붉은 차라투스트라
실천적 강령주의
혁명적 간부 조직
실천적 강령주의
보편투쟁 - 자유의지주의적 코뮌주의자 연방(Libertarian Communist Federation, LCF)와 그 전신인 북동아메리카 아나키즘적 코뮌주의자 연방(NEFAC)은 11년째 그 활동을 이어오고 있다. 이 조직은 초기부터 스스로를 강령주의자라 자칭해왔다. 이는, 이 조직이 『아나키스트 총동맹의 조직적 강령』의 방침을 따르고 있음을 의미한다. 이 정도로 오랜 시간을 성장하고 스스로 발전해 온 조직이라면, 거의 대부분의 경우 건강하다. 하지만 나는 잠시 우리의 강령주의에 대한 관점을 점검하고, 우리가 이 원칙에서 어긋나지는 않았는지, 혹은 그 원칙에서 벗어나야 하는 것인지를 판단해 보고자 한다. 나는 오래 전의 논쟁이었던 Bring the Ruckus(BTR)과 NEFAC 사이의 논쟁을, 특히 혁명적 간부 조직과 이중권력에 대한 관점을 중심으로 재점검하고자 한다. 『강령』과 네스토르 마흐노의 자서전 역시 다시금 검토해보도록 하겠다.
강령주의 경향의 주된 이론가 중 하나였던 네스토르 마흐노는 간부 조직의 지지자였다. 그리고 우리는 간부 조직이라는 말을 들었을 때, 일반적으로 마르크스주의를 연상한다. 다수의 아나키스트들이 『강령』이 권위주의적이라고 비난한 것이 이상한 것은 아닌 듯하다. 물론 이러한 비난은 근본이 없다. 이 비난이야말로 아나키스트들이 내용이 아닌 형태에 페티시를 가지고 있음을 드러내는 사례일 뿐이다. 그리고 이러한 페티시를 가진 아나키스트들은, 불행히도 너무 많다. 이는 결국, 조직적으로 작동하는 모든 기능들을 자유의지주의적 내용에 반하는 것이라 여기는 것이다. 우리는 이것을 인포샵 따위의 문화적 프로젝트에 대한 요구에서 충분히 볼 수 있다. 이러한 프로젝트가 나쁜 것은 아니지만(그야 반문화는 필요한 것이고.) 이것이 조직을 대처할 수는 없고, 진지한 조직(혁명적 자유의지주의자의 전위)에 필요한 집단적 질서를 요하지도 않는다. 이러한 부류의 “내용보다 형식”에 대한 요구의 예시는, 마르크스주의를 너무나도 꼿꼿하게 부정하여, 『자본』조차 읽지 않으려는 자들이 있을 것이다. 그들이 입에 답는 자본주의에 대한 비판은 『자본』 1권을 넘어가지도 못하고 있는데 말이다. 이들이 간부 조직에 대하여 이러한 태도를 보이는 것은, 이처럼 이들이 비판적 분석을 결여하고 있기 때문이다.
나는 BTR-NEFAC 논쟁에서 NEFAC의 논자들이 BTR이 간부 조직이라 공격했다는 것에(이것만으로 공격한 것은 아니지만, 이것이 상당부분을 차지한 것도 맞다.) 실망했다. 특히 니콜라스 피버스의 “전략과 조직의 차이”에서는 훌륭하게도 간부 조직을 비판했다. 이는 그가 BTR이 ‘자유의지주의적 간부조직’을 건설하고자 했다는 것을 언명하지 않은 데에서 기인한다. 어째서인가? 위계적이고 거만한 레닌주의적 간부 · 전위 개념을 부정하는 것은 흔한 일이다. 나는 간부 조직에 무게를 싣는 강령주의적 관점에서, 간부조직을 해소하는 것은 불가능한 것이라고 바라본다. 레닌주의적 간부조직과는 달리 자유의지주의적 간부조직은 “특정 조직이나 운동을 통제하려 하지 않고, 투쟁의 가장 진보한 부문이라 자칭하지도 않는다.” 자유의지주의적 간부조직은 “대중이 투쟁의 가장 진보한 부문이라 상정한다.”[1] BTR은 “(간부)조직은 모든 종류의 행동을 적극적으로 지지하는 것이 아니라, 이중권력을 건설할 가능성이 있는 투쟁을 지지할 것”[2]이라고 말한다. 이 언명의 문제는 웨인 프라이스 동지가 그의 글 “대체, 이중권력 전략이란 무엇인가”에서 적확하게 지적한 것처럼, 이중권력에 대한 BTR의 전략이지 이중권력을 건설하고, 사회혁명을 통하여 국가와 자본을 자발적으로 파괴하는 것 자체인 것은 아니다. 프라이스 동지는 BTR의 인종환원주의가 NEFAC의 공고한 계급기반정치보다 전략적으로 유효하지 못하다고 주장한다.
피버스의 글은 간부 조직의 “모순”이어야 하는 것을 지적하기 위하여 작성되었다. 하지만 이는 성공하지 못했다. 우선, 피버스는 BTR과 자유의지주의적 간부조직을 실제로 행해진 것과는 다른, 오래된 정의에 기반하여 정의하는 것으로 글을 연다. 피버스는 BTR도, 자유의지주의적 간부조직도 부르주아적이며 권위주의적이고 레닌주의적인 조직의 방법론이라 주장한다. 이 글은 BTR의 계획을 스스로의 단어로 정의하지 않는다. 피버스의 글은 당시 대중들에게 퍼져있던 전형성적 정치를 바탕으로, BTR이 권위주의적이고 대중이 “멍창하다”고 여긴다고 말한다. 그렇지 않다. BTR은 단지 혁명적 조직과 권력의 문제에 대해 현실적일 뿐이다. 『강령』이 아나키즘에 대하여 말한 것처럼, “바쿠닌, 크로포트킨 등의 위대한 아나키스트 사상가들은 아나키즘 사상을 발명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들은 그 사상을 대중으로부터 발견했다. 그들의 사상과 지식은 이를 구체화하고 확산시키는 것을 도왔을 뿐이다.”[3] 하지만, 대중들이 부르주아 사회의 탄압을 뚫고 아나키즘을 발견했다거나 프롤레타리아트가 마법처럼 아나키즘에 도달하리라고 믿는 것은 너무 순진한 것이다. 분명 일부는 그렇게 하겠지만, 일부는 그러하지 못할 것이다. 우리 혁명적 아나키스트들은 그렇게 한 일부인 것이다. <점령>시위에 나왔던 이들은 그 도달에 가까이 갔지만, 그들의 진정한 열망이라 할 수 있는 자유의지주의적 코뮌주의를 명확히 도출해내지는 못한 자들이다. 현실에서 노동을 해보라. 인종주의자가, 성차별주의자가, 반동적인 노동계급이 일터에서 자본주의 체제의 가장 끔찍한 측면을 강화하고 있지 않은가.
“Bring The Ruckus”의 최근 성명을 읽어보면, 이들이 마침내 간부조직이 무엇을 지켜내야 하는지를 이해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집단적 책임, 이론적/전술적 단결, 직접민주주의가 그것이다. 그렇다면, 조직적으로 BTR과 LCF/NEFAC의 차이는 무엇이란 말인가? BTR에 대한 내부 정보를 알지 않는 한, 이것을 정확히 답하기란 어렵다. 그리고 나에게는 내부 정보가 없다. 하지만, BTR은 그 깃발 아래의 간부들이 집행할 과업을 정의하는 공통전략과 구체적 준칙을 가지고 있다. LCF는 이러한 것이 없다. 하지만 LCF는 2011년 연방 총회를 통해 이에 대하여 논의했고, 전략과 준칙을 만들기 위한 특별위원회를 발족했다. ‘간부’ 문제에 대한 피버스의 결론은 다음과 같은 혼란스러운 주장이다. “NEFAC은 강령주의 연방 모델을 선택했다. BTR은 간부 조직의 모델을 택했다. 이 둘은 좋건 싫건, 서로 같은 것이 아니다.”[4] 강령주의 경향의 창시자부터가 이 말에 동의하지 않을 것이다. 마흐노는 그의 회고록 『우크라이나에서의 러시아 혁명』 1권에 다음과 같이 썼다. “우리는 선택하여야 한다. 대중에게 다가가 그 안에 침투하고, 그들을 혁명적 간부로 만들어내고, 그 속에서 혁명을 만들어낼 것인가, 아니면 사회변혁과 자본/국가에 대한 노동계급의 투쟁을 끝까지 밀어붙인다는 우리의 목적을 포기할 것인가.”[5]
혁명적 간부 조직의 개념에 정당한 쟁점들이 있음은 분명하다. 하지만 간부 조직이 BTR-NEFAC 논쟁에서 비판되었다는 것은 이해할 수 없다. 어떻게 혁명적 투쟁에 헌신적으로 결합하면서 동시에 배타적으로 혁명적 아나키스트 조직 건설에 반대할 수가 있는 것인가? 우리는 지배를 꿈꾸지 않지만 우리는 적합한 시기에 투쟁의 전위에 설 것이다. 우리는 아나키즘적 코뮌주의가 착취와 지배를 무너트릴 유일한 체계라고 믿어 의심치 않는다. 마찬가지로 우리는 단지 월가 점령 시위처럼 합의에 의한 의사결정이나 총회를 통한 의사결정과 같이 다소간 아나키즘의 요소를 가지고 있는 “아나키즘적인 운동”으로 만족하지 않는다. 우리는 착취와 지배를 끝장낼 사회혁명을 촉발할 수 있는 혁명적 아나키즘적 코뮌주의 운동을 건설할 것이다. 여기에서, 우리가 나머지 프롤레타리아 대중과 어떻게 관계맺을 것인가에 관한 문제가 도출된다. 나는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적확한 공식은 모른다. 하지만 나는 자기성찰과 정치적 교육 속에서 답을 찾아야 한다고 믿는다. “좌파들을 우리가 원하는 수준의 단결과 전략으로 끌어올리는 방법은 자연스럽게 제시되는 것이 아니”[6]라, 우리가 혁명분자로서 끊임없이 추구하고 스스로에게 도전해야 얻어지는 것이다.
간부들은 대리주의자처럼 행동하는 경향이 있다. 피버스 역시 이를 지적한다. “물론, 우리는 우리의 사상을 선동해야 하고, 이념의 전쟁을 이끌어야 한다. 하지만 계급의 구성원들은 외부의 선동가가 아니다.”[7] 나는 이 발언에 온전히 동의한다. 그리고 BTR은 이를 제대로 행하고 있다. 피버스의 지적은 합당하지만, 단어를 이상하게 구성하고 있다. 만약 간부들이 계급에 침투하는 것이 아니라 계급 바깥에 존재하려 한다면, 이것은 혁명 조직에 대한 잘못된 접근이다. 하지만 우리는 자유의지주의자들이지 레닌주의자들이 아니다. 우리의 조직에서 정치적 교육과 지도력을 제대로 건설한다면, 이러한 문제는 발생하지 않을 것이다. 간부들이 제 아무리 자유의지주의적 감수성을 가졌다해도, 그들이 태생적으로 대리주의자라고 정의하는 것은 오류다. 마흐노 동지의 말을 다시 한번 반복해보자. 혁명적 간부들은 대중 내에서 구성된다. 이를 정확히 이해한다면, 이것을 소위 “대리주의”와 혼동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이 소위 “혁명적이고 자유의지주의적인 간부”들은 어떤 모습이어야 하는가? 단순하다. 이들은 투쟁에 헌신하는 아나키즘적 코뮌주의자들의 지역적 동맹이어야 한다. 이들은 “조직적 입장만을 강조하는 것이 아니라, 투사들의 역량과 활동 역시 강조해야 한다.”[8] 이들은 강령주의의 주요 점유자가 되기 위하여, 계급투쟁의 전위가 될만한 지도력을 건설하기 위한 교육의 과정에서 자유의지주의 이데올로기를 내재화하기 위하여 노력해야 한다. 이들은 단순히 조직가의 조직이 되어서는 안 된다. 우리가 단 하나의 힘(조직)에 대한 페티시로 움직일 수는 없기 때문이다. 이들은 아나키즘을 대중에게 가져가 혁명적 아나키스트 운동을 만들 수 있는 선전가의 조직이기도 해야 한다. 그리고 이 선전행동은 조직가들이 건설한 노동대중의 조직이 뒷받침할 것이다. LCF는 현재 이렇게 행동하고 있지 않다. 하지만 우리가 진정으로 강령주의자라면, 이러한 것을 추구해야 한다.
우리가 투쟁이 만들어내는 상황들을 비판적으로 분석하고, 그 투쟁의 혁명적인 모습들을 인지하고, 개량주의를 예방하는 것은 중요하다. 다르게 표현하자면, 간부들은 언제나 투쟁을 사회혁명의 순간까지 심화하고 확장하는 것을 추구한다. 간부 조직은 질서와 헌신을 요하는 진지한 조직이다. 아나키즘적 코뮌주의의 세상을 건설하는 과업은 너무나도 큰 과업이기 때문이다.
[1] <Bring The Ruckus>. Bring The Ruckus. 2012
[2] 위의 책
[3] 『아나키스트 총동맹의 조직적 강령』, 네스토르 마흐노
[4] 『전략과 조직의 차이』, 니콜라스 피버스
[5] 『우크라이나에서의 러시아 혁명』, 네스토르 마흐노
[6] 『우리는 강령주의자가 아니다. 그렇게 되기를 추구할 뿐』, 스콧 나팔로스
[7] 『전략과 조직의 차이』, 니콜라스 피버스
[8] 『우리는 강령주의자가 아니다. 그렇게 되기를 추구할 뿐』, 스콧 나팔로스