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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혁명의두 가지 이론


제1부. 사회혁명에 대한 두 가지 반대 이론


이 책에서 우리가 해야 할 주요한 일은 러시아혁명에 관하여 알려져 있지 않은, 또는 거의 알려져 있지 않은 것을 될 수 있는 대로 조사하고 명확히 하는 데 있다.

먼저 서유럽에서는, 무시되지는 않는다고 할지라도 단지 피상적으로밖에 고려되지 않은 하나의 사실을 강조하고 싶다. 그것은 1917 10월에 이 혁명이 전혀 새로운 양상사회대혁명의 양상을 취했다는 것이다. 이리하여 혁명은 이전에 없던 전혀 특별한 길로 진행되었다.

그에 잇따라 혁명에 필연적인 발전이 한결같이 새로운 독자적 성격을 보여주게 되었다. 우리의 기술記述은 10월반란에 대한 기존의 역사와는 전혀 상이한 것이 될 것이다. 그 일반적 표현도, 거론하는 요인도, 용어까지도 달라서 지금까지 보지 못한 다른 국면을 제시할 것이다.

별로 잘 알려져 있지도 않고, 많은 독자에게 의외로 들릴 또 하나의 사실을 말하고자 한다. 1917년의 혁명에 이르기까지 서로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며 위기와 실패가 잇단 동안에 볼셰비즘만이 사회혁명을 어떻게 성취할 것인가에 대한 유일한 이론은 아니었다. 정치적, 권위적, 국가주의적, 중앙집권적 성격에 있어서 볼셰비즘과 비슷한 《사회주의혁명당》 좌파의 노선이라든지 또는 몇 개의 다른 그 비슷한 작은 정파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더라도, 또 하나의 근본 원리도 마찬가지로 완전무결한 사회혁명을 목표로 혁명적 그룹 또는 노동대중 속에 이룩되어 나가고 있었는데, 이것이 바로 아나키즘이었다.

아나키즘의 영향력은 맨 처음에는 극히 미약했으나 사건이 대규모로 확대됨에 따라 증대해 갔다. 1918년 말까지 아나키스트의 영향력은 어떠한 비판적 세력도, 반대도 반박도 허락하지 않는 볼셰비키가 상당히 불안을 느낄 만큼 강력해졌다. 1919년 말에서 1921년 말까지 볼셰비키는 이 아나키즘의 발전에 대하여 가혹한 싸움을 계속 할 수밖에 없었다. 그것은 대충 헤아려 보아도 반혁명에 대한 싸움과 같은 정도로 오래 계속된 격렬한 싸움이었다.

이 점에서, 역시 잘 알려져 있지 않은 또 다른 사실을 언급해 두겠다. 권력을 잡은 볼셰비키는 사상 면에서나 실제 면에서의 경험에 바탕을 두지 않고서, 또한 솔직하고 정직한 싸움의 절차를 밟지도 않고서, 반혁명군에게 사용한 것과 똑같은 억압적 방법, 즉 폭력이라는 방법을 사용해 아나키스트와 아나키즘적 조합주의자Anarcho-Syndicalist의 사상과 운동에 도전해 왔다. 그것은 아나키스트 조직의 본부를 폭력으로 폐쇄하고 아나키스트의 활동과 프로파간다를 모두 금지하는 데서 비롯했다. 아나키스트의 소리를 대중에게 들리지 않도록 하고 아나키스트의 계획을 오해하게 만들려고 했다. 이 압박에도 불구하고 아나키즘이 세력을 얻게 된 때, 볼셰비키는 재빨리 한층 더 폭력적인 방법, 즉 투옥, 체포, 사형이라는 수단에 호소했다. 그 이후 이들의 두 정파한 편은 권력을 잡고 있고 다른 편은 권력에 대항하는사이에 균형을 잃은 싸움이 확대되고, 어떤 지역에서는 내전으로 발전했다. 우크라이나에서는 이 전쟁 상태가 2년 이상이나 계속되어 볼셰비키는 아나키즘을 박멸하고 아나키즘에 고무된 대중의 운동을 일소하기 위해 전군을 동원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와 같은 사회혁명에 있어서의 두 가지 개념 사이의 충돌, 그것은 동시에 볼셰비키 권력과 노동대중의 운동 사이의 충돌이기도 했지만, 이것이 1919년에서 1921년까지의 기간에 발생한 여러 사건 중에서도 가장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게 되었다. 그런데도 예외를 빼놓고 극우에서 극좌까지의 모든 작가는―자유의지주의적 문헌은 예외지만―이 사실을 묵과해 왔다. 그래서 우리는 그것을 명확히 밝혀서 사소한 일에 걸쳐서 면밀히 제출하여 독자의 주의를 그곳에 쏠리게 할 의무가 있다.

이 일에 관련하여 두 가지 의문이 생긴다.

1. 10월혁명 직전에 볼셰비키가 인민 투표의 압도적 다수를 획득했는데도 아나키스트 사상이 갑자기 눈부신 발전을 보여준 이유는 무엇이었는가.

2. 볼셰비키와의 관계에 있어 아나키스트는 어떠한 입장에 있는가. 엄밀히 말해서 또, 볼셰비키가 아나키스트의 사상운동에 대하여 싸움―폭력적 싸움―을 하지 않을 수 없게 된 것은 어떤 까닭인가.

이 질문들에 대답하는 데는 볼셰비즘의 정체를 폭로하는 것이 손쉬운 방법이 될 것이다.

행동에 관해 두 개의 상반하는 사상을 비교함으로써 두 개의 사상을 좀 더 잘 이해하고, 제각각의 가치를 평가하고, 두 진영 사이의 전쟁상태의 원인을 캐고, 마침내는 1917년 10월혁명에서의 볼셰비키의 권력 탈취 후의 혁명의 고동을 들을 수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두 개의 이론을 대략적으로 비교해보자.

볼셰비키 사상은 부르주아 국가가 무너진 터전에 노동자, 농민의 정부를 세우고, 프롤레타리아 독재를 확립하기 위하여 새로운 노동자 국가를 건설하고자 한다.

아나키스트 사상은 정치적 국가나 정부, 또는 어떠한 종류의 독재체제에도 의존하지 않고 사회의 경제적, 사회적 기초를 변혁하려고 해 왔고 지금도 그렇게 하고 있다. 요컨대 혁명을 성취하여 최후의 자본주의 정부가 전복한 후에 정치적, 국가적 수단을 쓰지 않고서 노동자 자신의 공동조직의 자연스럽고 자유로운 경제적 · 사회적 활동에 의하여 그 문제를 해결해 나가려고 한다.

행동을 조정하기 위해, 볼셰비키 사상은 정부와 그 대리인의 도움, “중앙”의 공식적인 지시에 따라 국가의 생활을 조직하는 특정한 정치 권력을 상상했다.

아나키스트가 품은 사상은 정치적, 국가적 조직을 완전히 포기하고자 하고 있었다. 즉 경제, 사회, 산업, 기타의 기관(조합, 공동조합, 각종 단체 등)의 직접 연합적인 연맹과 합작을 이용하고 지역적, 지방적, 국가적, 세계적 규모로 이를 행한다. 그러므로 중앙정부에서 주위로 명령을 내리는 중앙집권적, 정치적, 국가주의적인 것이 아니라, 필요와 참다운 이익에 바탕을 두어 주위에서 중앙으로 명령을 내리는 경제적, 기술적인 중앙집권이다. 그 중앙집권은 지배도 명령도 없이 구체적 필요에 따라 논리적, 자연적인 방법으로 만들어진다.

아나키스트는 “파괴의” 방법밖에 모르며, 특히 “좌파”들에게 긴급한 임무가 맡겨질 때, 아무런 적극적인 건설적 사상을 지니고 있지 않다는 따위의 비난이 얼마나 터무니없는―혹은 편견에 가득 찬―것인지를 명심해 두어야만 한다. 가장 왼쪽에 있는 모든 정당과 아나키스트 사이의 논쟁은 언제나 부르주아 국가 파괴 후에 성취해야할 적극적 · 건설적 작업에 대해서였다(그 문제만은 누구에게나 일치하다). 그렇다면 새로운 사회를 건설하는 방법은 어떠한 것인가. 국가주의적으로 할 것인가. 중앙집권적으로 할 것인가. 정치적으로 할 것인가. 연합적으로 할 것인가. 비정치적으로 할 것인가. 순전히 사회적으로 할 것인가. 각 정파 간 논쟁의 테마는 언제나 이와 같은 것이다. 이는 곧 미래의 건설이라는 것이 언제나 아나키스트의 마음속에서 잠시도 떠난 일이 없었음을 보여주고 있다. 여러 당파의 논제인 정치적, 중앙집권적, 과도기적 정부에 대해 아나키스트는 반대하고 있다. 급속히 곧바로 경제적 연합공동체로 이행한다는 것이다. 모든 정당은 수 세기의 시대와 과거의 제도로부터 이어받은 사회구조 위에 서서 토론을 전개하고 있으며, 그들은 이 표본이 건설적 사상과 양립할 수 있다고 보았다. 아나키스트는 새로운 건설에는 처음부터 새로운 방법이 필요하다고 믿고 그러한 방법을 추진했다. 그들의 이론이 옳든 그르든 간에 아나키스트는 자기들이 바라고 있는 것을 똑똑히 알고 있다는 것, 그리고 본질적으로 항상 미래의 건설에 열중하고 있다는 것은 증명이 되고 있다.

아나키스트는 정당들의 테제, 정치적, 중앙 집중적, “과도기적” 국가에 대해 반대했다. 대신 그들은 점진적인, 그러나 즉각적인 경제 및 연방 공동체로의 이행을 이야기했다. 정당들은 수 세기 동안 과거의 정권이 남긴 사회구조에 대한 찬동을 바탕으로 그것이 건설적인 사상과 양립할 수 있는 척했다. 아나키스트는 처음부터 새로운 건설이 필요하다고 믿었고, 그러한 방법을 추천했다. 그들의 테제가 사실인지 거짓인지는 알 수 없더라도, 그들은 그들이 원하는 바를 정확히 알고 있었고, 엄밀히 건설적인 사상을 지니고 있음을 증명했다.

자유의지주의에는 조직론이 전혀 없다는 의미라고 잘못―또는 고의로 부정확하게―쓰이기 일쑤다. 이보다 진실에서 멀리 벗어나 있는 말은 없다. 조직이냐 반조직이냐가 아니라 두 가지 전혀 다른 조직론이 문제인 것이다.

모든 혁명은 어쨌든 자연발생적으로, 다소 혼란한 무질서 속에서 시작되는 것이 필연적이다. 물론 자유의지주의자들도 만약 혁명이 그 초기 단계에 그대로 머무른다면 실패하리라는 것을 다른 이들과 마찬가지로 잘 알고 있다. 자연발생적인 기동력에 계속해 곧바로 조직론이, 다른 모든 인간 활동에 있어서 필요하게 되는 것과 마찬가지로, 혁명에서도 개입하지 않을 수 없다. 여기서 중대한 문제가 제기된다. 어떤 방법과 기반으로 조직하느냐 하는 것이다.

어떤 정파는 중앙의 지도 그룹―“엘리트 그룹”―이 모든 작업을 담당하고 그들의 의사에 따라 이끌어 집단 전체에 그 의사를 강제하고, 정부를 수립하고, 국가를 건설해야 한다고 주장하며 그룹의 의지대로 움직이게끔 대중에게 명령하고, 강제와 폭력으로 준법을 강요하고, 그에 동의하지 않는 사람들에게 도전하고, 압박하고, 심지어 제거하기조차 한다.

그러한 주장을 하는 이들의 반대자인 아나키스트는 그와 같은 사상을 어리석기 짝이 없는, 인류 발전의 기본 원칙에 위배된, 결국 무익할뿐더러 성취해야 할 사업에 대해 유해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렇기에 아나키스트는 사회의 조직화는 당연히 성취해야할 일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이 새로운 조직은 그 밑바닥으로부터 자유로이 사회적으로 확실히 세워져야만 한다. 조직론은 나아가 전체를 손아귀에 넣고 모든 것에 자기 자신을 강제하려고 하는 중앙으로부터 생겨야 하는 것이 아니라, 그와 정반대로 사회의 모든 구석구석으로부터 생겨야 한다고 본다. 그리고 조직은, 모든 개개의 지역에 봉사하기 위해 아주 자연스럽게 구성된 중앙부를 완전히 대등한 것으로 다룬다.

물론 조직하는 사람, 즉 조직화를 수행할 능력이 있는 사람―엘리트―이 개중 존재한다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하지만 어떤 장소에서나 어떤 환경 아래서나 쓸모가 있는 모든 인간이 자유로 공동의 사업에 지휘자로서가 아니라 진정한 협력자로서 참가하는 것이다. 그들은 하나의 본보기를 특별히 만들고, 그룹을 만들거나 협동하거나 양심과 자주성과 지식을 활용하는 것이지 아무것도 지배하거나 복종시키거나 압박하거나 하지 않고 온갖 능력과 재능을 제공한다. 그러한 개개인이 참다운 조직가인 것이다. 그런 사람들이 풍부한 발전성을 지닌 충실하고 참된 조직을 건설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 조직은 무리가 없고 인간적이면서 실제로 급진적이기 때문이다. 반면 억압과 착취라는 구시대 사회의 것을 모방하고, 따라서 그 두 목표에 적응하는 다른 “조직”은 무균하고 불안정할 것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새로운 목적에 부합하지 않을 것이고, 따라서 전혀 진보적이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사실 그것은 새로운 사회의 어떠한 요소도 포함하고 있지 않을 것이다. 그저 구시대가 모양을 달리해서 나타난 것에 불과하니 말이다. 그것은 시대에 뒤떨어진 사회에 속하며 모든 점에서 완고하므로 참으로 자유로운 인간적 제도라 할 수는 없다. 때문에 순전히 새로운 기교와 새로운 기만과 새로운 폭력과 새로운 억압과 착취를 행사하지 않고서는 스스로를 유지해 나갈 수 없게 되는 것이다. 그와 같은 것이 불가피하게 혁명을 그릇된 길로 이끌어 위험에 빠뜨리고 만다. 그러한 조직이 사회혁명의 원동력으로서 아무것도 산출하지 못하리라는 것은 분명하다. 그것은 “과도기적 사회”에도 아무런 쓸모가 없다(“공산주의자”들이 쓸모가 있는 것처럼 말하지만). 그러한 사회는 필연적으로 장차 성장해 가려고 하는 것의 씨앗이 적어도 몇 가지를 당연히 내포하고 있기 때문이다. 즉 모든 권위적, 국가주의적 사회는 멸망한 사회질서의 잔존물밖에 가지고 있는 것이 없다.

자유의지주의적 이론에 따르면, 각종 계층, 조직, 공장위원회, 협동조합 등을 통해, 현실의 필요를 바탕으로 도처에서 혁명을 위태롭게 하는 문제를 해결하는 것은 노동대중이다. 자유롭고 양심적인 그들의 적극적이고 효율적인 행동에 의해 온 땅이 힘을 모아 노력한다. “엘리트”에 관한 자유의지주의자의 생각은, 그 역할이 노동대중을 계몽하고 가르치고 필요한 조언을 해주고 그들로 하여금 주도권을 잡도록 촉구하고 본보기를 보여주고 행동으로 그들을 지원하는 데에 있다―하지만 정부와 같이 그들에게 명령하지는 않는다.

자유의지주의자는 혁명 문제의 바람직한 해결방법은 몇 백만이나 되는 남녀가 그들의 필요와 이익, 힘, 능력, 재능, 취미, 전문지식과 이해력을 거기 집중하고 조화하고 자유롭게 양심적으로 협동하고 연합하는 작업에서 비로소 산출된다고 보고 있다. 또한 자유의지주의자가 보기에 그들의 경제적 · 기술적 사회조직의 자연스러운 상호작용에 의해, 또한 “엘리트”의 도움을 얻어, 그리고 필요한 경우에는 그들의 자유롭게 조직된 군대의 보호 아래 노동대중은 혁명을 효과적으로 추진시키고, 해야 할 모든 일을 신속히 합리적으로 수행할 수 있다는 것이다.

볼셰비키 이론은 이것의 정반대였다. 볼셰비키 이론에서 그것은 엘리트―그들의 엘리트―들에 의한 것으로, 즉 “노동자 정부”를 구성하고 소위 “프롤레타리아 독재”를 건설하는 것으로 사회적 변화를 수행하고 거대한 문제들을 해결해야 한다. 대중은 이 엘리트(엘리트들이 대중을 도와야 한다는 자유주의적 믿음의 반대)를 충실하게 맹목적이며 기계적으로 그들의 계획, 결정, 명령, 그리고 “규칙”을 수행함으로써 도와야 한다. 그리고 군대는 자본주의 국가들과 마찬가지로 맹목적으로 “엘리트”에 복종해야 한다.

이것이 두 사상의 근본적 차이다. 이는 1917년 러시아의 대변동기에 있어 사회혁명에 대한 상반된 두 가지 이론 역시 마찬가지였다.

앞서 말한 것과 같이, 볼셰비키는 아나키스트의 말을 들으려 하지도 않았으며, 하물며 그들의 이론이 대중에게 전파되도록 내버려 두지도 않았다. 그들은 자기들이 절대적인 반박할 여지가 없는 “과학적” 진리를 지니고 있다고 자부하고 재빨리 그것을 강제해야 한다고 사칭해서, 아나키즘이 대중의 관심을 모으기 시작하자 폭력을 써서 자유의지주의 운동에 도전해 이를 배격했다―이는 모든 지배자, 착취자, 독재자들이 흔히 사용하는 수법이다.

1917년 10월에 두 가지 사상의 갈등이 시작되었고, 점점 심각해져 어떠한 타협도 불가능하게 되었다. 그 후 4년간 이 충돌은 볼셰비키 군대로 하여금 경계를 게을리 할 수 없게 했고, 혁명의 변동 중에 점점 중대한 위치를 차지하게 되고, 마침내 러시아에서의 자유의지주의 운동은 1921년 말에 군사력으로 무너지고 말았다.

이러한 사실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혹은 아마 이 사실과 그것이 가르쳐준 교훈 때문에, 아나키즘 운동은 모든 정치적 박해에 의해 조심스럽게 압살되어 온 것이다.


제2부. 볼셰비키 이론의 원인과 결과


익히 알려진 것과 같이, 1917년의 러시아혁명에서 승리를 얻은 것은 정치주의적, 정부적, 국가적, 중앙집권주의의 이론이었다.

이 점에서, 그해 그곳에서 일어난 사건을 다루기 전에 밝혀둘 필요가 있는 두 가지 예비적인 문제가 제기된다.

러시아혁명에서 볼셰비즘이 아나키즘에 이긴 근본적인 이유는 무엇이었는가. 그 승리는 어떻게 평가되어야 하는가.

이 두 그룹 사이에 있는 숱한 차이와 아나키스트의 조직이 빈약했다는 것만으로는 아나키스트의 실패를 충분히 설명할 수 없다. 발전 과정에서 그들의 수는 늘어나고 있었으며, 조직도 진보하고 있었다. 폭력적 탄압 역시 그것만으로는 충분한 이유가 되지 못한다. 아나키스트 사상이 제때 대중을 설득할 수 있었다면, 아나키즘 운동에 대하여 함부로 폭력은 사용되지 못했을 것이다.

더욱이 앞으로 보게 될 패배의 원인은 아나키스트 사상이나 자유의지주의자들의 태도에도 책임을 돌릴 수 없다. 그것은 통제할 수 없는 요인의 복잡성에서 기인하는 불가피한 것이었다.

그렇기에 우리는 아나키즘을 격퇴한 본질적 원인을 발견하기 위해 노력하도록 하자. 그것들은 많은 요소에서 이루어지고 있다. 그것들을 중요한 순서대로 열거해 정확한 가치를 판단하고자 한다.

1. 지식층 및 대중의 일반적 정신 상태

러시아에 국한되는 것은 아니지만, 국가와 정부는 대중에게, 어느 시대에나 존재하는 불가결의 당연한 역사적 요소라고 여겨지고 있다. 국민은 국가와 정부가 건전한 기관을 정말 대표하고 있는지 어떤지 따져 물어보는 일이 없었다.[1] 그러한 문제에는 전혀 생각이 미치지도 못했다. 혹은, 가령 누군가가 그 문제를 공개해 보고자 한다고 하더라도 대중은 처음부터, 때로는 마지막까지, 그가 말하는 것을 알아듣지 못할 것이다.

2. 국가주의에 대한 편견은 수천 년에 걸친 발전과 개혁의 결과로 ‘제2의 천성’처럼 마치 타고난 것이듯 되어버렸다. 특히 러시아에서는 사회주의 문헌도 포함해서 아나키스트 문헌은 두세 가지 비밀 팸플릿이나 소책자를 제외하고는 일반적으로 거의 출판되지 않았으니까 그러한 경향은 한층 현저했던 것이다.

우리는 러시아에서의 진보적 청년들이 언제나 한결같이 국가주의 형태의 사회주의를 표명하고 있는 문헌을 읽고 있었던 것을 잊을 수 없다. 마르크스주의와 반마르크스주의는 상호 간에 또는 제각각의 동료 내에서 국가는 여전히 전근대 사회의 명백한 기초라는 논제를 토론했다.

그 때문에 러시아의 젊은 세대는 국가 형태를 취하지 않은 사회주의란 미처 상상하지도 못했다. 가끔 어쩌다 두세 가지 예외도 있었으나 아나키즘은 1917년의 사건이 일어나기까지 그들에게 알려지지 않은 채로 있었다. 러시아의 출판계뿐만 아니라 러시아의 교육자도 모두―어느 시대나―국가주의적 성격을 띠고 있었다.

3. 볼셰비키를 포함한 사회주의 정파들이 혁명 초기에 행동할 준비가 되어있는 대규모 무장단체 간부들을 마음대로 처리할 수 있었던 것은 위에서 제시한 이유 때문이었다.

온건한 사회주의 정당 당원들은 이미 그 당시 상당한 수를 헤아렸고, 멘셰비키와 《사회주의혁명당》 우파가 성공한 원인의 하나가 되었다. 볼셰비키의 조직은 당시 그 대부분이 국외에 있었다. 그러나 이들의 당원은 벌써 귀국하여 곧장 일을 착수했다.

대규모로 또한 조직적인 통제가 취해진 방식으로, 혁명 초기부터 러시아에서 활동하고 있던 사회주의 세력 및 볼셰비키 세력과 비교해 아나키스트는 영향을 미치고 있었다고는 하지만 그 수가 불과 몇 사람 되지 않았다.

하지만 인원수의 문제만이 아니었다. 아나키스트는 정치적 수단과 목적을 거부했으니 당연히 권력 탈취를 목표로 인위적으로 통제된 정당을 수립하지 않았다. 그들은 인원을 선전과 사회적 활동을 위해 몇 개의 그룹으로 나누었고, 나중에는 자유로운 규율을 가진 협회나 연합조직을 만들었다. 이와 같은 조직과 행동 방식은 일시적이긴 하지만 그들을 모든 정당과의 관계에서 불리한 입장에 서게 만들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그들은 좌절하거나 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그들은 대중이―사실의 힘에 의해, 또 설득과 교육 계몽과 선전에 의해―그들 사상의 진가를 이해하게 되고, 그 진가가 실현될 날을 위해 활동을 계속했기 때문이다.

내가 외국에서 러시아로 돌아와 1917년 7월 초에 페트로그라드에 도착했을 때, 집회와 학습 모임을 알리는 볼셰비키의 게시물이 수도와 교외의 모든 지역, 공회당, 그 밖에 사람들이 모이는 곳에 덕지덕지 나붙어 있는 것에 놀란 일이 있었다. 나는 아나키스트의 게시물은 단 하나도 보지 못했다. 나는 또 볼셰비키당이 페트로그라드와 그 밖에서 널리 일간지를 내고, 그것이 거의 가는 곳곳마다―특히 공장이나 관청이나 군대에서―중요하고 유력한 중핵을 만들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동시에 나는 수도에 단 하나의 아나키스트 신문도, 구두로라도 이루어지는 어떤 아나키즘 선전도 없음을 알고 몹시 실망했다. 겨우 두세 가지의 극히 초보적인 아나키스트 그룹이 있기는 했다. 그리고 크론슈타트Kronstadt에는 약간 영향력이 있는 소수의 아나키스트가 있었다. 하지만 이들의 ‘조직’은 아직 거의 알려지지 않은 사상을 선전하기 위해서도, 정력적인 볼셰비키의 활동과 프로파간다에 대항하기 위해서도, 유효한 선정을 수행할 만한 힘을 갖지 못했다. 대혁명의 5개월간 단 하나의 아나키스트 신문도, 아나키스트의 연설도 러시아의 수도에서는 볼 수 없었다. 볼셰비키의 거의 끝을 모를 활동 앞에서 이 꼴이었던 것이다! 이것이 내가 본 그대로의 기록이다.

여러 가지 곤란을 극복하고 간신히 8월이 되고서야 대부분의 동지로 구성된 작은 《아나키즘적 조합주의자 연맹Anarcho-Syndicalist Union》이 페트로그라드에서 「노동자의 목소리Golos Truda」라는 주간지를 내는 데 성공했다. 그러나 구두로 이루어지는 선전에 관해서는, 그것을 할 수 있는 동지가 페트로그라드에 서너 명 정도밖에는 없었다. 모스크바 쪽이 조금은 나았다. 꽤 큰 연합조직에서 벌써 「아나키Anarchy」라는 아나키스트 일간지가 나오고 있었다. 지방에서는 아나키스트 세력과 선전은 거론할 것이 못 되었다.

이렇게 빈약하고 불리한 상황이었는데도 아나키스트가 순식간에―거의 모든 곳에―상당한 영향력을 가지게 되고, 볼셰비키로 하여금 무력으로 아나키스트 정벌에 나서지 않을 수 없게 했다―몇몇 지방에서는 상당한 기간에 걸쳐서―는 것은 놀랄 만한 일이다. 아나키스트 사상의 이 빠르고 자발적인 성공은 매우 중요한 것이다.

내가 페트로그라드에 도착해, 몇 사람의 동지가 인상을 물었을 때, 나는 이렇게 말했다. “우리의 지연은 회복할 길이 없다. 흡사 시속 150 킬로미터의 속도로 우리보다 100킬로미터나 앞서가고 있는 볼셰비키의 기차를 걸어서 앞질러야만 하는 궁지에 몰려 있다. 우리는 따라붙어야만 할 뿐 아니라 전속력으로 매달리고 기어올라 그 속에 뛰어들어 볼셰비키와 격투 끝에 그들을 끌어내리고 기차를 빼앗고, 더욱 어려운 일이기는 하겠지만, 그것을 대중의 손에 넘겨주고 대중이 그것을 조종해 나갈 수 있도록 도와주어야만 한다. 성공하기 위해서는 기적이 필요하다. 우리의 의무는 그 기적을 믿고 현실을 위해 일하는 데 있다.”

나는 한 가지를 더 덧붙이고 싶은데, 그러한 “기적”은 혁명 시기에 적어도 두 번 일어났다―첫 번째는 1921년 3월의 크론슈타트 반란 때였고 두 번째는 《마흐노우슈치나(Makhnovshchyna, махновщина)》라고 불리는 우크라이나에서의 대중의 전진 운동이었다. 이 두 가지 성과는, 태만한 또는 편견에 사로잡힌 작가의 책에서는 묵살되고 왜곡되어온 발전 운동이었다. 그것들은 대체로 일반에 알려지지 않았다.

4. 이제부터 인용할 혁명 중의 어떤 사건은 우리에게 다음과 같은 것을 보여준다. 그것은 불리한 상황과 아나키스트 조직의 적은 인원수에도 불구하고, 가령 러시아의 대중이 혁명의 아주 초기에 과거의 경험이 있는, 시험된, 대중 자신의 의지로 행동해 그 사상을 현실화하는 데 대비한 계급조직을 장악하고 있었다고 한다면, 아나키즘은 뚜렷한 족적을 나타낼 수 있었거나 혹은 승리를 거두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현실은 전혀 정반대였다. 노동자의 조직은 혁명 과정에야 비로소 생겨났던 것이다.

확실히 그들은 급속하게 수적으로도 대규모로 발전했다. 전 국토가 순식간에 조합, 공장위원회, 소비에트 등의 광대한 그물로 뒤덮였다. 하지만 이들의 조직은 준비도 예비적 활동도 없이, 경험도 없이, 뚜렷한 이데올로기도 없이, 독자적인 자주성도 없이 시작되었다. 그것들은 역사적 전통도 지니고 있지 않았고, 능력도 없으며, 분담된 임무와 참된 사명에 대한 의식도 결여되어 있었다. 아나키즘은 그들에게 알려지지 않았다. 이와 같은 조건 아래 처음부터 그들은 정당의 손에 고삐가 잡히게끔 운명 지어져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 후 볼셰비키는 약한 아나키스트 세력이 대중을 계몽한다고 해봤자 얼마나 할 수 있겠느냐고 대수롭지 않게 보고 있었다.

그러한 자유의지주의적 그룹은 겨우 사상의 송신기에 불과했다. 그들의 사상이 현실 세계에 채용되기 위해서는 “수신기”가 필요했다. 이러한 사상 전파를 “수신”하고 실현할 수 있는 노동자의 조직이 필요했던 것이다. 가령 그러한 조직이 존재하고 있었다고 한다면, 통신을 전문으로 하는 아나키스트가 그것에 가담해 계몽적 원조와 조언과 모범을 안내해주고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러시아에서는 이러한 “수신기”는 없었고, 혁명의 소용돌이 속에서 발생한 조직은 필요한 속도로 이 목적을 달성하지 못했다. 몇 개나 되는 “송신기”를 정력적으로 활용해 널리 송신하기는 했지만, 아나키즘은 수신되지 않고 “허공에 헛되이” 울려 퍼졌을 뿐이다.

이와 같은 상황 속에서 아나키즘이 발자취를 분명히 남기고 승리하기 위해서는 볼셰비키가 존재하지 않고 볼셰비키 당원들이 아나키스트로서 행동하는 것이 필요했을 것이다―혹은 볼셰비키 국가에 의해 흡수되고 복종당하기 전에 그러한 사상을 받아들여 그것을 실행할 수 있는 노동자 조직을 가질 수 있을 만큼 충분한 시간을 혁명이 아나키스트와 노동자에게 허락하는 것이 필요했다. 이 후자의 가능성이 없는 동안에, 노동자가 아나키즘에 익숙해져서 볼셰비키에 의해 파악되는 데 반대하고 혁명을 아나키즘의 방향으로 돌리려 하기에 앞서 볼셰비키는 노동자 조직을 흡수해 버리고 아나키스트의 진로를 봉쇄했다.

혁명의 시초부터 아나키즘을 받아들여 실행해 나갈 만한 사회적 준비를 갖춘 “수신기” 즉 노동자 조직이 존재하지 않았다는 것(그리고 다음으로는 그와 같은 “수신 장치”를 만들 만한 시간적 여유가 없었다는 것)―이 부재가 1917년의 러시아혁명에서 아나키즘이 실패한 주원인 중 하나라고 나는 생각한다.

5. 잠깐 살펴보고자 하는 또 하나의 요인은 객관적 성격의 것이기는 하나 간과할 수 없는 중요성을 갖고 있으며 앞서 말한 것에 추가되는 것이다. 그것은 바로 앞에서 기술한 사정을 더욱 악화시켜 혁명에 완전히 치명적이게 만들었던 것이다.

대중의 후진성의 영향을 없애고, 잃어버린 시간을 회복하고, 공백을 메우기 위한 간단하고 신속한 방법이 있었다. 그것은 기존의 케렌스키(Kerensky) 정부가 붕괴한 후 언론과 조직 활동의 자유가 혁명에 의해 확실히 달성되었기에 자유의지주의 선전과 운동을 위한 자유로운 활동분야를 만들어 두는 일이었다.

노동자 조직의 부재, 자유의지주의에 대한 광범위한 선전의 부재, 혁명 전 아나키즘에 대한 지식의 부재를 고려한다면 어째서 대중이 그들의 운명을 정당이나 권위에 맡겨 과거 혁명의 근본적인 오류를 되풀이했는지를 이해할 수 있다. 이러한 상태 아래서는 기존의 것들은 객관적으로 변동하기 어렵다. 그러나 거기서 파생된 발전 경로는 전혀 불가피하지 않았다.

설명해 보도록 하자.

앞으로의 과정과 해결해야 할 문제에 관한 혁명적 사상이 자유로 교환될 수 있는 환경이 있고 나서 비로소 참된 혁명은 비약하고 발전해 목적을 달성할 수 있는 것이다. 이러한 자유가 혁명에 있어 필수불가결이라는 것은 숨을 쉬는 데 공기가 반드시 필요한 것과 마찬가지다.[2] 그러므로 이것이 무엇보다도 일당 독재, 즉 언론, 출판, 조직 활동 등의 모든 자유의 억압을 필연적으로 수반하는 독재야말로―권력의 자리에 앉은 당을 제외한 모든 혁명적 정파에 대해서도―어째서 참된 혁명에 대해 치명적인 것인지에 대한 이유다.

사회적인 문제에 있어 그 누구도 완전한 진실을 소유하고 있다거나 자기기만에서 벗어나 있다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은 없다. 그런 사람이 있다면―그들이 사회주의자라 자칭하거나 공산주의자, 아나키스트, 그 밖의 어떤 이라고 자칭하건 간에―일단 권력을 잡으면 이 진실을 가린 그늘 아래서 다른 사상들을 힘으로 파괴하고 반드시 일종의 사회적 종교재판을 행하게 되는 것이다. 모든 종교재판과 마찬가지로, 그들은 모든 진실과 정의와 진보, 생활과 인간, 그리고 혁명의 숨통을 조르고 만다. 혁명이론의 자유로운 교환, 각양각색의 집합적 사상만이 자연도태의 법칙에 따라 우리를 오류에 빠지지 않도록 지켜주고 길을 잃지 않도록 이끌어준다. 이것을 인정하지 않는 사람은 사회주의자나 집산주의자 또는 공산주의자인 척하더라도 단지 나쁜 개인주의자에 불과하다.

이러한 진실들은 오늘날 너무도 분명하고 자연스러워―명백하다고 표현해도 좋다―새삼스럽게 이런 이야기를 주장해야만 한다는 것은 정말 불편한 일이다. 이러한 것을 이해하지 않으려 한다면 그것은 소경이거나 벙어리이거나 또는 배신자일 수밖에 없다. 그런데 레닌과 그의 추종자는 의심의 여지 없이 진심으로 이를 부인하고 있다. 인간의 정신은 이처럼 쉽사리 오류에 빠지고 만다. 맹목적으로 지도자에게 추종하고 마는 무리도, 그들의 잘못을 깨닫는 것이 너무도 늦었던 것이다. 그러는 동안 종교재판은 전속력으로 기능해 “첩보부”와 강압적 군사력을 갖추어 버렸다. 그리고 대중은 거기에 익숙해지거나 다시 한번 상황을 바꿀 힘이 없어 “복종하고” 말았다. 혁명은 부패하고 궤도를 벗어나 올바른 길을 잃어버렸다. “모든 것이 내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레닌은 그의 주위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지켜보며 동지들에게 말했다. “나는 몸이 성치도 못하거니와 모든 것을 내버려두고 도망치고 싶을 뿐이다.” 그는 정말 사태의 본질을 간파하고 있었던 것일까.

일단 권력을 장악한 볼셰비키당자유의지주의자들에게 언론과 조직의 자유를 장려는 고사하고(이는 무리한 요구였을 것이다) 허락하기만이라도 했더라면 지연은 급속히 회복되고 공백은 메워졌을 것이다. 앞으로 보게 되듯이 사실들은 반박할 수 없이 이를 증명하고 있다. 볼셰비키가 아나키즘에 대해 맞서야 했던 길고 어려운 투쟁은, 아나키스트의 약세에도 불구하고, 만약 아나키스트가 언론과 행동의 자유를 가지고 있었다면 아나키스트가 반드시 성공했을 것이라고 추측하게 만든다.

하지만 자유의지주의 운동이 초기에 성공한 사실, 아나키스트 활동이 모든 정당과 모든 권력을 무용한 것으로 보는 생각을 낳아 볼셰비키당이 추방되는 사태를 불러오리라는 이유에서 볼셰비키당은 그러한 자유를 허용할 수 없었던 것이다. 아나키스트의 선전을 용인하는 것은 그것은 볼셰비키에게 자살과 맞먹는 것이었을 것이다. 때문에 볼셰비키는 모든 힘을 다해 자유의지주의의 발전을 방해하고, 다음에는 금지하고, 그리고 마침내 야만적인 폭력으로 탄압했던 것이다.

노동대중은 스스로의 힘으로 자유롭게 혁명을 수행할 능력이 없다고 자주 주장된다. 이 이론은 특히 “공산주의자”들이 즐겨 말한다. 왜냐하면 그렇게 주장함으로써 공산주의자는 필연적으로 “사악한 공상주의자 아나키스트”를 억압하기 위한 “객관적” 정체를 끄집어낼 수 있기 때문이다. (대중은 무능력하니 “아나키스트 혁명”은 혁명의 죽음을 의미한다고 그들은 말한다.) 하지만 이 이론은 완전히 근거가 없는 것이다. 그들에게 대중에게 능력이 없다고 단언하는 증거를 제시하도록 해보자. 대중이 실제로 자유롭게 행동할 수 있었던(물론 당연히 도움도 받으면서) 단 하나의 예도 역사에서 발견할 수 없는데, 이것이 그들의 부적절함을 증명하는 유일한 방법이 될 것이다.

이러한 경험은 한 번도 시도된 일이 없었는데 그 이유는 쉽게 추측할 수 있다. (비록 단순할 것이지만.) 왜냐하면 이 논리가 옳지 못하다는 것, 그리고 그와 같은 경험은 비록 어떤 형태의 것이라 할지라도 대중의 무능력에 기인하는 것이 아니라 침해와 기만에 기인하는 인민 착취와 권력에 종지부를 찍게 하리라는 것은 너무도 명료하다. 그것이 또한 마침내는 노동대중이 역사적으로 혁명, 진실된 혁명을 통해 그들의 행동의 자유를 쟁취하도록 이끌어질 것이다―왜냐하면 지배자(그들은 언제나 지배자인 동시에 착취자이거나 또는 착취계급을 위하여 봉사하고 있다)는 설사 어떤 꼬리표를 붙였든지 간에 결코 자유를 주는 일이 없기 때문이다.

노동대중은 오늘날까지 언제나 그 운명을 당이나 정부나 지도자에게 맡겨 왔다는 사실―모든 지배자와 적극적 착취자는 대중을 정복하는 데서 이익을 얻어 왔다는 사실―은 여기서 분석할 필요가 없는, 대중의 능력 · 무능력과도 전혀 관계가 없는 몇 가지 상황에서 설명할 수 있다. 이 사실로 말하면, 대중의 경신輕信과 경솔과 자신의 힘에 대한 인식부족을 보여주는 것이지 그들의 무능력, 즉 힘의 결여를 보여주는 것은 결코 아니다.

“대중의 무능력”. 과거, 현재, 미래의 모든 착취자와 지배자에 대해, 특히 현대에 있어서 사람들을 열심히 노예화하려고 하는 자―나치즘, 볼셰비즘, 파시즘, 코뮤니즘 등, 그 표상이야 어쨌든 간에―에 대하여 그것은 얼마나 안성맞춤인 도구일까. “대중의 무능력”. 모든 정파의 반동가들은 “공산주의자”와 완전히 일치하는 한 점이 있으니, 이 한 점은 매우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있다.

다가올 혁명 후에, 현재의 “유능한” 올바른 지도자는, 다만 필요한 경우에 노동자를 도와줄 뿐으로 노동대중에게 자유로운 행동을 허락한다면 대중이 정치적 보호자 없이는 행동할 “능력이 없는지” 어떤지 당장 알게 될 것이다. 그렇게 됐을 때, 혁명은 파시즘과의 그칠 줄 모르는 전쟁을 수반한 1917년의 혁명과는 다른 결과를 이끌어낼 것이 확실하다.

그런데 현재의 지도자들은 결코 그와 같은 실험을 하려고 하지 않으리라는 것은 묻지 않아도 알 수 있다. 그렇기에 대중은 다시금 특별한 임무를 수행하여야만 한다. 즉 주의를 게을리하지 않고 때에 대비하여 모든 “야심가”를 배제하고 일을 노동자 자신의 손에 탈환하여 아무것에도 의존하지 않고 자립해 그것을 치러내야 할 의무 말이다. 이번이야말로 그 임무가 완수될 것을 바라보자.

이로써 독자는 대중의 경신輕信을 분쇄하고, 대중에게 그들 자신의 힘을 인식시키고, 자신감을 가지게 하려고 한 아나키스트 사상의 선전이 어째서 어느 시대에나 어느 나라에서나 위험하기 짝이 없는 것으로 다루어져 왔는지 그 이유를 이해하게 되었을 것이다. 모든 반동적인 정부에 의해 예외적으로 신속하게, 그리고 엄격하게 아나키스트 사상의 선전은 탄압되었고 그 중심인물은 추방되었다.

러시아에서는 이 야만적 억압이 아나키즘의 확대―당시 상황 아래서는 이미 매우 어렵게 되어있었다―를 혁명이 닥쳐왔을 때까지 거의 불가능하게 했다. 혁명이 일어남과 동시에 아나키스트는 어느 정도의 활동의 자유를 얻었다. 하지만 1917년 2월에서 10월까지의 임시정부 기간에 아나키스트 운동은 아직 많은 일을 해내지 못했음은 앞서 말한 것과 같다. 볼셰비키는 어땠는가 하면 그들도 예외는 아니었다. 그들이 권력을 잡자마자 구사할 수 있는 온갖 수단을 사용해 아나키스트 탄압에 나섰다. 중상, 모략, 함정, 금지, 수사, 폭행, 집회장 파괴, 암살―무슨 짓이든 해치웠다. 그리고 그들의 권력이 충분히 견고해졌다고 느꼈을 때, 그들은 아나키스트에 대해 전면적이고 단호한 억압을 개시했다. 이는 1918년 4월에 시작되어 현재도 끝나지 않고 있다. 그런데도 볼셰비키에 의한 “용맹의 위업”은 일일이 러시아 바깥에까지 거의 알려지지 않고 있음을 독자는 알아차렸을 것이다.

이리하여 아나키스트 활동이 그런대로 자유롭게 행하여질 수 있었던 것은 대략 반년에 불과했다. 자유의지주의 운동이 조직화되고 확대되고 성장하여 약점과 오류를 고칠 만큼 시간을 가지지 못했음은 놀라운 일이 아니다. 이랬기에 대중에게 다가가 그들을 알릴 만큼의 시간이 부족했던 것이다. 그것은 마지막까지 “닫힌 통” 안에 갇혀 있었다. 그것은 껍질을 깨지 못한 채 알 속에서 죽임을 당했다. (이는 객관적으로 봐서 불가능한 일은 아니었다.)

아나키스트의 실패의 두 번째로 주요한 원인은 이와 같은 것이었다.

여기서 지금까지 이야기해 온 가운데서 첫째로 중요한 것―혁명에 대해―을 밝혀둘 필요가 있다.

볼셰비키는 아나키즘을 신중하고 신속하게 일소했다. 상황과 대중을 파악한 좋은 조건을 이용해 그들은 아나키즘과 그것을 지원하는 운동을 잔인하게 억압했다. 그들은 아나키즘에게 존재를 허락하지 않고, 대중으로부터 점점 격리시키려 했다. 나중에 그들은, 아나키즘은 “이데올로기적으로” 실패했다, 즉 대중이 아나키즘의 “반反프롤레타리아주의”를 이해하고 반발한 것이라고 정치적 이유에서 교활하게도 주장했던 것이다. 외국에서는, 속임 당하기 쉬운 사람들은 모두, 볼셰비키의 그 말대로 아나키즘을 받아들였던 것이다. “공산주의자”는 또, 앞서 말한 것처럼, 아나키즘은 볼셰비즘에 반하여 진행 도상의 혁명을 조금도 “객관적으로” 보려고 하지 않기 때문에 혁명을 위험에 빠뜨리고 객관적으로는 그 자신이 “반反혁명”임을 폭로하고 있으므로 사정없이 분쇄해야만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그들은 사실 아나키스트에게서 그야말로 “주관적으로”―그리고 대중에게서―최후의 기회와, 다름 아닌 실제적 수단과 성공의 현실적 가능성을 탈취하고 있었다는 데 대해서는 전혀 아랑곳하지 않았다.

자유의지주의 운동을 절멸시키고 대중의 자유로운 운동을 파괴하는 데 있어서 볼셰비키는 사실상 혁명을 멈추게 하고 숨죽여 버렸던 것이다.

대중이 참된 해방으로 전진하지 못하고, 그 대신 당연한 결과로 관료적, 착취적, “신자본주의적”인 지배적 국가주의가 바뀌어 놓였으니 진정한 혁명은 어쩔 수 없이 후퇴할 수밖에 없었다. 왜냐하면 달성되지 못한 모든 혁명, 요컨대 순수하고 완전한 노동자 해방을 가져오지 못한 혁명은 어떤 방식으로든지 후퇴하게끔 운명 지어졌던 것이다. 이것이 역사의 교훈이다. 그리고 러시아혁명이 다시금 이를 확증하고 있다. 하지만 잘 듣고 보려고 하지 않는 사람들에게는 좀처럼 그것이 이해되지 않는다.

어떤 사람들은 권위주의적 혁명을 믿는다고 하고, 또 어떤 사람들은 혁명의 실패 원인을 찾으면서 모든 혁명에 절망했다고 말하고 있다. 그리고 또 다른 사람들―유감스럽게도 이런 종류의 사람들이 제일 많지만―은 귀를 기울이려 하지도 보려고 하지도 않는다. 그들은 멀리 떨어져 복잡한 사회에서 몸을 피하여 “자기 혼자만의 생활”을 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들은 사회 전체에 대해 무관심하다. 그리고 그들의 그러한 태도가 인간의 진보와 그들 자신의 참된 행복에 대해 숱한 장애물을 만들어내고 있다는 데는 생각이 미치지 못하고 자신들만의 초라하고 고립된 처지를 지키려고 안간힘을 쓰고 있다. 그들은 “안식”을 마련해 준다는 것을 믿고, 따라간다. 그들은 이렇게 하여 대변혁의 소용돌이 속에서 자기만이 구원될 수 있기를 바란다. 이는 근본적으로 착각이자 환상이다. 그러나 진실은 간단한 것이다. 요컨대 일하는 인간이 인간에 의한 온갖 착취에서 해방되지 않는 한, 누구도 참된 진보, 참된 개인의 번영을 바랄 수 없다는 것이다.

수천 년간 주로 세 가지 조건이 인간의 자유로운 노동, 즉 “우애”와 번영을 방해해 왔다. 그것은

⑴ 생산기술의 상태―인간은 현재 자신이 주인인 광대한 자연력을 제대로 소유하지 못했다.

⑵ 여기서 파생하는 경제상태―인간의 노동에 의한 생산물의 부족과 거기서 일어나는 “교환경제”, 화폐, 이윤, 요컨대 공업생산물의 결핍에 기인하는[3] 생산과 분배의 자본주의 제도.

정신적 요인, 이것은 먼저 두 가지 조건에서 부수적으로 따라 나온다.―대중의 태만, 잔인성, 복종, 굴종.

그런데 최근 수십 년간에 앞서 말한 처음 두 가지 조건은 크게 변화했다. 기술적으로, 경제상 자유로운 노동은 이제 가능할뿐더러 정상적 생활과 인간의 발전에 대해 불가결한 것이 되게 하고 있다. 자본주의적, 권위적 제도는 벌써 어느 쪽도 보증할 수 없다. 그것은 전쟁을 야기할 뿐이다. 그런데도 사람들의 사기士氣만은 이 가능성에 알맞은 것이 되지 못하고 있다. 왜냐하면 인간의 대다수는 수천 년간의 복종과 굴종이 습성이 되어 그들 앞에 열려 있는 진실의 길을 보려 하지 않고, 역사가 그들에게 강요해 오는 행위를 인정하지 않는다. “복종”하고 “굴종”해, 그들은 현대의 상황 아래서는 그들의 자유로운 창조적 활동이 승리를 장식하리라는 것을 이해하지 않고 복종하고 굴종하여, 전쟁이나 무의미한 파괴활동에 막대한 에너지를 쏟고 있다. 사물의 힘, 즉 전쟁, 모든 것의 부패, 되풀이되는 혁명의 유산流産이 끊임없이 일어나고, 살아갈 모든 가능성을 그들로부터 빼앗아 가면, 그들의 눈은 차차 진실을 향해 열리고 그 에너지의 전력을 참된 인간의 자유로운 건설적 · 박애적 활동에 기울이게 될 것이다.

우리는 우리 시대에 혁명과 반동이 필연적으로 전 세계적으로 번져 나가리라는 것을 덧붙여 두어야 하겠다. 1789년의 프랑스대혁명과 그에 잇따른 반동은 여러 국가에 울려 퍼져 중요한 운동의 기동력이 되었다. 가령 러시아혁명이 계속해서 더욱 전진해 위대한 해방의 혁명이 되고 있었다고 한다면, 외국 사람들도 얼마 가지 않아 같은 방향을 향해 따라갔을 것이다. 그렇게 되었다면 탁상공론이 아니라 실제로 러시아혁명은 인류의 참된 길을 비춰주는 강력한 횃불이 되었을 것이다.

그런데 러시아혁명의 현실은 전혀 그와는 반대로 일그러지고 정체하고 후퇴할 대로 후퇴하여 세계의 반동의 목적에 알맞게 기여했다. 반동들은 그때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반동 측의 거물들은 혁명가들보다 통찰력이 뛰어나다). 환상과 신화와 슬로건과 와해와 휴지 조각만이 남았는데, 이런 것들 가지고는 아무 소용이 없는 현실의 생활은 전혀 다른 길을 걷고 있었던 것이다. 이와 같은 반동과 그 광범위한 파생물, 즉 파시즘, 새로운 전쟁, 경제적, 사회적 파탄이 불가피하게 되었다.

이러한 정세 가운데서 레닌의 근본적인―그리고 유명한―오류는 기묘하고 암시적인 것이다. 그는 “공산주의” 혁명이 급속히 다른 나라로 번져나갈 것을 기대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의 희망은 헛된 것이었다. 그러나 근본적으로는 그가 잘못 생각한 것은 아니었다. 다시 말하면, 참된 혁명은 “온 세상에 타오를 것”이라는 것이다. 그렇다. 참된 혁명이라면, 전 세계를 타오르게 했을 것이다. 다만 그의 혁명은 진짜가 아니었던 것이다. 그런데도 레닌은 그것을 몰랐다. 그의 잘못은 그 점이었다. 그의 국가주의적 이론 때문에 눈이 어두워지고 “승리”에 취한 그는 그것이 길을 그르친 실패한 혁명이고, 불모가 되려 하고 있으며, 그 “불이 꺼져”버렸으니 아무것에도 “불을 붙일” 수 없으며, 그것이 위대한 이데올로기이기를 그쳐 버렸으니 위대한 이데올로기의 특성을 확대할 힘을 잃어버렸다는 것을 깨닫지 못했고, 깨닫고자 해도 할 수가 없었다.

눈이 먼 그가, 이 혁명은 정체하고 후퇴하고 타락했으므로 다른 나라에서 실패한 두세 가지 봉기가 일어난 뒤 반동에게 승리를 안겨준 사실을 볼 수 있었을까. 물론 아니다. 더욱이 그는 두 번째 잘못을 범했다. 그는 러시아혁명의 최후의 운명은 다른 나라에의 혁명의 확대에 걸려 있다고 믿고 있었다. 바로 그 정반대가 옳았다. 즉 혁명의 결과에 걸려 있었던 것이다.

그 결과가 애매하고 불확실했기 때문에 외국의 노동대중은 주저하고 형편을 엿보고 자상한 사실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런데 정보와 그 밖에 들려오는 소식들은 점점 걷잡을 수 없는 모순된 것으로 나타나고 있었다. 조사위원들이나 파견위원은 한 가지도 정확한 데이터를 잡지 못했다. 한동안 러시아혁명에서 일어난 일에 대해 부정적인 설명서가 보였다. 유럽의 대중은 세상에 영합했고 굳이 조사하려 하지도, 신뢰하지도, 관심을 기울이지도 않았다. 그들에게는 필요한 정신이 결여되어 있었기에 그 운동은 의심을 품은 채였다. 그리고 일치와 분열이 생겼다. 이러한 모든 것은 반동을 이롭게 하기에 알맞았다. 반동은 착실히 준비하고 조직하고 행동했다.

레닌의 후계자들은 명백한 그 사실을 인정해야만 했다. 아마도 참된 운동을 이해하는 일 없이 그들은 “공산주의” 혁명의 확대에 대해 조건이 별로 좋지 않고, 그것에 반대하는 방대한 세력이 있다는 것을 직관적으로 깨달았다. 이 반동은 그들에 대해서도 그들의 혁명에 대해서도 위험하기는 하겠지만, 세계에 강요할 수는 없으리라고 그들은 생각하고 있었다. 그래서 그들은 열심히 신들린 사람들처럼 앞으로의 불가피한 미래 전쟁의 준비에 착수했다. 이때부터 이것은 그들이 취할 유일한 길이었다. 그리고 역사의 길이기도 했다.

그러므로, “공산주의자”가 “자본주의의 포위”나 외국 프롤레타리아의 무반응이나 세계의 반동세력을 핑계로 혁명의 실패와 착오를 설명하려 하는 것을 보면 기묘한 느낌이 든다. 외국 노동자의 미약함과 반동의 증대는 공산주의자 자신이 혁명노선으로 삼아온 그릇된 노선에서 당연히 귀결된 것이고, 이를 외면하는 데서 그들 자신이 반동으로의, 파시즘으로의, 전쟁으로의 길을 준비해온 것이다.

이것이 볼셰비키 혁명의 비극적 사실이다. 세계의 노동자를 위한 혁명의 교훈은 이러한 것이었다. 근본적으로 그것은 간단하고 명확하며 논쟁의 여지가 없다. 그런데 그것은 여태껏 확립되지도, 심지어 알려지지도 않았다. 하지만 그것은 사실에 비례해, 또한 러시아혁명에 대한 자유로운 연구가 발전됨에 따라 그렇게 될 것이다.

장차 도래할 혁명의 운명에 대해 속지 말자! 장차 도래할 혁명 앞에는 두 갈래 길이 있을 뿐이다. 그것은 노동자의 진정한 해방으로 이끌어가는 순수한 사회주의적 혁명의 길(그것은 객관적으로 가능하다)인가, 아니면 다시금 필연적으로 새로운 반동과 새로운 전쟁과 모든 붕괴를 초래하는 정치적, 국가주의적, 권위적 길인가.

인류의 발전은 그칠 줄 모른다. 그것은 어떠한 장애도 뚫고 나가고, 넘어서고, 돌아나가면서 뚜렷이 발자국을 남길 것이다. 오늘날 자본주의적, 권위적, 정치적 사회가 인류 발전의 길을 가로막고 있다. 그러니까 이 사회는 지금 무슨 방법으로든지 소멸시켜야만 한다. 만약 이번에도 다시 대중이 현 사회를 현실적으로 변화시킬 방법을 모른다면, 혁명의 순간에 속절없이 새로운 반동과 새로운 전쟁과 새로운 경제적 · 사회적 공황이 일어날 것이다. 다시 말하면 대중이 이해하고 그 이해에 비롯해 행동할 때까지 모든 파괴가 계속될 것이다. 왜냐하면 이 경우 인류의 발전에 이 이외의 자취를 비춰주는 길은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4]

마지막으로, 앞에서 말한 요인의 중요성은 말할 것도 없거니와, 그럼에도 러시아혁명의 비극 속에서 주목할 만한 역할을 연출한 요소에 대해 언급하겠다. “선전”, 혹은 데마고기demagogy에 대하여 논해야겠다. 모든 정당과 마찬가지로 볼셰비키당(오늘날의 “공산당”)은 그런 수단을 사용했고, 악용했다. 대중을 억압하고 “정복”하기 위하여 볼셰비키는 과장하고 선동하고 허세를 이용했다. 그리고 볼셰비키는 대중이 볼셰비키를 우러러 보고 그것을 보고 감탄할 수 있도록 무슨 수를 써서라도 산꼭대기에 스스로를 올려두었다. 이렇게 함으로써 우선 세력을 얻었던 것이다.

그런데 그러한 방법은 익명으로, 훨씬 신중하고 온건하고 조용한 자유의지주의적 운동과는 본질적으로 전혀 이질적이다. 이 사실은 아나키스트 운동을 일시적으로 약화시켰다. 아나키스트는 대중을 지도하는 것을 거부하고, 대중의 의식을 일깨우기 위하여 일하고 대중의 자유로운 직접행동에 의존했으니 선동을 부인하고, 그늘에서 활동하고, 권위를 덮어씌우지 않고, 미래를 위해 준비해야만 했다.

러시아에서의 상황은 이와 같은 것이었다.

여기서는 잠시 구체적 사실을 떠나 ‘철학적’ 영역으로 짧게 들어가 보고 싶다.

아나키즘의 기본 원리는 간단하다. 노동대중을 “지배하고” 혹은 “지도하기” 위해 대중 위에, 또는 바깥에 군림하는 정당이나 정치적, 사상적 그룹은 설령 진지하게 노동대중의 해방을 염원한다 할지라도 결코 성공하지 못한다. 참된 해방은 당사자인 노동자 스스로의, 그리고 정당이나 사상적 조직의 깃발 아래서가 아니라 구체적 활동과 자치에 기초한 노동자 스스로의 계급적 조직(산업노동조합, 공장위원회, 협동조합 등)으로 편성된, 그리고 대중 위에 서지 않고 그 한복판에서 일하는 전문기술, 방위, 그 밖의 분야에서 활동하는 혁명가에 의한, 지배가 아닌 원조를 받아, 직접적이고 대규모인 독자적 활동에 의해 비로소 성취된다.

정치적, 지배적인 길을 통해 대중을 해방으로 “이끌어가려고” 하는 모든 정치적 · 사상적 그룹은 그릇된 길로 나아가 실패를 피하지 못하고 새로운 경제적 · 사회적 특권 제도를 설치함으로써, 또한 대중을 해방으로 이끌어 가기 위해 혁명을 원조하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국면 아래 노동자의 억압과 착취의 제도―그렇기에 자본주의의 새로운 변형―를 발생시키는 결과가 되고 있다.

이 논리는 필연적으로 다른 하나의 논리로 이어진다. 아나키스트 사상과 진정한 해방의 혁명은 아나키스트만으로는 결코 성취하지 못한다. 당사자인 광범위한 대중의 손으로 비로소 성취되는 것이다―아나키스트 또는 일반 혁명가들은 그때그때의 상황 속에서 대중을 계몽하고 조력하는 것에 의해서만 환영된다. 만약 아나키스트가 대중을 “지도”함으로써 사회혁명이 완수된다고 주장한다면, 그러한 주장은 볼셰비키의 그것과 마찬가지로, 동일한 이유에서 환상이 될 것이다.

그뿐만이 아니다. 확대성―보편성이라고 해도 좋다―과 임무의 성격이란 관점에서 보면, 노동계급만으로 참된 혁명을 만족스러운 결과로 이끌어갈 수는 없다. 가령 노동계급이 자기 혼자만 행동하고 다른 분자들에 대해 독재적으로, 자기 의사대로 강제로 복종시키려고 자만한다면, 마찬가지로 실패에 부닥칠 것이다. 아나키스트의 원리와 정반대되는 것을 믿는다는 것은 사회현상이나 인간이나 사물의 성격에 대해 올바른 이해를 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또한, 그와 같은 유효한 해방투쟁이 시작되면, 역사도 필연적으로 전혀 다른 길을 취할 것이다.

혁명이 결정적으로 성공하기 위해서는 다음―중요한 순으로―세 가지 조건이 필수적이다.

1. 여러 나라에 걸친 막대한 대중―피치 못할 필요로 인해 몰아 세워진 수백만의 사람들―이 그들의 자유의지로 혁명에 참가하는 것이 필요하다는 것.

2. 이 사실 덕분에 훨씬 진보적인 분자, 혁명가와 노동계급의 두 부분 등이 정치적 성격의 강압적인 조치에 호소하지 않는 것.

3. 이 두 가지 이유로, 세찬 시세의 흐름에 의해, 수백만 명의 열정에 의해, 이 거대한 운동의 최초의 확실한 결과에 의해서, 억지로 끌려가지 않고, 방대한 “중립적인” 대중은 기성 사실을 그들의 자유의지로 인정하고 참된 혁명 편으로 따라오게 된다는 것.

이와 같이, 참된 해방을 목표로 한 혁명을 달성하기 위해서는 사물의 힘에 의해 쇠퇴하고, 직업을 빼앗기고, 균일화되고, 혁명의 소용돌이 속에 내던져진 모든 사회적 상황의 수백만 명의 사람들의 활동적 참여와 의지적이며 철저하고 긴밀한 협동이 요구된다.

그런데 이들 수백만 명의 사람들이 도피할 수 없는 한 점으로 당겨지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사물의 힘이 그들의 일상생활의 세속적 관습에서 그들을 벗어나게 할 필요가 있다. 이것이 실현되면 현재의 생활, 즉 기성 사회 자체가 불가능하게 된다. 위로부터 아래까지 모든 것이현존사회의 경제사회제도, 정치, 의식, 습관, 편견 등전복된다.

진정한 혁명, 참된 해방의 시기가 성숙했을 때, 역사는 이와 같은 순서를 취하게 된다.

문제의 핵심을 찌르는 것은 이 점이다.

러시아에서는 이러한 파괴가 그다지 충분히 단행되지 못했다고 나는 생각한다. 이리하여 정치적 사상은 파괴되지 않고 볼셰비키 권력을 허락하고, 그들의 독재를 견고하게 만들어주었다. 그 밖의 그릇된 원리나 편견도 마찬가지로 잔존했다.

1917년의 혁명에 선행한 파괴는 전쟁을 정지시키고 권력과 자본주의의 형태를 온건하게 하는 정도에는 족했다. 하지만 그 본질에 이르기까지 파괴하여 수백만 명의 사람들에게 그릇된 근대사회 사상(국가, 권력, 정부 등)을 버리게 하고 전혀 새로운 기초에 서서 행동하도록 하기에는 부족했다. 그리고 모든 옛 형태 그대로 자본주의와 권력을 영구히 존속시켰다.

이 어중간한 파괴가 볼셰비키로 하여금 러시아혁명을 왜곡시켜 참된 혁명에의 길을 가로막을 수 있도록 한 근본적인 요인이라고 나는 생각한다.[5]

여기서 “철학적” 문제가 제기된다.

다음과 같은 추론이 상당히 그럴싸해 보인다.

“만일 정말로 예비적 파괴의 부족이 대중의 혁명 수행을 방해했다고 한다면, 이 요인이 실제로 모든 것을 짓밟고 소탕하여 모든 것을 설명할 것이다. 이런 경우, 권력을 잡아 될 수 있는 한 혁명을 멀리 연기해 두고 반동의 길을 저지할 권리가 볼셰비키에게 있지 않을까. 볼셰비키의 행동은 그 방법과 그 결과를 두고 말해 역사적으로 정당화되는 것이 아닐까.”

이에 대해 나는 대답하겠다.

우선 문제를 명확히 할 필요가 있다. 근본적으로 노동계급은 혁명을 속행하여, 혁명에 의해 힘을 이루고, 혁명가의 원조에 의한 그들의 계급조직을 구사하여 새로운 사회를 자기들의 힘으로 건설할 만한 능력이 없는 것일까.

문제는 바로 거기에 있다.

대답이 아니오라면, 그 혁명이 참된 혁명이라고 주장할 수는 없다 하더라도, 그리고 대중이 그들만으로 행동할 힘을 갖고 있는 경우라면 볼셰비키의 절차는 정당하다고 주장할 수가 없다 하겠으나, 어째서 일부 인사가 볼셰비키를 정당화하려고 애쓰는지[6]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만약 답이 예라면, 설령 상황이나 대중의 일시적 오류가 어떠한 것이라 할지라도, “정상참작의 여지없이”, 최종적으로 볼셰비키에 대해 유죄가 선고될 것이다.

파괴가 충분히 행해지지 않았다는 데 대해서는, 특히 그 때문에, 정치사상의 악덕이 잔존했다는 것을 말하고 싶다. 이 정치사상이 진작부터 거세되어 있지 않았기 때문에 1917년 2월 승리한 대중은, 그 꼬리표가 무엇이든 간에 모든 사칭하는 자들을 제거해 버리지 않고, 혁명을 스스로의 수중에 넣지 않고, 새로운 한 당의 주인의 손에 혁명의 운명을 맡겨버렸다. 이렇게 하여 이전까지의 혁명의 근본적 과오를 되풀이했다. 하지만 이 잘못된 행동은 대중의 능력 유무와는 관계가 없는 일이다.

1. 이 잘못에 대해 이득을 본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는 데 대해 잠시 생각해보자. 대중에게는 혁명을 최종 목적―유효한 완전한 해방에 도달하게 할 능력이 있었을까. 이 문제에 대해서는 무조건 라고 답하겠다. 뿐만 아니라 나는 혁명을 거기까지 끌고 갈 수 있는 것은 노동대중 뿐이라고까지 말하고 싶다. 이 사실에 대한 반박의 여지가 없는 증명을 이 책 속에서 발견해 주기 바란다. 만약 이 단언이 옳다고 한다면, 정치적 요인은 반동을 물리치거나 혁명을 계속시키거나 혁명을 최종적으로 성공시키거나 하는데 대해 전혀 불필요하다는 말이 된다.

2. 하나의 중요한 사실―상세히는 나중에 언급하겠지만―에 의해 이 명제는 한결 확실한 것이 될 것이다. 혁명의 과정에 있어서, 많은 러시아인이 그들의 오류를 인식했다. (정치주의가 사라지기 시작했다.) 그들은 그것을 바로잡고자 했고, 자신들 스스로 행동하려 했고, 권력을 잡은 당黨의 자신만만하고 무력한 지도를 배제하려고 했다. 그런데 볼셰비키는 참다운 혁명가라면 당연히 그래야 했을 것임에도 불구하고 이를 반기지 않고, 그들을 격려하지 않았으며, 그 목적에 따라 돕지 않고, 유례없는 기만과 폭력과 온갖 군사적 테러 행위로 대중의 그러한 경향에 반대했다. 혁명적 대중은 자신들의 잘못을 발견하자 자신들 스스로 행동하기를 원했고, 또한 그렇게 할 능력이 있다고 느꼈다. 볼셰비키는 그와 같은 그들의 정신을 무력으로 박살냈다.

3. 때문에, 볼셰비키가 “혁명을 최대한으로 추진하지” 않았음은 당연하다. 모든 힘과 기회를 이용해 권력을 탈취하자마자, 그들은 오히려 혁명을 억압했다. 이어서 그들은 자본가의 재산을 빼앗고, 혁명을 지키기 위한 인민의 무서운 싸움 뒤에, 혁명을 그들 자신에게 유리한 것으로 만들고, 자본주의의 대중 착취를 다른 형태로 변환하는 데 성공했다. (사람들이 자유로운 조건 아래 노동하고 있지 않은 곳이면 어디서든, 이 체제는 비록 형태는 다를지라도 반드시 자본주의적이다.)

4. 이렇게 하여 그것은 1917년의 러시아혁명에서의 자유 사상에 대한 볼셰비즘의 승리를 어떤 식으로 정당화하느냐 하는 문제가 아니라 그 역사적 설명에 불과하다는 것은 명료하다.

5. 따라서 볼셰비즘의 진정한 “역사적 의미”는 순수하게 부정적인 것이다. 그것은 경험에서 도출된 또 하나의 교훈이고, 해서는 안 될 혁명의 교훈을 노동대중에게 제시하고 있다. 1917년의 러시아 정세 아래에서는 그와 같은 교훈은 거의 필연적이기는 하지만, 결코 피할 수 없는 것은 아니었다. 볼셰비키가 다른 방식으로 행동하고 있었다고 한들(이론적으로 그것은 불가능은 아니었다), 그것을 피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므로 그들에게는 자만할 권리도, 구세주인 척 뽐낼 권리도 없다.

6. 이 교훈은 또 그 밖의 주요사항을 강조하고 있다.

⒜ 인류의 역사적 발전은 진보를 계속함으로써 모든 속박에서, 모든 압박에서, 또한 인간에 의한 인간의 온갖 착취에서 풀려나는 자유가 요구되는 단계에 도달했다. 경제적으로도, 기술적으로도, 사회적으로도, 그리고 정신적으로마저도 자유로운 노동, 그러한 노동은 지금부터 가능할 뿐만 아니라 역사적 필연이 되고 있다. 이 거대한 사회적 대변혁의 “거점”(이에 대해서는 수십 년을 통해 우리는 비극적 격동을 경험해 오고 있다)이 바로 혁명이다. 진정으로 급진적이고 “정당하기” 위해서는 당연히 그 혁명은 인간노동이 실제로 전면적으로 해방될 그러한 체제로 나아가야만 한다.

⒝ 노동대중이 노예노동에서 자유 노동으로 옮겨가기 위해서는 혁명 당초부터 완전히 자유로, 자주적으로 혁명을 스스로의 손으로 추진하지 않으면 안 된다. 이러한 조건 아래 비로소 그들은 역사에 의해 현재 요구되고 있는 임무―해방된 노동을 바탕으로 한 사회의 건설―에 구체적으로 곧장 착수할 수 있는 것이다.

대중 스스로에 의해 행해지지 않는 모든 현대의 혁명은 역사적으로 제시되고 있는 결과를 가져오지 못할 것이다. 그러므로 그러한 혁명은 급진적이지도 않고 “정당하지도 않고” 타락하고 참된 길을 벗어나 마침내는 길을 잃고 말 것이다. 노동대중은 새로운 주인 또는 지도자에 이끌려 다시 한번 모든 주도권과 본질적으로 자유로운 책임 있는 활동에서 격리되어, 지난날처럼 고답적인 태도로 나오는 이런저런 “장長”이나 “지도자”에게 순종하도록 강제되어, 예전 그대로의 “복종”의 습관으로 되돌아가 얌전히 길들여진 “부정형不定形의 양의 무리”가 될 것이다. 그래서 참된 혁명은 좀처럼 달성되지 않을 것이다.

7. 물론 다음과 같은 반론이 제기될지도 모르겠다.

“어떤 점에 대해서는 당신이 옳다고 가정하자. 당신의 의견으로는 예비적 파괴가 불충분했다고 하지만, 아나키즘적 의미에서의 전면적 혁명객관적으로 불가능했다는 것은 여전히 진실이다. 때문에, 현실상 발생한 일은 적어도 역사적으로 필연적이었던 것이다. 아나키즘은 유토피아적인 꿈에 불과했다. 그 공상적 이상주의utopianism가 모든 혁명을 위기에 빠뜨렸다고 할 수 있겠다. 볼셰비키는 이 사실을 알고서 그 때문에 행동했던 것이다. 이것이 볼셰비키의 정당성이다.”

독자는 내가 언제나 반드시 “거의 필연적”이라는 말을 쓰고 있다는 것을 떠올렸을 것이다. 나는 신중하게 “거의”라는 말을 사용하고 있다. 내 표현방식에 있어 이 말은 특별한 중요성을 지니고 있다.

원칙적으로 일반적인 객관적 요인이 다른 모든 것보다 중요하다는 것은 당연하다. 표면적으로는 우리는 예비적 파괴의 부족―그리고 정치적 원리의 잔존―이 객관적으로 볼셰비즘의 권력 획득을 유도한 것이라고 본다. 그런데 인간의 세계에 있어서 “요인”의 문제는 매우 미묘한 문제다. 객관적 요인이 절대적은 아니지만, 어느 정도까지 그것을 지배하고, 주관적 요인이 중요한 역할을 연출한다.

이 역할이란 정확히 무엇을 뜻하며 또 어느 정도까지 그것은 중요성을 지니는 것일까? 우리는 알 수 없다. 인간의 과학의 초보 단계에서는 우리가 두 가지 역할을 엄밀히 구분할 수 없다. 게다가 이 두 가지 요인은 무한히 변동하는 것이기에 그 구분은 한층 더 어려운 일이다. (이 문제는 주체성의 문제이다.) 어떤 방식으로, 또한 어느 점까지, “결정성”은 인간의 “자유의지”에 영향을 미치는가? 반대로, 어떤 의미에서, 또한 어느 정도로 “자유의지”는 존재하는가? 그리고 어떻게 해서 그것은 “결정성”의 지배를 벗어나는 것인가? 숱한 사상가가 이 문제를 추구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여태껏 알 수가 없다.

우리가 완전히 아는 것만을 말하자면, 주관적 요인은 인간의 여러 일들에 중요한 지위를 차지한다―특히 주관적 요인들이 어떤 형태로건 밀접한 경우, 그것들은 객관적 요인의 분명히 “필연적”인 결과를 극복할 수도 있다는 것이다.

널리 알려진 두드러진 예를 하나 들어보겠다.

1914-1918년까지의 전쟁에서 독일은 객관적으로 프랑스를 격파하도록 되어 있었다. 사실 개전 후 1개월 남짓 무렵, 독일군은 프랑스의 성벽 아래 밀어닥치고 있었다. 싸움은 번번이 프랑스의 패배였다. 프랑스가 정복될 뻔한 것은 거의 필연이었다(가령 그렇게 되었더라면 사후에 과학적 방식으로 이는 역사적 · 객관적 필연이었다고 말하기는 용이했을 것이다). 그런데 이때 일련의 순전히 주관적인 도식이 튀어나왔다. 그것들은 서로 연결해 객관적 요인의 결과를 분쇄하였다.

독일제국군의 지휘를 맡았던 폰 클루크(Alexander von Kluck) 장군은 그의 군대의 압도적 우세를 믿고 승리에 도취해 있었으므로 우익 방면을 충분히 방어하는 데에 게을렀다―이것이 첫 번째 순수한 주관적 요인이었다(다른 장군이었더라면, 혹은 폰 클루크라 하더라도 다른 때였더라면 좌익 방면을 방어하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파리의 지휘관 갈리에니(Joseph Gallieni) 장군은 폰 클루크의 이 과실을 보고, 조프르(Joseph Jacques Césaire Joffre) 대원수에게, 사용할 수 있는 모든 세력, 즉 그 유명한 파리 수비대로 방어되지 않고 있는 측면에 총공격을 가할 것을 제안했다. 이것이 두 번째 주관적 상황이었다―왜냐하면 그러한 결정을 내려 그처럼 책임이 무거운 위험을 무릅쓰기에는 갈리에니라 하더라도 다른 때였더라면―그와 같이 판단하고 결정하지 않았을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조프르는 갈리에니의 계획을 승인하고 공격 명령을 내렸다. 이것이 세 번째 주관적 사실이었다―왜냐하면 그 제안을 승인하는 데는 조프르의 훌륭한 의지와 그 외 도덕적 자질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설혹 다른 대원수가 교만하고 자신의 권한을 지키는 데에만 급급했더라면, 갈리에니에게 이렇게 대답했을지도 모른다. “자네는 파리의 지휘관이다. 그러니 자네 자신의 일에나 몰두하면 된다. 자네가 맡은 지역 이외에 대해서 간섭하지 말게.”

마지막으로, 갈리에니와 조프르 사이의 의논은 언제나 프랑스 측에 일어난 일에 대해 정보를 샅샅이 정보를 파악하고 있던 독일의 최고사령부로부터 가로채이지 않았다는 이상한 사실도 프랑스를 승리로 이끌고 전쟁의 결정적인 결과가 된 주관적 요인들의 사슬에 추가되어야 한다.

프랑스인은 이 승리를 객관적으로 있을 수 없는 것으로 보고 있었기 때문에 그것을 “마른의 기적the miracle of the Marne”이라고 불렀다. 그러나 그것은 기적이 아니었다. 그것은 단지 보통과는 조금 다른 사례이자 객관적 요소를 극복한 일련의 주관적 요인에서 발생한, 예기치 않은, 있을 법하지도 않았던 사건에 불과했던 것이다.

그것은 내가 1917년에 러시아의 동지에게 말한 것과 같은 의미를 함축한다. “아나키즘이 이 혁명에서 볼셰비즘을 분쇄하는 데는 ‘기적’이 필요하다. 우리는 이 기적을 믿고 그것을 실현하기 위해 일해야만 하는 것이다.”

이 말에 의해 나는 예기치 않은, 있을 법하지도 않은 주관적 요인의 역할만으로 볼셰비즘의 압도적인 객관적 중압을 밀어젖힐 수 있으리라고 말한 것이다. 주관적 요인은 나타나지 않았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그것은 만일 일으켰으면 일어났을지도 모른다는 것이다. 실제로 그것은 두 번 발생했다는 것을 상기하자. 첫 번째는 1921년 3월의 크론슈타트 반란이고, 두 번째는 1919~1921년에 걸친 우크라이나에서의 새로운 권력과 아나키스트 대중 사이에 행해진 냉엄한 전투 과정이었다.

이처럼 인간 세계에서는 “절대의 객관적 불가피성”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어떤 순간에도 순전히 인간적인 주관적 요소들이 개입하여 그러한 추상화들을 재정립할 수 있다.

아나키스트의 신념은 볼셰비키의 사상에 못지않게 견고하게 “과학적”으로 구축되어 존재하고 있다(볼셰비키 사상도 혁명의 전후에는 반대파로부터 유토피아로 취급되고 있었던 것이다). 장차 도래할 혁명의 과정에서 그 운명은 모든 종류의 객관적 및 주관적 요인의 극도로 복잡한 상호작용에 달려 있다. 그리고 특히 주관적 요인은 다양하고 변화하기 쉽고 예측하기 어렵고 걷잡을 수 없는 것이다―그것은 그 결과가 “객관적으로 불가피한” 것은 결코 아닌 하나의 행위이다.

이 점에 대한 끝맺음으로 나는 파괴의 불충분이 1917년의 러시아혁명에서 볼셰비즘이 아나키즘에 승리한 근본 원인이었다는 것을 거듭 말해 둔다. 그것이 사실이고, 각종 다른 요인의 작용도 그 원인과 결과를 제거하지 못했기에, 여기에 논의되고 있다는 것은 말할 것도 없다. 그런데 그것은 다른 모양으로 나타날 수도 있었던 것이다. 주관적 요인이 볼셰비즘의 승리에 어떠한 역할을 했을지 누가 알 수 있겠는가.

확실히, 권위주의적인 “공산주의”라는 사악한 정치적 키메라를 사전에 신용하지 않았더라면 아나키즘 원칙의 실현을 보장하고, 촉진시키고, 가속화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혁명이 시작될 때 이 불신이 충분하지 않았던 것이 아나키즘의 피할 수 없는 쇠락을 의미하는 것은 전혀 아니었다.

각종 요인의 복잡한 작용이 의외의 결과를 초래하는 것이다. 그 결말은 원인도 결과도 은폐해 버리고 말지도 모른다. 정치적, 권위주의적 사상, 국가주의적 사상은 혁명이 진행되는 중에 파괴되었어야 했다. 그랬다면 아나키즘의 실천을 위한 자유로운 여지가 남아 있었을 것이다.

모든 혁명과 마찬가지로 1917년의 혁명은 그 앞에 두 가지 길이 있었다.

1. 완전한 해방으로 스스로를 직접 이끌어가는 대중의 참된 혁명의 길. 이 길이 취해졌더라면, 혁명의 크나큰 열광과 결정적인 결과가 분명히 “세계를 뒤흔들고” 있었을 것이다. 아마도 모든 반동이 그 순간부터 불가능했을 것이다. 그리고 사회운동 간의 온갖 분쟁은 기성 사실의 힘에 의해 예방되고 제지되었을 것이다. 마지막으로, 유럽에서 러시아혁명에 의해 촉진된 발효는 아마도 동일한 결정적인 결과를 낳았을 것이다.

2. 아직 완수되지 않은 혁명의 길. 이 길을 취했을 경우, 역사는 단지 같은 길의 연장으로서 전 세계에 번져나가는 반동, 파탄(전쟁), 현존사회의 전적인 파괴로 후퇴했다가 마침내는 대중 자신에 의한 혁명이 다시 시작되어 실제로 그들의 해방을 수행하게 될 것이다.

원칙적으로 이 두 가지 길이 가능했다. 그런데 현존한 모든 요인은 두 번째 길로의 가능성을 크게 만들었다. 사실 1917년의 혁명이 걸어간 것은 두 번째 길이었다.

그러나 첫 번째 길은 다음에 올 혁명이 취해야할 길이다.

그리고 지금, 우리의 철학적 삽입구는 이것으로 일단 매듭짓고 이 같은 문제의 모든 것을 포함한 여러 사건으로 돌아가겠다.


2. 10월혁명에 관하여

제1부. 10월 이전의 볼셰비키와 아나키스트


여기서 우리는 10월 혁명 전의 볼셰비키와 아나키스트들 각각의 입장을 몇 가지 사건에 소급해서 재검토하겠다.

혁명 직전, 볼셰비키의 위치는 특징적이었다.

그러나 레닌의 이데올로기와 그의 당의 입장이 1900년 이후 상당히 달라졌다는 것을 상기해 두어야 하겠다. 러시아 노동대중이 일단 봉기하기 시작하자 거침없이 발전해서 부르주아적 해결책으로는 멈추어지지 않는다는 것―부르주아지가 하나의 계급으로서는 거의 존재하지 않았던 러시아에서는 특히―을 안 레닌과 그의 당은 대중을 지도하기 위해, 대중의 선수를 쳐 지배할 계책으로, 극단적으로 진보적인 혁명적 프로그램을 공식화했다. 그들은 이제 엄밀히 사회주의적 혁명에 직면했다. 그들은 아나키스트의 슬로건인 자유의지주의적 혁명 상―물론 근본적 한계점에 대해서는 논외로 하고―권력 탈취, 그리고 국가라는 문제에 마주쳤다.

레닌의 저서들, 특히 1914년 이후의 저서들을 읽었을 때, 나는 국가와 권력에 대한 것을 제외하고는 그의 사상과 아나키스트들의 사상이 완전히 평행하는 것을 목격했다. 이해, 인정, 예측의 이 정체성은 이미 혁명의 진정한 원인에 매우 위험한 것처럼 보였다. 나는 스스로를 속이지 않았다. 펜 끝에서나 입에서나 행동에서나 볼셰비키의 이 같은 모든 위대한 사상에는 진정한 생명도 미래도 없었기 때문이다. 이들의 저작이나 언행은 매혹적이고 좌파적이기는 했으나, 볼셰비키의 그 후의 행동이 그들의 이론과 일치하지 않으리라는 이유에서 그것은 중대성을 지니지 못한다.

그러나 나는 한편으로는 아나키스트 운동의 약세로 인해 대중들이 맹목적으로 볼셰비키를 따를 것이고, 반면에 볼셰비키는 필연적으로 대중을 속여 악행으로 오도할 것이라고 확신했다. 의심의 여지 없이 그들은 그들의 공표된 원칙을 왜곡하고 왜곡할 것이었으니 말이다.

이는 실제로 일어난 일이었다.

볼셰비키당은 대중들의 정신을 촉진하고 그들의 동정과 자신감을 얻기 위해, 그 당시까지만 해도 아나키스트들이 특히나 고집스럽게 주장했던 구호를 자신들의 모든 권력과 함께 출범시켰다.

사회혁명 만세!

전쟁을 포기하라! 즉각적인 평화를!

그리고 특히

농민에게 토지를!

노동자에게 공장을!

노동대중들은 그들의 진정한 열망을 완벽하게 표현한 이러한 구호들을 재빨리 손에 쥐었다.

노동대중은 그들이 진정 갈망하고 있는 것을 완전히 표현한 이들의 구호에 곧바로 매혹되었다. 아나키스트의 입과 펜으로 표현된 이들의 구호는 성실하고 구체적이었다. 그들은 원칙에 충실하고 그러한 원칙에 조금도 어긋나지 않는 행동을 요구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볼셰비키에게 있어서는 이 동일한 구호가 아나키스트의 그것과는 애당초 다른 이론적 해결을 의미했고, 말로 표현하고 있는 사상과는 전혀 부합하지 않았다. 볼셰비키에게 있어 그것은 고작 구호에 불과할 뿐이었기 때문이다.

사회혁명은 아나키스트에게 진정한 사회적 행위, 즉 모든 정치적, 국가주의적 조직과 모든 구舊 사회제도―정부나 관료―의 바깥에서 행해지는 변혁을 의미했다.

그러나 볼셰비키는 전능한 국가, 전능한 정부, 독재 권력을 가진 국가의 도움으로 혁명을 수행하겠다고 주장했다.

아나키스트는 만약 혁명이 국가, 정부, 정치를 폐지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사회혁명이 아니라 단지 정치혁명―물론 사회적 요소를 약간 포함한 정치혁명―이라고 보았다.

그러나 “그들의” 정부, “그들의” 국가의 권력과 조직화의 달성에 “공산주의자”들은 사회혁명이라는 이름의 철자를 도둑질해 붙였다.

아나키스트에게 사회혁명은 국가와 자본주의를 동시에 파괴하는 것을 의미했고, 또 다른 형태의 사회조직에 기초한 새로운 사회의 탄생을 의미했다.

볼셰비키에게 있어 사회혁명은 이와 반대로 부르주아 국가가 폐지된 후 국가의 부활을 의미했다. 즉, “사회주의를 건설”하기 위한 강력한 새로운 국가의 탄생을 의미했다.

아나키스트들은 국가를 통해 사회주의를 확립하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여겼다.

볼셰비키는 국가라는 수단을 통해서만 비로소 사회주의를 달성할 수 있다고 단언한다.

이러한 해석의 차이는 이렇게 쉽게 드러나듯이 근본적인 것이었다.

[나는 10월 혁명 당시 페트로그라드의 벽에 있는 커다란 포스터를 기억하는데, 그것은 트로츠키(Lev Davidovich Trotsky)의 권력의 조직에 관한 강연을 발표에 관한 것이었다. 나는 “전형적이고 치명적인 오류”라고 동지들에게 말했다. “사회혁명의 문제에서는 권력의 조직이 아니라 혁명의 조직에 관심을 가져야 한다.”]

즉각적인 평화에 대한 요구에의 각각의 해석도 눈에 띄게 달랐다.

아나키스트들에게 그 구호는 지배자, 정치인, 그리고 장군들에 대한 무장한 대중들 스스로의 직접행동을 요구하는 것이었다. 아나키스트에 따르면, 그 대중들은 전선을 떠나 고향으로 돌아가야만 하며, 자본주의자들의 이익을 위해 싸우는 어리석음을 거부하고 파렴치한 학살자에 대한 혐오감을 세상에 선포해야 하는 것이었다. 아나키스트는 이러한 솔직하고 종합적이며 결정적인 행위는 다른 나라의 병사들에게도 막대한 영향을 미칠 것이며, 결국은 분석에서 전쟁의 종식까지, 아마도 세계혁명으로의 변혁을 유도할 것이라고 믿었다. 그들은 러시아의 광대함을 이용하여 적을 끌어들여 그들을 기지로부터 차단하고, 그 군세를 붕괴시키고, 적군 병사들을 싸움 바깥으로 이끌어 들일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볼셰비키는 그러한 직접적인 행동을 두려워했다. 정치인들과 정치인들은 정치와 외교 채널을 통한 평화, 즉 독일 장군들과 “전권대사”들과의 논의하여 결실을 맺기를 원했다.

농민에게 토지를! 노동자에게 공장을! 이 말을 통해 아나키스트는 누군가의 소유권 없이 땅을 (누구도 착취하지 않고) 경작하고자 하는 모든 사람과 협회나 조합, 그리고 마찬가지로 공장의 처분에 맡겨야 한다고 이해했다. 작업, 광산, 기계 등도 역시 모든 노동자의 생산적 협회와 조합에 위탁되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이를 행동으로 옮기는 방법과 세부 사항은 이러한 협회나 조합의 자유로운 동의에 의해 규정될 것이었다.

그러나 볼셰비키에게 이 같은 슬로건은 이 모든 요소의 국유화를 의미했다. 그들에게 토지, 작업장, 공장, 광산, 기계 및 운송 수단은 국가의 소유물이고 국가가 노동자에게 사용을 허가하는 것이었다.

다시 한번 말하지만, 이러한 해석의 차이는 근본적인 것이었다.

그러나 대중은 모든 구호를 직관적으로 자유의지주의적인 의미로 이해했다. 하지만 앞서 말했듯이 아나키즘의 목소리는 상대적으로 미약해서 많은 대중이 그것을 듣지 못했다. 그들에게는 볼셰비키만이 과감히 이 영광스럽고 정의로운 원칙을 선포하고 옹호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던 것이다. 볼셰비키당은 매일같이 거리에서 도시노동자와 농민의 이익을 위해 싸우고 있는 유일한 당이라느니, 일단 권력을 잡는 날이면 사회혁명을 달성할 방법을 알고 있는 유일한 당이라느니 선전했기 때문에 더욱 그렇게 보였던 것이다.

노동자, 농민 여러분! 볼셰비키당은 당신을 방어하는 유일한 정당입니다. 다른 누구도 당신을 승리로 이끄는 방법을 모릅니다. 노동자, 농민 여러분! 볼셰비키당은 당신 스스로의 정당입니다. 이것은 진정 당신의 유일한 정당입니다. 권력을 잡을 수 있도록 도와준다면 승리할 것입니다.”

볼셰비키 프로파간다의 이 돌림노래는 마침내 강박관념이 되었다. 작은 아나키스트 그룹보다는 훨씬 강력했던 《사회주의혁명당》 좌파조차 볼셰비키와 경쟁이 되지 않았다. 그러나 당시 《사회주의혁명당》 좌파는 충분히 강했기 때문에, 볼셰비키는 그 점을 고려해 얼마간 정부에 그들의 자리를 제공해야 했다.

마지막으로, 노동자 소비에트의 문제에 입각해 10월혁명 직전 볼셰비키의 입장과 아나키스트의 입장을 비교하는 것은 흥미롭다.

볼셰비키는 한편으로는 스스로 “모든 권력”을 요구하고 있던 이들 소비에트의 봉기를 통해 혁명을 달성할 것으로 기대했고, 한편으로는 소비에트의 행동을 지지하는 군대의 봉기(당의 직접적이고 효과적인 지도하에서의 모든 과정)을 통해 혁명을 달성하기를 기대했다. 노동대중은 이 행동을 적극 지지할 의무가 있었다. 볼셰비키는 그들의 견해와 “전술”에 완벽하게 일치단결해 혁명의 일반적인 구호인 모든 권력을 소비에트로!”를 시작했다.

아나키스트들은 이 구호를 의심했는데, 그럴만한 이유가 있었다. 그들은 그 공식이 볼셰비키당의 실제 계획과 전혀 일치하지 않는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들은 마지막 분석에서 볼셰비키가 고도로 중앙집중화된 힘을 추구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즉, 중앙위원회와 궁극적으로 지도자 레닌을 위해서 현재 일반적으로 알려진 것과 같이 트로츠키의 도움을 받아, 권력 장악을 위한 모든 준비를 지시한 것이다).

그러므로 모든 권력을 소비에트로!”라는 말은 아나키스트에 따르면 사실상 빈 공식에 불과하고, 나중에 어떤 종류의 내용으로도 채워질 수 있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것은 거짓되고, 위선적이고, 기만적인 공식이었다. 왜냐하면 아나키스트들은 “권력”이 정말로 소비에트에 속해야 한다면 그것은 볼셰비키당에 속할 수 없으며, 볼셰비키가 상상한 것처럼 권력이 볼셰비키당에 속해야 한다면 소비에트에는 속할 수 없다고 주장했던 것이다.

그렇기에 아나키스트들은 소비에트가 새로운 사회를 건설하는 데 특정 기능을 수행해야 한다고 인정하면서도 그 공식을 유보 없이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들에게 권력이라는 단어는 모호하고, 의심스럽고, 비논리적이며, 비논리적인 것을 제시하는 것이었다. 그들은 본질적으로 정치 권력이라는 것은 중앙에 있는 매우 제한된 그룹의 사람들에 의해서가 아니면 실제로 행사될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러므로 이 권력―진짜 권력―은 소비에트에 속할 수 없었다. 그것은 실제로는 당의 손에 달려 있게 될 것이다. 그렇다면 “모든 권력을 소비에트로!”라는 공식은 실제로는 무엇을 의미했을까?

이 주제와 관련된 논평과 의구심은 아나키즘적 조합주의자들에 의해 주간지 「골로스 트루다Golos Truda」에 게재된 〈이것이 다인가?Is This the End?[7] 라는 제목의 사설에서 표출되었는데, 날카로운 질문들이 쏟아졌다.

“모든 권력을 소비에트로 향하게 하는 공식, 오히려 정치적 권력을 장악하는 공식의 궁극적인 실현이 끝인가? 이것이 다인가? 이 행위가 혁명의 파괴적인 작업을 성취할 것인가? 반란을 일으킨 사람들의 창조적 정신을 위해 위대한 사회건설의 기반을 완전히 준비할 수 있을 것인가? 소비에트의 승리는―만약 달성된다면―그리고 이를 따르는 ‘권력의 조직’은 노동의 승리, 노동자의 조직된 힘의 승리를 의미하며, 진정한 사회주의 건설의 시작을 의미하는가?

이 승리와 이 새로운 ‘권력’이 혁명 스스로 발견한 교착 상태에서 벗어나 혁명을 이끄는 데 성공할 수 있는가? 그들은 혁명, 대중, 모두를 위한 새롭고 창조적인 지평을 열 수 있는가? 그들은 혁명이 건설적인 작업으로 향하는 진정한 진로를 지적하며, 그 시대의 모든 불타는 질문에 대한 효과적인 해결책을 지적할 수 있는가?”

아나키즘적 조합주의 기관지는 정복자들이 권력이라는 단어와 권력의 조직에 대해 그들이 어떻게 생각하고 해석했는지가 문제라고 주장했다. 그것은 또한 그 승리 이후 권력을 쥐고 있는 분자들에 의해 승리가 어떻게 이용되었는가 하는 데에도 달려 있을 것이다.

「골로스 트루다」의 기자들은 볼셰비키가 정당하고 공정하게 사태를 다루는 방식에 불가결한 몇 가지 상황을 노골적으로 적고 있다. 예컨대 어떤 요인이 존재하고 있다면 이 새로운 위기가 최후의 위기가 되고, 이 새로운 위기가 새로운 시대의 시작을 의미할 수 있었을 것이라고 그들은 단언했다. 이들의 요인은 다섯 가지 예시로 표현되었다.

“만일 ‘권력’이라는 말에 의해 국내의 모든 창조적인 사업이나 조직화의 활동에 무장할 대중에 의해 지지받은 노동자와 농민의 조직의 손에 쥐어진다는 것이라고 주장하기를 사람들이 바란다면.

만일 ‘권력’이라는 말에 의해 활동을 수행하고 이 목적을 위해 연합하는―이리하여 혁명을 평화로운 경제적 평등의, 정말 자유롭고 새로운 세계로 이끌어가는 새로운 경제적 · 사회적 건설이 시작되는 것이지만―이러한 조직화의 완전한 권리를 의미한다면.

만일 ‘모든 권력을 소비에트로’라는 말이 정치 권력의 로비에 앉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면.

만일 권력을 갈망하고 있는 정당이… 승리 후에 해산하고, 마침내 노동자의 자유로운 자치정부에 유효하게 넘어간다면.

만일 ‘모든 권력을 소비에트로’라는 것이 현실적으로 새로운 정당의 국가적 권력이 되지 않는다면.”

그런데 아나키즘적 조합주의자는 이렇게 생각한다. 만약 “권력”이 실제로 볼셰비키당의 권위적, 정치적 로비, 그 주요한 관료의 정치 중앙(당과 국가의 중앙권력)에 의해 지도되는 로비를 의미한다면, 또 만약 “소비에트에 의한 권력 장악”이 현실적으로 새로운 정당에 의한 권력 탈취를 의미하고, 정당의 힘을 구사해 위로부터, 그 “중앙”에 의해, 나라의 경제사회 생활을 재건하고, 이렇게 해서 현시점의 복잡한 여러 문제를 해결하려고 시도한다면―그렇게 하면 혁명의 이 새로운 단계는 최후의 단계가 되지는 않을 것이다.

「골로스 트루다」는 “이 새로운 권력”이 사회주의 건설을 시작하려 하지도, 이해하려 하지도 않을 것이며 대중의 긴급한 기본적 수요나 이익을 만족시키려 하지도 않을 것이라는 것을 조금도 의심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그리고 또 대중이 신속히 그들의 새로운 우상에의 미몽에서 깨어나 이 새로운 신들을 부인한 후에 별개의 해결로 방향을 바꿀 것임에 틀림없다는 데 의심을 풀지 않았다. 그로부터 얼마 동안 사이를 두고, 시기는 분명치 않으나 반드시 싸움이 다시 불타오를 것이다. 이것은 러시아혁명의 제3의 최후의 단계―실질적인 대혁명의 단계―의 시작이 될 것이다.

기자는 계속해 말한다.

“이것은 한편으로 대중의 창조적 정신의 생동하는 노력과 다른 한편으로는 자기를 격렬히 방위하려고 하는 중앙집권의 정신을 가진 사회민주주의 권력 사이의 투쟁이 될 것이다. 다시 말하면, 직접 자기 스스로 행동해 정말 새로운 인간 생활을 완전히 독립한 형태로 건설하기 위해 토지 및 생산 · 운송 · 분배의 모든 수단을 손에 넣으려 하는 한편의 노동자 및 농민의 조직과 다른 편의 마르크스주의 정치 권력 사이의 투쟁, 즉 권력 형태와 아나키스트 형태 사이의 투쟁, 장기간에 걸쳐 서로 앞서고자 싸워온 두 가지 이론, 마르크스주의 이론과 아나키스트 이론의 논쟁이다.”

나아가 아나키즘적 조합주의자 기자는 이렇게 끝맺는다. 아나키스트 이론―대중의 자유롭고 자연스러운 자주적 조직의 이론―의 완전하고 확실한 승리만이 대혁명의 진정한 승리를 이루는 것이라고.

그들은 정치적 과정을 통한 사회혁명의 달성 가능성을 믿지 않는다고 선언했다. 그들은 새로운 모든 건설사업과 광대하고 변화무쌍하며 복잡한 시국의 문제가 정상頂上, 즉 중앙의 권력 장악에 의한 정치 활동에 의해서는 성취될 수 없다고 믿었다. “살아있는 사람들을 보게 될 것이다!”라고 그들은 예언했다.


제2부. 10월혁명에서 아나키스트의 입장


같은 날, 《아나키즘적 조합주의자 프로파간다 연맹》은 「골로스 트루다」에 정치 권력 문제에 대한 입장을 밝힌 성명을 발표했다. 그것은 상황을 두 개의 간결한 단락으로 요약했다.

“1. 우리는 ‘모든 권력을 소비에트로’라는 구호를 내놓았는데, 이것은 사회민주주의 볼셰비키당이 운동을 주도하기 위해 정세 추이의 필요에 의해 제시한 그것과는 완전히 다른 의미이다. 우리는 정치활동으로써, 다시 말해 권력을 장악함으로써 혁명이 확대된다는 전망을 믿지 않으며, 우리는 정치적 목표를 위한 당의 통제 하에 있는 어떠한 활동도 지지하지 않는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우리는 진정한 사회혁명의 시작에 대해서나 또 그것에 이어지는 발전에 대해서나 다 같이 전혀 다른 길을 지향한다고 하는 세 가지 이유에서 현재의 운동을 지지하지 않는다.”

“2. 그럼에도 만일 대중에 의해 기획된 행동이 시작되고 있다면, 그때 우리는 아나키스트로서 가장 위대한, 가능한 모든 에너지로 그것에 함께할 것이다. 설혹 대중이 우리의 경로나 호소에 따라오지 않는다 하더라도, 또 우리가 그 운동의 패배를 예견한다 하더라도, 우리는 혁명적 대중과의 접촉에서 벗어날 수 없다. 우리는 대중의 운동의 방향이나 결과를 예측하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결코 잊지 않는다. 결과적으로 우리는 우리의 의미, 사상, 진실을 전달하려고 노력하면서 그러한 운동에 항상 참여하는 것이 우리의 의무로 여긴다.”


제3부. 기타 불일치점들


아나키스트와 볼셰비키를 분리하는 커다란 이론의 차이에 그치지 않고 양자 간에는 또한 세부 사항의 차이가 존재했다. 가장 커다란 두 가지 대립적 불일치점은 “노동자의 생산관리”라는 문제와 제헌의회의 문제였다.

볼셰비키는 노동자의 문제를 처리하는 데에 이른바 노동자의 생산관리―즉 노동자를 개인기업의 경영에 참여시킴―를 책정함으로써 문제를 해결하려는 방향으로 움직일 준비를 했다.

아나키스트는 만약 이 “관리”라는 두 글자가 사문死文에 그치지 않는다면, 그리고 만약 노동자의 조직이 유효한 관리를 행할 수 있다면, 아나키스트도 또한 모든 생산을 보증할 수 있으리라고 이의를 제기했다. 그런 경우, 사적 생산은 신속히, 그러나 점차, 배제되고 집산적 생산으로 바뀔 수 있다. 그렇기에 아나키스트는 “생산관리”라는 그런 막연하고 애매한 슬로건을 거부했다. 그들은 집산적 생산조직에 의한 사적 산업의 몰수점진적인, 그러나 즉각적인―를 제창했다.

이 점에 있어서 러시아혁명의 과정에서 아나키스트는 “극히 사소한 적극적 사상을 이론화하지도 못하고” 순전히 “파괴”와 “비판”의 방법에만 전념했다고 비꼬는 것은 절대 옳지 않다고 강조하고 싶다―나는 이 점을 힘주어 단언해 둔다. 왜냐하면 아무것도 모르면서 그저 맹신하고 있는 사람들에게 이 그릇된 주장이 현재 상당히 널리 퍼져 있기 때문이다. 또한 아나키스트는 “스스로도 사상을 소유하고 있지 않아서 그들 스스로의 개념 적용에 대한 명확한 이론을 충분하게 발표하지도 못했다”는 평가 역시 거짓말이다. 당시 러시아의 아나키스트 신문 「골로스 트루다」, 「아나키Anarchy」, 「나밧Nabat」 등을 주의 깊게 읽어본다면 노동자 조직의 역할과 기능, 그리고 농민과 공동으로 노동자 조직으로 하여금 파괴된 자본주의적 · 국가주의적 기구에 대치하게 하는 행동의 방법에 대해서도 명확하고 합리적인 해설이 풍부하게 게재되고 있었다는 것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아나키스트가 러시아혁명 때 가지지 못했던 것은 명확하고 엄밀한 이론이 아니라, 앞서 말한 것과 같이 처음부터 이러한 이론을 현실화할 수 있는 제도였다. 그리고 그와 같은 제도의 창설과 기능에 대해, 자신들의 계획 수행을 위해 반대한 것은 볼셰비키였다.

명확하고 정확한 아나키스트 이론은 공식화되고 있었다. 대중은 그것을 이해하고 혁명가, 지식인, 전문가의 도움을 얻어 언제라도 참된 목적을 향해 신속히 출발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볼셰비키는 이러한 이론과 그것으로 계몽된 도움과 계획된 조직제도의 활동이 확대되는 것을 고의로 방해했다. 왜냐하면 그들은 그들만을 위한 정치권력의 형태 아래서의 행동을 하고자 했기 때문이다.

이 명확하고 반박의 여지가 없는 현실의 복합체는 러시아혁명의 발전과 의미를 이해하고자 하는 사람들에 대하여, 이제부터 한 페이지, 또 한 페이지 나의 저술을 받침해 주는 숱한 실제 사례―수천 가지 가운데 선택한―가 될 것이다.

이제는 앞에서 이야기한 다른 논쟁점―제헌의회―에 대해 살펴보자.

혁명을 계속해 사회혁명으로 이행시키기 위해 아나키스트는 제헌의회의 소집의 어떠한 유용성도 인정하지 않았다. 그것은 본질적으로 정치적 · 부르주아적이며 번잡하고 쓸모없는 기관으로서 성격상 “사회투쟁의 바깥에” 있으며 위험한 타협의 수단에 의해 혁명을 정지시키고, 가능하다면 억압조차 할 수 있는 그런 기관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아나키스트는 제헌의회의 무용함을, 만일 그들이 진정 사회혁명을 시작하고자 원한다면, 제헌의회를 딛고 넘어서 당장 사회적, 경제적 조직을 그에 대치해야 함을 대중에게 알리고자 노력했다.

볼셰비키는 닳고 닳은 정치가였기에 솔직히 제헌의회를 포기하는 것을 망설였다(앞서 본 것 같이 그것의 소집은 권력 장악 이전의 그들의 프로그램에 있어 우위를 점하고 있었다). 이 머뭇거림의 배후에는 몇 가지 이유가 있었다. 한편, 볼셰비키는 권력의 주인이 되고자 할 속셈이었으니 혁명을 현재 단계에 “중단”되는 데에 아무런 불편함도 느끼지 않았다. 예컨대 회의는 만약 볼셰비키가 다수를 점하거나 혹은 대의원이 그들의 지도와 행동을 받아들인다면, 볼셰비키에게 이익이 될 수 있을 것이다. 다른 한편, 대중이 회의에 대한 의논에 집착하고 있는 동안은 대중에 반대하는 것은 현명하다고 할 수 없다. 결국 볼셰비키는 권력 장악 이전의 공식을 철회하여 반역죄! 라고 외치며 대중을 방해하려는 적에 대해 트럼프 카드를 내미는 모험을 감행하리만큼 스스로가 강력하다고 느끼지 않았다.

왜냐하면 대중은 전혀 억압되거나 복종 당하지 않았기 때문에 대중의 정신은 전진적이고 그들의 감정은 매우 돌변하기 쉬웠으며, 케렌스키 정부의 예시가 아직 기억에 생생했기 때문이다. 결국 당은 다음과 같이 결정했다. 제헌의회의 소집을 진행시키되, 한편으로 선거를 세세한 부분까지 감시하여 결과가 확실하게 볼셰비키 체제의 우세로 나타나게끔 최대한의 노력을 한다는 것이었다.

회의가 만약 볼셰비키에게 친화적이거나, 또는 적어도 유순하고 그다지 중요하지 않은 경우라면 책략을 사용해 정부의 목적에 이용할 수 있다. 그런데 만일 회의가 볼셰비키에 호의적이지 않다면, 당의 지도자는 대중의 반대 운동을 지켜보다가 기회를 엿봐 회의를 해산시키고자 했다. 확실히 승부는 약간 위험했다. 하지만 광대하고 깊은 인기와 회의가 지닌 권위의 결여, 게다가 회의가 볼셰비즘에 반대한다고 하더라도 스스로 타협해 오리라는 것은 확실하다는 점으로 미루어, 위험을 받아들였다. 연달아 일어난 사태는 볼셰비키당이 오판을 하지 않았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권력을 장악하면 곧바로 제헌의회를 소집한다는 볼셰비키의 약속은 근본적으로 그들에게 단순히 선동적인 공식에 불과했다. 그들의 게임에서 그것은 한 번에 모든 것을 이길 수 있는 카드였다. 만약 회의가 그들의 권력을 법적으로 유효하게 한다면, 그들의 지위는 당장, 특히 국내외에 걸쳐 공고하게 굳혀질 것이다. 그 반대의 경우라면 무리 없이 회의를 없앨 수 있을 만큼 힘이 충분하다고 생각했다.


제4부. 몇 가지 회상


물론 많은 대중은 서로 이러한 다른 해석의 미묘함을 인식할 수 없었다. 그들에게 이 상이함이 중차대하다는 것을 해하라는 것은―그들이 우리의 사상에 다소나마 접한 뒤에도―불가능이었다. 전 세계의 노동자 가운데서도 러시아의 노동자는 유별나게 정치적인 부분에 대해서는 특히 익숙하지 못했다. 그들은 마키아벨리즘도, 볼셰비키의 해석의 위험성도 인식할 수 없었다.

나는 가능한 한 말로써나 글로써나 대중이 볼셰비키당 권력을 공고하게 확립시켜 주는 것은 참된 혁명에 대해 몹시 위험하다는 것을 도시노동자들에게 경고하고자 애썼던, 그 절망적 노력을 회상한다.

나의 설득은 헛수고였다. 대중은 위험을 인식하지 못했다. 그들은 다음과 같이 반론하기 일쑤였다. “동지, 우리는 당신의 말뜻을 잘 이해하고 있소. 하물며 우리는 사람을 지나치게 불신할 정도요. 우리는 어느 정도 경계하고, 맹신하지 않고, 신중하게 불신을 유지해야 한다는 데에 동의합니다. 그러나 지금까지 볼셰비키는 우리를 배신한 적이 없소. 그들은 우리와 함께 똑바로 전진하고 있으며 우리의 친구요. 그리고 그들은 일단 권력을 장악하면 우리가 갈망하고 있는 것을 손쉽게 승리로 이끌어갈 수 있다고 주장하고 있소. 그것은 우리에게 진실처럼 보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왜 그들을 거부해야 합니까? 그들이 권력을 쟁취하도록 돕고, 그리고 어쩌는지 봅시다.”

알아주지 않는다고 해도 나는 사회혁명의 목표는 결코 정치 권력에 의해서는 실현될 수 없다고 지적했다. 의심을 품고 있는 청중을 향해 나는 볼셰비키 권력이 일단 조직되고 무장을 갖춘다면, 분명 다른 것과 마찬가지로 반드시 무능력해지고, 노동자에게 분명히 더욱 위험한 것이 되고, 이전 것보다 훨씬 타도하기 어려운 것이 되리라는 것을 나는 거듭 말했다. 그런데 이 말을 듣는 사람들은 틀에 박은 듯이 이렇게 대답하는 것이었다.

“동지, 차리즘Tsarism을 전복한 것은 바로 우리 대중이었소. 부르주아 정부를 타도한 것도 우리였소. 그리고 케렌스키를 전복시키고자 준비하는 것도 우리요. 그러니 만약 당신 말이 옳다면, 그리고 볼셰비키가 우리를 배반하고 약속을 지키지 않는 잘못을 저지르고 있다면, 우리는 이전에 그랬듯 볼셰비키도 전복시킬 것이오. 그때는 마지막으로 우리의 유일한 벗인 아나키스트와 함께 전진하겠소.”

나는 여러 가지 이유로 볼셰비키 국가를 전복시키는 것은 훨씬 더 어려울 것이라고 지적했지만 헛수고였다. 노동자들은 내 말을 내 말을 믿으려 하지도, 믿을 수도 없어 했다.

그러나 이런 일은 정치적 수단에 길들여져 있는 나라에서는 조금도 놀랄 만한 일이 아니었다. 다소나마 정치적 수단을 혐오하고 있는 나라(프랑스 같은)에서도 노동대중이나 지식인까지도 혁명을 바라면서도, 설령 극좌 정당이라 할지라도 정당의 권력이나 명칭 따위를 가릴 것 없이, 국가의 건설이 혁명의 사멸을 초래하리라는 것을 지금껏 이해하지 못하고 있는 형편이다. 하물며 정치적 경험이 전혀 없는 러시아와 같은 나라에서 어떻게 이것이 이해되기를 바라겠는가.

1917년 10월 승리를 거두고 페트로그라드에서 크론슈타트로 귀항한 전함의 혁명적 수병들은 얼마 뒤 전단적專斷的 권력을 가진 인민위원회의의 설립에서 야기될 위험에 대해 토의하기 시작했다. 특히 일부는 이 정치적 최고법원sanhedrin은 언젠가 10월혁명의 원칙을 배반할 가능성이 있다는 의견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전반적으로 그들은 그 안이한 승리에 도취된 나머지 무기를 휘두르며 이렇게 선언했다. “그런 경우, 대포가 겨울 궁전을 차지하는 방법을 알고 있으니, 스몰니Smolny를 차지할 방법도 알고 있다.”(페트로그라드의 전前 스몰니 연구소는 승리 후 볼셰비키 정부의 첫 번째 소재지였다.)

우리가 알고 있듯, 정치적, 국가적, 정부적 사상에 대해 1917년 러시아에서는 아직 불신이 없었다. 뿐만 아니라 아직 어느 나라에서도 불신을 품지 않았다. 대중이 어디서나 마침내 그 사상의 오류와 공허와 위험을 잘 알게 되려면, 프로파간다에 의한 계몽과 더불어 시간과 역사적 경험이 확실하게 필요하다.

저 유명한 10월 25일 밤에 나는 페트로그라드 거리에 있었다. 어둡고 고요했다. 멀리서 몇 발의 라이플 총성이 들렸다. 갑자기 장갑차가 맹렬한 속도로 내 옆을 지나갔다. 장갑차 안에서 손이 하나 나오더니 전단 뭉치를 하나 던졌고, 그것은 여기저기 흩어졌다. 나는 허리를 굽혀 한 장을 집어 들었다. 그것은 “노동자와 농민”에게 보내는, 케렌스키 정부의 몰락을 고하고 레닌을 필두로 하는 신체제의 “인민위원회”를 기록한 신정부에 의한 성명이었다.

슬픔, 분노, 혐오, 그러나 그와 함께 짓궂은 일종의 만족 섞인 복잡한 감정이 나를 사로잡았다. “이 어리석은 자들(그들이 단순히 선동적인 사기꾼이 아니라면. 나는 이렇게 생각했다)은 이렇게 해서 그들이 사회혁명을 수행하고 있다고 상상하고 있겠지. 아, 그렇다면 이내 보게 되겠지…. 그리고 대중도 좋은 교훈을 배우게 될 거야!”

그때 도대체 누가 불과 3년 4개월 뒤인 1921년 2월 5일에서 28일까지의 영광스러운 날에 페트로그라드 노동자들이 새로운 “공산당” 정부에 반기를 들 것이라고 예견할 수 있었겠는가.

아나키스트들 사이에 약간의 지지를 받는 의견이 하나 있다. 그것은 1917년 10월 일반 정세 아래서는 러시아 아나키스트가 정당, 데마고기demagogy, 권력에 대한 부정을 일시적으로 포기하고 “볼셰비키처럼” 행동했어야 했다, 즉 일종의 정당을 형성하고 임시적으로 권력을 장악하기 위해 노력했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게 했으면 그들은 “대중을 이끌어” 볼셰비키를 타도하고, “그럼으로써 아나키즘을 조직화할” 권력을 잡을 수 있었다고 주장한다.

나는 이 추론이 근본적으로 위험을 내포하는 오류라고 생각한다.

그런 임시적인 상황으로 아나키스트가 승리(매우 의심스럽지만)했다고 하더라도, 아나키즘의 근본 원리를 “잠시” 포기한 대가로 얻은 그 승리는 결코 아나키즘 원리의 승리로 이끌어지지 않았을 것이다. 사태에 떠밀려 권력을 장악한 아나키스트들―얼마나 우스꽝스러운가!―은 그저 볼셰비키의 변종에 불과할 뿐일 것이다.

(최근 스페인에서의 사태, 내각에 임명된 자신을 공허한 “정치”의 공간에 내던져 참된 아나키스트 행동을 무위로 돌린 어느 스페인 아나키스트의 입장은 나의 이 견해를 한결 더 확고히 하는 것이라고 나는 믿는다.)

만일 그러한 방법이 원하는 결과를 얻어낼 수 있었다면, 또 권력으로써 권력에 맞설 수 있다면, 아나키즘은 존재할 이유가 없을 것이다. “원칙적으로” 모든 사람은 “아나키스트”다. 공산주의자나 사회주의자들이 실제로 아나키스트가 아니라고 한다면, 그것은 단지 그들이 정치나 권력의 방법에 의해 자유의지주의적 사회질서에 도달할 수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나는 진지한 사람들에 대해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만일 누군가가 권력과 “강제된 대중”으로 권력을 타도하고자 한다면 그는 공산주의자이거나 사회주의자이거나 혹은 당신이 부르고 싶은 그 무엇일 수도 있지만, 아나키스트는 아니다. 권력, 권위, 국가(그리고 “강제된 대중”의) 도움으로 권력, 권위, 국가를 타도할 수는 없다고 보는 사람이 바로 분명히 아나키스트인 것이다. 그러한 수단에 의지할 때마다 언제나―비록 “일시적”이든 아주 선한 의도를 지녔든―누군가는 아나키스트이기를 포기하고, 누군가는 아나키즘을 포기하고, 누군가는 볼셰비키 원칙에 동조한다.

권력을 가지고 대중을 강제하려는 생각은, 인간이 그런 방법으로는 진정한 해방을 이룰 수 있다고 믿지 않는 아나키즘과는 정반대이다.

이와 관련해 나는 1919년 또는 1920년 모스크바에서 사회혁명당의 좌파 활동가였던 유명한 동지 마리아 스피리도노바(Maria Alexandrovna Spiridonova)와의 대화를 기억한다(그녀는 자신의 목숨을 걸고 차르의 가장 사나운 총독 중 한 사람을 암살했다. 그녀는 고문을 견뎌내고, 간신히 교수형을 면하여 오랫동안 투옥되었다. 1917년 2월혁명 때 석방된 그녀는 좌파사회혁명당에 합류해 그 기둥 중 한 사람이 되었다. 그녀는 헌신적이고 존경받는 혁명가 중 한 사람이었다).

토론 중에 마리아 스피리도노바는 나에게 사회혁명당 좌파는 매우 한정된 형태의 권력, 즉 아주 미약하고 인간적인, 그리고 특히 임시적인 최소한의 권력을 믿는다고 말했다. “정말 아주 최소한의 것입니다. 될 수 있는 한 빨리 약화하고, 무너뜨리고, 소멸시킬 것입니다!”

“속아서는 안 됩니다!” 나는 그녀에게 조언했다. “권력은 결코 굴리면 부서지는 모래 덩어리가 아닙니다. 오히려 굴리면 크기가 커지는 눈덩이입니다. 일단 권력을 잡으면 당신도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행동하게 될 겁니다.”

그리고 아나키스트들 역시 마찬가지라고 덧붙여 두어도 좋다.

같은 맥락에서, 나는 또 다른 충격적인 사건을 기억한다.

1919년, 나는 우크라이나에서 활동하고 있었다. 그 무렵 러시아 대중들은 이미 볼셰비즘에 대해 몹시 환멸감을 느끼고 있었다. 우크라이나에서의 아나키스트 선전(볼셰비키가 아직 완전히 그것을 억압하지는 못한 곳)은 활발한 성공을 거두기 시작했다.

어느 날 밤, 연대를 대표하는 몇 명의 붉은 군대 병사들이 우리들 하르키우Kharkov 그룹에 와서 이렇게 말했다. “이곳 수비대의 몇몇 부대는 볼셰비키에 지쳤습니다. 그들은 아나키스트에 공감하고 행동할 준비가 되었습니다. 지난밤 그들은 우크라이나의 볼셰비키 정부의 구성원들을 쉽사리 체포하고 아나키스트 정부를 선언할 수 있었는데, 그편이 훨씬 더 낫습니다. 아무도 반대하지 않을 것입니다. 볼셰비키의 권력에 모두 싫증이 난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는 아나키스트 정당이 우리와 동의하고 우리의 행동에 그 이름으로 행동할 권한을 부여하고, 현 정부를 체포하고, 우리의 도움을 받아 권력을 장악하기를 요청합니다. 우리는 전적으로 아나키스트 정당의 뜻대로 움직일 것입니다.”

물론 오해하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아나키스트 정당”이라는 용어만으로도 그것이 증명되었다. 이 훌륭한 병사들은 아나키즘이 진정 무엇을 의미하는지 전혀 몰랐다. 그들은 피상적으로 아나키즘을 이야기하는 것을 들었거나 혹은 어떤 집회에 참석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거기에 사실이 있었다. 두 가지 해법이 우리에게 가능했다. 이 오해를 이용해 볼셰비키 정부를 체포하여 우크라이나에서의 “권력을 장악”하는 것, 혹은 병사들에게 그들의 오해를 설명하고 아나키즘의 본질적 성격에 대한 이해를 제공하고 모험을 그만두도록 하는 것.

우리는 당연히 두 번째 방법을 선택했다. 그리고 두 시간에 걸쳐 나는 연대의 대표자들에게 우리의 견해를 밝혔다.

“만약,” 나는 그들에게 말했다. “러시아의 광대한 대중이 새로운 혁명에 궐기하여 깨끗이 정부를 포기하고 새로운 기반으로 그들의 삶을 조직하기 위해 그것을 다른 정부로 대체할 필요가 없다는 것을 이해한다면, 그것은 진정한 혁명이 될 것이고, 모든 아나키스트는 대중과 함께 행진할 것입니다. 그러나 만일 우리―일군의 사람들―이 볼셰비키 정부를 체포해 스스로를 그 자리에 두면 본질은 변하지 않습니다. 그런 다음 같은 매우 비슷한 제도를 사용해 나간다면 우리는 볼셰비키보다 더 잘할 수 있는 것이 하나도 없을 겁니다!”

마침내 병사들은 내 설명을 이해하고 진정한 혁명과 아나키즘을 위해 앞으로 일하겠다고 맹세했다.

당시 우리가 “권력을 장악”하지 않았다고 해서 아직도 우리를 비난하는 아나키스트가 있으리라는 것―그것도 한두 사람이 아닌―은 생각할 수 있는 일이다. 그들에 의하면 우리는 전진해서 볼셰비키 정부를 체포하고 그 자리를 차지했어야 했다. 그들은 우리가 권력의 도움을 받아 우리의 사상을 실현할 좋은 기회를 잃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그것은 우리의 원칙에 어긋나는 일이다.

혁명이 진행되는 동안 나는 몇 번이나 청중들에게 말했는지 모른다. “당신을 위해서, 당신 대신에, 당신 위에서 누군가 무언가 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는 것을 결코 잊지 마십시오. ‘가장 좋은’ 정부도 파탄할 수밖에는 없습니다. 그리고 만일 언젠가 나 볼린이 정치와 권위주의의 유혹에 빠져 내각 직책을 수락하고 ‘인민위원’이나 ‘장관’, 또는 이와 유사한 것이 되는 일이 있다면, 동지들은 2주 뒤 내가 진실과 진정한 대의, 진정한 혁명을 배신했다고 생각하고, 안심하고 나를 총살해도 좋습니다.”


3. 10월 이후


제1부. 권력을 쥔 볼셰비키―볼셰비키와 아나키스트의 차이


사회혁명에 대한 두 가지 사상―국가적 중앙집권주의와 아나키스트 연합주의 사상―의 투쟁은 1917년 러시아에서 불평등한 것이었다. 국가주의적 개념이 승리하고, 볼셰비키 정부는 빈 왕좌를 손에 넣었다. 레닌은 이론의 여지가 없는 지도자였다. 그래서 그와 그의 당은 전쟁을 종결시키고 혁명의 모든 문제에 직면해 그것을 진정한 사회혁명의 과정으로 이끌어갈 임무를 맡게 되었다.

승리한 정치적 사상은 스스로를 증명하고자 했다. 우리는 그것을 살펴볼 것이다.

새로운 볼셰비키 정권은 사실 지식인, 즉 마르크스주의 이론가의 정부였다. 그들은 권력을 휘두르며 노동자를 대표한다고 공언하고, 그들을 사회주의로 이끄는 올바른 방법을 알고 있는 유일한 집단이라고 주장하고, 무엇보다도 노동대중에게 받아들여 채용하도록 강요하는 명령과 법률에 의해 모든 것 위에 군림해 정치를 행하고자 했다.

처음에는 그 정권과 그 수장인 레닌은 노동자 대중의 의지에 충실한 심부름꾼이며, 어떠한 경우라도 노동자 앞에서 그들의 결정이나 성명이나 활동을 밝힐 듯한 자세를 취했다. 따라서, 예를 들면 볼셰비키의 맨 첫 정책, 특히 유명한 것으로는 농민에게 토지를 반환하는 법령(10월 26일)과 즉각적인 평화를 위한 첫 번째 공식 단계(10월 28일 법령)는 정부의 승인을 받은 소비에트 의회에 의해 채택되었다. 더욱이 레닌은 이 법률이 대중에게나 혁명적인 집단에게나 모두 만족스럽게 받아들여질 것을 미리 알고 있었다. 근본적으로 그들은 기존 상태를 승인하는 것 외에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바로 그 레닌은 소비에트 집행위원회 전에 1918년 1월에 열리는 제헌의회의 해산을 정당화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10월혁명의 이 행동은 자세히 설명할 가치가 있다.

독자가 이미 알고 있듯이, 아나키스트들은 그들의 모든 사회적 · 혁명적 개념에 따라 의회의 소집에 반대했다. 다음은 「골로스 트루다」(페트로그라드 아나키스트 프로파간다 연맹의 공식 기관지)의 1917년 11월 18일(신력新曆 12월 1일)자 제19호에서 그 문제에 대한 관점을 발전시킨 문장이다.

노동자, 농민, 병사, 수병 및 모든 육체노동자 여러분.

우리는 제헌의회 선거 중입니다. 이것은 곧 소집되어 개회될 가능성이 매우 높습니다.

모든 정당―볼셰비키를 포함해서―은 혁명의 궁극적인 운명을 이 중앙기관의 손에 맡겼습니다.

이 상황에서 우리에게는 여러분에게 닥쳐올 두 가지 위험에 대비하게 할 의무가 있습니다.

첫 번째 위험. 볼셰비키가 제헌의회에서 강력한 다수를 차지하지 못할 경우(또는 소수가 될 경우).

이 경우 의회는 쓸모없고 잡다한 사회적 부르주아 정치 제도로 구성될 것입니다. 그것은 모스크바의 “국가회의”, 페트로그라드의 “민주회의”, “공화국 임시위원회” 등과 같은 터무니없는 이야기가 될 것입니다. 그것은 공허한 내용 없는 토론과 분쟁으로 뒤얽힐 것입니다. 그래서 진정한 혁명을 후퇴시킬 것입니다.

우리가 이 위험을 과장하고 싶지 않은 것은 오직, 이런 경우 대중이 무기를 손에 들고 혁명을 구할 방법을 다시 한번 깨닫고 올바른 길로 밀고 나가기를 바라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대중이 이러한 새로운 혼란을 일으킬 필요가 없다는 것을 지적하고, 대중은 위험을 피할 수 있으며, 그래야만 한다고 지적합니다. 왜 터무니없는 기관을 수립해 유지하기 위해 에너지와 돈을 낭비해야 합니까? (기다리는 동안 노동자의 혁명은 다시 한 번 멈출 것입니다!) “혁명을 구하기” 위해, “죽음의 결말”에서 모면하게 하기 위해 “이 어리석고 쓸모없는 기관”과 나중에 싸우기 위해 또다시 더 많은 힘과 피를 희생하는 것의 좋은 점이 무엇입니까? 그 힘과 노력은 혁명, 인민, 전국에 더 큰 이익을 위해 노동대중을 마을이나 도시나 또는 각종 사업에 있어서의 가장 아래로부터 직접 조직하고, 그 결과 아래로부터의 조직을 직접적으로 자연스러운 방식으로 코뮌과 자유로운 마을과 도시의 단체에 연합시키는 데 사용할 수 있는 것입니다. 나중에 지역의 연합으로 이어질 이 모든 일은 정치적 또는 어떤 당의 회원들의 기반 위에 행해질 것들이 아닙니다. 마찬가지로 그 힘과 노력은 사업들에 원자재와 연료의 공급을 신속하고 정력적으로 조직화하고 통신수단을 개선하고 전혀 새로운 교환과 일반경제를 조직화하는 데 사용할 수 있으며, 또 그렇게 해야 합니다. 마지막으로 반동의 잔당, 특히 중앙당에 대단한 위협을 주는 칼레딘(Aleksei Maximovich Kaledin)의 운동에 대해 즉시 맞서 싸워야 합니다.

두 번째 위험. 볼셰비키가 제헌의회에서 다수를 차지할 경우.

이 경우 그들은 손쉽게 “반대 세력”을 압도하고 무난히 소탕해 국가와 전체 상황의 확고한 공식 주인―“인민의 다수”에게 공공연히 승인된―이 될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볼셰비키가 제헌의회에서 얻고자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야말로 그들이 필요로 하고 있는 것―의회가 그들의 권력을 공고히 통합하고 “합법화”하는 일입니다.

동지 여러분, 이 위험은 첫 번째 위험보다 훨씬 더 중대하고 심각한 것입니다. 경계하십시오!

일단 그들의 권력이 견고해지고 “합법화”되면, 볼셰비키―사회민주주의, 즉 중앙집권적, 권위적 활동가―는 정부의 독재적 방법으로 국가와 국민의 생활을 중앙에서 강제적으로 재정비할 것입니다. 페트로그라드에서의 그들의 지위는 온 러시아에 당의 의지를 지시하고 전국에 명령할 것입니다. 여러분의 소비에트와 그 외 다른 지역 조직들은 조금씩 중앙정부의 의지를 집행하는 기관이 될 것입니다. 노동대중의 건강하고 건설적인 작업 대신, 아래로부터의 자유로운 연합 대신, 우리는 위로부터 행동하여 그 앞을 가로막는 것이면 무엇이든지 강철 같은 손으로 깨끗이 쓸어내는 권위주의적이고 국가주의적인 기구의 설치를 보게 될 것입니다. 소비에트와 다른 조직은 그 뜻에 복종하고 따라야만 할 것입니다. 그것은 “규율”이라고 불릴 것입니다. 중앙권력에 동의하지 않고 그에 복종하는 것은 옳지 않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에게는 너무나 나쁜 일입니다! 대중의 “보편적인 허가”로 인해 그 힘은 강화되고 그들이 복종하도록 강요할 것입니다.

경계하십시오, 동지들!

신중히 보고 기억하십시오.

볼셰비키의 성공이 확실해지면 확실해질수록, 또 그들의 입장이 견고해질수록 그들의 행동은 권위주의적인 측면을 더 많이 취하게 될 것이며, 그들의 정치적 권력의 강화와 방어는 더욱 분명해질 것입니다. 그들은 소비에트와 다른 지역 조직에 점점 더 절대적 명령을 내리기 시작할 것입니다. 그들은 그들에게 저항할 경우 무력을 사용하는 것을 망설이지 않고 자신들의 정책을 상부에서 시행해 나갈 것입니다.

그들의 성공이 확정되면 될수록 볼셰비키의 행동은 더욱 안정되고 확실해질 것이기 때문에 더 많은 위험이 존재할 것입니다. 새로운 성공이 거듭될 때마다 그들은 머리를 더 돌릴 것입니다. 레닌의 정당이 새로이 일들을 성취하는 날마다 혁명에 대한 위기는 불어날 것입니다.

더욱이 여러분은 이것을 벌써 볼 수 있습니다.

새로운 권위의 최근 명령과 계획들을 주의 깊게 살펴보십시오. 여러분은 이미 볼셰비키 지도자들이 강제적 중앙의 수단에 의해 정치적이고 권위주의적인 방법으로 사람들의 삶을 재배치하려는 경향을 뚜렷이 볼 수 있습니다. 이미 그들이 국가에 공식적인 명령을 내리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여러분은 이미 그 지도자들이 “모든 권력을 소비에트로”라는 구호를 이해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모든 권력을 소비에트로”는 소비에트와 다른 지역 조직이 단순한 집행기관으로서 복종해야만 하는 페트로그라드의 중앙권력을 의미합니다.

볼셰비키 지도자들이 여전히 대중에게 강력하게 의지하고 있고 대중이 그들에게 환멸을 느끼는 것을 두려워하고 있는 지금, 그들의 성공이 아직 완전히 보장되지 않고 여전히 대중의 태도에 의존하고 있는 지금, 이런 일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그들의 성공이 기정사실화되고 대중이 열정적이며 확고한 자신감을 가지고 그들을 받아들인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노동자, 농민, 병사 동지들!

이 위험에서 결코 시야를 돌리지 마십시오!

당신이 어디에 있든지 간에, 새로운 권위의 폭력과 멍에, 새로운 주인, 즉 중앙집권화된 국가와 새로운 사기꾼들, 즉 정당의 수장들에 대항하여 당신의 조직과 운동의 진정한 혁명과 진정한 자유를 방어할 준비를 하십시오.

볼셰비키의 성공이 그들을 사기꾼으로 만든다면 그들의 성공을 무덤으로 바꿀 수 있는 행동을 준비하십시오.

새로운 감옥으로부터 혁명을 구출할 준비를 하십시오.

여러분만이 자유로운 지역 조직과 그 연합을 통해 여러분의 새로운 삶을 건설하고 창조해나갈 수 있다는 것을 잊지 마십시오. 만일 그렇게 하지 않으면 여러분은 결코 새로운 삶을 보지 못할 것입니다. 볼셰비키는 여러분에게 종종 같은 말을 하고 있습니다. 최종적인 분석으로, 그들이 말하는 대로 실행하면 더 좋아지는 것은 당연하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동지들, 모든 새로운 주인들은 대중의 동정과 신뢰에 따라 그들의 지위가 달라지기 때문에 처음에는 달콤한 말을 합니다. 처음에는 케렌스키도 꿀 같은 목소리로 말을 했습니다. 쓰디쓴 심중은 후에 드러나는 법입니다.

연설이 아니라 제스처행동을 관찰하고 주목하십시오. 그리고 이 사람들이 당신에게 말하는 것과 그들이 하는 일 사이의 작은 모순이라도 발견되는 순간 조심하십시오!

말을 믿지 마십시오, 동지들. 오직 행동만을 신뢰하십시오!

제헌의회도, 당이나 지도자도 신뢰하지 마십시오. 오직 자신과 혁명만을 신뢰하십시오. 오직 여러분만이―즉 여러분 지역의 대중으로부터 자연스럽게 뭉쳐 올려진 조직, 당이 아니라 노동자의 조직, 그리고 지역의 직접적이고 자연스러운 연합―새로운 삶의 건설자이자 주인이 될 수 있습니다. 제헌의회도, 중앙정부도, 당이나 지도자도 아닙니다!”

그리고 「골로스 트루다」의 다음 호[1917년 12월 2일(신력 15일)자 제21호]의 “제헌의회에 대신하여”라는 제목의 사설에서 아나키스트들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우리 아나키스트가 쓸모없을 뿐만 아니라 대의에 비추어 솔직히 해롭다는 점에서 제헌의회를 거부한다는 것은 잘 알려져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관점에 대한 이유를 알고 있는 사람은 아직 극소수에 불과합니다. 그리고 본질적인 것은 우리가 제헌의회에 반대한다는 사실이 아니라 우리가 그렇게 하도록 이끄는 이유들입니다. 우리가 제헌의회를 반대하는 것은 변덕이나 고집, 모순의 정신 때문이 아닙니다.

게다가 우리는 “순수하고 단순하게” 그것에 반대하는 것에 그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완벽하게 논리적인 방법으로 그에 대한 반대에 도달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사실 사회혁명의 시기에 노동자들에게 중요한 것은 위로부터의 권위적 · 정치적 중앙의 수단에 의하지 않고 직접적 · 경제적 조직의 도움으로 아래로부터 자신들이 스스로 새로운 생활을 조직하는 일이라고 믿습니다.

우리는 제헌의회를 거부하고 그 자리에 완전히 다른 “구성원” 기관―자연스러운 방식으로 아래로부터 통합된 노동자 조직을 제공하기 때문에 제헌의회를 거부합니다. 우리는 제헌의회를 위협하기 위해 이 다른 조직을 바라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

볼셰비키는 한편으로는 노동자의 직접적 계급조직(소비에트 등)을 인정하는 반면, 다른 한편으로 부적절하고 무익한 조직인 제헌의회를 두둔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 이중성이 모순적이고, 해롭고, 매우 위험하다고 생각합니다. 볼셰비키가 진정한 사회민주주의자로서 “정치”와 “경제”, “권위”, “계급”의 문제를 뒤섞어 혼동하고 있는 사실의 불가피한 결과입니다. 그들은 죽어버린 편견을 완전히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수영하는 법을 모르는데 물속에 몸을 던지는 것과 같기 때문입니다.

프롤레타리아 혁명 기간 동안 권력의 조직화를 주요 임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에게는 이 모순에 가담하는 것이 불가피합니다. 이 “권력의 조직화”에 반대하기 위해 우리는 그것을 “혁명의 조직화”로 대체할 것입니다.

“권력의 조직화”는 논리적으로 제헌의회로 이어집니다. “혁명의 조직화”는 마찬가지로, 논리적으로 다른 건축물로 이어집니다. 그곳에는 의회를 위한 방은 없을 것이며, 엄밀히 말해 의회는 장애물이 될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가 제헌의회에 반대하는 이유입니다.

볼셰비키는 의회 소집을 제안했지만, 볼셰비키가 다수를 차지하지 못한다면―당시 정세에서는 그럴 가능성이 있었다―의회를 지배하거나 해산시켜 버리기로 결정했다.

그래서 1918년 1월 그 집회가 소집되었다. 집권한 3개월간 볼셰비키당은 갖은 노력을 다했지만 제헌의회는 반反볼셰비키로 돌아가고 말았다. 이러한 진전은 아나키스트의 예상을 확실히 확인해주었다. “만약 노동자들이” 그들이 말했다. “정치적 희극에 관심을 기울이지 않고 조용히 경제적, 사회적 건설사업을 추구한다면 대다수 인민은 마침내 아무런 의식 없이 그들을 따를 것이다. 그렇게 될 때까지 그들은 불필요한 걱정을 등에 지고 있는 셈이다.”

그럼에도 이 집회가 전혀 무익하고 그 “회의”는 음울하고 전반적으로 냉담한 분위기 속에서 진행되었다(누구나 사실 그 기관이 허약하고 허황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이런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볼셰비키는 그 존재에 종지부를 찍기를 주저했다.

볼셰비키는 드디어 제헌의회를 해산하기 위해 아나키스트의 거의 우연한 개입을 필요로 했다. 이것은 또 하나의 거의 알려지지 않은 역사적 사실이다.

운명은 내가 아나톨 젤레즈니아코프(Anatol Jelezniakov)라고 이름 붙인 크론슈타트 출신의 아나키스트가 707명의 의원이 회의에 출석하고 있는 토리드Tauride 궁宮의 수비대 지휘관으로 볼셰비키 당국에 의해 임명되기를 결정했다.[8]

각 정당의 지도자들은 밤을 새워 연설하고 있었기 때문에 근무하던 수비대는 완전히 지쳐버렸다. 몇 시간의 토의 끝에 의회의 다수에게 볼셰비키의 강령은 거부되었다. 그런 다음 볼셰비키와 《사회주의혁명당》 좌파 당원들은 우파 의원들에게 위협적인 언사를 남기고 퇴장했다. 그러나 여러 가지 문제에 대한 다른 연설이 새벽까지 계속 이어졌다. 마침내 그 부대의 대장이었던 젤레즈니아코프는 회장으로 들어가 연단에 올랐다. 수비대장은 우파의 지도자이자 《사회주의혁명당》의 지도자인 빅토르 체르노프(Victor Tchernov)를 향해 말했다. “부디 폐회해 주시기 바랍니다. 부하들이 지쳐 있습니다!”

의장은 격분해 성을 내며 항의했다.

“수비대가 지쳐 있다고 말씀드렸잖습니까.” 젤레즈니아코프가 위협적으로 말했다. “모두 의사당에서 나가 주시기 바랍니다. 이런 잡담은 이제 이만하면 충분합니다. 당신들은 충분히 오랫동안 떠들어대지 않았습니까. 나가 주시오!”

의회는 그 말에 따랐다.

이튿날 아침, 의원들이 다시 낮에 모일 계획이라는 것을 알고 볼셰비키는 이 사건을 이용했다. 그들은 토리드 궁의 제헌의회 의사당을 점령하기 위해 군대를 보냈고, 병사들은 소총과 기관총 및 야포 두 문으로 무장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날이 끝나기 전 의회를 해산하는 법령을 발표했다.

사람들은 무관심했다.

후에 레닌 정부는 소비에트 집행위원회 앞에서 이 행위를 정당화했다.

그리하여 모든 일이 볼셰비키에게 순조롭게 진행되었다―정부의 의지가 피지배자”, 즉 인민의 의지와 충돌하게 된 그 날까지.

그 뒤에 독일의 새로운 공세에 직면해 모든 것이 바뀌었다.

10월혁명 이후 러시아 국경을 따라 작전을 펼치던 독일군은 한동안 활동을 멈추고 있었다. 명령을 보류하고 사태를 기다려 정세로부터 가능한 가장 큰 이득을 얻기 위해 꾀를 부리고 있었다.

1918년 2월, 독일인들은 준비가 다 되었다고 생각해 혁명적 러시아에 대한 공세를 시작하기로 결정했다.

그리고 이제 볼셰비키 정부가 입장을 취할 필요가 있게 되었다. 러시아 군대는 싸우려 하지 않았기에 어떠한 저항도 불가능했다. 상황에 대한 해결책을 찾는 것이 필수적이었다. 그 해결책은 동시에 혁명의 첫 번째 문제―전쟁 문제를 해결하기도 할 것이었다.

두 가지 가능한 해결책이 있었다.

1. 전선을 포기하는 것. 독일군이 광대한 반란지역으로 진군하게끔 하여, 러시아의 오지로 끌어들여 고립시키고, 보급을 끊고, 게릴라전을 벌여 사기를 꺾고 해체해 사회혁명을 지키는 것―이는 1812년에 성공적으로 활용되었고, 러시아와 같이 광대한 토지에서는 언제나 가능했던 전술이다.

2. 독일군 사령부와 협상에 돌입하는 것. 그들에게 평화협정을 제안하고 교섭해 어떤 조건이든 그것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이 두 가지 방법 가운데 첫 번째는 《사회주의혁명당》 좌파와 최대주의자Maximalist, 아나키스트뿐만 아니라 거의 모든 노동자 조직이 협의한 것이었다. 그들은 그렇게 행동하는 것만이 사회혁명에 부합하는, 다시 말해 그 결과로 독일 등지에서 혁명이 일어나기를 바랄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라는 견해였다. 요컨대 이 과정―참으로 인상적인 직접행동―이 기존 조건 아래서, 러시아와 같은 나라에서 혁명을 방어하는 유일한 올바른 방법이 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골로스 트루다」[9]는 〈혁명정신The Revolutionary Spirit〉이라는 사설에서 독일의 맹공격이 임박함에 따라 문제의 심각성을 다음과 같이 지적했다.

현재 우리는 혁명의 결정적 전환점에 있다. 그것은 치명적일 수도 있는 위기이다. 닥쳐오고 있는 그 시간은 인상적으로 분명하고 더없이 비극적이다. 마침내 상황은 분명하다. 문제는 해결되는 과정에 있다. 몇 시간 안에 우리는 정부가 독일과 평화협정을 체결했는지 아닌지를 알게 될 것이다. 러시아혁명의 모든 미래와 세계 사태의 과정은 오늘, 이 순간에 달려 있다.

독일이 제안한 조건은 명백하며 유보가 없다.

여러 정당의 몇몇 저명한 당원 및 정부의 생각들은 이미 알려져 있다. 그러나 어디에서도 통일된 의견이 없다. 볼셰비키 가운데도 의견이 불일치한다. 사회혁명당 좌파 당원 가운데도 의견이 불일치한다. 인민위원회에서도, 페트로그라드 소비에트와 그 집행부에서도 의견이 불일치한다. 대중 사이에서도, 작업장에서도, 공장에서도, 병영 내에서도 의견이 불일치한다. 그리고 지방의 의견은 아직 알려져 있지 않다.

(앞서 언급했듯 《사회주의혁명당》 좌파의 의견과 페트로그라드 노동대중의 의견은 독일과의 평화협정 조인에 적대적인 것으로 밝혀졌다.)

독일의 최후통첩 시간제한은 48시간이었다. 이런 조건 아래에서는 원하든 원하지 않든, 문제는 정부의 테두리 안에서만 논의되어 조급한 결론이 나와야 할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 가장 끔찍한 일이다….

우리의 의견에 대해서는 독자들이 이미 알고 있을 것이다. 우리는 처음부터 “평화협정”에 반대했다. 오늘 우리는 협정에 서명하는 것을 반대한다. 우리는 당장 강력한 파르티잔 저항 조직을 필요로 하고 있다. 우리는 평화를 요구하는 정부의 전보를 철회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도전을 받아들여 혁명의 운명은 전 세계 노동자의 손에 단호히 직접 놓여야 한다.

레닌은 평화협정 서명을 주장하고 있다. 그리고 우리의 정보가 정확하다면, 대다수가 결국 그를 따를 것이다. 평화협정은 체결될 것이다.

이 혁명이 궁극적으로 반드시 승리하리라는 깊은 확신만이 우리가 이 불의의 사태를 지나치게 비극적으로 받아들이지 않게끔 한다. 그러나 평화협정을 체결하는 방법은 혁명에 큰 타격을 입히고, 혁명을 약화하고 타락시켜 오랜 시간에 걸쳐 혁명을 왜곡할 것이라고 우리는 절대적으로 확신한다.

우리는 특히 〈혁명적 공론에 대하여On Revolutionary Phrases[10]라는 기사에서 레닌의 주장을 잘 알 수 있다. 그러나 그 주장은 우리를 납득시키지 못한다.

「골로스 트루다」는 레닌의 견해를 상세히 비판하고 반대 의견을 제시했다. 그들은 평화를 받아들이는 것은 혁명을 느슨하게 만들고 오랜 기간에 걸쳐 혁명을 미약하게 하고, 빈혈貧血에 걸리게 하고, 무색하게 만들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와 같은 평화를 받아들이면 혁명은 뒤틀려 무릎을 꿇고, 날개를 잘리고, 기어 다니게 될 것이라고 말이다. 정기간행물은 다음과 같이 끝맺고 있다. “혁명적 정신, 투쟁에 대한 위대한 열정, 세계 해방에의 빛나는 사상의 웅대한 도약을 빼앗길 것이다. 그리고 세상의 빛은 꺼지게 될 것이다.”

처음에 볼셰비키당 중앙위원회의 대다수는 첫 번째 해결책에 찬성했다. 그러나 레닌은 이 대담한 결정을 두려워했다. 다른 독재자들처럼 그도 공식 명령이나 흑막의 음모에 의해 간부나 정치인에 의해 이끌리지 않는다면 대중의 행동을 신뢰하지 않았다. 그는 독일이 제시한 평화협정을 거부할 경우 혁명에 대해 죽음의 위험을 무릅써야 할 것이라고 호소했다. 그리고 그는 “일시 정지”해 정규군을 창설할 필요가 있다고 선언했다.

혁명이 시작된 이후 처음으로 레닌은 대중과 동지들의 의견에 감히 반대를 무릅쓰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는 동지들을 위협하며 향후 일어날 일에 대한 모든 책임을 지지 않겠다고 했다. 그는 자신의 의지가 실행되지 않으면 물러나겠다고 선언했다. 그의 동지들은 결국 “혁명의 위대한 지도자”를 잃는 것을 두려워했다. 그들은 양보했다. 대중의 의견은 의도적으로 짓밟혔다. 1918년 3월 3일, 평화협정이 체결되었다.[11]

이렇게 하여 “프롤레타리아의 독재자”가 처음으로 노동대중을 제치고 승리했다. 볼셰비키 권력은 처음으로 대중을 공포에 떨게 하고, 그들의 의지에 복종시키고, 대중이 아닌 그들의 의지대로 행동하고, 다른 의견들을 무시하는 데 성공했다.

브레스트-리토프스크 평화협정Treaty of Brest-Litovsk은 볼셰비키 정부에 의해 노동자들에게 덮어 씌워졌다. 사람들은 완전히 다른 방식으로 전쟁을 끝내기를 바랐다. 그러나 정부가 모든 처리를 도맡았다. 정부는 문제를 촉발하고 억지로 사태들을 일으켰는데, 결국 이것은 대중의 저항을 무너뜨렸다. 정부는 대중을 진압하고 복종시켜서 그들을 강제로 수동성을 띠게 만들 수 있었다.

덧붙여서, 나는 이 열광적인 시기에 유명한 볼셰비키 니콜라이 부하린(Nikolai Ivanovich Bukharin)이 후에 악명 높은 모스크바 숙청 재판 과정에서 처형된 것을 기억한다. 나는 이전에 뉴욕에서 그와 친분을 쌓았는데, 그때까지 우리는 러시아에서 서로 만난 적은 없었다. (당시 볼셰비키 정부청사였던) 페트로그라드의 스몰니 연구소 건물의 복도를 급히 걸어가고 있을 때, 나는 한쪽 구석에서 부하린이 볼셰비키 무리 가운데 격한 몸짓으로 논쟁하고 있는 것을 보게 되었다. 그는 나를 알아보고 신호를 보냈다. 나는 그리로 갔다.

그는 대뜸, 그리고 감정에 가득 차 평화협정 문제에 대한 레닌의 태도에 대해 불평하기 시작했다. 그는 자신이 전혀 동의하지 않는다고 한탄하고, 이 점에 관해서는 사회혁명당 좌파나 아나키스트, 일반 대중에 전적으로 동의한다는 사실을 강조했다. 그리고 그는 놀랍게도 레닌이 아무 말도 들으려 하지 않을 것이라고 선언하며 “다른 사람의 의견에 전혀 신경을 쓰지 않는다”고 선언했고, 자신의 의지와 잘못을 모두에게 강요하며 권력을 포기하겠다고 위협해 당을 공포에 떨게 했다고 선언했다. 부하린에 의하면 레닌의 잘못은 혁명에 치명적이었다. 그는 그것을 두려워하고 있던 것이다.

“하지만” 나는 그에게 말했다. “레닌에 동의하지 않는다면 그렇게 말하고 주장하면 됩니다. 당신은 혼자가 아닙니다. 게다가 당신이 혼자라고 하더라도 당신은 레닌과 마찬가지로 의견을 가지고, 발표하고 선전하고 옹호할 권리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는 내 말을 가로막으며 말했다. “당신은 그것이 무얼 뜻하는지 모를 겁니다. 어떤 결과를 가져올지 생각해보세요. 레닌과 싸운다고요? 그러면 자동으로 당에서 추방당할 겁니다. 그것은 우리의 모든 과거, 규율, 무장한 동지들에 대한 반란을 뜻합니다. 나는 당 안에 분열을 촉진시켜 나와 함께 다른 의견을 지닌 이들을 끌어내 레닌과 싸우기 위한 또 다른 당을 만들 의무가 있다고 느낍니다. 당신도 잘 알다시피 나는 당의 지도자가 되어 레닌과 볼셰비키당에 전쟁을 선언할 만한 그릇이 되지 못합니다. 나는 리더의 자질이 없습니다. 설령 자질이 있대도, 아니, 아니, 나는 못 합니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에요.”

그는 몹시 흥분해 손을 머리에 얹고 거의 울상이 되었다.

나는 급한 일이 있었고, 이 이상 의논해봐야 소용이 없다고 느껴져 그를 내버려 두고 떠났다. 우리가 알고 있듯, 그는 나중에 레닌의 이론에 따랐다. 물론 겉으로 그런 것뿐이었지만.

이것이 새 정부와 통치당하는 인민 간 첫 번째 심각한 차이점이었다. 그것은 스스로 부여한 권력의 이점으로 인해 해결되었다. 이것이 첫 번째 사기였다. 그리고 첫 번째이기는 했으나 가장 곤란한 것이기도 했다. 그때부터 일은 “저절로” 진행될 수 있었다. 일단 노동대중의 의지를 면죄부로 유린하자, 일단 행동의 주도권을 잡자, 새로운 권력은 말하자면 혁명을 둘러싼 올가미였다. 나중에는 올가미를 조이고, 그로 인해 대중을 강요하고, 마침내 그것이 습관화되게 하여 모든 주도권을 쥐고 권위에 완전히 복종하게 하고, 혁명 전체를 독재 편으로 돌아가게 하면 그만이었다.

사실, 그것은 실제로 일어난 것이었다. 왜냐하면 이는 필연적으로 모든 정부가 취하는 태도이기 때문이다. 불가피하게 국가주의적, 중앙집권적, 정치적 정부를 유지하는 모든 혁명이 걸어갈 길은 그러한 것이다.

이 길은 경사져 있다. 그래서 어떤 그룹이든 그 경사면에 있으면 저절로 미끄러진다. 아무것도 그것을 멈출 수 없다. 처음에는 지배자도 피지배자도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인식하지 못한다. 전자는 (그가 진실하다는 가정에 한해서) 스스로가 자기 사명을 다하고 없어서는 안 될 유익한 일을 하고 있다고 믿고 있다. 후자는 거기 매혹되어 단단히 쥐어 잡히고, 지배당하고, 따라간다.

그리고 마침내 이 두 그룹, 특히 피지배자가 그들의 잘못을 깨닫기 시작했을 때는 이미 늦었다. 되돌아가는 것도, 수정하는 것도 불가능하다. 너무나 깊게 이 치명적인 경사에 말려들어 버린 것이다(낙하하는 가속이 너무 큰 것이다). 그리하여 피지배자가 지배자에게 항의하며 이 위험한 비탈을 다시 기어오르려 해도 때는 이미 너무 늦어 버린 것이다.


제2부. 치명적인 내리막길


이후 러시아혁명이 어떻게 되었는지를 확인하고, 볼셰비즘의 진정한 역할을 이해하고, 인류 역사에서 다시금 웅장하게 승리한 대중의 반란을 한탄할만한 실패로 바꾼 이유를 파악하기 위해서는, 불행히도 아직 충분히 널리 알려지지 않은 두 가지 사실을 이해하는 것이 필요하다. 그 오해는 진정한 이해에 관심이 있는 많은 사람을 방해하고 있다.

여기 첫 번째 사실이 있다.

명백하고 확실하게 서로 용납될 수 없는 모순이 있는데, 한편으로는 확장하려는 경향이 있는―그리고 결정적 승리로 무한히 확대될 수 있었던―진정한 혁명과, 다른 한편으로는 권위주의와 국가주의의 이론 및 실천이 그것이다. 국가사회주의 권력의 본질(만일 그것이 승리한다고 하면)과 진정한 사회혁명 과정의 본질 사이에는 명백하고 확실하게 서로 용납될 수 없는 모순이 있다. 진정한 사회혁명의 본질은 모든 노예노동에서 해방된 노동 대중의 광대하고 자유로운 창조적 운동을 인정과 성취에 있다. 그것은 해방된 노동, 자연스러운 조정과 근본적인 평등을 바탕으로 한 건설 과정의 긍정과 확장이다.

근본적으로, 참된 사회혁명은 참된 인류 발전의 시작, 즉 모든 분야의 활동에 있어서 수백만의 사람들의 방대하고 명백한 주도권을 기반으로 한 인류 대중의 자유롭고 창조적인 상승이다. 혁명의 이 본질은 혁명적 인민에 의해 본질적으로 감지되는 것이다. 그것은 아나키스트들에 의해 다소 정확하게 이해되고 공식화되었다.

이 사회혁명의 정의(반박할 수 없는 정의)에서 “자동적으로” 귀결되는 것은 대중에 대한 권위주의적 방향(독재 혹은 그 외)의 개념―순전히 옛 부르주아적, 자본주의적 착취의 세계 속하는 개념―이 아니라, 그것들의 진화를 가져오기 위한 협력의 그것이다. 그리고 그로부터 또한 모든 혁명적 사상의 절대적으로 자유로운 교류의 필요성, 나아가 마침내는 거짓 없는 진리에 대한, 즉 대중과 혁명의 완전한 승리에 대한 필요가 흘러나온다.

그러나 국가사회주의와 위임된 권력의 기초는 이러한 사회혁명의 원칙을 명백한 태도로 인정하지 않는 것이다. 사회주의의 이론과 실천 상의 주요한 특색(권위, 권력, 국가, 독재)은 미래에 속하지 않고 오로지 부르주아적 과거의 일부이다. 혁명에 대한 “국가주의적” 개념, 혁명적 과정을 제한하고 “종결”시키는 사상, 그것을 가로막고 돌처럼 굳게 만드는 경향, 그리고 특히 (노동대중에게 적절하고 자주적인 운동과 행동을 위한 모든 가능성을 허용하는 대신) 다시 국가의 극소수 새 주인의 손에 모든 미래의 진화를 집중시키고자 하는 경향―이러한 모든 것은 제한된 척도의 낡은 전통, 진정한 혁명과는 아무런 공통점도 지니지 않는 낡아빠진 모델에 있다.

일단 이 모델이 적용되면 혁명의 진정한 원칙은 치명적으로 버림받는다. 그런 다음 필연적으로 다른 새 이름 아래 노동대중의 착취와 그 모든 결과가 되살아난다.

따라서 의심의 여지없이 혁명적 대중이 진정한 해방을 향해 나아가는, 새로운 형태의 사회생활을 창조하는 것을 향한 전진은 바로 이 국가권력의 원칙과 양립할 수 없다. 그리고 권위주의적 원칙과 혁명적 원칙은 완전히 정반대에 놓여있고 상호배타적이라는 것, 또한 혁명의 원칙은 본질적으로 미래를 향하고 있는 반면 권위주의적 원칙은 그 뿌리가 과거에 묶여 있어 반동적이게 되는 것이 분명하다.

권위주의적 사회주의 혁명과 (진정한) 사회혁명은 두 가지 상반된 절차를 따른다. 결과적으로 한쪽은 정복해야 하고, 다른 한쪽은 멸절되어야만 한다. 홍수를 수반해 과거의 뿌리를 결정적으로 파괴하는 광대하고 자유로운, 창조적인 진정한 혁명이 권위주의적 원칙을 무너트리고 승리를 거두거나 혹은 권위주의적 원칙이 승리하거나의 한 쪽이다. 권위주의적 원칙이 승리하면 과거의 뿌리가 진정한 혁명을 “교살絞殺”함으로써 진정한 혁명은 결코 달성되지 않을 것이다.

사회주의 권력과 사회혁명은 서로 모순적인 요소다. 그것들을 화해시키는 것은 불가능하고, 하물며 연합시키기는 더욱 불가능하다. 한쪽의 승리는 어느 쪽의 승리든 종합적인 논리적 귀결로서 다른 한쪽을 위험에 처하게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국가사회주의에 영감을 받아 그 운명을 잠정적이거나 혹은 과도기적으로 맡긴다고 하더라도 그 혁명은 반드시 실패한다. 그것은 심연으로 곧장 치닫는 그릇된 길을, 점점 더 가팔라지는 급경사의 길을 출발하는 것이다.

두 번째 사실―이라기보다 오히려 사실의 논리적 합주―은 첫 번째 사실을 완성하고 더욱 구체적으로 만든다.

1. 모든 정치권력은 불가피하게 그것을 행사하는 사람들에게 특권을 부여한다. 따라서 그것은 처음부터 평등주의의 원칙을 위반하고 사회혁명의 핵심―사회혁명의 원칙에 의해 크게 영감을 받은―을 공격한다.

2. 모든 정치 권력은 설령 그것이 부르주아에 의존하고 있지 않더라도 필연적으로 다른 특권의 원천이 된다. 권력은 혁명을 이어받아 그것을 지배하고, 억압하고, 스스로를 유지하고자 하는 모든 권위에 대해 불가결한 관료적이고 강압적인 장치를 만들어내도록 강요되고, 지휘하고 명령하지 않을 수 없다―한마디로 “지배”하지 않을 수 없다. 권력은 지배하고 착취하고자 하는 온갖 종류의 요소들을 재빨리 자신의 주위에 끌어들여 조직화한다.

따라서 권력은 처음에는 정치적으로, 그리고 점차 경제적으로 새로운 특권계급 제도를 형성한다. 즉 지도자, 관료, 군인, 경찰 등―이들은 그 새로운 특권계급 제도에 의존하고 있으며, 때문에 그것을 지지해 “원칙”이나 “정의正義”는 전혀 신경 쓰지 않고 특권계급을 그 밖의 모든 것으로부터 방어할 준비가 되어 있다. 그것은 도처에 불평등의 씨앗을 뿌려 곧 모든 사회기구를 감염시키는데, 그 결과 사회기구는 그러한 감염과 싸우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느낄 정도로 점점 더 수동적으로 변하고 새로운 모습으로 부르주아적 원칙으로 복귀하는 데 호의를 가지게 된다.

3. 모든 권력은 사회생활의 고삐를 휘어잡아 손에 쥐고자 한다. 그것은 대중을 수동적 경향으로 밀어붙이고, 모든 주도적인 정신은 권력이 행사되는 범위 내에서는 권력의 존재 자체에 의해 억압된다.

원칙적으로 모든 것을 자신의 손에 휘어잡은 “공산주의” 권력은 이 점에 있어서 진정 함정이었다. 자신의 “권위”로 부풀어 올라 거짓 “책임감”에 충만해(마음속 깊이, 스스로에게 그것을 부여했다) 있고 모든 독립적 활동을 두려워하는 것이다. 공산주의 권력의 눈에는 자율적 주도권은 무엇이든 즉시 의심스럽고 위협적으로 보이기에 그러한 활동을 위축시키고 저지하고자 한다. 공산주의 권력은 운전대를 손에 쥐고 싶어 하고, 나아가 홀로 그것을 잡기를 원하기 때문이다. 다른 사람의 주도권은 공산주의 권력에게 자신의 영토와 특권에 대한 침략으로 보인다. 그러한 독립적인 활동을 이 권력은 지지할 수 없다. 그리고 그것은 무시되고, 거부되고, 짓밟히고, 혹은 가증스럽고 무자비한 “논리”와 고집으로 신중하게 감시되고 통제되는 것이다.

따라서 대중 속에 잠재된 방대하고 신선한 창조력은 사용되지 않고 남아 있다. 이것은 사상의 분야만큼이나 행동 분야에도 적용된다. 사상 분야에서 “공산주의” 권력은 절대적인 편협함으로 도처에서 구별되었는데, 이는 신성하신 종교재판 정도나 되어야 비교가 가능할 것이다. 왜냐하면, 한편으로 이 권력도 진실과 안전의 유일한 후계자라고 스스로 여기고, 어떠한 반대도, 또 자신과 다른 어떠한 개념이나 사고방식도 승인하거나 용납하지 않기 때문이다.

4. 어떤 정치 권력도 혁명의 거대한 건설적 문제를 효과적으로 해결할 수 없다. 이 거대한 임무를 이어받아 그것을 수행하는 척했던 “공산주의” 권력은 이 점에서 특히 무능하다는 것을 증명했다. 사실 그것의 허위는 수백만 인간의 무한히 다양하고 방대한 활동을 전부 “지도”하고자 하는 욕구와 그럴 수 있는 위치에 서는 것으로 구성되었다. 이를 성공시키기 위해서는 모든 것을 감독하고, 정리하고, 조직하고, 지도할 수 있어야만, 즉 생활의 모든 면을 감시해야만 했다. 그것은 무수한 필요, 관심사, 활동, 상황, 결합에 대한 문제다―그렇기에 온갖 종류의 문제가 지속적으로 움직이고 있다.

이내 나아갈 방향을 알지 못하고 권력은 어떤 것도 감시하거나 정리하거나 “지도”하거나 하는 것을 멈추고, 무엇보다도 먼저 러시아의 혼란스러운 경제생활을 효과적으로 조직하는 데 절대적으로 무력하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이것은 빠르게 붕괴되었다. 그것은 완전히 길을 잃고 붕괴한 제도의 폐허와 새로 선포된 제도의 무력함 사이에서 무질서하게 허우적대고 있었다.

이러한 상황 아래 러시아의 “공산주의” 권력의 무력함은 얼마 가지 않아 경제 붕괴로 이어졌다. 이는 산업 활동의 중단, 농업의 파멸, 국내 경제 각종 분야 사이의 전체적 결합의 파괴, 모든 경제적, 사회적 균형의 파괴를 의미했다.

그 결과 필연적으로 우선 농민과 관련된 제약적 정책이 생겨났다. 농민은 만사를 제쳐놓고 도시들을 먹여 살리도록 강요받았다. 그러나 그 방법은 농민들의 소극적 저항에 의해 빈곤이 전국을 휩쓸어 효과가 없었다. 노동, 생산, 운송 및 교환이 무질서하고 혼란스러운 상태에 빠졌다.

5. 국내 경제생활을 견딜 만한 수준으로 유지하기 위해 권력은 최종적으로 제약과 폭력, 테러를 대리인으로 삼았다. 권력은 점점 더 광범위하고 체계적으로 이것들에 의지해 갔다. 하지만 국내는 기근의 경지에 이르기까지 극심한 궁핍에 계속 허우적거리고 있었다.

6. 건강한 경제생활을 확립하지 못하는 권력의 명백한 무력함과 혁명의 명백한 무효, 이 상태에서 야기되는 수백만 개인들의 신체적, 정신적 고통, 날이 갈수록 억압과 강제를 증가시키는 폭력―이런 것들이 사람들을 피폐하게 하고 혐오하게 하여 혁명에 적대적이게 하고, 따라서 반혁명적 사상과 운동을 재발하도록 만든 본질적인 요인들이다. 이러한 상태는 매우 많은 중립적 또는 무관심한 사람들―지금까지 분명한 태도를 보류하고 있으나 그럭저럭 혁명에 호의적이었던 이들―이 혁명에 대해 단호히 반대 입장을 취하도록 부추겼다. 그리고 마침내 권력은 자신들 편에 선 이들의 신뢰까지도 죽여버렸다.

7. 이와 같은 상황은 혁명의 전진을 우회시킬 뿐만 아니라 혁명을 방어하는 일마저 위태롭게 한다.

활동적인 사회 조직(노동조합, 협동조합, 협회, 연합 등)을 활발하고, 살아있고, 건강하게 조율하고 반동의 위험(이러한 상황에서는 상대적으로 온건한)에 맞서 자신의 경제적 발전을 확보하게 하는 대신 재앙적인 국가주의자의 행동이 개시된 한두 달 뒤에 다시금 소수의 출세주의자와 모험주의자들이 등장한다. 그들은 자신들의 손으로 이미 망가뜨려 불모로 만들어 놓은 혁명을 “정당화”할 수도 확실히 강화할 수도 없다. 이제 그들은 점점 증대해 가는 적에 대해 자기 자신(및 파르티잔)을 방어해야만 한다. 적의 출현과 발전해 나가는 활동은 첫째로 그들 자신의 실패에 기인한다. 따라서 점차 스스로를 견고히 해나가는 사회혁명을 자연스럽게 용이하게 방어하지 않고 이처럼 패배한 권력이 때로는 가장 잔인한 자기 자신의 삶을 무슨 수를 써서라도 방어하려고 몸부림치는 당혹스러운 광경을 다시 한번 목격한다.

이러한 거짓 방어는 위로부터 자연스럽게 조직되는데, 이미 “증명된” 낡아빠진 정치적 및 군사적 방법, 즉 정부에 의한 인민의 절대적 통제, 맹목적으로 훈련된 정규군의 편제, 전문적인 경찰 조직과 광신적인 전문 기구의 창설, 언론, 출판, 집회 그리고 특히 행동의 억압, 압박과 공포체제의 개시 등의 도움으로 행해졌다.

전적으로 복종하는 세력을 손에 넣는 데는 개인을 훈련하고 잔인하게 만드는 것이 요구된다. 온갖 사건이 발생하고 있는 비정상 상태 아래에서는 이러한 절차들이 모두 급속하게 폭력과 전제주의적 양상을 띤다. 혁명의 붕괴는 빠르게 이어진다.

8. 파산한 “혁명적 권력”은 필연적으로 “우파”의 적들뿐만 아니라 좌파의 적들, 발목을 삔 진정한 혁명 사상을 지지하는 사람들, 그것을 위해 싸우고 방어에 나서는 사람들까지도 맞서게 된다. 이들은 진정한 혁명의 이익을 위해 권력을 공격한다.

그러나 권력은 지배와 권위와 특권의 독을 맛보고, 자신이 “프롤레타리아트”의 이름으로 행동할 수 있는 유일의 정당한 혁명세력이라고 착각하고 세계를 설득하려 하며, 자신이 혁명에 대해 “의무”와 “책임”을 지고 있다고 믿으며, 피하지 못할 그릇된 생각에서 혁명의 운명을 자신의 운명과 혼동하고, 자기 행동의 모든 가식적인 변명과 정당화를 발견하고, 자신의 패배도 소멸도 인정할 수 없으며 인정하려고 하지도 않는다. 반대로 잘못을 느끼고 위협을 받고 있다고 믿을수록 권력은 자신을 방어하기 위해 격렬하게 나아간다. 권력은 어떠한 희생을 치르더라도 그 상황의 주인으로 남고자 한다. 권력은 지금도, 그리고 언제나 “사태를 바로잡기”를 바라기조차 한다.

권력은 어떻게 해서라도, 요컨대 자신을 존속시켜야 한다는 것을 완벽하게 인식하고 있기에 더 이상 적을 구별하지 않는다. 그것은 더 이상 자신의 적과 혁명의 적을 구별하지 않는다. 점점 자기보존의 단순한 본능에 이끌려 더 이상 물러설 수 없이 맹목과 무분별의 도를 강화해 모든 방면에서 좌파도 우파도 공격하기 시작한다. 권력은 자신과 함께하지 않는 모든 이들을 구별 없이 공격한다. 자신의 운명에 겁을 낸 권력은 미래의 가장 좋은 세력을 파괴한다. 그것은 다시 한번 필연적으로 일어선 혁명운동을 억압한다. 그것은 사회혁명의 깃발을 다시 들려고 했다는 죄목으로 혁명가와 단순한 노동자를 집단으로 억압한다.

따라서 근본적으로 무능하며 단지 공포 때문에 강력하게 이 같은 행동으로 나오는 권력은 제 손을 감추어 기만하고, 거짓말하고 비방을 할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권력은 노골적으로 혁명을 파괴하지는 않고 적어도 자신에 대한 외국의 신망을 손상하지 않도록 해두는 편이 좋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9. 하지만 혁명을 분쇄하는 동안 그것에 의지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또한 허공에 매달린 상태로 총검과 위태로운 무력에 지탱되어 있는 것도 불가능하다. 따라서 혁명을 목 졸라 죽일 때 권력은 점점 더 확실히, 견고히, 편의상 권력에 기생해 관계하기를 원하는 반동적, 부르주아적 분자의 원조와 지원으로 자신을 보증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권력은 발밑에서 땅이 허물어져 가는 것을 느끼고 점점 대중과 멀어져 혁명과의 마지막 유대도 끊어버리고 크고 작은 독재자, 추종자, 아첨꾼, 출세주의자, 기생충들로 이루어진 특권계급을 만들었으나 새로운 세력을 거부하고 파괴한 뒤 진정으로 혁명적이고 긍정적인 어떠한 일도 해낼 만한 힘이 없기에 자신을 공고히 해 반혁명 세력과 교섭해야만 하는 것이다. 권력이 점점, 그리고 더 자주 기꺼이 구하고자 하는 것은 반혁명 세력과의 교제다. 권력은 그들과 함께 후퇴한다. 그 이외에 자신의 명맥을 확보할 길은 없는 것이다. 대중의 우정을 잃은 권력은 새로이 공감해 줄 이들을 얻고자 한다. 권력은 언젠가는 새로 공감해주는 이들을 배반할 수 있기를 바란다. 그러나 그러는 동안 시간이 지날수록 반혁명적, 반사회적 활동에 더욱 빠져들고 만다.

혁명은 더욱더 정력적으로 권력을 공격한다. 그리고 권력은 더욱 격렬한 분노와 함께 자신이 생각해낸 무기와 권력이 만들어낸 노력의 도움으로 혁명에 맞선다. 혁명은 이내 이 불균형의 투쟁에서 완전히 패배한다. 그것은 죽음과 붕괴의 지점에 있다. 고뇌는 시체와 같이 움직이지 않는 것으로 끝난다. 경사의 밑바닥까지 굴러떨어진 것이다. 여기에 심연이 있다. 혁명은 그날을 맞이하고 말았다. 반동이 승리한 것이다―무시무시하게 과장된, 오만하고 야만스러운 짐승과 같이.

이와 같은 사실과 그 설득력 없는 논리를 이해하지 못한 사람들은 러시아혁명에 대해 아무것도 이해했다고 할 수 없다. 이것이 어째서 바로 모든 맹목적인 이들, “레닌주의자”, “트로츠키주의자”와 같은 유의 모든 사람이 러시아혁명과 볼셰비즘의 파탄―그들이 부득이하게 인정하고 있는 파탄―을 그럴듯하게 설명할 수 없는지에 대한 이유이기도 하다(여기서는 서유럽의 “공산주의자”들을 두고 하는 말이 아니다. 그들은 눈을 감고 모르는 척하고자 한다).

러시아혁명에 대해 아무것도 이해하지 못하면서 그들은 같은 잘못을 되풀이하려 하고 있다. 정부, 권력의 승리, (“노동자와 농민”의!)정부, 국가(“사회주의”), (“프롤레타리아트”)독재―어리석고 진부하며, 죄 많은 모순이자, 역겹고 말도 안 되는 소리다! 악취가 코를 찌르는 이 시체를 부활시켜 권력은 다시금 노동대중을 이 구역질 나는 게임에 끌어넣을 것이다. 그것은 폐허와 부패 가운데 성장하는 또 다른 히틀러를 탄생시킬 뿐이다. 그리고 다시 한번 “그 빛은 세상에서 꺼지게 될 것이다”.

여기서 상황의 여러 요소를 간추려보자.

“혁명”정부(“사회주의” 또는 “공산주의”)가 세워진다. 당연히 그것은 자력으로 완전하고 완벽한 권력을 잡고자 한다. 그것은 지배권이다(그 이외에 무슨 목적을 바라겠는가?).

지배자와 피지배자 사이에 최초의 불일치가 발생하는 것은 시간문제일 뿐이다. 그 정부가 그 어떤 것이라 하더라도 대혁명의 문제를 해결하는 데는 무력하지만, 그럼에도 모든 것에 권력을 가지고 모든 것을 독점하고 주도권과 사실과 행동의 책임을 유지하고자 하는 데서, 그렇기에 필연적으로 이 불일치를 조장한다. 이 불일치는 항상 지배자에게 유리한데, 그들은 당장 자신의 권위를 온갖 방법으로 강요한다. 그리고 이후에 모든 주도권이 필연적으로 이들 지배자 쪽으로 옮겨지는데, 그들은 조금씩 피지배자의 주인이 되어 간다.

그렇게 함으로써 그 무능과 부적합함과 자질 없음에도 불구하고 “주인”이 권력을 고수하게 된다. 반대로 그들은 자신을 혁명의 유일한 후계자라고 믿고 있다. “레닌(또는 스탈린)은 히틀러처럼 항상 옳다.” … “노동자들이여, 당신들의 지도자에게 복종하라! 그들은 지금 무엇을 해야 할 것인지 알고 있고 당신을 위해 일하고 있다.” … “만국의 프롤레타리아여, 단결하라!(“우리가 더 잘 명령할 수 있도록”).” 그러나 이 슬로건의 마지막 부분은 “노동자의 당”의 “온화한 지도자”의 입으로 결코 소리 내어 말하지는 않는다.

이렇게 하여 조금씩 지배자는 국가의 절대적인 주인이 되어 간다. 그들은 자신들을 기반으로 하는 특권계급을 만들어낸다. 그들은 그들을 지탱할 수 있는 군대를 조직하고, 모든 반대와 모든 모순, 독립적 자주성에 맞서 철저히 스스로를 방어한다. 모든 것을 독점하고 국가의 모든 생활과 활동을 장악한다. 그리고 달리 행동할 방법이 없기에 그들은 억압하고, 복종시키고, 노예로 만들고, 착취한다. 그들은 모든 저항을 억압한다. 그들은 혁명의 이름으로 자신의 의지에 따르지 않는 모든 이들을 박해하고 추방한다.

그들은 자신을 정당화하기 위해 거짓말을 하고, 속이고, 비방한다.

진실을 억누르기 위해 그들은 야만적으로 된다. 그들은 감옥과 유형지를 가득 채운다. 그들은 고문하고, 살해하고, 처형하고, 암살한다.

이것이 러시아혁명에서 정확히, 그리고 불가피하게 일어난 일이다.

일단 권력을 튼튼히 정착시킨 후 절대군주인 볼셰비키는 자신의 관료, 군대, 경찰을 편성하고, 돈을 만들고, “노동자”라는 이름의 국가를 새로 건설하고 혁명의 모든 운명을 완전히 자신의 손에 거머쥐었다. 서서히―선동적 선전과 강제와 억압의 힘들을 증대시키기까지―정부는 언론과 사상을 포함한 모든 것을 국유화하고 독점했다.

경지耕地, 모든 토지를 소유하는 것은 국가―그러니까 정부―였다. 국가는 진짜 지주가 되었다. 농민은 집단적으로 점차, 처음에는 국가의 농민이 되고 나중에는 앞으로 보게 되듯이 정말 농노가 되어버렸다. 작업장이나 공장, 광산―요컨대 생산, 수송, 교환의 모든 수단―을 몰수한 것은 정부였고, 마침내는 정부가 국가의 신문이나 그 밖의 사상을 전파하는 다른 모든 기관의 유일한 주인이 되어버렸다. 출판물,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연방에서 인쇄된 것은 모두―명함에 이르기까지 국가에 의해 생산되거나 혹은 적어도 엄중히 통제된다.

간단히 말해서 국가―그러니까 볼셰비키 정부―는 마침내 러시아 영토 내의 모든 것의 정말 유일한 저장소이고, 모든 물질적, 정신적인 사물의 소유자이고, 말단에 이르기까지 모든, 국가의 모든 생활의 유일한 지도자이자 조직자이자 선동가였다.

1억5천만의 “주민들”은 점차 단순히 정부의 명령을 이행하는 사람들, 정부와 그 무수한 대변자의 도피할 수 없는 노예로 변해갔다. “노동자들이여, 당신들의 지도자에게 복종하라!”

소비에트에서 비롯해 가장 작은 세포에 이르기까지 모든 경제적, 사회적 기타의 조직은 정부가 경영하는 한갓 행정기관이 되고, 결과적으로 일종의 “국가적 착취 협동조합”을 형성했다. 그것은 완전히 “중앙행정 협의회”(정부)에 종속되어 정부의 대리인(관리와 비밀경찰)에 의해 밀접하게 감시되어 표면적 독립조차 박탈된 기관이었다.

12년 전에 완성된 이 진화의 진정하고 상세한 역사―전 세계를 통틀어 독특한 경이적인 역사―는 그것만으로도 한 권의 책이 될 만하다. 그렇기에 우리는 몇 가지 빼놓을 수 없는 사항을 하나씩 살펴보겠다.

독자 여러분은 이미 불가피하게 반대 운동을 자극하여 볼셰비키의 방식으로 혁명을 내다보지 않고 혁명을 방어하고 혁명이 급속히 진전할 수 있도록 노력한 좌파들에 의해 혁명의 질식과 그에 따른 비참한 필연적 결과가 지적되었음을 알고 있을 것이다. 이들의 줄기찬 운동 중 가장 중요한 것은 《사회주의혁명당》 좌파와 아나키스트 사이에서 성장했다.

《사회주의혁명당》 좌파의 반란은 적인 정치적, 국가주의적 당에 대한 반란이었다. 공산당과의 차이점 및 볼셰비키혁명의 비참한 결과로 나온 《사회주의혁명당》 좌파의 환멸은 마침내 그들을 볼셰비키에 반대하지 않을 수 없게 만들었다. 사회혁명당 좌파는 잠시 동안 레닌의 당과 협력했으나 정부에서 탈퇴하도록 강요받으며 점차 반反정부에의 폭력적인 투쟁을 시작했다. 반反볼셰비키 선전과 봉기 시도, 테러가 행해졌다.

《사회주의혁명당》 좌파는 레온체프스키Leontievsky가街에서 벌어진 유명한 암살사건에 참가했다. 그리고 그들은 우크라이나에서 독일 장군 아이히호른(Hermann Emil Gottfried von Eichhorn)과 모스크바에서 독일 대사 미르바흐(Wilhelm von Mirbach)의 암살―볼셰비키 정부와 독일 정부의 거래에 반대하는 두 가지 폭력적인 시위―을 조직했다. 그 후 그들은 몇몇 지방의 봉기를 선동했으나 이내 빠르게 진압되었다. 그 투쟁에서 그들은 가장 좋은 세력 일부를 희생했다.

그들의 지도자 마리아 스피리도노바, B. 캄코프(Boris Davidovich Kamkov), A. A. 카렐린(Apollon Andreevich Karelin) 등은 몇몇 익명의 무장 세력과 함께 이러한 사건에서 매우 용감히 행동했다. 그러나 설혹 《사회주의혁명당》 좌파가 권력을 장악했다 하더라도 그들의 행동은 결국 볼셰비키당의 행동과 완전히 동일했을 것이다. 동일한 정치체제가 피할 수 없이 같은 결과를 낳았을 테니 말이다.

근본적으로 《사회주의혁명당》 좌파는 공산당의 헤게모니와 독점에 반대해 일어섰다. 그들은 권력이 단일한 정당에 의해 독점되는 대신 둘 또는 그 이상의 정당에 의해 평등하게 분담된다면 모든 것이 최선으로 이루어질 것이라고 주장했다. 사물의 성격상, 이는 명백한 오류였다.

볼셰비즘이 파탄한 이유를 이해하고 그에 대해 싸우기로 결정한 노동대중의 활동적인 분자들은 이를 잘 알고 있었다. 그들은 극히 한정된 방법으로밖에 《사회주의혁명당》 좌파를 지지하지 않았다. 그들의 저항은 빠르게 격파되었고, 러시아에 어떠한 반향도 불러일으키지 못했다.

그러나 아나키스트의 저항은 당장 무서운 탄압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훨씬 광범위한 지역으로 확대되었다. 색다른 혁명사상의 실현을 목표로 도처에서 사건의 과정에서 중요한 지위를 획득했으며, 이 투쟁과 변화는 모든 독자에게 주목할 만한 가치가 있을 것이다.

한편으로는 볼셰비키에 의해 의도적으로 왜곡되고, 나중에는 억압되었으며, 다른 한편으로는 중요한 사건에서 빠져 있는 이 서사시가(흥미를 느끼고 있는 사람들을 제외하고) 널리 일반적으로는 물론 다소나마 러시아혁명을 연구하고 있는 사람들에게마저도 알려지지 않은 채 남아 있다는 것을 덧붙여 두어야하겠다. 그 중요성에도 불구하고 그것은 그들의 조사연구나 자료 바깥에 남아 있다. 인류 역사 가운데 아나키즘처럼 왜곡되고 중상모략을 받아온 사상은 없다고 봐도 될 것이다.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아나키즘에 관심조차 없다. 그들은 모든 정부에 의해 “공공의 제1의 적”이라고 간주되어 왔으나, 도처에서 유별나게 악의에 찬 방식으로 소개되고 있는 “아나키스트”를 특히 공격한다. 가장 좋은 경우에도 그들은 “원래 미친”, “반쯤 미친” 미치광이라고 비난받는다. 또 더 자주 “도적”, “범죄자”, 지각없는 테러리스트, 무차별 폭탄투척자로 묘사된다. 확실히 아나키스트 중에는 테러리스트가 있었고 지금도 있지만, 다른 정치, 사회조직 혹은 그러한 경향의 추종자 중에도 테러리스트가 있는 것과 다를 바가 없다. 그러나 대중이 아나키즘에 흥미를 느끼고 그것을 이해하도록 용인한다는 것은 너무나 유혹적이고 위험하다고 보는 데서, 엄밀히 말해 모든 나라의 각종 의견을 달리하는 모든 정부가 아나키스트 테러리스트에 의한 아나키즘 자체의 이름을 더럽히는 폭력행위에서 이득을 보고 있다. 그리고 그들은 이들 테러리스트의 얼굴에 진흙 칠을 할 뿐만 아니라 그들의 수단이 어떠한 것이든 모든 투쟁을 함께 더럽히고 있는 것이다.

아나키스트 사상가나 이론가는 가장 자주 “공상가”, “무책임한 몽상가”, “추상적 철학자”, “몰상식한 사람” 등으로 취급되는데, 아나키즘이 “추종자”들에 의해 해석되는 것은 위험하다고 취급된다. 또 “신비주의자”라고 불리는 경우도 있는데, 이 경우 그 사상은 아름답지만 현실의 생활 혹은 살아있는 사람과 전혀 상관이 없다고 이야기된다(부르주아 측에서는 자본주의 체제가 안정적이고 “현실적”인 것이며, 사회주의 측에서는 권위주의적 사회주의 사상이 공상적인 것이 아니라고 주장한다. 부르주아지에 의해 수백 년간 쌓이고 쌓인 무어라 해석할 수조차 없는 무질서와 사회적 불행에도 불구하고, 그리고 권위주의적 사회주의 사상에 의해 반세기 동안 “수행된” 잊을 수 없는 파탄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걸핏하면 그들은 아나키즘을 조롱하려 들었다. 그들은 아나키즘이란 “모든 사회와 모든 조직을 포기하고”, 때문에 “모든 인간이 제멋대로 할 수 있는” 시스템이라고 무지한 대중들에게 믿게 하고자 애쓰고 있지 않은가? 또 그들은 오늘날까지 시험되어 온 모든 비非아나키즘 제도 현실의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혼란을 눈앞에 보면서도 아나키가 무질서와 동의어라고 말하지 않는가?

아나키즘에 대한 정책은 너무 완전무결해서 그것을 포섭하기(사회주의에 대해서는 매우 효과적인 기술)가 불가능하며, 또 아나키즘이 온갖 “정치적” 활동을 배제한다는 점을 생각하면, 아나키즘에 대한 정책을 저절로 나오는 것이다. 즉 아나키즘이 출현하는 곳이면 어디서나 제기되는 불신과 공포와 일반적인 적대―또는 적어도 냉담과 무시와 뿌리 깊은 몰이해―다. 이와 같은 상황은 아나키즘을 오랫동안 고립시키고 무력하게 만들었다. 그러나 얼마 가지 않아 서서히 사건과 선전에 힘입어 여론은 아나키즘과 아나키스트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속임수가 드러나기 시작한 것이다. 아마도 방대한 대중이 아나키즘을 이해하고 박해받고 있는 사상에 대한 흥미가 점차 늘어나, 자연스러운 심리적 반감에 따라 “사기꾼들”(“교수형 집행인”이라고 써도 좋다)[12]에 대해 적대할 날도 머지않았을 것이다.

(스페인 내전 중 언론이 공표하지 않을 수 없었던 고백과 진실은 벌써 다소 잘 알려져 있는 그 밖의 사실과 마찬가지로 유익한 효과를 내 아나키즘이 뿌리 내리는 데 도움이 되었다.)

러시아혁명에 관해서 말하자면, 아나키스트에 대한 볼셰비키 정부의 태도는 사기, 중상모략, 억압이라는 점에 있어 과거의 어떠한, 또한 현재의 어떠한 정부의 그것도 훨씬 능가하는 것이었다. 아나키즘이 혁명 중에 연출한 역할과 러시아에서 마주한 운명은, 통례적으로 억눌려 왔음에도 불구하고 반드시 널리 알려지게 될 것이다. 꽤 오랜 기간 동안 그 역할은 상당했기 때문에.

그간 조금씩 쌓여온 의외의 새로운 사실은 과거와 현재의 여러 사건에 새로운 빛을 던져줄 뿐만 아니라 앞으로의 과정에도 밝은 빛을 던져주고 있다. 그리고 그것들은 가까운 미래에 일어날 중요한 현상들을 예측하고 보다 잘 이해할 수 있게 해준다.

이러한 모든 이유로 독자들은 여기서 폭로되는 사실을 이해할 권리―심지어 의무이기조차 한―를 지니고 있다. 러시아혁명에서 아나키스트의 활동은 무엇이었는가? 그들의 역할과 운명은 구체적으로 무엇이었는가? 아나키스트가 제시하고 방어한 이것과 다른 혁명사상의 숙명은 무엇이며 진정한 가치는 무엇이었는가? 우리의 연구는 그 진정한 역할, 활동 그리고 볼셰비즘의 시스템에 관해 필수불가결한 세부 사항을 제시하는 것과 동시에 이러한 질문에 답할 것이다. 우리는 이 설명을 통해 독자들이 심각한 현재 및 미래의 사건들과 관련해 방향을 잡는 데 도움이 되기를 바란다.

돌이킬 수 없을 만큼 뒤떨어지고 극도로 허약함에도 불구하고, 또 모든 종류의 장애물과 어려움, 그리고 마지막으로 그들이 대상이 되었던 포괄적이고 견딜 수 없는 억압에도 불구하고, 아나키스트는 여기저기서, 특히 1917년 10월 이후 활기차고 깊은 공감을 얻어낼 수 있었다. 그들의 사상은 특정 지역에서 신속한 성공을 거두었다. 그리고 그들의 수는 여러 가지 사건으로 그들에게 가해진 무거운 희생에도 불구하고 빠르게 증가했다.

혁명 과정에서 아나키스트의 활동은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했다. 첫째로 그것은 현저한 효과를 올렸다. 대중의 눈에 다소 신용을 잃은 볼셰비키주의자의 이론과 행동에 대해 새로운 사회혁명 사상을 대치시킨 것은 오직 그들뿐이었기 때문이다. 아나키스트는 그 사상을 힘이 미치는 대로 선전하고, 방어하고, 비인간적 박해에도 굴하지 않고 마지막까지 사심 없고 숭고한 헌신으로 몰두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마침내 아나키스트는 적의 압도적 우세인 수와 광란적인 선동과 부정행위, 그리고 유례없는 폭력에 의해 굴복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우리는 이 최초의 성공에도, 또는 그것이 성취되지 못한 데에도 전혀 놀랄 것이 없다. 한편으로는 그들의 통합된 용기와 자기희생 덕분에, 또 “내각”이나 여러 관료 가운데서가 아니라 대중의 한복판에서 끊임없이 나타나 활동한 덕분에, 또 끝으로는 당장 의심스럽게 되어 버린 볼셰비키의 행위를 보는 직면해 그들의 사상의 놀라운 활력 덕분에 아나키스트는 친구와 지지자를 발견했다―이들이 행동할 수 있었던 곳이라면 어디에서나(볼셰비키가 이 성공이 그들에게 위험하다는 것을 잘 알면서도 아나키스트의 활동과 프로파간다에 즉각적으로 종지부를 찍게 하지 않았다면, 혁명은 다른 방향으로 향하고 다른 결과를 초래했을지도 모른다고 가정해 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한편으로 사건의 출발이 늦은 것, 이 거대한 나라에서 광범위하게 서면으로 선전을 수행할 수 있는 투사의 수가 매우 한정되어 있는 것, 대중의 준비 부족, 일반적으로 불리한 조건과 박해와 상당수의 인적 손실―이러한 모든 사정이 아나키스트의 사업 확장과 연속성을 심각하게 제한했고, 볼셰비키 정권에 의한 억압행위를 용이하게 했다.

사실들을 살펴보자.

러시아에서 아나키스트는 언제나 결코 빼놓을 수 없는 인민의 해방을 목표로 한 사회혁명 사상을 대중 가운데 퍼뜨리고 있는 유일한 사람들이었다.

1905년의 혁명은 아나키스트를 제외하고 (부르주아적)“민주주의” 혹은 “차리즘을 타도하자!”, “민주공화국 만세!”와 같은 슬로건 아래 행진했다. 볼셰비즘도 그 이상 나아가지 않았다. 아나키즘은 그 당시 문제의 근원으로 이동해 대중에게 정치적 해결책의 위험성을 경고한 유일한 원칙이었다.

당시 아나키스트 세력은 민주주의 정당들에 비해 매우 약했기 때문에 아나키즘은 여기저기서 “민주주의”의 함정에 항의하는 노동자, 지식인의 작은 그룹을 중심으로 모여 있을 뿐이었다. 사실 그들의 소리는 헛되이 울려 퍼지고 있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그들은 낙담하지 않았다. 그리고 얼마 가지 않아 몇 사람의 지지자와 운동이 그들 주위에서 성장해 갔다.

1917년의 혁명은 처음에는 홍수처럼 성장하고 확산되었다. 한계를 예측하기는 어려웠다. 절대주의를 전복시키고 사람들은 “역사적 행동의 영역, 그 문을 열었다.”

정당들은 그들의 입지를 굳혀 자신을 혁명운동에 순응시키고자 노력했으나 헛수고였다. 노동자들은 확실히 그들의 적에 반대해 전진하고 “의도”를 품은 각종 정당을 차례로 내버려 두고 지나갔다. 볼셰비키―가장 철저히 조직된 당이고 권력에 가장 열성적 · 결정적 욕망을 품은―도 현실과 대중의 급속한 발전에 따라가기 위해 그들의 슬로건을 몇 번이고 거듭해 변경해야만 했다(제헌의회 만세!” 그리고 노동자의 생산관리 만세!”라는 그들의 첫 번째 슬로건을 상기해 보라).

1905년과 마찬가지로 아나키스트는 1917년에도 사회혁명의 진실하고 완전한 단 하나의 옹호자였다. 그들은 한정된 인원과 경제적 약점, 조직의 미비에도 불구하고 끊임없이 자신의 길을 지켜나갔다.

1917년 여름 동안 아나키스트는 말과 행동으로 농민운동을 지지했다. 아나키스트는 또한 10월봉기보다 훨씬 이전에 노동자가 각처에서 공장의 경영을 수용해 자율성과 노동자의 집산화를 기초로 조직화를 시도했을 때 그들과 함께 서 있었다.

아나키스트는 7월 3, 4, 5일, 크론슈타트와 페트로그라드의 노동자와 수병 운동의 전열에서 싸웠다. 페트로그라드에서는 노동자와 혁명가의 잡지를 발행하기 위해 인쇄소를 수용함으로써 모범을 보였다.

그해 여름, 볼셰비키가 부르주아지에 대해 다른 정당보다 더 대담한 태도를 취했을 때, 아나키스트는 이에 동의하고 레닌 및 다른 볼셰비키를 “독일 정부의 앞잡이”라고 부르는 부르주아 사회주의 정부의 거짓말과 맞서 싸우는 것이 그들의 혁명적 의무라고 생각했다.

아나키스트는 또한 케렌스키 연합정부(제4차 임시내각)에 대항해 1917년 10월 페트로그라드와 모스크바 등지에서 선봉에 서서 싸웠다. 다른 권력의 이름 아래서가 아니라 오로지 진정한 새 기반을 건설할 권리를 대중에게 쟁취하게 하려는 명목 아래 그들이 나아갔다는 것은 더 말할 필요도 없다. 독자가 알고 있을 여러 가지 이유로 그 사상은 실현되지 않았으나 아나키스트는 이 올바른 목적을 위해 최후까지, 더구나 홀로 싸웠던 것이다.

만일 이 점에 관해 그들을 비난할 근거가 있다면, 그것은 단지 그들 간의 합의에 도달하는 데 시간이 부족했다는 것, 대중 간 자유 조직의 기반을 만족할 만큼 제시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그들이 소수였다는 것, 결집이 매우 늦었다는 것, 그리고 특히 대중 자신에 대한 조합주의자와 아나키스트의 교육이 부재했다는 것을 고려해야만 한다는 것을 알고 있다. 이 상황을 바로잡기 위해서는 시간이 필요했다. 하지만 볼셰비키는 의도적으로 그리고 구체적으로 아나키스트나 대중 모두에게 이러한 지연을 극복할 시간을 허락하지 않았다.

페트로그라드에서는 크론슈타트의 수병이 재차 10월의 결정적 투쟁을 위해 수도로 달려와 특히 주목할 만한 역할을 했다. 그들 중에는 수많은 아나키스트가 있었다.

모스크바에서는 10월의 격렬한 싸움이 계속되는 동안 가장 위험하고 중요한 임무가 드빈치Dvintsi(드빈스크 연대the Dvinsk regiment)에게 떨어졌다. 케렌스키 휘하에서 이 연대 전체는 1917년 6월에 프로이센-오스트리아 전선의 공세에 참가하기를 거부해 투옥되었다. 크렘린에서, “메트로폴”에서, 그리고 모스크바의 다른 지역이나 훨씬 위험한 현장에서 “백군”(그 당시 카데트Kadets라고 불리고 있었다)을 제거할 필요가 있을 때 활약했던 것은 드빈치였다. 카데트가 원군을 얻어 공세를 재개했을 때, 열흘간의 전투에서 그들을 물리치기 위해 최선을 다한 것은 언제나 드빈치였다. 드빈치는 모두 스스로를 아나키스트라고 불렀으며, 그라초프(Gratchov)와 페도토프(Fedotov)라는 예부터 아나키스트인 두 사람의 지휘 아래 행동했다.

《모스크바 아나키스트 그룹 연맹The Anarchist Federation of Moscow》은 드빈스크 연대 일부와 함께 케렌스키 정부군에 맞서 싸우기 위한 행군에 앞장섰다. 프레스니아Presnia, 소콜니키Sokolniki, 자모스크보레치아Zamoskvoretchia, 모스크바 등지의 노동자는 선봉인 아나키스트 그룹들과 함께 전투에 돌입했다. 프레스니아의 노동자는 매우 용감한 투사이자 아나키스트 노동자인 니키틴(Nikitin)을 전투 중에 잃었다. 그는 언제나 반드시 최전방에 있었는데 시가전에서 전투가 끝날 무렵 치명상을 입었다. 그 외 수십 명의 아나키스트 노동자도 이 전투에서 목숨을 잃고 모스크바의 붉은 광장 공동묘지에 묻혔다.

10월혁명 이후 아나키스트는 새로운 “공산당” 권력과 사상 및 방법상 결별하기는 했으나 한결같은 인내와 헌신으로 혁명의 대의에 계속 봉사했다. 우리는 그들만이 의회의 원칙을 거부했고, 또 그들이 예견한 것처럼 의회가 혁명의 장애물이 되었을 때 그들이 그 해산을 향한 첫걸음을 내디뎠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그 후 그들은 반복되는 반동의 공격에 맞서 그들의 적들조차 인정하는 정력과 극기심으로 모든 전장에서 싸웠다. 라브르 G. 코닐로프(Lavr Georgiyevich Kornilov) 장군에 대항한 페트로그라드의 방어전에서(1917년 8월), 남부의 칼레딘 장군에 맞선 전투에서(1918년), 그 밖의 장소들에서 아나키스트는 뛰어난 역할을 했다.

헤아릴 수 없이 많은 크고 작은 파르티잔 부대가 아나키스트에 의해 편성되거나 지휘되고[마흐노(Nestor Ivanovich Makhno)의 파르티잔 부대의 중요성에 대해서는 말할 것도 없고 모크로소프(Mokrusov), 체르니악(Tcherniak), 마리아 니키포로바(Maria Nikiforova) 등] 그들의 전열에 많은 아나키스트가 포함되어 1918년에서 1920년까지 쉬지 않고 반동세력에 맞서 남부에서 싸웠다. 그리고 고립된 아나키스트는 모든 전장에서 전투원으로서 노동자 · 농민의 반란자들 틈에 끼어 전사했다.

여기저기서 아나키스트의 힘이 빠르게 성장했다. 그러나 아나키즘은 이 무서운 전쟁에서 가장 강력한 부대를 많이 잃었다. 혁명의 최종적인 승리에 강하게 기여한 이 숭고한 희생은 당시 간신히 형성되기 시작한 러시아에서의 아나키즘을 실질적으로 약화시켰다. 게다가 불행히도 아나키스트군은 반혁명군에 대한 다양한 전선에 종군했으나 이외의 지역들은 반혁명군에 의해 탈취되고 있었다. 그러는 동안 아나키스트의 활동과 선전은 현저히 고통을 받게 되었다.

특히 1919년, 데니킨(Anton Ivanovich Denikin) 장군이 이끄는 반혁명군이, 그리고 이후 브란겔(Pyotr Nikolayevich Wrangel) 장군이 이끄는 반혁명군이 아나키스트의 전열을 지금껏 이상으로 침공해 왔다. 왜냐하면 “백군”의 패배에 주로 공헌한 것은 아나키스트들이었기 때문이다. 백군은 북부에 있는 적군赤軍에게는 싸움을 걸지 않고, 그 주력을 《마흐노우슈치나》라 불리는 파르티잔 군, 즉 반란농민에 의한 남부의 우크라이나에 싸움을 걸어왔던 것이다. 《마흐노우슈치나》에는 자유의지주의적 사상이 강하게 뿌리내려 있었고 아나키스트인 네스토르 마흐노(Nestor Ivanovych Makhno)에 의해 인솔되고 있었다. 그리고 혁명가 조직으로서는 남부의 자유의지주의 조직만이 데니킨과 브란겔에 대항해 《마흐노우슈치나》 대열에서 싸운 유일한 이들이었다.

아래는 이에 대한 통렬한 세부 사항이다. 남부에서 일시적으로 행동의 자유를 얻은 아나키스트가 영웅적으로 혁명을 방어하고 목숨을 바쳤지만, 사실 그 행동 덕분에 구원받은 “소비에트” 정부는 나라의 다른 지역에서는 자유의지주의 운동을 맹렬하게 억압하고 있었다. 그리고 독자가 앞으로 보게 될 것처럼, 남부의 위기가 사라지자마자 그 지역의 아나키스트들에게도 억압이 떨어졌다.

마찬가지로 아나키스트는 동부 러시아와 시베리아에서 알렉산드르 콜차크(Alexander Vasilyevich Kolchak) 제독과의 전투에 대해서도 큰 역할을 했는데, 그곳에서 그들은 많은 투사와 동조자들을 잃었다.

많은 수의 자유의지주의자를 포함한 파르티잔 부대는 도처에서 정규 적군赤軍보다 훨씬 많은 일을 했으며, 도처에서 아나키스트는 사회혁명의 기본 원칙인 진정한 해방을 목표로 전진하는 노동자의 독립과 행동의 자유를 방어했다.


제3부. 아나키스트 조직들


혁명에서 아나키스트의 참여는 전투 활동에만 국한된 것은 아니었다. 그들은 또한 원하는 결과를 달성하기 위해 빼놓을 수 없는 조건으로 비非권위적 사회의 즉각적이고 진보적인 건설에 대한 그들의 사상을 노동대중 사이에 확산시키기 위해 노력했다. 이 과제를 달성하기 위해 그들은 자유의지주의적 조직들을 창설하고, 그들의 원칙을 완전히 제시하고, 가능한 한 실천에 옮기고, 기관지와 문건을 출판하고 유포했다.

당시 가장 활동적이었던 아나키스트 조직 몇 가지를 언급해보겠다.

1. 《골로스 트루다》는 노동자의 목소리라는 의미를 지닌 아나키즘적 조합주의자의 프로파간다 연맹이다. 그것은 아나키즘적 조합주의 사상을 노동자들 사이에 전파하는 것을 목적으로 했다. 이 활동은 처음에는 1917년 여름부터 1918년 봄에 걸쳐 수행되었고, 이후 얼마 동안 모스크바에서 진행되었다. 「골로스 트루다」라는 그 기관지는 주간지로 시작해 그 후 일간지가 되었다. 그리고 이 조직은 또 아나키즘적 조합주의 출판사를 설립했다.

권력을 잡자마자 볼셰비키는 모든 방면에서 이 활동 전반, 특히 출판 작업을 방해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마침내 1918~1919년에 걸쳐 “공산주의” 정부는 프로파간다 연맹을 완전히 해산시키고 곧이어 출판사도 폐쇄했다. 모든 구성원이 투옥되거나 추방되었다.

2. 《모스크바 아나키스트 그룹 연맹The Federation of Anarchist Groups of Moscow》―이것은 비교적 큰 조직으로 1917년에서 1918년 사이에 모스크바와 그 근방에서 집중적인 선전을 수행했다. 이 조직은 아나키즘적 코뮌주의Anarcho-Communism 성향의 일간지 「아나키」를 간행했으며, 마찬가지로 자유의지주의적 출판사를 설립했다. 그리고 1918년 4월 “소비에트” 정부에 의해 퇴출되었으나 그 운동의 일부는 1921년까지 존속했는데, 그때 연방의 마지막 흔적마저 “청산”되었고 최후의 무장세력들은 “억압”되었다.

3. 《우크라이나 아나키스트 조직 총연맹 나밧The Nabat Confederation of Anarchist Organizations of the Ukraine》[13]―이 중요한 조직은 1918년 말 우크라이나에서 창설되었으며, 이때 볼셰비키는 아직 독재를 강요하지 못하고 있었다. 《나밧》은 각처에서 적극적이고 구체적인 활동으로 두각을 나타내고, 비권위주의적 형태의 사회구조를 위한 즉각적이고 직접적인 투쟁의 필요성을 선언했으며, 그 실질적 구성요소를 정교하게 하기 위해 노력했다.

아지테이션 및 극도로 정력적인 프로파간다로 중요한 역할을 한 《나밧》은 우크라이나에서 자유의지주의 사상이 확산되는 데에 크게 공헌했다. 그들의 주요한 기관지는 「나밧」이었다. 그것은 단결된 아나키스트 운동을 만들고(이론상 일종의 아나키스트 “통합synthesis”에 기반을 두고), 러시아의 모든 아나키스트 세력을 특정 경향과 관계없이 전반적 조직으로 집결하기 위해 분투했다. 그리고 《나밧》은 우크라이나에 있는 거의 모든 아나키스트 그룹을 결속하고 또 대大 러시아의 일부 단체를 병합해 범汎러시아 아나키스트 연맹도 창립하고자 노력했다.

또한 《나밧》은 중앙의 탄광지대에서도 활동을 전개하여 혁명적 파르티잔과 농민, 도시노동자들의 운동과 긴밀한 관계를 맺었으며, 이 운동의 중핵인 《마흐노우슈치나》와도 밀접한 관계를 맺었다. 그들은 모든 체제의 반동에 대항한 싸움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헤트만hetman 스코로파즈키(Pavlo Skoropadsky)[14]에 맞서고, 페틀류라(Petlura), 데니킨, 그리고리예프(Grigoriev)에 맞서서. 이러한 전투에서 그들은 가장 우수한 투사들을 거의 모두 잃게 되었다.

《나밧》은 당연히 “공산주의” 권력의 분노를 불러일으켰으나 우크라이나에 존재하는 상황 아래서 정부의 지령에 의해 거듭되는 공격에 저항할 수 있었다. 볼셰비키 당국에 의한 최종적이고 완전한 숙청은 1920년 말에 이루어졌으며, 그 투사 중 몇몇은 형식상의 재판조차 없이 총살되었다.

상당히 큰 규모의, 그리고 다소 광범위한 활동을 했던 이들 세 조직을 제외하고, 그 밖에 덜 중요한 조직들이 존재했다. 1917년과 1918년에는 러시아의 거의 모든 지역에서 아나키스트 단체, 운동, 조류가 생겨났는데, 일반적으로는 별로 중요하지 않고 일시적인 것들이긴 했으나 도처에서 꽤 활발히 행동했다―이들 중 일부는 독립적으로, 다른 일부는 위에서 인용한 세 조직 중 어느 곳과 협력하고 있었다.

원칙과 전술의 일부 상이함에도 불구하고 이 모든 운동은 근본적인 점에서 동의하고 있고, 힘과 기회가 있는 한 혁명과 아나키즘에 대한 의무를 수행하며 노동대중 가운데 진정으로 새로운 사회조직―반권위주의와 연방주의의 씨앗을 뿌렸다.

그리고 결국 이들 모두는 같은 운명, 즉 “소비에트” 권위에 의한 잔인한 탄압에 마주쳤다.


제4부. 러시아혁명에서의 알려지지 않은 아나키스트 출판물


우리는 앞서 《아나키즘적 조합주의자 프로파간다 연맹》의 기관지 「골로스 트루다」의 사설을 인용해 볼셰비키에 의한 권력 장악과 브레스트-리토프스크 평화협정 및 제헌의회에 대한 그 조직의 태도를 제시했다.

이에 더해 다른 인용문을 첨가하는 것이 볼셰비키와 아나키스트 간의 여러 불일치 지점의 상세한 내용을 독자들에게 보여주고, 혁명의 문제에 관한 아나키스트의 입장과 마지막으로 두 사상의 정신을 명확히 하는 데에 적절할 것이다.

혁명 기간 동안 러시아의 아나키스트 출판물은 러시아 바깥에는 실질적으로 알려지지 않았기에[15] 이 인용문 중 몇 가지는 많은 독자에게 독특한 발견을 제공할 것이다.

「골로스 트루다」는 혁명이 발발한 지 5개월 반 뒤인 1917년 8월 11일에 처음 창간되었는데, 이는 벌써 돌이킬 수 없는 지연이었다. 그럼에도 동지들은 정력적으로 일에 착수했다. 그 과업은 험난했는데, 볼셰비키당이 이미 대다수 노동 대중을 획득했기 때문이었다. 볼셰비키의 활동과 영향력에 비해 프로파간다 연맹과 그들의 새 주간지는 거의 무의미할 정도였다. 그 일은 천천히 그리고 어려움과 함께 진행되었다. 페트로그라드의 공장에는 그 일을 하기 위한 여지가 거의 없었다. 그곳의 모든 사람은 볼셰비키당을 따르고 있으며 그들의 신문을 읽고 그들의 해석만을 보았다. 아무도 전혀 알려지지 않은 조직이나 낯선 곳에서 논의되고 있는 “별난” 사상에 주의를 기울이지 않았다.

그러나 《아나키즘적 조합주의자 연맹》은 재빨리 어느 정도 영향력을 획득했다. 곧 그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그들의 모임은 빠르게 페트로그라드와 그 근교―즉 크론슈타트나 오부코프Oboukhov, 콜핀Kolpin 등에서 상당히 강력한 단체를 만드는 데 성공했다. 주간지도 성공적이었다. 그 발행 부수는 온갖 장애물에도 불구하고 지방에서조차 계속 증가했다.

기존의 조건 아래서 연맹의 주된 일은 자신을 알리기 위해서, 또 노동대중의 주의를 다른 사회적 조류에 대한 사상과 태도로 끌어들이기 위해 선전을 강화하는 것이었다. 이 작업은 주로 정기간행물, 구두 선전으로 이루어져 있었는데 수단이 부족해 매우 한정되어 있었다.

이 조직의 아주 짧은 수명은 세 가지 기간으로 구분할 수 있다. 1. 10월혁명 이전, 2. 이 제2혁명 기간, 3. 그 이후.

첫 번째 시기에 연맹은 일제히 당시의 정부(케렌스키 정부)와 정치혁명의 위험(모든 것이 한 점에 수렴되는 것처럼 보였다)에 반대해 조합주의와 자유의지주의적 기반을 지닌 새로운 사회의 조직을 위해 싸웠다. 「골로스 트루다」의 각호에는 아나키즘적 조합주의자가 장차 다가올 혁명의 건설적인 임무를 구상하는 방식에 대한 명료하고 확실한 기사들이 실려 있었다. 예를 들어 공장위원회의 역할에 관한 일련의 기사가 있었는데, 소비에트의 과업 및 농업문제를 해결하는 방법이나, 그리고 다른 편으로 새로운 생산조직 및 교환에 관한 기사 등이었다.

몇 가지 기사 가운데―그리고 특히 논설 가운데―신문은 진정한 해방 혁명이 무엇이어야 하는지를 아나키즘적 조합주의자의 입장에서 노동자들에게 구체적인 방식으로 설명했다.

따라서 창간호[16]의 〈혁명의 막다른 골목The impasses of the Revolution〉이라는 제목의 사설에서 「골로스 트루다」는 그 반란의 발전을 검토해 1917년 8월에 통과한 위기를 분석한 후, 이전까지의 사회주의적 저작자들과는 전혀 유사하지 않은 방식으로 미래의 혁명적 활동을 구상했다고 선언했다. 「골로스 트루다」는 볼셰비키나 멘셰비키, 혹은 사회혁명당 좌파나 사회혁명당 우파와 같은 다양한 정당 및 파벌의 “계획”이나 “전술”에 강하게 반대한다고 말했다.

(기자는 선언했다.) 만일 우리가 혁명의 첫날과 몇 주 동안, 즉 자유로운 출발점, 그 웅장한 전개와 열정적이고 무한한 열망에 대해 더 일찍 목소리를 높였더라면, 우리는 그 첫 순간부터 사회주의 정당이 지금껏 예상해 오던 것과는 전혀 다른 방법과 행동을 제안하고 방어했을 것이다. 우리는 볼셰비키, 멘셰비키, 사회혁명당 좌파, 사회혁명당 우파 등 모든 정당과 파벌의 “계획”과 “전술”에 강력히 반대한다. 우리는 혁명을 위한 다른 목표를 지적했을 것이다. 그리고 우리는 힘써 일하고 있는 대중들에게 다른 과업을 제안했을 것이다.

외국에서의 우리의 오랜 작업은 사회혁명과 그 과정에 대한 완전히 다른 일련의 사상의 선전에 바쳐졌다. 아아, 우리의 사상이 경찰의 장벽에 가로막혀 타국으로부터 단절된 러시아에 침투하지 못했음은 얼마나 유감스러운 일인가. 오늘 우리의 힘은 이곳에 점점 집결하고 있다. 그리고 우리는 우리 자신의 땅―지금 이 자유의 땅에서 즉시 이 일을 수행하는 것을 우리의 첫 번째 의무, 우리의 가장 신성한 의무로 여긴다. 우리는 노동대중을 위한 새 지평을 열어야 하고, 그들이 추구하는 것에 도움을 주어야만 한다.

「골로스 트루다」는 당시 혁명이 일시적으로 난국에 빠져든 반면, 러시아의 대중은 서투른 명상에 빠진 듯 잠들어 있는 것을 보았다. 그리고 이 명상이 쓸모없게 되지 않기 위한 행동이 있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휴식은 새로운 혁명의 물결이 더욱 준비가 갖추어진 뒤 달성해야 할 목표를 보다 확실하게 인식한 대중, 수행해야 할 과업, 나아가야 할 과정을 발견할 수 있게 하는 방식으로 취해져야만 한다. 인간에게 가능한 모든 것은 닥쳐올 물결이 아무런 결과 없이 시작점에서 소멸되지 않도록 해야 한다.

“이제부터” 기자는 단언했다. “우리는 이 난국에서 벗어날 수 있는 수단을 지적할 것이다―모든 정기간행물이 예외 없이 그 수단에 대해서는 한마디도 언급하지 않고 있다.”

두 번째 호에서[17] 아나키즘적 조합주의자 기관지는 시기적절한 질문을 던졌다.

“우리는 중대한 시기에 살고 있다. 혁명의 규모는―지금은 천천히, 경련을 일으키며―움직이고 있다. 한동안 이 운동을 계속하다가 멈추게 될 것이다. 러시아의 노동자는 아직 혁명의 규모가 동요하고 있는 동안 적절한 기회를 잡아 그들의 지반에 새로운 사상, 새로운 조직의 원칙, 새로운 사회적 기초를 투입할 방법을 알 수 있을 것인가. 혁명의 운명과 결과의 대부분―전부는 아닐지라도―은 여기에 달려 있다.”

지방의 대중이 지닌 유효한 행동능력에의 신뢰는 「골로스 트루다」 제3호[18]의 〈시국문제Questions of the Hour〉라는 제목의 사설에서 표명되었다.

우리는 러시아의 노동자, 농민, 병사, 혁명가들에 호소한다. 무엇보다도 혁명을 계속하라. 그대들 스스로를 견고히 조직하고 새로운 조직, 즉 코뮌, 노동조합, 위원회, 소비에트를 통합하라. 확고함과 인내를 지니고 어디서나 항상 한 층 더 광범위하게, 한 층 더 효과적으로 지방의 경제활동에 계속해 참여하라. 모든 자재와 노동에 없어서는 안 될 도구들을 당신의, 당신 조직의 손에 넣기를 계속하라. 사적 기업을 계속해 없애도록 하라.

혁명을 계속하라! 작금의 모든 불타오르는 문제들의 해결책을 마주하기를 주저하지 말라. 해결책을 달성하기 위해 필요한 조직을 어디에나 창설하라. 농민이여, 토지를 회수해 그대들의 위원회 손에 맡겨라. 노동자여, 광산과 갱도를, 기업과 모든 건조물과 작업과 공장과 작업장과 기계를 그대들 스스로의 사회적 조직 손에―모든 곳에서 즉시―넣도록 하라.

그러는 동안 볼셰비키당은 점점 더 쿠데타를 향해 방향을 잡았다. 볼셰비키당은 대중의 혁명적 정신 상태를 충분히 알고 있었고, 그것을 이용하기를―다시 말해 권력을 장악하기를―희망했다.

아나키즘적 조합주의자 신문의 기자들은 그 방향을 비판하며 제3호에서 그러한 상황에 대해 더 언급했다. 그들은 하나의 논리적이고 선명하며 단순한 해결책이 사람들에게 제시되었는데, 이는 자연스레 생겨났고 단호하고 대담하게 이용해야 하는 것이었다고 말했다.

사건의 논리에 의해 제안된 마지막 단어를 결정하고 선언할 필요가 있다. 우리는 권력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권력”이라는 단어 대신 “삶의 주인”이 되어야 할 일하는 사람들―노동자와 농민―의 통일된 조직이 있다. 이러한 조직들은 혁명적 군대의 지지를 기반으로 누군가 “권력을 장악”하는 것을 돕지 말고, 토지와 다른 노동의 요소들을 직접 그들 자신의 손에 쥐고, 모든 곳에서 새로운 사회적 · 경제적 질서를 확립해야 한다.

기자들은 소박한 “토착민들”이나 “겁쟁이들”이 새로운 상황을 평화적으로 받아들이게 될 것이라고 말을 계속했다. 부르주아지―군대도 자본도 가지지 못하게 된―는 당연히 권력이 없는 상태로 남을 것이다. 그리고 단결한 노동자 조직들은 공동의 합의로 생산, 운송, 통신, 상품의 교환과 분배에 의해 견고히 발을 내딛을 것이다―모든 것을 새로운 기반 위에, 실제의 필요에 따라, 협동과 필수불가결한 중앙조직을 만들게 될 것이다. 그리하여―그때에야 비로소―혁명은 승리할 것이다.

게다가 「골로스 트루다」는 계속해서 투쟁은 권력 장악을 위한 정당 간 싸움의 성격을 띠고, 노동대중은 이 싸움에 끌려가 정치적 집착으로 분열되므로 혁명의 승리나 정말 심각한 사회 재건도 문제가 될 수 없다고 주장했다. 그리고 삶의 위기에 쫓겨 대중은 결국 이러한 일들을 해결해낼 것이며, 그 해결의 요소는 이미 시국의 객관적 조건과 모든 현재 상황에 의해 뿌리내려 있다는 희망을 표명했다.

기자는 이렇게 결론지었다. “우리가 예언자가 될 의도가 없다는 것은 말할 필요도 없다. 우리는 단지 어떠한 가능성, 발전하지 않을 수도 있는 어떠한 경향을 예측할 뿐이다. 그러나 발전하지 않을 경우 지금의 혁명은 진정 사회대혁명이 되지는 않을 것이다. 그리고 그때는, 문제의 해결책―우리가 방금 간략히 서술한 것과 같은―은 미래의 혁명에 맡겨지게 될 것이다.”

마지막으로 10월혁명 전날, 「골로스 트루다」의 사설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혁명이 그 과정을 따라 나가면 대중은―모든 종류의 시험, 불행, 공포 뒤에 오류와 지연과 충돌과 회복과 새로운 후퇴, 혹은 내란이나 일시적인 독재도 넘어선 뒤에―마침내 그들의 창조력을 그들의 자주적 조직의 적극적 활동을 위해 모든 곳에서 즉시 적용할 수 있을 수준으로 그들의 의식을 끌어올리게 될 것이다. 그때야말로 혁명의 안전과 승리가 보장될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대중은 혁명 과정에서 새로운 삶의 건설을 위한 조직들을 창설하지 못할 것이다. 그러면 혁명은 조만간 소멸될 것이다. 왜냐하면 이 같은 조직들만이 혁명을 완전한 승리로 이끌 수 있기 때문이다.

10월 쿠데타가 일어난 바로 그때의 《아나키즘적 조합주의자 프로파간다 연맹》의 태도는 앞 장에서 충분히 설명되었다. 아나키스트는 조건을 표명하고 그 혁명에 공격적으로 참여했다는 것―그 조건 가운데 분명히 표기되어 있는 이유와 목적을 지니고 (크론슈타트나 모스크바에서처럼) 대중이 행동에 옮긴 곳이라면 어디서나―을 잠시 떠올려보자.

10월혁명 이후 존립이 어려웠던 몇 달 동안, 그리고 볼셰비키 정부[19]에 의해 점차 제한되었음에도 《아나키즘적 조합주의자 연맹》은 날마다 아나키즘적 조합주의 활동과 사건의 전진에 종사했다. 3개월간 매일 간행된 「골로스 트루다」는 노동자들에게 새로운 권력의 온갖 실수와 비행을 설명하는 동시에 자신들의 사상을 발전시키고 그 관점에 따라 적용할 방법을 제시했다.

일련의 기사[20]에서 아나키즘적 조합주의 조직은 대중에 대한 독재의 정치적 방법을 즉각 포기하고 노동자 인민에게 조직과 행동의 자유를 허용할 필요성을 강력히 주장했다.

1. 혁명의 시작부터―3월부터―노동대중은 노동자의 조직, 즉 계급조직을 당과 상관없이 모든 곳에 설립하고, 이들의 조직을 협동시켜 달성해야만 할 유일한 참된 목적, 즉 노동, 그리고 나아가 국가의 경제생활에 불가결한 모든 요소를 수용하는 것에 집중했어야 했다.

2. 교육을 받고 의식적인 경험이 있는 사람들, 지식인들, 전문가들은 혁명의 첫날부터 정치적 투쟁이나 구호가 아니라, 권력의 조직화가 아니라 혁명의 조직화에 몰두했어야 했다. 이런 사람들은 대중이 그들 조직의 발전과 완성을 돕고 경제와 사회 모두에 걸친 혁명의 준비를 위한 경고와 에너지, 활동을 도왔어야만 했다. 당시 누구도 이 일로 그들을 방해하지 않았을 것이다.

실제로, 「골로스 트루다」는 농민과 병사가 이 집단적 의무에 완전히 합의하고 있었고―진정한 혁명은 올바른 경로에 의해 빠르게 진행되었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기자들은 처음부터 대중 스스로가 자발적인 조직망을 만들었으며, 이 건설적인 임무에 일정한 질서와 높은 의식을 부여하는 것이 과제였다고 주장했다. 만일 처음부터 아나키즘적 조합주의자의 청중에게 모든 진지한 혁명가들과 사회주의 언론 전체가 그 일에 그들의 힘, 그리고 에너지를 집중시켰다면 혁명의 과정은 달랐을 것이다―하지만 명확히 그렇게 하지 않았던 것이다.

권력이 시작되는 곳에서 혁명은 끝난다고 같은 기관지의 다른 기사는 지적했다.[21] “권력의 조직화”가 시작되면 “혁명의 조직화”는 끝나는 것이라고 단언했다―왜냐하면 “혁명적 권력”이라는 표현은 “따뜻한 얼음” 혹은 “차가운 불”과 마찬가지로 전혀 의미가 없기 때문이다.

만약 혁명이 “권력의 조직화”라는 처방에 따라 정치적인 길을 확고히 취한다면, (그 기사는 계속 말하고 있다) 우리는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를 보게 될 것이다. 반란한 사람들의 최초의 혁명적 승리(같은 정치적 방법을 취했기 때문에 그렇게나 심각한 희생을 치른 승리)가 확실한 사실이 되자마자 우리의 “제2의 혁명”은 멈출 것이다. 도처에서 즉시 행해지는 대중의 자유롭고 창조적인 혁명적 활동 대신에―이 승리의 통합과 발전을 위해 불가결한 활동―우리는 중앙권력을 둘러싼 역겨운 “거래”와 결국에는 새로운 중앙 “권력”―모든 러시아의 새로운 “정부”의―터무니없는 “활동”까지 목격하게 될 것이다.

소비에트나 다른 지방조직은 물론 중앙 소비에트나 정부에 종속될 것이다. 그것들은 실제로는 중앙에 자리 잡은 볼셰비키당 지도부의 권력기관이 되어버릴 것이다. 그리고 그들 스스로의 새로운 경제적 사회생활을 건설하는 자유로운 도시와 지방의 자연스럽고 자립적인 연합 대신 우리는 규정하고, 명령하고, 강요하고, 처벌하는 “강력한 국가 중앙”과 “확고한 혁명적 권력”을 보게 될 것이다.

「골로스 트루다」는 이 두 가지 가능성 사이에는 성취되어야 할 것이 아무것도 없다고 공언했다―두 가지가 유사한 것이라면, 권위는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활발한 국가권력이 있는 곳에는 “지역자치”에 관한 항목은 그 이전에도, 그 당시에도, 그리고 미래에도 항상 공허한 내용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노동자들은 아나키즘적 조합주의자 대변인들로부터 그들이 만일 새로운 권력으로부터 사회혁명이나 사회주의, 자본주의의 폐지, 그리고 그들 자신의 진정한 해방을 기대한다면 몹시 실망할 것이라고 경고받았다. 왜냐하면 그 권력도 그 밖의 어떠한 것도 노동대중에게 유리한 것을 주는 방법을 몰랐기 때문이다. 그 뒤, 볼셰비키가 마침내 러시아 인민을 타락시키고 배반함으로써 끝나리라는 것을 증명할 몇 가지 사실들이 제시되었다.

이는 볼셰비즘에서 자본주의에 이르기까지 노동대중에 대립하는 전선이 연속적이고 끊이지 않는 장벽이며, 정치투쟁의 불가피한 법칙의 결과임을 의미했다.

여러분은 우리에게 (기자는 계속했다) 당신이 항의할 것이고, 당신의 권리를 위해 투쟁할 것이며, 모든 장소에서 완전한 독립을 위해 즉각 행동할 것이라고 말할 것이다. 아주 좋다. 그러나 당신의 활동이 “독단적”이라거나 “아나키스럽다”고 불릴 것에 대비하라. “사회주의” 권위의 모든 힘을 가지고 이 구실로 당신을 공격해 오는 “권좌에 앉은 사회주의자들”에 대해서도 대비해야 하며, 마지막으로 혁명에 염증을 내고 당신에게 분노와 증오만을 품고 있는 모든 이들과 마찬가지로 새로운 정부에 만족하고 있는 계급(새 정부로부터 무엇인가 주어진 계급)으로부터의 반대에 대해서도 대비해야만 한다.

차리즘에 대한 투쟁에서 당신은 거의 전 국민을 같은 편으로 두고 있었다. 하지만 케렌스키에 대한 투쟁에서 당신은 벌써 더욱 고립되어 있었다.

만일 지금 새로운 권력이 스스로를 공고히 하기를 내버려두고(그리고 만약 사건들이 그것을 허용한다면), 일단 그것이 강력해진 후 이 권력과 싸워야 한다면, 당신은 그보다 한 줌일 수 없을 것이다. 그들은 당신을 “미친 사람”으로, “위험한 광신자”로, “사기꾼”으로 가차 없이 쓸어버릴 것이다. 그리고 그들은 당신의 무덤 앞에 비석조차 두지 않을 것이다.

볼셰비키에 의한 정부 장악 전야, 「골로스 트루다」는 〈막다른 골목에서 막다른 골목으로From Impasse to Impasse[22]라는 제목으로 상황을 다루었다. 거기서 혁명을 올바르고 제대로 된 방향으로 이끌 유일한 방법은 중앙정치 권력의 강화를 포기하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모든 권력은 혁명에 있어 위험하다”라고 사설은 시작했다. “어떠한 권력도 혁명을 진정한 목표로 이끌 수 없다. 정치적 계략의 미로 어디서도 승리의 신전이 약속된 문을 열 열쇠를 발견할 수 없다.”

대중들이 즉시, 모든 곳에서 당 외부에서 그들의 계급조직을 만들 수 있도록 원조하라(아나키즘적 조합주의자 언론은 그렇게 독자들에게 권고했다). 이러한 조직은 권위주의적 소비에트가 아니라 접촉과 협동의 매개체이다. 그와 같은 조직을 대표하는 소비에트의 손으로 먼저 지구地區적으로, 다음은 지역적으로 하나의 전체를 형성하도록 원조하라. 이들 조직을 유일한 중요한 목적으로―생산, 교환, 통신, 유통 등을 점차적으로 인수하는 목적으로 향하게 하라. 이처럼 즉시 새 기반 위에 국가의 사회적 그리고 경제적 생활의 조직화를 개시하라. 그렇게 하면 일종의 “노동자의 독재”는 쉽고 자연스러운 방식으로 성취되기 시작할 것이다. 그리고 일반 인민도 조금씩 그것을 하는 법을 배워갈 것이다….

사회주의자와 아나키스트의 행동방식은 「골로스 트루다」의 〈혁명의 조직화The Organization of the Revolution[23]라는 제목의 논평되었다.

사회주의 정당은 다음과 같이 표현되고 있다. “혁명을 조직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국가권력을 잡아 이 새로운 권력을 조직하는 일이 필수적이다. 그 도움으로 국가의 모든 경제도 또한 국가의 손에 넘어갈 것이다.”

그러나 이와는 대조적으로 아나키스트의 입장은 다음과 같이 표명되고 있다. “혁명을 조직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경제를 장악하고 그것을 조직화하는 일이 필수적이다. 이 수단에 의해 권력과 국가(사회주의자들 스스로도 ‘불가피한’ 일시적 악으로 인식하는)가 제거될 것이다.”

경제를 장악한다는 것(아나키스트의 방법을 계속 확장시키는 것)은 농업, 공업, 교환의 소유를 의미했다. 또한 그것은 생산, 노동, 운송, 토지 및 탄갱, 광산, 공장, 작업장, 제작소, 창고와 저장소, 상점과 은행, 철도, 역, 해상 및 하천운송, 그리고 모든 통신수단―우편과 전신 및 전화 등 모든 수단과 설비를 관리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권력을 장악하기 위해서는 정당이 필요하다. 왜냐하면 사실, 당의 지도자라는 자격으로, 하나의 당이 권력을 잡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어째서 사회주의자가 권력 장악 투쟁의 순간에 자신들을 지지하도록 하기 위해 대중의 하나의 당으로 조직하려고 선동하는지에 대한 이유이다.

경제를 장악하기 위해서는 정당이 필수적인 것은 아니다. 그러나 그 행동에 없어서는 안 될 것은 모든 정당 외부에 남아 있는 독립된 대중의 조직이다. 혁명의 순간에 새로운 사회적 · 경제적 체제를 구축하는 일이 이러한 조직들의 과제로 달려 있다.

이것이 아나키스트가 왜 정당을 만들지 않는지에 대한 이유다. 그들은 대중조직 가운데서 또는―선전활동가로서―그룹이나 사상적 연합 가운데서 선전 선동한다.

결론적으로 아나키즘적 조합주의자 신문은 다음과 같은 근본적인 질문을 제출했다. “권력 없이 어떤 방식으로 조직해야 하는가? 어떤 규칙으로 시작해야만 하는가? 어떻게 진행해야만 하는가?”

「골로스 트루다」는 세 가지 질문에 정확하고 상세한 방식으로 해답을 약속하고 있다. 그리고 실제로 1918년 봄 신문 탄압 이전에 간행된 몇 가지 기사[24]에서 그에 대답했다.

1917년 후반부는 러시아 인민에게 대단히 어려운 시기였다. 왜냐하면 전쟁이 나라를 계속 피폐하게 하고 마비시켰기 때문이다. 국내 정세는 점점 더 비극적으로 변해갔다.

「골로스 트루다」는 〈무엇을 해야만 하는가?What Must Be Done?〉라는 제목으로 국가의 광대하고 암울한 장면을 다루었다.

노동대중의 생활조건은 날로 악화되고 있다. 빈곤이 증가하고 있다. 끊임없이 굶주림 닥쳐오고 있다. 추위가 있으나 주택과 난방 문제는 해결되지 않는다. 아주 많은 공장이 설비, 연료, 원자재 부족으로 문을 닫고 있으며 소유주들은 도망치고 있다. 러시아의 철도는 한탄할 만한 상황에 있으며 국가 경제는 완전히 파산했다….

역설적인 상황이 벌어지고 있다.

가장 높은 곳에는 “노동자와 농민”의 정부가 있고, 중앙은 모든 권력과 그것을 행사할 힘을 가지고 있다. 대중은 그 권력으로부터의 해결책을 기다리고 있다. 중앙은 법령을 발의하고 어떠한 개혁이 이루어져야 할 것인지(그리고 중앙이 예상하고 있는 것은 대중의 요구에 부응하지 않는 것이다)를 교묘히 말하고 있지만 본질적인 문제는 회피하고 어떻게 해야 할지를 묻고 이렇게 대답한다. “제헌의회가 답이다!”

가장 낮은 곳에는 모든 것이 이전처럼 남아 있다. 대중은 굶주림으로 신음하고 있다―그럼에도 투기, 돈벌이, 가증스러운 “암暗”거래가 순조로이 계속된다. 대중은 빈곤해졌다―그런데도 상점(쇼윈도까지도)에는 옷, 고기, 야채, 과일, 잼이 넘쳐난다…. 하지만 도시에는 생필품이 산더미처럼 넘쳐난다는 것을 의심할 여지가 없다.

대중은 가난하다―그러나 은행은 부유하다. 대중은 거리로 내던져지고 공장은 폐쇄되고 자본, 연료, 자재도 없기 때문에 내버려진 기업을 “손에 넣는 것”도 불가능하다.

시골은 도시의 생산품을 필요로 한다. 도시는 시골의 생산품을 필요로 한다―그러나 상황은 교환을 거의 불가능하게 하고 있다.

이러한 비참한 상황에 직면해 볼셰비키 정부의 유약한 태도를 비판하며 아나키즘적 조합주의자 기관지는 국가의 절박한 첫 번째 문제를 충족시키는 가장 빠르고, 단순하며, 가장 효과적인 방법이라고 생각되는 몇 가지 방식을 제안했다.

「골로스 트루다」의 기자는 여러 기사(〈무엇을 해야만 하는가?〉, 〈경고〉 기타)에서 러시아 노동자의 검토를 구하고 긴급한 방법의 구체적이고 상세한 계획을 제안했다(이 인상적인 계획은 여기에 항목별 목록을 작성할 가치가 있다. 그것은 다음과 같다).

1. 노동자 조직과 창고, 배급소의 조직에 의한 필수품의 수용―굶주림을 방지하기 위해서

2. 인민식당의 건설

3. 주택의 부족에 대처하고 동시에 거주자로 구성된 단체에 의해 집주인을 대체하기 위해(거주자의) 주거위원회, 지역위원회, 그리고 지구위원회를 질서정연하게 조직할 것―즉 주거지의 즉각적이고 진보적인 사회화

4. 노동자 조직이 경영자가 포기한 기업을 즉각 진보적으로 수용할 것

5. 공공사업을 즉시 조직하고 도시, 철도 및 기타에서 긴급히 필요한 복구 작업에 착수할 것

6. 새로운 집단적 생산의 개발을 허용하기 위해 은행의 자금 일부를 즉시 수용할 것

7. 도시와 지방 간 규칙적 관계 회복

8. 노동자 조직과 농민 간 생산품 교환

9. 철도와 모든 통신수단의 사회화

10. 공장, 철도, 주택 등에 연료를 (노동자 조직을 통해) 될 수 있는 한 빨리 공급할 수 있게 하기 위해 즉시 광산을 수용해 사회화할 것

볼셰비키 정부는 그러한 조치들을 기획하는 것과는 거리가 멀었는데, 왜냐하면 그들은 필연적으로 그 역할을 축소해 그것을 이차적인 중요성의 위치로 떨어뜨리고, 그 무의미함을 보여주고 마침내 잊고자 해 왔던 것이다. 정부는 이 조치들을 용인할 수 없었다.

볼셰비키 정부는 대중을 신뢰하려 하지 않았지만 정치적 행동을 통해 결정적인 어떤 것을 시도할 만큼 스스로 충분히 강하다고 느끼지 않았기에 사태를 질질 끌면서 소심하고 비효율적인 경제적 개량 정도에 그쳤다. 정부는 특히 가장 긴급한 필수품을 정치 경찰과 군사적 절차를 동원해 입수하려고 했다. 즉 무질서한 징발, 지도자들에 의해 선동된 파견대의 도움을 얻은 마구잡이에 야만스런 징발(여러 요인 중에서도 특히 지방이 도시에 대한 반감을 가지게 하고 혁명에 대한 모든 관심을 파괴한 원인이 된 방식), 억압, 폭력 등을 사용했다.

아나키스트는 볼셰비키가 혁명을 그렇게 이끌어간 그 잘못된 방법에 격렬히 항의하고 볼셰비키 체제를 비판하며 참된 인민의, 참된 사회적이고 동시에 구체적인 방법을 호소하는 유일한 이들이었다. 그 방법은 혁명을 곧바로 진정한 사회혁명으로 나아가게 하는 것이라고 아나키스트들은 단언했다.

볼셰비키는 당연히 그들에게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다. 그리고 볼셰비즘에 의해 조종되고 지배당한 대중은 아나키스트의 말을 듣지도 못하고 스스로 입장을 취할 수도 없었다.

이런 맥락에서 나는 언론의 자유를 억압하는 볼셰비키 정부 법령을 다룬 「골로스 트루다」(1918년 2월 13일자 제18호)의 기사 전문을 인용할 것이다. 이 기사는 구체적인 문제를 언급하며 상반되는 두 이데올로기의 태도를 명확하게 설명한다.

그릇된 길

만일 진정한 사회혁명을 “위로부터” 달성할 수 없다는 것을 증명하는 사실이나 사건들에 매일같이 주목하고 싶다면 수십 개의 신문 칼럼을 그것으로 채울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지금 다른 물고기를 잡아야만 한다. 그리고 우리는 이 일을 우리 혁명의 참을성 있는 미래의 역사가들에게 맡긴다. 의심의 여지없이 그들은 문서보관소에서 “혁명을 일으키지 않는 방법”을 웅변적으로 보여주는 풍부한 문서들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는 진정한 자유도, 진정한 세계 노동자들의 해방도, 진정한 사회도, 새로운 문화도―요약하자면 정당의 정치 권력에 의해 움직이는 중앙집권적인 “국가기구”로는 달성할 수 없다는 주장을 정말 매일같이 충분히 반복해 왔다. 내일이면 이 삶 전체가 이 진실(기본적으로 매우 단순한)을 완전히 명확히, 맹인들에게 알려줄 것을 바라며 이 주제를 다뤄야 할 때가 아닌가?

그러나 이 맹인들은 너무나도 많다.

불과 며칠 전, 우리는 다음과 같은 결의안을 채택했다. 아나키스트 사상은 가장 좋고, 가장 영광스러우며, 가장 순수한 사상이지만 그 실현의 순간은 아직 오지 않았다. 성취한 (“사회주의”)혁명을 통합하는 것이 우선 필수적이다. “우리는 사회주의의 승리 이후 아나키즘이 도래할 것이라고 확신한다”고 결의안은 끝맺었다.

이것이 현재 아나키즘의 진부한 개념이다!

선량한 “시민”에게 있어 아나키즘은 폭탄과 약탈, 공포와 혼란, 혹은 가장 좋은 경우 아름다운 꿈, “사회주의 이후의” 낙원이다. 선량한 “시민”은 아나키즘을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들은 소문을 기반으로 그것을 판단한다. 그들은 너무나 순진하고, 속기 쉽고, 빈약하다.

그리고 결의안의 저자들은 그것을 보다 잘 이해하고 있지 않고 있다.

아나키즘을 코카인의 땅에서 살게 될 시대를 성취하는 것으로 나타낸다면, 그렇다, 그 시대는 아직 오지 않았다(그리고 이런 의미에서 “사회주의”의 시대도 아직 오지 않았다).

그러나 만일 (결의안의 저자들이 그랬던 것처럼) 해방을 향한 길, 자유를 위한 투쟁의 과정 그 자체의 관점에서 문제를 바라본다면, 이 길을 나아갈 때 다른 길을 따른다고 상상하는 것은 터무니없다. 그렇다면 한 가지 혹은 다른 방법을 선택해야만 한다.

아나키즘은 단지 사상, 목표일 뿐만 아니라 무엇보다도 인간의 해방을 위해 고군분투하는 방법이자 수단이기도 하다. 그리고 이러한 관점에서 우리는 “사회주의” 방식(권위주의적이고 국가주의적인 사회주의)은 사회혁명의 목표를 달성할 수 없고, 우리를 사회주의로 이끌 수 없다는 것을 명확하고 단호하게 주장한다. 오직 아나키즘적 방식만이 그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

진정한 사회주의를 향한 하나의 방법으로서, 투쟁의 한 방법으로서 아나키즘의 본질적인 테제는 바로 이것이다. “사회주의를 통해서”나 “사회주의 이후”로는 아나키즘이나 자유 전반에 도달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아나키즘을 달성할 수 있는 방법은 아나키스트의 직접적인 길을 통해 목표로 직행하는 것밖에 없다. 그렇지 않으면 아무도 도달하지 못할 것이다.

국가사회주의를 통해 자유를 획득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위로부터의 혁명을 통해 사회주의의 정복을 지지하는 “사회주의자들”은 우리의 의견으로는 길을 잃고 그릇된 길로 가고 있다. 그들은 어쩔 수 없이 길을 돌아와 올바른 길―즉 아나키스트의―을 되찾거나, 혹은 개입하기 시작해 혁명 전체를 막다른 골목에 빠뜨릴 것이다.

그것이 아나키즘이 주장하는 것이다. 그것이 오늘날 아나키즘이 “사회주의”와 맞서 싸우는 이유다. 그리고 그것이 곧 맹인들에게 삶이 보여주게 될 것이다….

우리는 여기서 우리의 확신을 강화한 모든 다양한 사실들을 언급하지는 않겠다.

우리는 방금 막 페트로그라드의 정기간행 여부와 관계없이 모든 인쇄물의 편집방법에 관한 잠정 규칙의 사본을 받았다.

우리는 늘 부르주아 언론에 대한 무자비한 투쟁을 사회혁명 시기에 노동자들의 긴급한 과제라고 생각해왔다.

그렇다면 독자 여러분, 이 혁명이 처음부터 아나키스트의 과정으로 진행되었다고 가정해보자. 노동자와 농민의 조직이 성장해 하나의 계급조직에 연합해 국가의 경제를 그들의 손에 넣고, 그리고 그들이 그들만의 방식으로 적대세력과 싸웠다면. 그렇다면 부르주아지의 도구였던 언론에 대해서도 “사회주의” 정부가 싸운 것과는 본질적으로 다른 방식으로 이들 노동자 조직이 싸웠을 것임은 쉽게 이해될 것이다.

실제로, 이러한 “임시적인 규칙”이 관여하는 것은 부르주아 언론일 것인가?

이 “규칙”의 제2조에서 제8조까지를 주의 깊게 읽어보라. 특히 발매금지와 몰수라는 항목을 잘 읽어보라. 당신은 처음부터 끝까지 이 “규칙”이 부르주아 언론이 아니라 전체적으로 언론의 자유의 모든 흔적을 억제하려 한다는 명백한 증거를 가지게 될 것이다. 어떤 성격의 것이든 정부를 불쾌하게 하는 모든 출판물에 대해 가장 엄격한 검열을 확립하는 전형적인 행동이라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당신은 이 행위가 전혀 쓸모없는 수많은 형식과 장애물을 설정한다는 것을 식별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는 노동자들의 진정한 혁명이 다른 방법으로 부르주아 언론과 싸울 것이라고 확신한다. 우리는 진정한 사회혁명의 참된 투사와 활동가라면 결코 검열법에 의지하지 않을 것이라고 확신한다. 그 법은 진부하고 전형적으로 관료적이며 권위주의적인 법이며, 좌우파를 막론하고 모든 종류의 비판이나 반론에 대해 현 정부를 보호하려는 법이고, 마지막으로 표현의 자유라는 관점이 쓸모없고 야만적인 브레이크, 방해, 장애물이라는 결론까지 끌어냈다.

우리는 모든 길에 저마다의 특성이 있다고 몇 번이나 이야기했다. 신들에게 영광을! 문제의 “특성”은 지금까지는 페트로그라드에만 영향을 미친다. 우리는 나라의 남아 있는 혁명적 대중들이 우리의 퇴폐적인 수도보다 더 깨어있기를 바라며, 그들이 지방에서 이러한 “임시 규칙”의 적용을 헛되게 만들기를 바란다.

우리는 또한 이 잠정적 “규칙”이 확정적인 것이 되지 않기를 바란다.

아나키스트들은 인쇄소와 그에 관련된 모든 수단을 즉시 노동자 조직의 손에 넘기고, 노동자 조직―순수하고 건전한―은 반혁명적 문서를 인쇄하고 출판하는 것을 거절하기를 제안했다. 그렇게 하여 다른 분야와 마찬가지로 어떠한 정치적(정부나 경찰 등) 행동도 불필요하게 될 것이고, 어떠한 검열도 성장하지 않을 것이다.

문제의 “규칙”이 전국으로 빠르게 확대되었으며 후에 정부적(볼셰비키적) 출판물 전부를 완전히 억압하는 법의 기초가 되었다는 것은 말할 필요도 없다.

〈시급한 과제〉라는 제목의 기사에서 아나키즘적 조합주의자 신문은 다양한 현재의 문제를 해결하는 데에 대한 상세한 제안을 제시했다. 그 핵심 단락은 배급의 조직, 어떻게 주택문제를 해결할지, 공장과 노동자, 은행, 도시와 지방, 원자재와 연료, 운송, 공공사업 등을 포함하고 있다.

당연하게도 「골로스 트루다」의 많은 사설이 노동자 문제[25]를 다루고 있듯이, 농민 문제[26]에 관해서도 다수의 사설이 게재되었다.

게재된 사설들의 인용을 끝마치며, 호기심을 끄는 〈레닌과 아나키즘Lenin and Anarchism[27]이라는 동 기관지 기사를 인용해 보도록 하겠다.

질서와 현명함, 신중함으로 부풀어 오른 “사회주의자들”은 시민市民 레닌이 아나키즘에 편향되어 있다고 끊임없이 비난한다.

시민 레닌의 대답은 매번 같은 공식으로 그것들을 감소시킨다. “조금 참아주시오. 나는 아직 완전히 아나키스트적이지 않소.”

아나키스트는 시민 레닌을 마르크스주의적 교조주의dogma에 대한 약점 때문에 공격한다. 시민 레닌의 대답은 매번 같은 공식으로 그것들을 감소시킨다. “조금 참아주시오. 나는 더 이상 완전히 마르크스주의자라고 할 수 없소.”

우리는 마지막으로, 이로써 마음이 동요하고 있는 모든 사람에게 이렇게 말하고 싶다. 동요하지 말라. 아무것도 기대하지 말라. 시민 레닌은 전혀 아나키스트가 아니다.

그리고 레닌의 혁명과 관련한 입장을 간략히 분석한 후 이 기사는 다음과 같이 말하는 것은 옳다고 말한다. “혁명이 소비에트를 탄생시켰기에 우리는 의회주의, 제헌의회 등을 거부한다.” 그렇다, 「골로스 트루다」는 혁명이 소비에트뿐만 아니라, 일반적으로 당의 바깥에서 비정치적 · 비국가적, 계급적 조직에 대한 올바르고 건전한 경향을 만들어냈다―그리고 혁명의 번영은 전적으로 이러한 경향과 결부되어 있다는 데에 동의한다.

시민 레닌은 옳았을 것이다(아나키즘적 조합주의자 기관지는 계속해 말한다). 만약 그가 오래 전, 젊었을 때 진정한 혁명은 정확히 이 과정을 취해야만 한다는 것을 알았더라면 말이다. 그러나 슬프게도 당시 그는 “순수한 마르크스주의자”였다.

그리고 지금? 오, 물론 대중의 경향은 날이 갈수록 아나키스트적인 자각이 깊어져 그를 괴롭힌다. 대중의 태도는 이미 시민 레닌을 옛길로 되돌리게 만들었다. 그는 굽히고 굴복하는 과정에 있는 것이다. 그는 “국가”, “권위”, “독재”를 아주 한동안만, 잠시 동안만 “이행기”에 한해 유지하고자 했을 뿐이었다. 그런 다음에는? 그 다음에는 아나키즘, 거의 아나키즘인 것, “소비에트 아나키즘”, “레닌주의적 아나키즘”이 있을 것이다.

그리고 술책, 간지奸智, 불신의 정신으로 가득 찬 마르크스주의자들은 공포에 질려 소리 질렀다. “보이나? 들리나? 끔찍하군! 이게 마르크스주의인가? 이게 사회주의인가?”

하지만 어림도 없다! 시민 사회주의자들이여, 시민 레닌이 권력을 공고히 하고 대중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일 필요가 없어졌을 때, 그가 무어라 말할지 예상하지 못하겠는가?

그때, 그는 원래의 패배로 향하는 길로 돌아왔다. 그는 가장 본격적인 종류의 “마르크스주의 국가”를 만들었다. 그리고 완벽한 승리의 엄숙한 때에 그는 당신에게 이렇게 말하려 하고 있다. “여러분이 보듯, 나는 다시금 완전한 마르크스주의자요.”

중요한 문제가 하나 남아 있다. 대중은 그 행복한 순간이 오기 전에 “완전한 아나키스트”가 되어 시민 레닌이 완전한 마르크스주의로 되돌아서는 것을 방해하지는 않을까?

나는 여기서 「골로스 트루다」나 (모스크바의)「아나키」, (우크라이나의)「나밧」의 몇 가지 다른 텍스트들을 인용할 수 없음을 유감으로 생각한다. 나는 필요한 사본들을 수중에 지니고 있지 않고, 이 책을 집필하고 있는 현재 그것들을 입수할 수가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몇 가지 세부 사항과 미묘한 점을 빼놓고는 그 당시 러시아의 모든 본격적인 자유의지주의적 정기간행물의 내용은 (실질적으로) 거의 동일하다는 것을 단언할 수 있다. 그리고 지금까지의 장에서 인용한 것들만으로도 혁명 기간 동안 (러시아) 아나키스트의 주장, 입장, 활동에 대한 명확한 생각들을 독자들에게 주기에 충분했을 것이다.

후에 볼셰비키 권력에 의해 탄압받은 《우크라이나 아나키스트 총연맹(나밧)》이 1918년 11월에 쿠르스크Kursk와 엘리자베스그라드Elizabethgrad에서 조직되어, 각각 1919년 4월에 매우 건설적인 일을 이룬 두 개의 회의를 덧붙이는 편이 적절할 것이다. 그들은 전 우크라이나를 위한 자유의지주의적 행동 계획을 세웠는데, 그들의 결의안은 당시의 다양한 긴급한 문제들에 대한 열의에 찬 해결책을 제공했다.

1917년 10월에서 1918년 말 사이는 중요하고 결정적인 기간이었다. 혁명의 운명이 결정된 것은 그 몇 달 동안이었다. 잠시 동안 두 사상, 두 노선 사이에서 동요하고 있었다. 몇 달 뒤 주사위가 던져졌다―그리고 볼셰비키 체제는 확실히 군사, 경찰, 관료, 자본주의(새로운 형태의) 국가를 확립하는 데 성공했다.

그에 점점 더 역행하는 자유의지주의 사상은 억압당했다.

그리고 광대한 노동대중, 그들은 결정적인 발언을 할 만큼의 힘도, 의식도 지니고 있지 않았다.


제5부. 몇 가지 개인적인 경험들


그와 같은 수천 가지 중 선택된 어떠한 개인적인 경험은 이 시기 러시아의 특성을 보다 잘 이해할 수 있게 해주는 삽화 역할을 할 것이다.

1917년 말 어느 저녁, 페트로그라드에서는 옛 노벨Nobel 정유공장(약 4천 명을 고용하고 있었다) 출신의 두세 명의 노동자가 우리 연합의 회의장에 와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그 정유공장은 소유주들에 의해 버려졌고, 그곳 노동자들은 수많은 회의와 토론 끝에 그것을 집단적으로 경영하기로 결정했다. 그들은 이 목적을 향해 조치들을 취하기 시작했고, 그 움직임 가운데서 특히 “그들의 정부”(볼셰비키 정권)에 그 계획을 실현하기 위한 원조를 요청했다.

그런데 노동인민위원회는 유감스럽게도 현 상황에서는 그들을 위해 아무것도 할 수 없다고 통지했다. 연료도, 원자재도, 주문도, 고객도, 운송 수단도, 자금도 얻을 수 없었다.

그래서 노동자들은 생산을 계속하고, 적당한 시장을 확보하기 위해 필요한 것을 발견하기 위해 독자적인 노력으로 공장을 다시 운영할 준비를 했다.

정유공장의 노동위원회는 노동인민위원회로부터 지금은 정유공장의 주장이 고립되어 있고, 많은 기업이 비슷한 처지에 처해 있기 때문에 정부는 이제부터 모든 기업을 폐쇄하고, 노동자들을 해고하며 2, 3개월 분량의 임금을 지급하고 더 나은 시기를 기다리기로 결정했다는 권고를 받았다.

그러나 노벨 정유공장의 노동자들은 정부에 동의하지 않았다. 그들은 지금 성공의 확신을 가지고 작업과 생산을 계속하기를 원했다. 그들은 정부에 그렇게 말했다. 볼셰비키 정권은 이를 단호히 거부하고 다음과 같이 선언했다. 국가 전체의 책임자로서 각 공장이 변덕에 따라 행동하는 것을 허용할 수 없다. 왜냐하면 이는 벗어날 수 없는 혼란으로 끝날 것이기 때문이다. 정부로서는 일반적인 행동을 취할 의무가 있으며, 그리고 그것이 노벨 정유공장의 운영에 관한 한 그들을 해고하는 것일 수밖에 없다.

공장위원회에 의해 총회에 소집된 노동자들은 이 결정에 반대했다. 그 뒤 정부는 새로운 총회를 제안하고 그곳에 정부의 대표자를 보내 그 결정의 진의와 그것을 채용해야 하는 필요성을 명확히 설명하고자 했다.

노동자들은 그 제안을 받아들였다. 그래서 우리 연합과 관계가 있는 몇 사람의 노동자가 그 상황을 우리에게 말해주러 왔고, 우리가 회의에 연설자를 보내 아나키스트들의 관점을 설명해 달라고 요청했다―그 당시에는 아직 이것이 가능했다. 그들은 공장 사람들이 두 가지 이론을 비교하고 더 나은 이론을 택해서 그에 따라 행동하기 위해 우리의 의견을 꽤나 듣고자 하고 있다고 말했다.

나는 그 모임에 갈 대표로 뽑혔고, 외부에서 온 사람 중 처음으로 도착했다. 큰 방 하나에 공장 노동자들 대다수가 모여 있었다. 중앙의 임시 연단에 그들의 위원회가 정부 측 구성원들이 나타나기를 기다리며 테이블 주위에 앉아 있었다. 노동대중의 태도는 심각하고 신중했다. 나는 연단에 자리를 잡았다.

잠시 후 정부의 대표들이 매우 “관료적으로” 그리고 아주 엄숙하게, 품에 빛나는 서류 가방을 끼고 도착했다. 그들 서너 명의 리더로서 노동인민위원 미하일 실랴프니코프(Mikhail Shlyapnikov) 자신이 입석했다.

그가 먼저 말했다. 그는 메마른 관료적인 어조로 정부의 결정 조항을 되풀이하고 그 결정에 이르게 된 동기를 장황하게 설명했다. 그는 그 결정은 절대적이고 돌이킬 수 없으며 항소할 수 없고, 만약 반대한다면 노동자들은 규율 위반을 저지르는 것이고 그 결과로 스스로와 나라 전체에 대해 심각한 영향을 미칠 것이라고 선언하며 끝맺었다. 연설이 끝나자 분명한 볼셰비키주의자의 박수를 제외하고는 얼음장 같은 침묵이 흘렀다.

그때 의장이 노벨 공장의 몇몇 노동자는 이 문제에 대해 아나키스트의 관점도 알고 싶어 하며, 《아나키즘적 조합주의자 연맹》의 대변인이 참석했으니 그에게 발언권을 주겠다고 발표했다.

나는 일어섰다. 정부 측 구성원들은(분명 그들은 이런 일을 예상하지 못했다) 호기심을 숨기지 않고 빈정거림과 불안, 악의로 뒤섞인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그때 일어난 일은 지금도 뇌리에 선명히 각인되어 있는데, 너무나 전형적이고 유익하며 내 신념을 고무시켜 주었기 때문이다.

많은 노동자 청중들에게 연설하면서 나는 그들에게 다음과 같이 확고하게 말했다.

“동지들, 여러분은 이 공장에서 몇 년 동안 일해 왔습니다. 여러분은 여기서 자유롭게 작업을 계속하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여러분은 그렇게 할 완전한 권리가 있습니다. 그것은 아마 여러분의 의무이기도 할 겁니다. 어떠한 경우든 정부가 해야 할 명백한 일은―정부는 여러분의 것이라고 자칭하고 있습니다―이 일을 활성화하고 여러분의 결정을 지지하는 데 있습니다. 그런데 정부는 그럴 만한 힘이 없고, 여러분의 결정이나 이익에도 불구하고 공장을 폐쇄하고 여러분을 해고하겠다고 방금도 되풀이했습니다. 우리의 관점으로 말하자면―나는 《아나키즘적 조합주의자 연맹》의 이름으로 말하고 있습니다―정부(여러분의 것이라고 자칭하고 있는)의 무능력이 정직하게 일해서 번 빵을 여러분의 입에서 빼앗으려 하는 이유가 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

박수갈채가 나를 맞이했다.

“반대로,” 나는 계속했다. “그들은 정부 구성원 혹은 다른 무엇이라 자칭하든 여러분의 주도권을 축복하고, 여러분을 격려하고, 내가 여러분에게 말한 것처럼 ‘당국은 무능하지만 여러분에게는 단 한 가지 의지할 만 수단이 있다. 그것은 스스로 관리하고 여러분 자신의 힘과 수단으로 길을 개척해 나가는 것이다’라고 말해야 했었습니다. 여러분의 정부는, 따라서 여러분을 돕기 위해 모든 힘을 다하겠다고 말해야 했었습니다.

나로 말하자면 정부의 일원도 아니며, 또 그중 하나가 되고 싶지도 않습니다―왜냐하면 어떠한 정부도, 알다시피, 여러분에게 필요한 것을 할 수 없고, 인간의 삶을 전반적으로 조직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한 가지 질문하겠습니다. 여러분은 작업을 계속할 힘과 수단을 가지고 있습니까? 여러분이 성공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까? 이를테면 여러분의 대오 가운데 활동적이고 기동력 있는 노동에 필요한 소규모 그룹을 만들어 그중 어떤 그룹은 연료를 구하고, 어떤 그룹은 원자재를 구하고, 다른 그룹은 철도운송의 문제를, 다른 그룹은 수주와 발주를 맡게끔 할 수 있습니까?

동지들, 모든 것은 그러한 행동에 달려 있습니다. 만일 여러분이 필요한 것을 만들 수 있다면, 여러분이 성공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면, 여러분이 그것을 시작하면 그만이고 정부(‘여러분의 정부’)는 이 모든 것에서 불편한 것을 발견해서는 안 됩니다. 반대로―

우리 아나키스트는 노동자가 제각기 적어도 두세 사람은 전국 모든 지방에 친척이 있고, 노동자의 일에 있어 본질적 요소를 잘 알고 있으므로―특히 여기에는 4천 명이나 되는 여러분이 있습니다―정부보다 훨씬 간단하고 신속하게 문제를 해결할 것이라고 확신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여러분이 기동적인 노동자 그룹을 구성해 지식과 적성, 접촉에 의해 활기차고 성공적으로 행동할 수 있는 사람들을 모아내기만 하면 된다고 생각합니다. 일단 그들의 임무가 끝나면 이 작업 그룹은 해산하고 그 구성원은 공장의 노동대중에 다시 합류할 것입니다. 여러분은 이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모든 이의 긴 박수갈채가 대답을 대신했다. 그리고 동시에 여러 사람이 외쳤다. “옳소! 바로 그거요! … 우리는 필요한 것을 모두 갖추고 있소! … 우리는 계속해 나갈 수 있고말고. 우리는 몇 주나 그 문제를 고민해 왔소.”

“주목해 주십시오, 동지들.” 내가 말을 이었다. “여러분에게는 연료가 부족합니다. 정부는 여러분에게 무언가 지급하기를 단념하고 있습니다. 연료가 없으면 노벨 공장은 가동될 수 없습니다. 여러분은 여러분의 수단으로 그것을 입수할 수 있습니까?”

“물론입니다.” 한 사람이 대답했다. “공장에는 시골로 갈 준비가 된 열다섯 명이 조직되어 있습니다. 제각기 접촉을 통해 공장에 알맞은 연료를 쉽게 찾을 수 있을 겁니다.”

“그 연료를 여기까지 가져오는 일은요?”

“우리는 이미 철도鐵道 동지들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습니다. 우리는 차량과 필요한 모든 것들을 입수할 겁니다. 우리 그룹 중 한 명이 그 일을 처리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시장은 어떻습니까?”

“문제없습니다, 동지. 우리는 공장의 거래처를 알고 있으니 간단히 제품을 처리할 수 있습니다.”

나는 실랴프니코프와 그 일행을 흘끗 보았다. 그들은 눈을 희번덕거리며 초조하게 손가락 끝으로 책상을 두드리고 있었다.

“좋습니다, 여러분” 나는 이어나갔다. “상황이 이렇다면 우리 아나키스트의 조언은 간단합니다. 행동하고, 생산하고, 전진하십시오! 그러나 한 가지만 더하겠습니다. 말할 것도 없이 여러분은 자본가 사장들처럼 행동하지 않을 겁니다―그렇지요? 여러분이 노동자를 착취하지 않겠지요? 여러분이 주식회사를 세워 주식을 팔지 않겠지요?”

그들은 웃었다. 그리고 곧 몇몇 노동자가 일어나서 물론 모든 노동은 완벽한 동지애 속에서 집단적으로 이루어질 것이며, 단지 살아나갈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만 이루어질 것이라고 말했다. 공장위원회는 기업의 경영을 감독하고, 들어온 돈은 공평하게 분배하고, 만일 매출액이 많이 남는 경우에는 공통의 합의에 따라 경영 자금으로 사용하겠다고 했다. “그리고” 그들은 끝맺었다. “만일 우리가 노동자의 상호부조에 반하는 행위를 하는 경우, 우리는 정부가 우리를 처벌할 자유재량을 감수하겠습니다. 그렇지 않은 경우는 정부가 우리를 내버려 두고 전적으로 우리를 신뢰하면 그만입니다.”

“좋습니다, 여러분.” 내가 차례로 말을 마쳤다. “여러분은 그저 전진하면 됩니다. 용기를 내십시오. 행운을 빕니다!”

천둥 같은 박수가 이어졌다. 조금 전의 마비된 듯한 정적 대신 지금은 엄청난 활기가 넓은 장내를 압도했다. 어느 쪽을 둘러보아도 청중은 우리의 공통된 결론에 환호했고, 의자에 붙어 앉아 꼼짝 않고 얼굴을 실룩거리는 정부의 대표단에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다.

실랴프니코프는 야단스레 벨을 흔들고 있는 의장의 귀에 무언가 속삭였다. 마침내 정적이 다시 자리 잡았다. 실랴프니코프는 다시 입을 열었다.

분명 눈에 띄게 화가 나 있지만, 냉정하게, 장군과 같은 몸짓을 붙여서, 그는 “정부의 일원으로서” 변경할 것도, 자신이 말한 것에 덧붙일 것도 없다고 주장했다. 그는 노벨 정유공장을 폐쇄한다는 정부의 결정은 최종적인 것이라고 되풀이했다.

“여러분 스스로가 우리를 권좌에 앉게 했소.” 실랴프니코프가 말했다. “여러분이 자발적으로, 자유롭게, 우리에게 나라의 운명을 맡겼단 말이오. 여러분은 우리와 우리의 행동을 신뢰했소. 당신들, 이 나라의 노동계급인 당신들은 우리가 당신의 이익을 관리하기를 바랐소. 그래서 우리가 그들을 잘 알고, 이해하고, 그들을 보살피고 있는 것이오. 말할 필요도 없이 우리의 임무는 노동계급의 진정한 전체적 이익을 지키는 데 있지, 여기저기 작은 분파들의 이익을 지키는 데 있지 않소. 우리는―어린아이들이라도 이를 이해할 수 있듯이―개별 기업들이 제각각의 이익을 위해 행동하게끔 할 수는 없소. 노동자와 농민을 위해, 국가 전체를 위한 행동 계획을 정교하게 수립하는 것은 논리적이고 또 당연한 일이오.

이러한 계획은 전체의 이익을 보호해야만 하는 것이오. 반대로, 즉 특정 집단을 이롭게 하는 조치를 취하거나 용인하는 것은 터무니없고, 인민의 일반적인 이익에 반하며 노동계급 전체에 대한 범죄를 저지르는 일일 것이오. 우리가 당장 현재의 여러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는 것은 일시적인 것이오. 그것은 우리가 겪어온 악, 간신히 빠져나온 혼란 상태 뒤의 끔찍한 현재 상황으로 설명할 수 있을 것이오. 노동계급은 이를 이해하고 인내심을 가질 필요가 있소.

현재 상황은 우리가 바라는 것이 아니오. 이는 우리가 만든 것이 아니오. 우리는 온갖 고통스럽고 치명적인 결과에 시달리고 있소. 이는 모든 사람에게 마찬가지이고, 앞으로 얼마간은 계속될 것이오. 그래서 노동자는 특정 집단으로서의 특권을 바라는 대신 다른 사람들과 같이 참아나가야 하는 것이오. 특권적인 태도는 본질적으로 부르주아적이고 이기적이고 비조직적이오. 만일 그 누구보다 프티 부르주아적이고 파괴적인 아나키스트의 꾐에 빠진 몇몇 노동자가 이를 이해하려 하지 않는다면 더욱 노동자에게 나쁜 짓일 것이오. 우리는 낙후된 분자들이나 그들의 지도자들에게 허비할 시간이 없소.”

그리고 실랴프니코프는 공격적이고 위협적인 어조로 다음과 같이 결론지었다.

“어떠한 경우라도, 나는 이 공장의 노동자들과 파괴의 전문가들인 아나키스트 신사들에게, 정부가 신중하게 고려한 결정에서 아무것도 변경할 수 없다는 것을 경고해 두어야만 하겠소. 그리고 무슨 짓을 해서든 그 결정을 존중하게 해 보이겠소. 만약 노동자가 저항한다면 그것은 그들에게 최악이 될 것이오! 그들은 그저 강제적으로, 그리고 아무런 배상 없이 해고될 것이오. 그리고 아나키스트 신사들에게 일러두는데, 노동자들을 내버려 두시오! 정부는 그들이 상관할 일이 아닌 일에 그들이 섞여드는 것을 용납할 수 없고, 정직한 노동자들에게 불복종을 선동하는 것을 용서할 수 없소… 정부는 그들에게 처벌을 내리는 방법을 알고 있으며, 주저하지 않을 것이오. 방금 한 말을 잘 기억해 두시오!”

이 연설은 사람들에게 매우 서먹한 태도로 받아들여졌다.

회의가 끝난 뒤 공장 노동자들은 분개하고 격분하며 나를 에워쌌다. 그들은 실랴프니코프의 기만적인 어조를 포착했다.

“그의 연설은 그럴싸했지만 거짓말이었습니다.” 그들이 말했다. “우리의 경우는 특권적 입장의 문제가 아닙니다. 그러한 해석은 우리의 진의를 저버리는 것입니다. 정부는 노동자들과 농민들이 전국에서 자유롭게 행동하도록 내버려 두기만 하면 됩니다. 그렇게 하면 모든 일이 신속히 처리되고, 모든 사람이 만족스럽게 합의하는 것을 보게 될 겁니다. 그러면 정부는 걱정과 변명거리가 줄어들 겁니다.”

이러한 경우 항상 동일한 두 가지 사상이 나타나고 반목했는데―정부의 국가주의적 사상과 사회적 자유의지주의 사상이었다. 그것들은 각자 이유와 논지를 지니고 있었다.

노동자들을 분개하게 만든 것은 그들과 우리에 대한 협박이었다. “사회주의 정부는 진리에 도달하기 위해 다른 수단에 의지해야 한다”고 그들은 강력히 주장했다. 그러나 그들은 이 충돌의 결과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생각하고 있지 않았다. 그리고 실제로 몇 주 후 노벨 정유공장은 폐쇄되고 노동자들은 해고되었는데, “노동자” 정부가 노동자에게 취한 조치에 저항하는 것은 전혀 불가능했다.

여기에 다른 장면 하나가 기억난다.

1918년 여름, 독일에 대항하는 우크라이나의 혁명 전선에 머무른 뒤 나는 우리 가족이 살고 있는 보로네시Voronezh 지방의 작은 마을 보보로프Bobrov를 다시 방문했다.

지역 볼셰비키 위원회의 구성원들은 모두 젊은이들이었는데, 나를 개인적으로 알고 있었으며 성인成人 교육의 교사로서의 나의 능력을 알고 있었다. 그들은 내게 그 지역의 교육활동을 조직해줄 것을 제안했다. 그 무렵 그러한 사업은 프롤레컬트Proletcult라는 이름으로 불리고 있었는데, 프롤레타리아 문화를 뜻하는 것이었다.

나는 두 가지 조건을 걸고 받아들였다. 1. 일하는 방법과 활동에 있어서의 완전한 독립을 지닐 수 있기 위해 내가 어떠한 종류의 보수도 받아서는 안 된다는 것. 2. 내 교육 활동의 완전한 독립이 엄격하게 유지되어야 한다는 것.

위원회는 이를 받아들였고 지역 소비에트는 당연히 이 활동을 확인했다. 그러고 나서 나는 이렇게 만들어진 새 기관의 첫 회의를 소집해 보보로프의 노동조합, 인근 마을의 노동자와 농민, 그리고 그 지역의 지식인들에게 안내서와 초대장을 보냈다.

회의가 있던 날 저녁, 나는 불신감을 품고 차분히 가라앉은, 적대적이라고 해도 좋을 만한 30여 명의 사람들 앞에 선 나 자신을 발견했다. 나는 즉각적으로 이 사람들이 허리띠에 권총을 차고 독재자처럼 행동하는 볼셰비키 “인민위원”이 엄격하게 복종하도록 명령하거나 지휘하는 여느 집회를 예상하고 있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그러나 이 선량한 사람들은 이번에는 전혀 사정이 다르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나는 그들에게 친구로서 이야기를 건네며, 그것이 우리의 일에서 그들 자신의 주도권, 그들의 정신, 그들의 의지와 에너지의 문제라는 것을 바로 이해할 수 있도록 했다. 나는 그들에게 무언가 명령하거나 지시하거나 강요하려는 어떠한 의도도 내게는 완전히 이질적인 것이라고 장담했다. 그러면서 나는 그들을 보보로프를 중심으로 한 이 지역에서 그들 자신의 의지로 그들의 능력, 건전한 교육 및 문화 활동을 최대한 만들어낼 것을 권고했다.

그리고 나는 그들의 선의와 타고난 재능을 향해서 나 자신의 역할을 명확히 했다. 그것은 계획과 프로그램을 작성하는 일, 교사를 돕거나 내 지식과 경험을 살려 의견과 조언을 말하며 친근하고 효과적인 조력자가 되는 것이다. 또한 나는 우리가 온 마음으로 함께 일한다면 성취할 수 있는 것들에 대한 대략적인 계획을 그렸다. 내 연설에 이어서 전적으로 자유로운 의견 교환이 뒤따랐다. 그리고 청중들 사이에서 어느 정도 관심이 일어났다.

적어도 백 명이 보보로프에서 열린 두 번째 모임에 참석했는데, 그 분위기는 훨씬 더 우호적이고 자신감에 차 있었다. 하지만 얼음을 완전히 깨뜨리고 상호 신뢰가 확립되기 위해서는 서너 번의 회의가 더 필요했다. 내 진정성의 깊이에 의심의 여지가 없었고 관계자 모두가 그 일에 흥미가 깊고 그것이 달성될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우리 모두의 사이에 깊은 공감이 자라나 몇몇 사람들에게는 큰 열정이 생겨났다.

그러고 난 뒤 열띤 활동이 시작되었는데, 그 범위와 효과는 내 모든 기대를 빠르게 뛰어넘었다. 수십 명의 사람이, 대개 교육은 받지 못했으나 그 계획에 열심히 참여했고, 강한 열정과 능숙함으로 일에 착수해 풍부한 아이디어와 효과를 거두었으므로 나는 곧 그들의 노력을 결합하고 조정하거나, 더 중요하고 큰 업적을 준비하기만 하면 됐다.

우리의 모임은 언제나 공개되어 있었으며 청중 전체가 자유롭게 아이디어와 노력을 제공할 수 있었으며, 보보로프에서 어느 정도 떨어진 마을들의 농민 남성들, 심지어 농민 여성들까지 끌어들이기 시작했다. 우리의 사업은 지역 전체에서 화제가 되었고, 시장이 서는 날이면 이들의 교육 모임이 늘 매우 활기찬 군중들을 매혹시켰다.

곧 훌륭한 대중극단이 조직되어 방법과 프로그램을 선택하고 순회공연을 준비했다.

우리를 위한 숙소가 곧 마련되었고, 우리의 모든 필요에 맞게 정비되었다. 가구는 새것처럼 수리되었고, 부서진 창문을 교체하고, 이전에는 학용품(노트, 연필, 펜, 잉크 등)도 없어서 불편을 초래했으나 즉시 그럭저럭 마련되었다. 이것이 새 교육계획의 첫 발걸음이었다. 도서관이 설립되었고, 기증받은 첫 책들이 들어오고, 성인을 위한 야학이 시작되었다.

그러나 지방 당국은 그때부터 모스크바의 중앙당국에 보고서를 보냈다. 이러한 상층부는 내가 상부의 “지시”나 “규정”에 신경 쓰지 않고 내 자유의지에 따라 활동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우리 모두가 모스크바로부터의 지령에 따르지 않고 자유로이 행동해서 우리 지역에서는 대부분 그것을 전혀 따르고 있지 않거나 혹은 처음부터 무시해 버리기조차 하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어느 화창한 날, 나는 보보로프 소비에트의 중재자를 통해 “아래쪽으로부터” 법령과 규정, 규칙과 정식명령, 프로그램과 설계와 계획으로 가득 찬 커다란 꾸러미를 받았는데, 그것은 모두 완전히 이상하고 터무니없는 것들뿐이었다. 나는 이 모든 멍청한 종이 낭비들, 이 실현 불가능한 명령들을 지키라는 지시를 받았다.

나는 그 모든 “문헌”들을 훑어보고는 그에 대해 더 생각하지 않고 활동을 이어나갔다.

그 뒤에 복종 혹은 추방이라는 최후통첩이 이어졌다. 나는 당연히 모스크바로부터의 지시에 복종하고 그것을 적용하는 것이 필연적으로 우리가 수행한 일들을 죽일 것이라는 것을 알았기에 후자를 선택했다(나는 독자들이 내가 그 일 자체에 흥미를 느끼고 있었다는 것을 믿어 주기를 바란다. 나는 아나키스트 사상에 대한 언급 없이 내 직업적 의무에 충실히 전념했고, 어떠한 “파괴적” 선전도 문제시되지 않았으며, 이 혐의는 내게 전달된 명령에서 전혀 제기되지 않았다. 중앙당국은 맹목적으로 그 규율에 복종하려 하지 않는 이는 누구라도 용납하지 않겠다는 것뿐이었다).

활동은 끝났다. 모두가 활동이 간신히 만들어지자마자 위태로워졌다고 느끼는 송별회 뒤에 나는 보보로프를 떠났다.

내 후계자는 모스크바의 충실한 추종자로, 중앙당국의 지시에 문자 그대로 복종하고 있었다. 얼마 못 가 성인 학생들과 교육사업의 참가자들은 모두 떠나고 말았으며, 얼마 전까지 생기 가득했던 학교는 사라져버리고 말았다. 그리고 몇 달 후, 이 프롤레타리아 문화 프로젝트가 전국에서 비참하게 패배했다.

페트로그라드의 노벨 정유공장 노동자들처럼 몇몇 도시와 공업지대의 여러 기업은 폐쇄될 위기에 처한 일을 계속하거나, 시골과의 교류를 확보하고 조직하거나, 혹은 온갖 어려움을 극복하고 불완전한 서비스를 개선하고, 불안정한 상황을 해결하고, 잘못된 점을 고치고, 공백을 메우기 위해 스스로 어떠한 조치들을 취하기를 원했다. 그러나 볼셰비키 당국은 스스로야말로 전혀 효과적이고 기민하게 행동하지 못하면서 대중이 자주적인 활동을 하려는 것을 조직적으로 도처에서 금지했다.

이와 같이, 예를 들어 엘리자베스그라드Elizabethgrad(러시아 남부에 위치한)의 소비에트는 긴급을 요하는 지방 경제문제를 해결하기에 무력하다고 고백하고 있었고, 그 관료들도 성공할 가능성이 없다는 것을 표명하고 있었기에 몇몇 공장의 노동자들은 그 소비에트 당국의 국장에게 그러한 문제들을 스스로 처리할 조직을 만들고, 유효한 결과를 확실히 하기 위해 시의 모든 노동자를 그 주변에 집결시켜 주도록 요구했다.[28] 요컨대 소비에트의 관리 아래 행동하겠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 밖의 어디서나 이러한 제안을 한 사람들은 호되게 질책받고 “무질서”라는 죄목으로 처벌의 위협을 받았다.

겨울이 다가오자 몇 군데 그 밖의 도시에서는 산업을 운영하는 것뿐만 아니라 가정용 난방을 위한 연료조차 부족했다.

러시아에서는 늘 가정에서 장작을 땠다. 러시아의 숱한 삼림지대에서는 적기에―보통 여름이 끝날 무렵―연료를 공급하기란 쉬운 일이었다. 혁명 이전에는 큰 장작 창고의 소유주가 종종 이웃 마을의 농민들을 고용해 나무를 벌채하고 가까운 철도 또는 저장소로 운반했다. 시베리아와 북부 지방에서는 이러한 관습이 보편적이었다. 한 해의 수확이 끝나면 농민들은 들판의 일에서 해방되어 매우 낮은 임금을 받고 기꺼이 이 일을 수행했다.

그러나 혁명 이후, 정부의 의지에 의해 행정기관으로 탈바꿈한 도시의 소비에트가 필요한 준비를 하는 일을 정식으로 부담했다. 따라서 농민들과 거래하는 일은 그들에게 맡겨져 있었다. 그리고 이는 삼림이나 저장소의 소유주가 발견되지 않고 철도가 잘 기능하고 있지 않았기에 더욱 필요한 것이었다.

그러나 관료적인 태만으로 인해―모든 관료조직이 다 그렇지만―소비에는 필요를 충족시키기 위한 알맞은 때에 맞게 이 임무를 거의 달성할 수 없었다.

마침 적절한 시기가 되어 도시의 노동자들과 주민들은 자진해 시골로 가서 농민들과 거래해 장작의 운송을 확보하겠다고 제안했다. 말할 것도 없이 소비에트는 이러한 행동을 “독단적”이며 “무질서”한 것이라고 힐난하며 거부하고, 연료의 공급은 중앙정부가 수립한 전반적인 계획에 따라서 국가의 관료 단위인 소비에트가 담당할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 결과, 도시에는 연료가 없거나, 있다고 해도 터무니없이 높은 가격에 구매되었고, 작업은 매우 어려워졌으며 9월이 지나고 나서는 비와 진흙탕 때문에 도로는 거의 통행이 불가능하게 되었다. 그러한 계절이 되자 많은 경우 농민들은 아무리 높은 임금을 줘도 볼셰비키가 발행한 종이 루블에는 유혹되지 않았고, 그 일을 맡기를 단호하게 거절했다. 그러고 난 뒤 농민들은 군의 명령에 의해 그 작업을 하도록 강요받았다.

나는 모든 분야에서 비슷한 예시들을 무작위로 끄집어내 수십 페이지를 채울 수 있다. 독자는 내가 언급한 것들을 스스로 조금씩 변화시켜 보기만 하면 된다. 그렇게 하더라도 결코 진실들을 넘어서지 않을 것이다!

소비에트 러시아의 도처에서 같은 현상이 나타났다―생산, 운송, 교환, 상업은 상상할 수 없는 혼란에 빠졌다. 대중은 그들 자신의 주도로 행동할 모든 권리를 박탈당했다. 그리고 “행정조직(소비에트 등)”은 끊임없이 파산 상태에 있었다.

도시에는 빵, 고기, 우유, 야채가 부족했다. 시골에는 소금, 설탕, 공업제품이 부족했다. 도시의 창고에서는 옷들이 썩어가고 있었다. 그런데도 지방에서는 아무도 입을 것이 없었다.

어느 곳, 어느 것에서든 무질서, 태만, 무기력함이 지배하고 있었다. 그러나 관심을 지닌 사람들이 이런 모든 문제를 활기차게 해결하고자 개입하고자 해도 그에 관해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정부는 “통치”하기를 의도하고 있었다. 어떠한 “경쟁”도 용납하지 않았다. 자주적인 주도권의 정신을 조금이라도 드러내면 “규율 위반”으로 몰리며 엄한 처벌의 위협을 받았다.

혁명의 가장 위대한 승리와 가장 아름다운 희망은 사라져가고 있었다. 그리고 가장 비극적인 측면은 러시아 인민들이 전반적으로 그것을 인식하지 못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그들은 “그들의” 정부의 능력과 미래를 믿고 “일을 처리하는 대로 맡기고 있었다.” 정부는 엄중하고 강압적인, 그러나 맹목적으로 복종하는 세력을 만들어내는 데 필요한 시간을 이용했다. 그리고 인민들이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를 알아차렸을 때는 이미 너무 늦어버렸다.

이러한 개인적인 경험과 관찰은 사실상 우리의 본질적인 이상을 확인시켜주었다. 즉, 참된 혁명은 관심을 지닌 수백만 노동자 인민의 자유로운 활동 없이는 성취될 수 없다는 것이다. 정부가 개입해 인민을 대신하면 혁명의 생명은 숨을 거두고, 모든 것이 정지하고 모든 것이 후퇴하며 모든 것을 다시 시작해야만 한다.

아무도 우리에게 러시아 인민이 “행동하려 하지 않았다”거나 “그들은 자신을 위해서” 행동하기 위해 “군사력에 의해 강제되어야만 했다”고 말하지 말라. 그것들은 모두 순전히 지어내진 말이다. 대혁명 기간 동안 인민은 행동하는 것 외에 아무것도 요구하지 않는다. 그들이 필요로 하는 것은 경험 많은 혁명가와 교육받은 이들, 전문가, 기술자들의 사심 없는 도움이다. 사실 그릇된 교리와 사람들에 대한 불신으로 가득 찬 계층, 집단, 그리고 권력과 특권을 갈망하며 인민을 신뢰하지 않는 이들이 인민의 행동을 가로막고, 인민을 돕는 대신 인민을 통치하고, 인민을 이끌고, 착취하고자 하는 것이다. 그리고 스스로를 정당화하기 위해 그들은 “권력이 없는” 것처럼 신화를 만들어낸다. 모든 인민, 즉 노동대중에 대해 말하면, 그들은 이 사실을 이해하지 않고 온갖 분자들의 반동적인 열망을 부정하지 않기에 모든 혁명은 실패로 끝날 것이고 노동자의 참된 해방은 공허한 꿈으로 남을 것이다.

우리는 방금 러시아 인민들이 혁명에 직면한 치명적인 위험을 정확히 깨닫지 못했다고 말했다.

그러나 볼셰비키 정부에 의해 만들어진 새로운 조건 아래서는 노동대중에 의한 주도권과 행동의 자유를 호소하는 아나키스트의 비판과 사상이 그 나라 사람들 사이에서 점점 더 넓은 반향을 일으키게 된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자유의지주의 운동이 러시아에서 급속한 성공을 거두기 시작한 것은 이때부터였다. 그리고 그 성공에 의해 점점 더 혼란스러워하는 볼셰비키 정권은 모든 정부에 의해 승인된 수단―계략과 폭력으로 뒷받침되는 무자비한 탄압을 위협적인 아나키즘에 대해 사용하기로 결정했다.


4. 탄압


제1부. 준비


한 가지 주목할 만한 임무가 “소비에트 권력”에 의해 성공적으로 수행되었다. 1918년 봄에 소비에트 권력은 정치적 · 국가주의적 조직―경찰 조직, 군대, “소비에트” 관료기구―을 모두 상당한 정도까지 추진했다. 따라서 독재제도의 기반은 충분히 강화되어 그 기구는 그것을 창설하고 유지하고 있는 사람들에게 완전히 종속되어 있었다. 그것은 믿음직한 것이었다.

볼셰비키 정부는 이 훈련되고 맹목적으로 복종하는 군대를 통해 여기저기서 일어나고 있는 몇몇 자주적인 행동의 시도를 짓밟았다.

또한 러시아 대중을 그 무서운 독재에 종속시킨 것도 급속히 확대되어 가는 그러한 세력의 도움으로 수행했다.

그리고 볼셰비키 정부가 인구 대부분의 무조건적 복종과 수동성을 확인하자 아나키스트를 적대한 것도 이와 같은 군대로써 한 것이었다.

1917년 10월혁명 때 아나키스트에 관한 볼셰비키의 정책은 다음과 같이 요약된다. 전투와 “파괴”의 요소로 어디까지나 아나키스트를 이용하고, 필요한 때는(무기 등으로) 원조하기도 했으나 엄격히 감시했다.

그러나 승리가 이루어지고 권력이 세워지자 볼셰비키 정권은 그 방식을 바꾸었다.

인상적인 예시를 하나 들어보겠다.

1917년 10월, 모스크바에서의 격전 동안 드빈치(앞서 언급한 드빈스크 연대)는 모스크바 소비에트 본부에 주둔하고 있었다. 볼셰비키 “혁명위원회” 역시 모스크바에 설치되어 “최고 권력”이라고 선언했다. 때문에 아나키스트들로 구성된 것으로 알려진 드빈치의 병사들은 곧바로 그 위원회에 의해 감시와 불신, 의심의 대상이 되었다. 그 주위에는 스파이들이 그물처럼 퍼져 있었다. 일종의 봉쇄가 그들의 운동을 방해했다.

그라초프(연대의 지휘관이었던 아나키스트)는 볼셰비키가 참된 혁명에도 새로운 러시아 국가의 긴급한 문제에도 관심이 없으며 오직 경쟁과 권력 장악에만 관심이 있다는 것을 명확히 간파했다. 그는 그들이 혁명을 황폐화하고 파멸로 이끌 것이라고 느꼈다. 깊은 고뇌가 그를 사로잡았다. 그는 어떻게 하면 새로운 권력의 죄악에 찬 마수를 포착해 제때 멈추고 혁명을 약진시킬 수 있을지 자문해 보았으나 헛수고였다. 그래서 그는 몇몇 동지들과 상의해 봤지만 슬프게도 모두 그와 같이 무력했다.

보다 나은 상황을 원했기에 그는 가능한 한 노동자들을 무장시킬 생각을 했다. 그는 소총과 기관총, 탄약을 여러 공장에 보냈다. 이리하여 그는 새로운 사기詐欺에 대해 다가올 반란을 위해 대중을 무장시킬 수 있기를 기대했다.

그러나 그라초프는 얼마 지나지 않아 돌연 살해당했다. 볼셰비키 당국에 의해 “군사상의 일로” 니즈니 노브고로드Nishni-Novgorod로 소환된 그는 그곳에서 아직 소총을 다룰 줄도 모르는 한 병사에 의해 극히 불가사의한 상황 아래 총에 맞았다. 몇몇 징후들은 그가 “소비에트” 권력에 의해 고용된 용병에 의해 암살되었다고 추측하게 한다.[29]

후에 10월 전투에 참여한 페트로그라드와 모스크바의 모든 혁명적 연대는 정부에 의해 무장 해제되었다. 모스크바에서 강제로 무장 해제된 첫 번째 연대는 드빈스키 연대였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전국에 걸쳐서 예외 없이, 그리고 노동자와 노동자 조직을 포함한 모든 시민은 무장하고 볼셰비키 군 당국에 대항하는 자는 사형에 처한다는 선포 아래 무기를 내놓도록 명령받았다.


제2부. 실행


1918년 봄, 러시아 “공산주의” 정부에 의한 아나키스트 박해가 전반적이고 조직적이며 철저한 방식으로 시작되었다. 브레스트 리토프스크Treaty of Brest-Litovsk 조약이 체결되고 레닌 정권은 “좌파” 반대자들―사회혁명당 좌파 당원들과 아나키스트들에 대한 근본적인 투쟁을 벌일 만큼 충분히 견고해졌다고 결론지었다.

그것은 체계적이고 신중하게 행동해야만 하는 것이었다.

처음에는 정부의 명령에 따라 공산주의 언론이 아나키스트에 대한 중상모략과 거짓 비방 캠페인을 시작했으며, 날이 갈수록 점점 더 폭력적으로 변해갔다. 동시에 집회와 강연을 통해 공장, 군대, 일반 대중 사이에서도 적극적으로 지반을 마련했다. 얼마 가지 않아 정권은 군대에 의존할 수 있으며, 좌파들의 반대에 대한 철저한 군사행동의 경우를 보더라도 대중은 무관심하거나 무력할 것이라고 확신했다.

그 후 4월 12일 밤, 거짓되고 터무니없는 구실로 모스크바의 모든 아나키스트 조직 본부―《모스크바 아나키스트 그룹 연맹》이 있는 곳을 주축으로―가 군대와 경찰에게 공격당하고 탈취당했다. 몇 시간 동안 수도는 포위상태에 있는 도시의 꼴이 되었다. 심지어 대포까지 “군사행동”에 동원되었다.

이 작전은 러시아의 거의 모든 주요 도시에서 자유의지주의적 조직 약탈의 신호가 되었다. 그리고 여느 때와 같이 지방 당국은 수도의 광기를 뛰어넘었다.

2주에 걸쳐 총공격을 준비하고 연대 안에서 스스로 “아나키즘적 도적들anarcho-bandits”에 대한 억제되지 않는 동요를 느낀 레프 트로츠키는 “소비에트 정부는 마침내 강철 빗자루로 러시아에서 아나키즘을 쓸어 냈다”는 그의 유명한 선언을 할 수 있게 된 데에 만족감을 느꼈다.

15년 뒤 이오시프 스탈린(Joseph Vissarionovich Stalin)가 트로츠키를 모욕하는 데 같은 방식을 사용해 트로츠키주의에 대해 동일하게 “강철 빗자루”를 적용한 것은 인류 역사의 영원한, 잔인한 모순이다.

나는 이 시적詩的인 정의正義의 행위에 어느 정도 만족감을 느꼈음을 고백한다.[30]

하지만 그 첫 번째 공격은 소심한 시작이자 “밑그림”이며 예행연습에 불과했다.

아나키즘 사상은 아직 위법이라고 선언되지는 않았다. 그리고 아직 언론의 자유, 출판의 자유, 사실은 신앙의 자유도 매우 제한적이지만 허용되고 있었다. 그런 기조 아래 자유의지주의적 조직들―과거의 창백한 그림자―은 “재앙”에서 살아남아 활동을 재개했다.

한편 볼셰비키당은 《사회주의혁명당》을(“최대주의자” 등 기타 좌파 기관과 마찬가지로) 분쇄했다. 우리는 이에 대해서는 별로 신경 쓰지 않을 것이다―이들의 투쟁에 대해서는 아나키스트에 대해 돌려진 것들과는 동일한 규모도 동일한 관심도 가지고 있지 않다. 《사회주의혁명당》 좌파와 볼셰비키 간의 결투는 권력 장악을 둘러싼 두 정당 간의 대립이라고 생각해도 좋을 것이다.

그러나 《사회주의혁명당》 좌파의 몇몇 구성원을 내각에서 추방한 것은 언급해 두어야 하겠다. 《공산당》은 사정없이 《사회주의혁명당》에 대해 전쟁을 벌였다. 그리고 1918년 여름이 끝날 무렵, 《사회주의혁명당》 좌파는 위법이라고 선포되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그들은 하나의 당으로서는 자취를 감추었다. 그리고 개개의 투사들은 전국 각지에서 추적되어 마지막 한 사람까지 억압당했다.

불행한 마리아 스피리도노바의 비극적인 운명은 이 비인간적인 탄압의 가장 끔찍한 페이지 중 하나를 이룬다. 체포되어 감옥에서 감옥으로 끌려다니고, 정신적으로, 그리고 아마도 육체적으로 고문을 당하고, 마지막에는 비록 지하실은 아니었으나 어느 더러운 독방에서 체카에 의해 총알에 의해 생을 마쳤다(나는 그녀의 죽음에 대한 정확한 정보가 부족하다). 혁명의 과정과 임무에 대해 다른 의견을 가졌다는 것이 유일한 범죄였던 얼마나 많은 이 당의 투사들이 이 같은 운명을 겪어야 했던가!


제3부. 무제한의 분노


1919년부터 1920년에 걸쳐서 러시아 노동자와 농민의 “소비에트” 권력의 독점적이고 테러적인 방식에 반대하는 항의와 운동들이 눈에 띄게 격화되었다. 정부는 독재에서 점점 더 냉소적이고 무자비해지며, 점점 더 강화되는 보복으로 답했다.

자연히 아나키스트는 다시금 그 공공연한 투쟁 속에서, 기만당하고 억압받는 대중과 몸과 마음이 하나가 되었다. 그들은 노동자를 지원하며 정치인의 개입 없이 노동자와 그들의 조직에게 상품의 생산을 스스로 관리할 권리를 요구했다. 그들은 또 농민을 지원하며 농민에게 독립과 자치, 그리고 노동자들과 자유롭게 직접 거래할 권리를 요구했다. 그리고 노동자와 농민 양자의 이름으로, 혁명에 있어 그들이 성취했으나 “공산주의” 권력에 의해 “좌절”된 것의 반환, 특히 “참된 자유 소비에트 체제”의 회복, 모든 혁명적 경향 등에 대한 “정치적 자유”의 재건 등을 요구했다. 요컨대 그들은 1917년 10월에 획득한 것을 인민 자신에게―자유로운 노동자와 농민조직에 반환할 것을 요구한 것이다.

당연히 아나키스트도 이 원칙들의 이름으로 문서와 구두口頭를 통해 정부의 정책을 폭로하며 싸웠다.

그들이 예견한 대로 볼셰비키 정권은 아나키스트에게도 전쟁을 벌였다. 1918년 봄에 행한 첫 번째 주요 작전 이후 박해는 거의 끊이지 않고 이어져 점차 잔인하고 단호한 성격을 띠어갔다. 그리고 같은 해 말까지 지방의 몇몇 자유의지주의적 조직들이 다시 한번 습격당했다. 우연히 이를 모면한 이들은 당국에 의해 아무것도 할 수 없게 되었다.

1919년, 대大러시아에서의 탄압과 거의 같은 시기에 우크라이나에서도 박해가 시작되었다(몇 가지 이유로 그곳에는 볼셰비키 독재체제가 다른 지방보다 상당히 늦게 설치되었다). 볼셰비키가 발을 들여놓은 모든 지역에서 자유의지주의적 단체들은 추방되고 투사들은 체포되었으며, 그들의 출판은 중단되었고 서점은 파괴되었으며, 강연회는 금지되었다.

이 모든 조치가 경찰, 군대, 또는 행정명령에 의해 집행되었으며, 고소나 해명, 어떠한 사법적 절차도 없이 완전히 자의적으로 자행되었음은 말할 필요도 없다. 그러한 행동의 표본은 1918년 봄에 트로츠키 자신에 의해 세워진 “선례先例”로 인해 결정적으로 확립되었다.

트로츠키에 의한 또 하나의 결정적인 행동은 1919년 여름, 이른바 《마흐노우슈치나》 운동을 위법이라고 선언한, 지금까지도 유명한 명령 제1824호를 공포한 것이었다. 그 후 아나키스트들은 네스토르 마흐노의 파르티잔들과 함께 러시아의 거의 모든 곳에서 체포되었다. 그리고 대개 적군 장교의 명령만으로 즉결 총살되었다.

대부분의 경우, 자유의지주의적 조직의 탄압에는 체카(공산당 비밀경찰)나, 기만당하고 있거나 기력을 상실하거나 혹은 지나치게 흥분한 적군 병사들의 야만적인 폭력, 무의미한 파괴가 수반되었다. 투사들은 남녀 구분 없이 “범죄자”로 난폭하게 다루어졌다. 그들의 건물은 파괴되고 서적은 불태워졌다. 그것은 무시무시한 탄압이었다.

그해 여름이 끝날 무렵 우크라이나에서 널리 아나키스트 조직에의 습격이 행해졌다. 그리고 같은 해 끝 무렵에는 러시아 아나키스트 운동은 잔재만 남아 있었다.

여기 볼셰비키사史에서의 기묘한 태세전환을 보이겠다.

1920년 10월 초순, “소비에트” 권력은 표트르 브란겔 남작의 “백군”과의 싸움에서 혁명적 《마흐노우슈치나》 파르티잔의 도움이 필요했기 때문에 마흐노와 동맹을 맺었다. 그 동맹이 기반을 둔 협정에 따르면, 투옥되거나 추방된 모든 아나키스트는 자유를 회복하고, 우크라이나와 러시아 어디서나 공공연하게 활동할 권리가 주어졌다.

당연히 볼셰비키는 그 규정의 이행을 꺼렸으나 기소를 중단하고 몇몇 투사들을 석방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브란겔이 패배하자마자 “소비에트” 정부는 마흐노를 배신해 공격하고, 우크라이나의 자유의지주의 운동을 재차 격렬하게 공격했다.

11월 말 브란겔이 막 패배한 가운데, 당국은 합법적 회의를 위해 각지에서 모여온 많은 아나키스트를 하리코프Kharkov에서 체포했다. 동시에 그들은 우크라이나 전역에서 자유의지주의자들을 추적해 몰이꾼과 복병으로 규칙적인 사냥을 조직하고, 그들의 부모와 아내, 아이들을 “인질”로 잡았다―그것은 마치 얼마 전 부득이하게 취한 양보에 대한 복수를 하고 잃어버린 시간을 만회해 “아나키스트라는 사악한 종”을 어린아이까지 멸종시키려 드는 듯했다.

이 파렴치한 행동을 정당화하기 위해 볼셰비키 정부는 마흐노에 의한 소위 반역을 이유로 마흐노와의 결별을 변명하고, “소비에트 권력에 대한 아나키스트의 대 음모”를 기묘하게 날조했다.

이 음모에 관한 진상은 유별난 것으로, 이야기할 만한 가치가 있다.

브란겔에 대한 결정적인 승리 며칠 전, 브란겔의 패배가 의심의 여지가 없게 됐을 때, 모스크바의 중앙전보국은 모든 지방의 전보국에 그들의 수신 장치를 차단하라고 명령했는데, 그것은 레닌으로부터의 긴급하고 극비인 메시지를 청취하지 못하게 하기 위해서였다. 이것은 오직 두 군데의 주요한 전보국―하나는 하리코프, 다른 하나는 크림 반도Crimea―만이 수신해야만 했다.

그 지역의 전보국에 근무하는 한 자유의지주의자의 동조자는 이 명령에 따르지 않았다. 그리고 그는 다음과 같은 전문을 청취했다.

우크라이나, 특히 《마흐노우슈치나》 지역의 아나키스트 세력을 분쇄하라.

레닌.

며칠 후 같은 방식으로 또 다른 전보가 송신되었다.

모든 아나키스트에 대해 엄중한 감시를 시행하라. 그들이 고발될 수 있는 범죄와 관련된 서류를 가능한 한 많이 준비하라. 명령과 문서는 비밀로 하라. 명령이 필요한 모든 곳에 송신하라.

레닌.

그리고 며칠이 더 지난 뒤 마지막 세 번째 간결한 메시지가 도착했는데, 다음과 같다.

모든 아나키스트를 체포하고 죄를 뒤집어 씌워라.

레닌.

이 전보는 모두 우크라이나 인민위원회 의장이었던 흐리스티안 라콥스키(Christian Georgievich Rakovsky)와 다른 군사 및 민사民事당국에 보내졌다.

세 번째 전보를 받고 자유의지주의에 동조하는 전보국 근무자는 한 아나키스트 동지에게 경고했다. 경고를 받은 아나키스트는 준비 중인 탄압을 자유의지주의자들에게 알리기 위해 서둘러 하리코프로 향했다. 하지만 그가 도착했을 때는 너무 늦어 이미 조치들이 취해진 상태였다. 하리코프의 거의 모든 아나키스트, 그리고 회의에 참석하기 위해 온 사람들까지 투옥되었다. 그들의 본부는 폐쇄되었다.

소비에트 권력에 대항하는 우크라이나 아나키스트들의 “음모”란 그러한 것이었다.

“소비에트” 정부와 네스토르 마흐노 간의 합의 당시, 그것을 교섭했던 《마흐노우슈치나》 대표단은 공식적으로 투옥되거나 추방된 사람들의 수를 확인하고 20만 명 이상의 석방을 요구했다. 이들은 대부분 《마흐노우슈치나》 운동에 동조한 혐의로 인해 집단으로 체포된 농민들이었다. 우리는 그들 가운데 얼마만큼의 의식적인 아나키스트가 있었는지 모른다. 그리고 우리는 이 시기에 얼마나 많은 사람이 여러 지방의 비공개적인 비밀감옥에서 흔적도 남기지 않고 총살되거나 실종되었는지 결코 알 수 없을 것이다.

1921년 3월 크론슈타트 봉기 때 볼셰비키 정부는 아나키스트와 아나키즘적 조합주의자들을 새로이 집단으로 체포했다. 그들은 감히 목소리를 높여 대항하는 남은 모든 투사를 쓸어내고 체포하기 위해 다시금 전국에 걸쳐 인간사냥을 조직했다. 왜냐하면 “소비에트” 권력이 러시아 국내를 비롯한 어디에나 퍼뜨린 거짓말과는 반대로, 크론슈타트 봉기와 그에 수반되는 운동에는 자유의지주의 정신이 자유의지주의 정신이 강하게 배어있었기 때문이다.

모든 대중운동―노동자들의 파업, 농민들의 저항, 혹은 군대나 수병 사이의 불만은 늘 아나키스트에게 영향을 미쳤다. 그리고 그 뒤 볼셰비키는 자유의지주의 사상에 동조하는 이나 친척, 어쩌다 알게 된 이들을 제외하고는 자유의지주의자들과 아무 관계도 없는 이들까지 투옥했다. 아나키스트와 같은 견해를 지니고 있음을 공공연히 인정하는 것만으로도 감옥에 보내기 충분한 이유가 되었고, 한 번 그곳에 투옥되면 나오기는 어려웠으며, 대개의 경우 다시 돌아오지 못했다.

아나키스트 청년 그룹은 1919년과 1921년에 잔혹하게 탄압받았다. 이 그룹들은 반향을 얻고 있는 아나키스트 원칙을 가르치고 공동으로 연구하는 데 무엇보다도 종사하고 있었다. 볼셰비키의 행위는 단순히 자유의지주의에 대한 청년들의 관심을 줄이고자 하는 의도에서 나온 것이었다. 마르크스주의 교의만이 정부에 의해 받아들여지고 있었다.

1921년 여름 소비에트 기관지는 주메린카Zhmerinka(우크라이나 포딜랴Podolia 지방의 작은 도시) 근처에서, 그 지역에 거주하며 남부지역의 다른 도시와 관계를 지니고 있는 30~40명의 아나키스트가 “발견되어 숙청되었다”―즉 총살되었다―고 보도했다. 볼셰비키에 의해 이처럼 솔직히 보도되는 일은 드문 현상인데, 이 경우는 그와 같은 청년들에게 경고하고 그들이 활동을 계속하지 못하게 하려는 의도라고밖에는 설명이 되지 않는다. 따라서 죽은 이들 모두의 이름이 특정되지는 않았다. 하지만 그들 가운데 가장 훌륭한 자유의지주의 투사가 몇몇 포함되어 있었음은 확실했다.

비슷한 시기에, 그리고 다시 소비에트 기관지에 의하면, 레닌 정부는 오데사Odessa에서, 특히 소비에트 기관과 그 서클 내에(오데사 소비에트와 볼셰비키당 지방위원회 내부까지) 프로파간다를 확대하고 있는 상당히 크고 중요한 아나키스트 그룹 구성원을 투옥했다(그리고 그들 중 몇은 총살했다). 그 혐의는 “대반역죄”였다고 당 기관지는 이야기했다.

관영 언론의 급보는 1922년까지 92명의 톨스토의주의적 아나키스트Tolstoyan(절대평화주의자)가 주로 군 복무를 거부한 죄로 총살되었다고 보도했다. 그리고 많은 톨스토의주의자들이 감옥에서 고통받고 있었다.

이 선량한 평화주의자들 중 한 명은 어느 날 군대의 사무국에서 체카(공산당 비밀경찰)의 악명 높은 사형집행인 야코프 페테르스(Jēkabs Peterss)와 마주하게 되었다. 기적적으로 그는 석방되려 하고 있었다. 그는 차례를 기다리면서 덥수룩한 수염 속에서 이를 골라내 평화롭게 마룻바닥에 던지고 있었다[당시 이는 러시아에서 인간의 가장 친밀한 친구였다. 이는 일반적으로 보건인민위원회 니콜라이 세마시코(Nikolai Aleksandrovich Semashko)의 이름을 따 세마시코라는 이름으로―통렬하지만 암시적인 역설을 섞어―애정을 담아 불리고 있었다].

“왜 그것들을 죽이지 않고 그렇게 내던지고 있는가?” 놀란 페테르스가 물었다.

“나는 살아있는 생명체를 죽이지 않습니다.”

“그래” 페테르스는 아주 재미있다는 듯 말했다. “아주 재미있군. 너는 이나 벼룩, 빈대에게 제 살을 먹인단 말이지. 확실히 미쳤군. 나는 수백 명의 도적을 죽여 왔지만 아무렇지도 않네.”

그는 놀라움을 극복하지 못하고 평화로운 톨스토이주의자를 한참 호기심 어린 눈으로 바라보며 그를 확실히 무해한 백치라고 생각했다.

나는 이런 순교자 명단을 아주 오래 나열할 수 있다.

나는 “심문”과 고문을 당한 뒤, 혹은 현장에서, 때로는 들판에서, 숲 언저리에서, 버려진 역의 기차 안에서 총살의 함정에 빠진 희생자의 수백 가지 사례를 인용할 수 있다.

나는 폭력이나 온갖 종류의 고통을 수반하는 잔인하고 파렴치한 수사 혹은 체포의 수백 가지 사례를 인용할 수 있다.[31]

나는 자유의지주의자들의 긴 명단을 들 수 있는데, 그들 중 많은 사람은 매우 어리고, 감옥에 갇히거나 비위생적인 곳으로 추방되었고 오랜 기간에 걸쳐 고통을 받다가 죽었다.

나는 파렴치한 밀고, 냉소적인 배반, 또는 혐오스러운 도발에 기인한 개인의 억압, 그에 대한 반항에 대해서도 이야기할 수 있다.

볼셰비키는 정부나 그 특권적 일파와 정확히 일치하는 사상을 품지 않은 경우, 사상을 지니지 않았다는 이유로 사람들을 탄압했다. 그들은 다른 사상 자체를 억압하고 모든 자주적인 사상을 없애고자 했다. 또한 그들은 종종 어떠한 사실을 알고 있거나 폭로할지도 모르는 사람들을 탄압했다.

나는 몇몇 개별 사례, 특히 증오스러운 몇 가지 예시로 그치도록 하겠다.


제4부. 레프 초르니와 파냐 바론의 사례


모스크바의 타간스카야Taganka 감옥에 그럴 만한 이유도 없이 수감된 13인의 아나키스트들은 1921년 7월 심문 또는 석방을 요구하며 단식투쟁에 들어갔다. 이 행동은 마침 수도에서 개최된 《적색노동조합 인터내셔널Red Trade Union International(프로핀테른Profintern)》의 대회와 때를 같이 했다. 한 외국 조합주의자 대표단(주로 프랑스인)은 수인의 친척들로부터 투쟁에 대해 상세히 전해 듣고 “소비에트” 정부에 그 투쟁에 대해 의문을 제기했다. 질의는 다른 종류의 사건, 더욱이 아나키스트와 조합주의자를 억압한다는 볼셰비키의 정책까지 언급하고 있었다.

정부의 이름으로, 레프 트로츠키는 다음과 같이 냉소적으로 대답했다. “우리는 진정한 아나키스트들을 투옥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투옥한 사람들은 아나키스트가 아니라 아나키스트를 사칭하고 있는 범죄자들과 도적들입니다.”

대표단은 사정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포기하지 않았다. 그들은 대회의 의장단에게 질의를 계속해 적어도 타간스카야 감옥에 수감된 아나키스트만이라도 석방할 것을 요구했다. 그 질의는 대회에서 큰 스캔들이 되어 정부는 양보하지 않을 수 없었다―그보다 심각한 폭로들을 두려워했기 때문이었다. 정부는 13인의 타간스카야 수인들을 석방하겠다고 약속했다. 단식투쟁은 11일이 되던 날에 끝났다.

대표단이 떠난 후, 정부는 두 달이나 그 실행을 지연하면서 그 동안 타간스카야 감옥에 있는 수인들을 중죄에 처할 적절한 구실을 찾고 그로 인해 그 약속을 파기하고자 했으나 결국 9월이 되어서야 13인을 석방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고 느꼈다. 그래서 세 명을 제외하고 나머지 사람들을 곧 소련에서 추방했다.

복수(복수는 볼셰비키의 탄압에 있어 끊임없는 요소였다)를 위해서, 그리고 특히 “이른바 자유의지주의자들”에 대한 테러 절차를 외국 노동자나 그 대표단 앞에 정당화하기 위해서 레닌 정부는 그 직후 같은 그룹의 어떤 사람에 대해 뻔뻔스러운 날조를 자행했다.

요원들은 가장 정직하고 진실하며 헌신적인 아나키스트 몇 사람을 “범죄”행위, 특히 소비에트 은행권 위조 혐의를 뒤집어씌워 총살했다(당연히 비밀리에 어떠한 사법절차도 없이, 밤중에 체카의 지하실에서). 총살된 아나키스트는 젊은 파냐 바론(Fanya Anisimovna Baron)과(그녀의 남편도 감옥에 있었다) 유명한 투사 레프 초르니(Lev Tcherny)[본명은 투르차니노프(Tourtchaninov)였다] 말고도 몇 사람이 더 있었다.

총살된 자유의지주의자들이 지적된 “범죄”와 아무런 관련이 없었음이 후에 증명되었다. 그리고 그 위조는 체카 자신에 의해 행해졌다는 것도 증명되었다. 그 요원들 중 두 사람, 한 사람은 슈타이너(Steiner)[카메니(Kamenny)라고 불렸다]이고 또 한 사람은 체카의 자동차 운전수였는데, 그들은 자유의지주의 단체와 범죄의 “관계”를 제시하고, 선택된 희생자에게 불리한 증거를 만들어내기 위해 자유의지주의 단체에 가입하고 그와 동시에 특정 범죄 단체에도 출입했다. 피할 수 없는 증거가 확립되어 그 “사건”은 정식으로 문제가 되어 공표되었다.

이리하여 볼셰비키 정부는 새로운 범죄의 도움으로 다른 범죄를 정당화하기 위해 아나키스트를 몇 명 더 희생시켜 그들의 이름을 더럽히려고 했다.


제5부. 르페브르, 베르게아 그리고 르페티의 사례


또 다른 미해결 사건에서 세 명의 프랑스 투사들이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그들은 1920년 여름 모스크바에서 열린 코민테른 국제대회the Congress of the Communist International의 대표자인 레이몽 르페르브(Raymond-Louis Lefebvre)와 베르게아(Jean Marcel Vergeat), 그리고 르프티(François Jules Lepetit Louis Bertho)였다.

레이몽 르페브르는 공산당원이었지만 당시 비관적인 감정을 반복해서 표명했으며, 그의 사상적 동지들이 취한 그릇된 길을 충분히 인식하고 있었다. 그리고 아나키즘적 조합주의자인 베르게아와 르프티는 분노를 공연히 표명하고 러시아의 정세에 대한 비판을 숨기지 않았다. 르프티는 머리를 싸매고 프랑스 조합주의자 동지들에게 보고해야 할 보고서를 작성하면서 “하지만 나는 그들에게 무엇을 말하고 싶어 하는가?”라고 몇 번이나 말했다.

대회가 끝나고 세 사람은 며칠 밤낮으로 노트와 문서를 함께 작성했다. 그들이 프랑스로 돌아가기 전날 밤, 소비에트 기관은 그들의 목적지로의 문서 운반을 담당하고 있다고 주장했으나 그들은 작성한 서류를 넘겨주기를 거부했고, 바로 그때부터 그들에 대한 탄압 조치가 취해지기 시작했다. 심지어 르페브르조차 그가 속해 있는 공산당의 러시아인 당원에게 그의 노트나 서류를 신뢰하고 맡기기를 거절했다.

그래서 모스크바의 정치가들은 세 사람의 출국을 방해하기로 결정했다. 거짓 구실을 내세워 그들은 카친(Marcel Cachin) 등의 공산당 대표가 취한 루트를 통과하지 못하게 하고, 소비에트 정부는 이상한 이유로 “그들을 북쪽 루트로 떨어뜨려 놓도록” 손을 썼다.

베르게아와 르프티는 그들의 사명을 지키기로 굳게 다짐하고, 공산당원 르페브르가 그들과 함께 여행하기로 되어있으니 충분히 안전할 것이라고 믿고, 보고를 하도록 되어 있는 연합회의에 참가하기 위해 제때 프랑스로 돌아갈 계획이었다.

그들의 골고타는 모스크바에서 무르만스크Murmansk(북극해에 있는 러시아 최북단의 항구)에의 멀고 어려운 여행으로 시작되었는데, 이는 잔혹한 조건에서 이루어졌다. “그들은 우리를 방해하고 있다”고 르프티가 말한 데에는 이유가 있었다. 그들은 기차를 타고 가며 지독한 감기를 앓고, 따뜻한 옷도 음식도 없었기에 그들을 호송하고 있는 체카 요원에게 다가가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들을 요청했다. 그들은 대표자로서의 입장을 말하기도 했으나 아무 효력도 없이 “우리는 이 기차에 대표자가 타고 있다는 것은 전혀 모른다. 우리는 그것에 관해서는 아무런 지시도 받지 않았다”는 대답을 받았을 뿐이었다.

그들이 얼마간 음식을 받은 것은 르페브르의 거듭된 주장에 의해서였다. 때문에 많은 고통에 시달리고 상황이 더 악화될 것을 예상하며 그들은 무르만스크에 도착했다. 그곳에서 그들은 친절한 어부의 집에 대피해 모스크바에서 약속받은 것의 이행, 스웨덴으로 자신들을 데려다 줄 배가 오기를 기다렸다.

이리하여 불안함과 놀라움 가운데 약속한 배가 도착하기를 기다린 지 3주가 지났다. 그들은 그들의 사명을 완수할 수 있도록 프랑스에 제때 도착하는 것이 가능할지 의심하기 시작했다.

그래서 르페브르는 모스크바에 있는 친구에게 편지를 썼다. 답신이 없었기에 그는 두 번째, 세 번째 편지를 보냈으나 모두 답장이 없었다. 후에 세 통의 편지는 가로채어져 트로츠키에게 보내져 압수되었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세 번째 편지에서 르페브르는 자신들의 곤경에 대해 가슴 아프게 설명하고 소비에트 땅에서 벗어나기 위해 어선을 타고 북극해를 건너겠다는 필사적인 결의를 표명하고 있었다. “우리는 죽으러 나가려 하고 있네”라고 그는 적었다.

그들은 작은 배를 한 척 살 만한 돈을 모았다. 그리고 몇몇 동료들과 어부들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배에 올라 레이몽 르페브르가 말한 것처럼 분명한 그들의 죽음으로 나아갔다. 그 뒤로 그들을 다시 본 사람은 없었다.

모스크바가 냉정하게 짜놓은 이 암살에 명백한 증거는 없다―혹은 증거를 쥐고 있는 사람들은 이해하기 쉬운 이유로 그것을 비밀로 하고 있다. 당연히 볼셰비키는 그것을 부인하고 있다. 그러나 베르게아와 르프티의 러시아 체재 중의 타협 없는 단호한 태도와 볼셰비키 정부의 상투적인 수단과 그들의 출발에 있어서의 차별을 생각해 본다면, 그것을 의심할 수 있을 것인가? 카친 등의 프랑스공산당 대표가 어려움 없이 귀국길에 오를 수 있었고, 그들이 모스크바에서 학습한 교훈을 투르Tours의 대회에서 보고하는 데 늦지 않게 돌아온 것을 기억해야 한다.

어느 경우든 우리는 결국 러시아에서 알려지게 된 그 이야기의 진정한 사실들을 충실히 이야기했다. 우리는 그들이 그들 자신을 위해 충분히 웅변적으로 말하고 있다고 믿는다. 독자의 판단에 맡기겠다.


제6부. 개인적인 경험


나는 여기서 비극적이지는 않으나 국가공산주의의 눈부신 활동 중에서도 소개할 만한 가치가 있는 볼셰비키의 행위에 조명을 비추어 내 자신이 경험한 것을 하나 이야기하겠다. 내가 말하고자 하는 그 시기에는 이러한 사건은 러시아에서 결코 드문 것이 아니었다. 하지만 그 이후로 새 주인에 의해 그와 같은 일은 다시 되풀이될 수 없었다.

1918년 11월, 나는 우크라이나 자유의지주의자 회의에 참석하기 위해 우크라이나의 쿠르스크 시에 도착했다. 그 무렵 그와 같은 집회는 그 지역의 특수한 조건을 생각하면 우크라이나에서는 아직 가능했다. 당시 우크라이나는 반동과 독일의 침공에 맞서 싸우고 있었다. 볼셰비키는 그곳의 아나키스트를 이용하고 감시하면서 그곳의 아나키스트를 용인했다.

혁명 초기부터 쿠르스크의 노동대중은 아나키즘에 대한 강좌를 한 번도 들어본 적이 없었으며, 그곳의 작은 지역 그룹은 그에 필요한 힘을 갖추고 있지 못했기에 몇 사람의 자유의지주의 강연자가 다른 지역으로 나가고 있었다. 내가 온 것을 기회로 그곳의 그룹은 큰 홀에서 아나키즘을 주제로 강연을 하기를 제안했다. 나는 당연히 기쁘게 받아들였다.

그 지역 소비에트 의장의 허가를 구할 필요가 있었다. 본래 착실한 노동자였던 그는 그것을 쉽게 허락했다. 귀중한 자료들을 준비하고, 홀은 2주 전에 예약하고, 며칠 후에는 인상적인 포스터를 주문해 벽에 붙였다. 모든 것이 준비되었다.

그 강연회는 우리의 사상에 대해 큰 성공을 약속하고 있었다. 몇 가지 징조들―거리의 화제나 포스터를 읽고 있는 군중, 지역 그룹에의 정보 요청―로 보아 그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었다. 그런 반응에 익숙하지 않았던(왜냐하면 대 러시아에서는 그 무렵까지 아나키즘에 대한 공개강연회는 불가능했기 때문이다) 우리는 큰 만족감을 느끼고 있었다.

지정된 날 이틀 전에 후원 그룹의 서기가 걱정스러운 얼굴로 화를 내며 나를 찾아왔다. 그는 방금 쿠르스크의 볼셰비키위원회(지역에서 실권을 지닌)의 의장으로부터 쪽지를 받은 것이었다. 그 내용은 “휴일에는” 아나키스트 강연회를 열 수 없으며 공산당위원회가 인민 댄스파티를 위해 홀 예약을 그곳 관리인에게 이미 전달해 두었다는 것이었다.

나는 곧장 그 위원회의 사무실로 쫓아가 의장과 격렬한 언쟁을 했다―내 기억이 옳다면 그의 이름은 린디치(Rynditch)[혹은 린딘(Ryndin)이었는지도 모른다]였다.

“이게 무슨 경우입니까?” 나는 물었다. “당신들 공산주의자들은 선약이라는 것을 모릅니까? 우리는 쿠르스크 소비에트의 허가를 얻어 2주 전부터 분명히 홀을 예약했습니다. 위원회는 순번을 기다려 주시오.”

“미안합니다, 동지.” 그가 대답했다. “하지만 당위원회는 쿠르스크의 최고 권력으로서, 당신이 모르는 이유나 혹은 그 외에도 모든 것을 변경할 이유가 있을 수도 있다는 것을 잊지 말아 주십시오. 때문에 당위원회의 결정은 취소할 수 없습니다. 소비에트 의장도 홀 관리인도 위원회가 그 날짜에 홀이 필요할 것이라고 미리 알 수 없었을 겁니다. 그 문제를 논의하거나 고집하는 것은 전혀 의미가 없습니다. 다시 말하지만 취소할 수 없습니다. 강연회는 그곳에서 진행할 수 없습니다. 혹은 다른 홀에서 진행하거나 다른 날짜에 진행하십시오.”

“당신도 잘 알겠지만” 내가 말했다. “모든 것을 이틀 만에 다시 정리하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그리고 충분히 큰 다른 홀도 없습니다. 게다가 모든 홀은 이미 휴일 파티를 위해 쓰일 겁니다. 강연회를 중단할 수밖에는 없습니다.”

“미안합니다. 다른 날로 연기해 주십시오. 당신은 손해 볼 것이 없습니다. 잘 정리될 겁니다.”

“그건 전혀 같은 일이 아닙니다.” 나는 강하게 주장했다. “이런 변경은 늘 목적을 크게 손상시킵니다. 게다가 포스터 값도 많이 들었고요. 더구나 나는 곧 쿠르스크를 떠나야만 합니다. 사정이 이런데 내가 예정된 날 밤에 어떻게 강연을 한단 말입니까. 강연을 들으러 반드시 많은 사람이 올 텐데, 당신은 그 대중의 반항에 마주칠 겁니다. 벌써 2주째 포스터가 붙어 있습니다. 쿠르스크와 인근 노동자들이 강연회를 학수고대하고 있소. 변경사항을 인쇄해 게시하기에는 이미 너무 늦었습니다. 강연회를 들으려 모인 군중에게 댄스파티를 하라고 하기는 어렵지 않겠습니까?”

“그건 우리 문제입니다. 참견하지 마시오. 우리가 모든 책임을 질 거요.”

“그러니까, 본질적으로 말해서” 나는 지적했다. “소비에트가 허가했는데도 불구하고 당신들 위원회에 의해서 강연회가 금지된다는 말이군요.”

“오, 아닙니다, 동지. 우리는 그것을 전혀 금지하지 않습니다. 휴일이 지난 날짜로 변경해 달라는 겁니다. 우리가 강연을 들으러 온 사람들에게 알리겠습니다. 그러면 되지요.”

여기서 우리는 헤어졌다. 나는 지역 그룹과 상의해서 1919년 1월 5일로 강연을 연기하기로 결정했다. 그리고 그것을 볼셰비키위원회와 홀 관리인에게 통지했다. 이 변경 때문에 나는 예정된 하리코프 행을 며칠 연기할 수밖에 없었다.

새 포스터를 주문했다. 그와 더불어 우리는 우선 볼셰비키 당국이 대중을 납득시키게 하기로 정하고, 둘째로 내가 그날 저녁 호텔 방에 머물고 있기로 정했다. 왜냐하면 많은 대중이 무슨 일이 있더라도 강연회를 열라고 요구할 것이고, 결국 볼셰비키가 양보할 수밖에 없게 될 것이라고 추측했기 때문이다. 때문에 필요한 경우 그룹의 서기가 나를 데려올 수 있어야 했다. 나는 개인적으로 큰 스캔들, 어쩌면 큰 소동이 일어나기를 기대하고 있었다.

강연회는 저녁 8시로 예정되어 있었다. 8시 30분쯤, 내게 전화가 걸려왔다. 서기의 흥분된 목소리가 들렸다. “동지, 홀은 문자 그대로 어떤 설명도 들으려 하지 않는 대중으로 포위되어 있고, 강연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볼셰비키는 그들을 설득할 힘이 없습니다. 아마 사람들에게 양보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고, 강연회가 진행될 겁니다. 택시를 타고 빨리 와주세요.”

나는 곧 택시를 잡아타고 전속력으로 달려갔다. 멀리서 그 거리의 시끄러운 소음이 들렸다. 현장에 도착한 나는 홀 주변에 서서 욕설을 퍼붓고 있는 군중을 보았다. “댄스파티는 악마나 줘버려라! 댄스파티는 그만 해라! 이제 지긋지긋해! 우리는 강연회를 원한다! 우리는 강연을 들으러 왔다! …강연회! …강연회! …강연회!”

서기는 나를 보고 서둘러 왔다. 우리는 간신히 대중을 헤쳐 나갔다. 홀은 사람들로 만원이었다. 단상에서 나는 린디치 “동지”가 “강연회! 강연회!”하고 계속 외쳐대는 군중을 향해 열변을 토하는 것을 보았다.

“아주 잘 오셨네요, 그래.” 볼셰비키위원장이 화를 내며 내게 덤벼들었다. “어떻게 되어 가는지 아시겠죠. 이건 이제 당신들 일입니다.”

나는 격분해서 말했다. “그러니까 말했잖소. 이 모든 책임은 당신에게 있소. 당신이 일을 정리하기로 했잖소. 어서 하시오! 당신이 하고 싶은 대로 하시오. 가장 좋고 간단한 방법은 강연회를 허락하는 일일 거요.”

“아니, 안 돼, 안 되고말고!” 그가 맹렬히 소리쳤다. “장담하는데 당신들 강연회는 절대 열리지 않을 거요.”

나는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갑자기 린디치가 내게 말했다. “이보시오, 동지. 그들은 내 말을 듣지 않을 거요. 하지만 나는 무력을 사용하고 싶지 않소. 당신이라면 일을 정리할 수 있을 거요. 그들은 당신 말이라면 듣겠지. 그들에게 상황을 설명하고 평화적으로 떠나도록 설득하시오. 그래야 할 이유를 말해주라는 말이오. 강연회는 연기되었다고 말하시오. 내가 부탁한 대로 하는 것이 당신 의무요.”

만일 그때 강연을 진행하지 않으면 결코 강연회가 열리지 않을 것 같았다. 강연회는 금지되어 있고, 내가 체포될 가능성이 매우 높다고 확신했다.

나는 계단에 빽빽하게 들어선 사람들에게 설명하기를 단호히 거절했다. 나는 머리를 저으며 위원장에게 말했다. “아니, 나는 말하지 않을 거요. 당신들이 이걸 원했잖소. 스스로 처리하시오.”

우리의 말다툼을 알아챈 군중은 더욱 큰 소리로 욕설을 퍼부었다. 린디치는 무언가 소리 지르려 했다. 헛수고였다. 그의 목소리는 폭풍과 같은 고함소리에 파묻혔다. 군중은 자신들의 힘을 느꼈다. 틈이 나는 대로 좌석 쪽으로 몰려들어 될 수 있는 한 계단과 입구에 빽빽이 밀고 들어왔다.

이제 린디치는 자포자기한 몸짓으로 다시 한번 내게 호소했다. “그들에게 말해주시오. 그러지 않으면 큰일이 나겠소.”

한 가지 생각이 떠올랐다. 나는 우리를 에워싸고 있는 사람들에게 조용히 하라고 신호를 보냈다. 그들은 곧바로 조용해졌다. 나는 침착하게 말에 간격을 두어 가며 말했다.

“동지들, 대단히 유감스러운 이 혼란에 대한 책임은 쿠르스크 볼셰비키위원회에 있습니다. 우리는 2주 전에 먼저 홀을 예약했습니다. 이틀 전, 볼셰비키위원회는 우리와 아무 상의도 없이 오늘밤 댄스파티를 열기 위해 홀을 독점했습니다. (여기서 군중은 “댄스파티가 뭐냐! 강연회를 하게 해라!”하고 외쳤다.) 그 때문에 우리는 강연회를 나중으로 연기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하지만 저는 강연자이고, 바로 강연을 할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볼셰비키는 오늘 저녁 그것을 공식적으로 금지했습니다. 하지만 여러분은 쿠르스크의 시민이고 대중입니다. 결정권은 여러분에게 있습니다. 나는 온전히 여러분의 결정대로 하겠습니다. 선택하십시오, 동지 여러분. 강연회를 연기하고 평화롭게 떠났다가 1월 5일에 돌아오거나, 아니면 만일 여러분이 지금 당장 강연회를 원한다면, 진정으로 결정했다면, 움직이십시오. 홀을 확보하십시오.”

내가 끝까지 말을 마치기도 전에 군중은 기뻐하며 박수를 치며 외쳤다. “당장 강연회를 합시다! 강연회! 강연회!”

그러면서 불가항력적인 힘으로 홀을 향해 밀고 들어왔다. 린디치는 압도당해 문을 열었다. 그러지 않았다면 그들은 강제로 문을 열었을 것이다. 그리고 내부에 불이 켜졌다.

몇 분 뒤, 홀이 가득 찼다. 앉아 있는 이나 서 있는 이나 조용해졌다. 내가 강연을 시작하기만 하면 되었다. 그러나 린디치가 단상에 올라섰다. 그는 청중을 향해 다음과 같이 말을 걸었다. “시민 여러분, 동지 여러분! 조금만 더 기다려 주십시오. 볼셰비키위원회는 회의를 열어서 최종결정을 내릴 겁니다. 아마 댄스파티는 취소될 겁니다.”

“만세!” 군중은 소리치며 그들의 분명한 승리에 대단히 기뻐했다. “강연회다! 강연회 만세!”

그들은 기뻐하며 다시 박수를 쳤다.

이제 볼셰비키위원들은 회의를 하기 위해 옆방으로 물러갔다. 기다리는 동안 홀의 문은 닫혀 있었고, 청중들은 끈기 있게 결정을 기다리고 있었다. 우리는 이 작은 코미디가 볼셰비키의 체면을 차리기 위해 연출되고 있다고 추측했다.

15분이 지났다.

그때, 갑자기 홀 문이 열리고 손에 소총을 쥔 강력한 체카 파견분대 요원들(레닌 정권에 맹목적으로 충성하는 일종의 국가경찰인 특수부대)이 들이닥쳤다. 청중들은 모두 어안이 벙벙해서 제자리에 얼어붙어 있었다. 조용해질 대로 조용해진 가운데 요원들이 홀로 밀려들어 벽을 따라 미끄러지듯이 좌석을 둘러쌌다. 일부는 입구 근처에 남아 있었고, 소총이 청중들에게 향해졌다.

(볼셰비키위원회가 처음부터 시의 부대로 가서 정규 연대가 개입해줄 것을 요청했다는 사실이 후에 알려졌다. 그러나 병사들은 해명을 요구했고―그 당시에는 이것이 아직 가능했다―자신들도 강연을 듣고 싶다고 선언하며 오는 것을 거절했다. 그 뒤 위원회는 모든 돌발 상황에 대비하고 있던 체카 파견분대 요원들을 불렀다.)

위원회 위원들이 곧 홀에 다시 나타났다. 린디치는 의기양양한 목소리로 그들의 결정을 발표했다.

“위원회 결정이 내려졌습니다. 댄스파티는 취소합니다. 강연회도 취소합니다. 어느 쪽이든 시간이 너무 늦었습니다. 나는 여러분에게 완전히 차분하고 완벽하게 질서를 지켜서 홀과 건물에서 나갈 것을 요청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체카가 개입할 겁니다.”

사람들은 분노했지만 무력하게 일어나 홀을 떠나기 시작했다. “그래도” 몇몇이 중얼거렸다. “저 사람들 당이 예전에는 괜찮았는데…. 엉망이 되어버렸어.”

밖에서는 새로운 놀라움이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출구에서 두 명의 무장한 체카 요원이 한 사람 한 사람씩 수색하며 그들의 신분증을 검사했다. 몇몇은 체포되었다. 몇 사람은 다음날 풀려났다. 하지만 나머지는 감옥에 감금되었다.

나는 호텔로 돌아왔다.

다음 날 아침, 전화벨이 울렸다. 린디치의 목소리가 들렸다. “볼린 동지, 위원회 사무실로 와주시오. 당신의 강연에 대해 이야기할 것이 있소.”

“날짜는 1월 5일로 정해졌소.” 내가 말했다. “통지가 이미 주문되었습니다. 무슨 이의라도 있습니까?”

“아니요, 하지만 어쨌든 와주시오. 당신과 해야만 할 이야기가 있습니다.”

내가 그곳에 도착했을 때 린디치는 보이지 않았다. 대신 웃으며 친절하게 대하는 다른 볼셰비키가 나를 맞았다. “이보시오, 동지. 위원회는 당신의 강연회를 개최하지 않기로 결정했습니다. 어제 당신의 태도는 오만하고 적대적이었으니 이 결정은 당신 스스로의 책임입니다. 또한 위원회는 당신이 쿠르스크에 머물 수 없다고 결정했습니다. 잠시 동안 당신은 여기, 우리 숙소에 머물게 될 겁니다.”

“아, 그럼 나를 체포하는 겁니까?”

“오, 아닙니다, 동지. 당신은 체포된 것이 아닙니다. 당신은 모스크바 행 기차가 출발할 때까지 몇 시간만 여기 있을 겁니다.”

“모스크바라고?” 나는 소리쳤다. “나는 모스크바에 전혀 볼 일이 없소. 그리고 나는 이미 하리코프 행 차표를 가지고 있소.[32] 이곳에서 일을 마치면 그리로 가게 되어 있단 말이오. 하리코프에 친구가 있어서 거기서 일하기로 했소.”

이 점에 대해 잠깐 말을 주고받다가 볼셰비키는 말했다. “괜찮습니다. 당신은 하리코프로도 갈 수 있습니다. 하지만 하리코프 행 기차는 새벽 1시가 되어서야 출발합니다. 당신은 하루 종일 여기 머물러 있어야 할 겁니다.”

“내가 호텔로 돌아가 계산하고 가방을 가져올 수 있겠소?”

“아니오, 동지. 우리는 그것을 허락할 수 없습니다.”

“나는 호텔로 곧바로 가겠다고 약속하겠소. …게다가 누구든 나와 동행해도 좋습니다.” “불가능합니다, 동지. 아시다시피 일이 시끄럽게 될 수도 있습니다. 우리는 그걸 원하지 않습니다. 이건 정식명령입니다. 우리 동지 중 한 명에게 시키십시오. 그 사람이 호텔로 가서 당신 가방을 가져올 겁니다.”

무장한 체카 경비원이 이미 내 방문 앞에 배치되어 있었다. 나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한 “동지”가 가방을 가져왔다. 한밤중이 되자 다른 사람이 택시로 기차역에 데려가 정말 내가 떠날 때까지 기다리고 있었다.

이 예기치 않은 여정은 너무나 고통스러웠기에 나는 도중에 병에 걸렸다. 동승객이 우크라이나의 작은 도시 수미Soumy에서 나를 숙박시켜 준 덕분에 간신히 폐렴을 피할 수 있었다. 그곳에서 유능한 의사가 나를 잘 돌보아주었다. 그리고 며칠 뒤 나는 하리코프에 도착했다.

도착하자마자 나는 우리 지역 주간지 「나밧」에―그것은 점점 성공적으로 되어갔기 때문에 얼마 뒤 볼셰비키 당국에 의해 금지되었다―〈프롤레타리아 독재 하에서의 강연회 이야기Story of a Lecture Under the Dictatorship of the Proletariat〉라는 제목의 기사를 썼다. 거기서 나는 그 불쾌한 모험을 자세히 다루었다.


제7부. 최종 합의


국가사회주의의 본질과 필연적인 진화에 대해 우리가 말한 모든 것을 통해 독자는 이 “사회주의”가 자유의지주의 사상과의 가차 없는 충돌로 이어지는 이유를 쉽게 이해할 것이다.

물론 알고 있는 이들에게는 러시아의 사회주의 권력이 아나키즘과 아나키스트를 탄압했다는 사실은 전혀 놀랄 일이나 예상 밖의 일도 아니다. 이는 러시아혁명이 국가주의적이거나 권위주의적으로 될 것이라는 것은 러시아혁명 훨씬 이전에 아나키스트 자신[그리고 미하일 바쿠닌(Mikhail Alexandrovich Bakunin)]에 의해 예견된 것이었다.

자유의지주의 사상에 대한 탄압, 추종자들에 대한 박해, 대중의 자주적인 운동에 대한 억압―이런 것들은 일시적인 승리이며, 전진을 거부하는 것이고, 진정한 혁명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며 이는 전진하는 진정한 혁명국가주의 원칙 사이의 필연적인 결과들이다.

새 정부(만일 어떤 혁명이 불행하게도 정부를 가지고 있다면)는 그것이 “혁명적”, “민주적”, “사회주의”, “프롤레타리아”, “노동자와 농민”, “레닌주의”, “트로츠키주의” 혹은 그 밖의 무엇이라 불리든 간에 진정한 혁명의 살아있는 힘에 거스를 수밖에 없다. 이 대립은 권력을 이끌어내고, 같은 필연으로 점점 잔인한 투쟁을 이끌어내고, 정부는 혁명세력에 대한 싸움을 정당화하기 위해 점점 더 위선적으로 되어가며 바로 그 사실에 의해 아나키스트와 충실한 대변인, 지지자 및 진정한 혁명과 그 열망을 지키려는 이들에 대해 현실적인 행위로 맞섰다.

이 투쟁에서 권력의 승리는 필연적으로 사회혁명의 패배를 의미하며, 따라서 “자동적으로” 아나키스트의 억압을 의미한다. 혁명과 아나키스트가 저항하는 한, 사회주의 권위는 뻔뻔스럽고 폭력적으로 그들을 억압한다. 거대한 기만과 무제한의 테러, 이것이 그 최후변론이며 필사적인 방어의 신격화이다. 그리고 진정으로 혁명적인 이들은 모두 “혁명의 절대적 이익”(얼마나 잔인한 역설인가!)에 반하는 이들로서, “범죄자”로서, 그리고 “배반자”로서, 소위 “혁명적인” 사기꾼들에 의해 무자비하게 처단되었다.

그것이 러시아에서 예견될 수 있었던 것이며―국가주의 사상이 승리했을 경우―몇몇 사람들이 예견했던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다음 혁명에서 러시아혁명의 실패, 파산, 재앙을 피하기 위해 수백만 명의 사람들이 마침내 이해해야만 할 것이다.

현재 차르 시대와 마찬가지로 러시아에는 자유의지주의 운동, 언론, 선전이 존재하지 않으며, 오랫동안 존재하지 않았다. 아나키즘은 불법화되었다. 러시아의 아나키스트는 상상할 수 있는 모든 가능한 방법으로 마지막 한 사람까지 몰살당하거나 고립되거나 추방되었다. 아직 몇몇 사람들이 이곳저곳의 감옥이나 유형지에 흩어져 있다. 하지만 죽음은 그들에게 너무나 많은 재앙을 초래해 극소수만이 살아있다.

살해를 모면한 소수의 러시아 아나키스트는 고국에서 추방되고 망명해 서유럽이나 아메리카 대륙의 다른 나라들에 있다. 그리고 러시아에 자유의지주의 사상에 대한 의식적인 파르티잔이 있다 하더라도, 그들은 그것을 속에 숨겨둘 수밖에 없다.

독일, 프랑스, 미국에서 오랜 기간 활동해 희생자들에게 보낼 자금을 모으고 탄압에 대한 정보를 공표한 《러시아의 투옥 및 추방 아나키스트 지원위원회The Committee to Aid Imprisoned and Exiled Anarchists in Russia》는 아직 살아남은 소수의 희생자들과의 연락이 불가능해진 관계로 모든 활동을 그칠 수밖에 없었다.

“공산주의” 혁명 다음 날 일어난 러시아의 자유의지주의 운동 박멸 서사시는 말 그대로 끝나버렸다. 이제 그것은 역사로, 이 지면들을 채울 뿐이다.

이 유례없는 탄압의 국면 가운데 가장 끔찍한 것은, 그동안 박멸에 고통받던 진짜 아나키스트들과 함께 볼셰비키의 사기에 대항해 일어선 수백 수천의 순진한 노동자―공업노동자, 농민, 지식인―가 마찬가지로 전멸되었고, 혁명적인 사상은 물론, 모든 자유 사상과 그 활동까지도 발생기의 사회주의의 땅에서 역사가 되어버렸다는 것이다.


제8부. 진화 작업


이 무시무시한 “역사”가 어째서 외국에 알려지지 않은 것인가? 독자들은 알게 될 것이다.

볼셰비키 정부는 처음부터, 그리고 오랫동안 침묵, 거짓말, 중상모략 같은 상투적인 방법을 사용해 체계적이고 뻔뻔스럽게 그들을 속임으로써 외국의 노동자나 혁명가들로부터 그 무서운 행위들을 은폐하는 데에 모든 노력을 기울였다.

그 기본적인 절차는 사상과 운동을 소멸시킨 뒤 그들의 역사도 지워버리는, 모든 사기꾼이 모든 시대에 사용하는 순서였다. “소비에트” 언론은 볼셰비키가 러시아 인민의 자유에 대항해야만 했던 싸움이나 이기기 위해 의존해야만 했던 수단에 대해서 한 번도 말한 적이 없다. “소비에트” 문헌의 어디에서도 독자는 이런 사실에 대한 이야기를 찾을 수 없다. 그리고 그러한 문헌의 저자가 그것들에 대해 언급하지 않을 수 없는 경우, 그들은 그것이 반혁명운동이나 도적들의 음모를 억제한 사건이라는 몇 줄로 언급을 국한한다. 이러니 누가 진실을 검증할 수 있겠는가?

역사 왜곡에 있어 모스크바의 “공산주의” 정부에 큰 도움이 된 또 한 가지 요소는 국경의 효과적인 폐쇄였다. 러시아혁명에서 벌어진, 그리고 지금도 벌어지는 일들은 밀폐된 선박에서 펼쳐졌다. 실제 현장에 있지 않는 사람에게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아는 것은 불가능하지는 않더라도 내내 어려웠다. 완전히 정부의 것인 그 나라의 언론은 억압에 관한 모든 것에 대해 침묵했다.

유럽의 진보적 집단들에서 러시아 아나키스트의 박해 문제가 제기되었을 때, 모든 제한조치에도 불구하고 진실의 몇 가지 편린이 새어 나왔을 때, 볼셰비키 정부는 번번이 대표자들의 입을 통해 시치미를 떼고 다음과 같이 말했다. “그게 무슨 말입니까? 진정한 아나키스트는 소비에트연방에서 그들의 사상을 긍정하고 선전할 완전한 자유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들은 심지어 클럽이나 언론까지 가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아나키스트와 그들의 사상에 별로 흥미를 지닌 이들이 없었기 때문에 그 대답만으로 충분했다. 반증을 얻기 위해서는 질문에 질문을 거듭했어야 했을 것이다. 그러나 누가 그렇게 할 생각을 했겠는가?

볼셰비키 정부로부터 후원을 받은 몇몇 아나키즘의 변절자들은 정부에 귀중한 공헌을 했다. 증거로써 정부는 이들 전前 아나키스트의 거짓 진술을 인용했다. 과거를 부정하고 순결을 되찾으려는 그들은 정부가 원하는 모든 것을 확인해주고 증언했다.

볼셰비키는 또한 “소비에트 아나키스트”라고 불리는 “길들여진” 변절자들의 말을 인용하기를 좋아했다. 이들은 신중하고 비밀리에 “차근차근 무언가를 할 수 있도록” 겉으로는 “충성”하면서 정세와 볼셰비즘에 영합하는 것이 현명하고 유리하다고 믿었다. 그러나 이 “보호색 전술”은 반정부투쟁의 온갖 기교에 익숙한 볼셰비키에게는 통하지 않았다. 이러한 “위장한” 아나키스트를 면밀하게 감시하고, 끊임없이 그림자처럼 따라다니며 그들을 위협하고, 교묘하게 “길들이는” 것으로 당국은 볼셰비즘의 모든 절차를―“일시적으로”―정당화하고 심지어 인정하게 하기 위해 그들을 이용하는 것으로 끝맺었다. 저항하는 자들은 투옥되거나 추방되었다. 그리고 진심으로 복종하는 이들에 대해서 그들은 “가짜” 아나키스트로 묘사된 다른 모든 사람과는 대조적으로 “볼셰비즘을 이해하는” “진짜” 아나키스트라며 너스레를 떨었다.

혹은, 볼셰비키는 거의 활동이 없고 “민감한” 점에 대해 결코 손을 대지 않는 어떤 아나키스트들에게도 겉보기에 우호적으로 말을 걸었다. 환상을 심어주기 위해 그들은 엄중히 감독되는 몇몇 보잘것없는 조직을 보유하는 것이 허용되었다. 그들 중 일부는 역사적 혹은 이론적인, 오래되고 거슬리지 않는 아나키즘 저작을 재판할 권한을 부여받았다. 그리고 이러한 “아나키즘 출판사”는 “진짜 아나키스트”에 손을 대지 않았음을 증명하기 위해 인용되었다. 후에 이러한 “조직”도 모두 “청산”되었다.

마지막으로, 아나키즘을 희화화하는 데까지 왜곡한 “아나키스트” 광대 몇몇이 용인되었다. 볼셰비키 작가들은 자유의지주의 사상을 비웃기 위해 그들을 인용하는 데 실패하는 일이 없었다.

이와 같이 레닌 정부는 러시아 대중과 정보가 부족한 외국의 사람들로부터 진실을 숨길 수 있는 허울을 만들어냈다. 그 뒤 볼셰비키는 외국 “진보적” 집단의 무관심, 순진함, 태만함을 확인하고는 진실을 숨기려고조차 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진보적인 인사들”과 러시아 대중들은 무엇이든 받아들일 것이기 때문이었다!

이 기만적인 허울은 또한 볼셰비키가 언제나 효과적인 무기인 비방을 사용할 수 있게 했다. 한편으로 그들은 고의로 아나키스트를 “반혁명가”나 “범죄자”, “도적”으로 혼동했다. 다른 한편 그들은 혁명의 와중에 아나키스트는 그저 쓸데없는 말이나 하고, 빈정대고, “방귀나 뀌어대고”, 혁명의 수레바퀴에 똥이나 뿌리고, 파괴하고, 무질서를 유발하고, 그들 자신의 이기적인 이익이나 추구할 뿐이라고 주장했다. 이런 비난을 하는 이들은 아나키스트가 혁명을 위해 봉사하고자 할 때도 그들은 아무것도 올바르게 달성할 수 없다며 거짓말을 해댔는데, 그들에게는 “적극적인 계획”이 없다거나, 결코 구체적인 것을 제안하지 않는다거나, 무책임한 몽상가이며 그들이 무엇을 바라고 있는지도 모르고, 그래서 이 모든 이유에서 “소비에트” 정권은 그들을 억압할 의무가 있었다, 이러한 요소들은 지난한 혁명의 과정에서 중차대한 위험을 초래했다고 주장했다.

관계자 이외에는 아무도 진실을 알지 못했고, 사실을 조사할 수 있는 위치에 있는 사람도 없었기 때문에 이 전술은 성공했다. 그것은 오랜 기간에 걸쳐 볼셰비키 정부에 훌륭하게 봉사했고, 볼셰비키가 구사한 기만적 체제의 일부를 이루고 있었다.

그들의 무자비함에 대해 자유의지주의 언론이나 외국의 다른 장소에서 점점 더 많이, 정확하게 폭로되었으나 이것에 대해 틀에 박힌 반박이 조직적으로, 냉소적으로 행해졌다. “최초의 사회주의공화국”이라는 거짓 명성에 현혹된 모든 나라의 노동대중, 전위지식인들은 그들의 “온화한 지도자”의 모든 허튼소리를 받아들였고, 따라서 스스로를 충성스럽게 “변화”시켜서 아나키스트의 폭로에는 거의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다. 허영심, 유행, 속물근성, 그리고 다른 이차적 요인들이 이 일반적인 무관심 속에 활약하고 있었다.

마지막으로 평범하기 짝이 없는 개인적 이익까지도 그 광범위한 기만에 기여했다. 특히 전 세계적으로 얼마나 많은 유명한 작가들이 그들이 너무나도 잘 알고 있는 진실에 일부러 눈을 감았는가. “소비에트” 정부는 선전 목적으로 그들의 이름이 필요했다. 그 대가로, 정부는 그들의 일을 위해 유리한 시장, 아마도 단 하나의 시장을 보장해주었다. 그래서 이 불쌍한 사람들은 새 후원자들로부터 불어 넣어진 변명과 정당화로 양심을 달래며 이 암묵적인 거래를 수행했다.


제9부. 대표단의 기만


여기에서는 “소비에트”가 대규모로 이용한 “주입식 교육”이라는 특수한 방식―외국 노동자대표단을 조직적으로 기만한 것에 몇 단락을 바쳐야겠다.

이 사실은 잘 알려져 있다. 러시아와 그 위성국들의 관리에 불리한 폭로를 반증하기 위한 볼셰비키의 “결정적 논거” 중 하나는 다른 여러 나라의 조직, 공장 또는 단체에 의해 소련에 파견된 대표단의 증언을 구하는 것이었다. 이들 대표단은 “사회주의의 땅”에 몇 주간 머문 뒤 거의 예외 없이 “소비에트” 정권의 신뢰를 손상하기 위해 외국에서 언급되는 것들을 전부 “거짓말이자 중상모략”이라고 불렀다.

처음에 “대표단의 기만”의 효과는 굉장했으나 나중에는 그 효력을 잃었다. 한동안 그것은 거의 방치되어 있었다. 한편으로 여러 사건이 급하게 진행되어 이 작은 게임은 옆길로 빗나가 버렸다. 다른 한편, 그들의 방문을 둘러싼 조건 아래에서, “소비에트”연방을 방문한 대표단이 진실하고 공정하다 하더라도 그곳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전혀 발견할 수 없다는 것이 마침내 외부 세계에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사전에 공식화되고 잘 조정된, 엄격하고 빠르게 진행되는 프로그램이 도착하는 순간부터 그들에게 부과되었다. 언어도, 관습도, 사람들의 실생활도 알지 못하는 그들은 정부의 안내인과 통역사들로부터 “보조”를 받았는데, 실제로는 조작된 것들이었다. 그들은 “공산주의” 정부가 그들에게 보여주고 싶어 하는 것을 보고, 믿게 하고 싶은 것을 들었다. 그리고 방문객들은 객관적이고 철저히 그들의 생활방식을 연구하기 위해 사람들에게 접근할 방법이 없었다.

이제는 이러한 모든 것들이 다소나마 민주주의국가의 노동자 조직과 관심을 지닌 사람들에게 받아들여지고 있다.

그러나 아직 대중에게 알려지지 않고, 소련의 상황에 대해 많은 것을 말해주는 또 다른 사실을 여기 기록해두는 것이 적당할 것 같다.

《러시아의 투옥 및 추방 아나키스트 지원위원회》, 몇몇 조합주의자 조직, 그리고 몇몇 유명한 개별 투사들, 특히 고인이 된 독일의 에리히 뮈잠(Erich Mühsam)과 프랑스의 세바스티앙 포르(Sébastien Faure)는 거듭해서 볼셰비키 정부에 진정한 대표단―“공산주의자”도 포함한 각각 다른 경향의 투사들로 구성된 완전히 독립적인 대표단이 러시아에 입국할 수 있도록 허용할 것을 제안했다.

이 제안에 따라 대표단의 후원자는 “소비에트” 정부에 다음과 같은 조건을 제출했다. 1. 대표단 스스로가 임무를 완수했다고 생각할 때까지 자유롭게 무제한으로 체류할 수 있을 것. 2. 대표단이 임무를 완수하는 데 불가결하다고 여기는 가능성이 있는 곳은 감옥, 유형지 등을 포함해 갈 수 있는 자유 및 편의. 3. 대표단이 사실, 인상, 결론을 외국의 전위 언론에 공표할 권리. 4. 대표단이 스스로 선택한 통역.

분명 그러한 제안을 받아들이는 것은 볼셰비키 정부에게 완전히 이익이 될 것이었다―만약 정부가 성실하고, 아무것도 숨길 것이 없고, 용인할 수 없는 진실을 감출 필요가 없었다면 말이다. 그와 같은 대표단에 의한 “소비에트” 러시아의 현상에 대한 호의적인 보고서는 모든 모호함을 종식했을 것이다. 어떠한 진정한 사회주의 정부나 어떠한 “노동자 농민의 정부”(그런 것이 존재할 수도 있는 순간을 가정하고)라도 두 팔을 벌려 대표단을 환영했을 것이다. 그러한 대표단을 고대하고, 오히려 제안과 같은 것들을 역으로 정부에서 먼저 제안할 법도 한 일이다. 위와 같은 상황에서 관찰한 대표단의 증언이나 승인은 결정적이고 거부할 수 없으며 반박의 여지가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 제안은 결코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소비에트” 정부는 매번 그것을 들으려고 하지 않았다.

독자들은 이 사실을 잘 고찰해봐야 한다. 이러한 대표단을 반대하는 것 또한 거부할 수 없고 결정적인 일이기 때문이다. 제안된 조사의 결과는 “소비에트” 정부의 훌륭한 이름에, 그 체제 전체에, 모든 명분에 대해 재앙이 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외국에서는 아무도 동요하지 않았다. 혁명의 무덤을 파는 사람들은 깊이 잠들어, 그들이 취한 방법의 결과, 혁명이 패배했다는 끔찍한 사실을 인정시키고자 하는 시도를 무시할 수 있었다. 전 세계의 맹인과 매수된 이들이 무덤을 파는 이들과 함께 행진해 나갔다.

우리는 이러한 진실들을―거의 모든 비非아나키스트 독자에게는 알려지지 않았다고 믿는다―폭로하는 데에 긴급한 의무를 다하고 있다. 왜냐하면 언젠가 반드시 진실은 광채와 함께 나타날 것일 뿐만 아니라―특히―정보를 얻고자 하고 끊임없이 사악한 사기꾼들에게 속아 넘어가고 싶지 않은 모든 사람에게 헤아릴 수 없는 공헌을 하여 그 사람들이 진실에 의해 힘을 받아 올바르게 상황을 인식하고 행동할 수 있게 하기 위해서이다.

소비에트연방 내 억압에 관한 이야기는 그 자체로 그저 암시적이고 시사적일 뿐만이 아니다. 그것은 여전히 근본, 은폐된 이면”, 권위주의적 공산주의의 본질을 알리는 뛰어난 수단이기도 하다.

이 점에서 우리에게 단 한 가지 유감스러운 것―그것은 이 이야기를 불완전한 방법으로밖에 말할 수 없다는 것이다.

볼셰비키와 그 추종자들이 모두를 속이는 방법을 효과적으로 드러내는 또 한 가지 최근의 예시를 더 들어보자.

이것은 악명 높은 볼셰비키인 예밀리얀 야로슬랍스키(Yemelyan Mikhailovich Yaroslavsky)의 작품과 관련이 있는데, 이는 스페인 등지에서 자유의지주의 사상의 궁극적인 성공을 방해하기 위해 1937년 스페인어와 프랑스어로 출판된 『러시아의 아나키즘 역사History of Anarchism in Russia』라는 책이다.

우리는 아나키즘의 기원, 바쿠닌, 1917년 이전의 러시아 아나키즘, 1914년 유럽에서 시작된 전쟁에 대한 아나키스트들의 태도와 같은 근거 없는 이야기는 제쳐두기로 하겠다. 이러한 신화들에 대한 답변은 아마 언젠가 아나키스트 언론에 구체적으로 나타날 것이다. 여기서 특히 우리에게 흥미로운 것은 이 책에 적힌 1917년 혁명 과정에 있어서 자유의지주의운동에 관한 설명이다.

야로슬랍스키는 진정한 아나키즘 운동에 대해서는 이야기하지 않으려고 주의한다. 그는 아나키즘과는 아무 상관이 없는 주변의 운동에 관해 장황하게 말을 늘어놓는다. 그는 이차적 중요성밖에 가지지 않는 아나키스트 그룹과 언론 및 활동에 깊이 관심을 보인다. 그는 주의 깊게 약점을 지적하고 악의적으로 그의 불신에 기름을 붓듯이 결점들을 늘어놓고 있다. 그리고 진정한 자유의지주의 단체들이 괴멸한 뒤 활동다운 무언가를 유지하고자 하는 그들의 필사적이고 헛된 “잔해”, 그 운동들의 불행한 “연명”을 특히 길게 다루고 있다.

이 잔해들은 소멸된 전前아나키즘 운동의 한탄스럽고 무능한 사족이었다. 따라서 그들은 중요하거나 적극적인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감시되고 방해받는 그들의 반쯤 은밀한 “활동”은 러시아 자유의지주의 운동의 특징을 전혀 지니지 못했다. 그리고 모든 나라에서 모든 시대에 국가의 힘에 의해 파괴된 뒤 겨우 살아남은 조직의 파편들은 그 뒤 그들이 완전히 피폐해질 때까지 의미 없고 무력한 존재를 계속한 것이다. 일탈, 비논리, 분열 등이 필연적으로 그들의 껍데기만 남은 삶 전체를 차지했는데, 물론 건강한 활동의 모든 가능성이 빼앗겨 있었기에 그것으로 그들을 비난할 수는 없다.

야로슬랍스키는 이 파편들이 진정한 아나키즘 운동인 것처럼 말하고 있다. 그는 페트로그라드의 《아나키즘적 조합주의자 연맹》과 그 기관지인 「골로스 트루다」를 단 한 번, 심지어 사실을 위조할 무언가를 찾아내려는 의도로 언급한다. 그는 《모스크바 아나키스트 그룹 연맹》도 그 기관지 「아나키」에 대해서도 말하지 않는다. 그리고 우크라이나의 「나밧」에 대해 몇 줄 적는데, 그것 역시 사실을 왜곡하는 것이다.

만일 이 저자가 정직했다면, 그는 주로 이 세 조직을 거론하고 그 기관지들을 인용했어야 할 것이다. 하지만 그는 그러한 공정성이 그의 주장을 망칠 것이며, 따라서 이 책의 전체 목적에 반한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그는 1917년 혁명 당시 러시아의 아나키스트와 아나키즘적 조합주의 운동의 중대한 기초와 적극적인 의미, 그리고 영향력을 명백하게 증명하는 모든 것을 생략했다.

야로슬랍스키는 그 운동에 대한 박해, 억압, 폭력적인 탄압에 대해서는 한마디도 하지 않는다. 만약 그가 그 맹습에 대한 진실을 이야기한다면 그것은 그의 거짓 이론을 망칠 것이기 때문이다. 그에 따르면 1917년 아나키스트는 “사회주의와 프롤레타리아혁명에 반대했다.” 그의 주장은 자유의지주의 운동은 인기가 없었고 무기력했기 때문에 자멸했다는 것이다.

독자들은 이 서술이 진실과 정반대라는 것을 알고 있다. 볼셰비키가 상투적인 폭력을 사용해 군대와 경찰의 야만적인 개입으로 그것을 뿌리 뽑으려고 서두른 것은 바로 그 운동이 러시아에서 빠르게 진화하고 성장해 지지를 얻고 영향력을 넓혔기 때문이다.

그러니 만약 야로슬랍스키가 진실을 인정했더라면 그는 자기 책의 구성 전체를 뒤집어엎었어야 할 것이다. 그래서 그는 독자의 무지를 기회로 삼아 자신감을 가지고 거짓말을 늘어놓는 것이다.

내가 이와 같은 예시를 장황하게 이야기하는 것은 이것이 “소비에트” 프로파간다의 전형이기 때문이다. 러시아 아나키즘에 관해 이야기하는 볼셰비키 저자들은 모두 약속이나 한 듯 똑같은 방식으로 똑같은 소리를 낸다. 명령이 상부에서 내려진다. 볼셰비키 “역사가”와 “작가”는 그것에 따르기만 하면 그만이다.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자유의지주의 사상을 파괴해야만 한다. 그것은 명령에 따라 행해지며, 충분한 보수가 약속된 일이다. 그것은 우리가 지금 드러내고자 하는 역사적 진실과는 아무 관련이 없다.


제10부. 볼셰비키식 “정의”


이 시기 볼셰비키 정부의 행정 및 사법절차를 잠시 살펴보는 일이 우리에게 남아 있다.

이 절차들은 본질적으로 거의 변하지 않았다. 지금은 그러한 처치가 조금 줄어들기는 했으나, 그것은 그 피해자들이 이미 모두 절멸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여전히, 꽤 최근까지도 동일한 원칙과 수단이 “트로츠키주의자”나 반反스탈린주의인 고참 볼셰비키[33]나 명예가 더럽혀진 공무원, 경찰관 등에도 취해지고 있다.

우리가 말했듯이, 러시아에는 공식적인 체포영장 없이 사람들을 비밀리에 체포할 권리가 있고, 증인이나 변호사 없이 비밀리에 그들을 재판할 권리가 있고, 사형을 포함한 각종 처벌을 비밀리에 유죄판결하거나, 적절하다고 판단하는 한 그들의 구금이나 추방을 연장할 권리가 있는 비밀정치경찰 시스템이 존재한다.

이것이 중요한 점이다. 수인囚人이나 유형인에게 적용된 가증스러운 요법은―우리는 속아 넘어갔거나 매수된 외국 “대표단”들의 모든 부정에도 불구하고 이 진술을 주장할 것이다―상황의 악화에 지나지 않는다. 러시아 감옥생활이 설령 교도관이나 조수들에 의해 약간의 인도주의적인 성격을 띠는 경우가 있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정직한 노동자가 가정이나 작업장에서 강제로 연행되어 투옥되고 어떠한 기관의 간단한 결정에만 따른 구속의 이유에 대항해 싸울 권리마저 박탈될 수 있다는 사실을 변경하는 것은 전혀 아니다.

우리가 특히 관심을 기울이는 이 시기에 그 전능한 경찰력은 체카라고 불리고 있었는데, 그것은 온전한 러시아식 명칭인 치레즈비차이나야 코미시야Chrezvytchainaya Kommissia, 즉 특수위원회의 약칭이었다. 체카는 1917년 말 레닌의 주도로 차리즘에 대한 투쟁의 공헌이 인정되어 러시아공산당 중앙위원회의 무한한 신뢰를 받고 있는 핵심 공산당 투사들에 의해 창설되었다.

당시 공산당원들은 혁명을 위협하는 수많은 음모에 대해 신속하게 행동할 필요성을 지적함으로써 이 기관의 존재와 그 기능의 특수성을 정당화했다. 그 뒤 이 구실은 의미가 없어졌다. 체카는 더 이상 그 변명을 써먹을 수 없게 되었다. 왜냐하면 새로운 문제, 다시 말해 혁명으로부터 권력을 수호한다는 문제에 대처할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1923년 비밀경찰은 이름을 G.P.U.라는 약칭으로 변경했는데, 아주 일부의 임무만이 변경되었을 뿐이다. 따라서 상층부 인사를 제외하고 아무것도 변하지 않았다. 세 사람의 이름이 외국에도 꽤 잘 알려져 있다―체카의 창설자임과 동시에 활동가였던 제르진스키(Felix Edmundovich Dzerzhinsky)는 급사했다. 혹은 무언가의 이유로 스탈린의 명령에 따라 근무 중 처형되었다. 야고다(Genrikh Grigoryevich Yagoda)는 유명한 “재판” 결과 처형되었고, 그의 후계자 예조프(Nikolai Ivanovich Yezhov)는 쥐도 새도 모르게 모습이 사라졌다.

체카는 노동대중에게도, 그들의 “대표”에게도 그 활동에 대한 보고를 발표하지 않았다. 그 활동은 늘 극비리에 행해졌다. 첩보원의 방대한 스파이 망網에 의해 정보가 체카에 제공되었는데, 그 첩보원의 상당수는 전前 차리스트 경찰로부터 채용되었다. 그리고 체카는 또한 모든 공산당원에게 정보 제공이나 고발 등을 의무로 부과해 “혁명적인” 경찰을 돕도록 했다.

지하 감옥에서 자행된 압제, 학대, 범죄는 모든 상상을 초월한다. 우리는 여기서 그것들을 열거하는 데 시간을 들일 수 없다. 이 특정 주제는 그것만 가지고도 충분히 책 한 권 분량이 될 것이다. 미래의 역사가들은 기록보관소가 공개되어 그 끔찍한 인간성의 기록이 발표되면 모골이 송연해질 것이다. 독자들은 입수할 수 있는 몇 가지 책으로 교훈이 될 만한 사례들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그 기간 동안 정치사건에 대한 법정이나 공개재판은 존재하지 않았다. 오늘날조차 그와 같은 재판은 예외적이다. 그리고 체카는 당시 그것들을 전담해서 다루었다.

일반적으로 체포된 이들에게 항소권은 없었다. 처음에는 선고도 공표되지 않았다. 그 뒤 가끔 경찰 앞에서 행해지는 구두로 이루어지는 재판의 판결에 한해 몇 줄 신문에 언급되는 경우가 있었다. 이러한 참조들도 소송사건표에 사건이 기록되고 판결이 내려졌다는 것을 적어두었을 뿐이었다. 재판의 이유는 결코 언급되지 않았다.

체카 자신이 처형을 직접 집행했다. 판결이 사형으로 결정되면 수인은 감옥에서 끌어내져서, 지하실로 통하는 계단 마지막 단을 내려가는 순간 뒤따라온 체카 처형인의 리볼버로 후두부가 쏘아져 처형되는 것이었다. 그리고 시체는 비밀리에 묻혔다. 시체는 수인의 가족들에게 돌려보내지지 않았다. 가족들은 종종 가족이 처형되었다는 것을 간접적으로 알 수 있을 뿐이었다―교도소 관리가 그들이 반입하려고 가져온 것을 거부함으로써. 전통적인 어휘는 매우 간단명료했다. “그는 더 이상 교도소 기록에 나와 있지 않다.” 이 말은 다른 감옥으로 이송되었거나 추방되었음을 의미할 수도 있는데, 죽었을 때 역시 공식 용어로 사용되었다. 다른 설명은 허락되지 않았다.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정확히 알기 위해 다른 곳을 찾아보는 것은 가족들의 몫이었다.

추방은 언제나 행정적인 것으로 광대한 국토의 가장 먼 불모의 땅, 즉 무덥고 습기가 많아 건강에 매우 좋지 않은 중앙아시아Turkistan나, 끔찍한 나림Narym이나 투루한스크Turukhansk 지방의 최북단에의 유형을 의미했다. 종종 정부는 추방자들을 맨 처음에는 중앙아시아로 보냈다가 갑자기 먼 북쪽으로 옮기거나 혹은 그 반대로 이송시키며 “즐거워했다.” 그것은 그들을 저세상으로 보내는 간접적이지만 확실한 방법이었다.

《지원위원회》와 북단으로 추방된 자유의지주의자들 사이의 서신은 이 희생자들의 “삶”에 대한 육체적 · 정신적 공포를 드러냈다. 목적지에 도착한 때부터 그들은 세상으로부터 고립되었다. 그러한 목적지는 대개 사냥이나 낚시로 살아가는 사람들의 세상에서 잊힌 마을이었다. 우편물은 일 년에 한두 번밖에 오지 않았다. 이들 수백 명의 주민은 얼음과 눈의 황무지에 있는 네댓 개의 오두막에 박혀 살았다.

그 추방자들은 영양실조, 혹한, 운동 부족으로 말미암은 온갖 질병―괴혈병, 결핵, 심장병, 위장병 등을 앓았다. 삶은 느린 고문이었고, 죽음이 구원으로 다가왔다.

자유의지주의자, 조합주의자, “반대파”, 모반했거나 혹은 단지 그 혐의를 받았을 뿐인 노동자나 농민 및 기타 시민이 갇혀있던 감옥들은 외국의 대표단의 방문을 받지 못했다. 그러한 방문 단체들은 보통 소콜니키Sokolniki, 레포르토보Lefortovo, 부티르키Butyrki의 특정 부서의 인도를 받았다―즉 반혁명자나 투기꾼, 일반 죄수들이 수감되어 있는 모스크바 교도소로 안내되었다. 때로 이들 수인은 스스로를 “정치범”이라 자칭하는 것으로 감형을 약속해준 교도소 기관을 찬양하도록 설득되기도 했다.

일부 대표단은 코카서스Caucasus의 티플리스Tiflis에 있는 사회민주주의자를 위한 감옥을 방문할 수 있도록 허가되었다. 그러나 기타 일정한 감옥들은 결코 외국 대표단이나 개별 여행자의 방문이 허락되지 않았다―특히 솔롭키Solovki 수용소는 외신에도 자주 언급되었지만 여전히 미지인 채였다. 그 밖에 수즈달Suzdal 감옥(원래는 수도원이었으나 변형되었다), 베르흐네우랄스크Verkhneuralsk, 토볼스키Tobolsk, 야로슬라블Yaroslavl의 “정치범 격리소”가 있었다. 이 밖에도 숱한 감옥과 수용소가 전국에 산재했다. 그 어느 것도 “최초의 사회주의 국가”에의 “연구” 여행에서 돌아와 “소련에 의해 만들어진 새로운 형무소 제도”에 대해 호의적인 보고를 하도록 이끌어진 소박한 사람들, 혹은 관심을 가진 사람들에게는 전혀 알려지지 않고 있다.

로맹 롤랑(Romain Rolland)은 “소비에트” 러시아에 있어 행정적 정의正義를 발견할 수 있었다고 말한다.

무제한적인 탄압, 인민에 대한 폭력, 테러―이러한 것들이 볼셰비키 작품으로, 그들의 “소비에트” 체제의 왕관을 만들어냈다.

이 모든 테러를 정당화하기 위해 그들은 혁명의 이익에 호소했다. 그러나 이 정당화의 시도만큼 거짓이며 위선적인 것은 있을 수 없다.

아나키스트는 단지 그들이 사회혁명의 원칙 그 자체를 옹호했기 때문에, 인민의 진정한 경제적 · 정치적 · 사회적 자유를 위해 투쟁했기 때문에 러시아에서 박멸당했고, 더 이상 그곳에 존재할 수 없게 되었다.

일반 혁명가들과 수십만 노동자는 세계 모든 곳의 권위와 특권계급과 마찬가지로 혁명정신을 전혀 지니지 않고, 그 대신 지배하고 착취하고자 하는 갈망으로 오로지 권력을 유지하는 새로운 권위에 의해, 새로운 특권계급에 의해 러시아에서 절멸되었다. 그들의 제도는 다른 권위주의적이며 국가주의적인 제도와 같이 계략과 폭력에 의해 뒷받침된다― 때문에 필연적으로 지배자, 착취자, 억압자가 된다.

“공산주의” 국가주의 체제는 파시스트 체제의 변형에 불과하다. 전 세계의 노동자가 이를 이해하고 숙고하여, 이 끔찍하고 부정적인 경험으로부터 유익한 교훈을 배우기에 가장 알맞은 때가 되었다.

뿐만 아니라 현재의 사건들은 그 성과에 강하게 기여하고 있으며, 다가올 사건들은 그들에게 한층 더 많은 기여를 할 것이다. 내가 이 글을 쓰고 있는 지금 1939년 12월, 볼셰비키는 마침내 국경을 넘어 러시아의 “우리”를 벗어나려 하고 있다. 곧 그것이 기능하는 것을 보게 될 것이다. 나는 이 최후의 심판의 성질에 조금도 의심을 품고 있지 않다.

이 사건들이 현재의 작업과 그 계시에 대한 보다 나은 이해에 똑같이 기여하기를 바란다. 그리고 또한 나는 이 책이 독자들에게 여러 사실을 더 잘 이해할 수 있게 해 주기를 바란다.

특히 이러한 계시들에 비추어 이오시프 스탈린의 대두를 이해할 수 있다. 사실 스탈린은 “달에서 내려온 것”이 아니다. 스탈린과 “스탈린주의”는 단순히 예비적이고 준비적인 개혁의 논리적 귀결이자 끔찍한 오류의 결과이며 혁명의 사악한 일탈의 결과 그 자체에 다름 아니다.

레닌과 트로츠키―즉 그들의 체제―가 스탈린을 위해 기반을 다지고 스탈린을 탄생시킨 것이다.

레닌과 트로츠키 및 그 일파를 지지했던 모든 사람에게, 오늘날 스탈린에 대항해 격앙된 모든 사람에게 반드시 다음과 같이 말해야만 한다. “그들은 스스로 뿌린 씨앗을 거두어들이고 있는 것이다!”

논리가 모든 사람이 납득할 수 있는 영역이 아니라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너무 늦기 전에, 그들의 목적을 바로잡도록 해야겠다.

15년 전에 그 사실에 닿은 한 아나키스트가 다음과 같은 어떠한 글을 썼다―훌륭하고 힘차고 올바른 문장을.

한결같은 권위주의의 괴물성을 보여주는 사실들이 여기 있다. 거대하고 숭고한 이상의 이름 아래, 또는 사회과학의 가장 논리적인 공식의 이름 아래, 독재에의 길을 맹목적으로 대담하게 전진하는 이들이 공포에 떨고 후퇴하기를 빈다. 러시아 아나키스트가 빠져들어 가 학살된 함정을 피하기 위해서뿐만 아니라, 혁명 시기에 공산주의 독재자들의 이론에 생산과 분배의 현실적 이론을 대치시킬 수 있도록 혁명적 정세로 발전하는 전야에 모든 예방적 조치가 취해지기를 빈다.

나중에 죽음을 얼마 앞두고서, 이것을 쓴 이의 아나키즘에 대한 신념은 무너졌다. 열광의 순간에 그는 볼셰비즘에 찬동했다.

다행히 일반적으로 약하고 비논리적인 존재인 인간이 굴복하고 변형되고 전향했다 하더라도, 이전에 그들이 선포했던 진실은 남아 있다.


5. 볼셰비키 국가


제1부. 볼셰비키 국가의 본질


1921년 말까지, 공산주의 권력은 상황을 완전히 지배했다고 느꼈다. 적어도 즉각적인 위험으로부터는 안전하다고 여길 수 있었다. 나라 안팎의 좌파 및 우파인 적이나 반대자는 이제 더 이상 그것에 맞설 수 없었다.

1922년부터는 세심하게 주의를 기울여 국가를 공고히 굳혀나갈 수 있었다.

한편으로 현재 러시아 국가는 근본적인 측면에서 1918년에서 1921년에 설립되고 확립된 것의 논리적 발전이다. 그 뒤 변경된 것은 단순한 수정이거나 세부의 완성일 뿐이었다. 우리는 생각나는 대로 그것들을 적어보겠다.

볼셰비키 국가는 이제 건립 20년이 된다.

그 국가의 본질은 정확히 무엇인가?

그것의 기초, 구조, 본질적 요소는 무엇인가?

그것은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연방이라고 불리며 약칭은 소련이다. 그것은 “프롤레타리아” 또는 “노동자와 농민”의 국가인 척하고 있다. 그것은 “프롤레타리아 독재”를 행사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그것은 스스로를 “노동자의 조국”이자 사회주의와 혁명의 성벽이라고 우쭐대고 있다.

이 중 얼마만큼이 진실인가? 이 국가의 사실과 행동은 이러한 선언과 자부를 증명하고 있는가?

볼셰비키의 구상을 대강 살펴보면 이 질문에 대한 적절한 답변이 가능하다.

내가 대강 살펴보면 된다고 이야기했지만, 사실 일반적으로 러시아 국가에 대한 상세하고 더 많은, 혹은 완전한 연구는 그 자체로 한 권의 책 분량을 요구할 것이다. 그것은 현재 우리 작업의 목표가 아니다. 그리고 이 페이지 전에 있었던 사항들과 그에 대한 일반적인 개괄이면 충분할 것이다. 우리는 우리가 문제 삼은 사항들을 정리하고 마무리하겠다.

이 점에 관해서 현재 프랑스에는 이 “소비에트”국가의 구조, 기능, 정신에 대해 상당히 정확한 지식을 제공하는 책이나 팸플릿, 잡지, 신문기사와 같은 풍부한 문헌이 갖추어져 있다는 것을 독자들에게 말해 두고자 한다.[34] 수년간 그 국가의 성격, 그 정부의 참모습, 그곳에서의 노동대중의 상황, 소련 경제의 정확한 상태, 그 문화 및 기타 측면을 명확히 보여주는 수많은 작품이 등장했다. 이 작품들은 볼셰비키 정권의 무대 뒤 측면과 숨겨진 이면, 그들의 오류, 그들의 “비밀스러운 병증”을 밝히고 있다.

확실히, 이 문헌의 저자들은 “소비에트”국가의 쇠퇴의 원인과 결과를 밝히기 위해 문제의 저변에 도달하려고 하지는 않았다. 그들은 러시아혁명에 있어서 “또 다른 불꽃”, 자유의지주의 사상, 그 역할, 그리고 그 운명에 대해서는 언급하고 있지 않다. 그들에게 있어 그 밖의 많은 나라에 관해서는 모두 미답未踏의 영역이다. 그들은 어떤 해결책도 제시하지 않는다. 그러나 그들은 성실히 사실을 제공하고 있다. 이리하여 그들은 혁명 이후 “공산주의” 정부가 취한 그릇된 경로를 알려주고, 그 파산을 반박할 수 없을 정도로 증명하고 있다.

일반적으로 이들의 연구는 풍부하고 정확한 문서를 제공한다.

다만 여기서는 일반적인 “전체상”에 국한하도록 하겠다. 이는 우리가 당면한 목적에는 충분할 것이다. 왜냐하면 혁명 중 및 혁명 후의 사건들에 빛을 비춘다는 점에서 우리가 특히 흥미를 지니고 있는 것은 이 국가의 전반적인 성격이기 때문이다.

권력을 장악한 볼셰비키당의 주된 관심사는 앞서 말한 것처럼 모든 활동과 러시아의 모든 생활, 실제로는 국유화할 수 있는 모든 것을 국유화하는 데 있었다. 그것은 현대의 용어로 전체주의totalitarian라고 불리는 체제를 만들어내는 문제였다.

일단 적당한 강압적 군대를 가지게 되자 당과 정부는 이 임무 수행을 위해 군대를 최대한 활용했다. 그리고 “공산주의” 권력이 거대한 관료기구를 만든 것도 바로 이 목적을 위해서였다. 그것은 마침내 “책임 있는” 직책의 관료의 광범위하고 강력한 계급을 형성하고 오늘날 약 2백만 명의 특권층을 구성하고 있다. 국가, 군대, 경찰의 유능한 여주인인 이 특권층은 그 우상이자 황제이며 소련의 질서를 유지하고 그 특권을 안전하게 지켜나갈 수 있다고 생각되는 유일한 사람인 스탈린을 지지하고 보호하고 숭배하고 아첨한다.

볼셰비키는 모든 러시아의 행정, 산업노동자 및 농민 등의 조직, 재정, 운송수단, 지하자원, 수출입과 중요한 국내 상업, 대공업, 토지와 농업, 교육, 일반문화, 출판과 문학, 예술, 과학, 스포츠, 오락, 그리고 심지어 사상과 적어도 그 모든 표현을 점점 손쉽게, 신속하게 국유화하고 독점하고 “전체주의화”했다.

러시아 노동자 조직―소비에트, 노동조합, 공장위원회 및 기타 그룹들―의 국유화는 가장 간단하고 신속했다. 그것들의 독립은 폐지되었다. 그것들은 그저 당과 정부의 사무와 행정상의 톱니바퀴가 되었다.

볼셰비키당은 교묘하게 이끌어나갔다. 노동자는 자신이 반신불수가 되어가고 있다는 사실조차 깨닫지 못했다. 국가와 정부는 지금으로서는 “그들의 것”이었으니 그들이 거기서 떨어질 수 없다는 것은 당연한 것처럼 여겨졌다. 그들은 그들의 조직이 “노동자”국가에서 기능을 수행하고 “동지 인민위원”의 결정을 이행하는 것이 정상이라고 생각했다.

머지않아 그 조직들에 의한 자율적인 행동이나 자유로운 행동이 금지되었다. 마침내 그들은 자신들의 실수를 깨달았다. 하지만 그때는 너무 늦었다. 몇몇 노동자 조직이 그들의 활동에 방해를 받고, 불안하게 되고, “소비에트국가의 무언가가 잘못되었다”고 느껴 불만을 드러내기 시작하고 약간의 독립성을 다시 손에 쥐려 했을 때 정부는 모든 에너지와 모든 계략으로 그들을 반대했다. 우선 그들은 즉시 처벌을 내렸다. 다음으로 불만이 있는 이들을 설득하려고 했다.

“이제서야” 그들은 세상에서 가장 태연스러운 태도로 노동자들에게 말했다. “우리는 노동자가 노동자 스스로의 독재를 집행하고 모든 것이 노동자의 소유인 노동자국가를 가지게 되었고, 이 국가와 그 기관은 여러분의 것이오. 그렇다면 어떤 “독립”에 대해 의문이 생기는 거요? 그런 요구는 터무니없는 소리요. 무엇으로부터 독립한다는 거요? 누구로부터? 그대들 자신으로부터? 국가는 그대들 자신이오!

이것을 이해 못 한다는 것은 성취한 혁명을 이해하지 못한다는 뜻이오. 이 정세에 반대한다는 것은 혁명 자체에 반대한다는 것을 의미하는 거요. 혁명, 노동계급, 노동자국가, 노동자독재, 노동자권력의 적들로부터만 그러한 생각이 생기는 것이니 그런 사상과 운동은 용납될 수 없소. 이들 적이 속삭이는 소리에 귀를 기울여 그대들의 젊은 국가에서는 아직 모든 것이 완벽하지 않기 때문에 그들의 사악한 제안에 솔깃한 무지한 사람들은 분명 반혁명적 행동을 저지르고 있는 것이오.”

말할 것도 없이 계속 항의하고 어느 정도의 독립을 고집한 사람들은 모두 무자비하게 분쇄되었다.

달성하기 가장 어려운 것은 토지의 완전한 독점과 개별 경작자의 억압이었다. 우리가 알다시피 수년 전 이 변혁을 초래한 것은 스탈린이었다. 주기적으로 정세는 다시 심각해지고 복잡해진다. 국가와 농민대중 사이의 투쟁은 새로운 형태로 계속되고 있다.

인간의 노동과 활동에 불가결한 모든 것―다시 말해 넓은 의미로 자본인 모든 것―이 러시아의 국가에 속해 있는 한, 이 나라는 완벽한 국가자본주의의 표본이다. 생활의 모든 영역―물질적, 도덕적, 정신적―에 걸친 논리적 귀결과 그 발현에도 불구하고 소련의 경제, 재정, 사회, 정치제도는 바로 국가자본주의다.

이 국가의 정확한 명칭은 U.S.S.R., 즉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연방이 아니라 U.S.C.R., 국가자본주의 공화국 연방일 것이다.

경제적으로, 이것은 국가가 국가의 모든 부, “국가의 유산” 전체, 수백만의 남녀가 생활하고 활동하기 위해 불가결한 모든 것들의 진정한 소유자라는 것을 의미한다. 여기에는 국내외의 모든 돈, 모든 금융자본이 포함되어 있다는 것을 강조해두어야겠다.

이것이 가장 중요한 것이다. 그것이 무엇보다도 이해되어야 하는 것이며, 나머지는 부수적인 것이다.


제2부. 노동자들의 상황


사회적으로, 스탈린이 지배하는 영역의 기초적인 체제는 다음과 같은 사실에 의해 성립하고 있다.

다른 모든 나라에서처럼, 소련의 노동자는 피고용인이다. 그러나 그는 국가의 피고용인이다. 국가가 그들의 유일한 고용주다. 사적자본주의가 만연한 국가들에서처럼 수천의 “선택지”를 가지는 대신 소련(국가 자본주의 공화국 연방)에서 노동자는 하나의 선택지밖에 가지지 못한다. 그곳에서 고용주를 변경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이 나라는 “노동자의 국가”인 척을 하니, 통상적인 의미의 고용주는 아니다. 상품생산에서 나오는 이익은 자본가의 주머니에 들어가지 않고(스탈린 정권은 그렇게 주장한다), 돈과는 다른 형태로 노동자에게 돌아와 결국에는 노동자의 이익이 되는 것이다.

교묘하게 들리겠지만, 이 추론은 순전히 이론 상의 그것이다.[35] “노동자국가”는 노동자 스스로에 의해 관리되지 않고(노동자는 완전히 다른 사회체제에서만 스스로 생산을 관리할 수 있으며, 근대의 중앙집권적 국가에서는 결코 그렇게 할 수 없다), 정부에 고용된 거대한 관료층의 손으로 관리되고 있다. 그리고 그 정부 자체가 노동 대중으로부터 유리된 견고한 집단의 중심을 이루고, 자기들 마음대로 행동하고 있다. 그렇게 하는 것이 노동자에 대해 “책임 있는” 태도라고 말하고 있다. 이것도 역시 또 다른 추상抽象이다. 현실은 그 공식과 아무런 공통점도 지니고 있지 않다.

소련 내의 모든 노동자―만일 그가 정말 단순히 노동자라면―에게 국가가 얻은 이익 중에서 임금 이외에 어떤 형태로든 그가 이익을 얻고 있는지 물어보라. 그는 당신의 말을 이해조차 못 할 것이다. 그는 그런 것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모른다고 답할 것이다. 그가 알고 있는 것이라고는 늘 불충분한 약간의 임금밖에 얻을 수 없다는 것, 그 임금으로 삶을 유지하는 데 극히 어려움을 겪고 있다는 것뿐이다. 그는 또한 “소비에트”연방에는 “유쾌하게”(스탈린이 말한 것처럼), 풍요롭게, 호화롭게 살고 있는 많은 사람이 있다는 것도 알고 있다.

노동자들에 대해 “책임이 있다”고 알려진 사람들을 압박할 수 있는지, 그들을 비판할 수 있는지, 그들에게 명령하거나, 그들을 추방하거나 교체할 수 있는지 그에게 물어보라. 그는 여전히 당신을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그가 알고 있는 것은 “그들이 무엇을 하는지 알고 있는” 그들의 수장의 명령을 수행하기만 하면 그만이라는 것, 그들에 대해 아주 조금이라도 비판을 하면 그에게 가장 큰 희생이 돌아오게 되리라는 것뿐이다. 이들 수장은 정부에 의해 그에게 강제로 강요된 이들이고, 정부에 대해서만 책임을 다하려 하고 있다. 정부에 관해서는, 그것은 오류가 없고 논쟁의 여지가 없는 것으로, 그 신빙성은 신화에 가깝다.

소련 노동자의 실태를 조금 살펴보도록 하자. 사적자본주의가 만연한 나라의 노동자들과 본질적으로 다른가?

다른 모든 곳처럼 스탈린의 영토 안에 있는 노동자도 월급날이면 급여를 받기 위해 그들이 고용된 곳의 급여담당자 창구로 가야만 한다. 이 임금은 그들의 유일한 사장인 국가의 급여담당인 직원으로부터 지급된다.

이 직원은 정부가 정한 임금 틀에 맞추어 그들의 급여명세서를 작성한다. 고용주인 국가가 공제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하는 분량만큼 직원은 급여에서 공제한다. 적군赤軍을 위해, 채권(“자유로운”, 그러나 강제적인, 소비에트의 궤변이다)을 위해, 외국의 프로파간다를 위해, 국가 복권(이것도 “자유로운”, 그러나 강제적인 제도이다)을 위해. 직원은 다른 나라의 다른 사무실에 고용된 급여담당과 마찬가지로 노동자에게 돈을 지불한다. 당연히 소련의 노동자는 국가가 그의 임금에서 이익을 얻어서 그 이익으로 무엇을 하는지 전혀 알지 못한다. “그것은 정부가 할 일”이며, 노동자는 그러한 문제에 상관하려는 생각은 꿈에도 하지 않는다.

그런데 사적자본주의가 만연한 나라에서는 노동자가 불만이 있는 경우 그 고용주를 떠나 다른 고용주를 찾을 수 있다. 그는 직업을 바꾸어 마음에 드는 곳으로 가서 마음에 드는 일을 할 수 있다.

모든 공장의 소유자인 고용주가 한 명밖에 없는 소련에서는, 이는 전혀 불가능하다. 최근의 법률에 따르면 노동자는 “그의 형기刑期를 물을” 권리도, 자기 의지로 공장을 사직할 권리도 없다. 사직하기 위해서는 경영자 간부의 허가를 받아야만 한다. 이 간부진은 오랫동안 공장위원회를 대체해 온 관리들로 구성되어 있다. 때문에 노동자는 농노나 노예와 마찬가지로 작업장에 못 박혀 있다.[36]

러시아 노동자가 그의 의무적 신분증에 기록된 특별허가 없이 공장을 그만두거나 해고될 경우, 재허가 없이는 다른 곳에서 일할 수 없다. 같은 국가에 고용된 관리인 다른 곳의 공장장은 그 노동자를 고용할 수 없는데, 이를 위반하면 엄한 처벌에 처해지기 때문이다.

이런 조건 하에서 국가라는 고용주는 노동자를 마음대로 다룰 수 있다. 국가는 노동자를 노예처럼 다룬다. 노동자는 자신에게 강요되는 모든 것을 받아들일 의무가 있다. 그에게는 고용주를 선택할 권리도, 방어할 수단(그의 노동조합은 정부라는 고용주의 손아귀에 있고, 조합원은 “자신의 정부에 반대하여” 자기를 방어할 수 없다는 등의 사태를 승복하지 않았다)도 없어서 단념하고 사는 것 외에 달리 방법이 없기 때문이다. 노동자가 어떻게 해서든 스스로 “매듭을 풀어나가지” 않는 한 방법이 없다.

언론도 “노동자의 정부”의 수중에 있고, 연설도 정부에 속해 있고, 집회도 공식 명령 없이는 허가되지 않으니 노동자는 불평을 표할 수도 없고 자기 의견을 다른 이들에게 이야기할 수도 없다. 러시아와 같은 광대한 국가에서는 “매듭을 푸는” 가장 좋은 방법은 언제나 방랑하는 길이었다. 이 관행은 변함이 없었다. 수천의 전前 노동자는 “불규칙하게” 직장을 그만두고 당국과의 사이가 틀어지면 옛 전통을 되살려 길을 나섰다. 그들은 큰 실업자 무리를 이루었지만 소비에트 언론은 물론 그 일에 대해서 입을 다물고 있다.

일반노동자와 특수한 공장노동에 관한 소련의 법률은 매우 엄하다. 수만의 노동자가 단지 그것을 지키지 않았다는 이유만으로 감옥과 유형지에서 고통을 받으며 죽어가고 있다.

더구나 노동도 고되다. 큰 중앙관청을 제외하고 작업장의 위생상태는 비참하며, 일반적인 환경도 빈약하다. 거의 모든 곳에서 분업에서 오는 중노동이 있고, 테일러시스템[37]이 채용되었다.

소련 전역에서 “스타하노프 운동”[38]이 만연하고 있는 것이 이를 증명한다(독자는 여러 다른 저작에서 소련의 노동조건에 대해 내가 말한 바에 대한 증거와 반박할 수 없는 증언을 발견할 것이다).[39]

스타하노프 운동에 대한 진상은 러시아 영토 바깥에서는 충분히 알려져 있지 않다. 이 용어는 노동자의 생산 강화를 위한 대규모 캠페인을 목적으로 볼셰비키 당국에 의해 선발된 광부 알렉세이 스타하노프(Alexey Grigoryevich Stakhanov)의 이름에서 유래했다. 그것은 “소비에트” 신자본주의 간부들에게 있어 그 용어를 사용하지 않고, 또 정부에 의해 부추겨진 것처럼 보이게 하지 않으며 미합중국에서 수입된 테일러시스템의 원리를 적용하는 문제였다.

어느 날 스타하노프는 자발적으로 그의 상사에게 x배로 생산을 증가시킬 수 있는 채광 작업을 조직하는 새로운 법칙을 발견했다는 파격적인 선언을 했다. 고 가정되고 있다. 정부는 즉각 이 발견에 “관심을 보이고”, 그것이 유용하다는 것을 깨닫고, 그에 대해 요란법석을 떨고, 모든 러시아에 새로운 방법을 도입하기 위한 광범위한 캠페인을 실시했다.

그러나 실제로는, 볼셰비키당에 의해 격려되고 추켜올려진 스타하노프는 미국을 “발견”했을 뿐이었다. 그의 “새로운” 방법은 대서양을 건너 처음으로 선보인 낡은 고안에 불과했다.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러시아의 환경에 맞게 개조된 조립 라인(포드 자동차 및 기타 공장에서 사용되고 있는 능률 촉진)이었다. 그러나 스타하노프의 막대한 일일 채광 작업량에 주어진 “무대장치”와 그것이 유발한 큰 평판으로, 그것은 마치 엄청나게 운이 좋은 대발견이 되어버렸다. 외국의 멍청이들과 얼간이들은 그것을 매우 정색하고 받아들였다.

그 “발견”은 국가라는 고용주의 특별한 사업이 되었다. 국가는 노동자의 생산량을 전반적으로 증가시키고자 하는 희망을 품게 되었다. 그러고 나서 그것은 정부에게 노동자 사이에 특권층을 형성하도록 촉발하고, 그 조직은 생산증가를 위한 정부의 요구에 크게 공헌하고―특권층은 대개 일반 노동자들보다 유능한 지도자였다―그렇게 하여 노동대중을 교묘하게 조종했다. 그리고 마침내 특권층은 정부라는 고용주의 위신을 드높이게 되었다.

새로운 능률 시스템은 언론, 포스터 및 공개집회의 연설에서의 집중적인 홍보를 통해 시작되었다. 스타하노프는 “노동영웅”으로 선포되어 포상금과 훈장을 수여 받았다. 그의 시스템은 산업의 기타 분야에도 적용되었다. 어디서나 시기심 많은 “경쟁상대”들이 그를 모방하고, 그의 성과를 넘어서기까지 시작했다. 이들은 모두 자신을 특별하게 하는 것, “출세하는 것”, “영달”에 의욕적이었다―그 결과 “영웅”들의 감독 하에 노동자 전체에 손해를 입히거나 새로운 능률 증진, 즉 착취의 증대를 강요하게 되었다. 영웅들은 다른 이들의 등을 밟고 서 있다. 그들은 이익과 특권을 획득하고 마침내 그 제도를 채용해 대중을 끌고 갔다. 그에 따라 스타하노프주의자 간의 “경쟁”은 스타하노프 운동을 탄생시켰다.

얼마 후 노동대중은 그 혁신의 참뜻을 이해했다. 이 전체적인 운동에 의한 “초超착취”에 반대할 힘이 없어 그들은 자신들의 불만을 무수한 사보타주와 복수로 표시하고, 마침내는 지나치게 열광적인 스타하노프주의자들을 암살할 정도였다. 정부는 반反스타하노프 운동 억압을 위해 엄중한 조치에 호소할 수밖에 없게 되었다. 더구나 이 기획은 곧 무의미하게 되었다. 일단 그 허구성이 간파되자 남은 것은 이제는 생산에 있어 현실적으로 유효한 역할을 하지 못하는 일종의 노동자 낙관주의뿐이었다.

소련의 “국유화된” 노동자는 적어도 본질적으로 근대적 노예다. 순종하고 열심히 일하는 조건으로 그는 꽤 좋은 대우를 받는데, “주군”에 의해 보호를 받거나 유급휴가로 보상받는 등이 그것이다. 그럼에도 현실적으로 이것은 노동계급의 극히 한정된 일부일 뿐이다. 그 계급은 여러 부류로 나뉜다. 그들의 생활조건의 차이는 모든 중간계급을 통해 양호함에서 빈곤에 이르기까지 서열이 있다. 은혜는 “그것을 받을 만한 가치가 있는” 노동자에게만 주어진다. 충분한 급여를 받거나 휴가 등의 특전을 받기 위해서는 그럴 만한 가치를 가지고 일반대중을 떨어뜨리고 “올라설” 필요가 있다.

소비에트연방의 압도적인 대다수 노동자는 비참한 생활을 견디고 있다―특히 미숙련자, 일용직, 보조공, 중소기업 종업원 및 일반 평균적인 노동대중들이 말이다. 그 밖에 숙련되고 전문화된, 특권을 가진 다른 노예들은 비교적 “괜찮은” 삶을 살고 있으며, 일종의 “노동귀족”을 형성하고 있다.

노동귀족은 매우 자주 불행한 계급의 동료들을 불신하고 반발한다. 소련 내 생존경쟁은 격렬하다. 희생자들에게는 몹시 불리하다. 그들은 스스로를 돌보아야만 한다. 만일 어떤 이가 희생자를 돌본다면, 그도 곧 희생자가 되고 만다. 그러나 숙련되고 특권노동자인 참된 스타하노프주의자―최초의 노동자 출세주의자인 스타하노프의 훌륭한 제자들―는 높은 지위에서 보다 높은 지위로 오르는 데 의욕을 불태우고 있다. 그는 언젠가 노예들의 대열에서 벗어나 공무원이나 어떠한 종류의 장長, 어쩌면 감독자가 되려는 희망을 가지고 있다.

그는 출세하기 위해 가능한 모든 것을 해야만 한다. 그는 비굴하게 굴고, 네 사람 분량의 일을 하고, 작업장에서 그의 후계자가 될 젊은이들을 훈련하고, 할 수 있는 대로 여기저기서 자신의 이름을 홍보하고, 항상 당국에 동의하며 당의 후보자임을 강조하고, 여기서는 간사하게 아첨을 하고 저기서는 자신을 숨긴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자신보다 낮은 레벨이나 비등한 레벨의 사람들과 결코 얽히지 않을 필요가 있다. 소비에트연방에서의 경쟁은 치열하다.

스타하노프주의자인 노동자들은 대개 주도자들인데, 그 역할은 노동대중에게 생산을 증진하는 것이 가능하다는 본보기를 보여주는 것이다. 그들은 높은 급여를 받고 승진을 하는데, 특히 스타하노프 운동의 “에이스”인 슈퍼스타 스타하노프주의자들일수록 그러하다. 그들의 역할은 일을 잘하면 “쾌적한” 삶을 “달성”할 수 있다(다시 한번 스탈린의 말이다)는 것을 프롤레타리아 대중에게 보여주는 것이다.

대부분의 경우, 일단 공장에 새로운 생산 기록이 확립되면 스타하노프주의자가 그곳에 남아 있는 것은 불가능하다. 다른 노동자들이 그를 살려두지 않기 때문이다. 당국은 일반적으로 그와 같은 충실한 하인을 돌보아준다. 보통 그는 휴양지로 보내져 몇 달 동안 “편안하게” 머무른다―그 후 모스크바나 다른 대도시의 행정직으로 소환되고 거기서 멋진 저택을 자유롭게 이용하고 “쾌적한” 삶을 보내며 급여를 받고, 공헌한 바에 비례해 특혜를 누린다. 그는 출세했다. 그는 이제 공무원이다. 그는 대열에서 빠져나왔다. 그는 “영달”을 얻은 것이다.

모든 절차에 의해―스타하노프 운동, 초 스타하노프 운동, 각종 임금별 계급 분화 등을 통해 “공산주의” 정부는 노동대중을 효과적으로 분열시키고 통제한다. 동시에 정부는 정부에 아첨하고, “군중”을 부단히 감시하고, 주인과 노예 사이의 완충지대로 쓸모 있는 특권층을 만들어 놓고 있다.

따라서 새로운 주인들―“공산주의자”―에 의해 노동계급에 취해진 정책은 그들이 언제나 하던 것인데, 바로 분열과 통치다. 그리고 주인이 “군중”에게 하는 위로의 말 역시 영원하다. “노동자들이여, 앞서나가고 싶은가? 글쎄, 그것은 순전히 당신들 스스로에게 달렸다. 부지런하고 임무에 충실하고 유능한 사람은 누구나 ‘특별한 사람’이 될 수 있으니까. 성공하지 못하는 이들, 즉 실패자는 스스로를 책망해야만 한다.”

소비에트연방 정부의 통계에서 얻어진 경제학자 E. 유리에프스키(E. Yurievsky)의 상세하고 객관적인 계산에 따르면 1938년 약 1천8백만 명의 노동자 가운데 약 1백5십만 명(8퍼센트)의 전前노동자와 특권노동자, 즉 스타하노프주의자초 스타하노프주의자 등이 있다.

물론 정부가 거기서 막대한 이익을 얻고, 출세주의라는 이름으로는 결코 부르지 않는 이 출세주의를 장려해 묵직한 보수를 준 것은 당연한 것으로 수긍이 간다. 이 능률 증진 경쟁은 출세주의라고 부르지 않고 “고귀한 경합”이라거나 “프롤레타리아트에의 봉사의 명예로운 열정”이라거나 그 외 비슷한 이름으로 칭송받는다. 그리고 “수상受賞노동자”라는 계층―오르데노노스치ordenonostsi라는 계급까지도 있다. 이러한 분자들 중 가장 “가치 있는” 이들로 정부는 일종의 새로운 “소비에트” 귀족과 크렘린 체제의 결정적이고 견고한 지지자인 새로운 국가자본주의 부르주아지를 만들어냈다.

그리고 그들 등반가 전체에 대해 최고책임자인 스탈린은 그의 연설에서 “우리의 생활은 계속해서 쾌적하고 쾌활해지고 있다”고 말하고 있다.

소련의 군중은 다른 곳들과 마찬가지로, 언제나 군중인 채로 남아 있다. 그리고 다른 곳들과 마찬가지로, 정부는 “그들을 시키는 대로 얌전하게 순종하도록 만들 수 있는 충분한 수단”을 지니고 있다.

그 방법들은 “진정한 공산주의”의 토대를 마련한다고 주장되고 있다.

우리는 소련에 있는 많은 노동자들이 사적자본주의가 지속되는 나라들의 노동자들보다 바람직한 상태에 있는지 어떤지를 자문해 보았다. 하지만 진짜 문제는 그것이 아니다. 보다 정확히는 이런 것이다. 그와 같은 상태가 사회주의와 양립하는가? 혹은 적어도 이것은 사회주의의 여명인가? 그러한 조직이나 그러한 사회적 배경은 우리를 사회주의로 인도할 수 있을 것인가?

독자는 이 책의 마지막에 도달했을 때 이러한 질문들에 대해―그 밖의 문제들도 마찬가지로―스스로 해답을 내릴 수 있게 될 것이다.


제3부. 농민들의 상황


네 개의 연속적인 시기를 구별할 필요가 있다.

맨 처음 볼셰비키 정부는 러시아의 방대한 노동대중과 군대의 공명을 확실히 획득하기 위해 농민에 대해 “자유방임” 정책을 실시했다. 그리고 농민은―독자들이 알고 있듯―토지를 손에 넣었고, 지주는 도망치거나 혹은 10월혁명 이전에 벌써 추방당하고 있었다. 레닌 정권은 이 상태를 승인하기만 하면 되었다.[40]

“스스로의 힘으로, 병사들은 전쟁을 끝내고, 농민은 토지를 손에 넣고, 노동자는 공장을 손에 넣었다”고 러시아의 유명한 역사학자이자 작가이자 제1차 임시정부의 전前 외무장관인 파벨 밀류코프(Pavel Nikolayevich Milyukov)는 말했다. “레닌은 병사와 농민, 노동자의 공감을 확실히 하기 위해 이미 이루어진 사실을 인정하기만 하면 되었다.”[41]

혁명가들의 활동과 프로파간다의 영향에 전혀 주목하지 않고 있는 점은 잘못이지만, 이 부르주아 지도자의 진술은 대체로 진실에 가깝다. 이 점을 참작하면 그의 증언은 특히 흥미롭다. 밀류코프는 언제나 러시아 생활의 예리한 관찰자이자 통역사였다. 그는 정확한 정보를 얻을 수 있는 위치에 있었다. 더구나 그가 볼셰비키의 역할을 과소평가할 이유가 없었다(이 증언은 전쟁 중의 노동자와 농민의 문제뿐만 아니라 전쟁의 문제에 관해서도 매우 풍부한 시사점을 지니고 있다는 데에 주의할 필요가 있다).

의도적이든 무의식적이든 대중이 아니라 볼셰비키가 혁명을 성취했다고 주장하는 모든 사람에게 경고해야만 한다. 밑줄을 쳐야 할 부분은 다음과 같다. 10월혁명은 2월혁명과 마찬가지로 온갖 분파에 속한 혁명가들의 원조와 지지에 의한 것은 물론, 근본적으로는 대중에 의해 성취된 것이다. 대중은 새로운 혁명을 준비하고 있었다. 그들은 매일, 어디서나 매 순간 그것을 성취했다. 그것이 중요한 점이다. 그것이 바로 “혁명을 성취한다”는 것이다. 볼셰비키에 관해 말하자면, 그들은 순전히 권력을 장악하기 위한 정치적 행동을 취했을 뿐이다. 필연적으로 그 행동은 진행 중인 이 대중혁명 과정에서 이루어질 수밖에 없었다. 볼셰비키는 그들의 정치적 행동에 의해 이 진정한 혁명을 중단시키고 일탈을 일으켰다.

볼셰비키는 만일 그들이 권력을 잡지 않았다면 반혁명이 통제권을 되찾고 혁명은 실패했을 것이라고 주장한다. 그 주장에는 근거가 없다. 볼셰비키는 광대한 대중이 혁명의 편에 섰기 때문에 권력을 잡을 수 있었던 것이다. “대중”은 주로 산업노동자, 농민, 병사였다. 노동자가 공장을 탈취하고, 농민이 토지를 점령하고, 혁명가가 이 둘을 돕고, 병사가 혁명의 파르티잔이 되었으니 어떤 세력―산업도, 자금도, 원조도, 군대도 없는 ―이 그것을 막을 수 있었겠는가? 외국의 개입? 만약 러시아혁명이 아나키스트가 제시한 과정을 취했더라면 다른 나라들의 정세와 태도가 어떻게 되었을지 누가 알겠는가? 그 결과가 어떻게 되었을지 누가 알겠는가? 그때야말로 두 개의 테제는 공공연하게 의논되고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볼셰비키는 다른 이들을 억압하는 것을 선택했고, 세계는 사반세기 동안 그 결과를 묵인해 왔다.

여러 주장이 있는 가운데 밀류코프가 말하는 것은 아나키스트의 근본 이론을 확인시켜주고 있다. 실제로 아나키스트는 바람직한 조건이 생겨났을 때, 대중은 혁명가의 원조와 지지를 얻어 혁명 자체를 완전히 성취할 수 있을 것이라고 주장해왔다. 그들은(이 점이 그들 견해의 본질적인 점이다) 승리 후에도 혁명은 동일한 길을 나아가야만 한다고 덧붙였다―당 이외의 것을 배제하거나 권좌에 앉거나 독재를 강요하거나 혁명을 독점하거나 하는 어떠한 정당도 없이 모든 정파의 혁명가들의 자유로운 활동에 지지받은 대중의 자유로운 활동을.

따라서 처음에는―첫 번째 시기―레닌도 농민을 괴롭히지 않았다. 농민이 레닌을 지지하고 있었기에 그동안 레닌은 그의 권력과 그의 국가의 기틀을 닦고 있었던 것이 그 이유였다. 그 단계에서는―특히 외국에서―, 농민은 러시아혁명에서 가장 많은 이익을 얻었기에 볼셰비키는 마르크스주의의 교의에도 불구하고 노동계급보다 오히려 농민계급에 기반을 두지 않을 수 없었다고까지 말해지고 있다.

그러나 그 뒤―두 번째 시기―국가가 견고해지고, 도시는 식량이 바닥났기 때문에 시골로 눈을 돌리게 되고, 레닌은 점차 농민 주위의 올무를 조이기 시작했다.

만일 도시와 공업지대의 노동자가 독립적이고 활동적인 조직을 통해 주도권과 행동의 자유를 누렸다면, 그들은 반드시 생산과 교환을 위해 농민들과 직접적이고 유익한 경제교류를 구축해냈을 것이다. 도시와 지방의 자유로운 생산자 간에 그러한 교류가 있었다면 사회혁명이 이 근본 문제―두 노동계급 간의 관계, 국내경제의 기본적 두 분야 간 관계의 문제―를 조화시켜 실용적이고 만족할 만한 해결로 이어졌을 것이라고 확신할 수 있다.

하지만 보라! 노동자와 그 조직에는 행동의 자유도 주도권의 자유도 없었다. 그리고 농민도 마찬가지로 아무것도 지니지 못했다. 모든 것은 국가, 정부의 손아귀에 집중되어 있었다. 정부만이 독단으로 행동하고, 모험하고, 해결할 수 있었다.

이런 조건 아래서 당연히 모든 사람이 정부의 결정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노동자의 직접적인 조언과 제안으로 농민이 자발적이고 단순하고 자연스러운 형식으로 도시에 대해 필요한 것을 확실히 수행할 수 있었을 테지만 지금은 움직여주려 하지 않았으며, 정부―그 목적으로 농민에게 왔지만―는 그 의도를 알리지 않았다.

그 존재와 그 기능에 의해 정부는 노동자의 두 계급 간에 개입해 그들을 분리하고 있다. 정부는 양자 간에 중개자로서, 독재자로서 개입함으로써 그들 스스로 협의하는 것을 방해하고 있는 셈이다.

여기에 레닌이 개입했다. 당연히 마르크스주의 독재자인 그는 실상에 대해 아무것도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는 농민의 냉담한 태도를 그릇된 정부의 원칙 적용, 그 필연적인 결과로서가 아니라 농민의 “이기주의”, 농민의 “프티 부르주아 정신”, 농민의 “도시에 대한 적개심”의 표현이라고 설명했다.

그는 잔혹하게 행동했다. 일련의 법령과 조례를 통해 그는 농민에게 수확물 대부분을 국가에 넘기도록 요구했다. 이 법령은 군대와 경찰에 의해 지지받았다. 이는 “무장원정대”의 징발과 강제의 시대, 요컨대 “전시戰時공산주의”의 시대였다. 군사적 폭력이 국가가 필요로 하는 모든 것을 농민으로부터 빼앗기 위해 농민에게 자행되었다.

농민들은 생산물의 판매가 금지되었다. 철도 주변에도, 거리에도, 도시 주변에도 국가가 “투기”라 부르고 있는 그러한 판매를 막기 위해 “바리케이드”가 설치되었다. 수천 명의 농민과 다른 “시민들”이 체포되었고, 그들 중 일부는 그러한 판매규제법을 위반한 혐의로 총살되었다. 말할 필요도 없이 이 불쌍한 사람들은 단지 일상 생계비를 충당하기 위해 밀가루 한 포대를 걸쳐 들고 시내로 나왔거나 또는 굶주린 친척이나 친구를 돕기 위해 나왔다가 붙잡힌 농민들이었다. 진짜 대규모 투기꾼은 뇌물을 주고 뇌물을 주고 간단히 바리케이드를 “돌파”했다. 다시 한번 국가주의 체제에서 현실이 “이론”을 조롱한 것이다.

이 정책은 곧 심각한 혼란을 초래했다. 농민들은 격렬한 저항으로 폭력에 맞섰다. 그들은 곡식을 숨기고 자신들이 꼭 필요한 만큼의 비율로 작물을 줄였다. 그들은 가축을 잡고, 일을 방해했으며, 여기저기에서의 임시징발이나 정기징발에 맞서고, 이러한 작전들을 담당하는 “인민위원”을 암살하는 일도 점차 빈번해졌다.

이제야 도시들은 기아에 위협받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지만 그 상황을 개선하는 것은 상상도 할 수 없었다. 쓰라린 곤궁을 경험하고 이 실패의 진정한 이유를 차츰 이해하고 혁명을 구해내고자 한 노동자들은 몹시 불안해졌다. 그리고 군대 일부도 상당히 이 대중운동을 지지할 마음이 있다는 것을 보여주었다(이러한 때, 1921년 3월 크론슈타트에서 커다란 봉기가 일어났다). 상황은 심각해졌다.

국가, 즉 지원과 강제의 총력이 어떠한 희생을 치르더라도 전 국토에 그 의지를 강제하기에는 충분히 통합되어 있지 않다고 느꼈기에 레닌은 후퇴했다. 트로츠키가 크론슈타트에서 “승리”한 직후, 레닌은 그 유명한 NEP, 즉 “신경제정책”을 공표했다.

NEP는 농업 문제의 개혁에 있어 세 번째 시기를 나타낸다. “신新”이라고 했으나 그것은 이전 시기의 잔인한 엄격성과 군사적 수단에 관해서만 그러했다. 그것은 단순히 어느 정도의 완화책에 불과했다. 압력은 농민의 배를 만족시키고 회유할 정도로 조금 누그러졌다. “신정책”은 그들에게 생산물을 처분할 어느 정도의 자유를 주었다. 특히 공개시장에서 그 일부를 자유롭게 팔아도 좋다는 것이었다. 바리케이드들은 제거되었다. 소상인들은 일부 “자유”의 혜택을 받았다. 사적소유권도 어느 정도 회복되었다.

그러나 여러 가지 이유에서 NEP는 아무 기본적인 것도 변경하지 않았다. 그것은 해결책이 아니었다. 그것은 모호하고 미심쩍은 반쪽짜리 조치였다. 확실히, 그것은 분위기를 조금 밝게 했다. 그러나 동시에 그것은 우유부단함과 무질서의 측면을 만들어냈다. 그것은 경제 분야와 일반적 국가의 생활에 중대한 혼란과 모순을 불러일으키는 결과를 낳았다.

더군다나 NEP가 초래한 모호하고 불안정한 상황은 정부의 안전에 결정적인 위기를 드러냈다. 양보한 볼셰비키 정부는 어떤 약점을 인정했다. 이렇듯 암암리에 약점을 자인한 것은 부르주아 단체들의 희망을 불러일으켰다. 그것은 그 활동과 정신이 빠르게 선동적으로, 심지어 정부에 위험한 것이 될 가능성이 있는 세력과 요소들에 새로운 자극을 주었다. 1917년 이래 대중의 볼셰비키에 대한 공감이 매우 약화되었기에 그러한 경향은 더욱 명백했다. 정부는 이를 잘 알고 있었다. 농민계급의 어떤 일부에는 부르주아적 욕망의 재再 각성이 특히 두드러지게 나타났다.

볼셰비키당원들과 새 국가 가운데 이미 편성되고 있는 상당히 영향력 있는 특권계층에 속한 사람들은 두려워하고 있었다. 그들은 정부가 “NEP라는 일시 정지”를 끝내고 국가라는 고용주와 강철 주먹의 국가로 돌아가는 것이 불가피하다고 강력하게 주장했다.

이런 모든 이유로, 1924년 사망한 레닌의 후계자 이오시프 스탈린은 두 가지 해결책 중 하나를 선택할 수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컨트롤 레버”를 쥐고 있다고는 하지만 NEP를 확대하여 사적자본주의 체제로의 경제적 혹은 정치적 후퇴로 문호를 개방하는 것―또는 완전한 국가주의, 전체주의 체제로 역행해 농민에 대한 국가의 공세를 재개하는 것이었다.

획득한 권력과 국가의 지배적인 지위를 확신하고, 완전히 복종하고 있는 군대의 상당 부분 및 그 “장치”의 강압적 세력의 지지와 함께 특권계층의 적극적인 지지를 확인하고 모든 것을 저울질한 스탈린은 마침내 두 번째 해결책을 취하기로 결정했다. 1928년 말, 그는 러시아 농업의 완전한 국유화, 즉 “집산화collectivization”라 불리는 국유화를 실시하고 농민 문제 개혁의 네 번째 시기를 드러냈다.

무력에 의해, 곧 전대미문의 형태와 면적으로 테러를 사용해 국가는 그 토지가 중간 규모 혹은 소규모일지라도 토지를 소유하고 있는 농민으로부터 토지를 빼앗는 일에 착수했다. 이리하여 국가는 토지의 효과적 및 완전한 소유권을 획득했다.

이 실시 이전의 소련에 있어서 세 가지 요소를 구별할 필요가 있다.

1. 솝호스sovkhoz는 러시아어로 “소비에트의 소유물”이라는 단어의 약어인데, 국가에 의해 직접 개발되었다.

2. 콜호스kolkhoz는 “집단적 소유물”이라는 뜻인데 국가의 통제와 지시 아래 농민들이 공동으로 개발했다.

3. 일종의 국가의 농민인 개별 경작자들은 콜호스와 같이 그들의 생산물 일부가 국가의 것이었다.

이 차이는 “집산화”와 함께 소멸했다. 이때부터 모든 농업이 국가 직영이 되었으며, 국가는 토지의 효과적인 지주가 되었다. 각각의 “농업 작업장”은 콜호스라는 이름으로 불렸다.

모든 농민은 콜호스에 들어가도록 강요받았다. 그들의 토지와 다른 소유물은 몰수되었다. 그리고 그것은 어느 정도 부유한 농민뿐 아니라 자신의 농사에 필요한 것밖에 가지지 않았으며 간신히 입에 풀칠을 하고 있는 몇백만이나 되는 빈농에까지 이르고 있다는 것을 강조해두어야만 한다.

그 이후로 소련의 모든 농민은 산업노동자가 공장에 붙들려 있는 것처럼 콜호스에 강제로 속박되었다. 국가는 그들을 국가의 농민으로 만들었을 뿐 아니라 농노로 바꾸어 그들에게 그들의 새 주인을 위해 일하도록 강제했다. 그리고 모든 진짜 주인들이 그렇듯이 노예의 노동에 의한 수확물 중에서 노예가 목숨을 유지하는 데 불가결한 최소한의 것만 남겨놓는다. 나머지 대부분은 정부 임의대로 처분된다. 또 모든 진짜 주인이 그러하듯 정부도 그것을 어떻게 이용할 것인지에 대해서 농민에게 한마디 말도 없이 결정한다. 확실히 이 잉여생산물은 자본가를 풍족하게 하지는 않지만 소비에트연방에는 그것으로 풍요로워질 수 있는 별개의 계층이 있다.

이론적으로 국가는 콜호스로부터 제품을 “구매”한다. 국가가 농민에게 그들의 노동에 대한 보수를 지급하는 것은 이런 식이다. 하지만 유일한 지주이자 구매자이기 때문에 이 상품들에 말도 안 되게 낮은 가격을 지불한다. 그 보수는 자본주의 국가에 의한 농민대중 착취의 새로운 모습에 불과하다.

이를 이해하기 쉽게 하기 위해서는 “소비에트” 언론이 국가는 1936년 콜호스에서 구입한 생산물의 재판매로 거의 2,500만 루블의 수익을 얻었다고 보도한 것을 인용하면 충분하다. 다시 1937년에 콜호스 노동자들은 그들의 노동의 산물의 실제 가치 중 50퍼센트 밖에 얻지 못했다. 나머지는 세금, 관리비, 각종 수입, 기타로 보류되었다.

소련의 거의 모든 농민이 오늘날 농노 상태에 있다. 이 농업조직은 차르 알렉산드르 1세 시대의 아락체예프(Count Alexey Andreyevich Arakcheyev)의 유명한 “둔전병 제도”를 상기시킨다. 사실 “소비에트” 농업은 “조직화”되고, “관료화”되고, “군사화” 되어있다.

그 목표에 도달하기 위해 스탈린은 농민에 대해 끔찍한 폭력수단을 사용하지 않을 수 없었다. 많은 지방은 공표된 개혁법을 얌전히 인정하지 않고 반항했다. 스탈린은 그것을 예상하고 있었다. 그는 주저하지 않았다. 수백만의 농민이 아주 약간 저항한 것만으로 투옥되거나 추방되거나 총살되었다. “특별한” 분대―일종의 헌병대―가 주로 그 임무를 수행했다. 이러한 “원정”에서 다수의 저항하거나 반항한 마을들은 대포나 기관총으로 파괴되고 불살라졌다.

그리고 그 격변과 병행하여 수차례에 걸친 기근이 전국을 황폐화시켰고, 수백만의 희생자를 냈다.

마침내 “힘은 곧 정의였다.” 우리의 고백에 놀라거나 회의적일 필요가 없다. 우리는 파시즘이나 히틀러주의 같은 다른 예시로부터 모든 현대적인 방법으로 무장한 권위주의 정권이 어느 정도로 대중을 예속시키며 경찰과 군대가 종속해 있는 한 어떠한 저항이나 장애에도 불구하고 대중에게 자신의 의지를 강요할 수 있는지 알고 있다.

일부 사람들은 볼셰비키 정부에게는 정권을 수호하고, 끊임없는 기아나 기타 치유하기 어려운 재해로부터 나라를 구출하고, “농업을 진보시키고”, “사회주의를 향한 전진을 보장하는” 다른 수단이 없었다고 말한다.

우리는 동의한다―그 목표를 제외하고.

확실히 국가주의적 정부 정책에는 이것들 외의 다른 수단이 없었다. 그러나 그것은 정확하게 그 교리가 잘못되었고, 만들어진 상황이 용납될 수 없다는 반박할 수 없는 증거다. 그러한 수단으로 사회주의는 결코 성취될 수 없기 때문이다.

이 체제는 사회주의가 아니라 사적자본주의보다도 가증스러운 국가자본주의에의 전진을 “보장”하고 있다. 그리고 이 체제는 “공산주의자”들이 우리에게 믿게 하기를 종종 바라고 있는 “과도기적” 상태는 결코 아니다. 그것은 그저 지배와 착취의 다른 형태다. 이 체제는 지배와 착취에 기반을 둔 다른 체제가 지금까지 공격을 받아왔듯, 역시 공격을 받아야만 할 것이다.

“농업의 진보”에 관해서는, 이 분야의 진정한 진보적 집산화는―모든 경제에 대해서도 그렇지만―국가주의적 · 정치적 독재 세력과는 아무런 공통점도 지니지 않는 세력에 의해 달성되어야만 한다고 우리는 확신하고 있다.

우리는 얼마 동안 농업문제는 소련에서 심각하게 복잡해졌다고 말했다. 농민대중은 국가라는 고용주에 대해 맹목적인, 그러나 효과적인 투쟁을 계속해 콜호스 작업을 사보타주했다. 농업 생산량은 파국적으로 하락하기 시작했다. 콜호스 노동자들을 자극해 어떻게든 체제에 순종시키기 위해, 콜호스 내부에 굉장히 제한된 작은 토지, 가축 몇 마리, 몇 가지 도구 등 일정량의 사유재산을 허가했다. 그리고 콜호스 노동자는 자신을 위해 조금씩 일할 수 있도록 허락되었다.

이 조치의 필연적 결과를 느끼는 데는 오래 걸리지 않았다. 농민과 국가 사이의 투쟁이 곧 이 “사적 구역”(러시아 사람들은 “젖소 주변”이라고 말하고 있다)을 둘러싸고 결정화되었다.

그 이후로 농민은 그들의 “재산”, 권리, 그리고 개인적 노동을 증대시키고자 콜호스를 해칠 만큼 고집스럽게 노력을 계속해왔다. 당연히 국가는 이러한 경향에 반대하고 있다. 그러나 한편으로 국가는 가능한 한 “개인적 구역”을 넓힐 수밖에 없었는데, 그 생산량은 콜호스의 생산량을 훨씬 뛰어넘어 국가의 번영에 크게 기여했기 때문이다.

현재 이 투쟁과 이러한 머뭇거림이 결합되어 “소비에트”연방 농업문제의 핵심을 이루고 있다. 이 나라가 농업 개혁에 있어 새로운 다섯 번째 시기의 전야인 것은 불가능한 일이 아니다.

단지 우리는 이러한 어떤 구체적인 사항들도 우리가 방금 그린 일반적 상황을 조금도 바꾸지 않았다는 데 주목해야만 한다.


제4부. 공무원들의 상황


그 중요성이 매우 높아진 소련의 제3계급은 관료, 즉 공무원이다.

노동자의 주도권 및 자유와 함께 노동자의 각종 직접적인 관계가 억제된 때부터 국가기구의 필요한 기능은 중앙의 지령에 기초한 중개 기관에 의해 확실하게 되어야만 했다. 이들 중개자에게 주어지는 이름―공무원functionary―은 기능function을 다한다는 그 임무를 완벽하게 묘사하고 있다.

“자유주의liberal” 국가에서 공무원은 국가와 관련된 기능을 한다. 그러나 국가가 전부인 국가에서는 모든 일을 하기를 요구받는다. 이것은 그들이 조직, 조정, 감독을 의미하는데, 요컨대 경제 등 이 나라의 모든 생활을 처리하는 책임을 지고 있다는 것이다.

소련처럼 광대한 나라에서는 국가라는 고용주의 이 “민병대”가 매우 크지 않을 수 없다. 그리고 실제로 소련의 관료계급은 수백만 명을 헤아린다. 앞서 인용한 E. 유리에프스키에 의하면 그 총원은 900만 명을 넘는다. 그 광대한 영토에는 국가로부터 독립한 지방자치단체도, 다른 서비스나 조직도, 어떠한 종류의 민간기업도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

하급 종업원을 제외하고, 말할 것도 없이 공무원은 가장 특권적인 사회계층을 형성하고 있다. 이 점에서는 군 상위계급만이 그들에 필적할 수 있었다. 그들이 고용주(국가)에 제공하는 서비스는 헤아릴 수 없다. 군대, 경찰과 더불어 거대하고 정연한 “소비에트” 관료기구는 가장 중요한 세력을 이룬다. 기본적으로 모든 것이 그에 의존하고 있다. 그것은 국가에 봉사하고, 국가를 조직하고, 국가를 통치하고, 국가를 운영하고, 국가를 관리할 뿐만 아니라―훨씬 더 중요한 것은, 국가가 완전히 의지하고 있는 스탈린 정권을 적극적으로 충실하게 지지하는 것이다.

그것이 대표하는 정부의 이름으로, 공무원 간부는 명령하고, 요구하고, 규정하고, 감독하고, 처벌한다. 그리고 중급, 심지어 하급 공무원까지 명령하고 관리하는데, 각 공무원은 그에게 할당된 구역 내에서는 주인이 된다. 모든 이가 계단식으로 상사에 대해 책임을 지고 있다. 최고위 공무원들은 위대하고 상냥하며 절대적으로 옳은 독재자에 대해 책임을 진다.

공무원은 자신들의 몸과 마음을 정부에 바치는데, 정부는 이에 대해 그들에게 보상할 방법을 알고 있다. 공업 및 농업노동자와 별 차이가 없는 하급 공무원의 무리를 제외하고, 소련의 “책임 있는” 지위의 공무원은 끊임없는 관심의 대상이다. 은혜를 받을 만한 가치가 있는 공무원에게는 훌륭한 보수와 승진이 보장된다. 순종하고 근면한 공무원은 모두 좋은 급여를 받고, 귀여움을 받고, 축복받고, 훈장을 받는다. 가장 헌신적이고 열정적인 이는 관청에서 당장 승진해 국가 요직에 앉혀질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 훈장에는 이면이 있다. 근본적으로 모든 공무원은 도구, 상관 손아귀의 꼭두각시다. 아주 사소한 잘못이나 실수, 태만으로도 그는 많은 대가를 치르게 될 수도 있다. 그들은 상사에 대해서만 책임을 지고 있는 그들은 어떤 형식의 재판도 없이 상사의 판단에 따라 행정적으로 처벌받는다. 그것은 완전한 빈곤을, 종종 감옥을, 때로는 죽음을 의미한다. 상사의 개인적인 변덕이나 전제는 아무런 비난도 없이 지배한다.

그 상황에서 가장 끔찍한 국면은, 처벌된 공무원의 “과오” 또는 실패가 상사의 잘못된 명령이나 부득이한 사정이나 정부의 정책에 의한 것인데도 종종 희생양이 된다는 데 있다. “스탈린은 항상 옳다”―마치 독일의 히틀러처럼. 실패가 있으면 재빨리 죄를 뒤집어쓸 사람을 찾아낸다. 이러한 일은 종종 일어나며, “소비에트”관료제의 전통에 깊이 뿌리박고 있다. 죄인은 생존경쟁의 희생양이 된 것이다. 적개심, 질투, 음모―이들 요소는 무제한의 출세주의에서 떼어놓을 수 없는 것들이며, 생활의 모든 순간에 그 공무원을 노리고 있다.

반면, 고위공무원의 사생활 면의 잘못된 행위는, 때로는 방탕도 일종의 필요한 위로라며 정부의 묵인을 받는다. G.P.U.도 눈을 감는데, 그 간부가 가담하고 있기 때문이다. 유명한 겐리흐 야고다는 변태적인 방탕자였다. 그리고 모스크바에는 지금도 주지육림이 있다.

출세하는 것어떤 희생을 치르더라도, 어떤 수단을 쓰더라도, 체포만 되지 않는다면. 이것이 소비에트연방에서 가장 큰 관심사이자 가장 강한 자극제다.

1억5천만의 산업노동자, 농민, 하급종업원의 거대한 무리에서 조금이라도 떠올라, 풋내기 공무원이라도 열의를 가지고 맹목적으로 복종하는 태도를 보이고, 아첨하고, 어떻게 “무릎을 꿇어야 하는지” 알면 “우아한 삶”을 얻을 수 있다.

오늘날 소련의 모든 젊은이를 교육과 학습으로 몰아가는 것은 바로 이 희망이다. 젊은이들은 스타하노프주의자처럼 “출세하기 위해” 갈망하고 염원한다―그는 빈곤 속에서 발버둥치고 있기 때문이다. 그는 높은 지위, 자동차, 가죽 서류 가방, 훌륭한 부츠 한 켤레, 높은 급여, 훈장에 의지를 불태우고 있다. 그 길에서는 옆 사람의 눈치를 볼 것도 없다. 그는 아첨하는 방법도, 경의를 표하는 방법도, 몸을 낮춰 비굴하게 구는 법도 완전히 터득하고 있다.

이 모든 것을 인지하기 위해서는 크렘린이 지배하는 광대한 영토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을 몸소 당해볼 필요가 있다. 러시아의 생활과 사고방식, 일반적인 관습을 알기 위해서는 “소비에트” 언론을 주의 깊게 읽을 필요가 있다. 상사의 연설이나 장광설, 정기적인 훈장의 배분, 대회에서의 대표의 선언과 성명, “소비에트” 신문에 게재되거나 반영되는 지역 뉴스와 일상의 “사소한 말썽”―이러한 모든 자료가 읽기에 따라, 해석하기에 따라 시국과의 접촉을 얻을 수 있게 한다.

유리에프스키에 따르면 소련의 약 1,000만 명의 공무원 가운데 2백만 명, 즉 20퍼센트가 특권층이라고 한다. 나머지는 다소 괴로운 생활을 계속하고, “입신”과 “출세”의 희망만이 이를 버틸 수 있게 해주고 있다.

모든 정보를 갈무리하면 다음과 같은 표를 얻을 수 있는데, 수치는 대략적인 것이다.


단위 만

특권노동자 150

특권공무원 200

부유농민 400

기타 특권계층, 볼셰비키당원(업무와는 관계없음), 전문가, 군인, 경찰 등

250


모든 노동자 1,800

모든 공무원 1,000

모든 농민 14,000

합계

특권계층 1,000

16,000


이 1천만 명이 “소비에트”연방의 새로운 특권계급과 스탈린 정권의 현실적 지주가 되고 있다.

나머지 인구―1억6천만 명―는 복종당하고 착취당하고 빈곤한 무명無名의 군중일 뿐이다.


제5부. 정치구조


공무원의 역할에 대한 분석에서 우리는 소련의 정치구조에 접하게 된다.

정치적으로 그것은 고급 국가 관료에 의해 지배되고 있으며(프랑스가 관례에 따라 지사知事에 의해 다스려지듯이) 그들의 지휘 아래 있는 무수한 부하들로 조직된 군대에 의해 통치되고 있다.

이 진술이 지지받기 위해 우리가 빼놓을 수 없는 몇 가지 세부 사항을 언급할 필요가 여전히 남아 있다. 무엇보다 먼저 두 가지 전혀 다른 요소를 구별할 필요가 있다. 하나는 외관, 장식, 무대 설정(영광스러운 10월혁명의 유일한 유산)을 이루어져 있고, 다른 하나는 현실이다.

외관상 소련은 소비에트에 의해 통치되고 있다(“가는 곳마다 소비에트다!”라고 “소비에트”에 대해 무엇을 믿어야만 하는지도 모르고, 그들의 진짜 역사와 그들의 진짜 역할에 조금도 고려하지 않은 프랑스 공산당원은 부르짖었다).

이보다 더 틀린 것은 없다. 이 신화를 지금도 성실하게 믿고 있는 외국의 선량한 사람들은 그들 스스로를 충성스럽게 “속여 넘기고” 있다.

세부적인 부분을 간과하지 않고, 전혀 알려지지 않았거나 혹은 거의 알려지지 않은 특성을 강조하면서 본질적인 사실을 확립하도록 하자.

오랫동안 소비에트(노동자평의회)는 정치적으로나 사회적으로나 소련에서 아무 중요한 역할도 하지 않았다. 그것들의 역할은 완전히 부차적인 것이며 심지어 보잘것없다. 그것들은 별로 중요하지 않은 작은 지방의 일을 담당하며 중앙당국, 즉 정부 및 “공산당” 지도부의 지령에 완전히 종속된, 순전히 행정적인 집행기관이다…. 소비에트는 권력의 편린조차 가지고 있지 않다.

소비에트에 관한 커다란 오해가 러시아 밖에서 퍼지고 있다. 다른 나라의 많은 노동자에게 소비에트라는 말은 신비적인 어떤 것을 느끼게 한다. 성실하고 소박한 인민 대중은―속담에서 말하는 “마약중독자”처럼―부대浮袋와 등불을 분간하지 못하고 신종 사기꾼들의 이른바 “사회주의”와 “혁명” 장식을 믿고 있다. 러시아에서는 폭력이나 다른 통제 방법에 의해(마치 히틀러의 독일이나 무솔리니의 이탈리아처럼) 대중은 그 사기를 받아들이도록 강요받는다. 그러나 외국의 수백만 노동자는 그저 기만당하고 있으며 언젠가 자신이 그 첫 번째 희생자가 될지도 모르는 사기행위를 전혀 깨닫지 못하고 있다.

소비에트에 관한 이 문제를 명확히 하자.

두 가지 근본적인 사실이 강조되어야만 한다.

첫째, 러시아에서의 소비에트 창설은 다양한 공장의 정보, 조정, 일상 활동을 조직화할 긴급한 필요성에서, 다른 노동자 조직이 없었기 때문에 이루어졌다. 만약 러시아에 노동조합이나 1905년 조합주의 운동 같은 것이 있었다면 소비에트를 만들고자 하는 생각은 생겨나지 않았을 것이고 이 우발적이며 그저 대의제에 불과한, 이처럼 모호한 조직체에 의존할 필요도 없었을 것이 분명하다.

둘째, 본질적으로 소비에트는 계급투쟁이나 혁명적 행동을 위한 조직이 아니라는 점이다. 그것은 사회혁명의, 혹은 새로운 사회가 탄생하려 할 때의 생생하고 활발한 세포에 불과하다. 그것은 구조 자체가 약하고 소극적인, 다소 관료적이기도 한, 좋게 말하자면 행정적인 성격을 띤 무엇인가이다. 소비에트는 어떤 작은 지방의 업무를 담당할 수 있을 정도이지 그 이상은 아니다. 그것은 일종의 노동자 자치평의회다. 그런데―이 점이 중요한데―그 구조, 특히 그 권위 때문에 그것은 특정 상황에서 러시아에서와 같이 정당이나 정부의 손에 들린 도구가 될 수도 있다. 따라서 소비에트는 “정치병”에 걸렸고, 그 결과로 혁명에 대해 모종의 위험을 제기하는 것이다.

이 두 가지 이유로, 러시아에서의 노동운동이 발견해낸 특정 조건의 산물인 “소비에트”라는 이 유명한 제도는 조합주의자 기관이나 조합주의 운동, 조합주의 투쟁이 존재하는 나라들에서는 노동자들에게 관심과 효용도 없다. 노동자가 오랫동안 전투와 사회재건의 계급조직을 가지고 있던 나라들에서도 그러하고, 노동대중이 국가나 정당이나 어떠한 정부와도 상관없이 결정적 직접투쟁을 준비하고 있는 나라들도 마찬가지다.

겉보기에 러시아는 소비에트(외국에 퍼져 있는 신화에 의하면 “노동계급의 자유의 발산”)의 지배를 받는다고 우리는 말했다. 이론적으로는 오늘날―즉 이전 “소비에트”의 서면 규약에 따르면 소련의 최고 권력은 정기적으로 소집되는 《범 러시아 소비에트 총회Pan-Russian Congress of Soviets》에 속하며 원칙상 정부를 임명하거나 해산하거나 교체할 권리를 가지고 있다. 원칙적으로 소비에트는 입법권을 가지며, 그 “집행위원회”는 행정권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실제로는 나라의 입법권과 행정권과 모든 권력을 절대적인 방법으로 쥐고 있는 것은 정부 자체―인민위원회, 즉 공산당의 직접적 의사표시―다.

주인은 정부이지 소비에트는 아니다.

정부는 원하기만 하면 반대하거나 불복종하는 경우 소비에트 총회든 개별 소비에트든 소비에트 구성원이든 소탕할 수 있다. 왜냐하면 모든 “지휘권”을 쥐고 있는 것은 정부이기 때문이다.

그뿐만이 아니다. 현실의 정부는 한낱 장식품에 불과한 인민위원회조차도 아니고 공산당 중앙위원 최고위층 몇 명으로 구성된 정치국Politbureau이다. 실제로는 당의, 그리고 중앙위원회의 잔학하고 교활한 간부인 “위대한” “온화한” 스탈린(또는 그를 대신할 누군가)이 진짜 최고 권력자다. 즉 독재자, 보이드Vojd(두체Duce 또는 퓌러Fiihrer)다. 이 사내야말로 루이 14세보다 훨씬 더 확실하게 “L’Etat(the U.S.S.R.) c’est moi!”(“짐이 곧 국가다!”)라고 말할 수 있다.

“아레오파고스Areopagus”[42](정치국), 인민위원회, 전全 당원, 당원 “후보자”(지원자), 특권층, 공무원, “첩보부apparatus”, 군대, 경찰이 한결같이 받들고 있는 것은 스탈린(또는 그의 후계자)다. 왜냐하면 이 세계는 모두 물질적으로나 정신적으로나 그에게 의지하고 있으며 오직 그 덕분에 존재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 세계는 모두 정권을 안전하게 유지해 나가는 데 대한 그의 힘과 기술을 맹목적으로 믿고 있는데, 이 정권은 기만당하고 강제로 복종 당하고 착취당하는 대중의 무형의 불만과 분노―당장은 무력하지만―에 의해 끊임없이 위협받고 있기 때문이다.

그들의 의지를 소비에트에 강요하는 것은 “위대한 지도자”인 그가, 정치국이, 당 중앙위원회가, 인민위원회이지 그 반대는 아니다.

혹자는 스탈린과 그 모든 기관이 인민의 의지에 따라 통치한다고 주장한다. 왜냐하면 정부, 지도기관, 소비에트의 모든 구성원이 자유롭고 비밀리에 선출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기구와 그것들을 규정하고 있는 조항을 면밀하게 살펴보면, 거기에 참가하지 않더라도 이들의 “자유로운 비밀” 투표가 단순히 코미디에 불과하다는 것을 쉽게 알 수 있다(많고 적음의 차이이지 모든 곳이 동일하다).

만약 애초부터 소비에트의 선거가 비교적 비밀이었더라면[43]―대중은 소비에트 편이었을 것이고, 정부는 득표수에 신경 쓸 필요가 없었을 것이고, 대중을 기만하는 것도 당장 불가능했을 것이다―이 상대적인 자유는 오랫동안 존재하지 않았다. 여러 해에 걸쳐 “소비에트”연방의 선거는 자유도 비밀도 아니었고, 이는 공공연한 사실인데도 외국의 무지한 “추종자”들은 그 사실을 불쾌하게 여기지도 않으며 부정해오고 있다. 사실, 외관만의 선거의 “자유”와 “비밀”이 최근 스탈린의 유명한 “민주적 헌법”에 의해 사람들에게 “용인”되었음은 악명이 높다. 이 제스처의 진의는 소련 내 불만이 커지는 것을 달래고, 나아가 외국 노동자를 현혹하는 데 있었다.

따라서 스탈린과 그 정부는 선거의 “자유”와 “비밀”에도 불구하고 상황을 지배하는 주인으로 남을 수 있다는 확신을 지니고 있었다. 국가의 “기구”는 충분히 견고했기에―대중은 완전히 정복되었고―정부는 “자유”가 부여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유권자 무리를 마음대로 다룰 수 있게 되었다. “헌법”의 조문 자체도 세밀한 해석을 허용하지 않게끔 되어있었다.

오늘날 모든 겉보기에도 불구하고 선거는 전능한 정부의 무수한 대리인에 의해 영향을 받고, 강제되고, 주도되고, 조직되고, 엄격하게 감시되고 있다. 위원회, “세포”, 다른 지역 당 기관이 유권자들에게 그들의 생각을 “제시”하고 그들의 후보들을 강요한다. 그리고 공산당에 의해 제시된 후보 리스트는 단 한 명뿐이다. 상대 후보는 없다. 누가 감히 이 리스트에 항의하거나 다른 리스트를 제안할 수 있겠는가? 그리고 그런 몸부림이 아무런 상황도 바꿀 수 없고, 완고한 이들은 기껏해야 투옥될 것이 명약관화한데 유권자가 무슨 목적으로 “연기를 거부”하겠는가?

투표는 투표자가 그 누구도 어깨너머로 엿보지 않고 펜을 움직일 수 있다는 의미에서만 “자유”이자 “비밀”이다. 하지만 그 펜이 종이에 무엇을 써넣을지에 대해서는 선택의 여지가 없다. 그의 행동은 “예정”된 것이기에 그저 기계적인 동작에 불과하다. 따라서 소비에트의 구성 및 정부에의 종속은 사전에 보증되어 있다. 때문에 “투표”는 오직 또 다른 사기일 뿐이다.

우리는 독자들에게 “스탈린 헌법”은 10월혁명 이후 세 번째 것임을 상기시켜야겠다. 1918년 7월 레닌 주재 하에 제5차 소비에트 총회에서 채택된 첫 번째 헌법은 볼셰비키국가의 기틀을 다졌다. 두 번째는 1924년에, 여전히 레닌 밑에서 채택되었다. 그것은 국가 권력을 공고하게 하기 위한 특정 수정과 사양을 만들어 소비에트, 공장위원회 등의 독립성에 대한 마지막 흔적을 폐지했다. 마지막으로 세 번째 헌법이 스탈린에 의해 공포되어 1936년에 채택되었다. 스탈린은 아무것도 변경하지 않았다. 몇 가지인가 중요하지 않은 세부항목의 변경, 몇 가지인가의 모호한 약속, “민주주의적” 공식을 되풀이하는 몇 가지 조항이 몇 가지 있었지만 이것은 당장 다음에 오는 항목과 모순되고 있었으며, 마지막으로 매년 1회씩 열리는 《범 러시아 소비에트 총회》가 4년마다 선거가 열리는 영속적인 최고 소비에트로 바꾸어놓았다. 그것이 전부였다.


제6부. 전체적 상황


내가 밑그림을 그린 그림을 완성하기 위한 몇 가지 마지막 붓놀림이 여기 있다.

볼셰비키제도는 국가라는 고용주가 모든 시민에 대해 부양자, 정신적 지도자, 보상과 징벌의 분배자가 되기를 원한다.

국가는 시민들에게 일거리를 주고 그들에게 직업을 할당한다. 국가가 그들을 먹여 살리고 급여를 준다! 국가는 그들을 감독한다. 국가는 그들을 사용하고 마음대로 조종한다. 국가는 그들을 교육하고 훈련한다. 국가는 그들을 심판한다. 국가가 그들에게 상을 주거나 벌을 준다. 따라서 고용주도, 부양자도, 보호자도, 감독관도, 교육자도, 지도관도, 심판관도, 간수도, 사형집행인도 하나의 상징 속에 있다―이 모든 것은 공무원의 협력을 빌려 편재遍在하는 전지전능한 신이고자 하는 국가 속에서 상징이 된다. 그로부터 도망치려는 이는 조심하라!

우리는 볼셰비키 국가(정부)가 존재하는 모든 물질적, 정신적 재화를 소유할 뿐만 아니라, 아마도 훨씬 더 심각한 것은―역사, 경제, 정치, 사회, 과학, 철학, 기타 모든 분야에서 모든 진리의 영원한 저장소를 만들어냈다는 점을 강조하고 싶다. 모든 분야에서 볼셰비키 정부는 절대로 잘못을 저지르지 않는다고 간주하고 인류를 인도하기 위해 부름 받았다고 자부한다. 볼셰비키 정부만이 진리를 점유하고 있다. 볼셰비키 정부만이 어디서 어떻게 지시해야 하는지를 알고 있다. 볼셰비키 정부만이 혁명을 올바르게 이끌 수 있다.

그렇기에 논리적으로, 또 필연적으로 볼셰비키 정부는 1억7천5백만의 러시아 주민에게 자신을 절대로 잘못이 없는, 이론의 여지없는, 신성한 진리의 유일한 보유자로 인정하기를 요구한다. 그리고 논리적으로, 또 필연적으로 이 정부에 도전하지는 않는다 할지라도 그 무류성無謬性을 의심하거나, 비판하거나, 반박하거나 혹은 무언가를 비난하거나 하는 개인 내지 집단은 볼셰비키 정부의 적으로 간주 된다. 따라서 진리의 적, 혁명의 적―“반혁명가”로 간주 된다.

이는 의견과 사고의 완전한 독점을 수반한다. 국가(또는 정부)의 의견 이외의 어떠한 의견도 위험하고 받아들일 수 없으며 범죄적 이단으로 여겨진다. 그런 까닭에 불가피하게 이단자들은 투옥, 추방, 사형에 처해진다.

감히 혁명에 대한 독자적인 의견을 가졌다는 이유만으로 맹렬히 박해받은 조합주의자와 아나키스트는 이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잘 알고 있었다.

독자들이 보다시피 이 제도는 진정으로 인민에 대한 완전한 절대노예제―육체적, 정신적 노예제다. 말하자면 새롭고 끔찍한 사회적 차원에서의 종교재판이다. 이것이 바로 볼셰비키당이 이룬 작품이다.

그런데 볼셰비키는 이러한 결과를 추구했을까? 그들은 고의적으로 이런 일들을 한 것일까?

결코 아니다. 의심의 여지없이 당의 최고대표들은 진정한 사회주의 건설을 가능하게 하고 완전한 공산주의로의 길을 여는 제도를 희망했다. 그들은 위대한 사상가들이 예견했던 방법들이 틀림없이 그리로 이끌어갈 것이라고 확신하고 있었다. 더구나 그들이 목표를 이룰 수만 있다면 모든 수단이 선하고 정당한 것이라고 믿고 있었다.

이처럼 성실한 이들은 속았던 것이다. 그들은 잘못된 길을 택했다. 돌이킬 수 없는 잘못을 깨닫고 사라진 희망 가운데 살아남기를 바라지 않던 그들 중 일부가 스스로 목숨을 끊은 것은 바로 이런 이유 때문이었다.

당연히 순응주의자들과 출세주의자들은 스스로를 거기에 적응시켰다.

나는 몇 년 전 열띤 토론 중에 훌륭하고 성실한 한 볼셰비키에 의해 인정된 것을 여기에 언급해 두어야겠다. “확실히” 그는 말했다. “우리는 과오를 범했고, 우리가 바라지도 예상하지도 않던 길로 들어서 버렸소. 하지만 우리는 오류를 바로잡고 난국에서 벗어나 올바른 길을 되찾기 위해 노력할 것이오. 우리는 성공할 것이오.”

이와는 반대로 사건의 논리적인 힘, 일반적인 인간의 심리나 물질적 요인의 연결, 그리고 결정적인 인과관계는 그들이 아무리 강하고 성실하다 할지라도 소수 개인의 의지보다 더욱 강력하다기에 그것은 성공하지 못할 것이 확실하다.

아, 만약 수백만이나 되는 자유로운 인간들이 속았다면, 만약 그것이 완전한 자유와 완전한 동의하에 행동하고 있는 강력한 집단의 문제라면, 의지의 공통된 노력으로 실수를 바로잡고 상황을 복원하는 것이 가능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러한 과제는 그들을 지배하는 거대한 힘에 가로막혀 있는 복종적이고 수동적인 대중으로부터 유리되어 있는 독자적 집단에게는 불가능하다.

볼셰비키당은 국가, 정부, 그리고 정치적 행동, 중앙집권적이고 권위주의적인 방법으로 사회주의를 건설하고자 한다. 그러나 그것은 “기계화되고” 맹목적이고 무의식적인 대중을 혐오스럽게 착취하는 데 바탕을 둔 거대하고 살인적인 국가자본주의로 이어질 뿐이다.

당 지도부가 성실하고, 활기차고, 유능하여 막대한 대중이 그들을 따르고 있다는 것을 과시하면 할수록 그들의 성과에 대한 역사적 결론은 더욱 잘 도출될 수 있다. 따라서

국가, 정부, 정치적 행동의 도움으로 사회혁명을 달성하려는 어떠한 시도도―설혹 그 시도가 성실하고, 활기차고, 정세에 의해 받아들여지고, 대중의 지지를 받더라도―필연적으로 사회주의 사회를 향한 인류의 전진과는 전혀 무관한, 자본주의의 최악의 형태인 국가자본주의로 이어질 것이다.

바로 이것이 세계가 볼셰비키의 거대하고 단호한 실험에서 이끌어낼 수 있는 교훈이며, 자유의지주의 이론을 강력히 지지하는 교훈, 그리고 여러 사건에 비추어볼 때 노동하고, 고통받고, 생각하고 싸우는 모든 사람에게 머지않아 이해될 교훈이다.


제7부. 성과들


“소비에트의 성과”가 허위라는 데 대한 풍부한 문서와 반박할 수 없는 세부 사항들을 포함하는 수많은 저작과 연구에도 불구하고, 많은 사람은 여전히 이 신화를 완고하게 믿고 있다. 그러한 많은 사람은 사정을 면밀하게 조사하지 않고, 그들 앞에 제기된 문제들에 대해 읽으려 애쓰지도 않고서는 사정을 잘 알고 이해하는 척한다.

소박한 많은 사람은 소련의 파르티잔이 표명한 성명에 대해 완전히 자신감을 지니고 유일한 “사회주의 국가”의 놀라운 “성과”가 진정하고 완전한 공산주의의 도래를 위한 토대를 마련한다고 진심으로 믿고 있다.

그러나 그 나라를 알고 있는 우리, 그곳에서 일어나는 일, 그리고 그곳에서 드러난 일을 면밀하게 관찰하는 우리는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벌어진 볼셰비키의 “정복”과 “용기 있는 위업偉業”의 진정한 가치를 이해할 수 있다.

그 가치에 대한 심오하고 상세한 분석은 우리의 주제가 아니지만, 우리는 최소한 다섯 가지 적절하고 자연스러운 질문에 답할 필요가 있다.

1. 성실한 공산주의자들이 스스로 인정한 것처럼, 볼셰비즘이 러시아에서 주도해 온 국가자본주의는 순수하게 산업적, 농업적, 혹은 문화적인 관점에서 적어도 중요한 결과를 달성하고 있는가?

2. 이 분야들은 진보하고 있는가?

3. 그것은 산업적, 기술적, 정치적, 사회적으로 뒤떨어진 나라에 자극을 주는 데 성공하였는가?

4. 언젠가는 그 진보 덕분에 사회변혁과 사회주의 사회로의 이행을 촉진할 수 있을 것인가?

5. 이 국가자본주의가 혁명 이전의 러시아와 같은 나라에서 불가피하고 필수적인 단계인 사회주의를 향한 과도기적 단계로 간주 될 수 있을 것인가?

그들의 옹호자 중 많은 이들이 현재 상황에서 볼셰비키는 가능한 한 최대한의 것들을 했다고 주장한다. 산업, 기술, 그리고 대중의 일반적 교육의 초보적인 상태 때문에, 그들은 이 나라에서 생각할 수 있는 유일한 목표는 엘리트 지식인이 권력을 지니고 강제로 국민을 이끌어나가 뒤떨어진 상황을 만회하고, 강력한 산업, 근대적 기술, 선진적 농업, 그리고 모범적 교육 제도를 만드는 것이었다고 단언한다.

그 옹호자들은 계속해서 주장하기를 이 임무는 시도될 수 있는 유일한 것이었다고 한다. 그리고 그것은 러시아에서는 필수불가결한 일이었다. 볼셰비키는 이 점을 이해하고 어떤 이유나 어떤 장애물에도 멈추지 않고 결연히 그에 헌신하는 유일한 사람들이었다. 그리고 그들이 그 준비작업을 방해하려 한 모든 이들을 무자비하게 숙청한 것 역시 진정으로 정당했다. 왜냐하면 이 나라의 절박한 장래, 또한 사회주의 전반의 미래는 이를 긴급히 성취하는 데 달려 있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지금까지의 이전 장들에서 말한 것들에 의해 이 주장의 옳고 그름을 판단할 수 있으리라 생각한다.

우리는 몇 가지 사실과 정확한 서술을 통해 개략적인 설명을 완성하고자 한다.

볼셰비키 국가의 실제 성과실제 상황을 발견할 수 있는 훌륭한 방법이 존재한다. 그러나 그것은 이 나라, 이 나라의 역사, 언어, 관습, 그리고 특히 소비에트 신문을 읽을 줄 아는 경우에만 그러하다. 이러한 필수조건을 제외한 채 러시아 바깥에서는 그러한 조사가 거의 실행되기 어렵다는 것은 유감스러운 일이다.

이 방법은 러시아에서 발행되는 신문들, 특히 「이즈베스티야Izvestia」와 「프라브다Pravda」를 정기적으로 탐색하는 것이다.

볼셰비키 정부는 몇 가지 예외를 제외하고는 이 신문들이 외국에서 읽히지 않고 있다는 것을 매우 잘 알고 있다. 한편으로는 소련에서 실제로 일어나고 있는 일에 대한 무지와, 다른 한편으로는 거대하고 강력한 프로파간다의 성과를 계산에 넣고 스탈린 정권은 예기치 않은 사실의 폭로에서 충분히 보호되고 있다고 느끼고 있다. 부득이하게 자국민들에게 약점을 인정하고 설명해야 할 경우에도 완전히 안전이 보장되어 있다. 그 때문에 그들은 물론 내용이나 외양에 대해서는 통제하면서도 몇 가지 약점을 인정하는 기사를 용인하고 있다.

정기적으로 세심하게 소비에트의 신문에서 약점을 인정하는 기사를 하나씩 얻어 가면 독자는 필연적으로 분명한 결론에 도달한다.

러시아 신문을 조사하는 데 있어 특히 다음과 같은 특징에 조사자는 관심을 두어야 한다.

1. 논설.

2. 회의, 특히 대표자들의 연설에 관한 보고.

3. 지방의 르포와 서신.

4. 요약들.

명령하기 위해, 그리고 항상 같은 표본대로 쓰인 논설과 주요 기사는 여러 해에 걸쳐 변함없이 동일한 성격을 취해왔다.

어느 기사나 “성과들”에 대한 찬가로 시작된다. 이러저러한 분야에서, 그것은 한결같이 우리가 막대한 약진을 이루었다는 것을 주장한다. 모든 것이 경이롭게 진행되고 있다. “당과 정부”(어느 기사에서나 반복되는 신성한 공식)는 이러저러한 결정을 내리고, 이러저러한 조치를 적용하거나, 이러저러한 법령을 공포했다. 그러므로 우리는 (어느 사이에서인가 미래의 시제로 슬쩍 옮겨놓고) 이후로 이러저러한 것이 수행될 것이다, 아주 가까운 미래에 이러한 진보가 이루어질 것이다, 직접적인 결과가 달성될 것이다 등을 확신한다는 따위의 논조다.

이러한 기사가 전체의 3분의 2를 차지한다. 그러고 나서 “그러나”, “그렇기는 하지만”, “그럼에도”라는 말들이 나온다.

기사는 계속해서 “그러나 당과 정부는, 최근 접수된 보고에 의하면, 현재 상황은, 필요한 결과를 얻기에는 아직 멀었다, 즉 현재는 이러저러한 것만 이루어졌다”고 말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리고 계속해 예측과는 놀라울 정도로 불규칙한 수치와 데이터가 뒤따른다.

더 읽어 가면 갈수록, 한편으로 미래는 화려할 것이지만 현재 상황은 개탄스럽다는 것, 언제나 태만, 심각한 오류, 약점, 무능력, 무질서, 혼란이 기사를 차지하고 있는 것을 점점 확실히 깨닫게 될 것이다. 그리고 반드시 필사적인 호소를 계속한다. “전진하라! 서두르라! 우리는 스스로에 대한 통제를 회복할 필요가 있다! 생산이 증대할 때가 되었다! 낭비하지 말라! 책임자들을 불러 명령을 내리도록 하라! 당과 정부는 그들의 의무를 다했다. 노동자는 자신의 의무를 이행하라. 등등” 또한 종종 이러한 기사는 불운한 “책임을 진 여러 정당”과 당과 정부의 호소에 귀를 기울이지 않는 이들에 대한 위협으로 마무리된다.

이런 측면보다 더 소련 언론의 전형적인 것은 없다. 이는 20년간 매일 반복되어 왔다.

소련 정치 제도의 각종 결의에 대한 회의 보고도, 대표자들의 발언을 면밀하게 읽어보면 매우 쓸모가 있다.

물론 그 모든 대표자는 특권노동 계급인 “귀족”에 속한다. 이 모든 발언은 어느 것이나 서로 닮아있다.

모든 연설은 스탈린에 대한 지나친 찬양으로 시작한다. 위대하고, 온화하고, 사랑받고, 존경받을 만한 초인, 모든 인류의 모든 역사 중 가장 현명한 사람이라고 말이다. 그런 다음 각 대표자는 자신의 지역―혹은 자신의 분야―에서 당과 정부의 명령을 이행하기 위해, 그리고 존경받는 보이드Vojd를 기쁘게 만들기 위해서 전례 없는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고 선언한다. 다음으로 그들은 미래에 대한 아름다운 약속을 한다. 마지막으로 그들은 거의 모두가 비굴한 태도로 당과 정부가 이미 “노동자를 위해서” 수행한 것들을 모두 열거한다. 예를 들어, 대표자는 언제나 자기 자신의 사례를 인용한다.

연설의 이 대목은 일반적으로 가장 기묘하다. 열성적으로 임무를 수행하고 이러한 결과를 거두었다는 것을 늘어놓은 대표자들은, 이러저러한 진보를 이룰 수 있었고, 그 덕분에 자신은 지금 훌륭한 집, 멋진 가구, 축음기, 피아노 등을 가질 수 있게 되었다고 말한다. 그리고 더욱 쾌적한 삶을 얻기 위해서 여전히 정진할 것을 희망하고 있다고 발언한다.

“우리의 위대한 스탈린은 탁월하게 올바릅니다.” 대표자는 소리높여 말한다. “소련에서의 삶은 매일 더 행복해지고, 편안해지고 있습니다.” 종종 그는 터무니없을 정도로 순진한 어조로 연설을 끝맺는다. “당국은 나의 노력에 대한 보답으로 이러저러한 물건(예를 들면 좋은 자전거)를 약속해주었습니다. 아직 약속이 지켜지지는 않았지만 나는 정부를 신뢰하고 인내심을 가지고 기다리고 있습니다….”(회의장에서의 긴 박수소리)

의도적으로 속셈을 포함한 이 연설의 목적은 분명하다. 그들은 노동자들에게 이렇게 말한다. “열심히 일하고, 당국에 복종하고, 보이드를 존경하라. 그러면 너는 군중 가운데서 출세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자신을 고상한 부르주아적 존재로 만들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이 프로파간다는 결실을 맺었다. “출세”하고자 하는 열망은 “소비에트”연방에 있는 수천의 사람들의 에너지를 자극했다. “출세”하고 있는 사람들의 예시가 그 에너지를 배가시키고 있다. 지배계급은 이익을 얻고 있다. 하지만 사회주의는? 불쌍한 사기당한 이들이여, 인내심을 가질지어다.

그리고 보고, 지방 통신이나 요약에서 우리는 일상적 제반사의 사정과, 실제로 생활을 구성하고 성격 짓는 “사소한 것들”에 대한 대략적이고 암시적인 견해를 얻을 수 있다.

이러한 연구의 결과, “최초의 사회주의 국가”의 사회적 수준과 현실의 정신에 대해 충분히 알 수 있게 된다. 물론 이 자료의 연구는 잡지의 기사나 통계를 면밀하게 조사함으로써 독자 스스로가 완성해야 한다.

그렇다면 소련의 구체적 성과에 대한 우리의 결론은 무엇인가?

다른 모든 것에 앞서, “소비에트” 권력이 모든 기록을 깨뜨린 분야―프로파간다의 분야, 더 정확히 말하자면 거짓말, 속임수, 엉터리 프로파간다의 분야가 존재한다.

이 분야에서 볼셰비키는 과거의 어떤 이에게도 뒤떨어지지 않는다.[44] 모든 정보망, 출판 및 통신을 마음대로 하고, 한편으로 그들은 그들의 계획에 상응하는 것만을 통과시키는 완벽한 방벽으로 나라를 에워싸고, 다른 한편으로 사기, 책략, 무대장치, 농간이라는 믿을 수 없는 기획을 실행하기 위한 온갖 가능한 수단을 이용하고 있다.

전 세계에 걸친 이 기만적인 프로파간다는 비길 데 없이 대규모이자 강력한 것이다. 그 일에 어마어마한 돈이 투자되어 있다. 볼셰비키 국가의 주요한 과제 중 하나는 타국민의 눈에 먼지를 던지는 것이다. 신문, 잡지, 팸플릿, 서적, 사진, 영화, 라디오, 박람회, 시위, “증언”―온갖 수단, 열거된 앞부분이 특히 만만치 않다―등이 구사된다.

부정할 수 없이, “소비에트” 정부는 외국의 직접, 간접적인 보조금을 크게 이용하고 있다. 예를 들어 《소비에트 연방의 친구들 모임The International Association of Friends of the Soviet Union》 중에는 그 모임의 이름에 의해 자신의 저작을 그 모임에서 팔 수 있도록 허가를 얻거나 다른 이점을 얻을 수 있다는 것만으로 “친구”가 되는 작가들도 있다.

그러나 말뿐인 프로파간다만으로는 불충분하다는 것이 입증되었고, 볼셰비키 정부는 사실에 의한 기만술을 숙달했다.

이 정권에 대해 확실한 공감이 보장되지 않는 한, 매우 입수하기 어려운 특수한 허가증 없이는 아무도 러시아 영토에 들어갈 수 없다. 아무도 자유롭게 국내를 여행할 수 없고, 관심 있는 일을 독립적으로 조사할 수도 없다. 반면, 정부는 세심하게 신경을 써 화려한 외관을 과장스럽게 설치해 두었다. 정부는 눈부신 세상을 보여주겠다는 약속을 크게 꾸며냈다. 어떠한 명목으로나 건축 발판을 마련해 놓는다. 몇 주간 러시아 체재를 허가받은 “노동자 대표단”은 (성실한 구성원이라도) 끔찍하게 속아 넘어가 정부의 목적을 위해 봉사하게 된다. 그리고 주위에서 실제로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 이해하지 못한 채 스파이들의 경계심에 가득 찬 눈 아래 그 나라를 여행하는 절대다수의 “관광객”이나 고립된 방문객들 역시 마찬가지다.

공장, 집단농장, 박물관, 매점, 스포츠와 연극을 위한 공원 등이 모두 사전에 일정한 장소에 준비되어 가련한 여행자는 사기인 줄 모르고 어안이 벙벙할 정도로 속아 넘어간다. 그리고 그들이 어쩌다 정말 훌륭하고 아름다운 것을 본 경우, 그것은 1천만 명의 특권층과만 연관이 있고 1억6천만 명의 착취당하는 프롤레타리아와는 아무 상관이 없는 것임을 깨닫지 못한다.

다른 나라의 부르주아지도 “쇼윈도”에 의지하기는 하지만 볼셰비즘의 그것은 “슈퍼 쇼윈도”이다. 그래서 우리 시대에는 여전히, 성실한 증인들의 증언에도 불구하고 각국 수백만의 노동자들이 소련에 대한 진실을 알지 못한다.

다른 성과로 넘어가 보자.

여기서 우리는 관료주의, 새로운 부르주아지, 군대 및 경찰에 대해 다룰 것이다.

우리는 볼셰비키 국가가 현기증이 날 정도의 속도로 비길 데 없이 거대한 관료주의, 오늘날에만 2백만 명이 넘는 특권적 “귀족적” 계급을 형성하는 관료주의로 발전하는 데 성공했다는 것을 이미 알고 있다. 또한 “사회주의” 국가의 국민을 적어도 임금별로 20개의 임금 소득자 범주로 나누는 데 성공했다. 그리고 그들은 사적자본주의 국가에도 아직 존재하지 않았던 사회적 조건의 불평등에 도달했다. 가장 하위는 한 달에 100에서 150루블을 받는다. 상위는 3천 루블 이상을 받는다.

“소비에트”연방에는 국가 부르주아지, 호화롭게 살며, 사치스러운 별장, 마차와 하인 등을 지닌 부르주아지가 포함되어 있다.

볼셰비키 국가는 볼셰비키 청년들 가운데서 특별히 일종의 국가 경찰인 “특별 육군부대”를 편성함으로써 지도적 당 자체를 군사화했다. 그리고 레닌 정부가 1921년 크론슈타트의 혁명적 봉기를 진압한 것도 이러한 특수부대의 도움에 의한 것이었으며, 같은 도움으로 스탈린 정권은 이따금 전국에서 발생하는 파업이나 시위, 반란을 무자비하게 피로 물들인다. 하지만 볼셰비키 언론은 물론 한 마디도 입에 올리지 않는다.

우리가 말한 것처럼 러시아혁명은 사슬에 묶이고, 거세되고, 관료화되고, 부르주아지스럽게 되고, 규격화되고, 매수되고, 경화되었기에 스스로 세상을 향해 진출할 힘이 없었다. 볼셰비키도 결국 이것을 깨달았다. 그들은 또한 이러한 조건 아래서 머지않아 아마도 러시아에 자행한 것과 같은 수단―군대에 의한 폭력을 사용하는 것이 불가피하다는 것을 이해했다.

그때부터 그들은 이 방법에 불가결한 도구인 강력한 근대적 군대 형성을 끈질기게 시도했다. 그들의 광산 생산과 중공업이 특히 이 계획을 수행하기 위해 활용되었다. 그 사업은 어느 정도 달성되었다. 그들은 드디어 세계의 모든 군대를 본떠서 조직적으로 훈련되고, 맹목적으로 권력에 헌신하며, 계급과 훈장으로 보장되고, 좋은 음식을 먹이고 좋은 옷을 입혀서, “마지막 하나”까지 완전 장비된 정규군을 창설했다. 이 군대는 당당한 세력이 되었다.

마침내 볼셰비즘은 일부는 정규적이나 대부분 비밀의 강력한 경찰을 형성하는 방법을 알게 되었다. 그 경찰은 복종 당하고, 속임 당하고, 착취되고, 가난한 인민을 억누르는 데 성공했다는 점에서 아마도 전 세계에서 가장 우수한 경찰일 것이다. 그 경찰은 특히 스파이 활동을 시민적 미덕으로 끌어올렸다. 공산당의 모든 당원―심지어 모든 충성스러운 시민들까지―도 G.P.U.를 도와 의심스러운 사건들을 지적하고, 밀정하고, 고발할 것으로 예상된다.

결국 볼셰비키 권력은 언젠가 그들을 자유와 번영과 진정한 공산주의로 이끌어갈―결코 틀림없는 방식이라고 그들은 주장한다―것을 목적으로, 1억6천만 명을 거느린 노예제도를 완성하는 데 성공했다. 그동안, 관료화된 행정부와 국유화된 경제와 직업적 군대와 전능한 경찰에 의해 이 권력은 특히 우수한 관료와 군대와 경찰의 국가, 전체주의 국가의 모범, 즉 비교할 수 없는 지배와 착취의 메커니즘, 진정한 자본주의 국가를 만들어낸 것이다.

이 모든 “용감한 위업”과 “성과”는 부인할 수 없다.

이 외에 무엇이라 말할 수 있겠는가?

우리가 다른 것을 하기 전에, 볼셰비키 당국 스스로가 마지못해 넌지시 암시한 고백이지만 충분히 정확한 고백에 따르면, 러시아 자본주의 국가의 가장 큰 세 가지 과제의 실시가 완전한 실패였다는 것을 명확히 해야겠다. 그 과제들은 다음과 같다.

1. 그 나라의 유명한 “산업화”

2. 저명한 “5개년 계획”

3. 대규모 “농업 집단화”

확실히 그들은 온갖 종류의 기계, 장치, 설비를 소련으로 수입했다. 그들은 특정 대도시와 특정 장소에 노동자의 집을 만들고 근대식 주택을 세웠지만 그것은 매우 형편없이 지어진 것이었다. 그들은 외국 기술자와 전문가의 도움으로 드네프로게스Dnieprostroi 댐과 마그니토고르스크Magnitogorsk 광업소와 거대한 스베르들롭스카야Sverdlovsk 기계 공장과 유명한 벨로오조르스크Bielooserski 운하와 같은 몇 가지 거대한 건설을 달성했다. 마침내 그들은―수년간의 긴박으로 인한 조업 정지 뒤에―광산 개발, 석유 생산, 공장의 본격적인 작업을 재개했다. 그러나 어떠한 정권이나 국가라도 그렇게 하지 않으면 소멸해 버릴 경우에는 이와 같은 일을 할 것이다.

우리에게 그 문제는 전혀 다른 의미를 지니고 있다. 볼셰비키 국가가 이룩한 모든 것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관점에서 흥미를 끄는 진정한 성과를 찾아낼 수 있을까? 국가의 진정한 일반적 진보, 즉 노동대중의 사회적 · 문화적 해방, 사회주의 혹은 참된 공산주의로의 길에서 그것을 이끌어내는 진보를 관찰할 수 있을까? 볼셰비키 정부의 활동이 국내에 그와 같은 개혁에 꼭 필요한 조건을 만들어내고 있는가? 그것이 정말로 새로운 사회에 대한 대략적인 밑그림을 달성했는가? 이 물음들은 모든 문제를 요약하고 있다.

한 나라의 산업화는 그 나라의 전반적이고 자연적인 발전과 조화를 이룰 때에만 진정으로 생산적이고 진보적일 수 있다. 그리고 그러한 산업화는 나라의 전체 경제생활과 조화를 이룰 때, 그리고 결과적으로 그 효과가 사람들에게 유용하게 소화될 때에만 사회적으로 유용할 수 있다. 반대일 경우, 그것은 주목을 끌더라도 사회적으로는 쓸모없는 건설로 이어질 수 있다.

특정한 수단을 가지고 있을 때, 특히 국가라는 고용주의 명령에 복종하고 고용주가 적당하다고 인정하는 액수만을 임금으로 받을 뿐인 노예노동이라는 수단에 호소할 수 있다면 누구든 소망하는 모든 것을 세울 수 있다. 그렇지만 문제의 해결은 기계적인 성과를 달성하는 것이 아니라 그 성과를 궁극적인 목적에 유용하게 할 수 있는 데 있는 것이다.

어느 모로 보나 산업화에의 각오가 되어있지 않은 사람들에게 부과되는 강제 산업화는 필요한 역할을 수행할 수 없다. 억압받고 기진맥진하고 비참한 무리인 노동대중을 거느린 나라에서 산업화하기를 원하는 것은 사막을 산업화하고자 하는 것과 다를 바 없다.

한 나라가 효과적으로 산업화되기 위해서는 두 가지 필수 요소 중 한 가지를 가지고 있어야만 한다. 활기차고 강력하며 부유한 부르주아지, 혹은 자신의 운명의 주인인 사람들―다시 말해 자유롭고 자기에게 필요한 행동을 인식하고, 발전을 갈망하며, 산업화를 이루기 위해 스스로를 조직하고자 결의하는 사람들. 첫 번째 경우, 부르주아지는 산업화의 생산량을 빠르게 흡수할 수 있는 시장을 지배하고 있어야 한다. 두 번째 경우, 이 협동화와 산업화가 진보를 지향하는 모든 사람의 강력한 열정에 의해 보장되어야 한다.

러시아혁명은 부르주아지를 탄압했다. 그러므로 첫 번째 조건은 그 당시 성립하지 않았다. 두 번째 조건이 남았다. 1억7천만 명의 사람들의 집단적 변혁에 자유로운 활동의 장을 제공할 필요가 있었다. 자발적으로 막대한 사회 실험을 하고자 자본주의적 또는 국가주의적 기반이 아니라 완전히 새로운 기반 위에 사회를 건설할 의지가 있는 사람들에게 자유로운 활동의 장을 주는 것이다. 간단히 말해서 그들이 실험해 나가는 것을 돕는 것만이 요구되는 것이었다.

막대한 기술적 진보는 세계에서 성취된 사실이며, 급속한 산업화와 풍부한 제품 또한 우리 시대에는 물질적으로 가능하기에, 커다란 열정을 지니고 주변에 온갖 숙련된 원조자가 있어서 힘이 되어 준다면 강력한 인간 집단이 소망하는 목적에 도달하지 못할 만한 극복할 수 없는 장애물은 없었다. 만약 이 과정을 따랐다면 오늘날 세상이 어떠했을지 누가 알겠는가?

그러나 볼셰비키당은 그 일을 전혀 모르고 있었다. 빈 왕좌를 차지한 그들은 추방된 부르주아지와 자유롭고 창조적인 대중을 대신하고 싶었다. 볼셰비키당은 두 가지 조건을 도살하고 제3의 조건으로 바꾸어놓았다. 그것은 혁명의 숨을 억누르고―혁명의 목적을 위한 수백만의 사람들의 무한한 열정을 질식시키고―진정한 진보의 모든 살아있는 원천을 말려 죽이고, 사회의 현실적인 변혁으로의 길을 가로막는 독재 권력이다. 이러한 오류의 결과는 필연적으로 “메커니즘”, 생명이 없는 메커니즘이자 영혼이 없는 메커니즘, 창조성이 없는 메커니즘이었다.

오늘날 우리는 정확하고 반박할 수 없는 자료를 바탕으로 볼셰비키의 “산업주의”가 군사부문을 제외한 대부분 쓸모없는 설비와 건설을 산출했다는 것을 알고 있다. 특히 인민의 현실적, 경제적, 사회적, 문화적 진보에 관한 한 더욱 그러하다.

우리는 이 모든 거대한 건축물 중 75퍼센트가 목적도 없이 세워졌고, 전혀 기능하지 못하거나 기능이 좋지 않다는 것을 알고 있다.

우리는 외국에서 수입된 수천 대의 기계들이 대부분 빠르게 고장 나거나 버려지거나 분실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

우리는 현재 소련의 노동인구, 즉 국가 고용주의 이익을 위해 마지못해 잔인한 환경에서 일하는 노예의 무리에 불과한 노동인구가 그러한 기계를 다루는 법도, 사용하는 법도 모르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으며, 이들은 그것들로부터 어떠한 혜택도 받지 못한다는 것을 알고 있다. 오직 군대의 장비만이 어느 정도 개선되었을 뿐이다.

우리는 1억7천만 중 1억6천만 명의 인민이 빈곤과 도덕적 야만화의 끔찍한 환경에서 살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

소련의 겉치레에 불과한 “산업화”는 찬양할 만한 성과를 거두고 있지 않다. 그것은 “사회주의 국가의 성취”가 아니라 “전시戰時 공산주의”와 그 뒤를 이은 신경제정책의 실패 이후 마지막 카드를 쓸 수밖에 없도록 강요당한 국가자본주의 기업이다. 그것은 “보다 나은 시대”가 올 때까지 스스로를 유지하기 위한 희망으로, 자국의 인민들과 타국의 인민들을 허구적이고 허황된 웅장함으로 기만하려는 의도로 구성되어 있다.

소련의 “산업화”는 허세에 불과하다. 마찬가지로 “5개년 계획”도 “산업화”에 이은 어마어마한 허세에 불과하다. 정확한 사실과 수치를 바탕으로 우리는 이러한 계획들이 완전히 실패했음을 주장한다. 이는 거의 모든 곳에서 인정되기 시작하고 있다.

“집산화”에 대해서는 이미 충분히 이야기했다. 독자는 현실에서 그것이 무엇을 나타내는지 보아왔다. 우리는 그러한 “집산화”가 결코 농지 문제의 진정한 해결책이 될 수 없다는 점을 반복해 둔다. 그것은 사회주의적 혹은 심지어 사회적 성취와도 거리가 멀다. 그것은 쓸모없고 완전히 메마른 폭력적 제도이다. 우리는 봉건영주가 국가라는 군주로 대체되는 중세 농노제로의 복귀와는 공통점이 없는 수단으로만 농민이 사회혁명의 대의에 끌어들일 수 있다고 주장한다.

이러한 기반 위에 사회주의는 고사하고 단순히 건강하고 진보적인 경제가 건설될 수 있겠는가?

5개년 계획에 관한 몇 가지 사실과 수치를 살펴보자.

1939년 소련은 제3차 5개년 계획의 결과를 발표했다.

첫 두 회의 5개년 계획 기간 동안 소비에트의 언론은 계획의 실행이 상당히 지연되고 있다고 끊임없이 불평했다. 석탄이나 기타 광물의 채굴, 유전의 채굴, 야금冶金 생산, 직물 생산, 중공업 및 모든 기타 산업의 발전, 철도의 확장과 차량의 개선―요컨대 모든 부문의 경제활동에서 할당량과 예측치를 훨씬 밑돌았다. 제1차 5개년 계획 기간에서 제2차 기간으로 이행한 때에는 다양한 산업이 기대치보다 훨씬 뒤처지고 있었다.

온화한 독재자는 격노하고, 체포하고, 처형했다.

그러나 「이즈베스티야lzvestia」는 일련의 기사들(1939년 8월에서 11월까지)에서 제3차 경제 계획의 실패를 간접적으로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 간행물은 1939년 10월의 철강제품 생산량이 1938년 10월보다 낮았고, 야금 산업의 모든 부문의 생산량이 감소했으며, 몇몇 용광로는 석탄과 금속의 부족으로 폐쇄될 수밖에 없었다고 밝혔다.

상황은 9월 말, 소비에트 언론이 월간 통계를 보도하는 것을 중단할 정도로 심각해졌다.

그 언론에 발표된 자료에 따르면 첫 2회의 5개년 계획 기간 동안 운송작업은 할당량의 50퍼센트 밖에 실현되지 못했다. 화물차 수는 공식 예상을 큰 폭으로 밑도는 수로 증가했다. 드네프로게스와 마그니토고로스크 같은 훌륭한 기업들은 능률이 좋지 못했다. 그러한 대기업 중 몇몇은 오랜 기간 강제적으로 활동 중지를 경험했다. 거대한 발전發電 계획은 극히 미미한 정도로만 달성되었다.

인민위원인 코시긴(Alexei Nikolayevich Kosygin)은 1939년 5월, 이 나라의 섬유기업들은 설비가 잘 갖추어져 있지 않고 필요한 생산 수준으로 운영하기에는 기술적으로 불충분하다고 선언했다. 그리고 그는 한편으로 섬유산업과 다른 한편으로 원자재 생산자 사이의 접촉이 부족하다고 불평했다.

“섬유기업들은 린넨이나 아마亞麻, 양모를 충분히 받지 못하고 있다. 그런데도 대량의 아마가 들판에서 썩고 있다. 아마 수확자는 언제 제사製絲될지 모르고 무기한으로 기다리고 있다. 양모에 관해서는 선별이나 세모洗毛 따위의 초보적 규정이 준비단계에서 소홀히 진행되고 있기에 옷감을 제조하는 데 큰 어려움을 초래한다. 그리고 누에고치의 준비에 대해서도 똑같이 말할 수 있다.”

따라서 이렇게 열거해 가면 5개년 계획의 실패를 명백히 입증하기 위한, 볼셰비키 언론에 나타난 모든 분야에 관한 정확한 사실과 수치로 몇 페이지라도 채울 수 있는 것이다.

모든 소비에트 산업의 참담한 상태를 묘사하는 것은 힘든 일이지만 선택하지 않으면 안 된다.

「이즈베스티야Izvestia」의 자백(1940년 1월호의 몇몇 기사)에 따르면 석탄 채굴업계는 새로운 기계의 사용법을 모른다. 그것이 부족한 생산량의 이유 중 하나이다.

1939년 7월 30일 볼셰비키 언론은 철도운송의 날을 위해 상당한 지면을 할애했다. 거기에 나타난 고백은 특히 명백하다. 그 일부는 다음과 같다.

일반적으로 레일은 공장에서 매우 부족한 수량으로 공급되고 있는데 그 품질은 나쁘다. 네 곳의 대공장이 소련의 레일을 만들고 있다. 한동안 그들은 1등급 품질의 레일을 만드는 것을 중단했다. 때문에 레일은 2, 3등급의 레일로 만족해야만 했다. 그러나 이 중 20퍼센트는 사용할 수 없다.

1939년 7월, 선로가 수리되고 있는 동안 대 쿠즈네츠키Kuznetski 공장은 갑자기 모든 레일 운반을 중단했다. 그 이유는? 천공기穿孔機가 모자랐던 것이다. 그리고 일반적으로 수리작업에 필수적인 예비 부품마저 보내지지 않아 이러한 모든 작업이 지연되었다.

철도 선로에 필요한 각종 부품을 만드는 세 곳의 대공장들은 아주 자주 강철이나 도구의 부족, 혹은 다른 이유로 운송작업에 지장을 주고 있다. 일례를 들면 어느 공장은 겨우 180푸드poods(3.25톤)의 금속이 모자랐다. 그럼에도 모든 운반 작업이 지연되었고, 철도는 백만 개의 수리부품이 부족했다.

또한 공장들은 종종 어떠한 부품은 전달하였으나 다른 부품, 마찬가지로 필수적인 부품을 전달하기를 소홀히 했다. 예를 들어 레일은 수중에 있지만 접목판이 부족해 녹이 슬거나 열화된다.

당국이 화를 내어도 헛수고였다. 정부는 긴급지령을 내려 “책임”을 명확히 규정했지만 허사였다. 이 모든 조치는 효과가 없었고, 공식 보고서는 때때로 이러한 모든 결함 원인 중 하나는 노동대중 사이의 모든 흥미와 정신의 결여라고 말할 수밖에 없었다. 유능한 당국의 주장에 따르면 노동자의 무관심은 태업에 가깝다. 그리고 그들은 또한 “과도한 중앙집권화”, “관료주의”, “일반적 태만”에 대해 이야기한다.

하지만 말하고 있다는 것이 꼭 개선으로 이어지는 것은 아니다. 어떤 해결책도 존재하지 않는다. 대신 이는 필연적으로 전체 시스템을 비난하는 결과로 이어진다.

볼셰비키 언론의 다른 주장에 따르면 석유뿐만 아니라 모든 광물의 채굴은 조직화의 부족으로 지장이 초래되고 있다는 것이다. 이들 부문의 생산량은 기계(자주 심각하게 고장이 나 있는)의 사용에도 불구하고, 그리고 온갖 공인된 수단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저조하다. 「프라브다Pravda」는 1939년 12월호의 어떤 기사에서 우랄산맥의 석탄 채굴량이 꾸준히 감소하고 있다고 발표했다. 그리고 거의 같은 시기에 언론들은 화학 산업이 수습하기 어려운 혼란에 빠져 있다고 탄식했다.

다른 곳에서도 우리는 야금 산업의 전위인 “적색 프롤레타리아트Red Proletariat” 공장이 “기술과 행정상의 무질서 때문에” 할당량의 40퍼센트밖에 생산해내지 못하고 있다고 알 수 있게 된다.

우리는 무한대로 예시를 들 수 있다.

모든 분야에서, 소련의 산업 상황은 늘 비관적이었고, 오늘날 역시 그러하다. 산업화는 신화에 불과하다. 기계는 있으나 산업화는 존재하지 않는다.

“집산화”에 관해서는 소비에트 언론에서 명확한 자료를 숱하게 인용할 수 있다.

우리는 러시아 신문에서 무작위로 발췌한 몇 가지 사실만 인용할 것이다.

1939년의 수확에 관해 「사회주의적 농업Socialist Agriculture」은 8월 8일 기사에서 모든 지역의 작업이 매우 지연되고 종종 수확물이 위험에 직면하고 있다고 말한다. 또한 곳곳에 수확할 사람이 거의 없는 경우도 있다. 공산당 중앙위원회 농업부에 따르면 이 주된 원인은 태만, 무질서, 부주의 및 온갖 지연으로 인한 기술적 수단의 부족에 있다. 이를테면 기계의 사용에 불가결한 부품이 제때 도착하지 않았거나 필요한 양만큼 제공되지 않았거나 하는 식이다.

수리점의 설치는 어느 곳에서나 계획보다 훨씬 늦어지고 있다. 예컨대 300개의 작업장을 지정일까지 건설하도록 계약한 센터는 아직 14개소밖에 설치를 완성하지 못했다. 또 다른 센터는 353개 중 8개만을 완성했다. 쿠르스크에서는 91개 중 3의 수리점만이 완성되었다.

게다가 같은 간행물에 따르면 올해(1939년)의 수확 작업은 악천후로 말미암아 많은 양의 밀이 쓰러져 어려움을 겪고 있다. 그리고 쓰러진 밀을 탈곡하기 위해 탈곡기를 채용하는 것에 대한 지침은 항상 소홀하다.

마지막으로, 농민 언론은 계속해서 올해는 숙련된 수확 노동자 수가 상당히 감소했다고 밝히는데, 그것은 많은 지역에서 기계 조작원과 기계공들에게 아직 작년 임금이 지불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왜 그런가? 정답은 이들 노동자는 콜호스가 세금을 납부한 후에야 급여가 지불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많은 곳에서 아직 그 세금들은 지불되지 않았다.

「이즈베스티야Izvestia」와 「사회주의적 농업Socialist Agriculture」 양 언론은 1939년에는 이러한 불상사 때문에 1938년보다 적은 6천4백만 헥타르 적은 밀이 8월 1일까지 수확될 것이라고 밝혔다.

1939년 11월 소비에트 언론은 감자 및 기타 야채의 수확이 상당히 지연되고 있다고 불평했다. 이는 사람과 말의 부족, 휘발유의 불충분한 운반, 특히 콜호스니키kolkhozniki(콜호스 구성원)의 태만에 기인했다.

11월 4일 「이즈베스티야Izvestia」는 10월 25일까지 솝호스가 그들의 의무 곡물 운반 양 중 67퍼센트밖에 인도하지 못했으며, 콜호스는 의무 지불액의 59퍼센트만을 이행한 것, 같은 날 감자 할당량의 34퍼센트, 기타 야채 할당량의 63퍼센트만이 콜호스로부터 공급되었을 뿐이라고 인정했다.

1939년 7월, 우크라이나의 《국가 낙농업자 회의Congress of State Cattle Breeders》는 다음과 같이 보고했다. 1. 당시 가축이 없는 콜호스가 많았다는 것(키르기스Khirguisie에서는 45퍼센트, 타지크Tadjiki에서는 62퍼센트, 랴잔Ryazan 지방에서는 17퍼센트, 키롭스크Kirovsk에서는 11퍼센트, 우크라이나에서는 34퍼센트). 2. 다수의 콜호스가 충분한 가축을 가지지 못했다는 것, 그리고 우크라이나에서는 거의 집단농장의 50퍼센트 가까이가 각각 열 마리 미만의 소밖에 가지지 않았다는 것(“소의 냄새를 조금 맡는 데 충분한 정도”라고 보고자는 농담을 했다). 3. 집산화 이후 일반적으로 소련에서 가축의 수가 매우 감소했다는 것.

그리고 가장 흥미로운 것은, 다른 모든 곳과 마찬가지로, 정말로 솔직하고, 실용적이며, 효과적인 수단을 고안할 수 없다는 것이다. 더 이상 설명이 필요한지?

이러한 사실들, 이러한 고백, 그리고 이러한 불평이 20년에 걸쳐 계속되고 있다. 그리고 “소비에트”연방의 많은 다른 분야에서도 무한대로 이러한 열거를 계속할 수 있다.

소련에서는 이러한 상황들이 눈에 띄게 주목받고 있다. 사람들은 당국의 요구에 필요한 범위까지 응하고 있으며―“최선을 다해 살아가고 있다.”

외국에서는 최근까지 이런 것들이 전혀 알려지지 않았다. 이제야 진실이 밝혀지기 시작하고 있다….

볼셰비키 정부가 콜호스의 활동을 추진하기 위해 취한 최근의 조치는 전형적인 것이다.

1939년 여름, 예를 들어 「당의 건설적 작업The Constructive Work of The Party」이라는 공식 문헌 제10호는 소비에트 체제의 본질적 악폐는 “농민이 능률적으로 일을 하고 훌륭한 수확을 거둬들여도 거의 이익으로 이어지지 않았다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상부로부터 교사된 이 언론은 이 주제를 자주 다루었다.

그리고 1940년 1월, 「이즈베스티야Izvestia」는 “당과 정부”가 집단농민의 경제적 이익을 증진하기 위한 결정을 내렸다고 공표했다. 그 기사 말미에 “각 집단농민은 그들에 의해 이룩된 수확량 증가는 모두 콜호스의 자체적 처분에 맡겨지고, 그것이 콜호스 경제의 개선에 사용할 수 있도록 보증해야만 한다.”고 설명했다. (이는 전례가 없는 일이었다.) 그리고 “집단 농민대중의 창조적 주도권을 발전시킬 것”이 매우 중요하다고 덧붙였다.

마지막으로 1940년 1월 18일자 법령에서 당 중앙위원회와 인민위원회는 콜호스에 일정한 경제적 독립을 승인했다. 각 콜호스는 자체 작물계획을 수립할 수 있는 권리를 부여받았다―그것은 당연히 항상 “공식 당국에 의하여 검증되어야 했지만.”

분명 신경제정책과 같은 집단농장이 수포로 돌아갈 것이라는 것은 지적할 것까지도 없다. 그것은 주로 핀란드 전쟁의 패배에서 기인하는 스탈린 정권의 공작에 불과하고, 사실상 모든 곳에서 부정되었다. 뿐만 아니라 농민대중은 이 책략에 대해 충분히 알고 있었으므로 그 “개혁”을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볼셰비즘의 “집산화”에 대한 실체를 보여주기에 우리는 여기서 그것을 다루었다.

일반적으로 이는 농민을 국가에 완전히 복종시키고 새로운 농노제를 만들어내려는 의도에서 행해진 강제적 “집산화”였고, 모든 부분에서 산산조각 났다. 그 점에 있어 우리가 내다보고 있던 바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그리고 소비에트 언론은 소비에트 농업에 있어 “개인적 요소”와 “사회적 요소” 사이의 투쟁의 심각성을 점점 더 주장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후자는 소련 농민에 의해 여러 핑계와 수많은 방법으로 공공연히 무시되고, 방치되고, 태업에 처해있다. 결국 상황은 “극단적으로 심각하다”고 간주 되고 있다. 몇 가지 외양적 양보는 집단농민에게 그들의 콜호스에 대한 관심을 환기하고, 그에 반하는 경향들과 싸우게 하기 위한 시도다.

그러나 이러한 시도들이 실패할 것이라는 데는 조금도 의문의 여지가 없다. 농노제에 대한 농민들의 투쟁은 계속될 것이다.

지금까지 소련의 물질적 측면―경제, 산업, 기술적 측면―을 다루어 왔으니, 정신적이라 불릴 수 있는 특정한 다른 분야를 살펴보기로 하자.

세 가지 부분에 대해 특별한 설명이 필요하다.

1. 사람들을 교육하는 것에 관한 문제

2. 여성해방

3. 종교 문제

나는 이 주제들에 대해 상세히 다룰 수 없어 유감이다. 그러나 그러한 작업은 상당한 지면을 필요로 할 것이고 이 책의 목적과는 맞지 않는다. 때문에 나는 특정한 본질적 성격을 밝히는 데에 그치도록 하겠다.

무지한 이들과 이해관계로 움직이는 이들은 수년에 걸쳐 완전히, 거의 “미개”하고 무지한 상태로 러시아 국토를 바라보고, 볼셰비키는 일반적 문화, 육성, 교육의 길에 있어 “대약진”을 이룩했다고 가장해 왔다. 러시아의 대도시를 방문한 외국인 여행자들은 “자신의 눈으로” 보고 온 경이로움을 우리에게 말해준다.

그들이 극구 장담하며 볼셰비키가 개입하기 전에는 “러시아에는 공립학교가 거의 없었”으나 오늘날에는 “거의 모든 곳에 훌륭한 공립학교가 있다”고 말하는 것을 내가 들은 일이 없다고 할 것인가? 어느 강연자가 “혁명 전에는 러시아에 두세 곳의 대학밖에 없었으나 볼셰비키가 여러 대학을 세웠다”고 말하는 것을 내가 듣지 못했다고 할 것인가? 그들은 볼셰비키 이전에는 거의 모든 러시아 국민이 읽고 쓰는 법을 몰랐으나 지금은 그 같은 온전한 문맹은 거의 없어졌다고 말하지 않았는가? 차르 치하에서는 산업노동자와 농민은 중등교육과 고등교육 이수가 법률로 금지되었다고 그들은 말하지 않았던가?―러시아에 관한 무지와 그릇된 주장의 예시로서만 나는 이런 말을 하고 있는 것이다.

여행자들에 대해 말하자면, 그들이 소련의 대도시에 있는 설비가 잘 갖추어지고 잘 조직된 몇몇 화려한 근대 학교를 견학하고 감탄할 수 있는 것은 사실이다―그것은 첫째로, 그와 같은 모범이 되는 학교는 세계의 모든 대도시에서 으레 있기 마련이기 때문이다(여행자는 제국 시절의 러시아에서도 같은 것을 관찰할 수 있었을 것이다). 둘째로는 그와 같은 학교의 설비는 볼셰비키 정부의 장식적이고 시범적인 계획의 일부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몇몇 대도시의 상황은, 특히 “소비에트”연방과 같은 광대한 토지에서는, 시골의 상황에 관해 아무것도 증명하지 못한다는 것은 명확하다. 진실에 기초한 결론에 다다르기를 바라는 여행자라면 적어도 몇 주 동안 매일 벽지와 여러 중소도시와 마을, 집단농장, 그리고 위대한 중앙에서 떨어져 있는 공장 같은 곳의 사정을 보고, 그 발전의 실태를 알아야 할 것이다. 그러나 그런 생각을 가지고 있다 하더라도 그렇게 할 수 있는 허가증을 얻을 수 있는 여행자가 있었던가? 방금 묘사된 종류의 신화에 관해서는 이 책의 다른 부분에서 이미 그 진상을 보인 바 있다.

혁명 이전에 러시아 인민의 교육이 충분히 널리 보급되었다고 주장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사실 그것은 어느 나라에서도 충분하지 않았다. 단지 세부와 온도 차가 있었을 뿐이다.) 제정 러시아에서 문맹의 수가 그리 많지 않았다거나 국민지도가 특정 서구 국가들에 비해 별로 뒤처지지 않았다고 주장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지만, 그것과 내가 앞서 인용한 진술 사이에는 상당한 차이가 있다.

그러나 정확한 진실을 밝히는 것은 꽤나 간단하다.

혁명 이전에 러시아의 초등, 중등, 고등학교들의 네트워크는 충분하지는 않았으나 이미 상당히 주목할 만한 것이었다. 그것은 주로 불완전한 교육이었다. 즉 프로그램, 방법, 수단이 형편없는 것이었다. 정부는 당연히 진정한 국민교육에는 무관심했다. 시립 및 사립학교는 로마노프Romanov 당국의 감독 아래 공식 교육과정을 따르도록 강요되어, 비록 일부 성과를 거두기는 했으나 많은 것을 성취할 수는 없었다.

그러나 교육 분야에 있어 볼셰비키 정권의 “대약진”이라 불리는 것은 사실 어정쩡한 것이었다. 이를 확인하기 위해서는 다른 경우와 마찬가지로 소비에트의 공식 언론을 면밀하게 따라가는 것으로 충분하다. 기타 부문과 마찬가지로 이 주제에 대한 탄식과 고백도 여러 해 동안 매우 웅변적이었다.

최근의 인용문을 몇 가지 더 살펴보자.

일반적인 공식 통계에 의하면 소련에서의 교육은 만족할 만한 것 이상으로 진행되고 있다. 초등 및 중등학교의 학생 수는 1935~36년에는 2천5백만이라는 주목할 만한 수를 달성했으며, 고등학교 학생 수는 52만 명으로 증가했다. 1936~37년에는 각각의 수가 2천8백만과 56만이 되었다. 1939년[45]에는 마침내 그 수가 2천9백7십만과 60만에 달했다. 거의 100만 명의 학생들이 산업, 상업, 농업 등의 기술 훈련을 받고 있다. 전국에 성인을 위한 강좌가 무수히 많았다. 그리고 교육에 대한 열의도 강렬했다.

물론 혁명으로부터 태어나 인민의 것이라고 주장하고 있는 정부가 좋은 교육에 대한 인민의 열망을 만족시키고자 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이 정권이 국가의 교육 제도를 근본적으로 개혁에 종사하는 것은 마땅한 일이다. 혁명 후의 어떠한 정권이라도 그렇게 했을 것이다.

하지만 볼셰비키 정부의 활동을 현명하게 판단하는 데는 공식적인 양적 수치로는 불충분하다. 진짜 문제는 이 새로운 교육의 질과 가치를 어떻게 보느냐 하는 데 있다. 정부가 훌륭하고 진지한, 가치 있는 견고한 교육을 보장하기 위해 교육을 조직하는 데 성공했는지 의문을 제기할 필요가 있다. 그리고 소련에서의 교육과 훈련이 새로운 생활을 창조할 수 있는 사회주의 활동을 위한 투사를 양성할 수 있는지를 아는 것이 선결과제이다.

이러한 근본 문제에 대해 소비에트 언론 스스로 여러 해에 걸친 고백에 의해 부정적인 답을 해 왔다.

첫째, 우리는 러시아에서의 교육이 모든 사람에게 적합한 것은 아니라고 말하지 않을 수 없다. 사실, 고등교육은 무상교육이 아니다.[46] 고등학교 학생 대다수가 국가장학금을 받고 있다. 국가장학금을 받지 않고 있는 사람들은 어떻게 되는가? 상당수의 청년이 고등교육을 받지 못하고 있으며, 그것은 정부의 의향에 따른 특권이 되고 있다. 또한 다른 결함들도 훨씬 더 심각하다.

여러 해에 걸쳐 교육에 관한 똑같은 성명과 불평이 소비에트 신문의 지면을 장식하기를 되풀이해 왔는데, 특히 다음과 같은 내용이 있다.

1. 정부는 아직 충분한 양의 교과서를 출판하는 데 성공하지 못했다. 관료주의, 중앙집권주의, 행정상의 지체와 같은 것들이 그것을 방해하고 있다[고등학교 지도위원회 위원장인 캅타노프(Sergy Kaftanov)는 연설[47]에서 고등학교 교과서가 전혀 없다는 것을 인정해야 했다. 1939년에야 겨우 적은 부수가 인쇄되었는데, 그 대부분이 혁명 이전 책의 재판에 불과했다].

2. 해마다 똑같은 학교 설비에 대한 불만. 설비의 부족, 혹은 설비가 있다 하더라도 매우 나쁜 품질의 설비가 교육사업을 심각하게 방해하고 있다.

3. 학교 건물의 심각한 부족. 조금씩 증가하고는 있으나 현실의 교육 증진에 대해서는 극심한 장애가 되고 있다. 그리고 기존 건물들은 비참할 정도로 형편없는 상태이고, 새로 건축된―언제나 황급히 날림으로―것은 결함투성이에 빠르게 못 쓰게 된다.

그러나 언급된 결점들이 가장 중요한 것은 아니다.

훨씬 더 심각한 해악이 소련의 교육 활동을 마비시키고 있다―교사와 교수의 부족이 그것이다.

1935년 이래 「이즈베스티야Izvestia」, 「프라브다Pravda」 및 기타 소비에트 기관지는 이 주제에 관해 많은 고백과 푸념을 늘어놓고 있다. 그들이 자인하는 바에 따르면 교사진의 조직화는 국가의 요구에 전혀 부합하지 않는다. 예를 들어 1937년에는 교사 “계획”의 50퍼센트만이 실현되었다.

일부 지역에서는 수백, 때로는 수천 명의 교사가 부족하다. 그러나 그것이 끝이 아니다. 교육에 종사하는 사람들이 도무지 적격과는 거리가 멀다. 중등학교 교사의 약 3분의 2가 대학 교육을 받지 못했다. 마찬가지로 초등학교 교사의 3분의 2가 중등교육을 받지 않았다.

소비에트 언론은 교사들의 형편없는 무지에 대해 몹시 불평하고 있으며, 그들의 무능과 부적합함에 대해 놀랄 만큼 수많은 사례를 인용하고 있다.

요약하자면―현실적으로 소련의 훈련과 교육은 한탄스러운 상태에 있다. 대도시나 인위적인 외관 이외에는 학교, 교사, 설비 또는 교과서가 충분하지 않다. 학교 건물에는 위생을 위한 기본 시설이 부족하고, 난방이 부족한 경우도 적지 않다. 그 나라의 벽지에서는, 대중교육은 믿을 수 없을 만큼 등한시되고 있다. 그것은 절대적 혼란에 상응한다.

이런 조건 아래서, 다소간 읽고 쓸 줄 아는 “90퍼센트의 인구”라는 것은 단지 또 다른 신화에 지나지 않겠는가?

소비에트 언론은 스스로 이 물음에 답하고 있다. 소비에트 언론은 일반 대중 뿐만 아니라 학생과 교사, 교수들 사이에서조차 가장 기초적인 교육마저 부재함과 최저한의 교양 수준에 미달한 이가 많다는 것을 해마다 말하고 있다.

이러한 상황을 개선하려는 정부의 모든 노력은 성공하지 못했다. 볼셰비키 체제의 근간인 일반적인 상황이 바로 상황 개선에 대해 극복할 수 없는 장애물이 되는 것이다. 러시아 교육 제도의 전반적인 경향이 그 성공을 가로막고 있다. 왜냐하면 그것은 교육이나 훈련을 제공하기보다 프로파간다를 퍼뜨리는 데에 바쁘기 때문이다. 그것은 학생들의 머리를 볼셰비즘과 마르크스주의의 엄격한 교리로 채워 넣는다. 어떠한 주도권도, 비판 정신도, 의심하거나 검토할 자유도 용납되지 않는다.

소련의 교육 전반에는 스콜라적 정신, 즉 생명을 잃고 지겹게 화석화된 경향이 깃들어 있다. 언론의 자유의 결여, 자주적 행동 또는 토론의 결여, 따라서 마르크스주의의 도그마만이 허락되는 땅에서의 자유로운 사상 교류의 결여―이 모든 것은 인민이 참된 교육을 받는 것을 방해하고 있다.

여행자들―이들은 당연히 피상적이고 종종 단순한 관찰자들이다―은 모스크바나 레닌그라드 및 기타 두세 도시를 공동으로 주마간산 격으로 돌아보고 “자기 스스로의 눈”으로 본 문화 및 스포츠 시설에 경탄한다.

하지만 우리가 「트루트Trud[48]지誌에서 발견한 것에 주목하라.

도네츠크Donetz 분지의 광부들은 정부 당국에 다음과 같은 질문을 제기했다. “고를롭카Gorlovka[49]의 ‘문화회관’을 유지하기 위한다는 명목으로 우리 임금에서 공제한 부담금의 용도는 어떻게 되었는가?”(이런 항의가 공표된다는 사실은 매우 드문 일이었다.)

1939년에는 이 회관의 관리비가 수백만 루블에 달했다고 광부들은 말하고 있다. “광부 클럽”의 예산만 해도 117만 3천 루블에 달했다. 그중 70만 루블은 필름 대여료로 영화제작소에 지불되었지만, 영사映寫가 제대로 되지 않아 아무도 보러 오지 않았다. 나머지 40만 루블은 직원 경비로 소비되었다. 광부들은 자신들이 지불한 금액에서 아무 이익도 얻지 못했다.

“문화회관”은(광부들의 불평은 계속된다) “공원”이라 불리는 정원으로 둘러싸여 위용을 뽐내고 있다. 이 정원을 정리하기 위해 상당한 액수의 금액이 그들의 임금에서 공제되고 있다. 그 돈으로 몇 개의 콘크리트 탑이 늘어선 커다란 문이 만들어졌다. 그러나 설계담당자들은 정원 둘레에 담을 쌓는 것을 잊고 있다. 정원에는 호화로운 문은 있으나 담장이 없다. 그대로 방치되어 있기 때문에 아무 소용이 없다.

또한 “그들”은 극장, 연단, 사격장과 목욕탕까지 만들었다. 하지만 이 시설 중 어느 것도 광부들이 사용할 수 없다. 그들은 단지 그곳에서 노동자 조직의 요직에 있는 책임자들이 노동자들의 돈을 쉽게 낭비하는지를 바라볼 뿐이다. 이 책임자들은 “광부위원회 정원”이라 불리는 사적인 용도의 작은 정원을 자신들을 위해 마련했다. 그러나 정작 광부들, “회관”이니 “클럽”이니 “공원”이니 “광부위원회 정원”이니 하는 것들을 위해 돈을 낸 노동자들, 그들은 고를롭카의 더러운 거리만을 마음대로 방황할 수 있을 뿐이다.

이 호소는 기적적으로 「트루트Trud」지誌에 실렸다. 아마 어떠한 이유로 당국은 광부에 대한 이 호소의 공표를 거절할 수 없었고, 그리고 그들의 불만의 호소를 바로잡고 처벌을 적용하기 위해 상부에서 결정되었으리라는 가정이 가능할 것이다. 그러나 이렇게 공표된 하나의 사례에 비해 수천의 다른 사례들이 알려지지 않은 채 남아 있는 것이 분명하다.

숨 막히는 교조주의, 모든 개인 생활과 자유로운 정신, 도덕적 열정의 부재, 열의로 불타는 장래에 대한 넓은 비전의 부족, 군대 정신과 숨 막히는 관료주의와 노예근성과 출세주의의 횡행, 심지어 사소한 세부 사항까지 국가의 명령에 의해 규제되는, 절망적일 만큼 천편일률로 공허하고 몰개성적인 생활―이것이 소련에서의 교육 및 “문화”의 특성이다.

「콤소몰스카야 프라브다Komsomolskaya Pravda」(청년 공산주의자의 진리)[50]에 의하면, 깊은 환멸과 “위험한” 권태의 정신이 그 나라의 청년학생층에 침투하고 있다고 했는데, 이 사실에 누가 놀라겠는가? 그들을 둘러싼 환경 전체가 젊은이들에게 우울한 영향을 끼치고 있다.

그리고 소비에트 언론이 인정하는 바에 따르면, 학생 대다수가 자신의 진짜 흥미 때문이 아니라 강제적으로 수업을 받고 있다고 한다. 그들 중 많은 학생이 트럼프나 하며 밤을 보내고 있다.

한 젊은 학생의 일기에서 다음과 같은 구절이 발견되었다.

“나는 권태롭다. 나는 끔찍할 만큼 권태롭다. 사람이든 사건이든 주의를 끄는 것이 전혀 없다. 나는 무얼 바라고 있는가? 좋다, 나는 학업을 마칠 것이다. 그래, 나는 엔지니어가 될 거야. 나는 두 칸 방과 멍청한 아내, 영리한 아이, 500루블의 월급을 받겠지. 한 달 두 번의 회의, 그리고 그 다음에는? … 이런 삶을 떠나는 데 후회가 없느냐고 스스로 물어볼 때, 나는 답한다. 아니, 나는 그다지 후회하지 않고 그 삶을 떠날 것이다.”

“볼셰비키에 의한 여성해방”에 대해서는 많은 소음이 있어 왔다. 진정한 성 평등, 법적 결혼 폐지, 여성의 신체에 대한 자기결정권, 임신중단의 권리―이러한 모든 “혜택”이 모든 나라의 전위적 언론에서 구가되어 왔다.

이러한 “성과”도 역시 신화의 영역에 속한다. 독자들은 성 평등과 자유에 대한 사상과 그 현실은 러시아의 급진적인 인사들에 의해 훨씬 이전―혁명보다도 훨씬 이전―부터 고려되어 왔다는 것을 잘 알고 있을 것이다. 혁명에서 탄생한 정부라면 어떤 정부라도 이 문제를 중요시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그러니 이 문제에 관한 진전이란 꼭 볼셰비키에 국한된 특별한 것은 아니다. 볼셰비키 정부의 업적은 사실 아주 미미한 수준에 불과하다. 볼셰비키 정부가 공식적으로 발표한 원칙을 실제로 적용하고자 했음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그러나 거듭되는 본질적 질문은 그것이 성공했는가 하는 것이다. 그리고 다시 한번, 우리는 그것이 한탄스럽게 실패했다는 것, 그 제도와 그 실제적 결과들이 모든 것은 방종하게 하고, 후퇴시키고, 신화와 허구만을 간직하도록 강요하고 있다는 것을 기록된 사실들에 의하여 증명할 수 있다.

법적 결혼은 소련에서 폐지되지 않았다. 그 대신 그것은 간소화되거나 민사民事가 되었는데, 혁명 전에는 종교적인 것이어야만 했다. 이혼은 이전에는 민사였으나 현재는 금전적 조건과 벌칙이 정해져 있다는 것도 적어두지 않으면 안 된다.[51]

혼인신고를 조사해 보면 매우 젊은 여성과 고령이지만 지위가 높은 남성 간에 결혼이 맺어진 경우가 많다는 것을 알게 된다. 이는 소련 내에서도 역시 다른 모든 곳과 마찬가지로 결혼은 볼셰비키가 믿었던 것처럼 사랑의 자유로운 결합이 아니라 “비즈니스”라는 것을 증명한다. 그리고 그것은 자본주의 체제가 외형만을 바꾸어 그 나라에 고스란히 남아 있는 한 완전히 당연한 일이다. 오직 외형만 바뀌었을 뿐, 그 기반과 모든 효력이 그대로 남아 있다.

사회주의 국가를 건설하려는 시도에 실패하고 자본주의 국가(별개의 국가라고 상상된)의 건설에 성공한 볼셰비키는 다른 모든 분야에서와 마찬가지로 가족, 어린이 등 남녀관계에 관한 모든 것에서 후퇴할 수밖에 없었다.

이는 피치 못할 일이었다. 이 분야의 상황은 사회 전체가 근본적으로 바뀌어야만 바뀔 수 있었다. 사회 전체가 완전히 개조되지 않고 단지 형태만 바뀌는 것만으로는 남녀 간의 관계, 가족 및 자녀를 포함한 모든 관습 역시 형식을 제외하고는 변하지 않는다. 외양을 바꾸는 한편 근본적으로는 예전 그대로 남는다.

그것이 소련에서 일어난 일이다. 1936년 5월부터 모든 “전위적 원칙”은 조금씩 폐기되었다. 일련의 새로운 법률이 결혼, 이혼, 배우자의 책임 등을 규정했다.

이 법률은 비록 형태는 새로운 것이었으나 순수하고 단순하게 “부르주아 가족”의 기본형을 재확립한 것이다. 여성의 신체의 자기결정에 대한 자유는 금지되었다. 임신중단의 권리는 엄격하게 제한되었다. 오늘날 그것은 의사의 조언이 있거나 아주 특수한 상황에 있는 예외적인 경우에만 허용된다. 법적인 허가가 없을 경우 임신중단 혹은 그것을 제안한 것만으로도 엄중한 처벌을 받는다.[52]

성매매는 소련에 널리 퍼져 있다. 이것 그리고 일반적으로 “소비에트”의관습의 낮은 수준을 확인하기 위해서는 날마다 세심하게 러시아 언론의 일간 뉴스 요약과 지역 통신과 가족란欄을 읽어보면 된다.

볼셰비키는 러시아 전위적 집단에 오랫동안 보급되어 온 “성 평등”에 대해 자연스럽게 받아들였다. 그러나 기타 영광스러운 사회적, 도덕적 테제와 마찬가지로, 혁명의 전반적인 왜곡의 결과, 그 역시 변질되어 있다.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그것은 소련에서는 임금이 아니라 작업상의 “평등”에 대한 문제이다. 여성은 남성과 동일한 일을 하지만 임금은 더 적다. 따라서 이 “평등”은 국가가 남성 이상으로 여성을 더 많이 착취하도록 허용한다.

종교의 중요한 문제에 대해 간단히 설명해보겠다.

종교적 편견에 관해 볼셰비키의 태도가 옳았다는 주장이 있다. 이는 오류인데, 그 근원은 다시 말하지만 사실에 대한 무지에 있다.

볼셰비키 정부는 테러를 통해 대중의 예배를 억압하는 데 한동안 성공했다. 그러나 볼셰비즘의 방책이나 그 “성과”에도 불구하고, 이와는 반대로 종교적 감정은 조금도 소멸되지 않고, 어떤 이는 점점 그것을 점점 강화했고, 어떤 이는 단순히 형태만을 변화시켰을 뿐이었다.

혁명 이전, 특히 1905년 이후에는 종교적 감정이 대중 사이에서 쇠퇴한 상태에 있었고, 사제나 차르 당국은 별로 심각하게 괴롭히는 일도 없었다. 볼셰비즘은 다른 형태로 그들을 부활시키는 데 성공한 셈이다.

종교는 테러나 프로파간다가 아니라 사회혁명의 효과적인 성공과 그 행복한 결과에 의해 소멸될 것이다. 반종교의 씨앗이 사회혁명의 성공이라는 비옥한 땅에 뿌려진다면 풍요로운 결실을 맺을 수 있을 것이다.

볼셰비키 정부가 그러한 성공을 거두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거나 그 노력이 완전한 성공을 거두지 못했으나 그것은 정부의 책임이 아니라는 따위의 반론이 때때로 내게 제기된다.

정말 그러하다. 그 정권의 훌륭한 의지를 보여줄 수 있으면 있을수록 참된 사회혁명과 참된 사회주의는 정부나 국가적 체제에 의해서는 달성될 수 없다는 것이 더 명백해질 것이다.

“공산주의 정부는 성공을 위해 모든 선의의 노력을 기울였다”고 어떤 이는 내게 말한다.

나는 그 말에 반대하지 않는다. 하지만 문제는 그것이 아니다. 이는 정부가 그것을 원했는지 아닌지에 대한 질문이 아니다. 이는 그것이 성공했는가를 아는 것에 대한 문제다. 정부가 모든 선량한 의지를 투입했음에도 불구하고 성공하지 못했다는 것이 입증될수록, 정부는 성공할 수 없다는 것이 더욱 분명해진다.

“정부는 그 이상 하지 못했다.”

그렇다면 왜 다른 이들이 시도하는 것을 막았는가? 정부가 할 수 없다는 것을 알았다면 다른 이가 행동하는 것을 금지할 권리는 없었을 것이다. 그리고 다른 이들이 무엇을 성취할 수 있었을지 누가 알겠는가?

정부는 왜 성공하지 못했을까?

“국가의 낙후된 상태가 그것을 방해했기 때문이다. 낙후된 대중은 준비가 되어있지 않았다.”

그러나 볼셰비키가 대중의 행동을 의도적으로 방해한 이상 이에 대해 실제로 알 수 있는 것은 없다. 마치 다른 사람의 발을 묶어놓고 걷지 못한다고 놀라는 것과 같다.

“다른 정파의 좌파들은 볼셰비키와 협력하고자 하지 않았다.”

하지만 이들은 그들이 악마라고 여겼던 볼셰비키의 명령과 요구에 맹목적으로 복종하고 싶어 하지 않았다. 그렇기에 그들은 말하고 행동하는 것을 방해받게 되었다.

“자본주의에 의한 고립화…”

정말 그러하다―자본주의에 의한 포위는 정부를 방해할 수 있고 퇴보시킬 수 있다. 그러나 우리가 본 것처럼 그것은 결코 크나큰 열정으로 진정한 혁명을 달성할 준비가 되어있는 수백만의 사람들의 자유로운 활동을 방해하거나 타락시킬 수는 없었다.

트로츠키처럼 “혁명의 배반” 운운하는 것은 마르크스주의 또는 유물론적 개념뿐만이 아니라 보다 평범한 상식에서조차 벗어난 “설명”이다.

이 “배반”은 어떻게 가능했으며 그토록 아름답고 완벽한 혁명의 승리 이후의 시대란 어떻게 발생했는가?

그것이 진짜 문제인 것이다.

상황을 면밀하게 검토해 보면 이 계획된 “배반”이 하늘에서 떨어진 것이 아니라 혁명이 취해 온 방식 그 자체에서 파생된 “물적物的”이자 엄밀히 논리적인 귀결이라는 것을 이해할 것이다.

러시아혁명의 부정적 결과는 단지 특정한 과정에서 귀결된 것에 불과했다. 그리고 스탈린주의 정권은 레닌 및 트로츠키에 의하여 수행된 방책의 불가피한 귀결에 불과했다. 트로츠키가 “배반”이라고 부르는 것은 실제로는 잘못된 방법으로 인해 조금씩 진행되어 온 타락의 피치 못할 결과이다.

정확히 말하자면, 정부와 국가의 절차가 “배반”으로, 즉 오늘날의 “배반”을 허용하는, 파산으로 이어지는 길을 열어놓았다―“배반”은 이 파산의 두드러진 한 측면일 뿐이다. 다른 절차들은 다른 가능성을 초래했을 수도 있다.

트로츠키는 맹목적인 편견에서(혹은 상상도 할 수 없는 위선으로) 용서할 수 없는 가장 명백한 혼란을 범하고 있다. 그는 원인과 결과를 뒤바꿔놓고 있는 것이다.

그는 조잡하게 자신을 기만하여(또는 자신을 속인 것처럼 꾸며 놓고, 자신의 이론을 방어할 수단을 발견하지 못하고서) 원인에서 결과(스탈린에 의한 배반)를 도출하고 있다. 무엇이 “스탈린주의”를 가능하게 했는지에 대한 근본적인 문제를 트로츠키가 간과한 것은 오류라고 하기보다 오히려 교묘한 수법인 것이다.

“스탈린은 혁명을 배반했다.” 간단하다. 하지만 너무도 간단해 아무것도 설명할 수 없다.

그럼에도 설명은 간단하다. “스탈린주의”는 진정한 혁명에 대한 파산의 당연한 결과지 그 반대가 아니다. 다시 추론해 보면, 혁명의 파산은 볼셰비즘이 취한 잘못된 과정의 자연스러운 결과였다.

다시 말해서, 좌절하고 실패한 혁명의 타락이 스탈린을 이끌어간 것이지, 스탈린이 혁명을 타락시킨 것이 아니다.

이 병마病魔에 공격받았을 때, 혁명적 유기체는 대중의 자유로운 행동을 통해 의기양양하게 저항할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레닌과 트로츠키 자신이 이끄는 볼셰비키는 대중으로부터 악에 대한 모든 자기방어 수단을 빼앗았기 때문에, 필연적으로 병마가 유기체를 침범하여 죽이는 것으로 마무리되었다.

노동대중이 “배반”의 준비에도, 그 달성에도 반항하지 않았기에 “배반”은 가능했다. 그리고 대중은 그들의 새 주인에 완전히 복속되어 진정한 혁명의 의미와 모든 주도 정신, 자유로운 행동과 그 반응의 의미를 빠르게 상실했기에 그에 대하여 저항하지 않았다. 그들은 속박되고, 복속되고, 지배당하고 있었기에 모든 저항이 헛되고―내가 무슨 말을 하고 있는가?―쓸모가 없다고 느꼈다. 트로츠키는 대중 사이에서 맹목적인 복종 정신을 깨우고, “상부”에서 일어나는 모든 것에 둔감한 무관심을 되살리는 데 직접 참여했다. 대중이 패배한 채 오랜 시간이 지나갔다. 그 이래로 어떠한 “배반”도 가능하게 된 것이다.

이 모든 것에 비추어, 우리는 독자들이 볼셰비키의 “성과”에 대해 스스로 판단하기를 권한다.


제8부. 반혁명


볼셰비키 정부의 창조적인 무능, 러시아가 곤두박질친 경제적 혼란, 전제주의와 전례 없는 폭력, 혁명의 파산, 그리고 그로 인한 비극적인 상황은 처음에는 광범위한 불만을 불러일으켰고, 이내 침체상태가 만연해 마침내는 독재로 말미암아 야기된 참을 수 없는 상황에 대한 강력한 반대 운동을 불러일으켰다.

그러한 경우 항상 그렇듯이, 그러한 운동은 항상 상반된 양극단에서 시작되었다―반동 측, 즉 권력을 되찾아 구질서를 재건하기를 바라는 “우파”, 그리고 혁명 측, 상황을 만회하고 혁명적인 행동을 재개하기를 바라는 “좌파”에서의 운동이다.

우리는 반혁명운동에 대해 장황하게 고민하지는 않을 것이다―한편으로는 그에 관해서는 다소 잘 알려져 있기 때문이며, 다른 한편으로는 그것들 자체가 그다지 흥미를 끄는 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한 반혁명운동은 모든 대혁명 가운데 나타나는 것과 같은 것이다.

그럼에도 이러한 운동의 일부 측면은 충분히 교훈적이기 때문에 묵과하지 말아야 한다.

러시아의 사회혁명에 대한 최초의 저항(1917년과 1918년)은 극히 제한적이며, 매우 국지적이고 비교적 해가 적었다. 모든 혁명과 마찬가지로 일부 반동분자들은 즉시 새 질서에 반대하여 혁명의 싹을 잘라내려고 했다. 산업노동자, 농민, 병사의 대다수는(적극적이든 소극적이든) 이 새로운 질서의 편이었기에 이들의 저항은 쉽고 빠르게 분쇄되었다.

그 후, 만약 혁명이 정말로 풍부하고, 강력하며, 창의적이고, 정의로운 모습을 보여주었더라면, 만약 혁명이 그 큰 문제를 만족스럽게 해결하고 러시아나 아마도 다른 나라들을 위해 새 지평을 여는 방법을 알았다면, 반혁명운동은 사소한 전투로 끝났을 것이 분명하며, 혁명의 승리는 위협받지 않았을 것이다. 또한 러시아 등지에서 잇달아 일어난 여러 사건도 우리가 20년간 목격한 것과는 크게 달라졌을 것이다.

그러나 독자들이 알다시피 권력을 장악한 볼셰비즘은 혁명을 왜곡하고, 속박하고, 거세했다. 첫째로 그것은 혁명을 무력하고, 무능력하고, 공허하고, 불행하게 만들었다―더욱이 우울하고, 비열하고, 폭압적이고, 무의미하고, 어리석게 폭력적으로 만들었다. 이리하여 볼셰비즘은 점점 더 많은 사람을 환멸나게 하고, 짜증나게 하고, 혐오스럽게 만드는 결과가 되었다. 그리고 농민에 대한 테러와 잔인한 폭력행위는 농민을 이반시켰다.

우리는 모든 혁명에서 인구의 대다수, 즉 단순한 정치적 무관심자들, 날마다 일에 쫓기는 시민들, 프티 부르주아지, 중산층 부르주아지의 일부, 그리고 농민 중 다수는 맨 처음에는 중립을 지킨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 혁명이 되도록 빠르게 이런 이들의 눈에 “자신을 정당화”할 수 있는 것이 중요하다. 그렇지 않으면 그러한 모든 “미온적인” 사람들은 혁명적인 작업을 외면하고, 그에 적대하고, 반혁명적 책략에 동조하기 시작하고, 그것을 지지하며 그 책략을 훨씬 더 위험하게 만들 것이다.

이러한 상황은 수백만 명의 이익을 휩쓸어 넣어 사회적 관계를 심오하게 수정하고, 어마어마한 고통을 수반하는 방식이기는 하나 미래의 커다란 만족을 약속하고 수행되는 대변동기다. 이 만족은 신속하게 초래되어야만 한다. 혹은 어떻게 해서든 대중이 그것을 강하게 기대할 수 있어야만 한다. 그렇지 않으면 혁명은 약화되고 반혁명이 지속된다.

이러한 중립적인 이들의 적극적인 공명이 혁명의 효과적인 발전에 불가결한 것이다. 왜냐하면 그들은 많은 “전문가”와 장인―숙련노동자, 기술자, 지식인을 포함하기 때문이다. 혁명이 일단 성취되면 혁명에 정면으로 적대하고 있는 것이 아닌 사람들은, 혁명이 확신을 가지고 그들을 격려하고, 혁명의 능력, 가능성, 전망, 이점, , 진실, 정의를 느끼게 한다면 혁명의 편에 서서 혁명을 열렬히 원조할 것이다.

그러나 만일 그러한 조건이 달성되지 않으면 그 모든 이들은 혁명의 공공연한 적이 되고 말 것인데, 이는 혁명에 대해 심각한 타격이 될 것이다.

혁명가들의 원조를 빌려 자유로운 활동을 하는 거대한 노동대중이 이들을 납득시킬 수 있을 만큼 성과를 거두어 이들 중립을 지키는 이들을 확신시켜 마침내 끌어들일 만한 힘을 지니고 있음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독재정권―무능하고, 오만하고, 어리석고, 잔혹하리만큼 폭력적인―은 그러한 성과를 거두지 못하고 이들을 다른 쪽으로 내몬다.

볼셰비즘은 스스로를 “정당화”하는 법도, 혁명을 “정당화”하는 법도 모른다. 우리가 보아온 것과 같이 볼셰비즘이 겨우 해결하는 데 성공한 유일한 큰 문제는―별로 내키지 않았으나 전투를 거부한 러시아 군대의 압력으로―전쟁이었다. 이 성공―평화의 달성―은 대중의 신뢰와 공감을 얻었다. 하지만 그것뿐이었다. 곧 그 경제적, 사회적, 기타 무능력이 드러났다. 사실 승리의 거의 이튿날에는 벌써 행동의 방법, 정부의 정책 및 국가주의적 절대주의의 무능함이 드러났다.

볼셰비키와 그 동조자들은 러시아 같은 나라에서 정부가 전쟁과 혁명 뒤에 극복해야 했던 “끔찍한 어려움”을 호소하기를 좋아한다. 그리고 그들은 이 지난함을 근거로 볼셰비키의 온갖 행위를 정당화하려고 한다.

사실을 전혀 모르는 외국인들은 그런 이야기를 그럴싸하게 받아들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혁명을 겪어온 이들은 마침내 현실에 눈을 뜨게 되었다.

1. 볼셰비즘의 유해한 방책은 어려운 상황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볼셰비키 이론의 본질 자체에서 비롯했다는 것.

2. 이런 어려움의 대부분은 애당초 정부가 대중의 자유로운 활동을 억압하기 시작한 데서 기인했다는 것.

3. 정작 어려움은 볼셰비키에 의해 제거되기는커녕 그들에 의해 크게 증가했다는 것.

4. 이러한 어려움은 대중의 자유로운 활동이 있었다면 간단히 극복되었으리라는 것.

주된 어려움은 확실히 식량의 배급문제였다. 혁명을 진전시키기 위해서는 되도록 빨리 식량난과 (화폐에 기초한) “교환경제”에서 화폐를 사용하지 않는 풍부한 “분배경제”로 이행할 필요가 있었다.

그러나 중요하고 큰 문제이면 문제일수록 정부는 그것을 해결할 만한 능력을 보여주지 못했다. 더 심각하고 어려운 상황이 될수록 사람들의 자유로운 주도권에 더 의존해야만 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가 알다시피 볼셰비키 정권은 사상, 주도권, 수단, 행동 등 모든 것을 독점하고 있었다. 볼셰비키 정부는 “프롤레타리아트”의 절대적 독재 체제를 확립하고 있었다. 그것은 대중을 굴복시켰고, 그들의 열정을 억눌렀다. 그리고 어려움이 커질수록 “프롤레타리아트”의 행동을 허락하지 않았다.

유명한 “5개년 계획”의 “산업화”라고 불리는 것에도 불구하고 볼셰비즘은 이런 어려움을 어떻게 해결해야 할지 몰랐고, 삶의 위기에 대한 필사적인 투쟁 가운데서 가장 심한 폭력에 호소했으며, 그 결과 일의 중요성을 역설할 뿐이었다는 것은 놀랄 만한 일이 아니었다. 노예에게 강요한 강제적 산업화라는 수단으로 한 나라가 풍요롭게 되고 새로운 경제를 수립할 수 있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러시아의 대중은 직감적으로 다른 형태의 생산으로 이행하고 생산 및 소비 사이의 관계를 변혁할 필요성을 느꼈다. 그들은 점점 더 화폐를 폐지하고 생산기관과 소비기관의 직접 교환 제도를 개시해야 한다는 중대한 필요성과 가능성을 인식하기에 이르렀다. 그들은 거듭 도처에서 그러한 방향을 향해 노력할 준비도 되어있었다. 만일 그들에게 행동의 자유가 있었다면 경제문제의 진정한 해결책인 분배경제에 점진적으로 도달할 가능성이 매우 높았을 것이다. 참된 친구로서 그들을 이끌어 돕는 한편 그들 스스로 길을 찾고, 행동하게 할 필요가 있었다.

그러나 레닌 정권은 그것에 대해 아무것도 듣고 싶어 하지 않았다. 볼셰비키는 모든 것을 자신들이 처리하고 그들의 의지와 방법대로 강요하려고 했다. 대중은 처음에는 직관적으로, 그리고 날이 갈수록 점점 더 분명하게 정부의 무능과 무력, 그리고 독재와 폭력이 이 나라를 위험으로 빠뜨리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런 상황에서 나오는 심리적 결과는 이해하기 쉽다. 한편으로 대중은 볼셰비즘에서 점점 더 돌아섰고, 환멸을 느낀 결과 볼셰비즘을 포기하거나 적대적이 되었다. 이 불만과 반항 정신은 날이 갈수록 고조되었다.

그러나 다른 한편, 대중은 교착 상태에서 어떻게 벗어나야 할지 알지 못했다. 어떤 유효한 해결책도 제시되지 않았다. 모든 사상운동, 토론, 프로파간다, 자유로운 행동이 금지되었기에 결정적인 해결책이 발견될 수 없었다. 이러한 상황은 그들에게 해결이 불가능한 것으로 여겨지게 만들었다. 그들은 어떠한 행동도 할 수 없었다. 그들의 조직은 국유화되고 군사화되었다. 사소한 반대라도 심하게 억압되었고, 무기 및 기타 모든 물질적 수단은 속이거나 변명하는 데 능숙한 당국과 새로운 특권층 손에 쥐어져 있었다. 이러한 상황 앞에서 대중은 점점 더 반항적으로 변해갔지만 효과적인 조치를 취할 가능성은 전혀 보이지 않았다.

기다리고 있던 반혁명 세력은 이 상황과 저항정신을 이용하는 데 실패하지 않았다. 그들은 부지런히 이 저항정신과 사태를 자신들에게 유리한 방향으로 유도하기 위해 안간힘을 썼다. 이렇게 해서 불만은 점점 더 커지고 깊어져서 번져나가는 반혁명운동의 기반이 되어 3년 동안이나 그들을 버티게 했다.

러시아 남부와 동부에서는 특권계급에 의해 음모가 꾸며지고, 외국 부르주아지의 지원을 받아 구질서의 장군들이 지휘하는 대규모 군사행동이 시작되었다.

새로운 정세 아래, 1919~1921년의 대규모 봉기는 남부에서의 칼레딘 장군의 반란이나 우랄 지역의 코사크 연대 아타만ataman 두토프(Alexander Ilyich Dutov) 및 기타 반란과 같은 1917~18년에 걸쳐 발생한 자발적인 비교적 덜 중요한 저항운동에 비해 훨씬 더 심각한 성격을 띠고 있었다.

1918~19년에 걸쳐 대규모 반란이 여기저기서 시도되었다. 이런 것들 가운데는 1919년 12월 유데니치(Nikolai Nikolayevich Yudenich) 장군의 페트로그라드 공격과 “차이코프스키(Tchaikovsky)” 정부의 후원에 의한 북부의 반혁명운동이 있었다.

편제와 무장과 장비가 잘 갖추어진 유데니치의 군대는 수도 문턱에 도달했다. 여기서 그들은 크론슈타트 수병 분견대의 원조에 의한 페트로그라드 노동대중의 열정과 헌신, 주목할만한 조직력의 폭발적 행동, 즉 적의 배후에서의 대봉기에 의해 강하게 지지받은 폭발적 행동에 의해 순식간에 분쇄되었다. 트로츠키가 지휘한 젊은 붉은 군대는 도시의 방어에 참가했다. 차이코프스키 반혁명운동은 아르한겔스크Arkhangelsk 지역과 볼로그다Vologda 지역 일부를 침공하는 데 성공했다. 다른 지역에서와 마찬가지로 여기서도 차이코프스키의 패배는 붉은 군대의 공적은 아니었다. 전선과 그 배후에서의 노동대중의 자발적 봉기가 그것을 종식시켰다.

외국 부르주아지의 지원을 받은 그 운동도 마찬가지로 서구 노동자계급의 저항에 부딪혔다는 것이 주목할 만하다. 러시아에 대한 모든 개입에 반대하는 파업과 시위―특히 영국 항만에서의 파업―가 외국 부르주아지를 방해하고, 불안에 빠뜨리고, 그들의 원조를 철회하게 만들었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1918년 여름, 동부에서 콜차크 제독이 주도한 반란이었다. 몇몇 원조 중에서도 러시아에서 편제된 체코슬로바키아 군의 지원을 받고 있었다. 트로츠키의 붉은 군대가 이를 격파할만한 힘이 없었음은 유명한 이야기다. 이 역시 무장한 산업노동자와 농민들의 맹렬한 파르티잔 저항운동 및 후방에서의 봉기에 의해 괴멸되었다. 붉은 군대는 “의기양양하게” 도착했다―일이 완전히 끝난 후에.

이 모든 반혁명운동은 다소 온건한 사회주의자―멘셰비키와 사회혁명당 우파에 의해 적극적으로 지지되었다.

볼셰비키가 추가적인 혼란을 두려워해 사후를 미연에 방지하고자 1918년 7월 16~17일 밤중에 시베리아 예카테린부르크Yekaterinburg로 추방된 전前 차르 니콜라이 2세와 그 일족을 처형한 것은 체코슬로바키아 공세 때였다. 그 후 볼셰비키는 예카테린부르크에서 철수했다.

이 처형의 정확한 사정은, 콜차크의 의뢰로 한 변호사가 꼼꼼하게 조사했음에도 불구하고 상당히 불가사의하다. 지하실에서 일어난 이 공적 살인이 모스크바 중앙당국의 명령에 의해 집행된 것인지, 아니면 지역 소비에트의 명령에 의한 것인지조차 구체적으로 알려지지 않았다. 그리고 볼셰비키 자신은 침묵을 지키고 있다.

그 무렵, 아직 레닌 정권에 의해 무장해제되지 않았던 러시아 대중은 볼셰비키 혁명에 대한 신뢰감을 회복해 정열적으로 반혁명운동에 항쟁했기에 비교적 용이하게 반란들이 종식되었다.

그러나 1919년 말, 이 상황은 완전히 바뀌었다. 볼셰비즘에 환멸을 느끼고, 볼셰비즘을 혐오하며 “소비에트” 정부에 의해 무장해제 당한 대중은 더 이상 반혁명 음모에 대해 여태까지처럼 저항을 보이지 않았다. 그래서 이러한 운동의 지도자는 이제 그들의 공감을 얻어내고자 노력했다. 전단과 성명서에서 그들은 볼셰비키의 독재에 대해서만 싸우는 것이라고 발표했다. 그들은 사람들에게 “자유 소비에트”와 레닌 정부에 의해 비웃음거리가 된 혁명의 다른 원칙들을 보호하겠다고 약속했다(물론 그들은 일단 승리하자 이러한 약속을 이행할 생각은 전혀 없이 모든 반란을 진압할 것이었다).

따라서 러시아의 중앙에 두 개의 “백색” 대반란, 즉 안톤 이바노비치 데니킨 장군의 반란과 표트르 브란겔 남작의 반란은 볼셰비키 정권을 전복시킬만한 세력을 펼 수 있었다.

데니킨 장군이 군사적으로 지휘한 운동은 처음에는 1919년에 전 우크라이나 및 중앙 러시아 상당 부분을 빠르게 침입했다. 적군赤軍을 격파하고 패퇴시킨 백군은 모스크바 근처의 오룔Oryol 시市에 도달했다. 볼셰비키 정부는, 뜻밖에도 데니킨 군이 돌연 발판을 잃고 황급히 후퇴하던 때, 도망칠 준비를 하고 있었다. 모스크바에 대한 위협은 끝나고 위기는 모면되었다. 하지만 이번에도 볼셰비키와 그 군대는 데니킨 군 격멸에 아무런 역할도 하지 않았다.

브란겔 장군은 레닌 정권을 위기로 몰아넣을 두 번째 운동을 이끌었다. 그는 데니킨 반란에 계속된 운동을 일으켰다. 보다 술책에 능한 브란겔은 그의 선두주자의 패배로부터 몇 가지 교훈을 얻을 수 있었기에 데니킨보다 더 깊고 확고한 공감을 얻었다. 거기에 더해서 러시아 인민의 정신적 타락은 이전보다 더 심화해 있었다.

하지만 브란겔의 운동도 데니킨의 그것이나 기타 그다지 중요하지 않은 운동들과 마찬가지로 패배했다.

데니킨의 운동은 갑작스러운 돌발 사고로 산산이 조각났다. 모스크바 문턱에 다다른 그의 군대는 갑자기 모든 것을 포기하고 무질서하게 남쪽으로 후퇴했다. 그러한 엄청난 실패로 데니킨 군은 괴멸했다. 그 잔당은 전국을 떠돌다가 그들의 뒤를 쫓아 북부로부터 추격해 온 붉은 군대 분견대와 파르티잔에 의해 차례로 절멸되었다.

공황상태에서 벗어난 모스크바의 볼셰비키 정부는 적어도 24시간 동안 데니킨 군이 왜 후퇴했는지 이유를 알 수 없어서 도저히 믿을 수가 없었다. 그 사실이 확인되고 나서야 그들은 백군을 추격하기 위해 붉은 군대의 몇몇 연대를 파견했다. 데니킨의 운동은 완전히 전멸했다.

얼마 후 시작된 브란겔의 노력은 처음에는 몇 가지 큰 성공을 거두었다. 모스크바를 위협할 수는 없었지만, 그것은 데니킨의 원정 이상으로 레닌 정권에게 불안을 안겨주었다. 왜냐하면 점점 볼셰비키를 혐오하게 된 러시아 대중은 이 새로운 반反볼셰비키운동에 대해 심각하게 저항할 것처럼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러시아 대중은 무관심한 채 있었다.

그런데 이 거의 일반적인 무관심 때문에 정부는 이제까지 이상으로 자신들의 군대도 믿을 수가 없었다.

그러나 그러한 초기의 성공 이후에, 브란겔의 운동은 다른 운동들과 마찬가지로 무너졌다.

“기적적”이라고 할 만한 역전, 즉 그렇게 성공리에 시작된 운동이 마지막에 패배한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이러한 성쇠의 실제 원인과 정확한 상황은 편견을 지닌 저자들에 의해 의도적으로 왜곡되었기 때문에 거의 알려지지 않고 있다.

백색운동의 몰락 원인은 주로 다음과 같다.

첫째, 지도자의 서투르고, 냉소적이며, 교만한 태도. 그들은 러시아의 어떤 지역을 획득하면 정복한 지역에 볼셰비키 못지않은 독재자로 군림했다. 그들은 매우 방탕한 생활을 했고, 건전한 사회를 조직하지 못하고, 교만해지고, 노동자를 불신하고, 온갖 “미명”에도 불구하고 구사회의 부활을 꾀하고 있다는 것을 노동자들에게 잔인하게 알게 했다. 단순히 사람들을 확보할 목적으로 공세 때 낸 그들 선언의 매혹적인 약속은 금세 잊혀졌다.

이 신사들은 완전한 승리를 기다릴 만큼의 인내심도 갖지 못했다. 그들은 안전해지기 전에 가면을 벗어던지고 돌연 그들의 진짜 의도를 드러냈다. 그리고 대중에게는 전혀 좋은 징조가 발견되지 않았다. 위협과 체포를 수반한 백색 테러와 잔인한 보복, 재판도 없는 무자비한 대량 처형이 도처에서 일어나기 시작했다.

뿐만 아니라 혁명으로 말미암아 스스로 도망쳤거나 추방된 본래의 지주나 공장주가 백군과 함께 돌아와 재빨리 그들의 “재산”을 회수했다.

이리하여 과거의 절대주의적이고 봉건적인 정권이 갑자기 그 흉측한 모습으로 되살아났다.

백군 지도자 측에 있는 이러한 태도는 노동대중 사이에 격렬한 반항심을 불러일으켰다. 그들은 볼셰비즘보다 차리즘과 대지주인 포메시키pomeshchiki의 귀환을 훨씬 더 두려워했다. 볼셰비키 상대라면 모든 어려움을 무릅쓰고 개혁, 잘못된 것들의 시정, 그리고 마침내는 “자유롭고 행복한 삶”을 성취하는 것을 바랄 수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차리즘의 귀환에서는 아무것도 기대할 수 없었다. 그래서 차리즘 귀환의 길을 곧장 차단할 필요가 있었다. 당시 가용 토지를 몰수함으로써 원칙적으로는 적어도 이득을 보고 있던 농민은 이 토지를 이전 지주의 손에 넘겨줘야 한다고 생각만 해도 겁을 먹었다(대중의 이러한 정신상태는 당시 볼셰비키 정부가 일시적으로나마 견고한 상태에 있었다는 사실을 설명해준다. 다시 말해 그들은 두 개의 악惡 가운데 비교적 덜해 보이는 것을 선택한 것이다).

이렇게 하여 잠시 동안의 승리 뒤에 이내 백군에 대한 봉기가 재개되었다. 위험을 깨닫자마자 대중은 다시 저항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급조된 파르티잔 부대는 화합을 회복한 붉은 군대와 노동대중의 지원을 받아 백군에게 참패를 안겨주었다.

특히, 데니킨과 브란겔의 지휘권을 파괴하는 데 가장 큰 기여를 한 군대는 아나키스트 파르티잔이며 그 군사령관인 네스토르 마흐노라는 이름을 따서 《마흐노우슈치나》 군으로 알려진 우크라이나의 반란 농민과 노동자들의 군대였다. 자유사회를 표방하고 싸운 그 군대는 러시아에서의 모든 억압적 세력, 즉 백군과 적군 모두에 맞서 싸워야만 했다.

백색 반혁명운동에 대해 말하자면, 데니킨이 오룔을 버리고 황급히 후퇴하도록 몰아넣은 것은 마흐노의 유명한 군대였다. 그리고 우크라이나에서 데니킨의 후위대와 특수부대에 압도적 패배를 안겨준 것도 바로 그 군대였다.

브란겔의 군대에 관해서는, 그들의 첫 번째 중대한 역전은 마흐노 군의 분투에 의한 것이라는 것이 기묘한 사정으로, 볼셰비키 스스로 나에게 고백한 것이었다.

브란겔의 맹렬한 공격이 계속되는 동안, 나는 모스크바에 있는 볼셰비키의 감옥에 있었다. 데니킨과 마찬가지로, 브란겔은 붉은 군대를 물리치고 북쪽으로 빠르게 몰아붙였다. 이 무렵 볼셰비키와 전투 중이던 마흐노는 혁명이 직면한 심각한 위기를 고려하여 볼셰비키와 화해하고 백군과의 전투에 도움을 주기로 결정했다. 볼셰비키는 불리한 전황에 있었기에 마흐노와 동맹을 체결했다.

그 아나키스트 지도자는 즉시 브란겔 군에 대항해 그의 군대를 동원했고 오레호프Orekhov 성벽 아래서 그들을 물리쳤다. 전투가 끝나고 퇴각하는 브란겔 군을 추격하기 전, 마흐노는 모스크바 정부에 전보를 보내 승리를 알리고, 그의 부관인 추벤코(Alexei Vasilyevich Chubenko)와 나를 석방하지 않는 한 더 이상 진군하지 않을 것이라고 선언했다. 아직 마흐노가 필요했던 볼셰비키는 이에 동의해 나를 석방했다. 이 때 그들은 마흐노의 전보를 내게 보이고 마흐노 파르티잔의 위대한 전투력을 찬양했다.

극우 반동에 대한 나의 논평을 마치면서, 나는 볼셰비키와 그 동조자들이 날조하고 유포한 전설이 거짓이라는 점을 강조해야겠다.

첫째는 외국의 개입이다. 그 전설에 따르면 외국의 개입은 매우 중요했다. 볼셰비키가 일부 백군 운동의 강한 세력과 성공을 설명하는 것은 주로 이러한 방식이다.

그러나 그 주장은 현실과 모순된다. 그것은 엄청난 과장이다. 사실 러시아혁명 기간 동안 외국의 개입은 결코 활발하거나 지속되지 않았다. 돈이나 군수품, 장비 등에서 약간의 원조가 있을 뿐이었고, 그것이 전부였다. 백군 스스로도 후에 원조의 부족에 대해 몹시 유감스럽게 여기고 있었다. 그리고 러시아로 파견된 분견대에 대해서도, 그들은 항상 사소한 의미만을 지닐 뿐이었고 거의 뚜렷한 역할을 하지 않았다.

그것은 쉽게 납득할 수 있는 일이다. 애초에 외국 부르주아지는 유럽전쟁이 한참이던 때와 전후 시기에 국내 사정만으로도 골치가 아팠다. 그 뒤 군 수뇌부도 혁명 러시아 인민과의 접촉으로 인해 군대가 “분열”될 것을 두려워했다. 그래서 그러한 접촉은 가능한 한 기피되었다. 여러 사건은 이러한 우려가 충분한 근거를 지니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혁명적 세력과 한 번도 교전한 적 없는 프랑스와 영국의 군대는 별도로, 우크라이나의 스코로파즈키(Pavlo Petrovych Skoropadskyi) 정부에 의해 보호되고 있던 꽤 많은 오스트리아-독일 점령군(브레스트-리토프스크 평화협정 이후)은 빠르게 분해되어 러시아의 혁명세력에 흡수되어 버렸다.

나는 또한 이와 관련하여 독일의 점령이라는 결과는 브레스트-리토프스크 평화협정 때의 아나키즘 이론을 실증하는 것이었다는 점도 강조해두고 싶다. 당시 볼셰비키 정부가 독일 제국주의자와 교섭하는 대신 카이저의 군대를 혁명적인 러시아 국내로 침입시켜 놓았더라면, 오늘날 세계가 어땠을지 누가 알 수 있겠는가? 그러한 침입에서 도출되는 요인은 후에 데니킨, 브란겔, 오스트리아-독일, 기타 온갖 군대를 파멸의 운명으로 이끈 요인과 똑같은 것이라고 말할 수는 없을까?

하지만, 보라! 어떤 정부든 항상 혁명을 위해 정치적 책략, 침체, 불신, 반동, 위험, 불행을 준비하고 있다!

레닌, 트로츠키 및 그들의 동료들은 결코 혁명가가 아니었다.

그들은 단지 난폭한 개혁가일 뿐이었고, 모든 개혁가나 정치인들과 마찬가지로 국내 문제를 다룰 때나 군사문제를 다룰 때나 늘 구舊 부르주아지적 방법에 의지했다.

그들은 대중에게도, 진정한 혁명에도 신뢰가 없었고, 심지어 그것을 이해하지도 못했다.

혁명적 러시아 노동자들은 이러한 부르주아 국가주의적 개혁가들에게 혁명의 운명을 맡겼다는 점에서 근본적이고 돌이킬 수 없는 오류를 저질렀다.

1917년 이래 러시아에서 일어난 모든 일에 대한 적어도 일부는 거기에 원인이 있다.

두 번째 전설은 붉은 군대의 중대한 역할에 관한 것이다. 볼셰비키 “역사가”들에 따르면 붉은 군대는 반혁명 군을 격퇴하고, 백군의 공격을 격파하고, 모든 승리를 쟁취했다고 한다.

이보다 더 잘못된 것은 없다. 모든 대규모 반혁명의 습격에서 붉은 군대는 격파되고 패배해 도망쳤다. 백군을 격파한 것은 다름 아니라 빈약한 무장을 한, 러시아 대중의 봉기에 의한 것이었다. 붉은 군대는 백군이 일소된 뒤에 (전군全軍으로) 돌아와 이미 승리한 파르티잔을 돕고, 이미 도망 중인 백군에게 마지막 일침을 가한 것만으로 승리를 차지했다.

[1] 혼동을 피하기 위해 몇 가지 정의를 내리겠다. 나는 국가State라는 용어를 현재적이고 구체적인 의미로 사용한다. 오랜 역사적 진화의 끝에서 습득한 의미, 모든 사람들이 완벽하고 균일하게 받아들인 의미다. 마침내, 정확히 전체 논란의 대상이 되는 의미이다. 여기서 국가는 "기계적으로" 중앙집권화되거나 복잡한 법률과 강압적 제도들에 의해 지원받는 정치 정부에 의해 지시되는, 응집된 정치 유기체를 의미한다. 어떤 부르주아. 사회주의, 그리고 공산주의 작가들과 비평가들은 국가라는 용어를 광활하고 일반적인 의미로 사용하며, 대규모로 조직된 모든 사회가 국가를 대표한다고 선언한다. 그리고 그들은 이로부터 어떠한 새로운 사회든, 그것이 무엇이든 간에, “필수적으로” 국가가 될 것이라고 추론한다. 그들의 말에 따르면, 우리는 아무 성과 없이 한 단어를 토론하고 있다고 한다. 우리의 말에 따르면, 그들은 말을 가지고 장난을 치고 있는 것이다. 일반적으로 받아들여지고 역사적으로 주어지는 구체적인 개념을 위해, 그들은 다른 개념으로 대체하고, 반국가주의, 자유주의, 아나키즘의 이름으로 싸운다. 더욱이, 그들은 무의식적이든 고의적이든 국가와 사회라는 두 가지 본질적으로 다른 개념을 혼란스럽게 하고 있다. 미래의 사회, 즉 진짜 사회가 될 것이라는 것은 말할 필요도 없다. 그것은 단어의 문제가 아니라 본질에 대한 문제이다. [그들은 (그 작가들과 비평가들)이 단호하고 제한된 형태의 사회를 지정하는 용어를 포기할 가능성이 높다. 어떤 경우에도 미래 선한 사회를 “국가”라고 부른다면, 이는 논란의 대상인 그 용어와는 완전히 다른 의미를 갖게 될 것이다.] 중요한 것은―그리고 아나키스트들이 유지하는 것은―이 미래 사회는 현재 국가라고 불리는 것과 양립할 수 없다는 것이다. 나는 이 기회를 빌어서 많은 저자들이 지금까지 받아들여진 용어의 두 가지 정의만을 인정하는 것이 잘못되었다고 말한다. 국가(그들이 사회와 혼동하는 것)나 자유로운 무질서한 집회, 그리고 개인과 개인 집단 사이의 혼란스러운 투쟁 둘 중 하나이다.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간에, 그들은 세 번째 가능성을 생략하는데, 그것은 국가(구체적인 의미에서의)도 아니고 개인의 무작위적인 집합도 아닌, 모든 종류의 협회와 연합의 자유롭고 자연스러운 결합, 즉 소비자와 생산자의 결합에 기반을 둔 사회이다. 그러므로, 한 개가 아니라 본질적으로 다른 두 개의 반통계학이 존재한다. 비합리적이고 결과적으로 쉽게 공격받는 한 가지는 “개인의 자유로운 상한제”에 근거한다고 한다. 누가 그런 부조리를 주창했는가. 논쟁을 위해 만들어진 순수한 발명품이 아닐까? 다른 하나는 정치적인 것이지만, 합리적으로 완벽하게 조직된 것에 기반을 두고 있으며, 다양한 협회의 협동조합에 기반을 두고 있다. 아나키즘이 국가를 상대로 싸우는 것은 반국가주의의 후자의 이름에서이다. 정부라는 용어에 대해서도 비슷한 견해가 나와야 한다. “조직, 관리, 지시, 기타 등등을 하는 사람은 결코 배척할 수 없을 것”이라고 선언하는 사람들이 많다. 거대한 사회적 콤플렉스, 즉 "국가"를 위해 이런 일을 하는 사람들은 여러분이 좋든 싫든 간에 “정부”를 형성한다. 그리고 그들은 여전히 그것이 단지 단어들에 대한 논의인 것처럼 행동한다! 그들은 여기서 같은 실수를 하게 된다. 정치국가의 정치적이고 강압적인 정부는 별개의 것이다. 행정가, 조직가, 애니메이터, 또는 기술, 전문가 또는 기타 디렉터들의 조직, 협회, 연방 등의 조정된 기능을 위해 필수적이다. 그러니 말장난은 하지 말자. 정확하고 명확해지자. 대의민주제에 기반한 정부가 지도하는 정치적 국가가 진실로 미래 사회에서 기능할 수 있는가? 예라고 답한다면, 당신은 아나키스트가 아니다. 아니오라고 답한다면, 당신은 거의 아나키스트다. 정치적 국가 등이 진정한 사회주의로 가는 길에서 이행기적 사회가 될 수 있는가? 예라고 답한다면, 당신은 아나키스트가 아니다 아니오라고 답한다면, 당신은 아나키스트다.

[2] 어떤 사람들은 사상의 자유가 혁명에 위험하다고 가장한다. 그러나 군대가 혁명가들과 함께 있고(그렇지 않으면 혁명이 일어날 수 없다) 국민 스스로가 그들을 통제하는 순간부터, 어떤 의견이 어떤 위험성을 지닐 수 있을까? 그러고 나서, 만약 노동자 자신이 혁명을 지키고 있다면, 그들은 진정한 어떤 위험으로부터도 스스로를 방어하는 방법을 “계엄군”보다 더 잘 알게 될 것이다.

[3] 현대 경제 진화의 문제를 조사하고자 하는 독자들은 특히 자크 듀빈(Jacques Duboin)의 작품을 참고해야 한다.

[4] 이와 관련해 저자의 러시아혁명에 관한 첫 번째 간단한 연구인 『Choses Vecues』를 참조하라. 「La Revue Anarchiste」, 세바스티앙 포레(Sébastien Faure), (Paris?), 1922–24.

[5] 이 모든 생각들은 앞서 언급한 내 연구에서 더 완전하게 다루어졌다. : 『choses vécues』.

[6] 독자들이 보게 되겠지만, 나는 이 경우에 볼셰비키가 정당했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그들이 자유롭고 완전한 혁명을 성취하기 위해 대중을 점진적으로 준비시키기 위해 그들이 다른 어떤 행동 방식도 가지고 있지 않다는 것을 증명해야 한다. 나는 그들이 다른 방법을 찾을 수 있었을 것이라는 의견을 강조한다. 그러나 나는 그 질문의 그 측면에 별로 관심이 없다. 대중의 무능에 대한 논제가 완전히 거짓이라는 것을 고려한다면, 그리고 이 작품에서 제시된 사실들이 그것을 풍부하게 증명하고 있다는 것을 고려하면, 나는 나에게 단순히 존재하지 않았던 상황을 상상할 이유가 없다.

[7] 페트로그라드, 1917년 10월 20일.

[8] 다른 많은 상황과 마찬가지로 볼셰비키는 오랫동안 젤레즈니아코프에 관한 사실을 왜곡하려고 노력했다. 그들은 언론에서 그가 볼셰비키가 되었었거나 혹은 항상 볼셰비키였다고 주장했다. 그렇지 않고서는 그들이 난처했으리라는 것은 이해할 만하다. 젤레즈니아코프가 사망했을 때(그는 중앙러시아에서 “백군”과의 전투 중 치명상을 입었다) 볼셰비키는 일간지 「이즈베스티야Izvestia」에 실린 쪽지에서 그가 죽어가는 병상에서 볼셰비즘에 동의했다고 선언했다고 주장했다. 그 이후로 그들은 그가 시종일관 볼셰비키였다고 잘라 말하고 있다.하지만 이는 모두 거짓말이다. 나나 다른 동지들이나 제레즈니아코프를 직접 알고 있었다. 그가 페트로그라드를 떠나 전선으로 갈 때, 나에게 작별인사를 하며 아나키스트로서 볼셰비키에게 무엇을 기대할 수 있겠냐고 알고 있었으니 말이다. 그는 내게 다음과 같이 말했다. “내게 무슨 일이 일어나든, 그들이 나에 대해 뭐라고 말하든, 나는 아나키스트이고, 아나키스트로서 싸우고, 내게 어떤 운명이 닥쳐도 나는 아나키스트로 죽을 것이라는 것을 잘 알아주십시오.”그리고 그는 필요한 경우, 볼셰비키의 거짓말을 뒤엎어 달라고 내게 부탁했다. 나는 여기서 그 의무를 수행하고 있는 것이다.

[9] 1918년 2월 24일 제27호

[10] 「프라브다Pravda」 제31호.

[11] 그 협정은 러시아로부터 “약 18개 지방과 같은 크기의 영토”를 빼앗아갔다.

[12] 프랑스어로 사기꾼bourreurs과 교수형 집행인bourreaux. 볼린의 매우 드문 동음이의어를 이용한 말장난이다. -영역자 주

[13] 나밧은 러시아어로 “경보Tocsin” 혹은 “경종Alarm”을 의미한다.

[14] 지난 수 세기 동안 헤트만은 우크라이나 선출직 지도자의 직함이었다. 독일군에 의해 권력을 장악한 스코로파즈키는 이 칭호를 전용했다.

[15] 프랑스어로 쓰인 볼린의 글은 “러시아 바깥에는 전혀 알려지지 않았기에”라고 쓰여 있다. 이 전혀라는 말은 러시아 아나키스트 출판물 중 일부가 지하로 밀사들에 의해 밀반입되어 미국의 러시아 망명자들에게 전달되었기에 사실상 위와 같이 바뀌었다. 특히 그러한 인쇄물들은 뉴욕에 설립된 러시아 노동자 노동조합 본부로 향했다.-영역자 주

[16] 1917년 8월 11일.

[17] 1917년 8월 18일자 「골로스 트루다」

[18] 1917년 8월 25일자

[19] 이 몇 달간 정부가 어떻게 행동했는지에 대한 생각을 건네기 위해 우리는 정부의 관행 중 일부를 인용해 보기로 하자. 전류를 손에 넣고 있던 그들은 거의 매일 오전 3시경 연맹의 인쇄소에 공급되던 회선을 끊었다. 전류는 5시나 6시경 돌아왔다(혹은 전혀 돌아오지 않았다). 따라서 이 신문은 모든 고용된 사람들이 일을 하고 있을 시간인 9시나 10시가 되어서야 겨우 출판되어 누구도 그것을 살 수 없었다. 또 신문판매원들은 거짓 구실로 탄압받고, 쫓기고, 때로는 체포당했다. 우체국에서는 「골로스 트루다」의 50퍼센트가 고의로 “분실”되었다. 요컨대, 볼셰비키 당국의 방해 행위에 끊임없이 저항할 필요가 있었다.

[20] 「골로스 트루다」의 기사들은 다음과 같다. 〈그리고 그 후?And Afterward?〉, 1917년 10월 27일, 〈2차 혁명The Second Revolution〉, 11월 3/16일, 〈선언과 생활The Declaration and Life〉, 11월 4/17일.

[21] 〈새로운 권력The New Power〉, 「골로스 트루다」 1917년 11월 4/17일자

[22] 1917년 11월 6/19일, 「골로스 트루다」 제15호

[23] 1917년 11월 7/20일자, 「골로스 트루다」 제16호

[24] 「골로스 트루다」 제19호, 1917년 11월 18일/12월 1일자. 이 출판물 이외의 다른 주목해야할 기사나 사설은 1917년 11월 8/21일자 제17호의 〈전쟁, 기아, 그리고 마지막 단계The War, The Famine, and The Last Stage〉, 제20호의 〈경고Warning〉, 제21호의 〈시급한 과제The Immediate Tasks〉이다.

[25] 「일간 골로스 트루다」 제7호 〈노동자 수업The Workers’ Course〉, 제11호 〈노동자의 임무The Workers’ Task〉, 〈노동자 회의The Workers’ Congress〉(날짜 및 일련번호 부여 없음) 그 외.

[26] 〈농민의 일The Peasant Job〉, 제22호 및 그 외.

[27] 「골로스 트루다」 제5호, 1917년 12월 19일, 1918년 1월 1일자.

[28] 1918~1919년에도 여전히 가능했다.

[29] 1936년 스페인 아나키스트 두루티(José Buenaventura Durruti Dumange)의 죽음과 관련된 상황은 그라초프의 사건을 명확히 상기시킨다.

[30] 이 문장은 트로츠키 암살 이전에 쓰였다.-영역자 주

[31] 이 작품의 저자는 볼셰비키에 의해 폭력을 당한 사람들 중 한 명이었다.-영역자 주

[32] 하리코프는 쿠르스크에서 남쪽으로 약 150마일 떨어져 있고, 모스크바는 쿠르스크에서 북쪽으로 약 300마일 떨어져 있다.

[33] 올드 볼셰비키Old Bolshevik 혹은 스타리 볼셰비키stary bolshevik라고도 한다. 1917년 러시아혁명 이전부터 볼셰비키 정파의 일원이었던 사람들을 가리키는 비공식적 명칭이다. 이들 고참 볼셰비키들 중 대다수는 1936년에서 1938년 사이 대숙청 때 수상스러운 정황 하에 NKVD에 의해 재판을 받고 처형되었으며, 1922년의 고참 볼셰비키는 44,148명이었다. 러시아공산당 제13차 대회 당시 발간된 통계에 따르면 1924년 당시 공산당원 60만여 명 중 1905년 이전에 입당한 이는 0.6%였고 1906년에서 1916년 사이에 입당한 이는 2%, 1917년에 입당한 이는 9% 이하였다. 최초로 사망한 거물급 고참 볼셰비키는 야코프 스베르들로프(~1919년)이고, 최후의 생존자는 라자리 카가노비치(~1991년)였다.-역자 주

[34] 이 글은 1939년에 쓰였다.-영역자 주

[35] 당연하지만 나는 “직접direct”이라는 용어를 통치governing(정치적 용어)가 아니라 조직화organizing 및 관리administration(사회적 용어)의 의미로 사용한다. 정부는 설혹 그것이 노동자로 구성되어 있다 하더라도(소련은 그렇지 않다), 필연적으로 국가주의 정치체제로 발전하는 특권계급의 이익에밖에 봉사하는 것이 불가능했다.

[36] 독자들은 내가 사적자본주의를 선호한다고 의심해서는 안 된다. 나는 사실을 말할 뿐,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고용주를 선택할 수 있는 자유가 사소한 것이라는 것은 명백하다. 그러나 유일한 착취자에 의해 영원히 협박받으며 생활하고 일하는 것은 전혀 즐겁지 않다. 이 협박은 소련 노동자들의 머리 위에 끊임없이 매달려 있으며, 그들을 노예로 만들고 있다. 그것이 내가 말하려던 전부다.

[37] 작업의 동작을 과학적으로 분석한 뒤 불필요한 움직임을 제거시켜 표준 동작을 책정하고 그것을 조합하여 작업 시간을 산출하였으며 표준 작업량을 달성하기 위한 성과급제도 등을 고안한 시스템. 이 테일러시스템은 경영관리기술 발전의 기초가 되었다.-역자 주

[38] 사회주의적 경쟁의 한 형태이다. 1935년 소련의 탄광부 A.G.스타하노프가 새 기술을 최대한으로 이용, 공정을 변혁함으로써 경이적인 생산증가를 초래한 데서 유래하였다. 스타하노프는 1935년 8월 31일 교대시간 내 노르마(norma, 기준량)의 14배에 달하는 102t을 채탄하는 기록을 세웠다. 전국 노동자에게 ‘그에게 배우라’는 운동이 전개되고, 높은 기록을 올린 노동자는 ‘스타하노프 노동자’라고 하여 높은 임금을 받았다. 스타하노프 운동은 노동자의 동지적 협력과 상호원조에 의하여 창조력을 발휘시킴으로써 노동생산성과 생산량을 증대시키려는 것이며, 사회주의로부터 공산주의로 이행하여 두뇌노동과 육체노동과의 대립을 해소하는 한편, 필요한 노동생산성을 달성하기 위한 유일한 방법이라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이 운동은 노동 강화에 저항하는 일반노동자의 반발을 불러일으켰을 뿐만 아니라, 생산성향상에 대한 조건부적 책임을 져야 할 현장경영자의 반발을 초래하여, 현장에서는 여러 가지 혼란이 야기되었다.-역자 주

[39] 예를 들어 『레닌 전후의 노동자들Workers Before and After Lenin』, 마냐 고든(Manya Gordon), 뉴욕, Dutton, 1941.을 보라.

[40] 1917년 10월 25일의 법령. (그러나 제15장의 네 번째 문단에서 볼린은 분명히 동일한 법령을 10월 26일이라고 나타내고 있다.-영역자 주)

[41] 파벨 밀류코프(Pavel Nikolayevich Milyukov), 『러시아의 역사History of Russia』 제3권, p.1274.

[42] ‘아레스(Ares)의 언덕’이란 뜻. 아덴의 유명한 아크로폴리스 북서쪽에 있는 높이 115m의 석회암 언덕. 그리스의 개혁자 솔론이 세운 대법원이 있었다. ‘아레스의 언덕’이란 그리스의 전쟁신 아레스가 바다의 신 포세이돈(Poseidon)의 아들 하리로티오스를 살해하여 처음으로 이곳에서 재판을 받았다는 고사에 근거하여 명명되었다. 재판이 진행된 언덕 정상에는 두 개의 돌단이 있는데, 그 하나는 ‘악행의 돌’, 다른 하나는 ‘비정의 돌’이라고 붙여진 원고와 피고석이 있었다. 아레오파고스 회의는 아덴에서 가장 역사 깊고 또 최고 권위를 인정받은 회의로서 초기에는 소송을 다루는 ‘법원’ 역할을 했었다.-역자 주

[43] “받아쓰기”, 감시, 위협은 처음부터 존재했다. 또한 인민위원회나 정치국, 기타 최고기관의 구성원은 결코 선출되지 않았으나 “온화한 보이드Vojd”의 영향을 받아 공산당 중앙위원회에 의해 임명되었고, 중앙위원회의 유순한 도구인 소비에트 총회에 의해 검증되었다는 점을 지적해야만 한다.

[44] 그들에 비하면 나치는 겸손한 학생이자 모방자에 불과하다.

[45] 「프라브다Pravda」 5월 31일자.

[46] 스탈린 헌법 제125조를 참조하라.

[47] 「프라브다Pravda」 1939년 5월 31일자.

[48] 1939년 7월, 제168호.

[49] 고를롭카는 그 분지의 산업지대이다.

[50] 1936년 10월 20일.

[51] 1936년 6월 28일 「이즈베스티야Izvestia」를 참조하라.

[52] 1936년 5월 법령을 참조하라. 그 법률 제정 이후 수많은 체포가 뒤따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