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성탄절은 원래 슬픈 날이라지만]

​성탄절을 마냥 기뻐할 수만은 없는 것은 성서가 전하는 예수 탄생 이전의 기록들 때문이다. 마태오 복음서 2장은 예수의 탄생을 알아본 동방박사들이 헤로데 왕을 찾아와 이 사실을 알리자, 헤로데 왕이 베들레헴과 그 일대에 사는 두 살 이하 사내아이들을 모조리 죽인 이야기를 전한다. 이렇게 성탄절은 그 첫 시작부터 너무나 슬프고 끔찍한 이야기로 시작되었다.

복음서의 이 이야기가 역사적 사실인지 아닌지, 그것은 관심의 영역이 아니다. 다만 복음서 기자가 전하고 싶었던 내용은 확실하다. 권력을 가진 이들은 그 권력을 지키기 위해 이런 끔찍한 일들을 자행하는 데 거리낌이 없다는 사실이다. 이는 권력이 지니는 만고불변의 특성일 것이다.

마태오 복음서에 반해 루가 복음서는 또 다른 예수 탄생의 풍경을 전한다. 신의 아들이라는 예수가 태어난 곳이 화려한 궁궐이나 안락한 어딘가가 아니라 여관 마굿간이요 갓 태어난 예수를 말구유에 눕혔다는 것이다. 앞서도 이야기했지만 역사적 사실 여부에는 관심이 없다. 다만 이 이야기를 통해 복음서 기자가 전하고 싶어 했던 이야기를, 우리는 또 다시 명확하게 읽어낼 수 있다. 세상을 구하는 사람들은 화려하고 으스대는 치들이 아니라 이렇게 보잘것없는 곳에, 눈에 띄지 않게 숨 죽이고 있다는 사실이다. 조용히, 소리 없이, 하지만 분명 그 자리에 존재하고 있다는 사실을 복음서 기자는 분명한 어조로 전한다.

2020년 이번 성탄절 역시 누군가는 울고, 누군가는 자신의 권력을 과시하는 성탄절이 되었다. LG트윈타워에서 일하던 청소노동자들은 노동조합을 만들었다는 이유로 집단해고 통보를 받아 이 노조파괴 공작에 맞서느라 LG트윈타워 로비에서 한뎃잠을 자며 이따금 출입을 막아대는 용역들과 힘겹게 싸움을 벌이고 있다. 그에 반해 LG그룹 구광모 회장은 연말을 맞아 이웃사랑 성금 120억 원을 기탁하고 늘 쌓아 오던 '좋은 그룹 이미지'를 도모하였다. 청소노동자들을 고용한 하청업체 '지수아이앤씨' 역시 구광모 회장의 고모들인 구훤미, 구미정 씨가 각각 50%씩 지분을 가진 LG 가족 그룹이니, LG 왕국의 영속을 위해 120억 원을 뿌릴 수는 있어도 감히 노동조합을 만들어 왕국에 반기를 드는 짓거리는 용서할 수 없다는 그 마음을, 너무나 잘 알겠다.

이렇게 성탄절은 권력에 도전할 것 같은 이들이 늘 고통 받는 역사를 되풀이해 왔다. 하지만 그럼에도 우리는 이 슬픔이 그저 슬픔으로 끝나지 않을 것임을 잘 알고 있고, 늘 함께 이 슬픔을 이겨낼 것이다. 크리스마스 이브인 24일, LG트윈타워 1층 로비에 LG트윈타워 청소노동자들의 고용승계를 염원하는 이들의 선물이 하나 둘 모여들어 선물로 크리스마스 트리가 만들어졌다. 바람이 숭숭 들어오는 건물 대리석 바닥에 누워 잠을 자야 한대도, 핫팩으로 겨우 이 추위에 맞서야 하고 밥 한 번 먹으러 나갔다 오려면 몇 십분을 용역과 드잡이질 해야 하는 이 가장 낮은 곳에서 바로 자기와 친지들만 잘 먹고 잘 살면 된다는 권력을 무너뜨릴, 세상이 희망과 행복으로 가득 찰 수 있게 하는 연대가 실존하고 있다. 그리하여 결국 자기만 아는 그 불행에 빠진 이들까지 모두 구해내는 그 구원의 역사가 몇 번이고, 몇 십 몇 천 번이고 다시 쓰이기 시작할 것이다.

성탄절은 원래 슬픈 날이라지만 이 슬픔 가운데 바로 역설적이게도 구원의 희망이 있다. LG트윈타워 청소노동자들의 투쟁이 승리하고, 이를 시작으로 권력와 자기 보위에 눈이 먼 LG왕국이 무너지는 일, 그를 통해 예수가 바랐던 모두가 행복한 세상을 노동대중의 손으로 직접 건설하는 것. 이야말로 성탄절에 즈음하여 예수 정신을 온전히 계승하는 올바른 기도 제목이 될 것이다.

"LG트윈타워 청소노동자 "내년에도 계속 일하고 싶어요"" :

http://www.hani.co.kr/arti/society/society_general/975865.html

"앞에선 120억 성금, 뒤로는 노조파괴...'표리부동' LG그룹의 '민낯' :

http://www.lcnews.co.kr/news/articleView.html?idxno=10955


2. [신(新) 신분제를 위한 교육에 관하여]

현 교육제도가 유산 계급의 계급 대물림을 위한 것임이 갈수록 노골적으로 드러나고 있다. 기사에 따르면 저소득층 중 고소득층의 학업성취도를 따라갈 수 있는 이들은 고작 3%에 불과하다. 이는 현 학벌제도가 우파들이 주장하듯 개인의 노력 여부에 달린것이 아닌 계급문제와 직결된 문제임을 보여주고 있다.

이상으로서의 교육은 대중이 사회를 살아가면서 필요한 교양을 배우고 각자에게 존재하는 재능을 바탕으로 자유롭게 자신의 능력을 개발하며 사회를 살아가는 구성원으로의 협력의 가치에 대해 배우는 것일 것이다. 그리고 그 과정 속에서 다른 이의 이익이나 인정을 위함이 아닌, 자신을 위하여 모두가 평등하고 공정하게 교육을 받을 권리를 누릴 수 있어야 한다.

하지만 학생들은 작금의 교육 과정 속에서 무엇을 배우고 어떤 취급을 받는가? 이상과는 반대로 학생들은 개인의 특성과 상관없이 국가와 자본이 요구하는 가치를 주입식으로 암기하기를 요구받는다. 그리고 사회를 더불어 사는 구성원으로서의 협력의 가치가 아닌 자유시장이라는 야만에 던져진 경쟁자로서의 경쟁의 가치관을 받아들이기를 상대평가제도 속에서 강요받는다.

하물며 이런 망가진 교육과정 속에서 국가는 개인에게 학습을 위한 제대로 된 환경조차 보장해 주지 않는다. 국가가 주관하여 사회에서의 지위를 보장하는 각종 시험은 부실한 공교육 환경에서 배운 이들에게는 가혹하며 사교육을 배울수록, 고비용의, 보다 고비용의 사교육을 배우는 이들에게 유리하다. 물론 이 혜택을 누릴 수 있는 것은 자본계급으로 평등과 공정은 애초부터 찾아볼 수 없다.

이렇게 국가와 자본에 의해 저학력으로 몰려난 이들은 공공연히 소외된다. 대학 졸업 여부, 학벌의 여부에 따른 혐오는 이미 사회에 만연해 있으며 XX 대학 졸업장이라는 카스트 증명서에 따라 저학력 대중의 저임금은 정당화당하고 지적 능력에 대해 낙인이 찍힌다.

심지어 사회정의로부터도 이들은 소외된다. 작금의 공정담론에서 내세워 지는 것은 소위 ‘명문대생’들의 아픔일 뿐 이들의 목소리는 누구에게도 대변되지 못한다. 반대로 공정이라는 단어를 이용하여 명문 기득권층의 기득권은 다시 한번 정당화된다. 이 모두 계급의 구분을 목적으로하는 교육제도 때문이다.

혹자는 현 교육체제 내에서 ‘평등한 경쟁’을 보장해야 한다고 하나 상술하였듯 근본부터 잘못된 체제 내에서 어떻게 평등과 공정을 찾겠는가? 권위자들이 자신의 입맛에 따라 주입을 강요하는 무의미한 가치, 국가가 보장하는 졸업증이라는 이름의 계급증명서 그리고 이들과 결탁하여 이에 대한 접근성을 판매하는 자본, 이들 자본, 국가 권위는 모두 한통속이다. 구조적 모순덩이인 체제 속에서는 평등은 찾을 수 없다.

결국 현 교육제도는 자본계급이 자신의 위치를 사수하고 상속하기 위한 또 하나의 도구일 뿐이다.

진실로 모두가 자신의 학업적 성취, 자신을 위해 자신의 능력을 개발하고 사회성을 기르며 협력의 가치를 기르기 위해서는 구조적인 변혁이 필요하다. 이 모든 부조리를 만들어내는 자본, 그리고 자본과 결탁한 국가를 타파해야 한다. 그리고 학생들을 포함해 모든 민중이 비로소 평등하게 의사 참여할 수 있는 민주적 교육제도 속에서 진실로 자본계급이 아닌 노동계급을 위한 교육을 만들어내야 한다.

"저소득 가구서 성적 상위권, 100명 중 3명..."자취 감춘 개천 용"" :

http://www.hani.co.kr/arti/society/schooling/976020.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