불의 사용에 대한 소유권을 배제한다면, 땅의 사용도 마찬가지여야 할 것이다. 이러한 논리적 연결을 샤를 콩트 씨는 『소유론Traité de la propriété』 (제 5장)에서 이미 예견한 듯이 보인다.

〈인간은 몇 분만이라도 대기를 빼앗기면 살 수 없을 것이고, 공기를 조금만 없애도 심한 고통을 느낄 것이다. 식량의 일부 또는 전부를 빼앗기면 그다지 즉각적이지는 않지만 결과는 마찬가지일 것이다. 어떤 기후 조건 아래에서는 몇몇 옷가지나 은신처를 빼앗겨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자기 몸을 보존하기 위해서 인간은 항상 온갖 종류의 사물들을 자기 몫으로 할 필요가 있다. 그러나 이러한 사물들이 같은 비율로 존재하지는 않는다. 어떤 것들은, 가령 별빛, 대기, 바닷물과 같이 엄청난 분량으로 존재하는 것들은 사람들이 그 증감을 전혀 의식하지 못한다. 누구나 타인의 향유를 해치거나 조금이라도 해를 끼치지 않는다면, 요구하는 대로 필요한 만큼 자기 것으로 할 수 있다. 이러한 유형에 속하는 사물들은 말하자면 인류의 공동 재산이다. 이 점에서 각자에게 요구되는 유일한 의무는 타인의 향유를 조금도 방해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샤를 콩트 씨가 열거한 목록을 완성해 보자. 큰길을 거닐고, 들판에 멈추어 서고, 동굴로 몸을 피하고, 불을 지피고, 야생 잡풀을 모으고, 목초를 따고, 구운 흙 안에서 목초를 끓이는 일이 금지된다면, 인간은 살 수 없을 것이다. 이렇게 토지는 물과 공기와 빛과 함께 타인의 향유를 해치지 않는 한 누구나 자유롭게 사용해야 하는 첫 번째 필수품이다. 그런데 토지는 왜 횡령되었는가? 콩트 씨의 대답은 기묘하다. 세는 토지가 〈옮겨 다닐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라고 주장한 데 비해서, 콩트 씨는 토지가 〈무진장〉이 아니기 때문이라고 확언한다. 콩트 씨에 따르면, 토지는 유한하다. 그러므로 토지는 전유될 수밖에 없다. 그는 아마도 정반대로 말해야만 했을 것이다. 즉, 그러므로 토지는 전유되어서는 안 된다고 말이다. 사람들이 상당한 분량의 공기나 빛을 자기의 것으로 한다고 해도 항상 충분히 남아 있기 때문에 누구에게도 손해를 끼치지 않는다. 그러나 땅의 경우 문제는 다르다. 원하는 사람이나 능력이 있는 사람은 누구나 태양광선, 스치는 산들바람, 바다의 파도를 차지할 수 있다. 나는 그것을 허용하며 그의 못된 의도가 있더라도 용서한다. 그러나 살아 있는 인간이 땅에 대한 점유권을 소유권으로 바꾸려 한다면, 나는 그에게 전쟁을 선포하고 끝까지 싸울 것이다.

샤를 콩트 씨의 추론은 자신의 논지와도 어긋나는 것이다. 그는 말한다. 〈우리의 생명을 보존하기 위해 필요한 사물들 중에는 무진장 존재하며 고갈되지 않는 것들이 있다. 다른 것들은 소량만 존재하며 일정 수의 사람들의 필요만을 충족시킬 뿐이다. 전자는 ‘공동의 것’ 후자는 ‘개인의 것’이라 불린다.〉

이것은 결코 정확한 추론이 아니다. 물, 공기, 빛은 〈무진장〉이기 때문이 아니라 〈필수불가결〉하기 때문에 〈공동의〉 사물인 것이며, 그렇기 때문에 자연은 이것들을 거의 무한정으로 창조해서 온갖 횡령으로부터 지켜냈던 것이다. 마찬가지로 토지는 우리 생명의 보존에 필수불가결한 사물이며, 따라서 공통의 사물이고, 따라서 전유될 수 없는 것이다. 토지는 다른 요소들보다 훨씬 그 양이 적으므로, 토지의 이용은 특정인의 이익을 위해서가 아니라 모두의 이익과 안전을 위해서 규제되어야 한다. 달리 말하자면, 권리의 평등은 욕구의 평등에 의해 정당성을 갖는다. 그런데 만약 사물이 유한하다면, 권리의 평등은 점유의 평등에 의해 실현될 수밖에 없다. 콩트 씨의 논지의 근저에 있는 것은 바로 농지법 류의 사고방식이다. 이 소유권의 문제를 어떤 측면에서 고찰하든 깊이 파고들기만 하면 곧 평등에 이르게 된다. 나는 전유될 수 있는 사물과 전유될 수 없는 사물 사이의 구별에 대해서 더 이상 재론하지 않겠다. 이 문제에 대해서 경제학자들과 법률학자들은 서로 누가 더 멍청한가를 겨루고 있다. 민법전은 소유에 대한 정의를 내린 후, 전유 가능한 사물들과 그렇지 않은 사물들에 대해서는 침묵을 지키고 있으며, 〈상거래의 대상이 되는〉 물건들에 대해 말할 때에도 어떤 규정이나 정의를 부여하지 않는다. 그러나 밝힌 것이 전혀 없지는 않다. 다음과 같은 변변찮은 격률이 있다. 왕은 모든 권리와 관계하며, 개개인은 특수한 일과 관계한다. 모든 권능은 왕에게 속하고 소유권은 개인들에게 속한다. 왕은 모든 지배권을 가지며 개개인들은 소유권을 가진다(Ad reges potestas omnium pertinet, ad singulos proprietas. Omnia rex imperio possidet, singula domino). 개인적 소유와 대립하는 사회적 종주권! 이것은 평등의 예언, 공화제의 신탁神託을 말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사례는 아주 많이 나타났다. 옛날에 교회의 재산, 왕의 영지, 귀족의 봉토는 양도 불가능했으며 시효취득에 의해 소멸되지 않았다. 제헌의회Constituante가 이 특권을 제거해 버릴 것이 아니라 시민 모두에게 확대했다면, 제헌의회가 자유와 마찬가지로 노동권도 결코 상실할 수 없는 것이라고 선언했다면, 바로 그때부터 혁명은 성취되었을 것이고 우리는 그것을 마무리만 하면 되었을 것이다.

제2절 보편적 동의는 소유를 정당화하지 않는다.

앞에서 인용한 세의 문장에는 저자가 소유권을 땅의 비유동성에서 찾고 있는지 아니면 모든 사람이 이 전유에 동의했다는 사실에서 찾고 있는지가 명확하지 않다. 문장의 구성을 보면 그 두 가지 중 어느 하나일 수도 있고 두 가지 다일 수도 있을 듯하다. 따라서 우리는 저자가 말하려는 것을 다음과 같이 정리할 수 있을 것이다. 즉, 소유권은 원천적으로 의지의 발현에서 나오는 것이고, 땅의 비유동성으로 인해 소유권이 토지에 적용되었으며, 그러고 나서 보편적 동의에 의해서 이러한 적용이 재가되었다고.

어떻든 간에 사람들은 그들 상호간의 동의에 의해서 소유를 정당화할 수 있었는가? 나는 그렇지 않다고 생각한다. 그러한 계약은 설령 그로티우스, 몽테스키외, 루소 등에 의해 작성되었다고 할지라도, 그리고 전 인류의 날인을 받았다고 할지라도, 아무런 법적 효력이 없으며 거기에 명기된 규약은 모두 정당성이 없는 것이다. 인간은 이제 자유와 마찬가지로 노동도 포기할 수 없다. 그런데 토지의 소유권을 인정하는 것은 노동을 포기하는 것이다. 그것은 노동의 수단을 버리는 일이고 자연권에 관해 양보하고 인간의 품성을 박탈하는 일이니 말이다.

그러나 나는 사람들이 내세우는 이 동의가 암묵적인 것이든 공식적인 것이든 존재했기를 바란다. 그 결과는 무엇이겠는가? 포기가 상호적이었다는 것은 명백하다. 사람들은 그 대가로 동등한 것을 얻지 않으면 권리를 포기하지 않는다. 따라서 우리는 모든 전유의 필수조건인 평등에 다시 봉착하게 된다. 요컨대 사람들은 보편적 동의 즉 평등에 의해 소유권을 정당화한 후에, 소유권에 의해 조건들의 불평등을 정당화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이 순환논법에서 결코 벗어날 수 없으리라. 사실상 사회 계약을 맺을 때 소유가 평등을 조건으로 한다면, 이 평등이 더 이상 존재할 수 없을 때 계약은 파기되고 모든 소유는 강탈에 불과할 것이다. 따라서 이른바 모든 사람의 동의라는 것에서 얻을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제3절 시효취득은 결코 소유를 낳을 수 없다.

소유권은 지상에 존재하는 악의 시초이며 인류가 탄생 이후 질질 끌고 다니는 범죄와 비참이라는 이 긴 쇠사슬의 첫 고리이다. 시효취득이라고 하는 거짓말은 정신에 던져진 불길한 주술이며, 진리를 향한 인간의 진보를 저해하고 오류의 숭배를 조장하기 위해 양심에 불어넣은 죽음의 말이다.

법전은 시효취득을 〈시간의 경과에 의해 획득되고 또 면제되는 수단〉이라고 정의한다. 이 정의를 관념 및 신념에 적용함으로써 우리는 〈시효취득〉이라는 말을 그 대상이 무엇이건 낡은 미신들에 결부된 부단한 편애 - 어느 시대에나 새로운 빛을 받아들이고 현자를 순교자로 만드는 이 격렬하고 피를 부르는 대립을 낳는 바로 그 편애 - 를 표현하는 데 사용할 수 있다. 세상에 나타나자마자 온갖 낡은 편견들이 공모한 듯한 기성 의견들의 거대한 장벽에 부딪히지 않은 원리, 발견, 고결한 사상은 하나도 없다. 이성에 어긋나는 시효취득, 사실에 어긋나는 시효취득, 지금까지 밝혀지지 않은 진리 전체에 어긋나는 시효취득, 현상유지 철학의 개요화 모든 세계의 보수론자들이 상정한 것이 바로 이것이다.

개신교가 세상에 나타났을 때, 폭력과 방탕과 이기심을 옹호하기 위해 시효취득이 존재했다. 갈릴레이, 데카르트, 파스칼과 그 사도들이 철학과 과학들을 혁신했을 때,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을 옹호하기 위해 시효취득이 존재했다. 89년(1789년의 프랑스 대혁명-옮긴이) 우리의 조상들이 자유와 평등을 요구했을 때, 압제와 특권을 옹호하기 위해 시효취득이 존재했다. 〈소유자는 항상 존재해 왔고 또 항상 존재할 것이다.〉 사회적 불평등을 편드는 박사님들은 궁지에 빠진 이기심의 최후의 발현인 이 심원한 격언에 의탁해서 반대파들의 공세를 막을 수 있을 것으로 생각하며, 관념들도 재산처럼 시효취득을 가진다고 믿어 의심치 않는다.

오늘날 우리는 과학의 진보에 의해 계도되고, 과학의 가장 빛나는 성공에 이끌려 우리 자신의 견해를 돌이켜본다. 우리는, 수많은 실험을 거치면서 가장 심원한 분석의 도움을 받아 지금까지 알려지지 않은 새로운 원리와 법칙들을 찾아내는 자연의 관찰자들을 열정과 갈채로 맞이한다. 우리는 우리보다 유능한 이들이 아주 옛날에 살았다는 이유로, 그리고 그들이 같은 현상을 알아차리지도 같은 유추를 이해하지도 못했다는 구실로, 어떤 사실이나 관념을 거부하는 일이 없도록 스스로 조심한다. 그런데 정치와 철학에서는 왜 마찬가지의 조심성을 보여주지 않는가? 모든 것이 다 말해졌다고, 즉 지성과 도덕의 사안에서는 모든 것이 다 밝혀졌다고 확언하려는 이 우스꽝스러운 집착은 어디에서 나오는가? 〈태양 아래 새로운 것은 없다〉라는 잠언은 왜 형이상학의 연구에만 적용되는가?

우리는 여전히 관찰과 체계적인 방법을 통해서 철학을 하는 것이 아니라 상상력을 가지고 철학을 하고 있다고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추론과 사실 대신에 어디에서나 공상과 자의를 심판자로 삼았기 때문에, 오늘날까지도 사기꾼과 철학자를, 현자와 협잡꾼을 구별할 수 없는 것이다. 솔로몬에서 피타고라스에 이르기까지 사회적 법칙이나 심리적 법칙을 파악하는 데 상상력이 너무나 많이 동원되었다. 온갖 체계가 다 제시되었다. 이 점에서 보면 〈모든 것이 다 말해졌다〉라는 말이 가능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모든 것이 아직도 밝혀지지 않고 있다〉라는 말 역시 진실이다. 정치(여기서 철학의 한 분야인 정치에 대해서만 예를 들어보자)의 경우, 사람들은 누구나 자신의 열정과 이해관계에 따라 관여하며 정신은 의지가 요구하는 대로 따른다. 아무런 과학도 없으며, 아무런 확실성의 단초도 없다. 이리하여 전면적인 무지는 전면적인 압제를 낳는다. 그리고 사상의 자유가 헌장에 명기되어 있지만, 사상의 예종이 〈다수자의 우월성〉이라는 이름 아래 헌장에 의해 선포된다.

법전이 말하는 민사상의 시효취득에만 한정하기 위하여, 나는 소유자들이 내세우는 이 비공소권非公訴權의 사유에 대한 논의는 건드리지 않을 것이다. 이는 너무나도 지루하고 허식적인 일이다. 시효취득에 의해 소멸될 수 없는 권리가 있다는 것은 누구나 알고 있다. 그리고 시간의 경과에 의해 취득할 수 있는 사물들에 관한 한 시효취득은 그중 하나만이라도 빠질 경우 시효취득 자체가 무효화되는 일정한 조건들을 요구한다는 사실을 모르는 사람은 없다. 예컨대, 소유자의 점유가 〈민사에 관한〉 것이고, 〈공적이며〉, 〈이의제기〉도 〈중단〉도 없었다는 것이 사실일지라도, 그 점유가 〈정당한 자격〉을 결여하고 있다는 것 역시 사실이다. 왜냐하면 점유가 내세우는 유일한 자격인 선점과 노동은 피고인 소유자에게와 마찬가지로 원고인 무산자에게도 증거 능력을 갖기 때문이다. 게다가 바로 이 점유는 법률상의 오류에 토대를 두고 있으며 또 법률의 오류는 시효취득을 방해하기 때문에, 〈선의bonne foi〉를 상실한다[파울루스(Paulus, 로마의 법학자, 유스티니아누스 법전 편안에 참여-옮긴이)의 격언에 따르면, 법적 용익권에 관한 한, 법률상의 오류는 결코 소유자에 이득이 되지 않는다(Nunquam in usucapionibus juris error possessori prodest)]. 이 경우 법률상의 오류는 보유자가 용익권자의 자격으로 점유할 뿐인데도 소유자의 자격으로 점유하거나, 그 누구도 양도하거나 매각할 권리가 없는 물건을 보유자가 구입할 경우에 성립한다.

시효취득이 소유를 옹호하기 위해 원용될 수 없는 또 다른 이유(가장 정교한 법리학에서 끌어낸 이유)는 부동산의 점유권이 인류의 가장 처참했던 시기에도 결코 완전히 소멸되지 않은 보편적 권리의 일부를 이룬다는 사실, 그리고 무산자로서는 그들이 전체의 일원으로 받아들여지기 위해서는 자신들이 항상 이 권리의 일부를 행사해 왔다는 것을 증명하기만 하면 된다는 사실에서 찾을 수 있다. 예컨대, 어떤 물건을 점유하고, 증여하고, 교환하고, 빌려주고, 임대하고, 매각하고, 변형하거나 파손할 보편적 권리를 지닌 이는 비록 그가 이 모든 방식으로 자신의 권리를 표현하지 않았다고 할지라도 빌려준다는 단 한 가지 행위만으로도 이 권리 전체를 보유하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우리는, 〈재산의 평등〉, 〈권리의 평등〉, 〈자유〉, 〈의지〉, 법인격 등은 한 가지 동일한 사물, 즉 〈보존과 발전의 권리〉의 여러 가지 표현에 불과하다는 점을 알고 있다. 달리 말하면 이는 곧 생존권인 것이며, 이 삶의 권리에 맞서서 시효취득은 당사자가 죽은 이후에만 개시될 수 있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시효취득에 필요한 시간에 대해 말하자면, 소유권 일반은 10년, 20년, 100년, 1000년, 10만년에 걸친 점유로도 취득될 수 없으며, 소유권을 이해하고 거기에 이의를 제기하는 사람이 단 한 명이라도 남아 있다면 이 권리는 결코 시효취득에 의해서 취득될 수 없으리라는 사실을 굳이 지적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법률의 원리나 이성의 격률이 아니라 우연적이고 우발적인 사실과도 같은 것이기 때문이다. 한 사람의 점유는 다른 사람의 점유에 맞서서 시효취득을 주장할 수 있다. 그러나 점유자가 자기 자신에 맞서서 시효취득을 주장할 수는 없듯이, 이성은 항상 스스로를 정정하고 고칠 능력이 있으며 과거의 잘못이 미래까지를 구속하지는 않는 것이다. 이성은 영원하고 항상 동일하다. 그러나 무지한 이성의 소산인 소유제도는 더 잘 계명된 이성에 의해 폐기될 수 있으며, 따라서 소유는 시효취득에 의해서 확립될 수 없다. 이 모든 것은 아주 확실하고 또 진실이기 때문에, 시효취득의 문제에 관한 한 법 해석의 오류는 이득이 되지 않는다는 금언은 바로 이러한 토대에 근거한 것이다.

그러나 내가 시효취득에 대해서 이 이상 더 말하지 않는다면, 나는 나의 방법에 충실하지 못한 셈이며 독자는 나의 협잡꾼 기질과 거짓말을 비난할 권리가 있을 것이다. 나는 앞에서 토지의 전유專有는 불법이며, 그렇지 않다고 가정하면 그 결과는 단 하나 즉 소유의 평등이 될 것이라고 논증했다. 그러고 나서 나는 보편적 동의가 소유를 지지하는 어떤 것도 입증하지 못하며, 설사 무엇인가 입증한다면 그것은 마찬가지로 소유의 평등이리라는 것을 보여주었다. 이제 나에게는 만일 시효취득이 인정될 수 있다면 그것은 역시 소유의 평등을 전제로 한다는 사실을 논증하는 일이 남아 있다.

이러한 논증은 길지도 어렵지도 않다. 시효취득을 받아들이는 동기를 상상해 보는 것만으로 충분하다.

뒤노드(Dunod, 1678~1752, 프랑스의 법률가, 역사가. 『시효론』을 썼다-옮긴이)는 말한다. 〈시효취득은, 자신의 뜻에 반하여 또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부를 빼앗기거나 다른 사람에게 손해를 끼치면서 부를 모으는 일을 금지하고자 하는 자연의 형평성에 어긋나는 것처럼 보일 수 있다. 그러나 만약 시효취득이 없다면 선의의 재산 취득자가 오랫동안 점유한 다음에도 그것을 빼앗기는 일이 자주 일어날 것이다. 또 정당한 소유자로부터 무엇이든 취득한 자나 또는 합법적인 방법으로 채무에서 해방된 자도 자신의 자격을 잃고 다시 재산을 빼앗기거나 종속될 수밖에 없을 것이다. 따라서 일정한 기간을 정해서, 그 기간이 지난 후에는 점유자들을 불안하게 한다거나 아주 오랫동안 방기해 온 권리 등등을 다시 찾는 일은 공공의 이익을 위해 허용하지 않게 된 것이다. 이리하여, 민법은 그것이 시효취득을 규정하는 방식에 따라서 자연권을 완성하고 만민법을 보충할 따름이다. 시효취득이란 개개인의 권리에 반드시 우선하는 공공의 이익에 토대를 둔 것이므로(bono publico usucapio introducta est), 법률이 요구하는 조건들을 갖추고 있는 한 호의적으로 취급되어야만 한다.〉

툴리에는 『민법론Droit civil』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소유의 문제를 너무 오랫동안 불확실한 상태로 방치해 둔다면 가정의 평화와 상거래의 안전을 해칠 것이기 때문에, 법률은 일정한 기간을 설정하고, 그것이 지나면 소유권 회복의 청구를 받아들이기를 거부하고 점유를 소유에 합치시킴으로써 점유의 오랜 특전을 유지하게 해주었다.〉

카시오도루스(F. M. A. Cassiodorus, 480~575, 로마 말기의 작가. 법률학자-옮긴이)는 이렇게 말했다. 〈소유란 궤변의 폭풍우와 탐욕의 분화구의 한가운데에 확고하게 남아 있는 유일한 항구이다(Hic unus inter humanas procellas portus, quem si homines fervida voluntate praeterierint; in undosis semper jurgils errabunt)〉.

이렇게, 이 저자들에 따르면 시효취득은 공공질서의 한 수단이고, 어떤 경우에는 원초적인 취득 방법의 회복이며, 달리 해결 방안이 없는 분규들을 종결해야할 필요성에서 그 존재 근거를 찾을 수 있는, 민법상의 허구이다. 왜냐하면 그로티우스가 말한 것처럼, 시간은 그 자체로는 아무런 유효한 효과도 갖지 못하기 때문이다. 민사는 시간 안에서 이루어지나, 어떤 것도 시간에 의해서 이루어지지 않는다. 시효취득, 즉 시간의 경과에 의해 무엇인가 취득할 권리란, 따라서 관례적으로 수용되는 법률의 허구이다.

그러나 모든 소유가 다 필연적으로 시효취득으로부터, 달리 말해서 라틴인들이 말하는 〈유스카피온usucapion〉, 즉 지속적인 점유로부터 시작되는 것은 아니다. 따라서 나는 우선 다음과 같이 묻는다. 어떻게 점유가 시간의 경과에 의해 소유로 될 수 있는가? 당신이 원하는 만큼 오랫동안 점유를 지속하라. 몇 해든 몇 세기든 쌓아가라. 그러나 당신은 결코 시간 지속에 의해 용익권자를 소유자로 변형시킬 수는 없다. 시간 지속은 그 자체로는 아무것도 창출하지도, 바꾸지도, 변형시키지도 못한다. 오랫동안 자기 권리를 누려온 선의의 점유자는 갑자기 나타난 불청객에게 모든 것을 박탈당하지 않을 권리를 민법에서 인정받고 있다. 이렇게 함으로써 민법은 이미 준수되고 있는 권리를 확인하는 것일 뿐이며, 이런 식으로 적용된 시효취득은 단순히 20년, 30년, 또는 100년 전에 시작도니 점유가 선점자에게 유지된다는 것을 의미할 뿐이다. 그러나 시간의 경과가 점유자를 소유자로 바꾼다고 법률이 선언한다면, 이는 권리가 그것을 낳은 원인이 없이 창출될 수 있다고 가정하는 것이다. 즉 법률은 아무런 동기도 없이 주체의 자격을 바꾸고, 논쟁점이 아닌 문제에 대해 규정을 내리고, 자신의 권한의 범위를 넘어서게 되는 것이다. 공공질서와 시민의 안전은 점유물의 보장만을 요구할 뿐이다. 그런데 법률은 왜 소유권을 창출했는가? 시효취득이란 미래에 대한 보험과 같은 것이다. 그런데 법률은 왜 시효취득을 특권의 원리로 만들었는가?

이렇게 하여, 시효취득의 기원은 소유 자체의 기원과 동일하다. 그리고 소유가 평등의 공식적인 조건 아래에서만 정당화될 수 있었듯이, 시효취득 역시 이 귀중한 평등을 보존해야 할 필요가 취한 수많은 형식들 중의 하나이다. 이것은 결코 헛된 유추이거나 맹목적으로 취한 결론이 아니다. 그 증거는 모든 법전에 명기되어 있다.

그런데 모든 국민들이 정의와 보존의 본능에 의해서 시효취득의 유용성과 필요성을 인정했다면, 그리고 그렇게 함으로써 그들의 의도가 점유자의 이익을 지켜주고자 하는 것이었다면, 그들은, 통상이나 전쟁에 의해 또는 포로 신세라서 가족이나 조국으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어 어떤 점유 행위도 행사할 수 없게 된 부재不在 시민에 대해서 아무것도 할 수 없었는가? 그렇지 않다. 시효취득이 법률에 도입된 바로 그 시기에 사람들은 소유가 의향만으로(undo animo) 보존된다고 인정했다. 그런데, 만일 시효취득이 의향만으로도 보존되고 소유자의 행위에 의해서만 상실되는 것이라면, 시효취득의 유용성은 도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어떻게 법률은, 의향만으로 무엇인가 보존하고 있는 소유자가 자신이 시효취득을 적용하도록 허용한 것을 포기할 의사를 가졌다고 추정하는 것인가? 얼마의 시간적 경과가 이러한 억측을 허용할 수 있다는 말인가? 어떤 권리로 법률은 소유자의 재산을 박탈함으로써 그의 부재를 벌할 수 있다는 말인가? 그렇다면 무엇인가! 우리는 조금 전에 시효취득과 소유는 동일하다는 것을 발견했는데, 이제 보니 그것들은 서로 상대방을 파괴하고 있지 않은가.

이러한 난점을 느낀 그로티우스는 아주 독특한 방식으로 여기에 답을 하고 있는데, 이는 인용해 볼 가치가 있다. 〈하찮은 일로 점유자의 죄를 영구화하려는, 전혀 그리스도교인답지 않은 영혼을 지닌 자가 어디에 있겠는가? 그러나 이는 점유자가 자신의 권리를 포기하지 않는 한, 틀림없이 일어날 일이다(Bene sperandum de homonibbus, ac propterea non putandum eos hoc esse animo ut, rei caducae causa, hominem alterum velint in perpetuo peccato versari, quod evitari soepe non poterit sine tali derelictione).〉 오, 하느님! 내가 바로 그 자이다. 설령 100만 명의 소유자들이 심판대에서 타 죽는다고 할지라도, 나는 그들이 이 세상의 부 가운데 내게서 빼앗아 간 몫에 대해 그들의 양심을 고발한다. 그로티우스는 이 유력한 사유事由에 다른 하나를 덧붙인다. 그것은 소송을 걸어서 국민들의 평화를 교란시키고 내전의 불을 지피는 것보다는 논란이 되는 권리를 포기하는 것이 더 안전하다는 생각이다. 보상을 해주기만 한다면, 나는 이러한 논리를 받아들이겠다. 그러나 이러한 보상이 주어지지 않는다면, 부자들의 휴식과 안전 따위가 무산자인 나에게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나는 〈공공질서〉를 소유자의 안전과 마찬가지로 별로 개의치 않는다. 나는 노동하면서 살고자 하나, 그렇지 못할 경우, 싸우면서 죽을 것이다.

그 이론이 아무리 섬세하다 할지라도, 시효취득은 소유와 모순된다. 아니 차라리 시효취득과 소유는 하나의 원리에서 나온 두 가지 형태, 그러나 서로 상대방을 정정하는 두 가지 형태이다. 이 두 가지를 화해시켰다고 자부한 것은 고대와 현대 법률학의 가장 큰 오류 중 하나이다. 사실 우리가 소유에서 각자에게 토지의 몫과 노동의 권리를 보장하려는 소망만을 보고, 허유(虛有, nue-propriété)와 점유의 구별에서 부재자나 고아들 및 자기의 권리도 알지도 지키지도 못하는 모든 이들에게 열려 있는 안식처만을 본다면, 시효취득이라는 것에서는 부당한 요구나 침해를 물리치거나 점유자의 이주에 의해 초래된 분규를 끝내는 수단만을 보게 된다. 그러나 설사 그렇다고 할지라도, 인류의 정의의 이 다양한 형태 속에서 우리는 사회적 본능을 구출하러 나선 이성의 자발적인 노력을 인정한다. 우리는 모든 권리에 대한 이러한 유보 장치 속에서 평등의 감정과 평등화를 향한 부단한 추세를 본다. 그리고 깊이 성찰하고 그 진의를 살펴봄으로써 우리는 우리의 학설에 대한 확증을 얻을 수 있다. 조건의 평등과 보편적 협동이 더 빨리 실현되지 않은 것은 입법자들의 기지와 재판관들의 거짓 지식이 일정 기간 동안 인민의 양식良識을 가로막는 방해물 구실을 했고, 한 줄기 진리의 빛이 원시 사회들을 비추었는데도 족장들의 최초의 사색이 무지몽매만을 낳았기 때문이다.

최초의 계약이 이루어진 후에, 최초의 욕구의 표현이었던 법률과 국가 조직의 희미한 윤곽이 마련된 후에, 법률가들의 사명은 입법에서 잘못된 것을 고치고, 결함이 있는 것을 보충하며, 모순되어 보이는 것을 최선의 규정에 의해 일치시키는 일이었다. 그러나 그렇게 하는 대신 그들은 법률의 자구적 의미에 매달리고 주석자나 고전주해자들의 판에 박은 역할에 만족하였다. 그들은 틀림없이 허약하고 허구에 가까운 이성에서 나온 영감을 영원불변의 진리인 양 받아들였다. 여론에 질질 끌려 다니고 경전의 숭배에 현혹된 나머지, 그들은 언제 어디서나 보편적으로 수용되는 것(quod ab omnibus, quod ubique, quod semper)은 의심할 나위가 없는 진실이라는 원리를 항상 들고 나온다. 마치 일반적이기는 하지만 자생적으로 나타난 신앙은 일반적인 가상假想 이상의 어떤 것을 증명한다고 신학자들이 주장하듯이 말이다. 그러나 우리는 속지 않는다. 모든 사람의 의견이라는 것은 어떤 사실에 대한 인식, 어떤 법률에 대한 막연한 감정을 입증하는 데는 소용이 될 수 있으나, 사실 그 자체나 법률 그 자체에 대해서는 우리에게 아무것도 가르쳐주지 못한다. 인류의 동의라는 것은 자연의 지침일 뿐, 키케로가 말하듯이 자연의 법칙은 아닌 것이다. 진리는 가상假想의 밑에 숨어 있다. 신앙은 그것을 믿을 수 있을 뿐이며, 오직 성찰만이 그것을 인식할 수 있다. 물리 현상이나 천재의 창작물들에 관련된 모든 것에서 인간 정신의 진보란 바로 이와 같은 것이다. 우리의 의식과 우리의 행위가 어찌 이와 다르겠는가?

제4절 노동에 대하여. 노동은 그 자체로는 자연의 사물들에 대하여 어떠한 전유 능력도 가질 수 없다.

우리는 정치경제학과 법학 자체의 금언들에 의해서, 달리 말하자면 소유가 한층 그럴싸하게 반대의 근거로 내세울 수 있는 모든 논거들로써 아래의 사실들을 논증할 것이다.

1. 노동은 그 자체로는 자연물들에 대하여 어떠한 전유 능력도 갖지 못한다.

2. 그러나 노동의 이러한 능력을 인정해 줌으로써 사람들은 노동의 유형, 생산물의 희소성, 생산능력의 불균등 여부에 관계없이 소유의 평등으로 인도된다.

3. 정의의 질서 안에서는 노동은 소유를 〈파괴한다〉.

우리에게 반박하는 이들을 본떠서 그리고 우리의 통행로에 가시나 덤불을 남기지 않기 위해서, 가능한 한 가장 높은 차원에서 문제를 제기하기로 하자.

샤를 콩트 씨는 『소유론』에서 〈국민nation으로서의 프랑스는 자신의 고유한 영토를 가진다〉라고 말한다.

프랑스는 단 한 명의 사람과 마찬가지로 자신이 경작하는 땅을 점유하나, 그 땅의 소유자는 아니다. 이는 개인들 사이에서 그러한 것처럼 국민들 사이에서도 마찬가지이다. 국민들은 용익권자요, 노동하는 자이므로 이들에게 땅에 대한 지배권을 부여하는 것은 언어도단이다. 사용할 권리라든가 남용할 권리가 개인에게 속하지 않은 것처럼 국민에게도 속하지 않는다. 그리하여 언젠가 땅을 남용하는 일을 막기 위한 전쟁이, 곧 성전聖戰이 되는 날이 올 것이다.

이리하여, 소유가 어떻게 형성되는가를 규명하려고 국민이 소유자라는 가정에서 출발한 콩트 씨는 이른바 〈부당전제不當前提〉의 궤변에 빠지고 만다. 이 순간부터 그의 모든 논거는 붕괴된다.

만일 어떤 독자가 땅에 대한 국민의 소유권에 이의를 제기하는 것은 지나친 억측이라고 생각한다면, 나는 국민적 소유라는 이 허구의 권리로부터 시대를 막론하고 종주권의 주장, 공납, 왕의 권한, 부역, 인신과 금전의 징발, 상품의 조달 따위가 생기고 급기야는 납세거부, 봉기, 전쟁, 인구감소가 나타났다는 사실을 환기하는 것으로 답을 대신할 것이다.

〈이 땅의 한가운데에 개인적 소유로 전환되지 않은 아주 넓은 토지가 존재한다. 대부분 삼림인 이 토지는 국민 대중에게 속하며, 여기서 수입을 얻는 정부는 그 수입을 모두의 이익에 맞게 사용하고 또 사용해야만 한다.〉

〈사용해야만 한다〉는 말은 제대로 된 표현이다. 허언虛言을 피할 수 있으니 말이다.

〈토지가 매각되어야 한다.…〉

왜 매각되어야 하는가? 누가 그것을 팔 권리를 가졌는가? 설령 국민이 그 소유자라고 하더라도, 오늘의 세대가 내일의 세대의 몫을 앗아갈 수 있는가? 인민은 용익권자의 자격으로 점유하며, 정부는 지배하고, 감독하고, 보호하고, 분배의 정의를 시행한다. 따라서 국민이 토지를 양도한다면, 이는 단지 그 사용만을 양도한 것이다. 국민은 그 어떤 것이라도 팔거나 양도할 권리가 없다. 소유자의 자격을 갖고 있지 않은데, 어떻게 국민이 소유를 변형시킬 수 있다는 말인가?

〈한 사업가가 그 땅의 일부를, 예컨대 거대한 늪지를 사려고 한다. 이 경우 부당취득usurpation이란 있을 수 없다. 왜냐하면 공중은 자기 정부의 손에 의해서 그 정확한 값을 돌려받고 있기 때문이며, 매각 후에도 매각 전과 마찬가지로 부자이기 때문이다.〉

이는 우롱조의 말이다. 뭐라고! 씀씀이가 헤프고 경솔하고 서툴기 짝이 없는 한 장관이, 내가 이의를 제기할 수도 없는 가운데(국가의 피보호자인 나는 국무회의에서 발언권도 심의권도 없다), 국가의 재산을 〈팔기〉 때문에, 이 매각이 건전하고 합법적이라고! 인민의 후견자들은 인민의 자산을 탕진하고 인민은 호소할 데도 없다니! 당신은, 내가 정부의 손에 의해서 내 몫의 판매 대금을 받았다고 말한다. 그러나 우선 나는 팔기를 원하지 않았으며, 팔기를 원했을 때는 팔 수 없었으며 또 그럴 권리도 없었다. 그리고 다음으로 나는 이러한 매각행위가 내게 어떤 이득이 되는지도 알지 못했다. 나의 후견자들은 군인에게 군복을 입히고, 낡은 성벽을 수리하고, 자랑이나 하듯 비싸고 보잘 것 없는 기념물들을 세웠다. 다음에 그들은 불꽃놀이를 벌이고 보물 따내기 기둥을 세웠다. 내가 잃은 것에 비하면 이것은 무엇인가?

사들인 자는 경계 말뚝을 박고, 울타리를 치고, 소리친다 : 이것은 내 것이다. 각자에게 자기 몫을, 각자가 자기 몫을. 이리하여, 이제 소유자나 그 친구가 아니라면 누구도 발을 들여놓을 권리가 없는 땅덩어리, 소유자나 그 종복들을 제외하고는 누구에게도 이득이 되지 않는 땅덩어리가 생긴다. 이러한 매각 행위가 되풀이된다면, 인민은 더 이상 쉴 자리도, 누울 자리도, 수확을 거둘 자리도 찾지 못할 것이다. 인민은 소유자의 대문 앞에서, 달리 말해 자신이 물려받은 유산이었던 이 소유의 벼랑에서 굶어죽을 것이다. 그리고 소유자는 인민이 죽는 것을 눈앞에 보면서 말할 것이다 : 이리하여 게으름뱅이와 겁쟁이들이 죽었도다!

소유자의 부당취득을 당연하게 받아들이도록 하기 위해서 콩트 씨는 매각할 때의 토지의 가치를 낮추는 척했다.

〈이러한 부당취득의 규모를 지나치게 과장하지 않도록 주의하자. 부당취득이란 것은 선점된 토지가 먹여 살리는 사람의 수와 이들에게 제공되는 생계수단들에 의해 평가되어야 한다. 예컨대, 오늘날 1,000프랑의 값어치를 지닌 토지 면적이 부당취득 될 당시에 5상팀에 불과했다면 실질적으로는 5상팀만큼만 횡령당한 셈이다. 4제곱킬로미터의 땅 한 조각은 야만인 한 명을 겨우 먹여 살리기에도 비좁았을 것이다. 그러나 그 땅은 오늘날 1,000명에게 생계수단을 확보해 주고 있다. 1000분의 999가 점유자의 정당한 소유이고, 1000분의 1만큼의 가치만이 부당취득된 것이다.〉

한 농부가, 자신의 빚 300프랑을 확인하는 채무증서를 찢어버렸다고 신부 앞에서 참회했다. 고해신부는 말했다 : 300프랑을 갚아야만 하오. 그러자 농부가 대답했다 : 아닙니다, 나는 종이 값으로 2리아드liard를 갚겠소.

그렇다. 콩트 씨의 추론은 바로 이 농부의 솔직함과 흡사하다. 땅은 단지 총액으로서의 값어치만을 갖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또한 미래를 향한 잠재적인 값어치를 갖는다. 그리고 그 값어치는 그 땅을 사용하고 값지게 만드는 우리의 능력 여하에 달려있다. 환어음, 약속어음, 연금증서를 찢어버려라. 그러면 종이 값으로는 당신은 거의 잃은 것이 없다. 그러나 당신은 이 종이와 더불어 당신의 자격을 파괴하고, 자격을 잃음으로써 당신의 재산을 파괴한 것이 된다. 토지를 파기하라, 아니 당신의 경우에 매한가지로 말하자면, 토지를 매각하라. 그러면 당신은 한 해, 두 해 또는 여러 해의 수확을 양도하는 것일 뿐만 아니라 당신과 당신의 자손들, 당신의 자손의 자손들이 거둘 수 있을 모든 생산물을 없애버리는 셈이 된다.

소유의 사도이자 노동의 찬미자인 콩트 씨가 정부 측의 토지 양도를 가정할 때, 우리는 그가 어떤 동기도 의도도 없이 그러한 가정을 내세우고 있다고 믿어서는 안 된다. 그로서는 이러한 가정이 필요했다. 그는 선점의 이론을 배척했기 때문에, 게다가 노동은 선점에 대한 사전 허가 없이는 권리를 구성할 수 없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이러한 허가를 정부의 권위에 결부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는 소유가 인민주권의 원리를, 아니 달리 말하자면 보편적 동의의 원리를 토대로 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우리가 이미 이 편견에 대해 논의했듯이 말이다.

소유가 노동의 딸이라고 말하고 나서 뒤이어 노동에 그 실행수단으로서의 가치를 인정해 주는 것은, 내 생각이 틀리지 않다면, 일종의 악순환을 빚는 일이다. 온갖 모순들이 모습을 드러낼 것이다.

〈일정한 넓이의 토지는 한 사람이 하루에 소비할 만큼의 식량을 생산할 수 있을 뿐이다. 만약 점유자가 자신의 노동에 의해 이틀 분의 식량을 생산할 수 있는 수단을 발견한다면, 그는 토지의 가치를 두 배로 만든 것이다. 이 새로운 가치는 그의 작품이며 그의 창조물이다. 그것은 누구에게도 빼앗기지 않는 그의 소유이다.〉

나는, 점유자가 두 배의 수확으로 자신의 노고와 근면을 보상받는다는 것을, 그러나 토지에 대한 어떤 권리도 얻지 못한다는 것을 주장한다. 일한 자가 노동의 결실을 자기 것으로 한다는 점에 나는 동의한다. 그러나 나는 생산물의 소유가 원료의 소유를 가져온다는 점은 이해할 수가 없다. 어부가 같은 해안에서 자기 동료들보다 더 많은 고기를 잡을 줄 안다고 해서, 그의 수완을 이유로, 자기가 고기잡이하는 해역의 소유자가 될 수 있겠는가? 사냥꾼의 수완을 한 지역의 사냥감에 대한 소유권 자격으로 간주할 수 있겠는가? 유사성은 완벽하다. 근면한 농사꾼은 풍부하고 질 좋은 수확으로 자신의 근면을 보상받는다. 만약 그가 땅을 개량했을 경우, 그는 점유자로서의 우선권을 갖는다. 그러나 결코, 어떤 경우에라도, 그는 경작자로서의 자신의 남다른 수완을 마치 자신이 경작하는 땅의 소유권에 대한 자격인 양 제시할 수는 없는 일이다.

점유를 소유로 전환시키기 위해서는 노동이 아닌 다른 어떤 것이 필요하며, 그것이 없으면 인간은 노동을 그만두자마자 소유자의 자격을 잃게 될 것이다. 그런데 소유를 구성하는 것은, 법률에 따르면, 아무도 이의를 달 수 없는 아주 오래 전부터의 점유, 즉 시효취득이다. 노동은 선점이 표현되는 물질적 행위이자 눈에 드러나는 표지일 따름이다. 따라서 농사짓는 이가 노동과 생산을 그만둔 후에도 소유자로 계속 남는다면, 처음에는 허용되고 다음에는 관용된 그의 점유가 마침내 양도할 수 없는 것으로 된다면, 그것은 바로 민법의 유리한 해석과 선점의 원리에 의한 것이다. 이것은 정말로 진실이므로, 이 사실을 전제하지 않고는 매매계약도, 토지나 가옥의 임대차도, 지대의 설정도 있을 수 없다. 한 가지 예를 들어보자.

부동산의 가치는 어떻게 측정되는가? 그 생산물에 의해서이다. 만약 어떤 토지가 1,000프랑의 수확을 올린다면, 이 땅의 값어치는 5%를 기준으로 할 때 2만 프랑으로, 4%를 기준으로 할 때 2만 5,000프랑으로 산정된다. 이것은 달리 말하자면 앞으로 20년 또는 25년이 지나면 토지가격이 모두 구매자에게 상환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따라서 일정 기간이 지난 후에 부동산의 가격이 완전히 구매자에게 상환된다면, 무슨 이유로 구매자가 계속 소유자로 남아 있는 것인가? 이는 선점권이 있기 때문이며, 그렇지 않다면 일체의 매각은 환매還買 행위가 될 것이다.

노동에 의한 점유라고 하는 이론은 따라서 법전과 모순된다. 그리고 이 이론의 주창자들이 그것을 토대로 법률들을 설명하고자 할 때, 그들은 자기 자신과 모순된다.

〈만약 사람들이 아무것도 생산하지 못하는 토지를, 심지어 늪지와 같은 유해한 토지를 비옥하게 만들었다면, 그들은 바로 그 일에 의해서 완벽한 소유권을 창출한 것이다.〉

마치 우리에게 착각을 불러일으키려는 듯이 표현을 부풀리고 모호한 말을 늘어놓은들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그들은 완벽한 소유권을 창출한 것이다〉라는 식으로 말이다. 당신은 그들이 이전에는 없었던 생산 능력을 창출했다고 말하려는 것인가. 그러나 이러한 능력은, 그것을 지탱해 주는 질료matière라고 하는 조건이 없이는 창출될 수 없다. 땅이라는 실체는 언제나 같은 것이다. 변하는 것은 그 품질과 형태뿐이다. 인간은 모든 것을, 질료를 제외한 모든 것을 창출했다. 따라서 내가 주장하는 것ㅇ느 인간은 이 질료를 점유하고 사용할 분이며 항구적인 노동의 조건 아래서 일정 기간 동안만 자신이 생산한 사물들에 대해 소유권을 가진다는 점이다.

이제 한 가지 중요한 문제가 해결된다. 즉 생산물의 소유는 설사 그것이 허용된 경우라도 결코 생산수단의 소유를 동반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는 더 이상의 상세한 설명을 필요로 하지 않을 것이다. 무기를 지닌 병사, 맡겨진 재료를 지닌 석공, 하천을 차지한 어부, 들판과 삼림을 차지한 사냥꾼, 토지를 지닌 농민들, 이들은 모두 마찬가지이다. 이들은 말하자면 자신이 산출한 생산물의 소유자들일 뿐이며 누구도 생산수단의 소유자는 아닌 것이다. 생산물에 대한 소유는 배타적이다. 요컨대 물物 안에서의 권리jus in re이다. 반면에 생산수단에 대한 권리는 공통적이다. 즉 물物에 대한 권리jus ad rem이다.

제5절 노동은 소유물의 평등에 귀착된다.

그러나 노동이 질료에 대한 소유권을 부여해 준다고 동의하자. 그러면 왜 이 원리는 보편적으로 적용되지 않는가? 왜 이 법률의 혜택이 소수에게만 한정되고 다수의 노동자들에게는 인정되지 않는가? 모든 동물은 옛날에 햇볕으로 데워진 대지로부터 마치 버섯처럼 생겨났다고 주장한 한 철학자에게 누군가가 왜 대지가 같은 질료를 가지고 이제 아무것도 낳지 않는가를 물었다. 그는, 대지가 늙었고 산출 능력을 잃었기 때문이라고 답했다. 옛날에 그토록 다산多産이었던 노동이 이렇게 불모로 되었는가? 왜 소작농은, 예전에는 소유자가 노동에 의해 획득하던 그 토지를 이제는 자신의 노동으로 얻지 못하는가?

그것은 토지가 이미 전유되었기 때문이라고 사람들은 말한다. 이는 답이 될 수 없다. 어떤 땅을 헥타르 당 50부아소(boisseau, 1부아소는 약 13리터-옮긴이)로 소작을 준다고 치자. 소작농의 재능과 노동은 이 생산물의 가치를 두 배로 만든다. 초과분은 소작농이 창출한 것이다. 지주가 여간해선 보기 드문 자제력을 발휘해서, 소작료를 올려 생산물을 독차지하려는 데까지 나아가지 않고 경작자에게 그 노동의 결실을 향유하게 했다고 가정하자. 그러나 그것으로써 정의가 충족되는 것은 아니다. 소작농은 땅을 개량함으로써 소유에 대한 새로운 가치를 창출했으며, 따라서 일정한 부분에 대한 소유권을 갖는다. 땅의 값어치가 원래 10만 프랑이었는데 소작농의 노동에 의해 15만 프랑의 값어치를 얻었다면, 이 잉여가치의 생산자인 소작농은 이 땅의 3분의 1에 대한 정당한 소유자이다. 콩트 씨도 이 논리를 거역하지는 못할 것이다. 왜냐하면 그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토지를 더 비옥하게 만든 사람들은 땅을 새로 넓힌 사람들보다 자신의 동료들에게 덜 공헌한 것이 결코 아니다.〉

그러면, 왜 이 규칙이 땅을 처음 간척한 사람에게만 적용되고 땅을 개량한 사람에게는 적용되지 않는가? 전자의 노동에 의해 토지가 1의 가치가 나간다면, 후자의 노동에 의해 토지는 2의 가치가 된다. 양쪽 모두 평등한 가치를 창출한 것이다. 왜 양쪽 모두에게 평등한 소유권을 주지 않는가? 이 점에 대해 최초의 선점자의 권리를 다시 들고 나오지 않는 한, 나는 사람들이 어떤 확고한 근거로도 이를 반박하지 못하리라고 단언한다.

그러나 어떤 이는 이렇게 말한다 : 당신이 원하는 바를 우리가 인정하더라도 소유지의 더 나은 분할에는 이르지 못할 것이다. 토지들은 그 가치가 끝없이 증대하지는 않는다. 따라서 두 번 또는 세 번 경작한 후에 토지는 곧 비옥도의 최대치에 도달한다. 농업기술에 의해 개량되는 것은 과학의 진보와 지식의 확산에 의한 것이지 농부의 기술에 의한 것이 아니다. 따라서 일하는 자 몇 명이 소유자 다중多衆에게 보태졌다는 사실이 소유 자체를 부정하는 논거가 될 수는 없다.

우리의 노력이 수백만 무산자 대중 가운데서 그저 단지 노동자들 수백 명만을 해방시킴으로써 토지의 특전과 산업의 독점을 확대하는 데 이를 뿐이라면, 이는 사실상 이 논의에서 아주 빈약한 수확을 얻는 것이리라. 그러나 그것은 또한 우리의 생각을 잘못 이해하는 것이며 지성과 논리의 박약을 보여주는 것이다.

만약 사물에 가치를 덧붙인 노동자가 그 사물의 소유에 대한 권리를 얻는다면, 그 가치를 보전하는 자도 마찬가지의 권리를 얻는다. 왜냐하면 보전한다는 것은 끊임없이 덧붙이는 것이며 지속적으로 창출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경작한다는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땅에 매년 그 가치를 부여하는 일이다. 그것은 창출 행위를 해마다 되풀이함으로써 토지의 가치가 감소하거나 상실되는 것을 막는 일이다. 따라서 소유를 합리적이고 정당하다고 인정하고 소작을 공정하고 올바른 것으로 인정함으로써 내가 말하고자 하는 바는 경작하는 자는 개간하는 자나 개량하는 자와 마찬가지 자격으로 소유권을 획득하며, 소작농이 지대를 낼 때마다 그는 자신의 손에 맡겨진 땅에 대해 지대 몫에 비례하는 만큼의 소유권을 얻는다는 사실이다. 이 점을 인정하지 않을 것인가. 그러면 당신은 독단과 전횡에 빠지는 것이며 카스트의 특전을 인정하고 노예제를 용인하는 것이다.

노동하는 자는 누구나 소유자가 된다. 이 사실은 현재의 정치경제학과 법학의 원리들 안에서 부정될 수 없다. 그리고 내가 소유자라고 말할 때, 우리 위선적인 경제학자님들처럼 봉급, 임금, 급료 등의 소유자들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내가 말하는 것은 자신이 창출하는 가치의 소유자들이다. 그 가치를 자신이 창출했음에도 불구하고 주인만이 그 혜택을 독차지하고 있지만 말이다.

이 모든 것이 임금 및 생산물 분배의 이론과 관련되어 있고 또 이 문제는 아직껏 명확히 밝혀져 있지 않으므로, 내가 이 점을 특히 강조하도록 허락해 주기 바란다. 이 점을 논의하는 것은 무익한 일이 아니다. 많은 사람들이 노동자들에게 생산물과 그 이익에 참여하도록 허용하는 것에 대해 말하고 있다. 그러나 이들이 노동자들을 위해 요구하는 참여는 순전한 자선이다. 이들은, 그 참여가 노동에 내재한 자연적이고 필연적인 권리이며 가장 저급한 작업에 이르기까지 생산자로서의 자질과 분리될 수 없는 것이라는 사실을 결코 입증하지 않았으며 의심조차 해보지 않았다.

이제 나의 명제는 다음과 같은 것이다 : 〈일하는 자는 심지어 자신의 임금을 받은 후에도, 자신이 생산한 사물에 대한 자연적인 소유권을 가진다.〉

콩트 씨를 계속 인용해 보자.

〈노동자들은 이 늪지에서 물을 빼고 잡목과 덤불을 없애도록, 한마디로 말해서 땅을 간척하도록 고용된다. 그들은 그 땅의 가치를 높이고 더 큰 재산으로 만든다. 노동자들이 거기에 부가한 가치는 식량과 일당의 형태로 그들에게 지불된다. 그러면 이 가치는 자본가의 소유가 된다.〉

지불은 충분하지 않다. 왜냐하면 노동자들의 노동이 가치를 창출했으며, 이 가치는 그들의 소유이기 때문이다. 노동자들은 그 가치를 팔지도 다른 것과 교환하지도 않았다. 그리고 당신, 자본가인 당신은 그 가치를 사들이지 않았다. 당신이 지급해 준 물품 및 당신이 마련해 준 생계수단의 대가로 전체의 일부에 대한 권리를 갖는다면, 그것은 물론 아주 정당한 일이다. 당신은 생산에 기여했다. 그러므로 향유에 참여해야 마땅하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당신의 권리가 노동자들, 당신이 원하든 원치 않든 생산과정에서 당신의 동료였던 노동자들의 권리를 무효로 만들지는 않는다. 임금에 대해 당신은 뭐라고 말하는가? 당신이 노동자들에게 일당으로 지불하는 돈은 그들이 당신에게 넘겨준 영구적인 점유의 겨우 몇 년 치 몫에 지나지 않는다. 임금은 노동자가 나날이 자신을 유지하고 회복하는 데 필요한 비용이다. 그것을 판매 대금으로 여기는 것은 당신의 오산이다. 노동자는 아무것도 팔지 않았다. 노동자는 자신의 권리도, 그가 당신에게 한 양도의 범위도, 당신이 그와 맺었다고 주장하는 계약의 의미도 알지 못한다. 노동자 편에서는 완벽에 가까운 무지가, 당신 편에서는 사기와 강탈이라고까지는 할 수 없어도 착오와 놀라움이 함께한다.

다른 예를 들어서 이 모든 것을 더욱 명확하고 더욱 진실에 가깝게 밝혀보자.

메마른 토지를 경작가능하고 생산성이 높은 토지로 바꾸는 데 얼마나 많은 어려움이 따르는지 모르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 어려움은 정말 엄청나서 대개의 경우 고립상태에서 홀로 일하는 사람은 그 땅이 자신에게 조금만이라도 식량을 마련해 줄 수 있는 상태가 되기 전에 죽고 말 것이다. 개간을 위해서는 공동체의 단합된 노력과 산업의 모든 자원이 다 동원되어야 한다. 콩트 씨는 이 주제에 대해 수많은 참된 사실들을 열거하고 있으면서도 사실상 자신의 논설에 어긋나는 증거들을 끌어 모으고 있다는 것을 눈치 채지 못한다.

20 또는 30 가구로 이루어진 한 개척마을이 덤불과 잡목으로 뒤덮인 황량한 지역에 들어서고, 원주민들이 협약에 의해 그 마을에서 퇴거하는 데 동의했다고 가정하자. 각 가구는 많지는 않지만 그래도 누구나 동물들, 곡물, 연장, 약간의 돈, 식량 따위 중에서 선택할 수 있을 만큼 충분한 자금을 지니고 있다. 땅이 할당되고 각자는 최선을 다해 주거지를 마련하고 자신에게 주어진 몫의 땅을 개간하기 시작한다. 그러나 난생 처음 겪는 피로, 믿을 수 없는 고역, 파멸적이고 거의 결실 없는 노동으로 몇 주일을 보낸 후, 우리의 입주자들은 자기 일을 불평하기 시작한다. 그들은 조건이 가혹하게 느껴지고, 자신들이 처한 비참한 신세에 대해 불평을 늘어놓는다.

돌연 이들 중 가장 약삭빠른 이가 돼지 한 마리를 잡아서 일부는 소금에 절이고 나머지는 나누어 주기로 결심하고 궁핍에 빠진 자기 동료들을 찾아 나선다. 그는 호의에 가득 찬 어조로 말한다. 벗이여, 보잘 것 없는 일 때문에, 기껏 지독한 생활을 하려고 이 고생인가! 당신네들에게 이득이 될 거래를 하세. 당신들에게 먹을 것과 술을 제공할 것이네. 당신들은 날마다 그만큼씩 얻게 될 걸세. 우리는 함께 일할 것이요, 신이여 만세, 내 벗들이여, 우리는 즐겁고 만족할 걸세!

텅 빈 위胃들이 이런 장광설에 저항할 수 있다고 믿는가? 가장 굶주린 사람들이 미덥지 못한 초청자를 따라 나선다. 사람들은 일을 시작한다. 함께한다는 미덕, 경쟁심, 희열, 상부상조가 노력을 배가시킨다. 일은 순식간에 진척되고 사람들은 노래하고 웃는 가운데 자연을 길들인다. 얼마 안 가서 땅이 모습을 바꾼다. 길들여진 땅은 씨뿌리기만을 기다린다. 이제, 소유자는 자기가 부린 노동자들에게 지불을 하며, 노동자들은 고마운 인사를 하고 물러나면서 그와 함께 지낸 행복했던 나날을 아쉬워한다.

다른 사람들도 이런 본보기를 좇으며 마찬가지로 성공을 거둔다. 그러고 나서 어떤 이들은 정착을 하고 나머지는 흩어진다. 한 사람 한 사람 자기 개간지로 돌아간다. 그러나 개간을 하려면 우선 먹고 살아야 한다. 남을 위해 경작하는 동안 자기 땅은 돌보지 못하지 않았는가. 씨를 뿌리고 수확을 거두는 데 이미 일 년을 빼앗겼다. 사람들은 자기의 노동력을 빌려줌으로써, 자기가 먹을 식량을 절약할 수 있으므로 더 많이 벌 것으로 생각했고 더 잘 살면서도 더 많은 돈을 모으리라고 생각했다. 잘못된 생각이로다! 남을 위한 생산도구를 창출했을 뿐, 자기를 위해서는 아무것도 창출하지 못한 것이다. 개간의 어려움은 여전했다. 걸친 옷은 해지고, 식량은 바닥나고, 주머니는 텅 비고, 결국 특정인만 이득을 본다. 모두가 받들어 일했던 그 자, 혼자만이 생산할 수 있는 위치에 남게 된 까닭에 다른 이에게 부족한 식량을 제공해줄 수 있는 바로 그 자 말이다. 그러고 나서, 가련한 개간자가 돈이 바닥날 때쯤, 멀리서부터 먹잇감 냄새를 맡는 동화 속의 식인귀처럼, 먹을 것을 잔뜩 가진 자가 다시 나타난다. 그는 어떤 사람들에게는 일당으로 고용하겠다고 제안하고, 어떤 사람들에게는 그 척박한 땅 조각을 헐값에 사겠다고 제안한다. 물론 사들인 땅에서 그는 아무 일도 하지 않으며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즉, 그는 자신을 위하여, 어떤 이의 땅을 다른 어떤 이로 하여금 경작하게 하는 것이다. 따라서 20년이 지나고 나면, 애초에는 동등한 재산을 지녔던 30여 명의 개개인 중에서 다섯 또는 여섯 명만이 지역 전체의 소유자가 될 것이고, 나머지는 보는 이의 연민을 자아낼 정도로 빈털터리가 될 것이다.

운 좋게도 내가 태어난 이 부르주아 도덕성의 시대는 도덕에 대한 감각이 정말 무뎌져 버렸다. 따라서 나는, 허다한 고매한 소유자들이 내가 발견한 모든 것이 근거 없고 부당하지 않느냐고 내게 묻더라도 결코 놀라지 않을 것이다. 비열한 영혼이여! 되살아난 시체여! 눈앞에서 일어나는 도적질이 당신에게 자명하게 보이지 않는다면, 어떻게 당신을 납득시킬 수 있겠는가? 인간은 감언이설을 동원해서 타인들로 하여금 자기의 사업을 위해 봉사케 하는 비결을 알고 있다. 그 다음에 일단 단합된 노력으로 부를 얻고 나면, 그는 자기에게 재산을 만들어 준 사람들의 복리를 증진시키는 일을 거부한다. 자기 나름대로 규정한 여러 조건들을 들먹이면서 말이다. 그런데 당신은 이러한 행위가 왜 사기냐고 묻고 있는 것이다! 노동자들에게 보수를 지불했고 더 이상 아무것도 빚진 것이 없다는 구실로, 자기의 사업은 바쁜 반면 다른 이들을 위해서는 달리 할 일이 없다는 구실로, 그는 다른 이들이 자기 사업을 도와주었음에도 불구하고 이들의 사업을 돕기를 거부한다. 그리고 고립에 따른 무력감 속에서 버림받은 노동자들이 물려받은 유산을 담보로 돈을 마련해야 할 절박한 지경에 빠졌을 때, 바로 그, 즉 이 뻔뻔한 소유자, 이 벼락부자 사기꾼이 나타나서 노동자들을 약탈하고 파멸시킬 계획을 짜고 있다. 그런데 당신은 이것이 정당하다는 말인가! 정신 차려라, 나는 당신의 눈초리에서, 본의 아닌 무지에서 오는 순진한 놀라움을 넘어서는 죄의식의 질책을 읽는다.

자본가는 노동자들에게 〈수당les journées〉을 지불했다고 사람들은 말한다. 정확하게 표현하려면, 자본가는 매일 노동자들을 고용할 대마다 그날의 〈일당une journée〉를 지불했다고 말해야 한다. 이것은 결코 같은 말이 아니다. 왜냐하면 노동자들의 협동과 조화, 그들 노력의 집중과 동시성이 나오는 이 거대한 힘에 대해 자본가는 아무것도 지불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200명의 정예병이 몇 시간 만에 룩소르Luqsor의 오벨리스크를 단단한 지반 위에 세웠다. 한 사람이 200시간 안에 같은 일을 해낼 수 있다고 당신은 생각하는가? 그런데도 자본가의 셈법으로는 임금의 액수가 같다는 말인가. 사막을 개간하는 일, 집을 짓는 일, 공장을 가동하는 일 따위는 오벨리스크를 세우는 일, 산을 옮기는 일과 같은 것이다. 가장 작은 재산, 가장 빈약한 기업, 가장 보잘 것 없는 공장의 운용도 한 사람의 힘으로는 도저히 이룰 수 없는 다양한 노력과 재능의 결합을 요구하는 것이다. 경제학자들이 이 점에 생각이 미치지 못한 것은 놀라운 일이다. 그러므로 자본가가 얻은 것과 지불한 것 사이에 수지를 맞추어 보자.

노동자는 자신이 일하는 동안 먹고 살 수 있는 정도의 임금을 필요로 한다. 당연히 그는 소비하면서만 생산할 수 있기 때문이다. 사람을 부리는 자는 누구나 그에게 먹을 것과 생계유지에 필요한 것, 아니면 그에 맞먹는 임금을 부담해야만 한다. 이것은 모든 생산에서 가장 먼저 해야 할 몫이다. 나는, 이 점에서 자본가가 자신의 의무를 다했다고 일단 인정한다.

노동자는 자신의 생산에서 당장의 생계 외에도 장래의 생계에 대한 보장책을 찾아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생산의 원천은 고갈될 것이며 노동자의 생산 능력은 소실될 것이다. 달리 말하자면, 해야 할 노동은 마친 노동에서 끊임없이 다시 태어나야 하는 것이다. 이것이 재생산의 보편적 법칙이다. 이리하여 소유자 농민은 ① 자신의 수확 속에서, 자신과 가족의 생계수단 뿐 아니라 자신의 자본을 유지, 증진시키고 가축을 사육할 수단, 한마디로 말해서 계속 노동하고 항상 재생산할 수단을 찾으며, ② 생산도구의 소유 속에서, 경작하고 노동할 토지에 대한 항구적인 보장을 찾는다.

자기의 노동력services을 제공하는 자가 경작할 수 있는 근거는 무엇인가? 소유자가 자기를 필요로 한다는 추정과 소유자가 자기를 무상으로 고용하려는 의사를 가지고 있다는 추정된 사실이다. 옛날에 평민이 영주의 선심과 선의에 의해 토지를 얻었듯이, 오늘날 노동자는 고용주와 소유자의 선의와 필요에 의해 일을 얻는다. 이것이 바로 사람들이 임시적précaire[13] 자격의 점유라고 부르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임시 조건은 부당한 것이다. 당연히 그것은 시장에서의 불평등을 내포하고 있기 때문이다. 노동자의 임금은 노동자의 일상적인 소비를 거의 넘어서지 못하고 내일의 임금을 보장해 주지 못하는 반면에, 자본가는 노동자가 생산한 도구에서 미래를 위한 독립성과 안전을 보장받는 것이다.

그런데 이 재생산의 효모, 이 영원한 생명의 씨앗, 생산의 도구와 토대의 이러한 준비야말로 자본가가 생산자에게 빚지고 있는 것이며 다시는 돌려주지 않는 것이다. 그리고 이것은 노동자의 빈곤, 유한자有閑者의 사치, 조건의 불평등을 만드는 기만적인 거부 행위이다. 사람들이 인간에 의한 인간의 착취라고 널리 불렀던 것이 바로 여기에서 나온다.

실은 다음 세 가지 중 어느 하나여야 한다. 즉 ① 노동자는 모든 임금을 제하고 자신이 생산한 것을 고용주와 함께 나눌 것이다. ② 그렇지 않으면, 고용주는 생산 노동의 등가물을 노동자에게 돌려줄 것이다. ③ 그렇지 않으면, 고용주는 노동자의 고용상태를 항상 유지해 주어야만 할 것이다. 생산물의 분배, 노동의 상호성, 항구적인 노동의 보장, 자본가는 이 세 가지 대안 중 어느 하나를 피할 수 없다. 그러나 자본가가 두 번째와 세 번째 조건에 만족할 리 없다. 그는 직간접으로 자신의 사업에 힘써 준 이 수천의 노동자들에게 봉사할 수도 없고, 그들 모두를 영원히 고용할 수도 없다. 따라서 소유의 분배만이 남는다. 그러나 소유가 분할되면, 모든 조건들은 평등해질 것이다. 대자본가들도 대소유자들도 존재할 수 없게 된다.

따라서 콩트 씨가 자신의 가설에 따라, 자본가가 자신이 대가를 지불한 모든 사물에 대한 소유권을 차례로 획득하는 것을 우리에게 보여줄 때, 그는 점점 더 개탄할 만한 거짓 추리에 빠지게 된다. 그리고 그의 논증이 늘 변함없는 만큼, 우리의 답변도 늘 한 가지이다.

〈여러 노동자들이 건물을 짓는 데 고용되어 있다. 어떤 이는 채석장에서 돌을 고르고, 어떤 이는 운반하며, 어떤 이는 다듬고, 또 어떤 이는 제 위치에 가져다 놓는다. 그들 하나하나가 자기 손을 거쳐 간 재료에 일정한 가치를 더한다. 그리고 이 가치, 즉 개개인의 노동의 산물은 개개인의 소유이다. 그는 가치를 창출하자마자 곧 그것을 건물 소유자에게 팔아버리고 건물 소유자는 그 대가로 먹을 것이나 임금을 지불한다.〉

〈분할하고 통치하라divide et impera〉. 분할하라, 그러면 당신은 통치할 것이다. 마찬가지로 분할하라, 그러면 당신은 부자가 될 것이다. 분할하라, 그러면 당신은 사람들을 속일 수 있을 것이며, 그들의 이성을 흐리게 하고, 정의를 우롱할 수 있을 것이다. 노동자들을 서로 떼어 놓으면, 각자에게 지불된 일당이 각자가 개인적으로 생산한 가치를 넘을 수도 있다. 그러나 문제는 그 점이 아니다. 20일 동안 1,000명이 노동한 힘에 대해서 단 한 명이 55년 동안 노동한 것과 마찬가지로 지불된 것이다. 그러나 이 1,000명이 단 20일 만에, 한 명의 힘으로는 100만 세기 동안 노력을 되풀이해도 이주지 못할 것을 해낸 것이다. 거래는 정당한가? 거듭 말하지만, 결코 아니다. 당신은 개개인의 힘 모두에 대해 지불했지만, 집합적인 힘에는 지불하지 않았다. 따라서 당신이 결코 얻지 못한 집합적인 소유권이 여전히 남는다. 당신은 그것을 부당하게 향유하고 있는 것이다.

20일의 임금이 이 많은 사람들을 20일 동안 먹이고 재우며 입히기에 충분하기를 나는 바란다. 그러나 계약 기간이 끝난 후 일거리가 없어지면 이 사람들은 어떻게 되는가? 그들은 생산물을 이루어내자마자 곧 소유자들에게 팔아넘기고, 소유자는 곧 그들을 저버릴 터이니 말이다. 노동자 모두의 단합된 노고 덕에 확고하게 자리 잡은 소유자는 안전한 생활을 누리고 더 이상 노동과 빵의 결핍을 걱정하지 않는 데 반하여, 노동자는 자신의 자유를 팔아버리고 종속시킨 바로 이 소유자의 호의 외에는 달리 희망을 걸 곳이 없다. 따라서 소유자가 자신의 안락과 권리 안에 웅크리고 앉아서 노동자를 고용하기를 거부한다면, 노동자는 어떻게 먹고 살 것인가? 그는 비옥한 땅을 마련하고도 거기에 씨를 뿌리지 못할 것이고, 안락하고 화려한 집을 짓고도 거기에 머물지 못할 것이며, 모든 것을 생산하고도 아무것도 누리지 못할 것이다.

노동에 의해 우리는 평등으로 나아간다. 우리가 내딛는 한 걸음 한 걸음이 우리를 평등으로 더욱 가깝게 인도한다. 그리고 노동자들의 힘, 근면성, 노력 여부가 동일하다면, 재산도 마찬가지로 동일해질 것이 명백하다. 사실 사람들이 주장하고 또 우리가 앞에서 동의한 것처럼, 노동자가 자신이 창출한 가치의 소유자라면, 다음과 같은 사실이 뒤따른다.

1) 노동하는 자가 한가한 소유자를 대신해서 얻는다.

2) 모든 생산은 필연적으로 집단적인 것이므로, 노동자는 자기의 노동에 비례해서 생산물과 이익에 참여할 권리를 갖는다.

3) 모든 축적된 자본은 사회적 소유이므로, 누구도 배타적인 소유권을 가질 수 없다.

이러한 추론들은 피할 수 없다. 이 추론들만으로도 우리의 경제 전반을 뒤흔들고 우리의 제도와 법률들을 변혁하기에 충분하다. 이러한 원리를 세운 바로 그 사람들이 왜 이제 와서 그 원리를 따르기를 거부하는가? 세Say, 콩트, 엔느켕 등등과 같은 이들이 왜 소유는 노동에서 나온다고 말하고 나서 뒤이어 선점과 시효취득이라는 것에 소유를 붙들어매려 하는가?

그러나 이 궤변가들이 자신의 모순과 맹목에 빠지도록 내버려두자. 인민의 양식이 그들의 모호한 태도를 심판할 것이다. 우리로서는 하루 빨리 이 양식을 계도하고 올바른 길을 보여주도록 하자. 평등이 다가온다. 이미 우리는 평등과 좁은 간격을 두고 있다. 내일이면 이 간격을 뛰어넘을 것이다.

제6절 사회에서 모든 임금은 평등하다.

생시몽주의자들Saint-simoniens, 푸리에주의자들fouriéristes, 또 일반적으로 오늘날 사회경제와 개혁에 관여하는 모든 이들은 자신들의 깃발 아래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각자의 능력에 따라 각자의 몫을, 각자의 성취에 따라 각자의 능력을.(생시몽)

각자의 자본, 각자의 노동, 각자의 재능에 따라 각자의 몫을.(푸리에)

비록 모양새를 갖추어 이야기하고 있는 것은 아니지만, 그들은 노동과 근면에 의해 취득되는 자연의 생산물들은 모든 종류의 탁월함과 우월성에 대해 주어지는 보상이요 찬가이며, 영광이라고 주장한다. 이들은 토지를 하나의 거대한 투기장으로 취급하는데, 이 투기장에서는 이제 창과 칼이 부딪치는 폭력이나 배신에 의해서가 아니라 획득한 부, 과학, 재능 심지어 덕망에 의해 가격이 흥정된다. 요컨대 이들 및 이들과 더불어 누구나 최고의 능력에는 마땅히 최고의 보수가 돌아간다는 것을, 상거래식이지만 모호함을 피할 수 있는 말투로 표현하자면, 〈보수〉는 성취와 능력에 비례해야만 한다는 것을 주장하고 있는 것이다.

이른바 이 두 개혁가의 제자들은 이것이 그들의 생각이라는 사실을 부인할 수 없을 것이다. 만일 그렇지 않다면 그들은 자신들의 공식적인 해석과 어긋날 것이며, 자신들이 내세운 이론의 통일성을 파괴할 것이기 때문이다. 게다가 그들이 부인한다고 해도 하등 염두에 둘 필요가 없다. 두 분파는, (그들의 말에 따르면) 그 역시 능력의 불평등을 배양했던 자연에 대한 유추를 빌려서 조건들의 불평등을 주장하는 일을 영예로 여기고 있기 때문이다. 그들은 단지 한 가지 사실을 자랑으로 내세우고 있는데, 그것은 그들이 구상한 정치조직이 너무 완벽해서 사회적 불평등이 항상 자연적 불평등과 일치하리라는 사실이다. 조건들의 불평등 - 나라면 보수의 불평등이라고 말하겠다 - 이 가능한가의 문제에 대해서, 그들은 능력의 척도를 규정하는 것 외에는 아무 데에도 관심을 두지 않는다.[14]

각자의 능력에 따라 각자의 몫을, 각자의 성취에 따라 각자의 능력을.

각자의 자본, 각자의 노동, 각자의 재능에 따라 각자의 몫을.

생시몽이 죽고 푸리에가 스스로를 신격화한 이후에, 그들의 사도 중 누구도 이 위대한 격언에 대한 과학적 논증을 사람들에게 제시하려 하지 않았다. 그리고 나는 푸리에주의자들 중 누구도 이 이중의 경구가 두 가지 다른 해석에 열려 있다는 점을 의심조차 하지 않고 있다는 사실에 100대 1로 내기를 걸겠다.

각자의 능력에 따라 각자의 몫을, 각자의 성취에 따라 각자의 능력을.

각자의 자본, 각자의 노동, 각자의 재능에 따라 각자의 몫을.

흔히 말하듯이 가장 평이한 의미로in sensu obvio, 즉 표면적이고 통속적인 의미로 해석되는 이 명제는 그러나 거짓이고 모순에 차 있으면서 부당하다. 자유에 적대적이고 압제를 비호하며 반사회적인 이 명제는 소유자적 편견의 절대적인 영향력 아래서 숙명적으로 받아들여진다.

우선, 〈자본〉은 보상의 기본 요인에서 제외되어야 한다. 푸리에주의자들은, 그들의 몇몇 팸플릿을 통해 내가 이해하는 바로는, 선점권을 부정하고 노동 외에 다른 소유의 원리를 인정하지 않는다. 비슷한 전제 아래 그들은 조금만 추론해 본다면, 자본은 선점권에 의해서만 그 소유자에게 이익을 가져다주지만, 이러한 생산은 정당하지 않다는 사실을 이해할 것이다. 사실 노동이 소유의 유일한 원리라면, 나는 어떤 다른 사람에게 소작료를 받고 경작시키자마자 내 땅의 소유자가 될 수 없을 것이다. 우리는 이것을 논박할 여지가 없이 입증했다. 그런데 이것은 모든 자본에 대해서 마찬가지이다. 따라서 어떤 기업에 자본을 투자하는 일은 법의 엄정한 해석에 따르자면 이 자본을 등가의 생산물과 교환하는 것이다. 무익해 보이는 이 토론을 여기에서 되풀이하지 말자. 나는 〈자본에 의한 생산〉이라 불리는 것에 대해서 다음 장에서 깊이 있게 다룰 것이다.

이렇게 자본은 교환될 수 있으나, 소득의 원천이 될 수는 없다.

이제, 〈노동〉과 〈재능〉, 즉 생시몽의 말을 빌리면 〈업적〉과 〈능력〉이 남는다. 이것들을 차례로 검토해 보자.

보수는 노동에 비례해야만 하는가? 달리 말하자면 더 많이 일한 자가 더 많이 받는 것은 정당한가? 이 문제에 두 배로 관심을 집중할 것을 독자에게 당부한다.

문제를 한 번에 해결하기 위해서는 다음과 같은 질문을 제기하는 것으로 충분하다. 노동은 하나의 〈조건〉인가 아니면 〈전투〉인가? 내가 볼 때, 답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신은 인간에게 말했다. 〈네 얼굴에 땀을 흘려 네 빵을 먹을지라. 너는 몸소 네 빵을 생산하라, 그리고 네가 스스로의 노력을 조절하고 인도할 줄 아는 만큼 너는 크고 작은 즐거움을 만끽하면서 일할 것이다.〉 신은 〈너는 네 이웃과 빵을 다투리라〉고 말씀하신 것이 아니라 〈너는 네 이웃과 함께 일하리라. 그리고 너와 네 이웃은 모두 평화롭게 살리라〉고 말씀하셨다. 너무나 단순해서 때로는 모호한 해석을 낳는 이 율법의 의미를 펼쳐보자.

우리는 노동에서 두 가지 요소, 즉 〈결합association〉과 〈이용재료matière exploitable〉를 준별해야만 한다.

결합된 자로서 노동자들은 평등하다. 그리고 한 노동자가 다른 노동자보다 더 많은 보수를 받는 것은 모순이다. 왜냐하면 한 노동자의 생산물은 다른 노동자의 생산물로밖에 지불될 수 없다는 점을 고려할 때, 만일 두 생산물이 불평등하다면 그 가치의 차이 즉 가장 큰 생산물과 가장 작은 생산물 사이의 차액은 사회에 의해 획득될 수 없으며, 따라서 교환도 이루어지지 않아 임금의 평등에 아무런 영향을 주지 못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 결과, 가장 힘센 노동자에게는 사회적 불평등이 아니라 구태여 말하자면 자연적 불평등이 생길 것이다(그의 힘과 생산적 활력은 아무에게도 상처를 주지 않는다). 한마디로 말하자면, 사회는 평등한 생산물들만을 교환한다. 사회는 사회를 위해 행해진 노동에만 대가를 지불한다. 따라서 사회는 모든 노동자들에게 평등하게 지불한다. 이들이 사회 밖에서 생산할 수 있는 것은 이들의 목소리나 머리카락의 차이 정도밖에는 사회에 영향을 미치지 못한다.

나는 지금 스스로 불평등의 원리를 세우고 있는 듯이 보일 수도 있다. 아니다, 그와 정반대이다. 사회를 위해 이루어질 수 있는 노동, 즉 교환 가능한 노동의 합계는 운영자금이 일정하다면 노동자의 수가 늘어날수록 그리고 각자에게 주어진 일의 양이 줄어들수록 커진다. 따라서 자연적 불평등은, 노동의 결합이 확대되고 더 많은 사용가치가 사회적으로 생산됨에 따라 줄어들게 된다. 따라서 사회에서 노동의 불평등을 가져올 수 있는 유일한 요소가 있다면 그것은 선점권이나 소유권일 따름이다.

그런데 경작, 제초, 수확 등으로 계산되는 이 하루당 사회적 일이 200제곱미터의 면적에 대하여 평균 필요노동 시간으로 7시간을 요구한다고 가정하자. 어떤 노동자는 6시간 만에, 어떤 노동자는 8시간 만에, 그리고 대다수는 7시간 만에 일을 마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누구나 요구되는 양의 노동을 제공하기만 하면 투자한 노동시간에 상관없이 임금의 평등에 대한 권리를 갖는다.

6시간 만에 자기 일을 끝마칠 수 있는 노동자는 자기의 힘과 활동이 더 크다는 구실로, 자기보다 덜 숙달된 노동자의 일감을 빼앗고 그리하여 그의 노동과 빵을 강탈할 권리가 있는가? 누가 감히 이런 주장을 고집할 수 있겠는가? 다른 사람보다 먼저 일을 마친 이는 원한다면 휴식을 취할 수 있으리라. 힘을 재충전하고 영혼의 양식을 얻고 삶을 쾌적하게 가꾸기 위해 운동이나 유익한 일에 몰두하는 것도 좋으리라. 그는 누구에게도 해를 입히지 않고 이런 일을 할 수 있다. 또한 다른 이에게 보탬이 되는 일을 할 수도 있으리라. 활력, 친분, 근면 그리고 이로 말미암은 모든 개인적 장점은 자연의 몫이며, 어느 정도까지는 개인의 몫이다. 사회는 이들에게 합당한 응분의 평가를 부여한다. 그러나 사회가 이들에게 주는 보수는 그들의 능력이 아니라 그들이 생산한 것에 비례한다. 이렇게 각자의 생산 몫은 모두의 권리에 의해 제한된다.

만일 땅의 넓이가 무한정이고 이용할 재료의 양이 무진장이라고 할지라도, 우리는 〈각자의 노동에 따라 각자의 몫을〉이라는 격언을 받아들일 수가 없다. 왜 그런가? 다시 한 번 사회는 그 구성원의 수에 관계없이 그들이 생산한 생산물로만 지불할 따름이므로 모두에게 동일한 임금을 줄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단지, 우리가 앞에서 한 가정에 따라 아무도 강자가 자신의 장점을 활용하는 것을 막을 수 없기 때문에, 사회적 평등의 바로 한복판에서 자연적 불평등이라는 거추장스러운 일이 되살아날 것이다. 그러나 토지는 주민의 생산력과 그들의 확장 능력의 측면에서 매우 제한되어 있다. 더구나 생산물의 극도의 다양성과 극단적인 노동 분업은 사회적 과업을 한층 더 해내기 쉽게 만든다. 그러므로 바로 이 생산 가능성의 한계와 생산 작업의 수월함에 의해서 절대적 평등의 법칙이 우리에게 주어지는 것이다.

그렇다, 삶은 하나의 전투이다. 그러나 이 전투는 결코 인간에 대한 인간의 전투가 아니라 자연에 대한 인간의 전투이며, 우리들 각자는 몸소 여기에 참여하지 않으면 안 된다. 이 투쟁에서 강자가 약자를 도우러 나선다면, 그의 선행은 칭찬과 사랑을 받을 것이다. 그러나 그의 도움은 자유롭게 베풀어져야 하며 무력에 의해 강제되거나 돈을 받고 제공되어서는 안 된다. 누구에게나 경주 트랙은 같은 것이며 지나치게 길지도 지나치게 험난하지도 않다. 끝까지 달린 사람은 누구나 결승점에서 대가를 받는다. 그러나 반드시 일등일 필요는 없다.

인쇄소에서 노동자는 대개 도급제로 일한다. 식자공은 조판할 수 있는 활자 수에 따라, 인쇄공은 인쇄한 종이 매수에 따라 봉급을 받는다. 여기에도 다른 곳과 마찬가지로 재능과 기술의 불평등이 존재한다. 일거리가 없는 것calence 즉 실업에 대한 걱정이 없는 한, 조판 일이나 식자 일이 부족하지 않은 한, 누구나 자유롭게 열심히 일에 전념하며 자기 능력을 펼친다. 많이 일을 한 사람은 많이 번다. 적게 일한 사람은 적게 번다. 그러나 일거리가 줄기 시작하면, 식자공과 인쇄공은 일감을 나눈다. 독차지하려는 자는 도둑이나 배신자만큼 미움을 산다.

이 인쇄업의 관행 안에 경제학자나 법률가들이 결코 도달하지 못한 하나의 철학이 있다. 우리의 법학자들이 인쇄소에서 볼 수 있는 분배적 정의의 원리를 자신들이 만든 법전에 도입했더라면, 그들이 이러한 민중의 본능적 관행을 비굴하게 흉내 내기 위해서가 아니라 잘 고쳐서 일반화시키기 위해 고찰했더라면, 이미 오래 전부터 자유와 평등은 난공불락의 기초 위에 터 잡았을 것이며, 더 이상 사람들은 사회적 차별의 불가피성이나 소유권 따위에 대해 논쟁할 필요가 없었을 것이다.

건강한 개개인의 육체의 수에 따라 노동이 할당된다면, 하루당 평균 노동시간은 프랑스의 경우 5시간을 넘지 않을 것이라고 사람들은 추정했다. 그렇다면, 누가 감히 노동자들의 불평등을 말하는가? 불평등을 낳는 것은 로베르 마케르(Robert Macaire, 19세기 중엽 통속극의 작중인물로 은행가, 실업가 등 현대판 도둑의 전형-옮긴이)의 〈노동〉이다.

〈많이 노동한 자는 많이 번다〉라는 의미로 해석된 〈각자의 노동에 따라 각자의 몫을〉이라는 원리는 따라서 명백히 잘못된 두 가지 사실을 전제로 하고 있다. 하나는 경제학적인 오류, 즉 사회적 노동에서 일은 평등할 수 없다는 주장이다. 다른 하나는 물리학적인 오류, 즉 생산 가능한 물건의 양이 무제한이라는 주장이다.

그러나 사람들은 이의를 제기할 것이다. 〈자기의 일을 반밖에 하지 않으려는 사람이 있으면, 어쩔 텐가? 무척 난처할 것이 아닌가?〉 아마도 이들은 그들이 받은 절반치 임금에 만족할 것이다. 자신들이 제공한 노동에 따라 지불을 받았으므로, 무슨 불평이 있겠는가? 이런 의미에서 〈각자의 성취에 따라 각자의 몫을〉이라는 격언을 적용하는 것은 정당하다. 그것이 바로 평등의 법칙이다.

게다가 경찰제도나 산업조직에 관련된 많은 난관이 여기서 제기될 수도 있다. 나는 이 모든 것에 대해 단 한마디로 답할 것이다. 이 모든 난관은 평등의 원리에 따라 해결되어야 한다고. 그러면 사람들은 물을 것이다. 〈어떤 일은 늦장을 부리면 생산이 큰 차질을 빚을 수 있다. 그런데 사회는 몇몇 사람들의 태만에 따른 피해를 감수해야만 하며, 노동권에 대한 존중 때문에, 이들이 거부한 생산품을 사회가 자기 스스로의 손으로 장만하지도 못한다는 말인가? 이 경우에 봉급은 누구에게 돌아가는가?〉

사회에 돌아가야 한다. 사회는 스스로의 힘으로든 아니면 대표자들에 의해서든, 그러나 항상 일반적 평등은 침해되지 않고 나태한 자들만이 자신의 태만의 값을 치르는 방식으로, 중단된 노동을 해나갈 것이다. 게다가 사회는 뒤처진 자들에 대해 너무 가혹한 조치를 취할 수는 없다고 할지라도, 사회 자체의 존속을 위해서 악폐를 감시할 권리를 갖고 있다.

사람들은 또 덧붙일 것이다. 〈모든 산업에는 지도자, 훈육자, 감독관 등등이 필요하다. 이들은 그러한 과업에 종사해야 하는가?〉 아니다, 지도하고, 감시하고, 훈육하는 것이 이들의 일이다. 그러나 이들은 노동자들 가운데서 노동자들에 의해서 선출되어야 하며 피선거권 자격을 갖추어야 한다. 행정이든 교육이든 모든 공적 직위들이 다 마찬가지이다.

이용 가능한 재료의 양이 제한되어 있다는 사실은 노동을 노동자의 수에 따라 분배할 필요를 입증한다. 사회적 과업 즉 평등한 과업은 성취할 수 있게끔 모두에게 능력이 주어져 있다는 사실과, 다른 노동자의 생산품에 의해서가 아니면 노동자에게 지불할 수 없다는 사실은 보수의 평등을 정당화해 준다.

제7절 능력의 불평등은 재산의 평등의 필요조건이다.

당신들은 반론을 제기할 수 있다. 그리고 이러한 반론이 사실 생시몽의 격언의 두 번째 구절을, 푸리에의 격언의 세 번째 구절을 이루고 있다.

반론은 다음과 같다 : 해야 할 노동이 모두 한결같이 쉬운 것은 아니다. 그 중에는 아주 뛰어난 재능과 지력을 요구하는 것도 있으며, 이러한 우수성 자체가 값어치를 낳는다. 예술가, 학자, 시인, 정치인 등은 그들의 탁월성에 준해서만 평가받으며, 이러한 탁월성은 그들과 다른 사람들 사이의 대등한 관계를 파괴한다. 지식과 재능의 이 최고 권위자들 앞에서 평등의 법칙은 사라진다. 그런데 평등은 절대적인 것이 아니라면 존재하지 않는다. 우리는 시인에서 소설가로, 조각가에서 채석장이로, 건축가에서 석공으로, 화학자에서 요리사 등등으로 내려간다. 능력은 등급지어지고, 목目과 속屬과 종種으로 세분된다. 재능의 양극단은 중간 단계의 재능들에 의해서 연결된다. 인류는 거대한 계서제를 이루며, 이 계서제 안에서 개인은 다른 사람과의 비교에 의해 자신을 평가하고 자신이 생산한 것에 대해 사람들이 매긴 값어치에서 자기의 진가를 찾는다.

이러한 반론은 늘 만만찮게 보였다. 그것은 경제학자들뿐만 아니라 평등의 주창자들에게도 거추장스러운 걸림돌이 된다. 그것은 전자를 엄청난 오류 속에 몰아넣었으며, 후자로 하여금 믿기 어려운 정도의 어설픈 말을 내뱉게 했다. 그라쿠스 바뵈프(G. Babeuf, 1760~1797, 프랑스의 혁명가, 평등주의 음모 혐의로 처형됨-옮긴이)는 모든 우월성을 〈단호히 배격하고〉 심지어는 〈사회적 재앙으로 고발하기〉를 원했다. 자신이 원하는 공동체의 건물을 짓기 위해 그는 모든 시민들을 가장 키가 작은 이의 수준으로 낮추었다. 우리는 무지한 유권자들이 지식의 불평등을 배척하는 것을 봐왔으며, 나로서도 언젠가 누군가가 미덕의 불평등에 맞서 들고 일어나더라도 놀라지 않을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추방당했고, 소크라테스는 독약을 마셨으며, 에파미논다스(Epaminondas, 기원전 418~362, 테베의 장군, 정치가-옮긴이)는 방탕하고 우둔한 대중선동가들보다 이성과 덕망에서 앞선다는 이유로 재판정에 섰다. 맹목적이고 부에 짓눌린 대중에게 재산의 불평등이 새로운 압제자의 출현을 두려워할 이유를 주는 한, 이러한 어리석은 짓은 되풀이될 것이다.

우리 주변 아주 가까운 데서 눈에 띄는 것보다 더 기괴한 것은 없으리라. 그리고 때로는 진실 그 자체야말로 가장 그럴듯한 법이다. 장 자크 루소는 〈우리가 매일 보고 지나치는 것을 한 번이라도 제대로 관찰하려면 많은 철학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그리고 달랑베르(D'Alembert, 1717~1783, 프랑스의 계몽철학자-옮긴이)는 〈어디서나 사람들에게 드러난 것처럼 보이는 진실도, 주의를 기울여 보지 않는 한 사람들의 주목을 끌지 못한다〉고 말했다. 경제학자들의 족장 격인 세Say - 나는 두 인용문을 세에게서 빌렸다 - 는 이 인용문들을 잘 선용했을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장님을 비웃는 자는 안경을 껴야할 것이며, 그를 알아본 자도 근시안에 불과하다.

놀라운 일이로다! 사람들을 그토록 놀라게 한 것이 평등에 대한 반론이 아니라 평등의 조건이라니! 자연의 불평등이 평등의 조건이라니! 이 무슨 궤변인가! 내가 착각하는 것으로 사람들이 오해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 나는 내 주장을 다시 되풀이한다. 즉 능력의 불평등은 재산의 평등의 〈필수〉 조건이라고.

사회에서는 두 가지 사실, 즉 〈기능〉과 〈관계〉를 구별해야 한다.

⑴ 〈기능〉 노동하는 자는 누구나 자기의 맡은 바 일을 완수할 능력이 있는 것으로 간주된다. 즉 일상적인 말로 표현하자면, 모든 수공업자는 자기의 일métier을 알아야만 한다. 노동자가 자기의 일을 충분히 숙지하므로 여기에서는 기능의 담지자와 기능 사이에 등식이 성립한다.

인간 사회에서 기능들은 서로 비슷하지 않으며, 따라서 여러 가지 능력들이 존재해야 한다. 게다가 어떤 기능들은 더 큰 지성과 능력을 요구하며, 따라서 우수한 정신과 재능을 갖춘 사람들이 존재하기 마련이다. 왜냐하면 성취해야 할 일이 필연적으로 수완가를 부르기 때문이다. 필요는 관념을 낳고, 이 관념은 생산자를 만든다. 우리는 우리의 감각이 불러일으키는 것, 그리고 우리의 지성이 스스로 자문하는 것 외에는 알지 못한다. 우리는 깊이 깨달은 것만을 열렬하게 원하며, 우리가 잘 깨달을수록 더욱더 잘 생산하게 된다.

이와 같이 기능은 필요에 의해, 필요는 욕구에 의해, 그리고 욕구는 즉각적인 지각과 상상에 의해 주어지므로, 상상을 담당하는 지성 역시 생산 기능을 담당하는 셈이다. 따라서 해야 할 어떠한 노동도 노동자보다 우월하지 않다. 한마디로 말하자면, 기능이 기능의 담지자를 부르는 것이라 할지라도, 현실에서는 기능의 담지자가 기능에 앞서 존재한다.

그런데 자연의 경제를 우러러보자. 우리가 안고 태어났으나 우리 개인들의 고립된 힘만으로는 도저히 만족시킬 수 없는 이 무수한 필요들에 대하여, 자연은 개체에게는 주어지지 않은 힘을 집단espèce에게 주지 않았는가. 여기에서 〈업무의 전문화〉에 근거한 원리, 즉 〈분업〉의 원리가 나온다.

게다가, 어떤 필요들은 충족되려면 인간의 지속적인 창조를 요구하는 반면에, 어떤 다른 필요들은 단 한 명의 노력만으로도 몇 백만 명을 그것도 몇 세기 동안이나 충족시킬 수 있다. 예를 들면, 의복과 식량의 필요는 끝없는 재생산을 요구한다. 반면에, 우주 체계에 대한 지식은 단 두세 명의 우수한 사람에 의해서 영구히 획득될 수 있다. 이를테면 하천의 영속적인 흐름은 우리의 통상을 유지하고, 우리의 기계를 돌린다. 그러나 태양은 하늘 한복판에서 홀로 세상을 비춘다. 자연은 노동자나 목자들을 창조해 내듯이 그렇게 많은 플라톤, 베르길리우스(Vergilius, 기원전 70~19, 고대 로마의 시인-옮긴이), 뉴턴, 퀴비에Cuvier 등을 창조할 수도 있었지만 그렇게 하기를 원치 않는다. 자연이 원하는 바는 천재의 희소성을 천재가 만들어 낸 생산물들의 내구력에 비례시키는 일이며, 동시에 능력들의 수를 각각의 충분함 여부에 따라 조절하는 일이다.

나는 여기서 사람들의 재능과 지성의 차이가 우리의 개탄할 문명에서 유래하는 것인지 그리고 사람들이 오늘날 〈능력의 불평등〉이라고 부르는 것이 더 나은 조건에서라면 사실 〈능력의 다양성〉에 다름 아닌 것인지를 묻고자 하지 않는다. 최악의 입장에 서서, 나는 내가 사람들을 기만하려 하거나 난점을 회피하려 한다는 비난을 사지 않기 위하여, 사람들이 원하는 만큼의 재능의 온갖 불평등이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고자 한다.[15] 평준화를 좋아하는 어떤 철학자들은 지력은 누구나 대등하며 차이점은 교육에서 나온다고 주장한다. 고백컨대, 나는 이러한 학설에 동의하지 않는다. 더욱이 이러한 학설이 설령 진실이라고 할지라도, 그것이 주장하는 것과는 정반대의 결론에 이른다. 왜냐하면, 모든 능력들이 다 균등하다면, 그 능력들이 어느 정도까지 힘을 다하든 간에(그도 그럴 것이 어느 누구도 강제당하지 않으므로), 가장 잘 보상받아야 할 것은 조야하고 거칠며 때로는 매우 힘겨운 기능들일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는 〈각자의 성취에 따라 각자의 몫을〉이라는 원리에 못지않게 평등의 원리에도 어긋나는 것이다. 그와 반대로 다른 사회를, 즉 모든 종류의 재능이 필요의 수에 비례하고 기능의 계서제를 존중하면서도 생산자 개개인에게 자신의 전문성에 따라 생산할 것만을 요구하는 그러한 사회를 내 눈앞에 제시해 보라. 그러면 나는 거기에서 재산의 평등을 추론해낼 것이다.

이것이 나의 두 번째 요점이다.

⑵ 〈관계〉 노동의 요소를 다루면서, 나는 같은 종류의 생산적 봉사에서는 사회적 과업을 수행하는 능력이 누구에게나 주어져 있기 때문에 개개인의 힘의 불평등이 보상의 불평등을 낳는 근거가 될 수 없다는 사실을 보여주었다. 그럼에도 어떤 능력들은 어떤 종류의 봉사에는 전혀 유용해 보이지 않으며, 인간의 재능을 돌연 특정한 종류의 생산물에만 제한한다면 즉시로 수많은 무능력이 생겨날 것이고, 따라서 엄청난 사회적 불평등이 나타날 것이라고 말하는 것은 정당하다. 그러나 내가 구태여 말하지 않아도 누구나 재능의 다양성이 이러한 난점을 방지해 준다는 사실을 알 것이다. 이것은 매우 자명한 진실이므로 여기서 더 거론할 필요가 없다. 따라서 문제는, 한 가지 같은 기능을 수행하는 노동자들이 서로 평등하듯이 기능들 역시 서로 평등한가를 입증하는 일로 귀착된다.

사람들은 내가 천재성, 지식, 용기 등을 거부하는 것에, 달리 말하자면 세상 사람들이 감탄해 마지않는 모든 우월성들, 위엄에 대한 경의, 권력과 부에서 오는 영예 따위를 거부하는 것에 놀란다. 그러나 거부하는 것은 내가 아니다. 그것을 거부하는 것은 바로 경제이고, 정의이며, 자유이다. 자유! 이 논의에서 처음으로 나는 그 이름을 일깨운다. 자유로 하여금 스스로 변론에 나서게 하고 자신의 승리를 찾도록 하자.

모든 거래는 생산물이나 용역의 교환을 목적으로 하므로 〈상행위〉로 규정할 수 있다.

상거래commerce를 말하는 자는 동등한 가치의 교환을 말한다. 그도 그럴 것이 가치가 동등하지 않고 손해를 본 계약당사자가 그 사실을 알아차린다면, 그는 교환에 동의하지 않을 것이며 상거래란 이루어질 수 없기 때문이다.

상거래는 자유로운 사람들 사이에서만 이루어진다. 물론 강압과 사기에 의해서 거래가 이루어질 수도 있지만 거기에는 상거래란 존재하지 않는다.

자유롭다는 것은 이성과 능력을 향유하며 열정에 눈이 멀지 않고 두려움에 강제되거나 방해받지 않으며 허위에 기만당하지 않는다는 것을 말한다.

그런데 어떤 교환에서나 계약당사자들 중 한 쪽이 다른 한 쪽에 손해를 끼치고서는 아무것도 얻을 수 없다는 일종의 도덕적 의무가 존재한다. 즉 상거래가 정당하고 진실 되기 위해서는 모든 불평등에서 벗어나야만 한다는 것이다. 이것이야말로 상거래의 첫 번째 조건이다. 두 번째 조건은 상거래가 자발적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즉 당사자들끼리 자유롭고 충분한 이해를 가지고 거래해야 한다.

따라서 나는 상거래 또는 교환을 일종의 사회적 행위로 정의한다.

주머니칼을 얻기 위해 자기 마누라를 팔고, 유리알을 얻기 위해 아이들을 팔며, 심지어 술 한 병을 얻기 위해 자기 몸을 파는 흑인은 자유롭지 않다. 그가 거래하는 인육 상인은 그와 한동아리가 아니라 그의 적이다.

빵 한 조각을 얻기 위해 온몸을 바쳐 일하고, 마구간에서 자기 위해 궁궐을 짓고, 누더기를 걸치기 위해 아주 비싼 천을 짜고, 아무것도 없이 지내기 위해 모든 것을 생산하는, 문명사회의 노동자들은 자유롭지 않다. 그가 몸 바쳐 일하는 주인은 임금과 용역의 교환에 의해 그와 한동아리가 되는 것이 아니라 그의 적이다.

사랑으로 조국에 봉사하는 것이 아니라 두려움에 끌려 조국에 봉사하는 병사는 자유롭지 않다. 그의 동지들, 그의 상관들, 장관 또는 군사재판 기구들, 이 모두가 그의 적이다.

토지를 빌린 농민, 자본을 빌린 실업가, 통행세, 염세鹽稅, 특허세, 영업세, 인두세, 동산세 등등을 바치는 납세자, 그리고 이들을 대표해서 표결하는 대의원, 이들 모두는 지성도 자신의 행동에 대한 재량도 갖고 있지 않다. 그들의 적은 바로 소유자들, 자본가들 그리고 정부이다.

사람들에게 자유를 주고 그들의 지성에 불을 밝혀서 자신들이 맺은 계약의 의미를 알도록 하라. 그러면 당신은 재능과 지식의 우월성에 조금도 구애됨이 없이 가장 완벽한 평등이 그들 사이의 교환을 주재하는 것을 볼 수 있다. 그리고 당신은 상업적 사고의 범주에서는, 즉 사회의 영역에서는 우월성이란 단어가 아무 의미도 갖지 못함을 알 수 있을 것이다.

호메로스가 내게 자신이 쓴 시를 읊어준다고 하자. 나는 이 숭고한 천재에게 귀를 기울인다. 단순한 목자요 천한 일꾼인 나는 그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다. 사실, 작품과 작품을 비교한다면, 『일리아드』에 견주어 볼 때 내가 만든 치즈나 내가 만든 누에콩이 무슨 가치가 있겠는가? 그러나 그의 불후의 시를 대가로 호메로스가 내게서 가진 것 모두를 빼앗아가고 나를 노예로 삼으려 한다면, 나는 그의 노래를 듣는 즐거움을 포기하고 그를 물리칠 것이다. 나는 『일리아드』를 안 들으면 그만이고, 정 필요하다면 『아이네이스』를 기다릴 수 있다. 반면에 호메로스는 내가 만든 생산물 없이는 단 하루도 버틸 수 없다. 그러므로 호메로스로 하여금 내가 제공해야 하는 아주 보잘 것 없는 것이라도 받도록 하자. 그리고 나는 그의 시를 통해 배우고, 용기를 얻고, 위안을 받도록 하자.

당신은 외칠 것이다 : 뭐라고! 인간과 신을 노래하는 자의 대가가 이것이라고! 수치와 고통이 따르는 은전恩典이라니! 이 무슨 야만스러운 관용인가! 소리치지 마시기 바라오. 소유는 시인을 크로에수스(Croesus, 기원전 6세기 리디아의 왕, 전설적인 부호-옮긴이)로 만들기도 하고 거지로 만들기도 한다. 평등만이 시인에게 영예를 부여할 줄 알고, 갈채를 보낼 줄 안다. 그렇다면 무엇이 문제인가? 노래하는 자의 권리와 듣는 자의 의무를 규정하는 일이다. 그런데 이 문제를 해결하는 데 아주 중요한 한 가지 사항을 유의하자. 즉 파는 자와 사는 자, 두 당사자는 모두 자유로우며 그 순간부터 각자의 권리 주장은 아무 효과가 없다는 사실, 그리고 한 쪽이 자신의 시에 대해 다른 한 쪽이 자신의 은전에 대해 가질 수 있는 올바른 또는 과장된 의견은 계약 조건에 아무 영향을 미치지 못한다는 사실을 말이다. 우리는 판가름 내리는 기준을 재능에 대한 고려가 아니라 생산물에 대한 고려에 두어야 한다.

아킬레우스(『일리아드』에 나오는 그리스의 영웅-옮긴이)의 시인이 마땅한 보수를 얻기 위해서는 우선 자신을 상대방에게 납득시키는 일부터 시작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러고 나서야 그의 시와 얼마간의 급료 사이의 교환은 자유로운 행위이자 동시에 정당한 행위가 될 것이다. 즉 시인의 급료는 그의 생산물과 동일해질 것이다. 그렇다면 이 생산물의 가치는 무엇인가?

우선 나는 『일리아드』 즉 공정하게 보상되어야 할 이 걸작이 실제로 더할 나위 없이 무한한 가치를 갖고 있다고 전제한다. 자유의사에 따라 그 시를 구입할 수 있는 위치에 있는 공중이 그 시를 사기를 원치 않는다고 하자. 그러면 그 시는 교환될 수 없으며, 그 내재적 가치는 조금도 줄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그 교환가치 즉 시의 생산적 효용성은 영零으로 줄어들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한편의 무한無限과 다른 한편의 무無 사이에서 양쪽 모두에 대등한 거리를 두면서 지불해야 할 임금의 액수를 정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도 그럴 것이 모든 권리와 모든 자유가 다 대등하게 존중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달리 말하자면 결정해야 하는 것은 팔린 물건의 내재적 가치가 아니라 상대적 가치인 것이다. 이제 문제는 단순해진다. 즉 이 상대적 가치란 무엇인가? 『일리아드』와 같은 시의 저자에게 돌아가야 할 마땅한 보수는 얼마인가?

이 문제는 정치경제학이 학문으로 정립된 후에 해결해야 할 첫 번째 문제였다. 그런데 정치경제학은 그 문제를 풀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해결 불가능하다고 선언했다. 경제학자들에 따르면, 물건의 상대적 가치 즉 교환가치는 절대적 기준으로 정해질 수 없으며 본질적으로 변화하는 것이다.

세는 말한다. 〈한 물건의 가치는 확정된 양을 가지고 있으나 주어진 순간에만 그러할 뿐이다. 그것의 본성은 끊임없이 변화하고 있으며 장소에 따라 달라진다. 아무것도 그것을 항구적으로 고정시킬 수 없다. 물건의 가치는 욕구와 생산수단들에 기반을 두고 있는데 이 욕구와 생산수단들은 매순간 변화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변화무쌍함이 정치경제학의 제반 현상을 복잡하게 만들며, 때로는 관찰하고 해결하기 어렵게 만든다. 나는 여기에 어떤 치료책도 가져다줄 수 없다. 사물의 본성을 바꾸는 것은 우리의 능력을 넘어서는 일이다.〉

세는 다른 곳에서도 되풀이해서 말하고 있다. 가치는 효용에 토대를 두고 있고, 효용은 온전히 우리의 필요, 변덕, 기분 따위에 따라 달라지므로, 가치는 의견만큼이나 가변적이라고. 그런데 정치경제학은 가치 및 그 가치의 생산, 분배, 교환, 소비에 대한 과학이다. 교환가치가 절대적인 방식으로 결정될 수 없는 것이라면, 어떻게 정치경제학이 가능하다는 말인가? 그것이 어떻게 과학일 수 있는가? 경제학자 두 사람이 서로 마주 쳐다보면서 어찌 웃지 않을 수 있겠는가? 어떤 면에서 이들이 감히 형이상학자들과 심리학자들을 비웃을 수 있는가? 뭐라고! 데카르트라는 어떤 어리석은 이는 철학은 과학이라는 건물을 지을 수 있는 어떤 부동의 토대(aliquid inconcussum)를 필요로 한다고 생각했으며 고지식하게도 그것을 찾았다. 그런데 경제학의 위대하고도 위대한 신 헤르메스Hermes인 세는 정치경제학은 과학이라는 이 엄숙한 주제를 부연 설명하는 데 책의 반을 할애하고 나서, 이 과학은 그 대상을 규정할 수 없다고 용기 있게 단언한다. 이것은 정치경제학은 원리도 토대도 없다는 말과 매한가지가 아닌가! 따라서 고명하신 세는 과학이란 무엇인가를 모르고 있으며 그가 말하려는 문제를 모르고 있다.

세가 든 예는 나름대로 결실을 맺었다. 정치경제학은 그것이 현재 다다른 지점에서 볼 때 존재론과 유사하다. 결과와 원인에 대해서 말하면서도 아무것도 알지 못하고 아무것도 설명하지 못하며 아무 결론도 맺지 못한다. 경제법칙들이라는 이름으로 장식한 것은 몇 가지 흔해 빠진 일반론으로 환원된다. 이 일반론에 겉멋 부리는 문체와 전문용어로 옷을 입히면 무언가 심오한 인상을 줄 수 있다고 믿었던 것이다. 경제학자들이 사회문제들에 대해 내린 해결책에 대해 말할 수 있는 것은 단지, 그들의 땀깨나 흘린 작품들이 가끔 어리석은 짓에서 벗어난다고 할지라도 곧 우스꽝스러운 짓에 빠지고 만다는 사실이다. 지난 25년 동안 정치경제학은 마치 두터운 안개처럼 프랑스를 뒤덮으면서 정신의 비약을 가로막고 자유를 짓누르고 있다.

산업의 모든 창조물은 절대적이고 변하지 않는, 따라서 정당하고 참된 시장가치를 갖는가? - 그렇다.

인간의 모든 생산물은 인간의 다른 생산물과 교환될 수 있는가? - 역시 그렇다.

얼마만큼의 못이 나막신 한 켤레와 맞먹는가?

우리가 이 엄청난 문제를 풀 수만 있다면, 우리는 지난 6,000년 동안 인류가 찾던 사회체제의 열쇠를 쥘 수 있으리라. 이 문제 앞에서 경제학자들은 혼비백산하여 뒤로 물러선다. 읽고 쓸 줄 모르는 농민은 서슴없이 답할 것이다. 같은 시간 안에 같은 비용으로 만들 수 있는 만큼이라고.

따라서 어떤 물건의 절대적 가치는 그 물건에 드는 시간과 비용이다. 모래 속에서 주워 올리는 다이아몬드는 얼마나 가치가 나가는가? - 전혀 가치가 없다. 그것은 인간이 만든 생산품이 아니다. 그 다이아몬드를 다듬고 세공한다면 얼마나 가치가 나갈까? - 직공에게 든 시간과 비용 만큼이다. - 그러면 다이아몬드는 왜 그리도 비싼가? - 사람들이 자유롭지 못하기 때문이다. 사회는 가장 희소한 물건들도 가장 흔한 물건들과 마찬가지로 누구나 그것을 얻어 향유할 수 있도록 교환과 분배를 규제해야만 한다. - 그러면 의견의 가치는 무엇인가? - 거짓말, 불의, 도둑질이다.

이렇게 보면, 모든 사람들의 합의를 이끌어 내기가 쉬워진다. 우리가 무한한 가치와 무가치 사이에서 찾는 중간 항이 모든 생산물에 대하여 그것의 생산에 들어간 시간의 비용의 합계로 표현된다면, 원작자가 30년의 노동과 여행이니 책자 등등의 비용으로 1만 프랑을 들인 시詩 한 편에 대해서 노동자의 평균적 봉금 30년 치와 1만 프랑의 보상을 지불해야만 한다. 그 총액을 5만 프랑이라고 가정하자. 이 걸작을 손에 넣은 사회가 100만 명을 수용하고 있다면, 나의 부담액은 5상팀인 셈이다.

이것은 몇 가지 의견을 일깨운다.

⑴ 같은 생산물이라도 시기와 장소에 따라 투자된 시간과 경비가 어느 정도 다를 수 있다. 이 점에서 가치의 양이 변동한다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이러한 변동은, 가치 변동의 원인들 안에 생산수단, 취향, 변덕, 기호, 의견 따위를 마구 뒤섞어 놓은 경제학자들이 말하는 변동이 아니다. 요컨대, 어떤 물건의 참된 가치는 화폐적 표현에서는 변할 수 있다고 할지라도 대수적 표현에서는 불변인 것이다.

⑵ 수요를 가진 모든 생산물은 그것에 들어간 시간과 경비만큼,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게 지불되어야 한다. 수요가 없는 모든 생산물은 생산자의 손실이며 상업적으로는 아무런 가치가 없다.

⑶ 평가의 원리에 대한 무지, 또 대개의 경우 그 원리를 적용하는 데 따르는 어려움은 상업상의 기만의 원천이며 재산의 불평등을 가져오는 가장 유력한 원인들 중 하나이다.

⑷ 어떤 산업들, 어떤 생산물들의 값을 지불하는 경우, 재능이 희소할수록, 생산물이 비쌀수록, 예술과 과학의 종류가 다양할수록, 그만큼 인구가 더 많은 사회를 필요로 한다. 예를 들자면, 50명의 농사꾼으로 이루어진 사회가 학교 선생님 한 명을 부양할 수 있다면, 구두수선공 한 명에는 100명이, 편자공 한 명에는 150명이, 재단공 한 명에는 200명 등등이 필요하다. 농사꾼의 수가 1,000명, 1만 명, 10만 명 등으로 늘어난다면, 그 수가 증가하는 데 비례해서 우선적으로 필요한 공무원들의 수도 같은 비율로 늘어야만 한다. 따라서 가장 높은 직능들은 가장 힘 있는 사회들에서만 가능하게 된다.[16] 바로 이 점에서만 능력의 차이가 나타난다. 천재성과 그 영예의 표지는 거대한 민족에게서만 탄생하고 또 발전할 수 있다. 그러나 천재의 이 생리적 조건은 그의 사회적 권리에는 아무것도 보태지 않는다. 그렇기는커녕, 천재가 뒤늦게 나타난다는 사실은 경제적, 시민적 질서에서는 가장 높은 지성도 부의 평등에, 즉 지성보다 앞섰고 지성이란 그것의 꼭대기 장식일 뿐인 바로 이 평등에 종속된다는 것을 보여준다.

이러한 사실은 우리의 자존심을 건드리는 일이지만 엄연한 진실이다. 여기서 심리학이 사회경제학을 뒷받침해 주고, 물질적 보상과 재능 사이에는 어떤 공통의 척도도 존재하지 않으며 이런 조건 아래서 모든 생산자들의 조건은 평등하다는 점을, 따라서 이 생산자들과 온갖 부류의 재산들 사이의 비교는 불가능하다는 점을 우리에게 일깨워 준다.

사실상, 사람의 손을 거치는 모든 작품은 그 작품에 들어가는 원료와 비교할 때 무한한 값어치를 갖고 있다. 이 점에서, 나막신 한 켤레와 호두나무 줄기 사이의 차이는 스코파스(Scopas, 기원전 5세기 그리스의 조각가-옮긴이)의 조각상과 대리석 한 덩어리 사이의 차이만큼 크다. 뉴턴 같은 이의 정신이 그가 거리와 질량과 운행을 측정하는 데 사용하는 무미건조한 지구의地球儀보다 우월한 바로 그만큼, 가장 단순한 수공업자의 재능은 그가 사용하는 재료보다 우월하다. 당신은 재능과 천재성에 대해 그에 상응하는 영예와 부를 요구한다. 나에게서 촌부로서의 재능을 평가해 다오. 그러면 나는 당신에게서 호메로스의 재능을 평가하리다. 지성을 평가할 수 있는 그 무엇이 있다면, 그것은 바로 지성 그 자체이다. 다양한 여러 유형의 생산자들이 감탄과 찬미의 언사를 서로 주고받을 때 생기는 일이 바로 이것이다. 그러나 서로의 욕구를 충족시킬 목적으로 생산물을 교환하는 일은 어떠한가? 이러한 교환은 재능이나 천재성에 대한 고려와는 관계없이 경제적 추산 아래서만 이루어지는 일이다. 그 교환을 규제하는 법칙은 막연하고 무의미한 감탄이 아니라 차변(借邊, le doit)과 대변(貸邊, l'avoir) 사이의 정당한 균형, 즉 상업적인 산술에서부터 나오는 것이다.

그런데 사고파는 자유가 임금의 평등에 대한 유일한 근거이고, 사회는 권리와는 아무런 관련이 없는 어떤 타성적인 힘에서만 재능의 우월성에 맞선 도피처를 구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다. 이들의 오해를 풀어주기 위해서 나는 왜 모든 능력들에 대해 같은 보수가 지불되어야 하는지를, 그리고 왜 임금의 차이가 부당한지를 설명할 것이다. 나는 사회적 수준에 순응할 의무가 재능의 내재적 속성이라는 점을 보여줄 것이며, 천재의 우월성이라는 바로 그 토대 위에 재산의 평등이라는 원칙을 세울 것이다. 앞에서 나는 모든 능력들 사이에는 임금이 균등해야 한다는 점을 소극적인 차원에서 지지했다. 이제 나는 그 점에 대한 직접적이고 적극적인 이유를 제시할 것이다.

우선 경제학자의 말을 들어보자. 그가 어떻게 추론하는지를, 그리고 정당하게 생각할 줄 아는지를 보는 것은 항상 즐거운 일이다. 게다가 경제학자가 없었다면, 웃음을 자아내는 그의 실수와 눈이 휘둥그레질 추론이 없었다면, 우리는 아무것도 알지 못했을 것이다. 평등은, 경제학자에게는 대단히 역겨운 것이라 할지라도, 사실 정치경제학에서 많은 것을 얻고 있다.

〈어느 의사(원문에는 변호사라고 되어 있으나 이 역시 좋은 예가 아니다)의 가족이 그의 교육에 4만 프랑을 들였다고 했을 때, 이 금액은 그의 머리에 투여된 자본이라고 할 수 있다. 투하된 자본이 앞으로 매년 4,000프랑 정도의 수입을 가져올 것으로 기대해 보자. 의사가 3만 프랑을 번다면, 따라서 자연이 부여한 그의 개인적 능력에서 나오는 수입의 몫은 2만 6,000프랑인 셈이다. 이러한 계산에 따른다면, 이자율을 10%로 할 경우, 자연적 자본은 26만 프랑이 된다. 그리고 그의 가족이 그에게 학비로 제공한 것은 4만 프랑이다. 이 두 가지 자본금을 합한 것이 바로 그의 재산이다.〉(세, 『경제학 강의』 등).

세는 의사의 재산을 두 부분으로 나눈다. 하나는 의사의 교육에 지불된 자본이고, 다른 하나는 그의 개인적 재능에 따른 것이다. 이러한 구분은 정당하다. 이 구분은 사물의 이치에 맞으며 보편적으로 받아들여진다. 이 구분은 또한 능력의 불평등에 대한 중요한 논증의 대전제 구실을 한다. 나는 이 대전제를 아무런 유보조건 없이 받아들인다. 이제 그 결과를 보자.

⑴ 세는 의사의 교육에 들어간 4만 프랑을 그의 대변 쪽에 집어넣고 있다. 하지만 이 4만 프랑은 그의 차변 쪽에 넣어야 한다. 왜냐하면 이 지출은 비록 그를 위해 쓰이기는 했지만 그가 쓴 것이 아니며 따라서 이 4만 프랑을 자기 것으로 하기는커녕 의사는 그것을 자기의 생산물에서 공제하고 빚진 자에게 갚아야 한다. 게다가 세는 자본이 생산적이라는 그릇된 원리에 의거해서 추론하다보니, 그것을 〈상환〉의 대상이 아니라 〈소득〉의 원천으로 보고 있다는 점을 주목하자. 이렇게, 재능의 교육에 들어간 지출은 바로 그 재능이 갚아야만 하는 빚인 것이다. 살아 있다는 바로 그 하나의 사실만으로도 그는 자신이 자라는 데 들어간 것만큼의 액수에 대한 채무자이다. 이는 너무도 자명하고 논박의 여지가 없는 사실이므로, 만일 어느 가정에서 한 아이의 교육에 그의 형제들의 교육보다 2배 또는 3배의 비용이 들었다면, 형제들은 상속재산을 나누기 전에 비례적인 자기 몫을 가질 권리가 있다. 재산이 미성년자들의 이름으로 관리되고 있는 경우라도, 이것은 후견권의 문제에서 어떠한 어려움도 따르지 않는다.

⑵ 재능에 대한 교육비를 상환해야 할 의무에 관해 내가 지금 말한 것에 대해서, 경제학자들은 조금도 개의치 않는다. 그도 그럴 것이 재능을 가진 사람이 자신의 가족을 계승할 경우, 자신이 지고 있는 4만 프랑의 빚에 대한 채권도 상속하게 되며 따라서 그 채권의 소유자가 된다고 이들은 생각한다. 그러나 여기서 우리는 재능의 권리문제를 벗어나서 선점권의 문제와 다시 마주치게 되며, 우리가 앞의 제2장에서 제기한 모든 문제가 다시 나타난다. 선점권이란 무엇인가? 상속이란 무엇인가? 상속권은 누적cumul의 권리인가, 아니면 단순한 선택option의 권리인가? 의사의 아버지는 누구에게서 재산을 얻었는가? 그는 소유권자였는가, 아니면 단순한 용익권자였는가? 그가 부자였다면, 그의 부는 어떻게 설명되는가? 그가 가난했다면, 어떻게 그가 그토록 막대한 지출을 감당할 수 있었는가? 만일 그가 구호금을 받았다면, 어떻게 이 구호금이 자선가에 맞서 채무자에게 유리한 특전을 낳았는가?

⑶ 〈자연이 부여한 그의 개인적 능력에서 나오는 수입의 몫은 2만 6,000프랑이다.〉(세, 앞의 책). 여기서 출발해서 세는 우리 의사의 재능은 26만 프랑의 자본과 맞먹는다고 결론짓는다. 이 능숙한 계산가는 결과를 원칙과 바꾸어 생각하고 있다. 의사가 얻는 수입에 의해 재능을 평가해야 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와는 반대로 재능에 의해 그의 급료가 산정되어야 한다. 왜냐하면 문제의 의사가 자신의 모든 장점에도 불구하고 아무것도 벌지 못하는 때도 있을 수 있기 때문이다. 이 경우에 이 의사의 재능 또는 재산을 영으로 평가해야 한다는 말인가? 유감스럽게도 세의 추론에 따른 결론은 바로 이런 식이다. 명백히 불합리한 결론이다.

그런데 어떤 재능이든 그것을 현금으로 평가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그도 그럴 것이 재능과 돈은 서로 공통의 척도로 측정될 수 없기 때문이다. 납득할 만한 어떤 이유로 의사가 농민보다 두 배, 세 배 혹은 백 배의 수입을 올려야 한다고 증명할 수 있겠는가? 이것은 탐욕, 필요, 압제 따위에 의해서가 아니면 해결된 적이 없는 아주 어려운 문제이다. 재능의 권리는 이런 식으로 결정되어서는 안 된다. 그러면 어떻게 결정되는가?

⑷ 우선 나는 의사가 어떤 다른 생산자보다 불리하게 보수를 받아서는 안 되며 다른 사람들과 대등한 수준 아래에 머물러서도 안 된다고 말한다. 나는 이 점을 줄기차게 입증할 것이다. 그러나 나는 의사가 이 평등의 수준을 넘어서도 안 된다고 덧붙인다. 왜냐하면 그의 재능이란 그가 한 번도 지불하지 않은 공동의 재산이며 그는 그 공동의 재산에 대한 영원한 채무자이기 때문이다.

모든 생산도구의 창출이 집합적인 힘의 결과인 것과 마찬가지로, 한 인간에게 있는 재능과 학문은 보편적 지성과 일반적 지식의 소산이며, 이는 많은 거장들에 의해 그리고 상대적으로 열등하나 근면한 많은 사람들의 도움을 받아 서서히 축적된 것이다. 의사가 자신의 선생님에게 지불하고, 자기 책과 자격증의 값을 치르고, 모든 비용을 다 청산했을 때에도, 그는 자신의 재능에 대해서는 값을 치르지 않았다. 이는 자본가가 노동자들에게 봉급을 지불하면서도 자신의 영지와 성城에 대해서는 값을 치르지 않은 것과 마찬가지이다. 재능을 가진 이는 자기 자신 안에서 유용한 도구를 생산해 내는 데 기여했다. 따라서 그는 공동점유자이다. 그는 소유자가 아닌 것이다. 그에게는 자유로운 노동자와 축적된 사회적 자본이 동시에 존재한다. 노동자로서 그는 자신의 본래의 능력인 도구의 사용이나 기계의 조작에 관여한다. 자본으로서 그는 자기 자신의 것이 아니다. 그는 자신을 위해서가 아니라 다른 이들을 위해서 이용된다.

재능의 우월성이라는 것이 타인의 희생을 요구할 수 있는 어떤 근거도 되지 못한다는 사실을 안다면, 사람들은 자신의 봉급을 공통의 수준 이상으로 올리기보다는 차라리 낮추는 동기를 재능에서 찾아야 하리라. 모든 생산자는 교육을 받는다. 모든 노동자는 재능이자 능력 즉 달리 말하자면 집합적 재산이다. 그러나 그 재산을 창출하는 데 드는 비용은 같지가 않다. 농사꾼이나 장인을 길러내는 데는 교사와 시간과 교양이 그리 많이 필요하지 않다. 창조의 노고, 굳이 말하자면 사회적 회임 기간은 능력의 탁월성에 비례한다. 그러나 의사, 시인, 예술가, 학자는 아주 소수만을 그것도 더디게 생산하는 반면에, 농사꾼의 생산은 훨씬 실패 부담이 적고 몇 년을 기다릴 필요도 없다. 따라서 인간의 능력이 무엇이든 간에, 그 능력이 창출되자마자, 인간은 이미 자기 자신의 것이 아니다. 근면한 손이 빚어낼 재료와 같이, 인간은 생산devenir의 능력을 지녔을 뿐이며, 사회가 그를 존재être로 만들었다. 도자기가 도공에게 〈나는 있는 그대로다. 나는 당신에게 아무 것도 빚진 것이 없다〉고 말할 수 있겠는가?

예술가, 학자, 시인은 사회가 그들에게 오직 학문과 예술에만 전념하도록 허용해 주었다는 바로 그 사실만으로도 정당한 보상을 받고 있다. 따라서 사실 그들은 자신들을 위해서가 아니라 자신들을 길러내고 온갖 다른 부담을 면제해 준 사회를 위해서 일하는 것이다. 사회는 엄격히 말해서 산문이나 시, 음악이나 회화 없이도, 즉 달과 북극성의 운행에 대한 지식 없이도 살 수 있다. 그러나 사회는 먹을 것이나 잠잘 곳이 없이는 단 하루도 살 수 없다.

물론, 인간은 빵만으로는 살 수 없다. 복음서에 따르자면, 인간은 〈하느님의 말씀에 따라 살아야〉 한다. 즉 선을 사랑하고 실천하며, 미를 알고 즐기며, 자연의 경이를 탐구해야 한다. 그러나 인간이 영혼을 함양하기 위해서는 육체를 보존하는 일부터 시작하지 않으면 안 된다. 앞의 의무가 고귀함에 의해 인간에게 요구되듯이, 뒤의 의무는 필요에 의해 인간에게 요구된다. 사람들을 매혹시키고 훈육하는 일이 영예이듯이, 사람들을 먹여 살리는 일도 귀중하다. 따라서 사회가 분업의 원리에 충실하여 구성원 중 한 사람에게 예술이나 학문의 사명을 맡기고 공통의 노동을 면제해 줄 때, 그는 자신이 생업에서 면제받은 모든 것에 대하여 사회에 보상할 책임을 진다. 사회가 바라는 것은 다만 이것뿐이다. 만일 그가 더 이상을 요구한다면, 그의 봉사를 거부하고 그의 주장을 무효로 할 것이다. 이렇게 되면, 그의 천성에 맞지 않는 노동을 살기 위해서 감당해야만 할 때, 천재는 무기력을 느끼고 최악의 생존 상태로 떨어질 것이다.

어느 유명한 여류 성악가가 러시아의 여황제 예카테리나 2세에게 2만 루블을 요구했다고 한다. 〈그 돈은 내가 장군들에게 주는 돈보다 더 많은 양이오〉라고 예카테리나는 말했다. 〈폐하, 장군들에게 노래를 시키시지요〉라고 상대는 답했다.

예카테리나 2세의 러시아보다 더 강국인 프랑스가 라셀Rachel 양에게 〈100루이(louis, 옛 금화, 1루이는 20프랑-옮긴이)를 받고 출연하든지 아니면 면화를 짜시오〉라고 하거나, 뒤프레Duprez 씨에게 〈2,400프랑으로 노래하든지 아니면 포도밭에 가시오〉라고 말했다고 하자. 비극배우 라셀 양과 성악가 뒤프레가 무대를 떠날 것으로 당신은 생각하는가? 그렇게 된다면, 라셀 양과 뒤프레 씨가 제일 먼저 후회할 것이다.

하셀 양은 코메디-프랑세즈Comédie-Française에서 연봉 6만 프랑을 받는다고 한다. 그녀와 같은 재능인에게는 보잘 것 없는 보수이다. 왜 10만 프랑, 20만 프랑이 되어서는 안 되는가? 왜 황실 경비와 같아서는 안 되는가? 이 무슨 째째한 일인가! 라셀 양과 같은 예술인과 값을 흥정하려 하는가?

극단 측은 답할 것이다. 손해를 보지 않고는 더 이상 지불할 수 없으며, 젊은 단원의 뛰어난 재능은 인정하지만 보수를 결정하면서 극단의 수입과 지출의 명세를 고려하지 않을 수 없다고 말이다.

이 모든 것은 정당하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은 내가 앞에서 말한 것을 확인해 줄 따름이다. 즉 예술가의 재능은 무한할 쉬 있지만, 그의 금전상의 요구는 필연적으로 제한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한편으로는 자기에게 돈을 지불하는 사회에게 그가 가져다준 효용성에 준해서, 다른 한편으로는 사회 자체의 자원의 양에 의해서 제한되는 것이다. 달리 말하자면 파는 이의 요구는 사는 이의 권리에 의해 균형을 이루게 된다.

라셀 양은 테아트르-프랑세즈Théâtre-Français에 6만 프랑 이상의 수입을 올리게 해준다고들 한다. 나는 그 말에 여전히 동의한다. 하지만 그렇다면 나는 극장 측을 비난한다. 테아트르-프랑세즈는 누구에게서 돈을 거두는가? 실로 자유로운 호사가들로부터이다. 옳다. 그러나 이 호사가들이 극단에 지불할 모든 돈을 얻어내는 노동자들, 세입자들, 소작인들, 이자와 담보로 돈을 빌리는 채무자들, 이들은 자유로운가? 그리고 이들의 생산물의 대부분이 자신들과 상관없이 극장에서 소비되고 있을 때, 당신은 이들의 가족이 굶고 있는 일은 없으리라고 나를 안심시킬 수 있는가? 프랑스 국민이 이들 예술가, 학자, 공무원에게 줄 급여에 대해 곰곰이 생각해 보고 실정을 알고 난 후에 완전히 자신의 의사를 표명하기 전까지는, 라셀 양와 그녀의 모든 동료들이 받는 보수는 오만심을 포상하고 방종을 고무하기 위해 폭력으로 탈취된 강제 헌금일 뿐이리라.

우리가 기만적인 거래를 받아들이고 노동자가 권력의 위압과 재능의 이기심에 눌려 한가한 이들의 호기심을 충족시키는 데 보수를 지불하는 것은 우리가 자유롭지 못하며 충분히 개명되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우리는 여론이 조장하고 갈채를 보내는 이 기괴한 불평등들에 늘 분개하며 사는 것이다.

국민 전체가 그리고 오직 국민만이 이들 작가, 학자, 예술가, 공무원 등에게 보수를 지불한다. 그 보수가 어떤 경로를 통해 이들에게 전달되든지 간에 말이다. 어떤 기준으로 국민은 이들에게 지불하는가? 평등의 기준에 의해서다. 나는 재능의 가치에 대한 평가를 통해 이를 입증했다. 다음 장에서 나는 일체의 사회적 불평등의 불가능성이라는 것에 의해 이를 확증할 것이다.

지금까지의 논의를 통해 우리는 무엇을 입증했는가? 정말이지 우스꽝스러워 보일 정도로 아주 단순한 아래와 같은 사실들이다.

여행객이 자신이 지나가는 대로를 자기 것으로 하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로, 농사꾼은 자기가 씨를 뿌리는 밭을 자기 것으로 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노동자가 자신이 들인 노고를 이유로 자신이 이용하는 재료를 자기 것으로 한다면, 그 재료를 이용하는 모든 이들은 마찬가지 자격으로 소유자가 된다.

물질적이든 정신적이든 모든 자본은 집합적 소산이며 따라서 집합적 재산을 이룬다.

강자는 약자의 노동을 강압적으로 침해할 권리가 없으며, 유능한 자는 단순한 자의 선의를 이용할 권리가 없다.

마지막으로, 누구나 자신이 원하지 않는 물건을 사도록 강요당하지 않으며 자신이 사지 않은 물건의 값을 지불하도록 강요당하지 않는다. 따라서 한 생산물의 교환가치는 사는 이의 의도나 파는 이의 의도를 척도로 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에 들어간 시간과 비용을 척도로 하기 때문에 소유는 누구에게나 항상 평등하다.

이것은 너무나도 턱없는 진실들이 아닌가? 물론이다! 아무리 턱없는 진실처럼 보여도, 독자여, 당신은 이보다 더 진부하고 턱없는 일들을 볼 것이다. 그도 그럴 것이 우리는 기하학자들과는 반대 방향으로 가고 있으니 말이다. 기하학자들의 경우, 이들이 앞으로 나가면 나갈수록 문제는 더욱 어려워진다. 이와 반대로 우리는 가장 추상적인 명제들로부터 시작해서 공리公理로 끝을 맺을 것이다.

그러나 이 장을 끝맺기 전에 경제학자도 법학자도 꿈꿔보지 못한 엄청난 진실들 중 하나를 드러내 보자.

제8절 정의의 질서 안에서는 노동은 소유를 파괴한다.

이 명제는 앞선 두 절의 결론이다. 우선 이를 요약해보자.

고립된 인간은 자신의 욕구의 아주 작은 부분만을 만족시킬 수 있을 뿐이다. 그의 모든 힘은 사회 안에 있으며 모든 사람들의 노력의 현명한 결합 속에 있다. 노동의 분업과 협업은 생산물의 양과 종류를 증대시키며, 기능의 전문화는 소비재의 질을 높인다.

따라서 수천의 여러 생산자들의 생산품으로 살지 않는 자는 한 명도 없다. 사회 전체로부터 소비 물자를 받지 않으며, 그 소비 물자와 더불어 재생산 수단을 받지 않는 노동자는 한 명도 없다. 〈나는 내가 소비하는 것을 나 혼자서 생산한다. 나는 그 누구도 필요하지 않다〉라고 누가 감히 말할 수 있겠는가? 옛 경제학자들이 유일한 참된 생산자로 간주한 농사꾼, - 농사꾼은 석공, 목공, 재단사, 제분업자, 제빵업자, 정육업자, 향료상, 대장장이 등의 덕택으로 주거를 마련하고, 가구를 들이고, 의복을 입고, 먹을 것을 구하고, 몸을 돌본다 - 말하자면 이 농사꾼은 혼자서 생산한다고 뽐낼 수 있을까?

각자의 소비는 모든 사람에 의해서 주어진다. 마찬가지로 각자의 생산은 만인의 생산을 전제로 한다. 한 생산물은 반드시 다른 생산물을 동반한다. 고립된 산업이란 불가능한 일이다. 농사꾼의 수확은, 다른 이들이 그를 위해 헛간, 수레, 쟁기, 의복 따위를 만들어주지 않았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학자에게 서적상이 없었다면, 출판업자에게 주물공과 기계공이 없었다면, 그리고 이들 모두에게 또 다른 많은 일꾼들이 없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진부한 말을 늘어놓는다고 핀잔할 터이니 더 이상 길게 명단을 나열하지 않겠다. 나열하기란 너무 쉬운 일이니 말이다. 모든 산업은 상호적인 관계에 따라 하나의 단일한 묶음으로 결합되어 있다. 모든 생산은 서로에게 목적이 되고 또 수단이 된다. 재능의 모든 다양성이란 열등한 것에서 우수한 것에 이르는 일련의 변용태變容態일 뿐이다.

그런데 개개 생산물에 대한 모두의 참여라는 이 논박할 수 없는 엄정한 사실은 모든 개개의 생산을 공동의 것으로 만드는 결과를 낳는다. 따라서 생산자의 손을 벗어난 개개의 생산물은 사회에 의해서 미리 저당 잡힌 셈이다. 생산자 자신은 자기가 만든 생산물의 아주 작은 부분에 대해서만 권리를 가지며, 그 전체 분모는 사회를 구성하는 개개인의 수와 맞먹는다. 반면에 이 생산자는 자기의 것이 아닌 모든 다른 생산물에 대해 권리를 가지며, 따라서 모든 다른 이들에 맞서 일종의 저당권을 갖는 셈이다. 마찬가지로 다른 이들도 그에 맞서 저당권을 가짐은 물론이다. 그러나 이러한 상호 저당이 결국 소유를 용인해 주기는커녕 점유까지도 파괴한다는 것을 모르는가? 노동자는 자신의 생산물의 점유자조차 아니다. 그가 생산물을 완성하자마자 사회가 즉시 그것을 자기 것이라고 주장한다.

사람들은 말하리라. 그러나 설령 그렇다고 해도, 설령 사회가 개개 노동자에게 자신의 생산물에 대한 등가물을 주기 때문에, 생산물은 생산자 개인에게 속하는 것이 아니라 할지라도, 이 등가물, 이 임금, 이 보상, 이 보수는 그의 소유라고. 이 소유는 정당하다는 것을 당신은 부정하는가라고. 노동자가 자신의 임금을 다 쓰지 않고 절약할 경우 누가 감히 그와 다툴 것이냐고. 노동자는 자기 노동의 값어치에 대한 소유자조차 아닐뿐더러 그것을 결코 마음대로 처분할 수도 없다. 잘못된 정의定義에 속아 넘어가지 말자. 자신의 생산물에 대한 대가로 노동자에게 주어지는 것은 그가 행한 노동에 대한 보수로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해야 할 노동에 대한 지급이자 선불로서 주어지는 것이다. 우리는 생산하기 전에 소비한다. 노동자는 하루 일과가 끝난 다음에 이렇게 말할 수 있으리라. 〈나는 어제의 비용을 지불했다. 내일 나는 오늘의 비용을 지불할 것이다〉라고. 살아 있는 매순간마다 사회의 구성원은 누구나 현재의 계좌에서 가불금을 얻는다. 그는 자기 빚을 갚지 못하고 죽는다. 어떻게 그가 조금이라도 저축을 할 수 있겠는가?

어떤 이는 절약에 대해 말한다. 소유자의 행태이다. 평등 체제에서는 앞으로의 재생산이나 향유를 목적으로 하지 않는 절약은 불가능하다. 왜 그런가? 이 절약은 자본화될 수 없는 만큼 그 즉시로 목적을 상실하게 되고 더 이상 〈궁극 원인〉도 갖지 않기 때문이다. 이 점은 다음 장을 읽으면 더욱 잘 이해될 것이다.

결론을 맺자.

일하는 자는 누구나 사회에 대하여 필연적으로 지불불능 상태로 죽어가는 채무자이다. 소유자는 자신에게 맡겨진 수탁을 부인하고 일수, 월수, 연수로 보관료를 받기를 원하는 불성실한 보관자이다.

우리가 지금까지 제시한 원리들이 몇몇 독자들에게는 여전히 너무 형이상학적으로 보일 수도 있다. 나는 이 원리들을 가장 우둔한 머리로도 알 수 있는 더 구체적이고 흥미진진한 결론들로 가득 찬 형태로 다시 논의할 것이다.

지금까지 나는 소유를 〈배제〉의 능력으로 고찰했다. 이제부터는 〈침해〉의 능력으로 살펴보겠다.

제4장 소유는 불가능하다

소유자들이 내세우는 마지막 논거, 그 막강한 힘으로 그들을 안심시키는 맹렬한 논거는 그들에 따르면 조건의 평등은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조건의 평등은 몽상이라고 그들은 모든 것을 다 아는 표정으로 외친다. 〈오늘 재산을 균등한 몫으로 나누어주자. 그러면 내일 이 평등은 사라질 것이다.〉

터무니없는 확신에 차서 그들이 아무 데서나 늘어놓는 이 진부한 반대론에 그들은 〈아버지에게 영광 있으라(Gloria Patri)〉라는 식으로 다음과 같이 사족을 달기를 잊지 않는다. 〈만일 모든 사람이 평등하다면, 아무도 일하려 하지 않을 것이다.〉

이러한 찬가는 여러 가지 곡조로 울려 퍼진다.

만일 모든 사람이 주인이라면, 아무도 복종하려 하지 않을 것이다.

만일 부자가 없다면, 누가 가난한 자들로 하여금 일하게 하겠는가?

그리고 만일 가난한 자들이 없다면, 누가 부자들을 위하여 일하겠는가? 그러나 우리로서는 더 이상 매도만 당하지 말고 응답을 하는 편이 나을 것이다.

만일 내가 불가능한 것은 바로 소유 그 자체라고 입증한다면, 소유는 모순이고 몽상이며 유토피아라고 입증한다면, 그리고 내가 그것을 형이상학이나 법학의 논증에 의해서가 아니라 수치와 등시고하와 산술에 의해서 입증한다면, 금세 깜짝 놀란 소유자의 공포는 어떠할까? 그리고 독자여, 당신은 이러한 반격을 어떻게 생각할 것인가?

수가 세계를 지배한다(mundum regunt numeri). 이 속담은 항성이나 분자의 세계와 마찬가지로 도덕과 정치의 세계에서도 진실이다. 법의 요소들은 대수학의 요소들과 마찬가지이다. 입법이나 통치는 분류표를 만들고 세력들의 균형을 맞추는 기술에 다름 아니다. 법률학은 산술의 규칙 안에 있다. 이 장과 다음 장은 바로 이 놀라운 원리의 토대를 놓는 데 기여할 것이다. 그때에 거대하고 새로운 행로가 독자의 눈앞에 드러날 것이다. 그때에 우리는 숫자들의 조화 안에서 철학과 과학의 종합적인 통일성을 보기 시작할 것이며, 자연의 이 깊고 엄숙한 단순성 앞에서 감탄과 열정에 가득 차서 최초의 사도처럼 외칠 것이다. 〈진실로, 신은 수와 무게와 양을 가지고 만물을 지으셨노라.〉 우리는 조건의 평등이 가능할 뿐만 아니라 그 외의 다른 것은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조건의 평등에 갖다 붙이는 그 허울 좋은 불가능성은 인간의 천성에 어긋나는 정치 형태인 소유라든가 공동체라는 것 안에서 조건의 평등을 생각하는 데에서 나온다는 사실을 이해할 것이다. 매일매일 우리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심지어 실현 불가능하다고 우리 스스로 확언하는 바로 그 순간에도 이 조건의 평등이 실현되고 있다는 사실을, 우리가 찾아 나서거나 원하지 않았는데도 도처에서 조건의 평등을 세우게 될 순간이 다가오고 있다는 사실을, 그리고 평등과 더불어, 평등 안에서만, 평등에 의해서만, 자연과 진리에 따른 정치 질서가 수립될 것이라는 사실을 우리는 마침내 깨닫게 될 것이다.

인간의 열정이란 얼마나 맹목적이고 완고한가를 이야기하고자 할 때 사람들은, 만일 진리를 부정하는 데에 무엇인가 얻을 것이 있기만 하담녀 누구나 서슴지 않고 산술적 진리의 확실성을 뒤흔들어 놓을 방책을 찾을 것이라고 말하곤 한다. 지금이 바로 그런 진기한 경험을 할 기회이다. 나는 소유를 그 고유한 경구들에 의해서가 아니라 산술에 의거해서 공격한다. 그러니 소유자들로 하여금 나의 계산을 검증할 준비를 하도록 하자. 왜냐하면 그들에게는 안 된 일이지만 나의 계산이 옳다면, 그들이 패한 것이니 말이다.

소유의 불가능성을 증명하면서 나는 소유의 부당성을 증명할 수 있다. 요컨대,

〈정당〉한 것은 하물며 〈유익〉하다.

〈유익〉한 것은 하물며 〈진실〉하다.

〈진실〉한 것은 하물며 〈가능〉하다.

결과적으로, 가능한 것에서 나온 것은 바로 그럼으로써 진실, 유용성, 정당함에서 나온 것이다. 따라서 선험적으로 어느 사물의 정당성 여부를 그 불가능성에 의해 판단할 수 있다. 만일 이 사물이 절대적으로 불가능한 것이라면, 그것은 절대적으로 부당한 것이리라.

소유는 물리적으로 그리고 수학적으로 불가능하다

논 증

공리-소유란 소유자가 자신의 표찰을 붙인 사물에 대해 행사하는 불로소득권이다.

이 명제는 완벽한 의미에서의 공리이다. 왜냐하면,

1. 이것은 결코 정의定義가 아니다. 그도 그럴 것이 이 명제는 소유권이 내포하는 것, 즉 팔고, 교환하고, 양도할 권리, 형태와 내용을 바꿀 권리, 소비할 권리, 파괴할 권리, 사용하고 남용할 권리 등을 다 표현하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이 모든 권리는 소유의 다양한 작용들이므로 우리는 그것들을 각각 고찰해 볼 수도 있지만 여기서는 단 한 가지만, 즉 불로수득(不勞收得, aubaine : aubaine은 원래 옛날에 귀화하지 않는 외지인이 죽을 때 남긴 재산을 해당 지역의 영주가 차지하는 것을 뜻했으나, 오늘날에는 힘 안 들이고 부당하게 취득한 모든 재산을 뜻한다. 여기서는 불로수득으로 옮긴다-옮긴이)의 권리만을 다루어 보도록 하자.

2. 이 명제는 보편적으로 받아들여지는 것이다. 이 명제를 부인하는 자는 누구나 사실들 자체를 부인하는 셈이며, 그 즉시로 보편적 관행과 어긋나게 된다.

3. 이 명제는 명약관화하다. 그도 그럴 것이 이 명제가 표명하는 사실은 늘 현실적이든 임의적이든 소유를 동반하기 마련이며, 소유가 스스로를 나타내고 확립하며 주장하는 것은 특히 이 사실에 의해서이기 때문이다.

4. 마지막으로, 이 명제를 부인하는 것은 자체 모순이다. 불로수득권은 실질적으로 소유에 내재하는 것이며 소유와 아주 긴밀하게 결부되어 있는 만큼, 불로수득권이 존재하지 않는 곳에서는 소유란 무의미하다.

〈비평〉 불로수득은 그것을 낳은 사물에 따라 여러 가지 이름을 지닌다. 토지에 대해서는 〈소작료fermage〉, 가옥 및 가구에 대해서는 〈임대료loyer〉, 영구 대여에 대해서는 〈지대rente〉, 금전에 대해서는 〈이자intérêt〉, 교환에 대해서는 〈이익bénéfice〉, 〈벌이gain〉, 〈이윤profit〉 - 세 가지를 임금, 즉 노동에 대한 정당한 대가와 혼동해서는 안 된다 - 등이다.

불로수득은 일종의 국왕 특권, 즉 유형 또는 무형의 신서信誓에서 유래하는 것으로, 그 명목적이고 관념적인 선점에 근거해서 소유자의 권한에 속한다. 소유자의 표찰이 물건에 붙는다. 이것만으로 그 누구도 〈소유자의〉 허가 없이는 이 물건을 선점할 수 없도록 하기에 충분하다.

소유자는 자신의 물건을 선점할 권리를 무상으로 양도할 수 있으나 통상적으로는 매각한다. 실제적으로 이 매각은 사취이자 횡령이다. 그러나 소유의 권한이라는 법적 허구에 의해 이러한 매각은, 그 이유를 알지도 못하면서 다른 경우에서라면 엄중히 처벌받지만, 소유자에게는 이윤과 경의의 원천이 된다.

소유자가 자신의 권리를 제공하는 대신 요구하는 몫은 금전적 표식으로, 아니면 예상되는 생산물에 대한 현물 배당 몫으로 표현된다. 따라서 소유자는 불로수득권의 덕에 거두기는 하나 밭을 갈지 않고, 수확은 챙기나 경작하지는 않으며, 소비는 하나 생산을 하지는 않고, 향유하지만 아무 일도 하지 않는다. 소유의 신들은 『시편』 작가(다윗을 가리킴-옮긴이)의 우상들과는 전혀 다르다. 후자는 손이 있으나 아무것도 만지지 않는다. 반면에 전자는 〈손이 있으므로 만진다(manus habent et palpabunt)〉.

불로수득권을 확립하는 절차는 신비롭고 초자연적이기까지 하다. 옛날에 비교단에 입회하는 의식 절차가 그러했듯이 소유자의 서임에는 대단한 예식이 따른다. 그것은 첫째로, 사물의 〈축성consécration〉이다. 축성은 누구나 소유자의 서명이 적힌 허가장을 얻어 그의 물건을 사용하고자 할 때마다 그에 합당한 공물을 소유자에게 바쳐야만 한다는 사실을 알리는 것이다.

두 번째는 〈파문anathème〉인데, 이는 위에서 말한 경우 외에, 소유자가 부재하는 경우라도 그의 물건에 손을 대는 일을 금지하는 것이며, 소유를 침탈한 모든 자들을 신성모독, 불명예, 벌금형 따위에 처하고 세속 권력에 인도한다고 선포하는 것이다.

세 번째는 〈봉헌dédicace〉인데, 이에 의해서 소유자 즉 사물의 수호신으로 정해진 수호성인은 신이 성소에 거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정신적으로 거기에 거하게 된다. 이러한 봉헌 효과에 의해서, 사물의 실체가 말하자면 소유자의 인격으로 전화되며, 이 인격체가 그 사물의 형질과 외양 아래 늘 자리 잡게 된다.

법률학자들이 내세우는 순수한 교리가 바로 이러한 것이다. 툴리에Toullier는 말한다. 〈소유란 사물에 내재하는 ‘도덕적 특질’이자, 그 사물을 소유자와 결부시켜 주며 그의 행위에 의하지 아니하고는 끊어질 수 없는 ‘실재적인 관계’이다.〉 로크는 신이 질료에 〈지력〉을 불어넣지 않았을까 하고 정중하게 의문을 표명했다. 툴리에는 소유자가 질료에 〈도덕성〉을 부여한다고 확언한다. 소유자를 신격화하는 데 달리 무엇이 더 필요하겠는가? 이는 과찬이 아니다.

〈소유는 불로수득의 권리이다.〉 즉 그것은 노동하지 않고 생산하는 능력이다. 그런데 노동하지 않고 생산한다는 것은 무로부터 무엇인가를 만드는 것, 한마디로 말하자면 창조하는 것이다. 이는 질료에 도덕성을 부여하는 일보다는 덜 힘든 일일 터이다. 따라서 법률학자들이 소유자에게 다음과 같은 성서 말씀을 갖다 붙이는 것도 일리가 있는 일이다. 〈내가 말했다시피, 당신들은 신이시며, 모두 지고하신 그 분의 아드님들이십니다.〉

〈소유는 불로수득의 권리이다.〉 우리에게 이 공리는 『묵시록』에 나오는 짐승의 이름과 같은 것인 바, 이 이름 안에 그 짐승의 온갖 신비가 감추어져 있다. 이 이름의 신비를 푸는 자는 모든 예언의 힘을 얻게 될 것이며 짐승을 물리칠 것이라고 전해진다. 그렇다! 우리가 소유라는 스핑크스를 무찌를 수 있는 것은 바로 이 공리를 완벽하게 해명함에 의해서이다. 이 명약관화한 사실, 즉 〈불로수득권〉에서 출발해서 우리는 이 노회한 뱀의 꿈틀대는 똬리 안에까지 추적해 들어갈 것이고, 이 가공할 촌충, 벗어던진 거대한 허물 자루는 적에게 내맡기면서도 그 무수한 흡반吸盤이 달린 머리는 늘 가장 강한 자의 칼도 피해내는 이 괴물이 내보이는 치명적인 휘감기의 횟수를 셈할 것이다. 괴물을 무찌르기 위해서는 용기 외에 그 무엇이 필요하다. 마법의 지팡이로 무장한 프롤레타리아가 대적하고 나서기 전까지 이 괴물은 절대로 쓰러지지 않을 것이라고 쓰여 있지 아니한가.

추론 │ 1. 불로수득의 양은 사물에 비례한다. 이자율이 얼마든 간에, 즉 이자율을 3%, 5%, 10%로 올리든, 아니면 1/2, 1/4. 1/10로 낮추든 아무 상관이 없다. 이자율 증가의 법칙은 언제나 동일하다. 그 법칙이란 다음과 같은 것이다.

화폐 가치로 평가된 모든 자본은 100을 비율로 하는 산술급수의 한 항項으로, 그리고 이 자본이 가져오는 소득은 이자율을 비율로 하는 또 다른 산술급수의 대응항으로 간주할 수 있다. 이렇게 하면, 자본금 500프랑은 비율을 100으로 하는 산술급수의 다섯 번째 항이 될 것이며, 3%의 이자율에 따르는 그 소득은 비율을 3으로 하는 산술급수의 다섯 번째 항이 된다.

100 200 300 400 500

3 6 9 12 15

이런 종류의 대수표에 익숙해지면 우리는 아주 진기한 수수께끼를 푸는 열쇠를 얻을 수 있다. 소유자들이 아주 높은 등급까지 계산해서 자기 집에 걸어놓은 이 대수표는 우리에게 놀라움에 놀라움을 더해줄 것이다.

불로수득권의 〈대수〉 이론에 의하면, 소득과 합산한 재산은 〈그 단위 수를 100으로 나누어 이자율을 곱한 총액과 같은 수치〉로 정의할 수 있다. 예를 들어, 10만 프랑으로 평가되고 5%의 비율로 임대된 가옥은 다음 식(100,000×5÷100=5,000)에 의해 5,000프랑의 소득을 가져온다. 이와 마찬가지로, 소득이 2.5% 비율로 3,000프랑인 토지는 다음 식(3,000×100÷2.5=120,000)에 따르면 12만 프랑의 가치가 된다.

첫 번째 경우에 이자의 증가를 나타내는 급수의 비율은 5이며, 두 번째 경우에 2.5이다.

〈비평〉 소작료, 지대, 이자 등의 이름으로 알려진 불로수득금은 1년 단위로 지불된다. 집세는 매주, 매월, 매년 단위로 지불된다. 이윤과 이익은 교환이 이루어질 때마다 생긴다. 따라서 불로수득금은 시간에 비례할 뿐만 아니라 사물에 비례한다. 이것이야말로 사람들이 〈고리대는 암과 같이 증식한다(faenus serpit sicut cancer)〉라고 말했던 이유이다.

2. 보유자에 의해 소유자에게 지불되는 불로수득금은 보유자에게는 완전한 손실이다. 왜냐하면 만약 소유자가 그가 받은 불로수득에 대한 대가로, 그가 보유자에게 허용해 준 것 이상의 그 무엇을 짊어져야 한다면, 그의 소유권은 완전할 수 없으며 그는 〈최상의 법으로(jure optimo)〉, 〈완전한 법으로(jure perfecto)〉 소유하지 못할 것이다. 따라서 그는 실질적으로 소유자가 되지 못할 것이다. 그러므로 불로수득권에 의해서, 선점을 허용한 대가로 선점자의 손에서 소유자의 손으로 넘어간 모든 것은 소유자에게는 영원히 획득되는 것이고, 선점자에게는 완전한 손실이 되는 것이다. 이제 증여, 자선, 노동에 의한 임금, 인도한 상품의 가격 등에 의해서가 아니면 그 무엇도 선점자에게 되돌아올 수 없게 된다. 한마디로 말하자면, 불로수득은 빌린 자에게는 완전한 손실인 바, 이는 〈사물은 분해되어 소멸한다(res perit solventi)〉라는 라틴어가 웅변적으로 말해준다.

3. 불로수득은 국외자에게 맞서 발생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소유자에게 맞서 발생한다. 사물의 지배자는 소유자로서의 자신과 점유자로서의 자신을 구별한다. 따라서 그는 자신의 재산을 스스로 이용한 대가로, 그가 제3자에게서 받을 수 있는 것과 동일한 이용료를 자기 자신에게 부과하는 셈이다. 따라서 자본은 그것을 빌린 차용인이나 출자 받은 자에게서와 마찬가지로 자본가 자신에게서도 이자를 낳는다. 실제로, 내 아파트의 집세 500프랑을 받는 대신에 내가 직접 그곳에 살며 누린다면, 나는 내가 포기한 만큼의 집세에 대해 나 자신에 대한 채무자가 되는 셈이다. 이 원리는 거래에서 널리 인정되고 있으며, 경제학자들에게는 하나의 공리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따라서 운전 자금의 소유자라는 유리한 위치에 있는 산업가들은 아무에게도 이자를 지불할 의무가 없는데도 불구하고, 자신의 봉급 및 경비와 함께 자본의 이자마저도 공제한 연후에 비로소 이익을 계산한다. 마찬가지 이유로, 대금업자들은 자기 수중에 가능한 한 돈을 남겨두려고 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자본에는 필연적으로 이자가 따르는 만큼, 만일 이 이자가 누군가에 의해 사용되지 않는다면 결국 자본금에서 빠져 나와 그만큼 자본이 줄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불로수득권에 의해 자본은 스스로에게 상처를 입힌다. 파피니아누스(Papinianus, 고대 로마의 법률학자-옮긴이)가 다음과 같은 우아하고 힘찬 문구로 표현한 내용이 바로 이것이다 : 〈이자는 총액을 잡아먹는다(Foenus mordet solidum)〉. 여기서 너무 자주 라틴어로 이야기하는 것을 용서해 주기 바란다. 이는 일찍이 고리대금업에 가장 능했던 국민에게 바치는 경의인 것이다.

첫 번째 명제 소유는 불가능하다. 왜냐하면 그것은 무에 대해 무엇인가를 요구하기 때문이다.

이 명제에 대한 검토는, 경제학자들이 그토록 논쟁을 일삼았던 소작료의 기원에 대한 검토와 매한가지이다. 대다수 경제학자들이 쓴 글을 읽을 때면, 나는 추악함과 몰상식이 서로 겨루고 있는 이 멍청한 구절들로 인해 경멸과 분노가 뒤섞인 감정을 억누를 수 없다. 잔인한 결말만을 빼버리면, 이는 달에 사는 코끼리 이야기와 마찬가지이리라. 도둑질, 공갈, 횡령에 지나지 않고 또 그럴 수밖에 없는 것에 대해 합리적이고 적법한 기원을 찾으려 하는 것은 실로 소유자가 내보이는 어리석음의 절정이며, 충분히 계발될 수도 있을 정신이 편벽한 이기주의에 빠져든 최고의 주술이다.

세는 말한다. 〈농민이 밀 재배에 드는 원료들을 가공하는 데 사용하는 도구들 중에는 우리가 밭이라고 부르는 큰 도구가 있다. 밭의 소유자가 아니라 소작인에 지나지 않는다면, 농민은 이 도구를 생산에 사용한 대가를 소유자에게 지불한다. 소작인은 그 비용을 구매자에 의해 보상받고, 그 구매자는 다른 구매자에 의해 보상받는 식으로 종국에는 생산물이 소비자에게 이른다. 그러면 소비자는 애초의 지불금에 더해서 생산물이 자기 손에 들어오기까지 든 일체의 지불금을 다 갚는 셈이다.〉

생산물이 소비자에게 도달하기까지 연달아 불어난 지불금은 제쳐두고, 여기서 우리는 최초의 지불금, 소작인이 소유자에게 지불하는 지대만을 다루도록 하자. 소유자가 이 지대를 자신에게 지불하도록 요구하는 근거는 무엇인가를 물어보자.

리카도Ricardo, 매컬록Maccullock, 밀Mill에 따르면, 본래 의미에서 소작료란 〈가장 비옥한 토지의 생산물을 그보다 열악한 토지의 생산물과 비교할 때의 초과분〉에 지나지 않는다. 따라서 소작제는 인구 증가로 말미암아 열등지의 경작에 호소하지 않을 수 없을 때에야 발생하기 시작한다는 것이다.

이 주장에서 조금이라도 어떤 의미를 찾아보기는 힘들다. 토지의 비옥도 차이가 어떻게 토지에 대한 권리를 가져올 수 있는가? 〈부식토〉의 다채로움이 어떻게 입법과 정치의 원리를 낳는가? 이 형이상학은 내게 너무나 미묘하고 심원해서, 생각하면 할수록 혼란만을 더해 줄 뿐이다. 면적이 같은 토지 A와 B가 있다고 하자. A는 주민 1만 명을 먹여 살릴 수 있는 반면에, B는 9,000명만을 먹여 살릴 수 있다. 인구 증대로 인해 A에 사는 주민들이 B를 경작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을 때, A땅의 지주들은 A땅을 빌린 소작인들에게 10대 9의 비율로 산출된 지대를 받는다. 내가 생각건대, 리카도, 매컬록, 밀 등이 말한 바가 바로 이것이다. 그러나 만일 토지 A는 감당할 수 있는 만큼만의 주민을 먹여 살리고 있다면, 즉 A 토지의 주민들이 인구수를 고려해 볼 때 먹고 살기에 꼭 필요한 것만을 가지고 있다면, 그들은 어떻게 소작료를 지불할 수 있는가?

만일 이들이 토지의 차이가 소작료의 〈원인〉이라고 말한 것이 아니라 단지 그 〈계기〉였다고 말한 것이라면, 우리는 이 단순한 관찰로부터 귀중한 교훈을 얻는 셈이다. 즉 그것은 소작료의 근거는 평등의 욕구에 그 원리를 두고 있으리라는 사실이다. 사실, 좋은 땅을 차지할 권리가 누구에게나 평등하다면, 그 누구도 반대급부 없이는 열악한 땅을 경작하도록 강제될 수 없다. 따라서 리카도, 매컬록, 밀에 따르면, 소작료는 이윤과 노고를 보상해 줄 요량으로 생긴 일종의 손해보상금인 셈이다. 이 실제적인 평등의 기제는 좋지 않은 것이라는 점을 인정하자. 하지만 그 의도는 나무랄 데 없는 것이었다. 리카도, 매컬록, 밀은 이로부터 소유권에 유리한 어떤 논거를 찾아낼 수 있었을까? 이들의 이론은 그들 자신과 어긋나는 것이며 그들의 목을 죄는 것이다.

맬서스Malthus는 소작료의 원천은 토지를 경작하는 사람들을 먹여 살리는 데 필요한 양보다 더 많은 식량을 제공하는 토지의 능력에 있다고 생각한다. 나로서는 맬서스에게 왜 성공적인 노동이 게으른 자에게 그 생산의 결과물에 참여할 권리를 부여해 주어야 하는가를 묻고 싶다.

그러나 맬서스 님은 자신이 말한 사실을 설명하는 데서 착각하고 있다. 물론 토지는, 만일 〈경작자〉라는 말이 소작인만을 뜻한다면, 그것을 경작하는 사람들을 먹여 살리는 데 필요한 양보다 더 많은 식량을 제공할 능력이 있다. 재단사는 몸소 입을 옷보다 더 많은 옷을 만들며, 가구공은 자기에게 필요한 것보다 더 많은 가구를 만든다. 그러나 모든 직업들이 서로를 전제로 하고 서로를 지탱하는 것이므로, 그 결과 농사꾼만이 아니라 온갖 직업인들, 심지어 의사나 교사에 이르기까지 〈토지의 경작자〉로 말해지며 또 그래야만 한다. 맬서스가 소작료에 적용한 원칙은 상업의 원칙이다. 그런데 상업의 기본 법칙은 생산물의 등가 교환이므로, 이 등가성을 해치는 것은 모두 법칙을 위배하는 것이다. 맬서스의 그릇된 평가는 정정되어야 한다.

스미스Smith를 논평하면서 부캐넘Buchanam은 소작료를 독점의 결과로 간주했으며 노동만이 생산적이라고 주장했다. 그래서 그는 이러한 독점이 없었다면 생산물은 값이 더 싸질 것이라고 주장했으며 나아가 소작료의 근거를 민법에서만 찾았다. 이러한 견해는 민법을 소유권의 토대로 보는 견해의 논리적 귀결이다. 그러면 성문화된 이성이라 할 민법이 왜 이러한 독점을 용인했는가? 독점을 말하는 자는 필연적으로 정의를 배제한다. 그런데 소작료가 법률에 의해 공인된 독점이라고 말하는 것은 불의가 정의를 자신의 원리로 한다고 말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모순된 이야기이다.

세는 독점자란 〈상품에 조금도 효용을 더하지 않는 자〉이기 때문에 소유자는 결코 독점자가 될 수 없다고 부캐넘에게 답한다.

소작인의 생산물은 얼마만큼의 효용을 소유자에게서 받는가? 소유자는 밭을 갈고, 씨를 뿌리고, 거두어들이고, 낫으로 베고, 키질을 하고, 잡초를 뽑았는가? 바로 이와 같은 작업을 통해 소작인과 그의 일꾼들은 재생산을 위해 그들이 소비하는 원료들의 효용을 높이지 않았는가.

〈지주는 토지라는 자신의 생산 도구로 상품의 효용성을 높인다. 이 도구는 밀을 구성하는 원료들을 어떤 상태로 받아들여 다른 상태로 돌려준다. 땅의 활동은 화학작용과 같은 것이다. 이 작용에 의해서 밀이라는 원료는 스스로 해체됨으로써 증대되는 식으로 일정한 변형을 겪는다. 따라서 땅은 효용의 생산자이다. 그리고 그것(땅?)이 그 소유자에게 돌아갈 이윤이나 소작료의 형태로 그 효용을 지불받고자 할 때, 이는 소비자가 지불하는 것에 대한 대가로 소비자에게 아무것도 주지 않고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생산된 효용을 소비자에게 주는 바, 바로 이 효용을 생산하기 때문에 땅은 노동과 마찬가지로 생산적인 것이다.〉

이 모든 것을 명확히 밝혀 보자.

농사꾼을 위해 농기구를 제작하는 대장장이, 수레를 만들어 주는 목수, 농사꾼의 헛간을 짓는 석공, 그리고 자신들이 준비한 도구로 농업 생산에 기여하는 골조공, 광주리공 등은 모두 효용의 생산자이다. 이 자격으로 그들은 생산물의 일부에 대한 권리를 가진다.

〈의심할 나위가 없다. 그러나 토지는 마찬가지로 하나의 도구이며, 그 사용에 대해서는 대가가 지불되어야 한다. 따라서…〉라고 세는 말한다.

토지가 하나의 생산도구라는 것에 나는 동의한다. 그러나 그것을 만든 사람은 누구인가? 소유자인가? 소유권의 효력에 의해, 땅에 스미어 있는 이 〈도덕적 자질〉에 의해, 땅에 원기와 비옥도를 더해주는 것은 바로 소유자인가? 소유자의 독점이라는 것은 바로 여기에서 생긴다. 그는 자신이 도구를 만들지도 않으면서 그 사용료를 챙기니 말이다. 차라리 조물주가 나타나서 스스로 소작료를 요구하고 나설지어다 - 그러면 우리는 조물주에게 지불하리라. 아니면 소유자가 스스로 그 대리인이라고 자처한다면 위임장을 보여줄지어다.

세는 〈소유자의 노고는 자신에게는 수월한 것이다. 나는 이를 인정한다〉고 덧붙인다.

고백은 솔직하다.

〈그러나 우리는 소유자가 없이는 지낼 수 없다. 소유권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농사꾼은 지주가 없는 밭을 갈려고 서로 싸울 것이며 밭은 황폐한 채로 남을 것이다.…〉

이렇게, 지주의 역할은 농사꾼들에게서 모든 것을 빼앗음으로써 그들을 화해시키는 데 있다. 오, 이성이여! 오, 정의여! 오, 경제학자들의 놀라운 과학이여! 이들에 따르면, 지주는 조개 하나를 놓고 다투고 있는 두 명의 나그네 앞에서 그 조개를 벌려서 먹어버리고는 이렇게 판결한 페랭-당댕(Perrin-Dandin, 라블레의 소설, 『팡타그뤼엘』에 나오는 인물로 아무렇게나 재판을 하는 재판관의 전형-옮긴이)과 마찬가지이다.

법정은 당신들 둘에게 조개껍데기를 주는 바이다.

소유권에 대해 이보다 더 형편없는 말을 할 수 있을까?

세는 우리에게, 소유자가 없다면 땅을 서로 차지하려고 싸울 농사꾼들이 어째서 오늘날 바로 마찬가지의 점유를 위해서 소유자들에 맞서 싸우지 않는가를 설명해 줄 것인가? 이것은 명백히 농부들이 지주들을 정당한 점유자라고 믿기 때문이며 또한 가상假想의 권리에 대한 존중심이 이들에게서 탐욕을 억누르기 때문이다. 나는 제2장에서 소유 없는 점유만으로도 사회의 질서를 유지하기에 충분하다는 사실을 입증한 바 있다. 그런데 지주가 있는 농부보다도 주인이 없는 점유자를 인정하는 것이 더 어려울까? 자신을 희생하면서 이른바 게으른 자들의 권리를 존중하는, 이 일하는 자들은 생산자와 산업가들의 자연권을 침해하는 것인가? 뭐라고! 농사꾼이 점유를 그만두어 그 토지에 대한 자신의 권리를 잃게 된다면, 그는 더욱 탐욕스럽게 될 것이라고! 그리고 불로수득금을 요구하지 않는다거나 타인의 노동에 과세하지 않는 것이 소송과 싸움의 원천이 될 것이라고! 경제학자들의 논리는 정말 기묘하다. 그러나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지주가 토지의 정당한 주인이라고 인정해 보자.

〈토지는 하나의 생산도구이다〉라고 경제학자들은 말한다. 이는 옳은 말이다. 그러나 이들이 명사를 형용사로 바꾸어서 〈토지는 생산적인 도구이다〉라고 말한다면, 이는 극악무도한 오류이다.

케네Quesnay와 옛 경제학자들에 따르면, 모든 생산은 토지에서 나온다. 반면에 스미스, 리카도, 드 트라시는 생산을 노동에서 찾는다. 세를 비롯해서 그의 뒤에 나타난 경제학자들은 토지와 노동과 자본 〈모두〉가 생산적이라고 가르친다. 이것은 정치경제학의 절충주의이다. 진실인즉 토지도 노동도 자본도 생산적이지 않다. 생산이란 이 세 가지 요소, 즉 모두가 필수적이나 따로 떼어 놓으면 불모인 이 세 가지 요소가 결합한 결과이다.

사실상, 정치경제학은 생산, 분배 그리고 부와 가치의 소비를 취급한다. 그러나 어떤 가치인가? 그것은 인간의 노력에 의해 생산된 가치, 즉 인간이 자신의 용도대로 원재료에 가한 변형의 결과물이지 자연의 자생적인 생산물이 아니다. 인간의 노동은 손을 대는 순간에만 이루어지며, 인간이 이러한 노고를 다할 때에만 가치가 생산된다. 그때까지는 바다의 소금, 샘의 물, 밭의 풀, 숲의 나무 등등은 인간에게는 존재하지 않는 것이나 다름없다. 어부와 어부의 그물이 없는 바다는 생선을 가져다주지 않는다. 벌목꾼과 벌목꾼의 도끼가 없는 숲은 땔나무도 목재도 가져다주지 않는다. 벌초꾼이 없는 초원은 건초도 그루풀도 가져다주지 않는다. 자연은 이용하고 생산할 거대한 원료와도 같다. 그러나 자연은 그 자체만으로는 아무것도 낳지 못한다. 즉 경제학적 의미로 말하자면, 자연의 생산물들은 인간에 대해서는 아직 생산물이 아니다.

자본, 도구, 기계도 역시 비생산적이다. 망치와 모루는 대장장이나 철이 없다면 아무것도 만들어내지 못한다. 방앗간은 제분업자나 곡물이 없다면 아무것도 빻지 못한다. 도구와 원료를 한꺼번에 집어넣어 보라. 예컨대 호미와 씨앗을 기름진 땅 위에 뿌린다거나 용광로를 만들어 불을 지펴놓고 공장 문을 닫아보라. 당신은 아무것도 생산하지 못할 것이다.

이러한 관찰은, 그의 동료들보다 뛰어난 양식을 지닌 한 경제학자가 이미 제기한 바 있다. 〈세는 자본에 그 속성과는 어울리지 않는 적극적인 역할을 부여하고 있다. 자본은 그 자체로는 무기력한 도구이다.〉(자크 드로 J. Droz, 『정치경제학』)

마지막으로, 노동과 자본이 합쳐지더라도 잘 조합되지 못하면 여전히 아무것도 생산하지 못한다. 모래사막을 갈고, 하천 물을 휘젓고, 활자活字를 체로 걸러보라. 이 모든 일은 당신에게 밀도 생선도 책도 가져다주지 않는다. 당신의 노고는, 해로도토스의 말에 의하면, 페르시아 대왕이 건설케 한 배다리(船橋)를 산산조각 낸 바다를 벌주기 위해 300만의 병사들이 막대기로 24시간 동안 헬레스폰토스 해협을 두들긴 크세르크세스(Xerxer, 기원전 486~465, 그리스를 침공한 페르시아 왕-옮긴이) 군대의 엄청난 노고만큼이나 비생산적일 것이다.

도구와 자본, 토지, 노동 따위는, 만일 이것들을 서로 떼어서 추상적으로 고려한다면, 비유적 관점에서만 생산적일 뿐이다. 자신의 도구, 생산력, 자신의 토지를 사용한 대가로 그에 따른 무엇을 요구하는 소유자는 따라서 근본적으로 잘못된 사실, 즉 자본이 그 자체로 무엇인가 생산한다는 사실을 전제하고 있다. 그리고 이 가상의 생산물에 대한 대가를 지불케 함으로써 그는 말 그대로 공짜로 무엇인가를 얻는 셈이다.

〈반론〉 그러나 만일 대장장이나 짐수레공이, 한마디로 모든 제조업자가 자신이 제공한 도구들의 대가로 생산물에 대한 권리를 갖는다면, 만일 토지가 하나의 생산도구라면, 왜 이 생산도구는 그 진정한 또는 가상의 소유자에게 생산물의 일부에 대한 몫을 보장해 주어서는 안 된다는 말인가?

〈답변 〉 여기에 바로 수수께끼의 매듭이 있으며, 소유권의 비밀이 있다. 불로수득권의 기묘한 효과에 대해 무엇인가를 이해하려면 바로 이 문제를 제대로 풀어야만 한다.

농기구를 제작하고 수선하는 노동자는 일시불이든 분할불이든 〈단 한 번〉 그 대가를 지불받는다. 일단 노동자에게 그 대가가 지불되고 나면, 그가 넘긴 기구는 이미 그의 것이 아니다. 그는 결코 같은 기구, 같은 수리에 대해 이중으로 보수를 요구하지 않는다. 만일 그가 매년 농민과 나누어 가진다면, 이는 그가 매년 농민에게 무엇인가를 해주기 때문이다.

이에 반해서, 지주는 자신의 도구 중 아무것도 내어주지 않는다. 그는 영원토록 자신의 도구에 대한 대가를 지불받으며 영원토록 그것을 보전한다.

사실 지주가 받는 지대는 도구의 유지와 수선에 드는 비용을 목적으로 한 것이 아니다. 이 비용은 고스란히 빌린 자의 몫으로 남으며 그 도구의 보전에 관심을 가진 정도만큼만 소유자와 관련될 뿐이다. 만일 지주가 그 비용을 떠맡는다 해도, 그는 자신이 선불한 돈을 어김없이 되돌려 받는다.

요컨대, 이 지대는 지주가 생산에 참여하고 있다는 점을 표현하는 것이 아니다. 그도 그럴 것이 이러한 참여는 대장장이나 짐수레공의 참여와 마찬가지로 자신의 도구의 전부 또는 일부를 양도할 때만 의미를 지니며, 이 경우 지주는 더 이상 소유자일 수 없게 된다.

따라서 지주와 소작인 사이에는 가치의 교환도 노동의 교환도 이루어지지 않는다. 따라서 우리가 공리公理에서 말한 것처럼, 소작료는 진정 불로소득일 뿐이며, 한편으로는 사기와 폭력에, 다른 한편으로는 무기력과 무지에 토대를 둘 뿐인 강탈 행위이다. 경제학자들은 〈생산물은 생산물에 의해서만 구입된다〉라고 말한다. 이 격언은 소유권에 대한 유죄판결이다. 소유자는 스스로도 자신의 도구에 의해서 아무것도 생산하지 못하며 어떤 대가도 치르지 않으면서 생산물을 취득한다. 따라서 소유자는 기생충이거나 좀도둑이다. 따라서 소유가 권리로서만 존재할 수 있다면, 소유는 불가능하다.

〈추론〉 1. 소유권을 〈자신의 노동의 결실을 향유할 권리〉라고 정의한 1793년의 공화정 헌법은 엄청나게 잘못된 것이다. 그것은 다음과 같이 말했어야 한다. 즉 소유권은 타인의 재산과 타인의 노동과 땀의 결실을 자기 마음대로 향유하고 처분할 권리이다.

2. 토지, 가옥, 가구, 기계, 도구, 금전 등등을 가진 자들 중에서 그것을 수리비를 초과하는 비용으로 빌려주는 자는 기만적인 전매꾼이며 사기와 횡령의 죄를 면할 수 없다. 한마디로 말하자면 손해배상의 구실로 그러나 사실상 빌려주는 대가로 징수하는 모든 임대료는 소유권의 행위이며 도둑질이다.

〈역사적 해설〉 승전국이 패전국에 요구하는 공납은 진정 소작료와 마찬가지이다. 십일조, 재산이전세, 부역 그리고 1789년의 혁명이 폐지한 영주 부과조 등은 소유권의 여러 형태이다. 그리고 귀족, 영주, 성직 이권자, 성직록 수혜자 따위의 이름으로 이 권리를 누리는 자들은 소유자 이외에 달리 아무것도 아니다. 오늘날 소유를 옹호하는 것은 혁명을 규탄하는 것이다.

두 번째 명제 소유는 불가능하다. 왜냐하면 소유가 용인되는 곳에서 생산은 효용가치 이상의 비용이 들기 때문이다.

앞의 명제는 법률적인 성격의 것이었으나, 이 명제는 경제적인 성격의 것이다. 이 명제는, 폭력을 기원으로 하는 소유가 결과적으로 무가치를 낳는다는 것을 입증하는 데 쓰인다.

세는 말한다. 〈생산은 하나의 거대한 교환 행위이다. 교환이 생산적이려면 생산에 들어간 모든 노동의 가치가 생산된 물건의 가치와 균형을 이루어야만 한다. 만일 이 조건이 충족되지 않았다면, 교환은 불평등했던 것이고, 생산자는 받은 것보다 더 많이 내준 셈이다.〉

그런데 가치는 효용을 필수적인 기반으로 하기 때문에, 효용을 갖지 못한 모든 생산물은 당연히 무가치한 것이고, 교환될 수 없으며, 따라서 생산에 들어간 노동을 〈지불하는〉 구실을 다할 수 없다.

따라서 생산이 소비와 균형을 이룰 수는 있어도 결코 소비를 넘어설 수는 없다. 왜냐하면 효용을 생산하는 곳에서만 실제로 생산이 이루어지며, 소비의 가능성이 있는 곳에서만 효용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과잉생산에 의해 소비되지 않고 남은 모든 생산물은 그 소비되지 못한 양에 대해서는 효용과 가치를 잃은 것이며 교환 대상이 될 수 없다. 따라서 무엇이든 간에 보상받을 수 없게 된다. 그것은 이미 생산물이 아닌 것이다.

소비의 경우도, 그 소비가 정당성을 가지려면, 즉 소비다운 소비가 되려면 효용을 재생산해 내야만 한다. 만일 소비가 비생산적일 경우, 소비가 생산물을 소모하는 일은 가치를 파손하는 것이고, 생산물을 완전히 쓸모없게 만드는 것이며, 생산물의 값어치를 그 가치 이하로 떨어뜨리는 것이기 때문이다. 인간은 응당 소모할 권한을 지닌다. 그러나 인간은 자신이 재생산하는 것만을 소비한다. 따라서 올바른 경제 활동에는 생산과 소비 사이에 하나의 등식이 존재한다.

이러한 점들을 전제로 해서, 외부와의 교섭이 단절된 채 일정한 영역에 틀어박혀서 사는 1,000가구의 한 부족을 가정해 보자. 우리에게 이 부족은 인류 전체를 대표할 수 있다. 지구에 널리 흩어져 있는 인류는 참으로 고립된 존재이니 말이다. 사실 한 부족과 인류 전체의 차이는 그 수적인 규모에 있을 뿐, 경제적인 면에서의 결과는 완전히 같을 것이다.

이제 단지 밀만을 재배하는 이 1,000가구가 생산량의 10%에 해당하는 수입을 매년 현물로 그들 중 100명에게 지불해야만 한다고 가정해 보자. 이 경우 불로수득권은 사회의 생산에 대한 징수와 같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 징수는 어디에 쓰이는가?

이 징수는 부족에게 식량을 공급하기 위한 것일 수 없다. 왜냐하면 이 식량 공급은 지대와는 아무 상관이 없으니 말이다. 또한 이 징수는 결코 노동과 생산물에 그 대가를 지불하는 몫이 아니다. 왜냐하면 소유자들은 다른 이들과 마찬가지로 노동할 때 오로지 자신들만을 위해서 노동하니 말이다. 마지막으로, 이 징수는 지주들에게 어떤 효용도 주지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지주들은 스스로 소비하기에 충분한 밀을 수확한데다가, 교역도 산업도 없는 사회에서 그것으로 다른 어떤 것도 취득할 수 없으므로, 사실상 자신들의 소득이 가져오는 이점을 상실할 것이니 말이다.

이와 같은 사회에서는 생산물의 1/10이 소비되지 않고 남기 때문에, 노동의 1/10이 지불되지 않고 남는 셈이다. 생산 비용이 그 생산물의 효용 가치보다 더 드는 것이다.

여기서, 밀 생산자 300명을 다른 분야의 일거리에 배당해 보자. 예컨대, 정원사나 포도 재배농 100명, 제화공이나 재단공 60명, 가구공이나 대장장이 50명, 여타 다른 직업인들 80명, 그리고 부족함이 없도록 학교 선생님 7명, 촌장 1명, 재판관 1명, 성직자 1명을 두도록 하자. 각 직종은 제 나름대로 부족 전체를 위해 생산한다. 그러면 총 생산량을 1,000으로 할 경우, 개개인에게 돌아가는 소비량은 1이 된다. 즉 개인은 밀, 고기, 곡물을 0.7만큼, 포도주와 정원을 0.1만큼, 신발과 옷을 0.06만큼, 철물과 가구를 0.05만큼, 여타 다른 생산품을 0.08만큼, 모두 합해서 1만큼을 소비하는 셈이다.

그러나 사회는 10%의 지대를 지불해야 한다. 그리고 우리는 농부들만이 그것을 지불하든 일하는 자 모두가 지불하든 그 결과는 마찬가지임을 알게 될 것이다. 농부는 자신이 지불해야 하는 몫에 비례해서 식료품값을 올린다. 그러면 제조업자들이 곧 이러한 상승 추세를 뒤따르게 되고, 몇 차례 엎치락뒤치락하고 난 다음에 형평이 회복될 것이다. 결국 개개인은 거의 동등한 양을 지불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한 나라에서 농부만이 지대를 낸다고 생각하면 큰 오산이다. 국민 전체가 지불하는 것이다.

따라서 내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만일 10%를 징수당한다고 치면, 개개인의 소비는 다음과 같이 줄어든다는 것이다. 밀 0.63, 포도주와 정원 0.09, 신발과 옷 0.054, 철물과 가구 0.045, 여타 다른 생산품 0.072, 교육 0.0063, 행정 0.0018, 예배 0.0009. 다시 말해 모두 합하면 0.9가 된다.

일하는 자는 1을 생산하는데 0.9만을 소비한다. 따라서 그는 자신의 노동의 가격에서 10%만큼을 잃어버린 것이다. 요컨대 그의 생산에 드는 비용은 항상 그 생산물의 효용가치보다 비싸다. 다른 한편으로, 소유자가 차지하는 이 10%는 소유자에게 무가치하게 된다. 왜냐하면 소유자 스스로도 일을 하므로 자신들이 생산한 생산물의 90%를 가지고 다른 이들처럼 살 수 있으며, 따라서 부족한 것이 없을 터이니 말이다. 그들이 그것을 소비할 수도 교환할 수도 없다면, 그들이 차지한 빵, 고기, 포도주, 옷, 집 따위의 양이 두 배로 된들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따라서 지대는 나머지 다른 이들에게와 마찬가지로 그들에게도 무가치한 것으로 남게 되며 그들의 손 안에서 소실되고 만다. 이 가설을 확대해서 생산물의 수효와 종류를 늘려 보라. 당신은 마찬가지 결론을 얻게 될 것이다.

지금까지 나는 소유자를 생산에 참여하는 자로, 즉 세가 말한 것처럼 단순히 자신의 도구에 의해서 참여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 스스로의 노동에 의해서 실질적으로 참여하는 것으로 취급해 왔다. 이러한 조건에서라면 결코 소유가 존재할 수 없으리라는 것은 쉽사리 생각해 볼 수 있다. 어떤 일이 일어나겠는가?

정절도 염치도 없는 천성적으로 호색한인 소유자는 질서와 규율의 생활과는 절대로 어울리지 않는다. 그가 재산을 사랑한다면, 그것은 그가 원할 때, 원하는 만큼, 자기의 안락을 얻기 위해서이다. 먹고 살기에 충분하다고 느끼면, 그는 쓸데없는 일이나 안일한 생활에 몸을 내맡긴다. 그는 즐기고, 바보짓하고, 신기한 것과 새로운 자극을 찾아 나선다. 소유는 자기 스스로를 만끽하기 위해서 일상적인 처지를 내팽개치고 사치스러운 일과 세속적인 향락에 눈을 돌려야만 한다.

손 안에서 소실되고 마는 지대를 마다한다거나 그만큼 사회의 노동 부담을 덜어주려 하기는커녕, 우리의 100여 소유자들은 몸을 뻗고 휴식을 취한다. 이들의 발뺌 때문에 생산의 절대량은 100만큼 줄어들지만 소비는 마찬가지여서, 생산과 소비가 균형을 이룬 듯이 보인다. 그러나 우선 소유자들은 일을 하지 않으므로, 그들의 소비는 경제 원칙에 따르자면 비생산적이다. 따라서 사회에는 예전과 마찬가지로 생산물에 의해 지불되지 않는 100만큼의 노동이 있는 것이 아니라 노동 없이 소비되는 100만큼의 생산물이 있게 된다. 생산과 소비 중 어느 항목에 나타나든 간에 결국 적자는 마찬가지인 것이다. 정치경제학의 격언이 잘못된 것이든 아니면 그 격언을 거스르는 소유가 불가능한 것이든 둘 중의 하나이다.

경제학자들은 비생산적인 모든 소비를 하나의 악으로, 인류에게 저지른 도둑질로 간주하고, 소유자들에게 마냥 절제와 노동과 검약을 권고해 마지않는다. 그들은 소유자들에게 자신의 유용성을 찾으라고, 얻은 것을 다시 생산에 투자하라고 권유한다. 그들은 사치와 태만에 대해 가장 끔찍한 욕설을 퍼붓는다. 이러한 훈육이 훌륭한 일이라는 것을 누군들 모르겠는가. 그러나 아쉬운 것은 상식이 결여되어 있다는 점이다. 노동하는 소유자, 즉 경제학자들의 표현을 빌리면 〈자신을 유용하게 만드는〉 소유자는 바로 이 노동과 이 유용성에 의해 지불받는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소유자가 자신이 몸소 이용하지 않으면서도 수입만을 챙기는 재산들에 대해서는 덜 나태한가? 그가 무슨 일을 하건 그의 처지는 비생산적인 것이며 〈흉물스러운〉 것이다. 소유자는 소유자이기를 그만두지 않는 한, 낭비하고 파괴하는 일을 그칠 수 없다.

그러나 이것은 소유자가 가져오는 가장 사소한 악에 지나지 않는다. 사회는 게으른 자도 부양한다는 것을 우리는 아무튼 잘 알고 있다. 사회에는 늘 맹인, 불구자, 정신병자, 저능아 등등이 있다. 그러니 사회가 몇몇 게으른 자를 부양 못할 이유가 있겠는가. 그러니 불가능한 일들이 복잡하게 뒤엉키고 겹겹이 쌓여가는 것이다.

세 번째 명제 소유는 불가능하다. 왜냐하면 자본이 일정한 경우 생산은 소유가 아니라 노동에 비례하기 때문이다.

생산물의 10%로 소작료 100을 지불하기 위해서는 생산물이 1,000이어야만 한다. 생산물이 1,000이기 위해서는 1,000명의 노동자가 필요하다. 따라서 누구나 지대수취자로서의 삶을 누릴 평등한 권리를 가진 이들 지주-노동자(Travailleurs Propriétaires, 지주이면서 동시에 일하는 자를 말한다-옮긴이) 100명을 지금 쉬게 한다면, 우리는 이들에게 그들의 수입을 지불할 수 없는 상태에 빠진다. 실제로, 원래 1,000이었던 생산력은 900으로 줄고, 생산 역시 900으로 줄게 되므로, 그 10%인 90만이 소작료로 남게 되는 것이다. 따라서 지주들이 소작료 전액을 다 받으려 한다면, 이들 100명 중 10명은 소작료를 받지 못하거나, 아니면 이들 모두가 10%만큼의 감소를 받아들여야만 한다. 왜냐하면 지주가 노동을 그만둔다고 해서 그 손실을 노동자가 떠맡을 수는 없는 일이기 때문이다. 노동자들은 결코 자기 직분을 다하지 못한 적이 없으며 예나 다름없이 생산을 해왔으니 말이다. 자신의 나태함에 따른 결과를 떠맡아야 하는 것은 바로 지주들이다. 그러나 지주는 그가 더 누리려 한다는 바로 그 사실로 인해 더욱 가난해진다. 자신의 권리를 행사하려 함으로써, 그는 그 권리를 상실한다. 이렇게 재산이란 우리가 그것을 붙잡으려 하면 할수록 줄어들고 없어져 버리는 듯이 보인다. 재산은 찾으면 찾을수록 손에서 멀어지는 것이다. 수량에 따라 가변적이고 산술적 배열에 따라 상실될 수도 있는 이 권리란 과연 어떤 것인가?

지주-노동자는 ① 노동자로서 0.9의 임금과, ② 지주로서 1의 소작료를 받았다. 그는 스스로에게 이렇게 말했다. 〈내가 받은 소작료로 충분하다. 나는 더 얻으려고 일할 필요가 없다.〉 따라서 그가 생각했던 수입은 1/10만큼 줄어드는 셈이다. 어째서 그렇게 되는지를 그가 생각조차 하지 못한 사이에 말이다. 생산에 참여했을 때, 그는 자신이 지금 되찾지 못하는 이 1/10만큼의 생산자였던 것이다. 그리고 그가 자신을 위해서만 일하고자 생각했을 때, 그는 자기 생산물을 교환하는 데서 일정한 손실을 입은 것이며, 그 결과 자기 소작료의 1/10만큼을 자기 자신에게 지불하게 하는 셈이었다. 다른 이들처럼 그는 1을 생산했으나, 0.9만을 받은 것이다.

만일 노동자가 900명이 아니라 500명밖에 없었다면, 소작료 총액은 50으로 줄었을 것이다. 마찬가지로 100명뿐이었다면, 10으로 줄었을 것이다. 그러므로 소유자 경제의 법칙으로 다음과 같은 공리를 세우자. 〈불로수득은 일하지 않는 자의 수가 늘어날수록 줄어든다.〉

이 첫 번째 결론은 우리를 한층 놀라운 또 하나의 결론으로 인도할 것이다. 그것은 소유를 제거하지 않고서, 소유자들에게 해를 입히지 않고서, 아주 보수적인 방법으로 단숨에 소유의 모든 부담에서 우리를 해방시키는 문제이다.

노동자 1,000명으로 이루어진 한 사회의 소작료가 100이라면, 900명의 경우는 90, 800명의 경우는 80, 100명의 경우는 10 등등이 된다는 것을 우리는 앞에서 보았다. 이런 식으로 사회에 노동자가 단 1명뿐이라면, 소작료는 차지한 땅의 규모나 가치에 상관없이 0.1이 될 것이다. 따라서 〈토지 자본이 일정하다면, 생산은 소유에 비례하는 것이 아니라 노동에 비례한다〉.

이 원리에 따라, 모든 소유에 대한 불로수득의 최대치는 얼마여야 하는지를 생각해보자.

토지임대차 계약이란 원래 무엇이었는가? 그것은 소유자가 토지에서 나오는 소득의 일정 몫을 자기가 가진다는 조건으로 자기의 토지에 대한 점유를 임차인에게 양도하는 계약이다. 만일 가족 수가 늘어서 소작인이 소유자보다 10배 강해진다면, 그는 10배 더 생산할 것이다. 이것이 지주가 소작료를 10배나 올리는 이유가 될 수 있는가? 그의 권리는 〈네가 많이 생산하는 만큼, 나는 많이 요구한다〉라는 것이 아니라, 〈내가 더 손을 떼면 뗄수록, 나는 더 요구한다〉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소작인 가족 수의 확대, 소작인이 부리는 일꾼의 수, 소작인이 일에 동원하는 자원들, 즉 생산을 증대시키는 이 모든 요인들은 지주와는 무관한 것이다. 그의 요구는 그 자신에게 있는 생산 능력에 의해 측정되어야 하며, 다른 이에게 있는 생산력에 의해 측정되어서는 안 된다. 소유는 불로수득의 권리일 뿐, 결코 머릿수에 따른 권리가 아닌 것이다. 혼자서는 겨우 몇 에이커의 땅도 경작하기 힘든 자가, 자기의 땅이 1만 헥타르라고 해서, 혼자서 생산할 수 없는 것의 만 배를 어떻게 사회에 요구할 수 있다는 말인가? 어째서 임대료가, 소유자가 거기서 얻을 수 있는 효용에 비례해서가 아니라 임차인의 재능과 힘에 비례해서 늘어나야 한다는 말인가? 따라서 우리는 두 번째 경제 법칙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불로수득금은 소유자의 생산을 분수分數로 해서 측정된다.〉

그런데 이 생산, 이 소유자의 생산이란 무엇인가? 달리 말하면, 토지를 가진 영주나 주인이 그것을 소작인에게 빌려주면서 자신이 희생하는 몫이라고 당당하게 말할 수 있는 그것은 과연 무엇인가?

소유자의 생산 능력이 다른 노동자들의 생산 능력과 마찬가지로 1이므로, 토지를 양도함으로써 그가 내어주는 생산물도 역시 1이 된다. 따라서 불로수득의 비율이 10%라면 불로수득금의 최대치는 0.1이 될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앞에서 살펴본 것처럼, 소유자가 생산에서 물러설 때마다 생산물의 총량은 1씩 줄어든다. 따라서 소유자의 손에 들어오는 불로수득금은, 그가 노동자로 남아 있는 동안에 0.1에 해당하지만, 그가 일을 그만두고 물러서는 경우 소작료 감소의 법칙에 따라 0.09가 될 것이다. 이것은 우리를 다음과 같은 마지막 공식으로 인도한다. 〈지주의 소득의 최대치는 노동자 1명의 생산물(이 생산물이 일정한 수치로 표현된다면)의 제곱근과 같다. 이 소득이 감내하는 감소분은, 소유자가 일을 하지 않을 경우에는, 1을 분자로 하고 생산물을 표현하는 수치를 분모로 하는 분수와 같다.〉

이리하여, 일하지 않는 소유자 또는 공동체의 외부에서 자기 자신만을 위해 일하는 소유자의 소득의 최대치는 노동자 1인당 평균 생산 1,000프랑의 1/10로 산정하면, 90프랑이 될 것이다. 따라서 프랑스에 해마다 평균 1,000프랑의 소득을 누리나 그것을 비생산적으로 소비하는 100만 명의 소유자가 있다면, 그들이 매년 지불받는 금액은 10억 프랑이 아니라, 법의 엄정함과 가장 정확한 계산에 따라 9,000만 프랑이어야 한다.

주로 노동계급을 짓누르는 부담금 중에서 9억 1,000만 프랑을 덜어낸다는 것은 이미 상당한 일이다. 그러나 아직도 계산은 끝나지 않았다. 노동자는 아직도 자기 권리의 모든 내용을 다 알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가 지금 보여준 바와 같이, 일하지 않는 소유자에게 응당 돌아가야 할 최소한으로 줄어든 불로수득권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선점권을 인정하는 것이다. 그러나 선점권은 만인에게 동등한 것이므로, 모든 사람은 같은 자격으로 소유자가 될 것이다. 모든 사람은 자기 생산물의 일부에 대해 동등한 소득을 취할 권리를 갖는다. 따라서 노동자가 소유권을 이유로 소유자에게 지대를 지불하지 않을 수 없다면, 소유자는 바로 같은 권리에 의해 같은 지대를 노동자에게 지불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러면 이들의 권리는 서로 균형을 이루게 되므로, 이들 사이의 차이는 영零이 된다.

〈주석〉 만일 소작료가 법적으로 소유자의 추정된 생산물의 일부에 지나지 않는다면, 그 소유의 범위나 비중에 관계없이, 개개의 소토지 소유자들 대다수에게도 같은 일이 일어난다. 왜냐하면 단 한 사람이 이들을 각각 개별적으로 착취할 수 있다고 하더라도, 그들 전부를 동시에 착취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요약해 보자. 불로수득권은 생산의 법칙에 의해 규정된 대단히 좁은 범위 안에서만 존재할 수 있으며, 선점권에 의해 무효화된다. 그런데 불로수득권 없이는 소유가 없으며 따라서 소유는 불가능하다.

네 번째 명제 소유는 불가능하다. 왜냐하면 그것은 살인 행위이기 때문이다.

만일 불로수득권이 이성과 정의의 법칙에 종속될 수 있다면, 그것은 일종의 수당, 즉 그 〈최대치〉가 노동자 한 명당 그가 생산할 수 있는 것의 일부를 절대로 넘어설 수 없는 보상금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우리가 논증한 것이 바로 이것이다. 그러나 불로수득권 - 주저 없이 말하자면 도둑질의 권리 - 이 왜 이성의 통제를 감수하겠는가? 불로수득권은 이성과는 아무런 공통점이 없는데 말이다. 소유자는 양식과 사물의 이치가 자신에게 부여해 주는 바대로의 불로수득에 만족하지 않는다. 그는 그것을 10배, 100배, 1,000배, 100만 배로 지불받는다. 소유자로서 그는 자기의 소유물에서 단지 1만큼의 생산물을 가질 수 있다. 그런데 그는 자신이 전혀 기여한 바 없는 사회를 상대로, 소유자로서의 생산 능력에 비례하는 권리를 요구하는 것이 아니라 머릿수 당 세금을 내라고 요구하는 것이다. 그는 자신의 동료들에게 그들의 힘, 머릿수, 근면성에 비례해서 세금을 매긴다. 농사꾼에게 사내아이 한 명이 태어난다. 〈옳거니, 불로수득이 하나 더 늘었다〉라고 소유자는 말한다. 소작료에서 인두세로의 이러한 탈바꿈이 어떻게 이루어졌는가? 우리의 법률학자들, 우리의 신학자들, 이 꾀주머니 박사님들은 어떻게 불로수득권의 이러한 확대를 막지 않았는가?

소유자는 자기의 생산 능력에 비추어 자신의 소유지를 다 이용하는 데 일꾼이 얼마나 필요한가를 계산해보고 나서 그 수만큼 소유지를 분할한다. 그리고 그는 〈각자 나에게 불로수득을 지불하라〉고 말한다. 따라서 소득을 늘리려면, 소유지를 나누기만 하면 된다. 소유자는 자기 몫의 이익을 자기가 행한 노동에 근거해서 계산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의 자본에 근거해서 계산한다. 이런 식의 치환 행위에 의해 주인의 손으로는 하나밖에 생산하지 못하는 바로 그 소유지가 그 주인에게 10개, 100개, 1,000개, 100만 개의 가치를 갖게 되는 것이다. 이제부터 소유자는 자기에게 달려오는 일꾼의 이름을 적을 채비만 하면 된다. 그의 일은 허가장과 영수증을 내주는 일뿐이다.

이토록 수월한 일거리에도 만족하지 않고 소유자는 자신이 놀고먹으면서 생기는 적자를 감수하려 하지 않는다. 적자는 생산자에게로 전가되고, 소유자는 늘 생산자에게 동일한 보상을 요구한다. 소작료가 일단 천정부지로 오르고 나면, 소유자는 절대 그것을 내리는 일이 없다. 물가의 양등, 일손의 부족, 계절에 따른 장애, 심지어 죽음마저도 그는 개의치 않는다. 자신이 일하는 것도 아닌데 왜 그가 흉년을 걱정하겠는가?

여기서 일련의 새로운 현상들이 나타난다.

세는 세금을 공격할 때는 언제나 멋지게 논리를 전개하면서도, 지주가 소작인에게 세리稅吏와 마찬가지의 약탈 행위를 저지르고 있다는 사실을 좀처럼 인정하려 하지 않는다. 그는 자신의 두 번째 서한에서 맬서스에게 다음과 같이 말한다.

〈만일 징세관들, 그 위탁업자들이 생산물의 1/6을 소비한다면, 그들은 이로 인해 생산자들이 자신들이 생산한 것의 5/6로 먹고 살도록 강요하는 셈이다. 그들은 이점을 인정한다. 그러나 동시에 그들은 각자가 자신이 생산한 것의 5/6만 가지고도 살 수 있다고 말한다. 원한다면, 나 역시 그 점을 인정할 것이다. 그러나 나로서는 생산물의 1/6이 아니고, 2/6 아니면 그 반을 요구할 경우라도 생산자가 마찬가지로 잘 살 수 있으리라고 생각하는가를 묻고 싶다. 그러면 나는 생산자가 2/3를… 나아가 3/4을 빼앗기더라도 여전히 살아갈 것인가를 묻고 싶다. 그들이 더 이상 아무 대답도 못하리라는 것을 나는 알고 있다.〉

이 프랑스 경제학자들의 대부께서는 만일 소유에 대한 자신의 선입견에 의해 눈이 멀지만 않았더라면, 소작제가 낳는 결과가 바로 이러한 것이라는 사실을 알아차렸을 것이다.

부모와 아이 넷, 합해서 여섯 명으로 이루어진 한 농민 가정이 있다고 하자. 이들은 작은 전답을 갈며 생활한다. 그들은 열심히 일해서 그럭저럭 수지를 맞추고 있으며, 의식주를 해결하고 나면 저축할 돈도 남지 않지만 빚질 일도 없다고 가정하자. 좋은 해도 있고 나쁜 해도 있지만 그들은 생활해 나간다. 풍년이 들며, 아버지는 포도주를 좀 더 마시고, 딸들은 드레스를 사고, 아들들은 모자를 산다. 약간의 낙농품도 먹고, 이따금씩 고기도 맛본다. 내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바로 이러한 사람들이 파산하고 몰락한다는 사실이다.

왜냐하면 우리의 공리의 세 번째 귀결에 따르자면, 이들은 자신이 그 소유자인 자본에 대해서 이자를 지불하지 않으면 안 되기 때문이다. 이 자본을 8,000프랑, 이자율을 2.5%라고 하면, 해마다 지불해야 할 이자는 200프랑이 된다. 따라서 만일 이 200프랑을 총생산에서 따로 떼어 저축하고 자본화시키는 대신, 소비에 돌린다고 하면, 가계의 지출에서 매년 200프랑씩 적자가 생기고 그리하여 40년이 지난 후에는 이 선량한 사람들은 알지도 못하는 사이에 자기 자산을 다 먹어치우고 알거지가 된다.

우스꽝스러운 결론이다. 그러나 비참한 현실이다.

징병이 다가온다… 징병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정부가 가정에 대해 행사하는 불시의 소유권 행위이며, 인력과 금전의 약탈이다. 농민들은 자기 자식들이 떠나는 것을 결코 반기지 않는다. 이 점에서 그들은 조금도 잘못이 없다고 나는 생각한다. 스무 살의 젊은이가 병영에서 무엇인가를 번다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그는 거기서 몸을 망가뜨리지 않으면, 자기혐오에 빠진다. 대개 병사의 사기는 그가 군복에 대해 품은 증오심에 의해 판단하면 된다. 불행한 백성 아니면 쓸모없는 백성, 이것이 바로 국가의 부름을 받은 프랑스인의 처지이다. 있어서는 안 되지만, 벌어지는 일이다. 10만 명에게 물어 보라. 그러면 단 한 명도 내 말을 부인하지 않을 것이다.

우리의 농민이 징집된 자식 두 명을 되찾으려면, 빌린 돈 4,000프랑을 내야 한다. 우리가 앞에서 말한 대로 이자는 5%로 계산해서 200프랑이다. 해마다 그럭저럭 수지의 균형을 맞추어 온 가족의 생산이 지금까지 1,200프랑 즉 한 사람 당 200프랑이었다고 하면, 이 이자를 갚기 위해서는 여섯 명이 일곱 명분의 일을 하거나 아니면 다섯 명분의 소비를 해야 한다. 소비를 줄일 수는 없는 일이다. 어떻게 생필품을 줄인다는 말인가? 생산을 늘리는 일도 불가능하다. 더 잘 더 많이 일할 방도가 없으니 말이다. 어중간한 방법을 택해서 다섯 명 반만큼 소비하고 여섯 명 반만큼 생산하면 어떨까? 위장에는 타협이 없다는 것을, 일정한 한계 아래로는 절식을 할 수 없다는 것을, 즉 건강을 해치지 않고 허리띠를 졸라매는 일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곧 체험할 것이다. 생산을 여섯 명 반으로 늘리더라도 서리, 가뭄, 가축병 따위가 덮쳐서 농민의 희망은 완전히 꺾인다. 요컨대 지대는 갚을 길이 없게 되고, 이자는 늘어만 가고, 작은 땅덩어리는 차압당하고, 원래의 점유자는 추방당한다.

이렇게, 소유권을 행사하지 않는 동안은 행복하게 살던 한 가정이 이 권리의 행사가 요구되자마자 비참한 상태에 빠진다. 소유란, 충족되려면 땅을 차지한 이가 말만으로 그 땅을 넓히고 또 기름지게 할 수 있는 이중의 능력을 요구하는 것이다. 토지의 단순한 점유자라면, 그는 거기에서 먹고 살 수 것을 찾을 수 있다. 그가 소유권을 주장한다면, 그 땅은 그에게 부족하게 된다. 자신이 소비할 만큼만을 생산할 수 있는 동안에는 그가 자신의 노력에 의해 얻은 결실은 그의 노력에 대한 보상일 뿐이다. 도구를 위해서는 아무것도 남지 않는다.

자신이 생산할 수 없는 것을 갚아야 하는 것, 이것이야말로 소유자가 공동체적 생산에서 뒤로 물러앉아 새로운 방식으로 노동자를 착취하기 시작하면서 소작농이 처하게 된 상황이다.

여기서 우리의 첫 번째 가설로 다시 돌아가자.

여느 때처럼 같은 양을 생산했다고 확신하고 있던 농민 900명은 소작료를 지불하고 나니 지난해보다 1/10만큼 가난해진 것을 알고는 깜짝 놀란다. 사실인즉, 이 1/10은 한때 생산과 공공지출에 참여했던 지주-노동자가 생산했던 것이고 또 그에 의해 지불되던 것이다. 그런데 지금은 이 1/10이 생산되지 않으며 지불되기만 할뿐이다. 즉 그것은 생산자의 소비에서 차압된 것임에 틀림이 없다. 이 불가해한 적자를 메우려고 노동자는 되갚을 수 있으리라고 충분히 자신하면서 돈을 빌린다. 그런데 이 확신은 결국 이듬해에 먼저 빌린 돈에 이자까지 덧붙인 또 한 번의 대부로 귀착될 뿐이다. 누구에게서 빌리는가? 지주로부터이다. 지주는 그가 노동자에게서 받은 돈 중에서 남아도는 몫을 노동자에게 빌려준다. 그리고 지주가 되돌려 주어야 마땅할 이 과잉징수액은 이자 대부의 형태로 다시 그에게 이득을 가져다준다. 이리하여 빚은 눈덩이처럼 늘어난다. 소유자는 갚을 능력이 없는 생산자에게 가불을 해주기를 꺼린다. 그리고 생산자는 늘 빼앗기면서도 그에게서 빼앗아간 것을 늘 빌리고, 마침내 알거지가 된다.

이번에 그는 수단을 강구한다. 그는 곡물 가격을 올린다. 그러면 제조업자도 그만큼 자기 제품 값을 올린다. 반작용이 계속되고 몇 차례 요동이 따르고 나면, 농민이 제조업자에게 전가했다고 생각하는 소작료는 거의 상쇄된다. 결과적으로, 그는 자신의 셈이 성공했다고 자축하는 동안 그가 또다시 가난해졌음을 알게 된다. 물론 이전보다는 상대적으로 덜 가난하다고 할 수 있다. 그도 그럴 것이 가격 상승은 누구에게나 미치는 것이니, 소유자도 타격을 받기 때문이다. 따라서 노동자는 1/10만큼 가난해지는 것이 아니라 9/10만큼 가난해지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항상 빚이며, 이 빚 때문에 노동자는 빌리고, 이자를 갚고, 검약하고 또 굶어야만 한다. 갚지 않아도 되나 갚고 있는 이 9/100 때문에 굶는 것이다. 빚을 탕감하기 위해 굶는 것이다. 그 빚의 이자를 탕감하기 위해 굶는 것이다. 흉년이 들면, 굶는 일은 아사에까지 이른다. 〈더 일해야 한다〉고 그들은 말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과도한 노동은 굶는 일만큼이나 치명적이다. 이 모든 일을 한꺼번에 다 하면, 어떻게 되겠는가? 〈‘더 일해야 한다’라는 말은 ‘더 생산해야 한다’라는 의미이다〉라고 그들은 말할지도 모른다. 그러면, 생산은 어떤 조건에서 이루어지는가? 노동과 자본과 토지의 결합된 작용에 의해서이다. 노동의 경우, 소작인이 의당 그것을 제공하도록 되어있다. 그러나 자본은 저축에 의해서만 마련된다. 그런데 소작인이 무언가 저축할 것이 있다면, 그는 곧 그것으로 빚을 갚아야 한다. 더 양보해서, 그에게 자본이 부족하지 않다고 하자. 그래도 그가 경작하는 땅덩이가 늘 같은 면적이라면, 그 자본이 그에게 무슨 쓸모가 있겠는가? 늘려야 할 것은 바로 땅덩어리이다.

그들은 마침내 〈더 잘, 더 생산적으로 일해야 한다〉라고 말할 것인가? 그러나 소작료는 생산량을 최대한으로 잡은 평균치를 바탕으로 계산한 것이다. 그렇지 않은 경우, 지주는 소작료를 올린다. 이런 식으로, 대지주들은 인구의 증대와 산업의 발전에 따라 사회가 자신들의 소유지에서 얼마나 더 생산할 수 있는지를 알 때마다 그만큼 순차적으로 임대료를 올리지 않았는가? 소유자는 사회의 공익에는 무관심하다. 그러나 그들은 마치 매처럼 먹이에 눈을 떼지 않고 언제든지 덮쳐서 먹어치울 채비가 되어있다.

우리가 지금 인구 1,000명의 사회에 대해 관찰한 사실들은 각 나라에서나 인류 전체에서 더 큰 규모로 재현되고 있다. 물론 그 모양새는 한없이 다채롭고 변화무쌍하지만, 여기서 그것을 묘사하는 것은 나의 의도가 아니다.

요컨대, 소유는 횡령에 의해서 노동자들을 헐벗게 만든 다음에 탈진으로 서서히 죽게 만든다. 약탈과 살인이 없으면, 소유는 무無이다. 그런데 약탈과 살인에 의해서 소유는 즉시 지지기반을 잃고 소진된다. 따라서 소유는 불가능하다.

다섯 번째 명제 소유는 불가능하다. 왜냐하면 사회는 소유에 의해 자기 자신을 먹어치우기 때문이다.

짐을 너무 많이 실으면, 당나귀는 기진맥진하지만 인간은 줄곧 앞서 걸어간다. 이 고집스러운 끈기, 이것을 소유자는 잘 알고 있으며 여기에 돈을 벌 희망을 건다. 자유로운 노동자는 10을 생산한다. 그러나 나를 위해 그가 12를 생산할 것이라고 소유자는 생각한다.

사실상, 우리가 앞에서 말한 농부는 자기 땅을 저당 잡히는 데 동의하여 자기가 태어난 집에 작별을 고하기 전에 필사의 노력을 다한다. 그는 새 땅을 소작한다. 그는 1/3만큼 더 씨를 뿌릴 것이다. 그러면 이 새 수확의 절반이 자기 몫이 되는 고로, 그는 1/6만큼만 여분으로 수확해서 지대를 지불할 것이다. 오호 통재라! 생산을 1/6만큼 불리기 위해서 농부는 1/6이 아니라 2/6만큼 더 노동을 해야만 하는 것이다. 그가 수확을 거두는 것은 이러한 대가를 치르고서이며, 그는 신 앞에서라면 지불하지 않아도 될 소작료를 지불하는 것이다.

소작인이 한 것을 이번에는 기업가가 따라한다. 소작인은 더 많은 땅을 경작하며 이웃을 땅에서 내쫓는다. 기업가는 상품 가격을 낮추고, 제조와 판매를 독점하며 경쟁자들을 물리치려 애쓴다. 소유를 만족시키려면 우선 노동자는 자신의 필요 이상으로, 그 다음에 자신의 힘 이상으로 생산해야만 한다. 왜냐하면 소유자로 격상한 일부 노동자가 자리를 비움으로써 한편은 늘 다른 한편의 결과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자신의 능력과 필요 이상으로 생산하려면, 다른 이의 생산을 차지해야만 하며 따라서 생산자의 수가 감소된다. 이렇게 소유자는 우선 스스로 생산에서 멀어짐으로써 생산을 감소시킨 후, 다시 노동을 독차지함으로써 생산을 감소시킨다. 계산해보자.

우리가 앞에서 살펴보았듯이, 지대를 지불한 후에 노동자가 입은 손실은 1/10이다. 노동자는 그 정도 분량만큼 자신의 생산을 늘리려고 애쓸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 노동자는 일을 더하는 것밖에 달리 수단이 없으며, 실제로 그렇게 하고 있다. 지대를 완전히 받아낼 수 없는 지주들의 불만, 더 성실하고 더 일을 잘한다고 여겨지는 다른 소작인들이 지주에게 내미는 유리한 제의와 언질, 비밀스런 흥정이나 음모, 이런 것들이 노동의 할당에서의 변동이나 일정 수의 생산자들의 퇴출을 결정한다. 다른 이들의 생산에 1/10을 덧붙이기 위해서 900명 중에서 90명이 퇴출될 것이다. 그러면 총생산은 늘어날 것인가? 결코 아니다. 노동자 810명이 900명 몫의 생산을 맡고 있지만, 그들이 생산해야만 하는 것은 1,000명의 몫이다. 그런데 소작료는 노동에 비례해서가 아니라 토지 자본에 비례해서 책정되는 것이며 절대 줄어들지 않기 때문에, 부채는 전과 마찬가지로 계속되고 피로는 쌓여만 간다. 이것이 바로 열 명 중에 한 명을 죽이고 또다시 열 명 중에 한 명을 죽이곤 하는 사회의 모습이다. 이 사회는, 실패, 파산, 정치적 · 경제적 파국 따위가 주기적으로 일어나서 평형을 회복해 주고 보편적 고난의 참된 원인에 관심을 돌리게 하지 않는다면, 스스로 붕괴하고 말 것이다.

자본과 토지의 침탈에 이어서 경제적 과정들이 뒤따르는데, 그 결과는 마찬가지로 일정 수의 노동자들을 생산에서 축출하는 것이다. 이자가 어디서나 소작인이나 기업가를 따라다니기 때문에, 이들은 너 나 할 것 없이 이렇게 말하곤 한다. 〈일꾼들에게 적게 지불한다면, 그것으로 지대와 이자를 갚을 수 있을 텐데.〉 이제 이 놀라운 발견은 노동을 쉽고 신속하게 만들어주며 나아가 노동자들을 수천씩 죽이는 그만큼 많은 끔찍한 기계들이 된다.

〈몇 년 전에 스트래포드Strafford 백작부인은 1만 5,000명을 영지에서 내쫓은 후 이들을 소작인으로 다시 고용해서 땅의 가치를 높였다. 이 사적인 통치 행위가 1820년에 어느 스코틀랜드의 대지주에 의해 소작농 600가구에게 다시 되풀이되었다.〉(티쏘Tissot, 『자살과 폭동에 대하여』).

내가 인용한 저자는 현대 사회들을 뒤흔드는 반항 정신에 대해 웅변조의 글을 쓰고 있으나 정작 추방당한 사람들의 반항을 부인할 것이냐 아니냐에 대해서는 한마디도 않고 있다. 나로서는 반항이 첫 번째 권리이며 가장 신성한 의무라고 소리 높여 외치는 바이다. 오늘 나는 다만 나의 신앙고백이 이해되기를 바랄 뿐이다.

사회는 자기 자신을 먹어치운다. 첫째는 노동자들에 대한 폭력적이고 주기적인 억압에 의해서(우리는 이 사실을 보아왔고 또 앞으로도 보게 될 것이다). 둘째는 소유가 생산자의 소비에서 취하는 몫에 의해서 말이다. 이 두 가지 형태의 자살 행위는 동시에 발생하는 것이나, 얼마 안 가서 첫째 것이 둘째 것에서 새로운 원기를 얻게 되어, 이제 폭리에 더해 기근이 노동을 더욱 필요하게 만듦과 동시에 더욱 드물게 만들 것이다.

상업과 경제학의 원리에 따르자면, 한 기업이 성공하려면 그 생산물이 ⑴ 자본의 이자와, ⑵ 이 자본의 유지와, ⑶ 모든 노동자와 기업가의 임금의 총액과 같아야만 하며 여기에 더하여 가능한 만큼 더 많은 이익이 실현되어야만 한다.

소유가 지닌 금전적이고 탐욕적인 재능을 찬미하자. 불로수득이 지닌 각양각색의 이름에 맞추어 소유자는 ⑴ 이자의 형태로 뿐만 아니라, ⑵ 이윤의 형태로 그것을 얻을 권리를 요구한다. 자본의 이자는 제조비에 들어간 선금의 일부일 뿐이라는 것이 소유자의 주장이다. 어느 공장에 10만 프랑을 투자해서 그 중에 경비를 공제하고 연 5,000프랑의 수입을 얻었다면 그것은 이윤이 아니라 자본의 이자일 뿐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소유자는 공짜로 일하는 인간이 아니다. 우화에 나오는 사자처럼, 소유자는 자기의 자격 하나하나에 대해 지불케 하고, 그러고 나서는 함께 일한 사람들에게는 하나도 남기지 않는다.

첫째 것을 차지한다. 내가 사자이니 말이다.

둘째 것을 가져간다. 내가 가장 힘이 세니 말이다.

셋째 것도 내 몫이다. 내가 더 뛰어나니 말이다.

넷째 것을 누군가가 가져가면, 그는 화를 입을 것이다.

(Ego primam tollo, nominor quia leo:

Secundam quia sum fortis tribuetis mihi:

Tum quia plus valeo, me sequetur tertia:

Malo adficietur, si quis quartam tetigerit.)

이 우화만큼 더 유쾌한 것이 있겠는가.

나는 기업가, 나는 첫째 몫을 차지한다.

나는 노동자, 나는 둘째 몫을 차지한다.

나는 자본가, 나는 셋째 몫을 차지한다.

나는 지주, 나는 전부 다 차지한다.

파에드루스(Gaius Julius Phaedrus, 기원전 20~?, 우화작가. 이솝이야기를 라틴어로 옮겼다-옮긴이)는 이 4행으로 소유의 모든 형태를 요약하고 있다.

내가 말하고 싶은 것은, 이 이자가, 하물며 이 이윤이 불가능하다는 사실이다.

노동자들은 서로 어떤 관계를 맺는가? 노동자들은 거대한 산업사회의 다양한 구성원들로서 제각기 노동 및 기능 분화의 원리에 따라 전체 생산 중 그 일부를 떠맡고 있다. 우선 이 사회가 축산업자, 무두장이, 제화공이라는 세 명의 개인으로 한정되어 있다고 가정해보자. 사회의 산업은 구두를 만드는 데 있다. 사회의 생산물에서 각 생산자가 차지하는 몫이 얼마냐고 내가 묻는다면, 어떤 학생이든 상업이나 회사의 규칙에 따라 그 몫은 생산물의 1/3이 될 것이라고 답할 것이다. 그러나 여기서 중요한 것은 관례적으로 서로 결합되어 있는 노동자 개개인의 권리들을 균형 잡는 문제가 아니다. 중요한 것은 서로 결합되어 있든 아니든 우리의 세 노동자가 의당 그렇게 하지 않을 수 없으며 원하건 원하지 않건 현실적 필요성이나 수학적 필연성이 이들을 서로 결합시킨다는 사실을 입증하는 일이다.

구두를 만드는 데는 세 가지 공정이 필요하다. 즉 가축을 사육하는 일, 가죽을 마련하는 일, 재단 및 바느질이 요구된다. 가죽의 가치는 농부의 축사에서 나올 때 1이라면, 무두장이의 작업장에서 나올 때는 2가 되고, 제화공의 가게에서 나올 때는 3이 된다. 각 노동자가 일정한 정도의 효용을 생산했다. 결국 생산된 효용을 모두 합하면 이 물건의 가치가 나온다. 따라서 각 생산자는 우선 자신의 노동을, 다음에는 다른 생산자들의 노동을 지불해야만 한다. 그러므로 10개의 가죽 구두를 얻기 위해서는, 농부는 30개의 생가죽을 주어야만 할 것이며, 무두장이는 20개의 무두질한 가죽을 주어야 할 것이다. 왜냐하면 10개의 가죽 구두는 연속된 두 공정을 거친 만큼 생가죽 30개의 가치가 나가기 때문이고, 마찬가지로 20개의 무두질한 가죽은 무두질 공정을 거친 만큼 생가죽 30개의 가치가 나가기 때문이다. 그러나 제화공이 자기의 상품 10개에 대해서 농부에게 33개, 무두장이에게 22개를 요구한다면 교환은 성립할 수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럴 경우 농부와 무두장이는 제화공의 노동에 대해 10을 지불한 후, 그들 자신이 10을 주고 판 것을 11을 주고 되사지 않으면 안 되기 때문이다. 이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자, 그렇다면! 그런데 이것은 제조업자가 무언가 이익을 남길 때마다 늘 일어나는 일이다. 이 이익이 지대이든 소작료든 이자이든 이윤이든 말이다. 우리가 지금 이야기하는 작은 사회 안에서 만일 제화공이 공구를 마련하고 가죽 재료를 사들인 후 그리하여 자금이 회수될 때까지 살아가기 위해서 이자로 돈을 빌린다면, 그는 그 이자를 갚기 위해서 농부나 무두장이에게서 이득을 올리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이 명백하다. 그러나 이 이익이라는 것은 사기를 벌이지 않는 한 불가능하기 때문에, 이자는 불쌍한 제화공의 부담이 될 것이고 결국 그를 파산으로 몰고 갈 것이다.

나는 터무니없이 단순화된 어떤 가상의 경우를 예로 들었다. 세 가지 기능만으로 축소된 인간 사회란 있을 수 없다. 가장 덜 문명화된 사회라도 이미 수많은 산업을 전제로 하고 있다. 오늘날 산업적 기능(나는 산업적 기능이라는 말로 모든 유용한 기능을 지칭한다)의 수는 아마도 1,000개 이상일 것이다. 그러나 기능인의 수가 몇 명이든 간에 경제 법칙은 항상 동일하다. 요컨대, 〈생산자가 살기 위해서는 그의 임금이 그의 생산물을 되살 수 있어야만 한다〉는 것이다.

경제학자들은 이른바 그들이 주창하는 과학의 이 근본 원리를 부정할 수 없다. 그러면 그들은 왜 그토록 고집스럽게 재산을 옹호하고, 임금의 불평등과 고리대의 정당성과 이윤의 정당함을 옹호하는가? 이 모든 것이 경제 법칙에 어긋나고 거래를 불가능하게 만드는 데도 말이다. 한 기업가가 원료를 10만 프랑에 사들이고 임금과 품삯으로 5만 프랑을 지불한다. 그러고 나서 그는 생산물에서 20만 프랑을 얻으려 한다. 다시 말해서 그는 원료와 노동자들의 노동에서 이익을 얻으려 하는 것이다. 그러나 원료의 공급자와 노동자들이 자신들의 임금을 합치더라도 자신들이 기업가를 위해 생산한 것을 되살 수 없다면, 이들은 어떻게 생활할 수 있겠는가? 문제를 파고들어보자. 자세한 설명이 필요하다.

노동자가 자신의 노동에 대해 하루당 평균 3프랑을 받는다면, 노동자를 고용한 부르주아가 자신에게 돌아갈 보수(비록 그것이 자신의 자본에 대한 이자라 할지라도)에 더하여 무엇인가 더 얻고자 한다면, 그는 상품의 형태로 노동자의 일당을 되팔아서 3프랑 이상을 빼내지 않으면 안 된다. 따라서 노동자는 자신이 고용주에게 생산해 준 것을 되살 수 없게 된다. 사정은 어떤 직업에서나 마찬가지이다. 재단공, 모자공, 가구공, 대장장이, 무두장이, 석공, 보석세공인, 인쇄공, 점원 등등, 심지어 자영농이나 포도 재배자에 이르기까지, 이들은 자신의 생산물을 되살 수 없다. 그도 그럴 것이 이런저런 형태로 이득을 얻고 있는 고용주를 위해 생산하면서도 이들은 자신의 노동에 대하여 그 노동으로 얻은 것보다 더 많이 지불해야 하니 말이다.

프랑스에는 2,000만 명의 노동자가 과학, 예술, 산업 등 온갖 분야에 흩어져서 인간 생활에 필요한 온갖 물건들을 생산하고 있다. 이들의 일당 총액이 연간 200억 프랑에 달한다고 가정하자. 그러나 소유권 때문에 그리고 무수한 불로수득, 사례금, 십일조, 이자, 뇌물, 이윤, 소작료, 집세, 지대 그리고 천차만별의 이익금 때문에, 생산물은 소유자와 고용주들에 의해 250억 프랑으로 평가된다고 하자.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살기 위해서 바로 이 생산물들을 되사지 않을 수 없는 노동자들은 그들이 4로 생산한 것을 5를 주고 되사야만 한다는 것을 의미하며 닷새 중에 하루를 굶어야만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 계산이 잘못이라고 입증할 수 있는 경제학자가 프랑스에 있다면, 나는 나의 잘못을 지적해 달라고 간청하는 바이다. 그러면 내가 오해해서 그리고 악의로 소유에 대해 퍼부은 모든 공격을 취소할 것을 약속한다.

이제 이 이익의 결과들을 살펴보자.

만일 노동자의 임금이 어떤 직업에서나 동일하다면, 소유자의 선취에 따른 결손도 어디에서나 동일하게 느껴질 것이다. 그와 동시에 악의 근원이 너무나도 명백하게 드러나기 때문에 이미 오래 전부터 잘 알려지고 또 억제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청소부의 임금에서 장관의 임금에 이르기까지 임금 사이에도 재산에서와 마찬가지로 불평등이 존재하기 때문에 약자에 대한 강자의 약탈은 파문을 이루듯 번져서 사회 계서제에서 가장 아래 자리 잡은 노동자일수록 더욱 큰 결핍을 느낄 것이며, 인민의 최하층 계급은 말 그대로 헐벗고 다른 사람들에 의해 산채로 먹힐 것이다.

노동자 대중은 그들이 짠 피복도, 그들이 만든 가구도, 그들이 벼린 쇠붙이도, 그들이 다듬은 보석도, 그들이 새긴 판화도 살 수 없다. 그들은 자기가 씨를 뿌린 밀도, 자기가 재배한 포도로 담근 포도주도, 자기가 기른 가축의 고기도 손에 넣을 수 없다. 그들에게는 자기가 지은 집에 살 권리도, 자기가 소재를 제공한 연극을 구경할 권리도, 자기 육체에 필요한 휴식을 즐길 권리도 허용되지 않는다. 왜 그런가? 이 모든 것을 즐기기 위해서는 요구하는 값을 치르고 그것을 사야만 하는데, 불로수득권이 이를 허용하지 않기 때문이다. 노동자들은 굶주린 채 넋을 잃고 쳐다보는 휘황찬란한 상점들의 간판 위에서 굵은 글씨로 새겨진 문구를 읽는다. 〈이것은 그대가 만든 것이나 그대가 가지지 못하리라(Sic vos non vobis!).〉

노동자 1,000명을 고용하고 이들 각자에게서 하루당 1수sou씩 버는 공장주는 노동자 1,000명을 도탄에 빠트리려고 준비하는 자이다. 이익을 보는 자는 누구나 기아 계약을 맺었다. 그런데 인민은 소유가 자신을 굶주리게 만드는 수단이 되는 그 노동마저도 얻지 못한다. 왜 그런가? 임금이 불충분한 까닭에 노동자들은 노동을 독점하지 않을 수 없으며 굶주림으로 죽기 전에 경쟁으로 인해 서로가 서로를 죽이고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진리를 들추어내자면 끝이 없다.

만일 노동자가 자신의 봉급으로 자신의 생산품을 살 수 없다면, 생산품은 생산자를 위해 만들어진 것이 아닌 셈이다. 그러면 누구를 위한 것인가? 가장 돈 많은 소비자를 위해서, 달리 말하자면 사회의 일부 집단을 위해서일 뿐이다. 그러나 사회 전체가 일을 한다면, 사회는 사회 전체를 위해 생산하는 것이다. 따라서 사회의 일부만이 소비한다면, 조만간 사회의 일부가 일을 쉬어야만 한다. 그런데 일을 쉰다는 것은 노동자에게나 소유자에게나 죽는 일이다. 여러분은 결코 여기에서 벗어날 수 없으리라.

상상할 수 있는 가장 개탄할 광경은 생산자들이 자신들의 편견 탓에 깨닫지 못한 이 수학적 필연성에, 이 수의 힘에 저항하여 싸우고 있는 장면이다.

인쇄공 10만 명이 3,400만 명에게 충분히 읽을거리를 제공할 수 있다면, 그리고 이들 중 1/3 정도만이 그 책값을 감당할 수 있다면, 이 10만의 노동자는 서점에서 팔릴 수 있는 양보다 3배나 더 생산하게 되리라는 것은 명백하다. 노동자의 생산이 소비의 필요를 초과하지 않기 위해서는 노동자가 3일 중 이틀은 일을 쉬든지 아니면 매주, 매달 또는 매 4분기마다 1/3씩 서로 교대해야만 한다. 즉 그들 생애의 2/3 동안 살지 않아야 한다는 말이다. 그러나 산업이란 소유자의 영향력에 의해서, 이런 식의 규칙을 따르지 않기 마련이다. 생산물의 양이 많으면 많을수록, 생산 공정이 빠르면 빠를수록, 책 한 권당 원가가 낮아지기 때문에, 적은 시간 안에 더 많이 생산하고자 하는 것이 산업의 본질이다. 매진될 징조가 보이는 즉시 공장은 일꾼들로 꽉 차고 모두 일에 달라붙는다. 이때 거래는 번창하며 지배하는 자도 지배받는 자도 서로 즐거워한다. 그러나 사람들이 일을 하면 할수록 그만큼 휴업을 준비하는 셈이다. 많이 웃는 만큼 많이 울게 되리라. 소유제도 아래서는 근면의 꽃이 장례식 화환을 장식하는 데 쓰일 뿐이다. 노동자는 일하면서 자신의 무덤을 파고 있다.

공장이 멈출 때도 자본은 이자가 붙는다. 따라서 생산업자는 당연히 생산 경비를 줄임으로써 생산을 유지하려 한다. 여기에서 임금의 인하, 기계의 도입, 여성 또는 아동 노동에 의한 남성 노동의 대체, 숙련도의 저하, 불량 제품 등이 생긴다. 생산은 계속된다. 왜냐하면 생산비의 저하가 판로의 확대를 가능하게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언제까지나 생산이 계속될 수는 없다. 왜냐하면 원가의 하락이 생산의 양과 속도에 토대를 두는 것인 만큼, 생산 능력이 그 어느 때보다도 소비를 초과하게 되기 때문이다. 소유의 원리가 끔찍스러운 결과를 낳는 것은 바로 이때, 즉 생산이 노동자들 앞에 멈추어서고 노동자들이 임금으로 그날의 생계를 겨우 때우기도 힘겨울 때이다. 이때에는 저축도 검약도 있을 수 없고 하루라도 더 살게 해줄 조금의 자본 축적도 있을 수 없다. 오늘 공장 문이 닫히고, 내일 광장에는 굶주림이 넘친다. 모레는 병원에서 죽거나 아니면 감옥에서 끼니를 때울 것이다.

새로운 사건들이 일어나서 이 끔찍한 상황을 한층 더 복잡하게 만든다. 상품이 넘치고 가격이 너무 떨어진 결과, 기업가는 곧 자기가 빌린 자본의 이자도 갚지 못하게 된다. 그러면 겁먹은 주주들은 서둘러 자금을 회수하고 생산은 정지되며 노동은 중단된다. 그러고 나서 사람들은 자본이 산업에서 빠져나가 증권거래소에 몰리는 것을 보고 깜짝 놀란다. 나는 일전에 블랑키(A. Blanqui, 1798~1854, 프랑스의 경제학자-옮긴이) 씨가 자본가들의 무지와 어리석음을 개탄하는 것을 본 적이 있다. 이 자본 이동의 원인은 실로 단순하다. 그러나 바로 그 이유 때문에 어떤 경제학자도 그것을 알아차릴 수 없었거나, 좀 더 정확히 말하면 그에 대한 언급을 회피해야만 했다. 그 원인이란 바로 〈경쟁〉이라는 것이다.

내가 경쟁이라고 부르는 것은 동종의 두 산업 사이의 대립뿐만 아니라 모든 산업들이 서로 상대방을 이기고자 벌이는 동시다발적인 분투를 가리킨다. 오늘날 이 분투는 너무나 엄청나서 상품 가격이 생산비나 판매비를 건지지도 못할 정도이다. 따라서 노동자들의 임금을 제하고 나면, 자본가에게는 이자는커녕 아무것도 남지 않게 된다.

따라서 상업 및 산업 침체의 첫 번째 원인은 자본의 이자인데, 이 이자라는 것은 아주 옛날에 그것이 돈을 빌려 쓴 대가를 지불하는 데 쓰일 때마다 고리대라는 이름으로 이구동성으로 비난을 받았으나, 이제 지대, 소작료, 이익 따위의 명칭으로 사용되자 사람들은 굳이 비난하려 들지 않는다. 마치 빌려 쓴 물건의 종류가 사실상 〈도둑질〉에 불과한 대부의 대가를 응당 정당화할 수도 있다는 듯이 말이다.

자본가가 얻는 불로수득이란 바로 이런 것이며, 상업 공황의 빈도와 강도가 바로 이런 것이리라. 첫 번째 것이 주어진다면 우리는 언제나 다른 두 가지를 알 수 있으며 그 역도 마찬가지이다. 당신은 사회를 규율하는 요인이 무엇인지 알고자 하는가? 그러면 가용 자본의 양, 즉 이자를 가져오는 자본의 양과 그 이자의 법정 이율에 대해 문의하라. 벌어질 사건들이란 일련의 파산에 다름 아닐 것이며 그 파산의 건수와 강도는 자본의 활동력 자체에 비례할 것이니 말이다.

1893년에 기록된 파산은 파리 한 지역에서만 1,064건이었다. 이 비율은 1840년 초 몇 달 동안 줄곧 유지되었으며 내가 이 글을 쓸 무렵에도 위기는 여전히 끝나지 않은 듯이 보인다. 게다가 스스로 문을 닫은 상사의 수가 파산이 선고된 상사의 수보다 훨씬 많은 것으로 확인된다. 이 대홍수에 의해 우리는 회오리바람의 파괴력을 확인해 볼 수 있는 것이다.

사회의 파탄은 때로는 은밀하고 상시적일 수 있으며, 때로는 간헐적이고 격렬할 수 있다. 이것은 소유가 움직이는 여러 가지 양태에 따라 다르게 나타난다. 소유가 분할되어 있고 소규모 산업이 많은 나라에서는 각자의 권리와 주장은 상대방의 권리와 주장에 의해 균형을 이루게 되며 따라서 소유의 침탈력은 서로 상쇄된다. 여기에서는 사실상 소유가 존재하지 않는다. 그도 그럴 것이 불로수득권이 거의 행사되지 않기 때문이다. 삶의 안정성에 관한 한 노동자들의 처지는 그들 사이에 절대적인 평등이 존재하는 것과 거의 마찬가지이다. 그들은 자유롭고 완벽한 결사체가 주는 모든 이점을 박탈당하고 있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들의 생존이 위협받는 것은 아니다. 소유권, 즉 누구도 그 근원을 알지 못하는 이 불행에 의한 몇몇 개별적인 희생자들을 제외한다면, 사회는 이러한 유형의 평등 속에 평온을 유지하는 듯이 보인다. 그러나 눈여겨보라. 사회는 칼날 위에서 겨우 균형을 잡고 있는 데 불과하다. 아주 작은 충격으로도 사회는 쓰러지고 죽음에 이르게 될 것이다.

대개 소유의 회오리바람은 국지화되어 있다. 한편으로 지대는 일정한 수준에서 머물며, 다른 한편으로 경쟁 및 과잉생산의 효과에 의해 공산품 가격이 더 이상 오르지 않는다. 따라서 농민의 처지는 크게 달라지지 않으며 계절에 의해 좌우될 뿐이다. 따라서 소유의 탐욕이 주로 미치는 것은 공업에서이다. 통상적으로 문제가 되는 것은 〈상업 공황〉이지 〈농업 공황〉이 아니다. 왜냐하면 소작농은 불로수득권에 의해 조금씩 먹혀 들어가는 데 반해서, 제조업자는 단숨에 먹혀 버리기 때문이다. 여기서 공장의 휴업, 재산의 파탄, 노동자 계급의 축출이 생기며, 이들 중 일부는 거리에서, 병원에서, 감옥에서, 도형장에서 죽어 간다.

이 명제를 요약해 보자.

소유자는 그가 노동자에게 지불한 것보다 더 비싼 값으로 생산물을 노동자에게 판다. 따라서 소유는 불가능하다.

다섯 번째 명제에 대한 보론

Ⅰ. 몇몇 개혁가들, 심지어 어떤 학파에도 속하지 않으며, 가장 수가 많고 가장 가난한 계급의 운명을 개선하고자 몰두하는 대다수 저술가들 역시 오늘날 더 나은 노동의 조직에 기대를 걸고 있다. 특히 푸리에의 사도들은 우리에게 줄곧 〈팔랑스테르로!Au phalanstère!〉라고 외치면서 그와 동시에 다른 파벌들의 어리석음과 우스꽝스러움에 대해 분노를 터트리고 있다. 이들은 〈5와 4를 더하면 9가 되고, 2를 빼면 9가 남는다〉는 계산을 고안해 낸, 여섯 명 남짓의 유래 없는 천재들로서, 이 놀라운 산술을 믿으려 하지 않는 프랑스의 아둔함을 개탄한다.[17]

사실 푸리에주의자들은 한편으로 그들이 만들어 낸 〈각자의 자본, 각자의 노동, 각자의 재능에 따라 각자의 몫을〉이라는 공식에서 알 수 있듯이 소유와 불로수득권의 옹호자임을 자임하고 있으며, 다른 한편으로 노동자가 사회의 모든 부를 향유하기를, 간단히 말하자면 자기가 생산한 생산물을 완전히 자기가 향유하기를 바라고 있다. 이것은 마치 노동자에게 다음과 같이 말하는 것에 다름 아니지 않을까? : 일하라, 너는 하루에 3프랑을 받으리라. 너는 55수로 살 것이며 나머지는 소유자에게 줄 것이다. 그러면 너는 3프랑을 쓴 셈이다.

만일 이 말이 샤를 푸리에의 체계를 가장 정확히 요약한 것이 아니라면, 나는 팔랑스테르주의자들의 어리석음을 나의 피로써 보증할 것이다.

만일 소유가 유지된다면, 그리고 노동이 지출을 절대로 메울 수 없다면, 산업과 농업을 개혁하는 일이, 한마디로 말해서 노동을 한다는 것이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소유를 폐지하지 않는다면, 노동의 조직은 또 하나의 기만일 뿐이다. 생산을 4배로 늘린다 해도, 이는 불가능한 일은 아니라고 생각하지만 쓸데없는 짓에 불과하다. 생산물의 증가분은 만일 그것이 소비되지 않는다면 아무 가치도 없는 것이며 소유자는 그것을 이자로서 받아들이기를 거부할 것이니 말이다. 설령 생산물의 증가분이 소비된다고 해도 소유에 수반되는 온갖 애로사항들이 다시 나타날 것이다. 정념情念의 인력引力이라는 이론이 여기서는 거짓이라는 사실, 그리고 나쁜 정념, 즉 소유의 〈정념〉을 조화시키려 했다는 것은 푸리에가 무엇이라 말하든 간에 그가 자기 마차의 바퀴에 빗장을 질러놓은 셈이라는 사실은 인정해야만 한다.

팔랑스테르 경제학의 엉뚱함이 너무 두드러지다 보니 많은 사람들이 소유자에 대한 푸리에의 온갖 존경심에도 불구하고 그가 소유의 숨은 적이 아니었나 의혹을 품는다. 이러한 견해는 몇 가지 그럴듯한 이유에 의해 지지될 수도 있다. 그러나 나는 이러한 의견에 동의하지 않는다. 이 인물에게 협잡꾼 기질은 너무 많고 성실성은 너무 적다. 나로서는 푸리에의 속내가 달랐다기보다는 차라리 어디서나 드러날 정도로 무지했다고 믿고 싶다. 그의 제자들은 어떠한가. 사람들이 이들에 대해 어떤 의견을 가지려면, 우선 이들 스스로가 단호하게 그리고 심정적 주저없이 자신들이 소유의 보전을 원하는지 아닌지를 밝혀야만 하며, 〈각자의 자본, 각자의 노동, 각자의 재능에 따라 각자의 몫을〉이라는 이들의 유명한 격률이 무엇을 의미하는가를 확실하게 밝혀야만 한다.

Ⅱ. 그러나 반쯤 개종한 어떤 소유자는 말할 것이다. 은행, 지대, 소작료, 집세, 온갖 고리대를 그리고 마침내는 소유를 폐지함으로써 생산물을 각자의 재능에 맞게 분배하는 것이 가능하겠느냐고 말이다. 이것이 바로 생시몽의 생각이었으며, 이것이 바로 푸리에의 생각이었다. 사실 이것은 인간의 의식에 내재한 욕구인 바, 장관더러 농민처럼 살라고 응당 요구할 수는 없는 일인 것이다.

아, 미다스(Midas,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프리기아의 왕. 들의 정령 판Pan이 자신의 피리 솜씨를 음악의 신 아폴론의 수금 솜씨와 겨루었을 때 심판관 토몰로스는 아폴론의 승리를 선언했다. 미다스가 이에 이의를 제기하자 아폴론은 미다스의 귀를 길게 늘여서 당나귀 귀로 만들어 버렸다-옮긴이)여! 그대의 귀는 길기도 하다! 뭐라고! 더 나은 대우란 실상 불로수득권과 같은 것이라는 사실을 그대는 절대 이해하지 못하리라! 물론 불평등과 공동체적 삶을 한 묶음으로 보려 했다든가 불평등과 소유를 한 묶음으로 보려 했다는 것은 생시몽이나 푸리에 또는 그들의 추종자들에게서 흔히 발견되는 오류였다. 그러나 그대, 수치에 밝고, 경제학에 능하고, 몸소 만든 대수표를 몽땅 외우고 다니는 그대가 어떻게 이토록 엄청난 오류를 범할 수 있는가? 경제학의 관점에서 볼 때 인간의 생산물은 그의 개인적 능력 여부와는 상관없이 한 인간의 노동으로서의 가치밖에 없으며, 한 인간의 노동은 마찬가지로 한 인간의 소비로서의 가치밖에 없다는 사실을 그대는 이제 기억하지 못하는가? 그대는 내게 19세기의 시이예스(Emmanuel Joseph Sieyès, 1748~1836, 프랑스의 로마 가톨릭 성직자, 정치 작가. 프랑스 혁명의 최고 정치 이론가 중 한 사람이었으며 프랑스 영사관과 제1프랑스 제국에서도 두드러진 역할을 했다-편집자) 라 할 만한 가련한 팽에로-페레라(S. Pinheiro-Ferreira, 포르투갈의 정치인, 법학자-옮긴이), 이 위대한 헌법의 초안자를 연상시킨다. 그는 국민을 12개의 계급 또는 등급으로 나누어 각각 10만 프랑, 8만 프랑, 2만 5,000프랑, 1만 5,000프랑, 1만 프랑 등등의 봉급을 책정했으며, 가장 낮은 등급에는 시민이 받을 수 있는 최저치 봉급인 1,500프랑과 1,000프랑을 책정했다. 팽에로-페레라는 차별을 좋아했으며 고위관직 없는 국가나 사령부 없는 군대를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 그리고 그는 또한 자유, 평등, 우애를 사랑했거나 아니면 사랑한다고 믿었기 때문에, 우리 옛 사회의 좋은 점과 나쁜 점들 사이에서 절충점을 찾아서 이것으로 헌법을 구성했다. 경탄할 팽에로-페레라여! 수동적 복종에까지 이르는 자유, 언어의 통합에까지 이르는 우애, 재판과 단두대에서의 평등, 이것이 그의 공화국의 이상이었다. 평가받지 못할 천재여. 금세기는 그들 받아들이지 못하나 다음 세기는 그의 앙갚음을 하리라.

들어라, 소유자여. 사실 능력의 불평등은 존재한다. 그러나 법적으로는 승인되지도, 허용되지도, 가정되지도 않는다. 3,000만 명의 사람드레 대해 뉴턴 같은 인물은 한 세기에 하나로 족하다. 심리학자는 이토록 멋진 천재성에 감탄하지만, 입법가는 기능의 희소성만을 본다. 그런데 기능의 희소성이 그 기능을 맡은 사람에게 남다른 특권을 주지는 않는 바, 이는 한결같이 중요한 다음의 여러 이유들 때문이다.

⑴ 조물주가 원래 의도한 바에 따르면, 천재의 희소성이란 결코 탁월한 재능을 부여받은 인간 앞에 사회가 무릎을 꿇게 하는 동기가 아니었다. 그것은 각자의 기능이 모두에게 널리 도움이 되도록 하기 위한 섭리의 수단일 뿐이다.

⑵ 재능은 자연의 선물인 것 이상으로 자연의 창조물이다. 그것은 축적된 자본이며, 그것을 받은 자는 수임자에 지나지 않는다. 사회가 없다면 그리고 그 사회가 베푼 교육과 든든한 도움이 없다면, 가장 훌륭한 천성도 그 영예를 빛내야 할 영역에서조차 범상한 능력에 미치지 못할 것이다. 한 인간의 지식이 방대하면 할수록, 그의 상상력이 탁월하면 할수록, 그의 재능이 풍부하면 할수록, 그를 교육하는 데 더 많은 비용이 들었을 것이고, 그에 앞선 자들과 그가 닮고자 한 자들이 더욱 탁월하고 더욱 수가 많았을 것이며, 따라서 그가 사회에 대해 지는 부채는 더 큰 것이다. 농사꾼은 요람에서 태어나서 관에 들어갈 때까지 일을 한다. 반면에 예술과 과학은 뒤늦게 그것도 드물게만 열매를 맺는 법이며, 때로는 그 열매가 채 익기도 전에 나무가 죽어버리기도 한다. 사회는 장래성을 믿고 재능을 길러냄으로써 모든 것을 희생하는 것이다.

⑶ 능력을 비교할 수 있는 척도는 존재하지 않는다. 재능의 불평등은 대등한 발전 조건 아래에서라면 재능의 특수성에 지나지 않는다.

⑷ 급여의 불평등은 불로수득권과 마찬가지로 경제적으로 불가능하다. 가장 유리할 경우, 즉 모든 노동자가 최대치의 생산을 제공할 경우를 생각해 보자. 생산물이 이들 사이에 균등하게 분배되기 위해서는 각자의 몫이, 생산을 노동자의 수로 나눈 값과 같아야만 한다. 이렇게 계산하고 나면, 얼마가 남아서 더 높은 급여를 지불할 수 있겠는가? 절대로 아무것도 남지 않는다.

노동자들 모두에게 세금을 거두어야 한다고 말할 것인가? 그러나 노동자들의 소비가 더 이상 노동자들의 생산과 대등하지 않을 때, 임금은 생산적 노동을 보상할 수 없을 것이고, 노동자들은 자신의 생산물을 되살 수 없을 것이며, 우리는 소유가 야기한 온갖 곤경에 다시 빠져들 것이다. 나는 헐벗은 노동자에 대해 저질러진 부당 행위, 적대감, 치솟는 야욕, 불타는 증오심 따위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겠다. 이 모든 것이 다 나름대로 중요성을 가지고 있지만 본론과는 직접 부합하지 않으니 말이다.

한편으로, 개개 노동자의 과업이 짧은 시간을 요하고 수월하며, 그것을 성공리에 해낼 수단도 평등하다면, 어떻게 훌륭한 생산자와 시시한 생산자가 있을 수 있겠는가? 다른 한편, 재능과 능력의 실질적 동등성에 의해서든 사회적 협동에 의해서든 기능이 모두 동등하다면, 어떻게 그 기능을 수행하는 자가 자신의 탁월한 천재성을 구실로 그에 걸맞은 임금을 요구할 수 있겠는가?

그러면 나는 무엇을 말하는가? 평등 안에서 임금은 항상 능력에 비례한다는 것이다. 경제학에서 임금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노동자가 자신을 재생산하는 데에 드는 소비로 구성되는 것이다. 따라서 노동자가 생산에 임하는 활동 자체가 그의 소비를 이루는 것이며, 이 소비는 우리가 요구하는바 그의 생산과 정확히 일치하는 것이다. 천문학자가 관측을 생산하고, 시인이 시를 생산하고, 학자가 경험을 생산할 때, 이들은 관측도구를 소비하고, 책을 소비하며, 여행 등등을 소비한다. 그러므로 사회가 이 소비를 충당해 준다면, 천문학자와 시인과 학자가 자신에게 걸맞은 어떤 사례금을 달리 또 요구한다는 말인가? 그러므로 결론을 맺자. 〈각자의 능력에 따라 각자의 몫을, 각자의 성취에 따라 각자의 능력을〉이라는 생시몽의 격률은 평등 안에서, 아니 평등 안에서만 완벽하게 적용될 수 있다.

Ⅲ. 소유가 초래하는 가장 큰 해악, 가장 끔찍스럽고 늘 따라다니는 해악은 소유가 존재하는 한, 인구가 아무리 줄더라도 늘 필연적으로 포화 상태라는 것이다. 어느 시대에나 사람들은 인구 과잉을 불평했다. 어느 시대에나 소유는 바로 자신이 유일한 원인 제공자라는 사실을 깨닫지 못한 채 만연한 빈곤을 거북살스러워했다. 더욱이 소유가 빈곤을 퇴치할 요량으로 궁리해 낸 여러 수단들만큼 기묘한 것도 없다. 흉폭한 일과 터무니없는 일이 우열을 다투듯 벌어졌다.

유아 유기遺棄는 고대에 늘 있어 온 관행이었다. 크고 작은 노예 살육, 내란과 전쟁 역시 여기에 동원되었다. 소유권이 강고하게 자리 잡은 로마에서는 이 세 가지 수단이 아주 오랫동안 효과적으로 사용되어 온 결과, 제국 말기에는 주민들의 씨가 말라버릴 정도였다. 야만족들이 쳐들어왔을 때, 이들은 아무도 찾아볼 수 없었다. 농촌은 버려지고 도시들은 거리마다 잡풀이 무성했다.

중국에서는 아주 오랜 옛날부터 기아가 빈민을 일소하는 역할을 떠맡았다. 쌀이 가난한 이들의 유일한 호구책이었기 때문에 변란이 일어나서 수확이 모자라면 단 며칠 만에 수만 명씩 굶어 죽었다. 중국의 연대기를 기록한 사관들은 어떤 황제가 재위한 어떤 해에 기근이 일어나 2만, 3만, 5만, 10만 명이 죽었다는 식으로 적고 있다. 그리고 사람들은 죽은 자를 땅에 묻고 나서 다시 아이를 낳기 시작하고, 또다시 기근이 일어나서 같은 일이 되풀이된다. 시대를 막론하고 공자孔子의 경제학이란 바로 이런 것인 모양이다.

다음의 내용은 어떤 현대 경제학자에게서 빌려 온 것이다.

〈14, 15세기부터 영국은 기근에 허덕였다. 걸인들은 법으로 엄하게 처벌되었다.〉(그러나 인구는 오늘날의 1/4도 안 되었다.)

〈에드워드 왕은 동냥 행위를 투옥형으로 다스렸다. …1574년과 1656년의 칙령은 재범일 경우 같은 조치를 취한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엘리자베스 여왕은 각 교구가 빈민을 먹여 살리라고 명을 내렸다. 그러나 빈민이란 누구인가? 찰스 2세는 다른 사람의 이의제기가 없이 40일 동안 거주한 경우 그 교구에 정주하는 것으로 결정했다. 그러나 이의제기가 있을 경우 뜨내기는 도시를 떠나야 했다. 제임스 2세는 이 법을 개정했으며, 윌리엄 왕은 또다시 그것을 개정했다. 조사하고, 보고서를 작성하고, 개정하는 와중에 빈곤은 증대하고 노동자는 초췌한 몰골로 죽어갔다.〉

〈빈민에게 징수된 세금은 1774년에 4,000만 프랑을 넘어섰으며, 1783년, 1784년, 1785년에는 각각 5,300만을 넘어섰다. 1813년에는 1억 8,750만 프랑, 1816년에는 2억 5,000만 프랑을 넘어섰고, 1817년에는 3억 1,700만 프랑에 이른 것으로 추정된다.〉

〈1812년에 교구에 등록된 빈민의 수는 400만 명으로 추산되는 바, 이는 인구의 1/3에서 1/4에 이르는 수치이다.〉

〈프랑스. 1544년에 프랑수아 1세는 빈민을 위한 보시세를 강제로 제정했다. 1556년과 1586년에는 이 법이 왕국 전역에 적용되었다.〉

〈루이 14세 치세 때는 4만 명에 이르는 빈민들이 수도에 횡행했다(인구 비례로 보면 오늘날과 상황이 비슷하다). 구걸 행위는 엄하게 처벌받았다. 1740년에 파리의 고등법원은 해당 관할구역 내에서 강제 갹출금을 다시 도입했다.〉

〈제헌의회는 재앙의 대단함과 치유의 어려움에 기가 질린 나머지 현상유지를 결정했다.〉

〈국민공회는 빈민에 대한 부조를 ‘국가의 채무’라고 규정했다. 그러나 그 법령은 시행되지 않았다.〉

〈나폴레옹 역시 재앙을 치유하려 애썼다. 그러나 그가 생각해 낸 법령은 징역형이었다. 이로써 짐은 걸인들의 파렴치함과 적빈이 가져온 불치병의 혐오스러운 광경으로부터 부자들을 보호하리라〉고 그는 말했다. 아, 위인이여!

나열하자면 끝이 없을 이러한 사실들에서 두 가지 결론이 나온다. 하나는 빈곤이 인구와는 무관하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빈곤을 퇴치하려고 동원된 어떤 처방도 무용지물이라는 것이다.

로마 가톨릭 교회는 병원과 수도원을 세웠으며, 보시를 권장했다. 즉 구걸을 장려했다. 사제들을 통해 표현된 로마 가톨릭 교회의 정신은 여기서 더 나아가지 못했다.

기독교 국가들의 세속 권력은 부자들에게는 세금을 매길 것을, 가난한 자들은 내쫓고 가둘 것을 명했다. 즉, 한편으로는 소유권의 침해를, 다른 한편으로는 시민권의 박탈과 살인을 명했다.

현대 경제학자들은 빈곤의 원인이 전적으로 인구 과잉에 있다고 생각해서 우선 인구 증대를 억제하기에 몰두한다. 이들 중 어떤 이는 가난한 자에게는 결혼을 금지시키기를 원한다. 따라서 이들은 종교적 독신을 비난한 후에 강제적 독신을 제의하는 셈인데, 이 강제적 독신은 방탕한 독신 생활로 변하기 마련이다.

반면, 어떤 이들은 이 방법, 즉 그들이 말하는 바에 따르면 가난한 자에게서 〈이 세상에서 그가 아는 유일한 즐거움〉을 빼앗는 너무 난폭한 이 방법에 찬동하지 않는다. 그들은 다만 가난한 자들에게 〈신중〉을 촉구하는 정도만으로 만족한다. 이것이 바로 맬서스 씨, 시스몽디 씨, 세 씨, 드로 씨, 뒤샤텔 씨 등의 견해이다. 그러나 가난한 자가 신중을 보여주길 원할 양이면, 부자가 모범을 보이는 것이 필요하다. 왜 결혼 연령이 부자에게는 18세, 가난한 자에게는 30세로 정해져야 하는 것인가?

다시금, 이들이 그토록 꾸준히 노동자들에게 권장하는 이 결혼의 신중함이라는 것이 과연 무엇을 의미하는가를 밝혀보도록 하자. 왜냐하면 이런 류의 문제를 모호한 채로 남겨둔다는 것은 실로 어처구니없는 일이며, 나로서도 경제학자들이 제대로 이해하고 있지 못한 것이 아닌가 의심이 들기도 하기 때문이다. 〈고루한 사제들은 사람들이 결혼에 대해 신중하게 나온다는 말을 듣자 깜짝 놀란다. 이들은 사람들이 ‘생육하고 번성하라’는 신의 계시를 어기는 것이 아닌가 하고 겁을 먹는다. 이들은 독신자들을 파문하려 할 것이다.〉 (J. 드로, 『정치경제학』)

드로 씨는 너무 순진하고 너무 신학적 심성이 부족한 탓에 고집불통 도덕론자들이 경각심을 갖는 이유를 납득할 수 없었다. 이 순진한 무지가 그의 심성의 순수함에 대한 가장 훌륭한 증거이다. 종교는 결코 조혼을 장려한 적이 없으며, 종교가 비난하는 이 〈신중함〉이라는 것은 산체스(T. Sanchez, 1550~1610, 에스파냐 출신의 예수회 신부. 『프로뱅시알』에서 파스칼의 놀림감이 된다-옮긴이)가 말한 다음과 같은 구절에 표현된 바와 같다. 〈아이를 가질 우려 때문에 씨를 그릇 밖에 흘리는 것이 허용되겠는가?(An licet ob metum liberorum semen extra vas ejicere)〉

데스튀 드 트라시는 어느 쪽의 신중에도 동의하지 않는 듯이 보인다. 그는 말한다. 〈나로서는 우리의 쾌락을 줄이고 구속하려는 도덕론자들의 열의도, 우리의 다산성을 높이고 인구증대에 박차를 가하려는 정치가들의 열의도 받아들이지 않는다고 밝혀둔다.〉 그의 의견인즉, 사람은 할 수 있는 한 사랑을 나누고 또 결혼을 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사랑과 결혼의 결과는 빈곤을 증식시키는 것이다. 우리의 철학자는 이 점을 별로 개의치 않는다. 악의 필연성이라는 교의에 충실한 그는 모든 문제의 해결책을 바로 악에서 찾는다. 따라서 그는 덧붙인다. 〈인구 증대는 사회의 모든 계급들에서 계속되기 때문에, 상류 계급들에서의 잉여 인구는 계속 하층 계급들로 밀려나며, 최하층 계급은 필연적으로 빈곤에 의해 절멸한다.〉 이 철학자에게는 확신에 찬 추종자가 거의 없다. 그러나 이 철학은 무엇보다도 실제에 의해 입증된다는 논박할 여지가 없는 이점을 가지고 있다. 얼마 전에 프랑스의 하원에서 선거법 개정을 논의할 때 들려온 이야기 역시 바로 이 철학이다. 〈가난한 자들은 늘 존재하기 마련이다〉라는 것이 바로 장관이 아라고(F. Arago, 1789~1853, 프랑스의 정치인으로 선거법 확대를 주장했다-옮긴이) 씨의 주장을 반박할 때 쓴 정치적 수사이다. 〈가난한 자들은 늘 존재하기 마련이다!〉 아무렴, 소유와 함께.

많고 많은 놀라운 것들을 만들어 낸 〈재주꾼〉인 푸리에주의자들은 이번에는 자신들의 천품을 감출 수 없었다. 이들은 인구 증대를 억제할 수 있는 네 가지 수단을 선보였다.

⑴ 여성의 체력. 이 점에서 그들의 주장은 경험과 어긋난다. 왜냐하면, 비록 건장한 여성들이 늘 빨리 임신을 하는 것은 아니지만 적어도 건강한 아이를 낳는 것이 바로 그녀들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출산에서 그녀들은 이점을 갖는다.

⑵ 종합적 운동. 달리 말하면 모든 육체적 능력의 균등한 발달이다. 만일 이 발달이 균등하다면, 어떻게 생식능력이 감퇴하겠는가?

⑶ 미식법. 불어식으로 말하면 혀의 철학이다. 푸리에주의자들은 풍성하고 기름진 음식은 여성을 불임으로 만든다고 단언한다. 마치 수액의 과잉이 꽃을 더 아름답고 더 풍성하게 보이게 하지만 실은 번식력을 고갈시키듯이 말이다. 그러나 이러한 비유는 잘못이다. 꽃의 번식력 저하는, 장미를 살펴보면 알 수 있듯이 수술, 즉 수컷 기관이 꽃잎으로 변하는 데서 오는 것이며 또한 과다한 습기로 화분이 생식력을 잃는 데서 오는 것이다. 따라서 미식법이 원하는 바의 성과를 얻으려면, 여성을 살찌게 하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남성을 생식 불능으로 만들어야 한다.

⑷ 화류계의 풍류. 즉 공창公娼이다. 나는 푸리에주의자들이 불어로 아주 잘 통용하는 생각을 표현하는 데에 왜 그리스 단어를 사용하는지 모르겠다. 앞의 수단과 마찬가지로 이 수단 역시 문명의 관습을 흉내 낸 것이다. 푸리에 자신은 그 증거로 공창의 예를 들고 있다. 그런데 그가 내세운 사실들에 대해 여전히 아주 커다란 의혹이 맴돌고 있다. 파랑 뒤샤텔(Alexandre Jean-Baptiste Parent du Châtelet, 1790~1836, 프랑스의 생리학자, 의사-옮긴이)이 자신의 책 『매춘에 대하여』에서 공식적으로 말한 것이 바로 이것이다.

내가 끌어 모을 수 있었던 정보들을 종합해 보면, 국민들이 일상적으로 실행하고 있으며 또 철학자나 경제학자 또는 최근의 개혁가들이 거론한 바 있는 빈곤과 다산성에 대한 치유책은 다음의 목록에 망라되어 있다. 즉, 마스터베이션masturbation, 오나니즘onanisme[18], 남색, 동성애, 중혼[19], 매음, 거세, 금욕, 낙태, 유아 살해[20] 등이다.

이 모든 수단이 불충분하다고 판명되고 나면, 이제 남는 방안은 추방이다.

유감스럽게도 추방은 가난한 자의 수를 줄임으로써 오히려 그 비율을 높일 뿐이다. 소유자가 생산물에 대해 징수하는 이자가 단지 이 생산물의 1/20에 상당한다면(법률에 의해 이자는 자본의 1/20이다), 20명의 노동자가 단지 19명의 몫만을 생산하는 셈이다. 왜냐하면 이들 중에 소유자라고 불리는 사람이 한 명 있어서 두 명 몫을 먹어치우기 때문이다. 가장 가난 한 20번째 노동자가 죽었다고 가정해보자. 다음 해의 생산은 1/20만큼 감소할 것이며 따라서 이제 19번째 노동자가 자기 몫을 내놓고 죽어야 할 것이다. 소유자에게 지불해야 하는 것은 19명분 생산의 1/20이 아니라 20명분 생산의 1/20이기 때문에(세 번째 명제를 보라), 살아남은 노동자 개개인이 빼앗겨야만 하는 것은 자신의 생산물의 1/20에다가 1/400만큼을 더한 값이다. 달리 말하자면 19명 중 한 명이 죽어야만 한다. 따라서 소유와 더불어 가난한 자들이 죽어 가면 갈수록 그것에 비례해서 가난한 자가 더 생기는 셈이다.

맬서스는 생산이 산술급수로 증대하는 데 반해서 인구는 기하급수로 증대한다고 학자답게 논증했지만, 〈빈곤을 가져오는〉 소유의 이 힘은 지적하지 않았다. 이 점을 잊지 않았다면, 그는 우리가 다산성을 억제할 방책을 찾기에 앞서서 불로수득권을 폐지하는 일부터 시작해야 한다는 사실을 이해했을 것이다. 왜냐하면 이 권리가 용인되는 곳에서는 토지의 넓이와 비옥도에 관계없이 늘 과잉인구가 존재하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아마도 인구의 평형을 유지하기 위해서 내가 무슨 수단을 제시할 수 있느냐고 물을 것이다. 이 문제는 조만간 해결되지 않으면 안 될 문제이니 말이다. 내가 여기서 이 수단이 무엇이라고 이름붙이지 않는 것을 독자들은 허락해주기 바란다. 내가 생각하기에는 증명하지 않고 말만 하는 것은 무익한 일인데, 내가 말하는 수단을 아주 말끔히 여실하게 밝히려면 적어도 틀을 갖춘 한 권의 논문이 필요하니 말이다. 이것은 아주 단순하고도 중대하며, 아주 범용하면서도 숭고하고, 아주 진실하면서도 오해를 불러일으키며, 아주 신성하면서도 세속적인 그 무엇이기 때문에, 이것을 상세히 설명하거나 논증하지 않고 이름만 붙인다는 것은 경멸과 불신만을 불러일으키는 데 소용될 따름이다. 우리에게는 다음 한마디로 충분하리라 : 평등을 확립하자, 그러면 치유책이 보이리라. 진리란 오류나 범죄와 마찬가지로 연이어 나타나는 것이니 말이다.

여섯 번째 명제 소유는 불가능하다. 왜냐하면 소유는 압제의 어머니이기 때문이다.

통치란 무엇인가? 통치란 공공의 경제, 곧 국민 전체의 노동과 재산에 대한 최상의 관리이다.

그런데 국민은 마치 시민 모두가 주주인 거대한 회사와 같은 것이다. 각자는 총회에서 발의권을 가지며, 주식 배분이 균등하다면 한 표씩의 투표권을 행사한다. 그러나 소유제도 아래서는 주주들이 출자한 몫이 서로 엄청나게 불균등하다. 어떤 이는 단 한 표밖에 갖지 못하는 반면에, 어떤 이는 수백 표를 가지는 것이다. 예컨대 내가 100만 프랑의 소득을 누린다면, 즉 내가 3,000만에서 4,000만 프랑에 달하는 부동산을 소유한 지주이며 이 재산이 그 자체만으로도 국민 자산의 3만 분의 1의 몫에 해당한다면, 내가 그 재산을 관리하는 일이 통치의 3만 분의 1을 구성할 것이며, 따라서 3,400만 인구를 기준으로 할 때 나는 혼자서 단순 주주 1.133명만큼의 투표권을 가지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아라고 씨가 국민방위군 Grande nationale 전원에게 투표권을 줄 것을 요구한 것은 나무랄 데 없는 정당한 일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모든 시민은 적어도 하나씩의 국민주株에 등재되어 있으며, 따라서 저마다 한 표의 권리를 갖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저명한 웅변가는 그와 동시에, 상업 회사들에서 볼 수 있는 바와 같이, 개개 유권자가 자신이 소유한 주식만큼의 투표권을 가져야 한다고 요구해야만 했으리라. 왜냐하면, 그렇지 않을 경우 이는 국민이 개개인의 의사를 묻지 않고 이들의 재산을 처분할 권리를 가진다고 주장하는 것과 마찬가지이며, 따라서 소유권과 상충하기 때문이다. 소유 제도를 가진 나라에서 선거권의 평등은 소유에 대한 침해인 것이다.

그런데 만일 주권이 재산에 비례해서만 개개 시민에게 귀속될 수 있을 뿐이며 또 그렇게 되어야만 한다면, 소주주들은 거대 주주들에 의해 좌우되기 마련이다. 거대 주주들은 마음만 먹으면 소주주들을 노예로 삼고, 마음대로 짝을 맺어주고, 그들의 아내를 빼앗고, 그들의 아들들을 거세시키고, 그들의 딸들을 매춘부로 만들고, 늙은이들을 상어 밥으로 삼을 수 있을 것이다. 거대 주주들은 자기 돈으로 자기의 하인들을 먹여 살리고자 하지 않는 한, 어쩔 수 없이 이렇게 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이것이 바로 오늘날 영국에서 일어나는 일이다. 자유, 평등, 존엄 따위에 그리 개의치 않던 존 불(John Bull, 영국 대중소설에 등장하는 작중인물. 전통적 영국인의 별칭-옮긴이)은 차라리 섬기고 구걸하길 택했다. 그러면, 그대, 선량한 자크(bonhomme Jacques, 프랑스 농민의 별칭-옮긴이)는?

소유는 정치적 · 시민적 평등과 양립할 수 없다. 따라서 소유는 불가능하다.

〈역사적 해설〉 1. 1789년 삼부회에서 제3신분 대표의 수를 두 배로 늘리기로 결정한 것은 소유에 대한 대대적인 침해 행위이다. 귀족과 성직자는 프랑스 땅의 3/4를 차지하고 있었다. 따라서 그들이 국민의 3/4만큼 대표성을 가져야 할 것이었다. 인민만이 거의 유일하게 세금을 내고 있으므로 제3신분 대표수의 배가는 정당하다고 혹자는 말한다. 만약 세금에 대해서 표결하는 것만이 문제였다면, 이는 옳은 추론일 것이다. 하지만 사람들은 통치와 헌법의 개혁을 말했다. 이때부터 제3신분의 배가는 소유에 대한 침탈이자 공격이었다.

2. 만일 현재 급진적 반대파의 대표들이 권좌에 오른다면, 이들은 모든 국민방위군을 유권자로 만들고 모든 유권자가 피선거권자로 되는 개혁을 단행할 것이다. 이는 소유에 대한 공격이다.

이들은 공채 이자를 끌어내릴 것이다. 이는 소유에 대한 공격이다.

이들은 일반의 이익을 위해 가축과 밀의 수출에 대한 법령을 제정할 것이다. 이는 소유에 대한 공격이다.

이들은 과세의 근거를 변경할 것이다. 이는 소유에 대한 공격이다.

이들은 인민들에게 무상 교육을 실시할 것이다. 이는 소유에 대한 모반이다.

이들은 노동을 조직할 것이다. 즉 노동자에게 노동을 보장해 주고 노동자가 이익 배분에 참여토록 할 것이다. 이는 소유의 폐지이다.

그런데 바로 이 급진파들이 소유의 열렬한 옹호자이니, 이는 그들이 자신이 하고 있는 일을 알지도 못하며 자신이 원하는 바를 알지도 못한다는 근본적인 증거이다.

3. 소유는 특권과 전제의 으뜸가는 원인이다. 따라서 공화제의 선서 문구는 변경되어야만 한다. 비밀 결사에 가입하는 자는 〈나는 왕정에 대한 증오를 맹세한다〉라고 선서하는 대신에 이제부터는 〈나는 소유에 대한 증오를 맹세한다〉라고 바꿔 말해야만 한다.

일곱 번째 명제 소유는 불가능하다. 왜냐하면 소유는 자신이 취득한 것을 소비함으로써 잃어버리고, 저축함으로써 폐기해 버리며, 자본화함으로써 생산에 적대하기 때문이다.

Ⅰ. 만일 우리가 경제학자들을 본받아 노동자를 살아있는 기계로 간주한다면, 노동자에게 돌아가는 임금은 이 기계를 유지하고 보수하는 데 필요한 경비로 볼 수 있다. 일당 3, 5, 10, 15프랑을 주고 노동자나 점원을 고용하고 나아가 관리 비용으로 20프랑을 쓰는 한 공장주는 자신의 지출을 손실로 여기지 않는다. 그 지출이 생산물의 형태로 자신에게 되돌아온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이렇게 〈재생산적 소비〉는 그에게 〈노동〉과 마찬가지이다.

소유자란 무엇인가? 그것은 일하지 않는 기계, 아니면 자신의 즐거움을 위해서나 기분 내키는 대로만 노동할 뿐 아무것도 생산하지 않는 기계이다.

소유자적으로 소비한다는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노동하지 않고 소비하는 것이며, 재생산하지 않고 소비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다시 한 번 말하지만, 소유자가 노동자로서 소비하는 것은 그에 의해서 그 자신에게 다시 회수되기 때문이다. 소유자는 자신의 소유와 맞교환해서 자신의 노동을 제공하는 것이 아니다. 만일 그렇게 한다면, 그는 더 이상 소유자가 아닐 것이니 말이다. 노동자로서 소비함으로써 소유자는 벌고 있거나, 아니면 적어도 그가 소비한 것을 되찾기 때문에 하등 잃을 것이 없다. 반면에 소유자적으로 소비함으로써 그는 가난해진다. 소유를 향유하기 위해서는 따라서 소유를 파괴해야만 한다. 요컨대 진정 소유자가 되기 위해서는 소유자이기를 그만두어야 하는 것이다.

자신의 임금을 소비하는 노동자는 파손되었다가 또다시 생산에 임하는 기계이다. 반면에 자신의 불로수득을 소비하는 소유자는 바닥없는 심연이요, 물을 빨아들이는 모래사장이며, 헛되이 씨 뿌리는 돌밭이다. 이 모든 것이 진정 진실일진대, 생산을 원하지 않고 또 생산 방법조차 모르는 소유자는 자신의 소유를 사용하면 할수록 돌이킬 수 없이 그 소유를 파괴하게 된다는 사실을 잘 깨닫고 있기 때문에 자기 몫을 대신해서 누군가에게 생산을 시키기로 마음을 굳힐 것이다. 경제학이 그 불멸의 정의正義로서, 〈자신의 자본에 의한 생산, 자신의 도구에 의한 생산〉이라고 부르는 것이 바로 이것이다. 그런데 이것은 〈노예에 의한 생산, 도둑 또는 폭군으로서의 생산〉이라 불려야 마땅한 것이다. 소유자인 그가 생산한다고! …그렇다면 도둑 역시 〈나는 생산한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소유자적 소비는 〈유익한〉 소비와는 대조적으로 〈사치〉라고 이름 붙여 왔다. 방금 이야기한 바에 따르면, 그다지 풍요롭지 못한 나라에서 사치가 만연할 수 있으며, 사치가 만연하면 할수록 그 나라는 그만큼 더 빈곤해지고, 그 역도 마찬가지라는 사실을 우리는 이해할 수 있다. 경제학자들이 사치에 대해 그토록 놀라운 혐오감을 북돋운 덕에, 오늘날 거의 전부라고는 말할 수 없지만 대다수 소유자들이 자신의 나태를 부끄럽게 여긴 나머지 노동하고 저축하며 또 자본을 투자하고 있다. 이것은 사태를 더욱 악화시키는 일이다.

다음과 같은 사실을 거듭 지적해 두도록 하자. 즉 자신이 노동을 하므로 소득을 누릴 자격이 있다고 믿고 있으며 그와 동시에 자신의 노동에 대한 급료를 받고 있는 소유자는 두 배로 봉급을 받는 관료와도 같다. 일하는 소유자와 일하지 않는 소유자 사시의 차이가 바로 여기에 있다. 그러나 소유자는 자신이 노동을 함으로써 자신의 보수만을 생산할 뿐, 자신의 소득을 생산하지는 않는다. 그리고 소유자는 자신이 처한 조건에서 가장 수지맞는 일거리에 매달리기 마련이므로, 소유자의 노동은 사회에 유익하기보다는 유해하다고 말할 수 있다. 소유자가 무슨 일을 하건 간에, 소유자가 자신의 소득을 소비하는 것은 사실상 그 소득을 잃어버리는 일이다. 소유자가 일을 하고 보수를 받는다는 사실이 이러한 손실을 보상해줄 수도 정당화해줄 수 없다. 이 손실은 다른 이들의 생산에 의해 마냥 보충되지 않는 한, 소유 자체를 소멸시키게 될 것이다.

Ⅱ. 따라서 소유자가 소비하는 행위는 생산품을 근절시킨다. 그러나 만일 소유자가 저축을 한다면 사태는 더 악화된다. 소유자가 한쪽 편에 쌓아두는 물건들은 완전히 다른 세계로 넘어간다. 아무것도, 심지어 그 희미한 흔적도 더 이상 찾아볼 수 없게 된다. 만일 달로 여행할 운송수단이 있다면, 그래서 소유자가 자신이 축적한 재산을 그곳으로 가지고 갈 생각에 사로잡히기만 한다면, 얼마 지나지 않아 우리의 지구마저 그에 의해 달로 옮겨질 것이다.

저축하는 소유자는 자신도 그것을 향유하지 못할뿐더러 다른 이도 향유하지 못하게 막는다. 그에게는 점유도 소유도 없다. 그는 수전노처럼 보물을 보듬어 안고는 도무지 쓸 생각을 않는다. 그는 보물을 두고 눈요기를 하고, 옆에 두고 누운 채, 끌어안고 잠이 든다. 그러나 부질없는 짓이리라. 금화가 금화를 낳는 것은 아니니 말이다. 향유 없이 완전한 소유가 있을 수 없고, 소비 없이 향유가 있을 수 없으며, 소유의 상실 없이 소비가 있을 수 없다. 이것이야말로 조물주의 심판이 소유자를 몰아넣은 필연적 궁지이다. 소유에 저주 있으라!

Ⅲ. 자신의 소득을 소비하는 대신 자본화하는 소유자는 그 소득을 생산에 적대 시키게 되며, 따라서 스스로 자기의 권리 행사를 불가능하게 만든다. 왜 그런가. 소유자가 투자에 따른 이자분을 높이면 높일수록, 그는 임금을 줄이지 않을 수 없다. 그런데 그가 임금을 줄이면 줄일수록, 달리 말하자면 기계의 유지와 보수에 드는 비용을 줄이면 줄일수록, 노동의 양은 줄어들 수밖에 없고 그에 따라 생산의 양 나아가 소득의 원천이 줄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아래의 예는 이러한 사정을 여실히 보여준다.

경작지, 목초지, 포도밭 및 지주와 소작인의 가옥으로 구성된 영지가 있다고 가정해보자. 이 영지는 모든 경작 설비를 포함해서 10만 프랑의 가치가 나가고 그 이자율은 3%에 달한다고 하자. 만일 소유자가 자신의 소득을 소비하는 대신, 그 소득을 영지를 확장하는 데가 아니라 영지를 미화하는 데 투자한다면, 그는 자신이 자본화한 3,000프랑에 대한 대가로 매년 소작인에게 90프랑을 더 요구할 수 있는가? 결코 그렇지 않다. 왜냐하면, 이러한 조건에서라면 소작인은 비록 그전보다 더 많이 생산하게 되지는 않더라도 아무런 대가도 받지 못하고 노동하도록 강요당하지 않을 수 없으며, 분명히 말해두지만, 임대를 유지하기 위해서 어ᄍᅠᆯ 수 없이 손실을 감수하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이다.

사실 소득은 생산 기반을 늘려야만 증대될 수 있다. 대리석 벽으로 울타리를 쌓고, 황금 호미로 밭을 간들 아무 소용없는 일이다. 그러나 영지를 계속 늘려가는 것, 즉 라틴계 사람들이 쓰는 말로 〈점유지들을 계속 취득하는 것〉이 가능하지 않기 때문에, 그럼에도 소유자에게는 자본화할 것이 늘 남아돌기 때문에, 얼마 안 가서 소유자의 권리 행사는 결국 어쩔 수 없이 불가능해질 것이다.

자, 그런데! 이러한 불가능에도 불구하고 소유는 자본화하고, 자본화함으로써 이자를 증식시킨다. 그럼 상업, 제조업, 은행 등에서 볼 수 있는 수많은 개별 사례들에 머물지 말고 시민 모두에게 관련되는 더 중요한 사실을 인용해 보자. 내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예산의 끝없는 증가에 대해서이다.

세금은 해마다 늘어난다. 그렇기는 하지만 이러한 증대가 공공행정의 어느 분야에서 나타나는지 정확히 집어서 말하기는 쉽지 않을 듯하다. 하기야 예산이라는 것에 대해 무언가 안다고 누가 감히 자신 있게 말할 수 있겠는가? 가장 능란한 재무관들도 서로 티격태격하는 것을 우리는 매일 보고 있지 않은가? 통치학의 대가들마저 수치에 대해 이러쿵저러쿵하는 마당에, 우리가 달리 무엇을 생각할 수 있겠는가? 예산 증대의 직접적인 원인들이 무엇이든 간에, 세금은 아무튼 사람들을 절망에 몰아넣을 정도로 날로 늘어나고 있다. 누구나 그것을 보고 있고, 누구나 그것을 말하고 있으나, 아무도 그 근본 원인을 알고 있지는 못한 듯하다.[21] 그런데 내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이러한 일이 달리 될 수 없으며 또 필연적이고 불가피하다는 사실이다.

국민은 우리가 〈정부〉라고 부르는 대지주의 소작인과도 같다. 국민은 땅을 사용한 대가로 〈세금〉이라는 이름으로 알려진 소작료를 정부에 지불한다. 전쟁을 할 때마다, 전쟁에서 지거나 이길 때마다, 군수품을 바꿀 때마다, 기념비를 세울 때마다, 운하를 뚫고 도로나 철도를 놓을 때마다, 정부는 돈을 빌리게 되고, 납세자가 그 이자를 지불한다. 다시 말하자면 정부는 생산 기반을 증대시키지 않고 운용 자본을 늘리는 것이다. 한마디로 말하자면 정부는 내가 앞에서 막 이야기한 바와 같은 소유자로서 자본화에 임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일단 공채가 발행되고 그 이자가 확정되어도, 예산은 줄어들지 않는다. 왜냐하면 예산을 줄이려면 다음과 같은 일들이, 그러나 실은 불가능한 조치들이 뒤따라야 하기 때문이다. 즉, 공채소유자들이 자신의 이자를 포기해야만 한다. 그러나 이는 소유권의 포기 없이는 불가능한 일이다. 아니면 정부가 파산해야 하는데, 이는 정치 원리에 대한 기만적인 부정이다. 아니면 정부가 빚을 상환해야만 한다. 그러나 이는 또 다른 공채에 의해서만 가능하다. 아니면 정부가 지출을 줄여야만 한다. 그러나 이는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그도 그럴 것이 공채가 발행되었다면, 이는 경상비가 부족했기 때문이니 말이다. 아니면 정부가 쓰는 경비를 재생산에 충당해야만 한다. 그러나 이는 생산 기반을 확장하지 않는 한 불가능하다(이는 우리의 가정과는 어긋난다). 아니면 마지막으로, 빚을 상환하기 위해 납세자가 새로운 세금을 내야만 한다. 이는 불가능한 일이다. 왜냐하면 새로운 세금이 시민 모두에게 균등하게 할당된다면, 시민의 절반 아니면 그 이상이 세금을 내지 못할 것이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새로운 세금이 부자들에게만 징수된다면, 이는 강제 징수요 소유에 대한 위해이기 때문이다. 오래 전부터 재정 실무는, 차용의 방식이 비록 아주 위험하기는 할지라도 여전히 가장 편리하고 가장 확실하며 가장 비용이 덜 먹히는 길이라는 사실을 보여주었다. 따라서 정부는 돈을 빌린다. 즉 끊임없이 자본화에 임하고 또 예산을 늘린다.

따라서 예산은 줄어들기는커녕 필연적으로 줄곧 늘어날 뿐이다. 이는 아주 단순명료한 사실인 바, 경제학자들이 그들의 온갖 학식에도 불구하고 이 사실을 깨닫지 못했다니 그저 놀라울 뿐이다. 그들이 이 사실을 깨달았다면, 어찌 그것을 비난하지 않았겠는가?

〈역사적 해설〉 오늘날 사람들은 예산 경감에 큰 효과를 가져 올 것으로 기대하는 재정 조치에 큰 관심을 보이고 있다. 이것은 국채율 5%에 관한 문제이다. 그렇다면, 정치적 · 법률적인 문제는 논외로 하고 재정 문제만을 고려하더라도, 국채율을 5%에서 4%로 변경할 경우, 앞으로는 같은 연유와 같은 필요로 인해 4%를 3%로, 3%를 2%로, 2%를 1%로 줄여야 할 것이며, 마침내는 모든 종류의 국채율을 폐기해야만 한다는 것이 진실이 아니겠는가? 그러나 이것은 사실상 조건들의 평등이나 소유의 폐지를 법령화하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그런데 내가 보기에, 끄떡도 않는 필연의 수레바퀴에 질질 끌려가느니보다 불가피한 혁명에 대처하는 것이 현명한 국민에게 더 어울리는 일인 듯하다.

여덟 번째 명제 소유는 불가능하다. 왜냐하면 소유의 축적력은 무한대인 반면 소유가 작용을 미치는 수량은 제한되어 있기 때문이다.

만일 평등하게 살고 있는 사람들이 그들 중 하나에게 배타적인 소유권을 부여해서, 이 유일한 소유자가 인류에게 100프랑을 복리로 빌려주고 24세대가 지난 후의 자손들에게 그것을 갚게 한다고 하면, 이 돈 100프랑은 600년이 지나면 107조 8,540억 1,077만 7,600프랑이 될 것이다. 이것은 프랑스의 자본금을 400억 프랑으로 가정한다면, 무려 2,696과 1/3배에 해당하는 액수이다. 이것은 동산과 부동산을 포함해서 지구 전체 가치의 20배가 넘는 금액이다.

성왕 루이Saint Louis의 시대에 살았던 어떤 사람이(그뿐만 아니라 그의 후손들 역시) 바로 이 100프랑을 빌리고는 갚기를 거부했다고 가정해보자. 그 후손들이 너 나 할 것 없이 악의에 찬 사람들이었고 마침내 시효취득이 만료되었다고 인정하더라도, 그 마지막 자손은 이 100프랑을 이자에 이자를 더해서 갚아야만 할 것이다. 그 액수는 앞에서 우리가 보았듯이 거의 108조 프랑에 달할 것이다.

재산은 날로 더욱 빠르게 증식되고 있다. 앞에서 든 예는 자본의 1/20에 달하는 이익을 가정했다. 그러나 그 이익이 자본의 1/10, 1/5, 1/2, 심지어 자본 그 자체와 맞먹는 경우도 드물지 않다.

평등의 불구대천의 적인 푸리에주의자들, 평등의 주창자들을 〈탐욕꾼requin〉으로 취급하는 푸리에주의자들은 생산을 4배로 늘림으로써 자본과 노동 및 재능의 모든 요구를 만족시키길 원한다. 그러나 생산이 4배로 늘어날 때, 소유는 그 축적력과 자본화 효과에 의해서 순식간에 생산물과 자본, 토지, 심지어 노동자들까지 흡수해 버린다. 팔랑스테르에서 자본 투자나 이자 대부를 못하도록 금지할 것인가? 그러면 소유가 의미하는 바를 무엇이라고 설명할 수 있을까?

이런 식의 산술을 더 밀고 나가지는 않겠다. 계산은 천차만별일 수도 있으며 내 계산만을 고집할 수도 없으니 말이다. 내가 묻고자 하는 것은 단지 점유권 관련 소송에서 판사들이 과연 어떤 규정에 따라 그 이자를 결정하는가 하는 것이다. 문제를 한 단계 더 높이 끌어올려서 나는 다시 묻는다.

입법자는, 소유의 원리를 공화정에 도입하면서 그로 인해 초래될 모든 결과들을 헤아려 보았을까? 그는 가능성의 법칙을 알고 있었을까? 만일 알고 있었다면, 왜 법전은 그것을 기술하고 있지 않은가? 왜 소유자가 그의 소유를 불리고 이자를 요구하도록 내버려두는, 재판관이 이 소유의 권한을 인정하고 확립하도록 내버려두는, 국가가 끝없이 새로운 조세를 매기도록 내버려두는, 이 끔찍스러운 방종이 생겨났는가? 인민이 예산을 거부하고, 소작인이 소작료를 거부하며, 기업인이 자본의 이자를 거부하는 권리를 가지려면, 어떤 경계선을 넘어서야 하는가? 놀고먹는 자가 얼마만큼이나 일하는 자를 착취할 수 있는가? 약탈의 권리는 어디에서 시작해서 어디에서 끝나는가? 생산자가 소유자에게 〈나는 이제 더는 당신에게 갚을 것이 없다〉라고 말할 수 있을 때는 언제인가? 소유가 언제 만족하겠는가? 도둑질이 허용되지 않을 때는 언제인가?

입법자가 가능성의 법칙을 알고 있으면서도 그것을 전혀 고려하지 않았다면, 그의 정의正義란 도대체 무엇인가? 그가 그것을 모르고 있었다면, 그의 학식이란 도대체 무엇인가? 그가 교활하든 어리석든 간에 우리는 그의 권위를 인정해야만 하는가?

우리의 헌장과 법전들이 불합리한 가정을 원리로 삼고 있다면, 법률 학교에서 무엇을 가르치겠는가? 최고재판소의 판결은 무엇인가? 우리의 의회들은 무엇을 심의하는가? 〈정치〉란 무엇인가? 우리는 누구를 〈정치인〉이라 부르는가? 〈법률학〉이란 무엇을 의미하는가? 차라리 우리는 〈법률무지학jurisignorance〉이라 말해야 하지 않겠는가?

만일 우리의 제도들이 계산 착오를 원리로 삼고 있다면, 이 제도들은 그만큼 기만행위가 되지 않겠는가? 그리하여 사회 기구 전체가 소유라는 이 절대적인 불가능성 위에 세워져 있다면, 우리를 지배하고 있는 정부라는 것은 하나의 허깨비이며 현 사회는 하나의 유토피아에 불과하지 않겠는가?

아홉 번째 명제 소유는 불가능하다. 왜냐하면 소유는 소유에 대해 무기력하기 때문이다.

Ⅰ. 우리의 공리의 세 번째 귀결에 따르면, 이자는 국외자뿐만 아니라 소유자와도 충돌하고 있다. 이 경제원리는 널리 인정되고 있다. 한눈에 보더라도 이보다 더 단순한 것은 없으리라. 하지만 이보다 더 불합리하고, 이보다 더 명확히 모순되며, 이보다 더 절대적으로 불가능한 것은 없다.

제조업자는 그의 집이나 그의 자본의 임대료를 자기 자신에게 지불하고 있다고 한다. 즉 〈제조업자는 자기에게 지불한다〉, 달리 말하자면, 제조업자는 자신의 생산품을 사는 세상 사람들에게 지불시키고 있다는 것이다. 자신의 소유에 의해 이익을 얻고 있는 듯이 보이는 제조업자가 그 이익을 마찬가지로 자신의 상품들에 의해서도 얻고자 한다고 가정해보자. 그는 90상팀이 들어간 물품에 대해 1프랑(1프랑은 100상팀-옮긴이)의 값을 자신에게 지불시키고 시장에서 이익을 얻을 수 있을 것인가? 아니다. 그와 같은 작업은 돈을 상인의 오른손에서 왼손으로 옮길 뿐, 그에게는 아무 이익도 되지 않을 것이다.

그런데 자기 자신과 거래하는 한 개인에 대해 진실인 것은 상업 세계 전체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로 진실이다. 10명이든, 15명이든, 20명이든 원하는 만큼 긴 생산자들의 사슬을 상정해보자. 생산자 A가 생산자 B에게서 이익을 취한다면, 경제원리에 따라서 B는 C에게서, C는 D에게서 다시 그만큼의 몫을 회수하지 않으면 안 될 것이며, 이러한 일이 결국 Z에게까지 이어질 것이다.

그러나 Z는 과연 누구에게서, 처음에 A가 취한 이익을 회수할 것인가? 〈소비자에게서〉라고 세는 답한다. 가련한 위선자여! 이 소비자는 그러면 A, B, C, D 등등 혹은 Z와는 다른 별개의 인물인가? Z는 누구로부터 회수할 것인가? 만일 그가 최초의 수혜자 A로부터 회수한다고 하면, 이미 누구에게도 이익은 존재하지 않게 되며 따라서 소유란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만일 반대로 Z가 그 부담을 짊어진다고 하면, 그 순간부터 그는 그 사회에 속하지 않게 된다. 그도 그럴 것이 사회가 다른 구성원들에게 인정해 주고 있는 소유권과 이익권을 그에게는 거부하는 것이니 말이다.

따라서 국민이란 인류 전체와 마찬가지로 자체의 테두리를 벗어나서는 움직이지 못하는 거대한 산업 사회와도 같은 것이니만큼, 한 사람이 부자가 되려면 다른 한 사람이 가난해져야만 한다는 것이 입증된다. 왜냐하면 A에게서 소유권이나 불로수득권이 존중되기 위해서는 Z에게는 거부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우리는 조건들의 평등과는 별개로, 권리의 평등이 어떻게 진실일 수 있는지를 알 수 있다. 이 점에서 정치경제학의 부당성은 명백하다. 〈기업가인 나는 노동자의 노무를 살 때, 노동자의 임금을 내 기업의 순생산 안에 포함시키지 않고 그와는 반대로 순생산에서 제외시킨다. 그러나 노동자는 그것을 자신의 순생산 안에 포함시킨다. …〉(세, 『정치경제학』)

이것은 노동자의 경우, 그가 얻는 모든 것이 〈순생산〉임을 의미한다. 그러나 동시에 기업가의 경우 그가 얻은 것 가운데서 자신의 보수를 제외한 나머지 것만이 〈순생산〉임을 의미한다. 그런데 왜 기업가만이 이득을 얻을 권리가 있는가? 이 권리는 근본적으로 소유권과 같은 것인데 왜 노동자에게는 거부되는가? 경제학의 용어로 말하자면, 노동자는 자본이다. 그런데 자본이란 그 수리 및 유지에 드는 비용 외에도 이자를 가져오지 않으면 안 된다. 소유자가 자신의 자본을 위해 또 자기 자신을 위해 얻어내려고 애쓰는 것이 바로 이것이다. 그런데 왜 노동자에게는 자신의 자본에 대해 이와 유사한 이자를 취득하는 것이 허용되지 않는가?

따라서 소유란 권리의 불평등이다. 왜냐하면 소유가 권리의 불평등이 아니라고 하면, 그것은 재산의 평등일 것이며 따라서 존재할 수 없는 것이니 말이다. 그런데 헌법은 만인에게 권리의 평등을 보장하고 있다. 따라서 헌법에 의해 소유는 불가능하다.

Ⅱ. A라는 영지의 소유자는 그가 이 토지의 소유자라는 사실만으로 자기 이웃인 B의 땅을 가로챌 수 있는가? 〈아니다〉라고 소유자들은 대답한다. 그러면 이것이 소유권과는 어떤 관련이 있는가? 이제 여러분은 일련의 유사한 명제들을 통해서 이를 보게 될 것이다.

모자 상인 C는 이웃에 사는 모자 상인 D에게 그의 가게 문을 닫고 장사를 그만두라고 강제할 권리가 있는가? 결코 아니다.

그러나 C가 모자 하나당 1프랑의 이윤을 남기려 하는 반면에, D는 50상팀으로 만족한다. 분명히 D의 절제가 C의 욕구를 해친다. C는 D가 헐값에 장사하는 것을 막을 권리가 있는가? 확실히 아니다.

D가 원한다면 C보다 50상팀 더 싸게 모자를 팔 자유가 있으므로, 이번에는 C가 모자를 1프랑 더 싸게 내놓을 자유가 있다. 그런데 D는 가난하나, C는 부자이다. 따라서 한두 해 지난 다음, D는 이 경쟁을 감당하지 못하고 파산하는 반면, C는 판매를 독차지하게 된다. 소유자 D는 소유자 C에 의해 무엇인가 보상을 요구할 수 있는가? 소유자 D는 자기의 소유권과 장사를 회복하기 위해 소유자 C에 맞서 소송을 제기할 수 있는가? 아니다. 왜냐하면 D가 더 부자였다면, 그 역시 C가 한 것과 똑같은 일을 할 권리가 있었을 테니 말이다.

같은 이유로 대지주 A는 소지주 B에게 다음과 같이 말할 수 있다. 〈당신 땅을 내게 파시오. 그렇지 않으면 당신은 당신의 밀을 팔지 못하게 될 것이오.〉 이렇게 말한다고 해서, B가 소송을 제기할 권리가 없는 한, A는 아무런 피해도 입지 않는다. 그 결과, A는 자신이 B보다 더 부자라는 바로 그 이유만으로 원하기만 하면 B를 먹어치울 것이다. A와 C가 B와 D를 약탈하는 것은 결코 소유권에 의해서가 아니라 힘의 권리에 의해서이다. 소유권에 의해서는 두 이웃 A와 C는 상인 B와 D나 마찬가지로 아무것도 할 수 없다. 그들은 서로에게서 빼앗지도, 서로를 파괴하지도 못하며, 서로 상대방을 희생시켜 부자가 될 수도 없다. 침탈 행위를 낳는 것은 바로 강자의 권리에 의해서인 것이다.

그런데 제조업자가 자신이 원하는 대로 임금을 인하하는 것도, 부유한 상인이나 돈 많은 지주가 자기들의 생산물을 원하는 값에 파는 것도 바로 이러한 강자의 권리에 의해서이다. 기업가는 노동자에게 다음과 같이 말한다. 〈내가 당신 노동력을 사든 말든 내 자유이듯이, 당신이 다른 데에 가서 일하든 말든 당신 자유이다. 나는 그만큼만 지불할 것이다.〉 상인은 고객에게 이렇게 말한다. 〈사든지 말든지 하시오. 내가 내 상품을 팔든 안 팔든 내 자유이듯이, 당신이 당신 돈을 쓰든 말든 당신 자유요. 나는 그만큼을 원하오.〉 그러면 누가 양보해야 하는가? 가장 약한 쪽이다.

따라서 힘이 없이는 소유는 소유에 대해서 무기력하다. 힘이 없다면, 소유가 불로수득에 의해 증대될 수 없으니 말이다. 결국, 힘이 없는 소유는 무용지물이다.

〈역사적 해설〉 식민 모국의 설탕과 토착민의 설탕의 문제는 우리에게 이 소유의 불가능성에 대한 놀라운 사례를 보여준다. 두 산업을 그대로 내버려 둔다면, 토착 기업인은 식민업자에 의해 파산당할 것이다. 사탕무 산업을 장려하기 위해서는 사탕수수에 세금을 매겨야만 한다. 한쪽의 소유를 유지하려면, 다른 한쪽의 소유를 침해해야만 하는 것이다. 이 문제에서 가장 주목할 만한 점은 실상 사람들이 가장 덜 관심을 두어온 점이기도 한 다음과 같은 사실이다. 즉 이렇게 하든 저렇게 하든 소유는 침해될 수밖에 없다는 점이다. 두 산업이 시장에서 균형을 유지하도록 하기 위해서 각각 비례 세금을 매겨보라. 그러면 〈최고가격maximum〉이 등장할 것이며 소유에 이중으로 타격을 주게 될 것이다. 즉, 당신이 매긴 세금은 한편으로 상업의 자유를 훼손하게 되며, 다른 한편으로 소유자들 사이의 평등을 무시하게 된다. 사탕무 쪽의 손해를 보상해주라. 그러면 당신은 납세자의 소유를 침해하게 된다. 여러 품질의 담배를 재배하듯이, 국민의 세금을 들여 두 품질의 작물을 재배해보라. 그러면 당신은 어느 한 종류의 소유를 파괴하게 된다. 이 마지막 내기가 가장 단순하고 최선의 방책일지 모른다. 그러나 국민을 여기에 끌어들이려면, 능란한 정신과 관대한 의지가 합쳐져야 하는데, 이는 오늘날 실현불가능한 일이다.

경쟁, 즉 상업의 자유 - 한마디로 말하자면 교환되는 소유 - 는 여전히 오래도록 우리의 상업 입법의 기초가 될 것이며, 이 상업 입법은 경제적 관점에서 볼 때 모든 유형의 민법과 일체의 통치를 다 포괄할 것이다. 그런데 경쟁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닫힌 경기장에서의 결투이며, 그 결투에서 권리란 무기에 의해 판가름 나는 것이 아닌가.

〈누가 거짓 증언을 하는가, 피고인가 증인인가?〉라고 야만 시대의 우리 조상들은 말했다. 〈그들을 싸우게 하라. 이긴 자가 옳다〉라고 한층 더 야만적인 우리의 판사님께서 대답한다.

〈우리 둘 중 누가 이웃에게 향료를 팔 것인가?〉 〈그것을 가게에 내놓도록 하자〉라고 경제학자는 외친다. 가장 기민한 자, 가장 교활한 자가 가장 정직한 자이며 가장 훌륭한 상인이리라.

이것이 바로 나폴레옹 법전의 정신이다.

열 번째 명제 소유는 불가능하다. 왜냐하면 소유는 평등을 부정하기 때문이다.

이 명제에 대한 설명은 앞의 명제들에 대한 요약이다.

1. 경제법의 원리는 〈생산물은 생산물에 의해서만 살 수 있다〉는 것이다. 소유는 효용을 생산할 때에만 옹호될 수 있는 것이며 아무것도 생산하지 못한다면 그 순간부터 비난의 대상이 된다.

2. 〈노동이 생산물에 의해 균형을 이루어야 한다〉는 것은 경제의 법칙이다. 소유에 의해 생산이 그 가치보다 더 많은 비용이 든다는 것은 엄연한 사실이다.

3. 또 다른 경제 법칙. 즉, 〈자본이 주어질 경우, 생산은 더 이상 자본의 규모에 의해 측정되는 것이 아니라 생산력에 의해 측정된다〉. 그런데 소유는 노동에 대한 고려 없이 소득이 늘 자본에 비례할 것을 요구하므로, 이런 점에서 소유는 원인과 결과 사이의 이 대등한 관계를 인정하지 않는다.

4.와 5. 명주를 잣는 누에와 마찬가지로 노동자는 결코 자신을 위해서 생산하는 것이 아니다. 소유는 두 배의 생산을 요구하면서도 그것을 얻기는커녕, 노동자를 헐벗게 하고 죽여 버린다.

6. 자연은 인간 개개인에게 하나의 이성, 하나의 정신, 하나의 의지만을 주었다. 그런데 소유는 한 인간에게 복수의 투표권을 부여하면서 그의 정신도 복수성複數性을 띤다고 가정한다.

7. 효용을 재생산하지 않는 모든 소유는 파괴 행위이다. 소유는 소비에 임하든, 저축에 임하든, 자본화에 임하든, 〈무효용〉을 낳으며 불모와 죽음의 원인이 된다.

8. 자연권의 충족은 일종의 등식과도 같다. 달리 말하자면, 한 물건에 대한 권리는 반드시 이 물건에 대한 점유에 의해 충족되는 법이다. 따라서 자유에 대한 권리와 자유로운 인간 조건 사이에, 아버지가 될 권리와 부성 사이에, 안전에 대한 권리와 사회 보장 사이에 하나의 균형, 즉 등식이 성립한다. 그러나 불로수득권과 이 불로수득의 실현 사이에는 등식이 성립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불로수득이 실현됨에 따라서 그 불로수득은 제2의 불로수득에 대한 권리를 낳고, 제2의 불로수득은 제3의 불로수득에 대한 권리를 낳는 식으로 끝없이 이어질 것이기 때문이다. 소유는 그 대상과 절대로 조응하지 못하므로, 자연이나 이성에 어긋나는 권리이다.

9. 마지막으로, 소유는 그 자체로는 존재하지 않는다. 소유는 발생하고 행동하기 위해서 어떤 대외적인 요인, 즉 〈무력〉과 〈사취〉를 필요로 한다. 달리 말하자면, 소유는 결코 소유와 대등하지 않다. 그것은 부정否定이고, 허위이며, 〈무無〉이다.

제5장 정의와 불의의 관념에 대한 심리학적 설명, 그리고 통치와 권리의 원리에 대한 규정

소유는 불가능하다. 평등은 존재하지 않는다. 우리는 소유를 혐오하면서도 그것을 원한다. 우리의 사고는 평등에 매달려 있으나 그것을 실현할 줄을 모른다. 우리의 의식과 우리의 의지 사이의 이 뿌리 깊은 반목을 누가 우리에게 설명해 줄 것인가? 정의와 사회의 가장 신성한 원리가 되어버린 이 불길한 오류의 원인을 누가 보여줄 것인가?

내가 감히 나서는 바이며, 그것에 성공하길 원한다.

그러나 인간이 어떻게 정의를 침해하였는가를 설명하기에 앞서서, 우선 정의란 무엇인가를 규정할 필요가 있다.

제1부

제1절 인간과 동물의 도덕 감각에 관하여

철학자들은 종종 인간의 지능과 동물의 지능을 구별해 주는 명확한 구분선이 무엇인가라는 문제를 거론해 왔다. 철학자들은 그들이 따라야만 했던 유일한 방침인 관찰에 이르기 전에 습관대로 커다란 어리석음을 내보이곤 했다. 이 끝없는 논쟁에 종지부를 찍은 이는 철학이라고는 조금도 내세우지 않는 겸허한 학자, 즉 프레데릭 퀴비에(Georges-Frédéric Cuvier, 1773~1848, 박물학자-옮긴이)였다. 퀴비에는 아주 단순한 구분, 그러나 그 자체만으로도 하나의 체계보다 값진 명철한 구분을 보여주었다. 즉 그는 〈지능〉으로부터 〈본능〉을 떼어낸 것이다.

그러나 지금껏 아무도 다음과 같은 문제는 제기하지 않았다. 즉 〈인간과 야수의 도덕 감각은 본질적으로 다른 것인가, 아니면 정도의 차이일 뿐인가?〉

만일 옛날에 어떤 이가 이 명제의 뒷부분을 감히 지지했다면, 그의 주장은 도덕과 종교에 상처를 입히는 파렴치하고 신성모독적인 일로 보였을 것이다. 교회 법정과 세속 법정은 이구동성으로 그에게 유죄 판결을 내렸을 것이다. 얼마나 끔찍한 말투로 이 불경스러운 역설을 단죄했겠는가! 사람들은 다음과 같이 외쳤으리라. 〈양심, 양심이라는 이 인간의 명예는 그에게만 주어진 것이다. 정의와 불의, 공덕과 죄과라는 관념은 인간의 고귀한 특권이다. 세속의 취향에 맞서고 선과 악을 구별하는 숭고한 능력, 자유와 정의에 의해 점점 신을 닮아갈 수 있는 이 숭고한 능력은 만물의 영장인 인간에게 고유한 것이다. …아니, 덕이라는 성스러운 이미지는 인간의 마음속에만 심어져 있는 것이다.〉 이것은 감정으로 가득 차 있으나 사실 아무 의미가 없는 말이다.

인간은 이성적이고 사회적인 동물(zôon logikon kaï politikon)이라고 아리스토텔레스는 말했다. 이 정의는 그 후에 나온 다른 어떤 정의들보다 낫다. 그러나 나는 〈인간은 기관器官들의 힘에 말미암은 지능이다〉라는 보날(L. de Bonald, 1754~1840, 프랑스의 정치저술가-옮긴이) 씨의 유명한 정의도 무조건 배제하지는 않는다. 비록 이 정의가 미지의 것에 의해 기지의 것을, 즉 지능에 의해 살아 있는 존재를 설명하고 나아가 인간의 본질적인 특성인 동물성에 대해서는 입을 다무는 이중의 결함이 있기는 하지만 말이다.

인간은 따라서 사회를 이루고 사는 동물이다. 사회를 말하는 자는 관계의 총화, 즉 한마디로 말하자면 체계를 말한다. 그런데 체계란 특정한 조건들 아래서만 존속하는 것이다. 그러면 인간 사회의 조건들은 무엇이며, 〈법칙들〉은 무엇인가?

인간들 사이의 〈권리〉란 무엇이고, 〈정의〉란 무엇인가?

여러 학파의 철학자들과 함께 다음과 같이 말하는 것은 아무 소용이 없다 ; 그것은 신성한 본능이고, 영원한 천상의 목소리이며, 자연이 준 가르침이고, 이 세상 모든 사람을 밝히는 빛이며, 우리 마음속에 새겨진 법칙이다 ; 그것은 양심의 외침이고, 이성의 명령이며, 감정의 영감이고, 감각의 취향이다 ; 그것은 타인 속의 자기애, 즉 계명된 이기심이다 ; 그것은 어떤 내재적 관념이고, 순수 이성에 뿌리를 둔 실천 이성의 정언 명령이다 ; 그것은 정념의 인력이다 등등. 이 모든 말이 멋지게 보이는 만큼, 진실일 수도 있다. 그러나 이 모든 말은 무의미하다. 우리가 이러한 미사여구를 열 페이지나 늘어놓더라도(수많은 책 속에서 찾아볼 수 있다) 문제는 단 한 줄도 진척되지 않는다.

〈정의는 공통의 효용〉이라고 아리스토텔레스는 말한다. 이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동어반복에 불과하다. 샤를 콩트 씨는 자신의 『입법론』에서 〈공공 행복이 입법자의 목적이어야만 한다는 원리는 어떤 뛰어난 이성에 의해서도 부정될 수 없다. 그러나 우리가 그 원리를 표명하고 증명했을 때라도, 환자의 치료가 의사의 목적이라고 말함으로써 의학이 진보하지 않는 것처럼 입법도 진보하지 않는다〉라고 말하지 않는가.

다른 길을 택하도록 하자. 〈권리〉란 사회를 규율하는 원리들의 총화이다. 인간에게 정의란 이 원리들을 존중하고 준수하는 것이다. 정의를 실천한다는 것은 사회적 본능을 따르는 것이다. 따라서 정의를 나타내 보이는 것은 사회를 나타내 보이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가 일정 수의 여러 상황들에서 발생하는 인간들 서로간의 행위를 관찰한다면, 인간이 언제 사회를 이루고, 언제 사회를 이루지 않는가를 쉽사리 깨달을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 결과로부터 추론함으로써 법칙을 얻을 수 있다.

가장 단순하면서도 가장 확실한 경우들로부터 출발하자.

자식을 생명의 위협으로부터 지키고 자식을 먹이기 위해 모든 것을 바치는 어머니는 자식과 함께 사회를 이룬다. 그녀는 좋은 어머니이다. 아이를 버리는 어머니는 사회적 본능(모성애는 사회적 본능의 수많은 형태 중 하나이다)에 충실하지 못하다. 그녀는 자연을 저버린 어머니이다.

만일 내가 익사할 위험에 처한 사람을 구하러 물속에 뛰어든다면, 나는 그의 형제이자 그의 동료이다. 만일 내가 그를 구하기는커녕 물속에 처박아 버린다면, 나는 그의 적이자 그의 살해범이다.

자선을 베푸는 자는 헐벗은 자를 동료로 대한다. 물론 완벽한 의미에서 동료로 대하는 것이 아니라 그와 나누는 금액 정도로만 동료로 대하는 것이기는 하지만 말이다. 자신이 생산하지 않은 것을 무력이나 교활한 짓으로 빼앗는 자는 자기 자신에게서 사회성을 파괴하는 자이다. 그는 강도이다.

길에 누워있는 나그네를 일으켜 세우고, 상처를 치료해주며, 기운을 북돋아주고, 돈을 나누어주는 사마리아인은 그렇게 함으로써 자신이 그의 동료이자 이웃이라고 선언하는 것이다. 돌아보지 않고 나그네를 지나쳐 버리는 사제는 그 나그네에게 동료일 수 없으며 적으로 남는다.

이 모든 경우에서 인간은 자신의 동료에 대한 내면적인 인력에 의해, 은근한 공감에 의해 이끌린다. 이것이 그로 하여금 함께 사랑하고, 함께 즐기고, 함께 슬퍼하게 한다. 따라서 이 인력에 저항하려면 자연에 어긋나는 어떤 의지의 힘이 필요하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이 인간과 동물들 사이에 어떤 뚜렷한 차이를 이루어내지는 않는다. 동물들의 경우도, 새끼의 연약함이 어미의 마음을 떠나지 않는 한, 즉 새끼들을 어미에게 결합시키는 한, 목숨을 걸고 새끼들을 보호한다. 마치 조국을 위해 목숨을 바치는 우리 영웅들을 생각나게 할 정도로 용기를 발휘하면서 말이다. 어떤 동물들은 사냥감을 좇아 서로 모이고, 먹이를 나누기 위해 서로 찾고 서로 부른다(어떤 사람이 표현한 바에 따르면, 서로 초대한다). 위험이 닥치면 동물들은 서로 돕고, 서로 보호하며, 서로에게 알린다. 코끼리는 도랑에 빠진 동료가 빠져 나오도록 돕는다. 암소들은 이리떼의 습격을 막기 위해 둥글게 진陳을 짜고 뿔을 위로 쳐들며 어린 새끼들을 가운데 넣어 보호한다. 말이나 돼지는 어느 한 마리가 고통스럽게 울부짖을 때 구하러 달려간다. 동물들이 서로 짝을 이루고, 수컷이 암컷을 어루만지며, 서로에게 충실히 대하는 광경을 내가 어찌 다 묘사하랴! 그러나 공정을 기하기 위해서, 동물들 사이의 사교, 우애, 사랑을 보여주는 이 감동적인 우화가 동물들이 먹을 것 때문에 서로 싸우고 수컷이나 암컷을 서로 차지하려고 이빨을 드러내고 물어뜯는 일을 방해하지는 않는다는 사실을 덧붙여두자. 동물들은 우리 인간들과 아주 흡사하다.

사회적 본능은 인간에게나 동물에게나 많든 적든 존재한다. 인간과 동물의 본성은 같은 것이다. 인간은 보다 필연적으로 더욱 줄기차게 결합한다. 동물은 고립에 더 강하게 버티는 듯하다. 인간에게 사회적 욕구는 더 긴급하고 더 복잡하다. 짐승에게 사회적 욕구는 덜 뿌리 깊고, 덜 다양하며, 덜 요구되는 듯하다. 한마디로 말해서 사회를 이루는 것은 인간의 경우 종과 개체의 보존을 목적으로 하나, 동물의 경우에는 종의 보존이 훨씬 더 중요하다.

지금까지 우리는 인간이 자신에게만 유일하다고 내세울 수 있는 그 무엇도 발견하지 못했다. 사회적 본능, 도덕 감각은 인간에게나 동물에게나 다 찾아볼 수 있다. 인간이 해하는 몇몇 자선과 정의와 헌신 따위의 행동을 두고 인간 스스로 신을 닮아가고 있다고 생각할 때, 그는 자신이 동물적인 충동에 따르고 있을 뿐이라는 사실을 깨닫지 못한다. 우리는 선량하고 애정 깊고 동정심 많으며 올바르다. 또한 우리는 성을 잘 내고 먹을 것을 탐내고 사치를 즐기고 고집이 세다. 즉 우리는 동물과 같다. 우리의 가장 고결한 덕도 결국에는 본능의 맹목적인 충동으로 환원되는 것이다. 시성諡聖과 신격화의 근거가 바로 이런 것이라니!

그러나 우리들 즉 두 발 두 손을 가진 동물과 다른 생물들 사이에는 차이점이 존재한다. 차이점은 무엇인가?

철학도는 주저 없이 이렇게 답할 것이다. 즉, 그 차이는 우리가 우리의 사회성을 의식하는 데 반해서 동물은 그들의 사회성을 의식하지 못한다는 사실, 우리가 우리의 사회적 본능의 작동에 대해 성찰하고 추론하는 데 반해서 동물은 그렇지 않다는 사실에 있다고 말이다.

한 걸음 더 나아가자. 우리가 우리를 지배하는 사회적 본능(우리는 이것을 정의라고 부른다)에 저항하는 것이 우선 타인에게, 다음에 우리 자신에게 해로운 일이라고 깨닫게 되는 것은 바로 우리 자신만이 지니고 있는 듯이 보이는 성찰과 추론의 능력에 의해서이다. 이기적 인간, 도둑, 살인자, 즉 사회의 배신자들이 자연에 대해 죄를 짓고 있으며 또 고의로 악을 행할 때에는 타인과 자기 자신에게 죄가 된다는 점을 우리에게 가르쳐 주는 것은 바로 이성이다. 우리와 같은 인간 존재가 자신의 행위에 책임을 지지 않으면 안 된다고 생각하도록 하는 것은 한편으로는 우리의 사회적 본능이며, 다른 한편으로는 우리의 이성인 것이다. 양심의 가책, 징벌 및 형법의 정의의 원리가 바로 이것이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은 인간과 동물 사이에 지능의 차이를 입증하는 것일 뿐, 결코 정서affections의 차이를 입증하는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우리 동료들과의 관계에 대해 이치를 따지기도 하지만, 마찬가지로 먹고 마시고 여자를 고르고 집을 선택하는 등의 아주 자질구레한 행동들에 대해서도 이치를 따지니 말이다. 우리는 하늘과 땅에 있는 모든 사물들에 대해 이치를 따진다. 우리의 추론 능력이 미치지 않는 것은 아무 데도 없다. 그런데 우리가 외계의 현상들에 대해 얻은 지식이 그 현상들의 원인이나 법칙들에 영향을 미치지 않듯이, 성찰은 우리의 본능을 일깨움으로써 우리의 감각적 특질을 계발해 주기는 하지만 그 성격 자체를 바꾸어 놓지는 않는다. 성찰은 우리에게 도덕성이 무엇이라고 가르쳐주기는 하나 도덕성을 바꾸거나 수정하지는 않는다. 실수를 저지른 다음에 우리가 스스로 품는 불만, 불의를 보고 우리가 느끼는 분노, 응분의 징벌이나 마땅한 보상이라는 관념 따위는 성찰의 결과이나 본능이나 정념의 직접적인 결과는 아니다. 우리의 사회적 의무에 대해 우리가 가지고 있는 지능(나는 배타적 지능이라고 말하지는 않는다. 왜냐하면 동물도 마찬가지로 잘못을 저질렀다는 감정을 느끼며, 무리들 중 하나가 공격을 당하면 함께 덤벼들기 때문이다), 즉 선과 악에 대한 의식은 도덕성에 관한 한 인간과 동물 사이의 차이를 이루어내지는 못한다.

제2절 사회성의 첫 번째 및 두 번째 단계에 대하여

나는 앞에서 내가 말한 사실, 즉 인류학의 가장 중요한 내용들 중 하나를 강조하고자 한다.

우리로 하여금 사회를 이루게 하는 힘인 공감의 인력은 그 본질상 맹목적이고 무질서하기 때문에 앞선 권리들을 존중하지도 그렇다고 공적이나 우선권을 구별하지도 않고 항상 그때그때의 충동에 빠져들곤 한다. 그것은 부르는 사람이면 누구나 따라가는 잡종 개와도 같다. 그것은 남자를 보면 누구나 아빠라고 부르고 여자를 보면 누구나 유모로 여기는 젖먹이 아이와도 같다. 그것은 자기 종족과의 교류를 박탈당하고 고립 속에서 동료에게 달라붙는 생물과도 같다. 사회적 본능의 이러한 근본적 성격은 경박한 사람들의 우정을 참을 수 없고 싫어지게까지 만든다. 새 얼굴을 대할 때마다 넋을 빼앗기고, 덮어놓고 사근거리며, 찰나의 사귐 때문에 가장 오래되고 가장 고귀한 정서를 저버리는 그런 경박한 사람들의 우정 말이다. 이러한 사람들의 결함은 마음속에 있는 것이 아니라 판단 속에 있다. 이 단계에서의 사교성은 우리와 닮은 존재를 생각함으로써 우리 안에서 일어나지만, 그것을 느껴보지 못한 사람에게서는 절대로 나올 수 없는 자기력과도 같은 것이다. 그것은 상호적이기는 하나 전달되지는 않는다. 사랑, 친절, 연민, 동정 등, 우리는 그것을 원하는 대로 이름 붙일 수는 있으나 그 평가에 값할 만한 것은 아무것도 없다. 그 어느 것도 인간을 동물보다 우위에 놓을 수 있을 만하지 않다.

사회성의 두 번째 단계는 정의한 바, 우리는 이것을 〈우리와 동등한 인격을 타인에게 인정하는 것〉이라고 정의할 수 있다. 감정의 차원에서 볼 때, 정의는 인간에게나 동물에게나 한결같다. 그러나 인식의 차원에서 볼 때, 우리 인간만이 〈정의로움〉에 대한 완벽한 관념을 가질 수 있다. 물론 그것이 내가 앞에서 말했듯이 도덕성의 본질 자체를 바꾸어 놓을 수는 없지만 말이다. 우리는 곧 인간이 어떻게 동물들이 도달할 수 없는 사회성의 세 번째 단계에 이르는가를 보여줄 것이다. 그러나 그 이전에 나는 〈사회, 정의, 평등〉이라는 이 세 가지가 서로 동의어이고 서로 통하는 표현들이며 마땅히 서로 바꾸어 쓸 수도 있는 용어들이라는 사실을 형이상학적으로 논증해야만 한다.

난파선을 피해 약간의 식량만을 가지고 겨우 나룻배에 옮겨 탄 어떤 사람이 파도에 휩쓸리는 것을 보았을 때, 나는 그를 구조해야만 하는가? 그렇다. 나는 구조에 나서야만 한다. 그렇지 않으면 나는 그에 대해 반사회적 대죄, 즉 살인죄를 범하는 것이다.

그런데 나는 또한 그와 식량도 나누어 먹어야 하는가?

이 문제를 해결하려면, 어조를 바꾸어 물어야 한다. 즉, 만일 사회가 나룻배에 대해 의무를 진다면, 사회는 마찬가지로 식량에 대해서도 의무를 져야만 하는가? 의문의 여지가 없다. 함께 사회를 이루는 자의 의무는 절대적이다. 인간의 사회적 본능은 인간에 의한 물건의 선점보다 앞서는 것이며, 후자는 전자에 종속되는 것이다. 점유 행위가 배타적으로 인정되는 것은 모두에게 동등한 선점권이 주어지는 순간부터일 뿐이다. 이 경우에 우리의 의무감을 희미하게 만드는 것은 우리의 예견 능력인 바, 이 예견 능력은 우리로 하여금 다가올 위협을 두려워하게 만들고 우리를 강탈 행위에 매달리게 하며 우리를 도둑이나 살인자로 만든다. 동물은 본능의 의무를 계산하는 법이 없으며, 하물며 거기서 생길 수 있는 불편을 염두에 두지도 않는다. 인간, 즉 가장 사회적인 동물인 인간에게 지능이 법에 복종하지 않을 동기가 되어 버린다는 것은 참으로 놀라운 일이다. 인간은, 법의 쓰임새는 오로지 인간을 이롭게 하는 것이라고 주장하는 사회 앞에 거짓을 늘어놓는다. 만일 우리의 신중함이 우리의 이기심을 위한 도구로만 쓰인다면, 차라리 신이 우리에게서 그 신중함을 다시 앗아가는 것이 더 나으리라.

〈뭐라고!〉 당신은 말할 것이다. 〈내가 일해서 얻은 빵, 바로 내 빵을 내가 알지도 못하고 다시 만날 일도 없으며 아마도 배은망덕으로 보답할 어떤 낯선 사람과 나누어야만 한다고! 이 빵이 적어도 함께 일해서 얻은 것이라면, 그 사람이 그 빵을 얻기 위해 무엇인가 일을 했다면, 그는 자기 몫을 요구할 수 있을 것이다. 그가 힘을 보탠 만큼, 그는 권리가 있으니 말이다. 그러나 그가 나에게 어떤 요구를 한다는 말인가? 우리는 함께 생산하지 않았다. 그러니 우리는 함께 먹지도 않을 것이다.〉

이러한 추론의 오류는 한 생산자가 다른 생산자와 반드시 연결되어 있는 것은 아니라는 잘못된 가정에서 나오는 것이다.

둘 또는 그 이상의 개인들 사이에 진정으로 하나의 사회가 결성되고, 그 기본 원칙이 승인되고 기재되고 서명되었다면, 그때부터 그 결과에서 어떤 어려움도 있을 수 있다. 예컨대, 두 사람이 서로 힘을 합쳐서 물고기를 낚는 가운데, 그중 한 사람이 물고기를 건져 올리지 못할지라도 그가 자기 동료가 낚은 물고기에 대한 권리가 있다는 것은 누구나 다 인정하고 있다. 만일 상인 두 명이 함께 회사를 세우는 경우, 그 회사가 운영되는 동안 손해와 이득은 공동의 몫이다. 각자가 자신을 위해서가 아니라 회사를 위해서 생산했기 때문에, 몫을 나눌 때, 고려되는 것은 생산자로서가 아니라 공동 경영자로서이다. 이것이 바로 노예(농장주는 노예에게 지푸라기와 쌀을 준다)나 문명사회의 노동자(자본가는 노동자에게 형편없는 임금을 준다)가 농장주나 고용주와 함께 생산에 임함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한동아리가 아닌 까닭에 생산물의 분배에 참여하지 못하는 이유이다. 우리의 마차를 끄는 말이나 우리의 쟁기를 끄는 소는 우리와 함께 생산하나 우리와 한동아리가 아니다. 우리가 생산물을 차지하며 말이나 소에게는 나누어주지 않는다. 우리가 부리는 동물이나 우리가 부리는 노동자는 이렇게 그 처지가 마찬가지이다. 우리가 이들에게 선한 일을 행한다면, 그것은 당연한 정의에 의해서가 아니라 순전한 친절에 의해서일 뿐이다.[22]

그러나 우리 인간들이 모두 한동아리가 아니라는 것이 있을 수 있는 일인가? 앞의 두 장에서 이야기한 것을 돌이켜보자. 즉, 우리가 서로 연결되기를 원치 않을지라도, 일의 추세, 소비의 필요성, 생산의 법칙, 교환의 수학적 원리 등이 우리를 서로 결합시킨다. 이 규칙에 대한 유일한 예외는 소유자의 경우이다. 소유자는 자신의 불로수득권에 의해 생산에 임하므로 그 누구와도 결합되어 있지 않으며, 따라서 누구도 그에게 나누어 주어야할 의무가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누구와도 자기의 생산물을 나누어야할 의무가 없다. 소유자만을 예외로 하고, 우리 모두는 서로를 위해서 일하고, 타인의 도움 없이는 몸소 아무 일도 할 수 없으며, 서로 끊임없이 생산물과 용역을 교환하고 있다. 이 모든 것이 사회적 행위들이 아니면 그 무엇이겠는가?

그런데 상업 사회든 산업 사회든 농업 사회든 평등을 넘어서는 생각할 수 없다. 평등은 그 필수적인 존재 조건이다. 따라서 이 사회와 관련된 모든 일들에서, 사회를 위배하는 일, 정의를 위배하는 일, 평등을 위배하는 일은 정확히 같은 것이다. 이 모든 것을 인간 모두에게 적용해보라. 그러면 지금 이야기한 바대로, 독자는 충분한 통찰력을 지니게 될 것이고 더 이상 나의 안내를 필요로 하지 않을 것이다.

이 원리에 따른다면, 한 사람이 어떤 밭을 차지해서 이 밭은 내 것이라고 말하는 것은, 만일 다른 사람도 그처럼 밭을 차지할 능력을 가지고 있는 한 부당한 일이 아니리라. 마찬가지로 그가 다른 곳으로 이사할 요량으로 이 밭은 그것과 대등한 다른 밭과 교환한다면, 그것은 부당한 일이 아니다. 그러나 만일 그가 다른 어떤 이로 하여금 자기 자리를 대신하게 하고는 그에게 〈내가 쉬는 동안 나를 대신해 일해라〉라고 말한다면, 그는 부당하고 한동아리가 아니면 〈불균등〉하게 된다. 그는 소유자이다.

마찬가지로, 사회적 책무를 다하지 않으면서 사회적 생산물을 다른 사람들만큼, 아니 왕왕 다른 사람들보다 더 많이 누리고 있는 게으름뱅이, 방탕아는 도둑놈이자 기생충이고 비난받아 마땅하다. 우리는 그들에게 아무것도 주지 말아야 할 것이다. 그러나 그들도 살아가야 하는 이상, 그들을 감독하고 일하게 해야 하는 것이 우리의 의무이다.

사회성은 감성적 존재들 사이의 인력과 같은 것이다. 정의는 성찰과 인식을 수반하는 바로 이 인력이다. 그런데 우리는 어떤 일반적 관념 아래서, 어떤 오성의 범주 안에서 정의를 인식하는가? 균등한 양의 범주 안에서이다. 여기서 정의에 대한 아주 오래 된 정의定義가 나왔다. 즉, 〈정의는 평등이요 불의는 불평등이다(Justum aequale est, injustum inaequale)〉.

그러면 정의를 실천한다는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평등한 노동 조건 아래서 각자에게 재산을 평등하게 나누는 것이다. 즉 그것은 사회의 일원으로 행동하는 것이다. 우리의 이기심이 아무리 불평을 늘어놓아도 소용이 없다. 명백한 증거와 필연 앞에서는 어떤 핑계도 있을 수 없다.

선점권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노동자들이 나타남에 따라 노동자들 사이에서 땅을 나누는 자연적인 방식이다. 이 권리는 일반 이익 앞에서 사라지며, 이 일반 이익은 말하자면 사회적 이익이므로 또한 선점자의 이익이 된다.

노동의 권리란 무엇인가? 그것은 요구되는 조건들을 충족시킴으로써 자기 몫의 재산을 얻어낼 수 있는 권리이다. 요컨대 그것은 사회의 권리이며 평등권이다.

관념과 본능이 결합한 산물인 정의는 인간이 느낄 수 있고 관념을 가질 수 있게 되는 즉시 인간 안에 모습을 드러낸다. 여기서 사람들은 정의를 내재적이고 원초적인 감정이라고 여겼으나 이는 논리적으로 보나 시간 순서로 보나 잘못된 견해이다. 그러나 감정의 능력과 지능의 능력에서 태어난 정의는 굳이 말하자면 그 잡다한 구성에 의해 내게는 〈자아moi〉의 통일성과 단일성의 가장 강력한 증거들 중 하나로 보인다. 이는 마치 청각과 시각이 섞인다고 해서 반은 청각적이고 반은 시각적인 양면 감각이 만들어질 수 없듯이, 유기체가 그 자체로는 이와 같은 혼합물을 생산하지 못하기 때문에 더욱 그러하다.

정의는 그 이중적 특성으로 인해, 우리가 제2, 3, 4장에서 보아온 모든 논증들에 대해 우리가 결정적으로 옳다는 것을 입증해준다. 한편으로 〈정의〉의 관념은 사회의 관념과 동일하고 사회는 응당 평등을 내포하기 때문에, 소유를 옹호하기 위해 고안된 모든 궤변의 근저에서 어김없이 평등이 발견된다. 왜냐하면, 소유는 그것이 정의롭고 사회적인 것일 때에만 옹호될 수 있고 소유란 불평등에 다름 아닌 만큼, 소유가 사회와 합치된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서는 불의가 정의이고 불평등이 평등이라는 모순된 명제들을 주장하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이다. 다른 한편으로 정의의 두 번째 요소인 평등의 개념은 사물에 대한 수학적 비율에 따라 우리에게 주어져 있기 때문에, 노동, 생산 및 소비에 필요한 균형을 파괴하는 소유 즉 노동자들 사이의 재산의 불균등 분배는 불가능할 수밖에 없다.

그리하여 모든 인간은 서로 결합되어 있다. 누구나 마찬가지로 정의를 부여받고 있으며 누구나 평등하다. 그렇다면 사랑이나 우정과 같은 남다른 감정은 정의에 어긋나는 것인가?

이것은 설명을 필요로 한다.

조금 전에 나는 내가 구하러 나설 수 있는 위험에 처한 어떤 사람의 경우를 가정했다. 이제 나는 목숨이 위태로운 두 사람에게 동시에 구원을 요청받았다고 가정한다. 그러면 나는 다른 한 사람을 그냥 죽게 내버려둔 채 혈연, 우정, 사귐 또는 존중심 등에 이끌려서 내게 가장 가까운 사람에게 먼저 달려가도록 허용되고 또 심지어 그렇게 하도록 요청받는 것인가? 그렇다. 왜 그런가? 왜냐하면 전체 사회 안에는 우리들 각자에게 개개인만큼이나 많은 개별 사회들이 존재하고 있으며, 따라서 사회성이라는 바로 그 원리에 입각해서 우리는 우리 주위에 형성된 친근성의 순서에 따라 우리에게 요구되는 의무를 다하지 않으면 안 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다른 이들에 앞서서 자기 부모, 아이들, 친구, 동료 등을 먼저 생각해야만 한다. 그러면 이 선호성의 바탕은 무엇인가?

재판관이 그의 친구와 그의 적 사이에 벌어진 소송에 대해 판결을 내려야 할 경우가 있다. 그는 이 경우에 〈가장 먼 자〉보다 〈가장 가까운 자〉를 선호해서 그와 정반대의 증거들에도 불구하고 그의 친구에게 승소 판결을 내려야 하는가? 아니다. 왜냐하면 만일 그가 자기 친구의 불의를 선택한다면, 그는 사회 계약을 어긴 자기 친구의 불충에 공범이 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는 말하자면 자기 친구와 함께 사회 전체에 맞서서 동맹을 맺는 셈이다. 편애의 효력은 사랑, 존중, 신뢰, 친밀감 등과 같이 우리에게 고유한 개인적인 관계들의 경우에만 작동하는 것이며 모든 사람에게 동시에 적용될 수는 없는 일이다. 그래서 화재가 발생했을 때, 아버지는 이웃의 아이를 생각하기 전에 우선 자기 아이에게 뛰어가는 것이다. 그러나 재판관의 경우 권리의 인증이 개인적일 수도 임의적일 수도 없다. 어떤 자에게 손해를 끼치면서 다른 자를 도와준다는 것은 그에게는 용납될 수 없는 일이다.

커다란 사회 안에서 우리 각자가 말하자면 동심원 모양으로 개별 사회들을 구성한다는 이 이론은 여러 종류의 사회적 의무들이 서로 간의 대립과 갈등을 낳을 수 있는 모든 문제들, 즉 고대 비극의 주요 소재가 되었던 문제들을 푸는 열쇠를 제공한다.

동물의 경우 정의는 어떤 의미에서 소극적이다. 약자를 지키고, 사냥에 나서고, 무리 지어 약탈하고, 공동 방어에 나서고 이따금씩 개별적으로 돕는 경우를 제외하면, 동물의 정의는 무엇인가를 하기 위한 것이라기보다는 무엇인가를 막기 위한 것이다. 일어서지 못하는 병든 동물, 함정에 빠진 어설픈 동물은 치료도 받지 못하고 먹을 것도 얻지 못한다. 자기 스스로 치료하거나 궁지에서 빠져 나오지 못하면 생명이 위태롭게 된다. 병상에서 치료를 받는다거나 수용소에서 음식을 제공받는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동물들의 자기 무리에 대한 무관심은 자원의 부족에서뿐만 아니라 지능이 모자라는 데서 생긴다. 인간들 사이에서 나타나는 친근성의 차이는 동물에게서도 찾아볼 수 있다. 동물들은 습성, 좋은 이웃관계, 같은 혈연에서 생기는 애정을 간직하고 있으며 이것보다 저것을 더 좋아하는 선호성을 보이기도 한다. 우리와 비교해 볼 때, 동물의 기억은 허약하고, 감정은 막연하며, 지능은 거의 백지상태이다. 그러나 사물을 식별하는 힘은 동물에게도 존재하는 바, 이 점으로 볼 때 동물에 대한 인간의 우월성은 전적으로 우리의 오성에서 나오는 것이다.

폭넓은 기억력과 깊은 판단력을 가진 우리 인간은 사회적 본능이 우리에게 일깨워준 행위들을 더 늘리고 서로 결합시킬 줄을 안다. 우리는 그 기억력과 판단력을 더 효율적으로 다듬으며 권리의 정도와 탁월성에 맞추어 배분할 줄 안다. 짐승도 사회를 이루고 살며 정의를 실행할 줄 알지만 성찰이나 사변이 없이 본능에 몸을 내맡긴다. 동물의 〈자아〉는 사회적 감정을 평등의 관념에 결합시킬 줄을 모른다. 그도 그럴 것이 평등이라는 관념은 추상적이라서 동물에게는 빠져 있는 것이다. 그 반면에, 사회는 평등한 배분을 의미한다는 원리에서 출발하는 우리 인간은 추론의 능력에 의해서 우리가 가진 권리들의 규칙에 대해 이해하고 동의할 수 있다. 우리는 우리의 판단력을 더 밀고 나가기도 한다. 그러나 이 모든 것에서 우리의 의식은 아주 작은 역할만을 하고 있다. 이 사실은, 우리와 지능이 아주 비슷한 어떤 동물들에게서 희미한 미광처럼 나타날 뿐인 권리의 관념이 어떤 미개인들의 경우 이와 비슷한 수준으로 나타나지만 플라톤이나 프랭클린Flanklin과 같은 이들의 경우 최고의 수준으로 나타난다는 점에서 입증된다. 개인들에게 나타나는 도덕 감각의 발달이나 국민들에게 나타나는 법률의 진보를 추적해보라. 그러면 정의나 입법적 완결성이라는 관념은 어느 경우에나 지능과 정비례함을 알 수 있다. 철학자들이 단순하다고 믿는 정의롭다는 관념은 실제로는 매우 복잡하다. 그 관념은 한편으로는 사회적 본능에 의해 주어지며 다른 한편으로는 타인과 대등한 공적이라는 관념에 의해 주어진다. 죄의식이 정의가 유린되었다는 자각과 의지적 선택이라는 관념에 의해 주어지듯이 말이다.

요약해보자. 본능은 그 본능에 대한 지식에 의해 전혀 수정되지 않는다. 그리고 우리가 지금까지 관찰해 온 여러 가지 사회의 사실들은 동물적 사회성에 속하는 것이다. 우리는 정의, 즉 평등의 이치 아래 인식된 사회성이 무엇인가를 알고 있다. 우리를 동물에서 떼어놓을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제3절 사회성의 세 번째 단계에 대하여

독자들은 아마 내가 제3장에서 적성의 다양성과 분업에 대해 말한 것을 잊어버리지는 않았으리라. 인간들 사이에 재능과 능력의 총화는 누구나 같으며 인간의 천성은 모두 유사하다. 지금 이대로의 우리 모두는 시인이자 수학자이자 철학자이자 예술가이자 장인이자 농사꾼으로 태어난다. 그러나 우리가 이 모든 것에 동일한 재능을 가지고 태어나는 것은 아니다. 한 사회 안에서는 이 인간과 저 인간 사이에, 한 인간 안에서는 이 능력과 저 능력 사이에 커다란 차이가 존재한다. 동일한 능력에서의 이 다양한 정도의 차이, 특정 작업에 대한 이 재능의 우월성은 우리가 앞에서 살펴보았듯이 우리 사회의 토대 자체를 이루고 있다. 지능과 천부의 재능이 자연에 의해 그토록 체계적으로 그리고 그토록 커다란 축복으로 널리 분포되어 있기 때문에, 사회라는 유기체는 어떤 특정 재능이 부족하거나 모자라지 않을까 걱정할 필요가 없으며, 개개 노동자는 자기 직능에 전념함으로써 충분히 자기 동료들이 이룩한 작업과 발견들을 누리기 위해 필요한 정도의 지식을 언제나 얻을 수 있다. 자연의 이 단순하지만 현명한 보살핌에 의해서 노동자는 자기의 작업에만 고립되지 않는 것이다. 그는 마음에 의해 동료들과 결합하기에 앞서서 생각에 의해 동료들과 맺어져 있다. 따라서 그에게는 사랑이 지능에서 출발하는 것이다.

동물들의 사회는 이와 같지 않다. 어떤 종이든 개개 동물의 적성들은 아주 제한되어 있는데다가 그 양적 측면에서 서로 대등하며, 그 적성들이 본능에서 나오는 것이 아닌 경우에는 그 강도의 측면에서도 서로 대등하다. 먹이를 찾는다거나, 적을 피한다거나, 구멍을 판다거나, 둥지를 짓는다거나, 개개 동물들은 다른 동물들이 하는 모든 것을 할 줄 안다. 동물들은 몸이 자유롭고 기력이 왕성한 한 자기 이웃의 도움을 기다리지도 요구하지도 않으며, 그 이웃도 마찬가지이다.

한동아리가 되어 사는 동물들은 서로 이웃을 이루기는 하지만 그들 사이에 어떤 생각의 나눔이나 어떤 친밀한 대화가 이루어지지는 않는다. 동물은 모두가 같은 짓을 하고, 아무것도 배우거나 머릿속에 담아두지 않으며, 그저 서로를 바라보고, 서로를 느끼며 서로 접촉할 뿐, 결코 서로를 이해하지 못한다. 인간은 다른 인간과 관념, 감정, 생산물, 용역 따위를 끊임없이 교환한다. 사회에서 습득되고 실행되는 모든 것이 그에게 필요하다. 이 엄청난 분량의 생산물과 관념들 중에서 각자가 홀로 행하고 홀로 얻어야 할 것은 마치 태양 앞에 있는 원자만큼이나 아주 적은 양이다. 인간은 사회에 의해서만 인간일 수 있고, 마찬가지로 사회는 사회를 구성하고 있는 힘들 사이의 조화와 균형에 의해서만 존립할 수 있다.

동물에게 사회는 〈단순한〉 양태를 띠지만, 인간에게 사회는 〈복잡한〉 양태를 띤다. 동물과 동물을 이어주는 바로 그 본능에 의해 인간은 인간과 이어진다. 그러나 인간의 결합은 동물의 그것과 다르다. 도덕성의 차이를 낳는 것은 바로 이러한 결합 양태의 차이이다.

나는 소유를 사회 상태의 토대로 간주하는 바로 그 법칙들에 의해 그리고 경제학에 의해 다음과 같은 사실을 어쩌면 지나칠 정도로 장황하게 입증하였다. 즉 그 사실은, 조건들의 불평등은 누가 무엇을 먼저 점유했다는 점에 의해서도, 재능, 용역, 근면성, 능력 따위가 남보다 더 우월하다는 점에 의해서도 정당화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조건들의 평등이 자연권, 자유, 생산의 법칙, 물리적 천성의 한계, 그리고 사회의 원리 그 자체의 필연적인 결과라 할지라도, 이 평등이 〈차변〉과 〈대변〉의 한계 너머로 사회적 감정이 비등하는 것을 막지는 않는다. 선행이나 사랑이라는 정신 상태는 그 한계를 넘어선다. 경제가 그 균형을 달성했을 때, 영혼은 자기 고유의 정의를 누리기 시작하며 인정人情은 한없는 애정 속에서 꽃을 피운다.

이때에 사회적 감정은 개인들 사이의 관계에 따라서 새로운 성격을 띤다. 그것은 강자에게는 관용의 기쁨으로, 대등한 자들 사이에서는 진솔한 우정으로, 약자에게는 감탄과 감사의 행복으로 나타난다.

힘과 용기와 재능이 우월한 인간은 자신이 그 모든 것을 사회에 빚지고 있으며, 사회가 없다면 그 자신도 있을 수 없고 아무것도 아니라는 사실을 알고 있다. 그는 자신이 사회의 최말단 구성원으로 받아들여진 이상, 그것만으로도 사회가 자신에게 해줄 바를 다 했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러나 그와 동시에 인간은 자기 능력의 탁월성을 가볍게 여기지 않는다. 인간에게서 영예와 존중의 대상이 될 만한 것은 바로 인간이 몸소 인류에게 바치는 자발적인 존중심이며 자신은 자연의 도구일 뿐이라는 자각이다. 인간이 자신을 구별하고 나아가 자신을 높여서 동물들은 도달할 수 없는 사회적 도덕성의 일정한 단계에 이르는 것은 굳이 말하자면 바로 이러한 심정과 정신의 동시적인 고백, 즉 위대한 존재에 대한 참된 갈망에 의해서이다. 헤라클레스는 괴물들을 때려눕히고 강도들을 징벌하여 그리스를 구했으며, 오르페우스는 천하고 거친 펠라스고이인들을 교화시켰지만, 이 둘은 공로의 대가로 아무것도 요구하지 않았다. 여기에 가장 고상한 시적 창조가 있으며, 여기에 가장 고상한 정의와 미덕의 표현이 있다.

헌신의 기쁨은 이루 다 말할 수 없다.

만일 인간 사회를 굳이 그리스 비극의 공연에 비교한다면, 나는 숭고한 정신과 위대한 영혼의 무리가 〈제1연演〉을 맡고 사소하고 미천한 무리가 〈제2연〉을 맡고 있다고 말할 것이다. 뒤의 무리는 힘들기만 하고 보잘것없는 역할을, 그러나 다수에서 오는 효과나 배역의 전체적인 조화로 보아 아주 중요한 역할을 떠맡고 있다. 그들은 앞의 무리가 구상한 역할을 상연한다. 그들은 앞의 무리에 이끌려 가면서도 앞의 무리에게서 아무런 도움도 받지 않는다. 그러면서도 그들은 앞의 무리에게 찬사를 보내고 갈채와 경탄을 아끼지 않는다.

감사에는 숭배와 열광이 뒤따른다.

그러나 내 마음을 기쁘게 하는 것은 평등이다. 선행은 압제로 변질되고, 찬미는 노예근성으로 변질된다. 그러나 우애는 평등의 딸이다. 오, 나의 친구들이여! 시샘이나 영예가 없이 내가 당신들 옆에서 살 수 있으면 좋으련만. 평등이 우리를 하나로 결합시키고 운명이 우리의 자리를 마련해 주면 좋으련만. 내가 당신들 중 누구에게 가장 큰 존경심을 바쳐야 할지를 고민하기 전에 그냥 죽을 수 있으면 좋으련만.

우애는 사람들의 동심童心에 아주 값진 것이다. 관용, 감사(여기서 나는 뛰어난 능력에게 바치는 찬미에서 나오는 것만을 감사라고 부른다) 그리고 우애는 내가 〈형평équité〉[23] 즉 〈사회적 비례배분〉이라 부르는 어떤 특유의 정서에서 나오는 서로 다른 세 가지 색조들이다. 형평이 정의를 좌우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정의는 항상 형평을 토대로 삼음으로써 그것에 존중을 덧붙여서 마침내는 인간에게서 사회성의 세 번째 단계를 구성한다. 우리가 우리의 도움을 필요로 하는 약자를 돕고 그들을 우리와 대등한 위치로 끌어올리는 일, 우리가 강자의 노예가 되지 않으면서도 그들에게 그에 상응하는 존중과 영예를 바치는 일, 우리가 비록 교환의 대가로서나마 우리 이웃, 우리 친구, 우리와 동등한 자들에게서 받은 것에 대해 그들에게 감사하는 일, 이 모든 것이 우리의 의무이자 동시에 기쁨이 되는 것은 바로 형평에 의해서이다. 형평은 이성과 정의에 의해 이상적인 상태로 고양된 사회성이다. 그 가장 통상적인 특징은 〈우아함〉 또는 〈예의바름〉인 바, 이는 몇몇 민족들의 경우 그것만으로도 사회적 의무의 대부분을 함축하고 있다.

그런데 이 감정은 짐승들에게는 알려져 있지 않다. 짐승들은 사랑하고 서로 집착하고 무엇인가에 대한 편애를 드러내기도 하지만, 존중이라는 것을 이해하지 못한다. 우리는 짐승들에게서 관용도 찬미도 예의바름도 찾아볼 수 없다.

이 감정은 지능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다. 지능은 그 자체로서 계산하고 추산하고 수지를 따지지만 결코 사랑하지 않으며, 보기는 하지만 느끼지 못하니 말이다. 정의가 사회적 본능과 성찰의 혼합물인 것처럼, 형평은 정의와 취향 혼합물, 내가 원하는 식으로 표현하자면 평가하고 이념화하는 능력의 혼합 생산물이다.

인간에게 나타나는 사회성의 세 번째이자 마지막 단계인 이 혼합물은 우리의 복합적인 소통 양식에 의해 결정된다. 이 소통 양식 안에서는 불평등, 아니 더 적절히 말하자면 능력의 차이와 기능의 전문화에 의해 일하는 자들이 점점 서로 더 멀어지는 경향이 있으므로 그만큼 더 사회성이 요구되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보호하면서도 억압하는 힘이 혐오스러울 수밖에 없는 이유이다. 이것이 바로 경탄할 예술작품과 더 없이 조야한 산업 생산물을 같은 눈으로 평가하는 천치 같은 무지가 더없이 경멸을 자아내는 이유이다. 이것이 바로 〈나는 네게 지불했다〉 〈나는 네게 아무것도 빚진 것이 없다〉라고 말하면서 승리를 뽐내는 오만불손한 범용이 더 없이 혐오스러운 이유이다.

〈사회성〉, 〈정의〉, 〈형평〉, 이것은 그 삼중의 단계에서 우리로 하여금 우리 동료들과의 소통을 추구하게 하는 본능적인 능력에 대한 정확한 정의定義이다. 이 본능적 능력의 물리적 표현 형태는 〈자연 및 노동의 생산물에서의 평등〉이라는 정식으로 나타난다.

사회성의 이 세 가지 단계는 서로를 지지하고 또 서로를 가정한다. 정의 없는 형평은 존재하지 않으며, 정의 없는 사회는 무의미하다. 만일 내가 재능에 보답하기 위해 갑의 생산물을 빼앗아서 을에게 준다면, 그것은 갑을 부당하게 약탈한 것일 뿐 갑의 재능을 걸맞게 평가한 것이 아니다. 만일 내가 사회에서 내 동료보다 더 많은 몫을 차지한다면, 우리는 진정한 한동아리가 아니다. 정의란, 무게를 달고 길이를 잴 수 있는 유형의 물질들을 배분하는 데 참여하는 것을 허용함으로써 나타나는 사회성이다. 반면에 형평이란 측정될 수 없는 물질, 즉 경의와 존중을 동반하는 정의이다.

여기서 몇 가지 결론이 도출된다.

⑴ 우리가 우리 마음대로 한 사람에게 다른 사람보다 더 많이, 그것도 상상할 수 있는 최대한으로 우리의 존중을 표현할 수 있다고 할지라도, 우리는 우리 마음대로 공동 재산에서 더 많은 몫을 그에게 줄 수는 없다. 왜냐하면 우리에게는 정의의 의무가 형평의 의무에 앞서며, 전자가 늘 후자보다 앞서 나아가야만 하기 때문이다. 형제의 죽음과 남편의 죽음 사이에서 선택하도록 폭군에 의해 강요당한 한 여인이 남편은 다시 맞이할 수 있지만 형제는 그럴 수 없다는 구실로 남편을 저버린다면, 그녀는 아마도 옛 사람들에게는 칭송을 받았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내가 보기에, 이 여인은 그녀 안에 있는 형평의 감정에 따르기는 했지만 정의를 저버렸으므로 악행을 범한 것이다. 왜냐하면 부부의 사회는 우애의 사회보다 당연히 더 긴밀하며 이웃의 목숨이 곧 우리에게 속한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마찬가지 원리에 의해서, 임금의 불평등이 재능의 불평등을 구실로 법적으로 허용될 수는 없다. 왜냐하면 재산의 분배는 정의에 속한 문제로서 경제의 영역일 뿐 경탄의 영역이 아니기 때문이다.

끝으로 증여, 유산 및 상속에 대해 말하자면, 사회는 가족의 애정과 사회 고유의 권리 두 가지에 동시에 이끌린 나머지 사랑과 호의가 정의를 침범하도록 허용해서는 안 된다. 오랫동안 아버지의 일에 협력해 온 이들이 아버지의 일을 물려받기에 그 누구보다 더 적합하다고 믿는다는 것은 흡족한 일이다. 마찬가지로 한창 작업에 임하다가 갑작스럽게 죽음을 맞게 된 한 시민이 그의 천직에 대한 자연적 취향과 애정으로 미루어 볼 때 후계자를 정하기에 가장 적합하며 그 후계자에게 온갖 유산들 중 선택하도록 할 수 있다고 믿는다는 것 역시 흡족한 일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사회는 단 한사람에게만 이익이 돌아가는 어떤 자본과 산업의 집중도, 어떤 노동의 독점도 어떤 침탈도 허용해서는 안 된다.[24]

⑵ 형평과 정의, 사회는 같은 부류의 개체들과의 관계에서만 살아있는 생명체로 존재할 수 있다. 이것들은 한 종에서 다른 종에게로, 예컨대 이리에게서 염소에게로, 염소에게서 인간에게로, 인간에게서 신에게로, 하물며 신에게서 인간에게로는 발생하지 않는다. 정의, 형평, 사랑 등을 최고 존재에게 부여하는 것은 일종의 순수한 신인동형론이다. 그리고 정의, 인자, 긍휼 등 우리가 신에게 부여하는 여타의 형용어들은 우리의 묵도서에서 삭제되어야 한다. 신은 신과의 관계에서만 정의롭고, 공정하며 선하다고 간주될 수 있다. 그런데 신은 고독한 유일자이다. 따라서 신은 선량, 형평, 정의와 같은 사회적 감정들을 체험할 수 없다. 양치는 목동은 자신의 양과 개에 대해서 정의롭다고 말할 수 있는가? 아니다. 그러나 만일 그가 생후 6개월 된 새끼 양에게서 2살 난 숫양에게서 만큼이나 많은 양털을 깎으려 한다면, 그가 강아지에게 어미 개에게 맡겨져야 할 양들을 돌보는 일을 요구한다면, 사람들은 그가 부당하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 미치광이라고 말하리라. 인간과 동물 사이에 애정은 있을 수 있으나 사회는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인간은 동물을 〈물건〉으로서, 구태여 말하자면 〈감정이 있는 물건〉으로서 사랑하나 〈인격〉으로서 사랑하지는 않는다. 따라서 철학이 미신이 우리에게 가져다준 열정들을 신의 관념에서 제거해 버렸다면, 그 다음에는 우리의 자유분방한 신앙심이 신에게 가져다 준 이러한 덕성마저 제거해야 할 것이다.[25]

만일 신이 이 땅에 내려와 우리와 더불어 살게 되더라도, 신이 우리와 함께 어울리지 않는 한, 우리는 신을 사랑할 수 없으리라. 신이 무엇이든 부를 생산하지 않는 한, 신에게 아무것도 줄 수 없으리라. 신이 우리의 잘못을 입증하지 않는 한, 아무도 신의 말에 귀를 기울일 수 없으리라. 신이 자신의 위력을 우리에게 내보이지 않는 한, 아무도 신을 찬미할 수 없으리라. 우리의 존재와 관련된 모든 감정적, 경제적, 지적 법칙들은 우리가 신을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대하라고, 즉 이성과 정의와 형평에 따라 대하라고 명하고 있다. 여기서 내가 얻은 결론은 만일 신이 인간과 직접적인 교섭에 들어가려면 그가 곧 인간이 되어야만 한다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만일 왕들의 신이 이미지이자 신의 의지의 집행자라 할지라도, 왕들이 우리에게서 사랑과 부와 복종과 영예를 얻으려면 그들 스스로 우리처럼 노동하고, 우리와 교제를 나누며, 자신들의 지출에 맞추어 생산하고, 종복과 함께 의논하며, 몸소 큰일들을 해내야만 할 것이다. 하물며, 어떤 이들이 주장하는 것처럼 만일 국왕들이 국가의 공무원이라면, 그들에게 돌아가야 하는 사랑은 그들의 개인적 다정함 여부에 따라 측정될 것이고, 그들에게 복종해야 할 의무는 그들이 내리는 명령의 권위에 따라 측정될 것이며, 왕실의 경비는 시민의 수로 나눈 사회적 생산의 총액에 의해 측정되어야 할 것이다.

이렇게, 법률학, 경제학, 심리학 등 모든 것이 우리에게 평등의 법칙을 부여한다. 권리와 의무, 재능과 노동에 따른 보상, 사랑과 열정의 약동, 이 모든 것이 굳건한 척도에 의해 미리 정해지며 수와 균형에 의존한다. 조건들의 평등, 이것이야말로 사회들의 원리이고, 보편적 연대성, 이것이야말로 이 원리의 재가이다.

조건들의 평등은 우리의 정념과 우리의 무지 탓에 한 번도 실현된 적이 없다. 그런데 이 법칙에 대한 우리의 반발은 조건들의 평등을 더욱더 필요한 것으로 만든다. 이것은 역사에 의해 늘 입증된 바이며, 일련의 사건들에 의해 우리에게 알려진 바이다. 사회는 등식等式에서 등식으로 진전한다. 제국들에서 발생하는 혁명은 경제학자들의 눈에는 때로는 서로 공제되는 대수적인 양들의 약분으로만, 때로는 시간의 불가피한 작용에 의해 나타나는 어떤 미지수의 등장으로만 보일 뿐이다. 수량은 역사의 섭리이다. 물론 인류의 진보에는 다른 요인들이 있다. 인민을 들고일어나게 만드는 수많은 내밀한 원인들 중에서, 소유에 맞선 프롤레타리아들의 주기적인 소요보다 더 강력하고, 더 규정적이며, 더 알아차리기 쉬운 것은 없다. 인구가 증대할 때면 어김없이 배제와 침해의 원리에 따라 몸을 움직이는 이 소유는 모든 혁명들의 발생 원리이자 결정 요인이었다. 종교전쟁과 정복전쟁들은, 인종의 말살에까지 이르지 않았을 경우에는, 그저 우연한 교란으로 그쳤으며 즉시 인구의 산술적인 증대로 보상되었다. 이것이 바로 소유가 갖는 축적의 힘이며, 이것이 바로 사회의 퇴폐와 사멸의 법칙이다.

중세의 피렌체를 보라. 겔프파(Guelfes, 교황파-옮긴이)와 기벨린파(Gibelins, 황제파-옮긴이)라는 이름으로 잘 알려진, 그러나 실은 무장한 채 서로 싸우는 하층민과 소유자 귀족 계급에 지나지 않는, 두 파벌 사이의 다툼으로 늘 찢겨진 이 상인과 중개업자의 공화국을 보라. 피렌체는 은행가의 지배를 받다가 결국 빚에 쪼들려 몰락하지 않았는가.[26]

고대의 로마를 보라. 로마는 건국 이후 고리대에 시달리다가, 그래도 전 세계가 그 비참한 프롤레타리아들에게 〈노동〉을 제공해주는 동안 잠시 번영했으나, 대외적으로 평온한 시기에는 내란으로 피투성이가 되고, 결국 인민의 왕성한 정력과 더불어 마지막 남은 도덕감각까지 잃게 되자 쓰러져 죽지 않았는가. 카르타고, 내부 경쟁에 의해 끊임없이 분열된 상업과 금전의 도시 카르타고를 보라. 티르, 시돈, 예루살렘, 니네베, 바빌론, 무역 경쟁으로 인해, 아니 오늘날의 표현을 빌리자면 판로의 부족으로 인해 차례로 몰락한 이들 도시를 보라. 잘 알려진 이 많은 사례들은 만일 인민이, 만일 프랑스가 그 힘찬 함성을 내지르면서 소유제도의 폐지를 선언하지 않는다면 어떤 운명이 현대 국가들을 기다리고 있을지를 충분히 보여주지 않는가?

여기서 나의 작업을 끝마쳐야 하리라. 나는 가난한 자의 권리를 입증했으며, 부자의 횡령을 보여주었다. 이제 나는 정의를 요구한다. 물론 판결의 집행은 나의 몫이 아니다. 만일 부당한 향유를 몇 년 더 늘릴 요량으로 어떤 이가, 평등을 입증하는 것만으로는 불충분하니 평등을 조직해야만 한다고, 그것도 아무런 마찰을 일으키지 않고 평등을 확립해야 한다고 주장한다면, 나는 정당하게 다음과 같이 대답할 것이다. 즉, 피억압자에 대한 배려는 장관들의 곤혹스러움에 우선한다고. 그리고 조건들의 평등은 원초적인 법칙이며 공공 경제와 입법도 여기에 의존한다고. 노동의 권리, 그리고 재산의 균등한 분배에 대한 권리는 권력의 근심걱정 앞에서도 양보할 수 없는 것이다. 법전의 모순들을 조정한다거나 하물며 정부의 실책에 괴로워하는 것은 결코 프롤레타리아의 몫이 아니다. 이와는 반대로, 정치적 평등의 원리에 바탕을 두고 스스로를 개혁하는 것은 바로 시민적 · 행정적 권력체의 몫이다. 공공연한 악행은 비난받아야 하며 또 근절되어야만 한다. 입법자는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 자신이 잘 모른다는 것을 명백한 불의에 대한 핑계로 삼아서는 안 된다. 바로잡는 일은 미루어질 수 없다. 정의, 사법, 권리의 인정, 프롤레타리아의 복권, 이 모든 것이 이루어지고 나면, 재판관이여, 집정관이여, 당신들은 경찰의 동정에 신경을 쓰고, 나아가 공화국의 통치에 미리 대비하는 것이 좋으리라.

또한 나는 나의 독자들 중 어느 누구라도 내가 파괴할 줄은 알지만 건설할 줄은 모른다고 나를 비난하리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평등의 원리를 입증함으로써 나는 사회라는 건물의 초석을 놓았다. 그리고 나는 그 이상의 일을 해냈다. 나는 정치와 입법의 문제를 해결하려면 따라야 할 절차의 실례를 보여주었다. 과학 자체에 대해서 말하자면, 나는 그 원리 이상의 것은 알지 못하고, 오늘날 어느 누구라도 자신이 남다른 통찰력을 지니고 있다고 뽐낼만한 처지가 아니라고 생각한다. 많은 이들이 〈내게로 오라. 그러면 당신에게 진실을 가르쳐 주겠노라〉고 외친다. 이런 사람들은 자신의 사적인 의견, 자신의 열정적인 확신을 마치 진실인 양 착각한다. 이들은 진실이라는 것에 대해 대개 잘못 생각하고 있다. 사회에 대한 과학은 모든 다른 인간과 관련된 과학들과 마찬가지로 영원히 미완의 상태이다. 사회가 포괄하는 문제들의 깊이와 다양성은 거의 무한에 가깝다. 우리는 이 과학의 ABC에 겨우 도달해 있다. 우리가 아직은 체계들systèm의 단계를 넘어서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 그리고 우리가 줄곧 사실들의 문제를 토론에서의 다수결로 대체한다는 사실이 그 증거이다. 어떤 문법 학회는 언어학의 문제를 다수결 투표로 해결했다. 우리 의회들에서의 토의도, 비록 그 결과가 그리 치명적이지는 않더라도, 여전히 우스꽝스럽기 짝이 없다. 우리가 사는 이 시대에 진실한 저술가의 과업은 사기꾼과 거짓말쟁이의 입에 재갈을 물리고, 일반인들로 하여금 상징이나 강령이 아니라 논증에만 만족하도록 교육하는 일이다. 과학에 대해 논의하기에 앞서서 우선 과학의 대상을 결정하고 그 방법과 원리를 발견해야만 한다. 과학을 짓누르는 갖가지 편견들을 물리쳐야만 한다. 바로 이것이 19세기의 사명이다.

나로서는 그렇게 하기로 다짐해 왔다. 앞으로도 나는 나의 파괴 작업에 충실할 것이며, 폐허와 잔해더미 속에서 끊임없이 진리를 찾아 나설 것이다. 나는 일을 어중간하게 끝내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 그리고 내가 만일 언약의 궤에 손을 댄다면 내가 그 뚜껑을 벗겨내는 데에만 만족하지 않으리라고 믿어도 좋다. 불의라는 성역을 둘러싼 신비를 벗겨내야 하고 낡은 언약의 석판을 부숴버려야 하며, 모든 낡은 숭배 대상들을 짐승의 먹이로 던져버려야 한다. 정치학 전체의 요약판이자 20여 입법 회기의 상징인 헌장憲章이 우리에게 주어져 있다. 한 통치자의 오만이자 고대의 지혜의 축소판이라 할 법전이 쓰였다. 아, 그런데! 이 헌장, 이 법전 중에서 어떤 한 조항도 남지 않으리라. 박학한 학자님들은 지금부터라도 방침을 정해서 재건을 준비해야 하리라.

그러나 오류를 파괴하는 일은 응당 그 반대 진리를 전제하는 것인 만큼, 나는 정치학의 첫 번째 문제, 오늘날 모든 지성을 사로잡고 있는 다음의 문제를 해결하지 않고서는 이 글을 끝맺을 수가 없다. 〈소유가 폐지되면, 사회의 형태는 어떻게 되는가? 그것은 공유제communauté인가?〉

제2부

제1절 우리의 오류의 원인들에 대하여 : 소유의 기원

인간 사회의 참된 형태를 확정하려면 다음과 같은 문제를 미리 해결해야만 한다. 즉, 소유는 우리의 자연적 조건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어떻게 확립되었는가? 동물들에게서는 그리도 확고한 사회적 본능이 왜 인간에게서는 찾아볼 수 없는가? 사회를 위해 태어난 인간이 왜 아직도 한동아리를 이루지 못하는가?

나는 인간이 〈복잡한 방식으로〉 결합한다고 말했다. 이것이 물론 적합한 표현은 아닐지라도, 이 표현으로 내가 특징짓고자 하는 사실 자체, 즉 재능과 능력들이 복잡하게 뒤엉켜 있다는 사실 자체는 여전히 진실이다. 그러니 이 재능과 능력들이 그 한없는 다양함으로 인해 의지의 무한한 다양함을 낳는다는 사실, 이로 인해 성격, 경향, 굳이 말하자면 〈자아〉의 형태가 불가피하게 달라진다는 사실을 보지 못하는 자가 있을까? 따라서 지능의 영역에서와 마찬가지로 자유의 영역에서도 개인들만큼이나 많은 유형들, 머릿수만큼이나 많은 독창성들이 존재하며, 그것들의 기질, 성향이 가지각색의 생각들로 채색되어서 반드시 서로 일치할 수만은 없다는 사실을 보지 못하는 자가 있을까? 인간은 그 천성과 본능에 의해 사회에 속하도록 미리 운명 지어져 있다. 그러나 인간의 개성은 늘 변화무쌍하고 다양다기해서 사회와 대립한다.

동물들의 사회에서 모든 개체는 어김없이 똑같은 일들을 해낸다. 동일한 천성이 그들을 이끌고, 동일한 의지가 그들에게 활력을 불어넣는다. 짐승들의 사회는, 그 모양이 둥글든 꺽쇠형이든, 사각형이든 삼각형이든 늘 완전히 똑같은 원자들의 집합체인 것이다. 그들의 개성은 일률적이며, 따라서 단 하나의 자아가 그들 모두를 지배한다고 말할 수 있다. 홀로든 사회를 이루든 동물들이 수행하는 작업은 그들의 특성을 낱낱이 드러내 주고 있다. 꿀벌의 무리가 성질도 같고 가치도 대등한 개개 꿀벌들로 이루어져 있듯이, 꿀벌집은 모양도 크기도 완전히 똑같은 촘촘히 반복되는 구멍들로 이루어져 있다.

그러나 인간의 지능은 사회적 운명과 개인적 필요를 동시에 계산에 넣고 있기 때문에 전혀 다른 모양새를 띠고 있으며, 이로 인해 아주 당연한 결과이지만 인간의 의지 역시 아주 각양각색이다. 꿀벌의 의지는 항구적이고 단일한 모양새를 띤다. 그것은 꿀벌을 이끄는 본능이 고정불변하며, 이 유일한 본능이 동물의 삶, 행복 및 존재 전체를 이루기 때문이다. 그러나 인간의 재능은 다양하고, 이성은 불확실하며, 따라서 의지도 각양각색이고 막연하다. 인간은 사회를 추구한다. 그러나 인간은 규제와 단조로움을 피한다. 인간은 모방을 잘 하기는 하지만 자기만의 생각을 중시하고 자기의 작업에 열중한다.

만일 인간이 꿀벌과 마찬가지로 이미 정해진 재능과 특정 사물에 대한 완벽한 이해력을, 한마디로 말해서 자신이 수행해야 할 기능들에 대한 선천적인 지식을 가지고 태어나지만, 성찰하고 추론하는 능력은 가지고 있지 못하다면, 사회는 저절로 조직될 것이다. 이 사람은 밭을 갈고, 저 사람은 집을 짓고, 어떤 이는 쇠붙이를 벼리고, 또 어떤 이는 옷을 만들고, 누구는 물건을 가게에 쟁이고, 또 누구는 물건의 분배를 떠맡을 것이다. 자기가 노동해야 하는 까닭을 따지지도 않고, 자기가 맡은 몫보다 일을 더했느냐 덜 했느냐를 염두에 두지도 않으면서, 개개인은 명령에 따르고, 생산물을 가져다주고, 임금을 받고, 시간이 나면 쉴 것이다. 인간은 이 모든 일을 아무런 타산 없이, 누구도 질투하지 않고, 감독관에게 어떤 불평도 늘어놓지 않고 행할 것이며, 감독관은 어떤 부당행위도 저지르지 않을 것이다. 국왕들은 통치하나 군림하지는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군림한다는 것은 보나파르트Bonaparte가 말했듯이 사육당하는 〈소유자〉가 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각자가 모두 맡은 바 위치에 있으므로 국왕들은 어떤 명령을 내릴 필요도 없을 것이며, 권위자나 조언자의 역할보다는 차라리 결집의 중심지 역할을 할 것이다. 여기에는 톱니바퀴처럼 맞물려 돌아가는 공동체는 존재할지 모르나, 성찰되고 자유로이 수용되는 사회는 존재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인간은 관찰과 경험에 의해서만 솜씨를 발휘할 수 있다. 인간은 성찰한다. 그도 그럴 것이 관찰하고 경험한다는 것은 곧 성찰하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또한 인간은 추론한다. 그도 그럴 것이 인간은 추론하지 않고는 살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인간은 성찰함으로써 스스로에게 환상을 만들고, 추론함으로써 잘못을 범한다. 인간은 자기가 옳다고 믿고, 옹고집이 되며, 자기 의견을 맹신하고, 자기를 존중하며 남을 멸시한다. 이때부터 인간은 스스로 고립된다. 인간은 자신의 의지와 이성을 부정해야만, 달리 말하자면 자기 자신을 부정해야만 다수에게 복종할 수 있는데, 이는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고립, 이 합리적 이기심, 요컨대 이 의견의 개인주의는 경험의 관찰에 의해 진리가 입증되지 않는 한 오래도록 지속될 것이다.

다음의 마지막 비교는 이 모든 사실을 한층 명백하게 보여줄 것이다.

만일 꿀벌 무리의 맹목적이나 합일적이고 조화된 본능에 돌연 성찰과 추론이 첨가된다면, 이 작은 사회는 더 이상 지속되지 못할 것이다. 우선, 꿀벌들은 틀림없이 무엇인가 새로운 작업 방식을, 예컨대 벌집 구멍들을 원형으로 또는 사각형으로 바꾸려는 시도를 할 것이다. 온갖 방식과 구상이 다 동원될 것이다. 마침내 오랜 경험의 결과 기하학적 지식의 도움을 얻어 육각형 모형이 가장 좋다고 입증될 때까지 말이다. 그 다음, 반란이 일어날 것이다. 수벌에게는 자기가 먹을 것은 자기가 마련하라고 요구할 것이며, 여왕벌에게는 당신도 일하라고 요구할 것이다. 일벌들 사이에는 질투심이 생기고, 불화가 폭발하며, 각자는 자기만을 위해 생산하게 되고, 마침내 벌집은 버려지고 꿀벌들은 멸종할 것이다. 악이 마치 이 꽃 밑에 숨어있는 뱁처럼 꿀벌 공화국에 스며들 것이다. 그것도 꿀벌 공화국의 영예가 되었어야 할 것들, 즉 성찰과 추론에 의해서 말이다.

그러므로 도덕적 악, 즉 우리를 사로잡고 있는 문제의 경우 사회의 무질서는 당연히 우리의 성찰하는 능력에 의해 설명된다. 빈곤, 범죄, 폭동, 전쟁 등은 조건들의 불평등을 그 원인으로 하며, 조건들의 불평등은 소유에서 유래한다. 소유는 이기심에서 나오고, 이기심은 개인의 의식에서 생기며, 개인의 의식은 이성의 전제專制에서 직접 유래한다. 인간은 범죄나 야만에서 출발했던 것이 아니라, 어리숙함과 무지와 무경험에서 출발했다. 인간이 부여받은 본능들은 절대적이기는 하나 추론이라는 조건 아래 놓여있다. 따라서 인간은 처음에는 조금밖에 사고하지 못하며 잘못 추론하곤 한다. 다음에 인간은 이 잘못된 추론의 덕에 조금씩 자기 생각을 고치고 자기 이성을 완성해 나간다. 그것은 하찮은 일에 자신의 모든 것을 바치고 난 후 곧 후회하며 눈물짓는 야만인의 모습이다. 그것은 자신의 장자상속권을 붉은 떡과 팥죽과 바꾸고 나서 곧 거래를 취소하려 하는 에서Esau의 모습이다(구약 『창세기』 25장 21~34절-옮긴이). 그것은, 자신도 고용주도 평등이 없다면 임금은 늘 불충분할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하기 때문에 불완전 고용 상태로 일하면서 끊임없이 임금인상을 요구하는 문명화된 사회의 노동자의 모습이다. 나아가 그것은 자기 유산을 지키다 죽은 나봇Naboth의 모습이고(구약 『열왕기』 상편 21장-옮긴이), 노예가 되느니 할복자살을 택한 카토(Marcus Cato, 기원전 93~46, 로마의 정치인으로 카이사르의 전제에 맞서 싸우다 자살했다-옮긴이)의 모습이며, 사상의 자유를 지키기 위해 독배를 마신 소크라테스의 모습이다. 그것은 자유를 요구한 1789년의 제3신분의 모습이며, 곧 생산수단과 임금의 평등을 요구하는 인민의 모습일 것이다.

인간은 사회적으로 태어난다. 달리 말하면, 인간은 자신의 모든 관계에서 평등과 정의를 갈구하나 그와 동시에 독립성과 칭송을 원한다. 이 여러 가지 필요들을 한꺼번에 만족시키기 어렵다는 사실이 바로 의지의 전제專制와 그에 따르는 횡령의 첫 번째 원인이다. 다른 한편으로, 인간은 자신의 생산물을 끊임없이 교환해야할 필요가 있다. 그러나 여러 종류의 가치들을 균형 있게 평가할 능력이 없기 때문에 인간은 그저 어림으로만, 즉 자신의 열정이나 변덕에 따라 판단하는 것으로 만족한다. 그리하여 인간은 부정직한 거래에 몸을 내맡기게 되고, 그 결과 언제나 풍요와 빈곤을 낳는다. 이렇게 인류의 가장 큰 죄악들은 인류가 자신의 사회성을 잘못 행사한 데서, 인류가 그토록 자랑삼던 정의를 그토록 개탄할 정도로 무지하게 행사한 데서 나오는 것이다. 정의의 실천은 하나의 과학이며, 그것의 발견과 전파는 우리의 권리와 의무에 대해 우리를 계도해 줌으로써 조만간 사회적 무질서를 종식시킬 것이다.

우리의 본능에 대한 이 점진적이고 고통스러운 교육, 우리의 자생적인 지각이 서서히 눈치 채지 못하는 사이에 성찰된 인식으로 변해 가는 과정은 동물들에게서는 절대 찾아볼 수 없다. 동물들의 본능은 고정불변이며, 또한 계도의 여지가 없기 때문이다.

동물들에게서 본능과 지능을 분명하게 구별해 낸 프레데릭 퀴비에의 말을 들어보자. 〈본능은 감수성, 피자극성, 지능과 마찬가지로 원초적이고 고유한 힘이다. 걸려들었던 덫을 알고 피하는 여우와 늑대, 인간의 말 몇 마디를 알아듣고 인간을 따르는 개와 말은 ‘지능’에 의해 그렇게 하는 것이다. 남은 음식물을 숨겨놓는 개, 벌집을 만드는 꿀벌, 둥지를 짓는 새는 ‘본능’에 의해 그렇게 할 뿐이다. 인간에게도 본능이 존재한다. 젖먹이가 태어나자마자 젖을 빠는 것은 어떤 특유의 본능에 의해서이다. 그러나 인간에게서 거의 모든 것은 지능에 의해 이루어지며, 지능이 본능을 보충한다. 동물은 이와 정반대이다. 동물의 경우, 본능이 지능의 보충물로 주어지는 것이다.〉(플루랑Flourens, 『프레데릭 퀴비에의 관찰에 대한 분석적 요약』)

〈우리는, 동물의 ‘감각중추’에, 일상적이고 우연적인 감각들이 으레 명령하는 대로, 행동을 촉발하는 생득적이고 항구적인 이미지나 감각들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인정할 때에만 본능에 대한 명확한 관념을 얻을 수 있다. 동물의 행동을 유발하는 것은 언제나 일종의 꿈 또는 환영이다. 본능과 관련된 모든 것에서 우리는 동물들을 일종의 최면술에 걸린 존재로 취급할 수 있다.〉(프레데릭 퀴비에, 『동물계 입문』)

이렇게 지능과 본능이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 인간에게나 동물에게나 공통된 것이라면, 인간을 구별 짓는 것은 무엇인가? 퀴비에에 따르면, 그것은 〈성찰〉, 즉 〈우리 자신을 되돌아봄으로써 우리 자신의 변화를 지적으로 고찰하는 능력〉이다.

이러한 말은 명쾌하지 않으며 설명을 요구한다.

동물들에게 지능이 있다고 인정한다면, 마찬가지로 어느 정도든 성찰력이 있다고 인정해야만 한다. 왜냐하면 전자는 후자 없이 존재하지 못하며, 퀴비에 자신도 여러 예를 들어 그것을 증명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박학한 관찰자가, 우리를 동물과 구별해 주는 성찰이라는 것을 〈우리 자신의 변화를 고찰하는 능력〉으로 정의하고 있음을 주목하라. 내가 이 자연주의 철학자의 엄격한 정식을 가능한 최선을 다해 보충함으로써 이해시키고자 하는 점이 바로 이것이다.

동물이 획득한 지능은 동물이 본능적으로 수행하는 작업들을 결코 바꾸어 놓지 못한다. 지능은 이 작업들을 방해할 수 있는 어떤 예기치 못한 사건들에 대처하기 위해서 주어진 것에 지나지 않는다. 이와는 반대로, 인간에게서 본능적 행동은 끊임없이 성찰된 행동으로 변한다. 이리하여 인간은 본능적으로 사회적이기도 하지만 또한 매일같이 추론과 선택에 의해 사회적이 된다. 태초에 인간은 본능에 의해 자기의 말을 창조했다.[27] 인간은 영감에 의해 시인이 되었다. 오늘날 인간은 문법을 하나의 과학으로, 시를 하나의 예술로 만든다. 인간은 자발적인, 굳이 말하자면 본능적인 어떤 관념에 의해 신의 존재를 믿고 내세를 믿는다. 그리고 인간은 이 관념을 차례로 기괴한 것, 우스꽝스러운 것, 우아한 것, 위로를 주는 것, 끔찍스러운 것 등 여러 형태로 표현해 왔다. 19세기의 경박한 무신앙impiété이 조소를 퍼붓곤 했던 이 다양한 숭배 형태들은 종교적 감정이 언명한 언어들이다. 인간은 언젠가 자기의 사념이 갈구하는 이 신이 과연 무엇인가를, 자기의 영혼이 갈망하는 이 내세에 대해 그가 진정 원하는 것이 무엇인가를 스스로 납득하게 되리라.

인간은 자신의 본능에 의해 이룩한 이 모든 것을 소중히 여기지 않으며 경멸한다. 혹시 소중히 여긴다면, 그것은 자신이 이룩한 것으로서가 아니라 자연이 이룩한 것으로이다. 여기서 태초의 발견자들의 이름을 덮고 있는 망각이 생겨난다. 여기서 종교에 대한 우리들의 무관심과 종교적 의례에 대한 경멸이 생겨난다. 인간은 성찰과 추론의 산물만을 높이 평가한다. 본능에 의해 만들어진 더없이 멋진 작품들이 인간의 눈에는 우연한 〈습득물〉로만 보일 뿐이다. 인간은 지능에 의해 만들어진 작품들에 〈발견물〉(아니 창조물이라고 표현해도 되리라)이라고 이름 붙인다. 본능은 정열과 열광을 낳는다. 그러나 지능은 범죄와 덕망을 낳는다.

자신의 지능을 발달시키기 위해, 인간은 자기 자신의 관찰만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의 관찰도 이용한다. 인간은 경험들을 기록하고 연대기를 보존한다. 따라서 개인에게나 종족에게나 지능이 발전한다. 동물들 사이에는 어떤 지식의 전수도 이루어지지 않는다. 각 개체의 기억은 그 개체와 더불어 사라진다.

따라서 만일 성찰이라는 말로 〈우리의 본능을 지능으로 변화시키고자 하는 항구적인 성향〉을 뜻하지 않는 한, 우리를 동물과 굽려시켜 주는 것이 바로 성찰이라고 말하는 것은 충분하지 않다. 인간이 본능에 복종하는 한, 인간은 자기가 한 일을 의식하지 못한다. 만일 동물과 마찬가지로 인간이 본능만을 추동력으로 삼는다면, 인간에게는 어떤 오류도, 어떤 악도, 어떤 무질서도 없을 것이다. 그러나 조물주는 우리에게 성찰의 힘을 부여했는데, 이는 우리의 본능이 지능으로 변하게 하기 위함이다. 그런데 이 성찰과 그 결과로 생기는 인식은 몇 가지 단계가 있기 때문에, 애초에는 우리의 본능이 성찰에 의해 인도되기보다는 오히려 방해받는 일이 생길 수 있다. 그 결과, 우리의 사고하는 능력이 우리를 우리의 천성이나 우리의 목적과는 어긋나게 행동하도록 만든다. 즉, 우리는 잘못 생각하기도 하고, 악을 저지르기도 하며 또 그것 때문에 괴로워하기도 한다. 우리를 선으로 인도해 주는 본능과 우리를 악에 빠뜨리는 성찰, 이 두 가지가 선과 악에 관한 지식으로 대체되어, 그로 인해 우리가 확신을 가지고 이것은 취하고 저것은 피할 수 있게 되는 그날까지 말이다.

이렇게, 악 즉 오류와 그 결과들은 본능과 성찰이라는 두 적대적인 능력이 뒤섞여 태어난 첫 번째 아이이다. 선 즉 진리는 그 두 번째의 불가피한 결실임에 틀림이 없다. 비유를 계속하자면, 악은 두 개의 상반되는 힘 사이의 근친상간의 소산이다. 선은 그 두 힘의 신성하고 신비스러운 결합에 의해 조만간 태어날 적자嫡子이리라.

추론 능력의 소산인 소유는 대조적인 것들을 통해 더욱 견고해진다. 그런데 성찰과 추론이 자발성보다 나중에 나타나고, 관찰이 감각보다 나중에 나타나며, 경험이 본능보다 나중에 나타나듯이, 소유는 공유제communauté보다 나중에 나타난다. 공유제라는 단순한 형태의 결사는 사교성의 필연적 목적이나 본원적 약동이며, 사교성이 모습을 드러내고 자리를 잡는 자발적인 운동이다. 그것은 인간 문명의 첫 번째 단계이다. 법학자들이 〈소극적 공유제〉라 부르는 이러한 사회 상태 안에서 인간은 인간에게 접근하고, 서로 대지의 결실과 동물의 젖과 고기를 나눈다. 인간이 아무것도 생산하지 않는 한 소극적으로 머물 수밖에 없는 이 공유제는 노동과 산업의 발전에 따라 점점 더 적극적이고 유기적인 것으로 되어간다. 그러나 바로 이때 사상의 자율성에 의해, 그리고 최선과 최악에 대한 가공할 추론 능력에 의해, 인간은 만일 평등이 사회의 필요조건이라면, 공유제는 예종의 첫 번째 유형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이 모든 것을 헤겔의 정식에 의해 설명하자면, 나는 다음과 같이 말할 것이다.

사교성의 첫 번째 양태이자 첫 번째 결정체인 공유제는 사회 발전의 첫 번째 항, 즉 테제(Thesis, 正)이다. 공동체의 모순된 표현인 소유는 두 번째 항, 즉 안티테제(Antithesis, 反)를 이룬다. 그러면 세 번째 항, 즉 신테제(Synthesis, 合)를 찾는 일이 남는 바, 우리는 이를 해결할 것이다. 그런데 이 신테제는 테제와 안티테제의 수정에 따른 필연적 결과이다. 따라서 테제와 안티테제의 특성들을 최종적으로 검토해서 사회성에 적대적인 요소들을 거기서 제거하는 것이 필요하다. 그리고 남은 그 두 요소를 결합하면 인간적 결합의 참된 형태를 얻을 수 있으리라.

제2절 공유제와 소유의 특징들

Ⅰ. 그 누구든 소유나 공유제 없이는 사회가 가능하지 않다고 생각했다는 사실을 숨겨서는 안 될 것이다. 한없이 개탄할 이 오류로 인해 소유는 생명력을 얻어 왔다. 공유제의 불합리한 점들이 너무나 명백하기 때문에 그 비판자들은 사람들로 하여금 공유제를 멀리 하도록 하는 데 그리 많은 웅변을 필요로 하지 않았다. 공유제가 가져온 치유할 수 없는 부당성들, 그 동조자에게나 반대자에게 가한 폭력, 인간의 의지에 부과한 철의 멍에, 인간의 의식에 가한 도덕적 고문, 사회에 불어넣은 무기력증, 한마디로 말하자면, 자유롭고 활동적이며 이성적이고 속박에서 벗어난 인간의 개성을 얽어맨 공유제의 그 맹목적이고 어리석은 획일성이 일반인의 양식을 일깨우고 마침내 공유제를 가차 없이 단죄하게 만든 것이다.

공유제를 옹호할 양으로 흔히 거론되는 인물들과 실례들은 오히려 공유제와 어긋나 보인다. 예컨대 플라톤의 공산주의 공화국은 노예제를 전제로 하고 있다. 루쿠르고스(Lukourgos, 기원전 9세기 스파르타의 전설적인 입법자-옮긴이)의 공화국은, 주인을 위해서 모든 생산을 짊어지고 오로지 체력 단련과 전쟁에만 전념하는 노예들에 의해 움직였다. 장 자크 루소 역시 공유제와 평등을 혼동하여 노예제가 없으면 조건들의 평등도 가능하지 않으리라고 말했다. 원시 교회의 공유제들은 그 첫 세기의 끝까지도 버티지 못했으며 얼마 지나지 않아 수도원 안으로 숨어들었다. 파라과이에서 예수회 신부들이 시도한 공유제에서 흑인들의 처지는 방문객의 눈에 노예들만큼이나 비참해 보였다. 신참자들이 도망치는 것을 막기 위해서 선량한 신부님들이 도랑을 파고 담장을 쌓아야만 했던 것이 사실이다. 명료하게 정식화된 어떤 신조에 의해서라기보다는 소유에 대한 불타는 혐오감에 의해 이끌린 바뵈프주의자들(프랑스 대혁명 당시 〈평등자의 음모〉를 꾸민 그라쿠스 바뵈프G. Babeuf의 추종자들-옮긴이)은 자신들의 원칙을 지나치게 강조하다가 몰락했다. 공유제와 불평등을 하나로 합쳐버린 생시몽주의자들은 가장행렬처럼 지나가버렸다. 오늘날 사회가 봉착한 가장 큰 위험은 우리가 또다시 이 암초에 부딪쳐 난파할 수도 있다는 것이다.

진기한 노릇이다! 계획적인 공유제, 즉 소유에 대한 심사숙고한 부정否定이 소유라는 편견의 직접적인 영향 아래서 구상되고 있는 것이다. 공산주의자들의 모든 이론들의 근저에서 다시 발견되는 것이 바로 소유이다.

한 공동체의 구성원들은 물론 자기 것은 전혀 갖고 있지 않다. 공동체 자체가 소유자, 그것도 재산만이 아니라 인격과 의지의 소유자인 것이다. 자연이 인간에게 부과한 하나의 조건에 지나지 않아야 할 노동이 공유제 아래서 인간에 대한 격률, 바로 그렇기 때문에 혐오스러운 격률이 되는 것, 성찰에 따른 의지와는 양립할 수 없는 수동적 복종이 엄격하게 요구되는 것, 겉으로는 명철해 보이지만 결함투성이일 수밖에 없는 규칙들을 지키는 데서 어떤 불평도 용납되지 않는 것, 인간의 생명, 재능, 모든 능력들이 다 국가의 소유물로 되고 국가가 그것을 일반 이익에 맞도록 원하는 대로 사용할 권리를 갖는 것, 개별 단체들은 그 단체들의 능력이나 특성에 대한 호 · 불호에 관계없이 철저하게 금지되는 것(개별 단체들을 허용한다는 것은 대 공유제 안에 소 공유제들을, 따라서 소유들을 도입하는 것이니 말이다), 의무에서가 아니라 선의에서, 규정에 의해서가 아니라 충고에 의해서이기는 하지만, 강자가 약자의 일을 떠맡아야만 하고, 부당하게 여겨지더라도 근면한 자가 게으른 자의 일을 떠맡아야만 하며, 불합리해 보일지라도 민활한 자가 우직한 자의 일을 떠맡아야만 하는 것, 인간이 자신의 〈자아〉, 자발성, 천분, 애정 등을 집어던지고 공동생활의 위업과 완고함 앞에서 미천하게 자신을 낮추어야만 하는 것―지금 열거한 모든 현상은 소유의 준엄성이라는 이 원리에 의한 것이다.

공유제는 불평등이다. 그러나 그것은 소유가 불평등이라는 것과는 정반대의 의미에서 그러하다. 소유는 약자에 대한 강자의 착취이다. 그러나 공유제는 강자에 대한 약자의 착취이다. 소유제의 경우, 조건들의 불평등은 물리적인 또는 지적인 힘, 사건들, 우연 또는 〈행운〉의 힘, 기존 소유의 힘 등 어떤 이름을 지니고 있든 간에 힘의 결과이다. 공유제의 경우, 불평등은 재능과 노동의 범용성을 소유제에서의 힘만큼 널리 존중하는 데서 나온다. 이 유해한 등식은 양식 있는 자들을 분노케 하며 공적 있는 자들의 불평을 산다. 왜냐하면 약자를 돕는 것이 강자의 의무일 수는 있다 할지라도, 강자는 자신의 아량으로 그리하려 할 뿐이며 자신과 필적되는 것조차 달가워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들을 노동과 임금의 조건에서 평등케 하라. 그러나 공동 과업에서의 불성실에 대한 서로 간의 의심으로 그들에게 시기심을 불러일으키지 않도록 하라.

공유제는 억압과 예종이다. 인간은 기꺼이 의무의 계율을 준수하고자 하며, 자기 조국에 봉사하고 자기 친구들을 따르고자 한다. 그러나 인간은 자기가 좋아하는 일을 자기가 원할 때 자기가 원하는 만큼 하고자 한다. 인간은 자기 시간을 자유롭게 선용하고 필요한 것만 따르기를 원하며 우정, 여가, 학습 등을 스스로 선택하길 원한다. 인간은 명령에 의해서가 아니라 이성에 의해서 봉사하길 원한다. 굴종적인 의무감에 의해서가 아니라 이기심에서 스스로를 희생하길 원한다. 공유제는 본질적으로 우리의 능력의 자유로운 행사에, 우리의 가장 고결한 성향에, 우리의 가장 내밀한 감정에 어긋나는 것이다. 공유제를 개별 이성 및 의지의 요구와 타협시키고자 하는 사람들이 생각해 내는 그 어떤 것도 그저 늘 같은 미명 아래 내용을 바꾸는 데 그칠 뿐이다. 그런데 우리가 진리를 추구한다면, 우리는 말장난을 피해야만 한다.

따라서 공유제는 의식의 자율성과 평등을 침해한다. 정신과 심정의 자발성 및 행동과 사상에서의 자유 의지를 훼손함으로써 의식의 자율성이 침해당하는 것이며, 노동과 태만, 재능과 우둔, 심지어 악덕과 덕망을 대등하게 취급함으로써 평등이 침해당하는 것이다. 요컨대, 소유가 축적하고자 하는 경쟁심에 의해 불가능하듯이, 공유제는 게으르고자 하는 경쟁심에 의해 불가능한 것이다.

Ⅱ. 한편, 소유는 배제권과 불로수득권에 의해 평등을 침해하며, 전제에 의해 자유 의지를 침해한다. 소유가 가져오는 첫 번째 결과는 앞의 세 장에서 충분히 논의했으므로, 여기서는 최종적인 비교대조를 통해 소유가 도둑질과 완벽하게 일치한다는 사실을 입증하는 것으로 만족하자.

도둑voleur은 라틴어로 fur 또는 latro라고 한다. 앞의 말은 그리스어 phôr, pherô(〈나는 가져간다〉)에서 나왔고 라틴어 fero에 해당한다. 뒤의 말은 lathroô(〈나는 강탈한다〉)에서 나온 말로 그 어원은 léthô, 즉 라틴어로는 lateo(〈나는 숨는다〉)이다. 그리스어에는 또한 kleptô(〈나는 훔친다〉)에서 온 kleptês가 있으며, kaluptô(〈나는 숨긴다〉), (〈나는 감춘다〉)와 어원을 같이한다. 이러한 어원론에 따르자면, 도둑의 관념은 자신의 것이 아닌 어떤 물건을 어떤 방법으로든지 숨기고 가져가고 빼앗는 사람을 가리킨다.

히브리인들은 바로 이 관념을 gannab이라는 말로 표현하는데, 이는 동사 gannab(〈떼어두다〉, 〈전용하다〉)에서 나왔다. 십계명의 여덟 번째 계율, lo thi-gnob(〈도둑질하지 말라〉)는 〈아무것도 너를 위해서 간직하지 말라〉, 〈너를 위해 아무것도 남기지 말라〉는 뜻이다. 이는 말하자면 유명한 사도 아나니아Anania가 그랬던 것처럼(신약, 『사도행전』 5장 1~11절에 나오는 이야기-옮긴이), 한 사회에 입회하면서 자기가 가진 모든 것을 다 가지고 오겠다고 약속해 놓고는 비밀리에 일부를 남겨두는 인간의 행위를 가리키는 것이다.

〈훔치다voler〉라는 프랑스 동사의 어원은 더욱 의미심장하다. voler 또는 faire la vole은 사람의 손바닥을 뜻하는 라틴어 vola에서 온 말로, 카드놀이에서 모든 패를 다 따내는 것을 뜻한다. 따라서 도둑voleur은 모든 것을 다 차지하고 최대의 몫을 얻은 수혜자와 같은 것이다. 아마도 이 voler라는 동사는 voleurs의 은어에서 생겨나서 일상어로 통용되다가 마침내 법률 용어로까지 쓰이게 된 듯하다.

도둑질은 수많은 방식으로 행해진다. 입법자들은 이 방식들을 그 흉악성이나 공헌도의 정도에 따라 아주 교묘하게 구분하고 분류했는데, 이는 도둑질들 중에서 어떤 것은 치하하고 어떤 것은 응징하기 위함이었다.

사람들은 훔친다. ⑴ 거리에서 사람을 죽임으로써, ⑵ 혼자서 또는 무리를 지어, ⑶ 가택 침입에 의해, ⑷ 사취에 의해, ⑸ 거짓 파산에 의해, ⑹ 공문서 또는 사문서 변조에 의해, ⑺ 화폐 위조에 의해.

위의 부류는 무력이나 공개적인 사기 행위에 의해 자기 직분을 행사하는 모든 도둑들, 즉 강도, 산적, 해적, 즉 육상과 해상의 도둑 등등을 다 포괄하고 있다. 고대의 영웅들은 이 칭호들을 일종의 영예로 여겼으며, 자신의 직업을 돈벌이로서만이 아니라 고귀한 것으로 생각했다. 니므롯, 테세우스, 이아손과 아르고 호號의 용사들, 입다, 다윗, 카쿠스, 로물루스, 클로비스와 메로빙거 왕조의 왕들, 로베르 기스키르, 탕크레드 드 오트빌, 보에몽 등 대다수 노르만 족의 영웅들, 이들 모두는 산적이요 도둑이었다. 도둑이 지닌 영웅적 특성은 호라티우스(Horatius, 기원전 65~8, 로마의 시인-옮긴이)가 아킬레우스에 대해 말한 다음의 시구에 잘 나타나 있다.

그가 타고난 권리를 부인하고, 무기에 모든 권리를 부여하라.

(Jura neget sibi nata, nihil non arroget armis)[28]

그것은 또한 야곱의 유언장(『창세기』, 제48장)에도 잘 표현되어 있는데, 이는 유대인들이 다윗에게, 그리스도교인들이 그리스도에게 적용했던 바로 그 유언이다(모든 것에 맞서는 그의 손〈Manus ejus contra omnes〉). 그의 손이 모든 것을 훔치고 몽땅 차지한다는 것이다. 오늘날, 도둑 즉 고대의 무장한 강자는 죽을 때까지 추적당한다. 그의 직업은 법령에 따라 금고형에서 교수형에 이르기까지 체형이나 명예형으로 다스려진다.

사람들은 훔친다. ⑻ 협잡에 의해, ⑼ 사기에 의해, ⑽ 배임에 의해, ⑾ 도박이나 복권에 의해.

도둑질의 이 두 번째 부류는 젊은이들의 기백과 창의력을 예리하게 다듬기 위해 루쿠르고스의 법령에서 장려되었던 것들이다. 이 부류의 도둑질은 오디세우스, 솔론, 시논, 야곱에서 도이츠Deutz에 이르는 고대 및 근대의 유대인들, 보헤미아인들, 아랍인들에 의해 실행되던 것들이다. 루이 13세와 루이 14세의 치세에서는 도박에서 속임수를 써도 불명예스러운 일이 아니었다. 이것은 어떤 의미에서 규칙의 일부였으며, 많은 정직한 이들이 운명의 장난을 교묘한 사기로 바로잡는 일을 조금도 주저하지 않았다. 심지어 오늘날도 어디서나 〈장사를 할 줄 안다〉는 것, 즉 상대를 속인다는 것이 농민들에게서나 크고 작은 장사에서 아주 존중받는 장점으로 통한다. 이것은 너무나 당연한 듯이 받아들여져서, 피해를 입은 사람조차 별로 원망을 늘어놓지 않을 정도이다. 우리 정부가 복권의 폐지를 얼마나 내켜하지 않으면서 받아들였는지는 잘 알려져 있다. 정부는 그것이 마치 소유에 어떤 치명타인 듯이 받아들였던 것이다. 소매치기, 사기꾼, 야바위꾼은 특히 교묘한 손놀림, 교묘한 재기, 뽐내는 장광설, 기발한 꾀를 십분 이용한다. 이들은 이따금씩 탐욕에 미끼를 던지는 것이다. 그리하여 물리적 강압에 대해서보다는 지능에 대해 훨씬 관대한 우리의 형법은 위에서 언급한 네 종류의 도둑질을 두 번째 범주로 분류하여 명예형이 아니라 그저 경범죄 정도로 처리해야 한다고 믿었다. 지금이라면 이 법은 유물론적이고 무신론적이라고 비난받을 것이다.

사람들은 훔친다. ⑿ 고리대에 의해.

복음서가 나온 이래 그토록 혐오의 대상이 되고 그토록 엄하게 단죄되어 온 이 부류의 도둑질은 금지된 도둑질과 허용된 도둑질 사이의 과도기적 형태를 이룬다. 따라서 그것은 그 모호한 성격으로 인해 법률이나 도덕의 문제에서 많은 모순들을, 궁정인, 재정가, 장사치 등에 의해 아주 교묘하게 이용되는 많은 모순들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말하자면, 10, 12, 15%로 저당을 잡고 돈을 빌려주는 고리대업자는 발각되면 무거운 벌금을 물지만, 대부가 아니라 교환 또는 할인이라는 명목으로 같은 이자를 받는 은행가는 국왕의 특권에 의해 보호받고 있다. 그러나 은행가와 고리대업자 사이의 차이는 실로 명목적인 것이다. 동산이나 부동산을 담보로 돈을 빌려주는 고리대업자와 마찬가지로, 은행가도 지폐를 담보로 돈을 빌려준다. 고리대업자와 마찬가지로 은행가는 이자를 먼저 받는다. 고리대업자와 마찬가지로 은행가는 담보가 소멸될 경우, 즉 은행권이 변제되지 않는 경우, 차용자에 대해 상환청구권을 갖는다(이 경우 은행가는 정확히 말하자면 돈을 판매하는 자가 아니라 돈을 빌려주는 자이다). 물론 고리대는 대부 기간이 1년, 2년, 3년, 9년 또는 그 이상일 수 있지만, 은행가는 단기 대부만 한다. 그러나 대부 기간의 차이나 증서 형식의 다양함이 계약의 성격을 바꾸지는 못한다. 국가나 회사를 상대로 3, 4, 5%의 이자로 자금을 투자하는 자본가들에 대해 말하자면, 이들 즉 은행가나 고리대업자들보다 어느 정도 적은 고리대를 받는 자본가들은 사회의 꽃이요 정직한 사람들의 화신이다. 도둑질도 적게 하면 최선의 미덕이 되는가.[29]

사람들은 훔친다. ⒀ 지대, 소작료, 집세, 임대 등에 의해.

『프로뱅시알Provinciales』의 저자(17세기 프랑스의 사상가 블레즈 파스칼을 가리킨다-옮긴이)는 예수회 신부 에스코바Escobar와 모하트라Mohatra 계약을 거론하면서 17세기의 성실한 기독교인들을 즐겁게 해주었다. 에스코바는 말했다. 〈모하트라 계약이란 상품을 비싸게 외상으로 사서 즉시 같은 사람에게 현찰로 싸게 되파는 계약이다.〉 에스코바는 이런 류의 사취를 정당화해 주는 이유들을 찾아냈다. 파스칼을 비롯한 모든 얀센파 교도들은 에스코바를 조롱했다. 그러나 에스코바 신부가 다음과 같은 논지를 그들에게 들이댄다면, 독설가 파스칼, 현학자 니콜(P. Nicole, 1625~1695, 프랑스의 정치사상가, 신학자-옮긴이), 불굴의 아르노(A. Arnaud, 1560~1619, 프랑스의 법률가, 신학자-옮긴이)는 과연 무어라고 말할까. 〈가옥 임대차계약은 건물을 비싸게 외상으로 사서 일정 기간 후에 같은 사람에게 싼 값으로 다시 파는 계약이다. 거래를 간단하게 하기 위해서 구매자는 첫 번째 판 값과 두 번째 판 값 사이의 차액을 지불하기만 하면 될 것이다. 가옥 임대차와 모하트라 계약이 동일하다는 것을 부인하라. 그러면 나는 즉시 당신의 콧대를 꺾어 놓으리라. 아니면, 두 가지가 동일한 것이라고 인정한다면, 나의 논지가 정확히 옳다는 것도 인정하라. 그렇지 않으면 당신은 지대와 소작료를 동시에 폐지해야 하리라.〉

예수회 신부의 이 무시무시한 논박에 대해 몬탈트(Montalte, 『프로뱅시알』의 저자인 파스칼의 별칭-옮긴이) 경은 경종을 울렸을 것이며, 사회가 위험에 봉착해 있고 예수회 신부들은 사회의 토대까지 좀먹고 있다고 소리쳤을 것이다.

사람들은 훔친다. ⒁ 상인의 이익이 그의 직능에 따른 정당한 보수를 초과할 경우의 상거래commerce에 의해.

상거래의 정의는 아는 바와 같다. 그것은 〈6프랑의 가치가 나가는 것을 3프랑에 사고, 3프랑의 가치가 나가는 것을 6프랑에 파는 기술〉이다. 이렇게 정의된 거래와 아메리카식 도둑질 사이의 차이점은 교환되는 가치들의 상대적 비율에, 즉 이익의 규모에 있을 뿐이다.

사람들은 훔친다. ⒂ 자기의 생산물에 대해 이익을 남김으로써, 한직을 받아들임으로써, 그리고 지나친 보수를 받음으로써.

일정한 양의 밀을 소비자에게 팔면서 무게를 잴 때 부대 자루에 손을 넣어 곡물 한 줌을 덜어내는 농부는 도둑질을 하는 것이다. 강의료는 국가로부터 받으면서 출판업자를 내세워 그 강의를 다시 일반인에게 파는 교수는 도둑질을 하는 것이다. 별 볼일 없는 일의 대가로 엄청난 생산물을 받는 한직자는 도둑질을 하는 것이다. 관리든 노동자든, 1만큼 생산하고 4만큼 받는 자, 100만큼 생산하고 1,000만큼 받는 자는 도둑질을 하는 것이다. 이 책을 출판하는 편집자와 이 책의 저자인 나는 책 값어치의 두 배를 받음으로써 도둑질을 하는 것이다.

요약해보자.

정의는 고대의 시인들이 〈황금시대〉라 불렸던 소극적 공유제에서 벗어나자마자 힘의 권리가 되기 시작했다. 사회가 구성되면, 능력의 불평등이 공적功績의 관념을 일깨우게 되고, 형평에 의거해서 비단 평판뿐만 아니라 물질적 재산까지도 개인의 공적에 비례시키고자 하는 착상이 생겨난다. 그리고 세상에서 인정받는 최초이자 거의 유일한 공적이 바로 물리적인 힘이기 때문에, 가장 공적이 큰 최우선자aristos로서 최대의 몫을 차지할 권리를 가진 자는 가장 힘센 자aristos이다. 그러므로 만일 이 권리가 거부된다면, 그는 당연히 그것을 힘으로 빼앗는다. 여기에서부터 모든 물건에 대한 소유권을 장악하는 데까지는 단 한 걸음만 더 디디면 충분하다.

그리스인과 로마인들이 적어도 전통에 따라 그들 공화정 최후의 날까지 보존했던 것이 바로 이러한 영웅시대의 권리였다. 플라톤은 자신의 『고르기아스』에서 칼리클레스라는 인물을 소개하고 있는데, 여기서 칼리클레스는 갖은 기지를 동원하여 힘의 권리를 지지하고 있는 반면, 평등의 옹호자tou isou인 소크라테스는 진지하게 그를 논박하고 있다. 위대한 폼페이우스(Pompeius, 기원전 1세기경 로마의 장군-옮긴이)는 얼른 얼굴을 붉히기는 했지만 어느 날 다음과 같은 말을 입 밖으로 흘렸다고 전해진다. 〈내가 무기를 손에 잡고 있을 때, 왜 법률 같은 것을 존중해야 한다는 말인가!〉 이것은 자신의 도덕 감각과 야망 사이에서 갈등을 하다가 결국 자기의 폭력을 영웅과 도적의 처세훈으로 정당화하는 인간의 모습이다.

힘의 권리에서 인간의 인간에 대한 착취, 달리 말하자면 노예제나 고리대금업이 나온다. 정복자가 피정복민에게 부과하는 공납 그리고 염세鹽稅, 국왕특전, 부역, 소작료, 집세 등등 다양한 세금들, 한마디로 말해서 소유가 바로 이 힘의 권리에서 나온다.

힘의 권리에 뒤이어서, 정의의 두 번째 표현 형태라 할 수 있는 책략의 권리가 나타났다. 이것은 사실 이 분야에서 그다지 솜씨를 발휘하지 못하고 잃기만 했던 고대의 영웅들이 아주 달가워하지 않던 권리이다. 이것도 여전히 힘에 바탕을 둔 권리였지만, 육체적 능력으로서의 힘에서 심리적 능력으로서의 힘으로 변용된 형태의 권리였다. 교활한 언술로 적을 속이는 기술은 마찬가지로 보상을 받을 가치가 있는 것으로 보였다. 물론 강자는 늘 자신이 신의를 지킨다고 뽐내긴 했지만 말이다. 당시에 약속을 지키고 서약을 준수하는 것은 당위적인 문제라기보다는 표현의 문제였다. 12표법(기원전 451년에 공포된 로마 최초의 성문법-옮긴이)에는 〈혀가 언명하는 대로 법이 있으라(Uti lingua nuncupassit, ita jus esto)〉라고 적혀 있다. 책략, 좀더 낫게 말하자면 배신이 고대 로마의 정치의 태반을 이루고 있었다. 비코(Vico, 1668~1774, 이탈리아의 역사가, 철학자-옮긴이)는 여러 예들 중에서도 특히 나중에 몽테스키외 역시 거론했던 다음과 같은 예를 들고 있다. 로마인들은 사회 또는 국가에 해당하는 키비타스civitas라는 말을 의도적으로 사용하면서 카르타고인들에게 그들의 재산과 〈도시〉를 보호해 주겠노라고 약속했다. 그런데 이와는 반대로 카르타고인들은 이것을 실제적인 도시 즉 우르브스urbs로 이해하고는 성벽을 쌓기 시작했기 때문에, 조약을 위반했다는 구실로 로마인들의 침략을 받았다. 로마인들로서는 이 점에서 자신들이 영웅시대의 권리를 따르고 있을 뿐이지 애매한 문구로 적을 습격하여 정의롭지 못한 전쟁을 벌인다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공업, 상업 및 은행의 이익은 책략의 권리에서 나온다. 거래에서의 사기 행각, 〈재능〉 또는 〈천재성〉이라는 미명으로 장식되어 있으나 고도의 속임수나 기만으로 보아야 마땅할 온갖 장광설들, 마지막으로 모든 종류의 사회적 불평등들, 이 모든 것은 바로 이 책략의 권리에서 나온다.

법률이 금지하고 있는 도둑질에서는 힘과 책략이 다른 어떤 도움 없이 노골적으로 사용된다. 그러나 허용된 도둑질에서는 힘과 책략이 어떤 유용한 생산물의 형태로 몸을 숨기고는 희생자들을 강탈하기 위한 병참도구로서 그 생산물을 이용한다.

폭력과 책략의 직접적인 사용은 아주 일찍부터 만장일치로 비난받아 왔다. 그러나 여태껏 어떤 국민도 재능, 노동 및 점유와 결합된 형태의 도둑질에서는 완전히 해방되지 못하고 있다. 여기서 도덕에 관한 공론의 모든 모호성과 법률학의 수많은 모순들이 나온다.

『일리아드』와 『오디세이아』에서 음유시인들이 그토록 찬미해 마지않던 힘의 권리와 책략의 권리는 그리스와 로마의 모든 입법들에 영감을 불어넣었으며, 오늘날 우리의 습속과 법령들에까지 전해져 있다. 그리스도교는 이 점에서 아무것도 바꾸어 놓지 않았다. 그렇다고 복음서를 비난하지는 말자. 성직자들도 잘못 인도되기는 법학자들과 마찬가지였으며 설명할 줄도 이해할 줄도 몰랐으니 말이다. 도덕에 관련한 문제에 대한 공의회와 교황들의 무지는 고대 법학자나 전당포업자의 무지와 맞먹었다. 권리, 정의, 사회에 대한 이 심각한 무지는 교회를 죽이고 그 가르침을 영원히 더럽히는 것이었다. 로마 교회들과 여타 그리스도교 교회들의 불충은 너무나 명백하다. 모두가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무시했다. 모두가 도덕과 교의의 문제에서 길을 잃었다. 모두가 거짓되고 모순되며 불의와 살기로 가득 찬 말들에 책임을 져야 한다. 교회는 신과 인간에게 용서를 빌어야 하리라. 자신의 무오류를 선언하고 자신의 도덕성을 더럽힌 교회 말이다. 개신교 자매님들도 몸을 낮추어야 하리라. …그러면 미망에서 깨어났지만 여전히 신앙이 깊고 너그러운 인민이 알아서 신중하게 행동하리니 말이다.[30]

권리의 발달은, 소유가 그 여러 가지 형태들을 통해 밟아온 것과 같은 단계를 그 여러 가지 표현 양태들을 통해서 밟아왔다. 도처에서 정의가 도둑질을 쫓아내어 점점 더 좁은 한계 안에 그것을 가두어 넣는 것이 보인다. 지금까지 불의에 대한 정의의 정복, 불평등에 대한 평등의 정복은 본능에 의해 그리고 현실의 필요에 의해서만 달성되었다. 그러나 우리가 지닌 사교성의 마지막 승리는 우리의 성찰에 달려있을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다시 봉건적인 혼동에 빠지고 말 것이다. 우리의 지성에 의해 이 영광을 이룰 것인가, 아니면 우리의 무능력에 의해 이 비참한 심연에 빠질 것인가.

소유의 두 번째 결과는 전제專制이다. 그런데 사람들의 생각 속에서 전제는 합법적인 권위라는 관념과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기 때문에, 나는 전제의 자연적 원인들을 들추어냄으로써 합법적인 권위의 원리를 밝혀내야 할 것이다.

우리는 어떤 통치 형태를 택할 것인가? 아! 그런 것을 묻다니! 당신은 공화주의자로군요라고 필경 나의 젊은 독자들 중 하나가 답할 것이다. 공화주의자, 그렇다. 그러나 이 말은 아무것도 분명히 나타내지 않는다. 레스 푸블리카Res Publica란 공적인 사물을 말한다. 즉, 공적인 사물을 원하는 자는 누구나 자신이 공화주의자라고 말할 수 있다. 국왕들 역시 공화주의자이다. 그러면! 당신은 민주주의자입니까? 아니다. 뭐요! 당신은 왕정주의자입니까? 아니다. 입헌주의자요? 천만의 말씀. 그러면 당신의 귀족주의자입니까? 천만에. 당신은 혼합 정체를 원합니까? 더욱 아니다. 그러면 당신은 뭡니까? 나는 아나키스트anarchiste요. 알았습니다. 당신은 빈정대고 있군요. 이것은 정부를 겨냥한 말이군요. 결코 아니오. 당신은 막 나의 진솔하고도 심사숙고한 신념 고백을 들었다. 나는 질서를 아주 사랑하지만 그 말이 뜻하는바 그대로 아나키스트이다. 내 말을 들어 보라.

사회를 이루고 사는 동물들의 세계에서, 새끼들의 유약성은 이미 힘을 가진 어미들에게 새끼들이 복종해야 할 당연한 이치가 된다. 그리고 동물 특유의 의식 구조를 보여주는 습성이라는 것에 의해 권력은 최고참에게 돌아간다. 비록 이 최고참이 점점 힘을 잃고 허약해진다고 할지라도 말이다. 사회가 한 우두머리의 통솔 아래 있을 때는 거의 언제나 이 우두머리는 사실상 무리 중의 최고참이다. 나는 거의 언제나라고 말한다. 왜냐하면 기존 질서가 거친 열정들에 의해 교란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렇게 되면 권위가 다른 이에게 넘어간다. 그러면 이 권위는 처음에는 무력으로 시작된 후에 곧이어 마찬가지로 습성에 의해 유지되는 것이다. 야생마는 무리를 지어 다닌다. 이들에게는 선두에서 달리는 우두머리가 있으며, 공격과 도주의 신호를 해주는 그 우두머리를 믿고 따른다.

〈우리가 기르는 양은 우리를 따른다. 그러나 양은 또한 자신이 태어난 무리를 따른다. 양은 인간에게서 ‘자기 무리의 우두머리’를 볼 뿐이다. …가축들에게 인간은 그들 사회의 일원에 지나지 않는다. 인간에게 요구되는 기술은 자신이 가축들에게 무리의 일원으로 받아들여지게 하는 것뿐이다. 지능이 가축보다 우수한 인간은 얼마 안 가서 가축의 우두머리가 된다. 따라서 인간은 뷔퐁(G. Buffon, 1707~1788, 프랑스의 박물학자-옮긴이)이 말했듯이, 이 동물들의 자연 상태를 바꾸어 놓는 것이 아니라 사실 이 자연 상태를 이용하는 것이다. 달리 말하자면, ‘사회성을 가지고 태어난’ 동물들을 발견하고는, 그것들을 ‘길들이고’ 한동아리가 되고 그 우두머리가 되는 것이다. 이렇게, 동물들의 가축화는 하나의 특별한 경우요, 단순한 변모에 지나지 않으며, ‘사회성’에 의해 정해진 결과일 뿐이다. 모든 가축은 그 본성에서 ‘사회적인’ 동물이다. …〉(플루랑, 『프레데릭 퀴비에의 관찰에 대한 분석적 요약』)

사회성을 지닌 동물은 〈본능적으로〉 우두머리를 따른다. 그러나 퀴비에가 빠뜨리고 넘어간 말, 즉 이 우두머리의 역할은 〈지능〉에 의한 것이라는 사실을 지적해 두자. 우두머리는 무리에게 한동아리를 이루는 법, 자기 지휘 아래 단결하는 법, 번식하는 법, 도망치거나 응수하는 법을 가르치지는 않는다. 우두머리는 자기를 따르는 무리 역시 이 모든 점을 자기와 마찬가지로 잘 알고 있다는 사실을 이해한다. 그러나 자신이 쌓아온 경험에 의해 돌발사태에 대처하는 것이 바로 우두머리이다. 어려운 처지에 놓이면 자신의 지능으로 무리의 본능을 보완하는 것이 바로 우두머리이다. 숙고하고 판단하고 이끄는 것이 바로 우두머리이다. 한마디로 말하자면 우두머리의 현명한 신중함이 전체의 최대 이익을 위해 무리의 관행을 통제하는 것이다.

천성적으로 사회를 이루고 사는 인간 역시 천성적으로 우두머리를 따른다. 애초에 이 우두머리는 아버지이고, 족장이며, 원로 즉 경험자이자 현자이며, 그 자질은 따라서 성찰과 지능의 자질이다. 인류는 다른 사회적인 동물들과 마찬가지로 본능, 타고난 능력, 일반적 관념, 감정과 이성의 범주 따위를 지니고 있다. 우두머리, 입법자, 왕들은 결코 무엇 하나 발명하지도 구상하지도 예견하지도 않았다. 그들은 단지 자신들이 얻은 경험에 따라, 그러나 늘 의견과 믿음에 순응하면서 사회를 이끌 뿐이다.

도덕이나 역사의 문제에 자신의 선동가적인 어두운 기질을 끌어들이면서, 인류는 원칙적으로 우두머리도 국왕도 갖고 있지 않았다고 확언하는 철학자들은 인간의 본성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고 있다. 왕정, 그리고 절대 왕정도 민주정과 마찬가지로, 아니 그 이상으로 아주 오래 된 통치 형태이다. 사람들은 태고적부터 영웅들, 산적들, 편력 기사들이 왕관을 차지하고 스스로 왕이 되는 것을 보아왔기 때문에, 왕정과 전제라는 두 가지를 혼동한다. 그러나 왕정은 인간의 창조와 더불어 시작되었으며 소극적 공유제의 시기에도 존속했다. 반면에 영웅주의 및 그것이 낳은 전제는 정의의 관념의 첫 번째 형태 즉 힘의 통치와 더불어 시작되었을 뿐이다. 공적을 서로 비교해 보아 최강자가 최적자라고 판단된 후부터 연장자는 최강자에게 자리를 양보해야만 했으며, 왕정은 전제적이 된 것이다.

왕정의 자생적, 본능적 기원, 말하자면 왕정의 생리학적 기원은 태초부터 왕정에 초인간적인 성격을 부여했다. 인간은 왕을 신과 결부시켰으며, 신으로부터 최초의 왕들이 탄생했다고 말했다. 여기에서 왕가의 신성한 계보, 신들의 화신, 구세주의 설화가 생겼다. 여기에서 지금도 그 기이한 주창자들이 버티고 있는 왕권신수설이 생겨났다.

왕권은 원래 선발에 의한 것이었다. 왜냐하면 인간이 거의 생산을 하지 않고 아무것도 점유하고 있지 않던 시기에는 세습의 관념을 낳고 아버지의 왕권을 아들에게 보장할 정도로 소유의 힘이 막강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인간이 땅을 갈고 도시를 세웠을 때, 여러 가지 직능들이 다른 것들과 마찬가지로 독차지되었다. 여기에서 왕위 세습과 성직 세습이 생겼다. 여기에서 가장 일상적인 직업들에까지도 세습의 원리가 적용되는 일이 생겨났다. 여기에서 신분들의 구별, 서열에 따른 오만함, 평민의 비참함이 생겨났다. 이로써 내가 앞에서 가산 상속의 원리에 대해 말한 것, 즉 공석을 메우고 미완의 작업을 완수하기 위해 자연이 마련해 준 방식이 확립된 것이다.

세월이 흐르면서 인간의 야욕에 의해 횡령자, 왕위 〈찬탈자〉 따위가 출현했으며, 어떤 이는 참주tyran라고 불러야 할 필요가 생겨났다. 그러나 이 명칭들에 구애되어서는 안 된다. 혐오스러운 왕들이 있었던 만큼, 참을 만한 참주들도 있었던 것이다. 왕정이 유일하게 가능한 통치 형태일 때, 그것은 좋은 것일 수도 있다. 그러나 그것은 결코 정당할 수 없다. 세습도 선발도 보통선거도 종교나 시대의 축성祝聖도 왕정을 정당화하지는 못한다. 군주제, 과두제, 민주제 등 어떤 외피를 걸치고 있더라도 왕권, 즉 인간에 의한 인간의 통치는 불법이며 불합리하다.

인간은 자신의 욕구를 가장 신속하고 가장 완벽하게 만족시키기 위해 〈규준規準〉을 찾는다. 태초에 이 규준은 인간에게 살아 움직이는 것이며 눈에 보이는 것이고 손으로 만져지는 것이었다. 그것은 곧 그의 아버지이자 그의 주인이며 그의 왕이었다. 인간이 무지하면 할수록 지도자에 대한 그의 복종과 신뢰는 절대적이 된다. 그러나 규준에 따르는 것, 즉 성찰과 추론에 의해 그 규준을 발견하는 것을 자신의 법칙으로 삼는 인간은 자기 우두머리의 명령에 대해 이성적으로 추론한다. 그런데 이러한 추론은 권위에 대한 저항이며 불복종의 시작이다. 인간이 주권자의 의지의 근거를 따지기 시작할 때, 바로 이때부터 인간은 저항하기 시작한다. 국왕이 명령을 했기 때문에 복종하는 것이 아니라 국왕이 그 명령의 근거를 입증했기 때문에 복종하는 것이라면, 이때부터 인간은 어떤 권위도 인정하려 하지 않으며 스스로를 자기의 왕으로 삼은 것이라고 확언할 수 있다. 인간을 다스리려 하면서도 그러한 권위의 전거로 다수자의 존중만을 들고 나오는 우두머리는 불행할지라. 왜냐하면 조만간 소수자가 다수자로 될 것이고, 따라서 이 신중하지 못한 전제자는 쫓겨날 것이며 그가 많은 모든 법령들은 철회될 것이니 말이다.

사회가 계몽됨에 따라 국왕의 권위는 줄어든다. 이것은 역사가 어김없이 입증하는 사실이다. 국민들이 처음 탄생했을 때, 인간은 추론하고 성찰해야 아무 소용이 없었다. 방법도 원리도 몰랐으며 이성을 활용할 줄조차 몰랐기 때문에, 인간은 자신이 올바르게 사물을 보고 있는지 아니면 속고 있는지조차 알지 못했다. 당시 왕들의 권위는 엄청났기 때문에 어떤 기성 학설도 이를 거역하려 들지 않았다. 그러나 점차적으로 경험은 습관을 낳고 습관은 관례를 낳았다. 그러고 나서 관례는 격률로 입안되고 원리로 확립되었다. 달리 말하자면 관례는 이제 법률로 표현되었으며 살아있는 법률인 국왕도 이제 이를 준수해야만 했다. 이윽고 관례와 법률들의 수효가 부쩍 늘어나고 군주의 의지가 일반 의지에 의해 말하자면 휘감겨버리는 시대가 왔다. 왕좌에 오를 때, 국왕은 관례와 상례에 따라 통치할 것이며 자신은 이제 스스로 법을 만드는 사회의 집행 권력에 불과할 따름이라고 선서해야만 했다.

이때까지는 모든 일이 본능적인 방식에 따라, 말하자면 당사자들도 모르는 사이에 이루어졌다. 그러나 이러한 추세의 피할 길 없는 결말을 보자.

몸소 배우고 관념들을 습득하는 능력에 의해 인간은 마침내 〈과학〉의 관념, 즉 사물의 현실에 일치하며 관찰에 의해 얻어지는 인식의 체계에 도달하게 된다. 따라서 인간은 과학을, 즉 무기물의 체계, 유기물의 체계, 인간 정신의 체계, 세계의 체계를 탐구한다. 어찌 인간이 마찬가지로 사회의 체계를 탐구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그러나 이 시점에 이르면 인간은 정치적 진실, 즉 정치의 과학은 주권자의 의지, 다수자의 의견, 대중의 의지와는 완전히 별개의 것임을 깨닫는다. 국왕, 대신, 사법관, 인민은 의지체意志體로서는 과학의 관점에서 아무것도 아니며 눈여겨볼 만한 가치도 없다는 것을 깨닫는 것이다. 인간이 사회적 동물로 태어났다면, 그에 대한 아버지의 권위는 그가 이성을 연마하고 교육을 끝마친 후 아버지와 동류가 되는 바로 그날로 효력을 상실한다는 사실, 진정한 우두머리나 진정한 국왕은 증명된 진실이어야 한다는 사실, 정치란 하나의 과학이지 농간이 아니라는 사실, 입법자의 기능은 마침내는 진실에 대한 방법론적 탐구로 귀착된다는 사실, 이러한 사실들을 인간은 마침내 깨닫게 된다.

그러므로 특정한 사회에서 인간에 대한 인간의 권위는 그 사회가 도달한 지적 발전의 수준과 반비례한다. 그리고 이 권위의 있음직한 지속 기간은 아마도 진정한 통치, 즉 과학에 따른 통치에 대한 다소간 일반적인 열망에 의거해서 측정할 수 있다. 그리고 힘의 권리와 책략의 권리가 정의의 점점 더 광범위해지는 결정력 앞에서 위축되어 마침내 평등 안에서 소멸되어야만 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의지의 주권은 이성의 주권 앞에 몸을 굽히고 마침내 과학적 사회주의 안에서 소멸될 것이다. 소유와 왕정은 이 세상이 시작될 때부터 무너져왔다. 인간이 평등 안에서 정의를 찾듯이, 사회는 아나키anarchie 안에서 질서를 찾는다.

〈아나키〉, 즉 주인이나 주권자의 부재, 우리가 하루하루 접근해가는 통치 형태가 바로 이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인간을 규준으로 삼고 인간의 의지를 법칙으로 삼는 뿌리 깊은 습관에 의해 아나키를 마치 무질서의 절정이자 혼동의 표현인 양 여기고 있다. 17세기 파리의 한 부르주아에 대한 이야기가 있다. 이 순박한 사람은 베네치아에는 국왕이 없다는 말을 듣더니 놀라움에서 깨어나지 못한 채 이 우스꽝스러운 말에 포복절도하여 죽을 지경이었다는 것이다. 우리의 편견이 바로 이와 같은 것이다. 즉, 우리가 살아있는 한, 우리는 한 명이든 여러 명이든 우두머리를 원하기 마련이라는 것이다. 나는 여기에 소책자 한 권을 가지고 있는데, 열렬한 공산주의자인 이 저자는 마치 또 한명의 마라(Marat, 1743~179, 프랑스 대혁명기의 민중 선동가-옮긴이)인 양 독재를 꿈꾸고 있다. 우리들 중 가장 앞선 자들은 주권자들의 수가 가능한 한 많기를 바라는 자들일 뿐이며, 따라서 국민 방위군의 충성을 확보하는 것이 이들의 가장 열렬한 소망이다. 아마도 곧 누군가는 이 시민군을 찬양한 나머지 〈모두가 왕이다〉라고 말할 것이다. 그러나 나는 그에게 답할 것이다. 아무도 왕이 아니라고. 우리는 좋든 싫든 한동아리를 이루고 있을 뿐이라고. 내정에 관한 모든 문제는 각 도별 통계자료를 토대로 해결되어야 한다. 그리고 외정에 관한 모든 문제는 국제적 통계에 따라 처리될 사항이다. 통치 과학은 응당 학문 아카데미의 한 분야에 속해야 하며, 수상이 마땅히 그 상임 비서를 맡아야 한다. 그리고 시민이면 누구나 아카데미에 의견서를 제출할 수 있으므로 모든 시민이 다 입법자인 셈이다. 그러나 그 누구의 의견도 그것이 입증될 때에만 고려 대상이 되는 만큼, 어느 누구도 자신의 의지로 이성을 대체할 수 없으며 그 누구도 왕이 아니다.

입법과 정치의 자료가 되는 모든 것은 과학의 대상이지 의견의 대상이 아니다. 입법권은 이성에만, 방법론적으로 인정되고 입증된 이성에만 속한다. 어떤 권력에라도 거부권이나 제재권을 부여하는 것은 압제의 절정이다. 정의와 합법성, 이 두 가지는 수학적 진리만큼이나 우리의 동의 여부와는 무관한 사항이다. 강제되기 위해서는 인식되는 것만으로 충분하다. 인식되기 위해서는 그저 고찰하고 연구하기만 하면 된다. 그런데 인민이 주권자가 아니라면, 입법권이 인민에게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면, 인민이란 과연 무엇인가? 인민은 법의 수호자이다. 인민은 〈집행권〉이다. 시민은 누구나 〈이것은 진실이다. 저것이 옳다〉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그의 확신은 그 자신만을 강제할 따름이다. 그가 선언한 진실이 법이 되기 위해서는 그 진실이 인정받아야만 한다. 그러면 법을 인정한다는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수학 또는 형이상학의 작업을 검증하는 것이다. 요컨대 그것은 경험을 반복하고, 현상을 관찰하며, 사실을 입증하는 것이다. 오직 국민만이 〈명령하고 결정하노라〉고 말할 수 있다.

지금까지 내가 말한 모든 것은 사실 기존 관념과는 정반대되는 것이며, 따라서 내가 현재의 정치적 논의를 뒤집고자 하는 것으로 보이리라고 자인한다. 그러나 나로서는 하나의 역설에서부터 출발했기 때문에, 진정 옳게 추론을 전개하자면 매순간마다 역설들을 만날 수밖에 없었으며 마침내 역설들로 끝을 맺을 수밖에 없었다는 것을 독자들이 이해해 주기 바랄 따름이다. 게다가 나는, 입법자의 붓 대신에 입법의 칼이 다시 시민들의 수중에 들어간다면, 시민의 자유에 어떤 위험이 닥칠지를 알지 못한다. 집행권은 본질적으로 의지의 영역에 속하기 때문에 너무나 많은 수임자에게 위탁되어서는 안 되는 것이다. 인민의 진정한 주권이 바로 이런 것이다.[31]

소유자, 도둑, 영웅, 주권자(이 모두는 사실 동의어이다)는 자신의 의지를 법률인 양 강요하지만 어떤 모순도 느끼지 않고 어떤 통제도 받지 않는다. 즉 그는 자신이 입법권이자 동시에 집행권이라고 주장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국왕의 의지를 과학적이고 참된 법률로 대체하는 일을 가차 없는 투쟁 없이는 성취될 수 없으며, 이러한 끊임없는 대체야말로 소유 다음으로 역사의 가장 강력한 요인이자 정치운동들의 가장 비옥한 요인이 되었다. 이러한 사례들은 너무나 많고 너무나 명백하기 때문에 여기서 일일이 열거할 필요조차 없으리라.

그런데 소유는 필연적으로 전제, 자의적인 통치, 음탕한 의지의 지배를 낳는다. 이것이야말로 진정 소유의 본질이기 때문에, 소유를 극복하려면 소유란 무엇인가를 상기해 보는 것만으로 충분하며 우리 주변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떠올려보는 것만으로 충분하다. 소유란 〈사용〉하고 〈남용〉하는 권력이다. 따라서 만일 통치가 하나의 경제적 행위라면, 만일 통치가 생산과 소비를, 노동과 생산물의 배분을 유일한 목적으로 삼는 것이라면, 어떻게 통치와 더불어 소유가 가능할 수 있겠는가? 만일 재화가 소유물이라면, 어떻게 소유자가 국왕, 전제적인 국왕, 그들의 후천적 능력에 비례하는 국왕이 아니란 말인가? 그리고 만일 개개 소유자가 자신의 소유 영역 내에서 지고의 주권자라면, 자기 영지의 전 영역에서 불가침의 왕이라면, 어떻게 소유자들의 통치가 혼란과 혼동이 아니란 말인가?

제3절 제3의 사회형태의 결정결론

따라서 소유를 토대로 하는 어떤 통치도, 어떤 공적 경제도, 어떤 행정도 가능하지 않다.

공유제는 〈평등〉과 〈법loi〉를 추구한다. 반면에 소유는 이성의 자주성 및 개인적 공적의 산물로서, 모든 사물에 대한 〈독립성〉과 〈비례균형proportionnalité〉을 원한다.

그러나 획일성을 규범으로 삼고 평준화를 평등으로 여기는 공유제는 전제적이 되고 또 부당하게 된다. 반면에 소유는 그 전제專制와 침해에 의해 곧 압제적이고 비사회적으로 변한다.

공유제와 소유는 선善을 원한다. 그러나 그 두 가지가 각각 낳는 것은 악이다. 왜 그런가? 그것은 이 두 가지가 서로 배타적이기 때문이며 제각기 사회의 두 요소를 무시하고 있기 때문이다. 즉 공유제는 독립성과 비례균형을 무시하는 반면, 소유는 평등과 법을 존중하지 않는다.

그런데 만일 우리가 평등, 법, 독립성, 비례균형이라는 이 네 가지 원리에 토대를 둔 사회를 머릿속에 그려본다면, 다음과 같은 사실들을 알게 된다.

1. 평등은 어떤 경우라도 정의와 형평을 침해하지 않는다는 것. 물론 이때 평등이란 〈조건들의 평등〉 즉 〈수단들〉의 평등만을 의미한다. 그리고 〈복리의 평등〉이란 평등한 수단들로써 노동자들이 달성해야 할 몫이다.

2. 법은 사실들에 대한 과학에서 유래하는 것으로서 필연성 그 자체에 의존하기 때문에 결코 독립성과 충돌하지 않는다는 것.

3. 개개인 상호간의 〈독립성〉 즉 사적 이성의 자주성은 재능과 능력의 차이에서 유래하는 것으로서, 법의 한계 안에서는 아무 위험 없이 존속할 수 있다는 것.

4. 〈비례균형〉은 물질의 영역이 아니라 지능과 감정의 영역에서만 인정되는 것으로서, 정의 및 사회적 평등을 침해하지 않고도 준수될 수 있다는 것.

공유제와 소유의 종합이라 할 수 있는 이 제3의 사회 형태를 우리는 〈자유〉[32]라고 부를 것이다.

자유의 성격을 규정하는 데에서 우리는 공유제와 소유를 무차별적으로 결합시키지는 않는다. 그것은 불합리한 절충주의이리라. 우리는 분석적 방법을 통해 그것들 각각에서 진실한 것, 자연의 요구와 사회성의 법칙에 순응하는 것을 찾아내고 나아가 이질적인 요소들을 제거한다. 그러면 그 결과물은 인류 사회의 자연적 형태에 적합한 어떤 표현을 제시해 준다. 그것이 바로 자유이다.

자유는 평등이다. 왜냐하면 자유는 사회 상태 안에서만 존재하는데 평등을 넘어서서는 사회가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자유는 아나키이다. 왜냐하면 자유는 의지의 통치를 용납하지 않으며 단지 법의 권위, 즉 필연의 권위만을 받아들이기 때문이다.

자유는 무한한 다양성이다. 왜냐하면 자유는 법의 한계 내에서는 모든 의지를 존중하기 때문이다.

자유는 비례균형이다. 왜냐하면 자유는 공적에 대한 야망과 영예에 대한 경쟁에 모든 여지를 남겨놓기 때문이다.

우리는 이제 쿠쟁 씨를 본받아 다음과 같이 말할 수 있다. 〈우리의 원리는 진실이다. 우리의 원리는 훌륭하고 사회적이다. 그러므로 거기서 모든 결론을 얻기를 두려워 말자.〉

인간에게 있는 〈사회성〉은 성찰을 통해 〈정의〉가 되고, 능력들의 맞물림을 통해 〈형평〉이 되며, 〈자유〉를 그 정식으로 삼는다. 사회성은 도덕의 참된 원리이고 우리의 모든 행동의 원리이자 규준이다. 사회성은 철학이 탐구해 오고 종교가 강화해 온 보편적 동기이며, 인간의 이기심에 의해 밀려났으나 그렇다고 순수 이성에 의해서는 결코 보완되지 않는 보편적 동기이다. 〈의무〉와 〈권리〉는 우리들 안에서 욕구로부터 생겨나는 바, 이 욕구라는 것은 외부 존재와의 관련에서 생각하면 〈권리〉가 되며, 우리 자신과의 관련에서 생각하면 〈의무〉가 된다.

우리는 먹고 자려는 욕구가 있다. 그러나 우리가 수면과 영양에 필요한 물품들을 마련하는 것은 권리이며, 자연이 필요로 할 때 그것들을 사용하는 것은 의무이다.

우리는 살기 위해 노동하려는 욕구가 있다. 그러나 그것은 권리이자 또한 의무이다.

우리는 아내와 아이들을 사랑하는 욕구를 갖는다. 그러나 그들의 보호자이자 버팀목이 되는 것은 의무이며, 그들에게서 다른 누구보다 더 사랑받는 것은 권리이다. 부부 사이의 정절은 정의이며, 간통은 반사회적인 범죄인 것이다.

우리는 생산물을 다른 이의 생산물과 교환하려는 욕구를 갖는다. 그러나 교환이 서로 대등하게 이루어져야 한다는 것은 권리이다. 그리고 우리는 생산하기에 앞서서 소비해야만 하므로, 만일 모든 것이 우리에게 달려 있다면, 우리가 소비를 한 다음에 곧 생산에 매진해야 한다는 것은 의무이리라. 자살은 기만적인 파산인 것이다.

우리는 이성의 빛에 따라 우리의 과업을 다하고자 하는 욕구를 갖는다. 그러나 우리가 우리의 자유 의지를 보유하는 것은 권리이다. 다른 사람의 자유 의지를 존중하는 것은 의무이다.

우리는 동료들에게 존중받고자 하는 욕구를 가진다. 그러나 우리가 그들의 칭찬에 값하는 것은 의무이며, 우리가 우리의 업적에 따라 평가받는 것은 권리이다.

자유는 상속의 권리나 유언의 권리와 전혀 어긋나지 않는다. 자유는 평등이 이 권리들에 의해 침해당하지 않도록 감시하는 것으로 만족할 따름이다. 자유는 우리에게 말한다. 〈두 유산 사이에서 선택하라. 다 가질 수는 없다〉라고. 양도, 한사限嗣상속, 양자결연, 그리고 감히 말하자면 〈성직계승권coadjutoreries〉 따위와 관련된 모든 입법들은 다시 만들어져야 한다.

자유는 경쟁을 장려하며 그것을 파괴하지 않는다. 사회적 평등 속에서 경쟁은 대등한 조건들 아래서 이루어져야 할 따름이다. 포상은 경쟁 그 자체에 주어질 뿐 승자도 패자도 있을 수 없다.

자유는 자기희생을 찬양하고 자기희생에 따른 고통을 높이 평가한다. 그러나 자유가 자기희생을 반드시 필요로 하는 것은 아니다. 사회적 균형을 유지하는 데는 정의만으로 충분하다. 자기희생은 필요 이상의 행위이다. 그렇지만, 〈나는 내 몸을 바친다〉라고 말할 수 있는 이에게 복이 있도다.[33]

자유는 본질적으로 조직화의 원리이다. 인간들 사이의 평등이나 국민들 사이의 균형을 확립하기 위해서는 농업과 공업, 교육, 통상 및 집산의 중심지들이 각 지방의 지리적 · 풍토적 조건, 생산물의 종류, 주민의 특성과 자연적 재능 등에 따라 아주 정당하고 현명하며 아주 알맞은 비율로 잘 배분되어야만 한다. 어떤 지역도 인구 및 소비와 생산의 과잉 또는 결핍에 의해 고통 받지 않도록 말이다. 여기에서 공법학과 사법학 그리고 참된 경제학이 시작된다. 새로운 법률들을 기술하고 세상을 평온하게 하는 것은, 이제 그릇된 소유의 원리에서 벗어난 법률학자들의 몫이다. 이들에게는 지식과 천재가 부족하지 않다. 이들은 이미 그렇게 할 기반을 갖고 있다.[34]

이것으로 나는 내 스스로 제안했던 일을 끝마쳤다. 소유는 타도되었다. 소유는 다시 회복하지 못하리라. 이 논설이 읽히고 전해지는 모든 곳에서 소유에 대한 죽음의 씨앗이 뿌려지리라. 거기에서는 조만간 특권과 예종이 사라지리라. 거기서는 이성의 지배가 의지의 전제를 대체하리라. 실로, 다음과 같은 아주 단순한 명제들 앞에서 어떤 궤변들, 어떤 고집불통의 편견들이 버틸 수 있으랴.

첫째, 개별적 〈점유possession〉[35]는 사회생활의 조건이다. 소유propriété의 5,000년 역사가 그것을 증명해 준다. 즉, 소유는 사회의 자살이다. 점유는 권리와 양립할 수 있으나 소유는 권리와 대립한다. 점유를 보존하고 소유를 제거하자. 이와 같은 원리의 변경에 의해서만 당신은 법률, 정부, 경제, 제도들에서 모든 것을 바꿀 수 있을 것이다. 당신은 이 땅에서 악을 내몰 수 있을 것이다.

둘째, 선점권droit d'occuper은 만인에게 평등하기 때문에, 점유는 점유자의 수에 따라 달라진다. 소유는 성립할 수 없다.

셋째, 노동의 결실 역시 만인에게 동일하기 때문에, 소유는 외부의 착취에 의해 그리고 임대료에 의해 상실된다.

넷째, 인간의 노동은 필연적으로 집합적 힘의 소산이기 때문에, 일체의 소유는 바로 똑같은 이유에서 집합적이 되며 분할될 수 없다. 정확히 말하자면, 노동은 소유를 파괴한다.

다섯째, 노동 능력은 노동 구도와 마찬가지로 축적된 자본이자 집합적 재산이기 때문에, 능력의 불평등을 구실로 삼은 보수와 기회의 불평등은 불의이며 도둑질이다.

여섯째, 상거래는 계약 당사자들의 자유와 교환되는 생산물들의 등가성을 그 필요조건으로 한다. 그런데 가치는 개개 생산물에 들어간 시간과 비용의 총화로 표현되는 것이고 자유는 절대 침해될 수 없는 것이기 때문에, 노동자들은 권리와 의무에서 평등하듯이 임금에서도 필연적으로 평등해야 한다.

일곱째, 생산물은 생산물에 의해서만 구매된다. 그런데 모든 교환의 조건은 생산물의 등가성이기 때문에, 이익은 불가능하고 부당하다. 경제의 가장 기본적인 이 원칙을 준수하라. 그러면 빈곤, 사치, 압제, 악덕, 범죄 등이 배고픔과 더불어 우리에게서 사라질 것이다.

여덟째, 인간들은 자신들의 완전한 동의에 의해서 결합하기에 앞서서 생산의 물리적, 수학적 법칙에 의해서 결합하고 있다. 따라서 조건들의 평등은 정의, 즉 사회의 법이자 공식적인 법인 반면에, 존중, 우정, 인정, 찬미 따위는 〈형평〉의 또는 〈비례〉의 법으로 귀착한다.

아홉째, 자유로운 결사, 즉 생산수단의 평등과 등가 교환에 한정하는 자유야말로 가능한 유일한 사회 형태, 정의롭고 참된 유일한 사회 형태이다.

열째, 정치학은 자유의 과학이다. 인간에 의한 인간의 통치는 어떤 이름으로 장식하더라도 압제일 뿐이다. 사회의 가장 완벽한 모습은 질서와 아나키의 결합에서 발견된다.

케케묵은 문명의 종말이 다가왔다. 새로운 태양 아래서 지표면도 새로워질 것이다. 한 세대가 사멸하도록 내버려두자. 노쇠한 독직자들이 사막에서 죽도록 내버려두자. 거룩한 대지가 그들의 뼈를 덮지는 않으리라. 세기의 부패에 격분하고 정의의 열정에 목마른 젊은이여, 만일 그대가 조국을 사랑한다면, 만일 그대가 인류의 행복을 염려한다면, 자유의 대의를 과감히 껴안아라. 그대의 낡은 이기심을 벗어던지고 갓 태어난 평등의 도저한 물결에 몸을 맡기라. 그 물결에 잠긴 그대의 영혼은 지금껏 몰랐던 정기와 활력을 얻으리라. 그대의 유약해진 천성은 억누를 길 없는 활력을 얻으리라. 이미 시들어버린 그대의 마음은 아마도 다시 젊어지리라. 맑아진 그대의 눈앞에서 모든 것이 면모를 일신할 것이다. 새로운 감정들이 그대에게서 새로운 관념들을 낳을 것이며, 종교, 도덕, 시, 예술, 언어 등이 더 장대하고 더 아름다운 모습으로 그대에게 나타날 것이다. 그러면 그대는 그대의 신념을 확신하고 심사숙고 끝에 더욱 열정적이 되어 보편적 갱생의 여명을 맞이하게 될 것이다.

그대, 사악한 법률의 슬픈 희생자, 빈정거리는 세상에 의해 헐벗고 두드려 맞은 그대, 결실 없는 노동과 희망 없는 휴식에 지친 그대여, 용기를 잃지 말라. 그대의 눈물은 보상을 받으리라. 아버지들이 고통 속에서 씨를 뿌렸으니, 아들들이 환희 속에서 그것을 거두리라.

아아, 자유의 신이여! 평등의 신이여! 내가 이성에 의해 깨닫기 전에 이미 나의 마음속에 정의의 감정을 심어준 신이여, 나의 간절한 기도를 들어주소서. 내가 지금껏 써내려온 것을 내게 불러준 이가 바로 당신이오. 당신은 나의 사상을 만들어주고 나의 연구를 지도하였으며, 나의 정신을 호기심에서, 나의 마음을 집착에서 벗어나게 해주었소이다. 그것은 내가 주인과 노예 앞에 당신의 진리를 널리 펼치게 하기 위함이 아니었습니까. 나는 당신이 준 힘과 재능에 의해 말했을 따름입니다. 당신의 작업을 완수하는 것은 바로 당신의 몫입니다. 당시는 내가 나의 이익을 추구하는지 아니면 당신의 영광을 추구하는지 알고 있습니다. 아아, 자유의 신이여! 아아! 나에 대한 세상의 기억을 지워주소서. 인류가 자유롭기만 바랄 따름입니다. 마침내 깨우친 인민을 그저 나의 희미한 그림자 속에서 볼 수 있게 해주소서. 고귀한 교육자들이 인민을 계도하게 하소서. 사심 없는 마음이 인민을 인도하게 하소서. 가능한 만큼 우리의 시련의 시간을 줄여주시고, 오만과 탐욕은 평등 속에 묻어 버리소서. 우리를 예종 속에 가두어놓는 이 영예에 대한 허망한 욕구를 꺾어 버리소서. 이 가련한 자녀들에게 자유 속에는 어떤 위인도 영웅도 없다는 것을 알려주소서. 권세자에게, 부자에게, 그리고 내가 당신 앞에서는 절대 그 이름을 부르지 않을 자들에게 그들의 탐욕이 가져올 공포를 일깨우소서. 그들이 앞을 다투어 회개하게 이끄시고 남보다 먼저 뉘우치는 자를 용서하소서. 그러면 위대한 자든 미천한 자든 박식한 자든 무지한 자든 부자든 가난한 자든 이루 말할 수 없는 우애 속에 맺어질 것이며, 모두 함께 새로운 찬가를 부르면서 당신의 제단을 세울 것입니다. 자유의 신이여, 평등의 신이여!


자크는 죽으면서 두 아들 피에르와 장을 재산상속자로 남겼다. 자크의 재산은 이 둘에게 동등하게 배분되었다. 그러나 피에르는 딸을 하나만 둔 반면, 그의 형제인 장은 아들 여섯을 두었다. 평등의 원리와 상속의 원리에 동시에 충실하고자 한다면, 피에르와 장의 자녀들이 두 사람의 유산을 일곱 등분해야만 할 것이 명백하다. 그렇지 않으면, 외부 사람이 피에르의 딸과 결혼할 경우 그로 인해 조부 자크의 재산의 절반이 다른 집안으로 넘어갈 것이기 때문이다. 이는 상속의 원리에 어긋나는 일이다. 게다가 장의 자식들은 여럿이다 보니 가난한 반면에, 피에르의 딸은 혼자인 덕분에 부자이다. 이는 평등의 원리에 어긋나는 일이다. 겉으로는 상반되어 보이는 이 두 가지의 원리를 결합시켜 폭넓게 적용해 보자. 그러면 사람들은, 오늘날 제대로 잘 알지도 못하면서 공격하고 있는 이 상속권이 평등의 유지에 전혀 걸림돌이 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닫게 될 것이다.

우리가 어떤 정부 아래서 살든지 간에, 〈죽은 자가 산 자를 붙잡는다〉라는 말, 즉 인정된 상속자가 누구이든 간에 유산과 상속은 늘 존재하리라는 것은 언제나 진실이다. 그러나 생시몽주의자들은 상속인이 사법관에 의해 지명되길 바란다. 다른 이들은, 자연의 의지가 평등의 법칙 테두리 안에서 구현되어야 한다는 취지에서, 상속인이 죽은 자에 의해서 선택되고 법률에 의해서 추인되길 원한다. 오늘날, 실제로 상속을 통제하는 것은 우연이거나 변덕이다. 그런데 입법 분야에서 우연이나 변덕이 규칙인 양 받아들여질 수는 없는 일이다. 자연이 우리를 평등하게 만든 후에 우리에게 상속의 원리를 제안한 것은 바로 우연이 가져오는 끝없는 혼란을 피하기 위해서이다. 이는 사회가 우리에게 우리 형제들 중에서 우리의 일을 이루기에 가장 유능한 이를 선택하도록 권면하는 목소리와 같은 것이다.

아킬레우스와 아작스는 서로 결합되어 있는가, 그렇지 않은가? 모든 문제는 여기에 달려 있다. 만일 이들이 서로 결합되어 있기는커녕, 둘 다 아가멤논에게 돈으로 고용되어 있다면, 아리스토텔레스의 규정에는 어떠한 이의도 제기도리 수 없다. 노예를 부리는 주인은 두 배의 충성을 바칠 노예에게 두 배의 술값을 약속할 수 있을 것이니 말이다. 전제정의 법칙, 예종의 법칙이 바로 이것이다. 그러나 아킬레우스와 아작스가 서로 결합되어 있다면, 그들은 평등하다. 아킬레우스가 4명의 힘을 가지고 있고, 아작스가 2명의 힘을 가지고 있다고 한들, 그것이 무슨 문제인가! 아작스는 자신은 늘 자유롭다고 답할 것이며, 또 아킬레우스가 4명의 힘을 가지고 있으면 5명이 그를 죽일 것이며 결국 몸으로 충성을 바치는 데는 그도 아킬레우스만큼 위험을 무릅쓴다고 답할 것이다. 동일한 추론을 테르시토스에게도 적용할 수 있다. 만일 그가 싸움을 모르면, 요리사나 보급병이나 술 창고 관리인을 시키면 된다. 만일 그가 전혀 쓸모가 없다면, 병원에 집어넣으면 된다. 어떤 경우라도 그에게 폭행을 가하거나 법을 강제할 수는 없는 일이다.

인간에게는 두 가지 가능한 상태만이 있다. 즉 사회 안에 있거나 아니면 사회 밖에 있거나이다. 사회 안에서 조건들은 각자가 도달할 수 있는 존중과 평가의 정도가 다를 뿐 필연적으로 평등하다. 사회 밖에서 인간은 착취의 대상이고 자본화된 도구이며 때로는 불편하고 쓸모없는 가구이다.

여성의 권리와 여성의 남성에 대한 관계는 여전히 규정되어야 할 문제이다. 혼인법은 민법과 마찬가지로 아직 미완성이다.

아일랜드가 빠져든 빈궁의 가장 중요한 원인들 중 하나는 국교회 성직자들의 막대한 수입이었다. 이렇게 이교도든, 정교파든, 개신교든, 교황파든, 누구도 서로를 비난할 근거가 없다. 모두가 마찬가지로 정의에서 길을 잃었으며, 모두가 십계명의 여덟 번째 계율(〈도둑질하지 말라〉)을 무시했던 것이다.

[1] 다음에 게재한 편지는 이 연구논문 초판의 서문 역할을 한다.

[2] P.-J.Proudhon, 『문법적 범주들에 대한 연구』, 고고문헌학 아카데미에서 호평을 얻은 글, 1839년 5월 4일, 미간행.

[3] P.-J.Proudhon, 『일요 예배의 효용에 대하여』, Besançon, 1839: 제2판, Paris, 1841.

[4] Charron, 『지혜에 대하여』, 제18장.

[5] 법무장관 비비앵Vivien 씨는 『소유에 관한 연구』에 대한 기소를 명하기 전에 블랑키 씨의 의견을 얻고자 했다. 이미 검사국의 격노를 산 이 저작을 법무장관이 그냥 넘어간 것은 이 존경할 만한 아카데미 회원의 진술 덕이었다. 비비앵 씨가 책이 처음 출판된 이후 내가 도움과 보호를 받은 유일한 권력자였던 것은 아니다. 그러나 이러한 관용은 정계에서는 아주 드문 일이니만큼 사람들은 그것에 정중하고 한없이 감사하는 것이다. 나로서는 어떤 단체들의 비겁과 위선이 단지 그 단체들을 지배하는 사람들의 정신에서 유래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나쁜 제도는 나쁜 행정관을 만들기 마련이라고 늘 생각해 왔다. 예컨대, 아카데미들은 그 안에서 빛을 발하는 덕망가와 재사들에도 불구하고 왜 일반적으로 지적 탄압과 어리석음과 비열한 음모의 온상인가? 이 문제는 아마도 아카데미가 한번쯤 거론해 볼 가치가 있을 것이다. 응모자들이 있을 것이다.

[6] 그리스어로 Sheptikos, 즉 진리의 탐구를 직업으로 삼는 철학자를 말한다.

[7] 종교, 법률, 결혼은 자유인들의 특전이었으며, 애초에는 귀족들만의 특전이었다. 명문씨족의 신들Dii majorum gentium이나 만민법jus gentium, 즉 가문 또는 귀족들의 법이 바로 그것이다. 노예와 평민은 가문을 형성하지 못했다. 그들의 자식들은 동물의 새끼처럼 취급되었다. 그들은 〈짐승〉으로 태어나서 〈짐승〉으로 살아야만 했다.

[8] 행정부의 수반이 책임을 진다면, 대의원들도 역시 책임을 져야만 한다. 이러한 발상이 아무에게도 떠오르지 않았다니 놀라운 일이다. 이는 흥미로운 논문의 주제가 될 것이다. 그러나 나는 누구에게도 이 논문을 제출하지 않을 것이다. 인민은 여전히 웬만한 논리학자 뺨치는 터라 내가 이들에게 결론을 도출할 자료를 제공할 필요조차 없으니 말이다.

[9] 토크빌Tocqueville의 『미국의 민주주의』와 미셸 슈발리에Michel Cheva-lier의 『북아메리카에 대한 단상』을 보라. 플루타크가 쓴 『페리클레스의 생애』에 따르면, 아테네에서 어엿한 사람들은 자신이 참주정을 바라는 것처럼 보이지나 않을까 두려워한 나머지, 학문에 몰두하는 일로 도피처를 삼지 않을 수 없었다고 한다.

[10] 툴리에Toullier에 의하면, 〈주권이란 인간의 전능성全能性이다〉. 이것은 유물론적 정의定義이다. 만일 주권이 그 무엇이라면, 그것은 〈힘〉이나 〈능력〉이 아니라 〈권리〉이다. 그러면 인간의 전능성이란 무엇인가?

[11] 바로 여기에서 우리 조상들의 단순함이 있는 그대로 드러난다. 우리 조상들은 친자식이 없을 경우 사촌형제들로 하여금 유산을 상속하게 했다. 그러나 한 가문 안에서 부와 가난의 양극단을 피하기 위해서 바로 이 사촌들을 이용해서 서로 다른 두 가계 사이에 유산을 균등하게 나누는 데까지는 생각이 미치지 못했다. 예를 들어보자.

[12] 지라드Girad, 『로마인의 소유권에 대한 연구』

[13] précaire는 precor, 즉 〈나는 간청한다〉라는 말에서 나왔다. 왜냐하면 양도 문서는 영주가 자신이 부리는 사람들 즉 농노의 간청에 따라 경작을 허락했다는 사실을 명시했기 때문이다.

[14] 생시몽에 따르자면, 생시몽파의 사제는 로마 교회에서 본뜬 교황의 무오류성에 의거해서 각인의 능력을 판정해야만 했다. 푸리에에 따르자면, 서열과 공적은 입헌제도를 본뜬 표결과 선출에 의해 정해질 것이다. 이 위대한 인물은 명백히 독자를 우롱했다. 그는 비밀을 털어놓지 않았던 것이다.

[15] 나는 여기서, 조건들의 불평등을 정당화하기 위해 사람들이 어떤 식으로 굳이 특정인의 성향과 재능의 천박함을 들먹거리는지를 떠올리지는 않겠다. 우리가 많은 사람들에게서 찾아 볼 수 있는, 이 마음과 정신의 수치스러운 비속성은, 소유로 말미암아 그들이 내던져진 빈곤과 비천에서가 아니라면 어디에서 오겠는가? 인간성을 거세하는 것은 바로 소유이다. 그런데 바로 이 소유가 인간을 메마른 고목이요, 열매 맺지 못하는 수목이라고 비난하고 있는 것이다.

[16] 철학 교수 한 명에게 봉급을 지불하는 데 얼마나 많은 시민이 필요한가? 3,500만 명이다. 경제학자 한 명에게는? 20억 명이다. 그러면 학자도 예술가도 철학자도 경제학자도 아닌, 그저 신변잡기 소설을 쓰는 글쟁이에게는? 한 사람도 필요치 않다.

[17] 푸리에는 정수整數를 분수分數로 곱해야만 했기 때문에 피승수(곱해지는 수)보다 훨씬 큰 값을 찾는 데 결코 실패하지 않았다고 말할 수 있다. 그는 조화로운 상태에서는 수은이 영도보다 높은 온도에서 굳을 것이라고 확신했다. 이것은 마치 조화론자들이 불붙는 얼음을 만들었다고 말하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나는 학식이 깊은 어떤 푸리에주의자에게 이러한 물리학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물은 적이 있다. 〈나는 잘 모른다. 하지만 나는 믿는다〉고 그는 내게 대답했다. 그런데 바로 이 사람은 화체설présence réelle(로마 가톨릭에서 성체성사 중 빵과 포도주가 예수의 몸과 피로 변한다고 하는 믿음-편집자 주)을 믿지 않았다.

[18] 오나니즘과 마스터베이션의 차이는 물론 후자는 혼자 하는 행위이고 전자는 둘이, 즉 남녀가 하는 행위라는 것이다. 더구나 요즘 남편들은 남성적 쾌락의 하나로 추잡한 오나니즘을 즐긴다.(Hoc inter se differunt onanismus et manuspratio, nempe quod haec a solitario exercetur, ille autem a duobus reciprocatur, masculo scilicer et faemina. Porro foedam hanc onanismi venerem ludentes uxoria mariti habent nunc omnium suavissimam)

[19] 중혼, 즉 일처다부제.

[20] 최근에 영국에서 맬서스의 제자라고 자처하는 어떤 저자가 한 소책자에서 유아 살해를 공개적으로 요구하고 나섰다. 그는 법률이 정한 수보다 자식이 많은 가족의 경우, 〈유아 살해의 연례행사〉를 제의했다. 그리고 그는 남아도는 유아들을 특별히 매장하기 위해 조각상, 정원, 분수, 화단 등으로 장식된 웅대한 묘지를 만들자고 주장했다. 어머니들은 이 지복의 장소를 찾아가 어린 천사들의 명복을 빌고 위안을 얻고 나면 곧 집에 돌아와 딴 아이를 낳고 또 그곳에 보내게 될 것이다.

[21] 영국 정부의 재정 상태가 1월 23일의 상원 회의에서 백일하게 드러났다. 재정 상태는 건전하지 못했다. 몇 년 전부터 세출이 세입을 초과했으며, 내각은 해마다 신규 차관을 도입함으로써 겨우 균형을 회복했다. 1838년과 1839년에 공식적으로 확인된 적자만 2,250만 프랑에 달했다. 1840년에는 세출이 세입을 2,250만 프랑 정도 초과할 것으로 예상된다. 이 수치를 제출한 것은 리폰Ripon 경이다. 멜버른Melbourne 경은 그에게 이렇게 답했다. 〈고결한 백작께서 공공 지출이 줄곧 늘어난다고 언명한 것은 유감스럽게도 옳은 지적입니다. 그리고 나도 백작과 마찬가지로 이 지출에 어떤 절약 방안이나 치유책이 있으리라고 ‘희망할 만한 여지가 없다’고 말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나시오날National」, 1840년 1월 26일자)

[22] 이웃에게 친절을 베푼다는 것은 히브리어로 〈정의를 행한다〉, 그리스어로 〈측은히 여긴다〉(élémosinen, 여기서 프랑스어 aumône이 나왔다), 라틴어로 〈사랑 또는 자비를 행한다〉, 프랑스어로 〈자선을 베푼다〉라는 말에 해당한다. 이 여러 가지 표현을 통해 원래의 의미가 조금씩 줄어드는 것을 볼 수 있다. 처음에는 의무를, 두 번째는 단지 동정을, 세 번째는 애정, 즉 의무의 문제가 아니라 선택의 문제를, 네 번째는 선의의 기쁨을 나타낸다.

[23] 여기서 형평이라는 말은 라틴인들이 〈후마니타스humanitas〉라고 부르는 것, 즉 인간에게 고유한 종류의 사회성을 의미한다. 〈휴머니티humanité〉는 모두에게 온화하고 상냥한 것으로 상처를 입히지 않고 지위들, 미덕들, 능력들을 구별할 줄 안다. 그것은 사회적 공감 및 보편적 사랑을 나타내는 분배적 정의이다.

[24] 〈적에게서 빼앗은 전리품 12개를 아킬레우스와 아작스에게 나누어 주거나 분배해야만 했다고 가정해보자. 만일 두 사람이 평등했다면, 전리품 역시 산술적으로 평등했을 것이다. 즉 아킬레우스가 6개, 아작스가 6개를 가졌을 것이다. 그런데 만일 이 산술적인 평등에 따른다면, 테르시토스 역시 아킬레우스와 대등한 몫을 받을 것이다. 이는 더없이 부당하고 괘씸한 일이리라. 그러면 이러한 불공정을 피하기 위해 사람들의 가치를 비교하고 그 가치에 따라 할당된 몫을 준다고 하자. 즉 아킬레우스가 아작스보다 두 배의 가치가 나간다고 하면 아킬레우스의 몫은 8, 아작스의 몫은 4가 될 것이다. 여기에 산술적인 평등이 아니라 비례적인 평등이 존재한다. 아리스토텔레스가 분배적 정의라고 부른 것은 바로 이러한 공훈의 비교rationum이다. 그것은 기하학적 비율에 의해 결정된다.〉(툴리에, 『법령별 프랑스 법』).

[25] 남녀간에는 사랑, 정념, 습관의 유대 등, 원하는 모든 것이 존재할 수 있으나 진실로 사회는 존재하지 않는다. 남자와 여자는 동료를 이루지 않는다. 남자와 여자 사이에 성별의 차이는 종의 차이에 의해 동물들 사이에 생기는 것과 같은 자연적 차이를 낳는다. 따라서 나는 오늘날 여성 해방이라 불리는 것에 갈채를 보내기는커녕, 이러한 극단적이 일이 일어난다면, 차라리 여성을 가두어 버릴 것이다.

[26] 미슐레Michelet 씨는 콜레주-드-프랑스에서의 강연에서, 〈코시모 데 메디치Cosimo de Medici의 금고는 페렌체의 자유의 무덤이다〉라고 말했다.

[27] 언어의 기원의 문제는 프레데릭 퀴비에가 제시한 본능과 지능의 구별에 의해 해결된다. 언어는 결코 미리 계획된 자의적이거나 인습적인 고안물이 아니고, 의사소통이나 계시로 신에 의해 주어진 것이 아니다. 언어는, 벌집이 꿀벌의 본능적이고 무의식적인 창조물인 것처럼, 인간의 본능적이고 무의식적인 창조물이다. 이런 의미에서 언어는 인간의 이성의 소산이 아니므로 인간의 작품이 아니라고 말할 수 있다. 게다가 언어의 메커니즘은 거기서 성찰이 하는 역할이 적으면 적을수록 더욱 완벽하고 정교하게 보일 것이다. 이것은 문헌학에 의해 확립된 가장 진기하고 가장 확고부동한 사실들 중의 하나이다. 특히 베르그만F. G. Bergmann의 라틴어 논문(스트라스부르, 1839)을 보라. 여기서 박식한 저자는 발음의 맹아가 어떻게 감각에서 발생하는가, 언어가 어떻게 연속적인 세 단계를 거치며 발전하는가, 자신의 언어를 창조할 본능적인 능력을 가지고 태어난 인간이 어떻게 자신의 이성이 발달함에 따라 이 능력을 잃게 되었는가, 언어에 대한 연구가 어떻게 참된 박물학, 즉 하나의 과학이 될 수 있는가를 설명하고 있다. 오늘날 프랑스에는 남다른 재능과 깊은 철학을 지닌 일류 문헌학자들이 여럿 있다. 이 겸허한 학자들은 일반인에게는 거의 알려지지 않은 학문을 만들어 내고, 무시당하는 연구에 일생을 헌신하며, 다른 이들이 찬사를 원하는 만큼이나 아주 조심스럽게 찬사를 멀리하고 있는 듯이 보인다.

[28] 나의 권리, 그것은 나의 창이자 나의 방패이다. 브로사르Brossard 장군은 아킬레우스처럼 말했다. 〈나는 나의 창과 방패로 포도주와 황금과 여자를 얻었노라.〉(호라티우스의 『시문집Ars poetica』의 제122절에 실린 구절-옮긴이)

[29] 고리대 또는 혹자의 완곡한 표현에 따르자면 이자 대부를 논한 저술가들을 검토해 보는 것은 아주 흥미진진하고 유익한 일일 것이다. 신학자들은 항상 고리대와 싸워 왔다. 그러나 그들은 항상 토지와 가옥의 임대차는 정당하다고 인정해 온 바, 가옥의 임대차와 이자 대부는 명백히 같은 것이기 때문에, 그들은 미묘한 차이의 미로에 빠져서 결국은 고리대에 대해 어떻게 생각해야 좋을지 갈피를 못 잡게 되었다. 교회, 이 도덕의 아성은 자기 교의의 순수성을 그토록 자랑삼기는 했지만, 소유와 고리대의 진정한 성격에 대해서는 영겁의 무지에 빠져버렸다. 교회는 심지어 높으신 분들의 입을 빌어 정말 개탄할 오류들을 공표했다. 교황 베네딕토 14세는 〈차용은 결코 임대 계약과 동등하지 않다(Non potest mutuum locationi ullo pacto comparari)〉라고 말했다. 보쉬에Bossuet에 의하면, 〈지대의 설정은 하늘과 땅의 차이만큼이나 고리대에서 멀리 떨어져 있다〉. 이런 식의 생각들로 어떻게 이자 대부를 단죄할 수 있는가? 무엇보다도, 고리대를 정식으로 금하는 복음서를 어떻게 정당화할 수 있는가? 여기서 신학자들의 곤란은 극에 달한다. 이자 대부와 집세를 조리 있게 동일시하는 경제학의 논증들을 확실한 증거를 가지고 논박할 수 없었던 이들 신학자는 더 이상 굳이 이자 대부를 단죄하려 하지 않는다. 이들은, 복음서가 고리대를 금하고 있는 것을 보면 무엇인가 고리대와 같은 것이 있기는 있는 모양이라고 말하는 데 그친다. 그러면 정작 〈고리대란 무엇인가?〉 이들, 국민의 스승들이, 그들의 표현을 빌리자면 〈헛말을 했을 리 없는〉 복음서와 경제학적 논증들의 권위 사이에서 주춤거리는 것을 보는 것만큼 재미있는 일도 없다. 내가 보기에, 이른바 복음서 박사님들의 이 낡은 불충만큼 복음서에 더없는 영광을 가져다주는 것도 없으리라. 살마시우스Cl. Salmasius는 대부 이자와 임차 이윤을 동일시했으나, 곧 그로티우스, 푸펜도르프, 부를라마키Burlamaqui, 볼프Wolf, 하이네치우스Heineccius에 의해 〈논박당했다〉. 더 재미있는 사실은 살마시우스 스스로 〈자신의 오류를 인정했다〉는 점이다. 살마시우스의 이러한 동일시에 근거해서 일체의 불로수득은 부당하다고 결론짓는다거나 이에 바탕을 두고 복음서의 평등을 입증하려 나서기는커녕, 이들은 정반대되는 결론을 끌어냈다. 그것은, 누구나 인정하듯이 소작료와 집세가 허용되는 만큼 금전의 이자도 그와 다르지 않다고 인정한다면, 더 이상 고리대라 불릴 수 있는 것은 없으며, 따라서 우리는 조금도 불경함이 없이 예수 그리스도의 계율은 〈환영幻影〉이요 〈무無〉라고 말할 수 있다는 사실이다.

[30] 『사도행전』에는 〈나는 복음을 전하고, 복음으로써 산다〉라고 적혀 있다. 이 말은 그는 자신의 노동에 의해 산다는 뜻이다. 그런데 로마 가톨릭 사제들은 소유에 의해 살기를 더 좋아했다. 대지주이자 영주였던 수도원장과 주교들에 맞선 중세 자치 도시들의 투쟁은 잘 알려져 있다. 성직자의 불로수득을 옹호하려는 교황의 파문 사례도 마찬가지로 잘 알려져 있다. 오늘날에도 프랑스 성직자들의 공식 기구는 여전히 성직자의 보수는 임금이 아니라 원래 성직자의 소유였으나 1789년에 제3신분이 그들에게서 빼앗아간 재산에 대한 배상금이라고 주장한다. 성직자는 자신의 생계를 노동의 권리에서가 아니라 불로수득권에서 찾기를 원한다.

[31] 만일 이와 같은 생각이 언젠가 사람들의 머릿속에 침투해 들어간다면, 이는 대의정부나 연설가들의 폭압에 의해서일 것이다. 옛날에 과학, 생각, 말 등은 하나의 동일한 표현 속에 섞여 있었다. 즉, 생각과 학식이 깊은 사람을 가리키기 위해, 말이 빠르고 언변이 좋은 사람이라는 표현이 사용되었다. 그 후부터 말은 추상 작용에 의해 과학과 이성으로부터 떨어져 나갔다. 이러한 추상은, 논리학자들이 지적하듯이, 조금씩 사회에서 실현되었다. 그 결과, 오늘날 말을 아끼는 여러 부류의 학자들이 있는가 하면, 말의 과학에서는 전혀 학자라고 할 수 없는 언변가들이 있다. 그리하여 철학자는 이미 학자가 아니다. 그는 언변가이다. 입법자나 시인들은 옛날에는 학식이 깊고 숭고한 사람들이었다. 오늘날 이들은 언변가이다. 언변가는 소리 나는 초인종, 아주 가냘픈 마찰에도 끝없이 소리를 내는 종이다. 언변가에게서, 물 흐르는 듯한 담화는 언제나 사상의 빈곤과 정비례한다. 언변가들이 세상을 지배한다. 이들이 우리를 소스라치게 하고, 우리를 진력나게 하며, 우리를 강탈하고, 우리의 피를 빨고, 우리를 조롱한다. 학자들은 어떤가. 그들은 입을 다물고 있다. 그들이 한마디라도 하려 하면, 누군가 곧 말을 차단한다. 그들은 그저 쓰기만 하면 되는 것이다.

[32] libertas(자유), liberare(해방하다), libratio(해방), libra(저울, 리브르[화폐단위-옮긴이]), 이 모든 표현들의 어원은 동일하다. 자유란 권리와 의무를 균형 잡는 일이다. 인간을 자유롭게 한다는 것은 다른 사람들과 균형을 잡는 것, 즉 자신을 다른 사람들의 수준에 놓는 것이다.

[33] 「평등주의자l'Egalitaire」라는 제목으로 첫 호를 출판한 어느 월간지는 자기희생을 평등의 원리로 내세우고 있다. 이것은 온갖 개념들을 혼동시키는 일이다. 자기희생 그 자체는 최고도의 불평등을 전제로 한다. 자기희생에서 평등을 구하는 것은 평등이 자연에 반한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이니 말이다. 평등은 정의에, 엄밀한 권리에, 소유자 자신이 내세우는 원리들에 토대를 두어야만 한다. 그렇지 않으면 평등은 존재할 수 없을 것이다. 자기희생은 정의보다 우월하다. 그것은 법으로 강제될 수 없으니, 자기희생이란 그 성격상 보상이 없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물론, 모든 사람들이 자기희생의 필요성을 인정하는 것은 바람직한 일이며, 「평등주의자」의 생각은 아주 좋은 모범이다. 그러나 불행히도 자기희생은 아무것에도 이르지 못한다. 사실, 〈나는 희생하길 원치 않소〉라고 당신에게 말하는 자에게 무어라고 대답하겠는가? 그를 강제해야 할 것인가? 자기희생이 강제로 이루어질 때, 그것은 억압, 예종, 인간에 의한 인간의 착취라 불린다. 프롤레타리아들이 소유에게 자기를 희생한다는 것은 바로 이러한 의미에서이다.

[34] 내가 보기에 현대의 모든 사회주의자들 중에서 푸리에의 사도들이 오래 전부터 가장 앞서 나가는 자들이며 사회주의라는 이름에 값하는 거의 유일한 자들인 듯하다. 만일 그들이 자신들의 과업을 이해했더라면, 만일 그들이 인민에게 호소할 줄을 알고, 공감을 일깨울 줄 알며, 모르는 것에 대해서는 입을 다물 줄 알았다면, 만일 그들이 좀 덜 오만한 주장을 내세우고 공적 이성에 대해 좀 더 많은 존중심을 보여주었다면, 아마도 그들 덕에 개혁이 시작될 수 있었으리라. 그러나 그토록 결연한 이 개혁가들이 어떻게 권력과 풍요 앞에, 즉 더욱 반反 개혁적인 것 앞에 줄곧 무릎을 꿇은 것일까? 이 이성의 세기에 그들이 어떻게 세계가 신화나 우화에 의해서가 아니라 〈논증적 이성〉에 의해 변혁된다는 것을 이해하지 못했을까? 문명의 화해할 수 없는 적인 그들이 어떻게 문명이 낳은 가장 불길한 소산, 즉 소유, 재산 및 서열의 불평등, 폭음폭식, 축첩, 매음, 요술, 잡술, 주술 등등을 문명에게서 빌려온 것일까? 도덕, 형이상학, 심리학 등 그들조차 이해하지 못하는 과학들이 바로 그들의 체계 그 자체를 이루고 있는 마당에, 왜 그들은 이 과학들에 대해 비난을 늘어놓는가? 명칭밖에 모르는 많은 사물들에 대해 억측을 늘어놓는 것이 주된 공적일 뿐인 한 인물을 더 이상 기묘할 수 없는 말로 신격화하는 이 기벽은 어디서 나오는 것일까? 어떤 한 인물의 무오류성을 인정하는 자는 누구든지 그것으로 인해서 다른 사람들을 가르칠 수 없게 된다. 이성을 포기하는 자는 누구든지 곧 자유로운 탐구를 스스로 삼가게 된다. 팔랑스테르주의자들은 만일 힘이 있었다면 실패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그들이 이성적으로 추론하고 방법을 세워 추진하고 우리에게 계시가 아닌 논증을 제시해 주길 바랄 따름이다. 그러면 우리는 기꺼이 귀를 기울일 것이다. 그들이 공업, 농업, 상업을 조직하고, 노동을 매력적인 것으로 만들고, 가장 미천한 직분도 고귀한 것으로 만들기를 바랄 따름이다. 그러면 우리의 갈채는 그들의 몫이 될 것이다. 마지막으로, 그들에게 신자요 사도로서보다는 사기꾼이자 얼치기로서의 인상을 심어주는 이 계시론에서 그들 스스로 벗어나길 바랄 따름이다.

[35] 개별적 점유는 결코 대규모 경작이나 경작의 단일화에 장애가 되지 않는다. 내가 토지 세분화에 따른 애로사항을 말하지 않는 것은 누구나 다 알고 있을 사실을 다른 이들이 이미 다 말하고 난 뒤에 굳이 반복할 필요가 없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그러나 나는, 빈곤이 영세 경작에서 나온다고 그토록 멋지게 주장해 온 경제학자들이 그 근원이 온전히 소유에 있다는 것을 알아차리지 못했다는 사실에, 특히 그들의 토지 동산화 계획이 소유의 폐지의 시작이라는 것을 알아차리지 못했다는 데에 그저 놀랄 따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