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아나키즘의 기원

‘아나키’라는 관념은 어떤 과학적 연구에서 나온 것도 아니고 어떤 철학체계에서 나온 것도 또한 아니다. 사회과학은 지금도 아직 물리학이나 화학처럼 정확성을 가지기에 이르지 못하고 있다. 풍토나 기후의 연구에 있어서 조차 1개월 또는 1주일 뒤에 어떤 날씨가 될지 미리 말할 수 없는 형편이다. 하물며 사회학과 같은 미숙한 학문을 가지고 바람이나 비 따위 보다 무한히 복잡한 사물을 다루어 장래에 일어날 사태를 과학적으로 예측할 수 있는 것처럼 주장한다는 것은 어리석은 짓이라 하겠다. 우리는 과학자 역시 보통 인간에 불과하다는 것, 그들이 대부분 상류계급에 속해 있다는 것, 따라서 그 계급의 편견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는 것, 더욱이 그들이 대부분 국가의 봉급을 받고 있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 그러니까 ‘아나키’란 관념이 대학에서 나오지 않았다는 것은 아주 명백하다.

사회주의 일반과 마찬가지로, 또한 다른 어느 사회운동과도 마찬가지로 아나키즘은 민중 속에 기원起源을 갖고 있다. 그래서 민중의 운동으로 전개되는 한에서만 그것은 활력과 창조력을 발휘한다.

예로부터 인간사회의 내부에는 사상과 행동의 두 개의 조류가 서로 싸워 왔다. 한편으로 대중 또는 민중은 자기네의 생활방식에 따라 사회적 생활을 가능케 하기 위하여, 평화를 유지하기 위하여, 분쟁을 조정하기 위하여, 그리고 또 협력을 요하는 온갖 상황 아래 상호부조를 실행하기 위하여, 필요한 숱한 제도를 만들어 내었다. 미개인 부락의 풍속, 습관, 촌락공동체, 그 후는 중세기 도시들의 산업길드, 이들의 도시 상호간의 관계를 조정하기 위하여 만들어낸 국제법의 기본원리들과 기타 허다한 제도는 법률에 의하여 생긴 것이 아니라 대중의 창조적 정신에 의하여 형성되고 발달하여 왔다.

다른 한편, 어느 시대에나 마법사, 요술사 , 기우사祈雨師, 예언자, 승려, 신관神官 등이 있었다. 그들은 자연에 대한 지식의 최초의 소유자였다. 또한 각종 종교적 예배(태양 숭배, 자연력 숭배, 조상 숭배 등등)를 처음으로 만들어 내었다. 동시에 각 종족간의 연결을 확보하기 위한 각종의 의식을 창조했다.

이 시대에는 자연연구(천문학, 천기 예보, 의학 등)의 최초의 맹아萌芽는 여러 가지 의식과 예배에 표현된 온갖 미신과 불가분하게 결부되고 있었다. 예술이나 기예技藝도 또한 여기에 기원을 갖고 있으며, 연구와 함께한 미신에서 발생했다. 그리고 이것들은 모두 신비적인 형식으로 정식화定式化되어 비전秘傳 전수자에게만 전하여지고 민중의 손에 닿지 않도록 신중히 보존되고 있었다.

이들의 과학 및 종교의 최초의 대표자들과 병행하여, 켈트족의 음유시인吟遊詩人이나 아일랜드의 브레흔 또는 스칸디나비아 제 민족 간에 있던 법률 구술인들과 같이 의견대립이나 불화가 발생하는 경우 누구나 그 재결裁決을 받지 않으면 안 되는, 전통과 인습의 전승자로 간주되던 사람들이 있었다. 그들은 법을 자기의 기억 속에 보존했다(때로는 기호記號의 도움을 빌려 보존했으니, 그것이 본래 문학의 시초였다). 그리하여 충돌이 발생하는 경우 그들은 중재자 역할을 담당했다.

끝으로 전투단의 임시 지휘자가 있었다. 그들은 전쟁에 승리하는 마법의 비밀을 지니고 있다고 믿어졌다. 그들은 무기에 바르는 독약의 비방秘方, 기타 군사적 비밀을 쥐고 있었다.

이 3종의 인간은 자고로 상호간에 비밀조직을 구성하여 그 전문지식의 비법을 보존함과 함께(장기간에 걸친 고통스런 습득에 의하여) 다음 세대로 전승했다. 가끔 그들 사이에 내분이 있을 때도 있으나 결국 서로 협력을 한다. 다시 말하면 그들은 대중을 지배하고 복종시키고 통치하고, 그리고 자기네를 위하여 부려먹기 위하여 서로 굳게 단결하고, 결속하고, 지원해 왔다.

두 말 할 것도 없이 아나키즘은 이러한 두 조류 중의 첫째에 속한다. 즉 소수 지배자에 대항하여 자기네를 옹호하기 위하여 관습법적 제도를 만들어낸 대중의 창조적, 건설적 힘을 대표한다. 다름 아닌 이 대중의 창조력과 현대과학과 기술의 힘에 바탕을 둔 민중의 건설 활동에 의거하여 아나키즘은 오늘날 사회의 자유로운 발달을 보증하는데 필요불가결한 제도를 만들어내고자 한다. 아나키즘이 대항하려고 하는 것은, 가혹한 규율을 갖고 민중 위에 군림하여 권력을 행사하려고 하는 소수의 통치자에 의한 입법에 모든 희망을 걸고 있는 사람들의 활동이다.

이 의미에서 우리는 어느 시대에나 아나키스트와 국가주의자가 대립하여 있었다고 말할 수 있다.

뿐만 아니라 우리는 또, 어느 시대에나 모든 제도가 본래는 평등, 평화 및 상호부조를 유지하기 위하여 만들어진 최선의 제도조차도 노화함에 따라 고정화한다는 사실을 발견한다. 이들의 제도는 그 본래의 목적을 망각하고 소수 야심가의 지배하에 귀속하여 점차 일층 더 사회가 발달하는 길을 가로막는 장애물로 변하고 만다. 그럴 적에 다소간에 고립한 개인들은 이러한 제도에 반역하게 된다. 불만을 품은 이런 사람들이 노화老化하여 억압적인 것으로 되고만 제도에 반역하여 그것을 대중의 이익에 맞도록 개혁하려고 시도한다. 특히 이러한 제도 위에 군림하여 그것을 그 지배하에 거두어들인 권력을 타도하려고 노력한다. 그런가 하면 다른 자들은 사회제도(부족, 촌락공동체, 길드 등등)로부터 이탈하여 오로지 그 밖에, 그리고 그 위에 서려고 하며, 사회의 다른 성원을 지배하여 그 희생을 발판으로 자기네의 부富를 구축하려고 기도한다.

무릇 정치적, 종교적, 경제적 개혁자는 이 두 가지 카테고리 중의 전자에 속하고 있다. 이들의 개혁자 중에는 언제나 다음과 같은 형의 인물이 있었다. 즉 그 동포의 모두가, 아니 그 소수자마저 같은 견해에 물들기를 기다리지 않고 자진하여 압제에 반역하고 나서서, 다소라도 많은 군중을 조직하기도 하나 따르는 군중이 없을 때는 단신으로 싸우기조차 주저하지 않는다. 어느 세상에나 이러한 형의 혁명가가 있었던 것이다.

그렇지만 혁명가 자신들도 두 가지 다른 방향을 대표하고 있었다. 그 한편은 사회의 내부에 발생한 권력에 대하여 반역하기는 했으나 이 권력을 근절하려 하지 않고 그것을 자기의 수중에 넣으려 했을 뿐이다. 노후화하여 억압적으로 된 권력 대신에 그들은 새로운 권력을 형성하려고 노력하고 그 권력의 소유자가 되려고 했다. 그들은 종종 선의로 이 새로운 권력이 민중의 이익을 희구하는 것이고, 민중의 진정한 대표자라고 약속했던 것이다. 하지만 이 약속은 얼마 안가서 반드시 그들이 망각하게 되거나 아니면 파기되거나 했다. 이리하여 로마에 있어서의 황제들의 권력, 그리스도교 등장 후 최초의 몇 세기 동안의 교회의 권력, 중세의 도시공화제 쇠망기에 있어서의 독재자들의 권력 등이 탄생하였다. 같은 조류는 봉건시대 말기에 있어서의 유럽의 왕권의 형성에 이바지 하는 바 컸다. ‘인민주의’의 황제 시저에 대한 신앙은 오늘에 이르기까지 아직 자취를 감추지 않고 있는 형편이다.

그러나 이러한 권위주의의 조류와 병행하여 기성제도를 재검토하려는 시기에는 다른 하나의 조류가 대두하고 있었다. 그리스의 옛날로부터 오늘에 이르도록 어느 시대에나 다음과 같은 개인과 사상과 행동의 조류가 있었다. 즉 그것은 한 권력을 다른 권력으로 바꿔놓는 것이 아니라 민중적 제도 위에 덮어씌워진 권력을 배제하고 그런 연후에 그 자리에다 다른 권력을 창설하려고 하지 않는 개인과 사상과 행동의 조류가 곧 그것이다. 그들은 개인과 민중과의 주권을 선언하고 민중적 제도를 이상異常비대한 권력으로부터 해방하려고 했다. 그들이 의도한 것은 대중의 집단적 정신에 완전한 자유를 부여하는 것이고, 또한 새로운 생활조건과 생존의 필요에 따라서 민중의 재능이 상호부조와 상호보호의 제도를 다시 한 번 자유로 개조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었다. 고대 그리스의 제 도시나, 특히 중세의 제 도시(피렌체, 프스코프 등)에서 이러한 투쟁의 많은 실례를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따라서 어느 시대에 있어서나 개혁자와 혁명가 중에는 한편으로 자코뱅주의자와 다른 편으로 아나키스트라는 두 종류의 사람들이 있었다고 말할 수 있겠다.

아나키스트적 성격의 인상을 띤 강력한 민중운동도 과거에 발생하고 있었다. 촌락이나 도시가 강권强權의 원리에 반항하여 봉기하고, 국가의 제 기관 및 재판소와 그 법률에 저항하여 인권의 절대권을 선언한 것이다. 그들은 일체의 성문법을 부인하고 각인이 자기의 양심에 바탕을 두고 스스로 다스려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들은 이와 같이 하여 평등과 완전한 자유와 노동의 원칙에 바탕을 둔 사회를 건설코자 했다. 아우구스투스 제帝의 치세 하에 로마의 법률, 로마의 국가, 당시의 도덕 또는 부도덕에 반대하여 유태에서 시작된 그리스도 교도의 운동에는 확실히 분명한 아나키스트적 요소가 있었다. 그런데 이 운동은 점차 고대 헤브라이 교회와 로마제국 자체를 모방하여 구성된 교회의 운동으로 타락해 갔다. 그 결과, 창립 당시에 간직했던 그리스도교의 아나키스트적 요소는 드디어 질식하고 그리스도교회에 로마적 형태가 가하여져 이윽고 권력, 국가, 노예제 및 억압의 지주로 타락하고 만 것이다. 그리스도교에 도입된 ‘기회주의’의 최초의 종자는 복음서와 사도행전 속에 벌써, 적어도 신약성서를 구성하는 이들의 문서의 편찬 속에 명백히 발견된다.

마찬가지로 또, 종교개혁을 발달시켜 그것을 도래케 한 저 16세기의 재세례파의 운동에도 극히 많은 아나키즘적 요소가 있었다. 허나 이 운동은 제후諸侯와 결탁하여 농민의 반란에 대항한 루터를 지도자로 한 종교개혁자들에 의해 분쇄되고 농민과 도시의 빈민들의 피비린내 나는 대학살에 의하여 탄압되고 말았다. 이리하여 우익 종교개혁자들은 점점 타락하여 마침내 자기의 양심과 국가와의 타협을 도모했으니, 이것이 바로 오늘의 프로테스탄티즘인 것이다.

요컨대 이렇게 해서 일반적으로 사회주의를 낳은 저 비판적 및 혁명적인 항의에서 아나키즘도 또한 탄생한 것이다. 헌데 일부의 사회주의자들은 자본을 부정하고 또 자본에 의한 노동의 예속에 바탕을 둔 사회기구를 부인할 뿐, 그 이상으로 나가지 않았다. 그들은 자본의 진짜 힘을 구성하는 것 - 즉 무엇보다도 우선, 권력과 자본의 존속을 위하여 만들어진 국가와 그 주요한 지주가 되는 권력의 중앙집권화, (항상 변함없이 소수자에 의하여 제정되고 소수자의 이익에 봉사하는) 법률 및 재판 등에 대하여 반항하지 않았다.

다른 한편 아나키스트는 이들의 제 제도의 비판만으로 만족하는 자가 아니었다. 그것은 단지 자본에 대해서 뿐만 아니라 자본주의의 지주支柱에 대해서도 감히 신성神聖을 모독하는 칼날을 세워 항거했다.

2. 18세기의 지적 운동

그러나 비록 아나키즘이 다른 모든 혁명적 조류와 같이 민중 속의 투쟁에서 발생한 것이지 학자의 연구실에서 나온 것은 아니라 할지라도, 그것이 오늘날 존재하는 각종의 과학적 철학적 사조思潮 속에서 어떤 지위를 차지하는가를 아는 것은 역시 중요하다. 아나키즘은 이들 각종 사조에 대하여 어떤 태도를 취하는가. 이들의 사조 중에 어느 것에 아나키즘은 주로 의거하려고 하는가. 또한 아나키즘은 자기의 결론을 기초하고 강화하기 위하여 어떠한 연구방법에 의존하려고 하는가. 바꿔 말하면 아나키즘은 어느 학파에 속하는가? 아나키즘은 근대과학의 어떤 조류와 가장 접근해 있는가?

사회주의자들의 서클 안에서 최근 보이고 있는 경제학적 형이상학에의 몰두에 비추어 볼 때 이것은 미상불 흥미 있는 문제다. 그래서 나는 되도록 간결하게 어려운 용어는 피할 수 있는 데까지 피하면서 이 문제에 대답해 보겠다.

19세기의 지적 운동은 18세기 중엽에서 말기에 걸친 영국 및 프랑스의 철학자들의 저작著作에 기원을 갖고 있다.

그 당시 시작된 사상의 고조는 모든 인간 지식을 하나의 전반적 체계 - 자연의 체계 속에 포함시키려는 소망을 갖고 이들의 사상가를 고무하고 있었다. 그들은 중세의 스콜라철학이나 형이상학을 모두 포기하고 대담하게도 전 자연 - 별의 세계, 태양계, 지구, 지구 표면의 식물, 동물 및 인간사회의 발달 -을 자연과학의 일관된 방법에 의하여 연구해야할 일련의 제 사실로서 내다보려고 했다.

참된 과학적 방법 - 즉 귀납?연역적 방법을 광범위하게 사용하면서 그들은 자연계에서 관찰되는 일체의 현상 - 그것이 별의 세계에 속하거나 동물계에 속하거나 -을 자연과학이 물리학의 문제를 다루는 것과 같은 방식으로 연구하려고 시도했다.

그들은 처음에 먼저 사실을 신중히 수집했다. 다음으로 이것을 일반화하려고 할 때, 그들은 귀납법으로 이를 수행했다. 그들은 일정한 가설을 세우기는 했지만, 그 가설에 대하여 다윈이 생존경쟁에 의한 신종의 기원에 관한 가설이나 멘데레프가 그 ‘주기율週期律’에 대하여 부여한 이상의 의미를 부여하지는 않았다. 그들은 가설을, 일시적 설명을 제공하고 사실을 수집하여 그 연구를 용이케 하기 위한 가정假定이라고 보았다. 그러나 그들은 이들의 가정이 다수의 사실에 적용되는지 어떤지를 검토하고 또한 연역적 방법에 의하여 확인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을 잊지 않았다. 이들의 가설이 이러한 검증에 붙여져 그것들이 표현하는 상호간의 항상적恒常的 관계의 원인이 밝혀지기까지는 ‘법칙’(증명된 일반화)이라 생각되는 일은 없었다.

18세기의 철학운동의 중심이 잉글랜드와 스코틀랜드에서 프랑스로 옮겨진 때, 프랑스의 철학자들은 그들에 고유한 체계구성에 대한 열정을 갖고 자연과학도 역사과학도 모든 인간지식을 보편적 계획에 의하여 동일의 원리 위에 건설하기 시작했다. 그들은 보편적 지식을 - 즉 전 우주와 그 생활의 철학을 엄밀히 과학적 형태로 구성하려고 노력했다. 그들은 그럴 적에, 전 시대의 철학자들이 구축한 일체의 형이상학적 구성을 포기하고 지구의 기원과 발달을 만족스럽게 설명할 수 있다고 생각된 물리적(즉 역학적) 제력諸力의 운동에 의하여 모든 현상을 해명하려고 했다.

나폴레옹 1세가 라프라스를 향하여 그의 「우주체계론」에는 어디에도 신의 이름이 언급되어 있지 않다는 것을 지적했을 때 라프라스는 “나는 그러한 가설의 필요를 느끼지 않습니다.”라고 대답했다는 것이다. 그런데 라프라스는 그것만을 한 것은 아니었다. 그는 또 현상의 불가해성不可解性, 또는 애매하고 어중간한 현상 파악 및 제 사실을 계산할 수 있는 양으로써 구체적 형식으로 고찰하는 능력의 결여를 배후에 숨기고 있는 저 허장성세의 형이상학적 미사여구에 호소하려 하지를 않았다. 라프라스는 조물주라는 가설과 함께 형이상학도 폐기한 것이다. 그러면서도 그의 「우주체계론」은 조금도 수학적 계산을 포함하지 않고도 교육받은 독자면 누구나 알만한 말로 쓰여 있었는데 수학자들은 후일 이 책에 서술된 개개의 사상을 정확히 수학방정식으로, 즉 계산될 수 있는 양의 상호간의 관계로 표현할 수 있었던 것이다. 라프라스는 그만큼 정확히 생각하고 표현했던 것이다.

라프라스가 천체역학에 관하여 수행한 것을 18세기의 프랑스 철학자들은 당시의 과학의 한계 내에서 생명현상의 연구에 대하여, 또한 인간의 이성과 감정의 연구(심리학)에 대하여 행하고자 했다. 그들은 그 선구자들이나 그 후의 독일의 철학자 칸트의 저작에 전개된 형이상학적 사변思辨을 폐기했다.

사실 주지하는 바와 같이, 칸트는 인간의 도덕적 감정을 증명코자 하여 그것이 ‘지상명령’의 표현이라고 말하고, 또 행위의 격률格率이 의무로 되는 것은 그것이 ‘보편적으로 적용할 수 있는 법칙으로서 받아들일 수 있는’ 경우라고 논하였다. 그러나 이 정의에 사용된 용어는 어느 것이나 주지의 도덕적 사실을 설명하는 대신에 애매모호해서 이해하기 어려운 어떤 것(‘명령’이니 ‘지상’이니 ‘법칙’이니 ‘보편적’이니 하는)을 표시하고 있다.

프랑스의 백과사전파는 이러한 ‘거창한 말’을 갖고 하는 ‘설명’에 만족하지 않았다. 스코틀랜드나 영국의 선배들과 마찬가지로 그들은 인간이 어디로부터 선악의 관념을 얻어왔는가를 증명코자 할 적에 괴테의 표현을 빌린다면, ‘사상의 공허함을 숨기기 위한 언어’를 삽입하려고 하지는 않았다. 그들은 인간을 연구했다. 그리고 이미 1725년에 하치슨이 한 것처럼, 또한 그 후 아담 스미스가 명저 『도덕적 감정의 기원』에서 한 것처럼, 그들도 또한 인간의 도덕적 감정은 괴로워하고 있는 자에 대하여 느끼는 연민과 동정의 감정에 그 기원이 있다는 것을 발견했다. 다시 말하면 그것이 우리 자신을 타인과 동화한다고 하는 우리에게 주어진 성능에서 발생했다는 것, 우리의 면전에서 아동이 매 맞는 것을 볼 때 우리는 거의 생리적 고통을 느끼게 되고 우리의 천성은 이러한 행위에 반항한다는 것을 그들은 발견한 것이다.

이와 같은 관찰과 만인주지의 사실에서 출발하여 백과전서파는 광범한 일반화에 도달했다. 이렇게 해서 그들은 복잡한 현상인 도덕적 감정을 보다 단순한 제 사실에 의하여 실제로 설명한 것이다. 그들은 주지의 이해하기 쉬운 제 사실 대신에 ‘지상명령’이니 ‘보편적 법칙’이니 하는 종류의, 아무것도 전혀 설명하지 않는 불가해하고 애매한 용어를 쓰지는 않았다.

백과전서파의 방법이 지니는 이점利點은 명료하다. ‘천계天界로부터의 영감’을 이러쿵저러쿵 말하는 대신에, 도덕적 감정에 관한 인간계 이외의 초자연적 기원을 말하는 대신에, 그들은 이렇게 말했다.

“인간이 이 지상에 출현한 이래 인간 속에는 언제나 연민과 동정의 감정이 있었으니, 그것은 동포를 관찰하는 데서 확인되고 차차 사회생활의 경험에 의하여 완전한 것으로 된 감정이다. 우리의 도덕관념은 이 감정에서 발생하고 있다.”

이리하여 18세기의 사상가들은 그 연구방법을 변경하지 않고 천체의 세계에서 화학적 반응의 세계로, 그리고 물리적 세계와 화학적 세계에서 동식물의 세계로, 다시 사회의 경제적 정치적 형태의 발달로, 또한 종교 기타의 진화로 옮아갔다. 방법은 언제나 동일했다. 과학의 모든 부문에서 그들은 언제나 귀납법을 적용했다. 그들은 종교의 연구에 있어서, 도덕적 감정의 분석에 있어서, 또한 사유 일반의 해부에 있어서, 그들의 방법이 실패하여 다른 방법을 필요로 했다는 단 하나의 예에도 마주치지 않았다. 또한 그들은 어떤 경우라도 형이상학적 개념(초월적 존재에 의하여 고취된 신이니, 불사의 영혼이니, 생명력이니, 지상명령이니 하는)이나 변증법적 방법에 호소할 필요가 없었다. 그런 까닭으로 그들은 동일한 자연과학적 방법에 의하여 전 우주와 그 전 현상을 해명하려고 한 것이다.

현저한 지적 발달이 성취된 이 시대에 백과전서파는 저 기념비적인 가치가 있는 『백과전서』를 작성했다. 라프라스는 『우주체계론』을, 돌바흐는 『자연의 체계』를 발표했다. 라보아제는 물질의 불멸, 따라서 또한 에너지와 운동의 불멸을 주장했다. 러시아의 로마노소프는 베이르의 자극을 받아 이 무렵에 벌써 열에 관한 역학적 이론을 구성하고 있었다. 라마르크는 동식물의 무한한 변종의 출현을 상이한 환경에의 적응에 의하여 설명했다. 디도르는 천상계天上界로부터의 영감에 호소하지 않고서 도덕적 감정과 습속, 원시적 제 제도와 종교를 설명하려고 했다. 루소는 정치제도의 탄생을 설명코자 사회계약에, 즉 인간의 의지적 행위에 의거하려고 노력했다. 요컨대 사실을 기초로 하여 사실의 관찰과 경험에 의하여 검증된 자연과학적 귀납과 연역이란 동일의 방법에 의하여 기도되지 않은 연구 영역은 하나도 없었던 것이다.

물론 이러한 거대하고 대담한 시도에 오류를 범한 예가 없는바 아니다. 이 당시에는 아직 지식이 부족한 분야에서는 때로는 앞질러 나간, 때로는 전혀 그릇된 가정이 세워지고 있었다. 그렇지만 새로운 방법이 인지의 전 부문에 적용되었으며 이 방법의 덕택으로 오류 자체도 뒷날에 손쉽게 발견되고 정정되었다. 19세기는 이리하여 강력한 연구방법을 계승했다. 그리고 이 방법이야 말로 우리의 세계관을 과학적 기초 위에 구성할 수 있게끔 했으며, 그것은 또 난관을 회피하려고 하는 악습의 결과 도입된 우리의 세계관을 흐리게 하는 편견이나 또는 무의미하고 애매모호한 용어의 일소를 가능케 하는 것이다.

3. 19세기 초의 반동

주지하는 바와 같이 프랑스대혁명의 패배 이후 유럽은 정치의 영역에서나 과학과 철학의 영역에서나 일반적 반동의 시기를 맞이했다. 부르봉 왕가의 백색 테러, 자유주의 이념과 싸우기 위하여 오스트리아, 프로이센, 러시아의 황제들 간에 1815년에 맺어진 신성동맹, 유럽의 상류사회 층에 유행하기 시작한 신비주의와 경건주의, 도처에 출현한 국가경찰 등이 모든 방면에서 개가를 올렸다.

그러나 다른 한편, 혁명의 근본 원리는 사멸하지 않았다. 지금까지 반노예적 상태에 얽매어 왔던 농민과 도시노동자의 해방, 법의 앞에서의 평등, 대의정치 - 이들의 세 가지 원리는 프랑스혁명에 의하여 선언되고 혁명군에 의하여 멀리 폴란드에 이르기까지 전 유럽에 전파되어 프랑스에서와 마찬가지로 전 유럽에 진출했다. 자유, 평등, 박애라는 대원칙을 최초에 선양한 혁명 뒤에 점차적 근대화 - 즉 제도의 점차적 변화의 과정이 시작되었다. 다시 말하면 1789년에서 1793년까지의 동안에 선언된 일반적 원칙이 일상생활 속에 적용되는 과정이 시작된 것이다. 혁명의 소용돌이 속에서 천명된 원리가 그 후 진화의 길을 따라 실현을 보게 됨은 사회발전의 일반 법칙이라고 봐서 무방할 것이다.

비록 사회와 국가 및 과학마저 혁명이 ‘자유?평등?우애’라는 자기의 부르짖음을 써넣은 깃발을 짓밟고 있었다 할지라도, 또 설사 현존 질서에의 적합이 당시는 철학에서 마저 일반적 슬로건으로 되었다 할지라도, 자유의 대원칙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생활 속에 침투해 갔다. 허기야 이탈리아와 스페인에 있어서 프랑스 혁명군이 일찍이 폐지한 농노제와 이단규문異端?問제도가 이제 다시 재건되기는 했지마는, 그러나 이미 이들의 제도에 치명상이 가해져 있어 거기에서 회복할 수는 없었던 것이다.

해방의 물결은 우선 최초에 서부 독일에 미쳤고, 계속해서 프로이센과 오스트리아에 밀어닥쳤고 스페인, 이탈리아, 그리스의 반도에 번져갔다. 다시 동방으로 흘러가 1861년에는 러시아에 다다랐고, 1878년에는 발칸 제국諸國에까지 흘러갔다. 북아메리카에서는 1863년에 노예제도가 자취를 감추었다. 동시에 법 앞에서의 만인의 평등과 대의정치의 이념도 또한 서방에서 동방으로 확대하여 19세기 말에는 러시아와 터키만이 전제專制의 굴레를 쓴 채 남게 되었다 - 물론 그나마 극히 취약화한 전제에 지나지 않았지만.

그 뿐이 아니다. 18,19 양 세기의 경계에 경제적 해방이란 이념이 소리높이 선언되고 있다. 1792년 8월 10일 파리의 민중이 왕권을 무너뜨린 직후, 특히 1793년 6월 2일에 지롱드당을 타도한 후에 파리를 비롯하여 전국의 대도시에서의 혁명 지부支部나 지방 소도시의 공청公廳의 대부분도 이 방향으로 행동했다.

프랑스 지식인들은 평등이 단순한 구호에 그칠 것이 아니라 사실로 되지 않으면 안 된다고 선언했다. 그리고 혁명이 ‘음모자 - 국왕들’에 대하여 수행되지 않으면 아니 되었던 전쟁의 과정에서 그 중압이 무엇보다도 먼저 빈민층 위에 덮어 씌워진 결과, 민중은 국민공회의 위원들에게 약간의 공산주의적, 즉 평등주의적 정책을 취하게끔 강요했던 것이다.

국민공회 자신도 공산주의의 방향으로 나가도록 강제되어 ‘빈곤의 근절’과 ‘재산의 평등’을 목적으로 하는 일련의 조치를 채택했다. 1793년 5월 31일에서 6월 2일 간의 봉기에 의하여 지롱드파가 정부에서 축출된 후, 공회는 토지뿐만 아니라 상업의, 적어도 생활필수품의 교역의 국유화를 기도하는 일련의 조치를 취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뿌리 깊은 이 운동은 1794년 7월까지 계속되었는데 이 때에 지론드당의 부르주아 반동파가 왕당파와 결탁하여 테르미도르 9일에 다시 권력을 잡았다. 이리하여 이 운동은 단기간밖에 계속하지 못했다고는 하지만 그것은 19세기에 자기의 명백한 각인을 - 즉 가장 진보적인 형태의 공산주의적 및 사회주의적 경향성을 부여했다.

1793년?94년의 운동이 계속되고 있는 동안에 민중 출신의 변사辯士가 나타나 이 운동의 이념을 표현했다. 그러나 이 시기의 프랑스의 문필가들 중에는 이들의 이념[당시 그것은 ‘마라를 넘어서’라 불리고 있었다]에다 이론적 표현을 부여하여 사람들의 마음속에 영속적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사람은 하나도 없었다.

겨우 영국에서 1793년에 고드윈이 등장하여 참으로 주목할 만한 저 노작勞作 『정치적 정의 및 그 사회도덕에 대한 영향에 관한 고찰』을 공간公刊했다. 고드윈은 이 책에서 ‘자주인적’ 사회주의 즉 아나키즘의 최초의 이론가가 되었다. 다른 한편으로 바부프[아마도 보나로티의 영향을 받고는] 1795년에 중앙집권적 사회주의, 즉 국가사회주의의 최초의 이론가로서 나타났다.

다음으로 19세기가 되어 앞서 말한 것처럼, 18세기 말에 선양된 원리를 발전시키면서 현대사회주의의 3인의 시조始祖가 중요한 3학파를 대표하고 출현했다. 푸리에, 생 시몽, 로버트 오언이 곧 이들이다. 다시 40년대로 내려가면 푸르동이 등장하여 고드윈의 노작을 아는 바 없이 새로 아나키즘을 기초해 놓았다.

이리하여 강권적 및 반강권적 쌍방의 사회주의의 과학적 기초는 19세기 초 경에 벌써 풍부하게 개척되고 있었는데, 유감스럽게도 금일의 사람들에게 등한시되고 있다. 그런데 인터내셔널의 창립에 비롯한 근대사회주의는 두 가지 점에서만 - 그것은 극히 중요한 점인데 - 이들의 사회주의 창시자들 보다 전진하고 있다. 그 하나는 근대사회주의가 혁명적으로 되었다는 점이고, 다른 하나는 1848년까지 즐겨 말해지던 ‘사회주의자?혁명가로서의 크리스트’라는 관념을 씻어 없앤 점이다.

근대사회주의는 그 이상을 실현하기 위하여 사회혁명이 필요불가결하다는 것을 이해했다. - 이 경우 사회혁명이란 것은 ‘산업혁명’이니 ‘과학혁명’이니 말할 때 쓰이는 의미에서의 혁명이 아니라 용어의 정확하고 명료한 의미에서의 혁명, 즉 사회의 기초 자체의 전반적이고 즉각적인 변혁을 의미한다. 다른 한편으로 근대사회주의는 약간의 그리스도교적 개혁자들이 제창한 천박하기 짝이 없는 센티멘틀한 개혁에 자기의 견해를 혼동시키기를 그만 두었다. 물론 이 점은 이미 고드윈, 푸리에, 로버트 오언 등의 경우도 마찬가지로 이것은 주목할 만하다. 그런데 행정, 중앙집권, 권력과 규율에의 궤배?拜와 같은 것은 인류가 신정주의神政主義와 로마제국의 법률에서 배운 것인데, 라브로프가 분명히 지적한 이들의 어두운 과거의‘유물’은 여태껏 많은 사회주의자를 완전히 얽어매고 있다. 그들은 이 점에서 프랑스나 영국의 선구자들의 수준에도 미달한 형편이었다.

프랑스대혁명 후에 기승을 부리던 반동이 과학의 발달에 끼친 영향에 관하여 여기에 논하기는 어렵다. 다만 다음과 같은 점을 지적해 두면 족하겠다. 즉 현대과학이 금일 자랑하는 성과의 전부가 벌써 18세기 말에 시사되고 있었다는 것, 아니 시사뿐 아니라 때로는 정확한 과학적 형식으로 제시되고 있었다는 점이다. 역학적 열 이론, 운동 불멸설[에너지 항존恒存], 환경의 직접적 영향 하에서의 종種의 변화, 생리학적 심리학, 역사?종교?법의 인류학적 고찰, 사상의 발전 법칙 - 한 마디로 말해서 자연의 과학적 세계관과 종합철학[물리적, 화학적, 생물적 및 사회적인 전 현상을 전체적, 통일적으로 파악하는 철학]은 18세기에 벌써 소묘素描되었고 부분적으로는 완성되고 있었던 것이다.

그렇지만 프랑스혁명이 끝난 후 반동이 승리함과 동시에 반세기에 걸쳐 이들의 발견을 억압하려는 경향이 시작되었다. 반동적 학자들은 이들의 발견을 ‘비과학적’이라 불렀다. 처음에 먼저‘사실’을 연구하고‘자료’를 수집한다고 하는 구실을 앞세워 그들은 학계에서 단순한 측정에 불과한 연구마저 배척하려고 했다. 이를테면 형兄 세구안에 의하여, 그 후 쥬르에 의하여 수행된 열熱의 작업당량作業當量의 결정법[일정의 열량을 얻기 위하여 필요한 기계적 마찰 양]도 배척되었던 것이다. 금일의 영국 과학아카데미에 해당한 ‘왕립협회’마저 쥬르의 연구를 ‘비과학적’이라 하여 출판을 거절했다. 더욱이 힘의 통일에 관한 글로브의 주목할 만한 저작은 1843년에 쓰였는데 1856년에 이르기까지 전혀 등한시되고 있었다.

19세기 전반의 과학사를 읽으면 프랑스혁명 패퇴 후 유럽에 얼마나 깊이 암운이 덮여 있었던가를 알게 될 것이다.

이 구름의 막은 돌연 50년대 말에 걷히기 시작했다. 이 때 서방에서는 자유주의 운동이 일어나 가르바르디의 궐기, 이탈리아의 해방, 아메리카에서의 노예제 폐지, 영국에서의 자유주의적 개혁 등이 나타났다. 러시아에서는 동일한 이 운동의 결과가 농노제와 태형笞刑의 폐지로서 나타났고 철학에서는 쇠링과 헤겔의 권위 실추를 일으키고 니힐리즘이란 이름으로 불린 정신적 예속과 일체의 권위에의 궤배에 대한 대담한 부정을 산출했다.

오늘날 우리가 당시의 지적 발달을 회고할 때 다음과 같은 것이 우리에게 명료하게 된다. 즉 과학을 짓누르고 있던 속박을 타파하기를 도운 것은 30?40년대에 행하여진 공화주의적 및 사회주의적 이념의 선전이고 또한 1848년의 혁명이었던 것이다.

사실 이 점은 상술할 것까지도 없어 다만 다음의 사실을 주목하는 것으로서 충분할 것이다. 즉 앞서 말한 세구안도, 오귀스탄 티에리[중세에 있어서의 코뮌의 민중적 기구와 연합주의적 이념의 연구의 창시자]도 시스몬디[이탈리아 자유도시에 관한 역사가]도 모두 19세기 전반의 3인의 사회주의의 시조 중의 한 사람인 생 시몽의 제자였다는 사실이다. 또한 다윈과 때를 같이하여 자연도태에 의한 종의 기원의 이론에 도달한 알프레드 R 월레스는 청년시대에 로버트 오언의 열렬한 귀의자歸依者였다.

오귀스트 꽁트는 생 시몽주의자였고 리카도도 벤담도 또한 오언주의자였다. 다른 편으로 유물론자 칼 포크트와 G. 루이스는 글로브, 밀, 허버트 스펜서, 기타 여러 사람들과 같이 30년대와 40년대의 영국의 급진적 사회주의 운동의 영향을 받고 있었다. 이 운동에서 그들은 각기 과학적 작업에 있어서의 용기를 길러 오고 있었던 것이다.

1856년에서 1862년에 이르는 불과 5,6년의 단기간에 글로브, 쥬르, 베르트로, 헤름 호르츠, 멘데레프 등의 업적, 다윈, 끄로드 베르나르, 스펜서 모레쇼트, 포크트 등의 여러 저작, 인류의 기원에 관한 라이에르, 베인, 밀, 뷔르노프의 여러 저작, 이러한 업적이 한꺼번에 꽃핀 결과, 당시의 학자들의 기본적 견해에 일대 변혁이 생기고 과학은 일제히 새로운 길로 매진하게 되었다. 인지人知의 전 부문은 놀라운 속도로 정비되었다.

생명의 과학[생물학], 인류의 제 제도의 과학[인류학과 민족학], 이성, 의지 및 감정의 과학[생리심리학], 법과 종교의 역사 등은 우리의 안전眼前에 급속히 성장하고 그 일반화의 대담성으로 말미암아, 또한 그 결론의 혁명적 성격으로 말미암아, 우리의 마음에 충격을 주었다. 전세기에서는 단지 막연한 가정에 불과하고 가끔 추측에 불과했던 것이 이제야 저울과 현미경으로 증명되어 수천 회의 관찰과 실험에 의하여 검증된 것으로 되었다. 저술방식 자체도 아주 달라졌다. 앞서 말한 학자들은 한 사람의 예외도 없이 귀납법의 특징으로 되고 있는 문체의 간결함과 정확함과 아름다움으로 되돌아갔다. 그리고 이러한 문체는 형이상학을 폐기한 18세기의 문필가들의 것이기도 했던 것이다.

금후 과학이 어떠한 방향으로 추이해 갈 것인지는 예언할 수 없다. 학자들이 오늘과 같이 부자와 정부에 의존하고 있는 한, 그들의 과학은 불가피하게 그 영향을 받지 않을 수 없겠고, 19세기 전반에 보던 바와 같은 과학의 침체기가 재현하지 않으리라는 법도 없다. 그러나 단 한 가지 확실한 것이 있다. 즉 오늘 보는 바와 같은 과학에 대해서는 라프라스가 그 것 없이도 해나갈 수 있던 저 가설이라든지 괴테가 조소嘲笑한 그런 형이상학적 ‘잠꼬대’ 같은 것은 무용의 사족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우리는 유기적 생과 인류의 생의 발달을 포함해서 저 대자연이란 서적을 읽을 수 있는 것이다. 이 서적을 이해하기 위하여 우리는 조물주라든지 신비적 ‘생명력’이라든지 불사의 영혼 따위에 의뢰할 필요도 없거니와, 또한 헤겔의 3부작을 참조할 것도, 우리 자신의 실재를 부여하고 있는 어떤 형이상학적 상징의 배후에 우리의 무지를 숨길 것도 필요치 않다. 기계적 현상 - 그것은 물리학에서 인생의 제 사실로 나아감에 따라 점점 복잡하게 되나 여전히 항상 기계적 현상이다 - 만으로 자연의 전모를 설명하고 다시 이 지상에 존재하는 일체의 유기적 지적 사회적 생활을 설명할 수 있는 것이다.

확실히, 이 우주에는 아직 여러 가지가 알려지지 않아 애매하고 불가해한 채로 남아 있다. 그리고 우리가 지식의 공백을 메워감에 따라 언제나 새로운 공백이 다시금 입을 벌린다는 것도 의심할 수 없는 사실이다. 하지만 두 개의 당구의 공이 부딪칠 때라든지, 돌멩이가 구를 때 일어나는 단순한 물리적 사실과, 또한 우리의 주변에 나타나는 화학적 사실에 눈을 돌릴 때, 우리가 이들의 현상을 설명 못할 영역은 하나도 없다. 자연의 전 생활을 해명하는 데에 이러한 기계적 사실에만 주목하면 그것으로 족한 것이다. 이들의 사실이 우리를 기만한 일은 없으며, 기계적 제 사실만 가지고는 불충분한 그런 영역이 있을 것으로 생각되지도 않는다. 여태껏 그런 영역의 존재를 추측케 하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4. 꽁트의 실증철학

과학이 이상과 같은 결론에 도달하기 시작했을 때, 이들의 모든 성과를 포섭하는 종합철학을 구성하려는 기도가 시험되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은 명백하다. 철학자들은 우리들의 아버지나 할아버지를 대접하는데 사용해온 공상의 산물, 즉 ‘실체’니 ‘우주의 이념’이니 ‘생의 목표’니 하는 따위의 상징적 표현에 헛된 시간을 낭비할 것 없이, 또한 의인관擬人觀 - 즉 자연과 물리적 제력諸力에다 인간적 자질이나 의도를 부여하는 따위의 작풍으로 귀중하기 짝이 없는 시간을 허송할 것 없이, 우리의 전 지식의 종합적, 통일적인 또한 이성적인 총괄을 제시하는 그런 철학을 구성하려고 시도함은 참으로 당연한 일이었다. 이 철학은 단순한 것에서 복합적인 것으로 점차 상승함으로써 우주적 생의 근본 원리를 해명하고 자연 전체를 이해하는 열쇠를 제공하려고 했다. 이러한 방법에 의하여 이 철학은 사물 상호간의 새로운 관련을 - 즉 새로운 자연법칙의 발견을 가능케 하는 강력한 연구 수단을 우리에게 제공한다. 동시에 또한, 설사 그것이 아무리 시대의 통설과 다르다 할지라도 우리의 결론의 정당성을 신뢰하도록 고무할 것이다.

이러한 종류의 많은 기도가 19세기에 실제로 시도되었다. 그 중에서도 오귀스트 꽁트와 허버트 스펜서의 기도는 주목할 만한 가치가 있다.

확실히 종합철학의 필요성은 이미 18세기에 백과전서파에 의하여, 또 금일까지 여전히 기념비적 노작勞作의 지위를 유지하고 있는 저 찬연히 빛나는 『철학사전』에 있어서의 볼테르에 의하여, 그리고 튀르고에 의하여, 내려와서는 생 시몽에 의하여 일층 명료하게 자각되어 왔다. 그러나 19세기 전반에 이르러 오귀스트 꽁트는 같은 모양의 저술을 자연과학의 최근의 진보에 적응하는 엄격히 과학적인 형태로 계획하고 있었다.

주지하듯이 수학과 정밀과학에 관해서는 꽁트가 그 과제를 훌륭히 성취했다 하겠다. 또한 그가 실증과학의 영역 안에 생명의 과학[생물학]과 인간사회의 과학[사회학]을 도입한 것이 완전히 옳았음은 일반의 승인을 얻고 있는 바라 하겠다. 그리고 꽁뜨의 실증철학이 19세기 후반의 여러 사상가와 학자들에게 거대한 영향을 끼쳤음도 주지하는 바다.

그렇지만 이 위대한 철학자의 찬미자들은 이렇게 묻는다. - 도대체 무슨 까닭으로 꽁뜨는 그 『실증정치학』에서 근대의 제 제도의 연구, 특히 윤리, 즉 도덕관념의 연구를 시도함에 있어서 저토록 유약한 태도 밖에 취하지 못했을까.

어찌하여 꽁트와 같이 광대하고 또 실증적인 지성이, 만년에 보는 바와 같이 하나의 종교와 어떤 종류의 예배의 창시자가 되고 말았을까.

그의 제자 중의 혹자는 꽁트의 만년의 단계와 이전의 노작과를 조화시키려고 이 철학자가 『실증철학』과 『실증정치학』이란 두 저작에 있어서 동일한 방법에 의거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이 주장은 옳지 않다. 때문에 꽁트철학의 두 사람의 정통적 제자 리토레와 존 스튜어드 밀은 다 같이 실증정치학을 꽁트철학의 일부라고 조차 보지 않으려고 한다. 그들은 이 저작을 지성이 쇠퇴한 결과라고 보고 있다.

그러나 꽁트의 두 저작 - 『실증철학』과 『실증정치학』 - 사이에 존재하는 모순은 극히 특징적인 것으로 그것은 오늘의 가장 중요한 문제들 중의 몇 가지에 빛을 던져주고 있다.

꽁트가 그의 『실증철학강의』를 완성했을 때 가장 중요한 사항, 즉 인간의 도덕적 감정의 기원 및 이 감정이 인간과 인간사회에 미치는 영향에 대한 문제가 아직 자기의 철학 속에 논해져 있지 않다는 생각이 났을 것임에 틀림이 없다. 이 감정의 기원을 연구하고 또 그것을 꽁트가 생의 전체를 설명하는데 쓰던 것과 같은 원인에 의하여 설명하는 것이 분명히 필요한 것이었다. 어째서 인간은 그 어떤 초자연적인 힘의 간섭 없이 이 감정에 복종하고 혹은 적어도 그것을 고려해야 할 필요를 느끼게 되는가를 그는 설명하지 않으면 아니 되었다.

꽁트가 여기에 바른 길을 걷고 있었다는 것은 극히 주목할 만하다. 후년에 영국의 위대한 박물학자 다윈이 『인류의 기원』에서 인간의 도덕적 감정의 발생을 설명코자 했을 때, 꽁트가 걸은 이 길을 이어 받았던 것이다. 사실 꽁트는 『실증정치학』에서 탄복할만한 여러 절節을 쓰고 있는 바, 이 대목은 동물계에 있어서의 사회성과 상호부조 및 이러한 사실들의 윤리적 의의를 그가 결코 간과하지 않았음을 보여주고 있다.

하지만 이들의 사실에서 그럴법한 실증주의적 결론을 이끌어내기에는 그것이 저술된 당시 아직 생물학의 지식이 충분치 못했고 꽁트 자신도 거기에 필요한 대담성을 상실하고 있었다. 그래서 그는 신을, 다시 말하면 인간이 도덕적이기 위하여 예배하고 기도드리지 않으면 아니 되었던 기성 종교의 신을 거부하고 그 대신에 대문자로 쓴 인류로 바꿔 놓았다. 이 새로운 우상 앞에 무릎 꿇고 절하기를, 그리고 또 우리 속에 있는 도덕적 감정을 발달시키기 위하여 그것 앞에 기도드리기를, 그는 우리에게 요구한 것이다. 일단 이렇게 되어 인간이 자기 밖에, 또는 자기 위에 자리하는 어떤 것을 우러러 절해야 한다고 승인됨으로써 인간적 동물이 의무의 길을 밟도록 밖으로부터 시켜지고 보면, 이에 따라 나머지 것은 저절로 따라 나오게 되는 것이다. 그의 종교적 의식도 동방에서 발생한 옛 종교들을 본으로 해서 구성된 것이다.

인간의 도덕적 감정이 그 사회성이나 사회 자체와 똑같이 인간 이전의 기원을 갖고 있는 현상이라는 것을, 그리고 그것이 자연계의 관찰과 인간의 사회생활의 체험의 축적에 의하여 인간 속에 보강된 동물적 사회성의 일층 진화하고 발달한 것임을 꽁트가 인식하지 못한 결과 그러한 결론에 도달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꽁트는 인간의 도덕적 감정이 그 육체적 조직과 같은 정도로 인간의 본성에 의존하고 있다는 것을 알지 못하고, 그리고 이 양자가 다 대단히 긴 세월의, 과거의 수만 년 간 계속된 진화의 과정에서 생긴 유전이라는 것을 알지 못했던 것이다. 꽁트는 동물계에 사회성이 있고 상호간에 동정의 감정이 있다는 생각은 했으나 당시 대권위자로 인정되고 있던 동물학자 큐비에의 영향 때문에 뷔폰과 라마르크가 이미 밝히고 있던 것 - 즉 종種의 변이성變異性을 받아들이지 못했다. 그는 동물에서 인간에로 부단히 계속되는 진화과정을 승인하지 않았다. 그 결과 그는 다윈이 이해한 바를, 즉 인간의 도덕적 감정은 최초의 유인적類人的 동물이 이 지상에 출현하기보다 훨씬 이전에 동물사회 속에 발달한 상호부조 본능의 일층의 진화에 불과하다는 것을 인정하지 못했던 것이다.

결국 꽁트는 우리가 오늘날 잘 알고 있는 다음과 같은 것을 인정하지 못했던 것이다. 즉 개개인은 아무리 비도덕적인 행위를 한다 할지라도 인류가 멸망기에 들어가지 않은 이상 인간성 속에는 도덕적 원리가 본능으로서 반드시 포함되어 있으리라는 것, 이 인간성에서 나오는 도덕적 감정에 위배되는 행위는 불가피하게 타인 속에 반동을 일으키리라는 것, 그것은 흡사히 물리적 세계에 있어서 역학적 움직임이 반동을 일으키는 것과 같다는 것 등이다. 개개인의 반사회적 행위에 대한 이와 같은 반응의 능력 속에 인간사회에 있어서의 도덕적 감정과 사회성의 습속을 필연적으로 버티어 주는 자연적인 힘이 뿌리박고 있어, 그것은 동물의 사회에 있어서 그것들을 일체의 밖으로부터의 개입 없이 지탱하고 있는 것과 똑 같은 것이고, 더욱이 이 힘은 여하한 종교나 여하한 입법자의 명령보다도 무한히 강력한 것이라는 것을 꽁트는 이해하지 못했던 것이다. 그런데 꽁트가 이것을 승인하지 못한 결과 그는 새로운 신성神性인 인류와 새로운 의식 및 새로운 예배를 발명하고, 이 신종교가 인간으로 하여금 도덕생활의 길을 걷도록 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이와 같이 하여 꽁트는 생 시몽과 같이, 또한 푸리에와도 같이, 자기 자신의 그리스도교적 교육에 공세貢稅를 바쳤다. 평등한 힘을 가진 악의 원리와 선의 원리와의 투쟁을 인정하지 않고서는, 또한 인간이 악의 대표자에 대한 싸움에서 자기를 강화하기 위하여 선의 대표자에 의거한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고서는, 그리스도교는 존재할 수가 없는 것이다. 이러한 그리스도교적 이념으로 침투된 꽁트는 도덕과 이 도덕을 인간의 감정 및 관념 속에 강화해야할 수단에 관한 문제에 마주치자마자 단박에 이 그리스도교적 이념으로 도피하고 말았다. 인류교는 그에 대하여 인간을 악의 파멸적 영향으로부터 구출할 수단으로 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었다.

5. 1856 - 1862년 사이의 각성

꽁뜨는 인간의 제 제도의 연구 - 특히 도덕관념의 연구 -에 성공하지 못했지만, 그러나 그가 『실증철학』과 『실증정치학』을 쓴 것은 앞서 말한 바와 같이 갑자기 과학의 지평선이 활짝 열리고 교양 있는 인사의 세계관의 수준이 높아진 저 1856?1862년보다 훨씬 전이었음을 잊어서는 안 된다.

이 5,6년의 짧은 기간에 과학의 각종 분야에 나타난 노작은 우리의 자연관과 생명관, 특히 인간의 사회생활에 관한 우리의 견해에 완벽한 변혁을 초래했는바, 이와 같은 변혁에 필적할 것으로는 과거 20세기 간의 전 과학사의 어디에서도 발견할 수 없을 만한 것이었다.

백과전서가가 단지 예견만 했던 것, 오히려 예감한데 불과했던 것, 또한 19세기의 최고의 지성들이 그때까지 간신히 해명한 것이, 이제 문득 일반적 지식의 성과에 편입되게끔 되었다. 그리고 그것은 자연과학의 귀납?연역적 방법의 덕택으로 완벽하고도 전면적으로 성취되었기 때문에 그 이외의 모든 연구방법은 벌써 불완전하고 허위적이고 무효과적인 것으로 생각하여지도록 되었을 정도다.

여기서 잠깐 머물러 서서 이 시기에 과학이 달성한 성과를 조망해 보자. 아마도 그렇게 함으로써 다음에 허버트 스펜서에 의하여 착수된 종합철학 구성의 기도를 좀 더 잘 평가할 수 있겠기 때문이다.

이 6년간에 글로브, 크라우쥬스, 헤름호르츠, 쥬르 등등 일군一群의 물리학자, 천문학자들은[이 중에는 화학적 스펙토르 분석의 발견에 의하여 우리들로부터 멀리 떨어진 천체인 별의 화학적 구성을 알 수 있도록 한 키르히호프도 포함되겠다] 19세기 전반기에는 물리학의 영역에 있어서의 대담하고 광범한 일반화 작업을 학자들에게 허락하지 않았던 한계를 드디어 돌파했다. 그들은 수년간에 모든 무기적無機的 세계에 있어서의 자연의 통일을 증명하고 확립했다. 이때 이후 무슨 신비적인 ‘유체流體’에 대하여 - 일찍이 물리학자들이 각종의 힘을 해명하기 위하여 호소해 왔던 열소熱素나, 자기나, 전기 기타의 유체에 대하여 말한다는 것은 전혀 불가능한 것으로 되었다. 이제야 광열, 전기, 자기 등을 포함한 모든 물리학적 현상은 바다의 파랑이나 베르 또는 음우音又의 진동이 생기게 하는 것과 똑같은 분자의 역학적 진동의 결과라는 것이 명료하게 되었다.

뿐더러, 우리는 낙하하는 돌이나 진행 중의 열차의 운동의 에너지를 측정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저 불가시적인 운동을, 분자의 진동을 측정하기를 - 다시 말하면 그 에너지를 계산하기를 - 배워서 알게 되었다. 물리학은 이리하여 역학의 한 부문으로 되었다.

나아가서는 또, 동일한 이 수년간에, 우리들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는 천체 - 은하계 속에 무수히 발견되는 태양조차 - 가 지구상의 모든 물체가 구성되어 있는 것과 똑같은 단순한 물체 또는 요소로 구성되어 있다는 것, 또한 지구상에 발견되는 것과 절대로 같은 분자의 진동이 같은 물리적 화학적 결과를 수반하여 거기서도 행하여지고 있다는 것이 증명되었다. 만유인력의 법칙에 따라 공간을 운행하고 있는 저 천체운동 자체도 아마 대우주의 별들 사이의 공간을 몇 10억, 몇 조 킬로라는 거리에 걸쳐 전파하는 진동의 결과에 불과할 것이다.

화학적 현상을 설명할 적에도 이것과 동일한 열과 전기의 진동만으로 족할 것이다. 화학은 분자역학의 일장一章에 불과하다. 그리고 온갖 형태로 표현되는 동식물의 생명마저도 모든 생물의 생명조직이 성립하고 있는 복잡한, 그런 까닭으로 또한, 해체하기 쉬운 화학적 물체의 광범한 계열에 있어서의 분자[또는 분자 속의 원자]의 교환에 불과하다. 생명이란 요컨대 극히 복잡한 분자들의 일련의 화학적 분해와 재결합 - 즉 화학적, 무기적 발효의 영향 아래 생기는 발효작용의 계열에 불과한 것이다.

다시 같은 이 연간年間에, 신경계통의 세포의 생활과정과 자극을 하나에서 타他로 전달하는 능력이 식물 및 동물의 신경생활에 있어서의 자극 전달의 기계적 설명을 제공하는 것임이 이해되고, 계속해서 1890?1900년 사이에 승인되고 증명되도록 되었다. 이들의 연구의 결과 우리는 이제 순전히 생리학적 관찰의 영역에 머물러 그 테두리 안에서 어떻게 해서 심상心像이나 일반적으로 인상印象이 우리의 뇌수腦髓에 심어지며, 어떻게 해서 그것들이 서로 작용하고, 그리고 어떻게 해서 그것들에서 개념이나 관념이 생기게 되는가를 이해할 수 있는 것이다.

우리는 이리하여 지금은 ‘연상聯想’이라는 것을, 다시 말하면 어떻게 해서 새로운 인상이 묵은 인상을 재생시켜가는 지를 이해할 수 있다. 그 결과 우리는 사유思惟의 메커니즘 자체를 또한 파악하고 있는 것이다.

물론 우리는 이 방면에서 ‘모든 것’을 다 알기까지에는 아직 도저히 이르지 못했다. 우리는 겨우 최초의 일보를 내디뎠을 뿐이고 아직 무한히 많은 것을 밝혀 나가야 하겠다. 과학은 오랫동안 자기를 질식시키고 있던 형이상학으로부터 간신히 해방되었을 뿐이고, 생리학적 심리학이란 이 광대한 영역의 연구에 막 착수했을 뿐이다. 그러나 금후의 연구를 위한 공고한 기초는 벌써 닦아진 셈이다. 독일의 철학자 칸트가 확립하려고 노력한, 두 개의 별개로 독립한 영역으로 갈라놓는 케케묵은 구분 - 즉 그의 ‘시간, 공간 내’에서 연구해야할 현상계[물리적 영역]와 ‘시간 내’에서만 연구되는 또 하나의 영역[정신현상의 영역]이란 구분은 이제 소멸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래서 일찍이 러시아의 유물론자 세쵸노프 교수가 제기한 다음과 같은 문제 - ‘심리학은 어디에 귀속하며 어떻게 배워야 할 것인가’ -에 대하여 해답은 이미 주어지고 있다. 즉 ‘심리학’은 생리학에 속하고 생리학적 방법으로 ‘배워야 한다’로 하는 것이 그것이다. 사실 최근의 생리학자들의 연구는 사유의 메커니즘과 인상의 발생과 기억에로 인상이 고정해가는 과정 및 그 전달 등에 관하여 지금까지 형이상학이 우리에게 제공해온 번쇄煩?한 고찰보다 훨씬 많은 광명을 던져주고 있다.

이리하여 형이상학은 일찍이는 의심할 바 없이 자기의 영토에 속하는 것으로 보이던 아성에 있어서조차 패퇴한 것이다. 심리학의 영토는 자연과학과 유물론철학에 의하여 점령되고 말았다. 이 분야에 속하는 사유의 메커니즘에 관한 우리의 지식을 일찍이 보지 못한 스피드로 전진시킨 것은 이들의 자연과학과 유물론철학이었다.

그러나 이 5,6년간에 나타난 노작 중에서 여타의 모든 명성을 압도한 발군의 저작이 있으니 그것은 찰스 다윈의 『종의 기원』이다.

이미 전세기[18세기]에는 뷔폰이, 18세기에서 19세기에 이르는 경계선에서는 라마르크가, 이 지구상에 생존하는 동?식물의 다양한 종은 영구불변의 형태가 아니라는 것, 즉 종은 가변적이어서 환경의 영향 아래 부단히 변화한다는 것을 감히 주장하려고 했다. 일정한 군群에 속하는 상이한 종 사이에 발견되는 동과적同科的 유사성은 이들의 종이 공통한 선조에서 유래했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이 아니겠는가 라고 그들은 말했다. 이리하여 우리가 초원이나 소지沼地에서 보는 각종의 모간毛?은 동일종의 선조들의 자손이 아닐 수 없다. - 다시 말하면 그것들이 서로 다른 생존의 제 조건 속에서 마주치게 된 변화와 적응의 결과로서 변종해온 자손인 것이다. 또한 낭狼, 견犬, 산견山犬, 호狐와 같은 금일의 종은 기왕에는 존재하지 않았다. 그것들 대신에 몇 세기 간에 금일의 낭, 견, 호 ,산견을 발생시킨 일종의 동물이 있었던 것이다. 말, 당나귀, 노새 등에 관해서는 그것들에 공통한 선조가 있었다는 것은 확실히 알려져 있고 그 뼈의 화석이 고대의 지질층에서 발견되고 있다.

그러나 18세기에 이와 같은 이단적 견해를 토로한다는 것은 위험천만이었다. 이보다 훨씬 경미한 이설異說을 말한 탓으로 뷔폰은 교회 재판소의 박해를 각오하지 않으면 아니 되었고, 결국 그는 그의 『박물지』에서 자기의 설을 철회하도록 강제되었던 것이다. 이 시대에 교회는 아직도 강력했으니 승려들에게 불유쾌하기 짝이 없는 이단적 언설을 주장하려고 결심한 박물학자는 감옥이나 고문이나 정신병원을 각오하지 않으면 아니 되었다. 그렇기 때문에 당시의 이단자들은 극히 신중히 조심조심 말했던 것이다.

그렇지만 이제 1848년의 혁명 후에는 다윈과 월레스가 동일한 이단설을 과감히 주장하게 되었다. 그리고 다윈은 용감히 부언하여 이렇게 주장했다. 즉 인간도 또한 완만한 생리학적 진화의 길을 따라 발달한 것이고 인간은 유인원類人猿에서 유래했으며 인간의 ‘불사의 영혼’과 ‘도덕적 정신’은 침팬지나 개미의 지혜 및 사회적 습관과 동일한 방식으로 발달해왔을 뿐이다, 라고.

당시 교회의 장로들의 다윈과 그의 용감하고 유식하고 총명한 학도 헉슬리의 머리 위에 얼마나 무서운 벼락을 떨어뜨렸던가는 주지하는 바다. 헉슬리는 다윈주의의 결론에서 모든 종교의 승려들을 공포의 도가니 속으로 빠뜨린 것을 끄집어내서 이를 강조했던 것이다.

투쟁은 격렬했다. 허나 다윈주의가 드디어 승리를 거두었다. 이 때로부터 우리들의 안전에 전혀 새로운 과학, 생물학이 - 다시 말하면 생명의 모든 현상에 관한 과학이 성장했다.

다윈의 노작은 다른 한편으로 물리적 물질의 활동, 유기체의 생활, 사회생활 등 모든 종류의 현상을 이해하기 위한 새로운 연구방법을 또한 제공하게 되었다. ‘계속적 발달’ 즉 ‘진화’란 이념과 제 조건의 변화에 따라 개체와 사회가 새로운 조건에 점차적 적응을 해나간다는 이념 - 이 사상은 새로운 종의 기원을 설명할 뿐만 아니라 그 이상으로 보다 광대한 분야에도 적용되었다. 이 사상이 자연일반의, 나아가 인간과 그 능력이나 사회 제 제도의 연구에 도입된 때, 그것은 새로운 지평선을 열고 인지人知의 전 부문에 걸쳐 가장 어려운 사실로 보이던 것을 해명할 가능성을 제공했다. 그처럼 많은 성과를 내포한 이 원리에 의거함으로써 비단 유기체의 역사뿐만 아니라 인간의 제 제도의 역사까지도 재구성할 수 있도록 되었다.

스펜서를 매개해서 생물학은 우리에게 다음과 같은 것을 제시했다. 즉 지구상에 생식生息하는 모든 종류의 동식물이 당초 지상에 존재했던 약간의 훨씬 단순한 유기체에서 출발하면서 어떻게 해서 발달해 왔는가 하는 것이다. 그리고 헥켈은 인간을 포함한 각종에 걸쳐 가능한 계보의 약도를 그렸다. 그것만 하더라도 벌써 훌륭한 성과였다. 그러나 다시 그 위에 인간의 습속, 관습, 신앙, 제도에 관한 역사에 약간의 최초의 과학적 기초를 닦아 놓을 수 있게 되었다 - 19세기의 오귀스트 꽁트에게 전혀 결여되었던 것은 바로 이 지식이었던 것이다. 금일 우리가 이 역사를 쓸 적에 벌써 헤겔의 형이상학적 정식定式에 호소할 필요도 없고 ‘생득관념生得觀念’에도, 칸트의 ‘실체’에도, 위로부터 주어지는 영감에도 의거할 필요가 없다. 우리는 일반적으로 이러한 정식에 의뢰함이 없이 이 과제를 수행할 수 있는데 다름 아닌 이 정식이야말로 탐구정신을 질식시키고 그 배후에 흡사히 구름이 덮고 있듯이 매양 한결같은 무지와 구태의연한 미신을 감추어 덮고 있었던 것이다.

한편으로 박물학자들의 저작과 다른 편으로 원시사회의 제 제도와 그것에 수반하는 법률의 연구에 동일한 귀납적 방법을 적용한 헨리 메엔 및 그 후계자들의 저작 덕택으로 인류 제 제도의 발달사는 최근 50년간에 동식물의 발달사와 마찬가지로 확고한 기초 위에 놓일 수 있도록 되었다.

물론 19세기 30년대 프랑스의 오귀스탄 티에리의 학파와 독일의 마우러및 ‘게르마니스트들’의 학파 - 러시아에서의 그 계승자는 코스토마로프와 베리야에프 등등 이었다 - 에 의한 저작들을 잊어서는 부당할 것이다. 진화론적 방법은, 물론 훨씬 이전부터 백과전서파의 시대 이래 습속과 제도, 나아가서는 언어의 연구에도 적용되어 왔다. 그렇지만 참으로 과학적인 결과가 얻어지도록 된 것은, 수집된 역사적 사실에 대하여 박물학자들이 식물 또는 새로운 종의 기관器官의 점차적 발달을 바라보는 것과 똑같은 방식으로 관찰하는 태도가 학습된 이후의 일이었다.

물론 형이상학적 정식도 그런대로 당시는 대체의 일반화를 하는데 유용하기도 했다. 그것은 잠자는 사상을 일깨워서 자연의 통일과 그 영원한 생명에 대한 모호한 암시를 줌으로써 사상을 자극했다. 19세기의 최초의 10년대에 지배했던 것과 같은 반동의 시대에 백과전서파와 그 영국 및 스코틀랜드의 선구자들의 귀납적 일반화는 망각되고 더욱이 신비주의가 개가를 올리고 있는 앞에서 물질계와 ‘정신계’와의 통일에 대하여 감히 논술하는 데는 도덕적 용기가 요구된 때 - 그런데 철학자들에게는 바로 이 용기가 결여되고 있었던 것이다 - 독일인의 잠꼬대 같은 형이상학마저 확실히 일반화에의 경향을 육성하고 있었다.

그러나 당시의 일반화는 혹은 변증법적 방법에 의하여, 혹은 반의식적인 귀납법에 의하여 행하여진 것으로 그 결과는 절망적으로 막연한 것이었다. 그 중의 전자, 즉 변증법적 방법이란 본질적으로 극히 단순하고 소박한 단정斷定에 바탕하고 있어 그것은 꼭 고대 그리스인들이 유성遊星은 우주공간을 원형으로 운행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을 논증함에 있어서 원은 가장 완전한 곡선이기 때문이라는 따위의 근거에 기基하여 있었던 것과 동곡이음同曲異音에 불과하다. 이와 같은 단정의 소박한 정도와, 그리고 또 증명이 전연 없음을 엄폐하고 있던 것은 막연한 의론과 애매모호한 용어 및 불명료하고 그로테스크할 정도로 무겁고 따분한 문체였을 따름이다. 다른 한편으로 반의식적인 귀납법에 의하여 얻어진 일반화에 관하여 말할 것 같으면, 그것은 언제나 관찰 사례의 극도의 부족에 기인하는 것이었다. - 그 좋은 예를 제공하고 있는 것은 최근 한바탕 파란을 일으킨, 극히 한정된 사실에 바탕을 두고 행하여진 와이즈만의 거창한 일반화일 것이다. 이 경우 귀납은 반의식적인 것에 불과했는데 그 의심스러운 결론의 가치는 경솔하게도 과장되어, 그것이 마치 다툴 여지도 없는 법칙인 것처럼 받아들여지는 결과가 되었다. 허나 그것은 사실인즉 단순한 가정 - 가설, 일반화의 맹아에 불과한 것으로서 그 결과를 실지로 관찰된 사실과 비교함으로써 기초적인 검증에 붙여질 필요가 있었던 것이다.

끝으로 이들의 일반화는 - 헤겔의 ‘정?반?합’이 그 예이거니와 - 너무도 추상적이고 애매모호한 형식으로 표현되고 있었다. 그 때문에 사상가가 실천적 귀결을 끄집어내려고 할 때 어떠한 귀결이라도 이끌어내기를 허용한 것이다. 이래서 이 정식에서 [실제로 하여진 바와 같이] 바쿠닌의 혁명정신과 그 도레스렌봉기도 도출될 수 있었고 마르크스의 혁명적 자코뱅주의도, 그리고 또 많은 사람들을 ‘현실과의 화해’로, 다시 말하면 전제專制와의 화해로 이끌어간 헤겔의 이른바 ‘존재하는 것의 용인’도, 어느 것이나 이끌어낼 수 있었던 것이다. 오늘날도 우리의 면전에서 사회주의자들이 빠지고 있는 여러 가지 경제학적 오류를 상기한다면 충분할 것이다. 이들의 사회주의자는 변증법적 방법과 경제학적 형이상학에 집념하는 나머지 모든 국민의 경제생활에 대한 현실적 제 사실의 연구를 게을리 하고 있는 것이다.

6.스펜서의 종합철학

인류학 [즉 인간의 생리학적 발달과 종교 및 제 제도의 역사적 연구]이 다른 자연과학의 연구와 같은 방법으로 연구되도록 된 이래 인류사의 주요한 근본 특징을 이해하는 것이 드디어 가능케 되었다. 동시에 또한, 일찍이 지질학의 연구를 방해해온 성서의 전승과 같이, 역사 연구를 방해하여온 형이상학을 최종적으로 일소하는 것도 가능케 되었다.

따라서 허버트 스펜서가 19세기 후반에 자기의 ‘종합철학’의 구성에 착수했을 때, 꽁트의 『실증정치학』에 보였던 그러한 오류에는 벌써 빠질 리 없을 터이라 생각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스펜서의 ‘종합철학’은 일보 전진을 의미하는 것이긴 했으나 [이 철학 속에는 종교나 종교의식을 용납할 여지는 없었다] 그 사회학적 부분에는 꽁트의 노작에 못지않은 큰 오류가 포함되어 있었다.

문제는 다음 점에 있었다. 즉 스펜서가 사회심리학에 도달했을 때, 그는 이 분야를 연구할 적에 자기의 엄밀한 과학적 방법론을 충실히 지키지 못했고, 이 방법이 도출해야할 귀결을 승인하려 하지도 않았다. 예컨대 스펜서는 토지가 사유재산이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승인했다. 지주는 자기 마음대로 소작료를 인상한 권리를 가지기 위하여 토지에서 실제로 일하는 소작인들이 집약集約경작으로 토지에서 수확할 수 있는 모든 것을 획득하는 것을 방해하기 때문이다. 혹은 또, 지주는 토지를 개간하지 않고 놀려두면서도 자기 토지의 주위에서 다른 농민들이 악착같이 일한 결과 자기의 지가가 오르기를 가만히 앉아서 기다릴 수 있으니 말이다. 이와 같은 제도는 - 스펜서는 당장 승인 한다 - 사회에 대하여 해롭고 위험하기 짝이 없다고. 토지에 관하여 이러한 폐단을 인정하는 한편, 이것과 같은 결론을 기타의 축적된 부에 대하여 - 공장 시설은 말할 것도 없고 광산이나 도크에 대해서도 인정하려 하지를 않았다.

다음으로 또한, 그는 사회생활에 대한 국가의 간섭을 엄격히 비판하여 그의 저작의 하나에다 혁명적 강령을 표시하는‘개인 대 국가’라는 표제를 붙였던 것이다. 그러면서도 그는 차차 국가의 방위적 활동을 보전하다는 구실을 내세워 결국 현존 형태 그대로 국가를 완전히 복권하고 다만 근소한 제한을 그것에다 붙여 놓았을 뿐이다.

이런 종류의 모순을 초래한 이유의 절반은 확실히 다음과 같은 점이라 할 수 있다. 즉 스펜서가 자기의 철학의 사회학적 부분을 구성한 것은 그가 자연과학의 부문을 집필하기보다 훨씬 이전의 일이고, 당시 그는 영국의 철학적 급진주의운동의 영향 아래 있었다는 사실이다. 사실 그는 1851년에 『사회정학社會靜學』을 썼는데 그 당시 인간의 제 제도에 관한 인류학적 연구는 아직 맹아상태에 있었을 뿐이다. 그러나 여하튼 결국 스펜서도 꽁트와 마찬가지로 인간의 제 제도를 연구함에 있어서 과학 이외의 영역에서 채용한 선입견에 의하지 않고 대상을 그 자체로서 고찰하지를 않았던 것이다. 그 뿐만 아니다. 스펜서는 사회철학에 착수하는 대목에 이르자마자, 물리학적 제 사실의 연구에서는 전혀 이용하지 않았던 새로운 극히 기만적인 방법 - 즉 유사類似[유추類推]의 방법을 취하기 시작한 것이다. 이 방법에 의하여 그는 숱한 선입관념을 정당화 할 수 있었다. 이리하여 우리는 금일에 이르기까지 자연과학과 사회학이란 두 부문에 걸쳐 동일의 방법에 의하여 구성된 참다운 종합철학은 아직 보지 못하고 있는 형편이다.

스펜서는 미개발인의 원시적 제도를 연구하는 데는 가장 부적당한 인물이었다는 것도 부언할 필요가 있다. 이 점에서 그는 태반의 영국인에 공통한 결함 - 즉 타국민의 습속 또는 관습에 대한 몰이해를 일층 확대하고 있다. 제임스 롤즈와 같이 극히 총명하고 날카로운 영국인도 일찍이 나에게 이렇게 말한 바 있다. “우리는 로마법적 인간인데 아일랜드인은 관습법의 인간이다. 그런 까닭으로 해서 우리의 상호이해는 가로막혀 있다.”고. 그런데 이질의 문명을 이해하지 못한다고 하는 이 특성은 일단 영국인이 ‘열등 인종’이라고 부르는 사람을 상대로 하는 경우에 이르면, 다시 더욱 명백한 것으로 된다. 스펜서의 경우가 바로 그렇다. 자기의 부족에 대하여 품는 미개인의 존숭尊崇의 염念이나 아이슬란드의 신화에 나오는 영웅들이 의무로 본 ‘혈수血讐’를 그는 전혀 이해하지 못했으며, 또 중세 제 도시에 있어서의 투쟁으로 장식된 파란만장의 진보적인 생활을 또한 그는 이해할 능력이 없었다. 이들의 시대에 존재했던 권리의 관념은 스펜서에게 전혀 불가해한 것이었다. 그러한 것 속에 그는 야만, 미개, 잔인성을 발견했을 뿐이다. 이 점에서 그는 오귀스트 꽁트에 비해서도 완전히 후퇴하고 있었다. 다른 한편으로 꽁트는 제 제도의 진보적 발전 중에서 중세가 수행한 중요한 역할 - 그것은 당시 프랑스에서 너무도 등한시된 관념이었다 -을 이해하고 있었다.

뿐만 아니라 - 더욱이 이 점은 가장 중대한 오류였지만 - 스펜서는 헉슬리와 기타의 여러 사람들과 같은 식으로 ‘생존경쟁’의 의미를 전혀 부당한 방식으로 이해하고 있었다. 즉 그는 이종의 동물간의 싸움[늑대가 토끼를 잡아먹고, 많은 조류가 곤충을 먹으며 살고 있다는 등의] 뿐만 아니라 각각의 종의 내부에서 동일종에 속하는 개체간에 있어서의 생존수단을 둘러싼 격렬한 싸움으로서 생존경쟁을 이해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실제에 있어서는 스펜서나 기타의 다윈주의자들이 상상한 것처럼 그렇게 격렬한 투쟁은 물론 있지 않다.

이와 같은 부당한 생존경쟁관에 다윈 자신이 얼마만큼 책임이 있는가를 여기서 논하지 않기로 하겠다. 그러나 다음과 같은 점은 확실하다. 즉 『종의 기원』이 나오고서 12년이 지나 다윈이 『인류의 기원』을 썼을 때 그는 생존경쟁이란 개념을 각개의 종의 내부에 있어서의 격렬한 투쟁이라기보다 훨씬 광범위의, 좀 더 비유적인 의미로 이해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예컨대 그는, 이 제2의 저작에서 이렇게 쓰고 있다. “상호적 동정과 사회성의 감정이 가장 잘 발달하고 있는 동물의 종은 자기의 생존을 보존하고 또 많은 자손을 남기고 보다 많은 기회를 가진다.”고.

그리고 그는 각개 개체가 지닌 사회적 본능이 자기보존의 본능보다 훨씬 강력하고 항상적일뿐더러 훨씬 활발하다고 하는 생각을 전개하기조차 했다. 이러한 견해는 몇 사람의 ‘다윈주의자들’이 말하고 있는 것과는 전혀 정반대다.

『인류의 기원』에서 다윈이 이 문제를 다룬 여러 장은 일반적으로 인간사회의 성질과 발달에 관한 극히 시사示唆적인 관념을 만들어낼 기초로 될 수 있었을 것이다[이를테면 괴테는 근소한 사실에 기초하여 이것을 벌써 예견하고 있다]. 그런데 이 여러 장은 주의를 끌지 않고 간과되어 왔다. 그러다가 겨우 1879년에 이르러서야 러시아의 동물학자 케스레르가 행한 강연에서 생존경쟁과 상호부조와의 사이에 자연 속에 존재하는 관계에 대한 명백한 이해를 발견한다.

‘종의 진보적 진화를 위해서는’ - 그는 약간의 예를 들면서 말한다 - ‘상호부조의 법칙은 상호투쟁의 법칙보다 훨씬 큰 의의를 갖고 있다’고.

그로부터 1년 지나 라느산은 「생존경쟁과 투쟁을 위한 결합」이라는 제목의 강연을 했다. 때를 같이해서 뷔히네르는 『사랑』이란 저작을 간행했는데 거기서 그는 최초의 도덕적 관념의 발달에 대하여 동물간의 동정심의 중요성을 지적했다. 다만 그럴 적에 그는, 오로지 친자 간의 사랑과 보살핌의 정에만 주목한 결과 자기의 탐구의 범위를 공연스레 좁히게 되고 말았다.

나는 1890년에 졸저 『상호부조론』에서 케스레르의 이념을 논증, 발전시켜 정확한 자연관찰과 인간의 제도사制度史에 관한 최근의 연구에 의거하면서 이 이념을 인간에까지 확대했는데 그것은 손쉬운 과제였다. 상호부조는 실제로 동물의 개개의 종이 그들에 적대적인 자연력에 대하여, 또한 다른 적대적인 종에 대항하여 자기의 생존경쟁을 수행함에 있어서 가장 강력한 도구였을 뿐더러 동시에 진보적 진화의 주요한 수단이기도 했던 것이다. 상호부조는 가장 약한 동물에 대해서조차 오래 사는 기회를 [따라서 또한 경험의 축적을] 주고 그들에게 자손과 지적 발달을 보증한다. 그 결과 상호부조를 보다 많이 실행하는 동물의 종이 다른 종보다도 살아남을 뿐더러 그것들이 육체적 구조와 지적 발달의 우월성의 덕택으로 - 각기의 강綱[곤충류, 조류, 포유류] 중에서 - 제1등의 지위를 차지하는 소이연所以然이다.

스펜서는 자연의 이 근본적 사실을 인정하지 않았다. 각기의 조이 내부에 있어서의 생존경쟁, 한 조각의 식물食物을 둘러싼 ‘이빨과 발톱을 갖고서 하는’ 사정없는 싸움을, 스펜서는 아무런 증명도 요하지 않는 원리로서, 공리公理로서 승인했다. 영국의 시인 테니슨이 ‘검사劍士의 피로 더럽혀진’ 자연이라 묘사한 것이 동물세계에 관한 스펜서의 관념이었다. 겨우 1890년이 되고서야 그는 『19세기』 지상誌上에 발표한 논문에서 어느 정도까지 동물의 세계에서의 상호부조[오히려 동정의 감정]의 중요성을 인정하기 시작하고 이 방면에서의 사실의 수집과 관찰에 착수했다. 그러나 스펜서는 마침내 죽을 때까지 원시인을 ‘이빨과 발톱에 의한’ 이웃사람의 수중에서 먹이의 최후의 한 조각까지 탈취함으로써 생존을 유지하는 야수와 같은 존재로 규정하고 있었다. 이와 같이 그릇된 전제를, 결론을 도출하는 기초로서 승인한 스펜서가, 일련의 오류와 미망에 빠짐이 없이 자기의 종합철학을 구성할 수 없었음은 명백한 일이라 하겠다.

7. 사회에 있어서의 법의 역할

이러한 오류에 빠진 것은 스펜서만이 아니었다. 홉스에 충실한 19세기의 전 철학은 원시인을 금수의 무리와 같은 것으로 보고, 그들은 소가족으로 분립하여 살며 상호간에 식물과 여자를 구하여 싸우고 있어 자비로운 권력이 나타나서야 비로소 그들 사이에 평화가 도입되는 것으로 보기로 고집해 왔다. 헉슬리와 같은 박물학자마저 이러한 홉스의 터무니없는 견해를 반복하여 [1885년에] 다음과 같이 언명하고 있다. 즉 소수의 우수한 개인들에 의하여 ‘최초의 사회가 만들어지기’까지는 인간은 당초 ‘만인에 대한 각인의’ 싸움을 하며 살고 있었다고 [그의 논문 「생존경쟁-자연의 법칙」 참조]. 이처럼 헉슬리와 같이 학식 있는 다윈주의자마저 사회가 인간의 손으로 창조된 것이 아니라 동물계에 인간이 등장하기 훨씬 이전에 벌써 존재하고 있었다는 것을 생각조차 못했던 것이다. 선입견의 뿌리 깊음은 이처럼 강한 것이었다.

이와 같은 선입견의 역사를 더듬어 간다면 그 근원이 종교 속에 있다는 것은 쉽게 발견될 것이다. 요술자妖術者, 기우사祈雨師, 샤만교의 주사呪師, 내려와서는 아시리아와 이집트의 승려, 그 후는 그리스도교의 목사 등의 비밀결사는 항상 일반인으로 하여금 이렇게 믿게끔 하려고 노력해 왔다. 즉 ‘세계는 죄 속에 매몰되어’있어 주사나 요술사나 성자나 목사들에 의한 인자한 개입으로 말미암아 비로소 악의 힘이 인간을 사로잡는 것을 막을 수 있고, 그들만이 인간이 범한 죄를 벌하기 위하여 온갖 불행을 인간의 머리 위에 퍼붓는 일이 없도록 마신魔神을 달랠 수 있다고.

원시 그리스도교는 확실히 승직자僧職者에 관한 이러한 선입견을 약화하려고 했다. 헌데 그리스도교회는 ‘영원의 불’에 대한 복음서 자체의 말씀에 의거함으로써 도리어 그것을 강화하고 말았다. 세상의 죄를 속하기 위하여 가사자可死者로서 이 세상에 강림했다는 신의 아들 예수라는 관념 자체도 역시 이러한 견해를 확인하는 것으로 되었다. 그리고 이것이 그 후 ‘성스러운 종교재판소’에 대하여 그 희생자들에게 극히 잔인한 고문을 가하는 것을 허락하고 천천히 회개할 시간의 여유를 줌으로써 저 세상에서의 영겁의 고통을 면하게 한다는 구실 아래 희생자들을 화형에 처하여 서서히 죽어가게 하는 것을 허용한 것이다. 더욱이 가톨릭교회만이 이런 방식으로 행동한 것은 아니었다. 같은 원리에 충실한 모든 그리스도교회는 ‘죄’투성이로 된 인간들을 교정하기 위하여 서로 앞을 다투어 새로운 고문과 공포를 발명했다. 지금도 천사람 중의 구백구십구 명까지가 한발旱魃, 지진, 역병疫病 따위의 자연 재해는 죄 많은 인류를 정도正道로 바로잡기 위하여 모종의 신이 하늘에서 내리신 업보라고 굳게 믿고 있는 것이다.

동시에 국가는 그 대학에서 타고난 사악한 성질이란 신앙을 지지해 왔고, 지금도 역시 지지하고 있다. 사회 위에 군림하는 권력의 필요성과 ‘도덕법’[그것은 교묘한 바꿔치기로 성문법과 동일시되게끔 만들어진다.]의 침범에 대하여 과하여지는 형벌에 의하여 사회 속에 도덕적 요소를 고취하기 위하여 작용하여야 할 권력의 필요성을 논증하는 것, 그리고 이 권력이 필요불가결하다는 것을 사람들로 하여금 믿게끔 하는 것, 그것은 국가의 사활에 관한 중대 문제인 것이다. 왜냐하면 만약에 사람들이 강권의 힘으로 도덕적 원리를 부식할 필요성을 의심하기 시작한다면 그들은 당장 지배자들의 고매한 사명에 대한 신앙을 버리고 말겠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우리의 전 교육 - 종교적, 역사적, 법률적, 사회적인 전 교육은 인간이 만약에 그들이 제멋대로 방치될 것 같으면 야수로 타락하고 만다고 하는 사상으로 침투되어 있다. 강권이 없어지면 사람들은 서로 물어뜯을 것이다. ‘군중’에게서 기대되는 것으로서는 단 한 가지 야수성과 만인에 대한 각인의 싸움이 있을 뿐이다. 이들의 군중은 만약 그들 위에 선정된 사람들 - 승려, 입법자, 재판관 및 그들의 조수인 경관과 사형집행인이 없었던들 반드시 멸망하고 말았을 것이다. 만인에 대한 만인의 전반적 전투를 못하게 제지하는 것은 다름 아닌 이 사람들이다. 그리고 마찬가지로 그들이야말로 사람들을 교화하여 법률을 존중케 하고, 규율을 학습케 하고, 사람들의 ‘고집 센 마음속에’ 고상한 관념이 발달하여 언젠가는 형태刑笞와 감옥과 교수대가 금일보다 그 필요성을 감減하게 되는 날까지 사람들을 엄격히 지도한다는 것이다.

우리는 1848년에 추방된 어떤 왕이 ‘가련한 나의 신민들이여! 짐이 없으면 너희들은 멸망하리라’고 말한 것을 웃음거리로 삼고 있다. 우리는 또 자기네 영국인은 이스라엘의 잃어버린 일족의 자손이고, 그런 까닭으로 ‘열등 인종’ 위에 군림하여 선정을 베풀어 줄 의무가 있다고 믿고 있던 영국의 한 상인을 웃음거리로 삼고 있다.

헌데 과연 우리는 이와 같은 과대망상적 자부심을, 어느 국민이건 대다수의 잘난 체하는 치들 속에서 발견하는 일이 없을 것인지.

이와 반대로 인간사회와 제도의 발달에 관한 과학적 연구는 이상과는 전혀 다른 결론으로 우리를 이끌어 간다. 그것은 다음과 같은 것을 보여주고 있다. 즉 상호부조와 방위 및 평화를 일반적으로 확보할 목적으로 인류가 창조한 습관이나 풍속은 대개 이름도 없는 군중에 의하여 산출되었다는 것이 곧 그 결론이다. 그리고 이 습관이야 말로 금일 생존하고 있는 동물들과 마찬가지로 인간에 대해서도 또한 생존경쟁에서 살아남기를 가능케 한 바의 것이다. 소위 인류의 지도자, 영웅, 입법자들은 사회 속에 관습법에 의하여 만들어져 온 것 이외에 아무것도 역사에 첨가하지 않았음을 과학은 우리에게 명시하고 있다. 그들 중의 최량의 지도자, 영웅, 입법자라 일컬어지는 사람들조차 이들의 관습법적 제도에다 형태를 부여하고 그것을 인가했음에 불과하다. 그러나 이들의 자칭 비호자庇護者들의 태반은 그들의 개인적 권력의 형성을 방해하는 그런 관습법적 제도를 타파하거나 아니면 자기의 개인적 이익 또는 자기의 계급의 이익에 합치하게끔 그것을 개악하려고 어느 시대에나 노력했던 것이다.

빙하시대의 어둠 속에 파묻혀 있는 아득히 먼 태고시대에도 사람들은 사회를 이루어 생활하고 있었다. 그리고 이들의 사회 속에서 소중히 준수되어온 일련의 습관과 제도들이 만들어져 공동생활이 가능케 되고 있었다. 그 후도 인류발달의 전 과정을 통하여 새로운 조건들이 발생함에 따라 새로운 형태의 사회생활, 상호부조, 평화의 보장이 이들의 이름도 없는 군중의 창조력에 의하여 형성된 것이다.

다른 한편으로 근대과학은 다음과 같은 것을 아주 명료하게 보여 주고 있다. 즉 일체의 법률은, 그 상상의 기원이 어떠한 것이건 간에 - 그것이 신으로부터 나왔다고 주장되건, 혹은 또 그것이 현명한 입법자의 손으로 만들어진 것이라 논하여지건 - 여하튼, 일체의 법률은 기존의 관습을 고정하여 항상적恒常的 형태로 결정結晶시키거나 아니면 그것을 확대하거나 했음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무릇 고대 법전은 후세에 전하기 위하여 문자로 기록되거나 혹은 돌에 새겨 넣어진 관습과 전승傳承의 수집에 불과했다. 다만 이 경우 법전은 이미 만인에 의하여 받아들여지고 있는 관습 외에 무장한 호전적 소수의 부자들의 이익에 봉사하는 약간의 새로운 규칙을 부가하는 것이 상례였다. 이들의 소수자에게 유리한 불평등과 예종隸從의 새로운 관습은 이러한 법규에 의하여 강화되도록 되는 것이었다.

이를테면 모세의 법은 이렇게 말하고 있다. ‘너희들 죽이지 말라, 너희들 훔치지 말라, 너희들 거짓 증언을 하지 말라’고.

그런데 이들의 훌륭한 행동의 규칙에다 그는 이렇게 부가했던 것이다. ‘너희들 이웃사람의 처, 그의 노예, 그의 당나귀를 취하지 말라’고.

이리하여 그 결과 모세의 입법은 오래도록 노예제를 합법화함과 함께 부인을 노예나 태마?馬와 같이 다루기를 허락한 것이다. 그 후 그리스도교는 ‘너희의 이웃을 사랑하라’고 말했다. 헌데 여기서도 당장 사도 바울의 입을 통하여 이렇게 부가되었다. ‘노예는 자기의 주인에게 복종해야 한다’, ‘신으로부터 나오지 않은 권력은 없다’고. - 이와 같이 해서 주인과 노예와의 구별을 합법화하고, 신성화하고, 당시 로마를 지배하고 있던 악당들의 권력을 성화聖化한 것이었다.

그리스도교의 진수라 할 만한 용서라는 지고의 이념을 가르치는 복음서조차 다른 편으로는 언제나 복수하는 신에 관하여 말하고 그것에 의하여 복수를 설교하고 있다.

로마제국 몰락 후의 이른바 만족蠻族들 - 고르인 , 론고바르도인, 게르만인, 색손인, 슬라브인 -의 법전에 있어서도 사정은 마찬가지다. 그들의 법전은 일찍이 행하여지고 있던 복수의 법칙[눈에는 눈을, 이에는 이를, 상해에는 상해를, 죽음에는 죽음을] 대신에 당시 일반으로 보급되어 있던 의심할 여지없이 좋은 관습, 즉 상해나 살해에 대하여 배상금을 지불한다는 관습을 입법화했다. 이와 같이 만족의 법전은 씨족시대에 지배한 혈수제血讐制와 비교하면 진보한 것이기는 했다. 허나 동시에 그것은 이 시대에 희미하게 나타난 자유인의 계급 분화를 확립하게 된 것이다.

노예에 대해서는 얼마만큼의 배상금을 지불해야 하고 [이 경우 배상금은 노예의 주인이 받는다], 자유인의 경우는 얼마, 수장首長의 경우는 얼마의 금액을, 이런 식으로 이들의 부족법전은 규정했다. 후자의 경우 배상금은 가해자에 대하여 필생의 노예를 의미할 만큼 고액이었다. 이와 같은 배상액의 차이가 규정되도록 된 애당초의 사상은 틀림없이 싸움에서 살해된 수장의 가족은 가장을 살해당한 보통 자유인의 가족의 경우보다 훨씬 많은 것을 잃었다고 하는 데에 있었다. 그런 까닭에 전자는 후자보다 더 많은 배상금을 받을 권리가 있다고 생각된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관습이 법률로 전화轉化함과 함께 인간의 계급분화는 그 후 오래 합법화하게 되고 금일까지 우리는 이러한 분화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을 만큼 견고하게 법제화하는 결과로 되었다.

이것과 같은 것이 금일에 이르기까지 모든 시대의 입법에서도 또한 발견된다. 말하자면 전시대에 행하여진 억압이 입법화되어 항상 그 뒷시대에 전해지는 것이다. 이리하여 페르시아제국의 부정은 그리스에 전해졌다. 마케도니아의 부정은 로마로 이행했다. 로마제국과 동방의 참주제僭主制의 압제와 잔학은 갓 생긴 어린 만족의 여러 나라와 그리스도교회에 전송傳送되었다. 이와 같이 해서 과거는 법률에 의하여 미래를 얽어매는 것이다.

사회생활에 필요불가결한 보장의 전부, 민족적 생활양식이나 농촌공동체나 중세 제 도시에서의 사회생활 형태 등의 전부, 또한 부족간의, 내려와서는 그 후 국제법의 기초로 된 공화제 도시간의, 관계의 전 형태 - 한마디로 말해서 배심원의 재판제를 포함한 상호부조와 평화옹호의 형태의 전부는 무명의 민중의 창조적 천재가 산출한 것이다. 이에 반하여 고대의 법전에서 금일에 이르는 모든 법률은 언제나 다음과 같은 두 가지 요소에서 구성되고 있다.

즉 그 하나는 만인에 의하여 유익한 것으로 승인된 일정한 관습적 생활형태를 확인, 고정시킨 것이다. 다른 편으로, 둘째 요소는 기존 관습에다 붙인 부가물 - 그것은 종종 단순한 부가물이긴 하나 음험한 방식으로 기존 관습을 정식화定式化한 것으로서, 그 의도하는 바는 주인, 전사, 왕후王侯, 승려 등의 발생 도상의 권력을 착안시켜 굳혀 놓는 데에, 즉 그들의 권력을 강화하고 신성화하는 데에 있다.

과거 40년간에 행한 사회발전에 관한 양심적인 많은 학자들의 과학적 연구는 이상과 같은 결론으로 우리들을 이끌어 준다. 앞에서 말한 그러한 이단적 결론을 학자들 자신이 대담하게 정식화한 것은 물론 아니다. 그러나 주의 깊은 독자라면 그들의 노작을 읽고 이러한 결론에 도달할 것은 필연적이다.

8. 근대과학에 있어서의 아나키즘의 지위

아나키즘은 19세기의 위대한 지적 운동에서 어떤 지위를 차지하는가. 이 물음에 대한 해답은 앞에 나온 여러 장에 논술한 바에서 시사되고 있다. 아나키즘은 인간의 사회생활을 포함시켜 전 자연을 포괄하는 현상의 역학적 해명에 바탕을 둔 우주관이다. 그 연구방법은 자연과학의 방법이니 이 방법에 의하여 일체의 과학적 결론이 검증되지 않으면 안 된다. 그 경향은, 자연은 온갖 현상 - 인간의 사회생활과 그 경제적, 정치적, 윤리적 문제를 포함시켜 -을 포섭하는 종합철학을 기초 닦음, 그럴 적에 전술한 바의 원인으로 말미암아 꽁트나 스펜서가 범한 오류에 빠지지 않고서 그것을 수행함에 있다.

그런 까닭에 아나키즘은 분명코 근대생활에서 제기된 모든 문제에 대하여 여태껏 낡은 형이상학적 신앙에서 해방되지 못한 정치적 당파나, 또한 마찬가지로 어느 정도로는 사회주의적 당파가 제공하는 해답과는 다른 해답을 주고 또한 이들의 당파와는 다른 입장을 취하지 않으면 안 된다.

물론 자연과 인간사회의 완전히 역학적인 관념의 구성은, 사회생활과 그 발달을 대상으로 하는 사회학적 부문에서는 이제 막 착수했을 뿐이다.

허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확립된 몇 가지 성과는 - 때로는 무의식적으로 그렇게 되었음에 불과하다 - 전술한 성격을 벌써 띠고 있다. 법철학에서도, 도덕이론에서도, 경제학에서도, 또한 제 국민과 제 제도의 역사연구에 있어서도, 아나키스트들은 형이상학적 결론에 만족하는 자가 아니라 자기의 결론의 자연과학적 기초 붙임을 탐구하는 자임을 증명하고 있다.

그들은 헤겔, 쉘링, 칸트 등의 형이상학에 굴복하기를 거부하고, 로마법이나 교회법의 주석자註釋者들, 학식 있는 국가법의 교수들, 형이상학적 정치경제학자들의 영향 아래 서려고 하지도 않는다. 그들은 자연과학자의 견지에서 최근 4,50년간에 수행된 일련의 업적에 입각하면서 이들의 학문 영역에서 제기된 모든 문제에 대하여 명쾌한 답을 주려고 노력한다.

각종 형이상학적 관념, 이를테면 ‘세계정신’, ‘창조적인 자연력’, ‘물질의 사랑의 흡인력’, ‘이념의 화신’, ‘자연의 목적과 그 존재 이유’, ‘불가지적不可知的인 것’, ‘정신의 영기靈氣’에 고취된 존재라는 의미로 해석된 ‘인류’ 따위의 관념이 이제야 유물론적인[역학적 내지 동력학적] 철학에 의하여 포기되고 이들의 용어의 배후에 감추어진 일반화의 맹아가 구체적인 사실의 언어로 번역되었듯이, 우리는 사회생활의 사실에 대할 때, 이러한 방식으로 접근해 가려고 한다.

형이상학자는 인간의 지적 생활과 감정생활이 ‘정신의 내재적 법칙’에 따라 발전하는 것이라고 자연과학자에게 설득하려고 한다. 그러나 자연과학자는 이와 같은 설명에 고개를 갸우뚱하며 생명?지식?감정의 제 현상에 대한 자기네의 연구를 참을성 있게 추진하여 이것들이 모두 물리적, 화학적 현상으로 환원될 수 있다는 것을 논증하려고 한다. 그들은 이러한 현상들의 자연법칙을 해명하려고 노력한다.

이와 똑같이 헤겔의 학설에 따라 일체의 진화는 ‘정?반?합’을 표현한다느니 ‘법의 목적은 정의의 확립이고, 그것은 지고의 이념의 물적 실체화’라느니 하는 따위의 설교를 아나키스트에게 들려줄 때, 혹은 또 ‘생의 목적이란 무엇인가’라고 아나키스트에게 질문할 때, 그는 마찬가지로 고개를 갸우뚱하며 이렇게 자문할 것이다. 즉 “자연과학이 현대처럼 발달하고 있는데 여전히 이러한 ‘케케묵은 것’을 믿고 있는 낡아빠진 사람들이 지금도 있다는 것은, 또한 자연을 ‘의인화擬人化’하여 인간의 모습을 한 존재물에 의하여 지배되는 것으로 자연을 본 원시적 미개인의 말투로 여태껏 지껄이고 있는 뒤떨어진 인사가 현재도 생존하고 있다는 것은 도대체 어찌된 일일까”라고.

아나키스트는 이러한 ‘듣기 좋은 말’에 승복하는 자는 아니다. 왜냐하면 이러한 말들은 언제고 반드시 단지 무지無知를 - 즉 불완전한 연구를 - 감추는 것이거나 아니면 더욱 나쁘지만 미신을 감추는 데에 유용할 뿐이라는 것을 알고 있으니 말이다. 따라서 아나키스트가 이런 종류의 말을 들을 때 그들은 그것을 마이동풍馬耳東風으로 흘려버린다. 그들은 자연과학적 방법에 따라 과거와 현재의 사회관념 및 제도의 연구를 계속한다. 그리고 인간 사회의 발전은 이들의 형이상학적 정식을 갖고 판단할 때 생각하기보다 사실인즉 훨씬 무한히 복잡한 [또한 실천적 목적에 대하여 일층 흥미로운] 것임이 명백하다.

우리는 최근 사회민주주의자들이 사회주의적 이상을 구성함에 있어서 추존하는 변증법적 방법이란 것에 대하여 다변多辯을 농弄하는 것을 듣는다. 그러나 어느 자연과학에 의해서도 이것이 승인되지 않듯이, 우리도 이 방법을 승인하지 않는다. 금일의 자연과학자에 대하여 이 ‘변증법적 방법’이란 것은 오래전에 이미 사멸한 것, 다행히 과학의 기억에서 사라진지 오래인 것을 상기시킨다. 19세기에 있어서의 여하한 발견도, - 역학, 천문학, 물리학, 화학, 생물학, 심리학, 인류학에 있어서의 어느 발견도 변증법적 방법에 의하여 성취된 것은 아니다. 무릇 이들의 발견은 유일의 과학적 방법인 귀납법에 의하여 성취된 것이다. 인간은 자연의 일부이고 인간의 개인적 및 사회적 생활은 꽃의 피어남과 같이, 또한 개미나 벌의 사회생활의 발전과도 같이, 자연적 현상이니까 우리가 꽃에서 인간으로, 또한 해리海狸의 정주지定住地에서 인간의 도시로 연구를 진행해 나갈 때, 지금까지 우리의 연구에 극히 유효했던 방법을 저버리고 형이상학의 영토에서 다른 방법을 빌려올 까닭은 조금도 없는 것이다.

자연과학의 연구에 사용된 귀납법은 그 효능이 입증되었고, 19세기 백년간에 그 이전의 과거 이천 년에 걸친 기간에 있어서 보다도 더 많은 과학의 진보를 가져왔다. 그리고 19세기 후반에 인간사회의 연구에 이 방법이 적용되기 시작했을 때, 이것을 버리고 헤겔이 부활시킨 중세 스콜라철학으로 되돌아가도록 요구되는 어느 대목에도 마주치지 않았다. 뿐만 아니다. 자기의 부르주아적 교육을 신봉한 자연과학자들이 다윈주의의 과학적 방법에 의거한답시고 우리에게 설교하기를 ‘너희보다 약한 자를 모두 절멸하라. 이야말로 자연의 법칙이다’라고 말할 때에도 이들의 학자가 사도邪道에 빠지고 있다는 것, 그 따위 법칙은 있지 않다는 것, 자연은 이것과는 전혀 다른 것을 우리에게 가르치고 있다는 것, 이러한 결론은 전면적으로 비과학적이라는 것을 우리는 이 동일한 과학적 방법에 의하여 손쉽게 논증할 수 있었다. 우리들로 하여금 믿게끔 만들려고 하는 다음과 같은 명제에 대해서도 마찬가지 말을 할 수 있다. 즉 부의 불평등은 ‘자연의 법칙’이고 자본주의적 착취는 훨씬 유리한 사회조직의 형태라고 하는 명제 말이다. 다름 아닌 자연과학의 방법을 경제적 사실에 적용함으로써 우리는 이러한 부르주아 사회과학 - 정치경제학을 포함해서 -의 이른바 ‘법칙’이란 것은 법칙 근처에도 못간 것이고, 단순한 주장 또는 가설에 불과할 뿐더러 아직 실제로 검증된 일조차 없다는 것을 증명할 수 있을 것이다.

두서너 가지 더 부언하겠다. 과학적 연구가 풍부한 성과를 가져오는 것은 다음과 같은 조건에 있어서다. 즉 연구가 일정한 목적을 갖고 또 그리고 특정의 정확히 제기된 문제에 대한 해답을 발견코자 하는 의도를 갖고서 계획된 때라고 하는 것이다. 그리고 모든 연구는, 해결을 위하여 제기된 문제와 우리의 세계관의 기본선과의 사이에 존재하는 관계가 명료하게 이해되면 될수록 더욱 더 많은 열매를 맺을 것이다. 이 문제가 우리의 세계관의 일반적 테두리 속에 확고히 편입될수록 그 해결도 보다 용이한 것으로 된다.

그런데 아나키즘이 제기하는 문제는 다음과 같이 표현될 수 있겠다. 즉 ‘여하한 사회형태가 소여所與의 사회에 있어서, 따라서 또한 인류 일반에 있어서 행복의 최대량을, 그런 까닭으로 또한 생활력의 최대량을 가장 잘 보증할 것인가’ - 나아가 ‘여하한 사회형태가 가장 잘 이 행복의 총계를 양적으로나 질적으로 성장발달 시킬 것인가, 즉 행복을 보다 완전하고 보다 일반적인 것으로 되게 할 것인가’라고.

이것은 또 겸하여 진보를 우리에게 제공한다. 진화를 이러한 방향으로 촉진시키고자 하는 소망이 아나키스트의 사회적, 과학적, 예술적 등등의 활동의 성격을 결정하는 것이다.

9. 아나키스트의 이상과 선행의 제 혁명

아나키즘은 전술한 바와 같이 실제생활의 지시하는 바에서 나온 것이다.

1789년?93년의 프랑스대혁명의 동시대인인 고드윈은 혁명기에 혁명의 제력諸力에 의하여 탄생한 정부 권력이 이번에는 역으로 혁명운동의 발달에 브레이크를 거는 것으로 된 사정을 그의 눈으로 직접 목도했다. 그는 또 영국 의회의 그늘에 숨어서 영국에서 무엇이 행하여지고 있었던가를 알았다. 그것은 공유지의 강탈이고, 유리한 정부 관직의 매매이고, 빈자의 아이들이 영국 전국에 파견된 특별 계원에 의하여 모집되어 작업장에 몰아세워지고 랑카시아의 공장에 보내어지고, 거기서 떼를 지어 죽어 갔다는 것 등이었다. 고드윈은 또 다음 사실을 이해했다. 즉 정부는, 가령 그것이 자코뱅당의 ‘유일 불가분의 공화국’이라 하더라도, 필요한 혁명을 - 사회적 공산주의 혁명을 완수하지 못한다는 것, 혁명정부라 할지라도 모든 정부가 옹호하지 않으면 안 되는 국가의 수호자이고 특권의 보존자라는 이유 만에 의해서도 머지않아 혁명의 장애물로 전화轉化한다는 것이다. 혁명이 승리하기 위해서는 사람들이 무엇보다도 먼저 법률, 권력, 질서, 재산권 기타 노예적 과거로부터 계승한 각종의 미신에 대한 신앙에서 벗어나지 않으면 안 된다고 하는 아나키즘의 사상을 고드윈은 이해하고 표명했던 것이다.

고드윈 뒤에 나타난 제2의 아나키즘 이론가 푸르동은 1848년의 좌절한 혁명을 체험했다. 그도 역시 그의 눈으로 공화국 정부가 범한 범죄를 바라보고 동시에 루이 블랑의 국가사회주의가 얼마나 무력한 것인가를 확신했다. 1848년의 운동기간에 얻은 체험의 생생한 인상 아래 그는 『(19세기에 있어서의) 혁명의 일반적 이념』을 쓰고 여기서 대담하게 국가의 폐지와 아나키를 선언했다.

끝으로 인터내셔널에 있어서도 아나키즘의 이념은 마찬가지로 혁명 직후 즉 1871년의 파리코뮌 뒤에 성숙했다. 코뮌의 평의회 - 그것은 당시의 전 혁명당파의 대표[자코뱅주의자, 블랑키스트, 국제주의자 등]를 매우 적절한 비율로 포함하고 있었는데 -의 완벽한 혁명적 무력, 런던에 설치된 인터내셔널 총무위원회의 마찬가지 무능 및 영국에서 발송하는 지령에 의하여 파리의 운동을 지배하려고 하는 어리석고도 유해한 요구권 - 이와 같은 두 가지 교훈은 많은 사람들의 눈을 열어 주었다. 이와 같은 사태에 직면하여 바쿠닌을 포함한 인터내셔널의 여러 성원들은 일체의 권력의 해독에 대하여 - 비록 그것이 코뮌이나 노동자의 인터내셔널에 있어서처럼 자유로 선출된 것이라 할지라도 - 깊이 생각하게 됐다.

그로부터 몇 달 지나, 매년 개최하도록 된 대회 대신에 1871년에 런던에서 가만히 소집된 비밀 협의회 석상에서 채택된 인터내셔널 총무위원회의 결정은 노동자의 국제결사에 구축된 정치권력이 얼마나 나쁜 것인가를 백일하에 폭로했다. 이 불행한 결의의 결과, 그때까지 경제적 혁명적 투쟁, 즉 고용주의 자본주의에 대한 노동조합의 직접투쟁에 기울여 왔던 인터내셔널의 힘은 정치운동과 선거와 의회운동으로 돌려지게 되었다. 그러나 여기서는 그 힘이 헛되이 낭비되고 파괴될 수밖에 없었다.

이 결의는 런던의 총무위원회에 대한 라틴연합 - 스페인, 이탈리아, 쥬라 및 베르기의 일부에 의한 공공연한 반항을 일으켰다.[프랑스에서는 인터내셔널은 엄중히 금압되고 있었다.] 아나키즘운동은 이 반항에서 발생하여 금일에 이르기까지 계속되고 있다.

이처럼 아나키즘운동은 언제나 어떤 거대한 실천적 교훈의 인상을 받고 발생했다. 그것은 생활 자체의 훈계에서 나온 것이다. 허나 일단 발생하고 보면, 그것은 즉시 자기의 이론적, 과학적 표현과 기초를 발견하려고 노력했다. 여기서 과학적이라 함은 불가해한 은어隱語로 가장하지도 않거니와 케케묵은 형이상학과 결부하는 것도 아니라 그 시대의 자연과학 속에 자기의 기초를 발견하고 스스로도 자연과학의 한 부문部門으로 전화하려고 한다는 의미다.

동시에 아나키즘은 자기의 이상의 전개를 위하여 꾸준히 일했다.

어떠한 투쟁도, 만약 그것이 무자각한 것이라 한다면 - 만약 그것이 자기의 목적의 구체적, 현실적 파악을 결하여 있다면 성공을 거둘 수 없을 것이다. 다시 말하면 파괴와 파괴로 이끌어가는 투쟁의 시기에, 파괴하려고 하는 것 대신에 출현해야 할 것은 무엇인가에 대하여 사람들이 그 관념을 마음속에 갖고 있을 것, 이것이 긴요하다. 현재 존재하는 것 대신에 새로이 만들어내고자 하는 것에 관한 다소나마 명확한 이미지를 머릿속에 그리지 않고서는 지금 존재하는 것을 이론적으로 비판하기조차 불가능할 것이다. 현존제도의 비판자라면 누구나 그 심중에 의식적으로선 무의식적으로건 이상 - 즉 보다 나은 것에 대한 관념 -이 그려지고 있는 것이다.

‘우선 자본주의를, 또는 전제주의를 파괴하자. 그런 뒤에 무엇이 그 뒤에 올 것인지 알 것이다’

이렇게 말하는 것은 자기 자신과 남을 속이는 일에 불과하다. 하지만 기만에 의하여 힘이 산출된 예는 없다. 사실인즉 이렇게 말하는 사람조차도 그가 공격하는 것 대신에 새로 만들어내고자 하는 것에 관하여 얼마쯤의 관념을 품고는 있는 것이다. 이를테면 러시아에서 전제주의를 파괴하기 위하여 몸을 바친 투사들의 어떤 이는 가까운 장래에 영국형 또는 독일형의 헌법의 수립을 마음속에 품고 있다. 다른 이는 아마도 자기네의 당의 강력한 독재 아래 종속하는 공화국을, 또는 프랑스형의 군주주의적 공화국을, 혹은 또 북미합중국형의 연방공화제를 꿈꾸고 있다. 끝으로 제3의 사람들은 국가권력을 일층 제한할 것을 - 즉 서로 연합의 메뉴대로 결합된 각 도시, 코뮌, 노동조합 및 기타 모든 집단에다 보다 큰 자유를 주려고 생각하고 있다.

이와 마찬가지로 자본주의를 공격하는 사람은 누구나, 현재 부르주아적 자본주의에 대체하기를 바라는 것에 대해서의 명료한 또는 막연한 무엇인지의 관념을 갖고 있다. 즉 국가자본주의가 아니면 국가공산주의를, 그것도 아니라면 끝으로 농업생산물과 공업생산물과의 생산, 교환, 소비를 위한 다소간에 공산주의적 결사의 관념을 마음속에 그리고 있는 것이다.

각 당파는 이와 같이 미래에 관한 자기의 관념을 갖고 있다. 그것은 국민의 정치?경제생활의 일체의 사실에 대하여 각 당파가 제각기 판정을 하는데 도움이 되는 이상이고 그것은 또 각 당파가 그 이상에 접근하고 각자의 목적을 향하여 좀 더 잘 전진하기 위한 행동수단을 발견케 한 것이다.

아나키즘은 일상투쟁 속에서 나온 것이지만, 아나키즘도 또한 애써 자기 자신의 이상을 구상했다는 것은 당연한 일이라 하겠다. 그리고 아나키즘의 이 이상, 이 목적, 이 희구는 그것을 달성하는 행동수단의 면에서 아나키스트들을 마침내 다른 일체의 정치적 당파로부터, 마찬가지로 또 대개의 경우 사회주의적 당파로부터도 분리시키게 되었다. 왜냐하면 후자의 제 당파는 구래舊來의 로마적?교회법적 국가의 이상을 보유하고 이것을 그들이 꿈꾸는 미래사회로 전하여 줄 수 있다고 믿고 있으니 말이다.

10. 아나키즘

각종의 역사적 정치적 경제적 고찰에 이끌려, 그리고 또 최근의 역사의 교훈에 유의하여 앞서 말한 바와 같이 아나키스트는 국가권력을 수중에 넣으려고 노력하는 일체의 정치적 당파와는 전혀 다른 사회관을 구성하게 되었다.

우리가 마음속에 그리는 사회는 다음과 같은 것이다. 즉, 거기서는 각 성원간의 관계가 과거의 억압과 횡포의 유산인 법률에 의해서 규제되지를 않고 또한 일체의 권력자[그 권력이 선거에 의하여 얻어졌건 상속권에 의하여 얻어졌건 간에]에 의해서 규제되는 일이 없이, 오로지 자유로 성립한 상호의 합의에 의하여, 그리고 또 마찬가지로 자유로 승인된 습관이나 풍습에 의하여 규제되는 그런 사회이다. 이들의 습관은 법률이나 미신의 영향아래 경화되거나 고정화하는 것이어서는 안 된다. 그것들은 생활의 새로운 제 요구와 과학 및 발명의 진보에 부응하고 또한 점점 합리적으로 되고 점점 숭고한 것으로 되어 가는 사회이상의 발달에 일치하여 부단히 발전해가는 것이 아니면 안 된다.

이와 같이 하여 - 여기에는 남에게 자기의 의지를 강제하는 아무런 권력도 없고, 인간에 대한 인간의 통치도 없고, 생활에 있어서의 일체의 정체도 없다. 거기에는 자연의 생활 자체에 보이는 바와 같은, 어떤 때는 빠르게 어떤 때는 느리게 진행하는 끊임없는 전진이 있을 뿐이다. 이리하여 각 개인에게 행동의 자유가 허용되고 각자 타고난 천분을 그리고 그 개성을 - 요컨대 각자 자기 속에 갖고 있는 독자적 개성적인 것을 피워나갈 수 있을 것이다. 바꿔 말하면 여하한 행위도 사회적 형벌의 공포나 초자연적인 신비적 보복의 두려움에 의하여 개인 위에 과課하여지는 일은 없다. 사회는 개인에 대하여 이 개인이 소여 시점에 수행하기를 자발적으로 승낙 아니 하는 일을 일체 강요하지 않을 것이다. 이와 함께 만인에 대하여 완전한 평등의 권리가 주어진다.

우리는 어떤 종류의 강제도 없는 평등인의 사회를 승인한다. 더욱이 이러한 일체의 강제의 결여에도 불구하고 평등인의 사회에서는 성원의 반사회적 행위가 사회에 대하여 중대한 위협으로 되리라고는 보지 않는다. 자유인들로 구성된 사회는 현대의 우리들의 사회보다도 훨씬 잘 이들의 반사회적 행위로부터 몸을 지킬 수 있을 것이다. 금일의 사회는 사회도덕의 옹호를 경찰, 스파이, 감옥 - 요컨대 그것은 범죄의 대학인 바 - 간수, 사형집행인 및 재판관들에 맡겨져 있는 것이다. 반면, 자유인의 사회는 무엇보다도 반사회적 행위를 예방할 수 있을 것이다.

물론 금일까지 이들의 기본원칙을 실제로 실현한 사회는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았다. 그렇지만 이들의 원칙을 실현시키려는 희구는 어느 시대에나 인류 속에 있었던 것이다. 일류의 어떤 부분이, 비록 일시적이나마 종래에 그들을 억압해 온 권력을 전복시키는데 성공했을 때, 혹은 또 뿌리를 내린 불평등[노예제, 농노제, 전제, 일정한 카스트 또는 계급의 지배권]을 배제하는데 성공했을 때, 그리고 새로운 자유와 평등의 빛이 사회에 침투했을 때, 이런 때에는 언제나 민중이, 억압된 사람들이, 전술한 기본원칙을 비록 그 일부에 불과하다 할지라도 실현하려고 노력한 것이다.

그러므로 아나키즘은 하나의 사회이상이다. 그것은 지금까지 항상 사람들을 지배하고 사람들에게 법률을 규정해 주기를 바라왔던 거의 모든 철학자, 정치가들이 고취해온 것과는 본질적으로 질이 다른 것이라 말할 수 있겠다. 아나키즘은 일찍이 한 번도 특권계급의 이상이었던 일은 없었다. 그것은 오히려 때에 따라 다소간 자각한 대중의 이상이었다.

그렇지만 아나키즘의 사회이상을 유토피아라고 말하는 것은 잘못일 것이다. 왜냐하면 금일의 용어법으로 말하면 ‘유토피아’는 실현 불가능한 것이란 의미가 붙어있기 때문이다.

본질적으로 ‘유토피아’란 말은 저술가가 이론적으로 바람직하다고 관념한 것에 기초를 두고 있는 사회관에 대해서만 적용되어야할 것으로, 사회 속에 성취되고 있는 사물의 관찰에 기基한 관념에 적용해서는 안 되는 것이다. 따라서 유토피아에는 다음과 같은 것들이 포함되어야 할 것이다. 예컨대 플라톤의 공화국, 법왕들이 몽상한 보편적 교회, 나폴레옹의 제국, 비스마르크의 몽상, 신생이란 위대한 이념을 초래해야할 구세주의 출현을 대망하는 시인들의 메시아니즘 등이 곧 그것이다. 그렇지만 아나키즘과 같이 사회의 진화 속에 이미 나타나고 있는 제 경향의 연구에 기초를 둔 미래상에다 ‘유토피아’란 말을 적용한다는 것은 잘못이다. 우리는 여기서 유토피아적 공상의 영역을 벗어나 과학의 영역으로 발을 들여놓고 있는 것이다.

특히 이 경우, 유토피아 운운하는 것은, 전술한 바와 같은 경향이 재삼 인류사에 있어서 극히 중요한 역할을 수행해 왔으니만큼 더욱 더 그릇된 견해라 하겠다. 왜냐하면 이러한 경향이야 말로 이른바 관습법 - 즉 유럽에서 5세기에서 16세기까지의 기간에 통용해온 법의 원천이 되어왔으니 말이다. 그리고 이 경향은 3세기 간 국가적 생활형태의 실체를 견문한 후, 이제야 다시금 문명사회 속에 대두하게 되었다. 문명사를 연구한 사람이라면 누구라고 그 중요성을 간과하는 일은 없을 것이다. 이러한 관념에 바탕을 두고 우리는 아나키즘이 가능한 이상, 실현될 수 있는 이상이라고 확신한다.

물론 사람들은 이렇게 말할 것이다 - 이상이 실현되는 것은 먼 미래의 일이다, 라고. 하지만 이 말에 대하여 우리는 잠깐 18세기 말의 일을 상기해 보자. 북미합중국이 건국된 일 말이다. 군주제 이외의 방식으로 상당히 광범위한 영토에 걸친 사회를 구축코자 하는 희구는 어리석은 생각이라고 보였던 것이다. 헌데 이제는 남북 양 아메리카의 여러 공화국들이, 다음으로는 프랑스공화국이 엄연히 존재하고 있음은, 공화주의자 쪽이 아니라 군주주의자 쪽이 바로 ‘유토피안’이라는 것을 증명하고 있다. ‘유토피안’이란 자기의 개인적 소원에 지배되어서 이미 얼굴을 보여주고 있는 새로운 경향을 주시하지 않는 사람이다. 또는 벌써 과거의 것으로 되어버린 사물에다 지나친 안정성을 부여하고 그것이 과거적, 일시적인 역사적 조건의 소산에 불과하다는 것을 생각해 보지도 않는 사람을 두고 하는 말이다.

이 연구의 첫 대목에서 말했듯이, 아나키즘적 사조의 기원을 더듬어 보면, 우리는 언제나 그 주요한 원천으로서 다음 두 가지에 마주친다. 즉 한편으로는 계급적 조직과 권력관 일반에 관한 비판이고, 다른 한편은 과거의 그리고 특히 현재에 있어서의 인류의 전진적 운동 속에 발견되는 경향의 분석이다.

아득히 먼 석기시대로부터 이제까지 인간이 자기네의 동료 중의 어떤 자에게 - 비록 그가 가장 지식이 있고 대담하고 현명한 자라 할지라도 - 일단 권력의 보유를 허락하고 보면 얼마나 비참한 결과를 초래하게 되는가 생각이 났을 것임에 틀림없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의 선조들은 자고로 이러한 권력의 확립을 막기 위하여 싸울 수 있는 제도를 만들어내려고 애썼던 것이다. 그들의 부족이나 민족, 내려와서는 농촌의 공동체와 중세의 길드[인접 주민의 길드, 수공업이나 기예技藝의 길드, 상인의 길드, 사냥꾼들의 길드 등등], 그리고 끝으로 12세기에서 16세기까지의 각 자유도시 - 이것들은 모두 민중 속에서 일어난 제도였다. 그것들은 외래의 정복자들이나 혹은 또 그들 자신의 씨족, 부족 도시의 개개 성원들이 자기의 수중에 권력을 휘어잡는데 대항하기 위하여 민중 자신에 의하여 - 지도자에 의해서가 아니라 - 수립된 제도들이다.

마찬가지의 민중의 경향은 전 유럽의 민중적 종교적 운동 속에, 종교개혁의 선구가 된 보헤미아의 후스 일파의 봉기나 아나밥티스트[재세례파]의 운동 속에 나타나 있었다.

그 후 1793년?94년에는 프랑스에서 다시금 마찬가지 사조와 행동이 파리의 각 ‘구區’와 기타 대도시 및 숱한 소 코뮌의 자못 독립적이고 건설적인 활동 속에 보인다. 다시 그 후 영국과 프랑스에 근대공업이 발달하기 시작한 때, 가혹한 탄압법을 물리치고 이 두 나라에서 형성된 노동조합 속에 같은 경향이 나타났다. 여기서도 우리는 자본가들에 대항하여 자기를 방위하려고 하는 똑 같은 민중적 정신작용을 발견하는 것이다.

아나키즘의 제 이념 - 고대 중세 - 푸르동 - 슈티르너

아나키스트적 성질을 띤 민중의 운동은 문헌 속에도 나타나지 않는바 아니다. 사실 우리는 고대 철학자들 중에 벌써, 즉 중국의 노자와 고대 그리스의 아리스티포스와 견유犬儒학파 및 제논과 스토아학파 중에 아나키스트적 제 이념을 발견할 수 있다. 하지만 아나키즘의 정신은 본질적으로 민중 가운데서 나온 것이지 소수 귀족의 학자들 가운데서 싹튼 것은 아니었다. 뿐더러 이들의 학자는 민중의 운동에는 별로 동정을 보내지 않았다. 따라서 사상가들은 대개 민중의 운동을 언제나 고무해온 이 깊은 이념을 해명하려 하지도 않았던 것이다. 어느 시대에나 철학자 또는 학자들은 강권적 경향과 계급제도적 규율의 정신 편에 서기를 택하는 것이었다. 과학의 여명기에도 그들이 즐겨 종사한 연구대상은 통치의 기술이었다. 따라서 아나키스트적 경향을 띤 철학자들의 수가 정말 얼마 안 된다는 것은 별로 이상할 것도 없다.

그러나 이 중의 한 사람의 철학자는 그리스의 스토아주의자 제논이다. 그는 (전제적) 정부가 없는 자유로운 공동체를 역설하여 그것을 플라톤의 ‘공화국’에 나타난 국가주의적 유토피아에 대립시켰다. 제논은 벌써 인간에 있어서의 사회성의 본능을 지적하고 있다. 그에 따르면 이 본능은 이기주의적 자기보존의 본능에 대항하는 것으로서 자연이 발달시킨 것이었다. 그는 인간이 국경을 넘어 결합함으로써 전 세계적 ‘코스모스’를 수립하여 법률도, 재판소도, 사원도 필요치 않고 상호의 노력勞力을 교환하기 위한 화폐도 필요치 않게 될 시대를 예견했다. 그의 용어 자체도 금일 아나키스트들이 쓰는 표현과 놀랄 만큼 유사하다고 생각되는 것이다.

아르바의 사교司敎 마르코 지로라모 비다도 1553년에 국가에 대한 그리고 국가의 법률과 국가의 ‘최고의 부정의’에 대한 마찬가지의 반대론을 역설했다. 같은 사상은 후스주의자들[특히 15세기의 고에키]과 초기의 재세례파들, 그리고 9세기에 있어서의 그들의 선구자인 아르메니아의 합리주의자들에게서 발견할 수 있다.

16세기 전반의 라브레, 17세기 말의 페느론, 특히 18세기 후반의 백과전서파 디도로도 같은 사상을 전개하여 전술한 바와 같이 그것이 프랑스대혁명 기간에 약간의 실천적 적용을 봤던 것이다.

그러나 아나키즘의 정치?경제적 원리를 처음 서술한 것은 1793년의 『정치적 정의에 관한 고찰』의 저자 영국인 윌리엄 고드윈이었다. 그는 아나키라는 말은 쓰지 않았지만 그 근본원리를 아주 훌륭히 밝혀 법률을 공격하고 국가가 필요치 않은 까닭을 논하고 재판소의 폐지에 의하여 비로소 진정한 정의가 - 즉 모든 사회의 유일의 진정한 기초가 달성될 것이라고 주장했다. 재산권에 관해서 그는 뚜렷이 공유共有주의를 요구했다.

푸르동은 처음으로 [무지배자라는 의미에서의] ‘아나키’란 말을 사용했고, 그리고 또 부자에 의한 빈자의 억압을 방어함과 함께 피지배자들을 통제 아래 놓으려는 그런 정부를 세우려고 하는 무익한 노력을 사정없이 비판한 최초의 인물이다.

푸르동은 국가사회주의의 모든 형태에 대한 적대자였다. 당시[19세기의 30년대 및 40년대]의 공산주의자들은 이러한 국가사회주의의 일당一黨파를 대표하고 있었다. 그래서 푸르동은 이와 같은 혁명의 전 계획을 맹렬히 비판했다. 로버트 오언에 의하여 제안된 ‘노동권勞動券’의 제도를 기초로 해서 그는 ‘상호주의’의 관념을 전개했는데, 이것은 바로 일체의 통치적 정부를 무용의 사족이 되게 하는 것으로 생각되었다.

푸르동은 이렇게 말했다. “모든 상품의 교환가치는 사회에 있어서 당시 각 상품을 생산하는데 필요한 노동량에 의해서만 계산되는 것이므로 사회에 있어서의 상품의 전 교환은 노동권의 지불을 맡는 국민은행을 매개로 행하여 질 수 있다. 그리고 청산소는 각 은행이 금일 행하고 있는 바와 같이 국민은행의 전 지점의 수지결산을 하게 될 것이다.

이와 같이 하여 온갖 사람들에 의하여 교환되는 노동은 등가等價로 될 것이다. 뿐더러 국민은행은 생산자의 조합에 대하여 그 생산에 필요한 상당액을 화폐로서가 아니라 노동권으로 대부貸付할 수 있을 것이다. 이 대부는 무이자로 된다. 왜냐하면 은행의 경비를 마련하는 데는 1년에 대부 총액의 1퍼센트 또는 그 이하로서 족할 것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무이자 대부라는 제도에 의하여 자본은 그 유해한 성격을 상실하고 착취의 수단이 되기를 그칠 것이다.”

다시 말하면 푸르동의 자기의 상호주의의 제도를 상세히 전개하여 국가와 (통치적) 정부가 불필요하고 유해하다는 사상을 사실로써 논증했다. 그럴 적에 그는 영국인의 선구자들이 있었음을 알지 못했던 것 같다. 그러나 사실인즉 그의 강령의 경제학적 부분은 이미 1824년에 영국에서 저명한 경제학자 윌리엄 톰슨에 의하여 전개되고 있었다[톰슨은 공산주의자로 되기 전에 상호주의자였다]. 또한 같은 사상은 그 후 영국의 톰슨 문하들 - 존 그레이(1825?1831), 호지스킨(1825?1832) 및 J.T.블레이(1839)에 의해서도 전개되고 있다. 물론 이들의 저자는 푸르동과 그의 문하들처럼 아나키즘을 정식화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 영국의 포크스웰 교수가 안톤 멘가의 주목할 만한 책 『노동전수익권勞動全收益權』[비엔나, 1886]의 영역에 붙인 서문 가운데서 말하고 있는 바와 같이 - 사실 아나키즘의 사조는 이 시대의 영국 사회주의의 전체 속에 분명히 맥박을 치고 있었던 것이다.

합중국에서는 조사이 워렌이 같은 경향을 대표했다. 그는 처음에 오언의 콜로니 ‘뉴 하모니’의 일원이었는데 그 후 공산주의의 반대자로 되고 1827년에 신시티에서 생산물을 노동시간으로 계산원 가치를 기초로 해서 ‘노동권’에 의하여 교환하는 ‘상점’을 열었다. 이러한 제도는 1865년에 이르기까지 ‘공평상점’,‘공평점’, ‘공평가’라는 명칭으로 존속했다.

생산에 소요된 노동량에 의하여 가치를 계산하는 방식에 기초하여 행하여지는 교환이란 이념은 독일에서도 1843년과 1845년에 모제스 헤스 및 칼 그륀에 의하여, 다른 한편으로 스위스에서는 빌헬름 마르에 의하여 주창되었다. 그들은 바이트링의 국가공산주의적 교설의 주장자들[그것은 프랑스의 바브프주의자들의 문하였다]에 반대하고 있었다.

다른 한편으로 노동자 중에서 상당히 많은 동조자를 모으고 있던 바이트링의 국가공산주의에 대항하여 독일에서는 한 사람의 독일인 헤겔리안 막스 슈티르너[본명 요한 카스파 슈미트]가 나타나 1845년에 『유일자와 그 소유』를 냈다. 이 책은 그 뒤에 J.H 막케이의 손으로, 말하자면 재발견되어 아나키스트 서클에서 개인주의적 아나키스트의 일종의 선언문으로 간주되어 큰 선풍을 일으켰다.

슈티르너의 저작은 국가에 대한 반역이고 또한 만약 권위주의적 공산주의가 승리를 거둔다면 수립되어질 터인 새로운 폭정에 대한 반역이다. 슈티르너는 분명한 헤겔학파의 형이상학적 사상가로서 사색하여 ‘자아’의 복권과 ‘개인의 존엄성’을 주장했다. 이런 방식으로 그는 ‘아모랄리즘[무도덕주의]’과 ‘이기주의자의 조합’을 논설한다.

그러나 이미 아나키스트 저작가들, 최근에는 프랑스의 V.바시 교수가 그 흥미로운 노작 『아나키스트적 개인주의, 막스 슈티르너』[파리, 1904]에서 지적했듯이, 이 종류의 개인주의는 ‘완전한 발달’을 사회의 전 성원에 대해서가 아니라 가장 유능하다고 인정되는 사람들에 대해서만 요구하는 것이어서 만인의 발달에는 무관심하다. 따라서 그것은 금일 국가의 비호 아래 소수 ‘귀족’이나 부르주아를 위해서 행하여지고 있는 교육독점의 가면을 쓰고 복귀하는 것에 불과하다는 것은 명백하다. 그것은 특권적 소수자에 대한 ‘충분한 발달의 권리’인 것이다.

그러나 이와 같은 독점은 그것에 상응하는 독점적 입법에 의한 보호와 국가로 조직된 강제 없이는 유지될 수 없다. 따라서 사실상 이들의 개인주의자의 요구는 그들 자신이 강하게 비판하는 국가와 권력이란 이념으로 불가피하게 후퇴한다. 그들의 입장은 스펜서나 맨체스터학파라 불린 경제학자들의 입장과 유사하다. 그들 역시 국가에 대한 맹렬한 비판으로 시작하여 항상 국가를 최선의 보호자로 삼는 재산독점의 제도를 유지하기 위하여 다시 국가의 전 기능을 승인하는 데서 끝나고 있는 것이다.

11. 아나키즘(속)

인터내셔널 내부에서의 사회주의 제 이념 - 권위주의적 공산주의자와 상호주의자

이상에서 우리는 프랑스혁명과 고드윈에서 시작하여 푸르동에 이르는 아나키즘 이념의 발전을 살펴봤다. 그 후의 발전은 국제노동자협회 - 즉 보불普佛전쟁 발발 직전의 1866?70년 간에 노동자에게는 커다란 희망을 안겨주고 부르주아에게는 크나큰 공포를 일으킨 이 협회 속에서 이루어졌다.

이 협회가 - 마르크스주의자들이 즐겨 주장하듯이 마르크스에 의하여 창설된 것이 아니라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주지하듯이 그것은 1862년 런던에서 열린 제2회 만국박람회를 방문하러온 프랑스 노동자 대표들과 그들을 영접한 영국노동조합 대표 및 약간의 영국 급진파들과의 회견의 결과였다. 이 방문으로 생긴 유대는 1863년의 폴란드반란에 즈음하여 열린 동정의 집회를 기회로 일층 강화되고 익년匿年에 드디어 협회가 설립된 것이다.

이미 1830년에 영국에 전국적 대 노동조합이 창립되었을 때, 로버트 오언은 ‘국제적 전 노동조합’을 수립하려고 계획한 바 있었다.

그러나 영국정부가 전국조합에 대하여 야만적 박해를 가하는 폭거로 나갔기 때문에 이 생각은 포기되지 않을 수 없었다. 하지만 인터내셔널의 이념은 사라진 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영국에서는 미적지근히 그을리고만 있었지만 프랑스에서 지지자를 얻게 되었다. 1847년의 혁명이 패퇴한 후 프랑스인 망명자는 이 사상을 갖고 합중국으로 건너가 거기서 『인터내셔널』 지紙를 통하여 전파했다.

1862년에 런던을 방문한 프랑스의 노동자들은 거의 모두 푸르동주의자 즉 상호주의자였다. 다른 한편으로 영국의 노동조합원들은 주로 로버트 오언의 학파에 속하고 있었다. 영국의 ‘오언주의’는 이리하여 프랑스의 ‘상호주의’와 손을 잡았고, 그 결과 노동자의 유력한 국제조직의 창조를 보게 되었고, 주로 경제적 지반 위에서 고용주와 싸웠으니 순純 정치적인 급진적 당파와는 일체 절연하려고 노력했다.

사회주의적 노동자들 간의 이들의 두 주요 경향의 결합은, 마르크스 기타의 사람들 가운데서 공산주의자들의 비밀적 정치결사의 잔당에 의한 지지를 발견했다. 이 비밀 정치조직은 바르베스와 블랑키의 비밀결사의 잔존분자들을 규합하고 있었던 것이고 그것은 독일에서의 바이트링의 비밀 공산주의적 결사와 같이 그 원류가 바부프의 음모단에서 나오고 있었다.

전출의 장[제5장]에서 이미 말한 바와 같이 1856?62년은 자연과학과 철학의 비상한 고조高潮를 특징으로 하고 있다. 그것은 또 유럽과 아메리카에서의 급진사상의 거의 전반적인 정치적 부흥의 시대이기도 했다. 이들 두 가지 운동은 노동자 대중을 각성시켰으니, 그들은 자기 자신의 어깨에 프롤레타리아혁명의 과업을 짊어지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을 이해하게 되었다. 1862년의 만국박람회는 세계 산업의 위대한 축제로 보였고 노동자의 자기해방 투쟁의 출발점이 되었다. 그리고 국제노동자협회가 일체 구식의 제 정당과의 절연絶緣을 소리높이 선언하고 노동자가 자기 자신의 손으로 자기의 해방을 쟁취할 결의를 표명했을 때, 그것은 도처에서 깊은 감명을 주었던 것이다.

실제로 인터내셔널은 라틴계 제국에 급속히 펴져 나갔다. 그 전투력은 얼마 안가서 위협적인 규모로까지 도달했다. 다른 한편으로 각 연합조직의 대회나 전 인터내셔널의 연차대회는 사회혁명이란 어떤 것이 아니면 안 되는가, 또 그것은 어떻게 해서 성취될 수 있는가에 대하여 노동자 자신들이 스스로 토의할 기회를 제공했다. 이렇게 해서 그것은 노동 대중의 창조력을 자극하고 그들로 하여금 생산과 소비를 위한 새로운 결합 형태를 탐구케 했다.

당시는 어디서나 머지않아 유럽에 대혁명이 일어나리라고 기대되고 있었다. 그러나 그 혁명이 취해야 할 정치적 형태에 대하여, 그리고 또한 혁명의 제1보가 어떠한 것이냐에 대하여 다소나마 명료한 관념은 아직 없었다. 오히려 반대로 인터내셔널 내부에서 전혀 대립하는 사회주의의 여러 사조가 한 당에 모여서 서로 충돌하고 있었던 것이다.

노동자협회의 지배적 사상은 경제적 지반에서 행해져야할 자본에 대한 노동의 직접투쟁 - 즉 부르주아지가 합의하는 입법에 의하지 않고 노동자 자신이 힘으로 자본가로부터 양보를 뺏어 내어서 마침내 그들을 완전히 항복시킨다는 그런 방식으로 수행하는 노동의 해방이었다.

그러나 자본가의 굴레에서 노동자를 해방하는 사업은 어떻게 해서 달성될 것인가. 생산과 교환의 신 조직은 어떤 형태를 취할 것인가. 이 문제에 관하여 1864?70년의 사회주의자들은 의견의 일치를 보지 못했다. 그것은 꼭 1848년의 파리에 설치된 공화국의 헌법제정의회에 참집한 각종 사회주의적 학파의 대표들의 경우와 같았다.

1848년의 프랑스의 선구자들 - 그들의 다양한 희구는 콘시데란에 의하여 『구세계에 직면한 사회주의』에서 보기 좋게 요약되고 있다 -과 마찬가지로 인터내셔널의 사회주의자들도 하나의 깃발 아래 규합되지는 못했다. 그들은 가지각색의 해결책 사이를 동요하고 있었는데 그 중의 어느 것도 지성을 하나로 통일할 수 있을 만큼 정당하지도 명확하지도 않았다. 뿐더러 진보적 지성의 소유자인 사회주의자 자신들에 있어서조차 자본과 국가권력을 존경하는 관념이 아직 완전히 가시지는 못했기 때문에 통일은 더욱 어려웠다.

이들의 각종 경향을 훑어보기로 하자.

거기에는 우선 프랑스 공산주의자[블랑키스트들]의 비밀결사의 형태로 프랑스대혁명의 자코뱅주의의 직계 - 즉 바부프의 음모단 후계자들 및 독일의 공산주의자들[공산주의자동맹]이 있었다. 이들 양파는 어느 것이나 1793년의 의심할 바 없는 자코뱅주의의 전통 속에 생명을 잇고 있다. 주지하다시피 그들은 1848년에는 언젠가 운이 돌아오는 날이면 음모에 의하여 - 또한 아마도 독재자의 조력을 얻어 - 국가의 정치권력을 수중에 넣고, 1793년의 자코뱅의 결사를 모범으로 해서[물론 이번은 노동자의 이익을 위하여] ‘프롤레타리아의 독재’를 수립하려고 꿈꾸고 있었다. 이 독재야말로 - 라고 그들은 생각했다 - 입법에 의하여 공산주의를 강제할 수 있을 것이라고.

온갖 종류의 억제적 법률과 과세에 의하여 재산소유의 상태는 극히 곤란하게 되어 이윽고 소유자는 재산소유의 고통을 면하고자 이것을 숫제 국가에 인도하는 편이 도리어 행복하게 느껴지도록 될 것이다. 다음으로 ‘농민군’이 파견되어 전답의 경작을 하게 될 것이다. 공업생산도 같은 반 군대적 방식으로 조직되어 똑같이 국가의 손으로 운전될 것이다.

이와 같은 견해는 인터내셔널 창립 당시도 여전히 사회주의자 간에 퍼지고 있었다. 그리고 그 후도 프랑스에서는 블랑키스트 간에, 독일에서는 라사르파와 사회민주주의자들 간에 지지되고 있었던 것이다.

다른 한편으로 로버트 오언의 학파에 속하는 영국 노동자들은 이러한 자코뱅적 견해에 정면으로 대립하는 견해를 지니고 있었다. 그들은 혁명을 달성하기 위해서나 사회주의 사회의 건설사업을 위해서도 또한, 국가권력에 의거할 것을 단연코 인정하지 않고 주로 노동조합의 활동에 의거하려 했다. 영국의 오언주의자들은 공산주의를 바라지 않았다. 반면 프랑스의 푸리에주의자들과 마찬가지로, 자유로 조직되고 상호결합한 공동체나 집단에 그들은 큰 의의를 부여했다. 이들의 공동체나 집단이야말로 토지와 공장을 공동으로 소유하고, 그리하여 그것을 이용함과 동시에 그들의 생산을 공동으로 저장할 것이다.

그들은 생산의 필요에 따라 혹은 집단적으로 혹은 단독으로 일할 것이다. 공동체와 집단에서의 노동의 보수 및 공동체 상호 간의 교환은 노동권에 의하여 행하여질 것이다. 이 노동권은 공동체의 경지와 공장 또는 작업장에서의 활동에 소비된 노동시간의 양을 표시한다. 그리고 각 공동체는 개인적으로 제조하여 교환을 위하여 공동 창고에 인도된 생산물에 대하여 노동권으로 지불할 것이다.

노동권에 의한 보수報酬라는 이 사상은 전술한 바와 같이 푸르동과 상호주의자의 사회개혁안에서도 채용되고 있었다. 그들도 또한 혁명에 의하여 탄생되어야 할 사회에 있어서의 국가권력의 간섭을 부인했다. 금일 경제적 사항에 관하여 국가의 기능을 구성하고 있는 것은 무용한 것으로 되고 말 것이다. 왜냐하면 일체의 교환은 민중은행과 청산소에 의하여 행하여지고 다른 한편으로 교육, 위생상의 조치, 필요한 기업 활동, 교통수단 등은 각기 독립한 공동체의 손으로 운영될 것이니까 - 그들은 이렇게 말했다.

교환에 있어서 화폐 대신에 노동권을 발행한다고 하는 이 동일한 사상이, 단 이 경우 일체의 토지, 광산, 철도 및 공장의 국유화란 이념과 결합되어 주장되고 있었는데, 이 사상은 1848년에 페쿠르와 비다르라는 두 사람의 주목할 만한 저작가에 의하여 제창되었다[양인의 존재는 금일 사회주의자에 의하여 편협하게 무시되고 있다]. 그들은 이 체제를 콜렉티비즘(집산주의)란 이름으로 불렀던 것이다. 비다르는 뤽산부르위원회의 비서였다. 그리고 페쿠르는 1848년의 헌법제정의회의 일원이고, 당시 이 문제에 대하여 주목할 만한 논문을 썼다. 그는 여기서 그 자신의 말을 빌려 말한다면, 사회혁명을 완수하기 위해서는 헌법제정의회가 실시로 옮겨 놓기만 하면 될 충분한 법률의 형식으로 자기의 체계를 상세히 전개했다는 것이었다.

인터내셔널 창립 당시 페쿠르와 비다르 양인의 이름은 그들의 동시대 인간에서조차 전혀 잊히고 있었던 것 같다. 그러나 양인의 사회조직의 사상‘콜렉티비즘’이란 이름으로 마치 새로운 발견물처럼 야단스럽게 널리 전해지게 되었다.

인터내셔널에 있어서의 사회주의 제 이념 - 생 시모니즘

앞에서 말한 각종 사회주의 학파와 나란히 생 시모니즘의 이념도 있었다. 이 이념이 사람들의 마음을 휘어잡은 것은 1848년 이전이었으나 그 후도 여전히 인터내셔널의 성원의 사회주의적 견해에 깊은 영향력을 지니고 있었다.

재능 풍부한 다수의 저작가들과 사상가, 정치가, 역사가, 나아가서는 산업인들이 30년대와 40년대에 생 시모니즘의 영향을 받고 성장했다. 여기서는 철학에서의 오귀스트 꽁트, 역사가로서는 오귀스탄 티에리, 경제학자 중에서는 시스몬디의 이름을 드는 것으로 충분하겠다. 무릇 이 시기의 사회개혁자들은 이 파의 영향을 받고 있었다.

생 시모니스트들은 이렇게 말했다 - 인류의 진보는 지금까지는 노예가 농노로, 그리고 농노가 임금노동자로 전화한 데에 있었다. 그렇지만 이제야 임금제까지도 폐지하고 이와 함께 전 생산시설에 대한 사유제까지도 소멸시켜야 할 때가 가까워진 것이다, 라고. 이와 같은 변화를 불가능하다고 봐서는 안 된다고 그들은 부언한다. 왜냐하면 사유제도 권력도 이미 역사의 과정에서 적잖이 변화를 겪어온 것이다. 새로운 변화가 필요하게 되면 그것은 반드시 달성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다.

사유재산의 폐지는 일련의 조치에 의하여 점차 행하여질 수 있을 것이라고 생 시모니스트들은 말한다[이 들의 조치에 대하여 프랑스혁명이 이미 선례를 보였음을 상기하자]. 이들의 조치는 예컨대, 국가가 상속에다 중세를 과함으로써 한 세대에서 다른 세대로 넘겨주는 사유재산을 점점 많이 수탈함을 허락할 것이다. 이리하여 사인私人의 수중으로 넘어가는 사유재산의 부분은 점점 줄어들고 사유재산은 차차 자취를 감출 것이다. 어째서 그러냐하면 부자 자신도 문명의 사멸기에 속하는 특권을 버리는 편이 유리하다고 믿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부자에 의한 자발적 재산 포기와 입법적 방책에 의한 상속 폐지는 생 시모니스트의 국가로 하여금 토지와 산업의 유일의 소유자로, 노동의 최고 규제자로 전화케 하고 예술, 과학, 산업이란 3기능의 절대적 수장, 즉 지휘자가 되게 할 것이다.

사회의 각 성원은 이들 3부문 중의 하나에서 일하고 생 시모니스트의 국가의 역군이 되는 셈이다. 그리고 이 국가의 정부는 ‘최량最良의 인사’ - 즉 과학, 예술, 생업이란 3계三界의 가장 우수한 사람들의 계층제에 의하여 구성된다는 것이다.

생산물의 분배는 다음과 같은 정식에 따라 행하여질 것이다. 즉 능력에 따라 각인에게, 일에 따라 각 능력에게.

이와 같은 미래의 계획 외에도 생 시모니스트학파와 이 학파에서 나온 실증철학은 19세기에 일련의 주목할 만한 역사적 노작을 산출하여 권력, 사유재산, 국가의 기원을 참으로 과학적인 견지에서 검토했다. 이들의 노작은 금일까지 가치를 지니고 있다.

동시에 생 시모니스트들은 이른바 고전학파, 즉 아담 스미스와 리카도의 경제학을 냉엄하게 비판했다. 이 경제학파는 후년 ‘맨체스터학파’란 이름으로 유명하게 되고 소위 ‘국가의 무간섭’을 주창했던 것이다.

그렇지만 생 시모니스트들이 산업적 개인주의와 자유경쟁이란 원리에 대하여 싸우고 있는 동안에 그들은 처음에 군사국가와 그 계층적 구별에 대하여 싸웠을 때 비판했던 그 동일한 오류에 빠지고 말았던 것이다. 즉 그들은 결국 국가의 전능을 승인하게 되고, 자기의 질서를 - 콘시데란이 이미 지적했듯이 - 불평등과 권력 위에, 또한 행정적 계층질서 위에 기초를 놓았던 것이다. 그들은 이와 같은 정치적 계층질서에다 제사적祭司的 성격마저 부여하려고 했다.

생 시모니스트들은 이처럼 전 사회에 의하여 생산된 재화를 각인에게 제각기 순 개인적인 부분을 귀속시킨다는 점에서 공산주의자와 옷소매를 나누었다. 그들의 많이는 경제학상의 우수한 노작을 내었지만, 그러면서도 그들은 재화의 생산이 사회적 행위 - 전 세계적인 행위라는 관념에 아직 이르지 못했다. 이 점이 생각났던들 생산된 재화의 총량에서 각 생산자에게 넘겨줘야할 부분을 정확히 결정짓기란 사실상 불가능하다는 것을 필연적으로 인정하지 아니 할 수 없었을 것을.

이 점에 관하여 공산주의자와 생 시모니스트와의 사이엔 뿌리 깊은 대립이 있었다. 그러나 그 대신 양편이 다 같이 개인과 그 권리를 무시했다는 점에서는 완전히 일치하고 있었다. 공산주의자가 개인들에게 허용한 것은 겨우 그들이 자기네의 관리와 통치자를 선출하는 권리에 지나지 않았다. 생 시모니스트들도 한 가지로 이 권리를 마지못해서 승인했다. 하지만 이전에는 그들은 이 선거권마저 거부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여하튼 공산주의자에 대해서나 생 시모니스트에 대해서나 매일반으로 각 개인은 국가의 관리에 불과하다. 『이카리아 항해기』를 쓰고 아메리카에서 공산주의의 콜로니를 건설한 카베에 있어서 자코뱅적 공산주의와 개인의 압박은 가장 완벽하게 표현되었던 것이다.

사실 카베의 『이카리아 항해기』에는 도처에 권력, 즉 국가를 - 각 세대世帶의 부엌에 이르기까지 발견할 수 있다. ‘조리調理의 지침’을 각 가정에다 배부하는 것만으로는 만족하지 않고 이카리아공화국은 다시 나아가 국가가 시인하는 식물食物의 일람표를 작성하여 농민과 노동자에게 그 식료품을 생산시켜 이것을 배급한다. 카베는 이렇게 쓰고 있다.

“누구라도 국가가 배급하는 이외의 식물을 가질 수 없으니까 국가에 의하여 승인 안 된 식품을 누구도 먹을 수 없음은 명백하다고 하겠다.”[『이카리아 항해기』 제5판, 1848년, 52면]

다시 나아가 위원회는 식사의 회수, 시간, 그 길이, 그릇의 수와 식물의 종류, 식사의 순서까지 규제한다고 하는 형편이다. 의복에 관해서는 위원회가 일정한 형을 지정하여 각인은 그의 사회적 지위와 상태를 표시하는 제복을 착용한다. 항상 같은 것의 생산 활동에 종사하는 노동자가 태반이다.

“이만큼이나 질서와 규율이 지배하고 있다”고 카베는 환성을 올리고 있다.

누구든지 공화국의 허가 없이는 아무것도 출판하지 못한다는 것은 말할 것도 없겠다. 게다가 저작자가 되기 위해서는 시험을 쳐 정식으로 면허를 얻은 뒤가 아니면 안 된다.

카베의 유토피아가 꼭 그대로의 형태로 인터내셔널 내에서 다수의 신봉자를 갖고 있었다고는 생각될 수 없을 것이다. 허나 그 정신은 잔존하고 있었다. 다음과 같은 것은 아주 확실하다 - 그리고 우리는 권위주의자, 특히 독일의 공산주의자들과 행한 논쟁에서 이것을 분명히 느꼈던 것이다 - 즉 금일에 와서는 어림도 없는 어리석은 일이라 생각되고 있는, 앞에서 말한 그런 엄격한 규제가 당시는 슬기로움의 표현으로 받아들여지고 있었던 것이다. 우리의 비판에 대하여 사람들은 카베의 말로 이렇게 대답한 것이다.

“확실히 공산체는 부자유와 속박을 강요할 것이다. 하지만 이것은 그 주요한 임무가 부와 행복을 산출하는데 있기 때문이다. 이중의 번거로움이나 낭비를 피하기 위하여, 그리고 또한 농업생산과 공업생산을 절약함과 함께 그 생산력을 10배나 올리기 위하여, 사회가 일체를 집중하고 처리하고 지휘하는 것이 절대로 필요하다. 사회는 일체의 의욕, 일체의 행동을, 자기의 규칙, 자기의 질서, 자기의 규율에 복종시키지 않으면 안 된다. 좋은 시민은 명령되지 않은 일체의 일을 자발적으로 삼가지 않으면 안 된다.”(『이카리아 항해기』 제5판,403면)

가장 난처한 일은, 권위주의자들이 다음과 같은 신조를 여태껏 지니고 있다는 것이다. 즉 카베가 말한 것처럼 결국 ‘공산체제는 공화국의 대통령 아래서와 마찬가지로 군주 아래서도 실현가능하다’고 하는 신조 말이다. 이 이념이 바로 나폴레옹 3세의 쿠데타에 길을 열어준 것이고, 또한 그 후 권위주의적 사회주의자가 부르주아적 반동에 직면하여 대수롭지 않게 ‘방임’의 태도를 취하는 것을 허락한 이념이기도 했다.

끝으로 인터내셔널 창립 당시에 프랑스와 독일에 다수의 신봉자를 거느리고 있던 루이 블랑의 학파에 대하여 한 마디 해야겠다. 이 학파는 독일에서는 라사르파라는 마무리 진 집단으로 규합하고 있었다. 이들의 사회주의자는 국가신봉적 경향의 지지자도, 그 이전의 사회주의자들과 마찬가지로 다음과 같이 보고 있었다. 즉 만약에 혁명에 의하여 탄생하고 사회주의적 견해에 의하여 고취된 정부가 노동자를 원조하여 광범한 노동자의 생산협동조합을 조직하게 하고 그것에다 필요한 자본을 정부가 대부한다면, 산업시설을 자본가의 손에서 노동자의 수중으로 옮아가도록 할 수 있으리라고. 이들의 협동조합은 국민생산의 광범한 일대 조직으로 결합될 것이다. 만인에게 평등한 보수제도가 과도적 조치로서 승인될 것이다. 그러나 각 생산자의 필요에 따라 행하여지는 생산물의 분배가 언젠가는 달성되어야할 최종 목적일 것이다.

그것은 콘시데란이 아주 정당하게도 지적한 바와 같이 민주주의 국가에 의하여 통치된 ‘공산주의적 생 시모니즘’이었다.

광범한 국가신용제도에 의거하여 극히 저리低利로 국가로부터 대부를 받아 자본가적 생산과 경쟁할 수 있게끔 국가의 명령으로 알뜰히 원조된 이들의 노동자의 조합조직은 머지않아 산업에서 자본가를 몰아내고 자신이 그 자리를 차지할 수 있을 것이다.

이들의 조합조직은 농업에도 확대할 수 있을 것이다. 노동자들이 잊어서는 안 될 것은 그러한 경제적, 사회주의적 목표다. 그것은 부르주아 정치가의 단순한 민주주의적 이상인 것은 아니다.

무릇 이들의 제 이념은 1848년 이전의 사회주의적 선전에 의하여, 그리고 또 1848년의 2월 혁명 및 6월사건에 의하여 탄생한 것이었는데 그것들은 세목에 있어서 여러 가지 변용을 가지면서 인터내셔널 내부에 널리 보급되고 있었다. 상호간 견해의 거리는 컸다. 그러나 이미 앞에서도 보았듯이 이들의 학파의 신봉자들은 다음의 한 가지 점에서 의견을 같이하고 있었다. 즉 그들은 모두 장래의 혁명의 기초에 강력한 정부가 놓이지 않으면 안 되고 이 정부는 나라의 경제생활을 그 수중에 거두어들이지 않으면 안 된다고 하는 점이 곧 그것이다. 그들은 모두 중앙집권적 계층적인 국가조직을 승인했다.

다행히도 이들의 자코뱅적 제 이념과 병립하여 그것과 대항하는 형태로 푸리에주의자의 이념이 또한 존재했다. 다음에 이 이념의 검토로 옮아가자.

12. 아나키즘(속)

인터내셔널에서의 사회주의 제 이념 - 푸리에주의

프랑스혁명의 동시대인 푸리에는 인터내셔널이 설립되었을 때 이미 세상을 떠났었다. 그러나 그의 사상은 문인門人들 - 특히 푸리에의 사상에다 과학적 성격을 붙여준 콘시데란 -에 의하여 널리 보급되고 있었으므로 인터내셔널의 가장 교육 있는 성원들은 의식적 무의식적으로 푸리에주의의 영향을 받고 있었다.

그런데 당시의 푸리에의 영향력을 이해하는 데는 다음 것을 주의할 필요가 있다. 즉 사회주의의 역사를 서술하는 서적에 흔히 지적되고 있는 것과는 달리, 푸리에의 지배적 이념은 부의 생산을 위한 자본과 노동 및 재능의 결합은 아니었다는 것이다. 그의 주요한 목적은 이윤추구를 위하여 행하여져 필연적으로 성실치 못한 대규모의 투기로 이끌어가는 일체의 생산물의 교환을 행하는 자유로운 국민적 조직을 창설할 것을 제안했다. 이와 같이 그의 이념은 저 파리의 민중이 지롱드당원을 국민공회에서 추방하고 생활필수품에 대한 최고가격법이 가결된 후, 1793?94년의 과정에서 프랑스혁명이 실현코자 한 이념을 부활시킨 것이다.

콘시데란이 그의 저작 『구세계에 직면한 사회주의』[이 책을 금일의 사회주의자들에게 크게 추천하고 싶다] 가운데서 말하고 있듯이, 푸리에는 금일의 착취의 온갖 추악한 형태를 제거하는 수단을 ‘생산자와 소비자 간의 직접적 관계의 수립에, 다시 말하면 생산지에서 직접 받아서 직접 소비자한테 건네주는 생산물의 보관자 - 그 소유자가 아니라 -의 역할을 다해야할 공동체의 중개적 대리자를 설치하는데서 발견했다.

이러한 조건 아래 상품의 가격은 투기의 대상이 되기를 그칠 것이다. 가격에는 운송 저장 및 집무에 소요된 거의 무시할 수 있을 정도의 실비가 가산될 뿐일 것이다.

푸리에는 어릴 때 일찍부터 양친을 도와 상점에서 일하면서 장사의 나쁜 측면을 실컷 경험했고 상업에 증오심을 품고 있었다. 그때로부터 그는 상업과 싸우기로 맹서하고 있었다. 장성해서 프랑스혁명의 시대에 그는 저 투기 - 처음에는 교회나 귀족한테서 몰수된 국유재산의 매매에 즈음하여, 나중에는 전쟁의 시대에 발생한 온갖 물자의 가격 폭등에 즈음하여, 끔찍한 투기를 소상히 목격한 것이다. 그는 또 자코뱅당의 국민공회도 테러도 이들의 투기를 제지하지 못하는 것을 봤다. 그래서 그는 사회화된 교환제도가 없는 한, 민주주의를 위하여 승려와 귀족에게서 토지를 몰수함으로써 달성된 경제적 혁명의 성과도 헛된 일로 돌아가고 만다는 것을 깨달았다. 이리하여 그는 상업의 공유화의 필요를 이해했고 이 방향에서 생 퀴로트가 1793년과 94년에 시험한 기도를 평가하지 않으면 아니 되었다. 이제 그는 이 이념의 사도使徒로 되었다.

푸리에의 의견에 의하면 생산품의 보관자인 자유코뮌은 생활필수물자의 교환 및 분배라는 대문제의 해결을 해 줄 것이다. 그러나 코뮌은 금일의 상인이나 협동조합처럼 그 소유자는 아닐 것이다. 그것은 단순한 대리인에 불과하고 생산품을 분배하기 위하여 창고에 수납하는 한편, 소지자로부터 일체 공세를 징수하지 않고, 또한 물자의 변동을 틈타 투기를 하는 일도 없다.

소비와 분배를 통하여 사회문제를 해결코자 하는 이 기도는 푸리에를 가장 심원한 사회주의적 사상가의 한 사람이 되게 했다.

그러나 그는 이것에서만 그치지 않았다. 그는 다시 농업코뮌 또는 공업코뮌의, 좀 더 정확히 말하면, 합체한 농?공업코뮌의 전 성원이 파란지를 구성하도록 제안했다. 이들의 코뮌은 토지, 가축, 농구, 기계를 하나로 결합하여 토지를 경작하고 혹은 공장에서 일함으로써 토지, 기계, 공장 등이 성원 전체의 공유에 속하는 것으로 보며, 그리고 다른 한편으로는 공동자본에 대하여 각인이 공헌한 액額을 엄밀히 계상計上할 것이다.

두 가지 주요 원칙이 파란지에서 준수되지 않으면 안 된다고 푸리에는 주장한다. 첫째로, 그것은 불유쾌한 노동이 있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일체의 노동은 항상 사람들을 유혹하게끔 조직되고 배분되어 다채다양한 것으로 되지 않으면 안 된다. 둘째로, 자유로운 결합을 바탕으로 세워진 사회에는 여하한 강제도 용납되어서는 아니 되며 또한 강제가 필요할 이유도 없다고 하는 것이다.

파란지의 각 성원의 개인적 필요에 대한 다소 신중한 주의와 각종 성격의 특수성에 대한 약간의 관용이 있다. 그리고 농업, 공업, 지적?예술적인 각종의 노동을 하나로 결합한다. 그 결과 현대의 사회제도 아래서는 종종 해악이 되기도 하고 위험하기도 한 인간적 격정 - 그리고 항상 그것이 강제력의 사용을 정당화하는 구실이 되는 이러한 격정마저 진보의 원천이 될 수 있음을 파란지의 성원은 머지않아 확신하게 될 것이다. 이들의 격정의 본질을 인식하여 그 사회적 적용의 방도를 찾아내면 족한 것이다. 새로운 사업, 위험한 모험, 사회적 태동, 변혁의 갈망 등은 이들의 격정에 필요한 배출구를 제공하게 될 것이다.

하기는 아직 푸리에가 국가적 이념에 집착을 남기고 있긴 하다. 그래서 그는 자기의 공동체 조직을 시험적으로 운영하기 위하여 ‘진정한 조화’의 선구자로 되어야할 ‘단순한 조화’를 우선 시험해 보자고 ‘군주의 참가’를 앙청仰請할 수 있으리라고 생각한 것이다.

‘프랑스 국왕에게 인류를 사회적 혼란에서 구출하는 명예를 위탁하여 전 세계의 조화의 창설자, 해방자가 되게 할 수 있으리라’고 그는 초기의 저작 중의 하나에서 말했다. 그는 이 동일의 이념을 1808년의 『네 가지 운동의 이론』에서도 되풀이하고 있다. 그 후도 그는 루이 필립 왕에게 이 목적의 실현을 위탁했던 것이다[페라랑, 『푸리에, 그 생애와 교설』 4판 114면]. 그러나 이것들은 모두 최초의 준비의 시도에 관련하고 있었던 것이다.

‘진정한 조화’ 또는 ‘보편적 조화’라 붙여진 사회에 관해서 말한다면, 그는 여기서는 정부의 필요성을 인정하지 않았다. 이 조화는 ‘부분적으로’ 도입될 수는 없을 것이다. 변혁은 사회?정치?경제?도덕 등 일체의 관계에 있어서 한꺼번에 일어나지 않으면 안 된다. 푸리에가 국가의 비판에 착수했을 때, 그는 꼭 지금 우리가 하고 있는 것과 같이 철저한 비판을 했다.

“정치적 무질서는 사회적 무질서의 결과이고 그 표현이다. 불평등은 부정의로 전화하고 있다. 권력이 그 이름 아래 행동하는 국가란 것은, 그 기원에 있어서나 그 원리에 있어서나 특권계급의 봉사자이고 잔여계급에 대립하여 자기네의 이익을 지키는 옹호자이다”라고 그는 말했다.

그 밖에도 이러한 어조로 비판이 전개되고 있다.

푸리에의 제 원칙이 완전히 적용된 결과 출현해야할 ‘조화적 사회’에서는 도무지 강제가 존재할 여지가 없다.

푸리에는 프랑스혁명의 패배 직후에 문필활동으로 들어갔기 때문에 필연적으로 사회문제의 평화적 해결로 기울고 있었다. 그는 자본과 노동 및 재능 간의 결합이란 원칙을 승인할 필요를 역설했다. 그 결과 파란지가 생산하는 재화의 가치는 세 부분으로 나누지 않으면 안 된다. 그 제1[총액의 반 내지 12분의 7]은 노동의 보수에, 제2[12분의3]는 자본에, 제3[12분의 2 내지 3]은 재능에 충당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러나 인터내셔널 내부의 푸리에 문하들의 태반은 그의 체계의 이 부분에는 큰 의의를 부여하지 않았다. 이 부분에는 푸리에가 글 쓰고 있던 당시의 영향이 보이고 있다고 그들은 보고 있었다. 그들은 오히려 다음과 같은 푸리에의 교설의 근본적 특징에 유의하고 있었다. 즉,

1) 자유코뮌 즉 독립한 작은 지역이 새로운 사회주의 사회의 기초가 되고 단위로 된다.

2) 코뮌은 그 내부에서 생산된 모든 생산물의 관리자이고, 일체의 교환의 중개자이다. 그 것은 동시에 소비자의 결합체이고, 대개의 경우 동시에 또, 생산의 단위이기도 할 것이다 [그런 위에 그것은 직업집단 또는 생산자 그룹의 연합이기도 할 것이다].

3) 이들의 코뮌은 상호간에 자유로 결합하여 연합, 지방, 국민을 형성한다.

4) 노동은 매력적인 것이 될 것을 요한다. 그것이 없고 보면 노동은 언제나 고역일 것이 다. 그리고 이것이 달성되지 않는 한 여하한 사회문제의 해결도 불가능하다. 이것을 달성 하는 것은 완전히 가능하다. 그리고 노동은 금일에 있어서 보다 훨씬 생산적인 것으로 되 지 않으면 안 되고, 또한 그렇게 될 수 있다.

5) 이런 종류의 코뮌에 있어서 조화를 유지하기 위하여 여하한 강제도 필요치 않다. 세론의 영향만으로 충분하다.

생산물의 분배 및 소비에 관해서는 극히 다양한 의견이 표명되고 있다. 인터내셔널 창설 후 사회주의의 제 이념은 점점 많은 성공을 거두었다. 특히 1868년의 브뤼셀대회, 1869년의 바젤대회에서 인터내셔널은 절대 다수로 경지, 임야, 철도, 운하, 전신 등, 나아가서는 광산과 기계에 대한 집산제를 선언했다. 집산제와 그것을 달성하는 수단으로서의 수탈을 승인함으로써, 인터내셔널의 반권력주의적 성원들은 콜레티비스트[집산주의자]라 칭하여, 마르크스, 엥겔스 및 양인의 신봉자들의 국가주의적 중앙집권적 공산주의에 대하여, 그리고 바부프와 카베의 권위주의적 전통을 지닌 프랑스의 공산주의에 대하여 명확한 일선을 그었다

1867년에 J. 기욤 - 그 자신도 콜렉티비즘의 선전활동에 적극적으로 참가했다 -에 의하여 공간公刊된 『사회주의론』, 마찬가지로 그의 주저인 『인터내셔널 - 기록과 회상』[1905?10년에 파리에서 4권본으로 공간되었음], 끝으로 기욤이 『생디칼리즘의 백과전서』에 최근 기고한 「인터내셔널에 있어서의 콜렉티비즘」에서, 인터내셔널에 있어서의 가장 활발한 연합주의적 성원들 - 바르랑, 기욤, 도 페프, 바쿠닌 및 기타의 동지들에 의하여 ‘콜렉티비즘’이란 말에 붙여진 정확한 의미의 상세詳細가 논술되고 있다. 그들의 언명에 의하면, 권위주의적 공산주의에 대항하여 그들은 콜렉티비즘이란 말 아래서 비권위주의적 연합주의적 또는 아나키스트적 공산주의를 이해했던 것이다. 그들은 콜렉티비스트라고 자칭함으로써 무엇보다도 우선 그들이 반권위주의자라는 것을 역설했다. 그들은 수탈을 완료한 사회에서 소비가 취해야할 형태를 사전에 결정하려고 아니 했다. 그들에 대하여 중요한 것은 사회를 엄격한 틀 안에다 억지로 가두어넣는 짓을 하지 않겠다는 희구이고, 이 점에서 그들은 진보적 그룹에 대하여 가장 광범한 자유를 보류하려고 했다.

불행히도 인터내셔널 내부에 씨 뿌려진 집산제라는 이념은 바젤대회 후 10개월이 지나서 보불전쟁이 일어난 당시, 노동자 대중 간에 널리 알려지기에 이르지는 못했다. 그 결과 파리코뮌 때에도 이러한 집산제 실현의 방향으로의 진지한 기도는 전혀 없었다. 코뮌이 괴멸한 후도 연합주의적 인터내셔널은 그 주요한 이념 - 즉 사회혁명을 실현코자 자본에 대한 노동의 직접투쟁을 실행하기 위하여 노동자의 세력을 반권위주의적 조직으로 결집한다고 하는 이념의 존속에 전력을 기울이지 않으면 아니 되었다.

이리하여 미래의 문제는 필연적으로 배경으로 후퇴하게 되었다. 아나르코 코뮤니즘이란 의미로 해석될 콜렉티비즘의 이념은 약간의 신봉자에 의하여 계속 선전되고 있었으나 그것은 한편으로 「공산당선언」의 제 이념을 포기하기 시작한 후에 마르크스주의자들이 전개한 국가집산주의의 관념과 충돌했고 다른 한편으로는 블랑키스트의 권위주의적 공산주의와 충돌했다. 그것은 또 푸르동에 의한 권위주의적 공산주의의 가혹한 비판의 영향 아래 1848년 이후 라틴 제국諸國의 노동자 대중 간에 착근着根하기 시작한 공산주의 일반에 대한 널리 퍼져있는 편견에 맞닥뜨렸다.

이 저항은 극히 강력했다. 그래서 이를테면 스페인 - 여기서는 연합주의적인 인터내서녈이 노동조합의 광범한 연합체와 밀접히 연결되고 있었다 -에서 당시나 훨씬 그 뒤나 콜렉티비즘이라 하면 단지 집산제의 주장으로만 받아들여졌고, 반국가적 이념을 강조하려면 콜레티비즘이란 말에다 별도로 ‘ 및 아나키’란 말이 첨가되었다[anarquia colectivismo ]. 그런데다가 그럴 때 생산자와 소비자의 개개의 집단이 여하한 - 공산주의적인, 그렇지 않으면 그 이외의 - 분배방식을 취할 것인가는 미리 결정짓지 않고 남겨 두었다.

끝으로 금일의 사회에서 사회주의 사회로 이행하는 방도에 관해서는 인터내셔널의 활동가들은 푸리에가 이에 관하여 말한 것에다 큰 의의를 부여하지 않았다. 그들은 유럽에 혁명적 상황이 성숙해 가고 있다고 느꼈고 더욱이 1848년의 혁명보다도 훨씬 심각하고 전반적인 혁명이 박두하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었다. 그리고 그 때 노동자들은 정부의 명령을 기다릴 것도 없이 그들 자신의 힘을 다하여 자본으로부터 그 수중에 쥐고 있는 독점을 탈취할 것이라고 보았다.

파리코뮌이 준 충격 - 바쿠닌

이상 각장에서 행한 개관에서 인터내셔널에서의 아나키즘의 이념이 어떠한 터전 위에서 발전하고 있었는지 밝혀졌을 것이다.

그것은 중앙집권적이고 권위주의적인 자코뱅주의와 지방적 독립 및 연합이란 이념과의 혼합을 보여주고 있었다. 그리고 이 두 가지가 다 같이 - 방금 우리가 본 바와 같이 - 프랑스 혁명에서 유래하고 있다. 중앙집권적 이념이 1793년의 자코뱅주의의 직계라 한다면, 지방의 독립적 행동이란 이념은 1793?94년의 파리의 제 지구 및 제 코뮌의 건설적이고 혁명적인 강력한 활동의 유산이었다.

그러나 이들의 두 조류 중에서 전자 즉 자코뱅주의 편이 우세했다. 인터내셔널에 가입한 부르주아 지식인의 태반이 자코뱅적 정신의 소유자이고 노동자는 그들의 영향을 받고 있었다.

유럽과 아메리카의 노동자 대중 간에서 혁명사상에 새로운 방향을 잡아주기 위해서는 파리코뮌과 같은 거대한 중요성을 가진 사건이 필요했다.

1870년 7월에 가공可恐할 보불전쟁이 일어났다. 나폴레옹 3세와 그 조언자들은 필연적으로 닥쳐올 것이 예측되고 있던 공화주의의 혁명에서 제국帝國을 구출코자 이 전쟁에 돌입했다. 전쟁은 프랑스의 소멸과 제정의 파멸, 티에르와 간벳다의 임시정부 및 파리코뮌을 초래했고, 계속해서 마찬가지의 기도가 상 에티엔느, 나르본느 기타의 남프랑스 제 도시에서, 그 후는 스페인의 바르세로나와 카르타제나에서 발생했다.

인터내셔널에 대하여 - 적어도 발생한 사건에서 교훈을 끌어내어 생각할 줄 아는 성원들에 대하여 - 이들의 코뮌의 봉기는 하나의 계시였다. 파리의 노동자들이 바리케이드 위에서 사수한 사회혁명의 붉은 깃발 아래 이들의 봉기는 라틴 제 국민 속에 일어날 장래의 혁명의 정치적 형태가 어떠한 것이 아니면 안 되며 또한 아마도 어떠한 것이리라는 것을 보여 주었다.

말하자면 그것은 1848년에 생각되었던 그러한 민주주의적 공화국이 아니라 코뮌 - 자유롭고 독립한, 그리고 아마도 공산주의적인 코뮌인 것이다.

민중혁명의 시기에 그 성공을 확보하려면 어떠한 정치적 및 경제적 방책을 취해야 할 것인가에 대하여, 당시의 지성을 지배한 혼란이 파리코뮌에도 감돌고 있었음은 확실하다. 인터내셔널 내부에 나타난 이러한 지적 혼란은 코뮌에도 지배하고 있었다.

자코뱅주의자도 코뮌주의자[자치주의자]도 - 말하자면 강권적 중앙집권주의자도, 연합주의자도 파리의 봉기에 다 같이 등장하여, 이윽고 코뮌 내에서 양파 간에 충돌을 빚어냈다. 가장 전투적인 분자는 자코뱅주의자와 블랑키스트 중에 있었다. 그러나 블랑키는 투옥되고 있었으며 블랑키스트 지도자들 - 태반이 부르주아였던 - 간에 그 선구자인 바부프주의자들의 공산주의적 이념이 거의 소실되고 있었다. 그들에 대하여 경제문제는 코뮌이 승리를 거둔 뒤에 다루지 않으면 안 될 문제였다. 이런 견해가 당초부터 아주 널리 퍼져 있었기 때문에 민중적인 공산주의적 견해는 충분히 보급되지 않았다. 뿐더러 파리코뮌이 단명으로 끝난 결과 이러한 견해는 확립되기에 이르지 못했다.

이와 같은 조건 아래 패배는 순식간에 닥쳐왔다. 공포의 밑바닥에 떨어졌던 부르주아지의 사납게 설치는 복수를 볼 때, 코뮌의 승리는 경제적 지반에서의 정복과 병행하는 발전으로써 민중이 코뮌 수호에 궐기하지 않고서는 도저히 불가능하다는 것이 다시 한 번 증명되었다.

정치적 혁명을 달성하려면 이것과 병행하여 경제적 혁명이 수행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다.

그러나 동시에 파리 코뮌은 또 하나의 귀중한 교훈을 주었다. 그것은 라틴계 제 국민 간에 프롤레타리아혁명의 이념을 선명히 했다.

자유코뮌 - 이것이 바로 사회혁명이 취해야 할 정치적 형태인 것이다. 설사 전국이, 설사 모든 이웃 나라가 이러한 행동양식에 반대한다 하더라도 일단 어떤 코뮌의, 어떤 지역의 주민이 그 생활필수품의 소비의 사회화를 결의하고 또 이들의 물자의 교환과 생산의 사회화를 바란다면, 그들은 이것을 그들 자신, 그들의 손으로 실현하지 않으면 안 된다. 만일 그들이 이것을 한다면, 만일 그들이 이 위대한 사업을 위하여 전력을 기울인다면, 그들이 뒤떨어진 적대적인 또는 무관심한 부분을 포함한 전 국토의 사태 진전에 정신을 쓰고 있을 때는 한 번도 가져보지 못했던 힘을 자기 자신의 코뮌 속에 발견할 것이다. 혁명의 발목에 감겨 붙은 무거운 짐과 같은 이들의 뒤떨어진 분자를 질질 끌고 걷기 보다는 이들과 공공연한 일전을 감행하는 편이 좋다.

뿐만이 아니라 우리는 다음과 같이 본다. 만약 자유?독립의 코뮌을 지배하는 중앙집권적 정부가 필요치 않다면, 만약 전 국민적 정부가 타도되고 국토의 통일이 코뮌의 자유연합으로 달성된다면, 마찬가지로 중앙의 시정市政도 또한 유해무익한 것으로 될 것이라고. 개개의 코뮌 내부에서 결정해야할 사항은 한 국가 전체에 있어서보다 훨씬 간단한 것이 되고, 시민의 이해관계도 훨씬 단순하고 모순 없는 것으로 될 것이다. 따라서 코뮌에 있어서의 생산자, 소비자, 기타 각종 그룹 간에 일치를 보기 위해서는 연합주의의 원리로 족할 것이다.

파리코뮌은 다시 진정한 혁명가들을 괴롭힌 어떤 문제에도 또한 해답을 주었다. 프랑스는 두 번에 걸쳐 사회혁명을 실시하려고 꾀했다. - 더욱이 두 번 다 중앙정부를 개재시켜서 했던 것이다. 즉 1793년?94년에는 지롱드당원 추방 후 ‘사실상 평등’을, 말하자면 참된 경제적 평등을 엄격한 입법조치로써 도입코자 했다. 다음으로 1848년에는 헌법제정의회를 통하여 ‘사회민주주의적 공화국’을 실현코자 했다.

그리고 그 결과 두 번 다 프랑스는 실패했다. 헌데 이제야 생활 자체가 새로운 해결책을 제시한 것이다. 자유코뮌이 곧 그것이다. 코뮌 자신이 자기의 영역에서 혁명을 실행하지 않으면 안 된다. 동시에 그것은 중앙집권적 국가에서 해방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다. 이 새로운 이념은 ‘아나키’라는 이상을 강화하게 되었다.

이때 우리는 푸르동의 저작 『19세기에 있어서의 혁명의 일반 이념』 속에 깊이 실천적 이념이 포함되어 있는 것을 이해했다. 그것은 다름 아닌 아나키의 이념이었다. 라틴 제 국민들의 진보적 인사의 사상은 이런 방향으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유감스럽게도 그것은 라틴계 나라들의 사이에서만 - 프랑스, 스페인, 이탈리아, 라틴계 스위스 및 와론계 주민의 사이에서 만이었다. 이에 반하여 독일은 프랑스에 대한 승리에서 이와는 전혀 다른 결과를 끌어냈다. 그들은 국가의 중앙집권주의에 무릎을 꿇고 절하게 되었다. 그들은 여전히 로베스피에르적 단계 속에 파묻혀 있어 자코뱅주의자의 역사가들이[실정과는 정반대로] 논술하고 있듯이, 자코뱅 글라브를 숭배하고 있었다.

견고하게 집중한 권력을 갖추어 여하한 국민의 독립에의 경향에 대해서도 적의를 갖고 대하는 국가, 관료진의 견고한 계층적 중앙집권 및 강대한 정부 권력 - 독일의 사회주의자와 급진파가 도달한 것은 이러한 결론이었다. 프랑스에 대한 독일의 승리는 사실인즉 1870년의 프랑스가 갖고 있던 모집병 제도에 대한 독일의 일반 징병제도에 의하여 가능케 된 거대한 군대의 승리에 지나지 않았다는 것, 그리고 승리는 혁명의 위협을 받고 있던 제2제정의 부패로 말미암아 얻어진 것임에 지나지 않다는 것을 그들은 이해하려 하지 않았다. 미상불 프랑스제정을 위협하고 있던 혁명이 독일의 침략에 의하여 방해되지 않았던들 그것은 전 인류에 이익을 주는바 컸을 것이었다.

이리하여 파리코뮌은 라틴계 제국에 아나키즘 이념의 발달을 촉진했다. 다른 한편으로 인터내셔널 총무위원회의 권위주의적 경향이 점점 강하게 전 인터내셔널을 위협하게 된 결과, 이것도 또한 마찬가지로 아나키스트적 경향에 박차를 가하게 되었다.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파리코뮌이 무너진 후에 런던으로 망명한 프랑스의 블랑키스트들의 도움을 얻고 총무위원회에 부여한 권력을 이용했다. 총무위원회는 협회의 행동강령 속에 정해진 자본에 대한 노동의 직접투쟁을 부르주아의회에서의 선동으로 바꿔치기해버렸다.

이 쿠데타는 인터내셔널을 죽이고 말았다. 그러나 그것은 많은 사람들로 하여금 눈을 열게 했다. 어떤 맹신가라도 자기 자신의 일을 정부의 손에 위임하는 결과가 - 가령 그 정부가 인터내셔널 총무위원회의 선임의 경우처럼 민주주의적 원리에 입각하여 선출된 정부라 할지라도 - 그것이 얼마나 어리석은 것으로 되는가를 깨닫게 되었다. 그래서 스페인, 이탈리아, 쥐라, 와론계 벨기에 및 영국 일부의 각 연합이 자치론자들이 총무위원회의 권력에 대항하여 궐기했던 것이다.

이제야 미하일 바쿠닌의 모습 속에 인터내셔널에서 발전하고 있던 아나키스트적 경향은 강력하고 정열적인 옹호자를 발견하게 되었다. 바쿠닌과 쥐라연합의 우인들의 주위에 스위스와 스페인의 젊은이들로 된 작은 서클이 결집했고, 그들은 바쿠닌의 사상의 폭넓은 전개에 기여했다.

바쿠닌은 역사와 철학 상의 광범한 지식을 종횡으로 구사하여 힘찬 일련의 팸플릿, 논문, 서한 속에 근대 아나키즘의 제 원리를 확립했다.

그는 대담하게 국가를 그 전 조직, 전 이념, 전 경향에 걸쳐 완전히 배제한다고 하는 이념을 천하에 천명했다. 일찍이 국가는 역사적 필연이었다. 그것은 종교적 카스트가 장악한 권위에서 발전해 나온 제도였다. 그러나 금일은 국가의 완벽한 배제야 말로 역사적 필연이 되었다. 왜냐? 국가란 자유와 평등의 부정否定에 불과하고, 만인의 이익에 봉사해야할 것을 실현코자 할 때조차 착수된 모든 것을 망가뜨리고 말기 때문이다.

아무리 작은 규모의 것이라 할지라도 모든 국민, 모든 지방, 모든 코뮌은 이웃에 대한 위협으로 되지 않는 한, 하고 싶은 대로 자기 자신을 조직함에 있어서 완전히 자유가 아니면 안 된다. 이른바 ‘연방’이니 ‘자치’니 하는 원리만으로는 불충분하다. 이것들은 단지 중앙집권국가의 권력을 은폐하기 위한 말에 불과하다. 코뮌의 완전한 독립, 자유코뮌의 연합 및 코뮌 내부의 사회혁명 즉 현존 사회의 국가적 조직에 대체되어야 할 생산을 위한 협동조합적 결합 - 이것이야말로 바쿠닌이 논한 바와 같이 과거의 암흑에서 현대문명의 면전에 그 모습을 나타내고 있는 이상이다.

개인은 그의 주위의 만인이 자유롭게 되는 한에서만 자기도 자유롭게 될 뿐이라고 하는 것을 이제야 이해하게 되었다.

이와 같은 이념을 품는 한편 바쿠닌은 동시에 사회혁명의 열렬한 선전자였다. 당시 사회주의자의 태반은 사회혁명의 박두를 예견하고 있었으나 바쿠닌은 바로 이 혁명을 타오르는 불과 같은 격렬한 말로 그 서한이나 저작에서 주장했던 것이다.

13. 아나키즘(속)

현상에 있어서의 아나키즘의 관념

1848년의 전야에, 또한 그 후 인터내셔널에 이르는 기간에, 국가에 대한 반역이 사회와 그 위선적 도덕에 대한 개인의 반역이란 성격을 띠고, 더욱이 주로 부르주아의 젊은 세대 가운데 나타났다고 한다면, 이제야 노동자들 간에서의 이 반역은 일층 심각한 성격을 띠게 되었다. 그것은 금일 국가가 밀어주는 압박과 착취에서 해방된 새로운 사회형태의 탐구로 변화하고 있다.

인터내셔널도 그것을 창립한 노동자들의 자각에 있어서는, 앞에서 말한 것처럼 사회혁명에 의하여 갱신된 사회가 취해야 할 미래상의 맹아를 비춰주는 노동자의 제 집단의 광범한 연합이 아니면 아니 되었다. 말하자면 그 미래의 사회란 금일의 통치기구와 자본주의적 착취가 자취를 감추고 생산자와 소비자 간에 맺어지는 새로운 관계에 자리를 비켜주어야 할 것이었다.

이러한 조건 아래 아나키스트의 이상은 개인적인 것이기를 그쳐야 했다. 그것은 사회적인 이상으로 된 것이다.

양 세계의 노동자들이 그들을 갈라놓는 국경에 상관없이 직접 관계를 맺고 서로 상대편을 잘 알게 됨에 따라 그들은 사회문제를 훨씬 잘 연구, 해명하게 되고 자기네의 힘에 대하여 일층 자신을 갖게 되어 갔다.

그들은 다음과 같이 내다보았다. 즉, 가령 민중이 토지를 소유하게 되고 공업노동자가 공장이나 작업장을 소유하여 자신들의 손으로 산업을 관리하고 국민생활의 필수품의 생산에 그것을 활용하게 된다면 사회의 기본적 필요를 빠짐없이 광범하게 공급하기가 용이할 것이다. 최근의 과학과 기술의 진보는 그 성공을 보증한다. 그럴 때 제 국민의 생산자는 바른 기초 위에서 국제적 교환을 수립할 수 있을 것이다. 작업장과 공장, 광산, 농업, 상업을 잘 아는 사람에게 이것은 아무런 의문 없이 아주 명료하다.

동시에 국가가 그 관료적 계층제도와 역사적 전통의 중압과 함께 독점이나 착취로부터 해방된 자유로운 새 사회의 도래를 방해하지 않을 수 없다는 사정을 깨달은 노동자의 수는 점점 불어날 뿐이다.

역사상 국가는 토지의 사유권을 한 계급을 위하여 확립하고, 그 독점권을 유지시킴으로써 발달해 왔으며, 이리하여 누구보다도 지주계급은 지배계급으로 되었던 것이다. 따라서 노동자들 자신이 자기 자신의 손으로 자기네의 결합 가운데서 이 독점을 타파하는 수단을 찾지 않고서 어찌하여 이러한 수단을 국가가 제공할 수 있다고 하겠는가. 19세기의 과정에서는 국가는 공업소유권, 상업, 은행을 부유한 계급의 수중에 독점시키고 농촌의 공동체에서 토지를 수탈하여 농민을 중세로 억누르고 이들의 부유계급을 위하여 값싼 노동력을 제공함으로써 강대화한 것이다. 이 특권을 배제하기 위하여 국가는 과연 여하한 편의를 제공할 수 있겠는가. 국가의 통치기구는 이들의 특권을 창조하고 유지할 목적으로 발달해 왔는데 도대체 다름 아닌 이들의 특권을 배제하는 역할을 그것이 맡을 수 있겠느냐 말이다. 이 새로운 기능은 그것에 알맞은 새로운 기관을 과연 필요로 하지 않겠느냐 말이다. 이 새로운 기관은 이제야 노동자 자신에 의하여 국가와는 아무 상관없이 노동자 자신의 조합, 노동자 자신의 연합 속에서 만들어 내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 아닐까.

국가에 의하여 출생하고 강화되어온 특권이 소실할 때 국가도 또한 그 존재이유를 상실할 것이다. 일단 인간관계가 착취자 대 피착취자의 관계이기를 그친다면, 전혀 새로운 사회집단 형태가 생길 것이다. 부자가 빈자의 노동을 착취함에 의하여 일층 부유하게 되게끔 짜여 있는 현존 기구가 무용화하자마자 생활은 단순화할 것이다.

지역적 결합을 위한 독립한 코뮌 및 사회적 기능별로 결합한 노동조합의 광범한 연합 - 그럴 적에 양자는 서로 연결하여 사회의 수요를 충족시키기 위한 지주를 제공한 것임 - 이라는 이념은 아나키스트가 해방된 미래사회의 있을 법한 조직을 구체적 현실적인 방식으로 구 상하는 단서로 되었다. 다시 그 위에 코뮌 및 노동조합과 병립하여 개인적 관계로 맺어지는 집단 - 이를테면 온갖 종류의 목적을 충족시킬 필요에서 생기는 무한히 다양한 일시적 또는 장기적으로 존속하는 무수한 집합체가 여기에 첨가될 것이다. 이런 종류의 결사는 이미 현금의 사회에서도 정치적 또는 직업적 집단과 별도로 숱하게 생기고 있는 것이다.

이들 세 종류의 결사는 그물눈처럼 서로 얽혀서 가지각색의 사회적 요구를 - 소비, 생산, 분배, 교통, 위생조치, 교육, 침략에 대한 상호방어, 상호부조, 지역방위, 나아가서는 또 과학상, 예술상, 문학상의 요구와 오락의 요구 등등 모든 것을 충족시킬 것이다. 이들은 모두 활기에 차서 사회적, 지적 환경의 새로운 요구와 새로운 영향에 응답하면서 재빨리 이에 적응할 수 있을 것이다.

가령 이와 같은 사회가 다양한 기호와 요구가 발전할 수 있을 만큼 충분히 광범위하게 다수의 주민을 가진 지역에 자라나 발달한다면, 여하한 권위주의적 강제도 벌써 무용지물에 불과하다는 것은 머지않아 만인의 눈에 명백하게 될 것이다. 권력에 의한 이러한 강제는 사회의 경제생활을 유지하는 데에 무용지물일 뿐더러 대부분의 반사회적 행위를 저지하는 데도 쓸모가 없을 것이다.

실제로 현금의 국가에서 사회생활에 필요불가결한 도덕적 수준을 향상, 유지하는 데 가장 큰 장애물이 되고 있는 것은 무엇보다도 사회적 평등의 결여이다. 평등 없이 1793년에 표현된 말로 하면 ‘사실상의 평등’ 없이 - 정의의 감정의 일반화는 절대로 불가능하다. 정의는 평등주의적인 것이 아니면 안 된다. 헌데 우리들의 계급사회에서는 평등의 감정이 한 걸음마다, 한 순간마다 패배를 맛보고 있는 것이다. 만인에 대한 정의의 감정이 사회의 풍속 습관에 침투하려면 평등이 실제로 존재하지 않으면 안 된다. 정의가 가능케 되는 것은 평등자의 사회에서 뿐이다.

이렇게 되었을 때 강제의 필요, 좀 더 정확히 말해서 강제력에 호소하려는 욕구는 벌써 발생하지 않을 것이다. 금일 행하여지고 있는 것처럼 법률상의 또는 신비적인 형벌의 공포에 의하여, 혹은 우월자로 인정된 인간에 대한 복종에 의하여 혹은 또 공포심 내지 무지로 말미암아 창조된 형이상학적 존재에 대한 궤배에 의하여 개인의 자유를 제한할 필요가 벌써 전혀 없다는 것을 만인이 똑똑히 알게 될 것이다. 헌데 현금의 사회에서는 앞에서 말한 모든 것은 지적 예종隸從으로, 개인적 창의의 억압으로, 도덕적 수준의 저하로, 또한 진보의 정체停滯로 이끌고 있는 것이다.

평등주의의 환경에서는 인간이 안심하고 자기 자신의 이성에 지침을 구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 이성은 이러한 환경에서 발달하는 까닭에 필연적으로 주위의 사회적 습관의 각인刻印을 띨 것이다. 인간은 자기의 전 능력의 완전한 발달을 - 개성의 충분하고 완전한 발달을 달성할 수 있을 것이다. 이와 반대로 금일 부르주아가 ‘우수한 천분天分을 지닌 자’에 대하여 인간성의 완전한 발전을 달성하는 수단을 제공한다고 떠들고 있는 개인주의란 것은 자기기만自己欺瞞 이외의 아무 것도 아니다. 뿐만 아니라 그들이 찬양하는 이 개인주의란 것은 독특한 개성의 발달을 저해하는 것이다.

허구한 나날을 개인적 이윤의 추구에 지새우며, 그 결과 전반적 빈곤으로 전락해 있는 사회에서는, 가장 유능한 사람도 자기의 생존을 지탱하기에 필요한 제 수단을 획득하기 위하여 격렬한 경쟁에 종사하지 않으면 안 된다. 개성의 자유로운 발달에 필요한 일정한 여가를 간신히 얻게 된 극소수의 사람들은 어떠냐 하면, 이 여가를 이용함에 있어 그들은 현금 사회에 의하여 다음과 같은 하나의 조건이 부과되고 있는 것이다. 즉 부르주아적 범속성凡俗性의 법과 관례와의 속박에 복종할 것, 그리고 너무 지나치게 신랄한 비판 또는 반역의 행위에 의하여 이 범속성의 왕국을 동요시키지 않을 것, 이것이 그 조건이다.

‘개인의 충분하고 완전한 발달’이 허락되는 것은 부르주아사회에 아무런 위협을 안주는 인간, 말하자면 부르주아사회에 대하여 흥미있는 인물이기는 하나 위험하지 않은 인물뿐이다.

전술한 바와 같이 아나키스트는 관찰의 결과로 얻어진 논거에 기하여 미래에 관한 예견을 한다.

사실 우리가 18세기 말 이후 교육 받은 계층 간에 지배해온 사조를 분석할 때 부르주아 간에도, 부르주아적 교육을 받고 자기 자신도 부르주아에 한축 들기를 바라고 있는 노동자들 간에도 중앙집권적, 권위주의적 경향이 극히 강력하다는 것을 승인하지 않으면 안 된다. 이와 반대로 반권위주의적, 반중앙집권적, 반군국주의 및 자유합의의 이념은 노동자 간에도, 또한 훌륭한 교양을 갖고 다소라도 자유로운 정신을 가진 부르주아적 지식인 간에도 많은 지지자를 얻고 있다.

사실 다른 저작[『빵의 정복이』나 『상호부조론』]에서 지적한 것처럼, 금일에는 국가와 교회의 테두리 밖에서 온갖 종류 - 경제[철도회사, 노동조합, 기업자조합, 농업협동조합, 수출조합], 정치, 학술, 예술, 교육, 오락, 선전 등 -의 요구를 충족시킬 목적으로 기천, 기만의 결사를 자유로 구성하려고 하는 강한 경향이 있다. 기왕에는 의심할 바 없이 국가와 교회의 의무였던 것이 금일은 자유로운 제 조직의 활동부문으로 되고 있다. 이 경향은 점점 현저한 것으로 되어 가고 있다. 자유로운 제 조직이 몇 천 개씩 등장하기 위해서는 자유의 입김이 교회와 국가의 탐욕스런 권력욕을 숨죽이는 것으로써 충분하다. 자유에 대한 두 개의 노회老獪한 적인 교회와 국가의 권력이 더욱 제한되는 날이면 자유로운 조직은 보다 광범하게 그 활동영역을 확대할 것이다.

미래와 진보는 이 방향에 있다. 그리고 아나키는 바로 이 양자를 표현하고 있는 것이다.

국가의 부정

아나키스트의 경제관에는 경제학이 여태껏 방황하고 있던 혼돈상태의 영향이 꼬리를 물고 있는 것을 인정하지 않으면 안 된다. 국가사회주의자 간에도 그렇지만 아나키스트 간에도 이 문제를 둘러싸고 다양한 견해의 대립이 있다.

사회주의자의 테두리 안에 머물고 있는 모든 사회주의적 당파와 마찬가지로 아나키스트도 현존 토지 사유제도 및 생산수단의 사유제도는 이윤추구를 목적으로 하는 동시에 그 결과이기도 한 금일의 생산구조와 함께, 악惡이라고 보고 있다. 그들은 또 현대사회가 고대의 제 문명과 같이 붕괴하지 않기를 바란다면 이러한 제도를 배제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생각한다.

그렇지만 이 변혁을 달성하는 수단에 관해서는 아나키스트는 국가사회주의의 모든 당파와 완전히 소매를 나누고 있다. 말하자면 아나키스트는 생산을, 적어도 그 주요 부문을 국가의 수중에 거두어들이는 국가자본주의 가지고는 사회문제의 해결이 가능하다고 보지 않는다. 의회에 의하여 임명된 대신들의 지휘 아래 현금 국가의 손에다 우편이나 철도를 넘겨주어 운영케 하는 것은 우리가 품은 이상은 아니다. 우리의 견지에서 말한다면 그것은 새로운 형식의 임금노예제이고 새로운 형식의 착취일 따름이다. 우리는 이것이 임금노예제와 착취의 폐지로 향하는 길이라고 믿지 않으며 이 목표에 이르는 하나의 과도적 형태라고 믿지도 않는다.

자본에 의한 노동의 착취를 폐지한다고 하는 참되고 넓은 의미에서 사회주의를 이해하는 한, 아나키스트는 이러한 사회주의와 손잡고 나왔다. 양자가 다 같이 사회혁명을 예상하고 그 도래를 대망했다. 다만 사회혁명의 결과 등장해야할 사회의 반권위주의적 형태에 대하여 양자가 의견을 달리 했을 뿐이다.

그렇지만 국가사회주의자의 대부분이라고까지 말할 수는 없으나 그 유력한 한 당파가 자본주의의 착취를 폐지할 필요는 전혀 없고 우리의 세대에 대한, 그리고 또 금일 우리가 경과하고 있는 경제발달의 단계에 대한 문제는 착취를 완화하는데 있을 뿐이고, 이를 위해서는 자본가에 대하여 약간의 법적 규제를 강제하는 것으로 족하다고 하는 사상에 물들 때, 아나키스트는 단연코 그들과 결별하지 않으면 안 되게 되었다.

이러한 사상에 아나키스트는 동의할 수 없었다. 우리는 다음과 같이 주장하는 자이다. 즉 자본주의적 착취의 폐지를 미래에 바란다면, 우리는 금일부터 전력을 기울여 그 배제에 노력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우리는 벌써 금일 생산에 필요한 모든 것 - 광산, 공장, 교통수단, 무엇보다도 생산자의 생존 제 수단 -을 자본가의 손에서 생산자의 집단의 수중으로 직접 넘겨오도록 힘쓰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다.

나아가서 또 우리는 생존수단을 현금의 부르주아국가의 수중에 넘겨주는 일이 없도록 유의하지 않으면 안 된다. 전 유럽의 사회주의 제 정당은 금일 있는 그대로의 부르주아국가에 의한 철도, 염鹽생산, 철광 및 석탄광, [스위스에서는] 은행, 알콜 전매의 국유화를 요구하고 있다. 헌데 우리는 부르주아국가에 의한 이러한 공동재산의 취득에서는 근로자, 생산자 및 소비자의 수중으로 나라의 부가 인도되는 것을 방해하는 최대의 장애물의 하나를 발견하는 것이다.

우리가 보는 바로는 그것은 자본가를 강화하여 반항하는 노동자에 대한 투쟁에 있어서 자본가의 힘을 키워주는 수단인 것이다. 자본가 증에서도 현명한 인사는 이 일을 잘 간파하고 있다. 이를테면 그들의 철도 자본은 철도가 일단 국유재산으로 되어 국가의 손에 군대식으로 운영되면 훨씬 안전한 것으로 된다는 것이다. 사회현상을 그 총체에 있어서 전망하는데 익숙한 사람들에게는 다음 점에 관하여 의심할 여지가 없을 것이다. 이것은 사회적 공리로서 다음과 같이 표현된다. ‘바람직한 방향으로 한 걸음 내딛지 않고서 사회변혁을 준비할 수는 없다. 이 방향으로 걸어가지 않는다면 목적지로부터 멀어질 뿐이다’라고.

그리고 실제로, 만약 생산과 교환을 의회, 각료, 현금의 관료들의 손에 넘겨주는 데서 착수한다면, 그것은 생산자와 소비자가 스스로 생산의 주인이 되는 시점에서 떨어져 나감을 의미할 것이다. 국가가 대자본의 종자從者인 이상, 금일 이들의 무리는 당연히 대자본의 도구다.

새로운 독점을, 더욱이 틀에 박히듯이 구 독점자의 이익이 되도록 신설하면서 과거에 성립한 독점을 파괴한다는 것이 도대체 될법한 말인가.

교회와 국가는, 특권계급이 대두하여 자기의 지위를 확립하기 시작할 때, 일체의 특권과 잔여의 민중에 대한 권리와의 합법적 소지자가 되고자 의거하는 정치권력에 지나지 않다. 이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 국가란 이들의 특권을 누리기 위한 지배자 상호간의 보증을 확립하는 제도인 것이다. 국가는 농민과 노동자에 대한 특권계급의 지배를 강화할 목적으로 몇 세기에 걸쳐 정비되어 만들어내어진 것이다. 그 결과 이제 교회도 국가도 이들의 특권을 제거하는데 유용한 힘이 될 수는 없다. 하물며 이들의 특권이 제거된 때에 등장해야할 사회조직의 형태는 더욱 될 수가 없다. 역사는 우리에게 가르치고 있다. 국민생활 속에 매양 새로운 경제형태가 나타날 때마다 - 이를테면 노예제가 농노제로, 농노제가 임금노예제로 교체할 때마다 - 새로운 정치적 결합의 형태가 나오지 않으면 아니 되었다는 것을.

교회가 인간을 옛적의 미신의 속박에서 해방되기 위하여, 또한 인간에게 자유로 받아들여진 새로운 윤리를 제공하기 위하여 일찍이 한 번도 이용된 예가 없듯이, 또 일체의 인간의 평등, 연대성, 통일의 감정이, 입을 벌리기만 하면 모든 종교가가 이구동성으로 설교함에도 불구하고 교회에 의하여 주어진 것과는 전혀 다른 형식을 취하고서야 비로소 인류 간에 널리 전파되었듯이, 이와 똑같이 경제적 해방이 성립하는 것도 국가 속에 표현된 낡은 정치적 형태가 분쇄될 때가 아니고서는 가망이 없다. 금일 국가가 그 관료 간에 분배하고 있는 사회적 기능을 대신 수행할 새로운 조직 형태를 인간은 찾아낼 필요가 있겠다. 이것이 되지 않는 한 아무 일도 할 수 없으리라. 아나키즘이 노력하는 것은 이러한 새로운 사회생활 형태가 꽃피어 나오도록 하기 위해서이다. 그리고 이 개화는 근대적 지식의 도움을 얻고 민중의 창조력이 발휘되어, 위대한 해방운동이 성취된 과거의 어느 시점에나 항상 그랬듯이 금후도 또한 기필코 달성되리라고 본다.

그러니만큼 아나키스트는 입법자의 역할도, 다른 일체의 국가적 활동도 거부한다. 우리는 법률에 의하여 사회혁명을 발생시킬 수 없음을 알고 있다. 왜냐하면 법률은 비록 그것이 헌법제정의회에 의하여 길거리의 대중적 압력 아래 채택되는 것이라 할지라도 [그렇지 않고서는 어떻게 가결될 수 있을 것인가, 의회에서는 다종다양하게 대립하는 제 이해를 화해시키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고 보니], 또한 그것이 이미 채택된 뒤의 것이라 하더라도, 요컨대 일정한 방향으로 행동할 것의 승낙에 불과한즉, 민중 속에 위치한 활동가들이 그 에너지, 그 창의, 그 조직적?건설적 재능을 마음껏 행사하도록 부르는 초대장에 그치는 것이다. 그런데 그러기 위해서는 법률의 정식定式과 원망願望을 현실생활의 사실로 전화시키는 능력을 가지고 또한 그 용의가 있는 힘들이 거기에 존재하지 않으면 안 된다.

이와 같은 이유에서 다수의 아나키스트들은 인터내셔널의 출현 이래 금일에 이르기까지 자본에 대한 노동의 직접투쟁의 목적으로 산출된 노동자의 제 조직에 적극적으로 참가해 왔다. 이 투쟁은 일체의 간접적 행동보다도 훨씬 노동자의 생활을 얼마만큼이라도 개선하는 역할을 해왔다. 그것은 또 자본주의 기구와 그것을 지지하는 국가가 사회에 초래하는 해악에 대하여 노동자의 눈을 열어 주었고 동시에 자본가와 국가의 개재를 허락하지 않고서 관계자 상호간의 소비, 생산, 직접적 교환을 어떤 식으로 조직할 것인가 하는 문제에 대하여 노동자의 사고를 일깨워 주었다.

자본과 국가의 간섭에서 해방된 사회에서의 노동생산물의 분배형식에 관해서는 앞에서 말한 것처럼 아나키스트의 견해는 분열해 있다.

가령 국가가 금일에 이미 철도, 우편, 교육, 상호보험, 국토방위를 그 수중에 넣고 있는 것과 같이 생산과 교환수단까지도 소유하게 된다면, 그 때 출현할 새로운 형태의 임금제도에 반대하는 점에서는 모든 아나키스트가 일치한다. 이미 국가가 장악한 힘[조세, 영토방위, 국교회國敎會 등]에다 이러한 새로운 힘, 즉 산업의 힘까지 첨가한다면 거기서 나올 것은 압제의 새로운 무서운 도구일 것이다.

그러므로 금일 아나키스트의 대부분은 아나르코 코뮤니즘의 해결책에 결집하고 있다. 문명사회에서 가능한 코뮌주의의 형태는 단 하나 아나르코 코뮌주의의 형태라는 견해가 점차 받아들여지기 시작하고 있다. 코뮌주의는 본질적으로 평등주의이고, 더욱이 일체의 특권의 부정을 의미한다. 다른 한편으로 어느 정도의 규모를 가진 무지배사회가 가능키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먼저 만인에 대하여 공동으로 생산된 최소한의 생활물자를 보장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보는 것이다.

이리하여 코뮌주의와 아나키즘은 필연적으로 상호 보완하는 두 개의 이념이다.

그러나 코뮤니즘이란 큰 조류와 나란히 아나키즘 속에 개인주의의 복권復權을 발견하는 또 하나의 조류도 여전히 존재한다. 끝으로 이 조류에 대하여 약간 부언하겠다.

개인주의적 조류

아나키즘에 있어서의 개인주의적 경향이란 지나간 시대의 유물처럼 생각된다. 말하자면 이왕에는 생산방법이 금일 과학과 기술의 진보로 말미암아 가능케 된 그러한 능률을 전혀 달성하지 못했고, 그런 시대에 코뮌주의라 하면 일반적인 궁핍 및 예속화와 같은 것으로 보이고 있었다.

60년 이전에는 미상불 사소한 여유도, 약간의 여가도, 남의 노동력을 착취하는 극소수의 인간에게만 허락되었던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경제적 독립을 존중하는 사람들은 자기네가 소수의 특권자에 속하지 못하게 될 날을 일종의 공포심을 갖고 내다보았다. 당시 푸르동이 프랑스의 전 생산을 1인당 1일 5스으라고 계산하고 있었음을 잊어서는 안 된다.

그러나 금일은 벌써 이 장애는 없어졌다. 농업에서도 공업에서도 인간 노동력의 거대한 생산성이 달성된 결과[졸저 『전원, 공장, 작업장』 참조], 만인에 대한 고도의 복지 수준을, 현명하게 조직된 코뮌주의적 노동으로 극히 용이하게, 더욱이 단시일 내에 이룩할 수 있는 것이다. 이 점에 대해서는 벌써 조금도 의심할 바 없다. 더욱이 이 때에 각인은 하루 4,5시간의 노동이 요구될 뿐이고 적어도 하루 5시간의 아주 자유로운 여가의 시간을 만인이 가질 수 있게 되었다.

따라서 코뮌주의에 대한 이와 같은 반대론은 벌써 근거가 박약한 것으로 되고 있다.

그건 그렇고, 개인주의적 조류는 금일 두 개의 주요한 지맥으로 갈려져 있다. 첫째는, 슈티르너의 의미에서의 순 개인주의자이다, 이 경향은 최근에 와서 예술적 향기가 높은 니체의 저작의 지원을 받고 있다. 하지만 우리는 이것에 대하여 상세히 논하지 않겠다. 이미 앞에서 나온 한 장에서 말했듯이, 이 ‘개인의 확립’이란 것은 형이상학적이어서 실생활에서 거리가 멀다. 또한 그것은 일체의 해방의 기초를 이루는 평등의 감정을 훼손하는 결과로 이끌어 간다. 어째서 그러냐 하면, 남을 지배하려고 욕망하면서 자기를 해방할 수는 없으니 말이다. 뿐더러 그것은 ‘개인주의자’라 자인하는 사람들로 하여금 귀족, 승려, 부르주아, 관료 등 그들 자신을 대중보다 ‘우월한’ 자라고 자부하는 소수자에게 접근케 하며 국가, 교회, 법률, 경찰, 군부 기타의 오랜 세월에 걸친 온갖 압제는 다름 아닌 그들 특권적 소수자의 존재에 기인하는 것이다.

또 하나의 ‘개인주의적 아나키스트’의 지맥은 푸르동의 의미에서의 상호주의자들로 형성된다. 이들의 아나키스트는 사회문제에 해결을 구하여 노동권에 의한 생산물의 교환을 도입하는 자유롭고 자발적인 조직을 형성하려고 했다. 노동권은 주어진 공업적 수준에 있어서 어떤 대상을 생산하는데 필요한 노동시간 수 또는 공공의 이익으로 인정된 기능을 수행하는데 개인이 소비한 시간 수를 표시하는 것이다.

이와 같은 제도는 그러나 사실인즉 결코 개인주의적인 것은 아니다. 그것은 공동주의[코뮤니즘]와 개인주의 간의 타협을 표현한다. 말하자면 생산자에 대한 보수에는 개인주의가, 반면 생산수단의 소유에 관해서는 공동주의가 채용되고 있는 것이다.

이 이중성은 우리가 보는 바로는, 이런 형식의 제도가 운영될 적에 극복이 안 될 장애물일 것이다. 두 개의 대립하는 원리, 즉 한편으로는 일정한 날까지 생산된 모든 것을 공유로 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생산된 것에 대하여 개인주의를 보존한다. 게다가 그때 이러한 개인주의 원리는 취미도 수요도 무한히 다양한 사치품뿐만 아니라 어느 사회에서나 평가가 한결같이 정해져 있는 생활필수 물자의 생산에 대해서도 적용된다. 이러한 원리로 사회가 조직될 수는 없는 것이다.

다시 다음과 같은 점도 간과되어서는 안 된다. 즉 거대사회에서 산업이 발달해 있는 경우 지방에 따라 기계와 생산방식에 큰 차이가 있다는 사정말이다. 이러한 차이가 있는 까닭으로 어떤 기계를 갖고 같은 양의 노동을 투하한 결과 다른 기계를 사용하는 경우보다 2배나 3내의 생산량을 올릴 것이다. 이를테면 금일의 직물산업의 경우 직기織機의 성능에 대단한 차이가 있으니까, 한사람의 노동자가 관리할 수 있는 직기의 수는 3대에서 20대[노오스로프식 직기]까지로 차이가 난다. 다른 한편으로 또, 상이한 생산부문에서 개개 노동자가 소비하는 근육노동과 두뇌노동과의 힘에도 차이가 있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 이와 같은 차이를 고려한다면 과연 노동시간이 생산물의 매매교환상의 척도로서 쓸모가 있는지 어떠니 하는 문제가 나올 것이다.

현금의 상업적 교환이라면 이야기는 알만하다. 그러나 노동력이 매매되는 상품이기를 그쳐서 벌써 거래대상이 아닌 노동시간이란 것에 평가의 기초를 두는 매매교환은 이해하기 어렵다. 노동시간이 생산물의 등가[오히려 근사치적 평가액]를 산정하는 데에 쓸모가 있는 것은 이미 대부분의 생활필수품에 공동주의적 원칙이 승인되고 있는 사회에서 뿐일 것이다.

만약에 개인적 보수란 이념에 대한 양보로서 ‘단순’노동시간에 대한 보수 외에 미리 수업修業의 연한을 요하는 ‘숙련’노동에 대한 특별의 보수를 도입하거나 직원의 계층제도에 있어서의 ‘승급의 기회’를 설정하거나 한다면, 그 결과는 우리가 잘 알고 있으며 따라서 그 폐단을 제거하는 수단을 강구하고자 하는 현금의 임금제도의 특징을 부활하는 셈이 될 것이다.

그렇지만 상호주의자의 이념은 아메리카합중국의 농업에서 다소간의 성공을 거두고 있으니 거기서는 약간의 대농장조직에서 작용을 계속하고 있는 듯하다. 이 역시 잊어서는 안 될 것이라 하겠다.

상호주의자에 접근하는 것은 아메리카의 개인주의적 아나키스트이니 그들은 19세기 50년대에 S.P. 앤드류스, W. 그린, 후에는 리산다`스푸너, 그리고 금일에는 여러 해에 걸쳐 『자유』지를 발행하고 있는 벤자민 터커에 의하여 대표된다.

그들의 이념은 푸르동에서 유래하고 있으나 동시에 허버트 스펜서에서도 나오고 있다. 그들은 아나키스트를 구속하는 단 하나의 법이 있고, 그것은 자기 자신의 일에 스스로 종사한다는 것이다, 라는 명제에서 출발한다. 그래서 개개인 및 개개 집단은 제각기 하고자 하는 대로 행동할 권리가 있으며, 가령 그렇게 할 힘이 있기만 하다면 전 인류를 복종시켜도 상관없다. 만약에 이들의 원리가 전면적으로 적용된다면 하등 위험할 것은 없다고 터커는 말한다. 왜냐하면 개개인의 힘은 다른 모든 개인의 마찬가지의 권리에 의하여 제한될 것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이와 같이 생각하는 것은 우리의 의견으로서는 형이상학에 과대한 경의를 갖고 공상적 억측을 함부로 하는 것에 불과하다. 어떤 자가 그렇게 할 힘이 있기만 하다면 전 인류를 복종시킬 권리가 있고, 더욱이 이 권리는 타인이 가지는 평등한 권리에 의하여 제약을 받는다고 하는 이런 말투는 그야말로 변증법에 빠지고 있는 것이다. 반면 실제생활의 영역에 발을 붙이고 있는 우리에게는 성원의 한 사람의 일이 다 성원 전부는 아니라 하더라고 그 다수에게 무관계한 그런 사회 또는 다소간의 공통한 사항을 가지는 사람들의 단순한 집합체를 상상해 본다는 것은 절대로 불가능하다. 하물며 성원 간의 부단의 상호관계가 나머지 다른 사람들에 대한 각인의 관심을 조금도 환기하지 않고 사회에 대하여 자기의 행동이 가져올 결과를 고려하지 않고서도 행위 할 수 있는 그런 사회를 생각해 보려고 해도 그것은 될 수 있는 일이 아니라 하겠다.

그런 까닭으로 터커는 스펜서와 마찬가지로 뛰어난 국가 비판론을 전개하고 개인의 권리의 강력한 변호론을 펴는 일방, 타면으로는 개인의 토지소유권을 승인하면서 결국은 개인주의자의 시민들이 서로 동류간의 싸움을 연출하지 않도록 한답시고 국가를 재건하기에 이른 것이다. 허기야 터커는 국가에 대하여 그 성원을 옹호할 권리만을 승인했다. 하지만 금일 보이는 바와 같은 막대한 권리를 갖춘 국가가 성립하기 위해서는 상기의 권리와 기능이 승인되기만 하면 충분한 것이다.

미상불 국가제도의 역사를 검토해 본다면, 개인의 권리의 옹호라는 이 구실 아래 세워지지 않은 국가가 없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그 법률, 침해된 개인을 보호할 권한을 받은 관리들, 법률의 적용을 감시하기 위하여 세워진 계층제, 법률의 원류를 연구하기 위하여 개설된 대학, 법의 이념을 신성화하는 교회, 질서를 유지하기 위한 계급제도, 병역의 의무, 그 전매권, 끝으로 그 해악과 그 압제 - 이 모든 것은 타인에 의하여 침해된 개인의 권리를 보호한다고 하는 이 제일의 구실에서 발전해 나온 것이다.

이상 간략하게 개관한 것만 가지고도 어째서 개인주의적 아나키즘의 체계가 부르주아적 ‘지식인’ 간에 신봉자를 가졌을 뿐 근로자 대중 간에 거의 보급되지 못했던가 그 이유가 판연할 것이다. 그러나 그렇다 해서 개인주의적 아나키스트가 그 동지인 공동주의자에 대하여 퍼붓는 비판의 중요성을 승인 아니 할 수 없는 것이다. 즉 그들은 아나르코 코뮌주의자가 중앙집권주의나 관료주의 편으로 빠져 떨어지는 것을 미연에 방지하고 일체의 자유사회의 제일의 원천인 자유로운 개인에 항상 정신을 쓰도록 설득한다. 낡은 미신에 빠져 버리는 경향은 진보적 혁명가들 간에서조차 너무도 많이 보인다는 것은 우리도 잘 아는 바이다.

금일 아나르코 코뮌주의는 노동자 간에 - 특히 라틴계 제국의 노동자 간에 - 확고한 지반을 구축하고 있으며 그들 노동자는 다소간에 목전에 박두한 혁명행동의 문제에 관심을 기울여 벌써 국가의 혜택에 신뢰를 두려고 하지 않게 되었다.

제 정당의 무익한 선동의 권외에 노동자의 전투력을 단결시키고 선거라는 허황한 기구와는 별개의 유효한 방식으로 자기 자신의 힘과 능력을 헤아릴 수 있도록 된 노동운동은 아나르코 코뮌주의의 제 이념의 발달에 크게 기여하고 있다. 다음과 같이 예상하더라도 이는 필시 과대한 희망적 관측에 그치는 것은 아닐 것이다. 즉 도시와 농촌과의 근로대중 간에 진지한 운동이 전개되기 비롯할 때, 아나키즘의 방향을 향하여 무엇인지가 기도될 것이다. 그리고 이 기도는 1793년 및 1794년의 프랑스 인민에 의한 그것보다도 훨씬 심각한 것이 되리라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을 것이라고.

14. 아나키즘의 약간의 결론

아나키즘의 기원과 그 원리를 서술한 후, 이번에는 우리의 이념이 현대의 과학과 사회운동 가운데서 차지하는 지위를 좀 더 정확히 결정하는 두서너 본보기를 제시하겠다.

예컨대 사람들이 대문자를 쓴 법에 관하여 ‘법이란 진리의 객체화이다’라느니, ‘법의 발전법칙은 인간정신의 발전법칙이다’라느니, 혹은 또 ‘법과 도덕은 동일하다. 다만 형식에 있어서 다를 뿐이다’라고 언명할 때, 우리는 이런 따위의 듣기 좋은 문구에 대하여 괴테의 『파우스트』에 나오는 메피스토펠레스가 그랬듯이 마이동풍으로 흘려버린다. 이와 같은 문구를 써놓은 사람들은 그것을 심원한 진리라고 확신하고 이러한 사상에 생각이 미치기까지 많은 정신적 노력을 아끼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이들의 사상가는 사도邪道에 들어서고 있으며 이처럼 그럴듯하게 들리는 문구가 표현하는 것은 아주 황당무계한 기초 위에 구성된 무자각적인 일반화의 시도에 불과할 뿐더러 사람들을 최면술에 걸려고 명문구로 흐려놓은 일반화에 불과하다.

기왕에는 법률에다 신적神的 기원을 부여하려고 노력한 때도 있었다. 그러나 지금은 직물織物의 진화나 벌이 꿀을 만드는 방식에 관하여 연구하는 것과 똑같은 방법으로 법 관념의 기원과 그 발달과정을 연구할 수 있는 것이다. 인류학자들의 노작을 이용함으로써 우리는 가장 원시적인 미개인에서 시작하여 사회적 습속과 법 관념을 연구하고 역사상의 각 시대의 법전을 통하여 금일에 이르기까지의 법률의 점차적 발달의 자취를 더듬어 볼 수 있다.

이렇게 해서 우리는 앞에 나온 한 장에서 말한 결론에 도달한다. 즉 일체의 법률은 이중의 기원을 갖고 있으니 이점이 바로 관례에 의하여 세워져 어떤 시대의 어떤 사회에 존재하는 도덕적 규칙을 표시하는 관습에서 법률을 구별하는 것이다. 법률은 이들의 관습을 확인하고 그것을 결정結晶시킨다. 그러나 동시에 소수 지배자와 군인의 이익에 봉사하는 새로운 제도를 슬쩍 도입하려고 항상 이 관습에 편승한다. 이를테면 법률은 노예제도를, 또한 계급분화를, 그리고 가장家長, 승려, 군인의 권력을 도입하거나 신성화하거나 한다. 또한 그것은 농노제도를, 후에는 국가에의 예종을 슬쩍 끌고 들어온다. 이런 식으로 사람들이 그런 줄도 모르는 사이에 멍에를 쓰게 되어, 벌써 유혈의 혁명에 의하지 않고서는 이 멍에를 벗어날 수 없게 되어버린 것이다.

어느 시대나 사태는 이렇게 진행해 왔고, 그리하여 현대에 이르고 있다. 같은 사정은 금일의 소위 노동입법에 대해서도 말하여진다. 이 입법은 ‘노동자의 보호’를 공인된 목적으로 구가하면서 실상은 은연중에 스트라이크가 일어날 때 국가에 의한 강제적 중재[강제적 중재란 - 이 무슨 모순이랴]란 관념을 집어넣고, 혹은 일일 최저 몇 시간이라는 식으로 강제노동 시간의 원칙을 삽입한다. 이리하여 스트라이크에 있어서 철도의 군대식 착취의 길이 열리고 또는 이전의 법률에 의하여 토지를 빼앗긴 아일랜드의 농민의 소유권 상실에 법적 인가를 부여한다. 혹은 또 질병이나 노령보험이나 실업보험의 제도마저도 도입되나, 이것으로써 국가는 노동자의 매일每日을 통제할 권리와 의무를 손에 넣어 국가와 관료의 인가 없이는 노동자가 제 맘대로 휴가를 할 수조차 없게끔 할 권리를 확보한다.

그리고 이런 사태는 사회의 일부가 사회 전체에 대신하여 법률을 제정하는 한, 금후도 계속될 것이다. 이러한 방식으로 그들은 자본주의의 주요한 지주인 국가권력을 항상 증대시켜 간다. 일반적으로 법률이 만들어지고 있는 동안은 이 사정이 변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니만큼 고드윈 이래 아나키스트는 일체의 성문법을 부인하는데 일관했다. 하지만 아나키스트는 누구나 어느 입법자보다도 몇 갑절이나 정의를 간절히 바라고 있다. 아나키스트에게 정의란 평등과 같고 평등 없이 정의는 불가능하다고 보는 것이다.

다음과 같은 반론이 우리들 앞에 제출될 것이다. 즉 법률을 부인함으로써 우리는 일체의 도덕을 또한 부인하게 된다. 칸트의 이른바 ‘정언적定言的 명령’을 우리가 인정 안 하기 때문이라고. 이에 대하여 우리는 이러한 반대론의 어법 자체가 우리의 이해理解를 초월한 것이며, 우리에게는 전혀 인연이 없는 것이라고 대답하겠다. 그것은 도덕성을 연구하는 자연과학자가 그것을 불가능하고 기이한 것으로 느끼는 것과 마찬가지다. 따라서 논쟁에 들어가기 전에 우리는 상대방에게 다음과 같은 물음을 제기할 것이다. ‘이 정언명령이란 말로 당신은 도대체 무엇을 의미하려 하는가. 당신은 자기의 주장을 남이 알아들을 수 있는 말로 번역할 수 없는가. 이를테면 라프라스가 고등수학의 공식을 만인에게 알려지는 말로 표현하는 방법을 발견했던 것처럼. 대학자란 사람들은 다 그렇게 했던 것이다. 어째서 당신도 그렇게 하지 않는가’라고.

실제로 ‘보편법칙’인 ‘정언명령’이니 말할 때, 그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그 의미는 ‘남이 너에게 대하여 하여지고 싶지 않은 것을 너도 남에게 해서는 안 된다’고 하는 관념이 만인에게 있다고 하는 것인가. 그렇다면 대단히 좋다. 우리도 [허치슨이나 아담 스미스가 한 것처럼] 어디로부터 이 도덕적 관념이 인간에게 생겼는지, 어떻게 해서 그것이 발달해 왔는지 연구하자.

다음으로 정의의 관념이 얼마나 평등의 관념을 함축하고 있는지 연구하자. 이것은 극히 중요한 문제다. 왜 그런고 하니, 타인을 자기와 평등한 자로 생각하는 사람만이 ‘남이 너에게 하여지고 싶지 않은 것을 너도 남에게 해서는 안 된다’는 규칙에 따를 수 있겠기 때문이다. 농노 소유자나 노예상인들이 ‘보편법칙’이나 ‘정언명령’을 농노나 흑인에 대하여 승인할 수 없었음은 명백하다. 왜냐하면 그들은 농노나 흑인을 평등자라고 인정 안 했기 때문이다. 가령 우리의 이 말이 옳다면 불평등의 관념이 주입되어 있는 곳에 도덕성을 가르쳐 준다는 것은 어리석은 짓이 아닐지 검토해보지 않으려는가.

끝으로 우리도 퀴이요처럼 ‘자기희생’이란 무엇인가 분석해 보자.

그런 뒤에 인간의 도덕적 감정 - 예컨대 이웃사람에 대한 평등사상에 표현된 감정이 발달하는데 역사상 가장 많이 기여한 것인 무엇인지 검토해 보자. 이 세 가지 연구를 하고 나서야 비로소 어떠한 사회조건과 어떠한 사회제도가 미래에 대하여 최선의 결과를 약속하는가를 이끌어낼 수 있을 것이다. 그 때 우리는 종교가 법률에 의하여 수립된 경제?정치적 불평등이, 나아가서 또 법률, 형벌, 감옥, 재판관, 옥리獄吏, 사형집행인이 도덕 감정의 발달에 얼마만큼 기여하는 것인가를 이해할 것이다.

이 모두를 하나하나씩 상세히 연구하자. 그래서야 비로소 우리는 도덕에 대하여, 그리고 법률, 재판, 경찰관의 도덕적 감화에 대하여 유효하게 이야기 할 수 있을 것이다. 어중간한 지식의 천박하고 피상적임을 은폐하는데 소용이 있을 뿐인 거창한 말들은 쓰지 않는 편이 좋겠다. 이들의 과대한 망언도 어떤 특정의 시기에는 불가피 했을는지 모르겠다. 그것이 일찍이 유익했던지 어떤지는 의문이지만, 그러나 금일은 우리가 정원사나 식물학자가 식물의 생성에 가장 적합한 조건을 연구하는 것과 꼭 같은 방식으로 현하의 가장 중요한 사회문제의 연구에 착수할 수 있는 정세에 있으니 그와 같이 해보지 않으려는가.

경제학상의 문제에 대해서도 같은 것을 말할 수 있다. 이를테면 “완전히 개방된 시장에 있어서는 상품의 가치는 그 생산에 대하여 사회적으로 필요한 노동량에 의하여 계산 된다”[리카도, 푸르동, 마르크스 기타 참조]고 경제학자가 말할 때도 이 주장이 이러한 권위자들에 의하여 말해졌으니까 라든지, 그렇지 않으면 노동이 상품의 가치를 계산하는 참된 척도이다 라고 주장하면 ‘아주 사회주의적’으로 들리니까 라든지, 하는 이유로 이 주장을 우리가 신조로 받아들이는 것은 아니다. 우리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이 명제가 올바를 수도 있다. 그러나 제군이 그렇게 언명함에 의하여 제군은 가치와 노동량이 필연적으로 비례하는 것이고 그것은 꼭 낙하하는 물체의 가도價度와 낙하의 계속하는 초수秒數가 비례하는 것과 완전히 같다고 주장하고 있는데 생각이 미치지 않는가. 이와 같이 하여 제군은 이 두 가지 크기 사이에 특정한 양적 관계가 있음을 인정하고 있다. 그렇다면 제군은 양에 관한 단정을 확인할 수 있는 단 한 가지 길인 계량을, 다시 말하면 양적으로 계산된 관찰을 하고 있단 말인가.”

“일반적으로 말해서 교환가치는 필요노동의 양이 증대할 때에 증대한다”고 제군도 말할 수 있겠다. 이렇게 아담 스미스도 이미 결론했었다. 그러나 그 결과로서 이들 두 개의 양은 정비례하여 한편은 다른 편의 척도라고 단정하는 것은 큰 잘못이다. 그것은 비유하면 명일의 강우량은 청우계晴雨計가 일정한 계절에 특정의 장소에서 설정된 평균점 이하로 몇 밀리 내려갔는가, 그 양에 비례한다고 주장하는 것과 꼭 마찬가지로 큰 잘못이다.

청우계의 강하와 강우량과의 사이에 일정한 상관관계가 있다는 것을 최초에 주목한 사람, 그리고 매우 높은 곳에서 떨어지는 돌은 겨우 1미터의 높이에서 떨어지는 돌보다 훨씬 큰 속력을 얻는다는 것을 처음 인정한 사람은 과학적 발견을 한 사람이다[아담 스미스는 이것과 같은 일을 가치에 관하여 행한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발견자의 뒤에 나타나 강우량은 청우계가 평균점에서 내려간 저울눈의 양에 따라 계량된다느니, 낙하하는 돌이 통과하는 공간은 낙하의 시간에 비례하고 그것에 의하여 계량된다느니 주장하는 사람은 어리석은 말을 지껄이고 있을 뿐이다. 뿐더러 이런 사람은 과학적 탐구의 방법이 무엇인지를 전혀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이고, 그런 사람의 저작은 과학적인 것이 아님을 - 비록 그 책이 과학적 은어隱語에서 빌려온 용어로 장식되어 있다 할지라도 - 증명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또, 상품의 가치와 그 생산에 필요한 노동의 양을 정밀한 척도로 확정하는 데는 정확한 데이터가 결여되어 있다는 핑계를 한다면, 그것은 근거 없는 구실이라는 것을 지적하고 싶다. 자연과학에서는 두 개의 양이 상호 의존하여 한편이 불어나면 다른 편도 불어난다고 하는 이와 같은 허다한 상관관계의 사례가 있다. 예컨대 식물의 성장속도는 무엇보다도 그 식물이 받는 열과 광의 양에 의존한다. 또한 총포의 반동은 탄약통의 화약의 양을 증가하면 증대한다.

그러나 무릇 학자라 이를만한 학자라면 - 양자의 양적 관계를 계량함이 없이 - 이상의 결과로서 식물 발육의 속도와 그것이 받는 열량, 그리고 총포의 반동과 탄약통彈藥筒의 화약량은 정비례한다고 하는 기묘하기 짝이 없는 사상을 주장하겠는가. 만약에 한편이 2배, 3배, 10배로 증가한다면 다른 편도 같은 비율로 증대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바꿔 말하면 가치와 노동량에 관하여 리카도가 이후 주장되고 있는 바와 같이, 양자는 한편이 다른 편에 의하여 계량된다고 논하는 그런 과학자가 있겠는가.

이러한 종류의 관계가 두 개의 양量 사이에 존재한다고 하는 가설을, 즉 가정을 만들어 놓고서 대담무쌍하게도 이 가설을 법칙이라고 제시할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이러한 단정을 서슴지 않고 하는 것은 오직 경제학자나 법학자들 즉 자연과학에서 ‘법칙’이란 말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일편의 지식도 안 가진 사람들뿐이다.

일반적으로 두 개의 양 사이의 관계는 극히 복잡한 것이니, 이는 가치와 노동과의 관계에 대해서도 타당하다. 교환가치와 노동량은 서로 정비례하는 것은 아니다. 말하자면 한편이 다른 편에 의하여 계량되는 것은 결단코 아니다. 그리고 이것을 지적한 것은 아담 스미스였다. 그는 각 물품의 교환가치가 그것을 생산하는데 필요한 노동량에 의하여 계량된다고 말한 뒤에 [상품의 가치를 연구한 후] 즉시 이렇게 부언하지 않으면 아니 되었다. 즉 원시적 교환제도 아래서는 그러했다 할지라도 자본주의 제도 아래서는 벌써 그렇지 않게 되었다고. 이는 완전히 옳다. 강제노동과 이윤추구의 교환이란 자본주의 제도는 이와 같이 단순한 관계를 파괴하여 노동과 교환가치 사이의 관계를 변경시키는 여러 가지 새로운 원인을 도입했다. 이것을 무시하는 것은 경제학에 종사하는 일이 못된다. 그것은 관념을 혼란시켜 경제학의 발달을 방해하는 일에 지나지 않는다.

가치에 관하여 앞에서 지적한 바는 거의 모든 경제학적 명제에도 들어맞을 것이다. 이들의 명제는, 금일에는 확고부동한 진리로서 - 특히 과학적 사회주의자라고 즐겨 자처하는 사회주의자들 간에 - 받아들여져, 얘깃거리도 안 될 만큼 나이브(소박)하게 자연법칙으로서 제시되고 있다. 헌데 이들의 소위 법칙의 대부분이 옳지 못한 것일 뿐더러 이들의 법칙을 확신하고 있는 사람들마저 만약에 그들의 수량적 명제를 마찬가지로 수량적 연구에 의하여 검증할 필요가 있다는 것을 깨닫게만 된다면 곧 이들의 법칙이 그릇된 것임을 스스로 납득하리라고 우리는 주장한다.

그런데 우리들 아나키스트에 대하여 경제학은, 경제학자들 - 부르주아 진영에 속하건 사회민주주의의 입장에 서있건 -에 의하여 제시되고 있는 것과는 약간 다른 형태로 생각되어지고 있다. 본래 과학적, 귀납적 방법은 이들 양쪽 경제학자의 관여하는바 아니므로 그들은 ‘자연법칙’이란 표현을 함부로 쓰고 싶어 하지만, 그것이 도대체 어떠한 의미의 것인가에 대해서는 전혀 알지 못한다. 무릇 자연법칙은 조건부란 성격을 띠고 있다는 것을 그들은 알지 못한다. 자연법칙은 항상 다음과 같은 형식으로 표현되는 것이다.

‘만약에 이러이러한 조건이 자연 속에 발견된다면, 결과는 이러이러한 것으로 나타날 것이다. 만약에 교차하는 점의 양면에 등각等角을 짓게끔 한 직선이 다른 직선과 엇갈린다면, 그 결과는 이러이러한 것으로 될 것이다. 만약에 성좌星座 간에 우주 공간에 존재하는 운동 만이 두 개의 물체에 작용하고 그리고 무한이 아닌 거리에서 이들의 두 개 물체에 작용하는 다른 물체가 없다면, 이들 두 개 물체의 중심重心은 이러이러한 속도록 서로 접근할 것이다[이것이 만유인력의 법칙이다].

이러한 식이다. 항상 여기에 ‘만약에’가 달려있다. 어떤 조건이 붙어 있다.

결국 경제학의 이른바 법칙이나 이론이란 것은 실제로는 다음과 같은 성격을 가진 명제에 불과하다. 즉 ‘만약에 어떤 나라에 국가가 [조세의 형식으로] 강요하려는 조건, 그리고 국가가 토지, 공장, 철도 등의 소유자로 인정하는 사람들에 의하여 제공되는 노동조건을 받아들이지 않고서는 1개월도, 아니 반 개월조차도 살아갈 수 없는 다수의 인간이 항상 있다고 한다면, 그 결과는 이러이러한 것으로 되리라’.

지금까지에는 언제나 경제학은 이와 같은 조건 아래 일어나는 일의 열거로 끝났지 조건 그것을 열거하거나 분석하는 일은 없었다. 경제학은 이들의 조건이 개개의 경우, 어떻게 작용하는가에 대해서도, 이들의 조건을 버티어 주고 있는 것이 무엇이냐에 대해서도 검토하지 않았다. 설사 이들의 조건이 어디에선가 언급된 경우에도 곧장 잊혀 버리고 말았다.

경제학자는 그러나 이러한 조건을 깨끗이 잊어버릴 뿐만이 아니었다. 그들은 이들의 조건의 결과로서 유래하는 제 사실을 숙명적으로 확고부동한 법칙으로서 제시했던 것이다.

사회주의의 경제학에 관해서 말하면, 그야 물론 이들의 결론을 약간 비판하고 혹은 다른 방식으로 약간의 결론을 해석한다. 그러나 사회주의 경제학도 또한 예에 빠지지 않고 앞에서 말한 조건을 망각하고 항상 자기 자신의 길을 계속 걷지 않았다. 그것도 역시 전철을 밟아 구태의연한 상태에 있었다. 사회주의 경제학이 [마르크스에 있어서] 달성한 최대의 성과도 요컨대 형이상학적 부르주아적 경제학의 제 정의定義를 섭취하여 이렇게 말할 뿐이었다.

“보라, 제군의 정의를 받아들여도 자본가가 노동자를 착취하고 있다는 것을 역시 인정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다”라고. 이와 같은 얘기라면 팸플릿 같은 데서는 기분 좋게 들리겠지만 과학으로 되기에는 거리가 멀다.

일반으로 학學으로서의 경제학은 이와는 다른 방식으로 구성되지 않으면 안 될 것으로 본다. 그것은 자연과학으로서 다루어져 새로운 목적을 제기하지 않으면 안 된다. 생리학이 동식물에 대하여 차지하는 것과 비슷한 지위를 경제학은 인간사회에 대하여 점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것은 사회생리학이 되지 않으면 안 된다. 목적으로서 제기하지 않으면 안 될 것은 사회의 부단히 성장하는 수요와 그것을 충족하기 위하여 쓰이는 각종의 수단의 연구가 아니면 안 된다. 그리고 이들의 수단을 분석하여 그것이 어느 정도로 과거 및 현재에 이 목적에 적합한 것인지를 검토하지 않으면 안 된다. 끝으로 [베콘이 오래 전에 지적한 것처럼] 모든 과학의 최종 목적은 예보와 실제생활에의 적용에 있는 이상, 경제학도 금일의 모든 수요를 가장 잘 충족시키는 수단, 말하자면 최소의 에너지 소비[경제]에 의하여 인류 일반에 대한 최선의 결과를 얻을 수단을 연구하지 않으면 안 된다.

이리하여 다음의 것이 명백할 것이다. 즉 우리는 부르주아 경제학 및 사회민주주의의 입장에 서있는 경제학자들의 대부분의 결론과는 몇 가지 점에서 아주 다른 결론에 도달하고 있다는 것, 우리는 그들에 의하여 지적된 몇 가지 상관관계를 ‘법칙’이라고는 인정하지 않는다는 것, 우리의 사회주의론은 그네들의 그것과 다르다는 것, 우리가 현실의 경제생활 가운데 관찰하는 발전경향의 연구에서 도출한 결론은 원망願望과 가능성에 관하는 그들의 결론과 크게 차이를 가진다는 것, 바꿔 말하면 그들이 도달하는 귀결이 국가자본주의 및 집산주의적 임금노동제임에 반하여 우리의 그것은 자유공동주의라는 것 등이다.

우리가 잘못이고 그들 편이 옳을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럴는지도 모르는 것이다. 그렇지만 우리들 중에서 누가 옳고 누가 그릇되었나를 검토코자하면 그것은 어떤 저술가의 논설에 대한 또는 설說하려고 한 것에 대한, 비산친식 주해註解에 의하여 할 수도 없으려니와 헤겔의 3부작을 원용함에 의해서도, 하물며 저 변증법적 방법에 호소하는 방식에 의해서도 하지 못하는 것이다.

그것은 다만 자연과학의 제 사실을 연구하는 그런 방식으로 경제관계의 연구에 착수함에 의해서만 가능한 것이다.

아나키즘은 언제나 이 동일한 방법에 의하여 사회의 정치형태 특히 국가에 관한 아나키즘 독특한 결론에 도달한다. 아나키스트는 다음과 같은 종류의 형이상학적 명제에 굴복할 수 없다. ‘국가란 사회에 있어서의 최고의 정의는 관념의 확증이라’느니, ‘국가는 진보의 도구이고 그 담당자라’느니, ‘국가 없이는 사회가 없다’는 따위의 주장 말이다. 아나키스트는 자기의 방법론에 충실히 따라, 흡사히 자연과학자가 개미나 벌이나 북국의 호반에 집을 지으려고 날아오는 새들의 사회를 연구하는 것과 똑 같은 태도로 국가의 연구에 대처한다. 우리는 이미 10장과 12장에서 된 짧은 요약 과거의 정치형태 및 미래의 있을 수 있는, 그리고 바람직한 진보에 관한 연구 성과를 말했다.

부언하면 우리들의 유럽문명[우리가 속하고 있는 과거 15세기 간의 문명]에 있어서 국가는 16세기에 이르러 발생한 사회생활 형태에 불과한 것으로 그것은 일련의 원인의 영향 아래 생긴 것이다. 이에 대하여는 졸저 『국가와 그 역사적 역할』에서 언급되고 있다. 이 시기 이전에는 로마제국의 붕괴 이후 국가는 - 로마적 형태로는 - 존재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만약에 국가가 역사의 교과서 가운데 존재한다면, 그것은 역사가들의 상상의 산물에 지나지 않고 이들의 역사가는 프랑스왕조의 계보를 메로빙거가의 수장首長에까지, 러시아의 그것을 류리크까지 소급시키려 하고 있는 것이다. 참 역사의 빛에 비춰보면 근대국가는 중세 제 도시의 폐허 위에 구축되었을 뿐이다.

다른 한편으로 정치?군사적 권력으로서의 국가 및 근대정부의 사법과 교회 및 자본주의는 서로 분리할 수 없는 제 제도라는 것이 밝혀진다. 역사상 이들 네 개의 제도는 상호 보강하면서 발달해 왔다.

그것들은 단순한 우연의 일치로서가 아니라 서로 굳게 결합되어 있다. 그것들 사이에는 인과의 연결이 있다.

국가란 요컨대 인민에 대한 지배 권력과 빈민의 착취를 각자가 보장하기 위하여 지주, 군부, 재판관 및 목사 간에 맺어진 상호보험회사와 같은 것이었다.

이것이 바로 국가의 기원이고 그 역사다. 그리고 금일에 와서는 그 본질을 이룬다.

국가를 유지시켜 그 원조를 받아가지고 동시에 자본주의를 배제할 것을 꿈꾼다는 것은, 국가란 것이 본래 자본주의의 발달을 조장하기 위하여 만들어진 것이고 언제나 자본주의와 더불어 성장하고 강화되어온 이상, 그것은 우리의 생각으로는 노동자의 해방을 교회나 시저주의의 도움을 얻어 성취하려고 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사도邪道이다. 하기는 19세기의 30년대, 40년대, 심지어 50년대까지도 사회주의적, 시저주의적으로 공상한 숱한 몽상가들이 있었다. 더욱이 이 전통은 바부프의 시기로부터 금일까지 계속되고 있다. 허나 20세기에 들어와서 아직까지도 이와 같은 환상 속에 살고 있다는 것은 사실 너무도 소박하다고 하겠다.

경제조직의 새로운 형태에는 정치조직의 새로운 형태가 필연적으로 따르지 않으면 안 된다. 그리고 변혁이 혁명을 통하여 급격히 발생하거나, 아니면 점차적 진화에 의하여 완만히 생기거나, 여하튼 경제와 정치의 양면의 변혁은 서로 손잡고 병행하지 않으면 안 된다. 경제적 해방을 향한 일보, 일보, 즉 자본에 대한 진정한 승리의 하나하나는 동시에 권력에 대한 승리 - 정치적 해방을 향한 일보일 것이다. 그것은 당사자 전원의 지역적, 직업적 및 기능적인 자유로운 협정의 방식으로 되는 국가의 멍에로부터 풀려 놓임이라 하겠다.

15. 행동의 수단

아나키즘이 그 연구방법이란 점에서나 그 근본원리한 점에서나 강단講壇과학뿐 아니라 사회민주주의의 동배同輩와도 큰 차이를 가지는 만큼 행동의 수단에 있어서도 또한 이들 양자와 다르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우리의 법?법률?국가관에서 보면 국가에 대한 개인의 점점 증대하는 종속 속에 진보의 보증을 찾아낼 수도 없겠거니와 하물며 사회혁명에로의 접근을 볼 수도 없는 것이다. 근대 자본주의의 기원은 ‘생산의 무질서 상태’에, 즉 이른바 ‘국가의 무간섭의 이론’에 있고, 국가는 ‘자유방임’의 정식을 실시한 것이다, 라는 따위의 천박하고 피상적인 사회평론가들의 입버릇을 우리가 되풀이 할 수는 없다. 왜냐하면 그것은 옳지 않으니 말이다. 정부는 적빈赤貧상태로 몰아 세워진 노동자들의 노동력을 사용하여 이윤을 추구할 자유를 자본가들에게 제공한 반면, 19세기의 과정의 어디서도 노동자들에게 ‘하고 싶은 대로 할’ 자유를 준 일이 없었다. 우리는 이를 잘 알고 있다. 따라서 ‘자유방임’의 정식을 일찍이 한 번도 실제로 적용되지는 않았던 것이다. 어째서 그렇지 않다고 하겠는가.

프랑스에서는 저 사나운 ‘혁명적’ 자코뱅의 의회마저 스트라이크에 대하여, 조합에 대하여, 사형을 선고한 것이다. 나폴레옹 제국이나, 되살아난 왕조나, 부르주아 공화제 하의 사정에 대해서는 더 말할 필요도 없다.

영국에서는 1813년에 스트라이크를 한 혐의로 교수형에 처하여지는 형편이었는데, 1831년에는 노동자가 대담하게도 로버트 오언의 노동조합을 만들려고 한 탓으로 오스트레일리아로 유형되었다. 60년대가 되어서도 ‘노동의 자유옹호’라는 주지의 구실 아래 스트라이크 참가자는 강제노동에 보내어지는 형편이었다. 금일에 와서도 1903년에 영국의 어떤 회사는, 노동조합이 스트라이크에 즈음하여 노동자가 공장에 들어가 취업하는 것을 그만두게 했다는 혐의로 [이른바 피켓팅] 회사 측에 127만 5천 프랑의 손해액의 지불을 명하는 판결을 했다. 리용에서의 아나키스트의 소요와 몬소광산에서의 노동자들의 운동의 결과 겨우 1884년에 노동조합의 설립이 허가되도록 된 프랑스에 대해서는 불문가지다. 벨기에, 스위스[아이로로에서의 학살을 상기해보라!], 더군다나 독일과 러시아에 대해서도 새삼 부언할 필요도 없겠다.

다른 한편으로 국가가 그 조세에 의하여, 또한 그 손으로 만들어 놓은 독점에 의하여, 얼마나 도시와 농촌의 노동자를 꼼짝달싹도 못하게 손발을 묶어 공장주에게 인도하고, 그들을 빈궁의 밑바닥으로 밀어 넣었던가를 상기해야겠다. 영국에서는 지방의 귀족들[그들은 단지 재판관에 불과했고 지주는 결코 아니었다] 이 공유지를 횡취하여 그들의 영유로 귀속시킴으로써 공유지를 파괴했고 지금도 그렇게 하고 있다. 또한 러시아에서는 현재도 역시 니콜라이 2세의 정부의 손으로 농민의 공동체에서 토지를 갈취하고 있다. 이러한 사실들을 새삼 재언할 것도 없으리라.

끝으로 이집트, 통킹, 트란스발과 같은 정복된 나라는 말할 것도 없고, 여태껏 모든 국가는 예외 없이 온갖 종류의 거대한 독점을 만들어 내고 있다. 매년 각국의 의회가 새로운 독점을 철도, 전차, 가스, 수도, 전기, 학교, 기타 만반의 영역에서 만들어내고 있는데, 마르크스가 과거의 조건으로서 말한 본원적 축적을 새삼 끄집어낼 필요도 없을게다.

한 마디로 말하면, 일찍이 한 번도 어느 국가에도 1년이라도, 아니 한 시간이라도 ‘자유방임’의 체제는 존재한 적이 없었던 것이다. 항상 국가는 자본의 지주이고 지지자이고, 또한 직접 간접의 창조자이기도 했고, 금일도 여전히 그러하다. 따라서 ‘무간섭’의 체제의 존재를 확인한다는 것은 대중의 빈곤이 자연의 법칙이라고 논증코자 하는 부르주아 경제학자에 대해서나 허용될 일이지 사회주의자가 노동자를 보고 이 동일한 문구를 말할 수는 없는 것이다. 착취에 저항하는 자유는 여태껏 일찍이 한 번도 어디에도 없었던 것이다. 도처에서 이 자유를 싸워서 얻기 위하여 일보, 일보, 미증유의 희생자로 싸움터를 메우면서 투쟁하지 않을 수 없었다. ‘무간섭’과 그리고 단순한 ‘무간섭’ 이상의 것이 - 원조, 지지, 비호의 손이, 항상 착취자의 이익만을 위하여 내밀어져 왔던 것이다.

그리고 그와는 달리 있을 수는 없었던 것이다.

앞에서 말했듯이, 사회주의가 역사 속에 어떤 형태로 나타나든지 간에, 코뮌주의로 접근하기 위하여 정치관계에 있어서 사회주의 독자의 형태를 찾아내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사회주의가 묵은 정치적 형태를 이용할 수 없음은 그것이 종교적 계층제도와 그 교설을, 또한 제정 내지 독재적 통치형태와 그 이론을 이용할 수 없음과 꼭 마찬가지다. 무슨 방식으로든지 사회주의는 대의정치 체제보다 훨씬 민중적으로 되어 고대 로마식의 포럼으로 일층 접근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것은 대의제에 의존함이 좀 더 적게 되고 자치제에 좀 더 가까워지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1871년에 파리의 프롤레타리아가 꾀한 것도 바로 이것이었다. 1793?94년에 파리코뮌의 각 구를 비롯해서 기타의 여러 군소 코뮌도 또한 이것을 시도한 것이다.

프랑스, 영국, 미국에서의 정치생활을 바라볼 때, 거기에는 도시 및 농촌의 독립 자주의 코뮌이 형성되어 이것들이 가지각색의 숱한 필요를 충족시키기 위하여 제각기 특수하고 특정한 목적으로 체결된 연합적 협약에 의하여 결합하는 아주 뚜렷한 경향이 싹트고 있다. 이들의 코뮌은 전 주민의 수요를 만족시키기 위한 필요물자의 생산자로 점점 전화하는 경향을 띠고 있다. 코뮌의 경영으로 운영되는 전차 외에도 원거리에서 몇 개의 도시의 연합체에 의하여 부설되는 수도가 있고, 다시 가스, 전등, 공장의 동력도 코뮌의 손으로 운영되도록 되었다. 나아가서는 코뮌의 탄갱炭坑이나 유제품공장, [토케이에 있어서의] 결핵환자를 위한 산양 방목장 또는 온수 배급과 채소밭의 경영 등이 있다.

물론 독일 황제도, 스위스에서 권좌에 오른 자코뱅당원도, 이 목표로 전진하는 자는 아니다. 그들은 반대로 과거로 눈을 돌려 국가의 손에 모든 것을 집중시켜 지역적 및 직능적 독립의 일체의 흔적을 파괴하려고 애쓴다.

우리가 주목하지 않으면 안 될 것은 유럽과 아메리카의 사회에 있는 진보적 부분이다. 거기에는 국가의 테두리 밖에서 조직되어 점점 국가에 대신하여, 한편으로 중요한 경제적 기능을 장악하고 다른 한편으로 국가가 여전히 자기의 직무로 자인하고는 있으나 여태껏 한 번도 적당한 방식으로 이행할 수가 없었던 제 기능까지도 장악하려는 경향이 분명히 보인다.

교회의 사명은 민중을 지적 예속상태에 붙들어 매어 두는데 있다. 다른 한편으로, 국가의 사명은 민중을 반 기아상태로 경제적 예속 속에 가두어 두는데 있다. 이제 우리는 이들 두 개의 사슬에서 벗어나려고 노력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을 안 뒤에는 벌써 우리가 점점 증대하는 국가에의 종속을 진보의 보증으로 인정할 수는 없다. 제도는 이론가의 희망대로 그 성격을 변경하는 것이 아니다. 그런 고로, 우리는 개인의 최대한의 완전한 해방 속에, 개인과 집단과의 일층 광범한 창의의 발달 속에, 동시에 또한 국가의 직권의 제한 속에 - 그 확대가 아니라 - 진보를 구한다.

우리가 전진이라 생각하는 것은, 우선 첫째로 16세기 이래 사회를 깔아뭉개고 계속 자기의 직권을 증대시켜온 정부권력의 배제로 향하는 운동이고 둘째로는 협약과 일시적 계약의 요소의 최대한의 발달 및 특정의 목적에 따라 발생하여 각자의 연합에 의해서 사회 전체에 번져있는 다종다양한 집단의 독립성의 일층 광범위한 발달로 향하는 운동이다. 이와 동시에, 우리가 생각하는 사회구조는 결코 최종적 형태를 취하는 일이 없이 부단히 생명에 넘쳐있고, 따라서 순간마다의 필요에 따라 그 형태를 변해가는 것이 아니면 안 된다.

이와 같은 진보관, 또는 미래에 대하여 바람직한 것[만인의 행복의 총량을 증대하는데 이바지하는 것]에 관한 우리의 관념은 필연적으로 투쟁을 위한 전술의 형성으로 이끌어간다. 그리고 그 전술이란 모든 집단에 있어서, 또 모든 개인에 있어서 최대한의 개인적 이니셔티브를 발달시키는데 있고, 그럴 적에 행동의 통일은 목적의 동일성에 의하여, 그리고 또 모든 이념이 자유로 표현되고 진지하게 토의되어 그 결과 올바른 것으로 인정된 때 필시 가지게 될 신념의 힘에 의하여 달성될 것이다.

이러한 경향은 아나키스트의 모든 전술 위에, 또한 그들이 결성하는 일체의 서클의 내적 생활 위에 자기의 각인을 눌러 찍는다.

우리는 다음과 같이 주장한다. 즉 정부의 수중에 중앙집권화 하여, 그 결과 전능으로 될 국가자본주의가 닥쳐오도록 일한다는 것은, 앞에서 말한 바와 같은 국가의 테두리 밖에서 사회의 새로운 조직형태를 희구하는 진보의 조류에 역행해서 일한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사회주의의 참된 역사적 과제를 국가사회주의자들이 이해하지 못하고 있는 점에 그들의 심각한 사상적 혼미 - 절대주의적, 종교적 편견의 유물이 있다고 우리는 보며, 그것에 대하여 우리는 싸운다. 노동자들에 대하여 그들이 국가기구를 말짱하게 그대로 유지하고 다만 권력자를 바꿀 뿐으로 사회주의의 기구를 도입할 수 있다고 가르치고, 또한 노동자의 지성을 도와서 그들에게 적합한 새로운 생활형태의 탐구로 향하게 하는 대신에 그것을 방해하는 것은 범죄이며 하나의 역사적 과오라고 우리는 보는 것이다.

끝으로 우리는 혁명의 당파이고, 따라서 우리가 역사 속에서 연구하는 것은 무엇보다도 우선 과거의 혁명의 발생과 발전이 아니면 안 된다. 이렇게 함으로서 우리는 지금까지 끊임없이 역사에 부여해온 그릇된 국가주의적 해석에서 역사를 해방하려고 한다. 지금까지 기록된 각종의 혁명사 속에서 우리는 아직 민중의 모습을 발견하지 못하며 혁명의 기원에 관하여 아무것도 아는 바 없다. 봉기 전야의 민중의 절망적 상태에 관한 서론에서 보통 되풀이되는 관용어는 이러한 절망의 한복판에서 어떻게 해서 개선 가능성의 희망과 신시대의 등불이 나타났고, 반역정신이 어디로부터 발생하고 어떻게 해서 퍼져 나갔는가에 대하여 아무것도 말하여 주지 않는다.

따라서 이러한 역사책을 내버리고 우리는 원 자료로 대결하여 민중 속에 일어난 각성의 경로에 대하여, 또한 혁명의 소용돌이 속에서 수행된 민중의 역할에 대하여 그 어떤 정보를 얻고자 한다.

이리하여 우리는 프랑스혁명을 무엇보다도 자코뱅 글라브에 의하여 지도된 거대한 정치운동이라고 내다본 루이 블랑과는 달리 이 혁명을 이해한다. 우리는 프랑스혁명 속에 무엇보다도 우선 위대한 민중적 운동을 발견한다. 그리고 특히 농촌에서의 농민운동의 역할을 [농민 반란에 관한 위원회의 보고자 그레고아르 목사가 역사가 시로세르에게 말한 것처럼 ‘모든 촌락이 자기 자신의 로베스피에르를 갖고 있었던’ 것이다] - 말하자면 봉건적 농노제의 유물의 배제와 각종의 욕심 많은 돈놀이꾼이나 지주들의 손으로 농촌공동체에서 약탈한 토지의 농민에 의한 수탈 - 예컨대 농민들은 특히 프랑스 동부에서 이 일에 성공했다 -과를 주요한 목적으로 삼고 있던 운동의 의의를 인정한다.

4년간에 걸쳐 계속된 농민봉기의 결과 혁명적 상황이 출현했고 도시에서도 이에 호응하여 코뮌주의적 평등으로의 경향이 발전하게 되었다. 다른 한편으로 부르주아지는 왕과 귀족의 권력을 착실히 무너뜨려 이 대신 이제 자기 자신의 권력을 수립하려고 교묘하게 활동하여 권력을 증대시키게 되었다. 이 목적으로 부르주아는 완강하게 사정없이 강력한 중앙집권적 국가를 만들어 내려고 서둘러 이 국가에다 일체를 병탄倂呑시킴과 함께 부르주아지에게 재산권[혁명 때에 그들이 약탈한 재산에 대한 소유권까지 포함시켜]을 보증시키고, 동시에 또 빈민을 착취할 완전한 자유와 국부를 법률적인 제한 없이 마음대로 투기할 자유를 그들을 위하여 인정케 했다.

이 권력, 이 착취의 권리 - 이 일방적 자유방임 -를 부르주아는 실제로 손에 넣었다. 그리고 그것을 유지하기 위하여 그들은 자기 자신의 정치형태 - 중앙집권국가에 있어서의 대의정치를 만들어낸 것이다.

그리고 자코뱅당원에 의하여 산출된 이 국가주의적 중앙집권 속에 저 나폴레옹 1세는 제정 수립의 알맞은 지반을 발견했던 것이다.

그로부터 50년 지나 꼭 같은 방식으로 이번은 나폴레옹 3세가 1848년 경 프랑스에 발전하고 있던 민주주의적 중앙집권적 공화제의 이상 속에 있는 제2제정 수립을 위한 제 요소가 완전히 마련되고 있음을 발견했다. 실로 70년에 걸쳐 모든 지방생활을 깔아뭉개고 도시와 농촌에서의 일체의 이니셔티브뿐만 아니라 국가의 테두리 밖에서의 이니셔티브[조합운동, 노동조합, 사적私的회사, 코뮌 등]도 압살한 이 중앙집권적 세력에 의하여 프랑스는 금일까지 상처를 입고 있는 것이다. 이 국가적 약속을 타파하려는 최초의 기도 - 그러므로 새로운 역사상의 제1기를 개척한 기도 -는 1871년에 가서 파리의 프롤레타리아의 손으로 비로소 행하여졌을 뿐이다.

우리는 다시 한걸음 나아가 이렇게 주장한다. 즉 국가사회주의자들이 중앙집권국가의 수중에 노동수단의 사회화를 꾀한다고 하는 망상을 포기하지 않는 한, 국가자본주의와 사회주의 국가와의 수립에 향해진 그들의 기도가 필연적으로 몰고 갈 결말은 곧 공상의 파산이요, 또한 군사독재일 것이라고.

여기서는 우리의 견지를 확증하는 각종의 혁명운동을 분석하기를 할애하고 다음과 같이 언명하는 것으로 그치겠다. 즉 우리가 이해하는 장래의 사회혁명은 자코뱅 독재도 아니려니와 국민공회나 의회 내지 독재자의 손으로 행하는 사회제도의 변혁도 아니다. 혁명은 일찍이 한 번도 이런 방식으로 추진된 예가 없다. 만약에 노동자의 봉기가 실제로 이러한 방향을 더듬어 간다면, 그것은 아무런 지속적 성과를 거두지 못하고 파멸이 약속될 것이다.

이와 반대로 우리가 이해하는 혁명은 광범하게 확대하는 혁명이고, 그 사이에 대중이 봉기하는 지방의 모든 도시, 모든 농촌에서 민중이 스스로 사회의 재건사업에 착수하지 않으면 안 된다. 민중 - 즉 농민과 도시의 근로자 -이 위로부터의 명령이나 지령을 기다리지 않고 다소간에 광범한 코뮌주의적 원칙에 입각하여 스스로 건설적, 계몽적 활동을 개시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들은 무엇보다도, 첫째로 만인에게 먹을 것과 집을 주도록 수배하고, 다음으로 만인의 식량, 주택, 의복의 공급에 필요한 것을 생산하도록 노력하지 않으면 안 된다.

폭력에 의하거나 또는 선거의 결과로 수립된 정부에 대하여 말하자면, 그것은 40년대의 프랑스에서 이름 붙여지고 아직까지도 독일에서 호칭되고 있는 저 ‘프롤레타리아의 독재’이건, 혹은 또 환호성으로 영접되고 또 선출되어 성립한 ‘임시정부’이건, 그리고 또 ‘국민공회’이건, 우리는 일체 그런 것에다 희망을 걸지 않는다. 그러한 정부가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다고 미리부터 단언하겠다.

이렇게 말하는 것도 개인적 기호에서가 아니다. 혁명의 물결에 번롱?弄되어 정부의 자리에 밀어 올리어진 사람들은 결국 충분히 요구를 총족시키지 못했다는 것을 역사 자체가 가르쳐 주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들은 도저히 요구를 충족시킬 수 없는 것이다. 왜냐하면 새로운 원리 위에 사회를 재건하는 일에 당하여 고립한 인간은 아무리 현명하고 아무리 헌신적인 인간이라 할지라도 필경 무력하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이다. 이 이을 위해서는 경작지, 주택, 운전 중의 공장, 철도, 선로를 달리는 객차, 기선 등의 현장에서 일하는 대중의 집단적 정신이 없으면 안 된다.

고립한 개인도 묵은 사회형태의 파괴가 성취되기 시작할 때, 이러한 파괴를 위한 정당한 표현 내지 정식을 발견할 수는 있을 것이다. 그들에게 될 수 있는 것은 기껏해야 이 파괴의 작업을 다소라도 넓혀서 나라의 일부에서 생긴 사태를 전 지역에 확대하는 일이겠다. 그러나 법률에 의하여 이 파괴의 작업을 강요하는 것은 절대로 될 수 없는 것이다. 이는 특히 1789?94년의 혁명사가 증명하고 있는 바다.

새로운 생활형태는 혁명 후 묵은 생활형태의 폐허 위에 탄생할 것이다. 하지만, 이들의 신 형태가 민중의 건설작업 속에서, 한꺼번에 수천 군데에서 행하여지는 작업 속에서, 스스로 형태를 갖추지 않는 한, 어떤 정부라 하더라도 그것들의 표현을 발견할 수 없는 것이다. 누구라서 1789?94년의 혁명의 제 사건의 과정에서, 지방자치체와 파리코뮌 및 그 제 지구가 어떠한 역할을 수행하게 될 것인지를 추측했을 것인가. 또한 추측할 수 있었을 것인가. 미래를 법에 복종시킬 수는 없는 노릇이다. 가능한 것은 그 주요한 경향을 추측하여 그 길을 말끔히 닦아 놓는 일이다. 우리가 하고자 애쓰는 것은 바로 이것이다.

사회혁명의 과제를 이와 같이 파악하는 이상 아나키즘이 ‘현존 국가에서의 권력 장악’을 목표로 내거는 강령에 동조할 수 없음은 명백하다.

이 권력 장악이 평화적 방법으로 달성되지 않을 것을 우리는 잘 알고 있다. 부르주아지는 싸우지 않고서 자기네의 권력을 내놓지 않을 것이다. 그들은 저항도 않고서 순순히 몰수를 감수하지는 않을 것이다. 다른 편으로 사회주의자가 정부의 일부로 들어가 부르주아지와 권력을 나누게 된다면, 이에 따라 그들 사회주의자는 불가피하게 퇴색한 자가 되어갈 것이다. 그러지 않을라치면 사회주의자의 기관지機關紙 상에서도 인정하다시피, 수로 보나 지식으로 보나 훨씬 강력한 부르주아지가 그 권력을 나누어 가질 권리를 사회주의자에게 인정할 리가 없다.

다른 한편으로, 프랑스 영국 또는 독일에 봉기가 일어나 사회주의의 임시정권의 등장이 가능케 되었다 하더라도, 민중 자신의 건설활동을 결할 것 같으면 그러한 정권은 전혀 무력하고, 얼마 안가서 혁명의 방해물 즉 브레이크가 되고 말 것이다. 그것은 반동의 대표자 즉 독재자의 발판 될 것이다.

혁명의 준비기를 연구함으로써 우리가 도달한 결론은 다음과 같은 것이다. 즉 어떠한 혁명도 의회 기타 어떤 대의집회의 저항이나 공세에서 유래한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모든 혁명은 민중 속에서 시작된 것이다. 더군다나 미상불 어떤 혁명도, 주피터의 두뇌에서 튀어나오는 미네르바와 같이 머리에서 발끝까지 무장하고 나타난 것은 아니었다. 무릇 혁명은 어느 것이나 부화기孵化器 외에도 진화기進化期를 갖고 있었고, 그 기간에 민중은 당초에는 극히 조심성 있는 요구를 내어놓다가 극히 완만한 걸음걸이로 차차 혁명정신에 침투되어 간다. 이리하여 그들은 점점 대담무쌍하게 되어가서 자기네의 힘에 자신을 얻고 절망의 정지상태를 벗어나 점차 자기네의 강령을 확대해 간다. 당초의 ‘온건한 건의’가 마침내 혁명적 요구로 전화하는 데는 시간이 필요했던 것이다.

사실, 수중에 권력을 장악할 만큼 강력한 공화주의의 소수파가 탄생되는 데는 1789년에서 1793년에 이르는 4년간이 프랑스에 필요했다. 부화기에 관해서 말할 것 같으면, 우리는 다음과 같이 이해한다. 즉 당초는 개개인이 자기들의 주의에 발견하는 사태에 깊이 마음이 동요하여 개별적으로 반역한다. 그들은 대부분 이렇다할만한 성과를 거두지 못한 채 사라진다. 그러나 사회의 무관심을 이들의 전초의 덕택으로 흔들어 놓인 것이다.

현상에 만족한 자도, 마음이 좁은 사람들도, 이제는 다음과 같이 자문하지 않고서는 배길 수 없게 되었다 - 도대체 무슨 까닭에 이들의 젊은, 성실한, 힘이 넘쳐나는 사람들이 자기네의 생명을 내어던졌을까, 라고. 벌써 무관심한 채로 머물러 있을 수는 없게 된 것이다. 찬부贊否 간에 태도를 밝혀야 하게 된 것이다. 이리하여 사상은 각성했다.

조금씩, 사람들의 소집단도 마찬가지로 혁명정신에 침투되어 갔다. 그들도 때로는 부분적 성공을 획득할 것을 기대하고, 이를테면 스트라이크에 승리하여 자식들에게 빵을 사다줄 수 있다거나 가증可憎스런 관리를 추방한다거나 하는 목적을 달성하려고 반역하고 나선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극히 빈번히 아무런 성공의 기대도 갖지 않고서 반역하기도 한다. 왜냐하면 벌써 그 이상을 참을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혁명에 선행하는 것은 이런 종류의 반역행위, 더욱이 1회나 2회나 10회의 반역이 아니라 몇 백 번이란 봉기인 것이다. 어떤 인내에도 한도라는 게 있다. 이는 금일의 아메리카합중국에서도 보이는 바다.

러시아에 있어서의 농노제도의 평화적 폐지에 대하여 종종 지적들 한다. 허나 그럴 때, 일련의 긴 농민폭동의 역사가 그것에 선행하여 있고, 이것이 바로 농노제 폐지를 이끌어 왔다는 것은 전혀 잊히고 있거나 아니면 전혀 알려져 있지 않다. 이들의 반란은 50년대에 벌써 시작되고 있었다. 그것은 아마도 1848년 혁명의 반향이거나 아니면 1846년의 가리시아에서의 농민반란의 반향이었다. 그리고 해마다 점점 러시아 전토에 확대하여 점점 심각한 것으로 되고, 지금까지 보지 못했던 사나운 성격을 띠기에 이르렀다. 이러한 사태는 1857년 알레산드르 2세가, 드디어 리투아니아의 귀족들에게 서간을 보내어, 농민의 해방을 약속하기까지 계속했다. ‘앉아서 밑으로부터의 해방을 기다리기보다는 위로부터 해방을 주는 편이 낫다’고 하는 저 게르첸의 명언 - 그것은, 알렉산드르 2세에 의하여, 모스크바의 농노제 지지에 고루한 귀족들의 면전에서 되풀이되게끔 된 말이다 -은 단순한 위협은 아니었다. 그것은 현실을 반영하고 있었다.

혁명이 가까워질 무렵에는 이것과 같은 일이 좀 더 큰 정도로 발생했다. 일반적인 법칙으로서 어느 혁명의 성격도 그것에 선행하는 폭동의 성격과 목적에 의하여 규정된다고 말할 수 있겠다. 아니 오히려 그뿐만 아니라, 역사의 사실로서 다음과 같이 확정할 수 있겠다. 즉 아무리 심각한 정치혁명도 만약에 혁명이 시작된 후에 일련의 지방적 폭동의 형태로 계속하지를 않고, 또한 만약에 인심의 동요가 1906년과 1907년의 러시아의 경우처럼 개인적 복수의 성격을 취하는 대신에 폭동의 성격을 띠는 일이 없었다면 결코 성취하지를 못할 것이라고.

따라서 장래 올 혁명의 성격을 결정하는 폭동의 선구先驅 없이 헛되이 사회혁명을 대망하고 이러한 희망적 관측에 빠지는 것은 유치하고 어리석다. 전반적 봉기가 마련되고 있다고 호언하면서 그러면서도 이들의 폭동을 방해하려고 하는 것은 벌써 범죄라 할 수밖에 없다. 헌데 선거의 선동운동에만 정력을 쏟으면서 노동자에 대하여 그들이 사회혁명의 모든 혜택을 입게 되리라고 애써 설득하고, 다른 한편으로 혁명정신이 역사적으로 고조된 국민 속에 발생하는 개개의 폭동적 행동에 대하여 악의에 찬 온갖 욕설을 퍼붓는 것은 스스로 혁명과 일체의 진보에 대한 방해물 - 언제나 변치 않고 그리스도교회가 그러했던 것과 조금도 다름없이 혐오해야할 방해물이 되고 마는 것이다.

16. 결론

이 이상 아나키즘의 제 원리와 아나키즘의 행동강령의 전개에 들어가지 않더라도 현금의 인간지식 속에서 아나키즘이 차지하는 지위를 제시하는 데는 앞에서 논술한 바로서 충분하겠다.

아나키즘이란 자연과학의 귀납?연역방법에 의하여 얻어진 종합을 인간의 제 제도의 평가에 적용하려고 하는 기도이다. 그것은 또한 평가에 입각하면서 인간사회의 각 단위에 대하여 최대량의 행복을 확보하기 위하여 자유, 평등, 우애로 향하여 나가는 인류의 걸음을 예지豫知하려고 하는 기도이다.

아나키즘은 자연과학에서의 지적 운동의 불가피한 결론이다. 이 지적 운동은 18세기에 비롯하여 프랑스혁명의 좌절 후에 유럽에 승리의 함성을 올린 반동으로 말미암아 침체한 후, 50년대 말에 이르러 다시금 전면적으로 떨치고 일어섰다. 이처럼 아나키즘의 근원은 18세기의 자연과학적 철학 속에 있다. 그러나 아나키즘이 자기 자신의 완전한 터전을 닦은 것은 19세기 후반의 초두에 일어나 인간의 제 제도화 사회의 자연과학적 기초에 의한 연구에 새로운 생명을 불어넣은 과학의 부흥 이후의 일이었다.

1820년대와 30년대의 독일의 형이상학적 철학자의 득의만면으로 자랑삼던 소위 ‘과학적 법칙’이란 것은 자연과학의 방법 이외의 여하한 방법도 승인 아니 하는 아나키즘의 세계관 속에 들어설 여지가 없다. 아나키즘은 일반으로 인문과학이란 이름으로 불리어지고 있는 모든 과학에도 이러한 방법을 적용하려고 한다.

이 방법에 의거하고, 또한 이 방법론의 영향 아래 최근에 이루어진 일체의 연구를 이용함으로써, 아나키즘은 인간에 관한 모든 과학의 종합을 구성하려고 힘쓰는 동시에 최근의 민족학적 연구에 의하여 전하여진 자료를 기초로 또한 그것들을 일층 확대하면서, 법이나 정의와 같은 것에 대한 통설적 관념을 재검토하려고 한다. 아나키즘은 18세기의 선구자들의 노작에 의거하면서 국가에 대립하여 개인을 옹호하는 편에 서고, 또한 역사적 제 조건에 의하여 사회를 지배하고 있는 권력에 대항하여 사회의 편을 들려고 한다. 아나키즘은 또한, 근대과학의 손으로 수집된 역사적 자료를 이용함으로써 금일 점점 그 압박을 증대시키고 있는 국가권력이 우리들 유럽인에 대해서는 15세기와 16세기 이래 비로소 대두한 유해무익한 상부구조에 불과하다는 것, 그것은 또한 자본주의의 이익을 위해서 만들어 내어진 상부구조이고, 이미 고대에는 로마와 그리스 멸망의 원인을 이루고, 다시 동양과 이집트에서의 제 문명의 모든 중심지의 붕괴의 근본 원인이기도 했다는 것을 입증했다.

역사의 경과 속에서 지주, 재판관, 군인, 승려를 공통의 이익 속에 통합할 목적으로 형성된 권력, 그리고 또한 역사 속에서 다소라도 보장된 자유의 생활을 만들어내려고 하는 인간의 시도를 매양 방해해온 권력 - 이 권력은 시저주의, 제국주의 내지 교회가 사회혁명의 도구로 되지 못함과 마찬가지로 해방의 무기로 될 수는 없는 것이다.

경제학에서 아나키즘이 도달한 결론은 다음과 같다. 정작 해악은 자본가가 ‘잉여가치’ 또는 순이익을 자기네의 손에 넣는데 있다기보다 오히려 이와 같은 순이익 또는 ‘잉여가치’가 가능케 된다는 사실 그것에 있는 것이다. ‘잉여가치’가 존재하는 것은 다만 몇 백만의 인간이 그 노동력과 지식을 이것의 존재를 가능케 할 만큼의 저렴한 값으로라도 팔지 않고서는 생활을 해나갈 아무 것도 가진 것이 없기 때문일 따름이다. 그렇기 때문에 경제학에서 우리가 첫째로 연구하지 않으면 안 될 것은 소비에 관한 장章이고, 또한 혁명에 있어서 해야 할 최초의 의무는 의식주가 만인에게 보장될 방식으로 소비를 재편성하는 일이 아니면 안 된다. 1793?94년에 우리의 선배들은 이것을 분명히 이해하고 있었다.

‘생산’에 관해서는 무엇보다도 먼저 전 사회의 제일의 필수품이 가급적 빨리 충족되게끔 조직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런 까닭에 아나키즘은 장래 올 혁명을 단지 금화 대신에 ‘노동권’을 사용하거나 또는 금일의 자본가들 자리에 자본주의 국가를 갖다놓는 방식으로 생각할 수는 없는 것이다. 아나키즘은 혁명 속에 국가 없는 자유코뮌주의에로의 제일보를 찾는다.

아나키즘의 이러한 결론은 과연 정당한 것일까. 그 해답은, 한편으로는 아나키즘의 기초의 과학적 비판이, 다른 한편으로는 실제생활이 우리에게 명시할 것이다. 허나, 아나키즘이 의심할 여지없이 전혀 올바른 한 가지 점이 있다. 아나키즘이 사회 제 제도의 연구를 자연과학의 한 부문으로 보고 형이상학과는 영원히 옷깃을 나누고, 현대과학과 금일의 유물론 철학과의 구성에 유용한 방법을 자기의 사유방법으로서 채용한 것, 바로 이것이다. 그 결과, 가령 아나키즘이 그 결론에 있어서 어떤 오류에 빠져 있다 하더라도 그것을 깨닫기는 아주 용이하다. 그러나 우리의 결론을 검증하려고 하면, 그것은 모든 과학이 거기에 기초를 두고 있고 또한 일체의 과학적 세계관의 발달이 거기에 의거하고 있는 과학적 귀납?연역적 방법을 쓰고서야 비로소 가능케 될 것이다.

※ 이 논문은 1909년 런던 프리덤 사에서 출판되고 그 후 1916년 미극의 마서 아스 사에서 출판되었다. 그런데 이 양쪽이 서로 대차大差가 없다. 그 외에 볼드윈이 편찬한 『혁명논문집』에도 이 논문이 합본되어 있으나 대단히 생략되어 있다. 이 역서에는 이들 3자가 참조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